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고령화 현상이 초래되면서 대응 방안이 다양하게 전개되던 와중에 코로나19에 의한 팬데믹 사태가 일어났다.
코로나19는 전 세계적으로 전파되어 이미 2억3000만 명이 확진되고 470만 명이 사망했으며, 의료 역사상 악명 높았던 1918년의 스페인독감보다 더 많은 희생자를 냈다. 놀랍게도 그동안 선진국으로 인정되었던 국가들마저 역병을 통제하지 못했고 환자들의 병원 치료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젊은이보다 노인의 치사율이 100배 정도 더 높다는 점으로, 미래 장수 사회에 울린 경종이 아닐 수 없다. 역병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국가별로 사회 문화적 차별성이 크게 노출되어, 이번 팬데믹 출현은 미래 사회 구축에 개인적 역량 강화도 중요하지만 사회적 공공 정책과 문화적 요소가 더욱 중요함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특이한 사항은 코로나19로 사망한 환자들 대부분이 고혈압, 당뇨, 폐 질환, 암, 비만 등의 기저질환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이러한 기저질환의 근저에는 생활 습관 문제가 있기 때문에 사태의 해법에 대한 일말의 희망을 갖게 했다.
면역 향상에 좋은 방안 7가지
코로나19 팬데믹이 보여준 고령 사회에 대한 엄중한 메시지를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하나, 고령이 되더라도 고혈압, 당뇨, 암, 폐 질환, 비만 등의 기저질환이 발생하지 않도록 생활 습관 개선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둘, 노인 요양 개호 시설의 철저한 관리와 지원이 요구되며, 밀집과 밀폐를 해소하는 방안이 필요하다. 셋, 사회적 거리두기와 연계해 시설의 단순 폐쇄로 초래되는 노인 고립화를 해소하는 방안이 시급하다. 넷, 위기 상황에서 노인들이 스스로 생활하고 봉사할 수 있는 여건 조성이 절실하다. 다섯, 팬데믹 상황에서 가족과 지역주민의 연대 의식과 상호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여섯, 개인의 일부 희생으로 보다 많은 공공의 혜택을 누리도록 질서를 지키는 데 협력해야 한다. 일곱, 비대면 상황에서 생계를 유지하고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기술적 시스템을 보급해야 한다.
이상과 같이 코로나19 사태를 극복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안이 거론되고 있지만, 가장 문제가 되는 치사율 저하의 결정적 조건으로 부각된 기저질환 예방이 시급하다. 기저질환은 기본적으로 잘못된 생활 습관으로 일어나는 질환이기 때문에 개인의 노력을 통한 생활 습관 개선이 중요한 대책임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예부터 오래 살기 위한 장생의 미련을 버리지 못한 인간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찾지 못했던 천연 불로초 대신 이에 준하는 약물을 직접 조제하는 연단술을 개발해, 그 소산인 단약을 방사들이 비술적 방법으로 제조하여 16세기 무렵까지 황실을 비롯한 고관대작과 부자들에게 1000년 이상 사용해왔다. 연단술은 아랍권으로 그리고 유럽권으로 전파되면서 연금술로 발전했고, 근대까지 이어져 철학과 의학의 중심 과제를 이루었다. 그러나 천연 또는 인공의 단약들은 수많은 부작용을 야기했다. 그 반작용으로 천연 또는 인공 약제의 복용을 거부하고 신체를 직접 단련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장생술 기법이 다양하게 개발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장생술은 생활 방식 개선과 신체 단련 위주로 발달하여 역사적으로 도교가 주도하면서 종교적 위상으로 승화했다. 그 결과 중국을 비롯한 동양권에 달생법(達生法)과 양생술(養生術)이라는 이름으로 전승되어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여전히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불로장생술의 핵심은 일상생활 습관에 있다
중국의 명산 무이산(武夷山)은 자연, 생태, 문화 세 가지 영역에서 모두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될 만큼 특별한 지역이다. 이곳에는 주자(朱熹)가 제자를 양성한 무이정사(武夷精舍)가 있어, 조선조 유학자들이 가고 싶어 한 성리학의 성지였다. 무이정사 가까이에는 도교 36성지 중 하나인 천유봉(天遊峰)이 있고, 그 정상에 팽조(彭祖)를 모시는 사당이 있다.
팽조는 1000년 가까이 살면서 부인을 49번이나 바꾸었고, 장생술의 일환인 방중술 비법을 완성했다는 인물로 달생술의 전설적 상징이다. 그 사당 안쪽 팽조의 조상 양편 기둥에 각각 은수서산수정양성 내장생불로극공(隱水棲山修精養性 乃長生不老極功)과 찬하복기토고납신 위익수연년요지(餐霞服氣吐故納新 爲益壽延年要旨)라는 장생술의 비급 두 가지가 새겨져 있다. 맑은 물 있는 깊은 산에 살며 정기를 단련하고 본성을 다스리는 것이 불로장생의 최고 방안이며, 이슬 먹고 호흡을 다스리며 낡은 것을 뱉어버리고 새것을 받아들이면 해를 거듭할수록 건강해지는 핵심 방안이라는 의미다. 장생술의 요건인 깊은 산 맑은 물은 청정한 지역으로 공기와 물이 맑고 열심히 신체 단련을 할 수 있는 공간적 환경을 거론하고 있고, 이러한 장소에 살며 몸과 마음을 단련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최근 팬데믹에서 심각하게 제기되는 공간적 문제점인 밀폐, 밀집, 밀접의 심각성을 이미 1000년 전부터 거론한 것이다. 나아가 신체 단련으로는 소식하며 호흡을 거칠게 하지 말고, 낡은 것을 버리고 새것을 취하는 적극적인 쇄신의 삶을 살아야 하는 실천적 생활 습관을 강조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도교의 양생술은 음식 섭생의 섭양술, 호흡 조절의 복기술, 자연과의 합일을 지향하는 신체 단련의 도인술, 음양 조화를 통한 방중술 등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섭양술로는 소식과 생식을 위주로 하라는 벽곡, 신선이 되는 장생식 또는 단약과 같은 약물을 복용하라는 복이가 있다. 약으로는 웅황이나 단사와 같은 광석과 지황이나 영지 같은 천연 식물이 있으며, 효능에 따라 상약, 중약, 하약이 있다. 호흡 조절의 복기술에는 조식, 태식, 폐기와 토고, 납신, 행기가 있다. 이와 같이 호흡 수련을 강조했고, 몸 안의 모든 노폐물을 제거하고 맑은 기운을 받아들이고자 했다. 이러한 호흡법은 단전호흡 형태로 현대에도 일반에 널리 보급되고 있다. 신체 단련을 위한 도인술로는 몸을 적절하게 활용하여 기를 보존하기 위한 운동 요법으로 역근경, 팔단금, 오금희 등이 전해지고 있으며, 중국에서는 공산당 정부 수립 이후 국민 건강 체조인 태극권과 같은 기공 요법을 보급하여 크게 성행하고 있다.
남녀 간의 육체적 결합을 적절히 활용하여 정(精)을 보하고 기(氣)를 키우는 방중술은 기본 원리가 채음보양에 있으며, ‘소녀경’, ‘채녀경’, ‘황제내경’ 등을 통해 일반에도 널리 회자되고 있다. 도교의 장생술은 도교 신봉자만이 아니라 유학자들에게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청정한 곳에서 은일하게 지내는 청정무위의 삶과 스스로 노력하여 건강을 다지는 자강유위를 생활 규범으로 삼았으며, 이를 본받아 퇴계 선생도 신체 단련을 위한 활인심방을 개발하여 중화탕, 화기환, 도인술과 같은 체조 요법을 스스로 실천했다. 이와 같이 양생술의 핵심인 신체 단련의 도인술은 선비 사회에서도 널리 유행하여 건강을 유지했다.
백세인들의 운동
프랑스의 랑동(Lucile Randon) 수녀님은 117세로 세계 최고령 2위에 오른 분인데, 코로나19에 걸렸지만 회복했다는 뉴스가 나와 세인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이어 세계 곳곳에서 백세인들이 코로나19를 극복하고 회복되었다는 뉴스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작년 9월 말 통계로 미국에서도 코로나19에 걸렸음이 확인된 백세인 60명 중 사망에 이른 분은 단 3명에 불과해 백세인의 코로나19 치사율이 5%라는 보고가 나왔다. 같은 보고에서 대조적으로 90대 초고령자의 코로나19 사망률은 11.4%로 백세인의 치사율이 유의미하게 낮았음을 밝혔다.
일본에서도 팬데믹 기간 중 백세인의 수가 예년보다 오히려 크게 증가했음을 보고했다. 또한 7월 말 도쿄에서 개최된 국제백세인학술대회(ICC2021)에서는 팬데믹 상황에서의 백세인에 대한 매우 의미 있는 논문들이 발표되었다. 저명한 인구학자 미셸 풀랭(Michel Poulain) 팀은 코로나19로 치명적인 타격을 받은 벨기에의 2020년도 사망률이 80대 이상 연령대에서 평년보다 20% 이상 증가했는데, 놀랍게도 100대의 경우에는 사망률이 0.95배로 오히려 감소했음을 보고했다. 백세인이 80~90대보다 코로나19에 대한 회복 능력이 더 강하다는 의외의 사실이 구체적으로 보고된 것이다. 큰 미스터리는 왜 백세인의 코로나19 치사율이 일반 고령인보다 낮은가라는 문제다.
노인이 되어 나이가 들어가면 갈수록 생체 기능이 저하되고 생체를 보호하는 기능도 동시에 낮아지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데, 백세인의 코로나19 저항성은 뜻밖의 사건이 되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일반 고령인과 백세인의 다른 점을 비교해보려는 새로운 시도들이 추진되고 있다.
우선 우리나라의 백세인 조사에서 밝혀진 백세인의 생활 습관적 특성인 활동성과 규칙성 그리고 절제성에서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백세인은 항상 몸을 움직이려고 노력하고, 생체 리듬에 따라 규칙적으로 움직이며, 먹는 것과 움직이는 것에서 결코 무리를 하지 않는다는 특성을 보였다. 그 결과 의학적으로는 당뇨병이환율이나 고혈압률이 일반 노인보다 백세인이 유의미하게 낮았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자신의 생활 리듬을 지키며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는 생활 습관은 건강을 지키고 기저질환을 예방했으며, 이러한 생활 습관은 결국 고대로부터 내려온 장생술의 재현이 아닐 수 없다.
신체 단련과 생활 습관 개선이라는 양생술이 불로초보다 강한 설득력을 갖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부작용 측면에서 훨씬 안전하다는 기대치와 고가의 경비가 들지 않는다는 경제성 때문이었다. 신체를 단련하는 방법으로 귀족만이 아닌 일반인들도 활용할 수 있었기에 널리 보급될 수 있었다. 장생술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개개인의 일상생활 습관을 개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에 사는 일반인은 일상생활의 편리함에 익숙하여 신체를 활용하고 욕구를 절제하는 데 거부감을 느끼고 있다. 도회지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먹는 것을 절제하고 몸을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행동양식의 개선이 더욱 요원한 일이다. 그러나 고령사회에서 건강장수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개인이 생활 습관 개선을 통해 건강을 유지하고 각종 기저질환의 근원인 퇴행성 질환을 미리 예방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일반인이 손쉽게 따라 할 수 있는 실천적 생활 습관을 확립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인터벌 워킹
이러한 측면에서 고령인이 일상생활 습관으로 지속적으로 운동하는 방법을 한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세계적 장수 지역인 일본 나가노 지역에서 주민들에게 권장하는 인터벌 워킹(Interval Walking)은 간단하다. 매일 3분 천천히 걷고 3분 빨리 걷는 사이클을 5회씩 반복하는 단순한 방법이다.
신슈대학 연구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 운동법을 3개월 이상 수행한 주민들의 심폐 기능이 크게 개선되고 고혈압과 당뇨가 회복되었으며, 3년 이상 추적한 결과 지역주민 건강보험 의료비 지출이 30%가량 줄었다. 인터벌 워킹은 단순하게 걷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속도를 빠르게 그리고 천천히 되풀이하여 걸음으로써 심폐 기능을 효율적으로 자극하는 가장 간편한 운동 방법이다. 이에 덧붙여, 심신을 자극해 정서적 기능도 증진하고 신체 균형 감각을 증진해 낙상 같은 사고를 방지하는 목적의 우리 춤 체조 같은 운동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를 권장한다. 이러한 운동 프로그램은 모두 신체적 기능을 증진하는 성과 외에 인지 기능 저하와 면역력 저하도 방지할 수 있음이 차례로 밝혀지면서 그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같은 위기 상황에서 병에 걸리지 않고 이겨내기 위해서는 면역력을 높일 수 있는 적절한 운동을 지속적으로 하는 생활 습관 개선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질병에 걸리지 않는 이상적인 무병장수를 이룬 경우는 기대만큼 흔하지 않다. 다만 건강하게 오래 살다가 가능한 한 아주 늦게 질환에 걸리는 경우가 일반적으로 보이는 백세인의 모습이다.
장수인이 되는 여러 가지 경로가 있지만, 결국은 맑은 공기를 마시며 여유로운 곳에서 건전한 생활 습관을 유지하면서 성실하게 일상생활을 하는 것이 비법임은 분명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코로나19 팬데믹 사태에서 보여준 백세인의 강인한 생존 미스터리는 그들이 평생 지켜온 건강한 생활 습관이 반영된 것임이 분명하며, 미래 장수 사회의 기본 조건이 바로 생활 습관 개선임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일단 미국의 시니어들은 많이 움직여요. 장거리 운전도 하고, 봉사도 하고, 집도 고치고, 바느질하고, 뜨개질도 해요. 책도 많이 읽고요.” 미국에 이민 와 20년을 현지 사회와 접해온 20대 후반의 딸이 바라보는 미국 시니어들의 모습이다. 이민 1세대로서 삶에 치여 그들과의 교제와 접촉이 그리 많지 않지만, 딸의 시각과 시선을 따라 미국 시니어들의 일상 습관을 들여다보았다.
미국인들, 특히 백인들은 피부가 좋지 않아 실제보다 더 나이 들어 보인다. 그럼에도 그들은 부지런히 외모를 가꾼다. 손·발톱과 모발을 정기적으로 관리하고, 가까운 마트에 갈 때도 옷·가방·구두의 색을 맞추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타인에 대한 예의이자 자신의 자존감이라 여긴다. 멋지게 차려입고 동네의 작은 박물관이나 아담한 식물원을 삼삼오오 방문한 후 카페에서 한가로이 담소하는 시니어들의 모습 역시 낯설지 않다. 시니어 관람객을 안내하는 제복 차림의 시니어 직원들의 활기찬 표정에도 자부심이 묻어난다.
미국의 시니어들은 대체로 부부가 같이 움직인다. 순한 눈을 한 나이 든 애완견을 사이에 두고 느릿한 걸음으로 산책하는 노부부의 모습은 아름답다. 거동이 심히 불편한 늙은 아내나 남편을 똑같이 연로한 배우자들이 조심조심, 느릿느릿 돌보는 모습은 병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우리처럼 간병인에게 맡기는 경우는 드물다.
남자들은 나이 불문하고 집 고치기가 일상화되어 있어 홈디포(대형 건축자재 스토어)를 즐겨 찾고, 차고에 깔끔하게 정리된 연장들은 그들의 재산 목록이다. 또한 백발 여성들은 수예나 뜨개질, 바느질 취미에 열중하여 옷감이나 실을 구입한 후 가게에 상주하는 강사들에게 직접 배워가며 각종 소품을 만든다.
미국 시니어들은 20대 후반부터 노후 대책을 세운다. 은퇴 후에는 사회보장연금이나 경제활동할 때 적립했던 퇴직연금 등으로 살아간다. 대부분의 은퇴자들은 미국 은퇴자 협회에 가입하여 의료 및 각종 보험 안내, 신용카드 사용액 포인트 적립, 여행, 쇼핑 등에서 할인 혜택을 누린다.
한편 봉사는 미국 시니어들의 진정한 힘이다. 이민자 영어학교 봉사자인 70대 초반의 린다는 늘 웃는 얼굴이다. 그녀는 아메리칸 드림을 찾아 건너온 이방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것은 물론이고, 미국 생활의 어려움에도 귀를 기울인다. 그녀는 3남매와 남편, 어머니와 사별 후 홀로 된 아버지까지, 대가족을 보살피기 위해 초등학교 교사직을 그만뒀다. 자녀들이 어느 정도 성장하자 일터로 복귀했으나, 기업체의 중견 지위에서 은퇴한 후 빨래방 두세 곳을 운영하는 남편과, 아흔을 훨씬 넘겨 점점 더 완고해지는 아버지를 돌보는 일은 여전히 그녀의 몫이다. 일요일에는 교회에 가고 지역 봉사단체에 짬짬이 일손을 보태며 바쁘게 살아가는 그녀가 어느 날 자신의 SNS에 가족사진을 올렸다. 성인 자녀들, 귀여운 손주들, 그리고 남편 틈에서 행복하게 웃고 있는 그녀에게서 70대가 아닌 20대의 눈부신 아름다움이 읽혔다.
보람 있고 헌신적인 삶을 살아가는 린다와는 대조적인 시니어로 신디가 있다. 미모와 명문대 출신이라는 것에 엄청난 자부심을 가진 81세의 그녀는 남편과 사별 후 늙은 개와 단 둘이 산다. 하늘이 두 쪽이 나도 매주 화요일 오전 10시 30분에는 20여 년 단골 미용실에서 머리와 손·발톱을 매만져야 하기에 코로나 자가격리 기간 중에도 미용사를 집으로 불러들였다. 그녀는 미용사 앞에서 여왕처럼 군림하며 매번 처음처럼 미용사 가족 하나하나의 안부를 묻고 나름대로의 충고를 지치지 않고 해댄다. 조울증과 강박 증상을 가진 그녀는 배타적이고 안하무인의 고압적인 자세로 주변 사람들을 질리게 한다. 외로운 그녀는 점점 더 괴팍해지는 중이다.
나이 들어 가족이 있고, 자신의 집에서 노후를 보낼 수 있는 건 행운이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시설로 들어가는데, 그곳의 휠체어 노인들은 거의 무표정하고 타인을 경계하며 웃지 않는다. 그나마 유일한 행복감은 젊은 시절 이야기를 할 때 잠깐 느낄 뿐.
노화는 피할 수 없는 자연스런 삶의 과정이다. 그러나 감사한 마음으로 주어진 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고, 주변과 따스하고 넉넉한 마음을 나누는 것은 나의 선택이자 나 하기 나름 아닐까.
평소와 다름없는 주말, 코로나19 탓에 외출이 조심스럽다. 집에 있자니 무료하기 그지없다. TV를 켜니 예능 프로그램 ‘1박 2일’이 나온다. 2명씩 짝을 이뤄 각자 다른 코스를 걸으며 쓰레기를 주운 뒤 중간지점에서 만나는 미션을 수행하고 있다. 하지만 김종민이 1시간 넘도록 약속 장소에 등장하지 않는다. 알고 보니 해변에 방치된 엄청난 쓰레기 더미를 혼자 치우느라 발이 묶여버렸던 것. 유통기한이 18년 지난 과자 봉지까지 발견됐다. 쓰레기가 이렇게나 많다니.
어릴 때 ‘선생님이 교내 정화 활동을 시켜서’, ‘봉사 시간을 채우기 위해서’ 같은 이유로 길에 버려진 쓰레기를 주운 적이 있다. 하지만 따로 쓰레기를 주우러 다닌 적은 없다. 길거리에서 많은 쓰레기를 마주하지만 내가 버린 게 아니라 굳이 나서서 줍지는 않았다. 그러나 우연히 본 예능 프로그램을 계기로 ‘쓰레기를 주워야겠다’고 다짐했다.
인터넷을 검색하니 그 활동은 ‘플로깅’(Plogging)이었다. 플로깅은 이삭줍기를 뜻하는 스웨덴어 플로카업(Plocka Up)과 달리기를 뜻하는 영어 조깅(Jogging)의 합성어로, 조깅하면서 쓰레기 줍는 활동을 뜻한다. 2016년 스웨덴에서 시작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2년 전부터 ‘줍깅’(줍다+조깅), ‘쓰담’(쓰레기를 담다) 등으로 부르며 확산되고 있다. 최근 배우 김혜수와 이시영 같은 유명 연예인들도 플로깅에 동참하고 있다. 비싼 장비도 필요 없고, 그저 봉지 하나와 튼튼한 팔다리만 있으면 된다.
