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비운 자리에 상대를 받아들이듯 서로 다른 나무가 한 몸이 되어야 비로소 하나의 가구가 완성됩니다.” 50여 년 ‘외길 인생’에 값하는 사유의 언어로 ‘전통 짜맞춤’을 설명하는 소병진(蘇秉辰·68) 씨. 1960년대 중반, 가난 때문에 학교 공부도 포기한 그는 열다섯 살에 가구공방에 들어가 ‘농방쟁이’ 목수의 삶을 시작했다. 이후 맥이 끊긴 조선시대의 가구 전주장을 재현해내고 대한민국 가구제작 명장 1호, 국가무형문화재 제55호 소목장 보유자가 됐다. 한 치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았던, 작업대 위의 시간들이 가져다준 당연한 결과였다.
전북 완주에서 작품활동을 하며 제자들을 가르치는 그는 마침 서울에 올라와 있었다. 6월 4일까지 열렸던 2018한옥박람회에서 ‘전통예술과 현대미술의 만남’을 주제로 자신의 작품을 선보이기 위해서였다. 인터뷰가 잡힌 날,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약속 시간을 조금만 미뤄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그의 작품과 제자들이 출품한 가구를 관람하고 전시장을 몇 바퀴 돌고 난 뒤에야 그가 나타났다. 사실은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과 늦게까지 술을 마시느라 늦잠을 잤다고 털어놨을 때 아직 건강한 그의 시절이 반가웠다. “좀 더 일찍 국가무형문화재가 되었더라면 제자들을 많이 길러냈을 텐데…” 하고 아쉬워했지만 그는 여전히 필드에서 펄펄 날고 있는 선수처럼 보였다. 고희(古稀)를 바라보는 나이도 믿기지 않았다.
“평생 나무와 함께해서 건강한 거 같아요. 가구를 만들다 보면 스트레스와 잡념이 사라지거든요. 못을 사용하지 않고 목재끼리 서로 끼워 맞추는 게 짜맞춤인데 이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뇌를 써야 하니까 치매 예방에 좋지, 온몸을 움직여야 하니 운동을 따로 할 필요가 없지, 시간도 잘 가지, 정서적으로도 좋지, 성취감도 있지,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어요. 미래학자 피터 드러커도 ‘전통문화는 미래산업의 최후 승부처’라고 했잖아요. 곧 시니어에게 짜맞춤이 최고의 직업이 되지 않을까 전망해봅니다.”
실제로 완주에 있는 그의 교육관에는 퇴직자들이 꽤 온다. 대부분 취미로 배우지만 제2직업으로 삼는 사람도 있다. 물론 후계자의 길을 걷기 위해 청년들도 문을 두드리기는 하지만 1년 정도 지나면 버티지 못하고 나간다. 경제적 이유 때문이다. 그는 전통문화의 부가가치를 내다보고 적극 지원하는 일본에 비해 우리나라의 현실은 매우 열악하다면서 안타까워했다.
“전통 짜맞춤 기법은 총 45가지인데 지금은 5가지밖에 안 가르쳐요. 돈 내고 그걸 다 배우려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죠. 교육생들에게 손 연마(수공구 연마)만 시키면 지루해합니다. 빨리 물건 하나 만들어보고 싶은 거예요. 6개월이면 사방탁자 정도는 만들 수 있어요. 하지만 흉내 내는 것밖에 안 돼요. 기술자가 되려면 눈을 감고도 나무를 다룰 수 있어야 하고, 이음매를 딱딱 때려보는 것만으로도 짜맞춤이 제대로 되었는지 감각적으로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세대가 가구를 배울 때는 청소와 심부름 등 온갖 잡일을 해가면서 스승 밑에서 10년 이상 공을 들여야 겨우 인정을 받았어요. 그러나 요즘 같은 세상에 그렇게 공부할 젊은이들이 과연 있을까요. 정부가 전통문화를 짊어질 이수자들에게 지원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가난 때문에 배우기 시작한 소목장 기술
‘농방쟁이’. 과거에는 가구 만드는 사람을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그가 소목장이 된 인연은 5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전매청에 다니던 아버지가 직업을 잃으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자 열다섯 살 소년은 일찍 철이 들어버렸다. 젓갈장사 등을 하며 7남매 뒷바라지하는 어머니를 보며 무슨 기술이든 배워 빨리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중학교를 중퇴한 채 8촌 형을 따라 들어간 곳이 ‘전주 중앙가구’ 목공부 소목반. 그곳에서 운명처럼 전통 소목 기술자 이해민 명장을 만나 사사한다. 어린 소병진은 하나를 가르쳐주면 둘을 알 정도로 눈썰미가 남달랐다. 남들은 10년 넘게 배우는 기술을 2년 반 만에 통달했다. 이 똘똘한 소년을 주변에서 그냥 놔둘 리 없었다. 어느날 그의 솜씨를 눈여겨보던 유명 목수 유춘봉 씨가 자기 집으로 오라 했다.
“유춘봉 선생님은 서울에서 일하던 최고 기술자였지요. 전주 중앙가구에서 디자인 개발을 위해 모셔왔는데 그렇게 인연이 된 거죠. 내게 넓고 새로운 세계를 보여준 은인입니다. 음료수 한 박스 사 들고 갔더니 ‘자네 인사성도 좋고 성실하고 솜씨도 참 좋네. 여기 놔두기 아까워서 하는 말인데 돈 벌고 싶은가, 기술 배우고 싶은가? 내가 만약 동일가구 보내주면 갈랑가?’ 하고 물으시더군요. 깜짝 놀랐죠. 동일가구는 아무나 들어가는 회사가 아니었거든요.”
더 큰 기술을 배우고 싶었던 그는 유춘봉 씨가 써준 편지를 들고 서울로 올라갔다. 과연 소문대로 시스템이 잘 갖춰진 회사였다. 그는 일본으로 가구를 납품하는 수출반에서 일하게 됐다. 최고급 가구를 제작하는 곳이었다. 그동안 어디서도 보지 못한 수려한 디자인의 가구들을 보며 그는 가슴이 뛰었다. 함께 일할 사람들은 모두 머리가 희끗희끗했다.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장인들이었다. 이때 배운 기술, 특히 디자이너를 귀찮게 따라다니면서 배운 디자인 기술은 그가 조선시대 가구 전주장을 복원해낼 때 큰 도움이 되었다.
‘전주장’을 대표하는 브랜드가 되다
“전주장을 처음 본 것은 동일가구에서 일할 때였어요. 휴일이면 인사동엘 자주 나갔는데 어느 날 골동품 가게에 있는 물건이 눈에 확 들어왔어요. 자그마하면서도 기품이 느껴지는 가구였어요. ‘전주태극이층장’이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길래 직원에게 물어보니 조선시대에 전주 지방에서 부잣집 마님들이 쓰던 가구라는 거예요. ‘우리 고향에서 조상들이 쓰던 가구라고?’ 귀가 번쩍 뜨였죠.”
그때부터 전주장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언젠가는 꼭 한 번 만들어보리라 마음먹고 월급을 타면 죽은 느티나무와 먹감나무를 사서 고향집에 쌓아 뒀고 전주장이 있는 곳이라면 전국 어디든 달려갔다. 박물관이나 개인이 소장한 가구를 통해 형태와 장석문양도 꼼꼼히 기록했다. 그것으로도 성에 안 차면 어렵게 구한 전주장을 분해해서 제작 기법을 하나하나 분석했다. 그러기를 20여 년 그는 마침내 전통가구 전주장의 원형을 재현해내는 데 성공했다.
“전주장 앞면에 들어가는 문양과 장석 하나까지 정통 그대로 살려냈어요. 장석은 너무 번쩍거리지 않도록 처리했고, 가구 보존을 위해 마무리는 동백기름으로 칠했지요. 전주장은 지방에서만 쓰이던 가구가 아니에요. 한때는 하사품으로 이용될 만큼 명성이 있었던, 조선시대 가구의 백미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사명감을 갖고 내가 알고 있는 기술을 모두 쏟아 부었어요. 2004년 전승공예대전에 ‘전주버선장’을 출품해 대통령상을 받았을 때 ‘내가 결국 해냈구나’ 하며 자부심을 느꼈지요.”
그 후 소병진은 ‘전주장’을 대표하는 브랜드가 됐다. 2014년에는 마침내 대한민국 중요무형문화재 제55호 소목장 보유자로 선정이 됐다. 한눈팔지 않고 최선을 다한 세월이 가져다준 보상이었다. 한때 부도를 맞아 ‘그만 살자, 격포에 가서 죽어버리자’ 하고 바위 위로 올라갔다가 어린 아들이 눈에 밟혀 다시 돌아왔던 날들은 이제 추억이 됐다. 그는 자신의 기술이 3대를 잇는 기술이라고 했다. 스승의 선대 기술까지 배웠으므로 100년의 기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살아 있을 때 전주장 기술을 보존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 일환으로 최근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소목장(전주장) 등재를 위한 노력을 다방면으로 하고 있다.
좋은 나무만 보면 아직도 설레는 사람
짜맞춤 가구에 사용되는 목재는 주로 오동나무, 느티나무, 먹감나무 등으로 보통 100년 이상 된 나무들이 쓰인다고 한다. 그는 지금도 좋은 나무만 보면 탐이 나고 설렌다고 말한다.
“나무를 들여오면 눈과 비바람과 햇볕을 맞히고 건조 과정을 거쳐 가구를 만들기까지 20여 년이 걸려요. 지금 내 나이가 곧 70인데 20년 뒤면 90입니다. ‘내가 이 나무를 사용할 수 있을까? 미쳤지! 그만 사야지’ 하면서도 좋은 나무만 보면 ‘얼마여?’ 하고 물어요. 이게 바로 정신 같아요. 여기 쟁여놓은 나무들, 누가 10억 준다 해도 안 팔아요.(웃음)”
그의 교육관에는 귀한 목재들이 가득하다. 스승은 제자를 위해 나무를 구하고 제자는 그 나무를 쓰며 스승을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서로에게 가는 마음의 길은 비움과 받아들임을 반복하며 상대를 꽉 안은 채 열릴 것이다. 순환의 사랑이 100년의 기술만큼 오래도록 이어지길 그가 기대하고 있는 것처럼.
세계 최초로 죽염 산업화를 이룬 ‘인산家’는 죽염의 대명사로 불린다. 그 인산죽염의 창시자는 신의(神醫)라 불렸던 인산(仁山) 김일훈 선생, 그리고 현재 인산家의 수장으로서 인산죽염을 이끌고 있는 이는 그의 아들 김윤세(金侖世·63) 회장이다. 1987년 정부로부터 죽염 제조 허가를 받아 30여 년간 사업을 이어왔다. 현재 29만 명의 회원을 거느리고 연매출 300억 원의 기업으로 성장한 인산家를 찾아 소금장수의 진심과 사명감을 들어봤다.
김윤세 인산죽염 회장이 선친 김일훈 선생이 구축한 인산의학의 내용을 보건의료 법령에 반영하여 국민 건강을 이롭게 하기 위해 국회를 찾은 것은 1977년이었다. 그러나 그 시도에서는 아무 소득이 없었다. 인산죽염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은 그로부터 무려 10년 뒤인 1987년이었다. 10여 년의 세월 동안 계속해서 인산家의 의학 비법을 알리고자 노력했던 김 회장은 당연하게도 세상의 어리석음에 대해 안타까움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요즘 그가 걱정하는 것은 식문화다.
요즘 음식들이 갖고 있는 심각한 문제들
“요즘 음식이 탈만 안 나면 다행이죠. 음식의 99%가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지요. 방부제, 화학 첨가물이 기본적으로 들어가 있고…. 술에는 인공감미료를 왜 넣을까요? 그것은 도수를 낮게 하기 위해서인데, 저도수의 술은 부패가 쉽게 돼요. 알콜도수가 25도만 넘으면 그런 문제가 없는데 말이죠….”
김윤세 회장은 요즘 음식들이 너무 사람들의 기호에 맞추려는 경향 때문에 위독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음식 고유의 맛을 즐기는 게 아니라 그저 단맛 같은 자극적인 맛을 즐기려고만 하고, 그 입맛에 맞추느라 음식이 불량해진다는 것이다.
“맛있는 것만 추구하면 편식하게 됩니다. 그러면 균형이 깨져요. 화려하고 아름다운 색깔만 추구하면 눈이 머는 것과 같아요. 진정한 아름다움을 파악 못하게 되는 거죠. 그러나 본래 자연의 아름다움을 봐야 합니다.”
