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와 ‘시니어’ 하면 여전히 탑골공원을 떠올리는가? 그러나 이제는 편견을 거둘 때가 됐다. 중장년을 위한 즐길거리, 먹거리, 볼거리가 즐비한 지붕 없는 아지트, 그 다채로운 경험의 시작은 종로3가역 5번출구를 나서면서부터다. 연재 순서 ①송해길 ②락희거리 ③익선동
종로3가역 5번출구#2 락희거리
1. LP 음악과 맥주 한잔 ‘추억 더하기’ 종로17길 52
42년 차 베테랑 DJ 장민욱 씨의 농익은 멘트에 웃음 짓고, 추억 속 LP 음악의 선율에 젖어드는 공간. ‘국내 최초 중장년 맞춤형 맥줏집’이라는 타이틀답게 삼삼오오 맥주잔을 부딪치며 사연과 함께 신청곡을 내민다. 맥주 한 병과 안주가 함께 나오는 ‘1만 원 세트’는 혼술족에게도 인기. 실버영화관이나 낭만극장 영화표를 제시하면 안주를 2000원 할인해준다.
2. 소문난해장국 수표로 131 & 황태해장국 낙원동 233
두 해장국집에서는 뜨끈한 국밥 한 그릇을 단돈 2000원에 맛볼 수 있다. ‘소문난해장국’(간판은 ‘원조소문난집국밥전문’)은 송해 선생이 자주 찾는 곳으로 60년 전통의 역사를 자랑한다. 단일 메뉴인 ‘우거지얼큰탕’은 일명 ‘송해국밥’으로도 불린다고. ‘황태해장국’의 대표 메뉴는 우거지·콩나물해장국(2000원)과 황태해장국(2500원)이다. 락희거리 테마에 맞춰 ‘큰 글자 메뉴판’, ‘지팡이 거치대’ 등이 마련돼 있어 더욱 편안하게 식사를 즐길 수 있다.
3. 그냥 들러봐요 ‘스타이발관’ 종로17길 45
이발 4000원, 염색 5000원이라는 파격적인 가격이 눈에 띈다. 락희거리의 주요 테마인 ‘상냥한 가게’ 콘셉트가 적용된 매장으로 ‘어르신 우선 화장실’이 마련됐다. 안전 손잡이와 지팡이 거치대, 미끄럼 방지 타일이 깔려 낙상 위험이 덜하다. 또 때에 맞춰 약을 복용할 수 있도록 생수를 제공하는 등 배려가 깃든 공간으로, 잠시 화장실에 들르거나 목을 축이고 싶을 때 가면 좋다.
4. 시니어 전용 악기 연습실 ‘촌티서울’ 종로17길 50
코러스 다방으로 탈바꿈 예정(4월 중)인 ‘종로 문화사랑방’ 위층에 자리한 악기 교실. 시니어의 눈높이에 맞춘 프로그램과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되는 악기 교육 과정 등을 개설해 운영하고 있다. 기타, 하모니카, 아코디언, 색소폰, 우쿨렐레 등을 배울 수 있다.
5. 반주(飯酒) 애호가라면 ‘맛집동방홍’ 낙원동 233
사골육수로 맛을 낸 청국장, 순두부, 김치찌개 등을 3000원에 즐길 수 있다. 요즘처럼 날이 좋을 땐 손님들이 식당 바깥 자리에서 반주를 곁들이곤 한다. 식사와 함께 꽁치·고등어(小) 구이(3000원), 부추·김치전(6000원), 제육볶음·마파두부(1만 원 내외) 등 반주용 메뉴를 골라 소주나 막걸리 한 병을 더해도 1만~2만 원대 선이다.
“계상 씨 이것 좀 도와주세요.” 22세 여직원이 건네는 말에 그는 짐짓 놀랄 수밖에 없었다. 두 아들보다도 열 살은 더 어리지 않은가. 평생을 이사, 상무라는 호칭 속에 살던 그에게 이름을 불러주는 동료가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낯선 환경이 그는 괴롭지 않았다. 마치 새 인생을 막 시작하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 같았다. 이케아에서 변화된 삶을 즐기고 있는 이계상(李桂相·63) 씨 이야기다.
이계상 씨가 근무하던 곳은 영등포에서 실크로 유명했던 섬유회사. 지금은 역사 속 이름이 되어버렸지만, 한때는 종사자가 4000명이 넘을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 3만 평 부지가 공장 시설로 차 있었고, 근로자를 위한 사내 학교까지 운영됐었다. 중국이 국제시장에 경쟁자로 등장했을 때 사업다각화를 하지 못한 것이 사양길로 접어드는 계기가 됐고, 1997년 외환위기 때 결정타를 맞았다.
“회사가 쓰러진 후에도 창업주 곁에 남아 재건을 도모했죠. 나중에는 자동차 관련 생산업체가 설립돼 그곳에서 상무이사로 정년을 맞이했어요. 새로 설립한 회사가 정상궤도에 오르고 나서는 사정이 나아졌지만, 섬유회사가 쓰러진 직후의 삶은 여러 가지로 힘들었죠. 회사를 지키지 못한 것이 낙인처럼 느껴져서 떳떳하게 밝히지도 못했으니까요. 외환위기 직후에는 월급이 나오지 않아 아내가 칼국수집을 해야 했어요. 테이블도 몇 개 안 되는 작은 가게였는데, 재건 작업 후 퇴근하면 가게로 출근해 아내를 돕곤 했죠.”
그가 창업주 곁을 떠나지 않고 35년이나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은, 서로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는 1979년 2월 입사해 시작한 회사생활을 2014년 2월에 마감했다. ‘국가부도의 날’도 이후 찾아온 금융위기도 멈추지 못한 직장인으로의 삶이 정리되는 날이었다.
귀농 후 투자한 오미자 농사 실패
사실 그는 퇴직 후에 농부가 될 꿈을 꾸고 있었다. 부모님께 물려받은 충주의 논밭을 다시 가꾸겠다는 다짐이었다. 비어 있는 집도 아직 쓸 만했고, 건강에도 자신이 있었다.
“퇴직 전 농협대학교 주말 귀농·귀촌대학을 이수했어요. 퇴직 후에는 중장비를 동원해 묵은 밭도 갈고, 집도 수리해 본격적인 귀농생활을 시작했죠. 농업기술센터를 들락거리며 다양한 정보도 얻으면서 이대로 고향에 정착할 수 있겠다 싶었죠.”
하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회사생활처럼 우직하게 해나가면 다 순조로울 것이라 믿었는데, 초보 농부에게 세상은 냉혹했다.
“주변에서 오미자 농사를 해보면 어떻겠냐는 추천을 많이 받았어요. 당시엔 효소 열풍이 불어 오미자 수요가 늘고 있었어요. 그래서 시에서 시설지원까지 받아가며 1000평이 넘는 땅에 오미자를 가득 심었죠. 오미자는 심은 지 3년이 되어야 수익성이 좋아지는데, 심자마자 오미자 값이 폭락하기 시작했어요. 효소가 설탕뿐인 허상이라는 이야기가 퍼지기 시작했거든요. 오미자로 손에 쥔 돈은 단돈 300만 원이 전부였고, 두 집 생활비와 교통비를 퇴직금으로 메워야 하는 악순환이 반복됐어요.”
이력서 내도 되나요?
2017년, 고민에 휩싸여 있던 귀농 2년 차에 친구의 조언을 듣고 그는 농사를 포기한다. 본전 생각으로 투자금에 미련을 뒀다가는 손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도 있었다.
이후의 삶은 주변의 중장년 구직자와 다를 바 없었다. 워크넷에 이력서를 등록하고 매일같이 구인구직 사이트를 들락거렸다. 수십 군데에 이력서를 뿌렸다. 하지만 고령자인 그의 손을 잡아주는 곳은 없었다.
“이력서 내도 되나요?” 그가 많은 회사에 건넸던 말이다. 이력서 내는 것쯤은 자유일 텐데도, 단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그는 눈치를 봤다.
“안 된다는 곳이 많았죠. 어떤 곳은 단순 안내직이었는데, 나이가 많으면 고객들이 부담스러워하니 이력서 낼 필요 없다고 했어요. 이해하기가 어려웠죠. 아직까지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나이라 생각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더라고요.”
“이력서 내도 되나요?” 그가 사는 일산 근처에서 열린 취업박람회장. 그곳에서 그는 다시 물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답이 돌아왔다. “그럼요, 이케아 광명점에는 선생님보다 나이가 많은 분도 계십니다.”
