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자유 해방의 흰색 날개를 몸 어딘가에 숨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하늘로 날아올라 들국화 만발한 넓은 들판을 밝은 눈으로 보게 되리라. 매년 가을 러시아의 거장 톨스토이와 차이콥스키, 도스토예프스키를 한 번쯤은 만나봤을지 모를 기러기들을 보러 철원으로 떠난다는 90대 청년. 캠핑 속에서 끊임없이 답을 찾고 우주를 품는 마음으로 평생을 살아온 진정한 캠핑 선구자 박상설(朴相卨·91) 씨를 만났다.
지하철 1호선 양주역에서 내려 또 시내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서 내리니 신축 아파트가 들어선 신도시가 눈에 들어왔다. 캠핑과 함께한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듣고자 한다면 직접 집으로 찾아오라고 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서 있는 박상설 씨가 반갑게 맞이한다. 집 안으로 들어가 보니 남자 혼자 사는 집이 맞나 싶을 정도로 깔끔했다. 서가에는 캠핑과 관련한 각종 서적들과 심리학 책 등이 보였다. 방 안에는 당장이라도 어디론가 훌쩍 떠날 때 입을 등산복들이 걸려 있었고, 강의할 때 사용하는 프로젝터와 각종 캠핑 도구들이 곳곳에 있었다. 집 안 구석구석에는 세월을 가늠케 하는 책처럼 90년 넘게 살아온 이 남자의 이력을 상징하는 것들로 가득했다. 칼럼니스트, 자연과 삶의 전문기자, 기계기술사 등 명함에는 다양한 직업이 적혀 있었다.
사색하는 아버지와 자연 속으로 여행하다
그가 기억하는 최초의 캠핑 장소는 소양강변이라고 했다. 일제강점기,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난 박상설 씨는 법무사였던 아버지 덕에 불편함 없는 유년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가 법원을 드나들다 보니 일본인 판검사들과 친분이 생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국어를 할 줄 몰랐던 그들은 통역이 가능한 아버지를 자주 찾았어요. 그들과 관계를 하면서 일본의 캠핑 문화를 접하게 된 거죠.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여섯 살 무렵에도 아버지와 함께 캠핑을 했을 거예요. 초등학교 운동회 때 쓰는 큰 타프 있잖아요? 해 가리개요. 그걸 강가에 친 뒤 그 아래 평상을 놓고 모기장을 쳤어요. 아버지는 낚시도 하고 책도 읽으시고요. 텐트 치고 여름을 즐기는 집은 당시 우리 집밖에 없었을 거예요. 캠핑은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접했습니다. 사람은 어떻게 살아왔느냐에 따라 습관이 생기잖아요.”
인문학을 좋아하고 책 읽기를 좋아하던 아버지 손에 이끌려 간 곳은 책이 즐비한 도서관이 아닌 대자연 속이었다. 그 뒤 시간이 흐르고 대학교를 졸업할 무렵 한국전쟁이 터졌다.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기계공학과 출신인 박상설 씨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육군 공병으로 입대했다.
“미군에서 지원해준 불도저나 글라이더 같은 중장비를 다루는 유일한 공병 중대였습니다. 다른 군인들이 총 들고 싸울 때 저는 대한민국의 길을 닦았어요. 텐트생활을 하면서 계속 이동해 다녔고, 중대장이 된 뒤에는 미군용 CP텐트를 썼는데 꽤 컸어요. 난로와 침대도 있었고요. 다른 사람들은 천막생활을 모를 때였죠. 군대에서 뭐가 제일 좋았냐고 물으면 텐트생활이 가장 좋았다고 말합니다.”
집을 짓고 사는 것은 가짜라고 생각했다. 집은 그에게 있어서 어두컴컴한 박쥐 둥지였다. 박쥐가 사는 곳은 아무리 좋아도 답답한 동굴 속이다.
“박쥐 둥지를 떠나게 해준 것이 텐트였죠. 그리고 책도 있었어요. 셰익스피어, 하이네, 루소의 책을 읽다 보니 캠핑의 의미가 더 선명해졌습니다. 어려서부터 캠핑을 해서 그런지 집에서 사는 게 제일 싫었어요. 특히 기와집이요. 그래서 노마드 보헤미안이 되고 말았죠.(웃음) 풀벌레 소리와 빗소리가 저는 정말 좋습니다.”
인문학과 정서가 스며야 진정한 캠핑이다
캠핑 인구가 100명도 안 됐던 시절,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듯 조금씩 캠핑 문화를 만들어갔다. 한국에 오토캠프의 씨를 뿌린 사람도 박상설 씨였다. 하지만 캠핑이 이뤄지는 행위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의 깨달음에도 집중한다고 했다.
“남이 하니까 부러워서 좇아다니는 것은 캠핑이 아니에요. 텐트 안에 들어가 있으면 우주를 품은 거 같습니다. 예를 들면 그 안에서 전혜린의 책을 읽으면 미쳐버릴 것 같은 감동이 밀려옵니다. 그래서 저는 텐트를 친다고 표현하지 않고 품는다고 말합니다. 정치인의 스캔들이나 세상 떠도는 소문에 관심을 갖는 것은 바보 같은 짓입니다. 우리는 그저 자연과 우주의 섭리에 의해 사는 거죠.”
박상설 씨는 전 세계를 여행하면서 단 한 번도 호텔에서 잔 적이 없다고 했다. 친척집이나 지인의 집에서 자는 일이 생겨도 마당에 텐트를 치고 잔다. 사람들은 집 안으로 들어와 자라고 하지만 고사한다. 그는 건물 속에서 자는 사람이 오히려 불쌍해 보인다고 했다.
“사막에는 꼭 가봐야 해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수많은 별이 쏟아집니다. 알래스카 자작나무 밑에서도 자봐야 해요. 호수가 참 많은데 아침에 일어나서 모닥불 피우고 커피 한잔하고 있으면 사슴이 다가와 5분이고 10분이고 서서 먼 산을 쳐다봅니다. 그 정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아요? 캠핑 문화는 알프스 사람들의 목가적 생활에서 시작됐습니다. 알파인 문화라고 하죠. 우리나라 사람들의 캠핑은 알파인 문화를 알고 정서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하니까 따라 하면서 장비 자랑하러 다니는 것 같아요. 목가적인 여유를 즐겨야 하는데… 캠핑장도 너무 갑갑해 보입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캠핑장 안 텐트의 간격이 너무 좁아요. 오토캠핑을 제가 소개했지만 이렇게 변형되어 참 안타깝습니다.”
벼랑 끝에서 다시 시작한 캠핑
군 생활 10년 동안 한 가정의 가장이 됐고 아이들이 태어났다. 종전 후 밥벌이를 못하게 된 아버지를 대신해 누나와 여동생까지 공부시키고 시집보내야 했다.
“그때는 정말 버거웠습니다. 군대 월급이
1만5000원밖에 안 될 때였습니다. 제가 벌어먹여야 하는 사람이 저 포함해서 열세 명이나 됐어요. 부업으로 학원 선생을 했어요. 다른 사람들 10만 원 받을 때 저는 50만 원 받는 실력 있는 강사였습니다.”
아무리 벌고 또 벌어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한동안은 죽을 생각에 호주머니에 늘 나일론 끈을 넣고 다녔다.
“그때 장 자크 루소의 ‘에밀’을 읽고 자연에 대해 알게 됐어요. 죽으면 안 되겠구나 하고 끈을 버렸어요.”
1963년 육군 공병 대위로 제대한 후에는 신흥건설종합설계회사에서 근무했다. 당시 부업으로 용산구 보광동 지역 토지를 외상으로 구입해 건설자재 후불 조건으로 15평짜리 집 10채를 지어 큰 수입이 생겼다.
“뭘 할까 고민하다 땅을 사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한 평당
5원 하는 가평의 임야 30만 평을 매입했는데, 캠핑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그동안 주말농장 운영과 함께 인문학 강의도 하면서 지냈어요. 서른일곱 살 때부터 했으니 벌써 54년이 됐네요.”
‘캠프나비’라고 이름 지은 그의 농장은 현재 강원도 홍천에 있다. 2000평이나 되는 농장에는 들국화도 피고 각종 채소와 과일들이 자란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워크숍이 열린다. 인문학 세미나장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잘 지은 건물은 없다. 비닐하우스가 있을 뿐이다. 아이와 어른이 만나 세대를 뛰어넘는 대화를 나누고 잠을 잘 때는 농장 곳곳에 텐트를 친다. 틀에 짜인 도시형 캠핑은 거부한다. 참된 자유를 알고, 본성 찾기를 권하기 때문이다.
길을 걷다가 죽기로 했다
그는 지금도 가끔씩 캠핑을 즐긴다. 생각나면 바로 실행에 옮기고 미루지 않는다. 91세 할아버지가 혼자 산다면 사람들은 그의 자식들에게 손가락질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세간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는다.
