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4년 전, 50대 중반의 대기업 임원 출신들이 모였다. 그들은 앞으로 계속 퇴직하는 이들이 늘어날 텐데, 함께 의미 있는 활동을 해보자고 의기투합했다. 그렇게 40명이 뜻을 같이하기로 했고, 이름을 ‘엔슬(ENSL)’이라고 지었다. ‘Executive Network for Second Life’의 약자다. 그리고 법적 실체가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협동조합으로 등록했다. 엔슬협동조합의 탄생이었다. 공덕동 서울 허브센터에 있는 엔슬협동조합의 배영효 이사장, 송덕호 이사를 만나 고수들의 고민과 이념과 가치, 미래 비전을 들어봤다.
“엔슬의 활동은 인생을 향유하고, 사회에 봉사하고, 배움을 추구하는 겁니다.”
지난 4년 동안 엔슬협동조합 이사장을 맡고 있는 배영효 이사장은 엔슬은 하나의 실험이라고 밝혔다. 수십 년 동안 한 분야에 몸담고 있다가 퇴직한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유익하게 시간을 보내고,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것인가는 우리 시대의 커다란 과제임이 분명하다. 엔슬은 엔슬의 방식으로 이런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다.
“엔슬이 성공을 거둔다면 다른 많은 사람에게 좋은 선례가 되고 우리 사회에 큰 공헌을 하는 것이 되겠지요. 또한 우리의 시행착오와 경험도 앞으로 같은 길을 걸어갈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여행, 지식 나눔, 재취업, 스타트업 투자까지 경험
인생을 즐기고, 봉사하고, 배운다는 차원에서 지난 4년 동안 엔슬은 다양한 활동과 경험을 했다. 여행과 답사, 지식 나눔, 재취업, 창업 멘토링과 스타트업 투자까지, 엔슬협동조합 회원들은 퇴직자들의 도전과 실수와 보람 등을 모두 겪었을 것이다. 그것들이 엔슬협동조합의 유의미한 데이터로 쌓여 있다. 예를 들어 serving, 즉 봉사활동을 봐도 그렇다. 그들의 봉사활동은 이웃돕기 같은 차원의 활동이 아니다.
“기업 경력이 30년 넘는 임원이 많다 보니 그 경험을 바탕으로 여러 활동을 벌여왔지요. 최근 창업이 붐이잖아요. 대부분의 창업자가 젊은 친구들이고요. 아이디어와 패기를 가진 창업자라 해도 네트워크나 사업 전개 방식 등에 있어서는 부족함이 있죠. 그래서 우리 멤버들과는 상호 보완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겁니다. 엔슬은 숙련된 전문가들이 멘토링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습니다. 아직 규모는 작아 실험적 단계입니다만, 회원들이 일정 금액을 모아 스타트업 투자도 하고 있고요. 창업 멤버들 중 일부는 투자 전문 기업을 창업하기도 했습니다.”
그루라고 해도 끝까지 성장하고 싶어 한다
내부적으로는 투자 기업 형태의 실험도 진행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엔슬은 회사가 아니다. 따라서 엔슬 조직은 위계도 없고, 멤버들이 보상을 받지도 않는다. ‘그러면서도 조직이 유지되느냐? 의미 있는 활동을 할 수 있느냐?’ 하는 질문들이 있을 수 있다.
“조직이 돌아가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어떤 일을 해야만 하고, 그 일을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거겠지요. 기업이라면 계층 구조 아래 급여를 주면서 일을 시키지만, 엔슬은 그런 조직하고는 다릅니다. 멤버들끼리 품앗이를 하면서 일을 합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이 있습니다. 서로의 기대도 다르고, 상대에게 강요할 수 있는 관계도 아니고요. 이런 상황 속에서 40명의 멤버가 4년간 활동해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엔슬이 지향하는 가치는 무엇일까? 바로 ‘사회적 의미가 있는 일을 하자’이다. 송덕호 이사는 ‘사람과 함께 활동하고자 하는 이들이 오는 곳’이 엔슬이라고 했다.
“퇴임 후 시간 보내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죠. 집에서 쉬고 싶고, 돈이 많으니 골프나 치면서 살겠다는 사람은 엔슬에 오지 않아도 됩니다. 공부라든지, 성장하길 원하는 사람이 오면 됩니다. 공부와 성장은 혼자만으론 힘듭니다. 멀리 가려면 같이 가야 하니까요. 그 니즈를 아는 사람이면 되는 것입니다.”
엔슬은 녹슬지 않는다
2019년의 엔슬은 큰 변화를 준비하고 있다. 과거에는 아는 사람끼리 활동을 해왔지만 이제는 새로운 사람을 받아들일 계획을 갖고 있다.
“2019년의 가장 큰 변화는 신입회원 모집입니다. 지난 4년간은 초창기 멤버들만 활동을 해왔는데 엔슬도 하나의 조직으로서 신진대사를 해야 할 것 같아 신입회원을 모집하기로 했습니다. 협동조합은 조합원의 상호 작용으로 가치를 창출해야 하는 조직입니다. 품앗이가 제대로 이루어져야 하는 거지요. 그래서 새해부터는 모든 회원이 하나 이상의 역할을 맡기로 했습니다. 무임승차(free riding)를 줄이는 것이 이런 성격의 조직을 유지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엔슬의 변화는 어떤 의미를 갖는 걸까. 그 의미는 엔슬의 가치가 학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성장과 배움을 이루려면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든지 새로운 환경에 노출되든지 해야죠.”
대부분의 인간관계는 과거의 관계들로 이뤄져 있다. 과거에 어디서 태어났느냐, 학교가 어디냐, 어떤 직장을 다녔냐 등등. 특히 시니어 세대를 이루는 50~60대는 고등학교와 대학교 동창 모임, 직장 선후배 모임, 종교 모임, 기타 취미활동 동호회 등이 인간관계의 주된 축이다. 미래지향적이라기보다는 과거지향적 관계들인 것이다.
“내가 만날 수 없는 사람을 만나야 발전할 수 있죠. 예를 들어 평소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던 인문학, 물리학, 블록체인 등의 내용을 처음 접하면서 사유를 넓혀가듯 말이죠. 그래서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끼리 만나는 게 중요하다고 결론을 내린 겁니다.”
‘계급장을 떼고 진짜 새로운 사람과 일을 해보자.’ 엔슬은 그렇게 과감한 판단을 내렸다. 물론 새로운 사람과의 관계가 무조건 장밋빛 미래를 가져오리라는 보장은 없다. 좋은 일도 있겠지만 리스크도 있을 것이다. 기업에서 수십 년간 일하며 온갖 사람들을 다 만났던 베테랑 엔슬 멤버들이 그런 문제들을 인지하지 못할 리가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평적 관계로서,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게 얻는 게 더 많으리라는 답을 내린 것이다.
당장의 욕구는 인생의 지향점이 될 수 없다
배영효 이사장에게 엔슬의 회원이 될 수도 있는 이들, 바로 곧 퇴임할 베테랑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에 대해 묻자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답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니, 무얼 어찌하라고 말하기는 어렵겠지요. 다만 ‘시간을 잘 쓰자’ 정도의 말은 누구에게나 할 수 있겠네요. 그런데 시간을 잘 쓴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생각을 많이 해봐야 할 것 같아요. ‘Happiness is not a destination. It is a way of life(행복은 목적지가 아니고 삶의 한 방법이다)’ 라는 개념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인생은 아무 문제없는 상태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고, 개인마다의 지향점이 있어야 한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그 지향점 찾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보통 정년이 되어 퇴직할 때가 되면 온갖 욕망들에 사로잡히기 마련이다. 배 이사장은 그런 욕망이 지향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보통은 옷을 벗고 나올 때 하고 싶은 것들이 있어요. 그런데 그런 욕구가 목적이 아닙니다. 회사에서 빨리 탈출하고 싶은 마음에 생기는 욕구이지요. 억압이 풀리면 그 욕구 역시 의미가 사라져요.”
구루가 되기 위한 출발선에 선 사람들
엔슬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단어가 있다. 바로 구루(guru)다. 자신들을 구루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직장에서 오래 생활했다는 것만으로 구루라고 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엔슬은 구루 모임이 아니라 구루가 되고자 하는 이들이 오는 자리라는 것이다. 즉, 엔슬은 인생의 끝이 아니라 그 반대로, 구루로서의 첫걸음을 지향한다.
“구루가 되려면 우선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리고 많은 지식을 아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지혜가 중요하죠. 지혜로운 사람은 향후의 변화를 읽을 수 있고 그걸 품을 수 있습니다. 자세히 아는 게 아니라 변화를 마음에 품고 사물을 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
배 이사장이 인생의 고수야말로 진정한 구루라고 말하자, 송 이사가 받아서 좀 더 구체적으로설명했다.
“구루가 되기 위해서는 네 가지 포인트가 있다고 봐요. 첫째는 살면서 성장하겠다는 욕구죠. 모든 사람이 성장하려 하지는 않거든요. 둘째는 분야를 정해야 합니다. 분야가 너무 많으니까요. 셋째는 과거와 무관치 않다는 것. 과거를 무시하고 구루가 되기란 쉽지 않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걸 경험해보겠다면 즐길 수는 있지만 구루가 되기란 어렵죠. 넷째는 십 년은 더 활동해야 한다는 겁니다.”