처음엔 귀를 의심했다. 그는 또 물었다. “사무직 출신이라 접객 경력이 없는데 괜찮나요?” 돌아오는 대답은 비슷했다. 채용 후 교육을 받으면 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입사지원과 면접을 거쳐 합격 전화를 받게 됐고, 여전히 아내 앞에서 자랑스러운 남편일 수 있어 보람을 느꼈다고 했다.
수평적 기업문화에 감탄
한국의 경제성장 초창기를 장식했던 섬유산업의 전통적인 기업문화 속에서 평생을 일해온 그가, 난생처음 해보는 일을, 그것도 외국계 기업 소속으로 해내는 것이 어렵진 않았을까? 이 씨는 “유니폼이 가장 어색했다”며 웃음을 지어 보인다.
“확실히 한국의 기업문화와는 거의 모든 것이 달랐어요. 전통적인 연공서열 조직문화에서 간부들은 뒷짐지고 도장만 찍잖아요. 하지만 여기는 파트너십으로 연결된 수평적 구조예요. 주변 부서가 손이 모자라면 다 같이 가서 도와요. 직급의 상하 여부 상관없이 말이죠. 가장 상징적인 부분이 호칭이에요. 이곳에서는 직함을 부르지 않고 이름을 불러요. 20대 어린 친구들에게도 저는 ‘계상 씨’예요. 상무님, 이사님으로 불리다가 이름으로 불리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어요.(웃음) 처음엔 어색했지만, 지금은 퇴근 후 젊은 직원들과 맥주 한잔 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지는 계기가 됐다고 생각해요.”
그가 놀란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직원들에게 자기계발을 늘 독려하는 회사를 보면서 감동을 받았다. 특히 사내채용 제도를 적극적으로 운용하는 모습은 한국 기업에서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라고 평가했다.
근무처인 고객지원센터에 장애인 직원이 배치된 것도 그에겐 생경하게 보였다. 처음엔 잘할 수 있을까 내심 걱정했는데, 반복 훈련을 통해 한 사람의 몫을 당당히 해내는 모습에 감탄했다고 했다. 사실 한국 기업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장애인 직원을, 그것도 기업의 이미지를 좌우할 수 있는 고객 대면 부서에 배치할 수 있는 기업은 국내에 많지 않다.
이에 대해 이케아 인사 담당자는 “고객 대면 부서에서도 근무 방식이 다양해 장애인 직원도 충분히 업무를 소화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있다”면서 “이케아에서 ‘다양성과 포용’은 사내 문화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성별, 나이, 배경, 장애 유무 등으로 차별받지 않도록 누구에게나 동등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지금이 너무 행복하며, 동네 지인을 마주쳐도 유니폼 차림의 자신이 부끄럽지 않고, 주어진 기회에 최선을 다할 수 있어 감사하다고 말한다. 새로운 기업문화도 즐거운 경험이다. 과거 노사분규 협상장에서 사측 자리에 앉은 그의 어깨를 눌러대던 부담감도 이제 없다.
“경제적 이득보다는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주는 행복이 커요. 삶의 활력도 얻고 건강관리도 돼요. 체력적으로 괜찮다면 가능한 한 오래 일하고 싶어요. 다른 중장년 구직자들에게도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은 꼭 나타나니까, 과거 경력에 매이지 말고 눈높이를 낮춰서라도 포기하지 말고 계속 일자리를 찾아보길 권하고 싶습니다.”
맥주라곤 하이트, 카스만 알던 시절, 난생처음 맛본 흑맥주의 맛은 충격적이었다. ‘간장 향’, ‘한약 맛’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들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그 강렬했던 맛이 잊히지 않듯 흑맥주의 매력은 입안에서 계속 맴도는 풍미에 있다. 영화 ‘킹스맨’을 본 사람이라면 자신도 모르게 기네스(Guinness)를 손에 들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킹스맨:시크릿 에이전트(Kingsman:The Secret Service), 2015
장르 액션, 스릴러
감독 매튜 본
출연 콜린 퍼스, 태런 에저튼, 사무엘 L. 잭슨 등
‘콜린 퍼스의 수트 포르노’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영화 속 콜린 퍼스는 수트를 입고 우산 하나로 악당을 처치하며 수트의 정석을 보여준다. 이러한 ‘킹스맨’의 독보적인 스타일링은 턴불&아서 셔츠, 드레이크 넥타이, 스웨인 아데니 브릭의 여행 가방, 브레몽 시계, 조지 클레버리 구두 등 전 세계 소수만 사용하는 명품 브랜드의 참여로 완성됐다. 신사의 나라 영국의 영화답게 젠틀맨 스파이 ‘킹스맨’의 작전 기지 또한 영국 새빌로에 있는 맞춤 양복점. 킹스맨 요원이 수제 양복으로 스타일을 자랑했다면 악당은 힙합 요소가 들어간 패션을 선보인다.
‘007’, ‘본’, ‘미션임파서블’ 등 스파이 영화에서 술이 빠지지 않듯 ‘킹스맨’에서도 다양한 술이 등장한다. 특히 해리(콜린 퍼스 역)가 ‘멋진(lovely)’이라고 표현한 아일랜드 대표 맥주 ‘기네스’는 킹스맨 최고의 명대사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manners maketh man)”가 탄생한 장면에서 빼놓을 수 없다. 펍에서 기네스를 마시고 있던 해리는 그에게 싸움을 걸어오는 무리에게 “난 이 멋진 기네스를 마저 마셔야겠다”고 말하며 물러가기를 요청하지만, 오히려 비웃음거리가 되고 만다. 그는 조용히 일어나 자리를 떠나는가 싶더니 가게 문을 모두 걸어 잠그고 이들을 차례차례 때려눕힌다. 이 장면의 화룡점정은 마지막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리로 돌아가 남은 기네스를 마저 비우는 그의 모습이다. 기네스의 풍미와 부드러움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듯한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이 장면은 통쾌함에 갈증이 해소되면서도 해리처럼 당장 기네스를 한잔 비우고 싶은 욕구를 일으킨다. 기네스를 한 번이라도 마셔봤다면 마지막 남은 한 모금을 포기할 수 없었던 해리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맥주계의 젠틀맨, 기네스
하루에 약 1000만 잔 이상 소비되는 기네스는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맥주다. 하지만 청량감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첫맛에 당황할 수 있다. 탄산이 강한 다른 맥주와 달리 기네스는 청량감이 거의 없다. 우리가 기네스 광고를 볼 때 부드러운 느낌을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기네스 특유의 부드러운 풍미와 거품의 비결은 바로 질소를 사용한다는 점에 있다. 1959년 기네스는 맥주 안에 질소를 넣어 이산화탄소가 담긴 다른 맥주보다 섬세하고 부드러운 거품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영화 속 해리가 샴페인, 위스키, 칵테일이 아닌 맥주 기네스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해리 역을 맡은 콜린 퍼스가 아일랜드 출신 배우이기 때문에’, ‘친근한 이미지를 주기 위해’ 등 많은 추측이 있지만 확실한 건 영화가 끝나도 계속 생각나는 콜린 퍼스처럼 기네스도 한 번 맞보면 쉽게 잊을 수 없다. 그만큼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9000년 임대 계약 체결 기네스 창립자 아서 기네스(Arthur Guinness)는 1759년 아일랜드 더블린에 위치한 폐기된 양조장 ‘세인트 제임스 게이트’를 매년 45파운드(약 6만5000원)를 지급하는 조건으로 9000년간 임대하는, 역사상 가장 독특한 계약을 맺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260년이 지났으니 앞으로 8740년이 더 남은 셈. 현재 기네스 양조장이 있는 더블린은 아일랜드 최고 관광 코스 중 하나다.
캔 속 작은 공의 정체 다른 캔맥주와는 달리 기네스 캔맥주에는 특별한 ‘무엇’이 들어 있다. 캔을 흔들었을 때 딸랑딸랑하면서 움직이는 이 물체의 이름은 ‘위젯(widget)’. 1991년 영국 여왕으로부터 ‘기술 진보상’을 수상하기도 한 이 발명품은 기네스 특유의 부드러운 거품층을 생성시킨다. 간단히 설명하면 캔을 땄을 때 압력 차로 인해 플라스틱 공(위젯)에 들어 있던 질소가 빠지면서 맥주와 섞여 부드러운 거품을 일으키는 원리다. 따라서 기네스 캔에 든 물체는 이물질이 아니니 안심하고 먹어도 된다.