“사람은 어차피 혼자 살아갑니다. 혼자 산 지 33년 됐어요. 이제는 식구하고도 같이 못살죠. 제 자식들과 손주들도 캠핑을 좋아합니다. 대기업 다니는 손주는 결혼 비용을 아껴 주말농장을 샀어요. 우린 이메일로만 연락을 주고받아요. 아흔 살, 백 살이 되면 이렇게 살아야지요. 왜 내가 아들네 집, 딸네 집에 가서 살아야 하나요.”
박상설 씨는 이미 죽음의 문턱을 한 번 넘어갔다 왔다. 환갑 무렵 뇌졸중으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됐다. 그의 건강을 다시 찾아준 것은 의술이 아닌 캠핑이었다. 가족한테도 알리지 않고 아메리카 대륙을 횡단했다. 그러자 움직이지 않던 몸이 서서히 좋아지면서 펴졌다. 자신감이 되살아났고, 길 위에서 삶의 방향을 잡고 살아왔다.
“나이가 아흔하나면 세상 떠나는 날이 내일이 될 수도 있고 모레가 될 수도 있어요. 언젠가는 죽죠. 지금 내가 이렇게 떠들지만 오래 살아봐야 백 살이겠죠. 9년밖에 안 남았습니다.”
그는 82세에 집을 나간 뒤 길을 걷다가 빈촌의 기차역장 집에서 폐렴으로 열흘 만에 생을 마감한 러시아 문학의 거장 톨스토이의 이야기를 해줬다.
“얼마나 멋진 죽음이야. 물론 톨스토이를 흉내 내려는 건 아니에요. 아들딸들도 내가 걷다가 죽기를 원할 거야. 충분히 잘 알기 때문에. 나는 여행할 때마다 시신기증등록증과 약간의 돈을 목에 걸고 다닙니다. 죽으면 제 몸은 대학병원 해부학 교실로 들어가요. 그럼 영안실이 필요 없겠죠.”
주변에 자신이 죽었다는 것도 알리지 말고, 조의금도 받지 말고, 제사상도 차리지 말라고 했다. 어느 날 딸이 “아빠가 보고 싶으면 어떻게 해?”하고 물었단다.
“제가 가을에 핀 들국화를 제일 좋아하거든요. 길을 걷다가 야생 국화를 보면 ‘아버지가 참 좋아하셨는데…’ 그렇게 스쳐가듯 가끔씩 생각해주면 된다고 했습니다. 캠핑은 인생에서 우러나와야만 제대로 발현되는 정서 운동입니다. 일평생 하고도 화장터에 갈 때까지 해야 하는 것, 그것이 캠핑입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이런 의문에 대한, 스스로 미욱하게 풀어낸 해답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부족한 재주로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틀릴 수도 있다. 여러분의 올곧은 지적도 기대한다.
‘우짜우짜우짜짜’라는 ‘우스개 표현’이 있었다. ‘웃기는 짬뽕, 날으는(나는) 골뱅이’라는 표현도 있다. 1980년대 후반, 이 말을 처음 쓴 사람은, 영화감독 이규형 씨다. 중식, 그중에서도 자장면, 짬뽕이 널리 퍼졌던 시기다.
자장면은 역사가 길다. 중국 서민의 음식이다. 한반도도 마찬가지. 한반도로 건너온 가난한 이들, 화교들의 길거리에서 한 끼 때우는 간단한 음식이었다. 한반도에서 새롭게 만든 음식도 아니다. 원래부터 중국 서민들의 식사였다. 우리로 치자면 된장찌개, 김치찌개 정도의 음식이다. 이것이 식당의 정식 메뉴가 되었다.
자장면은 한반도의 한식을 잘 보여준다. “자장면이 무슨 한식의 특징?”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도 많겠다. 잘 몰라서 하는 소리다. 자장면은 이제 한식이 되었다. 중국의 원형 자장면과는 맛이 완전히 다르다. 원본은 중국의 것이지만 우리의 ‘웃기는 짬뽕’이나 ‘우짜우짜’는 한반도의 음식이 되었다.
‘우짜’는 우동과 자장면(짜장면)을 의미하는 말이다. 사무실에서 야근을 할 때면 “난 우동, 난 짜장”이라고 외쳤다.
“우동이 웬 중식?” 하며 의심할 필요는 없다. 짬뽕의 원형은 우동이다. 짬뽕은 오랫동안 ‘중화(中華)우동’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일본에는 지금도 ‘중화우동’이 있다는 사실이다. ‘주카우동’이라고 표현한다.
우리는 중화우동 메뉴를 없앴다. 대신 가락국수, 일본식 우동 그리고 짬뽕을 남겼다. 한반도의 짬뽕은 요란하다. 종류가 많아졌다. 해물짬뽕이 있는가 하면, 매운 짬뽕도 등장한다. 채소짬뽕, 김치짬뽕도 있다. 일부 지방에는 돼지고기를 얹은 돼지짬뽕이라는 메뉴도 있다. 그야말로 짬뽕 천지다.
자장면도 마찬가지. 중국에도 없는 간자장에 느닷없는 삼선자장까지 생겼다. 삼선은 ‘삼선(三鮮)’이다. 신선한 해물 세 가지라는데, 물론 엉터리 조어다. 원래 중식당에서 사용했던 ‘해선(海鮮)’과 ‘삼(三)’을 더한 한국식 조어다.
한반도는 ‘음식의 용광로’다
자장면은 작장면(炸醬麵)이다. 중국식 발음으로 ‘자장미엔’쯤 된다. 자장미엔이 한반도에서 자장면으로 바뀌었다. 작장면(炸醬麵)의 ‘작(炸)’은 ‘터지다’, ‘튀기다’라는 뜻이 다. ‘튀기거나 터트린 장을 면에 얹은 음식’이 자장면이다. 기름을 두른 웍(wok)에 장을 볶으면 마치 기름에 장을 튀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고열 상태에서는 장이 마치 작은 폭죽처럼 터지는 현상도 볼 수 있다. 웍에 장을 볶아보면 ‘자장[炸醬]’이란 이름의 의미를 알 수 있다.
중국 자장미엔의 핵심은 장(醬)이다. 장 중에서도 중국식 ‘첨면장(甛麵醬)’이다. ‘첨(甛)’은 ‘달 감(甘)’과 ‘혀 설(舌)’이 어우러진 글자다. ‘혀에 달다’는 뜻이다. 첨면장은 면을 달게 만드는 장이다. 국수를 먹는데 그 국수를 달게 만들어, 잘 먹게 만든다는 뜻이다.
국수에 볶은 첨면장을 얹어서 먹는 음식은 된장찌개에 밥을 비빈 우리 음식과 비슷하다. 가장 기본적인 서민의 음식이다. 중국 산동성 등에서 널리 먹었다.
흔히 ‘북경 자장면’이라고 하는데 북경 자장면도 유래는 산동성 언저리다. 중국 역시 1950~60년대에 ‘국민 건강을 위해’ 돼지고기 등을 널리 보급했다. 국수[麵, 면]에 장(醬)을 더한, 가난한 이들의 음식에 영양분이 많은 돼지고기를 더한 것이다. 중국 첨면장을 넣고 잘게 썬 돼지고기를 볶는다. 볶은 장을 국수에 얹어서 비벼서 먹는다. 현대적인 중국 자장면이다. 돼지고기와 기름이 장과 어우러져 맛을 더한다.
첨면장은 밀가루와 콩을 이용해 만든다. 콩으로 만드는 경우도 있지만, 산동성 등지에서는 ‘밀가루+콩’으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한반도로 건너온 화교들도 첨면장을 만들었다. 오늘날 ‘춘장’이라고 부르는 장이다. 중국 첨면장의 변화는 한반도 자장면의 변화다. 첨면장이 바뀌면서 ‘중국 작장면’이 한반도의 자장면으로 바뀐다.
자장면이 처음 한반도에 등장한 것은 1894년 청일전쟁 무렵이다. 많은 중국 병사가 한반도로 건너왔다. 군대가 움직이면 군인, 상인, 가난한 서민들이 따라 움직인다. 중국 대륙 역시 기근, 홍수, 각종 질병에 시달렸다. 가난한 이들이 군대를 따라 대거 인천으로 몰려들어 중국인 거주 지역에 모여 살았다. 바로 차이나타운이다. 항구는 교통의 요지다. 사람과 물자가 움직이고, 이들이 사용하는 물건, 용역을 공급하는 이들이 나타난다. 가난한 이들이 살 수 있는 터전이다.
자장면은 이들의 일상적인 식사였다. 길거리에서도 그릇 하나에 면과 볶은 첨면장을 더한 다음 비벼 먹었다. 이 음식이 당시의 ‘공화춘’을 비롯한 여러 중화요릿집 메뉴로 등재되었다.
당시 유명 식당 중 하나였던 ‘공화춘’의 후손이 현재 인천 차이나타운에서 ‘신승반점’을 운영하고 있다. ‘신승반점’에는 유니자장이 있다. ‘유니[肉泥]자장’은 돼지고기를 잘게 썰거나 다진 다음 첨면장에 볶아서 만든다. 일반적인 자장면이 아니라 돼지고기를 듬뿍 넣은 자장면이다.
