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마미술관은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 안에 있다. 드넓은 공원엔 나무들이 많으니 얼추 자연 풍경과 동행하는 미술관이다. 세한에 부는 바람은 차고 황량하다. 공원 외부의 대로를 달리는 차량의 소음마저 강풍에 고꾸라진다. 이런 날씨에는 따뜻한 차를 마시고 싶다. 마음을 데워준다는 점에서 미술 작품 관람도 미진할 게 없다. 바람에 산발처럼 너울거리는 옷자락을 여미며 소마미술관으로 접어든다. 어떤 매력의 올가미가 기다리고 있으려나.
소마미술관 건축은 단출하다. 박스 형태의 2층 구조물 하나가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수평으로 전개된 1층 건축이 분위기를 주도한다. 들썩이는 구석이 없어 차분하다. 허공으로 불쑥 솟은 게 없고 거추장스러운 치레도 없어 고상하다. 자연스레 친근감을 자아낸다. 모자라지 않으려면 간명한 게 좋고, 지나치지 않으려면 평범한 게 좋다. 이게 처세에서뿐이랴. 건축도 마찬가지, 거창하면 자칫 허점을 초래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소마미술관의 외양은 미더운 느낌을 준다. 마치 가장과 과장이 없는 성향의 사람을 바라볼 때처럼.
그런데 나지막한 건물을 지은 데엔 유별한 연유가 있다. 어떤? 이 미술관은 2004년 9월에 개관했다. 진통을 겪고서였다. 인근 아파트에 사는 주민들의 반발이 심했던 것이다. 푸르고 향긋한 올림픽공원을 제집 앞마당처럼 여기며 애호했던 주민들이 “미술관 건립이 웬 말이냐?”며 쌍심지를 켜고 반대운동을 했다. 공원 경관 훼손을 이유로 삼아서였다. 기어이 뭔가를 지을 거면 차라리 도서관을 지으라고 했다. 결국 낮은 건물을 짓는 것으로 타협을 보고서야 공사를 착수할 수 있었다.
건물의 외관은 단아하다. 노출 콘크리트를 주조로 한 벽면의 일부에 적삼목(메타세쿼이아) 패널을 입히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치장을 자제해 실용성과 단순미를 구현했다. 간간이 유리창을 집중 설치한 건 외부의 풍경을 내부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다. 아울러 내부를 외부로 열어 보이기 위해서다. 따라서 풍경이 소통된다. 건물의 처신이 이러하니 사람도 답답할 게 없다.
창으로 들이치는 자연광의 농도에 따라, 시차에 따라 회랑이나 중정, 혹은 전시실의 광도가 다변한다. 그 소리 없는 빛의 스펙트럼에 실내는 한결 고요하고 유려하다. 차고 건조한 인공조명에 비해 자연 조명은 따뜻한 내면을 지닌 것만 같다. 물론 어느 건물이건, 아파트건 산중 오두막이건 창이 달려 빛을 끌어들인다. 그러나 자연조명을 미술 행위의 하나로까지 여기는 미술관 건축에서처럼 매혹적인 자연광은 드물다. 건축가는 자연광을 건축 재료의 하나로 존중해 고도의 기교를 발휘한다. 이 미술관의 건축가도 빛의 포획에 능란하다. 가급적 인공조명 대신 자연광선을 전시장에 배포하기 위해 통유리 창을 매우 과감하게 구성하기도 했다. 그게 살짝 지나쳤나? 과도한 자연광에 전시 작품이 훼손될 걸 우려해 전시실 유리벽의 일부를 패널로 틀어막았다.
소마미술관 설계자는 건축가 조성룡이다. 지형에 순응하기, 수평성을 강조하되 동선의 유기적 순환 체계를 확보하기, 저만치에 있는 몽촌토성의 경관을 위압하지 않도록 규모를 자제하기, 채광과 조망을 위한 개구부를 기능적으로 설비하기, 이것들이 설계의 기본 지침이었다. 조성룡은 ‘결국은 풍화(風化) 과정을 통해 퇴화하고 소멸할 건축물의 숙명’을 염두에 두고 건축을 설계한다. 건축물을 일종의 생명체로 바라보는 것이겠지. 인생의 희로애락을 미술로 토로하는 화가처럼, 그 역시 건축으로 삶과 세상에 말을 걸고 싶은가보다.
올림픽조각공원, 미술사의 획기적 사건
개관 이래 소마미술관은 묵직한 기획전을 자주 펼쳤다. 이름난 이름들의 작품을 심심할 짬이 없이 불러들였다. 파울 클레, 반 고흐, 피카소, 요셉 보이스, 백남준, 밀레, 프리다 칼로…. 불구경을 하다가도 달려가고플 대가들의 작품전을 펼쳤으니 그 방면으로 한가락 하는 미술관? 올림픽공원의 운영 주체이자 소마미술관 경영주인 국민체육진흥공단이 흐벅진 일을 하고 있다. 체육기관이 예술과 손을 잡았으니 이색이다. 이 미술관은 2006년, 국내 최초로 드로잉센터를 설립, 드로잉 분야 기획전을 집중적으로 펼쳐왔다. 물론 드로잉 외에 다양한 장르의 미술전도 정기적으로 선보인다.
지금은 ‘푸룻푸룻뮤지엄: APPLE IN MY EYES’ 전이 진행(2월 14일까지) 중이다. 주제는 주로 과일과 나무다. 국내 작가 15명이 참여했다. 회화, 설치, 조각, 미디어아트 등 다양한 미술 행위를 통해 주제를 요리한다. 저마다 기발하게, 요상하게, 상큼발랄하게 모티브를 풀어냈다. 눈을 후비는 현란한 색감과 비주얼로 전시실이 아예 만화경 속이다. 미술도 이쯤이면 쉽고 재미있는 유희다. 오감에 스파크 튀게 하는 판타지 영화관이다. 아이들은 여기에서 놀면 좋겠다. 어른들은 여기에서 감각의 굳은살을 벗겨낼 수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관람객이 가뭄에 콩 난 형국으로 드물다. 도대체 코로나가 삼키지 않은 게 뭐람.
미술관을 나와 올림픽조각공원으로 들어선다. 43만 평에 달하는 올림픽공원의 전체 부지 가운데 자그마치 23만 평이나 되는 너른 공간에 조성된 올림픽조각공원은 소마미술관이 보유한 최상의 자산이다. 국내외 작가들의 조각 220점이 산재했다. 88서울올림픽을 기념하는 예술 향연으로 조성되기 시작한 이곳은 공간의 스케일과 작품들의 품격으로 세계적인 조각공원이라 평가된다. 스위스의 저명한 화가 한스 에르니(Hans Erni)는 ‘금세기 미술사의 획기적인 사건’이라 극찬했다.
그러나 정작 알아보는 이가 많지 않다. 일부러 찾아와 유심히 감상하는 눈들로 후끈할 법하지만 실상은 다르단다. 미술계 사람들은 그래 속이 쓰리다. 진수성찬을 차려놨지만 먹자는 사람이 드문 꼴이다. 구미에 맞는 사람만 한갓지게 포식한다. 꿈과 상상을 말없는 말로 두런거리는 조각 작품이 흔전만전한 산책 공원이라니. 한풍이 맵차지만 기분은 상승한다.
< 2편에 계속 >
자유로를 벗어나 파주출판단지로 들어서자 드문 정경이 펼쳐진다. 저마다 개성과 미감으로 돋보이는 외형을 가지고 늘어선 건물들로 풍경이 생동한다. 너절한 난개발의 대척점에 존재하는 계획도시다. 내로라하는 건축가 여럿이 숙의하고 궁구해 만들었다. 홀로 있어도 매력으로 튈 건물이 군락을 이루어 볼거리로 족하다.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은 출판단지 북쪽 끝자락에 있다.
주차장에서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으로 이어지는 동선엔 작은 갈대밭이 있다. 하릴없이 누렇게 시든 채 살랑거리는 갈대들. 애잔한 서정을 자아낸다. 겨울 찬 바람 속에서 바라보이는 헐벗은 식물엔 한 번 더 눈이 간다. 괜스레 들머리에 갈대밭 소로를 조성했으랴. 몇 걸음 안 되는 길이지만 갈대들의 고요한 율동에 마음을 조율해보라는 뜻이겠다.
갈대밭을 돌아 너른 잔디 정원으로 들어선다.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의 전면부가 와락 시선을 압도한다. 유별한 건물이다. 어디서도 보지 못했던 형상이다. 수직으로 곧추선 건물의 삼면과 달리 곡면과 곡선의 연쇄로 이루어진 전면부 벽면의 이색이라니. 다각도로 휜 벽면이 두루마리 풀려나가듯 흐른다. 매끄러운 유영을 한다. 거대한 콘크리트 매스이지만 둔탁하지 않고 유려하니 모순적인 웅자(雄姿)다. 곡면들의 부드러운 파동에선 선율이 느껴지고 언어가 흘러나올 것만 같으니 건축으로 구현한 음악이자 시라 할까보다. 무감각한 콘크리트 덩어리로 하여금 이토록 고매한 내면을 열어보이게 하다니. 경이로운 건축미라 할 수밖에 없다.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은 매년 서너 차례씩 미술 기획전을 펼친다. 언제 방문하더라도 그림을 즐길 수 있다. 그림만이 다는 아니다. “건축물 자체가 예술품이다!” 이렇게, 뮤지엄 측이 표방한다. 관람객의 상당수는 건축 자체의 디자인을 구경할 목적으로 찾아든다지. 국내외 건축가들, 건축학도들의 발길도 이어진다는 거고. 디자인과 미학은 물론 공법을 들여다보기 위해.
문외한의 눈에도 인상적인 건 건축 공법이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건물의 서편 동체는 마치 허공에 떠 있는 느낌을 준다. 건물을 떠받친 하부 기둥이 전혀 없는 구조여서다. 이른바 캔틸레버(cantilever, 일명 외팔보) 공법을 적용했다. 이는 건축 일반에 광범위하게 쓰이는 기술이다. 그러나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의 경우에선 상황이 다르다.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이 내리누르는 어마어마한 하중을 캔틸레버로 감당하기가 실로 불가능에 가깝다고 한다. 실제로 사고가 날 뻔한 일도 있었다. 캔틸레버에 타설한 콘크리트가 한쪽으로 밀리는 위험 상황이 발생했던 거다. 그러나 극복했다.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작업을 해냈다”는 얘기도 있는 걸 보면 이 건축물에 동원된 기술력의 수준을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은 1400평 부지에 지은 연면적 1100평 규모의 3층 건물로 이루어졌다. 설계를 맡은 이는 알바루 시자(′Alvaro Siza)다. 포르투갈이 낳은 세계적 건축가로 흔히 ‘모더니즘의 마지막 거장’이라 부른다. 대표작으로 포르투 세할베스 현대 미술관, 아베이루대학교 도서관, 리스본 엑스포 파빌리온 등이 있다. 국내에서는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을 비롯해, 안양 알바루 시자 홀, 아모레퍼시픽 연구원을 설계한 바 있다. 1992년 건축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받았고, 1988년 미스 반 데어로에 유럽 현대 건축상, 2001년 울프 예술상, 2002년, 2012년 두 번에 걸쳐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 황금사자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알바루 시자를 ‘모더니즘 건축의 대가’라 치지만 그는 사실 초기 모더니즘 건축의 경향에 대해선 비판적인 관점을 유지했다. 복잡다단한 생활환경과 현상을 지나치게 단순화했다는 점, 과거 양식과의 과도한 단절로 마땅히 존중하고 반영해야 할 전통성을 무시했다는 점을 꼬집었다. 그러나 모더니즘의 합리성만큼은 적극 수용했으며, 건축 패턴의 전통성과 지역성을 외면하지 않는 건축적 고려와 추구로 독자적인 건축 세계를 다졌다.
