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난 반전 혹은 거대한 진실과 마주한 느낌이었다. 수도 없이 오가던 길목이었지만 분명 미용실은 없었다. 옷가게, 카페, 떡볶이집, 구둣가게가 생겨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곳. 스마트폰이 가리키는 장소에 당도했지만 역시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요즘은 외국 나가서도 하지 않는 일을 끝내 하고 말았다. “혹시 장성미용실이…?” 길을 물었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 외국인 관광객 물결 속에서도 45년 한자리를 고목처럼 지키고 앉아 옛 손님을 기다리는 신삼순(64) 미용사를 만났다.
북적대는 핫 플레이스 옆 작은 미용실
사람 눈길 단번에 끄는 화려한 가게 숲 사이에 그 흔한 간판 하나 없는 미용실. 문을 열면 손님을 반기듯 석상과 화분이 놓인 좁은 복도가 펼쳐진다. 엘리스의 토끼 굴을 지나듯 그 길을 걸어 들어가면 과거로 이동한 듯 기분 묘한 미용실 안으로 인도된다.
“저는 벌교 출신이에요. 간판만 없지 이름은 장성미용실입니다. 1960년대에 여기서 미용실 했던 분이 장성 분이셨어요. 제가 뭘 그렇게 쉽게 바꾸는 성격이 아니라 그 이름 그대로 썼습니다. 지금은 오실 분만 미용실에 오세요. 그러니 간판은 사실 필요가 없어요.(웃음)”
손님은 하루 한 명, 두 명 정도가 딱 적당하다고 했다.
“지금도 멀리서도 손님들이 오시는데 친구들이랑 같이 오시는 분이 더러 있어요. 근데 여기가 자리도 좁고. 딱 한 사람만 하고 가면 그거로 끝이에요. 그래서 한번은 ‘댁만 오세요. 뭐 친구까지 모시고 오고 그래요’라고 말한 적도 있어요.”
머리카락 자르고, 파마 말고, 중화제 발라서, 파마 풀고 머리카락 감기는 전 과정을 혼자 하니 힘도 제법 든다. 파마, 커트, 고데 세 가지만 고집하는 이유다. 파마도 구불구불, 바글바글 말아주면 제대로 고객이 만족하는 파마가 된단다. 단골들만 알아서 미용실을 찾아오니 손님 맞춤 머리 스타일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된다. 가격도 꽤 저렴하다. 파마 3만 원, 고데 2만 원. 서울 중심지 파마 가격이 싸도 너무 싸다.
“따님들이 다른 미용실 가자고 해서 따라가 보면 가격만 비싸다고 하세요. 나이 잡수신 분들 그냥 빠글빠글 해드리면 되거든요.(웃음) 요즘 미용사들은 그걸 잘 못하잖아요. 또 파마가 오래가는 것도 싫어하고요. 다른 미용실 다녀온 손님들은 파마한 것 같지 않다고들 말씀하세요.”
가끔은 젊은 손님이 파마를 해달라고 전화를 걸어오기도 한다. 그런데 젊은 사람은 정중히 거절한다. 머리숱도 많고 키도 크고 게다가 뭘 해달라는 요구사항이 많기도 많다.
벌교 처녀 서울 입성과 고마운 인연
어린 시절 신삼순 씨가 미용 기능사 자격증을 따게 된 데는 양복기술자였던 아버지의영향이 컸다. 앞으로는 기술 있는 사람이 대우받는 세상이라며 기술을 강조하신 덕분에 지금까지도 미용사 고수 소리 들으며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는 셈이다.
“자격증은 고향에서 땄어요. 초창기 몇 달은 벌교에서 일하다가 1974년도 열아홉 됐을 때 서울로 올라왔어요. 당시 중앙동에서 먼 친척 언니가 미용실을 하고 있었어요. 거기서 한 3개월 있다가 여기 왔어요.”
직업 소개를 미용 재료상이 하던 때였다. 마침 친척 언니 미용실을 오가던 상인이 지금의 장성미용실을 소개해줬고 길고 긴 인연으로 이어졌다.
“여기 와서 굉장히 좋은 분을 만난 거죠. 그때도 종업원들이 적당히 일하면 나가게 하고 그랬는데 여기 사장님은 우리들을 끝까지 책임지던 그런 분이셨습니다. 제가 언니라고 부를 정도로 막역했고요. 저희 부모님과는 19년 살았지만 그분과는 26년을 함께 살았습니다. 그런데 쉰아홉 한창 나이에 돌아가셨어요. 저에게 이 미용실을 거의 주다시피 했습니다. 굉장히 귀중한 인연이에요. 저는 늘 언니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언니가 1996년도에 돌아가시면서도 저더러 일 많이 하지 말라고, 몸 챙기며 살라고 유언하시고 떠났어요. 언니가 나를 너무 반듯하게 잘 키워줬어요. 이곳에서 줄곧 일할 수 있는 힘을 주셨고요.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한 분, 한 분, 손님 친구 모십니다
긴 세월 같은 자리에서 스타일과 기분 한껏 살리는 머리 만지는 작업에 매진하다 보니 어느덧 60대 중반이 됐다. 손님들 또한 긴 세월 함께 길을 걸어준 고마운 동반자다. 취재 갔던 날에는 30년 단골이라는 이준자 씨가 와서 파마를 하고 있었다. 머리 모양이 마음에 쏙 들어 다른 사람에게 머리를 맡기는 일 없이 장성미용실을 찾는다. 짧은 머리카락이라 한 달에 한 번은 찾는다는 이준자 씨는 함께 밥도 먹고 절에도 같이 가는 친구 사이다.
“제일 나이 어린 손님이 50대, 주로 70대, 80대, 나이 많은 분은 내일모레 90. 우리 집에서 97세, 98세 어르신도 파마를 하셨죠. 두 분 다 작년, 재작년에 돌아가셨어요.”