기네스와 기네스북의 관계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기네스북’은 기네스와 관련이 있다. 기네스 양조회사의 상무이사였던 휴 비버(Hugh Beaver)는 어느 날 어떤 새가 가장 빠른가에 대해 사람들과 논쟁을 했고, 그 사건을 계기로 세계 최고 기록들을 모은 책을 구상하게 됐다. 그 후 약 1년간의 조사 끝에 1955년 기네스의 이름을 딴 ‘기네스 북 오브 레코드(The Guinness Book of Records)’ 초판본이 출간됐고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2000년부터 ‘기네스 월드 레코드(Guinness World Records )’라는 제명으로 바뀌었고, 2001년 기네스는 기네스북 판권을 다른 회사에 넘겼다.
아일랜드보다 더 아일랜드다운 기네스 기네스 엠블럼으로 사용되고 있는 하프 문양은 1862년부터 현재까지 총 여섯 번의 수정을 거쳐 완성됐다. 흥미로운 점은 1922년 아일랜드 정부가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악기인 하프를 엠블럼으로 사용하려고 신청했지만 거절됐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1876년 기네스 사가 먼저 하프를 트레이드마크로 등록을 했기 때문. 결국 기네스보다 한발 늦은 아일랜드 정부는 하프를 엠블럼으로 사용하기 위해 기네스 엠블럼과는 다른, 좌우 위치가 바뀐 하프 문양을 쓸 수밖에 없었다.
보들레르는 “여행이란 어른들에게는 인생이라는 악랄한 강대국과 맺은 휴전, 전반적인 긴장과 투쟁 중에 취하는 잠시 동안의 휴식이다”라고 했다. 찌는 듯한 여름엔 시원한 곳이 그립더니 마음까지 움츠러들게 하는 겨울이 되니 따스함이 마냥 그립다. 베트남이야말로 한겨울 따스한 꿈을 꾸기에 더없이 알맞은 곳이다.
여행에서의 하루는 1년 치 행복이다
한국에서 4시간 반을 날아 다낭 국제공항에 내리면 하노이나 호치민과는 또 다른 베트남을 만나게 된다. 산과 바다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다낭은 휴양지로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태국의 파타야나 필리핀의 세부처럼 리조트형 휴양지에선 느낄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화려함보다는 소박함, 떠들썩함보다는 호젓한 느낌이 바로 그것이다. 한쪽으로 비켜나 조용한 안식을 주는 곳. 그곳은 바로 다낭과 호이안 그리고 후에다. 파도가 낮은 포복으로 밀려오는 미케비치의 아침은 더없이 상쾌하다. 모래사장엔 대나무로 만든 광주리 모양의 전통 고기잡이배 ‘틴퉁’이 무심하게 던져져 있다. 베트남 국적기를 배에 단 어부는 부지런히 그물을 걷어 올리고 있다. 사회주의 체제의 베트남이지만 호젓한 새벽의 바닷가를 겁낼 필요가 전혀 없어 보인다. 사회주의 국가로 여행 간다고 하면 사람들은 으레 ‘안전’에 대한 질문을 한다. 그러나 경험에 의하면 사회주의권 나라가 훨씬 더 안전하다. 이런 나라에선 범죄를, 특히 자국을 방문한 외국 여행자에게 범죄를 저지르면 중형의 벌을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여행자들의 모습은 평화롭고 여유롭다. 여행자의 신분을 잊고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곳이 바로 다낭이다. 다낭이 주는 특별한 선물이다.
베트남 중부의 최대 상업도시이자 베트남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 다낭은 베트남전쟁 때 미군의 최대 기지로 사용될 정도로 역사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러다가 미군이 물러나자 아이러니하게도 침체기를 맞게 된다. 다낭은 역사와 문화, 자연이 어우러진 천혜의 환경으로 요즘 새롭게 부각되는 곳이다. 주변에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될 만큼 매력적인 호이안과 후에도 있다.
동서양이 혼합된 낭만적인 밤 풍경 ‘호이안’
여행을 자주 해서 좋은 점은 무작정 많이 보려고 허덕이지 않게 된다는 것이고, 안 좋은 점은 어딜 가든 닮은 곳을 찾아내고 비교하게 된다는 것이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의 건축물들과 중국식 유적이 어우러져 낭만적인 풍경을 선사하는 호이안은 남인도 항구도시 코친과 중국의 리장을 합쳐놓은 듯한 인상이다. 전통을 훼손하지 않고 개성 있게 변화한 골목들, 그 속에서 살아가는 서민들을 마주하고 있으면 호이안이야말로 가장 베트남다운 곳이란 느낌이 든다.
작고 아름다운 투본 강을 낀 채 마치 중세시대에서 시간이 멈춘 듯한 호이안은 타임머신을 타고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오랜 역사가 스며 있는 장소들과 과거 번화했던 국제 무역항의 모습이 애수를 자아낸다. 내원교, 전가사당, 풍흥고가, 광조회관처럼 천 년에 걸쳐 중국과 일본의 지배가 남긴 흔적들이 절묘하게 섞여 있다. 에도 막부가 수교 거부 정책을 펼치자 호이안에 살던 일본 상인들은 하나둘 떠나가 버렸고 그 자리를 중국인이 차지했기 때문이다.
호이안에 밤이 오면 상점들은 하나둘 화려한 연등을 켠다. 동서양이 혼합된 이국적인 풍경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할 만큼 낭만적이다. 베트남의 명물인 시클로를 타고 골목 탐험에 나서도 좋다. 정신없이 돌아다니다 보면 시장기가 든다. 북부에선 국물이 있는 쌀국수가 대세이지만 중부에선 볶음쌀국수 카오라우가 대세다. 쌀국수가 질리면 프랑스 식민지 시절부터 내려온 바게트샌드위치(반미, 막대기 모양의 베트남식 바게트)를 먹거나 분위기 있는 노천 레스토랑에서 현지 맥주에 시푸드도 괜찮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구시가지를 관통하는 운하에서 연등을 팔고 있는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연등을 하나 사서 강물에 띄우며 소원을 빌어본다. 원뿔 모양의 전통 모자 ‘논(non)’을 쓰고 연등을 파는 꼬마들의 순박함과 노를 젓는 노파의 온화한 미소가 기도를 더욱 순수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안 가면 후회할 ‘후에’
다낭에서 후에로 가는 길. 이탈리아 남부 소렌토가 연상되는 멋진 해안도로를 끼고 달린다. 세계 10대 비경 중 하나라는 하이반 고개에는 외국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려고 만들었다는 요새들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망루에 올라 저 멀리 펼쳐진 바다를 감상한다. 점심은 유럽풍의 아기자기한 마을 랑코비치에서 먹는다. 다낭에서 두 시간 거리인 후에는 드라이브의 즐거움도 주지만 다낭과 호이안만으로는 충족되지 않은 역사적 자취를 살펴볼 수 있게 해줘서 좋다. 후에는 옛 참파 왕국의 수도답게 독특하고 고풍스런 유적이 많다. 마지막 날엔 흐엉 강을 따라 산책도 하고 배를 타고 사색에도 잠겨본다. 바람도 상쾌하고, 강물도 더없이 잔잔해 다음 날을 계획하기에 이보다 소중한 시간은 없을 것 같다. 배는 충분해서 가격 흥정도 해볼 수 있는 분위기다. 보통 한 시간에 5달러(베트남 돈으로 10만 동=5000원), 두 시간에 10달러면 작은 배 한 채를 단독으로 빌릴 수 있다. 이보다 더한 호사가 없다. 그렇게 배를 빌려 타고 배 안에서 두 시간 정도 깊고 고요한 강물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기울여본다.
사람들이 고요함을 못 참는 이유는 뭘까. 밖이 조용하면 상대적으로 시끄러워지는 내면의 소리들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일까. 익숙하지 않지만 참고 있어보면 고요는 나와 세상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행지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으로 돌아간 후에도 하루 한두 시간 정도 고요히 나를 지켜보는 시간을 갖는다면 내면의 아름다움을 더 잘 찾아낼 것 같은 생각이 든다.
travel tip
★찾아가기 인천- 다낭간 직항(대한항공, 베트남항공)이 있으며 4-5시간 소요된다. 다낭공항에서 시내까지는 차로 30분, 다낭에서 호이안까지 차로 30분 소요. 다낭에서 후에까지는 차로 두시간정도 소요되며, 기차도 매일 4편 운행된다.
★기본여행정보 아열대성기후이며, 여행 적기는 건기인 12월부터 5월이다. 5월부터 10월까지는 우기로 많은 비가 내린다. 특히 10월은 태풍이 지나가는 시기이므로 피하는 것이 좋다. 90일간 무비자며, 화폐단위는 동(VND)으로 1달러는 2만동이다. 언어는 베트남어와 부분적으로 영어가 통용된다.
