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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태형의 한문 산책] ‘후목분장(朽木糞牆)’
- 를 보면, 수많은 공자의 제자가 나오지만 그중 재여(宰予)만큼 특이한 인물은 없다. 를 읽어보면 공자가 제자에 대해 험담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나의 예외가 있는데, 그게 바로 ‘후목분장(朽木糞牆)’의 일화에 나오는 예다. 재여가 낮잠을 자자, “썩은 나무는 조각을 할 수 없고, 썩은 담장에는 칠을 할 수 없다”와 같은 심한 말로 나무라는 장면이 나온다. 왜 성인(聖人)인 공자가 이런 심한 말을 했을까? 자세한 내막은 알 길이 없지만, 를 살펴보면 약간의 유추를 할 수 있다. 에는 재여가 공자와 논쟁을 벌이는 장면이 세 번 등장한다. 첫 번째가 바로 ‘삼년상(三年喪)’과 관련한 논쟁이다. 어느 날 재여는 공자에게 삼년상이 너무 길므로 일년상으로 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한다. 그러자 공자가 일년상으로 끝내도 마음이 편하겠느냐고 물었고 재여는 편안하다고 답한다. 공자는 마음이 편안하다면 일년상으로 하라고 하면서, “군자는 부모님의 상중(喪中)에는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맛이 없고, 좋은 음악을 들어도 즐겁지 않다. 그래서 맛있는 음식을 먹지 않고 좋은 음악을 듣지 않는 법”이라고 했다. 재여가 나가자 공자가 말했다. “재여는 참으로 어질지 못한 사람이다. 자식은 태어나서 삼 년이 지나야 부모의 품을 벗어난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삼년상을 치르는 예(禮)를 갖춘 것이다.” 즉 이때 그는 공자에게서 ‘불인(不仁)하다’는 딱지를 받은 것이다. 또 의 ‘옹야(雍也)’ 편을 보면 재여가 다음과 같은 고약한 질문을 하는 대목이 나온다. “어진 사람[仁者]이 있는데 누군가가 알려주며 말하기를 ‘우물에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것을 따라 우물에 빠져야 할까요?” 공자가 말하기를 “어찌 그렇게 하겠는가? 군자에게 가서 보게 할 수는 있지만 그를 속여 빠지게는 할 수 없으며, 속일지언정 우롱하지는 못하니라”라고 했다. 가만히 읽어보면 공자가 화가 난 모습이 그려지지 않는가? 어진 사람이라면 마땅히 남을 도와야 하는데,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놓고 남을 도와야 하느냐는 발칙한 질문에 마땅한 대답을 내어놓지 못해 화가 나서 내뱉는 스승의 모습이다. 이외에도 의 ‘팔일(八佾)’ 편에 나오는 일화가 있는데, 대략 이상의 세 가지 일화를 종합해보면, 재여는 아주 똑똑하고 재기발랄한 제자이지만, 몹시 골치 아픈 제자였다. 묻는 질문마다 스승을 골탕 먹이려는 듯한 질문을 던지고 삼년상처럼 사실상 논리적으로도 맞고 현실에 부합하는 질문을 들이대면서 “스승님 말씀이 틀렸잖아요?”라고 따지는 어린 제자가 공자는 몹시 못마땅했을 것이다. 그런 제자가 열심히 공부해야 할 낮 시간에 단순히 조는 것도 아니고, 아예 드러누워 잠을 자고 있으니, ‘후목분장’이라는 극단적인 표현까지 쓴 것으로 이해된다. 이런 스승과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재여는 공자의 제자 중 가장 뛰어난 10명의 제자, 즉 ‘공문십철(孔門十哲)’ 중 한 사람으로 이름을 올려놓는다. 그리고 그는 공자가 천하를 주유(周遊)할 때 공자를 계속 수행했으며, 공자의 명에 따라 제(齊)나라, 초(楚)나라에 사신으로 파견 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런 그의 공을 후대에서 인정해, 당(唐) 현종(玄宗)은 그를 ‘제후(齊侯)’에 봉했고, 송(宋)대에는 ‘임공(臨公: 후대에는 제공(齊公)으로 개칭)’, 명(明)대에는 ‘선현재자(先賢宰子)’로 봉해지는 영광을 누린다. 하태형(河泰亨)>> 전 현대경제연구원장 아호는 양우(養愚). 1958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와 KAIST 대학원에서 경영학과 경영과학을 전공했다. 미국으로 유학하여 뉴욕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수원대 금융공학대학원에 교수로 복귀하여 강의하고 있다, 오랜 소망이었던 서예와 한학을 다시 공부하게 됐다. 를 접하게 된 이후 국내외 문헌을 찾아가며 난정서 연구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 저서로는 가 있다.
- 2017-10-27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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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북선의 고향 ‘여수’
- 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거북선 없는 이순신, 이순신 없는 거북선, 거북선과 이순신 없는 임진왜란. 이 세 가지 가정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성립될 수는 없다. 이순신이 없었으면 거북선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거북선이 없었으면 이순신이 빛나기 어려웠던 것처럼, 그 둘이 없었다면 임진왜란은 너무도 부끄러운 국난이 되었을 것이다. 거북선이 이순신의 창제냐 모방이냐, 이런 논란은 아무래도 좋다. 중요한 것은 이순신이 거북선을 만들어 남해바다의 제해권을 틀어쥐었던 사실이다. 조선수군이 왜 수군을 만나는 대로 때려 부수어 병참선을 차단해줬기 때문에 조선은 망국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또 한 가지는, 큰 그릇을 알아보고 발탁한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혜안이었다. 아무리 훌륭한 장수라도 이순신이 그때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면 무슨 쓰임새가 있었겠는가. 서애는 이순신을 발탁하기 위해 온갖 지략을 다 썼다. 종6품 정읍(井邑) 현감을 정3품 전라좌수사로 등용해 남해바다를 맡기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 가정만은 상상하기도 싫다. 전라좌수사는 지금으로 치면 전라도 동쪽 해역을 책임지는 해군 함대 사령관이다. 해역이 넓은 경상도와 전라도에는 각각 좌우 수사를 두었다. 충청, 경기 같은 곳에는 한 사람에게 책임을 맡겼다. 남해는 그만큼 중요한 바다였다. 지금도 낙하산 인사라는 게 있어 종종 물의가 일어나지만, 생각보다 합리적인 사회였던 조선시대에 일곱 계단을 한꺼번에 뛰어오르는 인사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위관장교가 일거에 별 둘의 장군이 된 벼락출세를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우의정 겸 이조판서 류성룡의 이순신 발탁인사 안이 올라가자 조정은 벌집을 쑤신 듯 시끄러웠다. 물리치라는 상소가 빗발쳤지만 임금의 신임이 깊었던 류성룡이 있어 인사는 성사되었다. 육군에서 뼈가 굵은 장수를 해군제독에 발탁한 것도 신묘한 인사였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영에 부임한 것은 임진왜란 발발 14개월 전인 1591년 2월이었다. 다른 수군 장수들이 무사안일로 날밤을 보낼 때 그는 왜적과 싸워 이길 궁리에 골몰했다. 좌수영 관할 지역인 오관(순천·보성·광양·흥양·낙안) 오포(방답·여도·사도·녹도·발포)를 순회하면서 전쟁 대비 태세를 점검하고, 전선 건조와 수리를 서둘렀다. 서류상의 명단뿐인 수군 병력을 실 전력으로 만들고, 전술 개발과 군기 확립을 위한 훈련을 서둘렀다. 그 가운데 거북선을 건조한 일은 장비가 적토마를 얻은 일에 비유될 일이었다. 거북선이 왜군에게 얼마나 무서운 배였는지 증명하는 기록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윽고 적선(거북선)은 어립선(御立船)을 향하여 쳐들어와 활을 마구 쏘아 우군을 죽였으며, 웅수(熊手)로 우리 배를 끌어당기고 연초호(煙礁壺)를 발사해 우리 배를 불태웠다. 이리하여 적에게 배를 빼앗긴 자도 있었으며 바다에 뛰어든 자도 있었다. 적이 이런 사람들을 창으로 찌르고 긴 칼로 쳐 죽이고 활을 쏘아 우군 전사자가 50여 명에 이르렀다.” 라는 일본 문헌에 전해져 오는 사천해전 상황이다. 어립선이란 사쓰마(薩摩) 영주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기함을 말하며, 웅수란 자루가 긴 낫, 연초호란 폭탄 비격진천뢰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기함의 피해가 이런 상황이었으면 다른 배의 사정은 볼 것도 없는 일이다. 거북선은 적진에 돌진해 부딪쳐 깨트리는 돌격전함이었다. 조총 위주의 단병접전((單兵接戰)을 주 전술로 삼는 왜 수군으로서는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었다. 좌우 양현에 열둘, 이물(선수)에 둘, 고물(선미)에 하나씩 화포구를 두어 포나 활을 쏠 때만 창을 열고, 볼일이 끝나면 닫아버렸다. 사격 목표를 찾을 수 없는 적선의 조총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두껍고 단단한 선재를 사용해 웬만한 포화에도 끄떡없었다. 이라는 일본 문헌에는 “적의 배 가운데 전체를 철판으로 싼 것이 있는데, 우리 대포가 그 배를 부술 수가 없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무서운 용머리와 좌우 양현에서 불을 뿜고, 지붕이 쇠 송곳으로 된 철갑선”이라고 표현되었을 만큼 거북선은 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처음 거북선을 출동시켜 시마즈 군을 깨트린 사천해전 후 임금에게 보고한 장계 에서 이순신은 거북선의 성능을 이렇게 자랑했다. “신은 섬 오랑캐 왜놈들이 쳐들어올 것을 염려하여 거북선을 만들었습니다. 