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 오전, 전철 1호선을 타고 종착역인 인천역으로 간다. 한산한 전철 안에서 시간여행자가 되는 상상을 한다. 인천역 앞에 있는 화려한 패루를 통과하면, 1800년대 말 인천 개항 시절의 풍경이 펼쳐지는 상상 말이다. 실제로 패루 너머에 근대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다. 그곳에 새겨진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시간을 되짚어보면, 나도 모르게 근대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고 만다.
걷기 코스
전철 1호선 인천역▶ 제1패루▶ 차이나타운▶ 선린문(제3패루)▶ 자유공원▶ 제물포구락부▶ 청일조계지 경계계단▶ 인천 중구청(옛 일본영사관)▶ 중구생활사전시관▶ 인천개항박물관(옛 인천일본제1은행)▶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옛 인천일본18은행지점)▶ 신포시장▶ 답동성당▶ 애관극장▶ 싸리재 카페▶ 전철 1호선 동인천역
인천 개항과 함께 형성된 화교 마을
1883년 인천 개항 후 청국인, 일본인, 러시아인, 독일인, 영국인들이 앞다퉈 제물포(지금의 인천항)로 몰려왔다. 항구 일대에는 각국의 조계지가 형성되었다. 최초의 근대식 공원, 극장, 학교, 호텔, 은행과 같은 서양식 근대건축물도 세워졌다.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 철도, 시외전화, 화폐, 구두, 등대, 담배 성냥, 축구, 야구 등 해외 문물도 물밀듯 들어왔다. 이 시절의 흔적이 제물포와 가까웠던 지금의 인천시 중구에 오롯이 남았다. 그 자취를 찾으며 질풍노도 같았던 인천의 근대사를 돌아본다.
출발지인 인천역부터 특별하다. 인천역은 1899년에 개통한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의 시·종착역이었다. 인천역에서 서울 노량진까지 우마차나 수로로는 반나절 이상 걸릴 길을 열차로 한 시간 만에 갔다고 하니, 당시 사람들에게는 신세계나 다름없었겠다.
인천역 광장 맞은편에는 중국 산둥성 웨이하이 시에서 기증한 패루가 화려한 단청을 뽐내며 서 있다. 패루 사이로 차이나타운의 ‘T’자형 대로가 보인다. 차이나타운 골목마다 붉은색으로 치장한 대규모 중식당과 중국 간식 상점, 기념품점이 즐비하다. 인천 차이나타운은 개항 후 중국 산둥성에서 건너온 화교들이 살기 시작한 곳이다. 이때 정착한 화교들이 중국요리점을 열고, 한국인 입맛에 맞는 자장면을 개발했다고 한다. 자장면의 대명사로 불렸던 ‘공화춘’의 우희광 씨는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1983년에 문을 닫은 공화춘은 30년 뒤인 2012년에 ‘짜장면박물관’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 옛날 공화춘의 인기는 신승반점, 만다복, 연경, 중화원 등이 잇고 있다. 차이나타운에서 중국 요리 외에 화덕 호떡인 옹기병과 월병, 홍두병, 공갈빵 같은 중국 전통 간식도 재미 삼아 먹어볼 만하다.
뜨거운 옹기병을 뜯어 먹으며, 차이나타운 중간 지점에 있는 선린문(제3패루)으로 향한다. 3개의 계단을 지나 마지막 계단 위에 우뚝 세워진 선린문은 차이나타운 최고의 포토존이다. 선린문을 통과해 다시 계단을 조금 오르면 자유공원 입구와 만난다. 왼쪽 길에 초한지 벽화 골목이 있고, 오른쪽 길은 자유공원 산책로와 연결된다.
우리가 알아야 할 인천 근대사 이야기
자유공원은 1888년 응봉산에 건립된 국내 최초의 서구식 근대공원이다. 공원 초입에 있는 석정루에 올라 인천 앞바다와 월미도를 조망하고, 한미수교 100주년(1982년)을 기리는 기념탑과 한국전쟁 영웅으로 알려진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둘러본 뒤, 제물포구락부로 이동한다. 제물포구락부는 자유공원과 이어진 계단 중간에 있다. 이곳은 개항 당시 제물포에 거주했던 독일, 미국, 러시아, 일본인들의 사교장이었다. 하얗게 회칠한 외벽과 고풍스러운 홀이 인상적이다. 제물포구락부와 청일조계지 경계 계단도 거리가 가깝다. 이 계단은 일본과 청나라가 각각 조계지를 설정하고, 영역을 구분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계단을 경계로 북성동 쪽은 청나라의 차이나타운이, 신포동 쪽은 일본 건축물이 들어섰다. 계단 양쪽에 세운 석등조차 중국식과 일본식으로 구별돼 있다. 계단 상단의 공자상도 중국 쪽으로 약간 치우쳐 세워졌다. 외국인들이 조선 땅을 땅따먹기하듯 갈라놓은, 어처구니없는 역사의 현장이다.
청일조계지 계단을 내려와 왼쪽, 중구청(옛 일본영사관)으로 가다 보면, 일본 적산가옥과 일본제1은행, 구 일본18은행과 같은 근대건축물이 모여 있는 개항장 거리를 만난다. 차이나타운처럼 이국적인 분위기다. 거리 입구에 있는 중구생활사전시관은 1888년에 개업한 국내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대불호텔의 외관을 되살려 지은 건물이다. 귀부인이 머물렀을 법한 객실과 1960~70년대 인천 중구의 의식주 생활공간을 실감나게 재현했다. 나무 전봇대가 세워진 골목길과 문방구, 백항아리집(선술집), 극장, 다방, 의상실, 이발소 등 추억을 부르는 풍경이 마냥 반갑다.
전시관 옆 개항박물관은 옛 일본제1은행을 개조한 것이다. 1883년에 건축한 르네상스풍의 석조 건물로서 일본영사관의 금고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들어온 우표와 우편물, 우체통, 전보와 전화기, 경인선 기관차 모형 등을 전시하고 있다. 같은 라인에 있는 근대건축전시관은 일본제18은행 건물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나가사키 상인들이 상해에서 수입한 영국 면직물을 한국에 수출해 큰 이익을 얻자, 인천에 은행 지점을 세운 것이다. 이곳에서 개항장 일대에 현존하는 근대건축물과 소실된 건축물의 모형을 볼 수 있다.
인천과 서울을 연결했던 싸리재 고갯길
개항장 거리를 지나 먹거리 성지인 신포국제시장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신포시장은 인천 개항 이후 형성된 인천 최초의 근대적 상설시장이다. 19세기 말 화교 농민들이 산둥성에서 채소 씨앗을 가져와 키워 시장에 내다 판 것이 신포국제시장의 시초라고 한다. 역사가 깊은 만큼 먹거리도 풍성하다.
쫄면의 탄생지도 신포시장이며, 신포순대, 신포만두의 고향도 이곳이다. 주먹으로 깨 먹는, 단단한 공갈빵과 매콤한 맛을 강조한 신포 닭강정의 인기는 말할 것도 없다. 닭강정을 사려는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골목 안이 새까맣게 보일 정도다.
시장 골목 끝에서 길 하나만 건너면 국내 성당 중 가장 오래된 답동성당과 국내 최초의 극장인 애관극장을 만날 수 있다. ‘보는 것을 사랑한다’는 뜻을 지닌 애관극장은 1895년에 ‘협률사’라는 이름으로 설립됐다. 1920년대부터 애관극장으로 불리며, 복합상영관이 주름 잡는 이 시대에도 꿋꿋하게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시설은 여느 극장과 비슷하고, 상영작도 같다.
흐뭇한 마음으로 애관극장을 구경하고, 동인천역으로 내려가는 고갯길, 싸리재를 걷는다. 옛날에 이 길에 싸리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지금은 낙후한 거리가 되었지만, 1920년대 말부터 70년대까지만 해도 병원, 한약방, 약국, 양화점, 포목점 등이 즐비했던 곳이다. 서울 명동 못지않은 상권을 자랑했다고. 옛날 양복점과 병원 건물과 기록 사진만이 싸리재의 옛 영화를 증명한다.
최근, 뉴트로 열풍에 힘입어 싸리재의 아날로그 정취가 돋보인다. 그 중심에 ‘싸리재’ 카페가 있다. 지은 지 90년 된 목조 카페에서 노부부가 커피를 내린다. 카페 안쪽에는 노부부의 100년 된 한옥 살림집이 있다. 음악에 조예가 깊은 부부는 수집한 축음기로 레코드판 음악을 들려준다. 마침 퀸의 ‘보헤미안랩소디’가 흘러나와 한껏 흥에 젖는다. 바리스타인 박차영 대표에게 메뉴 추천을 부탁하니 자신이 개발한 ‘커피봉봉’과 ‘싸리재’를 권한다. 모든 커피를 모카포트로 내려준다. 쌉싸래한 에스프레소와 달콤한 연유, 촉촉한 생크림의 조화가 감미롭다. 싸리재의 빈티지한 분위기와 포근하게 손님을 맞이하는 노부부가 두고두고 기억날 것 같다. 싸리재 카페에서 동인천역은 멀지 않다. 전철을 타기 전에 송현동 순대 골목이나 화평동 냉면 거리, 동인천 삼치 거리에서 요기를 해도 좋겠다.
