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후쿠오카 날씨는 한국과 다름없다. 35℃를 넘나드는 찜통더위에 10분 만 걸어도 땀이 주르르 흐른다. 모든 곳을 걸어서 이동해야 하는 여행자에게 한여름 여행은 고역이다. 하지만 일본 텐진에서는 더운 날씨에도 재밌는 여행을 할 수 있다. 지하로만 다녀도 볼거리, 먹거리가 넘쳐난다.
텐진은 지하철 텐진역과 텐진 미나미역, 니시테츠 후쿠오카역이 만나는 교통의 요지다. 니시테츠 후쿠오카역 위층엔 텐진고속버스터미널도 있다. 또한, 미츠코시, 이와타야, 다이마루 등의 유명 백화점과 파르코, IMS, 솔라리아 등 쇼핑몰이 밀집해 있어 큐슈 최대의 쇼핑가로 손꼽힌다. 백화점이나 쇼핑몰 말고도 톱 브랜드부터 100엔 가게까지 19세기 유럽 콘셉트의 상가들이 지하에 들어서 있어 굳이 쇼핑하지 않더라도 구경하는 재미를 누릴 수 있다.
백화점과 쇼핑몰 지하에 있는 음식점들도 여행자에겐 흥밋거리다. 전통적인 맛집이나 SNS에서 '핫'한 식당들은 어딜 가나 사람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다. 굳이 지도를 들고 찾아다니지 않아도 텐진에서 이름난 맛집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파르코 지하에 가면 겉만 살짝 익혀 나오는 고기를 뜨거운 철판에 익혀서 먹는 햄버거 스테이크집 ‘키와미야’를 찾을 수 있다. 온종일 기다리는 사람들로 붐빈다. 한국 여행객들 사이에서도 이름난 맛집으로 가격에 비해 질 좋은 스테이크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좁은 공간에서 다닥다닥 붙어서 먹어야 한다는 불편한 점이 있다.
햄버거 스테이크 먹으러 갔다가 줄이 너무 길다 싶으면 옆집 ‘테츠나베’를 선택해도 좋다. 야끼만두와 야키소바로 이름난 곳으로 군만두에 생맥주를 마시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단품은 430엔, 밥과 약간의 반찬이 포함된 세트는 680엔에 맛볼 수 있다. 겉은 바싹 하고 속은 부드러운 만두는 생각보다 작다. 만두 만으로는 1인분이 훨씬 못 미치는 양이니 배가 출출한 사람은 세트로 시켜먹을 것을 권한다.
파르코 지하에 있는 ‘우오스케’ 식당은 회를 산더미처럼 쌓아 먹을 수 있는 회덮밥 식당이다. 식당 앞에 걸린 사진만으로도 반한다. 대, 중, 소 밥공기를 고르고 계산을 하면 공기에 밥을 담아준다. 그 위에 회를 쌓아 올리면 된다. 예전에 피자헛에서 샐러드를 좀 더 많이 쌓기 위해 갖은 신공을 펼치던 일이 떠오르는 식당이다. 회를 높이 쌓느라 야단법석인 사람들을 보는 것도 유쾌하다.
배불리 먹고 나면 지하상가 끝에 있는 생활잡화점 내추럴 키친에 들러 보자. 식기나 주방용품, 인테리어용품 등 다양한 물건을 파는 100엔 가게로 가벼운 선물 고르기에 좋다. 다이마루 백화점 지하에선 현란한 일본 도시락과 식자재를 둘러보고,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을 위한 과자 선물 까지 장만하면, 텐진 지하상가에서 완벽한 여름 여행이 완성된다.
사노라면 가끔은 숨을 공간이 필요하다. 젊은 날이었다. 과음을 하고 동료들 몰래 건물 뒤로 돌아가서 시원하게 토악질을 해댔다. 보고도 못 본 척해주면 좋으련만 꼭 뒤따라와서 등을 두드려 주는 선배가 있었다. 썩 고맙지는 않았다. 손등에 흉터를 가리려는데 까뒤집어 들어내게 하며 “야! 우리 톡 까놓고 지내자” 하고는 정작 자신은 드러내지 않는 유형이다.
취업포털 사이트 커리어가 직장인 391명을 대상으로 ‘직장에서 가장 바라는 공간’을 물었다. 응답자의 49.6%가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수면공간을 원했다. 이어 산책 공간 (17.4%), 당구 탁구 등 레저가 가능한 공간(10.2%),자유로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카페 또는 매점(8.2%), 따로 건물 밖이나 옥상에 가지 않아도 흡연할 수 있는 흡연 공간(6.7%) 순이었다. 목적은 달라도 남들로부터 방해받지 않는 나만의 공간을 누구나 원한다. 회사 사장님이 들으면 펄쩍 뛸지 모르지만 정말 직원을 위한다면, 나아가 생산성 향상을 위해서라도 직원 수면공간을 만들어 주는 건 긍정적으로 검토해볼 만하다.
통계자료를 더 살펴보면 부모로부터 독립하지 않은 미혼의 20~30대는 나만의 공간으로 ‘내방’이 있다. 부모들이 자신의 방을 희생해서라도 자식의 방은 만들어줬다. 결혼 후에는 내방이 있어도 나만의 공간으로 인식하지 않거나 못한다. 심지어 40~50대는 나만의 공간이 자동차 안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은 퇴근 후 집이 아닌 혼자만의 공간인 오피스텔로 간다. 혼자 조용히 샤워를 하고 맥주를 마시며 스포츠방송을 보며 자신만의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다시, 들어왔을 때의 차림으로 갈아입고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집으로 간다.
나이 들면 나만의 공간이 점점 더 없어진다. 커피숍에 가도 온통 젊은이들 천지다. 그들은 나이 먹은 나를 의식하지 않는데 나는 그들이 불편해할까 봐 조바심 나서 오래 있지 못한다. 자식들이 결혼해 집을 나가면서 내 방이 생겼다. 오랜 습관 때문인지는 몰라도 내방이라는 인식이 덜하다. 비상금은 회사에 있는 내 책상 서랍에 두는 것이 더 안전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한국블로거협회’에서는 매주 월요일 회원들끼리 지역별로 모여서 ‘월요브런치클럽’이라는 오프라인 행사를 한다. 퇴직하고 특별히 갈 곳도, 만날 사람도 없는 도시의 은퇴자들을 동병상련(同病相憐)의 마음으로 집 밖으로 끌어내는 수단이다. 서로 관심사에 대해 이야기도 하고 밥도 한 끼 먹는다. 문제는 만나서 수다를 떨 공간이 절대적으로 없다는 것이다. 1만 원의 범위내에서 이루어지는 ‘만 원의 행복’을 하려다 보니 카페에서는 커피 값이 부담되고 오래 앉아있으면 눈총이 느껴진다.
짐승들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숨을 곳을 찾아야 살아남는다.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자신의 몸을 주위의 나뭇잎 색깔과 같게 보호색으로 변화 시켜 위장술로 숨는다. 사람도 혼자 있는 공간이 있어야 사색도 하고 꿈도 꾼다. 정부나 지자체에서도 은퇴자들에게 이런저런 교육만 시키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갈 곳 없는 도시의 은퇴자들이 혼자서 또는 삼삼오오 몰려와서 떠들고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나만의 공간’, ‘우리의 아지트’를 만들어 주는 것도 고려해봄 직하다.
요즘은 친구들과 1박 2일 모임을 한다. 잠깐 얼굴 보고 밥 먹고 헤어지는 만남이 아쉬워 언제부터인가 만나면 1박을 한다. 그날도 오후 느지막이 만나 여유 있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호텔로 가는 길에 노래방을 들러 가기로 했다. 그렇잖아도 ‘브라보마이라이프 콘서트’에서 들었던 가수 양수경의 노래를 흥얼거리던 차에 냉큼 맘이 땅겼다.
