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말은 다 하고 센 듯 보이지만 공감이 가니 유쾌하다. 과거는 마음에 두지 않고 현재와 미래만을 이야기한다. 돈과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는 게 삶의 철학이지만 쓸 때는 통 크게 쓰는 여장부. 최근 대한민국에서 가장 화제가 된 시니어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이 그 주인공이다. 지난 7월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 기부한 676억 원을 포함해 2012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 총 766억 원을 출연하며 전 국민의 관심을 모은 그녀를 만나 이 시대의 어른, 그리고 시니어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1936년 서울에서 4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6·25전쟁의 포화 속에서 10대 시절을 보낸 소녀는 이제 한 기업의 대표이자 막대한 기부금을 사회에 환원해 시니어의 지표를 새롭게 세운 유명인이 되었다. 그 주인공인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은 화통한 기부금만큼이나 솔직하고 유쾌한 모습으로 기자를 맞이했다.
“나는 과거에 매이지 않아. 오직 현재와 미래만 생각해.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니까. 아무리 돈이 없어도 옷 한 벌은 챙길 수 있지만 시간은 그럴 수 없잖아.”
기부를 하면 새로운 기쁨을 알게 된다
이미 팔순을 넘어 85세의 나이지만 오직 현재와 미래만 본다는 이 회장의 말에는 아직도 그녀가 젊게 살 수 있는 이유가 담겨 있었다. 그녀가 엄청난 기부금을 출연한 것도 현재의 삶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기부하면 이제까지 자신이 느끼지 못한 새로운 기쁨을 알게 되고 엔도르핀이 돌아. 사람들이 나를 보는 눈도 달라지고.”
그녀가 기부를 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6.25전쟁 시절에 있다.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동네 사람들이 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떡 잘 먹었다” 하고 인사를 했다는 것이다. 집에 와서 어머니에게 “동네 사람들이 떡을 잘 먹었다고 하던데 무슨 일이에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전쟁 때문에 동네 사람들이 너무 힘들어해서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해 떡을 나눠야겠다고 생각했고, 사람들에게 “우리 애기가 떡을 나눠드리라 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자신이 받을 감사를 딸에게 돌린 것이다. 그때 기부의 선한 영향력, 그리고 그걸 가능케 한 어머니의 부지런하고 알뜰한 모습이 이 회장에게 분명하게 각인되었다.
신문기자로 자리 잡기까지 거듭된 좌절
이 회장에게 다시 기부의 힘이 각인된 것은 그 어려웠던 시절에 들은 한 기독교 장로의 말 때문이었다. 온 나라가 구호물자를 얻으러 다니던 시절, 그 장로는 “우리도 가난하지만 주는 자가 되어보자”라고 설파했다. 그 말에 꽂힌 그녀는 자신이 모은 돈으로 세상을 더 선하게 만들 길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 쉬운 길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서울대 법대생이었던 그녀는 당연히 사법고시를 준비했다. 하지만 결과는 낙방이었다. 그녀는 그 시절의 자신에 대해 “선풍기도 없는 도서관에서 밤낮없이 공부하니 땀띠 범벅에 몸 곳곳이 망가졌고, 처음 맛본 실패의 고통은 상상 이상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래도 좌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시 한 번 세상에 도전했다. 그녀가 지원한 곳은 신문사. 기자가 되어보기로 했다. 그러나 사내 파벌 싸움, 서울대 나온 여성에 대한 질시 등이 심해 퇴사를 반복했다. 그러다 마침내 서울경제신문의 경제기자로 자리를 잡게 된다. 기자가 안 됐더라면 어땠을까. 기자의 질문에 이 회장은 바로 답을 했다.
“지금은 고시에 떨어진 걸 참 행운이라고 생각해. 고시에 합격했다면 그 검은 옷을 입고 변호사나 판검사가 돼서 살았겠지. 그런데 그 사람들은 싹 싸움꾼이야. 남의 싸움을 해결해주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을 못하는 사람들. 하지만 나는 신문기자로 살았으니 행동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할 말 다 하면서 많이 알게 됐지. 슬픈 사람, 잘난 사람, 못된 사람, 바보도 만나고…. 그때도 지금도 정직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죽이는 거라고 생각해. 양심적으로 살려고 했지. 기자생활하면서 인생의 많은 걸 배웠어. 평생 배우면서 살아야지.”
40대 중반에 제2의 인생을 개척하다
이 회장의 기자생활 커리어는 화려했다. 경제기자로서 당시 아무도 하지 못했던 이병철 삼성 회장과의 인터뷰를 성사시켰고, 그 덕분에 다른 기업 총수들과의 만남도 무난하게 이뤄지면서 격의 없는 관계를 쌓게 됐다.
