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돼서 마음만 동동 구르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이번 호에는 최학 소설가께서 故김용덕 교수님께 쓴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김 교수님.
참으로 오랜만에 인사 올립니다. 40년 가까운 세월을 흘려보내면서, 더러 예전 초등학교 시절의 방학숙제를 떠올리듯 가끔 교수님을 생각하긴 했지만 ‘인사’는 엄두조차 내질 못했습니다. 그곳에서 잘 계시겠지요? 이런 치렛말은 모두 생략하겠습니다. 교수님은 이미 ‘그곳’, ‘계시다’ 등등의 언어들과도 전혀 무관하실 테니 말입니다. 따라서 제 인사는 단지 저 혼자의 회억이고, 제 자신에게 들려주는 독백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1980년의 어느 봄날이었습니다.
그 전해, 한국일보사가 우리나라 사상 초유인 1000만원의 원고료를 내걸고 장편소설을 공모한 일이 있었지요. 대상은 기성작가와 신인을 망라하는 것이었습니다. 1973년 모 신문사의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이 당선되어 문단에 발을 들여놓고 있던 저는 그 몇 년 사이 작품 발표의 지면조차 제대로 얻지 못한 채 낙백의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지요. 그런 때에 광고를 보곤 결심을 했습니다. 좋다, 다시 공개 경쟁에 나서보자. 무명 신인작가의 설움을 씻을 호기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당시 서울의 한 조그만 잡지사에 근무하고 있던 저는 동료 직원들의 양해를 얻어 반년 넘게 소설쓰기에 매달렸습니다. 신촌의 와우아파트라고 아시죠? 어느 날 한 동(棟)이 와르르 무너져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아파트. 제가 그 아파트의 단칸방 하나를 얻어 살고 있었습니다. 돌이 갓 지난 딸애가 엉금엉금 제게로 기어오면 발로 아이를 밀어내면서 원고 칸을 메워나갔지요. 그렇게 완성한 작품이 홍경래의 난을 소재로 한 장편 역사소설 이었습니다.
운 좋게 그 소설이 당선되었습니다. 신문 한 면 가득히 심사평, 당선소감, 인터뷰 등 저에 관한 기사가 실린 다음 날부터 세상이 달라지더군요. 작품을 들고 가도 거들떠보지 않던 문학지 편집자들이 먼저 연락을 해서 작품을 달라지 않나, 미리 장편 출판을 계약하자면서 출판사 사장들이 번갈아 찾아오질 않나(교수님 생전에는 문자메시지 같은 것도 없어서 모르시겠지만, 요즘은 이런 문장 뒤에는 꼭 ‘ㅎㅎ’ 혹은 ‘ㅋㅋ’ 같은 이상한 부호를 붙인답니다. 옛사람들이 쓰던 ‘가가(呵呵)’와 흡사합니다).
아무튼 저는 그 덕에 화곡동에 마흔두 평짜리 단독주택을 마련했으며 전업작가의 길로 나선다고 출판사도 때려치웠습니다.
매일 이 신문에 연재되고 있던 그 해, 교수님으로부터 뜻밖의 엽서를 받았습니다. 좋은 역사소설거리가 있어서 작가에게 주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교수님의 존함은 전부터 알고 있었기에 저는 놀라움과 반가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화신백화점 옆에 있던 ‘종로다방’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교수님을 뵈었습니다. 단아한 모습에 말씀도 적으셨지요. 뒤늦게 셈해보건대, 그때 교수님은 쉰을 갓 넘긴 연세였고 저는 겨우 서른에 올라선 철부지였습니다. 온전히 기억하지 못합니다만 그때 주신 말씀의 대강은, 여러 해 동안 ‘기축옥사(己丑獄事)’에 관한 연구를 해봤는데 연구를 할수록 여기에 숨겨진 이야기가 많음을 알게 되었다, 중요하고도 흥미로운 이 이야기를 논문으로는 생동감 있게 독자에게 전할 수가 없다, 누군가 역사에 관심 있는 작가가 이를 소설로 형상화해주면 좋겠다, 그러면서 관련 저술이 든 노란 봉투를 제게 넘겨주셨지요. ‘역사가는 위대한 작가가 될 수 없지만, 작가는 위대한 역사가가 될 수 있다’는 말을 인용하시며 저를 부추겨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날 선선히 제가 그 일을 해보고 싶다고 말씀드렸던 것도, 저 또한 이전부터 이 사건에 소설가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589년 전주에서 정여립이 반란을 꾀한다는 고변이 있었고 이로써 수백 명이 희생을 당한 옥사의 실상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그동안 논란이 많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여기서 송익필 등의 음모론을 실증적으로 제기한 최초의 현대 역사가가 바로 교수님임은 누구도 부인치 못합니다.
서경덕, 이황, 기대승, 이이, 조식 같은 선학(先學)은 물론 정철, 유성룡, 이발, 김성일, 이산해, 김장생, 조헌, 허엽, 허봉, 김우옹, 성혼 등 조선 중기의 내로라하는 명사들이 죄 이 사건에 관련돼 있었기에 이를 소설화하는 일은 곧 우리 역사소설의 한 정점을 긋는 일이며 그 작업은 지난하고 시간이 많이 소요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저는 당시에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하여 교수님께 약속을 드리고서도 저는 쉬 작업에 들 준비를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딴짓거리를 하며 세월을 허비하는 중에도 그 약속은 무슨 채무인 양 제 심중에 남아 무게를 더해갔던 것도 사실입니다. 10년이 더 지나서였습니다. 홀연 교수님이 세상을 떠나셨다는 놀라운 소식을 접했습니다. 뒤늦게 사실을 안 저는 장례에도 참석치 못한 죄스러움에 한동안 몸을 떨었습니다. 돌아가시기 두 해 전쯤이었던가요? 교수님은 또 한 번 제게 서신을 주셨지요. 대전에 내려갔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잘 지내느냐? 그런 안부의 글이었지만 저는 마치 질책하시는 것만 같아 답장조차 드리지 못했습니다.
15년 전쯤 됩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여겨 방학을 맞아 안동 지례마을에 들어갔습니다. 산골 한옥 뒷방에 들앉아 한 주일 꼬박 컴퓨터 자판을 두들겨 500여 장을 만들었는데 다 부질없는 짓이었습니다. 한 달 후, 읽어보곤 주저 없이 지워버렸기 때문입니다. 2005년 교환교수로 중국 남경에 가 있는 동안은 전초작업이라 여기며 화담 서경덕에 관한 장편소설 한 편을 완성했습니다.
교수님, 종로다방에서 만났던 그 새파란 작가가 어느새 교수님보다 더 긴 세월을 대학 교단에 있다가 재작년 정년을 맞았습니다. 그러곤 소설을 쓰겠다고 충청도 연산 산골에 임시 거처도 하나 마련했습니다. 첫해를 어영부영 보낸 뒤, 올봄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지난 주말 1300장을 넘겼습니다. 2500장은 돼야 마무리가 될 듯합니다. 일단 이야기를 주재하는 동안은 퇴계, 율곡 같은 이도 사료를 근거로 제 의도껏 주물러볼 요량입니다. 제가 이미 율곡 죽은 나이보다 17년을 더 살고 있기에 어려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1584년에서 1589년, 이 과거 5년의 시간에 몰입돼 있는 요즘의 나날이 제겐 경이입니다. 제 거처에서 5분만 걸어 나가면 김장생이 걸었던 길을 만나고, 차로 10분만 나가면 정여립이 머물렀던 절간 마당에 섭니다. 아, 그래서 누군가가 저로 하여금 이맘때 이곳에 있게 했구나 싶은 생각마저 들 때가 많습니다. 명랑하게 들려오는 매미소리, 새소리도 제겐 16세기 말의 것이 됩니다.
성패는 뒷전으로 돌리겠습니다. 내년 봄날, 상하 두 권짜리 소설책을 존경하는 김용덕 교수님 묘소에 놓을 수 있다면, 종로다방에서 드렸던 제 약속을 지키는 것이 된다고 여기겠습니다.
최 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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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경북 경산 출생. 고려대 국문학과와 같은 대학 대학원 졸업.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이 당선되어 문단 등단. 1979년 한국일보 장편소설 공모에 역사소설 ‘서북풍’ 당선. 1981년~현재 우송대 교수. 고려대문인회 회장 역임. 현재 한중백주문화교류협회 회장. 저서로 창작집 ·, 장편소설 ·, 산문집 ·· 등.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돼서 마음만 동동 구르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의 문을 두드려주셔요. 이번 호에는 시인이자 야생화 사진작가인 박대문님께서 풀꽃들에게 쓴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계속되는 가뭄 끝에 단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단비를 가득 품은 바람 소리가 쏴 밀려옵니다. 주룩주룩 낙숫물 듣는 소리가 어느 고운 음악보다 감미롭게 들려옵니다. 얼마나 애타게 기다리던 단비입니까?
어제 산에서 만났던 풀꽃, 그대! 참 안타까웠습니다. 오랜 가뭄에 시들시들 연명하듯 버티는 모습이 참으로 애잔했습니다. 게다가 가뭄 탓에 꽃망울과 새순 줄기에 온갖 물것들이 달라붙어 진을 빠는 통에 제대로 꽃도 피우지 못하더군요. 힘겹게 열리는 꽃잎이 처량해 보이기조차 했습니다. 그런데도 시원한 물 한 바가지 뿌려주지 못하고 진딧물 한 무더기 털어주지도 못했습니다.
