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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낙 (사)현대미술관회 회장, (재)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장 “지인들이 부르면 불원천리, 산 넘고 물 건너 달려가요”
- 미술을 애호하는 의사? 의료활동을 가끔 하는 미술 전문가? 이성낙 가천의과대 명예총장(79)을 지칭할 때 헷갈리는 이름표다. 베체트병 최고의 권위자인 그는 가천의과대 총장 퇴임 이후 일흔의 나이에 미술사 공부를 본격 시작했다. 의학 박사이자 미술사학 박사로서 그는 (사)현대미술관회 회장, (재)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을 지내는 한편, 다양한 매체에 문화 관련 칼럼을 기고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젠 문화인으로서의 명성과 활동이 의료인의 경력을 압도할 정도다.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장 인터뷰를 약속한 날, 그는 최근 한 달여 유럽 미술관 전시회를 혼자 순례하고 왔다며 문화의 향취에 젖은 표정이 역력했다. 사진 촬영을 생각지 못하고 평상복(?) 차림으로 와 어쩌냐고 걱정을 했지만 중절모에 세련된 비즈니스 캐주얼, 적당히 손때 묻은 가죽가방을 멘 차림은 단아한 문화인 그 자체였다. 퇴임 후 미술사 공부를 시작, 박사학위를 받으셨습니다. 취미로 즐기셔도 될 텐데 굳이(?) 박사학위에 도전하신 이유가 있었나요? “한국 초상화에 나타난 피부병 연구, 이것은 한국에서 저 말고는 할 수 없는 분야란 절박감과 사명감이 있었습니다. ‘내가 그간 모은 자료들을 정리하지 않으면 모두 쓰레기가 된다. 내가 책임지고 반듯한 논문으로 남겨야 국내외로 인용될 것 아닌가’라는 사명감에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지요. 2008년 총장직을 사임하고, 사석에서 ‘초상화에 나타난 피부병 관련 자료가 많은데 어떻게 넘겨줄지 고민 중’이라고 털어놓았습니다. 그때 좌중에 있던 유홍준, 이태호 교수가 ‘대학원에 들어와 연구’를 하라는 조언을 하더군요. 그 말이 제가 평소에 갖고 있던 사명감을 부추겼다고나 할까요.” 그가 피부과 교수로서 초상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64년 뮌헨의과대학 졸업 종강강의 ‘예술작품에 나타난 피부병’을 듣고부터다. 당시 청년 의사 이성낙은 ‘예술을 의학적 시각에서도 접근할 수 있겠구나’ 하고 비로소 눈이 뜨이기 시작했다. 이후 유럽 미술관을 다니며 자료 수집을 하고 틈틈이 공부도 해왔다. 그 열매가 50여 년 만에 맺어진 셈이다. 피부병변을 통해 밝힌 한국 초상화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우리 선비문화의 정직성입니다. 죽기 전 영정에 해당하는 초상화들을 보면 중국, 일본과는 큰 차이가 있는데 바로 정직성입니다. 자료를 본격 수집하기 전엔 우리나라 초상화에는 피부병이 나타나 있지 않은 줄 알았어요. 그런데 막상 관찰해보니 우리나라 초상화의 83%에서 피부병이 확인되어 깜짝 놀랐습니다. 단지 17%만이 정상적인 피부란 이야기인데요. 예컨대 서예가 추사 김정희 선생님은 살짝 곰보였습니다. 이는 전기 등엔 안 나오는 사실이지요. 초상화들을 보면 곰보 자국, 여드름 자국, 다모증 등 실물 그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내시의 초상화는 수염을 그리지 않았지요. 다시 말해 그리는 사람이나 초상화를 요청한 사람이나 담담하게 가식 없이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고 그리게 한 것이지요. 피사체가 장바닥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사회의 상위층 양반 그룹이라 지시를 통해 그리지 말라고 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도 담담하게 다 드러내 그리도록 한 것이지요. 조선 선비정신의 진수를 보는 것 같아 희열을 느꼈습니다.” 일흔의 나이에 전혀 다른 분야, 늦깎이 공부에 도전하셨습니다. 취미로 하셨다 해도 녹록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대학원생이나 교수진이 부담스러워하진 않던가요? “퇴직하고, 2009년에 명지대에서 미술사 석·박사과정을 밟기 시작했지요. 공부도 힘들고, 주위의 눈길도 신경 쓰이긴 했지요. 또 뭘 읽어도 금방 잊어버리고…. 그렇다고 포기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예전에는 한 번 읽었다면 지금은 두세 번 반복해 읽는 노력이 필요할 뿐이지요(하하). 입학 전부터 전직(前職) 명함의 권위에 기대지 않겠다고, 그런 뒷소리를 듣지 않겠다고 단단히 각오했어요. 내 전직이 무엇인지 다 아는데, 불성실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엄청 노력했답니다. 설렁설렁 한다고 할까봐 강의 15분 전에 출석하고, 강의가 끝나면 맨 마지막에 나오는 등 성실한 학생으로서의 책임을 다했습니다. 100퍼센트 출석은 물론이고요. 무엇보다 큰 기쁨은 강의를 통해 그간의 부분적 지식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구슬이 한 줄로 꿰어지는 기쁨에 비유할 수 있어요. 늘 가르치던 입장에서 배우는 입장으로 돌아가 젊은 30대들과 동료가 된 재미도 적지 않았습니다.” 