마치 평상시에 색안경을 쓰고 있는 것과 같은 상태, 우울하면 꽃이 회색빛으로 보이는 것과 같은 상태라는 그의 말은 허상을 경계하라는 말로 이어졌다. 사람은 자기 주관으로 세상을 볼 수밖에 없는데 다양한 허상을 보게 되는 게 문제라는 그의 지적은 허상으로 가득한 현대를 향한 독한 일침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세상의 허상만 좇으며 사니까요. 생명의 본질이 무엇인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전혀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으면 짐승과 수준이 비슷해집니다.”
인류 구원을 부탁받은 인산 선생
인산家를 언급할 때 인산 김일훈 선생에 대해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김 회장은 선친인 인산 선생으로부터 전수받은 죽염 제조 이론과 제조 기술을 암·난치병 치유법과 함께 ‘신약(神藥)’이라는 책을 통해 세상에 낱낱이 공개했다.
죽염이라는 혁신을 세상에 내놓은 그는 어떤 인물일까. 그를 곁에서 지켜보며 업을 이어온 김윤세 회장의 목소리로 직접 들어봤다.
“아버지는 인류가 절멸의 위기로 가고 있는 걸 막기 위해 하늘이 내린 인물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이해를 못하기도 해요. 하지만 아버지는 전 세계 의학이 상상도 못한 치료법을 제시한 사람이에요. 아버지가 일으킨 그런 기적이 수북하니까 사람들이 병이란 게 어려운 게 아닌가보다, 병을 잘 고치는 분이라고만 기억해요. 하지만 그런 분이 아니라 지구와 우주, 시간과 공간을 꿰뚫은 분이셨어요.”
인산 김일훈 선생의 실체에 대해선 평생 같이 사는 어머니도, 자녀들도 모를 정도라고 한다. 그를 알아주는 사람은 오직 석가모니와 부처였다고 한다. 그들은 생멸이 없는 이들이니까 가능한 얘기라는 것이 김 회장의 설명이다. 또한 김일훈 선생은 실제로 그들과 만나기도 했다고 한다. 그들이 그의 앞에 나타나서 인류를 절멸에서 구해내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불가사의한 사람이시죠. 이런 얘기를 책이나 방송에서 못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이해를 못하니까요. 혹세무민한다는 얘기를 들으니까.”
그는 만약 휘발유가 아니라 물로 움직이는 자동차를 개발했다고 하면 잘 팔리겠냐고 물었다. 세상의 모든 자동차 산업이 휘발유로 움직이기 때문에, 그런 차가 개발됐다고 해도 세상에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세상에 이미 알려지고 99.9%가 사실이라 해도 진실이 아닌 게 있어요.”
그는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자연적 힘이 진정한 치료
김윤세 회장은 지혜롭고 뿌리 깊은 전통의학의 우월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의학이 이 시대에도 첨단의학보다 더 훌륭하다는 설명이었다.
“서양의학이나 현대의학으로 치료하면 낫는 병이 없어요. 나은 것처럼 보일 뿐이죠. 그런데 전통의학은 암 같은 난치병을 근본적으로 해결해주죠.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워요.”
그는 자연의 이치와 섭생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암 4기는 의학적으로 치료된 적이 전혀 없어요. 그런데 암 말기 중의 말기인 사람들이 인산 선생에게 와서 낫지 않은 사람이 없었어요. 인산 선생은 그냥 고치면 되지 하며 치료를 했거든요. 수준이 높을수록 간단한 법이에요. 의학이 복잡한 것은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죠. 아직 경지에 도달 못했으니 말만 그렇게 하고 복잡하기만 하고 치료가 안 되는 거예요.”
김 회장이 설명하는 인산 선생의 치료법은 간단명료했다. 중병인 환자가 와서 “어떻게 하면 살겠습니까” 하고 물으면 인산 선생은 “음, 죽염 배 터지게 퍼먹어라” 하는 말만 했다고 한다. 현대의학에서 들으면 기겁할 일이다. 나트륨은 무조건 줄이라고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 회장은 그런 말에 반대한다.
“소금이 무슨 독극물입니까? 소금은 반드시 섭취해야 하는 필수 식품이에요.”
그는 최고의 의학은 우주 자연의 법칙에 근거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이치에 근거하지 않으면서 무슨 의료가 나오겠냐는 비판이었다.
소금은 체온을 흩어지지 않게 만든다
소금에 대한 김윤세 회장의 얘기를 조금 더 들어봤다.
“사람은 온기가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소금은 사람의 체온을 흩어지지 않게 붙잡는 역할을 하죠. 죽염은 그 능력을 강화시킵니다. 소금은 바다에서 나와 기본적으로 찬 성질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아홉 번 굽는 과정을 통해 소금에 불을 집어넣죠. 그게 바로 죽염이에요. 철학적으로 정의한다면 소금 속에 빛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김 회장은 체온이 1℃ 떨어지면 암은 열 배, 백 배, 천 배 커진다고 설명했다. 암 치료를 위해선 기본적으로 체온을 회복시켜줘야 한다는 것이다.
“계속 암세포가 생겨나는데 죽이고 없애면 무슨 소용인가요. 그런데 체온을 유지시키려면 소금 아니면 방법이 없어요. 체온이 1℃ 높아지면 면역력은 다섯 배 높아져요. 그런데도 현대의학에서는 체온은 보지도 않으니 이게 말이 안 되죠.”
김 회장의 말에 따르면 우리나라 서해안 천일염에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원소가 거의 다 들어 있다고 한다. 전 세계 다른 나라 바닷물에는 없는 원소들, 인체를 구성하는 필수 원소들, 80여 종의 미네랄 등등. 인산 선생은 이 모든 걸 꿰뚫어 봤다고 한다.
그런데 천일염 안에는 독사의 독보다 월등히 무서운 맹독들도 있는데, 다행히 그 양이 많지 않아서 섭취해도 금방 죽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부분을 처리하지 않고 먹으면 위험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소금을 직접 섭취해 먹지 않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천일염이 가진 독성을 중화시키기 위해서였다. 인산家에서 소금을 대나무로 구워서 죽염으로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죽염을 만드는 과정이 거듭되는 동안 소금의 분자구조가 바뀌고 소금 속의 원소들이 우리 몸에 사용되기 쉬운 미네랄, 즉 생리활성 능력이 뛰어난 물질로 재탄생하게 된다. 김 회장이 죽염처럼 질 좋은 소금은 ‘짜게 마음껏’ 먹어야 몸에 이롭다고 역설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치유되기 어렵다는 병도, 본인의 고치겠다는 의지, 반드시 낫는다는 희망이 전제되면 진검승부를 벌일 수 있어요. 자가 치유력을 높여 자기 병을 자기 스스로 고치게 하는 인산家의 출발점은 결국 자기 자신이라는 겁니다.”
민족 전통의학의 우월성 전 세계에 알려
김윤세 회장이 하고 싶은 일은 대체의학의 위상을 전 세계에 드높이는 것이다. 그는 죽염이 인정받으면 우리나라가 의약 대국으로 가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주장했다.
“모든 소금은 산화력이 있어요. 녹슬게 만드는 거죠. 그런데 죽염은 환원력이 있어요. 녹에다 죽염을 쓰면 녹이 없어지거든요. 이건 물리화학적으로 금방 파악되는 거예요. 전 세계 어디에도 환원력을 띠는 소금은 없습니다. 그러니 사람이 먹어 병을 고치는 소금이 있다면 전 세계가 경악할 거예요. 이보다 더 좋은 전략 상품이 어딨나요? 전 세계가 한국만 쳐다보게 될 겁니다.”
그는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자기 지식 속에 매몰되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다각도로 면밀하게 검토해야지,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배척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 분야의 고수를 만나 꼭대기에 올라가서 얘기하면 서로 보여요. 바둑으로 일등을 한 사람이나 테니스로 일등한 사람이나 서로 소통이 가능한 법이죠. 그러나 사람들이 못 알아들어요.”
그는 독일은 기술을 배워서 명장이 되면 국가가 장관급 예우를 해주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숙달된 기술자를 그렇게 대우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서울대학교 등 명문대 위주로 만들어진 학벌 중심 사회가 기술자를 멸시하는 환경을 만들었다는 그의 비판은 아직 좁은 우물에 갇혀 있는 한국의 지식인 사회에 대한 경종이기도 했다.
“그건 결국 자기 혼자만 잘났다는 거죠. 그런 사람은 무한 국제 경쟁이 시작되는 글로벌 세상에 나가면 바로 깨져버려요. 그래도 요즘 사회가 기술자를 우대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어서 다행이긴 해요.”
인산의학의 전파야말로 인생 최고의 선택
“어려서부터 아버지에 대한 이해가 깊었고 심부름을 도맡아서 했죠. 지금 일도 아버지의 심부름이라 생각해요. 이 일은 제 인생에서 최고의 선물이에요.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고 그리고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명이기도 하고요.”
다른 일을 하다가 인산의학을 본격적으로 알려야겠다고 결정한 그 판단이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말하는 김윤세 회장. 그러나 그 선택 이후 사업을 정착시키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사실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소금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부정적인 인식이 많다. 1993년에 건강관리법 보도, 2002년에는 다이옥신 파동으로 시끄러웠고 그리고 요즘도 건강을 망치는 주범으로 비판받고 있다. 그러한 사정을 돌파하기 위해 인산家는 지난 2000년 업계 최초로 국제표준화기구 ISO의 품질경영시스템 인증서를 취득하고 무슬림 먹거리 할랄 인증도 받는 등 여러 노력을 해왔다.
그런데 정작 과거의 소금은 이런 취급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였다.
“옛날에는 집이 가난해서 짭짤하게 못 먹었어요. 소금이 귀했으니까요. 그래서 남의 집 음식 맛있다는 걸 ‘그 집 음식 짭짤하다’고 표현했죠. 그리고 돈을 많이 벌면 ‘수입이 짭짤하다’고 표현하는 것도 아시죠? 이처럼 ‘짭짤하다’는 말은 긍정적인 표현이었어요.”
김윤세 회장은 음식이 싱거운데 맛있다는 사람은 이상하다고 말했다. 어떤 음식이든 싱거우면 맛이 없는 게 당연하고, 따라서 짭짤하다는 표현이 전제되어야 맛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음식이 싱거운데 맛있다는 말은 ‘엄청나게 돈이 많은 가난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세상의 죽염이 되고파
현재 인산家의 회원은 29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기업이나 비즈니스에서 가장 중요한 신뢰를 더 확고히 다져 올해 30만 명을 목표로 하고 있다.
현재 죽염 회사는 인산家 말고도 50여 개가 있다. 인산家가 사업을 그만둔다 해도 죽염 기술은 다 공개되어 있으므로 앞으로도 계속 사람들이 찾게 될 터이다. 소금에 대해 부정적인 기류가 있어도 죽염의 역사는 계속될 것이다.
파스퇴르 연구소처럼 국제연구기관으로 손색이 없는 세계적인 연구소를 세우고, 자연물의 약성을 활용하는 의료를 교육하는 기관을 함께 설립해 대한민국이 의료 대국이 되는 데 선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마지막으로 김 회장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지를 물어봤다.
“죽염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빛이다’라는 말에 ‘온기’가 더해진 것입니다. 저는 세상의 죽염처럼 역할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어요.”
“맛이 서로 싸우는 걸 알아야 해요.” 명인의 한마디는 예사롭지 않았다.
20여 년간 커피와 함께한 삶. 육화된 시간의 두께가 느껴졌다. 엄살도 없고 과장도 없다. 오로지 그 세월과 맞짱 뜨듯 결투한 사람만이 들려줄 수 있는 절창이다. 국내에 커피 로스터가 열두 대밖에 없던 시절, 일본에서 로스팅 기술을 배우고 돌아와 그가 문을 연 청담동 ‘커피미학’에는 각지에서 맛을 보러 온 커피 애호가들로 북적였다. “여종훈 커피가 대한민국에서 제일 비싸다”는 소문에도 아랑곳없었다.
20대 때부터 커피를 달고 살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서커피에서 나온 무늬만 커피인 믹스커피를 마실 때 그는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깡통커피를 사다 마시곤 했다. 드립 커피에 대한 개념조차 생소했던 시대에 퍼컬레이터로 원두커피를 추출해 하루 열 잔 이상씩 마셨다니 요즘식으로 말하면 커피 덕후였다.
“당시 원두커피를 파는 다방들은 많지 않았어요. 신촌의 몇몇 다방은 양키시장에서 깡통커피 MJB, MJC를 사다가 썼죠. 그때는 바리스타를 ‘주방장’이라고 불렀어요. 지금 그러면 기겁할 일이지만 커피 전문 주방장들이 원두커피 맛을 높이기 위해 담배꽁초나 칡뿌리 등을 몰래 넣기도 했어요.”
