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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소식 끊긴 당신에게
-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마음만 동동 구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셔요. 이번 호에는 시인 장석주님이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편지를 보내주셨습니다. 경기도 북부에 있는 파주 교하로 거처를 옮겨 첫겨울을 맞았어요. 교하의 평평한 들을 덮은 한해살이 초본식물이 서리를 맞고 시들어 헐거워진 무릎을 꺾으며 가을이 끝나고, 곧 겨울이 닥쳤지요. 지구의 자전축이 태양에서 먼 쪽으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북반구에 햇빛이 약해지고 동절기가 온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지만, 올겨울은 유난히 눈도 잦고 한파도 자주 몰아쳤어요. 한파경보와 폭설주의보에 귀를 기울이며 겨우내 실내에 갇혀 겨울을 납니다. 기온이 영하 20℃ 이하로 떨어지는 혹한이 이어질 때 한강 하구 일대는 북극의 바다처럼 얼음덩이로 뒤덮였어요. 강가에서 건물 잔해처럼 나뒹구는 얼음덩이들이 펼치는 낯선 풍경을 하염없이 보다가 돌아오는 날도 있습니다. 노숙자가 동사했다는 비보가 전해진 날 한뎃잠을 자다가 얼어 죽은 길고양이도 드물지 않았지요. 고라니나 멧돼지 같은 야생동물이 언 땅에서 먹잇감을 찾지 못해 인가까지 내려옵니다. 이래저래 겨울은 네 발로 움직이는 동물이나 두 다리로 걷는 사람에게 두루 견디기 힘든 시련과 역경의 계절이지요. 사람이나 동물만 이 혹한을 견딘다고 생각하지만 풀과 나무도 한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묵묵하게 겨울을 납니다. 나무는 어떻게 이 겨울을 견디고 살아남는 걸까요? 나무의 내부는 많은 수분이 있어 얼 수도 있을 텐데, 나무가 영하 20℃의 추위에도 얼지 않고 겨울을 난다는 게 신기하지요. 낮이 점점 짧아지면서 빛이 약해지는 신호를 받고 나무들은 월동 채비를 해요. 활엽수는 잎을 다 떨궈 에너지 낭비를 최소화하지요. 그리고 “세포벽의 투과성이 극적으로 증가해서 순수한 물은 흘러나오고 세포 안에 남은 당, 단백질, 산이 농축”된다고 해요(호프 자런, ‘랩 걸’). 아무 불순물이 없는 순수한 물은 얼지 않지요. 부동액이 얼지 않는 이치가 그것이지요. 살아 있는 유기체 거의 모두가 그렇듯이 나무 내부는 물로 채워진 상자이지만 그 액체가 순수한 상태여서 얼음 분자가 결정을 형성하지 못한다지요. 식물의 씨앗이 보여주는 기다림은 탄성이 나올 정도예요. 가을로 접어들며 초목들은 수백 개에서 수만 개의 씨앗을 제 발치께에 떨어뜨리는데, 씨앗은 단단한 껍질로 둘러싸여 배아가 함부로 자라지 못하는 구조이지요. “씨앗 안의 배아는 자라기 시작하면 일단 허리를 굽히고 기다리던 자세를 곧게 펴서 오래전부터 기다려온 형태를 정식으로 띠기 시작한다. 복숭아씨, 혹은 참깨씨나 겨자씨, 호두씨 등을 둘러싼 딱딱한 껍질은 이런 팽창을 방지하려고 존재한다”(호프 자런, ‘랩 걸’). 씨앗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부터 배아는 딱딱한 껍질 속에서 긴 기다림을 시작하지요. 운이 좋으면 1년 만에 싹을 틔워 식물의 한 생애를 펼치지만 많은 씨앗들이 기회를 엿보다가 사라지지요. 중국의 토탄 늪지에서 나온 어떤 연꽃 씨앗의 배아는 2000년 만에 과학자의 도움으로 껍질이 벗겨지자 싹을 틔워 놀라게 했습니다. 연꽃 씨앗은 싹을 틔우려고 무려 2000년을 기다렸던 셈이지요. 씨앗은 껍질을 깨야만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을 수가 있지요. 씨앗은 생의 순환을 겪기 위해 오래 기다려야 합니다. 저 울울창창한 숲은 작은 씨앗의 기다림에서 시작된 것이지요. 초목들은 지구상에서 공룡이 멸종하고 지구가 몇 번이나 빙하기를 거치는 동안에도 죽지 않고 살아서 도처에 숲을 이루며 번성했어요. 그 번성이 작은 씨앗의 분투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요. 아름드리 떡갈나무도 배아에서 싹을 틔워 자라난 결과일 뿐이지요. 그러나 무수한 씨앗들은 운이 나빠 싹을 틔울 단 한 번의 기회를 잡지 못한 채 죽음을 맞아 사라지지요. 우리도 기다림 속에서 도약의 기회를 엿본다는 점에서 씨앗과 별반 다를 바가 없지요. 식물이 환경에 순응하며 인고와 복종과 침묵으로 일관하는 걸로 알지만 식물만큼 자기 숙명과 싸우는 존재는 드물지요. 붙박이로 자라는 식물이 침묵 속에서 싸움을 펼치는 까닭에 그 격렬함을 미처 눈치 채지 못할 뿐이죠. 식물은 땅속으로 뿌리를 뻗고 물과 자양분을 끌어다 줄기로 퍼 나르지요. 지금 이 순간에도 매화나무는 혹한을 견디며 꽃눈을 두툼하게 키우고, 튤립 같은 구근 식물은 땅속뿌리에서 싹을 틔울 준비가 한창이지요. 매운 추위라야 봄꽃이 더 화사하게 피어나는 법이지요. 화사한 봄꽃들이 혹한과 싸워 이긴 승리의 전리품이 아니라면 무어란 말인가요! 우리는 식물이 환경에 맞서 싸우는 저 용기와 지혜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현호색, 복수초, 양지꽃, 노루귀, 산달래, 변산바람꽃, 개불알꽃, 제비꽃, 패랭이꽃, 민들레 같은 야생 풀꽃조차 한자리에 붙박인 채 저를 짓누르는 숙명과 맞서지요. 그렇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동백, 모란, 작약, 산수유, 풍년화, 목련, 영산홍, 개나리, 진달래, 매화나무, 벚나무, 살구나무, 앵두나무, 배나무같이 가지를 뻗어 꽃을 피우는 초목도 맹추위 속에서 꽃 피울 준비를 하고 있어요. 가만히 들어봐요. 초목이 속삭이는 말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요. 헤르만 헤세는 ‘봄의 말’에서 그 말을 받아 적었어요. “어린애들은 알고 있다. 봄이 말하는 것을.//살아라, 자라라, 꽃피라, 희망하라, 기뻐하라, 새싹을 내밀라.//몸을 던지고, 삶을 두려워하지 말라!” 어느덧 입춘 지나고 우수입니다! 기세등등하던 겨울은 물러나고 곧 누리에 봄이 오겠지요! 파주 교하에서 첫겨울을 나며 오래 소식이 끊긴 당신을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 젊은 날의 혼돈과 기쁨은 아득히 멀어졌습니다. 당신이 뿌리를 내리고 사는 곳은 따뜻한가요? 당신이 어디에 있든지 잘 살기를 바랍니다. 생명을 가진 유기체의 살아냄은 태반은 기다림으로 이루어집니다. 기다림은 침묵과 혼돈을 견디는 인고의 시간이지요. 독일 철학자 니체가 “춤추는 별 하나를 탄생시키기 위해 사람은 자신들 속에 혼돈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말할 때의 그 혼돈! 기다림이라는 씨앗 속의 배아인 혼돈이 체념의 내성(耐性)을 만듭니다. 하지만 당신, 잊지 말아요. 생명은 춤추는 별이 그러하듯이 불가능한 필연으로서 꿋꿋하게 제 앞의 불확실함을, 제 안의 혼돈을 견디며 살아남음의 영광을 취한다는 것을. 삶의 광휘는 오직 혼돈을 견딘 결과로서 눈부십니다. 당신의 처지가 나쁘다면 좋은 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꿋꿋하게 기다리기를, 부디 불행에 꺾이지 말고 끝까지 견디고 잘 살기를 바라요. 잘 있어요, 당신. >>장석주 시인 스스로 산책자 겸 문장 노동자라 일컫는다. 매일 사과 한 알을 먹고 산책하며 침묵과 고요, 단순한 것과 느린 것, 바다와 대숲을 좋아한다. ‘마흔의 서재’, ‘철학자의 사물들’, ‘일요일의 인문학’,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 ‘베이비부머를 위한 변명’ 외 여러 권의 책을 썼다.