“노래방은 한 시간만 하고 가자. 호텔 들어가면서 맥주랑 안주도 사야지?”
택시 안에서 나누는 대화에 기사님의 눈빛이 곱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평일 오후에 여편네(?)들의 행태로는 의심받아 마땅할 법하다. 멀어지는 기사님에게 참하게 놀다 가겠노라고 속말을 전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온통 노래방 간판이다. 지하보다는 깨끗하고 쾌적한 지상으로 가자며 간택을 고민하던 차에 한 건물에 5층부터 8층까지가 노래방이 떼로 몰려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에서 가만히 들여다보니 선택이 쉽지 않다.
“노래빵, 노래룸, 노래클럽, 노래터, 노래스튜디오….”
엇비슷한 상호가 한 가득이다. 우리가 찾는 노래방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 헤매자 동승한 사람이, 여기는 노래주점이라고 넌지시 알려준다. 화들짝 놀라 다시 찾아보니 길 건너 저만치에 노래방이 보인다.
반가운 마음에 문을 밀고 들어섰는데 인기척이 없다. 작은 방이 쭉 이어져 있고 데스크 옆에 지폐교환기가 있을 뿐이다. 벽면에 시설 이용법이 붙어 있는, 말로만 들었던 코인 노래방이다. ‘코인 노래방’은 상호명이 아니고 ‘코인을 사용하는 노래방’이라는 설명이다. 한 곡에 500원! 5000원을 동전으로 바꿔 방에 들어서니 노래 반주기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일렬로 화면을 보고 앉아 동전을 넣고 노래를 선택하니 반주가 나왔다.
‘이건 쫌 아니다’ 싶은 마음과 함께 밀려오던 비루하고 애잔한 느낌. 다시 나와 주변 일대를 뒤지다 보니 졸음이 밀려왔다. 결국 노래방 로망은 날아가고 호텔로 급 귀가했다. 그날도 집에서의 일상처럼 잠옷을 갈아입고 얼굴에 팩을 붙인 후 폭풍 수다로 하루를 마감했다.
우리 세대에게 노래방은 건전한 문화 공간이다. 개인적으로는 술집이나 카페보다 더 편하게 속내를 풀 수 있는 고마운 곳으로 기억한다. 언젠가는 두 시간을 나 홀로 논 적도 있다. 마이크 두 개를 부여잡고 소리 지르며 놀던 시절도 있었는데….
‘이젠 노래방도 못 찾는 나이가 되었나 확! 이참에 노래방 마이크를 장만해?’
자려고 누우면서 든 생각이다.
수제 맥주(Craft Beer)가 인기를 끌면서 다양한 수제 맥주를 파는 음식점이 늘어나더니 직접 만들 수 있는 공방까지 생겨났다. 만드는 방법에 따라 천차만별인 수제 맥주! 강신영(65), 김종억(64) 동년기자가 맥주공방 ‘아이홉’에서 직접 맥주를 만들어봤다.
1. 물에 맥아추출물 넣고 끓이기
맥주를 만들기에 앞서 강신영, 김종억 두 동년기자의 기분이 매우 들떠 보였다. “맥주 좋아하세요?”라고 물어보자 옛날엔 1만cc도 넘게 먹어봤다며 과거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특히 강신영 씨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근무할 때 무알콜 맥주를 사서 직접 맥주를 만들어 먹은 경험이 있다고 한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슬람 율법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무알콜 맥주만 판매한다. 그렇다면 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맥주는 무엇일까? 맥주 마니아치곤 상당히 밋밋한 대답이 돌아왔다. 사람들 대부분이 알고 있는 국산 맥주였다.
맥주의 종류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국산 맥주처럼 깔끔하고 청량한 느낌이 강한 ‘라거’와 비교적 풍미가 강하고 탄산감이 적은 ‘에일’이다. 이번 ‘아이홉’에서 만들 맥주는 에일의 한 종류인 ‘페일 에일’. 오렌지, 자몽, 귤 등 상큼한 향이 특징이다.
20L의 물을 채우기 위해 김종억 씨가 나섰다. 2L짜리 통으로 10번을 옮겨 담아야 한다. 중간에 몇 번 넣었는지 살짝 잊어버리는 위기(?)도 있었지만, 옆에서 지켜보던 강신영 씨의 도움을 받아 성공한다. 여기에 맥아추출물을 넣어 섞어준 뒤 물을 끓인다. 맥아추출물은 한 통에 약 2만5000원.
2. 홉 넣고 식혀주기
물이 끓을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두 동년기자는 수제 맥주 시음에 빠졌다. ‘아이홉’ 대표가 만든 페일 에일과 스타우트(흑맥주)를 마시며 연신 향이 깊다며 한두 잔을 비워냈다. 이미 수제 맥주의 매력에 빠져버린 듯하다. ‘아이홉’은 시중에 나와 있는 다양한 수제 맥주도 판매하고 있다. 맥주를 만들면서 다른 수제 맥주도 맛볼 수 있으니 다양한 안주거리를 준비해가도 좋겠다. 물이 끓을 때쯤 두 동년기자의 얼굴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물이 끓기 시작하면 언제 홉을 넣을지 결정해야 한다. 맥주 레시피가 무궁무진할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홉을 넣고 얼마나 끓이냐에 따라 맥주의 향, 풍미, 쓴맛이 결정되는데 이때 오래 끓일수록 향은 날아가고 쓴맛이 나는 맥주가 된다. 원하는 시간대에 홉을 넣고 난 뒤엔 ‘칠러’를 사용해 물을 식혀준다. 수도꼭지에 연결된 호스로 물이 흘러들어갔다가 반대쪽 호스로 나오면서 뜨거운 물을 식혀주는 방법이다. 온도가 20~23℃로 내려갈 때까지 식혀주면 된다. 이때 칠러를 위아래로 흔들어주면 맞닿는 표면적이 넓어져 더 빨리 식힐 수 있다. 10분 정도 흘렀을까, 100℃가 넘던 물의 온도가 20℃까지 떨어졌다. 이제 발효통에 옮겨 담고 효모를 첨가한 뒤 약 일주일간 숙성시키는 일만 남았다.
3. 효모를 뿌린 맥아즙 숙성하기
발효통에 담기 전 가장 중요한 단계! 바로 효모가 죽지 않도록 발효통과 손을 깨끗하게 소독하는 일이다. 맥주는 균에 의해 쉽게 변질될 수 있기 때문에 소독을 하지 않을 경우 맛이 손상될 수 있다. 발효통에 소독약을 뿌려 깨끗하게 소독했다면 맥아즙을 반복해서 부으며 산소를 공급해준다. 위 작업은 두 사람의 팀워크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맥아즙 위에 건조 효모를 뿌려주면 발효를 위한 준비 과정은 끝난다.
두 동년기자는 마음이 급해져 “이제 가져가면 되나요?”라고 묻는다. 하지만 풍미가 제대로 나는 맥주가 되기 위해선 일주일 동안의 발효 과정과 또 한 번 일주일간 숙성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답이 돌아온다. 더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 몹시 아쉬운 표정으로 이주일 뒤 탄생할 수제 맥주를 기다리며 동년기자는 체험을 종료한다.
