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국진(文國鎭·91) 박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법의학자다. 1955년 설립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창설멤버인 문 박사는 당시 국내에 생소했던 ‘법의학’이라는 분야를 뿌리내리고 기틀을 잡는 등 한국 법의학계의 큰 스승과 같은 인물이다. 그런 그가 말하는 인생의 스승은 바로 ‘죽음’이라고 한다. 수많은 주검을 부검했던 문 박사는 요즘도 부검을 하고 있다. 바로 ‘책 부검’이다. 그가 이야기하는 ‘죽음’의 교훈은 무엇인지, ‘책 부검’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을 통해 들어봤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전문서, 교양서 등 통틀어 53권의 책을 펴낸 문 박사의 저서 중에는 , , 등 법의학과 예술이 어우러진 작품들이 상당수 차지한다. 작가의 성향이나 느낌을 중시하는 예술 분야와 객관적 증거와 분석을 통해 이루어지는 법의학이 과연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대답은 문 박사가 법의학을 전공하게 된 계기에서 찾을 수 있었다.
“대학생 시절 소나기를 피해 잠시 헌책방에 들렀는데 그곳에서 처음 ‘법의학’에 대한 책을 봤어요. 책에는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학이 임상의학이라면, 사람의 권리를 다루는 의학이 법의학이다. 법의학은 인권을 소중히 여기는 문화가 발달한 민주 국가에서만 발달한다’는 내용이 있었죠. 그 글을 보고 가슴이 뛰더라고요. 어찌 보면 예술에 과학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어리석게 보일지 모르지만, 두 분야 모두 인간을 중심에 두고 풍부한 인간성과 사회 문화 창달을 목적으로 한다는 데는 공통점이 있지요.”
이러한 뜻으로 문 박사는 정년 후 인생 이모작을 ‘예술과 법의학을 접목하는 융합과학’에 힘쓰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 생소하고 어려운 일을 시작한 지도 20여 년이 지났고, 그동안 펴낸 책만 10여 권에 달한다. 그는 명확하지 않았던 예술가들의 사인을 밝혀내고 의학적 관점에서 예술작품을 해석했다. 문 박사는 법의학박사가 아니라면 분석해내지 못했을 요소들을 발견해 작품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그의 독특한 작업을 ‘책 부검(book autopsy)’이라고 표현한다. 특히 은 사람의 오감 중 후각적 요소에 집중해 다양한 예술 작품을 헤아려 보고자 했다.
“알고 보면 인간의 오감(五感) 중에 가장 천대받는 것이 후각이에요. 시각은 빛이 있어야만 기능하고, 청각은 일정 데시벨 이상의 소리가 있어야 하지만 후각은 숨 쉴 때마다 작용하죠. 사람의 오감 가운데 오직 후각만이 의식으로 인식되기 전에 감정 반응을 먼저 일으켜요. 그래서 후각과 예술을 접목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어요.”
삶의 경험과 새로운 지식의 융합으로 만나는 ‘인생 이모작’
에는 ‘조제핀의 제비꽃향 체취와 나폴레옹의 운명’, ‘막달라 마리아와 나드 향유’ 등 흥미로운 주제의 이야기들이 예술적, 의학적 분석과 함께 담겨 있다. 글에 나오는 그림이나 조각, 작가의 초상화 등을 함께 볼 수 있어 가볍게 교양서로 읽기에 좋고, 작품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해석이 있어 예술적 식견을 넓히는 데도 도움이 된다. 예술, 과학, 법의학 등에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에게나 권해볼 만하지만, 그가 특별히 중·장년에게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어떠한 분야의 전문가라도 정년퇴직하고 나오면 현역 때 가지고 있던 지식이 낡아져요. 나 역시 그런 기분이 들어 한동안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했죠. 정년을 앞둔 후배들에게도 인생 이모작을 준비하라는 조언을 해요. 한 분야를 마스터하고 다른 분야를 접하면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거든요. 그동안 갈고 닦은 경험에 또 다른 경험을 융합하면 정말 기가 막힐 일들을 해낼 수 있어요. 이러한 내 경험이 담긴 책이 인생 이모작을 계획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해요.”
문 박사가 중·장년 세대에게 강조하는 것은 한 가지 더 있다. ‘지식을 환원하자’는 것이다. 아흔을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학술대회나 강연회에 나가고, 언론사 칼럼이나 인터뷰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현재는 54권째 책을 집필 중이라고. 그가 이토록 가만있지 못하는 이유는 서둘러 지식을 환원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말 한우물만 팠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법의학에만 매진하며 살아왔어요. 그런데 그런 내 지식과 경험을 나만 알고 느끼면 될까요? 강의를 하든 글을 쓰든 무엇으로든 남겨야죠. 그럼 이것들을 남기기만 하면 되느냐? 자꾸 알리고 이야기해서 많은 이에게 환원될 수 있도록 해야죠. 이제 이만큼 살았으니 돌아갈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서둘러서 내 모든 것을 사회에 남기고 환원하고 가려고 해요.”
‘시활사(屍活師)’, 살아 있는 가장 큰 스승은 바로 ‘죽음’
모든 것을 사회에 환원하고 갈 것이라는 문 박사의 말대로 그가 환원하고자 하는 것은 학술적인 것만은 아니다. 가능하다면 자신이 가진 금전, 지위, 명예 등을 모두 내려놓고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고 한다. 법의학자로 살면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의 죽음을 직접 마주했던 그는 누구든 죽음을 앞두면 생전에 지녔던 모든 욕망이 사라지고 순수한 인간 본연의 자세로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 정주영 회장처럼 부와 명예가 대단했던 사람이 죽을 때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가지고 가는 게 없구나!’라고 했대요. 우리가 살아 있을 때 가지고 있던 재산이나 명예는 다 자기 만족이고 욕심일 뿐이지 죽을 때는 다 놓고 갈 수밖에 없으니까요. 우리가 매달리던 것들이 결코 행복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죠. 죽음 바로 직전에 말이에요. 야속하기도 하지만 인간에겐 죽음이 삶의 참 의미를 깨닫게 해주는 인생의 가장 큰 스승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뜻으로 ‘시활사(屍活師)’라는 말을 쓰고 있죠.”
문 박사는 나이가 들면서 ‘항시 죽음을 생각하라’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를 강조했던 선현들의 혜안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죽음’이 지닌 또 하나의 가치는 삶을 의미 있게 만든다는 것에 있다고 덧붙였다.
“만약 사람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어떨까요? 더 행복할까요? 아닙니다. 불로장생할 수 있다면 귀중한 것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목적이나 욕망을 가질 필요도 없고, 또 누군가를 진지하게 사랑하는 일도 생기지 않을 거예요. 생명이 그 의미를 잃게 되는 거죠. 인간은 죽음을 알기에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을 하면서 인생의 즐거움과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겁니다. 삶이 유한하기 때문에 더 우리가 사는 의미가 있는 것 아니겠어요?”
역사학자 문강 이이화(文岡 李離和·79). 그의 아버지이자 주역의 대가인 야산 이달(也山 李達: 1889~1958) 선생이 지어준 독특한 이름과 호에는 빛난다[離]는 뜻과 글 봉우리[文岡]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야산 선생은 다섯 아들과 딸에게 8괘 중 부모를 뜻하는 ‘건’과 ‘곤’을 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선견지명일까? 문강 선생은 역사 통서 를 집필해 높은 평가를 받았음은 물론이고 한국사의 대중화를 위해 한 줄기 빛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 그가 겪은 대한민국 역사 중 가장 잊지 못할 사건은 1987년 6월에 일어났다. 거리는 마스크를 쓴 시위대와 전투경찰, 짱돌과 최루탄, ‘호헌 철폐, 독재 타도’가 적힌 피켓과 닭장차가 맞서며 아비규환을 이루고 있었다. 6월 항쟁이다. 당시 50세였던 문강은 하루도 쉬지 않고 눈물과 함성으로 젖은 현장에 나가 민족 헌법 쟁취를 외치며 정보를 수집하고 다녔다. 그는 를 보며 그날의 역사 속 그날을 떠올려본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6월 항쟁이 일어나기 전해 2월, 이이화 선생(현 역사문제연구소 이사)과 서중석 교수(현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는 ‘근현대사를 중심으로 연구하고 이것을 대중화한다’를 목표로 역사문제연구소를 설립했다. 당시 집중적인 집단 연구에 열성을 다하던 그들에게 6월 항쟁은 가장 생생하고도 의미 있는 사건으로 남았다. 수많은 이의 피와 땀으로 일궈낸 자랑스러운 민주화운동이 정치적 상황과 무지로 인해 훼손되어가는 것이 안타깝다는 문강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 교수는 우리 국민이 현대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2005년 를 출간했다. 문강은 그가 집필하는 동안 응원을 아끼지 않았고, 초판본(2005)에 추천사를 쓰는 등 적극 격려했다.
“해방 이후부터 6월 항쟁까지 사진, 만평, 우표, 지도 등을 곁들여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했어요. 책이 나오자마자 읽어보고, 이건 정말 중요한 책이라고 생각했죠. 현대사에 관한 책을 쓰려면 영어 원서도 보고 해야 하는데, 나는 한자는 능통하지만, 영어는 한계가 있거든요. 이런 책을 써서 대중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은 늘 했는데, 서중석씨가 한다 해서 정말 기뻤어요.”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의 절규로 가득했던 6월의 거리
문강은 자신의 책에서 주로 다뤘던 고대사나 삼국시대의 역사도 중요하지만, 우리 현실에 가장 가까운 현대사를 알아야 현재의 어려움에 대처하는 판단력이 생긴다고 역설한다. 특히 6월 항쟁과 같은 민주운동은 자신의 이야기이자, 누군가의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의 이야기이며 결국 우리의 이야기라는 것.
