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초반, 전세 자금과 가진 돈을 몽땅 가지고 해외에서 2년 동안 한 달에 한 도시에 머무르며 세계를 다녔다. 삶의 패턴을 한 달에 맞추자,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삶을 대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달팽이처럼 10년째 한달살기를 하는 김은덕·백종민 부부의 이야기다.
“5년 동안 집도 사고 준비해서 떠나려고 했는데, 어림도 없더라고요. 신혼여행을 2주 동안 다녀왔는데 정말 좋은 거예요. 이렇게 좋다면 미루지 말고 떠나자고 한 거죠.”
김은덕·백종민 부부는 결혼하면서 약속을 했다. 5년 뒤에 세계 여행을 가자고. 그런데 현실에는 그들이 떠나지 못하도록 발목 잡는 일들이 많았다. 지금 떠나지 못한다면, 5년 뒤에도 가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한 달에 한 번 이사하는 마음으로
백종민 작가는 자신들의 ‘결여와 결핍’이 ‘한달살기’라는 여행법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계산으로 1년간 세계 여행을 하는 데 1인당 필요한 돈은 3000만 원. 두 사람이 2년 동안 세계 여행을 하려면 총 1억 4000만 원이 필요했다. 당시 수중에 있던 돈은 7000만 원. 예상 비용에서 50%를 줄여야만 2년 동안 여행할 수 있었다.
“여행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비용이 숙박비와 교통비더라고요. 그래서 고민 끝에 찾은 방법이 한 달 동안 한 숙소에서 지내는 거였어요. 숙박비 할인받고, 이동이 적어지니 교통비도 줄일 수 있었죠. 그렇게 10년 동안 45회 정도 ‘한달살기’를 했어요.”
해외로 한달살기를 떠난 2013년만 하더라도 한곳에서 한 달을 여행한다는 개념은 흔하지 않았다. 주변에서는 ‘그럴 거면 유학을 하거나 이민하지’라는 반응이 많았다. 한 달 ‘여행’이 아닌 한 달 ‘살기’는 얼마나 달랐을까?
“여행(旅行)의 한자를 풀이해보면, 낯선 곳을 둘러보고 오는 거잖아요. 그런데 한달살기는 새로운 거주지를 찾아가는 개념이에요. 살아야 하는 곳이라면 좋든 나쁘든 적응해야 하잖아요. 어떻게 이 도시와 빨리 친해질까 생각하게 되죠. 그곳에서 무엇을 볼까가 아니라 무엇을 해볼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게 여행과 다른 점이에요.”
부부는 어느 도시를 가든 ‘달팽이 여행법’으로 한 달을 보낸다. 첫째 주에는 동네를 돌아다니며 맛집이 있는지, 슈퍼마켓은 어디에 있는지, 도서관 같은 공공시설은 있는지 정보를 수집한다. 둘째 주가 되면 조금 더 멀리 나가고 싶어진다. 첫째 주에 주변을 돌며 알게 된 동네 행사도 참여하고, 평소 궁금했던 장소도 찾아가 본다. 그렇게 2주를 돌아다니다 보면, 동네 주민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셋째 주에는 우리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꼭 나타나요. 말을 걸기 시작하죠. 밥 먹자고 하거나 동네에서 꼭 가봐야 할 곳을 알려주기도 해요. 정말 성격 급한 분들은 ‘야 거기 말고 여기 가야 해’라며 알려주다가, ‘그냥 내가 데려다줄게’라며 그 자리에서 차를 태워주기도 해요. 새로운 여행지를 갈 기회가 되죠.”
나선형으로 점점 커지는 달팽이 껍질처럼 1주 차부터 4주 차까지 활동 반경이 숙소로부터 점차 넓어진다. 그래서 ‘달팽이 여행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마지막 주에는 떠날 준비를 하면서 도움을 준 주민에게 한식을 만들어 대접하고 함께 식사하며 작별 인사를 한다. 물론 도시의 특성에 따라 교류가 많지 않은 도시도 있지만, 누군가와 이야기하며 이별하는 시간을 가지면 ‘아, 한 달 잘 살았다’ 하는 기분이 든다고.
김은덕·백종민 작가는 한달살기를 하는 동안 여행 기록을 매주 4편 블로그에 남겼다. 2년 뒤 돌아올 때 100호를 완성하겠다는 목표였다. 날것의 글이었지만, 마치 함께 여행하는 기분이 든다며 글을 기다리는 독자도 생겼다. 그래서 이 글들을 모아 ‘한 달에 한 도시’ 1, 2, 3권과 ‘여행 말고 한달살기’를 펴냈다.
◆중장년이 가기 좋은 나라 추천
중장년은 비행시간이 6시간 넘어가면 체력적으로 힘들어하세요. 또 ‘K-부모님’(한국 스타일 부모님)에게는 가성비 좋은 한달살기가 중요해요. 동남아 국가의 가장 좋은 점은 큰 집을 저렴하게 빌릴 수 있다는 거예요. 은퇴하고 나면 건강관리 하려고 운동도 많이 하시잖아요. 비행시간이 짧고, 가성비 좋으면서, 운동하기 좋은 나라들을 꼽아봤어요. 경제적으로 여유가 된다면, 가까운 일본도 좋아요.
ㆍ베트남 호찌민 주변에 골프장이 많아요. 골프를 즐기는 중장년이 가시면 좋을 거예요.
ㆍ태국 치앙마이 치앙마이는 겨울을 보내기에 좋아요. 트레킹도 가능하고, 코끼리 보호 활동같이 생소한 경험도 해볼 수 있어요.
ㆍ대만 가오슝 저렴한 비용으로 수영할 수 있어요. 매일 수영을 즐겨보세요.
ㆍ일본 삿포로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여름에 마라톤 대회가 열려요. 자연 경치가 멋진 곳이 많아 볼거리도 있어요. 일본인의 여름 휴양지로 꼽히는 만큼, 지금 떠나기 좋겠네요.
중장년에게 잘 어울리는 한달살기
한달살기는 삶과 여행이 공존한다. 여행 스케줄을 만드는 게 아니라, 삶의 스케줄을 그대로 옮겨온다. 그러니까 우리가 일상에서 했던 일들을 한달살기를 하는 도시에서도 이어간다. 그래서 한달살기는 중장년이 하기에 가장 좋은 여행이다. 시간은 많지만 경제적으로 아껴야 하고, 은퇴 후에 새로운 라이프스타일도 고민해야 하기 때문이다.
“은퇴하면 삶의 시간을 쓰는 방법이 완전히 바뀌잖아요. 라이프스타일에 변화가 있을 때 한달살기를 하면 정말 좋아요. 삶에 변화를 주고 싶을 때는 세 가지를 바꾸면 된다고 해요. 만나는 사람, 시간 패턴, 공간이에요. 한달살기는 이 세 가지가 다 가능하니까 좋은 거죠.”
부부는 한달살기를 하면서 평소 하고 싶었던 것들을 도전해보라고 조언했다. 배우고 싶었던 언어, 해보고 싶었던 수영 등을 낯선 도시에서 시도하는 거다. 도서관에 가는 걸 좋아했다면 숙소 근처에 공공도서관이 있는지 찾아본다. 마을에서 열리는 행사에도 참여해보고, 단골 음식점도 만든다.
“누구나 마음속에 하고 싶은 일들이 작은 것이라도 있을 거예요. 은퇴하고 해보고 싶었던 것을 낯선 도시에서 도전해보세요. ‘매일 헬스장 가기’를 말이 통하지 않는 낯선 곳에서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그 시도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자극이 돼요. 그런 경험을 할 때마다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은퇴할 때쯤이면 삶에서 더는 새로운 게 없을 것 같은데 외국에 나가면 정말 새로운 일투성이거든요. 그걸 온몸으로 겪어보면 좋지 않을까요.”
기왕 한달살기를 할 거라면 해외를 추천하는 이유다. 국내에서 한달살기를 하면, 그 도시가 나와 맞지 않는다고 느끼는 순간 차를 타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해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해외를 나가면 쉽게 돌아오지 못한다. 발목 잡는 환경을 만들어두면, 좋아도 싫어도 그곳에서 적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삶에 지쳐 무뎌진 감각을 날카롭게 세우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다.
“다른 언어, 내가 살아온 공간과 다른 환경, 다른 규칙이 자연스럽게 나를 날카롭게 만들어요. 삶에 지치거나 익숙해서 무료해질 때,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지?’ 의문이 생길 때 한달살기를 하면 다시 삶의 감각이 살아나요. 한 달이면 어느 정도 익숙해지는 시간이기도 한데, 익숙해질 때쯤 떠나니까 여행자면서 거주자의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좋더라고요.”
한달살기의 또 한 가지 장점은 ‘긍정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 파리에서는 숙소를 잘못 예약해 세 평짜리 방에서 한 달을 살아야 했다. 그 시간을 보내고 나니 ‘세 평에서도 한 달이나 살 수 있네’라는 긍정적인 마음을 갖게 됐다고. 작은 것에 실망하지 않고, 행복을 느끼고, 힘든 상황도 견뎌낼 수 있는 계기가 됐다. 2년 동안 한달살기를 하면서 삶을 대하는 가치관도 크게 바뀌었다. 세상을 보는 눈도 달라졌다. 부부는 그래서 한달살기를 ‘선물’이라고 말한다.
◆중장년을 위한 한달살기 Tip
1 첫째도 날씨, 둘째도 날씨!
한달살기에서 가장 중요한 건 날씨예요. 며칠이 아니라 한 달을 머무르는데, 매일 비가 오거나 매일 덥거나 매일 춥다면 어떨까요? 저희가 올해는 마음이 급해 2월에 터키로 떠났더니 눈보라가 엄청났어요. 4월에 갔던 조지아는 일주일 내내 폭설이 내리더라고요. 날씨의 중요성을 또 한 번 깨달았어요. 또 나이 들수록 움직임이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 날씨는 정말 중요해요. 시간 여유가 있는 중장년 분들은 날씨 좋은 때를 맞추기 편할 거예요.
2 비교는 금물!
‘한국보다 oo하네’라는 비교는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순간 내 여행의 격과 질이 뚝 떨어져요. 내가 다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 그 도시에서는 다를 수 있어요. 방문한 지역에 맞춘 삶을 살아야 만족스럽게 한 달을 보낼 수 있습니다. 더불어 신선한 자극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3 한 달 생활비 계산하기
한국에서 한 달에 얼마를 쓰는지 먼저 계산해보세요! 이 비용에 맞추면 풍족하지는 못해도 한달살기를 하는 데 전혀 무리가 없어요. 저희 숙소비는 월 500달러를 넘기지 않았는데요, 동남아라면 수영장과 헬스장까지 갖춘 곳에서 한달살기를 할 수 있어요. 내가 쓸 수 있는 상한선과 최소한의 생활이 가능한 하한선을 잘 알고 떠나면 해외 한달살기도 충분합니다.
4 비수기를 노리자
저희 부부가 한국에서의 생활비로 해외에서 한달살기를 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비수기에 떠났기 때문이에요. 9월에는 1인당 30만 원으로 태국으로 떠날 수 있었어요. 유럽도 비수기라면 왕복 70만 원으로 어디든 갈 수 있고요. 또 저비용항공 프로모션도 가능해요. 비수기에 떠난다면 항공료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
5 숙소는 한곳에서 머무르기
젊은 친구들은 한달살기를 하더라도 숙소를 일주일에 한 번씩 옮기더라고요. 그러면 체력 소모가 너무 커요. 또 쓸 수 있는 돈은 한정적이니까 비용을 아끼면 좋잖아요. 한 달 동안 한 숙소에 머무르면 주인을 설득해서 할인받을 수 있어요. 집주인도 비용이 줄기 때문에 보통은 30%, 많으면 50%까지 할인해줘요.
