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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 전달에 안달이 난 ‘행복 달인’
- 국내외적인 불황 요인들이 겹쳐 수많은 기업이 위기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현재,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독보적인 아이디어 제품으로 독자적인 시장을 지키고 있는 회사가 있다. 특허를 획득한 이온생성기가 만들어지는 수전류 시스템을 세계 40개국에 수출하는 아리랑이온이 그곳이다. ㈜아리랑이온의 경영을 책임지고 있는 김신자 대표는 감사 경영의 대표주자로, 감사의 실천을 통해 인생의 바닥을 치고 솟아오른 놀라운 경험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녀가 그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감사의 힘을 믿고 감사 전도사가 된 사연, 그리고 삶을 바꿔준 드라마틱한 CEO 성장기를 들어봤다. 헤어메이크업 이은정 스타일리스트 이서연 한복 박술녀 한복연구소 요즘 상위 셀럽들에게 제대로 된 ‘물건’이라며 입소문이 난 제품이 있다. 바로 아리랑이온의 샤워기가 그것이다. 물 본연의 특성을 이용해 연구 개발된 이온화 장치를 통해 오직 물만으로 에너지 활성수를 만들어내는 아리랑이온의 특수한 샤워기는 강력한 세척 효과와 의료보건, 미용소염 등의 영역에서 탁월한 성능을 발휘하는 것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세계 각국에서 특허와 ISO와 KC마크 인증 등을 이미 취득한 아리랑이온의 실력은 현재 세계적인 인정을 받고 있다. ㈜아리랑이온의 핵심기술을 만든 사람은 바로 발명가 허성열 대표. 그리고 회사의 경영을 책임지고 있는 이는 그의 아내 김신자 대표다. 사실상 시니어 부부가 합동으로 이끌어가는 아리랑이온은 10여 년 전만 해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회사였다. 아니 세상에 존재하기는커녕 그때 부부는 수십 년째 이어진 심각한 삶의 위기 속에서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었다. 가정은 내팽개치고 연구만 한 남편 “남편이 9남매 중 장남이었는데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글을 못 읽었다고 해요. 그런데 팽이나 연은 기가 막히게 잘 만들었대요. 그래서 시아버지께서 공고에 입학시켰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선생님이 남편에게 이온화가 뭐냐고 물었다고 해요. 책을 읽어서 내용을 알고 있던 남편이 이온화에 대해 설명하니 선생님이 깜짝 놀라셨대요. 그 이후로 남편은 평생 음이온을 생활화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왔답니다. 늘 스승을 잘 만난 덕이라고 해요.” 말하자면 17세에서 70대에 이르기까지, 허성열 대표는 끊임없이 이온화에 대한 연구를 했다. 특허를 내는 게 그의 유일한 일이었다. 문제는 가정은 내팽개치고 오직 연구만 했던 것. 발명 특허에만 매달린 남편을 대신해 집안을 지킨 이는 음악 교사였던 아내 김신자 대표. “남편은 실험을 한다며 매달 1000만 원 이상씩 썼죠. 빚을 너무 많이 져서 월급을 타도 빚쟁이들이 가져갔어요. 빚쟁이들이 교무실에 와서 제 돈을 다 가져가는 바람에 성당에 가면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쌀로 끼니를 해결하기도 했어요. 집은 경매에 들어가 저녁 10시가 되면 찾아와 집 언제 비워줄 거냐며 독촉했죠. 정말 비참한 생활이었어요.” 비참의 끝을 만나다 집이 평화로울 리 없었다. 남편의 성격도 문제였다. 그야말로 불같은 성격이었던 남편은 그녀에게 걸핏하면 폭언을 쏟아내고 물건들을 부수기 일쑤였다. 부부간의 정이라곤 기대할 수 없었다. “외롭고 슬펐죠. 남편의 마음속에는 다섯 살 아이가 있었던 거예요. 시아버지가 학대하면서 공부를 잘할 줄 알고 남편을 구박하고 때렸다고 해요. 결혼하고 나니 내가 그 아버지로 보였던 거예요. 너무 괴로웠지만 이혼을 하자니 주변 사람들이 쑤군거리면서 만족해할까봐 싫었어요. 그리고 내가 선택해서 결혼한 남편이기도 했고.” 2005년 그녀는 교직자로 정년퇴직을 했다. 40여 년간 일한 대가로 받은 퇴직금 덕분에 큰 빚은 어느 정도 갚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경제적 상황은 안 좋았다. 그런 데다 이제 일도 안 하게 됐으니 남편과 집 안에서 같이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함께 있으면 더 싸울 것 같아 남편에게 “특허들 중 한 가지를 내놔봐라, 내가 구슬을 꿰어보겠다”고 했다. 그 말이 씨가 되었다. 도약의 계기가 된 기적의 200만 원 “이제는 돈을 구할 수도 없고 아파트는 경매에 들어가 쫓겨날 위기에 있었고 빚 이자에 먹고살기도 힘들었는데, 마지막으로 200만 원만 있으면 20번째로 낸 특허 제품을 몇 개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하더군요.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매달렸던 건 성경 말씀이었어요. 그리고 긍정에 관한 책을 읽고 실천하는 막연한 날들뿐이었어요.” 그런데 하늘이 마치 그녀의 바람을 들어주기라도 한 것처럼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교통사고가 나서 합의금으로 200만 원을 받게 된 것이다. 그녀는 그 돈으로 이온샤워기를 열 개 만들어 강남 일대에 사는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제품을 권했다. “그러다 잠실에 사는 건설 회사 회장의 아내가 이온샤워기를 써본 뒤 가족들의 아토피, 무좀, 속쓰림이 없어지고 화장실 냄새도 안 나는 걸 확인했다며 이온샤워기를 사줬어요. 그래서 회사를 차리고 저희 제품들을 납품하게 됐지요.” 그녀 인생의 전환점, 아리랑이온이라는 회사가 탄생하게 된 잊을 수 없는 2009년의 일이었다. ‘감사’ 덕분에 회사가 회생하다 김 대표가 남편의 강한 성격에 당하고만 산 것은 아니다. 그를 이기기 위해 마음 공부, 심리학 공부, 기 공부, 오행 공부를 2000년부터 시작했다. 그녀의 취미이자 위안이 독서가 된 계기이기도 했다. “걱정, 근심, 좌절, 미움, 원망이 가득한 내 몸은 망가져 갔고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리려니 용기는 나지 않고 무서웠어요. 그 용기로 마음을 바꿔 새로운 삶을 살아보자는 결심을 했고 그때부터 책을 엄청나게 읽기 시작했죠. 나에게 용기를 주고 자존감을 지켜주는 책들을 읽기 시작했어요. 생명의 은인처럼 나를 살린 책들은 김상운의 ‘와칭’, 이재영의 ‘모든 것은 마음입니다’, 루이스 헤이의 ‘치유’, 로렌스 크레인의 ‘러브 유어 셀프’였어요. 지금도 시간만 나면 도서관 책방에 가서 쭈그려 앉아 읽고, 좋은 말은 적어 집 안과 회사 구석구석에 붙여놓고 되새깁니다. 그렇게 일주일에 책 다섯 권은 읽고 있어요.” 그녀의 버팀목이 된 또 하나의 계기는 ‘감사’였다. 사실 감사는 그녀를 버티게 해줬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바꾼 커다란 주문과도 같았다. 그녀는 2012년 우연히 CEO 포럼에서 감사 경영에 관한 손욱 농심 회장의 강연을 듣게 됐다. 마음을 긍정적으로 바꾸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말을 들었던 그때, 회사 상황은 썩 좋지 않았다. “3개월간 매출이 안 좋을 때였어요. 그때 손욱 회장님 강연을 듣고 쓰레기통에서부터 화장실까지 ‘감사 미소’ 스티커를 붙였죠. 힘들다가도 그걸 보면 웃음이 나왔어요. 그러던 차에 바로 뉴욕에서 1000개, LA에서 1000개의 주문이 들어온 거예요. 덕분에 회사가 회생할 수 있었죠. 그 후로 저는 남이 믿든 안 믿든 확신을 가지고 ‘감사편지’를 쓰기 시작했어요.” ‘사랑 감사는 기적을 낳는다’ 기적같이 다시 일어난 뒤 ‘감사’는 그녀의 신념이 되었다. 그리고 그 기적은 또 다른 기적을 만들었다. “심리학 공부를 하니 모두가 ‘내가 변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남편을 사랑하고 존경하기로 했어요. 또 하루에 다섯 가지 감사할 일을 찾기로 했어요. ‘시래깃국이 맛있어서 감사합니다, 남편이 웃어줘서 감사합니다, 남편이 고함을 안 쳐서 감사합니다, 남편이 그릇을 던졌는데 하나만 깨져서 감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합니다….’ 그렇게 감사를 찾고, 남편 생일에 감사한 내용을 모아 ‘100가지 감사 카드’를 만들어서 줬죠. 그러기를 네 번 했어요. 그랬더니 변하더군요. 이젠 신혼처럼 살고 있어요.” 남편은 이제 그녀에게 “당신 음식 솜씨가 좋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고, 김치찌개를 끓여주면 “세상에 이렇게 행복한 일이 어딨냐”면서 감동한다고 한다. “49년을 살면서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거든요. 상대에게 감사를 하니 변화가 왔어요. 기적이에요.” 감사 습관은 ‘333법칙’으로 감사가 만들어낸 놀라운 변화들을 목격한 그녀는 감사 경영을 회사에도 적용했다. “감사 경영은 가장 멋진 기업 경영입니다. 사원들도 감사로, 고객들에게도 감사로, 가족에게도 감사로, 화장실 청소하는 분들에게도 감사로, 거리 청소를 하는 분들에게도 감사로, 끼어드는 앞차에게도 감사로 대해야 해요.” 그녀는 어느 책에서 배운 감사 습관 형성 방법을 소개했다. ‘333법칙’이 그것이다. “결심이 사흘을 넘기기 어렵기에 3일은 습관을 길들이는 첫 번째 관문을 뜻합니다. 3주는 습관이 형성되는 최소한의 시간을 뜻해요. 하나의 세계가 깨지고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의미하죠. 3개월은 100일을 뜻하는데, 단군신화에서 곰이 사람으로 탈바꿈하는 데 100일의 시간이 걸렸듯 본능의 탈을 벗고 온전히 다시 태어나는 시간을 뜻합니다. 이렇듯 확신과 신념과 의지가 중요해요. 의지가 강한 저도 4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으니까요.” 이제 김 대표는 매일 새벽 4시부터 성경 구절로 감사편지를 쓰며 하루를 시작한다. 그렇게 하면 에너지가 충만해지고 그 충만한 에너지 덕분에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풀어지고 이뤄진다는 게 그녀의 믿음이다. 진짜 어르신의 조건 어렸을 적, 6·25전쟁이 막 끝난 뒤의 일이다. 김 대표는 어머니와 함께 시장에 가서 당사주를 본 적이 있다고 한다. 그때 “얘가 여자인데도 장관감이다. 대단한 딸이니 잘 가르치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장관이 되기 위해서였을까. 그 말을 지키기 위해 그녀는 평생을 성실하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가치를 놓지 않고 살았다. 이제 CEO로서 많은 가족을 부양하는 입장이 된 그녀는 백세시대의 삶에 대한 나름의 가치관을 세워두고 있다. 그녀는 백세시대 노년의 삶에서 중요하게 갖춰야 할 것들로 건강, 봉사, 독서, 취미, 경영을 꼽았다. “요즘을 어른이 없는 세상이라고들 하죠. 제가 생각하는 어르신이란 부지런해서 자기관리를 잘하고 온화하고 부드러운 말과 미소로 잘 들어주는 사람이에요. 따뜻하고 어질고, 알아도 모른 체하며 잘못을 이해해주고 포근히 감싸는, 결 고운 노인이라면 참다운 어르신이라고 생각해요.” 관찰자로 진정한 자신 찾기 황혼이혼·졸혼이 화제가 되는 사회 현실은 시니어의 가정이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상황을 이미 겪고 마침내 극복한 그녀가 할 말이 있을 듯했다. “모멸감이 들 때 꾹꾹 억누르면 그 감정은 거세게 부글부글 끓어올라 몸과 마음의 병이 됩니다. 그러니까 억누르지 말고 관찰자로 가만히 바라봐야 해요. 남편 때문에 괴롭고 모욕감을 느끼면 남편에 대한 분노, 절망, 억울함이 나도 모르게 떠오르거든요. 괴로운 감정을 멈추고 싶을 때는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일도 안 됩니다. 몸이 내가 아니기 때문에 어찌할 수가 없는 거예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일어나는 일을 바라봐야 합니다. 감정도 생각도 내 몸의 반응도 가만히 바라보세요. 억누르면 더 거세게 화가 나니까 있는 그대로 가만히 바라봐요. 그러면 저절로 사라지는 기적이 옵니다.” 사실 남편 입장에서 보면 아내에게 막말을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다.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의 응어리진 감정이 솟아오른 것이다. 그러니까 말도 생각도 감정도 남편의 것이 아니라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남편을 미워할 근거가 없는 것과 다름없었다. “진정한 나는 마음의 어떤 움직임이나 감정도 생각도 아닙니다. 나는 가만히 바라보는 관찰자예요. 그러면 영은 무한한 마음이 되고 응어리를 풀어놓으면 텅 빈 마음이 됩니다. 그 텅 빈 마음 안에 무한한 평화, 자비, 사랑, 연민, 근원의 감정이 차오르면 해탈할 수 있는 거죠. 그러니 가만히 주시하는 바람 자체가 되도록 멀리 관찰자로서 보라고 말하고 싶어요.” 500억 원 모아 세상 변화시키고파 “진정으로 사랑하는 길은 나를 먼저 사랑하는 것이고 그러면 가족 모두도 사랑으로 채워진다”는 믿음은 계속 확고해지고 있다는 김 대표. 그녀는 자신을 가리켜 ‘나의 생이 다할 때까지 행복을 전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믿거나 말거나 확고한 사랑과 감사의 실천으로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켜 사회에 기여하는 멋진 회사를 만들고 싶어요.” 이제 그녀의 꿈은 500억 원을 모으는 것이라고 한다. 그 구체적이고 큰 숫자에 담긴 사연은 무엇일까. “예술의전당 같은 성격의 작은 예술센터를 어려운 동네 열 곳에 짓기 위해서예요. 5층짜리 건물을 지어 동네 사람들이 가까운 예술센터를 찾아가 전시회, 음악회, 오페라, 독서토론, 인문학 강의 등을 경험하게 하고 싶어요. 그걸 경험한 사람들은 풍부한 감성으로 지성적이고 따뜻한 사람으로 변화해 가정의 태양이 될 거예요.” “모든 삶의 답은 긍정적인 마인드로 바꾸는 쉬운 일이다. 그러나 너무 어렵다”는 모순적인 그녀의 말에는 자신이 치른 일의 고통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만큼은 확실하다며 단언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 증거이기 때문이다. “333법칙으로 죽을힘을 다해 실천하면 부자 되기 쉬워요. 어렵다지만 실천하면 태양은 거기에 있습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미안합니다, 소중합니다’라고, ‘감사 미소’와 함께 실천해보는 건 어떨까요?”