★추천 숙소 풀만 다낭 비치 리조트 Pullman Danang Beach Resort
호이안 구시가지까지 무료셔틀 운행. 공항 서비스. Vo Nguyen Giap street, Khue My Ward Ngu Hanh Son District, 55000 Danang, tel. +84 511 3958 888 info@pullman-danang.com
1월 초 히말라야 트레킹을 할 때 가장 걱정했던 일은 고산병이었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는 4130m. 내 생애 가장 높은 곳에 도전하는 등산이라서 고산병에 대해 미리 알아봤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전문 산악인과 젊은 의사가 고산병으로 죽었다는 얘기가 있었다. 히말라야에 간다고 하니 주변 사람들이 모두 말렸다. 고산병으로 위험할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가지 않겠다고 통보를 했는데 더 늦으면 정말 못 갈 것 같아 결국에는 다시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트레킹을 하고 저녁에 롯지에 도착하면 할 일이 없었다. 저녁식사 후 8시에 취침을 해서 다음 날 오전 6시에 기상했다. 무려 10시간이나 잤다. 한국에서는 평소 6시간 정도 자는데 그 시간에 비하면 긴 잠이다. 그러나 트레킹이 워낙 힘들다 보니 잠자리에 들면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첫날 밤에는 돌아가신 아버지와 큰형님 꿈을 꿨다. 죽은 큰동서도 꿈에 나타났다. 세 사람 모두 저 세상으로 간 사람들이라서 기분이 찝찝했다. 죽을 때가 되면 저승으로 먼저 간 사람들이 부른다는 얘기가 생각 나 잠을 떨쳐내고 일어나 앉기도 했다. 최종 목적지인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가 가까워오자 기대감과 두려움이 앞섰다. 처음 가는 곳이라 설렘도 있었지만 고산병 걱정도 돼서 신경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현지 가이드는 고산병에 걸릴지는 미리 알 수 없고 끝까지 올라가봐야 알 수 있다고 했다. 다만 고산병 예방을 위해 샤워는 물론 머리도 감지 말라고 조언했다. 잘 때도 털모자를 쓰고 머리를 따뜻하게 하라고 했다. 트레킹할 때마다 땀을 비 오듯 흘렸지만 일주일 동안 씻지 못했다. 몸이 근질거리고 답답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물티슈로 간편 세수를 하고 면도는 아예 포기하니 편하기도 했다. 물을 많이 마시라고 해서 하루에 2ℓ짜리 병에 든 물을 다 마셨다. 막걸리나 맥주를 마시면 간단히 해결될 일을 다음 날 행보를 위해 그럴 수 없으니 아쉬웠다.
최종 목적지인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찍고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에서 자던 날이 최악이었다. 사람들 얼굴이 풍선처럼 부었고 가져간 커피믹스 봉지도 부풀었다. 저기압 탓이었다. 머리가 아프다는 사람, 어지럽다는 사람, 입맛이 없다는 사람, 똑바로 걷지 못하겠다는 사람, 소화가 안 된다며 체면 불구하고 방귀를 뀌는 사람 등 다양한 증세를 보였다.
그러나 나는 이상하게도 아무런 증상이 없었다. 고산병은 보통 해발 2400m 이상의 높이에서 발생한다는데 트레킹 3일 차에 3000m급 푼힐 전망대에 올랐을 때도 괜찮았다. 높은 곳에서는 산소가 부족해 호흡수가 늘어나고 혈액의 점성도 떨어져 혈액이 산소를 신체 곳곳에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그래서 남성 발기 부전 치료약을 먹는 사람도 있었다. 나이가 들면 뇌와 뇌를 둘러싼 뼈 사이에 공간이 생긴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였을까. 나이 때문에 제일 걱정했던 최고령자가 가장 팔팔했다.
이혼하게 되면 그동안 부부동반으로 만났던 부인들은 물론 남자들과의 사이도 멀어진다. 지방에 따라, 집안 분위기에 따라 다르지만, 아예 친분을 끊는 경우도 있다. 처음에는 이해를 못 했다. 원망도 했다. 그런데 이제 나이 들어 친구들 얘기를 들어 보니 이해가 될 만했다. 필자는 위험인물이라는 것이다. 착한 자기네 남편이 혹시 물들까 봐 걱정한다고 했다. 이혼해서 더 재미있게 사는 모습을 보니 더욱더 그렇단다.
치킨집을 운영하던 친구가 있었다. 온종일 부인은 주방에서 닭을 튀기고 남자는 배달 나가기 바빴다. 자리를 비울 수 없으니 그 친구를 만나려면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 친구가 일하는 중에 카운터 앞 테이블에 앉아 매상도 올려주고 얘기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친구가 바쁘니 생맥주는 아예 필자가 직접 따라 마셨다. 그래서 근처에서 사람을 만날 일이 있으면 약속 장소를 그 치킨집으로 잡았다. 그중에 여자들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 소문이 다른 친구들에게도 전해지고 부인들은 필자가 여자들을 데리고 왔다는 얘기만 들리는 모양이었다. 대학원 동창생 모임은 부부동반 모임이다. 필자가 이혼 후 혼자 나가자 누구라도 좋으니 데려오라고 했다. 어차피 두 사람분의 회비를 내고 대부분 먹는데 들어가기 때문에 두 사람이 와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다른 공무상 일이 있더라도 사람을 데려갔었다. 남자도 있었고 여자도 있었다. 그런데 매번 새로운 사람이 오니 남자들은 좋아하는데 여자들 눈빛이 안 좋았다. 재혼할 여자가 아니리면 데려오지 말라고 했다. 자기 남편들 눈빛이 아내 아닌 다른 여자에게 쏠리는 것이 보기 싫었다는 것이다. 필자가 댄스를 하는 것도 친구 부인들은 못마땅해 했다. 필자의 댄스 파트너들이 날씬하고 춤까지 잘 추니 자기 남편들이 부러워하는 모습이 보기 싫었다. 댄스가 재미있고 운동으로도 좋으니 부부가 함께 배워보라고 권유하면 댄스 배우러 가는 순간 이혼이라며 극구 반대했다. 여자들이 들끓는 세상에 자기 남편이 바람이 날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남편은 안 그런데 여자들이 유혹할지도 모른다고 지레 겁을 먹었다. 친구 부인들의 생각은 자기네 남편들은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리면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른 여자들은 곧 자기 남편과 바람이 날 수 있다고 비약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남자들은 대문을 벗어나면 통제 불능이다. 부인들이 못 보기 때문에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모른다. 통계가 기혼 남녀의 바람피우는 비율을 발표한 적이 있다. 자기 남편은 거기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지금 나이라면 그렇다. 늙은 남자에게는 여자도 안 붙지만, 남자도 그럴 생각도 없다. 이미 리비도가 떨어져서 의욕도 없다. 혼자 사는 사람들을 보는 시각도 곱지 못하다. 특히 여자가 혼자 산다고 하면 더 위험인물로 본다. 극도의 경계심을 보이며 자기 남편들과 말도 못 섞게 한다. 그래서 혼자 사는 여자들은 철저히 싱글이라는 사실을 비밀에 부친다. 현재 우리나라는 세 집 건너 한 집은 혼자 사는 사람들이다. 이혼, 사별, 미혼, 졸혼 등 사유는 갖가지이다. 비혼을 선언한 싱글 남녀도 많다. 필자가 싱글이라고 위험인물로 보는 부인들은 그들의 자녀들도 혼기가 지난 싱글이 많은데 그쪽은 못 보고 있는 듯하다.
예술가들이 사랑하는 아지트 뮌헨 슈바빙 거리. 불꽃처럼 살다 떠난 여류작가 故전혜린의 발걸음이 닿았던 그 길목에 들어서면 마냥 길을 잃고만 싶어진다. 그가 생전 즐겨 찾던 잉글리시 가든 잔디밭에 누워 우수수 낙엽 비를 맞으며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의 문장들을 떠올려본다.
