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에 다닐 때였다. 우리 아파트 부녀회장이 필자더러 동 대표에 출마해보라고 권유를 했다. 아파트 동마다 대표가 있고 그 대표들 중에서 전체를 총괄하는 동 대표 회장이 있다. 그동안 필자를 지켜보았는데 경험도 많아 보이고 부지런해서 동 대표 일을 잘할 것 같다고 부연설명까지 했다. 그래서 직장에서 사적인 일을 못하게 해서 할 수 없다고 완곡하게 사양했다.
직장에서야 근무시간 이후에 일어나는 개인적인 일에는 관여하지 않지만 필자에게는 동 대표에 얽힌 안 좋은 기억이 있다. 과거에 직장으로 투서가 날아왔기 때문이다. 그 내용은 회사 직원 모씨가 아파트 동 대표 일을 하고 있는데 근무시간에 동 대표 회의를 주제하는 등 근무를 태만히 했으니 처벌하라는 고자질이었다.
모씨를 불러서 사유를 들어보니 아파트 주민의 관리비 절감을 위해 경비를 몇 명 해고하는 과정에서 해고된 경비가 앙심을 품고 여기저기 진정을 하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아파트 관리비 절감을 위해 아파트 출입문에 자동출입자 감시 장치를 붙이고 경비원을 해고하는 일이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자동화 설비로 입주민의 관리비 부담은 줄었지만 해고되는 경비는 사생결단을 하고 덤벼들었다. 직책에 충실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구설수나 모함에 빠지게 된다. 그것이 필자가 동 대표를 맡지 않으려는 이유였다.
그러나 퇴직을 하고 나니 더 이상 거절할 명분도 없어지고 돌아가면서 맡는다는 심정으로 출마를 하고 주민투표로 당선되어 2년의 임기 두 번을 잘 마쳤다. 더 이상은 동 대표를 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제정되어 있어 홀가분한 마음으로 원래 자리인 주민의 한 사람으로 돌아왔다.
아파트 동 대표의 비리에 관한 사건들이 종종 신문이나 방송에 오르내리곤 한다. 비리를 막으려면 주민들이 깨어 있어야 한다. 첫째, 능력 있는 동 대표를 뽑아야 한다. 회계장부를 볼 줄 알고 상식적인 시설물 관리에 눈을 뜬 사람을 뽑아야 한다. 단지 인사성 밝은 좋은 사람으로는 부족하다. 둘째, 관리소장이나 관리소 직원을 적절하게 부릴 줄 알아야 한다. 크고 작은 아파트 유지 보수 건이 생기면 관리소 직원들이 자기 집 일하듯 시장조사를 하고 가격을 흥정하고 한 푼이라도 아낄 수 있도록 지시하고 관리감독을 해야 한다. 적당히 복수경쟁을 하도록 하고 영수증 처리나 하면서 나는 부정비리와는 관계없다고 생각하는 태도 또한 옳은 자세가 아니다. 미리 시장조사를 해서 예상 비용을 알고 입찰을 보는 것과 무조건 입찰을 보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셋째, 관리비 절감을 위해 아파트 공동 유지비용 절감에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한다. 필자는 지하주차장의 노후화된 재래식 안정기 형광등을 LED 등으로 바꿔 전력요금을 대폭 낮췄다. 개인재산인 보일러 같은 시설물을 교체할 때는 희망 세대수를 파악해 업체와 가격경쟁을 협상했다. 공동구매는 가격인하의 결정적 무기가 된다. 넷째, 주민들이 살기에 쾌적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근무자들이 신바람나게 일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줘야 한다, 관리소 직원이나 경비원 청소부도 고용안정이 최우선이다. 급여를 쥐어짜 다른 아파트보다 적게 주려고 하면 안 된다. 많이는 못 줘도 남들만큼은 줘야 한다.
한 개의 아파트 동만 해도 시골 마을 전체의 세대수와 비슷하다. 주민은 더 많고 더 젊다. 지적 수준도 월등하고 역동적이다. 그러나 반상회를 하면 참여율이 저조하다. 살기 좋은 쾌적한 아파트를 만들기 위해서는 주민 모두가 참여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최우선이라는 것을 알리고 물러나니 홀가분하다.
10월 1, 2, 3일은 연휴였다. 9월 말까지 끝내야 할 프로젝트들이 있었다. 다 끝내지는 못했지만 쉬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여름휴가도 못 가고 매진하다 보니 에너지가 고갈되는 느낌이었다.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해진 머릿속도 풀어야 했다. 그래서 9월 중순 추석 전에 휴가 계획을 잡았다. 탁 트인 순천만을 보며 가슴을 펴고 싶었다. 시간이 되면 담양 대나무 숲도 보러 가고 싶었다. 이렇게 아무 준비 없이 여행을 떠난 것은 처음이었다. 젊었을 때는 사전조사도 하고 숙소도 미리 예약하는 등 유난을 떨었는데 이제는 다 피곤하기만 했다.
순천으로 떠나는 날, 연휴가 중국 연휴와 겹쳐 관광객들로 붐비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러나 순천시까지는 무난하게 도착했다. 그런데 인터넷에서 얼핏 본 전통 초가 민박집에서 하룻밤 묵으려고 순천시에서 순천만 쪽으로 출발했는데 도착해서 전화하니 엉뚱하게도 반대 방향이라는 것이었다. 무려 22km나 더 가야 했다. 순천만 쪽에는 민박, 펜션 등이 이미 다 차버려서 난감한 상황이었다.
초가집 연락처는 집 전화밖에 없었다. 할머니가 전화를 받았는데 귀가 안 들리는지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순 전라도 사투리라서 알아듣기도 어려웠다. 낙안읍성으로 오라는데 낙안읍성은 처음 듣는 지명이었다. 게다가 주차장으로 오라며 주차장을 ‘주치장’이라고 발음했다. 상황을 보니 할머니는 ‘펜션’, ‘내비(게이션)’이라는 말은 아예 못 알아듣는 것 같았다. 상호도 없고 세 번째 집이라는데 정말 막막했다. 일단 낙안읍성을 찾아갔다. 정문 옆에 넓은 주차장이 보이길래 도착하자마자 전화를 했다. 그랬더니 주차장에서 한 시간이나 비 맞고 기다리다가 방금 집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스마트폰으로 초가집 사진을 보여줬더니 그곳에는 초가집이 수십 채나 된다고 했다. 할머니에게 겨우 전해들은 ‘박물관’, ‘교회’ 등을 물어봐도 모른다고 했다.
날은 어두워지고 비까지 내리는 데 암담했다. 이리저리 헤매다 보니 파출소 불빛이 보였다. 다시 전화를 걸어 이번에는 경찰관과 직접 통화하게 했다. 그제야 경찰관이 직접 데려다 주겠다며 차 시동을 걸었다. 경찰차는 낙안읍성을 향해 갔다. 교회를 지나 작은 다리를 건너고 논길을 지나니 낙안읍성 남문(쌍정루)이 보였다. 그리고 옆에 ‘남문주차장’이라는 작은 주차장이 있었다. 주차장이라기보다는 성벽 밑 공터였다.
그렇게 해서 겨우 할머니를 만났다. 얼굴이 검게 타고 주름이 가득한 80대 중반의 전형적인 농촌 할머니였다. 할머니를 따라 낙안읍성 안으로 들어가니 여러 채의 초가집이 밀집되어 있었다. 할머니 집은 과연 남문에서 세 번째 초가집이었다. 민박집이 성 안에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할머니가 싸리나무로 만든 대문을 열 때 시설이 너무 열악하지 않을까 순간 걱정이 되었다. 전형적인 시골집 구조로, 마당이 있는 ‘ㄴ'자 집이었다. 방문을 여는데 도배는 새로 했지만 창문 하나 없는 작은 방이었다. 화장실도 따로 떨어져 있었다. 할머니는 내가 다른 곳으로 갈까봐 몸이 달아 있었다. 주차장에서 한 시간이나 나를 기다리는 동안 전화를 못 받아 다른 손님을 놓쳤다며 투덜거렸다. 그러나 방이 4개나 되는데 손님이라고는 나밖에 없었다. 숙박료는 5만원이라고 했다. 아침에 돈을 줘도 되지만 미리 줬으면 하는 눈치였다. 흔쾌히 5만원을 줬더니 요즘 가짜 돈이 많다며 의심을 했다. 눈도 어둡고 할머니라 피해 사례가 있었던 모양이다. 칼라 복사기로 정교하게 복사한 위조지폐라면 속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설도 열악한데 5만원이나 받는 게 비싼 느낌이었지만 그냥 짐을 풀기로 했다. 그리고 서둘러 근처 음식점으로 나가 늦은 저녁식사를 했다. 비가 와서 날씨가 좀 쌀쌀하다고 했더니 보일러를 틀어줬다. 아침에 일어나니 할머니의 표정이 훨씬 편안해 보였다. 아침 간식을 좀 나눠줬더니 고마워했다. 전날 저녁의 경계심은 다 풀어지고 어머니 같은 따뜻한 표정이 보였다. 잘 자고 간다니까 마당 감나무에서 감을 따더니 가면서 먹으라며 건넸다. 바로 전라도 인심이었다.
아침 식사를 하고 주변을 돌아보니 여러 채의 초가집들이 민박집으로 운영되고 있었는데 나름대로 예쁘게 꾸며 놓고 있었다. 마당에 잔디가 깔린 집도 있고 방안에 화장실욕실이 있다는 민박집들도 있었다. 일률적으로 숙박료는 5만원인데 가장 열악한 집을 골랐던 것이다. 할머니에게 도움을 줬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낙안읍성은 조선시대 왜구의 노략질에 방어하기 위해 만든 읍성으로 읍성 내에 주민이 직접 살고 있다는 점이 다른 읍성과 다르다.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잠정 목록에 등재되어 있다고 한다. 여러 가지 볼거리도 많은 편이다. 바로 옆 근처에 70년대 유명 잡지였던 ‘뿌리깊은나무’ 박물관이 있다. 잡지와 다른 유물들도 깔끔하게 전시되어 있다.