- 2019-10-17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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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저 일만 하고 살아온 58년 연기 인생, 정혜선
- 한복을 입고 표지 촬영을 진행하는 연기자 정혜선을 보면서 새삼 한복이 무척 어울리는 배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시청률 60%를 넘긴 전설적인 드라마 ‘아들과 딸’에서 딸을 구박하는 독한 어머니 모습으로 기억하는 이가 많을 것이다. 그 이전이나 이후로나 국민 어머니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수많은 드라마에서 어머니 역을 맡아 열연했던 그녀는 곧 팔순을 바라보는 1942년생이다.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생기가 넘치는 자태를 보니 어쩌면 긴 세월 빚어낸 어머니 상이 우리에게 영원처럼 고정된 게 아닐까 싶었다. 정혜선은 1961년 KBS 공채 탤런트 1기로 연예계에 처음 입문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학예회에서도 뽑히고 무용도 하고 노래도 잘하는 편이었어요. 수도여고에서는 방송반 활동과 웅변을 하며 상도 꽤 받았고요. 아버지가 원고를 써주는 등 많이 도와주셨어요. 심지어 탤런트가 뭔지도 모르던 때에 아버지가 지원 원서를 가져다줬어요.” 대부분의 가정집에 TV가 없던 그 시절, ‘뭔가를 알았던’ 부모님의 적극적인 지원을 보면 아무래도 그녀는 연기자로 살아갈 운명이었나보다. 당시만 해도 연예인을 딴따라로 부를 만큼 인식이 좋지 않았을 것인데 딸의 재능을 알아본, 열린 생각을 가진 아버지 덕분에 시작이 평탄했다. 가족의 지원으로 연기자 생활을 시작한 그녀는 1967년 KBS ‘실화극장’에서 간첩 두목 등 캐릭터가 강한 역할에 캐스팅되어 대중에게 이름을 알렸다. 이후 그녀는 성격파 배우로서의 이미지를 쌓기 시작했다. “어머니 역할을 그때부터 많이 했어요. 그 시절은 배우가 별로 없었으니까. 얼굴에 주름 그려가며 어머니, 할머니 역을 소화해내면서 연기력을 인정받았죠.” 연기자, 그리고 어머니 역을 주로 하게 된 것은 운명 같은 일이었을까? 그녀는 30대부터 할머니 역할을 주로 맡았다. 불과 31세에 MBC 드라마 ‘새엄마’에서 시어머니 역을 연기했다. 1977년에 한 설문조사에서 할머니 역할을 잘하는 연예인 2위로 뽑히더니, 1978년에는 아예 1위가 되었다. 연기자로서의 첫 절정기는 1983년이었다. 마흔 즈음에는 MBC 드라마 ‘간난이’에서 손주들을 데리고 거친 세상을 사는 80세 꼽추 할머니 역할을 완벽히 소화해 각종 상을 수상했다.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의 연기자 그녀는 멜로 드라마의 주인공보다는 ‘쎈’ 역할을 주로 맡았다. 그런데 인기가 많아지자 재미있는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녀가 한때 가수활동을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간난이’ 에서 80세 할머니로 출연해서 불쌍한 손주들을 지극히 보살피는 역할로 각종 연기대상을 휩쓸었던 그해 1983년 대한민국을 빛낸 사람이라고 해서 롯데호텔에서 디너쇼를 열어줬어요. 그때는 철딱서니가 없었죠. 그 재주로 디너쇼를 했다니.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 별거 다 했어요.” 같은 해에 매니저 제안에 앨범도 하나 녹음했다. 잠깐 가수활동을 하며 남긴 유일한 이 앨범의 타이틀곡은 ‘망각’. 발라드풍의 처연한 노래인데, 직접 가사도 썼다. 잊어야만 했기에 잊었노라고 지워야만 했기에 지웠노라고 너와 나의 아름다운 그 옛날 추억이 못 잊어 생각나면 아 강물 위에 내 마음 띄워보리 여자로서의 삶은 불행했다 노래 가사에 배인 슬픔과 애잔함을 증폭시키는 애절한 창법을 들으니 자연스레 그녀가 겪은 고통이 떠올랐다. “서른두 살에 다시 싱글이 됐죠. 여자로서 정혜선은 불행했지. 그 부분에서는 인생의 패배자라고 생각해요. 여자로 태어나 남편 잘 만나 아이 행복하게 키우면서 가정 잘 이끌어가고 그랬어야 했는데… 짚신도 짝이 있는데 지금까지 혼자 살았다는 건 비극이에요. 물론 그동안 날 좋아하는 이도 있었고 중매도 들어오곤 했지만 지금은 혼자야.” TV에서 보는 정혜선은 거칠고 과격한, 세월의 풍파에 시달려 독해진 우리네 어머니의 모습 그 자체였다. 그러나 실제의 정혜선은 조용하고 나긋나긋하며 차분한 목소리를 지닌 천생 여자의 모습이다. 담담하게 자신을 패배자라고 말하는 그녀에게서 안타까움을 느끼지 않을 이가 있을까. 그 모습에서 자기 삶을 희생하며 사는 우리네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30·40대에 할머니역을 맡던 그녀는 60대가 넘으면서 카리스마와 온화함이 있는 ‘사모님’과 ‘여사님’ 연기를 주로 했다. 또 기품 있는 한복 차림으로 각인시켜주는 존재감이 느껴지는 역할엔 그녀만 한 배우가 없다. 그렇지만 “나도 살았는데…” 남편과의 결별은 이혼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세 아이를 키우면서 남편의 빚까지 갚아나가야 했다. 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일을 했던 것은 최소한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고통스러웠지만 기대어 신세를 질 만한 사람도 없었어요. 그래도 채권자 분들이 순순히 기다리기로 해서 제 출연료를 3분의 2씩 가져갔죠. 그런 걸 생각하면, 그분들에게 고맙죠. 지금은 다 고인이 되셨지만.” “스스로 일어나지 않으면 누가 단돈 100원도 안 준다”는 게 그녀의 지론이다. 그래서 그녀는 요즘 급격히 높아진 자살률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나 같은 사람도 죽지 않고 잘 사는데 왜 자살을 하지…. 나는 자살이라는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안 죽었어요. 빚을 갚아야 된다고 생각했기에 죽음은 생각도 안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죽는 방법도 있었네. 그런데 그걸 몰랐던 거예요.(웃음)” 허공 속으로 흩어지는 그녀의 퍽퍽한 웃음소리에 좀 아팠다. 나누고 베풀며 겸손하게 개인으로서, 여자로서 정혜선은 불행했을지 모르지만, 모두의 배우로서는 불행하지 않았다. 그녀의 방송활동에는 슬럼프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았다. 연기하며 힘들었던 순간이 없다 할 정도로 매일 최선을 다했으므로 기억이 안 난다고. “프로그램이 끝나면 다음 프로그램이 예약되어 있었고. 그러다 보니 방송국에서 시청률 높으면 보내주는 해외여행도 제대로 못 갔죠. 늘 바빠서 쉴 틈이 없었어요. 내 인생은 완전히 일의 연속이었어요. 물론 내가 워커홀릭 성향도 있지만, 연출자들이 나를 도와주려고 더 불러줬던 것 같아요.” 그녀는 문득 자신이 지금까지 한 번도 이탈리아를 가본 적이 없다는 걸 알고는 잠시 억울해했다. 요즘은 여유만 있으면 누구나 다 가는 유럽 여행 아닌가. 수십 년을 대한민국 국민의 어머니로 살았던 사람이 일하느라 이탈리아도 못 가봤다는 얘기는 그야말로 우리 시대의 어머니답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일만 하는 정혜선이었죠. 일 안 하면 죽는 줄 알았으니까.(웃음) 그런데 요즘 쉬면서 생각해보니 일이 다가 아니구나 싶어요. 너무 늦게 알았지. 지금은 쉬면서 봉사도 하러 다녀요. 내가 나서기만 해도 같이 참여하는 사람들이 좋아해서 시간이 나면 자주 가고 있어요. 무엇이든지 내가 쓰임이 있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잖아요” 이번 표지 한복 협찬을 해주신 박술녀 한복 디자이너는 “20여 년 곁에서 지켜봐온 정혜선 선생은 한결같은 성실함과 노력으로 늘 수수하게 살아서 때로는 연예인인지 자연인인지 분간이 안 간다”며 뚝배기처럼 소탈하시다 거들었다. 그녀는 이제는 좀 편안하게 살고 싶다는 속내도 내비쳤다. “오늘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매 순간 최선을 다합니다. 남의 눈치를 보거나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고요. 어려운 사람 있으면 가능한 한 힘닿는 대로 돕습니다. 그러니 무언가에 꽂히면 에너지를 쏟아 부을 수밖에. 연기자에겐 숙명적 성향 같아요. 그저 일만 하고 살았지.” > 이루지 못한 예술을 향한 꿈 인터뷰를 하다 보니 그녀가 연기생활을 하면서 안 해본 게 없다는 걸 알게 됐다. 가수, 드라마와 연극은 기본이고 심지어 뮤지컬 배우도 했다. 그녀의 기억 속 뮤지컬은, 정말 원 없이 노래를 불렀던 ‘사운드 오브 뮤직’. 연극은 ‘햄릿’. 무대에 세 번이나 섰다. 물론 영화도 찍었다. “1970년부터 1980년까지 50여 작품에 출연했죠. 그것도 액션 영화에. 내가 한때 액션 스타였어.(웃음) 그때는 정말 그걸로 잘나갔어요. 지금 들으면 젊은이들은 깜짝 놀랄 테지만.” 그러니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본 이 베테랑 배우에게 욕심나는 작품이 있냐는 질문이 싱거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녀는 “욕심이 없다”고 단칼에 자르듯 말했다. 다만 그녀에게 다시 삶을 살 수 있다면 하고픈 일에 대해 묻자 오래전 묻어버린 꿈을 아련히 기억해내며 그 시간들에 휩싸이는 듯했다. “인간이기 때문에 욕심이 많아요. 그런데 ‘부자가 됐으면’이란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어요. 사업은 내 길이 아니에요. 그러나 아무래도 예술에 대한 꿈은 있었죠. 특히 무용. 무용 선생님이 ‘영자야(정혜선의 본명), 넌 무용해야 해’라고 해주시던 말씀이 아직도 생생해요. 사실 집이 가난했죠. 그런데 무용을 하려면 돈이 많이 드니 부모님 생각을 해서 안 했어요.” 아니다 싶으면 결코 하지 않는다 정혜선은 자신의 건강 비결로 편식하지 않고 잘 먹는 것과 운동을 따로 안 하는 대신 걷는 것을 꼽았다. “사실 이제 내일모레면 팔십이니까 걷는 것도 귀찮죠. 집에 앉아서 선풍기 바람 쐬는 게 가장 행복해요.(웃음) 스케줄 없을 때는 여기저기서 식사하자고 하니 사람을 만나게 되네요. 내가 거절하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그래서 하루에 꼭 두세 가지 일은 있더라고.” 지금까지의 인터뷰에서 예상 가능하듯 그녀는 남다른 고집이 있는 사람이다. 사실 얼마 전 꽤 굵직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파격적인 출연 제의를 받았지만 정중히 고사했다. “내가 거기 나가서 남을 즐겁게 해줄 용기가 없어요. 과거에는 디너쇼까지 하면서 끼를 보여줬는데 지금은 다 늙어서.(웃음)”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녀의 선택은 오랜 세월 정혜선이란 정체성을 만들어낸 신념 그 자체였다. 그저, 주어지는 대로 열심히 한다 겸손하고 배려심 많은 성품으로 후배들의 귀감이 되어온 그녀는 진정성 있는 삶으로 탄탄한 신뢰를 쌓아왔다. 초심을 지키며 자기만의 길을 묵묵히 걸어온 우직함이 그녀의 힘이다. 그녀는 이번 추석 때 다른 사람들보다 더 바쁠 예정이란다. “지인과의 인연으로 NBS한국농업방송에서 프로그램을 하나 맡았어요. ‘그땐 그랬었지’라는 프로그램에서 제가 내레이터를 하기로 했어요. 한 달에 두 번 방송을 하는데 작업을 해야 하니까,(웃음) 어디로 움직이는 건 당분간 불가능해요.” 작든 크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자신을 다시 돌아보며 충전하는 좋은 시간으로 즐긴다. 그저 평범하면서도 평탄하게 살기를 바라는 이처럼. “나는 애써 관리해온 게 아니라 책임감 있게 살았던 것뿐”이라는 그녀의 말에는 연륜과 관록이 묻어 있다. 그녀 삶의 원동력을 그대로 보여주는 설명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녀의 삶에서 우리가 봐왔던 강인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고향처럼, 시간이 흘러도 언제나 그곳에 있을 것 같은, 아련하면서도 올곧고 강인한 모습으로서. 연연하지 않는 삶, 이렇게 살아서 또 한 번의 아침을 맞듯 그녀에게 아무 일도 없으면 좋겠다.
