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동파는 황주에서 매달 아주 적은 생활비를 받았기 때문에 식솔들의 의식주는 예전에 해두었던 저축으로 해결하고 있었다. 지출을 절약하기 위해서 그는 매달 초 저축했던 돈 가운데 4000~5000개의 동전을 꺼내서 한 꿰미에 150개씩 나눈 뒤, 집 대들보에 걸어놓고는 매일 한 줄씩 풀어서 사용하였다. 가능하면 하루의 지출을 한 줄의 동전으로 제한하려고 했다. 만약 그날 저녁에 몇 개의 동전이 남으면 단지에 넣고, 그다음 날에는 다른 동전 줄을 풀어서 사용했다. 한 달이 지나면 단지의 동전을 정산해서 손님들이 올 때 접대비용으로 사용하였다.” (스야후이, )
요즘 개인형 퇴직연금(Individual Retire ment Pension, 이하 IRP)이 금융계의 핫이슈다. 지난 4월 퇴직연금법인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시행령 개정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해 7월 26일부터 소득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IRP에 가입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노후 빈곤율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점은 전 세계가 아는 사실이다. 공적연금의 보장수준이 낮기 때문이다. 공적연금 보장수준을 높이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세대 간 부조에 의존하는 공적연금의 특성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인구학자인 서울대 조영태 교수는 저서 에서 “사회적 미래는 정해져 있을지언정 개인의 미래는 매 순간의 판단과 선택과 노력으로 ‘정해나갈’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사학연금을 받게 될 20년 뒤에는 인구구조상 사학연금 급여가 반 토막 날 가능성이 크다며 별도의 노후대책을 강구하고 있다는 말도 덧붙인다. 아무리 사회적 미래가 암울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 해도 개인의 미래는 ‘하기 나름’이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오대시안(烏臺詩案)이라는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44세에 좌천된 소동파가 철저하고 체계적인 절약과 황무지를 개간해 몸소 농사를 지으며 고난을 헤쳐 나갔듯이(전원시를 많이 쓴 중국의 고대 문인들 중 장기간 농사 경험이 있는 사람은 도연명과 소동파 둘뿐이다), 현재의 삶이 고달프다고 욜로(YOLO)만 부르짖다간 언덕 너머에 광활하게 펼쳐진 대초원 같은 후반 인생의 무한한 가능성을 외면하는 우를 범할 가능성이 크다.
이런 우를 최소화하고 우리의 인생을 만개시키는 데 IRP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저출산·고령화시대 자조노력연금의 대명사로 우뚝 설 IRP를 남이 아니라 내 잔칫상에 올려놓기 위해서는 철저히 파보고 스마트하게 이용해야 한다.
IRP란 무엇인가?
원래 IRP는 근로자가 직장을 옮기거나 퇴직할 때 받은 퇴직급여를 은퇴할 때까지 계속 축적해나갈 수 있도록 한 제도다. 전문용어로는 통산장치(portability)라고도 부른다. 애초에 IRP는 퇴직(일시)금을 수령한 퇴직 근로자와 퇴직연금제도에 가입한 재직 근로자들만 이용할 수 있었다. 이번에 시행령이 개정되면서 7월 26일부터는 자영업자, 근속기간 1년 미만 근로자와 1주 소정근로시간(所定勤勞時間)이 15시간 미만인 단시간 근로자 등의 퇴직급여제도 미설정 근로자, 퇴직금제도 적용 재직 근로자, 공무원·군인·사립학교교직원·별정우체국직원 등 직역연금제도 가입자들도 가입할 수 있도록 IRP의 문호가 활짝 열린 것이다. 사실상 모든 취업자가 IRP에 가입할 수 있게 된 셈이다.
2017년 6월 말 현재, IRP 가입 건수는 226만 6000건이고, 적립금액은 13조6928억원에 달한다. 적립금액 기준으로 2016년 성장률은 14.1%로 다소 주춤했지만 2015년과 2014년에는 각각 44.3%와 24.8%라는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올해는 가입 대상이 크게 확대됨으로써 이전 수준의 성장률을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된다. IRP의 높은 성장률과 자조노력연금 대명사의 역할은 우리나라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미국의 경우 우리나라의 IRP에 해당하는 IRA(Individual Retirement Account)가 이미 2010년에 DC(확정기여)형을 추월해 퇴직급여제도 중 가장 큰 적립금 규모를 자랑한다. 2017년 3월 말 미국 IRA의 적립금 규모는 8조2000억 달러에 달한다. 일본에서는 IRP를 iDeCo라고 부르는데, 2017년 6월 말 가입자 수는 54만9943명에 불과하지만, 최근 자영업자는 물론 학생·전업주부·공무원·회사원 등 20세 이상 60세 미만 국민이면 누구나 IRP에 가입할 수 있도록 문호가 대폭 확대되었다. 명실상부 전 국민적 노후준비수단으로 격상된 것이다. 바야흐로 IRP가 글로벌 대세로 부상하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이 대열에 동참하고 있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라 하겠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결국 어느 정도 여유 있는 사람만 가입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말을 한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다고 맞는 말도 아니다. 지금 당장 살림이 쪼들리는 사람들에게도 노후는 중요하다. 일일 생활비를 아껴 단지에 모아놨다 손님 접대비로 사용했다는 소동파처럼 돈이 부족한 사람들도 나름의 방법으로 미래를 준비할 필요가 있다. 이들이 IRP에 가입하면 의외의 효과를 볼 수도 있다. 바로 압류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민사집행법에서는 급여채권의 2분의 1에 해당하는 금액을 압류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상 퇴직연금채권은 전액 압류금지채권으로 봐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2014년 1월 23일) 이후 퇴직연금은 급여압류 대상채권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IRP는 퇴직연금의 한 종류다.
IRP에는 어떤 혜택이 있나?
IRP의 가장 큰 혜택은 세금을 절약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인 금융상품에 가입하면 발생한 이자(배당 포함)에 대해 15.4%의 이자소득세를 내야 하지만 IRP에 가입하면 이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 대신 나중에 연금으로 받을 때 3.3~5.5%의 연금소득세만 내면 된다. 이자소득세만큼 적립액이 늘어나고 이자에 이자가 붙는 복리효과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IRP에는 연금저축과 합산하여 연간 1800만원까지 납입할 수 있다. 보통 세액공제 한도액인 700만원까지 납입을 권유받거나 그렇게 납입하는 가입자가 많은데, 세액공제액을 초과하는 1100만원을 잘 활용하면 의외의 큰 효과를 누릴 수 있다. 이 1100만원은 세액공제 혜택을 받지는 못하지만 소득세를 절감할 수 있고, 중도해지나 연금을 받을 때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 요즘 보기 힘든 비과세 상품인 셈이다. 자금 사정에 여유가 있는 분들은 IRP 납입 최고한도액을 적극 활용하면 노후가 든든해질 것이다. 참고로 연금소득세율은 연령별로 다른데 연금소득자가 70세 미만인 경우는 5.5%, 70~79세는 4.4%, 80세 이상은 3.3%다. 단, 연금소득자가 70세 미만이더라도 종신연금을 신청하면 4.4%의 세율을 적용받는다.
IRP의 두 번째 혜택은 연금저축과 합산해 연간 700만원까지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IRP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이 연금저축에 가입하면 400만원까지만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는 것에 비해, 연금저축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이 IRP에 가입하면 700만원까지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다. 근로자 등 급여소득자의 세액공제율은 연간 총급여가 5500만원 이하인 사람은 16.5%를, 이를 초과하는 사람은 13.2%를 적용받는다. 자영업자 등 종합소득세를 적용받는 사람들의 세액공제율은 4000만원을 기준으로 그 이하는 16.5%, 초과하는 사람은 13.2%다. 연간 700만원을 납입할 경우 연말정산 때 16.5%를 적용받는 사람은 115만5000원을, 13.2%를 적용받는 사람은 92만4000원을 돌려받는다([표1] 참조). 쏠쏠하지 않은가?
IRP에 대한 세제혜택은 또 있다. 바로 퇴직금을 IRP 계좌에 넣어두고 운용하다 55세 이후에 연금으로 수령하면 퇴직소득세를 30%나 줄일 수 있다는 점이다(연금수급 자격에 대해선 [표2] 참조). 많은 사람이 퇴직할 때 퇴직금을 일시금으로 받아간다. 퇴직금을 일시금으로 받게 되면 퇴직금 규모와 근속기간에 따라 0~28.6%의 퇴직소득세를 납부해야 한다. 실제로 받는 퇴직금이 생각보다 적은 이유다. 그러나 퇴직금을 IRP 계좌로 이체한 뒤 연금으로 받게 되면 퇴직소득세율의 70%만 연금소득세로 납부하면 된다. 퇴직소득세 대비 연금소득세가 30% 절감되도록 소득세법이 개정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퇴직금을 일시금으로 수령했다 하더라도 60일이 경과되지 않았다면 이미 납부한 퇴직소득세를 돌려받을 수 있다. 금융기관을 방문해 IRP 계좌를 개설한 뒤 수령한 퇴직금을 이체하면 퇴직한 회사에서 원천징수해둔 퇴직소득세를 IRP 계좌에 입금시켜주기 때문이다. 만일 퇴직금 중 일부를 사용했다면 남은 금액만 IRP 계좌에 입금해도 입금비율에 맞춰 퇴직소득세를 돌려받을 수 있다.
IRP와 관련해 많은 사람이 오해하고 있는 것이 세액공제한도를 초과해 납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점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세액공제한도 초과분에 대해서는 이자소득세를 면제받는 혜택이 있을 뿐 아니라 다음 해에 세액공제를 신청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연간 총급여가 5500만원을 넘는 근로자가 2017년에 1000만원을 납입했다면 당해 연도에 700만원에 대한 세액공제를 받고, 2018년도에 300만원을 이월신청해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다. 보너스를 받을 경우에 활용하기 좋은 방법이다.
IRP에 가입할 때는 조심해야 할 부분도 있다. 바로 중도에 해지할 경우 이미 세제혜택을 받은 납입금액은 물론 운용수익까지 16.5%의 기타소득세를 내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사망, 해외 이주 등 세법상 부득이한 인출 사유에 해당되는 경우 인출액에 대해 세율이 낮은 연금소득세(3.3~5.5%)가 적용된다. 사유 발생일 이후부터 6개월 이내에 증빙서류를 갖춰 금융회사에 신청하면 된다. 한편 IRP에 가입해 55세 이후 연금으로 수령할 때 연금수령한도를 초과해 수령하는 경우 한도초과금액에 대해 16.5%의 기타소득세가 부과된다. 연금수령한도는 연금개시 신청일 당시의 적립금을 ‘11-연금수령연차’로 나눈 뒤 1.2를 곱해 계산된다. 예를 들어 연금개시 신청일 현재 IRP 적립금 평가액이 5000만원이면 첫해 연금수령한도는 ‘5000만원/(11-1)×1.2=600만원’이 된다.
IRP 가입과 적립금 운용은 어떻게?
절세상품이 줄어들고 있는 요즘 절세덩어리인 IRP는 매우 매력적이다. IRP 가입절차는 의외로 간단하다. 신분증과 [표3]과 같은 필요서류를 준비해 금융기관을 방문하면 그만이다. 일부 금융기관에서는 공인인증서만 있으면 온라인으로도 가입할 수 있으니 업무시간 중 금융기관을 방문하기 힘든 사람들은 이를 활용하면 된다. 계좌를 개설할 때는 0원으로도 가능하다. 계좌를 개설했으면 그다음은 계좌에 들어갈 적립금을 어떻게 운용할지 결정해야 한다. [표4]에서 보는 것처럼 IRP 가입자가 선택할 수 있는 상품도 있고, 선택할 수 없는 상품도 있다.
특히 투자형 상품을 선택할 때는 수익률과 리스크를 잘 따져야 한다. 투자의 세계에서는 현재의 수익률이 미래의 수익률을 보장하지 않는다. 이는 상식이다. 그럼에도 현재의 수익률만 보고 펀드를 선택하는 사람이 많다. 현재의 수익률과 함께 수익률 추이, 벤치마크 대비 수익률 수준, 펀드운용 시스템, 자산배분, 수수료 수준 등을 잘 따져보고 선택해야 한다. 금융기관별 수수료율과 장기(5년/8년) 연평균 수익률은 노동부 퇴직연금 홈페이지에 공시되어 있다.
만약 이미 가입한 펀드의 수익률이 최근 나빠졌다면 다른 펀드로 갈아타자. 이를 위해선 최소한 3개월에 한 번씩은 수익률을 체크할 필요가 있다.
손성동(孫盛東)한국연금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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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금융연구소 수석연구원, 미래에셋퇴직연금연구소 연구실장, 미래에셋은퇴연구소 연금연구실장 역임. 현재는 ‘한국연금연구소’ 대표로 있으면서 1인기업가를 꿈꾸고 있다. 공식 블로그 ‘꿈꾸는 은퇴와 연금’을 통해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며, 부산 동아대와 동서대에 출강하고 있다.