불면증의 시대다. “나는 불만 끄면 잔다”는 행복한 사람은 요즘 찾기 힘들다. 특히 전체 불면증 환자의 68%가 50세 이상이라는 기사로 미뤄봤을 때 독자의 수면시간도 안녕하지는 못할 듯하다. 그래서 준비했다. 잠들지 못하는 ‘가련한 영혼’을 잠의 신세계로 빠뜨려 줄 아이디어 상품! 글 권지현 기자 9090ji@etoday.co.kr
기능성 베개, 잠의 질을 바꾸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최근 5년간(2009~2013) 디스크 진료현황 자료를 분석했다. 그 결과 목디스크 환자가 약 70만 명에서 90만 명으로 근 30%나 늘었다. 과거의 목디스크는 보통 노화가 시작되는 40~50대에나 오는 퇴행성 질환으로 여겼다. 지금은 과도한 스마트폰과 노트북 사용 혹은 익스트림 스포츠에 의한 부상으로 20~30대에서도 나타나는 흔한 병. 따라서 목 건강, 더 나아가 잘못된 습관이 가져다 준 틀어진 몸의 균형을 잡기 위해 기능성 베개에 대한 관심이 높다. 인터넷 검색창에 ‘기능성베개’라고만 쳐도 다양한 모양과 가격의 베개가 시선을 끈다. 그중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두 제품을 소개한다. 바로 전문물리치료사출신이 개발한 ‘가누다 베개’와 자생한방병원이 개발한 ‘자생추나베개’다.
소지섭 베개로 유명한 가누다 베개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 균형 있고 편안하게 잘 가누다’라는 의미의 가누다 베개는 배우 소지섭이 광고모델로 등장해 더욱 유명해진 베개다. 가누다 베개는 두개천골요법이라는 도수치료법을 응용해 만들었다. 인체의 두개골 구조와 뇌척수액의 흐름을 기초로 바른 수면자세를 도와주는 것. 전문물리치료사가 할 수 있는 도수치료기법(손으로 직접 치료하는 기술)인 후두두개골기저부이완법(목덜미를 풀어주는 기술)과 제4 뇌실압박법(CV4효과: 뒷머리를 지긋이 눌러주는 기술) 등을 응용해 물리적 압력 없이도 잠을 편히 잘 수 있게 해주고 불면증을 완화해 준다고 설명한다. 특히 머리와 뒷목이 이어지는 부분을 부드럽게 받치고 지지해주어 C 자형 목(경추)을 유지해 준다. 자는 동안 치료를 받듯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고안했다. 누울 때 어깨 눌림이 덜해 편하며 옆으로 누워도 어깨와 귀가 눌리지 않도록 설계했다. 가누다 베개는 크게 블루라벨 알레그로와 골드라벨 두 종류로 나뉜다. 블루라벨 알레그로는 대, 중, 소, 주니어 사이즈가 있다. 골드라벨은 보조패드가 있어서 높낮이 조절이 가능하나 블루라벨 알레그로보다 약간 높다. 고밀도 항균 메모리폼과 소취 항균섬유를 사용했으며 생활방수가 된다.
가격은 블루라벨 알레그로 22만8000원, 골드라벨 15만8000원이다. 하지만 인터넷이나 홈쇼핑을 이용하면 더 저렴한 가격과 사은품을 받아볼 수 있다.
자생한방병원의 야심작 자생추나베개
척추전문 한방의료기관인 자생한방병원은 오랜 경험과 축적된 지식을 바탕으로 정기적인 치료를 받기 힘들거나 목 통증이 재발하는 환자들을 위해 자는 동안에도 건강한 C 자형 목으로 유지해 주는 자생추나베개를 개발했다. 두상의 압력뿐만 아니라 소재, 통기성, 발수기능을 두루 고려했다. 자생추나베개는 바른 자세로 누웠을 때 뒷목이 들뜨지 않게 전체를 받치는 곡선형으로 설계했다. C 자형 목을 위해 베개 중앙(목과 머리 경계 부위)에 가로로 ㄷ자 모양의 절개라인을 만들어 목 길이에 상관없이 목의 압력을 골고루 분산해 누구나 편안함을 느낄 수 있게 했다. 옆으로 누웠을 때 척추가 휘지 않을 어깨 높이인 10~15cm를 고려해 베개 높이 또한 맞췄다. 이 베개는 얼굴을 감싸주는 유선형으로 턱이 틀어지지 않게 부드럽게 감싸주며 어깨 안쪽 끝까지 베개가 닿게 만들어 잠에서 깬 뒤 어깨나 팔 저림을 최소화했다. 높낮이 조절패드로 두상 생김새에 맞춰 베개를 조작할 수도 있다. 베개 뒷부분에는 목의 피로를 실질적으로 풀어주는 지압봉 6개를 부착했다. 자생추나베개는 메모리폼이 아닌 공기 세포 모양의 결정구조처럼 생긴 ‘노그노플렉스2소재’를 사용했다. 작은 공기구멍으로 통기성을 유지하고 각기 다른 사람들의 두상과 자세에 맞게 섬세하게 변형되고 원형으로도 회복이 빠른 신소재다. 자생추나베개는 정품 한 개 22만9000원이고 이 제품 또한 각 쇼핑몰에서 다양한 구성과 방법으로 구입할 수 있다.
심신 안정과 숙면이 필요할 때 ‘멘탈닥터’
멘탈닥터는 집에서 누구든지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심리 안정과 개선을 돕는 기구다. 멘탈닥터는 안구운동을 통해 심리불안의 원인이 되는 나쁜 기억을 긍정적인 기억으로 유도하고 과거 상처도 재인식할 수 있게 해 준다. 멘탈닥터를 안경처럼 착용하고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귀로 들리는 지시를 들으며 눈에 보이는 파란 불빛을 따라 눈동자를 움직인다. 이렇게 이어폰으로 들리는 이야기와 함께 안구운동을 반복하면서 뇌 기억에 갇힌 신경세포의 정보를 모아 부정적인 기억들로 인한 감정을 제거해 마음의 고통을 해소해 숙면할 수 있도록 도움 받는다. 안구운동뿐만 아니라 정서적 안정감을 찾을 수 있도록 명상과 음악을 병행한다. 내레이션에는 호흡과 명상, 이미지 요법, 암시 효과, 근육 요법, 자율신경 훈련법 등 여러 가지 심리기법이 적용돼 불면증 개선에도 도움을 준다. 작동 진행 과정과 음원을 이용자 상황에 맞는 콘텐츠를 홈페이지를 통해 무상으로 제공받을 수 있다. 상담을 통해 맞춤 콘텐츠도 제공한다. 특히 마음 건강과 부정의 기억을 처리하거나 증상에 따른 콘텐츠, 명상호흡 등 각박한 삶 속에서 마음의 여유를 주는 콘텐츠를 끊임없이 연구하고 소비자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가격은 멘탈닥터 아이스캔(패밀리고급형)이 49만5000원이다.
집 안 캠핑족이 늘어난다 ‘따수미난방텐트’
집에서 웬 텐트냐고 하겠지만 생활텐트 전문기업인 아이두젠의 ‘따수미난방텐트’는 집 안에서 사용하는 것이 맞다. 2014년 출시됐을 때 ‘텐트계의 허니버터칩’이란 이름이 붙었을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다. 당시 아이두젠 공식 홈페이지의 10종류 텐트가 품절이 될 정도였다. 일명 수면텐트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에 들어가서 자면 따뜻하게 온도가 유지돼 잠이 잘 들기 때문이다. 따수미난방텐트가 인기를 얻게 된 이유는 가정에서 쓰는 텐트를 바라보는 시각을 달리했기 때문에다. 우풍이 심한 집에서는 난방텐트가 잠만 자는 공간이 아니라 생활공간일 수 있다. 실내에서 활동을 할 때 가장 제약이 덜 가는 구조로 설계해 현재 ‘디자인특허 출원’에 등록했다. 공기순환이 좋은 실내용 원단을 사용해 내부온도는 강하게 유지하고 수분과 습기는 외부로 배출할 수 있게 했다. 텐트 안이 건조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젖은 수건을 걸 수 있는 고리와 구멍도 만들었다. 따수미텐트의 난방효과는 한 예능프로그램에서도 입증한 바 있다. 올해 초 KBS에서는 가정집 안방에 보일러를 그냥 가동했을 때와 따수미텐트를 설치했을 때를 비교해 온도가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실험했다. 보일러를 켜고 1시간 후 실내 안방 온도는 21.9℃이었는 데 반해 따수미 난방텐트 내부 온도는 26℃로 4℃ 이상의 차이를 보였다. 가습효과도 30% 이상 나타나 난방비를 절감하는 탁월한 효과를 보였다. 따수미난방텐트는 사이즈별로 2만원대에서 7만원대까지 다양하다.
잠들기 참 쉽죠? ‘따스안 온열안대’와 ‘레그셀루션’
마지막으로 초간단 잠드는 방법이다. 바로 ‘온열안대’와 다리의 피로를 풀어주는 ‘레그셀루션’이다.
평소 느끼지 못하지만 남녀노소 누구나 TV나 스마트폰 등 전자기기 사용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외선 노출로 인해 눈의 피로 또한 쌓여만 간다. 이때 필요한 것이 온열안대다. 시중에 눈의 피로와 스트레스를 달래는 다양한 안대들이 다양하게 출시돼 있어 원하는 가격대와 사이즈를 구매하면 된다. 온열안대는 PC와 스마트폰을 많이 사용하는 직장인과 장거리 여행이나 출장을 떠나는 여행객이 꼭 가지고 가야 할 필수품이다. 책을 많이 보는 취업준비생과 수험생, 잠을 잘 못 이루거나 숙면이 필요할 때 간편하게 눈에 쓰고 있으면 금세 잠을 청하게 된다. 마나술의 따스안 온열안대의 경우 40도까지 온도가 올라가 눈 주위가 촉촉하게 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안구 건조증이 있거나 눈이 자주 뻑뻑한 사람이 사용하면 좋겠다. 별도의 향을 첨가하지는 않았으나 주 재료인 황토향이 아로마향처럼 얼굴 한가득 퍼진다. 기분이 쉽게 풀리면서 편안해지는 장점이 있다.