중식당의 원래 이름은 청요릿집이었다. ‘청’은 청나라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후까지 중식당은 청요릿집으로 불렸다. 음식 가격은 비쌌다. 서민들이 가기에는 부담스러운 장소. 음식점도 아니고 요릿집이었다. 팔보채, 난자완스, 탕수육, 양장피 등 고급 안주, 요리를 내놓던 곳이었다. 자장면은 예나 지금이나 가격이 싼 중국 서민들의 식사였다. 고급 청요릿집에 ‘주인공’으로 끼어들기는 힘들었다. 유니자장 같이 비교적 고급스러운 음식은 청요릿집 코스 중 하나였다.
첨면장의 진화, ‘자장면’
공식적으로 1955~65년까지 11년 동안 미국의 잉여농산물인 밀가루가 한반도에 대량 공급되었다. 1955년부터 공식적으로 시작된 미국의 밀가루 대량 공급은 끼니가 힘들었던 가난한 한반도의 식량난을 어느 정도 해결했다. 국수 공장이 대거 들어서고 수제비가 가난한 이들의 끼니가 되었다. 중식당에서는 밀가루를 이용한 그들 스타일의 ‘자장면’을 만들기 시작했다. ‘국수+첨면장’으로 만드는 자장면. 밀가루가 해결되고 나니, 이번엔 첨면장이 문제였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이후까지 화교 중식당들은 인근 화교 가정에서 만든 첨면장을 사용했다. 일상적으로 먹고 남은 첨면장을 화교 식당에 공급했다. 자장면이 급속히 확대, 공급되었다. 문제는 역시 첨면장이었다. 화교 민가에서 모으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가내수공업 식으로 만들어도 공급은 한계가 있었다. 외식을 할 만한 식당이 터무니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중식당의 자장면 수요가 급격히 늘어나자 공장에서 대량으로 첨면장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색깔이 검지 않다. 오래 묵은 첨면장은 색깔이 검다. 검은 색깔? 캐러멜 색소로 해결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한반도의 자장면, 첨면장은 진화한다.
원형 첨면장은 농도가 짙다. 뻑뻑하다. 잘 비벼지지 않는다. 지금도 북경 등에서 만나는 자장면은 뻑뻑해서 비비기가 힘들다. 그래서 자장 소스를 묽게 만들었다. 전분을 풀고 양파나 감자, 당근, 대파, 호박 등을 썰어 넣었다. 한국인들은 돼지고기가 들어간, 기름진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느끼한 음식은 반드시 채소와 더불어 먹는다. 그래서 자장 소스에 각종 채소, 캐러멜색소, 각종 감미제, 조미료를 넣었다.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자장면 소스다. 중국 첨면장에서 출발했지만 한반도 방식으로 대거 바뀌었다.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자장면은 심하게 변화, 왜곡되었다. 원형 자장면은 돼지기름을 사용했다. 어느 순간 “동물성 기름보다는 식물성 기름이 건강에 좋다”는 엉뚱한 오해가 널리 퍼졌다. 전 세계의 중식당들은 대부분 ‘라드(rard)’라고 부르는 돼지비계를 사용한다. 우리나라는 돼지고기 기름을 콩기름으로 바꿨다.
“중국에 자장면이 있다? 없다?”를 묻는 질문은 얼마 전까지도 상당히 어려운 퀴즈였다. 중국에는 자장면이 있기도 하지만 없다고 해도 옳다. 이도저도 아닌 대답인데, 이게 정답이다. 한반도의 자장면은 변형이다. 비비기 좋고, 튀기거나 볶는 것보다는 채소를 많이 넣고 끓이는 방법을 택했다. 중국 자장면과 다르다. 중국인들은 우리 자장면을 ‘한청자장미엔[漢城炸醬麵]’이라고 부른다. 한성, 서울식, 한국식 자장면이라는 뜻이다. 좋든 싫든 자장면은 이제, 한식이 되었다.
황광해 맛 칼럼니스트
연세대학교 사학과 졸업, 경향신문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년간의 기자생활 동안 회삿돈으로 ‘공밥’을 엄청 많이 먹었다. 한때는 매년 전국을 한 바퀴씩 돌았고 2008년부터 음식 공부에 매달리고 있다. KBS2 ‘생생정보통’, MBC ‘찾아라! 맛있는 TV’, 채널A ‘먹거리 X파일’ 등에 출연했다. 저서로 ‘한국 맛집 579’, ‘줄서는 맛집’, ‘오래된 맛집’ 등이 있다.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장면, 그리고 말이 있습니다. 2015년 7월 31일 독일 통일의 상징인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앞 야외무대에 세계적인 소프라노 조수미 씨가 오릅니다.
“제가 부를 곡은 저뿐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뿐만 아니라, 세계 사람들이 원하고 갈망하는 곡일 수 있습니다. 통일이 빨리 되어서, 제가 부르는 이 ‘그리운 금강산’이 오늘 이 베를린에서 마지막이 되기를 바랍니다. 더 이상 그리운 금강산이 아니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금강산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리운 금강산’을 부르겠습니다.”
광복 70주년을 기념해 열린 ‘유라시아친선특급’ 폐막 음악회, 그리고 앙코르 곡으로 ‘그리운 금강산’을 부르기에 앞서 조 씨가 한 말이 4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합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해 모스크바와 벨로루시, 폴란드를 거쳐 독일 베를린까지 19박 20일 동안 대륙횡단열차를 탔던 학생, 시인, 소설가, 화가, 경찰, 소방관, 기자, 음악가, 교수, 관료, 정치인, 독립운동가 후손 등 각계각층에서 참여한 원정 대원 400여 명은 조 씨의 발언에 뜨거운 박수를 보내며 진한 공감을 표시했습니다.
하지만 조 씨와 원정 대원, 그리고 국민 모두의 간절한 소망과 달리 달라진 건 하나도 없습니다. 그 사이 남과 북, 미국의 정상이 숨가쁘게 만나는 등 희망을 키우고 있지만 아직 이렇다 할 가시적인 성과는 없습니다. 금강산은 여전히 ‘그리운 금강산’입니다. 여전히 갈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그리운 금강산입니다. 그런 씻기지 않는 갈증과 그리움을 다소나마 해소해주는 ‘우리 꽃’이 있습니다. 특산 식물인 봉래꼬리풀이 그 주인공입니다.
봄 금강(金剛), 여름 봉래(蓬萊), 가을 풍악(楓嶽), 겨울 개골(皆骨). 계절마다 각기 다른 풍광을 자랑하기에 그 이름을 달리 불렀다는 금강산. 여름이면 1만2000 봉우리마다 계곡마다 온갖 나무와 풀들이 푸름을 뽐낸다고 해서 쑥과 명아주를 뜻하는 한자어 ‘봉래(蓬萊)’란 이름을 얻은 금강산. 그곳에서 여름철이면 꼬리 모양의 꽃을 피운다고 해서 봉래꼬리풀이란 국명을 얻었습니다. 학명 중 변종명 ‘디아만티아카(diamantiaca)’는 봉래꼬리풀이 처음 채집된 장소가 바로 ‘Diamond Mountain’이라는 영어명으로도 불린 금강산이며, 한국의 고유 식물이었음을 말해줍니다.
높이 20cm 안팎으로 자라며, 달걀 모양으로 마주나는 잎의 표면은 녹색이고 뒷면은 붉은빛이 돕니다. 7~8월 원줄기와 가지 끝에 연한 보라색 꽃이 원뿔 형태로 줄줄이 달립니다.
Where is it?
금강산에 자생하는 봉래꼬리풀이 남한에서 처음 발견된 것은 1990년대 초. ‘설악산의 꽃’을 찾아 나선 식물학자와 야생화 사진작가, 동호인 등이 설악산 마등령과 서북능선, 안산 등지에서 자라는 봉래꼬리풀을 잇따라 확인한 것. 이에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은 봉래꼬리풀이 “금강산 비로봉의 사스래나무와 눈잣나무의 숲속에서 자라며, 강원도 속초시와 인제군에도 분포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케이블카를 타고 5분여 만에 오르는 권금성 바위 더미 사이사이에서도 만날 수 있다. 울창한 숲이었으나 케이블카 운행으로 숱한 관광객이 오가면서 대머리 돌산처럼 변한 권금성 곳곳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어 놀랍고 반갑다. 미시령 옛길 주변에서도 울산바위를 바라보고 당당하게 선 봉래꼬리풀을 만날 수 있다.
‘2019 서울 아프리카 페스티벌’이 5월 25일(토) 오후 1시부터 8시까지 왕십리역 광장에서 열렸다.
올해로 4회째를 맞은 서울 아프리카 페스티벌(Seoul Africa Festival)은 ‘서울에서 만나는 아프리카의 다양한 매력’이라는 캐치 프레이즈를 내걸고 아프리카 음식과 공예품, 춤, 음악 등을 접할 수 있도록 마련된 자리다. 아프리카 인사이트가 주관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아프리카연구소 HK사업단과 아프리카 7개국 대사관, 아프리카 관련 학술기관, NGO 등이 참여한다.