#맥주공방 #수제맥주 #아이홉
송홧가루 날리는 5월의 산천(山川)은 풍요롭기 그지없다. 새빨간 덩굴장미가 담장을 타고 굽이굽이 올라가는 모퉁이에서 단발머리 소녀가 손짓하던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5월 중순의 어느 날, 철원평야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한창 모내기 철의 철원평야에는 싱그러움이 내려앉아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평화가 묻어난다. 얼마쯤 달렸을까? 영북면을 지나 넓은 평야 지대와 개활지를 가로질러 달리다 보니 관인으로 접어들면서 한탄강 줄기가 서서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녹음이 짙은 금학산이 눈앞으로 불쑥 다가온다. 군 시절을 회상하면서 이곳이 40여 년 전, 초산 부대에서 소대장 실습을 하던 곳이라는 것을 상기할 수 있었다. 눈이 부시도록 화려한 초록의 물결을 헤치며 도착한 곳은 한탄강 자락에 있는 민물매운탕집. 요 며칠째 전국적으로 쏟아부은 비로 인해 흙탕물이 된 강물은 강기슭 전체에 범람해 있었고 요란하게 흐르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친구와 강가에 앉아 장어구이와 민물매운탕으로 배를 불리면서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다. 맥주 한 잔을 반주 삼아 맛있는 점심을 먹은 우리는 “어디로 갈까?”, “여기까지 왔으니 노동 당사를 들러 백마고지로 가면 어떨까?” 하며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노동당사가 나타났다. 노동당사는 철원이 북한 땅이었을 때 북한 조선노동당이 지은 러시아식 건물이다. 다 허물어진 콘크리트 건물은 뒤는 무너지고 앞부분만 겨우 구색을 갖춰놓은 위태로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검게 그을린 시멘트 건물과 대비되는 새파란 잔디밭이 싱그러웠다. 노동 당사에서는 공산당 사무도 보고, 사람들 고문도 했다고 한다. 건물 벽 여기저기에 총탄 흔적이 그때의 사건들을 생생하게 증언해 주는 듯했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해 준 노동당사 건물을 한 바퀴 돌면서 참혹했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공산당원들이 철수하면서 지역의 유지들을 붙잡아 건물 지하에 가두어 놓은 채 학살하고 매몰했는데 이후에 그 유골들이 발견되었다. 밤마다 슬픈 영혼들의 울음소리가 들리기도 했다고 한다.
노동당사 앞에서는 넓은 개활지에 천막을 치고 지역특산품을 진열한 장이 들어서 있었다. 한쪽에서는 무대까지 설치한 채, 두 남녀가 구성지게 색소폰을 불고 있었고 사람들이 쭉 둘러서서 흥겨움에 몸을 흔드는 모습도 보였다.
강원도는 2018년 5월 1일부터 북한과 접경지역을 ‘평화지역’으로 바꾸기로 했다. 4·27 판문점 선언으로 하늘, 땅, 바다 교통망이 열리고 강원도는 남북경협 통일시대 준비에 돌입하면서 정상회담 후속 조치를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남북 관계가 개선되면서 접경지역의 부동산 시장이 들썩이고 있는 가운데 경기 북부인 연천군에 이어 강원도 지역도 활발하게 거래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민통선 인근 지역의 땅값도 덩달아 들썩이며 지금은 많이 오른 상태라고도 한다.
노동 당사를 견학하고 바로 백마고지 쪽으로 차를 몰았다. 멀리서 보이던 높은 백마고지 기념비가 가까워져 오자 하늘 높이 승천이라도 할 듯이 발을 번쩍 치켜든 백마의 동상이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백마고지전투위령비를 지나 한참을 올라가니 드디어 역사의 현장이 눈에 들어왔다. 아기 벼가 바람에 간들거리는 광활한 평야 건너에 백마고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아군 GP 초소가 보이고 그 너머에 북녘땅도 보였다. 말 없는 백마산 기슭, 백마고지는 해발 395m의 고지로 6·25전쟁 때 국군과 중공군이 이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백마고지 전투는 정전협정을 앞둔 1952년 10월6일부터 열흘 동안 무려 7번이나 고지의 주인이 바뀌는 등 아군과 중공군 간의 치열한 혈전이 벌어졌던 피의 고지전이었다. 28만 발의 포탄으로 15,000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10일간의 싸움 끝에 24번 만에야 우리 손에 들어온 격전의 고지 백마산은 깊은 침묵 속에 잠겨있다. 한국군과 중공군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전략 고지 백마를 탈취하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전개하였다.
심한 포격으로 산등성이가 허옇게 벗겨져서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백마가 쓰러져 누운듯한 형상을 하였으므로 백마고지라 부르게 되었다. 1951년 7월 정전회담이 시작되어 정전협정이 체결되는 시점의 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삼기로 정한 뒤 한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과 중공군에 맞서 조금이라도 유리한 지역을 차지하기 위하여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백마고지는 중부 전선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철원, 김화, 평강 즉 철의 삼각지대의 하나인 철원평야와 서울을 연결하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당시 김종오 소장이 지휘하는 국군 제9사단이 방어하고 있었다. 1952년 10월 6일 중공군은 백마고지 일대에 2000여 발의 포탄을 투하하며 공격을 개시하였는데 열흘간 24차례나 주인이 바뀔 정도로 혈전을 치른 끝에 제9사단이 중공군을 격퇴하고 승리하였다.
어김없이 6월이 오면 이 땅에서 벌어졌던 동족상잔의 전쟁인 6·25 전쟁이 기억난다. 이제는 명분 없는 전쟁의 역사에서 우리 모두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카시아 꽃이 흐드러지게 핀 철원평야를 지나면서 이토록 평화로운 이 강산을 고스란히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책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귀갓길을 서둘렀다.
봄비에 적신 웃음이 꽃잎처럼 퍼지는 것 같았다. 200여 명의 사람들이 모인 지난 5월 12일 오후 5시, 서울 중구 정동에 소재한 이화여자고등학교 유관순기념관이 그러했다. 그 안에는 기쁨, 반가움, 감격과 같은 밝은 감정들이 발랄하게 소용돌이쳤다.
1988년에 이화여고를 졸업한 88졸업생들은 준비된 이름표를 가슴에 달고 마치 어제도 본 듯한 환한 표정으로 반갑게 악수를 했다. 그리고 그 순간 저마다 30년 전 여고생으로 돌아갔다. 어언 30여 년 만에 다시 만난 이들은 추억을 더듬으며 각자의 살아온 이야기들을 나누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은사들이 한 사람 한 사람 등장할 때마다 설레는 마음이 담긴 뜨거운 박수와 환호성으로 반겼다.
웃음과 추억과 설렘이 어우러졌던 시간
이날 열린 이화여고 졸업 30주년 재상봉 기념식에는 88년 졸업 동창과 은사 등 200여 명이 참여해 총동창회와 모교의 발전에 기여하는 화합의 장을 만들었다. 또 이화라는 이름 안에서 특별한 시절을 누렸던 88한 배꽃들이 당시 담임과 학과목을 담당했던 스승 40여 명을 초대해 이벤트를 열고 선물과 함께 식사를 대접했다.
1986년 국제적 대행사였던 아시안게임을 치르고 1987년에는 민주항쟁이라는 격렬한 변혁의 과정을 겪고 대한민국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된 88년 졸업생들. 그들은 폭발적인 경제성장 속에서 소비문화의 정점이 된 1990년대에 20대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사방에서 ‘나라가 망한다’는 말이 들려오던 IMF 금융위기 속에서 30대를 맞이해야 했다. 그야말로 격동의 세대였다. 그렇게 쌓인 세월 속 할 얘기들이 어찌 한두 보따리만 될까.
“지나온 30년, 새로운 30년 가즈아!”