주변 명소 & 맛집
신승반점과 명월옥
공화춘은 1983년에 폐업했으나 우희광 씨의 자손들이 공화춘의 손맛을 이어가고 있다. 우희광 씨의 외손녀가 운영하는 신승반점이 그곳. 신승반점의 인기 메뉴는 돼지고기와 채소를 갈아 춘장과 볶은 유니자장면이다. 달지 않으면서 감칠맛 나는 자장 소스와 부들부들한 면발이 입맛을 당긴다. 흰 자장면이 궁금하다면 만다복(032-773-3838)을, 맛있는 짬뽕을 먹고 싶다면 복림원(032-773-8778)을 추천한다. 한식은 신포시장 가는 길목에 있는 백반식당, 명월집이 잘한다. 1966년에 개업한 식당이다. 7000원짜리 백반에 밑반찬만 열 가지. 여기에 곤로 위에서 푹 끓인 돼지김치찌개와 누룽지도 양껏 먹을 수 있다.
신승반점 인천 중구 차이나타운로44번길 31-3, 매일 11:00~21:00
명월옥 인천 중구 신포로23번길 41, 07:30~19:30(일요일 휴무)
송월동 동화마을
송월동 동화마을은 차이나타운과 이어져 있다. 2013년 마을 주거환경개선사업을 통해 세계명작동화를 주제로 마을을 예쁘게 꾸몄다. 입구의 아치문을 통과하면, 알록달록한 동화 속 세상이 펼쳐진다. 골목마다 도로시길, 빨간모자길, 전래동화길 등 테마가 있다. 동화 캐릭터 입체 조형물이 많아 곳곳이 포토존이다. 이 마을이 개항기 때 독일, 일본, 프랑스인들이 살았던 부촌이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인천 중구 자유공원서로37번길 22(연중무휴)
짜장면박물관
1908년 차이나타운에 개업한 중식당, 공화춘의 내부를 개조해 2012년에 개관했다. 전시물을 통해 화교와 자장면의 탄생기, 전성기, 자장라면의 역사 등을 알 수 있다. 1930년대 공화춘 접객실, 1960년대 공화춘 주방을 실제 크기로 재현했다. 졸업식이나 운동회 날에 부모님과 자장면을 먹으러 갔던 추억이 떠오른다. 공화춘 건물은 중국 산둥 지방의 장인이 참여해 중국식으로 지었으며, 2006년에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인천 중구 차이나타운로 56-14, 09:00~18:00(월요일 휴관)
걷기 Tip
❶ 차이나타운은 골목이 많으므로 인천역 앞에 있는 관광안내센터에서 지도를 받아, 갈 곳을 미리 표시해두는 게 좋다. 송월동 동화마을을 코스에 넣는다면, 맨 먼저 들르자.
❷ 신포시장까지만 걷는다면, 수인선 신포역에서 전철을 타면 된다.
❸ 개항박물관, 짜장면박물관, 중부생활사전시관, 근대건축전시관, 한중기념관 등 5개 전시관 통합관람권을 구매하면 입장료를 아낄 수 있다. 통합관람권 어른 3400원. 매달 마지막 수요일 문화의 날에는 입장료 무료.
소설을 좋아하던 문학 소년은 국가 발전을 위해 이 땅에 한 송이 꽃을 피우겠노라 다짐하며 연세대학교 생화학과(?)에 들어갔다. 머지않아 그는 알았다. 그 ‘화’가 ‘꽃’이 아니었음을. 낙담을 뒤로 하고 과감히 미지의 시공간으로 몸을 내던졌다. 실수라고 생각했던 순간의 선택은 평생을 함께해도 지루할 틈 없는 과업이 됐다. 인생 최악의 오작동 사건을 통해 진정 걸어가야 할 길을 찾아냈다는 서울시립과학관의 이정모(李庭模·56) 관장. 이 세상 모든 실패와 좌절, 오해로 꼬여 삶이 불편하다면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라. 천진함과 유쾌함이 가져다준 놀라운 긍정 에너지 효과를 경험할 것이다.
이정모 관장만큼 꾸준하게 대중과 소통하는 이도 드물 것이다. 서대문자연사박물관 관장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연령대를 가리지 않고 과학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쇼맨십에 언변도 좋아 매스컴에서 반기는 인물. 정통 과학 TV 프로그램이었던 ‘궁금한 일요일 장영실쇼’(KBS)는 물론이고, 이 시대 명사들만 초빙하는 ‘차이나는 클라스’(JTBC)와 ‘어쩌다 어른’(tvN) 등에 출연해 과학을 포기했던 시청자들까지 TV 앞에 끌어들였다.
눈높이에 맞춰 과학을 쉽게 알려주는 능력자
“글 쓰고 책도 출간하니 강연 요청이 들어오더라고요. 글로만 과학을 설명할 필요가 없구나 했죠. 의외로 강의료도 꽤 괜찮고요. 방송에 나가 보니 영향력이 더 크더군요. 책이 제일 깊은 얘기를 하고 강연은 약간 깊이가 낮아지고, 방송은 더 낮고 표피적이지만 영향력은 엄청나죠. 보는 사람도 많고요. 처음에는 방송 출연을 경원시했지만 세상을 바꾸려면 필요하겠다 싶었습니다.”
이 관장의 매력은 무엇보다 권위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서울을 대표하는 자연사박물관장에 이어 과학관 관장이라는데 낙천적이고 푸근한 인상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얼굴 알려진 명사라지만 아이이건 어른이건 반갑게 인사하고 만나는 ‘털보 관장님’. 과학의 범주에 있는 모든 것은 물어보는 순간 인터넷 지식 검색 수준으로 친절히 설파한다. 그는 언제부터 아는 것이 있으면 설명하고 말해주고 이해시키며 살아온 것일까. 얘기를 들어보니 인생의 과정 속에서 그런 역할을 자연스럽게 맡게 된 것 같다.
‘과학자’가 아닌 ‘과학 거간꾼’의 길을 걷다
“우리 부모 세대는 교육과정을 끝까지 못 마친 경우가 많았잖아요. 저희 어머니도 그랬고요. 아들이 좋은 학교에 들어가니까 신기해서 매번 학교에서 뭘 공부했는지 물어보셨어요. 어머니가 다림질하고 있으면 옆에 누워 뒹굴거리면서 배운 것들을 얘기해드렸어요. 너무 좋아하셨죠. 그렇게 1년간을 했더니 어머니가 양복 한 벌을 사주시며 ‘너, 야학 선생 해!’라고 하셨어요.”
대학교 2학년 때부터 대학원 졸업할 때까지 서울 연동교회 산하기관이었던 연동청소년학교에서 야학생들을 가르쳤다. 이 관장이 아이들에게 가르쳤던 과학과 수학은 소문이 날 정도였다고. 야학 선생을 하면서 교직에도 관심이 생겼지만 마음을 접어야 했다.
“당시 저희 학과의 경우 교직 이수가 가능했지만 상위에 있던 여학생들이 자리를 내주지 않아서 이룰 수 없었죠. 그런데 정작 교직 이수한 그 친구들 중에 선생님이 된 사람이 하나도 없더라고요.(웃음) 가르치는 일은 사람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못해요. 애정이 있으면 ‘내가 어떻게 보여줄까, 뭘 알려줄까’ 생각하게 됩니다. 처음부터 애정을 가질 수 없어도 자꾸 소통하다 보면 그런 마음이 생겨요. 그동안 사람들 만나고, 강연하고, 책 쓰고 방송 출연하면서 많이 변했어요. 물론 제게 타고난 성향도 있지만요.(웃음)”
입담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예능과 인문학적 소양을 겸비한 과학인” 같다고 말하니 “아주 잘 봤다”고 말했다.
“저는 실험실보다 도서관을 더 좋아했습니다. 한 개의 데이터를 만들기 위해 몇 년을 연구하려면 엉덩이가 무거워야 해요. 저는 남들이 만들어놓은 데이터를 이야기로 전달하는 재능이 있는 거 같아요. 그래서 ‘사이언스 커뮤니케이터’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이 용어는 대중적으로 사용하기 전부터 제가 써온 말입니다. 과학은 전문가 영역이니 대중과의 연결고리를 만들어줄 사람이 필요하잖아요. 그게 바로 사이언스 커뮤니케이터, 우리말로 ‘과학 거간꾼’ 정도로 설명하면 되겠네요. 제 바람대로 과학을 알려주는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다.”
실패는 당연한 것! 칭찬과 격려를
이 관장이 몸담고 있는 서울시립과학관은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시설이다. 이곳 초대 관장으로 부임하면서 설계에서부터 세밀한 것들까지 펼치고 구현했다. 무엇보다 서울시립과학관의 벽면 어디에도 과학지식 등 설명을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손으로 모래를 모으고 펼쳐 등고선의 위치 변화를 알아보고, 걸어보고, 뛰어보고, 펌프질에 자전거까지 타보면서 스스로 의미와 답을 찾도록 장치들을 마련해놓았다. 특별히 손주들 교육에 관심이 많을 ‘브라보 마이 라이프’ 독자를 위한 얘기를 들려 달라고 청했다.