“지금도 6월 항쟁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고 뿌듯해요. 매일 시위 현장에 나갔어요. 지나가던 버스에서 울리는 경적 소리, 사람들의 함성, 진동하는 최루탄 냄새까지 생생하게 떠오르죠. 우리 국민 스스로 민주 헌법을 쟁취하고 민주주의 절차를 찾아냈다는 점에서 세계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사건이라 생각해요.”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만 해도 역사문제 연구 자료를 발표하거나 강의하는 곳에는 수백 명의 사람이 모였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역사를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는 문강은 과거에 비해 그런 열기가 부쩍 줄었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 시절을 겪은 중·장년도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그 사건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아요. 그러니 아이들은 더 모를 수밖에요. 인터넷상에 퍼지는 그릇된 정보나 얕은 지식만 가지고 시위나 데모 등 민주운동을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여기기도 하죠. 역사를 정확히 알고 그 배경을 이해해야 현재의 문제에 대해서도 나름의 근거에 의한 판단을 할 수 있는데 말이에요.”
완결 10년, 그리고 다시 10년
이이화 선생 하면 를 빼놓을 수 없다. 1994년부터 10년간 22권으로 펴낸, 그야말로 인생의 역작이라 할 수 있다. 책이 완결되고 약 10년이 흐른 2015년, 그는 개정판을 냈다. 처음 완성하는 데만 10년, 그리고 다시 펴내는 데만 10년이 걸린 셈이다. 여전히 독수리타법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그가 오랜 시간을 투자해가며 개정판을 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처음 책을 낼 때는 우리 민족사·민중사·생활사 등을 어느 한쪽에 편협하지 않고 두루두루 종합적으로 쓰려고 노력했어요. 그런데 완성하고 난 뒤에 새로운 사건들이 일어났죠. 동북공정이나, 일본 위안부 문제 등 더 이야기해야 할 것들이 생겼어요. 우리 아이들도 볼 책인데 그런 내용이 빠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죠.”
그가 한국통사를 쓰고자 결심하고 아들에게 컴퓨터를 배워 1권을 낸 지도 20여 년이 흘렀다. 그동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얼마나 바뀌었을까? 그가 느꼈을 변화가 궁금했다.
“현대에 들어오니 민주운동은 다 사라지고, 오히려 민주운동을 하는 사람은 경제발전에 방해되는 인물로 취급하더라고요. 젊은이들은 ‘종북좌파’니, ‘빨갱이’니 하는 말을 개념 없이 쓰고요. 민주의식이 결여되다 보니 배려나 나눔의 정신도 사라졌죠. 오늘날 이만큼 살만하면 남을 배려할 줄도 알고, 인권을 이해하려는 자세가 필요한데 더 이기적이고 탐욕적으로 변해가는 것 같아요.”
문강은 그런 의식을 지닌 부모세대의 영향이 자식세대에 뻗치는 것을 우려한다.
“요즘 부모들을 보면 영어, 수학 공부는 시키면서 정작 인성교육은 소홀히 하는 것 같아요. 아이를 인간답게 키우기보다는 잘난 사람으로만 만들려 하죠. 자기 자식만 해를 입지 않으면 된다는 이기심에 공동체 생활에서 지켜야 할 교통질서나 예의범절은 뒷전이고요. 예전에는 안 그랬거든요. 남을 생각하고 민족을 위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시위도 활발할 수 있었죠.”
그는 어른세대가 아이들에게 배려하는 마음을 심어주는 것과 더불어 나누고 베푸며 살길 바란다고 말했다.
“6월 항쟁 때 상인들은 거리의 학생들에게 김밥이나 사이다 같은 것을 아낌없이 주었어요. 요즘처럼 자기 이익만 생각한다면 그런 행동을 할 수 없었겠죠. 나는 한국전쟁 유족이나 독립투사 후손을 만나면서 내 개인 소득에 비해 돈을 많이 썼어요. 나야 세 끼 밥 잘 먹고 있고, 병도 없고, 어디 투자하는 것도 아니니 삶의 여유가 그런 쪽으로 흐른 셈이죠. 그게 나눔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해외 재벌들을 보세요. 사회에 다 내놓잖아요. 그런 걸 보면 우리 사회는 나눔의 문화가 부족하다고 느껴요.”
어린이 도서관 인기쟁이 ‘역사 할아버지’
그가 역사의 대중화를 위해 그동안 낸 책만 100여 권이다. 개정판이나 공동 저서 등을 포함하면 200여 권에 달한다고 한다. 그중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어린이를 위한 역사책이다. 문강은 “역사는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이 쉽고 친근하게 역사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한다는 그다.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표현하려고 애쓰는데 쉽게 되는 건 아니더라고요. 오히려 아는 게 많아도 어린이 책을 쓰는 데는 지장이 생긴다는 것을 느꼈어요. 보여줄 것만 보여주면 되는데, 자꾸 내가 아는 걸 다 드러내려고 하니까 그게 참 어려워요.”
책을 쓰는 것 외에 그가 꾸준히 하는 일 중 하나는 독자와의 만남이다. 요즘도 그가 사는 파주 헤이리 근처 도서관에서 어린이 독자를 만나고 있다고. 문강은 어린이 팬 사이에서 ‘역사 할아버지’로 통한다며 흐뭇한 미소를 보였다.
“얼마 전에도 춘천에 있는 마을도서관에 다녀왔는데 그때 온 부모와 아이들이 인터넷으로 편지도 주고 참 즐거웠어요. 최근 인터넷에 한 군인이 를 10권째 읽었다며 소감을 썼더라고요. 자신이 나중에 사회생활을 할 때도 도움이 될 것 같다면서요. 역사 공부가 다른 게 아니에요. 과거에는 이랬는데 나는 이렇게 살아야겠다. 그런 상상력을 키우고, 삶을 살아가는 지혜를 배우는 과정이죠. 그런 독자를 만날 때면 내가 그동안 헛짓을 한 건 아니라는 생각에 보람을 느껴요.”
1992년 1월 8일 시작한 수요집회(매주 수요일 일본 대사관 앞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정기 시위)는 2011년 12월 14일 1000회를 맞았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렇다 할 해결책이 나오지 않아 위안부 할머니들의 아픔이 여전한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최근 일제강점기 세 소녀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 를 펴낸 권비영(權丕映·61) 작가는 “위안부 문제는 냄비 물 끓듯 일시적으로 분개할 일이 아닌, 가마솥에 불을 때듯 서서히 고아가며 해결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권 작가는 우리 문학이 그런 가마솥을 데우는 작은 불씨 역할을 하길 바란다. 그녀가 를 쓴 이유, 그리고 을 추천하는 까닭 또한 그러하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은 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처음으로 이야기한 소설가 윤정모가 쓴 역사 동화책이다. 권 작가는 을 처음 접했을 때, 그 제목이 참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면, “봉선화가 필 때쯤이면 돌아올 끼다”라는 순이의 말이 맴돌아 더욱 가슴 아픈 제목이기도 하다. 책에는 강덕경, 강일출, 김복동, 김순덕 등 위안부 할머니들이 직접 그린 삽화가 담겨 있어 애잔함을 더한다.
“윤정모 소설가는 우리 사회 문제에 대해 강성이 센 작가고, 특히 위안부 문제에 굉장히 관심이 많은 분 같아요. 를 시작으로 그동안 일제강점기와 위안부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꽤 나왔어요. 하지만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해 계속 묻혀왔죠. 수십 년 동안 끌고 온 민족의 문제인데, 주목받지 못한 게 항상 안타까웠어요. 그렇다고 덮어두고 멈출 수 있는 것은 아니죠. 저도 를 썼지만, 이러한 작품이 계속 나와 지속적인 관심을 끌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자라나는 키만큼 생각도 쑥쑥 크는 우리 아이들
권 작가의 말처럼 위안부 문제에 대해 다룬 책은 여러 권 있다. 그중에서도 을 꼽은 것은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어린이도 함께 볼 수 있는 책’을 추천해달라는 기자의 제안 때문이었다. 동화라는 장르는 부담 없었지만, 위안부가 주제라는 점에서 몇 가지 고민이 생겼다. 책은 일본군이 한국 소녀들에게 저지른 만행을 ‘못된 짓을 하려 한다’, ‘피에 젖은 옷자락’ 등 간접적으로 표현했는데, 이러한 상황을 아이들이 잘 이해할 수 있을지, 또 어른들은 어떻게 설명을 해줄 수 있는지 등이었다. 이에 그녀는 “대답을 피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요즘 아이들은 신체 성장뿐만 아니라 사고와 의식도 우리 때보다 더 성숙해요. 일단 아이들이 어떤 점에서 의문을 품었다면, 그만큼 그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질문할 생각조차 못 하고 넘어갔을 테니까요. 아이들에게 적나라하게 말할 수는 없겠지만, 상징적인 표현이나 이미지를 빌려 충분히 설명해주면 웬만큼 다 이해할 수 있어요. 아이들은 생각이 쑥쑥 자라는데 어른들이 민망하다고 해서 ‘그건 몰라도 돼’ 하는 식으로 넘겨버리면 우리 역사를 정확히 아는 기회를 빼앗는 셈이죠.”
그녀가 중학생 시절 배운 인수분해를 요즘 아이들은 초등학교 3학년 때 배운다. 체계적인 성교육을 받는 시기도 점점 빨라지고 있다. 그렇게 아이들의 의식은 앞서가는데 중·장년의 어린 시절 수준으로 바라볼 수만은 없다는 게 권 작가의 생각이다.
“언젠가 사인회에 초등학교 2학년, 5학년 자매가 온 적이 있어요. 는 어린이가 보는 만화도 있고, 청소년 소설로도 냈는데 그 아이들은 어른이 보는 책을 들고 왔더라고요. 그래서 너희는 왜 그런 걸 안 보고 소설로 읽었느냐고 했더니, ‘그건 너무 재미없다’는 거예요. 깜짝 놀라서 내용은 알면서 읽었는지 물으니까 다 이해했다 하더라고요. 물론 어른처럼 다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그만큼 아이들이 빨리 큰다는 것을 실감했어요. 언제까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고 끝나는 동화 이야기만 하면 안 된다고 느꼈죠.”
