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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자 명절 지내는 ‘혼추족’의 외로움 서울시가 달랜다
- 전국 1인 가구가 사상 처음으로 40%를 돌파한 가운데, 서울시가 추석을 홀로 보내는 1인 가구를 위해 맞춤형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시는 올 하반기 1인 가구 추석맞이 특별 여가 프로그램을 비롯해 1인 가구의 삶과 일상생활에 재미와 새로움을 더하는 온·오프라인 180개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서울 시내 25개 자치구 중 중구를 제외한 24개 자치구 1인 가구지원센터에서 각 프로그램 참여자를 모집하고 있다. 서대문구는 명절을 혼자 보내야 하는 1인 가구를 위해 ‘따로 또 같이 한(1)가위’ 프로그램을 추진한다. 성북구는 ‘랜선 명절 페스티벌’ 등 1인 가구 간 따뜻한 정을 나눌 수 있는 소통 프로그램을 진행할 예정이다. 이 외에도 1인 가구에 지원이 필요한 건강, 안전, 경제자립, 주거, 심리·정서 등 5대 분야를 중심으로 한 프로그램도 다양하게 편성됐다. 성동구에서는 혈당 조절 식습관을 형성해주는 ‘당떨어진당’을, 서대문구에서는 저염식 요리와 신체운동 교육을 해주는 ‘1거양득’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강남구는 ‘1인 가구 부채관리 교육’, 양천구는 소규모 생활시설 수리를 지원하는 ‘두드림’, 영등포구는 심리 정서 상담인 ‘같이 해’ 프로그램 등을 실시한다. 자치구별로 청년·중장년 등 1인 가구 밀집 지역의 특성을 반영한 프로그램과 지역 자원을 활용한 프로그램도 운영된다. 미취업 청년 비중이 높은 관악구는 집단상담 프로그램 ‘다시 한번 치얼업’을 운영하고, 서대문구는 고시원과 지하방, 옥탑방 거주 1인 가구를 대상으로 ‘밀프렙 만들기’와 운동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성동구 1인 가구지원센터는 관내 저층 주거지 생활환경을 조사하고 고독사 고위험 가구를 발굴하는 ‘고독사 제로 만든당’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서울 시민 혹은 서울에 생활권을 둔 1인 가구는 누구나 1인 가구지원센터 프로그램에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다. 자세한 접수 일정과 신청 방법 등은 ‘서울시 1인 가구 포털’이나 해당 1인 가구지원센터로 전화 문의하면 된다.
- 2022-08-31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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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절 생이별 계속" 올 추석도 요양시설 대면 면회 제한 유지
- 3년 만에 거리두기 없는 추석 연휴가 다가오지만 요양병원과 요양시설의 접촉 면회는 제한된다. 최근 한달 사이 감염취약시설의 코로나19 집단감염 확진자가 크게 증가한 데에 따른 조치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24일 코로나19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 회의에서 추석 연휴 기간 요양병원과 요양시설의 대면접촉면회 제한 조치를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한 총리는 “요양병원과 요양시설 등의 관리에 한층 더 집중하겠다”며 “어르신들의 감염 예방을 위한 ‘대면접촉면회 제한’을 추석 연휴 기간에도 계속 유지하겠다”고 말했다. 중대본에 따르면 요양병원과 요양시설의 집단감염으로 인한 감염자 수는 7월 4주 24.8명에서 8월 3주 42.6명으로 71.8% 급증했다. 요양병원·시설에 대해 주 2회 실시하고 있는 선제검사 결과 양성률 또한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다. 이에 중대본은 집단감염 규모와 선제검사 양성률 등을 감안해 추석 연휴 기간에도 종사자 선제검사, 비접촉 대면면회, 필수 외래진료 외 외출·외박 제한 등 현행 방역수칙을 유지한다고 발표했다. 현재 17개 시도에서 총 251개 팀이 운영 중인 요양시설 의료 기동전담반은 시군구별 1개 이상 운영을 목표로 지속적으로 확충해나갈 예정이다. 또한 계약 의사, 호흡기환자 진료센터 등을 활용해 기존 의료서비스를 지원한다. 먹는 치료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처방률을 주기적으로 점검하고, 중증 완화를 위한 처방도 계속 독려할 계획이다. 한편 정부는 25일부터 감염취약시설에서 코로나19 환자가 발생했을 때 초동 대처를 강화하기 위한 환자 발생 상황별, 시설 유형별 모의훈련을 시작한다. 추석 연휴 방역 대책도 발표할 예정이다.
- 2022-08-25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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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내의 전남편과 함께 시작한 재혼
-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언제나 그렇듯 추모공원 입구에 차를 세웠다. 1년마다 어김없이 해온 일이다. 특별히 나들이 철도 아니고 성묘객이 몰리는 명절도 아닌데 길이 막히는 것이 짜증스러웠지만 옆자리에 앉아 있는 아내에게 내색조차 못 했다. 평소에는 앞차가 시야를 가리고 브레이크를 자주 밟게 되면 구시렁거리며 불평을 내뱉곤 하지만 아내의 성묫길에는 교통체증에도 입을 꾹 다문다. 옹졸한 내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다. 하지만 늘 통 큰 남편인 척하는 것도 솔직히 지겹다. 아내는 내가 통 큰 척하고 있는 것에도 관심이 없다. 내가 통이 크든 작든 아내에게는 아무 상관도 영향도 미치지 않는 것이다. 도대체 이 짓을 언제까지 해야 하나. 내가 왜 이래야 하나. 벌써 20년째다. 이제는 그만둬도 되지 않나. 그런데 왜 나는 아내에게 이제 그만둘 수 없냐는 말조차 꺼내지 못하는 걸까. “조심해서 다녀와. 같이 갈까?” “아니에요. 혼자 갈게요. 운전해줘서 고마워요. 쉬고 계세요.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무거울 텐데… 제수(祭需)만 들어다주고 난 내려올게.” “그러실 필요 없어요. 늘 하던 일인데요, 뭐.” 그래, 늘 하던 일이지. 20년을 한결같이. 추모공원 앞에서 나누는 우리의 대화도 늘 똑같고. 그런데 왜 오늘따라 짜증 나고 답답하고 억울한가 말이다. 아니 억울할 것까진 없지만. 전남편 제사 지내는 아내 아내와 나는 20년 전에 재혼했다. 아내와 나 둘 다 30대 중반에 배우자와 사별했다. 혼자 지낸 지 3년쯤 지나 지인의 소개로 만났을 때 동병상련이 서로의 마음을 움직였다. 당시만 해도 이혼보다 사별이 재혼에는 유리하게 작용했다. 사별은 불가항력이니까. 그러나 이혼은 선택이니 사정이야 어쨌든 자기주장이 강하고 드센 사람이란 인상을 준다. 특히 여자에게는. 이렇게 생각하는 나를 보수적이라고 비난해도 하는 수 없다. 어쨌든 나는 그랬다. 혹자는 이혼은 자기 의지로 관계를 끊었기 때문에 전 배우자에 대한 미련이 더 이상 없지만, 사별은 생전에 사이가 나빴던 부부조차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이유로 애틋한 환상에 빠져 없던 사랑도 만들어내서 내내 잊지 못한다고 했다. 돌이켜 보면 아내의 경우가 그랬던 것이다. 죽은 남편을 잊지 못하는 것도 모자라 매해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으니. 그럼 나는? 생일이나 결혼기념일 같은 때 죽은 아내가 생각나기도 했지만, 그리고 이따금 꿈에 나타나기도 했지만 그냥 그뿐이었다. 아이들 엄마로서 아이들을 볼 때 떠오를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 내 삶에서는 이미 떠나간 사람이었다. 아무튼 재혼 상대로 나온 여자가 전남편과 사별했다는 것이 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결혼 전 아내가 들고 나온 약간 이상한 조건도 상대에 대한 나의 호감을 더했으면 더했지 감하지는 않았다. 그 조건이란 재혼을 하더라도 전남편의 기일을 지키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집에서 제사를 지내겠다는 건 아니고 성묘를 가고 싶다고 했다. 죽은 사람 못 이기는 산 사람 아내가 좋았기 때문에 무슨 부탁을 해도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뜻밖의 제안을 할 줄이야! 그토록 지고지순한 사람일 줄이야! 세상 떠난 남편에게 그 정도의 순정이라면 살아 있는 내게는 얼마나 정성스러우랴. 죽은 남편을 못 잊어 하는 것은 남이 들어도 그 자체로 칭찬받을 갸륵한 마음씨 아닌가. 그런 여자를 흔쾌히 받아들인 나는 더 넓은 마음씨의 소유자고. 이 모든 것이 나의 상상 속 이야기이자 착각이었다 해도 나는 통 큰 남자가 되기로 하고 그렇게 해온 지 20년째다. 그랬던 내가 뒤늦은 심술이 동한 것일까. 설마 죽은 사람에게 질투를 느끼는 것일까. 왜 내 심사가 이리 꼬이냔 말이다. ‘죽은 남편을 죽도록 사랑했나 보지. 그렇다 해도 세월 앞에 장사 있나. 몇 년 그러다 말겠지.’ 처음부터 이런 마음을 먹었던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랬다면야 예상이 빗나간 게 약올라서 심통을 부릴 수도 있겠지만. 아내는 왜 전남편을 잊지 못하는 것일까. 전남편과 산 기간보다 나와 함께 산 기간이 두 배나 긴데도. 세월조차 지우지 못하는 둘의 추억은 무엇일까. 물론 나는 물어보지 않았다. 그런 걸 물어볼 정도로 얼간이는 아니다. 자존심이 있지. 