“이곳은 몸소 체험하고 경험하면서 질문을 만들어가는 곳입니다. 과학관 방문객들 중 절반 이상의 친구들은 보고만 가고 절반 안 되는 친구들은 마음속에 질문을 안고 나가죠. 과학관은 과학자의 삶을 경험하는 곳입니다. ‘이 실험이 왜 안 되지?’ 하면서 실패를 양식으로 삼아야 하죠. 과학자들도 매번 실패해요. 어쩌다 한 번 성공하는 것이죠. 실패를 해봐야 회복탄력성이 생깁니다. 성공만 하다가 실패하는 아이들은 회복탄력성이 없어요. 실패 앞에서 대처 방법을 모르면 안절부절못하면서 거짓말을 하게 돼요. 아이들에게 실패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를 주셔야 합니다.”
유쾌한 관장님 고액기부자 대열 합류
재밌고 그저 신나는 명강사 관장님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작년 말 통 큰 기부가 세상에 알려지고야 말았다. 발달장애 청년들을 위해 써달라며 푸르메재단에 1억 원 기부를 약정하고 고액기부자 클럽 ‘더미라클스’ 회원이 됐다.
“포토월 앞에서 사진 찍자기에 응했는데 보도가 될 줄 몰랐습니다. 푸르메재단을 설립한 백경학 상임이사가 동네 가까이 살기도 하고 고등학교, 재수, 대학교 동창이에요. 전 재산 들여서 재단을 만들었는데 병원을 짓는 등 정말 돈이 많이 들어가더라고요. 기여를 좀 하고 싶었어요. 일단 책이 좀 많이 팔렸어요. 공무원은 공무원 월급으로 살면 되잖아요. 제가 무슨 대단한 일 한 거 아니에요. 저나 제 자식들은 너무나 멀쩡하잖아요. 발달장애아들의 부모는 잘못이 없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고요. 세금으로 해결이 되면 좋으련만 안 될 때는 조금씩만 모으면 되겠다 싶었습니다. 한 달에 3만 원 월정액으로 시작했죠.”
그러다 어느 날 문득 1000만 원이 내고 싶었단다. 그 뒤로도 돈이 생겨 500만 원을 또 기부했다.
“처음에는 1억 원까지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런데 1억 원을 낸 사람들의 클럽이 있다더군요. 그분들께 강연을 해드린 적이 있는데 다들 좋으셨습니다. 저도 그 클럽에 들어가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삽니다. 글도 열심히 쓰고, 특히 강연하러 갈 때 뿌듯해요. 얼마를 또 기부할 수 있겠구나 하고요!(웃음)”
1년 뒤면 관장 임기가 끝난다. 그는 어떤 자리이든 연연하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까지 늘 다 잘됐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교육방송에서 제 이름 달고 과학 프로그램을 하고 싶습니다. 재작년에 여균동 영화감독 작품에 출연해 배우로도 데뷔했어요. 배우의 꿈도 마음에 있고 말이죠.(웃음) 관장직을 마무리하면 또 뭔가를 하게 되겠죠.”
은퇴를 막막함이 아닌 도전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에 새삼 용기가 난다. 앞으로 더 멋진 인생을 살아갈 이정모 관장의 미래에 박수를 보낸다.
고인돌과 습지와 호수를 함께 둘러볼 수 있는 둘레길이다. 고인돌박물관을 출발점으로 해 고인돌유적지와 매산재를 거쳐 분곡습지에 닿기까지의 거리는 약 4km. 역으로 분곡습지까지 차로 간 뒤 매산재를 넘어 고인돌박물관에 도착해도 된다. 분곡습지 산기슭엔 동양 최대의 고인돌이 있다.
호수를 따라 굽이굽이 휘고 꺾이는 길. 그지없이 수려한 시골길이다. 차로 휘익 지나기엔 아깝다 느끼며 한껏 서행을 한다. 숲에 사는 귀 달린 생명들은 자동차 소음이 성가실 게다. 내 길을 쉬 가자고 덤불 속에 깃든 고라니를 놀래니 이게 민폐다. 옛 스님들은 지팡이를 앞세워 땅을 노크하며 길을 걸었다. 행여 무심한 발길에 죄지은 바 없는 개미며 지렁이 밟힐까 저리 가라 통고하기 위해서였다.
야산 모롱이를 돌 때마다 풍경이 바뀐다. 혹은 솔숲 사이로, 혹은 대숲 사이로, 혹은 자작나무 군락 옆댕이로 길이 나서. 기우는 하오의 햇살을 받은 호수에, 혹은 하얀 물무늬 아롱지고, 혹은 초록 물빛 너울처럼 일렁거려서.
호숫가 나무들은 내내 호수에 시선을 던지고 산다. 물 위에 비친 제 그림자를 바라보며 한 생애를 살아가는 저 나르키소스들. 나무들의 그 붙박이 시선에도 생의 희로애락이 어릴까. 뒤죽박죽 꼬이고 풀리다 다시 꼬이는 생의 아이러니를 바라볼까. 외투 깃을 세우고 망연히 길에 멈춰 서 전율하는 겨울 나그네처럼 쓸쓸한, 저 물가 나무들의 정경.
운곡습지 구역에 이르러 차에서 내려 길을 걷는다. 이곳엔 오래된 마을이 있었다. 운곡(雲谷)이라는 지명이 붙었으니 ‘구름골’이다. ‘오베이골’이라고도 한다. 매산재, 행정재, 호암재, 백운재, 굴치재 등 다섯 고개가 이 골짜기에서 갈리거나 모여 ‘오방곡(五方谷)’으로 통했다. 오베이골은 오방곡의 이 지역 사투리다. 오베이란 이름, 오 맛깔스럽구나. 사투리란 우리가 고이 간수할 만한 언어의 순수 오지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산야의 젖을 물고 살았던 오베이골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1983년 영광원자력발전소의 냉각수 조달을 위한 저수지가 이곳에 조성되면서 모든 주민이 물러났다. 농토의 경작도 철저하게 금지되었다. 냉각수의 오염을 우려해서였다. 이후 이곳은 인적 끊긴 적막강산일 따름이었다지. 그렇게 30여 년이 흐르자, 어라,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생태계가 완연히 살아난 것. 삵과 수달과 담비, 황조롱이와 황새와 팔색조 등 멸종 위기종 생물들이 대거 나타난 것. 폐농경지가 습지로 변하며 생물들의 서식 조건이 좋아진 덕이었다. 비무장지대(DMZ)에 버금갈 생태 경관을 보유하게 된 이 분곡습지는 2011년 람사르습지로 등록되었다. 자연과 사람은 길항한다. 사람이 극성을 부리면 자연이 망가진다. 사람이 발을 빼면 자연이 살아난다.
겨울 가뭄 탓일 테지. 물을 담지 못한 습지 일원의 경관은 아쉽게도 무덤덤하다. 봄비 내리고 봄꽃들 자지러지게 필 때면 습지에 수생식물들이 번성하리라. 이채로운 물 위의 야생 화원이 펼쳐지리라. 봄은 벌써 발길을 내딛을 채비를 하는가? 운곡서원 앞 매화나무엔 꽃망울이 소담스레 맺혀 있다. 소녀의 볼우물처럼 앳되고 곱살한 매화꽃이 머잖아 설레며 피어나겠지. 겨울과 봄의 어간에서 들썩이긴 사람도 마찬가지다. 천국과 지옥 사이를 오가는 게 인생이지만, 삶도 사랑도 죄짓는 일의 연속방송극일 수 있지만, 매화 망울에서 봄을 예감하는 자의 마음은 소망으로 슬며시 부푼다.
운곡습지를 뒤로 하고 매산재 고갯길로 접어들자 참 걷기 좋은 숲길이 가지런히 펼쳐진다. 우리네 삶의 골목골목엔 축축한 상처가 고여 있기 십상이지만 이 숲길에선 가슴 밑바닥부터 말끔한 생기가 돋는다. 이를 신비하다 말하지 못할 것도 없겠다. 고개 넘어 길 끝엔 고창고인돌 유적과 고인돌박물관이 있다. 유적지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 477기가 무리를 이루고 있다.
고인돌. 가장 오래되고 가장 단단하며 가장 비밀스런 무덤이다. 빗돌이 있을 리 만무하니 파묻혀 흙으로 돌아간 주인공의 정체를 알 수 없다. 그저 사람의 덧없는 소멸에 관한 적시다. 바위처럼 닳지 않는 영원을 향한 갈망의 표식이고 말이다. 영원이라니. 하루살이에 불과한 게 사람이라지만 영원은커녕 단 하루라도 제대로 사는 일조차 벅찬 게 삶이거늘. 그러나 죽어서라도 영원을 꿈꾸는 게 사람이다. 영원한 고요와 침묵은 거저 얻어지겠지만.