이젠 연두에서 완연한 초록이다. 선명해진 그 색감 속에서 자연을 충만하게 누릴 만한 곳, 안성에 가면 산자락을 돌며 이루어진 호숫가의 신록이 한창 물이 올랐다. 호수를 감싼 둘레길이 매력적인 안성. 날마다 감각적인 공간들이 튀어나오는 세상에 푸름이 가득한 시인의 고향에서 마주하는 사색과 사유의 시간으로 여기가 더없이 딱 안성맞춤이다.
시를 만나며 걷다, 박두진 둘레길
굳이 박두진 문학길을 내비게이션에 넣지 않아도 안성의 금광호수만으로도 자동차는 잘 찾아간다. 둘레길 진입로엔 청록뜰과 수석정 두 코스가 있다. 금광호수를 따라 빙 둘러싼 박두진 문학길 중 하나인 수변산책로 청록뜰은 인적이 드물다. 안성 시내에서 동쪽으로 자리 잡은 빼어난 경관의 금광호수 수변길은 오직 자연의 소리만 들린다. 잔잔하게 흔들리는 낮은 물소리와 숲길 따라 걸으며 들려오는 새소리가 전부다.
수변데크를 걷다 보면 호수를 둘러싼 주위 산들이 기다랗게 어우러진 풍경이 자연스럽다. 안성은 큰 강이 없는 내륙이다 보니 농업용수 공급을 위한 저수지를 여럿 만들었다. 금광호수는 안성의 대표적인 호수다. 보통은 둥그런 형태의 호수 모양이 흔한데, 주변의 산길 따라 구불구불하게 형성된 모양이다. 호수 위에 얹은 나무데크 길은 사뭇 물 위를 걷는 느낌이랄까. 가다가 숲 그늘 벤치에 앉아 마음껏 ‘물멍’에 잠겨도 좋다. 맞은편 산이 물속에 잠겼다. 물속에 잠긴 나무의 반영이 청송 주산지와 흡사하다. 다만 시인의 고향인 이곳의 고요함은 어쩐지 더 아련하다.
시인이 나고 자란 고향 안성. 조지훈, 박목월 시인과 함께 청록파 시인으로 알려진 혜산 박두진 시인은 유년기를 안성의 농촌 마을에서 보냈다. 그 후 평생을 대학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며 실천하는 지식인의 삶을 살면서 자연을 시로 노래한 분이다. 말년엔 안성에 집필실을 마련하고 문학적 토대가 되었던 고향 땅에서 시를 쓰고 유년기의 추억을 집필했다고 전한다. 호숫가를 돌다 보면 언덕 위로 집필실을 볼 수 있는데, 이곳에 앉아 호수 물빛을 바라보며 따스한 고향의 품을 누렸을 듯하다. 지금은 자료들을 모두 옮기고 빈집과 표지석만 남아 있다.
박두진 문학관과 안성맞춤 공간들
물 위를 걷듯 수변의 박두진 문학길을 걷다 보면 군데군데 시인의 시구가 한마디씩 맞아준다. 숲길 따라 시(詩)를 만나며 혜산정으로 오르는 산책로에서는 호수가 한눈에 들어온다. 적당히 땀 흘리며 여유롭게 걸으니 몸과 마음이 동시에 건강해지고 순해지는 기분이다. 이렇게 평온함을 주는 아름다운 둘레길이라니, 시인의 길에서 감성을 일깨우는 시간이기도 하다.
기왕 나섰다면 금강호수 둘레길의 박두진 문학관도 들러볼 일이다. 문학길에서 자동차로 10여 분 거리다. 잘 알려진 대표적인 시 ‘해’가 그려진 외관이 멋스럽다. 박두진 시인의 문학사상과 관련 자료 전시, 교육, 휴식이 어우러진 복합문화공간이다. 전시 공간은 1부 ‘박두진의 시를 읽다’, 2부 ‘박두진의 일상을 보다’, 3부 ‘박두진의 예술 세계를 만나다’로 구성되었다.
1층 북카페와 수장고를 지나 2층을 둘러보며 간간이 시를 읽어본다. 자필 원고와 원고료 영수증 같은 시인의 소소한 일상도 볼 수 있다. 단소와 서예를 즐기던 모습과 영상으로도 시를 만난다. 한켠의 서재 공간은 연희동 집에서 옮겨와 똑같이 만들었다고 한다. 잘 고증된 지인들의 회고 영상이나 수많은 작품과 자료들이 지루하지 않다. 살아생전 주변 문인들과 교류의 흔적, 시인의 대표적인 작품들을 낭독으로 들을 수 있는 특별한 전시 공간도 마련되었다. 노래로 만나는 박두진 시인 코너에서는 시에 곡을 붙인 조수미와 조하문 등의 노래를 헤드폰을 끼고 들어보는 것 또한 즐겁다.
박두진 시인은 수석과 붓글씨, 도자기 등 다양한 예술 분야에 조예가 깊었다. 전시장 곳곳에 집약적으로 펼쳐놓은 시인의 생활을 보면 일상이 고스란히 예술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1층으로 내려오는 계단을 따라 보여주는 문인들의 사진과 회화 작품들이 시인과 연관해서 생각케 한다. 다목적실로 이어지며 나타나는 책이 구비된 멋진 공간, 서가의 책을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어 편하게 앉아 책 속에 파묻히고 싶을 때 찾으면 좋을 듯.
문학관 주변에 조성된 공예문화센터와 잔디광장, 야생화 단지는 시민공원으로 최적이다. 박두진 문학관은 안성맞춤랜드 북쪽 끝자락인 셈이다. 안성맞춤랜드의 남사당 공연장이 문학관 건너편에 마주하고 있다. 안성 남사당패의 바탕이 된 여성 꼭두쇠 예인 바우덕이를 기리는 민중 예술단 남사당 공연장이 산 아래 웅장하다. 주변으로 천문과학관이나 캠핑장도 이어져서 커플이나 가족 단위 나들이로도 안성맞춤. 안성 시민들과 여행자들에겐 최고의 쉼터이자 복합문화공간이다.
주변에 가볼 곳이 아직 많다. 안성에서는 올망졸망하고 나지막한 산과 호수들이 천혜의 자원이다. 안성목장 들녘에는 청보리가 익어서 누렇게 일렁이고, 죽주산성의 탁 트인 성벽을 따라 오르며 역사를 되짚어보는 것도 의미 있다. 유기공방에서 장인의 전통 유기도 살펴보고, 4대째 이어오는 노포 맛집 안일옥에 들러 안성 쌀밥에 국밥 한 그릇도 먹어야 한다. 나선 김에 마음 끌리는 곳으로 한 군데 더 발걸음한다면 천년고찰 석남사(石南寺)가 있다.
천년고찰 석남사 돌계단 그 끝까지
서운산 기슭에 들어앉은 석남사는 통일신라 문무왕 때 창건된 절이다. 입구부터 시작되는 돌계단을 밟으면서 단박에 이 절이 마음에 들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가파르게 계단이 쭉 이어진다. 오르면서 계단 옆으로 불두화가 맞아주어 잠깐씩 발걸음을 멈춘다. 조금 더 오르면 계단 옆으로 호위하듯 세운 담장에 기댄 보랏빛 매발톱이 바람에 살랑살랑. 드물게도 계단 오르는 일이 힘들지 않다.
돌계단 중간쯤에서 양옆으로 두 기의 5층 석탑, 그리고 나타나는 영산전 문이 활짝 열려 있다. 기도를 올리는 스님의 뒷모습이 보인다. 석가모니불과 그 일대기를 그린 팔상도를 함께 모신 불전이다. 또한 500나한을 함께 봉안한 것이 특징인 조선시대 건축 양식으로 중요한 자료라고 한다. 영산전에서 또 한 번 계단을 오르면 그 끝에 석남사의 대웅전이 기다린다. 마치 마지막 신전에 오르는 기분이다.
대웅전 앞에 서서 석남사를 내려다본다. 산 높이에 따라 중턱에 배치된 몇 동 안 되는 사찰의 구성이 운치 있다. 절 앞으로 마주한 산과 뒤편으로 배경이 되어주는 산세가 너무나 평안하다. 이렇게 유순한 산세에 파묻힌 절의 긴 계단을 오르면 드라마 속 배우 공유가 날리던 풍등이 자연스러워 보였던 이유가 있었구나 싶다.
절에서 조금 더 걸으면 마애여래입상을 만난다. 산길을 쭉 걸으면 청룡사도 나오니 시간이 허락된다면 산행을 즐겨볼 만하다. 꼭꼭 숨은 듯 서운산 자락에 묻힌 석남사, 고졸(古拙)함과 소박함의 깊이가 거슬릴 것 하나 없이 기막히다.
지역을 온전히 느끼며 소소한 일상을 만끽하는 여행, 한달살기가 인기다. 지방자치단체에서는 한달살기 프로그램을 만들어 지역 활성화를 유도하고, 숙박업체는 장기 임대 상품을 선보인다. 한달살기를 하고 싶은 중장년이라면 이번 기사를 참고해 계획을 세우고, 당장 떠나보자.
중장년 10명 중 8명은 ‘장기간 살아보는 여행’을 하고 싶어 한다. 한달살기는 중장년의 버킷리스트(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을 적은 목록) 중 하나지만, 막상 떠나려니 어디에서, 어느 정도의 비용으로, 얼마나,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하는 이들이 많다. 자유롭게 떠나도 되지만, 가이드와 함께하는 여행이 익숙한 중장년이라면 프로그램으로 첫 한달살기를 경험해보는 것도 좋다.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에 지원해 활동비를 받으며 한 달을 보낼 수도 있고, ‘작가로 한달살기’처럼 테마가 있는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도 있다. 코로나19 이후에는 호텔에서 한달살기도 하나의 방법이 됐다. 조금 더 알찬 한달살기를 위해 입문이 되어줄 프로그램, 숙소를 찾을 수 있는 다양한 플랫폼, 한달살기 꿀팁이 가득한 도서까지 참고가 될 내용을 소개한다.
◆한달살기가 처음이라면
많은 중장년이 오래 머무르고 싶어 하는 곳은 제주다. 하지만 제주 외에도 한달살기에 적합한 다양한 도시들이 있다. 어느 도시가 좋을지 모르겠다면, 한달살기를 지원해주는 각 지자체 프로그램을 참고해보자. ‘남도에서 한 달 여행하기’, ‘경남에서 한 달 여행하기’ 등이 대표적이다. 예산을 지원하다 보니 조건이 까다로울 수 있지만, 기회와 혜택을 생각하면 도전해볼 만하다. 각 지자체는 지역의 특색을 담은 명소나 특산품 혹은 농장 체험 등의 다양한 여행을 제안하는데, 만약 프로그램 신청이 어렵다면 지자체의 추천을 참고해 자유 일정을 계획하는 것도 방법이다. 한 달이 너무 길게 느껴진다면 3박 4일이나 일주일부터 시작해도 된다. 지자체별로 지원하는 예산 범위와 신청 조건, 신청 시기가 다르므로 미리 알아두면 좋다. 예산 지원은 사전 지급이 아닌 사후 정산이라는 점 참고하자.
◆마을과 깊게 교류하는 한달살기
지역 주민들과 교감하고 머무르는 지역에 깊이 녹아들고 싶다면 ‘마을 호텔’ 형태의 도시에서 한달살기를 해보자. 한 건물에 라운지, 숙박, 헬스, 식사 등의 서비스가 모여 있는 호텔과 달리, 마을호텔은 마을 전체가 하나의 호텔 기능을 한다. 마을 입구의 카페가 안내데스크 역할을 하고, 마을의 맛집이 다이닝 역할을, 곳곳의 공방 등이 체험 서비스 역할을 한다. 그러니 마을 전체가 곧 즐길 거리다.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교류를 할 수 있는 건 덤이다. 관광형 한달살기가 아니라, 살아가는 한달살기를 찐하게 경험하고 싶다면 마을호텔은 어떨까.