그렇다고 아내와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다. 우리 둘은 잘 지낸다. 둘 사이에 자녀는 없지만 재혼할 때 각자 데리고 온 남매들끼리도 무난하게 잘 지낸다. 이젠 모두 성인이 되어 자주 만날 일이 없지만 나도 아내도 내 자식, 네 자식 나눠서 서운한 마음이나 갈등을 겪은 일이 없다. 오히려 상대의 자녀들을 서로 잘 챙긴다. 우리는 건강한 편이며 돈도 아주 없지 않고 주변의 관계도 원만하다. 이만하면 노후를 대비해 부족함 없는 복 받은 중년 부부다. 문제는 아내의 전남편이다. 전남편이 우리 사이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아니, 나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다. 허,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나. 죽은 사람이 산 사람 일에 끼어든다고? 하긴 산 사람은 결코 죽은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이 있지. 아내는 죽기 전까진 ‘저 짓’을 그만둘 의향이 없는 듯하다. 저러다 내가 먼저 죽으면 아내는 내 제사는 안 지내고 저 인간만 챙기는 거 아냐? 아내가 전남편을 못 잊는 이유 아내의 전남편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늦은 밤 집 앞 횡단보도를 건너다 차에 치었다고 했다. 빨간색 보행자 신호등에서 건너간 남편 쪽 과실이었다고. 딴생각을 하다가 순간적으로 착각했던 것 같다. 아니면 자투리 초록 신호등에서 무리하게 뛰어 건너다 변을 당한 것일지도. 남편은 즉사했다고 한다. 나는 그렇게만 알고 있었는데 재혼 후 5년쯤 되었을 때 아내의 친구에게서 사고 당일 밤 부부가 크게 다투었다고 들었다. 화가 난 남편은 술이라도 마실 생각으로 집을 뛰쳐나간 것 같은데 진정되지 않은 마음에 보행자 신호등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던 것 같다고. 그러면서 아내의 친구는 그 순간은 일부러라도 차에 뛰어들어 죽고 싶지 않았겠냐는 야릇한 여운을 남겼다. 아내의 전남편이 죽고 싶을 정도로 격렬했던 싸움의 원인은 뭐였을까. 내 얼굴에 어쩔 수 없는 궁금증이 피어오르는 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아내의 친구는 당시 아내가 잠깐 한눈을 판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아내의 외도 사실이 남편 귀에 들어가 부부가 대판 싸움을 했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구태여 내게 말하는 이유를 따져 묻고 싶었지만 그만두고 말았다. 그 사실 자체로 불쾌했고, 무슨 속내인지는 몰라도 친구의 치부를 폭로하는 그 여자에게도 불쾌했다. 안달이 난 쪽은 아내의 친구, 그 여자였다. 하지만 나는 그 입을 더 이상 열게 하지 않았다. 불쾌를 넘어 불안했다. 아내에 대해 내가 모르는 무슨 말이 더 나올까 싶어서. 그냥 아내에 대한 시기 질투로 이해하기로 하고 마음을 정리했다. 그 친구는 아내가 사별한 비슷한 시기에 이혼하고 혼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안정된 재혼 생활을 하는 아내가 부러울 수도 있었을 테니까. 그렇다면 더구나 캐묻고 싶지 않았다. 물론 아내는 내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걸 모른다. 자존심을 지켜주고 오히려 아내를 이해하는 쪽으로 작용한 나머지 전남편의 기일 성묘를 이제 그만둘 수 없냐는 말조차 꺼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내의 영혼은 누구에게? 그랬다. 지난번 결혼에서 아내는 남편이 자기 때문에 죽었다는 죄의식으로 20년간 남편의 기일을 챙기고 있는 것이다. 나하고는 아무 상관 없는 일에, 그것도 아름답지 않은 일에, 따라서 보람도 없는 일에 나까지 발을 담그고 있다는 사실에 자괴감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남들이 이 일을 알면 나를 바보라고 할 테지. 무엇보다 저 여자는 너무 뻔뻔하지 않나. 아무리 내가 허락했고 약속했다고 해도 20년을 한결같이 그의 기일을 챙기고 있으니. 나를 무시하고 깔보는 마음이 없고서야 미안해서라도 스스로 알아서 그만뒀어야 하지 않나. 더구나 아내는 한 번도 나를 성묘에 참여시키지 않고 있다. 나를 위한 배려라고 하지만 현 남편인 나를 전남편에게 한 번쯤 인사를 시켜줄 법도 하건만. 이쯤 되면 전남편과 오붓한 시간을 갖겠다는 심사가 아니고 뭔가. 아내는 죽은 남편의 묘 앞에서 매해 무슨 말을 할까.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고 또 사과하며 용서를 비는 걸까. 만약 그날 그 사고가 없었다면 저 사람이 아닌 당신과 해로할 수 있었을 텐데 하고 눈물을 찍어내는 걸까. 그나저나 조신한 아내가 어쩌다 그런 실수를 저질렀을까. 자동차 사이드미러 저 멀리서 성묘를 마치고 내려오는 아내가 보인다. 가까워올수록 평온하고 만족스러운 표정이 드러난다. 아까 올라갈 때의 스산한 표정이 아니다. 상념에서 깨어나, 시동을 걸어놓고 아내의 손에 들린 제사 음식 보따리를 받아들기 위해 차에서 내린다. 이제 아내는 다시 내게로 돌아오고 있다. 하지만 내가 차지하고 산 건 아내의 몸뚱이뿐이고 아내의 영혼은 늘 저곳, 저 남자에게 있었던 게 아닐까. 아니 몸조차 거기에 있고 지금 내게 오고 있는 여자는 아내의 모습을 한 허깨비가 아닐까. 내 아내는 여전히 묘 앞에서 전남편과 도란도란 사랑을 속삭이고 있는 건 아닐까. ✽브라보 마이 러브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 2022-06-30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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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헌 밖으로 나온 ‘전설의 술’ 전통주
-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각 가정에서 술을 담그는 ‘가양주 문화’가 있었다. 문헌에 남겨진 전통주 종류만 해도 600종이 넘는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가양주 면허제가 적용되고 양곡 정책으로 쌀을 주류 양조에 사용하지 못하게 하면서 대부분의 전통주가 사라졌다. 그럼에도 옛 문헌을 토대로 전통주를 복원하려는 시도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농촌진흥청은 ‘우리술 복원 프로젝트’로 옛 문헌으로 전해지던 술을 복원하고 있으며, 국순당도 ‘우리술 복원 사업’을 하고 있다. 문헌 밖으로 나온 전통주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녹파주(綠波酒) 녹파주는 우리나라 최초로 발간된 요리책 ‘산가요록’(山家要錄)에 실려 있던 고려 시대 대표주다. ‘푸른 파도’라는 뜻으로 선비의 술이라고 불렸다. 조선 시대 문헌인 ‘양주방’(釀酒方), ‘사시찬요초’(四時纂要抄),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규합총서’(閨閤叢書),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 등 여러 문헌에 소개된 것으로 보아 대중화된 술이었을 것으로 예상한다. 깔끔한 맛으로 기름진 명절 음식과 잘 어울린다. ◆소곡주 소곡주는 백제 시대 왕실에서 즐겨 마시다 조선 시대까지 이어져온 명주다. 쌀에서 우러나는 진한 단맛과 부드러운 맛이 특징이다. 누룩이 적게 들어가 ‘소곡주’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한번 마시면 일어나지 않고 계속 마셨다고 해 ‘앉은뱅이 술’이라고도 부른다. 소곡주를 빚는 방법은 대략 7가지가 알려져 있으며, 충남 한산 지방의 한산 소곡주가 유명하다. ◆이화주(梨花酒) 이화주는 배꽃이 필 무렵에 누룩을 띄워 담근 술이다. 농후한 단맛과 신맛의 조화가 특징으로, 숟가락으로 떠먹을 수 있을 정도로 걸쭉한 고려 시대 고급 막걸리다. ‘수운잡방’(需雲雜方),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 ‘규곤시의방’ 등의 기록에 따라 복원했다. ◆창포주(菖蒲酒) 창포주는 절기상 단오에 마시는 시절주로 고려 시대부터 내려온 역사 깊은 술이다. ‘동의보감’(東醫寶鑑)에서는 피를 맑게 해 풍증 등에 뛰어난 효과가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전통 누룩과 쌀을 이용해 ‘주찬’(酒饌)의 전통 방법 그대로 빚은 술이다. ◆석탄향(惜呑香) 와인처럼 향과 맛을 음미할 수 있는 조선 시대 명주다. 술의 맛과 향이 좋아 입에 한번 머금으면 삼키기 아깝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9가지 문헌에 언급된 술로 ‘주찬’(酒饌)과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에 기록된 제법으로 복원했다. ◆아황주(鴉黃酒) 아황주는 고려 시대부터 전해오던 우리술이다. ‘술잔에 비친 까마귀가 노랗게 보인다’는 이름 뜻처럼 다른 약주보다 진한 황금색을 띠고 단맛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궁중에서 사시사철 즐겨 마신 아황주는 조선 시대 요리책인 ‘수운잡방’(需雲雜方)에서 찾은 제조법으로 복원했다. ◆백세주(百歲酒) 백세주는 고려 시대 명주인 백하주의 제법인 생쌀 발효법을 복원한 약주다. ‘고사촬요’(攷事撮要)의 “쌀을 가루 내 끓는 물을 부어 반죽하여 술을 빚는다”는 문헌 내용을 바탕으로 복원했다. ◆삼일주(三日酒) 삼일주는 3일 만에 빚어지는 과일향이 나는 술로 서민들이 즐겨 마셨다. ‘음식방문’(飮食方文), ‘요록’(要錄), ‘주방문’(酒方文), ‘산림경제’(山林經濟) 등 수많은 문헌에 등장한다. 설을 맞아 가정에서 쉽게 담가 마시던 가양주다.