자연을 벗 삼아 여유롭게 살아보고 싶은 생각으로 ‘전원주택’을 지어 시골로 떠났으나 적응을 못하고 1년도 채 못 되어 도시로 되돌아오는 사람이 많다. 주택의 규모가 너무 크고 비싸 팔리지 않을 경우에는 도시로 돌아오고 싶어도 불가능하다. 최근 잘 지어진 멋진 전원주택이 경매 물건으로 많이 나오는 것은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세컨드 하우스’다. 물론 이전에도 ‘세컨드 하우스’는 있었다. ‘별장’으로 불리던 집인데 오늘날의 ‘세컨드 하우스’ 개념은 좀 다르다. 별장은 고급스럽고 호화롭고 큰 주택이다. 그러나 세컨드 하우스는 자연을 만끽하고 싶을 때 내려가 지낼 수 있는 집이다. 물론 도시에 메인 하우스가 있어 언제든 되돌아갈 수 있다. ‘세컨드 하우스’의 조건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규모가 작아야 한다. “초가삼간이면 족하다”는 옛말이 있듯 방, 마루, 주방만 있으면 된다. 둘째, 도시에서 가까워야 한다. 문화시설과 편의시설을 이용하려면 지하철로 1시간 거리에 있는 게 좋다. 또 30분 거리에 미술관, 박물관, 문학관 중 하나가 있으면 금상첨화다. 이외 절, 교회, 성당 등의 종교 시설이 있고 전통시장도 열리는 지역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
칼럼니스트 조용헌 씨가 시골에 마련한 집에서 글을 쓴다는 신문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도 작은 규모의 시골집이 있어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내려가서 쉰다는 이야기를 책에서 읽었다. 홍만희 시인도 홍천에 있는 세컨드 하우스에서 시 낭송회를 연다. 이처럼 세컨드 하우스는 도시인들의 꿈이 되었다. 하지만 막상 작은 집이라도 마련하려면 쉽지 않다. 그래서 새로 생겨난 직업이 ‘시골 마을 빈집 디렉터’다.
‘시골 마을 빈집 디렉터’는 어떤 직업?
시골에는 버려지거나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이 많다. 이런 집들 중에서 규모가 작은 집을 손질해 도시 사람들이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시골 마을 빈집 디렉터’다. 머리를 비운 채 아무 생각 없이 쉴 수 있는 공간,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공간, 글 쓰는 공간, 각종 모임을 할 수 있는 공간 등 사용자가 원하는 대로 다양한 공간을 디자인해준다. 기획은 물론 빈집을 손질하고, 집 소유자와 연결해주는 일까지 모두 총괄해서 진행한다. 부동산 중개 업무를 보는 사람들도 전원주택을 소개하지만 그들은 주로 규모가 큰 집들을 중개한다. ‘시골 마을 빈집 디렉터’와의 차이점이다.
시니어에게 ‘시골 마을 빈집 디렉터’는 아주 적합한 직업으로 보인다. 운동 삼아 다니면서 경제활동까지 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나도 쉬엄쉬엄 다니면서 이런 일을 즐겁게 하고 싶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 직업에는 인턴 과정이 없다. 이 분야에도 인턴 활동을 하며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이 생겼으면 한다. 기회가 오면 꼭 도전해보고 싶다.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취득한 후 한 번도 사용하지 못한 분들에게도 은퇴 후 제2의 직업으로 ‘시골 마을 빈집 디렉터’를 권하고 싶다.
우리에게 익숙한 학(鶴)은 두루미목(目), 두루밋과(科)에 속하는 대형 조류다. 겨울이면 북녘 시베리아, 중국 동북부, 몽골에서 날아와 한반도나 일본 홋카이도 등에서 겨울을 나는 전형적인 철새다. 몸무게는 6500~9500g, 몸길이는 135~145cm로 몸집이 비교적 크며, 다리는 회색이다(‘한반도 조류도감’, 송순창·송순광, 김영사, 2005).
그런데 학은 우리에게 가깝게 다가오는 새가 아니다. 독수리처럼 무섭지는 않은데 어딘지 접근하기가 녹록지 않다. 자태가 조금은 ‘거만’하면서도 우아한 것을 높이 여겨서인지 오래전 우리 선조는 학을 우리가 사는 지상과 하늘 사이를 오가며 메신저 역할을 하는 영(靈)적인 새로 생각했다. 이를 아주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고려시대 청자다. 구름 사이를 오르내리는 학 무늬를 상감으로 매병에 새겨 넣은 ‘청자상감운학문매병(靑瓷象嵌雲鶴文梅甁)’이 바로 그것이다(사진 1).
이와 관련해 필자는 구름 사이를 평화롭게 오르내리는 학을 보면서 머리에 붉은 모자(cap)가 없어 늘 아쉬웠다. 왜냐하면 학을 영문으로 표현하면 ‘Red Crowned Crane’이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이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고려 1100년을 기념하기 위해 연 전시회 ‘대고려, 그 찬란한 도전’에서 지금까지 국내에서는 보지 못했던 ‘붉은 모자’를 쓴 학을 보았다(사진 2).
물론 조선시대 그림에서는, 특히 병풍(屛風) 화폭에서 ‘붉은 모자’를 쓴 학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런데 왜 도자기에서는 ‘붉은 모자’를 쓴 학을 보기 어려운 걸까? 이는 도자미술사 연구자들이 풀어야 할 과제가 아닌가 싶다. 여하튼 ‘진짜 학’을 만나 기쁜 전시였다.
스코틀랜드의 긴 역사가 고이 간직된, 천년고도 에든버러. 대영제국이 된 지 300년이 흘렀어도 근원은 스코틀랜드일 뿐이다. 남자들은 킬트 줄무늬 치마를 입고 길거리에서는 백파이프 연주가 흐른다. 스코틀랜드의 민족성과 풍습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이외에도 스튜어트 왕가와 귀족들, 월터 스콧, 애덤 스미스, 데이비드 흄, 로버트 번스 등 세기의 작가들 흔적이 남아 있다. 회색빛의 고풍스러운 건축물에 서리서리 스며 있는 역사의 이야기는 긴 겨울밤을 하얗게 지새우게 한다.
스코틀랜드의 대문호 월터 스콧 기념탑
에든버러 공항에서 버스를 타면 시내 중심까지 한 시간이 채 안 걸린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 탓일까? 아니면 약간 구릉진 언덕 위에 자리를 잡은 고색창연한 건축물들 때문일까? 에든버러 겨울의 첫 느낌은 ‘회색빛’이다. 어쩌면 버스정류장 앞쪽에 우뚝 서 있는 스코틀랜드 대문호인 월터 스콧(1771~1832)의 기념탑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오래된 것처럼 보이게 해달라는 스콧의 유언에 따라 시커먼 사암석으로 만든 뾰족한 탑. 61m 높이의 기념탑은 왠지 기괴하고 음산하다. 이 탑을 만들 때, 잉글랜드에 대한 경쟁심으로 영국에서 제일 높은 트라팔가 광장의 넬슨 기념탑보다 5m 더 높이 올렸다는 후일담이 있다. 287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에든버러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지만 포기하고 스콧 기념탑 아래 프린세스 정원의 국립 갤러리, 로열아카데미를 찾는다. 모두 무료 입장이다. 관광객으로서는 매우 반가운 일. 미술관에 걸린 수준 높은 명화를 마음껏 감상하면서 미소 짓는다.
에든버러의 국교는 장로교
에든버러는 남북을 가로지르는 프린스 스트리트를 경계로 북쪽의 올드 타운과 남쪽의 뉴타운으로 구분된다. 구시가지는 15세기부터 스코틀랜드 왕국의 수도로 행정, 문화의 중심지였다. 신시가지는 18세기 이후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조성된 주택, 상업지구. 1985년, 유네스코는 신·구시가를 묶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하지만 시선도, 마음도 구시가지에 다 빼앗긴다. 무조건 ‘고성(古城)’을 기점으로 걷는다. 고성까지 걸어가는 길목에서 화폐 박물관, 뉴대학을 만난다. 대학 건물은 해묵은 향기를 뿜어낸다. 토마스 찰머스(1780~1847) 목사의 동상이 있는 이 대학은 스코틀랜드 장로교 교구가 있던 곳. 16세기경, 이곳은 매우 중요했다. 1560년, 스코틀랜드가 국교로 지정한 장로교를 잉글랜드와 미국으로 전파하는 중심지였다.