새로운 손님을 만나기보다는 지금까지 함께 나이 들어가는 손님들 머리를 마지막까지 만져드릴 수만 있으면 하는 마음이다.
“여기 오시는 분들이 돈이 없어서 이곳에 오는 거 아닙니다. 아무래도 젊은 사람들 가는 미용실에 가면 불편하잖아요.”
신삼순 씨는 파마를 할 때 맨손으로 머리카락을 로드에 마는 일이 많다. 그만큼 순하고 좋은 파마 약을 쓴다고. 매무새도 흐트러짐 없다. 단정하게 빗은 올림머리에 봉선화 꽃으로 물들인 손톱. 미장원 대표의 포스를 한껏 자랑한다. 이 모든 것이 오랫동안 손님을 맞이하는 자세이자 배려다.
“하루에 한 분이 오시더라도 손님을 맞이할 때 긴장감이 있습니다. 아무리 오래된 손님이라도 말입니다. 파마를 해드릴 때는 정성이 들어가야죠. 오며 가며, 내가 여기 있으니까 지나다가 마음 편하게 들르십니다. 여기 이곳에서만 45년 세월인걸요.”
긴장을 늦추지 않으면서도 편안함을 유지하다니. 고수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일 듯싶다.
우정으로 쌓여간 파마 시간
원래는 지금보다 꽤 공간이 넓은 미용실이었다. 10여 년 전 50세가 넘더니 몸에 이곳저곳 고장이 나기 시작했다. 미용실을 접을 생각으로 매장을 세 줘버렸다. 일종의 정년퇴직이었다.
“환갑 지나면 손을 놓아야지 했어요. 형제들도 못하게 했고요. 뭣 하러 그렇게 이 좁은 데서 일하느냐 해서 안 하려고 했더니 손님들이 자꾸 오고 또 지금 이 공간이 놀고 있으니까 주변에서 미용실을 다시 열라고 했어요. 그렇게 10년을 또 했네요.”
돈을 많이 벌 생각은 전혀 없다. 몇 안 되는 단골손님 머리를 책임지는 것이 1순위다. 겨울에는 가스비, 여름에는 에어컨 사용료만 좀 벌면 그걸로 끝이란다.
“그런데 젊은 사람들은 해야 돼. 왜냐하면 앞이 창창하니까. 50대까지는, 55세까지는 나도 열심히 했으니까. 이 목숨이 다할 때까지는 열심히 살아야죠. 60대쯤 되면 욕심은 좀 내려놓고 그저 남한테 돈 안 빌리고 밥만 잘 먹고 살면 되잖아요.”
이 골동품상회 같은 미용실에는 지금도 여전히 잘 사용하고 있는 오래된 물건들이 많다. 구식 고데기에 파마 잘 나오게 도와주는 열 기계 장치, 파마 로드 등은 다른 미용실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옛것이다. 40여 년 전 물건 그대로이지만 여전히 잘 사용하고 있다.
“저거 고장 나면 나도 끝이여.(웃음)”
기계가 망가지면 그 무거운 것을 들고 전파상 즐비한 세운상가에 가서 고쳐오곤 했다. 그런데 이제는 오래된 기계를 수리해주던 기술자를 찾는 게 예전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웃으면서도 애잔함이 전해진다. “칠십이 될 때까지도 파마를 계속 말고 있을 거 같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때까지 이걸 붙들고 있겄어?(웃음) 아직 4년 남았네요. 손님도 많지 않고 그때 가봐서 생각해야지 않을까요?”
그때도 고운 모습 그대로 웃음으로 손님을 맞이하는 미용 고수 신삼순 씨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요즘 먹방이 유행이다. TV 채널 어디를 돌려도 먹거리 방송이 빠지질 않는다. ‘맛집’으로 소문이라도 나면 줄이 길게 늘어서고 손님들이 몰려든다. 사람들이 먹거리에 대해 그만큼 관심이 많다는 증거다. 유명한 맛집 골목은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남산기슭 장충동 족발집이 유명하다 보니 저마다 ‘원조 할머니 족발집’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다. 신당동에 가면 ‘떡볶이’ 골목이 있고, 의정부에 가면 부대찌개 골목이 있다. 제주도에는 ‘흑돼지’가 유명하다. 전국 어디든 같은 현상이다.
그런데 줄 서는 집은 따로 있다. 바로 원조집이다. 몇십 분씩 기다리는 건 예사다. 어떤 때는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할 때도 있다. 옆에 같은 종류의 음식을 하는 식당이 있어도 그렇다. 나머지 식당들은 대부분 썰렁하다. 먹어보면 맛과 가격에서 그리 큰 차이가 없는데도 그렇다. 한 집은 잔칫집처럼 손님이 넘쳐나고 다른 집은 속된 말로 파리를 날린다. 손님이 없는 식당 주인은 TV를 보고 있다. 왠지 사람들이 줄 서 있는 식당에 가서 먹어야 잘 먹은 것 같고 그렇지 않은 집에서 먹으면 손해 보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기다리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붐비지 않는 식당이 서비스도 더 좋고 분위기가 쾌적하기까지 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잘되는 식당으로만 몰린다. 하도 사람이 많아 2호점 3호점을 내는 식당도 있다. 가족이 체인점 식으로 운영하기도 한다. 점포를 하나 더 내는 것은 전쟁터로 뛰어드는 일이다. 누군가는 살고 누군가는 죽는 일이다. 보이지 않는 싸움터, 약육강식의 현장이다.
이러한 싸움터에 아름다운 미담이 전해지고 있다. 일본 소설가 ‘미우라 아야코’의 이야기다. 그는 남편과 작은 점포 하나를 운영했다. 장사가 아주 잘됐다. 점포를 키워도 밀려드는 주문 때문에 트럭으로 물건을 공급할 정도였다. 매출이 쑥쑥 올라 부자가 되는 건 시간 문제였다. 반면 옆집 점포는 파리를 날렸다. 그러던 어느 날 미우라는 남편에게 솔직한 심정을 터놓았다.