88졸업생 대표 고혜정 씨의 힘찬 목소리는 지난 세월 동안 짊어지고 왔던 어둠들을 날려 보내는 주문과도 같았다. 김혜정 현 이화여고 교장의 환영사로 시작된 1부 행사는 이자형 이화여고 총동창회장의 축하, 이화교회 이종용 목사의 축도로 이어졌다. 88졸업생 고혜정 대표가 장학기금과 동창기금, 학교발전기금을 각각 전달했다.
“창립 132주년을 맞은 이화여자고등학교의 졸업 30주년 재상봉 기념식은 수십 년 동안 계속되어온 이화여자고등학교의 오래된 전통입니다. 올해 30주년 재상봉 행사에서 88년도에 졸업한 학생들이 첫 만남을 갖게 됐습니다. 추억과 옛 감정을 잘 나눌 수 있을까 걱정이었는데 정성껏 준비하고 모두 기쁜 마음으로 함께해서 너무 보기 좋습니다.”
30주년 재상봉 기념식에서 졸업생으로 참여한 이자형 총동창회장(1966년 졸업)의 목소리에는 뿌듯함이 담겨 있었다.
1부 행사가 은사들이 제자들에게 보내는 덕담이었다면 2부는 다시 학생으로 돌아간 50세 제자들이 스승에게 바치는 재롱잔치(?)였다. 올해 여든다섯 살을 맞이한 최종옥 전 교장의 격려로 시작된 2부에서는 88졸업생이 준비한 축하 영상, 플라멩코 댄스, 찬양 댄스, 오보에 연주, 동문 합창 등 다채로운 축하 공연으로 영원한 스승들에게 많은 웃음을 선사했다.
6개월 전부터 이 행사를 자체적으로 기획한 88졸업생들은 현수막부터 초대장, 은사님 선물꾸러미, 테이블 꽃꽂이, 꽃 코사지, 배너, 영상, PPT, 포토월, 크고 작은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각자가 가진 모든 재능들을 한데 모아 행사를 성황리에 끝마쳤다.
누가 스승이고 누가 제자?
이날 행사는 함께한 모두가 교정 곳곳에 묻어둔 아름다운 학창 시절의 추억을 소환하는 동시에 은사들과의 재상봉 기쁨으로 충만한 시간이었다. 학생으로 돌아간 88졸업생들은 이화라는 큰 그늘 속에서 살아온 30년을 지나 이제 어느덧 허리는 구부정해지고 흰머리를 날리게 된 은사들을 보면서 추억과 감사함에 뭉클함을 느꼈다.
사회를 본 88졸업생 정성진 씨는 “건강하시고 정정하신 은사님들의 모습에 얼핏 보면 누가 스승이고 누가 제자인지 구분이 잘 안 됩니다”라고 말하며 “저도 선생님처럼 가슴에 열정을 품고 남은 인생 활기 있게 살아가겠습니다” 하고 다짐했다.
88졸업생 한귀영 씨는 “나이 든 선생님들 모습을 보니 안쓰러움과 연대감이 함께 느껴진다”고 말했다.
“이젠 선생님들과 맥주 한잔 하면서 ‘그 시절’을 회상하고 친구처럼 수다 떨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의 담임을 맡을 때 20대였던 선생님들도 여럿이었죠. 돌이켜보면, 20대에 우리들을 만나 선생님들도 많이 긴장되고 두려웠을 것 같다는 생각이 이제야 들었습니다.”
운영진으로 활동한 88졸업생은 “제 인생이 이화 덕분에 참 많이 빛났던 것 같아요. 너무 많이 웃고 떠들며 힐링하는 시간이 됐습니다. 이런 기회를 준 동창회와 모교 동문에게 너무너무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지방에서 올라온 88졸업생 역시 “그동안 앞에서, 뒤에서 애써준 친구들 덕분에 너무 좋은 추억을 만들게 됐다”며 “88졸업생들이 너무 자랑스럽다.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한 미안함과 고마움을 어떻게 전할 수 있을지…”라고 말하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30년의 세월을 보내고 맞이하는 새로운 인생
감동한 것은 88졸업생 동문뿐만이 아니었다. 여전히 교편을 잡고 있는 스승 한소연 선생님은 “정성을 다해 준비한 행사에 감사했어요. 이화의 정신은 여러분들의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과분한 대접에 미안하고 앞으로 남은 시간 가르치는 일에 좀 더 마음을 쏟겠다고 다짐했어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88한 배꽃들의 오늘 만남이 삶에 큰 활력이 되기를 바라며 50세에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며 영원한 스승의 마음으로 제자들을 토닥거리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다른 은사들도 홈커밍데이를 잘 치른 88졸업생에게 ‘모교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으로 탄탄한 결속력을 보였다’며 한마디씩 치하했다.
지난해부터 88졸업생 대표로 뛰어다녔던 고혜정 씨는 “행사를 기획하고 준비해준 친구들에게 고맙습니다. 모교 사랑과 은사님에 대한 깊은 애정을 느끼는 행사였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이화라는 이름보다 더 큰 버팀목이 있을까 싶어요”라고 말했다. 이어 이번 30주년 재상봉을 시작으로 40주년, 50주년, 60주년까지 함께하겠다고 밝혔다.
“30년의 세월이란, 한 세대를 매듭짓고 새로운 인생을 다시 시작하도록 해주는 대단히 중요한 시간입니다.”
김성수 선생님은 사은회를 본 후 이렇게 말했다. 그의 말에는 제자들을 바라보는 스승으로서의 대견함과 소회, 그리고 함께 나이 들어가는 삶의 동지로서의 감격이 담겨 있었다.
“지금까지 사느라 얼마나 많은 열정과 아픔과 정진의 인고가 있었겠는가? 자네들, 스스로의 힘으로 한 세대를 사느라 얼마나 애를 많이 쓰셨는가? 은사로서, 자랑스럽고 대견해서 가슴 벅찬 박수를 보내네.”
단골로 가는 치킨 전문점이 있다. 전통시장인 대전 중앙시장 안에 있는 집이다. 전기구이 통닭 한 마리에 고작 7000원이다. 가격이 이처럼 착해서인지 언제 가도 손님들로 북새통이다.
그제도 이 집에 들러 전기구이 통닭과 소주 한 병을 시켜 먹었다. 셈을 치르려 보니 메뉴판 위에 ‘외상사절’이란 글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맞아! 외상을 주기 시작하면 버릇이 되고 결국엔 단골손님마저 아예 단절되지…’라는 생각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래전 시장 어귀에서 순대 전문 식당을 했다. 먹는장사이다 보니 가끔 외상을 청하는 손님도 있었다. 박절하게 거절하기 뭣해 외상을 줬는데 ‘혹시나?’가 ‘역시나!’이듯 외상 손님들은 하나같이 다시는 우리 가게를 찾지 않았다.
식당이 생각만큼 안 됐기에 일찍 처분을 했다. 그러곤 슈퍼마켓을 차렸다. 그러나 그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꼭두새벽에 문을 열고 자정이 넘어서야 문을 닫는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단골손님이 느는 만큼 외상 손님도 시나브로 증가했다.
‘다시는 외상을 주지 말아야지!’ 했지만 소용없었다. 금방 갖다 주겠다며 소주와 담배를 사간 이웃은 한 달이 돼도 코빼기조차 비추지 않았다. 자정이 넘도록 가게 밖 파라솔 의자에 앉아 술을 마시는 사람도 있었다. “죄송하지만 이제 문을 닫아야 하니 계산을 하고 드시든가 하시죠” 해도 셈은 나중에 치르겠다며 맥주를 한 병 더 주고 문을 닫든가 말든가 하라며 적반하장이었다.
