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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둔야학 홈커밍데이 “사랑이 넘치던 교실을 기억합니다”
- 수십 년 전 그들은 알았을까? 호롱불 밑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공부했던 행동이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킬지 말이다. 교육의 손길이 닿지 않는 아이들을 매일 밤 가르치고 보듬었더니 사회의 귀한 일꾼으로 자라났다. 20대 초반 야학 선생님의 노력은 교육을 넘어선 사랑, 그 자체였다. 이와 더불어 스승을 향한 야학생들의 고마움으로 기억되는 서둔야학. 서둔야학 홈커밍데이 현장에 찾아갔다. 짝사랑하던 선생님을 다시 만나니 새록새록 옛 추억이 떠오르는 것만 같다. 서둔야학, 서울대 농대생의 열정으로 기억돼 ‘야학’이 뭔지 모르는 젊은이도 꽤 될 것이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 학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던 시절,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농촌을 비롯해 어려운 지역의 배우고자 하는 이들을 가르치던 곳이 야학(夜學)이다. 서둔야학도 당연히 비슷한 맥락에서 시작됐다. 일제강점기이던 1926년, 우리 문화를 말살하려는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대한민국의 역사와 문화를 가르치고 국어를 지켜내고자 생겨났다. 수원 서둔리에 설립된 서둔야학은 야학 선생님과 야학생 1000여 명을 배출해냈다. 이곳에서의 배움을 계기로 더 높은 실력을 쌓아 업적을 남긴 이들도 여럿이라고. 1980년 당시 정권의 민주화운동 탄압으로 말미암아 폐교를 결정하면서 공식적인 서둔야학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1983년 잠시나마 야학으로서 기운을 내는가 싶더니 금새 사그라졌다. 1990년에는 야학 선생님과 졸업생들로 구성된 서둔야학회를 조직하고 소식지 발간과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홈커밍데이 행사도 명맥이 멈췄다 2011년부터 다시 시작했다. 이제는 좀 더 정기적인 모임으로 발전시킬 계획이다. 야학당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서울 관악캠퍼스로 옮기기 전 서울대학교 농업대학교가 있던 자리는 현재 ‘경기 청년문화 창작소’라는 명칭으로 바뀌어 문화 시설로 탈바꿈했다.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놀이 공간, 문화 한마당, 다양한 문화 지식들을 향유하고 체험할 수 있다. 오래전 서울대 농대의 원예학관으로 쓰였기에 옛 강의실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이곳이 바로 서둔야학당으로 가기 전 모임 장소. 하나둘 서둔야학을 빛냈던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모여들고 들어설 때마다 반가운 눈빛으로 서로를 맞이한다. 모두의 얼굴에 만발하는 웃음이 영락없는 야학 시절 모습 그대로다. 그 사이 많이 변했는지 이름을 알고 나서야 ‘그때 그 선생님이지, 그 학생이지’ 하며 기억을 되살려내는 모습이 정겹다. 황건식 서둔야학회 회장이자 전 서둔야학 교장은 인사말을 통해 간단하게나마 서둔야학이 걸어온 길에 대해 입을 열었다. “1963년, 제가 서둔야학에 들어왔을 때는 초등학교 교육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문맹자 교육을 많이 했습니다. 해방 후 교육을 못 받아 글 모르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1965년에는 중등 과정을 상설했습니다. 서둔야학의 순수한 마음이 정치적 물결에 희생된 것이 사실이죠. 군부독재세력에 대한 저항정신을 가졌던 것은 분명하죠. 젊은 청년들이었으니까요.” 야학 선생님과 학생들의 소개가 끝난 후 초대가수 3대 뚜아에무아인 김은영씨와 함께 추억의 노래를 듣고 함께 부르는 시간을 가졌다. 야학당 시절, 밤 10시쯤 수업을 마치면 선생님들이 목장길과 나무숲을 지나 매일 집을 바래다줬다고. 그때마다 한국의 가곡이며 미국 민요며 노래를 부르며 길을 걷곤 했다. 동년기자 박애란씨도 이에 대한 그리움이 넘쳐났다. “우리들이 야학에서 공부한 것은 공부보다 사랑과 관심이었어요. 부모들은 생존에 허덕이고 있었죠. 아이들한테 사랑? 관심? 이런 것은 사전에 나오는 것이었죠. 야학에서 선생님들이 항상 정성을 다해 가르치고 사랑해주셨어요. 그리고 집으로 갈 때는 노래를 부르면서 집으로 데려다주셨어요. 위험하다고요. 그땐 몰랐는데 나중에 ‘금발의 제니’, ‘매기의 추억’이라든가 이런 음악이 나오면 어김없이 눈물이 나요.” 서둔야학교의 홈커밍데이 가을 소풍처럼 나무 밭에 모여앉아 도시락을 까먹은 후, 서둔야학교로 향했다. 1950년대 서울대학교 주위 교회나 기관의 건물에서 야학교를 열다가 1965년 야학 선생님들이 돈을 모아 교내 연습림 근처에 대지를 매입해 스스로 건물을 지었다. 당시 뜻이 있던 교수에게 지원을 받고 일일주점으로 맥주를 팔아 돈을 모았다고 했다. 서울대학교 농대가 관악캠퍼스로 넘어가면서 인적이 드물어진 서둔야학당 앞에는 ‘서둔야학 유적지’라고 쓰인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잠겨 있던 문이 열리는 순간 옛 야학당 학생들의 책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몇 해 전, 황건식 회장이 사비를 들여 야학당을 복원한 덕분에 비교적 깨끗한 모습으로 야학당 사람들을 맞이했다. 비록 풀이 높이 자라고 사람이 찾아왔던 흔적은 없지만 말이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 천장을 바라보니 상량문이 시절을 기억해내듯 적혀 있었다. 학교 구석구석을 둘러보고 교가도 같이 불러보며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황건식 회장님에 이어 내년부터 서둔야학회 회장을 맡게 되는 김기옥씨는 서둔야학당에 대해 “우리가 정규 교과과정에 의해서 제대로 가르쳤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인성교육 차원에서 사랑으로 학생들을 가르쳤기에 졸업생들이 잊지 못하는 것 같다”, “이곳을 나온 모두가 건전한 사회인으로 살고 있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 2017-12-06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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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약 먹는 기분처럼 흥이 돋는다
- 1976년 여름밤, 진하해수욕장에서의 남녀 신입사원들을 위한 캠프파이어는 현란했다. 어둠 속에서 익명성이 확보된 100여 명의 격렬한 댄스파티는 젊음의 발산 그 자체였다. 그중 열정적이고 현란하게 춤을 추어대는 한 여직원의 실루엣이 너무 멋있어 끝까지 따라가서 얼굴을 확인해보니 순박하고 어려 보이기까지 했다. 익명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자유로운 자기표현을 가능하게 하는가를 실감했다. 그리고 이어진 장기자랑에서는 흥이 오른 젊은이들이 끼를 경쟁적으로 선보여 필자의 경쟁심을 자극했다. 필자도 용기를 내어 국통과 식기를 악기로 삼아 중모리 12박을 치며 춘향가 중 ‘쑥대머리’를 목청껏 불러댔다. 개성적인 민요가락에 빠진 남녀 신입사원들의 호응으로 심사위원들은 1등상을 줬고 부상으로 큰 밥솥을 탔다. 어깨너머로 배운 민요와 북장단 필자가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훨씬 전인 1954년 혹은 55년경으로 기억된다. 밤이면 외양간이 딸린 우리 집 사랑방으로 아버지 친구분들이 몰려오곤 했다. 6·25전쟁이 끝나고 얼마 안 된 시기였는데, 환담을 나누면서 삶의 뿌리가 송두리째 흔들리던 전쟁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말라붙은 정서를 되살리는 수단으로 북장단과 민요와 창을 배우셨다. 국악 선생님 한 분을 초청하여 우리 집에 모시면서 밤이면 민요와 북장단을 상당 시간 배우셨는데 나는 어깨너머로 익혔다. ‘궁궁딱 궁또드락 똑딱 궁궁딱 궁궁궁’, 소위 중모리 12박 장단은 밤마다 배워도 어르신들은 많이 틀리셨는데 필자는 어렵지 않게 익히고 반복하곤 했다. 1000회에 가깝게 외세의 침략을 받았다는 우리 한민족! 