“우리 가게는 너무 잘되는데 옆집 가게는 문을 닫을 지경이에요. 이건 우리가 바라는 바도 아니고 하느님 뜻도 아닌 것 같아요.”
남편은 아내가 자랑스러웠다. 부부는 가게를 축소하기로 했다. 손님이 오면 이웃 가게로 보내줬다. 적당한 수의 손님만 받다 보니 시간이 여유로웠다. 미우라는 남는 시간을 평소 하고 싶었던 글쓰기를 하며 보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소설이 ‘빙점’이다. 그녀는 그 소설을 통해 가게에서 번 돈보다 몇백 배 넘는 부와 명예를 얻었다.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작은 배려가 부부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여유와 배려가 있을 때 우리가 사는 세상이 따뜻해진다. 요즘 많은 사람이 힘들어한다. 뭘 해도 먹고살기가 어렵다고들 한다. 창업을 했다가 접게 되면 그 피해는 막대하다. 잘못하면 다시 일어서지 못할 정도로 빚에 쪼들리기도 한다. 이럴 때 이웃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다면 살맛나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 우리 가게에 손님이 넘치면 옆집 가게를 소개하는 배려심이 있으면 좋겠다. 잘되는 식당만 고집하지 말고 한 번쯤은 옆집 식당도 찾아주자. 이 추운 겨울, 가난한 이웃에게 배려의 마음이 따뜻한 온기로 전해지길 바라면서.
우리나라는 내가 아직 가보지 못한 아름다운 비경이나 이름나지 않은 멋진 곳이 아주 많다. 친구와 여행했던 한 곳은 깨끗하고 조용한 환경이 파괴될까 봐 남에게 알려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이기적인 이야기를 하며 웃은 적도 있다. 요즘엔 각 지자체에서 자기 고장을 알리려는 목적으로 축제나 행사에 초청하는 일이 많다. 그저 관광만이 목적이 아닌, 그 지방의 특색이나 역사까지 알게 된다면 다녀온 보람을 더욱 커질 것이다.
얼마 전 서산의 철새도래지인 천수만에 다녀왔다. 충남 서산에는 찾아볼 만한 유적이나 유명한 맛집이 많았다. 먼저 해미읍성을 돌아보았다. 지금은 깔끔하게 단장되어 그 지방 사람들이 소풍하러 나오는 멋진 장소가 되었지만, 조선 흥선대원군 시절에는 천주교 박해의 현장이었다니 가슴이 아팠다. 푸르게 펼쳐진 읍성 안에는 조선 시대 사용했던 신기전 기화차와 화포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재미있는 포즈로 각 문을 지키고 있는 포졸 인형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근처에는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드라마 촬영 장소인 유명 떡볶이집도 있어 많은 관광객이 찾아온다고 한다. 어느 음식 평론가가 죽기 전에 맛봐야 할 음식으로 서산의 영양 굴밥을 꼽기도 했다니 한 번쯤 찾아가 맛보는 것도 좋겠다.
서산의 여러 곳을 돌아보았지만 가장 기억에 남은 곳은 천수만의 철새 도래지 ‘버드랜드’다.
‘버드랜드’는 세계적인 철새도래지로 유명한 서산 천수만을 체계적으로 보전 관리하고 체험과 교육 중심의 생태관광 활성화에 주력하고자 조성된 철새 생태공원이다. 천수만으로 철새들이 무리 지어 찾아온다니 자랑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환경을 잘 보전해 언제나 철새들이 이곳을 찾아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조류 해설사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으며 둘러 본 박물관 안은 새의 자취로 가득했다. 벽면에 전시된 수많은 박제 새들을 보고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엔 총으로 잡아서 박제했지만, 요즘엔 자연사한 새를 박제해 전시한다는 해설사의 이야기에 그나마 좀 안심했다.
이어 관람한 4D 영상은 정말 신나고 재미있었다. 이전에 극장에서 3D 영화를 봤을 때 바로 눈앞에 영상이 다가오니 마치 영화 속 인물이 된 듯 즐거웠는데, 4D는 실제로 하늘을 나는 느낌이 들었다. 위험한 동물이 진짜 나를 집어삼킬 듯 다가왔고, 물이 튕기는 장면에선 실제로 우리에게 물이 뿌려졌으며, 산들바람은 부드럽게 또는 세차게 직접 몸에 닿아서 신기하고 즐거웠다. 4D 영화에서는 향기가 나는 장면이면 실제로 관객이 향기를 맡을 수도 있다고 한다. 요즘 젊은이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VR 체험이나 4D 영상이 왜 인기 있는지 체감할 수 있었다.
이날 본 영상은 어미 잃은 뜸부기를 꿩이 거두지만 철새인 뜸부기는 언젠가는 제 엄마를 떠나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래도 겨울나기로 떠났던 아기뜸부기는 철마다 천수만으로 꿩 엄마를 찾아온다는 내용이 콧날이 시큰할 정도로 아름답고 감동적 작품이었다. 또, 아이들에게는 철새에 대한 좋은 교육이 될 것이니 많은 이가 찾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드랜드’의 전망대 망원경을 통해 천수만의 너른 철새도래지를 살펴보는 재미도 있고, 옆쪽으로 숲과 예쁜 꽃이 아름답게 피어 있는 모습도 참 보기 좋았다. 영상으로 본 것처럼 이곳의 철새들은 겨울이면 따뜻한 곳을 찾아 떠났다가 이듬해 다시 고향처럼 이곳으로 돌아온다. 이렇게 새에게 좋은 환경을 망치지 말고 잘 보존해서 꼭 다시 찾아와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휴일에 가족끼리 또는 손자손녀를 데리고 ‘버드랜드’를 찾아가 보자. 교육과 소풍의 즐거움이 배가될 것이다.
