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갓진 시골이다. 도시의 소음과 야단법석이 감히 침범할 수 없는 산골이다. 눈이 내리면 고스란히 쌓여 눈부신 설경이 펼쳐진다. 솔바람이 술렁이며 지나거나 밤하늘에 별들이 모여 수군거리는 외엔 마냥 적막강산이다. 이 참신하고도 쓸쓸한 시골마을에 서점이 있다. 도시에서도 고전을 면하기 어렵다는 서점을 후미진 산골에 차리다니…. 의외성으로 보자면 이색이며, 관습의 틀을 깬 파격으로 보자면 다분히 진보적이다. 순항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이변이렷다.
서점 이름은 ‘숲속 작은 도서관’. 쥔장은 6년여 전에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이곳 괴산군 칠성면 산골로 귀촌한 김병록(53)씨 내외다. 페터 한트케의 소설 제목에 이런 게 있다. . 사실 머리 굴려 논리를 따져 진로와 셈평을 도모하는 게 한결 안전할 수 있다. 그러나 김병록씨는 세세한 논리로 인생을 측량하지 않았다. 논리 대신 충동을 앞세웠다. 서울에서의 어느 날, 김씨의 내부에서 어떤 간절한 음향이 번져 나왔다. 아아, 나 시골에서 살고 싶어! 그게 귀촌의 단초였다. 그는 내면의 소리에 후다닥 부응했다. 얘기를 들어볼까.
“복잡하고 어지러운 도시를 벗어나 시골에 내려가서 살고 싶었어요. 깊은 오지로 갈까, 교외의 전원마을로 갈까, 구체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만, 역시나 중요한 건 호구지책이었어요. 제아무리 산 좋고 물 좋은 시골로 이주한다 해도 손가락만 빨고 앉아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지속가능한 게 무엇일까, 가족을 무엇으로 먹여 살릴까, 그런 생각에 불안감이 밀려들었으나 이미 귀촌 욕구는 팽배해 있었죠. 내가 기왕에 책을 많이 가지고 있으니까 그걸로 뭘 좀 해봐야지, 하는 막연한 구상이 있었으나 또렷한 답은 나오질 않았어요. 일단 일을 저지르자, 시골에 눌러앉아 살다 보면 뭔가 답이 나오겠지, 하는 작심으로 귀촌을 결행했던 겁니다.”
머리를 싸맨 숙고나 장고 대신 가차 없는 결단으로 귀촌을 서둘렀던 셈이다. 신속하게 정처를 물색해 장만했고, 다니던 회사를 미련 없이 그만뒀으며, 마침내 이삿짐을 싸 시골로 내려왔다. 이른바 친환경마을을 표방하는 집단촌의 집 하나를 분양받아 이주했는데, 미처 건축이 완성되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내외는 컨테이너를 갖다놓고 그 안에서 한동안 살림을 살았더란다.
옹색한 컨테이너 생활은 필시 뒤숭숭했을 게다. 그러나 산골 자연의 풍광이 수려하고 다채로워 견디기에 따분할 게 없었다. 자연만 한 섬려한 벗이 다시 있던가. 소리 없이 다가와 불안한 가슴을 어루만져주는 산천의 모성이란 인류가 두고두고 예찬한 조물주의 선물이지 않던가. 하지만 느긋한 유유자적은 뒀다가 나중에 해야 했으니 우선은 생계를 모색하는 게 화급했던 거다. 김병록씨는 책을 재료로 밥을 벌 궁리를 본격적으로 하고 나섰다. 김씨 부부는 원래 책과 인연이 많았다. 경기도 일산에 살 때 사립도서관을 운영한 경험이 있으며, 서울 마포에서 아내 백창화(52)씨가 공공 도서관 네 곳을 오픈하기도 했다. 소중한 경험이었다. 옳다구나, 책방을 차리자! 부부는 찰떡처럼 의기투합했다. 라는 책을 보고 필이 꽂혀 유럽 몇몇 나라의 시골 서점을 답사하기도 했다.
2년 만에 단단히 다진 기반
“저희가 답사한 유럽의 시골들도 우리나라처럼 이농현상으로 젊은이들이 모두 빠져나간 곳들이었어요. 그럼에도 책방이 활성화돼 있더라고요. 그게 굉장한 설렘을 줬어요. 다녀와서는 부부 공저로 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이후 북 스테이, 즉 책과 함께하는 민박을 운영하는 것으로 일을 벌이기 시작했어요. 그게 3년 전의 일이고, 2년 전부터는 민박과 책 판매를 겸한 책방으로 전환했습니다.”
“매우 독특한 발상이에요. 전에 도서관을 운영했던 경험이 가장 믿을 만한 밑천이었겠죠?”
“물론입니다. 부부가 공히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가장 좋아하는 일을 찾아낸 셈이죠. 저희의 책 공간은 도서관과 책방, 민박을 결합한 형태입니다. 경제를 해결하고 문화적 의미도 부여할 수 있는 방책을 찾아냈다고 자부합니다.”
“산골에서 책방을 만난다는 일, 마치 폭염에 소낙비를 만난 것처럼 신선해요. 문제는 운영이 제대로 되겠느냐, 그 점일 텐데, 이 산골까지 책을 사러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싶은걸요.”
“순풍에 돛을 달고 내달리는 중입니다. 요즘은 너무 많은 방문자들이 들이닥쳐 고심할 정도예요. 처음엔 최소 5년은 지나야 기반이 잡힐 것으로 예상했으나 2년 안짝에 자리가 잡혔어요.”
“저런! 비결이 뭐죠?”
“언론을 통해 많이 알려진 덕분입니다. 게다가 저희 부부 공저로 2015년에 낸 가 꽤 많이 팔려나가면서 바람직한 홍보 효과를 거두었어요. 한 가지 부연한다면, 우리 책방에 오신 분들은 반드시 책 한 권은 사가야 한다는 수칙을 마련했는데, 그 역시 성과를 거두게 했죠.”
“무조건 책을 사야 한다? 그토록 도도한 비즈니스가 탈 없이 먹혀든 거예요?”
“아시다시피 오프라인 서점들은 대체로 고전합니다. 책이 안 팔려요. 왜지? 왜 안 팔리지? 제가 고민과 분석을 나름대로 열심히 했습니다. 그 결과 책을 사고 싶도록 여건과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게 관건이라는 판단을 했어요. 저희는 많은 책 관련 정보와 프로그램을 운용하거나,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북 콘서트를 열거나, 도서관처럼 종일 편하게 책을 읽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습니다. 그러자 자신감이 붙었어요. 식당에 일단 들어가면 누구나 음식을 시켜먹어야 하듯이, 서점 역시 그런 식의 관습을 만들어가는 일이 필요하다고 봤어요. 그와 같은 신념으로, 서점을 대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바꿔야 한다는 생각으로, 욕을 좀 먹더라도 무조건 책을 구입하도록 했죠.”
김씨 내외는 머리를 주로 쓰는 사람은 아닐지라도, 남달리 기발하고도 날렵한 두뇌의 소유자들로 보인다. 김씨는 미디어 분야를 전공했다. 아내는 국문과에서 배운 뒤 프리랜서 기자로 일한 바 있다.
실내의 표정이 책이 있는 카페풍이라면, 마당은 명랑만화 속에 나올 법한 놀이터 분위기다. 어린 자녀들을 대동하고 방문하는 사람들을 배려한 구색이다. 김씨 부부는 비지땀을 비처럼 쏟으며 집 안팎의 목조 구조물들을 손수 만들었다. 손에 손을 잡고 등장하는 가족들에게, 연인들에게, 부부들에게, ‘숲속 작은 도서관’은 색다른 체험을 제공하며, 추억을 새기도록 하며, 책이라는 골치 아픈 물건이 삼겹살보다도 향기로운 풍미를 야기할 수 있다는 실감을 하도록 이바지한다. 게다가 산골 특유의 정적과 나무숲과 온기에 찬 에테르는 또 얼마나 값진 보너스인가. 너희는 해변에서 회를 먹으며 놀았니? 우린 숲속 책방에서 우아한 한나절을 노닐었다! 아마도 방문자 중엔 그리 토설하는 이가 드물지 않을 게다. 진심으로 구하면 적중하게 마련이다. 줏대에 찬 정신이 깃들면 장사도 문화에 도달한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이 이미 행운
김병록씨의 책방은 기세 돋운 활보로 늠름하다. 따라서 의식주에 궁할 게 없다. 시련과 고생을 피하기 어려운 게 귀촌이라지만, 그는 끄떡없다. 애초에 선망했던 시골살이의 낙을 짬짬이 누리는 일도 흐뭇하다. 자연의 조화와 경이를 일깨워주는 산골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마음을 평온하게 건사하는 일은 도시에선 얻을 수 없는 진품.
“제가 귀촌을 통해 비로소 숙면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칠흑 같은 밤의 적막 덕분에 잠다운 잠을 자게 된 것 같아요. 머리를 쓰는 대신 몸을 쓰는 일이 얼마나 좋은가를 깨닫기도 했어요. 예컨대 목공일을 원 없이 해봤는데요, 심신이 맑게 깨어나더라고요. 나무와 화초를 심어 정원을 가꾸는 일, 텃밭을 일구는 일도 참 좋았어요. 건방진 얘기이지만, 이제는 자연의 순환이랄까, 낳고 자라고 커서 마침내 죽음으로 돌아가는 이치를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입니다. 죽음이라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거 같고 말이죠.”
“선생의 책방은 산골 책방으로 기반을 다진 유일한 사례가 아닐까 싶네요.”
“제가 시골에 내려온 뒤 남들에게서 들은 가장 흔한 질문이 ‘그 외진 산골에서 뭘 먹고 사느냐, 생활이 되느냐?’라는 것이었어요. 그런 의문들은 제게 기우에 불과했어요. 제가 생각하는 좋은 삶이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건데요, 막상 하고 싶은 일을 했으나 돈과 연결이 안 되는 사태가 벌어진다 할지라도 무방하다 생각해요.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자체가 이미 행운이지 않겠어요?”
산골에서 자신의 일을 찾은 사람의 자부심이 오롯하다. 진부하거나 쓸쓸할 수 있는 삶에 일로써 빛을 끌어들인 사람 고유의 자족감이 완연하다. 산골 책방이 건재할 수 있을 거라는 걸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나는, 세상을 건너는 옹골찬 비결 한 자락을 들여다본 듯 유쾌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귀로의 산경(山景)이 환하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 , 등의 저서가 있다.
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의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문창재 언론인(前 한국일보 논설실장)
정유재란 때 울산왜성은 일본군 최전선 보루였다. 위도 상으로는 가장 북쪽이었고, 방위로는 일본과 가까운 동쪽 끝이었다. 일조유사시 언제라도 도망쳐 가기 쉬운 위치였다. 호랑이 같은 조선수군도 없고, 망망대해와 맞닿아 철수작전에 큰 장애가 없는 전략적 요지였다.