한 방울 한 방울 모여 거대한 강을 이룰 때까지
어른·아이 모두에게 사랑받으며 100만 부 돌파라는 기록을 세운 다. 역사 교과서 속 몇 줄에 지나지 않는 덕혜옹주의 삶을 재조명한 소설로, 현재까지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역시 우리나라 역사에 등장하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로, 시대적 아픔을 이야기한다. 의 소설가 윤정모는 ‘아픔이 피의 강물처럼 흘렀을 우리 여성들의 참극을 중편이라는 어중간한 그릇, 아니 그저 바가지 하나로 강물을 떠내서 핏빛만 보여 주고 만 꼴이 되었다. (중략) 좋은 작품은 후배들에게 기대해 본다’라고 썼다. 도 그런 기대에 부응하는 작품 중 하나라 할 수 있겠다. 윤정모 작가가 그랬고, 권비영 작가가 그렇듯 소설은 역사적 사실을 머리가 아닌 가슴 언저리에 박히게 하는 살아 있는 교과서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런 점에서 권 작가는 어깨가 무거울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가 큰 사랑을 받고 나니 덜컥 겁이 나더라고요. 내가 하는 게 잘하는 건가? 내 꿈에 취해 잘난척하는 건 아닌가? 그러다 보니 작가라는 자리가 얼마나 무겁고 영향력 있는 존재인가를 깨달을 수 있었죠. 저는 나서서 강하게 행동하는 성격이 아니거든요. 하지만 문학은 한 발짝 뒤에 서서도 얼마든지 내 주장을 펼칠 수 있잖아요. 그렇게 우리 사회가 꼭 짚고 넘어갈 문제에 대해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이 이후로 더 뚜렷해졌죠. 는 그런 작가로서의 책임감과 소명의식이 깃든 작품입니다.”
그렇다고 그녀가 자신의 소설로 단기간에 사회적 문제가 해결되길 바라는 것은 아니다. 뜨거운 자극에 의한 일시적 행동보다는 지속적인 관심으로 뭉근하게 데워가다 보면 더 합리적인 방법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 를 읽어보면 그런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드러내고 주장하는 인물이 아닌, 다소 평범하고도 침묵하는 소녀들을 통해 객관적 시선으로 더 큰 아픔을 발견하게 한다.
“제 소설을 읽고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두게 된 독자를 한 방울의 물에 비유하자면,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웅덩이가 되고 내[川]를 이룰 수 있겠죠. 내가 되면 졸졸졸 소리를 낼 수 있고, 그 내가 모이면 커다란 강을 이루고요. 그렇게 생긴 강은 누가 갑자기 없앨 수도 없을 뿐더러, 없앤다 한들 그 물줄기가 흐른 자리를 부정할 수 없을 거 아녜요. 작은 물방울들이 모여 이야기하다 보면 오히려 무기나 거친 표현을 하지 않고도 평화로운 방안이 도출될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우리 중·장년들도 아이들과 이런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끊임없이 관심의 영역 안에 있을 수 있도록 계기를 마련해야 합니다.”
책(book)과 사람(人)의 이야기를 담아온 ‘명사와 함께하는 북人북’. 이번 호에는 그 의미를 살려 책을 통해 맺어진 특별한 인연을 소개하려 한다. 바로 박상진(朴相珍·76) 경북대학교 명예교수와 박병원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이다. 지난해 3월호에서 박 회장은 박 교수가 쓴 를 추천했다. 박 회장은 그전부터 여러 언론을 통해 박 교수의 책을 호평했고, 이를 고맙게 생각한 박 교수가 그를 찾아가면서 인연을 맺게 됐다. 두 사람을 이어준 매개체는 책과 나무다. 이번 호에서 박 교수는 을 추천했다. 과거 박 회장과의 인연이 그랬듯, 책 그리고 궁궐을 매개로 한 새로운 인연을 기대하며 박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역사건축기술연구소의 김동욱 이사와 이경미 소장 등이 합심해서 펴낸 은 평소 궁궐을 자주 찾던 박상진 교수에게 아주 반가운 책이었다. 궁궐이라는 소재와 더불어 책 표지의 ‘동궐도(東闕圖, 조선 후기 도화서 화원들이 그린 창덕궁과 창경궁 그림)’에 그려진 나무들이 눈에 띄었다.
“그동안 궁궐에 대한 책이 많이 나왔지만, 궁궐의 건물들에 사람 이야기를 입힌 것이 특별하게 느껴졌어요. 건물은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잖아요. 선정전(宣政殿), 인정전(仁政殿), 낙선재(樂善齋), 성정각(誠正閣) 등 곳곳마다 얽힌 이야기를 소개해 역사와 더불어 선조들의 삶을 엿볼 수 있게 했죠. 문학이나 철학 등의 장르가 아니니 책 제목처럼 우리 궁궐을 이해하고 알고 싶은 분들에게 유용한 책이에요. 하지만 읽다 보면 내용의 깊이나 정보 면에서 결코 가볍게 볼 책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죠.”
책은 건물마다 실물 사진과 함께 동궐도에 그려진 모습을 보여준다. 지도에 나타난 모습이나 위치 등은 현재와 다른 부분도 있지만, 이를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라고 한다. 에도 동궐도가 자주 등장하는데, 현재의 모습을 반영한 지도가 있어 더불어 읽기 좋은 도서라 권할 만하다.
“지도와 사진, 이야기를 종합적으로 넣어 품이 많이 들어간 책이에요. 궁궐의 다양한 면모를 알고 가면 더욱 생생한 시선으로 역사를 바라볼 수 있죠. 손주와 함께 간다면 들려줄 이야기가 참 많을 거예요. 궁궐은 역사의 현장입니다. 책이나 교과서로만 알던 역사를 그 현장에서 다시 보면 아이들에게도 기억에 남는 교육이 되겠죠.”
궁궐의 나무는 다 알고 있다
박 교수는 , 등 줄곧 나무와 역사를 함께 이야기해왔다. 나무를 전공한 그가 이토록 역사에 관심이 많은 까닭은 무엇일까? 누구나 역사를 알아야 하겠지만, 나무와 연관 짓는 그에게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예전에는 지금처럼 카페를 가는 일이 드물었죠. 그럴 때 휴식을 겸해서 찾은 곳이 바로 궁궐이었어요. 일이 광화문 근처면 경복궁에 갔고, 종각 쪽이면 창덕궁이나 창경궁에 가서 쉬곤 했죠. 그런데 궁궐에 가보니 오래된 나무가 정말 많은데, 사람들은 별로 관심이 없더라고요. 왕도 떠나고 사람들도 떠났지만 나무는 수백 년 역사를 그 자리에서 지켜봤잖아요. 나무에 입이 있다면 많은 기록을 남겼을 텐데, 그럴 수 없으니 내가 나무를 대변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창경궁(昌慶宮)에는 영조 38년(1762년) 문정전(文政殿) 앞에서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의 비명을 들은 나무가 아직도 살아 있다. 문정전에서 조금 떨어진 선인문(宣人門) 앞 회화나무와 광정문(光政門) 밖의 아름드리 회화나무다. 선인문 앞 회화나무는 줄기가 비틀리고 속이 완전히 비어 있는데, 너무 가슴이 아파 속이 까맣게 썩어버렸다고도 이야기한다. 이 두 나무는 동궐도에서도 찾을 수 있다.
박 교수를 만난 창덕궁(昌德宮)에서 가장 오래된 어른 나무는 바로 선원전(璿源殿) 앞의 향나무(천연기념물 제194호)다. 약 750세가 넘은 것으로 창덕궁의 터줏대감과 같다. 이 향나무는 와 에 모두 소개됐다. 그러니 나무와 역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 말할 수 있겠다.
나이가 들수록 느티나무처럼
창덕궁의 향나무도 역사적 가치가 있지만, 그는 느티나무도 빼놓을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우리 궁궐에서 볼 수 있는 100여 종의 나무 중 박 교수가 가장 좋아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무다.
“느티나무는 우리나라 나무 중에 가장 재질이 좋아요. 그래서 조선시대 궁궐의 기둥, 가구, 양반들이 쓰던 탁자 등에 주로 쓰였죠. 쓰임새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의 삶에 보탬이 됐다는 뜻이에요. 느티나무의 용도는 한 가지 더 있어요. 요즘도 시골 마을 입구에 가면 오래된 느티나무가 지키고 있잖아요.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추해지기도 하는데, 나무는 세월이 흐를수록 멋있어지죠. 그 넉넉한 품으로 오랜 세월 백성들의 안식처가 돼 주고, 고달픈 삶을 위로해준 고마운 존재예요. 나도 그런 느티나무처럼 늙어갔으면 좋겠어요. 살아서는 어려운 사람의 마음을 보듬을 수 있고, 죽어서는 여러 쓰임이 되는 존재가 되고 싶어요.”
느티나무뿐만 아니라 모든 나무에는 본받을 점이 한 가지 더 있다고 한다. 바로 ‘주어진 환경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다. 나무는 한 번 뿌리 내리면 생명이 다할 때까지 그 자리에서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봄에는 꽃을 피우고 가을에는 열매 맺기 위해 노력한다.
“나무는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포함한 동물들은 자기가 마음에 안 들면 옮겨 다닐 수 있잖아요. 바람에 날아왔든, 동물이 물어다 놨든 열심히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죠. 요즘은 사회에 불평하고 참을성 없는 이들도 많잖아요. 우리도 나무를 본받아 주어진 환경에 최선을 다하려는 자세가 필요해요.”
4월 궁궐 나들이엔 ‘매화’
겨우내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해 최선을 다한 나무. 봄기운이 충만한 4월이면 궁궐에도 나무마다 꽃망울 터뜨리기에 분주해진다. 궁궐은 어느 계절에나 가도 좋다는 박 교수는 특히 봄에는 매화나무가 으뜸이라고 했다.
