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에 들어가는 날은 아침부터 하늘이 꾸물거렸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두 좋았다.” 드라마 ‘도깨비’의 대사가 아니어도 이런 날씨도 나름 괜찮다. 날이 안 좋아서 하늘 사진이 예쁘게 찍히지 않을 테지만, 그럼에도 이 모든 날들이 고마운 건 무조건 긍정 마인드이어서가 아니다. 아마 그동안 살아온 세월이 만들어준 것이 아닐지. 나이를 먹는 게 나쁜 일만은 아니다. 날씨는 짓궂더라도 섬이 주는 위로가 있음을 안다.
눈앞으로 다가오는 흐린 날의 강화 본섬은 안개 섬처럼 신비롭다. 하늘은 흐렸고 강화대교 아래 서해가 여유롭게 흐르고 있었다. 곧이어 나타난 긴 교량. 강화도와 석모도를 연결하는 석모대교(席毛大橋)다. 예전에는 배를 타고 건너야 하는 섬이었는데, 2017년 석모대교 개통 덕분에 언제든지 쉽게 가볼 수 있게 되었다.
섬을 잇다, 석모대교
석모도 여행의 시작은 이제 석모대교다. 참고로 석모대교를 건너 왼편으로 돌면 바로 언덕 위로 미니공원과 함께 전망대가 있어서 강화도와 석모도를 잇는 다리와 서해의 출렁이는 바닷물을 상쾌하게 즐길 수 있다. 그 섬을 쉽게 건넜으니 마음껏 달리며 돌아볼 차례다. 강화도의 서편 바다 위에 길게 이어진 작은 섬 석모도. 긴 다리 하나가 주는 편리함으로 실컷 석모도를 놀아보면 된다. 자동차를 달려 알찬 하루 코스 강화섬 속의 섬 석모도다.
나룻부리항과 어류정항
먼저 가까운 나룻부리항을 들러본다. 강화나들길 11코스에 속한다. 한때 여객선이 드나들던 항구였지만 이젠 나룻부리항 시장으로 그 기능을 대신한다. 오가는 이 드문 어시장 뒤 오도카니 섬을 띄운 바다 위로 갈매기의 날갯짓이 한가롭다.
나룻부리항과 어류정항은 가까워서 간 김에 두 곳 다 돌아보는 것도 좋다. 바다낚시를 좋아하는 이들이 찾는 곳으로 수산물직판장과 편의시설을 잘 갖추고 있지만 아직은 한산하다. 텅 빈 항구에서 맞닥뜨린 세찬 바닷바람에 머릿속이 개운해진다. 사람 없는 한적한 바닷가 바로 옆을 달리다 보면 섬의 길목마다 손맛 좋은 집과 전망 좋은 카페가 기다린다. 자동차로 섬을 달리다 풍경 좋은 구간에선 우선멈춤이다. 낯선 포구와 산길 어디든 걷기에도 좋다. 석모도 바람길이란 이름에 걸맞다. 다만 어쩌다 ‘유실지뢰 주의’나 ‘해안 출입금지’를 접하면 북쪽과 가까운 최전방임을 실감한다.
민머루해변과 언덕 너머 호젓한 장구너머항
어류정항에서 자동차로 5분도 채 안 되는 거리에 석모도의 유일한 해수욕장이며 생태관광지로 지정된 민머루해변이 있다. 민머루해변의 고운 모래밭을 걸을 때는 푹푹 빠지는 발에 힘이 들어간다. 모래밭 군데군데 텐트 속에선 캠핑족의 정담이 두런두런 들린다. 조용히 캠핑 의자에 앉아 먼 바다를 바라보며 여유롭게 힐링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는 것 또한 힐링이다. 물이 빠지면 드러난 갯벌 위로 생물들이 꼬물거리는 게 생생하다. 이럴 때 맨발로 갯벌의 감촉을 맛보아야 한다. 수십만 평의 드넓은 갯벌 위로 갈매기가 사람과 공존하는 바다. 특히 천연기념물 제205호로 지정된 저어새의 번식지이기도 하다. 건강한 생태의 보고다.
민머루에서 서쪽으로 언덕을 올라 넘어가면 자그마한 항구가 나온다. 산마루가 장구처럼 생겼다 해서 붙은 이름 장구너머항이다. 오르는 길에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는 민머루의 질박한 풍경이 운치 있다. 뒤엉킨 그물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고 갯벌 위엔 바닷새와 고깃배가 쉬고 있다. 방파제 부근의 횟집과 수산물 판매하는 가게 역시 한가롭다. 산과 바다와 갯마을이 그림처럼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민머루에 가면 빠뜨리지 말고 들러야 할 곳이다.
서해 풍광을 품은 사찰, 보문사
석모도 하면 천년 고찰 보문사를 누구나 떠올린다. 신라 선덕여왕 4년에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보문사는 양양 낙산사 홍련암, 남해 보리암과 함께 이 땅의 3대 해상 관음기도도량이다. 문제는 오르막 입구부터 가파르다는 것. 대웅전 진입까지 10분 이내의 거리지만 숨이 턱까지 찬다. 정 힘들다면 30분 간격으로 운행하는 승합차를 이용해도 된다.
사찰 마당에 들어서자 열반에 든 부처의 모습을 한 거대한 와불과 사리탑을 중심으로 오백나한이 맞는다. 옆으로 석굴암처럼 천연 동굴에 지은 석실은 보문사의 명물이다. 극락보전과 대웅전, 용왕전, 삼성각, 선방, 범종각 등의 문화재가 고색창연하다. 일반적으로 사찰은 그 역사와 유적으로 가치를 내세운다지만, 오랜 고목 아래서 땀을 식히는 이들에겐 그 앞마당에서 수백 년 자리를 지킨 향나무의 그늘이 고마울 뿐이다. 그리고 시야를 가리지 않고 바다가 내다보이는 서해 풍광이 가슴을 탁 트이게 한다.
보문사를 품은 낙가산은 그리 높지 않은데 가파른 오르막은 또 있다. 경사가 가파른 계단 400여 개를 올라야 닿는 보문사 꼭대기의 마애관세음보살이다. 이곳에선 이른바 눈썹바위 아래 새겨진 마애석불을 마주하고 앉아 경건하게 두 손 모아 기도하는 사람들을 늘 볼 수 있다. 기도발이 아주 좋은 곳이라 알려져 찾는 이들이 줄을 잇는다.
서해의 노천탕, 석모도 미네랄 온천욕
보문사에서 자동차로 3분 거리에 뜨거운 해양 심층 온천수가 솟아난다. 입구에 들어서니 가족과 함께 온 어린아이가 앞서 달려가며 말한다. “난 여기 오는 게 제일 좋아.” 아이들에겐 따끈한 물놀이일 수도 있겠다. 온 가족이 온천탕에 발 담그고 앉아 몸과 마음을 씻고 마음의 안정을 취하는 시간이다.
강화 석모도 미네랄 온천탕은 바다와 인접한 노천탕으로 매일 천연 원수만 사용한다고 한다. 60℃가 넘는 특급 온천수다. 노천탕뿐 아니라 황토방, 족욕탕, 실내탕이 따로 있다. 관절염, 근육통, 아토피피부염 등에 효험이 있으며,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즐기며 피로를 날려버릴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무엇보다 눈앞에 바다가 펼쳐져 노을이 질 무렵에는 노천탕에 몸을 담근 채 환상적인 풍광에 푹 빠질 수 있다.
숲은 이제 녹음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온몸으로 숲 기운을 받으며 산책하고 사랑스러운 장미터널을 걸을 수 있을 것이다. 수목원은 석모리 일대 계곡을 따라 천혜의 자연환경을 품었다. 특히 숲 체험 프로그램으로 목공예 체험학습을 진행하고 갖가지 테마식물원, 생태체험관, 전시온실 등 테마별 탐방을 하며 자연을 관찰하고 배우는 시간을 갖는다. 산과 바다가 공존하고 숲과 자연을 교감하는 기회다.
수목원 입장료는 무료다. 예까지 왔으니 자연휴양림 숲속의 집에서 하루나 이틀쯤 머물며 푹 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터. 이제 초록초록한 색감 속으로 들어가는 초여름이다.
자동차로 석모도 당일 여행
서울 기준 자동차로 1시간 30분~2시간
주소 인천시 강화군 삼산면 석모리 산 154-1
여행 코스 석모대교→(2분)나룻부리항→(3분)어류정항→(10분)민머루해수욕장→(10분)보문사→(2분)
미네랄 온천→(10분)석모도수목원
올해 10월부터 일본의 75세 이상 후기고령자의 의료비 자기부담 비율이 10%에서 20%로 늘어난다. 고령자는 점차 많아지는데 출산율은 낮아져 의료보험을 부담하고 있는 현세대의 부담이 커지고 있기 때문인데, 수입은 줄어들고 의료비는 늘어나는 고령자 입장에서는 이번 보험료 인상이 무척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일본에서는 ‘후기고령자 의료보험’ 제도의 재원 고갈과 의료비 부담 문제가 점점 커지고 있다. 일본은 1973년 70세 이상의 노인에게 무료로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노인 의료비 무료화’ 정책을 마련했다가, 1983년부터는 ‘노인보건법’을 시행하면서 통원 월 400엔, 입원 1일 300엔을 환자가 부담하도록 했다. 그러다 2001년부터는 10%를 환자 부담으로 바꾸었고, 2014년부터는 70~74세 고령자를 대상으로 20%까지 단계적으로 자기부담률을 인상했다. 올해부터는 75세 이상 후기고령자의 의료비 자기부담률이 기존 10%에서 20%로 올라간다. 노인 의료 복지의 자기부담 비중이 점점 높아지는 모양새다.
의료비 부담 높이는 인구 고령화
1인이 평생 지출하는 의료비의 절반은 70세가 넘어 발생한다. 따라서 노인 인구의 증가는 노인 의료비 증가로 이어진다. 일본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후기고령자의 의료비 비중은 2015년 이미 35.8% 수준이었다. 1인당 의료비는 약 93만 엔으로, 65세 미만의 1인당 의료비 18.5만 엔과 비교하면 약 5배가 많다. 결국 75세 이상 인구가 많아질수록 의료비도 더 많이 발생한다는 뜻인데, 2022년부터는 일본의 단카이 세대(1947~1949년생)가 후기고령자로 편입되기 시작한다. 단카이 세대는 약 680만 명으로 추산되며, 일본 전체 인구수의 약 5.4%를 차지한다. 이에 따른 고령자 의료비 증가와 현역 세대의 부담 증가로 세대 간 갈등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노인 빈곤 가속화 우려 높아
일본에서는 74세까지는 국민건강보험제도에 귀속되어 있다가 75세가 되면 후기고령자 의료보험으로 자동 전환된다. 후기고령자 의료보험은 고령자의 보험료 부담도 높이면서 재원 마련 문제까지 있다는 지적이 꾸준히 있었다. 재원의 50%가 개인들이 내는 보험료로 충당되는 데다 건강보험제도의 경우 피부양자가 인정되는 반면 후기고령자 의료보험은 개개인으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전업주부인 아내는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남편의 건강보험 피부양자로 인정되어 한 사람만 의료보험료를 내면 됐다. 그러다 남편이 75세가 되어 후기고령자 의료보험으로 자동 전환되면 아내는 더 이상 피부양자가 아니기 때문에 건강보험제도 보험료를 납부할 의무가 생긴다. 기존에는 한 사람이 건강보험료를 냈다면 이제는 두 사람이 건강보험료를 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고령자의 의료비 자기부담금까지 높이자 노인 빈곤 문제가 심화될 수 있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고령자 자기부담률 인상, 실효성 있을까?
가장 큰 문제는 건강보험 재정 부담이 계속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후기고령자 의료보험 재원 구조는 국가와 지자체 세금 50%, 사업주와 개인 보험료를 통한 기금 40%, 본인 부담금 10%로 이뤄져 있다. ‘사회보험진료 보수지불기금’이라는 명목으로 건강보험료에서 40%의 재원을 마련하고 있는데, 재원이 부족해지자 현세대의 건강보험료가 계속해서 오르고 있다.
일본 정부는 현역 세대의 보험료 부담을 낮추기 위해 후기고령자 의료비 자기부담률을 높이기로 했지만, 정책의 실효성은 물음표다. 후기고령자 중 연 수입이 200만 엔(약 2000만 원) 이상이거나 부부 합산 연 320만 엔(약 3000만 원) 이상인 이들에게만 20% 부담률을 적용하기로 했는데, 이에 해당되는 후기고령자는 전체의 20% 수준이다.