그런 지리적 요인에다 왜군 선봉대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본진이어서 울산성은 정유재란 전투 중 손꼽히는 현장이 되었다. 허물어진 성벽만 남은 학성공원에서는 전투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성이 무너진 것은 세월의 작용이지, 전투 때문이 아니다.
서울을 떠나 밤늦게 돌아온 울산 나들이에서 그 처참했다는 울산왜성 전투의 흔적은 찾아보지 못했다. 성터 꼭대기에서 내려다본 천지개벽 같은 변화에 세월의 두께만 느꼈을 따름이다. 먹을 것이 없어 적병의 시신을 뒤졌다거나, 기갈을 면하려고 제 오줌을 받아 마시고, 말을 잡아 피를 마셨다는 아수라장을 엿볼 단서는 찾아내지 못했다.
울산왜성은 3개 층으로 된 구조다. 해발 25m 지점에 산노마루(三之丸), 조금 위에 니노마루(二之丸), 맨 위에 혼마루(本丸)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석축 일부만 희미하게 남아 있다.
큰 돌을 다듬어 경사면에 비스듬히 축대를 쌓은 것이 전형적인 왜성이다. 성문을 들어서면 급하게 방향을 꺾도록 돼 있는 호구(護口)도 그렇다. 기마병이나 보병에게 성이 뚫려도 바로 본성으로 달려갈 수 없도록 여러 굽이를 만들어 속도를 늦추려는 설계다. 호구에서 병력이 주춤거리는 사이 침입자에 대한 공격을 쉽게 하려는 의도였다.
그때 없었을 것은 너무 많았다. 우선 허허벌판이었을 격전지가 지금은 대도시 울산의 도심지가 되었다. 42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무너져 내린 성터에 수목과 초개가 우거져 울산성은 야산의 모습으로 변했다.
격전지가 공원으로 변해 울산 시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장소가 된 것이 제일 큰 변화일 것이다. 해발 50m 성 마루에 오르면 사방에 보이는 것은 온통 아파트와 빌딩 숲, 그리고 공장들이다. 상전벽해라는 말로는 표현이 한참 미흡하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뜬금없이 대중가요 ‘울산 큰 애기’가 떠올랐다. 1960년대 초부터 방방곡곡에 울려퍼진 이 노래 가사가 너무 신기하고 이채롭게 느껴진다. 두 세상을 살고 있는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내 이름은 경상도 울산 큰 애기 / 상냥하고 복스런 울산 큰 애기 / 서울 간 삼돌이가 편지를 보냈는데 / 서울에는 어여쁜 아가씨도 많지만 / 울산이라 큰 애기 제일 좋대나 / 나도야 삼돌이가 제일 좋더라.
반세기 남짓 전 울산은 큰 애기와 삼돌이의 연정이 아름답던 동해안 갯마을이었다는 증언이다. 눈 아래 펼쳐진 풍경과 비교하자니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50년 세월의 간격이 이러할진대 420년 세월이야 어떠하랴.
이 노래 가사 2절에는 “성공할 날 손꼽아 기다려만 준다면 좋은 선물 한 아름 안고 온대나”란 소절이 있다. 답답한 시골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성공’을 향해 서울에 간 연인을 다소곳이 기다리면서 선물받을 날을 꿈꾸는 큰 애기의 모습이 너무 아름답지 않은가.
울산성은 차츰 지옥으로
울산왜성 전투가 왜병들에게 얼마나 비극적이었는지는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성을 빼앗고 이 땅에서 왜를 몰아내지 못한 전투 결과로 보면 분명 조명연합군의 패전이지만, 왜군은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그 비극성이 잘 전해져온다.
영남 알프스라 불리는 서쪽 산악지대에서 발원한 태화강은 동쪽으로 곧게 흐르다가 급히 동해로 든다. 그 하구 언저리에 제법 널찍한 들판이 형성되어 까마득한 옛날부터 인간이 터를 잡는 살기 좋은 땅이었다. 들판 한가운데 외로이 솟은 야산에 가토 기요마사는 성을 쌓았다. 급히 자리를 잡았던 탓인지 성안에는 식수가 없었다. 남쪽으로 좀 더 가면 임진년에 쌓은 서생포성이 있는데, 태화강 너머에 진을 치라는 히데요시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했던 걸까. 직산 싸움에서 패하고 도망쳐 내려가다가 잡은 입지라 했다.
조명연합군은 그 성을 둘러싸고 군량과 탄약 등의 보급품과 식수공급 루트를 차단했다. 벌판에 우뚝 고립된 성을 몇 겹으로 둘러싼 조명연합군 포위망에 갇혀 현지조달도 막힌 상황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가토 기요마사의 운명적 대결을 그린 엔도 슈사쿠(遠藤周作)의 소설 에는 당시의 참상이 이렇게 그려져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일본군 병사들의 다리는 가느다란 막대처럼 되었고, 그 때문에 각반이 흘러내렸으며, 얼굴은 여위어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한다. 물을 찾아 야밤중 성 밖의 우물가에 가보면 우물 안에 시체가 던져져 있어서 물을 먹을 수 없도록 만들어놓았다고 한다. 성내의 소와 말은 모두 잡아먹었다. 그것이 동나자 적병의 시체에서 먹을 것을 구했다. 담벼락 흙을 빗물에 풀어 마실 때도 있었다. 두 달이 지나자 이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울산성은 차츰 지옥이 되어가고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기록이란 한 참전무사가 남긴 ‘조선이야기[朝鮮物語]’다. 아무리 목이 말라도 낮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밤이면 우물을 찾아 성을 빠져나오지만 우물마다 돌로 메워졌거나 시체가 썩어가고 있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태화강 강변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다. 피로 물든 강물이라도 마시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지옥과도 같은 울산성에서 기아에 빠진 가토 기요마사의 농성군은 구원군의 손에 간신히 구조되어 한숨을 돌렸다. 4만의 조명연합군은 3만의 일본군을 보고 철수했다. 그들 역시 일본군의 총격으로 상당한 사상자를 냈기 때문이었다. 포위에서 해방된 농성군이지만 양식이 떨어진 그들은 종이를 씹고 담벼락의 흙을 파먹었다고 한다. 기요마사의 수염도 자랄 대로 자랐고, 뺨이 말라서 쑥 들어간 채 구원군 앞에 나섰다.”
4만 병력 조명연합군의 철수
울산성의 참상은 라는 기요마사 문서에도 나온다.
“성내의 사기 조상(阻喪)은 정점에 달했다. 식량과 식수가 없어 성병(城兵)은 벽토(壁土)와 종이를 먹었고, 자기 오줌과 군마의 피를 마시는 판이었다.”
이런 극한 상황을 겪은 가토는 훗날 구마모토 성을 지을 때 천수각 다다미에 고구마 잎줄기를 섞어 짜도록 했다. 식수난 경험으로 성내에 우물을 120개나 팠다. 지금도 당시의 우물이 20여 개 남아 있다.
일본 측 기록에 나오듯 4만 병력의 조명연합군은 완공도 되지 않은 평지성을 오래 포위하고도 왜군을 제압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먼 나라에 와 피를 흘리기 싫었던 명군 장수 양호(楊鎬)와 마귀(麻貴)가 내린 통한의 결정이었다. 35km 남쪽 서생포에서 달려온 왜군 1만3000명에게 배후를 공격당하자 싸워보지도 않고 철수한 것이다.
“중국 장수가 군대를 후퇴시키면서 먼저 보병을 내보내고, 스스로 기병을 거느리고 뒤를 막으면서 후퇴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 장수가 도망치는 것을 보고 산 위의 적들이 줄지어 내려와 한꺼번에 사살했는데, 보병 중에 살아 돌아온 자가 많지 않고, 기마병도 죽은 자가 얼마인지 모릅니다. 갑옷과 투구를 버리고 맨몸으로 탈출하기도 했는데, 아군의 사상자도 많았습니다. 당당했던 대세가 순식간에 꺾이고 다 죽어가던 적이 도리어 흉독한 기세를 멋대로 부렸으니 진실로 통곡할 일입니다.”
에 실린 이 한 줄의 보고서가 역전된 전투의 참상을 증언하고 있다. 용열한 원군 장수의 결정이 조선 민중을 고통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생생한 증거다.
울산왜성은 아직 완공도 안 된 상태였다. 포위작전을 조금만 더 끌었어도 승리는 저절로 굴러들어왔을 것이다. 조명연합군의 첫 공격이 12월 23일이었으니 착공 2개월여도 못 되었을 때였다.
맹렬하게 불화살을 쏘아
일본군의 출진기지였던 규슈 나고야(名護屋)성 임진왜란 박물관에 걸려 있다는 울산성전투도에는 전투 상황이 파노라마처럼 묘사되어 있다. 들판에 홀로 솟아 있는 울산왜성을 조명연합군이 개미떼처럼 둘러싸고 공격을 퍼붓는 장면이다. 전투 중에도 성안에서는 말을 잡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종군승려 케이넨(慶念)의 종군일기 에는 전투 상황이 이렇게 씌어 있다.
“아침에 연기가 솟아오르고 대포소리가 연달아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적군이 기습을 해왔다고 한다. 적군은 돌담 밑에서 맹렬하게 불화살을 쏘아댄다. 성안에는 물건들이 수없이 많은데 침구와 의복, 재물과 보석 등을 담은 상자에 불이 붙었다. 타오르는 연기 때문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화재로 많은 무사와 인부들이 타죽었다.”
울산성 건축물 외곽에는 사방으로 삥 둘러 목조회랑이 설치되어 있었다. 바깥쪽으로 작은 창구를 설치해 거기에 총을 걸고 결사적으로 소총을 쏘았다. 수많은 창구에서 불을 뿜는 총격으로 조명연합군에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13일간의 전투에서 피아 1만2000명 가까이 죽었다는 기록이 전투의 참상을 말해준다. 연합군 포위망이 열흘 넘도록 이어지자 자포자기의 심정이 된 기요마사는 인근의 동료 장수에게 보낸 문서에서 자결의사를 비추기도 했다. 라는 일본 기록물에는 “나는 여기서 할복자살을 할 것이니 당신은 그 성에서 (할복) 하시오”라는 말이 나온다.
케이넨 일기에는 “드디어 물도 식량도 떨어졌다. 더 이상 성을 방어할 수 없게 되었다. 내일은 성이 적의 수중에 떨어질 것이다. 밤새 부처님의 자비에 감사드리고 그 마음을 읊는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기요마사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것은 인근에 주둔했던 일본군 지원 덕분이다. 왜성을 에워싼 조명연합군은 이런 상황에 대비해 태화강 하구를 봉쇄해 지원병력의 울산 접근을 차단했다. 바닷길로 울산에 온 병력이 격퇴당한 기록도 있고, 육로로 인근 양산에 온 적을 물리친 기록도 있다.
그러나 끝을 보지 못했다. 방심 아니면 포기였을 것이다. 기요마사 지원에는 숙적 유키나가 군대도 동원되었다. 둘은 불구대천지수 사이였지만 상대가 적군에게 함락되는 것만은 두고 볼 수 없었던 모양이다.