4년을 걸어온 엔슬의 새로운 도전은 2019년부터 전개된다. 신입회원은 최근 1~2년 내에 퇴임한 대기업 임원들을 중심으로, 2019년 1~2월에 걸쳐 모집 선발하고, 3월에는 오리엔테이션 프로그램을 운영할 예정이다. 그들이 바라는 구루의 길이 은퇴 후 제2의 인생을 찾는 고수들에게 어떤 모델로 제시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첫눈이 내리더니 대설(大雪)을 넘어 동지(冬至)가 다가오기도 전에 매서운 추위가 들이닥쳤다. 이렇게 되면 야외활동이 많이 위축되고 문화유산 답사도 지장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지금, 산과 들이 낙엽 지고 썰렁하다 못해 가슴 한가운데로 찬바람이 뚫고 지나가는 계절적 처연함이 가득한 늦가을과 초겨울이 엉겨 붙는 이때가 폐사지 답사에는 제격이다. 폐사지가 처량하면서도 아름답고 황량하면서도 존재감이 드는 것은 그곳이 한때는 번성하던 절터였기 때문이다. 말없이 우리를 대하는듯하지만 궁금한 것들은 차근차근 일러주는 미덕이 있으며 감추는 것 없이 있는 그대로 진솔하게 보여주는 사실과 증거가 널려있다.
충남 서산 보원사 터 (사적 제316호)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계곡은 내포(內浦) 지방의 진산 가야산(677m) 줄기 북쪽 봉우리 상왕산(象王山) 자락을 마주하고 서쪽으로는 개심사(開心寺)가 위치하고 있으며 그 산줄기 동쪽으로 깊은 계곡이 흐르는 곳이다. 지금은 국립용현자연휴양림이 있지만 그 옛날 이곳에는 100개의 절집과 1,000명이 넘는 승려들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곳으로 백제가 공주를 지나 부여에 자리를 잡고 있을 때 당진(唐津)을 통하여 중국과 왕래하던 중간지점쯤 되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통일신라 말 최치원이 지은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 '웅주 가야협의 보원사가 화엄 10찰이다'라고 기록되어 이즈음 창건된 사찰로 보기도 하지만 백제 금동여래입상이 발견되는 등 백제 때의 절일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원사가 상왕산에 있다’는 기록을 볼 때 16세기까지 그 사세가 지속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서산과 태안의 지방지 격인 호산록(湖山錄)에 보원사가 강당사(講堂寺)로 바뀌었다거나 철불의 양손이 없다는 기록 등이 있어 이때부터 사세가 기울어진 것으로 보이며 일제강점기 때 사진에는 석조물만 남아있을 뿐 절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1959년 근처에서 백제의 미소라 부르는 서산마애삼존불(국보 제84호)이 발견되었으며, 1968년에는 금동여래입상이 발견되었고 2006년부터 2012년까지 총 7차례에 걸쳐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대규모 발굴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현재 사적 제316호로 지정되었으며 102,886㎡의 웅장한 규모의 절터에는 당간지주, 석조, 오층석탑, 법인국사 승탑과 탑비 등 보물 5점이 있다.
당간지주 (보물 제103호)
절에서는 기도나 법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둔다. 이 깃발을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고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세월이 흘러 깃발(幢,당)이나 깃대(幢竿,당간)는 남아있지 않지만 돌로 된 기둥(支柱,지주)만 남아있으니 우리가 폐사지나 현존하는 절집 초입에서 자주 만나는 유적이다.
보원사 터 당간지주는 4m가 넘는 큰 석물이지만 전혀 위압적이지 않고 화려한 조각 없이 밋밋해 보이지만 찬찬이 살펴보노라면 의외로 멋진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하단이 상단보다 넓어서 안정적이며 기둥 안쪽은 아무런 장식이 없지만 바깥쪽으로는 띠를 두르듯이 조각하였다. 윗부분은 둥글게 궁굴려서 부드럽게 마감하였으며 마주 보는 기둥의 중앙에는 구멍을 뚫어 당간을 고정했다. 상단의 고정 부분은 열린 형태로 파내었고, 당간 받침대는 나중에 따로 만든 듯하며 큼직한 안상을 시원스레 조각했다. 중간에는 당간을 세울 때 받치는 자리, 즉 간대(杆臺)는 옛 모습 그대로 놓여있다. 저 넓은 3만 평 넘는 부지에 절집이 번성하던 시절, 이 당간지주에 힘차게 휘날리던 화려한 깃발(幢,당)을 생각해보면 참 멋지다. 주변에 사하촌 마을까지 들어차 얼마나 번화했을까.
오층석탑 (보물 제104호)
당간지주를 지나면 절터 중간을 횡단하여 흐르는 개울이 있다. 예전에는 징검다리로 불안하게 건너 다녔는데 최근에는 간이 철제 다리를 놓아 편리하다. 생각해보면 그 옛날 이곳에는 멋진 돌난간을 두른 큼직한 극락교나 해탈교 등이 놓여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다리를 건너 절집 안으로 들어서면 길게 높지 않은 축대가 쌓여있다. 그 중앙에 계단이 놓여있으며 위로 올라서면 중앙에 오층석탑 하나 서 있다. 멀리서부터 눈에 띄는 자태가 멋스러운 석탑은 상륜부를 치장하였던 찰주가 비죽 나와 있을 뿐 전체적으로 온전한 모습이다.
기단 위에 1층 몸돌이 얹히는데 그 사이에 굄대를 올린 것이 특이하며 충청도 지역 고려석탑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1층 몸돌의 각 면에 문비를 새겼으며 2층부터는 급격히 줄어들어 솟아오름이 강조되지만 지붕돌이 넓고 평탄하여 안정감을 준다. 상륜부에는 노반만 남아있지만 1945년 광복 전까지만 해도 아름다운 복발, 앙화, 보륜, 보개, 보주 등의 부재가 완전하게 남아있었다고 한다. 1968년 완전 해체, 복원 시 나온 부장품들은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보관, 전시 중이다.
법인국사탑과 탑비 (보물 제105호, 제106호)
오층석탑 뒤로는 금당 터가 발굴되었으며 중앙에 불대좌로 보이는 흔적이 있다. 그 뒤로 산자락에 연하여 다소 높직한 축대가 쌓인 곳에는 법인국사의 승탑과 탑비가 있다. 법인국사 탄문 스님은 고려 4대 임금 광종(光宗)을 위한 불사에 앞장섰으며 968년에는 왕사(王師), 974년에 국사(國師)가 되었고 975년에 보원사로 돌아와 76세에 입적하였다.
스님이 타계하자 국왕은 ‘법인(法印)’이라 시호를 내리고, ‘보승(寶乘)’이라는 사리탑의 이름을 내렸다. 그러면 승탑은 보승탑(寶乘塔)이라 불러야 맞는데 그냥 법인국사승탑이라 적었다. 승탑은 지대석 위의 기단부 8각 면마다 안상 모양을 파내고 그 안에 다양한 모습의 사자를 한 마리씩 돋을새김으로 새겼다. 중대석 받침돌은 8각이 다소 둥글게 보이는데 구름과 용무늬, 즉 운용문(雲龍紋)을 사실적으로 새겼다. 중대석은 아무 장식 없이 높고 큰 배흘림기둥이며 상대석은 연꽃무늬가 화려하고 그 위로는 난간을 조각하였다. 승탑의 몸돌은 8각의 앞뒷면에는 문비를 새겼고 나머지 6면에는 사천왕상과 알 수 없는 인물상 둘이 새겨져 있는데 설명이 아쉽다. 팔각의 지붕돌은 아깝게도 귀꽃이 많이 깨어진 상태이며 상륜부에는 연꽃을 새긴 복발 위로 보륜이 있다. 왼쪽에 세워진 탑비에는 법인국사(法印國師)가 광종 25년(974)에 국사(國師)가 된 후 이듬해에 입적하였으며, 비는 경종 3년(978)에 세웠다고 하니 비슷한 시기에 승탑도 세운 듯하다. 용 네 마리를 새긴 탑비의 이수 중앙에는 伽倻山 普願寺 故國師 制贈諡 法印三重大師之碑題額(가야산 보원사 고국사 제증시 법인삼중대사지비)라고 제액(題額)이 씌어 있으며 비석에는 모두 4천5백여 글자를 새겼다.
석조(石槽) (보물 제102호)
석조는 절집에서 물을 담아 쓰던 돌그릇으로 통돌을 파내서 만드는데 보원사지 석조는 현존하는 국내 최대 크기로 약 4톤의 물을 담을 수 있다고 한다.
철불(鐵佛)
보원사 절터에서는 지난 1968년에 9.3cm의 자그마한 백제 금동불이 나와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보존하고 있으며 일제강점기 때인 1910년경 이곳에서 출토된 철불 2구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백제의 미소,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국보 제84호)
보원사 폐사지를 둘러보고 용현계곡을 빠져나오다 보면 오른쪽 개울 건너 작은 산 중턱에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국보 마애불이 있다. 1958년 한 나무꾼 제보로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우리나라 마애불 중 최고로 손꼽힌다. 특히 벙글벙글 웃는 모습이 시간대별로 달라지는 햇빛에 따라 변하는 것이 특이하다. 최고의 국보 마애불을 보러 갔다가 폐사지를 둘러보든지, 쓸쓸한 폐사지를 둘러보러 갔다가 나오는 길에 국보 마애불을 만나보든지 아무튼 이 가을철에 가볼만한 답사지이다.
젊은 청년 장수 이성계
이성계의 아버지 자춘은 큰 형이 갑자기 병사(病死)하자 조카 대신 형의 벼슬을 물려받았다. 때마침 반원(反元) 정책을 펼치던 공민왕을 만나 쌍성총관부를 되찾기 위한 전투에 협력하기로 했다. 이를 성사시킴으로써 고려에 큰 공을 세우게 된다.
이때가 1356년(공민왕 5)으로 무려 99년 만에 원나라의 지배하에 있던 쌍성총관부를 되찾은 것이다. 이자춘은 그 공로로 대중대부사복경(大中大夫司僕卿)이 되고 저택을 하사 받아 개경(開京)에 머물렀다. 이후 동북면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로 임명되어 영흥(永興)으로 돌아갔으나 4년 뒤 병사(病死)한다.
