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남편 친구 자녀의 청첩장을 받고 우리 부부는 깜짝 놀랐다. 이제 부모님들의 나이가 거의 고희를 넘어서 자녀들의 결혼도 거의 끝나 가나 했는데 아직도 시키지 못한 자녀들이 많은가 보다. 요즘은 하도 결혼 연령이 늦어지니까 작은 결혼이라고 해서 부모님 친구들에겐 알리지도 않고 신랑 신부 친구들만 부르기도 한단다.
우리 젊었을 때는 맞벌이가 흔하지 않아서 남자는 물론 돈 벌이를 원칙으로 하지만 여자는 결혼을 하면 가정을 지키기 위해 당연히 사표를 던지던 시절이라, 여직원의 청첩장이 곧 사표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회사에서 혹시 어느 여직원의 결혼설이 있으면 그 자리를 누가 메꾸나 하는 것이 커다란 관심사였다.
그러나 당시의 외국인 회사는 예외였다. 결혼을 해도 여직원이 능력만 있다면 계속해서 직장에 다닐 수 있어서 그 때에도 외국 회사는 여성들에게 아주 인기가 많았다.
당시 한국에는 일본을 선두로 많은 외국 기업이 한국에 지사를 내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일본어를 비롯한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고급 여성 인력을 많이 필요로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여성들이 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해도 외국인과 실제로 대화해 본 적이 없는 한마디로 교과서 영어라 외국인 지점장들은 맘에 드는 비서를 구할 수가 없었다. 당시에는 ‘해외 여행 자유화’가 되기 전이라 외국 언어 연수는 커녕 지금은 흔해진 외국 여행 한 번 해 본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외국인은 학교 추천으로 비서를 구했는데 일을 시작해 보니 자기 말인 영어를 거의 못 알아 듣고 웃기만 해서 smile secretary 로 불렀다는 소리도 들었다.
당시엔 스마트 폰은 물론 컴퓨터도 없던 시절이라 외국인 비서의 중요한 업무는 보스의 영문 편지를 타자로 치는 일이었다. 우선 보스가 자필로 쓴 편지를 타자로 쳐서 깨끗하게 문서로 만들어야 하는데 보스들이 글씨들 흘려 쓰는 일이 많아서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얼마 지나면 그건 익숙해진다 하더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오타 하나 없이 편지를 타자로 친다는 건 매우 어려웠다. 치다가 틀리면 다시 치기를 몇 번을 하는 적이 당연히 많았다.. 지금은 워드로 모든 문서를 편집 하니까 편지의 일부를 오리든지 복사하고 고치고 붙여 넣기를 할 수 있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때는 하루 종일 타지를 치다 보면 어깨가 너무 아퍼서 진통제를 먹어야 할 지경이었다.
또 겨우 끝을 냈다고 하더라도 보스의 마음이 바뀌거나 상황이 바꾸면 수정을 못하니까, 처음부터 다시 타자를 쳐야 했다. 그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또 가끔 보스의 말을 잘 못 이해해서 실수를 하는 일도 많았다. 비서 초보자의 경우 보스가 two copy, please 했는데 two coffee 로 알아듣고 커피 두 잔을 가져가는 실제로 발생하곤 했다.
당시로서는 흔하지 않은 외국 생활을 잠깐이나마 하고 돌아온 필자는 그 때 원하는 대로 직장을 구할 수 있었다. 워낙 자리는 많고 영어 회화를 할 수 있는 여성 인력이 없어 대기업. 외국회사. 대사관 같은 곳 중에서 맘에 드는 조건을 골라서 직장을 구할 수 있었다.
요즘 젊은이들이 일자리가 없어 힘든 시간을 보내는 걸 보면 우리가 살았던 젊은 시절이 태평성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성긴 마대로 캔버스를 만들고 물감을 뒷면에서 앞으로 밀어내어, 마대 올 사이로 자연스럽게 흐르게 한 뒤, 앞면에서 최소한의 붓질만으로 작품을 완성한다. 사용하는 물감도 회색이나 검정, 청회색 등 단색으로 단조로우나, 보는 이들에게 고요한 명상에 잠기게 한다.
화가 하종현(河鍾賢, 1935~)은 1960년대 우리나라 앵포르멜(informal, 비정형) 추상화에서 출발해 1974년부터 2009년까지 연작을 그렸고 2010년부터는 연작을 그리며 독창적인 창작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홍익대학교 미대를 졸업한 후, 모교 회화과 교수로 40여 년간 재직했으며 2001~2006년 서울시립미술관 관장으로 있을 때는 미술 행정가로서 많은 공적을 남겼다.
1969년 ‘한국 화단에 새로운 조형 질서를 모색 창조하자’는 모토 아래 전위미술가 단체인 ‘한국아방가르드협회’(1974년 해체)를 결성한 이후 지속적으로 진보적이고 실험적인 작품세계를 펼쳐왔다. 35년간 꾸준히 작업해온 연작은 ‘전혀 의도되지 않은 우연한 순간의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물감을 성긴 마대 뒤에서 밀어냄으로써 하나의 물질이 자연스럽게 다른 물질의 틈 사이로 흘러나갈 때, 그리고 흘러나간 물질들의 언저리를 느긋이 눌러놓았을 때, 가능한 한 물질 자체가 물질 그 자체인 상태에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전부를 말해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캔버스 앞면에 물감을 바르고 칠하는 것이 회화라는 관념을 깨고 대항이라도 하듯, 기존의 관념을 뒤집는 반란(?)을 보여준 것이다.
물론 회화의 틀과 양상의 변화는 세계적인 흐름과 궤를 같이하는 게 문화의 보편적 추세다. 그러나 회화에 입문한 뒤 8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비정형의 추상화를 견지하는 것은 작가의 깊은 철학이 없고서는 안 될 일이다. 우리나라 현대 서양화의 선도자인 작가가 ‘비인기의, 그림이 잘 팔리지 않는 화가’라는 세간의 입방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작품 속에 절제된 고요함과 자연스러움을 녹여낸 당당함이야말로 미술인들에게 존경을 받는 소이라고 생각한다.
4~5년 전부터 세계미술 시장에 모노크롬(mono chrome, 단색화)의 바람이 거세게 밀려오고 있다. 난해하고 현란하던 기존의 구상이나 추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감상자, 즉 소비자의 욕구가 반영되고 있다는 증좌일 것이다. 하종현 작가의 연작은 캔버스 뒷면에서 밀어낸 물감을 나이프나 손을 이용해 최소한의 흔적만을 남겼는데 마치 담벼락에 진흙을 바르던 소박함이 연상되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이 그림 은 10여 년 전에 인사동 화랑에서 4개월 할부로 구입한 작품이다. 큰 작품은 부담이 되어 이 소품을 수집했다. 조금 무리해서라도 30~40호의 대작을 구입했다면 4~5배의 수익을 가져다줬을 것이다. 그만큼 그림에 대한 투자는 어렵다. 그의 작품을 서재에 놓고 수시로 눈 맞추며 명상에 잠기곤 한다. 청회색 물감의 흘러내림도 유연하고, 붓으로 가다듬은 질박한 모양이 상형문자와도 같아서, 단조로움 속 정중동(靜中動)의 리듬이 활력을 주곤 한다.
“전혀 무관한 일상의 사물들을 모아본다. 현재와 과거를 결합시켰다. 낯설다. 동양과 서양의 이질적인 정서가 교차하면서 현실도 이상도 아닌 낯선 세계에서 현실의 주위를 맴돌고 있다.”
화가 한만영(韓萬榮, 1946~)이 자신의 작품세계에 대한 고백의 일단이다. 1970년대 말에는 정밀묘사 기법의 연작이 대표작이고, 1980년대 초에는 포스터나 인쇄물을 이용한 작품을 제작했다. 1984년부터는 옛 거장들의 작품을 차용해 일상의 오브제(objet, 물체·객체)와 복합적으로 재구성하는 연작을 발표하고 있다. 홍익대학교 미대를 졸업한 후 성신여자대학교에서 후학을 지도하다 정년퇴임 후 현재까지 어떤 무리에도 참여하지 않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을 창조하고 있다.
그가 선택하는 오브제는 불상, 막대자, 도로표지판, 깃털, 핀, 새, 석고상, 병마도용, 토우, 악기 등 무척 다양하다. 이런 다양한 오브제에 앵그르(Dominique Ingres, 1780~1867), 고갱(Paul Gauguin, 1848~1903),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 ~1973), 정선(鄭歚, 1676~1759) 등 “동서양의 거장 화가들의 낯익은 작품의 이미지를 차용해 시간의 부딪침과 공간의 겹침을 시각화한 것이 한만영의 작품이다”라고 평론가는 말한다.
는 2009년 봄 인사동 ‘노화랑’에서 전시회 오픈 날에 200만원을 주고 구입한 작품이다. 화랑의 문턱을 낮추되 역량 있는 작가들의 밀도 높은 작품을 소개한 야심찬 기획전시는 1999년과 2000년에열렸다가 몇 해 쉬고 2006년부터 2017년까지 이어왔으나, 작품가의 상승 등 여러 요인으로 올해로 그친다는 서운한 소식이다. 해마다 5월이 되면 돈을 마련해 작품을 고르고, 아내와 밤늦도록 감상하던 작품이 어언 10여 점에 이르니, 5월의 향기로운 추억이 되었다.
그해 한만영 작가는 바이올린과 첼로를 핵심 오브제로 삼은 작품 10점을 내놓았는데, 나는 주저 없이 이 첼로 오브제의 작품을 선택했다. 첼로를 완벽한 비례로 축소한 오브제에는 중세 서양화가들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여러 이미지가 그려져 있다. 이 작품 속 첼로를 꺼내어 연주하면 그림의 주인공들이 튀어나올 것만 같다.
그림을 거실에 놓고,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714~1788)의 무반주 첼로 조곡 중에서도 내가 제일 즐기는 제5번 G장조의 선율을 이탈리아 첼리스트 ‘마이나르디(Enrico Mainardi, 1890~1976)’의 느린 연주로 듣는다. 중세 프랑스나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느릿한 춤곡이 바흐를 통해 되살아나고, 이미 40년 전에 작고한 마이나르디 연주가 음반을 통해 부활한다. 그리고 이렇듯 흘러간 시간을 휘어서 맞대어 붙이면, 역사의 뒤안길을 순례하는 기꺼운 상상에 잠기게 된다.
이재준(李載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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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경기 화성에 태어났고 아호 송유재(松由齋)로 미술품 수집가로 활동중이다. 중학교 3학년 ,을 읽고, 붉은 노을에 젖은 바닷가에서 스케치와 깊은 사색으로 화가의 꿈을 키웠다. 1990년부터 개인 미술관을 세울 꿈으로 미술품 천여 점을 수집해왔다.
‘내 청춘아 어디로 갔니, 소리 없이 흘러가는 세월이건만, 그것이 인생이더라.’ 오승근(吳承根·66)의 새 앨범 수록곡 ‘청춘아 어디갔니’의 가사다. 노래 속 그는 청춘을 찾고 있지만, 현실 속 그는 “내 청춘은 바로 지금”이라 말한다. 노래하는 지금이 청춘이고, 노래를 불러야 건강해지고, 세상을 떠난 뒤에도 노래와 함께 남고 싶다는 천생 가수 오승근. 사진을 찍을 때 “주름은 지우지 마라”며 뭐든 자연스러운 게 좋다는 그의 미소에는 특유의 편안함이 배어 있었다. 아내(故 김자옥)가 떠난 뒤, 이제는 살림도 제법 하면서 싱글라이프를 톡톡히 즐기고 있다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지금껏 나온 앨범 표지 중에 표정과 의상이 가장 밝아요. 밝기도 하고 젊기도 하죠. 한동안 ‘내 나이가 어때서’를 많이 불렀잖아요. 이후에 다른 곡들도 발표했는데 사람들에게 어필이 안 됐어요. 그 노래의 인상이 너무 강하다 보니까. 이번에는 ‘내 나이가 어때서’를 뛰어넘는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표지 촬영한 것 중에 중후한 멋의 사진들도 있었는데 사진작가나 기획사에서는 젊게 나가는 게 좋겠다 하더라고요. 그래서 얼굴에 포토샵도 하고(웃음). 나야 그런 거 안 하는 게 자연스럽고 좋긴 하죠.