마지막 전투
울산왜성 전투는 정유재란의 마지막 전투였다. 너무 혼이 났는지 일본군은 그 뒤로 수성전에 전념했다. 그러다가 몇 달 뒤 히데요시 사망 소식이 날아들었다. 이를 계기로 임진·정유 7년 전쟁은 끝났다.
“성주님이 나에게 배를 타라고 하신다. 너무도 기쁘고 도무지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 성을 내려올 때 너무 기뻐서 눈물을 흘렸고,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았다.”
울산성을 떠나 일본으로 돌아간 병사가 남긴 이날의 감회 한마디가 전쟁의 비극을 잘 말해준다.
정유년에 다시 쳐들어온 왜군은 한양을 목표로 진군하다가 충청도 직산전투에서 조명연합군에게 패했다. 전열을 가다듬어 남쪽 해안으로 퇴각한 그들은 각 군별로 농성 준비에 들어갔다.
기요마사가 울산에 당도한 것은 그해 10월 말이었다. 기요마사 토벌을 목적으로 경주에 본진을 설영한 조명연합군에 맞서기 위해 기요마사는 태화강 북안에 성을 쌓기 시작했다. 임진왜란 때 쌓은 서생포성을 두고도 가까운 북쪽에 또 성을 쌓은 것은 히데요시의 명에 따른 것이었다. 한양을 다시 도모하려면 태화강 북안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축성에 동원된 병력은 가토의 부장(部將) 구키 히로다카(九鬼廣隆) 등 5개 부대 병력 1만600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밖에 일본에서 차출되어온 일반 농민 등이 강제노동에 동원됐다. 케이넨의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새벽부터 산에 끌려가 건축자재 벌채에 동원되었는데, 조금이라도 게으름을 피우다 감독에게 들키면 목이 잘렸다 한다.
기요마사는 ‘일곱 자루의 창’이라 불린 히데요시 근습(近習) 가운데 주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은 가신이었다. 입이 무겁고 충직한데다가 무술까지 뛰어났으니, 그만한 자격을 갖춘 사무라이가 없었다. 유키나가는 머리는 좋지만 무(武)가 부족하고, 이시다 산세이(石田三成)는 머리만 뛰어난 인물이었다. 게다가 그는 주군 히데요시 인척이었다. 기요마사의 어머니는 히데요시 부인과 시누이 올케 사이였다.
히데요시 문하에서 그는 단연코 으뜸가는 사무라이가 되었다. 타고난 체격 조건과 근면성, 주군과의 관계를 의식한 충직성이 그를 모범적인 무사로 만들었을 것이다. 무사로 인정할 수 없는 유키나가에게 조선출진 제1군 장수의 명예를 빼앗긴 그는 사사건건 유키나가와 대립했다. 그러나 우직한 그는 유키나가의 지략을 당하지 못했다.
기요마사는 조선의 왕자 임해군을 인질로 잡은 일과 한국의 호랑이를 다 잡아먹었다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임금이 몽진한 평안도 방면을 유키나가에게 빼앗기고 함경도 방면을 맡게 되었는데, 뜻하지 않게 조선의 왕자 둘을 인질로 잡았다는 것이다.
함경북도 회령에 피란해 있던 임해군과 순화군은 거기서도 횡포를 멈추지 않았다. 수령을 닦달하고 아랫사람들을 시켜 백성들을 노략질했다. 민심이 극도로 이반되어 있는 터에 국경인(鞠景仁)의 반란이 일어났다. 왕자들의 한심한 작태에 혀를 차던 그는 제일 먼저 두 왕자를 붙잡아 기요마사에게 넘겨버렸다.
그는 호랑이를 사냥해 호피를 히데요시에게 바쳐 신임을 사기도 했다. 일본은 호랑이가 없는 나라였다. 그러니 영물의 상징인 호랑이보다 귀한 선물이 있을 수 있겠는가. “호랑이 고기가 강정식으로 좋다”는 시의들 말을 들은 히데요시는 고기도 보내라고 지시했다. 기요마사는 내장까지 말려서 바쳤다. 59세에 아들을 얻은 후로 그는 더욱 호랑이고기를 찾았다 한다. 이런 이야기가 기요마사와 호랑이가 엉킨 전설의 연원이다. 지금도 구마모토 토산품에는 어김없이 호랑이 이미지가 들어간다. 축제 때가 아니어도 기요마사가 호랑이를 잡는 모형이 번화가에 장식된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이승만 대통령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해서 유명해졌다. 한국과 일본의 국교수립을 중재한 미국의 요청으로 1954년 일본을 방문해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총리와 마주앉은 자리였다.
“한국에는 호랑이가 많다던데 아직도 많습니까?” 어색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는 듯 요시다 총리가 이 대통령에게 운을 떼었다. 이 말에 대통령은 “이젠 없습니다. 임진왜란 때 가등청정이 다 잡아먹었습니다” 하고 말을 받았다. 동석했던 김용식 주일공사에 의해 이 말이 전해지자, 재일동포 사회는 통쾌한 반격이라고 크게 반겼다. 물론 국내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기요마사 승자의 영화
히데요시 사후 기요마사는 주군을 배반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편에 섰다. 천하의 패권을 놓고 충돌한 세키가하라 전투 때 유키나가가 히데요시 아들 편에 섰던 것과 너무 대조적인 처신이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한 유키나가가 비참한 최후를 마친 것과 대조적으로 기요마사는 승자의 영화를 누렸다. 그러나 자신을 길러준 히데요시를 배반한 죄의식 때문이었는지 도쿠가와, 히데요시 양 가문의 화친을 위해 애쓰다가 50세에 세상을 떴다. 그 일을 못마땅해 한 도쿠가와 측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설도 전해진다.
울산 방문은 해군 상륙함(LST) 일출봉호 진수식 참석이 목적이었다. 막강한 기동력과 화력을 갖춘 그런 배가 당시에도 있었다면 울산전투가 그렇게 치욕적으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망상에 젖다가 귀경 KTX에서 부족한 잠을 청했다. LST는 없어도 압도적인 병력과 전세의 이점을 살리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쉬워 쉬 잠을 이루지 못했다.
글 박원식 소설가
대전에서 은행원으로 살았던 홍성규씨(75)가 명퇴 뒤 귀촌을 서둘렀던 건 도시생활에 멀미를 느껴서다. 그는 술과 향락이 있는 도회의 풍습에 착실히 부응하며 살았던 것 같다. 어지럽고 진부한 일상의 난리블루스, 그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돼 있는 게 삶이라는 행사이지 않던가. 그러나 문득 쇠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정색을 하고 화드득 나를 돌아보는 순간이 찾아오는 법. 홍성규씨는 그렇게 소스라치듯 자신과 독대한 뒤 곧바로 산골로 들어가기로 했다. 대담하고 파격적인 선택이었다. 반백년 이상을 살았던 도시생활을 일거에 청산한다는 건 일종의 모험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금강이 굽이치는 산발치에 터를 잡은 홍씨는 아내 박명자씨(70)의 손을 슬며시 잡아 유혹처럼 이끌었다. 처음에 아내의 반응은 미미하다 못해 썰렁했다. 난 싫소, 당신 혼자 잘해보시구려! 강과 산이 얼싸안고 춤을 추는 경관이야 기차게 삼삼했지만, 스러져가는 폐가와 길길이 웃자란 잡초들만 무성한 묵정밭으로 이루어진 터전에 아내는 초장부터 정이 떨어졌던 모양이다. 당장이라도 뱀이 대가리를 쳐들고 튀어나올 것처럼 뒤숭숭한 쑥대밭 앞에서 단박에 우아한 감흥을 느낄 여자란 세상에 없다. 홍성규씨는 기함을 치고 앵돌아진 아내를 거듭 꼬드겨 답사를 반복했다. 마침내 부부는 귀촌에 합의를 보기에 이르렀다. 여러 차례 드나드는 사이, 아내 역시 외진 호젓함과 빼어난 풍치에 마음을 열었던 것. 20여 년 전, 귀촌의 시동은 그렇게 걸렸다.
풍경을 볼까. 산과 강이 긴박한 교제를 한다. 산은 제 늠름한 하체를 강에 들이밀었고, 강은 수줍은 듯 살포시 온몸으로 산을 받아들인다. 이 소리 없는 통정과 협연을 관람하는 건 능선마루에 늘어서서 관음증에 취한 수목들이다. 도대체 여기에서 무슨 후끈한 일이 벌어지는지를 염탐하겠다는 양, 수면 위 허공으로는 연신 물새들이 선회한다. 밤이면 별들이 모여 수군거리겠지. 달빛은 요요히 쏟아져 산을 흘러 강물로 스며들겠지. 홍성규씨는 시를 짓는 버릇이 있는 사람이니 신바람이 날 수밖에 없을 게다. 알아주는 이가 많은 수묵 화가인 아내에게도 역시 이하동문이렷다.
풍경이 수려하다지만 풍경만 뜯어먹고 살 수 없는 게 생활이라는 난적이다. 유유히 음풍농월을 즐기며 참하게 찻잔이나 기울이면 그만일 것 같지만, 철따라 피고 지는 꽃들의 마술에서 시를 건져 올리고 그림을 길어 올리면 그만일 성싶지만, 그러나 널리 알려졌듯이 삶이란 고달픈 나그네 길이라서 고난을 피할 길이 없다. 게다가 홍성규씨 내외는 거하게 손에 움켜쥔 것도 없는 채로 산골에 입장했다. 산골이 주는 고립감과 권태도 만만치 않은 난관이리라. 홍씨의 얘기를 들어볼까.
“가령, 홍매화가 흐드러지게 피어나는데도 무심히 지나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귀촌하면 안 됩니다. 정서가 맞질 않으니까. 그 무엇보다, 그저 편안하게 살 궁리만 하는 사람이라면 절대 시골에 들어와서는 안 됩니다. 마음을 싹 비우고 갖가지 고생을 할 각오를 해야만 하는 것이죠. 산골의 적막이나 고독을 견딜 수 있는 힘을 발휘한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에요. 우리 부부도 초기엔 생각이 마구 왔다 갔다 했어요. 마치 향수처럼 도시 생각을 하곤 했는데, 우리가 지금 독립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왜 이러고 사나? 하는 회의가 없지 않았어요. 3년쯤 지나고 나자 비로소 만족감이 찾아듭디다.”
강물에 자동차가 떠내려가기도
“강철 같은 기세로 올라오는 풀들을 해치우는 일은 거의 전쟁이라죠? 선생의 거처 면적은 자그마치 2000평이에요. 이 너른 터를 간수하는 일부터가 벅차겠어요. 노년에 적당히 살기로는 터를 작게 잡을수록 이상적이라는 충고들이 많던데, 이건 믿을 만한 정보일까요?”
