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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저 일만 하고 살아온 58년 연기 인생, 정혜선
- 한복을 입고 표지 촬영을 진행하는 연기자 정혜선을 보면서 새삼 한복이 무척 어울리는 배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시청률 60%를 넘긴 전설적인 드라마 ‘아들과 딸’에서 딸을 구박하는 독한 어머니 모습으로 기억하는 이가 많을 것이다. 그 이전이나 이후로나 국민 어머니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수많은 드라마에서 어머니 역을 맡아 열연했던 그녀는 곧 팔순을 바라보는 1942년생이다.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생기가 넘치는 자태를 보니 어쩌면 긴 세월 빚어낸 어머니 상이 우리에게 영원처럼 고정된 게 아닐까 싶었다. 정혜선은 1961년 KBS 공채 탤런트 1기로 연예계에 처음 입문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학예회에서도 뽑히고 무용도 하고 노래도 잘하는 편이었어요. 수도여고에서는 방송반 활동과 웅변을 하며 상도 꽤 받았고요. 아버지가 원고를 써주는 등 많이 도와주셨어요. 심지어 탤런트가 뭔지도 모르던 때에 아버지가 지원 원서를 가져다줬어요.” 대부분의 가정집에 TV가 없던 그 시절, ‘뭔가를 알았던’ 부모님의 적극적인 지원을 보면 아무래도 그녀는 연기자로 살아갈 운명이었나보다. 당시만 해도 연예인을 딴따라로 부를 만큼 인식이 좋지 않았을 것인데 딸의 재능을 알아본, 열린 생각을 가진 아버지 덕분에 시작이 평탄했다. 가족의 지원으로 연기자 생활을 시작한 그녀는 1967년 KBS ‘실화극장’에서 간첩 두목 등 캐릭터가 강한 역할에 캐스팅되어 대중에게 이름을 알렸다. 이후 그녀는 성격파 배우로서의 이미지를 쌓기 시작했다. “어머니 역할을 그때부터 많이 했어요. 그 시절은 배우가 별로 없었으니까. 얼굴에 주름 그려가며 어머니, 할머니 역을 소화해내면서 연기력을 인정받았죠.” 연기자, 그리고 어머니 역을 주로 하게 된 것은 운명 같은 일이었을까? 그녀는 30대부터 할머니 역할을 주로 맡았다. 불과 31세에 MBC 드라마 ‘새엄마’에서 시어머니 역을 연기했다. 1977년에 한 설문조사에서 할머니 역할을 잘하는 연예인 2위로 뽑히더니, 1978년에는 아예 1위가 되었다. 연기자로서의 첫 절정기는 1983년이었다. 마흔 즈음에는 MBC 드라마 ‘간난이’에서 손주들을 데리고 거친 세상을 사는 80세 꼽추 할머니 역할을 완벽히 소화해 각종 상을 수상했다.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의 연기자 그녀는 멜로 드라마의 주인공보다는 ‘쎈’ 역할을 주로 맡았다. 그런데 인기가 많아지자 재미있는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녀가 한때 가수활동을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간난이’ 에서 80세 할머니로 출연해서 불쌍한 손주들을 지극히 보살피는 역할로 각종 연기대상을 휩쓸었던 그해 1983년 대한민국을 빛낸 사람이라고 해서 롯데호텔에서 디너쇼를 열어줬어요. 그때는 철딱서니가 없었죠. 그 재주로 디너쇼를 했다니.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 별거 다 했어요.” 같은 해에 매니저 제안에 앨범도 하나 녹음했다. 잠깐 가수활동을 하며 남긴 유일한 이 앨범의 타이틀곡은 ‘망각’. 발라드풍의 처연한 노래인데, 직접 가사도 썼다. 잊어야만 했기에 잊었노라고 지워야만 했기에 지웠노라고 너와 나의 아름다운 그 옛날 추억이 못 잊어 생각나면 아 강물 위에 내 마음 띄워보리 여자로서의 삶은 불행했다 노래 가사에 배인 슬픔과 애잔함을 증폭시키는 애절한 창법을 들으니 자연스레 그녀가 겪은 고통이 떠올랐다. “서른두 살에 다시 싱글이 됐죠. 여자로서 정혜선은 불행했지. 그 부분에서는 인생의 패배자라고 생각해요. 여자로 태어나 남편 잘 만나 아이 행복하게 키우면서 가정 잘 이끌어가고 그랬어야 했는데… 짚신도 짝이 있는데 지금까지 혼자 살았다는 건 비극이에요. 물론 그동안 날 좋아하는 이도 있었고 중매도 들어오곤 했지만 지금은 혼자야.” TV에서 보는 정혜선은 거칠고 과격한, 세월의 풍파에 시달려 독해진 우리네 어머니의 모습 그 자체였다. 그러나 실제의 정혜선은 조용하고 나긋나긋하며 차분한 목소리를 지닌 천생 여자의 모습이다. 담담하게 자신을 패배자라고 말하는 그녀에게서 안타까움을 느끼지 않을 이가 있을까. 그 모습에서 자기 삶을 희생하며 사는 우리네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30·40대에 할머니역을 맡던 그녀는 60대가 넘으면서 카리스마와 온화함이 있는 ‘사모님’과 ‘여사님’ 연기를 주로 했다. 또 기품 있는 한복 차림으로 각인시켜주는 존재감이 느껴지는 역할엔 그녀만 한 배우가 없다. 그렇지만 “나도 살았는데…” 남편과의 결별은 이혼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세 아이를 키우면서 남편의 빚까지 갚아나가야 했다. 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일을 했던 것은 최소한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고통스러웠지만 기대어 신세를 질 만한 사람도 없었어요. 그래도 채권자 분들이 순순히 기다리기로 해서 제 출연료를 3분의 2씩 가져갔죠. 그런 걸 생각하면, 그분들에게 고맙죠. 지금은 다 고인이 되셨지만.” “스스로 일어나지 않으면 누가 단돈 100원도 안 준다”는 게 그녀의 지론이다. 그래서 그녀는 요즘 급격히 높아진 자살률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나 같은 사람도 죽지 않고 잘 사는데 왜 자살을 하지…. 나는 자살이라는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안 죽었어요. 빚을 갚아야 된다고 생각했기에 죽음은 생각도 안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죽는 방법도 있었네. 그런데 그걸 몰랐던 거예요.(웃음)” 허공 속으로 흩어지는 그녀의 퍽퍽한 웃음소리에 좀 아팠다. 나누고 베풀며 겸손하게 개인으로서, 여자로서 정혜선은 불행했을지 모르지만, 모두의 배우로서는 불행하지 않았다. 그녀의 방송활동에는 슬럼프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았다. 연기하며 힘들었던 순간이 없다 할 정도로 매일 최선을 다했으므로 기억이 안 난다고. “프로그램이 끝나면 다음 프로그램이 예약되어 있었고. 그러다 보니 방송국에서 시청률 높으면 보내주는 해외여행도 제대로 못 갔죠. 늘 바빠서 쉴 틈이 없었어요. 내 인생은 완전히 일의 연속이었어요. 물론 내가 워커홀릭 성향도 있지만, 연출자들이 나를 도와주려고 더 불러줬던 것 같아요.” 그녀는 문득 자신이 지금까지 한 번도 이탈리아를 가본 적이 없다는 걸 알고는 잠시 억울해했다. 요즘은 여유만 있으면 누구나 다 가는 유럽 여행 아닌가. 수십 년을 대한민국 국민의 어머니로 살았던 사람이 일하느라 이탈리아도 못 가봤다는 얘기는 그야말로 우리 시대의 어머니답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일만 하는 정혜선이었죠. 일 안 하면 죽는 줄 알았으니까.(웃음) 그런데 요즘 쉬면서 생각해보니 일이 다가 아니구나 싶어요. 너무 늦게 알았지. 지금은 쉬면서 봉사도 하러 다녀요. 내가 나서기만 해도 같이 참여하는 사람들이 좋아해서 시간이 나면 자주 가고 있어요. 무엇이든지 내가 쓰임이 있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잖아요” 이번 표지 한복 협찬을 해주신 박술녀 한복 디자이너는 “20여 년 곁에서 지켜봐온 정혜선 선생은 한결같은 성실함과 노력으로 늘 수수하게 살아서 때로는 연예인인지 자연인인지 분간이 안 간다”며 뚝배기처럼 소탈하시다 거들었다. 그녀는 이제는 좀 편안하게 살고 싶다는 속내도 내비쳤다. “오늘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매 순간 최선을 다합니다. 남의 눈치를 보거나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고요. 어려운 사람 있으면 가능한 한 힘닿는 대로 돕습니다. 그러니 무언가에 꽂히면 에너지를 쏟아 부을 수밖에. 연기자에겐 숙명적 성향 같아요. 그저 일만 하고 살았지.” > 이루지 못한 예술을 향한 꿈 인터뷰를 하다 보니 그녀가 연기생활을 하면서 안 해본 게 없다는 걸 알게 됐다. 