신나는 음악과 원색의 화려한 의상이 넘실거리는 축제장은 아프리카를 비롯한 전 세계에서 모인 사람들로 생동감이 넘쳤다. 라이브 드로잉, 헤나타투(이내 지울 수 있는 문신), 페이스 페인팅 등 다양한 문화체험프로그램이 운영되었고 노래, 아프리카 댄스, 젬베(타악기의 일종) 등 열정적인 무대공연이 펼쳐졌다. 올해 처음으로 진행된 프로그램인 ‘아프리카 갓 탤런트’에는 일반인들이 참여하여 끼와 열정을 마음껏 뽐냈다.
참여 부스 가운데 팅가팅가의 선명하고 화려한 그림들이 눈길을 끌었다. 팅가팅가는 에드워드 사이디 팅가팅가(1932~1972년)가 개척한 아프리카 현대미술의 장르로 고대 원시적 동물들과 생활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탄자니아의 예술가들이 참여한 팅가팅가는 원색적이면서 정감 있게 아프리카를 표현하고 있다. 아프리카의 토속 의상들과 공예품들을 찬찬히 구경하다 출출하다 싶으면 세모난 만두처럼 생긴 사모사와 꼬치구이로 배를 채우고 음료를 한잔 사들고 그늘진 자리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가족단위 관람객들이 많았다.
‘Africa is not a country’라고 프린팅 된 옷이 메시지를 전한다. 아프리카는 서로 다른 문화와 환경을 가진 54개 나라가 모여 하나의 대륙을 이루고 있다. UN 가입국 외에 몇 개의 나라가 더 있어 실제는 60개국 이상이다. 해가 질 무렵에 축제는 끝을 알리고 EDM과 함께 모두가 함께 춤을 추며 내년에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였다.
서울 아프리카 페스티벌은 5월 25일인 아프리카의 날을 기념하여 매년 셋째 주 주말에 진행된다.
지하철 사당역 근처에 있는 시립남서울미술관에서는 요즘 ‘모두를 위한 세계’ 라는 제목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제목이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제목과 달리 내용은 올해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한 기획전시회다. 그런데 소재를 단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닌 세계사적 보편적 주제인 자유와 평등으로 풀어 각국 작가들이 여러 장르로 표현한 점에서 제목과 연결된다. 그 중 눈길을 끄는 작가가 있어 소개한다.
제주도 출신 덴마크 국적의 제인 진 카이젠의 ‘거듭되는 항거’
이름과 국적이 암시하듯 입양된 작가는 뿌리를 찾은 끝에 결국 2001년 가족과 재회하고 할아버지의 회고록에서 제주 4·3사건을 알게 된다. 이 작품은 8채널 영상설치 작품으로 무당, 희생자 유가족, 목격자, 추상적 시를 읊는 배우 등이 증언한다.
4·3사건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주제의 범위는 의외로 넓다.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다음에 일어난 정치 권력에 대한 항거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작가가 ‘2019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을 맡게 되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윌리엄 켄트리지의 ‘더욱 달콤하게 춤을’(2015)
작가는 1955년생으로 정치학, 아프리카학, 연극 디자인, 오페라 연출을 공부하여 다양하고 독창적인 미술세계를 구축했다. 특히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극심한 국가에서 사는 백인으로 관람객들에게 큰 울림을 주는 작품이다.
그림자 극, 목탄 드로잉, 발레, 거리 연극, 음악, 영화를 조합한 영상 작품이다. 작가는 북쪽에서 남수단으로 피난 가는 르완다 난민, 아프리카 대륙을 횡단하는 사람들의 이동, 발칸반도에서 탈출하는 사람들의 행렬, 2차 대전이 끝나갈 무렵 대규모 인구 이동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장례행렬, 난민의 행진을 연상케 하는 풍경에서 구성원들은 끊임없이 춤추고 노래하며 무언가를 애도한다. 4개의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아프리카 브라스 밴드의 연주곡에는 그들의 슬픔이 진하게 녹아 있다. 그림자극같이 표현한 것은 모든 실체를 기본적인 요소로 설명하는 환원주의(reductionism)로 바라보고자 하는 작가의 특별한 의도다. 물론 제목은 역설적으로 붙인 것일 터다.
이 전시회는 단지 3·1운동만을 기리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등 역사의 수직적 연관성과 동시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평적 관련성, 그리고 인권 문제 등 다양한 보편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러나 과연 ‘모두를 위한 세계’라는 이상은 가능할까?
‘모두’라는 말은 까다롭다. 개개인의 의사를 확인하지 않은 ‘모두’는 언어적 독단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처럼 소외되고 그늘진 역사와 삶을 찾아 드러낸다는 측면에서 ‘모두’는 정당화되고 균형을 이룬다. 작가들의 치열한 정신이 잘 구현된 전시로 보인다.
◇ 지혜로운 조부모의 감성 육아법 맑은샘생명학교 저ㆍ맥스미디어
30만 명 이상의 임산부와 조부모에게 영유아 교육을 진행한 각 분야 전문가 8인이 모여 조부만을 위한 육아 대백과를 펴냈다. 젊은 맞벌이 부부가 늘며 조부모가 손주 육아를 맡는 일이 많아졌다. 현실을 들여다보면 할머니와 엄마의 육아 방식 차이에서 오는 갈등과 스트레스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맡기고 마음놓고 일할 최선책이 조부모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책에서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서로 ‘어쩔 수 없는’ 심정으로 이겨내기보다는 ‘감사한’ 마음으로 육아를 바라보길 독려하고, 현실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노하우 등을 제시한다. 서두에는 ‘할머니·엄마·아기가 행복해지기 위한 지혜’와 조부모 양육이 아이에게 미치는 좋은 영향력에 대해 언급한다. 전반적으로 출생 후 24개월까지 조부모가 알아야 할 육아 관련 지식 등을 그림을 곁들여 알기 쉽게 보여준다. 더불어 응급 처치법과 베이비 마사지를 비롯해 조부모를 위한 특별 마사지까지 소개한다.
◇ 쉬엄쉬엄 가도 괜찮아요 서정홍 저ㆍ단비
산골 농부가 일하며 나누는 소박한 일상, 산골 어르신들의 삶의 지혜, 자연 속에서 삶을 배우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58편의 시에 담겼다. 청소년 세대에게 보내는 따뜻한 위로와 노년의 슬기를 엿볼 수 있어 조부모와 손주가 함께 읽어도 좋다.
◇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1·2 유홍준 저ㆍ창비
우리 땅 곳곳을 누벼온 유홍준 명지대학교 교수가 중국 대륙으로 떠났다. 1권은 삼국지의 무대 서안에서부터 만리장성을 지나 명사산에 이르는 여정을 담았다. 2권은 중국 불교미술의 축소판 막고굴 곳곳과 돈황문서의 다난한 역사를 그렸다.
◇ 나의 반려동물도 나처럼 행복할까 데이비드 미치 저ㆍ불광출판사
‘반려동물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에서 시작한다. 반려동물이 바라는 진짜 행복, 노년기 반려동물을 평화로운 죽음으로 이끄는 방법 등 반려동물과 함께 성장하고 살아가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들을 담았다.
◇ 너의 꽃놀이 김미녀 저ㆍ책밥
꽃을 찾아 어디로든 떠나고 싶은 이들을 위한 꽃놀이 여행 가이드북이다. 계절에 따라 아름다운 꽃이 피는 전국 72개 꽃놀이 장소를 추천한다. 방문하기 좋은 계절, 주차 여부, 인근 카페 등의 정보와 함께 필름에 담은 꽃 사진을 수록했다.
여행지의 선택은 보통 한 장의 사진에서 시작되기도 하지만 영화나 책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세상의 수많은 장소 중 하필 그곳이 선택된 데는 그만한 이야기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일본 영화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로 더 많이 알려진 울루루(Uluru)는 백혈병으로 죽어가는 한 소녀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꼭 가고 싶어 했던 꿈의 장소로 나온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고 오랜 세월이 지나 연인이 혼자 찾아온 울루루는 시간이 가져다준 무게만큼의 황량함과 상실감을 안은 채 뭔가 허무의 기운마저 자아내는 듯했다. 떠난 소녀의 갈망을 대신 풀어주기라도 하려는 듯 매해 백만 명이나 되는 전 세계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온다.
아프리카보다 더 거칠고 혹독했던 땅, 호주
‘빌 브라이슨의 대단한 호주 여행기’에서 저자는 “오스트레일리아 내륙 지방에 대해 과장이란 있을 수 없으며 19세기 탐험가들이 느꼈던 표현할 수 없는 더위와 끊임없는 물 부족, 고난은 지금도 별반 달라진 게 없다”고 말한다. 멜버른에서 시작해 그레이트오션로드, 애들레이드, 앨리스스프링스를 거쳐 울루루를 탐험한 뒤 서호주의 주도 퍼스, 몽키마이어, 웨이브록, 프리맨틀을 거치는 길고 험한 한 달간의 여정은 아프리카 여행이 무색할 만큼의 혹독한 인상을 줬다. 빌 브라이슨도 나와 같았다니 언제 만나서 한잔하며 호주라는 낯선 땅에 대해 수다라도 떨고 싶은 심정이다.