- 2018-02-28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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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대 가까이에 피어나는 봄꽃
- 해마다 봄이 다가올 무렵이면 사람들은 꽃을 보러 나서기 시작한다. 홍매화를 보러 절 마당을 찾고, 진달래나 철쭉, 산수유, 튤립... 등등 쉬지 않고 피어나는 봄꽃들을 찾아 사람들은 멀리멀리 떠나곤 한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그 먼길을 다시 돌아오면 결국 그 모든 꽃들이 서울에도 있다는 사실이다. 고궁에 기품 있는 홍매화가 있고 도심 한 복판 사찰의 기와 위에 산수유가 노랗다. 버스만 타도 진달래가 가득 피어난 산이 있고 지하철역을 나서면 푸짐한 개나리 동산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있다. 아름다운 고택의 담벼락에 피어난 능소화를 찾아 남녘으로 달려가지 않아도 된다. 가까운 공원에 능소화 터널이 있고, 동네 구청 화단에, 가까운 향교 돌담에, 심지어는 도로변에도 꽃담을 이루어 능소화의 전설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먼 남쪽의 산하에, 그 들판에, 고즈넉한 사찰과 함께, 그 마을 뒷산에서 또는 그곳의 숲에서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은 누가 뭐래도 사실이다. 스님의 맑은 미소가 봄볕처럼 따사로운 절 마당에 피어난 홍매화가 더없이 아름답다. 몽글몽글 빛나는 대웅전 뜰의 빛망울이 분홍빛 진한 홍매를 돋보이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야생화가 언 땅을 뚫고 나왔다. 서울에서 멀지 않은 광명의 구름산에 야생화가 지천이다. 남양주 쪽의 운길산과 청노루귀의 검단산이 있다. 차를 몰고 영흥도와 구봉도 쪽으로 잠깐 달리면 겨우내 낙엽더미 속에 묻혀있다가 고개를 내민 노루귀를 볼 수 있다. 아직 녹지 않은 눈 속에서 피어난 노오란 복수초가 환하다. 보물찾기 하듯 찾아낸 손톱만 한 야생화와의 조우가 짜릿하다. 반나절만 나서면 봄의 전령사들을 만날 수 있고 바다가 보이는 자연 속의 봄꽃을 귀한 손님처럼 맞을 수 있다. 겨우내 땅 속에 묻혀있다가 강인한 생명력으로 존재감을 보여주느라 애썼다고 눈인사를 하고 싶은 순간이다. 그 산비탈에 엎드려 봄바람에 하늘하늘 흔들리는 수줍은 바람꽃을 향해 렌즈 초점을 맞추며 행복하다. 렌즈를 통해서 바라보는 자연의 섭리와 변화를 만끽하는 기쁨에 감사한 시간이다. 반갑게 마주보고 고맙게 담아내고 조심히 남겨두고 발걸음을 옮긴다. 머잖아 꽃망울을 터트리며 개화를 알릴 매화나무도 추위 속에 싹을 틔우는 게 보인다. 온갖 풍상을 겪어 고목이 되어버린 나무에 봉오리가 맺혀있다. 비로소 나무의 굴곡진 꺾임의 멋도 눈에 들어온다. 굳이 멀리 떠나지 않아도 가까이에 봄이 있고 봄꽃이 싹을 틔우고 있다. 봄볕 드는 버스 창가에 앉아 꽃을 보러 가는 기분을 누려볼 수 있다. 봄 하늘은 푸르고 찬 공기는 상쾌하다. 매년 이런 계절을 맞으며 이 땅에 사는 맛을 비로소 즐겨본다. 뒤늦게 내가 사는 세상이 고맙고 애틋하다. 추위를 견디고 피어난 꽃들이 향기도 좋다고 한다. 매섭던 겨울이 지나고 해마다 이렇게 돌아오는 봄에 다투어 피어나는 봄꽃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네 인생은 감사하다.
- 2018-02-21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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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울수록 그 향이 짙어지는 매화(梅花) !
- 눈 내리고 내려 쌓여 소백산 자락 덮여도 매화 한 송이 그 속에서 핀다 나뭇가지 얼고 또 얼어 외로움으로 반질반질해져도 꽃봉오리 솟는다 - 도종환의 ‘홍매화’에서 정초가 지나면서 계절은 겨울의 한복판으로 접어들지만, ‘꽃쟁이’들의 마음은 벌써 춘삼월이 코앞에 다가온 듯 들뜨기 시작합니다. 지구온난화 등의 여파로 시절을 착각한 복수초나 노루귀 등의 야생화들이 여기서 불쑥 저기서 불쑥 한 달여나 이르게 꽃망울을 터뜨리기 때문입니다. 그중 엄동설한에 피는 모습이 어색하지 않은 꽃이 있습니다. 바로 매화(梅花)입니다. 눈 속에 피는 꽃, 즉 설중매(雪中梅)의 그림에 익숙하고, ‘매화는 일생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梅一生寒不賣香)’는 등의 찬사에 너무 길들어서 매화란 으레 한겨울에 피는 꽃이란 선입견이 강하게 박혀 있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실제 ‘따듯한 남쪽 나라’ 제주도에선 1월이면 팝콘 터지듯 가볍게 터진 하얀 매화꽃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습니다. 뭍에서도 최근 수년간 이상 난동으로 경남 양산 통도사의 유명한 홍매(紅梅)인 자장매(慈藏梅)가 1월부터 홍색 꽃을 피워 많은 인파를 불러 모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전남 순천에는 아예 음력 12월이면 피기 시작해, 음력 섣달의 한자 말인 납월(臘月)을 붙여 ‘납월홍매화’란 이름으로 불리는 매실나무가 있습니다. 금전산 금둔사 경내에 있는 홍매화 6그루가 그 주인공으로, 해마다 양력 1월 말부터 3월까지 개화해 남녘의 봄소식을 가장 먼저 알려준다는 말을 듣습니다. 30여 년 전 인근 낙안읍성에 있는 600년 된 홍매화의 씨를 받아다 키운 것인데, 지금은 어미 납월매가 고사해 이 6그루가 마지막 남은 토종 납월매일 것이라고 합니다. 여하튼 납월매가 됐든, 수령 360여 년의 자장매, 또는 뜻밖에 핀 동네 매화이건 정월은 추위가 뼛속 깊이 스며들수록 그 향이 코를 찌를 듯 짙어진다는 매화꽃을 찾아다니며 즐기는, 이른바 ‘탐매(探梅)’가 시작되는 달입니다. 그리고 그 여행길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란 말처럼 쉬 끝나는 게 아니라, 봄철 내내 이어집니다. Where is it? 매실나무가 국내에 들어온 건 약 2000년 전. ‘정원수로 심기 위해서’라는 게 국가생물종정보시스템의 설명이다. 당연히 오래된 매실나무가 많고, 이른바 유명한 고매(古梅)를 찾아다니며 즐기는 탐매 순례도 오래됐다. 수령 600년을 넘었다는 순천 선암사의 선암매(仙巖梅), 장성 백양사의 고불매(古佛梅), 양산 통도사의 자장매, 구례 화엄사의 흑매(黑梅) 등이 애호가들이 즐겨 찾는 매실나무다. 통도사엔 자장매 외에도 이름난 매실나무가 2그루 있는데, 일주문에 들어서면 먼저 보이는 만첩홍매와 분홍매가 그것이다. 유서 깊은 고불매와 선암매는 담양 계당매(溪堂梅)와 전남대 대명매(大明梅), 고흥 수양매(水楊梅)와 더불어 ‘호남 5매’란 명성을 얻고 있기도 하다. 이밖에 김해의 와룡백매(臥龍白梅)와 강릉 오죽헌의 율곡매(栗谷梅), 산청의 남명매(南冥梅) 등 수령 100년 이상 된 고매가 전국에 200여 그루 넘게 산재해 탐매객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최근에는 열매인 매실 수확 등을 목적으로 심은 대규모 매실나무들의 연륜이 쌓여 봄마다 농원 일대가 거대한 매화동산으로 변모하면서 수많은 인파가 찾는 매화 축제가 열리기도 한다. 전남 광양과 경남 양산의 매화 축제가 대표적이다.
