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외국어 표현에 익숙하지 않은 노년층이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로 인해 노년층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정보에서 소외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최근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글문화연대가 공공기관·언론이 사용하는 외국어 표현 3500개에 대한 국민 이해도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60% 이상이 이해하는 단어는 30.8%(1080개)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70세 이상 노년층이 이해하는 단어는 242개(6.9%)에 그쳤다. ‘드라이브스루’(승차진료소)의 뜻을 이해한다고 답변한 노년층은 2.4%에 불과했다. BJ(인터넷방송진행자), 마리나(해안유원지), 거버넌스(민관협력) 등의 단어를 이해한다는 비율은 0%였다.
이처럼 노년층의 외국어 표현에 대한 이해도가 높지 않은 상황에서 최근 발생한 코로나19 관련 표현인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코호트 격리(동일집단 격리), 비말(침방울), 진단키트(진단도구) 등과 같은 어려운 용어가 쏟아지고 있다. 때문에 감염병에 취약한 고령층의 정보 소외 현상이 더욱 심화되고 있는 양상이다.
이번 조사는 지난 1월 29일부터 2월 13일까지 서울, 경기 등 16개 지역의 14~79세 국민 1만1074명을 대상 온라인(10~60대) 및 개별 면접(70대) 방식으로 진행됐다.
한편 문체부와 국립국어원은 어려운 외국어 표현이 많이 들어와 신문맹률이 높아지고 소통이 어려워지는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쉬운 우리말 대체어를 보급하고 있다.
인생을 재밌고 멋지게 사는 액티브 시니어가 많다지만 세대를 뛰어넘어 이리도 신나게 유쾌하게 사는 사람이 또 있을까. 마치 나이를 거꾸로 거스르며 사는 사람 같았다. 말투건 표현이건 도무지 언제 태어났는지 가늠 불가다. 그의 취미는 디제잉과 수상 스포츠. 그리고 라틴댄스도 요즘 온몸으로 접수 중이다. 올해 나이 64세, 젊음 지수는 딱 그 반의반으로 느껴지는 이 사람. 전 홍익대학교 건축도시 대학원 겸임교수이자 아방디자인그룹의 최범찬(崔範瓚·64) 소장을 서울마리나에서 만났다.
“이런 거 봤어요? 얼마나 폼나요. 카카오톡,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전화번호까지 다 적혀 있잖아요. 이런 명함 처음 볼 거예요. 게다가 이 작은 명함을 뒤집으면 승선권이에요.”
서울마리나(서울 영등포구 여의서로)의 노천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으니 최범찬 소장이 가방에서 명함 몇 가지를 찾아 테이블에 올려놓는다. ‘아방가르드호 요트 탑승권’이라고 쓰여 있는 명함에는 요트를 조종하는 선장이라는 뜻의 스키퍼로 자신을 명명해놓았다. 최범찬 소장은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건축 업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능력자로 살았다고 자부한다. 올해 홍익대학교 건축도시 대학원 겸임교수에서 온전하게 물러나면서 요트와 취미에 투자하는 시간이 좀 많이 늘어났을 뿐. 늘 그랬듯이 젊은이들과 어울리며 하루하루를 즐겁게 살고 있다.
꼴찌 학생, 건축에 매료되다
“제 인생이 꽤나 재미있어요. 영등포구 당산동이 제 고향입니다. 파란만장했던 시절 제 일터였던 곳이 바로 여의도고요. 정년 마치고 당산역 근처 한강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잖아요. 제가 나고 젊은 시절을 보낸 곳에 돌아와 있는 느낌은 매번 좋습니다.”
요트를 타고, 홍대 클럽 구석구석 안 가본 곳 없다는 60대. 젊음의 거리에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구태의연함을 증명하며 사는 사람. 인생에 있어 결정적인 사건은 바로 홍익대학교 건축학과 입학이었다고 입을 뗐다.
“운명이죠. 홍대 건축학과에 들어간 거 말입니다. 대학 시험을 앞두고 뭐에 홀리듯 놀아서 홍대 건축학과를 최하위로 아슬아슬하게 합격했더군요. 35명 중에 34등이었어요. 다행이었던 점은 전공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는 겁니다.”
최하위 등수로 입학했지만 전공에 대한 매력에 흠뻑 젖어 살았다. 친구들 놀러 다닐 때 최대한 자제했다고. 대신 돈이 모이면 외국 건축 서적을 구해봤다. 꼴찌 학생에서 장학생으로 환골탈태했다. 건축학도로서 학업에 대한 깊은 애정은 대기업 마다하고 힘들기로 정평이 난 한국의 건축 거장인 김중업 선생의 건축연구소에 들어가게 했다. 하지만 가시밭길에 고행이었다.
“당시 각 대학교에서 공부 잘하던 사람들이 일곱 명이나 김중업 선생 밑으로 들어왔습니다. 2년 사이에 다 떠나고 저 혼자만 남더라고요. 아버지 같고 너무 좋아했지만 넘지 못하는 큰 바위 같은 존재였죠. 제가 학교 다닐 때 체격이 좋았어요. 그런데 김중업 선생님 사무실 그만둘 때가 64kg이었습니다. 이후에 위암수술도 했는데 그때는 74kg이었어요. 힘들고 외롭고 정신적으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선생님을 두고 다른 회사로 가는 모습이 제 생각에는 좋지 않아 모교 대학원에 진학해 조교 생활을 병행했습니다.”
사막 한가운데서 발견한 바다
석사학위를 마치고 난 뒤 몸담은 곳은 일리노이공과대(IIT) 학장을 지냈던 김종성 교수가 문을 연 서울건축종합건축사 사무소였다. 중동 건설 현장 사업 수주가 많던 시절 최범찬 소장은 힘겹던 리비아 현장에서 완벽한 인생의 터닝 포인트, 바로 수상 스포츠 세계에 눈을 뜨게 된다.
“저는 리비아 정부 종합청사 프로젝트 설계팀에서 1년 반을 근무했어요. 리비아 내전 훨씬 전이었는데 수도 트리폴리의 항구가 세계적인 미항으로 꼽히던 곳입니다. 부호들이 출입하는 고급 마리나(요트나 모터보트의 계류·연료 보급 등을 위한 기지)가 많아서 다양한 요트도 보게 됐어요. 그때 스쿠버 다이빙도 배웠습니다. 돈이 생기면 외국산 수상 장비들을 사 모았죠.”
리비아 시절 뭔가 잘 안 풀리면 넋 놓고 바라보던 달력이 하나 있었다고 했다. 항공사 이름이 새겨진 달력이었는데 다이빙, 요트를 비롯해 각종 수상 스포츠의 시원한 사진이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어줬다. 훗날 다시 보니 그 달력에 소개된 수상 스포츠들을 다 섭렵했더란다.
“아직도 당시의 달력을 가지고 있어요. 리비아 시절 눈과 마음으로 담았던 것들을 실현하면서 살아왔습니다.”
리비아 업무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는 과장 명찰을 달기도 전에 회사를 박차고 나왔다. 그리고 대학 동창들과 함께 작은 건축인테리어 사무실을 열고 사업을 시작했다. 인테리어 분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의 성과를 내면서 오랜 시간 승승장구했다. 홍익대학교 야간대학원 출강은 1997년도부터 했다. 학생들은 현업에서 10년 이상 일하고 있는 경험자들. 최범찬 소장은 그들 앞에 설 수 있는 적임자였다. 스스로도 50세 정도에 명예롭게 대학 강단에 서보겠노라 생각했는데 10년 앞당겨 강단에 섰다. 성공가도와도 같던 인생이었지만 IMF 금융위기가 발목을 잡았다. 병마와도 싸워서 이겨내야만 했다.
암에는 해피바이러스가 특효, 요트에 입문하다
“2002년도에 사업체를 부도 처리하고 등촌동에 사시던 누님 집에서 살았어요. 학교 수업만 신경 쓰면서 프리랜서로 일했습니다. 그런데 2010년도에 위암이 발병했어요. 가톨릭병원에서 수술을 했는데 잘라낸 암 부위가 워낙 컸나봐요. 11cm에 가까웠대요. 수련의가 제 수술 장면을 참관할 정도였답니다. 수술 후 시간이 많아 빈둥거릴 때 리비아에서 가져온 달력을 꺼내봤습니다. 문득 ‘내 소원 중 하나가 요트 타는 거였지!’ 하고 요트를 배우게 됐습니다.”