곡면과 평면, 곡선과 직선의 드라마틱한 조합과 변주가 야기하는 감흥은 이 뮤지엄 건물에서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의 핵이다. 단순하되 정밀하며, 웅장하되 고요하다. 이 점에서 이 뮤지엄은 시자의 시그니처 스타일에 값한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내가 건축에서 가장 눈여겨보고 감상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명료성과 단순함이다.” 그는 건축에 덕지덕지 군살을 붙이지 않았다. 군살빼기에 차라리 능하다. 이는 창의 수효를 최소화해 지은 뮤지엄의 외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시자가 말한 ‘명료성’과 ‘단순함’은 모든 진리의 요체이기도 하다. 아무리 복잡한 사물이나 현상도 참뜻을 알고 나면 뜻밖에도 간명하지 않던가. 시자의 건축이 그저 하나의 시설물에 불과한 게 아니라 치열한 지적 탐색의 결과물일 수 있는 건 바로 이 대목에서다.
알바루 시자 설계, ‘명료성’과 ‘단순함’ 추구
건물 곡면의 흐름에 편승해 천천히 잔디밭을 가로지르자 뮤지엄 출입구 앞이다. 문을 열고 로비로 접어드는데 내 발로 걸어 들어왔다기보다 후루룩 빨려 들어온 기분이 든다. 홀리듯 외관에 한참 취했던 바람에 벌어진 심리적 오작동? 뮤지엄을 찾은 재미가 이렇게 쏠쏠하다.
1층 공간은 로비와 카페테리아, 아트숍 등이 있는 휴게 공간과 미술 전시실로 양분돼 있다. 물론 둘을 나누는 벽은 없다. 개방적인 성향의 공간이다. 입구서부터 안통까지 층고가 점차 높아지는 구성으로 홀에 역동성을 부여한다. 북서향으로 난 대형 유리창으로 들이치는 자연광으로 공간의 반쯤은 밝으나 반쯤은 침침하다. 이곳에 인공조명은 거의 없다. 이게 외부의 자연을 끌어다 내부에 배포하는 것으로 공간에 깊이를 부여하는 알바루 시자의 방식이다.
한쪽 벽엔 높고 기다란 책장이 있다. 책들이 빼곡하다. 관람자들은 자유롭게 뽑아 읽을 수도 있고 할인가 구매도 가능하다. 출판사 ‘열린책들’이 만든 책들이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 등 외국문학 번역서로 다수의 밀리언셀러를 배출한 출판사다.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은 ‘열린책들’의 홍지웅 대표가 지은 미술관이다. 건축에 조예가 깊은 그는 일찍부터 알바루 시자에게 꽂혔다고 한다. 언젠가는 시자의 설계를 받은 건축물을 짓고 싶다는 숙원이 있었던 모양이다. 포르투갈이나 영국에 날아가 시자의 건축물 답사에도 열을 냈다. 그리고 마침내 시자와 손잡고 뮤지엄을 건립했다. “디자인이 정말 맘에 들어. 미메시스는 내 작품 가운데 최고야!” 가슴 깊이 품었던 숙원을 푼 홍지웅에게 시자가 건넨 말이 그랬다.
뮤지엄 건립엔 건축가 김준성(건국대 건축전문대학원 건축설계학과 교수)도 한몫 단단히 했다. 건축평론가들은 김준성을 ‘감성 건축의 대가’라 부른다지. 그는 건축 견습생 시절에 시자의 설계사무소에서 일하며 배운 적이 있다. 대가를 사사했으니 무엇으로, 왜, 어떻게 건축을 해야 하는지 옹골차게 얻은 게 많았을 것이다. 시자와의 이런 인연으로 김준성은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건축에 일익을 담당했다. 그가 시자를 말하는 글을 볼까.
“사실 시자의 건축적 행보는 논리적으로 혹은 어떠한 방향성을 가지고 정리하기 어렵다. 다만 미루어 짐작하는 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투명하리만치 선명한 공간을 체험하게 하는 그의 작업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켜들이 존재할 것이라는 점이다. 작게는 재료에서 크게는 관계적인 스케일에 이르기까지 켜켜이, 단단하게.” (2020년 5월 20일자, 서울신문 기사 중)
전시실을 볼까. 1층의 절반과 2~3층 전체가 전시공간이다. 세 개의 전시실은 물론 계단 벽면들도 건물 외부 벽처럼 온통 하얀색으로 칠갑을 했다. 내·외부에 통째 순백색 입히기. 이건 시자의 관습이다. 그가 추구하는 ‘명료성’과 ‘단순함’을 구현하는 데엔 백색이 적격이라 봐서일까? 그러나 순전한 화이트 큐브에 현기증을 느끼는 경향이 있는 관람자에겐 다소 부담스러울 수 있겠다.
전시실들에서는 면과 선이 극적인 광경을 연출한다. 곡면과 곡선이, 평면과 직선이, 예각과 둔각이 상호 교접하거나 교차하며, 또는 대비를 이루며 공간에 생기와 긴장감을 부여한다. 화이트 큐브의 지루한 단조로움을 타파한다. 이 뮤지엄을 예술적 건축물로 보는 눈이 많은 이유는 선과 면의 다채로운 조합에서 야기되는 심미감 때문일 것이다.
가장 인상적인 건 아무래도 조명의 구사 방식이다. 전시실마다 인공조명을 자제하고 태양이 무상으로 보내주는 빛을 끌어다 쓴다. 3층 전시실은 숫제 인공조명을 전혀 도입하지 않았다. 슬래브 지붕을 뻥 뚫어 설치한 천창으로 들어온 자연광이 천장에 매달아놓은 이중 천장의 가장자리를 통해 공간에 흩어질 뿐이다. 이렇게 살포된 빛은 그 농담(濃淡)의 묘를 붓으로 삼아 화이트 큐브에 수묵을 그린다. 시시각각 광량과 광도가 변하는 게 빛이다. 따라서 전시실의 조도(照度)도 시시각각 변하며 덩달아 분위기도 미묘하게 변전한다. “비 내려 빛이 너무 약하거나 어두운 저녁에는 그림을 어떻게 보여주죠?” 뮤지엄 공사가 진행 중일 때 건축가 김준성이 스승에게 물었다. 알바루 시자의 답은 이랬다. “안 보여주면 돼!”
시자의 건축은 건축 자재들만의 집적이 아닌 거다. 자연의 빛이 가세하고서야 건축이 완결되고, 그 쓰임새와 미감이 완성된다고 본 것 같다. 그렇다면 시자는 빛을 다루는 달인? 빛의 탐식가? 그건 그렇고, 아무튼 자연광이 어슴푸레 아롱지는 3층 공간은 미술 전시실이지만 뭔가 원초적인 동혈 속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게 한다. 상상력을 북돋아 아득한 시원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한다.
3개의 전시실에서는 기획전시전이 열리고 있다. 30~40대 작가들이 참여했다. 기량도 개성도 저마다 발군이다. 그림을 감상할 때엔 세상에서 그림처럼 재미있는 게 없지 싶다. 오늘도 그런 감흥을 느끼며 깜냥껏 즐겼다. 그러나 뇌리에 남은 건 미술작품이 아니라 건축 자체다.
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하는 시위대가 미 연방의회 의사당에 난입한 사건의 충격이 크다. 지난 6일(현지시간)의 폭거로 건물과 각종 시설물이 파손된 것은 물론 경찰과 시위대 여러 명이 숨졌다. 민주주의의 본바탕인 미국이 어쩌다 이리 됐나, 흥, 미국도 별수 없구나, 우리나라도 이런 일은 없는데, 트럼프는 정말 나쁜 X이야…. 이런 말이 들리고 있다.
그런데 그날 밤 한국계 이민 2세인 앤디 김(39) 민주당 하원의원(뉴저지)이 난장판이 된 의사당에서 쓰레기를 치우는 모습이 널리 알려졌다. 김 의원은 경찰관이 쓰레기봉투에 피자 박스 등을 넣는 걸 보고 “나도 (봉투를) 하나 달라”고 해 함께 청소를 했다고 한다. 김 의원은 “누구든 좋아하는 게 망가지면 고치고 싶지 않겠나”라며 “정말 가슴이 아팠고 그저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뉴저지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그는 시카고대를 나와 오바마 행정부의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이라크 담당 보좌관을 지냈다. 2018년 중간선거에서 뉴저지 3번구 하원의원으로 당선된 뒤 2020년 재선에 성공했다. 중국계 미국인 부인과의 사이에 두 아들이 있다. 고아였던 아버지 김정한 씨는 소아마비를 앓았지만 MIT와 하버드대를 거쳐 유전공학 박사가 된 입지전적 인물이다. 누나 모니카 김은 예일대 졸업 후 뉴욕대에서 역사학과 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정말 대단한 가족이다.
앤디 김의 행동이 알려진 이후 그의 홈페이지와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트위터에는 미국인들의 칭찬 댓글이 쇄도·답지·폭주하고 있다. “고마워요 앤디! 당신은 자랑스러운 공직자야”, “폭풍 속에 빛나는 등불 중 하나”, “우리는 정말 당신 같은 지도자가 더 필요해요”, “대통령 출마를 기대하겠음”, “청소하는 모습 보고 눈물 났어요. 미국인들은 갈라졌지만 앤디 김 같은 애국자들이 희망을 주고 있네요”, “내가 두 번 다 당신을 찍은 게 자랑스러워”, “뉴저지의 자랑”, “이 울적한 주간의 한 줄기 햇빛”….