민중의 삶이 피폐하고 삶의 뿌리가 흔들릴 때마다 건전한 일상을 회복하고 즐거운 정서를 고양하기 위해 민요를 만들고 발전시켜왔을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아리랑만 해도 같은 3박 세마치장단에 300종류가 넘게 만들어져 한국인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민요가 되었고 2012년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이 된 것이리라. 우리 가락의 멋과 흥 대형 조선소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 봄가을이면 대형 선박을 발주한 여러 나라의 해운회사들이 선박 건조 현장에 파견한 감독 혹은 검사원들을 야유회에 초청하여 한국의 산하와 문화유산을 보여주곤 했다. 동해안을 따라 울산에서 감포항으로 야유회를 가던 때 한국 민요의 장점과 특징을 설명할 기회를 가졌었다. 서양음악은 4분의 3박, 4분의 4박, 8분의 6박 등이 주종을 이루는데 한국의 민요는 훨씬 창의적이고 다양하게 민족의 정한(情恨)을 표현함을 설명했다. 또한 한국인이 많이 부르는 아리랑만 해도 지역마다 달라 그 종류가 300가지가 넘는다는 사실을 자랑했다. 아리랑의 뜻이 무엇이냐는 외국 선주 감독들의 질문에 ‘순수한 사랑을 갈구하는 가락’ 혹은 ‘고난을 삭이고 승화시키는 가락’이라고 말해줬다. 어느 해 가을, 추석 명절을 쇠기 위해 직장이 있던 동해안 쪽 울산에서 천리길을 차로 달려 서해안 쪽 고향 영광 집에 도착하니 초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이 와 계셨다. 이내 부친과 두 분이 북장단에 민요를 교대로 부르기 시작하셨다. 민요장단을 익힐 좋은 기회여서 부친과 담임선생님이 민요를 부르실 때 적극적으로 나서서 중모리와 중중모리 장단을 쳐드렸다. 북이 자꾸 발에서 빠져나가려고 해, 장단을 치며 북을 끌어안으려 애를 쓰니 두 분 모두 웃으시며 즐거워하셨다. 그 후 영화 가 나와 장님이 된 누이가 민요를 부르고 남동생이 북장단을 치며 서로 회포를 푸는 장면이 인상적이어서 민요와 가락을 익힐 기회를 더 엿보게 했다. 정년퇴직 후 달려간 민요교실 정년퇴직하고 집에서 가까운 신당5동 주민센터에서 민요·장구를 가르치는 것을 알고 바로 등록했다. 남자보다 여자 회원이 대부분이어서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일주일에 두 번, 2시간씩 민요와 장구를 익히기 시작했다. 노랫가락, 굿거리장단, 세마치장단 등 여러 박자들의 민요 7곡씩을 조합해 교본을 만들어 매번 반복해가니 익히기 좋았다. 2년 정도 하니 어느 정도 따라갈 수 있었다. 그러나 민요를 부르며 장구를 동시에 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중모리 12박에 맞춰 부르는 금강산타령 등은 소리를 올리고 내리고 감고 꺾는 내용들이 악보에 없어 따라 하기 힘들었고 가사 또한 많은 분량이라 외우기가 쉽지 않았다. 장구 치는 것은 북장단 익힌 경험이 도움이 되어 따라갈 수 있었다. 지금도 이곳에선 수요일과 금요일 2시간씩 민요·장구 배우는 프로그램이 계속되고 있다. 민요·장구 모임도 결성해볼 테다 경기도 용인으로 생활의 터를 옮겨 얼마 지나지 않아 집 가까운 곳에 노인복지관이 들어섰다. 약 60개 프로그램이 진행되는데 민요·장구가 포함되어 있어 기뻤다. 가르치는 선생님에 따라 장점들이 다름을 새삼 느꼈다. 빠른 자진(잦은)모리장단의 경복궁타령과 잦은 뱃노래는 매우 흥겨웠고 굿거리장단 4박에 실린 창부타령의 가사들은 민족의 애환을 다양하게 담고 표출함을 실감했다. 그리고 그해 말에 60개 프로그램 단체공연을 할 때 10여 명이 무대에 나가 배운 민요들을 부르며 흥을 돋우어줬다. 청중석에서 나와 어깨춤을 추는 관중도 있어 민요의 힘과 전파력을 느낄 수 있었다. 민요·장구도 좋은 취미로 익히고 만들려면 역시 지속성과 성실성이 필요하다. 집 가까운 노인복지관에서 경제논리로 폐강이 된 후 집에서 좀 멀지만 다른 지역의 주민센터를 찾았다. 이곳에선 금요일 초급반과 월요일 중급반으로 2시간씩 운영되어 좋았고 선생님은 또 다른 개성과 장점이 있었다. 특히 굿거리장단의 다양성을 익히도록 매번 반복하여 민요를 부르고 장구를 힘껏 쳐대면 일주일의 피로가 풀리며 심신 건강을 위한 보약을 먹은 기분이 된다. 1996년 부친을 위한 칠순잔치 때 국악인을 불러 부친과 고향 친구분들을 즐겁게 해드렸다. 내년 필자의 칠순 날이 오면 형제자매들과 친구들을 불러 노래와 한민족의 영원한 고향노래인 민요들을 같이 불러볼까? 이를 위해 작년 말에 어떤 모임에서 불렀던 중모리장단의 ‘한오백년’ 과 처가 마을에 가서 담 쌓는 봉사를 하면서 목청 돋워 불렀던 ‘창부타령’을 즐겁게 다듬어 가보자! 그리고 전 직장동료들 취미모임인 산악회, 역사문화탐방회, 바둑회, 독서문학회에 이어 민요장구회 결성도 건의해보자.
- 2017-11-19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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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천마리소리 여름축전 그리고 낯선 남자와의 하룻밤
- 작년부터 지인이 이 행사에 동호인 멋 겨루기에 출전한다며 오라고 했었다. 국악을 중심으로한 행사인데 3일간 축제 형식으로 열린다. 문제는 너무 먼 것이다. 차가 있으면 몰라도 대중교통으로 가자면 고생 깨나 해야 할 여정이었다. 그러나 마침 운길산 역에서 하룻 밤 잘 일이 있어 내친 김에 가볼 생각을 했다. 설악면에서 농장을 하는 다른 지인이 설악면으로 와서 같이 가자며 나섰다. 운길산 역 근처에서 다른 지인들과 하룻밤을 보내고 남들은 서울로 가는데 혼자 용문 역으로 갔다. 그리고 홍천 가는 시외버스를 타고 홍천에서 행사장에서 보내주는 셔틀버스를 타고 들어갔다. 마리소리 축제는 3시부터 악기박물관에서 시작했다. 악기 박물관도 우리나라 최초의 악기박물관이라며 우리 전통 악기 중심이었다. 덕소에도 악기 박물관이 있는데 주로 서양 악기라는 점이 다르다. 1억 원이 넘는다는 편종, 편경, 그리고 퉁소, 거문고, 가야금등 다양한 우리 악기가 전시되어 있었다. 이미 10년 전에 개관했다. 행사는 2일간 이어지는데 첫날은 악기 박물관에서 서도소리부터 시작하여 밤늦게까지 야외공연장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었다. 한편으로는 민요와 단소, 사물놀이를 배우는 프로그램도 진행한다. 둘째 날에는 동호인들의 경연대회가 펼쳐진다. 지인도 여기 참여하기 위해 팀원들과 함께 온 것이다. 국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가볼만 한 축제이다. 설악면에서 온다던 지인이 마음이 변했는지 못 온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귀가 길에 대책이 없었다. 당일 서울 가는 차가 있으면 얻어 타야 하는데 만차로 와서 여석이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행사 참여하는 지인들 팀과 섞여 하룻밤을 자든지 해야 한다. 머릿속이 복잡하여 야외 행사장 옆 간이 막걸리 파는 천막에 혼자 앉았다. 마침 야외무대에서 사물놀이가 한창이라 멀리서 소리만 들어도 흥겨웠다. 그런데 갑자기 웬 남자가 막걸리 병을 한 병 들고 필자 앞에 앉았다. 40대 중반 쯤인데 인상으로 보아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 필자가 서울 갈 고민을 얘기하자 자기 집이 근처이니 원한다면 같이 자도 된다는 것이었다. 농막이라고 했다. 모기에 뜯길 각오를 하며 그러자고 했다. 밤늦게 그 남자를 따라 나섰다. 산길을 달려 도착한 곳은 농막이 아니라 버젓한 별장이었다. 마당은 널찍하게 잔디가 깔려 있고 주변은 산으로 둘러 싸여 안온한 곳이었다. 돗자리를 펴고 팬티만 입은 채 제대로 마셔보자며 술상을 차려 왔다. 유쾌하게 담소를 나누며 마셨다. 주변은 정말 우리밖에 없었다. 홍천군 서석면 청량리라는 곳이었다. 앞에 청량 저수지가 있었다. 신원도 모르는 남자를 따라 혼자 온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잃을 것 없는 남자라서 가능했던 일이다. 지갑의 돈은 달라면 다 주면 그만이다. 설마하니 무인도에서 새우잡이 하라고 보내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날 밤 잘 자고 다음 날 아침 상 역시 잘 차려 먹고 서울까지 태워다 주었다. 살다 보니 별일도 다 있다. 덕분에 여름휴가를 잘 보낸 셈이다.