백조의 천국, 님펜부르크 궁전
강렬한 기억은 잊히지 않는다. 체코와 독일의 경계인 ‘젤레즈나 루다’에서 기차를 타고 뮌헨 중앙역에 도착했을 때 옛 기억이 스멀스멀 떠오른다. 몇 해 전, 스위스 취리히에서 출발해 야심한 시간 뮌헨에 도착했을 때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날, 예약해놓은 숙소에서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입소를 거절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그 기억은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뮌헨에서 가장 먼저 님펜부르크 궁전부터 찾아 나선다. 당시에도 궁전 근처까지 갔지만 새 숙소를 찾느라 여념이 없었고 시간도 여의치 않아 간과하고 말았다. 1664년, 바이에른의 선제후 페르디난트 마리아(1636~1679)가 아들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의 탄생 기념으로 지은 곳으로 뮌헨 시내에 있는 레지덴츠의 별궁이다. 넓은 호수 그 앞으로 길게 펼쳐져 있는 궁전 건물이 아름답다. 이 궁전에 바이에른 왕국의 국왕이었던 루트비히 1세(1786~1868)가 만든 ‘미녀들의 갤러리’가 있는데 당대에 엄청난 스캔들을 일으켰던, 그의 정부 롤라 몬테즈의 초상화가 눈길을 잡아끈다. 그것 말고도 역사적인 마차들을 전시하고 있는 왕궁 마구간 등 볼거리가 넘치고 기념품 숍의 물건들은 고급스럽고 아름다워 현혹적이다.
전혜린과 뮌헨 슈바빙 지구
님펜부르크 궁전을 빠져나와 뮌헨 슈바빙으로 가는 버스에 오른다. 슈바빙 거리는 뮌헨의 예술과 낭만을 사랑하는 예술가들의 아지트로 알려져 있다. 한국인들이 슈바빙을 찾는 이유는 전혜린(1934~1965) 작가 때문이다. 필자의 목적 또한 같다. 카페 제로제(Seerose)는 전혜린 작가와 당시의 문인들이 즐겨 찾은 곳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슈바빙 거리는 넓어서 갈 방향을 잃고 만다. 애써 길을 헤집으면서 찾고 싶지는 않다. 그냥 분위기만 느끼고 싶을 뿐. 생각을 바꿔 ‘잉글리시 가든’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 전혜린 작가가 슈바빙에서 4년간 살면서 자주 찾았던 곳이다.
정원으로 가는 길목에서 만난 앤티크한 카페. 문 앞에는 토마스 만(1875∼1955)이 머물렀음을 설명하는 작은 팻말이 서 있다. 그의 작품 중 노벨상을 받게 하고 영화로도 제작된 ‘베니스의 죽음’을 떠올리면서 조금 걸었더니 어느새 잉글리시 가든이다. 이자르 강을 따라 펼쳐진 광활한 영국식 정원은 생각보다 크고 아름답다. 숲길도 있다. 산책을 즐기고 잔디에 누워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호수에서 배를 타는 사람들, 빵조각을 들고 와 백조와 오리에게 먹이를 주는 사람들. 호수 안쪽으로 보이는 중국탑(Chinsesischer Turm)과 사이프러스 나무 사이로 석조물이 서 있는 모습이 참 조화롭다.
벤치가 아닌 잔디밭 안쪽으로 들어가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을 맞으며 잔디 위에 누워본다. 전혜린 작가 사후(死後)에 출간된 수필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떠올린다. 책 내용은 거의 다 잊어버렸지만 젊은 시절의 추억은 새록새록 떠오른다.
카를 성문과 노이하우저 거리
맑고 눈부신 가을 하늘을 머리 위에 올리고 메인 광장으로 향한다. 중앙역 주변의 멋진 건축물은 바이에른 주의 지방법원. 차도를 건너면 카를 광장. 분수대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광장 바로 앞에는 카를 성문. 현재 올드 타운에 남은 성문 3개(카를, 젠들링어, 이자르) 중 서쪽 문이다. 카를 성문을 통과하면 노이하우저 거리가 일직선으로 이어진다. 카를 성문에서 마리엔 광장까지 이어지는 인도 전용 도로. 엄청난 인파로 거리가 파도처럼 일렁댄다. 도로 양쪽으로는 다양한 상업 시설과 교회, 미술관 등이 이어진다. 독특한 분수대도 많아 눈길을 끈다. 예쁜 성 미카엘 교회를 지나면 사냥과 낚시 박물관이다. 거대한 건물 발코니가 온통 붉은 꽃으로 장식되어 있고 물고기 모양의 독특한 분수 앞을 지나면 저절로 발걸음이 멈춰진다. 13세기부터 1803년까지는 아우구스티노 교회 일부였다. 1900년경부터는 사냥 인기가 높아지면서 1934년 독일박물관으로 설립됐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수난을 당하다가 1966년 재개관했다. 이 박물관에는 약 500종의 전시품이 있는데 15~19세기 물건들도 보인다.
빅투알리엔 마켓 거리와 맥주
구시청사의 문을 통과하면 남쪽으로 오래된 성 페터스 교회와 성령교회가 있다. 성령교회를 지나면 빅투알리엔 거리다. 시장 거리여서 그런지 서민의 향기가 배어 있다. 이 거리는 1807년, 막시밀리안 1세 때 만들어져 1823부터1829년까지 크게 확대되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때 많이 망가졌다. 주변으로는 천막을 친 정육점, 식당 , 빵집, 과일 판매점 등이 있다. 가장 두드러진 모습은 마켓 공원 내에 무작위로 앉을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다. 무수한 사람들이 앉아 맥주를 마신다. 뮌헨 하면 ‘맥주’. 국내 호프집에 가면 꼭 걸려 있는 뮌헨의 유명한 맥주 축제 옥토버페스트(Oktoberfest) 사진의 현장이다. 옥토버페스트는 1810년 10월 12일, 바이에른 왕국의 황태자 루트비히 1세와 작센 가의 테레제 공주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20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매년 9월 15일 이후에 돌아오는 토요일부터 10월 첫째 일요일까지 16~18일간 축제를 연다. 이곳에서 맥주 마시기는 당연한 일. 맥주 고장에서 마시는 맥주 맛은 훌륭하다. 술안주도 입맛에 딱 맞아떨어진다. 맛있는 맥주와 맛있는 안주가 어우러지니 술술 목 넘김이 좋다.
Travel Data
가는 길 한국에서 루프트한자를 이용하면 추가 비용 없이 프랑크푸르트에서 환승해서 뮌헨으로 이동이 가능하다. 현지 시외교통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ICE 기차를 타고 바로 뮌헨으로 이동할 수 있다. 소요시간은 약 3시간 30분 정도.
현지 교통 바이에른 티켓을 구입하면 바이에른 주(뮌헨, 퓌센, 뉘른부르크, 밤부르크, 로템부르크) 일대의 대중교통을 모두 이용할 수 있다. 인원이 많을수록 더 할인된다.
화폐정보 유로
시차 한국보다 8시간 느림
맥주 정보 옥토버페스트에는 뮌헨 시가 선정한 6대 맥주 회사만 대형 천막을 설치하고 맥주를 판매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너(1328년), 하커 프쇼르(1417년), 호프 브로이 하우스(1589년), 기사단 수도원 맥주인 파울라너(1634년)의 살바토르가 대표적이다.
음식 정보 구운 닭고기 구운 소시지 등이 술안주로 인기다.
숙박 정보 호텔, 호스텔을 비롯해 한인 민박도 있다. 호스텔은 대부분 조식과 무료 맥주를 서비스한다.
날씨 정보 독일의 겨울 날씨는 우리나라의 초봄 날씨와 비슷하다. 온도는 0~4℃ 정도.
유의사항 시내버스를 탈 때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 사복 검표원들이 급작스럽게 티켓을 확인한다. 티켓이 없으면 70~80유로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
유행이 돌고 돌아 올가을에 호피무늬가 대유행이라고 한다.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치타 여사(라미란 역)가 즐겨 입던 호피무늬 옷을 거리에서 종종 보게 될 줄이야. 몇 해 전부터 불기 시작한 복고 열풍은 스치는 바람이 아니라 문화로 자리 잡아가는 것 같다. 학자들은 이 현상을 ‘삶이 고달파서’라고 해석한다. 사람들이 옛것을 통해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위안을 얻는다는 것이다. 세월은 고생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미화시키는 힘이 있으니. 세월을 비껴간 곳을 찾아 추억 여행을 떠나보자.
빈티지의 끝판왕, 을지로 인쇄소 골목
한국전쟁 이후 도시 재건에 필요한 모든 업종이 서울 을지로3가와 4가 일대에 자리 잡았다. 공구 골목, 도기·타일 골목, 재봉틀 골목, 조명 골목, 인쇄 골목 등이 거미줄 치듯 모여 거대한 산업단지를 이뤘다. 주변으로 고층 빌딩이 우후죽순 들어서도 을지로는 여전히 예전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일과를 마친 노동자들이 ‘동원집’의 감잣국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1000원짜리 노가리 안주에 시원한 생맥주를 마시며 회포를 풀던 노가리 골목도 여전하다. 노가리 골목은 오히려 지금이 더 전성기인 것 같다.