레그셀루션은 종아리나 발목에 붙이는 파스라고 생각하면 된다. 대신 실제 파스보다 청량감이 좋고 촉촉하다. 다량의 수분을 함유한 고밀착 하이드로겔 성분이 다리에 수분을 서서히 공급해 붙이고 있는 동안 상쾌함과 시원함을 느낄 수 있다. 장시간 걷거나 서 있을 경우, 오랜 시간 앉아 있어서 다리가 붓거나 뭉치면 잠들기도 쉽지 않다. 피곤한 부위에 붙이고 쉬면 피로가 풀리면서 몸이 노곤해진다. 따로 마사지를 하거나 사우나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레그셀루션을 꼭 써보기 바란다.
낮잠. 어린이집에 간 손자, 손녀만 청하는 것이 아니다. 어른도 낮잠 자는 시대다. 도시 생활에 지친 이들이 잠시라도 편히 쉴 곳, 잘 곳을 찾아 나서고 있는 세상. 노곤하고 피곤한 삶을 보듬고 치유하고자 낮 시간 잠시라도 누울 자리를 찾고 또 내어주는 곳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낮잠이 관심의 중심에 있다.
글 권지현 기자 9090ji@etoday.co.kr
수면시간은 적고 스트레스는 높고 “낮잠을 팝니다.”
‘낮잠 카페’ 혹은 ‘힐링카페’가 도시 곳곳에서 성업 중이다. 체인점화된 업체에서부터 크고 작은 사업장까지, ‘잠’, ‘피로’, ‘힐링’이 산업의 아이콘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상상도 못했을 일. 책상에 누워 잠깐 쉬면 될 것이 사업이 됐다. 낮잠 카페 등 소위 ‘힐링 사업’이 늘어난 것은 한국인의 잠 부족과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와 관계가 깊다고 말한다.
2014년 OECD 18개국의 평균 수면시간을 조사한 결과 우리나라는 7시간 49분으로 꼴찌. 1위 프랑스와 1시간 차이가 났다.
고용노동부가 발간한 ‘2016 통계로 보는 우리나라 노동시장의 모습’에서 한국 노동자의 은퇴 시기는 2014년 기준 남성 72.9세, 여성 70.6세다. OECD 국가의 평균 노동자 은퇴 나이가 남성 64.6세, 여성 63.2세인 것에 비해 7~8년은 더 오래 일하는 셈.
이렇게 잠 덜자고 일은 많이 하니 자연스레 낮잠, 피로 회복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 아닐까. OECD의 ‘2016 고용동향’에 따르면 2015년 기준 한국인 1인당 평균 노동시간은 연간 2113시간으로 34개 회원국 가운데 멕시코(2246시간)에 이어 2위다. 이OECD 34개 회원국 평균 1766시간보다 347시간이나 많았다.
낮잠 이색 공간 ‘여의도 CGV 씨에스타’
현재는 여의도CGV에서만 운영하는데 이용객 추이를 살펴 점차 다른 지점으로 늘려나갈 계획이다. 낮잠 장소로 이용되는 곳은 바로 프리미엄관. 대체로 직장인의 점심시간이 시작되는 오전 11시30분부터 1시까지 운영한다. 잠들기 좋은 어두운 조명에 아로마 향과 뉴에이지풍 음악을 방안 가득 채운다. 좌석마다 촛불형태의 수면등으로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편안한 숙면을 위한 허브티에 담요 등을 놓아 정말 낮잠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만전을 기했다.
특히 CGV 프리미엄관 중 가장 최근에 생긴 곳이기에 그 어떤 관보다 안락한 좌석에서 편안한 낮잠을 즐길 수 있다. 왼쪽 팔걸이 안쪽의 버튼을 누르면 의자가 쫙 펴지면서 편안하게 누울 수 있다. 좌석은 좌우로 남성, 여성석, 중간 좌석은 커플석으로 배치했다. 이용자 양옆으로는 티켓을 판매하지 않아 보다 개인적인 시간을 보낼 수 있다고. 힐링 카페처럼 안마의자는 아니지만 부드럽고 안락한 의자에서 최대한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씨에스타에는 이용객을 살피는 ‘미소지기’가 상주해 잠을 깨워주는 등 필요한 것들을 제공한다. 여의도 유일한 낮잠 공간을 꼭 한 번 이용해 보시길.
이용 요금 1만원(음료, 담요, 안대, 실내화 등 제공)
낮잠 카페 ‘미스터힐링’과 ‘퍼스트클래스’
낮잠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는 힐링 카페 두 곳을 찾아갔다. 고른 연령대가 이용한다는 체인형 힐링 카페인 ‘미스터힐링’과 ‘퍼스트클래스’ 명동점을 찾았다. 두 곳 모두 기본은 전신 마사지기를 이용한 서비스로 개인 부스와 커플 부스를 운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덧신과 손 세정제를 제공하는 것과 서비스 후 음료를 제공하는 것도 같은 점이다. 하지만 엄연히 다른 콘셉트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어 취향에 맞게 골라 이용해야 한다.
미스터힐링 (명동 인터내셔널점)의 장점은 음료를 마시는 공간(1,2층)과 휴식 공간(지하1층)이 분리돼 있다는 점이다. 전신 마사지기 위에서 쉬는 동안 외부 소음이 적어 쉽게 숙면할 수 있었다. 실내 전체에서 느껴지는 아로마 향과 낮은 조명, 음악, 부스마다 설치된 그림들이 휴식에 도움을 준다. 전체적으로 따뜻하고 심신의 안정에 중점을 두어 구성한 것이 이용객에게 사랑받는 비결이다. 이용 요금은 30분 코스 9000원(20회/15만원)이고 50분 코스는 1만3000원(10회이용권/9만원)이다.
‘퍼스트클래스’ 는 공항을 연상하게 하는 인테리어 때문일까? 여행가방 하나쯤 들고 티켓 부스 앞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할 것 같다. 피로를 푸는 방 또한 항공기 1등석처럼 꾸며 놓아 재미를 더했다. 퍼스트클래스는 음료 카페와 마사지 부스가 같은 층에 있다. 대신 마사지를 하면서 눈 안마기를 동시에 사용하기 때문에 조도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는다. 퍼스트클래스 마사지 코스는 총 6개로 활력, 쾌적, 수면, 목과 어깨, 허리와 엉덩이, 공기 마사지로 구성돼 이 중 원하는 두 종류를 고르면 된다. 객실마다 개별 이어폰과 스마트폰이 있다는 점도 편리하다. 이용 요금은 7000원에서 1만 3000원가지 다양하며 소셜커머스에서 더욱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다.
서울혁신파크의 '공간 휴'
‘공간 휴’를 말하기에 앞서 서울혁신파크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듯싶다. 서울혁신파크가 있는 곳은 서울시 은평구 녹번동 옛 질병관리본부가 있던 자리다. 오래전부터 아름드리 벚꽃나무로 유명했던 곳. 지금은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중이다.
공원 중심에 있는 미래청 건물 안에 바로 ‘공간 휴’가 있다. 창문 카페와 서고 사이, 천장 낮은 곳으로 사람들이 신발을 벗고 들어가 쉬는 곳이 바로 ‘공간 휴’다. 공원에서 책도 보고 이런저런 활동을 하다 좀 자고 싶으면 누구든지 누워 잘 수 있다. 많지는 않지만 베개와 이불도 준비돼 있다. 전기보일러가 설치돼 겨울에는 따뜻하게 이용할 수 있다. 조명이 있어 뒹굴면서 만화책을 보는 재미도 있지만 엄연히 잠을 자고 쉬기 위한 곳. 10분이고 1시간이고 잘 수 있다. 시민들에게 열린 공간이기에 이용료가 없는 대신 자기가 쓴 물건만 잘 정리하면 된다. 멋지고 화려한 것이 있는 곳은 아니지만 ‘쉼’이라는 단어가 기억에 남는 공간이다.
]지난 이야기를 써보려고 컴퓨터 앞에 앉아 기억과 씨름을 해보니 필자가 기억하는 시간이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필자의 첫 기억을 떠올려봤더니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언니. 고모. 이모 그들이 모두 함께 있다. 초등학교 입학식 때의 담임 선생님도 기억할 수 있고 3. 4. 5. 6 학년의 선생님들도 기억 속에 있다. 그러나 2학년 때 선생님은 아무리 생각하려고 해도 머릿속에 없다. 딱히 기억되는 동무도 없다. 왜 유독 건너뛰는지 인간의 기억이 재미있다. 언젠가 기억이 자기 혼자 스스로 살아 나올 때까지 기다려 보아야지. 이것이 치매 초기증상은 설마 아니겠지?
손이 귀한 집이었으나 모두의 바람과는 달리 아들은 필자의 남동생 하나밖에 없고 딸이 다섯이나 되었다. 맏딸과 바로 밑 남동생이 있었으니 둘째 딸 필자는 아무도 모르는 나름대로 출생 서열의 서러움이 종종 있었다. 지금도 필자의 성격 일부분을 지배하고 있음을 혼자 안다. 다른 사람과 다른 것을 경쟁력의 도구로 삼아야 한다는 이론을 믿는 성격이 필자에게 있다면 이 환경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짐작해 보기도 한다.
온종일 엄마는 시집살이에 너무 바쁘고 아버지는 정말 공평해서 저녁이면 남동생 빼놓고 언니와 필자만 양쪽 팔로 베게를 만들어 눕히고 우리와 함께 ‘아~ 목동들의 피리 소리들은 산골짝마다..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합창하였던 유년기 기억이 있다.
필자가 중학생이었는지 고등학생이었는지 오늘처럼 비가 오는 여름 어느 날 아버지가 가수 성재희의 ‘보슬비 오는 거리’ 레코드판을 사오셨다. 정작 듣는 건 한 번도 본적이 없지만 전축이라는 기계 위에 한번 잠깐 올려놓은 걸 본 적이 있다. 아버지가 그걸 사오신 것도 필자는 의아했다. 언제부터인가 아버지는 그냥 가족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런 유행가 음악이나 감성이 아버지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그때는 몰랐다. 엄마 아버지 그들은 스스로 삶의 도구가 되어서 희로애락을 떠나서 그냥 사는 것처럼 어린 필자의 눈에 비쳤다.