자기부담금 인상에 따른 현역 세대 1인당 보험료 경감 효과는 연 700~800엔에 불과하다. 현역 세대의 부담을 크게 줄여주는 것도 아니면서 노인 빈곤 우려는 높아지는 상황. 이에 일각에서는 개인의 부담을 높일 것이 아니라 정부의 재원 부담을 더 높여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가 지난 27일 ‘5월 궁능 무료·특별 개방’ 안내문을 공개했다. 어린이날과 대통령 취임일, 궁중문화축전과 관련해 2022년 5월 궁능유적기관 특별 개방 및 관람객 무료입장이 시행된다.
어린이날인 5일에는 경복궁, 덕수궁, 창덕궁·창경궁, 종묘, 조선왕릉, 세종유적을 무료로 개방한다. 당초 무료입장 대상은 만 12세 이하 어린이와 동반 보호자 2인이었으나, 외국 국적의 어린이를 제외해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에 문화재청이 지적을 수용해 이번 어린이날엔 궁능을 국적과 연령에 따른 구별 없이 누구에게나 무료로 개방하는 것으로 변경했다. 단, 창덕궁 후원은 특별 개방 및 무료입장에서 제외된다.
문화재청은 형평성 논란과 관련해 "현재 내국인과 외국인에 대해 별도의 관람료 체계를 적용하고 있지만, 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해 나가는 사회적 추세를 반영하기 위해 관람료 규정체계 자체를 정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제 20대 대통령 취임일인 5월 10일에도 창덕궁 후원을 제외한 궁능이 무료로 개방된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그간 제15대 김대중 대통령 취임일부터 제18대 박근혜 대통령 취임일까지 특별 무료입장을 시행한 바 있다. 또한 제19대 문재인 대통령 취임일(2017년 5월 10일)의 경우 대통령 선거 다음날에 바로 이루어진 관계로 별도의 유·무료 입장 여부가 검토되지 않았다.
10일부터 22일까지 이어지는 궁중문화축전 기간에는 궁능 특별 개방이 시행된다. 우선 휴무일이 월요일인 창덕궁, 덕수궁, 창경궁과 화요일이 휴무일인 경복궁, 종묘는 축전 기간 중 휴무일에 특별 개방된다. 또한 특별 개방의 일환으로 종묘 자유관람제가 실시된다. 조선왕릉과 세종유적의 경우 휴무일인 월요일을 제외하고 정상 운영된다.
궁중문화축전 기간 동안 경복궁은 무료 개방된다. 단, 경복궁 야간 관람은 경복궁 홈페이지에서 관련 공지를 별도로 확인해야 한다. 경복궁 외의 궁능은 대통령 취임일을 제외한 기간 동안 정상 운영(유료 개방)된다.
TV나 유튜브를 통해 ‘1970년대 서울’과 같이 대한민국의 옛 모습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 영상을 보면 ‘그땐 그랬지’,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변화가 있었구나’라며 감회에 젖는다. 현재 수원시에서는 지역의 과거와 현재를 알 수 있는 ‘매교동’ 전시가 열리고 있다. 매교동은 수원의 중앙에 있는 마을로 대한민국의 변천사를 겪은 곳이다.
수원시에서 관광 명소로 떠오르고 있는 행궁동. 그 인근에 ‘수원 구 부국원’(富國園)이라는 곳이 있다. 붉은 벽돌의 외관은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건물임을 짐작케 한다. 100년 넘은 이 건물은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부국원이란 일제강점기에 일본 사람들이 만든 종자회사를 말한다. 수원 구 부국원은 해방 이후 관공서, 병원, 인쇄소 등으로 운영되다가, 현재는 역사를 배울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 거듭났다.
이곳에서 ‘매교동’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구 부국원 1, 2층에는 매교동의 사진과 영상 자료가 가득하다.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비교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건물, 도로, 사람들의 생활 방식과 옷차림 등의 변화를 알 수 있다.
매교동은 수원의 번화가로 꼽히는 수원역과 인계동 사이에 있다. 수원의 중앙에 위치하며 수원천을 끼고 있어 과거에는 활기 넘치던 곳이었다. 그러나 산업의 발전과 다른 곳들이 개발되면서 올드타운이 됐다.
노후 다세대·다가구주택뿐만 아니라 철물점, 공구상, 인력사무소 등이 많은 곳이었다. 현재 매교동은 재개발로 또다시 변화를 앞두고 있다. 오는 7월부터 1만여 가구가 입주해 아파트촌으로 탈바꿈할 예정이다. 이러한 때 시기적절하게 전시가 열리니 묘한 기분이 든다.
매교동만큼 수원에서 변화가 많았던 곳이 있을까. 매교동은 대한민국의 변천사를 고스란히 겪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시를 보면 수원시를 넘어 우리나라의 발전 과정을 엿볼 수 있다.
매교동은 조선시대 정조대왕이 화성 신도시를 건설한 후 형성되기 시작했다. 옛 국도 1호(현재 정조로)와 수원천이 가로질러 마을이 동쪽과 서쪽으로 분리됐지만, 오래전부터 매교동 주민들은 수원천을 매개로 하나의 생활권을 이루며 살았다.
일제강점기에는 수려선 철도가 마을을 통과하면서 주거지가 작게 형성됐고, 1960년대 들어 도시 규모가 커지면서 시가지로 변모했다. 1971년에는 매교시장이 들어섰고, 1973년에는 수려선 철도가 철거됐다. 1977년 수원천 제방이 축조되면서 매교동은 한결 안전한 마을로 거듭났다.
1980년대에는 마을 곳곳에 주택과 편의시설이 들어섰고, 산업화와 함께 ‘공구상가’가 번영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동수원 지역이 개발되면서 매교동은 다소 정체됐고 낙후된 주택단지라는 인식이 강해졌다. 그러나 앞서 얘기한 대로 2000년대 들어 도시 재생과 재개발 사업이 이뤄지면서 매교동은 활기를 되찾았다. 과거처럼 다시 중심지가 될 수도 있다.
전시는 △1973년, 옛 1번 국도를 따라서(매교동을 관통하는 옛 국도 1호의 모습이 담긴 영상) △매교동 사람들(과거 매교동 주민들의 추억이 담긴 사진) △매교동의 변천 과정(195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매교동의 역사를 기록한 사진) △매교동 풍경(매교동 옛 사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번 전시는 수원시의 16번째 마을지 ‘매교동’ 발간 기념으로 개최됐다. 수원시 도서관·박물관 등에서 볼 수 있다.
전시는 6월 30일까지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매주 월요일·법정 공휴일은 휴관하며, 화~일요일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6시(입장 마감 오후 5시 30분)까지 관람 가능하다.
제2의 인생을 살고 싶은 시니어들을 위해 유망 직업을 소개한다. 대한민국은 2000년 고령사회가 됐고, 2025년 초고령사회 진입을 앞두고 있다. 이에 노인 문제와 이로 인한 복지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으며, 노인심리상담사는 유망 직업으로 떠오르고 있다.
노인 문제는 주거, 생활환경, 고용, 의료 등 사회적 문제뿐만 아니라 심리·정서로 인한 개인적인 문제도 동반한다. 노년기에는 경제적 불안감, 고독으로 인한 우울증, 상실감 등을 조심해야 한다.
특히 1940~50년대 출생 세대는 한국전쟁을 경험했거나 발발 직후 태어나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젊은 시절에는 독재와 억압 속에서 급격한 산업 발전을 일궜다. 그리고 현재 저성장 경기침체 속에 노년기를 보내고 있다.
이와 같은 현실에 부응해 노인 문제 해결의 효과를 기대하는 동시에 ‘상담 없이는 노인 복지를 논할 수 없다’는 역사적 과제가 부여됐다. 이는 노인심리상담사가 탄생한 배경이며, 이후 자격 제도도 생겼다.
노인심리상담사는 신체적·정서적·심리적 장애를 겪거나 일상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노인들과 그 가족들을 대상으로 심리상담을 하고, 이를 바탕으로 종합적인 진단과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는 전문가의 역할을 수행한다. 궁극적으로는 노인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일을 한다.
자격증 취득과 밝은 전망
노인심리상담사 자격증은 민간자격증이다. 1·2급으로 나뉘어 있으며, 나이와 경력에 따른 제한은 없다. 다만 심리학 전공, 심리상담 관련 자격증 소지자, 사회복지사, 간호사, 요양보호사 등은 업무가 겹치는 부분이 있어 노인심리상담사 자격증 취득이 유리하고 활용도가 높다.
특히 노인심리상담사와 요양보호사는 연관이 깊다. 노인심리상담사 자격증 취득을 위해 공부하다 보면 치매 예방교육 및 심리상담 기법을 배울 수 있다. 이에 요양보호사, 특히 재가요양, 가족요양 쪽으로 구직을 원한다면 노인심리상담사 자격증 취득은 많은 도움이 된다.
노인심리상담사 자격증 취득 시험은 1차 필기시험, 2차 직무교육으로 진행된다. 1차 필기시험은 상담심리학, 임상심리학, 이상심리학, 노인심리학, 총 네 과목으로 구성된다. 과목별 최소 40점, 전체 평균 60점을 넘으면 합격이다.
시험은 객관식으로 난이도가 높지 않다. 교육을 성실하게 받고 공부하면 누구나 어렵지 않게 합격할 수 있다. 특히 나이가 많을수록 노인 세대에 가깝기 때문에 내용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 현재 노인심리상담사 자격증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도 존재한다. 잘 알려져 있지 않고 민간자격증이기 때문에 실제로 취업에 도움이 되겠냐는 의견이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앞으로 더욱 수요가 많아질 것이며 전망이 밝다는 입장이다.
노인심리상담사는 다양한 교육, 복지, 의료, 종교기관의 노인상담 분야에서 일할 수 있다. 노인복지기관, 요양원, 실버타운, 노인대학, 지역마을회관, 지역사회문화센터, 개인 심리상담소 등으로 취업이 가능하다. 특히 각 지역의 노인심리상담센터가 점점 증가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노인들의 소외감과 우울증이 심화된 것도 영향을 끼쳤다.
다만 노인심리상담사 자격증을 취득했다고 해서 바로 상담사로 활동하기는 어렵다. 노년층의 인생 경험은 상담사보다 훨씬 풍부하므로 충분한 임상 훈련이 필요하다. 노인 관련 센터나 복지관에서 실무를 경험하거나, 사회복지사로 활동한 경력이 있어야 상담사로 인정받을 가능성이 높다.
노인심리상담사는 심신이 힘든 노인을 상대로 하기 때문에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잘 어울린다. 기본적으로 노인에 대해 이해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더불어 상담할 때 지식만 내세울 것이 아니라 노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진심 어린 조언을 해줘야 한다.
노인은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를 포함해 배우자, 자녀, 손주 등 가족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다. 뿐만 아니라 죽음에 대해 생각해볼 나이거나 질병을 앓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존재론적인 고민도 함께 나눠야 한다. 즉 노인심리상담사는 삶과 죽음에 대한 고민을 함께 나누기 때문에 어떤 상담사보다도 숙련도가 요구된다.
그렇기 때문에 노인심리상담사는 명예와 부를 축적하기보다 사명감이 필요한 직업이다. 현직에 있는 상담사들은 끊임없는 공부와 봉사정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노인심리상담사 교육 어떻게?
노인심리상담사의 중요성이 부각됨에 따라 관련 교육도 증가하고 있다. 온라인에서 무료로 수업을 들을 수 있는 창구가 많다. 한국교육검정원, 한국사이버진흥원, 사회교육중앙회 등이 있다.
서울사이버대학교에서도 노인심리상담사 기초과정을 신설했다. 노인상담의 이해, 전생애발달과 노인심리, 노인상담 이론과 기법, 노인 문제와 심리평가, 노인상담의 실제 등 5과목으로 구성됐다. 노인심리상담에 필요한 실제적인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과정이다. K-MOOC 플랫폼을 통해 강의를 무료 수강할 수 있다.
노인 인구가 전체의 33%로 이미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경남 고성에서는 노인 복지에 관심이 많고, 그중 하나로 노인심리상담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고성군 종합사회복지관은 거제대학교와 지역맞춤형 인재 양성 및 지역 상생을 위한 업무 협약을 체결해 전문 인력을 양성하고 있다. 이 가운데 노인심리상담사 자격증반이 가장 인기가 좋다.