ㆍ공주 마을스테이 ‘제민천’ 공주 제민천은 주민들이 유기적으로 마을호텔을 구성하고 있다. 한옥스테이 ‘봉황재’에서 시작하는 마을호텔의 프런트는 ‘가가상점’이 담당하고, 커뮤니티이자 로비 역할은 ‘반죽동247’ 카페가 하고 있다. 봉황재 외에도 ‘공주하숙마을’ 등의 고즈넉한 한옥스테이가 곳곳에 위치하며, 제민천을 중심으로 마을 곳곳에 먹거리와 볼거리가 숨어 있다.
ㆍ강원도 정선 ‘마을호텔 18번가’ 국내에서는 가장 먼저 마을호텔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고한읍의 낙후된 폐광촌에 고한18리 주민들이 힘을 모아 조성했다. 빈집을 리모델링한 숙소에 머무르면 마을식당, 카페, 사진관, 이발관 등에서 사용 가능한 할인 쿠폰을 받을 수 있다. 어르신들이 모여 있는 마을회관은 로비 역할을 한다. 마을을 둘러보다 쉬어가도 좋고, 어르신에게 볼거리를 물어봐도 좋다.
ㆍ군산 ‘후즈데어’ 군산 영화동에서는 ‘영화장’이라는 오래된 목욕탕과 여관이 게스트하우스로 재탄생 한 ‘후즈데어’에서 마을호텔이 시작된다. 프런트 역할은 영화타운에 있는 미국 음식점 ‘럭키마케트’가 담당한다. 스페인 레스토랑 ‘돈키호테’, LP바 ‘해무’, 청주바 ‘수복’ 등이 모여 있는 영화타운은 근대문화유산으로 유명한 군산의 또 다른 매력을 보여준다.
ㆍ서울 ‘서촌유희’ ‘서촌유희’는 오래된 한옥과 옛길의 흔적이 골목 곳곳에 녹아 있는 동네의 개성 넘치는 가게들을 연결하고, 걷기 좋은 골목과 장소를 제안한다. 서촌유희의 한옥 숙소는 휴식을 취하며 나를 돌아보기 좋은 곳이다.
〈책으로 미리 챙기는 한달살기 ‘꿀팁’〉
1_여행 말고 한달살기
저자 김은덕, 백종민 출판 어떤책
한달살기를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가이드북. 장기 여행을 준비하는 데 필요한 꿀팁이 가득하다. 특히 해외에서 한달살기를 해보고 싶다면 상황별·계절별 추천 도시들을 보고 나에게 맞는 나라를 찾아보자.
2_60대 부부의 피렌체와 토스카나, 그리고 남부 이탈리아 소도시 한 달 살기
저자 김영화 출판 바른북스
한 도시에 머무르며 주변 소도시로 여행을 떠나고 싶은 자유로운 여행자에게 어울리는 책. 대중교통을 이용해 유럽을 둘러볼 방법을 소개한다.
3_다녀왔습니다, 한 달 살기
저자 배지영 출판 시공사
일하며 한달살기, 은퇴 후 한달살기, 반려동물과 한달살기 등 나의 상황에 맞는 계획을 세우기 좋은 책. 국내에서 한달살기를 했던 여행자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떠나고 싶어진다.
◆호텔에서 한달살기
‘호텔에서 보내는 바캉스’라는 의미의 ‘호캉스’가 유행하더니 ‘한달살이’ 상품도 등장했다. 깔끔한 공간과 다양한 부대 서비스로 중장년에게 인기가 많다. 즐길거리가 많은 도심에서 일상을 만들어가는 한달살기를 하고 싶다면 호텔에서 머물러보는 것도 방법이다. 가격은 천차만별. 롯데호텔이 내놓은 ‘한 번쯤 꿈꾸는 호텔에서의 삶’을 주제로 한 시그니엘 서울 한달살기는 1000만 원이 넘는다. 신라스테이, 포포인츠바이쉐라톤, 롯데시티호텔 등은 100만~200만 원대에 이용할 수 있다. 호텔별로 제공하는 서비스가 다르니 취향에 맞게 골라보자.
◆주제가 있는 한달살기
하나의 주제를 정해 한달살기를 해보는 것도 방법이다. 만 19세 이상 60세 이하인 작가들의 한달살기를 지원하는 ‘묵호등대마을 논골담길 한달살기’, 제주 시골집에서 보내는 어른의 방학 콘셉트의 ‘제주맥주 한달살기’, 다른 지역에서 원격 근무를 하며 살아보는 일(Work)과 휴가(Vacation)를 함께하는 ‘강원도관광재단 워케이션’, ‘제주 세화리 질그랭이 워케이션’ 등이 있다.
〈쉼이 되는 공간, 숙소 찾는 플랫폼〉
한달살기에서 중요한 건 머무르는 공간이자 생활을 하는 숙소다. 장기 숙박 상품을 모아둔 플랫폼에서 살고 싶은 숙소를 찾아보자.
ㆍ미스터멘션 ‘쉼’을 제안하는 장기 숙박 플랫폼. 한달살기, 보름살기, 일주일살기에 맞춰 전국의 숙소를 볼 수 있다. 추천 숙소, 호텔, 프라이빗한 곳, 반려동물과 함께할 수 있는 곳 등 다양한 테마가 다양하다. 개인이 숙소를 예약했다가 일어날 수 있는 ‘이중 계약’, ‘당일 입실 거부’ 등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최대 100만 원까지 숙소 비용을 보장하는 안전거래제도가 있다.
ㆍ호텔에삶 한달살기를 할 수 있는 호텔만 모았다. 저렴한 3성급부터 5성급 프리미엄까지 서울, 수도권, 경상, 제주에 있는 호텔 숙박 정보가 있다. 호텔을 예약하기 전 미리 내부를 둘러볼 수 있는 투어를 신청할 수 있다. 매월 할인 프로모션도 있으니 원하는 도시의 호텔 가격을 비교해보고 합리적인 호텔 라이프를 즐겨보자.
ㆍ에어비앤비 에어비앤비는 숙박 공유 서비스다. 전문 숙박업체가 아니라 개인이 제공하는 빈집을 빌리는 개념이기 때문에 공간 상태도 천차만별이고 숙박업체와 같은 서비스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대신 저렴한 숙소를 구할 수 있다. 장기 숙박이라면 할인 제안도 해볼 수 있다. 특히 해외는 에어비앤비가 활성화되어 있어 잘 둘러보면 좋은 집을 구할 수 있다. 숙소 선택에 실패하지 않으려면 ‘슈퍼호스트’가 제공하는 숙소 위주로 보고, 해당 숙소의 후기와 별점을 참고하는 게 좋다.
전염병과 맞서던 지난한 시간도 배움을 향한 열정만큼은 꺾지 못했다. 포스트 코로나를 준비하는 시기, 팬데믹이 지나간 교육 현장은 어떤 모습일까. 초여름 햇볕이 따갑던 지난달 12일, ‘옛 지도로 읽는 한양과 서울’ 수업이 있는 동남권 캠퍼스 강의실을 찾았다.
“선생님들, 안녕하세요. 한 주 동안 잘 지내셨나요?”
이현군 강사가 어린이날 휴무로 인해 2주 만에 만난 학생들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이날 강의 참석자는 정원 15명 중 11명. 50대부터 80대까지 연령대도 다양하다. 네 번째 답사인 한양도성 방문을 앞두고 이론 수업을 듣기 위해 모인 학생들은 한 줄에 한 명씩 거리를 띄워 앉았다.
“여기는 지금의 어디일까요?”
1교시의 주제는 옛 지도로 읽는 도성과 서성(탕춘대성), 북한산성. 수업의 진도는 한양도성을 시작으로 동서남북, 네 가지 방향으로 펼쳐졌다. 2주 만에 만난 탓인지 복습차 묻는 질문에 대답이 곧바로 들려오지 않았다. 그럴 때면 다시 시작점인 한양도성부터 천천히 되짚으며 학생들의 이해를 도왔다. 학생들의 열정도 만만치 않았다. 직접 뽑아온 옛 지도를 요리조리 살펴보고, 생소한 내용은 수첩에 필기하는 등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 학생은 빔프로젝터로 띄워둔 지도의 지명이 잘 보이지 않자 손을 들고 지도를 확대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옛 지도로 읽는 한양과 서울’은 서울시민대학 동남권 캠퍼스에서 제공하는 서울학 강좌 중 하나다. ‘다양한 수업을 양질로 제공하자’는 서울시민대학 운영 방침 아래, 전문가 자문과 학생들의 피드백을 받아 만들어진 과정인 만큼 전반적으로 높은 수강 만족도를 보이고 있는데, 서울학 강좌는 특히 인기가 높다. 이론 수업과 현장 답사를 병행하는 덕분인지 수강 신청이 열리자마자 마감될 정도다. 김정호 서울특별시평생교육진흥원 시민참여팀 주임은 “수강 신청을 받던 시점에는 사회적 거리두기 조치 때문에 수강 인원이 줄어들어 더욱 경쟁이 치열했다”고 증언했다.
“강의실이 조금 덥죠?”
부쩍 더워진 날씨에 강의실이 조금 후덥지근하다 느껴질 참이었다. 이미지 학습 매니저가 학생들의 의사를 확인한 뒤 에어컨 작동을 위해 밖으로 나섰다. 강의실 구석에 앉아 누구보다 열심히 수업을 듣기에 강의를 신청한 학생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이 강의에 배정된 학습 매니저였다.
서울시민대학에서는 강의당 학습 매니저를 한 명씩 배정한다. 강의 환경을 항상 확인하고 수업 시작 전 출석 체크를 하는 등 강사와 학생들이 수업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보조하는 역할을 한다. 온라인 강의의 경우 화상회의 프로그램 ‘줌’(Zoom)을 조절하는 일을 맡는다. 옛 지도로 읽는 한양과 서울 수업의 학습 매니저는 조금 더 할 일이 많다. 답사가 있는 날이면 학생들을 인솔해야 하기 때문이다. 단체 기념촬영의 사진 기사 역시 그의 역할이다.
10분의 쉬는 시간이 끝나고, 학생들이 다시 자리를 채우자 2교시 수업이 시작됐다. 포천 이동막걸리의 ‘이동’이 어쩌다 붙었는지, 잠실새내는 왜 ‘새내’가 되었는지, 평창동과 창동의 공통점 등 지명의 유래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19세기에 제작된 전국 8도의 지도 ‘동국여도’의 연융대도, 도성연융북한합도 등을 띄워놓은 채였다.
54년 만에 개방된 북악산 남측면 ‘김신조 루트’에 대한 보너스 설명도 있었다.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등 북한의 무장대원 31명이 청와대 기습을 시도했던 ‘1·21 사태’ 당시의 이야기를 꺼내자 강의에 대한 집중도가 올라갔다.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한다고 하던가. 서울학 강의의 하이라이트는 다음 시간 집합 장소에 대한 안내 후 이어지는 답사지 근처의 맛집 소개였다. 코로나19 사태 이전처럼 답사 후 학생들과 뒤풀이를 할 수 없자 이 강사가 고안해낸 방식이다.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없다는 점은 아쉽지만, 기억이 가물가물한 상호를 되묻자 직접 검색해 확실한 상호를 알려주는 등 가장 열정적인 시간이었다.
수업 시작 전 만난 이현군 강사는 “과거와 현재의 오버랩”이라고 자신의 수업을 평가했다. 고문헌, 지도, 그림 등 다양한 사료들이 교재가 된다. 살고 있는 지역에 얽힌 옛이야기와 지명의 유래에 대해 배우고, 직접 걸어보며 답사에 나서면 지식도 오래 남고, 학생들도 수업을 더욱 즐길 수 있다는 것. 실제로 수업이 진행되는 2시간 동안 졸거나 딴짓을 하는 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배움을 향한 열정 앞엔 그 무엇도 방해물이 될 수 없다. 코로나와 탈(脫)코로나의 경계에서 계속되는 배움의 열기가 초여름 들녘처럼 푸르렀다.