1980년대 말 사업을 시작했을 때 윈드서핑을 좀 배웠는데 바람을 이용하는 것이 비슷해서 그런지 요트에도 금방 적응했다.
“암 투병하고, 항암치료제를 먹으면서 요트를 배웠어요. 왜냐?! 죽기 전에 타야 하잖아요.(웃음) 사실 암 걸리기 전에도 요트에 관심이 많아서 서울마리나 분양 카탈로그를 가지고 다녔어요.”
현재 최범찬 소장이 운영하는 ‘아방가르드호’는 J/24 기종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연안용 요트다. 10명이 공동 출자해서 산 중고 요트인데 지금은 멤버들이 다 떠나고 요트만 남았다. 돈이 좀 생기면 사비를 들여 요트를 유지 관리했고 지금껏 즐기고 있다.
“정년퇴임 이후 저의 놀거리를 위해서 요트 조정을 배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서울마리나 창립 때부터 이곳에 나왔어요. 그러니까 제가 소속해 있는 탑세일 요트클럽이 가장 오래됐습니다.”
사실 요트는 혼자서만 타는 것이 아니다. 요트를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권해도 보고 편하게 탈 수 있게 도와주고 있다고 했다.
“제가 홍대에서 DJ를 하니까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에게도 요트를 타보라고 권합니다. 서울마리나에서 요트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가서 한 번씩 말하죠. 어렵게 생각 말고 일단 요트에 와보라고요.”
홍대 놀이터의 늦은 밤은 ‘DJ 차니’
수상 스포츠에 대한 갈망과 함께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부분이 바로 음악 이야기였다. 홍대 앞 젊은이들이 모여 춤을 추고 버스킹을 하는 문화 공간에 떡하니 자리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최범찬, ‘DJ 차니’다.
“저 젊을 때만 해도 그랜드하얏트호텔 JJ마호니가 최고 클럽이었어요. 저는 그곳 VVIP 단골일 정도로 많이 갔어요. 건축 일과 관련한 사람들도 주로 그곳에서 만났죠. 그리고 홍대건 이태원 클럽이건 음악을 들으러 다녔어요. 춤추는 거도 좋아했고요. 주말마다 한 20군데 돌아다니다 보니까 딱 클럽마다 일정하게 음악을 트는 패턴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싫증나더라고요. 직접 해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DJ 개인 강습을 받았어요. 3년 동안 암 투병하면서요. 대학에서 강의를 할 때라 수업 끝나고 학교 앞 놀이터에서 음악 틀고, 그 옆 피시방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살았어요. 피시방은 인터넷 속도가 빠르니까 웹서핑하기가 너무 좋잖아요. 지금은 제가 홍대 놀이터에 등장하면 애들이 자리를 비워줍니다.”
최근에 젊은 사람들이 주로 추는 라틴댄스인 살사에도 도전했다. ‘DJ 차니’로 활동하다 보니 주어진 미션과도 같았다.
“지난해 11월부터 살사를 배우고 있는데 잘 안 늘어요. 배우게 된 동기는 제가 라틴팝 음악을 틀었는데 남미에서 온 외국인들 호응이 좋더라고요. 뭐든 올인하는 성격이라서 열심히 배우고 있어요. 서울마리나 루프톱에서 살사 파티 같은 걸 열어볼까 생각도 하고 있어요. 멋있을 것 같아요.”
큰 암 덩어리를 잘라내고 시작한 요트와 DJ, 같은 세대라면 선택하지 않았을 젊음의 춤 살사 도전까지. 나이를 짐작하기 힘들 만큼 건강한 기운이 느껴졌다.
“암은 완치 판정을 받았어요. 행운이죠 두 번 사는 거니까요. 그리고 이 나이에 요트도 타고 춤까지 배우고 있으니 즐거운 인생이죠.”
세상에 참 많은 것을 가진 사람 같다. 그러나 정작 그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말했다.
“사실 사업체 부도가 크게 나서 제 소유로 아무것도 가질 수가 없어요. 제가 가지고 있는 것들의 실제 소유주는 다 다른 사람이에요. 요트도 운영은 제가 하지만 동호회 요트잖아요. 저에게는 소유가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참 속 편하게 살고 있죠?”
행복하게 살다 고민 없이 세상과 이별할 계획이지만 언제든지 실내 건축가로서 현장에 뛰어들 생각도 있다고 말했다.
“나는 지금도 좋은 일이 있으면 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전 제 일을 정말 사랑하니까요. 단 아무 일이나 안 하겠죠. 정말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해야죠. 그나저나 지금 제 바람은 살사 춤 실력이 좀 빨리 늘었으면 하는 겁니다.(웃음)”
수많은 실력파 가수들을 배출했던 대학가요제에서, 우순실(57)은 1982년 ‘잃어버린 우산’으로 동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가요계에 데뷔했다. 발라드 곡 ‘잃어버린 우산’은 1970년대 포크송에서 1980년대의 발라드로 넘어가는 가요계 조류에서 분명하게 각인된 노래였다. 그녀의 묵직한 목소리는 경험을 통해 체득한 깊은 진심이 묻어난다. 그녀의 삶은 가혹했다. 뇌수종으로 잃은 첫째 아들, 전 남편의 사업 실패로 짊어져야 했던 빚 29억 원. 그러나 막상 만나본 그녀의 모습은 밝고 평온했다. 그녀가 겪어야 했던 남다른 삶의 여정과 그 속에서 얻은 깨달음을 들어봤다.
"인생이 순탄하기만 하면 감사함이 없게 돼요. 굽이굽이 좌절도 해봤다가 올라가기도 하고 그래야 참 감사하고 기쁘다는 걸 느끼게 되죠."
인생에 대한 얘기를 할 때, 가수 우순실만큼 그 주제에 어울리는 이도 없을 것이다. 노래를 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였다고 한다. 그녀의 어머니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딸 다섯을 홀로 키워야 했다. 그때에는 여러 가구가 모여 사는 동네에 스피커가 있었는데, 거기서 매일 일정한 시간에 노랫소리가 들렸다. 특히 이미자 등의 트로트 가수들 노래가 자주 나왔는데 어느 순간 그녀는 그 노래들을 따라 부르고 있었다. 동네 아주머니들도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노래를 해보라고 시키기도 했단다. 그래서 음악적 후원자였던 큰언니는 그녀에게 ‘너는 말보다 노래를 먼저 배웠다’고 말하곤 했다.
타고난 가수의 어린 시절
“초등학교 6학년 때는 큰언니가 피아노 학원을 보내줘서 음악적 소질을 발견하게 해줬어요. 고등학교 교련시간에는 휴식시간마다 불려나가 노래를 불렀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가수가 되었죠. 대학교를 작곡과로 들어간 것은 노래하는 데 필요한 지식들을 습득하기 위해서였어요.”
한양대학교 작곡과에 다니던 그녀는 1학년 때인 어느 어스름한 저녁, 국악과 연습실에서 들려오는 청아한 목소리를 듣고 반해버렸다. 그 무렵 대학가요제 출전으로 자퇴를 해야 했고 이후 그녀는 추계예술대학교 국악과를 들어가게 된다. 20대까지의 그녀의 삶에는 순수한 음악적 매혹에 의한 선택들이 있었다. 음악적 욕심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말을 안 하고 있으면 자신을 드러낼 수가 없는데 저 자신을 보여줄 수 있는 게 노래예요. 예를 들어 화가들이 자기 철학이나 인생관을 그림과 조각으로 표현하는 것처럼, 저에게 있어 노래는 간절한 표현 도구인 거 같아요. 아프면 아프다, 슬프면 슬프다 하고.”