“4월 10일쯤 되면 궁궐에 있는 모든 나무가 꽃을 피웁니다. 그중에서도 꼭 한번 가서 보시라고 권하고 싶은 건 매화나무예요. 매화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나름의 고고한 자태를 뽐내는 품격 있는 동양의 꽃 중 하나죠. 조선시대에는 난초, 국화, 대나무와 더불어 사군자에 꼽히기도 했고요. 태종이 특별히 좋아하던 꽃인데, 창덕궁 선정전 앞에는 와룡매(臥龍梅)라 불리는 백매와 홍매 두 그루가 임진왜란 전까지 있었다고 해요. 지금은 덕혜옹주가 마지막까지 살았던 낙선재에도 매화나무가 많으니(근래에 심은 것), 아름다운 매화를 볼 겸 궁궐 나들이 떠나보는 것 어떨까요?”
우리가 살면서 겪은 고난은 몇 가지나 될까? 고통으로 몸서리치던 날들도 시간이 지나면 그것은 고난이 아닌 인생의 한 조각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실패와 우여곡절로 다듬어진 조각들이 모여야만 인생의 큰 지도를 그릴 수 있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 고전평론가 고미숙(高美淑·56)씨다. 그녀는 중년 이후 삶의 여정에 는 훌륭한 내비게이션 역할을 한다고 이야기한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그녀는 를 리라이팅하며 를 다시 봤다. 그전까지만 해도 는 만화 정도로만 생각했다고. 만화처럼 재미있는 이야기 속에 불교적인 깨달음이나 ‘인간이 왜 이렇게 긴 여행을 해야 하는가?’ 등에 대한 문제가 담겨 있다는 것은 중년 이후 정독(精讀)하면서 알게 됐다.
“기본적으로 남녀노소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인데, 거기에 그동안 생각해온 철학적 사유나 구원의 문제 등이 어우러져 있었죠. 정말 최고였어요. 아마 젊은 친구들이 읽으면 손오공이나 요괴 등의 캐릭터에 집중할 것 같아요. 하지만 중·장년이 읽으면 자신이 살아온 시간과 대비해 굉장히 많은 인식의 지도를 만들어 낼 수 있죠. 막상 이런 장편을 읽으라고 하면 중·장년은 ‘내가 책을 놓은 지 오래됐어’, ‘한동안 공부를 안 했는데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앞서지만 는 정말 쉽거든요. 심오하거나 고상한 것 없이 나를 아주 편안하게 깨달음의 길로 안내해 주는 책이죠.”
인생의 안전띠 ‘고난’
삼장법사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은 14년간 10만8000리를 걸으며 총 81가지 난(難)과 마주한다. 이들은 108 요괴와 대적하며 구법과 구원을 위해 천축(天竺, 인도)으로 향한다. 위험천만한 고비가 많지만, 고난과 실패 없이 사는 삶이 훨씬 위험하다고 말하는 그녀다.
“젊어서는 성공과 에로스를 향해 달려가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아요. 그러고는 나중에 ‘앞만 보고 달려왔어. 이제 나는 뭐하지?’라고 생각하면 인생은 허무할 뿐이죠. 오히려 자기 뜻대로 안 되는 게 다행이에요. 그러면 걸려 넘어질 테고, 더 달려가지 못하잖아요. 그게 결국 날 구하는 것이라는 걸 나이가 들어야 알아요. 젊을 때는 걸려 넘어지면 ‘나만 왜 이래?’라고 생각하지만, 나이가 들면 ‘사람은 다 그래’라고 이해하죠. 그때부터 진정한 어른이 된다고 생각해요.”
81난을 겪어야만 탐진치(貪瞋癡, 욕심과 노여움과 어리석음)를 덜어낼 수 있다는 의 내용처럼, 인간은 자랑스러운 실패를 경험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살면서 몇 가지 난을 겪었느냐”고 종종 묻는다. 대부분 대답을 들어보면 몇 가지 꼽지 못한다고. 그런 그녀는 그동안 몇 가지의 난을 겪었을까?
“굉장히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어요. 현대인이 흔히 말하는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를 고루 겪으며 살았죠. 그런데 나중에 고전을 공부하면서 ‘과연 그런 것들을 안 겪는 게 더 좋은 건가?’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돌아보니 내가 겪은 것들이 정말 한 줌도 안 되는 거예요. 물론 당시에는 그런 고난이 날 너무 무겁고 힘들게 했죠. ‘내가 이렇게 힘들었는데 너희가 뭘 알아?’라는 식으로 주변 사람을 폭력적으로 대하는 근거로 삼기도 했고요. 그런데 찬찬히 생각해보니 그런 환경이 나를 가로막은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가둬두고 있더라고요. 그때 깨달았어요. 내가 자발적으로 고난에 뛰어들면 구법의 여행이 될 수 있지만, 끌려다니면 상처가 된다는 것을요.”
결국 과거 고난은 있었지만, 현재까지 이어지는 고난은 없는 셈이었다. 그녀는 고난을 해결하지 못하고 상처로 받아들이는 이들은 약자가 되어 트라우마라는 착각을 핑계거리 삼는다고 지적했다.
“인생이 무엇인가. 인생은 부귀영화를 누리고 호강하려고 온 게 아니라 생고생을 자처해서 온 것이라 생각해요. 그것을 즐기는 거죠. 갖은 고생을 해서 한고비를 넘겼을 때만큼 뿌듯한 것도 없잖아요. 고난을 통해 내가 변한다고 느꼈을 때가 가장 행복해요. 그렇게 받아들이면 실패는 두렵지 않아요. 기꺼이 대응할 수 있죠.”
인생의 가을, 청춘으로부터의 해방
그녀는 중년을 가을이라 표현한다. 인생의 봄, 여름을 지나 겨울을 가깝게 느낄 수 있는 만큼 삶 전체를 아우르는 힘이 생기는 시기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공부를 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중년에는 자기 인생을 걸고 공부해야 해요. 젊어서는 경제적인 자립이 중요하기 때문에 무엇을 배워도 기술적인 것이나, 전문적인 것에 치중하죠. 중년이 되면, 스펙이나 진도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단기적인 목표도 아니죠. 중간 지점에 있기 때문에 삶 전체를 바라보는 통찰력, 그것을 걸고 공부해야죠. 그런 공부 없이는 노년을 버티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술이나 쾌락에 빠질 테고요. 그런 것을 뛰어넘으려면 진리와 접속하는 방법밖에 없어요.”
그렇다면 ‘인생의 진리’는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그녀는 끊임없는 질문과 마주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질문은 저절로 생기는 것인데, 그것을 자꾸 회피하죠. 청춘을 모방하는 방식으로 도망가려 해요. ‘내 청춘은 어디로 갔나’라고 탄식하며 말이죠. 가을이 됐는데 봄을 모방하는 것은 가을의 정취를 훼손하는 것이라 생각해요. 지금 보면 봄이 썩 그렇게 아름답지만도 않았어요. 저는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 1위가 20대예요.”
하지만 인생의 봄으로 가고자 하는 이들도 더러 있을 터. 봄이 아름답지 않다는 것은 그녀만의 생각이 아닐지 의아했다. 이러한 물음에 그녀는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는 것은 착각이라 생각해요. 지금의 경제력이나 명성, 능력 등을 그대로 가지고 간다면 돌아갈 만하겠죠. 지금껏 살아온 인생의 노하우에 몸은 젊으니까요. 나는 젊은 시절의 무능한 상태가 싫었어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죠. 지금의 나는 할 수 있는 것도, 줄 수 있는 것도 많고 세상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잖아요. 이게 좋은 것 아닙니까? 폐경기가 되면 또 어때요. 나는 여자다울 필요도 없고, 여러 가지 면에서 자유롭잖아요. 어려서는 얼굴에 점 하나도 큰 고민거리겠지만, 지금의 나는 그런 자잘한 괴로움에서 벗어난 삶을 살고 있잖아요. 그게 바로 청춘으로부터의 해방이라 할 수 있죠.”
진정한 노후대책은 ‘유머’를 갖는 것
에는 81난이 나오지만, 상황이나 인물의 행동 등은 유머러스하게 묘사돼 있다. 단순히 재미만 주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지혜와 깨달음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의 매력이다. 그녀는 나이가 들수록 그러한 유머를 겸비해야만 지혜로운 노인이 될 수 있고, 세대 간 소통도 원활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노인은 지혜롭죠. 하지만 노인의 이야기에 유머가 없으면 바로 설교가 돼버려요. 정말 옳은 말인데 듣기가 싫은 거죠. 그게 세대 갈등의 포커스예요. 노인은 정말 못지않게 많은 고난을 겪은 분들이잖아요. 하지만 그 경험들을 이야기할 때, 자기를 주장하지 않는 것, 그리고 자기를 주장하기 위해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필요해요. ‘너희가 뭘 아느냐’는 식으로 노년세대를 내세우고 군림하려는 태도로 전달하면 소통의 벽이 생겨요. 돈이 많으면 뭐합니까. 대화를 못 하면 혼자 떠돌아 다녀야 하는데. 돈에 대한 설계보다는 유머러스하게 대화하는 방법을 쌓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녀가 제시한 노후대책은 한 가지 더 있다. 죽음을 가깝게 느끼라는 것. 그리고 오늘을 소외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100세 시대가 되고, 대부분 중·장년이 30년 뒤를 생각하며 부담을 느끼죠. 하지만 그럴수록 언제든 죽을 수 있는 나이가 됐다는 것을 인식해야 해요. 당장 내일 죽는다 해도 억울할 나이는 아니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하루를 굉장히 집중해서 살 수 있어요. 앞으로 100세까지 뭘 하고 사느냐를 걱정하는 것은 내 삶을 유예시키는 것에 불과해요. 살아 있는 한은 죽음을 이해할 수 없어요. 죽으면 삶을 지속할 수 없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고, 또 언젠가 그날이 온다 해도 현재의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지금의 고민은 도움이 되지 않죠. 내가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오늘을 오롯이 살기 위한 것이에요. 거기에만 소용되는 것이죠. 그렇게 하루하루를 사는 것이 진정한 노후대책 아닐까요?”