1월에 2기 수료식이 있었다. 교육생들은 ▶노인 문제와 상담 ▶노인의 특성 ▶놀이 및 미술 상담 ▶노인 우울 및 중독 ▶음악치료 ▶노인 레크리에이션 ▶보드게임 ▶음식을 활용한 감정표현 등 다양한 노인상담 이론과 실습 위주의 강의를 받았다. 총 16명이 수강 신청해 14명이 수료 및 자격을 취득했다.
◇ “경청·공감·인정하는 법 배웠어요”
정석철 노인심리상담사 인터뷰
정석철(67) 씨는 고성군 종합사회복지관의 교육을 통해 노인심리상담사 1급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는 평생을 보건복지 관련 공무원으로 일한 사람이다. 고성군 보건소 소장을 마지막으로 퇴직했다.
정석철 씨는 “그동안 공무원으로 편안하게 잘 살아왔으니 국가와 국민들을 위해 돌려드려야겠다는 생각을 늘 했다. 특히 어르신들을 돕고 싶었고 작은 일부터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공직 생활을 하면서도 사회복지사들과 어울리면서 봉사활동을 하곤 했죠. 사회복지사 자격증, 요양보호사 자격증은 원래 갖고 있었어요. 그리고 퇴직한 뒤 남는 게 시간밖에 없잖아요? 본격적으로 사회복지사 영역에 뛰어든 거죠. 사회복지시설, 요양원, 재가복지센터 쪽으로 많이 다녔어요. 나이에 걸맞게 노인 쪽으로 가게 되더라고요.”
그러다가 정석철 씨는 재가노인복지센터를 직접 열었고, 센터장을 맡고 있다. 방문 요양, 방문 목욕을 위주로 하고 있고, 요양보호사 양성 교육도 실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일을 하면서 노인심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그는 노인심리상담 교육을 듣게 됐다.
“어르신들을 만나보면 혼자 있어서 우울해하시는 분들도 많고 치매 환자이신 분들도 많아요. 그분들을 어떻게 하면 더 따뜻하게 잘 대해드릴 수 있을까 생각했죠. 그래서 교육을 듣게 된 거예요. 제가 수료생 중에서 나이가 제일 많았어요. 저는 배움이 필요하면 무엇이 됐든 달려가요. 아주 욕심이 많습니다.”
3개월 동안 교육을 받은 정석철 씨는 ‘자신의 심리 상태를 파악해서 발표하기’ 과제가 가장 어려웠고 기억에 남는다고 밝혔다. 남을 상담하기에 앞서 자신의 심리를 볼 줄 알고 드러낼 수도 있어야 한다는 점을 배운 것 같다.
“자신의 심리를 얘기할 때 긍정적인 부분도 있지만, 치부나 약점도 있잖아요. 그것을 모두에게 공유한다는 것이 쉽지 않죠. 자신의 얘기를 하면서 눈물을 흘린 여성분도 있었어요. 용기가 대단하다고 느꼈고, 모두 박수를 쳐줬어요. 저도 많은 용기를 얻었어요.”
그는 자격증 취득이 업무에 도움이 되냐는 말에 “아직 응용은 안 해봤지만 자신감이 생긴 것 같다”고 답했다. 교육에 음악 수업도 있었는데, 그는 이제 어르신들을 방문하면 노래도 부르고 더욱 살갑게 대한다는 것. 반응 역시 매우 좋다.
더불어 정석철 씨는 자신과 같은 중장년이 어르신들의 심리에 보다 공감하기 쉬울 것 같다면서 자격증 취득을 추천했다. 그는 어르신들을 위해 현재도 끊임없이 공부하고 있다. 기타, 수영, 골프를 배우는 것은 물론 제과제빵, 이미용까지 섭렵했다. 특히 노인심리상담사 자격증 취득으로 성숙해졌다는 점을 강조했다.
“많이 변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아요. 어르신들뿐만 아니라 우리 회사 직원들에게도 달라졌어요. 무슨 얘기를 하든 경청하고 공감해주고 인정해주고 있어요.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더라도 남을 먼저 인정해주고 격려해주려고 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전진해나가고, 지역사회가 건강해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지금은 방송 종료되었지만 '간이역'이란 프로그램이 있었다. 자그마한 소도심을 지나는 기차역의 아련함이 누구에게나 마음속의 추억처럼 자리하고 있기 마련이다. 그런 간이역이 사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 프로그램의 기획의도였다고 한다. 이제 간이역은 시간 속의 이야기가 켜켜이 스민 폐역이 되어 아날로그 감성을 소환한다. 오랜 시간 기차가 달리지 않아 녹슨 철길은 때론 사색의 장소가 되기도 하고 잔잔한 풍경 속에서 인생 샷을 담아내는 곳이 되었다.
남원의 구 서도역은 전라선 기차역이었다. 1934년에 역무원 배치를 시작해서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로 역사(驛舍)를 신축 이전했던 서도역이 차츰 간이역으로 격하되었다가 폐역이 된 것은 10여 년 전 일이다. 그 세월의 이야기를 간직한 자리에 봄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 그리고 겨울이 흐르고 있는 중이다.
1930년대의 풍경을 그대로 간직한 채 구 서도역 목조건물의 간이역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래서인지 근래 들어 영화 동주, 미스터 선샤인, 해어화 등의 드라마와 영화의 촬영지로, 뮤직비디오 촬영과 유명 모델들의 화보 촬영으로 부쩍 재조명받고 있는 곳이다. 사실 서도역은 그 이전에 최명희의 소설 '혼불'이 시작되는 장면으로 더 알려져 있었다. 일제 강점기부터 지금까지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둔 채 그 자리를 지킨 덕에 문학적 공간이 되기도 하고 시대적 묘사에 무리 없이 잘 어울린다.
남원의 숨은 보석 10선 서도역이라는 하트 표지판을 지나 역 내부로 들어가 본다. 역 대합실에는 그 시절 삶의 애환을 함께 했던 기차역의 이야기를 필름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미스터 선샤인의 유진 초이 복장과 촬영장의 이야기를 펼쳐놓았다. 들여다보면서 드라마와 영화의 추억이 스멀스멀할 것이다. 대합실 밖으로 나가면 역시 드라마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고애신과 행랑아범, 함안댁이 걸어 나오고 철로 목조 위에 앉은 구동매가 아기씨와 나누던 대화, 이렇게 다시 뵙습니다. 아기씨. 이 새벽 기차역에서... 절에 다녀오는 길이네. 그들의 당당하거나 애잔했던 눈빛. 이곳이었구나... 드라마의 힘은 아주 세다.
그 옆 서도역 역사관의 옛 책을 한번 뒤적이고 풍금도 눌러보고 나오니 젊은 커플들의 사진 촬영이 한창이다. 그들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방향을 돌렸다. 서도역이 소설 혼불의 첫 배경이다 보니 작품 속의 내용을 표현한 정크 아트 길이 이어져 있었다. 덕분에 잠깐 작품 속의 몇 줄씩을 읽어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기차가 다니지 않아서 마음 놓고 이리저리 다닐 수 있어서 좋다. 오래전 기차가 멈춘 녹슨 기찻길은 직선과 곡선과 원형의 철길이 독특한 곳이다. 메타세쿼이아와 등나무의 짧은 터널 옆에는 흰색으로 잘 단장된 역무원 관사가 있다. 그 옆의 역장 관사는 영화 동주의 하숙집으로 촬영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1930년대의 고풍스러운 모습을 그대로 살려 다다미가 깔린 일본식 가옥으로 영화 촬영은 물론이고 체험학습도 하는 곳이다.
요즘 들어 옛 모습에 손을 대어 때 빼고 광낸 모습으로 변신시키는 생경함에 종종 놀랄 때가 있다. 적어도 구 서도역의 겉모습은 약 90년 전 모습을 살려둔 듯해서 정겹다. 서도역은 전라선이 신설되어 이전할 때 철거계획이었다고 한다. 이때 남원시에서 서도역을 매입하고 보수하여 지금의 고즈넉한 아날로그 감성의 문화공원이 된 것이다. 옛 추억을 되새기게 하는 철도 관련 근대문화유산으로서의 몫 역시 크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기차역, 고요한 이른 아침 운해가 몽글몽글하면 간이역과 더 잘 어울린다. 철길을 둘러싸고 있는 나이 많은 고목은 전라선 완공 당시 심었던 벚나무들이다. 눈부신 봄날의 서도역이 미리 그려진다. 바삐 걷다가 잠깐 다리를 쉬는 곳처럼 구 서도역은 남도 여행길에 빠뜨리면 서운할 그런 곳이다.
☞Info 구 서도역
♤주소: 전북 남원시 사매면 서도길 32. 구 서도역영상촬영장.
♤문의처: ☎063-620-6165
♤교통: 남원역에서 523 버스가 하루 4회 운행. 대중교통 접근 불편. 택시나 자동차 이용이 편리하다.
♤휴무일 없이 연중무휴 방문 가능. 주변 1.4km 거리에 혼불문학관이 있다.
-최명희 작가의 숨결을 담다. 혼불 문학관
구 서도역에서 남쪽으로 자동차를 달리면 5분 거리에 혼불 문학관이 있다. '그다지 쾌청한 날은 아니었다'라고 시작되는 대하소설 ‘혼불’의 첫머리와는 달리 하늘은 푸르고 문학관은 평온하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1940년대 몰락해 가는 남원의 양반가 종부 3대(代)와 그들의 땅을 부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그린 최명희의 소설 '혼불'. 그 소설의 배경이 되는 전라북도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 노봉마을에 문학관이 자리했다.
돌계단을 오르면 널찍한 잔디마당이 방문객들에게 쉼을 안긴다. 문학관 내부에는 작가의 생전의 모습이 군데군데서 맞는다. 작가의 집필실로 재현된 방에는 유품으로 작품 일지와 만년필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펼쳐진 육필원고를 들여다보노라니 작가의 숨결이 느껴지면서 숙연해진다. 실내를 빙 돌다 보면 소설 속의 장면들을 디테일한 사진이나 모형으로 전시된 작품 속으로 한 걸음 들여놓게 한다. 그리고 작가와 친분이 있는 주변 사람들과 주고받았던 편지도 어느덧 누렇게 색이 바래가는 채로 보여주고 있다.
방송작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글에는 작가의 면밀한 내면이 스친다.
"너는 노트북 컴퓨터를 배워 이제 글씨는 안 쓰겠는데...... 나는 경향신문에 만년필을 쓰는 기쁨, 이라는 글을 썼단다. 나는 참 더딘 사람이다. 지난번에 말한 책도 이제야 부치고 내 살아온 생에 대한 자각도 이제 생기니 장자의 말이 절감이 된다. 行年 五十而知 四十九非. 나이 오십에 이르러서야 마흔아홉 가지가 그릇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혹은 안다, 는 이 한 절, 요즘은 이 말을 정말 깊이 생각해, 나의 非들. 얼음장처럼 가슴이 서늘해지지. 하지만 오십에 새 눈(芽)이 트이지 않았다면 어찌 四十九非를 말할 수 있으며 새 눈(眼)이 뜨이지 않았다면 제 그릇됨을 볼 수 있으랴... 그 芽와 眼이 새 희망을 준다."
약 6,000평의 문학관 건너편의 꽃심관이라는 한옥 쉼터에는 사랑실과 누마루가 있다. 건물 모퉁이의 정자에 올라 혼불문학관을 바라보며 소설 속 삶의 한 자락을 느껴볼 만하다. 살아생전 우리말을 사랑하던 작가 최명희 작가의 혼불. 작품의 어휘 하나하나 직접 취재하고 토속어를 찾아서 우리 문화의 정신을 문학 속에서 형상화했다고 한다. 혼불 속의 청호저수지 주변으로 울타리처럼 둘러있는 솟대들은 길게 목을 빼고 노봉마을을 건너다보는 듯하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겼던 기억 속의 간이역을 찾아 사람들이 온다. 작가의 숨결이 담겨있는 문학관에 들어 이 땅에 서린 삶의 한 자락을 가슴에 품는다. 전라도 남원고을에 가면 이렇게 쉬엄쉬엄 산책하듯 둘러볼 곳들이 기다리고 있다.
☞Info 혼불문학관
♤주소: 전라북도 남원시 사매면 노봉안길 52.(입장료 무료)
♤문의처 :☎ 063-620-5744~46
♤운영시간 평일 : 09:00~18:00(매년 1월1일, 매주 월요일 휴관) 하절기(7월~8월) 09:00~18:00 동절기(11월 ~ 2월) 09:00~17:00
“오늘은 사람 없는 편이야. 하루에 800명 올 때도 있거든. 파주랑 천안에서도 이거 먹으러 오기도 하고 그래.”