스코틀랜드-잉글랜드 격전지, 에든버러 성
에든버러 성은 오래전 활동을 중단한 화산 꼭대기(133m)에 있다. 성 뒤쪽은 거대한 바위산이 버티고 있는데 3면이 깎아지를 듯한 절벽을 이루고 있다. 딱 봐도 요새로 최적이다. 비교적 경사가 완만한 동쪽이 출입구. 이 성은 현재 영국군 사령부 역할을 하고 있는데 전통 복장을 한 두 명의 근위병이 성을 지키고 있다. 한겨울에도 킬트를 입은 채 맨살을 보여주는 근위병은 여행자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지만 정작 그들은 관광객들의 시선에 무심하다. 에든버러 성은 6세기에 지어졌다는 설이 있지만 정확한 기록은 없다. 1018년부터 조금씩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고 현재의 건물들은 16~18세기 혹은 그 이후에 지어졌다. 이 성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격렬한 투쟁사를 보여주는 현장이다. 수 세기에 걸쳐 여러 차례 성주가 바뀌었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가 수많은 전투를 치르는 동안 이 성은 이긴 자의 차지였다. 스코틀랜드의 스튜어트 왕조를 끝으로 결국 잉글랜드 차지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성내에는 가장 오래된 12세기 초기의 건축물인 세인트 마가렛 예배당이 있는데 대부분 군사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타탄 무늬 제품의 천국 도시
에든버러의 백미는 구시가지 거리 로열마일이다. 에든버러 성과 홀리루드 하우스 궁전을 연결하는 1.6km 남짓의 도로. 과거 왕가에서 쓰던 전용 도로로서 길이가
1마일이나 되어 ‘로열마일’로 불린다. 왕족들만 다닐 수 있는 로열마일 때문에 서민들은 좁은 클로즈 골목을 이용해야 했다. 대로 옆으로 무수한 클로즈 골목이 눈에 들어왔다. 클로즈는 한국의 피맛골 거리와 엇비슷하다. 로열마일 양쪽으로는 역사를 간직한 옛 건축물들이 즐비하다. 기념품 숍, 식당, 호텔 등도 무수히 이어진다. 로열마일에서 가장 흥미로운 곳은 브로디스(Brodie’s) 클로즈다. 18세기, 낮에는 저명한 인사로 지내고 밤에는 도둑으로 살았던 윌리엄 브로디(1741~1788)의 이름을 따서 붙인 골목이다. 론마켓에서 캐비닛을 만드는 장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낮에는 경건하고, 부유하고, 훌륭한 시민이었다. 1781년에는 시의 조합장(deacon)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밤에는 강도짓과 도둑질을 했고 도박꾼으로 방탕하게 살았다. 그는 두 번째 부인과 살면서 돈을 많이 써댔다. 1786년에는 시립은행의 열쇠를 복사해 800파운드를 훔쳤다. 또 부유한 집안에 일하러 다니면서 열쇠를 따로 복제했다. 주변 상인들도 도둑질에 끌어들였다. 기록에 의하면 그의 교활함과 뻔뻔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결국 성 자일스 교회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브로디의 이중적인 캐릭터에 영국 소설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1850~1894)이 영감을 얻어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라는 작품이 탄생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나 그 진위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현재 그의 집은 카페로 이용되고 있다.
애덤 스미스 동상과 세인트 자일스 대성당
로열마일의 가장 번화한 광장에 과거 스코틀랜드 국회의사당, 청동 말과 동상으로 만들어진 버클루 공작의 기념비, 애덤 스미스의 동상과 성 자일스 성당 등이 몰려 있다. ‘국부론’으로 잘 알려진 애덤 스미스(1723~1790) 동상은 랜드마크 역할을 한다. 애덤 스미스 동상 앞에 있는 성 자일스 성당(1495년 건립)의 노르만 양식의 탑이 인상적이다. 이 교회는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곳. 종교개혁가 존 녹스는 프로테스탄트 동지를 규합했다. 성당 앞에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의 18세기 시청사가 있다. 시청사 옆 리얼 마리 킹 클로즈는 ‘귀신 나오는 골목’으로 관광 트렌드가 되었다. 이 광장에서 조금 밑으로 내려가면 콕번 스트리트를 앞두고 데이비드 흄(1711~1776)의 흉상이 있다. 흄은 에든버러 근교인 나인웰스에서 태어났지만 에든버러에서 대학을 다니는 등 인연이 깊다. 우여곡절이 많은 그의 인생 이야기가 참 재미있다. 흄은 “철학자가 되어라. 그러나 철학 가운데서도 여전히 인간이어라!”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메리 여왕이 살던 홀리루드 하우스
흄 흉상을 지나면서 길은 한가해진다. 길 끝에 홀리루드 하우스 궁전이 있다. 홀리루드 하우스는 1128년 데이비드 1세가 지은, 성 아우구스티누스회의 성당이었다. 1498년, 제임스 4세의 명에 따라 궁전으로 다시 지었고 1530년대에는 제임스 5세가 자신과 왕비인 기즈의 메리를 위해 탑을 덧붙였다. 1560년대에는 이들의 딸인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가 살았다. 메리는 1565년, 이 수도원에서 사촌 단리와 두 번째 결혼을 했다. 하지만 단리가 살해되자 얼마 되지 않아 남편 살해 용의자 보스웰 백작의 아이를 임신한 채 이 궁전에서 결혼했다. 메리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메리와 단리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제임스 6세는 에든버러에 머물 때는 홀리루드 하우스를 이용했으나 1603년, 그가 영국으로 떠난 뒤로 이 궁전은 왕가의 방문이 있을 때만 사용되었다. 2002년에는 왕실이 소장한 예술작품을 전시하는 ‘퀸스 갤러리’가 만들어졌다.
주인의 무덤 지킨 충견, 보비
에든버러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보비의 동상이다. 존 그레이의 양치기 개 보비. 존은 보비와 여행을 하던 중 병으로 객사했다. 존의 시신은 보비가 지켜보는 가운데 에든버러 그레이프라이어스 교회 묘지에 묻혔다. 당시 두 살이었던 보비는 죽을 때까지 무려 14년간 매일 밤 존의 무덤을 지켰다. 보비의 감동적인 이야기는 스코틀랜드 전역은 물론 해외까지 퍼졌고, 에든버러의 아이들은 용돈을 모아 보비에게 목걸이를 선물했다. 보비가 집 없는 개로 오인받아 다른 사람들에게 잡혀가거나 사살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보비는 개로서는 유일하게 에든버러 시 명예시민권을 부여받았고, 죽은 뒤에는 특별허가를 받아 존 옆에 묻혔다. 보비의 동상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해리포터’의 작가인 조앤 롤링(1965~)이 즐겨 찾았다는 카페가 있다. 이혼 후 에든버러에 정착한 그녀는 아이 분유 값을 벌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동화를 쓰기로 결정한 그녀는 집 근처 카페에서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을 완성했다.
Travel Data
항공편 스코틀랜드까지 가는 직항편이 없다. 인천→영국 런던행 직항편을 이용해 히드로공항까지 약 11~12시간 소요.
교통 런던 빅토리아 코치 역에서 에든버러까지 내셔널익스프레스 버스가 운행된다. 런던 킹스크로스 역에서는 매일 20여 회 기차가 운행된다.
시차우리나라보다 9시간 늦다.
음식 ‘하기스(Haggis)’가 유명하다. 양의 내장을 잘게 다져 곡물과 섞은 것을 양의 위장에 채워 삶은 음식. 스코틀랜드의 전통 요리로서 매시포테이토와 순무를 곁들여 먹는다.
주류 스코틀랜드를 대표하는 것 중 하나가 스카치위스키다. 몰트위스키와 그레인위스키를 섞어 만드는 블렌디드 위스키가 가장 일반적이고, 한국인들이 즐겨 마시는 종류다.
숙박 게스트하우스, 호스텔 등을 이용하면 된다. 고급 호텔은 25만 원 이상의 비용이 들지만 평균 8만~10만 원대에서 이용 가능하다.
화폐 파운드
여행 포인트 시간 여유를 갖고 북부 고지대에 있는 ‘하일랜드(Highland)’ 지역을 연계하면 좋다. 에든버러 시내 여행사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먼 길 오셔서 뭐라도 건져 가셔야 할 텐데 저는 작업실이 따로 없어요.” 한 땀 한 땀 공들여 바느질하듯 상대를 배려하는 목소리는 촘촘하고 결이 고왔다.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박물관이 조각보를 구입해 소장할 만큼 경지에 이른 솜씨이지만 헝겊 자투리 갖고 잘 놀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고 소박하게 말하는 이소라(53) 섬유공예작가. 하루에 일고여덟 시간을 앉아 바느질을 해도 지루하지 않다니 그야말로 혼자 놀기의 고수 아닌가. 그녀의 손바느질이 피어나는 공간을 들여다보니 제대로 놀아본(?) 사람의 방이 맞았다.
등받이가 있는 좌식 의자, 조각 천이 수북이 쌓여 있는 낮은 나무 탁자, 바늘 바구니, 작고 오래된 분홍색 라디오 하나, 그리고 막 구상을 끝낸 듯한 조각보 도면 위로 감칠질한 조각 천들이 알록달록 놓여 있다.
삶의 공간은 주인을 닮아간다고 했던가. 그녀 방에는 유별난 포즈도 없고 포장된 풍경도 없다. 그저 반짝이는 것들에 자주 마음을 빼앗기는 한 사람이 앉으면 종종 시간을 잊어버리는 곳이다. 하루는 거실 한쪽에 쪼그려 앉아 매일 바느질만 해대는 이소라 작가에게 남편이 우스갯소리로 한마디 던졌다고 한다.
“당신은 한 평짜리 인생이야.”
그러나 한 평짜리에서 시작된 그녀의 바느질은 10여 년 전부터 전 세계로 영역을 확장하는 중이다. 한·일 공예특별전, 프랑스 보졸레 섬유엑스포 등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면서 이름을 알렸고,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박물관에 그녀의 작품이 걸려 있을 만큼 예술성도 인정받았다.