이거 생각보다 운동되네
7월의 마지막 토요일, 자발적으로 첫 ‘플로깅’에 나섰다. 오후 4시쯤 서울 관악구 장군봉 근린공원에 도착했다. 쓰레기 담을 봉지와 물을 준비했다. 쓰레기를 주울 때 나뭇가지 두 개로 젓가락을 만들어 사용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장갑이나 집게를 따로 준비하지 않았다.
공원 입구서부터 쓰고 버려진 마스크를 발견했다. 벤치 주변엔 담배꽁초가 수북했고 숲길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니 음료수 캔, 과자 껍데기, 물티슈 등 다양했다. 방석대신 깔아둔 종이 박스와 먹다 남은 음식물 찌꺼기를 묶어둔 봉지도 있었다. 심한 냄새와 함께 파리가 날아다녔다. 아마 박스를 깔고 앉아 ‘무언가’를 먹은 듯했다.
결국 음식물이 담긴 냄새 나는 비닐봉지는 치우지 못했다. ‘누군가 음식물을 먹지 않았더라면, 음식물을 먹고 제때 치웠더라면, 음식물과 비닐을 분리라도 했더라면.’ 여러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버리는 사람 따로, 치우는 사람 따로 있어?” 어릴 적 내 방을 대신 치우던 엄마의 잔소리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2시간가량 주운 쓰레기는 준비해간 20L 봉지의 3분의 2를 차지했다. 옷은 땀으로 범벅이 됐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플로깅은 일반적인 조깅보다 열량 소모가 크다. 걷다가 쓰레기가 보이면 다리와 허리를 굽히기도 하고, 앉았다 일어나는 동작도 반복돼서다. 집에 가만히 누워 있을 시간에 밖으로 나와 운동을 하고 쓰레기를 줍는 일석이조의 시간을 보냈다.
쓰레기를 위한 쓰레기까지 조심
혼자가 아닌 함께하는 플로깅에도 도전했다. 먼저 쓰레기를 주울 나무젓가락을 하나 챙겼다. 물과 쓰레기봉지는 근처 편의점에서 살 생각이었다. 이날은 비영리단체 이타서울에서 주관하는 ‘데이터 플로깅’에 참여했다. 활동 중간중간 쓰레기를 주운 위치와 종류를 지정된 인터넷 사이트에 기록하는 식이다. 어떤 쓰레기가 어디서, 얼마나 나왔는지 한눈에 볼 수 있다.
오후 2시 한강공원에서 데이터 플로깅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적지 않게 볼 수 있었다. 플로깅 활동을 계기로 초면인 라유림 씨와 함께 쓰레기를 주웠다. 처음 보는 사람들은 보통 카페나 식당에서 만나기 마련인데, 환경을 보호하는 마음 하나로 모여 함께 쓰레기를 줍다니 꽤 신선했다.
유림 씨는 쓰레기를 주울 도구인 나무젓가락, 옷을 구매하고 받은 종이 쇼핑백, 물을 담은 텀블러를 챙겨왔다. 편의점에서 살 생각으로 달랑 나무젓가락만 들고 온 게 창피했다. 라 씨는 “플로깅을 위해 최대한 갖고 있는 물건을 활용하려 했다”고 말했다. 쓰레기 담을 봉지를 얻기 위해 무언가를 사고 쓰레기가 추가로 나온다면 그 의미가 흐려진다는 설명이다. “쓰레기를 위해 쓰레기를 만드는 게 불편했다”고 말하는 유림 씨가 대단해 보였다. 또 “필름 사진 찍는 게 취미지만 사용한 필름도 결국 쓰레기가 되기 때문에 이 취미를 오래 할 수 없을 것 같아 고민”이라며 취미까지 환경에 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즐기려는 모습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주운 쓰레기를 공원 내 쓰레기통에 재활용품과 일반 쓰레기로 나눠서 버린 후 활동을 마무리했다. 기록한 데이터를 살펴보니 담배꽁초가 가장 많았다. 실제로 몇 걸음 옮기지 않아도 조금만 몸을 틀면 꽁초들이 모여 있었다. 틈새에도 숨어 있어 자세히 봐야 했다. 벤치나 한강 둔치 편의점에서 음식을 먹고 버린 빈 플라스틱과 비닐도 많았다.
플로깅의 유행이 사람들을 더욱 독려하는 것 같다. 쓰레기를 버리는 일이 아니라 쓰레기를 줍는 일이 유행이어서 다행이다. 두 번의 플로깅으로 지구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됐다.
어린 시절로 돌아간 부모님
플로깅을 마친 날 저녁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평소 어떻게 하면 부모님이 쉽고 편하게 운동할 수 있을까 관심이 있었던 터라 플로깅을 소개하기로 했다. “엄마, 요즘 쓰레기를 주우면서 등산이나 조깅하는 활동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어. 두 번 정도 해봤는데 그냥 걷는 것보다 운동도 되고 환경에도 도움을 줄 수 있어 뿌듯해. 주말에 아빠랑 산에 갈 때 한번 해보는 건 어때?” 수화기 너머에서 아빠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주말에 한번 해봐야겠네.” 들뜬 목소리다.
며칠 뒤 “주말에 산에 가서 쓰레기 주웠는데, 이거 운동 엄청 되네. 집에 와서 완전 뻗었잖니”라며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중간에 어떤 부부가 배즙을 마시곤 껍데기를 땅에 파묻고 있었는데 쓰레기 줍는 우릴 보더니 머쓱해하더라. 쓰레기봉지랑 집게를 들고 다니니까 사람들이 눈치를 보더라고.” 작은 활동만으로도 다른 사람들이 쓰레기를 버리지 않도록 자연스레 영향을 준다는 설명이다.
또 등산객들에게서 “좋은 일 하시네요”, “수고 많으십니다” 같은 덕담도 듣고, 환경을 위해 좋은 일 한다는 자부심도 얻었다고 했다. “이제는 걸을 때 쓰레기만 보여. 쓰레기가 왜 그렇게 많은지. 다음 등산 갈 때도 쓰레기 주워야겠어”라는 부모님 말씀을 들으니 부모님께 플로깅을 제안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느라 바빠 쓰레기 주우러 다닌다는 생각을 한 번도 못했어. 천천히 걸으면서 환경도 생각해보고, 방학 숙제하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더라. 나이 든 사람들한테 더 좋은 것 같아. 관절에 무리가 가는 것도 아니고, 쓰레기 줍는 데 정신 팔려서 자연스럽게 운동하게 되니까 힘든지도 모르겠더라. 멍하니 걷는 것보다 훨씬 뿌듯했어.”
한유사랑 이타서울 대표는 “플로깅은 환경과 인간에 대한 배려의 마음을 사회에 나눌 수 있는 선한 인간다움의 순간”이라며 플로깅의 가치를 설명했다. 이어 “쓰레기를 줍는것은 적극적인 선행 활동이자, 삶의 품격을 높이고 주변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한 대표는 “현장에서 플로깅을 진행하다 보면 청년들뿐 아니라 중년들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오히려 5060세대는 급변하는 환경 문제의 심각성에 더 깊이 공감하고, 이에 대한 책임을 크게 느낀다”며 “이들의 플로깅은 건강을 영위하는 품위의 표출이자, 미래 세대에 모범이 될 어른의 환경 활동”이라고 정의했다.
플로깅은 누구나, 언제, 어디서든 할 수 있다. 집 앞 골목부터 공원, 산, 바다 등 한정이 없다. 마스크 착용은 필수다. 버려진 쓰레기는 줍고, 내가 만드는 쓰레기는 줄이며 슬기로운 환경 생활에 동참해보자.
플로깅을 위한 팁
준비물: 쓰레기 담을 봉지, 장갑, 집게, 얼음물, 쿨토시, 손수건, 모자 등
주의사항
① 사용한 봉지를 재활용함으로써 쓰레기를 최소화한다.
② 분리수거용 봉지와 일반 쓰레기용 봉지 두 개를 준비하면 좋다.
③ 비닐장갑이나 물티슈 대신 면장갑이나 집게를 사용한다.
④ 위험한 곳까지 무리해서 들어가 쓰레기를 줍지 않는다.
⑤ 쓰레기를 줍기 전 가까운 분리수거장 위치를 찾아두고, 없을 때는 집으로 가져가 꼼꼼하게 분리 배출한다.
2004년 2월 28일 난 평생 잊을 수 없다. 이유는 40년간 몸담아 온 직장을 하루 아침에 쫓겨나다시피 잃었기 때문이다. 몇 달 전부터 교육계에 퍼진 정년 단축이 내게 먼저 닥친 것이다. 그렇다고 난 미리 준비한 계획은 전연 없었다. 만 61살 일손을 놓기에는 빠른 나이다. 당장 내일부터 할일이 없다. 가진 기능이나 특기도 없고 남과 같이 기운이 세거나 막노동을 할 정도의 힘도 없다. 또 바둑이나 장기, 화투 등 오락도 취미도 없고 내놀만한 운동기능도 전연 없다. 오직 학교와 집밖에 모르는 샛님같은 아주 여린 봄꽃같은 난 모든 일에 쓸모가 없었다.
퇴직 후 생활은 기상하여 동네 뒷산을 오르거나 전철을 타고 종점에 도착해 값싼 점심과 목욕이 전부며 할 일이 없이 멍하니 약장사 구경만 종일토록 관람하며 흘러간 유행가에 젖어 마실 줄 모르는 막걸리 한 두잔에 취하거나 해져 귀가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이러길 몇달째 참다참다 폭발한 아내는 울음섞인 목소리로 “이렇게 살바에는 다 죽자고” 짜증을 낸다. 이러길 수차례 어느날 울분과 흥분을 참지 못한채 길거리를 방황하는 난 가슴이 답답하여 길에서 쓰러졌다. 다행히 지나가는 고등학생의 신고로 119가 몇분만에 도착하여 난 분당 서울대병원 응급실로 실려갔다.
평생 처음타본 응급 앰뷸런스에 계속 말을 시키는 간호원 구급대원의 봉사에 처음으로 감사의 마음을 느꼈다. 수분 후에 응급실에 도착한 나는 기본 검사와 링겔 등 응급처치를 받고 병실 구석 후미진 코너 침대에 눕혀졌다. 사방을 살펴보니 별별 환자가 눈에 들어왔다. 금방 목숨을 거둘 것 같은 나이든 할머니, 뼈만 앙상하여 마치 해골같은 머리가 흰 할아버지, 한쪽 발이 없는 중년의 남자, 울다지쳐 버린 갖난애, 거기다가 지독한 소독약 냄새. 어느것 하나 빠짐없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온전한 것이 없었다. 아비규환 속 분위기에 젖기도 전에 난 담당 간호원에게 이제 멀쩡하니 퇴원하겠다고 말하니 반기는 기색을 하며 뒤늦게 찾아온 아내가 퇴원 수속을 해서 택시를 타고 귀가했다.
집에 돌아와 시원한 내방에 누워 명상에 잠겼다. 병원에서 본 환자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내 나이 61세, 방황하며 허송세월을 보내기는 너무 젊은 나이임을 실감했다. 뭔가 해봐야하고 한번 죽이되든 밥이되든 시도해 보고 후회해도 늦지않을 것 같아, 난 큰 결심을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잘 할 수 있는 일을 ‘벼룩시장’, ‘교차로’ 등 길가에 비치된 정보지를 봤다. 내게 맞는 일감은 없었다. 4호선 전철을 타고 오늘은 머리도 식힐 겸 친구와 만나 울분을 풀 셈으로 과천 서울대공원을 찾았다. 친구와 어울려 동물원을 걷는데 눈에 뜨인 광고판에 ‘한국에서 처음 시도하는 동물해설사’ 양성기사가 확 눈에 들어왔다. 난 친구에게 컨디션이 안좋아 먼저 간다는 핑계로 일찍 돌아와 동물원에 확인 전화를 했다.
나는 동물해설사이자 한 마리의 영리한 원숭이
“여보셔요. 거기 서울동물원 기획과죠. 동물해설사를 뽑는다는데, 나이 제한은 없나요?”
“어떤 서류를 갖추어야 하나요?”
난 급한 마음에 여러 가지 궁금한 문제를 애원하다시피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리고 다양한 서류를 갖추어 인터넷 접수를 했다. 다행히 서류전형엔 합격했다. 그뒤는 몇 주간 강습이었다. 강의 내용은 수많은 동물과 멸종위기의 동물 종보전, 자연생태계 복원, 인간의 탐욕으로 남획을 막고 인간과 공존하는 법 등 다양한 전문적인 교육이었다. 교육이 끝나면 필기시험과 면접 실연을 통해 실제 동물 앞에서 뭇관중이 보는 가운데 동물해설을 하며 최종선발을 거쳐 43명을 뽑는데 난 당당히 합격했다. 난 기뻐 날뛰면서 방안을 빙돌며 괴성을 질렀다. 아내가 놀라 날 쳐다보았다. 마치 로또복권에 당첨된 사람 같았다.
이렇게 환희의 순간을 만끽한채 동물원의 출근은 계속되었다. 동물원의 일과는 날 새로운 변신을 꾀하게 했다. 이유는 이른 아침에 출근하여 그날 체험학습을 올 아동 수 대로 당근, 배추잎(케일), 사료 등을 손질하는 것인데 당근은 하나하나 씻어 크기가 알맞게 자른 뒤 바구니에 준비하며 물기를 닦는 것이다. 그리고 코스별로 해설을 하며 체험교육을 시키는 것인데 예를 들면 최고의 광대처럼 재미있고 교육적인 산 교육이어야 인기가 있어 환영받는다. 즉 해설 방법 및 내용은 이러하다.
“어린이 여러분 안녕하셔요. 저는 동물해설사 xxx입니다. 제 별명은 영리한 원숭이구요. 오늘은 여러분을 남미 페루에서 많이 사는 기니피그 먹이주기, 다음엔 말, 나귀 다른 점 관찰, 다음에 사막에 사는 미어캣은 무엇을 즐겨먹나요? 여러분이 만약 이 침에 쏘인다면 생명이 위험하지만 이 동물은 즐겨먹는 전갈을 맛있게 먹지요. 다음엔 여러분이 가장 좋아하는 토끼 먹이주기, 꼭 장갑을 끼고 먹이를 줘야해요 하며, 케일잎과 배추잎을 잡는 법을 알려주고 다음엔 원숭이, 그리고 염소, 양 등의 특징을 설명하고 먹이를 주면 돼요. 먹이를 던지거나 동물을 귀찮게 하면 안돼요.”
머리를 흔들며 재롱을 떨고 나이 많은 노인답지 않게 귀여운 표정, 손짓으로 윙크를 날리며 분위기를 잡고 해설이 끝나면 지도일지를 깨알만한 글씨로 가득 채운 뒤 일과를 반성하고 정리한 뒤 귀가하는 것인데 이 생활이 어찌나 즐거운지 나의 즐거운 변신은 대만족이며 거기다가 듬직한 해설사 월급을 받는다. 도랑치고 가재 잡고 하듯이 건강챙기고 시간보내고 급료 받는 나이든 늙은이로는 최대한 대우며, 피복, 모자, 소지품, 간행물 등 다양한 혜택을 받아 최고의 나날을 보낸다. 정말 교직에 버금가는 변신이다. 나의 변신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다음 변신을 준비하고 실천했다.
실패의 나날에서 난 성공의 열쇠를 찾았다
-모형항공(글라이더, 고무동력 입상 및 국가대표가 되기까지)
동물원 해설이 없는 쉬는 날의 무료함을 달래고 내 취미생활 건강을 위해 고심하던 어느날 난 수원 제 10 전투비행단 블랙이글 축하비행과 공군참모총장배 스페이스 첼린져 모형항공기 대회를 참관했다. 아주 멋진 행사며 이 늙은 나이에도 나도 참가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 잡혔다. 내 자신도 할 것 같아서 서울과학사를 찾아가 모형항공기 셋트를 구입했다. 설명서대로 하나도 빠짐없이 만들었다. 밤을 새우면서 거의 완벽하게 조립하여 인근학교 운동장에서 시험 비행을 해봤다. 처음 만든 모형비행기지만 생각한 것보다 훨씬 잘 날고 체공 시간은 1분대였다. 몇 번을 날려봐도 아주 잘 날라서 기분이 아주 좋았고 자신이 생겼다. 이렇게 몇 번을 연습했다.
그리고 예선대회 즉 경기, 인천 예선대회가 수원 제 10 전투비행단에서 있었는데 그 대회에 참가했다. 내 차례가 되어 공군 보조원이 50m 후방에서 글라이더를 날려 주는데 왠지 몹시 서툴러서 믿음이 가지 않아 몇 번을 뒤돌아 보면서 뛰는데 글라이더가 영 상승을 하지 않고 왼쪽으로 “휙” 곤두박질하며 앞날개가 활주로 바닥에 부딪쳐 두동강이로 갈라져 1차 비행은 0점이었다. 난 당황해서 날개 조각을 회수하고 2차 비행 순서만 기다리고 있는데 남은 한 대 글라이더도 날개가 튼튼하지 못해 날개 중앙에 금이 가있었다. 급히 강력 접착제를 바르고 순서를 기다렸다.
두 번째 마지막 시합에서는 옛학교 과학주임이 와서 보조역할로 글라이더를 뒤에서 잡아주어 사수, 조수, 보조가 맞아 멋지게 바람을 가르며 높은 창공에서 선회하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회오리 바람이 불어 앞날개가 “우지직” 소리를 내며 망가진 채 공중에서 빠른 속력으로 활주로에 꼴아 박았다. 더 이상 기회도 없고 글라이더도 없어 퍽 아쉬웠지만 난 대강 비행기 잔해를 끈으로 묶어 보루지 박스에 쳐넣고 승용차편으로 귀가했다. 1년간 공들인 노력이 허사였고 그 공역과 재료비 등이 너무 아까워 눈엔 눈물이 고였다. 이렇게 무참하게 실패한 나는 집에 돌아와 실패의 원인을 분석했다. 그리고 노트에 기록하며 내년을 기약했다.
실패의 원인분석
◎ 모형 항공기가 튼튼하지 못해 쉽게 부서졌다.
→ 다른 참가자들은 낚싯대 카본으로 가볍고 튼튼하게 만들었다 : 재료 문제
◎ 견인자(사수)와 보조자(조수)의 싸인이 전연 안 맞음
→ 혼자만의 힘으로는 글라이더를 띄울 수 없음. 보조자 대동해야 함. : 보조자 양성
◎ 바람의 강약에 맞는 견인 연구
→ 견인 기술 부족. 연습이 필요함.
또 실패의 원인을 냉철하게 분석했다. 또 재료 및 여러 가지 계측장비 등을 준비해야 함을 알았다. 또 기록이 좋은 모형항공기는 스마트폰에 사진을 찍어 살펴봤다. 더 많은 지식을 얻기 위해 한국 최고의 장인에게 사사 받았다. 그러니까 한국 모형항공의 대부 격인 경복궁 옆 동학과학 심xx 사장의 50년 이상의 노하우를 하나씩 익혀가며 모형항공기 킷트 공장제품을 이용하지 않고 수제품을 하나씩 만들었다. 즉 앞날개, 동체 수평, 수직꼬리날개 종이는 외제를 사서 가볍고 단단하게 만들었다. 다음해에 대한 준비를 하나씩 진행했다. 제작 기술도 늘고 요령이 생겨 견인방법도 바람의 세기를 큰 연을 만들어 날리면서 익혔고 이탈 및 체공 시간을 연장하기 위한 다양한 기술을 습득했다. 두 번 다시 실패는 없다는 나의 각오는 연습으로 더욱 자신을 얻어갔다.