가수, 드라마와 연극은 기본이고 심지어 뮤지컬 배우도 했다. 그녀의 기억 속 뮤지컬은, 정말 원 없이 노래를 불렀던 ‘사운드 오브 뮤직’. 연극은 ‘햄릿’. 무대에 세 번이나 섰다. 물론 영화도 찍었다. “1970년부터 1980년까지 50여 작품에 출연했죠. 그것도 액션 영화에. 내가 한때 액션 스타였어.(웃음) 그때는 정말 그걸로 잘나갔어요. 지금 들으면 젊은이들은 깜짝 놀랄 테지만.” 그러니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본 이 베테랑 배우에게 욕심나는 작품이 있냐는 질문이 싱거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녀는 “욕심이 없다”고 단칼에 자르듯 말했다. 다만 그녀에게 다시 삶을 살 수 있다면 하고픈 일에 대해 묻자 오래전 묻어버린 꿈을 아련히 기억해내며 그 시간들에 휩싸이는 듯했다. “인간이기 때문에 욕심이 많아요. 그런데 ‘부자가 됐으면’이란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어요. 사업은 내 길이 아니에요. 그러나 아무래도 예술에 대한 꿈은 있었죠. 특히 무용. 무용 선생님이 ‘영자야(정혜선의 본명), 넌 무용해야 해’라고 해주시던 말씀이 아직도 생생해요. 사실 집이 가난했죠. 그런데 무용을 하려면 돈이 많이 드니 부모님 생각을 해서 안 했어요.” 아니다 싶으면 결코 하지 않는다 정혜선은 자신의 건강 비결로 편식하지 않고 잘 먹는 것과 운동을 따로 안 하는 대신 걷는 것을 꼽았다. “사실 이제 내일모레면 팔십이니까 걷는 것도 귀찮죠. 집에 앉아서 선풍기 바람 쐬는 게 가장 행복해요.(웃음) 스케줄 없을 때는 여기저기서 식사하자고 하니 사람을 만나게 되네요. 내가 거절하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그래서 하루에 꼭 두세 가지 일은 있더라고.” 지금까지의 인터뷰에서 예상 가능하듯 그녀는 남다른 고집이 있는 사람이다. 사실 얼마 전 꽤 굵직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파격적인 출연 제의를 받았지만 정중히 고사했다. “내가 거기 나가서 남을 즐겁게 해줄 용기가 없어요. 과거에는 디너쇼까지 하면서 끼를 보여줬는데 지금은 다 늙어서.(웃음)”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녀의 선택은 오랜 세월 정혜선이란 정체성을 만들어낸 신념 그 자체였다. 그저, 주어지는 대로 열심히 한다 겸손하고 배려심 많은 성품으로 후배들의 귀감이 되어온 그녀는 진정성 있는 삶으로 탄탄한 신뢰를 쌓아왔다. 초심을 지키며 자기만의 길을 묵묵히 걸어온 우직함이 그녀의 힘이다. 그녀는 이번 추석 때 다른 사람들보다 더 바쁠 예정이란다. “지인과의 인연으로 NBS한국농업방송에서 프로그램을 하나 맡았어요. ‘그땐 그랬었지’라는 프로그램에서 제가 내레이터를 하기로 했어요. 한 달에 두 번 방송을 하는데 작업을 해야 하니까,(웃음) 어디로 움직이는 건 당분간 불가능해요.” 작든 크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자신을 다시 돌아보며 충전하는 좋은 시간으로 즐긴다. 그저 평범하면서도 평탄하게 살기를 바라는 이처럼. “나는 애써 관리해온 게 아니라 책임감 있게 살았던 것뿐”이라는 그녀의 말에는 연륜과 관록이 묻어 있다. 그녀 삶의 원동력을 그대로 보여주는 설명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녀의 삶에서 우리가 봐왔던 강인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고향처럼, 시간이 흘러도 언제나 그곳에 있을 것 같은, 아련하면서도 올곧고 강인한 모습으로서. 연연하지 않는 삶, 이렇게 살아서 또 한 번의 아침을 맞듯 그녀에게 아무 일도 없으면 좋겠다.
- 2019-09-09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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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순애 자문단원, 글로벌 라이프로 제2의 인생을 열 기회
- 한국전쟁 이후 70여 년간 대한민국은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로 변화하는 경천동지의 사례를 만들어냈다. 그 시간에 아무것도 없었던 나라의 맨바닥을 일군 기반으로, 혹은 세계 곳곳의 산업 역군으로 대한민국의 위상을 드높이는 데 기여한 베이비부머들은 이제 새로운 삶의 시간을 맞이해 제2의 인생을 열고 있다. 바로 요즘 인기인 월드프렌즈 NIPA(정보통신산업진흥원) 자문단. 국내 퇴직 전문 인력 해외 파견 프로그램인 ‘월드프렌즈 NIPA 자문단’은 세계 곳곳을 누비며 대한민국 브랜드의 노하우를 전수하고 있다. 한국 정부 파견 해외 봉사단인 ‘월드프렌즈코리아(World Friends Korea)’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 중 하나인 ‘월드프렌즈 NIPA 자문단’은 민간 혹은 공공기관 출신의 퇴직 전문가들을 위한 해외 봉사 프로그램이다. 시니어 전문가들이 가진 기술 경영 및 경제 개발 노하우들을 개발도상국에 자문 형태로 전수하여 경제와 산업 발전에 기여하는 이 프로그램은 2010년부터 시작해 올해로 벌써 9년째를 맞이하고 있다. 2010년 첫해 18개국 38명 파견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총 45개국 809명의 자문단을 파견해왔다. 지금도 아프리카, 아시아, 중남미 등의 32개국에서 142명의 자문단이 활동하고 있다. 은퇴한 ICT 시니어들, 여기에 다 모여 ‘월드프렌즈 NIPA 자문단’은 은퇴한 ICT 시니어가 인생 2막을 보낼 수 있도록 큰 역할을 해준다는 점에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퇴직 이후에도 지속적인 사회활동을 희망하는 시니어가 많기 때문이다. 자문단원이 된다는 것은 개도국에 대한 봉사적 지원과 대한민국 브랜드의 전파 의미가 우선이지만, 동시에 자문단원 개인 입장에서는 은퇴 후 임팩트한 제2의 인생을 열 기회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베네피트 덕분에 자문단 지원은 경쟁률이 높다. 베트남, 네팔, 세네갈, 에콰도르, 우즈베키스탄 등 43개국 대상 65명의 자문단원을 선발하는 올해 상반기 설명회에는 100명이 넘는 지원자가 참석했다. 자문단원은 정보통신, 산업기술, 에너지, 무역투자, 지역발전 등 5대 산업자원정책 분야를 기준으로 선발한다. 파견기간은 1년이며 개도국의 요청 및 프로젝트 연속성을 고려하면 최대 3년까지 활동이 가능하다. 선발된 자문단원에게는 항공료(실비), 출·귀국 준비금 1000달러, 활동비 월 700달러, 현지 생활비가 국가별 차등 지급식으로 월 2300~5000달러가 지원된다. 자문단원 선발 시 각 수요국에서 요구하는 학위가 있지만 관련 학위가 없더라도 이에 상응하는 경력자는 지원이 가능하다. 특히 외국에서 생활하는 만큼 영어로 강의, 자문, 보고서 작성이 가능해야 한다. 새로운 활력 찾아 떠난 에콰도르 에콰도르에서 자문단 활동을 마치고 6월에 귀국한 양순애 씨를 만났다. 그녀는 이화여자대학교 컴퓨터학과를 졸업하고 삼성전관 컴퓨터 사업부 근무, 영국 에든버러대학교 유학이라는 경력을 가진 베테랑 컴퓨터 연구자 출신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했는데 차별이 심했어요. 옛날에는 여자가 직장생활하기 되게 힘들었잖아요. 그러다 영국으로 유학을 갔죠. 박사 학위를 따고 돌아와 정부 산하기관에서 전자정부 쪽 일을 하다가 그만두고 자문단원에 지원했어요.” 자문단원 활동은 에콰도르가 처음이 아니었다. 그 전에 KOICA(한국국제협력단)를 통해 동티모르에서 자문단원으로 2년간 활동한 경력이 있었다. “동티모르는 상당히 빈곤한 나라예요. 1인당 국민소득도 낮고 가게에 가면 물건도 별로 없죠. 그런데 그이들은 즐겁게 살더라고요. 가난해도 만족하며 사는 모습을 보면서 좀 겸손해졌다고나 할까요, 제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죠. 그리고 제가 가진 지식과 경험이 개도국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큰 보람이었어요.”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다 동티모르에 갔다 온 후 1년 정도 휴식기간을 가진 그녀는 다시 해외에서 일해보고 싶었다. 동남아시아는 갔다 왔으니, 다음은 아프리카나 중남미 쪽으로 나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때마침 에콰도르에서 전자정부 구축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인력을 필요로 했다. 