- 2017-08-11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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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둔야학교 가는 길
- 서둔야학은 우리 집에서 걸어서 약 20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들판을 지나서 가다 보면 5월의 훈풍이 필자의 볼을 간지럽혔고 넓은 들판의 보리가 바람에 넘실대는 모습은 마치 한 폭의 수채화 같았다. 보리밭 한가운데서 종달새는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내려왔다 까불대며 명랑하게 지저귀었고, 멀리서 구슬프게 들려오는 뻐꾸기 소리는 필자의 가슴을 깊이깊이 파고들었다. 그 소리 듣기를 너무 좋아했던 필자는 걸음을 멈추고 귀 기울여 한참 듣다가 다시 발걸음을 떼곤 했다. 논둑길 옆에는 씀바귀와 냉이의 작고 하얀 꽃이 무리 져서 피어 있었다. 토끼풀의 소담스런 하얀 꽃도 귀여운 모습으로 피어 있었다. 토끼풀 꽃을 줄기째 따서 꽃반지를 만들어 끼우기도 하며 학교 가는 길은 마냥 즐거웠다. “신은 자연을 만들고 사람은 도시를 만들었다”는 말이 있는데, 세상의 어느 것보다도 가장 위대한 스승, 자연은 필자가 혼자 있는 시간을 충분히 만끽하도록 해줬다. 배움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아직 어린 시절의 딸애가 그림을 그리며 동생의 눈은 커다란 쌍꺼풀에 왕방울만하게 그리면서 엄마 눈을 그릴 때는 왜 그렇게도 인색한지 볼펜으로 점만 한 번‘콕’찍어놓으면 그만이었다. 대개는 눈이 큰 사람들이 겁이 많다는데 필자는 작은 눈인데도 겁이 많았다. 일단 도착하면 집보다도 더 포근하고 정다운 야학교였지만 사방이 어둑해질 때는 숲길을 가로질러 가야 하는 상황이 질색이었다. 그래서 매번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세상의 온갖 유령과 귀신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필자를 괴롭힐 것 같았다. ‘아유 무서워, 언제 다 가지…’ 부지런히 걸어도 야학교 가는 길은 매번 까마득했다. 초긴장이 된 필자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온갖 무서운 상상을 떨쳐버리려 애를 쓰며 급히 걸어가던 어느 날이었다. 별안간 앞에 서 있는 소나무 뒤에서 사람이 ‘쓰윽’ 나타났다. 순간 너무 놀랐던 필자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때 황급히 필자를 붙잡으며 “애란아, 나야 나. 괜찮니? 응? 괜찮아?” 하며 누군가 다급히 소리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알고 보니 선배인 옥희 언니였다. 필자가 오는 것을 본 언니가 슬그머니 장난을 쳤던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얼굴이 하얘지며 쓰러지려고 해서 오히려 언니가 더 놀라며 ‘휴우’ 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고 한다. “한 글자라도 더 배워보겠다고, 금방 뭐가 불쑥 튀어나올 것 같은 산길을 마구 달려가면 저 멀리 희미한 불빛이 보였지. 기억나니? 전깃불도 없이 호롱불을 켜놓았었지. 바닥에는 가마니를 깔아놓고….” 최근에 야학교 모임에서 만난 민자 언니의 회상이다. 그랬다. 야학교는 이래저래 뛰어서 가야만 했다. 무서워서 또 빨리 공부가 하고 싶어서(공부에 신물이 난 지금 애들에게 상상이 되는 얘길까?)였다. 그리고 빨리 가야 하는 중요한 이유는 더 있었다. 아늑한 산골짝 작은 집에 아련히 등잔불 흐를 때… 미국 민요 ‘산골짝의 등불’의 가사인데 농대 연습림 끝자락에 있었던 서둔야학교는 산 중턱에서 내려다보면 그 가사 그대로였다. 저 멀리 아련히 등잔불이 켜진 것을 보고 있으면 필자 가슴에 뽀얀 봄 안개 같은 그리움이 피어올랐다. 선생님들이 미리 호롱불을 밝혀놓고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책가방이 없어 넓은 소창보자기에 책과 연필 몇 자루 담긴 필통을 넣고 허리에 질끈 동여매고 다녔던 필자는 야학교에 갈 때마다 뛰었다. 선생님들을 빨리 보고 싶어서 길게 자란 풀숲을 헤치며 숨이 턱에 닿도록 뛰었다. 어제도 만났고 조금 후면 보게 될 분들인데도 그새를 못 참고 마음이 그렇게 급했던 것이다. 그때마다 허리춤에서는 연필들이 아프다고 ‘달그락달그락’ 소리쳤다. 훗날 알고 보니 필자만 선생님들을 보고 싶어 한 것이 아니라 선생님들도 우리들이 너무 보고 싶어 방학기간에는 개학날을 손꼽아 기다리곤 하셨단다.