“연로한 분들의 경우엔 무리해서 너른 터를 잡지 말아야겠죠. 하지만 300평 이상은 돼야 뭐든 마음먹은 대로 활개를 쳐볼 수 있지 않을까요? 여하튼 온갖 노동과 정성을 쏟아야 기반이 잡히는 게 산골 살림입니다. 사람들은 우리 집을 둘러보고 거참 근사하다고들 하지만, 구석구석 비지땀을 쏟은 현장이라는 걸 알진 못해요. 물론 시골에서의 건강한 노동은 커다란 성취감을 줍니다. 모든 주변 사물과 정들게 되고요. 마치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정들듯이….”
“과도한 노동으로 골병이 들거나 우울증에 걸리기도 하더군요.”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창밖으로 보이는 저 돌담장은 3년에 걸쳐 쌓았어요. 돌담을 쌓다 보니 재미가 생겨 봄가을로 열심히 돌을 주워다 쌓아올린 것인데 3년이나 걸렸어요. 그 와중에 병을 얻기도 했지만, 햐, 완성을 하고 나서는 얼마나 좋던지…. 마치 영화 한 편을 만든 감독처럼 신나더라고요. 골병은 피해야겠지만, 하나하나 나만의 작품을 만들어간다는 성취감과 만족감이 크기에 시골살이를 애호할 수밖에 없어요.”
강의 이름은 올목강이다. 강굽이 형세가 오리의 목을 닮아 ‘올목강’이라 부른다. 이 강엔 교각이 없는 채로 콘크리트를 부어 납작하게 가설한 잠수교가 걸려 있다. 이 옹색한 다리나마 없었던 시절엔 배로 강을 건넜다. 폭우가 쏟아지면 잠수교는 순식간에 물에 잠긴다. 그렇게 되면 꼼짝없이 갇힐 수밖에. 장마철이나 봄가을의 폭우 때는 여러 날씩 외부와 고립된다.
“별안간 고립될 가능성에 대비해 음식이나 가축 사료를 늘 충분히 비축해둡니다. 한번은 새벽에 잠이 깨어 나가보니 마당까지 물이 차올라 아예 싯누런 바다로 변했더라고요(웃음). 세상에 물 구경, 불 구경처럼 신나는 게 없다지만 기가 막힙디다. 우당탕탕 굽이치는 물살에 아름드리 통나무며, 컨테이너 박스며, 자동차며, 뭐든 막 떠내려가더라고요. 그 난리 통에 강 저편에 세워뒀던 우리 승용차도 떠내려갔어요. 졸지에 차를 잃어버렸지만, 차보다 정말 아까웠던 건 마당의 컨테이너 박스에 보관했던 집사람의 그림이었어요. 모조리 물에 잠겨버렸죠.”
아내 박명자씨는 그림 그리기를 밥 먹듯이 해온 인물이다. 무채색 먹의 농담(濃淡)으로 사물을 표현한다. 세필을 활용한 정교한 사생보다 일필휘지, 대담하고 호방한 작풍을 구사한다. 그림만 봐서는 여자의 작품이라 알아챌 수 없을 만큼 활달하고 후련하다. 남편의 눈에는 이런 아내의 작품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명품이다. 그런 판국에 수해를 입어 그림들이 모두 물속 용궁 나들이를 했으니 상심이 컸을 게다. 수려한 강변에 사는 가혹한 대가를 치른 셈이다. 그런 변을 겪을 때면 귀촌이 후회될 성싶지만, 아서라, 홍씨는 수해이든 수난이든 자연의 형제로 살아가기로 작정을 한 자가 기꺼이 감당해야 할 수련이거나 단련의 계기로 받아넘기는 낌새다.
정든 오누이처럼
홍성규씨는 이라는 시집을 낸 바가 있다. 염염한 로맨틱이 비치는 제목이지만, 그의 적성은 자연과 사교하는 쪽으로 사뭇 발육했다. 이를테면 그는, 산골에서 꽃향기가 천지간에 가득하면 황홀해져 춤추고 싶어 하고, 비바람에 갈피없이 흔들리는 꽃들의 비통한 몸부림에도 섬세하게 가슴이 닿아 시적 충동을 느끼는 개성의 소유자로 보인다. 일찍이 세간에 횡행하는 욕망이나 허영은 대충 놔버렸기에 간소하게 먹고도 뿌듯하게 자족하는 생리가 몸에 익었다.
“시골에선 도시에 비할 때 생활비 지출을 절반 이하로 줄일 수 있습디다. 한 달에 150만원이면 뒤집어쓰고도 남을 지경이지만, 형편이 여의치 않을 때는 70만원 남짓으로도 까딱없어요.”
“텃밭에 키우는 작물들로 충분히 자급자족이 되겠죠? 닭들은 마구 알을 낳을 테고.”
“불필요한 외출을 즐거이 자제하며 살기 때문에, 거처 내부에서 사는 재미를 쏠쏠히 느끼기에, 지출을 줄일 수 있는 여지가 많죠. 승용차 대신 작은 트럭을 굴려 유지비를 절감하고, 가끔 먼 곳을 여행할 경우엔 대중교통을 이용해 검소한 살림을 운영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인간이란 역시나 돈 문제로 충돌하게 마련인 동물입디다. 때론 아내와 토닥거리기도 하는데 그게 주로 금전 문제 때문이었어요. 끙.”
“금전의 여유가 있으면 덜 싸우게 될까요?”
“부자들은 돈 때문에 더 치열하게 싸우지 않습디까(웃음)?”
“도무지 싸우지 않고, 부처님 가운데 토막처럼 어엿하게 살 수 없는 게 원래 인간일까요?”
“저 고고한 하늘에도 가끔은 번개가 치지 않나요? 부부싸움을 하지 않고 산다는 건 맹물 마시고 술 취하려는 것처럼 가당치 않은 일입니다. 충돌과 마찰 속에서 부부 사이가 더 단단해지는 법이거든요. 우리 내외가 말이죠, 도시에 살 때는 불행하게도 부부싸움을 할 기회가 없었어요. 나는 툭하면 밖으로 나돌아 다녔고, 아내는 아내대로 스케치니 전시회니 하면서 며칠씩 나가 살고 그랬거든요. 모든 시간을 같이 붙어살게 된 귀촌 이후엔 싹 달라졌어요. 자못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부부싸움을 전개해서 진정한 친선을 도모하게 되었으니까요. 이거 쾌거 아닌가요(웃음)?”
“앗! 부부싸움도 창의적 예술이라는 말씀?”
“집식구가 세상에서 가장 유능한 요리사입니다. 뭐 제 입맛에 딱 맞는 음식을 만들어주는 고마운 존재라는 뜻이죠. 대충대충 사는 저에 비해 합리적이고 현명하게 꼼꼼한 여자라는 점도 아주 매력이죠. 그러나 단점이라면 예민하다는 점이에요. 전엔 송곳이었다면 지금은 부지깽이처럼 좀 무뎌졌지만, 아무튼 이런 아내에게 제가 그림 비평을 인정사정없이 해대곤 했어요. 그러니 다툼이 없었을 리가. 오해는 마시라. 다툼의 날들은 이젠 추억의 잔영으로 남았을 뿐이니까(웃음).”
느티나무를 맨손으로 뽑을 천하장사가 있던가. 불화와 앙앙불락이 없는 부부가 있던가. 홍성규씨의 언설은 자주 아내와의 역사를 술회하는 쪽으로 번진다. 20년 세월을 산골에 살며 그는 자연과 교감하는 도락을 만끽해왔다. 일상의 근로로, 절간의 중들이 비운 발우와도 같은 허심(虛心)의 내공으로, 또는 우슬(牛膝, 일명 쇠물팍)이니 쇠비름 같은 산야초를 장복한 건강생활로, 그는 인생의 저물녘을 훈훈하게 통과하고 있다. 그러고서도 한결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존재가 하나 있으니 그게 바로 아내라는 고백을 차마 참지 못하고 토설한다.
“아내에게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을 때면 대통령에게 표창장을 받은 것보다 기쁩디다. 그런 아내가 강변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은 또 얼마나 행복한지…. 노년의 부부란 말이죠, 가급적 산골 외딴집에 살아야 합니다.”
졸혼(卒婚)이라는 요상한 잠정적 결탁이 예찬되기도 하는 이 부박한 세상. 그러나 강변에 사는 내외는 정든 오누이처럼 단란하게 어깨를 겯고 산골의 나날을 동행한다. 이는 아마도, 귀촌이 아니었다면 도달하기 어려운 비경이렷다.
>>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 , 등의 저서가 있다.
한 도예가를 만나기가 그렇게 힘든 일이던가. 왜 꼭 그 예인(藝人)을 만나고자 했던가? 돌아보면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 한구석 아릿함이 밀려온다. 청광 윤광조(晴光 尹光照· 1946~ ) 도예의 모든 과정을 함께 지켜보고 싶은 열망에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으로, 경북 안강의 자옥산 자락으로 몇 차례 도요지를 찾아갔으나 바람 같은 흔적을 놓치고 매번 조우조차 못했다.
‘예술인은 작품으로 말한다’고 하지만 작품이 탄생되는 순간을 생생히 보고 싶은 습벽(習癖) 때문에 여러 예술인들을 찾아다녀야 직성이 풀렸다. 특히 흙을 수비(水飛)하고 물레나 판으로 형태를 만들어 건조하고, 초벌구이와 그 위에 그림을 그리거나 깎아 내고, 유약을 바르고 마지막 가마에 불을 지펴 소성(燒成)하고 식혀서, 가마 문을 열어 완성품을 꺼내는 수 주일의 도예작업은 꼭 참관하고 싶었다.
고등학교 5년 선배라는 학연도 있었지만 1994년 호암미술관에서 ‘한국의 미, 그 현대적 변용’이라는 명제의 오수환(吳受桓·1946~ ), 황창배(黃昌培·1947~2001)와 함께 한 윤광조의 전시회에서 너무나 깊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홍익대학교 공예과에서 도예를 전공하고, 처음에는 전통도자(청자, 백자)를 잇는 기물을 빚기도 했으나, 태토(胎土)의 거칠고 질박한 질료에 화장토(化粧土)를 입히고 대칼, 지푸라기 혹은 손가락으로 유희하듯 글자나 문양을 만드는 과정에 매료되어 오늘날까지 분청자기만을 고집스레 만들고 있다.
심산(深山)의 사찰을 다니며 불가(佛家)의 깊은 명상에서 비롯한 선(禪)의 경지에 이르고자, 끝없는 수양(修養)과 참배여정(參拜旅情)으로 수개월에서 1,2년간 도요지를 비우기 일쑤였다. 도자기에 대한 구상이 가슴 가득 차 올라와야 몇 점씩 빚어내곤 하였다. 작가의 군 시절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서 본 옛 도자기에 매료돼, 국립중앙박물관장이던 혜곡 최순우(兮谷 崔淳雨·1916~1984)선생을 찾아가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1976년 첫 가마를 짓자 혜곡 선생은 젊고 창의력이 도저한 윤광조에게 당신의 스승이었던 미술사학자 우현 고유섭(又玄 高裕燮·1905~1944)의 아호이기도 한 급월(汲月)이란 아호를 내렸다. 그래서 윤광조의 도자 가마는 급월요(汲月窯), 급월당(汲月堂)이 되었다. 우현 선생은 원숭이의 우화(寓話)를 인용하여 급월을 설명하였다. ‘산중 원숭이가 깊은 밤 목이 말라 샘가에 오니 마침 달이 물에 비쳤다. 원숭이는 달을 건지려 계속 물을 떴으나 달은 여전히 물속에 잠겨 있었다. 학문을 연구하는 이치도 이와 같아서, 아무리 다해도 다하지 못하는 것이 학문이다.’ 그러므로 무슨 일에든지 끊임없는 열정을 바쳐야 한다는 감계(鑑戒)의 깊은 뜻이 서린 아호였다.