타이틀곡으로 ‘맞다 맞다 니 말이 맞다’를 고른 이유가 있나요? 전체적인 흐름이 좋았어요. 리드미컬하고, 따라 부르기 쉽고. 나이 들고부터 곡 고르는 기준이 달라졌어요. 예전에는 남이 어떻든 간에 나를 나타내려고 가수를 위한, 내가 좋아하는 노래만 했거든요. 요즘은 반대로 “이 노래는 내 노래가 아니라 여러분을 위한 노래”라고 하고 불러요. 내가 좋아하는 노래보다는 대중과 함께할 수 있는 노래를 부르려고요. 예전에 ‘투에이스’, ‘금과은’ 시절에 불렀던 노래는 듣기는 좋아도 따라 부르긴 어려웠어요. 그래도 여전히 찾는 팬들이 있어 자주 불러드리곤 하죠.
‘떠나는 님아’, ‘빗속을 둘이서’ 등 청춘 시절 노래를 부르면 어떤 감정이 드나요? 이전과 많이 다를 것 같은데요. 노래는 말이죠, 젊었을 때와 나이 들어서의 감정이 똑같아요. 오히려 노래를 부르면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나죠. 다만, 나이가 들어서 까랑까랑하던 높은음이 안 나오는데, 그럼 키를 낮추면 되니까. 동년배는 지금 목소리를 더 좋아하기도 해요. 청춘이라는 것도 꼭 20대만을 뜻하는 건 아니에요. 40대가 된 사람이 30대를 그리워하는 것도 청춘이고, 60대가 50대 떠올리는 것도 다 청춘 아니겠어요? 노래는 그런 감정의 매개체 역할을 하는 거죠.
타이틀곡 ‘맞다 맞다 니 말이 맞다’에서 ‘사랑해서 미안합니다’라는 가사는 어쩐지 애잔하더라고요. 아내를 향한 감정이 담긴 것이 아닐까 궁금했어요. 그런 건 아닌데,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나도 조심스럽게 부르긴 해요. 그만큼 사람들이 공감하는 가사이기 때문이죠. 사랑하는데 왜 미안해? 물어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미안할 수도 있거든요. 연인이나 부부, 자식 관계도 그렇고 모든 게 사랑한다는 이유로 서운하기도 하고, 상처도 주고 하니까요.
아내를 위한 추모곡 계획은 없나요? 안 하려고 해요. 추모는 그 사람을 계속 기억한다는 건데, 그러면 괴로움도 계속되는 거예요. 그 마음 아픈 게 얼마간은 있을 수 있지만 10년 20년 그렇게까지 가는 건 바람직하지 않죠. 노래로 만들어놓으면 계속 남잖아요. 그건 남들에게 자꾸 ‘가지고 있어라’ 강요하는 거밖에 안 돼요. 그 사람도 좋은 곳에 갔을 거고, 우리 애들하고 나하고 기도하고 그러니까. 다들 그런 그리움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주면 좋겠어요.
아내의 부재가 마음이 쓰여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라는 말을 나중에 물어보고 싶었어요. “어떻게 지내세요?” 똑같아요. 조금 달라진 거는 일하고 집에 갔을 때 같이 있었는데 이젠 혼자 있다는 것. 그 차이일 뿐이죠. 한동안은 같이 있다고 생각했었어요. 잠시 여행 갔다고 말이죠. 전에 같이 있을 때도 몇 개월씩 여행을 다녀오곤 했으니까. 어디 갔구나, 곧 오겠지, 근데 어떻게 하지? 혼자 밥해야 하네? 그렇게 조금씩 실감했어요. 애절하게 ‘나 외로워’ 이건 아니고. 물론 그럴 때도 있지만 매일 그러지 않죠. 그러면 남은 사람이 힘들어져요.
살림 솜씨가 늘었겠어요. 요리도 잘하세요? 잘하죠. 나 설거지도 잘하고 반찬도 잘하고 청소도 잘해요. 처음에는 (장가간) 아들하고 같이 살려고 했어요. 근데 아이들도 나도 편하게 살려면 분가하는 게 좋겠더라고요. 아내랑 함께 살던 집에서는 내가 못 지낼 것 같은 거예요. 거실이며 부엌이며 그 동네 어귀에도 아내와의 추억이 남아 있는데…. 거기 사는 건 내가 너무 괴롭다. 아빠가 나갈게. 그러고는 아내랑(봉안당) 가까운 판교에서 혼자 살게 됐어요.
그야말로 싱글라이프네요. 일상에서의 즐거움은 뭔가요? 내가 참 감사한 게 주변 친구들을 보면 다 실업자들이에요. 직장인들은 정년퇴직하고, 사업가들은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근데 나는 정년 없지, 새 노래도 만들 수 있지. 자기 관리만 잘하면 100세까지도 할 수 있는 거니까. 또 애들 엄마 하늘에 가면서 일찌감치 상속 정리를 했어요. 그러니 내가 벌어서 나만 쓰면 되고, 쓰고 남으면 좋은 데 봉사하고, 눈치 보지 않고 쓰고 싶은 데 쓰고 먹고 싶은 거 먹고 그러지. 그 자체가 즐거움이죠.
자기 관리 비법이 따로 있나요? 노래를 하면 젊어져요. 엊그제도 몸이 안 좋았거든요. 그러다 무대에서 섰는데 원래 부르기로 한 세 곡을 다하고 앙코르를 해서 총 다섯 곡을 불렀어요. 노래하면서 에너지를 채운 것 같아요. 노래가 약인 거죠. 지방 갈 때 아침엔 컨디션이 안 좋다가도 다녀오면 좋아져요. 매니저한테 나 오래 살길 바라면 일 많이 잡아줘야 한다고 해요(웃음). 약이 되는 피곤함이랄까?
일 외에 취미생활은요? 여행은 안 다니세요? 운동 삼아 골프도 치고, 여행도 가끔 가요. 사람을 골라서 만나지는 않지만, 여행 파트너는 마음이 맞아야 하거든요. 함께 다니던 가장 친한 친구가 작년에 세상을 떠났어요. 50년 지기인 데다가 마음도 참 잘 맞았는데… 그러는 바람에 이제 누구랑 여행을 가야 하나 싶어요.
요즘은 혼자 여행 다니는 사람도 많잖아요. 혼자가 좋다고들 하는데, 그건 정말 혼자가 되어보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나도 자다가 어떻게 될까 싶어 무섭고 외로워요. 여행은 좋은 사람과 함께 가는 게 최고죠. 어떻게 보면 지금이 얽매일 것 없어 여행 가기 좋은 때이기도 해요. 얽매이는 건 가정인데, 아이들도 다 커서 자유로워요. 근데 오히려 편하니까 나태해지더라고요. 이게 아니다 싶으면 스스로 채찍질도 하죠. 온전한 자유 안에서의 불안이 있잖아요. 고삐가 없는 것처럼.
자유로운 지금, ‘내 나이가 어때서’ 노래처럼 도전하고 싶은 일은 없나요? 나는 내 나이를 몰라요. 생각 안 해요.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하고, 가고 싶은 데 있으면 가고. 친구들에게 그래요. 너희들 돈 쓸 날도 얼마 안 남았어! 좋은 것도 한때이지 쓸 수 있을 때 쓰고, 재미있게 즐겨야죠. 지금처럼 자유롭게 지냈으면 하는 게 바람이에요. 오히려 도전, 목표 이런 걸 정해놓으면 거기에 구애받으니…. 자연스러운 게 좋아요.
‘자연스러운 것’을 선호하는 편이네요. 원래 성격이 그랬나요? 아뇨. 예전에는 그렇게 했어도 구애를 받게 되죠. 옆에 사람(아내)이 있으니까. 신혼 때는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지내왔는데, 살다 보니까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맞추는 게 좋더라고요. 아내가 좋아하는 쪽으로 계속 바뀌었죠. 근데 이제 상황이 달라졌잖아요. 요즘 나를 말하자면 자유분방 그 자체?
여전히 아내 얘기를 자꾸 하게 되는데, 솔직히 불편하지는 않나요? 할 수밖에 없죠 뭐. 크게 불편하지는 않아요. 근데 너무 길게 이야기하지는 말자 그래요. 그럼 또 생각나니까… 내가 힘들어져요. 그냥 이렇게 이야기하다가 물 흐르듯 지나가면서 하는 정도가 괜찮아요.
아내 김자옥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우리는 만나고 6개월 만에 결혼해서 서로를 다 알지는 못했어요. 살면서 느끼고, 알아갔죠. 다음 생에서도 그 사람과 함께할 수만 있다면, 다시 결혼하고 싶은 그런 여자예요. 근데 나뿐만 아니라 참 많은 사람이 사랑했잖아요. 아내가 떠날 때도 사람들이 정말 많이 왔어요. 이 사람 참 잘 살았구나 생각했죠. 내가 죽을 때도 그럴까 싶어요.
대중에게 오승근은 어떻게 기억되길 바라나요?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내 노래가 흘러나왔을 때, 아 이 사람! 그렇게 노래와 가수가 함께 떠오르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내가 세상에 없더라도 노래와 함께 회자되고 남아 있다면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이에요. 노래 자체가 나의 정체성이고, 나의 정체성이 노래로 표현될 수 있는, 그런 게 대중에게 공유될 수 있다면 좋겠어요.
심기석 세일ENS 사장은 별명 ‘ 다이소 누님’과 ‘건달’로 유명하다. 2007년 최고경영자로 승진, 현재 장수경영자로 10년째 성가와 성과를 함께 올리고 있다. 인터뷰 당일, 그녀는 살구색 재킷에 인어 스타일의 샤방샤방한 스커트 차림으로 나타났다.
심기석 세일ENS 사장(63)의 별명은 ‘다이소 누님’이다. 등산을 갈 때면 자신의 155cm의 가냘픈 체구보다도 더 큰 집채만 한 배낭을 지고 나타난다. 가파른 산을 올라가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짐을 넘기는 법이 없다. 1착으로 올라가 산마루에서 자리 펴놓고 일행들에게 바리바리 싸온 것을 풀어 먹인다. 짧은 일정의 여행에도 그는 거의 이민 갈 태세의 큰 가방을 밀며 나타나기 일쑤다. 그 커다란 산타자루 아니 트렁크에선 구호품(?)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다. 과일, 홍삼액, 심지어는 플라스틱 소주 컵, 야외 주방도구 일습에서 이쑤시개까지…. 사랑을 퍼주고 나눠주는 선샤인, 아니 문샤인 리더십 덕분에 그의 주변에는 남녀노소가 늘 끊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심 사장이 전통적 의미의 퍼주고 헌신하는 100% 모성형 리더만은 아니다. 그녀의 또 다른 별명은 ‘건달’이다. 바로 건배사의 달인이란 뜻이다. 술자리에선 능숙하게 소맥을 제조하고, 멋진 모습으로 술을 따르는 퍼포먼스를 연출한다. 씩씩한 건배사로 분위기를 선도하는 그녀는 일자리에선 쓴소리를 피해가지 않으며 군기를 세게 잡는다.
심 사장에 대한 조직 내외의 공통된 평가의 핵심은 양수겸장 리더십이다. 호탕한 형님과 따뜻한 누님의 장점을 다 갖고 있다는 것이다. 남자 같지는 않지만 남자처럼 일하고, 여성성을 내세우진 않지만 여성성을 최대한 살린다는 평이다. 심 사장의 양극단 별명 조합처럼 건달 누님 리더십이다. 남성도, 여성도 아닌 어중간한 중성의 평균 타협이 아니다. 상황별로 각각의 장점을 살려 평형을 맞추는 게 심 사장 리더십의 특성이다. 아낌없이 베풀며 모범을 보이되, 돌직구 직언도 아끼지 않는 ‘어른의 품격’을 보여준다. 지인들은 심 사장을 가리켜 요즘 시대에 흔치 않는 ‘어른의 롤모델’이라고 입을 모은다.
‘건달 누님 리더십’은 그녀가 전문건설 설비업계 세일ENS에서 뼈가 굵어 최고경영자에 올랐다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건설업은 일반적으로 남성 주도의 업종으로 알려져 있다. 전문 공조업이란 ‘여름엔 얼마나 시원한가, 겨울엔 얼마나 따뜻한가와 관련한 냉난방 배관설비를 건축물 내에 시공하는 사업’을 뜻한다. 거대한 건물 속의 모세혈관을 유지하는 일로서 세심한 손길과 관리가 필요하다.