천주교 한마음한몸운동본부가 운영하는 무료급식소 ‘명동밥집’에 입장하려면 대기표를 받아야 한다. 이날 오후 한 시경에 방문한 한 어르신이 받은 대기표는 274번. 명동성당 내 옛 계성여고 운동장에 크게 설치된 천막 밖에서 입장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만 어림짐작으로 서른 명은 넘어보였다.
코로나19 변종 바이러스 오미크론의 확산으로 백신패스 제도가 시행되면서 저소득층 어르신들이 불편을 겪고 있다. 추위를 피하고 외로움을 달래던 복지시설이 휴관하거나 부대사업으로 진행하던 경로식당 운영 중단, 입장 인원에 제한을 두면서부터다. 이에 추운 날씨에도 오갈 데 없이 거리를 배회하거나, 제대로 끼니를 챙기지 못하고 집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는 어르신들이 늘고 있다.
천주교 한마음한몸운동본부가 운영하는 명동밥집은 올해 1월부터 꾸준히 운영을 지속해오고 있다. 코로나 재확산 상황이 심상치 않음에도 운영을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야외에서 무료배식을 진행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옛 계성여고 운동장 자리에서 방문하는 이들에게 도시락을 나눠줬지만, 5월부터는 현장 배식으로 전환했다.
실제로 무료급식소를 이용하는 어르신들은 도시락보다 현장 배식을 선호했다. 올해 내내 명동밥집을 이용한 어르신은 “도시락은 가져가 먹을 곳이 마땅치 않다”고 말했다. 배식 방식을 변경하자 초반에는 200명 안쪽이던 방문자 수가 이제는 700명을 웃돈다. 수요일, 금요일, 일요일마다 운영되는 명동밥집의 주말인 일요일 방문자 수는 850여 명으로 가장 많다.
무료급식소 이용자는 여름보다 겨울에 더 많아진다. 농촌 일용직으로 일하던 이들의 일거리가 끊기면서 하루 한 끼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무료급식소를 찾는 발걸음이 늘어나는 탓이다. 전파력이 강한 오미크론 변이 때문에 기존에 운영되던 무료급식소와 복지관 경로식당도 운영을 중단하고 있다. 일례로 관악노인종합복지관은 경로식당 운영을 중단한 상태다. 현 상황으로는 무료급식소 이용을 희망하는 취약계층을 모두 포용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빈곤사회연대 관계자는 뉴스핌과의 인터뷰에서 “코로나19 상황에서는 무료급식이 불안정하게 제공되다 보니 문제가 된다”라고 말했다. 그는 “백신을 맞고서 쉴 공간이 없기 때문에 아예 맞지 않는 사례가 여전히 많다는 점 등 재난 상황이 노숙인들에게 더 가혹하게 다가오는 사례들이 많다”며 “정책이나 제도들이 주거박탈 상황을 해소하기 위해 좀 더 적극적으로 마련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노숙인들은 안전뿐 아니라 하루 한 끼 식사마저 위협받고 있다. 실제로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20년 노숙인시설 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내 노숙인시설의 수면실 절반 이상(52.3%)이 독립적 공간 확보가 어려운 침상형으로 구성돼 있다. 수면실 내에서도 2m 이상 거리두기가 가능한 시설은 34.9%에 불과했고, 커튼이나 가림막 등을 확보한 시설은 20.8%에 그쳤다.
현재 실내에서 운영되는 무료급식소는 코로나19 음성 확인서나 접종증명(백신패스)을 제출해야 입장 및 이용이 가능하다. 정보 접근이 상대적으로 어려운 어르신이나 노숙인의 실내 급식소 이용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취약계층의 겨울철 따뜻한 밥 한 끼가 위협받고 있다.
일반적으로 MZ의 밀레니얼 세대는 1981~1995년생, Z세대는 1996년 이후 출생자들을 일컫는다. MZ세대에 대한 분석과 견해는 넘쳐나는데 모두 남의 이야기였다. MZ세대를 이해하고 싶다면서, 정작 MZ세대의 이야기는 없었다. 1992년생 고광열은 그래서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기성 언론의 기사, 연구기관 보고서, 국내외 논문, MZ세대를 다룬 책들까지. 자료를 끌어모은 뒤 주변 밀레니얼 친구, Z세대 동생을 붙잡고 물었다. “너네 정말 이렇게 생각해?”
회식은 싫다. 점심 회식도 예외가 아니다. 일의 마무리를 위해 퇴근 시간 후 30분~1시간 정도의 초과근무는 ‘무료봉사’로 여겨 질색한다. 먹고살기 위해 사회생활을 한다만 회사에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 회사에서의 나와 친구들 사이의 나는 엄연히 다름을 선포하고, 1년에 한 번뿐인 친구의 생일에 교통정리 경광봉이나 멜로디언 줄 같은 쓸데없는 것들을 선물한다. 주식, 가상화폐 코인 수익률을 신경 쓴다지만 저축만 고집하는 부류도 많다. 공유주택(셰어하우스)과 차량 구독 서비스는 소유하지 못해 고르는 차선책이다.
책 ‘MZ세대 트렌드 코드’의 서술 방식은 가차 없다. 그들이 회식을 좋아하게 만들 방법은 없다고 단정 짓고, 회사의 ‘주인의식을 가지라’는 말을 ‘너를 착취하겠다’와 동일하게 여기는 심리를 여과 없이 드러낸다. 그럼에도 MZ세대 고광열은 MZ세대를 이해해야 한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MZ세대를 이해하는 것은 결론적으로 기성세대 스스로를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사회에 진출한 1990년대생이 경제력을 갖고, 근무 중인 회사 신입사원으로 들어와 일하는 요즘이다. 미우나 고우나 고객이요, 부하직원이며, 이 세상 함께 살아가야 하는 요즘 것들 아닌가.
MZ, 왜 그렇게 생각해?
그는 MZ세대를 이해하기 위한 키워드로 ‘워라밸(Work-life Balance)’, ‘현재 중심’, ‘거리두기’ 세 가지를 꼽았다. 이 중 일과 삶의 균형을 뜻하는 워라밸은 1990년대생 사회 초년병이 늘어나면서 주목받았다. MZ세대에게는 회사보다 개인의 삶이 더 중요하다. 정시 퇴근이 당연하고, 회식은 개인 시간을 잡아먹는 숙적이며, 회사 사람들과는 필요에 의해 함께하는 사이 그 이상도 이하도 되기 싫어한다. 그의 회사생활 또한 이해 안 되는 것들투성이였다. 그 역시 잦은 회의와 회식, 기저에 깔린 과도한 집단주의가 불편했다.
다들 군말 없이 하던 일들이 왜 MZ세대에게만 불편 요소로 전락한 걸까. 그는 이러한 가치관의 변화가 온라인의 발달로 인한 수평적 사고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날 때부터 디지털 기기 활용이 자연스러운 MZ세대가 인터넷으로 정보를 쉽게 접하면서 기성세대와의 정보 격차가 줄어들고, 나이와 경력이 주는 정보 권력 역시 희미해진 것이다. 농촌사회에서 연로자(年老者)를 원로(元老)로 우대한 이유 역시 축적된 정보와 경력이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인터넷 활용이 능숙한 ‘디지털 원주민’ 젊은 세대가 정보력 우위를 점하는 추세다.
수평적 사고를 가진 MZ세대는 회사와 단순히 돈과 능력을 주고받는 상호 계약 관계를 맺었다고 여긴다. 제공한 만큼 돌려받는 것이 공정하므로 회사로부터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거나 더 이상 얻을 것이 없다고 느끼면 퇴사한다. 그 역시 지금은 직장을 그만두고 공기업이나 공단에 강의를 나가고 있다. 40대나 50대 부장급 직원을 대상으로 강의하는데, 질의응답 시간에 날아드는 질문은 가볍고 단순하다. 젊은 사람들이 정말 코인을 많이 하느냐, ‘쓸데없는 선물 주고받기’를 실제로 하느냐 같은 것들이다.
“궁금해하시는 것들은 대체로 기사에서 일반화하는 것들이에요. 20대 전부가 코인을 한다는 둥, 공유하는 것을 좋아해서 공유주택을 선호한다는 둥 설명하는 그런 글들이요.”
그가 MZ세대를 대표해 같은 세대를 설명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계기도 여기에 있다. 신세대를 이해하려는 기성세대의 시도 자체는 좋았지만 현실성이 부족하다 여겼다. “이상하다고 느낀 것들을 모아다가 주변 친구들에게 물어봤어요. ‘진짜 이렇게 생각해?’ 그렇지 않다는 대답이 압도적이었어요. 저만 이상하다고 생각한 게 아니더라고요.”
MZ세대가 쓰는 같은 세대 이야기라 더 수월하리라 판단했다. 게다가 당시 마케팅 업무를 맡았던 덕분에 자연스럽게 책 내용에도 마케팅 분야의 접근법이 녹아들었다. 마케팅은 고객을 우선으로 생각해 그들이 원하는 걸 파악하는 게 최우선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기성세대가 MZ세대에게 가장 궁금해하는 것, 신입사원 MZ세대의 뇌 구조와 트렌드, 문화를 ‘현실적’으로 설명하는 책이 탄생했다.
지금, 나, 돌고 돌아 워라밸
현재에 집중하는 성향 역시 기성세대가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부분 중 하나다. 먹고살기 위해서 사회생활은 하지만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회사가 ‘이 정도는 해주겠지’ 하는 기대도 없다. 미래가 불확실한 국민연금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취하고, 기성세대가 보기에 영 쓸데없는 것에 흥청망청 돈을 쓰기도 한다.
“1990년대생이 현재만을 생각한다고 비난해서는 안 돼요. 청년들의 성향은 보통 기성세대가 만든 세상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나거든요.” 성장사회는 겪어본 적도 없고, 사회 전반적으로 기회가 적다 못해 없는 수준. 기회의 부재는 포기로 이어진다. 소수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경쟁 구도에서 1990년대생은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는 설명이다.
이러한 성향이 개인주의로 발현하는 흐름 역시 자연스럽다. 그러나 나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와는 엄연히 다르다고 그는 못 박았다. 대학내일20대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1990년대생 75.2%가 타인이 싫어하는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신경 쓴다고 답했다. 63.1%가 상대방에게 상처 주지 않고 불호나 거절 표현을 잘하는 방법을 배우고 싶어 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만큼 존중받기를 원할 뿐이다.
돌고 돌아 워라밸이다. 영화 취향이 다른 애인에게도 함께 보길 강요하지 않고 ‘혼영’(혼자 영화 보기)을 택한다. 기성세대에게 익숙한 집단주의와 단체생활을 상대적으로 꺼린다. ‘모두 다 함께’를 강조하는 집단에서는 소외되거나 희생되는 사람이 반드시 생기며 불가피한 비효율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고 있어서다. 집단주의적 성격이 강한 회사보다 자신의 삶을 챙기는 자세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세 가지 키워드가 유기적으로 맞물려 있어요. 모두에게 맞아떨어지는 내용은 아니지만, 하나씩 떼어서 너도 이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거의 다 그렇다고 대답할걸요?”
각 세대마다 살아온 시대가 다르니 마음 깊이 이해하고 공감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는 책에서도, 연단에 서서도 이 점을 꼭 짚고 넘어간다. ‘요즘 애들은 이런 고민을 하는구나’ 정도로 그냥 받아들이기를 추천하는 그의 조언은 퍽 현실적이다. 언제든 떠날 준비가 돼 있는 MZ세대에게 일을 맡길 땐 이직 시 경력 증명에 도움 될 것이라고 설명해야 효과적이고, 맥락 없고 선을 넘나드는 B급 감성 유머를 좋아한다고 해서 ‘아재 개그’를 남발하거나 선을 지키지 못할 바에는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식이다. 일반화는 금물이니 그의 조언이 불문율도 아니다. 까다롭고 별나지만 주목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참고했던 자료 중 MZ세대를 ‘바람직한 몬스터’에 빗댄 분석이 기억에 남아요. 진화심리학 용어로, 과거와 전혀 다른 특질을 갖지만 결국 사회 변화와 발전을 이끌어내는 개체를 뜻하죠. 별나지만 결국엔 바람직한 결과를 이끌어낼 세대로 바라봐주시면 좋겠어요.”
올해 만 65세인 A씨는 실외 운동 마니아다. 친구들과 산에 오르거나 근처 근린공원의 배드민턴장을 찾아 배드민턴을 즐겨 한다. 운동에 대한 열정은 코로나도 막을 수 없었지만, 차츰 나이가 들어가니 때 되면 찾아오는 추위가 두렵다. 길 곳곳이 얼어 빙판길에 넘어지면 다치기 십상인 데다 새벽 운동이라도 나설라치면 앓고 있는 고혈압과 당뇨가 악화될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외출과 운동을 완전히 그만둘 수는 없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실내운동시설이다.