이성계는 1335년 함경남도 영흥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자춘이 고려에 협력하여 쌍성총관부를 되찾는 공을 세울 때에 약관 20세의 청년 장수로 함께 참전하였다. 이후 크고 작은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고려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아버지 이자춘의 벼슬을 물려받은 이성계는 동북면 지역의 실세로 자리 잡게 되었으며, 1361년 10월에 독로강 만호 박의가 일으킨 반란을 평정하여 공민왕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해 겨울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온 홍건적의 침략에 공민왕이 개경을 버리고 피난길에 오르게 되자 수하의 사병을 동원, 수도 탈환작전에 참가하여 선두로 입성하는 개가를 올리게 된다.
또한 쌍성총관부를 빼앗긴 원나라에서 여진족 나하추에게 수만의 군사를 주어 이를 되찾게 하였는다. 이들과 맞선 고려군이 패배하자 조정에서는 이성계를 동북면병마사로 임명하여 대적케 하였다. 이성계는 나하추 주력부대를 격멸, 격퇴시킴으로써 저물어가는 고려국의 새로운 별로 떠오르게 된다.
이후 30여 년 넘게 전쟁터를 누비며 승승장구하는 불패의 명장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1364년 반원 정책을 밀어붙이며 기황후의 오빠 기철 등 부원(附元) 세력을 제거한 공민왕을 폐위시키고 덕흥군을 새 왕으로 임명하면서 군사를 동원하여 쳐들어온 원나라 군사들을 최영 장군과 합동으로 물리친 이성계를 이제 고려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된다.
고려말 당시 경상도, 전라도 등 남쪽으로는 왜구가 공공연히 침략하여 분탕질을 치고 있었다. 북으로는 여진족들이 심심찮게 건너와 노략질을 일삼았다. 이성계는 남으로 달려가 왜구를 물리치고 북으로 올라가 여진을 격퇴하는 등 눈부신 활약을 보인다.
특히 1380년 5월에 침략한 왜구들은 500척이 넘는 대선단으로 쳐들어왔으니 결코 도적떼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진포(鎭浦:지금의 군산) 부근에 배를 묶어놓고 상륙한 왜구들은 근처의 전라, 충청은 물론 멀리 경상도 내륙까지 약탈, 방화, 살육을 일삼았다. 정부에서는 진압군을 내려보내니 이때 최무선의 화약과 화통을 이용하여 적의 배를 모두 불살라 버렸다.
배를 잃은 왜구는 내륙으로 이동하면서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조정에서 보낸 진압군과 크고 작은 전투를 벌였다. 9월에 이르러 남원 운봉과 인월 지역에 주둔하면서 곧 북상하겠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었다. 이때 이들을 격파한 것이 이성계이다. 이키섬 출신 소년장수 아지발도(阿只拔都)를 포함한 왜구들은 전멸하다시피 하였으니 이 전투를 황산(荒山) 대첩이라 부른다. 이 황산대첩을 기념하여 1577년(선조 10)에 황산대첩비를 운봉에 세웠으나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이후 파편만 남은 것을 1977년에 복원하였다.
일제는 강점기간 중 조선 팔도에 세워진 일본 관련 승전비나 석물들, 예를 들면 이순신 장군 관련 비석과 김시민 장군 관련 비석 등을 비밀리에 파괴하는 등 역사를 숨기려는 짓을 서슴지 않았다. 이곳 황산대첩비 파괴도 그 일환으로 저질러진 만행이다.
이렇게 고려말 크게 이름을 떨친 청년장수 이성계는 나하추를 물리친 1362년에는 동북면 병마사가 되었다가 밀직부사에 제수되었다. 1382년에는 동북면도지휘사, 1384년에는 동북면 도원수문화찬성사가 되었다. 1388년에는 문하시중의 바로 아래인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까지 오르게 되며 마침내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역성혁명을 이루게 된다.
‘덕을 베풀고 의로써 행했다’ 하여 이성계가 목조(穆祖)로 추존한 4대조 이안사(李安社). 이안사는 전주에서 삼척으로 옮기면서 부모의 묘도 이장해 모셨다. 부친 양무장군의 묘가 준경묘(濬慶墓), 모친의 묘가 영경묘(永慶墓)이다. 이곳은 5대손 안에 군왕이 나온다는 왕조 창건 전설이 시작된 곳이다. 한 도승이 개토제(開土祭)때 소 백(百牛)마리를 잡아 올리라고 일러준 것으나 흰소(白牛)로 대신해 천년 사직이 반으로 줄어 오백년이 됐다거나, 준경묘 사방 다섯 봉우리의 수명이 각각 1백 년이라 도합 조선왕조 수명이 오백년이 되었다는 말이 전해온다. 어렵사리 전주에서 삼척으로 옮겨갔지만 악연의 뿌리는 모질고 질겼다. 전주에서 충돌했던 산성별감이 강원도 안렴사로 부임해 온다하여 짐을 꾸려 더 북쪽으로 올라갔다. 그곳은 동북면의 원산(元山) 북쪽 덕원(德源)으로 1236년(고려 고종 23))의 일이다. 몽고군의 침략이 수차례 이어지던 때로 고려는 목조대왕을 의주병마사(宜州兵馬使)로 삼아서 원나라가 점령하고 있는 쌍성(雙城: 永興 · 和州) 바로 남쪽인 고원(高原)을 지키게 하였다. 그 당시 함경도는 원나라의 속령이었다. 원나라가 이안사에게 여러 차례 항복을 요구하니 세(勢) 부족의 현실을 감안하여 수하의 족벌을 거느리고 항복하였다. 이후 경흥(慶興) 바로 아래 원나라 점령하의 여진(女眞) 땅인 오동(斡東)까지 북상하여 구역 내 수천호(首千戶)를 다스리는 원나라 관직 다루카치(達魯花赤)를 겸하게 된다. 이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는 1274년(고려 원종 15) 3월 10일에 별세하였다. 경흥(慶興) 남쪽에 장사 지냈다가 그 후 1410년(태종 10) 경인년에 함흥 서북쪽으로 이장했다. 이른바 덕릉(德陵)이다.
목조대왕 이안사의 후계는 4남 행리(行里)로 원나라 조정으로부터 천호(千戶) 벼슬을 이어받았다.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에 함께 나아갔다가 충렬왕을 만났을 때 선친 때의 이주가 배반이 아니라 위험을 벗어나기 위함이었음을 아뢰고 의심을 벗었다고 한다. 이후 원나라의 이민족 배척과 여진족의 적대행위가 계속되는바 그들의 영향력을 벗어나기 위하여 오동(斡東)에서 덕원(德源)으로 돌아와 쌍성 지역을 계속 관할하고 지내다 승하했다. 태조 이성계은 익왕(翼王)이라 칭했고 태종 때에 익조(翼祖)로 추존하니 능은 지릉(智陵)이다. 부인 정숙왕후 최 씨의 능은 숙릉(淑陵)으로 남편과 떨어져 모셨다. 최 씨의 상여가 출발하여 지릉으로 향하는 도중에 한 고개에 이르자 상여가 갑자기 저절로 부서져 더 갈 수가 없어 근처에 장례를 모신 탓이라고 한다. 아쉽게도 지릉과 숙릉의 사진이나 자료가 없다. 익조 이행리의 후계 역시 4남 춘(春)으로 부친의 벼슬을 이어받았다. 관할지역에 대농장을 유지하며 풍부한 재력으로 사병 2천 명을 관리할 수 있었다. 개경으로 올라가 충숙왕으로부터 하사품도 받아오는 등 왕실과의 관계도 유지하며 지내다가 돌아가니 각각 의릉(義陵)과 순릉(純陵)에 모셨다.
이렇게 고조부 이안사로부터 증조부 이행리를 거쳐 조부 이춘까지 벼슬을 세습하며 영흥, 함흥지역에 자리를 잡았다. 조부 이춘의 후계는 장자 자흥에게 이어졌으나 두 달만에 되돌아 갔다. 그 아들 교주(咬住)는 나이가 어려 계모의 흉계를 물리치고 이성계의 아버지 자춘(子春)이 임시로 이어받았다. 조카 교주가 성장함에 따라 관직을 돌려주려 했으나 받지 않았다. 고려 공민왕 때로 반원(反元) 정책에 따라 원나라가 차지하고 있던 쌍성총관부를 되찾기로 했다. 공민왕과 이자춘이 협약해 1356년, 99년 만에 옛 땅을 회복했다. 큰 공을 세운 이자춘은 대중대부(大中大夫) 사복경(司僕卿) 벼슬을 하사 받는 등 고려국 중앙에 등장했다. 개경으로 올라온 이자춘은 아들 이성계와 함께 크고 작은 전투에 참여했다. 승승장구함과 아울러 벼슬이 높아지게 되는데 천호(千戶) 관직에서 만호(萬戶) 관직으로 높아져 함경도로 떠난 그해 승하하여 함흥에 장사 지내니 환조대왕의 정릉(定陵)이다.
이렇게 이성계의 4대 선조 왕릉은 모두 북한의 함경남도 를 모셔져 있다. 2기는 쌍릉으로 함께, 2기는 각각 모시다 보니 여섯 지역에 나뉘어져 있는데 현재 어떤 상태인지는 알 수 없다. 세계유산에도 포함되지 않은 채 말이다. 남북관계가 좋아지면 답사꾼들이 찾아가볼 날을 기대해본다.
하늘과 구름, 강물과 바람소리, 햇살, 새들의 합주, 강변 단애, 그리고 숲 사이 오솔길. 있을 게 다 있다. 언제나 거기에 있어온, 본래 그러한 채로 있는, 자연스러운 자연의 저 완전한 충만. 그래서 아름답고, 그렇기에 신성하고, 그럴 수밖에 없도록 진실하다. 사람 안엔 결핍된 수려한 맑음과 밝음으로, 그지없이 온전한 자연다운 푸른 아우라를 뿜으며 순수의 향연을 펼친다.