아직 무림의 고수들이 등장하기 이전이었다. 여종훈(呂鐘勳·64) 명인의 커피 인생은 우연한 기회에 시작됐다. 식품공학과를 졸업하고 원예 사업을 해보려고 20대 중반에 시골로 들어갔던 그는 6년 만에 다시 도시로 나오고 말았다. 지금처럼 성능 좋은 농기계가 없던 때라 삽으로 직접 흙을 파야 했는데 허리가 견뎌내질 못했다. 젊은 패기에 농사일을 너무 우습게 봤던 것이다. 원예 사업을 접은 뒤에는 몇 번 직업을 바꿨다.
“손에 딱 잡히는 일이 없어 이런저런 생각이 많을 때였어요. 어느 날 일본에 살던 친구가 사업 구상차 한국에 왔는데 드립 세트랑 원두커피를 트렁크에 넣어왔어요. 마셔보니 맛이 기가 막힌 거예요. 어디서 가져온 커피냐 물었더니 일본에서 ‘커피미학(珈琲美学)’이라는 커피 전문점을 운영하는 장인이 볶은 콩이라고 하더군요. 국내 커피랑은 전혀 다른 고급스러운 향과 맛의 품격이 느껴졌어요. 반해버렸죠. 제가 커피를 정말 좋아하긴 했나봐요. ‘어떻게 하면 이렇게 맛있는 커피를 한국에서 계속 마실 수 있을까’ 궁리하다가 커피 사업을 해볼까 하는 생각에까지 이르렀어요.”
일본에서 온 친구는 그와 함께 청담동에서 커피미학을 운영한 재일교포 나가시마 요시코였다. 두 사람은 의기투합했다. 그는 곧바로 일본으로 가 오하라 히로시(小原博 )를 만났다. 명성대로 꼬장꼬장했다. 그에게 로스팅 기술을 배우고 ‘커피미학’이라는 브랜드를 가져오는 과정은 쉽지 않았지만 결국 승낙을 받아냈다.
“1년간 공부했어요. 고달팠죠. 커피 맛을 보기 위해 매일 30~40잔의 커피를 마시고 혈변을 보는 바람에 병원에 실려 가기도 했어요. 최고의 맛을 찾고야 말겠다는 강박 같은 게 있었죠. 지금 생각하면 너무 미련했어요. 한 모금 입에 넣고 맛만 보고 뱉어버려도 되는데 다 마시다가 그 사달이 났으니 말이에요.”
그는 해외유학파 1세대로서 일본 커피 명장의 인정을 받는다. 대학교 때 커피숍에서 일하다 마신 원두커피 한 잔이 인연이 되어 장인 명단에까지 이름을 올린 오하라 히로시는 많은 제자를 두었지만 여종훈 명인을 마지막으로, 가르치는 일을 그만두었다. 제자들이 자신이 가르친 범주에서 그대로 머물러 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여종훈 명인은 제자들을 가르쳐보고 나서야 선생의 깊은 뜻을 헤아리게 됐다.
“강의할 때 ‘이렇게 하면 안 돼요’라고 말하면 배우는 사람은 그걸 곧이곧대로 믿습니다. ‘왜 안 돼?’ 하면서 의심해보지 않는다는 거죠. 오하라 선생은 그런 면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게 큰 의미가 없고, 오히려 위험하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로스팅을 10년 해본 사람과 20년 해본 사람은 감별 능력이 다릅니다. 20년간 로스팅을 해온 저도 헤맬 때가 있어요. 맛에는 정답이 없어요. 그래서 연구는 끝이 없어야 합니다.”
그는 커피 맛을 스펙트럼에 비유해 설명한다. 맛의 정점이 한곳에 모여 있는 콩도 있고 넓게 형성되어 있는 콩도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원두 종류에 따라 반응하는 온도가 다른데 로스팅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풍미가 달라진다는 의미다.
“약배전으로 해줘야 맛이 제대로 나는 콩이 있어요. 그럴 때는 약배전으로 끝내야 해요. 더 볶으면 제 맛을 잃어요. 또 어떤 콩은 강배전일 때 최고의 맛이 나죠. 이런 콩을 약배전으로 볶으면 맛이 망가집니다. 이런 감별 능력은 경험치에서 나와요. 끊임없이 테스트를 해본 사람만이 섬세한 맛의 차이를 구별해낼 수 있는 거지요. 이런저런 방법 다 써봐야 맛의 정점에 가까운 로스팅 방법이 구해집니다. 제가 오하라 선생을 만나러 일본에 갔을 때 매장에 내놓은 커피가 70여 종이나 되었는데 참 대단한 분이에요. 커피에 미치지 않고서는 그 많은 콩의 맛을 감별해내기 힘들거든요.”
청담동 ‘커피미학’에서 ‘커피쌤’의 시대로
일본에서 돌아와 청담동에 커피미학을 열고 그는 40여 종의 커피를 메뉴판에 올렸다. 맛에 있어서만큼은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그가 직접 로스팅하고 핸드드립으로 정성껏 추출한 커피를 내놓자 난리가 났다. 당시 에스프레소 한 잔 가격이 무려 1만 원이나 했는데도 어디서 소문을 듣고 왔는지 매장 안은 커피 애호가들로 북적였다.
“커피값이 밥값보다 비쌌어요. 그래도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거의 매일 들락거렸지요. 우스갯소리로 커피미학에서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청담동 사람이 아니라는 말까지 나돌았어요. 연예인, 스포츠인들도 자주 왔는데 손님들 중 3분의 1은 연예인이었어요. 손숙, 윤석화, 임예진, 최민식, 송강호, 차인표, 김선아 등이 그때 단골이었죠. 드라마나 영화 촬영이 끝나면 기자들 데리고 와서 인터뷰도 하고 금융권에서는 특별한 날 아예 하루 빌려 행사를 치르기도 했어요.”
다양한 문화인들의 아지트이기도 했던 커피미학은 지금까지도 그 시절을 추억하는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 그만큼 편안하고 매력적인 공간이었다. 유럽풍의 고급스러운 실내 분위기와 넓은 정원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지만 지하에 쿠바, 탄자니아, 에티오피아 등지의 나라에서 수입한 생두를 로스팅하는 공장까지 세팅해놓아 마니아들에게 신뢰감을 줬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종훈 명인의 커피 맛이 일품이었다. 한창 입소문을 탈 때는 신문과 잡지, TV 등에도 자주 소개되었다. 커피미학에서 로스팅한 콩을 가져다 쓰는 커피 전문점도 점점 늘어났다.
“인기가 대단했어요. 지금은 원두를 팔기 위해 영업을 하지만 그때는 아무데나 안 주고 커피 맛에 대한 이해도가 있는지 심사를 한 뒤 콩을 줬죠. 그래도 간혹 커피를 재탕해서 쓰는 곳이 있었어요. 그런 소리가 들려오면 바로 공급을 중단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커피미학은 2010년 문을 닫는다. 1998년 청담동 본점을 시작으로 인사동, 롯데백화점, 현대백화점, 안성 등지에 새 둥지를 틀었다가 이런저런 부침을 겪은 후 재정상황이 급격히 나빠졌기 때문이다. 또 매해 급상승하는 월세를 당해내지 못했다.
현재 여종훈 명인은 경기도 용인민속촌 근방에서 ‘커피쌤’이라는 브랜드로 공방과 매장 운영을 하고 있다. 갓 로스팅한 그의 커피를 한 번이라도 맛본 사람들은 빠져나오기 힘들다. 그래서일까. 온라인에서도 여종훈 커피 맛에 중독되어가는 소비자들이 늘고 있다. 온라인 판매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 위력에 놀랐다고 한다. 이참에 브랜드에 명인 이름을 좀 더 부각하는 게 어떠냐고 묻자 그는 손사래를 친다.
“맛으로 보여주면 됩니다. 그 이상 뭐가 필요하겠어요. 그렇게 해서 방송에 나가고, 광고하고, 해외 산지 돌아다니다 보면 로스팅 연구는 뒷전이에요. 연구 안 하면 맛의 퀄리티는 당연히 떨어지는 거고요. 그런 커피 내놓기 싫습니다.”
“커피 맛은 농부와 조물주가 결정합니다”
그는 최근 지나치게 낮은 가격의 커피가 유통되는 상황이 염려스럽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드립 에스프레소는 식어도 맛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좋은 원두를 써야 하는데 요즘 인터넷에서 파는 원두 가격을 보면 놀라워요. 제대로 된 콩이라면 생산지에서 절대 그 가격에 사올 수 없습니다. 저가 커피는 품질을 의심해봐야 해요. 한때 유통업자들이 유통기한 지난 커피를 봉지갈이해서 팔았던 적도 있어요. 한두 가지 생두를 사다가 배전도에 따라 커피 이름을 마음대로 붙이기도 했죠. 커피 시장이 비정상적으로 성장하던 때였어요. 지금은 마니아가 워낙 많아 맛을 속이면 금방 들통이 납니다.”
요즘도 그는 새 로스팅 기계가 나오면 도전한단다. 기존의 로스터로 최고의 맛을 찾았을 텐데 뭐하러 새 기계를 들여와 그 힘든 과정을 다시 시작하냐고 물었다. 대답이 걸작이다.
“새 기계는 자동차로 비유하면 벤츠예요.(웃음)”
솔직히 호기심도 있고, 새로운 룰을 만들면서 긴장하는 시간이 즐겁단다. 커피에 대한 그의 애착은 식을 줄 모르는 것 같다. 요즘도 어디 커피가 맛있다더라 하는 소리가 들리면 당장 가서 마셔보고 분석한다.
“사람들은 맛이 싸우는 걸 몰라요. 커피를 다루려면 커피 마시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맛이 다투는 걸 먼저 느껴보고 로스팅은 그다음이에요. 세미나 할 때 하는 질문들을 들어보면 빤해요. 저는 이미 다 고민해본 것들이거든요. 어느 날 블렌딩 비율을 고민하는 사람에게 ‘조금 무겁네요, 요걸 한번 빼보세요’라고 말해줬더니 무릎을 탁 치더군요. 돌아가서 조언해준 대로 해보고는 전화를 했어요. 맛이 훨씬 좋아졌다고.”
서로 지지고 볶아대는 그 내밀한 다툼의 맛을 봐버린 그는 자신을 더 경계하게 됐을 것이다. 그래서 생두를 볶을 때마다 첫 마음, 처음 그 자리로 돌아간다. 그것이야말로 그의 기술이고 전략이며 내공이리라.
“커피 맛은 농부와 조물주가 결정합니다. 로스팅은 생두에 열을 추가해 그 맛을 최대한 살리는 과정일 뿐입니다. 원재료가 형편없어도 로스팅 기술로 맛을 낼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건 틀린 말입니다. 밥 짓는 솜씨가 좋다고 정부미로 아끼바리 밥맛을 낼 수는 없잖아요.”
농부와 조물주의 공을 먼저 챙기는 명인. 그에게도 얼마 전 직업병이 온 모양이다.
“로스팅하면서 연기를 하도 많이 마셔서 그런지 2년 전부터 폐가 안 좋아졌어요. 아파보니 ‘잘못되는 게 순간이구나’, ‘생과 사의 경계선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후 욕심이 사라졌어요. 예전에는 인간들 비리만 보이고 그랬는데 요즘엔 좋은 모습들만 생각해요. 참 감사한 일입니다. 앞으로 일도 좀 줄이고 제자도 키워볼 생각입니다.”
참 감사하다는 말이 오래 귓전에 머문다. 잘 숙성된 커피처럼 향이 깊다. 맛을 섬겨왔듯 이제는 그의 몸을 받들어 모실 때다.
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칠천교를 건너다가 소나기를 맞았다. 칠천량(漆川梁) 해전 기념관을 둘러볼 때는 청명한 봄날이었다. 버스 기다리기 지루해 걷기로 작정하고 나섰는데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들더니 한두 방울씩 비가 흩뿌리기 시작했다. 다리 한가운데 이르러서는 소나기였다. 세찬 바람까지 몰아쳐 금세 신발과 바지 자락이 젖었다.
1597년 7월 16일 새벽 조선 수군 치욕의 날도 이런 날씨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임진년 난리 이래 적선이 얼씬도 못하던 부산 서쪽 바다에 150여 척 전선(戰船)이 모조리 수장된 참담한 패전의 날도 비바람이 거세었다는 기록을 읽은 탓이리라.