바느질 놀이가 좋았다
뭐든 만들어 남 주기를 좋아했다. 바느질의 매력은 퀼트를 배우면서 알았다. 누가 아이를 낳으면 손수 예쁜 이름 수놓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이불도 만들어 선물하곤 했다. 그렇게 시작한 바느질이 조각보로까지 이어질 줄은 그녀도 몰랐다.
“딸이 서너 살 되었을 무렵 남편과 주말 부부가 됐어요. 남편도 없고 아이가 일찍 자면 할 일이 없어 너무 무료한 거예요. 그때 문득 ‘아이가 다 커서 내 손을 안 타고 직장도 관두고 나면 난 뭘 해야 하지?’ 스스로에게 물었어요. 이대로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 대학원에 들어가 산업공예를 배웠어요.”
그러나 대학원 공부는 궁합이 맞지 않았다. 심지어 실크스크린을 공부할 때 맡게 되는 물감 냄새조차 싫었다. 그러다 우연히 김현희 자수 명장이 국립민속박물관에서 하는 단기 강좌 정보를 접하고 서울까지 올라가 수강을 했는데 그 뒤 조각보 바느질에 흠뻑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때부터 조각보와의 인연이 시작된 것 같아요. 세 번 기초 강의를 듣고 그다음부터는 저 혼자 공부하며 바느질 기법을 터득했어요. 더 배우고 싶었지만 수강료가 너무 비싸 엄두를 못 냈거든요. 비록 혼자 하는 공부였지만 좋아서 하는 거라 열정이 넘쳤죠. 청주에 천연염색을 하시는 분이 있었는데 염색을 조각보에 응용하면 좋겠다 싶어 배워뒀지요. 나중에 여러모로 도움이 됐어요.”
조각보로 이름을 날려보겠다는 욕망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저 좋아서, 그녀의 표현을 빌리면 “10만 원 어치 재료만 사면 몇 달 잘 놀 수 있어서” 바느질을 했다. 그런데도 좋은 결과들이 자꾸 이어졌다. 알 수 없는 힘이 점점 조각보의 세계로 그녀를 이끄는 것 같았다. 작년에는 옻칠을 적용해 모시의 단점 보완과 함께 개성 있는 조각보를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 입상도 했다.
2007년,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박물관에서 그녀의 작품을 구입했을 때는 뉴스 보도가 쏟아졌다. 아무도 예상 못한 일이었다. 청주시가 2년마다 개최하는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사전홍보행사 일환으로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박물관에서 ‘한·미보자기-동서의 만남’ 특별 전시회가 열렸는데, 저명한 대학교수들 작품과 함께 출품된 50여 점 중에서 그녀의 작품이 박물관 관계자 눈에 띈 것이다.
“죽기 전에 개인전 한 번 열 수 있으려나 했는데 운이 좋았던 거죠. 당시 청주시 담당자가 특별 전시회에 참가할 작가 선정을 할 때 평소 조각보 작업도 하지 않으면서 이름만 걸어놓은 사람들은 배제했대요. 저로서는 특별한 기회가 된 거죠. 그게 인연이 되어 해외 전시회에 계속 참여하게 됐어요.”
조각보와 함께 써나가는 이야기
우리의 조각보는 조선시대 때 서민들이 자투리 천도 버리기 아까워 만들어 쓴 물건이지만 네덜란드의 유명 화가 몬드리안의 작품과 비교될 만큼 예술성이 뛰어나다. 이소라 작가는 요즘은 생활문화가 바뀌어 조각보를 실생활에 활용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우리의 전통 규방공예를 세계에 알리는 데는 손색이 없다고 강조한다.
“해외 전시회에 나가보면 외국인들이 우리 조각보를 보며 많이 놀라워해요. 기하학적 무늬가 아름답다며 감탄도 하지만 홑보자기의 바느질 앞뒤가 없는 게 굉장히 신기한가봐요. 믿기 힘든지 정말 손으로 바느질한 게 맞냐고 묻는 사람도 있어요. 바느질 기법으로 보면 별것 아닌데 말이죠. 서양의 퀼트는 홈질이 많고 조각보는 감칠질이 많아요. 그 차이로 보면 돼요. 조각보를 바느질할 때는 바늘땀을 뒤로 숨기기도 하지만 실 색깔을 달리해서 아예 장식처럼 보이도록 하는 기법도 써요. 서양 사람들은 그런 바느질 기법을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거죠.”
20여 년간 바느질을 해온 그녀의 손끝은 오래전부터 굳은살이다. 간혹 바늘에 찔려 고통스러워도 골무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골무를 끼면 섬세한 바느질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의자 위에는 똬리방석도 놓여 있다. 작업량이 많아 하루 10시간씩 앉아 있다 보면 엉덩이가 짓물러 사용하고 있단다. 그래도 여전히 손바느질이 고달프거나 지루하지 않다니 그녀의 조각보는 아무래도 유희의 물건에 더 가까운 것일 수도 있겠다. 그녀 스스로도 ‘놀이’에 적극 비유하곤 한다.
“저는 자투리 천만 있으면 하루 종일 잘 놀아요. 제 주변엔 골프 치는 지인도 있고 이틀만 집에 있어도 못 견뎌하는 친구도 있어요. 하지만 저는 제일 행복할 때가 일주일 동안 집 밖으로 나갈 일이 없을 때예요.(웃음) 뭔가 조몰락거리며 혼자 노는 시간을 정말 좋아해요.”
그러나 8000여 개의 조각 천을 이어 붙이고도 “어느 날 한번 세어보다 저도 깜짝 놀랐어요”라고 말하는 그녀를 보면 ‘놀이’라는 저 의미심장한 단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잠시 머리가 복잡해진다. 놀이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필사적이었을 결기의 시간들을 자꾸 헤아려보게 되는 것이다.
조각보가 그녀에게 무엇이냐고 물으니 ‘인생’이라는 답변이 곧바로 튀어나온다.
“저는 조각보 만드는 사람이에요. 제 인생은 조각보를 떼어놓고는 어떤 설명도 할 수 없어요.”
그녀가 보석처럼 발견해낸 이 황홀한 놀이가, 우연이 빚어준 조각보와의 필연적인 동행이,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써나갈지 궁금하다. 놀이가 깊어질수록 그녀의 작품세계도 확대될 것이다. 그것이 그녀가 혼자 있는 시간을 제대로 마주하는 이유다.
4) 데이비드 워나로비치(David Wojnarowicz, 1954~1992년)
화가, 사진작가, 영화제작자, 공연예술가, 에이즈 인권활동가로 활동했다.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어린 시절 가족에게 정신적, 성적 학대를 당했고 결국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16세에 집을 나와 거리 생활을 했다. 미국 전역을 히치하이킹했고 샌프란시스코와 파리에서 몇 달간 살다가 1978년에 이스트 빌리지에 정착했다.
이스트 빌리지에 새로운 물결을 일으킨 첫 멤버로 1980년대 초에 시빌리안 워페어, 클럽 57, 그레이시 맨션, 패션 모다, 림보 라운지 같은 전설적 공간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1985년에는 휘트니 비엔날레에 초청되어 ‘그라피티 쇼’를 했고, 미국을 포함한 유럽 등지에 그의 작품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38세에 에이즈로 사망했는데, 투병 중에도 도발적인 작품을 끊임없이 만들었다.
5) 쳉 퀑 치(Tseng Kwong Chi, 1950~1990년)
홍콩에서 태어나 16세에 캐나다로 이주했다. 파리 명문 예술학교에서 회화를 1년 공부한 후 사진으로 전공을 바꿨다. 1978년 뉴욕으로 이주해 에이즈로 40세에 사망하기까지 이스트 빌리지에 거주하며 사진작가로 활동했다. 키스 해링의 ‘절친’인 그는 해링의 부탁으로 4만 장의 ‘키스 해링 아카이브’를 제작했다.
챙 퀑 치는 뉴욕에서 경험한 다민족주의, 대량 소비문화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애매모호한 외교관’을 예술적 페르소나로 설정해 전 세계를 여행하며 작업했다. 1979년부터 1989년까지 작업한 ‘서양과 만난 동양’ 또는 ‘탐험 연작’은 서양이 아시아에 품는 순진무구한 선입견과 무지를 조롱하고, 서구라는 근대적 구성물이 동양과 어떤 연관 속에 구성되는지, 서구라는 상상 개념이 상징 지위를 확립하기 위해 어떻게 동양을 신비화하고 배제했는지를 묻는다. 챙 퀑 치는 중국인임을 적극 강조했지만 중국을 방문한 적은 한 번도 없다.
6) 장 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1960~1988년)
‘뉴욕타임스’는 바스키아를 가리켜 “흑인으로서 최초로 성공한 천재 아티스트, 검은 피카소”라 표현했다. 키스 해링, 앤디 워홀과 함께 3대 팝 아티스트로 불리며, 한때 마돈나의 연인으로도 유명했다. 1980년대에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지만, 자신을 인정해줬던 앤디 워홀 사망 후에 헤로인 과다 복용으로 27세에 짧은 생을 마감했다.
