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미술품 시장은 화랑과 경매 회사로 양분되어 있다. 물론 작가가 직접 개인적으로 판매하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 개인전 기간에도 작가는 화랑을 통해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형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미술품은 그리거나 만드는 예술인의 정신세계가 투영되기에, 각각의 개성이 다르고 장르가 다르므로 공산품이나 생필품처럼 쉽게 살 수가 없다. 제아무리 저명한 작가의 예술품도 내 보기에 탐탁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여 작가가 서명한 미술품에는 나름 독창적인 예술세계가 집약돼 있으므로 오랜 시간 작품과 교감할 필요가 있다.
경제성장의 침체 속에서도 미술품 경매시장은 나름 활기를 띠어 2017년 전반기 경매회사를 통한 미술품 거래액만도 989억원으로 2016년 상반기 964억4000만원보다 2.5% 높은 성장률을 보이고 있다. 국내 12개 경매회사를 잘 관찰하면 미술품 시장의 흐름뿐 아니라 거래된 장르별, 작가별 가격의 추이를 읽을 수 있다. 대부분의 경매회사는 현장경매뿐 아니라 온라인에서도 미술품 판매를 하므로 집에 앉아서 편하게 인터넷으로 경매에 참여할 수도 있다. 온라인으로 보는 작품 이미지와 짧은 설명이 미흡하면 경매사에 방문해 전시된 실물을 직접 살펴본 후 구매를 결정하면 된다.
집의 거실이나 서재, 침실 등에 그림 한 점 걸고 싶으면 우선 예산을 정하고 화랑이나 경매 회사를 찾아가 예산 범위에 맞는 미술품을 선별해본다. 작품 가격이 예산에 맞는다면 작가의 경력이나 전시 이력, 작품평 등을 인터넷 검색으로 확인한다. 또 그 작가의 최근 작품 가격 추이도 살펴본다.
천칠봉(千七峯, 1920~1984) 화가는 전북 전주에서 출생해 국전 특선 수상으로 이름을 널리 알린 화가다. 남녘에서는 경매 시 언제나 인기를 누리는 작가다. 는 4호의 소품이지만 농염한 붉은 빛이 명품인 작품이다. 인사동 화랑끼리 모여서 하는 경매에서 35만원에 낙찰받았다. 천 화가는 중학교 졸업 후 독학으로 화업을 이룬 입지전적 인물이다. 특히 빨간색의 처리는 가히 초일류급이란 평을 듣는다. 석류 알이 곧 쏟아질 것 같은 긴장의 순간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거실 빈 벽에 이 한 점만 걸어도 공간을 충분히 채운다.
공석순(孔錫洵, 1944~) 화가는 서라벌예술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국전에 입선했으나 화장품 회사 등에 근무하다 50대에 전업 작가를 선언하고 현재까지 꾸준히 격조 높은 작품을 표출하고 있다. 몇 해 전 인사동에서 함께 점심식사 후 골동품 가게에서 연꽃 모양의 소반을 사서 그곳에 꽃 그림을 부탁했더니, 보름 후 그림을 완성했다. 이 작품 또한 30만원 미만의 가격이 소요되었다.
철우(鐵友)란 아호를 쓰는 서각인(書刻人) 곽금원(郭錦元, 1955~)은 우리나라 각자장(刻字匠, 나무판에 글자나 그림을 새기는 장인) 철재(鐵齋) 오옥진(吳玉鎭, 1935~2014)의 수제자로 30여 년의 경력을 자랑하는 명인이다. 어찌어찌 연결이 되어 그분의 작품을 하나둘 장만하게 되었다. 나의 캐리커처도, 서실의 현판도 그분의 작품이다. 오옥진 선생은 문하생들과 경복궁 흥례문 회랑에서 전시회를 가져왔는데, 곽금원 선생이 무늬 좋은 느티나무 판재로 짜 맞춘 를 출품했을 때 30만원을 주고 가져왔다. 표면에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1891~1977) 선생의 푸른 대나무 그림을 새겨 품위와 운치를 더하고 있는 작품이다.
원로 화가 김숙진(金叔鎭, 1931~)은 홍익대학교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모교에서 후학들을 가르친 분으로 국전 문공부장관상, 예술원상을 수상한 관록의 화가다. 1호의 이 조그만 그림 속에는 ‘이상향(理想鄕)’이 꽉 차 있다. 바다 혹은 강가에 복숭아나무가 줄기를 늘어뜨리고, 사이사이에 분홍빛 복숭아가 탐스럽게 매달려 있다. 파란 물 위 하늘은 오색 빛으로 휘황하고 꼬리에 초승달과 보름달을 매단 새 두 마리가 힘차게 날고 있다. 덧없는 세월의 여정이 물결 따라 느리게 지나간다. 이 작품은 온라인 경매 당시 작가를 잘 인지하지 못해 입찰자 없이 15만원에 낙찰받았다.
한 포기의 히아신스를 맑고 투명한 수채로 그린 홍종명(洪鍾鳴, 1922~2004)은 평양에서 출생, 일본 도쿄제국미술학교를 졸업한 후 제주도를 근거지로 활발한 미술활동을 한 분이다. 특히 문명세계를 초월하는 시원(始原)을 향한 그리움과 두고 온 고향, 평양에 대한 향수를 승화시킨 시리즈와 시리즈의 작품들은 이분의 트렌드가 되기도 했다. 2호 사이즈의 이 수채화는 8만원에 낙찰받았다.
이렇듯 예술성과 인생의 경륜이 조화된 원로 화가의 작품 석 점과 집 안 어느 공간에 두고 봐도 좋을 장미꽃 소반, 서각 명인의 공예품을 모두 118만원에 구입했다. 예술작품을 금전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모순이다. 미술품을 바라보고 애호하고 한두 점씩 수집하면서 겪게 되는 개개인의 눈높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미술품에는 예술가의 푸른 영혼이 깃들어 있어, 정서를 함양하고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준다.
미술품 수집은 30만원에서 시작하되 50만원, 100만원으로 상향한다. 그 안에서도 언제든 빼어난 명품을 만날 수 있다. 부지런히 화랑가와 미술품 경매 현장을 드나들고 꼼꼼히 살피어 예향(藝香)에 젖어볼 일이다.
11월 22일은 대한민국김치협회에서 지정한 ‘김치의 날’이다. 김치 재료 하나하나가 모여 발효 과정을 거치면 22가지 효능을 낸다는 의미다. 우연일 수도 있지만, 김치의 날에 태어나 김치와 한평생을 동고동락한 이가 있다. 바로 포기김치명인 2호 유정임(兪貞任·61) 풍미식품 대표다. 소금에 절인 배추가 양념과 함께 숙성되듯, 인생의 우여곡절을 버무려 명인의 삶으로 승화시킨 그녀에게 김치는 우연이 아닌, 운명과도 같았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누가 김치를 사 먹어? 미쳤군!”
30년 전, 김치를 사 먹는다는 것은 생소하고 의아한 일이었다. 당시 김치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던 유 대표 역시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과 마주해야 했다. 명함을 건네면 뒤에서 박박 찢어버리는 이도 있었고, 험한 말을 들을 때도 있었다. 다행히 솜씨 좋은 유정임표 김치는 금세 입소문을 탔고 김치를 사서 먹겠다는 사람이 점점 늘어났다. 고난도 끊이지 않았지만 ‘포기란 배추를 셀 때나 하는 말’이라는 우스갯소리처럼 그녀에게 결코 포기란 없었다.
“치욕스러울 때도 많았어요. 그럴수록 더 잘하자고 마음먹었죠. 김치는 기계로 찍어내는 게 아니잖아요. 그해의 배추 농사나 재료의 질, 만드는 사람에 따라 맛이 좌우되니 김치 맛이 늘 똑같을 순 없죠. 그래서 힘든 점이 많았어요. 한번은 배추밭을 사놨는데 수확시기에 가보니 노랗게 배추꽃이 펴 있더라고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죠. 하지만 거기서 멈출 수는 없었어요.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며 문제를 파악하고 점검하며 해결 방법을 찾으려 했죠. 매해 환경이 달라지니 여전히 공부하고 있는 셈이에요.”