후미진 인쇄소 골목에는 임대료가 저렴한 건물을 찾아 들어온 예술가와 젊은 창업자들이 정착하고 있다. 카페, 술집, 음식점도 많이 생겼다. 대부분 을지로 특유의 허름한 분위기를 부각해 건물을 꾸몄다. 카페 ‘커피한약방’과 양과자점 ‘혜민당’이 대표적이다. 이곳은 개화기 때 차림으로 입장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다. 촌스러운 색유리 창문, 100년 된 자개장, 페인트칠이 벗겨진 나무 문, 전깃줄이 뒤엉켜 있는 골목 풍경이 내다보이는 2층 테라스마저 멋스럽게 보이니, 내 눈이 ‘복고깍지’를 쓴 것이 틀림없다.
Tip
을지로 일대에 오구반점, 을지면옥, 통일집, 안성집, 양미옥, 을지다방 등 개점한 지 최소 30년 이상 된 노포들이 즐비하다. 노포 순례를 하며 추억을 곱씹어보는 것도 좋겠다.
세월의 사각지대 익선동 한옥마을
북촌과 서촌에 이어 익선동 한옥마을도 인기를 끌고 있다. 익선동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 조성된 이후 재개발이 이뤄지지 않아 한옥이 잘 보존돼왔다. 전철 1·3·5호선이 교차하는 종로3가역과 인사동, 운현궁, 창덕궁, 종묘 등 서울 명소가 코 닿을 거리에 있는데도 이 동네 시간만 1970~80년대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 미로처럼 좁고 복잡한 골목 안에 오래된 식당과 한복집, 점집, 가정집 등 한옥 100여 채가 고요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요즘 익선동에 가보면, 상전벽해를 실감한다. 주택이 대부분 트렌디한 상가로 바뀌었다. 다행히 한옥 형태를 유지하고 내부만 개조해 익선동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한옥인 ‘열두달’, ‘이태리총각’, ‘익선디미방’ 등에서 파스타와 스테이크를 먹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가장 인기 있는 곳은 수플레팬케이크를 파는 복고풍 카페 ‘동백양과자점’이다. 평일에도 가게 앞으로 늘어선 줄이 엄청나다. 신생 가게들이 속속 들어서는 중에도 익선동에서 가장 처음 문을 연 전통찻집 ‘뜰안’, 익선동이 인기를 끄는 데 일조한 빈티지 카페 ‘식물’, 착한 맛집 ‘익선동121’, 담장 허문 가맥(가게 맥주)집 ‘거북이슈퍼’ 등이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Tip
익선동에서는 흥선대원군이 살았던 운현궁이 가깝다. 운현궁을 둘러보고, 고즈넉한 서순라길(종묘의 서쪽 담장길)을 산책한 뒤 종묘까지 둘러보면 알찬 도보 코스가 완성된다.
서울의 사교육 일번지였던 돈의문박물관마을
돈의문(서대문) 터 근처에 있던 새문안 동네는 몇 해 전 돈의문 뉴타운을 조성할 때 근린공원이 될 뻔한 동네였다. 서울시에서 헐지 않고, 도시 재생해 동네를 통째로 박물관으로 조성했다. 조선시대 한옥, 1930년대 일본식 주택, 1960년대 도시 한옥, 1970~80년대 슬래브집 등 각 시대상을 반영한 건축물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보존 가치가 있었던 것. 동네 역사도 흥미롭다. 1960년대에는 명문 중고등학교에 가기 위해 집마다 과외방이 있었다. 1980년 과외 금지법이 시행된 뒤로는 동네의 90%가 식당으로 바뀌기도 했는데 당시 ‘문화칼국수’, ‘풍미추어탕’집이 유명했다.
돈의문박물관마을에는 당시의 가옥 구조를 복원한 집 40채가 있으며 전시관, 연구실, 공예작가의 작업실 및 체험 공방으로 활용 중이다. 방문객은 그림 그리기, 와인 강좌, 쿠킹 클래스 등 40여 가지 프로그램을 선택해 체험해볼 수 있다. 이 중 마을 투어 프로그램을 강력 추천하고 싶다. 도슨트와 마을 골목길을 함께 돌면서 우리나라 근현대사와 건축 양식의 변화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하루 두 차례, 무료로 30분 동안 진행되며, 신청은 돈의문박물관마을 홈페이지(www.dmvillage.info)에서 하면 된다.
Tip
돈의문박물관마을 맞은편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였던 경교장이 있다. 서울 성곽 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홍난파 가옥, 권율 장군이 심었다는 은행나무와 3·1운동을 세계에 처음으로 알린 미국 특파원 앨버트 테일러가 살았던 딜쿠샤를 만날 수 있다.
‘그땐 그랬지’ 국립민속박물관 추억의 거리
국립민속박물관 야외에 ‘추억의 거리’가 조성돼 있다. 1960~70년대 거리 풍경을 실감나게 재현해놓았다. 마치 촬영장 같은 분위기다. 창신사장(사진관), 근대화연쇄점, 장미의상실, 고향식당, 약속다방, 화개이발관, 고바우만화방, 인쇄소, 좋은소리사(레코드점) 등을 실물 크기로 짓고, 소품을 구색 맞춰 비치했다. 구멍가게 안에 진열된 과자, 음료수, 과일, 달걀, 아이스크림을 보며 아련한 기억을 떠올린다. 그 시절의 아이들은 부모님이 구멍가게를 하는 친구를 가장 부러워했다. 화개이발관에는 종로구 소격동에서 2007년까지 약 50년 동안 영업한 이발관의 자료가 전시돼 있다.
창신사장, 약속다방, 북촌국민학교는 내부 입장이 가능한 체험 공간으로 꾸몄다. 창신사장에서는 옛날 교복을 빌려 입고 옛날 사진관에서 사진 찍듯 기념 촬영을 할 수 있다. 추억의 거리가 기성세대에게는 추억을 소환하는 공간으로, 젊은 세대에게는 이색 체험 공간으로, 재미를 선사한다.
Tip
국립민속박물관과 경복궁은 연결돼 있다. 단풍 고운 날, 고궁 산책과 더불어 추억의 거리를 거닐어보자.
생물학적 수명과 함께 사회활동 기간이 길어지면서 액티브 시니어에게 또하나의 고민이 생겼다. 바로 외모다. 모임이나 대인관계가 계속 유지되다 보니 여성 못지않게 외모에 대한 욕구가 높아진 것. 그러나 중장년 남성의 경우 성형이나 미용시술에 대한 거부감이 있어 자연스레 그 관심이 ‘다이어트’로 쏠리고 있다. “뱃살만 빼도 더 젊어 보일 텐데”라고 입을 모으는 이들이 늘고 있는 것. 하지만 전문의들은 “쉽지 않다”고 말한다. 무엇이 이들의 뱃살이 사라지지 않도록 붙잡고 있는 것일까. 비만치료에만 집중하는 365mc의 노원점 채규희(蔡圭希·42) 원장을 통해 그 이유를 들어봤다.
“나이 들면 살이 잘 안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어요.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뭔가 손쉬운 해결책이 있을 것을 기대했는데, 각오하라는 경고로 시작된다. 다이어트는 역시 쉽게 볼 일이 아닌 모양이다.
“나이가 들수록 뇌하수체에서 분비되는 성장호르몬이 줄면서 체내 근육량이 감소해요. 또 젊을 때보다 활동량이 줄면서 근육량 유지도 어렵게 되고요. 근육이 줄어드면 기초대사량이 줄어 섭취한 음식이 가진 열량을 모두 소비하지 못하고 지방의 형태로 체내에 저장하게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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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살을 빼고 날씬한 몸매를 가질 수 있을까? 역시 기대했던 마법은 없다. 채 원장은 “음식을 조절하고 운동을 하는 것이 기본”이라고 말한다. 당연한 이야기다.
“음식으로 발생한 에너지가 소모되는 것은 기초대사량이 70% 정도를 차지하고, 10%는 음식을 섭취하는 과정에서 소모됩니다. 운동이 차지하는 비중은 20%밖에 안 돼요. 기본적으로 발생하는 에너지를 줄이는 것이 중요한데, 결국 음식을 적게 먹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인 셈이죠.”
의사들이 비만도를 측정하는 방법은 이렇다. 비만도의 지표인 체질량 지수는 BMI(Body Mass Index) 지수라고도 부르는데, 체중(kg)을 키(cm가 아닌 m를 기준)의 제곱으로 나눈 숫자다. 만약 키가 170cm이면서 몸무게가 70kg인 사람이 있다면 체질량 지수는 70/1.72, 즉 24.2가 된다. 채 원장은 이 지수가 치료 계획을 세울 때 기준이 된다고 이야기한다.