해가 떠오르면 40℃가 넘는 가혹한 더위와 파리떼에 시달려야 했고, 날이 흐리면 세찬 바람과 장대비, 천둥 번개까지 쳤던 곳. 호주라 하면 시드니 정도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서호주나 남호주, 울루루가 있는 사막 지역 센트럴 호주는 좀체 상상이 되지 않는 곳일 수도 있다. “‘자유로워지다’라는 것은 설령 그것이 잠깐 동안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역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멋진 것이다”라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말했던가. 극한의 추위와 미세먼지로 마음마저 꽁꽁 얼어버린 겨울, 지구 반대편 뜨거운 땅 호주로 향했다.
세상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관문, 앨리스스프링스
울루루 여행을 계획할 때 주변에서 듣게 되는 대부분의 정보는 매우 더운 곳이니 반드시 열사병 약을 준비해야 하고, 모기방지 약을 뿌려야 하며, 파리들이 떼로 날아드니 망이 달린 모자를 써야 한다는 얘기 등이었다. 실제로 울루루 거점 도시인 앨리스스프링스에 가 보니 40℃가 넘는 땡볕의 날씨였다. 눈이 부셔 선글라스를 안 쓰면 강한 햇볕에 금방이라도 타버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여행 가기 전 예약해놓은 울루루 캠핑 ‘더락투어’를 확인하기 위해 잠시 걸었을 뿐인데도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버렸다.
울루루로 가는 방법은 다양하다. 호주의 동서남북 주요 도시에서 앨리스스프링스로 와 투어에 참여하거나 차를 렌트하기도 한다. 편리한 여행을 원하는 사람들은 에어즈록공항에 내려 인근 호텔이나 리조트에 머물며 하루 이틀 울루루를 돌아본다. 그러나 아무리 힘들다 해도 에어즈록공항에 내려 고작 몇 시간 머무르는 것만으로 아웃백(호주의 오지를 뜻함)을 체험하기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열흘에 가까운 종단 또는 횡단여행은 아니어도 최소한 2박 3일은 소요되는, 앨리스스프링스에서 울루루로 가는 아웃백 캠핑을 선택했다.
애보리진의 성지, 울루루
지구의 배꼽이라는 별칭처럼 울루루는 호주 대륙 한가운데, 앨리스스프링스 남서쪽 400km 지점에 있다. 약 5억 년 전 거대한 지각운동에 의해 융기한 모래바위로 세계에서 가장 큰 단일 바위로 알려져 있다. 1872년 탐험가 어니스트 길스가 발견했고 호주 초대 수상인 헨리 에어즈(Henry Ayers)의 이름을 따 ‘에어즈록’이라 불리기도 하지만 ‘울루루(Uluru)’가 일반 명칭이다. 애보리진(Aborigine)이라 불리는 이곳 원주민의 성지로도 알려진 울루루의 이름에는 ‘그늘이 지난 장소’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일출 때면 마치 활활 타오르는 불처럼 보이는 붉은 사암질의 바위는 크기가 해발고도 867m나 된다. 바닥에서의 높이는 330m, 둘레는 무려 8.8km에 이른다. ‘섬처럼 고립된 산’인 울루루는 바다의 빙산처럼 대부분의 덩어리는 땅속에 묻혀 있다. 암석 표면은 미세한 홈이 뒤덮고 있으며 측면에는 마치 동굴과 같은 깊은 홈이 나 있다.
바람에 실려 온 모래는 계속해서 암석을 깎아내린다. 비라도 내리면 측면의 홈을 따라 폭포가 형성되어 마치 붉은색 표면에 검은 혈관이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 시시각각 바뀌는 바위의 색깔이 장관이라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은 온종일 주변에 머물며 색의 변화를 즐긴다, 일출에는 오렌지색, 이른 아침에는 적갈색, 정오에는 호박색, 그리고 해질 무렵에는 짙은 선홍색으로 바뀐다. 울루루 주변에는 멀가나무, 청회색의 백단향, 데저트오크, 블러드우드와 유칼리나무 숲도 있지만 킹브라운, 웨스턴브라운 같은 독사도 서식하므로 걸을 때 주의를 해야 한다.
울루루의 정상 정복은 매우 위험하고도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원주민들이 정상 등반을 적극 말리는 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정상 정복을 하려다 사망한 사람이 37명에 이른다.
둘레길을 따라 걷다가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을 발견했는데, 마치 신성한 원주민의 살에 철심이라도 박은 듯 잔혹하고 위험해 보였다. 그런데도 종종 울루루 여행기를 읽다 보면 정상 등반을 자랑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꽤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목숨을 담보로 한 위험한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고 성지를 보존하기 위해 2019년 10월 26일부터 등반이 전면 금지된다고 한다.
울루루-카타추타 국립공원과 킹스캐니언
2박 3일의 더락투어 일정에는 울루루 탐험 외에도 카타추타 국립공원과 킹스캐니언 탐험이 포함된다. 첫째 날엔 울루루, 둘째 날엔 울루루-카타추타 국립공원, 돌아오는 길엔 킹스캐니언 탐험이 일반적인 코스다. 1958년 호주 정부가 울루루와 카타추타를 호주 국립공원으로 지정하자 토지를 소유한 원주민인 아그난족과 토지반환소송이 벌어졌다. 수차례의 협상 끝에 2084년까지 이 지역을 호주 정부에 임대해주는 것으로 합의가 됐다. 울루루와 함께 주요 성지로 유네스코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카타추타(1069m)의 이름에는 ‘머리가 많다’는 뜻이 담겨 있다. 카타추타는 다채로운 36개의 바위가 모여 바위산을 이루고 있는데, 혹자는 단순한 울루루 탐험보다 바위와 바위 사이를 가로질러 바람의 계곡을 트레킹하는 코스를 선호하기도 한다.
킹스캐니언 트레킹은 웅장한 협곡을 내려다볼 수 있는 장거리 코스와 협곡을 따라 산책하는 단거리 코스로 나뉘는데, 필자가 갔을 때는 비가 많이 내려 길이 유실되는 바람에 캠핑카에서 짐을 다 내리고 홍수가 난 강을 걸어서 건너가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울루루에 내리는 비와 인사이드 트랙
애보리진의 신성한 바위를 조금이라도 느껴보기 위해 땡볕 속을 걸었다. 가시투성이의 덤불과 무자비한 풀 스피니펙스에 찔리지 않으려 조심했다. 또 더위와 파리떼의 습격에 대비해 머리엔 망을 써야 했다. 이런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여행은 마법 같은 것! 5성 호텔의 그 어떤 호화로움도 수백만 개의 별이 쏟아지는 별밤 아래에서 잠드는 사치를 넘어서지 못한다.
울루루 아웃백을 탐험하는 동안 체코, 헝가리, 스위스, 영국 등 다양한 나라에서 온 18명의 친구들은 낮엔 40℃의 태양을 견디고 밤엔 천둥과 장대비를 피하며 함께 웃고 떠들면서 2박 3일을 보냈다. 캠핑이 끝난 후 누군가는 케언스로 누군가는 고국인 동남아로, 나는 퍼스를 향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사막에도 천둥 번개가 치고 그렇게 많은 비가 온다는 걸 처음 알았지만 예측할 수 없는 자연 속에서도 우린 즐겁게 살아남았다. 대자연은 힘들고 거친 환경 속에서도 서로 웃음을 나누고 즐기고자 한다면 진정 가능함을 가르쳐주려 한 것 같다.
여행 끝 무렵 프리맨틀의 한 서점에서 울루루를 제대로 탐험한 여성의 일대기가 담긴 책 ‘인사이드 트랙(Inside tracks)’을 만났다. 앨리스스프링스에서 출발해 울루루를 지나 인도양(샤크만)까지 무려 2700km를 낙타 4마리와 함께 273일간 도보로 횡단한 27세의 로빈 데이비드슨(Robyn Davidson)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녀 이야기가 담긴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내가 이 여행을 통해 깨달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당신이 허락하는 만큼 당신은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모든 시도나 노력에 있어 가장 어려운 일은
첫 결심을 실행에 옮길 때 내딛는 첫 발걸음이라는 사실이다.”
Travel Tip
가는 방법 호주의 대도시들(시드니, 퍼스, 애들레이드, 케언스)에서 앨리스스프링스공항이나 에어즈록공항으로 들어가는 방법이 있으며, 기차나 아웃백종단여행을 통한 방법도 있다. 앨리스스프링스에서 울루루까지는 차로 약 6시간 정도 소요되며 중간중간 유서 깊은 휴게소나 낙타농장 등 야생 체험도 할 수 있다.