기념관에서 관람한 영상물에는 수군이 곤히 잠든 한밤중 왜군이 작은 배를 몰고 와 판옥선에 불을 지르는 장면이 나온다. 그것도 모르고 자던 조선 수군이 미처 응전 태세를 갖추지 못해 속절없이 왜적의 창칼과 총탄에 쓰러지는 장면이 이어진다. 부산 앞바다에서부터 패주해온 군대가 적이 오는 줄도 모르고 자다가 변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있었으면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장수 한 사람 잘못 쓰면 이런 일도 일어난다는 교훈을 칠천량 패전의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주말에 기념관을 찾은 관람객들은 왜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는지 뜻밖이라는 표정들이었다.
이순신 장군의 정유년 7월 16일 자에 칠천량 전투 상황 개략이 나와 있다. 격군으로 출전했던 세남(世男)이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을 알몸으로 찾아와 전한 참상이었다. 7월 4일(음력) 한산도 통제영에서 출진해 칠천도와 옥포를 거쳐 7일 부산 다대포에 정박한 왜선 8척에게 싸움을 걸었는데, 왜군이 뭍으로 도망쳐 빈 배들을 불 지르고 절영도 바깥 바다로 나갔다. 때마침 대마도 쪽에서 적선 1000여 척이 건너오기에 싸우려 했더니 적이 회피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판옥선 6척은 서생포 앞바다로 표류하여 뭍으로 오르다 왜적에게 거의 다 살육당하고 자신은 숲으로 도망쳐 간신히 살아왔다는 내용이다.
늑장을 부리다가 도원수 권율 장군에게 곤장을 맞고 부산포에 출진한 통제사 원균은 제대로 싸워보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왜군 함대가 1000척이나 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엄청난 규모였음에 틀림없다. 병력과 군량, 병참물자 등을 싣고 오는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수송선단이었다.
원균은 즉시 공격 명령을 내렸다. 조선 판옥선들은 적진을 향해 부지런히 노를 저어갔다. 그러나 왜선들은 흩어져 달아나기만 했다. 부산 앞바다는 섬이 없어 피해 숨을 곳이 없다. 좀 멀리 나가면 파도가 높은 물마루[水宗]다. 바람은 거칠고 물결은 높다. 왜선들은 접근하다가 달아나기를 반복하는 수법으로 조선 수군의 힘을 빼려는 것 같았다.
간신히 선단을 수습하여 후퇴 길에 들어선 원균은 가까스로 가덕도에 기항했다. 서애 유성룡(柳成龍)은 에 그때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섬에 닿자마자 병사들은 다투어 내려 물부터 찾았다. 군사들이 허둥지둥 물을 찾아다니는 순간 갑자기 섬에서 왜적들이 나타나 덮쳤다. 결국 400여 군사를 잃고 원균은 칠천도로 갔다.”
칠천도로 가는 중에 거제도 북단 영등포에 닿아 밤을 보내려 했으나 적선 500여 척이 추격해왔다. 마지막으로 선택한 피난지가 거제도 서북쪽 칠천도였다. 본섬과 어깨를 겯고 있는 이 섬에는 아늑한 포구가 많아 선단을 숨기기 좋았다. 칠천도 도착은 밤 9시 무렵이었다. 여러 포구에 전선을 분산 정박시키고 원균은 작전회의를 열었다.
경상우수사 배설(裵楔)이 후퇴를 제안했다. “용기백배할 때와 겁낼 때를 구분하는 것이 병가의 계책인데 지금은 싸움을 회피하는 게 옳다”는 주장이었다. 원균은 이 말을 수용하지 않았다. 우선 쉬고만 싶었던 것일까.
그대로 주저앉아 뭉개자 권율이 다시 원균을 불러 곤장을 쳤다. 가덕도에 부하들을 버려두고 도망친 죄를 문책한 것이었다. 원균은 부대로 돌아와 술을 마시고 드러누었다. 이 모습을 본 장수들과 병졸들이 통제사를 어떻게 보았겠는가.
배설은 몰래 제 부하들을 이끌고 한산도로 튀어버렸다. 다른 부대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영화 에서 배설은 비겁한 도망자로 묘사되었지만, 그가 인솔해간 전선 12척은 뒷날 이순신의 수군재건에 밑천이 되었던 유명한 ‘상유십이척(尙有十二隻)’의 그 배들이다.
칠천량 해전의 수치
운명의 날은 16일 새벽이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이었다지만 어떻게 번을 섰기에 소형 적선 5~6척이 밤중에 수군선단 정박지에 잠입하는 것을 몰랐을까. 추격을 당하는 패주 길이라면 평소보다 더욱 경계하는 게 마땅할진대, 적병이 판옥선 밑창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지르도록 모르고 자기만 한 것인가!
원균 함대 곳곳에서 소동이 벌어졌다. 놀라 일어난 수군들은 미처 전투 태세를 갖출 새도 없이 허둥거리다가 왜군의 총격과 창칼에 쓰러져갔다. 불붙은 판옥선들은 맥없이 침몰했다. 적은 3중 4중으로 조선 수군 함대를 둘러싸고 소총과 포화를 쏘아댔다. 적은 포구에 갇힌 조선 판옥선에 붙어 자기 배 돛대를 누이고 사다리처럼 타고 건너와 맹수처럼 날뛰었다.
단병접전에는 세계 최강이라는 사무라이들이었다. 일본 수군의 전법은 적선에 올라 칼과 창으로 백병전을 벌이는 것이었다. 일대일로 벌이는 단거리 접전에 대적할 상대는 없다는 자부심을 가진 그들이었다.
“15일 밤 2경에 왜선 5~6척이 불의에 내습하여 불을 질러 우리 전선 4척이 전소하여 침몰되자 제장이 창졸간에 병선을 동원하여 어렵게 진을 쳤는데 닭이 울 무렵에는 헤일 수 없이 많은 왜선이 몰려와서 서너 겹으로 에워싸고 여러 섬에도 가득 깔렸습니다.”
에 기록된 선전관 김식(金軾)의 장계(보고서)에는 당시 상황이 이렇게 묘사돼 있다. 김식은 시종 통제사와 같이 행동했기 때문에 똑똑히 보았던 것이다.
임진년 이순신 장군에게 당한 수많은 패전에 절치부심하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수군 전력을 크게 강화해 떼 지어 건너보냈다. 해전의 명장이라는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 구키 요시다카(九鬼嘉隆), 도도 다카도라 (藤堂高虎) 등이 거느린 정예 수군이었다.
원균은 가까스로 포위망을 벗어나 도망쳤다. 칠천도 남쪽으로 빠져나가 허겁지겁 서북쪽으로 노 저어 갔다. 가까스로 고성 춘원포에 당도해 대장선을 버리고 뭍에 올랐다.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와 충청수사 최호(崔湖)는 현장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
수하 병사에게 업히다시피 뭍에 오른 원균은 산길을 따라 도망치다가 소나무 밑에서 쉬는 사이 추격해온 왜적에 의해 최후를 맞은 것으로 보고되었다. 선전관 김식의 장계에는 그 상황이 이렇게 적혀 있다.
“한편으로 싸우고 한편으로 후퇴하였으나 도저히 대적할 수 없어 고성 추원포로 후퇴하여 주둔하였는데, 적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여 마침내 우리나라 전선은 모두 불에 타 침몰되었고, 제장과 군졸들도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모두 죽었습니다. …원균은 늙어서 행보하지 못하고 맨몸으로 칼을 잡고 소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달아나면서 돌아보니 왜노 6~7명이 칼을 휘두르면서 달려들었는데 생사를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
이 보고서로 인해 원균은 그곳에서 죽은 것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 숨어 살았던 사실이 뒷날 조사로 밝혀졌다. 조선 수군 전 재산인 전함 150여 척과 1만 안팎의 장병 목숨을 수장시킨 장수가 천명을 다 살았다는 사실은 칠천량 해전의 또 다른 수치다.
원균의 무능이 패인
동아시아 최강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조선 수군이 왜 그런 치욕을 당했는가.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추상같던 기율의 해이와 사기 저하라는 게 임진왜란 연구자들의 일치된 견해다. 상승 조선 수군이라는 자부심과 명예를 누렸던 수군 장졸들은 후임 통제사 원균이 이순신을 모함해 옥에 갇히게 한 세력의 중심인물이라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니 그를 좋게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 정도가 아니라 수군을 지휘해 전투를 수행할 실력도 지략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장수들과 군졸들이 그와 따로 놀게 된 결정적인 이유다. 병사들 사이에는 “이런 군대로는 왜적을 이길 수 없어!”, “적을 만나면 36계 줄행랑이 상책이야” 하는 말들이 돌았을 정도다.
거기에다 원균이 권율에게 곤장을 맞는 사건이 일어나 더욱 영이 서지 않았다. 2년이 넘도록 수군을 떠나 있었던 원균은 전투가 두렵기도 했다. 도원수에게서 득달같이 부산포를 공격하라는 명령이 날아오는데 따르지 않는 장졸을 이끌고 나가기가 무서웠다. 육군이 안골포와 가덕도를 공격하여 배후를 튼튼히 한 뒤에 수군이 부산을 치는 수륙(水陸) 병진론을 거듭 건의하면서 날짜를 끌다가 권율에게 불려가 곤장을 맞았다.
경상·전라·충청 삼도수군을 거느린 삼도수군통제사는 해군참모총장에 해당하는 자리였다. 명령을 듣지 않은 죄가 크기는 하지만, 참모총장을 곤장으로 다스린 사례가 있을지 모르겠다. 육군 책임자인 도원수 권율이 수군 장수를 징치한 이상한 사건이었다.
얼마 후 권율은 또 원균에게 곤장을 쳤다. 6월 안골포 출동에 직접 앞장서지 않고 수하 장수들만 보냈다는 이유였다. 합천 초계에 진을 치고 있던 권율은 사천 곤양까지 내려가 원균을 불러올렸다. 매 맞는 통제사는 수하 장졸들 사이에 웃음거리일 뿐 존경과 신망의 대상은 아니었다. 수하 장졸의 사기가 어땠는지는 물어볼 것도 없는 일이었다.
조정의 전투 수행 능력 부족도 큰 원인이지만 무엇보다 전투 지휘자 원균의 무능이 결정적 패인이었다. 칠천도로 가지 말고 좀 더 항해하여 한산도 본영으로 갔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칠천도로 갔더라도 경계를 철저히 폈으면 그런 치욕은 면했을 것이다. 쫓기는 군대가 경계를 소홀히 해 적선이 접근하는 것도 몰랐다면 전투의 ABC도 몰랐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주둔지 주변뿐 아니라 물길 곳곳에 척후를 박아 적의 움직임을 손금 들여다보듯 한 이순신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무능이고 태만이고 무책임이었다.
패전의 결과는 수군에게만 참담한 것이 아니었다. 남해바다를 마음껏 휘젓게 된 왜적은 마음 놓고 전라도 땅을 유린할 수 있었다. 도망친 배설이 한산도 본영에 남은 군량과 병기들을 바다에 처넣고 불을 지르고 도망친 뒤 한산도와 전라우수영까지 적의 손에 넘어갔다.
남해와 순천을 차례로 손에 넣은 적은 전주를 목적으로 두 갈래 협공을 시작했다. 남원성을 지키던 군민이 모두 참살당하고, 전주성도 허무하게 떨어졌다. 두 성만의 불행이 아니었다. 삼남의 백성들은 조정의 청야(淸野)작전에 삶의 뿌리가 뽑혀나갔다. 청야란 왜적에게 이용되지 못하도록 집과 경작지를 태워 청소하듯 깨끗이 들판을 비우는 것이다. 도체찰사가 경상·전라·충청 삼도에 파견되어 제 손으로 제 집과 곡식을 태우지 않는다고 백성들 목을 쳤다. 왜적에게 당하고 제나라 조정에 당한 중첩된 비극이었다.
원균이 상륙한 장소는 고성 ‘추원포’로 기록되었지만, 사실은 ‘춘원포’의 오류로 인정되고 있다. 춘원포는 오늘날 통영시 광도면 황리 안정 국가산업단지가 자리 잡은 곳이다. 통영에서 택시를 타고 찾아간 그곳에 갯마을은 흔적도 없었다. 바닷가에 높다란 조선소 크레인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이런 데가 아닐 텐데…” 하는 생각이 앞섰다. 조선소와 협력 업체들이 타운을 이룬 산업단지가 춘원포일 리가 없다고 생각되었다.
택시를 내려 나이 지긋한 현지 주민에게 물으니 “어릴 때 저 너머에 목 없는 장균 묘가 있었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며 포구 뒤편 야산을 가리켰다. 거기서 원균이 최후를 마쳤다는 기록에 근거한 설화일 것이다. “옛날부터 이 포구마을을 춘원개라 불렀다”는 주민들 말에서 춘원포 위치를 믿게 되었다.
