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이기 힘든 체면 유지비

기사입력 2017-05-31 16:55 기사수정 2017-05-31 16:55

근 30년을 알고 지내는 미국인 친구가 있다. 직장생활을 할 때 그는 바이어였고 필자는 스포츠 장갑 수출을 담당하는 임원이었다. 미국 시장을 처음으로 개척하기 위해 관련 업체 디렉토리를 보고 팩스를 보냈다. 몇 군데서 만나자고 연락이 와서 미국 출장을 떠났다. 미국 동부부터 바이어들을 만났으나 정보만 빼내려는 바이어도 있었고, 처음이라 아직 미심쩍어하는 바이어도 있었다. 심지어 바이어라고 식사비용을 필자에게 전가하는 등 갑질을 사람도 있었다.

마지막 일정으로 서부에서 그를 만났다. 별로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뜻밖으로 환대를 해주고 필자가 먹고 싶어 하던 랍스터에 스테이크까지 사주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귀국 일자에 맞춰 첫 주문을 선물로 안겨주기까지 했다. 그때부터 미국 비즈니스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회사를 퇴직하고 개인 사업을 시작했을 때 다른 바이어들은 외면했으나 그는 선뜻 거래선을 필자에게로 옮기겠다며 지원했다. 필자는 사업을 접기까지 10년 정도 그와 관계를 맺어왔다. 큰돈은 아니었지만, 이익을 가져다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 후 비즈니스 관계가 끝나 딱히 만날 일이 별로 없었는데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그는 필자에게 연락을 한다. 1년에 한두 번 정도 오는데 그때마다 필자가 저녁식사를 대접한다. 하필 비싼 쇠고기를 좋아해서 꽤 부담이 되기도 했다. 둘이 먹어도 20만 원 정도 나오니 말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젠 비즈니스 관계도 끝났으니 비용 부담은 그가 하는 것이 맞겠다고 생각되었다. 더구나 필자는 퇴직하고 수입이 없는 상태이고 그는 아직 회사 카드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그렇게 하자고 하면 당연히 받아줄 것으로 생각되었다.

어느 날 그가 또 한국에 왔다며 연락을 해왔다. 이번에는 타이완 수출상도 한 명 데리고 왔다고 했다. 더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아무래도 이참에 저녁식사 비용은 그에게 대라고 요구하는 게 나을 듯했다.

하얏트 호텔에서 만나 저녁식사로 뭘 먹고 싶냐고 물으니 의외로 명동엘 가자는 것이었다. 강남은 워낙 비싼 음식점들이 많지만, 명동이라면 대중적인 음식점이 많아 마음이 놓였다. 명동을 구경시켜주고 필자가 가끔 가는 한정식 집으로 데리고 갔다. 식사를 하면서 서로의 안부를 묻고 근황에 대해 얘기할 때 필자가 이제는 수입이 없고 국민연금으로 근근이 살아간다고 설명했다. 앞으로 식사비용은 못 내겠다는 암시였다.

그런데 즐거운 식사가 끝나고 일어서는데 이 친구와 타이완에서 온 수출상이 손을 모으며 잘 먹었다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얼떨결에 인사를 받고 나니 필자가 비용을 대지 않으면 안 될 분위기라서 어쩔 수 없이 카드로 결제했다. 그나마 쇠고기가 아니라서 다행스럽게도 12만 원 정도가 나왔다. 2차로 마신 생맥주 비용은 타이완 수출상이 냈지만, 저녁 식사비용에 비하면 소소한 비용이었다.

체면유지비란 그런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그에게 지불을 요청할 수도 있었지만, 결국 못했다. 1년에 한두 번 만나는 친구에게, 그것도 멀리서 왔는데 식사비용을 내라고 하기가 야박해보이고 난감했던 것이다. 그래도 필자 사정을 생각해서 이번에는 단단히 별렀지만 결국 이번 저녁식사도 필자가 감당해야 했다. 이제 그가 알아서 지불하기 전에는 체면유지비로 감당해야 할 것 같다. 그동안 그가 필자를 도와준 마음을 고맙게 생각하고 그 빚을 갚는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봤자 몇 번이나 더 만날 것인가. 끝까지 좋은 관계를 지속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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