우리 땅에서 자란 재료만을 사용하는 게 원칙
15평 다락방에서 김치를 팔던 평범한 주부가 2000평 규모의 연 매출 100억원에 달하는 식품회사 대표가 되기까지, 그녀는 지난 30년 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고 말했다. 환희의 순간도 많았겠지만, 그동안의 우여곡절을 떠올리는 듯한 말투였다. 달콤했던 순간에 현혹되기보다는 쓰디쓴 나날들을 기억하며 경각심을 잃지 않는다는 유 대표다.
“승승장구하다가도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게 사업이잖아요. 오너는 항상 긴장하고 살아야 해요.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생길까? 외부에 있다가도 회사에서 전화가 오면 불안해지곤 하죠. 그런 긴장감이 나를 채찍질하고 언제나 최선을 다하도록 하는 것 같아요. 김치명인이 되고 인증패를 받던 날에도 기쁨보다는 잘 지켜야겠다는 부담이 컸어요. 그때부터는 옷차림도 화려하지 않게, 수수하지만 격식을 갖춰 입고 행동도 겸손하게 하려고 노력했죠.”
그녀는 사무실 한편에 드레스룸을 마련했다. 특별한 상황과 만나는 사람에 따라 알맞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다. 인터뷰 당일에도 캐주얼한 차림으로 다른 일정을 마치고 온 그녀는 “5분만!”이라고 외치더니 고운 한복으로 갈아입고 나타났다. 하루에 5~6번 옷을 갈아입을 때도 있다는 유 대표에겐 그만한 이유가 있다. 회사를 경영하며 한국농식품여성CEO연합회 회장, 대한민국김치협회 이사로 활동할 뿐만 아니라, 수원시 제12대 혜경궁 홍씨로도 선발되는 등 다양한 역할을 소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바빠도 ‘김치를 만드는 일’에는 소홀함이 없다.
“예나 지금이나 아침에 출근하면 바로 현장부터 내려가요. 배추가 잘 절여졌는지, 깍두기를 얼마나 담그고 열무를 몇 단이나 다듬어야 하는지 등을 직접 점검하죠. 만드는 김치를 매일 맛보냐는 질문을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당연하죠. 그게 내 일이니까요.”
본업에 충실해야 다른 일도 떳떳하게 마음놓고 할 수 있다는 유 대표는 김치를 만들 땐 좋은 재료가 기본이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우리 땅에서 자란 재료만을 사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단다. 그해 상황에 따라 배추 등 채소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을 때도 있지만 그녀에게 가격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조금 손해를 보면 봤지 비용을 아끼기 위해 재료의 품질을 낮추는 일은 절대 없다.
“싼 김치를 만들어 팔자는 제안도 받았지만, 그런 유혹을 뿌리치고 우리 김치를 지켜낸 건 정말 잘한 일 같아요. 사업이라는 게 잘될 때도 있고, 손해 볼 때도 있는 건데 얕은수를 써가며 돈을 벌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이윤만 따졌다면 맛과 신뢰를 잃었을지도 모르죠. 나와 내 가족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김치를 담갔고, 앞으로도 그 마음은 변치 않을 겁니다.”
김치는 재료의 품질도 좋아야 하지만, 기계가 아닌 사람의 손을 거쳐 만드는 식품인 만큼 만드는 이의 ‘손맛’ 또한 중요하다. 즐거운 마음으로 김치를 담가야 그 맛도 좋아진다는 게 유 대표의 생각이다. 그래서 간혹 부부싸움을 하고 왔거나, 안 좋은 일이 있는 직원은 김치 담그는 작업에서 제외시키고 다른 업무를 보도록 한다. 만드는 사람의 감정이 김치 맛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그래왔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직원들의 속사정까지 살피는 유 대표의 살뜰한 모습이다. 이러한 면모는 ‘사원은 가족처럼’이라는 풍미식품의 사훈에서도 잘 드러난다.
“우리 회사는 정년도 없고, 나이에 대한 기준도 없어요. 누구든 일을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함께할 수 있죠. 80세가 넘었는데도 김치를 담그는 분이 계시고, 70대 직원도 많아요. 모든 김치의 속을 내가 다 채울 수는 없잖아요. 나를 대신할 직원들의 정성 어린 손길이 필요하죠. 서로 가족처럼 여기고 믿고 의지하며 일하는 게 바탕이 돼야 해요. 그런 분위기가 원활히 회사를 경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바라보다
풍미식품의 경영 목표 중 하나는 ‘수입의 사회 환원’이다. 김치를 만드는 곳이므로 김치 기증이나 김장 봉사 활동 등 다양한 방법으로 그 목표를 이뤄가고 있다. 올해 9월, 유 대표는 아너소사이어티(사회복지공동모금회 1억원 이상 고액기부자클럽) 회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회사 자금이 아닌, 그동안 강의 활동 등을 하며 모은 개인 재산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 선뜻 내놓은 것이다. 밤낮으로 김치만 생각하며 어렵게 번 돈이지만, 그렇게 거액을 기부할 수 있었던 데에는 유년시절의 아픔이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 대신 동생들 끼니를 챙겨주곤 했어요. 당시 형편이 어려워 학교도 못 갔고 졸업도 미뤄졌었죠. 아마도 그런 아픔 때문에 배움에 대한 갈증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예전의 나처럼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학용품을 사주거나 학비를 지원해줄 때 가장 행복하고 가슴이 벅차요. 내 작은 도움으로 한 아이가 꿈을 키우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정말이지 자다가도 즐거워진다니까요. 방에 분홍색 돼지저금통이 하나 있거든요. 번외 수입이 생기면 거기에다 돈을 모아 일 년에 한 번씩 직원 중 어려운 사람을 돕거나 노인복지회관 등에 기부하고 있어요.”
2014년 세월호 참사 당시에는 진도 팽목항에 김치를 보냈는데, 그 어느 때보다 좋은 재료로 정성을 다해 만든 김치가 슬픔에 잠긴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길 바랐다. 대개 김치를 기증한다고 하면 상품가치가 떨어진 것을 나누어주는 것 아닌가 하는 오해도 있지만, 그럴수록 따뜻한 마음을 담아 더 좋은 김치를 내놓는다는 유 대표다.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바라본다는 그녀는 ‘내 가족이 먹을 수 있는 김치’, ‘직원들을 가족처럼’ 등 인터뷰 내내 가족이라는 말을 내려놓지 않았다. 여성 직장인들은 사회생활을 하며 살림도 하고 엄마 역할도 해내야 하기 때문에 1인 2역의 고충이 있다고 토로한다. 유 대표 역시 예외는 아닐 터. 가족의 일원으로서 그녀는 어떤 모습일까?
“여성은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 그리고 여사장은 더 강하다는 생각으로 여기까지 달려왔어요. 행여나 사업에 실패해서 가세가 기울면 우리 가족이 나를 원망할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남편과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내, 엄마이고 싶어 더 악착같이 일했어요. 그런데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는 없더라고요. 사업을 하기 전에는 음식 솜씨가 좋아서 가족들에게 맛있는 반찬도 자주 만들어줬는데, 그런 게 소홀해져서 미안하죠. 이제는 아이들도 바빠져서 일주일에 한 번 가족이 모여 식사하는 것도 힘들더라고요. 함께하는 시간이 부족한 건 꼭 우리 가족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아요. 여느 가족들처럼 우리 가족도 같이하는 시간을 자주 가지려 노력하고 있어요.”
유 대표는 사업이 30년 동안 탄탄대로를 달릴 수 있었던 것은 남편의 외조 덕분이라고 말한다.