왜적의 소굴이었던 안골포도 거기서 멀지 않다. 육지가 바다로 길게 뻗어 나온 곶이다. 그 끄트머리 야트막한 야산 꼭대기에 안골포 왜성이 있다. 길가에 서 있는 안내판을 보고 택시를 내렸더니 바로 성터 입구였다. 숨을 헐떡이며 한참 나무계단 길을 오르자, 무너진 성터 위에서 아낙네 둘이 봄나물을 캐고 있었다. 그 너머로 부산 신항 크레인들이 줄지어 서 있고, 성 아래에서는 아파트 건설공사가 한창이었다.
성터에서는 가덕도와 거제도가 보인다 했지만 초행자 눈에는 구별이 안 갔다. 남쪽 오른편 어름에 보이는 산봉우리들이 거제도가 아닐까 짐작만 해보았다. 다만 거제도 가덕도 앞바다를 감제할 수 있는 작전 요충지라는 말에는 고개가 끄덕여졌다. 칠천도에 기항한 조선 수군을 공격한 왜군의 출진 기지가 바로 그곳이었다는 사실에 세월의 무상함을 느낄 따름이었다.
칠천도도 이제는 자동차로 갈 수 있다. 2000년 거제도와 연결된 다리가 생겨 연륙이 되었다. 통영과 연결된 거제대교, 부산과 이어지는 거가대교를 건너 본섬 서북쪽으로 달려가면 바로 칠천도다.
본섬 서북단 칠전삼거리 버스정류소에서 내려 잠시 벚꽃 길을 따라 걸으니 이내 칠천교였다. 다리 건너편에는 크루즈 관광선 터미널이 자리 잡았고, 주변에는 횟집 숙박업소들이 고객을 부르고 있다. 다리에서 20여 분 더 가면 2013년에 문을 연 칠천해전기념관이다.
거제도 본섬을 마주 보고 걷는 칠천도 바닷길에는 온갖 봄꽃이 다투어 피고, 호수 같은 바다는 에메랄드빛이었다. 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어약연비(魚躍鳶飛)의 바다가 그런 참극의 현장이었다고 누가 짐작이나 하리오!
근래 경남도에서 거북선 찾기 운동을 벌였다. 칠천량 바다에 가라앉았을 잔해를 건져내 거북선의 실체를 마주해보자는 취지라고 보도되었다. 그러나 10억 가까운 비용과 3년이 넘게 걸린 그 사업의 결실이 보도된 일은 없다.
‘당신은 무엇을 먹고 사십니까?’ 지난해 대한불교조계종단으로부터 최초로 ‘사찰 음식 명장’을 수여받은 선재 스님의 책 제목이기도 한 이 문장은 요즘 가장 치열하게 식문화가 발전하고 있는 현재에 던지는 화두처럼 들려온다. 셰프가 TV 스타가 되고, 수많은 예능 프로그램이 요리를 소재로 만들어지고, 건강과 먹거리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풍부해진 요즘 과연 우리가 먹는 것은 제대로 된 음식일까? ‘우리는 음식을 왜 먹는가?’ 사찰음식의 대가 선재 스님에게 그 답을 들어봤다.
힘이 넘친다. 조계종에서 인정한 최초의 사찰음식 명장 선재 스님의 목소리에는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에너지가 넘쳤다. 사찰음식에 담긴 조화의 힘이 그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일까?
“불경에는 놀랍게도 음식에 관한 가르침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습니다. 음식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철학적인 이야기에서부터 조리법, 음식 손질과 보관법, 주방 설치법, 먹는 법까지 세세하게 쓰여 있습니다. 특히 에 나오는 ‘일체 제법은 식(食)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식이 아니면 존재할 수 없다’는 경구는 부처님이 음식을 굉장히 중요한 가르침으로 다루셨음을 말해주는 증거입니다.”
불경에서부터 귀하게 다루었던 식문화를 확인한 선재 스님은 문헌 연구를 거듭하였다.
그리고 1994년 중앙승가대학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며 발표한 ‘사찰음식문화연구’ 논문은 그동안 스님들에게만 전수되던 사찰음식에 관한 최초의 논문으로 기록됐다.
음식으로 다시 생명을 얻다
그러나 사찰음식 연구는 선재 스님에게 큰 시련을 안겨줬다. 연구를 하면서도 화성 신흥사 청소년 수련원에서 아이들의 수련교육을 맡았는데 교육의 좋은 결과에 반한 기관과 학교들에서 수련교육 요청이 빗발쳤다. 해야 할 일이 많아지자 하루에 두세 시간 정도밖에 잠을 못 잤고 음식의 질도 신경 쓰지 않고 급하게 끼니를 때우는 일이 거듭됐다. 그러자 기운이 없어졌고 어느 날 주저앉아버렸다. 병원에 가자 의사가 간경화라는 진단을 내리면서 1년을 넘기기 힘들다고 했다. 난데없이 시한부 인생이 된 것이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힘없이 누워 있는데 문득 제가 쓴 ‘사찰음식문화연구’ 논문이 생각났습니다.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 논문을 꺼내와 읽기 시작했습니다. 한 문장 한 문장이 논문을 쓸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내가 쓰고도 정작 나는 글대로 살지 못했구나, 부처님 법대로 살지 못해 아픈 거구나, 그제야 알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을 그토록 연구했음에도 자신은 정작 실천하지 않았다는 자책감에 스님은 남은 시간을 부처님의 법대로 철저하게 살아보기로 결심했다. 모든 가공식품을 끊고 자연 그대로의 음식, 제철 음식, 때에 맞는 음식, 깨끗한 음식으로 스트레스와 불규칙한 식사로 채워진 일상의 습관을 바꾼 것이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몸에 나쁜 음식을 먹지 않고 일상의 습관을 바꾼 것만으로도 몸이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의 마무리는 에너지 넘치는 스님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보인다. 선재 스님의 두 번째 삶은 딱딱하게 굳어 있던 간에 항체가 생기는 기적과 함께 시작됐다.
꿈꾸는 삶, 사찰음식에 다 있다
선재 스님의 두 번째 삶에는 사찰음식의 전파가 중요하게 자리하고 있다. 얼마 전 스님은 프랑스 부르고뉴에서 사찰음식에 관한 강연을 진행하고 프랑스 파리 오이시디 주재 한국대표부에서 행사를 가졌다. 최근 세계 3대 요리의 나라 프랑스는 물론 독일, 미국, 베트남 등 전 세계에서 선재 스님을 찾고 있다. 사찰음식이 갖고 있는 현대 식문화에 관한 대안적 성격을 요리 문화가 발달한 나라일수록 더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
“해외에 초대받아 갈 때 저는 음식만 가는 게 아니라 문화도 함께 가야 한다는 생각이에요. 그래서 외국에서 사찰음식에 관한 강연을 요청받으면 음식에 대한 얘기와 함께 불교가 갖고 있는 사상에 관한 강연도 함께 하죠. 예를 들면 대웅전의 꽃문살 사진 전시회와 함께 강연회가 열리기도 합니다. 언젠가 사찰음식에 관한 칼럼을 써서 강연을 들으러 오시는 분들한테 미리 공부해서 오시라고 요청한 적도 있어요. 그런데 그 강연이 반응이 좋아서 그해 있었던 그 지역의 해외 행사들 중 가장 훌륭한 행사로 최우수 평가를 받기도 했죠.”
스님이 전파하는 불교 사상의 핵심은 땅, 물, 바람, 동물이 나와 다르지 않다는 자연 존중에 있다. 사찰음식이라는 문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세상에 대한 고마움과 겸허를 알려주려는 스님의 노력은 파괴적이고 소비적인 작금의 식문화에 경종을 울리는 일이기도 하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육체, 정신, 영혼 모두에 영향을 미쳐요. 몸과 마음도 연결돼 있지요. 음식은 곧 생명, 먹는다는 것은 곧 산다는 것과 같거든요. 내가 만든 음식에 사람을 살리고 자연을 살리는 가치관이 담겨 있다는 것이 세계적으로 사찰음식을 찾는 이유일 거예요.”.
변질된 사찰음식은 사찰음식이 아니다
“사찰음식 문화의 범주를 의식주에서 찾으면 안 돼요. 약에서 찾아야 해요.”
음식을 약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선재 스님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절절하게 체험한 데서 나온 것이리라. 스님은 제대로 된 사찰음식은 누구에게나 맛있는 음식이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분명 몸에는 좋은 음식이라서 사찰음식이 입에 안 맞더라도 그 사람 몸에 좋다면, 그 사람 생각을 바꿔서라도 먹도록 해야 하는 게 맞다고 말한다.
“지금 바깥의 사찰음식을 보면 뭔가 빨리, 뭔가 맛을 내기 위해서 쓰는 것들이 보여요. 그런 건 사찰음식이 아니에요.”
스님은 요즘 사찰음식 붐이 일어나고 있지만 상당수의 사찰음식이 사찰음식 본연의 철학과 가치를 담고 있지 않다고 비판했다. 스님이 갖고 있는 가치관의 엄격한 면을 확인할 수 있는 말이었다.
“사찰음식을 강의하던 자리였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 자리에서 처음 만든 음식이 야채 샤브샤브였어요. 우리 땅에 나오는 재료로 음식을 만드는데 우리 언어를 써야 맞지 샤브샤브가 뭐냐 싶어서 그 사람에게 직언한 적이 있어요. 그 사람은 기분이 안 좋았겠지만 누군가는 말을 해줘야 해요. 자연음식가라면서 야채 샤브샤브라는 말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써도 되는지 안타까웠어요.”
스님은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친환경 급식’ 개념도 비판적으로 바라봤다.
“야채는 친환경일지 모르지만 거기에 들어가는 장은 첨가제가 들어가는데 친환경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친환경 급식의 맹점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첨가제가 들어간 음식은 먹지 말아야
“음식에 따라 사람의 성정이 달라집니다. 경상도 사람들은 음식을 짜게 먹으니 마음이 급하고 충청도는 심심하게 먹으니 사람이 순하죠. 육류는 동적인 에너지를 주고 두부는 정적인 에너지를 줍니다. 차를 불가의 대표적 음식이라 하는데, 차와 선은 같은 맛이라는 말이 있죠.”
불교에서 육식과 오신채를 금하기 시작한 것은 모든 생명에 자비심을 가지는 수행자들의 문화에 영향을 받았다. 조계종이 사찰음식 명장 1호로 선정한 선재 스님의 음식 철학도 “사찰음식에서 육식을 하느냐의 여부보다 어떻게 먹느냐의 문제”에까지 뻗쳐 있다. “내가 무엇을 먹고 살고 있는지 살피며 바른 음식을 먹고 바른 생각으로 살아야 지혜롭고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답니다.” 스님이 음식에 까다로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음식의 그런 막중한 역할 때문이기도 하다.
“육류와 파, 마늘은 수행자가 피곤할 때는 허락하기도 했어요. 그러나 가공식품은 약이 아니라 독이에요.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장아찌를 만들 때 음료수를 넣어 만들어요. 그렇게 하면 상하지 않죠. 하지만 자연적이라고는 볼 수 없죠. 설탕은 빠르게 흡수되면서 열을 발산하니까요. 저는 일체 안 먹어요. 차라리 깨끗한 생선은 부처님이 허락했지만 이런 건 안 된다고 봐요.”
스님에게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먹어야 하냐고 묻는다고 한다. 그때마다 스님은 뭔가를 먹으려 하지 말고 버리라고 말한다. 그래서 스님은 단언한다.
“다섯 살짜리 아이가 이해하지 못하는 첨가제는 먹지 말아야 합니다.”
김치와 장이 수행자의 맛
자연에는 온통 먹을 게 천지에 널려 있다. 그것들은 모두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는 음식이다. 그렇다면 스님이 선호하는 음식은 무엇일까?
“김치, 그리고 장. 그게 기본이죠. 나는 김치 속에 간장, 된장, 고추장을 넣어요. 김치에 발효음식을 넣는 거죠. 그래서 과거 스님들이 장을 다섯 말을 담갔다면 나를 만나면서 두 말을 더 담그게 됐어요(웃음).”
스님은 변질되지 않은 사찰음식을 보다 많은 사람이 먹을 수 있도록 하려면 김치를 집에서 담가 먹어야 한다고 말했다.