앞에는 용머리를 달고, 그 아가리로 대포를 쏘았습니다. 등판에는 쇠못을 박았습니다.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어도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볼 수 없습니다. 비록 왜적선이 수백 척이라 할지라도 그 가운데로 쳐들어가 포를 쏠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돌격장이 타고 나왔는데 먼저 거북선으로 하여금 전선 가운데로 돌진시켜 천(天)·지(地)·현(玄)·황자(黃字) 등 여러 총통을 쏘았습니다.” 수백 척의 적진 한가운데로 돌진해 대오를 흩트리며 좌충우돌 적선을 깨트리고 불 지르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통쾌하다. 에 수록된 그림을 보면 거북선은 용머리가 두 개나 달린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다. 위의 것은 화포구로 쓰였고, 아래 것은 적선을 당파(撞破)하는 데 쓰였다. 크고 단단한 용머리로 적선을 들이받아 옆구리에 구멍을 내는 용도였다. 이순신은 마치 전쟁이 터질 날을 알고 준비한 사람 같았다. 때맞추어 거북선을 건조하고 포격실험을 마친 것이 왜적 침입 하루 전날이었다. 에는 거북선 건조 이야기가 몇 번 나오는데, 임진년(1592년) 2월 8일 “거북선에 쓸 돛베 29필을 받았다”는 게 처음이었다. 4월 11일 일기에는 “순찰사(이광)의 편지와 별도의 목록을 순찰사 군관 남한이 가져왔다. 이날 비로소 돛베를 만들었다”라고 썼다. 거북선 제작에 상부의 지원이 일부 있었음을 짐작케 하는 단서다. 3월 27일에는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것을 시험했다”라고 씌어 있었고, 4월 12일에는 “거북선에서 지자포, 현자포 쏘는 것을 순찰사 군관이 살펴보고 갔다”라고 썼다. 상급관 인사의 임석으로 보아 공식 사격훈련으로 볼 수 있다. 거북선 제작 총책은 조선기술이 뛰어난 군관 나대용(羅大用)이었다. 좌수사로 부임하자마자 전선(戰船)부터 살펴본 이순신은 크게 낙담했다. 장부에는 분명 30여 척의 전선이 있는 것으로 적혀 있었지만, 실전에 쓸 수 있는 것은 5척을 넘지 않았다. 180년 전 태종 때 있었다는 귀선(龜船) 만들기로 작심한 계기일 것이다. 그때부터 이순신은 전선 건조에 심신의 에너지를 쏟아 붓는다. 좌수영 산하에는 선소(船所)가 셋 있었다. 좌수영 본영 선소, 순천부 선소, 방답진 선소. 이 세 곳에서 각각 한 척씩 거북선을 만들기로 하고, 그 책임을 나 군관에게 맡긴 것이다. 물론 판옥선도 같이 만들었다. 그리하여 임진년 5월 경상우수사 원균의 요청을 받고 24척을 거느리고 출전할 수 있었다. 거북선은 목질이 단단하고 두꺼운 목재를 사용해 돌격선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거북선의 바닥재는 소나무, 비자나무, 굴피나무, 졸참나무, 느티나무 등 목질이 단단한 목재였다. 충격에 강한 설계와 나무못을 쓴 것도 배를 한층 견고하게 했다. 전문가들의 비교연구에 따르면 목재의 두께에도 큰 차이가 있었다. 우리 판옥선 두께는 4치[寸]였다. 왜선 아타케부네(安宅船·3치)보다 한 치가 두꺼웠다. 골조를 요철(凹凸)로 짜 맞춘 목공기술도 한몫했다. 배 바닥이 회전에 용이한 평저선이어서 첨저선인 왜선에 비해 속도는 다소 느려도 방향 회전이 빨랐다. 왜선들은 속도가 빠른 대신 배를 돌리려면 회전 반경이 커 행동이 둔했다. 돛의 성능도 달랐다. 외돛배인 왜선은 순풍에만 쓸 수 있었지만, 거북선과 판옥선은 쌍돛배여서 역풍에도 사용할 수 있었다. 일본 문헌 는 “조선 사람의 해전은 육전과는 크게 다르다. 또 배가 크고 빠를 뿐 아니라 누각과 뱃전까지도 튼튼하고 두꺼워 우리 배가 부딪치면 모두 부서진다”라고 기록했다. 는 “조선수군의 배가 쇠로 포장되어 포로도 파괴할 수 없었다”라고 했다. 그들이 무서워한 또 다른 무기는 조선의 화포였다. 특히 구경이 13cm나 되는 천자총통이 발사하는 대장군전, 대완구가 쏟아내는 비격진천뢰의 살상력은 엄청났다. 직경이 30cm 가까운 비격진천뢰는 철구 안에 화약과 쇠 파편이 들어 있어, 왜선 갑판에 떨어져 폭발하면 수많은 적병이 죽어나갔다. 조선 판옥선과 거북선은 그런 총통과 천뢰를 사방에서 발사해 적선이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지금 남아 있는 선소 유적은 순천부 선소와 방답진 선소뿐이다. 본영 선소는 좌수영 본영이었던 진남관(鎭南館) 바로 아래 있었는데, 지금은 매립되어 ‘이순신 광장’이 되었다. 순천부 선소는 여수시청에서 남쪽으로 한 블록 거리의 해안, 가막만이 북쪽으로 깊숙이 파고든 만(灣)의 안쪽에 자리 잡고 있다. 당시는 여수가 순천부 관할이어서 그렇게 불렸는데, 고려 때부터 배를 만들고 수리하던 곳이어서 지금도 ‘선소마을’로 통한다. 방답진 선소는 돌산도 군내리 방답진 터에 아직 유허가 있다. 선소마을은 참으로 오묘한 지리를 가진 곳이었다. 이른 아침 숙소를 나와 택시를 타고 10여 분 달렸을 뿐인데 운전기사가 “다 왔소” 했다. 바다가 보이지 않는 곳에 선소가 있으랴 했더니, 바로 길 건너 숲속에 선소 유적이 숨어 있었다. 바다가 마치 호수 같았다. 사람이 가랑이를 벌리고 선 형상의 여수반도 한가운데, 국소에 해당하는 입지가 참으로 절묘했다. 남쪽으로 돌산도, 백야도, 개도 같은 섬들이 점점이 떠 있어 가막만 전체가 호수 같은 바다였다. 국소에서 또 하나의 작은 반도(망미산 돌출부)가 뻗어나가 선소 바다를 완전히 가려준다. 바다에서 보면 뭍이고, 뭍에서 보면 호수 같은 바다를 끼고 있다. 해발 100m도 채 못 되는 망미산은 이순신이 기마병을 훈련시키던 곳이다. 장군은 산 정상에 동백말채를 꽂아두고 “이 말채가 살아나면 내 영혼도 살고, 죽으면 내 영혼도 죽은 것이다”라고 했다는데, 지금도 살아 있으니 민족의 태양이 된 까닭을 알겠다. 선소마을 방문자를 처음 맞아준 것은 거북선을 만들던 굴강(掘江)이었다. 오목한 항아리 안처럼, 둘레에 석축을 쌓고 입구만 열어놓은 장난감 같은 항구 수면이 아침 해에 반짝이고 있었다. 강당 서너 개 넓이로 보아 거북선과 판옥선을 동시에 건조할 수 있는 규모로 보였다. 굴강 왼편으로는 근래에 복원했다는 대장간, 그 옆으로 세검정과 군기고가 자리하고 있었다. 대장간은 선재를 자르고 깎고 다듬는 연장을 만들던 곳이고, 세검정은 선소 지휘부, 군기고는 무기창고로 쓰였다 한다. 특이한 것은 세검정과 군기고의 기둥과 서까래, 마루, 문짝 등이 모두 검정색이라는 사실이다. 선소 위치가 쉽게 눈에 뜨이지 않게 하려는 배려 같았다. 세검정 앞 해변에는 계선주라는 돌기둥 하나가 외로이 서 있다. 배를 매던 용도라고도 하고, 벅수 역할까지 겸하던 것이라고도 한다. 돌장승 벅수는 선소마을 입구 도로변과 마을 안길에도 여러 기가 서 있다. 모두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왜적과 잡귀의 근접을 퇴치하려는 민간신앙과도 무관치 않으리라. 여수는 이순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곳이다. 출셋길에 들어 국난의 전쟁을 맞은 곳이고, 가장 오래 머문 곳이었다. 소문난 효자였던 그가 어머니까지 모시고 와 가까이에서 자식의 도리를 다하려고 애쓴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여수 곳곳에 그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여수 버스터미널에서 진남관이 있는 도심부로 이어지는 간선도로 이름이 ‘좌수영로’다. 국보 304호인 진남관을 지나칠 수는 없었다. 성종 시대 수군절도영을 둔 이래 고종 대에 이르기까지 400년 넘게 여수는 남해 방비의 중심지였다. 그 본영이 진남관이다. 1599년에 지어진 좌수영 객사 건물로, 현존 관아 건물로는 가장 크다. 이순신 시대에는 그 아래 망해루가 좌수영 본영이었다. 진남관 길 건너에는 고소대(姑蘇臺)가 있다. 바다를 굽어보는 언덕은 좌수사의 장대로도 쓰였다는데, 지금은 유명한 타루비(墮淚碑)와 좌수영대첩비가 있는 곳이다, 보물 1288호로 지정된 타루비는 글자 그대로 눈물을 흘리는 비석이라는 뜻이다. 좌수영 수졸들이 장군의 붉은 마음을 잊지 말자고 돈을 모아 세운 비석이다. 그 뜻이 비문에 선명하다. “영하(營下) 수졸들이 통제사 이순신 공을 위하여 짧은 비석 하나를 세우고 타루(墮淚)라 이름 하나니….” 졸병들이 사령관의 충절을 기려 불망비를 세운 일이 우리 역사에 있었던가! 타루비 옆에는 보물 571호로 유명한 좌수영대첩비가 서 있다. 광해군 시대에 세워진 이 비석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기로 이름났다. 높이 3.6m에 폭이 1.3m다. 비문은 이항복이 짓고 글씨는 명필 김현성이 써서 더욱 돋보였던 이 비석과 타루비는 명량대첩비와 함께 1942년 철거되어 행방을 모르다가, 광복 후 경복궁 근정전 앞뜰에 파묻힌 것이 발견되어 제자리로 돌아왔다. 진남관 뒷산은 종고산(鍾鼓山)이다. 여러 전설을 품은 여수의 진산인데, 특히 이순신과 관련한 전설로 유명하다. 무음산이란 별명을 가졌던 이 산은 난리 때 3일간 울었다 한다. 그 까닭은 이순신의 한산대첩을 알린 낭보였다는 설도 있고, 노량해전에서 순국한 비보를 전한 울음이었다고도 한다. 진남관에서 200여 m 바다 쪽으로 내려서면 바로 이순신 광장이다. 한 손에 칼, 한 손에 북채를 든 거대한 동상에 ‘민족의 태양’이라는 후세인의 헌사가 적혀 있다. 로터리 건너 바다에 면한 실물대의 거북선 모형은 방문자들의 촬영 욕구를 자극한다. 광장을 돌아 다시 북쪽으로 방향을 틀면 우리나라 최초의 이순신 사당으로 유명한 충민사(忠愍祠) 입구다. 1601년 이항복이 선조에게 품신해 통제사 이시언(李時言)이 세운 최초의 이순신 사당이다. 그의 부장 이억기(李億祺), 안홍국(安弘國)까지 함께 모셔져 있다. 장군이 가장 신뢰했던 이억기는 장군이 영어의 몸이 된 사이 칠천량 해전에서 순국했다. 선조 어가를 호종해 의주까지 갔던 안홍국 역시 안골포 해전에서 산화한 충신이다.