실패 후 1년이 지나 난 또 제 10 전투비행단 활주로에 시합을 위해 섰다. 조수는 우리집 차남이다. 평소에 같이 호흡하며 연습을 한 터라 손발이 “착착” 맞았다. 내 차례가 되어 계측하는 심사위원 대위의 신호가 떨어졌다. 난 무수히 연습을 한 터라 자신있게 센바람을 줄의 길이와 느슷함과 당김의 조화를 섞어 요리조리 걷다 뛰다하며 글라이더를 마치 살아있는 황새처럼 어루고 달래며 하늘 높이 띄우며, 그러니까 상승기류를 찾아 마치 강태공의 잉어낚시인양 뛰면서 글라이더 상태를 보며 살펴시 이탈시켰다. 많은 참가자와 구경꾼들이 박수를 치며 “무한대∞”를 연호했다. 아니나 다를까 난 일반부에서 3분(1차), 2차 3분 도합 6분으로 1위, 금상을 받았다. 60이 훨씬 넘은 노인이 상을 받는다고 축하박수가 유난히 컸다. 이렇게 예선은 작년의 패배를 설욕하고 회심의 미소를 먹음은 채 기쁜 마음으로 본선 대회를 준비했다. 대회는 9월이라 시간적 여유도 있지만 난 마음을 다시 잡고 제작 및 견인을 더욱 열심히 했다. 글라이더는 완전히 터득했다.
새파란 멍이 온 몸에 퍼져 기력이 쇠약해도 고무동력기는 내려야 했다
-청주 공군사관학교에서 본선, 공군참모총장대회, 고무동력기 이야기. 더 강하게 변신한 나의 모습
글라이더는 전국을 제패하고 몇 년간 노력 끝에 제 1인자로 자리메김 다. 이제는 고무동력부문이다. 처음부터 이 영역에는 값비싼 외국제품 및 부속으로 무장한 전국의 과학사의 문하생들이 주름잡고 있어 난공불락이었다. 거기다가 최신장비, 풍향풍속 계측기, 강력한 드릴로 신축성이 뛰어난 고무줄을 사용하는 그들을 따라잡기는 무리였다.
하지만 끈기와 변신의 귀재인 나는 하나씩 착착 계획을 진행했다. 그러니까 외제 고무동력기의 설계도를 수소문 끝에 구입하여 하나하나씩 내 기술로 개조했다. 고무동력기 동체, 외제는 값비싼 두랄루민·티타늄 등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난 이점을 가벼운 플라스틱을 말아 가늘게 쪼갠 대나무 껍질을 이용하여 트러스 공법으로 동체를 만들었는데 단단함은 물론 가볍기가 기본동체의 1/3 무게도 안되었다. 대성공이었다. 또 프로펠라의 크기가 기성품은 작기에 대추나무로 세밀하게 깎았고 고무줄은 미제를 구입했다. 또 프로펠라를 돌려 고무줄을 감는데 조수가 꼭 있어야 하는 번거러움을 덜기위해 혼자서도 고무줄을 감을 수 있는 장치를 발명했다. 즉 강력드릴에 강철고리를 부착시킨 뒤 프로펠라 걸이를 세워있는 기둥이나 나무에 감고 프로펠라를 회전시켜 감는 방법인데 어른이 잡아주는 힘보다 서너배 많이 감고 아주 편했다. 이렇게 만전을 기한 나의 변신 기술은 공군참모총장배 본선에서 빛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너무 가슴쓰린 추억이었다. 그러니까 본선대회 1차 시기에서 연병장의 축구 꼴대에 고무줄 감기와 드릴을 이용해 두서너배 많이 감은 고무동력기를 날렸는데 연병장 주위 아주 높은 반절쯤 죽어가는 소나무에 걸려 프로펠라는 허공을 향해 “빙빙”돌면서 ‘퍼덕’ 거렸다. 급히 달려가 행사 보조위원에게 내려 줄 것을 이야기했다. 보조요원은 철제 사다리를 펴서 준비한 장대로 내리려고 애썼지만 고무동력기에 닿지 않고 위험하다는 핑계로 포기하라고 내게 말했다. 하지만 난 보조원의 만류도 뿌리치고 사다리를 올라 소나무에 다람쥐처럼 올라가 장대에 갈쿠리를 달아서 힘껏 끌어당겼다.
하지만 고무줄이 가지에 감겨 풀리지 않아 한참만에 겨우 비행기를 내려서 떨어트리고 사다리가 걸쳐진 나무둥지를 디디는 순간 사다리가 넘어가 함께 떨어져 풀숲에 내동댕이쳐졌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회수한 비행기를 손보고 날개를 바로잡고 고무줄을 바꿔 꿰어 다시 드릴로 감아 마지막 2차시기에 임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2차시기 비행 체공 기록은 만점 3분 무한대였다.
내가 속한 조에서는 1등인데 다른 조의 기록이 궁금해서 각조의 기록을 조마다 쫓아 다니며 살펴봤다. 만점은 없는 것 같았다. 이윽고 전체 시합이 끝나고 시상식만 남았는데 난 기록이 좋아 늦게까지 대기했다. 몇 시간 뒤 시상식이 열렸다. 초등부, 중등부, 고등부. 일반부는 마지막이었다. “일반부 고무동력 금상, xxx” 내 이름이 호명됐다. 별이 4개이신 공군참모총장님이 직접 금메달을 목에 걸어 주시며 빙그레 웃으시며 “노익장을 과시하니 보기 좋습니다”하시며 부상과 상장을 주셨다. 그리고 기념촬영. 난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전국을 제패한 벅찬 변신이었다.
영광뒤에 따른 무서운 변화에 난 몇 달을 고생하며 치료에 온 정신을 쏟았다
-고무동력기를 내릴 때 사다리에서 떨어져서 아픈 이야기 (낙상사고 후유증에 헤멤)
하지만 시상식이 끝나고 귀가하는 승용차 안에서 엉덩이와 온몸이 쑤시기 시작했다. 처음엔 엉치뼈 그 다음엔 허리, 다음엔 목 등 차가 흔들릴 때마다 통증은 더 심했다. 난 천안 휴게소에서 내려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팬티를 내리고 아랫도리를 살펴봤다. 멍 비슷하게 푸르슴한 색이 하체에 내려앉았다. 난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다시 차를 타고 귀가했다. 금메달을 딴 기분이 가시지 않았기에 약간의 통증은 견딜만했다.
하루가 지났다. 통증은 온몸에 퍼지고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온몸을 살핀 뒤, 멍을 보고 주사와 처방전을 간호원에게 시키며 한달 가량 쉬면, 멍이 가실거니 걱정 말라며 진료를 마쳤다. 약국에서 복용약을 받아서 복용한지 일주일이 지나도 차도가 없었다. 온몸에 번진 시퍼런 멍, 거기다가 성기며 고환까지 자주빛 멍이 소변을 볼 때마다 공포가 더했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난 아내 몰래 한방병원을 방문했다. 한의사가 내 온몸을 보는 순간 혀를 차며 “빨리 왔어야지요. 이지경이 될 때까지 참고 있어요. 피가 굳으면 생명이 위험할 수 있는데”하며 날 나무랬다. 그리고 온몸에 수없이 많은 침과 뜸을 뜨고 1시간 쯤 후엔 부항을 뜬다며 엉덩이 부분을 내리고 부항을 수십차례 색이 진한 부분마다 검붉은 피를 뽑았다. 참 신기하고 시원했다. 이러길 하루 건너 두달 치료 끝에 정상으로 돌아왔다. 난 처음으로 한의학에 경이를 표했다.
멍이 가시자 마자 나의 변신은 계속되었다. 각종 모형항공대회와 더 나아가 ‘국가대표’ 선발전에 출전하여 대표자격을 땄다. 그러니까 모형항공의 귀재로 변신한 나는 고등학교, 중학교 심지어는 경기도 과학연구원 위촉 강사로 뽑혀 모형항공 지도를 했다. 하지만 요즈음은 드론이 대세라 막이 내렸지만 퍽 아쉽다. 그렇지만 난 드론에 도전하기엔 너무 손놀림이 늦어 포기했다. 내가 할 일이 아니기에.
낙방의 고배를 마시며 다져지는 나의 글쓰기 실력은 마침내 빛을 보았다
-백일장에 도전한 나의 이야기
나는 모형항공기 기능 섭렵을 끝내고 또 다른 변신을 꾀하던 어느 날 문득 백일장대회 현수막을 지나가던 길에서 눈여겨봤다. 또 변신의 기회를 잡으려고 도전하기로 마음먹고 준비를 했다. 먼저 서울 ‘교보문고’를 방문해서 백일장 입상문집을 사서 탐독했다. 그리고 입상작품의 특징과 글의 짜임, 쓰는 요령을 습득 뒤 나도 백일장대회에 참가했다. 내 딴에는 정성껏 바른 글씨와 내용을 그럴싸하게 써서 제출했다. 몇 시간을 기다린 끝에 입상자 발표가 있는데 내 이름은 없고 정성을 쏟은 보람도 없이 낙방이었다. 영문을 몰랐다. 떨어진 이유를.
돌아오는 전철에서 난 글쓰기에 소질이 없는 게 아닐까 반문해봤다. 도통 이해가 가지 않은 수수께끼였다. 그 뒤 계속 백일장대회에서 낙방을 연거푸 서너차례한 뒤 난 그 어떤 1% 부족한 내 자신을 찾았다. 그러니까 난 겉만 번지르한 실속 없고 알맹이 없는 미사여구만 늘어놓고 감동이 없는 허황된 글을 쓴 것이다.
내 결점을 찾은 뒤 백일장 대회를 기다린 어느 날 대전 동구에서 ‘우암송시열’ 백일장이 있었다. KTX를 타고 원거리 대회를 참가했다. 전국에서 수많은 문사가 참여한 전통 있는 대회라 난 기가 팍 죽었다. 축하공연이 끝나고 글제가 발표됐다. 주제는 ‘어머니’였다. 난 어머니와 같이 산 50년을 눈물을 흘리면서 회상하는 글을 써내려갔다. 내 어머니는 70여리가 넘는 먼길을 걸어서 쌀을 머리에 이고 자취하는 전주의 언덕빼기 집까지 부식을 마련하여 난 배고픔 없이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 어려운 시절에. 그리고 내가 교사로 발령을 받아 전등불도 안 들어오는 산간 벽지 오지 학교에 부임했을 때 삼시세끼를 따뜻한 밥을 해주시며 허름한 관사에서 동고동락하시며 내 뒷배를 후원하셨는데 끝내는 영화를 못 누리신 채 돌아가셨는데 눈물겨운 사연을 하나하나씩 깨알같은 글씨로 써냈다.
그뒤 서너 시간 뒤에 입상자 명단이 벽에 붙고 호명이 되었다. “수필부 금상, xxx 나오셔요” 처음으로 받은 상 그것도 장원이었다. 돌아오는 KTX열차가 왜 그리 느린지 난 처음으로 느꼈다. 이렇게 시작된 나의 영광은 서울 한강 ‘구상백일장’, 고양 ‘어르신 백일장’, 수원 ‘정조대왕승모백일장’, 평택 ‘사랑사랑백일장’ 등 무수한 영광을 안은 채 난 제 2의 변신을 계속했다. 늙은 나이에 그 기쁨은 날 흥분케 했고 생에 대한 그 어떤 자신이 생기는 나날이었다. 난 이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변신을 꾀하고 싶어 도전을 계속했다.
젊은이와 경쟁에서 스피드를 요하는 시합은 무리인가
-KBS1 ‘우리말 겨루기’에서 변신은 요원한 길인가?
매주 월요일 저녁 7시 40분 KBS1 TV의 ‘우리말 겨루기’는 날 들뜨게 한다. 그러니까 방영되는 월요일에는 모든 약속과 내 생활은 비상이다. 몇 년째 노트와 동영상을 캠코더를 찍어보고 여기에 수반되는 문제집, 국어사전, 속담, 사자성어, 크로스워드 책. 필요한 서적은 모두 구입해서 보며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도 모두 구입하여 보고 준비는 매일 밥 먹듯이 한다. 하지만 달인을 향한 내 꿈은 한 발자국도 진전이 없다. 석두일까? 자책도 해봤다. 치매증상이 있나? 치매 검사도 했지만 치매는 아니었다.
‘우리말 겨루기’ 예심이 인터넷에 뜨면 내 마음은 왠지 급해진다. 그러니까 예심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KBS홀에서 수많은 경쟁자와 한판 겨루기를 한다. 주최측에서 준비한 지필고사 20문제를 크로스워드, 십자말 칸을 인쇄한 용지와 대형 스크린을 비추면서 두 번 읽어주고 단 20분만에 답안지를 회수하여 30분쯤 채점이 완료되면 참가자의 10% 정도 합격자를 불러 2차 면접 및 실기 그리고 방송에 하자가 없고 유모어, 또는 시청률을 높일 수 있는 재미있고 재치있는 참가자를 선별하는 테스트 과정이다. 난 예심에는 언제나 수월하게 통과하며 본방에 출연까지는 항상 무난하게 뽑힌다.
그 이유는 다 까닭이 있다. 40년간 교직에서 다져진 말솜씨, 동물해설사로 활동하면서 익힌 유모어, 평소 내 나이에 걸맞지 않는 가곡 레파토리가 있다. 예전 유럽 현지 이탈리아에서 외국 여행객 이탈리아 가곡 부르기에서 상을 탄 저력이 있기에 말이다. 예심을 합격한 나는 마지막 단계 면접에서 뜻밖에 노래를 한번 불러보라는 면접심사위원의 청에 망설이다 정색을 하며 무대에서 그 당시 뜨는 가곡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열창했다. 면접대기자와 심사위원 전원이 앵콜을 연호했다. 난 주저하지 않고 ‘슈벨트의 세레나데’를 더 열정적으로 불렀다. 노래가 끝나고 모두들 “늙은이가 웬 노래를 저렇게 잘 부르지”하며 혀를 찼다.
며칠 후 인터넷에 합격자의 이름이 떴다. xxx 상위에 랭크된 내 이름 석자. 본방송 출연을 연락받고 밤새워 깨알같은 국어사전 글자를 돋보기도 쓰지않고 보던 어느 날 더 이상 눈이 침침하고 흐려 안과에서 백내장 수술을 했다. 보름 후엔 글씨가 똑똑하게 보였다. 그런 어느 날 ‘우리말 겨루기’ 녹화가 있으니 10시까지 KBS 녹화장이 있는 본관으로 오라는 연락을 담당 PD에게 받고 새옷을 입고 이발을 하고 달려갔다. 내가 제일 먼저 온 것이다. 이윽고 출연자 전원이 당도하여 분장실에서 마치 장가가는 새신랑마냥 아주 정성이 담긴 분장을 받았다. 기분이 황홀했다.
한 시간 뒤 녹화방송으로 ‘우리말 겨루기’가 엄지인 아나운서의 진행으로 시작되었다. 첫 단계부터 중간까지는 최상위 점수로 정상이었다. 우승이 눈앞에 보이며 젊은이들도 별것 아니구나 하며 자신이 생겼다. 마악 누름단추 벨을 누르며 우승을 확정짓고 싶은 감정이 앞섰다. 지나친 과욕이었다. 기다리면 결승단계에 진출하는데 감점이 시작됐다. 오답이 연속된 나의 경거망동은 끝내 빛을 보지 못한 채 끝났다. 멋진 변신, 변태는 지나친 욕심과 만용 때문에 끝났다.
하지만 한 번 출연한 사람은 2년을 기다리기에 매미는 땅속에서 수년을 기다리는데 난 다시 변신의 칼을 간다. 2년간 그리고 화려한 날개를 펴며 푸른 창공을 “훨훨” 날아다닐 그날의 변신을 꿈꾸며 오늘도 내 길을 간다. 숨이 멎는 순간까지 나의 변신은 계속될 것이며, 이 길을 기꺼이 간다. 오늘따라 하늘이 더 높게 보인다. 이제 내 나이 80. 앞으로 20년은 더 살아가며 끝없는 변신을 꾀하며 더 행복한 나날을 영위해야 하지 않을까? 무한한 변신. 이제 무엇을 찾아 또 화려한 변신을 해야 할지 고민이다. 변신은 날 행복하고 건강하게 만든 만병통치약인가 보다. 나의 변신은 오늘도 계속된다.
•수상소감 - 우수상 미니자서전 은정남
“죽는 순간 숨이 멎는 순간까지 도전하고파”
응모하신 사람 중에서 나이가 좀 많습니다. 팔순이니까요. 그래서 저의 하찮은 글을 건져 올려주셔서 너무 고맙고요. 용기를 주신 선생님들과 캐나다에 이민을 간 아들한테 축하 인사 받았는데 정말 뿌듯합니다.
큰 용기와 힘을 얻었어요. 그래서 이제 앞으로 이제 세상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더 열심히 쓰고 또 갈고 닦아야겠죠. 죽는 순간까지 숨이 멎는 순간까지 모든 것을 해보고 싶어 공모전에 출품하게 됐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노인들이 많잖아요. 노인들은 지하철 공짜로 타며 놀러 다니고 또는 복지관이나 문화센터 같은 곳에서 할 일 없이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많아요, 사실 도움이 안 돼요. 그래서 이제 그런 걸 탈피하기 위해서 제 나름대로 여러 가지 해봤는데 이번에 글을 한 번 써봤어요.
고등학교 다닐 때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시인 신석정 시인이 저희 은사였습니다. 그래서 글을 좀 잘 쓰려고 나름대로 좋은 책 많이 읽고 또 문학 활동을 꾸준히 했습니다.
제가 글을 쓰면 항상 친구들이나 동호회 회원들에게 카톡으로 공유했어요. 그러면 그분들이 모니터링해 주면 수정하며 첨삭하면서 배웠습니다. 학창 시절 백일장에 장원은 떼놓은 당상일 정도로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긴 했지만….
이번 수상을 계기로 자신감 가지고 소설을 써보려고 합니다. 제가 경험했던 동물해설사, 모형항공기, 우리말 나들이 도전을 통해 만났던 사람들이나 사건을 소재로 삼아서 소설을 써보고 싶습니다.
우리말과 우리글이 있어 행복합니다. 일감이 있다는 것은 어른으로서 큰 자부심을 느끼는데 이번에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을 준비한 주최 측에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 다시 하고 싶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쓸 만한 어른들과 아까운 시니어들이 많거든요. 사실 어르신들은 좋은 자원과 자산을 갖고 있고 재능과 경험이 다양한데 쓸모없이 이렇게 소멸해 가는 게 너무 안타까워요. 이번 공모전이 뜻 깊은 일을 하고 인생의 마무리를 하는 시니어들에게 힘을 주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자신보다 더 저를 믿어준 가족들에게 고맙고 사랑한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헉! 이거 뭐지? 혹시 그날 아람이가 얘기했던 게 이건가?’
누리는 미술관의 다섯 번째 전시실 모퉁이에 걸린 그림을 보다가 놀라 뒷걸음질 쳤다.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마침 까만색 유니폼을 입고 목에는 스태프 라고 쓰인 표를 달고 있는 남자가 느린 걸음으로 5전시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저 아저씨! 저 그림 좀 이상해요.”
“응? 뭐가?”
“그러니까 저게...”
하면서 누리가 다시 그림을 보니 그림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멀쩡했다.
검은 머리를 단정하게 뒤로 묶고 갸름한 얼굴에 눈에는 슬픔이 가득 담긴 채 마치 맞은편에 있는 남자 그림을 바라보는 것 같은 모습. 조금 전 누리가 봤던 그 놀라운 모습이 아니었다.
“저- 그게 저 그림이... 아, 아니에요.”
직원은 누리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더니 다시 천천히 걸으며 다음 전시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림을 보는 게 아니라 전시실에 상태를 살피는 거 같았다.
누리는 자기가 착각을 한 걸까 생각하면서도 이상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이번 전시를 오픈하던 날, 아람이가 했던 말이 떠오르자 자기가 본 것이 착각이 아닐 거라고 확신했다.
누리는 다시 그 여자그림 앞으로 가려다가 그만 두었다. 무슨 괴기 영화나 환타지 영화에서 본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싶으면서 지금 이 순간을 함께 해줄 사람이 그리웠다. 아람이랑 얘기를 하고 싶었다.
전시 개회식은 일주일전 목요일 오후 5시에 있었다.