초창기(1970년대 초반)에 책상 두 개와 직원 세 명밖에 없었던 작은 규모의 회사는 이제 직원 100여 명, 일용근로자 2300명 내외의 튼실한 전문건설 설비업계의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재수하던 중 전화나 받는 자리로 잠깐 취직한 회사에서 ‘불독 신세’로 사무실만 지킨다며 찔찔 울던 10대 소녀는 그 사이 60대 초반의 통 크고 손 큰 ‘건달 누님’이 됐다.
원래부터 성격이 담대하고 씩씩했나요?
“아니에요. 환경 탓이 큽니다(하하). 살아남기 위해 변화한 겁니다. 건설업계가 남성 주도 업종이다 보니 여자 관리자는 고사하고 직원조차 드물었습니다. 어느 자리이고 참석하면, 홍일점이란 이유만으로 눈에 띄는 겁니다. 회사 안에서나 밖에서나 직급과 상관없이 ‘한 말씀’을 요청받는 경우가 많았어요. 하다못해 자기소개 인사말이라도 하라고요. 이때 ‘준비 안 해 못 한다’고 하거나 ‘시킬 줄 몰랐다’고 수줍은 척 뒤로 빼면 ‘능력 부족’으로 못나 보이잖아요. 이왕 할 거면 제대로 하자, 기억에 남도록 하자는 생각에 늘 공들여 준비했어요. 저는 여자 후배들 교육시킬 때도 ‘건배사 제대로 하는 법’부터 가르칩니다. 차례가 돌아오기보다 자원하라고 말해줍니다. 또 두루 쓸 수 있는 범용 건배사와 자신만의 특성을 살린 필살기 건배사 두 가지를 준비해두라고 강조하지요. 각자 맡은 분야에서 실력은 노력하면 되지만 네트워킹, 사회적응 훈련은 산전수전, 공중전을 겪은 선배로부터 배우는 게 효과적이니까요.”
입에 척척, 귀에 쏙쏙 감기는 건배사가 허투루 즉흥적으로 튀어나온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심 사장은 책, 신문을 읽다가도 응용할 것이 있으면 메모하고, 변형하고, 외우고 연습한다. 사자성어로 신조어 건배사를 만들기도 한다. 최근의 히트 건배사는 인사불성(인간을 사랑하라는 말은 불경에도 나와 있고 성경에도 나와 있다), 적반하장(적당한 반주는 하느님도 장려하신다) 등이다. 술을 따르더라도 진기명기의 방법을 개발해 한편의 그럴듯한 퍼포먼스로 승화시킨다. 지방출장을 가든, 해외여행을 가든 사람들의 사는 모습, 먹는 모습, 마시는 모습은 관찰의 대상이고, 그것은 여러 가지 퍼포먼스와 아이디어에 스파크를 일으킨다. 관찰과 사고, 연습의 조합에서 의미와 재미와 흥미의 창조적 아이디어가 탄생한다.
고교 졸업하고 1973년에 취직해 44년간 한 직장에서 근무했습니다. 사원에서 사장까지 오른 성공 비결은 뭐라고 생각하나요?
“내 일처럼 생각한 것입니다. 비결이라고 말할 것도 없이 평범하지만 진실입니다. ‘시간이든 돈이든 비용을 덜 들이고, 더 효과적으로, 더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궁리하는 게 재미있었어요. 사원, 정확하게는 전화 받는 사환으로 온갖 궂은일을 할 땐데요. 세금계산서가 들어 있는 편지봉투를 그대로 버리는 게 아까운 거예요. 글자가 쓰인 부분만 자르고 봉투 뒷면을 사무실 내에서 메모지로 썼지요. 내 것이란 생각으로…. 구매 일을 할 땐 견적을 뽑아보고 어떻게 협상해야 보다 좋은 제품을 싸게 살 것인가를 고민했어요. 예전보다, 항상, 남보다 최고 2% 싸게 사는 작전과 목표를 세워 실천했습니다.”
구매 일을 하면서 사람 보는 법도 부가적으로 배웠다고 말한다. ‘저 사람은 곧 그만두게 될 사람, 독립할 사람, 독립해서 공장까지 지을 사람’ 등 나름대로 사람 보는 눈이 생기더라는 것. 10명 중 7명은 심 사장의 예상대로 운이 풀렸다. 족집게 적중률의 근거는 바로 주인의식이란다. ‘내 일처럼’ 진실, 성실, 창조적으로 하는 사람이 독립해서 사업도 잘하더라는 게 나름의 경험상 얻은 결론이다.
회사와 함께 개인적으로도 성장하셨는데요. 회사가 급성장하면 창업공신의 성장속도가 그에 미치지 못해 도태되는 경우도 있더군요.
“중간관리자 시절, 선행학습을 충분히 한 게 도움이 됐습니다. 중간관리자는 말하자면 조직의 관절이에요. 윗사람, 아랫사람을 가까이서 관찰하고 학습하게 되지요. 그러면서 각 입장을 고루 관찰하고 이해하고, 내가 해야 할 일을 선행학습할 수 있었습니다. 또 마흔 넘어 영업을 하며 고객의 외부적 시각, 내부의 시각을 다 고려해보게 되더군요. 결국은 단계별로 자기의 그릇을 키울 수 있느냐가 관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릇이 작으면 상을 차려줘도 밥을 못 챙겨먹습니다. 그릇을 키우는 게 먼저입니다.”
먼저 베풀고, 내 일처럼 하는 회사일, 좋은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신세대들은 헌신하다 소진하고 탈진돼 헌신짝된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일을 통해 기쁨을 얻는 것 그 자체가 아닐까요. 남의 보상이나 인정을 갈구할수록 실망할 일이 많아집니다. 오히려 남에게 의존적이 되고요. 내가 열심히 하고, 배우는 것을 우선순위로 놓으면 활용당하거나 보상이 적다고 실망하는 일이 적어집니다. 결국은 자기 실력으로 쌓이는 것이거든요. 자신의 시간에, 삶에 충실하지 않고 대충 일하는 것이야말로 책임, 인생 유기이니까요. 성실히 일하면 단기적으로 손해 같지만, 장기적으론 투자입니다. 비유하면 농사와도 같습니다. 씨앗을 많이 뿌린다고 해서 모두 싹이 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씨앗을 많이 뿌리지 않으면 싹이 날 확률이 줄어듭니다. 일단 노력과 열정을 기울이는 것이 먼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런 고민을 털어놓는 젊은이를 만나면 ‘잘나가는 것만 부러워하지 말고 어렵고 힘든 부서에 가서 몇 년만 버텨보라’고 말합니다. 나만의 노하우를 쌓을 수 있는 시간을 가지면, 다른 회사, 다른 부서, 어디에서든 잘할 수 있거든요.”
쓴소리 잘해서 ‘비즈니스계의 윤여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흔히들 ‘밥은 사고 말은 참는 것’이 어른의 의무라고들 하는데요.
“사람들이 싫어한다고 해서 올바른 소리를 피하는 것은 진정한 어른이 아니지요. 그저 뒤에서 혀만 쯧쯧 차기보다는 뭇매를 맞더라도 옳은 말을 해주는 게 어른의 역할입니다. 당장은 듣기 싫더라도 행동에 도움이 된다면 해야지요. 열 명에게 얘기해서 한 명이라도 받아들여 변화되고, 사회를 밝게 한다면 해줘야 한다고 봅니다. 제가 나서서 쓴소리를 하는 이유입니다.”
‘사원에서 사장까지’ 성공신화 뒤에 숨은 콤플렉스는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왜 없었겠습니까. 지금이야 예순을 넘었으니까 조금 자유로워지긴 했지요. 한창때엔 고루고루 콤플렉스투성이였습니다. 보다시피 제가 인물이 좋습니까, 키가 큽니까, 가방끈이 깁니까. 지금 이 나이니까 어느 정도 풍화됐지만 그때는 정말 고민이 많았어요. 영업을 할 때는 ‘내가 팔등신 미모에 좋은 학벌, 돈 많은 사람’이라면 얼마나 큰 도움이 됐을까 많이 아쉬웠지요. 또 내가 처음에는 술을 잘 못했거든요. ‘소주 두 병만 마실 수 있으면 업계 판도를 바꿨을 텐데’ 등등 별의별 생각을 다 했어요(웃음). 돌이켜보니 콤플렉스, 결핍이 오히려 다행이었어요. 부족하고 모자라서 더 노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모님께서 수수하게 낳아주신 것에 감사하고요. 실력과 학력이 부족한 걸 알기에 더 노력했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건배사 개발도 술을 많이 못 먹어 술자리나 재미있게 만들자는 궁여지책에서 시작됐다. 그가 국내든, 국외든 자주 들르는 곳이 있는데 바로 전통시장이다. 이곳에서 컵 홀더 등 특이하고 스토리가 있는 소품들을 사와 지인, 고객들에게 마음을 담아 선물한다. 골프를 치고 오면 같이 간 일행들의 골프 폼과 대화 등 후일담을 메일로 전하기도 한다. 심 사장에겐 마음을 나누고,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는 기쁨의 선순환이 사업가로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의미요, 재미다.
이야기가 인맥 쪽으로 좀 흐른 것 같습니다. 모든 관계에서 개척 못지않게 중요한 게 유지관리 아닙니까.
“맞습니다. 잘나갈 때는 누구나 잘해줄 수 있습니다. 위기 때의 태도가 신뢰의 증표입니다. 진정한 신뢰는 못나갈 때도 한결같이 잘해주는 것입니다. 직원들에게 늘 말하는 게 있습니다. ‘우리 세일은 이익이 날 때뿐 아니라 밑지더라도 잘하자!’ 도장을 찍었으면 이유 불문 책임을 지고 약속을 반드시 지키고자 합니다. 돈을 잃을망정 사람까지는 잃지 말자는 것입니다. 품질이든, 원가든 당초 약속을 반드시 지키자는 것이지요. 평판은 얻기는 힘들지만 잃기는 쉬운 법이거든요. 우선 나부터 충실하고 튼실해져야 합니다. 내가 급급해하면 남을 챙기고 지켜줄 여유를 갖기 힘듭니다. 개인이나 회사나 다 똑같습니다.”
심 사장은 밑질 때의 마음 다스리기 법을 들려주었다. 가령 5억이 남을 줄 알았는데 5억이 밑지면 일반적인 셈법으로 ‘10억을 손해봤다’며 억울해한다. 그는 신용을 지켰으니 3억만 밑진 것으로 나름의 가감승제법을 적용한단다. 당장의 손해가 앞으로 어떤 이익을 가져올지 모른다고 ‘투자’라 생각하며 위로를 한다는 내공 어린 고백이다.
경영자 등산모임 ‘시애라’의 회장도 맡고 계시지요. 최근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봉 트레킹을 열흘간 다녀오시기도 했는데요.
“여행은 가슴 떨릴 때 가야지, 다리 떨릴 때 가면 안 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산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더 나이 들기 전에 도전해보고 싶었어요. 육체적 자신감은 물론이고 심리적 에너지를 많이 얻었습니다. 웅장한 자연도 좋았지만 그보다 의미 있는 것은 절대고독의 시간이었습니다. 몸을 뒤척이기조차 힘든 옹색한 싱글 방에서 휑뎅그렁하게 있으며 나를 만나는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 일에 대한 욕심까지도 포함해서 세속의 먼지를 떨어내고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성공한 경영자들이 의외로 가정 경영은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더군요. 여성 경영자로서 애환이 더 많았을 것 같은데요.
“‘아침밥은 얻어먹고 다니십니까?’가 내조 점수 체크 질문이지요. 저는 남편이 아침밥을 차려준답니다. 행복하고도 감사한 일이지요. 저는 계란 프라이가 있어야 아침을 먹는데요. 한번은 출장을 갔는데 지인에게 그 사실을 알려줬어요. 밖에서도 계란프라이를 먹도록 챙겨줄 정도예요(하하). 어차피 집안일, 회사일을 다 잘하긴 힘들어요. 솔직히 말해 사장 되고선 주방 들어갈 시간이 없었습니다. 차라리 잘하는 일을 선택해, 집중하는 게 효과적이에요. ‘집에선 당신 부인이지만, 밖에선 남의 부인으로 생각하라’고 말할 정도로 전투적으로 산 게 우리 시대, 여성 리더의 생존전략이었어요. 기본적으로 서로 소통하고 이해를 구하고 신뢰를 쌓는 것, 그것 이상의 방법은 없다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은퇴 계획을 묻고 싶습니다.