- 2017-10-08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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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식의 칠보시(七步詩)
- 를 읽어보면 79권에 조조(曹操)의 사후,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은 죄를 물어 위(魏) 문제(文帝)로 등극한 조비(曹丕)가 자신의 친동생이자 정적인 조식(曹植)에게 일곱 걸음 안에 시를 짓지 못하면 죄를 묻겠다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바로 그 유명한 조식의 ‘칠보시(七步詩)’가 나온다. 그런데 이 칠보시의 원작자에 대해 아직까지도 논쟁이 있다. 조식이 활동하던 건안(建安) 시대에는 칠보시 같은 오언시(五言詩)가 아직 자리 잡지 못한 시기였다. 게다가 정사(正史)인 와 조식의 사후 편찬된 어디에도 이 시가 보이지 않는다. 바로 이 점이 신뢰성을 떨어뜨리고 있다. 그렇다면 이 시는 어느 문헌에 최초로 등장할까? 위진남북조 시대 송나라의 유의경(劉義慶)이 편집한 다. 이 문헌이 편찬된 시기와 조식의 시대는 약 200년 차이가 나는데, 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위 문제 조비가 동아왕(東阿王) 조식에게 일곱 걸음 안에 시를 지으라 하고, 만약 짓지 못하면 대법(大法, 사형을 의미함)을 받을 것이라 하자, 조식이 이에 시를 짓기를 ‘煮豆持作羹,漉菽以為汁。 萁在釜下然 ,豆在釜中泣。 本自同根生,相煎何太急?’라 하니, 황제가 심히 부끄러워하는 안색이었다. 이 문헌에 등장하는 ‘칠보시’의 원전은 특이하게도 6구의 오언시로 이루어져 있다. 즉 시에 관한 한 고금 제일이라 칭할 만한 조식이 불완전한 6구 형태의 오언시를 남겼다는 점이 의문스럽다. 또 가 위진시대 유명했던 인물들의 일화 및 대화만 기록한 글이어서, 이 시가 언제, 어떤 일로인해 지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위의 글을 토대로 시기를 유추해보면, 일단 조식을 동아왕으로 칭하고 있는데, 조식이 동아왕으로 봉해졌을 때는 그의 형 조비는 죽고, 조카인 조예(曹叡)가 명제(明帝)로 보위를 이은 후여서 이 시의 신뢰성은 또다시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후 이 시는 의 주석에 인용된다. 에 가장 권위 있는 주석을 단 이선(李善)은 60권, 임언승(任彥昇)의 에 대한 주석에서 “에서 말하길, 문제(文帝)가 진사왕에게 일곱 걸음 안에 시를 지으라 하니 그 시는 ‘萁在灶下燃,豆在釜中泣。本是同根生,相煎何太急’이다”라고 하면서 본래의 6구를 절구(絶句) 형태인 4구로 줄여 소개한다. 그러다가 조식 사후 1100여 년이 지난 명나라 때 나관중(羅貫中)이 쓴 에서 이 시는 실제와 허구가 뒤섞인 일화들과 함께 다시 화려하게 등장한다. 煮豆持作羹, 漉菽以為汁. 萁在釜下然, 豆在釜中泣. 本自同根生, 相煎何太急. 煮豆燃豆萁, 豆在釜中泣. 本是同根生, 相煎何太急. 조식의 칠보시는 소개되는 문헌에 따라 약간씩 다르게 인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2017-08-28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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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지>의 ‘도원결의’, 사실일까?
- 우리가 재미있게 읽는 는 사실상 라는 소설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중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는 전문가들을 제외하고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예를 들어, 소설 는 황건적 난에 만난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이 도원(桃園)에서 의형제로 결의를 하는 데서 이야기가 출발한다. 그리고 이들 세 명은 그야말로 천신만고를 겪으면서도 이 결의를 지켜낸다. 소설 후반부에서는, 오(吳)-촉(蜀) 동맹을 어기고 오나라가 형주를 지키던 관우를 공격해 죽이는 일이 발생한다. 그러자 장비는 연일 폭음을 하고 부하들을 두들겨 팼다. 급기야 장비까지 부하들에게 살해되고, 이에 대노(大怒)한 유비는 제갈공명의 만류를 뿌리치고 모든 군사력을 동원해 오나라를 공격한다. 하지만 이릉대전(夷陵大戰)에서 대패한 후 백마성(白馬城)에서 생애를 마감하면서 이들 세 사람의 의형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그렇다면 이 소설의 출발점인 ‘도원결의(桃園結義)’는 과연 사실일까? 역사적 사실을 알아보려면 먼저 삼국시대 역사서인 정사(正史) 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정사 에는 도원결의가 나올까? 유감스럽게도 그런 내용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먼저 촉서(蜀書) 관우전(關羽傳)을 보면, “선주(先主, 유비)는 관우, 장비와 잠을 잘 때도 같은 침대에서 자는 등 서로 아끼기를 형제와 같이 하였다. 관우, 장비는 여러 사람이 모여 있을 때는 선주 뒤에 시립해 하루 종일 있었으며, 선주를 따라 천하를 다니며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여기서 나온 ‘은약형제(恩若兄弟)’라는 단어에서 나중에 나관중이 ‘도원결의’를 상상해낸 듯한데 실제 관계는 위에서 보듯 형제라기보다는 군신관계로 보는 게 타당할 듯하다. 또한 촉서 관우전의 다른 부분에는 서주를 잃고 관우가 붙잡혔을 때 조조가 그를 극진히 대접하는 장면이 나온다. 조조가 장료(張遼)를 통해 자기를 위해 일하지 않겠냐고 관우의 의중을 떠보자 관우는 탄식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조공(曹公)이 베푼 극진한 은혜를 잘 아오. 하지만 나는 유 장군의 두터운 은혜를 받아서 함께 죽기로 맹서했고, 그러므로 그를 배신할 수 없소.” 즉 관우는 유비와 ‘함께 죽기로 맹서한’ 주군과 신하의 관계라고 말할 뿐, 의형제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한편 위서(魏書) 유엽전(劉曄傳)에도 이를 짐작하게 하는 내용이 있다. 관우가 오(吳)에 의해 피살된 후 위문제 조비(曹丕)가 여러 신하들에게 과연 유비가 병사를 일으켜 오를 칠 것인가, 관우를 위해 복수를 해줄 것인가라고 물었을 때 시중(侍中)인 유엽(劉曄)은 “유비와 관우는 의리상으로는 군신이나, 은혜상으로는 부자와 같습니다. 관우가 살해되었는데, 유비가 만일 그를 위해 복수해주지 않는다면, 관우의 은의에 대해 시종일관하지 못하는 것이 됩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도 관우와 유비는 의리상으로는 군신, 은혜상으로는 부자관계로 묘사되고 있을 뿐 의형제로는 묘사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촉서(蜀書) 장비전(張飛傳)에도 “어릴 적부터 관우와 함께 선주(유비)를 모셨는데, 관우의 나이가 몇 살 많아서 장비가 형 대접을 하였다”라는 표현만 나올 뿐, 형제관계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다. 하태형(河泰亨) 전 현대경제연구원장 - 아호는 양우養愚. 1958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와 KAIST 대학원에서 경영학과 경영과학을 전공했다. 미국으로 유학하여 뉴욕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수원대 금융공학대학원에 교수로 복귀하여 강의하고 있다. 오랜 소망이었던 서예와 한학을 다시 공부하게 됐다. ‘난정서’를 접하게 된 이후 국내외 문헌을 찾아가며 난정서 연구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 저서로는 가 있다.
- 2017-07-25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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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봄
- 늦은 봄을 노래한 시 중 필자가 좋아하는 시는 두보(杜甫)의 ‘곡강(曲江)’이다. 이 시는 두보가 47세 되던 AD 758년 늦은 봄, 좌습유(左拾遺) 벼슬을 할 때 지은 작품이다. 좌습유라는 벼슬은 간언(諫言)을 담당하던 종8품의 간관(諫官)이다. 당시 그는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재상(宰相) 방관(房琯)이란 사람이 죄목을 뒤집어쓰고 파면되는 일이 발생하자 ‘죄가 가벼우니 대신을 파직함은 옳지 못합니다(罪細,不宜免大臣)’라는 상소를 올린다. 그러자 숙종(肅宗)은 매우 노하여 삼사(三司)를 시켜 두보를 문초하게 한다. 이때 재상 장호(張鎬)가 얘기하길, ‘(간관인 두보가 간언한 것을 가지고) 죄를 묻는다면 그것은 간관의 언로를 막는 것입니다(甫若抵罪,絕言者路)’라고 하여 이 일은 일단락된다. 그러나 황제의 눈 밖에 난 두보는 여름이 되자 결국 화주(華州) 사공참군(司功參軍)으로 좌천된다. 이 시는 당시 황제의 눈 밖에 난 두보가 좌천되기 이전, 자신의 괴로운 심정을 늦봄에 실어 읊은 걸작이다. 2수 중 첫 번째 시의 전련(前聯)을 먼저 살펴보자. 一片花飛減却春(일편화비감각춘) 한 조각 꽃잎이 날려도 봄빛이 줄어드는데 風飄萬點正愁人(풍표만점정수인) 만 점 꽃잎이 바람에 흩날리니 정녕 사람을 시름 잠기게 하네 且看欲盡花經眼(차간욕진화경안) 장차 다 지려는 꽃잎, 눈앞을 스쳐가는 것을 보노니 莫厭傷多酒入脣(막염상다주입순) 몸이 많이 상했다 하여 술 마시는 것을 마다할 수 있으리오… ‘한 조각 꽃잎이 날려도 봄빛이 줄어든다’는 의미의 ‘일편화비감각춘(一片花飛減却春)’은 참으로 뛰어난 명구로서 역대로 수많은 문인들에 의해 애송되어왔다. 이 구절은, 대조를 이루는 ‘하나의 나뭇잎이 떨어지는 걸 보고도 천하에 가을이 왔음을 안다’라는 의미의 ‘일엽낙지천하추(一葉落知天下秋)’ 구절과 더불어 각각 봄이 짐과 가을이 옴을 읊은 천고의 절창으로 꼽힌다. 황제의 신임을 잃은 신세에, 떨어지는 꽃잎을 보니 어찌 심란하지 않았겠는가? 마지막 구절을 보면 ‘몸이 이미 많이 망가졌다(傷多)’는 표현을 통해 심적 고생이 이미 건강을 해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시를 짓고 난 뒤 두보는 같은 제목의 두 번째 시를 짓는다. 이 시의 전련에는 ‘인생칠십고래희’라는 유명한 시구가 등장한다. 朝回日日典春衣(조회일일전춘의)정에서 돌아오면 날마다 봄옷을 저당 잡혀 每日江頭盡醉歸(매일강두진취귀)매일 강가에서 만취하여 돌아온다 酒債尋常行處有(주채심상행처유)외상 술값이야 으레 가는 곳마다 있기 마련… 人生七十古來稀(인생칠십고래희)사람은 예로부터 70년 살기도 드문 일 아니겠는가 이 시를 보면 그는 더욱 심해진 마음고생을 술로 풀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차피 칠십도 못 사는 인생, 몸을 아낄 필요가 있겠냐고…. 이어지는 후련(後聯)이다. 穿花蛺蝶深深見(천화협접심심견)꽃을 파고드는 호랑나비 깊숙이 보이고 點水蜻蜓款款飛(점수청정관관비)물 위를 스치는 잠자리 사뿐히 날아오르네 傳語風光共流轉(전어풍광공류전)말을 좀 전해다오, (우리 인생과) 함께 흘러가는 경치에게… 暫時相賞莫相違(잠시상상막상위)“잠시나마 함께 즐기면서 서로 거스르지 말자고” 두보는 자신이 존경했던 도연명의 형식을 빌려 아름다운 봄날 경치에 대한 자신의 헌사를 이렇게 마무리하고 있다. >>하태형(河泰亨) 전 현대경제연구원장 아호는 양우養愚. 1958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와 KAIST 대학원에서 경영학과 경영과학을 전공했다. 미국으로 유학하여 뉴욕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수원대 금융공학대학원에 교수로 복귀하여 강의하고 있다. 오랜 소망이었던 서예와 한학을 다시 공부하게 됐다. ‘난정서’를 접하게 된 이후 국내외 문헌을 찾아가며 난정서 연구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 저서로는 가 있다.