병간호 속에서도 행복을 마주했다
우순실은 1991년에 결혼하면서 가수로서의 삶을 접는다. 그리고 첫째 아들이 시한부 뇌수종 판정을 받자 이후 13년 동안 함께 투병생활을 한다. 천생 가수였던 그녀가 대중의 시야로부터 멀어졌던 시간이다. 그때 그녀의 마음은 어땠을까?
“가수가 노래를 놓고 있을 때, 괜찮을 리는 없죠. 아쉬웠죠. 그러나 아이를 순탄하게 키우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 과정에서 느끼는 행복과 기쁨이 있었어요. 어느 날 시댁 식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오백년’을 부르는데, 감정이 안 살더라고요. 그 순간 행복한 상태에서는 한스러움이 표현되질 않는구나 했어요. 그러니까 그때는 나름 행복하고 만족했던 거예요.”
우리가 보는 그녀의 삶의 굴곡은 마음을 착잡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정작 그녀 자신은 그런 삶과 고통을 덤덤하게 받아들인 것 아닐까. 어쩌면 그 마음의 크기야말로 그녀가 가진 천성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있을 자리는 저 자린데 하면서도 옆에 아이가 있는 게 보이면 지금 할일은 이거라는 생각이 들곤 했죠. 늘 지금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려고 했어요. ‘너무 힘들었겠다’면서 위로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저는 제 앞에 놓인 상황을 잘 받아들이는 편이었죠. 그리고 받아들이면 스트레스도 덜해요.”
많이 겪은 자의 성숙함
인터뷰를 하던 도중 그녀가 잠깐 판소리의 한 대목을 가볍게 불렀는데 그 목소리의 맑음에 놀랐다. 동안만큼이나, 노래 실력만큼이나, 그녀는 세월의 변화에 초연한 듯 보였다.
“1982년에 데뷔를 했으니 벌써 37년의 세월이 흘렀네요. 어찌 보면 그때 노래한 걸 들어봐도 애늙은이 같았죠.(웃음) 감정이 막 요동치는 게 아니라 그냥 평행선이었어요. 어릴 때도 초월해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었어요. 친구들이 캔디 만화에 열광하고 로맨스에 빠질 때 저는 교정 벤치에 혼자 앉아 상념에 잠기고 고독을 씹는 애늙은이 같은 모습이었으니까요.”
그녀가 대학교 1학년 신입생 환영회 때 부른 노래도 ‘한오백년’이었다. 그녀의 안에 그런 한과 우울이 많았던 때였다.
“지금은 더 밝아지고 긍정적인 사람이 되었죠. 뭔가 많이 겪은 자의 예전과는 다른 성숙함이라고나 할까요.(웃음)”
사소한 달콤함에 감사
‘뭔가 많이 겪은 자’ 우순실이 도달한 깨달음은 나 자신의 소중함이다. 그녀는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노래할 때도 컨디션이 좋은 사람은 장비 탓을 안 해요. 내 상태가 좋으면 생마이크에서도 노래가 잘 나오죠. 인간관계에서도 내가 밝은 에너지가 있어야 해요. 그래야 상대가 뾰족한 사람이라도 품을 수 있는 포용심이 생기니까요.”
그녀가 둘째 딸과 셋째 아들에게 하는 말도 이와 같다.
“‘너 자신을 사랑하는 게 첫 번째다, 친구관계가 고민될 때는 너 자신을 사랑하면 된다’고 말해줘요. ‘지금 관계가 꼬여 힘들다면, 그런 자신의 힘든 마음을 먼저 알아줘라, 자신을 위로하는 게 우선이다’라고 말이죠. 그런 일은 상대와 나와의 문제 같지만 실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충돌이에요. 그래서 자신을 사랑하면 상대방과의 문제가 별것 아님을 알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사람과의 관계는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바가 크다. 친구와의 갈등이 빚어지는 것은 대부분 상대에게 기대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스로의 마음만 충만하다면 상대가 나를 사랑하든 안 사랑하든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는 게 그녀의 설명이었다.
“사실 나 자신은 생각보다 더 큰 에너지를 갖고 있는데 세상사에 치여서 작아지잖아요? 명상을 하면서 스스로를 들여다보면 정말 맑고 순수한 모습이 보여요. 그걸 발견할 때 충만함 그 자체를 느끼게 되죠.”
혼자여서 너무 좋다
홀로 지내는 그녀는 남는 시간에는 이것저것 공부하며 음악 연습과 요가를 한다. 꾸준히 하고 있는 요가는 그녀가 심신이 고달팠을 때 선배 가수가 자신을 돌봐야 한다고 권해서 시작했다. 그녀에게 요가 시간은 곧 에너지가 충전되는 시간이다. 그녀에게 어울리는 운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몸이 건강해지고 마음이 편안해져요. 노래의 힘과 호흡 등을 좋아지게도 하고요.”
그녀는 자신이 혼자라서 좋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외롭지 않냐고 묻기도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아주 자유롭고 좋습니다. 혼자만의 시간이 있어 자신을 더 충만하게 채울 수 있으니까요.”
시니어 중에는 유독 고독을 심하게 느끼며 마음을 나눌 친구를 찾는 이가 많다. 그녀가 혼자 잘 지내는 비법은 무엇일까?
“어차피 인생은 외로운 거예요. 같이 살아도 외롭죠. 그러니 인간은 고독하다는 걸 전제하면 그런 감정에 연연하지 않게 돼요. 인정할 건 빨리 인정해야 좋죠. 그리고 나를 위한 선물을 해야 해요.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걸 하는 게 좋아요. 저에게는 그게 음악, 요가, 힐링, 집안청소 등인 거죠.”
벚꽃이 흐드러진 날에 새로운 여정
우순실은 다시 태어나도 여전히 가수를 하겠다며 존 레논처럼 인류가 살아가는 데 메시지를 주는 힐러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마침 그녀는 얼마 전 전영록에게서 곡을 받아 새 앨범을 발표했다. 타이틀 곡은 ‘어느 벚꽃이 흐드러진 날에’. 봄날을 연상케 하는 어쿠스틱함이 강조된 발라드 곡이다.
“원래 받을 곡은 이 노래가 아니었어요. 그런데 전영록 선배님이 우순실에게 곡을 줘야겠다 해서 녹음을 하게 됐는데, ‘어느 벚꽃이 흐드러진 날에’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한 번 불러봤는데 바로 선배님이 ‘이건 네가 불러야겠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래서 열몇 곡 중 일곱 곡을 추려 앨범을 만들었어요.”
그녀는 오는 4월 26일 여의도 마리나에서의 디너쇼 콘서트를 시작으로 6월까지 공연 스케줄을 잡아 놨다. 그녀가 가장 하고 싶은 것이 관객과의 만남인 콘서트였던 만큼 그 소망을 이루는 시간이 될 것이다.
“저 사람이 노래하면 내가 뭔가 힐링이 되는 거 같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다, 제 노래를 들으면서 위안이 됐다는 말을 듣고 싶어요.”
멋진 왕언니에게서 사랑스런 여성의 모습도 보인다. 당차고 또 열정적이다. 1990년 이후 30년 만에 다시 노래 부르는 신인처럼 그녀는 눈빛을 반짝였다.
2018년 개띠의 해가 열렸다. 올해도 어김없이 지구는 돌고 역사는 기록될 것이고 개개인의 삶은 흘러갈 것이다. 올 새해맞이는 따뜻한 휴양지 코타키나발루에서 ‘지치지 않는’ 여행을 하면서 쉬는 것. 낮에는 바닷가에 나가 물놀이를 하고 배가 고프면 슬렁슬렁 시장통에 나가 애플망고를 실컷 먹고 저녁에는 밤하늘을 보면서 수영을 즐기는 일. 한 해의 초문을 여는 방법으로 이보다 행복한 여정은 없다.