할머니는 미술관을 놀이터 드나들 듯 좋아하는 누리 때문에 미술관에 자주 가시게 됐다. 그러다가 지난 가을부터 미술관에서 하는 도슨트 교육을 받으셨다. 도슨트는 미술관에서 관람객에게 전시에 대한 여러 정보와 전시물,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설명해주는 봉사자라고 한다. 그날 할머니가 누리에게 전시 오픈식에 참석해서 작가들을 만날 거라고 함께 가자고 하셨다. 누리는 미술관엔 자주 가서 그림과 조각들을 보았지만, 작가들을 직접 만나본 적은 없었다. 더구나 오픈식이 끝나면 맛있는 다과 파티도 있다는 할머니 말씀에 누리는 냉큼 할머니를 따라 나섰다. 그렇지만 아람이는 시큰둥했다.
이란성 쌍둥이로 태어난 아람이와 누리는 불과 32분 차이로 세상에 나왔다.
아람이는 12월 31일 밤 11시 49분, 누리는 다음 해 1월 1일 0시 21분.
부모님은 출생신고를 하면서 잠깐 같은 날로 올릴까 고민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결국 병원에서 기록한 그대로 출생신고를 해서 아람이는 학교도 한해 먼저 들어갔다. 4학년이 된 아람이는 걸핏하면 3학년 보다 4학년이 되니 할 일이 너무 많다며 유세를 부렸다.
쌍둥이지만 둘은 비슷한 것보다 다른 면이 훨씬 많다.
아람이는 책을 좋아하고, 누리보다 덩치는 작지만 야무져서 누나답다는 얘길 많이 듣는다.
누리는 활발하고 덜렁거리는 편이다. 그렇지만 게임이나 그림 그리는 것, 만들기는 아람이보다 선수다. 그래서 할머니와 엄마는 ‘금손 누리’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한다.
오픈식 때, 아람이가 미술관 건너편에 있는 학원에서 수업이 일찍 끝났다며 미술관으로 왔다. 전시 담당 큐레이터가 인사를 하고 전시 기획의도를 알려주는 동안 할머니는 메모장을 들고 제일 앞쪽 자리로 가서 앉으셨고, 누리는 다과가 차려지는 쪽 가까이 앉았는데 아람이는 지루했는지 혼자 전시실로 들어갔다.
문화재단 대표이사가 활짝 웃으며 조선 왕릉이 세계문화유산의 반열에 오른 것은 역사적인 사건이라며 오랫동안 얘기 했다. 그다음엔 그 왕릉 중 8기가 우리 시에 있으니 큰 자랑거리라고 시장이 더 길게 길게 얘기했다. 누리가 보니 가슴에 꽃을 달고 한쪽에 쭈-욱 앉아 있는 사람들이 작가들 같았다. 작가들도 지루한지 얘기하는 시장을 보다가 바닥을 보다가 자기 손을 맞잡았다가 했다. 그때 얼굴빛이 빨갛게 상기된 아람이가 누리 옆으로 오더니,
“누리야, ‘류원’이란 화가는 어디 있어?”
하고 물었다. 행사 식이 끝나면 재빨리 좋아하는 케잌을 먼저 집으려고 음식물들이 있는 상을 보고 있던 누리는
“나도 몰라. 아직 작가들은 인사 안 했어. 저쪽에 있는 사람들 중에 있을 거야.”
하며 작가들 쪽을 가리켰다.
그때, 드디어 누구에게 감사하고, 또 누구에게 감사하고, 또, 또 누구에게 감사말씀을 전하는 바라고 말하던 시장님 얘기가 끝나고 작가들 인사 차례가 되었다.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이 어떤 인물과 관계된 것인지 어떤 방법과 의도로 제작한 것인지를 짧게 얘기했다. 그런데 여덟 명의 얘기가 다 끝났는데 ‘류원’이란 작가는 없었다.
사회를 보던 큐레이터가 말했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작가는 총 11명인데 그중 세 분은 개인 사정과 해외 전시에 참여하느라 못 왔으니 양해바랍니다.”
아람이는 실망하는 표정이 되었다.
“왜 그러는데?”
누리가 이상하다는 듯 묻자,
“글쎄- 내가 잘 못 본 걸 수도 있어서......”
하다가 누리를 빤히 보며 물었다.
“너 다음에 또 올 거니?”
누리는 전시가 열리는 동안 적어도 두세 번은 관람을 하곤 했다.
집에서 10분 거리인데다가 시립 미술관이라서 입장료도 저렴하다.
또 미술관 간다고 하면 엄마는 늘 입장료에 1,000원을 더 얹어 준다.
그러니 누리에게 미술관 관람은 그야말로 1석 2조, 아니, 1석 3조도 넘는 거다.
“당연하지. 오늘은 사람들이 많아서 제대로 볼 수도 없을 걸.”
“그럼 다음에 올 때 5 전시실에 있는 ‘류원’이란 화가 그림 좀 자세히 봐줘. 정말 이상했거든.”
“뭐가?”
“그건 네가 그림 보고난 다음에 얘기 할 게.”
‘그래. 아람이도 그날, 분명 나랑 같은 걸 봤을 거야.’
마음이 급해진 누리는 여섯 번째, 일곱 번째, 그리고 마지막 전시실도 그냥 지나쳐 집으로 내달렸다.
현관문 번호단추를 빠르게 눌렀다. 운동화는 벗겨져 날리듯 흩어졌지만 그건 쳐다볼 생각도 없었다.
“아람아, 아람아 너 그거 봤지?”
급하게 자기를 찾는 누리를 보면서도 아람이는 소파에 앉아 동화책을 읽다가 느긋하게 한 마디 했다.
“저런~ 누나라고 불러야지. 3학년 꼬마야.”
“웃기지마. 너 그거 봤지, 맞지?”
“음- 너, 지금 미술관 갔다 온 거구나?”
“그래. 그 ‘류원’이란 화가가 그린 여자 그림 봤어.”
“어땠는데? 너도 이상했어?”
“있잖아. 꼭 ‘헤리포터’ 영화에서 본 그림들처럼 움직이고 나한테 말을 거는 같았어.”
“그래? 내가 볼 때도 그랬어. 근데 그거 너 혼자 봤어? 무슨 말을 했어?”
“몰라. 무서워서 뒤로 물러섰더니 원래대로 안 움직이는 그림이 됐어. 넌?”
“나도 잘 모르겠어. 갑자기 그림이 움직이면서 말하는 거 같아 얼른 밖으로 도망쳤지. 다른 사람이 하나도 없었거든.”
“나는 거기 직원 아저씨한테 물어보려고 했는데, 그림이 그대로 안 움직이는 거야. 그래서 미쳤다는 소리 들을까봐 그냥 한참 동안 서 있다가 너랑 얘기하려고 얼른 온 거야.”
“마법 그림인가? 그런 게 정말 있는가봐. 그치?”
아람이가 일어나며 말했다.
“이상해, 이상해. 우리 지금 가 보자.”
“안 돼. 지금 가도 소용없어. 미술관은 6시까지만 연단 말이야.”
아람이가 다시 소파에 앉으며 무슨 큰 결정이라도 내리는 듯 누리에게 나직이 말했다.
“우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우리끼리 비밀을 풀어 보자.”
“무슨 비밀?”
“그림 속 여자는 왜 우리에게 말을 건 것인지, 정말로 그림이 움직이는 게 우리 눈에만 보인 건지. 이유가 있을 것 같아. 왜 있잖아, 동화나 영화에서 나오는 그런 거. 우리가 그 여자의 원한이나 비밀을 푸는 순수한 아이들로 선택된 걸지도 모르잖아.”
아람이는 야무지게 말했지만, 누리는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종잡을 수가 없었다.
“누리야, 우선 이번 전시의도를 알아야 하고 ‘류원’이란 화가는 왜 그런 그림을 그렸는지 알아야 해.”
“그건 어렵지 않아. 전시가 설명된 리플릿도 있고 10시, 11시, 오후 2시, 3시엔 전시를 설명해 주는 선생님들도 있거든. 아, 이번부터 할머니도 미술관에서 도슨트 하니까 할머니한테 물어보면 간단하겠다.”
“아냐. 그럼 재미없지. 우리가 선택됐으니까 우리가 해결하는 거야. 어른들에겐 비밀로 하고.”
아람이는 다시 눈동자를 굴리며 입술을 옴찔거리며 생각을 모으느라 애썼다.
“그래. 우선 전시 리플릿부터 보자. 너 갖고 있지?”
“물론이지. 난 여태껏 전시 리플릿은 다 모았다니까.”
누리가 자랑스러운 얼굴로 뒷주머니에서 리플릿을 꺼내 놓았다.
아람이와 누리는 머리를 나란히 하고 전시 설명이 담긴 네 면으로 된 리플릿을 읽었다.
앞면엔 전시 제목과 대표 작품 사진, 전시 날짜가 적혀있고, 안쪽 두 면에는 전시 내용과 사진 두 개가 있었다.
왕릉의 전설
-조선 왕족들의 미술관 행차-
은 조선왕조 500년을 이끌어 왔던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은 가장 화려한 삶의 중심에 있었으면서도, 권력과 명분 획득을 위한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 혹독한 고독과 괴로움을 겪어야 했던 증언자들이기도 하다. 이들 왕족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처절한 주인공으로 8인을 선정하고 각 존재들에 대한 시각적 대화를 시도하는 작가 11명의 작품을 소감형식으로 구성한 전시이다.
전시의 소재가 된 왕족은 인수대비, 폐비 윤씨, 인종, 소현세자, 숙종, 희빈 장씨, 의빈 성씨, 그리고 철종이다.
왕릉이라는 신들의 정원에는 그들이 마저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전설이 전해온다.
인간의 삶이 언제나 그러하듯 온전하게 충족되지 못한 애절한 마음은 후손인 우리의 심정을 흔들어 생각을 일으킨다.
사실 조선왕조의 역사적 의의가 갖는 무게에 비해 현대인들의 그에 대한 관심은 가벼웠다.
이번 전시에 참여하는 작가들은 그 표현 중심에서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인간의 본질적 욕망과 치열한 꿈의 허상을 새로운 예술적 형식으로 보여줄 것이다.
여기까지 읽고 나자 누리가 투덜거렸다.
“이게 뭔 말이야아~? 난 짜증나.”
“어른들한테 보여주는 거라 그래. 어쨌든 조선시대 왕족들 얘기를 그린 작품이란 말이지 뭐.”
“그럼, 류원이란 화가는 누구 얘길 그린 걸까?”
누리가 마음이 급해져서 뒷장으로 넘겼다.
뒷면에는 참여 작가 11명의 이름과 간단한 작품 내용이 있었다. 문경은, 태인주, 노장현, 박영훈, 류원, 신희경, 백승민, 최원범, 우정석, 김화준, 이민숙. 누리와 아람이는 류원 작가 옆에 있는 글만 소리 내어 읽었다.
“류원은 신비한 전설 속 이야기를 끊임없이 제작하고 있는 작가이다.
이번 전시에는 고양시 서삼릉에 있는 정조의 후궁 의빈 성씨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데, 그동안 작가가 그려오던 기법에서 크게 벗어난 새로운 시도를 엿볼 수 있다.”
“의빈 성씨 얘기라고?”
아람이는 의빈 성씨를 아는 거 같은 표정이었다.
“그게 누군데? 너 알아?”
“응.”
“어떤 사람인데?”
아람이가 좀 뻐기는 표정으로 누리에게 말했다.
“누나, 아니 '누님 알려 주시옵소서.'하면 가르쳐 주-지.”
“야! 겨우 32분 먼저 태어났다고 그 소릴 듣고 싶냐? 나 같으면 그냥 친구먹자고 하겠다.”
“싫음 말구.”
“어-휴!”
치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궁금증이 풀릴 열쇠인 것만 같아서 누리는 ‘이번만’하는 맘으로 더 과장되게 아양을 떨었다.
“누님, 저는 의빈 성씨가 누구인지 매우, 매우, 매우 궁금하옵니다. 알려 주시옵소서.”
“좋다! 내 알려주지. 잠시만 기다리거라.”
그러더니 아람이는 누리에게 의빈 성씨가 누구인지 얘기는 않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왜? 가르쳐준다면서 왜 가?”
아람이는 책 한 권을 들고 나오며 말했다.
“내가 좀 똑똑한 편이기는 하지만 그걸 다 외우는 건 아니쥐이. 여기 봐-.”
아람이는 ‘조선왕조실록’이란 만화책권을 펴서 195쪽에 있는 ‘제 22대 정조 가계도’를 손가락으로 톡톡 가리켰다.
거기엔 정조 밑으로 ‘효의왕후 김씨(1753~1821)- 후사 없음’ 이라 적혀 있고, 그 다음 줄엔 ‘의빈 성씨(1753~1786)-1남, 문효세자 일찍 죽음’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림 속 여자가 이 사람이구나. 그런데 그래서 뭐가 어떻다는 거야?”
“이거 봐. 의빈 성씨는 겨우 서른네 살에 죽었어. 그러니까 뭔가 사연이 더 있을 거야. 이 책에서 보면 화빈 윤씨가 미워한 거 같거든.”
아람이는 입을 야무지게 다물더니 말했다.
“그래서 화빈이 의빈 성씨를 죽였대?”
“아니. 그런 건 없어. 그렇지만 아직 풀리지 않은 원한이 있어서 우리한테 말을 걸었는지도 모르잖아. 그러니까 우리가 알아내야지. 그림 속 여자가 우리한테 하려고 하는 말도 뭔지 알 수 있고, 영혼을 달래줄 수도 있겠지.”
“하~ 아람아! 내가 보기엔 넌 이상한 책을 너무 많이 읽은 거 같아.”
“뭐라구? 너도 그림이 움직이면서 말하는 거 봤다며? 얼마나 억울하면 그림이 말을 다 하겠니?”
“엄마랑 아빠한테 물어 보자. 아니 이따가 할머니한테 물어 보는 게 낫겠다.”
“안 돼, 안 돼. 하지 마! 이렇게 재밌는 사건이 우리 평생에 얼마나 있겠어? 어쩌면 이건 우리 생애 최고로 짜릿한 비밀을 만들 수 있는 기회란 말이야.”
“치~ 비밀 만들고 싶은 거야?”
“동화를 읽다보면 비밀이나 엄청난 사건이 생겨서 주인공이 재미난 경험을 하는데, 우린 언제 그런 일이 생기겠어? 만날 똑같은 날이니... 그러니까 너랑 나, 둘이서만 이 문제를 풀어보자고. 내가 너한테 슬라임 전부 다 줄게.”
“진짜? 앗~싸~. 그러지 않아도 만들고 싶은 게 있어서 엄마한테 사달라고 조르려고 했는데... 좋아! 어떻게 하면 돼?”
“우선, 의빈 성씨에 대한 자료를 더 찾는 거야. 그리고 미술관에 가는 거야. 사람들이 없는 시간에.”
“사람들이 없는 시간을 어떻게 알고? 5 전시실에서 사람들이 나가길 기다려야 하나?”
“그렇지! 자, 이제 자료를 어떻게 찾는다? 도서관에 가야 할까?”
“에이 바보! 컴퓨터로 인터넷 검색을 하는 게 빠르지.”
아람이는 민망한 듯,
“아하하... 그렇구나. 근데 조금 있으면 엄마랑 아빠 집에 올 시간이야. 그니까 일단 오늘은 숙제 하는 척 하면서 이 책을 보고, 내일 학교 갔다 와서 찾아봐야지.”
“와~ 철저하네. 난 그냥 내일 학교 끝나고 곧장 미술관에 가서 의빈 성씨랑 단판을 내고 싶구만...”
다음 날 오후, 누리는 학교 운동장에 땀을 흘리며 친구와 축구공으로 놀고 있는데 아람이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누리야, 누리야아~~ 지금 미술관 가자~~”
“너네 누나도 미술관 좋아하냐? 이상한 남매야. 나도 이제 학원 가야겠다.”
하며 친구가 교문밖으로 나갔다.
“나 입장료도 없단 말이야.”
누리는 아람이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야! 내가 누구냐? 초대권을 할머니한테 두 장 받았어. 그리고 인터넷 검색은 아까 점심시간에 도서실에서 해놨고.”
“역시! 짱인데.”
“학습지 선생님 올 시간 맞추려면 빨리 갔다 와야 해. 뛰자~”
1 전시실에서 4 전시실까지는 건너뛰고 5 전시실로 들어간 아람이와 누리는 다른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의빈 성씨의 그림 앞으로 다가갔다.
아주 잠깐, 그림은 그림인 채로 있었다. 그런데 그림 앞 1m 정도로 바짝 다가가자 그림이 움직이며 말을 걸었다.
“어서오세요.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헉! 정말요? 왜요?”
누리가 깜짝 놀라 물었고, 아람이도 서둘러 말했다.
“무슨 사연이 있으신 거죠? 혹시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셨나요?”
“아~ 글쎄... 왜 그렇게 생각지?”
“내가 다 찾아봤어요. 이름은 성덕임이고, 정조 임금님이 무척 사랑했고, 아들인 문효세자는 다섯 살에 죽고, 딸도 태어나서 첫돌도 안 돼서 죽었잖아요. 또 세 번째 아기를 낳기 두 달 전에 죽은 것도 알아요.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거 아닌가요?”
“어머나! 나에 대해서 많은 걸 공부했구나? 고맙다. 그렇지만- ”
그때, 세 사람이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5전시실로 들어 왔다.
“아니, 이게 누구야? 우리 아람이랑 누리네! 책가방도 메고 있는 걸 보니 학교에서 곧장 왔구나?”
“네, 할머니.”
할머니와 인사를 나누며 그림을 돌아보니 그림은 다시 멈춰 있었다.
아람이와 누리는 눈을 맞추고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망설였다.
그런데 그림이 다시 움직이며 말을 시작했다.
“정조 임금님과 나는 금슬 좋은 부부였지요. 정조 임금님은 내가 죽은 후 저를 애도하는 글을 많이 써 주셨지요. 저는 지금도 그분이 그리워 이렇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답니다.”
눈이 휘둥그레진 누리와 아람이와는 달리 할머니와 다른 두 분은 웃으며 그림을 향해 인사했다.
“수고가 많아요. 박선생님!”
다시 또 놀란 누리가 물었다.
“할머니! 어떻게 된 거에요?”
“이런 작품은 누리도 처음 보지? 이런 작품을 ‘인터렉티브 아트’라고 하는 거야. 테크놀러지가 결합되어 관객을 만나야 완성되는 작품. 관객들이랑 얘기도 나눌 수 있어.”
“그럼 그림 안에 AI라도 들어 있는 거예요?”
이번엔 아람이가 물었다.
할머니가 바닥의 한 부분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그건 아니고 여기 이 지점에 사람이 서면 센서가 작동해서 관람객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그림 뒤에 숨어 있는 분이 말을 하는 거지. 그러면 디지털로 된 그림이 움직이는 거야.”
“그림 뒤에 있는 분은 우릴 볼 수 있어요?”
“소리는 들을 수 있지만 보지는 못 해. 컴퓨터를 앞에 놓고 검색어를 치면서 여러 가지 질문에 답도 해야 하니까. 하하, 내가 비밀로 해도 될 걸 너무 많이 알려준 건가?”
그제야 아람이와 누리는 모든 게 이해되었다. 그러면서도 누리는 디지털 그림이 너무나 감쪽같아 놀라웠고, 아람이는 신비한 경험을 놓친 거 같아 크게 서운했다.
나중에 아람이와 누리에게 둘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얘기 듣고, 할머니는 즐겁게 웃으며 말했다.
“애들아! 할머니는 너희들 덕분에 미술관에서 새로운 걸 많이 배우고 또 그걸 여러 사람과 나눌 수 있어서 참 좋구나. 더구나 그림 하나가 호기심을 자극해서 이렇게 배워나가는 아람이랑 누리를 보니 얼마나 좋은지 몰라!”
•수상소감 - 우수상 동화 배홍숙
“동화나 그림책을 쓸 땐 내 생각이 신기해 기분이 좋아져요”
감사합니다.
블로그에 동화를 몇 편 써 두고 공개는 안했는데,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에 처음 응모해서 이렇게 상을 받으니 많이 기쁩니다.
독서 동아리 회원이 공모전이 있다고 단톡방에 링크를 걸어주셨어요. 그 분도 우수상을 받았습니다.
응모 부문에 동화가 있어 용기를 내봤습니다. 어쩌면 50대 이상이 참가하는 거라면 동화 부문 응모자가 적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하면서…
글쓰기 관련 책을 보기도 하고, 강의도 가끔 듣습니다. 함께 독서동아리 활동을 하는 친구들과 가족, 제가 하는 모든 활동이 글쓰기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적극적인 글쓰기엔 특별한 동기가 필요한 거 같아서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이후에 다른 공모전이 있나 살펴보고 있습니다.