- 2017-12-26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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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을빛 치마에 새긴 가족사랑
- 명칭이 항상 헛갈리는 곳! 은평한옥역사박물관이 맞는지 아니면 은평역사한옥박물관이 제대로 된 이름인지? 여러분은 어떻게들 알고 계시는지요? 오늘은 작심하고 그를 만나러 왔다. 그러나 그를 만나려면 삼가야 할 순서가 있다는 생각이다. 먼저 싸리문을 열고나 보자. 조선의 3대로를 아시는가? 큰길을 따라 서발, 북발, 남발의 삼발로가 조직되었으니 그중 한양에서 의주까지의 서로(서발)는 기발(말을 타고 이동)에 해당되는데, 바로 이곳 박물관 인근을 경유했던 것이다(구파발, 지명의 유래). 때문에 입구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조선의 역참제도에 대한 내용은 빼놓을 수 없을 터이다. 유리판 아래로 생생한 발굴 현장을 재현해놓은 김자근동 묘를 스릴 있게 체험하는 잔재미도 느껴보며(현재 유적 발굴 과정에 있는 서울 은평구 이말산에서 발굴됨), 세종의 6남 금성대군(단종 복위에 가담했다가 32세의 나이로 죽임을 당함)을 모신 사당인 금성당(실제는 은평뉴타운 우물골 소재) 코너에선 무속신앙, 즉 샤머니즘에 잠시 빠져보기도 한다. 2층의 한옥 상설전시관으로 오르다 보면 계단길 벽면으로 전국의 한옥촌을 사진으로 만나볼 수 있으며, 한복체험 코너에선 끼리끼리 방문 인증샷도 남길 수 있다. 멀리서 온 객을 위한 대접이 이만하면 융숭한 편이다. 자, 이제 헛기침 한번 해볼 차례다. 그가 버선발로 반겨줄지 모를 일이다. 노을빛 치마에 새긴 가족사랑 슬하에 자식 아홉을 두었던 그, 그러나 그중에 여섯이 그만 병사하고 마는데 자식을 먼저 보내는 어버이의 그 마음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어디 그뿐인가? “누리령 산봉우리는 바위가 우뚝우뚝, 나그네 뿌린 눈물로 언제나 젖어 있네. 월남리로 고개 돌려 월출산을 보지 말게, 봉우리 봉우리마다 어쩌면 그리도 도봉산 같을까.” 유배길에 전남 영암의 월출산을 바라보며 두고 온 집과 가족을 그렸을 그의 마음이 그대로 묻어나 있는 시다. 그러나 그는 지금 가는 이 길이 무려 18년간이나 지속되리라고 짐작조차 했을까? 참으로 헛헛한 독백이 아닐 수 없다. “주인 없는 초당엔 적막만이 가득하고, 처마 끝에 방울방울 낙수지어 반기는가?” 지금으로부터 약 20여 년 전, 친구와 함께 초당에 들린 적이 있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길을 더듬어 그를 만나러 갔던 그 길, 한적한 초당 대청에 걸터앉아 낙수에 손 비비며 그가 만들었다는 연못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던 기억이 오버랩된다. 부부간의 애틋함, 자식을 향한 아비의 마음은 옛사람이라고 다를 리 없고 오히려 더하면 더했지 뺄셈은 전혀 아니라는 생각이다. 유배생활을 하던 그는 부인이 보내온 치맛자락을 재단하여 두 아들과 그 후손들이 간직하도록 아비의 당부를 글로 표현한 서첩을 만드는데 그중 3첩이 남아 있다(국립민속박물관 소장). 또 남은 천으로는 시집가는 딸에게 매화나무 가지 위에 두 마리 새가 앉아 있는 '매화병제도'를 그려줌으로써 다복한 가정을 꾸미고 집안이 번창하기를 기원했다. 바로 아버지의 이름으로. “내가 강진에서 수년간 유배 중일 때, 부인 홍씨가 해진 여섯 폭 비단 치마를 보내왔다. 세월이 오래 흘러 붉은색이 퇴색되었다. 네 첩의 글을 만들어 두 아들에게 보내고, 남은 천으로 작게 장정하여 딸아이에게 보낸다.” 짐작하셨겠지만 오늘 필자가 만나러 온 분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다. 하피첩, 은평에 오다 은 노을 하, 치마 피, 엮을 첩의 의미로 부인이 시집올 때 입고 온 붉은 치마가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색이 바랬음을 은유한 것으로 지어미에 대한 지아비로서의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그리 넓지도 않고 그렇다고 비좁지도 않은 기획전시실, 그 공간의 범위로는 감히 재단할 수 없는 선생의 마음과 정신은 결국 오랜 유배생활을 이겨내고 고향(남양주시 능내리)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고, 만년에도 저술을 놓지 않았던 선생은 회혼일(결혼 60주년 기념일)에 그만 세상을 떠난다. 생의 마직막엔 곁을 지켜준 부인이 있었으니 선생의 임종은 외롭지 않았으리라. , , 등 다산 사상의 핵심은 사회 현실을 바탕으로 제도와 법을 맞도록 바꾸자는 것이 그 골자로 정치 및 행정체제, 형률제도, 경제제도, 생산기술, 군사제도 등 제반 영역을 포괄하는 것이다. 선생이 저술한 책은 모두 503권이라고 한다. 인고의 세월 동안, 그리고 말년에도 평생 붓을 놓지 않았던 선생! 나는 어떤 남편이고 어떤 아버지인가? 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본 기획전은 6월 11일까지 이어지며 문의는 은평역사한옥박물관으로 하면 된다.