그 업무는 그녀의 전문 분야였다. “에콰도르는 전자정부 수준이 아주 낮지는 않고 중간 정도예요. 우리나라의 정보통신부 역할을 하는 부처도 있고요. 그곳에 국립고등교육연구소가 있는데 사실상 국립대학원이라고 보면 돼요. 교수들이 연구도 하면서 정부의 자문기구 역할도 하죠. 저는 그 기관 행정 부서에서 일했어요.” 에콰도르에서 일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없었는지 궁금했다. 그녀는 높은 산지에 위치한 도시에서 생활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했다. 적응하는 데 5~6개월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가 지냈던 수도 키토는 해발 2850m에 위치해 있어, 충분히 먹어도 살이 빠지고 걷기만 해도 숨이 찼다. 치안 부재도 불편했다고.생활범죄가 늘어나 사람들이 휴대폰과 지갑을 잃어버리는 일이 잦았다. 이 두 가지만 빼면 살기 좋은 나라라고 그녀는 말했다. 자부심과 인내심 함께 가져야 그녀는 에콰도르의 전자정부 수준이 중간 단계 이상으로 올라가고 있어 1년 정도 더 있으면 가시적인 성과가 보일 것 같았는데 돌아오게 됐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자문단 선배’로서 자문단을 지원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팁들을 알려줄 수 있냐고 물어봤다. “우선 언어, 특히 영어가 중요해요. 소통은 중요하니까요. 그리고 건강이죠. 특히 남자들은 음식문화 때문에 고생해요. 부부가 함께 가면 좋은데 혼자 나가서 지내다 보면 몸이 부실해질 때가 있어요. 건강을 위해 자신이 좋아하는 요리를 미리 배워서 가면 좋아요.” 자문단원들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기 때문에 프라이드가 높을 수밖에 없다. 그녀는 그래서 더 봉사한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현지에 가면 대부분 공공기관에서 일하게 되는데 우리나라와는 직장 문화가 많이 달라 힘든 일이 종종 발생한다고 했다. “인내심이 필요해요. 잘 들어줘야 하고 무작정 강요를 해서도 안 돼요. 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지 않으면 소통이 어려워져요. 현장 교육을 받아도 실제로 부딪치는 부분은 달라요.” 60세까지는 당분간 푹 쉴 생각이다. 그림을배우며 짧은 휴식을 마친 뒤 인생의 다음 지점을 준비하게 될 그녀를 응원한다. 하반기 신청은 월드프렌즈NIPA자문단의 공식 홈페이지(senior.nipa.kr)에서 하면 된다. 만 50세 이상의 퇴직(예정)자로 정보통신, 산업기술, 에너지자원, 무역투자, 지역발전 등 5개 파견 분야에서 10년 이상 또는 이에 상응하는 경력이 있다면 지원이 가능하다. 서류 및 면접심사를 거쳐 선발하며, 개도국 정부나 공공기관에 파견돼 1년간 자문단원 활동을 하게 된다. 평가에 따라 최대 3년까지 활동 기간을 연장할 수 있다.
- 2019-07-17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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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녀의 벽' 허문 17년 차 베테랑 여성 경호원 이용주 씨
- 흰색 와이셔츠에 검은색 정장, 선글라스로 반쯤 가린 무표정한 얼굴, 근육질의 몸. 경호원 하면 떠오르는 클리셰다. 게다가 이 세계는 한동안 ‘금녀(禁女)의 영역’이었다. 꽤나 케케묵은 이 통념을 깨트린 이가 있다. 2002년 국내 보안 업체에 ‘첫’ 여성 경호원으로 입사해 톰 크루즈, 빌 게이츠, 히딩크, 고르바초프, 박세리 등 국내외 유명 인사들의 경호 업무를 수행해온 이용주(李庸朱·39) ADT캡스 경호팀장. 화려한 경력에 놀라고 단아한 외모에 또 한 번 놀라면서 28세의 나이에 팀 수장이 되어 맹활약해온 이야기를 들어봤다. 그녀에게는 ‘첫’이라는 수식어가 자주 따라 붙는다. 경호학과를 졸업한 1호 여성 경호원으로도 주목받았지만 국내 여성으로서 경호학 석·박사 학위도 최초로 취득했다. 입사 5년 만에 경호팀장 자리에 오른 사실도 입지전적인 이력이다. 남자도 쉽지 않은 분야에서 도전을 거듭하고 있는 그녀에게서 근성과 유연성을 자랑하는 파이터가 연상됐다.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환경에서 홀로 견뎌왔을 고독한 시간들도 느껴졌다. “입사했을 때 여자 경호원이 저밖에 없었어요. 남자 경호원들은 달가워하지 않았죠. 현장에 나가면 하루 종일 같이 있어야 하니 얼마나 불편했겠어요. 그 심정이 이해는 됐지만 제 입장에서는 그런 눈치까지 봐야 했으니 더 힘들었죠. 멘토도 없어서 많이 외로웠습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더 채찍질했는지도 몰라요.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뭘까 매일 고민했죠.” 여성 경호원 생명은 짧다는 얘기도 자주 들려왔지만 귀담아 듣지 않았다. 선택한 길의 결말도 함부로 상상하지 않았다. 당장 극복해야 할 문제들에 집중하며 몸과 마음의 탄력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후배들에게는 등대 같은 존재였기에, 선도자로서의 역할도 중요했다. “결혼과 출산은 경력 단절로 이어져 여자들에게 큰 부담이었어요. 저도 지인들에게 ‘결혼하면 보직 변경을 해야 할 텐데 어느 부서를 선택할 거냐?’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경호 업무를 더 이상 못 하게 되는 건가 고민이 됐죠. 부서 내에서는 상의할 사람이 없어 인사팀에 상담을 요청했더니 왜 그런 고민을 하냐고 하더군요. 걱정 안 해도 되겠구나 했죠. 그런데 아이를 낳았을 때 또 자격지심이 밀려오더라고요. 출산 과정의 공백기를 과연 이해해줄까 염려스러웠어요. 선례가 없어 속앓이를 했던 것 같아요. 경호학과 나온 여성들이 경찰공무원 시험을 보거나 법원 경비대 등 안정적인 곳에서 일자리를 찾는 건 그 때문이에요. 저는 운이 좋았어요. 회사의 배려를 많이 받았거든요. 후배들은 선배들이 만들어놓은 토대 위에서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됐죠.” 서비스 마인드 없으면 고독한 직업 그녀는 일의 핵심을 재빨리 꿰뚫어보는 능력이 있었다. 남성 중심의 체력과 무술 실력이 주로 요구되어왔던 경호 업무야말로 시대에 맞게 패러다임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고, 여성의 강점인 부드러움과 섬세함으로 차별화를 꾀해 신뢰를 얻었다. 이를테면 의뢰인이 일정을 마치고 차량에 오르면 편히 쉴 수 있도록 적절한 온도를 유지하고 최적의 컨디션을 위한 각종 음료도 구비해놓는다거나 식사가 늦어지면 시장기를 달래줄 간단한 간식거리를 준비하는 식이다. 그녀가 경호를 ‘토털 서비스’라고 표현하는 이유다. “경호원이 되고 싶어 하는 학생들에게 조언할 때 서비스 마인드를 강조해요. 의뢰인 입장을 한 번 더 생각하는 경호를 하라는 거죠. 음료수 하나를 살 때도 고민을 해야 합니다. 의뢰인에게 어떤 음료가 더 필요할지 헤아려보는 마음, 그것이 바로 서비스 마인드입니다. 체력 좋고, 오랫동안 잘 서 있는 것이 경호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자필 편지를 손에 쥐어준 고르바초프 태권도 4단, 유도 3단, 합기도 2단의 무술 실력을 갖춘 그녀는 슬럼프에 빠지기 전까지는 음대를 지망하며 플루트를 배우던 학생이었다. 플루티스트의 꿈을 접은 건 고등학교 3학년 때. TV에서 우연히 경호원을 꿈꾸는 학생 인터뷰를 보게 되면서부터였다. 평소 운동에도 소질을 보였던 그녀는 어머니의 권유로 용인대학교 경호학과로 진로를 바꾼다. 망설임은 없었다. 악기 연주에 투자한 시간이 아쉽기는 했지만 새로운 선택에 적응하는 데 부지런했다. 당시 TV에 나왔던 학생은 같은 학교 선배로 만나 결혼까지 했다. “남편은 경호원 꿈을 접었지만 제 얘기를 많이 들어주고 조언도 해줍니다. 9년 연애하고 결혼했으니까 어느새 제 인생 절반을 함께했네요. 둘째 낳았을 때 육아 문제로 심각하게 고민을 했는데 그때 남편이 ‘네 일을 더 열심히 하면 좋겠다, 대신 내가 부모 역할 더 많이 하겠다’라고 말했어요. 남편 응원이 큰 힘이 됐습니다.” 국내외 명사들의 수행 경호를 도맡아 해온 그녀는 2008년도에 방한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일주일을 꼬박 함께 다녔다. 