어떤 출판사에서 책을 내자고 요청이 온다면 글쓰기에 더 큰 동기부여가 될 것 같네요.
내가 쓴 에세이는 항상 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동화나 그림책을 쓸 땐, 내가 해낸 생각들이 신기해서 기분이 좋아지고요.
그래서 새로운 아이디어로 동화나 그림책 글을 계속 쓰면서, 감동을 주는 좋은 수필도 쓰려고 노력하겠습니다.
공모전 정보를 주셨던 선생님, 잘못된 파일 경로를 수정하라고 알려주신 담당자에게 감사드리며, 독서동아리 친구들과 어린 시절에 많은 얘기를 들려주셨던 엄마와 외할머니, 응원해 주는 식구들에게도 감사함을 전합니다.
길을 잃다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길을 잃었습니다. 사업이 무너지니 가정도 파탄되고 종교생활도 다 무너졌습니다. 그동안 알던 모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불편하고 싫었습니다. 자격지심(自激之心)인지 저의 현재 상황을 일일이 설명하는 것에 비참함을 느꼈습니다. 방황하며 현실을 도피했습니다. 일부러 서울을 떠나 아무도 모르는 타지(他地)에 가서 머물렀습니다. 그러다가 중국까지 도망치듯 오게 되었습니다.
흔히 인생을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라고 합니다. 태어나서 죽기까지 매번 선택하며 사는 것이 인생이라는 뜻입니다. 그중에 중요한 3대 선택을 결혼, 직업, 종교라고 하는데, 나이 50세에 이 모든 것들의 기반이 한순간에 붕괴된 것입니다. ‘과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나는 어떤 선택이 잘못된 것일까?’ 지나온 저의 50년을 곰곰이 반추해보았습니다.
나의 1차 꿈
저는 가난한 집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저의 아버님은 1·4후퇴 때 월남해온 이산가족입니다. 남한에 친척이 없었고 저의 어머님을 중매로 만났지만 가정에 정(情)을 못 붙이시고 한평생을 유랑하듯 밖으로만 떠도셨습니다. 그래서 어머님이 홀로 저희 3남매를 키웠습니다.
어머님의 고생을 익히 보고 자란 저는, 빨리 커서 돈 벌어 어머님께 집 한 채 사드리는 것이 1차 목표였습니다. 대학 갈 때쯤 우연히 저의 주민등록초본을 떼어보았는데, 거기에는 제 나이보다도 주소지 이전 횟수가 훨씬 많았습니다. 그만큼 더 싼 곳으로 자주 이사를 다녔다는 의미입니다.
대학 시절엔 저를 특별히 아끼시는 교수님께서 제게 미국에서의 7년간 석·박사 유학 코스를 권하며, 공부하고 돌아와 우리 대학의 교수가 되라고 기회를 주셨는데, 저는 거절했습니다.
제게는 현재의 대학생도 과분하며, 저는 제가 교수되는 것보다, 빨리 돈을 벌어 어머님을 편히 모시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교수님께서는 “사람이 돈을 쫓으면 추해진다. 돈이 너를 쫓아오도록 해야지” 하시며 저를 훈계하셨지만, 그때 저는 그 말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군(軍) 입대할때도 경제생활을 고려해 장교를 선택했고, 대기업에 입사했다가 1년 반 만에 대형 증권사로 이직(移職)을 합니다. 거기서 3년 만에 드디어 꿈을 이룹니다. 드디어 어머님께 집을 사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때의 제 나이가 서른 살이었습니다. 이후 증권사에서 저는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고 승승장구합니다.
고민이 시작되다
그리고 이어 제가 서른한 살에 아들을 낳았는데, 그때에 아들 이름을 지으며 저는 처음으로 인생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저처럼 좋은 집을 사고 좋은 차를 타며, 가족끼리만 잘 먹고 잘 사는 게 목표일까? 그 이상의 인생은 없는 걸까? 나중에 크면 아들에게 인생이란 무엇이라고 말해줘야 할까?’ 그런 생각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들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금강산(金剛山)’. 저의 성이 김(金)이니, 김강산이나 금강산이나 한자(漢字)의 표기는 같았습니다. 제가 그때는 교회도 열심히 다닐 때였기에, ‘역사의 하나님’께서 앞으로 우리 민족의 미래를 열어주실 때, 제 아들 녀석을 ‘금강산 찾아가는’ 통일의 도구로 써주십사 하는 의미였습니다.
저는 비록 제 가족밖에 모르는 인생이지만, 제 아들만큼은 그 이상의 가치 있는 인생을 살게 해달라는 기도의 산물이었습니다.
한편 증권사 시절은 가히 저의 전성시대였습니다. 최연소 영업추진부장, 지점장, 연수원장, 홍보실장, 강남본부장(11개 지점 총괄), KBS 라디오 증권방송 등 종횡무진(縱橫無盡)했고, 급여도 억대 연봉이었습니다. 20여 년 전에 연봉 1억 원이면 거의 상위 1% 수준이었습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위치였는데, 언제부터인가 왠지 가슴 한구석이 허전했습니다. 경제적인 풍요가 더 이상 나를 행복하게 하지 않았고, 가시적 1차 목표가 사라진 인생은 조금씩 허무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히 IMF 때 저는 증권사 신촌지점장이었는데, 문득 제가 하는 일에 회의(懷疑)가 생겼습니다. ‘조국 대한민국은 현재 달러가 없어서 국가부도 사태인데, 지금 내가 하는 일은, 이 혼란 속에서도 돈 있는 사람들에게 돈을 좀 더 벌게 해주는 역할 정도가 아닌가? 과연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 걸까?’ 본질적인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결국 증권회사에 사표를 제출하게 되었을 때, 저를 아끼셨던 사장님께서 제게 물었습니다. “지금 잘하고 있는데, 왜 갑자기 사표를 내는가?” 그때에 저는 ‘재미가 없어서요’라고 답한 기억이 있습니다. 진심이었습니다.
그 말에 사장님께서는 씨익 웃으시며 “사표는 유보할 테니, 유급으로 한두 달 푹 쉬고 충전해서 돌아오라”고 말씀하셨고 실제로 그렇게 처리해주셨지만, 저는 결국 사표를 철회하지 않았습니다.
헤드헌터(Head Hunter)사의 유혹
증권사 퇴직 얼마 전부터 강남의 유명 헤드헌터사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대기업이나 국가기관이 소수의 전문가를 특별 채용하고자 할 때는 공개채용을 하지 않고, 헤드헌터사가 보유한 분야별 전문 인력 풀에서 추천을 받곤 합니다. 어찌된 일인지 그쪽 추천 리스트에 저도 포함되어 있었나 봅니다. 기분 나쁘지 않았고 신기했습니다.
첫 번째 제안은 외국계 증권사의 홍보팀장이었는데 제가 거절했습니다. 우선은 IMF 시기에 외국 회사라는 게 싫었고, 저의 공식적인 답변은 그쪽 역할이 지금보다 작고, 연봉도 저의 현재 수준이 더 높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러자 2개월 후 다시 제안이 왔습니다. 이번엔 역할도 크고 연봉도 맞춰주겠다고 했습니다. 그게 우리금융그룹 홍보실장이었습니다.
일단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우리금융은 IMF 때 공적자금을 받은 5개 은행을 통합하여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금융지주회사인데, 빨리 회생하여 주가를 높여야 우리나라가 IMF로부터 벗어나는 상황이었습니다. 일단 면접이라도 보아달라는 헤드헌터사의 거듭된 요청을 받아들여, 면접을 보고 결국 입사를 결정하게 됩니다.
가서 만나보니, 하나은행을 성공적으로 경영하셨던 윤병철 회장님께서 우리금융그룹 초대회장으로 오셨고, 이후에 금융감독원장이 되신 전광우 부회장님이 제 직속 상관이셨습니다. 두 분 모두 능력도 탁월하시고 인품도 훌륭하셨습니다. 특별히 저를 많이 아껴주시고 믿어주셔서 가까이서 많은 일들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근무여건은 녹녹지 않았습니다. 산하의 은행들은 지주회사를 마치 점령군처럼 인식하여 노조를 중심으로 사사건건 반발했고, 언론도 호의적이지 않아, 매일 밤 언론사를 찾아가 부정적인 기사를 막아내는 것이 저의 주된 업무가 되었습니다.
또다시 흘러가는 시간이 아깝게 느껴졌고, 저는 결국 1년 만에 최종 사직을 합니다. 저의 사표에 대한 답신으로 윤병철 회장님이 써주신 덕담 가득한 친필 서한(書翰)에, 저는 한 번 더 감동하며 고별인사를 드렸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엿보다
총 18년간의 직장생활을 정말 미련 없이 정리하고 나서는, 직장인 시절에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일들에 관심을 갖고 시간을 보냈습니다. 첫째는 각종 동문회 참가였고, 둘째는 강사 활동이었습니다.
동문 모임으로는 서울시립대학교 대학동창회와 ROTC 총동기회가 있었는데, 나름 열심히 하다 보니, ROTC 21기 총동기회장으로 전국을 누볐고, 당시 ROTC 중앙회장이셨던 5기 차인태(전 MBC 아나운서) 회장님과도 좋은 신뢰를 쌓았습니다.
이어 회사 다닐 때부터 간간이 요청이 있었던 몇몇 대기업에서의 강의 요청을 이제는 편하게 다닐 수가 있어서 좋았습니다. 삼성그룹, 효성그룹, 푸르덴셜생명 등에 리더십, 프레젠테이션, 커뮤니케이션, 네고시에이션(협상기술) 등을 주제로 4~8시간까지 강의를 진행하곤 했습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푸르덴셜생명으로부터 한 가지 큰 제안을 받게 됩니다. 난치병 어린이들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는 ‘한국 메이크어위시(Make A Wish) 재단’의 초대 사무총장을 맡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제겐 생소한 분야였지만, 자원봉사자 선발 및 교육, 소원행사 감동연출 및 홍보, 그리고 기업으로부터 후원금 조달업무 등을 총괄하는 역할이어서, 저를 적임자로 평가한 것 같았습니다. 저에 대한 기대도 감사하고 좋은 일이어서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한국 메이크어위시 재단의 사단법인 인허가 설립부터 총 2년여를 봉사했는데, 미국재단으로부터 매뉴얼 교육을 받고, 소아암병원으로부터 소원 대상자를 추천을 받아, 최선을 다해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수십 건의 소원성취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그때에 저는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습니다. ‘약값이나 치료비를 지원하지 왜 소원성취인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꿈꿀 수 없는 어린이들에게 단 한 번의 소원은 무얼까? 인간에게 진정한 소원이란?’ 이런 물음을 통해 사회봉사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고, 이런 생각은 후일 중국에 와서도 나름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새로운 큰 도전, 그리고 실패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깊이 생각한 것은, 돈 이상으로 의미 있고 하고 싶은 일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제게는 ‘한류문화 관광사업’ 이었습니다.
이 사업을 선택한 이유는 첫째, 우리 문화를 사랑하고 상품화하는 것은 제가 잘할 줄 아는 분야였고, 둘째, IMF를 겪고 보니 국가적으로 달러 버는 일이 중요했는데, 이 일이 바로 그쪽 분야의 일이었고, 셋째는 우리나라 환율이 오르니, 이른바 인바운드(inbound, 한국 입국) 관광사업에 경쟁력이 높아졌던 시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은 2002년 한일 월드컵에 맞춰서 일을 시작하려던 계획이었는데, 여기저기 세상을 엿보다가 좀 늦어져서 2004년에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한국에 오는 외국 관광객들에게 한국적 감동을 추가로 전하며, 1인당 100불씩 더 쓰게 하자는 내부 경영목표를 세우고, 독창적 한류문화 전시 및 상품개발 사업을 기획합니다.
그리고 김포공항 국제선 제2청사 지하 1층에 약 1000㎡ 규모로 ‘한류스타 홍보관’을 제법 호화롭게 개장했습니다. 전시관 조성에만 총 9억 원을 투자했습니다. 당시 일본에 한류 붐이 있었고, 국제선 제2청사는 도쿄 하네다공항을 직행하는 항공편이 매일 16편이 있었습니다. 김포공항의 한국공항공사는 물론, 문화관광부, 한국관광공사 등의 기대와 관심을 한껏 받으며 사업을 자신감 있게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초기에 공동으로 지분투자를 약속했던 일본 도쿄의 파트너 관광사업자가 약속을 어기면서 틀어지기 시작했고, 개장 6개월 후부터 갑자기 일본의 한류 붐이 식으면서 위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직접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한류 페스티벌 행사에도 참가하고, 말레이시아와 중국 등에도 직접 진출을 시도했습니다. 중국은 그때 처음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수익 다변화를 위해 국내 이벤트 기획사로도 사업영역을 넓혔습니다. 당시 오세훈 시장 시절에 서울시 장애인 예술제도 연출했고, 노인협회 주관의 세계노인문화예술제를 8개국을 초청하여 속초와 설악산에서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도 포천 양귀비 꽃 축제, 대기업 행사 등을 수주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불황과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개장 4년 만에 전시시설을 김포공항에 기부체납하면서 사업장의 문을 닫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부채청산을 위해 모든 개인 재산 정리를 했고, 가정도 파탄을 맞습니다. 돌이켜보면 뜻만 좋았지 저 자신이 자신감을 넘어 너무 교만했고, 위기대응 준비가 충분하지 못했고, 모두가 저의 부덕한 탓이었습니다.
어머님이 계시기에
졸지에 더 이상 갈 곳도 없고 반기는 곳도 없었습니다. 낮에는 대인기피증이 생겼고, 밤에는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렸습니다. 몸도 마음도 피폐해졌습니다. 개인적으로 나쁜 생각도 참 많이 했었지만, 그때마다 어머님이 슬퍼하실 얼굴이 떠올라서 참고 참았습니다.
어머님은 당시에 큰아들이 고생한다고 제가 사드린 집을 처분하여 제게 마지막 힘을 보태주셨는데, 저는 그 기대마저도 부응하지 못하고 무너진 것입니다. 저 때문에 졸지에 어머님마저도 다시 사실 곳이 마땅치 않은 상황이 되었습니다.
사실은 그 몇 해 전부터 어머님은 몸이 많이 상하셔서 거의 거동을 못하시는 상태셨습니다. 한약방에서는 맥박도 약하고 보약도 효험이 없다고 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사업이 망하고 가정파탄마저 겪게 되자, 어머님은 기적처럼 아픈 몸을 털고 다시 일어나셨습니다.
이유는, 갈 곳 없는 저의 끼니를 챙기시고 저의 옷을 세탁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정녕 어머니는 위대하다는 말을 저는 그때 다시금 느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 원인도 모른 채 제가 밤새 심한 복통으로 끙끙 나뒹군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어머님은 두 손으로 저의 아픈 배를 계속 문지르시며, 당신은 평소 불교 신자셨는데 제가 믿는 하나님을 외치시며 ‘우리 큰아들을 제발 살려달라’고 밤새 우셨습니다. 너무도 아프고 길었던 그날 밤, 어머님의 그 뜨거운 눈물과 안타까운 외침 소리를 저는 결코 잊지 못합니다.
중국으로 떠나오다
그런 어머님을 뒤로하고 저는 중국행을 선택합니다. 당시 중국과는 비록 지지부진했지만, 고구려의 420여 년간 수도였던 집안시(集安市) 정부 관료들과 제가 고구려축제를 협의하던 중이었던 바, 거기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아니 그것을 핑계로 한국을 도망치듯 떠납니다. 어쩌면 아무도 없는 무인도(無人島)를 찾는 마음이란 표현이 더 솔직할 겁니다.
집안시의 고구려 프로젝트는 3개월 뒤 결국 무산됩니다. 제가 한국인이라는 이유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인이 중국에서 고구려를 거론하는 것은 그 자체가 금기시되는 일이었습니다. 집안시 정부 책임자도 처음에는 그 정도로 민감한 문제인 줄을 미처 몰랐던 것 같았습니다.
집안시 프로젝트는 무산되었지만 저는 한국으로 돌아갈 마음이 없었습니다.
아무런 대책도 목적도 없이 그저 좀 더 중국에 머물기로 하고 지인이 있는 곳을 찾았는데, 그곳이 바로 단동시(丹東市)였습니다. 단동은 압록강을 사이로 북한 땅 신의주와 마주하고 있으며, 북한 대외무역의 약 80%가 단동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단동은 한마디로 우리말 백화점이었습니다. 당시 단동에는 중국 조선족이 1만 5000명, 북한 사람이 1만 명, 북한에서 태어난 중국 화교(華僑)가 1만 명, 요동대학교 한국·조선(북한)어과 학생들이 1000여 명, 그리고 한국인이 총 2000명 정도 살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대북사업 관계자이거나 선교사였습니다.
누구를 만날 일도 없고 아무 일과도 없는 저는, 매일 새벽 혹한의 추위에도 저를 채찍질하듯 하염없이 압록강 산책로를 걸었습니다. 새벽 교회당을 찾아 무릎 꿇고 홀로 숨죽여 울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밤, 강 건너 불 꺼진 북한의 신의주 땅을 멍하니 넋 놓고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게 저의 ‘살아남아 버티기’의 중국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사람이 살고 있었네
그렇게 한두 달을 보내다 보니, 점점 주변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도 저와 똑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여러 해 전 소설가 황석영이 북한을 다녀와서 쓴 책의 제목이었던 ‘사람이 살고 있었네’가 생각났습니다. 한인교회를 통해 한국 사람들을 접하고 단동한인회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제가 시간이 많으니 한인회 봉사를 제의받아, 당시 막 설립한 단동한국문화원의 부원장직(원장은 한인회장이 겸직)과 한인회 사무국의 사무총장으로 무료봉사를 시작했습니다.
단동한인사회는 대부분 1992년 한중수교 직후와 1997년 IMF 전후로 중국에 건너오신 소상공인 분들이 많았던 바, 아마도 저와 같은 대기업 출신의 사회 경험자가 드물어, 오자마자 졸지에 감투를 쓰게 된 것이었습니다.
봉사의 길에 들어서다
뜻밖에 할 일이 생긴 저는, 대기업에서의 기획력과 이벤트 기획사 대표로서의 경험을 되살려 많은 일들을 추진했습니다.
우선 요동대학교 한국·조선어과를 찾아서는 한국어 말하기 대회와 글쓰기 대회, 그리고 합동 문화공연을 매년 추진했습니다. 재외동포재단에는 기획서를 보내 한인회관 건축지원금을 50% 받고 나머지는 현지 모금하여 3층짜리 아담한 단동한인회관을 건립했습니다.
한편, 장기체류 단동 한인들의 대부분이 현지인과 결혼한 다문화가족들이었는데, 이들에 대한 지원체제가 없어, 문화원 내에 다문화가족 복지센터를 만들고, 당시 단동을 방문한 국회 통일외교안보위의 박선영 국회의원님과 심양총영사관의 협조를 얻어 다문화가족 합동결혼식과 단체 한국 신혼여행을 추진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족학교에 가보니, 70% 이상 대부분 학생들은 부모가 한국에 돈 벌러 가서 없는 결손 가정이거나 조부모 위탁상태였고, 소학교를 졸업해도 별도 우리말도 잘 못하고 중국어도 잘 못하는 언어수준에다, 문화예술 방면 재능교육 발견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비록 몸은 건강해도 스스로는 아무것도 꿈꾸지 못하는 조선족 아이들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먼저 문화원에서 조선족 학생들을 대상으로 우리말 교육과정을 시작했고, 해마다 한국어 말하기 대회를 개최하여 수상자들에게 한국문화체험여행을 제공했습니다. 제가 단동에 머문 4년 동안 총 140여 명의 학생들이 한국을 방문했는데, 여행비용은 경기문화재단과 한국 지인들의 개인적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조선족 학생들의 예술적 잠재력을 끌어내기 위해, 나아가 그들 스스로가 무언가를 꿈꾸게 하기 위해, 제가 예술단장이 되어 직접 학교에 가서 학생 67명을 선발하여 ‘압록강 청소년예술단’을 공식 발족하였습니다.