대기업에서 인사담당 임원으로 근무하다 퇴직한 이상철(57세)씨는 전 직장 동료들끼리 월 1회 정기적으로 모이는 OB(Old Boys) 모임에 가입했다. 그가 가입한 모임은 매월 특정한 주제에 대해 2시간 정도 강의를 들은 후 저녁을 먹으며 토론하는 학습모임이다. 이번 달 모임의 주제는 ‘저성장 고령화 사회에서의 생애설계’였다. 이번 강의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평균수명 76세 시대의 나이에 대한 개념과 평균수명 100세 시대의 나이에 대한 개념이 달라져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강사는 청중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인간의 일생을 하루에 비유해 설명했다.
새롭게 생겨난 시간 ‘서드에이지(Third Age)’
평균수명 76세 시대의 인생시계를 4등분하면 오전 6시에 해당하는 나이는 19세다. 오전 6시는 기상시간에 해당하며 19세의 나이는 사회활동을 시작하는 나이를 의미한다. 그리고 정오가 되면 점심을 먹고 잠시 쉬고 오후 6시가 되면 퇴근시간이다. 인생시계에서 오후 6시, 즉 퇴근시간은 퇴직시기를 의미한다. 조퇴하는 사람도 있고 야근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쨌든 오후 6시는 공식적인 퇴근시간, 즉 퇴직시기다. 하지만 평균수명 100세 시대가 되면 시간의 상징은 변한다.
오전 6시 기상시간은 25세가 된다. 그리고 낮 12시는 50세에 해당하고 퇴근시간은 57세에서 75세로 바뀐다. 100세 시대의 인생시계에 의하면 이상철씨는 현재 퇴근시간이 아니라 점심시간 직후에 있다. 100세 시대의 장수 보너스로 인해 새롭게 해석되어야 할 시간이 바로 50세부터 75세까지의 시간이다.
노년 전문가들은 이 시기를 서드에이지(Third Age), 즉 ‘제3의 연령기’라고 부른다. 미국의 사회학자 윌리엄 새들러 박사는 서드에이지를 ‘창조적 불확실성의 시기’라고 하면서 콜럼버스가 발견한 신대륙에 비유했다. 신대륙은 미지의 세계다. 그리고 예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기회가 넘치는 세상이기도 하다. 부모님이나 선배들과는 다른 삶을 원했던 이상철씨는 서드에이지를 제2차 성장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만들어보기로 했다.
역할에 충실한 삶에서 자아실현의 삶으로
퍼스트에이지(First Age)가 배움의 시기이고 세컨드에이지(Second Age)가 가족을 위해 주어진 역할에 충실한 시기라고 한다면 서드에이지(Third Age)는 자아실현을 위해 매진해야 하는 시기다.
이상철씨는 누구보다 열심히 세컨드에이지를 살았다고 자부한다. 그리고 지금부터 남은 인생은 좀 더 자기가 중심이 되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삶을 살며 성장해온 시기를 ‘제1차 성장의 시기’라고 하면 자기 중심의 삶을 살면서 성장하는 삶은 ‘제2차 성장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중심의 삶을 살기로 한 그가 제일 먼저 한 작업은 하고 싶은 일들을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모두 적어보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자료1] 같은 양식지를 이용해 하고 싶은 일들을 구분해 정리해보았다.
이상철씨는 이 양식지를 이용해 하고 싶은 일들을 정리하면서 자기 중심의 삶을 위해 ‘꼭 하고 싶은 것’을 최우선 순위에 놓고 가족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 ‘해야 하는 것’과, 하면 좋지만 굳이 안 해도 상관없는 ‘하면 좋은 것’의 항목을 다음과 같이([자료2] 참조) 채웠다.
이상철씨는 직장에 있는 동안 인사업무를 하면서 조금씩 공부를 한 심리상담에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본인과 상담을 한 후배나 동료들이 도움이 많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떠올리며 심리상담소를 열어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심리상담사를 인생 2막의 직업으로 삼아보기로 했다. 아직은 자녀들이 독립 전이고 국민연금수령 시점도 6년이나 남아 기본소득에 대한 불안감이 없지 않지만 더 늦으면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에 결심을 굳히기로 했다. 그리고 현재 대학에서 상담심리학과 교수로 있는 친구를 찾아가 심리상담사의 길에 대해 자문했다.
제2차 성장을 위한 재무 포트폴리오 변경
이상철씨가 심리상담소를 개소하기 위한 자격과 경험을 갖추기 위해서는 대략 5년의 시간과 대학원 석사과정을 포함한 교육비가 약 5000만원 정도 소요된다. 그리고 심리상담을 진행할 사무실이 필요하다. 당장 돈이 되는 새로운 직장을 구하는 대신 새로운 직업을 위한 공부를 선택한 이상철씨는 가계의 재무구조와 소비구조를 바꿔야만 했다.
그는 현재 거주 중인 아파트를 매각하고 좀 더 외곽의 아파트를 구하기로 했다. 그리고 아파트를 매각한 잔액으로 오피스텔을 사서 임대를 하기로 했다. 오피스텔의 임대료 수입은 현재의 생활비를 보조하고 향후에는 심리상담소로 활용할 계획이다. 이외 자녀독립 지원자금으로 준비해둔 자금의 일부는 본인의 교육비와 창업준비자금으로 사용하기로 하고 자녀들에게 미리 뜻을 밝혔다. 그 대신 퇴직 후 건강을 위해 신경 쓰기로 한 운동 증 비용이 많이 드는 골프를 줄이고 자전거를 타기로 했다. 또자동차를 통해 하는 여행보다는 자전거를 이용한 여행을 더 많이 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대부분의 50대 퇴직자들이 제1차 성장기의 열매를 어떻게 잘 관리할까를 노심초사하고 있을 때 이상철씨는 100세 인생이 선물한 보너스의 시간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다시 한 번 더 배우고 성장하고 성숙하는 삶을 살아보기로 했다.
망망대해에 고깃배 한 척이 유유자적한 모습으로 떠 있다. 주변에는 강렬하게 내리쬐는 햇빛이 바다에 튕겨 하늘로 솟아오르는 빛의 잔치로 눈이 부실 지경이다. 배를 때리는 파도소리만이 심해와 같은 적막에 미세한 균열을 내고 있을 뿐이다. 멀리서 보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이 바다놀이를 즐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팽팽한 긴장감으로 서늘한 느낌마저 든다. 먼 바다로 고기잡이를 나온 고깃배가 자동항법장치와 통신장비의 고장으로 항구로 돌아가지 못한 채 닻을 내리고 구조되는 행운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항해를 할 수도 있지만 연료가 소진되기 전에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면 큰일이다. 마냥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정답이 아님을 선원들은 잘 알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배에 실린 음식물이 바닥을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다.
현재 우리나라 퇴직연금 가입자들도 좌표를 잃으면 망망대해에 정박해 있는 고깃배의 선원들처럼 위급한 상황에 처하게 될지도 모른다.
원리금보장 상품에 몰린 퇴직연금 적립금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16년 말 기준 우리나라 퇴직연금 적립금 규모는 전년 말보다 16.3% 늘어난 147조원이다. 이 중 약 131조원, 즉 전체 적립금의 89%가 원리금보장 상품에 몰려 있다. 실적배당형 상품에 투자되어 있는 적립금은 10조원 정도로 전체 적립금의 6.8%에 불과하다. 나머지 4.2%는 운용을 기다리고 있는 대기성 자금이다. 대기성 자금은 운용 지시가 있을 때까지 원리금보장 상품에 보관되는 현실을 생각하면, 전체 적립금에서 원리금보장 상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95.8%에 해당하는 셈이다. 이는 우리나라 퇴직연금의 경우 사실상 자산배분이 이뤄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산배분은 위험과 수익구조가 상이한 상품에 분산투자함으로써 안정적으로 높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여러 개의 원리금보장 상품에 적립금을 나누는 것은 자산배분이라 할 수 없다.
퇴직연금 적립금이 원리금보장 상품에 집중된 결과 2016년 총비용 차감 후 퇴직연금 적립금 수익률은 1.58%에 머물러 있다. 물가 상승을 감안하면 사실상 제로 수익률인 셈이다. 원리금보장 상품의 수익률은 1.72%, 실적배당형 상품의 수익률은 -0.13%이다. 퇴직연금 가입자의 안전지향적 적립금 운용 형태는 적어도 2016년만 보면 성공을 거둔 셈이다. 그러나 장기수익률을 보면 상황은 달라진다. 2016년 기준으로 5년 연환산 수익률과 8년 연환산 수익률은 2.83%와 3.68%로 1년 수익률보다 각각 1.25%p와 2.10%p 높다. 이는 과거의 원리금보장 상품 금리가 지금보다 높았기 때문이다. 8년 수익률만 놓고 보면 실적배당형 상품의 수익률(5.61%)이 원리금보장 상품의 수익률(3.05%)보다 2.56%p나 높다. 수익은 위험의 대가라는 기준에서 보면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역사적 저금리 기조와 길어진 수명에 대한 인식이 많이 제고된 그간의 상황을 감안하면 원리금보장 상품에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경도되어 있는 우리나라 퇴직연금 적립금 운용 행태는 선뜻 이해하기 힘들다. 이는 닻을 내리고 구조의 행운을 기다리고 있는 고깃배 선원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처럼 이성적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현상이 우리나라 퇴직연금시장에서 지속되고 있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원인은 아주 복잡한 것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단순하다. 퇴직연금시장의 적립금 운용 관련 행태와 인간의 의사결정을 지배하는 뇌 구조라는 양 측면에서 살펴보자.
목표가 없는 퇴직연금 적립금 운용
먼저 우리나라 퇴직연금시장에서 가입자의 적립금 운용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살펴보자. 자신이 적립금 운용에 대한 책임을 지는 확정기여형에 가입한 근로자는 사용자가 납부한 부담금을 어떤 방식으로 굴릴지 결정을 해야 한다. 이를 운용 지시라고 부른다. 앞에서 살펴본 원리금보장 상품과 실적배당형 상품이 바로 운용 지시의 결과물이다. 감독기관의 통계는 이처럼 아주 단순하게 집계해 발표되지만 원리금보장 상품에도, 실적배당형 상품에도 수많은 상품들이 존재한다. 개별 가입 근로자가 수많은 상품을 일일이 비교해 자신에게 적합한 상품을 고르는 일은 매우 어렵다. 그래서 운용관리기관이라는 퇴직연금사업자가 선별해 제시하도록 하고 있는 게 우리나라의 퇴직연금제도다.
퇴직연금사업자는 상품을 제시할 때 원리금보장 상품과 실적배당형 상품을 함께 제공한다. 이를 상품 라인업이라고 하는데, 가입 근로자는 라인업된 상품 중에서 자신의 적립금을 굴릴 상품을 선택한다. 모든 사업자는 두 부류의 상품을 함께 제시하며 자산배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산배분이 되지 않는 이유는 뭘까? 바로 자산배분의 기준을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적배당형 상품에 적립금의 일부라도 배정하면 자산배분이라고 말하기가 곤란하다. 자산배분은 목표수익률을 정하고 가입자가 감내할 수 있는 위험수준 내에서 목표수익률을 달성할 수 있도록 적립금을 다양한 상품에 분산투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자산배분의 핵심은 목표수익률을 정하는 것인데, 희망하는 목표수익률을 묻는 수준에서 그치는 게 우리나라 퇴직연금시장의 현주소다.
정확한 목표수익률을 정하기 위해서는 근로자별로 노후 준비에서 퇴직연금이 차지하는 몫을 계산하고 현재의 퇴직연금 부담금 규모와 앞으로의 전망치, 예상되는 가입기간, 금융시장 상황 등을 종합해야 한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근로자가 스스로 판단해서 결정할 수 있는 영역은 더더욱 아니다. 그래서 전문가 집단인 퇴직연금사업자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퇴직연금사업자는 이런 역할을 포기하거나 모른 체하며 “저금리 시대엔 실적배당형 상품을 편입해야 합니다! 중위험·중수익 투자가 필요합니다!” 등의 쉬운 방법을 동원한다. 이 정도 방법과 노력으로 ‘퇴직금은 손해보면 안 된다!’는 강고한 유산을 깨트릴 수 없음은 원리금보장 상품에 극도로 치우쳐 있는 현실이 증명하고 있다. 근로자별로 목표수익률을 쉽게 산출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시스템 개발 및 운영 인력 등 투자가 필요하다.
동물적 특징에 지배당하고 자극하는 현실
인간의 역사는 선택의 역사다. 오른쪽으로 갈지 왼쪽으로 갈지, 결혼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아이를 낳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등 삶은 수많은 선택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 이들 선택은 심사숙고 끝에 내리는 것이 있는가 하면 무의식적으로 이뤄지는 것도 있다. 또 미래에 큰 영향을 미치는 선택이 있는가 하면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선택도 있다. 어쨌든 수많은 선택들은 인간의 뇌에서 이뤄지는 신경학적 반응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인간의 뇌에서 선택과 관련해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부분이 전두엽(frontal lobe)과 대뇌변연계(limbic system)다. 전두엽은 대뇌반구 앞에 있는 부분으로 이마엽이라고도 한다. 전두엽은 인간의 역사에서 볼 때 비교적 최근이라 할 수 있는 15만 년 전에 발달한 뇌의 한 부분으로서 합리적 판단과 장기계획 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대뇌변연계는 대뇌반구 내측 벽의 대뇌피질 아래에 고리처럼 감겨 있는 부분으로, 인간의 감정적·본능적 반응을 담당한다. 대뇌변연계는 작은 위험신호라도 감지되면 즉각적인 36계를 종용함으로써 인간의 생존을 담당해온 중요한 부분이다. 즉 전두엽은 우리에게 장기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할 것을 요구하지만, 대뇌변연계는 즉각적인 만족을 얻는 것을 요구한다. 퇴직연금처럼 장기간 운용해야 하는 자금은 전두엽의 결정을 따르는 게 맞지만 대뇌변연계가 자꾸 훼방을 놓는다. 린다 그래튼과 앤드루 스콧은 이란 책에서 “인간은 주로 대뇌변연계에 따라 움직이며 즉각적인 만족에 굴복하는 경우가 많다. 삶이 험악하고 야만스럽고 짧은 경우에는 즉각적인 만족에 굴복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기대여명이 길어지고 장기적으로 더 나은 결정을 하려면 합리적인 전두엽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 좀 더 현명하지 않을까”라고 말한다.