“모든 음식의 재료는 또 다른 생명이에요. 그 생명을 내 몸에서 잘 흡수되게 만들려면 중간 역할이 필요하죠. 그것을 장과 발효가 해주는 거예요. 그리고 요즘은 배추에 농약을 많이 쳐서 쓴맛이 나요. 진짜 유기농은 처음도 달고 끝도 달아요. 김치를 담그고 그 쓴맛이 없어지는 때가 오는데, 이는 발효를 통해 중금속이 중화됐기 때문이죠.”
스님은 밥 중에서는 쌀밥을 최고로 친다. 그런데 식은 밥이 아니라 바로 한 밥만을 먹는다고 한다. 바로 한 밥은 3분의 1만 먹어도 에너지가 생기지만 식은 밥은 두세 공기를 먹어도 몸에 흡수가 안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제야 ‘요리사라는 직업은 의사와 같다’는 스님의 말이 이해가 갔다. 불가의 가르침에 따라 철저하게 음식의 효능과 조화를 따지는 그의 모습에서 환자를 살피는 의사의 모습을 본다. 음력 4월은 부처님 오신 달이다. 부처님에게 한 가지 밥과 반찬을 공양하라 하면 선재 스님은 어떤 음식을 만들까?
“우선 참죽나물로 만든 밥이 좋겠어요. 그 이파리를 말려 볶아 으깨서 넣은 밥. 원래 참죽나물은 참선하는 스님들이 먹는다 하여 ‘참중나물’이라고 불리기도 해요. 단백질이 많고 열이 많은 나물이죠. 모든 야채가 냉한데 이건 뜨거워요. 이 밥으로 비빔밥을 만들어 올리면 좋겠어요.”
사찰음식을 만드는 수행자들은 음식이 몸과 마음을 합일(合一)시켜준다는 사실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깨달음은 음식을 통해서도 오는 것임을 이제야 알겠다. 거기에는 스스로를 다스린다는 명제가 있다. 선재 스님이 만들어준 오색화전과 상추떡을 먹고 나니 왠지 맑은 심성을 되찾아 착한 사람이 된 듯했다. 그리고 평소의 오만함이 무모한 자신감으로 이어졌다.
“스님이 하시는 거 보니 사찰음식 너무 쉬워 보이는데요, 저도 집에 가서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의기양양한 기자를 보며 선재 스님은 어리석은 중생을 위해 또 한 번 미소를 내어주셨다. 그 사이 봄날 보리사 장독대에서 익어가는 장(醬) 내음은 홍매화 향기 못지않게 코끝을 간질였다.
선재 스님이 가르쳐준 사찰음식
취나물전병, 진달래전병
새알 빚어 꼭꼭 눌러 기름 둘러 지져낸 희고 둥근 반죽 위에 진달래를 꽃피우게 해서 둘둘 말아 김밥처럼 썰면 진달래전병이 되고, 취나물 잎을 얹어 둘둘 말면 취나물전병이 만들어진다.
오색화전
찹쌀가루에 단호박, 비트즙, 쑥즙, 백년초 가루를 각각 섞어 다섯 가지 색을 낸 반죽을 팬에 기름을 두르고 구운 뒤 진달래꽃, 제비꽃, 냉이꽃, 민들레꽃 등을 전에 얹으면 오색화전이 만들어진다.
상추전, 취나물전
상추전은 감자를 갈아서 부쳐내고 취나물전은 갈아놓은 호박과 함께 부친다.
이맘때쯤이었다. 1962년 완도 앞바다의 햇살은 따뜻했다. 바닷가엔 조개껍데기가 지천에 널려 있었다. 뱃머리에 선 소년은 이 정도 기온이면 다시는 추위에 떨지 않을 수 있겠다 싶어 안심했다. 당시만 해도 전라남도 완도에서 서울로 가려면 배를 두 번 타야 했고, 꼬박 24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14세 소년은 멀고 긴 상경길이 걱정되지 않았다. 고향에는 다시 내려오고 싶지 않았다. 금의환향을 위해서는 차라리 먼 여정이 낫다고 생각했다. 소년은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눈 앞의 조개들이 그의 인생을 바꿔놓을 것이라는 사실을. 소년은 나전칠기 대한민국명장 임충휴(任忠休·67)씨다.
“원래 어릴 때부터 공부에 관심이 없었어요. 그래서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무작정 서울로 가출을 했죠. 신문팔이며 구두닦이며 닥치는 대로 일을 했어요. 그런데 서울의 추위는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한 달 만에 집으로 도망쳐왔어요. 그리고 날이 좀 풀렸을 때 다시 서울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어요. 동네 이장이셨던 아버지는 그때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다시 도망쳐올 것 같으면 생각조차 하지 말라고. 성공하려면 인내가 있어야 한다고 말이죠.”
임충휴 명장은 그날부터 아버지의 조언을 평생 가슴에 새기며 살고 있다. 그의 작업실 한쪽에는 큼지막하게 쓰인 ‘忍耐’라는 글자 액자가 걸려 있다.
그는 두 번째 상경 때 생각을 바꿨다. 무작정 돈을 좇기보다는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인천의 라이터 공장에 들어갔다. 그의 성실함이 통했는지 후암동의 한 공장에서 함께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나전칠기 공장이었다.
나전칠기를 처음 본 소년은 바로 사랑에 빠져버렸다. 영롱한 빛깔이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그가 나고 자란 고향에서 전복 껍질은 지천에 널린 흔한 것이었지만, 주걱 대신 무엇을 긁을 때 말고는 쓸모가 없었다. 그런 하찮은 것이 이렇게 아름답게 변하다니 신세계를 만난 것 같았다. 그는 이 기술을 꼭 자기 것으로 만들겠노라 다짐한다.
월급·휴일 없어도 감지덕지
그러나 기술을 익히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처음 3년간은 월급도 받지 못했다. 그저 명절 때 주는 옷 한 벌과 간식 정도 사먹을 수 있는 용돈이 전부였다. 일요일도 없었다. 휴일은 한 달에 한 번뿐이었다. 그래도 숙식을 해결하며 어깨너머 기술을 훔쳐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작업만 고됐던 것이 아니다. 한겨울에도 찬물로 청소를 하느라 손과 무릎에는 생채기가 가실 날이 없었다. 아직도 그의 몸에는 당시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말도 못하게 힘들었죠. 어린아이에게는 벅찬 일들뿐이었어요. 당시엔 기술자 중 상당수가 통영 분들이었는데, 연장 명칭은 죄다 일본어였죠. 전라도 출신 아이가 일본어가 섞인 경상도 사투리를 어떻게 알아듣겠어요. 그런데 말도 못 알아듣는다고 혼났죠(웃음).”
엄격한 교육은 요령을 부리지 않고 길고 번거로운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해야 제대로 된 완성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체득하도록 해줬다. 전통 공예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었다.
그렇게 3년이 지나고 그는 이미 한 사람의 몫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그리고 또 한 번의 기회가 찾아온다. 중일(잡부가 아닌 정식 기술자의 초보 단계) 자리를 줄 테니 공장을 옮겨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다. 그렇게 인연이 된 공장은 보문동의 조안공예사. 이곳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 나전장 김태희 선생의 제자 안승권씨가 운영하던 공장이었다. 임충휴 명장은 아직도 당시에 인연을 맺은 13명과 친목회를 통해 친분을 이어가고 있다.
그를 담금질한 성공과 고난의 시간들
제대로 기술을 배울 수 있다는 기쁨에 날아갈 것 같았지만 그 역시 순탄하지는 않았다. 옻칠에 사용되는 고운 토분(土粉)을 얻기 위해 매일같이 흙먼지를 마셔야 했고, 나무판자 표면을 곱게 고르는 작업에 종일을 바쳐야 했다.
그렇게 또 정신없이 5년을 보내고 나니, 임충휴 명장은 업계에서 꽤 알려진 기술자가 돼 있었다. 탐을 내는 사람도 많았다. 말 그대로 어엿한 기술자였다. 웬만한 화장대나 문갑 정도는 만들 수 있는 실력이 됐다. 그리고 또 한 번의 스카웃 제의가 있었다. 이번에는 김호창 선생이었다.
“김호창 선생님 덕분에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었죠. 제 성실함을 눈여겨보셨는지
4년 만에 그 공장에서 공장장을 맡게 됐어요. 저보다 나이 많은 사람도 많고, 실력 있는 사람도 있었지만 악착같은 제 모습이 맘에 드셨나봐요. 그곳에서 공장장으로 일하다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제 회사를 차리게 됐어요. 독립하고 나서도 선생님이 하청을 주고 신경을 써주셔서 자리 잡는 데 큰 고생은 하지 않았어요.”
어렵게 융통한 300만원이 밑천이 됐다. 시작은 직원들 먹일 밥 지을 곳이 없어 비 맞으며 음식을 할 정도로 열악했다. 전라도 사람을 차별하는 풍토도 있어 어떻게든 신용만은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성공이라는 계단을 차근차근 밟아나갔다.
“그때는 9자 나전칠기 장롱이 300만원 정도 했어요. 그 돈이면 당시 시골에서 논 20마지기(약 6000평)를 살 수 있었어요. 고향에서 장롱이 그 가격이라고 하면 믿지 않았으니까요(웃음). 덕분에 여러 고관대작의 집에 들락날락했는데 그분들 중에 재벌이나 국회의원, 장관도 있었죠. 가장 기억에 남는 일 중 하나는 삼성종합건설의 부탁으로 쿠웨이트 영빈관에 줄 선물로 자개병풍을 만든 것이에요. 사진이라도 하나 남겨놨으면 좋았을 텐데….”
인내는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뚝섬과 성남에 나눠져 있던 그의 작업장에는 직원이 어느 새 100명에 달했다. 제대로 된 9자 나전칠기 장롱이 만들어지는 데는 6개월이 걸리는데, 그의 작업장에서는 하루에 하나꼴로 완성됐다. 그만큼 꾸준한 수요가 이어졌을 정도로 그의 작품은 시장에서 사랑받았다.
“당시 나전칠기 장롱은 주부들에게는 일종의 로망이었어요. 누구나 갖고 싶어 했고, 부의 상징이었죠. 실제로 정부에서는 이 장롱을 사치품으로 간주해 특소세 인지가 있어야 거래가 가능하도록 했어요. 주부들이 자개장을 갖기 위해 계모임을 하는 것도 흔한 일이었어요.”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그에게도 어려움이 닥쳤다. 1978년 2차 유류 파동에 잠시 휘청했던 사업이 좀 견뎌지나 싶더니 1997년 IMF라는 직격탄을 맞고 말았다. 현찰 대신 받았던 어음들은 줄줄이 부도가 났다. 당시 부도난 어음의 총규모는 12억8000만원 정도. 개인사업자가 넘길 수 있는 액수가 아니었다.
“당시 인사동과 명동, 신설동에 거래하던 가게들이 많았죠. 물론 대부분 어음으로 거래를 했어요. 받지 못한 돈이 12억이 넘었어도 절 믿고 따라준 거래처, 직원들을 실망시킬 순 없었죠. 몇 채 가지고 있던 집들을 모두 처분하고 빚잔치를 했죠. 직원들에게 퇴직금도 조금씩 챙겨주고. 그러고는 칠기와는 인연을 끊으려 했죠.”
실제로 그는 칠기와 잠시 이별했지만 다시 돌아왔다. 그도 천직을 잊기 어려웠지만, 그의 솜씨가 사장되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주변의 만류도 컸다. 그렇게 해서 지금의 진성옻칠공예가 다시 부활했다.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면서 그는 과거의 제작 방식과 전통 소재에 더욱 집중했고, 이러한 노력은 2004년 노동부의 칠기 분야 명장 지정으로 결실을 맺는다. 그는 명장 지정 이후에도, 전승공예대전 문화재청장상, 한국옻칠공예대전 금상 수상, 대한민국명장회 최우수 명장 위촉 등으로 진가를 제대로 인정받고 있다.
“어려운 시기를 잘 이겨냈다며 주는 상 같았어요. 그간의 노력이 인정받은 것 같아 기뻤습니다.”
그는 명장 제도가 기능인들의 사기를 살리고, 상공인들의 활동에 활력을 불어넣었다고 평가했다.
칠기에 대한 몇 가지 오해
나전칠기에 대한 가장 큰 오해 중 하나는 자개 장식에 관한 것. 나전칠기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당연히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수많은 자개 장식이다. 이 자개 장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가구는 높은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일까? 임 명장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칠기의 생명은 곱고 투명하게 옻칠을 하는 실력과 옻칠의 재료인 칠액에 있어요. 칠액은 옻나무의 수액을 정제해서 만드는데 1Kg에 70만원을 호가하기도 해요. 그래서 예전엔 저렴한 동남아에서 캐슈(cashews) 나무 수액으로 만든 칠액을 쓰는 곳도 있었어요. 사실 자개가 가구 표면에서 차지하는 면적이 넓으면 넓을수록 만드는 과정은 쉬워요. 또 자개 재료는 상대적으로 저렴하고요. 그래서 자개는 약간의 장식으로만 쓰인 옻칠 가구가 훨씬 귀하고 비쌉니다.”