- 2017-05-29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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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후에 발생하는 3대 리스크 극복 방법
- 과거 족보나 문헌들을 조사해보면 고려시대(918~1392년) 임금 34명의 평균수명은 42.3세, 조선시대(1392~1910년) 임금 27명의 평균수명은 46.1세로 나타난다. 왕들의 수명은 40세 전후에 불과했던 셈이다. 조선시대 임금 중 가장 장수했던 임금은 21대 영조로, 현재 우리나라의 평균수명을 뛰어넘는 83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의료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그 시대의 장수 비결이 궁금해지기도 한다. 필자는 시골에서 홀로 생활하시던 외조모가 몇 년 전 향년 92세로 굴곡 많은 생을 마감하시는 모습을 보며 100세 시대가 멀지 않았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몇 년 만에 100세 시대라는 말이 낯설지 않게 들린다. 일반적으로 100세 시대란 사망 빈도가 가장 높은 연령, 즉 ‘최빈사망연령’이 90세가 넘는 경우를 말한다. 우리나라는 대략 2020년경이면 최빈사망연령이 90세가 넘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최근의 의료기술 발달 속도와 건강에 대한 높은 관심을 고려할 때 5070세대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오래 살 확률이 높다고 봐야 한다. 5070세대는 경제활동을 활발히 하는 동안에도 자산 축적에 관심이 많았다. 즉 은퇴설계를 할 때도 수익률과 재테크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제는 축적된 재산을 유지하고 보전하는 일에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그동안 열심히 저축하고 모아온 자산 등이 예상하지 못한 일로 한순간에 없어지거나 줄어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위험관리’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이미 우리 코앞으로 다가온 100세 시대에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위험과 우발적으로 생기는 위험을 관리하고 통제하지 않으면 그동안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다. 앞으로 5070세대가 부딪칠 수 있는 대표적 위험 3가지를 살펴보고 구체적인 대응 방안을 모색해보자. 의료비 리스크 보장자산을 사망에서 노후 의료비로 재편 우리나라의 100세 이상 인구는 몇 명 정도 될까? 2015년 기준 통계청에 따르면 3159명으로 여성이 2731명, 남성이 428명으로 여성이 6배 정도 많다고 한다. 하지만 행정자치부 조사에서는 100세 이상 인구를 17만562명으로 집계하고 있다. 1만4000명 정도 차이가 나는 이유는 뭘까? 행정자치부는 주민등록 기준으로 말소 여부로 판단하는 반면 통계청은 인구센서스 전수조사를 통해 파악하는 조사 방법의 차이 때문으로 보인다. 필자는 여기서 궁금한 점이 하나 더 생겼다. 과연 차이가 나는 1만4000여 명의 100세 어르신들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대부분은 거동의 불편과 질병 등을 이유로 병원이나 요양병원에 입원치료 중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지난해 생명보험협회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건강수명, 즉 전체 평균수명(82.4세)에서 질병이나 부상으로 고통받는 기간을 제외하고 건강한 삶을 유지하는 기간이 76.4세라고 발표한 바 있다. WHO(세계보건기구)에서는 2014년 기준 우리나라 사람의 건강수명을 73.2세라고 발표하기도 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우리나라 사람들은 짧게는 6년, 길게는 10년 정도 병치레를 하다 사망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노후에는 질병이라는 달갑지 않은 친구를 맞이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노후 질병이 재무적인 측면에서 특히 위험한 이유는 일정 연령이 되면 자연스럽게 발생하고, 오래 살수록 그 위험의 정도가 급증하며, 질병의 정도를 예측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노후에 발생하는 질병은 자연스런 현상이란 점에서 건강관리만 잘하면 어느 정도 예방할 수 있겠지만, 완벽한 예방이 쉽지 않고 한 번 발병하면 치료비가 만만치 않다는 문제가 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속담처럼 노후에 발생되는 치료비는 가족에게 큰 부담이다. 건강보험공단(2015)의 조사에서처럼 연령이 증가할수록 1인당 연간 의료비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형태를 보이고 있다. 1인당 생애 총의료비가 65세 이후에 절반 이상 발생하는 것은 노후 질병으로 인한 의료비 부담이 5070 은퇴재무설계 관점에서 가장 큰 위험 요소라는 사실을 반증한다. 의료비 부담을 완화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를 위해 먼저 국민건강보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만약 5070세대가 은퇴 후 의료비가 1000만원 발생했다면 본인이 부담하는 금액은 얼마나 될까? 요양기관별로 다소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건강보험공단에서 63.4%(약 630만원)를 부담하고 나머지 36.6%(약 370만원)는 개인이 부담해야 한다. 개인부담분을 분해하면 건강보험 급여 대상 의료비의 20.1%와 비급여 의료비 16.5%다. 국민건강보험제도의 구조를 감안할 때 5070세대의 노후의료비 부담은 건강보험 본인 부담금과 비급여 부분을 어떻게 준비했는지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5070세대가 2040 시절에는 가장의 유고에 대비한 사망보장 중심의 위험관리에 초점을 두었다면, 50대 이후에는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노후의료비 보장 중심의 위험관리로 보장 자산을 새롭게 리모델링해야 한다. 2040 시절에 가입해두었던 보험을 노후의료비 보장 중심으로 재검토하고, 행여 중복보장으로 인해 과도한 보험료 지출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분석해 웰스(wealth)가 아닌 헬스(health) 시대에 맞도록 재편할 필요가 있다. 자녀부양 리스크 현명한 노후준비는 ‘자녀의 경제적 독립’ 대한민국의 5070세대가 늙은 염낭거미를 닮아가고 있다. 염낭거미는 독거미의 일종으로 새끼가 먹을 것이 없으면 새끼를 위해 제 살을 먹이로 주는 습성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 5070세대는 은퇴 후에도 성인이 된 자식 뒷바라지를 걱정하고 있다. 혹자는 자식뒷바라지가 100세 시대에 무슨 위험이냐고 반문할 수 있다. 부모가 자녀를 낳았으면 자녀가 경제적으로 독립할 때까지 물심양면 지원하는 것은 인지상정 아니냐고 항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은퇴 이후 연금 외 변변한 수입원이 없는 상황에서 생물학적 성인자녀가 사회학적 성인자녀로 탈바꿈하지 못하면, 예상치 못한 상황에 따른 심리적 고충은 물론 경제적 부담도 만만찮다는 점에서 엄청난 리스크가 아닐 수 없다. 경기침체에다 비혼(非婚)과 만혼(晩婚)이라는 사회적 현상까지 더해져 부모와 불편한 동거를 하는 성인자녀가 늘고 있다. 동거를 하지는 않더라도 경제적으로 의지하는 성인자녀도 꽤 많다. 이는 선배 세대들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던 고민이란 점에서 5070세대에겐 새로운 리스크라 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동서양이 다르지 않다. 미국에서는 대학졸업 후 취업을 못해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부모 곁에 머무는 자녀를 ‘낀 세대’라는 의미의 ‘트윅스터(Twixter)’라 부른다. 캐나다에서는 직업을 구하러 이리저리 다니다가 결국 집으로 돌아온다는 뜻에서 ‘부메랑키즈’, 영국에서는 부모 퇴직연금을 축낸다는 뜻에서 ‘키퍼스(KIPPERS: Kids in Parents Pockets Eroding Retirement Savings)’, 이탈리아에서는 모친이 해주는 음식에 집착한다는 의미의 맘모네(Mammone)라고 칭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학교 졸업 후 취업을 못해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부모에게 의존하는 20~30대 젊은 층을 캥거루족, 취업을 했어도 경제적 독립을 못하고 부모에게 의존하는 30~40대를 신캥거루족이라고 칭한다. 이처럼 5070세대가 은퇴 이후 성인자녀를 부양하는 상황이 연출되면 이들의 노후준비 자산은 급속하게 줄어들게 된다. 자녀의 경제적 독립이야말로 가장 현명한 노후준비 방법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개인이 처해 있는 상황과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자녀부양 리스크에 대한 통일된 대처 방법을 제시하기는 어렵지만 조금 생각하면 실천할 수 있는 방안 두 가지를 제시해보고자 한다. 첫째 부양기간과 지원 범위를 자녀와 함께 정하는 것이다. 최근 육아정책연구소에서 20~50대 성인을 대상으로 “언제까지 자녀에게 경제적 지원을 해야 하나?”라고 물어본 결과 응답자의 40.9%는 적어도 취업 전까지는 자녀를 경제적으로 뒷받침해줘야 한다고 응답했다. 2008년에는 이 비중이 26.1%였던 점을 감안할 때 성인자녀의 부모에 대한 의존도가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자녀의 경제적 미독립이 게으름 등 개인적 소양 탓보다는 사회경제적 구조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상황에서 자녀의 경제적 독립을 이끌어내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경제적 지원 범위와 기간을 자녀와 합의하는 과정을 거쳐 합리적인 선에서 정하고, 독립을 이루는 방법을 함께 고민하다 보면 자녀의 경제적 독립이 앞당겨지지 않을까. 