- 2017-08-07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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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극 '흥보 씨' 흥이 넘치는 우리 가락 공연
- 국립극장 달오름으로 창극 '흥보 씨'를 보러 갔다. 마침 티켓이 여러 장이라 친구들에게 연락하면서도 조금은 걱정스러움이 있었다. 구닥다리처럼 창극이 뭐냐고 할 줄 알았는데 모두들 좋다며 환호한다. 사실 필자는 음악이라면 모든 장르를 다 좋아한다. 그렇지만 아직 창극이나 판소리공연은 가보지 못했다. 젊은 날 팝송과 샹송, 칸초네를 듣고 거기에 잘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클래식까지 섭렵하면서도 우리 가락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가요 중에서도 트로트를 들으면 큰일 나는 것처럼 금기시했는데 옛말 그른 것 없다는 말이 딱 맞다는 것을 시니어가 되어서야 이해했다. 젊었을 땐 어른들이 왜 저런 노래를 좋아하는지 유치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남진 나훈아로 대표되는 트로트 가요나 민요, 판소리가 너무나 가슴에 와 닿고 듣기 좋은 음악이 되었으니 너희도 나이 들어 보라던 말씀이 딱 맞아떨어졌다. 창극이라면 대여섯 살 쯤 엄마 치마꼬리 잡고 극장에 따라가서 보았던 국극이 떠오른다. 보통 여자들로 구성되어 남자역도 여자가 했는데 눈썹과 눈을 까맣게 칠하고 우렁찬 목소리로 화려한 연기와 노래를 하던 그들이 흥미로우면서도 좀 무서웠던 기억이 있다. 오늘 본 창극 ‘흥보씨’는 젊은 국악인들이 판소리에 대한 고정관념을 뛰어넘어 연출한 흥이 넘치는 무대로 판소리와 리드미컬한 현대음악이 교차하면서 신선한 음악적 풍경이 펼쳐졌다. 주인공 흥보 씨는 요즘 촉망받는 유명하고 잘 생긴 국악인이어서 보는 재미가 더했고 출연진 대부분이 젊은 국악인이어서 참신했다. 국립극장 달오름에 창극을 보러 어르신들이 많이 올 줄 알았는데 관객 역시 젊은이가 대부분이다. 국립창극단과 각색의 귀재 연출가 '고선웅' 씨, 천재 소리꾼 '이자람'이 의기투합해 만들었다는 ‘흥보 씨’는 우리가 알고 있던 흥부놀부전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슬하에 자식이 없어 근심하던 연생원이 친척 집 문상을 다녀오다가 길에 버려진 아이를 발견하고 데려와 양자로 삼는데 가문이 흥하기를 바라며 ‘흥보’라 이름 짓는다. 그사이 연생원의 처 황 씨는 남편이 집을 비운 사이 다른 남자와 동침하여 이듬해 아들을 얻는데 혼외자식임을 모르는 연생원이 귀하고 놀랍다는 뜻으로 ‘놀보’라 했다. 그러니 놀부가 형이 아니고 흥부가 형이라는 설정이다. 우리가 알고 있듯 흥보는 심성이 착하고 놀보는 심술궂게 자란다. 스무 살이 되던 해 놀보는 착한 형 흥보를 졸라 소원이라며 형과 아우를 바꾸자고 한다. 그때부터 재산도 형이 된 놀보에게 넘어가 착하기만 한 흥보의 고난이 시작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흥보는 묘소에서 3년 상을 보내고, 돌아오는 날 아이를 낳지 못해 시집에서 쫓겨 난 여자 정 씨를 만나 부부의 연을 맺는다. 이들은 길에서 딱한 처지의 거지 아홉 명을 자식으로 삼아 집으로 돌아오는데 집에는 놀보가 버티고 있다. 원작에선 흥보가 금실이 좋아 자식을 여럿 두지만, 창극에서는 모두 데려온 자식으로 각색되었다. '흥보 씨'는 기존 이야기를 비틀어 새로운 이야기를 전하지만 권선징악인 작품 본래의 교훈은 그대로 담았다. 고선웅 연출가는 각색하는 과정에서 착한 사람이 손해 보지 않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한다. 까치가 물어다 준 박씨 덕분에 부자가 된다는 설정을 버리고 스스로 깨닫는 흥보를 만들었다. 고을 원님이 딱한 흥보의 편을 들어 놀보를 벌하는 심판자 역할을 하고 흥보에게 돌아가는 상은 금은보화가 아니라 다시 형이 되는 명예회복이다. 난데없이 외계인이 나타나 흥보에게 깨달음을 준다거나 행운의 제비가 나이트클럽의 춤꾼으로 나오는 등 웃음을 겨냥한 설정도 있어 재미있었다. 필자가 좋아하는 권선징악의 창극이 펼쳐져서 속이 시원했다. 젊은 국악인들의 노력으로 우리 가락이 널리 보편화하여 젊을 때의 필자처럼 편견을 갖지 않고 모두가 즐길 수 있으며 넓은 팬층을 만들어 세계적으로도 뻗어 나갈 수 있는 고유의 인기 있는 우리 창극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 본다.
- 2017-04-26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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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단카이 세대의 취미
- 이태문 일본 통신원 gounsege@gmail.com 정년퇴직 이후의 삶, 제2의 인생을 어떻게 하면 알차게 즐길 수 있을까? 아마도 누구나 한번쯤 고민하며 그 실마리를 찾으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릴 것이다. 하지만 나이 들어 새로운 취미를 만드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의욕과 체력이 따라주는 젊은 시절부터 ‘취미의 씨’를 뿌려두는 게 중요하다. 취미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사람들에게 그 비결을 물으면 “젊었을 때 했던 취미생활을 다시 시작했다”고 대답하는 분들이 꽤 된다. 그러나 새로운 취미에 도전하는 걸 방해하는 건 의욕도 체력도 아니고 ‘오래 계속하는 것’이라는 선입견일지도 모르겠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기회이자 타이밍’이니 남은 삶에 지금까지 맛본 적 없는 ‘재미’와 ‘보람’을 선물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자기 삶의 ‘애호가’일 것이다. 일본 시니어들의 취미 일본에서는 고령자가 계속할 수 있는 취미로 주식, 등산, 워킹, 낚시, 독서, 자수, 골프, 볼링, 시쓰기, 체스, 데생, 원예, 역사, 장기, 분재, 서예, 유화, 과자만들기, 수묵화, 시계수집, 게이트볼, 꽃꽂이 등을 꼽는다. 크게 몸을 움직이는 취미, 머리를 쓰는 취미, 손동작이 필요한 취미 등으로 나눌 수 있겠다. 이러한 취미는 운동 부족을 해소해주고, 치매 예방에도 좋다. 또한 같은 취미를 즐기는 사람들과의 교류도 넓혀주고 쓸쓸한 노후의 고독도 피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60대 남녀의 인기 취미 순위 350개 이상의 취미를 소개하는 일본의 ‘취미찾기닷컴’이 조사한 인기 순위를 잠깐 살펴보자. 먼저 60대 남성은 혼자 하는 여행, 사이클링, 오토바이, 재택근무, 사진, 전자공작(PIC), 절과 신사 순례, 주식, 워킹 순으로 조사됐다. 60대 여성의 경우는 혼자 하는 여행, 재택근무, 온천 순례, 절과 신사 순례, 워킹, 자수, 양궁, 등산, 심리학 순으로 인기가 있었다. 참고로 50대 남성의 취미로 사격, 50대 여성의 취미로 소설쓰기, 기타, 퍼즐 맞추기 등이 눈에 띄었다. 내 꿈을 찾아라~ 인생은 60부터 일본의 주쿄(中京) TV는 매주 일요일 아침 5시 45분부터 을 방송하고 있다. ‘아라칸’은 Around Kanreki의 줄임말로 칸레키는 우리말로 환갑을 의미한다. 이 프로그램은 환갑 전후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꿈에 도전해 제2의 인생을 즐길 수 있는 힌트를 제안하고 있다. 이 방송에서 소개된 이색 취미 몇 가지를 소개해보겠다. 2015년 12월 6일 방송에서는 빙상 위의 컬링(curling)이 아닌 날씨와 관계없이 체육관에서 즐길 수 있는 ‘커롤링(curolling)’이 소개됐다. 20여 년 전 나고야에서 시작된 이래 경기 인구 40만 명을 자랑하는 인기 스포츠로 체력보다는 두뇌게임이라는 점에서 ‘마루 위의 체스’라고도 불린다. 2016년 1월 10일에는 미술 취미로 ‘어탁(魚拓)’이 소개됐다. 