“여성들은 남편의 이해와 신뢰가 없으면 사업하기 힘들어요. 저녁에 업무 약속이 잡히거나 거래처에 가야 할 경우가 많은데, 그럴 때마다 남편이 간섭하거나 불편한 소리를 했다면 지금처럼 왕성하게 일하지 못했을 거예요. 늘 감사한 마음이죠. 가끔 식당에 가면 ‘고객을 가족처럼’이라는 문구가 있는데, 안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가족은 편하니까 허물없이 대하고 잔소리도 하지만 고객은 그렇지 않잖아요. 그래서 저는 ‘가족을 고객처럼’이라고 반대로 말해요. 그렇게 하고 나니 가족을 대하는 태도가 사뭇 달라지더라고요.”
글로벌 김치 홍보대사가 되는 게 꿈
김치에 대한 열정과 가족의 지원으로 회사를 잘 키워가고 있는 그녀에게 ‘성공’이라는 단어는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 그러나 정작 유 대표는 ‘성공’이 아니고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말한다. 성공이라는 단어를 받아들이면 자칫 안일해질 수 있기에 거리를 두기로 한 것. 늘 그렇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사업을 이끌어왔지만, 요즘은 그 끝을 염두에 두기도 한다.
“100세 시대라고 하지만, 그때까지 지금처럼 일할 수는 없잖아요. 얼마나 더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칠십 정도 되면 일선에서 물러나 적임자에게 회사를 물려줘야겠죠. 사업을 이어받아 잘 키워나갈 수 있는 자식이 있으면 승계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기꺼이 사회에 환원하려고 합니다. 후계자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나면, 그때부턴 교육사업이나 강의 등을 하면서 여유롭게 살고 싶어요. 남들처럼 여행도 가보고요. 그런데 일 중독인지는 몰라도 아직은 놓지 못한 것들이 많아요. 천천히 하나씩 내려놓을 준비를 해야겠죠.”
노인들을 대상으로 강의나 봉사를 하며 노후를 보내고 싶다는 유 대표는 일찌감치 레크리에이션과 성교육 자격증 등도 따놓았다. 그녀는 차분하게 노후생활을 설명하다가 어느새 김치 이야기를 하며 눈을 반짝였다. 아직은 내려놓을 때가 아님이 여실히 느껴졌다.
“이만큼 살아보니 사람 일은 알 수가 없더라고요. 당장 내일 무슨 일이 생길지, 뭐가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매일 최선을 다해, 지금 이 순간을 열정적으로 사는 게 지혜로운 것 같아요. 하지만 나름의 꿈과 목표는 있어야겠죠. 그것이 매 순간 한 걸음씩 나아가는 방향을 제시해주니까요. 요즘 내 목표는 김치 홍보대사가 되는 거예요. 우리나라에 계시는 세계 대사들을 모셔와 김치 담그기 퍼포먼스를 하고 싶어요. 대사들이 담근 김치는 각 나라로 보내고요. 그러면 우리 김치가 전 세계인의 식탁에 올라가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게 바로 제 꿈입니다.”
'불량공주 모모코 (下妻物語)'. 일f본 코미디 드라마 영화이다. 원제는 ‘가마가제 소녀’인데 가미가제에 대한 나쁜 이미지를 고려해서 ‘불량공주’로 바꾼 것 같다. 감독은 나카시마 테츠야, 주연은 모모코 역에 후카다 쿄코, 폭주족 이치코 역에 츠치야 안나가 나온다. 네티즌 평점이 8.3으로 꽤 높다.
이 영화를 보면 일본은 과연 만화 공화국이고 사람들도 만화에 취해 사는 것 같다. 사람 사는 것은 어디나 비슷하지만, 어릴 때부터 만화를 많이 보고 성인들도 만화를 많이 보는 일본은 만화처럼 사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실생활에서는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만화 같은 삶을 나쁘게 보지 않는 것 같다.
코미디 물이므로 가볍게 보면 된다. 모모코의 아버지는 베르사체 짝퉁 의류를 만들어 팔면서 재미를 좀 보았으나 결국 이것이 문제가 되어 시모츠마라는 시골로 잠수 차 이사 간다. 이 동네 사람들은 촌이라 편한 추리닝을 선호하여 늘 추리닝 바람이다. 어지간한 옷도 동네에 유일한 마트인 자스코에서 사 입는다. 그러나 모모코는 다르다. 고등학교 2학년이다. 유럽 중세 로코코 풍의 드레스를 좋아해서 언제나 양산을 쓰고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입는다. 그런 옷을 사기 위해 아버지에게 거짓말도 해가며 용돈을 타내고 동경까지 가서 그런 옷을 구입해 입는다.
아버지가 짝퉁 판매하다가 재고로 남은 옷들을 모모코가 인터넷에 내 놓는다. 인터넷 광고를 보고 찾아 온 여인은 여자 스쿠터 폭주족의 일원인 이치코이다. 거친 말투와 외모까지 모모코와는 정 반대의 여자이다. 불량배들처럼 침을 칙칙 내 뱉고, 박치기 공격을 하지 않나, 자수를 곁들인 특공복 패션을 하고 다닌다.
이치코는 폭주족의 리더가 결혼한다며 송별폭주 행사에 참가하려는데 리더를 위해 특공복에 전설의 자수명인 자수를 놓겠다며 자수 명인을 찾아다닌다. 돈이 필요하니 빠찡코에 갔는데 엉뚱하게도 모모코가 대박을 터뜨린다. 주인이 속임수를 썼을 거라며 트집을 잡자 앞머리를 길게 한 이상한 모습의 남자가 나타나 모모코 편을 들어준다. 이치코는 이 남자를 첫사랑의 대상자로 찜한다.
모모코는 동경에 간 김에 수제 로코코 드레스 점에 자주 간다. 한번은 벌레 먹어 모자에 구멍이 여러 군데 생겨 손수 자수로 구멍을 활용했다. 그걸 본 점원이 사장에게 얘기하고 사장은 모모코의 재주를 알아본다. 그래서 샘플로 제작한 하얀 드레스에 장미 자수를 놓아달라고 부탁한다.
전설의 자수 명인을 찾아 다니던 모모코와 이치코는 전설의 명인은 가상 인물일 거라며 찾기를 포기한다. 그 대신 어릴 때부터 자수에 소질을 보인 모모코에게 특공복 자수를 부탁한다.
로코코 드레스의 장미 자수가 다 되어갈 무렵, 이치코에게 위기가 생겼다. 빠찡코에서 자기네들 편을 들어준 앞 머리 긴 남자가 폭주족 두목의 남자로 결혼한다고 발표하자 좌절하며 탈퇴를 선언한다. 동료 폭주족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하려는 순간에 모모코가 스쿠터를 몰고 나타난다. 야구배트를 하나씩 든 집단 폭행의 살벌한 분위기에서 모모코는 자신이 전설의 자수 명인 딸로서 기법을 전수 받아 이치코의 특공복에 자수를 놓아준 것이라며 분위기를 장악한다. 그 덕분에 이치코와 모모코는 스쿠터로 그 현장을 빠져 나온다. 이치코는 그 후 모델로 성공하고 모모코는 로코코 드레스 회사와 손잡고 일한다.
모모코의 아버지는 짝퉁 옷을 만들어 팔다가 낭패를 본 사람이다. 술집 골목에서 좌절하여 신세타령을 할 때 술집에서 튀어나와 토하던 모모코의 어머니가 눈이 맞아 바로 결혼한다. 모모코를 임신하여 출산 후 얼마 안 가 가출하고 이혼장을 보낸다. 미모가 출중하여 미인대회에도 나간다. 모모코는 치매 초기의 할머니 밑에서 외롭게 자란다. 학교에서도 왕따이고 동네에서도 별난 드레스 때문에 손가락질 당한다.