둘째 소규모 청년창업이다. 취업이 어렵다 보니 소규모 청년창업이 늘어나고 있다. 청년창업의 경우 어느 정도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지만 결국 부모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능력이 된다면 한없이 지원하고 싶지만, 5070세대 대부분은 그렇지 못한 게 현실이다. 참 난감한 상황이다. 수년 전 은행에서 퇴직한 박씨(60)의 경우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땅과 아파트, 그리고 퇴직금이 전 재산이다. 그런데 명문대 졸업 후 몇 년째 취업을 하지 못하고 불편한 동거를 하고 있던 자녀가 어느 날 조심스럽게 창업자금을 요청하더란다. 지원을 해야 하나, 말려야 하나? 많은 고민 끝에 박씨는 구체적인 조건을 내걸고 지원을 해주기로 했다. 자녀에게 사업계획서를 요청하고, 자금을 한꺼번에 지원하기보다는 순차적으로 지원하며, 아버지가 아닌 채권자로서 계약서까지 썼던 것이다. 부모와 자식 간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혀를 찰 수도 있으나, 이런 일일수록 냉정하게 대하는 게 정답에 가까운 차선책인 것 같다. 금융사기 위험 내 돈 지키는 5가지 행동지침 뉴스나 드라마를 통해 은퇴자들이 어이없게 금융사기를 당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드라마의 소재거리로 활용될 정도로 은퇴자들이 쉽게 금융사기 표적이 되는 이유는 뭘까? 주된 직장에서 물러난 은퇴자들은 비록 고정수입은 크게 줄어들었다 해도 퇴직금과 모아둔 유동자산이 다른 세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다. 여기에다 금융시장의 변화에 둔감한 상황에서 줄어든 고정수입을 보충하고픈 조급한 마음에 고수익 상품에 대한 욕구가 커져 금융사기범의 미끼를 덥석 물 가능성이 높다. 미국 투자자교육재단에서는 금융사기를 당하기 쉬운 사람의 유형을 다음과 같이 분류하고 있다. ① 50대 후반의 기혼자, ② 자신의 판단과 금융 지식이 평균 이상이라고 생각하는 낙관적인 성격의 소유자, ③새로운 생각이나 판매 선전에 귀가 솔깃한 사람, ④ 최근에 건강 또는 금융상 어려움을 겪은 사람 등. 이 중에서 두 가지 이상에 해당되는 사람은 금융사기에 당할 가능성이 높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단 한 번이라도 금융사기를 당하게 되면 힘들게 모아온 자산을 다 잃을 수 있다. 아래에 금융사기 예방을 위한 5가지 행동지침을 소개한다. 첫째, ‘아는 사람인데 잘해주겠지, 전문가이니까 잘해주겠지’라는 생각을 버려라! 아는 사람이 더 무서울 수 있다. 이들은 오히려 고객의 이익보다 금융기관이나 종사자의 이익을 우선할 수 있다. 둘째, 금융업에 종사하는 개인이 제공하는 보고서가 아닌 금융기관의 보고서를 받아라! 가끔 개인이 작성한, 고수익을 보장하는 보고서를 믿고 투자에 나섰다 낭패를 보는 경우가 있다. 고수익을 보장하는 약속 뒤에는 대부분 고객의 자금을 유용할 의도가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 초저금리 시대에는 고수익을 미끼로 두 자릿수 수익률을 제공하면서 호시탐탐 돈을 노리는 금융사기꾼이 주변에 널려 있다는 점을 명심하자. 셋째, 배우자의 사망, 이혼소송 등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 불현듯 다가오는 도움의 손길을 조심하자! 사람의 어려움을 악용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특히 돈과 연관된 도움의 손길은 주변 사람과 충분히 상의해 결정해도 늦지 않다. 채근하는 사람은 뭔가 꿍꿍이가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삶의 전환기나 시련기에는 좀 더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결정해야 한다. 넷째, 장점만 있는 금융투자상품은 없다는 점을 명심하자!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처럼 금융투자상품에 투자할 때는 그 상품의 장단점을 충분히 파악한 후 투자를 결정해도 늦지 않다. 마지막으로 금융사기꾼이 노리는 것은 높은 수익률에 쉽게 흔들리는 고객의 마음일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자! 고수익을 확정 보장하거나 마감임박이라면서 투자 권유를 종용하는 경우 금융사기를 의심해봐야 한다.
- 2017-05-22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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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찰음식 명장 선재 스님, “음식을 의식주의 하나가 아닌 약으로 보라”
- ‘당신은 무엇을 먹고 사십니까?’ 지난해 대한불교조계종단으로부터 최초로 ‘사찰 음식 명장’을 수여받은 선재 스님의 책 제목이기도 한 이 문장은 요즘 가장 치열하게 식문화가 발전하고 있는 현재에 던지는 화두처럼 들려온다. 셰프가 TV 스타가 되고, 수많은 예능 프로그램이 요리를 소재로 만들어지고, 건강과 먹거리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풍부해진 요즘 과연 우리가 먹는 것은 제대로 된 음식일까? ‘우리는 음식을 왜 먹는가?’ 사찰음식의 대가 선재 스님에게 그 답을 들어봤다. 힘이 넘친다. 조계종에서 인정한 최초의 사찰음식 명장 선재 스님의 목소리에는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에너지가 넘쳤다. 사찰음식에 담긴 조화의 힘이 그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일까? “불경에는 놀랍게도 음식에 관한 가르침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습니다. 음식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철학적인 이야기에서부터 조리법, 음식 손질과 보관법, 주방 설치법, 먹는 법까지 세세하게 쓰여 있습니다. 특히 에 나오는 ‘일체 제법은 식(食)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식이 아니면 존재할 수 없다’는 경구는 부처님이 음식을 굉장히 중요한 가르침으로 다루셨음을 말해주는 증거입니다.” 불경에서부터 귀하게 다루었던 식문화를 확인한 선재 스님은 문헌 연구를 거듭하였다. 그리고 1994년 중앙승가대학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며 발표한 ‘사찰음식문화연구’ 논문은 그동안 스님들에게만 전수되던 사찰음식에 관한 최초의 논문으로 기록됐다. 음식으로 다시 생명을 얻다 그러나 사찰음식 연구는 선재 스님에게 큰 시련을 안겨줬다. 연구를 하면서도 화성 신흥사 청소년 수련원에서 아이들의 수련교육을 맡았는데 교육의 좋은 결과에 반한 기관과 학교들에서 수련교육 요청이 빗발쳤다. 해야 할 일이 많아지자 하루에 두세 시간 정도밖에 잠을 못 잤고 음식의 질도 신경 쓰지 않고 급하게 끼니를 때우는 일이 거듭됐다. 그러자 기운이 없어졌고 어느 날 주저앉아버렸다. 병원에 가자 의사가 간경화라는 진단을 내리면서 1년을 넘기기 힘들다고 했다. 난데없이 시한부 인생이 된 것이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힘없이 누워 있는데 문득 제가 쓴 ‘사찰음식문화연구’ 논문이 생각났습니다.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 논문을 꺼내와 읽기 시작했습니다. 한 문장 한 문장이 논문을 쓸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내가 쓰고도 정작 나는 글대로 살지 못했구나, 부처님 법대로 살지 못해 아픈 거구나, 그제야 알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을 그토록 연구했음에도 자신은 정작 실천하지 않았다는 자책감에 스님은 남은 시간을 부처님의 법대로 철저하게 살아보기로 결심했다. 모든 가공식품을 끊고 자연 그대로의 음식, 제철 음식, 때에 맞는 음식, 깨끗한 음식으로 스트레스와 불규칙한 식사로 채워진 일상의 습관을 바꾼 것이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몸에 나쁜 음식을 먹지 않고 일상의 습관을 바꾼 것만으로도 몸이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의 마무리는 에너지 넘치는 스님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보인다. 선재 스님의 두 번째 삶은 딱딱하게 굳어 있던 간에 항체가 생기는 기적과 함께 시작됐다. 꿈꾸는 삶, 사찰음식에 다 있다 선재 스님의 두 번째 삶에는 사찰음식의 전파가 중요하게 자리하고 있다. 얼마 전 스님은 프랑스 부르고뉴에서 사찰음식에 관한 강연을 진행하고 프랑스 파리 오이시디 주재 한국대표부에서 행사를 가졌다. 최근 세계 3대 요리의 나라 프랑스는 물론 독일, 미국, 베트남 등 전 세계에서 선재 스님을 찾고 있다. 사찰음식이 갖고 있는 현대 식문화에 관한 대안적 성격을 요리 문화가 발달한 나라일수록 더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 “해외에 초대받아 갈 때 저는 음식만 가는 게 아니라 문화도 함께 가야 한다는 생각이에요. 그래서 외국에서 사찰음식에 관한 강연을 요청받으면 음식에 대한 얘기와 함께 불교가 갖고 있는 사상에 관한 강연도 함께 하죠. 예를 들면 대웅전의 꽃문살 사진 전시회와 함께 강연회가 열리기도 합니다. 언젠가 사찰음식에 관한 칼럼을 써서 강연을 들으러 오시는 분들한테 미리 공부해서 오시라고 요청한 적도 있어요. 그런데 그 강연이 반응이 좋아서 그해 있었던 그 지역의 해외 행사들 중 가장 훌륭한 행사로 최우수 평가를 받기도 했죠.” 스님이 전파하는 불교 사상의 핵심은 땅, 물, 바람, 동물이 나와 다르지 않다는 자연 존중에 있다. 사찰음식이라는 문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세상에 대한 고마움과 겸허를 알려주려는 스님의 노력은 파괴적이고 소비적인 작금의 식문화에 경종을 울리는 일이기도 하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육체, 정신, 영혼 모두에 영향을 미쳐요. 몸과 마음도 연결돼 있지요. 음식은 곧 생명, 먹는다는 것은 곧 산다는 것과 같거든요. 내가 만든 음식에 사람을 살리고 자연을 살리는 가치관이 담겨 있다는 것이 세계적으로 사찰음식을 찾는 이유일 거예요.”