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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견뎌온 시간의 깊이를 고스란히, 평화의 땅 철원
- 철원 가는 길은 어렵지 않다. 멀지도 않다. 알고 보면 생각난 김에 떠나볼 수 있는 곳이다. 분단의 현실을 보여주는 DMZ가 인접해 있고, 겸재 정선의 화폭에 담긴 폭포가 지금도 쏟아져 내린다. 아득한 옛날 후고구려의 궁예 이야기와 임꺽정의 무대였던 지역임을 떠올린다면 조금은 먼 곳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수도권 기준으로 두 시간 정도 거리다. 다가갈수록 북녘을 눈앞에 둔 철원평야는 황금 들녘이다. 절벽에 매달린 한탄강 협곡의 주상절리길은 스릴 넘치게 아찔하다. 전쟁을 대비하고 군부대 포사격 훈련장이었던 땅엔 백만 송이가 넘는 평화의 꽃을 피워 올렸다. 이 땅의 최북단 철원의 풍성한 가을이 마냥 아름답다. 마음을 두드리는 평원의 가을 가을을 마음에 담기에 이 땅의 드넓은 평야만 한 곳이 있을까. 누렇게 물든 대자연과 넓은 평야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철원 소이산은 다른 지역보다 가을이 먼저 시작된다. 새벽부터 분주히 달려서 도착한 소이산 주변으로 운무가 가득하다. 소이산은 해발 362m의 야트막한 산이다. 밑에서 올려다보면 금방 오를 것 같은 높이지만 제법 가파르다. 20여 분 숨차게 오른 소이산 전망대는 본래 군부대 주둔지였던 곳이다. 지금은 오르막 길목의 평화마루공원에서 공원과 지질 명소를 안내한다. 오래전의 미군 막사와 초소는 녹슨 채 허름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근처의 소이산 생태숲 녹색길인 봉수대오름길로 이어지는 코스도 보인다. 전망대에 오르자마자 펼쳐지는 경이로운 광경에 비로소 가을을 흠뻑 맞는다. 황금빛 너른 들녘의 놀라운 풍광이 전망대를 중심으로 둘러싸고 있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드넓은 산야는 거대하다. 무한한 대지와 하늘, 철원 북쪽의 평강고원까지 두루 조망할 수 있도록 막힘없이 탁 트였다. 철원평야에 오름처럼 우뚝 솟은 소이산은 고려시대부터 외적의 출현을 알리는 봉수대가 위치했던 곳이다. 철원의 역사와 함께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소이산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철원평야 너머엔 비무장지대가 있다. 맑은 날에는 북한 주민들의 움직임도 보인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최대 격전지였던 DMZ 건너편 철의 삼각지대를 미묘한 기분으로 바라본다. 분단이란 현실이 만들어낸 알 수 없는 감정이 생겨나는 지점이다. 최북단 철원은 가을이 일찍 찾아와 추수도 다른 지역보다 빠르다. 9월 초부터 시작해 10월이 되면 조생종 벼들은 일찌감치 수확을 끝낸다. 이미 추수를 한 논과 벼가 익은 상태에 따라 논마다 채도 대비가 다양하다. 끝없이 넓은 패턴의 선과 면의 들판은 한 편의 작품 같다. 철원평야에서 생산되는 오대쌀은 우리에게 유명하다. 무엇보다 용암 대지와 현무암의 풍화로 비옥한 토양을 자랑한다. 청정환경에서 생산되는 쌀의 질과 밥맛을 결정하는 천혜의 기후 조건 또한 으뜸이다. 한국전쟁 때 치열한 전투에서 패하고 철원평야를 빼앗겨 김일성이 슬퍼했다는 게 괜한 얘기가 아닌 듯하다. 철원오대쌀은 지역 특산물로 국내 최초로 브랜드화한 이름이다. 소이산을 내려오는 길 양쪽으로 아침 이슬을 매달고 있는 가을 들꽃들이 예쁘다. 깊은 산속에서 피어나 유난히 색감이 선명하고 맑다. 쾌청한 숲길에서 절로 힐링된다. 소이산을 내려오니 막 운행이 시작된 모노레일이 지나가고 있다. 산길을 오르내리는 것이 편치 않은 교통 약자라면 소이산 모노레일을 이용하면 된다. 철원역사문화공원 철원역에서 모노레일을 탑승하면 왕복 1.8km 거리다. 주변에 노동당사가 있어 가볼 만하다. 한국전쟁 전까지 북한의 노동당사였으나 이후 전쟁의 크나큰 상흔을 그대로 보존한 채 근대문화유산으로 보호받고 있다. 현재는 보수공사 중이다. 평화의 꽃을 피워 올리다 아침 햇살에 빛나는 것이 이슬뿐일까. 소이산 전망대에서 2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철원 고석정 꽃밭에선 가을 정취가 물씬 풍긴다. 강원도 북단에 이토록 넓은 꽃밭이 조성되어 있다니, 꽃 따라 봄가을로 여행 올 만하다. 입구에서부터 짙은 빨강과 다홍, 노랑으로 화려한 융단처럼 펼쳐진다. 꽃 이름이 촛불맨드라미다. 바로 옆으로 고향 마을에서 본 듯한 백일홍이 제각각의 색깔로 꽃밭 가득하다.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서 마음껏 즐기는 꽃마당이다. 꽃밭 넓이가 자그마치 23만 1000㎡라고 한다. 축구장 서른 개가 넘는 규모다. 산책하듯 천천히 걸어도 한참 걸린다. 맨드라미를 시작으로 백일홍, 천일홍, 메밀꽃, 해바라기, 장미, 코스모스, 가우라, 버베나, 핑크뮬리, 댑싸리, 억새 등 종류별로 가을꽃이 활짝 피어 눈부시다. 봄 시즌에는 노란 유채꽃이나 수레국화, 안개초 등이 피어난다. 꽃길을 걷다 보면 때론 연못이 나타나고 넓은 잔디광장이 나온다. 어린 왕자 조형물이 있는 전망대와 풍차가 볼거리를 더하는데, 일몰 풍경과 꽃의 조화가 환상적이다. 편안하게 꽃구경을 하고 싶다면 꽃밭을 한 바퀴 도는 깡통열차를 이용하면 된다. 고석정 꽃밭은 애초에 군부대 포병 훈련장이었다. 과거 Y진지라 불리던 곳이 철원 지역의 새로운 관광 트렌드로 변신했다. 포성이 울리던 허허벌판에 평화의 꽃을 피워 올렸다. 철원이 안보 관광지로 알려져 있지만 무한히 넓은 꽃밭에서 계절별로 꽃의 물결을 볼 수 있다. 수직 벼랑길을 한 걸음 한 걸음, 주상절리 철원의 주상절리는 한탄강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에 위치한다. 화산이 폭발하고 분출한 마그마가 서서히 식으면서 현무암이 되었고, 강의 침식작용으로 만들어진 협곡이다. 자연이 만들어낸 신비로운 바위들이 수직의 벼랑을 이룬 비경을 그동안은 배를 타고 돌아볼 수 있었다. 지금은 아찔한 절벽에 선반처럼 매단 3.6km의 잔도(棧道)가 마련되었다. 일명 한탄강 하늘길로 불리는 잔도 덕분에 빼어난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까이에서 생생히 만날 수 있다. 트레킹의 출발점은 두 군데다. 순담 게이트와 드르니마을 게이트가 있는데 대부분 순담매표소에서 출발한다. 참고로 드르니는 애초에 양지바른 마을에서 유래되었는데, 궁예가 고려 왕건으로부터 피신할 때 ‘들른’ 마을이라는 데서 나온 말이라고 전한다. 철원 여행을 하다 보면 유난히 궁예와 연관된 명칭을 자주 본다. ‘말등소’라는 소는 궁예가 왕건에게 쫓길 때 빠졌던 소(沼)로, 말이 너무 힘들어 똥을 쌌다 하여 말똥소라고도 한다. 트레킹을 마치고 시작점으로 다시 갈 경우 셔틀버스를 이용할 수 있는데 현재는 주말에만 운행한다. 잔도는 걷기에 따라 다르지만 두 시간 정도 소요된다. 우리나라에 잔도가 몇 군데 있지만 철원 한탄강 주상절리길 잔도는 그 절정이다. 한탄강 협곡 절벽 20~30m 높이 벼랑길에 매달린 잔도를 걸으면서 깎아지른 수직 절벽의 위용에 놀라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허공에 떠 있는 듯한 반원형 전망대는 아찔함의 최고점이다. 틈틈이 쉼터가 나타나니 잠깐씩 쉬면서 절경에 잠겨봐도 좋다. 쪽빛소쉼터, 맷돌랑쉼터, 돌단풍쉼터, 드르니쉼터 등 이름도 예쁘다. 자주 나타나는 13개의 출렁다리마다 지질 이야기가 담겨 있다. 생김새와 위치 등에 따라 돌개구멍교, 한여울교, 선돌교, 수평절리교, 단층교 등의 이름이 붙여졌다. 잔도 위를 걷다 보면 신나고 짜릿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간간이 허공을 걷듯 공포감이 드는 구간도 지나야 하고, 가파른 계단을 몇 번씩 만나게 된다. 나중에는 기진맥진할 수도 있으니 적당한 체력 조절이 필요하다. 감동과 스릴, 억겁이 빚어낸 경이로움을 경험할 수 있는 철원 주상절리길이다.