그런데, 우리나라에선 영 딴판이다. 기사를 보고 삐딱선을 타거나 왼새끼를 꼬는 댓글꾼이 많다. “저게 의원의 의무인가? 청소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데 무슨 쇼인가. 저런 것에 속지 말아야 개돼지 소리 안 듣는다”, “미국에서 저런 싸구려 쇼를 하면서 언론에 보도돼 나오면 다음 선거에 도움이 되겠나? 가수는 노래로 자존감을 나타내고, 연방 하원의원이면 지역주민에게 한 몸 바쳐 봉사하면 그뿐인데 청소나 할 거면 그냥 청소원으로 취업하는 게 낫지 않겠냐?”, “우연히 찍힌 사진이 아닌데 뭐~”, “저런 짓 하는 놈이나 저런 거 찾아서 찍어 올리는 기레기나… 기레기야, 미국은 한국이 아니다.”
그가 민주당이라서 더 싫어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이런 일에서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반감을 확인하게 될 줄이야. “미국이든 한국이든 민주당은 그저 쇼통밖에 할 줄 모르는구나”, “생쇼가 피에 흐르는가? 문제는 진정성이다”, “이미 청소되고 걸레질까지 된 바닥에 빈 물병 놓고 사진 찍은 것. 이건 누가 봐도 쇼다”, “미 의사당에는 전용 청소원들이 있다. 지역 유권자들은 의회에 가서 청소나 거들라고 선출한 게 아니다. 청소원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일을 뺏는 무경우한 몰상식적인 짓이다. 그 시간 도서관으로 가든지 숙소로 돌아가 의정활동에 관한 책이라도 보라!”
어떤 신문은 맨 처음 보도를 할 때 앤디 김이 민주당이라는 걸 표기하지 않았다(설마 의도적인 걸까? 실수로 빠뜨린 거겠지?). 댓글을 유심히 비교해서 읽어 보니 민주당임을 밝힌 신문보다 반감이 확실히 적었다. 그런데 하루 뒤엔가 인터넷에 새로 뜬 그 신문의 기사에는 민주당이 표기돼 있었다. 그러자 반감과 비판이 높아지고 왜 기사를 또 실었느냐, 앤디 김을 띄워주려고 그러느냐는 댓글이 붙었다.
앤디 김을 칭찬하는 사람도 많다. “어떤 나라에 민주라고 떠드는 것들 중에 이러한 사람이 하나라도 있을까?”, “저런 인재가 한국에 많아야 하는데 안타깝습니다”, “권위주의에 절어 있는 한국의 국회의원과는 다른 모습이다”, “한국계지만 우리 정서가 없는 미국인이지요. 그래도 훌륭합니다.”
그런데, 다음 댓글대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 왜 그럴까? “왜 요즘 사람들은 멋진 일을 해도 비뚜로만 보는지 뭐가 그렇게 마음이 꼬였을까?” 다음 댓글이 이 의문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까? “저 자가 잘못했다는 건 아니다. 근데, 요즘 한국인 중 보이는 곳에서만 남들 안 하는 언행으로 튀어보려는 얕은 모습이 눈에 띈다. 평소에도 법을 지키고, 선하고, 예의 바르고, 사기 안 치고, 거짓말 안 하고, 쇼 안 하는 진솔한 인간이면 금상첨화라 본다. 현 정권을 보고 하는 말이다.”
최근에 본 인터넷 유머에 이런 게 있었다. 일본은 욕할 때 “죽어~!”라고 해서 인구가 줄고, 미국은 “Fuck”이라고 욕을 해서 인구가 늘고, 한국은 “개새끼”라고 욕을 해서 사람들이 개가 되고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정말 그런 걸까? 테스형, 도대체 댓글이 왜 이래? 한국인들은 왜 이렇게 갈수록 더 삐딱해지고 못돼가는 거유?
테스형 혼자서 풀기 어려운 문제일라나? 그러면 어디 다른 형들 생각은 어떤지 물어보세. 네스형(디오게네스, 아낙시메네스), 데스형(파르미데스), 라스형(아낙사고라스, 프로타고라스, 피타고라스), 레스형(탈레스, 아리스토텔레스, 엠페도클레스), 로스형(에피쿠로스, 아낙시만드로스), 토스형(데모크리토스, 헤라클레이토스) 어디 한번 다 나와서 말씀 좀 해보시구려. ‘스’ 자가 안 들어가는 형님들은 나중에 부르기로 할 테니 좀 지둘리시고.
낯선 여행지에서 마치 숨어 있듯 조용히 자리 잡은 동네 책방을 발견하면 설렌다. 서점은 어디에나 있지만 동네 책방은 그렇지 않다. 어디에나 없어서 특별하다. 언제부터인가 여행 중에 들러볼 코스로 동네 책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여 거리의 당진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낡은 이층집이 포근하게 안고 있는 책방 ‘오래된 미래’를 만났다.
당진의 면천읍성은 ‘성안마을’로 불린다. 마을 입구로 들어가면 저 길목들 안에 뭐가 있을까 궁금해진다. 산책이 시작되면서 드는 생각은 ‘이 마을엔 천천히 돌아가는 시계가 있는 게 분명해’였다. 아주 오래전에 살았던 옛 마을을 그리워하며 찾아온 듯하다. 이용원이라는 간판을 단 이발소, 상호의 글자가 반쯤 떨어져나간 중국집, 전파상, 세탁소 등이 평화롭게 자리 잡고 있다. 인적 드문 조용한 그 길을 따라 옛 면천초등학교의 천 년 넘은 은행나무 앞으로 걸어가다 보면 낡은 이층집이 눈에 들어온다. 동네 책방 ‘오래된 미래’다.
동네 책방의 꿈을 열다
문을 열고 들어가 두리번거리며 책장을 넘겨보기도 하고 한참을 서서 책을 읽어도 주인은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다. 아, 도중에 “어서 오세요”라고 눈인사를 했던가. 하던 일이 끝나가는 것 같아 다가가 말을 걸었더니 선한 웃음으로 맞는다. 책방 주인 지은숙 대표다.
그녀가 이 집을 처음 본 것은 아주 오래전이었다고 한다. 당진에 살면서 면천읍으로 가끔씩 놀러갔는데 그때마다 운명처럼 자꾸만 이 집이 눈에 들어오곤 했다.
“10여 년 전에 이 건물을 처음 봤어요. 면천에 놀러 가면 우연히 지나가다가도 늘 이 집이 제 눈에 확 띄었어요. 독특한 외양이었죠. ‘저 집에 책방을 차리면 참 좋겠다’ 했지만 쉽사리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찜하고 있었죠.”
‘자전거포’였던 이 집은 한동안 주인을 찾지 못한 채 수년간 빈집으로 방치되어 있었다. 지 대표는 이곳을 지날 때마다 “예쁘다 예쁘다” 하며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그렇게 관심만 갖고 있다가 어느 날 시기적으로 맞아서 사들이게 되었다. 지은 지 60년이 넘은 낡은 집이었다. 손볼 데가 하도 많아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골조는 그대로 살린 채 몇 달 동안 남편이 고치고 다듬었다. 그리고 드디어 동네 책방 ‘오래된 미래’를 만들어냈다.
책방 이름 ‘오래된 미래’는 환경운동가인 헬레나 노르베리-호지가 쓴 책 제목에서 따왔다. 인도 북부에 위치한 라다크 사람들이 그 지역의 땅과 유대관계를 맺고 서로 협력 공생을 모색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지 대표는 책방을 열면서 면천이라는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공유의 가치를 염두에 둔 듯하다. 참 많이 고민했던 책방 이름이 정해지고 나니 의도에 맞게 착착 일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지인들의 시선은 달랐다. 책방이 있는 면천읍성이 유적지라 개발도 제한되고 어르신들만 사는 곳인데 왜 하필 그런 동네에 책방을 내느냐고 의아해하는 사람이 많았다며 그녀는 하하하 웃으며 말했다.
“시니어들이 뭔가를 시작하면 제2의 인생 ‘무엇’이라고들 하잖아요. 저 역시도 처음엔 책방을 차린다는 말을 섣불리 꺼내지 못했어요. 다들 걱정을 했으니까요. ‘돈 버는 일’을 해야지 다 늦은 나이에 무슨 ‘하고 싶은 일’을 하냐면서요. 더구나 여기서 책이 팔리겠냐고 했죠.”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한 번쯤 책방 주인을 꿈꾸기도 한다. 지 대표도 책을 무척이나 좋아한 국문학도 출신. 한때 아이들을 가르치며 생활할 때 책방 주인이 되고 싶었던 적이 있다. 5~6년 동안 작은 책방 투어도 많이 다녔다. 아침에 일어나면 책방을 검색하고 새로운 책방이 어디에 있나 들여다보는 일이 다반사였다.
“간절히 원하면 마음을 담아보세요”
“꼭 해보고 싶으면 해봐야 알지 ‘이럴 거야, 저럴 거야’ 미루어 짐작만 하면 결과를 알 수 없잖아요. 뭐든 마음이 간절하면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 간절함이 용기를 갖게 하더라고요.”
예쁜 카페나 책방 여는 걸 꿈꾸면서 잘할 수 있을까 겁부터 났지만 그래도 꿈만 꾸지 말고 저질러봐야 진짜 그 과정을 아는 것이라고 지 대표는 경험자로서 말한다.
“‘내가 책방을 열면 손해 보는 게 뭐지?’ 하고 스스로에게 물었죠. 크게 타격이 되지 않는다면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큰 수익을 생각하지 않았기에 결정을 내릴 수 있었고요. 그렇지만 타격이 크다면 바로 멈춰야죠. 시니어 세대들이 버티거나 고집부리는 건 문제가 될 수 있으니까요. 저는 상황에 따라선 포기도 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책방에 대한 열망이 너무 컸기에 결정을 못 내리고 망설이던 어느 날 꿈을 포기하게 될까봐 엉엉 울어버린 적도 있어요. 현실 속으로 들어가면 이런저런 상처도 받겠지만 내 마음을 담아 한다면 극복이 되지 않을까요?”
진솔하고 내밀한 이야기가 그녀의 과정을 짐작케 해줬다.
사람들은 묻는다. “책방 해서 돈 많이 벌어요?”라고. 지은숙 대표는 사실 수익을 찬찬히 따져보면 돈보다 더 많은 가치를 얻는다고 말한다. 정말 책만 사러 오는 사람이 뭐 그리 많겠냐고 반문하며 ‘사람들’을 알아가는 것이 더 큰 기쁨이라고 했다.
‘동네’라는 지역사회에서 만나 함께 수업을 하고 뭔가를 같이 꾸려가는 것, 그런 게 너무 새롭고 에너지가 생기고 힘이 난단다. 예쁜 소품이나 달력을 하나 만들어 와서 책방 공간에 놓아주는 소소한 마음들이 그녀에게 행복감을 가져다준다면서 진달래꽃이 그려진 지도를 가리킨다. 이야기가 있는 면천 마을에 오신 분들이 읍성이나 책방만 쓰윽 보고 가는 것이 안타까워 좋은 사람들과 마을지도를 만들어 면의 지원을 받아 배포했는데 그 결과물이 뿌듯하단다. ‘오래된 미래’는 어느덧 책만 파는 동네 책방이 아니라 지역문화의 가치까지 전파하고 있는 것이다. 지 대표는 그 어엿한 입장을 무척 기꺼워한다.