퇴직연금은 장기자산이니 자산배분을 통해 적절히 리스크를 감수하면서 높은 기대수익을 추구하는 게 맞다고 전두엽은 말하지만, 대뇌변연계는 퇴직연금은 안전하게 굴러야 하니 원리금보장 상품에 넣어두라고 고집을 부린다.
우리는 은연중에 대뇌변연계의 손을 들어주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에는 개미투자자들의 실패한 투자 경험도 한몫한다. 퇴직연금 가입자의 이런 성향을 부채질하기라도 하듯 퇴직연금사업자들은 금리가 1bp(0.01%)라도 높은 원리금보장 상품을 제시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기본적으로 보수적 성향이 강한 퇴직연금 가입자의 속성과 영업실적에 대한 부담을 무시할 수 없는 퇴직연금사업자의 속성이 맞물려 나온 결과가 원리금보장 상품 일변도의 적립금 운용행태인 셈이다.
퇴직연금 잘 굴리려면?
‘100세 인생’이 약방의 감초처럼 일상 대화에 등장하는 요즘 퇴직연금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금과 같은 저출산, 수명연장의 흐름이 바뀌지 않는 한 후세대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공적연금 확대는 기대하기 어렵다. 노후를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자조노력 연금시대도 거스르기 힘든 대세다. 노후의 재정적 안정은 퇴직연금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답은 뻔하다. 공부를 해야 한다. 좋은 고과를 얻기 위해, 승진을 위해 내가 맡은 일과 관련한 지식을 습득하듯 금융과 연금에 대한 지식을 쌓아야 한다.
지난 호에서 말했듯 퇴직연금은 제2의 임금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한 연구에 의하면, 금융 지식이 해박한 투자자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똑같은 수준의 리스크를 감내하면서도 연간 수익률이 1.3%p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아주 큰 차이다. 만약 10만 달러를 10년 동안 투자할 경우 금융 지식이 많은 투자자들은 1만6000달러를 더 번다. 20년 동안 투자할 경우에는 4만2000달러를 더 벌고, 30년 동안 투자할 경우에는 14만5000달러를 더 번다는 결과가 나온다.
문제는 금융 지식이 하루아침에 쌓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구조조정이 일상화되고 있는 시대에 금융 공부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가 쉽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더 높은 수익을 얻기 위해서는 퇴직연금사업자들이 제공하는 상품들의 수수료율을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수수료율이 높다고 그 상품이 좋은 상품이고 수익률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더 많다. 그럼에도 퇴직연금 가입자들은 금융 회사들이 제시하는 표면적인 금리수준이나 기대수익률 또는 과거의 성과만을 보고 상품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 수수료율을 체크포인트의 하나로 꼭 첨가하자. 개별 금융상품의 수수료 관련 정보는 고용노동부 퇴직연금 홈페이지를 방문하면 확인할 수 있다.
제도적으로 보장된 기회를 잘 활용하는 것은 금융 지식과 연금 지식을 제고하는 좋은 방법임을 잊지 말고 실천하자.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퇴직연금 가입자 교육을 법정 의무교육으로 하고 있다. 퇴직연금 가입자 교육은 법적으로 보장된 가입자의 권리다. 이 권리를 내팽개치지 말고 적극 활용해야 한다. 이를 통해 금융과 연금 지식을 제고하고 자산배분에 도전해보자. 자산배분을 했다면 그것에 안주하지 말고 주기적으로 자산배분 비율을 조정하는 리밸런싱을 해야 한다. 이를 무시하면 자산배분 노력이 도로아미타불이 되거나 원리금보장 상품에 묻어놓는 것보다 못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퇴직연금사업자는 가입자들이 퇴직연금 적립금을 잘 운용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특히 가입자들이 목표수익률을 정확하게 설정하고, 리밸런싱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상생의 길이다.
근 30년을 알고 지내는 미국인 친구가 있다. 직장생활을 할 때 그는 바이어였고 필자는 스포츠 장갑 수출을 담당하는 임원이었다. 미국 시장을 처음으로 개척하기 위해 관련 업체 디렉토리를 보고 팩스를 보냈다. 몇 군데서 만나자고 연락이 와서 미국 출장을 떠났다. 미국 동부부터 바이어들을 만났으나 정보만 빼내려는 바이어도 있었고, 처음이라 아직 미심쩍어하는 바이어도 있었다. 심지어 바이어라고 식사비용을 필자에게 전가하는 등 갑질을 사람도 있었다.
마지막 일정으로 서부에서 그를 만났다. 별로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뜻밖으로 환대를 해주고 필자가 먹고 싶어 하던 랍스터에 스테이크까지 사주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귀국 일자에 맞춰 첫 주문을 선물로 안겨주기까지 했다. 그때부터 미국 비즈니스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회사를 퇴직하고 개인 사업을 시작했을 때 다른 바이어들은 외면했으나 그는 선뜻 거래선을 필자에게로 옮기겠다며 지원했다. 필자는 사업을 접기까지 10년 정도 그와 관계를 맺어왔다. 큰돈은 아니었지만, 이익을 가져다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 후 비즈니스 관계가 끝나 딱히 만날 일이 별로 없었는데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그는 필자에게 연락을 한다. 1년에 한두 번 정도 오는데 그때마다 필자가 저녁식사를 대접한다. 하필 비싼 쇠고기를 좋아해서 꽤 부담이 되기도 했다. 둘이 먹어도 20만 원 정도 나오니 말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젠 비즈니스 관계도 끝났으니 비용 부담은 그가 하는 것이 맞겠다고 생각되었다. 더구나 필자는 퇴직하고 수입이 없는 상태이고 그는 아직 회사 카드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그렇게 하자고 하면 당연히 받아줄 것으로 생각되었다.
어느 날 그가 또 한국에 왔다며 연락을 해왔다. 이번에는 타이완 수출상도 한 명 데리고 왔다고 했다. 더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아무래도 이참에 저녁식사 비용은 그에게 대라고 요구하는 게 나을 듯했다.
하얏트 호텔에서 만나 저녁식사로 뭘 먹고 싶냐고 물으니 의외로 명동엘 가자는 것이었다. 강남은 워낙 비싼 음식점들이 많지만, 명동이라면 대중적인 음식점이 많아 마음이 놓였다. 명동을 구경시켜주고 필자가 가끔 가는 한정식 집으로 데리고 갔다. 식사를 하면서 서로의 안부를 묻고 근황에 대해 얘기할 때 필자가 이제는 수입이 없고 국민연금으로 근근이 살아간다고 설명했다. 앞으로 식사비용은 못 내겠다는 암시였다.
그런데 즐거운 식사가 끝나고 일어서는데 이 친구와 타이완에서 온 수출상이 손을 모으며 잘 먹었다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얼떨결에 인사를 받고 나니 필자가 비용을 대지 않으면 안 될 분위기라서 어쩔 수 없이 카드로 결제했다. 그나마 쇠고기가 아니라서 다행스럽게도 12만 원 정도가 나왔다. 2차로 마신 생맥주 비용은 타이완 수출상이 냈지만, 저녁 식사비용에 비하면 소소한 비용이었다.
체면유지비란 그런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그에게 지불을 요청할 수도 있었지만, 결국 못했다. 1년에 한두 번 만나는 친구에게, 그것도 멀리서 왔는데 식사비용을 내라고 하기가 야박해보이고 난감했던 것이다. 그래도 필자 사정을 생각해서 이번에는 단단히 별렀지만 결국 이번 저녁식사도 필자가 감당해야 했다. 이제 그가 알아서 지불하기 전에는 체면유지비로 감당해야 할 것 같다. 그동안 그가 필자를 도와준 마음을 고맙게 생각하고 그 빚을 갚는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봤자 몇 번이나 더 만날 것인가. 끝까지 좋은 관계를 지속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된다.
무관심 속에 성장하는 퇴직연금
사회보장제도의 마지막 퍼즐이었던 퇴직연금이 도입된 지 10년이 넘었다. 1988년에 국민연금이 도입되었고, 연금저축으로 일컬어지는 세제적격 개인연금이 도입된 것은 1994년이다. 퇴직연금은 이보다 11년이나 늦은 2005년 12월에야 도입되었다. 퇴직연금 도입까지 걸린 시간이 길어진 것은 퇴직연금 관련 이해관계자들의 이해 조정에 많은 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퇴직연금이 각자의 이해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 여겼고, 그만큼 법안 하나하나에 관심을 기울였다.
제도 도입 초기의 치열한 관심과 달리 퇴직연금이라는 열차가 괘도를 달리기 시작하자 열의는 식기 시작했다.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전면 개정안이 통과되는 데 3년이나 걸렸고, 2차 개정안이 국회에 상정된 지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통과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다. 이해관계자들의 관심과 열의가 식지 않았다면 과연 개정안이 국회에서 그토록 오랜 낮잠을 즐길 수 있을까? 아직도 퇴직연금의 기본개념조차 이해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소식을 들으면 서글퍼지기까지 한다. 저출산 고령화의 큰 파고 앞에서 위기에 처해 있는 100세 시대의 노후생활을 생각하면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노후준비가 국민적 스트레스로 거론되고 있는 상황에서 노후준비 핵심 축의 하나인 퇴직연금이 관심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것은 아이러니를 넘어 배임행위라 여겨질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도 퇴직연금시장은 높은 성장세를 구현해왔다. 2016년 3분기 퇴직연금 적립금 규모는 130조원으로 전년 동기(111조원) 대비 17.1% 증가했다. 전년 동기 대비 기준으로 2012~2015년의 성장률은 20%를 훌쩍 넘어선다([표1] 참조). 극심한 경기침체 상황을 감안하면 실로 놀라운 성장률이 아닐 수 없다. ‘관심의 불황과 시장의 급성장!’ 불황형 흑자를 떠올리게 한다. [표1]에서 보는 것처럼 문제는 성장률이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관심의 불황과 시장의 정체’라는 불황형 적자의 시대가 올까봐 걱정스럽다.
퇴직연금, 쉽고 효율적인 노후준비 방법!
기업·근로자·금융기관 등 퇴직연금 핵심 이해관계자들의 열의가 식는다고 해서 개인 및 사회에 대한 퇴직연금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제반 상황을 감안하면 퇴직연금의 영향력은 오히려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퇴직연금 적립금이 늘어날수록 기업에 미치는 영향력은 커질 수밖에 없다. 가계부채와 늘어만 가는 후반 인생을 생각하면 근로자에 대한 퇴직연금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마땅한 신수종 사업이 없는 상황에서 여전히 고도성장을 하고 있는 퇴직연금은 금융기관에게 아주 매력적인 시장이다.
무엇보다도 퇴직연금은 가장 쉽고 효율적인 노후준비 방법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근로자가 노후자금을 마련하려면 적잖은 부담을 감수해야만 한다. 별도의 자금을 염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퇴직연금은 다르다. 퇴직연금에 적립되는 부담금을 기업이 내기 때문이다. 근로자는 퇴직연금 적립금을 쌓기 위해 자신의 주머니에 손댈 필요가 없는 셈이다. 빠듯한 가계 상황을 걱정하지 않고도 노후를 준비할 수 있으니 얼마나 쉽고 좋은가! 또한 퇴직연금에 가입하면 적립금 운용수익에 대한 세금이 인출하는 시점까지 이연되는 등 많은 세제혜택을 누릴 수 있다. 세금으로 내야 하는 돈이 다음 해 원금에 추가되니 ‘이자에 이자가 붙는’ 복리효과가 극대화된다. “그까짓 이자가 얼마나 된다고?” 하며 얕보다간 큰코다칠 수 있다. 한두 해 일하고 그만둘 것은 아니지 않는가. 게다가 보험료를 내고도 운용 과정에 전혀 참여할 수 없는 국민연금과 달리 퇴직연금에 가입하면 각자의 상황에 맞는 운용 방법을 유연하게 선택하고 변경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전문가 집단의 도움을 거의 무료로 받을 수 있으니 노후자금을 불리는 방법으로 이만큼 효율적인 수단은 찾기 힘들다.