또 옻칠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조금 다른 방법으로 진행된다. 말리는 과정이 그렇다. 칠액을 바르고 말리고 바르고 말리는 과정이 수차례 반복되어야 제대로 된 옻칠의 광택이 살아난다. 투명 옻칠은 이 과정을 스무 번 정도 반복해야 한다. 보통 말린다는 표현은 수분이 날아가 표면이 단단하게 굳는 것을 의미하지만, 옻칠은 물로 말린다. 습도가 80% 이상 되는 곳에서 표면을 굳혀야 특유의 투명함이 살아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업실의 건조장 바닥은 늘 흥건하다.
이렇게 천연재료로 만들어진 칠기는 모양뿐만 아니라 기능적으로도 훌륭한 생활 도구가 된다. 환경호르몬이 원인으로 지목되는 아토피 같은 질환을 예방하는 데도 좋은 친환경 재료로 알려져 있다. 칠기 가구가 아기용 옷장으로 입소문이 난 것도 이 때문이다. 잘 썩지도 않고 불도 잘 붙지 않는다.
후진 양성을 위한 노력
임충휴 명장은 최근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옻칠을 전수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보통의 장인이라면 옻칠을 평생의 업으로 삼겠다 마음먹은 제자들 중에서 후계자를 골라 기술을 전수하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지금 업계의 가장 큰 문제는 일할 장인이 없다는 것이에요. 특히 자개장 같은 건 기능인이 부족해서 웬만한 곳에서는 만들 엄두도 못 내요. 50세 정도는 이제 현장에서 젊은 축에 듭니다. 예전엔 옻칠조합 회원이 100명도 더 됐는데, 이젠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가 돼서 조합도 없어졌어요.”
그래서 시작한 것이 후진 양성이다. 군포시에 위치한 서울남부기술교육원 옻칠나전학과에서 취업이나 취미를 목적으로 모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기술을 가르친 지 2년이 됐다. 이제 그를 사사한 학생이 100명이 넘는다. 장인에게 기술은 밥줄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는 교육원의 제안에 흔쾌히 응했다.
“전통공예를 현대적 디자인에 접목하고 싶어도 매일 비슷한 것만 만들어온 사람들에겐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칠기 소비를 늘리기 위해서는 다양한 시도가 필요한데 말이죠. 그런데 교육원에서 학생들을 만나면서 오히려 제가 배우는 기분이에요. 실제로 미술 전공자들도 많이 있고요. 이제 교육원에 나가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일은 제 인생에서 보람 있는 일 중 하나가 됐어요.”
사회적 수명과 생물학적 수명의 간극은 시니어들을 가장 고민하게 하는 요소 중 하나다. 직업은 단지 경제적 자원을 얻는 행위에 그치지 않는다. 인생의 보람, 즐거움 심지어는 건강과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최근 이러한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자격증을 선택하는 시니어들이 늘고 있다. 결국 취업이든 창업이든 기술 없이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시니어들을 위한 자격증, 무엇이 좋고 어떻게 딸 수 있을까?
글·사진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시니어들의 자격증에 대한 관심은 통계로도 나타난다. 은퇴 후 삶을 대비하기 위해 국가기술자격증을 취득하는 50~60대가 크게 증가하고 있다. 한국산업인력공단이 발간한 를 살펴보면 2015년 50대 자격증 취득자는 2011년 2만6307명에서 2015년 3만8260명으로 45.4% 늘었다. 65세 이상 고령자도 2011년 571명에 불과했던 것이 2015년에는 1017명으로 두 배 가까이 늘은 78.1% 증가했다.
자격증 수요와 효용가치 잘 따져봐야
자격증은 크게 세 가지 분야로 나뉜다. 특정 기술에 대한 기능자격을 국가가 관리하는 국가기술자격이 있고, 기술 외 전문 분야에 대한 자격인 국가전문자격 그리고 민간자격증이다. 국가기술자격과 국가전문자격은 크게 한국산업인력관리공단에서 시행하는 자격과 한국콘텐츠진흥원이나 한국인터넷진흥원과 같은 관련 정부산하 기관에서 시행하는 자격으로 나뉜다. 이런 자격증에 관한 일반적인 정보는 한국산업인력관리공단에서 관리하는 포털사이트Q-net(www.q-net.or.kr)에서 자세히 검색할 수 있다.
자격증은 다양하게 존재하지만 모든 자격증이 취업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특히 일부 민간자격증의 경우 자격증 취득을 위한 교육과 응시비용 자체를 ‘수익 모델’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 잘 따져봐야 한다. 물론 민간자격증도 업계에서 공정성과 권위를 인정받는 경우가 많다. 전문가들은 자격증 획득 전에 발급기관 연혁이나 회원수, 자격 보유자수 등을 살펴보는 것이 좋다고 조언한다. 또 취업사이트에서 검색을 통해 해당 자격증 보유자를 구인하는 기업이 얼마나 되는지 살펴보는 것도 방법이다.
전액 공짜! 기술교육원을 아시나요
보통 자격증 취득을 생각하면 가까운 지역 학원에 가서 수강료를 내고 수업을 통해 응시 준비를 하는 것을 떠올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니면 온라인 학원을 통해 교재를 산 뒤 최근 유행하는 인터넷 강의에 참여하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다. 운전면허증에서 공인중개사까지 마찬가지다.
비용도 만만치 않다. 만약 모든 교육을 무료로 들을 수 있는 교육기관이 있다면 어떨까. 자격증 취득과 취업 알선까지 지원해주는 공립기관 중 대표적인 기관은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기술교육원이다. 서울시 기술교육원은 동부, 중부, 북부, 남부 4개 기관이 운영되고 있으며, 4개 기관에서 1년짜리 정규 과정 53개 학과 1842명, 단기과정 25개 학과 915명을 교육시키고 있다. 교육 과정은 취업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자격증 취득을 우선시한다. 또 예산으로 진행되는 만큼 수료 후 취업자들에 대한 모니터링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일단 합격만 되면 수료 때까지 교재와 실습 재료비를 포함해 전액 무료 교육을 받을 수 있고, 취업 알선과 취업 후의 생활 상담까지 가능하다. 일부 과목의 경우는 협력기관, 프로그램에 따라 교육 지원금까지 제공받을 수 있고, 수업시간이 긴 과목은 점심을 제공하기도 한다.
이렇게 제공되는 혜택이 많다 보니 경쟁률이 만만치 않다. 과목에 따라 경쟁률이 2대 1에서 4대 1을 넘기도 한다. 전형은 면접이 50%, 서울 거주기간(5년 이상 만점)에 따른 배점이 50%다. 면접에서는 기술을 익히려는 뚜렷한 목적이나 계획을 중점적으로 심사한다.
전통기술에서 첨단기술 분야까지 다양
교육 현장의 실무자들은 시니어들의 자격증 취득에 대한 관심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로 높다고 말한다. 남부기술교육원의 남혜성 팀장은 현장의 변화를 이렇게 설명한다.
“시니어 교육생들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20%대까지 늘었고, 시니어들의 관심이 큰 학과의 경우는 40~50% 정도까지 비율이 늘었습니다. 창업 등을 고려해 바리스타나 외식조리학과를 지원하는 중·장년층도 많아졌고, 옻칠나전, 조경관리와 같은 분야도 시니어들이 많이 관심을 갖는 분야입니다.”
취업에 유리한 자격증 취득을 위한 학과도 인기가 높다. 예를 들어 전기학과의 경우 전기산업기사 자격증을 취득하면 건물 관리인 등으로 취업하기 쉬워 남성 중·장년층이 많이 찾는다. 여성 중·장년층은 피부미용 관련 자격증을 통해 피부과, 성형외과, 피부관리실 등에 취업한다.
최근 구인 수요가 가장 많이 늘어난 자격증 중 하나는 요양보호사다. 치매·중풍 등 노인성 질환으로 독립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노인을 위한 노인요양보호시설이 늘어나면서 인력에 대한 수요도 증가하고 있는 추세. 그러나 궂은일을 꺼리는 추세와 저임금의 처우까지 겹쳐 여전히 인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신재생에너지 분야와 같은 첨단 분야의 교육도 진행된다. 관계자들은 매년 새로 생겨나는 자격증이나 취업시장의 변화를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중부기술교육원의 박훈균 팀장은 “신재생에너지PM(프로젝트 매니저)학과가 대표적이죠. 전력 직거래를 통해 태양열과 같은 신재생 에너지의 수익을 낼 수 있는 분야의 교육입니다. 협동조합에 취업하는 경우도 많지만, 토지나 자본이 있으신 분들이 직접 사업화하기 위해 교육을 받으시는 경우도 많습니다”라고 귀띔한다.
무엇을 할지 몰라도 방법은 있어
은퇴를 앞둔 시니어들 중 상당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한다. 실제로 상담을 신청하는 시니어 중 대다수는 구체적인 계획이 없는 경우가 많다고 실무자들은 입을 모은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상담을 받아보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자아실현, 취업을 통한 생계유지나 창업, 자기계발 등 어떤 목적을 갖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전문가와 함께 찾는 것이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목표가 설정되면 그다음부터는 교육 과정 속에서 함께 고민을 하므로 쉬워진다.
중부기술교육원 한국의상학과의 김경미 교수는 기술 전달뿐만 아니라 취업이나 창업 이후까지도 고민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최근 개량 한복이 인기를 끌면서 한복 분야도 다양해졌어요. 중·장년 학생들은 창업에 관심이 많고요. 학생들과 옷 만드는 방법뿐만 아니라 소비자들에게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 주소비자로 떠오르고 있는 젊은 층이나 외국인들에게 한복을 어떻게 홍보할 것인지 함께 고민하고 있습니다.”
남부기술교육원에서 옻칠나전공예를 가르치는 임충휴 명장은 교육의 효과를 이렇게 설명한다. “나전칠기를 활용해 창업을 준비하시는 시니어들도 적지 않습니다. 젊은 사람들과 중·장년층이 섞여 수업을 하다 보니, 오랜 경험과 새로운 아이디어가 시너지 효과를 내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양한 제품으로 응용이 시도되기도 하고요. 저 역시도 전통적인 디자인과 방식을 고집하지 않고 학생들의 아이디어에서 자극을 받고 있습니다.”
각 지역 기술교육원은 이달 중순까지 수강생을 모집 중이다.
현 정권의 요직을 담당했던 사람들이 영어(囹圄)의 몸이 되어 카메라 앞에 서는 모습을 보는 마음이 편치 않다. 역사상 정말로 뛰어났던 신하들은 충심을 바쳐 모시던 주군이 천하를 호령하는 자리에 오르면, 오히려 표표히 초야로 떠나 횡액을 피한 사례들이 전해진다.
중국의 춘추시대, 월(越)나라는 오(吳)나라와 국가의 존망을 건 사투를 수십 년간 벌였다. 월나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반전을 성공시키고 마침내 오나라를 멸망시키며 중원의 패자(覇者)로 올라서게 된다.
당시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했던 두 명의 신하가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범려(范蠡)와 대부(大夫) 종(種)이었다. 그런데 본격적 권세를 누려야 할 시점에 범려는 외려 월왕 구천(句踐)에게 작별을 고한다. 구천이 펄쩍 뛰면서, “나와 함께 있으면 나라를 반으로 나눠 줄 것이로되 만일 끝내 떠나고자 한다면 베어버리겠다”는 극언까지 하지만 범려는 “군주는 자신의 명령을 행하지만, 신하는 자기의 희망을 행할 뿐입니다[君行令 臣行意]”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다. 그러면서 대부 종에게 다음과 같은 경고의 편지를 남긴다.
“하늘에 새가 다하면 좋은 활도 창고에 넣어 두게 되고,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는 삶겨 죽는 법, 게다가 폐하의 상은 목이 길고 입은 새 부리처럼 생겼으니, 이런 인물은 어려움은 함께할 수 있으나 즐거움은 함께 누릴 수 없소. 그대는 어째서 떠나지 않는 것이오?[蜚鳥盡,良弓藏;狡兔死,走狗烹。越王為人長頸鳥喙,可與共患難,不可與共樂。子何不去]”
바로 ‘토사구팽(兔死狗烹)’, ‘장경조훼(長頸鳥喙)’란 고사성어를 낳은 명구절인데, 여기 나오는 또 하나의 유명한 말이 바로 ‘어려움은 함께할 수 있으나 즐거움은 함께 누릴 수 없다’란 어록이다.