이문재(李文宰·57) 시인 겸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2014년 을 펴내며 이런 말을 썼다. ‘시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대신 시란 무엇이어야 하는가라고 물었다. 시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고 묻지 않고 시가 무엇을 더 할 수 있는가라고 묻곤 했다. 시를 나 혹은 너라고 바꿔보기도 했다. 나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더 할 수 있는가. 그러다 보니 지금 여기 내가 맨 앞이었다.’ 지금 여기 맨 앞에 선 그는 를 통해 실천하는 지성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평소 자본주의 시대의 생태계와 소비문제에 관심이 많던 그는 한 일간지에 실린 짧은 서평을 보고 를 읽게 됐다. 책의 저자인 하랄트 벨처(독일 사회심리학자)라는 인물은 낯설었지만, 내용은 익숙하리만큼 그의 시집과 같은 맥락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난해 많은 책을 읽었는데, 새로운 미래에 관한, 가장 기억에 남는 책입니다. 제가 갖고 있던 에콜로지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하는 계기가 됐고, 특히 자본주의를 소비사회의 틀로 분석한 것이 참 인상적이었어요. 요즘 쓰는 칼럼들도 어떻게 소비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등에 대한 것인데, 그런 점에서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죠. 그동안 잘 몰랐던 부분을 건드려 주기도 하고, 새로운 생각을 확대해줘서 처음부터 끝까지 메모를 해가며 읽었습니다.”
하랄트 벨처는 미래를 되찾으려면 효율성과 소비, 성장에 기초한 삶에 대해 저항하고 삶의 기준을 행복과 지속가능성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스스로 생각하기, 스스로 행동하기’를 통한 실천적 저항을 제안한다. 이 교수 역시 이러한 제안에 동의하며, 무엇보다 우리 시대 중·장년의 각성과 의미 있는 행동이 필요한 때라고 말한다.
“지금 우리 기성세대가 좋은 미래를 위한 가능성을 만들어놓지 않으면 후손들의 미래는 없는 거잖아요. 지구적 차원에서 보면 후기 산업사회, 절정을 달리고 있는 자본주의가 누리고 있는 풍요가 미래세대의 것을 일방적으로 수탈한 셈이라고 생각해요. 지구의 자원은 미래세대와 공유하고, 남겨줘야 하는데 우리는 너무나 함부로 소비하고 있죠. 그런 점에서 중·장년세대가 뼈아픈 각성을 해야 해요. 는 그런 이들에게 우리가 누리는 물질과 풍요는 어디서 왔는가, 과연 정당한 것인가, 후손에게 물려줄 것은 무엇인가 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미래의 가장 소중한 가치는 행복
책에는 가치가 실천을 이끌어내는 시대를 지나, 실천이 가치를 이끌어낼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렇다면 기성세대가 실천해야 하는 것과 그들이 궁극적으로 이끌어내야 하는 가치는 무엇일까?
“그에 대한 해답을 한 리서치를 통해 설명할 수 있죠. 경희대학교 학생 1만4000명이 참여한 ‘미래대학리포트’를 살펴보면 ‘현재와 50년 후 미래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 1순위가 모두 ‘행복’이에요. 행복한 사람은 행복을 추구하지 않죠. 우리 아이들이 느끼고 있을 불행에 대해 기성세대들이 정말 심각하게 생각하고 행복한 미래를 위한 고민을 해야 합니다.”
흔히들 청년세대에게 "너희는 왜 꿈이 없느냐. 도전하지 않느냐"고 꾸짖지만, 이 교수는 그러한 행동은 가혹하다고 말한다. 굶어 죽어가는 사람에게 "너는 왜 비타민을 먹지 않느냐"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 굶어가는 사람에게는 물을 먼저 마시게 하고, 조금씩 먹여가며 기운을 차리게 하는 게 우선이기 때문이다. 그는 새로운 미래에 대한 저항 역시 청년 세대를 질타하는 것이 아닌, 기성세대의 행동이 솔선수범돼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서서히 기성세대와 행복한 미래에 대한 믿음을 쌓아가다 보면 자연스레 청년세대의 실천이 뒤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청년들로 하여금 지금과는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게 할 수 있을까요? 이제는 말하고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줘야 해요. 내가 안드로이드를 안 쓰고 애플을 쓰면 쟤들하고 다르다. 폭스바겐을 타지 않고 아우디를 타면 다르다. 어느 지역에 사는 것, 어떤 옷을 입는 것 모든 것이 소비를 통해서 신분, 계층, 삶의 질이 구분되고 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소비하는 것에 대한 반성, 성찰 그리고 올바른 실천이 필요합니다. 그런 행동을 통해 자본주의 시스템 바깥에서 덜 소비하면서 살아도 얼마든지 의미 있고 행복한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 아이들에게 보여줘야죠.”
에세이 쓰면 삶의 의미를 발견 할 수 있어
그는 생태와 환경 문제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상황이 몇몇 사람의 운동이나 캠페인 정도로는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느꼈다. 하지만 누구나 예외일 수는 없다. 중금속, 방사능, 초미세 먼지 등 이미 우리가 피할 수 없는 환경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느냐. 그는 결국 정치라고 말한다.
“이때의 정치는 여의도 정치, 청와대 정치 이런 게 아닙니다. 자기 정치를 의미하죠. 책의 서두에 실린 ‘성공적인 저항을 위한 12가지 지침’ 중 ‘모든 것은 달라질 수 있다. 그것은 당신에게 달려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것이 정치의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정치적 주체로 나서는 것이죠. 그렇게 하려면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자신이 생각하는 자기 정치의 주체는 어떤 모습인지를 생각하고, 스스로 법칙을 만들고 그것을 준수하는 것이죠.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기 정치는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책임을 지되, 그것을 표현해야 해요. 표현하지 않으면 타인과 만날 수 없으니까요. 이러한 과정을 공유하고 실천할 수 있어야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거죠.”
의 부제는 ‘스스로 생각하라’이다. 책의 마지막 장에는 스스로 생각하기의 본보기가 될 만한 다양한 사례들을 담았다. 이 교수가 실천하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궁금했다.
“시를 쓰는 거죠.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서 어떻게 시를 쓰겠어요. 또, 스스로 생각하기 위해 자주 걸어 다니려고 애를 씁니다. 그리고 글쓰기 강연을 하고 있어요. 서울시와 함께하는 서울시민대학 프로그램을 통해 ‘나를 위한 글쓰기’라는 강좌를 열고 있습니다. 글쓰기는 특히 은퇴 전후 중·장년층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야말로 국가와 사회와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아왔는데 자신의 삶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스스로 정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내가 이렇게 살아왔다고 누구한테 이야기할 수 있는 환경도 안 되고요.”
‘자기 성찰과 재탄생’이라고도 불리는 이 강좌를 통해 수강생들은 10편의 짧은 에세이를 쓰게 된다. 5편은 과거 삶에 대해, 3편은 현재, 나머지 2편은 미래에 관해 쓰는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를 담아낸 10편의 에세이를 묶어 놓으면 한 권의 자서전이나 다름없다.
“특히 중년 남성분들의 경우 공통적인 반응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 등을 쓰라고 하면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기업 임원 은퇴자든, 교수든, 공무원이든 살아오면서 그런 순간을 떠올려본 적이 없다며, 그저 앞만 보고 달려왔노라 말하죠. 글쓰기 과정을 통해 스스로 인생의 기승전결을 구성하다 보면 삶의 의미가 만들어져요. 누구나 그 안에 엄청난 보물을 가지고 있는데 이 사회가 그것을 못 돌아보게 했던 거죠.”
중·장년 수강생들이 공통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한 가지 더 있다. 대부분이 미래에는 타인을 위해, 사회를 위해 환원하고 봉사하며 살겠다고 쓴다는 것. 이 교수는 그런 이들이 같은 책을 읽으면 남다른 깨우침이 있을 것이라 말했다.
“에세이를 쓰다 보면 자기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돼요. 이를 통해 그동안 의미 있게 살아온 만큼 앞으로도 미래 세대를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느끼게 되죠. 누구나 그럴 수 있을 텐데, 그걸 알게 해주는 촉매제나 불씨가 없이 살아왔을 뿐이에요. 책에는 3~5퍼센트 법칙이 나옵니다. 각 분야의 3~5퍼센트가 다른 생각을 가지면 사회가 변한다는 거죠. 저는 우리 기성세대의 3~5퍼센트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새로운 미래가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만들어가길 희망하고 있어요.”
청소년기부터 클래식 음악을 좋아했고 베토벤의 곡을 즐겨 들었다는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전호근(田好根·54) 교수. 10년 전, 메이너드 솔로몬이 쓴 베토벤 평전 은 자연스레 그의 손에 들렸다. 처음 책을 접했을 당시에는 평전 글쓰기의 모범이라 생각할 만큼 저자의 분석력에 감탄하며 읽었다. 그때는 자료를 읽어내듯 눈으로 읽고 머리로 기억했는데, 그는 최근에 들어서야 같은 책을 마음으로 읽게 됐다. 지난해 여름, 국제학술대회 참가차 오스트리아 빈에 다녀오고부터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베토벤의 생가와 묘소를 둘러본 그는 한국에 돌아와 다시 을 꺼내 들었다. 과거 글쓰기를 염두에 두고 읽었을 때와는 다르게 감성적으로 느끼며 읽게 된 것. 그러자 베토벤의 삶이 보이기 시작했고, 인간 베토벤을 이해할 수 있었다.