울루루 캠핑투어 더락투어 therocktour.com.au
여행 루트 앨리스스프링스→울루루→울루루-카타츄타 국립공원→킹스캐니언→앨리스스프링스
지구 끝이라니 생각만 해도 멀고 먼 땅으로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는 말도 있듯이 막상 가보면 그리 멀기만 한 곳도 아니다. 남극 바로위 남아메리카의 칠레와 아르헨티나에 걸친 일부지역을 칭하는 파타고니아라는 명칭은 등산복 브랜드로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마젤란과 그의 원정대가 거인족이라고 묘사했던 원주민들을 가리키는 파타곤(patagón)이라는 말에서 비롯됐다. 남반구에 위치하여 우리와 계절이 정반대인 이곳은 연중 기온이 낮아 11월에서 3월이 여행적기이며, 이때 간다 하더라도 사람을 지구 밖으로 날려버릴 기세로 불어대는 토레스 델파이네의 바람을 피할 방법은 없다. 자연은 냉혹하여 불평을 허락하지 않는다던가? 절대적 힘 앞에서 작은 불평 따위는 내동댕이쳐버리게 되는 곳이 파타고니아가 주는 힐링의 힘이다. 그러니 이곳에서라면 바람을 피하기보다는 바람을 기꺼이 마주하는 쪽으로 마음을 먹는 쪽이 낫다. 사람은 40m/s를 넘으면 날아갈 수도 있다는데, 이곳은 최대 풍속이 60m/s를 넘는 일도 많아서 영국 탐험가 에릭 시프턴(Eric Shipton)은 '폭풍우의 대지'라 불렀다는 곳. 그렇다면 우린 왜 이렇게 혹독한 곳에 가려하는 것일까?
나만의 이야기를 쓰기 위한 결행
1989년 1월, 48세로 요절한 브루스 채트윈은 의 기자로 일하던 어느 날, 93세의 디자이너 아일린 그레이를 인터뷰하러 갔다가 그녀가 그린 파타고니아 지도를 보고 깊은 감동을 받는다. 아일란은 자신은 이미 늙어 갈 수 없다며 브루스 채트윈이 대신 그곳에 가줄 것을 부탁했다. 얼마 후 브루스는 다니던 신문사에 ‘파타고니아로 떠남’이라는 짤막한 한 을 남긴 채 지구 반대편 파타고니아로 사라져 버렸다. 그가 쓴 책 의 서문에는 이렇게 쓰였다.
“제가 늘 저지르겠다고 협박했던 일을 드디어 결행했습니다. 오늘밤엔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떠납니다. 거기에 살면서 저 자신만을 위한 이야기를 쓰려고 합니다.”
문명의 이기는 거리감각을 바꿔놓았다
우린 이제 단 두 시간에 비행기로 목적지에 갈수도 있고, 수 십 시간을 버스를 달려 육로를 통해 목적지에 닿을 수도 있다. 효율성과 비효율성사이에서. 속도와 비속도 사이에서. 빠름과 느림 사이에서. 우린 어느 쪽이든 선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비행기로 단 두시간만에 갈 수 있는 길을 버스로 온종일 달려서 간다. 느린 것에 익숙하지 않은 탓에 30시간의 버스여행이 쉽지 않다. 그래도 칠레와 아르헨티나를 가로지르는 파타고니아 땅만은 꼭 육로로 달려보고 싶었다.
그래야 지도로서가 아니라 온몸으로 이 땅덩어리가 얼마나 거대한지 알 수 있을 테니까. 30시간을 달려도 피곤함보다는 오랜 상상이 실현되는 기쁨에 잠을 이룰 수 없어 창밖의 변화를 지켜본다. 그 길이만큼이나 버라이어티한 땅덩어리. 사막에서 툰드라로, 와이너리가 펼쳐진 녹색의 땅으로, 그리고 바다와 산맥, 파타고니아 빙하에 이르기까지.
이름 모를 도시에 사람들이 내리고 타고, 내리고 또 타고 손님을 끝없이 바꾸며 TUR 버스는 달려간다. 일직선으로 뻗은 도로. 직진으로 난 길. 고속도로 휴게소엔 먹을게 별로 없고, 떡복이와 오뎅, 우동 생각이 간절하지만 그저 커피한잔과 웨하스 과자로 허기를 달랜다. 간간이 노점상이 차에 오르기도 하는데 먹을게 없기는 마찬가지다. 파타고니아만 하더라도 대한민국의 다섯배 크기. 우리나라 북쪽끝에서 남쪽 끝까지 달려봐야 고작 5시간인 곳에 살던 나는 그저 한도시에서 옆 도시로 가는데 30시간이 걸리는 이 나라에 와서야 우리나라 땅덩어리가 얼마나 작은지를 실감한다.
파타고니아의 비경을 잇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루트 40!
이곳에 오면 마음을 방해하거나 어지럽게 하는 것이 하나도 없는 땅. 오로지 자신의 마음만을 명징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거울같은 자연을 마주할 수 있다. 왜곡되지 않은 정직한 선.
가다가 얽히거나 꼬임이 없이 그저 올곧게 이어지는 선을 보며 굽혀진 마음을 조금은 펼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이 없어 무엇이 더 아름답다는 것이 왠지 모를 슬픔을 자아내지만 땅보다 더 큰 면적으로 다가오는 광활한 하늘은 늘 빌딩에 가려져 그 모양을 알 수 없었던 구름의 존재를 각인시켜준다.
토레스델파이네국립공원과 페리토모레노 빙하!
파타고니아를 대표하는 곳을 꼽는다면 칠레의 토레스델파이네 국립공원과 아르헨티나의 페리토모레노를 비롯한 약 50개의 빙하국립공원이다. 3개의 화강암 봉우리를 비롯해 해발 2천5백미터의 설봉들이 하늘을 찌를 듯 서있는 토레스델파이네는 남미 최고의 풍광으로 눈이 닿는 곳마다 광고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봉우리를 지나 길고긴 잿빛 모래를 한참을 걸어가서야 만난 그레이 빙하(Grey glacier)는 이름처럼 짙은 회색빛을 띠고 있다. 거대한 빙하를 마주보며 다가가는 길, 어디선가 우루루쾅쾅 땅이 갈라지는 듯한 들리더니 바로 눈앞에서 거대한 빙하 한조각이 떨어져 내린다. 지구의 한끝이 닳아 없어지는 듯 가슴속이 철렁해져 온다.
아르헨티나 빙하 국립공원의 북쪽 입구라 할 수 있는 엘찰텐에서는 모든 등반가들의 꿈이라 일컬어지는 피츠로이산(3,405미터)을 등반할 수도 있다. 모레노빙하의 관문이라할 수 있는 엘칼라파테 마을은 가장 번화한 곳으로 오랜만에 쇼핑도 하고, 레스토랑에서 아르헨티나산 말벡 와인한잔에 스테이크의 호사를 누리며 쌓인 피로를 씻어보는 것도 좋다. 30킬로미터 길이에 5킬로미터의 폭, 60미터 높이의 얼음덩어리 펠리토모레노 빙하는 남극과 북극을 제외하고 인간이 접근할 수 있는 빙하 중 가장 아름다운 빙하로 꼽힌다. 아이젠을 착용하고 수천년된 빙하위에서 빙하조각을 넣은 위스키한잔을 마셔보자! 그 감동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빙하를 보는 또 다른 방법중 하나는 배를 타고 돌아보는 것으로 웁살라(Upsala)빙하크루즈는 세계최대의 빙하와 수많은 빙산을 크루즈로 돌아볼 수 있다. 빙하라고 하면 무척 추울 것 같지만 맑은 날씨엔 후드티 하나만으로 충분할만큼 그곳 여름의 날씨는 그리 춥진 않다.
파타고니아엔 크고 작은 빙하가 50개 이상이 있으며, 남극과 그랜란드 다음으로 양이 많다. 안데스 산맥에 내리는 많은 비가 빙하를 만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온난빙하에 속하는 이 지역의 빙하는 빠르게 순환하는 것이 특징인데, 여름과 겨울의 이동 속도는 다르지만, 연간 평균 100m에서 200m 사이의 속도로 움직여서 육안으로도 빙하의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빙하크루즈나 트레킹 중에 천둥 같은 소리와 함께 찾아오는 빙하붕괴현상을 목도할 가능성이 높은 곳이기도 있다.
지구 최남단마을, 우수아이아(Ushuaia)
파타고니아 여행은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국경을 몇 번씩 오가는 여행이다. 아르헨티나의 엘찰텐, 엘칼라파테, 모레노빙하를 만나고 칠레의 토레스델파이네국립공원을 왔다가 다시 아르헨티나의 땅끝 마을을 향해 달려간다. 12시간 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고, 마젤란 해협을 웅장한 크기의 배, 파타고니아호를 타고 건넜다. 심한 바람엔 장사 없는 듯 그 큰 배도 휘청대고 약간의 배 멀미도 났다. 말 그대로 산 넘고 바다건너서 도착한 우수아이아. 우수에 찬 듯 보이던 그 곳. 사람들이 왜 이곳을 지구의 끝. 핀 델 문도(FIN DEL MUNDO)라 했는지 몸으로 와 닿는다. 남극을 제외하고 인간이 모여 사는 최남단 마을인 우수아이아는 거대한 아메리카 대륙의 가장 아래쪽에 설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항구마을이다. 먼옛날 대항해시대엔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건너가는 많은 배들이 대자연의 재앙 앞에 침몰했다고 전해지는 곳. 마젤란 해협을 바라보며 경사진 언덕에 자리 잡은 이 마을은 1년 내내 세상의 끝을 느끼고 싶어 하는 여행자들로 붐빈다. 남극으로부터 불과 1000km 떨어진 곳. 핀델문도(땅끝)박물관에는 찰스다윈이 비글 해협을 항해할 때의 항해일지와 작품들도 전시되어 있으며, 이곳까지 온 수고로움을 치하해주듯 여권에 스탬프도 찍어주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특별한 엽서를 보낼 수 있는 파란 우체통도 마련되어 있다. 장거리버스와 배 멀미로 지쳐있던 나는 한글로 주소를 써서 우체통에 넣어버리고 말았는데, 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그 엽서를 친구가 받았단다. 대한민국 만세라는 문자가 왔다. 정말 대한민국 만세다.