지인들과 당구를 치고 나서 음식점에 들어갔는데 메인 메뉴 옆에 사리 종류가 있었다. ‘우동 사리’, ‘라면 사리’, ‘만두 사리’, ‘야채 사리’, 등이었다. 큰돈은 아니지만 돈을 더 내게 되어 있었다.
사리는 냉면 먹을 때 면만 추가로 더 주문할 때 사용했던 단어인데 만두 사리, 야채 사리는 맞지 않는 용법이 아닌가 해서 논란이 분분했다. 어떤 사람은 ‘사리’가 일본어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래서 스마트 폰 검색으로 사전을 찾아 봤다. 사리에 너무나 많은 뜻이 있어 그 자리에서는 포기했다. 사물의 이치나 일의 도리를 뜻하는 ‘사리(事理)’, 시신을 화장한 뼈를 뜻하는 ‘사리(舍利)’, 매달 음력 보름과 그믐날, 조수가 가장 많이 밀려오는 때를 얘기하는 순수 우리말 ‘사리’, 사적인 이익을 뜻하는 ‘사리(私利)’, 허리 부분이 노출되는 인도식 복장인 ‘사리’, 등 뜻이 정말 많았다.
우리가 찾고자 하는 ‘사리’는 일본어도 아니고 순수 우리말 ‘사리’였다. ‘떡볶이나 냉면 따위의 기본 음식 위에 덧얹어 먹는, 국수나 라면 따위의 부가 음식’이라는 해설이 있었다. 그러므로 만두 사리, 야채 사리도 부가 음식의 개념으로는 틀린 용어는 아닌 것이다.
당구 칠 때 큐가 미끄러지는 ‘픽사리’도 있다. 신중하게 겨누었는데 스트로크할 때 큐가 미끄러지면 김이 빠진다. 스트로크가 직선이 아니거나, 탭에 초크 칠 하는 것을 소홀히 했거나, 지나치게 당점을 공의 바깥쪽에 두다 보면 미끄러져 생기는 현상이다. 공을 치고 나서 안 맞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공을 제대로 맞추지도 못하고 미수에 그쳤으니 허무한 일이다. 그냥 당구인들끼리 사용하는 속어인줄 알았는데 엄연히 국어사전에 들어 가 있다. 순화 용어로 ‘헛 치기’라고 제시했는데 우리는 ‘픽사리’가 더 친숙하다.
노래를 부를 때 흔히 고음에서 음정이 어긋나거나 잡소리가 섞이는 경우를 통속적으로 이르는 말인 ‘삑사리’도 있다. 그래서 노래방에 가면 여자가수가 부른 노래는 남자 음정으로 맞추어서 불러야 하고, 같은 남자 가수 노래라도 원래 가수가 고음인 경우에는 자기 목소리에 맞게 음정을 몇 터치 낮춰서 부르는 것이 삑사리를 피하는 요령이다.
‘몸을 사린다’는 뜻도 있다. 어떠한 일에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고 살살 피하며 아낄 때 쓰는 말이다. 당구 칠 때 자기 점수대로 놓지 않고 낮춰서 치는 사람도 몸을 사리는 축에 들어간다. 실수하면 상대방에게 치기 좋은 공을 줄까봐 소극적으로 플레이 하는 사람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그날 우리는 2차로 노래방까지 갔다. 당구장에서 픽사리, 음식점에서 라면 사리, 노래방에서 삑사리까지 여러 가지 사리를 경험한 셈이다. 더 이상 돈 버는 데 혈안이 될 필요가 없으니 ‘사리(私利)를 탐하지 말자고 했다. 모두 장례는 화장을 원하고 있으므로 그때는 사리(舍利)를 남길 것이다.
필자가 사는 동네 후미진 곳에 일본식 선술집이 하나 생겼다. 도무지 장사가 될 것 같지 않은 상권에 자리 잡은 것이다. 안에 들어가 보니 4인용 테이블 2개에 주방과 바로 마주보고 앉는 1인용 의자 4개가 전부였다. 젊은 사장이 주방 일을 겸하고 있었다. 메뉴도 일식집에 가면 최하 3만 원 이상 줘야 하는 메뉴 대신 1만 원 대 메뉴가 주류이고 주인이 알아서 내 놓은 모듬회가 그날의 메인 메뉴로 2만원이었다. 동네 구석진 곳인데다. 외관도 허름해서 처음에는 손님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몇 안 되는 손님들끼리 얼굴이 익다 보니 말도 섞는 재미가 있었다. 주로 혼자 오는 동네 젊은 사람들이었다. 처음에는 주인에게 블로거 명함을 줬더니 인터넷에 소문 좀 내달라며 특별대우도 받았다. 그때 다른 손님들이 반대 의견을 냈다. 알려지고 나면 정작 동네 단골손님들이 밀려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우리끼리 속닥하게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과연 필자가 오랜만에 귀가 길에 들러 보니 자리가 없었다. 그날 만 그런 것도 아니고 빈자리가 있는 날은 행운이라도 잡은 것 같았다. 핫(HOT)한 장소가 된 것이다. 예약도 안 받고 4인 이상 손님은 받지도 않았다. 테이블이 4인용이라 다른 테이블 의자를 이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한 팀이 단체로 오면 시끄럽다는 것이다. 한 사람 씩 오면 조용하게 즐기고 갈 수 있다. 여러 사람이 단체로 오는 것보다 한 사람이 오면 회전도 빠르다는 것이다.
얼마 전 지인들과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다. 서울에서 미리 유명한 맛집들을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끼니 때 마다 순례하기로 했었다. 그런데 제주도에 사는 지인을 만나 리스트를 보여 주니 대부분 만류했다. 비싸기만 하고 맛도 고만고만하다는 것이었다. 손님이 넘치니 친절도도 떨어졌다. 그래서 제주도 지인을 통해 잘 알려지지 않은 맛집들을 소개 받았다. 전통 시장에 있는 간판 없는 음식점도 포함되어 있었다.