마침 정부가 단계적 일상회복 이행계획을 발표했다. 보건복지부 중앙사고수습본부(중수본)에 따르면 오는 11월 1일부터 모든 다중이용시설의 시간제한이 완화된다. 헬스장 등 실내체육시설을 시간제한 없이 이용할 수 있고, 시설 내 샤워장도 이용 가능하다. 다만 시설 이용자는 접종완료를 증명하거나 미접종자의 경우 코로나19 음성확인서를 지참해야 한다. 물론 실내시설이니 여전히 마스크 착용은 필수다. 점점 추워지는 요즘, 시니어가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는 실내체육시설에는 어떤 곳이 있을까.
다양한 종목 즐기며 커뮤니티의 기능까지, 종합복지관과 국민체육센터
서울시에 거주하고 있다면 시립종합복지관을 찾아가보자. 노인종합복지관에는 각 자치구 거주민들을 위한 건강관리실과 다양한 운동시설이 구비돼있다. 탁구와 당구, 포켓볼 등 장년층에게 인기 많은 운동들 위주로 마련돼있다. 뿐만 아니라 구민들 대상으로 진행하는 문화·여가 프로그램이나 서로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 시니어 커뮤니티의 기능도 수행한다.
대부분이 구민들에게 개방된 시설이지만, 서울시민이라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시설도 있다. 서대문구의 서대문노인종합복지관의 웰빙운동실은 서울에 거주하는 만 60세 이상 어르신이 모두 이용 가능하다. 각 지역의 복지관에 직접 연락하면 더 확실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서울시를 벗어난 지역에는 국민체육센터가 있다. 지자체의 도시관리공사가 운영하는 국민체육센터는 지역 주민의 생활체육과 건강 증진을 목적으로 마련돼, 비교적 저렴한 비용에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다. 또한 체육시설의 설치‧이용에 관한 법률에 의해 매년 시행한 안전점검결과가 공개된다. 양호 등급을 받은 시설은 이용자에게 위해‧위험을 발생시킬 요소가 없는 상태로, 안전시설로 분류된다.
고양국민체육센터는 2년 연속 양호 등급을 받았다. 헬스장, 체력측정실, 배드민턴과 실내구기 종목이 가능한 다목적체육관 외에 실외 테니스장, 무료 주차장을 갖춘 시설이다. 현재는 배드민턴과 수용, 탁구, 헬스 등이 가능하다. 코로나로 인한 거리두기 및 이용 제한이 걸려있는 현재는 고양시민 회원에 한해 대관 및 유료로 일일 입장만 가능하다.
11월부터는 탈의실과 샤워실도 이용할 수 있다. 기존에는 고양시민이 아닌 타 지역에 거주하는 회원들도 이용할 수 있었으나 코로나 이후로 이용이 막혀있었는데, 월말에 발표될 정부 지침에 따라 변경된 이용 규정이 안내될 예정이다. 관계자는 “추후 단계적 일상회복이 이뤄질 경우 타지역 회원도 이용 가능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광명국민체육센터 역시 2년 연속으로 양호 등급을 받았다. 유료 주차장과 샤워실, 탈의실, 장애인 프로그램이 마련된 이곳에서는 배드민턴, 탁구, 수영, 에어로빅 등의 운동이 가능하다. 배드민턴과 탁구는 수시로 일일입장권을 구매해 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데, 만 65세 이상 어르신은 이용 요금의 50%를 할인받을 수 있다. 단 광명시민이 아닌 관외 사용자는 이용요금의 30% 할증이 붙는다.
다만 아직까지는 샤워실과 탈의실 이용 및 타지역 회원 사용 여부가 불투명하다. 관계자는 “오는 금요일 정부 지침에 따라 사용 여부가 확정될 것”이라며 “변동되는 사항은 홈페이지 공지사항에 게재하고 있으니 공지 확인을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종목·지도 검색하고 싶다면 ‘체육시설알리미’
현재 방문 가능한 게이트볼, 배드민턴, 테니스 등 특정 종목 시설을 찾고 싶다면 ‘체육시설알리미’ 홈페이지를 활용해보자. 문화체육관광부에서 관리하는 체육시설알리미에는 체육관, 종합체육시설업, 간이운동장 등 전국의 체육시설들이 모두 등록되어 있다. 홈페이지 내 ‘시설 검색’ 기능을 이용해 골프, 수영, 테니스, 댄스, 배드민턴 등 특정 종목을 검색창에 입력하면 시설 현황과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집 근처 체육시설을 찾을 때는 체육시설알리미의 ‘지도 검색’ 기능이 유용하다. 이용자의 현재 위치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체육시설 정보를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사용자의 위치 파악 기능이 켜져 있어야 한다. 이외에도 ‘상세 검색’을 통해 지역을 특정하거나 이용자의 성별, 셔틀버스, 체육지도사 등 필요시설 조건을 충족하는 시설들을 확인 가능하다. 최근 1년 내 안전점검 완료시설, 스포츠강좌 이용권 이용가능 시설, 장애인 스포츠 강좌 이용권 이용 가능 시설 등 원하는 조건에 해당하는 시설만 검색할 수 있다.
길을 잃다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길을 잃었습니다. 사업이 무너지니 가정도 파탄되고 종교생활도 다 무너졌습니다. 그동안 알던 모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불편하고 싫었습니다. 자격지심(自激之心)인지 저의 현재 상황을 일일이 설명하는 것에 비참함을 느꼈습니다. 방황하며 현실을 도피했습니다. 일부러 서울을 떠나 아무도 모르는 타지(他地)에 가서 머물렀습니다. 그러다가 중국까지 도망치듯 오게 되었습니다.
흔히 인생을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라고 합니다. 태어나서 죽기까지 매번 선택하며 사는 것이 인생이라는 뜻입니다. 그중에 중요한 3대 선택을 결혼, 직업, 종교라고 하는데, 나이 50세에 이 모든 것들의 기반이 한순간에 붕괴된 것입니다. ‘과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나는 어떤 선택이 잘못된 것일까?’ 지나온 저의 50년을 곰곰이 반추해보았습니다.
나의 1차 꿈
저는 가난한 집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저의 아버님은 1·4후퇴 때 월남해온 이산가족입니다. 남한에 친척이 없었고 저의 어머님을 중매로 만났지만 가정에 정(情)을 못 붙이시고 한평생을 유랑하듯 밖으로만 떠도셨습니다. 그래서 어머님이 홀로 저희 3남매를 키웠습니다.
어머님의 고생을 익히 보고 자란 저는, 빨리 커서 돈 벌어 어머님께 집 한 채 사드리는 것이 1차 목표였습니다. 대학 갈 때쯤 우연히 저의 주민등록초본을 떼어보았는데, 거기에는 제 나이보다도 주소지 이전 횟수가 훨씬 많았습니다. 그만큼 더 싼 곳으로 자주 이사를 다녔다는 의미입니다.
대학 시절엔 저를 특별히 아끼시는 교수님께서 제게 미국에서의 7년간 석·박사 유학 코스를 권하며, 공부하고 돌아와 우리 대학의 교수가 되라고 기회를 주셨는데, 저는 거절했습니다.
제게는 현재의 대학생도 과분하며, 저는 제가 교수되는 것보다, 빨리 돈을 벌어 어머님을 편히 모시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교수님께서는 “사람이 돈을 쫓으면 추해진다. 돈이 너를 쫓아오도록 해야지” 하시며 저를 훈계하셨지만, 그때 저는 그 말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군(軍) 입대할때도 경제생활을 고려해 장교를 선택했고, 대기업에 입사했다가 1년 반 만에 대형 증권사로 이직(移職)을 합니다. 거기서 3년 만에 드디어 꿈을 이룹니다. 드디어 어머님께 집을 사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때의 제 나이가 서른 살이었습니다. 이후 증권사에서 저는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고 승승장구합니다.
고민이 시작되다
그리고 이어 제가 서른한 살에 아들을 낳았는데, 그때에 아들 이름을 지으며 저는 처음으로 인생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저처럼 좋은 집을 사고 좋은 차를 타며, 가족끼리만 잘 먹고 잘 사는 게 목표일까? 그 이상의 인생은 없는 걸까? 나중에 크면 아들에게 인생이란 무엇이라고 말해줘야 할까?’ 그런 생각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들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금강산(金剛山)’. 저의 성이 김(金)이니, 김강산이나 금강산이나 한자(漢字)의 표기는 같았습니다. 제가 그때는 교회도 열심히 다닐 때였기에, ‘역사의 하나님’께서 앞으로 우리 민족의 미래를 열어주실 때, 제 아들 녀석을 ‘금강산 찾아가는’ 통일의 도구로 써주십사 하는 의미였습니다.
저는 비록 제 가족밖에 모르는 인생이지만, 제 아들만큼은 그 이상의 가치 있는 인생을 살게 해달라는 기도의 산물이었습니다.
한편 증권사 시절은 가히 저의 전성시대였습니다. 최연소 영업추진부장, 지점장, 연수원장, 홍보실장, 강남본부장(11개 지점 총괄), KBS 라디오 증권방송 등 종횡무진(縱橫無盡)했고, 급여도 억대 연봉이었습니다. 20여 년 전에 연봉 1억 원이면 거의 상위 1% 수준이었습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위치였는데, 언제부터인가 왠지 가슴 한구석이 허전했습니다. 경제적인 풍요가 더 이상 나를 행복하게 하지 않았고, 가시적 1차 목표가 사라진 인생은 조금씩 허무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히 IMF 때 저는 증권사 신촌지점장이었는데, 문득 제가 하는 일에 회의(懷疑)가 생겼습니다. ‘조국 대한민국은 현재 달러가 없어서 국가부도 사태인데, 지금 내가 하는 일은, 이 혼란 속에서도 돈 있는 사람들에게 돈을 좀 더 벌게 해주는 역할 정도가 아닌가? 과연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 걸까?’ 본질적인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결국 증권회사에 사표를 제출하게 되었을 때, 저를 아끼셨던 사장님께서 제게 물었습니다. “지금 잘하고 있는데, 왜 갑자기 사표를 내는가?” 그때에 저는 ‘재미가 없어서요’라고 답한 기억이 있습니다. 진심이었습니다.
그 말에 사장님께서는 씨익 웃으시며 “사표는 유보할 테니, 유급으로 한두 달 푹 쉬고 충전해서 돌아오라”고 말씀하셨고 실제로 그렇게 처리해주셨지만, 저는 결국 사표를 철회하지 않았습니다.
헤드헌터(Head Hunter)사의 유혹
증권사 퇴직 얼마 전부터 강남의 유명 헤드헌터사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대기업이나 국가기관이 소수의 전문가를 특별 채용하고자 할 때는 공개채용을 하지 않고, 헤드헌터사가 보유한 분야별 전문 인력 풀에서 추천을 받곤 합니다. 어찌된 일인지 그쪽 추천 리스트에 저도 포함되어 있었나 봅니다. 기분 나쁘지 않았고 신기했습니다.
첫 번째 제안은 외국계 증권사의 홍보팀장이었는데 제가 거절했습니다. 우선은 IMF 시기에 외국 회사라는 게 싫었고, 저의 공식적인 답변은 그쪽 역할이 지금보다 작고, 연봉도 저의 현재 수준이 더 높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러자 2개월 후 다시 제안이 왔습니다. 이번엔 역할도 크고 연봉도 맞춰주겠다고 했습니다. 그게 우리금융그룹 홍보실장이었습니다.
일단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우리금융은 IMF 때 공적자금을 받은 5개 은행을 통합하여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금융지주회사인데, 빨리 회생하여 주가를 높여야 우리나라가 IMF로부터 벗어나는 상황이었습니다. 일단 면접이라도 보아달라는 헤드헌터사의 거듭된 요청을 받아들여, 면접을 보고 결국 입사를 결정하게 됩니다.
가서 만나보니, 하나은행을 성공적으로 경영하셨던 윤병철 회장님께서 우리금융그룹 초대회장으로 오셨고, 이후에 금융감독원장이 되신 전광우 부회장님이 제 직속 상관이셨습니다. 두 분 모두 능력도 탁월하시고 인품도 훌륭하셨습니다. 특별히 저를 많이 아껴주시고 믿어주셔서 가까이서 많은 일들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근무여건은 녹녹지 않았습니다. 산하의 은행들은 지주회사를 마치 점령군처럼 인식하여 노조를 중심으로 사사건건 반발했고, 언론도 호의적이지 않아, 매일 밤 언론사를 찾아가 부정적인 기사를 막아내는 것이 저의 주된 업무가 되었습니다.