- 2017-05-22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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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벚꽃 명소가 된 선진리 왜성
- 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선진리(船津里) 왜성을 다시 찾은 것은 꼭 13년 만이었다. 남해안 꽃마중 길에 벚꽃 명소라는 소문에 이끌려 찾아간 것이 2004년 4월이었다. 경남 사천군 용현면 선진리. 사천만 바다가 내륙으로 깊숙이 파고든 한적한 어촌 마을 야산을 뒤덮은 벚꽃이 제철이었다. 그곳이 정유재란 때 일본 무장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부자의 거점이었다는 사실에 잠시 관심을 가졌었다. 그는 지금의 가고시마(鹿兒島) 땅인 사쓰마(薩摩) 영주였다. 그 벚나무들이 일제의 유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잠시 세월의 나이테를 헤아려보았다. 성의 주인이었던 시마즈 후손들 입김으로 조선총독부는 그곳에 공원을 꾸미고 벚나무를 심었다 한다. 더러는 그때 심은 것으로 보이는 고목도 있었다. 벚나무들은 봄마다 무심한 꽃잎을 쏟아낸다. 올 4월에도 벚꽃 축제가 또 사람들을 유혹할 것이다. 첫 방문 이후 13년 동안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2005년부터 시작된 성터 발굴사업에서 의미 있는 출토품이 나왔다는 사실은 몰랐다. 고려시대의 자기류 같은 출토품은 왜성이 생기기 이전부터 왜구의 분탕질에 대비해 고려수군영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옛 모습의 편린을 짐작케 하는 성터가 복원된 사실도 알 턱이 없었다. 첫 버스로 진주에 도착해 삼천포 가는 버스로 갈아타고, 선진리 정류장에서 내려 3km를 걸어서 갔다. 1598년 가을 사천벌을 붉은 피로 물들인 치욕적인 패전의 흔적은 남았을 리 없겠지만 분위기만은 느껴보고 싶었다.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들판 여기저기서 봄 기지개가 한창이었다. 농수로마다 물이 흘러넘치고, 농사 준비에 바쁜 농부들 모습이 정겨웠다. 논두렁, 밭두렁 너머 울타리마다 피어나는 매화도 반가웠다. 420년 전 초토에도 봄은 왔다. 싸움에 패해 달아나다가 왜군의 소총에 맞아 죽고, 칼과 창에 찔려 죽은 수많은 조·명 연합군 병사들의 비참한 최후는 이제 까마득한 옛일일 뿐이다. 지금 그 땅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알 턱이 없는 시대다. 정유재란 최대의 치욕 선진리 왜성도 순천과 울산처럼 바다와 뭍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순천과 울산 육전(陸戰)에서는 명군이 적장의 뇌물을 받거나 몸을 사려 비겁하게 물러난 데 비해, 선진리 전투는 어이없는 패전이었다는 사실이다. 병력 면에서 비교조차 되지 않았던 조·명 연합군의 선진리 패퇴는 정유재란 최대의 치욕으로 기록됐다. 오죽하면 일본이 전과를 크게 부풀려 3대첩의 하나로 자랑했으랴! 서전은 연합군의 승승장구였다. 중로(中路)군 장수였던 명군 제독 동일원(董一元)이 이끄는 명군 3만7000명과 정기룡(鄭起龍) 장군 휘하의 조선군 3000명은 1598년 9월 20일 진주성을 차지했던 왜군을 쉽게 물리쳤다. 이어 남강 변 망진산 왜성까지 함락시켜 왜군을 바닷가로 내몰았다. 진주성과 망진산을 거점으로 연합군에 저항하던 왜군은 압도적인 병력에 위축되어 사천 읍성과 선진리 성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사천읍도 쉽게 탈환됐다. 정기룡이 읍성을 포위하고 야간 기습공격을 가해 가볍게 수복한 것이다. 시마즈군은 7km 서남쪽 선진리 성으로 철수하면서, 수백 명의 병력을 남겨 수성하도록 했다. 그 병력으로 4만 대병을 막으라는 것은 연합군 남진의 속도를 늦춰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보자는 계산이었을 것이다. 선진리 전투는 10월 1일이었다. 양력으로는 10월 30일이었으니 4만 연합군과 1만 안팎의 시마즈군이 가을 들판에서 벌인 창과 방패의 대결이었다. 누가 봐도 싸움이 되지 않을 이 전투에서 연합군은 역사적인 치욕을 당했다. 사천만 바닷가 고지대에 견고한 성을 쌓고 농성하던 시마즈군은 독 안에 든 쥐 형국이었다. 그러나 연합군은 그 쥐에게 급소를 물린 꼴이 됐다. 성내를 향해 포화를 집중하고 성문을 부수기 위해 돌격대를 투입했다. 성문만 열리면 전투는 끝이었다. 왜군은 유리한 지형을 등에 지고 결사항전으로 나왔다. 주변에 미리 지뢰를 매설하고 조총을 총동원해 연합군의 행동반경을 묶었다. 전투 중 세토구치 시게하루(瀬戸口重治)가 연합군 식량 창고를 불화살로 공격해 군량미가 소실됐다. 군량이 사라진 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연합군의 공세는 눈에 띄게 수그러들었다. 게다가 뜻하지 않은 사고까지 일어났다. 사고였는지 적의 공격에 당한 것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명군 화약고가 폭발해 큰 혼란이 일어났다. 어떤 기록에는 왜군의 불화살로 일어난 일이라 하고, 어떤 기록에는 명군의 실수로 돼 있다. 아비규환의 사천벌 연합군 진영이 우왕좌왕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왜군은 일제공격으로 돌변했다. 불끄기에 동원된 병사들이 미처 무기를 챙겨 들 사이도 없이 밀려든 왜적의 공격에 연합군 전선은 허무하게 와해됐다. 진중은 너나없이 도망치는 병사들로 어지러웠다. 도리 없이 동일원은 남은 군사를 진주성으로 철수시켰다. 왜군은 달아나는 병사들을 추격하면서 총을 쏘고 칼과 창을 휘둘렀다. 사천벌은 순식간에 단말마 비명으로 아비규환이 됐다. 논두렁과 밭두렁은 피로 물들었다. 연합군이 철수해 달아난 진주까지 핏자국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았을 정도다. 이렇게 죽은 연합군 전사자 숫자는 제각각이다. 뜻하지 않은 전과를 크게 자랑하고 싶었던 일본 측 기록에는 2만~3만으로 나오는 데 비해, 에는 7000~8000명에 달한다고 기록돼 있다. 일본이 크게 늘리고 조선이 크게 줄였다고 가정한다면, 1만 안팎으로 보는 의견이 타당해 보인다. 더 비극적인 사건은 그 후의 일이다. 시마즈는 자신의 전공을 자랑하기 위해 전사자 시체에서 코와 귀를 잘라 소금에 절여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보냈다. 전공을 증명할 수급 대신 잘라 보낸 코와 귀는 지금 교토의 유명한 사적지 미미즈카(耳塚, 귀무덤)에 묻혀 있다. 그곳에 묻힌 원혼은 이 전투의 희생자뿐만이 아니다. 살아 있는 사람 코도 베어 보냈다는 기록도 있다. 모두 12만 명이 넘었다. 그 한을 풀기 위해 1992년 박삼중 스님(부산 자비사 주지)이 원혼이 깃든 교토 이총의 흙을 떠다가 선진리 조명군총(朝明軍塚) 옆에 안장하고 비석을 세웠다. 선진리 전투 패전 보고를 받은 명나라 만력 황제는 크게 노하면서 즉시 진군해 성을 빼앗고 왜장을 징치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겁에 질린 동일원이 남은 병력을 추슬러 11월 17일 다시 왜성 공격에 나섰으나, 시마즈는 이미 성을 버리고 귀국한 뒤였다. 그 치욕의 흔적은 지금도 남아 있다. 바로 왜군이 만행을 저지르고 쫓겨 간 뒤 현지 백성들이 시신을 수습해 묻은 조명군총이다. 