Travel tip
◆가는 법: 파타고니아를 여행하는 방법은 항공으로 편하게 가는 방법(란항공(http://www.lan.com)과 버스를 타고 육로나 배로 이동하는 방법이 있다. 시간과 체력을 절약하고자 한다면 항공이 좋겠지만 남미의 어마어마한 대지의 맛을 제대로 즐기고 싶다면 2층침대 버스가 의외로 편리하므로 육로이동도 고려해볼만 하다.
◆꼭 방문해야할 주요도시 및 장소: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엘칼라파데. 엘찰텐, 피츠로이, 페리토모레노빙하, 마젤란해협. 우수아이아, 핀델문도박물관. 칠레 산티아고, 토레스델파이네국립공원.
◆여행적기 및 기온: 파타고니아는 우리와 정반대로 우리가 겨울일때가 그곳의 여름이다. 2월에 방문하면 그곳의 여름에 해당하지만 빙하라고 해서 생각한만큼 춥진 않고 18도 정도의 기온이지만 바람이 부는 토레스델파이네는 파카가 필요할만큼 춥기 때문에 사계절 옷이 다 필요하다.
백두산 탐방 일정에 윤동주 생가 방문이 있었다. 강신영 동년기자, 이경숙 동년기자와 함께 한 이번 여행에 동행한 신광철 시인의 시평(詩評)이 이동하는 버스에서 이어졌다.
윤동주, 참담한 이름이다. 눈물을 통해서 바라보아야 이해되어지는 맑은 시인이다. 시를 한 편도 발표하지 못한 시인. 시집을 한 번도 내지 못하고 간 시인. 스물아홉이란 나이에 싸늘한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한 시인이다. 첫 시집이 유고(遺稿) 시집이 되었다. 윤동주 시인 자신은 받아보지도 못한 시집이 되었다. 그의 이름에는 성장하지 못한 소년이 들어 있다. 아니 청년이겠지? 스물아홉, 가장 빛나는 시절을 막 넘기려는 나이다. 스물아홉에 죽음을 맞이한 윤동주 시인은 순결의식에 안타까워 쩔쩔매게 하는 빛나는 슬픔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그의 죽음을 정지용 시인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시집 서문에 이렇게 썼다.
“무시무시한 고독 속에서 죽었구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도 없이!”
자신이 쓴 시를 이 세상에 한 작품도 발표한 적이 없었다. 그렇게 미완의 한 시인은 죽었다.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라는 정지용 시인의 글에서 또 한 번 숙연해진다. 윤동주 시인을 떠올리면 미완성이라는 단어가 그의 곁에 서성이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성숙보다는 어린아이 같은 순수와 파릇파릇한 양심에 기댄 인생관이 보인다. 막 봄을 만난 나무가 추위에 겨우 견디고 있는 모습이 그려진다.
- 신광철 시인의 산문 中
숙연한 마음으로 생가를 들어섰다. 대문 앞에 있는 돌비석에는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 생가’라는 글과 함께 한문이 새겨져 있었다. 1945년, 해방을 6개월 앞두고 29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 윤동주는 간도 이주민 3세로 1917년 북간도 명동촌(明東村)에서 태어났다. 윤동주의 성장기는 부러울 것이 없었다. 10칸짜리 생가 옆에는 교회가 있고, 소학교도 얼마 안 된 거리에 이웃해 있었다. 소년 윤동주에게는 교육자요, 기독교 목사인 큰 외숙 김약연(金躍淵, 1868~1942)의 영향이 매우 컸다. 규암(圭巖) 김약연은 명동소학교를 창립하고, 교장을 지낸 우국 교육자다. 그러나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에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서 작고했다. 당시 그의 나이 29세였지만 실제로는 만 27년 1개월 17일을 살고 갔다.
관리인의 안내로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푸르디푸른 스물아홉의 나이에 현해탄 건너 일본 감옥에서 생체실험을 당하면서 쓸쓸하게 죽어간 시인의 아픔이 절절이 다가왔다. 동행한 이경숙 동년기자가 시비(詩碑) 앞에서 윤동주의 서시(序詩)를 낭송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윤동주 생가에 하루 500여 명의 한국인들이 다녀간다고 하니 그나마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
머지않아 불어올 훈풍
이튿날, 우리는 도문을 향해 출발했다. 명동촌 입구에서 중국 공안이 버스를 세우고 차에 오른다. 공안의 표정이 일순간 섬뜩해보였다. 이곳이 중조(中朝, 중국과 조선) 변경에서 가까운 도시라 검문이 철저하다고 했다. 탈북자들을 감시한다는 명목 하에 한 사람 한 사람 여권 사진을 대조하면서 검문을 했다.
얼마 후 고대하던 두만강에 드디어 도착했다. 압록강 강변에서 보았던 북한의 풍경이 더욱 가까이 눈에 들어왔다. 무심한 강물만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내 마음을 대신하듯 빗방울이 간간이 뿌려댔고 하늘도 잔뜩 찌푸려 있었다. 이곳 강물에 손 한 번 담가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친구와 함께 ‘눈물 젖은 두만강’도 불러보고 싶었다. 철조망 너머로 손에 잡힐 듯 보이는 북한 땅은 고요하기만 했다. 두만강 철교는 러시아와 중국, 북한의 접경 지역으로 민간인 출입이 쉽지 않다고 한다.
4월 27일 남북 정상회담에 이어 북미회담까지 이루어졌으니 앞으로 이곳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머지않아 훈풍이 불어오기를 기대해본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곳 분위기는 정중동이라고 할까? 어쩌면 훈훈한 바람은 머나먼 남의 얘기가 될 수도 있다.
강을 가로질러 물보라를 일으키며 배를 타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마도 중국인들이겠지? 친구와 나는 그저 마음으로만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부르면서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자리를 떴다.
하지만 언젠가는 유라시아 대륙 철도를 타고 자유롭게 두만강 철교를 건너게 될 날도 오지 않을까 희망을 가져본다.
4박 5일의 모든 일정이 두만강에서 끝났다. 과연 나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낀 걸까? 출발하기 직전의 설렘은 광개토대왕릉을 탐방하면서 아쉬움으로 다가왔다. 마치 현란한 마술쇼를 보여주듯, 안개 장막을 걷어내고 고운 속살을 보여주던 백두산 천지의 모습은 오랜 감동과 전율로 남았다.
압록강과 두만강에서 희망의 싹을 보았으니 더 이상 무엇을 바랄까? 그저 감사할 뿐이다. 언젠가 또다시 이곳을 찾는다면 기쁨에 겨워 목청을 돋워보리라.
인천공항에서 몽골의 수도인 울란바토르까지는 비행기로 네 시간 남짓. 비행기 여행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어렵지 않게 마음먹어볼 수 있는 피서지 몽골! 그 낯선 땅에 발을 딛자마자 가장 먼저 나를 툭 치며 환영 인사를 던진 건 사람도 동물도 아닌 바람이었다. 세계 곳곳을 여행해봤지만 몽골의 바람은 아주 생소하게 느껴졌다. 초원의 상큼함 같기도 하고 동물의 썩은 가죽 냄새 같기도 한, 뭐라 한마디로 형용하기 힘든 태초의 냄새 같은 것이었다. 기억조차 나지 않을 만큼 까마득한 세월에 걸쳐 지구 이곳저곳을 휘저으며 머물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했을 그런 바람이 지니고 있는 냄새. 그제야 난 깨달았다. 불과 네 시간 만에 와 닿은 곳은 대륙의 이편저편이 아니라 내가 살던 삶의 방식과 정반대의 삶이 있는 땅임을.