툰구 압둘 라만 해양공원에서 놀고 액티비티 투어도 하고
코타키나발루는 사바 주의 주도(州都)다. 사바 주는 우리 귀에 아주 익숙한 보르네오 섬의 북쪽에 위치한 항구도시다. 여행은 서두를 이유가 없다. 낮에는 툰구 압둘 라만(Tunku Abdul Rahman) 해양공원의 5개 섬을 골라 다니면서 놀면 된다. 가야(Gaya), 마누칸(Manukan), 사피(Sapi), 술룩(Sulug), 마무틱(Mamutik) 섬이다. 툰구 압둘 라만 해양공원의 이름은 말레이시아 초대 총리인 툰쿠 압둘 라만(1903~1990)의 이름에서 따왔다. 물빛이 아주 맑은 수트라 항구(Sutera Harbour)에서 배를 타고 빠르게 달려 5분도 안 돼 마무틱 섬에 이른다. 5개 섬 중에서 규모가 가장 작고 산호초로 둘러싸여 있어 일명 ‘산호섬’으로 불린다. 섬에서 노는 게 지겨운 날에는 시내에서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키나발루 국립공원(Kinabalu National Park)으로 가서 트레킹을 하면 된다. 골프를 하고 싶다면 탄중아루(Tanjung Aru) 리조트 내의 골프 코스를 찾으면 될 것이다. 그 외에도 제셀턴 포인트(Jesselton Point)에서 배를 타고 반딧불 투어, 밀림 투어 등을 해도 좋다. 제셀턴 포인트는 주변 섬으로 갈 수 있는 페리 탑승장이다. 이 도시와 인근 섬들을 연결하는 여객선이 드나든다. 수많은 현지 여행사가 있어 각종 투어와 액티비티 투어 등을 예약할 수 있다. 참고로 제셀턴은 과거 영국의 식민통치 시대에 말레이시아의 물자를 실어 나르던 항구로 1945년 오스트레일리아 군인이 내려 거주하던 곳이다. 제2차 세계대전 끝 무렵 일본군으로부터 코타키나발루(당시 이름 제셀턴)를 탈환하기 위해 진입한 오스트레일리아 군이 야영했던 곳이라서 붙여진 지명. 기념 동판 하나만이 남아 그날을 일러준다.
필리핀 마켓 야시장에서 애플망고 실컷 사 먹기
코타키나발루 여행의 백미는 야시장 구경이다. 이 도시로 이주한 필리피노들이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가지고 있던 물건들을 하나둘씩 내다 팔면서 자연스레 형성된 시장. 오후 4시경 문을 여는 노천 야시장엔 활력이 넘친다. 상인들 거의가 무슬림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도 어렵지 않다.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머리에 ‘히잡’을 쓰고 있으니 말이다. 시장에는 망고가 지천이다. 한국에서는 비싸서 사 먹을 엄두를 낼 수 없는 애플망고를 보고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새우튀김도 사고 닭 날개(사테, Satay)도 사 먹는다. 한국인이 많이 오는지, 구운 닭 날개 소스에 대해 능숙하게 말한다. ‘매운 맛’이나 ‘맛있어요’라는 말은 아주 잘한다. 바나나튀김도 맛있고 작은 팬케이크는 보는 재미가 있다. 또 첸돌(Chendol)도 재미있다. 간 얼음 위에 꼬물꼬물한 연두색 첸돌과 코코넛밀크, 흑설탕을 넣어 만든 빙수다. 이와 비슷한 아이스카장(Ice Kajang)도 있다. 잘게 간 얼음 위에 야탑 열매와 옥수수, 팥, 젤리 등과 여러 가지 시럽을 넣은 빙수다. 시장 구경을 하다 보면 어느새 해가 질 시간. 시장통을 비껴 워터 프런트 쪽으로 걸어가면 바다 너머로 해가 진다. 지는 해의 열기는 생각보다 뜨겁다. 숙소로 피신하는 게 답. 달빛과 별을 보며 수영하면서 맛있는 애플망고와 새우튀김을 안주 삼아 지역 맥주 한잔 곁들이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행자가 된다.
전통 부족민 볼 수 있는 ‘카다잔-두슨 원주민 민속촌’
사바 지역의 속살을 들여다보고 싶어 전통가옥을 재현해놓은 사바 카다잔-두슨 문화협회(Kadazans-Dusuns Cultural Association Sabah)를 찾는다. 사바 주의 용맹한 ‘카다잔’ 원주민 전사와 몬소피아드 사냥꾼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민속촌이다. 카다잔족, 두슨족, 룬구스족, 바자우족, 무루트족(Murut) 등은 이 나라 대표적인 전통 부족들. 카다잔족과 두슨족은 사바 주에서 가장 큰 민족 집단으로 전체 인구의 30%나 된다. ‘키나발루’라는 이름도 카다잔족의 언어로 ‘죽은 자들의 안식처’를 뜻하는 ‘이키나발루’에서 유래되었다.
두 부족은 같은 언어와 문화를 공유했다. 다른 점이라면 카다잔족은 분지에서 쌀농사를 짓고 두슨족은 구릉성 산지에서 산다는 것. 카다잔-두슨 민속촌에 이들이 살던 집과 풍습 등을 엿볼 수 있는 것들이 마련되어 있다. 또 매년 5월 30~31일에는 추수 축제가 열린다. 벼를 수확한 후 한 달 정도 풍성한 축제가 벌어질 때 훨씬 볼 만하다.
도시 전망은 시그널 힐에서, 낙조 감상은 탄중아루에서
시그널 힐(Signal Hill) 전망대도 오른다. 걸어서 가기에는 가파른 길이다. 낙조를 감상하기 제일 좋은 곳이지만 낮에는 도시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뷰포인트’의 역할을 한다. 전망대에서는 코타키나발루 시내 전경과 페낭 해변을 둘러볼 수 있다. 근처 시계탑은 랜드마크로 원래 등대 역할을 담당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연합군의 융단 폭격으로 폐허가 된 도시에서 유일하게 피해를 입지 않은 건축물이다.
마침 일요일이라서 근처의 선데이 마켓으로 간다. 잘란 가야(Jalan Gaya)에서 열리는 선데이 마켓은 300개 이상의 노점이 생활용품, 식재료, 약초, 의류 등 다양한 품목을 판매한다. 원래는 현지인들을 위한 작은 로컬 마켓이었지만, 관광객이 증가하면서 시장의 규모가 커지고 판매 품목도 다양해졌다. 필리핀 마켓과 달리 수제품이나 공산품이 많다. 보기 드문 제비집도 있다. 마켓은 생각보다 일찍 파장한다. 다시 가장 번화한 원보르네오(One Borneo)와 와리산 스퀘어(Warisan Square)로 이동해 마사지를 받고 천천히 이 도시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낙조를 볼 수 있는 탄중아루로 간다. 탄중아루는 석양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 이 도시의 낙조는 그리스 산토리니, 남태평양 피지와 함께 세계 3대 해넘이로 꼽힌다. 아쉽게도 바닷가에는 비가 내린다. 낙조를 보지 못하면 어떠리. 맘껏 휴식했으니 이것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Travel Data
항공편 인천에서 코타키나발루까지 직항편은 대한항공이 주 2회, 아시아나와 이스타항공이 주 4회 운항하고 있다. 말레이시아항공 직항편도 있다. 매주 금요일 출발.
기후 1년 내내 덥고 습한 기후다. 평균 기온은 영상 30℃. 계절에 따른 기후변화가 없어서 여행 성수기와 비성수기가 나뉘지 않는다. 날씨는 대체로 맑은 편이지만 하루 한 번 열대지방의 소나기인 스콜이 내린다. 코타키나발루의 1월은 우리나라의 한여름 날씨와 비슷하다. 통풍이 잘되는 얇은 옷 위주로 챙기고, 한 달 평균 일주일 이상 비가 내리기 때문에 우산은 필수다. 고산인 키나발루 산과 쿤다상(Kundasang) 지역은 기온이 서늘한 편이다.
언어 공식 언어는 말레이어다. 하지만 호텔 및 관광지에서는 영어가 널리 사용된다.
통화 정보 자국 통화인 말레이시아 링깃(Ringgit)이 통용된다. 1링깃은 260원대다. 인천 공항에서 환전해서 가면 된다.
사용 전압 200~240V, 50Hz다. 우리나라와 콘센트 모양이 다르니 꼭 어댑터를 준비하자.