근로자들이 이런 장점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옷이라도 쇼윈도 안의 마네킹이 입고 있으면 별무소용이다. 마네킹이 입고 있는 옷을 벗겨 내 손에 넣어야 비로소 내 옷이 되는 법이다. 퇴직연금도 마찬가지다. 제도적으로 아무리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 한들 근로자들이 이를 활용하지 않으면 진열장에 전시된 제품에 불과하다. 아이쇼핑은 심리적 만족감을 주지만, 활용하지 않는 제도적 장점은 공약(空約)의 씁쓸함을 가져다줄 뿐이다. ‘톡!’ 건드리기만 하면 터져 씨앗을 사방으로 퍼트리는 잘 익은 봉숭아처럼 전국 방방곡곡 모든 계층의 근로자들이 혜택을 받아 노후준비를 제고할 수 있도록 퇴직연금에 대한 관심과 열의에 불을 지펴야 한다.
퇴직연금에 대한 근로자의 관심과 열의에 불을 지피기 위해서는 기본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기본을 다지는 출발점은 퇴직연금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다. 퇴직연금의 본질을 꿰뚫고 이를 이해하기 쉽게 전파한다면 식어버린 관심과 열의를 다시 불러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두 가지 측면에서 퇴직연금의 본질을 살펴보자.
퇴직연금은 제2의 임금
‘퇴직연금은 제2의 임금’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퇴직연금의 법적 성질과 관련한 학설로는 노후보장·공로보상설·임금후불설 등이 있다. 노후보장설은 퇴직연금을 사용자가 선의로 근로자의 노후보장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라 보며, 공로보상설은 그동안 일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퇴직연금을 지급하는 것이라고 본다. 임금후불설은 매달 임금으로 지불해야 할 것의 일부를 나중에 퇴직할 때 지불하는 것이 퇴직연금이라고 보는 학설이다.
정설은 임금후불설이다. 퇴직연금의 법적 성질을 임금후불설로 보는 것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글로벌 퇴직연금시장에서 세계적 표준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곳은 미국이다. 미국의 퇴직연금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때에 비약적인 성장의 토대를 마련한다. 전시통제정책의 하나였던 임금통제정책 때문이다. 원활한 전시물자 보급을 위해 취한 임금통제정책으로 기업들은 근로자 확보에 비상이 걸렸다. 물건을 만들기만 하면 팔리는 상황에서 물건 만들 인력이 부족하니 얼마나 속이 타들어갔겠는가.
기업의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여성을 일터로 끌어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가급여(fringe benefits)로서 퇴직연금을 도입하는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의 성인 여성들은 전업주부로서 주로 가사를 담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터로 나간 젊은 남성들을 대신해 여성들이 노동력 부족 사태를 해결하려 대거 사회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불러온 예상치 못한 사회 변화였다. 퇴직연금과 같은 부가급여는 전시임금통제정책의 대상이 아니었다. 임금을 올려줄 수 없는 상황에서 중장년 남성 인력은 물론 사회에 진출하기 시작한 여성 인력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다른 대책이 필요했다. 지금 당장 임금을 올려줄 수 없으니 나중에 올려주겠다는 당근책이 필요했던 것이다. 바로 퇴직연금이었다. 즉 임금으로 줘야 할 것 중 일부를 퇴직연금이라는 형태로 해당 근로자가 퇴직할 때 지급하기로 한 것이다. 미국연금회계기준서에는 퇴직연금을 임금후불이라고 못을 박아놓았다.
이처럼 퇴직연금은 단순한 인센티브가 아니다. 당연히 받아야 할 임금을 어떤 배경으로 인해 지급을 뒤로 미룬 임금의 일부인 것이다. 퇴직연금을 제2의 임금이라 부르는 이유다. 모든 근로자들은 임금협상철만 되면 신경이 곤두선다. 과연 올해는 임금이 얼마나 오를까? 최소한 물가인상률만큼은 올라야 할 텐데… 임금이 오르면 가계의 재정상태도 좀 나아지겠지. 이런 기대를 하며 임금투쟁에 적극 나선다. 기대에 어긋나면 파업까지 불사한다. 근로자의 당연한 권리 중 하나다.
그런데 제2의 임금이라는 퇴직연금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도입 당시 타오르던 관심이 금방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당장 내 호주머니에 들어오지 않는 돈이라고 관심 영역 밖으로 밀려난 퇴직연금은 주인을 잘못 만난 화초처럼 생기를 잃고 시들어갔다. 내 퇴직연금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는 것은 애교에 가깝다. 내가 가입한 퇴직연금이 어떤 종류인지, 어느 퇴직연금사업자에 내 적립금 운용을 맡겼는지 모르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필자의 경험으로 볼 때 내 퇴직연금이 안녕한지 그렇지 못한지 알고 있는 사람은 30%도 채 되지 않는다.
자신의 임금에 이처럼 무관심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음지에서 시들어가고 있는 퇴직연금을 양지로 끌어내야 한다. 퇴직연금의 본질은 3층 사회보장제도의 하나로서 노후준비의 한 수단이 아니라 제2의 임금이다.
노후준비 수단은 임금을 활용하는 한 형태일 따름이다. 최소한 1년에 한 번만이라도 퇴직연금에 관심을 기울이고 점검하자. 그 결과 변화가 필요하다면 사업자를 바꾸거나 상품을 바꾸거나 자산배분을 바꿔보자. 시들해진 퇴직연금이 되살아날 것이다.
퇴직연금 가입자는 잠재적 액티브 시니어
퇴직연금의 본질과 관련해 간과하고 있는 중요한 포인트의 하나는 퇴직연금 가입자에 대한 것이다. 바로 퇴직연금 가입 근로자는 모두 잠재적 액티브 시니어라는 점이다. 누구나 은퇴 후 활기차고 행복한 노후를 꿈꾼다. 이 점에서 퇴직연금 가입자는 특히 더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 퇴직연금을 도입할 때 근로자의 동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근로자가 퇴직연금 도입에 동의할 때 동의를 해달라니 마지못해 동의할까, 아니면 노후에 대한 희망을 안고 동의할까? 비록 지금은 잃어버렸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근로자들은 도입 당시 각자 나름의 꿈과 희망을 퇴직연금에 담았을 것이다.
퇴직연금은 액티브 시니어가 되기 위한 중요한 물적 기반이다. 이전 호에서 살펴본 것처럼 ‘액티브 시니어란 육체적·정신적 건강함을 기반으로 일정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는 연장자’를 뜻한다.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육체적·정신적 건강함과 함께 재무적 탄탄함을 필요로 한다. ‘가난한 강남 부자’라는 말이 암시하듯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더라도 현금흐름이 말라버리면 사회적 활동은커녕 움직이기조차 힘들다. 퇴직연금은 재산이 적더라도 현금흐름이 풍부한 시민이 되기 위한 초석이다. 많은 근로자들은 이런 심정으로 퇴직연금 도입에 동의하고, 퇴직연금사업자를 선정하고, 적립금 운용 방법을 선택했을 것이다. 퇴직연금을 잘 가꿔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행복한 노후를 꿈꿨을 것이다.
하지만 한바탕 바람이 일고 난 뒤 일상으로 돌아오면 꿈은 사라지고 일상의 권태와 피로에 지배당하고 만다. 이 권태와 피로를 잊게 하고 생활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이 꿈임을 이성적으로는 알지만 그 이성을 일깨우는 데에는 게으르다. 안다고 할 수 없는 셈이다. 퇴직연금은 제2의 임금임을 회상하며 다시 꿈을 일깨우자. 근로자 입장에서 퇴직연금은 은퇴 이후에 받는 또 다른 임금이다.
임금 인상 여부에 일희일비하던 기억을 퇴직연금에 접목해보자. 그러면 꿈은 되살아나고 삶에 대한 구체적 그림이 보일 것이다. 그 구체적 그림 속에서 퇴직연금의 역할을 부여해보자. 그러면 현재 나의 퇴직연금은 안녕한지 불편한 상태인지 보일 것이다. 안녕한 상태라면 잘 유지하고, 불편한 상태라면 상품·사업자·자산배분 등을 조정해 더 나은 상태로 바꿀 필요가 있다.
과거 족보나 문헌들을 조사해보면 고려시대(918~1392년) 임금 34명의 평균수명은 42.3세, 조선시대(1392~1910년) 임금 27명의 평균수명은 46.1세로 나타난다. 왕들의 수명은 40세 전후에 불과했던 셈이다. 조선시대 임금 중 가장 장수했던 임금은 21대 영조로, 현재 우리나라의 평균수명을 뛰어넘는 83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의료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그 시대의 장수 비결이 궁금해지기도 한다.
필자는 시골에서 홀로 생활하시던 외조모가 몇 년 전 향년 92세로 굴곡 많은 생을 마감하시는 모습을 보며 100세 시대가 멀지 않았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몇 년 만에 100세 시대라는 말이 낯설지 않게 들린다. 일반적으로 100세 시대란 사망 빈도가 가장 높은 연령, 즉 ‘최빈사망연령’이 90세가 넘는 경우를 말한다. 우리나라는 대략 2020년경이면 최빈사망연령이 90세가 넘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최근의 의료기술 발달 속도와 건강에 대한 높은 관심을 고려할 때 5070세대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오래 살 확률이 높다고 봐야 한다.
5070세대는 경제활동을 활발히 하는 동안에도 자산 축적에 관심이 많았다. 즉 은퇴설계를 할 때도 수익률과 재테크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제는 축적된 재산을 유지하고 보전하는 일에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그동안 열심히 저축하고 모아온 자산 등이 예상하지 못한 일로 한순간에 없어지거나 줄어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위험관리’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이미 우리 코앞으로 다가온 100세 시대에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위험과 우발적으로 생기는 위험을 관리하고 통제하지 않으면 그동안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다. 앞으로 5070세대가 부딪칠 수 있는 대표적 위험 3가지를 살펴보고 구체적인 대응 방안을 모색해보자.
의료비 리스크
보장자산을 사망에서 노후 의료비로 재편
우리나라의 100세 이상 인구는 몇 명 정도 될까? 2015년 기준 통계청에 따르면 3159명으로 여성이 2731명, 남성이 428명으로 여성이 6배 정도 많다고 한다. 하지만 행정자치부 조사에서는 100세 이상 인구를 17만562명으로 집계하고 있다. 1만4000명 정도 차이가 나는 이유는 뭘까? 행정자치부는 주민등록 기준으로 말소 여부로 판단하는 반면 통계청은 인구센서스 전수조사를 통해 파악하는 조사 방법의 차이 때문으로 보인다. 필자는 여기서 궁금한 점이 하나 더 생겼다. 과연 차이가 나는 1만4000여 명의 100세 어르신들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대부분은 거동의 불편과 질병 등을 이유로 병원이나 요양병원에 입원치료 중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지난해 생명보험협회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건강수명, 즉 전체 평균수명(82.4세)에서 질병이나 부상으로 고통받는 기간을 제외하고 건강한 삶을 유지하는 기간이 76.4세라고 발표한 바 있다. WHO(세계보건기구)에서는 2014년 기준 우리나라 사람의 건강수명을 73.2세라고 발표하기도 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우리나라 사람들은 짧게는 6년, 길게는 10년 정도 병치레를 하다 사망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노후에는 질병이라는 달갑지 않은 친구를 맞이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노후 질병이 재무적인 측면에서 특히 위험한 이유는 일정 연령이 되면 자연스럽게 발생하고, 오래 살수록 그 위험의 정도가 급증하며, 질병의 정도를 예측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노후에 발생하는 질병은 자연스런 현상이란 점에서 건강관리만 잘하면 어느 정도 예방할 수 있겠지만, 완벽한 예방이 쉽지 않고 한 번 발병하면 치료비가 만만치 않다는 문제가 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속담처럼 노후에 발생되는 치료비는 가족에게 큰 부담이다. 건강보험공단(2015)의 조사에서처럼 연령이 증가할수록 1인당 연간 의료비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형태를 보이고 있다. 1인당 생애 총의료비가 65세 이후에 절반 이상 발생하는 것은 노후 질병으로 인한 의료비 부담이 5070 은퇴재무설계 관점에서 가장 큰 위험 요소라는 사실을 반증한다.
의료비 부담을 완화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를 위해 먼저 국민건강보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만약 5070세대가 은퇴 후 의료비가 1000만원 발생했다면 본인이 부담하는 금액은 얼마나 될까? 요양기관별로 다소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건강보험공단에서 63.4%(약 630만원)를 부담하고 나머지 36.6%(약 370만원)는 개인이 부담해야 한다. 개인부담분을 분해하면 건강보험 급여 대상 의료비의 20.1%와 비급여 의료비 16.5%다.
국민건강보험제도의 구조를 감안할 때 5070세대의 노후의료비 부담은 건강보험 본인 부담금과 비급여 부분을 어떻게 준비했는지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5070세대가 2040 시절에는 가장의 유고에 대비한 사망보장 중심의 위험관리에 초점을 두었다면, 50대 이후에는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노후의료비 보장 중심의 위험관리로 보장 자산을 새롭게 리모델링해야 한다. 2040 시절에 가입해두었던 보험을 노후의료비 보장 중심으로 재검토하고, 행여 중복보장으로 인해 과도한 보험료 지출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분석해 웰스(wealth)가 아닌 헬스(health) 시대에 맞도록 재편할 필요가 있다.