가뭄과 물것에 시달려 제대로 피우지도 못한 풀꽃, 사람으로 치면 화장기 없는 병색 짙은 민낯에 카메라만 들이댔습니다. 아니 민낯이 아니라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대의 생식기에 확대경을 들이댄 것입니다. 목마른 갈증, 물것의 시달림을 번연히 보고서 도움도 못 주면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대의 은밀한 곳만 훑고 지나쳤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대에게 참 많은 잘못을 저지르고 다녔습니다. 삭막하고 황량한 겨울 지나고 이른 봄이 되면 발밑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풀꽃 하나에 넋을 잃고 홀딱 빠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같이 나온 새순이나 꽃망울이지만 좀 더 크고 먼저 핀 꽃에만 카메라 앵글 들이대고 옆에 돋아나는 새싹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밟고 뭉개기 일쑤였습니다.
온갖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는 봄날과 초여름이면 작고 빈약한 꽃은 본체만체 제치고 화려하고 멋진 꽃에만 매달렸습니다. 꽃이 귀한 시기에는 발밑의 사소한 풀꽃도 애지중지하다가 여기저기 온갖 꽃이 한창일 때는 크고 화려한 것만 중시하고 그렇지 못한 것은 차별하는 변덕을 부린 것입니다. 심지어 예쁜 꽃 곁에 뻗은 다른 줄기를 사진 화면에 잡티 된다며 제치고 꺾기도 했습니다. 어려운 역경 속에 생을 위해 악전고투하는 데도 도움 주지 못하면서 아무런 배려도 없이 은밀한 치부를 사진 찍어 자랑스럽게 내놓고 공개했습니다.
태어난 생체로서 소명을 저버리지 않는 풀꽃, 그대! 좋아하고 사랑합니다. 선택의 기회도 없이 주어진 최악의 환경일지라도 생을 포기하지 아니했습니다. 온갖 주위 역경과 고난을 감수하며 새싹 틔어 꽃피우고 열매 맺어 씨앗을 남기는 데 전력을 다했습니다.
지금은 어디에 가든 경애하는 마음으로 눈 맞춰 인사하고 이름을 불러주며 가슴 깊이 사랑합니다. 꽃 사진 찍으면서 혹시나 새싹을 밟을까봐 삼각대도 거의 쓰지 않습니다. 특히 이른 봄에는. 또한 옆에 다른 풀과 가지가 끼어들어도 웬만하면 그대로 찍습니다. 그동안 관심 밖에 두고 낮춰 보며 함부로 하고 차별한 것 반성하고 뉘우칩니다. 너그러이 용서하고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지금 그대를 사랑하는 마음만큼 ‘나도 그래’라고.
-2017년 8월 모일, 풀지기 올림
말도 느낌도 통하지 않는 풀꽃에게 편지를 보내다니? 이런 편지를 쓰게 될 줄은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우연히 에서 ‘부치지 못한 편지’를 써보라 하기에 생뚱맞게 용기를 냈습니다.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무료한 일상을 메꾸기 위해 풀꽃에 관심을 두고 탐사활동을 시작한 지 10년이 되어갑니다. 지금은 생활 중 대부분의 관심 사항이 풀꽃에 있어 카메라 들고 산과 들에 나가 풀꽃을 찾고 때로는 멀리 여행도 갑니다.
풀꽃 탐사활동을 하기 이전에는 풀과 나무를 주변에 그저 널브러져 있는, 아무런 느낌도 감각도 없는 사물로만 여겼습니다. 눈에 띄게 예쁘고 화려한 꽃을 피우면 화초, 아닌 것은 모두 잡초로만 여겼습니다. 이름을 안다는 것이 고작해야 농작물과 채소 일부 그리고 과일 몇 종류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뜻하지 않게 직장생활을 생각보다 일찍 그만두고 나서 무료한 일상과 나름 정신적 안정을 찾기 위해 산·들·꽃에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언제든지 찾아가면 만날 수 있고 미소 짓는, 앙증맞게 고운 꽃이 마치 나를 반기는 듯 여겨졌습니다. 그러는 사이 차차 풀꽃 이름을 하나둘 알아가면서 비로소 풀꽃과 새로운 관계가 이루어져갔습니다.
아무리 좋고 귀한 것도 내가 관심이 없으면, 즉 내가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나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는 허상입니다. 내가 관심을 갖고 내용을 알아 의미를 두고 보았을 때, 비로소 나와 새로운 관계가 설정되고 서로 의미 있는 상대가 됩니다.
이 세상에 이름 없는 풀꽃은 없습니다. ‘이름 없는 풀’이라며 잡초를 천덕꾸러기 취급하지만, ‘잡초’라는 이름의 풀은 없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그 이름을 모를 뿐입니다. 풀꽃은 좋든 싫든 선택의 기회도 없이 주어진 환경에서 싹을 틔워야 합니다. 선택 없이 태어난 우리 사람과도 같습니다. 오직 살아야 한다는 대명제를 안고 끈질기게 참고 견디며 살아갑니다. 닥쳐오는 시련 모두를 벌거벗은 몸뚱이 하나로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역경에 아랑곳하지 않고 꽃피워 결실을 보아야 하는 생체로서의 신비로움과 경이로움을 이제야 하나둘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동안 말 못 하고 느낌 없고 귀하지 않다고 함부로 여기고 다루어왔습니다. 알고 보면 이 세상의 생명체 중 가장 막내가 인간이라 합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마치 지구 상 모든 생명체 가운데 으뜸이고 주인인 양 착각하고 있습니다. 지구에 태어난 것으로 치자면 현생 인류는 식물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현생 인류의 탄생은 4만 년 남짓입니다. 고생대 석탄기의 양치식물은 차치하고 꽃이 있고 생식기관으로서 씨방이 있는 속씨식물이 탄생한 것만 해도 약 1억4000만 년 전인 중생대입니다. 감히 대비할 수 없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모두를 좋아하고 사랑합니다. 멀리 해외에 나가서도 우리 땅에 자라는 같은 풀꽃을 만나면 고향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갑고 다정스럽습니다. 외국에 있으면서도 고향 땅인 것처럼 푸근한 마음이 생깁니다. ‘오! 너도 여기에 있네.’ ‘천지만물이 나와 함께 존재하고 한 형제[天地與我 竝存, 萬物與我 爲一]’라는 장자(莊子)의 말이 더욱 실감 납니다.
이제까지의 저의 잘못을 반성하고 뉘우치며 한 말씀 올립니다.
“풀꽃, 그대! 사랑합니다. 그대도 한 말씀만 하소서 ‘나도 그래’라고.”
>>박대문 야생화 사진작가
환경부에서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과장, 국장, 청와대 환경비서관을 역임했다. 우리 꽃 자생지 탐사와 사진 촬영을 취미로 삼고 있다. 저서로 시집 . , 가 있다.
“망고, 어디서 났게?”
동생은 망고를 깎으면서 대단한 비밀이라도 들려주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의도를 알기 어려운 질문이어서 잠시 머뭇거리니까 동생이 그새를 못 참고 말을 이어갔다.
“요즘 우리 시어머니가 이상해.”
그 말에는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이 잔뜩 묻어 있었다.
동생의 시어머니는 음식 솜씨가 참 좋다. 그 솜씨를 동네 노인정에서 발휘하니 점심 먹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으쓱해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다. 게다가 나이가 들었어도 무너지지 않은 얼굴선 덕분에 70세가 넘은 할머니치고는 예쁘장한 외모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당신이 노인정에서 인기가 많다는 걸 자랑 삼아 얘기하기도 한단다.
그러던 어느 날 초인종이 울려 나가보니 대문 앞에 계란 한 판이 놓여 있더란다. 사람은 없고 계란만 덩그맣게 있길래 의아해하고 있는데 시어머니가 마당까지 쫓아 나와서 한마디 하셨단다.
“노인정 영감이 놓고 갔나?”
그래놓고 당황한 기색으로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으셔서 “들어오시라 해서 차라도 한잔 대접하시지 그러셨어요” 했더니 “에이, 나이 들어서 주책이야” 하며 뛰어 들어가시더란다. 언제부터인지 시어머니가 아침 숟가락을 놓기 바쁘게 노인정으로 달려갔는데, 멜론이나 망고 등 시어머니가 평소에 돈 주고 사지 않을 과일들이 냉장고에 들어 있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며 동생은 깔깔 웃었다.
모두들 나이 들어가면서 꺼리고 외면하는 것들이 있다. 나잇값을 제대로 하지 못할까봐 하고 싶은 말, 하고 싶은 일을 감추기에 급급하다. 잘못했다가는 ‘나이 들어 주책이야’라는 소리를 들을까봐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얼굴에 주름이 파이고 육체의 기능이 쇠락해도 감정은 여전히 살아 있다. 사랑은 숫자로 하는 게 아니라 느낌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니 청춘은 갔어도 가슴 뛰는 인생의 봄날을 여전히 기대하는 것 아닌가.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이라는 소설을 통해 90세 노인에게 찾아온 첫사랑을 이야기한다. 평생을 창녀들과 함께 보내면서 이 세상에 순정한 여자는 없다고 생각하는 독신이자 신문사 칼럼니스트 사비오. 그는 90세 생일에 자기 자신에게 아름다운 밤을 선사하기 위해 선택한 14세 소녀에게 빠진다. 사랑의 열병은 그에게 낭만주의 문학작품을 들추게 하고, 연애편지 형식의 칼럼을 쓰도록 만든다. 사랑 때문에 죽는 것은 시적 방종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던 그가 사랑 때문에 죽는 일은 가능한 일일 뿐 아니라 자신도 사랑 때문에 죽어가고 있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그 고통의 달콤함을 무엇과도 바꾸지 않겠다고 말한다.
