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에 쓰인 ‘용돈’의 정의는 ‘개인이 자질구레하게 쓰는 돈.
또는 특별한 목적을 갖지 않고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돈(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이다.
말 그대로 그 누구의 방해를 받지 않고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라는 뜻.
그렇다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시니어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용돈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을까?
각기 다른 분야의 시니어 남녀 4명에게 물었다.
질문 ?한 달 용돈은 얼마?
?용돈 주로 어디에 쓰나?
?1년에 가장 지출이 많은 달은?
?세뱃돈은 얼마나 지출하나?
?500만원 혹은 그 이상의 돈이 생긴다면?
“우리 나이 되면 그렇게 욕심내 쓸 곳이 없어요”
(男77, OO 기업 회장)
기업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돈 많이 쓸 거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한 달에 저만을 위해 쓰는 돈은 한 50만원 정도입니다. 주로 지인들과 식사하거나, 등산모임에 가서 쓰는 것이 전부죠. 지인들 만나서 제가 주로 밥값을 내는 편입니다. 평균적으로 연말에 씀씀이가 많이 커집니다. 어려운 사람도 도와야 하고요. 그리고 그다음으로 많이 나가는 건 설날 등 명절이지요. 세뱃돈은 아이들 나이에 따라서 차등 지급합니다. 1만원에서 5만원까지 생각해요. 초등학생은 1만원, 중학생은 2, 3만원, 고등학생은 5만원 정도 세뱃돈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약 저를 위한 큰돈이 생긴다면 좋은 데 쓰고 싶습니다. 봉사하러 요양원에 자주 가는데 그런 곳에 보태주는 게 보람 있지 않겠습니까? 지인들과 밥도 사 먹고 싶고, 직원들과도 나눠야겠죠. 선물도 주고 말입니다. 사실 그렇게 뭘 가지고 싶은 것도 없어요. 우리 같은 사람들은 어린아이, 직원들에게 써야죠. 돈 들어오면 쓰느라 바쁩니다. 회사 빌딩 경비, 용역 직원에게도 나눠드리고 싶어요. 나이 먹으니까 작은 것이라도 실천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 늘 생각하고 삽니다. 돈도 중요하지만 보람있게 살고 싶습니다.
“내 이름으로 된 통장 없어요. 단, 돈은 쓸 뿐”
(女66, OO 갤러리 관장)
용돈이 얼만지 솔직히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가계부도 살면서 써본 적이 없거든요. 돈은 주로 누구를 만나 음식 대접할 때 쓰거나 미술관 갈 때, 미술관에서 차 마실 때 쓰죠. 만나는 사람이 저보다 어리거나 월급 받아 사는 친구들이라면 제가 돈을 써요. 아무래도 내가 쓰는 게 낫죠.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돈은 모을 필요 없다고 가르치셔서 우리 자매들 다 돈에 연연하지 않으면서 삽니다. 어렸을 때도 아버지가 남들 용돈 4, 5배는 주셨거든요.
문화 교육, 강의 등 문화 관련 분야 굉장히 좋아해요. 예술의전당은 몇 개월 들으면 40여만 원이고 개인교습은 좀 더 비싸요. 그룹으로 클래식 이야기 듣기도 하고요. 문화를 즐기고 지식을 넓히는 게 즐겁습니다. 남편이 장애아동 돕는 일을 정말 열심히 해요. 제가 뭔가 돕는 거 대신 골프를 안 쳐요. 이미 처녀 때 다 해봤고. 골프 안 치는 것만으로도 돈 안 쓰는 거니까 남편 도와주는 거로 생각해요.
사실 양친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 특별히 용돈 드릴 곳도 없고, 돈은 항상 비슷하게 나가는 거 같아요. 언제 많이 나가고 적게 나가는지 생각해 본 적 없어요.
예전에는 세뱃돈 많이 주는 이모고 고모였어요. 그런데 요즘 사촌 조카들 다 시집, 장가가고 우리 집까지는 발길이 안 닿아서 특별히 아이들에게 세뱃돈을 줘 본 적은 없어요. 단, 우연히 호텔 로비나 헬스장에서 친구 손자를 만나면 단 얼마라도 손에 쥐여주거든요. 좀 큰 애들은 5만원, 어린아이는 2만원. 뭐 그런 돈을 주느냐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내가 너희를 만나서 반갑다’는 의미거든요. 내 버릇이기도 하고 오랫동안 가지고 온 내 스타일이기도 합니다.
큰돈이 생기면 일시적으로 아주 좋겠지요. 일단 친구, 형제 순으로 만나서 밥 먼저 먹으려고요. 먹고 나서 스카프 같은 선물도 준비해서 줄 거예요. 자주 가는 호텔 빵집에 들러서 빵도 사줄 거예요.
“큰돈이 생기면 따뜻한 섬나라 가서 몇 년 살다 오고 싶어요”
(男59, 자유기고가)
카드를 주로 이용하는데 청구서를 보면 들쭉날쭉이더라고요. 60만원 정도부터 300만원까지. 내가 여행을 갈 때는 그보다 훨씬 많기도 해요. 어제도 여행비 460만원 결제했습니다.
돈 쓰는 거야 주로 지인들과 밥 사 먹는 데 많이 사용합니다.
사실 우리 부부는 세뱃돈을 주기 보다 받아왔어요. 작년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는데 그전까지는 우리 부부가 세배를 하면 세뱃돈을 주셨죠. 우리 가정은 상당히 자유로워서 집을 거점으로 생각해요. 꼭 돌아와야 하는 개념 같은 거 모르고 살았어요. 아이들이 외국에도 많이 가 있어서 세뱃돈 챙겨줄 일이 없었습니다. 몇백만 원이면 푼돈이라 간단히 길 떠나는 데 써야 할 것 같고, 몇억이 생기면 다 접고, 따뜻한 어느 섬나라 가서 몇 년 살다 오고 싶어요. 여행자가 아니라 몇 개월 이상, 1년~2년 각기 다른 대륙에 살아볼 생각이거든요. 죽기 전에 말입니다. 나이가 들어서 여행가는 거니까 돈이 많이 있어야 해요. 레스토랑에서 누군가에게 밥을 사주어야지 함께 밥을 먹지 않겠어요? 언젠가 캐나다 노바스코샤에서 배낭여행길에 한 노부부와 바닷가재를 먹었는데 수다와 식사를 즐긴 뒤 그 부부가 돈을 내니 참 좋더라고요. 나도 나중에 저렇게 살아야지 했습니다. 그러니 나이들면 언제든지 쌈짓돈이 필요해요.
“친구들 만나 밥 먹는데 돈을 제일 많이 쓰지 않나요?”
(女56, 주부)
용돈은 한 달에 대략 200만원 정도 쓰는 것 같아요. 용돈이라기보다는 그냥 생활비라고 하는 게 맞는 표현인데 여행도 용돈에 포함했을 때 이 정도 쓰는 거 같아요. 기본적으로 유류비가 많이 나가고요, 친구들을 만나 식사하거나 문화생활도 하고요. 지금까지 명절에 돈을 많이 썼던 것 같아요. 양가 부모님 다 살아계셔서 용돈을 드리는데 각각 20만원 정도 드립니다. 그런데 또 세뱃돈은 줘본 적이 없네요. 매년 설날 때마다 외국으로 여행을 가기 때문에 세뱃돈 생각 안 해봤어요. 이번 설날에는 형제들과 함께 5박 6일 일정으로 베트남 다낭으로 여행갑니다.