낚시를 좋아하지 않아도 누구든 즐길 수 있는 ‘어탁’은 기존의 수묵(水墨) 중심이 아니라 색채와 구도 등을 바꿔가며 다양한 느낌을 줄 수 있다. 꼭 물고기가 아니어도 되며 모든 사물의 본을 떠서 작품으로 만드는 ‘탁화(拓畵)’라는 장르가 새롭게 소개됐다. 그다음 주인 1월 17일에는 카우보이 복장으로 차려입고 컨트리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드는 컨트리 댄스가, 3월 13일에는 1960~1970년대에 붐이 일어나 일렉트릭 기타에 빠졌던 세대들이 밴드를 결성해 제2의 청춘을 만끽하는 모습이, 4월 17일에는 실제 동물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매력적인 리얼 양털 퀼트 아트가, 8월 7일에는 다양한 무늬가 특징인 넥타이를 재활용해 가방과 인형 등을 만드는 리폼이 소개됐다. 이 밖에 9월 4일에는 경이로운 종이접기의 세계, 9월 11일에는 걸리버 여행기를 방불케 하는 미니어처의 세계, 10월 9일에는 종이를 오려내 그림을 만드는 ‘키리에(切り絵)’, 10월 23일에는 실제로 사람을 태우고 증기를 뿜으며 달리는 철도 모형 등이 소개됐다. 2017년에 들어와서는 우쿨렐레와 돌하우스(미니어처 장난감 집), 천사의 소리 핸드벨 음악, 볼펜 그림의 세계 등이 전파를 탔다. 이색(異色) 취미보다는 다양한 취미 인구가 많아지고 평균수명이 계속 늘어나면서 취미도 점차 다양해지고 있다. 과거 이색적이라는 이유로 주목을 끌던 취미들은 최근 덕후(마니아, 광)들이 등장하며 주류와 당당하게 어깨를 겨루고 있다. 그만큼 취미를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진 셈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걸 증명하는 것 역시 새로운 취미에 도전해 개척하는 자세일 것이다. 전문가들은 고령자들에게 무리하게 몸을 움직이기보다는 치매 예방 차원에서 손가락과 뇌를 자주 사용할 수 있는 주산, 바둑, 장기, 손글씨, 그림, 색칠하기, 민요, 노래방, 꽃꽂이 등을 권한다. 간단한 요리를 만들게 하거나 본인이 좋아하는 것을 시키는 것도 좋다. 몸 푸는 기분으로 이런 취미는 어떨까? 사단법인 일본 화살불기 레크레이션협회는 폐활량에 자신이 없는 사람은 물론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취미로 화살불기를 권한다. 실제로 전국의 화살불기 교실에는 60~70대 회원들이 많은데 90세가 넘은 고령자도 있다고 설명한다. 또한 수집이 취미인 사람들은 모으는 것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수집한 물건을 이용하는 방향으로 취미활동을 확대해보는 것도 좋겠다. 예를 들어 도자기 수집을 하는 사람이 도예 교실을 다니며 직접 만들어보거나,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이 바리스타 자격증에 도전해 실력을 인정받는 것은 어떨까? 또 인물과 동물, 자연 풍경 등 사진 찍기를 즐기는 사람은 독거노인의 영정사진을 찍어주는 등 자신의 취미와 능력을 사회에 환원하는 재능기부 나눔을 실천해보는 것도 좋다. 이처럼 좀 더 관심을 갖고 주변을 살펴보면, 의외로 쉽게 시작할 수 있는 취미들이 많다. 먼저 발품을 팔아 정보를 찾아보고 자신에게 ‘안성맞춤’인 취미를 선택해보자. 슬슬 발동을 걸어보자 지난 2014년 5월에 구성된 댄스 그룹 ‘TGK48’은 일본 기후 현 다지미 시의 고령자들이 만든 그룹이다. 그룹명은 일본의 인기 여성 아이돌 그룹 AKB48의 이름에서 힌트를 얻어 ‘다지미, 겐키(건강), 고레샤(고령자)’의 머리글자를 따서 지었다. ‘노래하고 춤추고 먹고 마시고’를 기치로 내걸고 2016년 8월 60대 42명, 70대 21명, 80대 1명 등 총 64명(남성은 5명)으로 구성된 ‘TGK48’은 힙합도 소화하는 본격 댄스 그룹으로 공공시설을 빌려 일주일에 한 번씩 두 시간가량 연습을 하며 구슬땀을 흘린다. 최근 춤을 잘 춘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크고 작은 행사와 스포츠 대회에 출연,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뽐내고 있다. 강사 레슨비 등 연간 100만엔가량의 운영비는 다지미 시로부터 지원받고 있다. 고령자의 의료비와 개호비 등의 삭감과 관련해 길게 내다본 다지미 시의 획기적인 투자라고 할 수 있겠다. 실제로 2016년 3월 16일자 마이니치 신문에 따르면, ‘TGK48’ 멤버 35명의 체력을 측정한 결과 전 항목에 걸쳐 동세대의 일반인들을 훨씬 뛰어넘는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깜빡이는 빛을 보고 도약하는 데 걸리는 ‘전신 반응속도’는 무려 0.3초대로 20대 수준으로 나타났다. 5초간 빠르게 스텝을 밟는 ‘서서 스텝핑’의 평균 횟수도 60대 멤버가 40.1회, 70대 멤버가 37.7회를 기록해 젊은이 못지않은 결과를 보여줬다. 이들의 체력을 측정한 기후대학교 교육학부의 가스가 히카루 교수는 “힙합은 빠른 템포의 음악에 몸의 움직임을 맞추는 춤으로 신경에 좋은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 2017-04-17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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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메마른 민초에 한 숨, 시민 호흡에 한 숨 '노작 홍사용 문학관'
- 신도시 건설은 종종 자연과 문화재 훼손의 주범으로 지목되곤 한다. 수만 세대를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시설의 등장은 늘 그래왔다. 그러나 지혜가 모아지고 제도가 보완되면서, 우리는 가끔 사랑할 만한 무엇을 남기기도 한다. 동탄 신도시 등장에 발맞춰 건설된 노작 홍사용 문학관이 그렇다. 경기도 화성시 노작로에 위치한 ‘노작 홍사용 문학관’은 동탄 신도시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뒤로는 동탄역이 있고 앞으로는 호텔을 포함한 상업시설이 성처럼 둘러싸고 있다. 또 그 주변은 지평선 따위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빼곡하게 아파트들이 들어서 있다. 이런 곳에 문학관이라니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다. 노작 홍사용 문학관은 2007년 동탄 신도시 개발을 위한 행정구역 개편이 시작되면서 함께 건립이 구상됐다. 2008년 연면적 941.55㎡ 규모로 설계가 완료되고 공사를 거쳐 완공된 것은 2010년의 일이다. 동탄 신도시 개발과 함께 노작 홍사용 문학관의 건립이 고려된 것은 신도시의 허파 역할을 할 반석산에 그의 묘소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 계기가 됐다. 노작 홍사용 문학관은 화성시 미디어센터, 동탄복합문화센터와 반석산 근린공원을 구성하는 주인공이 됐다. 일제강점기에도 지조 지킨 작가로서의 삶 노작 홍사용(露雀 洪思容)은 1900년에 태어나 1947년 사망할 때까지 뜨거운 삶을 산 우리나라의 대표적 근대 시인이다. 학문적으로는 1920년대 초 낭만주의 운동의 대표 시인으로도 꼽힌다. 동심 어린 시각에서 어머니를 바라본 시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그의 작품이다. 이 시는 형식적인 면에서도 근대시의 기틀을 마련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또 ‘봄은 가더이다’와 같은 민요풍의 율조가 바탕이 된 민요시들도 발표했다. 노작은 시인으로만 보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창작활동을 했는데, 소설과 수필 등에서도 남다른 재능을 발휘했다. 