- 2019-09-09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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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퇴 후의 좌충우돌
- “정년퇴직이라…. 이건 뭐 생전 장례식이다.” 우치다테 마키코의 소설 ‘끝난 사람’에서 정년퇴직을 하는 주인공 다시로의 말입니다. 자기 사업체가 아닌 이상 퇴직은 누구나 거쳐야 합니다. 정년이 연장되더라도 본질은 변화 없습니다. 그래서 주된 직장에서 퇴직할 때 무엇을 준비해둬야 할지 생각하는 게 좋습니다. 재무적 준비뿐 아니라 비재무적 준비도 중요합니다. 여기서 그 몇 가지를 알아볼까 합니다. 퇴직 사춘기 대비 소설 ‘끝난 사람’의 주인공 다시로가 구직센터를 찾아가니 마침 조건이 괜찮은 곳이 있어 면접을 보러 갔습니다. 사무실에 8명 남짓이 앉아 있는 회사였지만 자신을 최대한 낮춰 채용해주면 열심히 해보겠다고 합니다. 사장은 도쿄대학교 법학부 출신이 자기 회사에 오면 할 일이 없을 것 같다고 합니다. 기술도 없는 일류대 출신은 쓸모가 없습니다. 다시로는 모교를 방문해 벤치에 앉아 펑펑 울고 맙니다. 주인공은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마음먹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일거리가 생기면서 대학원 진학은 무한 연기됩니다. 그러다 문화센터 등록처에서 여자를 만납니다. 63세의 주인공이 39세의 미혼 여성을 만났으니 가슴이 쿵쾅거립니다. 끝난 인생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것 역시, 결론은 헛물입니다. 다시로는 그냥 밥 잘 사주는 아저씨였던 셈입니다. 다시로는 피트니스에서 젊은 벤처 사업가를 만납니다. 사업가는 그를 고문으로 초빙합니다. 그런데 사업가가 급사를 하면서 아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표이사 자리를 덜컥 맡습니다. 결과는 대참사입니다. 회사가 미수금을 받지 못해 파산을 하게 되고 대표이사인 관계로 자신의 돈으로 은행 대출금 10억 원을 상환합니다. 아내의 은퇴자금까지 날려버리게 되죠. 이 일로 이혼 직전까지 갑니다. 아내는 가출하고, 회사는 파산하고, 은퇴자금 10억 원도 날리고, 맘 설레게 하던 39세 아가씨는 동상이몽이었습니다. 이제 주인공은 아버지의 구부정한 뒷모습을 생각하며 아버지가 느꼈을 고독을 이해합니다. 퇴직 후 사춘기처럼 방황하던 주인공은 방향을 잡습니다. 20~30대에 할 일과 60~70대에 할 일이 따로 있다는 걸 깨닫습니다. 우리도 주인공 다시로처럼 퇴직 후 사춘기를 앓습니다. 10대 사춘기처럼 퇴직 후에 좌충우돌하고 고독을 느끼고 분노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이를 ‘물 빼기 3년’이라고도 합니다. 이 변화 과정을 무탈하게 넘겨야 합니다. 자신이 평생 쓰고 있던 가면(페르소나)에 집착하지 말고 다른 가면으로 잘 바꾸는 게 필요합니다. 노후의 변신은 절대 무죄입니다. 노후의 행복 조건 노후에는 이제 행복하게 살겠다고 마음먹습니다. 마음만 먹는다고 되는 게 아니니 실천을 해야 합니다. 행복을 연구하는 심리학자들은 ‘좋아하는 사람과 맛있는 걸 같이 먹을 때’ 혹은 ‘여행을 할 때’ 등과 같이 구체적 방법들을 이야기합니다. 경제학자들도 행복의 이유를 분석합니다. 브루노 프라이(Bruno Frey)가 쓴 ‘행복, 경제학의 혁명’에는 경제학자들이 찾은 행복의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 행복을 노골적으로 추구할수록 반대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멋있는 파티를 계획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파티 후에 실망이 컸다고 합니다. 행복하려면 지속적인 만족감을 얻어야 하는데 더 강한 만족감이 이어지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행복은 단기적인 희열 추구 혹은 희열의 연이은 추구가 아니라 장기적인 ‘좋은 삶’의 결과물일 수 있습니다. 둘째, 돈은 일정 수준까지만 행복에 중요하고 그 이상에서는 중요한 변수가 아닙니다. 이를 ‘이스털린의 역설(Easterlin Paradox)’이라고 하는데, 소득이 증가해도 행복이 증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 이스털린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2000년 초에 실시한 세계가치조사를 보면,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가 될 때까지 삶의 만족도는 올라갑니다. 그러나 1만 달러를 넘어서면 1인당 국민소득과 삶의 만족도 사이의 상관관계가 거의 사라져버립니다. 셋째, 행복해지려면 일을 해야 합니다. 일과 행복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실업은 삶을 극도로 불행하게 만듭니다. 이혼이나 별거 등 다른 어떤 사건보다 안정감을 떨어뜨린다고 합니다. 돈이 있어도 일하지 않으면 불행해진다고 합니다. 건강상태가 나빠지고 사망률도 높아지고 자살할 가능성도 커진다고 합니다. 실업 상태에 빠진 사람들은 많은 ‘비금전적 비용’을 지불한다는 걸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내재적 속성을 가진 활동에 의도적으로 자신의 자원을 배분해야 합니다. 내재적 속성은 타인과의 연결, 자신의 유능감, 자율성, 참여 등과 관련되어 있고 외재적 속성은 재화의 소비, 지위, 소득, 명예 등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내재적 속성은 반복해도 지겹지 않고 좋았던 경험의 기억도 오래 지속됩니다. 반면에 외재적 속성은 빨리 지루해지고 경험의 기억도 오래가지 않습니다. 명품 백을 사고 조금 지나면 행복감은 희미해집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행복이라는 단어를 까먹고 장기적으로 좋은 삶을 살아가면 됩니다. 그리고 삶의 구조를 다음과 같이 바꾸어나갑니다. 돈은 어느 정도는 필요하지만 그 이상의 돈이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으므로, 돈을 버는 데 집중되었던 자원을 적절히 재배치합니다. 일은 해야 합니다. 금전적 가치 외에 비금전적 가치도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내재적 속성의 활동을 의도적으로 늘려야 합니다. 노후자산 지키는 삼총사 행복이라는 비재무적인 문제를 봤다면 이제 재무 솔루션을 보겠습니다. 노후 재무설계의 포인트는 수명에 맞게 자산 수명도 길게 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단번에 해결해주는 전가의 보도 같은 상품은 없으며 연금자산, 투자자산, 보험자산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우선, 종신연금은 사망할 때까지 연금을 지급하므로 나의 수명과 자산 수명을 일치시킬 수 있습니다. 한편, 공적연금은 매년 연금 지급액을 물가에 연동해서 올려주기 때문에 구매력이 유지됩니다. 공적연금은 장수리스크와 구매력리스크를 없애주기 때문에 노후에 가장 적합한 자산입니다. 공적연금을 가급적 충분히 마련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부족할 때는 주택연금이나 민간의 종신연금으로 보완할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 투자자산은 수익률이 높으므로 자산 수명이 깁니다. 지금 가진 돈의 4%를 매년 인출하고 2% 물가가 오르는 만큼 인출을 증가시킨다고 해보겠습니다. 이 경우 자산운용수익률이 2%이면 25년 만에, 3%일 때는 28년 만에 자산이 모두 소진됩니다. 하지만 4%일 때는 34년, 5%이면 43년으로 자산 수명이 길어집니다. 노후자산은 안정적이어야 함을 감안할 때, 목표하는 투자수익률은 4%를 중심으로 해서 3~5%가 적절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마지막으로, 보험자산은 노후자산을 블랙스완(black swan)에서 보호해줍니다. 블랙스완은 아주 가끔씩 발생하지만 일단 발생하면 치명적인 타격을 주는 것이라 보면 되겠습니다. 노후 자산은 중대 질병이라는 블랙스완의 출현으로 크게 줄어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수십 년 준비해둔 노후설계가 한순간에 무너집니다. 보험은 생애설계에서 블랙스완의 출현을 막아줍니다. 노후의 보험자산은 생명보험보다는 질병이나 요양보험들이 해당되겠죠. 세 자산 중, 투자자산은 골을 넣는 공격수로 자산 수명을 길게 해주는 주포(主砲) 역할을 해줍니다. 축구에서 공격에 치중하다 보면 골을 먹을 수 있습니다. 인생 후반의 실점은 치명적입니다. 그래서 연금자산으로 1차 수비라인을 만들어야 합니다. 연금자산으로 생계를 유지할 소득을 만들어둬야 하는 거죠. 하지만 이 수비만으론 부족합니다. 노후자산의 급격한 변동을 막기 위해서는 2차 수비라인으로 보험자산을 가져야 합니다. 연금, 보험, 투자 이 셋은 노후자산을 지키는 삼총사입니다. 내 연금 내가 만들기 연금처럼 자신이 보유한 금융자산에서도 매월 일정한 소득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국가나 금융기관이 아닌 자신이 만드는 셀프연금인 셈이죠. 종신연금은 유동성이 없는 데 반해 셀프연금은 언제든 중도에 필요한 돈을 찾아 쓸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셀프연금 체계는 퇴직 후 반드시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배당일이 다른 6개의 리츠(REITs)를 사놓으면 매월 배당금이 들어옵니다. 보유 리츠의 평균배당금액을 감안해 매월 일정한 금액을 인출하면 됩니다. 금융상품을 달리하여 받을 수도 있습니다. 계좌에 주식펀드를 넣어두고 여기에서 매월 확정된 금액을 인출하는 방법입니다. 이 경우 수익률이 높으면 수익금만으로 연금을 받을 수 있지만 수익률이 낮을 때는 원금을 빼 써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변동성이 큰 자산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셀프연금을 만들기에 적합한 금융상품은 수익률이 너무 낮지 않은 현금흐름이 꾸준히 나오는 인컴형 투자자산입니다. 투자자산이지만, 자산가격 상승보다는 배당이나 이자획득이 주목적인 자산이죠. 리츠, 상장 부동산펀드, 회사채, 배당주 등이 해당됩니다. 이런 자산을 담고 나면, 계좌의 수익금과 원금의 일부를 연금처럼 인출할 수 있는 인출 방식을 적용해야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정액식(定額式)입니다. 예를 들어, 초기 자산의 4%(5억 원이면 연 2000만 원)를 계속 인출하는 방식입니다. 이 방식은 금액이 확정적이어서 이해하기 쉬우나 계좌의 잔고가 언제 바닥날지 예상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계좌 운용수익률이 높으면 오래 유지되고 낮으면 일찍 바닥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대표적인 방식은 인출기간을 정해놓는(예를 들어 30년) 정기식(定期式)으로 매년 계좌잔고를 잔존 연금기간으로 나눈 금액을 인출합니다. 초기 자산이 5억 원이고 운용수익률이 4%라면, 첫해에는 1666만 원(=5억 원/30년) 인출하고, 둘째 해에는 1733만 원(=5억 266만 원/29년) 인출합니다. 이렇게 되면 마지막 해에는 5197만 원을 인출하고 계좌잔고는 없어집니다. 즉 연금액은 매년 변동하지만 30년 후에 계좌잔고는 정확히 ‘0’이 됩니다. 이는 매월 연금액은 확정적이지만 계좌잔고의 소진기간을 모르는 정액식과 대비되는 방식입니다. 국민연금은 우리가 손댈 수 없고, 민간 종신연금은 유동성이 없어 무작정 많이 하기 어렵습니다. 금융자산으로 내가 스스로 만드는 셀프연금이 노후에 중요해지는 이유입니다. 셀프연금과 함께 공적연금, 종신연금을 잘 활용해서 노후 소득을 만들면 좋습니다.