삼국시대에 관해서 제일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가 ‘왜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하지 못했나? 고구려가 통일했다면 우리의 영역이 만주까지 넓혀졌을 것인데..’라는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의 대외관계를 검토하면 이것은 이루기 어려운 목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 간의 관계에만 주력한 신라, 백제와는 달리 고구려는 중국 왕조들을 비롯하여 만주의 여러 민족들을 상대해야만 했다. 특히 중국의 여러 왕조들은 감당하기 힘든 세력이었다. 연(燕)을 비롯한 하북의 왕조들은 중국 전체 판도에서는 강대국이 아니었지만 고구려에게는 위협적인 존재였다. 왕성이 점령당하고 왕모가 잡히고 전왕의 묘가 파헤쳐지는 참사도 겪는다. 고구려는 때로는 조공이라는 외교적 수단으로, 때로는 군사력으로 대응하며 힘을 키위 5세기 광개토왕과 장수왕 시대의 전성기를 맞게 되는 것이다.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했다면 그 전성기인 광개토왕과 장수왕 시대였을 것이다. 백제의 진사왕(辰斯王)이 ‘용병에 뛰어났다’고 평한 대로 광개토왕은 20여 년 동안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 일곱 차례나 원정을 단행한다. 392년 백제를 침공하여 국도를 포위하자 백제의 임금(阿莘王, 아신왕)은 그의 면전에 꿇어앉아 스스로 “영원히 노객(奴客, 노예)이 되겠다”고 서약한다. 400년에는 신라와 가야까지 진출하여 신라의 ‘국성(國城)’에 가득 찬 왜구를 몰아낸다.
광개토왕의 아들 장수왕은 79년간 집권하면서 중국의 여러 왕조를 상대로 고구려의 국익을 극대화한 군주로, 한국사에서 뛰어난 ‘외교군주’라고 칭할 만한 인물이다. 그는 북중국에서 가장 강력한 북위(北魏)와 일면 타협하고, 일면 강공으로 대항하면서 여러 차례 위기를 극복한다. 그리고 당시 중국 왕조들의 외교무대인 북위 조정에 모인 여러 사신들에게 ‘우리가 강하다’는 점을 과시한다. 그는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고(427년) 남진정책을 추진하며 백제 수도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蓋鹵王, 475)을 살해한다.
그러나 고구려는 삼국을 통일하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우선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같은 민족이라는 ‘관념’이 있었느냐, 그래서 통일의 당위성을 느꼈느냐는 문제가 중요할 것이다. 민족개념이 없으면 상대국은 우리의 안보에 위협이 되는 ‘이웃’일 뿐이다. 같은 핏줄이기 때문에 합치고 보듬어야 한다는 ‘당위성’이 아니라 귀찮은 안보의 적을 혼내주고 복종하게 만들거나 제거할 ‘필요성’만 느낀다는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를 이같은 입장에서 대했다.
‘삼국사기’를 검토하면 중국 왕조들에 대해 수세적이었던 고구려의 상황은 최전성기라는 광개토대왕-장수왕 시대에도 크게 개선되지 않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광개토왕 9년(399) 정월 사신을 연(燕)에 보내 조공했으나, 2월에 연왕 모용성(慕容盛)이 “오만하다”면서 3만 명을 이끌고 습격해왔다. 연나라 군대는 신성(新城, 요녕성 무순시) 등을 함락시키고 700리의 땅을 차지하고 백성 5000호를 옮겨놓고 돌아간다.
그 후 고구려와 연은 서로 상대방을 침공한다. 408년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 ‘종족의 예’를 차렸더니, 왕 모용운(慕容雲)이 답례했다. 이것은 북연이 고구려 왕실에서 갈려나온 혈족임을 서로 확인하고 적대관계를 완화한 것이다. 중국내에서 강대국이라 할 수 없는 연조차 고압적으로 고구려를 압박하고, 고구려는 조공을 보내면서 이를 감내한 것이다.
고구려의 남방경략은 이같이 대륙의 정세 변화를 정확히 읽고 서북국경의 안전을 확보한 시기에 단기적으로 감행된 것이다. 원정은 모두 연과의 전쟁이 일어난 해들의 사이이거나 연과 평화적 관계를 회복한 이후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목표를 달성한 뒤에는 신속히 철수한다.
통일이라는 대과업은 단기간에 기존 왕조를 멸망시키는 것으로 끝날 수 없다. 장기적으로 점령지역에 주둔하면서 평정작업을 벌여 민심을 얻어야 한다. 고구려로서는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중국과의 서북국경에서 안보위협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많은 군대를 백제나 신라에 장기간 주둔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백제와 신라가 나제동맹(433년)으로 고구려에 대항하게 되면서 고구려가 단독으로 남쪽의 두 왕국을 제압할 수 있는 기회는 줄어들었다. 백제와 신라는 가야까지 진출한 고구려의 힘을 목격하고 또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하자 상호 지원을 ‘암묵적으로’ 약속하는데 이것이 곧 나제동맹이다. 이후 나제동맹은 삼국관계의 안정에 큰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550년 백제가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한강 유역에서 몰아내고 곧 이어 신라가 백제의 뒤통수를 치며 이 지역을 탈취할 때까지 삼국은 정족지세(鼎足之勢)를 이루었다. 정족이란 발이 3개인 솥 모양으로 국제정치에서 가장 안정된 상황을 말한다.
나제동맹 후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의 침공을 받으면 서로 지원하는 양상을 보였다. 개로왕이 살해당했을 때 신라군이 지원에 나서자 고구려는 철수했다. 고구려가 신라 국경으로 내려오면 백제가 출병하고 고구려군은 그대로 돌아갔다. 만약 중국이라는 외세의 간섭이 없이, 혹은 중국이라는 존재 앞에 고구려가 군사력 일부를 요동에 묶어두면서 삼국관계가 유지되었다면 통일과 같은 대변혁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나제동맹이 무너지고 백제와 고구려가 접근함으로써 신라는 안보위협을 느끼게 된다. 또 589년 중국에 통일제국 수(隋)가 탄생하면서 삼국간의 정세는 급변한다. 고구려-수/당 전쟁은 통일 중국이 고구려를 국경지역의 안보위협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군사적으로 대비하고, 조공으로 화해를 시도하고 또 포로를 송환하는 등 타협/저자세를 취해도 평화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고구려의 승리는 국력 고갈로 이어졌으며 신라가 이에 편승한 것이 삼국통일로 이어졌다고 하겠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550년 한강유역을 얻은 후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세력이 일취월장하여 동아시아 국제관계에서 ‘새로운 힘’으로 등장한 신라의 잠재력을 고구려가 간과하여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는 점도 지적해야 할 것이다.
△ 구대열 이화여대 명예교수
서울대 영문과 졸, 한국일보사 기자, 런던정경대 석ㆍ박사(외교사 전공).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통일학연구원장 등 역임. 저서 등.
스페인음악은 전형적인 라틴음악이고 넓은 의미에서는 샹송이나 칸초네도 모두 라틴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음악에서 라틴음악이라고 하면 주로 멕시코를 비롯한 라틴 아메리카(중남미)음악을 말한다.
라틴음악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음악에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인디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끌려와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한 흑인의 음악이 다양하게 섞여 형성된 음악이다.
