거실에 앉아 VOD로 영화보기를 했다. 가까운 지인들과 집안에서 멋진 대화를 나누던 ‘영화 논-픽션’을 택했다. 1년 전에 영화관에서 매혹되었던 이들의 지적인 토크, 특히 요리가 담긴 넓은 접시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대화를 나누던 풍경을 다시 보고 싶었다.
종이책과 e-Book간의 선택이나 문제는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도 진행 중인 고민이다. 책이나 신문이 인터넷 사이트라는 시공간을 넘어 순간적으로 먼저 전한다. 이런 현실에 현대인들은 이미 익숙하다. 이 영화를 만든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은 "우리가 사는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디지털화는 일어나고 있다. '논-픽션'은 그러한 변화에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에 대한 영화"라며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 물살에 몸을 맡기는 것뿐이다"라고 말한다.
영화 속에서 출판사를 운영하는 성공한 편집장 알랭이 작가 레오나르와 새 책 출판에 대한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시작이 된다. 알랭은 레오나르가 자신의 사적인 경험을 창작에 적용하는 것을 회의적으로 대꾸한다. 그러다가 EU 정책에 대한 토론까지 나아간다.
편집장 알랭은 퇴근한 뒤에도 그런 시간이 계속된다. 영화배우인 아내와 친구 부부 등이 모여서 자신들만의 의견을 자유롭게 피력한다. 블로그 조회 수와 책 판매에 관한 비교, 그리고 읽고 쓰는 사람들의 생각을 말한다.
각자의 무릎 위에 음식이 담긴 접시를 올려놓고 지적인 토크가 쏟아져 나오는 풍경은 생경하다 못해 경이롭다. 책을 중심으로 한 출판이나 정치와 문화 민주주의, 디지털화에 따른 대중의 취향과 그들의 삶에 대한 담론이 위트 있고 아름답다. 개운하고 유쾌하다.
일상에서 늘 만나는 이웃이나 친구들의 대화가 마냥 수다가 아니다. 비판이나 세상의 문제제기, 그리고 문제 해결에 따른 의견들이 담담하면서도 빛나는 사유의 언어로 나타난다. 영화의 모든 대사가 탄탄하고 시원하게 터져 나온다. 도서 출판계의 위기가 다가온 세상에 현재와 미래의 고민이 무겁고 지루할 만 한데 영화 보는 내내 시종일관 귀 기울여 경청하게 된다.
게다가 그들만의 각자의 연애가 유지되고 있음을 서로 눈치채고 있는 중이었다. 알랭의 아내 셀레나와 작가 레오나르가 오랜 연인 관계였다. 물론 알랭도 회사의 젊은 디지털 마케터 로르와 연애 중이다. 이런 아슬아슬하기만 한 일상이 복잡하게 얽히는 감정 씬 하나 없이 가볍게 해결해 나간다. 섬세한 감정의 흐름을 굳이 차단하지 않는다.
작가 레오나르가 부인에게 결국 고백한다. “사실 나 바람피웠어” 놀라운 이 말에 “알고 있었어. 당신 책도 순 그 얘기잖아”영화를 보는 사람이 더 놀라울 뿐이다.
우리의 보편적 정서로는 가능키 어렵겠지만 그들은 결국 공존을 택한다. 막장을 우아하게 승화시켰나 잠깐 시큰둥했지만 파리지앵들의 쿨한 감정 정리가 시원하기까지 하다. 완벽하게 쿨하다. 이 또한 무거울 수 있는 주제를 벗어나게 하는 유쾌한 장치가 되어준다.
특히 작가 레오나르가 서점에서 진행되는 소설가와의 대화 장면이 있다. 독자와 작가와의 자유로운 비판은 간간히 가슴이 쫄깃해진다. 직설적이면서 촌철살인의 질문과 대답은 바라보며 멋지기까지 하다. 때로 영화 전편으로 음악으로 채운 듯한 작품을 볼 때가 있다.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대화가 가득한 영화다.
무엇보다도 나는 이 영화를 보기 전부터 줄리엣 비노슈가 나온다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 그녀가 출연했던 영화 ‘초콜릿’을 떠올렸다. '세상의 모든 초콜릿'이라는 이름의 초콜릿 가게를 연 그녀에게 집시의 자유분방한 기질을 가진 조니 뎁이 나타나던 영화. 그때의 신비로운 아름다움과는 다르게 인생의 내공이 조금 더 묻어나는 연기를 한 줄리엣 비노쉬가 반가웠다.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새해 아침, 한 중견 시인의 시집 제목에 마음이 출렁였다. “무슨 끝이 있나요”라는 물음이 메아리치듯 들려왔다. 일찍이 프랑스의 철학자 롤랑 바르트는 인간의 성찰 없는 사랑을 비판하며 “오늘날의 사랑 담론은 지극히 외로운 처지에 놓여 있다”고 말했다. ‘이해관계’만 작동하는, 흔해빠진 결판의 스토리만 분분한 탓이다. 세기의 족보에 기록된 저 유명한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사랑은 어땠을까. 자기 존재에 대한 결사항전의 나날이 아니었다면 진즉 서로의 손을 놔버렸을 것이다.
51년간 유지된 계약결혼
시몬 드 보부아르와 장 폴 사르트르. 20세기의 프랑스 최고 지성 커플로 불리는 이름이다. 규정된 인간이 아닌 행동하는 주체로서 살려고 노력했던 두 사람은 정식 결혼을 하지 않은 채 평생 연인이자 동지적 관계를 유지했다.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와의 관계가 내 인생에서 가장 성공적인 성과였다”고 말했고, 사르트르는 보부아르에 대해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사람”, “나의 검열관” 등으로 표현했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만난 건 1929년. 당시 그의 나이는 24세, 그녀는 그보다 세 살 어렸다. 보부아르는 배움에 대한 호기심이 남다른 모범생이었다. 한마디로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여인이었다. 반면 사르트르는 160cm도 안 되는 작달막한 키에 한쪽 눈은 시력을 거의 잃은 사시(斜視)였다. 첫인상은 쉽게 호감이 안 가는 외모였지만 그는 해박한 지식과 유머로 주변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요즘 말로 뇌섹남이었다.
어느 날, 밤새 논쟁을 하게 된 두 사람은 서로가 완벽한 대화 상대자임을 알게 됐다. 지적 반려자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자신들의 운명을 동시에 꿰뚫어본 것이다. 실제로 보부아르는 아무도 말 걸어오지 않는 상태를 죽음으로 봤다. 사르트르가 죽자 “더 이상 그와 대화를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매우 슬퍼했다.
이들이 2년간의 계약결혼을 시작해 세간의 이목을 끌었던 건 까다로운 철학교수 자격시험에서 각각 수석(사르트르)과 차석(보부아르)으로 합격하고 나서였다. 그 후 둘 사이의 계약은 51년간 파기되지 않았다.
“인생은 B와 D 사이의 C다”
“2년 동안은 함께 살면서 둘 중 누구도 자유를 함부로 사용하면 안 되고, 그 후에는 각자의 길을 가며 자유를 누리되 헤어지지는 말 것. 상대가 찾을 때는 반드시 응해줄 것, 강압과 관습에 방해받지 않는 관계가 될 것, 숨기는 일이 없어야 하며 거짓말도 하지 말 것, 각자 경제적으로 독립할 것.”
전통적인 결혼제도에 대해 부정적 입장이었던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의 이 제안을 즉각 받아들였다. 여성의 창조적 본성을 억누르지도 않고 가사노동자로 전락하게 만들지도 않을 이상적 삶의 모델이라고 생각했고, 그를 사랑했기에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훗날 사람들은 두 사람의 특별했던 결혼생활을 관습과 제약에 매이지 않고, 자유와 평등의 조화를 추구한 실험적 사랑이었다고 평가했다.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다.” 사르트르가 남긴 이 명언에는, 인간은 태어나서 죽는 날까지 수많은 선택 앞에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사르트르와 그의 연인 보부아르도 자신들의 존재 방식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실천하며 살았다. 물론 두 삶에 제3의 인물이 끼어들면서 종종 질투와 분노를 일으키고 상처를 받기도 했지만 끝까지 사랑의 총량을 채워나가며 서로에 대한 존중의 태도를 견지했다.
1970년대 초, 사르트르는 시력을 점점 잃어갔고 더 이상 그가 쓴 글을 아무도 해독할 수 없는 지경이 됐다. 그런데도 1980년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펜을 놓지 않았다.
보부아르는 사르트르가 떠난 후 그의 고통스러운 말년을 기록한 ‘이별의 의식’을 출간했다. 그리고 6년 뒤 그녀도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전부가 되려고 하지 않았기에 죽을 때까지 함께할 수 있었다. 그녀는 사르트르와의 관계에서 더 고독했어야 했다고 고백했다. 호사가들은 이들의 삶에 흠집을 내기 위해 두 사람에게 닥쳤던 위기와 다양한 인물들과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관계를 파헤쳤다. 그러나 사랑의 통념들에 저항하기 위해, 서로에게 완벽한 자유를 허용하기 위해, 완전한 존재로 나아가기 위해 이들이 얼마나 큰 대가를 지불해야 했는지도 알게 됐다.
사르트르와 잠시 헤어져 있던 그녀는 파리 몽파르나스 묘지에 누워 있는 사르트르 곁으로 돌아갔다. “사랑하는 남자와 나란히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야말로 내가 원하는 삶이에요!”라고 말했던 보부아르는 늘 ‘여인들’이 끊이질 않아 온전히 독차지할 수 없었던 남자와 영원히 함께 있게 된 것이다.
‘바람에 실려’, ‘밤에 떠난 여인’ 등으로 7080세대 청년들의 마음을 울렸던 하남석. 최근 24세의 나이로 사망한 비정규직 청년 김용균의 죽음을 애도하는 노래 ‘천화’와 나이 들어서도 꿈을 꾸는 청춘의 노래 ‘황혼의 향기’가 유튜브에 소개되며 그가 다시 대중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자신만의 색깔을 가진 철학을 표현하는 올곧은 뮤지션으로 여전히 노래를 부르는 그는 1949년생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젊은 정신으로 무장해 있었다. 여전히 지혜와 담론이 담긴 노래를 부르길 멈추지 않겠다는 몽상가, 칠순의 하남석이 꾸는 꿈은 무엇인지 들어봤다.