당시 팔십에 가까운 고령이어서 지병 유무, 복용약 등을 체크하고 건강상의 문제가 생기면 바로 갈 수 있도록 이동 경로에 따른 병원들도 미리 알아봤다. “돌발 상황도 있었죠. 워낙 유명하신 분이라 사진을 찍으려고 달려드는 사람이 많았어요. 제가 여자라 약해 보였는지 팔을 꺾으며 밀어붙이는 통에 진땀을 흘렸습니다. 하루는 계단에서 넘어지실 뻔해서 신속하게 부축을 했는데 남자 손길이 아니어서 불편하셨나봐요. 괜찮다 하시더라고요.(웃음) 그러나 차차 제 마음을 알아주셨어요. 마지막 날 호텔에서 나오면서 ‘한국에서 좋은 친구를 알게 돼서 너무 고맙고 좋다’는 내용의 자필 편지를 손에 쥐어주셔서 감동했습니다. 헤어질 때는 할아버지처럼 저를 꼭 안아주셨지요.” 외빈 경호를 하게 되면 팀을 구성해 예행연습을 한다. 묵게 될 호텔에 가서 도면을 받아 내부 구조를 살피고 지방으로 이동할 때는 식당 등의 비상구까지 꼼꼼하게 체크한다. 2011년 필리핀 장관들이 우리나라의 환승문화를 도입하기 위해 방문했을 때는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며 체험을 해야 했기에 바짝 긴장했다. 각 노선표는 물론 지하철 어느 칸을 타야 바로 계단을 이용하고 에스컬레이터를 탈 수 있는지 하나하나 확인했다. “현장에 들어갈 때는 위험 상황에 대비해 시·분·초 단위로 사전 점검을 해요. 그렇게 철저하게 준비해도 갑자기 일정이 바뀌어 당황스러운 경우도 있죠. 대부분 개인적인 업무를 보거나 자녀들하고 올 때는 아이들 관련 일을 보기도 합니다. 그럴 때가 제일 난감하지만 의뢰인들과의 감정 갈등은 있을 수 없습니다.” 최선을 다하는 최고가 되고 싶다 그녀는 사회가 흉흉할수록 경호 문의가 많다고 했다. 특히 학교 폭력, 데이트 폭력 때문에 경호를 의뢰하는 사람이 점점 늘고 있다면서 안타까워했다. “아이 경호는 학교와 학부모 동의를 받아야 할 수 있습니다. 문의가 오면 저도 아이 키우는 입장에서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상담을 해드립니다. 금전적인 부담 때문에 경호를 맡기지 못하는 분에게는 자존심을 지켜드리려고 하지요. 아이를 경호하면 당장의 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친구들과의 관계, 아이를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의 인식에 문제가 생겨 최선의 방법은 아닐 수 있다고 말씀드려요. 요즘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데이트 폭력은 생각보다 훨씬 심각해요. 협박 전화 때문에 친구들도 다 떠나고 부모도 힘들어 전화선을 뽑고 사는 의뢰인이 있었는데 상대를 멀리서 봐도 몸을 벌벌 떨 정도로 정신적 충격이 심했습니다. 신변 보호가 우선이지만 이럴 때는 의뢰인의 심리적 안정을 위해 카운슬러 역할도 합니다.” 현재 여성 경호원 비율은 10% 정도에 머물고 있지만 여성의 부드러운 이미지를 선호하는 의뢰인이 많아져 더 큰 활약이 기대되고 있다. 그녀 나이 올해 마흔. 경호원은 나이 제한이 없는지 궁금했다. “그런 건 없어요. 경력이 쌓일수록 경호는 몸으로만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실감해요. 몸과 마음, 두뇌가 동시에 가동돼야 하지요. 물론 현장에서 일할 때는 무전기와 3㎏에 달하는 삼단봉, 가스총, 전기충격기 등 기본 무기를 지녀야 합니다. 체력관리는 필수입니다. 저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출근하기 전까지 운동도 하고 독서도 합니다.” 2011년도부터 시작한 호신술 재능기부에 이어 최근에는 심폐소생술 강의까지 하고 다니느라 더 바빠진 그녀는 사회에 보탬이 되는 봉사활동을 통해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또 자신에게 따라다니는 최초라는 타이틀도 의미 있고 감사하지만 앞으로는 ‘최선을 다하는 최고’가 되기 위해 스스로를 독려하겠다고 했다. 그녀가 자신의 인생에 무엇을 더 얹게 될지 아직은 모르지만 삶의 매순간이 도전과 열정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음은 분명히 알 것 같다.
- 2019-06-18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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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수 따라 맑은 공기 가르며 뛰다
- 이런 기분이었다. 시원하게 속이 뻥 뚫리고 세상이 진짜 내 것 같은 느낌 말이다. 노곤한 몸을 일으켜 잠에서 깰 때까지도 몰랐다. 사람들이 왜 이 새벽에 뛰겠다고 모이는가 생각했다. 그 생각은 너른 호수가 눈에 들어오고 푸르른 나무 사이를 지나다 햇살이 몽환적으로 몸을 감싸는 순간 사라진다. 아침에 달리는 느낌이 이런 것! 하루를 만나고 또 만나다 보니 15년 한결같이 같은 곳을 바라보며 뛰게 됐다는 사람들을 소개한다. 바로 ‘런조이일산마라톤클럽’이다. 매주 토요일 아침 6시. 일산호수공원 제1주차장에서 호수공원 쪽으로 난 문을 열고 들어가면 런조이일산마라톤클럽 회원들이 삼삼오오 모이다가 금세 40명에서 50명으로 무리를 이룬다. 시간이 되면 빙 둘러서서 함께 몸을 풀고 뛸 준비를 한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벤치에 놓인 과일과 물을 나눠 마시고 난 뒤 대열을 맞춰 호수공원 트랙을 뛰기 시작한다. 매번 이렇게 모여 호수공원을 두 바퀴 뛰면 일정이 마무리된다. 말이 쉽지 일산호수공원 두 바퀴는 10km 코스를 의미한다. 이들은 매주 수요일 밤과 토요일 새벽에 만나서 어김없이 뛴다고 했다. 사실 런조이마라톤클럽은 일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서울 동작구의 보라매와 여의도, 잠실 등지에서 먼저 생겨났고 일산은 마지막에 조직됐다. 게다가 꽤 유명한 마라토너가 창단한 클럽이라고 이희준 훈련감독이 말했다. “이 클럽은 이홍렬 감독님이 마라톤에 대한 열정을 담아 ‘뛰는(RUN) 기쁨(JOY)’이란 이름으로 만드셨습니다. 우리나라에서 10년 동안 넘어서지 못하던 2시간 15분대의 벽을 1984년 동아마라톤대회에서 1초 앞당겨서 깨신 분입니다. 국가대표도 오래하셨고 마라토너 출신 첫 체육학 박사이십니다. 저도 감독님께 배웠죠.” 특히 런조이일산마라톤클럽이 받은 혜택이 있다면 이홍렬 감독이 초창기부터 꽤 오랜 시간 일산에 거주했다는 것. 다른 지역 클럽은 애써 찾아갔다면 일산은 매번 와서 함께 훈련하고 뛰었다. 바탕이 튼튼하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꾸준하게 회원들이 찾아온다고. 매주 이렇게 모여서 뛰면서도 줄곧 하는 얘기는 또 마라톤 이야기다. 회원들은 자세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기도 하고 다 뛰고 나면 다 같이 몸을 푼다. 15년 된 초창기 회원도 매주 나와 뛰고 있고 적게는 3년, 평균적으로 10년 정도 이곳에서 마라톤 경력을 쌓아온 베테랑이 많다. 사뿐히 뛰는 아름다운 꽃중년 미녀들 런조이일산마라톤클럽 부회장을 맡고 있는 정혜경 씨는 이곳에서 10년째 뛰고 있는 베테랑 중 한 명. 취재를 할 때도 뛰면서 이야기하자고 할 정도로 자신감과 활기가 넘쳤다. 팔다리가 길고 여린 체구의 그녀에게 “요즘은 여자들을 위한 실내운동이 많은데 왜 마라톤을 선택했냐”고 묻자 참 단조로운 답이 돌아왔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었거든요. 나중에 지인들이 뼈가 부러질 거라면서 말리더라고요. 물론 여자로서 꺼려지는 게 있죠. 햇빛에 노출되어 주근깨도 생기고 피부 걱정이 돼요. 그런데 야외에서 뛰다 보니까 실내운동은 생각만 해도 답답해요. 매일매일 다른 풍경을 보여주는 자연과 호흡하면서 뛰는 느낌이 정말 좋습니다.” 7년 전 갑상선암 수술을 한 뒤 1년 쉰 기간을 제외하고는 매주 호수공원 트랙을 돌고 있다. 덕분에 남들이 걱정하는 골밀도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고 했다. “완전 정상이에요. 갑상선암 수술하면 골밀도가 문제라던데 저는 전혀 그런 거 없고 지금은 갑상선 약도 끊었어요. 마라톤 덕을 확실히 봤죠.” 긴 머리 휘날리며 호수공원을 뛰는 또 한 명의 미녀가 있다. 올해 4월 보스턴마라톤대회에 참가하고 돌아온 정경화 씨다. “작년에 개띠 선배님들이 보스턴에 다녀왔는데 너무 좋으셨다며 자꾸 바람을 넣는 거예요.(웃음) 그래서 보스턴마라톤대회 참가자 2기가 꾸려졌습니다. 보스턴마라톤대회에는 42.195km 풀코스밖에 없어요. 그런데 진짜 말로만 들어서는 이해하지 못할 감동이 있어요. 동네가 온통 축제 분위기이더라고요. 