- 2022-06-28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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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국선열과 국민 함께하는 친근한 장소 만들고파”
- 사실 평소에는 바쁘다는 이유로 그곳의 존재를 잘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호국보훈의 달인 6월이 되면 그곳이 떠오른다. 바로 국립서울현충원이다. 6월을 앞둔 어느 날, 국립서울현충원에는 호국영령과 순국선열을 위로하듯 이팝나무꽃이 흩어져 내렸다.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이유 하나로 가슴이 아려지는 그곳에서 김수삼(57) 현충원장을 만났다. 김수삼 원장은 고려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1997년 행시 40회로 공직에 입문했다. 이후 국방부 군수기획과장, 직무감찰담당관, 기획총괄담당관, 국제군수협력과장, 기획관리관 등을 역임했다. 국립서울현충원도 국방부 소속이다. 김수삼 원장은 지난 1월, 제23대 국립서울현충원장으로 취임했다. 코로나19로 인해 별도의 취임식을 치르지는 못했다. 그러나 TV에서 그를 볼 기회가 많았다.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 후와 5월 10일 취임식 때 현충원을 찾아 참배했기 때문. 김 원장은 “TV에서 저를 봤다며 반가워하는 지인들의 연락을 많이 받았다”고 말하며 웃었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는 등 정치적으로 중요한 시기에 현충원장에 취임해 책임감을 느끼고 걱정도 많았는데요. 무사히 치를 수 있어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느낀 것이 있어요. 대통령을 비롯해 정치인들이 선거를 치르거나 당선될 때 현충원을 가장 먼저 찾는 것을 보고 정말로 중요한 곳이라는 걸 실감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일반 국민이나 자라나는 어린이, 청소년들도 조국을 위해 헌신하고 목숨 바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이곳의 중요성을 느끼고 자주 찾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조국을 위한 선열들의 장소 ‘여기는 민족의 얼이 서린 곳. 조국과 함께 영원히 가는 이들, 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리라.’ - 현충탑에 새겨진 글귀 서울 동작구에 자리한 국립서울현충원은 휴전 2년 후인 1955년 설립된 국군묘지가그 뿌리다. 6·25전쟁에서 전사·순직한 군인들을 안장하는 것이 목표였다. 이후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65년 국군묘지에서 ‘국립묘지’로 승격됐고, 군인이 아닌 순국선열 및 국가유공자 안장도 가능해졌다. 이어 1996년 국립현충원, 2006년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름을 확정했다. 김수삼 원장은 “국립서울현충원은 조국의 독립과 수호, 발전을 위해 고귀한 생명을 바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이 영면해 계시는 민족의 성역이다. 국난을 극복해온 민족의 얼과 호국 의지, 나라 사랑 정신이 가득 서려 있는 곳”이라고 소개했다. 또한 “총면적은 약 44만 평이며, 네 분의 전직 대통령을 포함해 총 18만 7000여 분의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을 모시고 있다”고 설명했다. 더불어 국립대전현충원은 1985년 건립됐고, 국립연천현충원은 2025년 건립을 목표로 준공 중이다. 김 원장은 “서울현충원, 대전현충원, 연천현충원은 모두 같은 위상을 가진 국립묘지다.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은 서울, 대전, 연천현충원에 안장되는 대상자를 동일하게 규정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국립서울현충원은 국방부 소속이고, 대전과 연천현충원은 국가보훈처 소속이다. 김수삼 원장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강조하며,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친 선열들의 희생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립서울현충원이 갖는 역사적인 의의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의미 있는 곳의 원장으로 반년 가까운 시간을 보낸 그의 소감은 어떨까. “올해 1월 국립서울현충원장에 취임해 현충탑에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께 참배를 드린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상반기가 다 지나갔네요. 처음 참배를 드릴 때 현충원장으로 취임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한편, 막중한 책임과 사명을 느꼈습니다. 제가 당시 다짐한 것이 있어요. 장례와 추모 행사에 대한 사회 인식의 변화와 엄중한 코로나19 상황 등에 맞춰 보다 체계적이고 품격 높은 안장 및 참배·추모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유공자 및 유가족들에게 최고의 예우를 하기 위해 ‘고객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좀 더 노력하겠다는 것입니다.” 김수삼 원장은 최고의 예우를 다하겠다는 다짐을 실천하고 있다. 그는 설 명절 때 유가족을 대신해 직원이 참배드리고 이를 사진 찍어 전송해주는 ‘설맞이 참배 대행 서비스’를 실시했다. 또한 유가족의 편의를 위해 참배용 사다리 및 참배용 원목 의자를 비치했고, 그동안 코로나19로 인해 중단됐던 셔틀버스 운행도 시작했다고. 김 원장은 취임 후 가장 뜻깊었던 일로 지난 4월의 ‘제2충혼당 개관’을 꼽았다. 제1충혼당은 영현 2만 468위를 모신 후 2020년 7월 만장됐다. 제2충혼당은 2018년 착공돼 올해 4월 13일 완공됐다. 제2충혼당에는 3만 2952위를 추가로 안장할 수 있다. “제2충혼당 건립을 통해 유공자분들을 최고의 시설로 모실 수 있게 되었고, 나아가 국가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의 나라 사랑 및 호국 정신을 후대에 계속 이어갈 수 있게 돼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이번 제2충혼당 개관식에서 배우 신현준 씨가 사회를 봐주셨고, 가수 진미령 씨가 추모시를 낭독해주셨습니다. 두 분 모두 이곳 현충원에 잠들어 계신 유공자의 후손입니다. 행사 며칠 전에 갑자기 부탁드렸는데도 기꺼이 다른 일정을 조정하고 참여해주셨습니다. 이 기회를 통해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더불어 국립서울현충원에서는 ‘유해 발굴 및 확인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국립서울현충원에는 6·25전쟁 당시 전사한 사실은 확인됐으나 유해를 찾지 못한 이들의 위패가 10만 3000여 위나 있다. 김수삼 원장은 “현재도 이분들의 유해를 찾기 위한 유해 발굴 사업이 꾸준히 진행 중이지만 발굴된 유해 중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 호국용사는 극소수인 상황”이라고 밝혔다. 또한 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위쪽에 있는 무후선열제단에도 134위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구한말 의병 활동 및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한 분들 가운데 유해를 찾지 못하고 후손이 없는 선열들의 위패다. 그러나 안장되어 있고 유가족이 있다 하더라도 상황이 여의치 않은 것은 마찬가지다. 시간이 흘러 나이를 먹음에 따라 유가족이 꾸준히 현충원을 찾는 것이 힘들어지고 있다. 그 원인은 거주 지역이 멀어서 일 수도 있고, 가족이 달라지거나 건강 상태의 변화 때문일 수도 있다. “6·25전쟁에서 전사한 분들은 대부분 젊은 나이에 전쟁에 참전했습니다. 때문에 기혼자가 적어 후손이 없거나, 남은 유가족 대부분이 형제나 조카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묘역을 찾는 유가족이나 친지들의 발길이 뜸해지면서 점점 쓸쓸한 묘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선열의 희생에 감사하며 ‘내가 후손’이라는 마음가짐으로 항상 관심을 가지고 잊지 말아야 합니다. 쓸쓸한 묘소가 생기지 않도록 말이죠.” 현충원, 국민 속으로 일반 국민에게 ‘현충원은 어떤 곳이라고 생각하나?’, ‘실제로 현충원에 가본 적이 있나?’라고 물어보면, 현충원 근처에 사는 서울시민이나 견학을 가본 경우가 아니라면 스스로 현충원을 찾아가 봤다고 답하는 이는 드물 것이다. 보통 TV를 통해 6월 6일 현충일 행사를 보면서 국립서울현충원을 접한 경우가 대부분일 터. 그렇기 때문에 현충원은 정부 관계자나 유공자의 후손들만 들어갈 수 있다고 잘못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 더욱이 원래는 국립묘지였기 때문에 매우 엄숙한 공간이라고 느껴진다. 