1974년, 포크와 싱어송라이터의 전성시대에 자신의 이름을 깊이 새긴 가수가 대중 앞에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하남석. 데뷔 앨범 ‘바람에 실려/밤에 떠난 여인’에는 총 10곡이 실렸고 타이틀곡인 ‘바람에 실려’와 ‘밤에 떠난 여인’은 대단한 성공을 거뒀다. 이후 TBC 라디오 DJ로도 활약하며 그 시대의 다운타운가를 장식했다. 나지막하면서도 쓸쓸한 음색의 목소리로 청춘의 아이콘이 된 그는 7080세대의 가슴에 남게 됐다.
청춘들을 위로해온 목소리
그가 첫 앨범을 발표한 지 어느새 45년이 흘렀다. 강산이 다섯 번은 바뀌었을 그 긴 시간 동안 하남석은 결코 지치거나 꺾이지 않았다. 그동안 낸 앨범이 무려 14집. 소위 ‘대박을 친 노래’가 없어서 대중의 시야에서 멀어졌다고 여길지 모르겠지만 그는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절대로 놓지 않고 있었다.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해온 그 긴 시간이 놀랍다. 대표적으로 그의 14집 앨범에 실린 타이틀곡 ‘몽상가’를 들어보면 그가 자신의 음악적 스펙트럼을 어떻게 넓혀왔는지 알 수 있다. 재즈 음악을 기반으로 한 편곡에 블루지한 색채의 관조적인 목소리 톤이 잘 어울리는 이 곡은 칠순이 넘는 가수의 노래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세련되면서도 고급스럽다. 그가 젊었을 때보다 도리어 더 젊어진 감각으로 자신의 음악세계를 계속 발전시키고 있다는 걸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젊었을 때보다 더욱 젊게 사는 70대
하남석이 최근 푹 빠져 있는 가수는 호주 출신으로 유럽에서 활동하고 있는 싱어송라이터 라이 엑스(RY X)라고 한다. 그는 아예 그들처럼 공연을 해보고 싶은 게 꿈이라 말한다. 처음에는 싱어송라이터라고 하기에 자신처럼 포크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하는 가수로 생각했단다. 그런데 확인해보니 포크와 일렉트로니카를 결합시킨 포크트로니카 장르의 뮤지션에 온갖 악기들을 활용하는 다채로운 스타일의 가수였다. 보컬 스타일도 요즘 팝 음악계에서 소위 ‘대세’인 얇고 호소력 있는 고음을 구사한다. 심지어 국내에는 많이 알려지지도 않은, 아는 사람만 알고 있는 젊은 실력파였다. 하남석의 음악적 감각이 남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그의 데뷔가 1973년이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그가 가수를 하게 된 데에는 그보다 먼저 1960~70년대를 풍미한 형 하남궁의 영향이 컸다.
“형은 프랭크 시나트라, 앤디 윌리엄스 등 주로 팝송 레퍼토리로 노래를 불렀던 중후한 중저음의 목소리를 가진 가수였죠. 특히 김희갑 씨가 형 목소리를 좋아해 곡을 많이 줬어요. 그런데 1973년에 형이 가수를 그만두고 미국으로 떠나버렸죠. 나는 어렸을 때부터 가수에 대한 꿈이 있었어요. 그래서 형의 빈자리를 채우면서 노래를 하게 됐죠.”
진정한 뮤지션으로서 묵직한 존재감
그러나 그는 형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에만 만족할 가수가 아니었다. 장르를 넘나드는 창법, 그리고 트렌디한 작곡과 작사 등 예상 가능한 부분이지만 그는 자신의 목소리를 발전시키는 데도 게으르지 않았다.
“요즘 매일 산에 다녀요. 그 이유가, 사람들이 잘 안 다니는 길을 알게 돼서죠. 거기가 지금 제 아지트가 됐어요. 사람들이 없으니까, 산에 갈 때면 그곳에 꼭 들러 음악 들으면서 연습을 하거든요. 옛날에는 소리를 지르는 노래가 별로 없었어요. 저음 가수를 선호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승철, 김종서, 김건모 등 고음을 잘 지르는 가수가 세상에 나오게 됐어요. 저도 시대를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쪽으로도 창법 연습을 하고 있어요.”
그가 최근 발표한 노래를 들을 때 느낄 수 있었던 세련된 변화는 그러한 꾸준한 연습 덕분으로 보였다.
“30대부터 연예인이 아닌 진정한 뮤지션이 되고 싶었죠. ‘진정 좋은 음악을 이 세상에 남기자’ 그게 원동력이 돼서 지금까지 활동한 거예요.”
사회의 약자들을 보듬는 ‘몽상가’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젊어지고 있는 하남석의 감각은 시대의 아픔과 정서를 놓치지 않고 있었다. 그가 2004년에 내놓은 ‘거리의 아이들’은 방황하는 가출 청소년들을 보듬는 노래이고, 2010년에 나온 ‘넌, 특별한 사람이야’는 장애우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 만든 노래다. 2011년에 발표한 곡 ‘길 위의 남자’는 노숙자들의 애환을 담았고 최근에 작사·작곡한 ‘천화’는 태안화력발전소의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다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한 비정규직 청년 김용균을 추모하며 만든 곡이다. 그런 이야기들을 노래로 만드는 이유에 대해 묻자 그는 “자꾸 눈길이 그쪽으로 가더라고요” 한다. 그가 가수 활동을 시작했던 시절의 포크가 청년의 정서를 대변했던 만큼, 여전히 청년의 마음을 지녔다면 시대의 고통에 관심을 두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제 노래는 돈 많고 신나게 사는 사람들을 위한 노래는 아니죠. ‘몽상가’처럼 살아왔고 ‘몽상가’라는 노래를 만들어 세상에 던진 이상 그렇게 계속 해야죠.”
사회, 정치, 음악, 문화가 너무 흔들리고 있다며 각 분야가 주체성을 갖고 가고자 하는 길을 확고하게 가야 한다고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이 세상에 대한 안타까움이 서려 있었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삶에서 노래를 건지고 그 노래가 삶과 어긋나지 않도록 노력하는 이였다.
결국 뮤지션일 수밖에 없더라
하남석의 노래들 중 ‘나이 듦에 대하여’는 제목 그대로 나이 들어가는 것에 대한 생각을 담은 노래다.
나이 듦에 대하여 걱정 말아요
나이 들어가면 갈수록 그대는 더욱 멋지고 아름답죠
더 깊고 더 넓게 세상을 바라보죠
커다란 고목나무 그 나무처럼
더 많은 그늘을 만들어 사랑을 주죠
나무가 되어 그늘을 만들고 그 그늘을 통해 사랑을 주자는, 나이에 대한 철학이 담긴 노랫말을 보고 문득 궁금해졌다. 45년이 넘는 긴 시간을 같은 일을 하면서 그 또한 지치고 힘들 때가 있었을 것이다. 그는 그 시간을 어떻게 견디며 지냈을까?
“현실은 항상 돈 문제가 있으니까, 위기의식은 늘 있었죠. 그래서 미사리, 평택에서 가게도 하면서 꾸준히 라이브를 했지요. 그런데 장사를 하려면 철저한 장사꾼이 해야 해요. 자존심 다 버리고 어떻게 해서든 악착같이 돈을 벌어야 한다는 프로의식이 있어야 하는데, 저는 그런 게 없었죠. 노래 부르는데 술 취한 사람이 올라와 방해하면 굉장히 자존심이 상했고. 그런 게 쌓이면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을까’ 하며 자괴감이 들었죠. 결국 작년 8월에 가게는 정리했어요.”
자신이 할 일이 아닌 것 같아서 그만뒀다는 것은, 결국 하남석은 가수이자 뮤지션으로서 살아야 한다는 자각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는 최근 후배들에게도 곡을 주기 시작했다.
“후배들에게 준 곡이 많지는 않아요. 저는 전문 작곡가도 아니고 싱어송라이터니까, 주제넘게 누구에게 곡을 주나 싶은 생각도 했고. 그런데 그동안 200곡 정도를 만들었는데, 알려지지 않으면 그저 묻혀버리는 것 아니겠어요? 히트나 상업적인 결과를 원하는 것은 아니에요. 이제부터라도 주변 후배들에게 주자는 마음이 든 거죠.”
비록 외로울지라도 할 수밖에 없다
“삶의 의미와는 상관없이 오로지 돈만 벌고…. 제가 활동하는 통기타 쪽은 애초에 그런 것과는 거리를 둬야 하는 것 같아요. 의미 있는 이야기를 가사에 담고 싶고…. 이 나이에 판 팔고 다시 인기 얻으려고 음악하겠어요? 좋아서 하는 거고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고, 그게 삶의 ING죠. 그래서 안주하고 있는 동료 가수들을 보면 속으로 화가 날 때가 있어요. 선배가 후배들에게 가교역할을 해야지 옛날 노래만 갖고 인사나 하고 돈이나 벌려고 하는 그런 모습들이 참….”
그는 자신과 같은 이른바 ‘선배 가수’들이 후배들에게 모범이 되지 못하고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일들에 대해 얘기하면서 점점 목소리를 높였다. 어쩌면 가수들 중에서도 그이라서 볼 수 있었던 드문 격정이었다.
“나라도 하자, 외로울지라도. 하다 보면 멜로디가 생각나고 책을 보다가 이게 좋겠다 싶으면 노래로 풀어나가고…. 어차피 완성은 없지만 그래도 근사치에 가까워지는 것, 그래서 계속 할 수밖에 없는 일을 하는 거죠.”
‘책과 음악 그리고 자연’.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황혼의 향기가 이 세 가지라고 말한다.