또다시 흘러가는 시간이 아깝게 느껴졌고, 저는 결국 1년 만에 최종 사직을 합니다. 저의 사표에 대한 답신으로 윤병철 회장님이 써주신 덕담 가득한 친필 서한(書翰)에, 저는 한 번 더 감동하며 고별인사를 드렸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엿보다
총 18년간의 직장생활을 정말 미련 없이 정리하고 나서는, 직장인 시절에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일들에 관심을 갖고 시간을 보냈습니다. 첫째는 각종 동문회 참가였고, 둘째는 강사 활동이었습니다.
동문 모임으로는 서울시립대학교 대학동창회와 ROTC 총동기회가 있었는데, 나름 열심히 하다 보니, ROTC 21기 총동기회장으로 전국을 누볐고, 당시 ROTC 중앙회장이셨던 5기 차인태(전 MBC 아나운서) 회장님과도 좋은 신뢰를 쌓았습니다.
이어 회사 다닐 때부터 간간이 요청이 있었던 몇몇 대기업에서의 강의 요청을 이제는 편하게 다닐 수가 있어서 좋았습니다. 삼성그룹, 효성그룹, 푸르덴셜생명 등에 리더십, 프레젠테이션, 커뮤니케이션, 네고시에이션(협상기술) 등을 주제로 4~8시간까지 강의를 진행하곤 했습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푸르덴셜생명으로부터 한 가지 큰 제안을 받게 됩니다. 난치병 어린이들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는 ‘한국 메이크어위시(Make A Wish) 재단’의 초대 사무총장을 맡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제겐 생소한 분야였지만, 자원봉사자 선발 및 교육, 소원행사 감동연출 및 홍보, 그리고 기업으로부터 후원금 조달업무 등을 총괄하는 역할이어서, 저를 적임자로 평가한 것 같았습니다. 저에 대한 기대도 감사하고 좋은 일이어서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한국 메이크어위시 재단의 사단법인 인허가 설립부터 총 2년여를 봉사했는데, 미국재단으로부터 매뉴얼 교육을 받고, 소아암병원으로부터 소원 대상자를 추천을 받아, 최선을 다해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수십 건의 소원성취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그때에 저는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습니다. ‘약값이나 치료비를 지원하지 왜 소원성취인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꿈꿀 수 없는 어린이들에게 단 한 번의 소원은 무얼까? 인간에게 진정한 소원이란?’ 이런 물음을 통해 사회봉사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고, 이런 생각은 후일 중국에 와서도 나름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새로운 큰 도전, 그리고 실패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깊이 생각한 것은, 돈 이상으로 의미 있고 하고 싶은 일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제게는 ‘한류문화 관광사업’ 이었습니다.
이 사업을 선택한 이유는 첫째, 우리 문화를 사랑하고 상품화하는 것은 제가 잘할 줄 아는 분야였고, 둘째, IMF를 겪고 보니 국가적으로 달러 버는 일이 중요했는데, 이 일이 바로 그쪽 분야의 일이었고, 셋째는 우리나라 환율이 오르니, 이른바 인바운드(inbound, 한국 입국) 관광사업에 경쟁력이 높아졌던 시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은 2002년 한일 월드컵에 맞춰서 일을 시작하려던 계획이었는데, 여기저기 세상을 엿보다가 좀 늦어져서 2004년에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한국에 오는 외국 관광객들에게 한국적 감동을 추가로 전하며, 1인당 100불씩 더 쓰게 하자는 내부 경영목표를 세우고, 독창적 한류문화 전시 및 상품개발 사업을 기획합니다.
그리고 김포공항 국제선 제2청사 지하 1층에 약 1000㎡ 규모로 ‘한류스타 홍보관’을 제법 호화롭게 개장했습니다. 전시관 조성에만 총 9억 원을 투자했습니다. 당시 일본에 한류 붐이 있었고, 국제선 제2청사는 도쿄 하네다공항을 직행하는 항공편이 매일 16편이 있었습니다. 김포공항의 한국공항공사는 물론, 문화관광부, 한국관광공사 등의 기대와 관심을 한껏 받으며 사업을 자신감 있게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초기에 공동으로 지분투자를 약속했던 일본 도쿄의 파트너 관광사업자가 약속을 어기면서 틀어지기 시작했고, 개장 6개월 후부터 갑자기 일본의 한류 붐이 식으면서 위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직접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한류 페스티벌 행사에도 참가하고, 말레이시아와 중국 등에도 직접 진출을 시도했습니다. 중국은 그때 처음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수익 다변화를 위해 국내 이벤트 기획사로도 사업영역을 넓혔습니다. 당시 오세훈 시장 시절에 서울시 장애인 예술제도 연출했고, 노인협회 주관의 세계노인문화예술제를 8개국을 초청하여 속초와 설악산에서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도 포천 양귀비 꽃 축제, 대기업 행사 등을 수주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불황과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개장 4년 만에 전시시설을 김포공항에 기부체납하면서 사업장의 문을 닫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부채청산을 위해 모든 개인 재산 정리를 했고, 가정도 파탄을 맞습니다. 돌이켜보면 뜻만 좋았지 저 자신이 자신감을 넘어 너무 교만했고, 위기대응 준비가 충분하지 못했고, 모두가 저의 부덕한 탓이었습니다.
어머님이 계시기에
졸지에 더 이상 갈 곳도 없고 반기는 곳도 없었습니다. 낮에는 대인기피증이 생겼고, 밤에는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렸습니다. 몸도 마음도 피폐해졌습니다. 개인적으로 나쁜 생각도 참 많이 했었지만, 그때마다 어머님이 슬퍼하실 얼굴이 떠올라서 참고 참았습니다.
어머님은 당시에 큰아들이 고생한다고 제가 사드린 집을 처분하여 제게 마지막 힘을 보태주셨는데, 저는 그 기대마저도 부응하지 못하고 무너진 것입니다. 저 때문에 졸지에 어머님마저도 다시 사실 곳이 마땅치 않은 상황이 되었습니다.
사실은 그 몇 해 전부터 어머님은 몸이 많이 상하셔서 거의 거동을 못하시는 상태셨습니다. 한약방에서는 맥박도 약하고 보약도 효험이 없다고 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사업이 망하고 가정파탄마저 겪게 되자, 어머님은 기적처럼 아픈 몸을 털고 다시 일어나셨습니다.
이유는, 갈 곳 없는 저의 끼니를 챙기시고 저의 옷을 세탁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정녕 어머니는 위대하다는 말을 저는 그때 다시금 느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 원인도 모른 채 제가 밤새 심한 복통으로 끙끙 나뒹군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어머님은 두 손으로 저의 아픈 배를 계속 문지르시며, 당신은 평소 불교 신자셨는데 제가 믿는 하나님을 외치시며 ‘우리 큰아들을 제발 살려달라’고 밤새 우셨습니다. 너무도 아프고 길었던 그날 밤, 어머님의 그 뜨거운 눈물과 안타까운 외침 소리를 저는 결코 잊지 못합니다.
중국으로 떠나오다
그런 어머님을 뒤로하고 저는 중국행을 선택합니다. 당시 중국과는 비록 지지부진했지만, 고구려의 420여 년간 수도였던 집안시(集安市) 정부 관료들과 제가 고구려축제를 협의하던 중이었던 바, 거기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아니 그것을 핑계로 한국을 도망치듯 떠납니다. 어쩌면 아무도 없는 무인도(無人島)를 찾는 마음이란 표현이 더 솔직할 겁니다.
집안시의 고구려 프로젝트는 3개월 뒤 결국 무산됩니다. 제가 한국인이라는 이유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인이 중국에서 고구려를 거론하는 것은 그 자체가 금기시되는 일이었습니다. 집안시 정부 책임자도 처음에는 그 정도로 민감한 문제인 줄을 미처 몰랐던 것 같았습니다.
집안시 프로젝트는 무산되었지만 저는 한국으로 돌아갈 마음이 없었습니다.
아무런 대책도 목적도 없이 그저 좀 더 중국에 머물기로 하고 지인이 있는 곳을 찾았는데, 그곳이 바로 단동시(丹東市)였습니다. 단동은 압록강을 사이로 북한 땅 신의주와 마주하고 있으며, 북한 대외무역의 약 80%가 단동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단동은 한마디로 우리말 백화점이었습니다. 당시 단동에는 중국 조선족이 1만 5000명, 북한 사람이 1만 명, 북한에서 태어난 중국 화교(華僑)가 1만 명, 요동대학교 한국·조선(북한)어과 학생들이 1000여 명, 그리고 한국인이 총 2000명 정도 살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대북사업 관계자이거나 선교사였습니다.
누구를 만날 일도 없고 아무 일과도 없는 저는, 매일 새벽 혹한의 추위에도 저를 채찍질하듯 하염없이 압록강 산책로를 걸었습니다. 새벽 교회당을 찾아 무릎 꿇고 홀로 숨죽여 울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밤, 강 건너 불 꺼진 북한의 신의주 땅을 멍하니 넋 놓고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게 저의 ‘살아남아 버티기’의 중국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사람이 살고 있었네
그렇게 한두 달을 보내다 보니, 점점 주변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도 저와 똑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여러 해 전 소설가 황석영이 북한을 다녀와서 쓴 책의 제목이었던 ‘사람이 살고 있었네’가 생각났습니다. 한인교회를 통해 한국 사람들을 접하고 단동한인회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제가 시간이 많으니 한인회 봉사를 제의받아, 당시 막 설립한 단동한국문화원의 부원장직(원장은 한인회장이 겸직)과 한인회 사무국의 사무총장으로 무료봉사를 시작했습니다.
단동한인사회는 대부분 1992년 한중수교 직후와 1997년 IMF 전후로 중국에 건너오신 소상공인 분들이 많았던 바, 아마도 저와 같은 대기업 출신의 사회 경험자가 드물어, 오자마자 졸지에 감투를 쓰게 된 것이었습니다.
봉사의 길에 들어서다
뜻밖에 할 일이 생긴 저는, 대기업에서의 기획력과 이벤트 기획사 대표로서의 경험을 되살려 많은 일들을 추진했습니다.
우선 요동대학교 한국·조선어과를 찾아서는 한국어 말하기 대회와 글쓰기 대회, 그리고 합동 문화공연을 매년 추진했습니다. 재외동포재단에는 기획서를 보내 한인회관 건축지원금을 50% 받고 나머지는 현지 모금하여 3층짜리 아담한 단동한인회관을 건립했습니다.
한편, 장기체류 단동 한인들의 대부분이 현지인과 결혼한 다문화가족들이었는데, 이들에 대한 지원체제가 없어, 문화원 내에 다문화가족 복지센터를 만들고, 당시 단동을 방문한 국회 통일외교안보위의 박선영 국회의원님과 심양총영사관의 협조를 얻어 다문화가족 합동결혼식과 단체 한국 신혼여행을 추진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족학교에 가보니, 70% 이상 대부분 학생들은 부모가 한국에 돈 벌러 가서 없는 결손 가정이거나 조부모 위탁상태였고, 소학교를 졸업해도 별도 우리말도 잘 못하고 중국어도 잘 못하는 언어수준에다, 문화예술 방면 재능교육 발견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비록 몸은 건강해도 스스로는 아무것도 꿈꾸지 못하는 조선족 아이들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먼저 문화원에서 조선족 학생들을 대상으로 우리말 교육과정을 시작했고, 해마다 한국어 말하기 대회를 개최하여 수상자들에게 한국문화체험여행을 제공했습니다. 제가 단동에 머문 4년 동안 총 140여 명의 학생들이 한국을 방문했는데, 여행비용은 경기문화재단과 한국 지인들의 개인적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조선족 학생들의 예술적 잠재력을 끌어내기 위해, 나아가 그들 스스로가 무언가를 꿈꾸게 하기 위해, 제가 예술단장이 되어 직접 학교에 가서 학생 67명을 선발하여 ‘압록강 청소년예술단’을 공식 발족하였습니다.
그 뒤 8개월간의 훈련 후에 5성급 호텔에서 1000여 명의 학교관계자과 학부모들을 모시고 ‘내 마음의 북두칠성’이라는 제목의 예술단 창단공연을 성공리에 추진하였습니다. 대부분 첫 무대를 경험하는 것이라 감동은 컸고, 학교를 향한 후원금도 쏟아졌고, 부모님들은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심양으로 진출하다
이런 저의 활동들이 인근 지역에도 소문이 났던 모양입니다. 심양총영사관에서는 당시 조백상 총영사님의 파격적 배려로 저를 총영사관의 경제문화행사 기획자 겸 사회자로 발탁해서 일을 맡겼습니다.