여기저기서 썩어가는 악취를 견디다 못한 백성들은 코와 귀가 잘린 수급을 모아 성 옆에 묻었다. 명군 수가 훨씬 많아 ‘당병무덤’ 또는 ‘뎅강무데기’라 불렸다. 뎅강무데기란 말이 섬뜩했다. 아무도 돌보는 이가 없었던 무덤은 원형대로 보전되다가 1983년 사천문화원과 민간이 협력해 비석을 세우고 매년 10월 30일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남의 나라 남의 땅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은 원혼들에게 한 가닥 위안이라도 하려는 건지 왕릉 규모 못지않은 거대한 무덤 주위에 올해도 매화와 동백이 피었다. 선진리 왜성은 처음 왔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말쑥하게 새 단장을 하고 있었다. 2005년 발굴사업에 이어 복원 공사와 공원화 공사가 끝난 탓이다. 동쪽에 있던 성문 터에는 육중한 문루도 복원됐다. 전형적인 일본 성으로 들어서는 기분이었다. 천수대 자리에 우뚝 선 6·25 전몰 공군 장병 위령탑은 엉뚱해보였지만, 허물어졌던 성곽이 복원되어 옛 모습을 짐작하게 해줬다. 성 마루에서 바라본 사천만 바다는 드넓은 호수 같았다. 잔물결 하나 없는 잔잔한 바다가 옛날 그 자리에 고요히 가라앉아 있었다. 임진년 해전에 처음 출전한 거북선 용머리가 포효하며 왜선들을 수장시켰던 성난 바다의 모습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치욕적인 육전과는 반대로 7년 전의 임진년 해전은 통쾌한 승첩이었다. 세계 해전 역사에 그 명성을 떨친 이순신 함대의 거북선이 처음으로 위력을 과시한 전투였다는 점에서도 사천만 해전은 유명하다. 사천해전은 1592년 5월 하순에 일어났던 전투다. 첫 승첩인 옥포해전(1592년 5월 7일) 직후 전라좌수영(여수)으로 돌아간 이순신이 전열을 가다듬을 새도 없었던 5월 27일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에게서 다급한 지원 요청이 왔다. “왜군 전선 10여 척이 사천 곤양 바다를 침범해 노량에 대피했으니 빨리 와서 도와 달라”는 내용이었다.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일 일이 아니라고 판단한 이순신은 곧 휘하 장수들을 거느리고 경상도 바다로 달려갔다. 거북선의 첫 승리 삼천포 해안에서 멀리 내륙으로 파고 들어간 사천 바다로 가니 선진포구에 왜선들이 오색 깃발을 날리며 정박해 있는 것이 보였다. 이순신은 처음 거느리고 온 거북선 성능을 실험해볼 겸 적선을 너른 바다로 유인하는 작전을 펼쳤다. 적은 그 계책에 넘어가 따라나섰다. 두려운 척 물러가던 이순신 함대는 수심이 깊은 바다에 이르러, 돌연 뱃머리를 돌려 거북선을 앞세우고 적진으로 돌진했다. 거북선 용구(龍口)에서 천자총통, 지자총통 등 화포들이 불을 뿜고, 여러 판옥선들이 일제히 불화살과 총통공격을 퍼붓자 적선들은 삽시간에 불길에 휩싸여 엎어지고 깨지고 가라앉았다. 불이 난 선상의 왜병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에 뛰어들고, 천신만고 끝에 뭍에 오른 병사들은 산으로 도망치며 통곡을 쏟아냈다. 삽시간에 왜선 10여 척을 분멸시키고 당파한 쾌거였다. 이 해전의 의미는 단연코 거북선의 성능에 귀일한다. 무시무시한 용머리를 앞에 달고 무서울 것 없다는 듯 달려드는 괴물 같은 전함에 왜적은 크게 당황했다. 선재도 두꺼운 적송으로 돼 있어 가볍고 날렵하기만 한 왜선들은 부딪히는 대로 깨졌다. 이순신은 뒤이은 당포해전이 끝난 뒤 임금에게 전투보고서 ‘당포파왜병장(唐浦破倭兵狀)’을 올렸는데 전투 상황이 이렇게 묘사돼 있다. “산 위와 배를 지키는 곳에서 왜적들이 빗발치듯 철환을 쏘았는데, 그 가운데 우리나라 사람도 섞여 있어 분하여 배를 급히 저어 앞으로 나아가 배를 두들겼습니다. 여러 장수들이 한 번에 구름처럼 모여들어 천자, 지자 대포들과 장편전, 화전 등을 쏘아 천지를 뒤흔들었고, 고막이 상해서 엎어지는 자, 부축해서 끌고 달아나는 자가 얼마인지 모르겠으며, 언덕으로 물러가서 감히 앞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왜선들은 처음에는 거북선의 무서운 외양에 겁을 먹었으나 판옥선보다 크지 않은 몸집에 자신감을 가졌던 모양이다. 일단의 왜병들은 2층 층루에서 사다리를 걸고 거북선 위로 뛰어내렸다. 육박전에 도가 튼 그들은 단병전에 승부를 걸 요량이었겠지만, 뛰어내린 적병마다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거북선 등을 덮은 가마니 거적 속에 촘촘히 박힌 철추에 팔다리와 배가 찔린 것이다. 사천해전 승전의 중요한 의미 첫 해전이 끝난 뒤 이순신은 신병기 거북선 보안을 위해 삼천포 대방진 굴항에 깊숙이 정박시켰다. 이순신 선단은 현장에서 멀지 않은 모자랑포에서 밤을 보내면서도 거북선만은 안전하게 멀리 숨겨둔 것이다. 이 굴항(窟港)은 지금도 옛 모습 그대로다. 고려시대 때부터 왜구 침입에 대비해 군선을 안전하게 정박시키려고 만든 시설이 요긴하게 쓰인 것이다. 그 뒤로도 이 굴항은 조선수군의 주요 시설로 보전돼왔다. 사천해전에서 이순신은 큰 전상을 입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부하 장수의 상처를 돌봐주는 대인의 풍모를 보여줬다. 에 따르면, 이순신은 신변의 안전을 돌보지 않고 줄곧 대장선 꼭대기에 선 채 전투를 지휘하다가 어깨에 적탄을 맞았다. 피가 발등까지 흘러내렸는데도 활을 놓지 않고 지휘를 마쳤다. 전투가 끝난 뒤에야 상처를 내보인 그는 생살을 두 치(6cm)나 째고 철환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는데 태연하게 웃으며 부하들과 대화를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그 상처는 1년이 넘도록 낫지 않았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다음해 유성룡에게 보낸 편지에서 “죽음에 이를 만큼 다치지는 않았지만 연일 갑옷을 입고 있는 데다 상처에서 진물이 줄줄 흘러 아직 옷을 입을 수 없습니다. 뽕나무 잿물로도 바닷물로도 씻어보지만 차도가 없어 민망할 따름”이라며 고통을 실토했다. 이 전투에 이기지 못했다면 왜군의 호남 진출 거점인 선진리를 잃어 임진왜란 초기 전쟁의 양상은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사천해전 직후 당포해전에서도 승리한 이순신의 장계에는 “사천선창에서 바라보니 험준한 산 위에 400여 명의 왜적들이 긴 뱀이 똬리를 튼 듯한 모양의 진[長蛇結陣]을 치고 붉고 흰 깃발을 난잡하게 꽂아 사람의 눈을 어지럽게 하고 있었다”는 내용이 있다. 왜성을 쌓는 모습이 그렇게 묘사된 것으로 해석된다. 사천해전에 패했다면 그 축성 공사는 바로 완공됐을 것이다. 그랬다면 이순신의 본거지인 전라좌수영과 뒷날 한산도 통제영까지 감제하는 요지가 그들에게 제공됐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도 사천해전 승첩은 전쟁 초기 제해권 향방을 가른 중요한 전기였다. 선진리 성은 정유재란이 일어난 1597년 10월 왜군 장수 모리 요시시로(毛利吉城)에 의해 축성됐다. 공사가 불과 2개월밖에 안 걸렸다는 기록으로 보아 곡창 호남을 도모하려는 작전 계획이 얼마나 시급했는지 그 사정을 알 수 있다. 그런 곳에 갇혔던 왜장을 징치하지 못한 선진리 전투 현장을 답사하면서, 나의 전쟁과 남의 전쟁, 나의 염원과 남의 인식 간의 상관관계를 골똘히 천착하게 됐다. 문창재(文昌宰) 언론인 1946년 강원 정선 출생. 서울 양정고, 고려대 국문과, 한양대 대학원 졸. 한국일보 도쿄특파원, 사회부장, 논설실장 역임. 저서로 , , , 등이 있다.