“정말 좋은 음악을 남기고, 누군가가 나중에 인정해주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말하는 그를 보면서 젊음이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됐다. 그에게 시간의 흐름은 자신의 목적과 비교하면 큰 의미를 갖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나이가 들어 불편할 수 있고, 달라지는 부분들 또한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변치 않을 것을 끝까지 품에 안고 있는 사람이었다. 젊음이란 그렇게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을 가진 사람이어야 지켜지는 것 아닐까. 여전히 치열하게 도전하는 하남석의 노래가 펼쳐 보일 젊음에 기대감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보다 더 오래 남게 될 그의 노래에 실릴 새로운 꿈을 응원한다.
영화 포스터가 밝고 환하다. 언뜻 알록달록 꽃들인 줄 알았는데, 예쁜 면 생리대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생리컵이라는 낯선 물건들도 함께 놓여 있었다. 마치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것처럼.
포스터부터 대놓고 영화의 주제가 ‘생리’임을 드러내는 영화 ‘피의 연대기’. 인류의 절반인 여성들의 몸에서 일어나는 자연 현상에 대한 내용이다. 50플러스서부캠퍼스에서 영화 상영과 함께 감독과의 대화 시간을 마련했다. 덕분에 영화의 후일담을 들을 수 있어 매력적이라 느꼈다.
그렇다면 ‘피의 연대기’라는 제목이 담고 있는 뜻은 무엇일까? 영화의 출연과 연출을 맡은 김보람 감독은 “여자들이 생리를 처리해 온 역사뿐만 아니라 내 몸에서 일어난 개인이 겪은 생리의 역사, 그리고 생리를 하고 있는 여자들의 연대 모두를 의미한다”라며 야무진 답변을 들려줬다.
우리 사회 담론에서 밀려나 있던 여자들의 은밀한 이야기 ‘생리’. 저소득층 여학생의 깔창 생리대 문제가 사회에 툭 튀어나오고부터 정치권에서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영화를 보며, 이제는 완경을 맞은 나의 생리 역사도 떠올랐다. 초경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엄마와 언니가 있었지만 딱히 알려주는 사람이 없어 쑥스럽고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생리 주기는 정확한 편이었고, 생리통도 심하지 않은 것은 정말 다행이었다. 그러나 더운 여름에 생리를 하면 많이 불편하고 힘들었다. 생리통으로 하얗게 얼굴이 변하며 고생하던 친구들도 떠오른다.
영화는 이러한 내용을 무겁지 않게 톡톡 건드리며 쉽고 자연스레 몰입하게 만든다. 여자들 몸에서 일어나는 은밀한 이야기이지만, 세상에 환하게 드러내 놓고 보니 또 자연스럽다. 처음 사용법을 알게 된 생리컵이라는 이상한 물건도 신기하게 느껴졌다.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생리에 대해 남자들도 관심을 가져야
“남자들이 이 영화를 많이 보면 좋겠어요. 어떤가요?” 감독과의 시간에 내가 던진 질문이다. 이에 김보람 감독은 “독립영화, 다큐멘터리, 게다가 주제는 생리, 남자들이 싫어할 만한 3가지 요소를 다 가지고 있는 영화입니다. 간혹 여자친구 손에 끌려오는 남자들이 있기는 하지만, 남성 관객이 별로 많지는 않습니다”라며 웃으며 답한다.
여자마다 다양한 생리 증후군이 있다. 나는 여자들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고통을 남자들이 좀 알았으면 한다. 여성은 그들의 친구, 동료, 애인, 아내, 이웃이 아니던가? 이 세상의 절반인 여성을 이해하고 함께 생활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첫걸음은 없으리라. 여성들도 남자들이 저절로 알아주기를 기대하지 말고 도움과 이해를 적극적으로 구해야 한다. 나는 생리 직전 우울감과 무력감을 많이 느꼈다. 이런 호르몬의 장난을 알고 있던 남편은 긴 연애와 결혼 생활 동안 매달 유난히 까칠해지는 나를 어느 정도 이해해주었다.
생리대는 필수품, 뉴욕시 공짜 생리대 법안 통과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 같아 다행이다. 영화에도 나오듯 2016년 뉴욕시는 공립학교·교도소·노숙자 보호소 등 공공화장실에 생리대를 설치하기로 하였다. 영화 제작진은 이 장면을 직접 촬영했다.
“모든 여성의 존엄과 보건을 위한 중대한 한 걸음”이라는 뉴욕시의 슬로건이 뭉클하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건강이 좋지 않으면 몸의 주기성이 깨져 언제 나올지 모르는 생리의 불안감에서 벗어나는 사람이 많아지리라. 우리나라도 저소득층 여성 청소년들에게 생리대를 지급하는 지자체가 많아지고 있어 반갑다. 물론 아직 갈 길은 멀지만.
생각의 변화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몇 년 전, 남녀공학 고등학교에 재직할 때 일이다. 보건 선생님은 생리대를 준비해오지 못해 쑥스러워하는 여자친구의 손을 끌고 보건실에 온 남학생들이 가끔 있다고 귀띔해주었다. “OO을 건드리지 마! 오늘이 그날이래~”하는 남학생도 있었다. 장난처럼 오가는 말에 친구를 위한 배려가 느껴졌다. 무엇보다 음지에서 양지로 나와 자연스런 몸의 현상 중 하나로 이야기되는 일이 좋아 보였다.
‘피의 연대기’ 같은 여자의 몸, 생리에 대한 다큐 영화가 제작되고, 함께 토론해보는 것도 진전의 신호이다. 여혐, 남혐 사회를 뛰어넘어 남녀가 살아가는 동반자로 서로의 특징을 잘 이해하는 것이 평화로운 삶의 첫걸음일 것이다.
그나저나, 영화가 적자라 고민이 많다던 감독의 말이 머리에 맴돈다···.
지난 달 건국대 새천년관에서 재미있고 유쾌한 토크 콘서트가 열렸다. 주제는 성 평등이었다. 깊이 들어가면 그리 유쾌할 수만은 없는 남녀의 차별 문제도 제기되었다. 그래도 시종일관 분위기가 밝았던 건 사회를 본 최광기 여사 덕인 것 같다. 본인의 이름으로도 큰 웃음을 주었고 태어났을 당시 자매들의 출생신고가 아무렇게나 되었는데 딱 하나 아들을 낳자 그날로 출생신고를 하셨던 아버지를 예로 들며 태어나자마자 차별을 받았다고 고백해 청중을 웃겼다.
딸만 셋이었는데도 지극한 사랑을 주셨던 아버지 덕에 필자는 남녀차별을 전혀 모르고 자랐다. 주변 이야기를 들어보면 과거에는 아들과 딸의 차별이 아주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밝게 꾸며진 콘서트홀은 왠지 즐거운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했다. 미국인이지만 이미 대한 미국인이라 불리는 '타일러'가 패널로 나와 특히 기대가 되었다. '타일러'는 요즘 모 방송의 '비정상회담' 원년 멤버로 나오고 '문제적 남자'라는 프로그램에서 대단한 뇌섹남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친정엄마와 필자는 타일러의 열성팬이다.
최광기 씨의 사회로 여성가족부 정현백 장관과 방송인 타일러, 개그맨 황영진, 좋은 연애연구소 김지윤 소장이 무대에 자리를 잡았다. 먼저 어린 시절의 고정관념이 남녀의 성차별에 큰 영향을 준다는 얘기로 시작했다. 남녀의 역할은 따로 있다는 식으로, 남자아이에게 “남자가 울면 어떡하니?”라고 하고 여자아이에게는 “여자가 칠칠치 못하게”라는 표현을 무의식으로 써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무심결에 한 말이 고스란히 아이에게 각인되어 결국 성차별이라는 고정관념이 생겼다는 설명이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약간의 걱정이 생겼다. 며칠 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세 살짜리 손자가 여섯 살짜리 손녀에게 용감한 포즈를 취하며 "누나는 내가 보호해줄 거야!"라고 했다. 아기가 한 그 말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귀여워서 마구 칭찬해주며 "그래, 누나는 여자니까 남자가 보호해줘야 해" 했는데 성 평등에 어긋나는 표현이었을까 우려가 됐다. 오랫동안 이어져온 고정관념이 사라지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 평등으로 완성되는 나라다운 나라'의 주제로 진행된 토크쇼는 대한민국 남녀가 바라는 성 평등은 어떤 모습일지, 왜 지금 성 평등을 주장하는지에 대해 담론했다.
20~30세대 2000명에게 다시 태어나 성별을 바꾸고 싶은지 묻는 설문조사에서 남자는 37%, 여자는 무려 49.5%가 그렇다고 했다. 여자가 느끼는 성차별이 더 크다는 의미다. 정현백 장관은 50년 이상 지속되어온 호주제에서의 폐해와 똑똑한 여 제자가 취업할 때 받았던 불이익을 예로 들어 말해줬다. 그러나 새 정부도 여성 장관 기용 30% 공약을 지키는 등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변화의 바람을 잘 받아들이고 있다.
어떤 일을 할 때 남녀의 역할을 정하지 않고 잘할 수 있는 사람이 하면 된다는 해결책도 나왔다. 형광등은 꼭 남자가 갈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키가 좀 더 큰 사람이 하면 된다는 의견에 모두 찬성했다. 김지윤 소장은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역할을 정해야지 성에 따라서 할 일이 정해져서는 안 된다고 조언했다. 맞벌이 부부의 경우도 먼저 귀가한 사람이 식사 준비를 하면 되고 덜 피곤한 사람이 청소를 해야 한다는 의견에 많은 사람이 공감했다.
세계적으로도 성 평등 운동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데 UN이 추진하는 연대운동인 ‘He for She’는 성 평등을 위해 함께 노력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작한 글로벌 캠페인이다. '화이트 리본'은 사라 제시카 파커와 카메론 디아즈 등 유명 할리우드 배우들이 참여해 화제가 되었다. 우리나라에도 45명의 남성이 성 평등을 실천하는 '성 평등 보이즈'라는 모임이 있다.