자녀부양 리스크
현명한 노후준비는 ‘자녀의 경제적 독립’
대한민국의 5070세대가 늙은 염낭거미를 닮아가고 있다. 염낭거미는 독거미의 일종으로 새끼가 먹을 것이 없으면 새끼를 위해 제 살을 먹이로 주는 습성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 5070세대는 은퇴 후에도 성인이 된 자식 뒷바라지를 걱정하고 있다. 혹자는 자식뒷바라지가 100세 시대에 무슨 위험이냐고 반문할 수 있다. 부모가 자녀를 낳았으면 자녀가 경제적으로 독립할 때까지 물심양면 지원하는 것은 인지상정 아니냐고 항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은퇴 이후 연금 외 변변한 수입원이 없는 상황에서 생물학적 성인자녀가 사회학적 성인자녀로 탈바꿈하지 못하면, 예상치 못한 상황에 따른 심리적 고충은 물론 경제적 부담도 만만찮다는 점에서 엄청난 리스크가 아닐 수 없다.
경기침체에다 비혼(非婚)과 만혼(晩婚)이라는 사회적 현상까지 더해져 부모와 불편한 동거를 하는 성인자녀가 늘고 있다. 동거를 하지는 않더라도 경제적으로 의지하는 성인자녀도 꽤 많다. 이는 선배 세대들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던 고민이란 점에서 5070세대에겐 새로운 리스크라 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동서양이 다르지 않다. 미국에서는 대학졸업 후 취업을 못해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부모 곁에 머무는 자녀를 ‘낀 세대’라는 의미의 ‘트윅스터(Twixter)’라 부른다. 캐나다에서는 직업을 구하러 이리저리 다니다가 결국 집으로 돌아온다는 뜻에서 ‘부메랑키즈’, 영국에서는 부모 퇴직연금을 축낸다는 뜻에서 ‘키퍼스(KIPPERS: Kids in Parents Pockets Eroding Retirement Savings)’, 이탈리아에서는 모친이 해주는 음식에 집착한다는 의미의 맘모네(Mammone)라고 칭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학교 졸업 후 취업을 못해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부모에게 의존하는 20~30대 젊은 층을 캥거루족, 취업을 했어도 경제적 독립을 못하고 부모에게 의존하는 30~40대를 신캥거루족이라고 칭한다.
이처럼 5070세대가 은퇴 이후 성인자녀를 부양하는 상황이 연출되면 이들의 노후준비 자산은 급속하게 줄어들게 된다. 자녀의 경제적 독립이야말로 가장 현명한 노후준비 방법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개인이 처해 있는 상황과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자녀부양 리스크에 대한 통일된 대처 방법을 제시하기는 어렵지만 조금 생각하면 실천할 수 있는 방안 두 가지를 제시해보고자 한다.
첫째 부양기간과 지원 범위를 자녀와 함께 정하는 것이다. 최근 육아정책연구소에서 20~50대 성인을 대상으로 “언제까지 자녀에게 경제적 지원을 해야 하나?”라고 물어본 결과 응답자의 40.9%는 적어도 취업 전까지는 자녀를 경제적으로 뒷받침해줘야 한다고 응답했다. 2008년에는 이 비중이 26.1%였던 점을 감안할 때 성인자녀의 부모에 대한 의존도가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자녀의 경제적 미독립이 게으름 등 개인적 소양 탓보다는 사회경제적 구조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상황에서 자녀의 경제적 독립을 이끌어내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경제적 지원 범위와 기간을 자녀와 합의하는 과정을 거쳐 합리적인 선에서 정하고, 독립을 이루는 방법을 함께 고민하다 보면 자녀의 경제적 독립이 앞당겨지지 않을까.
둘째 소규모 청년창업이다. 취업이 어렵다 보니 소규모 청년창업이 늘어나고 있다. 청년창업의 경우 어느 정도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지만 결국 부모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능력이 된다면 한없이 지원하고 싶지만, 5070세대 대부분은 그렇지 못한 게 현실이다. 참 난감한 상황이다. 수년 전 은행에서 퇴직한 박씨(60)의 경우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땅과 아파트, 그리고 퇴직금이 전 재산이다. 그런데 명문대 졸업 후 몇 년째 취업을 하지 못하고 불편한 동거를 하고 있던 자녀가 어느 날 조심스럽게 창업자금을 요청하더란다. 지원을 해야 하나, 말려야 하나? 많은 고민 끝에 박씨는 구체적인 조건을 내걸고 지원을 해주기로 했다. 자녀에게 사업계획서를 요청하고, 자금을 한꺼번에 지원하기보다는 순차적으로 지원하며, 아버지가 아닌 채권자로서 계약서까지 썼던 것이다. 부모와 자식 간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혀를 찰 수도 있으나, 이런 일일수록 냉정하게 대하는 게 정답에 가까운 차선책인 것 같다.
금융사기 위험
내 돈 지키는 5가지 행동지침
뉴스나 드라마를 통해 은퇴자들이 어이없게 금융사기를 당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드라마의 소재거리로 활용될 정도로 은퇴자들이 쉽게 금융사기 표적이 되는 이유는 뭘까? 주된 직장에서 물러난 은퇴자들은 비록 고정수입은 크게 줄어들었다 해도 퇴직금과 모아둔 유동자산이 다른 세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다. 여기에다 금융시장의 변화에 둔감한 상황에서 줄어든 고정수입을 보충하고픈 조급한 마음에 고수익 상품에 대한 욕구가 커져 금융사기범의 미끼를 덥석 물 가능성이 높다.
미국 투자자교육재단에서는 금융사기를 당하기 쉬운 사람의 유형을 다음과 같이 분류하고 있다. ① 50대 후반의 기혼자, ② 자신의 판단과 금융 지식이 평균 이상이라고 생각하는 낙관적인 성격의 소유자, ③새로운 생각이나 판매 선전에 귀가 솔깃한 사람, ④ 최근에 건강 또는 금융상 어려움을 겪은 사람 등. 이 중에서 두 가지 이상에 해당되는 사람은 금융사기에 당할 가능성이 높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단 한 번이라도 금융사기를 당하게 되면 힘들게 모아온 자산을 다 잃을 수 있다. 아래에 금융사기 예방을 위한 5가지 행동지침을 소개한다.
첫째, ‘아는 사람인데 잘해주겠지, 전문가이니까 잘해주겠지’라는 생각을 버려라! 아는 사람이 더 무서울 수 있다. 이들은 오히려 고객의 이익보다 금융기관이나 종사자의 이익을 우선할 수 있다.
둘째, 금융업에 종사하는 개인이 제공하는 보고서가 아닌 금융기관의 보고서를 받아라! 가끔 개인이 작성한, 고수익을 보장하는 보고서를 믿고 투자에 나섰다 낭패를 보는 경우가 있다. 고수익을 보장하는 약속 뒤에는 대부분 고객의 자금을 유용할 의도가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 초저금리 시대에는 고수익을 미끼로 두 자릿수 수익률을 제공하면서 호시탐탐 돈을 노리는 금융사기꾼이 주변에 널려 있다는 점을 명심하자.
셋째, 배우자의 사망, 이혼소송 등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 불현듯 다가오는 도움의 손길을 조심하자! 사람의 어려움을 악용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특히 돈과 연관된 도움의 손길은 주변 사람과 충분히 상의해 결정해도 늦지 않다. 채근하는 사람은 뭔가 꿍꿍이가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삶의 전환기나 시련기에는 좀 더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결정해야 한다.
넷째, 장점만 있는 금융투자상품은 없다는 점을 명심하자!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처럼 금융투자상품에 투자할 때는 그 상품의 장단점을 충분히 파악한 후 투자를 결정해도 늦지 않다. 마지막으로 금융사기꾼이 노리는 것은 높은 수익률에 쉽게 흔들리는 고객의 마음일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자! 고수익을 확정 보장하거나 마감임박이라면서 투자 권유를 종용하는 경우 금융사기를 의심해봐야 한다.
미국의 예금 금리가 올랐고 우리나라도 예금 금리를 올려야 한다고 하지만 아직은 최저 금리다. 금리를 낮추어 경기 부양을 시도했지만 경제가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망해야 할 기업은 망해야 한다. 낮은 생산성과 적자 기업을 낮은 금리로 겨우 기업 목숨을 부지하다가 결국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고 더 크게 망했다. 낮은 금리로 빚을 내어 부동산을 사고 빚을 내어 창업에 뛰어들다보니 가계부채는 1.000조를 훌쩍 넘어섰다. 앞으로 금리가 인상되면 줄도산이 우려되는 시한폭탄을 안고 살아간다.
금리 인하의 역습으로 근로 소득 없이 알량한 퇴직금에서 나오는 이자 소득만으로 생활하는 노인의 삶은 더욱 팍팍하게 만들고 있다. 1억 원의 즉시연금 이자가 반 토막이 되어 30만 원 대에서 17만 원 대로 주저앉았다. 은행 이자를 받아도 세금 15.4%를 제하면 물가 상승률에도 못 미친다. 일본에서는 마이너스 금리라고 겁을 주고 우리나라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위안을 삼으라고 한다. 이제는 저축의 시대가 아니고 투자의 시대라고 한다. 투자의 위험은 스스로 감수해야 하고 그 위험을 직시하는 안목을 키우기 위해 경제 공부를 하라고 하지만 노인들에게 이제 와서 경제 공부를 하라는 것은 소수의 노인에게만 해당될 뿐 대부분 노인으로서는 감당 못할 소리다. 부동산이나 증권투자도 위험부담이 높아서 쉽게 접근하기 어렵다. 노인은 금리가 낮아지면 소비를 증가하기 보다는 낮은 이자만큼 허리띠를 더 졸라 맬 뿐이다. 낮은 금리가 소비를 진작시킬 것이라는 이론은 노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금리가 낮다보니 불빛을 찾는 불나방 모양 한 푼이라도 이자를 더 준다는 곳을 찾아 다닌다. 그러다보니 자식들이나 친척들이 사업을 해서 더 많은 이자를 주겠다고 빌려가서는 뒤는 내 몰라라하는 똥배짱에 속절없이 당한다. 어찌 동방예의지국에 영수증 없이 돈을 빌려준 자식과 송사를 벌린단 말인가. 부동산 임대 수입이 최고라며 상가 구입을 꼬드겨 막상구입하면 임차인을 못 찾아 빈 상가에 관리비만 물어주고 있다. 기획부동산은 노인의 돈을 요리하기 쉬운 먹잇감으로 보고 밤낮으로 하이에나처럼 덤빈다. 새로운 유망산업이라고 투자만 하면 놀고 이익금을 주겠다는 감언이설에 속아 피 같은 돈을 날리고 눈물짓는 노인들의 사연을 들을 때 마다 안타깝고 답답하다. 가난한 노인들이 가난하게 된 원인 중에 자기 돈을 허망하게 날린 사람이 많다. 은행금리가 낮아지면 노인의 돈은 갈 길을 잃고 방황하다 허망하게 날린다.
인간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건강하고 오래 살기를 원한다. 그런데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노인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최하위의 노인 빈곤 국가이다.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의 빈곤 율은 45.1%로 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13.5%보다 3배 이상 높고 회원국 중 부동의 1위라고 한다. 자식들을 위하고 조국 근대화를 위해 먹을 것 못 먹고 입을 것 못 입고 열심히 살아온 노인세대가 왜 가난에 시달리는지 근원을 파악해야 함에도 그 근원은 외면하고 현 실태만 파악해서 극빈자로 취급해주고 일정액을 지원해 주는 것으로 정부는 할일 다 했다고 손을 놓는다.노인들이 갖고 있는 돈을 보호해 주지 않으면 이들은 금방 극빈자 대열에 합류한다. 극빈자가 된 후 쌀을 주네 지원금을 주네 하지 말고 극빈자로 떨어지는 원인을 파악하고 예방책을 마련해야 한다. 노인이 갖고 있는 돈을 보호해 주기위해서도 65세 이상 노인의 비과세 예금 한도를 대폭 높여야 한다.
가난하게 사는 노인을 전수 조사하여 왜 가난의 나락에 떨어졌는가를 파악하고 이를 교훈삼아 후배세대들이 똑 같은 수순을 밟지 않도록 계도해야 한다. 치료보다 예방이 우선이고 노인이 가난하게 된 원인을 알아야 탁상 대책이 아닌 실질적 구체적 대책이 마련된다. 젊어서 열심히 일한 노인이 왜 지하실 단칸방에서 가난과 질병과 고독과 싸워야 하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우리나라는 빈곤층의 노인을 지원하는 제도는 있지만 빈곤층으로 떨어지기 전의 예방책이 없음을 개탄한다.
은퇴 이후 인생 2막을 삶의 황금기로 만들 것인가, 황혼기로 만들 것인가. 황혼기와 황금기를 가르는 것은 무엇인가. ‘충분히 쓸 만큼 모아놓고 쟁여놓은’ 돈일까? 그보다 중요하고도 필요한 것은 인생을 재설계할 수 있는 은퇴 멘탈 갑, 즉 새로운 은퇴 마인드다. 과거 경력, 직장, 직책의 아우라를 들어내고, 자기의 진짜 정체성을 떳떳하게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 진정으로 ‘브라보 마이 라이프’를 외칠 수 있다.