마침 한중수교 20주년도 겹쳐서, 각 도시마다 한중우호의 밤 행사가 있었고, 중국 동북3성(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27개 대학을 대상으로 한 ‘한국어 말하기 대회 및 K-Pop 경연대회’, 그리고 한국 국경절(개천절) 기념 총영사관 한복패션쇼 등의 행사를 연출했습니다.
그러면서 항일유적연구소장과 동북3성 한국인연합회 사무총장을 맡게 되어 동북3성 최대도시인 심양으로 진출하게 됩니다. 심양은 단동의 10배 규모로, 외곽까지 도농(都農)인구 합계가 총 2000만 명인 대도시입니다.
중국 동북3성에 와서 알게 된 사실은, 전 세계 한민족 항일유적지의 3분의 2가 중국에 있고, 중국 항일유적지의 3분의 2가 동북3성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인은 물론 조선족들도 우리의 항일역사에 대해 잘 모르고, 항일유적지 찾기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만든 것이 항일유적연구소였습니다.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의 항일역사에 대해서도 많은 공부를 했습니다.
저는 연구소장으로서 연구원을 모집하고, 안중근 13일간의 이동경로와 거사일정을 뒤따라가 보기도 했고, 윤동주의 생가, 신흥무관학교의 발자취 등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많은 항일열사들의 발자취도 찾아다니며 공부했습니다.
그런 중 우리나라 3대 독립선언 중 하나이자 최초의 독립선언인 ‘무오독립선언’의 내용과 의미를 분석, 발굴하여, 심양총영사관과 국가보훈처의 협조 아래 저희 항일유적연구소가 주관하여, 중국 현지 최초로 ‘무오독립선언 기념식’을 개최하였습니다. 저의 가장 큰 보람 중 하나인 이 행사는, 민주평통 선양협의회의 주관으로 지금도 8년째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중교류문화원을 설립하다
대도시 심양에 와서 저는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동안 제가 잡다하게 벌여놓은 문화예술 봉사활동과 조선족학교 지원, 그리고 항일역사연구와 유적지 방문활동 등을 종합하여, 체계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시스템과 공간 확보의 필요성이 커진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한중교류문화원’을 설립 추진합니다.
한중교류문화원은 심양의 코리아타운 지역인 서탑가 인근에 약 2000㎡ 규모로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아 2014년 7월 19일 설립하였습니다. 자체적으로 130여 석 규모의 강당을 갖게 된 문화원은 많은 교육활동과 문화예술 공연행사를 연출합니다. 그중에 최고의 대박상품은 ‘실버대학’입니다.
제1기 실버대학은 2014년 가을에 약 15주의 과정으로 진행되었는데, 50세 중반부터 80세 전후의 조선족 어르신들 93명이 첫 신입생으로 입학했습니다. 노래교실, 역사문화특강, 10년 젊어지기 미용특강, 핸드폰 사용법, 기본생활영어, 도전 골든벨, 그리고 졸업여행에 이어 사각모와 졸업가운 입고 졸업식하기 등의 행사에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습니다. 실버대학은 제가 문화원장으로 재임한 약 3년 반 동안 총 4회가 이어졌습니다.
한편, 실버대학은 제가 특별한 의미로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한국에 두고 온 저의 어머님을 생각하며 만든 행사입니다. 사실 한국에 있을 때, 어머님의 집에 가면 마음으로는 늘 눈물겹게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대부분의 우리 세대 장남들이 그러했듯이 다정다감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무뚝뚝한 아들이었습니다.
사실은 어머님과 재미있게 놀아드리고도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죄송스러움과 한(恨)을 실버대학을 통해서 조선족 어머님들께 재롱도 부리며 조금이나마 풀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일까요? 실버대학 어머님들의 공통된 감사인사 표현은 “우리 아들도 못 해준 호강을 실버대학에서 받았네요, 너무 행복합니다!”였습니다. 저도 응답합니다. “아닙니다. 행복하시다니, 제가 더 고맙습니다.”
그밖에도 한중교류문화원에서는 항일사진전, 어린이 K-Pop대회, 한국가수 김광석 가요제, 중국가수 등려군 가요제, 장예모 감독 영화제, 한국영화제, 조선족학교 돕기 프로젝트, 청춘콘서트, 사물놀이 강습, 한국 만화도서관 개관, 한중친선 배구대회와 탁구대회 등의 행사를 연출하였습니다.
동주학당, 동북에 물들다
그렇게 3년 반의 초대원장 자리를 마치고, 조선족에게 한중교류문화원 2대 원장을 물려주었습니다. 경영의사결정 과정에서 오해와 어려움도 있었고, 제가 너무 강하게 한국 문화를 중국 조선족들에게 전파한다는 정치적 오해가 깊어져서, 부득불한 조치였습니다.
대신에 저는 조선족 지식인들과 함께 윤동주의 이름을 딴 ‘동주학당(東柱學堂)’이란 모임을 만들고, ‘한중 문화융합연구소’라는 개인연구소를 차린 후, 다시 독립하여 조선족들을 향한 집중 봉사활동을 재개합니다.
동주학당은 민족시인 윤동주를 한민족 디아스포라(Diaspora)의 대표인물로 생각하여 ‘한민족 디아스포라 사랑방’을 추구하는 가운데, ‘찾아가는 민족문화원’을 표방했습니다.
우선 심양에서 ‘윤동주 100주년 기념 시낭송음악회’를 연출했고, ‘동주학당, 대련에 물들다’, ‘동주학당, 치치하얼에 물들다’, ‘동주학당, 영구에 물들다’ 등 동북3성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찾아가는 민족문화원’의 면모를 과시했습니다. 또한 심양 남부 소가툰 지역에 ‘윤동주 문화원’을 건립하여 실버대학도 성황리에 진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거의 최북단으로, 3만 명의 조선족이 거주하는 흑룡강성 치치하얼에도 ‘치치하얼시 조선족문화원’ 설립을 지원하고, 제가 명예원장을 맡아, ‘치치하얼시 조선족 아리랑 예술제’ 및 대동제를 개최하였습니다.
이어 거기서도 같은 마음으로 실버대학을 진행했는데, 제가 중국에서 총 6번째로 진행하게 된 ‘치치하얼 조선족 실버문화대학’은 무려 1200km 거리(심양-치치하얼)를 3개월간 매주 고속열차로 달려가서 진행한 것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소중한 것의 크기는, 자신의 재물과 시간과 열정을 투자한 것에 비례한다는 말을 저는 온전히 믿습니다. 치치하얼이 제겐 그런 곳입니다. 그곳에서 만난 조선족 동포 분들이 제겐 그랬습니다.
한중 갈등에 아파하다
그렇게 해서 어느 새 10여 년이 흘렀고, 50세에 길을 잃고 도망치듯 중국에 왔는데, 뜻밖에 어쩌다 길이 되어버린 조선족 대상 봉사활동을 하다, 어언 환갑을 지나 올해 63세에 이르렀습니다.
앞에서 제가 제법 많은 일들이 성취되었음을 자랑하듯 나열했는데, 그러나 돌이켜보면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고, 어렵고 힘든 문제들은 지금도 계속 발생되고 있습니다.
특히나 한중관계가 어려워지면 중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은 숨이 막힐 만큼 생존에 위협을 느낍니다. 평소에도 역사문제는 중국의 동북공정과 부딪치며 민감해서 매우 조심해야 했지만, 설상가상 사드 사태 등 정치적으로 꼬이면 한국인은 택시 탑승을 거절당할 만큼 배척됩니다. 지금도 한중관계가 소원해지면 겁부터 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동주학당이 야심차게 윤동주문화원을 설립했으나, 윤동주의 국적문제가 불거지면서 설립 1년 만에 활동을 접어야 했고, 개인적으로는 문화간첩으로 오해받아 특정 지역에 출입이 막힌 적도 있었습니다.
살펴보면, 중국인들은 조건 없는 봉사를 믿지 않습니다. 조선족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분명히 숨겨진 다른 목적이 있다고 의심합니다. 그리고 문화는 정치라고 생각합니다. 문화침투 등 정치적인 오해로 몰면, 어느 친구도 나서서 저를 변호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게 중국이고 그게 조선족의 입장임을, 너무 아프고 안타깝지만 이제는 이해하고 인정합니다.
한편, 한때는 한국 정부도 저를 오해해서, 제가 북한과 중국의 국경지역인 압록강 지역을 자주 오고가니까, 인천공항에 입국할 때마다 혹시 친북간첩이 아닐까 조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어쩌다 한국과 중국이 모두 저를 의심하는 웃지 못할 상황도 있었습니다.
흔히 우리나라 외교를 ‘안미경중’(安美經中)이라고 말합니다. 안보는 미국이요, 경제는 중국이라는 뜻입니다. 양쪽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다리기 외교만큼, 재중 한국교민들의 마음도 불안하고 위태롭습니다. 어찌되었거나 서로 신뢰하고 미래지향적으로 협조하는 훈훈한 한중관계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조선족 전성시대’가 온다
제가 중국에서 만나본 조선족들은 현재 중국인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고, 아울러 한민족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 그 내면을 살펴보면 어디 가도 비주류요, 이방인처럼 살고 있습니다.
1950년대 초에 중국 소수민족의 하나인 조선족으로 편입되어, 그동안 중국인으로 산 세월이 미처 70년이 되지 않습니다. 아직 중국의 주류인 한족들과의 융화가 문화 차이로 쉽지만은 않고, 마찬가지로 모국인 한국에 와서도 여전히 차별받는 비주류요, 이방인입니다.
현재 조선족 부모와 자녀들은 매우 고민합니다. 중국에서는 점차 조선족에 대한 우대조치가 사라지고, 얼마 전 조선족학교를 향해 앞으로 조선말이 아닌 중국어로 교육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그동안 조선어로 시험 보아 다소 유리했는데, 앞으로는 대학시험도 중국어로 쳐야 합니다.
그러자 조선족 유치원과 학교에는 학생들이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빨리 중국 한족학교로 옮겨가야 그나마 중국 학생들을 따라갈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조선족 학생들이 한족 학생들과 경쟁에서 이기기는 어렵습니다. 대학을 나와도 갈 곳이 거의 없습니다.
얼마 전 조선족 대학생연합회 대표들과 대화했는데, 그들의 대다수가 원하는 꿈이 커피숍이나 식당을 꾸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그 외에는 별다른 기회가 없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 조선족들에게 저는 이제 곧 ‘조선족의 전성시대’가 온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입니다. 이는 굳이 정치적 통일이 아니더라도, 상호간 화해협력을 기반으로 북한이 경제적으로 개방하는 시대를 의미합니다. 이때가 되면 조선족 역할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바, 이를 잘 준비하자는 것입니다.
저는 외칩니다. “조선족은 어디 가나 비주류요 이방인이 아니라, 향후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에 모두가 필요로 하는 핵심인재들입니다. 그래서 하늘이 미리 점지(點指)하고 100년 전부터 중국 땅에 선발대로 보낸, 최고의 일꾼들입니다.” 저는 이런 점들을 우리 조선족들에게 분명히 가르쳐주려 합니다.
저의 그런 주장의 근거는 세계적인 투자자 짐 로저스의 분석에 기초합니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하는 제 인생 이모작의 꿈도 거기서 같이 출발합니다.
20년 전부터 중국의 획기적 성장을 예견했던 짐 로저스는, 이제 일본의 시대는 끝이 났고, 앞으로는 북한의 개방을 주목하라고 말합니다. 북한의 개방은 분명 대한민국과 한민족의 미래에 가장 큰 기회가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합니다. 저도 이 주장에 100% 공감하며 진실로 기대하며 설렙니다.
‘조선족 희망전도사’의 꿈
한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중국에서도 가끔은 강의를 할 기회가 생깁니다. 대부분은 조선족단체 모임이고, 한국국제학교 학생들에게도 할 기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공통적으로 빠지지 않고 제가 설파(說破)하는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조선족이여,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의 실무주역이 되자!’ 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독일 통일 이후의 상황에 주목합니다. 1989년 서독과 동독이 통일할 때 양국의 경제력 차이는 8:1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난 32년간 동독의 발전을 위해 엄청난 투자를 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서독과 동독은 아직 2:1 이상의 격차 상태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과 북한은 3년 전 기준으로 경제력 차이가 무려 44:1입니다. 이 격차를 해소하자면 적어도 향후 50년 이상의 투자와 인적교류가 무조건 필요합니다. 그때에 필요한 실무인력으로 조선족보다 더 경쟁력 있는 집단은 없다고 저는 감히 주장하고 있습니다.