두 시간의 토크쇼가 마무리되면서 패널들에게 던져진 마지막 질문은 '내가 꿈꾸는 성 평등 대한민국은?'이었다. 정현백 장관은 '소통하고 이해하는 성숙한 민주 사회'라고 했고 김지윤 소장은 '누구나 원한다면 안전하게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나라'라 했다. 필자가 좋아하는 대한미국인 타일러는 '아직 멀었다'라고 따끔하게 현실을 꼬집었다.
세상에 이기지 못할 것이 운발이라고 한다. 운칠기삼(運七技三), 운이 70%라면 재능과 노력은 30%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다. 심지어는 운11. 기 마이너스 1이란 이야기조차 있다. 운이 좋아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윤은기(66) 한국협업진흥협회장은 그 답을 협조와 협업에서 찾는다. 그는 개인이나 기업이나 공생, 상생하는 것이 운을 좋게 만들고, 지속가능경영을 가능케 한다고 말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가 아니라 ‘남을 돕는 자’를 돕는다”가 그의 신조다. 남과 나눠야 운이 따른다. 운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라기보다 후천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다. 별명이 ‘미스터 콜라보(Mr. collabo)’인 그를 여의도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윤 회장께선 일찍이 미래의 물결, 정보화사회를 이야기하는 등 미래 트렌드를 남보다 앞서 예측하시고 강의해왔습니다. 그런데 운 이야기를 강조하시는 게 좀 모순 같습니다.
“정보화를 넘어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운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내가 말하는 운이란 덕행의 인과법칙입니다. 지극히 과학적입니다(웃음). 남을 돕지 않는 자에겐 운이 따르지 않아요. 아무리 똑똑하고 잘난 사람도 남이 도와주지 않거나 방해를 하면 성과를 낼 수 없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노력뿐만 아니라 남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는 점입니다. 귀인을 만나야 운이 좋아질 수 있습니다. 귀인을 만나려면 먼저 인간 존중,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최근 를 쓴 일본의 원로 변호사 니시나카 쓰토무도 국내 언론 인터뷰에서 ‘운=도덕과학’이라고 풀이한 바 있다. 니시나카 변호사는 “도덕적 과실이 운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하다.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라도 갚지 않으면 운이 나빠진다. 은혜를 받기만 하면 ‘도덕적 부채’로 쌓인다”고 말했다. 도덕적 선행과 나눔이 운을 불러온다면, 도덕적 부채와 독과점은 금전적 부채보다도 더 큰 불운을 초래한다는 지적이다.
‘하늘은 스스로를 돕는 자보다 남을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은 과학적 근거가 있다. 남을 돕는 봉사를 하고 난 뒤에는 거의 모든 경우 심리적 포만감, 즉 ‘하이(high)’ 상태가 며칠 또는 몇 주 동안 지속된다. 의학적으로도 혈압과 콜레스테롤 수치가 현저히 낮아지고 엔도르핀이 정상치의
3배 이상 분비되어 몸과 마음에 활력이 넘친다. 이른바 마더 테레사 효과다. 기업의 사회적 공헌(CSR,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리더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개인의 사회적 공헌(PSR, Personal Social Responsibility) 실행은 이타적이라기보다는 운을 불러들이는 이기적 행위인 셈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말은 많이 합니다. 반면에 일반 개인의 사회적 공헌(PSR)은 그만큼 강조되진 않지요.
“‘사회 공헌, 기부’ 하면 거대 담론으로만 생각합니다. 나중에 여유 생길 때 기부한다고 미뤄두면 평생 하기 힘듭니다. 기부는 물질적 여유가 아니라 평상시 태도, 습관입니다. 저는 재능기부 차원에서 군에 강의를 갑니다. 또 공군 순직 조종사 유자녀 장학금을 매년 1000만원씩 지원하는 일을 7년째 해오고 있습니다. 기부를 꾸준히 하는 것은 남을 위하는 것을 넘어 스스로 행복하게 사는 비결입니다.”
그는 “돈이 많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며 앰뷸런스를 이용하며 운전기사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소개했다. “부자들은 앰뷸런스에 시체가 실리는 순간부터 가족이 싸우는 경우가 많다는 거예요. 그렇게 산다면 부자인들 무슨 삶의 의미가 있겠습니까. 저는 있어야 나누는 것이 아니고 나누어야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짜 부자는 돈이 있는 게 아니라 마음을 나누는 사람입니다.”
1년에 기부금 1000만원을 약정하고 꾸준히 하는 것, 쉬운 일은 아닌데요. 사모님도 처음부터 동의하셨는지 살짝 궁금합니다.
“저는 집사람을 설득해야 할 때 집에서는 절대 말을 꺼내지 않습니다(하하).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이나 술집에 데려가 이야기를 시작하지요. ‘사는 게 뭐 별것 있나, 잘사는 인생이란 무엇인가’ 등등으로요. 먼저 길을 닦고, 마음을 촉촉하게 적신 뒤 본론을 꺼내지요. ‘우리 여행 한 번 덜 가고, 골프 한 번 덜 치자, 소비를 조금 줄이더라도 좋은 일을 해보자, 돕고 사는 게 재미지, 혼자 잘사는 게 무슨 재미인가’ 하고요. 똑같은 이야기라도 반응이 전혀 달라요. 집사람이야 콩나물값 깎아가면서 알뜰살뜰 살림하는 전업주부인데 처음엔 좋아하지 않았지요. 하지만 지금은 저보다 더 기부에 적극적이랍니다.”
윤 회장은 스스로의 전공을 심경학, 즉 심리경영학(그는 학부는 심리학, 석·박사는 경영학을 전공했다)이라고 말하곤 한다. 심리를 경영할 줄 안다는 의미에서다. 그는 “정의파, 대의명분파들이 설득에 실패하고 저항에 부딪히는 이유는 단 하나다. ‘옳으냐’로 ‘좋으냐’를 무시하거나 압박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진정한 소통은 ‘옳다’를 넘어, 마음속으로 ‘좋다’고까지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이성보다 감성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에 이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베스트셀러 비결도 사모님과의 심경학 소통 덕분이라면서요.
“하하. 네. 제 책의 첫 독자, 안테나 마켓은 집사람입니다. 작가에겐 책 내용이 정리돼 영감이 오는 ‘유레카’의 순간이 있습니다. 한밤중이라도 깨워 한바탕 책 내용을 설명하지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심드렁해하면 책의 콘셉트 혹은 틀을 바꿉니다. 베스트셀러가 된 책은 대부분 집사람이 한밤중 잠결에 들어도 흥미롭게 들은 책, 말 된다고 집사람이 동의를 표한 책이었습니다(웃음).이번 협업 책도 그렇고요.”
진정한 소통은 같은 세대, 같은 수준의 말을 쓰는 사람뿐 아니라 이질적 그룹의 사람과 통하는 것이다. 그의 강의가 폭넓은 호응을 얻는 것도 그 덕분이다. 이장우 브랜드마케팅그룹 회장, 차동엽 신부, 장용동 목사 등 숱한 명사들이 윤 회장의 강의를 ‘내 인생에 영향을 준 명강의’로 꼽는 것도 소통력 때문이다.
윤 회장께서 살아오시면서 겪은 가장 큰 고비는 무엇인가요.
“1980년도에 발간된 앨빈 토플러의 을 읽고 우리나라가 살 길은 정보화사회에 빨리 도전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갖게 됐습니다. 잘 다니던 종합무역상사에 사표를 내고 1983년 여의도에 정보전략연구소를 차렸는데 2년 만에 퇴직금까지 모두 까먹고 엄청난 부채를 지게 된 거예요. 하루가 지나면 부채는 늘고 철수하자니 빚 감당을 못하겠고. 그때가 내 인생의 최대 위기였습니다. 마침 1985년 앨빈 토플러가 방한해 붐이 일어나면서 극적으로 위기를 벗어나게 됐습니다. 그때 깨달은 것은 세상 모든 일은 반드시 때가 있다는 거였습니다. 너무 늦어도 안 되지만 너무 빨라도 안 된다는 겁니다. 이후, 무슨 일이든 최적의 타이밍을 찾아내려고 심사숙고했습니다. 사람들은 좋은 아이디어가 생기면 자신감이 넘쳐 성급하게 뛰어드는데 그러면 실패하기 십상이지요.”
우리나라 최초의 골프 칼럼니스트로 골프와 경영을 접목한 글로 인기를 끄셨지요.
“우리 사회의 내로라하는 인사들치고 저랑 골프를 치지 않은 사람은 드물지요. 골프를 치면서 인생의 깊은 내공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글로 써본 것이지요. 특히 김종필 전 총리랑 골프를 치면서 들은 인생 허업(虛業) 이야기가 제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정치는 허업이야. 잘났다고 하는 저 사람(정치인)들이 하는 일이 뭐가 있어? 온갖 폼은 다 잡지만 남는 게 뭐 있어? 정치는 자기들끼리 싸우다 다 잃는 거야. 제일 어리석은 직업이 정치야’라고 허무하게 말씀하신 게 기억에 남아요.”
인생의 산전수전을 다 겪은 분께 그런 이야기를 들었기에 허명(虛名), 허업(虛業)에 대한 내려놓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지나치게 욕심을 많이 부리면 반드시 터지거나 넘어지게 돼 있다. 윤 회장은 인생의 욕심을 풍선과 계단오르기에 비유해 설명한다. 계단을 하나씩 올라가면 문제가 없지만 한꺼번에 많이 오르려 하면 반드시 고꾸라지는 게 인생의 법칙이다. 풍선도 마찬가지다. 있는 힘껏 풍선을 끝까지 불 수는 있지만 그러다가 터질 수도 있다. 그래서 80~90% 정도만 불고 남겨둬야 한다. 너무 빵빵하게 불면 언제 터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힘을, 마음을 내려놓아야 하는 이유다.
탈속의 이야기만 했네요. 세상 이야기로 돌아와 볼까요. 정보화사회, 협업 등 늘 기업 경영의 화두를 먼저 설정, 새바람을 일으키셨습니다. 또 시(時)테크, 골드칼라 등 시사용어를 선도해 유행시키셨는데요. 그 촉(觸)의 비결이 무엇인지요.