특히 희곡과 이를 바탕으로 한 연극에도 관심을 보여 연극단체 토월회(土月會)를 이끌며 자신이 쓴 작품의 배우로도 직접 출연했다고 전해진다. 노작 홍사용은 일제강점기에도 지조를 지켜 문인들의 친일행위라 할 수 있는 매문(賣文)을 하지 않은 대표적 작가로 손꼽힌다. 그는 1919년 기미독립운동 당시 학생운동에 가담했다 체포되기도 했고, 8·15 광복을 맞아 근국청년단(槿國靑年團)운동에도 가담했다.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문화 공간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는 문학관들은 특정 작가를 기리는, 일종의 ‘박물관’처럼 운영되는 곳이 많다. 생전의 작품이나 유품들을 전시해놓는 것이 전부이다 보니 현재와 과거가 만나는 접점이 빈약하기 쉽다. 이런 면에서 보면 노작 홍사용 문학관은 좋은 점수를 받기에 충분하다. 홍사용 선생의 작품들이 일제 치하의 민초들에게 꿈꾸고 숨 쉴 수 있는 정서적 여유를 가져다 줬다면, 노작 홍사용 문학관은 지역주민들의 다양한 문학적 체험이 가능한 공간이다. 노작의 생전 활약에 대한 정보나 유작 등에 대한 전시는 물론이고, 약 1만2000권의 문학 서적으로 채워진 도서관과 북카페가 운영되고 있다. 1층에 마련된 88석 규모의 공연장에선 매달 최근 개봉작 영화가 상영되기도 하고, 시민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연극동아리 산유화회의 다채로운 공연을 위한 공간으로도 활용된다. 지역주민 위한 다양한 행사와 문예강좌 열려 노작 홍사용 문학관의 자랑 중 하나는 바로 수준 높은 문예강좌에 있다. 극작법에서부터 소설창작, 인형극, 시창작, 문학평론에 이르기까지 문학과 관련한 전반적인 수업이 진행된다. 또 금요일에는 판소리, 남도소리반도 운영 중이어서, 소리를 통한 해학과 이면을 이해할 수 있다. 매년 10월에는 노작의 문학정신을 기념하기 위한 노작문학제가 열리고 노작문학상 시상식이 이뤄진다. 2000년에 시작된 시(詩) 문학상의 초대 수상자는 대중적으로도 잘 알려진 안도현 시인이다. 문학상은 지난해부터 범위를 넓혀 희곡 부문도 공모를 받고 있다. 지난해 당선된 희곡 대상 작품은 올해 전문 극단의 손에서 완성돼 10월쯤 무대에 오른다. 관람시간 09:00~18:00 휴관일 매주 월요일, 명절, 선거일 (국경일은 개관) 입장료 무료 주소 경기도 화성시 노작로 206 문의전화 031-8015-0880
- 2017-04-07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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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공감] 연극 <씻금>
- ‘굿’은 슬픔과 맞닿아 있다. 죽음 혹은 아픔이 전제하고, 한(恨)이 깔려 있으며 원한풀이로 이어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작년 말 30스튜디오(서울 종로구 창경궁로)의 개관 작품으로 선보인 은 진도의 씻김굿을 연극무대로 옮긴 것이다. 개인의 슬픔을 넘어 한국의 역사, 풀리지 않는 현실 속 한국의 이야기가 한판 굿으로 관객과 어우러졌다. ‘순례의 삶에 한국 근·현대사를 담다 무대는 진도 바다 바위 언덕. 동네 아낙이 바위 주위를 돌며 섭(홍합) 채취를 하고 있고, 높은 바위에 앉은 남자는 바다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주인공 순례는 어기적거리며 무대를 돌아다닌다. 들어오는 관객과 무대 위 남자와 여자의 행동에도 간섭하며 연신 싱글벙글이다. 객석의 불이 꺼지고 본격적인 극이 시작되면 무대를 돌아다니던 순례는 바위 위 남자와 대화를 나누더니 “나, 간다” 한마디 남기고 바다에 몸을 던진다. 수난의 시대를 온몸으로 이겨내며 살아온 순례의 죽음으로 산 자와 죽은 자가 통하는 세계를 열어 영혼을 달래는 ‘씻금’의 시간이 마련된다. 영혼이 된 순례는 굿을 통해 뭍으로 올라오고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남도 민요와 함께 풀어낸다. 육자배기, 흥그레타령, 닭노래, 진도아리랑 등 진도 지역에서 내려오는 노랫가락을 통해 우리의 아픈 이야기 또한 발견하게 된다. 순례의 삶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거울이다. 순례는 시어머니가 낳은 어린 시동생들 보살피느라 정작 내 아이는 입히지도 먹이지도 공부시키지도 못한 것이 아쉽다. 그나마 제대로 키운 장남은 IMF로 잘 다니던 한국은행에서 실직하고 증권에 손을 댔다가 망해 결국 자살을 택했다. 순례의 가정사와 함께 진도 앞바다에서 생을 달리한 넋들도 등장한다. 정신대를 피해 나이 많고 얼굴도 모르는 남자에게 시집갔던 여자의 영혼, 빚을 이겨내지 못해 바닷물에 빠진 연인이 등장해 씻김을 받는다. 구천을 떠돌아 거지꼴이 된 순례의 장남도 돌아와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로 깨끗하게 치유받고 저승 갈 채비를 서두른다. 마지막으로 뭍으로 올라오지 못한 세월호의 영령들까지 달래기에 이른다. 수난의 역사이자 지금의 시대는 ‘씻김’과 ‘길닦음’이라는 제의를 통해 삶과 죽음, 개인과 역사, 극 전체와 관객이 서로 화해하고 보듬으며 화합한다. ‘관객과 배우가 함께 어우러지다 이 연극은 관객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어야 더욱 빛나는 작품이 된다. 마치 굿판을 구경하듯, 길거리 공연을 보거나 시위에 참가한 듯 어깨를 들썩이고 함께 어우러져야 제대로 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관객의 참여를 돕기 위해 무대 뒤 스크린을 적극 활용한다. 배우들이 부르는 남도소리 전곡을 스크린에 띄우고 관객이 따라 부르는 시간도 갖는다. 공연 전부터 순례로 등장하는 배우 김미숙이 무대를 걸어 다니면서 관객에게 툭툭 말을 건네는 것 또한 관객들과 함께 공연을 이뤄간다는 의미다. 특히 연극이 끝나고 나면 실제 굿이 끝나고 음식을 나눠 먹듯 배우들은 막걸리와 떡, 고기 등을 무대에 내온다. 관객과 배우가 함께 어우러져 준비한 음식을 나눠 먹는다. 그 어떤 연극보다 더 쉽게 배우에게 다가가 사진 찍기를 권하고 덕담을 나누는 연극이 바로 이다. 또한 배우들이 정성스레 만든 ‘넋발(씻김굿에 쓰이는 종이 도구로 망자의 혼을 표현한 것)’을 관객에게 기념으로 나눠준다. 연극을 보고 나왔다는 느낌보다는 함께 공연을 하고 나온 느낌으로 극장을 나서게 된다. 굿극 은 2010년 국립남도국악원의 제안으로 진도 씻김굿을 무대 형식으로 제작하게 되면서 시작됐다. 이때 연극학자인 서연호가 굿을 연극화했다 해서 ‘굿극’이라는 개념이 부여됐다. 공연의 맥은 잠시 끊겼다가 작년 말 대본 집필과 연출을 맡았던 이윤택이 국립국악원의 양해를 얻어 자신의 극단인 연희단거리패에서 제작하게 돼 다시 관객들 곁으로 돌아왔다. ‘진도 마지막 당골, 고(故) 채정례의 삶 녹아들다 씻김굿이란 서남해안 지역에서 보편적으로 행해지는 넋 굿이다. 살아생전의 좋지 못했던 기억과 마음 깊은 곳의 앙금을 깨끗이 씻어내 망자가 수월하게 이승에서 저승으로 건너갈 수 있도록 돕는다. 굿극 은 진도씻김굿의 마지막 당골(세습무당)인 채정례(1925~2013)와 악사 함인천 부부의 실제 삶을 줄거리로 삼았다. 살아생전 채정례 선생은 씻김굿의 전체 무가와 장단을 당시 남도국악원의 모든 단원에게 전수해 후세에 남겼다. 굿에 사용되는 종이 무구(巫具)인 지전(紙錢)과 고깔, 넋 등의 제작 과정 또한 단원들에게 지도했다고. 국립남도국악원은 제작 초기 진도의 큰 당골인 채정례를 주목했다. 실제 진도에서 부부가 짝을 이루어 세습무계의 전통을 이으면서 원형을 고수한 원로는 채정례 당골과 남편인 함인천이 유일했다. 큰무당이 가지는 위대한 포용력과 함께 여러 당골들 사이에서도 그녀는 오랜 연륜과 탁월한 기예로 존경받아왔다. 씻김굿은 죽은 이를 위한 천도의례이지만, 채정례 당골의 씻김굿 현장은 죽은 이를 위한 자리인 동시에 산 자들의 슬픔까지 걷어내는 자리였다.