지금의 필자보다 훨씬 젊었던 시절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정서 한 가닥이 지금 필자의 정서 한가닥이 되어있음을 이제는 안다. 어머니, 아버지 그들은 제3의 성에 속해 있는 줄 알았지만 어른이 된 필자가 아버지를 돌이켜보면 켭켭 시집살이 속에 있던 엄마에게 아버지는 200% 따뜻한 남편이었을 것이라는 느낌이 있다. 실제로 필자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0년을 더 사시고 돌아가셨는데, 우리가 모두 주책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아버지 사후 10년 동안 아버지를 그리워하면서 사셨던 행복한 여자였었다.
1960년대 초반 지방 도시에서 서울로 이사를 왔으니 나름 일찍 서울에 터전을 잡은 편이라 사춘기 시절 종로구에 있던 필자의 집은 취직 등의 이유로 지방에서 올라온 친척들 없이 밥상에 앉았던 날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할아버지도 돌아가시고 고모들도 시집을 다 갔지만 육 남매를 비롯한 우리 식구 수도 만만치 않았는데 늘 손님까지 있던 집을 필자는 정상인 줄 알았고 거기에 대해서 별 불만이 없었다.
전학을 와서 다녔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여학교에 입학한 필자는 함께 등교하자고 약속한 친구의 집으로 좀 일찍 갔을 때 필자는 소리 없이 놀랐다. 친구의 집은 아침을 먹고 있었는데 식구가 어머니, 아버지, 동생과 친구 이렇게 네 사람이었고 그들은 식빵과 우유를 아침으로 먹고 있었다, 더구나 집에는 식탁이 있었고(필자는 이게 최고 부러웠다) 식탁 위 전등은 형광등이었다. 필자는 당시 형광등은 정말 부잣집에만 있는 것 인줄 알고 친구네 집이 바로 말로만 듣던 부잣집인 줄 알았다. 속으로 미국은 어떤 곳인지 몰랐지만 ‘이 집은 미국 같은 집이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친구의 집이 한없이 부러웠고 필자는 엄마를 조르기 시작했다.
‘엄마, 우리 집에 사람들 좀 못 오게 해. 우리도 식탁 사고 형광등도 달아. 그리고 아침을 양식으로 먹어.’ 이런 주문을 마구 하면서 날마다 졸랐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우리 집에는 할머니가 계시고 식구가 많아서 아침을 그런 거로 먹을 수 없다고만 대답했다. 필자는 ‘그렇게 간단한 딸의 부탁을 엄마는 왜 못 들어주나’ 라고 생각하고 사춘기 심통을 마구 부렸던 기억도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지방에서 오던 친척들이 점점 수가 줄면서 집을 수리하게 되자 동생과 필자가 함께 쓰는 방에 꼭 형광등도 달아 달라고 주문했는데 아버지는 집 전체 전등을 형광등으로 교체하고 어머니는 식탁도 샀다. 또 가끔은 양식(?)으로 아침도 차려 주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대가족이라는 게 다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특별히 인성교육을 강조해서 받은 기억은 없지만 여러 연령층이 함께하는 가족 집단에서 권리와 의무의 한계 같은 게를 자연스럽게 습득한 것 같기도 했다. 많은 사람에게 당연한 일로 여기며 따뜻한 밥을 해 먹였던 어머니나 대식구를 거느렸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면 그들 삶 자체가 존경의 대상이다.
집에는 빈약한 크기의 냉장고가 있긴 있었으나 지금 생각하면 대식구의 냉장고의 역할을 하기나 했을까 싶다. 더운 여름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참외와 토마토르 먹었는데 그들은 항상 그늘진 곳 빨간 고무 대야 수돗물에 동동 떠 있었다. 승용차나 대중교통 노선이 자유로웠던 시절도 아니고 배달이라는 것도 없었을 텐데 필자가 먹었던 그 많은 과일은 누구의 손에 들려서 집에까지 왔는지.
또 있다. 여름 방학이면 식구 단체로 만리포해수욕장에 가곤 했다. 필자는 해바라기 비슷한 정체 모를 꽃이 마구 달린 비닐 수영 모자까지 갖추고 갔다. 딸이 필자 하나도 아니었을 텐데 식구 전체가 해수욕을 가기 위해 혼자 걸어서 동대문시장을 왔다 갔다 했을 어머니의 모습이 그려진다. 만리포 숙소로 가기 위해 식구들은 지난한 투쟁을 감수해야 했다. 우선 새벽같이 단체로 시외버스에 올라 인천까지 간 뒤 인천에서 만리포로 가는 여객선을 4시간 이상을 타야 했다. 이뿐 아니다. 여객선이 바다에서 육지가 가까워져 올 때쯤 다시 나룻배를 갈아타고 해변에 내려서 직사광선 아래 모래밭을 한 시간 가까이 걸어야 그놈의 숙소를 만날 수 있다. 와중에 누군가 심지어 석유풍로라는 것까지 들고 갔던 것 같다. 도착하는 즉시 엄마는 석유풍로에 불을 피워 닭백숙 같은 걸 마구 끓이셨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피서였는지, 피난이었는지 구분 안 되는 행렬이었지만 정말 오랫동안 이 풍경을 기억할 것 같다.
그리고 할머니에 대한 기억. 할아버지 돌아가고 지금의 필자 나이쯤에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사 와서 서울이 낯설고 친구도 없는 할머니를 위해서 아버지는 야사로 된 ‘야담전집’을 사드렸다. 할머니가 요새 살아있었으면 아마 박사가 되시지 않았을까? 이런 전집류는 표지가 거의 딱딱한 하드보드로 되어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할머니는 들기도 쉽지 않은 이런 책을 밤낮없이 읽었다. 덕분에 필자는 할머니로부터 영창대군과 단종,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끝없이 들어야 했다. 처음에는 어린 영창과 단종의 이야기가 너무 슬퍼서 어린 필자는 들을 때마다 마음이 눈물 쏟았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는 한 단계 더욱 수준을 높여 삼국지까지 읽어서 유비, 장비, 관우, 조자룡과 제갈공명의 이야기를 또한 외울 때까지 들어야 했다. 어떻게 하면 집안에서 최대로 할머니와 멀리 있을 수 있을까가 필자의 최대 고민이었던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할머니에게 정말 많이 고마워하고 오래 기억해야 할 것 같다. 할머니가 더 오래 사셨다면 그리스 신화도 읽으시지 않았을까? 참고로 필자의 할머니는 1900년 이전에 태어나신 무학의 19세기이었고 독학으로 언문을 깨우치셨다고 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옛날 대구 삼덕동 재판소에 근무하셨던 당시의 법조인이라고 하셨다.
종로구 정든 집에서 15년 정도를 살다가 필자의 집은 강남이 시작될 즘에 아버지가 논현동에 주택을 지으시고 식구를 모두 데리고 이사를 하셨다. 말이 논현동이지 1974년도 필자의 집이 이사할 즈음 대중교통은 남산 순환도로를 돌고 돌아 제3한강교 (현 한남대교)를 건너서 신사동으로 진입하는 좌석버스와 서초동 칠성사이다 앞으로 오는 말죽거리행 시내버스가 전부였다. 사대문 안이 서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양재동은 참으로 머나먼 곳이었다. 버스가 한남대교를 지나 신사동으로 들어서면 아무 건물도, 가로등도, 네온사인도 없어서 해가 지면 사방이 어두워서 잘못 내리면 집 찾아가기도 어려웠다. 특히 방심해서 내릴 정류장을 놓쳐 말죽거리까지 가서 남동생이 말죽거리까지 데리러 나온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러나 필자는 그 집에서 얼마 살지 않고 결혼을 해서 그 동네를 탈출하여 미국에 갔었지만 그때 그 동네 풍경은 지금의 강남과 연결이 되지 않는다. 몇 년 만에 그리운 고향 집(?)에 돌아왔을 때 밤하늘 번쩍였던 신사동 후지필름 네온사인 불빛을 보고 ‘여기가 라스베이거스인가’ 라고 생각하고 혼자 웃었다.
꿈에 부풀어 이사하였던 그 당시 한 벌판에 서 있던 양옥집이라는 곳은 때맞춰 시작된 유류파동으로 방 하나에 보일러를 켜고 모든 식구가 모여 있어야 하고 화장실은 샤워는커녕 세수하기에도 추웠다. 유류파동이 아니더라도 하루가 멀다고 고장 나는 당시의 보일러는 집과 마음을 순식간에 얼려버렸다. 이 집은 필자 상상 속에 존재했던 양옥집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 집은 종로에 있었던 개조한 한옥에서 어머니, 아버지가 가꾸어 왔던 따뜻한 평화를 깨트릴 수도 있는 집이었다.
다만 1대뿐인 TV와 전화기 등의 문화기기가 집결되어 있었던 안방은 재미있었다. 식구 모두의 모든 문화생활이 한곳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고 모든 전화 대화는 자동으로 누군가에게 검열을 받아야 하는 씨스템이였으며 그 검열에 대해서 아무 불만이 없었고 가질수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그 써늘한 이층집에서도 재미난 에피소드도 있다. 지금은 미국에 사는 60세가 갓 된 재미있는 여동생의 이야기. 당시 최헌 가수의 ‘당신은 몰라’라는 노래가 있었다. 가라오케 노래방도 없었던 시절에 동생은 모나미 볼펜을 마이크 삼아 이 층 계단을 걸어 내려오면서 자기 흥에 이 노래를 매일 불렀다. 처음에는 ‘도대체 왜 저래?’ 하다가 나중에는 아무도 관심 두지 않았지만 그래도 동생은 썰렁했던 집에서 썰렁하기만 했던 필자보다는 1층과 2층을 연결하며 가족의 몫을 해 줬다.