김수삼 원장 역시 ‘일반인이 현충원에 들어갈 수 있나요?’라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고 밝혔다. 그는 이에 대해 안타까워하면서 “현충원이 무겁고 어려운 이미지가 아닌 국민과 함께하는 열린 호국공원으로 거듭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특히 44만 평의 국립서울현충원은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곳이다. 김 원장은 “봄에는 아름다운 수양벚꽃, 여름에는 이팝나무 가로수길, 가을에는 현충원 둘레를 잇는 은행나무길이 아름답다”면서 “이와 더불어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고귀한 희생과 숭고한 나라 사랑 정신을 직접 보고, 듣고, 느끼면서 가슴 깊이 간직할 수 있는 뜻깊은 장소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수삼 원장의 말대로 국립서울현충원은 아름답고 뜻깊은 곳이다. 현충원을 걷다 보면 느껴지는 감정도 많을 것. 지금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소중함을 새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근무 환경이 좋아서 오래 일하고 싶다”는 김 원장은 현충원의 명소로 현충천과 현충지를 추천했다. “현충원에 천이 있다는 것을 아는 분이 많지 않은데요. 현충천을 따라 산책하다 보면 사시사철 다양한 꽃을 만날 수 있습니다. 물고기들도 많고요. 현충지는 조그마한 연못으로 가만히 앉아서 사색하거나 소위 ‘멍때리기’ 좋은 곳입니다. 많은 어르신들이 찾아와 휴식을 취하시기도 하는데요. 심지어 심신을 치유하신 분도 많아 후손들이 감사한 마음에 기증한 의자도 있어요. 저도 점심 식사 후 산책할 때 현충천과 현충지는 거의 빼놓지 않고 있습니다.” 김수삼 원장은 국민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해 온·오프라인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먼저 국립서울현충원은 온라인을 통해 ‘기일 : 기억의 날’(당신을 기억합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독립유공자가 서거한 달에 맞춰 업적을 소개하는 프로젝트다. “독립유공자 하면 어떤 분들이 떠오르시나요? 대부분은 우리가 잘 아는 김구 선생님이나 안중근 의사 같은 분들을 떠올리실 겁니다. 하지만 이분들 외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독립유공자들이 계십니다. 기일 프로젝트는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신 독립유공자들의 업적을 국민과 함께 기억하고, 추모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자 기획했습니다. 한분 한분을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5월 21일에는 국립서울현충원 경내에서 호국 문예 백일장과 그림 그리기 대회를 개최했다. 코로나19 때문에 지난 2년간은 비대면으로 개최됐다. 김 원장은 “학생들이 우리나라의 미래라고 생각한다”면서 많은 이들의 현충원 방문을 뿌듯해했다. 그는 코로나19로 제한됐던 행사를 앞으로 적극적으로 개최하고, 시민들의 참여의 장을 넓히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김수삼 원장은 재임 기간의 목표에 대해 “국민과 함께 공감하고 소통하는 열린 호국 추모공원을 만드는 것”이라면서 “국민들이 언제나 편안히 찾을 수 있도록 하고,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호국정신을 배우며 후손들에게 이어지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김수삼 원장에게 현충원장으로서가 아닌 개인적인 목표를 물었다. 그는 “곧 정년을 맞이하기 때문에 퇴직 후를 준비하고 있다”고 답했다. “먼저 퇴직하신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돈, 건강, 취미, 친구들이 있어야 노년을 즐겁게 보낼 수 있다고 합니다. 근로소득은 정년까지 일하는 것으로 충분하고, 퇴직 이후에는 금융소득을 통해 번다는 목표로 퇴직연금, 리츠, 부동산 펀드 등을 적립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평생학습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요즘 사이버 대학이 많아 관심 있는 분야에 관한 공부를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편리하게 할 수 있습니다. 저도 틈틈이 시간을 내어 사회복지학과를 다니며 사회복지사 2급 자격증을 취득했고, 지금은 한국어학과에 다니고 있습니다. 졸업하면 외국인 학습자를 가르칠 수 있는 한국어교원자격증이 부여됩니다.”
- 2022-06-03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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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병 최전선의 목소리, “암 환자에게도 일과 생활은 엄연한 현실”
- 질병과 가장 근접한 이들은 누구일까. 환자와 그의 가족, 혹은 그들과 함께하는 의료인일 것이다. 질병과 삶, 때로는 죽음을 마주하는 간호사들은 우리 사회에서 아픈 몸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국립암센터 암생존자통합지지실과 호스피스 병동에서 전담 인력으로 근무하는 간호사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박미애 국립암센터 암생존자통합지지실 간호사 “유방암을 예로 들어볼게요. 유방암 0기, 1기 환자들의 경우 방사선 치료에 보통 한 달 걸립니다. 호르몬 치료를 위한 처방약 복용은 장장 5년간 계속해야 해요. 하지만 방사선 치료가 끝나면 그 뒤로 의사에게 진단받을 기회가 없어요. 의사들은 ‘이제 치료 끝나셨어요. 몇 달 뒤에 검사받으러 오시면 됩니다’라고 하면 환자들이 치료가 끝나서 좋아할 거라고 생각해요. 사실은 그렇지 않거든요. 앞으로 나는 뭘 해야 하나. 몸 관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정보가 부족하니 오히려 막막하고 불안해하는 분들이 정말 많아요.” 박미애 간호사가 만나는 환자들은 암 진단을 받은 뒤 수술이나 항암 치료, 방사선 치료 등의 적극적인 치료를 끝낸 암 생존자들이다. 그러나 치료가 끝났다고 해서 질병과의 고리도 끊어진 것은 아니다. 센터를 찾는 이들은 여전히 암 재발을 가장 두려워하며, 미미한 통증이나 신체 변화만 생겨도 암과 관련된 증상이 아닐까 불안해한다. 그가 하는 일은 환자들이 스스로를 관리하고 원활하게 사회에 복귀할 수 있도록 상담과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 2019년 기준으로 전체 인구 10만 명당 연령표준화발생률은 295.7명으로, 2015년 이후 신규 암 환자 수는 매년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암 치료 후 어떤 것을 신경 써야 하는지,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받을 기회는 턱없이 부족하다. 경제적 지원을 받거나 재취업은 언감생심이다. 그저 환자들끼리 모여 정보를 주고받는 경우가 대다수다. 2017년 7월 시범사업으로 시작한 암생존자통합지지사업은 올해부터 본사업으로 전환됐다. 박 간호사는 사업이 처음 시행될 때부터 함께한 암생존자통합지지실 초기 멤버다. 정신 전문 간호사로서 암 생존자인 환자가 방문하면 자가평가 및 상담부터 진행하며 환자가 겪고 있는 신체적·정신적 어려움을 파악하고, 건강관리법에 대한 교육과 상담을 맡았다. 또한 통합지지실의 전반적인 행정 업무 및 간호학과나 대학원 등 관련 전문 인력을 대상으로 암 생존자 관리에 대한 교육을 진행해왔다. 지난해 암 환자 10명 중 7명은 5년 이상 생존한다는 통계자료가 발표됐지만 암은 여전히 통증, 단절, 혹은 죽음을 연상시킨다. 사실 당연한 이야기일지 모른다. 환자들은 피로와 통증 등의 신체적 어려움이 있어 경제활동을 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다시 일을 시작해도 괜찮을까’ 등의 심리적인 불안감까지 합세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투병 사실 알리기를 꺼리기도 한다. 같이 사는 배우자를 제외하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환자도 더러 있다. 사람들의 지나친 배려가 부담스럽거나 무덤덤하다 못해 냉담한 반응에 상처받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성공이나 노력보다 행복, 남의 시선보다 나 자신과 가족에게 집중할 변화의 계기로 삼는 이들이 조금이나마 늘어나고 있는 점은 긍정적이다. 작년에 센터를 찾았던 65세 림프종 환자 A씨도 비슷한 사례다. 현재 센터에서는 코로나19 때문에 프로그램 다수를 비대면 콘텐츠로 제공하고 있다. 스마트폰 사용을 비롯해 익숙지 못한 일에 대한 도전을 특히 겁내던 분이었다. 그러나 영양식생활 프로그램과 사진, 짧은 일기를 공유하는 ‘고잉온 다이어리’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용기를 얻었고, 결국 노인 일자리 사업으로 운영되는 카페에서 바리스타로 취직해 일하게 되었다. 