- 2023-11-10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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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드뉴스] 다시 돌아보는 중년의 의미
-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청춘스타로 인기를 끌었는데, 정작 자신은 “시기를 잘 타고났다”면서 겸손하게 말한다. “과거 젊은 시절의 인기를 좋게 말해주는 분들도 많지만, 사실 그때 저는 연기에 대해 하나도 몰랐어요. 그래서 당시가 전성기였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현재 40대 중반의 그는 배우로서 과도기에 있다고 본다. 지금을 잘 보내야 노년까지 연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연기 변신을 꾀하고 싶다. “새로운 연기로 스스로를 테스트해 봐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해본 적 없는 제대로 된 악역 연기를 해보고 싶어요.” 최정윤은 책임져야 하는 가족, 딸 지우가 있어 더욱 열심히 일하려고 한다. 그에게는 배우 박진희, 피아노 선생님 등 ‘또 다른 가족’도 존재한다. “가족 이상으로 의지할 수 있는 보물 같은 사람들이 옆에 있어줘서 감사해요. 가족이 꼭 혈연으로만 이뤄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람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어떤 일에도 스트레스받지 않는 성격을 지닌 최정윤. 하루하루 충실히 살아가는 그의 앞날이 기대된다. To. 브라보 독자 “지나간 시간은 흘려보내고,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죠. 지금, 이 순간을 즐기면서 사세요!”
- 2023-11-03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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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정윤, “중년이란 과도기 넘어, 악역 도전하고파”
-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활발한 활동을 펼친 최정윤(46). 청순한 미모와 출중한 연기력으로 인기를 끌었다. 그는 “지금 생각해보면 과거의 나는 예뻤던 것 같다. 외모를 말하는 게 아니라 젊음이 예뻤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당시가 전성기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때의 인기를 좋게 말해주는 분들도 많지만, 정작 나는 연기가 뭔지 하나도 몰랐다. 내가 인정할 수 있는, 나만의 전성기는 아직 보지 못했다”는 최정윤의 행보가 주목된다. SBS 시트콤 ‘똑바로 살아라’, MBC 드라마 ‘옥탑방 고양이’ 등의 캐릭터 때문인지 최정윤은 새침데기 이미지가 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세상 털털한 사람이다. 과거 뜨거운 관심을 받은 것에 대해 “시기를 잘 타고났다”라면서 “일찍 데뷔해서 천만다행이다. 요즘 같은 시기였다면, 어디 가서 배우라고 명함도 못 내밀었을 것 같다”고 말할 정도다. 배우로 데뷔한 것도 우연한 계기였다. 고등학생 시절 친구들과 재미 삼아 찍은 프로필 사진 덕에 공익 광고에 출연하게 된 그는 당시로서 큰돈인 50만 원을 벌었다. 재밌는 경험이었지만 배우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광고와 사진을 본 소속사 관계자로부터 제의를 받아 배우의 삶을 살게 됐다. “저도 모르게 배우의 길로 가고 있더라고요. 그래서인지 신인 시절 저는 겁이 좀 없었어요. 연기 욕심은커녕 연기가 뭔지도 몰랐으니까 카메라 앞에서도 무서운 게 없었던 거죠.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래서 지금까지 배우를 할 수 있었다는 생각도 들어요. 처음부터 너무 연기 욕심을 부리고, 배우로서의 인정이나 성공이 간절했다면 일을 즐기면서 하지 못했을 것 같거든요. 저는 모든 촬영 현장이 늘 재밌었고, 힘들어서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어요. 큰 욕심 없이 살았던 것이 제가 이 세계에서 오래 버틸 수 있었던 이유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청춘스타에서 ‘아침드라마 퀸’으로 데뷔 작품은 1996년 SBS 드라마 ‘아름다운 그녀’로 기록된다. 27년 차 배우인 최정윤은 대표작을 무엇이라고 생각할까. 잠시 고민에 빠졌던 그는 이내 “대표작은 아니고 사람들이 많이 얘기해주시는 작품”이라면서 MBC 드라마 ‘태릉선수촌’(2005), 영화 ‘라디오스타’(2006), SBS 드라마 ‘청담동 스캔들’(2014~2015)을 꼽았다. 최정윤은 “대중들이 ‘라디오스타’는 PD 역할로 잘 기억해준다. ‘청담동 스캔들’은 인지도가 높아진 작품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태릉선수촌’에 대해서는 연기의 매력을 깨닫게 해준 작품이라고 표현했다. ‘태릉선수촌’은 엘리트 체육인들의 운동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다룬 8부작 드라마로, 최정윤은 양궁 선수 역을 소화했다. “연기를 하면서 처음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을 가진 작품이에요. 그 전까지는 쫓기듯이 연기를 했다면, 그때는 본연의 나로서 진심을 다해 드라마를 찍었죠. 감독님부터 배우들, 현장 분위기까지 모든 것이 좋았어요. 만약 당일 예정된 분량대로 촬영이 진행되지 않으면, ‘술이나 한잔 하자’라면서 서로 위로하고 같이 고민하고 그랬죠. 배우들끼리 워낙 끈끈해서 이윤정 감독님의 차기작 ‘커피 프린스 1호점’ 촬영 때, 다 같이 현장에 놀러 가기도 했어요.” 최정윤은 ‘청담동 스캔들’에 이어 2021년 ‘아모르 파티-사랑하라, 지금’(이하 ‘아모르 파티’)에 출연하면서 ‘아침드라마 퀸’이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그러나 이제 그 수식어를 이어갈 수 없는 상황이다. ‘아모르 파티’를 끝으로 방송 3사 KBS·SBS·MBC의 아침드라마가 폐지됐기 때문. 최정윤은 대한민국의 마지막 아침드라마에 출연한 여주인공으로 남았고, 책임감을 통감했다. 더욱이 ‘아모르 파티’는 ‘청담동 스캔들’ 이후 오랜만의 드라마 작품으로 아쉬움을 더했다. 긴 공백 사이, 드라마 제작 현장은 많은 변화가 있었다. “촬영 환경이 정말 좋아졌더라고요. 일정이 빠듯하지도 않고, 밤샐 일도 없어졌죠. 과거에는 밤새고 첫 신을 찍을 때도 많았어요. 지금은 상상도 안 되는 일이죠.” 중년 배우 과도기 잘 넘겨야 호전된 제작 환경은 배우로 오랜 시간 연기하고 있다는 점을 느끼게 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배우로서 역할이 달라질 때도 세월이 체감된다. 청춘스타로 이름을 알린 최정윤은 2013년 방송된 MBC 단막극 ‘소년, 소녀를 다시 만나다’를 시작으로 엄마 연기를 하게 됐다. “그때 당시는 제가 실제로도 엄마가 아니었어요. 처음 제안이 들어왔을 때 걱정을 많이 했고, 그래서 출연을 거절했어요. 엄마 연기를 할 나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게 아니에요. 스스로 엄마 역할을 잘 소화할 수 있을지 걱정됐던 거죠.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연기 연습도 할 수 있고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의사를 번복해 출연했는데, 엄마 연기가 생각보다 재밌었던 거죠. 이제는 엄마 역할에 대한 부담은 전혀 없어요. 아역 배우들이 성인이 된 모습을 보면 신기할 뿐이에요.” 40대 중반의 최정윤은 현재 배우로서 과도기에 있다고 본다. 연기를 하고 싶은 열정으로 가득찬 그는 “지금 이 시기가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연기로 스스로를 테스트해야 할 것 같다. 그동안 주로 착한 역할을 연기했는데, 해본 적 없는 제대로 된 악역을 통해 연기 변신을 하고 싶다. 연기가 재밌을 것 같다”고 말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연기든 소화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뿐이다. 