그러나 쿠바에서는 원주민이 너무 일찍 멸망했기 때문에 나머지 두 가지 요소만으로 만들어졌다. 룸바 맘보 차차차 볼레로 등의 리듬은 모두 쿠바에서 만들어져 다른 나라들로 퍼져나갔으나 막상 쿠바에는 남아 있지 않다. 삼바는 브라질의 흑인계 리듬이다. 이와 같이 라틴음악에는 스페인음악이 바닥에 깔려 있기 때문에 스페인음악을 좋아하다 보면 라틴음악은 저절로 따라오게 마련이고 곡목도 겹치는 것이 많다.
그러나 (물론 필자 개인의 경우지만) 같은 ‘질투’라는 곡을 스페인음악으로 들으면 울긋불긋한 옷을 입은 정열적인 여자가 칼이라도 뽑아들고 달려들 것 같은 느낌이라면, 라틴음악의 경우 파도에 부서지는 달빛 어린 바닷가에서 가냘픈 여인이 훌쩍훌쩍 울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필자는 △사랑의 역사(Historia De Un Amor), 제비(La Golondrina), 키사스 키사스 키사스 등이 들어 있는 트리오 로스 판초스 △라 쿰파르시타, 달빛 어린 난초(Orchids In The Moonlight), 질투 등이 들어 있는 ‘남미의 허니문’ △맘보 5번, 라 밤바, 엘 콘도 파사, 커피룸바(Moliendo Cafe) 등이 들어 있는 맘보리듬의 창시자 페레츠 프라도 △아마폴라, 씨엘리토 린도(Cielito Lindo), 마리아 엘레나 등이 들어 있는 ‘라틴 칵테일 아우어’라는 판 등 라틴음악 역시 참 많이 들었다.
1982년 7월에 지하철 자료수집차 갔던 첫 번째 파리 방문 때 업무를 마치고 짧은 시간이나마 관광을 할 시간을 마련하였다. 센 강 유람선을 타고 에펠탑을 구경한 후 영화박물관 근처를 지나가는데 어디서 경쾌한 음악이 들려왔다. 가보니 남미에서 온 듯한 2인조가 라틴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다리도 쉴 겸 돌난간에 걸터앉아 음악을 듣고 있자니 몸이 저절로 리듬을 타고 있었다.
그런데 역시 남미에서 온 듯한 한 젊은 여인이 손을 내밀어 춤을 청했고 신 나게 한 곡을 추고 나니 박수소리가 들렸다. 지나가던 관광객들이 둘러서서 구경을 하다 박수를 친 것이다.
1984년 10월에서 11월에 걸친 약 3주간 필자는 브라질 리우 데 자네이루에서 열렸던 제10차 국제도로연맹(IRF) 세계도로회의에 한국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우리 일행이 묵던 호텔이 있는 코파카바나 해변의 뒷골목에는 수많은 기념품가게와 술집이 있었다. 그중 한 기념품가게에 들렀다가 괜찮은 술집을 물으니 알베르토(Alberto's) 피아노 바(Bar)를 소개해 주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기념품가게 여종업원인 마리 양이 저녁 때는 그 바의 유일한 여종업원이기도 하였다. 아담한 크기에 주인 알베르토의 피아노연주가 일품인 이 바가 마음에 들어 거의 매일 저녁마다 출근을 하다시피 했다. 그 바의 손님들은 대부분 이웃나라인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우루과이, 파라과이 등에서 온 관광객들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한국 사람이 처음이었으나 멀리 동양의 한 작은 나라에서 온 젊은 사람이 자기들 나라의 노래를 너무 많이 아는 것이 신기해서 쉽게 친해졌고, 또 서로 어우러져 돌아가며 같이 춤을 추기도 했다. 사실 당시 필자의 나이는 만 40이었으니 젊다고 하기에는 좀 그런 나이였지만 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젊어 보였는지 절대로 25세 이상으로는 보지 않아 내기를 해서 술도 꽤 많이 얻어마셨다.
하루는 기념품가게 여주인과 마리 양이 아주 괜찮은 극장식 레스토랑이 있으니 가겠다면 자기들이 안내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 일행에게 물어보니 12명 정도가 가겠다고 해서 알베르토에게 양해를 구한 여자들과 함께 레스토랑에 갔다. 실내는 꽤 넓었고 여러 테이블에 손님들이 있었으나 우리 테이블이 가장 많았다.
쇼가 시작되자 사회를 보는 여자가 테이블마다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 물어보다가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우리말로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를 하면서 그날 밤은 ‘한국의 날’로 무대를 꾸미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중간 중간에 우리 음악에 맞춰 쇼를 진행함으로써 우리를 놀라게 했다.
클라이맥스가 되자 사회자가 무대 위로 올라오라고 우리 테이블에 손짓을 했고, 모두들 일행 중에 가장 젊었던 필자를 밀어내 타의반 자의반으로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아름다운 백 댄서들 사이에서 정말 풍만한 반나(半裸)의 두 히로인(heroine)과 평생 잊을 수 없는 즐거운 무대를 가질 수 있었다.
쇼가 끝나자 필자와 함께 춤을 추었던 두 여자가 옷을 갈아입고 우리 테이블에 와 일행과 같이 어울려 맥주를 마셨다. 그때서야 우리들의 의문이 풀릴 수 있었다. 그들은 워커힐 호텔의 극장식 레스토랑에서 6개월간 브라질 댄싱 팀으로 공연을 했고, 귀국 후에는 한국 사람들을 거의 볼 수 없었는데 오래간만에 한국 사람들을 만나 무척 반가웠다는 것이다.
한편 포르투갈의 민속음악인 파두(Fado)도 일부 라틴음악이라고 소개되기도 했다. 파두가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80년에 방영된 차화연 주연의 TV드라마 ‘사랑과 야망’에서 아마리아 호드리게스가 부른 ‘검은 돛배(Barco Negro)’가 주제음악으로 사용된 후부터였다.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해 검사로 활동하며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 법무연수원 원장 등을 거쳐 10년 전부터는 변호사로 살고 있는 법무법인 대륙아주의 정진규(鄭鎭圭·69) 대표변호사. 탄탄대로의 그의 삶에는 분명 나름의 비법이 있을 터.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노라고 말하는 정 변호사에게 은 인생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어준 책이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인터뷰에 앞서, 추천 도서 선정에 신중함을 잃지 않았던 그다. 한때 낭만을 가득 품고 읽었던 러시아 문학, 나폴레옹의 전기나 헬렌 켈러의 수필 등 많은 책이 그의 생각에 머물렀다. 학창시절 도서관에 있는 책들을 다 읽을 정도로 독서에 심취했던 정 변호사는 그때 읽었던 책들이 삶의 자양분이라고 말한다. 그런 그가 오랜 고민 끝에 선정한 책은 이다. 책에 대한 기억은 50여 년 전 처음 읽었던 그때가 전부라고 했다. 반세기 만에 꺼내든 책이지만 머리보다는 가슴에 새겼기에 그 메시지만큼은 또렷이 남아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입시를 코앞에 두고 목표는 서울대 법대였는데 성적이 많이 떨어져 있었어요. 모의고사를 보고 담임선생님이 어머니께 지금 성적으로는 원하는 대학은 어림도 없다고 하셨죠. 남다른 의지가 필요했던 그때, 우연히 을 발견했어요. 마력이라는 단어에 끌려서 정말 순식간에 읽어냈죠. 사실 그때 이후로는 한 번도 읽지 않았지만 그때의 감정과 메시지는 매사 잊지 않고 지내왔어요.”