이미 만취한 사람과 드잡이를 할까 싶어 함구하며 문을 닫았지만 속이 편할 리 없었다. 선친께선 생전에 술을 물처럼 드셨다. 아내 없는 홀아비라는 자괴의 신세타령에 덧붙여 경제적 고립무원이었던 당신을 자학하며 침면(沈湎, 술에 절어서 헤어나지 못함)으로 사셨다.
가장이 돈은 안 벌고 허구한 날 술만 마시면 누란(累卵)의 위기에 봉착하는 건 시간문제다. 술은 담배처럼 중독성이 심각하다. 그래서 이미 취했음에도 더 취해 아예 인사불성이 되길 원하는 게 알코올 중독(자)의 특성이다.
뿐만 아니라 상습적 외상까지 필자에게 강권하셨다. 외상으로 술과 담배 따위를 가져만 갔지 도무지 갚지 않았던(사실은 갚을 능력이 못 되었던) 우리 부자(父子)에게 동네에 하나뿐이던 구멍가게 주인은 점점 냉담해졌다.
“밀린 외상값을 다 갚기 전에는 우리 가게에 얼씬도 하지 말거라! 나는 뭐 땅 파먹고 사는 줄 아니?” 당시엔 자정부터 통행금지였다. 필자는 자정이 임박해 시키는 술심부름, 그것도 외상으로 가져오라는 아버지의 술 채근(採根)이 가장 싫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남의 집 마루 밑에 기어들어가 새우잠을 청하는 등의 풍찬노숙을 점철했다. 그 시절의 트라우마로 필자는 아이들에게 단 한 번도 술과 담배 심부름을 시키지 않았다.
‘외상’은 나중에 치르기로 하고 물건을 사거나 파는 일을 뜻한다. 외상이 잦으면 단골손님마저 잃게 되는 외상(外傷)을 반드시 입는다. 이게 바로 필자가 경험한 외상의 경제학(經濟學)이다.
수제 맥주(Craft Beer)가 인기를 끌면서 다양한 수제 맥주를 파는 음식점이 늘어나더니 직접 만들 수 있는 공방까지 생겨났다. 만드는 방법에 따라 천차만별인 수제 맥주! 강신영(65), 김종억(64) 동년기자가 맥주공방 ‘아이홉’에서 직접 맥주를 만들어봤다.
촬영 협조 아이홉
1. 물에 맥아추출물 넣고 끓이기
맥주를 만들기에 앞서 강신영, 김종억 두 동년기자의 기분이 매우 들떠 보였다. “맥주 좋아하세요?”라고 물어보자 옛날엔 1만cc도 넘게 먹어봤다며 과거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특히 강신영 씨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근무할 때 무알콜 맥주를 사서 직접 맥주를 만들어 먹은 경험이 있다고 한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슬람 율법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무알콜 맥주만 판매한다. 그렇다면 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맥주는 무엇일까? 맥주 마니아치곤 상당히 밋밋한 대답이 돌아왔다. 사람들 대부분이 알고 있는 국산 맥주였다.
맥주의 종류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국산 맥주처럼 깔끔하고 청량한 느낌이 강한 ‘라거’와 비교적 풍미가 강하고 탄산감이 적은 ‘에일’이다. 이번 ‘아이홉’에서 만들 맥주는 에일의 한 종류인 ‘페일 에일’. 오렌지, 자몽, 귤 등 상큼한 향이 특징이다.
20L의 물을 채우기 위해 김종억 씨가 나섰다. 2L짜리 통으로 10번을 옮겨 담아야 한다. 중간에 몇 번 넣었는지 살짝 잊어버리는 위기(?)도 있었지만, 옆에서 지켜보던 강신영 씨의 도움을 받아 성공한다. 여기에 맥아추출물을 넣어 섞어준 뒤 물을 끓인다. 맥아추출물은 한 통에 약 2만5000원.
2. 홉 넣고 식혀주기
물이 끓을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두 동년기자는 수제 맥주 시음에 빠졌다. ‘아이홉’ 대표가 만든 페일 에일과 스타우트(흑맥주)를 마시며 연신 향이 깊다며 한두 잔을 비워냈다. 이미 수제 맥주의 매력에 빠져버린 듯하다. ‘아이홉’은 시중에 나와 있는 다양한 수제 맥주도 판매하고 있다. 맥주를 만들면서 다른 수제 맥주도 맛볼 수 있으니 다양한 안주거리를 준비해가도 좋겠다. 물이 끓을 때쯤 두 동년기자의 얼굴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물이 끓기 시작하면 언제 홉을 넣을지 결정해야 한다. 맥주 레시피가 무궁무진할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홉을 넣고 얼마나 끓이냐에 따라 맥주의 향, 풍미, 쓴맛이 결정되는데 이때 오래 끓일수록 향은 날아가고 쓴맛이 나는 맥주가 된다. 원하는 시간대에 홉을 넣고 난 뒤엔 ‘칠러’를 사용해 물을 식혀준다. 수도꼭지에 연결된 호스로 물이 흘러들어갔다가 반대쪽 호스로 나오면서 뜨거운 물을 식혀주는 방법이다. 온도가 20~23℃로 내려갈 때까지 식혀주면 된다. 이때 칠러를 위아래로 흔들어주면 맞닿는 표면적이 넓어져 더 빨리 식힐 수 있다. 10분 정도 흘렀을까, 100℃가 넘던 물의 온도가 20℃까지 떨어졌다. 이제 발효통에 옮겨 담고 효모를 첨가한 뒤 약 일주일간 숙성시키는 일만 남았다.
3. 효모를 뿌린 맥아즙 숙성하기
발효통에 담기 전 가장 중요한 단계! 바로 효모가 죽지 않도록 발효통과 손을 깨끗하게 소독하는 일이다. 맥주는 균에 의해 쉽게 변질될 수 있기 때문에 소독을 하지 않을 경우 맛이 손상될 수 있다. 발효통에 소독약을 뿌려 깨끗하게 소독했다면 맥아즙을 반복해서 부으며 산소를 공급해준다. 위 작업은 두 사람의 팀워크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맥아즙 위에 건조 효모를 뿌려주면 발효를 위한 준비 과정은 끝난다.
두 동년기자는 마음이 급해져 “이제 가져가면 되나요?”라고 묻는다. 하지만 풍미가 제대로 나는 맥주가 되기 위해선 일주일 동안의 발효 과정과 또 한 번 일주일간 숙성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답이 돌아온다. 더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 몹시 아쉬운 표정으로 이주일 뒤 탄생할 수제 맥주를 기다리며 동년기자는 체험을 종료한다.
동년기자 체험 후기
강신영 동년기자
맥주의 황금빛! 그 색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평온해지고 기분이 아주 좋아져요. 제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색으로 꼽는 색이죠.(웃음) 그만큼 전 맥주를 좋아해요. 그래서 오늘의 체험은 유익했고 또 즐거웠어요. 우리가 음식점에 가서 맥주는 시켜봤어도 만들어본 적은 없잖아요. 이렇게 직접 만들어보니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정성이 들어가는 작업이란 걸 알겠어요. 그래도 과정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어요. 필요한 장비를 갖추는 데 약 50만 원 정도 든다고 하니 애주가들은 충분히 집에서 만들어 먹을 수 있겠구나 싶더라고요. 가장 좋았던 건 맥주 이론에 관해 설명을 들을 때였어요. 맥주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는 무엇인지, 홉을 넣는 시간에 따라 왜 맛이 달라지는지, 효모를 넣는 이유 등 맥주에 대해 확실히 알게 됐어요.