“‘박수칠 때 떠나자’는 게 제 신조입니다. 외부 평가보다 내부 평가가 더 좋은 리더로 기억되고 싶고요. 우선 3년 후에 있을 회사 50주년 행사 준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은퇴 후에는 제 장점을 살려 나만의 재미나는 놀이터를 만들고 싶어요. 가깝고 편한 사람들끼리의 작은 공간, 행복살롱을 만들고 싶습니다.”
3시간여 격정적인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서는데 심기석 사장이 필자의 명함을 다시 꺼내들었다. 건달 누님 리더십의 직설본능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긴장하는 순간 아니나 다를까, 조언이 쏟아졌다.
“명함의 글자가 너무 작아요. 글자 배치도 조금 앞으로 와야겠군요.”
어른이 내리치는 죽비소리는 아프기보다는 시원한 법이다. 요즘 신세대들이 기성세대를 꼰대라고 탓하는 것은 ‘발언 내용’의 문제가 아니라 ‘발언 자격’의 문제가 아닐까. 어른의 품격은 바른 소리가 아니라 바른 소리를 할 수 있는 자격에서 우러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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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영화 에서 실비아 크리스텔처럼 순진했던 여인도 서서히 본능에 눈을 뜨게 된다. 급기야 남편과 서로 각자의 다른 사랑을 인정하고 즐기는 수준까지 도달한다. 이 점을 파고들어 졸혼을 했다면 또 다른 사랑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도발적인 질문을 해봤다. 개그우먼 박미선은 “푸하하!” 하고 웃었다.
보통 여자 연예인들은 포털사이트 프로필에서 나이를 알 수 없다. 밝히길 꺼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미선은 버젓이 1967년 3월 10일이라고 생년월일을 모조리 밝히고 있다. 그만큼 꾸밈이 없고 솔직한 사람이다. 그래서일까? 다른 어떤 게스트와 인터뷰할 때보다 훨씬 설레었다. 솔직하게 막 털어놓을 것 같은 기대감 때문이었다. 박미선과는 2014년 TV조선의 라는 프로그램에서 6개월 정도 같이 방송한 경험이 있다. 그때 메인 MC가 박미선이었고 이봉규는 여우팀을 공격하기 위한 늑대팀의 최전방 공격수였다. 제작진의 이 같은 의도와는 달리 보통 여우들이 아닌 구미호들(금보라, 이경실, 현영 등)을 상대하기에 한량 이봉규는 역부족이었음을 회상한다. 여우들의 화풀이, 분풀이, 속풀이 대상으로 그저 얻어터지기만 했다. 최전방 공격수로서 역할을 못한 정도가 아니라 늑대팀의 자살골을 어시스트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으로까지도 몰렸다. 그때 여우들과 늑대들을 적절히 어루만지며 긴장감과 소통의 고난도 플레이를 능수능란하게 펼쳤던 메인 MC가 바로 박미선이다. 이봉규도 자칭타칭(自稱他稱) 한량이기에 어느 정도 내공이 있다고 자부해왔건만 박미선의 사람 다루는 내공에는 손을 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27세에 결혼해 모범 전과 같은 삶을 살다
방송 MC로서의 내공은 상당하지만 사랑이나 섹스에 관해서는 왠지 솔직한 선무당 같은 느낌이 들어서 훅~ 들어갔다. “남편 이봉원과의 결혼생활 만족하나? 이봉원을 아직 사랑하나? 잘생긴 다른 남자를 보면 설레는 마음이 들지 않나?” 등 집중 포화했다.
솔직한 그녀이기에 쇼킹한 답변을 기대하고서다. 박미선은 역시 기대에 부응했다. “평생 한 남자랑 사는 것은 벌칙이다. 봉원과는 친구 같은 감정이다.” 그러면서 개그우먼의 센스도 곁들인다. “남편과 사랑의 감정 대신 인류간의 사랑이나, 동물을 사랑하거나 무엇인가 대상을 찾고 있다.” 상대의 무기를 공격할 바에는 때린 데 또 때리는 전술도 효과적이다.
“결혼 25년 차 아줌마지만 아직 충분히 매력적이고 섹시하다. 바람피운 적 있나?”라고 도발적으로 물었다. 그녀는 “푸하하!” 하고 크게 웃더니 한참 후에 입을 뗐다. 그래도 은근 기대했는데 “맛을 모르면 그 맛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금단의 열매를 안 먹어봐서 바람피우는 게 어떤 것인지 상상조차 못해봤다. 스물일곱 살에 결혼해서 모범 전과 같은 삶을 살았다”는 쓸쓸한 고백만이 돌아왔다. 방송이 아무리 늦게 끝나도 새벽에 일어나는 습관에다 시간만 나면 책 보기를 좋아해서 음악 카페에서 책을 읽노라면 남편이 채워주지 못하는 빈자리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박미선은 늘 재밌게 살고 있다.
어지간해서는 흔들리지 않는 여자
모범생일지라도 발칙한 상상은 하는 법. 그리고 EBS의 에서 졸혼(혼인관계는 유지하지만, 부부가 서로의 삶에 간섭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개념)에 대해 “각자의 삶을 존중하는 것이 졸혼이라고 생각한다”며 의견을 밝힌 적이 있고 “현재 이봉원과는 설레는 감정이 없다”라고 대답한 적도 있기에 치정 전문가 이봉규가 또 깊숙하게 들어갔다.
프랑스 영화 에서 실비아 크리스텔처럼 순진했던 여인도 서서히 본능에 눈을 뜨게 되고 급기야는 남편과 서로 각자의 다른 사랑을 인정하고 그걸 오히려 즐기는 수준까지 도달할 수 있다는 점을 파고들면서 “졸혼을 했다면 각자 서로 다른 사랑을 찾을 수 있지 않나?”라고 도발적으로 물었더니 박미선은 “이봉원이 상남자라서 내가 실비아 크리스텔이 되긴 어렵다”고 말한다. “이봉원은 박미선이 바람을 피우면 즉시 이혼 도장을 찍는다”는 부연 설명도 한다. 워낙 사슴보다 큰 눈을 가진 사람으로 겁이 많기 때문에 그러고 살았으리라! 게다가 박미선은 완벽주의자에 가까운 성품이라 결혼을 깰 정도로 흐트러지기가 매우 어려운 사람이다. 인터뷰 도중에도 다음 녹화 준비에 대해 매니저에게 시시콜콜 체크하며 철저히 준비하는 모습을 보고 눈치 챘다. 이 여인은 어지간해서 무너지지 않겠구나! 이봉원이 전생에 나라를 여러 번 구했나보다. 처복(妻福)이 넘쳐난다. 내가 진행했던 방송 에서 부인 덕을 본 남자 순위를 매긴 적이 있는데 이봉원이 상위에 랭크됐었다. 완벽주의자 박미선이 결혼한 지 25년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남편을 상남자로 대접해주는 걸 보면 이봉원에게 뭔가 필살기가 있다고 봐야 한다. “이봉원이 빚을 많이 져서 박미선이 그걸 갚느라고 방송을 많이 한다” 등의 얘기가 방송가에 떠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봉원은 자기가 버는 한도 내에서 최선을 다해 쓴다. 내가 번 돈을 축내지는 않는다”고 해명한다. 이봉원도 한 방송에서 아내 박미선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라는 별명에 발끈했다. 이봉원은 SBS의 에 출연해 빚에 대해 밝힌 적이 있다. “박미선에게 돈을 빌린 적은 없다. 갚는 것은 내가 다 갚았다. 다만 생활비를 안 줬을 뿐. 돈이 없으니까, 있으면 줬다”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정말 요즘 보기 드문 간 큰 상남자다.
박미선은 이봉원의 이 같은 배짱을 좋아하고 존경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봉원과 끝낸다고 생각조차 안 해봤다”는 그녀의 말 속에는 남편에 대한 존경심이 묻어난다. 그렇다면? 25년 같이 살아온 부인으로부터 상남자로 인정받고 있는 이봉원은 멋진 남자 아닌가? 이 대목에서 한량 이봉규도 슬쩍 위축된다. 재혼한 지 1년이 조금 넘었으니까 아직은 마누라에게 인정받고 있지만 만약 25년 후 늙었을 때도 나를 존경해줄까? 왠지 어깨가 오그라드는 느낌이다.
여든 살이 넘어도 흰머리로 방송하고 싶다
완벽주의자로 준비성 많은 박미선은 버킷리스트를 작성해놓았단다. 몸짱 실천/ 아프리카봉사/ 아무 생각 없이 친구들과 떠나기/ 배낭 메고 세계 유명 미술관 다녀오기/ 마지막 불꽃 태워보기/ 올해 30주년 기념 디너쇼 등이 그녀의 버킷리스트다. 크게 어렵지 않아 보인다. 버킷리스트를 봐도 역시 그녀는 허황함이 없다.
‘마지막 불꽃 태워보기’에 귀가 솔깃해서 “아직 몸매도 예쁘고 매력이 있으니까 더 늙기 전에 빨리 마지막 불꽃을 태울 상대를 찾아라!” 하며 부추겼다. 중년 여성들에게 몰매 맞을 각오하고 조언한다면? 여성의 섹시함은 수명이 그리 길지 않기 때문에 박미선이 지금처럼 섹시함을 유지할 수 있는 기간은 앞으로 10년을 넘지 않으리라는 판단이다. 물론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여자는 남자에 비해 육체적인 섹시함이 빨리 사라진다. 예를 들어 남자 60세는 잘만 관리했다면 상당히 섹시할 수 있다. 숀 코네리는 1930년생으로 88세이지만 아직도 섹시하다. 그의 60대 시절은 섹시함의 전성기였다. 숀 코네리보다 두 살 아래인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아름다움의 대명사였지만 2011년 사망하기 한참 전인 60대에 이미 섹시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드리 헵번도 마찬가지다. 물론 58년 개띠 마돈나는 60세에도 여전히 섹시하지만 대체로 여자는 남자에 비해 섹시함을 빨리 상실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나의 이 같은 분석이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면? 박미선이 지금의 섹시함을 유지할 수 있는 기간은 10년도 채 남지 않았을지 모른다. 이 점을 용감하게 지적했더니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게 인정하면서도 마지막 불꽃을 태울 엄두를 내지 못한다. 상남자 이봉원이 겁이 나서일까? 아니면 대중의 시선이 무서워서일까? 아니면 새로운 사랑의 위험이 무거워서일까? 이것도 저것도 아닐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박미선은 버킷리스트에는 그렇게 적었어도 이생에서는 이봉원을 떠날 용기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지 않을까? 그만큼 만족스런 생활을 해왔던 것은 아닐까? 이봉원과의 결혼생활도 그럭저럭 만족스럽고 지금의 방송활동이나 책을 읽고 영화 보는 취미생활까지 더 이상 바랄 게 없는지도 모른다.
“여든 살이 넘어도 흰머리를 하고 방송하고 싶다. 나이 들수록 일하는 게 즐겁다”고 말하는 박미선의 큰 눈이 더 커진다. 박미선의 버킷리스트는 전부 다 이루어질 가능성이 매우 크다. 심지어 그녀의 버킷리스트 중에 가장 어려워 보이는 ‘마지막 불꽃 태워보기’도 이뤄질 것 같다. 그런데 혹시 그 상대가 이봉원이 아닐까? 완벽주의자 박미선이 결혼한 지 25년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남편을 상남자로 대접해주는 걸 보면 이봉원에게 뭔가 필살기가 있다고 봐야 한다. “봉원과 끝낸다고 생각조차 안 해봤다”는 그녀의 말 속에는 남편에 대한 존경심이 묻어난다.
그녀는 뽀얗고 하아얀 뭉게구름 같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색다르고 기발한 발상이 피어오른다. 집중해서 듣자니 성자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이상희 헤어팝’의 이상희(李相熙·56) 원장. 직업은 미용사인데 그녀 인생에서 봉사를 뺀다면 삶이 심심할 것만 같다. 손에 익은 기술을 바탕으로 모두가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꾸니 말이다. ‘누군가를 돕는다’란 말에 백만 개의 하트풍선이 ‘뿅뿅’ 터지는 그녀의 환한 얼굴과 마주했다.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루하루가 감사한 사람입니다
“지금도 하루하루가 감사해요. 저는 되게 감사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 잠시 망설이더니 ‘감사’라는 단어를 꺼낸다. 열 손가락이 성한 가운데 기술을 배운 것도, 그 기술을 가지고 다른 사람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있어서 감사하단다.