정확한 목표를 갖고 그것을 이뤄낼 수 있다는 강한 신념과 열망으로 최선을 다하면 원하는 바를 성취할 수 있다는 메시지가 주를 이루는 이 책은 정 변호사의 인생관과도 흡사했다. 본래 낙천적인 성격을 지녔지만, 행동에 적극적이지는 못했던 그였다. 책은 수줍음이 많았던 그에게 자신감을 심어줬고, 그 자신감은 곧 행동에 힘을 실어주었다. ‘행동이 따르지 않는 신념은 죽은 것이다’라는 책의 한 구절처럼 신념에 자신감 넘치는 행동이 더해지자 그의 인생은 더욱 만족스러운 모습으로 나아갔다.
“잠재하고 있던 능력들이 자신감을 통해 발현됐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누구에게나 이 책을 권하고 싶어요. 사람이 사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죠. 좋은 것을 믿고 받아들이는 자세로 사는 것과 매사에 의심하고 회의적인 자세로 사는 것인데, 기왕이면 좋은 것을 취하고 장점을 부각할 줄 아는 사람이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해요. 꼭 무언가를 이뤄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마음가짐으로 사는 것이 삶에 만족도 주고, 행복이나 가치 추구에 굉장히 도움이 돼요. 또, 잘 안 되더라도 그 결과를 좋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생기고, 과정이 즐겁게 남겠죠.”
마음속 그림대로 끌려온다
열망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신념의 마력. 그의 신념은 정말로 마력을 발휘했을까? 정 변호사가 열망해온 삶이 궁금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하잖아요. 마음먹기 따라 달라지고, 믿는 만큼 이뤄낼 수 있어요. 명예롭고 정의로운 검사가 되고자 마음먹었었죠. 그게 목표였고, 국가와 사회, 이웃에 보탬이 되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어요. 최선을 다하면 이루어질 테니 그것을 통해 행복하게 살아보자. 그렇게 검사로서는 서울 고검장, 법무연수원장까지 했으니 할 수 있는 만큼 한 셈이죠. 그 뒤로는 총장이나 장관이 돼야 하는데 그건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요. 하지만 충분히 만족하고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해요.”
긍정적인 자세로 최선을 다해온 덕분에 만족스러운 지난날을 회상하는 정 변호사에게도 위기는 존재했다. 하지만 그런 날도 강한 신념과 노력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었다.
“1980년대 말, 마산지방검찰청 충무지청장으로 있었는데 대우조선에서 1만여 명에 달하는 노조가 열흘 넘게 파업하는 심각한 사건이 벌어졌죠. 그맘때 울산에서 현대 파업 사태가 난항을 겪어 분위기는 절망적이었어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라는 말을 떠올렸죠. 사용자와 노조의 문제점을 면밀히 분석하고 분명히 해결되리라는 강한 신념으로 최선을 다했어요. 당시 공권력이 1만4000여 명 투입되기로 예정돼 있었는데, 실제는 경찰이 3000여 명밖에 없었는데도 파업문제를 원만히 해결할 수 있었죠. 그렇게 굉장히 크다고 여겨지는 문제에도 해결의 길은 있기 마련이거든요. 어려움에 닥치면 좌절하거나 꺾이지 말고 ‘어! 왔어? 한번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부딪혀보고 열심히 방법을 찾다 보면 분명 해결할 수 있다고 믿어요.”
열망하는 삶, 다채로운 삶
늘 호기심 어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그는 아직도 해보고 싶은 일들이 무척 많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가 열망하는 인생 이모작은 어떤 모습일까?
“실은 검사직을 그만두고 학계로 가거나 다른 일을 해볼까 생각했는데 이런저런 인연으로 변호사를 하게 됐죠. 외국 기업으로부터 특허침해소송을 받은 우리 기업을 구제한 적이 있는데 그런 일들이 참 보람 있더라고요. 기업이나 개인을 도우면 사회에 보탬이 되고 제게도 보람이 있으니 얼마나 행복해요. 그렇게 지금은 법인의 대표 변호사로서 주어진 일에 전념해야겠고, 후배들을 잘 격려해 훌륭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하고 싶어요. 일로는 그렇고 궁극적으로는 다채로운 삶을 사는 것이 목표예요. 도둑질이나 남 해치는 것 빼고는 다 해보자는 마음으로 살아왔죠. 가령 취미 생활을 해도 대충 하는 법이 없었어요. 바둑도 아마 5~6단 정도 될 때까지 했고, 테니스도 테니스 전문 잡지에 선수로 나갈 만큼 치열하게 했죠. 요즘은 클라리넷에 관심이 있는데 일이 바빠서 시작은 못 하고 있어요.”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그에게선 삶의 만족과 행복이 느껴졌다. 너그러운 미소에서는 인생의 즐거움이 묻어났고, 반짝이는 눈빛에는 강한 자신감이 맺혀 있었다. ‘열망, 노력, 자신감’ 이 세 가지가 선순환하며 행복한 그의 삶을 이끌어 가는 듯했다.
“빌 게이츠가 매일 뭘 하는지 아세요? 그도 신념의 마력을 아는 사람 같아요. 매일 아침 주문처럼 외우는 게 ‘아브라카다브라(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 ‘오늘은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 ‘나는 할 수 있어’ 이 세 가지라고 해요. 그처럼 기왕이면 하는 일에 즐거운 상상을 하고 자신감을 느끼는 것이 긍정적 영향을 주죠. 무언가를 간절히 희망하면 열심히 하게 되고, 열심히 하면 이룰 수 있는 것이 많아지고, 그 성공이 다시 자신감으로 축적되죠. 그렇게 쌓인 자신감이 제 삶의 활력이자 원동력 아닐까요?”
러일전쟁이라면 국권을 빼앗긴 을사조약이 먼저 떠올라 우리에게는 결코 유쾌한 사건이 아니다.
전쟁의 쟁점도 한반도라고 믿고 싶겠지만 서양 학계에서는 러-일 양국이 다툰 것은 만주라고 평가해 왔다. 지난 20~30년 전부터 ‘한반도’도 이에 포함될 수 있다는 인식이 생겼다.
지난 호에서 청일전쟁을 ‘일본과 이홍장 간의 전쟁’이라고 평한 바 있는데 러일전쟁도 비슷하다. 양국의 임전태세를 ‘일본은 사활을 걸고 싸우며 러시아는 저녁 식사거리를 위해 싸운다.’고 비유했다. 일본은 이 전쟁에 국가의 운명이 걸렸다는 각오 아래 정부와 국민이 단결하여 총력전 태세로 임하지만 러시아는 페트로그라드-모스크바가 있는 ‘중앙’ 러시아에서 1만km나 떨어진 ‘극동’지역의 국경 밖에서 뭔지 아리송한 목표를 위해 싸운 것이다. (물론 패전 소식이 전해지면서 국내정치에 불똥이 튄다.)