거리두기가 전면 해제되고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풍토화, 즉 ‘엔데믹’에 대한 기대가 커지면서 각종 기관에서 여행활동 지원 확대 및 다양화를 추진하고 있다. 관광취약계층이 보다 편리한 여행을 즐기기 위한 지원 사안도 늘고 있다. 저소득층이나 장애인을 대상으로 여행상품을 제공하거나, 현장영상해설을 운영해 무장애 관광 환경을 조성하는 식이다.
서울시는 ‘관광취약계층 여행활동 지원사업’을 통해 사회적‧경제적 이유로 여행이 어려운 관광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한 여행활동 지원에 나선다. 3억 5천만 원 규모의 예산을 추가로 편성해 저소득층과 장애인 등 기존 600명 대상자 외에 최대 1천 100여 명까지 지원 대상을 늘릴 예정이다.
오늘(8일)부터 저소득층 및 장애인 등 관광취약계층 대상 참가자를 추가로 모집해 1박 2일 숙박 여행상품을 제공한다. 관광진흥법 시행령 상 관광취약계층으로,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및 차상위계층 최대 1000명(최소 470명), 중증장애인 중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및 차상위계층 100명을 모집한다.
기존에 서울 시내 여행상품에 한정해 최대 2인까지만 지원했으나, 서울 및 지방 여행상품까지 포함하고 최대 4인까지 여행활동을 지원하는 것으로 지역과 대상을 확대했다. 저소득층은 2인 기준 27만 원(주말 30만 원, 4인 기준 최대 60만 원) 한도, 장애인은 31만 원(주말 34만 원, 4인 기준 최대 66만 원) 한도 숙박 여행상품을 지원받는다.
참여자 선정 결과는 문자를 통해 개별 통보된다. 이후 여행 기간 내에 홈페이지에 접속해 여행상품을 선택 후 이용할 수 있다. 여행 기간은 6월 말에서 12월 초로, 참여를 원하는 서울시민은 서울시 홈페이지의 고시‧공고란의 관련 내용을 참고하거나, 서울시관광협회에 전화로 문의하면 된다.
서울시는 해당 사업으로 2017년부터 총 5135명을 지원해왔다. 매년 참여자 평균 만족도가 90점을 넘기는 등 선호도와 재신청률이 높다. 지난해부터는 소규모 개별 여행을 선호하는 트렌드를 반영해 단체여행이 아닌 개별여행을 지원하고 있다.
윤희천 서울시 관광정책과장은 “평소 여러 제약으로 여행이 어려웠던 분들의 많은 참여와 관심을 부탁드린다”라며 “앞으로도 서울시민 모두가 여행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계속해서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서울관광재단은 7일부터 시각장애인을 위한 현장영상해설 투어 예약을 받고 있다. 서울의 전통적인 매력과 자연, 역사를 즐길 수 있는 경복궁, 창경궁, 남산 등 3개 코스다. 현장영상해설사들은 시각장애인이 안전하면서도 풍부한 관광을 즐길 수 있도록 방향과 거리 등 자세한 정보를 제공한다. 촉각 등의 감각을 활용해 관람하도록 돕기도 한다.
올해는 경복궁, 창경궁의 각 건축물의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생생한 해설이 제공된다. 경복궁의 경회루, 창경궁의 통명전 등 주요 건축물 모형을 만지며 건축 구조를 살펴볼 수도 있다. 창경궁에서는 청진기를 통해 식물의 소리를 들어보는 체험도 가능하다.
오는 9월 7일까지 총 40회가 무료로 운영된다. 모든 코스는 공휴일을 제외한 평일(월~금요일) 오전 10시와 오후 2시에 두 차례 운영된다. 궁궐 휴궁일로 인해 창경궁 코스는 월요일, 경복궁 코스는 화요일에 쉰다.
경기도와 경기도장애인복지종합지원센터는 장애인 가족과 단체의 국내 여행을 돕기 위해 ‘팔도누림카’를 운영한다. 휠체어 6대가 동시 탑승 가능한 29인승 대형버스 1대와 휠체어 1대 탑승이 가능한 레저용 차량(RV) 1대 등 총 2대의 팔도누림카가 전국을 누빌 예정이다.
이용 대상은 도내 장애인 및 장애인 가족과 단체다. 대형버스는 장애인 1명 이상을 포함한 5명 이상, 레저용 차량은 장애인 1명 이상을 포함한 3명 이상이어야 이용할 수 있다. 평일과 주말에 관계 없이, 최대 2박 3일까지 국내 어디든 운행 가능하다. 단 대형버스는 운전기사가 함께 지원되지만 레저용 차량은 차량만 제공되며, 유류비와 통행료 등 일부 비용은 이용자가 부담해야 한다.
매달 1일 누림센터 홈페이지를 통해 신청하면 팔도누림카를 다음달에 이용할 수 있다. 다만 매달 1~7일은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이 포함된 경우만 우선적으로 신청할 수 있다. 8일부터 월말까지는 신청에 제한이 없다. 이달 신청자는 지난 3일부터 접수받고 있다.
허성철 경기도 장애인복지과장은 “장애인은 그동안 가족‧단체와 함께 여행하는 게 쉽지 않다는 민원이 많아 ‘팔도누림카’를 도입하게 됐다”며 “운행 이후 이용객이 많으면 확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외에도 ‘열린관광 모두의 여행’ 홈페이지를 이용하면 무장애 관광정보를 얻을 수 있다. ‘열린관광 모두의 여행’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지난 2월 개설했다. 텍스트 크기 조정과 음성 지원, 시각적 편의를 높인 고대비 보기 등의 기능을 추가해 실질적 수요자인 고령자, 장애인 등의 정보 접근성을 개선한 점이 특징이다.
추천 여행코스, 편의시설 등 무장애 관광정보 검색 기능과 여행코스 및 이동경로 지도 서비스, 수화 영상과 발달장애인을 위한 무장애 관광지 홍보영상 등 장애 유형별 맞춤 콘텐츠가 마련돼 있다. 고령자‧장애인‧영유아 동반 가족 등 수요자 유형별 무장애 추천코스, 7500건 이상의 관광명소‧숙박‧맛집 등의 무장애 데이터베이스도 제공한다.
날씨가 풀리기 시작하면서 앞다투어 봄꽃 개화 시기를 전하고 있다. 매화, 개나리, 진달래, 철쭉, 산수유, 수선화, 튤립... 그리고 벚꽃엔딩까지 친절한 안내가 줄을 잇는다. 그야말로 꽃철이다. 멀리 남녘 지방까지 가지 않아도 주변에서 만물이 생동하는 계절의 기운을 맞을 수 있는 곳, 날마다 꽃이 피어나고 있는 수도권 부천의 꽃 이야기다. (시절이 하 수상하니 사정에 따른 변동으로 꽃 축제와 입장 가능 여부를 미리 확인하는 것은 언제나 필수다.)
부천 원미산 진달래 꽃동산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이런 시 한 소절이 아니어도 봄을 떠올리면 먼저 생각나는 것이 진달래꽃이다. 부천 원미산(富川 遠美山)은 진달래 군락지로 유명하다. 봄이 되면 원미산을 뒤덮는 진달래가 온 산을 붉게 물들이고 만개한 꽃물결 속에 파묻혀 봄을 누리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초입에 세워진 김소월 님의 진달래꽃 시비(詩碑)를 지나 능선을 조금 오르다 보면 발아래로 저 멀리 부천 FC 스타디움이 보인다. 원미산 167m에 올라 정상의 원미정에서 내려다보는 부천 시가지와 종합운동장, 역동적인 축구장을 진달래 동산이 에워싸는 포인트에 서면 봄을 만끽하는 순간이 된다. 3월 중순경부터 약 한 달 남짓 만발한 진달래를 볼 수 있다.
♤가는 길: 지하철 7호선 부천 종합운동장 2번 출구로 나와서 500m 정도 거리에 있다. 참고로 1번 출구로 나와 직진하면 우측 놀이동산을 끼고 부천 순환 둘레길이 나온다. 계단을 따라 오르면 둘레길 걷기의 시작이 된다. 특히 1구간의 향토 유적 숲길은 운치 있다.
부천 자연생태공원 튤립 정원
사월과 오월 중순쯤까지 가장 화려한 색감으로 온 누리를 빛내주는 튤립을 볼 수 있는 곳, 부천 자연생태공원이다. 이곳은 부천식물원, 자연생태박물관, 부천 무릉도원 수목원, 농경유물전시관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무엇보다도 테마 정원과 유아 숲 체험관, 힐링쉼터가 잘 조성되어 있어서 아이 어른 상관없이 다양한 볼거리가 가능한 문화휴식 공간이다. 코로나로 훌쩍 떠나지 못하는 수도권 시민들이 찾아드는 곳이기도 하다.
부천 무릉도원 수목원의 튤립은 고결하고 우아한 자태로 봄 햇살을 받으며 가장 강렬한 색감으로 최상의 멋을 보여준다. 놓치기 아까운 풍경이다. 튤립 꽃길을 걸으며 선명한 빨강, 노랑과 보라, 하양, 핑크 등의 화사한 꽃들을 들여다보는 행복은 오직 이때뿐이다. 이 무렵 담장 너머 목련은 이미 지는 중이고, 춘덕산에서는 부천을 상징하는 복사꽃 피는 마을답게 춘덕산 복사꽃 축제가 이어졌었다.
튤립 정원을 지나 나타나는 수목원은 편백 군락지 산책로와 연결되어 있어서 그야말로 힐링의 숲이다. 천천히 걷거나 곳곳의 벤치에 앉아 봄의 정취를 즐기기에 더없이 좋다. 주상절리를 연상케 하는 폭포, 생태연못 쪽으로 가면 수생식물들과 시원하게 내뿜는 분수의 물바람을 맛볼 수 있다. 나비정원, 풍차, 귀여운 토끼나 공작새의 미니 동물원은 튤립을 보러 왔다가 자연 속의 풍경에 푹 빠지는 시간이 된다. 출구로 나가면 주변에 맛집도 즐비하다.
♤경기도 부천시 길주로 660(춘의동)
7호선 까치울역 1번 출구에서 3분 정도 직진
내비게이션 명칭 검색 : 부천식물원 또는 자연생태박물관
☏부천 자연생태공원 공원 조성과(032-625-3502)로 연락
백만 송이 장미원의 화려한 봄날
해마다 오월이면 장미가 온 천지에 가득했던 부천 백만 송이 장미원, 올해도 여전히 피어나겠지만 문이 활짝 열리기를 기대해 본다. 혹시라도 아쉬움에 찾아가 장미원 둘레 담장 너머로 먼발치의 장미꽃들을 바라볼 만도 하다. 돌아보면서 군데군데 나타나는 장미 터널과 예쁜 포토존이 행복감을 주는 장미원이다.
부천 백만 송이 장미원은 부천시에서 1998년 150000여 그루의 장미나무를 심으면서 시작되었다. 장미 한 그루에서 7~10송이의 꽃이 피어나기에 백만 송이의 꽃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벚꽃이 눈부시게 피어나는 주변의 도당산이 에워싸고 장미를 비롯한 야생화 단지와 분수대, 체력장 등의 시설들이 갖추어진 장미꽃 테마공원이다. 오월과 칠월 사이에 절정을 이루는 백만 송이 장미를 풍성하게 볼 수 있다.
♤경기도 부천시 도당동 산 34
지하철 역곡역이나 까치울역에 내려 마을버스 013-3번
☏부천시청 공원관리과 공원관리 2팀(032-625-4854)
부천 상동호수공원의 꽃양귀비
계절별 꽃 경관을 즐길 수 있는 상동호수공원. 그중에서 5~6월이면 붉은 꽃양귀비가 피어나 짙은 아름다움 속에서 힐링의 시간을 준다. 부천시에서 면적이 가장 넓은 공원으로 호수 근처로 나무 데크 길이 길게 연결되어 있어서 바람 쐬며 걷는 맛이 최고다. 또한 체육 시설과 놀이시설, 휴식 공간이 두루 잘 갖추어져 있어서 산책길에 한나절쯤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원이다.