. 변질된 사찰음식은 사찰음식이 아니다 “사찰음식 문화의 범주를 의식주에서 찾으면 안 돼요. 약에서 찾아야 해요.” 음식을 약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선재 스님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절절하게 체험한 데서 나온 것이리라. 스님은 제대로 된 사찰음식은 누구에게나 맛있는 음식이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분명 몸에는 좋은 음식이라서 사찰음식이 입에 안 맞더라도 그 사람 몸에 좋다면, 그 사람 생각을 바꿔서라도 먹도록 해야 하는 게 맞다고 말한다. “지금 바깥의 사찰음식을 보면 뭔가 빨리, 뭔가 맛을 내기 위해서 쓰는 것들이 보여요. 그런 건 사찰음식이 아니에요.” 스님은 요즘 사찰음식 붐이 일어나고 있지만 상당수의 사찰음식이 사찰음식 본연의 철학과 가치를 담고 있지 않다고 비판했다. 스님이 갖고 있는 가치관의 엄격한 면을 확인할 수 있는 말이었다. “사찰음식을 강의하던 자리였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 자리에서 처음 만든 음식이 야채 샤브샤브였어요. 우리 땅에 나오는 재료로 음식을 만드는데 우리 언어를 써야 맞지 샤브샤브가 뭐냐 싶어서 그 사람에게 직언한 적이 있어요. 그 사람은 기분이 안 좋았겠지만 누군가는 말을 해줘야 해요. 자연음식가라면서 야채 샤브샤브라는 말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써도 되는지 안타까웠어요.” 스님은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친환경 급식’ 개념도 비판적으로 바라봤다. “야채는 친환경일지 모르지만 거기에 들어가는 장은 첨가제가 들어가는데 친환경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친환경 급식의 맹점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첨가제가 들어간 음식은 먹지 말아야 “음식에 따라 사람의 성정이 달라집니다. 경상도 사람들은 음식을 짜게 먹으니 마음이 급하고 충청도는 심심하게 먹으니 사람이 순하죠. 육류는 동적인 에너지를 주고 두부는 정적인 에너지를 줍니다. 차를 불가의 대표적 음식이라 하는데, 차와 선은 같은 맛이라는 말이 있죠.” 불교에서 육식과 오신채를 금하기 시작한 것은 모든 생명에 자비심을 가지는 수행자들의 문화에 영향을 받았다. 조계종이 사찰음식 명장 1호로 선정한 선재 스님의 음식 철학도 “사찰음식에서 육식을 하느냐의 여부보다 어떻게 먹느냐의 문제”에까지 뻗쳐 있다. “내가 무엇을 먹고 살고 있는지 살피며 바른 음식을 먹고 바른 생각으로 살아야 지혜롭고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답니다.” 스님이 음식에 까다로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음식의 그런 막중한 역할 때문이기도 하다. “육류와 파, 마늘은 수행자가 피곤할 때는 허락하기도 했어요. 그러나 가공식품은 약이 아니라 독이에요.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장아찌를 만들 때 음료수를 넣어 만들어요. 그렇게 하면 상하지 않죠. 하지만 자연적이라고는 볼 수 없죠. 설탕은 빠르게 흡수되면서 열을 발산하니까요. 저는 일체 안 먹어요. 차라리 깨끗한 생선은 부처님이 허락했지만 이런 건 안 된다고 봐요.” 스님에게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먹어야 하냐고 묻는다고 한다. 그때마다 스님은 뭔가를 먹으려 하지 말고 버리라고 말한다. 그래서 스님은 단언한다. “다섯 살짜리 아이가 이해하지 못하는 첨가제는 먹지 말아야 합니다.” 김치와 장이 수행자의 맛 자연에는 온통 먹을 게 천지에 널려 있다. 그것들은 모두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는 음식이다. 그렇다면 스님이 선호하는 음식은 무엇일까? “김치, 그리고 장. 그게 기본이죠. 나는 김치 속에 간장, 된장, 고추장을 넣어요. 김치에 발효음식을 넣는 거죠. 그래서 과거 스님들이 장을 다섯 말을 담갔다면 나를 만나면서 두 말을 더 담그게 됐어요(웃음).” 스님은 변질되지 않은 사찰음식을 보다 많은 사람이 먹을 수 있도록 하려면 김치를 집에서 담가 먹어야 한다고 말했다. “모든 음식의 재료는 또 다른 생명이에요. 그 생명을 내 몸에서 잘 흡수되게 만들려면 중간 역할이 필요하죠. 그것을 장과 발효가 해주는 거예요. 그리고 요즘은 배추에 농약을 많이 쳐서 쓴맛이 나요. 진짜 유기농은 처음도 달고 끝도 달아요. 김치를 담그고 그 쓴맛이 없어지는 때가 오는데, 이는 발효를 통해 중금속이 중화됐기 때문이죠.” 스님은 밥 중에서는 쌀밥을 최고로 친다. 그런데 식은 밥이 아니라 바로 한 밥만을 먹는다고 한다. 바로 한 밥은 3분의 1만 먹어도 에너지가 생기지만 식은 밥은 두세 공기를 먹어도 몸에 흡수가 안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제야 ‘요리사라는 직업은 의사와 같다’는 스님의 말이 이해가 갔다. 불가의 가르침에 따라 철저하게 음식의 효능과 조화를 따지는 그의 모습에서 환자를 살피는 의사의 모습을 본다. 음력 4월은 부처님 오신 달이다. 부처님에게 한 가지 밥과 반찬을 공양하라 하면 선재 스님은 어떤 음식을 만들까? “우선 참죽나물로 만든 밥이 좋겠어요. 그 이파리를 말려 볶아 으깨서 넣은 밥. 원래 참죽나물은 참선하는 스님들이 먹는다 하여 ‘참중나물’이라고 불리기도 해요. 단백질이 많고 열이 많은 나물이죠. 모든 야채가 냉한데 이건 뜨거워요. 이 밥으로 비빔밥을 만들어 올리면 좋겠어요.” 사찰음식을 만드는 수행자들은 음식이 몸과 마음을 합일(合一)시켜준다는 사실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깨달음은 음식을 통해서도 오는 것임을 이제야 알겠다. 거기에는 스스로를 다스린다는 명제가 있다. 선재 스님이 만들어준 오색화전과 상추떡을 먹고 나니 왠지 맑은 심성을 되찾아 착한 사람이 된 듯했다. 그리고 평소의 오만함이 무모한 자신감으로 이어졌다. “스님이 하시는 거 보니 사찰음식 너무 쉬워 보이는데요, 저도 집에 가서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의기양양한 기자를 보며 선재 스님은 어리석은 중생을 위해 또 한 번 미소를 내어주셨다. 그 사이 봄날 보리사 장독대에서 익어가는 장(醬) 내음은 홍매화 향기 못지않게 코끝을 간질였다. 선재 스님이 가르쳐준 사찰음식 취나물전병, 진달래전병 새알 빚어 꼭꼭 눌러 기름 둘러 지져낸 희고 둥근 반죽 위에 진달래를 꽃피우게 해서 둘둘 말아 김밥처럼 썰면 진달래전병이 되고, 취나물 잎을 얹어 둘둘 말면 취나물전병이 만들어진다. 오색화전 찹쌀가루에 단호박, 비트즙, 쑥즙, 백년초 가루를 각각 섞어 다섯 가지 색을 낸 반죽을 팬에 기름을 두르고 구운 뒤 진달래꽃, 제비꽃, 냉이꽃, 민들레꽃 등을 전에 얹으면 오색화전이 만들어진다. 상추전, 취나물전 상추전은 감자를 갈아서 부쳐내고 취나물전은 갈아놓은 호박과 함께 부친다.
- 2017-05-02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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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문도 뱃노래길, 바다 건너 만난 꽃다운 어느 날
- 여수항을 출발한 쾌속선이 손죽도와 초도를 들른 후 남쪽을 향하다 좌우로 요동치기 시작한다. 바람이 제법 부는 탓에 파도가 뱃전에 자꾸 부딪히는 모양이다. 하늘이 도와야 갈 수 있다는 섬 거문도. 내륙과 제주도 중간 망망대해에 위치해 좀처럼 출입을 허락하지 않는다. 불현듯 우리를 태운 쾌속선이 요동을 멈춘다. 동도, 서도, 고도 세 섬이 병풍처럼 둘러싼 도내해(島內海)에 무사히 안착한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마침내 거문도에 첫발을 디뎠다. 동경 127°11′, 북위 34°에 위치한 거문도는 동도(東島), 서도(西島), 고도(古島) 이렇게 세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옛 문헌에는 삼도, 삼산도, 거마도 등으로 기록돼 있는데 현재 거문도로 불리는 데는 두어 가지 설이 전해진다. 첫째는 섬에 아름드리나무로 가득 차 한낮에도 어두웠는데 이때 고유어 ‘검은’을 한자어로 바꿔 거문(巨文)이 됐다는 설이다. 두 번째 설은 중국 청나라 제독 정여창이 섬에 학문이 뛰어난 사람이 많은 것을 보고 문장가들이 많다는 뜻인 ‘거문(巨文)’으로 개칭하도록 건의해 지금의 이름이 됐다는 설이다. 한반도 남쪽 외딴 섬까지 청나라 제독이 찾아온 연유는 거문도의 생김새에서 찾을 수 있다. 거문도를 구성하는 세 섬은 원을 그리듯 포진해 있는데, 덕분에 가운데 위치한 도내해(島內海)는 외부의 험한 날씨 영향을 적게 받는다. 게다가 수심까지 깊어 무리 없이 큰 배가 진입할 수 있고 이는 남해 망망대해에서 천혜의 항구 역할을 하기에 제격인 셈이다. 한반도 침략을 노리는 서구 열강들 중 영국이 먼저 1885년에 거문도 불법점거를 행했고 이때 조선을 대신해 협상을 벌이던 청나라의 장수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옛부터 사람들이 건너와 살았던 동도, 서도와 달리 무인도였던 고도는 영국의 해군기지로 사용되다가 이후 일제의 어업기지로 탈바꿈하면서 세 섬의 행정 중심지로 개발됐다. 때문에 거문도에는 여전히 영국군 묘지나 일제 군사시설 등이 남아 있고 일본식 건축 양식을 가진 주택들도 간간이 눈에 띈다. 거문도가 바다 위 요충지 역할을 했기에 1905년 서도에는 우리나라 남해 연안 최초로 등대가 들어서기도 했다. 망망대해 위를 걷는 길 동도 선착장에 잠시 들렀던 쾌속선이 고도에 위치한 거문도여객선터미널에 정박했다. 흔들리던 여객선에서 덩달아 요동치던 속을 안정시키며 땅을 밟았다. 김유희, 최미연씨도 같이 내린다. 서울서 여수까지 350km, 여수에서 거문도까지 다시 115km. 봄을 찾아 먼 길을 왔다. 터미널 근처 숙소에 짐을 풀어 몸을 가볍게 하고 본격적으로 섬 탐방에 나선다. 오늘 목적지는 거문도 등대. 단, 덕촌리 마을 뒤편 불탄봉을 경유하는 코스를 택해 가벼운 산행을 곁들이기로 한다. 밑으로 배가 지나다닐 수 있게 봉긋한 아치형으로 된 삼호교를 건너 고도에서 서도로 넘어갔다. 산행은 덕촌리 거문중학교 옆길로 시작한다. 가파르지 않은 오르막을 그리 오래 걷지도 않았는데 뒤편으로는 벌써 바다풍경이 펼쳐진다. 등산로 옆으로는 육지에서 보던 것과 다른 생소한 식생들이 보인다. 연평균 14.4℃로 따뜻한 남쪽 기후 때문이다. 시작부터 낯설음이 재미를 준다. 이번 여정 중 가장 높은 불탄봉이 해발 200m가 채 안 돼 거문중학교 담벼락부터 억새밭이 지천인 능선까지는 15분 정도밖에 안 걸렸다. 