위대한 첫사랑이다. 90세 노인에게 찾아온 첫사랑을 주책없는 늙은이의 추태로만 볼 것인가? 아니다. 그 사랑은 죽음과 멀지 않은 노인에게 찾아온 마지막 열정이자 의미 있는 삶에 대한 순정한 고백이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외로움과 고독에 익숙해진다는 의미다. 함께 산책하고 함께 여행하면서 맛있는 음식 먹고 행복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축복이다. 동생은 시어머니와 영감님이 언제쯤 드러내놓고 주책을 부릴까 그때를 기다린다고 했다.
지난 6월 22일 남부터미널역 ‘팜스 앤 팜스’에서는 계간 문학잡지 제 13회 신인 문학상 시상식이 있었다. 이 자리는 한국시니어블로거협회의 회원인 손웅익씨가 수필가로 등단하는 자리였다.
필자는 한마디로 겉모습도 속마음도 잘난 남자들을 좋아한다. 지휘자 중 가장 좋아하는 불세출의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외모 자체가 명품이다. 이에 버금가는 손 수필가님도 외모가 근사하다. 글은 그 사람이다. 그동안 한국시니어블로거협회에 올린 그의 글들이 정말 훌륭했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철학자인듯 싶은데 예술가이고 사색가인 듯싶은데 수필가이다. 그의 글에는 철학자의 깊이가 있고 예술가의 향기가 배어있다. 내 평생의 변함없는 친구는 문학과 클래식음악이다. 어려서부터 책을 광적으로 좋아했다. 수많은 문장들, 글들을 접해봤던 필자가 판단하기에 손수필가님의 글은 애저녁에 기성 수필가의 필력이었다. 문학지 어디에 실려도 모자람이 없는 빼어난 문장력이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요, 문학은 고통을 먹고 자라는 나무이다.’
완전 반전이었다. 그의 글을 보고 비로소 알았다. 고생하고는 거리가 먼 귀공자같은 그의 모습 뒤에 숨겨진 비밀을. 그가 청소년기에 어렵게 살았다는 것을. 혹독한 IMF시절을 겪어낸 과정을 읽는 중에는 그에 대한 안쓰러움에 눈물이 났다. 아마도 지고지순한 사모님의 지극한 사랑과 정성이 없었다면 그는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평생 사모님께 ‘깨갱’ 꼬리 내리고 살아야만 한다.
여차하면 사모님 입장에서는 다 죽어가는 사람을 겨우 살려 놓으니까 은혜도 모르고 큰소리친다고 할 것이다.
인재는 키우는 것이다. 봄날에 손 수필가님께 구체적으로 심사방법을 알려드리고 작품을 출품하실 것을 권유 드렸다. 이쁜 남자는 이쁜짓만 골라 한다. 두말 할 것도 없이 바로 작품을 내었고 일사천리로 작품심사를 통과하여 오늘날의 영광을 안게 되었다. 서리풀 문학회는 서초문화원에서 신길우 교수님께 수필지도를 받고 있는 문하생들의 모임이다. 그 문하생들도 수강한지 몇 년이 되었어도 아직 등단 못한 사람이 수두룩하다. 단 한 번의 심사에 통과된 것은 엄청난 실력자인 손수필가님이 일궈낸 쾌거였다. 그가 수필심사에 통과하였다는 말을 듣는 순간 정말 내 일같이 기뻤다.
그런데 그 순간 프랑스의 샹송가수 에디뜨 삐아프와 이브 몽땅이 연상되는 건 뭐지? 에디뜨 삐아프는 어렸을 때의 극심한 영양실조로 실명할뻔 했고 키가 142센치밖에 안된다. 불우한 환경 속에 내팽개쳐졌던 에디뜨 삐아프는 갖은 고생 끝에 가수로 성공하였다. 이후 여러 명의 남자들과 만나고 헤어졌다. 삐아프가 뼈아프게 키워낸 남자들은 성공한 후에는 하나같이 그녀 곁을 떠나갔다. ‘내가 소설과 영화를 너무 많이 봤나? ㅋㅋ’ 에디뜨 삐아프와 이브 몽땅의 관계는 애정이고 손 수필가님과 애란이는 우정이다.
등단 후 수필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는 그의 얘기에 나는 속으로 ‘앗싸라비아 너무 좋아서 춤을 추고 있었다.’필자는 그가 ‘되면 좋고 안돼도 그만이다.’ 큰의미를 두지 않는줄 알았던 것이다.
시상식에는 수많은 문인들이 참석했고 ‘세컨드 같은 퍼스트’인 손 수필가의 애잔하고 어여쁜 사모님이 동석하였다. 맞다! 유유상종이다. 미남미녀 부모님의 우월한 유전자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잘생긴 장남도 함께 하였다.
그의 수상작 과 은 사랑스러운 사모님과 얼마나 알콩달콩 예쁘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여러사람에게 입이 아프게 자랑하고 있다. 그는 부정하고 있지만. 독자들은 다 알고 있다. 그가 얼마나 재미있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지를.
겉모습도 영혼도 아름다운 손 수필가님의 곁에는 늘 행복이 머물러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행복이 달아나다가도 멋진 그의 모습이 보고 싶어서 다시 돌아올 테니까.
일흔에도 여든에도 아흔에도, 심지어 100세가 되어서도 저세상엔 못 가겠다던 노래가 공전의 히트를 친 적이 있다. 노래는 150세가 되어서야 극락왕생했다며 겨우 끝을 맺는다. 살 수만 있다면 100년 하고도 50년은 더 살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 아닌가. 장수만세를 외치는 100세 시대 시니어들에게 어쩌면 ‘죽음’은 금기어와 같다. 얼마나 ‘사(死)’에 민감하면 건물에도 엘리베이터에도 ‘4’층을 빼어버리기 일쑤인가 말이다. 그런 면에서 유분자 소망소사이어티 이사장(83)은 용감하고 거침이 없다. 1968년 간호사로 도미해 치열한 이민자의 삶을 산 그녀는 은퇴 후 시니어들을 향해 ‘품위 있게 죽자’고 외치고 있다. 그녀는 말한다. 100세 시대, 지금이야말로 죽음에 대해 터놓고 말해야 할 때라고.
일흔에 다시 품은 ‘소망’
미국 땅에서 이민자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지 50년, 반세기다. 그 세월을 지나는 동안 유분자라는 이름 앞에는 재미 한인 간호사의 대모, 코리아타운의 철의 여인, 한인 여성운동가 1호라는 수많은 수식어가 붙었지만 어느 하나 의도한 바는 없다. 매 순간 절실하게 필요한 일이 있었고 아무도 하지 않았기에 그녀가 했을 뿐이다.
1971년 낯선 타국에서 일하는 간호사들끼리 서로 의지하자는 뜻에서 만든 ‘남가주 한인간호협회’는 지금의 재미간호협회로 발전해 한인 간호사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RN(미국의 국가면허 소지 간호사)이 고소득 전문직으로 이민생활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직접 한국어 클래스와 예상 문제집을 만들어 한인 여성들의 RN면허 취득을 도왔다. 당시 이 프로그램을 통해 RN자격을 획득한 간호사만 3000명이 넘는다.
1980년대 한인들의 미국 이민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이민 가정에 크고 작은 문제들이 불거지자 가정법률상담소도 만들었다. 가정폭력에 노출된 한인 여성들을 위한 인권운동으로 시작된 가정법률상담소는 현재 미주 한인 사회를 대표하는 비영리단체로 자리 잡았다.
한국의 가족과 친지들을 초청하면서 일으킨 요식업체 ‘비지비(Busy Bee)’도 성공가도를 달렸다. 간호사를 그만두고 그녀가 CEO로 활동하는 동안 ‘비지비’는 캘리포니아에만 14개 지점을 오픈, 탄탄한 프랜차이즈 브랜드로 입지를 굳혔다. 유분자 이사장이 신분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한인들에게 비지비를 통해 영주권을 취득하도록 주선한 일화는 수도 없이 많다.
1997년 조국이 IMF 외환위기로 신음할 때는 한국의 결식아동을 위해 '나라사랑 어머니회’를 만들었다. 이후 ‘어머니회’는 터키, 동티모르, 베트남, 이라크, 북한 등의 불우 어린이를 돕는 글로벌 단체로 성장했다.
실로 철의 여인이라 할 만하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어느덧 그녀의 삶은 미주 한인 이민의 역사가 되어 있었다.