“미용기술을 배울 때 돈만 벌기 위해 시작한 것은 아니었어요. 한 달에 네 번 봉사를 간다면 나머지 시간은 봉사를 가기 위해 미용실에서 일하는 시간이라 생각하거든요. 제 이름이 서로 ‘상’에 빛날 ‘희’거든요. 말 그대로 상희답게 사는 거죠.”
어려운 이들을 만나면 뭔가 해줄 수 있어 좋고 자신이 운영하는 미용실에서 후배들이 잘 배우고 성장해나가는 것도 참 좋은 일이라고. 이상희 원장을 만난 것은 5월 말. 본인 스스로가 정한 인생의 안식년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채 안 된 시점이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은데 미용실을 계속하면 쉴 수 없겠더라고요. 원래 하던 넓은 미용실을 4월 30일까지만 하고 5월 1일 철거했어요. 저와 오래 일했던 디자이너들이 일할 곳을 마련해 지금의 아파트 상가로 옮겼어요. 이성적으로는 이제 내가 하고 싶은 일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철거하던 날 잠이 안 오더라고요. 안식년이라 해도 두 손 다 노는 게 아니라 그런지 다음 날부터는 잠이 너무 잘 왔어요.”
그런데 그 안식년이란 것 말이다. 대부분 휴식을 염두에 두고 설계를 한다. 이상희 원장은 그 하고 싶다던 일(?)에 더 빠져보려 미용실 운영 대부분을 후배 디자이너들에게 맡겼다. 벌여놓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 당장 앞두고 있었던 새터민 결혼식에 피부 관련 사업, 매달 있는 봉사, 새로운 봉사, 미용인의 처우 개선 등 쌓이고 쌓인 일을 보니 이게 안식년인가 싶다.
봉사와 업(業)이 하나인 인생을 구상하다
전라북도 정읍 출신인 이상희 원장은 성공하려고 미용계에 입문했다. 미용실에 갔더니 기술을 배우면 서울도 갈 수 있고 해외도 갈 수 있다고 말해줬다. 솔깃한 말에 응시한 미용 자격증 필기시험에 떡하니 붙었고 곧바로 실기시험을 준비했다.
“학원 안 다니고 미용실에서 연습했어요. 고등학교 친구들 데리고 가서 머리 잘라주면서 두세 달 정도 훈련했고 합격 1년 정도 후에 상경했죠.”
서울에 오자마자 당시 유명했던 미용실에 취업한 이상희 원장은 일주일을 못 다니고 그만뒀다. 줄지어 서 있는 거울에 헤어디자이너의 이름이 아닌 번호가 붙어 있었다.
“큰 미용실 가야 성공한다기에 들어갔는데 거기선 사람 이름을 부르지 않았어요. 적응하기 힘들더라고요. 제가 시골 애였지만 자존감은 있었거든요.”
서울살이 초반 20대의 이상희는 걷기도 많이 걸었다. 집이 있던 상도동을 지나고 한강다리 건너, 숙대, 남대문시장.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했다.
“신호등 앞에 있는데 파마가 막 말아지는 거예요. 다시 미용을 해? 돈 많은 남자 만나서 미용실을 열어? 가난해서 걷고 고민하면서도 걷고. 그렇게 내린 결론이 나를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실력을 키워 성공하겠다는 거였어요.”
머리 자르는 미용기술 외에도 머리를 올리는 ‘업스타일’에 ‘메이크업’ 기술도 할 수 있어야 했다. 다니던 미용실 원장과 선배, 동료에게 양해를 구해 시간을 마련했고, 잘살던 친구에게 학원비를 부탁해 메이크업 학원에 등록했다. 선후배 관계가 수직적이고 딱딱하던 시대였지만 업무시간을 배려받고 학비문제를 해결해나가면서 더욱 완벽한 미용사로서 비상을 꿈꿨다.
“후배들에게 돈과 시간이 없어서란 변명을 하지 말기를 당부해요. 꼭 해야 할 일이고 열정이 있으면 누구든 도울 테니 도움을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해요.”
20대는 미용사 이상희로서 삶을 채우는 시간이었다면 30대는 그것을 바탕으로 존중하고 돕고 깨치며 살아갔다.
‘높임말’과 ‘봉사’는 철칙
서른 살의 나이, 자신의 이름을 단 미용실을 열었다. 개업과 함께 이상희 원장이 철칙으로 삼았던 두 가지가 있다. 그 첫 번째가 직원들 사이에 높임말 사용이었다. 당시는 손님이고 미용사들이고 서로에게 함부로 하던 시절이었다.
“저희 때는 디자이너와 스태프가 같이 앉아 밥도 안 먹었어요. 솔직히 미용기술에는 차이가 있지만 사람 차이는 없잖아요. 그래서 오픈할 때부터 높임말을 사용했어요. 혹여 함부로 하는 손님이 있으면 더 예의를 갖춰 말했어요. 구두며 유니폼도 갖춰 입었습니다. 그렇게 분위기를 바꿨어요.”
두 번째는 바로 봉사다. 한 달에 한 번은 전 직원이 봉사하기로 했다. 좋은 기술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을 좋은 일에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종교, 지역 그 어떤 것도 따지지 않고 손길이 필요한 곳을 찾아 어려운 이웃과 얼굴을 마주했다.
“처음 찾아서 봉사했던 곳이 가난한 마음의 집이라는 곳이었어요. 1990년대에는 메이크업이 아주 강할 때였어요. 장애우들이 저희를 보고 놀라서 숨는 거예요(웃음). 그래도 몇 번 가니까 친해졌어요. 봉사하다 보니 새터민과도 연결이 됐어요.”
어렵던 시절 동료들과 친구의 도움으로 메이크업을 배운 것이 두고두고 고맙다는 이상희 원장. 좋은 마음이 모여 얻은 기술이기에 봉사를 할 때 더없이 기분이 좋다.
“미용실 열고 1년쯤 돼서 어떤 손님이 저에게 도움을 요청했어요. 러시아 여자와 함께 한국으로 들어온 탈북민이 결혼식을 하는데 메이크업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요. 제가 메이크업을 한다는 걸 몰랐던 손님인데 말입니다. 당연히 좋다고 했죠.”
봉사한다는 게 알려지면서 놀이처럼 재미있고 기획력 있는 봉사가 이어졌다. 정부 지원이 어려운 틈새 청소년들을 위해 일일찻집을 열고, 산골 아이들을 위해 자전거도 사주고 고아원에 세탁기도 기증했다.
“손님들에게 이건 꼭 약속했어요. 우리 미용실에 와서 머리를 하면 그 일부는 다른 사람들 위해 쓰인다고요. 제가 그렇게 좋은 일을 하면 이곳에 오시는 분들이 복을 받는 거잖아요.”
‘K뷰티’와 ‘뷰티엔젤’ 봉사의 중심에 서다
2000년대 중반에는 한·일 미용인 간의 세미나가 자주 있어서 일본에 갈 기회가 많았다. 그때 일본의 성년의 날과 우리나라의 성년의 날에 대한 의문과 고민이 일었다.
“일본에 갔는데 일본 젊은이들이 기모노를 많이 입더라고요. 예쁘기도 하지만 그 나라 문화잖아요. 그런데 일본의 ‘성인식’은 공휴일인데다가 자치단체에서 큰 잔치를 열어요. 기모노 입고 화장과 머리를 하고. 이 모든 게 다 미용실에서 이뤄지는 거예요.”
함께 일본에 방문하고 온 미용실 원장들에게 우리 청년들을 위한 성년의 날을 특별한 날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메이크업과 머리손질은 미용실에서 도움을 주고, 한복은 당시 이상희 원장이 다니던 우석대학교 최고경영자과정 ‘미르’에서 만난 지인이 공급해주기로 했다.
“연세대학교 다니는 손님한테 학교 대동제 때 성년식을 열어주겠다고 제안했어요. 단, 스마트폰으로 한복 입은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리는 학생들에게만 기회를 주기로 했어요. 2011년 5월에 이틀 동안 저희가 준비한 성년식에 300여 명이 참여했어요.”
이 행사를 계기로 K뷰티디자인협회의 시초가 된 한국업스타일협회를 창설했다.
“일본에 같이 다녔던 미용인에게 한국으로 돌아가서 좋은 일도 하고 미용실 손님도 우리 손으로 오게 하자고 말씀드렸어요. 한국업스타일협회는 이후 좀 더 의미를 넓혀 지금의 K(Korea)뷰티디자인협회가 됐습니다.”
이상희 원장의 또 다른 활동 영역은 뷰티엔젤이다. 미용실 개업 초기 직원들과 다니던 봉사가 주위 미용인들과 함께하는 한국미용봉사회로 이어지다가 누구든 함께 참여하는 연합봉사 형태의 ‘뷰티엔젤’로 탄생했다. 한국 봉사는 물론 캄보디아 미용기술 지원봉사를 이어가고 있다.
“‘미르’의 박문희 원장님이 의료진하고 캄보디아 봉사를 간다고 머리를 하러 오셨어요. 제가 ‘의사들은 너무 좋겠다, 다른 나라 가서 봉사도 하고’ 그랬더니 너무 좋아하시는 거예요. 봉사를 하게 된다면 저는 미용을 가르쳤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그게 진행이 됐어요. 그쪽 아이들 미용기술 가르칠 생각을 시작하니까 잠이 안 왔어요.”
캄보디아 봉사는 이상희 원장 인생에 새로운 전환점이 됐다. 20년 넘게 많은 사람을 도우며 살아왔지만 처음의 그 에너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캄보디아 봉사를 앞두고 느꼈어요. 왜 잊고 있었지? 친구 한 명의 도움으로 내가 20대를 살았는데 지금 못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난해도 여자가 기술을 배우면 자식교육 시킬 수 있고 생활고에서 나아지니까 공부는 늦게라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지금까지 두 번의 캄보디아 미용기술학습프로그램을 통해 20명을 지원했다. 학비뿐만 아니라 숙식과 생활보조금까지 지원하는 사업이라 매년 할 수 없다고 한다.
“캄보디아 아이들과도 약속한 것이 있어요. ‘너희가 성공을 하면 한 사람을 가르쳐라.’ 그게 약속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캄보디아에 미용실 오픈을 생각하고 있어요. 그곳 아이들이 일할 수 있는 곳을 만드는 거죠.”
‘미용복지사’라는 직업 멋지지 않나요?
안식년이라는 본인의 결정과는 무관하게 하는 일이 너무나도 많다. 매달 13일 레드엔젤(청년응원단체)과 함께 K-컬처 콘서트를 개최한다. 2~3개월에 한 번씩은 다른 봉사단체와 연합활동도 한다. 캄보디아는 물론 올가을 새터민 합동결혼식도 계획 중이다. 미용인으로서의 고민도 남다르다.
“미용은 보건의 개념도 있지만 지금 사회에서는 복지의 개념입니다. 형편은 되는데 거동이 힘들어서 미용실에 못 오시는 경우가 있잖아요. 현재 미용은 이동 미용이 안 됩니다. 환자 외에는요. 미용복지사가 필요한 세상입니다.”
미용사의 새로운 직업에 대한 아이디어일 뿐 아니라 고령화 사회 시니어들의 복지에 대한 깊은 배려가 담겨 있다. 이외에도 한류로 인해 유입되는 외국 여행객에게 보다 친근하게 한국 문화를 알릴 수 있는 ‘뷰티존’을 만들어 세계에 한국 문화와 아름다움을 알리고 싶단다. 미용실을 작은 평수로 옮기면서 ‘손아당(蓀雅堂)’이라는 공간도 만들었다. 뜻 맞는 사람들이 모여 봉사에 관한 아이디어를 주고받는 허브 역할을 하게 되기를 바라면서.
“근데 저는 생각하는 게 예쁜 거 같아요. 끊임없이 꿈을 꾸는 거 같아요. 내가 만일 미용 일에서 손을 뗀다면 내 직함을 뭘로 하지? 뷰티풀 라이프 디자이너 이상희로 불리면 어떨까 하는데 되겠죠?”