- 2019-08-19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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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멩코의 시원(始原) 세비야
- 오래전 TV에서 전자회사 광고를 보다가 눈이 크게 뜨고 화면을 본 적이 있다. 당시 신인 연기자였던 김태희가 스페인 전통 의상을 입고 이국적인 풍경의 광장에서 플라멩코 춤을 추는 영상이었다. 배경이 된 아름다운 광장이 어디인지 궁금했다. 그곳이 스페인 세비야에 있는 ‘스페인 광장’이라는 사실을 알고 난 뒤 내 버킷 리스트 목록에 들어갔다. 세비야는 스페인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다. 구시가지 옆으로 ‘과달키비르 강’이 흐르는 이 도시는 이슬람 왕조 점령기에는 ‘이스빌리아’로 불렸다. 이사벨 여왕 시대에 되찾은 뒤에는 무역 중심지로 성장해 스페인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가 됐다. 그러나 16세기 후반에 ‘카디스’에 항구가 개발되면서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세비야를 배경으로 하는 예술 작품도 많다.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 비제의 ‘카르멘’,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과 ‘돈 조반니’를 꼽을 수 있다. 최근에는 영화 ‘스타워즈 에피소드2: 클론의 습격’ 편의 배경 도시로 나오기도 했다. 다양한 아름다움 지닌 스페인 광장 스페인 광장은 1929년 ‘라틴아메리카 박람회’를 위해 20세기 스페인 최고의 건축가 아니발 곤살레스가 지었다. 반원의 형태로 바로크 양식과 신고전주의 양식이 혼합된 건물이 광장을 둘러싸고 있다. 건물 양쪽 끝에는 이슬람풍의 힐랄다 탑을 본떠 만든 탑이 있고, 광장과 건물 사이에는 수로가 있다. 광장과 건물을 연결하는 건 타일이 붙여진 아치형 다리다. 채색된 타일과 갈색 벽돌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광장을 보고 있는 건물 벽은 스페인의 역사적 사건들을 타일 모자이크로 장식해놨다. 건물 아래에는 이슬람풍 타일로 만든 벤치에 스페인 58개 도시의 이름과 그 도시를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이 그려져 있다. 타일의 선명한 색과 아름다움에 그저 감탄사만 나온다. 고인 빗물에 광장과 건물이 반사되면 그 아름다움을 언어로 표현할 방법이 없다. 더욱이 해가 지면 켜지기 시작하는 주황색 조명은 모든 선과 색을 더 환상적으로 만든다. 수로의 물에 반사되는 주황색 가로등과 건물, 아치형 다리, 타일, 그리고 광장의 분수에서 솟구쳐 오르는 초록, 분홍, 보라색 물줄기…. 어둠이 내린 젖은 광장을 바라보고 있으면 가슴이 콩닥콩닥 뛴다. 플라멩코 공연장 ‘카사 데 라 메모리아’ 세비야는 그 유명한 ‘플라멩코’의 발상지다. 스페인 예술의 꽃인 플라멩코는 2010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무형문화유산에 지정되었다. 플라멩코라는 이름은 ‘불꽃’, ‘열정’을 뜻하는 ‘플라마(Flama)’를 집시들이 은어로 사용한 데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와 댄서의 손 모양이 플라망고 새와 비슷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 등 다양하다. 흔히 플라멩코를 춤으로 알고 있는데, 춤이 아니고 공연 예술이다. 춤(Baile), 기타(Toque), 노래(Cante), 손뼉과 추임새(Jaleo) 등 4가지 요소로 구성된 공연이다. 전통 플라멩코의 매력을 확인하려면 ‘플라멩코 문화센터(Centro Cultural Flamenco)’에 가면 된다. 추억의 집(Casa de la memoria)에서 플라멩코 춤을 관람할 수 있다. 입장료는 1인당 18유로이고 오후 7시 30분과 9시 하루에 두 번 공연한다. 무대가 작은 실내에 설치돼 있어 출연자의 숨소리까지 들렸다. 기타 연주자 한 명, 가수 두 명, 그리고 남녀 댄서가 한 명씩 출연했다. 플라멩코 음악에는 비장함이 담겨 있다. 댄서의 눈빛과 춤사위는 극장 안에 있는 관객들을 몰입하게 한다. 특히 역동적인 동작과 누구라도 빨아들일 것 같은 여자 댄서의 깊고 검은 눈에서 집시의 애환이 느껴졌다. 마치 사라사테의 ‘지고이네르바이젠’을 연주하는 바이올린의 선율처럼. 플라멩코는 관객과 공연자의 벽을 허물어뜨린다. 세비야에서 꼭 가봐야 할 곳 세비야 대성당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성당이다. 원래 있던 이슬람 사원을 허물고 1402년부터 1528년까지 1세기에 걸쳐 지었다. 고딕 양식, 신고딕 양식, 르네상스 양식이 혼재되어 있다. 스페인의 옛 왕국인 ‘레온’, ‘카스티야’, ‘나바라’, ‘아라곤’의 왕을 상징하는 조각상이 콜럼버스의 관을 메고 있는 ‘콜럼버스의 묘’도 볼 수 있다. 히랄다 탑 대성당 앞에 있는 104m 높이의 종루다. 왕이 말을 타고 종루에 올라가기 위해 탑 안의 통로를 계단이 아닌 나선형의 경사로로 만들었다. 세비야 시내를 전망할 수 있다. 알카사르 요새로 건설되었지만, 나중에 궁전으로 개조했다. ‘작은 알함브라’라는 별칭에 어울리는 중정 형식의 건물에 아름다운 정원을 가지고 있다. 벽돌을 주로 사용했다. 섬세한 문양의 타일 패턴으로 벽과 바닥에 장식하는 무데하르 양식을 살렸다. 르네상스 양식의 기둥과 아치들을 절묘하게 결합한 빛나는 건축물이다. 환상적인 정원을 안 보면 후회할 수 있다. 마리아 루이사 공원 유럽 도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원 중 한 곳이다. 스페인 광장 맞은편에 있다. 1893년 궁전 주인인 ‘마리아 루이사 페르난다’ 공작 부인이 시에 기증했다. 공원 끝에 있는, 각기 다른 양식으로 지어진 세 개의 궁전에 둘러싸인 ‘아메리카 광장’까지 걸으면서 호젓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메트로 폴 파라솔 21세기 건축의 새 트렌드를 상징하는 건물이다. 지붕의 스카이라인이 특징인 건물로 세비야의 해질녘 풍경과 야경을 감상할 수 있다. 세계 최대 목제 건물로 ‘빅 머시룸’, ‘안달루시아의 버섯’ 등으로 불린다. 황금의 탑 이슬람 ‘알모하데 왕조’가 적의 침입을 감시하기 위한 망루로 사용하려고 1220년에 세운 탑이다. 마젤란이 세계일주 항해를 떠난 역사적 의미를 지닌 곳으로도 유명하다. 현재 해양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 2019-07-16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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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저하게 체험으로 일군 부동산 투자 고수, 방미
- 점프슈트를 입고 카메라를 바라보는 방미가 소녀처럼 웃었다. 특유의 눈웃음, 그리고 다부진 몸매, 허스키한 목소리로 팬들의 마음을 흔들며 데뷔한 40년 전의 얼굴 그대로라면 믿겠는가. 부동산 관련 책을 출간하고 저자의 삶을 살고 있는 그녀는 요즘 ‘BangmeTV’ 제작하는 재미에 푹 빠졌다. 날것 그대로를 보여주면서 맨 얼굴로 그날그날의 이슈와 생각을 이야기하면 할수록 재미와 의미가 더해지는 작업이란다.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사는 여자 방미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봤다. MBC 2기 공채 개그맨으로 1978년 연예계에 데뷔한 방미는 1980년 ‘날 보러 와요’로 한국 가요계를 휩쓸었고 동명의 영화 출연료를 종잣돈으로 국내 부동산 투자를 시작해 해외 부동산까지 성공, 서울 강남은 물론 제주도까지 섭렵하며 큰 부를 쌓았다. “1983년 LA 공연차 미국을 방문한 뒤 해외 진출과 비즈니스를 꿈꿨어요. 그러다 1993년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발표한 후 연예계를 떠났고 미국 뉴욕으로 갔어요. 2007년 거기서 이모가 하던 주얼리숍 등을 운영하면서 뉴욕, 로스앤젤레스, 하와이 등의 부동산에 투자했어요. 성공을 거둔 건 맞아요. 이 모든 것들이 근검절약하고 노력한 덕분이라고 당당히 말하고 싶어요.” 연예인을 하면 돈 좀 벌 수 있을까 하고 시작했다는 그녀는 그동안 전심전력하며 열심히 살았던 젊은 날이 자랑스럽기만 하다. 육십의 나이가 믿기지 않았다. 에너지 넘치는 목소리에 호탕하게 인사를 하는 모습이 너무 반갑다. 사람들은 아직도 감칠맛 나는 그녀의 노래를 듣고 싶어 한다. 그녀를 ‘날 보러 와요’를 부른 1980년대 인기가수로만 여기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2007년에 가수생활 종료를 선언하고 재야의 부동산 투자 고수로서 활약한 지 오래다. 언니, 아직 죽지 않았다요? 서울 신사동 카페에서 만난 그녀는, 지금 한국 사회는 뭔가 안 풀리고 답답한 상태라며 쓴소리를 한다. 그 답답함이 너무 싫어서인지 자신의 생각을 풀어내는 그녀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그런 시원시원함이 나이를 거스르는 듯한 그녀의 외모와 잘 어울렸다. 방미는 2018년부터 유튜브를 통해 ‘BangmeTV’를 운영하고 있다. 그녀 삶의 이야기, 헬스, 부동산 투자, 정치에 대한 얘기들을 풀어내는 출구다. 그런데 그녀의 채널은 댓글을 달 수 없게 해놨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맥락 없는 비난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사람들이 나를 꼴 보기 싫어해요. ‘너는 뭐냐. 뭔데 잘난 척이냐’라는 식으로 말하죠. 하지만 저는 전혀 신경 안 써요. 버닝썬 사건처럼 연예인들이 방송에서 잘난 척하는데 알고 보니 ‘바지사장’인 경우 많잖아요? 심지어 나를 사기꾼이라고도 하는 사람이 있는데, 내가 세금 안 내고 사기꾼이었으면 가만 놔뒀겠어요?” 그녀의 솔직 담백함은 지독히 가난했던 ‘흙수저’ 시절을 극복한 자신에 대한 확신에서 비롯되는 듯싶었다. “어린 나이에 너무 어렵게 살다가 출세를 하고 돈을 벌고 명예를 얻었죠. 돈을 벌기 시작한 건 ‘날 보러 와요’를 부를 무렵이었고, 버는 대로 저축했어요. 시작과 동시에 계획을 잘 짰어요. 돈에 대한 플랜을 말이죠. 적금을 부어 오백만 원을 모으면 차를 사고 전세를 얻을 수 있겠다 하는 식으로 구상이 늘 있었죠. 그게 습관이 됐어요. 그렇게 지금까지 계획에 맞춰 살아왔죠.” 물론 그녀의 삶이 생각한 대로 흘러간 것은 아니다. 스스로를 “젊었을 때는 굉장히 싸가지 없었다”라고 표현하는 그녀는 20여 년 전, 믿었던 사람에게서 10억 원에 달하는 막대한 사기를 당한 적이 있다. 그때 그녀는 ‘내가 사람 하나는 잘 본다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하고는 자신의 교만함을 반성하고 깨닫게 됐다고 한다. 잘 하는 일 보다 좋아하는 일을 하다 계획을 중시하는 방미답게 오래전부터 유튜브 방송도 차근차근 준비했다. 사실 그녀는 유튜브를 하기 전에 이미 10년 넘게 블로그 ‘악질 방미’를 개설해 운영하고 있었다. 블로그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가수를 그만뒀어도 ‘연예인’이라는 자신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 번 연예인은 영원한 연예인이죠. 방미가 죽으면 신문에 ‘가수 방미’라고 기사화될 테니까요. 그러니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가볍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러면서도 행사를 하거나 신곡을 또 내기는 싫었죠.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블로거에서 유튜브 크리에이터라는 또 다른 모험을 하며 그녀는 제작, 연출, 각본, 진행 등 실로 다양한 역할을 해내고 있는 중이다. 