이 영화는 만화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인들이 보기에 유치하지 않고 재미가 있다. 일본의 정서를 읽는 것 같다. 폭주족 문화는 어느 나라에나 있지만, 우리나라 폭주족들도 그런 인식에서 보면 이해할만 하다. 모모코는 별난 드레스 때문에 왕따이지만 자기 세계를 고집한다. 그런 점이 일본이 노벨상을 많이 타는 자원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일본 영화 ‘카모메 식당’, ‘심야 식당’을 재미있게 본 사람들이라면 '앙: 단팥 인생 이야기'도 틀림없이 좋아할 것이다. 소설가, DJ, 시인, 밴드 보컬리스트라는 다양한 재주를 가진 두리안 스케가와의 소설을 여성 감독 가와세 나오미가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1943년생으로 영화에서도 78세로 나오는 고령의 여인 키키 키린이 도쿠에 역으로 나오고, 중년의 단팥빵 점장 센타로 역으로 나가세 마사토시, 단팥빵으로 끼니를 때우는 여중생 와카나 역으로 우치다 카라가 나온다.
빵 반죽을 납작하게 만들고 두 개의 빵 사이에 단팥(일본어로 ‘앙’)을 끼운 일본식 화과자 도라야끼를 만들어 파는 작은 가게 이야기이다. 아르바이트 광고를 붙인 것을 보고 고령의 도쿠에가 일하게 해달라고 조른다. 힘든 일이라 노인에게는 무리라며 두 번이나 거절했으나 시급을 절반만 받아도 좋으니 일이나 하게 해달라며 애원한다. 이 노인이 세 번째 찾아 왔을 때도 역시 거절했는데 단팥빵의 겉 재료는 그런대로 먹을 만하지만, 단팥소가 제 맛이 아니라며 평을 해준다. 그리고는 조그만 봉투를 놓고 가는데 열어 보니 단팥소가 든 반찬통이었다. 그 맛을 본 센타로는 예사 솜씨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챈다. 다음에 이 할머니가 찾아 왔을 때 바로 일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동안 쓰던 단팥은 시판하는 것으로 그냥 사다 쓴 것이었다. 할머니는 단팥을 만드는 요령을 가르치면서 단팥 한 알마다 비와 태양을 맞으며 사연이 담겨 있다는 철학을 가르쳐 준다. 단팥의 맛은 결국 정성이라는 것이다. 그때부터 이 가게는 대박이 난다. 문을 열기 전부터 손님들이 단팥빵을 사기 위해 줄을 선다.
그런데 이 단팥빵의 사장이 할머니가 나병으로 알려진 한센병 환자일 가능성이 높다며 내보내라고 한다. 그러나 정이 들어 계속 같이 일을 하고 오히려 주방뿐 아니라 서빙까지 해달라고 요청한다. 이 가게의 단골들은 주로 여중생들이다. 한창 때라 잘 먹을 때이며 달작지근한 단팥빵을 좋아한다. 끼니를 때우려고 드나들던 여중생 와카나가 할머니의 굽은 손가락을 보고 왜 그러냐고 묻는다. 어릴 때 병에 걸려서 그렇다고 답을 해주고 나니 그때부터 손님들의 발길이 완전히 끊어져 버렸다. 와카나는 어머니 한 사람에게만 할머니 얘기를 했을 뿐인데 소문이란 그렇게 빨리 퍼져 나간다. 도쿠에 할머니는 그 길로 일을 그만두었다.
어느 날 와카나가 집에서 기르던 카나리아를 새장 째 들고 왔다. 아파트에서는 애완동물을 못 기르게 되어 있는데 옆집에서 민원을 제기하는 바람에 더 이상 집에서 키울 수 없어 갖고 나왔다는 것이다.
그길로 와카나는 센타로에게 할머니 사는 집에 가보자고 한다. 버스로 몇 정거장 가야 하는데 과연 할머니는 한센병 격리시설에 거주하고 있었다. 일본에서도 한센병 환자는 격리해서 수용하고 있었고 그들이 지나간 자리는 소독을 할 정도로 혐오 대상이었다. 1996년에야 그런 제약이 풀렸다고 한다.
그 시설에서 도쿠에 할머니의 친구를 소개받는다. 생과자의 달인이다. 단팥죽을 대접받는데 역시 보통 맛이 아니라 노하우를 물어본다. 센타로는 원래 단맛을 싫어해서 단팥 종류를 안 좋아했었는데 소금을 가미한 것이 노하우라고 가르쳐 준다. 와카나는 카나리아를 새장 째 맡기고 간다.
센타로는 젊은 시절 술집을 경영했었는데 술에 취한 고객과 다투는 과정에서 큰 상해를 입혔다. 그 때문에 징역을 살고 합의금으로 목돈을 구하다 보니 이 작은 단팥빵의 점장으로 일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빚은 다 못 갚았기 때문에 늘 얼굴이 우수에 차 있었다. 할머니는 처음에 단팥의 단 맛에 발길이 끌려갔다가 센타로의 우수에 찬 눈빛을 보고 동정이 가더라는 얘기이다.
사장은 조카가 다른데서 잘 적응을 못한다며 센타로에게 조수로 가르치며 데리고 있으라고 한다. 생김새부터 성실하게 생기지 않았다. 결국 얼마 안 가 조카에게 점장 자리도 내줘야 할 판이다.
센타로와 와카노가 다시 할머니의 시설에 찾아 갔을 때 도쿠에 할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센타로와 와카노에게 편지와 녹음을 남겼다. 부디 자신만의 노하우로 단팥빵을 만들어 명인이 되라고 했다. 와카노에게는 맡긴 카나리아를 바로 풀어줬다고 고백한다. 평생을 한센씨 병으로 갇혀 지낸 것이 한이 되어 바로 풀어주었다는 것이다. 할머니의 묘는 따로 하지 않고 평소 좋아하던 벚꽃을 생각하고 벚나무를 심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봄날 센타로는 웃음을 되찾으며 단팥빵을 판다. 독립한 것이다.
이봉규 시사평론가
중년이 돼서도 예쁜 여자나 ‘쭉쭉빵빵’한 몸매의 여인들을 보면 눈이 자동으로 돌아간다. 좀 더 솔직하게 표현하면 품고 싶은 욕망을 느끼지만 어쩔 수 없이 눈요기만 한다. 수컷 본능이다. 암컷들은 수컷에 비해 소극적이기 때문에 멋진 남성을 대놓고 쳐다보지 못하고 드라마를 보면서 눈요기를 즐기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한다.
드라마 속 주인공과 비교하면 가끔은 신세가 한탄스럽기도 하다. 남자나 여자나 한탄하고 부러워하면서 늙는다. 포기하는 것에 익숙해져버린 우리네 인생이다. 죽기 직전이 되어야 “왜 그토록 많은 것을 포기하며 살았나?” 하고 피눈물을 흘린다. 중년의 나이에도 천년만년 살 것 같은 착각 속에서 인생을 허비한다. 어느새 중년이 되었듯이 불현듯 늙어버리고 한 줌의 재가 될 날도 우리를 호시탐탐 노리며 다가온다.
후회하지 않으려면 짜릿하게 살아야 한다. 가장 짜릿한 것은 역시 연애(戀愛)일 것이다. 사랑하는 마누라와 짜릿하게 연애하듯 살면 최상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마누라가 엄마처럼 느껴지거나 선생님처럼 또는 가정부처럼 느껴지면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짧은 인생 허송세월할 시간이 없다. 그럴 때는 이혼이 정답이다. 최소한 한 달에 한 번이라도 부부관계를 하지 않는다면 다른 이성을 찾아야 한다. 이혼을 하고 다른 이성을 찾든지, 아니면 부부가 합의하에 다른 이성과 교제를 하든지 적극적으로 행복 찾기에 나서야 한다. 아니면 부부가 서로 자위행위를 해주거나, 그 어떤 방법으로라도 서로를 위해 짜릿한 감정을 살릴 수 있는 특단의 돌파구를 찾아야만 한다.