- 2017-01-31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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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성빈의 문화공감] ‘엽전’이라 비하했던 국악에 푹 빠지다
- 서양음악은 좋아하면서도 1970년대 초까지 필자뿐만 아니라 친구들까지 모두 국악은 물론 소위 뽕짝이라고 하는 가요도 고무신 또는 엽전이라고 비하하면서 들어 볼 생각조차 안 했으니 교육 탓이었을까, 분위기 탓이었을까. 1960년대 초 김치 캣의 ‘검은 상처의 블루스’를 좋아하긴 했지만 그 곡도 실은 실 오스틴의 ‘Broken Promises’를 번안한 것이었으니 우리 음악이라고 하기에는 그렇고 1960년대 말 펄 시스터스가 부른 신중현의 ‘님아!’나 ‘커피 한 잔’, ‘빗속의 여인’ 등이 겨우 젊은이들에게 어느 정도 인기가 있었던 것 아닌가 싶다. 그런데 1971년 봄 어느 날 대학원에 다니던 후배 P군이 고교동창이라고 하면서 역시 대학원생이던 L군(후에 KAIST 교수 역임)과 같이 서울대 공대 앞에 있던 필자의 집에 놀러 왔다. L군이 들고 온 파이프같이 생긴 악기를 불자 거기서 기가 막힌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때까지 국악을 별로 접해 볼 기회가 없어 아무것도 모르던 필자에게 그는 그 악기가 단소라고 가르쳐주었다. 자신은 어렸을 때 비원 앞에 있던 국립국악원 옆에 살아서 국악을 배웠다면서 며칠 후에는 가야금을 가지고 와서 연주해 주었다. 그 소리도 너무 좋아 필자는 국악을 배워볼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다가 얼마 안되어 거문고를 하시는 용문고 (故)최철호 선생님, 단소 명인이신 김중섭 선생님, 당시 서울대 국악과에 재학 중이었으며 지금은 원광대 교수가 된 가야금의 임재심씨 등이 보문동에 있던 최 선생님 댁에 모여 국악 동호인회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필자는 보문동에 다니며 김 선생님께 단소를 배웠다. 집사람에게는 임재심씨가 우리 집으로 와서 가야금을 가르치기로 하였다. 우리는 국악 악보를 오선지에도 표기할 수 있으나 원고지와 비슷하게 생긴 정간보(井間譜)로 표기한 것이 많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서양음악이나 국악이나 한 옥타브에는 모두 12음정(국악에는 율(律))이 있는데 서양음악에서는 그중 7개를 주음(主音), 나머지를 간음(間音)으로 사용하고 있다. 국악에서는 5개를 주음, 7개를 간음으로 사용한다. 기본 5율은 중(仲), 림(林), 무(無), 황(潢), 태(汰)이고 한 옥타브 낮은 음은 배성(倍聲)의 배자 왼쪽 사람인변(?)을, 높은 음은 청성(淸聲)의 청자 왼쪽 삼수변(?)을 붙인다. 그래서 중(仲)의 낮은 음은 중(?), 높은 음은 중(?)이 되고, 황(潢)의 낮은 음은 황(黃), 더 낮은 음은 황(?), 높은 음은 황(?)이 된다. 그리고 정간보의 한 칸은 한 박(拍)이어서 한 칸에 한 글자면 1박, 두 글자면 ½박, 네 글자면 ¼박이 되는 것이다. 한편 국악의 주요한 악기들에 대해서도 약간의 지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관악기인 대금은 단소보다 훨씬 크고 단소가 똑바로 부는 데 비해 옆으로 부는 가로저[橫笛]로, 소리도 청아한 단소에 비해 훨씬 더 남성적이고 중후하다. 또 대금과 비슷하나 크기가 조금씩 작은 중금과 소금이 있으며 리드가 있고 소리가 야무진 향피리나 애잔한 세피리 등도 있다. 같은 현악기이고 12현을 손가락으로 연주하는 가야금에 비해 해죽으로 만든 술대를 손가락에 끼고 연주하는 6현의 거문고 소리는 매우 남성적이고 웅장하다. 그리고 7현인 아쟁은 2현 악기인 해금과 함께 이들과 달리 활대로 현을 문질러 소리를 내는 찰현(擦絃)악기이다. 연습곡부터 시작하여 영산회상(靈山會相) 전곡과 청성곡(요천순일지곡) 등을 배우는 과정에서 연습용 악보는 선생님들이 마련해 주셨으나 제대로 된 악보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생각다 못해 당시 남산에 있던 국립국악원에 가서 악보를 좀 빌릴 수 없겠느냐고 통사정을 했다. 직원이 신원을 물어보기에 신분증을 보여줬다. 당시만 해도 국악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별로 많지 않을 때인데 더군다나 공과대학에 근무하는 사람이 웬 국악이냐는 듯이 신분증을 본 직원은 필자를 한참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악보를 빌려주었다. 그러나 그때는 복사기가 없을 때라 거래하던 인쇄소에 부탁해 빈 정간보 노트를 만들고 볼펜으로 일일이 필사를 했다. 그 악보는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단소를 어느 정도 불 수 있게 되자 이를 학생들에게도 좀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실험실에서 PVC 수도파이프로 단소를 만들었다. 그리고 미농지에 먹지를 대고 골필(骨筆)로 단소악보를 필사한 후 이를 청사진으로 만들어 배우겠다는 학생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들을 종종 국악 연주회에도 데리고 다녔으니 숫자는 몇 명 안됐지만 국악 보급에 조금은 기여를 한 셈이다. 집사람은 민요와 박상근(성금연)류 가야금산조를 배웠고 필자도 어깨너머로 조금은 배웠다. 국악의 장단에는 가장 느린 진양조부터 중모리, 중중모리, 굿거리, 자진모리, 그리고 가장 빠른 휘모리가 있다는 것도, 농현(弄絃:현을 짚은 왼손가락을 흔들어 소리에 변화를 주는 것)의 맛도 알게 됐는데 필자나 집사람이나 음악에는 별로 재능이 없는 데다 배우고 난 후 연습을 제대로 하지 않아 이제 연주는 전혀 할 수 없는 상태이다. 그러나 김죽파, 성금연 등과 같은 가야금 명인들과 새로운 가야금의 세계를 열어가고 있는 황병기 교수, 거문고의 신쾌동, 한갑득 등의 명인들, 대금의 김성진, 원장현, 이생강 등과 같은 명인들의 연주뿐만 아니라 판소리와 민요, 그리고 이은관의 배뱅이굿과 안비취의 회심곡 등까지 국악을 많이 이해하고 또 좋아할 수 있게 되었다.
- 2016-05-02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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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한류스타 ‘나’라고 전해라!