이렇게 함께 살아왔던 필자의 형제들은 지금 다 제각기 바쁘게 나이 들어가고 있다. 같은 환경에서 육 남매가 살아왔는데 지금은 각자의 환경도 다르고 생각도 달라서 타인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가장 안타까운 건 바로 밑 남동생은 간경화로 투병 중이어서 일 년에 두세 번씩 입원하면서 지내고 있다는 점이다. 아들이 중요했던 집에서 그래도 아들만 둘을 두어서 엄마 아버지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어 자기 몫은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100세 시대’를 동생이 누렸으면 좋겠다. 필자는 필자의 자식들이 더 독립체가 될 때쯤에 기회가 되면 그들과의 생활로 이런 에피소드를 엮어보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마치겠다
미국 세탁소는 오후 7시까지 꼬빡 12시간 영업한다. 전 지역 어느 곳에서나 거의 똑같다. 드디어 이민생활 3년 만에 국제적 해변도시 산타모니카에 작은 클리너(세탁소)를 갖게 되었다. 필자의 가족은 커다란 꿈이라도 잡은 듯 잠을 이루지 못했고, 그것은 첫 번째 아메리칸드림이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100년이 넘은 건물, 세탁소 옆에는 이란 마켓과 침대 파는 곳이었다. 철창으로 된 세탁소 뒷문은 오랜 세월에 녹이 슬어 있었다. 50여 년 전통의 세탁소 철창문을 열고 들어갔다. 웅장한 각종 기계들이 새 주인을 맞으며 우뚝 자리를 잡고 서있었다. 낡고 수명을 다한 것들도 눈에 띄었다. 필자는 미국의 세탁소에는 낯이 설었고, 시커먼 바닥과 높은 천장에는 몇 십 년 묵은 먼지들이 너덜너덜 달려있었다. 마치 납량 영화 속 창고 같아 대대적인 청소를 시작했다.
매일 새벽 5시면 일어나서 먹을 것들을 준비하고 6시쯤 집에서 출발을 한다. 세탁소까지는 약 33마일로 40분 거리에 있었고, 405번 프리 웨이를 타고 산타모니카로 달려가는 새벽 공기는 아침을 산뜻하게 열어주었다. 신나는 팝송을 틀어놓고 남편과 함께 가는 길은 드림(꿈)만 같았다. 미국의 프리웨이는 부지런한 차량들로 이른 새벽부터 삶을 향해 거대한 불바다를 이룬다. 영락없이 6시 40분, 중고차는 덜덜거리며 세탁소에 도착했다. 미국의 몰(상가)들은 뒷문 쪽에 대체로 주차장이 마련되어있었다.
철창문을 열고 가게로 들어가 남편은 제일 먼저 전기 불 스위치를 올리고 가장 중요한 보일러를 켠다. 하루 시작을 알리는 웅~소리와 각종의 기계들이 뒤섞여 묘한 소리가 신고식을 한다. 진한 커피와 함께 초보 이민자 필자에게 남편은 이것저것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아침 7시가 되면 뜨거운 다림질을 해대는 멕시칸 2명이 도착하고 9시면 바느질 아줌마가 출근을 한다. 금발 머리 첫 손님과 남편은 한참 동안 수다를 떨었다. 미국 사람들은 남녀가 수다 떠는 것을 참 좋아했다.
남편은 전날 들어온 각종 세탁물에 손님마다 제각각 다른 색깔로 번호 딱지 붙이는 작업을 지시했다. 왜냐하면 손님들 옷들이 서로 뒤섞이면 찾아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얼룩 부위에는 빨간색 테이프를 붙여 그 위치를 선명하게 표시해주고, 옷 색깔 별로 분리해서 세탁 장소로 이동을 한다. 남편은 스팀 건(총)으로 우선 얼룩을 빼주고는 커다란 드라이 기계 통속으로 던져 버렸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기계 소음과 수많은 빨래들 속에서 필자는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도대체 남의 나라에서 때묻은 옷에 딱지를 붙이는 삶이 아무리 생각해도 꿈같지는 않았다. 클리너(세탁소)란 온갖 더러움으로 굴러 온 삶의 얼룩들을 깨끗하게 빨아주는 직업이다. 그야말로 3D 직업 중 하나로 지극 정성으로 노동을 투자해야만 달러로 연결된다. 옷 구석구석에 세심한 노력과 많은 땀을 흘려야 하는 아주 정직한 비즈니스였다. 아무리 곰곰이 따져봐도 결코 아메리칸드림이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사이 남편은 빨리하라고 독촉을 했다. 세세하게 주머니 속까지 먼지 하나 없이 털어내라고 하더니 느리다고 보채는 것이다.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었고, 반나절도 되지 않아 온몸이 쑤셔왔다. 남편은 필자가 오기 전부터 단단히 당부를 했었다. 미국은 노동으로 먹고살아야 한다며 몇 번을 확인해왔고, 필자는 알았다고 했지만 아무 개념이 없이 가족과 함께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태어나 생전 처음으로 피땀 흘리는 노동의 현실은 만만치가 않았다.
어느 날, 대형 보일러가 터졌다. 세탁소 모든 작업이 중단되었고 남편은 이리저리 뛰더니 거금을 들여 메카닉(기계 고치는 사람)을 불렀다. 그는 이민생활 30년 동안 아직도 떠돌이 생활로 미국 전 지역을 다닌다며, 필자 부부가 세탁소 하는 것을 엄청 부러워했다. 그는 필자에게 행복한 줄 알라며 충고도 했다. 자기는 방방곡곡 힘들게 일해도 수입은 겨우 먹고 살 지경이라며 푸념을 해댔다.
삶의 질을 찾아온 곳,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왔지만 결코 남들이 말하는 아메리칸드림은 실감 나지 않았다. 육체적 노동이 피부로 익숙해지기까지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필자의 머릿속을 혼란스럽고 어지럽게 하는 것은 정신적 안정감의 결함이었다. 갑자기 바뀐 환경 속에서는 저녁이면 초주검 되어 쓰러지고, 다음날 아침이면 또 일어나야만 낯선 곳에서는 살아갈 수가 있었다.
먼저 온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처음 와서 1년은 지옥 생활이고 2년쯤 되면 숨을 쉴 수가 있고 3년쯤 돼야 조금씩 미국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했다. 적어도 5년은 지나야 적응이 되면서 한국 생각이 덜 난다고 위로를 했다. 이민 생활에도 공식이 있었던 것이다. 그때까지 자신과 싸워가며 견딘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결국 며칠을 쓰러져 약에 의존했다. 병원은 한국보다 10배는 비싸서 갈 수도 없었다. 급기야 우울증까지 겹쳐오며 정신이상 증세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필자는 어스름밤이 찾아오면 아파트 앞에 쪼그리고 앉아 한국을 향해 울고 있었다. 남들이 말하는 소위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것은 엄청난 과정을 겪어내야만 이룰 수가 있었다. 세탁소를 갖게 된 행복은 꿈을 향한 시작에 불과할 뿐이었다. 필자는 하루하루 녹초가 되어 병자가 되고 있었고, 아메리칸드림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피나는 노력을 그 필수조건으로 요하고 있었다.
필자는 한국전쟁이 나던 해 자식 많은 가난한 농사꾼의 9남매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지금의 풍요로움을 느낄 때마다 돌아가신 부모 생각에 마음 한구석 애잔함이 밀려든다. 한국전쟁 이후 폐허로 변한 농촌에서는 극심한 식량부족에 시달렸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포함한 13명의 대가족이 한 끼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커다란 가마솥에 밥을 해야 할 만큼 식량이 필요했다. 봄날은 길고 보릿고개는 높았다. 봄에 장리쌀 한 가마니를 빌려오면 가을에 한 가마니 반을 갚아야 했다. 50%의 이자다. 지금의 잣대로 보면 과히 살인적인 이자요, 착취다. 부자는 점점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점점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사회 구조였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한 해만 보릿고개를 넘을 때 장리쌀의 고리에서 벗어나면 되었지만 굶을 수는 없으니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걸 필자가 해보리라 결심을 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진학을 1년만 포기하기로 했다. 1년 동안 돈을 벌어보겠다는 결심을 했는데 어린 필자가 어찌 그런 생각을 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놀랍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주도하는 새마을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는 시절이었다. 필자 동네도 정부에서 구불구불한 논둑을 똑바로 펴는 경지정리 작업을 시행했다. 지금 말로 하면 공공근로다. 읍사무소 담당 공무원이 나와서 그날 할 일을 지정해주고 저녁 무렵 성과를 측정해서 실적에 따라 밀가루 티켓을 나눠 줬다. 지원자가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최저임금에 버금가는 적은 밀가루 지급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농사일이 다 끝난 겨울에 하는 일이었다. 꽁꽁 얼어붙은 논둑에 한 뼘 정도 들어 올릴 만큼의 범위를 정하고 곡괭이로 논둑에 구명을 낸다. 거기에 쇠로 된 긴 지렛대를 넣고 논둑을 들어 올리면 논둑이 무너져 내렸다. 그 자리에 직선화된 새로운 논둑을 만드는 일이다. 공사가 다 되면 바둑판처럼 반듯한 직선화된 논둑과 논이 만들어진다. 경지면적도 커지고 농토가 반듯해서 농사짓기에도 편하게 된다. 요즘 같으면 포크레인 등 기계로 하겠지만 당시는 순전히 사람의 노동에 의한 작업이었다.
공공근로라는 것이 다 그렇듯 일은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하루 할당된 일의 양도 5~6시간이면 다 마칠 일이었다. 밀가루를 매일 주는 것이 아니고 며칠에 한 번씩 읍사무소에 가서 받아왔다. 이렇게 받은 밀가루가 10포대 정도 되었다. 필자가 벌어온 밀가루로 수제비도 해먹고 콩가루 넣은 칼국수도 만들어 먹었다. 늙은 호박에 팥을 넣은 호박범벅도 해먹었다. 덕분에 쌀이나 보리를 아낄 수가 있었다. 그해 장리쌀의 고리를 끊고 보릿고개를 넘었다. 이제 빚은 없어졌다. 어머니가 두고두고 필자 공을 인정해주었다.
당시는 다 가난한 시절이었다. 먹어야 사니까 흉년에는 콩죽 한 그릇 하고 논 서 마지기를 바꾼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방직공장에 취직한 나이 어린 소녀들이 봉급 받은 다음 날 우체국에 줄을 서서 고향으로 돈을 보내는 모습도 봤다. 고향 집에 보내기 위해 손에 쥔 그 돈이 달랑 3000원이었던 시절이었다. 그런 돈으로 오빠나 동생들 학교 다니게 하고 살림 밑천인 송아지도 샀다. 이런 돈들이 모여 논, 밭도 사고 고향 집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한 일등공신들이 수두룩하던 시절이었다. 땅값이나 집값이 지금처럼 비싸다면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지만 그 당시는 가능한 일이었다.