“우리 동네를 사랑해요”
지은숙 대표는 ‘오래된 미래’가 일반 책방의 역할만 하는 게 아니라 문화의 장으로도 활용되고 있어 다행스럽고 큰 보람으로 생각한다고 말한다. 시내 도서관 프로그램을 이곳에서 만들어 배달 강좌도 한다. 재능을 가진 분들이 주거지에서 가까운 책방을 통해 동네 주민들에게 강의를 하고, 작가와 함께 북 토크도 열고, 바느질·면천 역사 수업·독서모임·영화보기 등도 진행했다. 특히 책 만들기 수업을 통해 각자 책을 만들고 나름의 출판 기념도 하기에 이르렀다. 단지 책방으로 출발했지만 이제는 이곳에 오는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소통의 공간이 된 것이다.
‘오래된 미래’는 시골 마을의 책방이지만 책이 제법 많다. 책방지기의 책 욕심 때문이다. 처음에 책방을 연다고 하니까 다들 북 카페도 함께 내라는 조언을 많이 했다. 그러나 지 대표는 책을 우선순위에 둬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이곳이 도서관은 아니므로 책을 읽으며 차 한 잔 정도는 마실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도 괜찮다 싶어 최소한의 음료를 준비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오래된 미래’의 모든 책은 제가 선택했습니다. 사람 마음이 비슷해서인지 반품하는 책들이 거의 없어요. 잘 모르는 책은 딱 한 권만 주문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책은 쌓아놓고 팝니다. 저는 일상적인 책들을 좋아해요. 특히 3~5권 정도 낸 작은 출판사의 책을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었는데 내용들이 너무 좋아요. 때로는 손님들이 이 책 괜찮다며 알려주기도 해요. 제가 다 알 수는 없으니 그런 말씀 해주시면 고맙죠.”
둘러보니 어쩐지 주인을 많이 닮은 것 같은 책방이다. 책방지기로서 애착이 가는 코너도 있을 듯싶었다.
“어른들의 이야기책이 있는 코너입니다. 어머니 아버지 얘기가 들어 있는 책은 다 구해서 갖다놓고 싶어요. 그림책 코너도 있는데 엄마들이 아이들이랑 오면 아이 책만 고르는 게 늘 마음에 걸려요. 엄마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책을 편안히 골라 읽으면 좋겠어요.”
이층으로 올라가 보니 “이 편안한 공간을 그대에게 허하노라” 하는 것 같아 고마운 느낌이 확 든다. 한쪽 옆으로는 책으로 벽면을 가득 채운 방이 열려 있다. 배 깔고 엎드려 책을 읽고 싶게 만드는 방이다. 천장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공간에는 둥근 탁자와 긴 테이블이 놓여 있다. 차 한 잔 하면서 담소를 나누거나 조용히 앉아 책 읽기 딱 좋아 보인다. 햇살 잘 드는 창 너머로 보이는 옛 면천초등학교와 면천 관아의 문루였던 풍락루(豊樂樓)가 고즈넉했다.
옆으로 이어진 옥상으로 나가면 면천 마을을 전망할 수 있다. 내려다보니 마을 사람들이 사는 다소곳한 가정집들이 보인다. 깨끗하게 빤 빨래가 빨랫줄에 나란히 걸려 가을볕에 뽀송뽀송 마르고 있었다. 마당 끝에는 북 스테이로 활용하는 방도 하나 있는데, 이 방을 이용하려면 자격이 있어야 한다. 면천에 머물면서 마을을 즐기고 책방을 이용해 쉼을 얻고자 하는 여자여야 한다. 식사 제공은 없는 단출한 조건이다. 그렇지만 아침이면 자기도 모르게 누룽지를 끓여다준다면서 지 대표는 또 하하하 웃는다.
동네 책방이 주는 또 다른 가치 ‘나눔’
그러고 보니 ‘오래된 미래’에는 오래된 책을 따로 구비해놓은 공간도 있다. 책방을 하다 보니 옛날 책들도 정겹고 애틋해 한쪽에 코너를 만들었단다.
“책의 가치는 읽는 사람이 정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누렇게 변한 책들도 데리고 살기로 했어요.”
이뿐만이 아니다. 책방 입구 벽면에는 세 칸의 ‘나눔 책장’이 있다. 여기에 놓인 책들은 팔지 않는다. 누구라도 마음껏 가져다 읽으면 된다. 간혹 자신이 다 읽은 책을 기증하고 싶거나 누군가에게 읽히고 싶어 가져오면 경우에 따라 헌책 값을 계산해주기도 한다. 책방이라는 공간을 초월해 나눔의 의미를 공유하는 좋은 아이디어다.
요즘 동네 책방이 많이 생기기도 하고 또 사라지기도 한다. 무슨 이유일까 궁금했다.
“책방을 시작하는 이들의 계층 분포도가 의외로 넓어요. 젊은이들도 있고 퇴사한 중년이나 시니어들도 있지요. 그런데 젊은 분들은 대부분 임대를 얻어서 하다 보니 현실적인 어려움에 처하게 돼요. 시니어들은 저처럼 수년씩 고민해서 결정하거나, 또 사는 집에 딸린 공간을 이용하는 분이 많아요. 아무래도 젊은이들보다 임대료 부담에서 좀 더 자유롭죠. 그래서 오래가는 게 아닐까 싶네요.”
면천이라는 오래된 마을이 주는 고즈넉함, 그 분위기 속에 ‘오래된 미래’는 아주 잘 어우러져 있다. 지낼수록 점점 더 애착이 간다는 책방지기의 말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동네 책방이 주는 가치가 충만한 시골 마을의 가만가만한 가을 한나절이 따스했다. 문은 연 지 아직 2년 남짓밖에 안 되어 서툴렀던 부분도 있었다. 그걸 조금씩 보완하면서 지금처럼 성장하고 싶은 게 그녀의 바람이란다. 지 대표는 밝게 웃으며 덧붙여 말했다.
“그렇지만 책방을 하고 싶었던 오랜 꿈이 이루어져 지금 너무 행복하고 좋아요.”
할 말은 다 하고 센 듯 보이지만 공감이 가니 유쾌하다. 과거는 마음에 두지 않고 현재와 미래만을 이야기한다. 돈과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는 게 삶의 철학이지만 쓸 때는 통 크게 쓰는 여장부. 최근 대한민국에서 가장 화제가 된 시니어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이 그 주인공이다. 지난 7월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 기부한 676억 원을 포함해 2012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 총 766억 원을 출연하며 전 국민의 관심을 모은 그녀를 만나 이 시대의 어른, 그리고 시니어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1936년 서울에서 4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6·25전쟁의 포화 속에서 10대 시절을 보낸 소녀는 이제 한 기업의 대표이자 막대한 기부금을 사회에 환원해 시니어의 지표를 새롭게 세운 유명인이 되었다. 그 주인공인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은 화통한 기부금만큼이나 솔직하고 유쾌한 모습으로 기자를 맞이했다.
“나는 과거에 매이지 않아. 오직 현재와 미래만 생각해.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니까. 아무리 돈이 없어도 옷 한 벌은 챙길 수 있지만 시간은 그럴 수 없잖아.”
기부를 하면 새로운 기쁨을 알게 된다
이미 팔순을 넘어 85세의 나이지만 오직 현재와 미래만 본다는 이 회장의 말에는 아직도 그녀가 젊게 살 수 있는 이유가 담겨 있었다. 그녀가 엄청난 기부금을 출연한 것도 현재의 삶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기부하면 이제까지 자신이 느끼지 못한 새로운 기쁨을 알게 되고 엔도르핀이 돌아. 사람들이 나를 보는 눈도 달라지고.”
그녀가 기부를 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6.25전쟁 시절에 있다.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동네 사람들이 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떡 잘 먹었다” 하고 인사를 했다는 것이다. 집에 와서 어머니에게 “동네 사람들이 떡을 잘 먹었다고 하던데 무슨 일이에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전쟁 때문에 동네 사람들이 너무 힘들어해서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해 떡을 나눠야겠다고 생각했고, 사람들에게 “우리 애기가 떡을 나눠드리라 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자신이 받을 감사를 딸에게 돌린 것이다. 그때 기부의 선한 영향력, 그리고 그걸 가능케 한 어머니의 부지런하고 알뜰한 모습이 이 회장에게 분명하게 각인되었다.
신문기자로 자리 잡기까지 거듭된 좌절
이 회장에게 다시 기부의 힘이 각인된 것은 그 어려웠던 시절에 들은 한 기독교 장로의 말 때문이었다. 온 나라가 구호물자를 얻으러 다니던 시절, 그 장로는 “우리도 가난하지만 주는 자가 되어보자”라고 설파했다. 그 말에 꽂힌 그녀는 자신이 모은 돈으로 세상을 더 선하게 만들 길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 쉬운 길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서울대 법대생이었던 그녀는 당연히 사법고시를 준비했다. 하지만 결과는 낙방이었다. 그녀는 그 시절의 자신에 대해 “선풍기도 없는 도서관에서 밤낮없이 공부하니 땀띠 범벅에 몸 곳곳이 망가졌고, 처음 맛본 실패의 고통은 상상 이상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래도 좌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시 한 번 세상에 도전했다. 그녀가 지원한 곳은 신문사. 기자가 되어보기로 했다. 그러나 사내 파벌 싸움, 서울대 나온 여성에 대한 질시 등이 심해 퇴사를 반복했다. 그러다 마침내 서울경제신문의 경제기자로 자리를 잡게 된다. 기자가 안 됐더라면 어땠을까. 기자의 질문에 이 회장은 바로 답을 했다.
“지금은 고시에 떨어진 걸 참 행운이라고 생각해. 고시에 합격했다면 그 검은 옷을 입고 변호사나 판검사가 돼서 살았겠지. 그런데 그 사람들은 싹 싸움꾼이야. 남의 싸움을 해결해주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을 못하는 사람들. 하지만 나는 신문기자로 살았으니 행동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할 말 다 하면서 많이 알게 됐지. 슬픈 사람, 잘난 사람, 못된 사람, 바보도 만나고…. 그때도 지금도 정직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죽이는 거라고 생각해. 양심적으로 살려고 했지. 기자생활하면서 인생의 많은 걸 배웠어. 평생 배우면서 살아야지.”
40대 중반에 제2의 인생을 개척하다
이 회장의 기자생활 커리어는 화려했다. 경제기자로서 당시 아무도 하지 못했던 이병철 삼성 회장과의 인터뷰를 성사시켰고, 그 덕분에 다른 기업 총수들과의 만남도 무난하게 이뤄지면서 격의 없는 관계를 쌓게 됐다.