그 뒤 8개월간의 훈련 후에 5성급 호텔에서 1000여 명의 학교관계자과 학부모들을 모시고 ‘내 마음의 북두칠성’이라는 제목의 예술단 창단공연을 성공리에 추진하였습니다. 대부분 첫 무대를 경험하는 것이라 감동은 컸고, 학교를 향한 후원금도 쏟아졌고, 부모님들은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심양으로 진출하다
이런 저의 활동들이 인근 지역에도 소문이 났던 모양입니다. 심양총영사관에서는 당시 조백상 총영사님의 파격적 배려로 저를 총영사관의 경제문화행사 기획자 겸 사회자로 발탁해서 일을 맡겼습니다.
마침 한중수교 20주년도 겹쳐서, 각 도시마다 한중우호의 밤 행사가 있었고, 중국 동북3성(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27개 대학을 대상으로 한 ‘한국어 말하기 대회 및 K-Pop 경연대회’, 그리고 한국 국경절(개천절) 기념 총영사관 한복패션쇼 등의 행사를 연출했습니다.
그러면서 항일유적연구소장과 동북3성 한국인연합회 사무총장을 맡게 되어 동북3성 최대도시인 심양으로 진출하게 됩니다. 심양은 단동의 10배 규모로, 외곽까지 도농(都農)인구 합계가 총 2000만 명인 대도시입니다.
중국 동북3성에 와서 알게 된 사실은, 전 세계 한민족 항일유적지의 3분의 2가 중국에 있고, 중국 항일유적지의 3분의 2가 동북3성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인은 물론 조선족들도 우리의 항일역사에 대해 잘 모르고, 항일유적지 찾기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만든 것이 항일유적연구소였습니다.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의 항일역사에 대해서도 많은 공부를 했습니다.
저는 연구소장으로서 연구원을 모집하고, 안중근 13일간의 이동경로와 거사일정을 뒤따라가 보기도 했고, 윤동주의 생가, 신흥무관학교의 발자취 등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많은 항일열사들의 발자취도 찾아다니며 공부했습니다.
그런 중 우리나라 3대 독립선언 중 하나이자 최초의 독립선언인 ‘무오독립선언’의 내용과 의미를 분석, 발굴하여, 심양총영사관과 국가보훈처의 협조 아래 저희 항일유적연구소가 주관하여, 중국 현지 최초로 ‘무오독립선언 기념식’을 개최하였습니다. 저의 가장 큰 보람 중 하나인 이 행사는, 민주평통 선양협의회의 주관으로 지금도 8년째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중교류문화원을 설립하다
대도시 심양에 와서 저는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동안 제가 잡다하게 벌여놓은 문화예술 봉사활동과 조선족학교 지원, 그리고 항일역사연구와 유적지 방문활동 등을 종합하여, 체계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시스템과 공간 확보의 필요성이 커진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한중교류문화원’을 설립 추진합니다.
한중교류문화원은 심양의 코리아타운 지역인 서탑가 인근에 약 2000㎡ 규모로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아 2014년 7월 19일 설립하였습니다. 자체적으로 130여 석 규모의 강당을 갖게 된 문화원은 많은 교육활동과 문화예술 공연행사를 연출합니다. 그중에 최고의 대박상품은 ‘실버대학’입니다.
제1기 실버대학은 2014년 가을에 약 15주의 과정으로 진행되었는데, 50세 중반부터 80세 전후의 조선족 어르신들 93명이 첫 신입생으로 입학했습니다. 노래교실, 역사문화특강, 10년 젊어지기 미용특강, 핸드폰 사용법, 기본생활영어, 도전 골든벨, 그리고 졸업여행에 이어 사각모와 졸업가운 입고 졸업식하기 등의 행사에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습니다. 실버대학은 제가 문화원장으로 재임한 약 3년 반 동안 총 4회가 이어졌습니다.
한편, 실버대학은 제가 특별한 의미로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한국에 두고 온 저의 어머님을 생각하며 만든 행사입니다. 사실 한국에 있을 때, 어머님의 집에 가면 마음으로는 늘 눈물겹게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대부분의 우리 세대 장남들이 그러했듯이 다정다감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무뚝뚝한 아들이었습니다.
사실은 어머님과 재미있게 놀아드리고도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죄송스러움과 한(恨)을 실버대학을 통해서 조선족 어머님들께 재롱도 부리며 조금이나마 풀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일까요? 실버대학 어머님들의 공통된 감사인사 표현은 “우리 아들도 못 해준 호강을 실버대학에서 받았네요, 너무 행복합니다!”였습니다. 저도 응답합니다. “아닙니다. 행복하시다니, 제가 더 고맙습니다.”
그밖에도 한중교류문화원에서는 항일사진전, 어린이 K-Pop대회, 한국가수 김광석 가요제, 중국가수 등려군 가요제, 장예모 감독 영화제, 한국영화제, 조선족학교 돕기 프로젝트, 청춘콘서트, 사물놀이 강습, 한국 만화도서관 개관, 한중친선 배구대회와 탁구대회 등의 행사를 연출하였습니다.
동주학당, 동북에 물들다
그렇게 3년 반의 초대원장 자리를 마치고, 조선족에게 한중교류문화원 2대 원장을 물려주었습니다. 경영의사결정 과정에서 오해와 어려움도 있었고, 제가 너무 강하게 한국 문화를 중국 조선족들에게 전파한다는 정치적 오해가 깊어져서, 부득불한 조치였습니다.
대신에 저는 조선족 지식인들과 함께 윤동주의 이름을 딴 ‘동주학당(東柱學堂)’이란 모임을 만들고, ‘한중 문화융합연구소’라는 개인연구소를 차린 후, 다시 독립하여 조선족들을 향한 집중 봉사활동을 재개합니다.
동주학당은 민족시인 윤동주를 한민족 디아스포라(Diaspora)의 대표인물로 생각하여 ‘한민족 디아스포라 사랑방’을 추구하는 가운데, ‘찾아가는 민족문화원’을 표방했습니다.
우선 심양에서 ‘윤동주 100주년 기념 시낭송음악회’를 연출했고, ‘동주학당, 대련에 물들다’, ‘동주학당, 치치하얼에 물들다’, ‘동주학당, 영구에 물들다’ 등 동북3성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찾아가는 민족문화원’의 면모를 과시했습니다. 또한 심양 남부 소가툰 지역에 ‘윤동주 문화원’을 건립하여 실버대학도 성황리에 진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거의 최북단으로, 3만 명의 조선족이 거주하는 흑룡강성 치치하얼에도 ‘치치하얼시 조선족문화원’ 설립을 지원하고, 제가 명예원장을 맡아, ‘치치하얼시 조선족 아리랑 예술제’ 및 대동제를 개최하였습니다.
이어 거기서도 같은 마음으로 실버대학을 진행했는데, 제가 중국에서 총 6번째로 진행하게 된 ‘치치하얼 조선족 실버문화대학’은 무려 1200km 거리(심양-치치하얼)를 3개월간 매주 고속열차로 달려가서 진행한 것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소중한 것의 크기는, 자신의 재물과 시간과 열정을 투자한 것에 비례한다는 말을 저는 온전히 믿습니다. 치치하얼이 제겐 그런 곳입니다. 그곳에서 만난 조선족 동포 분들이 제겐 그랬습니다.
한중 갈등에 아파하다
그렇게 해서 어느 새 10여 년이 흘렀고, 50세에 길을 잃고 도망치듯 중국에 왔는데, 뜻밖에 어쩌다 길이 되어버린 조선족 대상 봉사활동을 하다, 어언 환갑을 지나 올해 63세에 이르렀습니다.
앞에서 제가 제법 많은 일들이 성취되었음을 자랑하듯 나열했는데, 그러나 돌이켜보면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고, 어렵고 힘든 문제들은 지금도 계속 발생되고 있습니다.
특히나 한중관계가 어려워지면 중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은 숨이 막힐 만큼 생존에 위협을 느낍니다. 평소에도 역사문제는 중국의 동북공정과 부딪치며 민감해서 매우 조심해야 했지만, 설상가상 사드 사태 등 정치적으로 꼬이면 한국인은 택시 탑승을 거절당할 만큼 배척됩니다. 지금도 한중관계가 소원해지면 겁부터 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동주학당이 야심차게 윤동주문화원을 설립했으나, 윤동주의 국적문제가 불거지면서 설립 1년 만에 활동을 접어야 했고, 개인적으로는 문화간첩으로 오해받아 특정 지역에 출입이 막힌 적도 있었습니다.
살펴보면, 중국인들은 조건 없는 봉사를 믿지 않습니다. 조선족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분명히 숨겨진 다른 목적이 있다고 의심합니다. 그리고 문화는 정치라고 생각합니다. 문화침투 등 정치적인 오해로 몰면, 어느 친구도 나서서 저를 변호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게 중국이고 그게 조선족의 입장임을, 너무 아프고 안타깝지만 이제는 이해하고 인정합니다.
한편, 한때는 한국 정부도 저를 오해해서, 제가 북한과 중국의 국경지역인 압록강 지역을 자주 오고가니까, 인천공항에 입국할 때마다 혹시 친북간첩이 아닐까 조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어쩌다 한국과 중국이 모두 저를 의심하는 웃지 못할 상황도 있었습니다.
흔히 우리나라 외교를 ‘안미경중’(安美經中)이라고 말합니다. 안보는 미국이요, 경제는 중국이라는 뜻입니다. 양쪽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다리기 외교만큼, 재중 한국교민들의 마음도 불안하고 위태롭습니다. 어찌되었거나 서로 신뢰하고 미래지향적으로 협조하는 훈훈한 한중관계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조선족 전성시대’가 온다
제가 중국에서 만나본 조선족들은 현재 중국인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고, 아울러 한민족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 그 내면을 살펴보면 어디 가도 비주류요, 이방인처럼 살고 있습니다.
1950년대 초에 중국 소수민족의 하나인 조선족으로 편입되어, 그동안 중국인으로 산 세월이 미처 70년이 되지 않습니다. 아직 중국의 주류인 한족들과의 융화가 문화 차이로 쉽지만은 않고, 마찬가지로 모국인 한국에 와서도 여전히 차별받는 비주류요, 이방인입니다.
현재 조선족 부모와 자녀들은 매우 고민합니다. 중국에서는 점차 조선족에 대한 우대조치가 사라지고, 얼마 전 조선족학교를 향해 앞으로 조선말이 아닌 중국어로 교육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그동안 조선어로 시험 보아 다소 유리했는데, 앞으로는 대학시험도 중국어로 쳐야 합니다.
그러자 조선족 유치원과 학교에는 학생들이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빨리 중국 한족학교로 옮겨가야 그나마 중국 학생들을 따라갈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조선족 학생들이 한족 학생들과 경쟁에서 이기기는 어렵습니다. 대학을 나와도 갈 곳이 거의 없습니다.
얼마 전 조선족 대학생연합회 대표들과 대화했는데, 그들의 대다수가 원하는 꿈이 커피숍이나 식당을 꾸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그 외에는 별다른 기회가 없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 조선족들에게 저는 이제 곧 ‘조선족의 전성시대’가 온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입니다. 이는 굳이 정치적 통일이 아니더라도, 상호간 화해협력을 기반으로 북한이 경제적으로 개방하는 시대를 의미합니다. 이때가 되면 조선족 역할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바, 이를 잘 준비하자는 것입니다.
저는 외칩니다. “조선족은 어디 가나 비주류요 이방인이 아니라, 향후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에 모두가 필요로 하는 핵심인재들입니다. 그래서 하늘이 미리 점지(點指)하고 100년 전부터 중국 땅에 선발대로 보낸, 최고의 일꾼들입니다.” 저는 이런 점들을 우리 조선족들에게 분명히 가르쳐주려 합니다.
저의 그런 주장의 근거는 세계적인 투자자 짐 로저스의 분석에 기초합니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하는 제 인생 이모작의 꿈도 거기서 같이 출발합니다.
20년 전부터 중국의 획기적 성장을 예견했던 짐 로저스는, 이제 일본의 시대는 끝이 났고, 앞으로는 북한의 개방을 주목하라고 말합니다. 북한의 개방은 분명 대한민국과 한민족의 미래에 가장 큰 기회가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합니다. 저도 이 주장에 100% 공감하며 진실로 기대하며 설렙니다.
‘조선족 희망전도사’의 꿈
한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중국에서도 가끔은 강의를 할 기회가 생깁니다. 대부분은 조선족단체 모임이고, 한국국제학교 학생들에게도 할 기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공통적으로 빠지지 않고 제가 설파(說破)하는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조선족이여,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의 실무주역이 되자!’ 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독일 통일 이후의 상황에 주목합니다. 1989년 서독과 동독이 통일할 때 양국의 경제력 차이는 8:1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난 32년간 동독의 발전을 위해 엄청난 투자를 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서독과 동독은 아직 2:1 이상의 격차 상태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과 북한은 3년 전 기준으로 경제력 차이가 무려 44:1입니다. 이 격차를 해소하자면 적어도 향후 50년 이상의 투자와 인적교류가 무조건 필요합니다. 그때에 필요한 실무인력으로 조선족보다 더 경쟁력 있는 집단은 없다고 저는 감히 주장하고 있습니다.
만약 북한이 문을 열면, 서울 청년들이 평양 청년들과 별 갈등 없이 일할 수 있을까요? 저는 매우 어렵다고 봅니다. 당장에 한국인과 조선족도 문화인식 차이가 작지 않은데, 남북한 간에는 불가피하게 갈등해소 시간과 비용이 엄청나게 많이 소요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한국의 자본주의도 충분히 알고, 중국의 공산주의 체제에도 잘 적응하고 있는 조선족만의 실무역할 영역이, 다가올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에 차별적 블루오션(Blue Ocean)으로 분명히 생겨날 것이라 저는 판단합니다.
앞으로 적어도 50년 동안은 조선족을 필요로 하는 시대가 활짝 열릴 것입니다. 그러하니 조선족이라면, 기본적으로 우리말은 무조건 똑똑히 배워두고, 능력이 되면 한국의 기술이나 장점을 잘 공부해두라는 조언을 조선족 청년과 부모들에게 진심을 다해 전해줍니다.
그렇게 강의하며 말하고 다니다 보니, 일부 조선족들이 제게 붙여준 별명이 ‘조선족 희망전도사’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 별명이 참으로 과분하지만 제 마음에도 흡족하게 스며듭니다. 더 노력해서 진짜 ‘조선족 희망전도사’로 살아보자는 꿈도 생겨났습니다.
대륙에서 길을 묻다
나라 잃은 슬픔 속에서 민족시인 윤동주는 그의 시 ‘길’을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게 나아갑니다.’ 아마도 나이 50에 직업과 가정과 신앙의 동반 몰락을 경험하면서 도망치듯 중국으로 넘어온 때의 제 심정과 조금은 닮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다시 기운을 차려, 작고 소박하지만 같은 민족으로서의 안타까움과 애정을 담아, 혹시라도 저의 재능을 필요로 하는 곳에, 특별히 조선족들에게 아무 조건 없이 달려갔던 중국에서의 지난 10여 년을 정리해봅니다.
중국의 대문호 노신(魯迅) 선생이 청년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하면서 말했던, ‘처음부터 길은 없었다. 사람들이 다니면서 비로소 길이 되었다’는 구절이 생각납니다. 처음엔 미처 길인 줄 몰랐는데 저도 어찌어찌 십여 년을 지나고 보니, 이젠 나름 하나의 길처럼 느껴집니다.
제 몸 하나 추스르지 못했던 한심한 존재가, 어쩌다 타국 땅에서 문화 봉사를 통한 희망전도사로 모질게 살아남아 있습니다. 30~40대의 젊고 풍요로울 때 그렇게도 갈구했으나 찾지 못했던 인생의 참 의미와 가치를, 어리석게도 60을 훌쩍 넘어 늙고 가난해지면서 비로소 조금씩 깨닫고 배워갑니다.
그동안 중국에 와서 개인적으로 절망하며 힘들었을 때, 제게 특별한 위로가 되어준 시(詩)가 있습니다. 정호승(鄭浩承) 시인의 ‘봄 길’입니다.
봄 길
-정 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 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김영식이 있다’
이제 고백합니다. 정호승 시인의 ‘봄 길’은, 제가 대륙에 와서 길을 묻다가 십 수년 만에 찾아내어 저 스스로에게 답한 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때때로 저는 시의 마지막 구절 뒤에 한 줄을 더 보태어, ‘김영식이 있다’를 다짐처럼 홀로 외치기도 했습니다.
오늘도 길을 잃고 다시 길을 찾는 분들에게 지난날 저의 절망도 작은 위로 중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깜깜한 절망 속에서 위로를 받았듯, 많은 분들이 그랬으면 좋겠고, 앞으로 살면서 서로에게 작으나마 위로가 되고, ‘봄 길’의 내용처럼 희망이 되어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만약 하늘이 허락하셔서, 제게도 ‘인생의 이모작’이 가능하다면, 우선은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에 무한 감사하며, 이제부터는 중국 땅에서 한 핏줄 동포를 향한 희망전도사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나아가 더 축복해주신다면, 30여 년 전 제가 아들 이름을 ‘금강산(金剛山)’이라 지었던 그 기도의 응답까지 받아서, 북녘의 아버지 고향 땅에 달려가 입 맞추고, 거기 그분들을 뜨겁게 보듬다, 그곳에서 그분들과 함께 묻히고 싶습니다. 이런 저의 마지막 소망이 너무 큰 욕심일까요?
•수상소감 - 대상 미니자서전 김영식
“중국 조선족 100년의 이야기를 중국판 처럼 작품으로 써 세상에 알리겠다”
•대상 수상을 축하드린다. 수상 소감은?
저는 7살 어릴 적 시골에서, 코 흘리게 손수건을 왼쪽 가슴에 달고 소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학교 가는 게 너무너무 좋아서,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1학년을 마치는 날, 담임선생님께서는 제 이름을 호명하시며 뜻밖에 1등 우등상장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제게는, 태어나 받은 ‘첫 상(賞)’이었습니다.
우등상 상품은 공책 한 권과 연필 두 자루였습니다. 그걸 들고 낮은 언덕의 신작로 길을 뛰어 어머니께로 달려갈 때, 저는 얼마나 가슴이 뛰며 기뻤는지 모릅니다. 만나는 모든 분들에게 막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그로부터 어언 56년이 지났습니다. 어쩌면 ‘마지막 상(賞)’일지도 모르는 이번 상이 저에게는 그때만큼이나 기쁩니다. 그때만큼이나 설렙니다.
저에게 이렇게 설레고 행복한 순간을 선물로 주신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의 주최한 브라보와 신한은행의 관계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인사 드립니다.
이번에 제가 쓴, 미니 자서전 는, 어쩌면 교만했던 인생의 부끄러운 고백이고, 뻔뻔한 반성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에게 특별히 큰 상을 주신 뜻은, 아마도 이 두 가지가 아닐까 저 나름 생각해 봅니다.
하나는, 다시 한 번 힘을 내서 ‘인생 이모작’에 도전하라는 따뜻한 격려로 느껴집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기대만큼 열심히 새로운 길에 도전하며 살겠습니다.
또 하나 이번 상은, 제 글쓰기에 대해 숙제를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글쓰기를 통해, 세상에 조금이나마 ‘선한 영향력을’ 보태라는 명령입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늘 정직하고 공감과 위로를 주며, 보존할 가치가 있는 글을 쓰겠습니다.
다시 한 번, 큰 상을 주신 브라보와 신한은행에 감사드리며, 끝으로, 조국 대한민국의 조속한 코로나 승리를 기도하고 응원하겠습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응모 배경이나 동기는?
저는 현재 중국 심양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생활했는데, 코로나로 인해 지난해 설 명절을 지내고 중국에 온 후, 한국에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지난해 말에는 운동 중 아킬레스건이 파열되어, 중국에서 수술을 받고 3개월을 치료한 후 현재는 재활 중입니다.