음식 정보 해산물이 풍부하다. 그 외 볶음밥인 나시고렝(Nasigoreng)이나 국수 등 메뉴가 다양하다. 한국인이 일부러 찾는 집으로는 ‘웰컴씨푸드’가 있다. 주문하면 수족관에 있는 해산물로 즉석요리를 해준다.
숙박 정보 휴양도시라서 고급 호텔, 리조트, 콘도, 레지던스, 아파트 등 묵을 곳이 많다. 골프를 원한다면 리조트를 선택하는 게 좋다. 한 달 정도 머물 예정이면 아파트를 추천한다. 거실 하나에 방 두 개다. 아파트 객실은 에어컨, 평면 TV를 갖추고 있으며, 일부 객실에는 냉장고 등이 완비된 간이 주방도 마련되어 있다. 1일 7만~10만 원 선이다. 수트라 항구 근처의 이마고(Imago) 쇼핑몰·콘도는 장기투숙자가 많이 이용한다. 또 KK 베케이션 아파트먼트 @ 마리나 코트 리조트 콘도미니엄을 비롯해 여럿 있다.
기타 볼거리 북보르네오 증기기차 투어나 새로 지은 시청사, 석호(潟湖, lagoon) 위에 세워진 시티 모스크, 사바 주 모스크(Sabah State Mosque)가 있다. 건물 돔은 온통 황금으로 뒤덮여 있다.
코타키나발루 여행정보 www.mtpb.co.kr
시니어 한 달 여행 포인트 코타키나발루는 관광지를 찾아다니느라 애쓸 필요 없는 곳이다. 많은 곳을 다니기 싫어하는 시니어에게 좋은 여행지다. 대부분의 숙소에는 수영장, 피트니스 센터, 마사지 숍 등이 갖춰져 있다.
일본 오사카는 새로 카지노 단지를 만들어 연간 6조원의 수입을 올리겠다는 발표를 했다. 대기업들이 도쿄로 본사를 이전하면서 파친코 산업 매출이 부진하고 장래 올림픽과 국제 박람회, 그리고 중국 관광객들을 겨냥한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연간 7만 명의 고용효과까지 생긴다고 했다.
블룸버그 인텔리전스의 자료를 인용한 신문보도에 의하면, 카지노 시장의 규모가 도박의 도시 마카오는 2015년 기준 289억달러, 라스베이거스가 63억달러, 싱가포르가 48억달러, 한국은 24억달러 규모라고 한다.
마카오에도 가봤는데 그야말로 카지노를 빼면 볼 것도 없는 작은 도시였다. 그런데 이곳이 세계 카지노 시장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라스베이거스도 도시 호텔 거의 전체가 카지노 시설을 가지고 있다. 미국은 라스베이거스 말고도 내국인들에게 리노, 아틀랜틱시티 등 카지노 산업을 허용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카지노 산업을 해금하면서 일약 대성공을 거둔 나라다. 국부로 불리던 리콴유 전 총리가 생전에 절대 불가라고 했던 카지노 산업을 사후에 전격적으로 해금한 것이다. 우리나라 쌍용건설이 지어 화제가 되었던 마리나 베이 호텔 카지노 덕분에 연간 국민 총생산이 15~20% 신장하고 있다니 대단한 성공이다.
미국의 카지노장에 들어갔을 때 노인들이 많아서 놀랐다. 주로 슬롯머신을 즐기고 있었다. 한 번 버튼을 누르거나 바를 당길 대 일렬로 같은 그림이 나오면 돈이 나오는 장치의 기계다. 보통은 25센트(300원) 정도 배팅을 하는데 노인들은 주로 5센트(60원) 기계에 매달려 있었다. 그야말로 큰 돈 안 들이고 소일거리로 즐기고 있었다.
우리나라가 강원랜드를 제외하고는 내국인들의 카지노장 출입을 금지하고 있는 것은 도박 중독을 우려해서다. 그러나 일부 중독자가 생길 수는 있지만 대다수 이용자들은 그렇지 않다. 이미 강원랜드를 수년간 운영해봐서 알 수 있다.
인천에 6성급 크루즈 선이 들어와도 볼 것이 없어 차라리 배 안에 그냥 있겠다는 외국 관광객들이 대부분이라는 보도에, 앉아서 돈 벌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시니어들의 소일거리라는 면에서 카지노 산업은 육성할 만하다. 미국은 내국인들에게 카지노를 허용했지만 도박 중독자가 넘쳐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왜 금지하는 걸까. 도박 중독을 자제할 줄 모르는 국민으로 본다는 의미다.
슬롯머신은 재미있다. ‘돈 놓고 돈 먹기’라는 데 매력이 있다. 게임 방식이 간단해 누구나 즐길 수 있다. 미국 가서 슬롯머신을 하면 괜찮고 한국에서 하면 안 된다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 논리다. 이제는 카지노를 대폭 개방해 외국 관광객들을 유치해야 한다. 도박 산업은 수익률도 높다. 지자체 장들이나 국회의원들이 몸 사리는 바람에 돈 벌 기회를 남의 나라에 다 빼앗기고 있는 것이다.
“부동산이 전자제품이라도 됩니까? 돈이 얼마인데… 어떤 바보가 부동산을 전자상거래로 합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예전에 참 많이 들은 말이다. 부동산은 전자상거래가 불가능하고 또 필요도 없다는 말이다. 부동산은 고가의 재화라는 점, 거래 규모와 중요성을 따져볼 때 개별 물건의 현장 확인을 빼놓을 수 없다는 것을 그 이유로 들었다. 거래의 안정성, 대금 결제와 환불의 어려움, 사기 및 잘못된 정보 제공, 해킹 등에 의한 거래 사고도 부동산 전자상거래의 걸림돌로 지적이 됐다.
부동산거래 새롭게 진화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빠르게 바뀌어가고 있다. 정부는 지금 민간 부문 부동산거래 전자계약시스템을 시행 중이다. 2016년 상반기 서초구 시범 사업을 마친 후 2016년 8월 말부터는 서울시 전역으로 확산 실시하였고 2017년부터는 아파트 중개 등에 본격적으로 활용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공인중개사를 통해 체결되는 부동산 계약을 정부에서 도입한 이 시스템으로 사용할 경우 안전성, 경제성, 편리성 측면에서 이점이 있다는 것이다. 정부 입장으로는 부동산 정책 입안을 위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수 있다는 점도 강점이다.
다만 2016년 1년 동안 부동산 전자계약에 참여한 공인중개업소가 1400개를 넘어섰으나, 2016년 서울시에서 이루어진 부동산 전자계약은 아직 540건에 불과하다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우리나라 공공 부문 부동산거래 전자계약시스템인 한국자산관리공사의 공공자산 처분 시스템 온비드(www.onbid.co.kr)도 1999년 검토 이후, 2002년 시행되어 이제는 정착발전 단계로 원활히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온비드는 2016년 한 해 동안 19만 명의 국민들이 입찰에 참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입찰 참가자 수는 2015년 15만 명 대비 26.7% 증가한 셈이다. 2016년 연간 낙찰 건수는 3만3000건으로 나타났다. 공공 부문의 전자거래에 이어 이제는 민간 부문 부동산 거래에도 전자계약이 확산될 수 있는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우리나라 부동산거래 전자계약시스템은 세계적으로도 인정받는 제도로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보통 부동산 전자상거래는 제1단계 정보수집활용, 제2단계 계약실행, 제3단계 사후행정처리로 구분하는데 그동안 우리나라는 이 세 가지 단계가 원활히 연결되어 거래가 이루어지고 가장 적극적으로 인터넷을 활용하는 나라, 인터넷으로 부동산 공매 입찰을 하는 모범적인 나라로 변모했다.