바스키아는 뉴욕 브루클린의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재능을 보여 어머니가 미술 전문 사립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러나 7세 때 어머니의 우울증으로 인해 부모가 이혼하면서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 15세 때부터 가출을 반복하며 거리 생활을 했다. 뉴욕 거리와 지하철에 낙서화를 하며 이스트 빌리지의 신표현주의 경향을 주도했다.
노숙자들과 공원 벤치에서 숙식하고 구걸하고 마약을 거래했다. 작업 초창기에 손으로 그린 엽서와 티셔츠를 뉴욕 거리와 상점에서 1~3달러에 팔며 생계를 유지했다. 그의 명성에 비해 초라해 보이는 7장의 엽서 시리즈 ‘무제(안티프로덕트 엽서)’는 이 시기의 작품이다. 바스키아의 엽서 시리즈는 앤디 워홀이 구매했는데, 당시 워홀과 함께 있던 뉴욕현대미술관 큐레이터는 이 엽서를 사지 않았다가, 훗날 바스키아에게 그림을 달라고 애걸하는 처지가 됐다고 한다.
7) 버스터 클리브랜드(Buster Cleveland, 1947~1998년)
소호 거리에서 우표 크기의 콜라주 작품을 판매하다 리무진을 빌려 소호 거리에서 작품을 전시하는 ‘리무진 쇼’를 열어 유명해졌다. 가난과 무명이 창조력을 발휘한 예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앤디 워홀의 영향을 받아 장난감, 자동차 후드 장식품 등 일상 재료를 이용한 콜라주 작품을 우편으로 보낸 ‘메일아트’가 그것이다. 메일아트는 가난한 예술가가 기성 제도권 전시 공간인 갤러리나 박물관에서 벗어나 대안 네트워크 공간에서 대중과 소통하면서 작품을 유통할 수 있는 방법이자, 국가나 기관으로부터의 검열을 피할 수 있었던 방식이기도 했다.
그가 애용한 재료는 미술잡지 ‘아트포럼’ 표지였다. 또 벼룩시장에서 싼값으로 구매한 제품들, 친구로부터 받은 선물, 이스트 빌리지 작가들 사진, 담뱃갑, 거리에서 주운 쓰레기로 작품을 만들었다. 작품은 재료 특성에 따라 변주됐는데, 누구든 월 구독료 100달러 혹은 평생구독료 1000달러를 내면 우편으로 그의 작품 ‘Art For Um’을 받을 수 있었다.
대부분의 전시장은 월요일 휴관한다. 현대미술은 도슨트 설명 없이는 온전한 이해가 어렵다. 도슨트 해설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을 확인하고 가길 권한다.
‘이스트 빌리지 뉴욕: 취약하고 극단적인’(전시기간: 2018년 12월 13일~2019년2월24일)
‘반항의 거리, 뉴욕’(전시기간: 2018년 12월 21일~2019년 3월 20일)
‘키스해링: 모두를 위한 예술을 꿈꾸다’(전시기간: 2018년 11월 24일~2019년 3월 17일)
‘케니 샤프, 수퍼 팝 유니버스‘(전시기간: 2018년10월 3일~2019년 3월 3일)
겨울의 절정이다. 게다가 미세먼지의 공습이 재난 수준이다. 온화한 기온의 남프랑스에서 긴 겨울을 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일탈하듯 단 일주일 정도의 여행이어도 몸과 마음을 녹일 수 있다. 지중해의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편안한 휴식이 될 일주일은 엄동설한을 잊게 해줄 것이다.
하루 한 군데에서 느릿하게 놀기
남프랑스의 항만도시 니스는 지중해 연안에 위치해 있다. 연중 평균기온이 15℃이고 대부분 온난한 날씨여서 겨울을 나기엔 좋은 조건을 갖고 있다. 한 시간 내외의 거리에는 모나코, 칸, 생폴 드 방스, 에즈 빌리지도 있다. 또한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접경지역이어서 국경을 넘어가 볼 수도 있다. 지중해의 햇살이 쏟아지는 니스에 숙소를 정하고 날마다 놀이하듯 여유롭게 여행의 맛을 즐기기에 최적이다.
니스의 코발트블루에 빠져들다
여름 피서지나 휴양지로 니스만큼 각광받는 곳이 있을까. 따사로운 니스의 해변은 아름다운 지중해를 품고 있어서 여름이면 피서객으로 북적인다. 피서객이 어마어마하게 넘쳐나는 여름철엔 호텔비가 만만치 않다. 하지만 여름 피서객이 빠져나간 가을과 겨울엔 할인 가격으로 호텔에 묵을 수 있다. 특히 이때 꼼꼼히 찾아보면 지중해의 일출과 일몰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는 전망 좋은 방을 구할 수도 있다.
내가 니스에 갔을 때는 가을이었는데도 해변에서 비키니 차림으로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풍경이 일상의 모습처럼 자연스러웠다. 해변의 동글동글한 몽돌 위를 맨발로 거닐면 지압을 받는 듯 시원하다. 4~5km에 걸쳐 곡선으로 멋지게 이어진 해변에서 바라보는 코발트블루의 바다는 시원한 색감만으로도 휴식을 준다.
군데군데 이어지는 계단을 통하면 구시가지로 들어가게 된다. 아름다운 성당이나 교회를 지나 영국인의 산책길이라 불리는 길을 걷는다. 탁 트인 광장에 앉아 천천히 도시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는 즐거움도 맛볼 수 있다. 또한 샤갈이나 마티스 박물관을 조용히 둘러보는 시간도 행복하다. 꽃시장, 채소시장, 벼룩시장을 지나 고풍스러운 골목길을 걸어 전망대에 올라 광활한 니스의 해안선을 굽어보는 시간은 절대 빠뜨리면 안 된다.
노천카페에서 수많은 사람이 끝없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그렇게 어슬렁거리며 걷다가 지중해 샐러드와 신선한 해산물 요리를 맛보는 것도 당연한 즐거움이다.
동화 속 중세마을 생폴 드 방스
16세기 중세도시 생폴 드 방스는 여행자에게 안식을 주는 동화처럼 예쁜 마을이다. 한적한 골목을 느릿하게 걸으며 세상과는 아랑곳없는 듯한 풍경 속에 빠져든다. 마네, 브라크, 마티스 등의 예술가들이 영감을 얻었던 곳. 특히 샤갈이 사랑한 마을이다. 성벽을 따라 걷다 보면 공동묘지가 있고 그곳에 소박한 샤갈의 묘가 있다. 여행길에서 이만큼 평온한 마을을 만나는 일은 그리 흔치 않다. 생폴 드 방스는 니스의 버스터미널, 그리고 군데군데 있는 버스정류장에서 400번 버스를 타면 한 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에 있다.
영화제의 도시 칸의 종려나무 해변길
칸은 우리에게 무엇보다 영화제의 도시로 떠올려지는 곳이다. 영화배우 전도연이 레드카펫을 밟고 들어가 영화 '밀양'으로 여우주연상을 탔던 도시다. 칸 영화제는 베니스와 베를린 영화제와 함께 세계 3대 영화제로 알려져 있다. 5월에 가면 영화제로 축제 분위기다. 햇살 쏟아지는 항구에 정박해 있는 눈부신 요트를 눈앞에 두고 커피 한 잔 마셔보는 여유를 가져본다. 종려나무들이 즐비한 해변을 걸으며 세계적인 영화인들의 숨결을 느껴보는 시간 또한 즐겁다. 니스 역에서 기차로 40분 거리다.
하루에 둘러볼 수 있는 모나코와 에즈 빌리지
여배우에서 왕비가 된 그레이스 켈리가 먼저 떠오르는 모나코는 니스에서 30분 정도 거리에 있다. 누구라도 한 번쯤 들러보는 몬테카를로 카지노 앞에는 언제나 여행객들로 붐빈다. 해안가로 나오면 카지노를 즐기러 온 도박꾼들의 화려한 요트를 마음껏 구경할 수 있다. 궁전과 대성당이 있는 구시가지를 지나 해양박물관을 구경해도 좋다. 시간이 충분해 모나코 빌리지의 골목까지 걸어볼 수 있다면 아쉬울 게 없다.
지중해의 선인장 마을
지중해 절벽 위에 13세기에 만들어진 작은 요새 마을이 있다. 수백 가지의 선인장들이 마을 정상에 가꾸어져 있다. 이 마을에 오르면 가슴을 뻥 뚫리게 해주는 아름다운 지중해를 마음껏 바라볼 수 있다. 니체는 이곳을 거닐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구상했다고 한다. 지중해의 아름다움은 이곳에서 바라보는 게 최고였다. 에즈 빌리지와 모나코는 가까이 있다. 두 곳을 하루에 다녀올 수도 있다.