몇 해 전 필자의 자서전을 만들어준 대학생들이 있다. 그 당시 10여 차례 만나며 그때마다 필자가 아는 맛집들에 데려 갔었다. 단가가 좀 비싼 음식점도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 다시 만나니 그때 유명 음식점들은 기억을 못하고 이름 없는 음식점들만 기억하고 있었다. 양재시장 골목의 실내 포장마차 갈치 찜, 낙원동 골목의 아귀찜, 신당동 떡볶이 집이 특히 좋았다는 것이다.
SNS가 발달 하면서 사람들은 인증 샷을 좋아한다. ‘선찍 후식’이라고 음식이 나오면 사진부터 찍고 나중에 먹는다. 그걸 모르고 음식이 나오자마자 젓가락을 댔다가는 음식 모양이 망가지므로 비난을 한 몸에 받아야 한다. 이런 행위는 “나는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 또는 이런 숨은 맛집을 알고 있다”는 ‘자랑질’ 심리이다.
사람들은 이제 방송에 나왔다는 유명 음식점은 기피하는 풍조도 있다. 어지간한 음식점들은 방송 출연 장면을 사진으로 내걸고 영업하는 곳도 많다. 여러 곳에 있는 프랜차이즈 점인데 마치 자기네 집에서 촬영한 것인 양 눈속임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가서 맛을 보니 손님이 많아 복잡하기만 하고 맛도 그저 그랬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옆집에 간다. 혐핫 신드롬이다. 그래서 어느 음식점은 “TV에 한 번도 안 나온 집‘이라는 플래카드를 밖에 붙인 곳도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다.
세상 모든 길에 사람이 지나다닌다. 이들 중에는 길과의 추억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있다. 추억이란 살아온 시간, 함께했던 사람, 그날의 날씨와 감정이 잘 섞이고 버무려져 예쁘게 포장된 것이다. 박미령 동년기자와 함께 오래전 기억과 감정을 더듬으며 종로 길을 걸었다. 흑백사진 속 전차가 살아나고 서울시민회관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다. 그리고 행복한 발견. 감동이 잔잔히 밀려왔다.
경복궁에서 스케이트 타던 시절이 있었어요!
서울시 종로구 당주동에서 태어난 박미령 동년기자는 대학 시절을 넘어 결혼 전까지 종로에서 산 토박이다. 세종문화회관 전신인 서울시민회관 계단이 놀이터였고, 중학생이 돼서는 경복궁과 인왕산 활터가 주 무대였다.
“인왕산에 활터가 있어요. 활터 아저씨들이랑 얘기하고 맛있는 것을 주시면 먹기도 했어요. 경복궁은 젊었을 때 너무 많이 왔어요. 경회루 연못이 얼면 그곳에서 스케이트를 탔어요. 그때는 뭣도 모르고 탔죠. 스케이트 날을 가는 아저씨와 스케이트 빌려주는 아저씨가 저기 경회루 계단 아래 앉아 있었어요.”
현재를 사는 젊은이에게는 상상이 되지 않는다. 경복궁은 문화재청이 엄격하게 관리하는 문화재다. 취재 당일에도 문화재청에 경회루 사진촬영허가신청서를 냈다. 스케이트를 탔다는 말이 그저 충격이었다.
“창경원에서 보트도 탔는걸요. 밤벚꽃놀이도 하고요.”
이 부분에 있어 옛 추억으로 그냥 넘어가기에 씁쓸함이 앞선다. 일제강점기 창경궁은 창경원으로 불렸다. 궁 안에 동물원과 식물원 등 놀이시설이 들어섰다.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벚꽃 수천 그루를 심어 놓고 밤벚꽃놀이를 즐겼다. 왕이 사는 궁궐의 의미를 상실한 시대를 지나야만 했다. 경복궁 내에 세워졌던 조선총독부 건물은 1996년 철거됐고, 창경원으로 불리던 창경궁은 1983년 원래 명칭으로 환원하였다. 시니어의 추억은 안타깝게도 일제강점기 잔인한 역사와 함께한다는 생각이 들어 꼭 낭만적이지만은 않았다.
아버지와 아침식사, 금천교시장 기름떡볶이
1960년대, 박미령 동년기자가 초등학생이던 시절 서울시민회관 옆 길가에는 중국인이 직접 운영하는 중화요리집이 있었다. 아침잠이 없는 아버지는 아침잠이 많은 어머니를 깨우지 않고 박미령 동년기자를 데리고 그곳으로 아침식사를 하러 가곤 했다.
“중국 사람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먹고 부인 먹을 것을 싸들고 온답니다. 아버지가 그러셨어요. 근데 거기서 먹었던 콩국이 정말 맛있었어요. 콩국에 찹쌀튀김을 잘라 넣은 것인데 시리얼 같다고 생각했어요. 지금도 가끔 생각이 나서 중국여행 가면 찾아는 보는데 딱 그 음식 맛이 나는 걸 아직은 못 먹어봤어요.”
함경도 출신인 박미령 동년기자의 아버지는 혈혈단신 남한으로 내려왔다. 이북 사람들은 의식주 중에 먹는 것을 가장 최고로 친다고 한다. 그래서 음식 솜씨가 좋은 외할머니와 아버지가 여느 모자 못지않게 친했다. 그리고 기름떡볶이에 대한 추억도 나눠주었다.
“어렸을 때 먹었던 기름떡볶이에 대한 기억이 많아요. 떡볶이가 먹고 싶어서 엄마 따라 시장에 갔습니다. 제 기억에 떡볶이는 빨간 떡볶이가 아니고 기름에 바짝 구운 떡볶이예요.”
박미령 동년기자의 말에 곧장 기름떡볶이를 파는 통인시장으로 향했다. 사실 박미령 동년기자가 말한 기름떡볶이는 통인시장에서 파는 것이 아니다. 경복궁역 2번 출구, 금천교시장에서 기름떡볶이를 팔던 故 김정연 할머니(향년 98세)의 떡볶이다. 북에서 홀로 남한으로 내려온 김 할머니는 평생 모은 재산을 기부하고 돌아가셨다.