그런 가운데 2016년에 정부가 시작한 민간 부동산거래 전자계약시스템이 출발했다. 예를 들어 아파트 전세를 전자계약으로 하고 싶으면 출입문에 전자계약 상징 마크를 부착하고 있는 중개업소를 찾으면 된다. 아파트 매매, 전세 등이 부동산 전자계약이 가능하다고 보면 된다. 물론 단독주택과 상가 거래도 전자계약이 가능하다. 부동산거래 전자계약시스템은 첨단 ICT 기술과 접목, 공인인증·전자서명, 부인방지기술을 적용해 종이와 인감 없이 온라인 서명으로 부동산 전자계약을 체결할 수 있도록 하고, 실거래 신고 및 확정일자 부여를 자동화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매매계약을 하면 실거래 자동신고가 되고, 임대차 계약이라면 주민센터 방문 없이도 확정일자가 자동 부여된다.
전자계약의 시대, 공인중개사 어떻게 변할까?
우리나라는 부동산 전자상거래가 태동한 지 이제 14년이 됐다. 공공 부문 부동산 공매 입찰이 인터넷 입찰 방식 전환으로 그 역사가 시작됐다면 민간 부문은 아파트 거래를 중심으로 태동한 셈이다. 그렇다면 민간 부문 부동산 전자상거래는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까? 그리고 주요 이해 당사자인 공인중개사와 부동산 중개업무는 어떤 관점으로 발전의 포인트를 잡아야 할까?
공인중개사는 저널리스트인 마리나 크라코프스키의 책 에 나오는 ‘미들맨’에 해당한다. 에서 미들맨은 그 답을 ‘연결’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연결에서 가치를 창출하는 기업 또는 비즈니스맨을 중개자의 의미인 ‘미들맨’이라 명명한다. 인터넷을 새로운 도구가 아닌 시대의 본질적 변화로 읽는 미들맨은 구매자와 판매자 사이에 가치를 선사함으로써 이익을 거두는 사람들이다.
인터넷이 처음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미들맨의 시대가 사라져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났고 이런 추세는 앞으로도 더욱 힘을 받을 전망이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세상이 상호 연결된 것이고 연결 가치의 활용이 중요시된 것은 당연하다. 미들맨에 해당하는 공인중개사의 입장에서 보면, 인터넷의 발달로 거래가 활성화되면서 결정적으로 신뢰가 더 필요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판매자와 구매자가 직접 거래하는 것보다 미들맨이 각각의 그들과 더 자주 거래하며, 이를 통해 신뢰를 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일회성의 직거래로는 쌓을 수 없는 신뢰관계를 미들맨은 수많은 거래를 통해 쌓을 수 있다는 의미다. 또한 인터넷 세상에서는 미들맨을 배제함으로써 얻는 비용절감 효과보다 미들맨을 활용해 얻는 생산성이 우선시되는 경우가 발생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최근 ‘연결’에서 기회를 찾은 미들맨들은 계속 등장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러한 현상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부동산 전자상거래의 새로운 과제
부동산 전자상거래는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민간 부문에서 보면, 부동산거래 전자계약시스템은 등기비용 등 절감, 각종 행정 처리의 간소화, 거래의 투명성이 자랑이다. 공공 부문도 마찬가지다. 먼저 전국의 부동산 공매장이 없어졌다. 공매 입찰자는 이제 집에서 응찰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누구든 원하는 정보를 편리하고 투명하게 받아볼 수 있게 됐다. 공매 담당 직원도 대폭 줄었다. 주변 부수 시스템도 함께 정비가 됐다.
그러나 무엇보다 민간 부문이든 공공 부문이든 부동산 전자상거래의 가장 큰 성과는 업무의 표준화와 업무 개선이다. 오프라인에서도 복잡한 부동산 업무를 온라인에서 하려면 온라인에 맞게 표준화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절차의 공정성과 투명성이 정립되었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정부 일도 편해졌다. 실거래가가 노출되다 보니 현실과 맞지 않는 공시지가나 과세시가 표준액에 의지해 세금을 물릴 필요가 없어진다. 거래가 투명해지고 공정성은 높아지는 반면 이중계약서나 투기 행위는 줄어들게 된다.
거래의 안정성은 사회적 인식과 관행에서부터 출발한다. 법률적, 기술적 한계보다 먼저 심리적 불안감을 극복해야 한다. 그 중심에는 국민, 정부, 공인중개사가 있다. 민간 부문 부동산거래 전자계약시스템의 성공 여부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 여기에 공인중개업소의 참여와 공인중개사에 대한 정부의 지원, 신뢰의 가치를 중시하는 미들맨인 공인중개사의 경영 철학이 성공의 열쇠다.
부동산 관련 정보가 활발히 유통되면서 부동산 상품의 가격과 매물 등의 정보가 거대한 DB로 구축돼 네트워크로 연결될 가능성도 높다. 아울러 전자서명, 전자금융, 전자감정 등 첨단기법의 발전으로 인해 부동산 상품의 객관적 가치 개념이 보편화될 것이다. 이에 따라 부동산의 입지 개념이 변화하는 것은 물론 변화 속도 또한 빨라질 것으로 보인다.
부동산은 모든 산업과 국민이 직접 관련되어 있는 분야다. 그래서 공정하고 투명하고 효율적이어야 한다. 이해관계자 모두가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부동산 전자상거래는 이제 꿈이 아니라 현실이다. 부동산 산업 분야에서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해 부동산이라는 상품을 시스템화하고 오프라인에서의 절차를 보완하고 줄여나가는 연구와 함께 거래 고객과 공인중개사를 보호하고 지원할 수 있는 장치도 지속적으로 마련해나가야 한다. 공인중개사의 소득 노출 등으로 인한 걱정을 자랑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 조성과 관련 제도의 적극적 개선이 병행되어야 부동산전자계약 시스템이 빠르게 정착될 수 있을 것이다.
>>김정렬(金淨烈) 한국일반행정사협회 전임교수
국내 최초로 부동산 전문가들로 네트워크를 구성, RE멤버스를 설립하고 부동산써브 대표를 역임했다. 한국자산관리공사, 한국자산신탁, 기업체, 금융기관 등에 부동산 자문을 꾸준히 하고 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한때 올림픽 선수가 되고 싶었던 신중년들이 그런 기분을 만끽할 수 있는 경기대회가 미국에서
열린다. 눈요기만 하는 관광보다는 세계 각지에서 온 선수들과 경기를 하면서 우정을 나누고 풍물도 즐기고 싶은 신중년이라면 참가해 볼만한 대회다.
올해로 30회째를 맞이하는 ‘헌츠먼 세계 시니어 경기대회(The Huntsman World Senior Games)’. 미국 서부 유타주 세인트조지(St. George)에서 열리는 이 대회는 시니어 올림픽으로 자리를 잡았다.
‘더 높이, 더 멀리, 더 빨리’보다는 ‘더 건강하게, 더 즐겁게, 더 친밀하게’를 지향하는 것이 올림픽과 다른 점이다. 물론 참가 자격 제한이 있다. 50세 이상이라야 참가가 가능하다. 그 대신 예선전은 없다. 자신의 수준에 맞는 경기에 참가하고 경기하다 보면 메달을 딸 수도 있다. 못 따면 또 어떤가? 연금을 받는 것도 아니니. 올림픽은 참가하는 데 의의가 있지 않은가? 선수로 뛰지 않고 그냥 응원단이나 관람객으로 참가해도 선수와 같은 대접을 받을 수 있다.
딕시주립대학의 한센스타디움에서 개최되는 개막식은 올림픽을 방불케 한다. 세계 20여개 국가와 미국 50개 주에서 온 선수들이 출신 국가와 지역의 특색을 살린 복장과 깃발을 들고 입장을 하면 세인트조지 시민들은 관중석에서 환영의 함성을 지른다. 성화 봉송과 점화, 선수 선서와 매스게임, 그리고 불꽃놀이로 이어지는 화려한 개막식의 분위기에 젖다보면 국가대표선수가 된 느낌이 들게 된다. 부부가 손잡고 함께 개막식에 참석하는 장면은 생각만 해도 흐뭇해진다.