모두가 청량산의 식솔들이다. 저만치서 우뚝한 청량산의 모성을 젖줄 삼아 태어나거나 성장한 낙동강과 야산들과 나무들이 오케스트라처럼 어우러져 풍경의 절창을 빚어낸다. 청량산이라 하면 생각나지 않는가? 청량산인(淸凉山人)이란 호를 쓰며 줄곧 청량산을 사랑한 사람, 도학(道學)의 부흥을 평생사업으로 삼으며 수많은 저작을 쏟아냈던 공부벌레, 천 원짜리 지폐의 인물 도안에 불려나온 영감님. 바로 퇴계 이황(1501∼1570)이시다.
이 숲길에 ‘퇴계 오솔길’이라는 이름이 붙은 건 퇴계가 거닐었던 길이어서다. 퇴계의 시구(詩句)에서 따 지은 ‘예던길’, 혹은 ‘녀던길’이라는 이름으로도 부른다. 청량산 자락에서 모태를 박차고 나온 퇴계는 평생 청량산을 애지중지했다. 끝내는 청량산 자락에 묻혔다. 그는 소싯적부터 청량산에 들어가 공부를 했다. 기력이 쇠한 노년에도 느릿느릿 산언저리를 산책하기를 좋아했다. 그러하니 지금 내가 걸어가는 이 숲길에 퇴계의 숨결이 감돌 수밖에. 퇴계가 내딛었던 발길에 내 발자국이 포개지고 있을 테니 홍복(洪福)이다.
퇴계 오솔길은 퇴계 종택에서부터 청량산으로 이어지는 길 50여 리 구간에 걸쳐 있다. 도산면 가송리 농암종택 일대의 강변 오솔길이 단연 백미다. 농암 이현보(1467~1555)는 34세 연하의 퇴계와 격의 없는 교유를 했다지. 서로의 거처를 방문해 즉흥시를 주고받고 술잔을 주고받았다. 덧없는 세사와 뜻 깊은 자연을 교감했다. 이 연상연하 커플의 교제는 문사들답게 낭만적이었다. 실천적 도학자들답게 준절했으며, 산천 애호가들답게 관조적이었다.
숲길에 강물소리 들이친다. 맑고 세차고 기찬 물줄기와 고요하게 좌정한 나무들의 숲길이 동행을 하니 절경이다. 숲에서 강으로, 강에서 숲으로 불어제치는 바람의 거친 애무에 산천이 부르르 통째 몸을 떤다.
가을 들꽃들로 오솔길이 밝다. 핀 꽃술이 바람에 너울거리는 억새, 청초해서 애틋한 쑥부쟁이, 살랑살랑 몸 흔들어 향을 뿜는 산국(山菊). 저 멀리 도시는 소음과 매연의 저주에 붙들려 있지만 이 숲길엔 가을꽃 향 그윽하니 이방(異邦)이다. 숲길 어간의 쉴 만한 자리에 이르자 물가에 도드라진 너럭바위가 보인다. 퇴계가 그 이름을 지었다는 경암(景巖)이다. 자연을 통한 격물치지(格物致知)와 궁구(窮究)를 일삼았던 퇴계는 이 바윗덩어리를 보고 버릇대로 시 한 수를 지었다. 천년을 변함없이 흐르는 물과 부평초처럼 덧없는 인간사를 빗댄 시를.
길을 돌아 나와 고산정(孤山亭)에 닿자 다시 시야에 가득 차오르는 찬연한 풍광! 가슴이 두근거린다. 강물과 단애(斷崖)와 산이 합작한 풍경의 드라마를 속수무책으로 멍하니 바라만 볼 뿐이다. 아, 이 견디기 어려운 난해한 세상 속에도 개결한 세상이 있었구나! 풍경의 매혹에 고단한 인생을, 별 볼 일 없는 삶의 남루를 돌아보게 된다.
고산정은 퇴계의 제자 금난수(1530~1604)가 세운 정자다. 퇴계는 자주 고산정을 찾아 노닐었다. 주변 일대의 가경을 한눈에 쓸어 담을 수 있는 이 누각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시를 두레박으로 길어 올렸을 퇴계의 심취한 모습이 환(幻)처럼 정자에 아롱진다. 이곳에서 수많은 시편을 썼다 하니 말이다.
나는 퇴계를 뵌 적이 없고, 고인(古人) 역시 나를 알 바가 없다. 그러나 유려한 숲을 서성이며 종일 퇴계를 만난 것만 같다. 퇴계를 생각하면 왜 심장이 뛰나. 그는 자신의 기질이 산야(山野)와 닮았다 했다. 독일의 거장 괴테가 울고 갈 만한 학문의 숲을 쌓았다. 그러고서도 겸양으로 일관했다. ‘학문의 길은 구할수록 멀었다’고 토로하지 않았던가. 퇴계의 풍모는 임종 때 더욱 빛을 발했다. 국장(國葬), 그런 거 부질없다. 비석도 세우지 마라! 그는 그리 당부했다. 이승을 떠나는, 이토록 가뿐한 행보를 본 적이 있는가?
탐방 Tip
농암종택 주차장에 주차하고 농암종택, 경암, 학소대, 고산정을 답사한다. 평평한 강변 숲길이 걷기에 좋다. 등산으로 벽력암까지 오르면 강물 굽이치는 통쾌한 산경(山景)이 저 아래에 전개된다. 퇴계 오솔길 인근엔 도산서원, 퇴계종택, 퇴계묘소가 있다.
몇 년 전, 박물관 소속 전통문화지도사로 답사를 자주다녔다. 답사나 여행을 할 때 꼭 필요한 것이 있다면 지도와 안내서 등이다. 지금 나도 손쉽게 얻을 수 있고 편리하게 이용하는 우리나라 지도는 지리학자이면서 실학자인 고산자 김정호(1804-1866)의 덕택으로 이다. 그는 이 일을 위해 귀중한 단 하나의 목숨까지 바친 인물이며, 너무나 훌륭한 분이며 우리가 본받을만한 인물이다. 마침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조선 지도예찬’ 전시와 관련한 ‘조선지도 500년, 공간 시간 인간의 위대한 기록’을 주제로 강좌가 열렸다. 강좌를 통해 김정호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지도와 지리지에 깊은 뜻을 두고 여러 방법의 장단점들을 파악했다. 18세기 비약적으로 발전한 조선 지도학에 김정호의 역학이 크게 작용했다. 약 30년 동안 어려움을 홀로 극복하면서 정밀한 지도를 만들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다. 전국지도인 청구도(2첩)를 순조 말년이던 1834년에 제작했고, 김정호가 손수 그려 판에 새긴 대동여지도(2첩)는 1861년에 간행했다. 이것을 흥선 대원군에게 바치자 그 지도의 정밀함에 놀라 대신들은 나라 기밀 누설죄로 그 판목을 불태우고 투옥까지 하여 옥사시켰다는 설도 있다.
박물관 전시와 강좌를 직접 보고 들으면서 그의 학문 세계를 실제로 새롭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단 하나뿐인 목숨을 바친 열정과 의지는 대단하고 숭고했다.
우리나라의 열세 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산사 일곱 번째는 해남 대흥사로 ‘한국의 산사 7곳’을 마무리하는 순서이다.
대흥사는 백제시대에 창건된 유서 깊은 도량으로 옛날에는 두륜산을 대둔산(大芚山), 혹은 한듬산 등으로 불렀기 때문에 대둔사 또는 한듬절이라고도 했다. 근대에 대흥사로 명칭을 바꾸었다. 대흥사 창건은 426년에 정관존자, 혹은 514년에 아도화상, 혹은 신라 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세 가지 설이 있다.
일찍이 서산대사가 “전쟁을 비롯한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三災不入之處)으로 만년 동안 훼손되지 않는 땅(萬年不毁之地)”이라 하여 묘향산 보현사에서 입적하면서도 그의 의발(衣鉢)을 이곳에 보관한 도량이다.
이후 대흥사는 한국불교의 종통이 이어지는 곳(宗統所歸之處)으로 한국불교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게 되면서 풍담(風潭) 스님으로부터 초의(草衣) 스님에 이르기까지 열세 분의 대종사(大宗師)와 만화(萬化) 스님으로부터 범해(梵海) 스님에 이르기까지 열세 분의 대강사(大講師)가 이곳에서 배출되었다.
열세 대종사 가운데 한 분, 초의 선사로 인해 대흥사는 우리나라 차(茶) 문화의 성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서산대사가 모셔짐과 더불어 ‘호국과 차(茶)의 성지’로 불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이자 대흥사 도량 전체가 사적 제508호, 명승 제66호로 지정된 명찰(名刹)이다.
넓은 산간 분지에 위치한 대흥사는 크게 남원과 북원 그리고 별원의 3구역으로 나뉘다. 북원에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명부전, 응진전, 산신각, 침계루, 백설당 등이 위치하고, 남원에는 천불전을 비롯해 용화당, 봉향각, 가허루 등이 있으며, 남원 뒤쪽으로 조금 떨어진 별원에는 서산대사의 사당인 표충사와 대광명전, 성보박물관 등이 있다.
대흥사는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국보 제308호)을 포함하여 탑산사 동종(보물 제88호), 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 제301호), 응진전 삼층석탑(보물 제320호), 서산대사 부도(보물 제1347호), 서산대사 유물(보물 제1357호), 천불전(보물 제1807호) 등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두륜산(頭輪山) 대흥사(大興寺)
나름대로 구획정리를 잘한 것으로 보이는 사하촌 식당가를 지나면 대흥사가 자랑하는 십리 숲길, 또는 아홉 번 굽었다 하여 구림구곡(九林九曲)이라 부르는 멋진 숲길을 지난다. 걷거나 차를 타고 갈 수 있는 길인데, 시간이 되면 걸어 들어가기를 권한다.