현재 구독자 수는 1만6000여 명. “아직 폭발적으로 사람들이 많이 들어오지는 않고 있어요. 50대, 60대가 시청자의 주류이다 보니 구독자가 급격히 늘어나는 분위기는 아니예요. 그게 좀 아쉽지만 그래도 재미있게 하고 있어요. 제가 여전히 무대 체질인 거 같기는 해요. 유튜브를 하면 신나거든요.” 유튜브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를 주고 싶은 마음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요즘 특히 비중을 두고 방송을 하는 분야는 재테크다. “제가 현물은 잘 모르지만 부동산은 40년간 발로 뛰면서 많은 정보를 얻었어요. 그래서 알려줄 게 많아요. 20년은 한국에서, 20년은 미국에서 부동산 투자를 하며 보냈으니까요.” ‘나는 해외 투자로 글로벌 부동산 부자가 되었다’ 사실 방미는 그동안 세 권의 책을 낸 저자이기도 하다. 그녀가 가장 최근에 낸 책은 ‘나는 해외 투자로 글로벌 부동산 부자가 되었다’로, 5월 초에 발간되어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 무엇보다도 정보를 쉽게 얻기 힘든 해외 부동산 투자에 대한 내용을 다뤘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그녀가 실제로 수익을 낸 지역들을 예로 들어 비자 발급, 관련 용어 설명, 미국의 각 지역 정보에서부터 수수료와 세금까지 다양하고도 실전적인 투자 정보를 담고 있다. 해외 투자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주목할 수밖에 없다. 해외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그녀는 지금도 국내외를 오가며 지내고 있지만 현재는 청담동에서 거주하고 있다. 사무실은 압구정동에 있다. 그리고 작년에 제주도에 리조트도 마련했다. “해외에서 살다 보니 한국에 왔을 때는 꼭 자연을 충분히 느낄 수 이 있는 곳이어야 하더라고요. 이장희 ‘형’(그녀는 이장희에게 노래 ‘주저하지 말아요’를 받으면서 인연을 맺게 됐다)도 울릉도에 사는 이유가 그래서일 거예요. 산과 바다 등 자연을 보면 충만해지는 느낌이 들거든요.” 부동산 관련 책을 출간한 의미까지 듣고 나니 부동산 투자가로서의 방미가 궁금해졌다. 특히 제주도는 10여 년간 계속 투자가들의 관심을 끌었기에 그녀가 전문가로서 제주도의 부동산 가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슬쩍 듣고 싶었다. 독자들을 위해 제주도 투자에 대한 그녀만의 노하우를 청했다. 제주도 투자, 이것만은 명심하라 “제주도는 집을 잘 선택해야 해요.” 그 이유는 중국인들이 이미 많은 땅을 선점했고 매체의 영향으로 제주도 붐까지 일어나면서 난개발을 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 속에 지어진 집들이 문제점이 많다는 게 방미의 진단이다. “제주도는 섬이고 초원이다 보니 야생동물, 바퀴, 개미 등 벌레가 많아요. 그리고 하수구 등 배수 문제도 있고요. 나이 들어서 거기 가서 영원히 살겠다? 그건 무리라고 봐요. 제주도 초원에서 살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있죠. 그런데 가서 막상 살면 한 달도 못 견뎌요.” 방미는 제주도에서의 집은 세컨드하우스 개념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세컨드하우스로 살 때 제주도의 분위기를 한껏 내보겠다고 검은 화산석으로 치장한 집을 사는 사는 사람들이 있어요. 저는 말리고 싶어요. 제주도 돌은 TV에서나 다른 사람 집 보면서 감상하고, 정말 편하고 세련된 집을 선택해야 해요. 집 밖으로 나갔을 때 KFC도 있고 스타벅스도 있는 편의성이 있는 곳에 마련하는 게 좋아요.” 그녀는 사방이 펼쳐져 마치 그림 같은 풍광을 자랑하는 곳은 오히려 불편함이 많다고 지적했다. 밖으로 나오면 바로 문화를 즐길 수 있고 편리함이 있는 곳, 인프라 접근성과 재밋거리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재야의 부동산 고수로서 한마디 “그래서 제주도는 바닷가 바로 앞에 있는 집을 사면 안 돼요. 그건 하와이도 그래요. 철칙인데 사람들이 잘 모르더라고.” 바닷가 앞에 있는 집에는 필연적으로 벌레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가뜩이나 습한 날씨가 많은 섬에서 바닷가까지 앞에 있으면 생활 환경이 최악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제주도는 쉬려고 가는 곳이지 고생하려고 가는 게 아니라는 게 그녀의 관점이다. 얘기를 듣고 보니 그녀가 주택이 아닌 리조트를 선택한 것이 당연해 보였다. 리조트나 레지던스는 청소와 식사 등 필요한 서비스들을 기본으로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투자처로서의 제주도는 지금 어떨까? 그녀는 제주도의 부동산 경제 사정이 현재 최악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되려 그렇기 때문에 투자처로서의 가치는 높아질 수 있다고 조언했다. “눈여겨보고 있어요. 올 하반기가 투자할 시점이 아닐까 생각해요. 삼방산 밑 지역과 서귀포 중문 관광단지 쪽이 괜찮아 보여요. 삼방산은 요즘 방송에서 많은 관심을 보이는데 예전부터 핫한 곳이었어요.” 최소한 10년 계획을 세운다 부동산 투자에서 전문적인 시각을 보여주는 그녀를 보니 현재의 방미에게 가수로서의 욕구는 더 이상 없다고 봐도 좋을 듯했다. 사실 그녀는 꼭 참석해야 할 행사가 있어도 가서 노래는 절대 부르지 않는다고 한다. 욕심을 부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설 수 있는 무대들은 이제 후배에게 물려줘야죠. 그 자리 외에도 내가 활동할 수 있는 자리들이 있을 테니까요.” 가수로서 최선을 다한 시절이 있기에 후배의 자리를 뺏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그녀에게서 인간에 대한 배려와 정의(正義)가 느껴졌다. 그렇다면 가수가 아닌 부동산 투자 강의를 하는 방미는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제 강의료가 1000만 원이에요. 그렇게 금액을 정한 건 강의를 꼭 들으려면 그만한 대가를 지불하시라는 의미도 있지만 너무 비싸니까 부르지 말라는 의미도 있어요. 하지만 정말 의미가 있는 자리에서 강연을 할 때는 돈을 받지 않으려고 해요.” 그녀는 삶을 충분히 즐겼다고 말한다. 해외에서의 삶도 풍족했다. 뉴욕에서 10년 번 돈으로 LA에서 5년 동안 즐겁게 살았다. 이제 그녀는 4~5개월은 한국에서, 3개월은 미국에서, 나머지는 여행을 하며 여생을 보낼 생각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잘살았어요. 이제 내일모레가 칠십(?)인데 인생 정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해봐야죠. 그러니 더 돈을 벌겠다, 다시 노래 좀 불러볼까 하는 욕심은 없어요.” 방미는 모든 계획의 단위가 최소한 10년이라고 했다. 내 마음대로 ‘브라보 마이 라이프’ 그녀는 유튜버 활동이 큰 욕심 없이 마음대로 할 수 있어 매력이 있단다. 그걸로 돈을 벌기는커녕 되려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며 운영하고 있다. 지금까지 열심히 살았으니 그 정도 자유는 당연하지 않냐는 게 그녀의 말이다. “여기까지 오기까지 쉬운 길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앞으로 10년 동안은 내 맘대로 살고자 해요. 이제는 나한테 투자를 하고 싶어요. 우선 충분히 잘 멋지게 쓰고 행복해지는 데 집중하자, 그러니 미리 고민하지 말자는 생각이죠.” 물론 늘 계획하고 사는 게 습관이 된 그녀가 모든 걸 내려놓을 리는 없다. 우선 유튜브 구독자 수를 올해 말까지 3만 명 정도까지 늘리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다. “스튜디오를 만들고 싶어요. 강연과 세미나, 공연, 요가, 운동, 놀이터 등이 가능한 만남의 공간을 마련하고 싶은 거죠. 요즘 시니어는 예전에 비해 훨씬 건강해요. 베네피트에 공감하며 함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브라보는 젊은 애들이 잘 안 하는 말이다. 진정 우리 나이여야 할 수 있는 말”이라면서 멋지게 정리해버리는 방미는 그야말로 ‘브라보, 브라보 마이 라이프’라고 외칠 수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녀의 ‘브라보’스러운 미래 계획은 또 어떻게 세울지 궁금해졌다.
- 2019-07-11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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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북 괴산 연풍면 산골에 사는 박병각 씨
- 마을 뒤로는 신록이 사태처럼 일렁거리는 큰 산. 앞쪽엔 물고기들 떼 지어 노니는 냇물. 보기 드문 길지(吉地)다. 동구엔 수백 살 나이를 자신 노송 숲이 있어 오래된 마을의 듬직한 기풍을 대변한다. 겨우 2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였으니 한눈에 살갑다. 마을 여기저기로 휘며 돌며 이어지는 돌담길은 야트막해 정겹다. 이 아늑한 산촌에 심히 고생을 하는 농부가 있다. 경기도 일산에 살았던 그는 특별한 준비 없이 귀농했다. 귀농을 좀은 만만하게 봤을까? 혹은, 매사 서둘러 일단 일을 저질러놓고 보는 배짱의 소유자일까? 물론 그가 무작정 시골로 내려온 건 아니다. 내려오라! 연로한 부모님께서 먼저 사인을 보내왔더란다. 그럴 즈음 그의 건강도 좋지가 않았다. 해서, 으라차차, 가자, 고향으로 내려가자! 그렇게 결연히 부르짖으며 아내와 함께 귀향을 했던 모양이다.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를 것만 같은 산촌의 포실한 경관과 공기를 일용한 양식처럼 취하며 살아온 지 어언 5년. 박병각 씨(63, 영농조합법인 알토팜 대표)의 낯빛은 들판에서 타 구릿빛이다. 몸엔 땀내가 배었으니 그의 일상적인 근로의 양이 어느 정도인가를 직감할 수 있다. 도시에선 갖가지 직업을 편력했다. 경영학을 전공한 박 씨는 한때 교수생활을 했다. 기업체 중견간부로도 일했다. 돈을 실컷 벌겠다고 맘먹고 통신장비 관련 업체를 창업하기도 했다지. 비록 꽃을 피우진 못했지만. 귀농 직전까진 번역 사업을 했다. 박병각 씨의 말에 따르면, 그는 이재에 밝지 못한 사람이다. 몇 번의 기회가 왔으나 어여삐 머물러주지 않았단다. 그러나 다양한 직종을 거쳤으니 갖가지 노하우가 실하게 쌓였을 것이다. 빛은 빛대로, 그늘은 그늘대로 질주의 돛대 역할을 하는 법. 때로는 순항으로, 때로는 난항으로 건넌 세상이 그에게 응분의 기량을 증정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머리와 몸에 축적된 실력을 다 끌어올려 농사에 쏟아 부었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이 아직 방문하지 않았거나, 자신의 저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않은 탓일까? 농사는 제자리걸음이다. 물심양면의 불황이 자심할 테지. 애초 “거의 빈털터리로 내려왔다”고 하는데, 귀농 5년 사이에 뭐 별반 늘거나 불어난 게 없는 모양이다. 싱글벙글 낙천적인 미소가 얼굴에 피부처럼 붙어 있지만, 5년간 들판에 쏟은 땀방울을 생각하면 내심 긴장감이 들솟을 게다. “귀농할 때 별다른 준비 없이 내려왔어요. 우선은 건강부터 챙기고 보자는 생각뿐이었죠. 그럼에도 첫해부터 농사를 지은 건 부모님께서 경작하시던 농토가 있어서였어요. 밭 2000평에다 참깨를 심었어요. 기대치만큼의 수확이 나오질 않더라고. 현재는 규모가 늘어 1만 평입니다. 콩을 주 작물로 하고, 찰수수와 레드비트도 재배합니다. 양봉도 하고요. 그러나 타산을 맞추기는 여전히 힘들어요.” “적자를 보는 거예요?” “당연하죠. 초보 농부의 자세로 그저 열심히 노력하지만 농사라는 게 참 어렵다는 걸 실감합니다. 사실, 귀농 5년 차인데도 적자를 본다면 얼른 떠나는 게 현명해요. 하지만 저에겐 희망이라는 게 있어요. 