100세 시대를 앞둔 요즘, 은퇴 이후의 시기는 막다른 골목이 아니라 인생의 3분의 1을 살아내야 하는 인생의 터닝포인트다. 그래서 우리는 은퇴를 충격이 아닌 감격으로 맞고 싶다. 끌끌 혀를 차며 밸이 배배 꼬인 채 훈수나 푼수를 떠는 뒷방 노인이 아닌 적극 참여하는 현장의 선수로 사는 롤모델 인생 선배를 만나고 싶다.
퇴직 5년 차가 아니라 진짜 좋아하는 일을 선택한 ‘취업 5년 차’라는 박시호(63) 행복경영연구소 이사장을 만났다. 인디언 핑크색 니트 상의에 옅은 브라운색 패딩 점퍼, 흰 바지 그리고 빨간색 운동화에 무스로 바짝 세운 밤톨머리 헤어스타일을 하고 나타난 그는 과거 CEO의 물이 쏙 빠진 사람처럼 보였다. 그에게선 인터뷰 약속 장소인 ‘신촌’의 청춘물결에서 한 치도 뒤처지지 않는 것을 넘어 자유인의 바람마저 느껴졌다. 2003년부터 행복과 관련한 앤솔러지를 사진에 담아 매일 아침 이메일로 배달하던 일은 이제 취미와 봉사에서 ‘주업’으로 승격됐다. 그 외 강연과 원고 쓰기, 사진 찍기 등등 요즘엔 여행기획가로서 행복을 오프(0ff)에서 실현하는 일에까지 관심사를 확장하고 있다. 그의 하루 24시간은 풍요롭다.
은퇴 괴담은 현실적으로 ‘밥’ 이야기로 시작하곤 합니다.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는 퇴직 가장의 현실을 표현한 단어 중에 ‘삼식이(집에서 삼시세끼를 먹는 가장)’란 호칭이 있는데요. 많은 퇴직 가장들이 “이러려고 지금까지 뼛골 빠지게 일했나”라며 피눈물을 흘린다고 합니다.
“감정계좌를 깡통계좌로 만들어놓고 만기일 됐다고 복리로 쳐서 가장 높게 대우해달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집밥만 우기지 말고 칼국수집이든 냉면집이든 같이 맛집 순례라도 해보세요. 찜질방 같이 가서 놀자고 해보세요. 절로 삼식님이 될 겁니다(웃음). 가장이 건강해야 집안을 끌고 간다고 하는데 마찬가지로 부인이 건강하고 행복해야 집안이 유지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남편 혼자 행복하고 즐거우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퇴직 이후 집에서 대우받는 것은 남편 하기 나름이지요.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게 부부입니다.”
그는 “체력관리한다며 주중, 주말 가리지 않고 매일 등산 가던 친구가 있었다”며 부인이 뇌졸중으로 쓰러져 병석에 누운 후 그 친구가 “부인이 건강할 때 산에 같이 갈걸, 왜 나 혼자 갔을까” 하며 땅을 치고 후회하더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행복은 거창하고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작은 데, 평범한 일상에, 함께 나누는 데 있다”고 말하는 그는 여러 일정 중에서 부인과 맛집 순례 후 하는 공원산책이 그날의 하이라이트라고 덧붙였다. 신혼 때처럼 전기가 찌르르 통하지는 않지만 40년 이상 살아온 인생 동지와 함께하는 ‘침묵의 공유’야말로 가장 든든한 의지가 된다는 이야기였다.
현직에 계실 때보다 더 활기차고 멋져 보이십니다. 부부 금실에서 비롯된 에너지 말고 비결이 있습니까.
“현직에 있을 때보다 몸무게를 10kg 정도 뺐어요. 회식이나 약속을 줄이고 운동을 하니 절로 빠지더군요. 제가 BMW족입니다. 버스(Bus)-지하철(Metro)-워킹(Walking),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많이 걷습니다. AMP 동기 부부동반 모임에 갔는데 집사람이 아무 정보 없이도 동기들 중 현직, 퇴직파를 족집게처럼 맞히더군요. 은퇴하면 현직 때의 아우라가 사라져 갈기털 빠진 사자처럼 되기 쉽습니다. 퇴직할수록 용모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합니다. 퇴직하니 공식적 일 없다고 후줄근하게 입고 다니거나 등산복을 평상복으로 입고 다니면 안 됩니다. 오히려 더 산뜻하게,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어야 해요. 뚝배기보다 장맛이 아니라 겉볼안이 더 맞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볼 때 이미지 판단이 6초 만에 끝난다고 하지 않습니까. 예전엔 아우라가 우러났다면 이제는 만들어야 한다고나 할까요. 퇴직할수록 의관이 생명이란 게 제 지론입니다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탓하지 말고, 먼저 남이 알아주도록 갖춰 입을 필요가 있습니다.”
은퇴 준비에도 선행학습이 필요할까요?
“일관된 인생 계획을 세워서 현직 시절부터 준비하지 않으면 의미 있는 은퇴의 삶을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선 공부를 해야 합니다.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합니다. 생존하기 위해서라도, 즐기기 위해서라도. 은퇴 이후의 공부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쫓기는 공부가 아닙니다. 자신이 즐길 수 있는 것, 좋아하는 것 뭐든 좋습니다. 사람들은 그동안 자신이 뛰어오던 트랙을 벗어나는 걸 두려워합니다. 그 두려움을 없애야 합니다. 등산도 높은 산을 오르려면 동네 산부터 오르며 준비하지 않습니까. 직장생활을 하면서 은퇴 후 뭘 하면 좋을까 늘 염두에 두고 그 일을 조금씩 준비해둬야 합니다.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준을 향해 공부하십시오. ‘지금 이 나이에…’ 또는 ‘시간이 없다’ 말하지만 그것은 모두 새로운 것을 배우기 싫어해서 하는 핑계일 뿐입니다. 취미든 기술이든 뭐든 배움은 운명까지도 바꿉니다. 공부를 하고 도전하다 보면 전문가 반열에 오르고, 그것이 새로운 세상의 지평을 열게 해줍니다.”
실제로 미국의 한 설문조사 결과에 의하면, 은퇴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적응하기 힘들었다고 대답한 은퇴자가 41%나 되고, 대부분 단조롭고 지겨운 일상과 목적 상실 및 지적 자극의 결여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은퇴에서 재정 설계 못지않게 필요한 것이 시간 설계, 즉 은퇴 후 동기 설계임을 보여주는 통계다.
행복이란 것이 요즘에야 흔한 담론입니다만. 행복편지를 시작한 2003년에는 요즘처럼 유행하는 화두가 아니었을 듯한데요.
“저도 욕심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정치도 해보고 싶었고, 돈도 많이 벌어보고 싶었지요. 그런데 특별조사부장을 하며 정치인, 재벌 총수들의 영고성쇠한 모습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습니다. 자기가 지은 고충 건물에서 피고인으로 수사를 받아야 하는 기업 총수를 보며 권력, 금력의 무상함을 보았습니다. 또 부도가 나 자살을 한 금융인,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표변하는 인심의 허망함을 한꺼번에 압축해봤어요. 권력도 금력도 아닌 세상에서 진정으로 변치 않고 행복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봤지요.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행복이라는 생각에 미쳤습니다. 저의 어렸을 때부터의 꿈인 그림그리기를 시작했지요. 그러다 점차 재능의 한계를 느껴 사진으로 바꾸게 된 것이고요.”
그는 사진을 공부하면서 행복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쳇바퀴 같은 삶을 바쁘게 살던 그가 ‘저녁이 있는 삶, 주말이 있는 삶’을 애써 찾으며 여유를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번 주엔 이 꽃을 이런저런 각도에서 찍어봐야지” 하는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아진단다. 또 사진을 찍으면서부터는 ‘집에 꿀단지를 묻어놓은 것처럼’ 퇴근을 기다렸고, 주말 새벽마다 강남고속터미널에 가서 꽃을 사는 행복한 마음은 뭐라고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하단다. 지인들에게 꽃 사진 선물을 하고, 그들이 감사인사를 전해오고, 급기야 행복편지까지 쓰게 된 계기가 되었다. 지인 700명 정도를 엄선해 보내는 행복편지는 감동적인 내용으로 ‘작지만 강한’ 행복 공유의 플랫폼이 됐다.
직장 후배들에겐 멘토로 여전히 환영받는 ‘퇴직 상사’라는 말씀 들었습니다. 그 비결이 있습니까? 어떤 분은 퇴직하니 알던 사람들 중 절반은 모른 척하며 떨어져 나간다고 ‘동선하로(冬扇夏爐, 여름 난로와 겨울 부채라는 뜻으로 철에 맞지 않는 물건을 이르는 말)’의 신세를 한탄하기도 하시던데요.
“하하. 저는 연락 안 해도, 거절당해도 고까워하지 않습니다. 또 조금도 불편하게 하지 않고요. 그러니 오히려 환영받네요. 잘해주면 고맙지만, 못 해주는 것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면 고까운 마음이 전혀 안 생깁니다. 상대도 부담스러워하지 않으니 오히려 더 찾더라고요. 부하직원들이 초대하면 병권을 맡깁니다. 예컨대 동석할 사람을 상대에게 정하라고 선택권을 주는 겁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정해 만나자고 하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또 그 밥에 그 나물인 예전 사람들만 만나면 재미없는데 후배들이 새로운 사람 소개해주니 저도 좋지요. 폐쇄성을 나부터 없애야 합니다. 자기를 열고 세상에 맞추면 세상살이 편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자기를 낮추고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또 상대가 누구든 불편하지 않도록 마음을 더 내어 배려해주는 것이 존중받는 비결입니다.”
박 이사장께서는 퇴직 후 제일 먼저 할 일로 명함 만들기부터 권하신다면서요.
“은퇴한 사람들이 모임에 나가면 제일 먼저 당황하는 게 명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명함이 없으면 몸을 꼬며 온갖 군말을 갖다 붙여요. ‘제가 회사를 그만둔 지 얼마 안 돼서요’ 등등. 스스로도 초라하고 서로 당황하기 쉬워요. 명함을 만들려고 구차한 자리 부탁하기도 하거든요. 당당한 명함은 당당한 자기정체성과 통합니다. 이제 과거의 후광은 벗어던지고 자기정체성을 드러내는 명함을 만드는 게 필요합니다. 하다못해 ○○를 연구하는 사람 ○○○라는 명함이면 어떻습니까. 말로 구구하게 설명하기보다는 자기정체성을 잘 드러내줄 수 있는 한 줄짜리 문장을 만들어보는 것입니다, 스스로 초라해질 필요 없습니다. 명함 주고받는 게 부담스럽고 부끄러워지면 대외활동은 끝나는 겁니다. 그만큼 중요해요. 아날로그 구세대에겐 직책과 직장이 필수이지만 젊은 디지털 세대는 그보다는 업, 좋아하는 일, 하고 있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사진이면 사진, 서예이면 서예, ‘이것에 대해선 나한테 물어봐. 내가 설명해줄 수 있어’라고 말할 수 있는 전문 분야가 있다면 더 좋고요.”
박시호 이사장의 명함엔 사진가, 행복경영연구소 이사장이라는 직함과 함께 연락처(전화번호와 이메일)가 간결하게 들어가 있다.
퇴직 후 부딪히게 되는 어려운 점 중엔 경조비 부담도 빠지지 않더군요. 국민연금 100만원 이상을 받는 사람들의 가계부에서 경조비 비중이 16%나 됩니다. 의료비보다 높은 비중입니다.
“퇴직 상태에서 대소사가 한꺼번에 밀려들면 아무래도 부담감이 커질 수밖에 없는데요. 은퇴한 사람들의 고민이 ‘경조사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이지요. 체면과 얽히고설킨 과거의 인연 때문이지요. 저는 기분, 체면보다 기준을 분명히 합니다. 과거의 주고받은 인연보다 1년간의 교류를 기준으로 삼습니다. 아이들 결혼 때의 방명록도 그 자리에서 없애버렸습니다. 1년 동안 만나지 않은 사람은 교류가 없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은 연락이 와도 경조사에 가지 않습니다. 정말 필요한 사람만 부르고, 성의만큼 성의를 표하자. 허례허식은 없애자는 게 제 주의랍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돈을 벌었지만 이제는 다르지 않습니까? 동창회 단체 공지에 올랐다고, 안 하면 욕먹는다고 찜찜해하면서 자주 보지도 않는 사람의 경조사까지 챙겨야 하는 것은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다 보니 주위에서 욕을 먹기도 해요. 그러나 욕을 먹더라도 자신의 기준을 지켜나가는 맷집과 용기도 은퇴 멘탈 갑의 마인드 중 하나입니다.”
박시호 이사장은 은퇴지능개발의 핵심 키워드로 배움을 꼽았다. 기술이든 지식이든 뭐든 배우고, 남의 눈 때문에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거나 그 반대의 경우가 없도록 하는 것. 그는 “좋은 사람과 맛있는 것을 나눠 먹을 때 행복을 느낀다”며 이 모든 것을 합친 것이 여행이라고 했다. 앞으로 여행 프로그램도 꾸준히 운영할 계획이라고. 지난 경험보다 앞으로의 계획을 말할 때 그는 더 설레면서 반짝였다.