“체질량 지수가 30을 넘으면 비만으로 보고 약 처방을 합니다. 만약 고혈압이나 당뇨병 같은 성인병이 있다면 27 이상일 때 처방을 시작하고요. 물론 혈압이나 당뇨 수치가 약으로 조절이 안 된 상태라면 그것을 먼저 안정화시킨 다음에 체중을 줄일 수 있는 계획을 세워요.”
“또 약을 먹으라고?” 처방 제안을 받으면 아마 많은 중장년들이 가장 먼저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흔히 4종 세트라고 말하는 혈압약과 당뇨약, 고지혈약, 통풍약까지 챙겨 먹어야 하는 시니어가 적지 않다. 여기에 약 하나를 더하라니. 하지만 채 원장은 성인병 치료를 위해서도 체중조절은 중요하다고 말했다.
“혈압이나 혈당 조절을 할 때 체중 감량이 중요합니다. 저희가 적극적으로 치료를 권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고요. 요즘 나오는 약들은 장기간 복용했을 때 문제가 생겼던 약과는 다릅니다. 임상실험을 통해 장기간 복용해도 문제가 없음이 증명됐어요. 그만큼 안전하다는 뜻이기도 하죠.”
체중감량을 위해 처방되는 약은 크게 3가지다. 식욕을 억제하는 약과 체지방분해를 촉진하는 약, 음식물의 흡수를 억제하는 약으로 나뉜다. 안전하지만 넘어야 할 부분이 또 있다. 최소 3개월 이상 복용을 해야 효과가 나고, 끊게 되면 원래의 체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점이다. 건강보험 적용이 안 돼 약값도 부담이 될 수 있다.
다이어트에 치명적인 술자리
사실 남성들에게 가장 큰 다이어트의 적은 바로 술과 외식이다. 다이어트 식단으로 식사를 해보려고 해도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식당밥’을 먹는 경우가 대다수라 지키기 어렵고, 잦은 술자리는 뱃살을 더욱 두둑하게 만든다. 악순환의 연속이다.
“중장년 남성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이죠. 늘 밖에서 식사를 해야 하니 다이어트 식단 같은 것은 꿈도 못 꿔요. 게다가 생맥주 3잔 혹은 소주 1병이면 밥 두 공기만큼의 칼로리와 맞먹어요. 여기에 안주까지 더하면 한 끼에 1만kcal에 육박할 수도 있어요.”
성인 남성의 하루 권장 섭취 열량은 2500kcal. 한 번의 술자리가 미치는 여파가 가늠이 된다. 그래서 채 원장이 권하는 것은 ‘야채 도시락’이다. 방울토마토나 오이 같은 야채를 도시락으로 갖고 다니다가 식사 때 꺼내어 밥과 함께 먹는 것이다. 포만감을 주기 때문에 식사량을 줄여주고, 염분섭취도 낮춰준다. 이것이 곤란하다면 식사마다 밥을 3분의 1가량 덜고 조금만 식사하는 것이 최소한의 대책이다.
특히 시니어에게는 과일이나 떡과 같은 간식도 치명적이다. 송편 3개만 먹어도 열량이 밥 한 공기와 맞먹는다. 과일은 건강에 좋으니 맘껏 먹어도 된다 생각하기 쉽지만 오해다. 과일 속 과당도 엄연한 당분이다. 먹으면 살로 간다.
해야 하는 운동, 몸이 따르지 않는다면
“무릎이 나가 우리는!” 지난해 방영된 모 소화제 광고에서 소화가 되지 않으면 걸으면 그만이라는 젊은이에게 이경규는 이렇게 일갈해 화제를 모았다. 다이어트도 마찬가지. 시니어 입장에선 운동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무릎이나 어깨, 허리 등 주요 관절에 크고 작은 질환이 있는 경우가 많다.
“관절에 문제가 있다면 중력의 영향을 덜 받는 수중운동을 권합니다. 수영이나 아쿠아로빅 같은 운동이 대표적이죠. 관절에 무리를 주지 않고, 심폐기능을 키우는 데도 도움이 돼요. 복부지방을 빼고 싶다면 빨리걷기도 효과가 좋습니다. 이런 운동들이 익숙해지고 근력운동까지 더하면 금상첨화죠.”
뽈록한 배, 지방흡입 효과 있을까
중장년 남성의 다이어트 지향점은 날씬한 배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배만 좀 날씬해진다면 다른 부위에 살이 좀 붙은 것쯤은 신경 쓸 거리도 안 된다. 그러니 길거리에 붙은 지방흡입 광고에 눈길이 갈 수밖에 없다. 운동도 싫고 약도 곤란하다면 확 들어내버리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채 원장은 “지방흡입도 만능은 아니다”고 말한다.
“복부는 윗배와 아랫배로 나눌 수 있는데, 윗배는 내장지방의 비중이 높고, 아랫배는 피하지방이 대부분이에요. 문제는 지방흡입 수술과 같은 방식이 효과적인 부분은 피하지방이라는 것이죠. 내장지방은 지방흡입으로 빼는 것보다는 운동이나 식이조절을 통한 체중감량이 더 효과적이에요. 결국 또 제자리인 셈이죠.(웃음) 지방흡입 수술은 내장지방을 직접적으로 감소시켜주는 건 아니지만, 체형 변화에 따른 동기부여 효과로 체중감량에 도움닫기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남성들이 지방흡입을 주목하는 것이지요. 남성들은 시술에 대한 거부감도 여성에 비해 크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경우도 많아요. 그래도 최근에 지방흡입 수술에 비해 간단하게 주사로 지방을 추출하는 시술이 개발되어서 그나마 나은 편이긴 합니다.”
채 원장은 마지막으로 효과적인 다이어트를 위해 스스로를 돌아볼 것을 권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바꾸려 하지 말라는 것이다.
“환자들이 대부분 본인의 문제점을 이미 알고 있어요. 말씀 나누다 보면 살찌는 원인을 파악하고 거꾸로 제게 알려줍니다. 갑자기 여러 가지를 뜯어 고치려 하기보다는 이런 문제에 대한 한 두 가지 정도의 간단한 대책을 만들어 생활에 변화를 줘보시는 것이 지키기 좋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어느 날 날씬해진 자신을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발틱 3국 중 ‘라트비아’가 한국인들에게 낯설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국내 대중 가수, 심수봉이 불렀던 ‘백만 송이 장미’라는 번안곡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노래의 원곡은 라트비아의 가수가 불렀다. 특히 이 노래 가사에는 ‘특별한 사연’이 담겨 있다. 그루지아의 한 화가가 프랑스 가수를 흠모해 바친, ‘서글픈’ 백만 송이 장미. 라트비아 수도인 ‘리가’에 두 번째 방문하는데도 그 유행가 선율이 계속 머릿속에 감돈다.
두 번째 만남이 더 행복한 ‘리가’
필자는 현재 4개월 여행의 막바지에서 핀란드에 와 있다. 가을이 짙은 핀란드 경치를 바라보면서 ‘최고의 행복’을 느끼고 있다. 여행을 하면서 많은 나라, 도시를 만났다. 기억나는 곳들이 많지만 그중 한 곳이 라트비아 리가다.
러시아 프스코프에서 버스를 타고 에스토니아 국경을 넘어 라트비아 리가로 향했다. 4년 전 늦가을, 잠시 발만 딛고 떠나버렸던 리가. 어떻게 변했을까? 시외버스터미널 바로 앞에 있는 중앙시장 건물이 반갑다.
다우가바(Daugava) 강 제방 위에 열 지어 서 있는, 다섯 개의 거대한 홀 모양의 건물. 현재는 시장 건물이지만 원래는 독일이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공격할 목적으로 지은 체펠린 비행선 격납고였다. 전쟁이 끝난 후 리가로 그대로 옮겨져 현재는 활황을 누리는 재래시장 건물이 됐다. 잠시 눈인사로 대신하고 여행자들의 ‘숙제’와 같은 숙소 찾기에 나선다. 그런데 4년 전의 버스터미널이 아니다. 여행 안내소가 생겼고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친절한 여행 안내원이 있다.
올드 타운까지는 멀지 않은 거리이지만 길이 울퉁불퉁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시내버스 타고 숙소로 갈까?”라고 물었더니 ‘고작 7분 거리’라면서 걸어가란다. 터미널에서 올드 타운으로 들어서는 골목길이 제법 정돈되어 캐리어를 끄는 데 크게 힘들진 않다.