재미 ★★★★☆
정보 ★★★★☆
만족도 ★★★★★
김종억 동년기자
‘술’ 하면 기절할 뻔했던 순간이 기억나요. 옛날에 진급 심사를 앞두고 상사가 냉면 그릇에 소주랑 맥주를 섞어서 마시라고 줬거든요. 그 당시만 해도 술 잘 먹는 사람이 일도 잘하고 성격도 좋다며 부추기는 시절이었죠. 지금 생각하면 참….(웃음) 오늘 처음으로 수제 맥주를 시음할 기회가 있었는데 솔직하게 말하면 수제 맥주보단 카스, 하이트처럼 운동 끝나고 먹었던 맥주가 제 입맛엔 맞는 것 같아요. 근데 확실히 수제 맥주가 풍미가 깊고 도수도 높더라고요. 조금만 마셔도 금방 취할 것 같아요. 끝나고 맥주를 바로 가져갈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시간이 좀 걸린다고 하니 아쉽더라고요. 그래도 기다린 만큼 맛도 더 있겠죠?
재미 ★★★★☆
정보 ★★★★★
만족도 ★★★★★
애초부터 걷기와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고비’라는 말과 맞닿아 있던 삶. 다양한 운동 방법이 세상에 넘쳐나지만 걷는 게 그에게는 최적, 최상, 최고의 선택이었을 게다. 극복을 위한 아주 원초적 접근 방법. 한 발짝 한 발짝 내디뎌 무조건 길을 나선다. 걷는다. 여행한다. 궁극의 선택 안에서 자유를 찾고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는 느낌은 어떤 것일까?
“내가 목소리만 좋았으면 배우가 됐을 거예요!(웃음)”
사진을 찍는 동안 오십 넘은 중년의 얼굴이 어린 소년처럼 한껏 생기가 넘친다. 모델로서 이런 포토제닉 또한 오랜만이다. 기본적으로 재밌고 대화하는 상대를 편하게 해준다. 자신에 대한 사랑까지 충만하다. 삶의 중요한 부분이라는 걷기에 여행 이야기가 더해지니 함께하는 시간이 즐겁다. 최근 ‘마흔 넘어 걷기 여행’이라는 책을 낸 걷기 여행 전문가(?)이자 강동경희대학교병원 한방신경정신과 김종우(金鍾佑·53) 교수를 만났다. 대한민국은 물론이고 세계의 걷기 성지까지 두루두루 섭렵했다.
“제 나름대로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걷기 여행에 관한 책을 쓰게 됐습니다. 제 삶의 철학 중 하나죠. 여행을 가더라도 좀 걷자! 대학생인 딸도 그렇고 저보다 어린 직장인, 병원 내 레지던트들이 들려주는 여행 이야기도 그렇고. 좀처럼 재미가 없어요. 안타까워요. 어디를 가도 장소를 점처럼 찍어서 가요. 마치 사진작가처럼, 먹는 것을 찾아 떠난 셰프처럼 그렇게요.”
선을 연결해 영토를 확장하듯 면을 만들고 입체적인 그림을 그려가는 게 걷기 여행이다. 돈도 적게 들고 좋은 것도 많이 볼 수 있다. 여행자 자신의 관심사를 명확히 알게 해주기 때문에 걷기 여행이 매력적이라고..
“걷기는 인간의 본능적 행동이자 의도하는 바를 이루게 하는 행위이죠. 여행은 반복된 일상에서 벗어나서 진짜 나를 찾아가는 작업이라고 정의하고 싶어요. 걷기와 여행이 결합하면 떠나는 순간부터 마칠 때까지 여정 속에 푹 빠져서 자기 자신을 찾고 새로운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걷기에 의사의 해석이 더해지다
걷기 여행에 관해 이야기하기 전에 걷기가 뭔지 들어보기로 했다. 걷기에는 운동이라는 요소와 철학이라는 요소가 맞물려 있다고 김종우 교수는 말한다. 걷기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 육체적인 성취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걸으면서 여행하고, 세상을 보고, 사람을 만나고, 문화를 가까이서 느낄 수 있다. 이 모든 것을 포함할 수 있는 단순하지만 놀라운 행위가 걷기다.
“한 일간지에서 걷기 두 시간 해봤자 운동 효과 제로라는 제목의 기사를 본 적이 있어요. 그래서 제가 요즘 쓰고 있는 문화일보 고정 칼럼에 ‘걷기는 굉장히 중요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숭고한 철학이 담긴 활동’이라는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걷기를 그냥 운동이라고만 생각하면 그건 걷기가 아니죠.”
스트레스와 화병 전문가인 김종우 교수는 오랜 기간 한 월간지에서 주최하는 건강캠프 등에서 상담과 주치의를 맡아왔다. 한의학을 하다 보니 스트레스 치료의 가장 좋은 조건이 자연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했다.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사람들 대부분 활동량이 많이 떨어집니다. 가장 큰 해결책이 어떻게 하면 활동량을 늘리느냐 하는 점이죠.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 자연만 한 좋은 환경은 없죠. 물론 자연에서 어떤 방법을 쓸 것인가도 중요하겠지만 조용히 걷고 사색하는 것만으로도 심적 치유를 느낄 수 있습니다.”
걷기 여행이 주는 매력을 말하다
치유 프로그램이나 트레킹 스태프로 참여할 때마다 하나의 주제를 선정해 참여자들과 토론을 하고 강의도 한다. 선정된 주제에 관련한 책들을 먼저 많이 읽어두고 그 느낌을 걸으면서 계속 확인하는 과정을 거친다고 했다.
“스태프로 참여할 때는 걷기와 관련해 훨씬 더 많은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게 됩니다. 걷기 여행의 콘셉트을 제대로 가지고 가고 싶어서요.”
문득 걷기 여행을 예찬하는 김종우 교수가 이렇게 스스로 준비해 참가자들과 철학적 의미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 부담 되지 않는지 물었다. 예전부터 자신도 비슷한 방식으로 여행을 해왔기 때문에 괜찮다고 했다.
“그리고 나이 오십이 넘으면 내가 얻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얻은 것을 전해야죠. 선생의 즐거움은 가르침을 주는 것이잖아요. 가르침의 즐거움이 없으면 선생을 할 필요가 없죠.(웃음)”
김종우 교수는 일반인과 함께 참여하는 걷기 프로그램을 즐긴다. 아침 6시부터 밤 12시까지 걷고 명상하는 일을 반복하지만 행복한 시간이라고 했다.
“저는 정말 굉장한 스태프예요.(웃음) 아침 6시부터 명상이나 새벽 산책을 해요. 이때는 주로 육칠십대 분들이 참여합니다. 그리고 두 시간 걷죠. 아침식사를 하고 한나절을 걷고 점심을 먹고 또 걸어요. 저녁식사 후에는 허리나 무릎에 침을 놔줘요. 물집도 다 따주고요. 그러고 나서 오후 8시, 9시쯤 되면 밤 산책을 나가요. 그때는 사오십대가 많이 가세요. 대신 이 사람들은 다음 날 새벽에 절대 안 나와요. 저는 다시 아침 6시부터 밤 12시까지 걷죠. 풀타임으로요.(웃음)”
그렇다면 하루 중 가장 걷기 좋은 시간은 언제일까? 김종우 교수는 이른 아침 통이 트기 시작할 때를 꼽았다. 도시건 자연이건 가장 근본적인 원초적 에너지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이 바로 새벽이라는 것이다.