1986년부터는 쉽게 도자를 빚는 물레를 치우고, 판 작업과 흙 타래를 쌓아 올리는 자유롭고 정형이 없는 창작도예를 통해 그릇으로서 쓰임은 이어가되 무심히 손가락으로, 혹은 지푸라기나 못 끝으로 글을 써 넣거나 문양을 그렸다. 심경(心經), 율(律), 정(定), 관(觀), 월인천강(月印千江), 정토(淨土), 지월(池月) 등의 작품들은 작가의 깊은 선정(禪定)의 경지에서 빚은 격조 높은 예술품으로 그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독보적 분청자기의 세계를 나타냈다. 이 작품 ‘정(定)’은 직사각 육면체 통 위에 동그란 구멍을 두어 꽃을 꽂을 수도 있으며, 넓은 한쪽에는 한 그루 나무와 새의 형상을 손가락으로 그리고, 이면에는 달이 강에 비치는 월인천강(月印千江)을 나타낸 귀한 작품으로, 인사동 화랑 주인을 꽤 오래 졸라서 구입한 것이다.
올해 7~8월 ‘놀다 보니 벌써 일흔이네-遊戱三昧(유희삼매) 도반 윤광조. 오수환 전’에서 윤광조는 산동(山動), 혼돈(混沌), 심경(心經) 등 무위자연의 순수와 인간의 고뇌를 한 점 한 점 도자에 녹여내고 있다. “작업장에서 해가 질 때까지 하루 12시간 이상 작업한다. 죽을 때까지 흙과 불을 붙들고 예술적 삶을 이어가겠다.” 거칠되 따뜻한 두 손을 잡으니 “보잘 것 없는 선배를 깊게 생각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만날 때마다 겸손한 그의 인품에서 든든한 예(藝)의 거목을 본다.
내 향리(鄕里)인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에 이수종(李秀鍾 1948~ ) 도예가가 가마를 짓고 도자를 굽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소나무 숲이 우거져 고산자 김정호(古山子 金正浩·? ~1866)가 대동여지도를 만들려고 답사하면서 “그곳에 소나무가 많다”고 기록했다는 한촌(閑村)이다.
이수종은 중송리 언덕에 중송당(中松堂)이라 자호(自號)하고 특색 있는 분청자기를 빚었다. 그의 도자기는 산청의 흙이나 옹기토로 도판, 병, 사발, 불상 등을 자유롭게 만들고 화장토를 입힌 후 붓이나 손가락에 철화(鐵畵)안료를 찍어 대담하게 문양을 그리되 그 임리(淋)가 뚝뚝 흘러 그릇 바닥에 넘치기도 하였다. 그 역시 윤광조와 같은 홍익대에서 도예를 전공하였으며 분청자기에 매료되어 그것만을 구웠다. 초기에는 추상의 물상을 만들기도 했으나, 대학 강의 등을 물리고는 오직 분청자기만을 만들었다.
고향 시인 두 명과 동행했던 가을날 그는 맑은 미소로 우리를 맞이했다. 사진도 마음껏 찍게 하고 저간에 새로 시도한 백자 달항아리를 여러 점 안아 볼 수 있게 했다. 단아한 부인의 다과 접대를 받으며 그의 예술관을 경청하였다. “새벽이나 해 질 무렵, 솔숲을 지나 추수가 끝난 빈 들판을 걸으면서 엄숙한 자연의 숨소리를 듣는다. 그런 마음의 리듬을 작품에 이입하려 한다.”
일찍이 그가 만든 연적, 향꽂이, 찻사발, 약사여래불상을 수집하고 아껴왔는데, 이젠 고희(古稀)를 앞둔 그의 달항아리를 수집하러 중송당을 드나들 즐거움이 더 생겼다. 이 편병(扁甁)은 신세계백화점에서 토전 김익영(土田 金益寧·1935~ ) 등 빼어난 도예가 몇 명과 함께하는 전시회에서 아내와 함께 구입한 것이다. 철화의 그림 속 이삭이 끊긴 수숫대가 빈 밭에서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이 편병을 바라볼 때마다 낫으로 수수 이삭을 자르던 유년의 고향 밭이 떠오른다.
2010년 용인의 ‘지앤아트스페이스’에서 3개월간 열렸던 ‘이수종 청담에 뜬 달’이라는 대형 전시회는 이수종의 분청자기에서 백자의 달항아리까지 맥을 짚어 볼 수 있는 자리였다. “황량한 대지 위에 그늘을 드리우고 장소의 풍경마저 바꿔 버리는 오늘날의 거목이 되기까지 모진 세월을 어찌 필설로 다 할 수 있으랴.” 평자(評者)는 이어 “어느 누구보다 그의 작품들은 한결같이 원초적인 맛이 흘러 넘치고 살아 꿈틀거리며 또 그만큼 주위 공간과 사물들을 자연처럼 너그럽고 편안하게 감싸 안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언젠가는 이 두 도예가의 가마를 찾아가서, 물에 잠긴 달을 긷듯 노년의 열정을 불사르는 예술혼에 슬며시 젖어 볼 꿈을 꾼다.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
한 도예가를 만나기가 그렇게 힘든 일이던가. 왜 꼭 그 예인(藝人)을 만나고자 했던가? 돌아보면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 한구석 아릿함이 밀려온다. 청광 윤광조(晴光 尹光照· 1946~ ) 도예의 모든 과정을 함께 지켜보고 싶은 열망에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으로, 경북 안강의 자옥산 자락으로 몇 차례 도요지를 찾아갔으나 바람 같은 흔적을 놓치고 매번 조우조차 못했다.
‘예술인은 작품으로 말한다’고 하지만 작품이 탄생되는 순간을 생생히 보고 싶은 습벽(習癖) 때문에 여러 예술인들을 찾아다녀야 직성이 풀렸다. 특히 흙을 수비(水飛)하고 물레나 판으로 형태를 만들어 건조하고, 초벌구이와 그 위에 그림을 그리거나 깎아 내고, 유약을 바르고 마지막 가마에 불을 지펴 소성(燒成)하고 식혀서, 가마 문을 열어 완성품을 꺼내는 수 주일의 도예작업은 꼭 참관하고 싶었다.
고등학교 5년 선배라는 학연도 있었지만 1994년 호암미술관에서 ‘한국의 미, 그 현대적 변용’이라는 명제의 오수환(吳受桓·1946~ ), 황창배(黃昌培·1947~2001)와 함께 한 윤광조의 전시회에서 너무나 깊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홍익대학교 공예과에서 도예를 전공하고, 처음에는 전통도자(청자, 백자)를 잇는 기물을 빚기도 했으나, 태토(胎土)의 거칠고 질박한 질료에 화장토(化粧土)를 입히고 대칼, 지푸라기 혹은 손가락으로 유희하듯 글자나 문양을 만드는 과정에 매료되어 오늘날까지 분청자기만을 고집스레 만들고 있다.
심산(深山)의 사찰을 다니며 불가(佛家)의 깊은 명상에서 비롯한 선(禪)의 경지에 이르고자, 끝없는 수양(修養)과 참배여정(參拜旅情)으로 수개월에서 1,2년간 도요지를 비우기 일쑤였다. 도자기에 대한 구상이 가슴 가득 차 올라와야 몇 점씩 빚어내곤 하였다. 작가의 군 시절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서 본 옛 도자기에 매료돼, 국립중앙박물관장이던 혜곡 최순우(兮谷 崔淳雨·1916~1984)선생을 찾아가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1976년 첫 가마를 짓자 혜곡 선생은 젊고 창의력이 도저한 윤광조에게 당신의 스승이었던 미술사학자 우현 고유섭(又玄 高裕燮·1905~1944)의 아호이기도 한 급월(汲月)이란 아호를 내렸다. 그래서 윤광조의 도자 가마는 급월요(汲月窯), 급월당(汲月堂)이 되었다. 우현 선생은 원숭이의 우화(寓話)를 인용하여 급월을 설명하였다. ‘산중 원숭이가 깊은 밤 목이 말라 샘가에 오니 마침 달이 물에 비쳤다. 원숭이는 달을 건지려 계속 물을 떴으나 달은 여전히 물속에 잠겨 있었다. 학문을 연구하는 이치도 이와 같아서, 아무리 다해도 다하지 못하는 것이 학문이다.’ 그러므로 무슨 일에든지 끊임없는 열정을 바쳐야 한다는 감계(鑑戒)의 깊은 뜻이 서린 아호였다.
1986년부터는 쉽게 도자를 빚는 물레를 치우고, 판 작업과 흙 타래를 쌓아 올리는 자유롭고 정형이 없는 창작도예를 통해 그릇으로서 쓰임은 이어가되 무심히 손가락으로, 혹은 지푸라기나 못 끝으로 글을 써 넣거나 문양을 그렸다. 심경(心經), 율(律), 정(定), 관(觀), 월인천강(月印千江), 정토(淨土), 지월(池月) 등의 작품들은 작가의 깊은 선정(禪定)의 경지에서 빚은 격조 높은 예술품으로 그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독보적 분청자기의 세계를 나타냈다. 이 작품 ‘정(定)’은 직사각 육면체 통 위에 동그란 구멍을 두어 꽃을 꽂을 수도 있으며, 넓은 한쪽에는 한 그루 나무와 새의 형상을 손가락으로 그리고, 이면에는 달이 강에 비치는 월인천강(月印千江)을 나타낸 귀한 작품으로, 인사동 화랑 주인을 꽤 오래 졸라서 구입한 것이다.
올해 7~8월 ‘놀다 보니 벌써 일흔이네-遊戱三昧(유희삼매) 도반 윤광조. 오수환 전’에서 윤광조는 산동(山動), 혼돈(混沌), 심경(心經) 등 무위자연의 순수와 인간의 고뇌를 한 점 한 점 도자에 녹여내고 있다. “작업장에서 해가 질 때까지 하루 12시간 이상 작업한다. 죽을 때까지 흙과 불을 붙들고 예술적 삶을 이어가겠다.” 거칠되 따뜻한 두 손을 잡으니 “보잘 것 없는 선배를 깊게 생각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만날 때마다 겸손한 그의 인품에서 든든한 예(藝)의 거목을 본다.