“베토벤이 남긴 작품이 총 135곡이에요. 거의 모든 곡을 샅샅이 신물이 날 정도로 들었죠. 그렇게 익숙한 멜로디가 빈에 다녀오고 다시 이 책을 읽고 들으니 새롭게 들리는 거예요. 지식을 많이 알게 돼서 다르게 들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음악에 접근하는 감수성의 차이가 작용했던 것 같아요. 베토벤의 삶을 더 이해하게 되면서 음악도 좀 더 깊은 수준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 거죠.”
많은 사람이 베토벤의 음악적 재능을 인정하고 주목하지만, 전 교수는 베토벤의 인간적 면모에 관심을 기울였다. 1802년에 남긴 베토벤의 유서는 철학을 전공하는 그에게도 큰 깨달음을 주었다.
“유서를 보면 베토벤처럼 절대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조차도 인간적으로 인정받고 싶어 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어요. 자신이 인격적으로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끊임없이 강조하죠. 나 같은 철학자는 부당한 권력과의 관계를 어떻게 가지고 갈 것인가, 자기 수양은 제대로 됐는가 등으로 평가를 하는데 그런 까다로운 기준을 굳이 베토벤 같은 예술가에게 적용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베토벤의 유서를 읽고 생각을 바꿨어요. 아, 모든 사람은 인격적으로 인정받을 때 행복할 수 있구나. 아무리 권력과 부를 쌓아도 인격적으로 훌륭하다고 평가받지 못하면 불행한 거구나. 그게 인간의 보편적 욕구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베토벤은 서른두 살에 유서를 썼지만, 18세기 당시 평균수명이 30대였던 것을 감안하면 중년이나 다름없다. 30세 무렵부터 귀가 먹기 시작했기에, 음악가로서 중년의 베토벤은 자살을 결심하고 유서를 남긴 것이다. 전 교수는 위기를 지나 더욱 뛰어난 작품을 남긴 베토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 책을 소개한 이유를 말했다.
“중·장년이 되면 기회도 오지만 어려움도 많이 찾아오잖아요. 베토벤은 작곡가인데 귀가 먹어가니 심적으로도 힘들었고, 통증도 심각했죠. 그러한 시련을 오히려 자신의 창작력을 불태우는 원동력으로 삼거든요. 구애가 실패로 돌아가도 걸작으로 나오고, 귀가 먹어가는 고통이 있어도 그런 어려움이 뛰어난 작품으로 생산하죠. 그런 걸 보면 고난이 다가왔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베토벤이 잘 보여준다고 생각해서 이 책을 추천하게 됐어요.”
추운 계절의 소나무를 칭찬하는 까닭
전 교수는 공맹(孔孟) 유학과 조선 성리학을 전공하고, 16세기 조선 성리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지난해 원효부터 장일순까지 한국 지성인 35명의 철학을 담아낸 를 펴냈다. 그런 전 교수가 베토벤을 보면 떠오르는 한국의 역사적 인물은 누구일까? 그는 단연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라 답했다.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뿐만 아니라 경학과 실학 등의 다양한 학문까지 아우르며 학예일치의 경지에 오른 추사, 절대적인 명성을 얻은 점 또한 베토벤과 유사했다.
“베토벤이 몸에 병이 생기며 찾아온 내적 고통을 앓았다면, 추사는 역적으로 몰려 유배를 갔으니 외부에서 온 고난에 시달린 셈이죠. 베토벤이 고난을 이겨내고 위대한 곡들을 작곡했듯, 추사 역시 세한도 같은 작품을 탄생시켰어요.”
전 교수는 그들의 삶을 통해 시련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한다.
“추사는 시련을 겪으며 우정을 얻게 됐죠. 유배를 가서 정치적 생명이 다하고 나니 가까웠던 친구들이 하나둘씩 연이 끊기게 되거든요. 그런데 이상적(李尙迪, 1804~1865)이라는 제자는 그를 이전과똑같이 대하고 더욱 살뜰히 챙기죠. 고난의 시절이 있었지만 그를 통해 우정과 이상적의 인격을 확인할 수 있었던 거예요.”
그때 이상적의 우정에 감동해 추사가 남긴 작품이 ‘세한도’이다. 그는 세한도에 공자의 말을 덧붙여 마음을 전하는데, 내용은 이러하다. ‘세한연후(歲寒然後) 지송백지후조(知松柏之後凋)’, 추운 계절이 오고 다른 나무들이 시든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여전히 푸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대가 나를 대하는 것은 이전에도 더함이 없고, 이후에도 덜함이 없다. 나의 곤경 이전 그대는 칭찬할 만한 것이 없지만, 이후의 그대는 성인의 칭찬을 들을 만하지 않겠는가?
“삶이 평온하면 그 사람의 진정한 인격을 발견하기 힘들죠. 인격이라는 것은 사람 사이의 신뢰이기도 한데, 역경이 없으면 서로 간에 그런 것을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까요. 소나무가 푸르렀음을 알게 해준 추운 계절처럼, 인간에게 고난의 시간은 깨달음을 주죠.”
앞만 보고 달려온 중년, 이제는 나를 바라볼 시간
흔히들 요즘 중·장년들을 말할 때, 앞만 보고 달려온 세대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그만큼 열심히, 진취적으로 살았다는 의미가 있지만, 전 교수는 이제 자신을 바라봐야 할 때라고 조언했다.
“앞만 보고 달린다는 것은 성취, 다른 말로 욕망입니다. 돌아볼 줄 모른다는 거니까요. 그렇게 되면 자기 내면과 대화할 기회가 적은 거죠. 나이가 들고 어떠한 상실감을 느꼈을 때, 자신의 내면과 대화를 하면서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잃었는지 자각하면 자연히 겸손해지거든요. 잃어버린 게 많을수록 삶의 무게는 높아지고, 고통이 클수록 내면은 더 단단해지죠. 그러니 어느 순간 공허한 기분이 들었다면 그나마 다행인 거예요. 자신을 마주하고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니까요.”
전 교수는 지난 삶을 돌아보고, 자신의 내면을 돌볼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며 이상을 지키는 노력 또한 필요하다고 했다.
“젊어서든 나이가 들어서든 근본적인 철학이 변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애초부터 철학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봐도 중요한 비중을 두고 기술되지 않은 사람들은 젊은 시절부터 자신을 지키는 데 실패한 사람들이죠. 권력이나 출세 등의 외압에도 끝까지 자기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는데, 지킨다고 하는 게 반드시 사회적 지위를 기준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에요. 젊은 시절에 가졌던 이상, 그 이상을 포기하거나 모독하지 않고 끝까지 유지하는 게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것을 바꾸고 변절시키려고 외부에서 강요를 하겠지만 어떻게 지키는가가 자기 수양이죠. 결국 그런 신념이나 이상을 잘 지키는 게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해요.”
1996년 로 제27회 동인문학상을 받은 소설가 이순원(李舜源 · 57). 하지만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던 그였다. 아버지로 인해 겪은 유년시절의 상처와 어머니의 아픔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에게 죄송스러웠지만 그럴수록 전화 한 통 드리는 게 더 어려웠다. 무거운 마음으로 지내던 어느 날 아버지에게서 연락이 왔다. 좀 다녀가라는 것. 아버지의 얼굴을 바로 마주할 자신이 없었기에 그는 조금 천천히 다가갈 길을 택했다. 아들 상우와 함께.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대관령 꼭대기에서 아버지 집까지는 50리(약 20km). 차로 가면 30분이 안 걸리지만, 걸어서 가자면 네다섯 시간은 걸어야 하는 거리다. 그 길을 초등학교 6학년인 큰아들 상우와 걸어서 가기로 한 것이다. 아내와 둘째 아들이 차를 타고 가서 먼저 아버지를 달래 드리는 동안 그도 속죄하는 마음으로 그 길을 걸어가고자 했다.
“아이와 길을 걷다 보니 집에서는 하지 못했던 다양한 대화가 오갔어요. 식탁이나 소파에 앉아 어떤 목적성을 가지고 하는 대화보다 훨씬 풍부하고 자연스러운 이야기를 할 수 있었죠. 내가 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듯 아들도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을 거고, 내가 아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듯 아버지도 내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을 거 아녜요. 오랜 대화를 하다 보니 아들의 생각도 아버지의 마음도 이해가 되더라고요.”
덕분에 그는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단 하루였지만 훌쩍 성장한 아들의 모습에 가슴이 뿌듯하기도 했다. 그날의 경험을 쓴 소설이 바로 이다. 그는 많은 아버지들이 아이들과 대화를 통해 자신이 느낀 감정을 공유할 수 있기를 바라며 이 책을 권한다.
“대부분의 가정이 엄마와는 대화가 되는데, 아버지와는 필요한 말만 하잖아요. 어떤 문제가 생겨야 이야기를 하는데 그마저도 남편들은 아내에게 미루게 되고요. 대화도 훈련이거든요. 자주 하려고 노력해야 하는데, 처음에는 서먹하고 어려울 수 있겠죠. 그럴 때는 대관령 옛길처럼 함께 오래 걷는 길을 가보세요. 걱정은 말고요. 일단 길 위에 서면 대화는 자연히 이루어지니까요.”
길 위에서 배우는 인생의 희로애락
실제 이야기를 토대로 썼지만, 순서는 새롭게 짰다. 대관령 굽이의 길이에 따라 긴 굽이에는 긴 대화를, 짧은 굽이에는 짧은 대화를 풀었다. 그는 길고 짧은 굽이가 모여 긴 대관령 옛길이 이어지듯 우리네 삶도 이런저런 일들이 모여 인생을 이룬다고 했다.