무엇보다 현재 중년 배우로서 시간을 잘 보내야 노년까지 연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최정윤은 “할머니가 되어서도 글을 읽고 말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연기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때가 되면 선배 배우들에게서 보았던 연륜과 삶의 태도를 갖출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청담동 스캔들’에 출연한 배우들과 지금까지 연락하고 주기적으로 자주 만나요. 반효정 선생님도 만나는데, 제가 선생님을 참 좋아합니다. 지금도 안주하지 않고 배우로서 고민을 계속하시는 모습이 정말 멋져 보여요. 반효정 선생님을 포함해 좋은 선배님들과 함께 연기할 수 있다는 것은 배우로서 정말 큰 복이라고 느낍니다.” 딸 지우, 그리고 또 다른 가족 책임져야 하는 가족이 있기 때문에 최정윤은 더욱 열심히 일하려고 한다. 그의 슬하에는 2016년 태어난 딸 지우가 있다. 엄마를 꼭 빼닮은 지우는 벌써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요즘 훈육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이 많다는 최정윤은 자신을 ‘적당한 엄마’라고 표현했다. “좋거나 나쁜 엄마의 기준을 잘 모르겠지만, 엄마로서 저는 적당한 편이라고 생각해요. 공부하라고 잔소리하지 않고, 아이가 스트레스받지 않게 하죠. 그런데 예의, 사회성 교육은 진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성이 없으면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거든요. 또 잘못한 게 있으면 혼나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래서 아이가 섭섭함을 느껴 투정 부릴 때도 있지만, 저는 안 받아줘요. 나중에 엄마가 왜 그랬는지 알아줄 거라고 생각해요.” 작품 활동으로 바쁠 때는 어머니와 피아노 선생님이 지우를 돌봐줬다. 피아노 선생님과 최정윤의 관계는 참 특별하다. 여섯 살 때 피아노 선생님과 제자로 만난 두 사람은 40년간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그는 “우리는 친구라고 생각한다. 나이 많은 친구, 조금 어린 친구. 선생님이 항상 곁에 있었기 때문에 저한테는 너무나 당연한 관계였다. 사람들이 신기하게 생각할 줄은 몰랐다”라고 말했다. 40년 우정의 피아노 선생님과 함께 연예계 절친으로 유명한 배우 박진희에 대해 최정윤은 ‘나의 또 다른 가족’이라고 표현했다. 일하면서 만나는 사람과는 진짜 친구가 되기 어렵다고 하는데, 최정윤과 박진희는 벌써 20년 넘게 우정을 이어오고 있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최정윤은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점을 느낄 수 있었다. 한번 인연을 맺으면 오래가고, 의리가 넘쳤다. “만약 내가 죽으면 지우는 어떻게 하지 걱정이 된 적이 있었어요. 그랬더니 (박)진희가 자기가 무조건 데려가서 키우겠다고 한 거예요. 진희는 정말 일하면서 얻은 보물이에요. 주변에 친구가 많아도, 이렇게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는 친구를 만나기는 힘들거든요. 진희, 피아노 선생님처럼 가족 이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감사해요. 가족이라는 게 꼭 혈연으로만 이뤄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최정윤에게는 평온함과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크든 작든 어떤 일에도 스트레스받지 않는 성격 덕분일 것. 하루하루 충실히 살아가는 그의 앞날에는 당연히 꽃길이 펼쳐질 것으로 예상된다. “누군가 ‘스무 살 시절로 돌아가면 어떨 것 같아?’라고 물어볼 때가 있잖아요. 그러면 저는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답해요. 지금 삶도 좋은 점이 많은데 왜 과거로 돌아가서 힘들었던 순간을 반복하나요? 과거를 후회해봤자 시간만 아깝고 아무런 발전도 없어요. 우리 지금 이 순간을 즐기면서 재밌게 살아요!”
- 2023-11-02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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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의 피 나눠 가진 자매, 귀촌해 일군 농장
- 그가 귀농한 지 어언 15년이 지났지만, 처음이나 지금이나 농장의 모습은 변한 게 없단다. 처음부터 그냥 있는 그대로 자연스러운 농사를 지었는데, 지금도 그냥 그렇게 자연의 생리를 좇아 일을 지속하고 있다는 거다. 한 가지 변한 건 있다. 처음 몇 가지 소소하게 길렀던 채소, 과일, 화초의 수가 자그마치 300여 종으로 늘었다. 그 많은 식물이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지? 그다지 넓지 않은 농장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려도 단박에 알아보기는 불가능하다. 비정형적으로 또는 제멋대로 작물이 산재하고 있거니와, 그마저도 수북이 자란 풀들과 동거하기 때문이다. 얼추 야생의 풀밭을 연상시키는 농장이다. 그렇다면 이건 지리멸렬한 농사의 산물? 아니다. 농장주 한은영(59, 아르아르농장 대표)은 옥천군에서 알아주는 이가 많은 선진농업 경영인이다. 매우 독특한 농법으로 순풍을 돛에 매단 배처럼 질주하고 있다. 서울에서 살았던 한은영이 이곳 옥천군 외진 시골로 내려와 관심을 가진 건 양봉이었다. 과천시 변두리에서 양봉을 했던 부모님의 어깨너머로 좀 익힌 양봉 기술이 있어서였다. 그래 벌통 몇 개를 놓고 소규모 양봉 농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의 진정한 관심사는 자급자족에 있었다. 이왕 시골살이를 할 거라면 내가 먹을 건 내 손으로 길러 취하자는 생각으로 텃밭 농사 스타일의 농장을 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 그에겐 수칙 하나가 있었다. 농약을 아예 사용하지 않는 농법을 시종일관 유지하겠다는 기본 방향을 설정한 것이다. 농장은 한적하고 조용한 야산 아래에 있다. 저 멀리 사방에도 나지막한 산들이 펼쳐져 싱그럽다. “이곳에 터를 잡은 건 아늑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서였다. 아, 좋다! 우연히 지나가다 만난 곳이지만 첫눈에 호감을 갖고 탄성을 터뜨렸다. 양봉을 할 만한 밀원(蜜源)도 있어 적격이었다. 무엇보다 먹거리를 자급하며 재미있게 살 수 있는 산골이라는 생각에 즐거웠다.” 여기에서 산 15년 가운데 절반의 세월이 흐르기까지는 자급자족을 위한 작은 농사를 했을 뿐, 계획적인 생산이나 판매 활동은 전혀 하지 않았다지? “그렇다. 애초 무슨 구상을 가지고 귀농을 한 게 아니었다. 그저 농약 치지 않은 깨끗한 먹거리를 길러 건강한 밥상을 차리고, 거둔 것들을 친지나 이웃들과 나누자는 데 가치를 두었다. 따라서 비닐하우스 두 동 외에 농업 시설이나 장비를 마련할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시작한 귀농의 나날은 정신적으로 여유로웠다. 살고 싶은 방식대로 살아 유쾌했다. 작물을 가꾸고 꽃을 키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농사 초심자였던 만큼 유기농에 필요한 기술 습득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초기엔 씨앗이 싹을 틔우고 싱싱하게 잘 자라는 재미에 빠져 무엇이든 갖다가 잔뜩 심었다. 한 평 땅에 20여 가지 채소류를 가꾸기도 했다. 서툰 재배 기술은 마을 어르신들에게 여쭈어 보완했다. 그런데 농업기관에서 나온 이들이 작물마다 특화된 농약과 비료가 있다며 만류하더라. 자칫 다 죽을 수 있다면서. 하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는 얘기였다. 있는 그대로 자연조건을 고려해 심은 식물들이 잘 자라는 걸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수확량은 관행 농사보다 적을망정 생태농업을 통해 깨끗한 결실을 거둘 수 있다는 게 너무도 좋았다.” 이곳에서처럼 무농약농업, 생태농업을 하는 농가가 드물지 않다. 그러나 수익성이 낮아 흔히 고전한다. “무농약농업은 제초 작업부터 버거운 게 사실이다. 