꽃양귀비 정원에 들면 화려하고 강렬한 색상의 붉은 양귀비와 함께 청보리가 자라나고 있다. 두 가지의 어울림을 조화롭게 사진으로 담을 수 있다. 혹시 코로나의 여파로 꽃밭 가까이 갈 수 없을 수도 있으니 촬영하려면 망원렌즈를 지참해야 한다. 멀리 꽃구경 가기 어렵다고 생각된다면 부천 상동호수공원은 수도권에서 쉽게 나설만한 곳이다.
♤지하철 7호선 삼산체육관역 1번, 5번 출구 역
경기 부천시 길주로 16 복사
부천 중앙공원 능소화 터널
한때는 능소화를 찾아서 저 아랫녘까지 가기도 했다. 이제는 길거리나 동네 주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꽃이 되었다. 그 옛날 구중궁궐 속에서 다시 찾지 않는 임금이 하도 그리워 궁녀 소화는 날마다 임금의 발자국 소리에 오매불망 귀를 기울였다. 죽으면서도 담장 아래에 묻혀 님을 기다리겠다는 애절한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궁녀 소화, 님의 발소리를 들으려 귀를 활짝 열어놓은 듯 피어난다. 기다림의 세월이 능소화로 곱게 다시 피어났다는 전설의 꽃이다.
부천 중앙공원에 가면 능소화가 터널을 이루어 피어난다. 6월 말부터 7월 중하순까지 흐드러지게 만개했다가 툭툭 떨어지며 진다. 꽃이 지는 모습도 볼만해서 능소화 터널 아래 낙화가 뿌려져 있을 때 다시 가기도 한다. 더위와 비바람에도 흐트러진 남루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꽃잎 하나씩 날리며 지는 게 아니고 미련 없이 꽃 한 송이 통째로 떨어뜨리는 게 능소화의 마지막 모습이다.
♤경기 부천시 중동 1177(부천 시청 뒤편)
권문현(70) 콘래드서울호텔 지배인은 36년간 웨스틴조선호텔에서 근무하고 2013년 정년퇴직했다. 같은 해 콘래드서울호텔에 채용돼 총 45년을 호텔에서 근무하며 인생을 배웠다. 하루 9시간씩 서 있고, 1000번 이상 허리를 숙인다. 그는 오늘도 문 뒤에서, 혹은 앞에서 묵묵히 고객을 맞이하고 배웅하며 하루를 보내고 있다.
‘평생직장’, ‘평생직업’이라는 말이 드물어진 시대. 권문현 콘래드서울호텔 지배인은 여전히 한 분야에서 현역으로 활동 중이다. “건설 현장에서 같이 일하던 친구가 어느 날 다른 회사에 면접을 보러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공사 현장에서의 일이 너무 힘들고 벅차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에 나도 모르게 응했다. 호텔에서 면접을 본다는 말을 듣고 긴장됐다. 영어를 쓰는 곳이라는데 영어라면 한마디도 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면접장에 들어가 뭐든 맡겨주면 열심히 하겠다고만 대답했다. 그렇게 조선호텔 임시직 페이지 보이가 됐다. 어쩌다 호텔에 들어와 40년 넘게 일했고 아직도 출근하고 있다.”
살아 있는 호텔의 역사
페이지 보이는 전자결제 시스템이 없던 시절, 각종 서류에 승인을 받은 후 해당 부서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던 사람이다. “그 시절에 만보기가 있었다면 하루에 2만~3만 보는 족히 찍혔을 거다. 입사 초기에는 온종일 호텔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고 나면 퇴근 후 다리와 발바닥이 너무 아파 매일 뜨거운 물에 발 마사지를 했다.” 당시 그가 가진 가장 큰 콤플렉스는 영어였다. “가끔 영어로 표기된 서류를 잘못 전달해 혼이 나기도 했다. 당시 조선호텔 고객은 외국인의 비중이 매우 높았는데, 나한테 말이라도 걸까 두려워 목례만 하고 지나가기 바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월급을 받은 뒤 바로 종로1가 영어학원에 등록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ABC부터 따라 그리기 시작했고, 2~3년 동안은 퇴근하면 바로 영어학원으로 갔다.”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 그랬을까, 정직원이 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였을까. “외국인과 마주 보기만 해도 울렁증을 겪던 시기를 지나 서서히 외국인 고객들의 말이 조금씩이나마 들렸다. 정말 간절했다. 다른 회사는 갈 곳도 없고, 무조건 여기에서 자리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영어 공부도 못 할 게 없었다. 물론 배우는 속도는 더디고 발음도 좋지 않았지만 말이다.” 피나는 노력 끝에 결국 벨보이로 정식 발령이 났다. 발령 후 대기할 때의 자세나 표정 등을 하나하나 지적받았다. “호텔 직원은 특히 자세가 중요한데, 고객이 눈앞에 없을 때는 나도 모르게 자세가 흐트러지고 무표정한 얼굴로 바뀌기 일쑤여서 초반에는 많이 혼났다. 웃는 얼굴이 아니라며 고객에게 한 소리 듣고는 거울 앞에서 매일 몇 시간씩 표정과 자세를 연습한 적도 있다.”
의전이 전부였던 그때는 도어맨과 벨맨을 대상으로 차 번호 암기 시험을 봤다. “지금도 자동차 번호판을 보면 습관적으로 숫자를 중얼거린다. 특히 대통령, 기업 CEO, 장관 등 특별히 기억해야 하는 차의 번호판 네 자리 숫자는 최대한 많이 외워야 했다. 가장 많이 외웠을 때는 350개 정도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외교관 차가 들어오면 차에 달린 국기만 보고도 어느 나라 외교관인지 알아야 했기 때문에 국기도 외웠다. 자동차 번호는 거의 잊어버렸지만 그때 외운 국기들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가끔 손주들이 보는 책이나 TV에 다른 나라 국기가 나올 때면 자신 있게 맞힐 수 있다.”
권 지배인은 국가적인 행사가 많이 열리는 특급 호텔에서 일하다 보니 박정희 대통령을 시작으로 전·현직 모든 대통령을 봤다. “군인 출신인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대통령은 겉모습에서부터 힘이 들어가 딱딱한 분위기였다.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은 따뜻한 인사를 건네주시곤 했다. 특히 김대중 대통령은 언젠가 흰 봉투 속 손 글씨가 적힌 편지를 건네기도 했다. ‘관광 산업을 위해서 노력하는 호텔 직원들 수고가 많으십니다’라고 적혀 있었는데,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격려였다.”
그는 매일 아침 조간신문 세 개를 정독하고 장·차관, 대기업 임원 인사는 꼭 챙겨 메모한다. “인물 정보 파악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오래전 장관을 역임했던 분이 행사 참석차 호텔을 방문했는데, ‘○○○ 장관님 잘 지내셨지요?’라고 인사했더니 어떻게 이름까지 기억하냐며 깜짝 놀라신 적이 있다. 한 끗 다른 정성의 차이다. 기억력이 뛰어난 편이 아니라서 틈날 때마다 메모해둔 걸 보고 또 본다.”
진상 고객은 애정 고객
신입 시절 선배들에게 배운 노하우와 권 지배인의 경험이 매일 더해져 고객에게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고객의 택시가 도착했을 때 문을 벌컥 열면 안 된다. 요즘은 카드 결제 후 영수증을 받기까지 몇 초 걸리기 때문에 잠시 기다렸다 고객이 영수증을 받을 때 여는 것이 좋다. 고객이 타고 온 택시 번호를 기억해두면 물건 잃어버렸을 때 빨리 찾을 수 있다. 외국인 관광객의 경우, 택시를 타고 출발할 때 내비게이션에 목적지 설정이 잘됐는지 체크해야 한다. 서비스의 질 차이는 디테일이다.”
권 지배인은 항상 고객들이 ‘내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워낙 고객들의 성향이 다양하니 응대에 신경 쓰다 보면 하루에 한두 가지라도 경험과 노하우가 쌓인다.” 더불어 그는 진상 고객을 애정 고객이라 부른다. 무언가를 지적하고 불편함을 표시한다는 것은 그만큼 호텔이 발전할 기회, 애정을 주는 사람이라서다. 그 불만을 귀 기울여 듣고 해결해준다면 다시 방문할 마음이 있다는 것이라 본다. “나는 불만이 가득 쌓인 고객의 말에 우선 귀를 기울인다. 10분이고 20분이고 고객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다. 내 이름의 ‘문’이 들을 문(聞)이 아닐까 생각할 정도다.” 하지만 노련한 그에게도 어려운 손님은 있다. “아무리 설명해도 쉽게 화를 누그러뜨리지 않는 손님을 만나면 명함을 한 장 달라고 한다. 경청을 위한 관계 형성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관계라는 것은 투명해질 때 더 견고해지는 것 같다. 명함을 받고 고객과 잠시라도 눈을 마주치고 대화를 나누는 순간, 관계가 한 겹 더 탄탄해지고 단단해지는 마법이 일어난다. 또 고객이 무슨 일을 하는 분인지 알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보이는 경우가 많다.”
훌륭한 선배가 되다
우리나라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호텔 종사자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다. “처음엔 나를 깔보는 사람이 주변에 더러 있었다. 결혼하겠다고 처가에 인사하러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서비스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던 시절이었다. 특히 고객들은 호텔 직원을 ‘어이’라고 부르고 다짜고짜 반말을 하기도 했다. 손님이 왕이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1980~90년대로 넘어오며 호텔리어라는 말이 쓰이면서 호텔의 황금기가 열렸다. 자존심 상하는 순간도 많았지만 이제는 직원을 대하는 고객들의 태도가 달라졌고, 친척들이 나를 보는 시선도 달라졌으며, 입사 경쟁률도 높아졌다.”
점차 호텔이 시스템을 갖춰나가고 사내 교육이 늘면서 그는 서비스업 종사자로서, 선배로서의 사명감이 커졌다. “내 일에 내가 가치를 부여하고, 내가 한 번 더 웃고, 내가 더 친절해지려고 노력했다. 자주 오는 고객들의 자동차 번호와 고객의 성함, 나이, 직장, 특이사항 등을 정리해서 공유하고 수시로 업데이트했다. 벨맨과 도어맨의 자세나 인사하는 법, 불만을 제기하는 고객에게 대응하는 법 등도 차근차근 후배들에게 가르쳤다. 가끔은 이런 것까지 배워야 하나 싶은 표정을 짓는 후배도 있고, 자동차 문 닫는 힘과 소리 등의 세세한 것을 새롭게 배우면서 뭔가 깨닫는 듯한 후배도 있었다. 내가 경험한 것들을 이것저것 알려주다 보니 어쩌다 아들보다 어린 직원들의 멘토가 돼 있었다.”
교육하다 보면 권 지배인은 오랫동안 쉬지 않고 일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후배들에게 많이 받는다. “그만두고 싶은 위기마다 가족들이 반대해서 버티다 보니 지금까지 왔다고 이야기했는데, 그 누구보다 자신의 선택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요즘 젊은 친구들이 내 이야기에 얼마나 공감했을지 모르겠다. 나 역시 뒤돌아보면 그만둘 위기가 여러 번 있었지만 그게 또 죽을 만큼 호텔 일이 싫었던 건 아니었나 보다. 하기 싫거나 지겹다는 생각도 할 틈 없이 달려왔으니, 알게 모르게 이 일이 내 천직이라고 여겼던 게 아닐까. 내 이름에는 문(文)자가 들어 있다. 항상 문(門) 앞을 지키며 고객들에게 묻고(問) 고객들의 말을 듣는(聞) 사람으로 살고 있으니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지 싶다.”