참고로 필자는 요즘 정말 짜릿하게 살고 있다. 지난 3월 29일 일본 교토(京都)의 한인교회에서 하객이 단 한 명도 없는 단둘만의 멋진 결혼식을 올리고 짜릿한 재혼생활에 흠뻑 빠져 살고 있다. 매일 결혼식 사진을 보고 동영상을 관람하면서 마누라와 환하게 웃는다.
요즘은 회식도 줄이고 친구들과의 소주파티도 대폭 줄였다. 대신 마누라와 북한산 바로 밑 신혼집에서 거의 매일 저녁 단둘이 파티를 즐긴다. 달콤한 발라드나 재즈 음악을 틀어놓고 막걸리를 마시면서 블루스를 추고 난리다. 20년 전 이혼하고 숱한 연애를 했건만 지금처럼 행복하진 않았다. 지금이 인생 최고의 전성기다.
만약 하나님이 나에게 “언제로 돌아가고 싶니? 그때로 돌려 줄게!”라고 물으신다면 나는 주저 없이 “지금입니다. 이대로 건강만 허락해 주세요!”라고 간곡하게 요청드릴 것이다.
누구라도 필자와 같이 행복할 권리가 있다. 행복은 쟁취하는 것이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금 살고 있는 배우자와의 생활이 무미건조하다면 과감하게 다른 이성을 찾아야 한다. 얼마든지 이성으로부터 유혹을 당할 수 있다. 그 상대가 나에게도 끌린다면 못이기는 척하고 넘어가 주면 된다. 수동태가 될 가능성이 없으면 능동태로 적극적으로 이성을 유혹해서 행복 찾기에 나서야 한다.
부인과 남편이 따로따로 불행한 나날을 보내면서 세월만 낚고 있다면, 내 인생은 물론 포기한 것이지만, 배우자의 인생도 같이 망가뜨리고 있는 공범이다. 중년인 지금부터라도 서로 의기투합하면 윈-윈 게임을 할 수 있다. 그게 이혼일 수도 있고, 별거라는 형식으로 합의하에 서로 다른 이성과 짜릿한 연애를 하면서 가정을 지키는 것도 방법이다. 아니면 솔직하게 서로 털어놓고 짜릿한 만족을 위해 요구하고 조정해야 한다.
결혼 30년 차인 내 지인은 아내와 잠자리를 한 지가 10년도 넘었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술자리에서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그런데 몇 달 전 갑자기 신수가 훤해져서 나타났다. 마치 아우라를 드리운 스타와도 같았다. 이유인즉, 부인과 합의해서 서로 다른 이성을 찾아 연애를 하기로 의기투합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지금 15살이나 어린 젊은 애인과 너무나 짜릿한 연애를 하고 있다고 자랑을 늘어놓는다.
“부인은 어떠냐?”고 필자가 물어보니, “와이프도 초등학교 동기동창과 기분 좋은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고 솔직하게 말하는데 아무런 감정이 없어서 자기 자신도 놀랐다고 심경을 피력했다. 털끝만큼의 질투심도 남아 있지 않아서 놀랐다는 자가진단이다. 오히려 부부사이가 더 편해져서 진짜 친구(Best Friend) 같다고 너스레를 떤다. 그 전에는 부인과의 성생활이 전혀 없기에 본능적인 성욕의 해소를 위해 몰래 직업여성과 가끔 돈 주고 섹스를 하곤 했는데, 그럴 때면 어김없이 부인에 대한 죄책감이 들어서 찜찜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서로의 연애를 인정해주니까 부인에 대한 죄책감도 없고 오히려 신뢰감이 더 쌓였다고 한다.
부인도 스스럼없이 초등학교 동창과의 만남을 소상히 얘기하면서 남자의 심리에 대해 물어보곤 하는데 정말 재미있다고 털어놓는다. 극히 드문 케이스지만 중년에 짜릿한 행복을 쟁취한 경우다. 전통적인 도덕관에 비추어 본다면 당연히 옳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도덕관마저 시대에 따라 변하고 있다. 불과 백 년 전에는 행세깨나 한다는 남자들은 첩을 두고 살아도 사회적으로 아무 문제가 되질 않았다. 심지어 같은 집에서 본부인과 첩이 형님 동생하면서 의좋게 살기도 했다. 첩이 두세 명인 경우도 허다했다.
10년 이상 섹스 없이 서로 각방을 쓰면서 배우자 몰래 바람을 피우는 것보다는 배우자와 서로 합의하에 애인을 두는 편이 훨씬 도덕적으로 정당할 수 있다. 실비아 크리스텔(Sylvia Kristel)이 열연한 영화 에서 부부는 정말 사랑한다. 그 부부는 서로의 행복을 위해 다른 파트너와 잠자리를 적극 권장하기까지 한다. 심지어 그 장면을 보면서 음미하기도 한다. 영화 의 스토리는 에로티즘으로 한 발 더 나아갔지만, 아까 소개한 지인 부부의 경우는 앞으로 백세 시대의 행복을 위해서는 보편화될지도 모를 일이다.
필자는 이혼한 지 20년 만에 짜릿한 재혼생활을 하고 있고, 전 아내도 필자보다 먼저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딸에게서 전해 듣고 있다. 만약 우리가 이혼하지 않고, 배우자 몰래 도둑연애나 하고 대충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에 급급하게 살고 있다면 얼마나 불행했을까 생각하면 끔찍하다.
자칭 대한민국 최고의 한량이라고 자부하는 필자가 독자들에게 강력하게 권하고 싶다. 지금 살고 있는 배우자와 짜릿하지 않다면 이혼이나 위에서 예로 들었던 케이스처럼 뭔가 특단의 조치를 강구해야 한다. 행복은 최고의 가치이고 쟁취해야만 한다. 눈치를 보다간 이 생명 다할 때 피눈물 흘리며 후회하게 될 것이다. 중년인 지금이 행복을 쟁취하기 위해 결심할 최고의 적기다.
>> 이봉규 시사평론가
조지워싱턴대 정치학 석사, 한국외대 정치학 박사, 한국외대 외래교수
우리는 자신을 가장 잘 알아주는 친구를 일컬어 ‘지음(知音)’이라 부른다. 중국 춘추시대 금(琴)의 명인인 백아(伯牙)가 자신의 음악을 가장 잘 알아주던 친구 종자기(鍾子期)가 죽고 나자 ‘파금절현(破琴絶絃)’, 즉 자신의 음악을 더는 이해해줄 마음의 친구가 사라져 버렸으므로 금을 부수고 줄을 끊어버린 뒤 다시는 금을 잡지 않았다는 고사이다.
이 고사에서 비롯된 지음이라는 단어는, 곧 자신을 어쩌면 자신보다 더 잘 이해해 주는 세상의 하나뿐인 친구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된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지의 영웅 조조의 아들 조비(曹丕)는 신하이자 친구였던 건안칠자(建安七子)를 전염병으로 잃자, ‘통지음지난우(痛知音之難遇: 지음을 다시 만날 수 없음에 애통하고...)’라 읊었고, 두보(杜甫)는 ‘이 사람 다시 볼 수 없으니, 장차 늙어 지음을 잃어 어찌할꼬(斯人不重見 將老失知音)’라 노래하였다. 신라의 최치원(崔致遠)은 ‘추풍유고음(秋風惟苦吟) 세로소지음(世路少知音)’, 즉 ‘가을바람에 오직 괴로워 노래하노니, 이 세상에 나를 알아주는 지음이 없구나’라고 독백하였던 것이다.
중국 위진시대 서진(西晉)에 손초(孫楚)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에게는 왕제(王濟)라는 절친이 있었다. 재주는 있었으나 성격이 나빴던 손초를 유일하게 알아주었던 왕제는 당시 황제의 사위인 높은 지위에 있던 인물이었다. 손초는 내심 세상에 나가 출세를 하고 싶었으나 당시 유행하던 죽림칠현(竹林七賢)의 예를 따라 은거하겠다고 마음먹고 왕제에게 “이제 은거하여 자연에서 침석수류(枕石漱流: 흐르는 물로 이를 닦고 돌로 베개를 삼다)나 해야겠네”라고 말하려는 것을 잘못하여, ‘수석침류(漱石枕流: 돌로 이를 닦고 흐르는 물로 베개를 삼다)’라고 했다.