나는 풀을 베어 거름을 만들거나, 발로 밟아 쓰러뜨려놓거나, 그냥 그대로 놔둔다. 농토를 최대한 자연 상태 그대로 두고 식물을 기르는 게 사리에 맞다는 생각에서다. 한때는 소 한 마리를 기를 생각도 했다. 기계장비로 밭을 가는 것보다 소 쟁기질로 일을 처리하는 게 땅이라는 자연을 존중하는 길이라고 봤는데, 소 한 마리 사육을 위한 축사 허가가 불가능한 걸 알고 포기했다.” 생계 문제는 어떻게 해결했나? 먹거리 자급자족만으로는 생활 유지에 한계가 있었을 텐데. “소득원이 있었다. 서울에서 해왔던 직업 활동의 일부를 이곳에서도 틈틈이 계속해 문제를 해결했다. 경제적 불확실성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판매 목적의 농사 방식을 선택했을 것 같다. 농사로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강박감을 갖고 살지는 않았다.” 긍정적인 신호로 가득한 나날들 한은영에겐 서울에 근거를 두고 활동했던 직업이 있었다. 그는 국악을 전공했다. 비파라는 전통 현악기 연주자이자 작곡가로 활동했다. 한동안 명맥이 끊기다시피 한 비파를 복원한 유공자이기도 한 그는 강의를 했고, 제자를 양성했다. 이와 같은 경륜과 재능 일부를 시골 생활에 접목했다. 이를테면 원데이 클래스 같은 걸로 일정한 수입을 얻으며 긍정적인 신호로 가득한 나날을 꾸려왔던 것이다. 이채로운 건 또 있다. 그는 여동생 한은미(57)와 이곳에서 함께 산다. 즉 이 농장은 자매가 지향점을 공유하며 공동으로 일군 노력의 소산이다. 한은미도 예술을 전공했다. 금속공예로 기량을 발휘했다. 이런 한은미 역시 텃밭 농사를 즐기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게 아니라 지역에서 공예 관련 일을 함으로써 수입원으로 삼았다. 언니와 마찬가지로 인근 학교 아이들에게, 또는 농장을 방문하는 이들에게 재능을 나누며 생활에 지장 없는 수준의 소득을 올렸다. 농장에선 자매의 컬래버레이션으로 기획된 예술적 프로그램이 자주 펼쳐졌던 것 같다. 어쩌면 농장이 통째 두 사람의 예술적 감수성과 상상력이 날갯짓하는 오픈 스튜디오, 혹은 꿈의 공간일지도. 한은미는 요즘 인근 학교의 도서관 사서로 일한다. 이날도 출근해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삶이란 묘한 것이다. 사람을 미처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데려가기도 하니까. 변신이랄까, 한은영은 귀농 중기에 이르러 완전한 농부가 됐다. 직업으로 농사를 하기에 이르렀다. 먹거리를 스스로 해결하는 한편 이웃들과 결실을 나누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으나, 시나브로 농장 상황에 한결 긍정적인 변화가 오면서 판매 활동에 나서게 됐다. 10년 후에도 지금처럼 풀들과 함께 본격적인 농사, 그러니까 남들에게 생산물을 팔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나? “7~8년 전부터다. 당초 농작물 판매는 계획에도 없었고 예감하지도 못했다. 일찍부터 우리 농장엔 방문객이 많았다. 구경 삼아, 체험 삼아 오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풀밭에서 자라나는 온갖 식물들을 신기해했다. 단장을 하지 않아 농장은 어수선했지만, 말 그대로 ‘자연이 준 선물’에 가까운 친환경 생산물을 거둔다는 데 관심을 갖고 지지해줬다. ‘정신 나간 농사’라는 말도 들었지만 말이다.(웃음) 그러나 이상하다 여긴 사람들조차 우리가 나누어준 먹거리에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구매를 원했고, 그 수가 날로 늘어났다. 이러한 상황에 부응해 상업적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저절로 고객층이 형성되다니. 이는 흔히 보기 어려운 신개념 판매 루트에 가까울 것 같다. 농민들에게 가장 어려운 판로 문제가 선행적으로 자동 해소된 ‘넘사벽’ 마케팅이다. “구매를 원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입소문도 덩달아 나서 주문이 잦았다. 그런 상황 변화에 따라 농장 일이 한결 분주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택배 꾸러미를 만들어 배송을 하거나 로컬푸드 마켓을 통한 판매 활동 같은 게 일상화된 지 이미 오래됐다. 소규모 농장이라 생산 물량은 많지 않다. 매출도 크진 않지만 일찌감치 안정적인 궤도에 진입했다. 읍내 재래시장 안에 작은 가게도 차렸다.” 가게까지? 어떤 물건을 판매하나? “식당 겸 농산물 매장을 겸한 공간이다. 먹을 수 있는 약용 꽃들을 콩처럼 넣어서 지은 밥으로 만든 ‘꽃김밥’이 주력 상품이다. 모든 상품이 자연농법으로 거둔 청결한 것들이라 인기가 있다.” 농장 연매출액은 얼마나 될까? “농산물 판매와 체험 교육으로 얻는 수입, 그리고 식당에서 나오는 매출 등을 합해 1억 원 이상이다.” 적지 않은 매출이다. 한은영은 애초 생태농업에 관한 인식조차 없이 그저 당연지사처럼 자연환경에 순응하는 농사를 시작했으며, 지금도 여전히 풀들과 공생하는 농사를 지속하고 있다. 이런 생활이 그는 즐겁다. 소농이지만 상당한 수준의 이득을 내고 있어서만은 아니다. 어쩌면 불안하거나 순진한 농사라 할 수 있는 생태농업의 가치와 지속 가능성을 확인하면서 얻는 자신감과 보람 역시 크기만 하다. 그의 농사를 두고 ‘이상적인 미래 농업의 모델’이라 하는 평하는 사람도 있다. 한은영의 농사법엔 인상적인 게 더 있다. 주변 농가들과 협업하는 방식이 그렇다. “농사에 욕심부릴 것 없다는 생각이다. 가령 토마토 3개를 수확했다고 가정할 경우, 그중 하나는 내가 먹고, 하나는 이웃과 나누고, 나머지 하나는 자연에 돌려주는 게 옳다는 생각으로 농사를 지어왔다. 특히 나의 농장 일이 이웃 농민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마음을 썼다. 예컨대 마을 분들을 나의 고객들과 연결시켜 농산물 판매를 적극 거들곤 했다. 이렇게 하면 그들도 어떤 식으로든 우리 농장 일을 돕는다.” 농사는 물론 식당 일까지 하느라 일상이 매우 분주할 것 같다. 한 이틀쯤 완전한 자유시간이 주어진다면 어떤 일을 하고 싶나? “이걸 어쩌나? 난 자유에 갈증을 느낀 적이 없다.(웃음) 내 딴엔 즐거운 일상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식당 일도 어렵지 않다. 시장 할머니들과 사이가 좋아 사나흘 가게에 못 나가도 그분들이 알아서 척척 장사를 대신 해주신다. 행운처럼 난 귀농 이후 많은 주민들과 좋은 인연을 맺었다. 이 역시 즐거운 생활의 원천이다.” 10년 후 당신의 농장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10년 전 과거의 모습과 현재가 다르지 않듯이, 10년 뒤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풀들은 여전히 가득하고, 새들과 곤충들이 지천이고, 그냥 지금처럼 그렇게.” 현실에 만족이 커서 미래에도 별다른 기대가 없다는 얘기다. 현재 그가 지닌 고민은 딱 한 가지. 어떤 방법으로 지역 친환경 농가들의 이익 창출에 이바지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자신의 농사는 이미 자리를 잡았으니, 이젠 남들을 도울 차례라는 것이다. 한은영이 주는 귀농 Tip •시골의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귀농 생활로 만족을 누리려면 우선 소박한 삶의 방식을 기획하자. 자연을 즐길 수 있는 감성을 끌어내 마음을 돌보는 일도 중요하다. 그게 ‘소확행’과 만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농사로 성공하기 쉽지 않다. 치밀한 준비 없이 귀농해 큰돈을 벌 욕심에 사로잡힐 경우 실족할 가능성이 높다. 생계유지조차 버거울 수 있는 게 농사라는 걸 유념하자. 큰돈을 벌고 싶다면 차라리 도시에서 사업을 하는 게 낫다. •과도한 투자를 하지 마라. 농토도 가급적 작게 확보해 농사를 시작하는 게 안전하다. •그림 같은 집보다 편안한 집을 지어라. •좋은 풍경만 보고 산속 외진 곳에 터를 잡는 건 좋지 않다. 밤마다 으스스한 분위기에 질려 떠날 수밖에 없는 불운을 초래할 수 있다.
- 2023-10-27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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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일 마카오에서 진행 중인 ‘샌즈 골프데이’에 참석 중인 골프 스타 리디아 고(좌)와 이민지(우)가 더 런더너 호텔 주방에서 일일 세프에 도전했다.