- 2017-03-31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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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 마당 조경수 아래 수목장
- 그녀는 집 마당 매실나무 아래 영원히 잠들었다. 며칠 전 내가 사는 마을의 한 젊은 부인이 오밤중에 갑작스러운 지병의 악화로 병원으로 이송되어 수술을 시도했으나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마흔다섯의 정말 꽃다운 나이었다. 가족도 가족이지만 마을 주민들은 슬픔에 빠졌다. 화장으로 장례절차를 마친 그 여인의 유골은 주민들의 생각을 넘어 살던 집안 마당의 작은 매실나무 아래 묻혔다. 남편의 지고한 아내 사랑이지 싶다. 너무 짧은 나이로 멀리 보내기에 안타까움이었는지 남편은 아내와 함께 심었던 마당 한쪽의 매실나무 아래를 아내의 안식처로 정했다. 살아있을 때처럼 늘 가까이 두고 싶은 남편의 사랑으로 보고 싶다. 언덕배기의 그 집 위로 하늘은 높아지고 하얀 구름이 흐른다. 대문 밖의 연못에 핀 연꽃의 연밥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저녁이면 그 여인이 밤늦게 켜놓았던 창문의 불빛도 여전하다. 까치도 여느 때와 같이 지저귀고 참새도 이 나무 저 나뭇가지로 우르르 옮겨 다닌다. 글을 쓰다 창밖을 보니 서쪽에 해가 나고 동편에 구름이 덥혀 비가 내리나 보다. 무지개가 둥그렇게 그 집 위를 감싸고 있다. 내가 사는 마을은 4년 전부터 터를 만들기 시작하여 한두 집 짓기 시작했고 지금은 50여 채가 들어선 새로 이뤄진 전원풍의 마을이다. 나이가 든 사람보다 젊은 층이 많이 산다. 67세 나는 늙은이에 속한다. 마을의 동남쪽과 서남쪽은 나지막한 동산으로 둘러쳐졌고 북동쪽과 서북쪽은 논밭에 비닐하우스가 즐비하다. 세상에 잘 알려진 “일산 열무” 재배단지다. 산등성이를 개발하여 전원 마을이 되었다. 마을이 만들어질 즈음에 40 중반의 젊은 부부가 6학년 초등학생 아들을 데리고 이곳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마을 중간쯤 언덕배기에 아담한 2층 단독 주택을 지었다. 3층 옥탑방이 있어 외양이 서구풍이다. 마을 행사에 헌신적으로 참여하는 젊은 층이다. 마당엔 텃밭을 만들고 대문 앞쪽에 작은 연못을 파고 연꽃을 심었다. 마당 한쪽 양지바른 곳에 매실나무도 한 그루 심었다. 봄이면 그 매실나무에 매화도 소담스럽게 핀다. 부인은 매화를 무척 좋아하였다. 2년 전에 이곳으로 이사를 온 나는 아침 산책길에 이곳을 지나며 예쁘게 핀 연꽃이나 연잎에 영롱하게 맺힌 물방울을 카메라에 담기도 하며 텃밭을 가꾸는 젊은이와 살가운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3년의 세월 속에 연잎이 너울거리게 되었고 여름이면 홍련이 저 멀리 하늘을 향해 큰 미소를 보낸다. 젊은 주인은 마당 텃밭에 먹거리로 채소를 가꾸었다. 고구마도 심고 토마토도 심는다. 지난해 가을에는 재배한 고구마라며 큼직한 녀석을 서너 뿌리 건네주어 맛있게 먹었다. 행복한 부부가 사는 집 중의 하나였다. 그 젊은이는 이제 또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우리의 세대가 생각할 수 없는 집안 마당에 안사람의 유골을 안치한 최초의 사람이 아닐까? 아침저녁이면 미소가 보일 것만 같은 아내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갈 매실나무 아래를 물끄러미 바라볼 그 젊은이를 상상해 보기도 한다. 별이 총총한 자정 무렵 어슴푸레 윤곽을 드러내는 매실나무를 계속하여 지켜볼 수 있을지도 관심거리다. 평생을 살지 않고 이사를 갈 경유엔 어떻게 할까? 영혼이 있다면 남편의 그러한 애틋한 사랑을 지켜보며 저승으로 떠나지 못하고 이승을 맴돌고 있지나 않을까? 그 자체의 옳고 그름이나 따라올 여러 가지 문제점을 차치하고 살아생전처럼 옆에 두고 싶은 남편의 사랑만을 얘기하고 싶다. 살아갈 세월이 그 젊은이와 확연히 다르지만, 과연 나와 안사람은 우리 집 마당의 과실나무 아래 나나 안사람의 유골을 안치할 생각이라도 해 볼 수 있을까?
- 2016-08-29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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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인철의 야생화] 섬진강변 흩날리던 매화의 환생 매화마름!
- “저 매화 화분에 물 주어라[灌盆梅].” 우리의 옛 선비들이 매화를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아끼고 좋아했는지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한마디 말입니다. 조선 중기의 대학자 퇴계 이황(李滉·1501~1570) 선생이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이라고 제자 이덕홍(李德弘)이 이란 문집에 전하고 있습니다. 생전 100여 편이 넘는 매화시를 짓기도 했고, 500년이 지난 현재 1000원권 지폐에 활짝 핀 매화꽃과 함께 초상이 등장할 정도이니 선생의 매화 사랑이 얼마나 유달랐는지 짐작이 가면서, 그런 유언을 남겼을 만하다고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한평생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梅一生寒不賣香]’에 대한 옛 선비들의 사랑과 연모는 다소간의 정도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동소이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매화는 봄을 알리는 꽃이란 명성답게 제주 등지에서 1월부터 피기 시작하는데, 3월 중순이면 전남 광양과 경남 양산에서 매화축제가 열릴 정도로 만개합니다. 특히 전남 광양과 구례, 경남 하동 일대의 매실나무에 하얗게 꽃이 필 무렵이면 굽이굽이 흐르는 섬진강도 봄바람에 휘날린 매화 꽃잎이 물 위에 가득 내려앉은 듯 반짝반짝 빛이 납니다. 그렇게 섬진강 가에서 흩날리던 매화 꽃잎이 섬진강 물에 어지러이 내려앉았다가 서해 바다를 거쳐 강화도로, 안면도로, 더 멀게는 백령도까지 올라가 모내기 전 물이 찬 논에 하얀 눈이 내린 듯 환생한 게 아닌가 싶은 꽃이 있습니다. 바로 매화마름입니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 강화도를 비롯해 서해안 일대 논이나 수렁 등 여기저기에 잡초처럼 피어나는 꽃입니다. 꽃은 물매화를, 잎은 붕어마름을 닮아 ‘매화마름’이라고 이름 지은 이 수생식물은 모내기 전 물이 고인 논이나 습지, 연못 등에서 흔하게 만나던 꽃이었습니다. 농약 사용이 보편화하고, 논이 밭이나 과수원 등으로 바뀌면서 그 개체 수가 크게 줄어들어, 한동안 한란·나도풍란·광릉요강꽃·섬개야광나무·암매와 함께 환경부 지정 6대 멸종 위기 야생식물(1급)로 보호받다가 몇 해 전에야 2급으로 내려앉았습니다. “어디서 봤더라. 어디서 봤더라.” 기시감(旣視感)이라고 하지요. 전에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 매화마름을 처음 만났을 때 단번에 떠올린 단어입니다. 물속으로 파고든 뿌리에서 뻗어 나온 수십 가닥의 줄기가 거의 수면에 붙어 방사상으로 퍼지고, 그 줄기에서 마디마디마다 꽃자루가 올라와 손톱 크기의 흰 꽃을 무수히 피워냅니다. 그런데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그저 물속에 보잘것없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는구나 하고 지나치기 십상인데, 꽃자루 끝에 하나씩 달린 1cm 크기의 꽃을 자세히 살펴보고 5장의 꽃잎이 가지런한 매화를 떠올리고 매화마름이라 작명한 그 안목과 재치에 놀라면서 “아, 맞다. 두 달여 전 섬진강 가에서 보았던 매화를 똑 닮았다.”라고 무릎을 칩니다. Where is it? 주로 서해안 지역에 국한되어 있기는 하지만, 강화도에서부터 안면도까지 비교적 자생지의 폭이 넓다. 최근 백령도 등 서해 섬 지역의 논에서도 자생하는 게 확인된 바 있다. 충남 태안군 남면 신원리 곰섬 입구의 논에서는 국내 최대 규모인 집단 자생지 2만㎡가 발견되기도 했다. 서울에서 가까운 인천광역시 강화군에도 송해면 당산리 등 여러 곳에 자생지가 있다. 특히 초지대교 건너 길상면 초지리 큰길가에는 한국내셔널트러스트 ‘시민유산 1호 강화 매화마름 군락지’(3,014㎡)가 있다. 매화마름이 자생하는 초지리의 이 논은 2008년 논 습지로는 세계 최초로 람사르습지로 등록되는 역사적인 기록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 2016-05-19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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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의 인상학]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1000원권 지폐가 된 사연