박미애 간호사는 앞으로도 제2의 A씨가 많아지길 바란다. 암이라는 제약과 편견으로부터 벗어나 다시 세상으로 향하길 꿈꾸고 있다. 유재빈 국립암센터 호스피스·완화의료병동 간호사 “여전히 암 진단은 사형선고나 다름없고, 호스피스 병동은 무겁고 엄숙한 공간이라는 편견이 강해요. 그래도 죽음과 호스피스 병동에 대한 인식 변화를 위해 노력하려고 해요. 제가 고등학생일 때 가족들끼리 췌장암에 걸린 할머니에게 마지막 생일파티를 해드리려고 병실에서 촛불과 케이크를 준비했었어요. 당시 할머니는 이미 의식이 없으셨고, 이상하게 보는 시선이 많아 유난이라며 아버지를 나무랐죠. 하지만 지금은 병동에서 환자들의 생애 마지막 생일파티를 소소하게나마 챙겨드리고 있어요. 앞으로도 암과 죽음에 대한 인식이 점차 변화하리라고 믿어요.” 호스피스·완화의료병동에서 3교대로 근무하는 유재빈 간호사는 입원한 환자와 보호자 곁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다. 신체적 증상 관리부터 위생, 임종 돌봄 및 장례 준비, 정서적 지지까지 환자의 말기 돌봄 기간에 필요한 모든 간호 활동을 수행한다. 그가 일하는 곳에서는 입원한 환자 9명의 힘든 증상을 적극적으로 완화시키는 치료가 이뤄진다. 환자의 의사를 가장 존중하여 수혈 및 중재적 시술을 적극적으로 지속하고, 가정에서 증상 조절이 가능해지면 퇴원이 이뤄지는 일반 병동과 다를 바 없다. 다만 일반 병동에서 환자를 치료하고 회복하는 과정에 집중한다면, 호스피스 병동에서는 입마름 같은 신체적 증상 완화부터 환자의 안위 증진 및 개인 위생에 대한 돌봄이 제공되고 있다. 국립암센터 호스피스·완화의료병동과 일반 병동의 가장 큰 차이점은 상담 및 돌봄 프로그램이 있다는 점이다. 일주일에 한 시간 이상 환자 및 보호자와의 상담을 필수로 진행하는 것은 물론, 음악이나 미술 요법, 스트레칭 데이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심적인 안정과 위로를 건넨다. 코로나19 때문에 가족을 제외한 지인들의 면회가 쉽지 않아 병동에서는 유튜브 라디오 프로그램을 고안해내기도 했다. 유튜브 채널을 열어 사연과 신청곡을 받는 실제 라디오와 유사한 진행으로, 특히나 만족도가 높다. 호스피스 병동에서는 환자와 가족들의 수용 정도, 실질적인 심리·사회적 어려움이 무엇인지부터 파악에 나선다.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임상심리사, 약사, 요법치료사로 이뤄진 전담팀이 지속적으로 소통하며 남은 시간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후회 없이 보낼 수 있도록 도와주고, 통증과 증상을 적극적으로 조절해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일을 하는 호스피스·완화의료는 엄연히 의료 서비스에 해당한다. 그러나 병동 바깥에서 호스피스·완화의료가 갖는 이미지는 무겁기만 하다. 죽음을 준비하기보다 터부시하고 쉬쉬하는 분위기와 더 이상 치료할 방법이 없을 때 마지막으로 향하는 곳이라는 인식이 합쳐진 결과다. 병동을 찾아 초기 상담을 진행할 때까지만 해도 엄숙하고 숨 막히는 공간으로 생각해 걱정하는 환자와 보호자들이 적지 않다. 환자들이 ‘왜 나에게 이런 몹쓸 병이 와서 우리 가족을 힘들게 할까’, ‘이제야 살 만해졌는데 이런 나쁜 병에 걸렸구나’ 하며 자책하는 모습도 자주 본다. 의식이 흐려지기 전까지 자녀와 배우자, 부모에게 미안해하는 것이다. 암에 걸리고 싶어 걸린 것이 아니며,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의 문제가 아님에도. 그러나 암은 의학 기술의 발달로 고혈압 및 당뇨 같은 만성질환화되고 있다. 약을 복용하고, 생활 습관을 조절하며, 남은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그런 병 말이다. 병동에 들어와보니 예상했던 분위기와 달라 놀라는 이들이 많다. 그는 얼마 전 명절맞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환자들이 서로에게 편지를 쓰고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는 호스피스 병동에서 일하며 매일 깨달음을 얻는다. 일한 기간이 늘어날수록 ‘함께’, 그리고 ‘가족’이 갖는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지 곱씹게 된다. 그에게 울림을 준 건 아들이 아버지를 간병하는 무뚝뚝한 부자였다. 입원 초기 서먹했던 사이가 서로를 용서하며 관계를 회복하는 과정, 호스피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변화하는 것을 지켜보며 느끼는 바가 많았다. 아버지가 병동 내 ‘평온실’에서 임종을 맞은 몇 달 뒤 아들은 병동으로 세 장짜리 장문의 자필 편지를 보내왔다. ‘주저앉고 싶었던 마지막 순간, 슬픔을 공감하고 이해해주며 오히려 배려하는 모습에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편지의 한 구절을 읽어주며 눈시울을 붉힌 그는 다짐했다고 한다. 누구에게도 예외 없는 죽음 앞에서 환자가 편안할 수 있도록, 호스피스·완화의료에 덧씌운 선입견을 벗겨내는 데 보탬이 되는 간호사로 성장하고 싶다고.
- 2022-03-17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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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 결혼의 무덤 앞에 선 중년의 사랑
-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퇴근해 돌아와 보니 아내가 짐을 싸서 집을 나갔다. 장식장과 콘솔 등 소품 자리가 빈 휑뎅그렁한 거실 한가운데에 찌무룩이 섰다가 주방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들이켰다. 찬 기운이 정수리를 타고 올라가는가 싶더니 가슴께로 싸하게 번졌다. 나도 모르게 숨을 크게 뱉었다가 크게 들이마셨다. 정신을 가다듬어야 한다. 하긴 출근길에 아내의 딸이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는 것을 보았으니 오늘 짐을 빼겠구나 짐작은 했다. 그리 놀랄 일이나 새삼스러운 충격은 아니란 뜻이다. 이렇게 해서 다시 혼자가 되었다. 재혼한 지 1년 반 만에. 말이 1년 반이지 한 공간에서 지낸 것은 6개월도 채 되지 않는다. 다툴 때마다 아내는 버릇처럼 집을 나갔으니까. 친정도 없는 사람이 변변히 갈 데가 있을 리 없건만 마치 가출 자체로 위로를 삼는 것처럼 수틀리면 훌쩍 집을 나갔고, 그렇게 한번 나갔다 하면 몇 달씩 들어오질 않았다. 그럴 때마다 거의 내 쪽에서 화해를 청했고, 아내가 마음을 풀고 돌아오면 이번에는 내가 불안해졌다. 다시 나가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이제 다시 돌아올 일은 없으리라. 불안할 일도 없으리라. 서로가 재혼이라 혼수를 따로 장만한 것도 없고 아내가 아끼던 자잘한 것들만 가지고 내 아파트에서 합쳤던 터라, 이번 가출은 전과 달리 물건을 모두 실어서 나간 걸 보면 이로써 우리의 인연도 끝난 것일 터. 그렇게 자꾸 나갈 거면 아주 나가버리라고 했던 건 나니까. 다시 혼자가 되어 이렇게 둘이서 서둘러 결정할 게 아니라 그 흔한 부부 상담이라도 받아봤어야 했던 거 아닐까. 갈등의 뿌리는 건드려보지도 못하고 서로 자존심만 세우다 아내도 나도 얼결에 이런 선택을 하게 된 건 아닐까. 나는 아내를 사랑했을까. 아내는 나를 사랑했을까. 함께 연주를 하기도 전에 조율 중인 악기를 내팽개쳐버린 것처럼 이런저런 생각이 마구 뒤엉키며 혼란스레 오갔다. 아내와 나는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으니 법적으로는 부부가 아니다. 그저 잠깐 동거한 관계일 뿐. 그렇게 생각하면 홀가분하다가도 성대히 치른 결혼식이 마음에 걸린다. 그랬다. 우리는 결혼식을 꽤나 성대히 치렀다. 남들 눈에 그럴 듯해 보이고 싶었던 허영심, 과시욕에서만큼은 아내와 내가 의기투합했던 것이다. 돌이켜보니 허탈감과 자괴감이 든다. 재혼의 형식만 그럴 듯했지 부부의 내실은 너무나 허약했고, 그나마 이제는 관계를 쌓아갈 토대가 사라졌다. 그렇다고 내가 재산을 지키자고 아내와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아내도 그건 인정할 것이다. 내 재산 못지않게 아내도 자기 몫이 알찬 사람이니까. 그러니 혼인신고를 미룬 이유는 서로 속 깊이 사랑하지 않아서라 할밖에. 말이 부부지 결속의 끈은 느슨했던 것이다. 동병상련의 사랑 나는 20년 전에 상처(喪妻)를 했다. 대학 선배의 소개로 만난 두 살 아래 전처와의 10년 결혼 생활은 만족스럽고 행복했다. 서른 살에 결혼하여 이듬해와 또 그 이듬해에 연년생 남매를 낳았다. 아이들은 건강하고 영리했다. 안정된 나의 직장과 가정을 소중히 보살피는 아내, 무엇을 더 바란다면 죄를 짓는 느낌이 들 만큼 평범하지만 안온한 생활이었다. 아내가 간암 판정을 받을 때까지는. 그랬던 우리가 무엇을 더 바라는 죄라도 지었던 것일까. 서른여덟 살 젊디젊은 아내는 그렇게 우리 세 식구를 남겨두고 1년 투병 끝에 훌쩍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사랑하고 아끼던 아이들을 남겨두고. 아홉 살, 여덟 살 남매는 엄마를 잃었고 나는 나이 마흔에 아내를 잃고 홀아비가 되었다. 이후 직장과 가정을 병행하여 돌봐야 했던 지난 20년, 고달프고 서글프고 버거워 견딜 수 없을 때면 아내의 묘를 찾아가 “나는 이렇게 힘든데 당신은 어쩌면 이렇게 태연히 누워 있을 수 있냐”고 원망과 푸념을 쏟아내곤 했다. 