- 2023-10-23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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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년의 정신적 고립, “열등감 잊고 사람 마주해야”
- 중년은 왜 외로울까. 부와 명예를 쌓으며 인정받던 사회에서 물러나면서 오는 1차 충격. 그리고 위로해줄 이가 아무도 없다는 데서 오는 2차 충격이 있다. 대화가 단절된 지 오래된 가족마저 그들을 외면한다. 마음 둘 곳 없는 중년이 정신적인 고립에 빠져 있다. 극복 방법은 없는지 김찬호 성공회대학교 교양학부 초빙교수를 만나 이야기를 나눠봤다. “배드민턴 운동을 좋아합니다. 30대 때 운동을 시작해서 10년 정도 치다가 쉬었어요. 그러다가 최근에 다시 운동을 하려고 하는데 무릎이 안 좋아져서 힘들더라고요. 몸이 예전 같지 않은 거죠. 그런데 그걸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1962년생인 김찬호 교수는 최근 자신이 겪었던 배드민턴 일화를 얘기했다. 당시 그는 “인생 후반기에 접어든 중년이 받아들이기 제일 어려운 일은 ‘상실’”이라는 점을 깨달았다고. 중년의 정신적 위기는 바로 ‘상실’에서 시작된다. 돈만 벌다 보니 어느새 고립 김찬호 교수는 중년의 고립에는 사회적인 원인이 있다고 봤다. 현재의 40~50대(1983~1964년생)는 어떤 성장의 시간을 보냈는가. 1997년 IMF 외환위기가 그들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자본주의 체계에서 일에 몰두하는 삶을 살다 보니 인간관계가 자연스럽게 단절됐다. “IMF 이전에는 노동시장 바깥에서도 인간관계가 형성되어 있었어요. 이웃끼리 친하게 지냈고, 친척과의 왕래도 잦았죠. 그러니까 퇴직하고 나서도 외롭지 않았어요. 그런데 IMF 이후에는 삶이 생존이 됐어요. 주부들도 일터에 나가야만 했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에 전력투구했죠. 다른 사람에게 관심 갖기 어려워졌고요. 그나마 맺는 관계는 권력 관계나 이해관계였죠. 고립으로 가는 지름길이 만들어진 거예요.” 김 교수는 중년의 고립에 대해 “여유 없이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산 결과”라고 진단했다. 그들은 오직 ‘돈 잘 버는 것’이 목표인 삶을 살았다. 좋은 대학교, 좋은 직장에 가서 돈을 많이 버는 것이 행복해지는 길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노력해서 산 만큼 자녀 양육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자녀는 자신처럼 고생하지 않았으면 했고, 명문대나 대기업 등의 꿈을 이루지 못한 이들은 자녀가 대신 실현해주기를 바랐다. “중년의 기러기 아빠(자녀의 교육을 목적으로 아내와 자녀를 외국으로 보내고 홀로 한국에 남아 뒷바라지하는 아버지)가 많은데, 그들을 단적인 예로 얘기해볼게요. 기러기 아빠는 가족으로부터 오는 정서적인 통로가 다 막힌 상태에서 돈을 벌겠다는 생각에 일에만 몰두합니다. 자기 내면도 가꾸지 못한 채로요. 그러다가 돈 버는 것을 못 하게 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거죠. 가족들은 이미 아버지를 돈 버는 사람으로만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돈 잘 버는 것이 중요한 사회에서 실직, 퇴직, 사업 실패 등 일자리 상실은 큰 충격을 안겨준다. 이제 남은 건 좌절감과 패배 의식뿐이다. 그래서 창피한 마음에 중년은 고립되기를 자처하는데, 그런 존재를 가족들도 환영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10~20대 자녀는 부모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는 것을 불편해한다. 사회적 고립이 가정 내 고립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중년에는 자기와 화해하는 게 정말 중요하거든요. 자기를 온전하게 수용하고,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방을 맞아들여요. 그런데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하니까 남한테 그 사랑을 요구하는 거죠. 그러다 보면 꼰대가 되고 권위주의자가 되는 거예요. 인정 결핍을 가진 굉장히 빈곤한 사람이 됐다고 할 수 있죠. 자녀한테 대접받고 싶으면 화를 낼 것이 아니라 자신이 먼저 변해야 합니다. 자녀의 이야기는 듣지도 않고 자신의 얘기만 하려고 하면 누가 좋아하나요? 다른 사람한테 짐이 되지 않으려면 스스로 자족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정신적 고립에서 벗어나는 방법 김찬호 교수는 저서 ‘대면 비대면 외면’에서 ‘고독’에 대해 흥미로운 표현을 했다. ‘고독’이라는 글자에 각각 ‘립’(立)을 붙이면, ‘고립’과 ‘독립’이 된다는 것. 사람들은 독립을 추구하지만, 타인과의 관계를 배제하는 방향으로 흐를 때 고립에 이르고 만다. 그래서 스스로 독립을 훈련할 수 있다면 타인과의 만남도 한결 충실해진다. 중년이 스스로 독립하고자 한다면, 김 교수는 마음의 공간을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마음의 공간이 작기 때문에 소통의 부재가 일어나고, 결국 고립된다는 것이다. 또한 이 늪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기 스스로를 점검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얘기를 정리해 보면, 퇴직은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 상실감에 빠져 있을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동안은 조직에서 주어진 것을 시키는 대로 하는 삶을 살았죠. 자신의 삶을 스스로 살지 못했어요. 그런데 퇴직을 하면 온전히 스스로 하루 24시간을 채워야 합니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을 크게 나눠보면 건강, 일, 재정, 그다음에 인간관계라고 할 수 있어요. 이 네 가지를 하나하나 오랜 시간 동안 점검해봐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지금 원하는 게 뭔지, 필요한 게 뭔지 알 수 있어요. 인간관계가 부족해서 개선하면 거기서 힘을 얻고, 그 힘으로 일을 하고, 그래서 건강도 회복하는 선순환의 고리가 만들어집니다.” 김찬호 교수는 “인생 점검이 끝나면 나만의 스토리가 만들어진다. 고립되는 데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자신의 스토리가 없거나, 또는 있어도 그 스토리를 들어줄 사람이 없을 때”라고 설명했다. “저희 아버지가 올해 99세입니다. 요즘 아버지를 뵈러 일주일에 세 번은 가는데, 사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2주에 한 번 갈까 말까였어요. 아버지가 60년 동안 같은 얘기를 하셨기 때문에 정말 지겨웠거든요. 그러다가 최근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걸 즐거워하신다면 기꺼이 들어드리기로 마음을 바꿨죠. 아버지는 분명 스토리가 있는 분이에요. 여기서 스토리란 잘 살아온 삶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패한 스토리밖에 없다고 해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어요. 저는 아버지가 왕년에 잘나갔을 때 얘기보다 힘들었을 때 얘기를 해주시면 훨씬 더 와닿고 느끼는 바가 많습니다.” 그다음은 실전이다. 김찬호 교수는 자신의 취약함, 콤플렉스, 열등감 등을 내려놓고 사람들과 마주하라고 조언했다. 스토리는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서, 인문학적 소양을 쌓으면서 풍부해지기 때문. 김 교수는 모임 활동을 추천하면서, “익숙한 사람끼리 계속 모이는 것은 좋지 않다. 새로운 모임에 가서 새로운 것을 배워 자기 변신을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새로운 자신이 만들어지면 안 쓰던 마음의 근육을 쓰게 돼 단단해진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인간은 시간의 노예다. 우리는 흐르는 시간에 매여 있지만 시간을 창조하는 힘을 가져야 한다”면서 “다음 세대에는 좋은 세상이 펼쳐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조금씩 달라지길 바란다. 저도 아버지와의 대화를 늘린 이유는 충만해진 제 마음이 퍼져나가길 바라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김찬호 교수. 현재 중년의 시기를 잘 보내야 외롭지 않은 노년을 맞고, 행복한 미래를 열 수 있다고 메시지를 남겼다. “중년을 넘어 노년은 죽음을 향해 가는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대학교 동아리 단체 채팅방에 50명 정도 있어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죠. 요즘 부친상, 모친상 비보가 많이 올라오는데, 20년 후에는 본인상이 올라오지 않을까 하는. 결국 마지막에는 한 사람이 남겠죠. 그 한 사람은 얼마나 고독하고 쓸쓸할까요? 디지털 세상에서 진짜 고립된 거죠. 이런 고립을 대비해 미리 예행연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2023-10-19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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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해 바닷가에서 만난 선옹(仙翁)… 심동로의 흔적 남은 해암정