대찰(大刹)의 면모를 갖추려는지 숲길의 초입에는 거대한 산문(山門)이 세워져 있고 절 입구에는 통상의 일주문이 서 있는데 사명(寺名)의 변화를 보여주듯 산문에는 두륜산(頭輪山) 대둔사(大芚寺)라고 씌어있고, 일주문에는 두륜산(頭輪山) 대흥사(大興寺) 현판이 걸려있다.
또한 일주문의 뒷면에는 ‘선림교해만화도량(禪林敎海滿華道場)’ 즉, 선과 교가 활짝 꽃을 피운 도량이라는 의미의 커다란 현판을 달았는데, 선(禪)과 교(敎)의 종원(宗院)으로 동국(東國) 최고의 선원이라는 자부심을 나타내고 있다.
이어 나무로 만든 사찰 정승과 최근 새롭게 깎아 세운 돌 정승이 나란히 서있는 가운데, 13명의 대강사(大講師)를 배출한 자부심이 있는 도량(道場)이라는 석주(石柱)를 지나면 수 십 기의 승탑과 탑비가 보인다. 사명대사와 초의선사 등의 승탑이 모여 있어 발길을 멈추게 된다.
일주문을 지나 승탑들을 둘러본 후 두륜산(頭輪山) 대흥사(大興寺) 현판이 달린 해탈문(解脫門)을 들어서면 비로소 경내로 진입한 것이다. 해탈문에는 좌우로 사자를 탄 문수동자와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이 모셔져 있다.
대흥사 뒷산이 누워계신 와불(臥佛), 청정법신 비로자나 부처님 모습이라는 설명과 함께 정면의 건물군이 남원, 왼쪽 개울 건너가 북원이며, 오른쪽으로 더 올라가면 표충사 등 별원 지역이다.
우선 대웅보전을 보기 위하여 왼쪽 북원으로 향한다. 작은 개울을 건너야 하는데 홍교 다리 심진교를 건너 침계루로 들어서면 일직선상에 대웅보전이 마주한다. 좌측으로는 대향각, 우측은 백설당이 가운데 중정(中庭)을 중심으로 ‘ㅁ’ 자형으로 모여 있다.
대웅보전의 정면 계단 소맷돌에는 구한말 일본 석공이 조각했다는 사자머리 한 쌍이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 축대 위 고정 쇠고리를 물고 있는 용두(龍頭)가 눈길을 끈다. 또한 대웅보전의 오른쪽 응진전 옆 보물 제320호 삼층석탑은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가져온 진신사리를 모신 탑이라고 한다.
남원 구역은 천불전을 중심으로 용화당, 봉향각 등이 돌담으로 둘러져 있다. 그 입구는 5칸 건물 가허루(駕虛褸)의 중앙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정면에 천불전(보물 제1807호)이 있고 좌우로 용화당과 봉향각 등이 가운데 중정(中庭)을 중심으로 역시 ‘ㅁ’ 자형으로 모여 있다.
가허루(駕虛褸) 현판 글씨는 비운의 명필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1770~1845)이 썼는데 유배길에 오른 추사 김정희를 모셔 자신의 글씨를 내보이자 ‘시골에서 밥은 먹고 살겠다’는 말로 비꼬았다고 한다. 제주도 유배에서 서예에 새로운 눈을 뜬 추사가 나중에 창암을 찾아 사과하려 했으나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원교 이광사나 창암 이삼만의 글씨를 한껏 푸대접했던 추사는 제주도에서 돌아와 자신의 무례함을 깨닫고 원교가 쓴 대웅보전 현판은 다시 달도록 하였으며, 창암은 이미 죽고 없자 애통함과 송구함으로 창암의 묘비문을 손수 써주었다고 한다.
남원의 중심건물 천불전(千佛殿)에는 석가모니불과 문수, 보현 보살상과 함께 옥석(玉石)으로 만든 천불을 모셨다. 1813년(순조 13년)에 완호 윤우 선사(玩湖尹佑禪師)가 천불전을 중건하고, 화순 쌍봉사 화승(畵僧) 풍계 대사(楓溪大師)의 총지휘 하에 경주 불석산에서 나오는 옥(玉)으로 10명의 대흥사 스님들이 직접 6년에 걸쳐 정성스럽게 완성하였다.
각기 다른 형태로 조각한 천불은 두 척의 배에 실려 경주를 떠났는데 그중 한 척의 배가 풍랑에 표류하다가 일본까지 흘러갔다. 기쁜 마음에 일본인들이 불상을 봉안하려 하자 현감의 꿈에 현몽하여 대흥사로 가던 길이라고 알려주어 다시 돌려보냈다는데, 그렇게 일본에 갔던 불상들 밑면에는 ‘日’자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남원의 오른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성보박물관을 지나 초의선사 동상이 있고 그 위로 표충사가 있다. 이곳은 서산대사와 사명당 유정, 뇌묵당 처영 스님의 화상을 봉안한 유교 형식의 사당으로 절집에서는 흔하지 않은 일이다.
유물전시관에는 서산대사의 가사와 발우, 친필 선시, 신발, 선조가 내린 교지 등 유물과 정조가 내린 금 병풍 등이 보관되어 있다. 초의선사 동상 옆에는 장군 샘이라 부르는 샘이 있고 호국문을 지나 내삼문 격인 예제문(禮齊門)을 들어서면 표충사와 비각이 있다.
표충사 오른쪽으로는 표충비각이, 왼쪽으로는 조사당이 있는데, 유가(儒家) 형식의 사당을 꾸며 매년 서산대사의 가르침을 받드는 제례와 추모행사를 거행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설명을 접하고 나니 대흥사를 호국의 성지라고 하는 까닭이 이해되었다.
별원 지역의 표충사를 보고 나서 내친김에 발걸음을 계속 위로 향하니 호젓하게 절에서 멀어지면서 대광명전 지역이 나왔다. 동국선원이 있어 지금은 선원(禪院)으로 쓰고 있는데,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는 곳이다.
부득이 추사의 친필이 있다는 동국선원을 지나쳐 산으로 오른다. 험한 산길을 40분 넘게 숨이 턱에 닿도록 오르니 북미륵암이다. 북암이라고도 부르는 이곳의 창건에 관한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1754년에 중수했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북미륵암에는 국보 제308호 마애여래좌상을 모신 용화전(龍華殿)과 보물 제301호 삼층석탑이 있고 맞은편에는 지방문화재 삼층석탑(전남 문화재자료 제245호)이 하나 더 있다. 힘들게 올라가 볼 만한 곳이다.
열성 답사꾼이거나 불심이 깊은 신도가 아니면 찾기 힘든 북미륵암에 올라 국보 마애불상을 친견하고 나니 대흥사가 과연 명불허전임을 알겠다. 그 옛날 이토록 힘든 곳에 불상을 새긴 것은 과연 누구의 손길이며, 부처의 가피로 무엇을 이루고자 열망하였을까.
산사 일곱 곳 답사를 마치며
111년 만의 폭염이었다는 금년 여름 8월 한 달 동안 열세 번째 세계유산에 등재된 일곱 곳 산사에 대한 연속 답사를 모두 마쳤다. 마곡사를 시작으로 법주사, 봉정사, 선암사, 부석사, 통도사에 이어 대흥사까지 돌아보고 나니 성취감과 함께 뿌듯한 자부심이 가득하다.
다시 한 번 열세 번째 세계유산 등재를 축하하며, 이제 우리의 보물이 아닌 세계의 보물, 세계인의 문화유산이 되었으니, 답사를 마친 후 느낀 소감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세계유산 등재를 자축하거나 자화자찬에 열중할 게 아니라 세계에 내놓아 부끄럽거나 부족한 건 없는지부터 살펴볼 일이다. 필요하다면 문화재청과 소속 지방자치단체, 유관 시민사회단체, 그리고 해당 사찰 관계자들이나 조계종과 태고종 실무자가 연합하여 시정, 보완해주기 바란다.
먼저 일곱 곳 산사를 돌아보니 충실하게 준비한 소개자료, 즉 브로슈어(brochure)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나마 통도사가 영어, 일어, 중국어 등 주요 외국어를 포함해 잘 준비하였으며 법주사 정도가 인쇄물 형태로 건네주었다. 선암사는 자체 제작한 듯 성의껏 자료를 준비하였으나 다소 미흡했고, 사찰을 소개하는 안내 자료 한 장 없는 곳이 많았다.
또한 일곱 곳 사찰 입장료도 최소 1200원부터 최대 4000원까지 몇 배의 차이가 났다. 여전히 카드결재는 안 되고 현금만 가능하다는 곳도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 사찰 매표소 직원들이 절집과는 무관한 듯 세련되지 못하거나 불친절한 것이 거슬렸다.
이뿐만 아니라 대부분이 촬영 금지가 지나치다. 예불이 진행 중이거나 행사 등에 방해가 되면 안 되겠지만 이유 막론하고 촬영을 하지 말라는 것은 세계유산에 등재하고, 세계에 알린다는 취지에 맞지 않는 일이다. 오히려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안내해주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또한 안내와 설명에 필요한 인원, 표지판 등이 많이 부족하다. 세계유산이 된 이상 외국어 능력도 구비한 안내요원이 상주해며, 적재적소에 다양한 언어로 설명을 비치하여 방문객의 이해를 도와야 할 것이다.
그밖에 화장실과 세면장, 음료수 급수대, 휴게시설 등을 수준 높게 구비하길 바란다. 과거에 비해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부족한 게 현실이다. 비록 종교시설이고 보호해야 할 문화재도 많지만 방문객을 배려하는 마음도 넓어지기를 기대한다.