거문도 등대는 남쪽이지만 우리는 잠시 반대 방향에 있는 불탄봉을 들렀다 가기로 한다. 일제 강점기 지하 관측시설 위에 설치한 불탄봉 데크에서 우리는 첫 거문도 파노라마를 즐겼다. 바람은 사뭇 불었지만 그래도 사방팔방 펼쳐진 섬과 바다 풍경이 시원하다. 다시 방향을 남쪽으로 잡아 억새밭을 지난다. 억새밭 이후에는 동백나무숲이다. 끔벅이는 황소 눈만큼 큰 빨간 동백꽃이 피어 있기도, 이미 떨어져 있기도 하고 이제 피려고 꽃망울을 웅크린 것도 있다. 길은 평탄해 동백나무 터널이 편안하게 느껴진다. 한 차례 오르막과 내리막을 지나자 절벽 해안에 맞닿는다. 앞으로는 망망대해가 펼쳐지고 진행 방향 저 멀리에는 목적지 거문도 하얀 등대가 모습을 드러낸다. 파도에 요동치던 배를 놀이기구 정도로 여긴 유희씨와 달리 고소공포증이 있는 미연씨는 경치를 제대로 감상하지 못한다. 아찔한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고 짜릿한 절벽 풍경이 주는 유희를 만끽하기 위해 절벽과 조금 거리를 두고 걸었다. 꽃다운 계절, 꽃다운 시절 보로봉까지 절벽 해안길이 이어진 후에는 365계단을 내려간다. 바다에 인접한 목넘이를 지나고 나면 곧 거문도 등대로 이어지는 숲길이다. 동백나무, 생달나무, 해국과 같이 잎이 두텁고 광택이 강한 녹색을 띠는 식생들이 길 옆을 채운다. 느슨한 경사를 오르다 보니 멀리서 보이던 거문도 등대가 어느덧 코앞이다. 등대 앞 관백정에 서서 동쪽을 바라보았다. 백도가 어슴푸레 모습을 드러낸다. 날이 맑은 날에는 제주도까지 조망된다 한다. 수평선 끝에서부터 왔을, 여전히 강한 바람이 불지만 훈훈한 봄기운이 만연한 기색이다. 서서히 해는 지고 있는데 날이 흐릿해 노을이 보이지는 않을 태세다. 목넘어까지 왔던 길을 돌아 나온 뒤 도로를 따라 숙소가 있는 고도로 돌아가기로 한다. 오늘 저녁은 자연산 횟감으로 배를 든든히 채우기로 하고 다소 지친 걸음에 힘을 보탠다. 다음 날. 몸이 제법 찌뿌둥하다. 어제 예상보다 많은 거리를 걸었다. 여독이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12km 정도를 걸었으니 오늘은 조금 편안히 서도 북쪽 끝 녹산등대를 다녀오기로 한다. 택시를 불러 서도 북쪽 끝에 있는 거문초등학교 서도분교장 인근까지 갔다. 오늘은 날이 좋아 차창 밖 바닷물이 반짝이며 생동감을 발산한다. 녹산등대를 향하는 길은 거문초등학교를 기점으로 양옆 두 갈래로 나뉜다. 택시기사는 오른쪽 길에 비해 왼편 길이 완만하다며 왼편으로 들어갔다 오른편으로 나오는 코스를 추천했지만 우리는 오른편을 먼저 택했다. 누적된 피로로 일행들이 오르막보다 내리막이 더 힘들다고 하소연했기 때문이다. 가파르다고 한 오른편 길도 생각만큼 가파르지는 않다. 10분 정도 오르니 얕은 언덕에 가렸던 녹산등대 전경이 드러난다. 풍경은 그림 같다. 기본은 우선 쪽빛 바다와 하늘이다. 여수에서 보던 빛깔보다 더 맑고 밝은 바다, 말 그대로 화창해 온기를 품은 봄 하늘이 캔버스 전체를 가득 채운다. 그다음은 바다 가장자리 하얀 포말 일으키는 해안가 바위와 초원, 잘 정비된 산책로다. 산책로 끝은 녹산등대가 하얀 점을 찍는다. 봄기운 만연한 망망대해 위 산책로로 꽃다운 나이 방년 29세, 25세 아가씨들이 걸어간다. 시간을 확인하니 육지로 나가는 배를 탈 시간까지 아직 넉넉하다. 여유를 부려 천천히 걷는다. 등대 아래서 바람도 느끼고 햇살도 만끽한다. 근처 해변에 들러 투명한 바다도 한눈 가득 담아 넣는다. 꽃다운 계절에 꽃다운 시절, 이제 찬란한 봄이다.
- 2017-04-04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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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공지능 ‘왓슨’ 암 환자 구세주 될까?
- 지난해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대결은 많은 것을 바꿨다. 일명 ‘알파고 쇼크’로 불리는 이 사건은 전 세계 미디어들이 2016년 10대 뉴스로 꼽을 만큼 인류에게 충격을 줬다. 의료계에서도 이런 충격적 현상이 진행 중이다. 암 치료를 돕는 인공지능 프로그램 ‘왓슨’의 국내 병원 도입이 그것이다. 이세돌을 넘은 알파고처럼 왓슨은 과연 名醫를 넘은 神醫가 될 수 있을까? 인공지능 왓슨(Watson)은 과학자들 사이에선 이미 유명인사다. 왓슨은 인간을 최초로 꺾은 인공지능 체스 프로그램 ‘딥블루’를 개발한 IBM이 선보인 또 다른 인공지능 프로그램. 이미 2011년 미국 TV 프로그램 제퍼디 퀴즈쇼에 참가해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며 우승한 바 있다. 이후 왓슨은 의료용으로 특화돼 학습을 계속해왔는데, 의료용 인공지능을 ‘왓슨 포 온콜로지(Watson for Oncology)’로 부르는 것도 이러한 특징 때문이다. 왓슨은 2012년 처음 미국 메모리얼슬로언케터링암센터(MSKCC)에서 ‘레지던트’ 생활을 시작하며 암 환자의 진료를 터득했으며 현재도 교육을 받고 있다. 선진 의료기관의 자체 제작 문헌과 290종의 의학저널, 200종의 교과서, 1200만 페이지에 달하는 전문자료를 학습한 왓슨의 암 진단 정확도는 지속적으로 높아져 연말이면 전체 암의 약 85%를 분석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왓슨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각종 암에 대한 왓슨의 진단이 전문의와 90% 이상 일치되는 결과를 내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미국암학회는 왓슨이 평균적인 전문의에 비해 초기 오진 가능성이 적다는 내용의 조사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길병원에서 국내 암 환자 첫 진료 지난해 12월 5일은 국내 의료계에 기념비적인 사건이 기록된 날이다. 가천대 길병원 진료팀은 대장암 진단을 받은 61세(당시) 남성 조태현씨에게 왓슨을 이용한 진료를 진행했다. 조태현씨는 이날 국내에서 인공지능으로부터 진료받은 첫 번째 한국인이 됐다. 왓슨은 의료진을 통해 입력된 조태현씨에 대한 다양한 사항들을 분석해, 불과 몇 초 만에 치료 방법을 제안했다. 길병원의 왓슨 도입에 대한 사회적 반향은 예상외로 컸다. 길병원에서 왓슨에게 진료받고 싶다는 문의가 기대 이상으로 많았고, 소위 빅5로 불리는 서울의 큰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암 환자가 왓슨을 찾아 길병원을 방문하기도 했다. 길병원 의료진은 “왓슨의 기대효과 중 하나는 인천 지역의 암 환자가 불필요하게 타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라고 겸손하게 표현했지만 실제로는 타 지역 환자까지 불러들이는 일종의 ‘간판’ 역할까지 하고 있다. 왓슨에 대한 의료계와 환자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가운데 부산 지역 암센터인 부산대학교병원도 두 번째로 왓슨을 도입했다. 한국IBM은 부산대학교병원이 ‘왓슨 포 온콜로지’와 ‘왓슨 포 지노믹스(Watson for Genomics)’를 도입한다고 1월 25일 밝혔다. 이어 충남 지역 암센터인 충남대학교병원도 왓슨 도입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인공지능 의사의 암 치료 방법 그렇다면 왓슨은 암 치료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 암 치료는 일반적으로 암인지를 확인하는 진단 과정과 암 확진 후 어떻게 치료할 것인지 계획을 세우는 과정, 그리고 이 계획에 따라 수술과 항암치료 등을 진행하는 과정으로 나눌 수 있다. 왓슨은 여기서 중간 과정인 치료 계획 수립에만 참여한다. 길병원은 암이라고 확진 판정을 받은 환자를 대상으로 왓슨을 활용한 다학제 진료를 진행하고 있다. 길병원에서는 진단을 위해 왓슨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암 환자가 아니면 왓슨을 만날 수 없다. 쉽게 말하면 암 환자의 치료를 어떻게 진행하면 좋을지 암 치료 방법을 제안하는 것이 왓슨의 역할이다. 물론 그에 따른 치료는 의사의 몫이다. 인간의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당연히 아무도 몰랐던 ‘하늘에서 뚝 떨어진’ 비기를 발휘하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전문의들이 모두 알고 있는 범위 내의 치료법에서 최적의 것을 골라낼 뿐이다. 치료 가능한 암종도 대장암, 직장암, 유방암, 폐암, 위암, 자궁경부암으로 아직은 제한적이다. 이후 난소암과 전립선암까지의 확대를 계획 중에 있다. 암 치료 계획을 세우는 일은 보통일이 아니다. 환자의 신체적 특징이나 암종 등을 고려하면서, 미국종합암네트워크(NCCN) 암 치료 가이드와 미국 MSKCC 전문지식 데이터 등 천문학적으로 방대한 문헌들을 참고해 환자의 치료법을 선택한다. 이러한 특징들 때문에 전문의들은 이미 치료가 많이 진행된 환자보다는 치료 계획을 세워야 하는, 즉 최근 암 진단을 받은 환자 혹은 암이 재발된 환자에게 왓슨의 능력이 효과적으로 발휘될 것이라고 조언한다. 의료진 능률을 높여주는 구심점 돼 길병원 의료진들은 왓슨 도입 후 2개월간 100명 이상의 환자를 치료하면서 얻은 긍정적 효과 중 하나로 효율적인 의료진 간의 협업과 예기치 못한 부작용을 방지하는 효과를 꼽는다. 길병원에서는 여러 과의 의사가 참여하는 ‘다학제 진료’ 과정에서 왓슨을 활용한다. 왓슨 암센터에는 8개 전문과 30여 명의 전문의가 있는데, 왓슨 치료시간에는 이들 전문의가 한데 모여 환자의 치료 계획에 대한 왓슨의 의견을 검토하고 최종적으로 어떤 과정으로 치료를 진행할지 결정한다. 이런 방식은 타 병원의 치료 과정과 다르다. 일반 병원은 담당의가 환자의 치료 방법을 독자적으로 결정하고, 필요할 때 타 분야의 전문의에게 조언을 얻는 방식으로 환자를 치료를 한다. 다학제 진료 방식을 도입해 시도하는 병원도 있지만, 의사들 사이에서 이견이 발생할 경우 ‘최선’의 치료 방법이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의사 간 서열이나 이해관계에 의해 치료 방법이 결정될 수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왓슨 치료에 참여하고 있는 길병원 혈액종양내과 김영생 교수는 “왓슨은 원활한 다학제 진료를 위한 훌륭한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어요. 왓슨이 우선순위에 따라 치료 방법을 제시하면 의료진은 별다른 갈등 없이 그 방법을 검토하면 되죠. 왓슨 진료시간은 환자당 10분 남짓에 불과하지만, 왓슨의 의견에 대응하기 위해 의사들은 환자에 대한 사전 검토를 더 충분히 해야 합니다. 일종의 자극제 역할도 해주는 것이죠”라고 설명한다. 왓슨이 수많은 논문을 바탕으로 부작용에 대한 모든 경우의 수를 순식간에 계산해 검토하기 때문에 자칫 의료진이 할 수 있는 실수를 막아주는 것도 장점 중 하나로 꼽힌다. 