그러나 권력의 힘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1980년 5공화국이 언론통폐합을 하면서 그녀의 기자생활은 해직으로 끝나게 되었다. 40대 중반이었고 배우자 없는 여성이었다.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근심에 싸일 수밖에 없는 악조건이었다.
하지만 경제부 기자로서 수많은 CEO들을 만나면서 사업 수완을 익힌 덕분일까. 그녀는 제2의 인생을 사업가로서 다시 개척하기로 했다. 사실 그녀는 기자생활을 하던 서른다섯 살 때 아버지의 도움으로 안양 하천부지를 구입해 주말이면 내려가 농사를 지었다. 그 농장은 퇴직 후 본격적인 본업이 되었다. 돼지를 키우고 옥수수를 재배했고 젖소까지 들였다. 이후 돼지가 1000마리까지 불어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사업 노하우는 인연의 중요함을 잊지 않는 것
숱한 위기와 고난을 헤쳐 온 그녀에게 다시금 시련이 찾아왔다. 이 회장의 땅이 도로 건설로 인해 수용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그녀는 안양천에서 모래 채취 사업을 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서울 여의도 맨하탄 빌딩의 5층을 매입해 깡패들과 싸워가며 부동산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다른 층도 계속 사들여 빌딩관리단 회장이 되었고, 미국 LA의 도심 빌딩까지 구입하면서 막대한 성공을 일구었다.
그녀는 사업의 성공은 운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운이 자신 앞을 지나갈 때 누구는 붙잡고, 또 누구는 놓치느냐의 차이로 성패가 갈린다고 보는 것이다. 이 회장은 또 사람과의 인연을 중시한다. 아무리 작더라도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의 운명이 바뀌면 자신의 운명이 바뀌기도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녀의 사업 노하우는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 지금은 아무리 하찮게 보여도 진심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에 있는지도 모른다.
“허투루 보지 않고 면밀하게 검토하면 길이 나와. 그걸 안 하니까 문제지. 감나무 밑에서 입 벌리고 있으면 감이 떨어져?”
이 회장은 땀 흘려서 번 돈이 아니면 가치가 없다고 여긴다. 자신이 기자 시절부터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녀의 기부 또한 그런 기준에서 이뤄진다. ‘왜 카이스트에만 기부하고 모교인 서울대에는 기부하지 않느냐’라는 세간의 의문에 대해 그녀는 명확하게 대답했다.
“모교라고 다 해줄 생각은 없거든. 그래도 의과대학은 좀 하려고 해. 법대는 인성교육이 안 돼서 안 했어. 내 후배라고 할 사람도 없으니 연연할 필요도 없고. 내가 하는 기부의 기준은 국가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야.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 하는 것이고, 기부의 가치가 서야 해. 빈민 구제 사업을 하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번 돈인데 함부로 쓸 수는 없지.”
자식에게 무조건 돈을 주는 건 자식 망치는 길
이 회장의 기부금에 대한 단호한 기준은 최근 더 현실적으로 구체화되었다.
“지금까지는 기부한 기관에 맡기고 활용하게 했는데, 부작용이 너무 커. 돈 만지는 사람들 손에서 돈이 다 녹더라고. 그래서 내가 직접 ‘이수영과학교육재단’을 만들려고 준비하고 있어. 누가 봐도 투명하고 깨끗하게 운영할 생각이야.”
이 말에는, 지금까지의 막대한 기부를 멈추지 않고 되려 더 정확하고 분명하게 지속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이처럼 기부금에 대한 기준이 확실하고 공정한 운영에 강력한 의지를 보이고 있는 그녀가 최근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상속증여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지 궁금했다.
“자식에게 무조건 다 남기려는 건 틀린 거야. 자식을 무능하게 만들어. 젊은 날에 부모가 뼈빠지게 돈 버는 모습을 자식에게 보여주고 그대로 가르치면 돈을 지킬 수 있는데, 그건 안 하고 ‘내가 고생했으니 자식은 고생 안 시키고 돈만 주겠다’면 자식들이 사치하고 탕진하고 마약이나 하게 되는 거지. 부모라면 아이들에게 인성교육을 하고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줘서 값진 삶을 살도록 해야지. 땀 흘리지 않고 번 돈은 제 돈이 아니야.”
82세의 초혼, 그리고 첫 부부싸움
이 회장이 핫피플이 된 데에는 막대한 기부금도 있지만 82세의 나이에 성사된 초혼도 한몫했다. 상대는 서울대 동기인 김창홍 변호사. 사업을 하면서 친구들끼리 골프 모임을 자주 가졌는데, 골프가 서툴렀던 그녀의 캐디 역할을 자임했던 사람이 바로 김 변호사였다. 그렇게 쌓인 친분 속에서 마침내 결혼이라는 결실이 맺어졌다.
“동기생 중에 동아일보 기자가 있는데 인터뷰 기사를 쓰겠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우리 영감이 내가 먼저 프러포즈했다고 하는 거야. 무슨 개똥같은 소리를.(웃음) 결혼은 여자가 아무리 좋아해도 남자가 싫어하면 못하는 거 아냐? 화가 나서 반지랑 시계를 풀어서 쓰레기통에 버렸지. 그랬더니 남편이 ‘내일 결혼식인데 안 한다고 하면 어떡하니?’ 하더라고. 내 마음 달래줄 생각은 안 하고 결혼식이 걱정이었던 거야. 그래서 싸웠지.”
그녀에겐 인생 최초의 기념비적인 사랑싸움이었다. 그러나 남편은 감정을 묻어두는 사람이 아니고 그녀도 똑같은 성격이었다.
“그렇게 티격태격 싸우고 난 뒤에 둘이 웃는 걸로 끝냈지. 칼로 물 베기지. 그래서 결국 결혼식을 했는데, 신부화장하는 데 와서 날 보곤 입을 다물질 못했어. 좋아서.(웃음)”
또 하나의 가족이었던 ‘마리’
이 회장에게는 남편 외에 애정을 주는 가족이 또 있었다. 바로 그녀의 애견 마리다. 유기견이었던 마리는 얼마 전까지 그녀의 집 3층을 차지하고 살았다.
“나는 2층에서 지내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파바로티의 노래를 틀어주면 막 뛰어나와. 그러고 같이 산책을 하러 나가는데, 중간쯤 가다가 계속 날 돌아보고, 쓰다듬으면 꼬리가 빠지게 흔들고, 밥을 먹을 때는 식탁에서 나를 바라보곤 했지.”
그러나 지금 마리는 없다. 지난 11월 1일 비 오는 일요일에, 산책을 하고 돌아오던 마리는 불쑥 상추밭으로 뛰어 들어갔다.
“‘마리야!’ 하고 불렀는데 반응이 없어. 없어진 거야. 누구는 발정이 났다고도 하고, 그러다 돌아온다고도 했지. 그런데 끝내 안 들어와서 CCTV를 보니, 들개 세 마리에게 공격당하는 모습이 나오는 거야. 급히 골짜기를 다 뒤졌는데도 못 발견했어. 먹힌 모양이야. 지금도 가슴이 아파. 그래서 남은 사진들로 앨범을 만들었어.”
그녀의 핸드폰 대문 사진에는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웃고 있었다.
깊고 풍성한 마음이 닿는 찬란한 가치
아직도 잊지 못하는 마리의 사진들을 하나씩 보여주는 애견인 이 회장. 마치 손주 사랑에 흠뻑 빠진 시니어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그녀는 과거에 비해 자신이 유해졌다고 말했다.
“늙으면 서러운 게 많대. 나도 늙으면서 성질이 유해지더라고. 젊을 때는 칼 같았지. 아랫사람들에게도. 그런데 어느 날 ‘저 사람들이 나보다 정말 뛰어났으면 내 밑에서 일하지 않겠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때부터 납득하게 됐어.”
나이 들면서 철학적 사유와 희생이 그녀의 삶에 깊숙이 스며들어 어느덧 인생의 품격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 회사의 직원들은 대부분 10년 이상 일한 장기 근무자들이다. 그녀는 그들의 미래를 위해 자신이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 무서운 게 없는 사람처럼 철두철미하게 직원들과 회사를 이끌어왔지만 그 강인함 뒤에는 직원들을 향한 애정이 숨어 있다. 이 회장의 형제 가족들에게 유언증서까지 마다하지 않고 측은지심으로 챙겨주는 그녀가 더 담백한 이유는 더 큰 세상을 향한 여정으로 이끄는 용기와 지혜에 있다.
“잘못된 것은 그냥 못 넘어가는 성격이야. 세상 사는 데는 정직이 최고지. 그리고 신용이고. 내가 받으려고 애쓰지 말고 주려고 해야 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한 사람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싶어.”
인터뷰를 진행하며 왜 이 회장을 매스컴에서 앞다퉈 다루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건 우리 사회에 필요한 어른다운 어른이 없어서가 아닐까. 그녀야말로 이 무거운 코로나 블루 상황에서 통 큰 기부로 미담을 준, 정직하게 열심히 살아온 영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합리적이고 현명하며 나눌 줄 아는 그녀의 선행이 사회적 가치로 거듭나 진짜 선한 영향력을 행하는 모습에서 우리 사회를 따뜻하게 밝혀주는 등불을 본다. 2021년에도 이 영웅의 스토리는 계속 이어질 것 같다.
오랜 시간 죽음을 공부했던 김이경(56) 작가는 가족과 지인들의 생사기를 목도하며 관념 속에 있던 죽음의 실체를 경험하게 된다. 평생의 스승과도 같았던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자기 생의 일부를 떠나보내는 슬픔과 성찰로 긴 애도기를 거친 그녀. 자신을 위무했던 죽음의 통찰을 담은 글귀를 모아 ‘애도의 문장들’(서해문집)을 펴내며, 애도의 시간을 보낼 이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하고자 한다.
Q. ‘애도의 문장들’을 펴내게 된 계기와 소감이 궁금합니다.
책을 내려고 글을 쓰기 시작한 건 한 5년 전부터였어요. 중간에 몇 번 포기도 했고, 출판사랑 계약을 파기한 적도 있었죠. 그러다 20년가량 고민해온 죽음에 대한 문제나 그사이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이제는 한 번 정리하고 넘어가야겠다 싶어 매듭짓게 됐습니다. 그야말로 숙제를 한다는 생각으로 마친 거죠. 사실 책이 나오고 큰 만족감은 없었어요. 해냈다는 건 뿌듯하지만, 잘했다는 건 잘 모르겠더라고요. 죽음에 대한 공부는 끝이 없기 때문에, 이 책은 끝이 아닌 시작이고, 잠시 마침표를 찍은 거라 생각해요.