그러나 권력의 힘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1980년 5공화국이 언론통폐합을 하면서 그녀의 기자생활은 해직으로 끝나게 되었다. 40대 중반이었고 배우자 없는 여성이었다.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근심에 싸일 수밖에 없는 악조건이었다.
하지만 경제부 기자로서 수많은 CEO들을 만나면서 사업 수완을 익힌 덕분일까. 그녀는 제2의 인생을 사업가로서 다시 개척하기로 했다. 사실 그녀는 기자생활을 하던 서른다섯 살 때 아버지의 도움으로 안양 하천부지를 구입해 주말이면 내려가 농사를 지었다. 그 농장은 퇴직 후 본격적인 본업이 되었다. 돼지를 키우고 옥수수를 재배했고 젖소까지 들였다. 이후 돼지가 1000마리까지 불어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사업 노하우는 인연의 중요함을 잊지 않는 것
숱한 위기와 고난을 헤쳐 온 그녀에게 다시금 시련이 찾아왔다. 이 회장의 땅이 도로 건설로 인해 수용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그녀는 안양천에서 모래 채취 사업을 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서울 여의도 맨하탄 빌딩의 5층을 매입해 깡패들과 싸워가며 부동산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다른 층도 계속 사들여 빌딩관리단 회장이 되었고, 미국 LA의 도심 빌딩까지 구입하면서 막대한 성공을 일구었다.
그녀는 사업의 성공은 운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운이 자신 앞을 지나갈 때 누구는 붙잡고, 또 누구는 놓치느냐의 차이로 성패가 갈린다고 보는 것이다. 이 회장은 또 사람과의 인연을 중시한다. 아무리 작더라도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의 운명이 바뀌면 자신의 운명이 바뀌기도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녀의 사업 노하우는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 지금은 아무리 하찮게 보여도 진심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에 있는지도 모른다.
“허투루 보지 않고 면밀하게 검토하면 길이 나와. 그걸 안 하니까 문제지. 감나무 밑에서 입 벌리고 있으면 감이 떨어져?”
이 회장은 땀 흘려서 번 돈이 아니면 가치가 없다고 여긴다. 자신이 기자 시절부터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녀의 기부 또한 그런 기준에서 이뤄진다. ‘왜 카이스트에만 기부하고 모교인 서울대에는 기부하지 않느냐’라는 세간의 의문에 대해 그녀는 명확하게 대답했다.
“모교라고 다 해줄 생각은 없거든. 그래도 의과대학은 좀 하려고 해. 법대는 인성교육이 안 돼서 안 했어. 내 후배라고 할 사람도 없으니 연연할 필요도 없고. 내가 하는 기부의 기준은 국가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야.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 하는 것이고, 기부의 가치가 서야 해. 빈민 구제 사업을 하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번 돈인데 함부로 쓸 수는 없지.”
자식에게 무조건 돈을 주는 건 자식 망치는 길
이 회장의 기부금에 대한 단호한 기준은 최근 더 현실적으로 구체화되었다.
“지금까지는 기부한 기관에 맡기고 활용하게 했는데, 부작용이 너무 커. 돈 만지는 사람들 손에서 돈이 다 녹더라고. 그래서 내가 직접 ‘이수영과학교육재단’을 만들려고 준비하고 있어. 누가 봐도 투명하고 깨끗하게 운영할 생각이야.”
이 말에는, 지금까지의 막대한 기부를 멈추지 않고 되려 더 정확하고 분명하게 지속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이처럼 기부금에 대한 기준이 확실하고 공정한 운영에 강력한 의지를 보이고 있는 그녀가 최근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상속증여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지 궁금했다.
“자식에게 무조건 다 남기려는 건 틀린 거야. 자식을 무능하게 만들어. 젊은 날에 부모가 뼈빠지게 돈 버는 모습을 자식에게 보여주고 그대로 가르치면 돈을 지킬 수 있는데, 그건 안 하고 ‘내가 고생했으니 자식은 고생 안 시키고 돈만 주겠다’면 자식들이 사치하고 탕진하고 마약이나 하게 되는 거지. 부모라면 아이들에게 인성교육을 하고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줘서 값진 삶을 살도록 해야지. 땀 흘리지 않고 번 돈은 제 돈이 아니야.”
82세의 초혼, 그리고 첫 부부싸움
이 회장이 핫피플이 된 데에는 막대한 기부금도 있지만 82세의 나이에 성사된 초혼도 한몫했다. 상대는 서울대 동기인 김창홍 변호사. 사업을 하면서 친구들끼리 골프 모임을 자주 가졌는데, 골프가 서툴렀던 그녀의 캐디 역할을 자임했던 사람이 바로 김 변호사였다. 그렇게 쌓인 친분 속에서 마침내 결혼이라는 결실이 맺어졌다.