“가장 큰 접점은 해 뜰 때거든요. 여명이 딱 깃들 때 도시와 자연은 정말 달라요. 자연은 특히 이탈리아의 돌로미티 같은 곳에 가면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요. 새벽에는 그 도시의 풋풋함이 느껴집니다. 자연의 기운을 그대로 내 몸에 받아들이는 것이 명상인데 새벽에는 장애 요소들이 없잖아요. 새벽 산책은 도시건 자연이건 각성, 깨달음을 느낄 수 있는 최적의 시간이에요. 만약 도시여행이라면 해가 뜨고 나서 호텔로 돌아가기 전에 카페에 들러 에스프레소와 크루아상 하나 딱 먹으면 최고죠. 그리고 새벽에 걸으면 두 배는 더 여행할 수 있고요.”
모두가 말린 히말라야에 오르다
걷기 프로그램 주치의로 활동하다 급기야 히말라야 트레킹에까지 참여하게 됐다. 히말라야는 김종우 교수가 가서는 안 될 장소였다.
“저는 세 살, 일곱 살 때 심장병으로 수술을 받았습니다. 중·고등학교 때는 뛰지를 못하니까 체육시간에 맨날 낙오됐어요. 30대 중반에 부정맥 증상이 나타나서 반복적으로 응급실에 갔었고 중환자실에도 들어갔다 왔고요. 그런 저에게 히말라야가 다가왔습니다. 무조건 간 거죠.”
이런 제안이 없으면 언제 또 히말라야에 가보나 생각했다. 심장병 주치의가 말렸지만, 비아그라를 처방받아 네팔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아무 생각 없이 말이다.
“도보 코스도 굉장히 좋았고 마지막에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모든 것이 너무 좋았어요. 1000m에서 2000m, 3000m 갈 때 힘들어지는데 산은 올라갈수록 에너지가 생겨요. 반복적인 리듬으로 계속 가다 보면 걷는 게 쉬워지거든요. 트레킹을 아주 재밌고 멋지게 다녀왔죠.”
웃으면서 얘기했지만 사지 보행을 하면서 힘들게 올라갔다는 고백(?)을 받아냈다. 그 후로 스페인 순례자의 길인 산티아고를 비롯해 이탈리아 아말피 해안도로와 터키의 리키안 웨이 등 세계 유수의 트레킹 코스를 다녀왔다. 그렇게 걸어 다니면서 꼭 지키는 법칙이 있는데 밤 12시에는 반드시 잔다는 것.
“일과를 마치고 나면 마을 사람들이 다니는 선술집에 가요. 맥주 한 병 혹은 와인 두 잔이 딱 적당하죠. 그리고 함께 걸었던 사람들과 여행 이야기를 해요. 사람들이 똑같은 길을 온종일 걸었다고 칩시다. 그럼 다 똑같은 거만 볼까요? 얘기를 하다 보면 훨씬 더 다양한 느낌이 와요. 그러고는 밤 12시에 취침에 들어가는 거죠.”
가족과 함께 나서는 길
꼭 프로그램을 통해 걷기 여행을 하는 것은 아니다. 어렸을 때부터 걷기 여행 조기교육을 받은 대학생인 아이들과 아내가 함께 할 때도 있다. 작년에는 호주의 그레이트 오션 워크를, 올해는 일본 순례자의 길인 오헨로에 다녀왔다.
“그레이트 오션 워크는 100km인데 3일 동안 60km를 걸었습니다. 어렸을 때도 아이들이 배낭 메고 10km, 20km 걸었거든요. 일본 시코쿠에 1400km의 오헨로 길이 있어요. 88개의 절을 지나는 순례길이죠. 한 번 갔을 때 다 걸으려면 45일은 걸립니다. 저는 직업도 있고 일을 하는 사람이니까 딱 10년 계획을 세웠어요. 1년에 일주일 정도 120km만 걷자. 아내하고 아이들 다 데리고 갔어요. 그런데 기특하게도 우리 애들은 걷자고 하면 걸어요.”
물론 가족들과 가면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 계속 걷기보다는 도시 여행도 한다. 오헨로 길 여행 때는 이틀은 걷고 이틀 노는 방식으로 가족들과 시간을 보냈다. 다음 달에도 오헨로 길을 가는데 아내와 6일 내내 걷기로 했다.
“아내가 날 좋아하니까요.(웃음) 나 혼자 즐기는 게 억울해서 가는 거겠죠. 그런데 아내가 대단한 것이 10년 동안 그 길을 걸을 계획이라니까 일본어를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떠날 때마다 제안하겠지만 아마도 아내랑 함께 걷게 될 거 같아요.”
생사를 넘나드는 삶 속에서 얻은 깨달음
“언제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네 번의 전신마취를 했다. 그때 깨달았다. 수술대에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굴곡진 길 또한 쉼 없이 걸었다. 명상하고 마음을 다잡고 하는 건 벌써 오래전에 끝냈다는 김종우 교수.
“삶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봤자 달라지지 않아요. 문득 떠오르는 생각 속에서 ‘내가 이렇게 살아왔구나!’ 하고 한두 번 씩 깨달으면 됩니다. 내면의 뭘 찾겠다고 해봤자 다 내 삶이거든요.(웃음)”
올 초에도 몇 번이나 힘든 일들을 겪었다. 1월에 맹장염이 복막염으로 번졌다. 수술 도중에 담석이 발견됐지만 곧바로 제거하지 못하고 다음으로 미뤄야 했다. 심장이 약해 전신마취가 쉽지 않았던 것. 결국 일본 오헨로 길 여행을 다녀온 후에 담석 제거를 했다.
“간단한 수술이기는 한데 일본 트레킹 가서 아이들한테 그랬어요. 아빠는 언제 갈지 모른다고요. 너희들 대학교까지 보내고 잘 키워놨으니까 언제든 혼자 살 수 있겠다고 말했죠. 물론 술 먹으면서 잘 풀어서 대화했습니다. 우리가 걷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자연과 교감을 하는 것이죠. 건강한 삶을 추구하지만, 또 언제든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니까요. 자연의 이치 같은.”
가보고 싶은 길이 있냐고 물었다. 어디를 가도 좋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학회 때문에 미국 미니애폴리스에 갔을 때도 3시간씩 걸었어요. 어디가 중요한 것이 아니죠. 걸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습니다. 적당한 장소에 에스프레소와 크루와상이 있으면 정말 끝내주겠죠.”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스켈레톤과 봅슬레이 두 썰매 종목에서 한국 최초의 메달리스트가 탄생했다. 메달 소식과 함께 주목을 받은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한국체육대학교 강광배(姜光倍·45) 교수다. 그는 동계올림픽 최초로 모든 썰매 종목(루지, 스켈레톤, 봅슬레이)에 출전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후 썰매 불모지인 우리나라에서 제자를 발굴하고 육성에 힘쓴 그의 노력은 오늘날 한국 썰매의 발전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
‘한국 썰매의 아버지’, ‘한국 썰매계의 문익점’, ‘한국 썰매의 개척자’. 이 모든 수식어는 한국 썰매의 시초부터 함께한 강광배 교수에게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그와 썰매의 뗄 수 없는 인연은 20여 년 전으로 돌아간다. 때는 그가 대학교에 막 입학하기 전 무주리조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부터다.
한국의 첫 루지 국가대표 탄생
“휴무 날에 생전 처음으로 스키를 타봤어요. 아니나 다를까 스키에 푹 빠져버렸죠. 처음으로 확실한 꿈이 생겼어요. 국가대표가 되는 것.”
그의 스키 실력은 날이 갈수록 좋아졌다. 대학부에서 우승하는가 하면 스키장에서 강사로도 활동했다. 꿈에 한 발짝 다가가는 듯싶었지만 불의의 사고로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스키 강습 도중 십자인대가 끊어지는 부상을 당한 것이다. 절망하던 그에게 한줄기의 빛처럼 눈에 띈 게 있었다. 바로 학교 게시판에 붙은 루지 국가대표를 뽑는다는 루지 강습회 안내문이었다.