“지도자라는 것이 무슨 의미겠습니까. 선지자, 선견, 먼저 보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지도자는 지도를 가진 사람입니다. 즉 방향성을 제시하는 게 중요합니다. 청년기에 군에서 훌륭한 리더를 만나 생각의 틀을 다진 게 제겐 큰 도움이 됐습니다. 청년 장교(중위) 때 투스타 김동호 장군의 부관을 하다 보니 엄청난 용량의 공부가 필요했습니다. 인생의 한창때 존경할 만한 롤모델을 만나는 것은 큰 운입니다. 책 100권, 아니 1000권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칩니다.”
책 에서 귀인효과를 말씀하시는데요. 김동호 장군이 윤 회장님의 귀인이셨나보군요.
“맞습니다. 김 장군은 영어, 일어 등 외국어 실력도 뛰어나시고, 유도, 검도 유단자에다 특히 인품이 뛰어난 분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지덕체, 문무를 겸비하신 분이었습니다. 김 장군이 면접하는 모습을 보고 단번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제 실력을 묻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이력, 종교, 꿈을 들려주시며 리더로서 이렇게 노력하겠다고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겁니다. 당시 제 주변 동료 장교들은 퇴근 후 취직 공부를 해야 한다며 24시간 근무해야 하는 부관을 기피했어요. 저는 퇴근 후 두 시간 공부보다 이분을 모시는 게 훨씬 큰 공부가 되겠다는 느낌이 한 번에 오더군요. 존경받는 것도 기쁘지만, 존경하는 사람을 가까이 두는 것이 더 기쁜 일입니다.”
윤 회장은 그 후 4년간을 한결같이 김 장군을 곁에서 ‘모셨다’. 제대하는 토요일, 오후 3시까지 초과 근무를 자청한 것은 초급 장교 중 전무후무해 공군 본부에서 화제가 될 정도였다. 윤 회장은 김 장군과의 인연을 40년째 이어오고 있다. 지금도 1년에 두세 차례씩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고 예전 어록과 교훈을 같이 추억하며 이야기꽃을 피우곤 한다.
김 장군도 훌륭하시지만 그분을 한눈에 알아본 윤 회장님도 대단합니다. 더구나 20대 중반의 청년 장교 때요.
“그런가요.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알아보는 용인술도 중요하지만,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알아보는 ‘역용인술’도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롤모델을 만나고 싶어 하지만 스스로 찾아보려고 노력하진 않거든요. 존경하는 사람이 없으면 반쪽 인생이에요. 한 번도 사랑해보지 못하고 죽는 것보다 더 불행하고 불쌍한 삶이지요. 어려운 의사결정을 할 때 ‘김 장군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자기객관화가 되면서 답이 보여요. 존경할 대상이 생기면 상대의 장점 DNA가 보이고 배워야 할 사항이 쏙쏙 들어와요. 존경하는 사람을 가지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지요.
“앞으로 10년 정도는 우리나라 모든 영역, 모든 분야에 협업문화를 확산시키는 일에 매진할 계획입니다. 그 후에는 청소년 시절부터 꿈이었던 소설가로 데뷔하고 싶습니다. 소설은 현실에서는 추진할 수 없는 이상향을 마음껏 그릴 수 있으니까요. 제가 존경하는 소설가 김주영 선생님도 수시로 만나고 있고 최근에는 김홍신 선생님도 몇 번 만났습니다. 평생 동안 경험한 일들과 상상했던 일들을 융합시켜 멋진 소설을 쓰는 게 내 인생의 마지막 직업이 될 겁니다.”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출판사들이 모여 있는 파주출판도시, 날카로우면서도 부드러운 곡선 건물 한 채가 눈에 띈다. 연둣빛 잔디밭과 파란 하늘 사이, 마치 흰 종이가 펄럭이듯 살랑살랑 손짓을 한다. 다양한 전시품은 물론 건축물 그 자체로도 미적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이곳, 바로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이다. 단순한 듯 단순하지 않은 특유의 매력에 이끌려 햇살이 스미듯 자연스레 발걸음했다.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은 다양한 규모의 전시 공간이 한 덩어리에 담긴 설계가 돋보인다.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 황금사자상(2002·2012)에 빛나는 포르투갈의 건축가 알바루 시자(Alvaro Siza)가 설계해 건축물 그 자체로도 예술 작품이라 평가받는 곳이다. 일반 관람객 외에도 국내외 건축가와 아티스트들이 방문하는 등 미술관 그 이상의 가치를 선사하는 공간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흰색에 가까운 연회색 빛 벽면으로 둘러싸인 건물에는 그 흔한 간판이나 전시 현수막도 걸려 있지 않다. 그래서일까? 아무런 힌트도 주지 않는 도도함에 ‘대체 정체가 뭐야?’ 하는 호기심이 든다. 벽면의 단조로움은 곡선이 생동감을 선사하며 오묘한 조화를 이룬다. 단순한 벽면 덕분에 곡선의 날렵함이 더욱 눈에 띈다. 얼핏 두 채로 보였던 건물은 입구에 다다라서야 잘록한 허리를 드러냈다. 부드러운 곡선을 따라 건물을 훑어보고 입구에 들어섰다.
자연광이 선사하는 예술의 향연
전시공간으로 가기 전, 1층 로비는 널찍한 카페로 꾸며졌다. 실내 카페와 테라스에서는 커피, 생과일주스, 허브티 등을 즐길 수 있다. 카페에서 슬쩍 미술관 내부를 둘러보면 조금은 침침하다는 생각이 든다. ‘빛으로 미술관’이라는 콘셉트로 인공조명을 두지 않아 자연광으로만 명암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계절과 시간에 따라 매번 다른 작품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다. 자연광에 의존하다 보니 개관은 오전 10시로 동일하지만, 폐관 시간은 계절에 따라 다르다. 봄·가을에는 오후 6시, 여름에는 오후 7시, 겨울에는 오후 5시에 문을 닫는다.
전시공간으로 이동하면서 눈에 띄는 것은 역시나 새하얀 벽면이다. 전시 작품도 널찍하게 간격을 두고 걸어 여백이 많은 편이다. 오히려 그런 점들 덕분에 작품 하나에 오랜 시간 집중하며 감상할 수 있다. 외관과 마찬가지로 내부 역시 흰 벽면의 단조로움에 곡선 구조가 리듬감을 불어넣는다. 중간중간 보이는 통유리 자연조명에 따라 작품의 분위기와 온도가 다르게 느껴진다. 언제 가느냐에 따라 그림자가 길어지기도 하고, 짧아지기도 하면서 흰 여백에 무늬를 수놓는다.
보고 느끼고 체험하며 즐기는 예술
1층 카페와 한 공간에 있는 ‘북앤아트숍(book &artshop)’에서는 미메시스(‘열린책들’이 설립한 예술 전문 출판사)에서 출간하는 책들을 할인된 가격에 판매한다. 단순히 비평가들이 쓴 담론보다는 예술가들이 삶의 혼이 담긴 자서전, 창작노트, 일기, 예술 에세이 등을 위주로 출간하고 있다. 미메시스에서는 오랜 시간과 비용을 투자하더라도 책의 속살은 실로 꿰매는 전통 제작 방식을 고수한다. 이러한 고집은 디자인 문구를 만드는 데도 발휘된다. 정교한 디자인에 높은 품질의 디자인 제품을 합리적인 가격으로 내놓는다. 출판과 건축, 예술의 만남을 아우르는 문화공간으로서의 미술관을 지향하며 다양한 예술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자세한 프로그램 일정은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 및 신청 가능하다.
△ 이용 정보
경기도 파주시 문발로 253 (파주출판도시)
매주 월요일, 화요일 전시 휴관
카페·북앤아트숍 매일 운영
사람이 털북숭이가 아닌 다음에야 살갗을 다치지 않기 위해 옷을 입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나아가 추위와 더위를 견디기 위해 거기에 맞는 옷을 마련하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게다가 사람이 원숭이가 아닌 다음에야 질기고 편하고 보기 좋은 옷을 입는 지혜를 발휘하는 것도 마땅한 일입니다. 하물며 사람인데 자기에게, 그리고 경우에 따라, 잘 어울리는 아름답고 멋있는 옷을 골라 입는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 없이 ‘사람다운’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자연스럽고 당연하고 마땅하고 사람다운 ‘옷 입는 일’이 그렇게 물 흐르듯 인간의 역사를 흘러오지 않았습니다. 실제로는 어쩌면 앞에서 서술한 흐름의 역류(逆流)라고 해도 좋을 법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옷 문화’는 참 서술하기도 복잡하고, 설명하기도 어렵고, 이러저러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힘듭니다. 그래서 그런지 옷 입는 일에 대한 아무리 짧은 발언을 해도 그것은 사람들 사이에 공감하는 자리를 넓히기보다 오히려 불편하게 얽히고설키는 언짢음을 낳곤 합니다.
사람이 아닌 옷이 주체가 된 세상
생각해보십시다. 우리는 옷 입는 모습을 보면서 참 많은 말들을 합니다. 이를테면 남자가 여자처럼 입었다느니(반대도 마찬가지이고), 늙은이가 젊은이처럼 입었다느니(이 또한 반대도 마찬가지이고), 감히 귀한 분 옷매를 흉내 낸다느니(반대로 자기가 언제부터 서민이라고~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고), 아예 다 벗지 저걸 옷이라고 걸쳤느냐느니(반대로 아예 옷을 입었다 하지 말고 둘둘 감았다는 게 낫지~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고), 1960년대 복고풍이라느니(반대로 우주시대 첨단 모습이라느니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고), 품위가 돋보인다느니(반대로 속물처럼 보인다느니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고) 하는 말들이 그러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처럼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준거로 한 의상문화의 서술이 무의미하게 된 새로운 이른바 ‘패션담론’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 담론의 준거가 무언지 가늠하기가 무척 힘들지만 분명한 것은 ‘유행’이라고 일컬어지는 그것이 무섭게 강한 규범적 가치로 누구나의 옷 입음을 판단하여 누구도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새 패션 담론에 어울리지 않는 이전을 준거로 한 패션 서술이 얼마나 적합하지 않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 짐작이 되고도 남습니다. 한데 그렇기는 하면서도 아직은 이런 묘사를 아주 접고 싶지는 않습니다. 무엇을 준거로 하든지 어울림과 그렇지 않음을 통해 옷 입는 일에 대해 발언하는 일은 멈추지 않을 거니까요.