“동기생 중에 동아일보 기자가 있는데 인터뷰 기사를 쓰겠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우리 영감이 내가 먼저 프러포즈했다고 하는 거야. 무슨 개똥같은 소리를.(웃음) 결혼은 여자가 아무리 좋아해도 남자가 싫어하면 못하는 거 아냐? 화가 나서 반지랑 시계를 풀어서 쓰레기통에 버렸지. 그랬더니 남편이 ‘내일 결혼식인데 안 한다고 하면 어떡하니?’ 하더라고. 내 마음 달래줄 생각은 안 하고 결혼식이 걱정이었던 거야. 그래서 싸웠지.”
그녀에겐 인생 최초의 기념비적인 사랑싸움이었다. 그러나 남편은 감정을 묻어두는 사람이 아니고 그녀도 똑같은 성격이었다.
“그렇게 티격태격 싸우고 난 뒤에 둘이 웃는 걸로 끝냈지. 칼로 물 베기지. 그래서 결국 결혼식을 했는데, 신부화장하는 데 와서 날 보곤 입을 다물질 못했어. 좋아서.(웃음)”
또 하나의 가족이었던 ‘마리’
이 회장에게는 남편 외에 애정을 주는 가족이 또 있었다. 바로 그녀의 애견 마리다. 유기견이었던 마리는 얼마 전까지 그녀의 집 3층을 차지하고 살았다.
“나는 2층에서 지내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파바로티의 노래를 틀어주면 막 뛰어나와. 그러고 같이 산책을 하러 나가는데, 중간쯤 가다가 계속 날 돌아보고, 쓰다듬으면 꼬리가 빠지게 흔들고, 밥을 먹을 때는 식탁에서 나를 바라보곤 했지.”
그러나 지금 마리는 없다. 지난 11월 1일 비 오는 일요일에, 산책을 하고 돌아오던 마리는 불쑥 상추밭으로 뛰어 들어갔다.
“‘마리야!’ 하고 불렀는데 반응이 없어. 없어진 거야. 누구는 발정이 났다고도 하고, 그러다 돌아온다고도 했지. 그런데 끝내 안 들어와서 CCTV를 보니, 들개 세 마리에게 공격당하는 모습이 나오는 거야. 급히 골짜기를 다 뒤졌는데도 못 발견했어. 먹힌 모양이야. 지금도 가슴이 아파. 그래서 남은 사진들로 앨범을 만들었어.”
그녀의 핸드폰 대문 사진에는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웃고 있었다.
깊고 풍성한 마음이 닿는 찬란한 가치
아직도 잊지 못하는 마리의 사진들을 하나씩 보여주는 애견인 이 회장. 마치 손주 사랑에 흠뻑 빠진 시니어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그녀는 과거에 비해 자신이 유해졌다고 말했다.
“늙으면 서러운 게 많대. 나도 늙으면서 성질이 유해지더라고. 젊을 때는 칼 같았지. 아랫사람들에게도. 그런데 어느 날 ‘저 사람들이 나보다 정말 뛰어났으면 내 밑에서 일하지 않겠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때부터 납득하게 됐어.”
나이 들면서 철학적 사유와 희생이 그녀의 삶에 깊숙이 스며들어 어느덧 인생의 품격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 회사의 직원들은 대부분 10년 이상 일한 장기 근무자들이다. 그녀는 그들의 미래를 위해 자신이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 무서운 게 없는 사람처럼 철두철미하게 직원들과 회사를 이끌어왔지만 그 강인함 뒤에는 직원들을 향한 애정이 숨어 있다. 이 회장의 형제 가족들에게 유언증서까지 마다하지 않고 측은지심으로 챙겨주는 그녀가 더 담백한 이유는 더 큰 세상을 향한 여정으로 이끄는 용기와 지혜에 있다.
“잘못된 것은 그냥 못 넘어가는 성격이야. 세상 사는 데는 정직이 최고지. 그리고 신용이고. 내가 받으려고 애쓰지 말고 주려고 해야 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한 사람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싶어.”
인터뷰를 진행하며 왜 이 회장을 매스컴에서 앞다퉈 다루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건 우리 사회에 필요한 어른다운 어른이 없어서가 아닐까. 그녀야말로 이 무거운 코로나 블루 상황에서 통 큰 기부로 미담을 준, 정직하게 열심히 살아온 영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합리적이고 현명하며 나눌 줄 아는 그녀의 선행이 사회적 가치로 거듭나 진짜 선한 영향력을 행하는 모습에서 우리 사회를 따뜻하게 밝혀주는 등불을 본다. 2021년에도 이 영웅의 스토리는 계속 이어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