“책을 보면 아들이 한 굽이를 걷다가 ‘이 굽이는 짧다’며 좋아하죠. 거리는 정해져 있는데 이번 굽이가 짧다고 해서 걸어야 할 게 줄어드는 것은 아니잖아요. 짧은 굽이가 있으면 긴 굽이가 있게 마련이죠. 험한 길이 있으면 편한 길도 있고요. 인생의 희로애락처럼 말예요. 또 어떤 굽이를 갈 때는 아이가 뛰어서 가보자고 하죠. 그렇게 두 굽이를 달리다가 결국 발이 미끄러져 다쳤잖아요. 먼 길을 가야 하는데 고작 두 굽이를 빨리 왔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죠. 인생도 그래요. 빨리 이루고 싶은 욕심에 조급해하기보다는 멀리 보고 꾸준히 걸어가야 해요. 상우도 그런 경험을 통해 인생의 굴곡을 어느 정도는 이해했을 거예요.”
상우가 대관령 옛길에서 인생의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그에게도 무언의 가르침을 준 길이 있다. 중학생 시절 등굣길에 있던 오솔길이다. 핑계를 대고 학교를 가지 않으려던 때였는데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가방을 들고 먼저 오솔길을 향했다. 길 양옆으로 무성하게 자란 풀에는 주렁주렁 이슬이 맺혀 있었는데, 어머니는 아들의 옷이 젖기라도 할까 봐 말없이 이슬방울을 툭툭 털어내며 앞장서 걸어가셨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느낀 어머니의 사랑은 그의 인생에 큰 교훈과 원동력이 되었다. 아들 상우에게는 ‘엄마 책상’이 그런 가르침을 주었다. 책에서 아들이 “나는 엄마가 엄마 책상을 가지고 있는 게 참 좋아요”라며 “친구들 집에 가도 엄마 책상이 없는 집이 더 많아요. 아뇨, 거의 다 없는 것 같아요”라고 하는데, 그런 현실이 늘 안타까운 그다.
“여자는 결혼하면서 장롱, 냉장고, 세탁기 등 많은 것을 준비해요. 그런데 정작 책상은 생각을 안 하죠. 식탁이나 화장대에 앉아 책을 볼 수도 있겠지만 책상이라는 것은 자아의 성역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누구에게나 책상은 중요하죠. 어질러진 책상이라도 아이들이 책상에 앉아 있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자라는 것이 정서적으로도 좋고, 산교육이 되죠. 아내가 일본어를 독학하겠다고 한 적이 있어요. 그런 도전도 책상이 있으니까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아내가 꿈을 키울 수 있도록 남편이 아내에게 액세서리가 아닌 예쁜 책상을 선물해준다면 좋겠어요.”
책에 나온 아이, 그 이후
책이 나온 지도 19년이 흘러, 올해 32세인 상우는 결혼을 앞두고 있다. 초·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릴 만큼 유명했던 소설인지라 상우의 별명은 예나 지금이나 ‘책에 나온 아이’다. 가정의 달이면 상우와 인터뷰하자는 요청이 있었지만, 아이의 정서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칠까 염려한 그는 동반 인터뷰는 거절해왔다. 어른이 된 상우도 그때 아버지의 결정에 고마움을 표하고 있다.
“아들은 그때 통제를 잘해주었다며, 어리지만 세상사에 대해 아버지와 대화를 나눴다는 것을 좋게 기억하죠. 그 이후로는 상우랑 대관령을 걸어보지는 못했어요. 대신 평상시에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이죠. 나중에 군대를 제대한 둘째 아들이랑 그 길을 걸었는데, 감회가 새로웠어요. 자녀가 어른이 되면 차곡차곡 가방에 짐 싸주듯이 대화를 하는 게 아니라 더 폭넓고 인문학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더라고요. 그런 순간을 기다리기도 했죠. 아직은 내 품에 있을 때 다시 그 길을 아이들과 걸을 수 있다면 참 좋겠어요. 아들도 언젠가는 자기 아들과 그 길을 걸을 날이 오겠죠?”
1. 배우자에게: 다비드 르 브르통 산문집
이것은 그냥 걷기에 대해 안내하는 책이 아니다. 우리가 자연과 함께 사색하며 가슴 뿌듯한 기쁨을 안고 걷는 걸음걸이에 대한 철학과 인문학이 담겨 있다. 책도 읽고 아파트 단지 한 바퀴라도 배우자와 함께 자연을 벗 삼아 걷는 것은 어떨까.
2. 자녀에게:
얘들아, 그 어떤 책보다 재미있는 책이 좋지. 삼국지는 재미있으면서도 세상에 대해 또 수많은 사람의 유형에 대해 얘기하는 책이란다. 읽다 보면 사람들이 왜 이 책을 다섯 번도 읽고 열 번도 읽는지 알게 되지.
3. 친구에게: 칼 세이건
여보게, 이 책은 참 오래전에 나온 책이야. 요즘 우리가 사는 모습
참 각박하지. 하늘 한번 바라볼 틈도 없지. 그럴 때 이 책을 펼쳐보시게. 지금 자네가 고민하는 것, 그 고민을 말끔하게 해소해 주지는 못해도 그게 우리 가슴안의 참 작은 일이라는 걸 깨닫게 하지. 나이 들수록 이 세상만 보지 말고 우주를 쳐다보자고.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해 검사로 활동하며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 법무연수원 원장 등을 거쳐 10년 전부터는 변호사로 살고 있는 법무법인 대륙아주의 정진규(鄭鎭圭·69) 대표변호사. 탄탄대로의 그의 삶에는 분명 나름의 비법이 있을 터.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노라고 말하는 정 변호사에게 은 인생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어준 책이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인터뷰에 앞서, 추천 도서 선정에 신중함을 잃지 않았던 그다. 한때 낭만을 가득 품고 읽었던 러시아 문학, 나폴레옹의 전기나 헬렌 켈러의 수필 등 많은 책이 그의 생각에 머물렀다. 학창시절 도서관에 있는 책들을 다 읽을 정도로 독서에 심취했던 정 변호사는 그때 읽었던 책들이 삶의 자양분이라고 말한다. 그런 그가 오랜 고민 끝에 선정한 책은 이다. 책에 대한 기억은 50여 년 전 처음 읽었던 그때가 전부라고 했다. 반세기 만에 꺼내든 책이지만 머리보다는 가슴에 새겼기에 그 메시지만큼은 또렷이 남아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입시를 코앞에 두고 목표는 서울대 법대였는데 성적이 많이 떨어져 있었어요. 모의고사를 보고 담임선생님이 어머니께 지금 성적으로는 원하는 대학은 어림도 없다고 하셨죠. 남다른 의지가 필요했던 그때, 우연히 을 발견했어요. 마력이라는 단어에 끌려서 정말 순식간에 읽어냈죠. 사실 그때 이후로는 한 번도 읽지 않았지만 그때의 감정과 메시지는 매사 잊지 않고 지내왔어요.”
정확한 목표를 갖고 그것을 이뤄낼 수 있다는 강한 신념과 열망으로 최선을 다하면 원하는 바를 성취할 수 있다는 메시지가 주를 이루는 이 책은 정 변호사의 인생관과도 흡사했다. 본래 낙천적인 성격을 지녔지만, 행동에 적극적이지는 못했던 그였다. 책은 수줍음이 많았던 그에게 자신감을 심어줬고, 그 자신감은 곧 행동에 힘을 실어주었다. ‘행동이 따르지 않는 신념은 죽은 것이다’라는 책의 한 구절처럼 신념에 자신감 넘치는 행동이 더해지자 그의 인생은 더욱 만족스러운 모습으로 나아갔다.
“잠재하고 있던 능력들이 자신감을 통해 발현됐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누구에게나 이 책을 권하고 싶어요. 사람이 사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죠. 좋은 것을 믿고 받아들이는 자세로 사는 것과 매사에 의심하고 회의적인 자세로 사는 것인데, 기왕이면 좋은 것을 취하고 장점을 부각할 줄 아는 사람이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해요. 꼭 무언가를 이뤄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마음가짐으로 사는 것이 삶에 만족도 주고, 행복이나 가치 추구에 굉장히 도움이 돼요. 또, 잘 안 되더라도 그 결과를 좋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생기고, 과정이 즐겁게 남겠죠.”
마음속 그림대로 끌려온다
열망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신념의 마력. 그의 신념은 정말로 마력을 발휘했을까? 정 변호사가 열망해온 삶이 궁금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하잖아요. 마음먹기 따라 달라지고, 믿는 만큼 이뤄낼 수 있어요. 명예롭고 정의로운 검사가 되고자 마음먹었었죠. 그게 목표였고, 국가와 사회, 이웃에 보탬이 되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어요. 최선을 다하면 이루어질 테니 그것을 통해 행복하게 살아보자. 그렇게 검사로서는 서울 고검장, 법무연수원장까지 했으니 할 수 있는 만큼 한 셈이죠. 그 뒤로는 총장이나 장관이 돼야 하는데 그건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요. 하지만 충분히 만족하고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해요.”
긍정적인 자세로 최선을 다해온 덕분에 만족스러운 지난날을 회상하는 정 변호사에게도 위기는 존재했다. 하지만 그런 날도 강한 신념과 노력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었다.
“1980년대 말, 마산지방검찰청 충무지청장으로 있었는데 대우조선에서 1만여 명에 달하는 노조가 열흘 넘게 파업하는 심각한 사건이 벌어졌죠. 그맘때 울산에서 현대 파업 사태가 난항을 겪어 분위기는 절망적이었어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라는 말을 떠올렸죠. 사용자와 노조의 문제점을 면밀히 분석하고 분명히 해결되리라는 강한 신념으로 최선을 다했어요. 당시 공권력이 1만4000여 명 투입되기로 예정돼 있었는데, 실제는 경찰이 3000여 명밖에 없었는데도 파업문제를 원만히 해결할 수 있었죠. 그렇게 굉장히 크다고 여겨지는 문제에도 해결의 길은 있기 마련이거든요. 어려움에 닥치면 좌절하거나 꺾이지 말고 ‘어! 왔어? 한번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부딪혀보고 열심히 방법을 찾다 보면 분명 해결할 수 있다고 믿어요.”