왓슨 진료비는 아직 ‘무료’ 왓슨에게 치료를 받고 싶다면 왓슨이 근무 중인 병원으로 찾아가면 된다. 타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중이라도 가능하다. ‘명의’를 만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대기시간도 그리 길지 않다. 길병원은 왓슨에게 치료받고 싶은 환자가 늘면 왓슨의 진료시간도 늘릴 계획이다. 왓슨을 통해 치료 계획을 점검하고 원래 치료받던 병원으로 돌아가도 된다. 병원의 수익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중증 환자가 병원을 자주 옮겨 다니는 것은 의사들이 권하지 않지만, 환자가 떠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렇다면 환자들이 궁금해할 왓슨의 진료 비용은 얼마나 될까? 유명 의사들처럼 특진비라도 받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인공지능 진료라서 아직 진료비를 청구할 근거가 마련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길병원은 기존의 암 치료 비용 외에 왓슨의 특별 진료비를 받고 있지는 않다. 이후 진료비 청구의 근거가 마련되어 비용이 발생해도 왓슨으로 인한 경제적 효과는 유효하다. 가장 먼저 왓슨을 도입했던 미국의 경우 그 효과를 ‘의료 민주화’라고 표현한다. 일부 병원에서만 받을 수 있는 높은 수준의 고가 의료 서비스를 일반인들도 받게 됐다는 의미다. 길병원 인공지능기반 정밀의료추진단 이언 단장은 “왓슨 암센터를 이용하면 진단을 위한 검사 남용 예방, 진단의 오류 최소화, 최적의 처방, 진료비용 부담 감소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왓슨을 통해 세계적 수준의 암 진료 문턱을 과감히 낮출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라고 말했다. 전망 밝지만 보완도 필요 앞으로 왓슨의 진료가 암 치료의 표준이 될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다. 왓슨도 아직 갈 길이 남아 있다. 길병원 김영생 교수는 “아직 도입 초기이고 외국에서 개발된 프로그램인 만큼 보완해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왓슨이 한국인 환자의 특징이나 생활환경, 소득수준, 국내 건강보험제도까지 고려해주진 않으니까요. 고쳐나가야 할 부분에 대해서는 개발사인 IBM과 의견을 교환하고 있고, 병원 내에서도 독자적인 연구를 진행 중에 있습니다”라고 밝혔다. 왓슨 진료를 좀 더 지켜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서울대학교병원 교수를 역임한 디지털헬스케어연구소 최윤섭 소장은 이렇게 설명한다. “왓슨이 의료계 전체에 주는 긍정적인 영향은 아직까지 명확하지 않으며, 이는 더 증명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일반적으로 왓슨의 도입을 통한 여러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겠지만, 이 중에 아직까지 증명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도 왓슨을 포함한 딥러닝 등 인공지능 기술이 의료 분야로까지 확대 적용된다면 변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인공지능의 영향을 너무 과장할 필요는 없겠지만, 현재의 연구결과들을 보면 변화는 불가피해보입니다.”
- 2017-02-27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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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운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 친정엄마가 필자 아파트 옆 동으로 이사 오셨다. 엄마와 필자는 영화 보기를 좋아하는 같은 취미를 가졌다. 엄마 집에 케이블방송을 설치한 후 요즘 우리는 좋은 영화 찾아보기에 열중하고 있다. 각각 다른 장르의 수많은 영화 중에서 보고 싶은 영화를 골라내기란 그리 쉽지는 않다. 그래서 엄마랑 필자는 리모컨을 들고 계속 영화 제목을 돌리고 있다. 엄마는 한국영화는 보지 않으신다. 알고 보니 언젠가부터 귀가 나빠져서 자막이 나오는 외국영화를 볼 수밖에 없다고 하셨다. 이유를 알고 나니 쓸쓸하고 가슴이 아팠다. 엄마는 역사 이야기를 좋아하신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유럽이나 서양의 왕실 이야기에 아주 해박한 지식을 갖고 계신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동안 엄마의 설명을 듣는 건 재미있고 영화에 대한 이해가 잘 되는 장점이 있다. 오늘은 많은 영화 중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를 선택했다. 필자가 아는 ‘앙투아네트’는 그저 프랑스 왕실에 시집온 철없는 왕비가 극심한 사치를 부리다 혁명군에 의해 기요틴으로 사형당했다는 정도였는데 영화를 보는 동안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잘못 알려진 내용도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시대 배경으로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는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왕녀인 어린 앙투아네트는 동맹을 위해 정략결혼으로 어린 나이에 프랑스에 홀로 오게 된다. 할아버지 루이 14세는 나라를 잘 통치하고 있었지만, 왕실이나 귀족의 머리 모양과 의상에서 화려한 허영의 극치를 보여 주었는데 여인 의상 한 벌이면 서 너 명의 옷을 만들고도 남았을 것으로 보일 정도였다. 앙투아네트 역의 배우가 인상이 좋고 연기를 잘해서인지 그렇게 사치만 일삼은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고 역사가에 의해 내려오는 이야기도 두 가지 설이 있다. 오스트리아를 통치하던 어머니의 엄명을 받고 정략으로 어린 나이에 혼자 프랑스에 도착한 그녀가 얼마나 두렵고 외로웠을지 상상이 된다. 더구나 적국으로부터 온 왕녀라는 이유로 귀족들의 차가운 눈초리는 그녀를 더욱 움츠리게 했을 것이다. 예쁘고 고운 심성의 그녀는 잘 어울려보려고 노력하지만, 권위적인 프랑스 귀족들과 친해지기는 어려운 듯 보였다. 남편이 된 루이 16세는 앙투아네트에게 그저 예의를 지키며 대했고 사랑하지 않는 듯 거들떠보지 않았다. 사실 7년 동안 그들은 잠자리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앙투아네트는 사치와 허영에 눈을 돌린 것이라는데 그 문제에 대해서는 해석이 다르게 내려오고 있다. 역사는 성공한 사람의 편에서 이루어진다고 앙투아네트가 사형을 당했기 때문에 그녀의 좋은 점이 가려지고 루머가 이어졌다는 설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일화로 프랑스 국민이 배가 고파 살 수 없다 했을 때 앙투아네트가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정말 그렇게 말했다면 철없고 나쁜 사람이지만 그런 말은 한 적이 없었다는 문헌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도 그녀가 사치를 즐긴 것은 사실일 것이다. 어린 나이에 다른 나라로 시집왔는데 남편은 모른 척하니 주변 귀족들과 어울려 사치 향락에 빠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국민들은 너무나 가난하고 배고픔에 허덕이는데 왕실은 큰돈을 물 쓰듯 하며 향락에 빠져있으니 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혁명의 도화선이 된 스캔들로 유명한 목걸이 사건이 있다. 앙투아네트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추기경이 그녀에게 선물하려고 엄청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샀다. 그러나 약간의 돈만 지급했을 뿐 외상으로 사서 궁궐에 자주 드나들던 백작 부인에게 왕비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는데 중간에 이 백작 부인이 다른 나라로 빼돌려 팔아먹었다고 한다. 보석상은 추기경이 나머지 돈을 주지 않자 왕비에게 직접 청구서를 보냈는데 목걸이를 본 적도 없던 왕비가 백작 부인을 잡아들여 감옥에 가두었다. 그러나 간수를 매수해 백작 부인이 도망을 가버리자 국민들은 앙투아네트가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혁명을 일으켰다. 그들은 평소 심한 사치를 한다고 알고 있어 그녀를 믿지 않은 것이니 앙투아네트는 참으로 억울한 왕비였다. 그러나 프랑스가 적자가 된 것은 왕실의 사치 허영뿐 아니라 영국과 전쟁하고 있는 미국을 돕느라 국고를 탕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도 그 당시 프랑스에서 만들어 준 것이다. 결국, 혁명군에 의해 처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감옥에서 처형 소식을 듣고 하룻밤 사이에 머리가 백발로 변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슬픈 마음이 든다. 영화는 감옥에 들어가 괴로워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정책적으로 여리고 순수했던 한 여인이 루머와 스캔들에 휩싸여 쓸쓸하고 무서운 종말을 맞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어떤 모습이 진짜 앙투아네트였을까? 정치의 희생양이 된 거라면 너무 불쌍하고 30대 후반의 나이로 단두대에서 죽은 그녀가 매우 안타깝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엄마와의 토론은 계속 이어졌는데 화려한 궁중 모습과 귀족 여인들의 패션을 감상해 본 것도 영화 보는 재미와 즐거움 중 하나였다. 케이블 TV에는 수많은 영화가 있어서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 어쩌다 보석 같은 좋은 영화도 발견할 수 있으니 한가한 시간엔 영화 한 편 찾아보는 호사를 누려 봐도 좋을 듯하다.
- 2017-02-23 1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