아내가 떠난 후 남은 우리 세 식구는 함께 외식을 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아내가 없는, 엄마의 자리가 빈 가족 외식은 그 존재의 부재를 더욱 각인시키며 누가 뭐라는 것도 아니건만 식당에 앉아 있는 내내 위축감을 느끼게 했다. 부부와 자녀들이 함께 식사하는 모습을 볼 때는 더욱 그랬다. 저 평범한 일상이 우리에게는 더 이상 주어질 수 없다는 쓰라림과 함께. 아내를 따라 나도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내 책임을 다한 후 이담에 저세상에서 아내를 만나 단단히 생색을 내자며 오기 아닌 오기로 버텨온 것이 어느덧 20년. 30세가 가까운 남매는 아직 미혼이긴 해도 둘 다 직장이 있으니 내 역할은 끝났다고 생각할 즈음, 지금 막 헤어진 두 번째 아내를 만났다. 그간 주변에서 재혼 권유나 소개가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아이들을 생각해서 마다해왔던 것을 이제는 마음을 좀 열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을 때였다. 막 헤어진 지금의 아내도 나와 비슷한 시기인 38세 때, 세 살 많은 남편을 교통사고로 잃고 딸 하나를 데리고 혼자 살아왔다. 설 명절을 지방 시댁에서 보내고 귀경하던 눈길 고속도로에서 타고 오던 차가 미끄러지면서 중앙 분리대를 박으며 순식간에 일어난 사고였다. 피로를 덜고자 부부가 교대 운전을 하고 있었고, 사고 당시 운전대는 아내가 잡고 있었다. 옆자리의 남편은 중상을 입은 후 병원에서 사망했고, 뒷자리에 앉아 있던 다섯 살 딸과 자신은 큰 부상을 입지 않았다. 허울뿐인 결혼 딸을 키우며 20년 가까이 혼자 살아온 아내. 야무지게 자신을 지키며 강한 생활력과 다져진 실력, 철저한 자기 관리로 직장의 잔뼈가 제법 굵어져 나를 만날 무렵에는 꽤 높은 위치에 올라 있었다. 나는 지금 대표 자리에 있는 회사에서 당시는 중역이었기에, 어느 경제인 조찬 모임에서 회사를 대표하여 참석한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열 개 남짓 마련된 원탁 가운데 마침 한 테이블에 앉게 되어 서로 명함을 주고받으며 인사를 나눈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우리는 사별의 아픔을 겪은 공통점으로 인해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같은 모임에서 다시 한번 우연히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되자 우연을 인연으로, 인연을 필연으로 연결시키고자 하는 갈망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음을 열었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봤다고 할까. 느낌이란 게 있다고 할까. 우리는 연민과 연정으로 그렇게 한 마음, 한 몸이 되었다. 우리의 성대한 결혼식은 조찬 모임 참석자들을 의식한 점도 작용했다. 경제인 단체 회원 중에 커플이 탄생한 것도 이례적이거니와 그들의 사회적 신분을 고려할 때 아예 가족끼리 조촐히 치르면 모를까, 식을 올린다면 하객들의 신분에 걸맞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은 모두 부질없는 짓일 뿐 아니라 크게 벌인 만큼 창피한 일이 되어버렸지만. 실상 말이 가족끼리지 그녀에게는 부모님도, 가까운 친척도 안 계셨고, 나도 다른 형제 없이 홀로 자라 연로하신 어머니 한 분뿐이니 조촐하다 못해 초라한 모양새가 될 게 뻔했다. 결국 사회에서 연결된 지인들을 모시다 보니 나와 그녀의 직장 관계자까지 초대하여 그만 식이 커져버린 것이다. 기가 막히게도 아내는 대학 3학년 때 양친을 한날한시에 교통사고로 잃었다. 그때도 어느 해 설에 부모님과 함께 지방의 조부모님을 뵙고 올라오던 때였다고 한다. 뒷좌석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졸고 있었던 그녀는 사고 후 혼자 살아남았다. 운명이란 게 있다면 그녀에게는 같은 운명이 반복되었던 것이다. 학생 때는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고, 결혼 후에는 역시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었으니. 또한 부모를 잃은 자신의 운명을 딸에게 그대로 넘겨줬다. 굶주린 애정 아내와 그녀의 딸은 처음에는 나와 한집에 살았다. 아내를 위한 나의 배려였다. 또한 두 사람이 불편하지 않도록 나의 두 아이는 따로 거처를 마련해서 내보냈다. 한평생 의지하고 살아온 아내와 아직 미혼인 아내의 딸을 떼어놓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화근이었을까. 모녀는 한 몸처럼 결합되어 도무지 내가 끼어들 여지를 주지 않았다. 다툼의 원인이 아내의 딸 때문일 때도 종종 있었다. 가령 무질서한 생활 습관이나 늦은 귀가 시간에 대해 몇 번 주의를 줬더니 그게 서운했던지 내게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제 엄마랑만 속닥거린 후 독립을 해버렸다. 그때 나는 내심 잘됐다는 생각도 들었고, 제 발로 나가준 것이 고맙기도 했다. 내 아이들을 생각할 때 공평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아내와 나 본격적인 둘만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집을 나가는 아내의 버릇도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딸의 아지트가 있었으니까. 채 정이 들지 않은 나와 사는 것보다 딸과 지내는 것이 더 익숙하고 편했던 거겠지. 관계가 본격적으로 엇나가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부부로 정이 들기도 전에 균열이 깊어가고 있었다. 그러고는 오늘의 결별을 맞은 것이다. 나도 아내도 첫 결혼에서 배우자를 일찍 여의고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해야 했다. 외롭고 팍팍한 길을 걸으며 사랑에 굶주려 있었다. 상대의 빈 가슴을 채워주기보다 나의 허기가 먼저였다. 그만큼 새로 만난 사람에 대한 기대가 컸던 것이다. 남자로서 내가 좀 더 아량이 넓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보지만 그 또한 생각일 뿐, 그게 말처럼 쉽다면 지금의 이 상황을 마주하지는 않았을 터. 누구를 탓하랴. 탓할 것은 내 팔자요, 그녀의 팔자일 뿐. 여하튼 지금은 쉬고 싶을 뿐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 2022-03-16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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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꼰대는 NO” 시니어 인턴십 도전하기
- 은퇴 후 패션 회사 인턴으로 재취업한 70대 노인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인턴’. 이는 비단 해외 영화 속 이야기만은 아니다. 우리나라도 정부의 노인 일자리 사업 중에 ‘시니어 인턴십’이 있으며, 지속적으로 강화되고 있다. 시니어 인턴십 사업이 무엇인지 짚어보고, 실제로 시니어 인턴십을 거쳐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시니어의 이야기도 담아봤다. 시니어 인턴십은 보건복지부 주관 한국노인인력개발원과 기업이 함께 만드는 노인 일자리 사업의 일환이다. 만 60세 이상의 시니어에게 기업 내 인턴으로 일할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직업 능력 강화와 재취업 기회를 촉진하는 사업으로, 2011년부터 시행되고 있다. 정부는 시니어 인턴십으로 구직자를 채용하는 기업에 인건비를 지원해준다. 인턴 지원금, 채용 지원금, 장기 취업유지 지원금이 있다. 먼저 인턴 지원금은 시니어 인턴십 참여 기업에 월 급여의 50%를 3개월 동안 지원하는 것을 말한다. 참여자 1인당 최고 월 37만 원이 지원된다. 또한 참여 기업이 인턴 종료 후 계속고용 계약(6개월 이상)을 체결한 경우, 채용 지원금으로 3개월 동안 최고 월 37만 원을 추가 지원받을 수 있다. 최대 총 222만 원의 인건비를 지원받는 셈이다. 장기 취업유지 지원금은 인턴십 사업으로 18개월 이상 고용한 뒤, 6개월 이상 계속고용 계약을 체결한 경우 총 90만 원의 장기 취업유지 지원금을 지급하는 것이다. 즉 시니어 인턴십은 노인과 기업 모두 윈윈 할 수 있는 일자리 사업이다. 노인은 실제 기업에서 일하면서 다른 일자리에 비해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고, 참여 기업은 구인난 해소, 인건비 절감, 고령 친화 기업 이미지 제고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점점 확대되는 시니어 인턴십 시니어 인턴십 참여 인원은 2011년 3643명으로 시작해 꾸준히 증가 추세를 보였다. 2019년에는 7349명, 2020년에는 1만 5547명으로 배로 뛰었다. 1만 명 대를 넘어선 것은 처음이다. 참여 기업 수는 4350개로 전년도 대비 참여 기업이 1862개 증가했다. 이 중 중도 포기하지 않고 시니어 인턴십 참여를 완료한 노인은 1만 4943명이며, 계속고용 노인은 1만 4389명인 것으로 집계됐다. 2020년 시니어 인턴십 계속고용률은 무려 96.3%에 달한다. 또한 참여자 평균 연령은 65세로 나타났다. 