45년의 비결은 배려와 인내심
권 지배인이 업계 장인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은 일단 직원들을 향한 배려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젊은 후배들과의 소통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지만 그는 끊임없이 노력한다. “아들딸보다 어린 동료들과 같이 일하며 조심하는 것이 몇 가지 있다. 말과 행동이다. 우리는 희롱이 난무하는 세상을 지나왔고, 나이를 훈장처럼 달고 다른 사람들에게 함부로 말하는 이도 많았다. 하지만 세상이 이제 변했다. 나 같은 세대도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는 제일 좋은 소통법으로 ‘말수 줄이는 것’을 꼽았다. “필요한 말만 하면 된다. 생각 없이 흘러넘치는 말이 없게 해야 한다. 회식 같은 술자리에서는 특별히 더 조심해야 한다. 나는 회식 때 보통 1차만 참석하고 집으로 간다. 요즘 말로 ‘낄끼빠빠’(‘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져라’를 줄여 이르는 말)라고 하던가. 나이는 벼슬이 아니다.”
또 하나는 인내심이다. “언젠가부터 인내심이나 버틴다는 말이 구시대의 상징처럼 돼버린 듯하다. 40년 넘게 호텔에서 실습생이나 파트타임 직원들을 보면 반나절 근무하다 밥을 먹고 연락이 두절된 경우도 있었다. 물론 대학생일 때 호텔로 실습 나와 성실하게 일하고 지금은 동료가 된 직원도 분명 있다.” 호텔은 이직률이 높은 편이다. 외부에서 볼 때는 화려함에 이끌리지만 업무 강도가 높고 버티기가 쉽지 않아 실망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 신입 사원들의 임금도 높은 편이 아니다. “힘들겠지만 직업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호텔에 취업할 것이라면 한 직장에서 몇 년 일해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좋은 평판을 쌓고 선배들의 노하우를 최대한 배워 내 것으로 만들어 발전시켜나가면 어떨까. 물론 호텔에서 오래 일한 사람으로서 이 업계가 더 일하기 좋은 직장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후배들이 자부심과 소속감을 느끼고 일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선배로서 그런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이 미안하고 안타깝다. 그래서 노력한다. 후배들에게는 또 다른 잔소리로 비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성실하고 우직하게 일했던 45년. 그의 직장 생활에는 자부심이 묻어났고, 상대방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삶의 태도는 따뜻했다.
[TIP] 시시콜콜 호텔 이야기
●욕실에서 쓰는 샴푸, 린스, 보디워시 따위의 어메니티는 가져가도 된다. 슬리퍼와 머리끈 같은 일회용품도 무료다. 호텔마다 어메니티의 디자인과 브랜드가 제각각이라 비교하는 재미도 있을 것이다.
●호텔에 간 날이 생일이라면 체크인할 때 적는 것이 좋다. 서비스가 좋은 호텔에서는 소정의 선물을 제공하기도 한다.
●객실 뷰 이외에 에어컨이 약하다거나 담배 냄새가 나는 등 객관적인 어떤 이유로 객실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고객은 방을 바꿀 수 있다.
●주변 맛집이나 교통 정보, 예약 등이 필요하면 컨시어지 서비스를 이용해보자.
●짐이 많을 때 배기지 다운 서비스를 요청하면 짐을 로비까지 옮겨준다.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2021년 12월, 그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해 1월 폐암 진단을 받고 꼬박 1년을 투병한 후 그렇게 떠났다. 그와 내가 사귄 지 10년째 되던 해이기도 했다. 나의 지난 한 해는 벽두부터 그의 병간호로 시작됐고, 소생과 회복에 대한 간절한 소망에도 아랑곳없이 그가 떠나며 한 해가 저물었다. 그리고 이렇게 새해가 희망 없이 밝았다.
장례를 치른 후, 간호를 하느라 1년 동안 함께 지냈던 그의 대전 집을 나와 다시 서울 내 집으로 돌아왔다. 환자를 돌보는 도중 간간이 들러 옷가지 등 필요한 것들을 챙겨가곤 했지만 그가 떠나고 나니 내 집 풍경조차 다르게 느껴졌다. 칫솔이나 면도기 등 내 집에 두었던 그의 소소한 물건이 눈에 들어온 탓이다. 이제는 영원히 주인 잃은 것들, 그의 부재를 상기시키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것들을 없애지 못하고 있다. 다만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두었다. 보고 있으면 마음이 더 아프니까….
그와 나는 20년 전 어느 기업인 모임에서 만났다. 나도 그도 나름 단단한 사업체를 꾸리고 있었고, 두 사람 모두 이혼한 상태였지만 10년을 서로 바라만 보는 중이었다. 10년 동안 썸을 탔냐고? 그건 아니고 좋은 사람이니까, 좋아 보이는 사람이니까 당연히 사귀는 사람이 있겠거니 서로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해 겨울, 12월 중순의 첫눈 내리던 날, 첫눈치고는 늦었고 첫눈치고는 제법 눈송이가 실했다. 모임이 끝난 후 지하 주차장에서 우리는 다시 만났다. 우연히도 그와 나의 차가 나란히 세워져 있었던 것이다. 그와 그렇게 가까이 마주한 것도 10년 만에 처음인 것 같았다.
천년의 사랑이 시작되고
다소 어색한 의례적인 인사를 나눈 후 각자의 차에 올랐다. 운전석에 앉아 고개를 기울여 그가 먼저 나가도록 손짓을 해 보였다. 그는 또 그대로 내게 먼저 차를 빼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잠시 서로 그렇게 배려의 몸짓을 하다가 내가 먼저 차를 움직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그 사람의 시선까지 느껴져 더 당황스러웠다. 난감한 상황에 처한 내게, 무슨 일인지 잠시 지켜보던 그가 차에서 내려 다가왔다. 하지만 그 사람이라고 별수 있나. 고장의 원인을 찾지 못한 데다 이미 밤늦은 시각이니 내 차는 주차장에 그대로 두고 그가 나를 집까지 태워주겠다고 하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오니 깜깜한 밤하늘에 흰 눈이 별처럼 쏟아졌다. 우리 만남의 서곡이자 팡파르처럼. 나란히 함께 차를 타고 오던 시간이 의외로 편안했고, 그렇게 우리는 가까워졌다.
천생연분이란 촌스럽고 진부한 표현을 내가 할 줄은 몰랐다. 이혼 후 10년 만에 본격적으로 만난 그 사람, 이제야말로 하늘이 점지해준 짝을 찾았다고 믿었다. 그와는 모든 것이 잘 통했고 모든 것이 좋았으니까. 가치관, 취미, 식성, 관심사, 대화는 물론, 부끄러워해야 할 필요가 없다면 몸까지 잘 맞았다고 솔직히 고백하리라. 국내는 물론이고 코로나 이전에는 자유로이 해외여행을 다녔고 맛집이란 맛집은 죄다 섭렵했다. 전시, 공연, 독서 등 문화생활도 알뜰히 했다. 우리는 성인이 된 자녀들이 각자 둘씩 있었지만 모두 독립해서 제 갈 길을 잘 가고 있었기 때문에 자녀 문제로 신경 쓸 일도 없이 무엇 하나 부족함 없는 관계였다. 느긋하게 나이 들어갔고 다가올 노후를 함께 설계하며 행복한 노년을 꿈꿨다.
사랑의 보험이 깨지고
그러던 그와의 화려했던 세상이 불과 10년 만에 흑백의 암전을 맞았고 그는 영원히 무대에서 사라졌다. 사랑은 떠나도 삶은 지속되는 거라지만, 환갑도 한참 지난 내가 그걸 모를 리 없지만 그가 없는 세상 한가운데에서 우두망찰 길을 잃었다. 그가 없는 하늘 아래 나는 어떤 생을 살아야 할까. 혼자 산다는 것이 가당키나 할까. 그와 나는 결혼한 사이는 아니지만 성혼 선언문의 ‘죽음이 둘을 갈라놓을 때까지’라는 구절을 떠올린다. 견고한 우리 사랑 한가운데 죽음이 끼어들 수 있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젊지 않은 나이였으니 10년이 지난 지금 나는 이미 노년의 문턱에 들어섰다. 그가 없는 나의 노년, 그 막막한 길을 홀로 걸어갈 수 있을까. 나는 요즘 부쩍 늙어버린 기분이다. 지난 1년간 그의 병간호로 쇠약해진 탓도 있겠지만, 사랑을 잃은 슬픔과 삶의 막막함 때문이리라. 홀로 늙어감, 그것이 나를 두렵게 한다.
나이 든 여자의 사랑은 사랑을 하는 중에도 버겁다. 더구나 우리는 동갑이 아니었나. 여자로서, 그것도 젊지 않은 여자로서 같은 나이의 남자에게 위축되지 않는다면 약간은 거짓이리라. 내 경우 역시 그가 어떻게 생각하는가와 무관하게 문득문득 내 나이를 의식하곤 했다. 아니다, 그런 적이 있었다고 해도 그게 무슨 대수라고. 내가 젊은 여자가 아니라고 해서 그와 나의 사랑에 무슨 문제가 있었단 말인가. 그와 만나는 동안엔 오히려 내 나이를 의식하지 못했는데, 그가 가고 나니 내 나이가 갑자기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그렇다. 나는 혼자 남겨진 ‘나이 든 여자’다.
나이 든 사람들에게 사랑은 보험이라는 말이 있다. 홀로 늙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사랑할 상대를 찾는다는 뜻이란다. 더는 다른 상대를 만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알기에 성실한 보험 납세자처럼 꼬박꼬박 애정을 쏟고, 서로를 챙기다 보면 보험의 만기가 도래하듯 안온한 노후를 함께할 수 있으리라는 의미에서 긍정적으로 들린다. 노년의 원만한 부부가 전형적인 그 모습이리라. 그렇다면 나는 정성스레 부어가던 보험이 중간에 깨져버린 것 아닌가. 새로 들 가능성, 새로 들고 싶은 마음도 이제는 없다. 탈 수 있는 보험금 없이 홀로 노후를 맞는 대열에 내가 동참한 것이다.
만날 사람을 다 만났다면
어느 종교계 방송에서 환갑이 지나면 인생에서 만날 사람은 다 만난 거라는 말을 들었다. 이 세상에 태어나 부모와의 만남을 시작으로, 산다는 것은 만남의 연속이라 할 때 소위 반환점을 도는 나이가 되면 사람과의 새로운 인연은 더 이상 별 의미가 없다는 뜻으로 들렸다. 배우자가 되었든, 연인이 되었든, 친구가 되었든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는 말이다. 이미 맺어져 있는 인연을 일부러 끊어낼 필요는 없겠지만 혹여 기존 관계에서 자리가 비어 새 인연을 들인다 한들, 관계 맺기를 통한 성장판은 이미 닫혔다는 의미다. 마치 빠진 치아 자리에 임플란트나 틀니를 해 박는다 해도 치아 본연의 성질과는 무관하듯이.
사람과의 관계에서 더 이상 성장하고 누리고 진화할 수 없다면 더는 살아도 산 게 아니란 의미일까. 물론 그건 아닐 테지. 이제 저 너머의 존재, 신을 만나야 한다는 뜻이겠지. 사람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는 알지 못했던, 알아도 제약적이며 한계가 있었던 관계의 장막을 거둬내고 영성에 눈을 떠야 한다는 의미겠지. 그래야만 성장을 지속할 수 있고, 실상은 그러한 성장이 참 성장이라는 의미일 테지. 세속적 희로애락 속에서 울고 웃던 나를 관찰자, 주시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며, 교정하고 회복되도록 하는 과정일 테지.