그러자 왕제가 “흐르는 물로 베개를 삼고 돌로 이를 닦는 것이 가능하겠는가?”라고 하자 잘못을 인정하기 싫었던 손초는 “흐르는 물을 베개로 삼겠다는 것은 (옛날 허유(許由)처럼) 귀를 씻기 위해서이고, 돌로 양치질한다는 것은 이를 연마하기 위함이라네”라고 답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한다.
이후 왕제가 대중정(大中正)이라는 관직에 있을 때 그의 하급관리가 관리를 추천하는데, 손초를 평가할 때에 이르자 왕제가 “이 사람은 그대가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 내가 하겠노라”며 직접 기록하길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어 특별히 발군의 인재[天才英博 亮拔不群]”라고 써 주었다. 이 덕분에 손초는 후일 풍익태수(馮翊太守) 자리까지 오르게 된다.
성격이 오만하고 고집이 세었던 손초는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았으나 오직 왕제에게만은 진심으로 감복하고 존경하였는데, 아내가 죽어 상복을 벗을 때 즈음 자신의 마음을 적은 시를 왕제에게 보여주었다. 이를 본 왕제는 ‘시문이 정에서 생겨나는지, 아니면 정이 시문에서 생겨나는지 모르겠구나![未知文生於情 情生於文]’라며 감탄했다고 전한다.
위의 고사에서 전하는 ‘수석침류(漱石枕流)’는 이후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고집스러움을 뜻하는 말로 쓰이기도 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쓰이기도 한다. 덕수궁 중명전(重明殿)은 1906년 이름이 바뀌기 전 본래 이름이 수옥헌(漱玉軒)인데, 이 ‘수옥(漱玉)’이라는 단어의 원래 출전이 바로 수석침류로, 수석(漱石)을 수옥(漱玉)으로 바꾼 것이다.
정읍역에 내려 역사로 나가는 출구에는 ‘정읍농악대’를 그린 서양화 작품이 걸려 있다. 예로부터 풍류의 고장으로 불리는 정읍을 한눈에 느낄 수 있는 그림. 벚꽃이 잔잔하게 깔린 시내 곳곳에서도 ‘농악’, ‘전통’이란 문구의 표지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국 예술혼을 줄기차게 이어가는 곳 정읍. 이곳에 우리악기를 3대째 계승 발전시키고 있는 이가 있다.
바로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2호 악기장(장구·북) 서인석(徐仁錫·58) 명인이다.
서인석 명인은 지난해 12월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2호(장구·북) 악기장이 됐다. 전통기법에 따라 장구와 북을 손으로 직접 깎아 만드는 유일한 전승 기능 보유자다. 이는 할아버지(서영관 徐榮寬·1884~1973)를 시작으로 아버지(서남규 徐南圭·1924~2005), 서인석 명인까지 3대째 내려오는 가업이다.
“열두 살 때부터 도끼 들고, 칼 들고, 대패질 정도는 할 수 있었습니다. 중학교 때는 200kg 되는 나무들도 툭툭 쳐가면서 옮겼습니다.”
악기 만드는 방법을 앉아서 배워본 적도 없다. 그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돕다 자연스럽게 국악기 전승 장인이 됐다.
서인석 명인의 할아버지는 동네 훈장이었다. 마을의 세시풍속 행사도 관장했다. 동네 대소사에 풍장(풍물놀이)이 빠질 수는 없다. 당연히 악기를 만들고 연주하는 데 도통할 수밖에. 그렇게 가업이 시작됐다.
아버지 대에서 서인석 명인으로 국악기 제작 가업이 넘어오면서 큰 시련을 겪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전답에 집까지 저당 잡혀 사들인 대형 트럭 7개분의 나무가 오간데 없이 사라졌다.
가세가 기울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있다가 공무원이 됐다. 1년 뒤, 수소문 끝에 나무를 훔친 범인을 잡았지만 노름으로 돈을 다 탕진한 상태였다. 범인을 잡은 이후 공무원 생활을 그만둔 서인석 명인은 힘든 시간을 버티며 가업을 이어갔다.
“할아버지 때는 무형문화재 제도가 없었고, 아버지 때가 돼서 생겼습니다. 아버지는 이런저런 이유에서 문화재 지정이 미뤄지다 1996년 3월에 무형문화재가 되셨습니다.”
3대째 가업승계를 하고, 2대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국악기 명가지만 현실은 많이 척박하다. 시중에 유통되는 장구 대부분이 기계로 빠르게 제작돼 박리다매된다. 만드는 데 5년에서 10년은 걸리는 서인석 명인의 장구는 공장에서 만들어진 장구와 가격 경쟁이 안 된다. 전통을 고수하고 이어나가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세상의 편견과도 맞서야 한다. 그래서 2000년에는 대학에 들어가 국악을 전공하고 석사과정까지 마쳤다. 그에게 악기를 사러 오는 국악 전공자는 대학물(?)을 먹었다는 이유로 서인석 명인 앞에서 아는 척을 했다.
“제가 아버지의 문화재 제1호 ‘전승 장인’이라 할지라도 국악 전공자들은 ‘이렇게 해달라’며 요구를 했습니다. 장단이 틀리는 사람들도 전공자라는 이유만으로 내가 배운 것들을 인정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악기장으로 무형문화재가 됐지만 장구 연주자로도 유명하다. 전주대사습놀이에서 설장구로 두 번이나 장원을 했다. 김병섭 류 설장구를 비롯해 설장구는 모두 섭렵했다. 대학교에 다닐 때 장구 장단을 오히려 교수에게 가르칠 정도였다. 석사 논문은 온전히 아버지로부터 보고 배웠던 것을 썼다.
“현대와 고려 시대의 비교 논문을 썼어요. 고려 때는 토기로 악기를 만들었어요. 장구 제작 기법에 관한 연구론을 썼죠. 논문을 쓰면서 용어 정리를 제대로 했습니다.”
박사과정에도 도전하고 싶었지만 우리나라에는 국악기 제작 박사과정이 없다. 주위 사람들이 일본 유학을 권유했다.
“일본에는 제작학과가 있다더군요. 그런데 갈 수 없었습니다. 제가 가서 공부하면 우리의 기술을 일본에 주는 격이니 더더욱 갈 수가 없었어요.”
선대에는 국악을 아는 사람도 많았고, 악기만 잘 만들면 됐다. 지금은 편견을 이겨내고, 한 단계 더 발전해 나가야 하기에 헤쳐 나갈 것들이 너무나 많다.
집안의 가업 승계에 관한 얘기를 하다가 4대째로 넘어갈 수 있는지에 대해 물었다. 4형제를 둔 아버지인 자신도 궁금한 부분이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집안일을 보며 자랐지만 ‘아직은 아버지, 어머니가 하세요’라고 말합니다. 그래도 꼭 이어야 할 가업이라는 것을 아들 모두 알고 있습니다. ‘언제든지 필요하다고 할 때 오겠습니다’라고는 하더군요.”
4형제도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돕고 거들면서 성장했다. 모두 장구를 깎고, 연주할 줄도 안다.
“장남이건 막내건 거부감이 없어요. 그냥 늘 보던 일인 거죠. 이게 복입니다. 아버지도 복이시고 할아버지도 복이신 거죠.”
현재 서인석 명인은 호남우도(전북 정읍) 풍물의 명맥을 이어가는 설장구 연주자로 무형문화재 신청을 계획하고 있다.
“악기를 다룰 수 있어야 원하는 공명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치를 아는 사람을 찾고 싶습니다.”