참여 노인 1인당 월평균 소득도 매해 높아지고 있다. 2013년에는 월평균 소득이 81만 3079원이었는데, 2020년에는 최고치인 193만 7079원을 기록했다. 전년과 비교해도 약 15만 원 증가했다. 사업 유형으로 보면 단순 노무직인 일반형 참여자가 89.5%로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중 사업시설 관리 및 사업 지원 서비스업이 3800명으로 가장 많았다. 또한 출판·영상·방송통신 및 정보서비스업이 61.5세로 평균 연령이 가장 낮았고, 건설업이 68.5세로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정부는 올해 시니어 인턴십 사업을 더욱 확대한다. 앞서 말한 대로 2022년 노인 일자리 사업의 규모는 84만 5000명이다. 이 중 취업형(시니어 인턴십, 취업알선형) 노인 일자리 사업은 전년 대비 1만 4000개 증가한 12만 7000개다. 사업을 전담할 수행기관도 확충한다. 2022년 수행기관은 서울 25개를 포함해 전국 248개로 250여 개에 이른다. 2021년도 수행기관은 213개였다. 수행기관은 노인과 기업을 매칭해주는 역할을 하며, 노인에게 취업 관련 교육도 진행한다. 시니어 인턴십 어떻게 참여할까? 그렇다면 시니어 인턴십 사업 참여 방법은 무엇일까. 먼저 참여 가능한 기업은 만 60세 이상인 자를 고용할 의사가 있는 4대 보험 가입 사업장 중 근로자 보호 규정을 준수하는 기업이다. 다만 성직자, 종교종사원, 요양보호사 및 간병인 등 해당 직종 종사자 및 자영업자, 파견직 및 건설 일용 근로 형태는 사업 신청에서 제외된다. 시니어 인턴십 참여를 원하는 노인은 만 60세 이상이면 누구든지 신청 가능하다. 인턴십 신청을 한 후 한국노인인력개발원 및 수행기관의 소양 교육을 이수하면 자격을 갖게 된다. 이후 구인처에서 서류와 면접으로 심사를 진행하며, 이를 통과하면 채용된다. 근무 시간은 회사와 지원자가 논의해서 정할 수 있다. 서울시50플러스재단의 경우는 파트타임형, 풀타임형을 나눠놓았다. 파트타임형 기업에는 사회적경제, 소상공인 지원, 지역 기반형이 속하며, 노인은 주 2~3회, 월 최대 57시간 활동한다. 풀타임형에는 중소기업, 그린·디지털 회사가 속하며, 주 5일 근무하고 4대 보험에도 가입된다. 보통 시니어들은 일의 능률과 관련해 파트타임형을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시니어 인턴십을 하기 위해서는 통상적으로 세 가지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첫 번째, 서류 전형과 면접을 통과해야 한다. 회사에 대한 사전 조사를 철저히 해야 하고, 자신의 역량이 회사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 어필하는 것이 중요하다. 두 번째, 3개월의 인턴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해야 한다. 소위 말하는 ‘라떼는 말이야’ 식의 꼰대 정신을 내려놓아야 한다. 나이와 경력이 많다고 으스대거나 일을 대충 하면 안 되고, 조직원들과 융합하고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세 번째, 궁극적으로 채용 제의까지 이끌어내야 한다. 참여자의 최종 목표는 결국 취업이라는 생각을 갖고 회사가 자신을 뽑아야 하는 이유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바늘구멍보다 어렵다는 은퇴 후 재취업을 시니어 인턴십 제도로 성공해보자. “경험은 절대 늙지 않는다. 경험은 결코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다”라는 영화 ‘인턴’의 명대사를 기억하면서. ■시니어 인턴십, 현장의 목소리를 듣다 ◇시니어 인턴십, 저 같은 젊은 대표에게 필요해 - 홍원희 플레이시드스쿨 대표 사회적 기업 플레이시드스쿨(Playseed School)의 자문위원 이강호(65) 씨는 시니어 인턴십 과정을 거쳐 정직원이 됐다. 대표 홍원희(33) 씨와는 아빠와 딸뻘이다. 두 사람은 시니어 인턴십 사업에 대한 만족도가 높았다. 플레이시드스쿨은 놀이와 활동으로 성숙한 민주 시민을 양성하는 사회적 기업이다. 대표적으로 보드게임을 통해 민주주의, 통일, 사회적 경제, 세계 시민 교육 등을 하고 있다. 2017년 사단법인 회사로 시작해 2018년 11월에 예비 사회적 기업이 됐다. 20대를 NGO 활동을 하며 보낸 홍 대표는 경영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이에 자문 역할을 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느껴 2019년 시니어 인턴십 참여를 신청했다. 홍원희 대표는 이강호 씨의 이력을 보고 그가 단번에 마음에 들었다. 이 씨는 유엔(UN) 산하 아동구호기관 유니세프 한국위원회의 1994년 공채 1기다. 그는 25년간 기금 모금 마케팅 업무를 맡았다. 홍 대표는 이강호 씨가 비영리 법인을 잘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간절한 마음으로 이강호 씨 ‘모셔오기’에 성공했다. 이강호 씨는 2019년 6월 플레이시드스쿨의 인턴이 됐고, 2020년 1월 정직원이 됐다. 홍원희 대표의 혜안은 적중했다. 이 씨가 오고 사업 자문을 해주면서 매출이 두 배 가까이 늘었다. 더불어 지난해 플레이시드스쿨은 사회적 기업으로 전환됐다. 홍원희 대표는 이강호 씨 덕분에 힘든 순간을 버틸 수 있었다면서 고마움을 표했다. “코로나19로 힘든 시기에 사회적 기업이 되니 두려움이 컸어요. 이제 숫자로 평가되고, 직원들 월급도 제대로 줘야 하잖아요. 그때 선생님께서 ‘버티는 게 이기는 거다’라고 말씀해주셨어요. 그래서 정신을 차리고 지난 3년을 평가하는 시간을 가졌더니 정확한 수치들이 보이더라고요. 내실을 다지고 역량을 강화한 거죠.” 홍 대표는 시니어 인턴십 사업이 더욱 널리 알려져서 다른 기업들도 자신처럼 도움을 받길 바랐다. 다만, 회사의 이미지 제고를 위해 사업을 악용하는 사례는 근절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니어 인턴십 지원자분들을 보면 고스펙이거나 경력 많은 분들이 많아요. 정말 선생님 같은 분을 필요로 하는 기업이 많을 거예요. 그런데 그분들한테 제대로 된 업무를 주지 못한다는 사례 발표들이 있어요. 그것은 회사도 불편하고 선생님들한테도 잘못된 예우라고 생각해요. 대표의 확고한 의지를 본다든지, 선정 기업에 대한 기준이 높아졌으면 좋겠어요.” ◇시니어 인턴의 노하우는 큰 힘, 꼰대 짓은 금지! - 이강호 플레이시드스쿨 자문위원 이강호 씨는 서울시50플러스재단의 ‘서울 50+ 인턴십’ 사업의 일환인 ‘사회적경제(SE) 펠로우십’을 통해 플레이시드스쿨과 인연을 맺었다. ‘사회적경제(SE) 펠로우십’은 50+ 세대와 사회적경제 기업(사회적기업, 협동조합, 소셜 벤처)을 연결해준다. 2015년부터 사회적 기업에 관심을 가진 이 씨는 인턴십을 하고자 10개 회사와 면접을 봤다. 그중에 4개 회사가 마음에 들었지만, ‘미션’과 ‘비전’을 혼동하는 모습에 고심했다. 그때 마침 플레이시드스쿨의 러브콜을 받고 최종 선택했다. 이강호 씨는 후회가 없다며 “대표와 같이 서로 존중하고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점이 제일 좋다”고 말했다. 2019년 이강호 씨가 인턴을 시작할 당시 플레이시드스쿨은 정리되지 않은 채 주먹구구식으로 사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씨는 회사를 이해하는 데만 3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는 “보드게임이 뭔지도 몰랐고, 기업이라고는 하는데 수익이 안 나니 정체성이 애매모호했다”고 털어놓았다. 플레이시드스쿨의 경영, 마케팅, 홍보의 자문위원이 된 이강호 씨가 처음으로 한 일은 ‘미션과 비전 바로 세우기’였다. 또한 그는 “밑지는 장사를 할 필요는 없다”고 조언하며 사업군을 정리했고, 회사 소개 책자도 새로 만들었다. “유니세프에서 했던 일이기 때문에 어렵지 않았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플레이시드스쿨은 ‘사회’가 붙어 있지만 기업이니까 이익을 창출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저의 목표죠. 인턴십이 끝나고 정직원 의사를 물을 때 ‘모르겠다’고 했는데 대표님이 와달라고 하더라고요. 대신 제가 조건을 걸었어요. 앞으로 3년 뒤에도 남지 않는 장사를 하면 나는 나가겠다, 그리고 회사 문 닫고 다른 일을 하라고 했죠. 다행히도 회사 사정이 점점 좋아지고 있고, 내년 정도면 자리를 잡을 것 같아요.” 이 씨는 시니어 인턴십의 유일한 단점으로 “놀 시간이 부족하다”고 외쳤다. 근무는 3일이지만 집에서도 계속 사업이나 아이디어 생각을 해야 하고, 개인적으로 그는 사진 동호회 활동도 하고 운동도 하기 때문에 늘 바쁘다. 마지막으로 이강호 씨는 시니어들에게 “집에만 있지 말고 밖으로 나와서 무엇이든지 해보라”고 조언했다. 그는 “하고 싶었는데 못 했던 것을 시도하라는 거다. 그게 뭔지 모르겠다면 책도 읽고, 언어도 배우고, 운동도 하다 보면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중 하나로 재취업이 목표라면 시니어 인턴십은 좋은 방법이라고 전했다. “시니어 인턴십은 모든 분들에게 좋을 것 같아요. 직장생활 오래한 분들, 사업한 분들 모두요. 노하우, 경험을 공유한다는 것은 사회적 기업, 스타트업에 큰 힘이 되거든요. ‘명절 때 먼저 전화해라’, ‘지나가는 길에 거래처가 있다면 들러라’ 같은 것도 사소한 일이지만 하나의 노하우죠. 이때까지 건강하게 살아 있다면 젊은 사람보다 나은 점이 뭐라도 있지 않겠어요? 꼰대 짓만 안 하면 돼요! ‘라떼는 말이야’만 안 하면 우리는 배울 게 많은 사람들이죠.”