필자는 다음 해 공업고등학교 전기과에 진학했다. 적성도 모르고 오직 취업이 잘되고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공고를 택한 이유라면 이유다. 당시는 공부를 못해서 실업계 고등학교에 가는 것이 아니라 가난과 빠른 취업을 위해 실업계 고등학교에 가는 시절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이 끝나자 동급생들이 하나둘씩 취업되어 학교를 떠났다. 필자도 학교장의 추천을 받아 전매청 연초제조창에서 일할 수 있게 됐다. 담배를 만드는 기계는 이태리 제품인데 요즘처럼 완전자동은 아니나 당시로는 획기적인 자동화 기계다. 학교에서 배운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자동화 설비에 대해 도면 보는 법을 익히고 고장 난 기계들의 점검하고 수리하면서 새로운 기술을 익혔다.
군대에서 기술을 더 배워보려고 육군 발전기술병으로 지원했다. 처음에는 대대 참모부에서 군수품을 담당하는 행정병 보직을 받았다. 그런데 전기 일을 하게 될 운명이었는지 부대 목욕탕 관리 병사가 전기 감전사고로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결국 후임으로 전기를 안다는 이유로 필자가 선발됐다. 목욕탕 관리사병은 보일러를 다룰지 알아야 하지만 필자는 보일러에 대해서는 통 몰랐다. 인근 부대를 다니며 독학으로 보일러의 운전법을 배우고 무난히 목욕탕 관리사병의 임무를 마쳤다. 한 번은 목욕탕에 사성장군인 군사령관이 방문했다. 별 4개를 보는 순간 벌벌 떨었다. 35개월을 마치고 제대한 후 한국전기안전공사에 입사하게 됐다. 27세 때었다.
필자 인생에서 전기안전공사를 빼놓고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이곳에서 결혼도 하고 자식 공부도 시키고 60세 정년퇴직을 했으며 노후생활도 보장받았다. 안전공사 생활 중 가장 기억나는 것은 간부시험에 일찍이 합격한 것이다. 간부는 60세 정년이지만 직원은 58세가 정년이었고 급여에서도 차등이 있어 경쟁이 심했다. 간부시험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최소 3년의 근무 경력을 바탕으로 하는 근속연수 점수와 상급자가 매기는 고과점수를 합한 기본점수가 있다, 여기에 필기시험을 쳐서 학과 점수를 보태어 성적순으로 뽑았다. 당락을 좌우하는 것은 역시 필기시험이었다.
필자는 상급자인 주임들을 제치고 간부시험에 입사 3년 만에 합격하였다. 간부로 첫 부임지가 공교롭게도 과거 근무한 적이 있는 사업소였다. 간부로 발령받고 보니 옛날 상사인 주임들이 부하로 바뀌어 있었다. 필자도 마음이 불편했지만 주임들도 필자를 대하기에 곤혹스러웠다. 이런 때일수록 필자의 상급자인 과장이 잘 컨트롤 해 줘야 하는데 상급자인 과장도 주임들과 오래 근무한 정으로 심적으로는 주임들과 더 가까운 편이었다. 공식적인 술자리에는 필자가 참석했지만 주임들과 과장 간의 사적인 술자리에는 필자를 고의로 배제했다. 마음고생이 심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직의 힘으로 간부의 위치를 찾아갔다.
두 번째 사건은 고등학교 후배가 많은 지역에 과장으로 발령이 난 것이다. 필자가 졸업한 공고는 선후배 간 위계질서가 엄격하여 동문회 야유회 때는 장난 비슷하게 선배가 후배 엉덩이를 몽둥이로 때리기도 했다. 나쁜 감정이 실려 있지 않은 매이니까 웃으며 맞았다. 부부동반으로 야유회도 다녔는데 선배들이 후배 벌주는 것을 부인들이 다 보고 있었지만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고착화된 선후배 간 전통이었다. 그런데 회사 간부인 필자를 때리기는 아무리 선배지만 버거워했다. 필자로 인해 벌씌우거나 매를 드는 것은 차츰 없어졌다. 하지만 선배들을 사적인 장소에서는 더욱 깍듯하게 모셨다. 술을 따를 때도 3년 이상 선배한테는 무릎을 꿇었다.
세 번째 사건은 기술직으로 감사반장이 된 것이다. 감사는 회계감사가 중요한데 기술회사에서는 기술을 아는 사람이 감사반장을 해야 한다는 사장의 경영방침에 의해서 필자가 선택되었다. 부서별 부장급 감사반원을 이끌고 사업소를 순회하며 실무 감사를 했다. 잘못하는 점보다 잘하는 점을 찾아서 타사업소에 전파하는 것에 역점을 두었다. 징계도 했지만 표창도 많이 했다. 올바른 비판력과 판단력이 있다는 말을 들을 때 가장 기분이 좋았다.
네 번째 사건은 전문대학교에서 겸임교수를 맡은 일이다. 기술사 자격을 갖고 있고 현장 경험이 많다는 점을 들어서 대학교에서 섭외가 들어왔는데, 사장이 허락해 교수직을 겸임한 것이다. 전기응용 과목을 맡았는데 전기응용은 조명, 전동력응용, 전기철도, 전기화학 등 폭이 넓은 실무 분야다. 4년간의 겸임교수 시절은 몸은 힘들었지만 보람도 있었다.
다섯 번째 사건은 전기안전 부문에서 필자가 노력한 일들을 정리하여 공적조사로 만들어 경향신문이 주최하고 한국전력공사가 후원하는 에너지대상을 신청한 결과 국민봉사 부문 본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굵직한 상을 받는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부상으로 대만 여행을 보내주고 금 20돈의 황금 열쇠를 받았는데 지금도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다.
세월이 흘러 60세 정년퇴직을 했다. 1남 1녀의 자식도 결혼하여 필자 곁을 떠났다. 비록 나이에 의해 정년퇴직했지만 아직은 신체 건강하여 일자리를 찾았다. 급여는 적지만 필자를 필요로 하는 곳에 다니고 있다. 나이 더 들면 직장에서 완전히 은퇴해야 한다. 그때를 대비해서 취미가 있는 글쓰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글쓰기의 자산은 역시 독서이므로 도서관의 ‘책 읽기 마라톤’에 3년간 참가하여 언제나 1등을 하였다.
귀촌을 위해 도시 근교에 땅도 사두었다. 나이 들어서 버티는 힘은 경제력에서 나온다. 그래서 연금도 부었다. 체력도 중요한데 그런 의미에서 올해 동호인 테니스대회에서 30년 만에 처음으로 우승한 것이 기쁘다. 앞으로 전국테니스대회에 노년부로 참가하려고 한다. 우승하고 못하고가 문제가 아니라 무슨 일을 하든 목표가 있어야 한다.
70세가 넘으면 봉사하는 삶을 살려고 한다. 건강한 노인이 덜 건강한 노인을 돌보는 노노케어에 매진할 것이다. 이것도 공부해야 한다. 사회봉사의 이론을 갖추기 위해 인터넷으로 사이버대학을 수강하여 사회복지사 자격을 취득했다. 말로만 하는 봉사가 아니라 육체가 따라가는 봉사를 위해 발마사지와 경락안마도 배우고 민간자격증도 취득했다, 경험을 얻기 위해 시간 날 때마다 치매센터에 치매전문 자원 봉사자의 일을 하고 있다. 세상살이는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신념을 늘 갖고 있다. 필자의 생애가 아직은 진행 중이지만 돌이켜 보니 준비하며 여기까지 잘 왔다고 자신을 칭찬해 주고 싶다.
몇 시간을 달려왔는지 모르겠지만 필자가 부모님을 따라 청량리역에 내린 시각은 어둠이 짙게 깔린 밤이었다. 청량리역을 나서면서 필자 입에서 나온 일성은 ‘아부지! 하늘에 호롱불이 좍 걸려 삣네요’였다. 그때가 필자 나이 9세이던 1966년 가을이었다.
필자는 경주 인근 작은 산골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곳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마을이었다. 초등학교는 논밭 사잇길을 지나 형산강 상류 얕은 곳을 건너고 긴 아카시아 터널과 무서운 보리밭을 지나야 갈 수 있는 먼 곳이었다. 농사철이나 눈보라가 심한 겨울날에는 학교에 오지 않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 작은 산골 마을에서 필자 집은 제일 높은 언덕 위에 있었다. 방이 두 개고 방 사이에 작은 부엌이 있는 초가집. 아버지는 일하러 서울에 가시고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들과 그 집에서 살았다.
그 시절 서울에서 철공소 일 하시던 아버지께서 다 망가져서 내다 버린 세발자전거를 주어다가 용접하고 색칠해서 보내주신 적이 있다. 그 신기한 물건은 나를 영웅으로 만들었다. 한번 태워달라고 내 자전거 뒤로 동네 아이들이 긴 줄을 지어 따라 다녔다.
정식으로 학교에 다니신 적이 없는 어머니께서는 동네 할아버지들을 찾아다니면서 한글을 깨치시고 셈법을 배우셨다. 배움에 한이 맺히신 어머니는 내가 어릴 때 ‘ㄱㄴㄷㄹ’ ‘가나다라’가 빽빽하게 들어 있는 책받침을 사다 주셨다. 덕분에 나는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한글을 깨우쳤고 학교에 들어가서는 반장을 도맡아 하게 되었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난 다음 해에 우리 가족은 서울로 이사 오게 되었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2학기인 1966년 가을이었다. 검정고무신을 새로 사면 아까워서 신지 못하고 며칠 동안 들고 다녔고 반딧불이 여러 마리를 잡아넣은 호박꽃을 움켜쥐고 밤길을 뛰어다니던 천방지축 필자가 서울에 오게 된 것이다. 청량리역에서 태어나서 처음 본 가로등을 하늘에 좍 걸려 있는 호롱불로 알았던 것도 당연한 이치.
몸이 약하고 왜소했던 필자는 서울 아이들의 놀림감으로 충분했다. 심한 경상도 사투리는 심지어 선생님들도 놀림감으로 사용했다. 가난도 한몫했다. 솜틀집 귀퉁이 작은 방 하나에 우리 전 가족이 살았다. 시골학교에서 반장을 했던 필자는 자신감이 자꾸 사라졌다. 필자는 더 우울해지고 소극적인 성격으로 변했고 외톨이가 돼갔다.