나름 최선을 다해 농사를 하기에 결국은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리라는 낙관, 그런 거.” “부진한 농사, 그건 사전 준비를 소홀히 한 사필귀정 아녜요?” “그런 측면도 있죠. 시행착오가 없지는 않아요. 그래서 요즘 제가 남들에겐 준비를 철저히 해오라고 당부합니다. 그런데 말이죠. 농사란 여러 면에서 한계에 봉착하게 되더군요. 그 무엇보다 기후 조건에서 자주 한계를 느낍니다. 농부의 능력보다 하늘과 땅의 조력이 더 중요한 변수라는 거. 농부가 직접 유통에 나서야만 하는 구조도 벽으로 다가와요.” 농부란 숭고한 신앙인에 가깝다 대지를 일구는 농부란 시를 쓰는 시인과 다를 바 없다. 방울방울 진땀 뿜는 일을 한다는 점에서. 무심히 빛나는 별을 바라보며 영감을 짜내느라 머리칼을 쥐어뜯는 시인처럼, 농부 역시 비와 바람을 주재하는 하늘의 협찬을 간절히 기도한다는 점에서. 그러나 농부의 하늘은 더 절대적이다. 더위와 추위와 서리, 가뭄과 홍수와 태풍, 이 모든 자연의 순환과 횡포에 고스란히 노출돼 있는 게 농사이지 아니한가. “농부란 ‘숭고한 신앙인’에 가깝다고 봅니다. 처음엔 몰랐으나 농사를 지으며 그걸 알았어요. 시골 사람들이 아는 게 농사뿐이라 그냥저냥 농부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투철한 가치관이 아니고선 뜻을 이루기 어렵다는 걸 그들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한평생 농사를 지어온 어르신들도 기후의 혼란과 변덕 앞에선 속수무책이에요. 그런데 저는 이제 겨우 5년. 정착까지는 아직 멀었어요. 아마도 10년은 흘러야 자리가 잡히지 않을까. 끙.” “건강은 좋아지셨고?” “농사일이 워낙 많아서 건강이고 뭐고 돌볼 틈이 없는 것을.(웃음)” “농림축산식품부의 최근 발표에 따르면 귀농 5년 차 농가의 평균소득이 3898만 원이라고 해요. 이거 믿을 만한 소식일까? 제가 만난 귀농인들은 흔히들 고전하고 있었어요.” “정부의 공식 통계이니까 그러려니 해야겠죠. 그러나 가처분 소득이 아니고 매출액 기준의 산정이라 봅니다.” “선생의 농사는 아직 불안정한 상태예요. 만약에 말이죠, 누군가 귀농을 하려 한다면 뜯어말리시려나?” “흠. 텃밭농사 정도가 이상적이죠. 농사를 직업으로 삼는다는 건 사실 위험합니다. 전적으로 농사 하나에 생계를 걸 경우엔 더 어려워질 수 있어요. 시행착오의 연속일 수 있으니. 그렇다고 무작정 두려워할 일도 아녜요. 귀농이란 본질적으로 자연으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자연의 방식에 부합하는 신념으로 산다면 만족을 누릴 수도 있죠.” “자연의 방식이라는 건 순응의 태도? 있는 그대로 자족하는 거?” “제가 아무런 준비 없이 귀농했지만 한 가지는 가슴에 새기고 내려왔어요. 비우자! 이제부턴 비우고 살자! 그런 마음가짐 말이죠. 도시에서 가졌던 과욕이나 비즈니스 마인드 대신 빈 마음으로 살자는 거. 한마디로, 돈벌이 목적보다는 비우려고 귀농한 겁니다.” 마음을 비우는 일은 밥그릇을 뚝딱 비우는 일과 달라 내공이 필요하다. 흔히들 마음 비우기에 관심을 두지만 비울수록 마음은 허기로 보챈다. 매사 비우려는 건 어엿한 지향이지만, 진정 비우기도 전에 고프고 슬퍼 떨리는 게 삶이지 않던가. 먹고사는 일의 고역과 경쟁은 거의 항구적인 숙명이니 말이다. 하지만 부진한 농사는 이 비우기를 쉬 구현하게 하는 기묘한 견인차란 말인가? 박 씨는 농사 부진에 그다지 조바심치지 않는 것 같다. 들어오는 게 없으니 굳이 채울 것도 없으며, 따라서 비우고 살고자 하는 신념을 관철하기가 오히려 용이하다는 투의 얘기를 하고 있으니. 치레가 없어 푸근한 농가주택 귀촌이든 귀농이든, 그게 종전과는 전혀 다른 삶으로 들어가는 일이기에 모두들 신중에 신중을 기한다. 생판 낯선 객지보다는 가급적 연고가 있는 곳에 자리를 잡는다. 농식품부의 조사에 따르면 귀농자의 53%, 귀촌자의 37%가 고향, 또는 사소하나마 연고 있는 시골에 둥지를 틀었다. 연고 덕분에 적응과 정착이 더 수월할 거라는 판단에서다. 하지만 연고지로 이주하더라도 크고 작은 애환은 따개비처럼 들러붙는다. 박 씨는 이웃들에게 그가 도시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아예 밝히질 않았다. 자칫 오해와 편견을 심어줄 수 있어서. “고향이라는 단 하나의 근거를 앞세워 귀농하는 건 바보 같은 짓입니다. 중요한 건 어디로 내려가느냐보다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미리 충분히, 구체적으로 연구하는 일이에요. 만약 돈벌이에 목적을 둔 귀농이라면 더 치열하게 공부를 해야죠. 일테면 선택한 작물의 재배조건, 생산한 농산물의 유통 환경 등을 심도 있게 파악해야 합니다. 이모저모 의지대로 살기 쉽지 않은 게 시골이라 보면 됩니다. 이건 제 경험에서 우러난 얘기들이에요.” “반면교사로 삼으라는 말씀?” “바로 그거! 저는 도시가 싫었어요. 힘겨웠어요. 그렇다면 도피성 낙향일까? 그렇게 물으실지 모르지만, 기꺼이 내려왔으니 탈출이라 해두죠. 충분한 준비보다는 도시를 벗어난다는 사실에 생각이 쏠려 있었어요.” “이 마을에 와서 저는 두 가지에 놀랐어요. 하나는 수려한 마을 풍치이고, 다른 하나는 선생께서 농약을 쓰지 않는 농사를 처음부터 고수해왔다는 점이에요. 일반 관행농법보다 몇 곱절 더 어려울 무농약 농사에 어떻게 착안하셨죠?” “아하. 당연하고도 간단한 이유가 있어요. 내 가족들이 먹을 음식에 농약 성분이 섞인다면? 그런 자문을 하면 답이 빤할 수밖에. 남의 가족들을 생각해도 마찬가지예요. 물론 작물이 병들어갈 때 약은 필요합니다. 그럴 때면 저는 화학적 농약 대신 자연에서 얻어온 재료들로 만든 농약이나 퇴비를 사용해요. 공장 농약 외 대안이 없다면 이미 농사를 포기했을 겁니다.” “괴산군 귀농귀촌인 협의회장을 맡으셨죠? 귀농귀촌 실태에 환하겠어요. 실패 사례엔 어떤 게 있죠?” “대체로 귀농이 아닌 귀촌 케이스가 만족도가 높습니다. 실패자엔 두 부류가 있어요. 첫째는 준비가 덜 된 상태로 덜커덕 귀농했다 망치고 돌아가는 경우, 둘째는 적막한 시골에서 우울증을 얻고 쓸쓸히 떠나는 경우.” 대책 없는 전원 판타지를 꿈꾸는 그대여, 그냥 도시에 사시라! 그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거다. 귀농귀촌의 실상이 꽤나 알려진 요즘엔 얼간이 같은 짓을 하는 사람이 드물다. 맹목적이거나 낭만적인 환상을 가지고 냅다 시골로 들이닥치는 우행은 생고생을 자초하는 지름길이니까. 문제는, 인류를 구원할 듯한 기세로 머리를 싸맨 준비와 연구를 선행하더라도 허무한 귀결에 닿을 수 있다는 점일 테지. 특히나 어려운 건 역시나 주민과의 융화 문제. “시골의 자연환경이 파괴되었듯 인심도 변했어요. 합리성이 결여된 시골 분들이 많다는 것도 유념해야 합니다. 그들은 합리나 법리보다는 마을의 관습적 불문율을 중시해요. 여기에서 텃세 문제가 야기되죠. 그러나 그걸 불편하게 여기면 안 됩니다. 텃세를 메시지로, 우리의 규율 안으로 들어오라는 메시지로 읽어야 해요. 이건 불변의 풍습이에요. 일단 불문율을 존중, 선선히 마을에 녹아들어간 뒤 바꿀 걸 바꾸는 노력을 하는 게 순서이지 않겠어요?” 그의 거처는 오래되고 소박한 농가주택이다. 꾸밈이 없어 담백하다. 치레가 없어 푸근하다. 앞뜰과 뒤란엔 향이 번진다. 갖가지 꽃나무를 심어둬서다. 항아리들은 불룩한 배통을 두드리며 저희들만의 밀어를 속닥거린다. 지붕 위를 가로지르며 노래하는 가수는 박새구나. 아무런 결함이 없는 평화. 집 안팎에 그런 기운이 남실거린다. 밤이면 창으로 들이친 별들이 부부의 침실을 염탐하려나? 박 씨에 따르면 부부가 각방을 쓰는 행위는 죄악에 가깝다. 그는 농사에 시달린 나머지 퇴행성관절염을 앓는 아내의 손가락 열 개에 송구스럽다. 농사엔 여자들이 해치워야 할 일들이 많다. 그는 그게 또 미안하다. 아마도 그는 다정다감으로 아내를 자주 살살 녹일 것 같다. 하지만 아니란다. 밖에서만 다정한 처신을 한다는 게 아닌가. 아내 최선희 씨(63)의 얘기를 들어볼까? “보기와는 다른 남편이에요. 도무지 제 말을 들어주질 않아요. 양봉을 만류했으나 기어이 시작하는 식으로요. 이젠 아예 단념하고 삽니다.(웃음) 귀농 얘기 좀 할까요? 농사 경험 없이 덤벼들어 참 많은 어려움을 겪어왔지요. 한마디로 아직은 답이 없어요. 그러나 이젠 도시에서 다시 살기 싫어졌어요. 시골에만 있는 맑은 공기와 순수한 자연, 손수 기른 깨끗한 먹거리들. 그것만으로도 삶의 질이 이미 개선된 걸 느껴요. 게다가 부부가 함께 미사를 드릴 수 있는 연풍성지가 가까이에 있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어쩌면 모든 게 축복이죠.” 우리 곁에 있으나 우리가 자주 잊고 지내는 그 사소한 축복들. 고달픈 일상의 굽이에서 축복을 느낀다면 그건 잘 산다는 증빙이겠지. 삶을 축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두려울 게 없겠지. 귀농은 아찔한 모험일 수 있지만, 삶은 단 한 번 주어진 복주머니이겠고. 박병각 씨가 주는 귀농 준비 Tip •귀촌인이야 집 사서 취미생활을 즐기면 그만이지만 귀농엔 고난이 많다. 사전 준비를 단단히 하자. 돈만을 목적으로 삼기보다 여의치 않을 경우, 자급자족으로도 만족할 수 있을 가치관을 확고히 하는 지혜도 필요하다. •최소한의 생활자금은 미리 비축하고 귀농하자. 아울러 극도로 지출을 자제하자. 자금 회전이 안 될 경우 빼도 박도 못할 상황에 봉착하기 쉬운 게 귀농이다. •굳이 집 사지 말라. 컨테이너 하나로 시작하는 게 좋다. 농토도 사지 말라. 묵은 전답을 빌리면 된다. 비싼 농기계도 살 필요 없다. 임대하면 된다. •반드시 부부 합의로 함께 내려오는 게 옳다. 만에 하나, 가족공동체가 깨진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 2019-06-07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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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수(鄕愁) 못이겨 경북 영주시 이산면 산골에 귀촌한 심원복 씨
- 향수(鄕愁)가 귀촌을 촉발했더란다. 영주시 이산면 산기슭에 사는 심원복(57) 씨의 얘기다. 어릴 때 경험한 시골 풍정이 일쑤 아릿한 그리움을 불러오더라는 거다. 일테면, 소 잔등에 쏟아지는 석양녘의 붉은 햇살처럼 목가적인 풍경들이. 배고프면 아무 집에나 들어가도 밥을 나눠주었던 도타운 인정이. 타향을 사는 자에게 향수란 근원을 향한 갈증 같은 것. 그렇다고 사무친 그리움은 아니라 굳이 억지로 누르며 살아온 것도 아니었다. 삶이란 어차피 부평초처럼 객지를 떠도는 일이지 않던가.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향수가 깊어졌던 모양.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들이 더 많아질 즈음, 심 씨는 서울생활을 후다닥 접었다. “새가 제 둥지에 깃들여 살듯이!” 심원복 씨는 귀촌생활을 그리 비유한다. 도시에선 좀체 느끼기 어려웠던 안심과 평온을 비로소 누린다는 뜻일 테지. 물론 도시에서라고 불안이나 불만을 옆구리에 달고 살았던 건 아니었단다. 숨막힐 것 같은 일상의 수레바퀴 속에서 적당히 착실하고 조신하게, 적당히 눈치보고 적당히 머리 굴리고 적당히 처세하며 살아가는 게 우리네 소시민들의 절박하고도 쩨쩨한 현실. 그 역시 그렇게 지극히 평범하게 살아왔던 것 같다. 발칙한 일탈 따위는 그의 종목이 아니었으며, 과한 출세욕이나 물욕에 허덕이며 살지도 않았을 게다. 심 씨의 유순해 보이는 인상에 이미 쓰여 있다. 별다른 폭풍과 이변과 무용담이 없었을 얌전한 인생 드라마의 표징이라는 게. 심 씨가 아늑하게 옴팡진 여기 산기슭에 집을 짓고 귀촌한 건 10년 전. 땅은 이미 그전에 사두었다. 소백산으로 등산을 갔다가 무심코 들른 산촌에서 만난 싼 매물이었다. 길도 없는 농지 1200평을 우발적으로 사들였던 것. 오우, 나중 여기에 허름한 흙집이라도 하나 짓고 살면 되겠는걸! 그런 생각으로 말이다. 땅을 미리 잡아놓은 덕에 귀촌 행보는 빨랐다. 애초 생각했던 간소한 흙집 대신 번듯한 목조주택을 지었다. 바지런히 직장생활을 했기에, 좀 모아둔 게 있었기에, 귀촌해서 생활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여력은 됐다. 그렇게 사뿐한 산골살이를 시작했다. “시골에 가서 무슨 획기적인 생활의 변화를 딱히 의도하거나 꿈꾸진 않았습니다. 번잡한 도시에서 벗어나서 마음 편하게 살면 그만이지 싶었거든요.