- 동해를 끼고 있는 동해시의 인상은 밝다. 시원한 눈매를 가진 사람을 바라볼 때처럼 상쾌한 기분을 안겨주는 해변 도시다. 바다는 어쩌면 동해시의 모태이거나 모성이다. 바다에서 건져 올린 수산물로 생존을 이어온 게 아닌가. 수려한 바다 풍경만으로도 동해시는 복 받은 땅이다. 저 웅장한 만경창파를 보라. 아스라이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을 보라. 푸르디푸르러 아찔하다. 이 바다에선 아침마다 붉은 해가 솟아오른다. 그래 동해시를 찾아드는 여행자가 숱하다. 그들은 드넓은 바다를 가슴에 담는다. 태초의 일순을 보여주듯이 장엄한 일출을 감상한다. 일출 명소는 촛대바위로 유명한 북평동 추암 일원이다. 해돋이 장소 중 한국인이 가장 좋아한다는 곳이다. 추암해변에선 기암괴석들의 전시회가 성황리에 펼쳐지고 있다. 능파대(凌波臺)라 부르는 바위 군락이 해안 경관을 북돋워 절경을 연출하는 게 아닌가. 가히 자연이 펼치는 예술제전이다. 장구한 세월 속에서 바람에 닳고 파도에 깎인 바위들의 묘한 형상이라니. 자연에 속하는 모든 것이 그렇듯, 능파대 역시 사람의 상상력을 능가하는 자연의 재능을 웅변한다. 이처럼 빼어난 능파대는 조선이 낳은 걸출한 화가 단원 김홍도의 화첩에도 등장한다. 단원은 금강산과 관동팔경 지역을 여행하며 명승 60폭을 그려 ‘금강사군첩’(金剛四郡帖)을 만들었다. 거기에 능파대를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한 그림 한 점이 포함돼 현존한다. ‘능파’(凌波)란 ‘물결 위를 걷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가인(佳人)의 가볍고 우아한 걸음걸이를 이르는 말이다. 능파대란 그렇다면 미인의 섬려한 거동처럼 아름다운 곳이라는 뜻? 풍경을 보는 안목에 서정과 낭만이 서려 있다. 조선의 정치가 한명회가 그 이름을 지어 붙였다. 능파대 곁엔 정자가 있다. 해암정(海巖亭)이다. 간결하고 담백한 정자다. 자그마하고 덤덤한 모습이라 정자 앞에 서서 바라보면서도 정작 눈에 쏙 들어오지 않을 수 있는 건물이다. 멋스럽기보다 예사롭다. 그 무슨 미학적 작위를 구태여 구사하지 않은 집이다. 하지만 유서 깊은 해변 정자다. 고려 말 공민왕 때인 1361년에 삼척 심씨의 시조 심동로(沈東老)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건립했다. 이후 화재로 스러진 걸 조선 중기인 1530년에 7대손 심언광이 중건했으며, 1794년에 또다시 지어져 현재의 모습을 지니게 됐다. 해암정은 작은 규모만큼이나 구조도 간명하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구성해 팔작지붕을 얹었다. 들어 올릴 수 있는 창호 문을 단 정면을 제외한 3면엔 모두 판문을 설치했다. 이채로운 건 처마 아래 걸린 현판이 세 개나 된다는 점이다. 가운데엔 나는 새도 떨어뜨렸다는 우암 송시열이 능란하게 붓을 휘저어 쓴 해서체 편액이 있다. 우암이 예송논쟁에서 패하고 함경도로 귀양 가는 길에 들러 쓴 글이란다. 오른편엔 심동로의 18대손 심지황이 쓴 전서체 편액이 걸려 있다. 왼편엔 해암정 뒤편 능파대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를 종소리에 빗대어 ‘석종람’(石鍾襤)이라 쓴 해서체 현판이 보인다. 이건 송강 정철이 쓴 것이라 하나 정확하진 않다. 정자 내부 벽면엔 시판과 기문 다수가 걸려 있다. 세상의 꿍꿍이로부터 등 돌리고 해변에서 독락(獨樂)하는 심동로의 지향을 알아채거나 교감하는 글들이 시판에 섞여 있다. 심동로는 해암정과 더불어 노년을 한가하게 지냈다. 창망한 바다가 부여하는 위안과 풍류를 낙으로 삼았다. 그가 벼슬에서 물러난 건 권문세족의 쉰밥 냄새나는 아귀다툼에 염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괜히 바닷가에 바짝 붙여 정자를 지었겠나? 능파대에서 들끓는 파도 소리를 울타리 삼아 속세의 소음과 두절하고 싶은 심정의 발로이지 않았을까. 일찍이 신라의 고독한 천재 최치원은 가야산의 물소리를 방패 삼아 세상 잡음을 물리치고 은거했다. 심동로의 심회가 비슷하지 않았을까. 정치판의 이전투구는 저질러놓은 너희끼리 알아서 하라. 난 해변에서 노닐겠어! 그런 심사이지 않았을까. 그는 공민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노령을 핑계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이에 공민왕은 ‘노인이 동쪽으로 돌아간다’는 뜻의 ‘동로’(東老)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이렇게 동으로 돌아온 노인은 즐겨 해변을 소요하며 음풍농월로 회포를 풀었다. 이런 그를 일러 사람들은 ‘동해 바닷가의 선옹’(仙翁)이라 일컬었다지. 해암정을 지을 즈음에 쓴 심동로의 문장이 있다. ‘갈매기와 더불어 바닷가에서 늙으니/ 일생의 행적이 바람결 같구나/ 부귀공명이야 다 헛된 것/ 매미 껍질 벗듯이 일찍이 관직을 버렸네’ 감성충전소 ‘논골담길 벽화마을’ 이제 묵호동으로 간다. 산이면 산, 바다면 바다, 동해시의 자연경관은 두루 빼어나다. 곳곳에 고유한 승경과 역사와 문화가 스며 있다. 그런데 묵호엔 묵호의 인간사와 사회사, 문화와 풍속, 빛과 그늘을 한눈에 더듬어볼 수 있는 곳이 있다. 바로 ‘논골담길 벽화마을’이다. 묵호의 유난한 ‘달동네’였던 언덕배기 마을을 2010년부터 시작한 문화재생사업으로 본때 있게 살려낸 곳이다. 이미 ‘전국구 명소’로 부상했다. 동해시를 찾아오는 여행자들의 발길이 주로 논골담길로 쏠려 기존 명소들이 예전과 다르게 썰렁해졌다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다. 이변이라면 이변이다. 초라하고 침침했던 언덕배기 마을에 와락 생기가 감돌다니. 묵호는 1960~1970년대 한때 번영을 누렸다. 묵호 사람들의 생존 기반이었던 묵호항의 성황 덕분이었다. 석탄을 실어 나르는 항구로, 국제무역항으로, 명태와 오징어 등속이 흔전만전 유통되는 어항으로 이름을 날렸다. 화주(貨主)와 외항 선원, 어부, 잡역부 등 갖가지 인력이 집중됐다. 그러면서 경제 효과가 파급돼 ‘강아지조차 지폐를 입에 물고 돌아다닌다’는 소리가 나돌 정도였다. 이 좁은 바닥에 극장이 네 개나 있었다고 하니 말 다했다. 그러나 석탄 산업이 저물고, 어떻게 된 영문인지 바다에서 잡히는 게 드물어지면서 묵호항의 전성시대가 곤두박질치기에 이르렀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그러잖아도 내동 궁색했던 달동네의 형편은 더욱 나빠져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그렇더라도 삶은 이어지는 것.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끌어안고 애면글면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는 것. 떠날 사람들은 떠나고, 떠날 길 없는 사람들은 남아 운명의 횡포에 맞설 수밖에 없는 것. 이렇게 지역의 변천에 따라 달동네 사람들이 껴안고 살았던 애환, 그리고 그 궤적과 사연을 재료로 삼아 예술을 입히고 문화 요소를 돋우어 볼 것 많고 찍을 것 많고 느낄 것 많은 이색 여행지구로 부활한 게 논골담길 벽화마을이다. 이 마을의 골목길은 넥타이처럼 좁고 가랑잎처럼 허름하다. 다닥다닥 밀집한 집들은 하나같이 작고 허술하다. 삶의 파란만장이 한눈에 읽히는 모습이다. 그러나 문화자원을 투입하자 달라졌다. 면밀한 의도로 기획된 다양한 형태의 벽화, 사진, 낙서, 디자인, 공예를 깨알처럼 섬세한 디테일로 흩뿌리자 급변했다. 감성충전소로 변신했다. 언덕 저 아래로 눈길을 던지면 거기에 눈부시게 푸른 동해 바다가 있다. 그러니 사람들이 몰려들 수밖에. 노멀 크러시와 뉴트로를 즐기는 이들에겐 한결 적합한 답사지다. 그 무엇보다 문화재생의 힘과 매력을 실감할 수 있는 마을이다. 오종식 동해문화원장 올가을 ‘2023 지역문화박람회 in 동해’를 펼친다 동해시는 1980년에 삼척군 북평읍과 명주군 묵호읍이 통합되면서 출범했다. 북평 권역은 전통적으로 농경이 성행했다. 반면 묵호 권역에서는 어업을 중심으로 한 상업이 번성했다. 따라서 정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이질감이 있었지만 40여 년의 동화 과정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공존하고 있다. 이와 같은 동해시의 특질에 대한 오종식 동해문화원장의 생각은 이렇다. “두 권역의 상이점이 섞여 융화되면서 풍부한 문화적 스펙트럼을 갖추게 되었다. 바다와 항만을 모체로 한 어로 문화와 해양 문화가 여실한 한편, 과거부터 이어진 농경 문화와 유교 문화, 그리고 불교 문화 역시 지역 정신의 축을 이루고 있다.” 동해시의 대표 문화자원을 꼽는다면? “동해시의 모산인 두타산에 있는 천년고찰 삼화사, 그리고 여기에서 행해지는 ‘국행수륙대재’(國行水陸大齋,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125호)를 꼽고 싶다. 