내 향리(鄕里)인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에 이수종(李秀鍾 1948~ ) 도예가가 가마를 짓고 도자를 굽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소나무 숲이 우거져 고산자 김정호(古山子 金正浩·? ~1866)가 대동여지도를 만들려고 답사하면서 “그곳에 소나무가 많다”고 기록했다는 한촌(閑村)이다.
이수종은 중송리 언덕에 중송당(中松堂)이라 자호(自號)하고 특색 있는 분청자기를 빚었다. 그의 도자기는 산청의 흙이나 옹기토로 도판, 병, 사발, 불상 등을 자유롭게 만들고 화장토를 입힌 후 붓이나 손가락에 철화(鐵畵)안료를 찍어 대담하게 문양을 그리되 그 임리(淋)가 뚝뚝 흘러 그릇 바닥에 넘치기도 하였다. 그 역시 윤광조와 같은 홍익대에서 도예를 전공하였으며 분청자기에 매료되어 그것만을 구웠다. 초기에는 추상의 물상을 만들기도 했으나, 대학 강의 등을 물리고는 오직 분청자기만을 만들었다.
고향 시인 두 명과 동행했던 가을날 그는 맑은 미소로 우리를 맞이했다. 사진도 마음껏 찍게 하고 저간에 새로 시도한 백자 달항아리를 여러 점 안아 볼 수 있게 했다. 단아한 부인의 다과 접대를 받으며 그의 예술관을 경청하였다. “새벽이나 해 질 무렵, 솔숲을 지나 추수가 끝난 빈 들판을 걸으면서 엄숙한 자연의 숨소리를 듣는다. 그런 마음의 리듬을 작품에 이입하려 한다.”
일찍이 그가 만든 연적, 향꽂이, 찻사발, 약사여래불상을 수집하고 아껴왔는데, 이젠 고희(古稀)를 앞둔 그의 달항아리를 수집하러 중송당을 드나들 즐거움이 더 생겼다. 이 편병(扁甁)은 신세계백화점에서 토전 김익영(土田 金益寧·1935~ ) 등 빼어난 도예가 몇 명과 함께하는 전시회에서 아내와 함께 구입한 것이다. 철화의 그림 속 이삭이 끊긴 수숫대가 빈 밭에서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이 편병을 바라볼 때마다 낫으로 수수 이삭을 자르던 유년의 고향 밭이 떠오른다.
2010년 용인의 ‘지앤아트스페이스’에서 3개월간 열렸던 ‘이수종 청담에 뜬 달’이라는 대형 전시회는 이수종의 분청자기에서 백자의 달항아리까지 맥을 짚어 볼 수 있는 자리였다. “황량한 대지 위에 그늘을 드리우고 장소의 풍경마저 바꿔 버리는 오늘날의 거목이 되기까지 모진 세월을 어찌 필설로 다 할 수 있으랴.” 평자(評者)는 이어 “어느 누구보다 그의 작품들은 한결같이 원초적인 맛이 흘러 넘치고 살아 꿈틀거리며 또 그만큼 주위 공간과 사물들을 자연처럼 너그럽고 편안하게 감싸 안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언젠가는 이 두 도예가의 가마를 찾아가서, 물에 잠긴 달을 긷듯 노년의 열정을 불사르는 예술혼에 슬며시 젖어 볼 꿈을 꾼다.
>>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리뷰어
나이가 들면서 친구 사이도 연인만큼이나 복잡하고 다양한 관계 속에서 헤어지고 만나기를 반복한다. 학창 시절부터 만난 오래된 친구부터 사회에서 만났어도 그 누구 못지않게 마음 잘 통하는 친구도 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좋은 내 친구, 어쩌다 만났는데 단짝이 된 친구 이야기를 들어봤다.
글·사진 권지현 기자 9090ji@etoday.co.kr
365일, 일만 생각하며 앞만 보고 살았던 금융맨이 퇴직 후 친구들의 여행을 돕는 여행 전문가가 됐다. 일명 ‘동창생 여행 전문가’가 된 정강현(丁康鉉 ·69) 회장. 퇴직 후 서울사대부고 동문 카페에 18회 졸업생들의 여행 모임 ‘여유회’를 만들어 친구들과 여행을 다닌 지도 10여 년이 훌쩍 넘었다. 한 달에 한 번은 꼭 어디든지 간다는 정 회장. 그가 추진하는 여행에는 항상 20명 이상은 참석한다. 이 놀라운 출석률은 정 회장의 탄탄한 여행 준비 덕분이다. 1만원 정도의 적은 회비로 친구들에게 이야기가 있고 맛있는 여행을 즐길 수 있게 해준다고. 답사는 기본이고 역사가 있는 여행지를 선정하면 꼼꼼하게 공부하고 챙겨서 여행 해설가로도 변신한다. 지난 7월 7일에는 작년 메르스 때문에 일정을 잡았다 가지 못했던 양수리 세미원과 두물머리를 다녀왔다. 이날 비소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29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 자리에서 내 친구 정강현은 어떤 사람인지 동창생들의 목소리를 들어볼까.
내 친구 정강현은 어떤 친구입니까?
성기정
강현씨는 두말할 것도 없이 멋쟁이예요. 봉사에 앞장서는 사람, 가장 멋진 일을 친구들에게 알려주고 싶어 하는 사람이지요. 강현씨 덕에 우리는 새로운 것을 경험하게 되니까 멋있을 수밖에 없어요. 이번에 온 세미원도 예전에 와봤지만 새롭게 단장한 이후 오늘이 처음입니다. 서오능 이런 곳에 갈 때는 역사 공부를 해 와서 친구들한테 설명해 주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 친구들하고 다니는 것이 너무 좋습니다.
송남영
동창들이 만나는 것도 다 때가 있습니다. 우리도 30~40대에는 못 만났어요. 각자 바쁘다보니 그랬습니다. 50대에 접어들면서 동문회가 활성화되고. 향수를 찾아간다고나 할까요? 동창회에 간다고 하면 그때 친구들이 좋아요. 강현이가 여유회를 시작하면서 안 가본 데가 없어요. 서울성곽 길, 전주한옥마을 등 뭐 말할 것도 없죠. 그리고 같이 있으면 재미있어요. 정말 늙었는지도 모르겠어요. 다들 너무 애들 같아요. 귀엽다니까요. 50년 전으로 가버리니까 그때 같이 있던 사람들이라 마음이 소년, 소녀가 되는 거죠. 목소리도 깔지 않고 서로 앞에서 폼 잡을 일 없고 너무 편합니다.
유경옥
생긴 건 기본이고 멋지고 근사하고 박학다식하고 멋있는 친구예요. 같은 학교를 졸업해서 동창으로 있는 것이 정말 행운이죠. 진짜 전문성도 갖추고 정서적인 거, 마음을 건드리는 감성 그리고 따뜻함을 갖췄어요. 헌신적으로 모임을 위해서 리드를 잘 하세요. 계획적으로 그야말로 여유 있고 즐겁게요. 오늘 보신 것처럼 우리 상태를 보아 가면서 여행 계획을 짜는데 정말 존경스러워요.
김혜자
정강현은 리더십 강하고, 봉사도 잘하고, 정말 사실이 그래요. 이 나이에 저렇게 땀을 뻘뻘 흘리고 좋지도 않은 길을 가면서 설명도 해주고 말입니다. 보통 노력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죠.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니까 하는 거죠. 강현이는 여행을 할 때 꼭 그곳에 관한 공부를 많이 해오는데 대충 알아서 말하는 게 아니라 충분히 자기 말로 표현하고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줍니다. 여행 가이드 이상으로 저희에게 알려주죠. 한번은 부부동반으로 몽골의 갈매기섬이라는 곳에 갔었어요. 여기는 사람이 혼자 가면 갈매기들이 공격해요. 그런 곳을 혼자 뚫고 갔다 돌아 나올 때 배가 고장이 났는데 기지국이 많이 없어 연락이 안 되는 일도 있었어요. 그렇게 위험한 상황을 겪고도 다음에 또 보면 그런 오지 같은 데를 데리고 가더라고요. 이 친구 아니면 저희가 또 어떻게 그런 곳에 가보겠어요. 그러니까 친구들이 감격해서 잘 따라 다니는 거예요.
서울사대부고 동창 대표 잉꼬 부부 장재숙·하지환 부부
저 친구 정말 좋은 친구입니다. 이 나이에 앞장서서 희생하는 것이 쉽지 않잖아요. 이렇게 여러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 얼마나 좋아요. 강현이도 나름대로 바쁜 사람이거든요.
희생정신이 있는 겁니다. 이 많은 친구들을 위해 사전 답사하고, 열차 시간까지 챙기는 거 보면 너무 감사하지요. 서울사대부고 동문 중에서도 우리 18회 동창들이 제일 행복하지 않을까요?
전업주부 사이구사 하쓰코의 열렬 한국 사랑 “아직 배울 것도 많고 보고 싶은 것도 많아요”
인터뷰 이태문 일본 통신원 gounsege@gmail.com
한국 사극 보고 역사책 읽고
“한국 여행안내 책자에 없는 일본의 멋진 곳을 구석구석 안내하고 싶어요.”
똘망똘망, 호기심에 가득 찬 눈을 지닌 사이구사 하쓰코(三枝初子, 1956년생)는 유홍준 교수의 일본편을 꺼내며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물론 일본어 번역판이 아닌 한국에서 구입한 우리말 책으로, 아스카(飛鳥)문화와 교토(京都)유적에 대한 유 교수의 구수한 이야기에 대해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면서 한·일 양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신의 생각도 빠트리지 않고 덧붙였다.
“고대 도래인(渡來人)이 가져온 문화가 일본 각지에 영향을 주었고, 거기서 일본적인 것이 싹트고 자라온 것을 부정할 수 없는데, 갈수록 관심이 적어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평소 역사를 좋아하는 하쓰코가 한국의 매력에 푹 빠진 것은 흔히 말하는 한류 드라마가 계기가 되었다. 그것도 2009년께부터 봤다는 과 같은 사극이었다. 드라마의 재미에서 시작된 한국 역사에 대한 관심은 일본에서 출판된 한국 역사 관련 서적을 두루 읽게 되었고, 그러다가 한국어가 일본어와 어순이 비슷해 공부해 볼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고 한다.
행동하라 그리고 즐겨라
한글을 외우고 싶어서, 아니 혼자 배우는 독학의 재미보다는 다 같이 공부하는 분위기가 좋아서 그녀는 2011년 12월 동아리를 만들었다.
2012년 첫 한국 여행으로 제주도를 선택한 하쓰코는 한국에 대한 관심이 한국 사랑으로 바뀐 자신을 발견했다. 서슴없이 “도와 드릴까요?” 라고 말을 걸어오는 한국인, 알지도 못하는 어느 아줌마가 “어디 가세요?”라며 요구르트를 건네는 등 일본에서는 사라진 인정(人情), 그 따스함에 흠뻑 빠져들었다.
“정말 신기했죠. 일본인들이 잊고 살았던, 정이 넘치는 한국 사회를 직접 경험해 보니까 더 열심히 공부해 한국 사람과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졌어요.”