일본도 주요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완벽한 승리를 얻지 못했다. 전쟁이 끝났을 때 전선은 러시아 영토 밖에 있었다. 전쟁 초기 블라디보스토크 항에 대한 포격과 종전 무렵 일본군이 사할린에 진주한 것이 ‘러시아 영토’에 가한 유일한 타격(?)이었다. 종전 때의 상황은 겉으로 보기에는 1차 대전이 끝났을 때 전선은 독일영토 밖에 있었던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독일은 4년 여의 전쟁에서 모든 자원이 고갈되어 기진맥진한 끝에 항복한 데 비해 러시아는 아직 힘이 싱싱하게 남은 상태에서 종전을 맞았다. 당연히 패배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왜 종전이 이루어졌을까? 국제정치적으로 미국은 러시아가 만주를 점령하고 이 지역에서 경제적 문호개방을 거부한 데 반발하여 일본을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영국은 일본의 동맹국으로 당연히 일본을 지원했다고 믿고 있다.(한국에서는 특히 이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독일의 팽창에 대항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인 영국은 프랑스와 그 동맹국인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을 추구하고 있어 이해관계가 약한 ‘극동’에서 러시아와 분쟁을 조장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전쟁을 빨리 끝내 러시아가 유럽에 관심을 집중하기를 희망했다. 전쟁 중 영국의 지원을 기대했던 일본사회에서는 전쟁 후 “영국이 동맹국이라면서 무슨 도움을 주었느냐?”면서 반영 감정이 고조되기도 했다.
일본군이 주요 전투에서 연승하자 영국과 미국은 일본이 만주에서 러시아를 몰아내고 ‘제2의 러시아’가 되는 걸 원치 않았다. 양국이 만주에서 ‘균형 잡힌 적대관계’를 이루는 상태에서 이 거대한 시장이 서양 열강에게 개방되기를 바란 것이다. 이후의 역사는 일본이 만주의 지배자가 되어 서양 열강의 권익을 몰아내지만. 기이하게도 종전을 서두른 쪽이 연전연승한 일본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일본 군부가 있었다. 군부가 항상 과격한 정책을 선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가 바로 러일전쟁이다. 일제 군부라면 우리는 끝을 모르는 욕망으로 대륙 팽창과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여 패배한 쇼와(昭和)군부를 연상할 것이다. 메이지(明治) 군부는 그렇지 않았다. 메이지 군부도 러시아와의 전쟁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하면 일본은 인적·물적 자원이 러시아보다 빨리 고갈될 것을 우려한 것이다. 실제로 만주의 첫 주요 전투인 1904년 10월 사하(沙河, 사카)에서부터 일본군은 보급품 부족을 느끼기 시작했다. 사하는 심양에서 여순 방향으로 흐르며 요양(遼陽) 북쪽에 있는 강이다.
다음해 3월 만주의 운명을 가르는 요양전투에서 일본은 승리하지만 인적·물적 자원이 한계에 도달한다. 일본군은 탄약 부족으로 패주하는 러시아군을 섬멸하지 못함으로써 러시아에 결정적인 패배를 안겨주지 못한 것이다.
더욱이 일본은 승리하면서도 손실이 러시아를 능가했다. 1905년 정월 초하룻날 러시아군의 항복으로 일본의 승리를 대대적으로 선전한 여순 전투에서 러시아 사상자는 2만8200명인 데 비해 일본은 5만7789명이었다. 메이지 천황조차 “이긴 것은 좋지만 일본의 젊은이들이 이렇게 많이 죽어서야...”라며 탄식했다.
반면 러시아는 새로이 건설한 시베리아와 만주의 철도를 통해 보급품을 수송함으로써 요양전투 패배한 후에도 군사력을 증강시키고 있었다. 물론 전쟁이 계속된다고 해도 러시아가 일본을 패퇴시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에 일본 군부는 전선의 상황이 일본에게 유리할 때 종전 협상에 들어가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한다. 이를 ‘전략과 정략의 일치’라고 불렀다. 만주군 총사령관 오야마 이와오(大山?) 원수는 1904년 7월경 만주전선으로 떠나기 전 친구인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 해군상에게 “만주 전투는 내가 알아서 하겠지만 언제 끝내야 할지는 (동경에 있는) 자네가 결정하게.”라는 말을 남겼다.
이후 만주군 수뇌부는 전투에서의 승리를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신중히 고려하여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본국정부에 평화회담을 시작할 것을 지속적으로 독촉한다.
다음 해 3월 28일 오야마의 참모총장인 고다마 겐타로(兒玉源太郞)는 만주전역을 논의한다는 명목으로 동경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주 임무는 정부에 평화회담 개최를 독촉하는 것이었다. 그는 동경 역에 마중 나온 부참모장 나가오카 가이시(長岡外史)에게 소리쳤다. “나가오카, 바보짓 그만해라. 총을 쏘았으면 멈출 줄 알아야지. 그것도 몰라?” 그 다음, 외무성을 향해 또 한 번 고함친다. “일본에는 외무성도 없느냐?”
원래 평화협상은 전투와는 달리 단시간에 시작할 수 없는 것이다. 일본정부는 1905년 3월부터 테오도르 루즈벨트(Ted Roosevelt) 미국 대통령과 접촉하여 이해 9월 포츠머스 조약을 맺으면서 승리의 열매를 챙긴다. 그중에는 한국을 삼키기 전 단계인 보호권도 포함된다. 군부가 현명한 판단을 내릴 때 국운이 융성해진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라 할 것이다.
△ 구대열 이화여대 명예교수
서울대 영문과 졸, 한국일보사 기자, 런던정경대 석ㆍ박사(외교사 전공).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통일학연구원장 등 역임. 저서 등.
글 황경춘 전 외신기자클럽 회장
하모니카는 서민들에게도 친숙한 가장 대중적인 악기 중의 하나입니다. 가격이 적당하고, 배우기 쉽고, 그러면서도 오묘한 트레몰로(tremolo)음을 내어 음악 애호가를 매혹합니다. 게다가 100세 시대를 지향하는 요즘의 노인들 건강에도 좋다고 하니 한때 침체했던 우리나라 하모니카 동호 운동이 다시 활기를 찾고 있습니다.
하모니카의 기원과 확산
이렇게 대중의 사랑을 받는 하모니카가 언제 어떻게 발명되었는지에 관해 여러 설이 있었으나, 현재 정설로 굳어지고 있는 것은 1827년 독일인 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부시만(Christian Friedrich Ludwig Buschmann)이 하모니카의 원형을 발명했다는 설입니다. 베를린에 사는 오르간 직공의 아들이었던 부시만은 이보다 6년 전 16세일 때, ‘오라(AURA)’라는 오르간 조율용(調律用)으로 철제 리드(reed)를 붙인 퉁소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모니카 발명의 단서가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모니카는 꾸준히 개발돼 현재 1500여 종의 모델이 있습니다. 가장 정교한 모델은 1200개 이상의 부품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수작업은 약 50가지 과정을 거친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품 중 많은 부분이 이렇게 수작업으로 만들어지고 있어 대량생산이 어렵다고 합니다. 하모니카에는 복음(複音), 단음(單音), 중음(重音)의 세 종류가 있으나 복음이 가장 많이 보급되고 있습니다.
부시만이 하모니카를 발명한 뒤 몇 차례의 모델 개발을 거쳐, 하모니카의 상업생산을 시작한 것은 독일의 호너(Hohner)사입니다. 전 세계로 판로를 확대한 호너사는 지금도 하모니카 생산의 중심에 있습니다. 1857년 창립된 호너사는 독일 남부의 소도시 트로싱엔(Trossingen)에 있는 군소 하모니카 공장을 흡수했습니다. 기술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 부품 제작의 분업화를 실시함에 따라 한때 지역 주민의 약 3분의 1이 하모니카 제작에 종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창업자 마티아스 호너(Matthias Hohner)는 캐나다로 이민한 4촌 형을 통하여 6개의 하모니카를 1862년에 처음으로 북미대륙에 수출하였습니다. 이때 하모니카 한 대의 수출가격은 단 1달러였다고 합니다.