저렴한 가격의 숙소 또한 훌륭하다. 낡은 건물이지만 에스컬레이터가 있어 무거운 짐 옮기는 걸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실내도 먼지 하나 없을 정도로 깔끔하고 조식 제공에 오이와 자른 레몬을 넣은 음료를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
한껏 편한 마음으로 어슬렁어슬렁 올드 타운 골목길로 발걸음을 옮긴다. 도심의 거리는 화려하고 활발하다. 관광 인파로 넘실대는 골목의 카페에서는 라이브 음악이 흘러나와 흥을 돋운다. 같은 장소를 두 번 방문하는 일은 생각보다 좋다. 기억을 더듬는 것도 좋고, 못 본 곳들을 재발견하는 재미도 있다. 4년이란, 충분히 도심을 변하게 할 수 있는 시간 같다.
‘백만 송이 장미’로 더 친숙하게 다가온 나라
제정 러시아 시대에 ‘리가’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에 이어 제3의 도시로 불릴 정도로 활황을 누렸다. 러시아에서 발원한, 리가의 젖줄인 다우가바 강은 수로로 이용하기에 좋은 요새였다. 당시 리가는 ‘동유럽의 파리’, ‘동유럽의 라스베이거스’라 불렸다. 동유럽에서는 최고로 유흥산업이 발달했던 도시. 한국인에게는 ‘백만 송이 장미’라는 노래로 알려진 나라.
‘백만 송이 장미’라는 노래는 라트비아 작곡가 라이몬즈 파울스가 만들고, 라트비아 여가수 아이야 쿠클레가 처음 불렀다. 이 노래를 알린 사람은 러시아 여가수인 알라 푸가체바다. 노래 가사는 안드레이 보즈네센스키의 시다.
한 화가가 살았네/홀로 살고 있었지/그는 꽃을 사랑하는 여배우를 사랑했다네/그래서 자신의 집을 팔고, 자신의 그림과 피를 팔아/그 돈으로 바다도 덮을 만큼 장미꽃을 샀다네/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붉은 장미…
이 시는 그루지아(현 조지아)의 화가 니코 피로스마니가 프랑스 출신 여배우에게 사랑에 빠졌던 일화를 바탕으로 쓴 것. 한 가난하고 외로운 무명화가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가 살고 있는 고장에 유명하고 아름다운 여배우가 순회 공연차 오게 된다. 그녀를 흠모하던 화가는 단 하루밖에 없는 그 기회를 이용해 특별한 방식의 사랑 고백을 계획한다. 여배우가 묵고 있는 호텔 광장에 장미를 가득 뿌려놓겠다는 것. 자신의 모든 재산을 처분해 장미 백만 송이를 산 그는 그녀가 창을 통해 볼 수 있는 모든 곳에 장식했다. 이 노래는 동유럽 일원에서는 흔히 들을 수 있는, 길거리 음악의 대명사가 됐다.
구시가 골목 즐기기
긴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골목길. 자꾸만 길을 잃게 만들면서 블랙헤드 길드 광장 앞으로 안내를 한다. 이 광장은 리가의 랜드마크로 건물에 금박이 박혀 있어 금세 눈길을 끌어당긴다. 예전 상인들의 숙소와 연회장이었던 건물. 눈길을 끄는 천문시계에는 처음 주문한 길드가 시계공의 눈알을 빼버렸다는 전설이 흐른다. 너무 아름답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동유럽의 흔한 전설 중 하나다.
그것보다 이 건물의 특징은 블랙헤드다. 금박 건물에 이들의 수호성인인 성 마우리티우스가 새겨져 있다. 그는 북아프리카 흑인 출신의 로마 전사였다. 그래서 블랙헤드라는 건물명으로 지칭된 것. 이 전당은 제2차 세계대전 때 건물의 80%가 파괴되었는데 라트비아가 재건축(2001년)했다.
현재 박물관과 관광안내소가 함께 있다. 길드 앞에 있는 크리스마스 트리 조형물은 1510년, 리가의 길드 회원들이 커다란 전나무를 세워놓고 각양각색의 화려한 장식을 해 밤새 놀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자리에 있다. 작은 트리 조형물. 왠지 억지스럽다. 그보다 광장 뒤쪽에 있는 성 피터 성당의 뾰족한 첨탑이 눈길을 끈다.
1209년에 건설된 이 성당은 1666년 이후 여러 차례 보수되었다가 현재는 1941년의 모습 그대로다. 이 성당은 시대에 따라 가톨릭 성당, 루터 교회, 그리고 박물관 등으로 여러 차례 기능이 바뀌었다. 종교와 상관없이 이 성당을 찾는 이유는 첨탑(123m)으로 올라 시내를 조망하기 위해서다. 탑 위까지 걷지 않고 리프트를 이용할 수 있다.
구시가지의 붉은 가옥과 강, 좁은 골목길, 그리고 사람들을 구경한다. 특히 반가운 것은 한국의 유명 기업 상호가 새겨진 멋진 고층 건물이다. 성당 뒤쪽으로는 독일 형제 작가인 그림 형제의 유명한 동화 ‘브레멘 음악대’에 나오는 동물들의 동상이 있다.
이외에도 독일인들이 이 땅에 와서 처음으로 지은 돔 성당도 여러 번 만난다. 이 성당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6768개의 파이프를 가진 오르간. 제작(1884년)될 당시만 해도 이 파이프 오르간은 세계에서 가장 컸다. 그러나 지금은 세계에서 네 번째 크기가 됐다.
스웨덴 문과 아르누보 건축
그 어떤 곳보다 필자의 관심을 끈 곳은 스웨덴 병사와 리가 아가씨의 사랑 이야기가 흐르는 스웨덴 문 주변이다. 누군가의 설명을 듣지 않으면 눈여겨보지 않을 정도로 작은 아치형 문.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 애달파서일까? 좁은 골목길에서 풍겨나오는 향취가 남다르다.
케케묵은 연륜이 고스란히 남은 건물 모퉁이의 작은 카페들. 올드 타운의 화려하고 시끌벅적함과는 미세하게 색깔을 달리한다. 카페를 장식하고 있는 화단에 오후의 햇살이 스며들 때면 커피향이 그립다. 스웨덴 문을 지나면서 만나는 리가 성은 1330년, 리보니아 기사단의 기지로 강변 옆에 건설되었다.
리가의 구시가지를 빠져 나와 동쪽으로 가면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진다. 1935년에 세워진 자유의 기념물 옆 공원의 작은 개울에서는 보트를 빌려 탈 수 있다. 또 울창한 나무숲 사이로 화약탑(1621년)과 리가에서 가장 큰 러시아 정교회의 모습도 보인다. 라트비아의 시인이자 사회운동가인 라이니스의 동상도 만날 수 있다.
리가 여행의 숨겨진 보석은 신시가지 거리의 아르누보 건축물이다. 리가의 아르누보 건축 설계는 미하일 에이젠슈타인이 했다. 1899~1914년에 조성된 이 건물은 요즘 들어 많은 관광객의 관심을 끌고 있다. 필자는 그가 남긴 화려한 건축 양식보다는 그의 아들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흔적을 찾고 싶었다. 당시 세르게이는 러시아권의 유명한 영화감독이었지만 그 흔한 동상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의 흑백영화는 무성시대의 찰리 채플린을 무색케 할 정도다.
Travel Data
교통편 발틱 3국은 버스 편이 용이하다. 탈린이나 리투아니아에서 리가 행 버스를 타면 된다. 교통정보 대부분 걸어 다녀도 된다. 시내 교통카드는 편의점에서 판매한다.
맛집 퓨전 레스토랑이 많다. 구시가지 쪽에는 관광객을 상대로 장사를 해서 음식값이 비싸다. 반면 동쪽 호텔 뒤쪽으로 가면 저렴하면서도 맛 좋은 음식점이 즐비하다.
숙박 고급 호텔을 비롯해 아파트, B&B, 호스텔 등 다양하다. 고급 호텔은 가격이 비싸지만 도미토리룸은 1인당 2만~3만 원 선에 이용 가능하다.
대표 술 리가 블랙 발삼(Riga Black Balsam)은 러시아의 여황제 예카테리나의 병을 낫게 한 술로 유명해졌다. 그 외 리가는 러시아 사람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라 보드카가 많다. 라트비아 최고의 맥주는 알다리스(aldaris)다.
시차 한국보다 7시간 느리다.
날씨 리가의 기온은 전형적으로 14°C에서 23°C. 5월부터 9월 중순까지는 날씨가 온화해서 여행하기 좋다. 그러나 11월부터는 급격하게 온도가 떨어지고 일교차가 커서 두터운 겨울옷이 필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