그러던 중 친구가 하나 생겼다. 그 친구와는 어떤 계기로 가까워졌는지 기억에 없으나 어린 시절 은인이었다. 그 친구네 집은 'ㅁ‘자 모양의 큰 기와집이었는데 마당 가운데에는 꽃이 피는 정원이 있는 대궐 같은 집이었다. 학교가 끝나면 늘 필자를 자기네 집에 데리고 갔다. 그 친구의 어머니는 언제나 맛있는 음식을 해 주셨다. 반들반들 거리는 마루에 그 친구와 단 둘이 앉아서 텔레비전을 봤다. 그 친구는바둑도 실력급이어서 필자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 친구네는 검은색 자가용이 있었는데 광나루에 물놀이 갈 때는 필자도 같이 데리고 가 주었다.
초등학교 3학년 단 일 년 동안의 시간을 보내고 그 친구와는 연락이 끊어졌다. 4학년 때 필자 집이 멀리 이사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의 이름을 긴 세월 동안 잊지 않고 있었다. 성씨는 기억나지 않았으나 그의 이름은 언제나 또렷하게 가슴에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필자가 우울하고 힘들어하던 어린 시절에 필자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고 필자가 다시 용기를 갖도록 만들어 준 친구. 우여곡절 끝에 나는 2008년에 그를 찾아냈다. 만나서 얼굴을 확인하면서 우리는 지나간 사십여 년의 긴 시간도 같이 지낸 듯 친근한 서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필자처럼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그는 원불교 성직자가 되어 있었다. 어릴 때 필자에게 했던 그 나눔을 평생 실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건네준 시집에서 그 친구와 함께 꼭 뵙고 싶었던 어머니와 아버지께서는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나신 것을 알게 되었다.
필자의 그림 솜씨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우리가 시골에 살 때 아버지는 서울에서 철공소 일을 하시면서 돈을 벌어 보내셨다. 그렇게 일하시면서 그림 공부를 하시고 그 시절 미대를 졸업하셨다. 본래부터 가지고 계시던 재능인 그림 공부를 하신 후 평생 나염 공장에서 도안 그림을 그려 가족을 부양하셨다. 블록으로 지은 쪽방 도안실에서 꽃 그림을 그리시는 모습이 아직도 필자 기억에 남아 있다. 철공소의 험한 일은 그만하셨지만 나염공장도 열악하기는 별 차이가 없었다. 월급을 못 받는 경우도 많았고 다니시던 회사가 갑자기 부도가 나는 경우도 있었으니 우리 집은 늘 가난했다.
필자가 고3 때 미대를 간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절대 안 된다고 하셨다. 중ㆍ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받은 상은 전부 그림 상이었다. 사생대회를 나가기만 하면 특선을 했다. 필자는 그림이 좋았고 평생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아버지께서는 절대 안 된다고 하셨다. 대신 그림과 관련이 있는 건축과로 가라고 하셨다. 건축이 무엇인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 상태에서 필자는 건축과를 가게 되었다. 그림에 빠져있던 내가 공대 건축과를 갈 수 있었던 것은 특별하게도 수학을 잘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건축과 학생 중 디자인에 관심이 있는 선후배가 모여서 작품전을 준비하는 써클에 가입했다. 1년에 5개월 정도를 써클룸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설계 공부를 하며 작품전을 준비했다. 그 당시 써클룸은 학교의 제일 높은 산 위에 있는 건물의 지하 보일러실 옆 정화조 위에 있었다. 냄새 나는 좁은 공간에서 저학년들이 전체 인원이 먹을 밥을 하고 반찬을 만들었다. 어쩔 수 없이 먹는 그 밥으로 대부분 영양실조 상태였다. 잠은 제도판 위에서 쪼그리고 잤다. 낮에는 자고 밤을 꼬박 새우면서 설계하는 습관 때문에 수업을 많이 빠졌다. 그러니 제때에 졸업 못 하는 선배들도 있었고 필자도 학점 미달로 한 학기를 더 다니고 졸업하는 신세가 됐다. 그렇게 희로애락을 함께한 선후배들은 사회에서도 형제처럼 서로 도우면서 건축을 할 수 있었다. 남자 형제가 없는 필자는 그렇게 맺은 건축과 선후배들이 형과 아우 같은 관계를 만들었고 지금도 그 연결고리에서 도움을 받고 나누고 있다.
졸업 후 7년 동안 건축 설계사무실의 도제 생활을 거치고 나서 건축사 시험에 합격했다. 그리고 나이 서른두 살에 건축설계사무실을 개업했다. 개업하기 한 해 전에는 결혼해서 첫째 아들이 태어났는데 세 식구가 살 작은 원룸 아파트도 돈을 빌려서 전세로 들어갔고 사무실 개업비도 전부 선배들에게 빌려서 해결했다. 1989년이었다. 개업하자마자 일이 밀려 들어왔다. 그 시절 온 나라는 공사판이었고 설계일도 넘쳐났다. 삼십 대 초반에 내 인생의 큰 전환점이 찾아온 것이었다. 내가 그동안 만져보지 못한 큰돈이 들어왔다. 직원 수도 늘어났다. 일주일에 두세 차례 새벽까지 이어지는 술자리가 많아졌다. 골프도 치러 다녔다. 둘째 아들이 태어난 후엔 작은 전셋집에서 분양받은 아파트로 이사하게 되었다.
필자의 삼십대는 건축이 가져다준 풍요에 방향타를 놓치고 흥청거렸다. 그러나 그 풍요는 오래가지 못했다. 1997년 늦가을 어느 날 세상은 천지개벽했다. 그날 필자는 선후배 골프모임을 마치고 사무실로 복귀하고 있었는데 사무실에서 급히 연락이 왔다. 설계, 감리를 시행하고 있는 현장에서 인부 두 명이 사망하는 대형 사고가 발생했던 것이다. 경찰서에서 여러 날 공사현장 사고 조사를 받는 중에 IMF가 터졌다. 처음엔 IMF가 뭔지도 몰랐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다. 필자가 거래하던 중소 건설회사는 전부 부도가 났고 예정된 모든 설계프로젝트가 사라졌다. 한 순간에 모든 것이 거품이 터지듯 사라졌다.
필자가 사십 대에 접어드는 시기에 일어난 악몽이었다. 삼십 대에 이룬 것을 전부 잃게 되었다. 그로부터 몇 년간 일거리가 없었다. 빚이 눈덩이처럼 쌓여가고 독촉장들이 여기저기서 날아들었다. 급기야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공황장애와 폐쇄공포, 협심증과 감각마비라는 중증 질환이 한꺼번에 찾아왔다. 신경과 전문의인 둘째 처남이 약을 지어주면서 ““약은 상태호전에 큰 도움이 안 되니 가능하면 약을 먹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진단을 했을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위기는 가족의 단결도 가져왔다. 어머니께서는 늘 기도해 주셨고 아내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면서도 밤마다 뜸을 떠주고 필자 손바닥에 빽빽하게 수지침을 놓아 줬다. 몇 달 후 건강이 조금씩 호전되기 시작했다. 그 당시 필자 사진 한 장이 지금도 남아 있다. 허공을 바라보는 초점 없는 눈과 창백한 피부. 그 당시 얼굴은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들어 보인다.
이런 가족의 성원에 보답하려고 당시 건축설계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찾아다녔다. 그동안 건축을 하면서 예술가인 양 거드름을 피우고 살았으나 필자의 사십 대 건축은 단지 생계 수단일 뿐이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빚을 정리하면서 사십 대를 보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아이들의 키가 나보다 더 커져 있고 필자 머리카락이 반백이 된 것을 알았다. 필자의 불혹은 말 그대로 허무하게 지나갔다.
내 나이 오십이 되던 해, 그러니까 2007년부터 매년 한가지씩 이루어 나가기로 했고 지금까지 실행에 옮기고 있다. 담배 끊기, 목 조각 배우기, 책 내기, 상담사 자격증 따기, 강의하러 다니기, 새로운 사람 오십 명 사귀기 등이 그동안 내가 실행한 일들이다. 올해는 캘리그라피에 도전하고 있다. 앞으로도 매년 성취 가능한 목표를 하나씩 세우고 꼭 이루어 나가려고 한다.
2007년도부터는 건축 분야 가운데서도 환경, 생태건축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 여러 가지를 연구하고 있다. 어류를 포함한 동물 공부도 하고 수목원과 식물원을 찾아다니면서 식물도 공부하고 있다. 건축은 궁극적으로 사람을 위한 것이다. 필자가 연구하는 건축은 사람과 함께 지구 위에 살아가는 모든 생명을 위한 환경이다. 그와 더불어 지속가능한 소득이 있는 시니어타운을 연구하고 있다. 필자를 포함해 아파트 하나가 재산 전부인 대부분의 베이비부머들에게 작지만 그림 같은 집을 갖게 하고 싶다.
필자가 이렇게 계획을 세우고 실천해 나가는 이유는 분명하다. 우선 인생 후반전을 능동적이며 긍정적으로 살고 싶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시니어에 필자가 가진 것을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퇴직한 시니어들을 대상으로 생애 재설계 강의도 하러 다니는데 이것도 같은 차원이다. 사실 한국의 시니어들은 퇴직 후의 인생 2막에 대해 대책을 세울 여유가 없었고 앞으로의 대안도 마련돼 있지 않다. 필자도 예외가 아니다. 그 대안의 하나로 다양한 분야의 공부를 계속하면서 관계를 넓혀가려고 한다.
최근에 필자는 ‘5070세대의 가슴 펄떡이는 기사를 쓰실 기자를 찾습니다’라는 이투데이의 시니어기자단 모집기사를 보면서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필자 희망대로 필자의 경험을 나누고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배울 수 있는 장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 앞으로 세상과 사람을 보는 시야가 좀 더 넓어지고 깊어지면 동시대를 살아가는 시니어들과 서로 나눌 수 있는 것들이 더 많아질 것으로 기대한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의 삶은 현재 진행형이다.
6월이면 한해의 전반부가 마쳐지고 2016년 후반부가 시작되는 시점이다.