“거창한 일을 해보자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다 그때그때 절실한 일이었어요. 하지만 하다 보니 좌우명 같은 것이 만들어지더라고요. 남이 하기를 기다리지 말고 내가 하자. 내가 할 거면 지금 하자. 지금 한다면 기쁘게 하자. 그러다 보니 은퇴도 좀 늦었어요. 일흔이 되던 해, 이젠 좀 편하게 지내라는 딸의 성화에 못 이겨 일을 놓았는데 저는 하나도 편하지 않더라고요. 할 일이 없다는 것,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오히려 불편했어요. 그리고 그때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뒀던 ‘그 일’을 시작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로 노인들에게 사전의료의향서와 유언장을 쓰게 하는 일이었어요.”
2007년, 소망소사이어티는 그렇게 탄생됐다. 그녀의 나이 일흔에 다시 품은 소망이었다.
그녀가 죽음을 이야기하는 이유
간호사라는 직업 때문에 유분자 이사장은 수많은 죽음을 목격했다. 특히 시니어 전문의료시설인 너싱홈에서 근무할 당시 죽음 앞에서 환자와 가족들이 겪는 여러 가지 모습들을 보면서 깨달았다고 한다. 죽음에는 당하는 죽음과 맞이하는 죽음이 있다는 것을.
“당하는 죽음은 본인은 물론 가족까지도 불행하게 만듭니다. 극도의 두려움으로 삶에만 집착하지요. 살려 달라 소리치고 나중엔 의료진과 가족에게 분노와 원망을 퍼부어요. 한 번도 자신의 죽음에 대해 가족들과 이야기한 적이 없으니 죽음 이후에도 가족들은 장례 문제를 두고 갈등과 언쟁을 벌이게 돼요. 반면 맞이하는 죽음은 아름답기 그지없습니다. 마음의 평정을 가지려 애쓰며 가족들에게 사랑과 감사의 뜻을 전해요. 평소 좋아했던 음악을 듣고 자신이 믿는 절대자에게 기도하죠. 마지막 의료행위와 장례에 관한 뜻도 가족들에게 미리 전해 모든 절차가 평화롭게 진행됩니다. 가족들은 온전히 고인을 추모하면서 서로를 위로하는 데 집중할 수 있어요. 이렇듯 준비하는 죽음은 나와 가족 모두를 위한 일이에요.”
사실 다니는 교회를 중심으로 주변의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에게 유언장을 쓰라고 권하고 다닌 지는 꽤 오래됐다. 당시 세상은 온통 웰빙을 부르짖던 시절이다. 온 세상 사람들이 잘 살아보자는데 그녀 홀로 잘 죽는 법을 외치고 다닌 셈이다. 돌아보면 그것이 바로 ‘웰다잉’ 운동이었다. 물론 그때는 그런 단어조차 없었지만.
유언장은 돈 많은 노인들이 유산분배를 할 때나 쓰는 것으로 알았던 한인 노인들은 적지 않게 당황스러워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내민 종이에는 응급상황 시 연명치료는 어디까지 원하는지, 화장과 매장 중 어떤 것이 더 좋은지, 장례식은 어떻게 치르기를 원하며 특별히 원하는 음악이나 글귀가 있는지를 묻는 질문이 있었다. 오래 사시라고 덕담을 해도 모자랄 판에 난데없는 유언장이라니. 재수 없다고 욕도 많이 얻어먹었다고 한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일이 벌어진 것은 그다음부터였다.
“유언장을 쓴 분들의 한결같은 고백은 자신의 죽음을 상상하고 난 후의 삶이 묘하게 자유로워지고 더 소중해졌다는 것이었어요. 건강하게 살아야겠다. 더 의미 있게 살아야겠다 등등. 죽음에 대한 인식이 삶에 대한 인식까지 바꾸어놓은 것이죠. 죽음은 삶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삶과 바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그냥 오래 사는 것이 아니란 말이지요.”
비우고 내려놓음, 그리고 너그러움
여든셋의 그녀는 누구보다 건강하다. 여전히 붉은 립스틱을 멋스럽게 소화하고 적당히 높은 굽의 구두도 문제없다. 요즘같이 화사한 봄날에는 어김없이 연분홍 네일컬러를 바르고 사람들을 만난다. 작은 모임이라도 향 좋은 커피와 샌드위치를 내어놓고 회의 테이블에 모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사람으로 소개한다. 그녀의 삶 어느 한 구석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어 보인다.
“웰다잉을 위해 먼저 해야 할 일이 뭔지 아세요? 바로 웰에이징이에요. 나이를 먹어가면서 가장 좋은 것 중 하나는 나에게 또 남에게 너그러워진다는 사실이죠. 고백하건대, 나는 소망소사이어티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 그리 너그러운 사람은 아니었어요. 완고했고 많은 사람들이 나를 어려워했지요. 무엇이든 원하는 것, 기대하는 것이 많으면 너그러워지기 힘든 거 같아요. 결국 비우고 내려놓음이 키워드죠.”
10년 전, 소망유언서 쓰기로 시작한 소망소사이어티의 사역은 현재 여러 가지 방향으로 영역을 넓혔다.
건강한 삶을 위한 치매 예방과 삶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호스피스 교육, 장례절차 간소화 운동, 그리고 비우고 내려놓는 삶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장기기증과 시신기증 캠페인이 그것이다. 특히 2009년 UC어바인 의과대학과 진행하고 있는 시신기증 캠페인은 대학병원 측도 놀랄 만한 결과를 가져왔다. 당시 4명에 불과했던 한인 기증자는 현재 869명에 이르고 있다.
“가장 높은 차원의 내어줌이죠. 하지만 시신기증을 결정하기까지 저 자신도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아이들을 설득시키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시신기증이 편안하고 행복한가라는 질문에 ‘예스’라고 대답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결정할 수 있는 일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에도 앞장서고 있다.
2010년 아프리카 차드에 첫 우물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아프리카와 중남미에 302개의 우물을 만들었다. 식수가 없어 오염된 물을 마신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유분자 이사장은 직접 원정대를 꾸려 차드까지 날아갔다. 오는 11월에는 네 번째 원정대가 떠난다. LA에서 파리를 거쳐 장장 22시간의 비행 끝에 도착하는 곳, 물론 유분자 이사장도 함께다.
죽음을 준비하는 일은 삶 가운데서 진행되는 것이었다. 소망소사이어티의 슬로건 ‘아름다운 삶, 아름다운 마무리’는 결국 한 연장선에 있었다는 것이 유분자 이사장의 고백이다.
아름다운 삶, 아름다운 마무리
소망소사이어티는 올해 창립 10주년을 맞았다. 일흔의 나이에 그녀가 비영리단체를 만들었을 때 사람들은 그러다 큰일난다는 반응이었다. 여든셋에도 아프리카 차드에 간다고 하니 이번엔 사람들이 한결같은 질문을 한다. 도대체 건강비결이 뭐냐고.
“글쎄요. 실제로 걷는 운동 말고는 비결이라고 할 것도 없어요. 잘 먹고 많이 걷습니다. 밥을 많이 사주는 것도 비결이라면 비결일까요? 어떤 분이 멋지게 늙으려면 입은 닫고 지갑을 열라고 하더라고요. 웰에이징이라면 뭐든 잘 따라하는 편입니다(웃음).”
최근 유분자 이사장은 애써 하는 일이 한 가지 있다고 한다. 오래된 전화번호 수첩을 들춰가며 과거 알고 지내던 사람들에게 안부전화를 하는 것이다.
“크게 거창한 이유는 없어요. 그저 인사를 나누고 싶더라고요. 낡은 전화번호부에 적힌 이름들을 보면 지나온 시절이 떠올라요. 알게 모르게 내가 섭섭하게 한 사람, 나를 서운하게 했던 사람들이 다 있지요. 누가 시킨 일도 아니고 안 해도 뭐라고 할 사람도 없지만 가능한 한 계속하고 싶어요. 이것도 일종의 비움이에요. 이상하게도 삶이 홀가분해지고 즐거워지는 느낌입니다.”
유분자 이사장은 창립 10주년에 대한 칭찬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것에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비영리단체인 소망소사이어티를 이끌고 있는 것은 후원자와 자원봉사자, 그리고 함께 ‘아름다운 마무리’를 준비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언젠가 자신이 떠난 후에도 이들에 의해 비움과 내려놓음의 미학이 전해지고 소망소사이어티가 이어질 것이라 믿고 있다.
“짧은 여행을 한번 하려 해도 준비를 많이 해야 하잖아요. 준비한 만큼 여행이 안전하고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죠. 헌데 막상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여행, 삶과 작별하는 긴 여행에 대해서는 어떻게 준비는커녕 생각조차 하지 않을 수 있죠?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는데 두려움 때문에 피한다는 게 많이 안타깝습니다.”
그녀가 웃으며 말한다.
“저는 장례식이 없을 거예요. 죽으면 바로 대학병원에서 가지고 갈 거니까요. 대신 살아 있을 때 멋진 이별파티를 열면 어떨까 계획하고 있어요. 다들 멋지게 차려입고 말이에요. 그 자리에서 좋아하는 시를 하나 낭송할까 합니다. 저는 평생 간호사로 지냈지만 사실 문학소녀였거든요. 하긴 제가 시낭송을 하면 모두가 놀라긴 할 겁니다. 하하하.”
귀천(歸天)_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어쩌면 우리는 유분자 이사장의 이별파티에서 시 한수를 듣게 될지도 모르겠다.
83세의 유분자 소망소사이어티 이사장, 그녀의 삶 어느 한 구석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어 보인다.