- 2022-02-16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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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 명절 후유증 날려주는 3인 3색 스트레칭
- 올해 가장 긴 명절이었던 설날이 끝났다. 5일간의 긴 연휴였던 만큼 일상으로의 복귀 이후 명절 후유증을 잘 극복하는 것이 중요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이번 설은 팬데믹 속 네 번째 맞이한 명절에 적응한 영향인지 연휴를 보내는 방식이 다양했다. 지난해 가족을 만나지 못한 아쉬움으로 귀성길에 오른 사람도 있었고, 긴 연휴를 기회로 호캉스(호텔+바캉스)를 떠나는 이들도 있었다. 또 명절 시즌에 단기 수입을 얻기 위해 아르바이트에 나서는 알바족도 등장했다. 일산자생한방병원 김영익 병원장의 도움말로 귀성족, 호캉스족, 알바족 각 유형별로 주의해야 할 근골격계 증상과 일상 회복에 도움을 주는 스트레칭을 알아보자. 고향에 간 ‘귀성족’, 장시간 운전에 엉덩이·허리 뻐근하다면 ‘폼롤러 엉덩이 스트레칭’ 최근 한 구인구직 플랫폼의 조사 결과 직장인 절반인 50.6%가 귀성 의사를 밝혔다. 지난해 설문조사 결과보다 14%p 증가한 수치다. 하지만 귀성길과 귀경길에 같은 자세로 장시간 앉아있게 되면 엉덩이와 허리가 뭉치기 쉽다. 이때 뭉친 근육을 풀어주지 않고 일상으로 돌아가면 명절 후유증으로 몸이 쉽게 피곤해지거나 요통이 생길 수 있다. 명절이 끝난 시점에도 지속적으로 통증이 남아 있다면 ‘폼롤러 엉덩이 스트레칭’이 도움이 된다. 왼손으로 땅을 짚고 옆으로 누워 왼쪽 엉덩이 밑에 폼롤러를 놓은 다음 오른쪽 다리를 구부려 세운다. 왼쪽 발목을 오른 무릎에 올리고 엉덩이를 지그시 눌러 폼롤러를 밀고 당긴다. 1~2분 근육을 풀어준 뒤 다시 오른 다리를 구부려 세워 몸을 밀고 당겨주면 된다. 이어 오른발을 왼 다리 앞으로 넘기고 동작을 반복한다. 반대쪽도 동일하게 실시하여 1세트를 총 3회 반복하면 된다. 혼자서 풀기 힘든 엉덩이 근육을 폼롤러로 자극해주면 엉덩이 근막이 이완되는 효과가 있다. 엉덩이를 포함한 하체의 대부분을 눌러주기 때문에 순환을 촉진하고 손상된 근육의 회복을 돕는다. 둔부 주위로 많은 신경이 지나가기 때문에 처음에는 고통이 느껴질 수 있지만 꾸준히 반복하면 통증이 완화된다. 일산자생한방병원 김영익 병원장은 “둔부는 상체와 하체 중간에서 허리를 받쳐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엉덩이 근육이 뭉치면 허리 통증이 유발될 수 있다”며 “스트레칭 후에도 일주일 이상 통증이 지속된다면 정확한 진단과 함께 추나요법이나 침치료와 같은 한방치료를 받는 것이 척추 질환 예방에 좋다”고 말했다. 연휴 만끽한 ‘호캉스족’, 잘못된 자세로 목 통증 생겼다면 ‘갸우뚱 스트레칭’ 연휴의 절반 이상을 호텔에서 푹 쉬려는 사람도 늘어났다. 관련 업계에 따르면 이번 설 연휴에 2박 이상 연박으로 예약한 건수는 지난해 대비 11배 이상 많았다고 한다. 오랜만에 긴 연휴를 맞이해 제대로 쉬어보고자 하는 심리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내에서 무심코 취하는 편한 자세는 목뼈(경추) 뿐 아니라 주변 근육에 무리가 되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하다. 특히 평소에 사용하지 않던 높은 베개 등 침구류를 이용할 경우 목과 어깨가 긴장하게 돼 뻐근한 통증이 나타날 수 있다. 경직된 목 근육은 머리로 향하는 혈관을 압박해 만성피로로 이어지기도 쉽다. 호캉스를 즐기고 난 후 목에서부터 어깨 부근까지 묵직하게 당기는 느낌이 든다면 간단하게 따라 할 수 있는 ‘갸우뚱 스트레칭’으로 근육을 이완시킬 필요가 있다. 갸우뚱 스트레칭은 말 그대로 고개를 기울여주는 동작이다. 바르게 앉거나 선 상태에서 고개를 양쪽으로 기울여 좌우 번갈아 4초간 유지한다. 이후 고개를 대각선 방향으로 젖히고 기울인 자세를 좌우 4초간 유지한다. 좌우 대각선 동작을 한 세트로 총 5회 반복하면 된다. 목을 당길 때 어깨가 함께 올라가지 않도록 주의한다. 설 연휴 ‘알바족’, 뭉친 어깨 근육 간단하게 풀 수 있는 ‘몸통 돌리기 스트레칭’ 평소보다 시급이 높은 명절 시즌에 단기 수입을 얻으려 하는 ‘알바족’도 많았다. 지난달 한 구인구직 앱에서 성인남녀 1218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 10명 중 4명이 설 연휴에 아르바이트를 할 것이라고 답했다. 연휴에 아르바이트를 하는 이유로는 ‘설 연휴 특별한 계획이 없어서(30.4%)’가 가장 높게 나타났으며 ‘설 연휴에 높게 책정되는 시급(18.4%)’도 중요한 조건으로 나타났다. 귀성이나 호캉스 등의 계획이 없는 사람들이 집에 있기보다는 아르바이트를 택한 것이다. 하지만 아르바이트 구직자들의 선호도가 높은 서빙이나 매장관리 업무는 반복적으로 어깨를 사용하게 되는 만큼 어깨 관절에 큰 부담을 누적시킨다. 만약 연휴 동안 어깨를 많이 사용했다면 일상회복을 위해 어깨 스트레칭을 하는 것을 권한다. 추천하는 스트레칭은 ‘몸통 돌리기 스트레칭’이다. 양손을 깍지 껴 팔을 앞으로 뻗은 후 몸통을 좌우로 3회 천천히 회전시킨다. 시선은 정면에 고전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후 손을 위로 뻗어 동일한 방법으로 스트레칭한다. 이를 1세트로 총 3회 반복하면 어깨 근육과 인대의 피로를 풀 수 있다.
- 2022-02-03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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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홀몸노인 설 챙겨야"… 지자체 명절나기 나서
- 설 연휴를 앞두고 지자체에서 홀몸노인을 비롯, 기초수급자와 장애인 등 소외된 이웃에게 명절 선물을 전달하고 있다. 서울 서초구는 서초어르신행복e음센터·방배노인종합복지관에서 독거어르신 1080분께 손 편지와 명절 복(福)꾸러미를 직접 전달한다. 복꾸러미에는 떡국세트와 한과, 털모자, 마스크 등이 담겨 있어 취약 어르신들이 따뜻한 설 명절을 보낼 수 있도록 돕는다. 또한 결식 우려 어르신을 위해 무료급식 및 밑반찬을 제공한다. 방배·양재·서초중앙 노인종합복지관 3개소는 무료급식 어르신 330명에게 명절 특식을 전달할 예정이다. 양재노인종합복지관에서는 전통시장 소상공인들에게 저소득 어르신 500명에게 쌀, 떡국 떡, 유과, 과일 등을 담은 선물을 설 연휴 전까지 전달할 계획이다. 한편 홀몸노인이 명절에도 외롭지 않도록 ‘AI(인공지능) 스마트 맞춤형 돌봄서비스’ 등 맞춤형 돌봄 서비스가 제공된다. 지난해부터 서초구에서 도입한 돌봄 로봇 ‘서리풀복동이’에 만족하는 어르신들이 많아, 올해는 100대를 추가로 지원할 예정이다. 천정욱 서초구청장 권한대행은 “코로나 장기화로 힘든 독거 어르신들을 위한 세심한 지원으로 따뜻한 설 명절을 보내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경기도 의왕시내손2동지역사회보장협의체는 지난 20일 김 세트와 떡국 떡이 담긴 설명절꾸러미를 홀몸노인, 차상위계층, 한부모가정 등 저소득층 50가구에 지원했다. 지영숙 내손2동지역사회보장협의체 위원장은 “쓸쓸하게 명절을 보내는 이웃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다”며 “작은 정성이지만 따뜻한 온기가 전해져 혼자가 아니라 지역사회가 늘 함께 하고 있다고 생각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부2동 지역사회보장협의체도 26일 관내 취약계층 30가구에 ‘설맞이 선물꾸러미 나눔’에 나섰다. 지역 희망이웃 후원금으로 구입한 곰탕, 떡국 떡과 유과를 포장해 각 가정에 안부인사와 함께 전했다. 윤장식 선부2동 지역사회보장협의체 민간위원장은 “설맞이 선물꾸러미 나눔을 통해 홀몸노인, 장애인가정 등 어려운 이웃들도 행복한 명절을 보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충주시 용산동행정복지센터에서는 25일과 26일 양일간 경로당 13곳을 방문해 새해 인사를 전했다. 코로나19로 인해 일상생활에 제약을 받는 지역 노인들에게 세배를 드리고, 건강과 안부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다. 조수정 용산동장은 “최근 코로나19로 인한 경로당 운영 축소로 혼자 계신 시간이 많아진 어르신들을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라고 말했다. 충북 충주시노인복지관 역시 설 연휴를 앞둔 26일 홀몸노인 600명과 선별진료소 의료진 100명에게 한과와 식혜를 전달했다. 홀몸노인의 따뜻한 명절나기를 기원하고,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최전선에서 힘쓰고 있는 선별진료소 의료진을 응원하기 위함이다. 김웅 충주시노인복지관 관장은 “설을 맞아 가족과 만나지 못하는 어르신의 외로움을 조금이나마 달래주는 의미있는 시간이 됐다”고 말했다.
- 2022-01-27 13: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