뷰티풀 라이프 디자이너를 꿈꾸는 그녀의 입에서는 이쁘다(예쁘다)라는 말이 참으로 많이 흘러나온다. 자주 쓰는 단어에는 그 사람의 평소 모습이 담겨 있다. 그녀의 이쁜 마음이 영원하길 지지하고 응원한다.
여행전문가 한비야씨의 7번째 책이다. 58년 개띠 여자이다. 그저 여행이 좋아 평범한 삶을 포기하고 여행에 인생을 건 여자로 봤었다. 멀쩡하게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유타 대학 언론대학원에서 국제 홍보학 석사학위까지 받은 재원이다.
여행 책이 최근 관심 있게 손에 잡히는 이유가 필자도 앞으로는 여행을 제대로 해보고자 하는 버킷리스트 때문이다. 가 본 나라도 많지만, 아직은 안 가본 나라가 훨씬 더 많다. 그렇다고 안 가본 나라들을 꼭 가보고 싶은 것도 아니다. 세계지도를 놓고 볼 때 가보고 싶은 나라들이 아직 즐비하다. 그러나 직접 가 보고 싶은 나라는 아니지만, 관심은 많다. 그래서 책을 통해서 간접 경험을 얻고 싶은 것이다.
지도를 보면 잘 사는 나라와 못 사는 나라가 있다. 잘 사는 나라를 먼저 보고 싶은 것이다. 못 사는 나라는 시간과 돈을 들여가서 볼 것도 없고 불편하고 위험하다면 후회할 것 같다. 그러나 지구상에는 그런 위험하고 가난한 나라들이 더 많다.
한비야씨의 이 책은 직접 가보기도 어렵고 위험한 나라들이다. 국제 긴급 구호 요원으로 아프리카의 말라위, 잠비아, 시에라리온, 라이베리아, 중동의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아시아의 네팔,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북한을 다녀와서 쓴 글들이다. 현재 전쟁이나 내전 중이기도 하고 각종 전염병 등으로 위험한 지역들이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의 이스라엘의 만행도 참고할 만 하다. 단순한 여행으로는 다녀오기 어려운 나라들인데 긴급 구호요원으로 활동 한 덕분에 한비야씨의 생생한 현지 경험담을 들어 볼 수 있다. 시에라리온은 ‘사자의 산’이라는 뜻이고 평균 수명이 25세~35세로 인구 대비 난민이 절반, 신체장애자 수도 가장 많은 나라란다. 내전 중에 전 인구 5백만 명 중 1/5이 죽었단다. 이웃나라 라이베리아는 ‘자유의 땅’이라는 뜻이란다. 미국의 식민지였다가 해방된 나라로 다이아몬드 자원 때문에 내전을 겪은 나라들이다. 반군들이 양민들의 팔다리를 잘라 장애자 수가 많다는 것이다.
가난한 나라들은 말만 들어도 가슴이 아프다. 전 세계 60억 인구 중 절반이 끼니 걱정을 하고 산단다. 한 달에 2만원만 있어도 먹고 살 수가 있는데 그 돈이 없어 지금 이 순간에도 죽어가는 아이들이 즐비하다는 것이다.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 있었던 오드리 헵번 같은 사람들이 아프리카에 가서 봉사하고 왜 존경받는지 알 것 같다.
‘한국의 자립은 쓰레기더미에서 장미꽃이 피는 것보다 불가능한 일’이라던 우리가 원조 받던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가 되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외국 원조를 1990년까지 받았다고 한다. 그때까지 무려 130억 달러의 원조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 원조하는 나라가 되었는데 아직 그 액수가 22억 달러로 은혜의 빚이 많다는 것이다. 국민 총소득의 0.06%, 일인당 한 달에 400원 정도를 원조금으로 내고 있어 나라의 경제 규모에 비해 크게 못 미치는 모양이다. 원조 1위국 덴마크는 국민 총소득의 0.91%, 유엔 권장이 0.7%이며, 국민총소득이 우리보다 못한 그리스도 0.17%, 포르투갈도 0.25%나 된다는 것이다. OECD 평균치도 0.23%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 부분은 앞으로 크게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흔히 듣는 얘기로 우리나라도 불쌍한 사람들이 많은데 굳이 멀리 외국에 까지 원조를 할 필요가 있느냐, 그런다고 무슨 큰 도움이 되겠느냐는 질문을 받는다고 한다. 우리가 원조를 받을 때도 원조를 주는 나라의 국민들도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또한 한 사람의 힘은 약하지만, 이 운동이 활발해진다면 상당히 큰 힘을 발휘할 것이다.
나방을 고운 시선으로 본 적 있던가? 여름밤, 밝은 조명 주위로 크고 작은 나방이 몰려들면 무서웠다. 누군가는 살충제를 들고 나와 연신 뿌려대기도 했다. 어린이용 애니메이션 의 사오정 입에서 나오는 나방은 그저 웃음거리. 더럽고 지저분하고 방해되는 날개 달린 벌레. 인간사 속 ‘나방’이란 정체의 위치가 그러했다. 허운홍(許沄弘·64)씨가 나방의 생활사에 대해 관찰하고 알리고 의미를 부여하면서 차갑던 시선에 조금씩 꽃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주부 허운홍, 나방에 빠지다
세상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지만 ‘나비’가 아닌 ‘나방’을 연구하고 그 매력에 푹 빠진 사람이 있다니! 대학 교수라면 이해가 갈 것 같다. 자연계열과는 거리가 멀던 주부가 ‘나방생활사 전문가’로 불린다. 바로 허운홍씨 얘기다. 우선 허운홍씨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자면, 10여 년 동안 직접 채집해 길러낸 나방이 2000여 마리 900여 종에 이른다. 이렇게 채집한 나방은 손수 표본으로 만들었고 올해 초 광릉수목원에 기증했다. 나방뿐만 아니라 파리와 벌들의 표본도 함께 기증해 시민에게 내줬다. 서강대학교 사학과 출신, 곤충과는 멀던 삶. 나이 오십 넘어 그 작고 날라 다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돌볼 것 많은 주부생활 대부분은 오래전부터 자식도 남편도 아닌 나방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 그녀는 왜! 수많은 곤충들 중 나방에 빠지게 된 걸까?
“전업주부로만 살아왔어요. 대학 졸업하고 친구 소개로 만난 남편과 곧바로 결혼했거든요. 뭐든 해보려고 했는데 생각대로 잘 안 풀렸어요. 그런데 뭘 하고 살 것인가는 늘 고민했죠. 그러다 1997년에 남편이 교환교수 자격으로 영국에 가게 됐어요. 그곳에서 처음으로 생태학과 만났어요.”
영국에서 생태학에 눈뜨다
가족과 함께 간 영국 케임브리지. 그곳이 나방 연구에 힘을 실어주는 도화선 역할을 했다. 케임브리지는 지식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도시의 한가운데는 대학교와 도서관으로 가득 차 있었고 배울 것이 널려 있었다. 학업에 대한 갈증과 궁금증이 많았던 허운홍씨는 케임브리지 개방대학에서 관심 있는 것이 있으면 뭐든 찾아서 수강신청을 했다. 천문학에 미술사, 영국사 강의도 들었다. 그중에 생태학도 있었다.
“생소했어요. 식물에 관한 걸 배울 수 있다기에 수업을 들어보기로 했어요. 그때까지 에콜로지(Ecology·생태학)란 단어조차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학교였지만 수준은 남달랐다. 생물학, 곤충학, 천문학 전문가가 한 학기 동안 전문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숙제도 내주었다. 무엇보다 허운홍씨가 놀란 것은 학문을 대하는 영국인의 자세였다.
“천문학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은하계를 볼 수 있는 필름과 슬라이드 장비를 가지고 있었어요. 옷은 정말 허름하고 냄새가 날 정도였는데 슬라이드는 다들 가지고 있더군요(웃음). 생태학 수업을 같이 듣는 분과 영국의 유명한 습지에 간 적이 있는데 차 트렁크에 장화며 쌍안경, 돋보기 등 없는 게 없더라고요. 저는 운동화 신고 뒤따라갔거든요. 문화수준인 거 같았어요. 그게 제가 느낀 차이였어요. 특히 연세 드신 분들이 많았는데 다들 너무나 열심히 공부하셨어요.”
지식이 넘쳐나는 영국에서 소녀처럼 공부할 수 있었던 시간은 잠시였다. 1998년 한국에 IMF 위기가 와서 1년도 채 못 되어 돌아와야만 했다. 조금 더 영국에 빨리 가서 공부를 시작했거나 더 오래 있었다면 뭔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늘 아쉬움이 남는다.
벌 대신 나방을 선택했다
“그렇게 한국에 돌아왔는데 1999년에 길동생태공원이 문을 열었어요. 2008년까지 생태안내 자원봉사를 하면서 곤충 생태에 더 깊은 관심을 갖게 됐어요.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일을 하다 보니까 정말 열심히 공부했어요. 영국에 있을 때 교수님이 소개해준 책도 해석해서 보고 말이죠. 사실 벌을 더 연구하고 싶었어요. 벌이 선구적으로 하고 있는 일을 사람들이 배워가는 것 같다고 생각했거든요.”
정자은행의 시초였을 것 같은 여왕벌의 저정낭, 말벌의 독특한 아파트 생활 등 벌들의 사회생활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꿀벌과 말벌을 제외한 대부분의 벌이 나무줄기 속, 집 틈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지하생활을 해 포기했다.
“그래서 나방으로 돌아섰습니다. 처음에는 이쪽 분야 전공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미 다 연구한 줄 알았어요. 그런데 연구가 전혀 안 돼 있었어요. 도감 대부분이 일본 책을 베낀 거였어요. 영국에 있을 때도 생태학 교수가 일본 책만 소개시켜줬죠. 그때까지 한국 책은 없다고 했어요.”
2007년부터 중부지방을 기점으로 발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나방 애벌레를 채집하고 인공으로 키워냈다. 수백 회 반복한 끝에 2012년과 2016년에 1권과 2권을 발표했다. 나방의 탄생과 변화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국내 최초의 도감이다.
새로운 나방 찾아 순천으로 남하(南下)하다
현재 허운홍씨는 남편과 순천에서 살고 있다. 서울 생활을 접은 이유는 나방 때문이다.
“중부지역 쪽에서만 주로 채집했어요. 친정이 밀양이라 그곳에서도 좀 했고요. 그렇게 900종을 채집했으니 새로운 곳에서 채집을 해보려고 순천에 왔어요. 이곳에 친척 한 명 없는데 찾다 보니 여기까지 왔어요(웃음). 남쪽은 사는 식물이 달라요. 그래서 나방도 다른 종이 나와요. 예덕나무, 푸조나무 이런 것들은 서울에 없어요. 제주도에서도 살아볼까 생각했는데 여기랑 식물이 비슷하고 섬이라 한계가 좀 있죠. 이곳에 훨씬 생물이 더 다양하게 있어요. 지리산도 가깝고. 내려와서 70~80여 종을 찾았습니다. 백운산, 제석산, 조계산, 봉화산 등 순천 쪽 산은 거의 다 다니고 있어요.”
지금도 매일 주위 산을 오르고 반가운 마음에 애벌레를 채집하고 관찰하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어느 대학 박사, 교수 같은 명함은 없지만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열정과 노력으로 살아가고 있다.
“교수 몇 분이 와서 학교에 들어와서 공부하면 어떻겠느냐고 한 적이 있어요. 공부를 하면 채집을 못하지 않냐 물으니까 채집할 시간을 주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제가 채집하러 나가면 새벽 6시에 나가서 왕복 6시간, 6시간 채집해서 한두 종 추가해요. 어떻게 공부하면서 할 수 있겠어요? 안 해본 사람들 생각이죠. 벌레들이 생각처럼 쉽게 찾아지지 않아요.”
허운홍씨는 78세까지 2000종의 애벌레를 채집해 나방 성충으로 키워낼 꿈을 가지고 있다. 그때가 되면 지금까지 모아둔 자료를 가지고 대학에서 공부하고 싶다.
“채집 생활을 모두 끝마치고 나면 나방을 생활사별로 정리하고 싶어요. DNA 검사를 비롯해서 종합적으로 연구하고 싶은데 눈이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시력이 너무 떨어져서 의사에게 조심하라는 경고를 들었다. 원시가 너무 빠르게 진행되지만 하는 일들을 멈출 수 없단다.
“제가 78세까지 2000종을 채집하겠다고 허풍을 쳐놔서요(웃음).”