미국에 수출된 이후 번창
미국에 소개된 하모니카는 특히 흑인들이 즐겨 부르는 블루스, 재즈, 포크 뮤직 등의 연주에 좋은 반응을 얻어 크게 유행하고, 독특한 모델도 많이 개발되었습니다. 뉴저지주 유니온에 두 개의 하모니카 제조공장까지 설립되어 번창하였습니다.
이렇게 대중화된 미국의 하모니카 산업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뜻하지 않은 곤경에 빠지기도 하였습니다. 하모니카의 리드에 필요한 특수 합금이 군수품 통제의 영향을 받게 된 데다 하모니카 제작에 긴요한 자재를 적국인 독일이 수출 금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모니카가 군인 사이에도 널리 유행되자 미국 정부는 하모니카 제작에 필요한 특수 제강을 하모니카 공장에 계속 배급하였습니다.
하지만 전시라서 자재가 부족해지자 미국은 플라스틱 리드(plastic reed)를 발명하여 이를 하모니카에 사용하였습니다. 이 플라스틱 리드는 미묘한 음질의 차이는 있었지만, 미국 하모니카 산업에 큰 도움이 되었으며 대중의 반응도 좋았다고 합니다.
미국 음악계에서 하모니카가 차지하는 위치는 미국 음악연맹이 1948년에 하모니카를 ‘합법적 악기’로 인정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초엽에 하모니카 연주 음반은 극소수였고 주로 흑인을 위한 것이 많았다고 합니다. 1930년대에 들어서 비로소 하모니카 연주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백인을 위한 음반도 나오게 됐습니다. 당시 하모니카 연주자 래리 애들러(Larry Adler)가 처음으로 저명 작곡가들이 클래식 음악을 위해 쓴 곡을 하모니카로 연주했습니다. 그때까지 하모니카는 역시 ‘완구 악기(toy instrument)’로 분류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920년대
19세기 말엽에 이 하모니카가 일본에도 수입되었는데, 그 확실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1896년 8월에 발간된 월간지에 ‘손풍금 독학’이라는 기사가 있고 하모니카 판매 광고가 실려 있었다고 합니다. 1902년에는 어느 완구 도매상이 독일 호너사의 불량품을 수입하여 완구로 팔아 호평을 받았다고 합니다. 일본제 하모니카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1910년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일제통치가 시작된 후, 이 하모니카가 일본으로부터 흘러들어 1928년에는 평양고등보통학교에 하모니카 밴드가 결성되고, 1935년에는 역시 평양에 YMCA 밴드가 결성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필자의 기억에 당시 라디오에서 가끔 하모니카 연주가 방송되었지만, 이것이 우리 동포의 연주였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이렇게 명맥을 이어 온 우리 하모니카 활동이 광복 후인 1952년 고려하모니카연구단이 결성되고 1957년 대한하모니카협회의 결성으로 이어졌습니다. 당시 체신부 차관이었던 조응천 박사가 초대 회장을 맡은 이 협회는 곧 문공부 산하 사단법인으로 등록되었습니다. 지금은 이 협회 외에도 한국하모니카연맹, 오케스트라 하모니카 교육센터, 한국하모니카아카데미 등 여러 단체와 수많은 동호회가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2010년에는 ‘아시아 태평양 페스티벌’을 유치하고, 올해 8월에도 ‘국제 하모니카 페스티벌(International Harmonica Festival)’을 주최하는 등 국제 교류도 활발합니다. 그리고 노인회나 의료기관의 환자 재활에도 하모니카 동호인들이 활약하고 있습니다.
하모니카 제작사는 45년의 역사를 가진 미화악기사가 유일합니다. 이 회사는 2008년부터 자체 브랜드의 하모니카를 시장에 공급하고 있는데, 회사 측은 국내외에서 평판이 좋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중국과 동남아시아, 그리고 브라질에도 하모니카 애호가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모니카 생산은 독일, 일본 및 중국이 주요 생산국으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생산에 노동력의 비중이 큰 만큼, 일본도 국내에서는 교육용으로만 생산하고 중국에서 주문생산을 하고 있습니다.
초등 4학년 때 털장갑 대신 산 악기
올해 92세인 저와 하모니카와의 인연은 열두 살이던 초등학교 4학년 때 시작됐습니다. 특별히 음악에 취미나 소양이 있는 어린이는 아니었으나 가끔 라디오에서 듣는 하모니카 연주가 어린 저를 홀렸습니다.
그러나 하모니카를 원한다고 사줄 가정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추운 겨울이 다가오자 어머니는 제게 털장갑을 사라고 30전을 주셨습니다. 제게는 큰돈이었는데 문득 이 돈으로 평소에 원했던 하모니카를 사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 학교가 끝난 뒤, 제가 찾은 곳은 장갑 가게가 아닌 악기점이었습니다. 지금 확실한 가격은 기억나지 않지만, 하여튼 그 장갑 살 돈으로 연습용 새 하모니카를 살 수 있었습니다. 당시 담배 한 갑이 5전 정도였다고 기억합니다.
장갑을 사오지 않은 저의 꼼수는 금방 탈이 났습니다. 인자하신 어머니는 크게 야단을 치기는 하셨지만, 하모니카를 빼앗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간단한 동요나 아리랑 같은 쉬운 노래는 독학으로 하모니카로 불 수 있었습니다.
중학교 입학으로 부모 밑을 떠나 진주에서 하숙을 하면서 객지의 외로움을 달랜 것이 이 하모니카였습니다. 당시 최고 인기였던 진주 출신 가수 남인수의 히트곡 ‘애수의 소야곡’ 외에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고복수의 ‘타향살이’ 등 당시에 배웠던 곡들을 지금까지 사랑하고 있습니다. 음악 소양이 없어 정식 악보는 읽지 못하는 처지지만 하모니카로는 동요, 유행가 등을 즐겨 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의 일제 하모니카는 광복의 혼란 속에서 행방불명이 되어 1950년 미국공보원에 근무할 때 피난 수도 부산에서 미국인 동료에게 부탁해 구입한 일제 하모니카를 지금까지 쓰고 있습니다.
하모니카는 들숨과 뱉는 숨으로 소리를 내는 리드(reed)가 교대로 배열되어 있어 나이 많은 분이 연주하기에도 별 어려움이 없는 단순하고 편리한 악기입니다. 노인들의 폐활량을 증강시키는 데 효과가 크다고 하니 늦다고 생각지 마시고 지금이라도 도전해볼 만한 간단한 악기입니다.
천년 제국 고구려를 되살리고 있는 작가 김진명의 ‘필생의 역작’인 대하소설 와 미국과 중국이라는 거대한 충돌의 그림자에 드리운 한반도의 운명을 그린 에 이은 2015년 또 하나의 대작 . 베스트셀러 상위 순위에서 한국 소설이 사라져가는 요즘, 나오는 책마다 베스트셀러를 기록해온 그의 이번 작품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침체된 한국 문단의 현실 속에서 빛을 내고 있는 작가 김진명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ay.co.kr
을 쓰게 된 계기와 이 책을 통해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중국대륙에 처음 세워진 나라는 은나라인데 중국의 고고학자들은 은나라가 한족이 아닌 동이족의 나라라고 결론내리고 있습니다. 동이족은 요하문명을 일군 주역으로 한족보다 오히려 일찍 북중국과 발해만 한반도 등에 자리를 잡았는데 오랜 역사가 흐르며 동이족은 모두 한족으로 흡수되고 우리 한민족만이 유일한 후예로 남았습니다. 글자전쟁은 한민족의 나라인 은나라와 은나라의 글자인 한자를 다시 생각하자는 뜻에서 썼습니다.