Q. 공부를 통해 관념적으로 알던 죽음과 실제 가족과의 이별을 통해 경험한 죽음은 어떻게 다르던가요?
젊었을 때는 죽음에 대해 어떤 환상을 갖고 있었던 것도 같아요. 가령 천재들은 요절한다거나 이런 얘기를 들으면, 죽음이 두렵거나 무서운 게 아니라 ‘짧고 굵게 사는 거지 뭐’라는 식으로 쉽게 생각했던 거죠. 그러다가 가족이 병에 걸리고 생사를 달리하는 과정 등을 보면서 ‘아, 죽음이 그렇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구나’라는 걸 깨달았죠. 한 사람의 인생이 끝나면 그 죽음은 주변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그들의 삶까지 크게 좌우할 수 있다는 걸 느꼈어요. 삶과 죽음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삶과 죽음은 늘 함께 있는 거였죠. 어쩌면 죽음에 대해 막연히 두려움을 갖는 건 인생을 잘 모르기 때문일지 몰라요. 그래서 더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Q. 제목처럼 책에는 애도에 관한 문장들이 나오는데, 그중 자신에게 가장 위안이 됐던 문장은 무엇이었나요?
책에 언급한 문장 하나하나 제게 위안이 된 셈이죠. 그래도 가장 마음에 남는 걸 꼽으라면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발견한 문장이에요. 아버지의 묘비명에도 쓰였는데, 아마 일종의 인생 후반기 좌우명처럼 생각하신 것 같아요. ‘모든 상대는 흐르는 물과 같다’는 거죠. 그 상대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죽음이 될 수도 있고, 어떤 감정이 될 수도 있어요. 어쨌든 이 모든 것은 계속 흘러간다는 거죠. 그러니 내가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느끼는 이 슬픔이나 절망도 언젠가는 다 흘러간다는 거잖아요. 그 문장에 많이 기대고 위로받았습니다.
Q. 아버지는 인생의 멘토와도 같은 분이라고 하셨죠. 삶의 끝자락에서 아버지가 남긴 죽음에 관한 이야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무엇인가요?
언젠가 해가 뉘엿뉘엿 질 때쯤 함께 차를 타고 가는데, ‘죽음이 오면 저런 노을빛 같이 올까?’라고 하시더군요. 사실 아버지는 ‘죽음은 이런 거야’라는 식으로 단정 지어 말씀하신 적은 없어요. 사후세계나 이런 부분도 제가 여러 번 물어야 조금 이야기하신 정도였죠. 아마 그런 고민들에 대한 답은 ‘네 몫이다’라고 여기신 것 같아요. 다만 그건 확실히 말씀해주셨어요. ‘두려워할 건 없다’는 거죠. 제가 아버지께 사는 것도 죽는 것도 겁이 난다고 하면, 그럴 필요 없다고 다독여주셨어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착하게 살라’는 당부도 하셨습니다. 오히려 어려서는 그런 말씀을 안 하셨는데, 저도 나이 들고, 아버지도 돌아가시기 전에 그렇게 이야기하시니 남다르게 와 닿더라고요.
Q. 웰다잉이 곧 웰빙이라는 이야기도 합니다. 20년 가까이 죽음을 공부하면서, 달라진 일상의 변화나 태도가 있다면요?
섣불리 죽고 싶다는 말을 안 하게 됐다는 것과 타인의 상황에 대해 쉽게 얘기하지 않게 된 거죠. 특히 누군가의 죽음이나 고통에 대해서는, 그게 당사자에겐 얼마나 큰 아픔인지 알기에 더욱 조심하려 해요. 혹시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더라도 어쩌면 그에게 말 못 할 두려움이 있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하고요. 아, 파리나 모기도 잘 못 죽여요.(웃음) 그만큼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고 진지해진 것 같습니다.
Q. 스스로 생각하는 ‘좋은 죽음’과 ‘좋은 애도’는 무엇인가요?
당사자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으면 ‘좋은 죽음’이라고 생각해요. ‘그래, 나는 괜찮아. 잘 살아왔어’라며 본인 스스로 자연스럽게 여긴다면, 아마 주변 사람들도 그의 죽음을 자연스럽게 바라볼 수 있겠죠. 물론 요즘은 의학기술이 발달해 애초에 ‘자연스러운 죽음’이라는 경계가 허물어진 편이긴 하지만요.
또 ‘좋은 애도’를 위해서는 충분히 슬퍼하고, 자신이 왜 슬퍼하는지 들여다보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봐요. 가령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게 왜 그리 슬픈지 스스로 물어봤어요. 충분히 나이가 드셨고, 당신께서도 만족스러운 인생을 사셨는데, 결국 그분을 잃어 슬픈 건 내 문제잖아요. 애도기 동안 떠난 이가 내게 어떤 존재였는지 묻고, 내 삶에서 그 사람과 함께했던 시간을 정리하며, 결국 내 인생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거죠. 그런 점에서 누군가의 죽음은, 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일부를 보내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 그런 충분히 슬퍼할 수 있도록 주변 사람들이 잘 기다려줬으면 좋겠어요. ‘뭘 그리 오래 슬퍼해?’라는 식으로 무심코 던지는 말이나, 마음대로 단정 지어 내뱉는 조언은 애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Q. ‘좋은 죽음’을 위해 스스로 준비하고 노력하는 부분이 있다면요?
사실 지금도 많이 준비가 안 돼 있다고 봐요. 갑자기 아프고 병이 든다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확 줄어들잖아요. 소위 환자가 되면 주체가 아닌 객체가 되는 거죠. 그렇다면 인생이 과연 내 의지대로 흘러갈 수 있을까요? 저는 자신에게 매일 물어봐요. 지금 죽어도 상관없을 만큼 잘살고 있나 하고요. 스스로 조금 두려운 순간이 찾아오면 ‘지금까지 잘하고 있었으니 괜찮아’라고 자신에게 얘기하고요. 어느 날 갑자기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을 때, 제 혼(魂)이 혼비백산(魂飛魄散)하지 않도록 늘 그런 말들을 상기해두려 하죠. 끊임없이 죽음에 대해 공부하려 애쓰는 것도 그러한 노력 중 하나고요.
Q. 중장년 세대는 죽음과 가깝다고 볼 수 있는데, 아직 이에 대한 인식이나 준비가 덜 된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나요?
독서회를 오래 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가장 읽기 싫어하는 주제가 바로 ‘죽음’입니다. ‘나는 죽어도 괜찮아’라고 말하는 이들조차 꺼리더군요. 저는 그럴수록 일부러 죽음에 대해 읽게 하고 대화를 나누자고 권해요. ‘죽음을 생각한다’는 건 겸손해지는 거라고 봐요. 내가 한계가 있는 사람이라는 걸 일깨워주니까요. 그런 겸손한 마음을 갖고 계속 이야기하다 보면 처음엔 관심 없던 분들도 아주 솔직하게 자기 인생관을 털어놓게 되죠. 그런 대화를 통해 관계는 깊어지고, 인생도 더욱 잘 살아낼 수 있어요. 사람은 살던 대로 죽는 거잖아요. 잘 사는 게 곧 잘 죽는 것이죠. 그러니 죽음을 너무 멀리 보고 막연히 두려워 말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어가셨으면 좋겠습니다.
△ 김이경 작가
대학과 대학원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대학 강사를 하다 학계를 떠난 뒤 도서관에서 혼자 ‘죽음, 시간, 여성’ 등을 주제로 공부했다. 우연히 인연이 닿은 글두레 독서회에서 26년째 강사를 하고 있다. 뒤늦게 출판사에 취직해 다양한 책을 만들었으며, 책을 주제로 한 소설집 '살아 있는 도서관'을 내면서 작가로 전향했다. 이후 '마녀의 독서처방', '마녀의 연쇄 독서', '책 먹는 법', '시의 문장들', '시 읽는 법' 외 다수를 펴냈다.
나이 들면서 가장 두려워하는 질병이 치매다. 자신을 스스로 돌보지 못하고 가족에게 짐이 되다가 저세상으로 떠나는 슬픈 병이다. 치매나 건망증은 사람의 뇌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도서관에 가보면 고령사회로 가는 길목을 반증하듯 뇌와 관련한 책들이 무척 많다. 동네 도서관인데도 100권은 넘는 것 같다. 더욱 놀란 것은 저자가 대부분 의사가 아니라 유명 저널리스트다. 이분들이 기자나 작가정신을 발휘하여 의사 또는 환자를 만나고 각종 논문들을 찾아서 증상과 예방법을 기술하고 있다.
뇌와 관련한 여러 권의 책을 읽어보니 내용은 대동소이(大同小異)했다. 다만 기억력 훈련법으로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올 때 익숙한 길이니 눈을 감고 감각에 의존해 걸어보는 훈련을 하라는 문장을 읽었다. 시각장애인의 삶이다. 현대인들은 TV, 휴대폰 등 시각을 많이 쓴다. 또 물건을 사러 가면 바코드로 자동 계산을 하니 도무지 머리를 쓸 일이 없다. 이제 계산기가 없으면 쩔쩔매게 된다. 구구단도 가물가물하고 초등학생 수준의 산수도 암산으로 계산하기가 어렵다. 그러면 머리는 언제 쓰는가? 두뇌가 싫어하는 걱정할 때만 쓴다. 그러니 스트레스만 쌓인다.
시각장애인은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없으니 기억력, 소리, 촉감, 후각 등 일반인보다 더 많은 오감 정보를 통해 사물을 이해한다. 손으로 만져보는 행동은 기본이다. 손을 많이 써야 두뇌에 좋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다. 건강한 사람은 눈으로 모든 정보를 알아차리니 다른 감각기관은 퇴화되어간다. 엘리베이터 층수 표시에 시각장애인용 점자 글자가 있는데 일반인의 촉감으로는 숫자를 느끼지 못한다. 그만큼 촉감에도 무디어져 있다.
그렇다면 시각장애인은 치매나 건망증 환자가 정말 없을까? 궁금해서 내가 잘 아는 '시각장애인 복지관' 팀장에게 물어봤다. 내 질문에 황당해하면서도 시각장애인이 치매 환자인 경우를 못 봤다고 한다. “야~ 이거 획기적 사건이다” 하고 시각장애인 중에 건망증 환자는 있냐고 물어봤더니 건망증에 대한 통계가 없어서 자세히는 모르지만 일반인들보다 기억력이 좋다고 한다. 방송에서도 시각장애인들이 아기 분유도 타서 먹이고 익숙하게 물건들을 꺼내 요리하는 걸 봤다. 농사짓는 시각장애인도 있는데 넓은 들판에서 자신의 논밭을 기억하는 것도 놀라운데 같은 풀 종류인 잡초와 채소를 구별하는 걸 보고 입이 떡 벌어졌다. 내 경험을 볼 때 글자를 모르는 문맹자들이 기억력이 더 좋다. 그들은 글을 모르니 필사적으로 외우려고 한다.
거실에 여러 가지 장애물을 두고 눈으로 사진 찍듯 찍어 기억력으로 암기한 후 촉감을 동원해 피하는 훈련을 해보니 효과 만점이다. 가끔 안전한 곳에서 눈을 감고 촉감으로, 소리로, 냄새로 이동하는 훈련을 해보면 두뇌 훈련에 아주 좋을 것 같다. 한쪽이 약하면 다른 쪽이 약한 쪽을 보강해준다. 눈을 덜 쓰는 훈련, 매일 조금씩 해보면 좋겠다.