“태극 마크를 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어요. 루지가 뭔지도 몰라서 찾아봤는데 누워서 타는 썰매더라고요. 무릎에도 부담이 없을 것 같고… ‘아 이건 정말 나를 위한 종목이다’ 하곤 바로 강습회에 신청서를 냈죠.”
국제루지연맹에선 군터 렘머러 수석 코치를 파견해 한국 선수 지도를 도왔다. 말도 통하지 않아 손짓 발짓 해가며 루지 조종법을 익혔다. 제대로 된 장비나 훈련장도 없었다.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수준이었다.
“선발전이라곤 그냥 아스팔트 언덕길에 꼬깔콘 모양의 라바콘을 세워두고 누가 빨리 장애물을 피해 내려오나 초시계로 재는 거였어요.(웃음) 썰매에 바퀴를 달고요.”
아직 무릎도 완치되지 않은 몸을 이끌고 선발전에 출전했다. 잘못될 경우 재수술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부담감도 있었지만, 그가 품은 국가대표의 꿈이 훨씬 더 컸다.
“기회라는 게 자주 오는 게 아니잖아요. 정말 간절했거든요. 오히려 몸을 더 과감하게 던졌죠.”
그 결과 3명을 뽑는 선발전에서 2등을 기록했다. 1등과 3등을 한 선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루지를 그만뒀다. ‘루지는 비전이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대표팀을 꾸리기 위해선 서둘러 두 자리 공석을 채워야만 했다. 이때 새로 들어온 선수가 강광배의 3년 후배인 이기로와 현재 봅슬레이 대표팀 감독인 이용이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한국 첫 루지 국가대표팀이 탄생했다.
1996년 캐나다에서 열린 첫 전지훈련, 강광배 교수는 이날을 회상하며 “아팠던 기억밖에 없다”고 말했다.
“트랙에 하도 많이 부딪혀서 저녁만 되면 선수들끼리 서로 약 발라주느라 바빴어요. 보호대를 착용하면 그나마 덜했을 텐데 그 당시에는 보호대를 착용하는 것조차도 몰랐으니까요.(웃음) 썰매를 탈 때마다 연습복도 다 찢어졌는데 매번 새 옷을 입을 수 없는 형편이어서 찢어진 데를 테이프로 붙여가며 훈련을 했어요.”
마땅한 장비도 훈련장도 경기장도 없었지만, 루지 국가대표 3인방은 구슬땀을 흘리며 올림픽 무대를 향해 달렸다. 그렇게 처음 출전한 19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 강광배는 출전 선수 34명 중 31위를 기록했다. 기권한 두 명의 선수를 제외하면 꼴등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에게 등수는 중요하지 않았다.
“전 세계에서 썰매를 가장 잘 탄다는 선수들은 다 모인 거잖아요. 국가대표로 출전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었죠.”
불행이 행운이 되어 돌아오다
나가노 동계올림픽에 출전한 뒤 강광배는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체육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첫째 ‘루지를 제대로 배우고 싶어서’, 둘째 ‘더 넓은 세상에서 공부하고 싶어서’였다. 인스브루크 체육대학에 입학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한루지연맹으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통보를 전달받았다. 세대교체가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그의 선수 자격을 박탈한다는 내용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무릎 부상까지 겹쳤다.
“루지를 배우러 갔는데 가자마자 목표가 사라져버린 거죠. 유학 가기 전에 선생님, 친구들, 가족한테 열심히 하고 돌아오겠다고 했는데… 한국으로 돌아가자니 제 인생을 포기한 사람이 된 것 같더라고요.”
평생 흘릴 눈물을 하루 만에 다 흘렸다는 그는 ‘이곳에서 뭔가를 이루기 전까진 절대로 한국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이후 절박한 심정으로 더욱 공부에 매진하던 강광배는 어느 날 스켈레톤 선수이자 인스브루크 학생인 마리오 구겐베르거를 소개받는다. 루지를 탈 수 없었던 그에게 스켈레톤은 새로운 탈출구였다. 당시 트랙을 두 번 이용하는 데 들었던 비용은 약 5만 원. 스켈레톤을 타기 위해 그는 3~4시간 정도 폐지와 캔을 주웠다. 그래봐야 겨우 두 번 정도 탈 수 있었다.
“낮에는 민망하니까 사람들이 다 자는 밤에 나와서 폐지랑 캔을 주웠어요. 특히 강 주변으로 산책로가 있었는데 그 근처에서 신문을 보거나 맥주 마시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곳으로 자주 주우러 갔죠.(웃음) 덕분에 자전거 타고 한 바퀴 쭉 돌면 더 이상 실을 수 없을 만큼 주울 수 있었어요.”
그렇게 그가 스켈레톤에 미쳐 있을 때 생각지도 못한 희소식이 들려왔다.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 스켈레톤이 54년 만에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부활한다는 소식이었다. 스켈레톤은 1948년 생모리츠 동계올림픽 이후 선수가 별로 없다는 이유로 폐지된 상태였다.
“루지 선수 자격을 박탈당했을 땐 나한테 왜 이런 시련이 왔나 했는데 돌이켜보면 큰 행운이었죠. 덕분에 스켈레톤 국가대표로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또 한 번의 태극마크를 다는 길은 순조롭지 않았다. 대회에 나가기 위해선 의사의 확인도장과 연맹 회장의 직인이 찍힌 라이선스가 필요했다. 가장 큰 문제는 한국에 스켈레톤 연맹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를 자른(?) 대한루지협회에 전화해 도움을 요청했다. 국제연맹에 가입하는 건 좋지만, 그에게 10원도 지원할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래도 좋았다. 그는 가입에 필요한 서류를 모두 준비하고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을 털어 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렇게 1999년, 우리나라도 국제 봅슬레이 스켈레톤 연맹 회원국이 됐다.
“매년 국제연맹에서 회의가 열리는데 2000년에 제가 참석했어요. 갔는데 태극기가 딱 걸려 있더라고요. 뿌듯했죠. 우리나라를 국제연맹에 가입시킨 건 제 인생에서 가장 보람된 일이었어요.”
1998년 유학길에 올라 루지 선수 자격을 박탈당하고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 스켈레톤 국가대표로 나가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그는 되돌아보니 그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고 말한다.
“제가 힘들어도 계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썰매를 정말 좋아했기 때문이에요.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은 고생이 아니잖아요. 그땐 제가 미쳐 있었으니까요.(웃음)”
이젠 국민들의 관심이 필요할 때
강광배는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봅슬레이 출전을 끝으로 모든 썰매 종목에서 올림픽 진출이라는 기록을 세운다. 이후 한국체육대학교에서 썰매부를 맡으면서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스켈레톤 금메달리스트 윤성빈을 발굴하는 등 한국 썰매 육성에 힘을 보태고 있다.
“선수들과 지도자들이 노력해서 딴 메달입니다. 마치 제가 다 한 것처럼 비춰지지 않으면 좋겠어요. 전 그저 씨앗을 뿌렸을 뿐이고 농사가 잘된 거죠. 얼마나 큰 행운입니까. 잘 성장해줘서 고마울 뿐입니다. 이젠 저보단 우리나라를 빛낼 선수들과 감독, 코치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어요.”
썰매라면 이제 지겨울 법도 한데 그는 어쩔 수 없는 썰매 바보인가보다.
“가장 힘든 건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계속 가고 있다는 생각에서 오는 외로움이었어요. 이제는 터널을 빠져나와 빛을 봤으니 미련도 여한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