천지간의 모든 영혼을 달래고 삼라만상의 무사 안녕을 기원하는 제례로, 이념 대립과 갈등을 넘어 통합으로 가는 세상을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불교예술의 정수를 보여주기도 한다. 매년 가을 삼화사에서 사흘간 공개 행사로 거행된다.” 동해문화원을 이끌며 그간 펼쳐온 주요 사업을 소개해달라. “‘동해학기록센터’를 설립, 동해시의 역사와 문화 관련 기록물을 체계적으로 수집해 디지털 아카이브 작업을 했다. 청소년을 위한 지역 역사 교재 ‘세상의 아침을 여는 동해시’ 출간과 북카페 ‘소담채’ 조성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동해문화원이 ‘논골담길’ 형성에 주도적 역할을 했더라. “그렇다. 우리 문화원의 조연섭 사무국장이 2010년에 ‘논골담길’을 기획하면서 사업이 개시됐는데, 동해시는 물론 마을 주민과 문화 인력이 동참해 진척시켰다.” ‘논골담길 벽화마을’을 답사하고 강한 인상을 받았다. 새롭고 흥미로워서. “‘논골담길’은 이미 동해시 최고의 명소로 부상했다. 도시 문화재생의 모범 사례로 알려지면서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방문한다. 주차난이 문제점으로 대두됐을 정도다. 소외된 ‘달동네’였지만 감성마을로 변모시킨 성과가 이렇게 크다. 동해 바다와 동해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조망도 매우 빼어난 곳이다.” 올가을엔 한국문화원연합회가 주최하는 ‘지역문화박람회 in 동해’가 동해시에서 열린다지? 어떤 구상과 준비를 하고 있나? “10월 20일부터 3일간, 동해와 ‘논골담길’이 바라보이는 천연의 무대 ‘묵호항 여객선터미널 공원’에서 펼쳐진다. 주제는 ‘K-컬처, 뿌리를 만나다’로 설정했다. 지역 문화의 가치를 조명하고 미래 비전을 담을 수 있는 최고의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다양한 공연과 전시는 물론 바다불꽃쇼, 대동한마당, 대한민국 팔도 명인전 등 갖가지 행사를 펼칠 예정이다.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린다.” 이 문화박람회에 전국 231개 문화원도 참여해 프로그램을 선보일 예정이다. 성대한 문화축제가 예상된다.
- 2023-09-08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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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령화 대비 고령친화도시 변신 꾀하는 지자체들
- 전 세계가 빠르게 고령화 되어가는 가운데, 노인의 평안한 삶을 영위하는 방법 중 하나로 ‘고령친화도시’ 조성이 꼽히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전 세계적인 고령화와 도시화 추세에 더욱 효과적으로 대응해나가기 위해 ‘고령친화도시 국제네트워크’(GNAFCC) 프로젝트를 2007년부터 추진하고 있다. WHO에서는 고령친화도시에 대해서 “나이가 드는 것이 불편하지 않은 도시, 연령에 상관없이 누구나 살기 좋은 도시, 평생을 살고 싶은 도시에서 활력 있고 건강한 고령기를 위하여 고령자들이 능동적으로 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도시”로 정의하고 있다. 국내 지자체 47개, 고령친화도시 네트워크 가입 고령친화도시 국제네트워크 회원 인증은 WHO가 정해놓은 8대 영역에 적합해야 받을 수 있다. 8대 영역은 △외부환경과 시설 △교통수단 편의성 △주거환경 안정성 △여가 및 사회활동 △사회참여 및 일자리 △사회적 존중 및 통합 △의사소통 및 정보 △건강 및 지역사회 돌봄이다. 2023년 5월 기준 전 세계 51개국, 1455개 도시가 가입돼 있다. 대표적인 고령친화도시로 미국 뉴욕, 일본 아키타 시가 꼽힌다. 우리나라는 47개 지방자치단체(이하 지자체)가 가입된 상태다. 국내에서는 고령친화도시 국제네트워크에 첫 번째로 가입한 서울시가 롤모델로 통한다. 서울시는 고령 인구가 급증함에 따라 일찌감치 고령친화도시 조성에 관심을 뒀다. 2010년 노인 실태·욕구 조사를 실시했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전략과제를 개발하고, 노인복지 조례를 제정했다. 또한 다양한 경로를 통해 전문가를 비롯한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한 끝에 2013년 고령친화도시 국제네트워크에 가입했다. 서울시의 고령친화도시 핵심 내용은 고령자의 자기결정권이 존중되며, 사회적으로 배제되지 않는 도시라고 할 수 있다. 2016년에 가입한 부산광역시는 공동체 활성화를 지원하는 도시 환경 조성에 주력하고 있다. 특히 부산시는 프랑스 파리처럼 ‘15분 도시’ 개념을 도입했다. 집에서부터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15분 이내에 출퇴근과 의료 상업 등 일상생활이 모두 가능한 도시를 말한다. 15분 도시와 연계해 노인을 위한 모임 공간 하하(HAHA)센터 건립을 추진 중이다. 2017년 도 단위 최초로 가입한 제주도는 사람 중심, 상생·통합, 네트워크, 행복 등 4가지를 핵심가치로 하고 있다. “국가 지원 필요” 의견도 표현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지자체의 고령친화도시 비전 대부분은 ‘건강하고 활기찬 100세 도시’이다. 또한 지자체에서는 노인복지 기본조례를 제정하고 고령친화도시 1기, 2기 계획을 실행한 뒤 고령친화도시 네트워크에 가입하는 절차를 따르고 있다. WHO의 8대 영역이 기준이다 보니 추구하는 비전과 가치, 과정 등이 비슷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각 도시마다 10~20%의 차별성도 존재한다. 현재 고령친화도시 조성을 적극 추진하고 있는 전라북도를 예로 들 수 있다. 전라북도는 식품산업 중심지로서 고령친화식품 육성에 주력한다. 고령친화 은퇴자 체류 도시 모색 계획도 세웠다. 자연환경 자원이 우수하고 다양한 문화체험이 가능해 은퇴자 체류 도시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처럼 고령친화도시 조성 사업은 지자체별로 진행해왔다. 그러나 국가가 지원할 수 있는 근거가 법률상 마련돼 있지 않아서 예산 등 지원이 어렵다는 지적도 불거졌다. 이에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최연숙 국민의힘 위원은 국가가 고령친화도시를 지정하고 지원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노인복지법 일부개정법률안’을 지난 6월 대표 발의했다. 최연숙 의원은 “세계 주요 도시들이 고령층의 활력 있는 노후생활을 위해 각종 시책을 펼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고령친화도시 관련 조례를 제정한 지자체가 63개에 불과하다”며 “고령화 시대에 국가가 노인 정책을 지방자치단체에만 맡겨두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지적하며 국가 차원의 지원 필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 2023-08-11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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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일운동의 역사, 스토리텔링으로 다크 투어리즘 변신
- 자타공인 한국 문화 지킴이인 서경덕 성신여대 교양학부 교수는 ‘현장에 답이 있다’고 믿는다. 울림을 주는 홍보 영상, 잘 정리된 책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는 일을 어언 30년 가까이 해보니 깨달은 점이다. 기존의 방식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더 효과적인 방식을 찾았기 때문에, 그는 2019년부터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저는 역사학자가 아니라 홍보학자입니다. 역사 왜곡을 막기 위해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고자 노력해왔어요. 누군가 제게 가장 효과적인 홍보 수단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현장’이라고 답할 겁니다.” 서경덕 성신여대 교양학부 교수는 자타공인 한국 문화 지킴이다. 주변국의 역사 왜곡 시도에 항의하고 잘못된 역사 인식을 바로잡기 위해, 홍보 영상을 만들거나 독립운동 유적지에 비치할 안내서를 발간하고 한국어 간판을 제작해 기부하는 등의 활동을 해왔다. 서 교수는 일 년 중 여섯 달은 해외에 있을 정도로 출장이 잦다. 그는 아무리 일정이 빡빡해도 여유 시간으로 반나절 정도는 꼭 마련해둔다고 한다. 관리를 전혀 받지 못해 방치돼 있거나, 이름은 알려져 있으나 안내 시설 등이 노화돼 찾기 힘든 유적지가 있는지 두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다. 서 교수는 다니면 다닐수록 관리가 부족한 지역이 많다는 것을 실감한다고 했다. 