그 뒤로 한국어 공부 동아리 사람들과 2012년 가을 서울 인사동, 한국 민속촌, 경기도 수원 화성 등을 돌았으며, 2013년에는 경북 경주, 안동 화회 마을, 부산에서 역사와 문화를 만끽했다. 그리고 2014년에는 혼자서 4박 5일 동안 중부내륙 순환열차를 이용해 강원도를 비롯해 지방을 여행하고 판문점도 찾아 남북 분단의 현실을 직접 목격했다.
2015년에는 친정 아버님의 병환과 별세로 한국에 가지 못했고, 2016년 4월에는 3박 4일의 일정으로 전남 진도와 목포를 돌며 남도의 예술 향기와 맛깔스러운 음식에 흠뻑 취했다.
그녀는 여행 후에 일정과 정보, 유적 설명, 그리고 거기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를 꼼꼼하게 정리해 파일로 남겼는데, 그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전업 주부, 결코 평범하지 않다
“5만원권에 등장하는 신사임당 생가에 가고 싶어요”라고 밝히는 하쓰코는 두 아들의 엄마, 직장인 남편의 아내인 평범한 전업 주부다.
지금 사는 아파트가 1층이라 앞에 건물이 보여 답답한 것도 있고 해서, 산책과 트레킹, 특히 경관이 탁 트인 산에 오르는 것을 즐기는 그녀는 15년 전 사진 찍기를 시작해 DSLR 카메라와 300㎜ 렌즈를 배낭에 넣고 한적한 산에 올라 계절마다 표정을 바꾸는 온갖 꽃들을 담고 있다.
물론 등산에 필요한 체력은 스포츠센터를 다니며 단련했지만, 역시 경치가 없어서 금방 질려 버린다며 신선한 공기와 푸른 자연이 있는 세상 속에서 자신의 건강을 유지할 생각이라고.
전업 주부인 그녀가 길지는 않지만 회사를 다닌 적이 있다. 아들이 대학교에 입학해 캠퍼스 생활을 누릴 때, 늦깎이로 컴퓨터와 제작 실무를 배워 후지쓰(富士通)와 가와사키(川崎)시의 재단법인에 각각 2년쯤 근무하면서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그 경험은 한국어 공부와 한국 여행을 기록하고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그리고 지난 6월 제195회째 공부 모임을 마친 요코하마(橫浜) 한국어동화 독서회를 꾸려가며 트위터와 페이스북, 그리고 카톡과 라인 등 SNS를 이용해 모임 소식과 정보 공유, 그리고 회원들의 감상문 제출 등 젊은 사람들 못지않은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노후는 나를 위한 욕심쟁이로
액티브 실버, 한마디로 파워 넘치고 활기 찬 인상의 사이구사 하쓰코에게 꿈을 물어 봤다.
“꿈이 아니다. 희망이다. 한국어는 의성어와 의태어가 많아서 그 풍부한 표현이 매력적이라 앞으로도 계속 공부해 유홍준 교수의 문화답사에도 꼭 참가하고 싶다. 그리고, 2020년 도쿄올림픽 때 자원봉사자로 참가해 한국어 안내를 맡을 생각이다. 벌써부터 가슴이 설렌다. 말을 통해 마음이 서로 이어지고, 마음을 통해 사람과 사람이 하나 되는 그 자리에 나 자신이 함께하고 있고, 내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면 정말 흥분된다.”
아울러 하쓰코는 3년 뒤 남편이 정년 퇴직을 하면, 첫 부임지로 가족이 함께 살았던 센다이(仙台)를 잊을 수 없어서 다시 그곳에서 당시의 생활을 천천히 음미하며 지내고 싶다는 소망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동안 가족들을 위해 정말 애쓰고 열심히 살아온 남편이랑 크루즈 세계여행도 계획하고 있다고 귀띔해 줬다.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과 도전이야말로 다이나믹한 노후를 보내는 그녀의 원동력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삶에 활력을 심어 준 한국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사랑도 더욱 깊어지고 뜨거워질 것이다.
그런 욕심쟁이는 너무 멋져요. 아름다워요. 파이팅 하쓰코 !
한 번 시도했다가 못 한 일은 별것 아니더라도 꼭 다시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이런 하찮은 욕구가 문명 발전에 기여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또다시 ‘방콕예술문화센터(BACC : Bangkok Art & Culture Center)’를 찾았다. 어제의 답사 덕분에 고가철도 BTS를 타고 내셔널 스타디움 역으로 태국인처럼 거침없이 갔다. BTS를 타면 마치 놀이동산에 모노레일을 타는 기분이 들어 공연히 신났다.
다시 찾은 BACC는 못 들어갔다가 들어가니 감지덕지하는 마음에 더 꼼꼼하게 보았다. 커다란 둥근 건물은 내부가 나선형으로 9층까지 돌고 돌아 거대한 톱니바퀴를 연상시켰다. 9층에서 내려다보면 층층이 다니는 사람들이 다 보이고 1층에선 천정이 9층까지 뚫려 가슴까지 시원했다. 방문객들은 마치 한 공간에 있는 듯했다.
태국식 탱화, 비디오 아트, 초상화 그리는 곳 등과 작가들의 작업실 겸 가게 등 여러 곳을 둘러본 후 7층에 다다랐다. 입장료가 무료인 그곳에 난데없이 책상과 지키는 여자가 보였다. 눈치껏 살펴보니 ‘여권이 있으면 무료’라고 쓰여 있었다. 아뿔싸! 여권은 잃어버리면 한국에 못 돌아갈까 봐 숙소에 고이 모셔놓고 왔는데. 연일 ‘또 낭패네!’ 하고 돌아서는데 자세히 보니 소지품 맡기는 것이 무료라는 뜻이다.
거기부터는 가방을 못 들고 들어간다는 얘기다. 그럼 태국인들은 대체 가방을 어디 두고 들어가나 봤더니 그 옆에 로커가 있었다. 로커 대여료는 고작 330원이었다. 별거 아닌 것에 손해 보지 않으려다 더 큰 것을 놓칠 뻔했네. 그야말로 소탐대실이다. 그곳에는 전이 열리고 있었는데 이것은 ‘White Elephant Art Award’라는 태국에서 꽤 권위 있는 상을 받은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중 지금도 마음에 남는 작품 중 하나는 이다. 원숭이의 모성애를 하도 따뜻하게 그려 관람자들은 태국 말과 글씨를 모르는 사람도 모두 공감할 정도다. 열대지방이라 그런지 원숭이나 악어, 코끼리 등 동물을 소재로 한 작품이 많았다. 또 특이한 것은 왕을 모델로 그린 작품도 여러 점 있었다. 그 중 은 동그란 방글이 얼굴 모양 스탬프를 수없이 찍어 명암을 주며 그린 왕의 옆모습이다. 태국 국민 중 많은 사람이 왕을 존경하고 사랑한다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올해로 만 70년째 재임해 세계 최장기 집권 국가 원수인 푸마폰 아둔야뎃(라마 9세) 국왕이 이렇게 존경과 사랑을 받는 이유는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국민의 편에서 서서 민주주의를 확립했기 때문이다. 그는 태국 곳곳을 다니며 국민의 소리를 들었고 그들의 고충을 해결하기 위해 왕실 재산도 아낌없이 썼다. 태국 지폐에 모셔진 라마 9세는 그야말로 태국 국민의 정신적 지주다. 크리스마스도 휴일이 아닌 태국에서 국왕의 생일인 12월 5일이 아버지날이고 휴일이라니 이것만으로도 라마 9세는 살아있는 신의 경지로 추앙받는 셈이다. 참고로 영화 ‘왕과 나’는 그의 증조할아버지인 라마 4세의 일대기다.
마지막으로 이 전시회에서 대상을 받은 작품은 다. 러브레터를 받았을 때의 홍조 띤 기쁜 얼굴을 수많은 정사각형 러브레터를 펴고 접고 유사한 색상의 편지로 섞어가며 만든 것이다. 태국어를 안다면 그 내용도 읽을 수 있어 더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글자를 모르는 답답함에 빠졌다. 저 작가는 이토록 많은 러브레터를 붙이며 어떤 마음이었을까? 설렜을까? 어쩌면 대상을 기대하며 러브레터를 기다리듯 조마조마했겠다.
다른 전시관에는 전위예술인지 엽기적인 작품과 색다른 시도를 한 작품도 많았다. 미술 문외한이 신세대의 감성과 현대 미술을 어찌 다 이해하겠는가. 그래도 작품 하나하나를 대하며 작가와 교감하는 것은 감상의 짜릿한 기쁨이다. 그 나라의 문화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려면 예술작품을 접하는 것이 지름길이라는 생각을 하며 BACC를 나섰다. 과연 외국인들은 우리나라 문화 예술을 접하며 어떤 느낌일까? 이제야 비로소 우리 관광산업의 문제가 객관적으로 이해되었다.
"또 언제 여행 가?" 요즘 필자가 가장 많이 듣는 말이다. 이런 질문을 받으면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몰라 잠시 망설이게 된다. 필자도 언제, 어디로 떠나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블로그를 시작하고 소소하게 돌아다니면서 제일 처음 알게 된 게 팸투어였다. 팸투어란 지자체 등이 바이럴 마케팅을 위해 블로거들을 모아 여행을 시켜주는 일종의 사전답사여행인데, 팸투어 카페에 가입하자마자 여행을 떠나게 됐다.울긋불긋 가을에 백두대간 협곡열차를 타고 태백여행을 했다. 정선 오일장에서 장도 보고 원주에 있는 박경리 문학관까지, 돈 한푼 안들이고 대절 버스에 올라 이곳저곳 구경하는 것이 참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러나 혼자가 편하고 좋은 내 성향 때문이었을까, 다른 여행을 찾아보게 되었다.
그러다 블로그 이웃의 소개로 여행사 이벤트를 알게 됐다. 참가비 10만원만 내면 2박 3일 일본 여행을 할 수 있단다. 게다가 동반 1인도 가능한 자유여행이라 눈이 번쩍 뜨였다. 이 이벤트로 동생과 요나고에, 엄마와 미야자키에 다녀왔다. 도쿄나 오사카 등 대도시 위주의 여행만 하다가 작은 소도시를 돌아보니 색다르고 좋았다. 요나고 가이케온천과 미사사온천, 미야자키의 쉐라톤온천은 지금도 생각난다.여행을 이리저리 다니다 보니 더 많은 곳을 가고 싶어졌다. 그래서 관심을 갖게 된 게 항공프로모션이었다. 저비용항공사들은 주기적으로 싼 값에 비행기티켓을 풀곤 한다. 빈 좌석으로 운행하는 것보다는 아주 싼 가격에라도 팔아 좌석 점유률을 높이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여행카페나 블로그 이웃들이 주는 정보를 기억했다가 티켓을 샀다. 평일 출발 표는 상대적으로 경쟁이 덜했다.최근 제주항공 프로모션 일본 항공권은 5~6만원 대 믿기 어려운 가격도 포함돼 있었다. 이런 항공권을 구입하려면 순발력과 약간의 팁이 필요하다. 필자는 하롱베이에 가보고 싶단 생각이 들자 프로모션을 통해 하노이행 티켓을 끊어 놓았다.