경조사는 못 다녀요
나방 애벌레 채집에 집중하는 기간은 4월 말부터 9월 말까지. 10월에도 밖을 나선다. 비가 오는 날은 사진을 정리하고 그 외 모든 시간은 산 이곳저곳을 다닌다. 나방 엄마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 같다.
“특히 표본작업을 할 때는 강의나 다른 일들은 하지 않아요. 6월에도 성남에서 토크쇼에 와달라고 했는데 거절했어요. 일단 채집이 시작되면 사람도 안 만나요. 친인척 결혼식도 안 가요. 장례식에는 꼭 가죠. 그 외에는 아무 곳도 안 가요. 쉽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정말 집중이 필요하거든요.”
사람들은 올해 채집을 못하면 내년에 하면 되지 않느냐고묻는다. 애벌레를 집으로 들여와 길러보니 매년 나는 종들이 다른 것을 알게 됐다. 한 해 거르면 영원히 못 보는 개체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여름 여행도 포기했다. 이런 허운홍씨. 가족들과 친구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우리 가족은 서로 관여 안 해요. 예전에 아들들은 ‘엄마 나방이 날라 다녀요, 번지수를 잘못 찾았나봐요’ 그러기도 했어요. 손자들은 벌레들에게 너무 관심이 많죠. 친구들은, 제가 경기여고를 나와서 수준이 있거든요(웃음). 동기 모임도 미술관, 박물관 이런 곳에서 하니까 제 생활을 이해해요. 가끔은 제 남편 대단하다고 해요. 벌레 키우는 여자랑 이혼 안 해주고 산다고요.”
그래도 주부로서 최소한의 원칙은 있다. 새벽에 나갔다 저녁이 돼서 집에 오면 남편 먹을 반찬은 꼭 만들어놓는단다. 남편이 반찬투정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그렇게 하는 게 마음이 편하다.
정중하고 예의바르게 자연을 만나다
채집할 때 가방 안에 뭐가 있을까 궁금해 열어봤다.
“물, 카메라, 우산, 비닐, 샬레(실험도구인 납작한 원통형 용기), 가위는 3개 정도 꼭 넣고 다녀요. 작업하다 가위를 떨어뜨려서 찾으려고 보면 뱀이 있다거나 보이지 않은 곳에 떨어져 못찾을 때가 있거든요.”
가위를 여러 개 가지고 다니는 것은 ‘식물에 대한 예의’라고 했다. 잎사귀나 가지를 깨끗하게 잘라주지 않으면 병이 들 수도 있고 끝이 갈라져 보기에도 좋지 않다. 식물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기본은 가위를 이용해 가지를 잘라주는 것이란다.
“사람 좋을 대로 하면 안 됩니다. 식물 입장도 생각해봐야죠.”
올해 허운홍씨의 나이는 64세. 적지 않은 나이에 매일 새벽 나방이 될 애벌레 채집을 위해 길을 나선다. 집안일하다 생긴 손가락 관절염에 점점 나빠지는 눈, 매일 걸어 다녀 굳은살 박인 발은 물론이고 어깨 통증도 달고 산 지 오래다. ‘가지에 손만 닿으면 되지’ 싶어 병원에는 가지 않는다. 어디서 오는 사명감일까.
“여섯 시간을 찾아 헤매야 한두 종을 찾는다고 했잖아요? 10년을 이렇게 찾은 것입니다. 만약 다른 누군가가 나방생활사 연구를 한다면 제가 지금까지 했던 것 이상의 시간을 투자해야 하잖아요. 누가 하겠어요. 제가 할 수밖에 없죠. 결과물에 비해 시간이 너무 많이 요구됩니다. 누구든지 하고 싶다면 가르쳐주고 싶지만 돈도 안 되는 것을 누가 하겠어요.”
보물찾기, 퍼즐게임 그리고 컬렉션(?)
요즘도 매일 나방 애벌레를 찾아 곳곳을 돌아다니는 허운홍씨는 이를 두고 ‘보물찾기’라고 표현한다. 숲속을 헤매다 눈앞에 새로운 종의 애벌레가 보이면 날아갈 듯 좋단다. 그 시기가 지나 겨울이 되면 또 다른 재미, ‘퍼즐게임’에 돌입한다.
“겨울에는 동정(생물의 분류학상 소속이나 명칭을 바르게 정하는 일)을 해요. 표본한 것을 쫙 펼쳐놓고 종류를 구분해요. 애벌레 사진 찍어놓은 것과 성충 표본을 보면서 일본 책을 가지고 이름을 찾아요. 밖에 나가는 건 보물찾기, 동정은 퍼즐게임 그리고 모으면 컬렉션이에요. 재밌는 일이 아주 많은 저만의 취미입니다.”
78세가 되면 소속된 학교도 단체도 없지만 나방 아줌마의 멋진 퇴임식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 말에 “2000종 채우면요!” 한마디 외치며 산속으로 걸어갔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돼서 마음만 동동 구르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의 문을 두드려주셔요.
이번 호에는 낯선 길에서 아주 사소한 친절을 베풀어준 한 사람에게 미처 하지 못했던 말을 김인숙 소설가께서
이 지면을 통해 해주셨습니다.
김인숙 소설가
기르던 고양이가 죽었습니다. 이런 경우, 무지개다리를 건너갔다는 표현을 쓰기도 하더군요. 다리를 건너든, 강을 건너든, 열다섯 살 소녀도 아니고 이미 오십이 훨씬 넘은 처지에 기르던 것이 세상을 뜬 얘기로부터 이 편지를 시작하는 걸 이해해주십시오. 나이를 들먹이는 건, 이 나이쯤 해서는 기르던 것만 세상을 뜨는 게 아니라 사랑했던, 사랑하는 많은 사람 역시 내 곁을 수시로 떠나기 때문입니다. 가족들, 선배들, 심지어는 후배들까지. 그러니, 이런 나이에 기껏, ‘기르던 것’과의 작별에 대해 당신에게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민망하기도 한 것입니다.
먼저, 오해는 하지 말아주십시오. 꼬박꼬박 기르던 것이라고 말을 하고 있지만, 그 말에 무시하고 하찮아하는 마음을 담고 있는 건 아닙니다. 다만 내가 눈물로 이별했던 사람들과 ‘기르던 것’과는 구분을 하고 싶을 뿐입니다. 이별은 같지만, 사랑도 같지만, 그래도 다른 건 다른 것이고, 달라야 할 것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그 아이, 기르던 것과의 작별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 것은 작별의 슬픔과 살고 죽는 것의 어찌할 수 없음에 대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런 이야기는 해서 뭐하겠습니까. 누구나 짐작할 만큼 슬펐다고 그렇게 말하는 걸로 족합니다.
그런데도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잊히지 않는 것 때문입니다. ‘그 아이’가 세상을 뜨기 직전, 먹을 걸 거부하더군요. 죽을 걸 알고 있으니 조용히 굶어죽겠다는 겁니다. 그걸 가만 보고 있을 수가 없어 강제급식이란 걸 시작했습니다. 거부하는 아이를 꽁꽁 싸매 꼼짝도 못하게 하고 주사기로 묽은 죽과 약을 억지로 투여하는 겁니다. 아이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버티고, 나는 진땀을 뻘뻘 흘리며, 울며, 제발 먹어 먹어, 나를 위해서라도 먹어줘, 그랬습니다. 그때, 그 한숨소리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죽어가는 고양이가 한숨을 쉬더군요. 모든 걸 다 내려놓은 듯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한숨을 쉬더라고요.
이제 그만해.
사람의 말로 말할 수 있었다면 아이의 말은, 아마 그런 것이었을 겁니다. 분명히 그랬을 겁니다. 이런 울적한 이야기 끝에 이제야 인사를 드립니다. 당신은 나를 모르시겠지만요. 나는 언젠가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은 일이 생긴다면, 그 누군가가 아주 낯선 사람이기를 바라곤 했었습니다. 사랑하는 누군가에는 내 마음을 다 털어놓고 싶지 않았고, 그게 가능할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둘만이 통하는 말이 다른 말들을 가로막을 것 같았습니다.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내 짐을 얹어주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어떤 편지를 쓰더라도, 나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려고 애쓸 거고, 나 자신을 위로하는 말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위로하는 말을 하려고 들 텐데, 그러면서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런 내 마음을 이미 다 알아차리고 더 마음 아파하고 있다는 걸 알아버릴 테니까요. 그래서, 편지 같은 거, 절대로 안 쓸 거라 생각했고, 그래도 꼭 누군가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다면, 누군가에게 그저 다정한 안부 한마디쯤 문득 건네고 싶어진다면, 그 누군가가 완전히 낯선 사람이기를 바랐던 겁니다.
그래서, 당신.
나는 당신의 이름도 알지 못하고 얼굴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어떤 우연이 당신을 다시 만나게 해준다고 하더라도 당신도 나도 서로를 기억하지 못할 게 틀림없습니다. 물론 나는 당신을 압니다. 당신을 기억할 수밖에 없는 사연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한테는 너무나 무의미해서 내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조차 모를 게 뻔합니다. 기껏해야 당신은 말하겠지요.
아, 내가 그런 일을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당신은 그런 일을 했습니다. 몇 해 전이었고, 나는 그때 싱가포르 공항에 막 내린 참이었습니다. 싱가포르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섬에서 몇 달을 체류하다가 비자를 연기해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가장 쉬운 방법이 그 섬을 나갔다 돌아오는 일이라고 해서 하루 일정으로 싱가포르에 갔던 겁니다. 그래서 싱가포르에서의 체류시간이란 게 고작 몇 시간밖에는 안 되었습니다. 여유 있게 다시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에 돌아오려면, 싱가포르 시내를 구경할 시간도 안 되었지요. 싱가포르에서 하루나 이틀 자고 돌아오는 일정을 짤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서둘러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무슨 이유가 있었겠으나 지금은 잊어버렸습니다.
아무튼 고작 두어 시간, 그래도 공항에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어서 내가 짰던 여행 계획이란 게 버스를 타고 시내 한 바퀴를 돌아보는 거였습니다. 공항에서 출발해 공항으로 돌아오는 버스가 있었습니다. 한 시간 반쯤, 버스 안에서 시내를 구경할 수 있겠네요. 당신은 공항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나는 내가 타려고 하는 버스가 어디에서 출발하는지를 물었습니다. 버스를 타려면 버스비가 필요하다는 것, 그것도 싱가포르 돈이 필요하다는 것, 그러므로 환전을 해야 한다는 것, 이런 복잡한 생각은 당신에게서 버스 타는 곳이 어디인지를 알게 된 후에야 들었습니다. 버스 한 번 타자고 먼 환전소를 찾아가 돈을, 그것도 코인으로 환전해야 할 상황입니다. 난처한 내 표정을 눈치 챈 당신이 내게 먼저 묻습니다.
차비가 필요합니까?
이런 민망한 질문에 쉽게 대답하기는 어렵습니다. 머뭇거리고 있는 동안, 당신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내게 내밀어줍니다. 그러고는 내가 고맙다는 말을 다 하기도 전에, 그러니까, 땡큐 뒤에 쏘 머치 하기도 전에 당신은 다른 곳으로 가버립니다.
나는 당신이 준 동전을 손에 꽉 쥐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 백원짜리 동전을 손에 꽉 쥐고 문방구나 만화방으로 달려갈 때처럼, 손바닥에 땀이 고입니다.
이쯤 되어서는, 당신은 아마 내게 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게 답니까? 내가 이런 편지를 받아야 하는 이유가?
맞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당신은 기억도 하지 못하는 어떤 한국 여자의 시간과 수고를 아껴주기 위해 동전 몇 개를 주었다는 이유로 지금 이 편지를 받고 계십니다. 게다가, 내 마음의 이야기까지 들어주어야 할 판입니다. 당신이 바란 일은 결코 아니었겠지요. 당신은 그저, 먼 곳에서 온, 혼자인 여행객이 당신의 나라, 당신의 도시를 잠깐이라도 좋은 마음으로 바라보다 돌아가기를 바랐을 뿐일 텐데요.