- 박정희 혜담(慧潭) 인상코칭 연구원장 ilise08@naver.com 1975년 8월 발행된 1000원권의 인물은 조선중기 문신이며 성리학의 대가로 영남학파를 형성한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이다. 영남학파는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유파로, 조선 중기에 영남좌도에서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과 예학(禮學)을 바탕으로 한 사변적(思辯的)인 성리학을 더욱 중시하였다. 우계(牛溪) 성혼(成渾)과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에 대칭되면서 학문적으로는 주리론(主理論), 정치적으로는 동인의 입장을 고수하였다. 성군을 바라는 지어 올려 또한 이황은 살아 있을 때부터 유종(儒宗 : 유학에 통달한 권위 있는 학자)으로 불렸다. 그동안 유학을 하는 선비들은 주자학(朱子學)을 단순하게 받아들여 실천하는 데 불과했으나, 이황은 사상적으로 깊이 파고들어 주희(朱熹)에 버금가는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황은 이로 인하여 많은 후학들을 길러냈고, 영남학파를 이끌어 가는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황은 시와 서화에도 뛰어났으며 벼슬보다는 학문 탐구를 더 원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의 정치 성향은 전반적으로 왕권을 중시하고 군주의 책임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군주의 자리는 백성의 지도자로서 모든 책임이 모이는 곳으로 온갖 욕심을 부리고 조금이라도 직무에 태만하고 소홀히 한다면 산이 무너지고 바다에 해일이 일어나는 것 같은 위기가 온다. 그것은 곧 백성에게 화(禍)가 미칠 것이라는 마음에 이황은 선조를 위해 를 지어 올렸다. 자신이 보필하지 못하더라도 학문을 열심히 하고 늘 경계하는 마음과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추어 성군이 될 것을 주청(奏請)한 것이다. 성학십도는 병풍으로 만들어져 지금도 도산서원에서 퇴계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진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 관리) 1000원권 지폐가 처음으로 나온 해인 1975년은 유신헌법의 찬반을 묻는 국민 투표(2월12일)가 실시된 해였다. 당시 대통령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에 특별선언을 발표하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보호는 물론 국제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한다는 명목 아래 계엄을 선포하였다. 이와 동시에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활동을 중지시켰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구성된 비상 국무회의는 즉각 헌법개정안을 제출, 의결하였으며 이를 국민투표에 부쳤던 것이다. 아이러니라 할 수 있지만 퇴계 이황이 성군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던 선조 시대, 사림들의 극심한 대립으로부터 당파가 생겨났다. 동인 서인으로 나누어진 동기는 이조전랑(정5품), 좌랑(정6품)의 벼슬자리가 원인이 되었는데 그때 서울 동쪽에 살면 동인, 서쪽에 살면 서인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황이 지폐의 인물이 된 이유는 그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존경하는 인물이라서라는 말이 있었다. 박 대통령은 성군을 바라는 이황의 마음을 간절하게 담아 임금을 교육하고자 하는 의지력과, 매화를 사랑하는 섬세함, 손주를 아끼는 인간적인 마음 등이 부러웠을 것이다. 사람의 향기와 굳은 절개를 두루 갖춘 그의 모습을 닮은 협조자를 휘하에 두고 싶은 간절함을 담았을 수도 있다고 볼 수 있다. 병약해 보이는 초상화 실제와 다른 듯 이황의 초상은 세종대왕이나 율곡의 모습에 비해 몹시 여위고 말라 보인다. 어렸을 때부터 잔병이 많았고, 성품이 깔끔했다는 고증을 반영하여 1974년 이유태 화백이 그린 상상화로 당시에 논란이 많았다. 2007년에 발행된 1000원권에서도 인물 초상은 이황을 그대로 유지했다. 앞뒷면에 초상을 동시 반영해 파격적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1000원권의 이황 초상을 접할 때마다 과연 이분이 그 많은 저서를 남겼고 수많은 제자를 길러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남기신 인물일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큰 인물의 초상을 그릴 때는 많은 고증을 통해 그의 성품을 먼저 파악하여야 한다. 진성(眞城)이씨 대종회에서 발간한 제20호, 2005년판에 실린 내용을 살펴보면 선생은 평소 “털 하나라도 틀리면 나의 진면목이 아니다” 라는 말씀을 하신 바 있으며, 진영은 남기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용모를 짐작할 수 있는 기사로는 잡기19칙 제1에 ‘선생, 안각풍광(顔角豊廣) 송재기애지(松齋奇愛之) 상호왈(常呼曰), 광상(廣?),이불명언(而不名焉)’ (이안도(李安道) 선생 , 퇴계선생언행록에서)이다. 해석하자면 “선생은 이마가 모가 나고 풍성하여 송재께서는 이를 기이하게 여기고 사랑하여 평상시에 부르기를 廣?(넓은 이마)이라 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위의 내용이 전하는 바도 있지만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의지력으로 퇴계는 300여년을 성리학의 대가로 인정받으며 우리 시대를 이끌어 가는 큰 학자로 추앙받고 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일본과 중국 등에서도 성리학을 완성 한 큰 인물로 존경 받고있다. 유럽에서도 퇴계 연구가 왕성한 것을 보면 초상화 속 인물보다는 턱이 넓고 단단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하게 된다. 우리는 퇴계 이황이 완성한 성리학을 예(禮)의 근본으로 삼아 바르고 밝고 어질게 살아가려고 한다. 인상학자의 작은 바람이지만 우리의 위대한 성인의 모습을 제대로 고증, 복원해 훌륭한 인물을 정확한 모습으로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해본다.
- 2016-04-25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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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사와 함께하는 북人북] 궁궐 속 나무에 스민 조선의 역사, 박상진 경북대학교 명예교수 <우리 궁궐을 아는 사전>
- 책(book)과 사람(人)의 이야기를 담아온 ‘명사와 함께하는 북人북’. 이번 호에는 그 의미를 살려 책을 통해 맺어진 특별한 인연을 소개하려 한다. 바로 박상진(朴相珍·76) 경북대학교 명예교수와 박병원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이다. 지난해 3월호에서 박 회장은 박 교수가 쓴 를 추천했다. 박 회장은 그전부터 여러 언론을 통해 박 교수의 책을 호평했고, 이를 고맙게 생각한 박 교수가 그를 찾아가면서 인연을 맺게 됐다. 두 사람을 이어준 매개체는 책과 나무다. 이번 호에서 박 교수는 을 추천했다. 과거 박 회장과의 인연이 그랬듯, 책 그리고 궁궐을 매개로 한 새로운 인연을 기대하며 박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역사건축기술연구소의 김동욱 이사와 이경미 소장 등이 합심해서 펴낸 은 평소 궁궐을 자주 찾던 박상진 교수에게 아주 반가운 책이었다. 궁궐이라는 소재와 더불어 책 표지의 ‘동궐도(東闕圖, 조선 후기 도화서 화원들이 그린 창덕궁과 창경궁 그림)’에 그려진 나무들이 눈에 띄었다. “그동안 궁궐에 대한 책이 많이 나왔지만, 궁궐의 건물들에 사람 이야기를 입힌 것이 특별하게 느껴졌어요. 건물은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잖아요. 선정전(宣政殿), 인정전(仁政殿), 낙선재(樂善齋), 성정각(誠正閣) 등 곳곳마다 얽힌 이야기를 소개해 역사와 더불어 선조들의 삶을 엿볼 수 있게 했죠. 문학이나 철학 등의 장르가 아니니 책 제목처럼 우리 궁궐을 이해하고 알고 싶은 분들에게 유용한 책이에요. 하지만 읽다 보면 내용의 깊이나 정보 면에서 결코 가볍게 볼 책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죠.” 책은 건물마다 실물 사진과 함께 동궐도에 그려진 모습을 보여준다. 지도에 나타난 모습이나 위치 등은 현재와 다른 부분도 있지만, 이를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라고 한다. 