한국의 가족도 한국의 소식도 모두 그립습니다. 한국뉴스를 검색하다가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을 발견했습니다. 그중에 특별히 ‘50+’라는 표현에 많은 생각이 스쳤습니다. 제가 사업에 실패하고 도망치듯 중국에 온 것이, 바로 50세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타향살이 어언 13년이 흘러, 갑자기 코로나로 멈춘 일상 속에서 지나온 저의 인생을 되돌아 반추해보는, 귀한 시간을 가져 보게 되었습니다. 뜻밖에 좋은 기회를 주셔서 정말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번 시니어 공모전을 통해 ‘인생 이모작’도 새로이 꿈꾸게 되었습니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글을 잘 쓰기 위한 노력이라기보다는, 기왕에 제가 쓴 글이 독자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주며 더 잘 읽히면 좋겠다는 차원에서의 노력은, 제가 많이 부족해서 앞으로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평소 저의 글은 딱딱하고 설명형입니다. 재미없는 제 성격과 꼭 닮았습니다. 게다가 글쓰기로 처음 상을 탄 것이 대학 때 논문공모대회였고, 대기업에서 기획담당자였기에 더더욱 저의 글은, 사사로운 감정이 담기지 않은, 그래서 재미와 감동이 ‘1’도 없는 필법(筆法)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특별히 개인적으로 지난 10여 년간, 중국에 와서 여러 종류의 한글 잡지를 만들고 배포했는데, 주된 독자층이었던 중국조선족들은 한국인들에 비해 우리말 어휘력이 30% 수준을 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 글은 그저 수준 높고(?) 어려운 글이었습니다.
로 유명한 미국작가 훼밍웨이가 어느 회고문에서 자신의 독자로부터 받은 편지 하나를 소개했습니다. 전쟁 파병(아마도 한국전쟁) 중인 미군병사가 자신의 소설을 읽고 나서, 어려운 단어가 없어 ‘사전(辭典)찾기 ’없이도 100% 공감하며 큰 감동을 받았다는 감사편지였습니다.
저 역시, 쉽고도 감동적인 글, 그리고 오래 간직하고픈 글을 쓰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겠습니다.
•글을 쓰는데 도움을 준 멘토나 동기부여 이유가 있다면?
직접적인 멘토는 아니지만, 제가 특별히 닮고 싶은 작가가 두 분이 있습니다. 한 분은 한국의 유명한 시인 류시화이고, 또 한 분은 의 저자이자 인류학자인 미국의 루스 베네딕트 교수입니다.
시인 류시화는 개인적으로 저와 고등학교 동기동창입니다. 본명은 안재찬이며, 대광고등학교 30회로, 고교 2,3학년을 같은 반에서 공부했습니다. 경희대학교 2학년 때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당선된 그는, 인도 여행을 다녀와서 쓴 수필집 및 시집 등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인기작가가 되었습니다. 그의 글은 쉬우면서도 깨달음을 줍니다. 저도 글을 쓴다면 그런 면을 배우며 닮고 싶습니다.
다음은 미국의 여성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 교수인데, 제가 단동에서 항일유적연구소장을 할 때, 그분의 저서 을 읽었습니다. 2차 대전 전쟁을 종료하기 직전에 미국이 일본에 대해서 분석한 책으로, 70여년이 지난 지금도 전 세계인들에게 일본과 일본인 분석에 관한 제 1의 필독서입니다.
같은 패망국인 독일과는 달리, 일본은 왜 끝까지 반성하지 않는가에 나름의 분석이 명쾌합니다. 일본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상태에서 쓴 글이라는 점도 놀랍고, 냉철한 대안 제시가 전후(戰後) 미국과 일본의 관계설정에 기준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대단히 유효합니다.
일본에 대해 비판만하고 흥분만하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줄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나는 중국인에게 대한민국에 대해 얼마만큼 설명할 수 있는가, 또는 한국에 와서는 중국에 대하여, 그리고 제가 중시하는 중국 조선족에 대해서, 나는 얼마만큼 본질을 명쾌하게 공부했는가에 대해 통렬하게 반성하게 하는 책입니다. 중국판 같은 글에도 도전하고 싶은 이유입니다.
•수상을 계기로 앞으로 어떤 글을 쓰고 싶은가?
얼마 전 미국 아카데미상에서 영화 가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70년 전 조선인의 미국 이민사를 소재로 한 영화인데, 이 영화를 보면서 저는 제 주변의 중국조선족들을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대부분 100년 전후로 대륙에 이주해 왔고, 영화 미나리 이상의 휴먼 스토리가 얼마든지 있다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향후 중국 조선족 100년의 이야기를 중국판 처럼 작품으로 써서 세상에 알리는 것도, 이번 상(賞)을 통하여 저에게 주신, 귀한 소명 중 하나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감사와 고마움을 전하고 싶은 분이 있다면?
많은 사람이 있지만, 딱 한사람만을 꼽으라면 저는 주저 없이 저의 여동생 ‘김경희’를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교만한 실패와 방황, 그리고 대륙에서 길을 묻는 지난 10여 년 동안, 개인적으로는 부끄럽게도 맏아들로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저희 어머님께 제가 한 때는 자랑이던 아들이었지만, 이제는 걱정을 끼치는 아들로 살고 있는데, 그 빈자리를 저의 여동생이 말없이 채워주고 있습니다.
여동생 김경희는 제 인생에서 가장 미안하고 가장 고마운 존재입니다. 이번에 받은 저의 수상이, 제 여동생에게도 작으나마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KBS TV에서 PD로 근무하던 심웅섭(62)은 어느 날 퇴근길에 뜬금없는 우울감에 사로잡혔다. 자신의 아파트를 올려다보면서였다. 저 메마른 잿빛 콘크리트 상자 안에 살다니, 이거 실화냐? 그렇게 중얼거렸던 모양이다. 심웅섭의 말에 따르면 눈물까지 핑 돌더란다. 그날 밤 그는 아내에게 선언했다. “나 아파트에서 못 살겠어!” 이후 그는 도시 변두리의 단독주택으로 이사해 살았는데, 그즈음 내심에선 귀촌을 향한 희망의 싹눈이 돋았다.
말하자면 심웅섭에게 귀촌은 일종의 묵은 숙원이었다. 늘 시골을 마음에 담고 살았으니까. 그의 근무지는 서울에서 충주로, 다시 청주로 바뀌었다. 청주에 살면서는 시골티가 나는 외곽의 단독주택에서 살았다. 그러나 성에 차지 않았고,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에 마침내 꽤 깊숙한 산골에 집을 짓고 귀촌을 했다. 충북 보은군 회인면의 산촌으로.
“내가 시골 태생이다. 과수원집 막내아들이었다. 과수원에서 강아지와 함께 뛰어놀며 사과를 따 먹던 추억이라거나, 그리운 게 너무도 많았다. 때가 되면 시골에서 살고 싶었다. 하지만 직장이 있으니 쉬운 일은 아니었지. 그렇다고 미루기도 싫어 보은에서 청주로 출퇴근을 하기로 하고 이주했던 거다. 물론 아내의 동의를 얻어서였다.”
당시 불운하게도 그의 아내 홍근옥(59)은 암 투병 중이었다. 아내의 요양을 위해서도 물 좋고 공기 맑은 시골살이가 이상적이었을 테다. 청주로 출퇴근을 하며 시골 맛을 누리는 생활은 길게 이어졌다. 2년 전에야 퇴직을 하고 온전한 산골 생활로 접어들었으니까.
부부는 아주 오래전부터 기(氣) 수련에 열중했다. 계룡산에 있는 수련원을 드나들면서였다. 귀촌을 추동한 요인 중에는 자연 속에 살며 영성이라는 걸 북돋우고 싶다는 바람도 있었던 것 같다. 처음엔 귀촌지를 아예 수련하기 좋은 계룡산 자락으로 정하려 했다. 그러나 적당한 터를 찾지 못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마음에 드는 땅을 만나기도 했으나 계약 단계에서 확인해보니 집을 지을 수 없거나 길이 없는 터였다. 부부 연분처럼 땅하고도 인연이 돼야 일이 성사되는 것 같았다. 이곳 보은의 터와는 좋은 인연으로 만난 셈이다. 수월하게 터를 잡았으니까.”
어떤 경로로 매입했기에?
“인터넷에 나온 매물을 보고 답사를 왔는데, 용케 호의를 베푸는 주민을 만나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는 초면임에도 가격을 좀 깎아서 살 수 있도록 땅 주인에게 다리를 놔주겠다고 하더니 정말 그렇게 해주었다. 집을 지을 때도 이모저모 도움을 받았다.”
집이며 조경이며 수려하고 안락한 모습이다. 어떤 기본 구상을 가지고 집짓기에 착수했을까?
“생태주의랄까, 생활 방식은 좀 간결한 게 좋다는 생각을 평소에 지녔기에 가급적 작은 집을 짓기로 했다. 그래서 바닥 면적 18평짜리 목조주택을 지었다. 나중에 자그만 황토방을 추가로 지은 건 필요성이 커서였다. 남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일단 작게 짓고, 차후 꼭 필요하다면 부속 건물을 지으라고.”
목공실도 있네?
“집짓기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일찍이 목공학교를 다니며 기술을 배웠다. 덕분에 갖가지 생활가구를 직접 만들어 쓸 수 있게 됐다. 집 안에 있는 탁자, 의자, 책장은 모두 직접 만든 것들이다. 문짝도 만들어 쓴다. 나무로 뭔가를 만든다는 건 신나는 일이다. 직접 만들었다는 자부심으로 즐거워지거든.”
도시보다 생활비 30% 덜 들어
심웅섭이 손수 가구를 만들어 쓰는 데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생활비를 절약할 수 있다는 게 바로 그렇다. 그는 알뜰한 소비를 지향한다. 무슨 ‘짠돌이’ 계열의 성향이어서가 아니다. 통장 잔고가 불어나는 재미로 낙을 삼는 습성의 소유자도 아닌 것 같다. ‘그저 빠듯하게 살 뿐’이라는 얘기로 보자면 쟁여놓은 부가 있는 것도 아닐 거다. 여하튼 돈에 관한 주관이 뚜렷하다. 돈과 행복의 상관관계가 크지 않다고 믿는 그는 과도한 물욕의 추구만큼은 자제하고 싶다.
“농사엔 햇빛이 필수지만 지나치게 높은 광도는 오히려 생산성을 떨어뜨린다. 이걸 광포화(光飽和) 현상이라고 하더라. 돈이나 물질도 마찬가지다. 과잉 추구하느니 자제하는 게 낫다.”
돈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건 아니라는 믿음을 진심으로 간직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그건 이상적인 신념이지만 돈이라면 영혼까지 거래하는 게 현실이다.
“돈이 안 들거나 덜 드는 방식의 삶이 그래서 필요하다. 가령 내가 필요한 가구를 마트에서 사들이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한다.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원하지 않는 일에도 진땀을 쏟아야 하고, 여기에서 삶의 질이 떨어지는 게 아닐까. 필요한 가구를 직접 만들어 쓸 경우에는 문제가 달라진다.”
귀촌자들은 흔히 생활비 절감 효과를 귀촌의 매력 가운데 하나로 꼽는다.
“도시에서보다 30%쯤 생활비가 덜 드는 것 같다. 돈이 덜 들어 돈 버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원하는 일에 선용할 수 있다는 건 시골 생활의 큰 장점이다. 우리 부부는 가급적 산길을 많이 걷고자 한다. 여기에 무슨 돈이 들겠나?”
그의 집 주변은 온통 산이다. 숲을 흔들며 불어온 바람이 솔향기를 흩뿌린다. 숲속의 인기 가수들인 온갖 새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지지구재재구 명랑한 노래를 협연한다. 이 찬탄할 만한 오케스트라 공연엔 입장료가 없다. 산나물은 또 어떻고? 아내 홍근옥은 귀촌 이후 완연히 건강을 회복했다. 그녀가 누리는 최상의 기쁨은 산나물 뜯기인데, 앞산 뒷산에서 얻어온 풋것들로 몸도 씽씽해졌다. 그렇더라도 때로 무료하지 않을까? 산중의 반복되는 일상에 심심하지 않을까?
“귀촌 5년 차쯤 되면 슬슬 심심해진다고들 하던데 정말 그렇긴 하다.(웃음) 그렇다고 심각하게 무료한 건 없다. 사실 시골에서 할 수 없는 일은 거의 없다. 우리가 ‘나는 자연인이다’처럼 사는 것도 아니고, 충분히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게 요즘의 시골이다. 차로 40분이면 닿는 청주로 나가 갑갑증을 해갈하는 식으로.”
부부 사이에 갈등이 늘어날 수 있는 게 귀촌 생활이다. 종일 함께 지내다 보면 불편한 일도 생기는 거라서. 상대의 장점을 재발견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뭐든 항상 같이 한다. 소소한 다툼은 있지만 서로 조금씩 양보하는 태도로 풀어나간다. 세상에 부부 사이보다 더 귀하고 좋은 게 있을까?
햐, 부부간에 ‘귀차니즘’이 증대될 나이인데.
“우리 부부는 오랫동안 함께 영성 수련을 해왔다. 영성, 이건 함부로 말할 건 아니지만 자연 속에서 영성을 생각하며 사는 삶이 좋은 거라는 생각 정도는 하고 산다. 배우자는 물론 모든 사람이 영적인 존재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안도감이 느껴진다.”
독서는 주로 어떤 분야의 책으로 하지?
“우주에 관한 책이 재미있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나 평행이론을 알게 하는 책들을 좋아한다. 우주에 관심을 갖다 보면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라는 걸 깨우칠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가 유일한 우주가 아닐 수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사실 내가 아는 게 별로 없지만, 영적인 존재든 우주든 그것들이 나와 맞닿아 있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이럴 때면 깊은 위안을 얻는다.”
산야의 들풀 한 포기와 인간이 크게 다를 게 없다고 느껴질 때도 뭔가 삶이 더 넓게 보이는 것 같더라. 자연과 가까이 지낼 수 있는 귀촌 생활의 유익함은 한둘이 아닌 셈이다. 그런데 산중의 낙은 달밤에 한잔 마시는 데에도 있다. 음주는 간혹 즐기나?
“술은 전혀 못 마신다.(웃음) 명상 수련을 하면서 생활 패턴이 조용한 쪽으로 바뀌기도 해 술자리에 섞이지 않는 편이다.”
시골에서도 다이내믹한 삶이 가능하다
살면 살수록 더 가지고 싶고, 더 벌고 싶고, 더 욕망을 채우고 싶은 게 필부의 속성이다. 심웅섭은 여기에서 좀 벗어나 살고 싶은 것이다. 때로 산골 생활이 무료하지만 방안을 찾아 해소한다. 오디오 장비를 마련해 레코드 음악 감상에 입문하는 식으로. 이웃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도 능동적으로 움직인다. 남들에게 피해 주는 일을 삼가는 데에서 나아가, 뭔가 도움 되는 일을 하는 게 좋은 삶이라는 생각도 강화됐다.
“방송사 PD로 일할 때 휴먼 영상 다큐를 자주 만들었다. 이 경험을 살려 요즘 농촌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스마트폰으로 만드는 영상 자서전’ 강의를 하고 있다. 인근의 젊은 귀촌인들과 함께 ‘해바라기 문화공작소’를 만들기도 했다. 영상을 매개로 지역 문화를 돋우는 활동을 하기 위한 동아리다. 아내 역시 면 소재지에 꾸린 ‘작은 도서관’에서 일한다. 이건 봉사활동이자 알바다.”
시골이 따분한 곳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심웅섭에 따르면 그건 좁은 선입견에 불과하다. 생각과 행동의 외연을 확장할 경우 다이내믹한 삶을 영위할 수도 있는 게 귀촌 생활이라고 본다.
“집에 폭 파묻혀 풀만 뽑는 식의 스타일에서 벗어나 다양한 방식의 삶을 시도해볼 만한 게 시골이다. 이 점에서 귀촌은 하나의 도전 행위다. 그 무엇보다, 나도 좋고 남도 좋은 일을 하면 즐거움이 커진다.”
심웅섭 씨가 주는 귀촌 Tip
•귀촌·귀농인들이 겪는 애환 중 가장 큰 건 원주민과의 갈등에서 발생한다. 문제의 원인이 어느 한편에만 있는 건 아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알력과 닮았다. 일단 우월감을 버려야 한다. 배운 건 많지 않더라도, 대체로 나쁜 맘 없이 진솔하고 순수한 면이 있는 게 시골 사람들이다. 그들의 삶에 녹아든 지혜를 배운다는 태도로 존중해주는 게 현명하다. 좋은 관계 맺기에 정 자신이 없다면 마을과 떨어진 곳에 터를 잡는 게 낫다.
인생 이모작에 성공하고 트로트 가수를 목표로 인생 삼모작을 준비했던 이금수(63) 씨가 마침내 꿈을 이루었다. 고등학교 수학교사, EBS 수학 영역 스타 강사, EBS 입시 프로그램 방송 진행자, 서울진학지도협의회, 서울시교육청 대학지도단을 거쳐 은퇴 후 대진대학교의 입학사정관까지, 교육 분야에서 줄곧 일해온 이금수 씨의 트로트 가수 데뷔 스토리를 들어본다.
인생,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여~
이모작도 버거워하는 중장년들에게 한줄기 빛과 같은 희망을 주는 사나이 이금수 씨가 인생 삼모작 주인공으로, 마침내 꿈꿨던 가수로 데뷔했다. 이금수 씨의 데뷔 앨범은 최근 트로트 가수 강진의 ‘막걸리 한잔’으로 주가를 올리는 류선우 씨가 작곡과 작사를 맡고, 트로트 업계에서 고급스런 편곡으로 소문이 자자한 장승연 씨가 편곡자로 나섰다. 아내 주현선 씨와 ‘금실은실’이라는 혼성듀오로 2곡을 녹음했고, 부부가 각각 2곡씩 녹음해 총 6곡이 수록돼 있다.
지난해부터 이금수 씨는 1년 가까이 쉬지 않고 트레이닝을 받으며 트로트 창법을 익히고 연마했다. 워낙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고 남들에게 노래 잘한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왔던 터라 ‘자신감’ 하나만 믿고 여기까지 내달렸단다.
이금수 씨의 솔로곡인 ‘중년고백’은 노래를 부르는 가수의 중후한 이미지를 잘 살렸다는 평이다. 아내 주현선 씨의 솔로곡 ‘우야꼬’는 어쩌면 가수로서 단점이 될 수 있는 경상도 사투리를 그대로 가사로 풀어내 오히려 매력 포인트로 활용한 것이 특징이다.
함께 부른 ‘꽃노래’는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부부의 마음을 그대로 담은 듯한 노래라 중년부부들로부터 큰 공감을 얻고 있다. 이금수 씨 부부는 처음 이 노래를 연습할 때부터 애착이 많이 갔던 곡이라 기대가 각별하다고. 트로트 업계에서 실력자로 통하는 작곡·작사가와 편곡자가 힘을 합쳐서인지 트로트의 구성진 가락에 세련된 사운드가 입혀져 감성을 건드리는 게 일품이다.
TV만 켜면 채널마다 트로트 프로그램이 쏟아지는 요즘, 목소리만 꺾어대는 기교형 가수보다 진심을 담아 정감 넘치고 사람 냄새 나는 곡으로 승부를 던지는 신참내기 가수에게 기대가 모이는 것은 당연하다. 8개월의 보이스 트레이닝 끝에 지난해 연말부터 녹음에 돌입, 올 초 앨범을 발표했다. 특히 이번 트로트 가수로 도전하면서 트레이닝과 앨범 녹음 기간 아내와 줄곧 함께해 부부 사이가 신혼 때보다 더 각별해졌다고 이금수 씨가 환한 웃음을 짓는다.
그렇다면 이금수 씨는 젊은 시절부터 가수가 꿈이었을까? 본인에게 가수의 꿈이 있다는 것은 언제 알았을까? 술을 좋아하는 편이어서 친구, 동료들과 술 한잔에 얼큰해지면 노래를 하고 싶어 꼭 마이크를 잡았단다. 주현선 씨도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해 아이들이 어렸을 땐 잠을 재워놓고 같이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부르고 온 적도 많다.
“지금 생각하니 아이들에게 미안하네요. 그래도 아내는 그렇게라도 노래를 부르면서 육아 스트레스를 견디지 않았을까요? 올해가 결혼 37주년이니 37년 이상 노래를 불렀습니다. 특히 고등학교에서 수학 교사를 할 당시에는 축구, 테니스 등 운동을 마치고도 동료들과 함께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췄네요. 송창식의 ‘고래사냥’을 부르면서 말이죠.”