우리나라의 열세 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산사 7곳’ 다섯 번째는 영주 부석사이다.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건물 중 하나이며 배흘림기둥으로 유명한 무량수전이 있는 천년고찰 부석사는 당나라 종남산 화엄사에서 지엄에게 불도를 닦던 의상이 670년에 당나라의 침공 소식을 전하고 돌아와, 5년 동안 양양 낙산사를 비롯하여 전국을 다니다가 마침내 수도처로 자리 잡아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창건하였다.
당시에는 현재의 규모는 아니었으며 초가나 토굴을 짓고 화엄세계의 심오한 뜻을 닦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의상의 제자 신림 이후 국가지원 등으로 크게 중흥하여 대사찰의 건립이 이루어졌는데, 부석사에서는 신라 왕을 그려 벽화로 걸어놓고 있을 정도였다. 후삼국 시기에 궁예가 이곳에 이르러 칼을 뽑아 내리쳤는데 그 흔적이 고려 때까지 남아 있었다고 한다.
부석사 무량수전 우측에 위치한 선묘각은 용으로 변하여 의상대사를 도왔던 선묘 낭자의 초상을 봉안한 건물이다. 창건설화를 계승한 융합적 신앙을 보여주는데, 설화의 주인공을 모신 전각을 유지하며 받드는 모습이 익숙하지는 않다.
부석사는 석등(국보 제17호), 무량수전(국보 제18호), 조사당(국보 제19호), 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45호), 조사당벽화(국보 제46호) 등 5점의 국보와 보물 6점을 갖춘 유서 깊은 절집이며, 아미타신앙의 성지이다.
태백산(太白山) 부석사(浮石寺)
부석사 일주문에는 태백산(太白山) 부석사(浮石寺) 현판이 걸려있으며 범종루에는 봉황산(鳳凰山) 부석사(浮石寺) 현판이 걸려 있다. 또한 절 입구에는 소백산과 태백산 설명이 장황하게 쓰여 있다. 결론은 태백산 지역의 마지막 부분이 소백산 지역에 편입되어 있으나 착오 없기 바란다는 말이니, 부석사가 소백산 국립공원이 아닌 태백산 국립공원 지역이라는 것이다.
즉, 부석사는 태백산 국립공원과 소백산 국립공원 사이에 있고 거리상으로는 소백산이 더 가깝지만 지형상 부석사가 자리한 봉황산은 그 뒤편 선달산으로 이어지면서 태백산 줄기에 속한다. 그래서 (소백산이 아니라) 태백산 부석사라는 것이다.
일주문 안쪽에 당간지주가 서 있는 것이 의아하다. 1980년 전후 사천왕문과 일주문을 새로 세웠으며 그전까지는 지금의 사천왕문 자리가 일주문이었다는 설이 있는데, 그래야 일주문 밖에 당간지주를 세우는 논리에 맞는다. 아마 사찰의 영역을 키우고 싶었나 보다.
매표소부터 일주문, 당간지주, 천왕문까지 험난하지는 않지만 꾸준히 이어지는 오르막 지형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천왕문부터 범종루, 안양루를 지나 무량수전까지는 3개의 큰 석축을 올라야 하며, 이 석축들은 다시 작은 경계로 나누어져 불교의 구품만다라를 상징한다고 한다.
즉, 구품만다라의 맨 위에는 극락을 상징하는 안양루와 극락을 주재하는 아마타부처님을 모신 무량수전이 위치한 매우 이상적인 구조라는 것이다. 게다가 그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나 되새겼다는 최순우 선생의 답사기는 지금도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명구(名句)가 되었다.
천왕문을 들어서서 범종루를 오르기 전 잠시 평탄해지는 지형의 왼쪽에는 종무소가 위치하고 있다. 앞마당에는 삼층석탑 2기가 나란히 서 있는데 이 석탑들은 원래 이곳이 아니라 인근 옛 절터에서 옮겨왔다는 이건비(移建碑)와 함께 세워져 있다.
삼층석탑 위로는 날아갈 듯 솟아있는 2층 건물 범종각이 보이는데 정면에 마주 보이는 면이 건물의 측면으로 팔작지붕의 합각이 방문객을 향해 날개처럼 펼쳐져 있다. 1층은 누하진입으로 계단을 통해 올라서는 구조이며 2층 누각에는 법고와 목어, 운판이 있다.
범종각은 1층으로 누하진입하여 2층 누마루 중앙 아래로 계단을 올라가게 된다. 그 정면으로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지는 장면은 부석사의 하이라이트 안양루와 무량수전으로 안양루(安養樓)의 안양(安養)은 극락을 의미한다. 구품만다라를 올라 극락에 도달하는 마지막 과정을 상징한다.
안양루에 올라서면 국보 제18호 무량수전이며 이곳에는 끝없는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지녔다는 무량수불, 아미타여래를 모셨다. 이 소조 아미타여래좌상은 국보 제45호이며 무량수전 앞마당에 있는 석등이 또한 국보 제17호이다.
부석사가 보유한 국보 5점 중 이곳에만 석 점이 모여 있는데, 무심코 뒤돌아보면 멀리 이어지는 높고 낮은 산자락들이 이어지는 풍광의 멋스러움에 대한 감탄과 함께 무량수전 어느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바라보았는지 사뭇 궁금해진다.
무량수전 앞마당에는 석등 하나 있을 뿐, 별다른 치장이나 장엄을 위한 설치물 하나 없다. 그러나 석등은 높이가 3m쯤 되어 마주 서도 우러러 보아야 하며 석등 앞 배례석과 함께 말없이 무겁게 다가오니 과연 국보급 석등답다.
1919년 일제강점기 때 무량수전을 해체, 수리하였는데 이때 무량수전에서 석등까지 땅 밑으로 석룡(石龍)이 묻혀 있었으며 허리가 잘렸다고 한다. 그때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선묘 낭자의 전설이 기억나 사뭇 아쉽기만 하다.
안양루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엎드려 모여 있는 경내 여러 건물의 지붕과 멀리 펼쳐진 소백의 연봉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스라이 보이는 소백산맥의 산과 들이 마치 정원이라도 되듯 눈앞으로 다가온다. 뛰어난 경관이지만 지금은 안양루 2층에 올라갈 수 없어 아쉽다.
안양루와 마주 보는 무량수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중 하나로 손꼽히는 국보 건물이다. 비록 봉정사 극락전에 최고의 자리를 내주었지만 어차피 건물의 중수 기록이 앞선다는 것일 뿐 창건 일자가 밝혀진 것은 아니기에 무량수전의 비중이 덜하다고 할 수는 없다.
무량수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주심포 형식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강릉의 객사문 다음으로 심한 배흘림기둥을 갖추었으며 평면의 안허리곡(曲), 기둥의 안쏠림과 귀솟음 등을 적용한 뛰어난 건축물로 고대 불전 형식 연구에 기준이 되는 중요한 건물이다.
무량수전 정면 중앙 칸에 걸린 편액은 고려 공민왕의 글씨로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안동으로 몽진 왔다가 부석사에 들렀을 때 썼다고 한다.
무량수전에는 고려시대에 조성한 소조여래좌상(국보 제45호)을 모셨는데 협시보살 없이 독존으로 동향(東向)하도록 앉힌 점이 특이하며 이는 아미타불이 서방 극락세계의 주인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불상은 우리나라에서 소조불상 중 가장 크고 오래된 작품이며 손 모양(수인)은 석가모니불이 취하는 항마촉지인으로 아미타불이 맞나 의심이 들지만 원융 국사 탑비 비문에 아미타불을 만들어 모셨다는 기록 등으로 보아 조선시대에 불상을 수리하면서 그리 된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절집을 답사하노라면 ‘실내 촬영금지’에 난감할 때가 많은데 부석사 무량수전은 특히 더 심한 편이다. 심지어 촬영금지 글씨가 안 보이냐고 힐난하거나 감히 부처님을 사진 찍을 수 있냐고 하니, 불상과 부처를 구분하지 못하고 문화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듯싶어 답답했다.
아무튼 무량수전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오니 동편 언덕 위에 삼층석탑이 하나 보인다. 금당 앞에 석탑은 당연한데 이 탑은 동쪽에 세워져 있다. 아마도 아마타불이 서편에 앉아 동쪽을 바라보니 그 정면에 탑을 세운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제 다 보았나 하는데 석등 위로 산길이 이어진다. 갑자기 속세를 벗어난 듯 이어지는 오솔길을 따라 가보니 조사당(祖師堂)이 나타난다. 조사(祖師)는 불교의 한 종(宗)이나 파(派)를 세워서 그 종지(宗旨)를 열어 개창한 승려에게 붙여지는 칭호로 의상대사를 기리는 전각이다.
신라 교종 화엄종 본찰에서 선종의 구산선문이 개창조를 섬기듯 하는 것이 조금은 낯설어 보이지만 의상 직후에는 없었으나 선종이 유행하면서 화엄종도 이를 따라간 것이 아닌가 싶다.
조사당의 왼쪽에는 자인당과 응진전, 단하각 등이 있으며 자인당에 모신 석불 3기 중 좌우 비로자나불은 보물 제220호, 가운데 아미타불은 보물 제1636호이다. 1칸짜리 단하각은 지신(地神)을 모시는 전각이라는 말도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여기까지 둘러본 후 올라온 길을 다시 내려오면서 부석사 오른쪽 산길로 접어드니 그 너머에 원융국사비(경북 유형문화재 제127호)가 있었다. 고려 정종 때 왕사, 문종 때 국사가 된 그는 1053년 세수 90세, 법랍 78세로 입적하자 원융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를 세워주었다.