만약 북한이 문을 열면, 서울 청년들이 평양 청년들과 별 갈등 없이 일할 수 있을까요? 저는 매우 어렵다고 봅니다. 당장에 한국인과 조선족도 문화인식 차이가 작지 않은데, 남북한 간에는 불가피하게 갈등해소 시간과 비용이 엄청나게 많이 소요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한국의 자본주의도 충분히 알고, 중국의 공산주의 체제에도 잘 적응하고 있는 조선족만의 실무역할 영역이, 다가올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에 차별적 블루오션(Blue Ocean)으로 분명히 생겨날 것이라 저는 판단합니다.
앞으로 적어도 50년 동안은 조선족을 필요로 하는 시대가 활짝 열릴 것입니다. 그러하니 조선족이라면, 기본적으로 우리말은 무조건 똑똑히 배워두고, 능력이 되면 한국의 기술이나 장점을 잘 공부해두라는 조언을 조선족 청년과 부모들에게 진심을 다해 전해줍니다.
그렇게 강의하며 말하고 다니다 보니, 일부 조선족들이 제게 붙여준 별명이 ‘조선족 희망전도사’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 별명이 참으로 과분하지만 제 마음에도 흡족하게 스며듭니다. 더 노력해서 진짜 ‘조선족 희망전도사’로 살아보자는 꿈도 생겨났습니다.
대륙에서 길을 묻다
나라 잃은 슬픔 속에서 민족시인 윤동주는 그의 시 ‘길’을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게 나아갑니다.’ 아마도 나이 50에 직업과 가정과 신앙의 동반 몰락을 경험하면서 도망치듯 중국으로 넘어온 때의 제 심정과 조금은 닮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다시 기운을 차려, 작고 소박하지만 같은 민족으로서의 안타까움과 애정을 담아, 혹시라도 저의 재능을 필요로 하는 곳에, 특별히 조선족들에게 아무 조건 없이 달려갔던 중국에서의 지난 10여 년을 정리해봅니다.
중국의 대문호 노신(魯迅) 선생이 청년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하면서 말했던, ‘처음부터 길은 없었다. 사람들이 다니면서 비로소 길이 되었다’는 구절이 생각납니다. 처음엔 미처 길인 줄 몰랐는데 저도 어찌어찌 십여 년을 지나고 보니, 이젠 나름 하나의 길처럼 느껴집니다.
제 몸 하나 추스르지 못했던 한심한 존재가, 어쩌다 타국 땅에서 문화 봉사를 통한 희망전도사로 모질게 살아남아 있습니다. 30~40대의 젊고 풍요로울 때 그렇게도 갈구했으나 찾지 못했던 인생의 참 의미와 가치를, 어리석게도 60을 훌쩍 넘어 늙고 가난해지면서 비로소 조금씩 깨닫고 배워갑니다.
그동안 중국에 와서 개인적으로 절망하며 힘들었을 때, 제게 특별한 위로가 되어준 시(詩)가 있습니다. 정호승(鄭浩承) 시인의 ‘봄 길’입니다.
봄 길
-정 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 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김영식이 있다’
이제 고백합니다. 정호승 시인의 ‘봄 길’은, 제가 대륙에 와서 길을 묻다가 십 수년 만에 찾아내어 저 스스로에게 답한 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때때로 저는 시의 마지막 구절 뒤에 한 줄을 더 보태어, ‘김영식이 있다’를 다짐처럼 홀로 외치기도 했습니다.
오늘도 길을 잃고 다시 길을 찾는 분들에게 지난날 저의 절망도 작은 위로 중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깜깜한 절망 속에서 위로를 받았듯, 많은 분들이 그랬으면 좋겠고, 앞으로 살면서 서로에게 작으나마 위로가 되고, ‘봄 길’의 내용처럼 희망이 되어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만약 하늘이 허락하셔서, 제게도 ‘인생의 이모작’이 가능하다면, 우선은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에 무한 감사하며, 이제부터는 중국 땅에서 한 핏줄 동포를 향한 희망전도사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나아가 더 축복해주신다면, 30여 년 전 제가 아들 이름을 ‘금강산(金剛山)’이라 지었던 그 기도의 응답까지 받아서, 북녘의 아버지 고향 땅에 달려가 입 맞추고, 거기 그분들을 뜨겁게 보듬다, 그곳에서 그분들과 함께 묻히고 싶습니다. 이런 저의 마지막 소망이 너무 큰 욕심일까요?
•수상소감 - 대상 미니자서전 김영식
“중국 조선족 100년의 이야기를 중국판 처럼 작품으로 써 세상에 알리겠다”
•대상 수상을 축하드린다. 수상 소감은?
저는 7살 어릴 적 시골에서, 코 흘리게 손수건을 왼쪽 가슴에 달고 소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학교 가는 게 너무너무 좋아서,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1학년을 마치는 날, 담임선생님께서는 제 이름을 호명하시며 뜻밖에 1등 우등상장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제게는, 태어나 받은 ‘첫 상(賞)’이었습니다.
우등상 상품은 공책 한 권과 연필 두 자루였습니다. 그걸 들고 낮은 언덕의 신작로 길을 뛰어 어머니께로 달려갈 때, 저는 얼마나 가슴이 뛰며 기뻤는지 모릅니다. 만나는 모든 분들에게 막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그로부터 어언 56년이 지났습니다. 어쩌면 ‘마지막 상(賞)’일지도 모르는 이번 상이 저에게는 그때만큼이나 기쁩니다. 그때만큼이나 설렙니다.
저에게 이렇게 설레고 행복한 순간을 선물로 주신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의 주최한 브라보와 신한은행의 관계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인사 드립니다.
이번에 제가 쓴, 미니 자서전 는, 어쩌면 교만했던 인생의 부끄러운 고백이고, 뻔뻔한 반성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에게 특별히 큰 상을 주신 뜻은, 아마도 이 두 가지가 아닐까 저 나름 생각해 봅니다.
하나는, 다시 한 번 힘을 내서 ‘인생 이모작’에 도전하라는 따뜻한 격려로 느껴집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기대만큼 열심히 새로운 길에 도전하며 살겠습니다.
또 하나 이번 상은, 제 글쓰기에 대해 숙제를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글쓰기를 통해, 세상에 조금이나마 ‘선한 영향력을’ 보태라는 명령입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늘 정직하고 공감과 위로를 주며, 보존할 가치가 있는 글을 쓰겠습니다.
다시 한 번, 큰 상을 주신 브라보와 신한은행에 감사드리며, 끝으로, 조국 대한민국의 조속한 코로나 승리를 기도하고 응원하겠습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응모 배경이나 동기는?
저는 현재 중국 심양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생활했는데, 코로나로 인해 지난해 설 명절을 지내고 중국에 온 후, 한국에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지난해 말에는 운동 중 아킬레스건이 파열되어, 중국에서 수술을 받고 3개월을 치료한 후 현재는 재활 중입니다.
한국의 가족도 한국의 소식도 모두 그립습니다. 한국뉴스를 검색하다가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을 발견했습니다. 그중에 특별히 ‘50+’라는 표현에 많은 생각이 스쳤습니다. 제가 사업에 실패하고 도망치듯 중국에 온 것이, 바로 50세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타향살이 어언 13년이 흘러, 갑자기 코로나로 멈춘 일상 속에서 지나온 저의 인생을 되돌아 반추해보는, 귀한 시간을 가져 보게 되었습니다. 뜻밖에 좋은 기회를 주셔서 정말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번 시니어 공모전을 통해 ‘인생 이모작’도 새로이 꿈꾸게 되었습니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글을 잘 쓰기 위한 노력이라기보다는, 기왕에 제가 쓴 글이 독자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주며 더 잘 읽히면 좋겠다는 차원에서의 노력은, 제가 많이 부족해서 앞으로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평소 저의 글은 딱딱하고 설명형입니다. 재미없는 제 성격과 꼭 닮았습니다. 게다가 글쓰기로 처음 상을 탄 것이 대학 때 논문공모대회였고, 대기업에서 기획담당자였기에 더더욱 저의 글은, 사사로운 감정이 담기지 않은, 그래서 재미와 감동이 ‘1’도 없는 필법(筆法)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특별히 개인적으로 지난 10여 년간, 중국에 와서 여러 종류의 한글 잡지를 만들고 배포했는데, 주된 독자층이었던 중국조선족들은 한국인들에 비해 우리말 어휘력이 30% 수준을 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 글은 그저 수준 높고(?) 어려운 글이었습니다.
로 유명한 미국작가 훼밍웨이가 어느 회고문에서 자신의 독자로부터 받은 편지 하나를 소개했습니다. 전쟁 파병(아마도 한국전쟁) 중인 미군병사가 자신의 소설을 읽고 나서, 어려운 단어가 없어 ‘사전(辭典)찾기 ’없이도 100% 공감하며 큰 감동을 받았다는 감사편지였습니다.
저 역시, 쉽고도 감동적인 글, 그리고 오래 간직하고픈 글을 쓰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겠습니다.
•글을 쓰는데 도움을 준 멘토나 동기부여 이유가 있다면?
직접적인 멘토는 아니지만, 제가 특별히 닮고 싶은 작가가 두 분이 있습니다. 한 분은 한국의 유명한 시인 류시화이고, 또 한 분은 의 저자이자 인류학자인 미국의 루스 베네딕트 교수입니다.
시인 류시화는 개인적으로 저와 고등학교 동기동창입니다. 본명은 안재찬이며, 대광고등학교 30회로, 고교 2,3학년을 같은 반에서 공부했습니다. 경희대학교 2학년 때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당선된 그는, 인도 여행을 다녀와서 쓴 수필집 및 시집 등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인기작가가 되었습니다. 그의 글은 쉬우면서도 깨달음을 줍니다. 저도 글을 쓴다면 그런 면을 배우며 닮고 싶습니다.
다음은 미국의 여성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 교수인데, 제가 단동에서 항일유적연구소장을 할 때, 그분의 저서 을 읽었습니다. 2차 대전 전쟁을 종료하기 직전에 미국이 일본에 대해서 분석한 책으로, 70여년이 지난 지금도 전 세계인들에게 일본과 일본인 분석에 관한 제 1의 필독서입니다.
같은 패망국인 독일과는 달리, 일본은 왜 끝까지 반성하지 않는가에 나름의 분석이 명쾌합니다. 일본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상태에서 쓴 글이라는 점도 놀랍고, 냉철한 대안 제시가 전후(戰後) 미국과 일본의 관계설정에 기준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대단히 유효합니다.
일본에 대해 비판만하고 흥분만하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줄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나는 중국인에게 대한민국에 대해 얼마만큼 설명할 수 있는가, 또는 한국에 와서는 중국에 대하여, 그리고 제가 중시하는 중국 조선족에 대해서, 나는 얼마만큼 본질을 명쾌하게 공부했는가에 대해 통렬하게 반성하게 하는 책입니다. 중국판 같은 글에도 도전하고 싶은 이유입니다.
•수상을 계기로 앞으로 어떤 글을 쓰고 싶은가?
얼마 전 미국 아카데미상에서 영화 가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70년 전 조선인의 미국 이민사를 소재로 한 영화인데, 이 영화를 보면서 저는 제 주변의 중국조선족들을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대부분 100년 전후로 대륙에 이주해 왔고, 영화 미나리 이상의 휴먼 스토리가 얼마든지 있다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향후 중국 조선족 100년의 이야기를 중국판 처럼 작품으로 써서 세상에 알리는 것도, 이번 상(賞)을 통하여 저에게 주신, 귀한 소명 중 하나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감사와 고마움을 전하고 싶은 분이 있다면?
많은 사람이 있지만, 딱 한사람만을 꼽으라면 저는 주저 없이 저의 여동생 ‘김경희’를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교만한 실패와 방황, 그리고 대륙에서 길을 묻는 지난 10여 년 동안, 개인적으로는 부끄럽게도 맏아들로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저희 어머님께 제가 한 때는 자랑이던 아들이었지만, 이제는 걱정을 끼치는 아들로 살고 있는데, 그 빈자리를 저의 여동생이 말없이 채워주고 있습니다.
여동생 김경희는 제 인생에서 가장 미안하고 가장 고마운 존재입니다. 이번에 받은 저의 수상이, 제 여동생에게도 작으나마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