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인생사 희로애락이야 뭐가 다르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그냥 순순히 적응하며 살면 될 거라 봤지요. 흔히들 귀촌 초기의 갖가지 고생담을 토로하는 것 같은데 저희 부부에겐 그런 게 거의 없었어요.” “낯설고 물설은 산골에 잠시 놀러온 것도 아니고, 아예 새 살림을 시작하는 상황이었는데 전혀 곡절이 없었던 거예요?” “아마도 아내는 초기에 이모저모 고생이 좀 있었을 겁니다. 제가 직장을 정리하기까지 아내 먼저 이곳에 내려와 잠시 혼자 살았으니까. 보시다시피 저희 집이 마을과 떨어진 골짜기에 있는 외딴집이에요. 일단은 밤이 엄청 무서웠다 하더라고요. 근데, 외딴집의 장점도 많아요. 오붓하고 조용하고, 게다가 어느 정도 이웃들의 관심권 밖에 있으니까.” “귀촌 정착은 의자를 만드는 일이나 뒷산 꼭대기에 오르는 일과 달리 만만치 않은 공력을 쏟아야만 할 겁니다. 그래서들 미리미리 준비를 철저히 하고 내려가라 하죠.” “제가 보기보다는 꽤나 태평한 사람입니다. 매사 준비나 계획 같은 걸 하고 살질 않았어요. 직장에서 업무를 볼 땐 불도저처럼 밀어붙이기도 하고, 여차하면 호통도 내질렀지만 타고난 천성은 느긋하고 무계획적이에요. 귀촌 준비, 그런 거 전혀 없이 내려왔어요.” “계획 대신 그때그때 상황에 적응하는 게 상책이라는? 흐르는 물처럼?” “사전 귀촌 계획이 오히려 일을 어렵게 만들 수 있습니다. 제아무리 치밀한 계획을 세웠더라도 시골의 현실적 형편과 어긋나는 수가 많으니까. 제게 있었던 계획이라면 나를 내세우지 않겠다, ‘틀’ 안에 나를 가두지 않겠다 정도였죠. 이건 소극적인 태도로 보일 수 있지만 오히려 신속하고 효율적인 정착을 가능케 했습니다. 목에 힘을 빼고, 긴장할 것 없이, 예컨대 소풍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내려오는 게 더 지혜로울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잊을 수 없는 귀촌 첫날의 별빛 소풍처럼! 지독한 게 삶이라 하지만 지독하게 애만 쓰다가 허무맹랑한 파장을 보기 쉬운 게 또한 인생이다. 그러하니 억지로 애쓰지 말자, 귀촌에 너무 큰 기대를 걸지 말자, 김밥 싸 들고 소풍 가듯이 가볍게 운신하자, 심 씨의 내심엔 그런 게 있었던 모양이다. 그 외에 구체적인 구상이나 기어이 이루고 싶은 그 무슨 목표를 정하지 않은 채 산골살이를 시작했던 것 같다. 마치, 내가 과연 어떻게 살아가나 어디 두고보자, 하는 투로. “산골 자연 경관이 너무도 마음에 들었어요. 그 한 가지만으로도 귀촌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봅니다. 은퇴한 분들에게 어서들 내려오십쇼,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자신 있게 권장하는 이유 역시 거기에 있어요. 제가 낭만적인 사람이 전혀 아니지만 나무와 달, 별을 즐기게 되었는데요, 그 순수한 자연 풍경들이 마음을 하염없이 평온하게 만들기 때문이에요. 뭐니 뭐니 해도 마음 편히 사는 게 행복이지 않겠어요? 귀촌 첫날 밤, 침실 창밖 허공으로 쏟아지던 별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달도 별도 날마다 바라보다 보면 심드렁해지지 않던가요? 낭만주의자들의 음풍농월조차도 반복되면 싱거워지는 거라서.” “초반엔 권태를 느낄 겨를이 없었어요. 딱히 할 일을 만들진 않았지만 텃밭 농사하랴, 산나물 뜯으러 다니랴, 산책하랴, 하루해가 어떻게 넘어가는지 모를 지경으로 아내와 함께 즐겼어요. 그런데 말이죠, 한두 해가 지나자 슬슬 심심해지더라고요. 친구들의 방문도 서서히 줄어들다 끊어지고, 시간이 무료해지고. 그래서 농사를 본격적으로 짓기 시작했죠.” “어떤 작물들을?” “1000평 농토에 고추, 생강, 도라지, 호박 등 이 마을에서 흔히들 하는 작물을 재배했어요. 인건비를 아끼려고 모든 일을 아내와 둘이서 해냈지요. 양봉도 해봤고, 된장을 만들어 팔기도 했고요. 한 해 2000만 원 정도의 매출을 올리기도 했지만, 어느 해엔 기상 악화로 망치기도 했어요. 농사란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걸 실감했습니다.” 심 씨의 집 풍경을 볼까? 포옹처럼 터를 에워싼 야산 중턱에 들어앉은 남향집이니 밝고 따사롭다. 집도 마당도 널찍하다. 꼬끼오! 닭장에선 수탉이 관악기처럼 목을 길게 빼고 청을 돋워 산중 적막을 비틀어댄다. 집 모서리엔 한때 꿀을 얻었던 폐 벌통 스무 개쯤이 쌓여 있다. 뒤뜰 장독대엔 후덕하게 생긴 항아리들이 즐비하다. 나무나 화초 가꾸기엔 별 취미가 없는지 이렇다 하게 공들여 운치 있게 꾸민 기색이 없다. 너른 발코니나 마당에 의자라거나 앉을 만한 자리 하나 마련해두지 않은 걸 보면 주로 서서 움직이는 분주한 일상을 보내는 모양이다. 집 둘레 곳곳에 널브러진 폐물들에서도 이 집에 사는 부부가 미화작업에 신경 쓸 겨를 없이 근로에 시간을 아껴 쓴다는 걸 짐작할 만하다. 마당 한편에 설치한 비닐하우스에선 심 씨의 아내가 쇠스랑으로 텃밭을 고르고 있다. 어디 딴 데 눈 한 번 돌리는 법 없이 열심히, 혹은 고독하게. 이분은 한때 병을 얻어 고생을 했다. 그게 귀촌을 서두른 요인이기도 했다지. 산골의 어디에 사람의 몸을 고치는 미약이 숨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귀촌을 통해 다 죽어가던 사람이 살아나기도 하는 걸 나는 간혹 봤다. 심 씨의 아내 역시 귀촌 이후 건강을 완연하게 회복했다는 게 아닌가. “저희 부부는 외식을 안 합니다. 농약 친 식재료들로 만들어진 음식을 싫어해서죠. 직접 온갖 채소들을 깨끗하게 가꿔 찬을 만들어 먹기, 이 역시 산골에 사는 행복 중 하나입니다. 그게 건강비결이라고 봐요. 요양을 위해서라면 가급적 깊은 산골로 들어가는 게 좋을 겁니다. 농약을 엄청 뿌려대는 과수 단지나 유해 가스를 배출하는 축사 지구를 피해야 한다는 거죠. 그런 곳은 도시보다 공기의 질이 더 나쁠 수도 있으니까.” “도시에서와 달리 거의 모든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하는, 어쩌면 불운한 여건에 처한 부부 사이에 흐르는 공기의 질도 중요하겠죠? 귀촌한 부부들이 대화단절이라거나, 도시에서보다 갈등을 더 겪는 경우도 드물지 않더군요. 부인은 산골생활에 만족하시나요?” “만족할 리가요. 여자에게 시골은 아무래도 불편이 많으니까요. 체념하고 사는 것 같아요. 부부싸움도 하지만 그때마다 화해를 하죠. 친구처럼 그냥 무덤덤하게 삽니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애쓴다고 좋아지는 것도 아니더라고. 뭐 그래도 밥은 얻어먹고 삽니다.(웃음) 다툼이 있더라도 그게 다 내 탓이거니, 그리 여기고요.” “‘내 탓’이라는 건 뭐죠?” “흠, 제 약점이랄까, 제가 느려터진 면이 있어요. 게으름과는 좀 다른 건데요, 옆에서 볼 땐 당치 않은 여유나 허세를 부린다고 느낄 수도 있겠죠. 그러나 어릴 때부터의 천성이라 어쩔 수 없더라고요. 좀 더 느린 숨결로 여유롭게 살자! 귀촌 때 그런 다짐도 했고요.” “마을 이장을 맡으셨죠? 주민들의 신임을 얻지 않고선 그거 어려운 거 아녜요?”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했어요. 저를 내세우지 않고 배운다는 자세로 어울렸어요. 술자리도 함께하고 오락 화투도 같이 치며 섞여들었어요. 시골에선 사생활이라는 게 어렵습니다. 뭐든 묻거든요. 답을 안 해주면 오해를 살 수 있고요. 그런 풍토를 긍정하고 잘 적응해 주민들의 사랑을 받아야 정착할 수 있어요.” 마을에서 가장 바쁜 사람 사람의 마음은 새장에 달린 문과 같아서 활짝 열어젖힐 때 비상할 수 있다. 시골에 살며 아는 척, 잘난 척, 멋있는 척을 하다 보면 새장에 갇힌 신세를 자초할 수 있다. 그렇지만 자세를 낮춘 갸륵한 선의마저 곧이곧대로 믿어주질 않는 경우가 많은 게 세상이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 아파하는 게 인간이라는 종이다. 시골인들 혼선이 없으랴. “험한 꼴을 당한 적은 없으셨고? 겉으로는 웃지만 속으로는 울고 싶은 상황이라든가.” “텃세라는 건 주로 집성촌에서 벌어집니다. 60여 명의 각성바지들이 살아가는 이 마을 주민들은 다들 점잖아요. 귀촌하고서 집들이를 했는데 온 마을 사람들이 오셨더라고요. 이 마을에 이주한 최초의 외지인이라며 반겨줬어요. 그 분위기를 죽 유지한 셈이죠.” 이장 일을 보면서부터 심 씨의 양상이 급변했다. 마을에서 가장 바쁘고, 가장 유명하고, 가장 당당한 사람이 되었다. 굵직굵직한 마을 사업들을 펼쳐 성과를 거둬서다. 자칫 먹은 것 없이도 바가지로 욕먹을 수 있는 게 마을 사업 선도자다. 그는 공생 공영을 열심히 추구한 나머지 흠집 난 게 없는 것 같다. 남을 위하는 일이 곧 나를 위하는 길임을 아는 이의 활보라 할 수 있겠다. “귀촌하려는 분들에게 꼭 귀띔하고 싶어요. 재능과 역량을 마을에 쏟는다면 반드시 좋은 기회를 포착할 수 있다는 걸. 요즘 정부나 지자체가 시행하는 마을지원사업의 규모나 종목이 점점 늘어나고 있음에 착안하시길 바랍니다. 마을의 공적 이익을 창출할 수 있으며 개인의 이익도 도모할 수 있으니까.” 심 씨는 고개를 뒤로 꺾으며 큰 소리로 자주 웃어젖혔다. 우스울 게 없는 대목에서도 마구 웃으니 난 그게 우스워 덩달아 웃길 거듭했다. 적극적인 사교의 기술일 테지. 몸에 밴 겸양의 꽃으로 터져나온 홍소(哄笑)일 수도. 심원복 씨가 주는 귀촌·귀농 준비 Tip •최소한의 생활비(월 100만 원 정도)를 조달할 수 없는 재정 형편이라면 귀촌하지 않는 게 좋다. 비참해질 수 있으니까. •농사로 돈을 모으기는 정말 어렵다. 노동 강도도 세다. 섣불리 농토에 투자하지 말자. 일단 맨몸으로 들어와 빈집과 묵은 전답을 빌려 수련기를 갖는 게 좋다. •시골생활을 하다 보면 무료해진다. 변화가 없는 일상에 지칠 수 있다. 그럴 때 자연과의 교감이 필요하다. 산야에 관심을 가지다 보면 감성도 길러진다. 열렬한 취미 한두 가지를 가지고 내려온다면 한결 바람직하고.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 2019-05-07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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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박 육아’
- 얼마 전 TV를 보다가 낯설지만 그 의미만큼은 뚜렷하게 느껴지는 ‘독박 육아’라는 표현을 들었다. 출연자들은 ‘대한민국의 아기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힘든 직업 중의 하나라고 입을 모았다. 독박의 사전적 의미는 혼자서 모든 것을 뒤집어 쓰거나 감당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독박육아란 단어에는 억울함과 외로움이 담겨있을 터이다. 여자들이라고 해서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본능적으로 육아방법을 알게되는 것은 아니다. 처음 엄마의 길로 들어선 초보엄마들이 그 역할을 힘들어 하는 것은 당연하다. 예전에 비해서는 요즘 젊은 아빠들이 육아나 가사노동을 많이 분담한다. 그렇더라도 젊은 엄마들이 겪어야 하는 육체적인 피로, 갑작스런 고립, 박탈감 등은 견디기 힘든 고통일 것이다. 가정주부에게 많은 책임과 희생을 요구하는 우리의 오래된 관행은 여전한데 거기에 맞벌이까지 해야 하니 젊은 아내들에게 육아는 극한 직업일 수밖에 없다. 워킹 맘들 사이에서 친정엄마가 아이를 봐주면 금수저, 시어머니가 봐주면 은수저, 어린이집에 맡기면 흙수저라는 얘기가 유행어처럼 돈 적이 있다고 한다. 어느 누구라도 최소한 독박을 썼다는 억울함을 느껴서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다행히 사회적인 장치가 마련되어 해결된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지만 그렇지 못한 현실에서 부모 다음으로 가장 바람직한 양육자 1순위는 조부모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인지 요즘 문화센터나 지역 구청 강좌에서도 손주 양육에 관한 프로그램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예비 시어머니나 친정어머니들은 미리 미리 할머니의 소양을 길러두는 게 좋겠다.