원융국사비를 둘러보고 지장전 앞으로 오니 아까 올라갈 때는 범종각에서 비껴간 각도로 보이던 안양루와 무량수전이 이쪽에서는 정확하게 일치하는 모습이다. ‘아’ 하는 가벼운 감탄으로 바라보는데 문득 안양루 공포와 공포 사이 빈 공간에 앉아계신 부처님이 보인다. 현현불이다.
우리나라의 열세 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산사 7곳’ 네 번째는 순천 선암사이다. 선암사는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조계산 동쪽에 위치하며, 숲으로 둘러싸인 넓은 터에 가람을 배치하였다. 많은 대중이 생활하는 대규모 산사였기 때문에 사방으로 둘러싸인 ‘ㅁ’자 형태인 건물이 많이 건립되었다.
절 서쪽에 신선이 바둑을 두던 평평한 바위가 있어 ‘선암사’라 이름 붙였다는 전설이 있는데, 백제 성왕 5년(527)에 아도화상(阿度和尙)이 현재의 비로암지에 창건하였고 청량산(淸凉山) 해천사(海川寺)라 하였다.
이창주 도선국사는 현 위치로 절을 옮겨 중창하였으며 1철불 2보탑 3승탑을 세웠다. 삼창주 의천 대각국사는 대각암에 주석하면서 선암사를 중창하여 호남의 중심 사찰로 키웠는데 정유재란 때 큰 피해를 당한 이후 여러 차례 중창 복원과 화재 등이 반복되면서 절 이름도 조계산 선암사로 다시 청량산 해천사로 개칭, 복칭을 반복하다가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선암사는 (승려들이 결혼할 수 있는) 태고종의 총본산이며 유일한 태고총림(太古叢林)이다. 총림(叢林)이란 승려들이 참선 수행하는 선원(禪院)과 교육기관인 강원(講院), 계율 전문교육기관인 율원(律院)을 모두 갖춘 사찰을 말하는데 조계종에 5대 총림(조계, 영축, 가야, 덕숭, 고불총림)이 있고, 태고종 유일 태고총림이 있다.
정조 13년(1789), 임금이 후사가 없자 눌암이 원통전에서, 해붕이 대각암에서 100일 기도를 하여 1790년 순조 임금 출생하였으며, 순조는 즉위 후 선암사에 인천대복전(人天大福田) 편액과 은향로, 쌍용문가사, 금병풍, 가마 등을 하사하였다.
선암사 일원은 사적 제07호로 지정되었으며 보유 문화재에 국보는 없으나 보물 제395호 삼층석탑과 400호 승선교 등 14점의 보물 및 다수의 유무형 지방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특히 선암매(천연기념물 제88호)로 부르는 400년 이상 된 우리 토종 고매화(古梅花)가 유명하다.
조계산(曹溪山) 선암사(仙巖寺)
선암사는 순천시 서북쪽 상사호 상류 계곡에 자리 잡고 있는데 조계산의 동쪽이며 반대쪽 조계산 서쪽에는 송광사가 위치하고 있다. 트래킹 코스로 선암사-송광사 구간을 찾는 사람도 많다. 절 아래 식당가를 지나 매표소부터 절집까지 이십 분 남짓 숲길을 걸어 올라간다.
특히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 만나는 승선교(昇仙橋)는 선녀들이 목욕을 하고 하늘로 오른다는 다리인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지개다리로 손꼽힌다. 숙종 24년(1698) 호암 대사가 백일기도에도 관음보살을 뵙지 못하자 벼랑에서 몸을 던졌는데 이때 관음보살이 나타나 받아주시니 감동하여 원통전과 승선교를 세웠다고 한다.
예전에는 승선교를 지나 계곡을 건너야 절에 갈 수 있었는지 모르나 지금은 계곡을 건널 일 없이 절까지 큰길을 따라가므로 무심코 지나칠 수 있다. 승선교를 지나려면 그 아래 작은 무지개다리를 건너갔다가 승선교로 다시 건너와야 한다.
승선교 뒤에 있는 강선루 역시 오른쪽에서 흘러와 큰 개울과 합쳐지는 작은 시냇물 위의 선원교(仙源橋)라는 작은 다리 위에 세워진 2층 누각으로, 예전에는 누각 아래로 다리를 건너다녔겠지만 지금은 그 옆으로 넓은 길이 나 있어 옛 맛을 잃어 아쉽다.
승선교에 못미처 2개의 승탑군(부도전)이 있는데 먼저 만나는 곳이 숲속의 비석거리이고 두 번째가 선암사 동승탑군(東僧塔群)인데 이곳에 눈길을 끄는 탑비가 있어 발길을 멈추게 한다.
19세기 큰 스님으로 추앙을 받던 상월 스님의 탑비는 후학들을 사랑했던 스님을 기려 제자를 가르치던 강원(講院)을 향해 비석을 세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승탑군을 지나 승선교를 건너 강선루 아래로 숲길을 걸어 올라가면 선암사에 도착한다. 방문객을 처음 맞이하는 건 일주문이 아니라 삼인당이라는 멋스러운 원형 연못이다. 대개 절집은 앞마당쯤에 연지(蓮池)를 꾸며놓고 있지만 선암사 삼인당은 조금 다르다.
삼인당 앞에는 전통찻집이 조용히 자리 잡고 있다. 창 넓은 찻집에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듯 전통찻집에 앉아서 삼인당 연못을 바라보는 멋스러움이 나름 괜찮은 곳이다.
선암사 숲길 내내 이어지는 순탄한 오르막 지형은 삼인당 연못을 지나도 계속 이어지는데 아직 일주문은 보이지 않고 한번 휘돌아 꺾어진 길 오른쪽으로는 계곡물이 흐른다. 그 너머에는 차밭이 늘 푸르게 깔려 있으며 왼쪽 높은 언덕 위에는 주목받지 못하는 하마비(下馬碑) 하나가 서 있다.
조금은 급격해지는 오르막 경사로가 한 번 더 굽어지면 비로소 일주문이 나타난다. 몇 개의 계단 위에 화려한 지붕을 이고 선 일주문은 좌우로 담장이 이어진 특이한 형태로 여느 사찰의 일주문과 달리 특정한 영역이나 큰 건물로 들어서는 대문의 느낌이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오르막 계단 위에 범종루가 있고 범종루 아래로 누하진입(樓下進入)을 하면 만세루가 나온다. 만세루는 누하(樓下) 없이 좌우로 돌아 들어가니 바로 대웅전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일주문을 지난 후 천왕문, 금강문, 인왕문 등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선암사의 3무(無)에 기인하는데 조계산의 주봉이 장군봉인지라 불교의 호법신인 사천왕상을 세우지 않았다는 것이며, 두 번째는 대웅전에 부처님을 혼자 모셨으니 좌우 협시불이 없다는 것이다. 대웅전 가운데에 큰스님이 드나드는 전용문을 어간문(御間門)이라고 하여 신도들은 못 드나들게 하는데 선암사에서는 부처님처럼 깨달은 분만 드나든다고 하여 가운데에 사람 출입을 위한 문은 없다는 것이다.
만세루는 원래 강당으로 총림에서 많은 학승에게 강학을 하는 곳이다. 원래 강당은 금당의 뒤쪽에 있어야 하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대웅전 앞에 위치하게 되었다. 예불 시 큰 스님 몇 분만 대웅전에 들어가고 나머지 스님들과 재가불자들은 강당에서 예불에 동참하는 형태로 진행되다가 지금은 모두 대웅전에 들어가서 올린다고 한다.
대웅전 영역은 이렇게 만세루와 대웅전이 마주 보며 가운데 마당에 석탑 2기가 세워져 있고 왼쪽에는 설선당, 오른쪽에는 심검당이 있는 ‘ㅁ’자형 네모꼴 구조이다. 대웅전의 왼쪽에는 음향각이 오른쪽에는 지장전이 있으며 심검당 아래 만세루 옆으로는 범종각이 있다.
범종각에는 종을 치는 나무, 즉 당목(撞木)이 있는데 종을 매다는 용뉴(龍鈕)가 사실은 용의 셋째 아들 포뢰(蒲牢)이다. 이 포뢰는 고래를 무서워하여 당목을 고래 모양으로 만들어서 두드리면 종이 더 크게 운다는 것이고 그래서 선운사의 당목이 고래 모양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답사 결과 고래 모양이라던 선운사 당목은 머리 부분을 잘라낸 모양이어서 충격적이었다. 원래 이런 모양이었는지 아니면 용 이야기를 모르는 채 무심코 잘라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너무 아쉬웠다. 생각 없이 자른 결과가 아니기 바란다.
대웅전 영역 뒤로는 조사전, 불조전, 팔상전이 나란히 있고 그 뒤로 순조 임금 출생을 기도한 원통전이다. 원통전은 주원융통(周圓融通)한 자비를 구한다는 뜻인데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으로 관음전이라고도 한다. 많은 사람이 찾아와 간절한 기도를 올리는 곳이다.
원통전의 뒤쪽은 응진당 영역이며 그 오른쪽은 무우전 영역인데 그 사잇길이 유명한 선암매가 피는 공간이다. 응진당 출입문에는 ‘湖南第一禪院’(호남제일선원) 현판이 달려 있다. 응진당을 중심으로 몇 개의 당우가 있으며 응진당 뒤에는 작은 산신각이 다소 옹색하게 자리 잡고 있다.
선암매 공간을 건너 오른쪽 무우전은 태고종정이 머무는 공간으로 비공개지역이다. 그런데 그 뒤에는 각황전이며 여기에 철불이 모셔져 있어 답사객들은 자꾸만 들여다보고 싶은 것이다.