내 경우라면 그의 빈자리를 하나님 혹은 부처님으로 채워야 한다는 뜻일 테니 교회나 성당, 절에 나가 위로를 구하라는 소리로 들렸다. 하지만 그 얼마나 진부하고 맥 빠지는 소린가. 나는 지금 그가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인데, 간절한 그리움과 사무치는 외로움에 애간장이 녹아내릴 지경인데, 눈에 그 존재가 보이지도 않고 귀에 그 음성이 들리지도 않는 신을 통해 위로를 구하라는 말은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인데 공기를 뻐끔거리며 배를 채우라는 소리처럼 공허하게 들린다. 위로받기는 고사하고 왜 그를 내게서 빼앗아갔냐고, 이제 겨우 64세, 아직 죽음과는 거리가 있다고 할 나이의 그를, 자기 분야에서 드물게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는 그를, 무엇보다 나와의 변함없는 애정으로 행복의 절정기를 누리던 그를 무슨 이유로 데려가야 했냐고 따지고 대들고 싶은 심정이다. 신도 질투를 하냐고, 그렇다면 신도 아니지 않냐고.
차라리 그와 혼인을 했더라면 지금 이렇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에 빠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내가 그의 아내였다면 세상 떠난 그를 대신해 현실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도 있고, 가족 내의 위치에서 자리를 지키며 감당할 역할들로 사별의 아픔을 추스를 여지가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기껏’ 그의 연인이 아닌가.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이, 그 상실감과 무력감만이 내가 경험할 수 있는 전부다.
다시 빛을 찾아서
슬픔에 겨워 탈진하는 하루하루 중에도 간간이 빛을 느낄 때가 있다. 이해할 수 없는 평안과 내적 안온함이 찾아오는 순간이 있다. 실은 나는 그가 떠난 이후 성당에 다닌다. 매주 수요일마다 교리 공부도 한다. 신앙심이 갑자기 생긴 건 아니고 그저 그곳에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이다. 생전에 그는 신앙이 없었지만 왠지 성당에 가면 영혼이나마 그가 내 옆에 앉아 함께 미사를 드리는 것처럼 마음이 평온해지곤 한다.
올해로 나는 65세가 되었다. 10년 전 55세에 만난 그가 떠나고, 2022년의 출발선에 혼자 오도카니 섰다. 혼자라고 하지만 어쩌면 내 옆에는 신이 서 계실지도 모른다. 신은 무언의 침묵을 통해 나와 동행할 채비를 하고 계시는 걸까. 왜 신은 굳이 내 옆자리에 서려고 하시는지. 나는 그 사람 하나로 행복했건만. 하긴 연일 눈물로 어룽져 시야가 흐려진 내 눈엔 생의 완주 지점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이제 신의 손길에 의지해서 그 길을 가야 하는 것일까. 지금 나는 누군가의 인도가 절실하다. 그러나 앞서 방송 내용처럼 나 또한 이제 더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동반자를 구하고 싶지 않다. ‘사람 대신 신’이란 결단에서가 아니라 또다시 그 존재를 잃고 슬픔의 늪에 빠져 허둥대거나 흐느적거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일생 한 번으로 족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후의 상실감과 그리움, 그것은 너무나 혹독하기에.
‘시니어들이 집에만 있는다’는 생각은 편견이다. 젊은 MZ세대만큼 활발하다. 백화점이든 카페든, 젊은 세대의 전유 공간이라 생각되는 곳에도 시니어들이 있다. 그들은 어떤 매장의 주요 소비자일 수도 있고, 직원일 수도 있다. 그런 활발한 시니어들을 보면서 궁금증이 생겼다. ‘시니어 직원이 바라보는 MZ 소비자, MZ 직원이 바라보는 시니어는 어떤 모습일까. 그리고 정말 세대 차이가 존재할까?’
세대 차이의 실체를 알아보고자 정반대 상황에 있는 카페 두 곳을 방문했다. ① MZ세대가 직원이고, 시니어가 주요 고객층인 카페, 반대로 ② 시니어가 직원이고, 젊은 MZ세대가 주요 고객층인 카페. 확실한 비교를 위해 같은 질문을 했고, 그 차이점을 짚어봤다.
① 시니어 손님 vs MZ 직원
탑골공원 때문일까. 예로부터 서울 종로에는 시니어들이 많다. 종로에도 프랜차이즈 카페가 많이 생기고, 카페 직원들 나이도 점점 어려지고 있는데 말이다. 그러니까 카페는 젊어지는데, 손님들은 여전히 시니어라는 소리다.
그 대표적인 예로 ‘카페 에이치(h)’를 들 수 있다. 카페 에이치는 종로3가역 2-1번 출구 바로 앞에 위치한다. 무려 3층짜리 건물로 올 블랙의 근엄한 자태를 뽑내고 있기 때문에 멀리서도 한 눈에 보인다. MZ세대 직원들 역시 올 블랙 의상을 입고 분주하게 일하고 있다.
카페에 잠시만 앉아 있어도 시니어 손님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시니어 손님들은 음료 주문 하나도 쉽지 않다. QR코드 입력하는 데도, 무엇을 마실지 정하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 계산하는 모습마저 슬로모션이다.
시니어 손님들을 응대하느라 젊은 직원들은 애를 먹는다. 잘 안 들리는 어르신들과 대화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일 수밖에 없다. “QR코드가 있긴 있는데, 어디 있더라. 찾아줘 봐요”라고 부탁하는 시니어들도 있다. 기자가 보기에는 당황스러운 상황인데, MZ 직원은 익숙해 보인다. 아들처럼 친절하게 손님들을 대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카페 에이치의 장점은 앞서 말했듯이 3층짜리 건물에, 테라스와 흡연실까지 있어 여유롭게 앉아 있을 공간이 많다는 점이다. 또한 커피 맛으로 승부를 보는 카페다. 카페 에이치의 직원 강동우(30) 씨 또한 “커피가 맛있다. 특히 라떼가 시그니처인 것 같다”고 자랑했다.
② 시니어 직원 vs MZ 손님
‘함께 그린 카페’의 직원은 모두 만 60세 이상이다. 금천호암노인종합복지관 일자리 사업에 참여한 시니어들이다. 바리스타에 관심 있던 이들은 경제활동을 하면서 활기찬 노후를 보내고 있다. 총 25명이 격일로 근무하며, 하루 3시간 30분씩 10일간 일해 월급으로 약 36만 원을 벌어간다.
시니어들이 일하는 카페이기 때문에 맛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특히 이 카페의 판매 수익 80%는 아침 출근 시간에 발생하며, 주요 고객층은 20·30대의 MZ세대다. 커피든 디저트든 맛이 없으면 카페를 찾지 않는 고객층이다.
시니어 직원들은 좋은 재료로 최고의 맛을 내기 위해 노력한다. 특히 인기 메뉴는 샌드위치와 커피로 구성된 모닝 세트. 오전 7시 30분부터 11시 사이에 할인된 가격으로 제공한다. 2년 2개월이나 일한 베테랑 신선희(70) 씨는 “샌드위치를 제일 많이 만들었고, 자신도 있다. 토마토와 양상추를 가운데 쏠리지 않게 놓고, 빵도 노릇하게 잘 굽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더욱이 카페 구조가 음료를 픽업하기 좋게 되어 있고, 가격도 저렴하다. 특히 시니어 직원들은 친절하고 밝게 손님을 응대한다. 가산디지털단지역 직장인들에게 ‘아침 맛집 카페’로 소문나 있을 것이 분명하다.
커피 한잔일 수 있지만, 시니어 직원과 MZ 손님은 서로에게 좋은 기운을 전해주는 모습이다. 시니어 직원들은 젊은 에너지를 받고, MZ 손님들은 부모님 세대의 직원들을 보고 따뜻함을 얻어가는 것 같다.
- 어떻게 이 카페에서 일하게 됐나요?
시니어 카페 신선희 금천호암노인종합복지관 안 부장님 권유도 있었고, 예전부터 카페에서 일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는데 연락이 와서 얼른 왔죠. 노인센터에서 교육도 받고, 2차로 개인이 하는 곳에 가서 자격증을 따기도 했고요.
김훈심 직장 퇴직하고 뭔가 해보고 싶었는데 지인이 잘할 것 같다면서 추천해 줬어요. 자녀들도 많이 호응해줬고요.
MZ 카페 강동우 원래는 회사 다니다가 카페 창업을 하고 싶어서 그만두고, 일 배우려고 여기에 오게 됐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창업할 생각은 계속 하고 있어요.
- 주요 고객층의 연령대와 가장 바쁜 시간은 언제인가요?
시니어 카페 신선희 20~30대부터 60~70대까지 다양해요. 오전 8시 20분 정도부터 9시까지가 바쁜 것 같아요.
김훈심 오전 시간에는 20~30대 분들. 주변에 회사가 많아서 직장인들이 많고, 그 이후에는 다양하게 오시는 것 같아요.
MZ 카페 강동우 50~60대 분들이 가장 많이 오시는 것 같아요. 오후 1~2시가 가장 바쁜 편이고, 6~8시도 요즘 손님이 좀 오시는 것 같아요.
- 주요 고객층인 젊은 or 시니어 분들이 좋아하는 메뉴는 뭐라고 생각되나요?
시니어 카페 신선희 아침조는 식사를 안 하고 오시는 직장인들이 많잖아요. 샌드위치 세트가 가장 잘나가는 것 같아요.
김훈심 아이스 아메리카노. 그리고 샌드위치나 카야토스트로 구성된 모닝 세트가 많이 나가는 것 같아요.
MZ 카페 강동우 레몬차, 자몽차도 좋아하시고요. 달달한 커피도 많이 좋아하세요.
- 젊은 or 시니어 손님들을 만나보면 어떤가요?
시니어 카페 신선희 젊은 손님들을 보면 같이 젊어지는 기분이고, 자식 대하듯 소중하게 여기며 항상 유쾌하게 대하려고 해요.
김훈심 젊은 분들이 아무래도 밝고 활기차잖아요. 에너지를 받는 것 같아요.
MZ 카페 강동우 젊은 손님들보다 QR인증이라든지 설명을 해드려야 하는 부분이 아무래도 많은 편이죠. 어르신들한테는 좀 크게 또박또박 말씀드리려 하고 있어요. 가끔 잘 안 들리시는 분들에게는 서너 번 더 설명해드리죠.
- 젊은 or 시니어 손님들과 세대 차이를 느낄 때가 있었나요?
시니어 카페 신선희 가끔 젊은 손님 중에 작은 목소리로 빠르게 주문하는 분들이 있어요. 그러면 제가 얼른 못 알아듣고 다시 물어볼 때가 있거든요. 그럴 때 내가 나이 먹었나, 세대 차이를 느끼곤 하죠. 귀찮아하는 것 같지는 않아요.
김훈심 줄임말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아아’, 바닐라라떼를 ‘바라’, 이렇게 주문하면 빨리 캐치하지 못하니까 어려운 게 있어요. 대여섯 명이 와서 빨리빨리 주문할 때는 ‘죄송합니다. 저희가 좀 늦다 보니 천천히 말해주세요’라고 하기도 해요.
MZ 카페 강동우 젊은 세대는 당연하게 카페 다니고 주문도 자연스럽게 하시는데, 시니어 분들은 주문 자체를 어색해하실 때가 있어요, 진동벨도 어색해하시고요. 그럴 때 세대 차이가 조금 느껴지는 것 같아요.
- 기억에 남는 손님 있나요?
시니어 카페 신선희 젊은 여자 손님 두 분이 단골로 오세요. 그중 한 분이 엄청 사근사근 상냥하게 주문하시는데요. 하루는 아이스라떼가 주문이 잘못되어 아이스커피로 나가게 됐어요. 손님이 라떼를 생각하면서 ‘아이스 두 잔’이라고 하신 거예요. 잘못된 것을 알고 얼른 다시 라떼로 만들어주겠다고 하니 오히려 주문하신 손님이 미안해하면서 그래도 되겠냐고 했던 것이 기억에 남아요.
김훈심 자주 오시는 젊은 아가씨인데, 개인용 텀블러에 커피를 받아가세요. 그 모습이 예쁘게 보여요.