전통의 맥을 잇는 것이 정말 소중하다는 서인석 명인. 세상 사람들이 비록 그것이 식상하다 할지라도 말이다.
마침내 소줏고리의 주둥이 끝에 작은 이슬이 맺힌다. 마치 옥구슬 같은 이슬이 한 방울씩 떨어질 때마다 정재식(鄭宰植·53) 예도(藝道) 대표의 표정이 사뭇 심각해진다. 그러기를 잠시, 이슬이 모여 물결을 일으키기 시작하자 부드럽고 무거운 향이 주위를 감싼다. 향기의 끝에서 달콤함이 느껴지자 안심했다는 듯 어머니 유민자(柳敏子·73) 명인이 허리를 펴고 일어난다. 유씨(柳氏)가문의 가양주 옥로주가 완성되는 순간이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옥로주(玉露酒)는 경상남도 하동의 유씨 가문이 대대로 전수해 온 가양주다. 가양주(家釀酒)란 말 그대로 집에서 담근 술. 유민자 명인은 어린 시절 집안에서 담가오던 술을 기억했다.
“집안 어른들이 매년 술을 담갔던 것이 기억나요. 늘 그것을 보고 자랐으니까. 일제 강점기 때는 술 빚는 것이 금지됐지만, 몰래 담가 대나무 숲에 묻어두기도 했어요. 순사들이 귀신같이 찾아내 깨부수면 다시 빚기를 반복했어요.”
그렇게 대대로 이어진 집안의 비기(秘技)가 자연스레 전수돼 평탄하게 이어져 온 것으로 예상했지만, 뜻밖에 숨은 사연이 많았다.
“부친으로부터 전수받은 기술을 현대화하기 위해 아들이 나서주었죠. 아들은 과거의 기록들을 발굴하고 국가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경상대학교, 동국대학교 등 여러 곳을 다녔습니다. 또 궁중요리가도 만나 옥로주를 인정받기도 했어요. 덕분에 1994년에 무형문화재로 등록될 수 있었어요. 그리고 아들은 원하던 미술공부를 위해 프랑스로 떠났죠. 그게 아쉬워요.”
1996년 유 명인은 정부의 전통식품 명인 10호로 지정돼 정통성을 인정받았다. 처음에 사업은 잘되는 듯했다. 옥로주의 맛과 향에 애주가들이 매료돼 술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연 매출 10억원을 넘어섰고, 당시 김대중 대통령에게 직접 ‘진상’하는 영광까지 맛봤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선 만찬주로 선정됐다.
하지만 평생 술에만 매달렸던 장인이 경영에 능숙할 리 없었다. 아들의 부재도 독이 됐다.
“제가 손이 커서 여기저기 술을 퍼주기도 했고, 술의 인기가 높아지자 경영에 다른 사람들이 참여한 것도 문제였죠. 엄청났던 주세(酒稅)를 고려하지 못했던 것도 실수였어요.”
결국 엄청난 규모의 부도가 났고, 빚을 떠안게 됐다.
당시 아들인 정재식 대표는 술과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었다.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1998년부터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한국미술협회 판화분과 위원장을 맡을 정도로 미술계에서 확고한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그러다 2013년 학교를 떠나 지금의 예도를 설립한다. 가문과 어머님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학교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정 대표는 이야기한다.
“어머니가 그동안 쌓아 올린 명예가 무너지는 것을 볼 수는 없었으니까요. 옥로주는 어머니의 희로애락이 담겨 있는 술이기도 하고요. 전혀 다른 분야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술을 빚는 것이나 미술은 한 분야라고 생각합니다. 장인정신이 필요하다는 동질성도 있고. 예도주가(藝道酒家)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실제로 정 대표는 본인의 미술적 감각을 살려 옥로주를 담는 술병을 직접 디자인했다.
유민자 명인은 비록 작은 규모의 공장으로 다시 시작하게 되었지만, 아들에게 집안의 전통을 물려줄 수 있게 된 것에 무척이나 안심하고 있다.
“술을 빚는 것은 엄청나게 까다롭고 예민한 작업이에요. 파리 한 마리만 입을 대도 쉬어버리는 것이 술이니까요. 이젠 옛날 방식으로 누룩을 만드는 곳도 거의 사라져 누룩을 재현해 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속 편히 술을 만들 수 있으니 행복하지 않을 수 없죠.”
옥로주가 가업으로 계속 이어질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두 모자는 함께 고개를 끄덕인다. 대학생인 아들이 벌써 관심도 많고 가끔 돕기도 해, 후대는 걱정없다는 것이 정 대표의 설명이다.
그렇게 명인이 직접 버무리고 빚은 술은 2014년부터 본격 제조되기 시작돼 올가을 추석 대목을 맞이해 출하할 예정이다. 전통주의 깊은 향을 더욱 살리기 위해 3년 숙성을 기본으로 하겠다는 다짐이다. 현재는 과거 옥로주의 깊은 향을 잊지 못하는 애호가들을 대상으로만 주문 판매하는 상태다.
정 대표는 “옥로주의 장점은 부드러운 목넘김과 깊은 향에 있습니다. 율무가 들어가 술이 부드럽고, 독하지만 금방 취하고 금방 깨며 숙취도 없습니다. 술이 장(腸)까지 내려가기 전에 깬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니까요.(웃음)”라고 말했다.
서양음악은 좋아하면서도 1970년대 초까지 필자뿐만 아니라 친구들까지 모두 국악은 물론 소위 뽕짝이라고 하는 가요도 고무신 또는 엽전이라고 비하하면서 들어 볼 생각조차 안 했으니 교육 탓이었을까, 분위기 탓이었을까.
1960년대 초 김치 캣의 ‘검은 상처의 블루스’를 좋아하긴 했지만 그 곡도 실은 실 오스틴의 ‘Broken Promises’를 번안한 것이었으니 우리 음악이라고 하기에는 그렇고 1960년대 말 펄 시스터스가 부른 신중현의 ‘님아!’나 ‘커피 한 잔’, ‘빗속의 여인’ 등이 겨우 젊은이들에게 어느 정도 인기가 있었던 것 아닌가 싶다. 그런데 1971년 봄 어느 날 대학원에 다니던 후배 P군이 고교동창이라고 하면서 역시 대학원생이던 L군(후에 KAIST 교수 역임)과 같이 서울대 공대 앞에 있던 필자의 집에 놀러 왔다. L군이 들고 온 파이프같이 생긴 악기를 불자 거기서 기가 막힌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때까지 국악을 별로 접해 볼 기회가 없어 아무것도 모르던 필자에게 그는 그 악기가 단소라고 가르쳐주었다. 자신은 어렸을 때 비원 앞에 있던 국립국악원 옆에 살아서 국악을 배웠다면서 며칠 후에는 가야금을 가지고 와서 연주해 주었다. 그 소리도 너무 좋아 필자는 국악을 배워볼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다가 얼마 안되어 거문고를 하시는 용문고 (故)최철호 선생님, 단소 명인이신 김중섭 선생님, 당시 서울대 국악과에 재학 중이었으며 지금은 원광대 교수가 된 가야금의 임재심씨 등이 보문동에 있던 최 선생님 댁에 모여 국악 동호인회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필자는 보문동에 다니며 김 선생님께 단소를 배웠다. 집사람에게는 임재심씨가 우리 집으로 와서 가야금을 가르치기로 하였다. 우리는 국악 악보를 오선지에도 표기할 수 있으나 원고지와 비슷하게 생긴 정간보(井間譜)로 표기한 것이 많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서양음악이나 국악이나 한 옥타브에는 모두 12음정(국악에는 율(律))이 있는데 서양음악에서는 그중 7개를 주음(主音), 나머지를 간음(間音)으로 사용하고 있다. 국악에서는 5개를 주음, 7개를 간음으로 사용한다. 기본 5율은 중(仲), 림(林), 무(無), 황(潢), 태(汰)이고 한 옥타브 낮은 음은 배성(倍聲)의 배자 왼쪽 사람인변(?)을, 높은 음은 청성(淸聲)의 청자 왼쪽 삼수변(?)을 붙인다. 그래서 중(仲)의 낮은 음은 중(?), 높은 음은 중(?)이 되고, 황(潢)의 낮은 음은 황(黃), 더 낮은 음은 황(?), 높은 음은 황(?)이 된다. 그리고 정간보의 한 칸은 한 박(拍)이어서 한 칸에 한 글자면 1박, 두 글자면 ½박, 네 글자면 ¼박이 되는 것이다.