다들 손 흔들어주고요. 첫발부터 결승점까지 계속 감동이에요. 눈물 날 것 같았어요.” 마라톤 경력 3년, 과감한 도전을 하고 감동까지 만끽하고 돌아왔다는 그녀의 눈빛이 촉촉하게 빛났다. 팔순잔치 삼아 참가한 보스턴마라톤대회 런조이일산마라톤클럽에서 단연 눈에 띄는 사람은 바로 이명희 씨다. 이 모임의 최고 연장자이지만 열정만큼은 20대를 방불케 하는 인물. 젊은 회원들하고 뛸 때도 뒤처짐이 없을 뿐만 아니라 80대가 맞나 싶을 정도로 다리 근육도 단단해 보였다. 그의 마라톤 인생에 있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작년에 참가했던 제122회 보스턴마라톤대회. 정경화 씨가 언급한 58년 개띠들과 함께 보스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저를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작년에 제가 80세였거든요. 그걸 기념하고 싶었어요. 마침 회원 들 중 작년에 환갑을 맞이한 58년 개띠들이 보스턴에 간다고 하더라고요. 같이 가겠다고 했죠. 생일은 6월인데 팔순 기념으로 4월 말 보스턴에 다녀왔죠. 제가 참가했던 첫 마라톤이 2005년에 열린 ‘보스턴제패기념마라톤대회’였거든요. 그때부터 보스턴에 한 번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꿈을 이뤘죠. 폭풍우가 몰아쳤지만 완주는 했습니다.” 현역 시절 공인노무사로 일하다가 정년퇴임 뒤 일산 신도시로 들어오면서 그의 마라톤 인생이 시작됐다. “2004년부터 였으니까 우리 클럽이 생기기 전부터 뛰었습니다. 일산에는 65세에 이사 왔어요. 그때 제 눈에 운동할 만한 곳이 호수공원밖에 없어서 매일 나왔습니다. 어느 날 보니까 런조이마라톤클럽이 회원을 모집하더라고요.” 이제 정말 마라톤 은퇴를 생각한다면서도 미련을 버릴 수가 없는 모양이다. “팔십 먹어 마라톤 하면 사람들이 욕해요. 죽으려면 집에서 죽지 미쳤다고 길거리에 죽냐고요.(웃음) 금년까지는 뛰고 싶습니다. 하프 코스에서 10km로 조금씩 줄여나가야죠. 이제는 좀 힘들어요.” 15년을 함께 뛰다 보니 기념일도 챙긴다. 매년 6월에 있는 클럽 창립 기념일에는 환갑을 맞이하는 회원들을 위해 ‘환갑 마라톤’을 연다. 올해는 정년퇴임을 하는 회원과 함께 양평으로 가서 뛸 예정이다. 혹시 마음속에 질주 본능이 있다면 토요일 아침 6시 일산호수공원으로 나가보시라. ※ 라이프@이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소개하고 싶은 동창회, 동호회 등이 있다면 bravo@etoday.co.kr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 2019-06-07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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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시 잊고 지낸 청춘과 건강을 함께 누리다
- 뭔가 복잡하고 제대로 풀리는 게 없는 듯한 요즘,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지치기 마련이다. 그런 세상을 살아가면서 놓치고 있는 청춘과 건강을 되찾아주기 위한 특별한 행사가 마련된다. 바로 시니어 공감 매거진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브랜드 행사 ‘브라보! 헬스콘서트’다. 올해로 어느새 4회째를 맞이하는 ‘브라보! 헬스콘서트’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사회공헌을 위해 준비한 무료 행사로서 건강 정보를 나누며 콘서트를 즐기는 축제 한마당이다. 이번 행사는 ‘건강과 청춘을 위한 Healthy Senior Life’를 주제로 오는 6월 13일 목요일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서울 마포구 마포아트센터 아트홀맥에서 열린다. 1부는 현직 의사에게 의학 정보를 듣는 시간으로 구성했다. 한설희 건국대학교병원 의료원장과 이재동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학장, 이병진 콩세알튼튼예방치과의원 원장 등 의료계 명의들을 초빙해 강의를 듣는 시간으로, 시니어의 삶과 직결되는 키워드인 치매, 치아건강 잇몸질환, 장수음식 등 3개의 세션으로 나뉘어 1시간 동안 진행된다. MC는 스포츠 중계로 유명한 김정일 SBS 아나운서가 맡아 특유의 에너지 넘치는 말솜씨를 보여줄 예정이다. 2부에는 8090시대의 추억을 공유하며 열정을 불태우게 할 청춘콘서트가 100분 동안 펼쳐진다. ‘그 아픔까지 사랑한 거야’로 데뷔하고 드라마 ‘아이싱’ 배우로 출연한 당대 미남 가수 조정현, 명곡 ‘이별 아닌 이별’로 가요계를 평정했던 로커 이범학, ‘꿈결 같은 세상’을 부르고 이선희의 명곡들 ‘나 항상 그대를’, ‘추억의 책장을 넘기면’, ‘한바탕 웃음으로’의 작곡가이자 뮤지컬 연출가인 송시현 등 ‘다시 돌아온 8090세대 아이콘’ 가수들이 무대에 오른다. 화려한 레퍼토리에 수많은 라이브 콘서트를 치러온 베테랑들답게 밴드와 함께 20여 곡의 노래를 선보이며 떼창의 진수를 보여줄 예정이다. ‘브라보! 헬스콘서트’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독자들은 물론 50+세대 모두를 환영하는 자리다. 봄이 가고 여름을 맞이하는 이 시기에 새롭게 삶을 충전시킬 수 있는 ‘브라보! 헬스콘서트’로 자신을 위한 선물을 주는 게 어떨까. 이번 행사는 종근당, 아모레퍼시픽 ‘동의본초연구 잇몸치약’, 동국제약, 유한킴벌리, 서울시 50플러스재단이 후원한다.
- 2019-05-23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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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로3가역 5번출구② 락희거리
- ‘종로’와 ‘시니어’ 하면 여전히 탑골공원을 떠올리는가? 그러나 이제는 편견을 거둘 때가 됐다. 중장년을 위한 즐길거리, 먹거리, 볼거리가 즐비한 지붕 없는 아지트, 그 다채로운 경험의 시작은 종로3가역 5번출구를 나서면서부터다. 연재 순서 ①송해길 ②락희거리 ③익선동 종로3가역 5번출구#2 락희거리 1. LP 음악과 맥주 한잔 ‘추억 더하기’ 종로17길 52 42년 차 베테랑 DJ 장민욱 씨의 농익은 멘트에 웃음 짓고, 추억 속 LP 음악의 선율에 젖어드는 공간. ‘국내 최초 중장년 맞춤형 맥줏집’이라는 타이틀답게 삼삼오오 맥주잔을 부딪치며 사연과 함께 신청곡을 내민다. 맥주 한 병과 안주가 함께 나오는 ‘1만 원 세트’는 혼술족에게도 인기. 실버영화관이나 낭만극장 영화표를 제시하면 안주를 2000원 할인해준다. 2. 소문난해장국 수표로 131 & 황태해장국 낙원동 233 두 해장국집에서는 뜨끈한 국밥 한 그릇을 단돈 2000원에 맛볼 수 있다. ‘소문난해장국’(간판은 ‘원조소문난집국밥전문’)은 송해 선생이 자주 찾는 곳으로 60년 전통의 역사를 자랑한다. 단일 메뉴인 ‘우거지얼큰탕’은 일명 ‘송해국밥’으로도 불린다고. ‘황태해장국’의 대표 메뉴는 우거지·콩나물해장국(2000원)과 황태해장국(2500원)이다. 락희거리 테마에 맞춰 ‘큰 글자 메뉴판’, ‘지팡이 거치대’ 등이 마련돼 있어 더욱 편안하게 식사를 즐길 수 있다. 3. 그냥 들러봐요 ‘스타이발관’ 종로17길 45 이발 4000원, 염색 5000원이라는 파격적인 가격이 눈에 띈다. 락희거리의 주요 테마인 ‘상냥한 가게’ 콘셉트가 적용된 매장으로 ‘어르신 우선 화장실’이 마련됐다. 안전 손잡이와 지팡이 거치대, 미끄럼 방지 타일이 깔려 낙상 위험이 덜하다. 또 때에 맞춰 약을 복용할 수 있도록 생수를 제공하는 등 배려가 깃든 공간으로, 잠시 화장실에 들르거나 목을 축이고 싶을 때 가면 좋다. 4. 시니어 전용 악기 연습실 ‘촌티서울’ 종로17길 50 코러스 다방으로 탈바꿈 예정(4월 중)인 ‘종로 문화사랑방’ 위층에 자리한 악기 교실. 시니어의 눈높이에 맞춘 프로그램과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되는 악기 교육 과정 등을 개설해 운영하고 있다. 기타, 하모니카, 아코디언, 색소폰, 우쿨렐레 등을 배울 수 있다. 5. 반주(飯酒) 애호가라면 ‘맛집동방홍’ 낙원동 233 사골육수로 맛을 낸 청국장, 순두부, 김치찌개 등을 3000원에 즐길 수 있다. 요즘처럼 날이 좋을 땐 손님들이 식당 바깥 자리에서 반주를 곁들이곤 한다. 식사와 함께 꽁치·고등어(小) 구이(3000원), 부추·김치전(6000원), 제육볶음·마파두부(1만 원 내외) 등 반주용 메뉴를 골라 소주나 막걸리 한 병을 더해도 1만~2만 원대 선이다.