그 사소한 친절은 그러나 사소하게 흘러가지 않고 오래 따듯한 마음으로 남습니다. 생의 어떤 고비마다 문득문득 가파른 길에 서 있다고 여길 때마다, 그래서 누군가를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할 때마다, 그러나 누구의 짐도 되고 싶지 않을 때, 나는 내가 오래전에 받았던 당신의 친절을 떠올립니다. 고작 동전 몇 개, 버스 한 번 탈 돈, 그러나 외면하지 않고 베풀어진 친절, 그런 게 정말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나는 당신이 준 동전 덕분에 싱가포르 시내를 구경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편안한 자리에 앉아 한가롭게 시내 한 바퀴를 돕니다. 그날의 햇살, 그날의 적당히 기분 좋던 나른함을 나는 아직도 기억합니다.
고양이를 떠나보내고 돌아오던 길, 나는 내 고양이에 관한 이야기를 누구에게 할 수 있을지 생각했었습니다. 그날 그 시간의 내 마음을 함께해줄 사람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어쩌면 아주 많이, 내 생각보다도 훨씬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그럴 겁니다. 그러나 때로는, 아주 낯선 사람의 아주 사소한 친절만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 친절을 동전처럼 손에 꼭 쥐고, 땀을 흘려가며, 잊지 말아야지, 잊지 말아야지, 하고 싶은 겁니다. 적당한 거리의 타인에게 내 이야기를 하고, 그 누군가는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 친절이 내 마음을 녹이는 순간 말입니다. 슬픔이 동전처럼 손안에서 땀으로 흘러내려, 그게 위로라고 여겨지는 순간, 그런 것 말입니다.
그 낯선 사람이 당신이라면, 당신은 내게 ‘이제 그만해’라고 말해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너무 사랑하면, 그런 말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서나 그런 말을 들을 수 있을 것 같고, 듣고 싶습니다. 당신의 주머니에 아주 많은 동전이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 어디에서나 몰려드는 많은 여행객들에게 그 동전이 하나씩 하나씩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괜찮다는 마음, 이제 그만해도 된다는 위로, 당신은 의도치 않았을지 모르나, 그 마음을 담고 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제 와서, 땡큐 뒤에 끝내 못 부쳤던 말, 쏘 머치를 붙입니다. 감사합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얘기하다 보니 3분 만에 성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요약하자면 투명하고 맑은 느낌이다. 마치 자신이 부른 노래들의 영롱함을 모습 그대로 보여준다고나 할까. 그 주인공은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 ‘꿈을 먹는 젊은이’ 등의 명곡들로 80년대 초중반을 장식한 포크 가수 남궁옥분이다. KBS가요대상 신인가수상, MBC 10대 가수상 등 가수로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그녀는 가수로서만이 아니라 방송 MC, 광고 모델, 라디오 DJ로도 활약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이제 ‘그토록 기다렸다고’ 하는 60을 맞이하며 여전히 행복하게 활동하고 있는 그녀의 현재와 인생관을 들어봤다.
글 김영순 사진 박규민 parkkyumin@gmail.com
인기 DJ 이종환이 1973년 종로2가에서 문을 연 음악감상실 쉘부르는 무교동에 자리한 세시봉의 뒤를 잇는 1970년대 대표적인 음악감상실로 수많은 포크 가수와 진행자 들을 배출했다. 그 쉘부르 출신의 남궁옥분은 포크로 대변되는 청년 문화의 끝자락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가수였다.
그 시절의 청년다운 건강함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60을 맞이하고 있는 남궁옥분이 기자 앞에 있었다. 첫 인상은 섬세하고 차분했다. 그러면서도 호탕하다는 인상을 줬다. 이런 이미지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하고 책임져 온 사람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에너지가 있기에 가능하기 마련이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행복한 사람을 이해 못한다
“윤회에 대해서 오래 전부터 확신하고 살아왔어요. 그래서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전생의 업보겠지 하죠.”
남궁옥분은 108배를 17년 동안 했다. 정신적 수련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윤회 사상과 108배를 봐도 알겠지만 그녀의 세계관에는 불교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고 그 불교적 영향력은 삶에 대한 달관적인 시선으로도 드러나고 있었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행복한 사람을 이해하지 못해요. 새장 안에서 사는 새는 새장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도 있죠. 나도 내 영역을 가진 것이니까 행복한 거예요. 누가 나를 보면 답답해 보일지라도, 내 기준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사는 것이 내가 후회하지 않을 일이기 때문에 합니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행복한 사람을 이해 못한다’는 말은 ‘후회하지 않을 일을 한다’는 말과 함께 남궁옥분의 생각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다. 즉, 그녀에게는 자신만의 확고한 세계를 마련한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외고집이 있다.
“애초에 돈이나 명예에 관한 욕망이 없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그 어떤 직책도 안 맡았었죠. 그러다가 최백호 오빠가 운영하는 한국음악발전소에서 이사를 맡게 됐어요. 과거에는 그런 일을 안 했지만, 이제는 선배가 후배들에게 큰 우산이 되어줘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요. 나도 그 역할을 하고 싶어진 거죠.”
한국음악발전소는 최백호가 독립음악인들의 창작 지원을 위해 운영하고 있는 사단법인이다. 그녀가 한국음악발전소에 몸을 싣게 된 것은 최백호에 관한 믿음 때문이었다. 최백호가 하는 일이라면 타협하지 않으면서 공공적인 선의를 구현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사람을 그토록 전적으로 신뢰하는 경우는 흔치않다.
인터뷰 중 그녀는 물질보다는 관계에서 오는 고통이 더 크다고 말했다. 유명인이 되고 연예인으로서 방송계 일을 하게 되면서 인간관계에서 오는 크고 작은 상처들을 무수히 겪어야 했고, 심지어 허술한 인간관계로 인해 아예 2년 동안 방송을 완전히 안 한 시기도 있었다. 오죽하면 자신을 키운 게 사람이라고 말할까.
오랜시간 다른 사람의 삶을 읽을 수 있게 된 그녀에게는 산과 사람이 있었다고 털어놨다.
“많은 사람 안에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스승이에요. 사람은 사람을 통해서 크는 것이죠. 제가 사람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는데, 그때는 자신이 다져지지 않아서 그런 것도 있었을 거예요. 지난 시간 동안 저는 피해자의 입장으로 보는 법을 배웠다고 생각해요. 그런 게 없었으면 정신적으로 단단해지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리고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지리라는 생각이 저를 지탱시켜주죠. 그래도 사람으로 만들어진 상처는 사람이 치유해줘요.”
노력한 만큼의 댓가는 확실히 있다고 믿는 그녀
그녀는 자신을 밟고 올라가서는 그 전과는 완전히 바뀐 사람들을 수없이 봤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가 봤을 때 그들이 걷는 그 길은 잘못된 길이다. 그리고 그렇게 잘못 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녀는 무작정 분노하기보다는 스스로를 가다듬는 쪽을 택했다.
“난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되고 싶으니까요.”
디딤돌의 마음가짐으로 고통을 깨닫고, 고통이 지나가는 과정을 여러 번 겪으면서도 맥없이 절망에 빠져 버리지 않은 것은 그녀가 가진 인간적 역량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힘은 평등과 박애로 무장되어 있는 어떤 의지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에 관한 얘기를 들으며 그러한 그녀의 박애 정신은 어쩌면 천성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는 1993년에 돌아가셨어요. 1922년에 태어나셔서 지주 집안도 아니고 가장 평범한 사람의 한 명으로서 대한민국의 가장 힘든 시기를 살다 가셨죠. 근검절약이 몸에 배신, 완전 보살이셨어요. 주변 사람들에게는 중심축과 같은 역할을 하셨죠. 김장철이 되면 김장을 엄청나게 해서는 어려운 동네에 갖다 주시곤 했죠.”
그녀는 자신이 어머니 나이가 되면서 느끼는 바가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어머니가 50대에도, 60대에도, 70대에도 여자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여자임을 포기하고 엄마로만 살다가 돌아가셨죠.”
그녀는 소위 엄마로서의 삶만을 강요당하는 것을 거부한다. 여기서 남궁옥분을 설명하는 단어가 또 떠올랐다. 바로 ‘자유’다. 스스로 원칙을 세우고 그를 단호히 지킴으로써 그녀는 자신만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앞서 그녀가 말한 새장이란 표현은 그녀가 추구하는 법도의 다른 말이기도 할 것이다.
항상 60이 되기를 기다렸다
남궁옥분은 그녀 스스로가 말하듯이 긍정적인 사람이다. 그런데 그녀가 말하는 긍정론은 극단적이고 무조건적인 행복을 강요하는 게 아니다. 대신 그녀는 “안 행복하다고 불행한 게 아니다”라고 말한다. “행복은 적을 수도 있는 것”이라는 의미다. 즉, 행복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많느냐 적느냐의 문제라는 것. 행복과 불행이라는 양 극단의 정의가 아닌 행복의 높낮이를 주시하는 그녀의 태도에는 삶을 관조하면서 보다 침착해진 사람의 시선이 담겨 있었다.
“얼마 전에는 가수 선배를 만나서 얘기를 할 일이 있었어요. 그러면서 우리 나이에 싫은 일에 굳이 시간을 갖지 말자고 결론을 내렸어요. 코드가 안 맞는 사람과 시작된 일은 뭔가 트러블이 생겨요. 그럼으로써 잃게 되는 게 있죠.”
남궁옥분은 60 이전이 인연법에 의한 삶이었다면 60 이후부터는 자신이 지난 60년 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의 모습이 보이는 출발선이라고 정의했다. 그 말을 증명하는 것처럼 그녀는 죽을 만큼 힘들었지만 멋지게 살아온 것에 자신을 기특하다고 여기며 바쁘게 살고 있었다. 윈드서핑과 볼링 등 운동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고 인터뷰가 끝난 다음에는 김해 공연과 라디오 출연, 봉사활동 등등의 스케줄이 꽉 차 있었다.
또한 그녀는 미술가로서도 활동하고 있었다. 개인전에 관한 제안은 꾸준히 들어오고 있는 중이다. 문필가로서의 능력을 살려 책을 집필하려는 계획도 있다. 그녀는 이 모든 것들을 아울러서 보다 복합적인 프로젝트를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200석 정도 되는 작은 공간에서 책과 전시, 공연을 합친 이벤트를 하고 싶다는 것이다. 60을 새로운 출발선이라고 정의한 사람답게 그녀의 머릿속은 창의적 시도들로 가득한 것처럼 보였다.
“지난 20년 전, 그러니까 40대부터는 정리를 해야 하는 법이죠. 사실 60에 의미를 두고 살아서 그런지 작년부터 뭔가 열매가 맺어지는 것처럼 느껴져요. 60만을 기다렸다고 사람들에게 얘기하고 다니고(웃음). 너무 행복하게 맞아들이고 있어요. 주변의 상황과 함께 할 때 시너지가 생기는 법인데 요즘이 그런 것 같아요.”
사유와 자기 성찰에 전념하다
여전히 무명인 가수 선후배들을 챙기는 남궁옥분은 자신의 그런 행동의 이유를 “힘이 되고 싶어서”라고 말한다. 그것은 자신이 아직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드러내는 증거이자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했다. 40대부터 60까지 열심히 치열하게 살아온 자신이 대견하고 사랑스럽다고 말하는 그녀는 자신의 삶의 보람에 대해 “돈보다 멋진 기억들을 얻었다”고 말한다.
“나에게 만족하는 삶, 그리고 타협을 허락하지 않는 삶이 제가 원하는 삶이에요. 천억 원을 준다 해도 불의와는 타협하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나를 가치 있게 만들고 싶어요.”
그녀는 죽음을 절대로 알리지 않고 떠날거라고 한다. 시간이 지나 오랫동안 보이지 않으면 사람들이 그녀를 ‘명예롭게 퇴진하는구나’는 정도의 말을 듣는 게 좋겠다고 담담하게 털어놓는다. 오래 지나지 않아 바로 발견하는 누군가가 ‘아무 소리 없이 떠났는데 이걸 해놨네?’라는 말을 하게 만드는 그런 삶. 딱 그 정도가 남궁옥분이라는 존재가 세상에게 가지고 있는 소박한 욕심이다. 그러나 그녀의 진실한 욕심보다는 크게, 아직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기억하고 그리워하고 있다.
자기 원칙과 소신과 기준이 있는, 그리고 여백을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 남궁옥분이 머지않아 60을 맞이하는 방법은 그렇게 단단하게 다잡고 있었다.
오늘도 그녀의 밴드 에는 행복한 것과 안 행복한 것에 기준을 아는 팬들은 그늘을 내어주는 그녀의 수다로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