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家和만사성의 조건 Part 8]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2호 악기장(장구·북) 서인석

기사입력 2016-05-26 09:11 기사수정 2016-05-26 09:11

시대는 흘러도 우리 것은 지켜야 합니다

정읍역에 내려 역사로 나가는 출구에는 ‘정읍농악대’를 그린 서양화 작품이 걸려 있다. 예로부터 풍류의 고장으로 불리는 정읍을 한눈에 느낄 수 있는 그림. 벚꽃이 잔잔하게 깔린 시내 곳곳에서도 ‘농악’, ‘전통’이란 문구의 표지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국 예술혼을 줄기차게 이어가는 곳 정읍. 이곳에 우리악기를 3대째 계승 발전시키고 있는 이가 있다.

바로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2호 악기장(장구·북) 서인석(徐仁錫·58) 명인이다.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2호 악기장(장구·북) 서인석n 명인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2호 악기장(장구·북) 서인석n 명인

서인석 명인은 지난해 12월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2호(장구·북) 악기장이 됐다. 전통기법에 따라 장구와 북을 손으로 직접 깎아 만드는 유일한 전승 기능 보유자다. 이는 할아버지(서영관 徐榮寬·1884~1973)를 시작으로 아버지(서남규 徐南圭·1924~2005), 서인석 명인까지 3대째 내려오는 가업이다.

“열두 살 때부터 도끼 들고, 칼 들고, 대패질 정도는 할 수 있었습니다. 중학교 때는 200kg 되는 나무들도 툭툭 쳐가면서 옮겼습니다.”

악기 만드는 방법을 앉아서 배워본 적도 없다. 그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돕다 자연스럽게 국악기 전승 장인이 됐다.

서인석 명인의 할아버지는 동네 훈장이었다. 마을의 세시풍속 행사도 관장했다. 동네 대소사에 풍장(풍물놀이)이 빠질 수는 없다. 당연히 악기를 만들고 연주하는 데 도통할 수밖에. 그렇게 가업이 시작됐다.

아버지 대에서 서인석 명인으로 국악기 제작 가업이 넘어오면서 큰 시련을 겪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전답에 집까지 저당 잡혀 사들인 대형 트럭 7개분의 나무가 오간데 없이 사라졌다.

가세가 기울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있다가 공무원이 됐다. 1년 뒤, 수소문 끝에 나무를 훔친 범인을 잡았지만 노름으로 돈을 다 탕진한 상태였다. 범인을 잡은 이후 공무원 생활을 그만둔 서인석 명인은 힘든 시간을 버티며 가업을 이어갔다.

“할아버지 때는 무형문화재 제도가 없었고, 아버지 때가 돼서 생겼습니다. 아버지는 이런저런 이유에서 문화재 지정이 미뤄지다 1996년 3월에 무형문화재가 되셨습니다.”

3대째 가업승계를 하고, 2대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국악기 명가지만 현실은 많이 척박하다. 시중에 유통되는 장구 대부분이 기계로 빠르게 제작돼 박리다매된다. 만드는 데 5년에서 10년은 걸리는 서인석 명인의 장구는 공장에서 만들어진 장구와 가격 경쟁이 안 된다. 전통을 고수하고 이어나가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세상의 편견과도 맞서야 한다. 그래서 2000년에는 대학에 들어가 국악을 전공하고 석사과정까지 마쳤다. 그에게 악기를 사러 오는 국악 전공자는 대학물(?)을 먹었다는 이유로 서인석 명인 앞에서 아는 척을 했다.

“제가 아버지의 문화재 제1호 ‘전승 장인’이라 할지라도 국악 전공자들은 ‘이렇게 해달라’며 요구를 했습니다. 장단이 틀리는 사람들도 전공자라는 이유만으로 내가 배운 것들을 인정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아버지 故 서남규 명인(맨 오른쪽)의 살아생전 모습. 장구를 다듬는 이가 서인석 명인이고 왼쪽이 아들 서창호씨다.
▲아버지 故 서남규 명인(맨 오른쪽)의 살아생전 모습. 장구를 다듬는 이가 서인석 명인이고 왼쪽이 아들 서창호씨다.

그는 악기장으로 무형문화재가 됐지만 장구 연주자로도 유명하다. 전주대사습놀이에서 설장구로 두 번이나 장원을 했다. 김병섭 류 설장구를 비롯해 설장구는 모두 섭렵했다. 대학교에 다닐 때 장구 장단을 오히려 교수에게 가르칠 정도였다. 석사 논문은 온전히 아버지로부터 보고 배웠던 것을 썼다.

“현대와 고려 시대의 비교 논문을 썼어요. 고려 때는 토기로 악기를 만들었어요. 장구 제작 기법에 관한 연구론을 썼죠. 논문을 쓰면서 용어 정리를 제대로 했습니다.”

박사과정에도 도전하고 싶었지만 우리나라에는 국악기 제작 박사과정이 없다. 주위 사람들이 일본 유학을 권유했다.

“일본에는 제작학과가 있다더군요. 그런데 갈 수 없었습니다. 제가 가서 공부하면 우리의 기술을 일본에 주는 격이니 더더욱 갈 수가 없었어요.”

선대에는 국악을 아는 사람도 많았고, 악기만 잘 만들면 됐다. 지금은 편견을 이겨내고, 한 단계 더 발전해 나가야 하기에 헤쳐 나갈 것들이 너무나 많다.

집안의 가업 승계에 관한 얘기를 하다가 4대째로 넘어갈 수 있는지에 대해 물었다. 4형제를 둔 아버지인 자신도 궁금한 부분이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집안일을 보며 자랐지만 ‘아직은 아버지, 어머니가 하세요’라고 말합니다. 그래도 꼭 이어야 할 가업이라는 것을 아들 모두 알고 있습니다. ‘언제든지 필요하다고 할 때 오겠습니다’라고는 하더군요.”

4형제도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돕고 거들면서 성장했다. 모두 장구를 깎고, 연주할 줄도 안다.

“장남이건 막내건 거부감이 없어요. 그냥 늘 보던 일인 거죠. 이게 복입니다. 아버지도 복이시고 할아버지도 복이신 거죠.”

현재 서인석 명인은 호남우도(전북 정읍) 풍물의 명맥을 이어가는 설장구 연주자로 무형문화재 신청을 계획하고 있다.

“악기를 다룰 수 있어야 원하는 공명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치를 아는 사람을 찾고 싶습니다.”

전통의 맥을 잇는 것이 정말 소중하다는 서인석 명인. 세상 사람들이 비록 그것이 식상하다 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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