개막식에 이은 연주회에서는 축제 분위기를 더욱 만끽할 수 있다. 지난해 실내 경기장에서 열린 브리티시 인베이션 트리뷰트 밴드와 더 몽키스 밴드의 공연은 압권이었다. 각국의 선수들과 동반자들은 가슴 깊숙이 숨겨 두었던 열정을 마음껏 분출하면서 몸을 흔들고 괴성을 질렀다. 경기 후 열리는 디너와 댄스파티도 잊을 수 없는 행사다. 각국 선수들과 어울려 춤을 추다보면 새로운 추억과 로맨스가 마음깊이 남게 된다.
10월 3일부터 15일까지 2주간 열리는 올해 경기는 모두 29개 종목. 대부분 연령대별(5세 간격)로 나뉘어 경기가 치러진다. 축구, 소프트볼, 배구 등 3개 종목은 팀경기로, 볼링 등 나머지 26개 종목은 개인경기로 진행된다.
팀경기는 팀원을 구성해 함께 등록해야 한다. 개인경기는 개별 등록 후 같이 뛰고 싶은 선수를 등록 리스트에서 선택할 수도 있다. 일정만 맞으면 여러 종목 참가도 가능하다. 한 번 등록한 선수의 번호는 바뀌지 않고 매년 같은 번호가 부여된다. 그래서 다음해 같이 경기를 하고 싶은 선수가 있으면 지정하기도 편리하다.
골프는 사교 경기와 메달 경기 두 그룹으로 나누어져 있어 자신의 수준에 맞는 경기를 택할 수 있다. 메달 경기도 36홀의 연령대별 경기와 18홀의 핸디캡 경기로 나누어 치러진다. 특히 준프로급이 참여하는 연령대별 경기는 내년에 미국에서 열리는 내셔널시니어골프대회 예선전을 겸하고 있어 좋은 성적을 거두면 내셔널골프대회 출전자격도 덤으로 얻을 수도 있다.
유타주 세인트조지시는 선브룩나 딕시 레드힐스와 같은 유명 골프장이 주변에 즐비해 세계의 골프 마니아들이 연중 몰려드는 골프 휴양지다. 건조한 사막성 기후에 붉은 바위산을 끼고 양탄자 같은 잔디가 펼치진 링크코스는 골퍼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도전적인 신중년들은 철인 3종 경기와 산악자전거 경기에서 세계의 베테랑 철인들과 한판 승부를 겨뤄 볼만하다. 강렬한 햇살을 받으며 선인장밖에 없는 황무지에서 진행되는 사이클링, 도로 달리기와 경보는 요즘 붐이 일고 있는 운동. 동우회의 회원들이 함께 참가하면 좋은 추억을 만들 수 있다.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과는 달리 헌츠먼 시니어대회는 매년 열려 미국, 캐나다는 물론 세계 각지 스포츠 동우회의 연례 모임 장소로도 활용하고 있다.
네바다주 카슨시의 브렌다 블랙햄 여사는 35년 전 고등학교 배구팀 코치로 활약했다. 전국 대회를 휩쓸었던 추억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동고동락했던 학생 선수들이 이제는 의사, 변호사, 교육자 등으로 미국 각지에서 맹활약을 하고 있으나 다 같이 한번 모이기가 쉽지 않았다.
학생들이 지천명(50세)의 나이를 넘긴 2014년, 이 대회에 배구팀으로 함께 참가하면서 소망했던 재회가 이루어졌다. 손발 한 번 맞추어볼 겨를도 없이 바로 경기에 참가했지만 그저 즐거웠고 경기를 거듭할수록 옛날 팀워크가 되살아나면서 더 즐거웠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 10월의 대회기간에도 바쁜 일을 접어놓고 모두 모여 경기를 하면서 재회의 기쁨을 나눌 계획이다.
독일 배구팀은 지난해 금메달의 한을 10년 만에 풀었다. 2006년부터 참가한 독일팀은 2013년에는 세계시니어배구챔피언십을 겸한 이 대회에서 캐나다 팀에 석패해 은메달에 그쳤다. 2년간 실력을 더 갈고 닦아 지난해 우승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올해 있을 독일과 캐나다 팀 간의 리턴매치는 벌써부터 관심을 끌고 있다.
심금을 울리는 러브스토리도 빠질 수 없다. 서울올림픽 때의 안재형과 자오즈민의 열애에 견줄만한 전설 같은 이야기도 전해진다. 전역 군인인 미국의 댄 크레이번스와 러시아의 마리나 안드리바는 2004년 탁구 경기에 출전했다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했고 이제는 복식조로 함께 참가하고 있다. 신중년과 꽃중년이 뒤늦게 소울 메이트로 만나 적대적인 양국의 탁구계를 잇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해피엔딩 스토리다.
중국 청소년들의 자원봉사활동도 화제다. 2010년 미국의 시니어배구팀이 중국 순회 경기를 갔을 때 친절하게 봉사한 중국 청소년들과 인연이 되어 그 후 해마다 중국 청소년 10여명이 이 대회 때 미국에 와서 한 달여간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제법 치열한 경쟁을 통해 선발된 중국 청소년들은 현지 자원봉사를 통해 영어는 물론 국제 매너와 봉사정신을 익히게 된다.
헌츠먼 대회는 각계의 봉사자와 후원이 뒷받침되면서 참가 선수만 1만명이 훌쩍 넘는 국제대회로 성장했지만 출범은 단순했다. 1987년 존 모건 주니어 부부가 ‘운동과 체력단련이 일상이 되면 신중년의 황금기가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각지의 시니어가 함께 하는 대회를 구상하게 됐다.
여기에 홀인원을 5차례나 기록한 만능 스포츠맨이자 건강과학박사인 스티븐 워너 하이너 교수가 가세하고 세인트조지시도 적극 지원에 나서면서 대회를 출범시켰다. 출범 2년 뒤 헌츠먼코퍼레이션의 존 헌츠먼 회장과 부인이 본격적으로 후원하면서 세계적인 대회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이 대회가 성황을 이루는 데는 1시간 이내의 거리에 자이언캐년 국립공원이 있고 브라이스캐니언, 그랜드캐니언, 라스베이거스, 솔트레이크시티 등 많은 관광 자원과 부대시설이 뒷받침하고 있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문화 행사와 박물관 투어 등 다양한 볼거리와 먹거리가 있고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한 무료 건강검진을 실시하는 등 세심한 서비스도 참가율을 높이는 요인이다.
모건 회장은 메시지를 통해 “봉사자, 후원자, 참가자 및 임직원의 헌신과 노력으로 대회가 놀랍게 발전했다”며 “30주년을 기념해 성대하게 진행될 올 대회에 세계의 신중년들이 적극 동참하여 건강을 증진하고 우정도 돈독히 하자”고 역설했다.
요즘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의 힐튼 헤드 섬(Hilton Head Island)이 은퇴자의 천국으로 떠오르고 있다. 골프 애호가라면 PGA투어 RBC 헤리티지대회가 매년 열리는 아름다운 하버타운 링크스코스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힐튼 헤드 섬은 미국의 은퇴자들이 좋아할 요소를 거의 다 갖추고 있다. 겨울에도 영하로 떨어지지 않고 눈이 거의 오지 않는 온화한 기후는 한파에 시달리는 뉴욕, 보스턴 등 도회지의 은퇴자들에게는 큰 매력이다. 30도를 넘는 여름 더위가 9월까지 이어지기는 하지만 수온은 수상 스포츠에 최적이다. 저녁이면 선선해지니 휴식과 숙면을 취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고즈넉한 대서양 해변과 하얀 요트가 즐비하게 정박된 마리나와 야자수가 어우러진 항구의 전경은 숨 막히게 아름답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넓게 펼쳐진 바다, 하얀 모래와 맑고 깨끗한 습지 그리고 이끼로 뒤덮인 울창한 떡갈나무 숲은 대자연이 주는 은퇴기념 선물이며, 넉넉한 남부 인심은 은퇴자들에게 기를 불러 넣어주는 활력소다. 눈부신 햇살 아래 짭짤한 갯바람을 맞으며 160㎞에 달하는 자전거 도로를 달리고, 30여 개 골프 코스에서 라운딩을 하다보면 인생 후반기의 허무감은 어느새 충만감으로 바뀐다.