한편 국악의 주요한 악기들에 대해서도 약간의 지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관악기인 대금은 단소보다 훨씬 크고 단소가 똑바로 부는 데 비해 옆으로 부는 가로저[橫笛]로, 소리도 청아한 단소에 비해 훨씬 더 남성적이고 중후하다. 또 대금과 비슷하나 크기가 조금씩 작은 중금과 소금이 있으며 리드가 있고 소리가 야무진 향피리나 애잔한 세피리 등도 있다.
같은 현악기이고 12현을 손가락으로 연주하는 가야금에 비해 해죽으로 만든 술대를 손가락에 끼고 연주하는 6현의 거문고 소리는 매우 남성적이고 웅장하다. 그리고 7현인 아쟁은 2현 악기인 해금과 함께 이들과 달리 활대로 현을 문질러 소리를 내는 찰현(擦絃)악기이다.
연습곡부터 시작하여 영산회상(靈山會相) 전곡과 청성곡(요천순일지곡) 등을 배우는 과정에서 연습용 악보는 선생님들이 마련해 주셨으나 제대로 된 악보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생각다 못해 당시 남산에 있던 국립국악원에 가서 악보를 좀 빌릴 수 없겠느냐고 통사정을 했다. 직원이 신원을 물어보기에 신분증을 보여줬다. 당시만 해도 국악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별로 많지 않을 때인데 더군다나 공과대학에 근무하는 사람이 웬 국악이냐는 듯이 신분증을 본 직원은 필자를 한참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악보를 빌려주었다.
그러나 그때는 복사기가 없을 때라 거래하던 인쇄소에 부탁해 빈 정간보 노트를 만들고 볼펜으로 일일이 필사를 했다. 그 악보는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단소를 어느 정도 불 수 있게 되자 이를 학생들에게도 좀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실험실에서 PVC 수도파이프로 단소를 만들었다. 그리고 미농지에 먹지를 대고 골필(骨筆)로 단소악보를 필사한 후 이를 청사진으로 만들어 배우겠다는 학생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들을 종종 국악 연주회에도 데리고 다녔으니 숫자는 몇 명 안됐지만 국악 보급에 조금은 기여를 한 셈이다.
집사람은 민요와 박상근(성금연)류 가야금산조를 배웠고 필자도 어깨너머로 조금은 배웠다. 국악의 장단에는 가장 느린 진양조부터 중모리, 중중모리, 굿거리, 자진모리, 그리고 가장 빠른 휘모리가 있다는 것도, 농현(弄絃:현을 짚은 왼손가락을 흔들어 소리에 변화를 주는 것)의 맛도 알게 됐는데 필자나 집사람이나 음악에는 별로 재능이 없는 데다 배우고 난 후 연습을 제대로 하지 않아 이제 연주는 전혀 할 수 없는 상태이다. 그러나 김죽파, 성금연 등과 같은 가야금 명인들과 새로운 가야금의 세계를 열어가고 있는 황병기 교수, 거문고의 신쾌동, 한갑득 등의 명인들, 대금의 김성진, 원장현, 이생강 등과 같은 명인들의 연주뿐만 아니라 판소리와 민요, 그리고 이은관의 배뱅이굿과 안비취의 회심곡 등까지 국악을 많이 이해하고 또 좋아할 수 있게 되었다.
봄바람 따라 왁자지껄 피어나던 바람꽃들이 어느 순간 기세가 꺾여 눈에서 사라지기 시작하는 4월의 깊은 계곡, 높은 산기슭에선 꽃 걱정 말라는 듯 순백의 탐스러운 꽃들이 여기저기 자리를 잡고서 방긋방긋 눈인사합니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땅이 풀리고, 산기슭과 계곡에 두껍게 쌓였던 눈이 녹아 폭포수가 되어 흘러내리는 계곡의 푸른 이끼 곳곳에 달덩이처럼 환한 야생화가 꽃잎을 활짝 열어젖히고 봄날의 환희를 노래합니다.
“청산리 벽계수(靑山裏 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 일도창해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그렇습니다. 높고 푸른 산속에 눈 녹은 맑은 물이 폭포수가 되어 콸콸 흘러내리고, 그 곁에 한국 특산식물인 모데미풀이 무더기로 피어 ‘산꽃 들꽃’, 우리의 야생화를 찾아 나선 벗들을 등산객들을 반갑게 맞이합니다. 한국 특산식물이란 전 세계에서 우리 땅에서만 피고 자라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식물종의 하나라는 뜻입니다. 1935년 지리산 자락인 운봉의 ‘모뎀골’ 또는 ‘모데미마을’이란 곳에서 일본인 학자 오이 지사부로(大井次三郞)가 처음 발견해 모데미풀이란 이름이 유래했다고 합니다. 학명에 오이(Ohwi)란 일본 성이 들어간 이유입니다.
그런데 모뎀골이나 모데미마을이란 동네 이름이 확인되지 않아 꽃이 피어 있던 ‘무덤’을?일본어로 옮기는 과정에서?‘모데미’라는 엉뚱한 이름이 붙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학명 중 종명 메갈에란티스(Megaleranthis)는 ‘크다’는 뜻의 그리스어 메가스(megas)와 너도바람꽃(Eranthis)의 합성어입니다. 실제로 10~20cm 안팎의 줄기 끝에 흰색의 꽃잎처럼 보이는 꽃받침 잎 5장과 노란 수술을 가진 꽃송이가 하나씩 달리는데, 꽃은 순백의 너도바람꽃을 닮았지만 크기는 2배쯤 됩니다. 첫 발견지인 전북 남원의 ‘운봉금매화’란 별칭으로도 불리는데, 영어 이름은 한국 특산식물답게 한글명인 모데미풀(Modemipul)입니다.
다행인 것은 세계적으로는 한국만의 고유종, 한국의 특산식물이기는 하지만, 아직은 만나기 힘들 정도로 매우 희귀하지는 않다는 사실입니다. 남으로 제주도 한라산부터 북방한계선으로 알려진 강원도 점봉산까지 폭넓게 분포하는데, 대부분 해발 800m가 넘는 습지나 능선 부근에서 자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고산·아고산 지대가 자생지인 특성으로 인해 늦은 봄인 4~5월 개화함에도 불구하고 설중화(雪中花)의 주인공이 되곤 합니다. 산자락 아래에서는 분명 비가 내리지만, 같은 날 같은 산이라도 정상 부근 고지대에서는 눈발이 흩날리기 때문입니다.
Where is it?
첫 발견지라는 학술적 기록에도 불구하고 전북 남원 운봉의 지리산 자락에서는 정작 모데미풀을 한 포기도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대신 한라산, 설악산, 태백산, 점봉산, 오대산, 광덕산 등 전국적으로 폭넓게 자생지가 확인되고 있는데, 개체 수가 많기로는 소백산과 덕유산이 꼽힌다. 특히 소백산 정상 부근은 한국 최대(한국에만 있으니 세계 최대라는 말도 된다) 규모의 자생지가 펼쳐지는 곳으로 유명하다. 야생화 사진작가들이 최고로 꼽는 모데미풀 자생지는 강원도 횡성군 둔내면 청태산 자연휴양림. 졸졸졸 흐르는 계곡 물과 무성한 초록색 이끼, 바위 사이사이에 하얗게 핀 모데미풀을 한꺼번에 담을 수 있는 명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