늦은 봄을 노래한 시 중 필자가 좋아하는 시는 두보(杜甫)의 ‘곡강(曲江)’이다. 이 시는 두보가 47세 되던 AD 758년 늦은 봄, 좌습유(左拾遺) 벼슬을 할 때 지은 작품이다. 좌습유라는 벼슬은 간언(諫言)을 담당하던 종8품의 간관(諫官)이다. 당시 그는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재상(宰相) 방관(房琯)이란 사람이 죄목을 뒤집어쓰고 파면되는 일이 발생하자 ‘죄가 가벼우니 대신을 파직함은 옳지 못합니다(罪細,不宜免大臣)’라는 상소를 올린다. 그러자 숙종(肅宗)은 매우 노하여 삼사(三司)를 시켜 두보를 문초하게 한다. 이때 재상 장호(張鎬)가 얘기하길, ‘(간관인 두보가 간언한 것을 가지고) 죄를 묻는다면 그것은 간관의 언로를 막는 것입니다(甫若抵罪,絕言者路)’라고 하여 이 일은 일단락된다. 그러나 황제의 눈 밖에 난 두보는 여름이 되자 결국 화주(華州) 사공참군(司功參軍)으로 좌천된다. 이 시는 당시 황제의 눈 밖에 난 두보가 좌천되기 이전, 자신의 괴로운 심정을 늦봄에 실어 읊은 걸작이다. 2수 중 첫 번째 시의 전련(前聯)을 먼저 살펴보자.
一片花飛減却春(일편화비감각춘)
한 조각 꽃잎이 날려도 봄빛이 줄어드는데
風飄萬點正愁人(풍표만점정수인)
만 점 꽃잎이 바람에 흩날리니 정녕 사람을 시름 잠기게 하네
且看欲盡花經眼(차간욕진화경안)
장차 다 지려는 꽃잎, 눈앞을 스쳐가는 것을 보노니
莫厭傷多酒入脣(막염상다주입순)
몸이 많이 상했다 하여 술 마시는 것을 마다할 수 있으리오…
‘한 조각 꽃잎이 날려도 봄빛이 줄어든다’는 의미의 ‘일편화비감각춘(一片花飛減却春)’은 참으로 뛰어난 명구로서 역대로 수많은 문인들에 의해 애송되어왔다. 이 구절은, 대조를 이루는 ‘하나의 나뭇잎이 떨어지는 걸 보고도 천하에 가을이 왔음을 안다’라는 의미의 ‘일엽낙지천하추(一葉落知天下秋)’ 구절과 더불어 각각 봄이 짐과 가을이 옴을 읊은 천고의 절창으로 꼽힌다. 황제의 신임을 잃은 신세에, 떨어지는 꽃잎을 보니 어찌 심란하지 않았겠는가? 마지막 구절을 보면 ‘몸이 이미 많이 망가졌다(傷多)’는 표현을 통해 심적 고생이 이미 건강을 해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시를 짓고 난 뒤 두보는 같은 제목의 두 번째 시를 짓는다. 이 시의 전련에는 ‘인생칠십고래희’라는 유명한 시구가 등장한다.
朝回日日典春衣(조회일일전춘의)정에서 돌아오면 날마다 봄옷을 저당 잡혀
每日江頭盡醉歸(매일강두진취귀)매일 강가에서 만취하여 돌아온다
酒債尋常行處有(주채심상행처유)외상 술값이야 으레 가는 곳마다 있기 마련…
人生七十古來稀(인생칠십고래희)사람은 예로부터 70년 살기도 드문 일 아니겠는가
이 시를 보면 그는 더욱 심해진 마음고생을 술로 풀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차피 칠십도 못 사는 인생, 몸을 아낄 필요가 있겠냐고…. 이어지는 후련(後聯)이다.
穿花蛺蝶深深見(천화협접심심견)꽃을 파고드는 호랑나비 깊숙이 보이고
點水蜻蜓款款飛(점수청정관관비)물 위를 스치는 잠자리 사뿐히 날아오르네
傳語風光共流轉(전어풍광공류전)말을 좀 전해다오, (우리 인생과) 함께 흘러가는 경치에게…
暫時相賞莫相違(잠시상상막상위)“잠시나마 함께 즐기면서 서로 거스르지 말자고”
두보는 자신이 존경했던 도연명의 형식을 빌려 아름다운 봄날 경치에 대한 자신의 헌사를 이렇게 마무리하고 있다.
>>하태형(河泰亨) 전 현대경제연구원장
아호는 양우養愚. 1958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와 KAIST 대학원에서 경영학과 경영과학을 전공했다. 미국으로 유학하여 뉴욕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수원대 금융공학대학원에 교수로 복귀하여 강의하고 있다. 오랜 소망이었던 서예와 한학을 다시 공부하게 됐다. ‘난정서’를 접하게 된 이후 국내외 문헌을 찾아가며 난정서 연구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 저서로는 가 있다.
햇살이 따사로운 봄날,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손관승(58) 전 iMBC 대표를 만났다. 전 MBC 베를린 특파원, 전 iMBC 대표이사, 교수 등 다양한 직업을 거쳐온 그는 여러 개의 호칭을 갖고 있다. 스스로 부여한 현업(業)은 스토리 노마드, 즉 이야기 유목민이다. 강의와 강연, 기고와 저술을 하는 삶이다. 전반전은 수치와 가치를 추구한 2치의 삶이었다면 후반전은 브런치, 맘대로 시간을 쓰고 배울 수 있는 사치, 그리고 세상의 흐름을 한발 먼저 호흡해야 하는 눈치, 3치의 삶이란다. 그의 3치의 삶에 1치를 덧붙이고 싶다. 재치! 고전의 인용과 고급 유머의 재치를 적재적소 활용하는 활용하는 그에게선 자유인의 향취가 물씬 풍겼다.
그는 거듭되는 사진 촬영 포즈 요청에도 ‘Sure’, ‘OK’를 연발하며 경쾌하게 응했다. 또 ‘흑모백모(黑毛白毛) 가리지 않고 아쉬운 중년의 머리숱이니 정수리 부분의 사진 촬영은 피해 달라’는 유머로 분위기를 경쾌하게 띄웠다. 퇴직 후 3년이라는 기간 동안 이른바 전직의 ‘잉크’가 쏙 빠진 티가 역력했다.
메고 오신 백팩의 끈이 ‘나달나달’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닳았습니다. 바꾸지 않고 사용하시는 사연이 있으신지요.
“독일 속담에 ‘가방을 보면 그 사람의 삶이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퇴직할 때 직원들이 선물해준 것입니다. ‘그간 고생했으니 새로운 설레는 이야기를 담아 가져와달라’는 당부를 담아서요. 단순한 가방이 아니라 제가 일생 뜨겁게 일하던 열정, 후배와 동료들이 준 사랑 등 과거와 미래가 함께 담긴 가보예요. 그 직원들의 바람과 기대를 생각하면 열심히 뛰게 되지요. 중요한 자리에도 가능한 한 이 가방을 메고 간답니다.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 ‘빈티’ 가방을 ‘빈티지’ 가방으로 보면서 감동받더군요. 이 백팩과 운동화는 스토리 노마드로서의 프로 의식과 현장 의식을 잊지 않겠다, 허례허식을 버리겠다는 제 다짐이 담긴 인생 2막 필수 장비(?)입니다.”
퇴직 후 많은 사람이 조직의 후광, 즉 타이틀이 없어지는 상황에 멘붕이 되시더군요. 선생께선 어떠셨습니까.
“타이틀 앞에 전(前), ex라는 말이 붙는 것보다 비참한 것이 없습니다. 죽어라 하고 치달린 인생이 A4 용지 발령장 하나로 흔들리지요. 자기 인생을 찾으려면 명함의 타이틀에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과거는 선용 하면 자산이지만, 매달려 있으면 부채입니다. ‘내가 누군데’ 하며 과거에 발목을 잡히면 실패합니다. 허세를 빼야 실세가 됩니다(허허). ex를 잊어야, 인생 전반전에서 exit해야 인생 후반전 진입이 가능해집니다. 저는 예전 CEO를 할 때도 늘 엑시트 플랜이 없는 프로젝트는 결재 보류했어요.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직업에서 20년 이상 일했으면 나중에 어떻게 엑시트할지 상정해놓는 게 필요합니다.”
그는 “경영자는 수치(數値)가 나쁘면 수치(羞恥)를 당한다. 최고의 수치는 강판당하는 것, 그만두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또 경영자 시절 “매일 주가, 실적, 매출, 수익 등의 수치와 싸워야 했다”며 “나쁜 수치는 강판을 시키지만, 좋은 수치가 자리를 보호해주지는 않는 게 현실의 역설”이라고 말했다. 인생의 그늘조차 위트를 담아 말하는 모습이 스토리 노마드다웠다.
조직에 있으면서 출구 전략을 미리 준비하는 게 쉽지 않아 보이는데요.