카약, 승마, 테니스, 낚시 등 갖가지 스포츠와 취미활동은 힐튼 헤드 섬의 주요 일과다. 19㎞에 걸쳐 펼쳐진 해안을 따라 무리지어 유영하는 돌고래를 유람선을 타고 관찰하며 달도 없는 깜깜한 밤에 붉은바다거북의 산란을 위해 해변의 조명을 모두 끌 때면 자연과의 일체감을 맛보게 된다. 저지대 늪지에서는 새우와 게를 쫓아다니는 푸른 왜가리와 큰 입을 딱 벌리고 햇볕을 쬐는 악어를 만나는 놀라움도 있다.
맨해튼(여의도의 30배)만한 넓이의 힐튼 헤드 섬에서는 4만여 주민이 오순도순 지내지만 해마다 250만 명의 외지인이 찾아와 한가하고 여유로운 기분이 전혀 들지 않는다. 쇼핑 환경도 맨해튼 수준이다.
특가 상품에서부터 디자이너 브랜드와 특별한 사람에게 선물할 독특한 기념품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든 구할 수 있는 200여 개의 아웃렛과 상점, 그리고 6곳의 마리나 빌리지 상가는 주민뿐 아니라 관광객의 눈길과 발길을 끌고 있다.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자동차로 5시간, 사바나에서 45분(57㎞) 거리에 있는 힐튼 헤드 섬은 큰 다리로 내륙과 연결되어 있어 여객선이 다니지 않는 섬이다.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이나 사바나국제공항에서 항공편을 이용하면 이동시간을 줄일 수 있다. 미국 동부 연안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인 힐튼 헤드 섬은 원래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따뜻한 기후와 야자열매, 풍부한 해산물을 즐기던 곳으로 1663년 영국의 윌리엄 힐튼 선장이 처음 이 섬을 발견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 ‘힐튼 헤드’라고 명명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섬의 73%가 은퇴자를 위한 주택단지
힐튼 헤드 섬의 73%는 10개의 대단위 리조트형 주택단지가 차지하고 있다. 이 주택단지 가운데 상당수는 매입 자격을 55세 이상의 신중년으로 제한하고 있다. 대부분 단지에는 관리사무소를 중심으로 실내외 수영장, 피트니스센터, 테니스장, 연회장, 식당 등이 갖추어져 있고 호수와 숲, 골프 코스와 마리나가 인접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섬에 정착한 은퇴자들은 평균 6차례 이상 방문하여 생활환경을 체험한 후 주택을 매입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웃과 격이 없이 지내는 이 섬의 분위기를 느끼고 썰물 때면 90m나 밀려나 숨겼던 민낯을 드러내는 갯벌을 산책하면서 돌고래가 수영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저절로 들게 된다.
이 섬의 지난해 주택매매 가격은 단독주택의 경우 52만달러, 타운하우스와 아파트는 20만달러 수준. 침실과 화장실이 각 2개인 아파트는 20만~40만달러, 단독주택은 25만~45만달러, 그리고 침실과 화장실이 각 3개인 주택은 40만~70만달러를 호가한다. 바다 경치가 아주 좋은 주택은 150만달러를 훌쩍 넘고 700만달러를 호가하는 그림 같은 주택도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
6개월 정도만 빌려 살아볼 수 있는 아파트도 구하기 어렵지 않다. 스튜디오형은 월 평균 600달러, 침실 1개짜리는 800달러, 침실 2개짜리는 900달러 수준이다. 성수기인 여름철에는 며칠만 빌릴 경우에도 임대료가 치솟는다. 침실 1개인 주택이나 아파트도 전망이 좋으면 1주에 1200~1800달러, 해변을 걸어서 갈 수 있는 위치면 1000~1200달러 정도다. 봄과 가을에는 20% 정도 할인되고 겨울에는 50%나 싸진다. 2억달러 넘게 투입해 새 단장을 한 리조트의 하루 방 값은 일반형 기준으로 130~340달러 수준이다.
주거비가 웬만한 휴양지나 은퇴자 생활지보다 비싸지만 주거비를 포함한 생활비 총지출은 맨해튼의 50%, 워싱턴이나 보스턴의 75% 수준을 넘지 않는다. 재산세가 다른 지역의 25% 수준인 데다 소득세, 소비세 등 각종 세율이 낮고 85세 이상의 주민에게는 더 낮은 세율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자동차보험과 휘발유 값이 저렴한 것도 수월찮게 도움이 된다. 이 지역 주민들 가운데는 현역 시절 주택을 구입해 별장처럼 이용하다가 은퇴 후 눌러앉은 사람도 적지 않다. 세컨드 주택을 구입하면 세제 및 금융 혜택이 있는 데다 에어앤비를 비롯한 휴가용 주택 알선 사이트가 붐을 이루면서 목 좋은 곳의 별장은 재테크 수단이 되었다.
미국 남부 사람들이 테러보다 더 무서워하는 것이 허리케인이다. 힐튼 헤드 섬 주민들은 1850년 이후 섬 주변 반경 80㎞ 이내로 81차례의 허리케인이 지나갔지만 큰 피해를 입은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는 전설을 믿고 있다. 천혜의 지형 덕분인지 주민들의 후덕한 인심과 간절한 소망 덕분인지 알 수가 없다.
각양각색의 취미활동 그리고 평생교육도
힐튼 헤드 섬에서는 축제와 이벤트가 풍성하다. 해마다 열리는 다양한 뮤직 페스티벌, 해산물 축제, 고기잡이 경진대회, 카약과 보트 경주 등은 주민과 관광객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자리다.
멋을 살린 음악 카페, 길거리 밴드,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지어진 건물이 늘어선 메이 강변에 각종 포장마차와 공예품 전시판매점까지 어우러지면서 남부 특유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16㎞ 떨어진 블러프턴의 소도심에서는 이국적인 정취를 느낄 수 있고 남북전쟁 때의 화재와 파괴를 견뎌낸 대농장주의 저택과 교회는 박물관과 관광안내소로 활용되고 있다. 수백 년 된 거대한 나무와 옛 건물은 그림엽서로도 간직되고 있다.
은퇴자들의 취향은 제각각이다. 요트, 카약, 낚시 등에 빠져 있는 ‘해양스포츠파’, 생태관찰 보존과 식물 재배에 몰입한 ‘에코파’, 골프, 사이클, 테니스와 달리기 등을 주로 하는 ‘육상스포츠파’, 공예품 만들기, 독서, 해변 일광욕, 흔들의자 등을 즐기는 ‘정중동파’ 등 각양각색이다. 하지만 봉사활동과 평생교육은 이곳 은퇴 생활자들의 공통된 일과다. 해안사구와 야생동물 서식지 보호에서부터 노약자 서비스, 도서관 운영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에서 자원봉사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사우스캐롤라이나대학과 협력관계를 맺은 오셔평생교육원은 1600명의 은퇴 생활자들을 대상으로 400여 강좌를 운영하고 있다.
1년 회비 40달러에, 수업료는 과목당 15달러. 모두 다 합쳐 연간 95달러를 넘지 않게 책정되어 있다. 선생과 학생이 따로 없다. 자신의 전공분야를 가르치고 관심 분야를 배운다. 학습을 하다가도 기분이 내키면 밖으로 나가 현장학습에 들어간다.
미국의 주요 언론과 관련 전문매체의 힐튼 헤드 섬 예찬도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2015년 최고의 은퇴 생활지’, ‘인생을 바꿀 건강한 봄철 휴가지’, ‘하계 모임을 위한 남부 최고의 장소’, ‘2016년 북미지역 최고의 골프 휴가지’, ‘캐롤라이나 남부 최고의 사이클 친화지역’, ‘미국 남부 5대 하계 가족휴가지’, ‘세계 50대 테니스 휴양지’, ‘미국 최고의 섬’, ‘인터넷 검색이 가장 많은 섬’, ‘사우스캐롤라이나 최고의 해변’, ‘2015년 세계 최고의 여행목적지’ 등등. 이런 찬사 덕분에 이 지역 은퇴 생활자들의 만족감은 더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