그런데 좀 갸우뚱해지는 것은 이런 ‘옷 담론’을 듣다 보면 ‘옷’과 옷을 입는 ‘사람’의 자리가 묘하게 바뀐 것이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주체가 되어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입은 옷’이 사람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요즘 우리네 삶에서 ‘옷 입는 문화’란 사람이 주체가 되어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옷이 주체가 되어 사람을 드러내면서 그를 판단하고 설명하는 그런 세상이 되었다고 해야 옳을 것 같은데, 그렇다고 하는 사실이 묘하게 저를 편하게 해주지 않습니다. 이 불편함이 무언지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유로워야 할 ‘옷’ 입기
아무튼 아름다운 옷을 입으면 그 사람이 아름다워 보이고, 비싼 좋은 옷을 입으면 그 사람이 부귀하게 보이고, 이른바 멋스럽게 옷을 입으면 그 사람이 세련되어 보이고, 후줄근하게 입으면 그 사람은 좀 모자라다고 판단되며, 꾀죄죄하게 옷을 입고 있으면 오갈 데 없이 그 사람은 그만큼 너절하게 보입니다. 이는 지금 우리에게 어쩔 수 없는 현실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대체로 우리는 그렇게 판단하며 살고 있고, 그런 판단에 상당한 긴장을 하면서 옷을 입으며 살아갑니다. ‘옷을 통한 사람의 규정’이라고 할 수 있을 이러한 현상은 유니폼 문화에서 아주 직접적으로 구체화되어 있습니다. 좀 과장을 하자면, 특정한 기능 수행을 위한 제복이 마련되면서 그 자리에서는 그 유니폼을 벗는 순간 아예 그것을 입었던 사람조차 사라져버립니다. 존재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죠. 그러고 보면 우리는 모두 아름다움이라는 유니폼, 부귀하다는 유니폼, 멋있다는 유니폼, 때로는 타의에 의해 후줄근하고 꾀죄죄하다고 여겨지는 유니폼, 그런데 그것이 세월 따라 흐르면서 끊임없이 바뀌는 그러한 옷 문화를 살고 있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자기가 실제로 그렇든 말든 그러한 유니폼을 입고 또는 그런 유니폼을 입으려 애쓰며, 아니면 입지 않으려 애쓰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도 또한 다른 형태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필요의 발전만이 옷 문화의 진전’을 이룬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옷이 사람을 규정한 것이 오히려 진정한 옷 문화의 전개였던 것임에 틀림없어 보입니다. 이를 잘 드러내주는 것이 아득한 때부터 전해지는 ‘옷이 날개’란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러한 옷 정의에 의하면 옷을 입는다는 것은 내가 내게 날개를 다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를 우리가 승인한다면 어떻게 무엇을 입을까 하는 일이 그리 큰 문제일 까닭은 없습니다. 어차피 어떻게 옷을 입어도 옷 입음이 내가 내 날개를 다는 일이라면 아름답게, 부귀하게, 세련되게 입어 그 날개로 내가 꿈꾸는 가장 높고 넓고 자유로운 하늘을 날 수 있도록 하면 되니까요. 옷이 시원찮아 날개 꺾인 새처럼 살 수는 없는 일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생각해보면 옷 입음이란 결국 다른 것이 아닙니다. 자유롭기 위한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자유롭기 위해 옷을 입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옷 문화가 옷 입음에 대한 어떤 담론을 어떻게 펼치든 간에 아직도 우리가 여전히 옷을 입는 주체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자유를 위한 비상(飛翔)이 옷 입기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날개가 날개다워야 합니다. 치덕치덕 온갖 치장으로 날개를 무겁게 하면 그 날개를 가지고 하늘을 날 수는 없습니다. 날개가 먼저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또한 내 날개로 날아 자유로울 수 없는 자리나 때라면 그 하늘로 그때 굳이 날 필요도 없습니다. 날개를 바꾸든지 그때나 그곳을 피하거나 포기하든지 둘 중의 하나에 대한 선택을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앞에서 지적한 불편함의 까닭을 조금은 서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옷이 사람을 규정하는 일이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이 일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것이 나도 모르게 내 자유에의 희구를 억제하기 때문일 거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옷 입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유로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옷 입는 일에서의 이른바 ‘파격(破格)’이 그 자유를 보장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정석(定石)’의 정장(正裝)이 그 자유의 드러남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내가 옷의 주인이 되는 일이 옷의 예속에서 벗어나 내 하늘을 확보하는 자유의 우선하는 규범이었으면 좋겠다는 무척 고루한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의 관성적으로 사람의 자리가 아니라 옷의 자리에서 사람을 봅니다. 그리고 그런 자리에서 내 옷을 챙겨 입습니다.
>>정진홍(鄭鎭弘) 서울대 명예교수
1937년 충남 공주 출생. 공주중, 대전고, 서울대 종교학과 졸. 서울대 대학원 석사, 미국 유나이티드 신학대학원 석사,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 박사. 서울대·한림대·이화여대 교수 역임. 현재 아산나눔재단 이사장, 서울대 명예교수, 울산대 철학과 석좌교수,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이사장.
은퇴 이후 인생 2막을 삶의 황금기로 만들 것인가, 황혼기로 만들 것인가. 황혼기와 황금기를 가르는 것은 무엇인가. ‘충분히 쓸 만큼 모아놓고 쟁여놓은’ 돈일까? 그보다 중요하고도 필요한 것은 인생을 재설계할 수 있는 은퇴 멘탈 갑, 즉 새로운 은퇴 마인드다. 과거 경력, 직장, 직책의 아우라를 들어내고, 자기의 진짜 정체성을 떳떳하게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 진정으로 ‘브라보 마이 라이프’를 외칠 수 있다.
100세 시대를 앞둔 요즘, 은퇴 이후의 시기는 막다른 골목이 아니라 인생의 3분의 1을 살아내야 하는 인생의 터닝포인트다. 그래서 우리는 은퇴를 충격이 아닌 감격으로 맞고 싶다. 끌끌 혀를 차며 밸이 배배 꼬인 채 훈수나 푼수를 떠는 뒷방 노인이 아닌 적극 참여하는 현장의 선수로 사는 롤모델 인생 선배를 만나고 싶다.
퇴직 5년 차가 아니라 진짜 좋아하는 일을 선택한 ‘취업 5년 차’라는 박시호(63) 행복경영연구소 이사장을 만났다. 인디언 핑크색 니트 상의에 옅은 브라운색 패딩 점퍼, 흰 바지 그리고 빨간색 운동화에 무스로 바짝 세운 밤톨머리 헤어스타일을 하고 나타난 그는 과거 CEO의 물이 쏙 빠진 사람처럼 보였다. 그에게선 인터뷰 약속 장소인 ‘신촌’의 청춘물결에서 한 치도 뒤처지지 않는 것을 넘어 자유인의 바람마저 느껴졌다. 2003년부터 행복과 관련한 앤솔러지를 사진에 담아 매일 아침 이메일로 배달하던 일은 이제 취미와 봉사에서 ‘주업’으로 승격됐다. 그 외 강연과 원고 쓰기, 사진 찍기 등등 요즘엔 여행기획가로서 행복을 오프(0ff)에서 실현하는 일에까지 관심사를 확장하고 있다. 그의 하루 24시간은 풍요롭다.
은퇴 괴담은 현실적으로 ‘밥’ 이야기로 시작하곤 합니다.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는 퇴직 가장의 현실을 표현한 단어 중에 ‘삼식이(집에서 삼시세끼를 먹는 가장)’란 호칭이 있는데요. 많은 퇴직 가장들이 “이러려고 지금까지 뼛골 빠지게 일했나”라며 피눈물을 흘린다고 합니다.
“감정계좌를 깡통계좌로 만들어놓고 만기일 됐다고 복리로 쳐서 가장 높게 대우해달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집밥만 우기지 말고 칼국수집이든 냉면집이든 같이 맛집 순례라도 해보세요. 찜질방 같이 가서 놀자고 해보세요. 절로 삼식님이 될 겁니다(웃음). 가장이 건강해야 집안을 끌고 간다고 하는데 마찬가지로 부인이 건강하고 행복해야 집안이 유지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남편 혼자 행복하고 즐거우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퇴직 이후 집에서 대우받는 것은 남편 하기 나름이지요.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게 부부입니다.”
그는 “체력관리한다며 주중, 주말 가리지 않고 매일 등산 가던 친구가 있었다”며 부인이 뇌졸중으로 쓰러져 병석에 누운 후 그 친구가 “부인이 건강할 때 산에 같이 갈걸, 왜 나 혼자 갔을까” 하며 땅을 치고 후회하더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행복은 거창하고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작은 데, 평범한 일상에, 함께 나누는 데 있다”고 말하는 그는 여러 일정 중에서 부인과 맛집 순례 후 하는 공원산책이 그날의 하이라이트라고 덧붙였다. 신혼 때처럼 전기가 찌르르 통하지는 않지만 40년 이상 살아온 인생 동지와 함께하는 ‘침묵의 공유’야말로 가장 든든한 의지가 된다는 이야기였다.
현직에 계실 때보다 더 활기차고 멋져 보이십니다. 부부 금실에서 비롯된 에너지 말고 비결이 있습니까.