강원도라 하면 누구라도 산과 바다가 고루 펼쳐진 대자연이라는 걸 자연스럽게 떠올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동해로 떠나고 바다를 둘러싼 수려한 강원도의 산으로 향한다. 그런데 그것뿐만이 아니다. 그 자연 속에 문화 예술의 멋이 자리 잡고 있다. 폐교에 펼쳐진 예술의 풍성함과 메밀꽃 이야기의 정취 속에서 조용하게 보낼 수 있는 공간이 기다린다.
언제부터인가 시골 학교의 폐교가 늘면서 비어 있는 공간 이용의 다양한 모습을 감상하게 되었다. 농촌 인구가 도시로 유출되면서 아이들도 부모와 함께 떠나버려 폐교가 되고 있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 잇따르며 생긴 공간이다. 이제는 아이들이 떠난 학교가 미술관이나 창작실, 도서관 캠핑장, 또는 카페와 같은 휴식 공간으로 탈바꿈하여 지역 주민은 물론이고 세상 사람들과의 소통을 이끌어내고 있다.
강원도 평창의 무이예술관은 시골마을의 자그마한 무이초등학교였다. 폐교된 이후 서양화가 정연서, 이천섭, 조각가 오상욱, 도예가 권순범 등의 예술인들이 뜻을 모아 예술관으로 변신시켰다. 폐교를 이용한 공간을 여러 군데 가본 적이 있는데 무이예술관은 실내와 실외로 나누어 예술작품이 넘쳐나는 게 특별하다.
교실마다 장르별 작품들이 꽉꽉 채워져 있다. 가끔은 조각 작품을 앞에 두고 버스킹도 한다. 무이예술관, 이곳이라면 꽉 채운 가을날 하루를 보낼 만하다. 이곳을 서성이다 보면 어느덧 어릴 적 추억이 소환되고 감성은 더없이 말랑해져서 비로소 숨통이 트여 있는 자신을 느끼게 된다.
무이예술관은 입구부터 눈길을 사로잡는 거대한 조형물이 시골 학교를 그저 조촐하게 꾸민 예술관이 아니라는 걸 대번에 전한다. 복도에 발을 들이면 창가의 새하얀 커튼이 바람에 살랑이고 흰색 천의 직조 틈 사이로 복도 가득 빛이 쏟아진다. 창가에 줄지어 전시된 조각 작품들은 가을볕에 멋스럽게 빛난다.
둘러보니 원래도 작은 학교였던 것 같다. 몇 개의 교실이 있는 건물 한 동이 전부인데 교실(전시실)마다 회화, 조각 작품, 도예 작품들이 가득하다. 빽빽하게 전시된 서예 작품도 고요히 묵향을 풍긴다. 또 한쪽 전시실에는 역시 봉평의 예술 공간답게 새하얀 메밀꽃 그림으로만 가득 채워져 있다. 복도에서는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삽화와 함께 스토리텔링을 감상할 수 있어 문학적 분위기에도 잠겨보게 된다.
볼거리는 끝이 없다. 스튜디오 겸 작업실이 열려 있어 예술가의 공간을 훔쳐보는 맛도 쏠쏠하다. 체험 공간과 아트 숍이 함께 꾸며져 있어 참여 활동도 가능하다. 복도 창가나 틈새 공간도 그냥 놔두지 않고 예술가들의 손길이 닿아 있다. 계단참의 소품들을 구경하면서 위층에 오르면 모임이나 파티를 열 수 있는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문 열고 옥상으로 나가면 무이예술관의 바깥 풍경을 내려다볼 수 있다. 가슴이 탁 트이는 공간이다.
예전엔 운동장이었을 조각공원은 자연이 주는 넉넉함이 있어 천천히 둘러볼 수 있는 여유를 준다. 잔디 마당은 발걸음마다 부드럽다. 아이들은 조각품들 사이에서 뛰어놀고 엄마 아빠는 예술작품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 모습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가을이 깊어가는 운동장엔 노랗게 빨갛게 물든 단풍잎이 날리고 발아래는 낙엽이 바스락거린다. 이곳을 오가는 누구라도 갬성 충만이다.
커피 향 따라 가본 전시관 끄트머리의 갤러리 카페. 사방으로 널찍한 덱에 앉아 운치 있게 차 한 잔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카페 안은 운동장을 향해 문을 활짝 열어놓아 테이블에 앉아 편안히 풍경을 감상하며 휴식시간을 누릴 수 있다. 예술적 상상력과 소통이 공존하는 무이예술관에 가면 가슴 가득 예술의 기운을 얻어 나오게 된다.
살다가 잠시 멈추고 천지의 가을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깊게 숨을 쉬어볼 만한 곳. 폐교에 담긴 예술 작품과 따스한 휴식 공간에서 충분한 감성 충전을 했던 참으로 괜찮았던 가을날 하루, 자연스럽게 힐링이 되었던 시간이다.
▲주변에 가볼 만한 곳
-이효석 문학의 숲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 이 소설의 배경지인 봉평엔 메밀밭뿐 아니라 소설 속 내용을 모형으로 재현해놓은 ‘이효석 문학의 숲’이 있다. 발걸음에 따라 30분에서 1시간 정도 걸리는 산책로가 마련돼 있다. 덱 주변에는 자작나무가 하늘 높이 솟아 있다. 산책길을 따라 소설 속 장터와 등장인물들이 막걸리를 마시던 충주집과 물레방아 등 소설 속 내용이 길목마다 새겨져 있어 하나씩 읽다 보면 어느새 전편을 다 읽게 된다. 가을이 깊어지는 계절에 이효석 문학의 숲에서 단편문학 한 편 읽으며 산책하는 시간, 좋지 아니한가.
몇 년 전부터 나만의 북큐레이션으로 무장하고 독자와 호흡하는 소소한 이벤트로 세상에서 사라져가고 있던 동네 책방을 되살려내고 있는 책방지기들이 등장했다. 이곳 동네 책방 한쪽에 앉아 차 한 잔 마시며 조용히 책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가슴속 묻어뒀던 작은 행복 하나가 ‘똑똑’ 심장을 두드리며 응답한다.
“남에게 보이는 것보다 내가 행복한 삶’이 좋다. 오늘 당장 떠날 것, 가까운 동네 책방으로!!”
“책방도 사업입니다. 지속 가능성이 없다면 문 닫아야죠.”
어? 이 사람 ‘찐’이다. 소위 공트럴파크(공릉동+센트럴파크), 옛 경춘선 철길 따라 조성된 노원구 시민공원 한쪽 2층에 위치한 동네 책방 ‘책인감’. 이곳에 위치해 있던 책방 ‘51페이지’를 인수해 간판을 바꿔 단 지 2년 9개월 됐다.
이제 막 전업 3년 차를 향해 달려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대기업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동네 책방 운영자, 1인 출판사 사장 및 출판 기획자, 저자, 강연자, 콘텐츠 기획자라는 다양한 이름으로 세포분열 중이다.
이철재 대표는 대학에서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업, 18년 동안 안정된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조금씩 직책이 높아지고 중간관리자가 되면서 직장인으로서의 삶이 녹록지 않았단다. 합리적이지 않은 상사의 지시, 몇 차례 설득과 설명을 해도 돌아오는 건 “까라면 까”라는 상명하복의 문화가 싫었다. 부하 직원에게 자신 역시 똑같이 불합리한 지시를 내리고 업무 성과를 요구하는 모습을 보면서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임계점에 도달하게 됐을 때 인생 2막을 준비하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무작정 그만둘 수는 없어 ‘뭘 해볼까?’ 고민하다가 ‘내가 좋아하는 책과 관련된 일을 해보자’ 마음먹고 동네 책방 쪽을 알아보게 됐단다. 새로 시작하는 것보다는 기존 사업체 인수가 여러모로 나을 것 같아 ‘51페이지’와 계약을 하면서 미련 없이 회사에 사표를 던졌다.
딱히 책을 열렬하게 좋아했던 건 아니었단다. 자전거 타고 전국을 누비며 여행을 하다가 동네에 자그맣게 자리한 동네 책방들을 만나게 됐고 콘텐츠로서 책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호기롭게 사표를 던지고 나와 새로운 인생의 길을 만들고 있는 중이지만 ‘바깥은 전쟁터’라는, 드라마 ‘미생’의 대사를 실감하고 있다. 그래도 대기업 출신이 운영하는 동네 책방이라는 소문이 나면서 주인장 ‘이철재’를 궁굼해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정답은 없지만 계속 도전하는 이유
현재 이철재 대표는 꾸준히 책 관련 콘텐츠 기획을 하며 외연 확장을 시도하고 있다. 처음부터 동네 책방 운영만이 목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1인 출판사 ‘책인감’을 통해 ‘이철재’ 이름으로 두 권의 책을 펴냈고 책을 출간하고 싶은 이들과 협업으로 세 권의 책을 더 세상에 선보였다.
이 대표의 저서 ‘1인 가게 운영의 모든 것’은 서점 주인만을 대상으로 펴낸 책이 아니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1인 가게 운영자들이 꼭 알아야 할 A부터 Z까지의 노하우를 담았다. 경영학도답게 1년간 동네 책방을 운영하면서 겪었던 시행착오와 시장분석을 통해 스스로를 컨설팅하고 전국의 동네 책방까지 컨설팅해준다.
이 책이 동네 책방에서 판매되고 지역 서점조합의 주문도 받게 되면서 종종 서점조합이나 도서관에서 열리는 행사 강연자로 초대되기도 한다. 본격적으로 동네 책방 업계에 ‘이철재’라는 세 글자를 알리게 된 셈이다.
그런데 책 출간 방식이 기존 출판사 문법과는 다르다. 한마디로 책을 먼저 판매한 뒤 출간을 진행한다. 지난해 3월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인 텀블벅을 통해 펀딩에 나섰고 220명으로부터 531만3800원의 후원을 받았다. 그 뒤 ‘1인 가게 운영의 모든 것’이 출간됐다.
이 대표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펴낸 두 번째 책은 ‘제주 힐링 여행 가이드’. 대한민국 자전거길 국토 완주 그랜드 슬럼을 달성할 만큼 자전거를 타고 전국을 누볐던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책은 제주 토박이와 관광객으로 이분화돼 있는 제주의 숨은 여행지와 맛집 등을 중간자적 입장에서 소개한 안내서다. 역시 텀블벅 펀딩으로 79명으로부터 164만 원의 후원을 받아 출간됐다.