소설 속 소설이라는 구조가 독특합니다. 일반적인 구조와 비교해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두 다른 시대를 같이 보여줌으로써 주제의 시간적 영속성을 나타내려 했습니다. 즉 이 글자전쟁은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정체성의 위기를 고민하는 소설입니다. 현재의 우리는 문화, 역사, 가치관 등을 멀리하고 오로지 돈과 속도에만 빠져 사는데 이러면 결국 내면의 피폐함과 의미의 결핍에 빠져 결국 중국에 종속될 뿐이지요.
소설 속 소설가 전준우는 ‘문단에서는 그를 허구라는 장치를 사용하지만 드러난 사실보다 더 깊은 수면 아래의 진실을 캐낸다’는 뜻의 ‘팩트 서처’라는 별명을 가진 인물입니다. 어찌 보면 이는 김진명 작가와 닮은 것 같은데요. 혹, 전준우라는 인물은 작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인물은 아닐는지요.
물론 그렇습니다.
책을 읽고 실제로 ‘弔’와 ‘吊’이라는 한자에 대해 궁금하여 관련 자료를 찾아보려 했으나 간단치 않았습니다. 실제 글을 쓰면서 관련 자료를 찾고 연구하는 과정에서의 어려웠던 점은 없었나요?
문헌상의 모든 기록은 공자로부터 시작하여 사마천이 뒤를 채운 왜곡이며 조작입니다. 공자 한 사람이 자신이 살던 시대로부터 천 년이나 전에 존재했다 멸망한 은나라를 객관적으로 기술했다고 볼 수 없어요. 그래서 맹자는 공자가 쓴 역사책인 서경을 믿느니 차라리 없는 게 낫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 지경이니 문헌을 믿을 수는 없고 과거를 보는 과학인 고고학과 그들의 전횡을 꿰뚫는 집중적 사색이 필요하죠.
책의 띠지에 보면 ‘유일하게 남은 한 글자, 답(畓)을 지켜라!’라고 나와 있습니다. 책에서 ‘畓’이라는 글자에 대한 이야기를 흥미롭게 읽었지만, ‘유일하게 남은 한 글자’라고 표현한 것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습니다.
모든 한자가 다 중국에서 만들어진 건 아니라는 뜻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출판사의 홍보문구인데 표현이 지극히 논리적이지는 않은 것 같아요.
국내소설이 주춤하고 있는 요즘 은 아주 반가운 책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는 한편 6권을 기다리는 독자들도 많을 텐데요. 독자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고구려는 저의 필생 역작이라 함부로 써지지가 않습니다. 저의 기준이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삼국지보다 반드시 나아야 한다’이기 때문에 그간 반만 완성하고 지금 나머지 반을 깊이 구상하고 있습니다. 최근 좋은 플롯을 완성해 기쁩니다.
△ 김진명 작가
대표작 , , , , , 등
한 달쯤 전에 유럽 몇 개국을 오랜만에 여행하고 돌아왔습니다. 젊은 시절의 부푼 기대나 해방감, 잠자는 시간도 아까웠던 흥분은 이제 없었지만 며칠 동안이라도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은 홀가분하고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인기가 높은 ‘일상의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이 ‘여행의 기술’이라는 책에 썼듯이 “인생에서 비행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몇 초보다 더 해방감을 주는 시간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말을 실감했습니다.
외국에 나가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 속에 들어가는 것은 언제나 일상으로부터 헤어나는 일이며 나를 다른 세상에 세워보는 일입니다. ‘지금 여기’로부터 ‘다른 저기’로의 이동을 통해 인간은 삶에 활력을 불어넣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순전히 상한 삶을 새로이 하려는 시도가 여행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집에서 불편함을 느꼈던 샤를 보들레르(1821~1867)는 “늘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는 잘 살 것 같은 느낌이다. 어딘가로 옮겨가는 것을 내 영혼은 언제나 환영해 마지않는다.”고 썼습니다.
벨기에 여행 중 중풍으로 쓰러져 파리로 돌아온 끝에 사망한 보들레르는 일상이 기억나지 않는 곳, 다른 곳, 먼 곳, 다른 대륙으로 가는 걸 늘 꿈꾸었습니다. 그는 “삶은 모든 환자가 자리를 바꾸어야 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힌 병원”이라는 말도 했습니다. 이 환자는 난방장치 앞에서 앓고 싶어 하고 저 환자는 창가에 누워 있어야 나을 거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건강을 위해 걷는 사람들이 아주 많아졌지만, 그런 이들의 도보여행도 상한 삶, 모자라는 삶을 기우고 채우는 일입니다. 40일 가까이 걸어야 하는 스페인 ‘엘 카미노 데 산티아고’(산티아고에 가는 길) 순례를 다녀온 사람들도 많습니다. 나의 선배 한 분은 그 길을 걷는 동안 세 번을 울었답니다. 어느 성당 앞에 혼자 앉아서 종소리를 들으며 저녁노을을 볼 때, 들판 가득 메운 빨간 양귀비를 흔드는 바람 속에 꽃과 함께 섞였을 때, 비가 갠 다음 날 아침 곱다 못해 서러운 일출을 보았을 때 어디서 온 건지 알 수 없는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고 합니다.
이 여행으로 그는 맑아져 돌아왔습니다. 그 맑음과 성취감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좋은 자양분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반드시 외국이 아니더라도 낯선 곳으로 가는 것, 모르는 풍광과 사람을 접하며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은 모두 다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꽃 핀 봄밤의 즐거움을 노래한 이백(李白)의 시 ‘춘야원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는 “무릇 하늘과 땅은 만물의 여관이요/세월은 영원한 시간의 나그네로다”[夫天地者萬物之逆旅 光陰者百代之過客]라고 시작됩니다. 이어 “덧없는 인생 꿈과 같으니 즐거움을 누린다 한들 얼마나 되랴/옛사람이 촛불을 밝히고 밤에 논 것은 과연 그 까닭이 있도다.”[而浮生若夢 爲歡幾何 古人秉燭夜遊良有以也]라고 했습니다.
세상이라는 여관에 머무는 우리들 나그네는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언론인 오소백(吳蘇白·1921~2008)은 ‘단상’이라는 글에서 “여행량은 인생량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세계는 한 권의 책이며 여행하는 사람은 한 페이지밖에 못 읽는다.”고 했지만, 그럴수록 더 여행을 해야 합니다. 릴케가 ‘말테의 수기’에 썼듯이 시는 감정이 아니라 사실은 경험입니다. 이 경험을 구성하는 게 인간과 사물에 대한 학습, 그리고 미지의 세계와 세상에 대한 여행 아니겠습니까?
개인의 여행은 그 자신의 삶은 물론 세상에 대해 많은 변화를 몰고 옵니다. 모로코 출신 중세 이슬람의 여행가 이븐 바투타(1304~1368)는 인도와 중국을 여행하는 데 체류기간까지 합쳐 25년이 걸렸습니다. 64년의 생애 중 25년이면 철들고 나서 절반의 생애를 바친 셈인데, 그의 여행을 통해 세계는 좀 더 가까워지게 됐습니다. 그보다 앞서 중국 천축 등을 24년간 여행한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상인 마르코폴로(1254~1324)의 ‘동방견문록’이 세계사, 특히 서양사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습니다.