열망하는 삶, 다채로운 삶
늘 호기심 어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그는 아직도 해보고 싶은 일들이 무척 많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가 열망하는 인생 이모작은 어떤 모습일까?
“실은 검사직을 그만두고 학계로 가거나 다른 일을 해볼까 생각했는데 이런저런 인연으로 변호사를 하게 됐죠. 외국 기업으로부터 특허침해소송을 받은 우리 기업을 구제한 적이 있는데 그런 일들이 참 보람 있더라고요. 기업이나 개인을 도우면 사회에 보탬이 되고 제게도 보람이 있으니 얼마나 행복해요. 그렇게 지금은 법인의 대표 변호사로서 주어진 일에 전념해야겠고, 후배들을 잘 격려해 훌륭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하고 싶어요. 일로는 그렇고 궁극적으로는 다채로운 삶을 사는 것이 목표예요. 도둑질이나 남 해치는 것 빼고는 다 해보자는 마음으로 살아왔죠. 가령 취미 생활을 해도 대충 하는 법이 없었어요. 바둑도 아마 5~6단 정도 될 때까지 했고, 테니스도 테니스 전문 잡지에 선수로 나갈 만큼 치열하게 했죠. 요즘은 클라리넷에 관심이 있는데 일이 바빠서 시작은 못 하고 있어요.”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그에게선 삶의 만족과 행복이 느껴졌다. 너그러운 미소에서는 인생의 즐거움이 묻어났고, 반짝이는 눈빛에는 강한 자신감이 맺혀 있었다. ‘열망, 노력, 자신감’ 이 세 가지가 선순환하며 행복한 그의 삶을 이끌어 가는 듯했다.
“빌 게이츠가 매일 뭘 하는지 아세요? 그도 신념의 마력을 아는 사람 같아요. 매일 아침 주문처럼 외우는 게 ‘아브라카다브라(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 ‘오늘은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 ‘나는 할 수 있어’ 이 세 가지라고 해요. 그처럼 기왕이면 하는 일에 즐거운 상상을 하고 자신감을 느끼는 것이 긍정적 영향을 주죠. 무언가를 간절히 희망하면 열심히 하게 되고, 열심히 하면 이룰 수 있는 것이 많아지고, 그 성공이 다시 자신감으로 축적되죠. 그렇게 쌓인 자신감이 제 삶의 활력이자 원동력 아닐까요?”
한류와 케이팝 등의 여파로 문화의 힘을 실감하는 요즘. 30여 년을 문화체육관광부에 몸담았던 신현웅(辛鉉雄·72) 웅진재단 이사장은 세종대왕을 떠올려 보곤 한다. 훈민정음 창제와 더불어, ‘종묘제례악’을 작곡할 만큼 언어와 음악의 힘을 바탕으로 정치를 펼친 세종의 선견지명에 감탄하던 그에게 는 단연 고개를 끄덕이게 할 만한 책이었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웅진재단에서 수학·과학·예술분야 영재들을 위한 장학 사업을 운영하는 신 이사장은 분기마다 3~4권의 책을 직접 골라 지원하고 있다. 도 아이들을 위한 책을 고르면서 접하게 됐는데, 평소 세종대왕의 문화 정치에 관심이 있던 그에게는 더욱 흥미롭게 다가왔다.
“21세기는 문화의 시대라고 하잖아요. 그동안 정치적 성장이나 경제적 기적은 많이 이루어 왔는데 이제는 명실공히 문화 국가를 만들어야 할 때가 온 것 같아요. 세종은 ‘예(禮)와 악(樂)을 갖춘 사람이 덕인(德人)’이라 했는데, 그 정신을 되살려서 나라의 격도 더 높이고 온 국민이 문화와 더불어 화평하게 사는 세상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재미있게 읽었어요.”
책의 저자인 극작가 신봉승은 현 정부 부처의 장 자리에 조선시대 명현들을 대입해 이상적인 정치가의 표상을 제시했다. 대통령에 세종대왕, 국무총리에 오리 이원익, 기획재정부 장관에 퇴계 이황 등 20명이 등장한다. 1998년부터 이듬해까지 문화관광부 차관을 지낸 그에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 선정된 연암 박지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박지원은 과거에 낙방하고 스스로 학문을 깨치기 위해 북경과 열하에 가서 직접 그들의 학문과 문화를 접하고 돌아왔죠. 그때 탄생한 것이 바로 고요. 사실 문화라는 것이 그래요. 어떠한 법칙이나 이론으로 국민들을 일부러 계도한다 해서 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자신의 경험을 통해 눈을 뜨고 그것이 몸에 배서 우러나는 것이죠. 그러한 식견과 유연한 사고방식을 가진 연암을 문화체육부 장관으로 꼽은 걸 보면 저자 역시 문화에 대한 가치관이 잘 갖춰진 분이라 생각해요.”
법으로 다스리지 말고, 예를 가르쳐라
‘법으로 규제하면 피동적인 국민이 되고, 예(禮)를 가르치면 스스로 알아서 행동하는 상식적인 국민이 된다.’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으로 꼽힌 사계 김장생이 남긴 말이다. 신 이사장은 문화도 지식의 차원을 넘어 피부로 접할 수 있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모든 것을 법이나 정책으로 해결하면 한계가 있어요. 하지만 예가 갖춰지면 자연히 사람 도리를 하게 되고, 질서가 생기게 되죠. 그런 과정이 ‘본(本)’이라 할 수 있고 거기에 덧붙여지는 지식이나 법 등을 ‘말(末)’이라 할 수 있어요. 아이를 교육할 때도 예를 가르치는 것이 기본이고, 간혹 나타나는 비행청소년들을 훈계하기 위한 부수적인 방법으로 법을 적용하게 되는 거죠. 이게 거꾸로 되면 사회가 아주 삭막해지고 황폐해져요. 문화도 마찬가지죠. 먼저 음악도 듣고 예술 작품도 보며 문화를 몸에 배게 하려는 노력이 필요해요. 그 뒤에 지식이나 정책 등이 어우러져야 잘 흡수가 되는 거죠. 제가 문화관광부에 있을 때도 깊은 철학과 신념은 없었지만 그런 것에 의미를 두고 하려고 노력했어요.”
신 이사장은 문화란 모든 삶의 양식이라 말한다. 문화적인 삶을 살면 인생이 풍성해지고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것. 나이가 들수록 일상을 단조롭게 느끼는 이들이 많지만, 다양한 문화를 향유하는 사람은 그만큼 할 일이 많아 지루할 틈이 없다고 한다.
“예전에는 음악 한 곡 들으려면 얼마나 어려웠는지 몰라요. 지금은 간단하잖아요. 해외 공연이나 유명 미술품을 만날 기회도 많아졌고, 찾아보면 알뜰하게 문화적 욕구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많아요. 저도 좋은 책을 많이 읽으려 하고, 영화나 공연도 보면서 틈틈이 글도 쓰고 있어요. 특히 발레 공연은 거의 다 볼 정도로 좋아해요.”
‘짜르디 짜르디’ 하지 말고 ‘비스타리 비스타리’
여유가 생기면 해외여행도 어렵지 않으니 얼마든지 여러 나라의 문화를 경험해볼 수 있는 요즘이다. 신 이사장은 다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언어를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만큼 문화와 언어를 한 몸처럼 생각하는 그는 2008년 다문화가족 음악방송을 개국했다. 타지에서 외롭게 살아가는 다문화가족을 위해 각 나라의 DJ가 모국어로 모국의 음악과 소식, 한국 생활에 필요한 정보 등을 제공한다. 다문화가족 음악방송을 이야기하는 신 이사장의 눈빛에서 문화에 대한 그의 진심어린 애정과 신념이 느껴졌다.
“1970~1980년대에 영국과 사우디아라비아에 문화 공보관으로 있었을 때가 생각나요. 고향 생각에 힘들 때 다른 무엇보다 ‘그리운 금강산’이나 ‘가고파’ 같은 노래를 듣는 게 가슴 찡한 위안이 되던 때였죠. 지금 우리나라에 와 있는 외국인들이 17만 명이 넘어요. 그들을 돕는다고 돈을 얼마나 많이 줄 수 있겠어요. 그럴 수 없다면 그들 나라 노래 한 곡이 더 큰 위로가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시작하게 됐죠. 물론 많이 알려진 것은 아니지만 실제 모국의 언어가 그립고 소통이 간절한 외국인들에게는 희망이고 활력이 되는 존재예요.”
신 이사장은 오래전부터 해외를 방문하게 되면 그곳의 시나 노래를 그 나라 언어로 외워가며 존중을 표하고 있다. 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외국 시 한 구절을 부탁하자, 그보다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하나 들려준다고 했다.
“네팔 히말라야산맥 등반대를 가이드하는 현지인을 ‘셸파’라 하는데, 그들 말이 한국 사람은 너무 ‘짜르디 짜르디’ 한다는 거예요. ‘짜르디’는 ‘빨리’라는 뜻인데, 걷다가 중간에 쉬면서 자연도 감상하고 해야 하는데 한국인들은 재촉하기 바쁘대요. 그럴 때면 셸파들은 ‘아직 영혼이 따라오지 못해서 몸이 갈 수가 없다’며 ‘비스타리 비스타리(천천히 천천히)’ 휴식을 즐긴다고 해요. 근데 그것을 보니 지난 수십 년간 앞만 보고 일에만 매진하며 달려온 한국 중·장년들이 생각났어요. 이제는 너무 ‘짜르디 짜르디’ 하지 말고 지난날도 되돌아보면서 철학적인 면에서 자신을 다스려 보기도 하고, 앞으로의 여정도 살펴봤으면 좋겠어요. 영혼이 올 때까지 기다린다는 셸파들의 말처럼 이제는 ‘비스타리 비스타리’ 하면서 영혼을 살찌우는 문화적인 삶을 즐기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