“뭘 원하는지, 잘하는지 자신과 진정으로 만나는 시간을 갖는 게 필요합니다. 세월과 나이가 저절로 가르쳐주는 것은 아니거든요. 퇴직을 속절없이 당하느냐, 의지를 갖고 맞이하느냐는 차이가 큽니다. 코앞의 일이 급하다고 미루다 보면 늦습니다. 아무리 성실하게 살아왔어도 자신과의 대화를 갖지 못한 사람은 퇴직 때 자괴감과 혼란을 느끼기 쉽습니다. 방향을 생각하지 않고 열심히 달리기만 하다가 낭떠러지에서 갑자기 멈추면 더 위험하고 부상도 크게 당하지 않습니까. 준비 없이 갑자기 조직 밖으로 내동댕이쳐지는 상황이 그와 같습니다. 인생이 계획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대책 없는 ‘퇴직’과 대책을 생각해둔 퇴직은 많이 다릅니다.”
그는 “지금의 50플러스 세대는 물심양면에서 퇴직 이후가 가장 준비되지 않은, 낀 세대”라며 “부모 세대가 그랬던 것처럼 대충 해도 잘살았어 하며 퇴직 이후를 안이하게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선생께선 2013년 퇴직 후 괴테의 궤적을 따라 이탈리아 여행을 떠나셨지요.
“과거에는 일에 미쳤지만, 이젠 한량이 되어 내가 미칠 것을 찾고 싶었습니다. 심리스(seamless), 말 그대로 30년을 재봉틀 박음질하듯 쉼 없이 달려온 직장생활에 완전 지쳤다고나 할까요. 번아웃(burn out)된 내 인생에 갭 이어(gap year), 안식년을 줘야겠다는 절박한 생각뿐이었습니다. 혹자는 ‘먹고살 만한 게 있어서’ 그렇다고 말했지만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었어요. 대학 다니는 애들도 둘이나 있고요. 독일 여행 버킷리스트에 도전하느라 새 자리와 기회, 제안 등을 놓쳤지요. 하지만 리스크 없는 투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내일, 내일’ 하며 미루고 리스크를 최소화하다 보면 ‘매일 책임질 일’은 계속 이어지고 평생 헤어나오질 못해요. 여행을 하며 내가 원하는 것이 자유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할 자유요.”
그의 여행 궤적은 이라는 책으로 나왔고, 마법처럼 제2인생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었다.
퇴직 후 일반적 설계는 크게 버킷리스트의 로망형, 생활형 구직으로 크게 나뉘는데요. 각각의 유형에 조언을 해주신다면 어떤 것인지요.
“첫째도 둘째도 자기탐색입니다. 버킷리스트를 남, 책, 영화에서 나온 대로 따라 하기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자기맞춤 프로그램을 세워야 합니다. 속절없이 시간보내기를 하면 후회합니다. 계획을 세웠으면 도전해야 합니다. 못할 이유를 찾으면 백 가지도 더 나오게 마련입니다. 또 조급한 구직 역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목마르다고 바닷물을 마시면 더 갈증이 나는 이치입니다. 100세 시대를 맞아 오랫동안 일할 커리어 로드맵을 찾는 게 중요합니다.”
프리랜서로 2막을 시작하신 지 이제 3년 차에 접어드셨지요. 전반전과 후반전의 룰은 무엇이 다릅니까.
“인생 전반전은 남이 정해진 룰을 익히는 타율의 적응학습이라면, 후반전은 자기주도 학습이에요. 전반전이 패키지여행이라면 후반전은 자유여행이에요. 당연히 전술과 전략이 달라야 해요. 남이 보기 좋은 옷이 아니라 내게 어울리는 옷, 내게 맞는 신발을 고르는 것에 비유할 수 있지요. 남의 답안지 훔쳐보면서 인생을 허비할 시간이 이젠 없어요. 또 주인공에서 벗어나 조연, 심지어는 카메오 역할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관점을 전환하고 마인드컨트롤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를 다스리면 됩니다. 그러다 가끔 주인공 역할 맡게 되면 또 감사한 것이고요.”
인생 전반전은 앞서가기 위해 최고에 역점을 뒀더라도, 2막은 최적을 택해, 오래가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됐다. ‘빛 좋은 개살구’보다 ‘뚝배기보다 장맛’의 내용, 즉 자기 적합성 여부를 따져야 멀리, 오래갈 수 있다는 의미다.
요즘 기성세대를 꼰대라고 말하며 비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꼰대와 어른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꼰대는 과거에 갇혀 있고, 어른은 미래를 향해 있는 게 가장 큰 차이라고 봅니다. 꼰대는 ‘어떻게 살아야 한다’며 장광설만 늘어놓고 실천은 따르지 않습니다. 반면에 어른은 매일 성장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과거의 영광, 기억에 머물러 있으면 ‘옛날 타령’만 하게 됩니다. ‘러닝 바이 두잉(learning by doing)’을 해야 하는데 꼰대일수록 doing을 하지 않습니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입이 아니라 몸으로 직접 배우려는 것, 그것이 조직 밖 세상에서 살아남는 비결이자 어른으로 존경받는 비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직(職)과 업(業)은 어떻게 구분이 되나요.
“직(職)은 조직에 있어야만 유지되는 직책, 직장이지요. 업은 남이 뺏을 수 없는 본인의 경쟁력, 경륜입니다. 퇴직 후의 대책 하면 흔히 경제적인 것과 이직을 위한 타이틀 등 유형자산만 생각합니다. 저는 업, 경험과 지혜의 노하우 등 무형자산을 준비하는 게 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투자에도 종잣돈이 필요하듯, 인생 2막에 키워나갈 수 있는 종자 경험이 업입니다. 전문성, 네트워크, 경험 등의 총합인 내 일[業]이 없으면 내일(來日)은 없습니다.”
그는 “직은 동료들에 비해 뒤처졌지만 업의 힘을 베를린 특파원 시절에 길렀다”며 “혼자 지낸 고독력이 그 비결”이라고 털어놓았다. 혼자 먹는 밥, 혼자 마시는 술, 혼자 하는 여행. 웅덩이가 있어야 물이 고이는 것처럼 혼자 있는 시간을 이겨내야 창조적인 것들이 따라온다는 설명이다.
파워 스토리텔링을 강조하시는데요. 선생처럼 베를린 특파원, CEO, 교수 등 화려한 경력과 해외탐방의 이색 경험이 없는 분들도 가능합니까.
“내 이야기야말로 삶의 무궁무진한 무형자산이에요. 각각 자기의 파워스토리는 다 갖게 마련이지요. 스토리텔링이란 성공 스토리를 말하는 게 아니라 극복 스토리예요. 백퍼센트 성공담과 실패담은 재미와 의미가 없어요. 시련과 역경을 어떻게 이겨냈느냐 그것을 담아내는 반전에서 스토리의 파워가 나옵니다. 나를 스토리텔링할 줄 아는 게 경쟁력 있는 셀링포인트예요. 덕장, 지장보다 앞서는 게 운장이라고 하는데요. 그보다 상수가 담장(談將), 즉 스토리장이라고 농담하곤 합니다.”
그의 인생 2막을 열어준 비밀의 열쇠는 현직 시절 틈틈이 적어놓은 수첩이다. 이순신에게 남아 있던 ‘12척의 배’처럼 12권의 수첩이 그를 소생시켰다. 책 아이디어를 얻으면서 인생 2막의 시침이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도 그는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메모를 한다. 심지어는 영감을 얻은 식당의 영수증까지 노트에 꼼꼼히 붙여놓는다. 그것이 이야기의 보물창고가 된다.
이른바 ‘손빠’를 가지실 만큼 강연 및 저술로 프리랜서계에서 자리를 잡으셨습니다. 경영사상가 찰스 핸디는 자신의 저서 에서 “100세 시대에 코끼리에 붙어사는 것은 불가능하니 ‘1인 기업가’처럼 강인한 벼룩으로 성장할 준비를 하라”고 말한 바 있지요. 프리랜서가 명심해야 할 생존법은 무엇입니까.
“자유직업, 프리랜서의 다리는 조직인의 다리와 달라야 합니다. 뭍사람의 다리와 뱃사람의 다리가 다른 것처럼요. 뭍사람은 배를 타면 작은 파도의 출렁거림에도 일을 못합니다. 반면 뱃사람은 균형감각을 잡아 폭풍우 속에서도 일을 하지요. 프리랜서는 뱃사람처럼 심리적으로 굳건한 다리를 가져야 합니다. 고체가 돼선 안 되고 액체가 돼 늘 유연한 사고를 해야 하고요. 자유는 공짜로 얻어지지 않습니다.”
그는 프리랜서력(力)을 3가지로 요약했다. 첫째는 상대를 설레게 할 정도의 섹시한 제안 능력이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점에서다. 그러기 위해 생자료를 가공자료로 바꿔 기획안을 만들고, 제안하고, 그러다 역제안을 만들며 아이디어를 발전시켜나가야 한다. 이때 조심해야 할 것은 전직을 내세워 고위관계자와 직통하려 드는 것. 필패하게 돼 있다는 조언이다. 둘째는 상시 준비력이다. 언제 어떤 요청이 들어오더라도 알파에 베타까지 덧붙여 재빨리 대응할 수 있는 준비력이다. 평일 자유로울 수 있다는 말은 바꾸어 말하면 쉬는 날에도 일해야 하는 상시 근무체제와 같은 의미다. 셋째는 탄력 회복성이다. 숱하게 거절당하거나 좌절당할 일이 있어도 자존심 상해하지 않고, 다시 원점으로 회복하고 돌아봐 스스로를 성장시킬 계기로 삼는 능력이 그것이다.