동양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여행에 대해 발섭(跋涉)이라는 말을 써왔습니다. 시경에 나옵니다. 발은 넓은 광야를 걸어가는 것, 섭은 물을 건너가는 것입니다. 여행이란 광야를 걷고 물을 건너가는 일입니다. 여행의 규모와 거리에 대해서는 장자의 붕정만리(鵬程萬里)라는 말이 동양의 언어를 지배해왔습니다. 상상의 새인 붕(鵬)은 크기가 몇 천리가 되는지 모를 정도이며 물을 치면 3천리에 파도가 일고 회오리를 일으켜 날아오르면 높이가 9만리에 이르는데, 6개월을 날아서야 한 번 쉰다고 합니다. 원대한 뜻을 지닌 사람의 일은 소인배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크다는 뜻이지요. 같은 여행을 하더라도 남기는 것은 서로 다릅니다.
어떤 이들이 ‘세계 최고의 여행기’라고 상찬하는 연암 박지원(1737~1805)의 ‘열하일기(熱河日記)’는 중국 문명과 문물에 대한 정밀하고 방대한 관찰과 기록이 읽는 이를 압도합니다. 연암은 이 책의 ‘도강록(渡江錄)’에서 아득하고 묘막(渺漠)한 요동벌판에 이르러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오늘에야 비로소 사람이란 본시 어디고 붙어 의지하는 데가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아 다니게 마련임을 알았다.” 그리고 “좋은 울음터로다. 한바탕 울 만하구나”[好哭場 可以哭矣]라는 고금에 빛나는 멋진 말을 합니다.
엘 카미노 데 산티아고의 도보여행객이 흘린 소리 없는 눈물과, 여기 나오는 연암의 소리 내는 울음은 다릅니다. 연암은 ‘울음터’ 다음에 인간이 꼭 슬퍼서만 우는 게 아니라는 긴 울음론을 펼치는데, 두 경우 다 슬퍼서 우는 건 아닙니다. 인간의 본질과 근원에 대한 인식이나 깨달음에서 비롯된 울음이지요. 작고 소박하고 아름다운 것과, 거대하고 웅장해 숭고미를 느끼게 하는 것을 볼 때의 울음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여행은 기록입니다. 아니 여행은 기록이라야 의미가 있습니다. 현장이 중요합니다. 소설가 김연수는 어떤 작품은 중국 옌볜(延邊)에서, 어떤 작품은 독일에 가서 썼습니다. 머무는 동안 그곳의 책을 많이 사서 보았다고 합니다. 여행이라는 직접 경험에다 독서라는 간접 경험을 결합한 글쓰기인데, 독서와 여행의 중요성을 갈파한 ‘독만권서 행만리로(讀萬卷書 行萬里路)’가 바로 이런 경우일 것입니다.
파스칼은 “인간의 불행의 유일한 원인은 자신의 방에 고요히 머무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라고 했지만, 한 번 생을 받아 이 땅에 온 사람은 세상을 남김없이 돌아 괴테처럼 ‘하늘이 어디서나 푸르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 고요하게 자신의 방에 머물러도 될 것입니다. 누군가와 함께, 아니면 여럿이서 여행하는 것에 관해서는 이번에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중국대륙을 명멸(明滅)한 수많은 문인들 중 가장 존경하는 사람을 꼽으라면 진사왕(陳思王) 조식(曹植)을 들며, 가장 좋아하는 문인을 들라면 동파(東坡) 소식(蘇軾)을 꼽는다. 조식을 존경하는 이유는 그의 천재성 때문이며, 소동파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의 낙관적 삶의 태도 때문이다. 그의 불후의 명작이자, 인류의 소중한 문학유산인 는 바로 그의 이러한 삶의 태도가 가져다 준 결과물이라 하겠다.
명문가 출신에 과거까지 장원급제하여 승승장구하던 그는, 44세 되던 해 소위 오대시안(烏臺詩案) 사건으로 알려져 있는 무고(誣告)를 받아 투옥된 후 죽음의 위기에 처한다. 이후 여러 사람들의 구명운동에 힘입어 46세 되던 2월에 호북성(湖北省) 황주(黃州)에 유배되는데, 이때 마몽득(馬夢得)이란 지인이 제공한 몇 고랑의 땅을 출생 이후 처음으로 경작하여 기근을 면하여야 하는 처지로 전락하니, 그 고초와 역경은 이루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이때부터 자신의 호를, 고생 끝에 손수 개척한 ‘동쪽 언덕’을 뜻하는 ‘동파(東坡)’ 또는 ‘동파거사(東坡居士)’라 칭하게 된다. 그가 거처하던 황주에는 적벽강(赤壁江)이란 조그만 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이 궁벽진 촌구석의 쪽강에 쪽배를 띄워놓고, 당시로서 약 1,100년전 가어현(嘉魚縣)의 북동, 양자강(揚子江) 남안의 적벽(赤壁)에서 벌어졌던 삼국시대 적벽대전(赤壁大戰)을 상상하며 지은 글이 바로 다. 주목할 점은 이 천고의 명문 어디에도 그가 겪는 생활의 고초에 대한 표현은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생각건대 아마도 이러한 상상의 나래가 그 어려운 나날을 지탱해 나가도록 만든 원동력이었을 것 같다.
이달엔 그가 섣달 그믐밤 상주성(常州城) 밖에서 야숙을 하며 지은 란 시의 마지막 두 구절을 소개할까 한다. 이 시의 소개에 앞서, 당시 중국사람들이 새해를 맞아 마시던 도소주(屠蘇酒)란 약주(藥酒)를 먼저 설명하여야 할 것 같다. 이시진(李時珍)의 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새해 아침에는 온가족이 동쪽을 향해 앉아, 나이어린 사람부터 나이 많은 사람 순으로 도소주를 마시니, 도소주를 담그고 난 약재를 우물 속에 던져 넣어 한 해 동안 이 물을 마시면 병을 앓지 않는다.’
보통 술을 마실 때는 나이든 사람부터 먼저 마시는 것이 예법인데, 도소주만은 그 반대로 연장자가 가장 늦게 마시니, 연장자가 젊은이처럼 오래 장수하길 바라는 마음이 스며 있는 예법이라 하겠다.
但把窮愁博長健(단파궁수박장건)
곤궁함의 근심을 붙잡아 늘 건강함으로 바꿀 수 있다면
不辭最後飮屠蘇(불사최후음도소)
도소주 마지막에 마시는 것쯤이야 사양치 않겠네...
나이가 드니, 병도 나고 생활의 곤궁함도 피할 수가 없었으리라. 그러나 그는 이러한 처지를 오히려 역설적으로 외친다. 나이 먹는 것과 건강함을 바꿀 수만 있다면, 나이 먹는 것쯤이야 얼마든지 사양치 않겠노라고... 같은 의미지만 바라보는 시각이 다른 것이다. 에 나오는 두보의 구절과 비교해 보시라. 필자가 소동파를 좋아하는 이유이다.
多病所須唯藥物(다병소수유약물)
여러 가지 병 때문에 구하고자 하는 것은 오직 약물이니,
微軀此外更何求(미구차외갱하구)
미천한 이 내 몸이 그 외 무엇을 구하리오
하태형(河泰亨)
뉴욕주립대(빙햄턴) 경제학박사
보아스 투자자문 대표이사
수원대 금융공학대
학원장 등 역임
현재 현대경제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