-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가수 이애란(예명·53)씨를 두고 하는 말이다. 작년 말, 전국을 ‘전해라’ 열풍에 빠트린 죄(?)를 물어 방송사와 광고계가 그에게 잇단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떴다’하는 순간 방송사 특집 프로그램, 휴먼다큐멘터리, 심지어 대한민국 최고의 예능 프로그램까지 접수했다. 25년 무명생활을 한방에 날려버린 ‘백세인생’ 이애란의 2016년 소망을 브라보가 만난 사람이 들어봤다. “요즘 들어서 인기를 조금씩 실감하고 있어요.” ‘백세인생’ 가수 이애란씨의 하루는 바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무명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았다. 이제는 어딜 가나 말 그대로 스타급 대우다. SBS 아침방송 고정 리포터는 물론 인기 아이돌만 모신다는 MBC 설날 특집 ‘2016 아이돌스타 육상·풋살·양궁 선수권대회’에 초대돼 노래도 불렀다. 길거리, 식당 어디에서도 ‘어머, 이애란이야!’라는 소리를 수도 없이 듣는다. 인기를 얻기 전부터 존재했던 인터넷 팬카페는 매일 꾸준히 회원이 늘고 있다. 회원 수는 1월 현재 1428명이다. 그전에는 이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많이 늘었어요. 한 분, 한 분 저와 노래를 알게 되고 좋아하시는 분들이 가입하세요. 요즘은 자주 들어가 보지 못해서 팬들에게 미안하죠.” 오로지 노래만 생각한 25년 세월 어렸을 때부터 가수의 꿈을 키워왔던 이애란. 20대가 되면서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그러나 오래가지는 않았다. “1990년, KBS 일일드라마 주제가 공개 오디션이 있었어요. 거기서 저 포함해서 3명이 마지막 오디션을 봤는데 제가 낙점된 거죠. 그런데 어떤 상황인지 가수가 부른 노래는 나가지 않고 곡만 드라마에 사용하더군요. 정작 제 목소리는 전파를 타지 못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실망할 법도 한데 지금까지 노래를 부르는 것 외에 다른 일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 소소한 아르바이트도 노래가 아니면 안 했다. “그래도 노래할 곳은 꽤 있었어요. 풍물 장터 야시장이라고 겨울만 빼놓고 동네마다 많았어요. 서울에도 있었고요. 야시장에서 초대해주시면 가서 노래를 불렀죠.” 당시 야시장마다 기본적으로 노래 반주를 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가수를 초대하면 그 사람 음정에 맞춰 연주해줬다. 뭐든지 생음악으로 불렀던 때다. 길고 긴 ‘백세인생’과의 인연 이애란이 노래 ‘백세인생’ 가락을 처음 접한 것은 1995년 한 국악학원에서다. 그때 녹음을 했지만 상업적인 목적은 아니었고 장구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 정도였다. “장구가 배우고 싶어서 국악학원에 갔었어요. 그때 선생님이 장구랑 민요도 같이 가르치던 분이신데 선생님이 그 노래(지금의 백세인생)를 민요로 부르는 것을 귀동냥했어요. 저도 장구 치면서 흥얼거리곤 했어요. 한 달 넘도록 장구채 잡는 방법만 가르쳐서 그만뒀는데 노랫가락 하나는 익히고 나온 거죠.” 이애란은 이렇게 알게 된 노래를 1998년 경주세계문화엑스포 무대에서 관객들의 박수에 맞춰 불렀다. 반응이 상당히 좋았다. 그 모습을 보고 부산 시장거리에서 활동하던 품바 가수 명월이 알려달라기에 노래를 가르쳐줬다고. “그런데 품바라 그런지 왜곡이 많이 되더라고요. 시장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상황에 맞게 다 개사를 해버리잖아요. 2012년에 김종완 작곡가님을 만나 악보를 보고 알았죠. 우리가 왜곡해서 부르고 있었구나. 그 이후 가사 수정도 많이 하고 다시 처음부터 배운 거죠.” 힘든 시절 장구를 치면서 익혔던 노래가 인생을 바꿔주는 열쇠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2012년 사촌 오빠의 소개로 첫인사를 나눴던 작곡가 김종완씨와의 인연도 기막히다. 알고 보니 그가 흥얼거렸던 ‘백세인생’의 원작자이자 데뷔곡이 될 뻔한 드라마 주제가 작사가였다. 현실은 영화만큼이나 극적이었다. 작곡가와 새롭게 노래 녹음을 하기 위해 5, 6개월여 피나는 연습을 했다. 새벽 2시건, 3시건 될 때까지 말이다. “2013년 드디어 노래 녹음을 했어요. 1995년 장구를 배울 때만 해도 ‘백세인생’의 원제목이 ‘저세상이 부르면 이렇게 답하리’ 였는데 2013년에는 ‘저세상이 부르면’으로 바꿨죠. 작년 2월 말 발표 때는 원래 100세까지만 있던 가사를 150세까지 늘려 다시 썼어요.” 제목도 ‘백세인생’으로 완전히 갈아 끼웠다. 고령화 사회, 장수사회로 접어들면서 생겨난 ‘백세인생’이란 말이 저승에서 오라는데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말하는 노래 가사와 잘 어울렸다. “제목 안에 가사 내용이 다 담겨 있는 거 같아요. ‘백세인생’에는 한 가지가 아니고 여러 가지가 감정이 있습니다. 나 대신 네가 좀 내 마음을 좀 전해줄래? 하는 것도 있고, 또 덩실덩실 리듬도 있고, 우리가 노래 가사처럼 정말로 150세까지 살 수 있다면 하는 욕심도 담긴 노래입니다.” 가장 많이 생각나는 사람은 아버지 인기몰이가 시작되고 하루하루가 바빠질수록 먼저 떠나신 부모님 생각이 부쩍 많이 난다. 다른 매체에도 소개됐지만, 작년에 이애란씨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이애란의 영원한 팬이자 버팀목이었던 아버지를 생각하니 목소리가 애잔하게 깔린다. “아버지는 이 노래를 처음부터 좋아하셨어요. 작년 2월에 음반이 ‘백세인생’으로 나왔다고 하니 제목이 좋다고도 하셨어요. 좋아하시기만 했지 제가 방송 활동하는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해 늘 가슴이 아파요. 그리고 빨리 못 보여드린 게 가슴에 한이 남았다고 할까요? 맺혔다고 할까요?” 아버지 살아계실 때는 가끔 아버지 팔을 베고 누워서 ‘백세인생’의 한 구절을 불러드리기도 했다. “90세에 저 세상에서 또 데리러 오거든……. 재촉말라 전해라.” 달리 아픈 곳이 없어서 100세까지는 사실 거라 생각했는데 갑작스럽게 운명하셨다. 지방행사 때문에 아버지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게 못내 죄스럽다. 노래하는 이애란에게 아버지는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도전이 아름다운 거지 후퇴는 하지 마라. 그리고 네가 후회할 일은 절대로 하지 마라” 라며 항상 응원을 해주던 한 사람이다. 젊은이들의 유희 ‘전해라~ 짤방’, 인생역전 견인차 이애란의 인기는 젊은이의 기발함이 빚어낸 결과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짤방이란 ‘잘림방지’의 준말로 내용에 상관없이 사진이나 동영상을 인터넷에 올리는 것을 말한다. “2014년 11월 말에 ‘백세인생’ 노래 영상을 만들어서 인터넷 동영상 사이트에 올렸습니다. 조회 수가 빠르게 올라가더라고요. 그런데 그걸 눈여겨봤던 최준원씨가 소속사에 얘기한 거죠. 제 영상으로 짤방이라는 걸 만들고 싶은데 만들어도 되느냐고요.” 최씨는 한국방송예술진흥원 학생이면서 이애란과 같은 소속사의 트로트 음악 작·편곡을 겸하고 있는 전문 작곡가다. 지금은 이애란씨와 이모, 조카 하는 사이라지만 짤방을 만들 당시에는 안면만 있는 정도였다고. 소속사에서도 최씨의 얘기를 들으니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 생각해 흔쾌히 승낙했다. 작년 7월, 인터넷에 첫 번째로 유포된 짤방은 ‘간다고 전해라, 못 간다고 전해라’였다. 이애란의 감정 실린 표정과 ‘전해라’라는 궁서체 자막은 묘하게 어울리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특이하고 재미있는 것에 관심 두는 젊은이들, 신선한 것을 찾아다니는 방송 작가, 기자들의 눈에 띄면서 마침내 세상 남녀노소에게 사랑받는 전해라~ ‘백세인생’이 됐다. 이애란의 인생은 이제부터 시작 결혼에 관해서 물어보려 하자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이애란씨. 살아생전 아버지도 묻지 않던 질문이다. 노래하다 보니까 결혼을 해야겠단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단다. 노래를 벗 삼아 버텨온 삶이다. 그래도 이상형은 있다. 자상하고 정말 착한 사람 만났으면 좋겠다. 사람은 다 착하지만, 자신을 아껴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2016년을 맞이하는 각오도 함께 물어봤다. “제 욕심이겠지만 트로트를 발판으로 한류 스타가 되고 싶어요. 바람이고 욕심이죠. 작년은 여러분들 사랑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2016년도에는 보답을 하는 한 해를 만들어야죠. 드라마에 출연하고 싶을 때도 있어요. 드라마에 노래교실이 나올 때도 있는데 초대해주시면 좋겠어요(웃음).” 한류스타를 예약해두고 있는 인기가수답게 이애란씨와의 인터뷰는 사실 쉽지 않았다. 그녀의 일정대로라면 아직도 만날 수 없는 상황. 이동하는 차 안에서, 식당에서, 걸어가면서 틈틈이 이애란씨와 인터뷰했다. 방송 촬영 모습도 지켜봤다. 힘들만도 한데 사진을 찍겠다고 길게 줄을 선 팬들 하나하나 웃으면서 사진을 찍어주고 악수를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마지막으로 독자에게도 한 말씀 부탁했다. “무조건 힘내시고 파이팅하라 전해라~!” 100세 인생은 60세부터 시작이기 때문에 꽃중년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60세는 너무 어리다는 것. 이애란의 인생도 이제부터 시작이니 모두 젊은 마음으로 100세 인생 살아가기 바란다고 전했다.
- 2016-02-18 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