- 2019-05-04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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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로3가역 5번출구① 송해길
- ‘종로’와 ‘시니어’ 하면 여전히 탑골공원을 떠올리는가? 그러나 이제는 편견을 거둘 때가 됐다. 중장년을 위한 즐길거리, 먹거리, 볼거리가 즐비한 지붕 없는 아지트, 그 다채로운 경험의 시작은 종로3가역 5번출구를 나서면서부터다. 종로3가역 5번출구 #1 송해길 1. 송해길의 마스코트 ‘송해 동상’ 종로3가역 5번출구 2016년 명예도로로 지정된 ‘송해길’(수표로)은 종로2가 육의전빌딩부터 낙원상가에 이르는 240m 구간이다. 50년 넘게 종로구 낙원동 일대를 제2고향처럼 여기며 활동했던 방송인 송해를 기리기 위해 이름 붙인 거리다. 그 명성답게 곳곳에 송해 캐리커처가 붙은 가게들이 눈에 띈다. 종로3가역 5번출구로 나오면 거리의 상징인 송해 동상과 팻말을 바로 찾을 수 있다. 2. 젊은 시절 속으로 ‘실버영화관 추억을 파는 극장’ 삼일대로 428 한국 영화 중흥기를 대표하는 개봉관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단 하나의 극장이 있다. 바로 옛 허리우드극장인 ‘추억을 파는 극장’이다. 2009년 실버영화관으로 탈바꿈하면서 종로거리를 추억하는 시니어의 발길을 돌려놓았다. 55세 이상이면 2000원에 영화를 볼 수 있다. 타 상영관에 비해 자막이 크고 곳곳에 손잡이를 설치해 거동이 불편한 시니어를 배려했다. 미세먼지 때문에 바깥 활동을 꺼리는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5월부터는 ‘종로는 맑음존’을 설치해 운영할 계획이다. 추억을 파는 극장 바로 옆에 마주해 있는 낭만극장은 영화 상영뿐 아니라 유리상자, 전영록이 출연했으며 김세레나, 송해 등의 공연도 이뤄진다. 3. 송해길 대표 맛집 ‘종로진낙지’ 수표로 122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먹방요정 이영자가 정우성과 함께 방문해 화제가 됐는데 원래도 송해길을 대표하는 맛집이다. 낙지볶음과 산낙지철판볶음 등이 소문날 만큼 맛은 보장됐으니 송해길 방문 시 잊지 말고 드셔보시길. 4. 노래 찐하게 부르고 싶다면 ‘송해길 가수 김미나 라이브 카페’ 수표로 125 성인가요 ‘만날사람’을 부른 가수 김미나가 운영하는 라이브 카페. 노래 좀 한다는 사람들에게 입소문 난 곳이다. 술 한잔 마시고 스트레스도 풀고, 노래 연습하는 장소로 좋다. 노래동호회나 출판기념회, 시낭송회 등 모임 공간으로도 애용되고 있다. 5. 따끈한 차 한잔 마셔요 ‘라이브 카페 스타하우스’ 수표로 120 노래를 부르는 라이브 카페이지만 평일 낮시간대에는 커피, 생강차, 유자차 등을 마시러 오는 손님도 많다. 코미디언이자 전문 MC인 김종수 사장이 평생 군대, 경찰서, 교도소 등지로 위문공연 다니며 받은 각종 상패가 벽면에 가득하다. 위문공연으로 사장님이 자리를 비우면 미모의 아내 구현숙 씨가 꿋꿋하게 자리를 지킨다. 6. 퇴근길 추억의 음악을 청하다 ‘청춘1번지’ 수표로 108 장민욱, 차영민, 강해룡 3명의 베테랑 DJ가 돌아가며 음악 선곡을 한다. ‘추억 더하기’ 메인 DJ 장민욱 씨도 오후 6시 이후엔 ‘청춘1번지’로 이동한다. 소장하고 있는 LP와 CD만 5000여 장. 원하는 음악을 DJ에게 신청해 들을 수 있다. 40~50대 이상 직장인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붐비는 시간은 오후 7시 이후다. 7. 색소폰 입문은 ‘효은 색소폰 클럽’ 수표로 107-1 송해길이 시작되는 육의전빌딩 뒤쪽 건물 계단을 따라 쭉 올라가면 ‘효은 색소폰 클럽 엔터테인먼트’라고 쓰인 푯말이 보인다. 말 그대로 색소폰을 배우는 곳. 색소폰 기초부터 차근차근 익힐 수 있다. 송해길에 사람이 와글대는 시간이 되면 남효석 대표가 종로3가역 5번출구로 나와 모임 홍보 차 직접 색소폰 연주를 들려준다. 밤거리의 낭만 ‘포장마차’ 종로3가 5번출구 일대 종로3가 5번출구의 밤 분위기는 ‘포장마차’가 책임진다. 서울에서 잘 알려진 포차거리 중 하나로 중장년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에게도 인기다. 어스름해지기 시작하면 포차 천막이 하나둘씩 올라가고, 퇴근시간 이후에는 술자리가 본격적으로 활기를 띤다. 쭉 늘어선 포장마차 중 어느 곳을 가더라도 곰장어, 오도독뼈, 닭발 등 20가지가 넘는 다양한 안주를 즐길 수 있으니, 오래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송해길에서 송해 선생을 만나다 “안녕하세요, 송해입니다! 나들이하기 참 좋은 계절이죠. ‘송해길’ 오시면 2000원으로 든든하게 우거지국밥 한 그릇 드셔보세요. 개그우먼 이영자 씨가 단골인 낙지집도 아주 맛있답니다. 락희거리도 한번 둘러보시고요. 최근엔 익선동 거리에도 젊은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때론 사람 구경도 취미로 삼으면 좋지요. 천태만상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는 재미가 있거든요. 종로에 자주 오셔서 맛난 것도 드시고 사람들과 어울리며 좋은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 2019-04-30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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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술교육원 통해 의류수선점 창업한 박정단 씨
- “그렇게 하면 안 되지!” 남편의 호통에 새댁은 눈물이 맺혔다. 결혼한 뒤 신랑을 돕겠다며 세탁소로 나섰는데, 그녀의 실수에 용서가 없었다. 서운함이 밀려왔다. 결혼생활 26년이 흐른 지금, 그녀는 “그 시절의 고생이 자긍심의 밑거름이 됐다”고 말하면서 “이젠 내가 남편에게 잔소리할 정도가 됐다”며 웃는다. 최근 양장기능사, 양복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한 후 의류수선집을 창업한 박정단(朴廷丹·50) 씨 이야기다. 서울시 강동구 고덕동에 위치한 아파트 단지 내 3평 남짓한 가게.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재봉틀과 ‘단이네패션옷수선’이라고 적혀 있는 간판이 옷 수선집임을 알려준다. 박 씨가 이 가게를 연 지는 1년 6개월 정도 됐다. 그녀는 “이제 자리를 잡아 멀리 하남에서도 고객이 찾아올 정도”라고 말한다. 과감히 도전한 창업은 연착륙에 성공했지만, 그 과정은 만만치 않았다. 박 씨가 처음 재봉틀을 잡은 것은 신혼생활을 시작하던 무렵이다. 신랑 혼자 세탁소를 운영하는 것이 힘들어 보여 돕겠다고 나섰다. 봉제일을 하던 친언니에게 어깨너머로 재봉질을 배운 적이 있어 조금 고생하면 적응할 수 있겠다 싶었다. 벌써 26년 전 일이다. 생계 위해 시작한 일, 26년 차 베테랑 “처음엔 고생이 심했죠. 수선 기술을 남편에게 배웠는데, 손님 옷을 다루는 일에 대해 매우 엄격했어요. 잔소리를 들을 때마다 서럽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했지만, 덕분에 한 번도 손님 옷 망가뜨린 적 없이 지금까지 이 일을 잘 해왔어요.” 그러다 남편이 신학 공부에 뜻을 품으면서 박 씨가 의류 수선집을 차려 독립했다. 물론 운영이 쉽지 않았다. 가게를 포기하고 식당에 취업해 일하다 쓰러진 적도 있을 정도. 결국, 의류 수선으로 돌아왔다. 남다른 손재주 덕분에 가게는 점차 손님들로부터 사랑을 받았고, 두 아이와 남편 뒷바라지까지 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박 씨는 일을 하면 할수록 궁금한 게 많아졌다. 바로 봉제와 의류 제작의 기본 이론에 관한 것들이었다. 주변에선 26년 차 베테랑이라고 치켜세웠지만, 자신의 지식이 금세 바닥을 드러내는 것 같아 늘 부끄러운 마음이었다. “옷 수선과 제작은 전혀 다른 작업이에요. 