그런데 약 300년 후, 중국은 유방의 한(漢)나라와 항우의 초(楚)나라 간 천하 쟁패를 다시 겪게 되는데 한나라는 초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하는 과업을 성취하게 된다. 이때 한고조 유방을 도와 천하를 통일시킨 대표적 공신이 소하(蕭何), 장량(張良), 한신(韓信)의 한초삼걸(漢初三傑)이다.
이들 중 가장 뛰어난 책사로 불렸던 인물이 바로 장량으로, 그는 유방이 황제의 자리에 올라 제(齊)나라 3만호 식읍을 상으로 내리자 이를 사양하고 유방을 처음 만났던 조그만 유(留)땅만을 청한다. 그리고 병을 핑계로 모든 공직을 내려놓고 중앙 정치무대를 떠나버린 후 천수를 누린다. 반면에 천하의 명장 한신은 계속 한고조 유방의 곁에 머물다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당시 한신이 남긴 말이다.
“옛사람이 말하길,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는 삶겨 죽고, 나는 새가 사라지면 좋은 활도 창고에 넣어두게 되며, 적국이 망하면 유능한 신하도 필요없다’라고 하였거늘, 이제 천하가 평정되었으니 나도 실로 마땅히 죽게 되었구나.[果若人言,狡兔死,良狗烹;高鳥盡,良弓藏;敵國破,謀臣亡。天下已定,我固當烹]”
최근 권력의 부침을 보면서 새삼 되새기고 싶은 어록이 바로 ‘가여공환난, 불가여공락[可與共患難,不可與共樂]’이다.
>>하태형(河泰亨) 전 현대경제연구원장
서울대 경영대 졸업, 뉴욕주립대 경제학박사. 수원대 금융공학대학원장 역임.
다케오(武雄)는 야트막한 산들에 둘러쌓인 오래된 온천마을이다. 지금이야 다케오시립도서관이나 큐슈(九州) 올레 출발지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지만, 다케오는 3000년이 넘는 수령을 자랑하는 녹나무와 1300년 역사를 지닌 온천 등 오래된 것들이 매력적인 마을이다.
다케오에는 3천 년 이상 된 녹나무가 세 그루 있다. 그 중 으뜸은 다케오신사 뒤편에 있는 ‘다케오노오오쿠스’다. 다케오신사는 이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신사로 헤이안시대 중기에 지어졌다고 전해진다. 대부분의 신사들이 일본의 전통색인 주황색인데 반해 흰 색을 띄고 있어 특이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다케오신사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건, 신사 뒷편 푸른 숲에 둘러쌓인 3천 년 된 녹나무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3천 년 전이면 B.C. 천 년 경이다. 이 나무는 일본의 청동기 시대부터 살고 있었다.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선사시대 유물과 동창이다. 그런데도 아직 살아있다. 태고에 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성역이라 불리며 다케오 사람들에게 정신적인 힘을 주는 존재로 여겨져 왔다던 이유를 느낄 수 있었다. 3천 년을 이어왔다는 건 이런 의미다. 100년 사는 인생의 유상함을 생각하니 나무 앞에서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녹나무를 보고 내려오니 온 몸이 땀에 젖었다. 더운 날씨에다 습도까지 높아 조금만 걸어도 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흐르는 땀을 닦으며 도로를 따라 걷다보니 저 멀리 길 끝에 주황색 문이 보였다. 일본의 유명 건축가가 설계했다는 다케오온천 로몬이었다. 로몬을 들어서니 대중탕과 가족탕 그리고 전시관, 료칸 등 아담하게 자리한 다케오온천 지구가 눈 안에 들어왔다.
다케오온천은 약알카리성 탄산온천으로 보습력이 뛰어나 미인온천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일본천황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다녀갔고, 임진왜란 때 전쟁으로 다친 병사들이 치료차 들르기도 했다. 미야모토 무사시 등 명장들이 다녀간 온천이라 다케오(武雄)온천으로 불리기 시작한 역사적인 곳인데 생각 보다 규모가 작았다. 주말인데도 한산했다.
노천탕은, 실내탕 하나에 작은 노천탕이 전부였다. 그저 그런 욕탕이어서 별 기대없이 탕에 들어갔다가 미끌미끌 점성이 느껴져 깜짝 놀랐다. 마치 오일을 잔뜩 섞어놓은 것 같았다. 물을 만져보고, 몸 한번 만져보고를 반복했다. 온 몸이 기름 바른 것처럼 반들반들했다. 린스도 안한 머리는 하루종일 찰랑거렸다. 온천 한번 하고 다케오온천에 홀딱 빠졌다.
다음 날 다시 온천을 찾았다. 이번엔 원탕에 들어갔다. 탈의실은 1층인데 탕은 계단을 한참 내려가 있었다. 덩그마니 탕 두 개에 샤워기 몇 개가 전부였다. 나무로 된 높은 천장을 올려다 보니 얼기설기 엮은 나무 사이로 바람이 솔솔 들어왔다. 천장에 높은 탓에 41.5도에서 44.5도 까지 두 개의 탕에서 나오는 열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탕에 앉아있으니 불어오는 바람에 얼굴이 시원했다. 원탕에서 목욕하는 즐거움이 컸다.
다케오온천은 도시의 세련됨이나 유명 관광지의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피부에 스며드는 부드러운 감촉과 오래된 전통의 향기를 느끼기에 좋은 온천이었다. 탕 속에 몸을 맡기고 눈을 감으니 여행 중 쌓인 피로가 싹 가셨다. 우리는 말개진 얼굴로 현지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명탕 중 하나인 다케오온천을 만끽했다.
오래된 시간 속을 들여다 보고 경험하는 다케오 여행은 이제까지 여행과는 다른 차원의 여행에 눈 뜨게 했다. 여행이 즐거웠냐는 물음에 딸은 온천도 좋고 3천 년된 녹나무를 직접 본 것도 신비스러웠다고 했다. 그러더니 ‘엄마랑 단 둘이 여행 한 게 제일 좋아’ 라며 필자의 품을 파고 들었다.
가뭄이 들어 세상이 모두 타들어 가더라도 마르지 않는 곳이 있다. 바로 계곡이다. 계곡은 세상의 모든 것이 말라도 마르지 않는다.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다. 낮은 곳으로 임하는 ‘계곡의 정신’은 강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경쟁력의 원천이다. 이 같은 계곡 정신을 그려 노자는 ‘도덕경’에서 곡신불사(谷神不死)라고 했다. 진정한 승자는 세월이 지나봐야 드러난다는 뜻이다. 이것은 필자가 마음속 깊숙이 간직하면서 괴롭고 힘들 때 되뇌이는 생활신조다.
필자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지하수를 식수로 사용하는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미 암소 1마리를 키우면서 새끼를 낳으면 가축시장에 팔아서 생활비와 교육비를 충당하고, 논과 밭을 소작해 먹을 것은 해결하며, 산 비탈길에서 잡목을 베서 집까지 지게지고 와서 말린 후 땔감으로 사용하는 그런 집이었다. 필자 집에선 여름철 더위는 볏짚으로 만든 멍석을 마당에 깔아 놓아 이기고, 모기와 벌레는 잡풀로 연기를 만들어서 퇴치했다. 또 부러진 소나무 옹이를 태워서 저녁 밤을 밝혔다.
이렇듯 옹색했으나 낭만도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저녁 밤하늘의 반짝이는 유난히도 많고 별들을 누나와 동생들이랑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하면서 별의 개수를 셌다.
부모님은 무척 지혜로운 분들이었다. 귀뚜라미와 여치, 소쩍새와 부엉이 소리를 들으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으면 당시에는 시계도 없는데도 달그림자가 기울어진 정도와 대기 온도 차이로 시간을 말씀하시곤 했다.
아무리 시골이지만 초등학교 입학식 때나 어린이날, 각종 행사 때는 부유한 집안의 친구 부모들은 화려한 의상을 차려입고, 돈 들여 파마까지 하고 온다. 특히 생전 처음 보고, 먹어보는 음식과 다과를 가지고 온다. 이런 음식을 필자는 내내 계속 얻어먹기만 했다. 필자는 이들의 이런 생활을 보면서 분노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목표로 삼았다.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생각할 기회를 줬다는 점에서 부자 친구와 부모들에 감사한다.
그 당시에는 하루하루 시간이 너무 지루하고 길게만 느껴졌으나 돌이켜보면 너무 짧은 추억의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흘러간 세월이 너무 아쉽기만 하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 시내 아이들은 학원 다니고 공부하는 동안 소 풀 먹이고, 소 풀 베면서 잠깐의 틈바구니 시간을 활용해 공부했다. 그래서 항상 손에 책을 들고 다녔다. 공부는 열심히 했지만 먹고 살기 힘든 집안에서 대학은 꿈도 꿀 수 없는 먼 나라 이야기 동화에 나오는 ‘상상의 우주선’이었다.
초등학교를 6살에 조기 입학해 고등학교 졸업반일 때는 공무원 시험을 볼 수 있는 최소 연령에 미달해 응시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바로 직업 전선에도 뛰어들 수 있는 실력도 없어 공학도가 되기로 했다. 관련 자격증을 취득해 기술자가 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대학 전기과에 입학했다. 남들은 대학의 낭만을 즐기고 여행가는 사이 자격증 취득 공부와 취업준비에 매달린 결과 졸업반 여름에는 최연소 기사자격증 3개를 취득하고 국가공무원 및 한전 입사 시험까지 동시 합격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필자는 두 가지 직장 가운데 국가공무원을 선택했다. 공무원으로서 첫 발령지는 연고도 없는 서울이었다. 덕분에 난생처음 서울에서의 직장 생활이 시작됐다. 하지만 호사다마라던가. 기대에 부풀어 첫 월급을 받았는데 숙박비와 식비도 충당도 못 하는 수준이었다. 공무원 생활을 계속해야 한다면 계속 통장 잔액가 마이너스 되는데 이걸 누구에게 손 벌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고민만 쌓이는 사이 한국전력공사 신입사원 연수원 입교통지서가 날아왔고 미련 없이 공무원은 사직서를 내고 한전에 입사했다. 한전은 월급이 공무원의 3배가 넘었다. 그 당시엔 후회 없이 잘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한전연수원 교육을 마치고 화력발전소에 처음 부임해 교대근무 37개월 후 원자력발전소 건설 현장으로 보직을 변경됐다. 그런데 우선 용어와 도면, 시방서, 서류가 모두 영어로 돼 있다. 우리나라가 원자력 건설 기술이 없어 외국인들이 같이 투입됐는데 이들과도 영어로 소통해야 했다. 영어와 사투하느라 힘들었으나 그래도 신기술 분야여서 정말 흥미로웠다. 하루 종일 보고, 배우고, 현장 쫓아다니고, 온통 정신없이 업무에 몰두하다 보면 하루해가 언제 가고 오는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건설현장에는 외국인은 오전 9시 출근에 오후 5시 퇴근하게 돼 있었지만 한전 직원은 오전 8시 출근에 오후 퇴근 시간이 따로 없을 정도로 한마디로 일에 미친 미치광이처럼 업무에 몰두했다.
필자의 원자력 건설 처음 10년은 외국인들에게 배우는 시기였고, 그다음 10년은 국산원자력발전소 1호의 건설에 참여하는 성장기의 단계였으며, 이어 10년은 선행호기 문제점을 찾아 개선하고 품질을 최우선으로 하는 자립기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발전하기까지 기술자의 한사람으로서 이바지했다는 생각이다. 특히 이런 공로로 국가품질명장에 선정되기도 했다.
세계 최고의 품질상은 말보르상이지만 국내에서는 품질경영상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기업이 아닌 개인이 도전할 수 있는 최고의 품질상은 국가품질명장이다. 제안 실적, 설비개선 건수 및 개선 실적, 꾸준한 품질 개선 활동 실적, 자격증 취득 건수, 품질교육 실적, 사회봉사활동 시간, 현장 경력, 품질경진대회 포상실적 등으로 1차 서류심사를 한 뒤 2차 필기시험, 3차 현장실사, 4차 면접시험을 거쳐서 최종합격자를 가린다. 선출된 품질명장은 매년 10월 정부주관 품질명장 및 뺏지 시상식이 부부 동반으로 거창하게 치러지고 있다. 국가품질명장이 되면 사내에서는 사장상 공로 1등급과 해외교육, 사내외 품질개선활동 심사위원, 품질교육 등 다양하게 후진을 양성하도록 기회가 주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