- 2019-04-24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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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을 가르고 하루를 여는 버스 '6514'
- 아침 첫차를 타본 적이 있는가. 어둡고 텅 빈 길을 걸어서 파란 조명 켜진 정류장에 서면 무대 위에 배우가 등장하듯 하나둘 사람들이 모여든다. 시계를 보며 발을 구르다 보면 기다리던 첫 버스가 스르르 꿈결처럼 도착한다. 하루를 가장 빨리 여는 사람들이 버스 위에 오른다. 금세 사람들이 들어차고 냉기 가득한 버스 안은 사람 냄새 나는 온기로 따뜻해진다. 그리고 또 하루가 시작된다. 미세먼지 가득했던 3월 초, 새벽 3시 30분. 서울시의 양천공영차고지에는 초록색 지선버스와 파란색 간선버스가 새벽잠 자듯 빽빽하게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모두들 깊은 잠에 빠져 있을 시간이지만 남보다 빨리 하루를 여는 사람들이 속속 모인다. 이곳에는 4개 시내버스 회사뿐 아니라 마을버스 등 10여 개 버스 업체가 입주해 있거나 주차하고 있다. 이날도 도원교통 6514번 버스를 운전하는 황재현(63) 씨는 말끔하게 차려입고 출근했다. 6514번 버스 운전만 23년째. 정년을 마치고도 계약직으로 3년째 운전대를 잡고 있다. 퇴직 후에도 여전히 승객들을 맞이할 수 있어 매일이 감사하다고 했다. 회사에서는 황 기사의 건강을 생각해서 짧은 노선버스를 권했지만 오랜 시간 함께해온 6514번 버스가 익숙하고 또 친근하기 때문에 바꾸지 않았다. 황재현 기사는 아침 첫차를 운전할 때마다 인생에 대한 고민을 한다. “남들보다 일찍 깨어 출근하는 분들이잖아요. 주로 새벽에 나가서 건물 청소하시는 연세 많은 여성분들이 타십니다. 연세가 많으신데도 불구하고 현장에서 일하시는 분이 많아요. 한편으로는 그래도 일할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하시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모시는 것입니다.” 아침을 여는 버스 기사 황재현 버스 운전기사의 하루 일과는 음주측정 검사를 받으면서 시작된다. 그다음엔 현찰로 버스비를 내는 일부 시민들을 위해 돈 통을 챙겨 버스로 향한다. 타이어는 이상이 없는지, 엔진오일이나 냉각수가 새지는 않는지도 확인한다. 다시 차고지 건물로 들어와 닫혀 있는 회사 배차실 문을 열고 나면 생기는 잠깐의 휴식시간.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보온병에 물을 한가득 담은 뒤 버스에 오른다. 첫차 타고 일터로 향하는 이들을 맞이하기 위해서다. 그가 운전하는 6514번 버스는 도원교통이 운행하는 버스들 중 가장 긴 노선을 달린다. 양천공영차고지를 나와 양천구, 강서구, 영등포구, 동작구, 관악구 5개구를 지나는 여정. 첫차는 왕복 3시간 10분 정도, 출퇴근 시간에는 4시간 30분 가량 소요되는 구간이다. 노선이 길다 보니 각지에서 온 수많은 사람이 타고 내리기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하루 800명가량이 이 버스를 이용한다. 첫차 타고 출근하는 사람들 이야기 운전기사들이 순번제로 돌아가며 운행하기 때문에 매번 첫차를 모는 것은 아니지만 한 달에 네 번은 새벽 버스에 오른다. 20년 넘게 같은 노선버스를 운전하다 보니 얼굴이 눈에 익은 승객도 꽤 있다. 간혹 차고지에서 버스를 타는 승객도 있지만, 첫 손님은 차고지를 떠나 네 정거장 뒤인 푸른마을아파트 1단지에서 탄다. 첫차가 출발하고 7분 후다. 신한은행 신월동지점 정류장쯤 도착하면 버스 안은 어느새 승객들로 꽉 찬다. 환승하기 좋은 강서구청사거리나 까치산역, 당산역과 신길역 정류장에서는 타고 내리는 승객들로 붐비기까지 한다. 첫버스에서 만난 시니어 여성 4인4색 6514번 버스 안에서 시니어 여성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승객들은 매일 얼굴을 마주치기에 안면이 있지만 굳이 인사는 하지 않는다. 대충 어디서 내리고, 또 어떤 일터로 향하는지 짐작하는 정도다. 첫차를 타고 일터로 혹은 어딘가로 향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잠시나마 들어봤다. #1. 첫손님 아무데서나 내려요. 직장이 경복궁 쪽이라서 갈아타야 하거든요. 저요? 일해요. 그냥 아줌마들이 하는 청소 일이요. 아직 어둡기는 한데 집에서 정류장까지 금방 가요. 이 차에서 내려 다른 버스로 환승합니다. 경복궁에 도착하면 5시 10분이나 15분 정도 돼요. 매일 같은 차를 타니까 익숙한 얼굴이 많아요. 근데 서로 대화는 하지 않아요. 아침이니까 하루에 대한 계획도 하면서 조용히 가야죠. 저는 묵주기도하면서 가요. #2. 여자의 완성은 메이크업! 까치산역에서 탔어요. 나는 강서구청에 내려요. 여자는 화장을 꼭 해야 해요. 부스스한 얼굴은 예의가 아니지. 적어도 눈썹이랑 입술만이라도 그려야 하는 거 아냐? 새벽 2시가 아니라 1시에 일어난다고 해도 단장하고 나와야죠. 나는 자고 일어난 모습은 이불 속에서 부부만 봐야 한다고 배웠거든요. 매일 보는 사람들이니까 인사를 안 해도 마음속, 눈빛으로는 하죠. 그런데 이게 첫차인지 두 번째 차인지 잘 몰랐네. 나, 다음에 내려요. #3. 일하러 가면서 여행해요 부천 고강동에서 4시 17분에 출발했어요. 부천에서는 그 버스가 첫차예요. 예전에는 좀 늦게 다녔는데 이 차 타고 다닌 지 두 달 됐어요. 오늘은 좀 빨리 왔네. 선유도공원에서 탔는데 당산역에서 내릴 거예요. 첫차 타고 일하러 가지만 여행하는 기분으로 다니면 되는 거죠 뭐. 저같이 청소하는 여성들이 많이 타는 것 같아요. 저 머리숱 많아 보여요? 제 머리카락이에요. 내가 올해 72세인데 가발 쓰면 머리카락이 더 빠진다고 해서 두피 관리에 신경 좀 쓰고 있어요. #4. 새벽 산행 전문가 매일 관악산에 가요. 첫차를 타고. 그런데 오늘 좀 차가 늦었네. 10여 년 전에 갈증이 자주 일어나 병원에 갔더니 당뇨라더군요. 운동을 해야 한다고 해서 매일 가게 됐어요. 차가 안 막히면 관악산까지 50분이면 가요. 젊었을 때는 산악회 활동도 꽤 했는데 이제는 안 해요. 등산은 천천히 3시간 정도 해요. 습관이 되다 보니까 이제는 늦게 가는 게 싫어요. 저는 새벽 산행이 좋아요. 낮엔 너무 더워요. 가끔 도보여행도 하는데 산이 더 좋아요. 슬슬 다닙니다. 무릎이 안 좋거든요. 폭포 있는 데 가면 할머니들 많아요. 나랑 한번 가보실래요?(웃음) 기억에 남은 사람들 서울대 정류장에 거의 이를 때쯤 황재현 기사가 산에 오르는 승객이 매일 첫차를 타는 분이라고 말하니 마지막 손님이 “기사님이 어떻게 아시네” 하고 웃으며 내렸다. 취재를 마치면서 황재현 기사에게 첫차를 타는 승객 중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는지 물었다. 잠시 시간을 달라 했고 며칠 뒤 전화가 걸려왔다. “그러고 보니 그분 본 지가 오래됐네요….” 매번 버스에 오르면 운전석 뒤쪽에 앉아서 가던 80대 여성분이라고 했다. 등산복을 입고 첫차를 탈 때도 있고 낮에 탈 때도 있었는데 단골 승객이었다. “딸이 미국에 산다며 초콜릿도 주시고 뒤에 앉아서 저를 ‘동상’이라고 부르셨어요. 제가 어리다고요.(웃음) 운전석 안전 펜스가 없을 때 뵈었는데 안 보이신 지 한 몇 년 됐습니다. 돌아가신 모양입니다.” 서울대 정류장에서 회차해 차고지로 돌아가는 시간에는 젊은 사람들이 더 많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승객들의 세대와 성별도 달라지는 풍경이다. 새벽에 하루를 여는 시니어의 활기참 뒤에 차분하게 하루를 여는 젊은이들이 조화롭게 시간을 나누어 버스에 오른다. 아침 버스 안이 마치 인생의 희로애락을 담은 영화 장면들처럼 느껴졌다.
- 2019-04-08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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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었지만 해보고 싶어요"
- 동호회 모임에서 50대 후반의 여성 회원인 K가 한 말씀 올리겠다고 일어섰다. 자녀의 결혼 소식을 전하거나 축하받을 일이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모두가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했다. 고등학교 진학을 해보겠다는 것이었다. 평소의 말이나 행동으로 미루어볼 때 그녀의 최종 학력이 중졸이었다는 것에 우선 놀랐고 진학하려는 동기가 궁금했다. K는 가난한 농사꾼의 딸로 태어나 공부를 잘했다고 한다. 그런데 관내 중학교까지는 다닐 수 있었지만 외지로 나가야 하는 고등학교는 무리였다. 남존여비 사상이 강했던 아버지는 여자가 공부해서 뭐하느냐며 단칼에 잘랐다. 가정 형편상 오빠들의 공부 지원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K는 면 소재지 중학교를 수석 졸업하고도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그 뒤 결혼을 했고 시아버지가 운영하던 아파트 보수 업체를 남편과 함께 물려받았다. 도배, 난방시설 수리, 싱크대 교체 등 크고 작은 노동일을 했다. K는 두뇌가 명석한 데다 미적 감각까지 있어 물량 파악이나 재료 선정은 물론 독특한 디자인으로 고객의 주목을 받았다. 꼼꼼한 일의 마무리와 완벽한 하자보수 등 소비자 구미에 맞게 성실히 일을 잘해 입소문이 났고 일감이 몰려들면서 인근의 작은 건물까지 사들였다. 그다음에는 옷가게까지 인수해 돈을 제법 많이 벌었다. 그렇게 자식들을 외국 유학 보내고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했다. 건물에서 나오는 월세만 해도 꽤 큰 금액이어서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되어 사업을 접고 해외에 놀러 다니면서 골프도 친다. 그러나 그녀는 모두 이루었다고 생각했지만 고등학교를 다니지 못한 아쉬움이 늘 있었다. 그녀는 어려서 여고생의 모습이 너무 부러웠기에 야간 여고가 아닌 주간 여고에 꼭 입학하고 싶어 했다. 남편도 적극 지지해줬다. 하지만 과연 이 나이에 잘하는 행동인지, 머리도 녹이 슬어 수업을 잘 따라갈 수 있을지도 걱정되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에게 자문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는 자체도 대단한 용기였다. 많은 사람이 조언하길, “그 나이에 정규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교까지 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니 검정고시를 보고 방송통신대학에 진학하라”고 했다. 그러나 K가 원하는 것은 졸업장이 아니었다. 가슴속에서 한이 된 학교를 꼭 다녀보고 싶었다. 가난으로 결혼식을 못 올린 사람은 드레스를 입은 결혼식을 해보고 싶어 한다. 결혼식을 정식으로 올린 사람은 그 마음을 잘 모른다. 그 나이에 주책이라고 말하기 쉽다. K가 쉽게 또는 빨리 대학 졸업장을 손에 쥔다 해도 그 졸업장은 그녀에게는 큰 의미가 없다. 그녀는 17세 소녀로 돌아가 책상 앞에서 선생님이 이름을 부르면 “예” 하고 대답하고 싶은 거고, 빵집에서 친구들과 수다를 떨어보고 싶은 것이다. 나이 먹은 사람이 손녀 같은 아이들과 빵집에 앉아 수다를 떨어보고 싶은 마음이 철이 없는 것일까? 하고 싶으면 해야 한다. 나는 그녀에게 조언을 했다. 늦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가장 빠른 때라고. 수업을 못 따라간다고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다고. 빨리 대학을 마치고 졸업장을 흔들고 자랑해봐야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다고. K는 내 말에 용기를 얻었는지 도전해보겠다고 한다. 시작이 반이다. 이제 그녀에게는 나머지 반이 남았을 뿐이다.
- 2019-03-25 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