MZ 카페 강동우 특정한 누구보다는 좋았던 기억은 아무래도 손주처럼 보이고 막내아들처럼 보이니까 가끔씩 간식거리도 챙겨주시는 분도 있고, ‘잘생겼다’, ‘예쁘다’, 칭찬도 해주실 때 기분이 좋더라고요. 반대로 안 좋았던 기억은 어려 보이니까 가끔 함부로 하시는 분들이 계세요. 코로나19 이후 더 심해진 것 같은데, QR코드 같은 것 하기 싫다고 무대뽀로 들어오시는 분들도 있고 그래요.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 해주세요.
시니어 카페 신선희 금천호암노인종합복지관에서 이런 일자리를 만들어주셔서 감사하고요. 이대로 쭉 함께 그린 카페에서 일하고 싶어요. 나이는 더 먹기 싫어요. 노인 일자리를 열심히 찾아서 참여하면 훨씬 젊게 살 수 있답니다. 많이들 참여하셔서 활력을 얻어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김훈심 금천구청이나 금천호암노인종합복지관 관장님께 감사드리고 싶어요. 나이 든 어른들께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주셨잖아요. 최고로 청결하고 정성을 다해서 만들고 있거든요. 많이 많이 오셔서 잡수고 가세요~.
MZ 카페 강동우 아무래도 손님들이 나이대가 있으니, 허니브레드 같은 빵을 처음 먹어보시는 경우가 있어요. 정말 맛있다고 해주시고, 메뉴 이름도 휴대폰에 적어 가시고 그러면 진짜 뿌듯하더라고요. 공부하실 때도 그렇고 사람 만나서 얘기하실 때도 우리만 한 카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최종 진단
시니어와 MZ 사이에 약간의 세대 차이는 존재했다. 시니어의 노후에서 비롯된 차이였다. 아무래도 시니어는 귀가 잘 안 들리고, 요즘 젊은 세대의 말을 모르기 때문. 그러나 심각한 문제는 아니고, 감수할 수 있는 정도였다. 오히려 엄마 같아서, 반대로 아들 혹은 딸 같아서 서로에게 더욱 친절하게 대하고 배려하려는 모습이 엿보였다. 이는 이전에 비해 시니어 세대도, MZ세대도 다름의 차이를 받아들인 것으로 해석된다. 그동안 일반적으로 MZ세대는 ‘시니어 세대는 무조건 해달라고 한다, 짜증만 낸다’, 시니어 세대는 ‘MZ세대는 예의 없다’라는 부정적인 인식이 팽배했다. 그러나 진단 결과, 실제로는 세대 간의 벽이 많이 허물어졌고,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가을이라 해도 날씨는 여전히 온화하다. 강릉으로 떠나며 날씨를 검색해보았더니 기온이 뚝 떨어질 거라는 예보다. 환절기의 쌀쌀함을 즐길 때는 아닌 것 같아 머플러랑 니트를 주섬주섬 더 담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강릉은 언제나 따스했다. 이전에도 그랬고 이번에도 그랬고, 그곳은 언제나 따스하게 날 맞는다. 아마 앞으로도 또 그럴 것 같은 강릉.
명주동 거리, 강릉의 ‘핫플레이스’이라고 했다. 명주(溟州)는 신라 시대에 강릉을 이르던 지명으로 ‘바다와 가까운 아늑한 땅’이란 뜻이다. 1500년 전의 고도 명주는 예부터 문화·행정의 중심지이던 곳인데 강릉 시청이 옮겨가면서 한물간 구도시가 되어버린 듯했다. 그런데 이젠 달라졌다. 구도심 귀퉁이 마을인 명주동 일대가 요즘의 레트로 바람을 타고 찾아가고 싶은 원도심으로 변신했다.
가을볕 아래 명주동 문화마을 천천히 걷기
강릉 대도호부 관아 건너편에서 시작해 그 주변 동네와 골목 한 바퀴를 느릿느릿 걸으며 시간 여행을 시작한다. 어릴 적 추억도 소환하고, 숨겨진 예쁜 가게를 발견하는 재미가 걷는 내내 이어지는 풍경. 드라마 시대극을 연상케 하는 오래된 주택과 상점들이 옛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시나미 명주. 시나미는 ‘천천히’ 또는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을 뜻하는 강원도 말이다. 산책하듯 천천히 걷다 보면 과거와 현재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공존하는 뉴트로 강릉의 모습이 보인다. 시공을 넘나드는 이 골목에서는 저절로 천천히 걷게 된다. 그게 오히려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벽돌담 모퉁이를 돌면 유년의 뜰에서 늘 보았던 백일홍이 옹기종기 모여서 피어 있다. 반쯤 열린 나무 대문 앞으로 한 무더기씩 뿌리내린 채 꽃을 피워 올린 소박한 식물들이 예쁘다.골목 여행을 하는 이들을 위한 주민들의 자발적 배려다. 저절로 따스함을 얻는다. 낡은 담벼락에 나태주 시인의 시 ‘풀꽃’이 바른 글씨체로 세 줄 적혀 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세월이 느껴지는 담장에 켜켜이 스며 있는 옛이야기를 느끼며 그 길을 걸어간다. 쭉 걷다 보면 빈티지하면서도 멋스러운 건물들이 간간이 눈길을 끈다. 담쟁이덩굴이 뒤덮은 ‘봉봉 방앗간’ 건물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 속 장면으로 더 유명해진 집이다. 근처의 작은 공연장, 박물관, 예술마당, 프리마켓 등의 문화공간에 슬슬 가을 분위기가 덧입혀지는 중이다. 골목길을 걷다 잠깐 앉았다 갈 수 있도록 가게 앞에 의자를 놓은 인심이 더 멋진 풍경을 만든다. 그 의자에 한 번씩 앉아 사진을 담는 여행자들 덕분에 아예 포토존이 되기도 한다. 이제는 찾아가 보고 싶은 ‘인싸들의 강릉 여행지’가 되었고, 곳곳에 젊음의 생기발랄한 에너지도 풍겨난다.
오래된 건물을 현대적 감각으로 새 단장한 소박한 점포들, 골목상권의 소상공인을 여행자와 연결해주고 쇠락한 골목길에 생기를 불어넣으려는 노력도 엿보인다. 신구(新舊)가 공존하는 원도심 거리답게 옛집을 개조한 카페 ‘오월’의 격자무늬 창문 너머로 동네 할머니가 뒷짐 지고 걸어가시던 골목길 풍경 또한 가을볕에 아련하다. 정겨운 가을날이다. 강릉의 구도심을 온몸으로 느끼며 마실 가듯 천천히 느릿느릿 타박타박 걸었던 명주동 골목 나들이다.
강릉 대도호부 관아
명주거리를 벗어나기 전에 건너편 강릉 대도호부 관아(사적 제388호)에 들어가 보는 것도 의미 있다. 골목길을 따라 늘어선 강릉 대도호부 관아는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걸쳐 중앙의 관리들이 강릉에 내려오면 머물던 곳이다. 강릉 임영관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객사문으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안으로 들어가면 전대청이 있는데 '임영관'이라고 쓴 현판 글씨는 공민왕이 낙산사 가는 길에 들러서 쓴 친필이다. 현재 객사문은 이 터의 남측에 국보 제51호로 지정 보존되어 있고, 서측은 임진왜란 이후 경주에 있던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셔다 봉안했던 집경전(集慶殿) 터다. 해설사님의 해박하고 구수한 해설로 역사적 사실이 더욱 흥미롭다. 누구나 원하면 미리 신청해서 해설사님의 안내를 받을 수 있다. 관아 곳곳에 우뚝 선 고목이 되어버린 은행나무는 가을이 한창이었다.
바다 언덕 위에 펼쳐진 예술 세계
이제는 시원한 바다를 보며 예술과 자연, 인간이 공존하는 전시 공간에서 감성을 충전할 때다. 묵은 스트레스도 날려버릴 시간이다. 강릉의 괘방산 자락을 배경으로 등명마을에 자리 잡은 ‘하슬라 아트월드’. 산과 바다와 하늘과 바람과 햇살이 함께하는 아트월드다.
조각가 부부가 힘을 모아 만들고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며 새로움을 선보이고 있는 하슬라 아트월드. 하슬라는 고구려 때 부르던 강릉의 옛 지명이다. 현대 미술관, 아비지 갤러리, 터널 설치미술, 체험학습실, 피노키오 박물관, 마리오네트관 등 볼거리가 한가득이다.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가 터널을 통과하고 고래 뱃속 터널을 지나 지하 계단, 그리고 피노키오 전시관과 마리오네트 전시관까지 감상하는 내내 눈이 즐겁고 동심을 불러일으키는 곳. 발길 닿는 곳마다 포토존이다.
해안 절벽 위에 위치한 야외 조각공원은 예술 정원으로 3만3000평의 드넓은 자연 속에 있다. 어딜 돌아보아도 산과 바다. 이처럼 바다가 아름답게 보이는 곳이 또 어딜지. 이어지는 스카이워크를 통해 다시 한번 자연을 만끽한다.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건강하게 로스팅한 산야초 커피를 마시는 것도 좋다. 문화예술 공간에서 하루나 이틀 쉬고 싶은 이들을 위해 아트월드 안에 호텔도 있다.
설화 속의 월화거리 즐기기
강릉을 떠나기 전 전통시장인 강릉중앙시장에도 잠깐 들러봐야 하지 않을까. 강릉역으로 가는 길에 들른 시장통엔 매스컴을 통해 이미 유명해진 아이스크림호떡과 치즈호떡을 맛보려는 사람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맛집들이 즐비하다. 마늘빵과 닭강정 역시 인기여서 사람들이 찾아드는 모습이다. 군것질을 하며 시장 구경을 즐기다 보면 여행은 더욱 흐뭇하다.
중앙시장을 지나 KTX를 타러 가는 길목에 월화거리로 가는 화살표가 있다. 강릉의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고 있는 교동의 ‘월화거리’는 강릉 도심을 지나던 폐철도 부지에 조성된 공원 시설이다. KTX 강릉선 개통으로 강릉 도심 철도가 지하화되면서 옛 지상 철길은 유휴지로 남게 됐다. 강릉시는 기차가 달리지 않게 된 이 공간을 공원화한 것이다. 컨테이너로 이루어진 월화 풍물시장은 기존에 있던 시장을 리모델링해서 만들어졌다. 메밀전병이나 감자떡 등 강원도 토속음식은 물론이고 다양한 간식거리로 옛 분위기를 느끼며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월화거리는 강릉 월화정 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기록에 따르면 신라 시대 화랑 무월과 강릉 지방 토호의 딸 연화는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경주로 돌아간 무월에게서 연락이 없고 연화는 다른 사람과 결혼할 상황에 처한다. 이에 연화는 산책하던 연못의 잉어에게 편지를 전달함으로써 두 사람이 다시 만나 혼인하게 된다는 것이 월화 설화의 주요 내용이다. 사랑의 메신저가 잉어라니. 무월과 연화의 이름에서 따온 월화정이 있는 이곳을 월화거리로 만들어낸 것이다. 걷는 내내 눈길을 끄는 갖가지 구조물이나 꽃 조형물들이 시민들과 여행자들에게 힐링을 선사한다. 강릉역에서 부흥마을까지 걸을 수 있는 길이지만 노선은 각자의 형편에 따라 조절하면 된다.
시장과 월화거리를 지나며 강릉역이 저편으로 보인다. 2017년 12월에 서울 강릉 간 KTX가 개통되면서 114분 만에 강릉에 도착할 수 있어 강릉 당일 여행이 쉬워졌다. 강릉선은 서울역에서 출발하면 청량리-상봉-양평-만종-횡성-둔내-평창-진부-강릉 도착이다. 일상을 벗어나 바다도 보고 하루쯤 나만의 시간을 만들어보고 싶을 때 강릉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