니스 여행은 천천히 느긋하게 어슬렁거리며 해야 한다. 그래야 자연의 질감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해변에는 햇살을 즐기거나 힘차게 달리기를 사람들이 언제나 있다. 추운 겨울에 쏟아지는 태양처럼 환한 그들의 삶을 느껴보자. 역사 속의 또 다른 세상을 걸어보면서 고단한 일상을 잊는 시간도 괜찮다. 사계절 온난한 남프랑스 니스에서 추위를 떨쳐보는 일주일은 짧아도 알차다.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첫눈이 내리더니 대설(大雪)을 넘어 동지(冬至)가 다가오기도 전에 매서운 추위가 들이닥쳤다. 이렇게 되면 야외활동이 많이 위축되고 문화유산 답사도 지장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지금, 산과 들이 낙엽 지고 썰렁하다 못해 가슴 한가운데로 찬바람이 뚫고 지나가는 계절적 처연함이 가득한 늦가을과 초겨울이 엉겨 붙는 이때가 폐사지 답사에는 제격이다. 폐사지가 처량하면서도 아름답고 황량하면서도 존재감이 드는 것은 그곳이 한때는 번성하던 절터였기 때문이다. 말없이 우리를 대하는듯하지만 궁금한 것들은 차근차근 일러주는 미덕이 있으며 감추는 것 없이 있는 그대로 진솔하게 보여주는 사실과 증거가 널려있다.
충남 서산 보원사 터 (사적 제316호)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계곡은 내포(內浦) 지방의 진산 가야산(677m) 줄기 북쪽 봉우리 상왕산(象王山) 자락을 마주하고 서쪽으로는 개심사(開心寺)가 위치하고 있으며 그 산줄기 동쪽으로 깊은 계곡이 흐르는 곳이다. 지금은 국립용현자연휴양림이 있지만 그 옛날 이곳에는 100개의 절집과 1,000명이 넘는 승려들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곳으로 백제가 공주를 지나 부여에 자리를 잡고 있을 때 당진(唐津)을 통하여 중국과 왕래하던 중간지점쯤 되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통일신라 말 최치원이 지은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 '웅주 가야협의 보원사가 화엄 10찰이다'라고 기록되어 이즈음 창건된 사찰로 보기도 하지만 백제 금동여래입상이 발견되는 등 백제 때의 절일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원사가 상왕산에 있다’는 기록을 볼 때 16세기까지 그 사세가 지속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서산과 태안의 지방지 격인 호산록(湖山錄)에 보원사가 강당사(講堂寺)로 바뀌었다거나 철불의 양손이 없다는 기록 등이 있어 이때부터 사세가 기울어진 것으로 보이며 일제강점기 때 사진에는 석조물만 남아있을 뿐 절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1959년 근처에서 백제의 미소라 부르는 서산마애삼존불(국보 제84호)이 발견되었으며, 1968년에는 금동여래입상이 발견되었고 2006년부터 2012년까지 총 7차례에 걸쳐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대규모 발굴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현재 사적 제316호로 지정되었으며 102,886㎡의 웅장한 규모의 절터에는 당간지주, 석조, 오층석탑, 법인국사 승탑과 탑비 등 보물 5점이 있다.
당간지주 (보물 제103호)
절에서는 기도나 법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둔다. 이 깃발을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고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세월이 흘러 깃발(幢,당)이나 깃대(幢竿,당간)는 남아있지 않지만 돌로 된 기둥(支柱,지주)만 남아있으니 우리가 폐사지나 현존하는 절집 초입에서 자주 만나는 유적이다.
보원사 터 당간지주는 4m가 넘는 큰 석물이지만 전혀 위압적이지 않고 화려한 조각 없이 밋밋해 보이지만 찬찬이 살펴보노라면 의외로 멋진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하단이 상단보다 넓어서 안정적이며 기둥 안쪽은 아무런 장식이 없지만 바깥쪽으로는 띠를 두르듯이 조각하였다. 윗부분은 둥글게 궁굴려서 부드럽게 마감하였으며 마주 보는 기둥의 중앙에는 구멍을 뚫어 당간을 고정했다. 상단의 고정 부분은 열린 형태로 파내었고, 당간 받침대는 나중에 따로 만든 듯하며 큼직한 안상을 시원스레 조각했다. 중간에는 당간을 세울 때 받치는 자리, 즉 간대(杆臺)는 옛 모습 그대로 놓여있다. 저 넓은 3만 평 넘는 부지에 절집이 번성하던 시절, 이 당간지주에 힘차게 휘날리던 화려한 깃발(幢,당)을 생각해보면 참 멋지다. 주변에 사하촌 마을까지 들어차 얼마나 번화했을까.
오층석탑 (보물 제104호)
당간지주를 지나면 절터 중간을 횡단하여 흐르는 개울이 있다. 예전에는 징검다리로 불안하게 건너 다녔는데 최근에는 간이 철제 다리를 놓아 편리하다. 생각해보면 그 옛날 이곳에는 멋진 돌난간을 두른 큼직한 극락교나 해탈교 등이 놓여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다리를 건너 절집 안으로 들어서면 길게 높지 않은 축대가 쌓여있다. 그 중앙에 계단이 놓여있으며 위로 올라서면 중앙에 오층석탑 하나 서 있다. 멀리서부터 눈에 띄는 자태가 멋스러운 석탑은 상륜부를 치장하였던 찰주가 비죽 나와 있을 뿐 전체적으로 온전한 모습이다.
기단 위에 1층 몸돌이 얹히는데 그 사이에 굄대를 올린 것이 특이하며 충청도 지역 고려석탑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1층 몸돌의 각 면에 문비를 새겼으며 2층부터는 급격히 줄어들어 솟아오름이 강조되지만 지붕돌이 넓고 평탄하여 안정감을 준다. 상륜부에는 노반만 남아있지만 1945년 광복 전까지만 해도 아름다운 복발, 앙화, 보륜, 보개, 보주 등의 부재가 완전하게 남아있었다고 한다. 1968년 완전 해체, 복원 시 나온 부장품들은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보관, 전시 중이다.
법인국사탑과 탑비 (보물 제105호, 제106호)
오층석탑 뒤로는 금당 터가 발굴되었으며 중앙에 불대좌로 보이는 흔적이 있다. 그 뒤로 산자락에 연하여 다소 높직한 축대가 쌓인 곳에는 법인국사의 승탑과 탑비가 있다. 법인국사 탄문 스님은 고려 4대 임금 광종(光宗)을 위한 불사에 앞장섰으며 968년에는 왕사(王師), 974년에 국사(國師)가 되었고 975년에 보원사로 돌아와 76세에 입적하였다.
스님이 타계하자 국왕은 ‘법인(法印)’이라 시호를 내리고, ‘보승(寶乘)’이라는 사리탑의 이름을 내렸다. 그러면 승탑은 보승탑(寶乘塔)이라 불러야 맞는데 그냥 법인국사승탑이라 적었다. 승탑은 지대석 위의 기단부 8각 면마다 안상 모양을 파내고 그 안에 다양한 모습의 사자를 한 마리씩 돋을새김으로 새겼다. 중대석 받침돌은 8각이 다소 둥글게 보이는데 구름과 용무늬, 즉 운용문(雲龍紋)을 사실적으로 새겼다. 중대석은 아무 장식 없이 높고 큰 배흘림기둥이며 상대석은 연꽃무늬가 화려하고 그 위로는 난간을 조각하였다. 승탑의 몸돌은 8각의 앞뒷면에는 문비를 새겼고 나머지 6면에는 사천왕상과 알 수 없는 인물상 둘이 새겨져 있는데 설명이 아쉽다. 팔각의 지붕돌은 아깝게도 귀꽃이 많이 깨어진 상태이며 상륜부에는 연꽃을 새긴 복발 위로 보륜이 있다. 왼쪽에 세워진 탑비에는 법인국사(法印國師)가 광종 25년(974)에 국사(國師)가 된 후 이듬해에 입적하였으며, 비는 경종 3년(978)에 세웠다고 하니 비슷한 시기에 승탑도 세운 듯하다. 용 네 마리를 새긴 탑비의 이수 중앙에는 伽倻山 普願寺 故國師 制贈諡 法印三重大師之碑題額(가야산 보원사 고국사 제증시 법인삼중대사지비)라고 제액(題額)이 씌어 있으며 비석에는 모두 4천5백여 글자를 새겼다.
석조(石槽) (보물 제102호)
석조는 절집에서 물을 담아 쓰던 돌그릇으로 통돌을 파내서 만드는데 보원사지 석조는 현존하는 국내 최대 크기로 약 4톤의 물을 담을 수 있다고 한다.
철불(鐵佛)
보원사 절터에서는 지난 1968년에 9.3cm의 자그마한 백제 금동불이 나와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보존하고 있으며 일제강점기 때인 1910년경 이곳에서 출토된 철불 2구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백제의 미소,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국보 제84호)
보원사 폐사지를 둘러보고 용현계곡을 빠져나오다 보면 오른쪽 개울 건너 작은 산 중턱에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국보 마애불이 있다. 1958년 한 나무꾼 제보로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우리나라 마애불 중 최고로 손꼽힌다. 특히 벙글벙글 웃는 모습이 시간대별로 달라지는 햇빛에 따라 변하는 것이 특이하다. 최고의 국보 마애불을 보러 갔다가 폐사지를 둘러보든지, 쓸쓸한 폐사지를 둘러보러 갔다가 나오는 길에 국보 마애불을 만나보든지 아무튼 이 가을철에 가볼만한 답사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