더 뒤로 나가면 숲속에 숙종 때 세운 중수비(전남 유형문화재 제92호)와 1929년 세운 선암사 사적비가 서 있고 일반인 출입을 금지한 선원 뒤쪽으로 동부도(보물 제1185호)와 북부도(보물 제1184호)가 있다. 답사꾼들에게는 필수 지역이지만 금지구역이라 아쉽다.
또 하나 선암사의 명물은 ‘뒷간’이다. ‘깐뒤’라고 우스개 소리하는 선암사 뒷간은 전라남도 지정 문화재자료 제214호로 영월 보덕사 해우소와 함께 도지정 문화재 화장실로 지정된 곳이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에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정호승
올림픽 폐막식을 앞두고 치러지는 마지막 경기인 마라톤은 ‘올림픽의 꽃’이라고도 불린다. 42.195km를 쉬지 않고 달리고 또 달리다 보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질주도 끝이 난다.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2시간 13분 23초의 기록으로 결승 테이프를 끊은 마라톤 금메달의 주인공, 황영조(黃永祚·49)를 만났다.
가난해서 달려야 했던 소년
42.195km를 2시간 15분 안에 들어와야 한다고 가정하면 이는 100m 달리기를 422번, 그것도 한 번도 쉬지 않고 매번 18초의 기록으로 들어와야 가능한 일이다. 상상만 해도 숨이 차고 정신이 아득해진다. 이런 힘든 종목인 마라톤을 시작하게 된 이유가 궁금했다. 그는 뛰고 싶어서 뛴 게 아니라 뛸 수밖에 없었다고 운을 뗐다.
“돈 없이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운동이 달리기예요. 특별한 장소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그냥 나가서 뛰면 그만이죠. 저에게 마라톤은 가난했던 시절 유일하게 돈을 받으면서 할 수 있었던 운동이었어요.”
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난 그는 학교 월사금도 제때 내지 못할 만큼 어려운 집안에서 자랐다. 준비물을 마련하지 못해 항상 야단을 맞았던 미술시간은 그가 제일 싫어하는 과목이었다. 돈이 없어 못 사온 건데 그게 무슨 죄가 된다고 벌을 서야 하는가.
“교통비도 없었기 때문에 제 두 다리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어요. 학교에 가려면 초등학생 땐 왕복 6km를 걸어야 했고, 중학생 땐 어머니가 어렵게 사주신 중고 자전거를 타고 24km를 달려야 했죠. 운동을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 생활 자체가 운동이었던 거죠.”
매일 가파른 언덕과 비탈길을 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체력이 좋아졌고 중학생 때 이를 눈여겨본 운동부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처음 그가 선택한 종목은 육상이 아닌 사이클이었다. 하지만 장비가 워낙 비쌌고 돈이 많이 드는 종목이라 고등학교 진학 후에도 선수생활을 이어나가기엔 무리였다.
“옛날엔 돈 없으면 고등학교도 못 갔어요. 근데 강릉에 위치한 명륜고등학교에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졸업도 시켜줄 테니 육상부에 들어오라고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온 거죠. 돈 안 들이고 졸업하면 효도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바로 종목을 바꿨죠. 처음엔 1500m, 5000m 중장거리 선수로 데뷔했는데 늦은 나이에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선배들을 가볍게 제쳤어요. 제가 뛰고 있는 구간엔 같이 안 있으려고 할 정도로 두려움의 대상이었죠.(웃음)”
1991년 페이스메이커로 출전한 동아마라톤대회에서 3위를 기록했다. 얼떨결에 그의 마라톤 데뷔전이 된 셈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같은 해에 열린 셰필드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마라톤 금메달, 1992년 벳푸-오이타 마라톤대회에선 한국 선수 최초로 마의
2시간 10분 벽을 깨고 한국 신기록을 세웠다. 이 기세를 몰아 1992년엔 바르셀로나올림픽에 최연소 선수로 참가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가 올림픽의 피날레를 장식할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또한 같은 생각이었다. 그는 “금메달은 신이 정해주는 메달”이라고 말한다.
“스포츠는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하잖아요. 마라톤도 아무리 열심히 뛴다 해도 경기가 끝날 때까진 결과를 알 수 없는 종목이죠. 그래서 저는 대회에 나갈 때마다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기보단 주어진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자, 죽을힘을 다해 뛰자고 마음먹었어요.”
혜성같이 나타난 마라톤 영웅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 코스는 현재까지 올림픽 사상 가장 어려웠던 난코스로 꼽힌다. 코스를 살펴보면 우선 항구도시 마타로에서 출발해 25km 지점부터 시작되는 오르막길을 지나 그라시아 거리, 카탈루냐 광장을 통과한다. 그러다 38km 부근에 도착하면 그 유명한 ‘몬주익 언덕’이 모습을 드러낸다. 해발 213m의 몬주익 언덕에 오르면 바르셀로나 시내는 물론 넓게 펼쳐진 지중해를 볼 수 있다. 26년 전 이 아름다운 무대에서 치열한 레이스가 펼쳐졌다.
“마라톤 최악의 조건이 덥고, 습하고, 경사가 많은 코스인데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 코스가 기가 막히게 모든 악조건을 다 갖추고 있더라고요. 기온은 30℃를 웃돌았고 바다를 낀 도시답게 엄청나게 습했어요. 이런 날씨에 몬주익 언덕을 뛰어 올라가야 했으니 사전 답사 때 보고 아이고야! 했죠.”
바르셀로나 시내는 선수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리고 오후 6시, 경기 시작을 알리는 총소리에 맞춰 선수들이 뛰기 시작했다.
“출발선을 떠나는 순간 주사위는 던져진 거예요. 죽이 될 수도 밥이 될 수도 있는 거죠. 솔직히 속으론 ‘어느 세월에 다 가냐’ 하는데 한편으론 더 이상 힘든 훈련을 안 해도 된다는 생각에 후련해지기도 해요. 이때부턴 정말 미친 척 뛰기만 하는 거예요. 머릿속도 다 비워야 해요. 이런저런 생각하면 뛸 수가 없거든요.”
30km를 지나자 선두권 그룹에서 뒤처지는 선수들이 생겨났다. 황영조와 속도를 잘 맞춰오던 김완기 선수도 페이스를 잃으면서 본격적으로 황영조, 일본의 모리시타 고이치 두 사람의 싸움이 시작됐다. 황영조가 앞으로 치고 나간다 싶으면 모리시타가 뒤를 바짝 쫓았고, 모리시타가 앞서나간다 싶으면 황영조가 냉큼 따라잡았다. 그렇게 서로를 떨어뜨리고 잡기를 반복했다.
“마라톤이라는 게 그냥 뛰면 될 것 같지만 사실은 엄청난 전략싸움이거든요. 속도 조절을 잘하면서 체력을 비축하고 상대가 방심할 때 그 힘을 폭발시켜서 나가야지 거리를 벌릴 수 있어요. 결승지점을 2km 남겨뒀을 때 모리시타가 속도를 줄이더라고요. 아마 스타디움에서 승부를 볼 생각이었나봐요. 이때다 싶었죠. 이때 간격을 더 벌려두지 않으면 금방 따라올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죽을힘을 다해서 뛰었어요. 모리시타가 아차 싶었을 거예요.”
메인 스타디움에 황영조가 모습을 보이자 스타디움은 함성으로 가득 찼다. 그의 옆에 모리시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황영조가 마지막 코너를 돌더니 양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결승선을 향해 뛰어 들어왔다. 그러곤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원래 옆에 사람이 있으면 숨소리가 다 들리거든요. 마지막 코너를 도는데 뭔가 나만 뛰고 있는 느낌이 들어서 뒤를 돌아본 거죠. 아, 내가 금메달이구나 싶었죠. 결승선을 밟는 순간 이제 안 뛰어도 된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어요.(웃음)”
우연의 일치인지 황영조가 금메달을 딴 8월 9일은 손기정 선수가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딴 날짜와 같았다. 56년 만이었다. 황영조는 스타디움에서 지켜보고 있던 손기정 선수를 찾아가 금메달을 그의 목에 걸어줬다. 당시 외신도 이들의 모습에 주목했다.
“손기정 선생님이 식민지 시절 일장기를 달고 시상식에 올라선 역사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큰 아픔이잖아요. 근데 외국인들은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죠. 선생님의 한을 풀어드린 것 같아 행복했어요.”
선수에서 감독의 길로
황영조는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 딴 마라톤 금메달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이후 2000년부터 국민체육진흥공단 마라톤선수단 감독을 맡으며 그의 뒤를 이을 선수를 양성하고 있다.
“요즘 친구들을 보면 간절함이 없어 보여요. 조금만 더 하면 되는데 금방 포기해버리니깐 제자리걸음이 될 수밖에 없죠. 훈련할 때도 포기하지 말라는 말을 제일 많이 해요. 그 힘든 순간만 견디고 넘기면 정말로 더 큰 무대를 바라볼 수 있거든요.”
유독 뜨거웠던 8월의 태양을 피해 국민체육진흥공단 마라톤선수단은 강원도 대관령으로 전지훈련을 떠났다. 그나마 더위가 식은 오후 6시에 훈련을 시작했지만 20분이 채 지나지 않아 선수들의 유니폼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이들을 따라가며 “포기하지 마! 바짝 붙어야 해!” 힘껏 외치는 그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다.
“간혹가다 가쁜 숨을 몰아쉴 때 살아 있음을 느낀다는 둥 심장이 요동칠 때 희열을 느낀다는 둥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정말 죽어라 뛰어보지 않아서 하는 소리예요. 마라톤이 재미있는 운동은 아니에요. 강인한 정신력과 체력이 늘 요구되는 외롭고 힘든 자신과의 싸움이죠. 이런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마라톤에서 앞으로 손기정, 황영조, 이봉주 말고도 언급할 수 있는 선수들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게 제가 ‘마라토너’로서 가지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