저도 원단을 사다가 아이들 옷을 만들어 입혀보기도 했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 꽤 있었어요. 옷을 만들고 수선할 때도 기초가 중요한데 저는 남편에게 주먹구구식으로 배웠으니까요. 기본이 부족하다 보니 옷을 과감하게 절개하거나 디자인을 바꿀 때 주저하게 되더라고요. 또 오랫동안 터득해온 지식들이 제대로 된 것인지도 검증받고 싶었고요.” 그러다 알게 된 곳이 서울시 산하 기관 동부기술교육원. 의상 제작 분야에서 강점이 있는 곳이라는 지인의 소개에 공부에 대한 열망이 더 커졌다. 하지만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하루 종일 매여 있어야 하는 가게 때문이었다. “며칠 고민하다가 결심을 했죠. 가게를 정리하기로요. 교육원 다니는 김에 제대로 배워보고 싶었어요. 그동안의 궁금증을 다 풀어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일을 하면서는 공부를 못할 것 같았어요. 말 그대로 올인하기로 한 거죠.” “제대로 배우자” 하고 가게 정리해 수십 년간 현장에서 배우고 익힌 기술은 몸이 기억하도록 많은 습관을 남긴다. 당연히 좋은 습관도 있지만 나쁜 습관도 있기 마련. 오랜 기간 수선일을 해왔다고 해서 배우는 과정이 순조롭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무척 조심스러웠어요. 또 20년 넘게 재봉틀을 잡고 살아온 사람이 더 배우겠다고 왔으니 가르치는 분이 부담스럽지 않을까 걱정도 됐죠. 하나라도 더 배우고픈 마음에 말과 행동을 조심했어요.” 박 씨는 배우는 과정이 기쁨 그 자체였다고 표현했다. 20여 년간 쌓였던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고. 옷본(패턴)이나 봉제 원리에 대해서도 점점 눈이 열렸다. 동부기술교육원에서 공부를 한 뒤 단순한 수선이 아닌 다양하면서도 과감한 시도를 할 수 있게 됐다고 박 씨는 말했다. “바지를 수선할 때 허리 1인치 줄인다고 엉덩이까지 그만큼 줄이면 안 돼요. 손님 체형을 고려해야 하는데, 특히 입던 옷을 수선할 경우엔 신체의 변화도 파악해야 합니다. 예전엔 옷을 망가뜨릴까봐 하지 못했던 작업도 원리를 알고 난 뒤부터는 과감하게 해요. 다행히 만족하시는 고객이 많아요. 몸에 딱 맞게 수선하는 솜씨가 맘에 드는지 아예 기성복을 사와 맞춤옷처럼 만들어 달라 하시는 분들이 늘었어요.” 일감이 많아지면 가끔 남편에게 도움을 청하는데, 이제는 그녀가 남편 솜씨에 대해 지적을 한다. 입장이 역전된 것이다. 박 씨는 “신랑에게 혼나며 배웠던 시절을 생각하면 고소한 마음도 든다”며 웃었다. 여성들에게 권하고 싶은 직업 오래된 옷을 최신 스타일로 바꾸려는 손님이 늘면서 유행에도 민감해졌다. 사람들이 선호하는 스타일을 알기 위해 그녀가 주로 살펴보는 교재는 바로 드라마다. 예전에는 보는 둥 마는 둥 했지만 일에 재미를 느끼면서 젊은 연예인들의 의상 핏이나 스타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20년 넘도록 같은 일을 해오고 있지만, 재교육을 통해 제2인생을 살게 된 셈이다. 이러한 재미는 자연스레 수익으로도 이어졌다. 박 씨는 “여자 수입치고는 괜찮은 편”이라고 말하면서 중장년 퇴직자나 경력단절 여성들에게 의류 수선을 권하고 싶다고 했다. 물론 동네마다 수선집이 한두 곳 있어 경쟁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6개월 이상 배우고 노력하다 보면 자리 잡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생각보다 이 분야에 대해 교육을 하는 곳이 많지 않아요. 배우고 싶어도 쉽지 않죠. 요즘은 손님들의 요구가 정말 다양합니다. 그래서 제대로 배우고 일을 시작하는 게 좋습니다. 특히 여성들 옷은 값비싼 게 많아 손을 대려면 겁부터 나니까요. 그래도 한 번 만족하면 단골이 되고, 단골이 늘면 바빠지는 것이 체감이 돼요. 패션에 관심이 많거나 손재주 있는 분에게 추천하고 싶은 직업이에요.”
- 2019-04-30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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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격증 두드림① 인터뷰-퇴직 후 강사로 인생 2막 연 정노희 씨
- 은퇴 후 전문 지도사나 강사 활동을 희망하는 시니어가 많다. 회사에 취직해 매일 출퇴근하는 것보다 시간 대비 수익이 좋은 편이고, 누군가를 가르치며 얻는 보람과 즐거움도 크기 때문이다. 이렇듯 매력적인 요소가 많지만, 그에 상응하는 전문성과 독창적인 강의 커리큘럼이 뒷받침돼야 한다. 자신의 능력과 적성을 바탕으로 자격증 취득 후 강사로서 제2인생을 맞이하고 있는 정노희(61) 씨를 만나봤다. 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했던 정노희 씨. 퇴직 후 남편의 권유로 국가기술 자격인 직업상담사(2급) 자격증을 딴 이후 올해 1월 노인두뇌훈련지도사(1급)까지, 모두 12개의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야말로 자격증 고수인 그녀가 가장 오래 걸려 딴 자격증은 처음 도전했던 직업상담사였다고. 국가기술 자격증인 만큼 학습량도 많고 실습 경력을 쌓아야 하기 때문일 터다. 이후 직업상담사(2급), 진로상담사(2급) 등도 섭렵했지만, 손재주가 좋았던 정 씨는 창작예술 쪽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와 관련한 자격증을 알아보던 중 다양한 종목을 두루 인정받을 수 있는 ‘토탈공예지도사’에 도전하기로 했다.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덕분에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었다. 기세를 몰아 창의활동지도사(2급), 아동요리지도사(1급), 생태놀이지도사(2급), 노인여가운동지도사(2급) 등을 2년이 채 되지 않아 모두 땄다. “제가 하는 강의는 실습 위주의 창의 활동을 통해 교감하는 방식이에요. 이론을 가르치거나 전수하는 분야보다는 그게 전공도 발휘하고 적성에 맞으리라 여겼죠. 자격증 많아 봐야 소용없다고 하지만, 자기가 잘할 수 있는 분야를 정하고 그 범위 내에서 곁가지를 뻗어 나간다면 도움이 된다고 봐요. 실제 커리큘럼을 짤 때도 복합적으로 작용하고요. 누군가의 추천이나 유행에 휩쓸리기보다는 자기 적성과 강점을 찾고, 거기에 알맞은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이 좋겠죠.” 강의를 위한 전문성과 자신감 채워야 민간 자격증의 장점은 단기간에 손쉽게 취득이 가능하다는 것. 그러나 다른 이에게 올바른 가르침을 줘야 하는 교육·지도사 분야의 경우 전문성은 필수인데, 속성으로 자격증만 취득해 누군가를 강의한다는 건 역부족이다. 때문에 어떤 자격증을 준비하든 취득만을 목적으로 할 게 아니라 시간이 걸리더라도 전문성을 갖추는 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물론 정 씨처럼 관련 분야의 전공을 이수했거나, 직장 생활과 사회 경험을 통해 전문성을 갖춘 경우라면 좀 더 유리하다. “온라인에서도 쉽게 취득할 수 있는 자격증이 많지만 깊게 배우기는 어려운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빈약한 실력으로 누군가를 가르치기 어렵다는 건 아마 스스로가 잘 알 거예요. 막상 강의에 나서더라도 자신감이 부족할 수 있고요. 시간을 투자해 역량을 기르고, 공부하고 실습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문제에 부딪혀봐야 다른 이에게도 제대로 된 가르침을 줄 수 있다고 봅니다.” 아울러 전문 지식을 갖추고 자격증을 땄더라도 강의 실력이 없다면 실전에서 난항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정 씨는 조언한다. “사람 앞에 나서는 걸 두려워한다면 아무리 자격증이 많아도 활동하기 어렵습니다. 