올해 환갑인 제 입장에서 이 시점은 제가 살아가는 기간 중에 반드시 의학적인 연구가 이어져 아마도 120세사시는 분이 많이 보여질 그 시대가 될 것이기에 인생의 후반부가 이제 시작되는 나이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노인정어르신들의 분포도를 볼 때 90세 이상은 되어야 어른대접을 받고 청소나 식사당번에서 열외가 된다고 한다. 70대와 80대 분들이 청소도 하고 식사준비도 하여 함께 노인정을 이끌어가고 있는 추세라고 70대 중반도 넘은 분이 동네통장과 부녀회장을 하던 저에게 노인정막내라서 힘들다는 말씀을 들었다.
거창하게 인생후반부를 준비하고 은퇴자여 내게로 오라는 다양한 단체의 교육이나 세미나가 무료 혹은 유료강좌가 이어진다. 시간을 내어 바로 무언가 경제적으로나 명예적으로 갑자기 눈에 보이는 뭔가가 보일 것 이라고 큰 기대하지 말고 꾸준히 서서히 준비를 하시기를 바래본다. 강의를 듣고 하나씩 가능한일부터 실천해가다보면 본인 원래 갖고 있는 직업가진 분들이 취미가 특기가 되고 직업이 되었다고 잡지에 소개되거나 방송에 나온 내용을 보게 되듯이 자신감이 서서히 차오르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의 부모님들께서는 시간으로 물질로 정성으로 부모님을 대하여 챙겨드리고 자녀에게 노후를 맡기신 세대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세대는 생활비는 물론 광고에 나오듯이 부모님의 보일러를 새로 장만해드리는것과 치과 치료 등의 부모님 노후를 우리가 책임졌다면 우리의 노후는 우리 스스로 책임지는 그런 시대가 왔습니다.
난 안 늙을 것 같고 늘패기있고 열정으로 가득 찼다고 하던 그 패기와 열정을 건강이 허락하는 정도에서는 계속 유지하면서 노후를 내가 가진 능력을 살리면서 경제적인 여유나 자녀와의 소통에 도움될 것과 어디서나 컴퓨터가 가능한 스마트폰세대에 아주 뒤떨어지지 않고 인생 후반부를 착실히 구체적으로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한해의 후반부 인생의 후반부를 준비하는 이 때에 라이락꽃 향기에만 취해있을때는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내가 나를 케어할 힘이 있어야하는 사실 엄중한 현실을 알고 걸어가야 합니다.
옛날 봉지쌀을 사먹고 연탄 때던 시대에 비하면 아주 잘사는 나라가 되었지만 우린 아직도 계속 어떤 이유로든 전전긍긍 살아갑니다. 욕심을 내려놓고 인생은 마라톤이기에 마지막까지 함께 뛸 그룹에서 낙오는 되지 말고 속도를 조절하는 힘 있는 아직 열정이 식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삶으로 감사하게 하루 하루 살아가야할 필요가 있다.
더 이상 자녀가 노후보험인 시대가 아니고 오히려 타먹을 수 없는 보험이 된지 오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파트에 사는 것이 꿈인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도시의 집값은 터무니없이 오르고 그나마 있던 매력을 잃은 지도 오래다. 그런 틈새를 노려 생겨난 것이 바로 도심형 전원마을이다. 말로만 듣던 ‘전원마을’에 ‘도심형’이 붙어 멀리 가지 않아도 전원생활을 즐길 수 있다. 말로만 하면 뭐하겠는가.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직접 가봤다. 도심형 전원마을에 막연한 관심이 있던 독자들에게 살짝 비슷한 듯 전혀 다른 도심형 전원마을 두 곳을 소개한다.
단독주택, 꼭 넒어야 한다는 편견을 없애라
하우개마을
하우개 마을은 파주 황룡산 앞에 세워진 도심형 전원마을이다. 하우개 마을은 작은 땅에 효율적인 집을 짓기 위해 집집마다 지하에 차 2대가 들어갈 주차공간을 확보했다. 차고 위에 정원을 조성하고 2층과 다락방을 올려 이용 공간을 넓혔다.
다락방 천창으로 바라다보이는 하늘이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평온함까지 준다. 4년 전만 해도 전원주택은 330m²(100평) 이상 큰 평수대로 지어져왔다. 지금은 젊은 30~40대나 은퇴를 앞둔 50~60대가 살 수 있는 99.2~132m²(30~40평) 형대의 전원주택이 건설되고 있다. 집값이 안 오를 바에는 넓고 편한 집에서 살아보겠다는 젊은 사람들에게 인기다.
남의현(南議鉉·61)씨와 김경주(金庚珠·60)씨는 하우개 마을 첫 입주자로 2014년 9월 문패를 달았다. 점심시간 조금 넘어 방문했을 때는 바깥주인인 남의현씨만 집을 지키고 있었다. 작년 말 공기업을 정년퇴직하고 장애인 봉사를 하며 은퇴 생활에 적응해 가고 있다. “우선 공기가 좋다는 게 마을의 최고 매력입니다. 아파트에 살 때는 아침마다 머리가 아팠는데 지금은 사라졌습니다.”
남씨는 마을에서 최고 연장자고 오랫동안 산 사람이지만 동생 격인 주민들과도 친하게 지내는 중이다. 현재 남씨 부부를 제외하고 30대에서 50대까지 다양하게 살고 있다. 다른 주민들 입주가 시작되고 친해지다 보니까 매일 만나 밤새 술을 마시기도 했다.
“요즘에는 날씨가 추워서 자주 못 만나는데 날씨 좋을 때는 정말 거의 매일 만났던 것 같아요. 함께 삼겹살 파티를 하면 정말 좋습니다. 맛이 달라요.”
부인 김경주씨는 홀트일산복지타운 원장이다. 사무실이 근처라 주위 아파트를 찾아보다 하우개마을을 알게 됐다.
“그때는 벌건 흙밖에 없었어요. 간이 크다고 하겠지만 조감도만 보고 집을 계약했어요. 누가 여기 들어오나 했는데 그게 바로 우리 부부였습니다.”
입주를 망설이는 사람들에게 도우미를 자청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결정을 못하고 그럴 때 우리 집을 보여줬어요. 아마 여기 입주민은 우리집 한 번쯤 왔을 겁니다.”
집은 지상 2층에 다락까지 공간이 꽤 되는데 연료비나 전기료 부담이 없다.
“도시가스비가 제일 많이 나왔던 게 14만원이었어요. 전기료도 두 식구밖에 안 되니까 얼마 안 나와요. 아파트에선 관리비를 30만원씩 냈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창뿐만 아니라 집 구석구석에 쓴 히노키 나무가 마음에 듭니다. 나무집은 습기가 차면 나무가 팽창해서 습기 들어오는 걸 막고 더울 때는 마르면서 통풍이 된다던데 정말 그렇더군요.”
퇴근해서 집에 올 때면 나무 냄새 등자연의 향을 맡을 수 있어서 좋다. 새소리는 도시에서 느낄 수 없었다.
전원생활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도시와도 가깝고 또 공기까지 좋아서 도심형 전원주택으로 오기를 잘 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최소한의 대지에서 최대한의 공간을 활용한다
도시농부 타운하우스
파주 운정 신도시를 지나다 보면 마치 만화에서 튀어나온 듯 알록달록한 집들을 볼 수 있다. 바로 도시농부 타운하우스(이하 도시농부) 1, 2차 단지다. 오솔길처럼 낸 길을 따라 옹기종기 집들이 모여 있다. 곳곳에 도시농부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텃밭도 보였다. 현재 5단지까지 분양 완료 됐는데 가격은 3억원 대로 알려져 있다.
도시농부의 특이점은 빌라형이면서 독채로 사용하는 것이다. 도시 대부분이 평면을 넓혀 단층(1층)을 높이 쌓아서 집을 지었다면 도시농부는 가로가 아닌 세로로 집을 잘라 구분했다. 박닥은 좁은데 천장이 높고 2층에 다락방까지 있다. 지금까지 봐온 도시 주택과는 확실하게 차별화됐다.
6년 전 지어진 도시농부 1, 2차 단지의 경우, 설계를 담당한 도시농부 최용덕(崔龍德·57) 대표의 생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실내와 실외의 융합을 노린 듯 층마다 텃밭이 있다. 면적은 좁지만 그안에 층을 만들어 공간 활용을 했다. 그런데 최 대표는 그런 실험이 사실상 실패라고 말했다. 실내와 실외의 융합을 위해 준실내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다고. 그렇게 보완해 설계한 것이 최근 지어진 도시농부 미니멀하우스다. 이 집도 역시 세로로 집을 구분한 독채 빌라형이다. 1,2차 단지에 비해 옆으로도 꽤 넓고, 높다. 여러 군데 창이 있어 내부가 도시 집에 비해 상당히 밝은 것도 이 집의 장점이다.
조인관(趙寅官·71)씨는 딸의 권유로 당산동에서 파주 도시농부로 이사 왔다. 최근 간 이식수술을 한 부인이 공기 맑은 곳에서 살기를 바랐다. 가격에 비해 집안 환경이 마음에 들었다.
조씨의 집은 1층 응접실과 주방, 2층 부부의 방, 3층을 손님들이 묵고 갈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로 꾸몄다. 3층 공간을 조금 나눠 드레스룸을 만들었다. 드레스룸 안, 높은 천장 위를 가로로 분리해 창고로 만들었다. 2층은 통째로 부부의 방으로 꾸몄다.
“부부 단 둘이 살기 때문에 공간을 쪼개서 방을 많이 만들 필요는 없었어요. 대신 계단 옆에 뭐든 넣을 수 있는 수납공간을 만들었습니다. 계단 때문에 힘들지 않을까 했는데 살아보니까 적응돼 괜찮습니다.”
인테리어는 조씨가 직접 했다. 조씨가 집안 내부를 인테리어에 직접 개입한 것은 ‘마이너스 옵션제’로 분양 받았기 때문이다. 마이너스 옵션제란 익스테리어(건물외관, 창호, 전기, 보일러, 정원)는 회사측이, 내부공사는 입주자가 하는 방식. 유럽이나 미국 등지에서 시행하고 있고 도시농부와 하우개마을도 마이너스 옵션제를 시행하고 있다.
조씨는 집 앞 마당 가꾸는 것이 취미다. 봄을 맞아 마당 주위에 꽃도 심었다. 도시의 아파트 생활에서 벗어나 조금이나마 이곳에서 시골 생활을 느끼며 살아가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