“김 할머니는 간장으로 간을 한 기름떡볶이만 했어요. 금천교시장 할머니가 원조죠. 할머니는 곤로에다 무쇠솥 하나 올리고는 낚시의자에 앉아 떡볶이를 만드셨어요. 할머니 앞에 손님들이 빙 둘러앉으면 ‘몇 개 줄까?’ 하고 물어보셨어요. 겉을 바삭하게 무쇠솥에 지져서 구워주셨는데 정말 맛있었어요. 어렸을 때 그 기름떡볶이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정신여고 회화나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통인시장에서 택시를 타고 박미령 동년기자의 모교인 정신여고가 있던 종로구 연지동 옛터를 찾아갔다. 명성왕후의 주치의이자 선교사였던 애니 엘러스 벙커(Annie Ellers Bunker)가 1887년 중구 정동에 설립한 정신여고는 1895년 종로구 연지동으로 교정을 옮겼다. 1978년 지금의 교정인 잠실로 이전하기 전까지 깊은 역사의 흔적이 쌓인 곳이 연지동 교정 터다. 이곳에서 박미령 동년기자는 여중·여고 시절을 보냈다.
“버스를 타고 지나는 다녀봤지만 내려서 학교 쪽을 가본 적은 없어요. 종로5가 뒤쪽 대학로로 가는 중간에 있어요. 종로통을 잇는 전차를 이용해 통학했는데 종로4가에 내려서 학교로 걸어갔어요.”
지금 생각해도 학교 시설이 너무 좋았다고 회고했다. 수세식 화장실에 라디에이터 난방을 했다. 기숙사에는 침대가 설치돼 있는 등 당시에는 최고 시설을 갖춘 서양식 학교였다. 예쁜 교정이 그립지만 정신여고 옛터에는 본관과 기숙사로 사용됐던 세브란스관만 남아 있다. 현재는 다양한 기업체들이 상주해 과거 교실을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옛 모습 그대로 사용하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기도 하다.
“우리 저기 뒤쪽으로 가보면 안 될까요? 교정이 남아 있는 것 같아요.”
과거 정신여고 부지를 사들였다는 보험회사 건물과 남아 있는 정신여고 본관 건물 사이에 조성된 녹지공원이 보였다. 그곳에 가보니 정신여교의 교목인 회화나무가 그대로 서 있었다.
“우리 학교 교목이에요. 옆에 건물도 보니 우리 학교 건물이 맞아요. 건물 사이를 이어주는 구름 다리도 기억나고요. 제가 찾아올 줄 알았겠어요? 나무를 찾아서 너무 좋아요.”
정신여고의 교목인 회화나무는 독립운동을 함께한 고마운 나무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애국부인회의 출발점인 정신여고가 일본 관헌의 수색을 받았을 때 비밀문서와 태극기, 국사책 등을 고목의 구멍에 숨겨 보존할 수 있었다. 걸어 다니기 힘들 정도로 뜨거운 날에 만나 시원한 바람으로 마무리한 멋진 데이트였다. 한 사람의 역사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였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종로의 작은 틈, 작은 돌 하나에도 우리의 역사와 추억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활동하는 모임에서 회의 후에 자주 가는 식당이 있다. 부부가 운영하는 아주 작은 규모의 식당이다. 오늘도 전체 회의가 끝난 후 회원들과 함께 가서 여러 메뉴를 주문했다. 김밥, 칼국수, 냉면, 떡볶이 등이 정성스럽게 요리되어 나왔다.
이 식당은 화려한 식당도 아니고 큰길에서 보면 보이지도 않는데 사람들이 골목까지 찾아들어가 먹는다. 오늘은 아줌마 혼자 열심히 김밥을 말고 있었다.
“아저씨는 어디 가셨기에 혼자 일하셔요?”
필자가 물으니 옆에 있던 한 회원이 옆구리를 쿡 찌른다. 마치 드라마에서나 있는 일처럼 어느 날 아저씨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사람의 운명이 참 별것 아닌 거라는 생각이 든다. 필자도 어느 날 잠자듯 이 세상을 떠날 수도 있다. 어차피 누구나 한 번은 가는 길이다. 그러므로 좋은 일도 자주 하고 주변 사람에게 더 따뜻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더 중요한 게 있다. 언제 이 세상을 떠나도 여한이 없도록 자신만을 위한 ‘맞춤의 삶’이 필요하다. 봉사와 일, 재능기부는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된다.
나이가 들수록 나만을 위해 하고 싶은 게 많아진다.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들어도 상관하지 말자는 다짐도 해본다. 그동안 예쁜 옷을 보면 가격 때문에 만지작거리기만 하고 못 살 때가 많았는데 이제는 그러지 않고 모양도 내볼 생각이다. 관절 상태가 안 좋으니 계단이 무서운 날은 택시도 탈 것이다.
필자는 거의 다 쓴 립스틱도 솔로 파서 끝까지 알뜰하게 사용한다. 그런데 어느 날 생각해보니 필자가 세상 떠난 뒤 아들이 필자가 쓰던 화장대 립스틱을 보고 가슴이 미어질 것 같다. 그래서 이제는 아까운 마음이 들어도 초라해 보이는 물건들은 다 버리려고 한다. 아들 가슴 미어지게 하고 싶지 않아서다.
서랍도 열어보고 옷장도 열어본다. 버릴 것은 버리고, 사람에 대한 미련도 일에 대한 욕심도 없애겠다. 최선을 다하되 결과가 좋지 않아도 아쉬워하지 않겠다. 인생의 시계는 결국 종료된다. 언제 인생이 끝났다는 벨이 울릴지 모른다.