마지막으로 묻죠. 손 선생에게 현재 ‘성공’이란 어떤 의미인지요.
“마음 설레는 일을 갖는 것입니다. 쓰고 싶은 글거리가 줄줄이 머릿속을 채우고 맴돌 때의 희열, 그것 이상의 행복과 성공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는 인터뷰 후 연거푸 제안서 미팅이 있다며 낡은 백팩, 아니 이야기 보따리를 메고 서둘러 일어섰다. 파란 운동화 끈을 조여 매고 세상 속으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정현종 시인의 시구가 떠올랐다. ‘가볍게 떠올라야지, 곧 움직일 준비되어 있는 꼴, 둥근 공이 되어…’.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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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마로니에 공원의 추억을 들추며
비 내리는 날의 외출이 신나고 즐거울 시기는 지났지만 때론 예외일 때도 있다. 빗속을 뚫고 혜화동의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도착하니 역시 날씨에는 아랑곳없는 청춘들이 삼삼오오 손잡고 오가고 있었다. 참 오랜만에 와보는 마로니에 공원이지만 친근함으로 다가온다. 한때 젊은이들의 문화를 꽃피웠던 이곳에서 봄날의 파릇함, 낙엽 지던 가을의 스산함을 느끼며 보냈던 한때의 시간이 떠올라서인지도 모르겠다. 누구에게나 있음직한 그런 젊은 시절의 추억이 마로니에 공원에도 있을 것이므로.
이화마을과 낙산공원 산책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낙산공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본다. 이화마을의 복잡한 골목과 계단을 거쳐야만 하는데 하나하나 눈여겨보면서 걸어가는 재미도 있다. 조금은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오래된 주택가와 상점들이 조금 전 지나왔던 대학로의 첨단거리들과 대조된다.
해발 124미터 높이의 낙산
낙산을 오르다 보면 옛 풍경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이화마을이 있다. 우리가 어릴 적 보았던 골목이나 담벼락 풍경에서 푸근함을 얻는다. 아무리 그래도 유의할 점은 현재 그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에게 우리의 산책이 방해가 돼서는 안 된다. 우리들에겐 편안한 산책길이고 또는 행복한 데이트일 수도 있지만 그들에겐 스트레스가 될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일이다. 언덕과 좁은 골목길과 낡은 계단은 계속 이어졌다. 어찌 보면 비좁은 길이 어수선해 보일 수 있지만 길 옆 풀숲이나 비 맞은 꽃과 나무들이 정겹기만 하다. 비 오는 날의 정취가 풍경들을 더 아늑하게 그려낸다. 쭉 걷다 보면 길목마다 친절한 안내 표지판이 곳곳에 있어 헤맬 일도 없으며 길을 선택해서 다닐 수 있다. 이화마을 텃밭, 이화동 대장간, 이화동 벽화마을, 낙산정, 그리고 아기자기한 벽화들과 놀이광장, 쉼터 등 지루할 틈 없는 산책길이다.
한참을 걷다 보니 땀이 흐른다. 이럴 땐 골목 옆의 작은 구멍가게에서 아이스바 하나 사 먹으며 숨을 고르거나 등나무 아래 정자에서 땀을 식히면 된다. 많은 이들이 찾는 곳이다 보니 이쁜 카페도 있고 가락국수이나 초밥을 파는 작고 멋진 음식점뿐 아니라 예술 갤러리도 있다. 먹으며 놀고 즐길거리가 얼마든지 있는 낙산공원이다.
중턱 이상 올라오니 성곽이 보인다. 성곽 길을 중심으로 안과 밖으로 길이 나 있다. 성곽 밖으로는 오래된 주택과 아파트가 보인다. 낙산의 옛 모습과 현재의 모습을 함께 볼 수 있다. 밤에는 성곽 길에 불을 켜는데 이 불빛이 성벽을 더욱 환상적으로 만들어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특히 사진을 찍는 사람들에겐 낙산의 야경이 인기가 많아 촬영 명소가 되었다.
어느덧 전망대에 올랐다. 비에 젖은 서울이 내려다보인다. 한참을 내려다보며 땀 흘리면서 올라온 이화마을과 낙산을 되짚어 생각해본다. 낙타 모양의 산이어서 낙산이라 이름 붙여진 이곳은 단종비인 정순왕후가 단종 폐위 이후 평민이 되어 살았던 한 서린 곳이다. 평생을 궁 안에서만 살던 정순왕후가 궁 밖으로 나와 단종을 그리워하며 살았을 그 모습을 생각하며 역사의 한 페이지를 떠올려볼 수 있는 곳이다. 온통 도시화되어가던 서울의 한 공간이 이렇게 복원되어 휴식하며 즐길 수 있음은 고마운 일 아닌가. 낙산공원 산책을 마치고 대학로 문화거리로 나가 연극 한 편 보고 맛집을 들르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낙산의 산자락을 따라 동대문으로
시간이 허락된다면 낙산 성곽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동대문의 DDP로 향해보는 것도 좋다. 낙산의 산자락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동대문을 중심으로 하는 시내가 나오고 최첨단 현대 복합 문화시설이 어우러진 동대문 디자인플라자가 있다. 모든 건물들의 겉면이 알루미늄 패널로 되어 있고 밤이면 휘황한 조명으로 멋진 볼거리를 제공한다.
DDP(Dongdaemun Design Plaza)는 3차원 첨단 설계기법 BIM을 도입했다. 이라크 태생의 세계적인 영국 건축가 자하 하디드(Zaha Hadid)의 작품으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알림터, 배움터, 살림터, 어울림 광장, 동대문 역사문화공원과 각종 편의시설로 이루어져 있어서 즐길거리가 아주 많다. 특히 우주선을 보는 듯한 눈부신 야경이 일품이다.
쇼핑천국 방산시장과 광장시장의 눈요기와 먹거리
동대문은 우리나라 최고의 상권인 동대문 시장을 중심으로 다양한 볼거리와 먹을거리들이 도처에 있다. 길 건너편으로 건너가면 광장시장과 방산시장이 있다. 1945년 광복 이전에 작은 시장이 형성되어 지금까지 발전을 거듭하며 이어져온 방산시장이 바로 앞에 있다. 이곳에서 각종 식료품이나 제과제빵 재료, 포장재와 인테리어 용품들을 시중보다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광장시장은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시장으로 점포 수가 5000개가 넘는 대규모 의류시장이다. 뿐만 아니라 농수산품을 비롯한 먹을거리가 풍부한 시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곳 먹자골목의 녹두전이나 겨자 장에 찍어먹는 마약김밥은 먹지 않고 지나치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할 만큼 유명하다. 저렴하고 푸짐한 최고의 메뉴다. 맛있게 잘 먹은 후 그 옆의 시원한 청계천을 바람 쐬며 거닐면 그야말로 완벽한 마무리다.
이렇게 한나절을 보낸다면 서울의 역사 유적을 감상하며 현재의 자신을 생각해볼 시간도 가질 수 있고 치열한 삶의 현장도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다. 산책길 내내 비가 내렸다. 이제 막 시작된 낙산의 여름이 비에 젖어 녹음의 짙푸름이 더했다. 비 오는 날의 외출도 보람 있고 즐거울 수 있음을 확인한 날이다. 동대문 DDP엔 날씨와 상관없이 많은 인파로 붐볐고, 광장시장과 방산시장은 여전히 활기 찬 풍경을 필자에게 보여줬다.
필자의 엄마는 여행을 좋아하신다. 그런 엄마 덕에 여기저기 많이도 다녔다. 여행을 떠나는 날 아침, 엄마는 참 바빴다. 네 명의 아이들에게 예쁜 옷 찾아 입히고 머리 빗기면서 3단 찬합 가득 김밥을 싸야 했고 그 와중에 화장도 해야 했으니 출발도 하기 전에 엄마 목소리가 커지기 일쑤였다. 4형제 중 누구 하나가 엄마 주먹맛을 본 후에야 우리는 집에서 출발할 수 있었다. 엄마는 현관 앞에서 뒷짐 진 채 서 있던 아버지를 원망했지만 아버지는 가만 웃기만 할 뿐이었다. 아이들 데리고 힘든데 왜 그렇게 열심히 돌아다녔냐고 물으니 자식들이 넓은 세상 많이 보길 원했다고 하셨다.
“수덕사에선 너 때문에 살아났어.”
아버지가 이야기를 꺼내셨다. 필자가 일곱 살 무렵이었는데 자다가 한밤중에 깨어 머리가 아프다고 우는 바람에 가족들이 연탄가스 사고를 피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는 열 번도 더 들었다. 여행 중에 일어난 가장 큰 사고여서 여행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단골로 나왔다. 자연농원에서 찍은 사진을 앞에 놓곤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가 도망치듯이 한국을 떠난 이야기가 펼쳐졌다. 주차장을 배경으로 찍은 가족사진을 보니 그 당시 우울한 집안 사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우리는 누가 더 못생기게 나왔는지를 보며 깔깔댔다. 식탁에 앉아 여행에 관한 이야기보따리가 한 번 풀리면 수다가 멈출 줄 몰랐다.