강사 양성 과정이나 실무 프로그램 등을 이수하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저 역시 강사로서 역량을 강화하려고 6개월 동안 마포구 고용복지지원센터에서 현장 실무 과정에 참여했어요. 또, 서울시어르신취업지원센터 내일행복학교에서 강사양성 심화교육도 수료했고요. 그 외에도 재능기부나 봉사활동을 하면서 부지런히 실습 경험을 쌓다 보면 자신감이 생길 거예요. 자신을 프로로 인정할 수 있을 때, 다른 사람 앞에서도 프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정 씨는 강사 관련 교육을 수료한 이들과 의기투합해 선배시민문화를 위한 늘샘아카데미 협동조합을 추진 중이다. 이렇듯 강사의 꿈을 안고 만난 인연은 서로 정보를 교류하며 업계 동향을 파악하고 유익한 활동도 도모하는 데 도움이 된다. 돈보다는 경험과 보람을 쌓고 싶어 강사로서 인생2막 포문을 연 정 씨는 서울노인복지센터를 비롯한 데이케어센터, 구청 등에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활발히 활동 중이다. 강사로 이름을 알린 지는 3년 남짓이라 아직 수익이 높은 편은 아니라고 한다. “마음에 드는 프로그램이 있어 강사로 지원했다가 떨어진 적이 있어요. 나중에 강사진을 보니 각 분야 베테랑들이더군요. 인정할 수밖에 없었죠. 그 후 저는 더 많은 실력을 쌓기 위해 노력했고 지금도 도전하고 있습니다. 학생 대상 교육기관에서는 시니어 강사 채용이 드문 편이에요. 사실 시니어 강사 입장에서도 젊은 층보다는 중장년층 동년배를 교육하는 걸 선호하고요.(웃음) 제가 60대인데도 노인복지센터 같은 데 가면 젊은 사람 왔다 하시고 딸처럼 대해주시니 더 마음이 편안합니다. 그렇게 차근차근 경험을 쌓다 보면 수익은 자연스레 따라오게 되겠죠. 물론 돈보다는 배움을 나누는 보람에 더 집중할 계획입니다.”
- 2019-03-20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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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득 떠날 수 있는 곳, 청주
- 때로 심란한 일상일 때가 있다. 그럴 때 조용히 혼자 떠나거나 마음이 잘 맞는 친구와 가볍게 길을 나선다면 기분 전환이 될 것이다. 소소한 당일 여행으로 알맞은 도시 청주가 있다. 넓은 도시가 아니어서 발길 닿는 대로 하루를 여행하기 딱 좋은 곳이다. 강남고속터미널을 출발해 한 시간 반이면 도착한다. 핫플레이스 성안길 청주 도심에 성안길이 있다. 청주의 명동이라 불리는 곳이다. 입구부터 시네마 거리다. 영사기 조형물과 영화 ‘박하사탕’의 철길, ‘국가대표’, ‘타이타닉’, ‘007’의 제임스 본드 등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세워진 조형물들이 있다. 배우들의 핸드프린팅과 사진을 촬영할 수 있는 포토존과 레드카펫도 마련돼 있어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또한 ‘짝패’를 비롯해 ‘베테랑’, ‘닥터스’ 등을 촬영한 곳이기도 하다. 주변에는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세 군데나 있다. 그 옆 골목으로 들어가면 삼겹살 거리도 있다. 전국 유일의 삼겹살 특화거리인데 3월 3일 삼겹살 데이를 전후해 삼겹살 축제도 연다. 중앙공원 성안길 중간 지점쯤에서 골목으로 들어가면 중앙공원이 있다. 900년 수령의 은행나무와 임진왜란 당시의 전적비, 유형문화재 망선루, 척화비, 독립기념비 등이 가득하다. 역사적으로 의미 깊은 장소다. 시민들의 쉼터로 오랜 세월 사랑받아온 공원으로 청주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한꺼번에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여름의 신록이나 가을의 단풍철엔 계절의 색감을 충분히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도심의 국보와 맛집 공원 골목에는 50여 년 전통의 가락국수집 공원당이 있다. 6000원짜리 가락국수를 비롯해 판모밀, 돈가스가 유명하다. 청주의 명물인 쫄쫄호떡 하나 사 먹으며 거리를 걷는 재미도 있다. 골목을 벗어나면 도심에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이 있으니 빠뜨릴 수 없다. 고려시대 때 용두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이 절터에서 발견된 것이 ‘용두사지 철당간’이다. 국보 41호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전국에 철로 만들어진 당간은 공주 갑사의 철당간, 칠장사의 철당간, 그리고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 세 군데뿐이다. 100년의 역사를 지닌 전국 최대의 육거리 시장 성안길을 따라 끝까지 쭉 가다 보면 우리나라 전통시장 중 규모가 가장 크고 역사가 깊은 육거리 시장이 있다.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넘친다. 지나가면서 한 가지씩 사 먹기도 하고 신기한 물건을 보고 물어보면 구수한 말투로 친절하게 알려준다. 품질도 좋고 인심도 후하다. 사람 냄새 물씬 나는 시장이다. 옛 연초제조창의 화려한 변신, 청주 문화산업단지 아주 오래전 청주에는 연초제조창이 있었다. 청주와 인근에 사는 사람들의 생계를 책임져온, 청주를 대표하는 산업체였다. 1946년 11월 1일 건립된 옛 청주 연초제조창은 3000여 명이 넘는 근로자가 근무하던 곳이었다. 이곳이 창고의 원형을 유지한 채 새로운 문화예술 공간으로 재탄생되어 많은 이의 관심 속에 시민들과 소통하고 있다. 입구부터 켜켜이 세월의 연륜이 느껴진다. 아련하다. 근대문화유산으로 보존가치가 높은 건축물이다. 담뱃잎을 보관하던 연초제조창이 지금은 문화와 예술이 살아 숨 쉬는 동부창고로 변신한 것이다. 매해, 매월 다양한 행사들이 펼쳐지는데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그 주제들이 새롭고 따뜻하다. 현재 37동, 38동, 6동, 8동, 36동, 35동, 34동으로 되어 있다.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고 즐길 수 있는 힐링의 공간이다. 청주 국립현대미술관 지난해 말 개관한 청주 국립현대미술관은 과천, 덕수궁, 서울에 이은 네 번째 분관이다. 서울과 수도권을 제외한 첫 지방 분관이다. 개방 수장고와 기획전시실 등을 갖추고 미술품들이 전시, 보관되어 있다. 5층 기획전시실에서는 6월 16일까지 개관 특별전인 '별 헤는 날: 나와 당신의 이야기'가 열리고 있다. 수암골 수암골 마을은 10년 전쯤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의 촬영지로 이름을 알렸다. '영광의 재인', ‘카인과 아벨' 등 유명 드라마와 영화 촬영이 이어지며 명소가 되었다. 원래 이곳은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들이 정착하면서 만들어진 달동네다. 또한 과거 청주 제일의 인쇄골목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곳인데, 지역 예술가들이 ‘추억의 골목길 여행’이라는 주제로 서민들의 생활을 담은 벽화를 그려 애환과 과거의 향수를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동네로 재탄생됐다. 높은 지대에 위치한 팔봉빵집 주변의 찻집이나 카페에서 다리를 쉬며 청주를 조망하면서 차 한 잔 할 수 있는 장소다. 그리운 도시, 청주 발길 닿는 대로 아늑한 청주 도심을 걷다 보면 저절로 스트레스가 날아간다. 택시기사의 순박한 이야기, 육거리 시장통 아주머니의 정감 어린 인심, 새롭게 만난 문화 예술의 면면들, 추억을 소환하는 골목길의 벽화, 소박한 맛집의 편안함, 조용한 찻집에 푹 파묻혀 일상을 이야기하고 세월을 이야기하던 시간들이 가슴을 훈훈하게 할 것이다. 청주는 마음에 여유를 가져다주는 도시다.
- 2019-02-19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