아들 둘을 장가보내고 나니 청지기의 사명이 떠오른다. 자식에게 부모가 필요한 시기는 학교 교육이 끝날 때까지라고 한다. 동감한다. 환갑 이후 다시 세상에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새 인생 살아가려고 매일 남편에게 희망을 주고 위로도 하고 격려도 아끼지 않는다. 그러면서 나만을 위한 삶을 살겠다는 마음도 잃지 않는다.
딸이 밤늦게 돌아오는 날이 많아졌다. 연애를 하고 있는 게 티가 났다. 말갛던 얼굴은 피곤해 보였지만 늘 환히 웃고 있었고 발걸음도 달 떠 있었기 때문에 쉽게 눈치 챌 수 있었다. 필자와 눈이 마주치면 커다란 꽃다발을 삐쭉 내밀어 보이고는 자기 방으로 냉큼 들어가 버렸다.
하루가 멀다 하고 꽃다발을 들고 들어왔다. 은은한 핑크빛 장미나 카네이션 혹은 이름을 댈 수 없는 새로운 종류의 꽃들이 고급스런 포장지에 쌓여있었다. 한 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꽃들이었다. ‘첫만남’ ‘꽃향기처럼 달콤한 사랑을 원해’ ‘100일’ 꽃다발에 담겨있을 의미를 혼자서 상상해 보다가 남편과 데이트 하던 때가 떠올랐다
남편은 만날 때 마다 책을 선물했다. 책들은 충무서적이라는 글자가 수없이 새겨진 포장지에 쌓여있었다. 남편이 서점에 들어가 이청준의 책을 고르는 장면에 감사하면서 300원 짜리 삼중당 문고로만 가득하던 가난한 책꽂이를 채워 나갔다.
키다리 아저씨 같던 남편은 무엇이든 주려고 했다. 월급날이면 백화점에서 리바이스 청바지를 사고, 명동거리를 거닐며 탠디나 소다 같은 구둣방을 기웃거렸다. 대학생이던 필자는 더 이상 떡볶이나 만두를 먹지 않아도 되고, 서점에 가서도 돈 걱정 없이 서 너 권의 책을 고를 수 있는 남편과의 데이트가 행복했다. 시계가 없는 내 손목에 일제 시계를 채워준 것도, 텅 빈 지갑에 빳빳한 수표를 꽂아 준 것도 남편이었다. 그러나 남편은 필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참 쉬운 방법을 모르는 듯 했다.
“나도 꽃다발 받아보고 싶은데~”
하고 투정을 부리면 남편은
“고기 사줄게”
하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세상 모든 것을 내게 주려 애썼던 남편이었지만 꽃 선물은 어색해 했다. 그런 탓에 풍성한 꽃다발을 안은 여자가 세상에서 가장 부러웠다. 결국 꽃다발 한번 받아보지 못한 채 결혼하게 되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 그 조차 잊고 살았다.
딸이 꽃다발을 받아오면 필자는 아름다운 꽃들의 싱싱함을 하루라도 더 유지하기 위해 분주해졌다. 포장지를 풀어 알맞은 크기의 화병을 골라 꽃을 꽂았다. 싱싱함을 잃기 시작하면 종류대로 분류해 말렸다. 잘 마른 꽃을 다시 화병에 꽂는 것도 온전히 필자 몫이었다.
‘500일 추억이 당신과 함께여서 감사하고 행복해요’ 라는 메모가 담긴 어여쁜 꽃을 받은 딸은 이제 곧 결혼한다. 하늘에서 내려온 축복 같은 사랑 앞에서 세상은 얼마나 아름답고 찬란할지, 그들에게 세상은 꽃이고, 꽃은 향기로운 사랑일 것이다. 필자는 그 향기롭고 아름다운 사랑을 응원한다.
아름다운 한 송이의 커다란 꽃처럼
세계는 향기롭고 찬란하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한때 “칼질하러 가자”고 하면 그날은 ‘경양식집에 가서 돈가스 먹는 날’이었다. 요즘은 도시락 반찬이나 분식 정도로 생각하는 음식이 돼버렸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좋은 날 귀하게 먹던 고급 외식 메뉴였다. 멋스럽게 차려입고 나가 돈가스를 썰며 기분을 내던 그 시절의 추억을 재현한 맛집 ‘모단걸응접실’을 찾아갔다.
‘모단걸응접실’은 그 이름에서부터 독특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조선 후기 ‘모단걸’이라 불렸던 신여성들이 서양문물을 즐기던 고급 살롱을 모티브로 했다. 가게 입구에는 ‘우린 내일 큰일을 할 거잖아요. 오늘 꼭 만나요. 그때 먹었던 음식과 술을 준비할게요. 기다릴게요’라는 문구가 보인다. 비장함마저 느껴지는 이 메시지를 읽고, 지하 계단을 내려가다 보면 비밀스러운 아지트로 향하는 듯한 오묘한 기분마저 든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면 강렬한 청록색 벽과 체스 무늬 바닥, 고풍스러운 샹들리에, 그리고 앤티크한 소파와 테이블이 앙상블을 이룬다. 예스럽지만 세련된 경양식집 특유의 매력이 잘 드러나는 공간이다.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와 더불어 테이블마다 놓인 와인 잔과 포크·나이프·스푼이 돈가스의 품위를 더한다. 왕돈가스를 비롯해 함박스테이크나 비후가스 등 메인 메뉴를 주문하면 식전 빵과 수프가 나온다. “빵으로 드릴까요? 밥으로 드릴까요?”라는 정겨운 멘트는 들을 수 없지만, 빵과 밥 모두 즐길 수 있다(밥은 메인 메뉴와 함께 제공). 후춧가루를 톡톡 뿌려 나온 따뜻한 수프에 빵을 곁들여 먹어도 좋지만, 이곳에서는 더 특별하게 즐길 수 있다. 채 썬 양배추에 마요네즈와 케첩을 버무려 만든 옛날식 샐러드, 일명 사라다가 함께 나오기 때문이다. 모닝빵을 반으로 갈라 사라다로 속을 채우면 추억의 사라다빵으로 즐길 수 있다.