“현직에 있을 때보다 몸무게를 10kg 정도 뺐어요. 회식이나 약속을 줄이고 운동을 하니 절로 빠지더군요. 제가 BMW족입니다. 버스(Bus)-지하철(Metro)-워킹(Walking),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많이 걷습니다. AMP 동기 부부동반 모임에 갔는데 집사람이 아무 정보 없이도 동기들 중 현직, 퇴직파를 족집게처럼 맞히더군요. 은퇴하면 현직 때의 아우라가 사라져 갈기털 빠진 사자처럼 되기 쉽습니다. 퇴직할수록 용모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합니다. 퇴직하니 공식적 일 없다고 후줄근하게 입고 다니거나 등산복을 평상복으로 입고 다니면 안 됩니다. 오히려 더 산뜻하게,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어야 해요. 뚝배기보다 장맛이 아니라 겉볼안이 더 맞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볼 때 이미지 판단이 6초 만에 끝난다고 하지 않습니까. 예전엔 아우라가 우러났다면 이제는 만들어야 한다고나 할까요. 퇴직할수록 의관이 생명이란 게 제 지론입니다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탓하지 말고, 먼저 남이 알아주도록 갖춰 입을 필요가 있습니다.”
은퇴 준비에도 선행학습이 필요할까요?
“일관된 인생 계획을 세워서 현직 시절부터 준비하지 않으면 의미 있는 은퇴의 삶을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선 공부를 해야 합니다.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합니다. 생존하기 위해서라도, 즐기기 위해서라도. 은퇴 이후의 공부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쫓기는 공부가 아닙니다. 자신이 즐길 수 있는 것, 좋아하는 것 뭐든 좋습니다. 사람들은 그동안 자신이 뛰어오던 트랙을 벗어나는 걸 두려워합니다. 그 두려움을 없애야 합니다. 등산도 높은 산을 오르려면 동네 산부터 오르며 준비하지 않습니까. 직장생활을 하면서 은퇴 후 뭘 하면 좋을까 늘 염두에 두고 그 일을 조금씩 준비해둬야 합니다.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준을 향해 공부하십시오. ‘지금 이 나이에…’ 또는 ‘시간이 없다’ 말하지만 그것은 모두 새로운 것을 배우기 싫어해서 하는 핑계일 뿐입니다. 취미든 기술이든 뭐든 배움은 운명까지도 바꿉니다. 공부를 하고 도전하다 보면 전문가 반열에 오르고, 그것이 새로운 세상의 지평을 열게 해줍니다.”
실제로 미국의 한 설문조사 결과에 의하면, 은퇴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적응하기 힘들었다고 대답한 은퇴자가 41%나 되고, 대부분 단조롭고 지겨운 일상과 목적 상실 및 지적 자극의 결여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은퇴에서 재정 설계 못지않게 필요한 것이 시간 설계, 즉 은퇴 후 동기 설계임을 보여주는 통계다.
행복이란 것이 요즘에야 흔한 담론입니다만. 행복편지를 시작한 2003년에는 요즘처럼 유행하는 화두가 아니었을 듯한데요.
“저도 욕심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정치도 해보고 싶었고, 돈도 많이 벌어보고 싶었지요. 그런데 특별조사부장을 하며 정치인, 재벌 총수들의 영고성쇠한 모습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습니다. 자기가 지은 고충 건물에서 피고인으로 수사를 받아야 하는 기업 총수를 보며 권력, 금력의 무상함을 보았습니다. 또 부도가 나 자살을 한 금융인,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표변하는 인심의 허망함을 한꺼번에 압축해봤어요. 권력도 금력도 아닌 세상에서 진정으로 변치 않고 행복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봤지요.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행복이라는 생각에 미쳤습니다. 저의 어렸을 때부터의 꿈인 그림그리기를 시작했지요. 그러다 점차 재능의 한계를 느껴 사진으로 바꾸게 된 것이고요.”
그는 사진을 공부하면서 행복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쳇바퀴 같은 삶을 바쁘게 살던 그가 ‘저녁이 있는 삶, 주말이 있는 삶’을 애써 찾으며 여유를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번 주엔 이 꽃을 이런저런 각도에서 찍어봐야지” 하는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아진단다. 또 사진을 찍으면서부터는 ‘집에 꿀단지를 묻어놓은 것처럼’ 퇴근을 기다렸고, 주말 새벽마다 강남고속터미널에 가서 꽃을 사는 행복한 마음은 뭐라고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하단다. 지인들에게 꽃 사진 선물을 하고, 그들이 감사인사를 전해오고, 급기야 행복편지까지 쓰게 된 계기가 되었다. 지인 700명 정도를 엄선해 보내는 행복편지는 감동적인 내용으로 ‘작지만 강한’ 행복 공유의 플랫폼이 됐다.
직장 후배들에겐 멘토로 여전히 환영받는 ‘퇴직 상사’라는 말씀 들었습니다. 그 비결이 있습니까? 어떤 분은 퇴직하니 알던 사람들 중 절반은 모른 척하며 떨어져 나간다고 ‘동선하로(冬扇夏爐, 여름 난로와 겨울 부채라는 뜻으로 철에 맞지 않는 물건을 이르는 말)’의 신세를 한탄하기도 하시던데요.
“하하. 저는 연락 안 해도, 거절당해도 고까워하지 않습니다. 또 조금도 불편하게 하지 않고요. 그러니 오히려 환영받네요. 잘해주면 고맙지만, 못 해주는 것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면 고까운 마음이 전혀 안 생깁니다. 상대도 부담스러워하지 않으니 오히려 더 찾더라고요. 부하직원들이 초대하면 병권을 맡깁니다. 예컨대 동석할 사람을 상대에게 정하라고 선택권을 주는 겁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정해 만나자고 하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또 그 밥에 그 나물인 예전 사람들만 만나면 재미없는데 후배들이 새로운 사람 소개해주니 저도 좋지요. 폐쇄성을 나부터 없애야 합니다. 자기를 열고 세상에 맞추면 세상살이 편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자기를 낮추고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또 상대가 누구든 불편하지 않도록 마음을 더 내어 배려해주는 것이 존중받는 비결입니다.”
박 이사장께서는 퇴직 후 제일 먼저 할 일로 명함 만들기부터 권하신다면서요.
“은퇴한 사람들이 모임에 나가면 제일 먼저 당황하는 게 명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명함이 없으면 몸을 꼬며 온갖 군말을 갖다 붙여요. ‘제가 회사를 그만둔 지 얼마 안 돼서요’ 등등. 스스로도 초라하고 서로 당황하기 쉬워요. 명함을 만들려고 구차한 자리 부탁하기도 하거든요. 당당한 명함은 당당한 자기정체성과 통합니다. 이제 과거의 후광은 벗어던지고 자기정체성을 드러내는 명함을 만드는 게 필요합니다. 하다못해 ○○를 연구하는 사람 ○○○라는 명함이면 어떻습니까. 말로 구구하게 설명하기보다는 자기정체성을 잘 드러내줄 수 있는 한 줄짜리 문장을 만들어보는 것입니다, 스스로 초라해질 필요 없습니다. 명함 주고받는 게 부담스럽고 부끄러워지면 대외활동은 끝나는 겁니다. 그만큼 중요해요. 아날로그 구세대에겐 직책과 직장이 필수이지만 젊은 디지털 세대는 그보다는 업, 좋아하는 일, 하고 있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사진이면 사진, 서예이면 서예, ‘이것에 대해선 나한테 물어봐. 내가 설명해줄 수 있어’라고 말할 수 있는 전문 분야가 있다면 더 좋고요.”
박시호 이사장의 명함엔 사진가, 행복경영연구소 이사장이라는 직함과 함께 연락처(전화번호와 이메일)가 간결하게 들어가 있다.
퇴직 후 부딪히게 되는 어려운 점 중엔 경조비 부담도 빠지지 않더군요. 국민연금 100만원 이상을 받는 사람들의 가계부에서 경조비 비중이 16%나 됩니다. 의료비보다 높은 비중입니다.
“퇴직 상태에서 대소사가 한꺼번에 밀려들면 아무래도 부담감이 커질 수밖에 없는데요. 은퇴한 사람들의 고민이 ‘경조사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이지요. 체면과 얽히고설킨 과거의 인연 때문이지요. 저는 기분, 체면보다 기준을 분명히 합니다. 과거의 주고받은 인연보다 1년간의 교류를 기준으로 삼습니다. 아이들 결혼 때의 방명록도 그 자리에서 없애버렸습니다. 1년 동안 만나지 않은 사람은 교류가 없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은 연락이 와도 경조사에 가지 않습니다. 정말 필요한 사람만 부르고, 성의만큼 성의를 표하자. 허례허식은 없애자는 게 제 주의랍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돈을 벌었지만 이제는 다르지 않습니까? 동창회 단체 공지에 올랐다고, 안 하면 욕먹는다고 찜찜해하면서 자주 보지도 않는 사람의 경조사까지 챙겨야 하는 것은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다 보니 주위에서 욕을 먹기도 해요. 그러나 욕을 먹더라도 자신의 기준을 지켜나가는 맷집과 용기도 은퇴 멘탈 갑의 마인드 중 하나입니다.”
박시호 이사장은 은퇴지능개발의 핵심 키워드로 배움을 꼽았다. 기술이든 지식이든 뭐든 배우고, 남의 눈 때문에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거나 그 반대의 경우가 없도록 하는 것. 그는 “좋은 사람과 맛있는 것을 나눠 먹을 때 행복을 느낀다”며 이 모든 것을 합친 것이 여행이라고 했다. 앞으로 여행 프로그램도 꾸준히 운영할 계획이라고. 지난 경험보다 앞으로의 계획을 말할 때 그는 더 설레면서 반짝였다.
은퇴 이후 새로운 삶의 설계와 도전도 마찬가지다. 용기 있는 사람만이 구태의연함에서 벗어나 신세계에 도전할 수 있다. 마음속에서 불을 뿜는 두려움의 용을 처단하고…. 박시호 이사장이 말한 ‘배움’은 구태의연함을 처단하고, 마음속에서 불을 뿜는 용을 무찌르는 날카로운 무기가 될 것이다.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대학생일 때는 공부에 매진할 수밖에 없던 환경이었죠. 고등학교 때는 시골에 있었으니 좀 여유 있게 놀 수 있었죠. 노래를 좋아했어요. 주위에서 목성이 좋다고 하고 발음도 명확하다며 성악을 하라고 하더군요.”