은퇴 이후 새로운 삶의 설계와 도전도 마찬가지다. 용기 있는 사람만이 구태의연함에서 벗어나 신세계에 도전할 수 있다. 마음속에서 불을 뿜는 두려움의 용을 처단하고…. 박시호 이사장이 말한 ‘배움’은 구태의연함을 처단하고, 마음속에서 불을 뿜는 용을 무찌르는 날카로운 무기가 될 것이다.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어느 60대 여성들의 대화
어느 화창한 주말 오후! 어린이 놀이터를 빙 둘러싸고 있는 벤치에 6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성 두 분이 앉아 있다. 놀이터에서는 아이들이 할머니의 존재를 잊은 듯 신나게 노느라 여념이 없었고, 할머니 두 분은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잠시 손주들의 존재를 잊은 듯했다. 우연히 그 옆에서 할머니들과 아이들을 번갈아 쳐다보며 어정쩡하게 서 있던 필자는 어느 순간 벤치 쪽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우고 시선을 고정했다. 남 이야기를 엿들은 것 같아 조금 민망하지만 직업병 탓으로 돌리며 그 내용을 여기에 잠시 소개하고자 한다.
할머니 한 분이 많은 돈은 아니지만 곗돈을 탄 모양이었다. 그 곗돈을 어떻게 사용하면 좋을지 서로 의견을 나누는 중이었다.
“요즘은 은행에 넣어둬도 이자가 얼마 붙지 않아 재미도 없는데, 곗돈을 어디에 쓸 거유?”
“연금에 가입해 매달 연금으로 받으려고 해요.”
“연금으로 받으면 몇 푼 되지도 않을 텐데, 차라리 여행을 다녀오거나 며느리에게 주면 좋아하지 않을까?”
“얼마 되지 않는 돈이라도 매달 받는 재미가 얼마나 쏠쏠한데…. 그리고 이제 우리 노후는 우리가 책임져야 하는 시대잖우.”
이 말을 들은 여성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성과 감정의 줄타기 게임
위의 대화는 오늘날 60대의 고민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다. 돈이 좀 생기면 고민도 생긴다. 자식을 위해 써야 할지, 아니면 이기적으로 보이더라도 자신을 위해 써야 할지, 자신을 위해 쓴다면 어떻게 쓰는 게 과연 좋을지 판단이 잘 안 선다. 노후를 위해 연금에 가입하는 게 좋을까? 이성은 연금에 가입하라고 권하는데, 감정은 자식을 위해 쓰라고 부추긴다. 이성과 감정의 줄타기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감정의 힘에 굴복하고 만다. 하지만 위의 사례에 나오는 여성처럼 꿋꿋하게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사람도 있다. 그 결과는 어떨까? 감정적으로 내린 판단보다는 이성적 판단이 지혜로운 판단이었음을 곧 알게 된다.
2001년, 미국의 저명한 두 교수가 2001년 이전에 태어난 사람 중 2150년까지 생존해 있을 가능성을 두고 내기를 걸었다. 미국 앨라배마 버밍햄대학교 오스태드 교수는 메트포르민과 라파마이신 등이 인간의 수명을 상당히 늘려줄 것이라며 생존 쪽에 내기를 걸었고, 시카고대학교의 올생스키 교수는 유전적 프로그램이 걸림돌로 작용해 아무리 오래 살아도 115세밖에 못 살 거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2001년에 각각 150달러씩 내어 300달러를 펀드에 투자했다. 이 펀드는 2016년까지 연평균 9.5%의 높은 수익률을 보여 300달러가 1275달러로 늘어났다. 2016년 이들은 각각 300달러씩 또 내어 600달러를 이 펀드에 추가로 넣었다. 이 펀드가 2150년까지 연평균 9.5%의 수익률을 실현하면 2150년에는 약 2억 달러가 된다. 이 돈은 내기에서 이긴 사람의 유족이 다 가져가기로 했다. 지금의 60대가 150세까지 생존할 가능성은 없지만 앞으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수명이 더 길어질지도 모른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연금을 선택한 이성의 판단은 옳은 것이다.
60대 연금술의 핵심과 전략
60대 연금술의 핵심은 어떤 연금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 효과가 달라진다는 점에 있다. 가진 돈을 모두 연금으로 전환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바로 여기에 60대 연금술의 전략이 있다. 모든 자산을 연금화한 뒤 매달 받는 연금으로 감당할 수 없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발생하면 대응할 수 없다. 연금은 마치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계속 나오겠지만, 당장의 큰 지출을 감당할 수 없어 빚을 얻게 된다면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는 쪼들린 생활을 해야 함을 물론 최악의 경우에는 하류노인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최근 우리나라에 소개되어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후지타 다카노리의 저서 는 연금으로 일상적인 생활은 그럭저럭 유지하더라도 여윳돈이 없는 상황에서 질병 등 추가로 돈 들어갈 일이 생기면 곧바로 하류노인으로 전락하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현금이 흘러넘치는데도 경제 주체들이 돈을 움켜쥐고 풀지 않아 경기가 나아지지 않고 마치 경제가 함정에 빠진 것처럼 보이는 상태를 ‘유동성 함정’이라 한다. 은퇴자의 경우도 연금이 쉼 없이 나오는데도 일시적 지출에 대응하지 못하는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이를 ‘은퇴자의 유동성 함정’이라고 하자. 은퇴자는 이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결국 60대 연금술의 핵심은 연금화와 유동성의 적절한 조화라 할 수 있다.
정상연금이냐? 연기연금이냐?
60대가 연금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은 국민연금의 수령시기를 법에서 정한 시점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뒤로 미룰 것인지를 결정하는 데 있다. 2017년에 만 60세가 되는 1957년생은 만 62세가 되어야 국민연금을 신청할 수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국민연금은 정상 수령 연령부터 받는 것이 기본이지만 최대 5년간 앞당겨 받을 수도, 늦춰 받을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앞당겨 받는 것을 조기연금, 늦춰 받는 것을 연기연금이라고 한다. 조기연금을 신청하면 정상연금보다 일찍 수령하므로 1년당 6%씩 수령액이 낮아지며, 연기연금을 신청하면 1년당 7.2%씩 수령액이 늘어난다.
1957년생이 62세에 연금을 신청할 경우 연간 1200만원(월 100만원)을 받는다고 해보자. 이 사람이 연금 수령을 5년 늦게 신청할 경우와 5년 빨리 신청할 경우에는 어떻게 될까? 5년 늦게 신청할 경우에는 1년당 7.2%씩 급여액이 올라가므로 첫해 연금액은 36% 증가한다. 반면에 5년 빨리 신청할 경우에는 1년당 6%씩 급여액이 삭감되므로 첫해 연금액이 정상연금액보다 30% 줄어들게 된다. 첫해 받게 되는 월 연금액은 조기연금 70만원, 정상연금 100만원, 연기연금 136만원이다. 이렇게 보면 언뜻 연기연금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연기연금에 비해 조기연금은 10년 먼저, 정상연금은 5년 먼저 받기 때문이다.
어떤 수령 방법이 가장 유리한지는 누적연금액을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에서 보는 바와 같이 누적연금액 곡선의 기울기가 가장 가파른 것은 연기연금이고, 그다음이 정상연금이다. 이는 일정 기간이 지나면 정상연금의 누적연금액이 조기연금의 누적연금액을 초과하지만, 연기연금의 누적연금액에게는 추월당함을 의미한다. 정상연금 월 100만원과 이 연금액이 매년 물가상승률(2% 가정)만큼 증가한다고 했을 때 76세가 되면 정상연금의 누적연금액이 조기연금의 누적연금액보다 많아지고, 80세가 되면 10년 늦게 시작한 연기연금의 누적연금액이 조기연금의 누적연금액을 추월하며, 84세가 되면 연기연금의 누적연금액이 정상연금의 누적연금마저 넘어서게 된다( 참조). 이는 84세 말까지 생존해 있을 경우 연기연금의 누적연금액이 가장 많음을 뜻한다.
2015년 완전생명표에 따르면, 62세 여성의 기대여명이 25.1세이므로 여성은 평균적으로 연기연금을 신청하는 것이 가장 많은 연금을 받는 방법이며, 남성의 기대여명은 20.6세이므로 연기연금을 우선으로 생각하되 상황에 따라 정상연금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많은 연금을 받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상황이란 가족력이나 본인의 건강상태 등을 말한다. 이 상황을 감안해 기대여명보다 오래 살 가능성이 낮으면 정상적으로 62세에 연금을 신청해야 가장 많은 연금액을 받는다.
‘은퇴자의 유동성 함정’ 피하기
이제 60대 연금술의 전략이라 할 수 있는 ‘은퇴자의 유동성 함정’ 피하기에 대해 살펴보자. 미래에셋은퇴연구소에 따르면, 사망할 때까지 연금이 나오는 종신연금의 적정비율은 은퇴 자산의 규모, 국민연금 수령액, 주택연금 가입금액 등에 따라 달라지는데, 은퇴파산 확률이 가장 낮은 종신연금의 비중은 24~42%라고 한다. 종신연금의 비율이 24% 이하로 떨어지면 장수리스크와 변동성리스크 때문에, 42%를 넘게 되면 구매력리스크와 이벤트리스크 때문에 은퇴파산 가능성이 높아진다( 참조). 모든 자산을 종신연금으로 전환해버리면 은퇴파산 확률이 90%로 올라가는데, 이는 일반 국민들이 이용하는 사적연금의 경우 연금액이 일정 금액으로 고정되어 있어 인플레이션에 취약하고, 이 상황에서 질병이나 사고 등 큰 금액의 지출이 생기는 일이 발생하면 대응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피하기 위해서는 국민연금을 포함해 종신연금의 비중을 3분의 1 정도로 유지하고, 나머지 자산은 인플레이션 헤지와 유동성 확보를 위해 운용할 필요가 있다. 은퇴 후 인플레이션 헤지를 위해서는 투자형 상품을 활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최근 일본에서는 ‘저축 투자형 소비’가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는데, 이는 일본의 베이비붐 세대인 단카이 세대(1947~1949년생)가 은퇴 자산을 운용하는 새로운 패턴을 말한다. 과거의 은퇴자들이 저축한 돈에서 매달 생활비를 빼 쓰는 방식을 취했다면, 단카이 세대는 저축한 돈의 일부를 투자로 운용하는 것이다. 단카이 세대는 투자를 위험한 행위로만 생각하지 않고, 돈에게 일을 시켜 새로운 돈을 벌어들이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 요즘 일본의 50~60대 남성들의 일상 대화 속에 건강 이야기 못지않게 ‘돈이 되는 금융상품’이 회자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새로운 어른 문화 연구소’의 소장인 사카모토 세쓰오는 저서 에서 아베노믹스가 사회적 현상으로 자리 잡은 것은 일부 기관 투자가나 해외 펀드만으로는 불가능하며 많은 개인 투자가들이 참가했기에 가능했다고 주장하면서 “그 개인 투자가의 중심적 존재가 바로 단카이 세대였다”고 말한다.
투자를 통해 돈이 제대로 일을 수행하면 괜찮은데, 반드시 그러리라는 보장이 없는 게 투자의 세계다. 이런 경우에 대비하고 아울러 유동성을 확보하기에 좋은 것이 주택연금이다. 주택연금은 만 60세 이상(주택 소유자 또는 배우자)의 고령자가 소유 주택을 담보로 맡기고 평생 혹은 일정 기간 동안 매월 연금 방식으로 노후생활 자금을 지급받는 국가 보증의 금융상품(역모기지론)을 말한다. 주택연금을 받으려면 우선 주택금융공사로부터 보증서를 발급받고, 이를 제휴 금융기관에 내면 그 금융기관에서 주택연금을 지급해준다.
주택연금에서 특히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연금지급방식이다. 주택연금의 지급방식은 월 지급금을 종신토록 지급받는 종신방식과 고객이 선택한 일정 기간 동안만 월 지급금을 지급받는 확정기간방식으로 나뉜다. 종신방식은 다시 인출한도 설정 없이 월 지급금을 종신토록 지급받는 종신지급방식과 수시인출한도(대출한도의 50% 이내) 설정 후 나머지 부분을 월 지급금으로 종신토록 지급받는 종신혼합방식으로 구분된다. 수시인출한도를 잘 활용하면 ‘은퇴자의 유동성 함정’을 피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주택연금을 신청할 때 무조건 종신지급방식을 고집할 게 아니라 국민연금 수령액, 퇴직연금 등 사적연금 수령액을 먼저 계산한 뒤 부족한 월 생활비만큼을 종신연금으로 수령하고 나머지는 수시인출한도를 설정해 유동성을 확보해둘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하면 종신토록 안정적으로 생활비를 조달받으면서 갑자기 도래할 수 있는 예상외 지출 건에도 대응할 수 있어 은퇴파산에 빠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손성동(孫盛東) 연금과 은퇴포럼 대표
삼성금융연구소 수석연구원, 미래에셋퇴직연금연구소 연구실장, 미래에셋은퇴연구소 연금연구실장 역임. 현재는 ‘연금과 은퇴포럼 대표’로 있으면서 1인기업가를 꿈꾸고 있다. 공식블로그 ‘꿈꾸는 은퇴와 연금’을 통해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며, 부산 동아대와 동서대에 출강하고 있다.