메인 메뉴 옛날 왕돈가스(9500원)는 김치와 단무지가 함께 차려진다. 최신식 패밀리레스토랑에서는 보기 힘든 경양식집만의 독특한 구성이다. 케첩 뿌린 반달 모양 감자튀김과 흰쌀밥은 돈가스와 한 그릇에 담긴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투박한 차림에 더욱 정감이 간다. 새로운 조리법을 쓰는 것보다는 추억의 맛에 초점을 맞췄다. 돈가스 1인분에는 국내산 최상급 돼지 등심 250g이 사용된다. 질 좋은 재료로 만든 든든한 돈가스 한 접시는 예나 지금이나 훌륭한 외식 메뉴로 사랑받고 있다.
돈가스와 함께 경양식 대표 메뉴로 손꼽히는 오리지널 함박스테이크(1만2000원)를 찾는 이들도 많다. 진한 갈색 데미글라스 소스 위에 노란 반숙 달걀을 덮은 도톰한 함박스테이크가 입맛과 눈길을 사로잡는다. 돈가스와 함박스테이크가 함께 나오는 모단걸 세트(4만8000원)와 모단보이 세트(3만6000원)는 샐러드와 음료까지 즐길 수 있는 실속 구성이다. 음료 대신 1만2000원만 추가하면 와인 1병으로 변경할 수 있다. 분위기를 내고 싶은 날, 와인 한잔하며 여유롭게 식사하는 것은 어떨까? 식사보다는 알코올 위주로 즐기고 싶다면 바(bar) 자리를 추천한다. 높은 바 의자에 앉으면 사뭇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와인을 비롯한 맥주, 보드카, 위스키, 칵테일 등 다양한 주류를 판매하고 있다. 아이들과 함께 가게 된다면 치즈 왕돈가스(1만1000원), 카르보나라 함박파스타(1만9000원), 고르곤졸라 버섯 크림 떡볶이(1만6000원) 등 퓨전 메뉴를 즐겨보는 것도 좋겠다.
주소 (샤로수길점) 서울시 관악구 관악로 14길 11 (가로수길점) 서울 강남구 신사동 539-1
모단걸응접실은 샤로수길점과 가로수길점 두 곳에서 운영 중이며, 실내 인테리어와 분위기, 메뉴는 동일하다.
요즘은 지방에서도 축제가 많이 열리고 전통시장도 많다. 필자는 직업상 지방 행사나 축제를 많이 다니는데 이런 행사를 보면서 나름대로 내린 결론이 있다. 어디를 가나 별 차이가 없고 재미도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행사 관계자들이 관광객보다 더 많은 경우도 있다.
언제부터인가 아내는 두물머리 인근 강변에서 열리는 무슨 마켓이 좋다면서 같이 가자고 채근했다. 뭐가 특별하냐고 물었더니 고구마튀김이 특별해서 꼭 그곳에서 사와야 한단다. ‘아니 얼마나 형편없는 마켓이면 고구마튀김이 특별하지?’ 하며 아내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튀김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서 흥미도 없었고 귀찮기도 했다. 그러나 아내는 주기적으로 고구마튀김 이야기를 하면서 압박을 해왔다. 쇼핑의 여왕인 아내가 고구마튀김에 집착하는 것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생각을 바꿨다. 집에서 그리 멀지도 않은데 계속 버티는 건 거의 자폭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토요일, 필자와 아내는 차를 몰았다. 그러나 양평 방향으로 나가는 차량들이 팔당 댐 훨씬 이전부터 밀려 있었다. 구불구불한 구도로로 나가봐도 마찬가지였다. 차를 홱 돌려버리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참고 후환을 걱정하며 버티고 또 버텼다. 평소 30~40분이면 될 거리를 두 시간이 더 걸려서 도착했다. 오전인데도 강변의 넓은 주차장에는 차가 빼곡했다. 북한강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는 강변에는 텐트가 두 줄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그런데 처음 마주친 사인 판이 멋졌다. 목재로 만든 사인 판에 정감이 가는 글씨체로 마켓을 소개하는 글이 써져 있었다. 디자인에 예민한 필자의 눈에 당연히 그 사인 판이 들어왔다. 첫 번째 마켓은 풋고추, 애호박, 버섯, 피망 등을 진열해두었는데 디스플레이가 아주 예술적이었다. 나무판에 연두색 페인트를 바르고 가게 이름을 멋지게 쓴 게 보였다. 필자는 첫 번째 가게에서 이미 마음을 빼앗겼다.
산책로를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는 텐트 가게가 죽 늘어서 있었다. 농민들이 직접 재배한 각종 농산물, 식품, 도자기, 목공예품, 천연염색 의류, 각종 소품 등 다양한 상품이 판매되고 있었다. 가게마다 특색 있는 이름을 예쁘게 디자인해서 가게 앞에 세워두었고 상품 진열도 아주 예술적이었다. 무엇보다 가게 주인들이 단골을 맞이하듯 친근하게 손님들을 대했다. 아내와 필자는 거의 마지막 가게에서 고구마튀김 세 봉지와 감자튀김 한 봉지를 샀다. 풋고추, 파김치, 토마토, 작은 지갑을 사고 떡볶이, 오뎅, 스테이크 한 조각이 들어간 햄버거도 먹었다. 오랜만에 축제다운 행사를 본 기분이었다.
건축을 전공한 필자는 지속가능한 전원주택단지 모델을 연구 중이다. 이곳 리버마켓에서 전원주택 단지에 디자인해야 할 지속가능성을 보장하는 몇 가지 아이디어를 얻게 됐다. 놀이동산에 온 것처럼 가게마다 돌아다니며 구경을 하고 사진을 찍고 주인들과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런 필자를 보고 아내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필자는 아내에게 익살스럽게 말했다. “다음 장날에 또 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