한영섭(韓永燮·61) 인간개발연구원 원장은 성악이라는 자신의 오랜 꿈을 더듬어보기 위해 10대 시절의 기억으로 돌아갔다. 그만큼 오래된 꿈을, 그는 50여 년의 세월이 흘러서야 비로소 이루게 됐다. 지난해 12월 10일 꿈에 그리던 무대에 서서 그간 갈고닦은 자신의 실력을 선보인 그에게 꿈을 이룬 제2의 인생 담론을 들어본다.
운동에 재능이 있고 배짱이 있었던 한영섭 인간개발연구원 원장은 얼떨결에 교련 과목에서 연대장을 맡게 됐다. 당시 교련은 굉장히 비중이 큰 과목이었다. 그래서 방과 후에 교련 연습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구령을 하려면 목소리를 키워야잖아요. 산에 가서 차렷, 열중쉬어를 많이 외쳤어요. 마이크 없이 질러대는 거예요. 그때 목이 많이 개발됐죠.”
대학교를 다니면서는 레코드를 자주 사게 됐는데, 특히 가곡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가 인생의 노래로 꼽는 곡도 그때 만나게 됐다. 양명문의 시에 변훈이 곡을 붙인 가곡 ‘명태’였다.
“다른 가곡들도 좋았지만 ‘명태’를 듣는 순간 이런 노래가 있구나 싶었어요. 엄청나게 따라 부르면서 외우곤 했죠. 학교를 다닐 때도 부르고 버스 안에서도 부르고. 그렇다고 성악의 길을 간 건 아니고 그보다는 좋은 공부를 해서 직장을 가야겠다 싶어 전경련에 들어갔어요.”
여기까지 살아온 내공이 있는데 그걸 못하랴
그가 전경련에서 맡은 건 CEO 교육이었다. 그래서 연사를 초청하다 보니 당연히 그중에 성악가들도 있었고, 그들과 자연스럽게 친하게 됐다. 그런데 그들의 공연을 보다가 문득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저런 무대에 서봤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내가 혼자서만 불렀지 교육을 받은 건 아니잖아요. 노래는 사사를 받아야 하더라고요. 우연한 기회에 감성CEO 오페라 과정에 들어가서 성악을 하게 됐습니다. 제가 ‘명태’를 부르는 걸 보고는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1막에 나오는 ‘Non piu andrai(더 이상 날지 못하리)’를 부르라는데 다른 사람은 다 2분 내에 끝나는 노래인데 이 노래는 5~6분 되는 거예요. 악보가 일고여덟 장 돼요. 다 이탈리아죠. 처음에는 자신 없었는데 그래도 여기까지 살아온 내공이 있는데 그걸 못하랴 싶었어요.”
‘더 이상 날지 못하리’가 한 원장 손에 쥐어진 건 2015년 5월 중순. 연습 시간은 한 달. 그는 집에서 엄청나게 연습했다. 횟수로 세진 않았지만 천 번은 거뜬히 넘었다고 한다.
“재미도 있지만 외우는 게 너무 힘들더라고요. 다행스러운 게 비슷한 패러그래프가 반복된다는 거였는데, 그게 또 헷갈려요. 반복이 정기적으로 되면 되는데 엇박자로 가는 게 있더군요. 그리고 노래가 경쾌하다보니 템포가 굉장히 빨라요.”
안 좋은 기억이 생기면 극복하려고 노력해야
연습을 하다보니 자신감이 생겼고, 지난해 7~8월 휴가 때 제주포럼에 가서 한 번 불러본 후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한 달 뒤에 그를 가르치던 분 앞에서 자신 있게 이 노래를 다 불렀다. 그러나 반응은 충격적이었다.
“‘그걸 노래라고 불렀어요?’ 그러더라고. 충격 먹었어요. 자신 있게 했는데 어째서 그렇게 말을 할까. 상처가 됐죠. 일주일 정도 지난 다음에 선생님에게 ‘그렇게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항상 긍정적으로 얘기해야 합니다. 부정적으로 얘기하면 학생에게는 상처가 됩니다’라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아, 그렇게 해야 다시 노력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대답하더군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런 질책은 잘못한 거죠.”
그러나 예순 살의 나이에 겪게 된 그런 강렬한 충격에도 불구하고 한 원장은 자신의 노래를 계속 가다듬었다. 혼자 알아서 해야 했던 연습이기에 박자가 안 맞고 숨을 엉뚱한 데서 쉬는 등의 실수를 나중에 가르침 받았다. 감정에 치여 좌절하지 않은 것이다.
“과거에 제가 평행봉을 잘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손에 땀이 너무 나니까 평행봉을 하다가 떨어졌어요. 하필 비탈에 떨어지면서 배를 쫙 긁혔죠. 보통은 그런 일이 벌어지면 운동을 단념해요. 철봉이 꼴도 보기 싫어지거든요. 그런데 저는 그때 더 열심히 했어요. 안 좋은 기억이 있을 때, 그 지점에서 더 열심히 하면 이겨낼 수 있는데 쇼크를 받아서 안 하면 완전히 멀어지는 것 같아요. 이번 경우에도 그런 쇼크를 받았어도 계속 코치를 받고 발전하려고 노력했죠.”
잠재력을 증명한 열정의 무대
“하고 싶은 노래를 하니 좋은 점이, 내가 잠재력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증명했다는 거죠. 그리고 전경련을 나와서 인간개발연구원에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데 취미를 하나 만들 수 있었다는 것도 굉장히 좋은 일입니다.”
나이를 들어서 꿈이 없으면 추하다는 말이 있다. 지금 그가 꾸고 있는 꿈의 모습은 무엇일까?
“올해 5, 6월즈음 개인 발표회를 하려고요. 한 곡 한 곡 사사를 받아 날 좋을 때 발표를 해야겠다 싶어요. 제가 바리톤으로 7~8곡은 부르고 소프라노 한 분, 테너 한 분 모셔서 함께 공연하는 식으로 진행하면서 단독으로 개인 발표회를 해보고 싶어요.”
그는 자신의 모든 잠재력을 가동하고 있다고 느낄 때 살아 있음을 감지한다. 그 잠재력을 모두 동원해 자신의 꿈을 향해 점점 나아가고 있음을 확인할 때 행복해한다. 그는 노래를 할 때 행복감이야말로 사는 이유라는 것을 알았다. 노래는 혼자 있어도 그를 행복하게 해주었고 그의 영혼을 풍요롭게 해줬다.
이렇게 꿈을 이룬 그에게 꿈에 대한 다른 시선을 물었다. 그는 꾸준한 노력이 함께하지 않는 꿈은 몽상에 불과하다고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발을 움직여 스스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며 꾸준히 노력하고 직접 몸으로 맞서 꿈을 이룰 것을 조언했다.
“간절하지 않으면 꿈꾸지 마세요. 간절히 바라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그 간절함은 분명하지 않으면 안 돼요. 막연한 간절함이 아닌 ‘반드시 이렇게 하고 싶다’ ‘이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의지와 다짐이 분명한 간절함이 필요해요. 24시간 먹고 자는 것을 잊을 정도로 간절하게 바라면 어느 순간 불현듯 자신도 모르게 놀라운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일과 즐거움이라는 두 마리 토끼
그는 전경련에서 33년 3개월을 보냈다. 초년기 중년기를 거기서 다 지낸 것이다.
“산업사회에 기여하는 조직으로서 훌륭한 직장이었죠. 송충이는 솔잎만 먹는다고 저는 다른 데서 다른 걸 할 수가 없어요. 조찬회를 만들어 회사를 좋은 방향으로 가게끔 하는 훌륭한 경영자 스토리를 교육하고 정치, 외교, 통일 안보에서 훌륭한 사람을 데려와 그쪽 교육도 진행했습니다. 인간개발연구원이 저에게 그 장을 마련해준 거죠. 혼자 그걸 만들려면 엄청나게 어려워요. CEO지혜산책을 만드는 등 제게 그런 지식과 기회를 만들어준 곳입니다.”
인간개발연구원은 30여명의 기업인이 1975년 조찬 공부 모임으로 창립한 인간개발경영자연구회를 모태로 설립돼 지금까지 사람 중심의 가치관을 전파하기 위한 세미나 등 각종 활동을 펼쳐오고 있다. 그는 인간개발연구원 경영대상 시상식 준비에 바쁜 와중에도 공연에 대한 열정이 샘솟는다. 일과 꿈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 하는 그의 인생 2막의 다음 무대가 기대되는 이유다.
한영섭 원장과의 1문1답
꿈을 이루지 못했던 이유?
어렸을 적부터 성악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취업과 생활을 위해 바쁘게 살아야 했습니다.
꿈에 다시 도전하게 된 계기?
성악가들의 공연을 자주 접하게 되면서 부러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CEO를 위한 오페라 과정에 참여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노래를 배우게 됐습니다.
어릴 적 꿈 vs 중년의 꿈?
어릴 적 꿈은 운동선수였으나 지금은 꿈을 이루고 나니 나만의 개인 공연을 했으면 하는 간절함이 있습니다. 로맨틱한 서정시를 음악으로 낭송하는 행위가 얼마나 멋집니까. 완전히 몰입된 감정 상태의 시인이 돼 노래하고 싶습니다.
꿈을 이루기까지 어려웠던 점?
노래에 빠져 있는 동안 저는 훌륭하게 부른다고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선생님(스승)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아서 호된 질책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알고 난 이후부터가 어려움의 시작이었습니다.
당신의 꿈은 무슨 색?
성악을 색깔별로 표현하면 노래마다 다르긴 한데, 특히 가을에 부르는 성악은 완전히 익은 갈색 같아요. 그런데 모차르트의 노래는 경쾌하고 파릇파릇한 게 초록색 같습니다.
꿈을 이루고 난 뒤 좋은 점?
자신의 한계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것 자체가 좋았습니다. 그저 잠재력이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그걸 증명해냈다는 거죠. 그리고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데 취미를 하나 만들었다는 것도 굉장히 좋은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