손성동 연금과 은퇴포럼 대표 ssdks@naver.com
전 세계적으로 국민연금 수급 개시 연령 기준은 65세다. 우리나라의 국민연금 수급 개시 연령은 1988년 도입 당시에는 60세였다가 1998년 연금개혁조치로 2013년부터 5년마다 1세씩 높아져 2033년에는 65세가 되어야 국민연금을 받을 수 있다. 이에 따라 1952년생까지는 현행대로 60세에 받을 수 있지만 1953~1956년생은 61세부터, 1957~1960년생은 62세부터, 1961~1964년생은 63세부터, 1965~1968년생은 64세부터, 1969년생 이후는 65세부터 연금을 받을 수 있다. 서구의 복지 선진국들도 65세에 지급하던 국민연금을 고령화에 따른 재정 부담을 고려해 2~3년 뒤로 늦추고 있는 추세다.
국민연금 수급 개시 연령이 왜 65세로 정해진 걸까? 세계 최초로 국민연금이 도입된 나라는 독일이다. 1889년 비스마르크가 처음 국민연금을 도입할 때 연금 수령 개시 연령은 70세였다. 당시 독일의 평균수명이 46세에 불과했던 점을 감안하면 아주 운 좋은 사람만 혜택을 받는 불합리한 제도였다. 평균수명이 80세인 오늘날에 비스마르크 시대의 연금 개시 연령을 적용하면 104세가 되어야 연금을 받을 수 있다. 보편적 복지제도로서의 가치가 매우 약한 제도였던 셈이다. 사회주의자 탄압이라는 채찍에 대한 당근책치고는 너무나 말라비틀어진 당근이었던 것이다. 이런 비판이 지속적으로 일자 1916년, 수급 연령을 65세로 낮추었고 이 제도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65세 이상을 노인으로 보는 기준 역시 이 제도에서 유래됐다.
여기까지는 팩트, 즉 논픽션이다. 독일에서 처음 국민연금 수급 연령을 70세로 정한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상상력, 즉 픽션이 필요하다. 비스마르크는 처음 국민연금 수급 개시 연령을 정할 때 왜 70세로 했을까? 잘 알려진 대로 유럽은 크리스천 대륙이다. 이는 곧 성경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성경 시편 90장 10절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우리의 일생이 70이고, 혹시 힘이 남아 더 살아봤자 80인데, 그저 고통과 슬픔의 연속이며 그것도 금세 지나가니 우리가 멀리 날아가 버리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성경에 ‘우리의 일생이 70이고 좀 더 살아봤자 80’이라고 했으니 국민연금 수급 개시 연령을 70세로 정한 타당성은 이미 확보한 셈이 된다. 그러나 시편의 내용처럼 수급 개시 연령을 70세로 정하면 너무 인색해 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러한 이유로 65세로 낮출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천지만물을 창조할 때 하느님이 인간에게 70년의 생명을 부여한 근거는 무엇일까? 이제는 진짜 창작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독일의 유명한 형제 동화작가의 작품인 에는 ‘수명’이라는 동화가 나온다. 이 동화에서 그림 형제는 인간의 수명이 70세가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재미있게 풀어낸다(내용을 약간 변형시켰다).
세상을 창조한 뒤 하느님이 피조물들에게 수명을 정해주기로 하자 나귀가 먼저 왔다. 하느님이 나귀에게 30년을 주겠다고 하니 나귀가 펄쩍 뛰며 말한다. “아이구, 하느님. 너무 길어요. 저의 고달픈 삶을 생각해보세요. 저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등에다 무거운 짐을 실어 날라야 하고, 또 곡식자루도 방앗간으로 날라야 해요. 그 덕분에 사람들은 빵을 먹을 수 있게 되지만, 제게 돌아오는 것이라고는 정신 차리고 기운을 내라는 욕설과 발길질뿐인걸요. 그러니 제 수명을 줄여주세요.”
하느님은 나귀의 딱한 사정을 감안해 18년을 빼주었다. 모든 피조물들에게 30년의 수명을 주기로 한 하느님의 계획이 처음부터 삐걱거리고 말았다. 다음엔 개가 찾아왔다. 다소 근엄한 목소리로 하느님이 개에게 물었다. “넌 얼마나 살고 싶으냐? 나귀는 30년이 길다고 했다만, 너에게는 적당한 것 같은데.” “하느님은 그러길 바라세요? 제가 그렇게 많이 달려야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제 다리는 그만한 거리를 견뎌낼 힘이 없어요. 게다가 짖지도 못하고 물어뜯을 이빨도 없어진 다음에는 이 구석 저 구석을 옮겨 다니며 불평 속에서 살아야 해요.” 개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하느님이 당초 생각한 개의 수명에서 12년을 빼주었다.
개가 나가자 원숭이가 들어왔다. 피조물들의 만만찮은 도전에 직면한 하느님이 다소 당황한 표정으로 원숭이에게 말했다. “너는 분명히 30년을 살고 싶어 할 거야, 안 그래? 너는 개나 나귀처럼 일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항상 즐겁게 사니까.” 사태의 준엄함을 파악한 원숭이가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휴 하느님, 그렇게 보일 뿐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재수좋은 날조차 늘 빈 밥그릇 바닥을 핥는걸요. 사람들은 내게 늘 재미있는 장난과 우스운 표정을 기대해요. 그러면서도 그들은 내게 사과 한 쪼가리 던져줄 뿐인데, 그나마도 시어서 먹을 수 없는 것뿐이죠. 내 기쁜 얼굴 뒤에는 슬픔이 감춰져 있다고요. 난 그런 일들을 30년이나 견뎌내긴 싫어요.”
원숭이의 안타까운 사연을 들은 하느님이 자비를 베풀어 원숭이의 수명에서 10년을 빼주었다. 드디어 사람이 들어왔다. 그는 즐거워 보였고, 건강했고, 활기에 차 있었다. 사람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해하며 하느님이 말했다. “네 수명은 30년이야, 충분하겠지?” 당황한 인간이 약간 볼멘소리로 하느님과 협상을 했다. “너무 짧아요! 생각을 해보세요. 집을 지어서 불을 지피고, 제가 심은 나무가 자라 꽃이 되고 열매가 맺어 이제 막 인생을 즐기려 할 때, 그때 죽어야 하다니요! 오, 하느님, 제게 좀 더 시간을 주세요.” 나귀, 개, 원숭이와는 반대의 제안에 다소 당황한 하느님이 그래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나귀가 반납했던 수명인 18년을 사람에게 주었다. “그래도 충분치 않아요.” 할 수 없이 개의 수명이었던 12년도 주었다. “아직도 너무 적어요.” 끝도 없는 인간의 욕심에 뿔이 난 하느님이 단호하게 말했다. “좋다. 그렇다면 원숭이의 10년까지 더 주지. 그 이상은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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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인간의 수명은 70년이 되었다. 하지만 70년 속에는 인간의 원래 수명 30년에다 나귀와 개, 원숭이가 반납한 수명 40년이 포함되어 있다. 인간의 숙명을 짐작하게 하는 내용이다. 그림 형제는 인간의 숙명을 다음과 같이 날카롭게 지적한다.
“처음 30년은 사람 자신의 수명으로, 참으로 빨리 지나가버립니다. 이 기간에는 건강하고 즐거우며, 일도 즐거운 마음으로 하며 사는 것 자체가 즐겁습니다. 이 기간이 지나고 오는 18년은 나귀의 수명이었던 기간으로, 하나의 짐이 들어지면 그다음 짐이 얹히는 식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먹여 살리기 위해 곡식을 실어 날라야 하지만 그의 충성스런 봉사의 대가로 돌아오는 것은 욕설과 발길질뿐입니다. 그러고 나서 오는 개의 수명이었던 12년은 물어뜯을 이빨도 없이 구석에 앉아 불평만 늘어놓습니다. 그리고 이 기간이 지나고 나면 원숭이의 10년이 그의 삶을 마무리 짓지요. 그때 사람의 머리는 아주 물렁물렁해져서 바보가 됩니다. 하는 짓마다 어리석어 아이들의 웃음거리가 되지요.” -
그림 형제의 해석에 따르면, 인간의 수명 70년은 하느님에게 떼를 써가며 얻어낸 것이다. 요즘은 어떤가? 그림 형제를 비웃기라도 하듯 인간의 수명은 끝없이 연장되는 것처럼 보인다. 미국은 이미 150세 인간을 상상하고 있으며 평균수명 120세의 시대도 멀지 않았다는 낙관론도 있다. 인간수명의 한계는 115세이며 이미 그 한계치에 도달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어느 쪽이든 국민연금 수급 개시 연령을 70세로 하느냐 65세로 하느냐를 두고 논쟁을 벌였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그야말로 상전벽해다. 진시황제가 하늘에서 이 사실을 안다면 “차라리 2000년 뒤에 평범한 노동자로 태어날걸” 하면서 통곡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양적으로 늘어난 수명을 질적 수준이 받쳐주지 못하면 허망할 수밖에 없다. 하느님으로부터 애걸복걸하며 늘린 수명, 눈부신 과학의 발달로 늘어난 수명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면 그동안의 노고는 헛수고에 그치고 만다. 수명 연장에 대한 욕심의 반만이라도 연금에 쏟아 부어야 하는 이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림 형제가 비유적으로 표현한 인생의 막장만 길어질 뿐이다.
늘어난 수명을 제대로 누리게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공적연금의 급여 수준을 대폭 올려주면 된다. 그러나 이는 너무 근시안적인 방법이다. 낮은 출산율과 점점 길어지는 수명을 생각할 때 지속가능한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루 이틀 살다 갈 세상이 아니지 않는가. 길게 봐야 한다. 나이 들면 자연스레 노안이 오는 이치를 깨달아야 한다. 왜 멀리 있는 것은 잘 보이는데 가까이 있는 것은 잘 안 보일까? 이제는 눈앞의 일만 생각하지 말고 멀리 보며 살라는 신의 계시가 아닐까!
당장 내 연금통장에 들어올 돈이 늘어나면 좋겠지만 그러려면 큰 대가가 따른다. 바로 사회적 기회비용이다. 누군가는 그 비용을 감당해야 하는데, 주로 왕성한 경제활동을 하는 젊은이들이다. 일인당 연금액이 증가하고, 연금을 받는 사람의 숫자가 늘어나면 젊은이들의 가처분소득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결국 젊은이들은 아이를 덜 낳고 소비를 줄이고, 그 결과 경제성장률이 낮아지는 악순환의 고리가 힘을 얻게 된다.
다행히도 요즘 노후를 자식에게 맡기겠다는 노인은 별로 없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이 가정의 문을 넘어 광장으로 나오면 상황은 달라진다. 내 자식에서 누군가의 자식으로 옮겨가는 순간 굳은 의지에 균열이 생긴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약점이다. 이 틈바구니를 정치권이 비집고 들어온다. 이렇게 하여 노후의 주 서식지가 사유지에서 공유지로 바뀌면 ‘공유지의 비극’에 직면해 젊은이들의 고충은 더욱 커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사람들은 여러 사람과 공유하는 재산은 잘 간수하지 않는다. 누구나 다른 사람과 공유한 물건보다 자기 물건에 더 많은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
‘공유지의 비극’을 세대 전쟁으로 풀어쓴 이야기를 살펴보자. 알버트 브룩스의 에 나오는 이야기다.
2020년대 암이 완전 정복되고 각종 요법의 발달로 어느 정도 경제력이 있는 노인들이 더욱 젊어 보이는 세상이 도래한다. 노인복지에 엄청난 재정이 투입되고, 젊은 세대의 부담은 늘어만 간다. 젊은 세대의 불만은 차곡차곡 쌓여가지만, 막강한 노인협회의 로비로 개선의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 젊은이를 대변하는 맥스라는 청년은 비밀결사체를 만들어 노인들이 타고 있는 유람선을 납치한다. 노인 대상 테러와 살인사건도 증가한다. 설상가상으로 LA에 대지진이 발생해 미국의 상황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빠진다. 적자재정으로 연명해오던 미국은 도시 재건을 위해 중국에 손을 벌린다. 결국 중국인이 연방 대통령에 당선된다. 이렇게 하여 세계를 호령하던 미국은 중국의 손아귀에 들어간다.
비록 소설 속 허구의 이야기이지만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연금을 누리는 자와 부담하는 자가 극명하게 대비되면 곤란하다. 그 순간 세대 갈등은 증폭되고 급기야 세대 전쟁으로 비화될 소지도 있다. 인간 욕망의 산물인 무병장수는 누구든 누려야 한다. 그리고 장수에 따른 연금 재정 문제도 골고루 나눠 가져야 한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면 ‘공유지의 비극’에 직면할 개연성이 높아진다. 남은 길은 하나밖에 없다. 노후는 스스로 책임지는 문화를 정착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자기노력으로 견고한 연금 피라미드를 쌓아야 한다. 이른바 ‘자기노력 연금’ 시대를 활짝 열어야 한다.
>> 손성동(孫盛東) 연금과 은퇴포럼 대표
삼성금융연구소 수석연구원, 미래에셋퇴직연금연구소 연구실장, 미래에셋은퇴연구소 연금연구실장 역임. 현재는 ‘연금과 은퇴포럼 대표’로 있으면서 1인기업가를 꿈꾸고 있다. 공식블로그 ‘꿈꾸는 은퇴와 연금’을 통해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며, 부산 동아대와 동서대에 출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