에도 동궐도가 자주 등장하는데, 현재의 모습을 반영한 지도가 있어 더불어 읽기 좋은 도서라 권할 만하다. “지도와 사진, 이야기를 종합적으로 넣어 품이 많이 들어간 책이에요. 궁궐의 다양한 면모를 알고 가면 더욱 생생한 시선으로 역사를 바라볼 수 있죠. 손주와 함께 간다면 들려줄 이야기가 참 많을 거예요. 궁궐은 역사의 현장입니다. 책이나 교과서로만 알던 역사를 그 현장에서 다시 보면 아이들에게도 기억에 남는 교육이 되겠죠.” 궁궐의 나무는 다 알고 있다 박 교수는 , 등 줄곧 나무와 역사를 함께 이야기해왔다. 나무를 전공한 그가 이토록 역사에 관심이 많은 까닭은 무엇일까? 누구나 역사를 알아야 하겠지만, 나무와 연관 짓는 그에게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예전에는 지금처럼 카페를 가는 일이 드물었죠. 그럴 때 휴식을 겸해서 찾은 곳이 바로 궁궐이었어요. 일이 광화문 근처면 경복궁에 갔고, 종각 쪽이면 창덕궁이나 창경궁에 가서 쉬곤 했죠. 그런데 궁궐에 가보니 오래된 나무가 정말 많은데, 사람들은 별로 관심이 없더라고요. 왕도 떠나고 사람들도 떠났지만 나무는 수백 년 역사를 그 자리에서 지켜봤잖아요. 나무에 입이 있다면 많은 기록을 남겼을 텐데, 그럴 수 없으니 내가 나무를 대변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창경궁(昌慶宮)에는 영조 38년(1762년) 문정전(文政殿) 앞에서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의 비명을 들은 나무가 아직도 살아 있다. 문정전에서 조금 떨어진 선인문(宣人門) 앞 회화나무와 광정문(光政門) 밖의 아름드리 회화나무다. 선인문 앞 회화나무는 줄기가 비틀리고 속이 완전히 비어 있는데, 너무 가슴이 아파 속이 까맣게 썩어버렸다고도 이야기한다. 이 두 나무는 동궐도에서도 찾을 수 있다. 박 교수를 만난 창덕궁(昌德宮)에서 가장 오래된 어른 나무는 바로 선원전(璿源殿) 앞의 향나무(천연기념물 제194호)다. 약 750세가 넘은 것으로 창덕궁의 터줏대감과 같다. 이 향나무는 와 에 모두 소개됐다. 그러니 나무와 역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 말할 수 있겠다. 나이가 들수록 느티나무처럼 창덕궁의 향나무도 역사적 가치가 있지만, 그는 느티나무도 빼놓을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우리 궁궐에서 볼 수 있는 100여 종의 나무 중 박 교수가 가장 좋아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무다. “느티나무는 우리나라 나무 중에 가장 재질이 좋아요. 그래서 조선시대 궁궐의 기둥, 가구, 양반들이 쓰던 탁자 등에 주로 쓰였죠. 쓰임새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의 삶에 보탬이 됐다는 뜻이에요. 느티나무의 용도는 한 가지 더 있어요. 요즘도 시골 마을 입구에 가면 오래된 느티나무가 지키고 있잖아요.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추해지기도 하는데, 나무는 세월이 흐를수록 멋있어지죠. 그 넉넉한 품으로 오랜 세월 백성들의 안식처가 돼 주고, 고달픈 삶을 위로해준 고마운 존재예요. 나도 그런 느티나무처럼 늙어갔으면 좋겠어요. 살아서는 어려운 사람의 마음을 보듬을 수 있고, 죽어서는 여러 쓰임이 되는 존재가 되고 싶어요.” 느티나무뿐만 아니라 모든 나무에는 본받을 점이 한 가지 더 있다고 한다. 바로 ‘주어진 환경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다. 나무는 한 번 뿌리 내리면 생명이 다할 때까지 그 자리에서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봄에는 꽃을 피우고 가을에는 열매 맺기 위해 노력한다. “나무는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포함한 동물들은 자기가 마음에 안 들면 옮겨 다닐 수 있잖아요. 바람에 날아왔든, 동물이 물어다 놨든 열심히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죠. 요즘은 사회에 불평하고 참을성 없는 이들도 많잖아요. 우리도 나무를 본받아 주어진 환경에 최선을 다하려는 자세가 필요해요.” 4월 궁궐 나들이엔 ‘매화’ 겨우내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해 최선을 다한 나무. 봄기운이 충만한 4월이면 궁궐에도 나무마다 꽃망울 터뜨리기에 분주해진다. 궁궐은 어느 계절에나 가도 좋다는 박 교수는 특히 봄에는 매화나무가 으뜸이라고 했다. “4월 10일쯤 되면 궁궐에 있는 모든 나무가 꽃을 피웁니다. 그중에서도 꼭 한번 가서 보시라고 권하고 싶은 건 매화나무예요. 매화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나름의 고고한 자태를 뽐내는 품격 있는 동양의 꽃 중 하나죠. 조선시대에는 난초, 국화, 대나무와 더불어 사군자에 꼽히기도 했고요. 태종이 특별히 좋아하던 꽃인데, 창덕궁 선정전 앞에는 와룡매(臥龍梅)라 불리는 백매와 홍매 두 그루가 임진왜란 전까지 있었다고 해요. 지금은 덕혜옹주가 마지막까지 살았던 낙선재에도 매화나무가 많으니(근래에 심은 것), 아름다운 매화를 볼 겸 궁궐 나들이 떠나보는 것 어떨까요?”
- 2016-04-19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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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인철의 야생화] 폭포수의 벗이자, 춘설(春雪)과도 친구인 특산식물 '모데미풀'
- 봄바람 따라 왁자지껄 피어나던 바람꽃들이 어느 순간 기세가 꺾여 눈에서 사라지기 시작하는 4월의 깊은 계곡, 높은 산기슭에선 꽃 걱정 말라는 듯 순백의 탐스러운 꽃들이 여기저기 자리를 잡고서 방긋방긋 눈인사합니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땅이 풀리고, 산기슭과 계곡에 두껍게 쌓였던 눈이 녹아 폭포수가 되어 흘러내리는 계곡의 푸른 이끼 곳곳에 달덩이처럼 환한 야생화가 꽃잎을 활짝 열어젖히고 봄날의 환희를 노래합니다. “청산리 벽계수(靑山裏 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 일도창해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그렇습니다. 높고 푸른 산속에 눈 녹은 맑은 물이 폭포수가 되어 콸콸 흘러내리고, 그 곁에 한국 특산식물인 모데미풀이 무더기로 피어 ‘산꽃 들꽃’, 우리의 야생화를 찾아 나선 벗들을 등산객들을 반갑게 맞이합니다. 한국 특산식물이란 전 세계에서 우리 땅에서만 피고 자라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식물종의 하나라는 뜻입니다. 1935년 지리산 자락인 운봉의 ‘모뎀골’ 또는 ‘모데미마을’이란 곳에서 일본인 학자 오이 지사부로(大井次三郞)가 처음 발견해 모데미풀이란 이름이 유래했다고 합니다. 학명에 오이(Ohwi)란 일본 성이 들어간 이유입니다. 그런데 모뎀골이나 모데미마을이란 동네 이름이 확인되지 않아 꽃이 피어 있던 ‘무덤’을?일본어로 옮기는 과정에서?‘모데미’라는 엉뚱한 이름이 붙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학명 중 종명 메갈에란티스(Megaleranthis)는 ‘크다’는 뜻의 그리스어 메가스(megas)와 너도바람꽃(Eranthis)의 합성어입니다. 실제로 10~20cm 안팎의 줄기 끝에 흰색의 꽃잎처럼 보이는 꽃받침 잎 5장과 노란 수술을 가진 꽃송이가 하나씩 달리는데, 꽃은 순백의 너도바람꽃을 닮았지만 크기는 2배쯤 됩니다. 첫 발견지인 전북 남원의 ‘운봉금매화’란 별칭으로도 불리는데, 영어 이름은 한국 특산식물답게 한글명인 모데미풀(Modemipul)입니다. 다행인 것은 세계적으로는 한국만의 고유종, 한국의 특산식물이기는 하지만, 아직은 만나기 힘들 정도로 매우 희귀하지는 않다는 사실입니다. 남으로 제주도 한라산부터 북방한계선으로 알려진 강원도 점봉산까지 폭넓게 분포하는데, 대부분 해발 800m가 넘는 습지나 능선 부근에서 자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고산·아고산 지대가 자생지인 특성으로 인해 늦은 봄인 4~5월 개화함에도 불구하고 설중화(雪中花)의 주인공이 되곤 합니다. 산자락 아래에서는 분명 비가 내리지만, 같은 날 같은 산이라도 정상 부근 고지대에서는 눈발이 흩날리기 때문입니다. Where is it? 첫 발견지라는 학술적 기록에도 불구하고 전북 남원 운봉의 지리산 자락에서는 정작 모데미풀을 한 포기도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대신 한라산, 설악산, 태백산, 점봉산, 오대산, 광덕산 등 전국적으로 폭넓게 자생지가 확인되고 있는데, 개체 수가 많기로는 소백산과 덕유산이 꼽힌다. 특히 소백산 정상 부근은 한국 최대(한국에만 있으니 세계 최대라는 말도 된다) 규모의 자생지가 펼쳐지는 곳으로 유명하다. 야생화 사진작가들이 최고로 꼽는 모데미풀 자생지는 강원도 횡성군 둔내면 청태산 자연휴양림. 졸졸졸 흐르는 계곡 물과 무성한 초록색 이끼, 바위 사이사이에 하얗게 핀 모데미풀을 한꺼번에 담을 수 있는 명소다.
- 2016-04-12 08: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