한여름 최적의 피서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몽골은 평균고도 1580m에 위치하며 5분의 1이 고비사막이다. 넓게 퍼져 있는 사막의 영향으로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에 속한다. 이르면 9월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해 4월까지 겨울이 계속되고 매우 춥기 때문에 7월과 8월 한여름이 여행하기 가장 좋은 때다. 여름 한낮의 평균기온은 16℃이고 밤엔 살짝 한기가 느껴질 정도. 찌는 듯한 더위를 피해 쾌적한 휴양지를 찾고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없을 것이다. 비라도 내리면 파카를 꺼내 입고 밤새도록 불을 지펴도 한기가 사라지지 않는다. 한반도 7.5배의 면적에 달하는 거대한 땅덩어리에 인구는 고작 서울의 한 구에도 못 미치는 280만 명이 사는 곳. 울란바토르에서 출발해 바다라 불리는 호수 홉스굴까지 한 바퀴 돌아 다시 울란바토르로 돌아오는 2499km의 길고 험한 여정이다. 피서에는 더없이 좋은 곳이지만 쉽게 지루함을 느끼는 사람에겐 맞지 않는 곳일 수도 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몽골 여행은 바람에서 시작해서 바람으로 끝난다. 초원의 바람에서 시작해서 구릉의 바람으로, 구릉의 바람에서 시작해서 호수의 바람으로. 러시아, 중국과 국경을 이루고 초원과 구릉 외에 4000개에 달하는 호수와 강이 있는 대자연이 몽골이다. 그렇다고 대자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랜 역사를 품은 에르덴조(Erdene Zuu) 사원, 간단(Gandan) 사원 같은 불교 사원, 칭기즈칸 기념관, 자이승 전망대, 이태준 공원 등 역사적 건물들과 화산, 협곡까지 다채로운 자연을 품고 있다. 지구상에 아직 이런 땅과 이런 유형의 삶이 존재한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원시적이다.
실크로드와 칭기즈칸의 나라
기원전 13세기 초 칭기즈칸이 건설한 몽골 대제국은 ‘용감함’이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으며,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에 나와 있듯 러시아와 중국, 동남아와 유럽, 중동 국가에 이르기까지 동서 문물교류에 큰 영향을 끼치며 실크로드를 열었다. 결코 멸망할 것 같지 않던 이 야생의 유목제국도 결국 막을 내리고 내륙 중앙부가 1688년 중국 청나라에 복속되어 ‘외몽골’로 불리다가 1911년 제1차 혁명과 1921년 제2차 혁명을 통해 독립을 이루게 된다. 고비사막을 주변으로 내몽골과 외몽골로 나뉘며 내몽골은 아직도 중국에 속해 있다. 몽골 여행 하면 대부분 울란바토르와 테를지를 중심으로 한 옛 몽골 제국으로의 여행을 말한다. 지금도 도시 한가운데서 전통 복장에 무공훈장을 단 노인을 볼 수 있는데 현대식 마트 앞 벤치에 앉아 먼 과거로 시선을 둔 그 모습이 왠지 모를 아련함을 자아낸다.
한국에 온 듯한 착각을 하게 만드는 마트
울란바토르 마트에는 한국 음식이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한 집 건너 한국 음식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도시에만 머무른다면 먹는 데에는 아무 어려움이 없다.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몽골의 대표적 휴양지인 테를지에는 전통 가옥 게르를 호화롭게 개조한 호텔부터 유럽식 리조트까지 편리한 시설이 갖춰져 있다. 말을 타며 여유로운 휴식을 즐기기에 좋다. 그러나 몽골까지 와서 이런 편리함만 만끽하고 간다면 진정 몽골을 여행했다 할 수 없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과 수만 마리의 양떼와 말떼들을 호령하는 거친 유목민의 삶을 제대로 체험하려면 몽골의 옛 수도 하르호린(Kharkhorin)을 지나 눈이 시리게 아름다운 호숫가 차강노르와 푸른 진주라 불리는 홉스굴까지 적어도 열흘간의 유목생활을 체험해보길 권한다. 유목민 전통 천막 게르에서 잠들고, 삶은 양고기 허르헉을 먹고, 30도의 독한 칭기즈 보드카에 취해보는 것. 그리고 새벽에 깨어 쏟아지는 별을 바라보는 것. 그렇게 몇 날 며칠을 대자연에 온몸과 마음을 맡겨보는 것. 이것이 진정한 몽골 여행이다.
스타렉스와 초원 화장실
몽골 여행은 눈뜨면 4륜 구동차를 타고 온종일 초원 사이로 난 울퉁불퉁한 오프로드를 달리다가 아무 데서나 철퍼덕 앉아 도시락을 먹고 볼일도 수풀 사이로 찾아들어가 보는 일이다(아프리카에선 이를 ‘부시 토일렛’이라 표현하는데 몽골에선 초원 화장실쯤 되겠다). 처음엔 우산이나 옷으로 가리면서 불편해하던 사람들이 어느새 익숙해지면 돌아갈 때가 된 것이다. 간혹 길 한가운데 간이화장실처럼 보이는 곳도 있는데 재밌는 것은 앞문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지, 얼마나 귀한 대자연과의 교감인데 문으로 풍경을 굳이 가릴 필요가 있을까.
말과 양 외에 초원을 달리는 차는 딱 두 종류, 한국 차 스타렉스와 러시아 차 푸르공뿐이다. 편한 아스팔트길은 없고 대부분 협곡과 구릉을 번갈아 넘어가는 롤러코스터 같은 길이다. 그중에서도 차강노르에서 홉스굴까지 12시간이나 달려야 했던 비포장도로는 내 생애 가장 고단한 여정으로 기록될 만큼 힘들었다. 하지만 끝없이 펼쳐진 풍경은 답답했던 가슴속을 한방에 뻥 뚫어줬다. 도로 곳곳엔 ‘어워’라는 이름의 파란색 천을 두른 돌무덤이 있었다. 샤머니즘의 강한 전통을 보여주는 어워의 돌 사이사이에는 음식과 돈이 놓여 있었는데 사람들은 차를 타고 가다가도 이 어워를 만나면 오른쪽으로 세 바퀴 돌며 기도를 드렸다. 거친 비포장 길을 달리다 차가 고장이라도 난다면 정말 곤란한 상황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저절로 기도하는 마음이 되었다. 차를 타고 가지만 말을 타고 가는 것처럼 끝없이 요동치던 길. 어이쿠, 어이쿠 비명을 지르다 나중엔 그마저 체념한 채 눈을 감아버렸다. 어쩌면 이 길을 가장 잘 만끽하는 방법은 칭기즈칸을 떠올리며 말 타고 달리는 상상을 해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옛 수도 하르호린에서 만난 에르덴조 사원
칭기즈칸의 손자인 쿠빌라이칸은 다양한 문화와 민족을 아우르기 위해 모든 종교를 허락하고 관대한 정책을 폈다. 그의 아내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옛 수도 하르호린의 폐허 위엔 1585년에 세워진 몽골 최초의 티베트 불교 사원이 있다. 바로 에르덴조 사원. 108개의 불탑으로 성벽과 같은 벽을 이루고 있어 한참을 걸어야 제대로 볼 수 있을 만큼 광활하다. 사원 주변에서는 9세기경 투르크 기념비와 8세기경 위구르 왕국 수도의 폐허 등 역사적 유적도 만날 수 있다. 대륙 횡단용 캠핑카를 타고 이동하는 유럽의 단체 여행자들도 만날 수 있다. 어떻게 저들이 몽골 한 귀퉁이까지 왔을까 신기했지만 칭기즈칸의 명성을 생각해보면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다.
홉스굴의 비 내리던 밤과 차탄족 소녀
‘푸른 진주’라 불리는, 바다 같은 호수 홉수굴 근처 타이가 숲에서 진정한 노마드로 불리는 차탄족을 만났다. 전 세계에 약 200명밖에 남지 않았다고 전해지는 차탄족은 순록이 이동하는 경로를 따라 움직이며 영하 40℃의 날씨에도 순록의 등에서 잠을 잘 때가 있다. 우리나라에선 부동산이 부의 상징이지만 이들 유목민들에겐 순록의 숫자가 부의 상징이다. 오르츠라 불리는 천막은 게르와 다르게 생겼는데 에스키모족의 원추형 천막 티피와 닮았다. 여름엔 관광객을 상대로 사진을 찍어주고 돈을 받거나, 손수 만든 전통 장신구와 사탕, 꿀, 옷을 팔기도 한다. 전통 복장을 다소곳이 차려입은 차탄족 소녀의 수줍은 미소가 오랜 여운으로 남아 있다.
단순한 삶을 보여주는 땅
전통 음식 허르헉을 끓이는 강인한 인상의 몽골 여인. 밤새도록 난롯불이 꺼지지 않도록 두세 시간 간격으로 야크 똥을 넣어주던 무뚝뚝한 아들. 평생 번 돈을 주고 산 스타렉스를 애지중지 닦으며 묵묵히 자기 일을 하던 무뚝뚝한 아트레 아저씨. 그들의 웃음은 요란하지 않았고 그만큼 귀한 감동을 주었다.
노을이 지고 칠흑 같은 밤이 오자 별이 쏟아지더니 어느새 여명이 떠오른다. 시간이 흘러가는 풍경을 이토록 선명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 지구상에 몇 곳이나 될까? 짜릿한 볼거리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몽골 여행이 허무에 가까울 수도 있겠다. 하루 종일 초원과 구릉을 달려 게르에 도착한 뒤 작은 불빛에 의지해 책을 읽는 일, 게르에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를 듣는 일, 바람의 소리를 듣는 일, 그것이 전부다.
그러나 “못해본 경험을 하면 그만큼 인생이 레벨업되는 것”이라던 어느 일본 영화의 대사처럼 한 번쯤은 복잡한 삶의 시간을 멈추고 단순한 야생의 삶을 느껴보는 것도 좋겠다. 그러한 여행지로서 몽골은 최고의 땅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