그는 동료들이 “노래 잘한다”며 치켜세울 때는 기분이 우쭐해서 술값도 많이 계산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EBS에서 강의를 하고 있어 수입이 짭짤하니 술값을 내라는 칭찬 아니었을까? 갑자기 합리적인 의심(?)도 든다며 너털웃음을 짓는다.
하지만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틀리지 않는 것이, 그런 이야기를 자꾸 들으니 노래가 더 좋아지고 일하면서도 쉬지 않게 노래를 흥얼거리는, 말 그대로 생활 속에 노래가 꼭 박혀버렸다. 이렇게 시작된 노래 사랑은 개포동성당에서 성가대 활동을 하면서 절정을 이루었다. 노래를 좋아하는 신도들끼리 모여 합창을 연습하며 세속의 노래인 ’마법의 성‘을 부르는데 너무 멋있어서 마치 천사들이 하늘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 같은 환희의 순간을 맛봤다.
“한번은 성가대 연습을 마치고 성가대 단원끼리 동네 맥줏집에서 한잔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을 정도로 동요를 조그맣게 불렀는데, 호프집 손님들이 맥주를 보내면서 노래를 좀 더 크게 계속 불러달라고 조르기도 했어요. 화음이 정말 훌륭하다고 격려해주면서요.”
37년 결혼 생활을 맞춰온 팀워크로 혼성듀오도 완벽 깔맞춤
인생 이모작에 성공적으로 안착하여 하루하루 심적인 안정을 찾아갈 때쯤이었다. 대진대학교에서 입학사정관 실장을 하면서 인생 삼모작을 생각하게 되었고, 부부가 함께 노년을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것을 제일 중요한 기준으로 삼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다가 부부가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니 가수에 도전해보면 어떨까 의견을 나누게 됐고, 뜻을 합하게 됐다.
마침 EBS에서 오랜 기간 함께 일했던 지인과 만난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고, 그러자 지인은 자신의 아우가 작곡가라며 소개를 해주었다. 그 아우가 바로 ‘막걸리 한잔’의 작곡·작사가인 류선우 씨였다. 류선우 씨의 테스트를 거쳐 1년 가까운 훈련 기간을 마치고 마침내 신곡 ‘꽃노래’와 ‘중년고백’, ‘우야꼬’로 결실을 맺게 된 것.
처음 테스트를 받으러 간 날이 2020년 4월 19일. 그 전 3개월 정도는 실용음악학원에서 매주 1회씩 원장님에게 지도를 받았다. 류선우 작곡가는 부부의 노래를 처음 듣고 나서, 이금수 씨는 노래를 자주 불러서 익숙하게 느껴지는데, 주현선 씨는 목소리가 노래와 겉도는 등 익숙함이 상대적으로 부족하지만 목소리 자체는 깔끔해서 집중적으로 훈련하면 톤이 좋아질 것 같다며 격려를 해주었다.
이금수 씨는 목소리가 탁성이라 앨범 전체를 솔로로 하는 것이 걱정이었고, 주현선 씨는 노래에 익숙하지 않아 역시 솔로를 하기에 부담이 있었는데,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가 혼성듀오를 결성해 가수로 데뷔하자고 의기투합했다. 하긴 37년을 혼성듀오로 살아왔던 부부인 만큼 그 어느 팀보다 팀워크만은 탁월하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하지만 트로트 가수를 준비하는 과정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인생 이모작이야 30년 넘게 몸담았던 같은 교육 분야로 이동한 것이니 이질감도 없고 그런대로 적응할 수 있었지만, 인생 삼모작으로 목표한 트로트 가수는 완전히 트랙을 달리하는 분야이니 사실 막막함이 더 컸다고.
앨범이 나오기까지 부부는 매일 2시간 정도 수락산 아랫자락에서 노래 연습을 했고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그래도 힘든 시간을 이겨내고 앨범 발매 가수로서 무대에 서서, 부부가 함께 눈을 맞춰가며 노래 한 곡을 부를 때 느껴지는 성취감이 엄청나다고 한다.
야외무대에 서며 관객과 호흡해
지난 4월 26일 부부는 엠스타 TV가 천안 ‘화수목 정원’에서 진행한 ‘유예진의 히트가요쇼’ 녹화에 참가하는 기회를 얻었다. 야외에서 진행하는 녹화 무대에 서니, 앨범을 발매한 가수로 확실한 대접을 받는 것 같아 뿌듯하기 그지없었다. 이를 계기로 ‘금실은실’ 듀오는 무대에서 불러주기만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아예 무대를 직접 만들자는 마음으로 유튜브를 통해 라이브 콘서트를 진행하게 됐다.
유튜브 채널이 열리자 많은 분들이 실시간으로 댓글을 남기며 부부 가수와 소통을 했다. 진행자까지 투입된 유튜브 미니 콘서트 무대에 오르니, 비록 방송 프로그램은 아니었지만 나만의 콘서트를 연 듯한 가슴 꽉 찬 시간이었다.
“시작은 미미하나 끝은 창대하리라”는 성경 구절처럼 ‘금실은실’ 부부 가수의 첫 유튜브 콘서트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실시간 조회수는 1000회를 넘었고 ‘좋아요’는 60개를 넘는 등 부부 가수의 첫 콘서트라고는 믿기지 않는 훌륭한 성적이었다.
6월에도 역시 야외 녹화 일정은 물론 유튜브를 통한 2차 라이브 콘서트 계획이 잡혔다며 “부부 가수 ‘금실은실’로 조금씩 알려지면 애초 계획대로 지역 봉사활동을 많이 다니고 싶다”는 작은 소망을 내비쳤다.
트로트 맛깔나게 부르는 설운도 닮고 싶어
신참내기 트로트 가수로서 롤 모델은 마음속의 영원한 스타, 설운도란다. ‘58년 개띠’로 나이는 똑같지만 가수로 정점에 오른 후에도 꾸준히 노래 연습을 하며 곡을 쓰는 모습에서 배울 점이 정말 많다고 느꼈다.
“부러운 것 하나는, 설운도 씨는 가사를 직접 쓰다 보니 자신만의 감성을 듣는 이에게 호소력 있게 전달하는 것 같다”며, “아무래도 노래를 배워서 부르다 보면 기교에만 신경을 쓰게 되는데 설운도 씨의 노래를 듣고 가사 전달력이 어떤 것인지 경험하게 됐다며 여전히 배울 것이 많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요즘도 보컬 트레이닝을 꾸준히 받는데, 이 훈련을 통해 가사를 분석하는 것은 물론 마디마디 창법과 트로트 가수들의 전매특허라 할 밀당 기술 등을 꾸준히 연습해 몸에 착 배도록 하는 것이 목표라고 한다. 요즘 배우는 노래는 ‘사랑반 눈물반’, ‘처녀뱃사공’ 등인데 나만의 노래가 됐다 싶을 때 녹음해서 유튜브에 올릴 생각이다.
트로트 부부 가수 데뷔하니 주위 사람들 반응 뜨거워
“트로트를 한 것이 돈을 벌려고, 유명해지고 싶어서 시작한 게 아니잖아요. 이렇게 하고 싶고 되고 싶은 게 있어서 늦은 나이에도 목표를 세우고 정진해서 꿈을 이루며 살 수 있다는 것을 후배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는 세월에 순응하며 사는 것도 좋지만, 적어도 인생의 다음을 걱정하려면 2~3년 고심하며 탄탄히 준비하고 미리 계획한 후 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생 이모작과 삼모작의 목표가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아마 실패하기 십상일 것이다. 단지 자신의 재능을 조금 더 사용해 여가생활에 보태고 이웃에 봉사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 자체로 훌륭하다고 말이다.
그래도 질투와 시기 어린 시선보다 격려와 따뜻한 말 한마디로 힘을 주는 분들이 훨씬 많아 힘이 됐다는 그는, ‘금실은실’의 첫 유튜브 라이브 미니 콘서트 날 주위 분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크게 고무됐다. 그가 SNS 활동을 열심히 하는 ‘6070중년쉼터’ 밴드의 선배들과 동년배, 후배들이 접속을 독려하며 응원해준 것에 크게 감동한 것이다. 이들의 격려와 응원을 장착하고 신인 가수의 패기를 얹어 야외무대와 유튜브 미니 콘서트를 멋지게 소화해, 지상파 방송 프로그램에서 먼저 섭외 전화를 받는 가수가 되겠다는 각오다.
함께 취미를 공유하고 꿈을 나누며 이루어나가는 부부의 모습은 주위에 귀감이 된다. 결국 인생이란 바로 내 옆의 가장 가까운 가족과 소통하며 건강한 가족과 이웃, 사회를 만들어나가고 꿈을 이루기 위해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닐까?
“걱정만 하다 문턱을 넘어보지도 못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걱정만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부딪혀보지도 않았는데 무슨 일이 일어나겠어요. 문턱을 넘을까 말까 걱정만 하면서 시간 낭비하지 말고, 하고 싶은 일을 찾아 하루하루 손에 익히고 몸에 체화하는 것. 그렇게 매진하며 살다 인생 마지막에 내가 나를 인정하고 엄지를 치켜세워줄 수 있어야죠.”
‘끝이 좋으면 다 좋다.’ 셰익스피어 희곡의 제목처럼 삶의 마무리가 인생에서 중요하다.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느냐가 삶의 질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웰다잉, 즉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서는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고 준비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원혜영 웰다잉문화운동 대표(71)를 만나 현시대 웰다잉의 의미와 필요성, 그리고 실천 방법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
원혜영 대표는 은퇴 전 풀무원 창업주, 부천시장, 5선 국회의원 등 사회의 여러 방면에서 활동했다. 그와 관련한 얘기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를 꼽자면 바로 ‘웰다잉’이다. 실제로 마지막 의정 활동을 펼친 20대 국회의원 시절, ‘웰다잉 기본법’을 발의하기도 했다. 그는 어떤 계기로 웰다잉에 관심을 두게 되었을까?
“2009년 세브란스 김 할머니 사건이 굉장히 유명했다. 인공호흡기를 찬 채로 소생이 어려운 고령의 환자를 두고 가족과 의료진 간에 이견이 발생했다. 가족은 사전 할머니의 뜻대로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을 원했고, 의료진은 이를 반대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대법원 재판까지 갔는데, 대법원은 행복추구권과 자기 결정권을 토대로 가족의 손을 들어줬다. 다만 당시 연명의료 중단은 이렇게 특수한 경우에만 허락됐다. 이런 일이 계기가 되어 무의미한 연명의료 중단이 하나의 제도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19대 국회의원 시절부터 웰다잉 문화 조성을 위한 국회의원 모임을 조직해서 관련된 활동을 펼쳤다. 그 결과 2016년에 연명의료결정법(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이 통과됐다.”
사실 웰다잉은 그가 국회의원 시절에 했던 수많은 의정 활동 중 하나에 불과한데, 인생 2막의 주제를 웰다잉으로 정한 이유가 있을 터. 어떤 계기로 시작했는지 물어봤다.
“직접 법을 만들고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여러 가지를 깨달았다. 삶에서 무수한 선택이 있듯이 하나의 죽음에도 여러 가지 절차와 수많은 선택이 있다. 장례식장 선정, 화장과 매장 같은 장묘법, 재산 분배, 장기 기증 등과 같이 세심하게 준비해야 할 것이 많다. 사전에 잘 결정하면 남은 가족 간의 분쟁을 줄이는 효과도 있다. 결국 죽음을 스스로 결정하는 과정은 품위 있는 삶의 마무리로 이어진다. 초고령화로 인한 장수 시대에 가장 필요한 사회문화가 바로 웰다잉이라고 생각해, 은퇴 후 봉사활동 차원으로 열심히 웰다잉 문화운동을 하고 있다.”
웰다잉의 본질은 자기 결정권
‘웰빙’은 대중적인 문화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그만큼 건강한 삶에 대한 요구가 큰 터. 반면 ‘웰다잉’은 다른 나라와 비교해 우리나라에서는 인지도가 낮다. 그 이유에 대해 그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에서 차이가 있다”라고 말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전통적인 문화의 영향이 크다. 다른 나라는 도심에서도 종종 무덤을 볼 수 있는데, 우리나라는 산속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현대의학에 대한 의존이 커서, 의학이 모든 죽음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우리나라 사망자의 약 70%는 병원에서 죽는다. 예전에는 미국도 우리나라처럼 병원에서의 사망률이 훨씬 높았지만, 이제는 많이 감소했다. 대신 집에서 죽는 비율이 증가했다. 말하자면 우리는 사회 내에서 죽음을 회피하고 외면하는 경향이 있고, 현대의학으로 생명을 연장하고자 한다. 반면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죽음을 굉장히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인다. 소생 가능성이 없더라도 병원에 의존하지 않고 집에서 조용히 마지막을 맞이한다. 그런 차이로 인해 벌어지는 일이라고 본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도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에 대한 필요성은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을 위해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등록하는 인원이 증가하고 있으며,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올해 하반기엔 1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무의미한 연명치료가 남기는 고통이 크다. 개인이 부담하는 경제적 비용을 무시할 수 없다. 또한 주변인의 임종 과정을 지켜보면서 학습이 된 것 같다. ‘무의미한 연명치료로 인한 가족의 고통이 합당한가?’ 의문이 든 것이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이 증가한 것도 이러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는 증거다. 다만 무조건 연명치료를 중단하라는 뜻은 아니다. 소생 가능성이 있다면 치료하는 게 맞다. 하지만 회복이 힘들다면 중단하는 것도 지혜로운 결정이다. 이제 시동조차 걸리지 않는 자동차에 계속 기름을 넣을 필요가 있을까? 따라서 ‘우리 사회가 현대의학에 너무 의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스스로 죽음을 택할 권리를 사회에서 용인하고 보장하는 문화가 필요한 시기가 온 것이다. 이러한 자기 결정권이 웰다잉의 본질이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언제든 철회할 수 있어서 부담 없이 쓸 수 있다. 다만 정부로부터 인정받은 상담사와 상담을 진행한 후 등록해야 한다. 이러한 연명의료 중단이 가동하기 위해서는 사망 당시 입원한 병원에 윤리위원회가 설치되어 있어야 하는데, 큰 병원을 제외하고는 아직 부족한 실정이다.
“통계를 보면 요양병원이나 규모가 작은 병원의 경우는 상급병원과 비교해 윤리위원회를 갖춘 곳이 아직 많지 않다. 위원회를 구성하려면 비용도 들고, 상황이 발생했을 때 바로 회의할 수 있는 구조도 갖춰야 하며,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전문 인력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는 국가적 차원에서 여러 가지 제도를 통해 보완할 필요가 있다. 결론적으로 현 상황에서 개인이 실천할 수 있는 건 조금이라도 건강할 때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해두는 것이다.”
순리대로 정리하는 삶
그는 삶 속에서 웰다잉이 필요한 이유를 “일종의 순리다”라고 말하며, 첫 번째로 실천할 수 있는 일을 소개했다.
“봄에는 새싹이 나고, 가을에는 맺은 열매를 수확한다. 무릇 인생도 같다. 은퇴한 시니어에게 새로운 도전도 좋지만, 이제는 삶의 결실이라 할 수 있는 마무리를 잘 준비할 필요가 있다. 웰다잉의 구체적인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첫 단추를 유언장으로 시작해보는 것이 좋다. 유언장은 내 삶을 정리하며 쓰는 일종의 종합기록부다. 생전에 고마웠던 이들에 대한 마음이나 남는 가족들에게 하고 싶은 말, 재산이나 장례 방식 같은 문제를 글로 써보는 것이다. 이것은 오로지 본인만 할 수 있기에 더 값지다.”
덧붙여 웰다잉을 준비하는 시니어에 대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웰다잉을 위해서 우리는 죽음에 친숙해질 필요가 있다. 가까운 친구나 가족들과 일상에서 웰다잉과 관련된 얘기를 나누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정진석 추기경이 장기 기증을 하고 돌아가셨다는데 나도 해볼까?’ 또는 ‘유언장을 쓰는 게 좋다는데 어때?’ 이런 식으로 가볍게 얘기하면서 하나씩 실천해보는 것이다. 이런 문제는 자식이 먼저 꺼내는 것보다 당사자가 먼저 얘기하는 것이 좋다. 이런 과정을 통해 웰다잉을 공통의 관심사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는 웰다잉, 즉 좋은 죽음은 어떤 것일까?
“톨스토이는 ‘인간은 겨우살이를 준비하면서 죽음은 준비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죽음을 회피하고 외면하려고 하지만, 죽음은 필연적이라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죽음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잘 준비하는 게 지혜로운 인생의 마무리다. 유언장 쓰기, 장기 기증 서약과 같은 과정을 통해 내 삶을 정리하면 삶의 자세가 달라진다. 웰다잉은 잘 죽는 일과 죽음을 잘 준비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내 삶을 한번 정리하고 새로운 자세로 인생을 살게 하는 중요한 중간 점검과 같다. 이는 곧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한 길이다.”
끝으로 그는 앞으로의 목표와 계획에 대해 말했다.
“천만 노인 시대가 멀지 않았다. 이분들이 삶의 주인으로서, 삶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를 스스로 결정하는 사회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그 목표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웰다잉 문화의 지속적인 확산이 필요하다. 주체적으로 결정하고 죽는 노인이 많을수록 사회가 건강해지고 품격이 올라가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는 죽음을 외면하는 경향이 만연하지만, 죽음이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과정임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여러 가지 활동을 하고 싶다. 병원에서 쓸쓸하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지 않도록, 스스로 죽음을 결정하고 준비할 수 있게끔 도와드리고 싶다. 비대면 상황으로 인해 활동에 여러 가지 제약이 있지만, 온라인 영상 콘텐츠를 통해 지속적인 웰다잉 문화 확산에 보탬이 되고자 한다.”
치열했던 삶을 내려놓고 은퇴한 노인들은 어떤 가치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할까? 보건복지부가 7일 발표한 ‘2020년 노인실태조사’에 그 답이 있다.
경제 활동보다 중요한 취미·여가 활동
노인들이 현재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취미·여가 활동이었다. 37.7%가 이를 선택했고, 다음으로 경제 활동 25.4%, 친목(단체) 활동 19.3%, 종교 활동 14.1%, 자원봉사 활동 1.7%, 학습 활동 0.9% 순으로 응답했다. 다수의 노인들이 즐겁고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 노인 80.3%가 여가 문화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여가 문화 활동 가운데 산책이나 음악 감상 같은 휴식이 52.7%로 가장 많았으며, 취미 오락 49.8%, 사회와 기타 44.4%, 스포츠 참여 8.1%, 문화 예술 참여 5.1%가 뒤를 이었다. 지난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문화 활동이 어려워지면서 휴식이 많아진 것으로 분석된다.
노인들은 여가를 어디에서 즐길까? 노인 중 28.1%는 경로당에서 여가를 즐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음으로 노인복지관 9.5%, 사회복지관·장애인 복지관·여성회관 6.0%, 공공 여가 문화 시설 4.7%, 노인 교실 1.8% 순이었다.
이는 최근 경로당을 중심으로 한 지역 사회 프로그램 확대에 따른 효과가 나타난 것으로 해석된다. 주요 프로그램으로는 음악 활동, 바둑 장기 교실, 문학 활동, 미술 활동, 공연 활동, 한방 치료, 안마 교실, 방문 간호, 웃음 교실, 요가·명상, 건강 운동 등이 있다.
노인 74.1% "온라인 중심 서비스 불편해"
코로나19 영향으로 우리 사회는 점점 더 디지털화하고 있다. 노인들도 56.4%인 절반 이상이 스마트폰을 보유하고 있을 정도다.
노인의 정보화 기기 사용률과 활용 역량은 상대적으로 낮은 나이인 65~69세 노인이 81.6%, 85세 이상 노인이 9.9%로 노인 간에도 차이가 매우 큰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노인 74.1%가 온라인 중심으로 제공되는 정보 서비스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일상생활에서 정보화 기기를 이용할 때 불편함을 경험하고 있었다.
교통수단을 예매해 본 노인 중 60.4%, 키오스크 활용을 통한 식당 주문을 해 본 노인 중 64.2%, ATM 기기를 이용해 본 노인 중 38.4%, 카드 전용 상점을 이용해 본 노인 중 31.3%가 불편함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