‘책인감’ 이름으로 펴낸 세 권의 책은 모두 책방 고객들로부터 의뢰를 받아 제작 출간됐다. 서울시민정원사회가 펴낸 ‘서울시민정원사가 들려주는 가드닝 이야기’, 시와 꽃 동인들이 펴낸 시집 ‘꽃씨한톨’, 간호사 김미정 씨가 펴낸 ‘아무도 나를 말릴 수 없다’ 등이다. 책방에서 독서모임을 갖거나 자주 방문하는 고객들이 토로한 출판의 어려움을 듣고 시작된 프로젝트들이다.
“동네 책방은 왜 대박을 기대하면 안 되죠?”
이렇듯 이철재 대표는 동네 책방을 기반으로 문화 콘텐츠 기획자로 변신을 꾀하고 있다. 두번째 외연 확장은 마을공동체 및 서울시, 공공기관의 다양한 지원사업 도전이다. 하루에도 수십 개는 뚝딱 만들어내던 기획서 작성 능력을 바탕으로 공공기관의 다양한 수행 사업을 실행 중이다. 특히 마을공동체 사업 등은 책방 공간을 활용한다. 마을공동체 구성원들이 모여 그림을 배우거나 기타 다양한 활동을 하는 장소이자 ‘책인감’을 널리 알리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동네 책방의 단골 이벤트라 할 독서모임도 눈길을 끈다. 과학책 읽는 모임인 ‘과학강좌’와 ‘여행강좌’, 그리고 와인을 좋아하는 이들이 매월 마지막 주 금요일에 모여 와인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금요와인’ 등이 있다. 과학에 관심이 많고 여행과 와인을 좋아하는 주인장의 취향을 엿볼 수 있다.
Mini interview '책인감' 이철재 대표
현재 텀블벅 프로젝트 3탄을 준비중이다. 책방 운영하랴… 공공 지원사업 신청하랴… 부족한 시간 가운데에서도 세번째 책 집필에 동분서주하고 있다.
이철재 대표가 회사 생활할 때 ‘엑셀의 신’으로 불렸던 본인의 꼼꼼한 엑셀 활용법을 복기하면서 직장 생활의 애환을 담을 예정이다. 엑셀의 무한한 활용을 꼼꼼하게 전수할 실용서에 회사 생활의 애환을 함께 담는 실용 에세이라고 할 수 있다.
책 집필 시간이 너무 부족해 월요일 하루였던 책방 휴무를 화요일까지 이틀로 늘렸을 정도다. 이전 텀블벅 프로젝트보다 훨씬 대중적인 분야라 모금액이 더 많지 않을까 기대를 걸고 있다. 올해 안에 출간하는 것이 목표란다.
남들이 안 하는 것들을 많이 시도하고 있다는 질문에 이철재 대표는 아래와 같이 답을 하며 인터뷰를 마쳤다. “정답은 없지만 이런 시도를 계속하는 건, 그래야 발전하니까요.”
‘책인감’ 서울 노원구 동일로 182길 63-1, 2층
사십대 후반, 또래의 여성 직장 동료들에게 독서의 기쁨을 전하기 위해 ‘여리 독서 모임’을 만든 손문숙(51) 씨. 어느덧 4년째 모임을 통해 중년이 되어 느끼는 몸의 변화부터 퇴직 후 인생 계획까지 함께 나누고 있다. 퇴직 후에는 작은 도서관을 꾸려 회원들과 멋진 할머니로 늙어가고 싶다는 그녀. ‘지극히 사적인 그녀들의 책 읽기’의 저자 손문숙 씨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Q. 4년 째 직장의 여성 동료들과 독서 토론 모임을 진행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처음에 모임을 만들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모임 소개도 함께 부탁드립니다.
“글을 잘 쓰려면 책을 먼저 읽어야 한다”는 글쓰기 강사의 조언을 듣고 독서 학습 공동체에서 1년 동안 독서 토론을 공부했습니다. 독서 토론의 즐거움을 먼저 깨닫고 직장 동료들에게도 그런 기쁨을 나눠주고 싶어 ‘여리 독서 모임’을 만들게 됐습니다. 여리 독서 모임은 인천광역시교육청의 사무관 이상으로 구성된 여성 관리자 네트워크에서 만든 동아리로 회원들은 여자이고 나이는 40대 후반 이상입니다. 1년 단위로 회원들을 모집하는데 매년 17명 정도 활동하고 있고 인천 북구도서관에 직장인 독서 동아리로 등록돼 있어 매월 1회 평일 퇴근 후 도서관에서 모임을 합니다.
Q. 모임에서 주로 도서 선정은 어떻게 이뤄지나요? 토론 방식은요?
토론할 책을 같이 의논해서 정하기 때문에 문학, 철학, 사회, 역사, 예술 등 다양한 주제의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들으면서 자신의 고정 관념을 깨우치고 모든 상황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게 되지요.
우리가 하는 토론은 찬반으로 나눠 경쟁적으로 토론하는 것이 아닌, 논제를 가지고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비경쟁 방식입니다. 직장 동료들은 책 내용뿐만 아니라 자연스럽게 가정, 직장, 사회 문제 등 사적인 이야기까지 스스럼없이 풀어냅니다. 중년이 되어 느끼는 몸의 변화, 자녀에 대한 고민, 남편과 시댁과의 문제, 직장 이야기, 퇴직 후 인생계획 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쏟아집니다.
Q. 중년 이후 시작한 독서 토론을 통해 얻은 일상에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인가요? 또 동료들에게는 어떤 긍정적인 변화가 생겼나요?
저는 40대 후반에 시작한 독서 토론을 통해 나를 찾고 타자를 이해하게 되었으며 자연스럽게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나와 가정, 사회까지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지요. 그리고 인생 2막에 작가로 살고 싶다는 멋진 꿈을 가지고 제 인생에 첫 번째 단독 책을 쓰게 되었습니다.
회원들 중에는 책을 가까이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책을 잘 읽지 않는 회원들이 더 많았습니다. 독서 모임에 나오면서 1년 동안 같이 읽을 책 목록이 공지되면 시간 여유 있을 때 책을 미리 읽어둡니다. 매월 모임에 나올 때 한 번 더 읽고 토론 후에 블로그나 독서장에 기록을 남기면서 한 번 더 복기를 합니다. 그러면 한 책을 세 번 정도 읽는 셈이지요. 토론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듣다보면 이해가 안 되던 것들도 알게 되고 본인의 생각도 객관화할 수 있게 되죠. 독서 모임을 통해 강제로라도 한 달에 한 권씩은 책을 읽게 되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알 수 있게 되어 배우는 점이 많다고 말합니다. 혼자 읽을 때는 읽고 나서도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하나도 안 나는데 독서 토론을 하게 되면 기억에 많이 남는다고도 하고요.
Q. 이번에 펴내신 ‘지극히 사적인 그녀들의 책 읽기’에 담고자 했던 주요 메시지는 무엇이었는지요?
저와 독서 모임 회원들이 독서 토론을 통해 깨달은 자아와 인생에 대한 성찰과 긍정의 힘을 제 책을 읽는 독자들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으면 해서 이 책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카페에 커피 한 잔 마시러 가듯이 가벼운 마음으로 독서 모임에 나가서 좋은 사람들과 좋은 책을 함께 읽고 토론함으로써 인생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하는 일이 소수의 고상해 보이는 취미 생활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일상 속에서 공기 마시듯 행하는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으면 하기 때문이죠.
Q. 독자로 책을 접할 때와 이번처럼 저자가 되어 책을 접할 때, 어떤 점이 가장 다르던가요?
독자로 책을 읽을 때보다 독서 에세이 작가로서 원저작을 읽을 때는 좀 더 꼼꼼하게 읽고 작가의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습니다. 책을 읽고 나서 책 내용과 관련된 나의 생각과 통찰을 글로 담아내야 해서 일반 산문을 쓸 때보다 시간이 훨씬 더 오래 걸렸습니다.
Q. 우리네 인생에서 ‘독서’(또는 책)가 주는 가장 큰 힘은 무엇이라 생각하시는지요?
故 신영복 선생님의 ‘담론’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우리가 일생 동안 하는 여행 중에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낡은 생각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오래된 인식틀을 바꾸는 탈문맥입니다. 그래서 니체는 ‘철학은 망치로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갇혀있는 완고한 인식틀을 깨뜨리는 것이 공부라는 뜻입니다.” 이렇듯 완고한 인식틀을 깨뜨리는 것이야말로 독서가 주는 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Q. 여성 중장년 독자들에게 꼭 읽어보시라 권하고 싶은 책은 무엇인가요?
루이제 린저의 ‘삶의 한가운데’입니다. 작중 니나를 통해 저자는 “모든 게 미정이야.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될 수 있어”라는 말로 우리 안에 있는 자아들 중의 하나에 우리를 고정시키지 말고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생을 살아감에 있어 스스로를 가두지 말고 거침없이 옳다고 생각한 대로 살아가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죠. 생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모험적으로 살아간 그녀의 삶의 방식은 전후 세대의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지금의 우리들도 동경하는 모습일 것입니다.
Q. ‘내 인생의 책’이라는 타이틀로 한 권을 꼽는다면 어떤 책이 될까요? 그 이유는요?
인상 깊은 좋은 책들이 많지만 앞서 언급한 신영복 선생님의 ‘담론’을 꼽고 싶습니다. 20년 20일이라는 긴 수형 생활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따뜻한 성찰을 간직하고 있는 작가의 마음을 통해 이 시대의 진정한 어른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에요. 선생님은 실천하는 지식인이셨고 “삶에 대한 공부를 통해 우리가 변화와 창조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공부이다”라고 늘 강조하셨습니다.
Q. 블로그, 인스타그램, 브런치 등 SNS 활동도 하고 계신데요. 주로 어떤 용도로 활용하고 계신가요?
동료들과 토론한 책 이야기를 주로 블로그와 브런치에 남깁니다. 처음에는 독서 토론을 한 기억이 휘발되기 전에 기록을 남기려는 목적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독서 토론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글로 정리해서 나중에 책으로 만들 수 있도록 차곡차곡 쌓아 두고 있습니다.
Q. 현재 교육행정공무원으로 일하고 계시는데요. 장차 퇴직 후에 작가가 되어 책을 쓰고 작은 도서관을 만들어 운영하겠다는 꿈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구체적으로 준비하고 있는 일이 있다면요?
저는 퇴직 후에 집필실을 겸해 여자들의 작은 도서관을 만들어서 운영하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지금의 독서 모임 회원들과 퇴직 후에도 우리들의 재능을 나눌 수 있는 멋진 할머니로 늙어가고 싶어서입니다.
퇴직이 8년 반 정도 남았는데 뜻을 같이 하는 동료들과 미래를 상상하며 차근차근 꿈을 실현해나가고 있습니다. 저는 작은 도서관 공간을 만들기 위해 돈을 모으고 꾸준히 책을 쓰고 있고, 뜻을 같이 하는 동료는 사십 초반에 사서가 되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상상하는 미래를 실현시키기 위해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