하지만 유적지를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려면 지속적인 관심과 방문이 필요하다. 관광객들의 방문이 이어지면 현지에서도 해당 장소를 관리하기 위해 신경을 쓰게 되고, 관리가 잘 된 유적지를 방문해 좋은 인상을 받은 관광객들은 입소문을 내며, 그로 인해 점차 방문객이 늘어나는 흐름이 만들어지기 때문. 이러한 선순환이 많은 유적지에서 동시에 일어난다면, 시민들의 전반적인 역사 인식도 향상되는 결과까지 기대해볼 수 있다. 그가 다크 투어 분야에 뛰어든 것은 2019년. 여태 해오던 일을 확장시켜 ‘이제는 내가 직접 나서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 각지를 돌며 직접 보고 느낀 점을 다른 사람들과 나눠보고 싶다는 마음에서였다. 뜻이 맞는 여행사를 찾은 그는 직접 다녔던 루트 그대로 여행 코스를 짰고, 다달이 진행되는 모든 프로그램에 재능기부 차원에서 참여하며 정성을 들였다. 지금까지 서 교수와 함께하는 여행사 ‘자유여행기술연구소 투리스타’ 역시 실비만 받고 다크 투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홍보학자, 현장에 직접 나서다 첫해의 성공으로 시즌2를 계획하던 2020년 2월, 코로나19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아쉬움을 삼키며 온라인으로만 활동해야 했던 서 교수는 지난 2월 말, 3년 만에 오프라인 다크 투어 프로그램 ‘항일운동 역사투어’를 진행했다. 삼일절을 기념하고자 기획한 프로그램이라 목적지는 전라남도 완도군 소안도로 결정했다.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주민만 스무 명이 넘고, 그 후손들은 일 년 내내 태극기를 걸어둔 채 생활해 ‘항일의 섬’, ‘태극기의 섬’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곳이다. 함경도 북청군, 부산시 동래군과 더불어 국내 3대 항일운동 성지로 불리지만 인지도는 훨씬 낮다는 점이 아쉽던 차, 이번 기회에 소안도를 제대로 소개해보리라 마음먹은 것. “이번에는 45인승 차 한 대를 빌렸어요. 이 차만 다 채워도 성공이라고 생각했죠. 인기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을 통해 일본 하시마 섬(군함도)에 대한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고, 배우 송혜교 씨의 후원으로 해외에 있는 독립운동 유적지를 소개하는 안내서를 온·오프라인으로 발간하는 등의 활동이 매체를 통해 많이 소개되면서 다크 투어에 관심 갖는 분위기가 고조되던 2019년과는 상황이 다르니까요. 그런데 웬걸, 막상 신청을 받아보니 사람들이 너무 몰려서 함께할 분들을 ‘선정’해야 했어요. 놀랄 수밖에 없었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소안도의 항일운동 유적지를 찾아온 것은 처음입니다.” 소안도에서 만난 지역 해설사의 한마디는 서 교수를 포함한 모두의 마음에 큰 울림을 남겼다. 그는 40여 명과 함께 소안도 외에도 국내 최대 강제노동 지역인 ‘옥매광산’, 안중근 의사 위패가 있는 ‘해동사’를 찾았다. 사람들은 설명을 들으며 함께 분노하고 슬퍼했다. 성공적인 다크 투어의 필요조건으로는 좋은 스토리텔링이 있다.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장소를 방문해 그곳에 대한 단편적인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 역사적 사건이 일어날 당시 우리나라가 처한 상황은 어땠는지, 우리 조상들은 하필 이 지역에서 운동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잘 짜인 하나의 이야기처럼 전달하는 것이 필요하다. 서 교수는 더욱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역사적 사건 발발 당시의 현장 사진을 큰 종이에 출력해오기도 하고, 지역 해설가를 섭외하기도 한다. 좋은 스토리텔링을 위한 사전 준비가 탄탄해야 관광객들이 현장에서 더욱 감명받고, 그렇게 느낀 교훈을 오래도록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적재적소에 더해지는 서경덕 교수의 너스레는 분위기가 과열되지 않도록 막아주는 역할을 했다. 또 일정이 끝난 뒤 지역 대표 맛집에서 여행의 고단함을 해소하는 시간을 꼭 가졌다. 아무리 의미와 교훈이 중요한 여행이라도, 여행만의 잔재미를 느낄 구간 또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는 역사학자도 아니고, 여행 전문가도 아니에요. 역사적 지식을 어떻게 해야 잘 홍보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사람이죠. 다크 투어를 통해서 몰랐던 역사적 사실을 깨닫고 교훈을 얻는 일도 물론 중요하지만, 핵심은 입소문이죠. 그래야 좋은 후기들이 퍼져서 더 많은 사람들이 유적지를 찾고, 그렇게 우리의 소중한 유적지를 지켜 후대에 물려줄 수 있을 테니까요. 그래서 소안도를 함께 방문했던 분들도 ‘SNS 홍보단’이라고 부르면서 많이 공유해달라고 부탁드렸어요.” 앞으로 3년이 적기인 이유 서경덕 교수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국내 유적지와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명소를 돌아보는 여행 프로그램을 구상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사와 문화를 알리는 홍보 방식으로 다크 투어를 어떻게 확장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떠올린 갈래다. “코로나19 대유행을 계기로 오히려 K-콘텐츠들이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요즘입니다. 이제 해외여행도 자유로워졌으니 그 어느 때보다 우리나라에 관심을 갖고 한국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이 많으리라 생각해요. 개인적으로는 올해 외국인 관광객 3000만 명 시대가 열리지 않을까 예상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2025년까지의 행보가 중요해요. 그들이 관심 있어 하는 먹거리, 화려한 경복궁, 대도시 서울의 모습을 보여줌과 동시에, ‘당신들이 관심을 가지는 우리나라에는 사실 이런 아픈 역사도 있습니다’ 하고 유적지도 방문하게끔 하는 거죠. 당장 올해는 정전 70주년이자 한인 이민 120주년이에요. 그러니 한국전쟁과 연관 있는 배우들을 초청해 기념행사를 진행하거나, 유해 발굴 현장을 외국인이 직접 방문하는 식의 프로그램을 기획해도 괜찮겠죠.” 공식적인 행사나 프로그램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아쉽겠지만, 그렇다고 귀중한 시기를 그냥 흘려보낼 수는 없다. 그는 자신이 진행한 다크 투어 코스를 SNS에 모두 공개하고 있다. 한국 문화 알림이로 유명세를 탄 서 교수의 개인 SNS 계정을 구경하던 누군가가 한 명이라도, 한 번이라도 더 찾아오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다크 투어는 굉장히 효과적인 홍보 방식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꾸준히 참여하고 발전시켜야 합니다. 3040 부부가 아이와 함께 가족 여행으로 다른 지역을 방문할 때 그 지역의 유적지를 짧게나마 다녀오는 일이 일상화됐으면 해요. 이런 문화가 자리 잡기까지 몇 년이 걸릴지 모르겠지만, 그때까지 저도 최선을 다해보려고 합니다.”
- 2023-05-16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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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드뉴스] 빈둥지 노는 방, 진짜 노는 방으로 탈바꿈하기
- 노후의 집에는 새로운 인생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혼자만의 취미를 즐기거나, 지인들과 함께할 수 있는 공간이 대표적이다. 자녀가 독립한 뒤 남은 '노는 방'을 진짜 노는 방으로 변신시키는 팁을 소개한다. 오랜 친구들과 함께, 모임방 여러 명이 한데 모여 수다 떨고, 가볍게 와인 한잔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 1) 평상을 놓아보자 여러 명이 둘러앉아 대화하기 편할뿐더러 실용성까지 충족할 수 있다. 바닥을 한 층 높인 형태라 아래에 수납공간을 만들 수 있기 때문. 2) 공간의 리듬감은 조명으로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에는 메인 조명 이외에 테이블 램프나 브래킷 등 여러 개의 조명을 사용해보자. 밝기의 정도에 따라 리듬감 있는 공간이 만들어진다. 오로지 나만을 위한 취미방 취미를 즐기며 제2의 인생까지 꿈꿔볼 수 있는 공간 1) 벽은 제2의 수납공간 공간이 작아 수납할 가구를 두기에 한계가 느껴진다면? 벽에 행거나 선반을 설치해 수납공간으로 활용해보자. 2) 소파로 재미와 휴식을 한 번에 편안한 의자나 리클라이너 소파를 배치해보자. 취미와 휴식을 한 번에 즐길 수 있는 아지트가 완성될 것이다.
- 2023-05-16 0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