여행을 즐기려고 마음 먹자 공짜나 다름없는 돈으로 즐길 수 있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여행을 다녔지만 가장 즐겁고 보람있는 일은 기자단 활동이다. 대한민국정책기자단으로 활동 하면서 관광이나 문화관련 기사를 위해 여기저기 여행할 기회를 많이 얻었다. 외암마을을 취재하고 혼자 농촌에서 휴가를 즐겼다. 인문열차를 따라 영주, 봉화, 안동 일원의 양반 동네를 구경하고 400년 된 고택에 묵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 또, 박찬일 쉐프와 함께 영동 와인여행을 하면서 도리뱅뱅에 어죽을 맛본 경험은 참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게다가 기사를 쓰면서 원고료까지 받게 되니 만족감이 높아졌다.
팸투어, 여행사이벤트, 항공프로모션 그리고 기자단 활동이 내 주된 여행원이다. 대부분 무료이거나 아주 작은 값만 지불하면 된다. 그래서 나는 공짜로 여행 다닌다 그렇게 말하곤 했고, 내 이웃들도 그렇게 알고 있다. 그러나 그건 아니다.팸투어를 다녀오면 주최 측에서 원하는 숫자 만큼 블로그 포스팅을 해야한다. 어떤 경우에는 날짜가 정해져 있어 여행을 다녀오면 여러 날 동안 블로그 포스팅을 위해 일해야 할 때도 있다. 여행사 이벤트도마찬가지다. 공짜나 다름없는 가격에 여행을 다녀올 수 있지만 여행지나 교통편에 대해 블로그 포스팅을 요구하기도 한다.항공프로모션은 더하다. 티켓이 열리는 시간에 알람을 맞춰놓고 광클릭으로 티켓을 잡아야한다. 인기가 많기 때문에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몰려 로딩 시간이 길어지면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한다. 품이 많이 드는 작업이다.여행을 떠나기 위해 내가 기울인 노력과 열정이 값으로 매겨진다면 결코 싼 값일 수 없다. 하지만, 사람들이 나를 보고 공짜나 다름없는 여행 다니는 사람이라 부러워 하는 것이 참 좋다.
신라의 천년고도(千年古都) 경주. 이곳에서 맞는 새벽은 늘 벅차다. 문무대왕의 산골(散骨)이 뿌려진 동녘 끝 감포바다로부터 잘생긴 신라 화랑의 자태를 연상케 하는 감은사지 탑, 너른 황룡사지, 계림의 신비로운 숲과 왕릉들. 어디든 지그시 눈감고 앉아 있으면 그윽한 고도의 기운이 감지되는 곳들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곳을 방문할 때마다 제일 먼저 하는 고민이 ‘과연 어디서 새벽을 맞을 것인가?’ 이다. 어디서 또 신라의 새벽향취를 맡아볼 것인가?
글·사진 남정우 사진가 njkor@naver.com
잠들지 않는 바다 - 감포 대왕암과 이견대, 감은사지
감포의 새벽은 경건하다. 동이 트기 전, 대부분의 동해안처럼 일출을 보러 사람들이 모여들지만 어느 누구도 들뜨지 않는다. 해안 곳곳에 켜놓은 촛불과 새벽기도를 나선 만신들의 모습이 이채롭다. 예사롭지 않은 이 풍경은 해안에서 200m 떨어진 검고 긴 바위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사적 158호로 지정된 이 바위의 이름은 대왕암이다.
668년, 부왕 무열왕시대의 백제 정벌에 이어 고구려마저 정벌한 문무왕은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국토는 여전히 불안정했고, 왜구의 침범까지 빈번했다. 그는 죽기 전 자신의 유해를 화장하여 동해바다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죽어서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신념이었다. 유언대로 유해는 대왕암 바위에 뿌려졌다. 호국의 용이 된 문무왕은 대왕암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이견대 주변에 종종 모습을 나타냈고 그의 아들 신문왕은 이곳에서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만파식적(萬波息笛)을 얻었다.
대왕암이 있는 해안을 뒤로하고 929번 도로를 따라 500m쯤 가다보면 우측으로 잘생긴 두개의 탑이 모습을 나타낸다. 감은사지다. 문무왕은 대왕암에 자신의 산골처를 정하고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명당에 절을 지어 불력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했다. 절을 짓는 공사가 시작되었지만 완성을 못보고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 이듬해 아들 신문왕에 이르러 마침내 절은 완공되었고 부왕의 은혜에 감사드린다는 의미로 신문왕은 절 이름을 감은사(感恩寺)라 하였다. 감은사지에서는 두 가지를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먼저, 너른 양북면 들녘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두 개의 탑이다. 두 기의 감은사지 삼층석탑은 국보112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 하나는 금당의 바닥구조이다. 특이하게도 불전 밑으로 빈 공간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 수 있도록 해놓은 것이다. 신문왕의 효심이 만든 독특한 공간이다.
경주 시내유적 답사 - 대릉원, 첨성대, 반월성, 계림
서기 65년 어느 봄밤, 왕은 궁궐 서편의 숲에서 울리는 닭울음 소리를 들었다. 늦은 밤 닭이 우는 까닭이 궁금했으나 밤이 깊었다. 다음 날 아침, 왕은 신하를 시켜 숲으로 가보게 했다. 금빛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데, 흰 닭 한 마리가 그 밑에 앉아 울고 있었다. 궤짝을 열어보니 놀랍게도 그 안에 아이가 하나 있었다. 범상치 않은 일임을 직감한 왕은 아이를 거두었고, 알지(閼智)라 이름을 붙였다. 금궤짝에서 태어났다 하여 김(金)씨 성을 붙였으니, 경주 김씨의 시조이다. 이후 이 숲을 신성히 여겼고, 닭계 자를 붙여 계림(鷄林)이라 불렀다.
경주 시내 유적의 중심은 첨성대를 중심으로 반월성, 계림, 인왕동 고분군, 대릉원으로 이어진다. 조금 더 범위를 넓히면, 안압지와 국립경주박물관까지 쉬엄쉬엄 걸어서 돌아볼 수 있다. 경주의 풍경 중 독특하고 인상적인 것이 왕릉이다. 거대한 고분들이 옹기종기 모여 고분군을 이루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대릉원과 인왕동 고분군이다. 대릉원은 23기가 모여 능원을 이루는 곳으로 황남대총과 미추왕릉, 천마총 등이 자리하고 있다. 유일하게 내부가 공개된 천마총에서 신라 왕릉의 구조를 엿볼 수 있다. 인왕동고분군은 계림 서편 너른 공간에 자리하고 있다. 현재는 내물왕릉을 비롯해 5기의 고분이 있지만, 일제 강점기 때까지만 해도 13기 가량이 남아 있던 것으로 전해진다. 첨성대와 계림 사이의 공간에서 바라보면 멀리 선도산 자락과 어우러져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산과 능이 마치 한 무리처럼 보인다. 반달처럼 생겨서 반월성이라고 불렀던 월성은 신라 궁궐이 자리했던 곳이다.
동양 최대 사찰 황룡사지와 분황사
경주시내 동쪽에 자리한 황룡사지는 총 면적이 2만 여평에 달하는 동양 최대의 사찰이었다. 진흥왕 14년(553)에 창건되어 선덕여왕 12년(643)에 완공되었으니 공사 기간만 무려 90년이 걸린 국가의 명운을 건 대공사였다. 애석하게도 1238년 몽고 침략 때 전각들은 모두 불타 없어졌지만, 주춧돌과 초석 등이 남아 절의 규모와 전각의 자리를 유추해볼 수 있다. 황룡사에는 지금 시대로 말하자면 경주의 ‘랜드마크’가 있었다. 높이가 무려 80m에 달했다는 황룡사 구층목탑이다. 경주박물관이나 경주타워에 가보면 옛 경주의 모습을 재현해놓은 디오라마를 볼 수 있는데, 황룡사 구층목탑의 위용을 간접적으로나마 실감해볼 수 있다. 황룡사터 초입에는 분황사가 있다. 선덕여왕 3년(634)에 창건된 분황사는 황룡사지에 비하면 아담한 규모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신라 중심의 평지에 자리 잡은 유서 깊은 사찰이다. 당나라에서 귀국한 원효대사와 자장율사가 이곳을 거쳐 갔고, 독특한 양식의 분황사 석탑이 남겨져 있다. 분황사 석탑은 보기 드문 모전석탑인데, 모전석탑은 중국의 전탑을 모방하여 돌을 벽돌처럼 깎아 쌓은 탑을 말한다. 지금은 3층까지만 남아 있으나, 원래는 9층탑이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국립경주박물관과 안압지
천년고도 경주의 명성에 걸맞게 경주국립박물관은 중앙국립박물관에 이어 최고의 규모와 전시품을 자랑한다. 모두 3개의 전시관에 2500여 점이 전시되어 있으며 8만여 점의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선사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는 그야말로 신라의 모든 문화가 압축되어 있다. 전시실의 외부에는 경주 인근에서 옮겨온 국보 38호 고선사지 석탑을 비롯 석조유물들이 경내 곳곳에 가득하며 국보 29호 성덕대왕 신종도 이곳에 보관되어있다. 시주로 바쳐진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에밀레 에밀레하고 들린다 하여 에밀레종이라는 별칭이 붙어 있는 이 종은 경덕왕 시절 부왕인 성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든 것으로 그 모습만으로도 유려하며 장중함이 느껴진다. 화려한 비천상과 연꽃 등의 조각이 섬세하다. 경주박물관에서 길을 건너 조금만 북쪽으로 가면 안압지가 있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룬 직후, 674년에 못을 파고 679년에 궁궐을 만들어 동궁으로 사용하던 곳이다. 신라의 인공 정원이라 불릴 만한데, 삼국사기 문무왕시대를 보면 “궁 안에 못을 파고 가산을 만들고 화초를 심고 기이한 짐승들을 길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경주여행 tip
추천 경주 답사일정 감포 대왕암–감은사지-대릉원-첨성대-계림-반월성-국립경주박물관-황룡사지-분황사-안압지-계림일대 야경
경주의 고택에서 숙박 www.gjgotaek.kr
경주의 먹거리 시내 쪽에서 많이 찾는 것이 쌈밥으로, 대릉원과 첨성대 인근에 쌈밥집이 즐비하다. 보통 1인당 1만원 정도로 푸짐하고 먹을 만하다. 보문호 가는 길 북군동의 맷돌순두부도 많이 찾는 경주 먹거리다.
>>남정우(南晶祐) 사진가·여행작가. 스튜디오 COREE 대표
광고사진을 시작으로 출판, 잡지 등의 분야에서 사진가로 활동 중이다. 19번 국도 도보여행이후 백두대간 종주 등의 경험을 바탕으로 를 집필했다.
문화유적에 관심이 많아 관련 모임을 운영했으며, 문화재청과 수자원공사 등 사보에 기고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