엄마와 단둘이 일본 여행
오랜만에 엄마를 만났다. 엄마는 몇 달 전에 봤을 때보다 등이 굽고, 키가 한 뼘이나 작아져 있었다. 80세가 넘은 티가 확 났다. 관광버스를 타고 남해에 다녀오셨단다. 엄마는 오랜만에 버스 타는 일이 얼마나 좋았던지 도착해서도 버스에서 내리기 싫었다고 했다. 버스 타는 게 그렇게 좋냐고 퉁명스럽게 내뱉곤 미안한 마음에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나랑 둘이 여행 갈래?”
“좋~지.”
엄마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혼자 인천공항까지 올 수 있냐고 물으니 나를 어떻게 보고 그런 말을 하냐며 나보다 먼저 공항에 도착해 있었다.
일본은 몇 번 다녀와 별로라는 엄마는 미야자키를 맘에 들어 했다. 태평양 푸른 바다가 인상적인 우도신궁에서 소원을 빌고, 시원한 소나무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노천 온천도 즐겼다. 회전초밥집에 가서 싱싱한 초밥을 먹은 뒤에는 동물원 구경을 했다. 아주 가까이서 기린과 눈이 마주친 엄마는 깜짝 놀라 뒷걸음치더니 쪼그리고 앉아서 비둘기 모이를 주는 재미에 푹 빠졌다. 엄마는 행복해 보였다.
저녁이 되자 가방에서 주섬주섬 초록색 표지의 낡은 수첩을 꺼냈다. 엄마가 메모를 열심히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여행 수첩이 따로 있는지는 처음 알았다.
“뭐라고 쓸 건데?”
엄마 옆으로 바짝 다가갔다.
“별거 없어. 며칠에 뭘 했고 뭘 먹었나 정도 쓰는 거야. 쓸 때는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나중에 읽어보면 정말 재밌어.”
엄마는 수첩에 ‘산본 광장동 공항버스 정류장 오전 6시, 일본 공항 11시 30분 도착’, ‘쇼핑몰 구경하고 7시 회전초밥 저녁식사’와 같은 사소한 일정들을 적어 내려갔다.
돌아서면 잊어버리니 여행의 기억을 오래 간직하기 위해 기록한다는 엄마의 수첩을 들여다보았다. 중국 여행, 싱가포르 여행, 캐나다 여행, 제주 여행, 울릉도 여행. 수첩엔 여행의 기록이 끝이 없었다. 대부분 아버지와 둘이서 한 여행이었다. 지금은 걷는 게 편치 않아 엄마와 함께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건강이 안타까웠다. 그 많은 여행 중에 필자가 동행한 여행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결혼해서 내 자식, 내 식구 돌보느라 엄마, 아버지를 잊고 살았던 모양이다.
“엄마, 언제부터 이런 걸 쓰고 있었던 거야? 너무 멋진걸.”
필자의 칭찬에 엄마는 신이 났다. 수첩에 기록해놓은 여행지를 하나하나 설명하면서 그때의 기억을 소환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밴쿠버에 사는 큰딸 집에서 보낸 두 달 동안의 기록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 집에서 먹은 삼시 세끼, 교회 가서 헌금하라고 사위가 쥐어준 빳빳한 달러, 주변 지인들의 식사 초대, 블루베리 따러 갔던 일 등이 세세하게 기록돼 있었다. 엄마는 딸이 생각날 때마다 그 수첩을 펼쳐보았다고 말했다. 자식을 그리워하는 부모의 마음이 느껴져 코끝이 시큰해졌다.
필자는 부모님과 자주 만나 식사를 하고 간단한 드라이브를 즐기긴 했지만, 잠깐 만나고 헤어졌기 때문에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러다가 여행 와서 엄마와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엄마를 참 모르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의 이야기를 듣느라 관광은 뒷전이 되어버렸지만 엄마를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엄마와의 여행은, 여행이 목적이기보다는 함께하는 시간이 곧 여행이란 걸 깨닫게 해주었다.
서울대 심리학과 최인철 교수는 행복의 최고 활동은 여행이라 하였다. 사람은 뭔가에 대해 신나게 이야기할 때 행복감을 느끼는데, 여행은 다양한 경험을 통해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새 옷을 산 얘기는 몇 년째 할 수 없지만, 몇 년 전 다녀온 여행에 대해서는 지금 이야기해도 즐겁다. 새로운 곳에 가서 맛있는 거 먹고 같이 간 사람들과 말하고 노는 것도 즐겁지만, 여행은 다녀와서도 말할 거리가 있기 때문에 행복감이 높아진다.
행복하지 않은 인생은 재미없다.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을 텐데 여행을 통해 행복감을 높일 수 있다면 당장 가방을 싸야 하지 않을까? 요즘은 가족이라도 각자 자신의 삶을 사느라 서로를 돌아볼 새가 없다. 한집에 살아도 한상에 둘러 밥 먹는 일이 뜸해지니 별 할 말도 없다. 이럴 때 가족여행을 다녀온다면, 여행지에서 새로운 것을 즐기는 재미는 물론이려니와 다녀와서도 식탁 위 대화가 풍성해질 것이다. 엄마가 쾌활하고 건강하게 사는 건 여행을 즐기기 때문인 것 같다.
필자는 엄마가 건강한 심장과 다리로 여행하고 살면서 행복한 감정을 늘 간직할 수 있기를 빈다.
여기저기 꽃이 만발한 봄날이다. 가고 싶은 데 있으면 얘기해보라는 필자의 말에 엄마는 미리 준비라도 해둔 듯 “백두대간 협곡열차가 참 멋지던데” 하신다.
그 여인은 지금 어디에서 살고 있을까? 댓잎에 바람이 스치는 소리를 들으면 불현듯 생각나는 여인이 있다. 고운 얼굴은 아니었어도 목소리는 청아했다. 필자가 자원입대한 공군 복무를 마치고 2학년에 복학했을 때 그녀는 3학년이었다. 나이는 필자가 네 살 위였다. 경상도 시골 태생이었던 필자는 서울 생활이 서툴기만 했다. 세련된 구석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다. 의상학과를 다녀서인지 옷매무새가 세련되고 늘 깔끔했다. 나이 차이가 있어 친오빠 같은 생각이 들었는지 만나는 날이면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곤 했다. 여동생이 없었던 필자도 그녀가 싫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별다른 감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4학년이 되던 봄날, 제안을 해왔다. 여자 친구와 단양팔경으로 1박 2일 여행을 가는데 여자끼리는 두려우니 필자가 함께 가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하도 간절하게 부탁을 하는 통에 거절도 못하고 따라가 경호원 역할을 하기로 했다. 물론 기차여행이었다. 출발 시각에 맞춰 청량리역에 도착하니 혼자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가 일이 급하게 생겨 못 가게 되었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처음부터 필자와 함께하려는 계획이었다.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기차를 타고 단양으로 향했다. 살가운 누이동생과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었다. 도담삼봉과 상선암 등을 둘러보았다. 그러는 사이 해가 저물어 하룻밤을 지낼 숙소를 찾아야 했다. 참으로 난처했다. 그러나 그녀는 마냥 즐거운 모습이었다. 따로 방을 잡으려니 혼자 무섭다며 반대해 한방에 들었다. 남녀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어떠한 일도 이미 각오했지 싶었다.
그러나 우리는 특별한 일 없이 하룻밤을 한방에서 보냈다. 친누이 동생을 보호하듯 팔베개까지 해서 말이다. 대단한 인내심의 발휘였을까? 아니면 책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다음 날 나머지 여행까지 마치고 우리는 귀경하였다. 그런데 그날의 일이 오히려 그녀에게 큰 신뢰를 준 것 같았다. 필자에게 더 마음을 쏟으며 다가왔다. 그녀의 짝사랑에 필자가 분명한 태도를 보여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후회가 남는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필자는 기대했던 행정고시에서 낙방한 후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지리산 자락 고향 마을에서 외부와 연락을 끊고 지내고 있었다. 그 시기에 그녀는 계절 졸업을 했다. 졸업식에 필자가 꽃다발을 들고 나타나리라 기대했을 그녀.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았으니 실망이 얼마나 컸을까?
그녀를 다시 만난 건 필자가 직장을 다니던 어느 날이었다. 그녀의 연락을 받고 종로에 있는 커피숍에서 재회했다. 물론 필자는 지금의 부인과 결혼한 상태였다. 그녀는 필자와의 만남이 좋은 추억으로 남았다며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담담히 털어놓았다. 그리고 모든 걸 자기 운명으로 돌렸다. 그녀는 대학 졸업 후 약사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지만 2년도 채 되지 않아 남편이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는 비운을 맞았단다. 그 뒤 친정에 돌아와 두문불출하다 옛 생각이 나서 얼굴 한번 보려고 연락을 했다는 것이다. 마음이 착잡했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날이었다.
그 뒤 필자는 엽서 한 장을 받았다. 어느 늦가을 그녀는 지리산 칠불사 암자로 온 이야기와 함께 골바람에 바스락거리는 댓잎 소리를 들으며 엽서를 쓴다고 적었다. 엽서 맨 아래에는 ‘다른 곳으로 떠나며… 칠불사에서’라는 글이 씌어 있었다. 그러고는 더 이상 소식이 없었다. 지금은 어디서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다시 연락이 되면 오래된 친구처럼 반갑게 만나 그녀가 좋아하던 짙은 커피 향을 맡으며 추억에 잠기고 싶다. 그리고 한마디 들려주고 싶다. “당신 참 괜찮은 사람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