아주대 의대 학장과 가천의과대 총장으로 지내던 시절, 예술·인문·문화학을 정규 강좌로 개설해놓고 의학도들에게 의무적으로 듣도록 하셨습니다. 인문학을 이처럼 앞장서 강조해온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인문학은 공감학입니다. 여유가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제대로 살고 성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지요. 공연, 전시회, 책을 보며 우린 사람으로서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돌아보고 경계하게 됩니다. 영국에선 유명 연극배우에게 ‘Sir’라는 칭호를 줍니다. 정치가, 기업인보다 높이 평가하는 거지요. 배우는 황제, 살인자, 거지 등 인간의 다양한 삶을 펼쳐 보이며 다양한 인격을 구현해냅니다. 또 문학 서적을 읽으며 그 안에서 비겁한 사람도 보고, 정의로운 사람도 보고, 용감한 사람도 봅니다. 그들의 갈등을 제3자의 눈으로 보며 경계하고 배울 것이 무엇인지 의식을 갖게 하는 것, 그것 때문에 예술과 인문학이 중요하지요. 생명을 다루는 직업인 의료인에게도 특히 필요한 학문입니다.” 실제로 총장님 삶에서 인문학과 예술이 문제해결의 마스터키로 작용한 적이 있는지요? “(하하) 네, 제가 독일 유학을 갔을 때입니다. 1950년대 말이니 한국인 유학생이 흔치 않을 때였지요. 기숙사 룸메이트가 저를 노골적으로 무시했습니다. 늦은 가을 기숙사로 들어가는데 룸메이트가 베토벤의 을 듣고 있는 걸 보고 나도 모르게 ‘베토벤!’ 하고 탄성을 질렀지요. 그날 그 말을 들은 친구와 밤새도록 베토벤 얘기를 했어요. 그 전까지는 한 달 동안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사이였는데 말이죠. 문화 예술을 통해 서로 소통하고 공감한 덕분이지요.” 인문학은 세대, 국가, 민족을 넘어 소통과 공감의 가교로 자리한다는 설명이었다. 그는 “진정한 교육은 잘난 사람, 있는 사람이 아니라 못난 사람, 없는 사람을 어떻게 일으켜 세우는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명문대 진학률을 평가의 잣대로 삼는 현행 입시체제는 잘못됐다, 사람의 아픔에 연민을 느끼고, 함께 나누고자 하는 인문학적 교육 인식이 필요하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흔히 십년지기(十年知己)라는 말도 있듯이 십 년 이상 알고 지낸 사이를 오래된 인연이라 표현합니다. 총장님을 안 지 저도 십 년 이상 됐는데요. 뵈면 ‘70년지기’ 유치원 친구들과 서로 이름을 부르며 친하게 지내시는 모습이 참 정겹습니다. 인연을 오래 유지하시는 비결이 무엇인가요? “살아보니 사람에게 복 중의 최고 복은 인복(人福)이더군요. 돌이켜보면 친구, 학교 은사 등 제 주위엔 늘 인간적으로 훌륭하신 분이 많았습니다. 천운이라 생각하며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분들을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떨리고 행복해져요. 이들과의 귀한 인연을 돌이켜보니 공통점은 지속성입니다. 인간관계를 오래 유지하려면 지속적으로 가꿔나가야 합니다. ‘이 사람이 유용하다, 아니다’라는 계산에서 탈피해 순수하게요. 생각에만 그치지 않고 용건이 없어도 안부를 묻고 꾸준히 관심을 표현하는 것, 그것이 나의 우정 유지 방법입니다.” 그는 마르부르크대 의예과에 들어가 처음 만난 독일 친구와 아직까지도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요즘도 일주일에 한 번은 전화를 하고 2014년 박사학위를 받을 때는 부부가 함께 한국까지 일부러 와서 축하를 해주었다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얼마 전에는 신록의 연둣빛에 감탄해 “문득 네가 생각났다”는 메시지와 함께 사진을 보내니 바로 “어디에서든 우리에겐 봄소식이 들려온다”고 답장이 왔단다. 삶의 진정한 행복은 큰 행운이 아니라, 소중한 사람들과의 소소한 일상 나눔에 있다는 고백이었다. 그의 말을 들으며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에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어른들은 신세대에게 자신들의 풍부한 경험을 나눠주고 싶어 합니다. 신세대는 ‘꼰대의 잔소리’로 거부감부터 표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총장님의 세대 간 소통의 지혜는 어떤 것인지요? “한마디로 역지사지입니다. 내가 이 말을 들으면 어떤 기분이 들까, 입장을 바꿔 미리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또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되도록 가르치려 들지 않아요. 지나가는 말처럼 사례를 들어 이야기하지요.” 이외에도 이 총장이 잘 쓰는 세대 간 소통 방법은 시사 현안을 갖고 그때그때 간단한 화두를 던지는 것이다. 그는 미술을 전공하는 손녀와도 현안에 관한 미니토론을 카톡으로 소소하게 나누곤 한다. 얼마 전 마네의 그림 를 패러디한 을 국회의원회관에 전시한 것이 문제됐을 때도 “예술에 있어서 역지사지란 무엇인가, 예술가는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 등을 생각해보면 좋겠구나” 하는 식으로 질문을 던지고, 간단히 코멘트를 해주며 손녀와 대화를 했다. 일방적인 주입보다는 사고의 확장을 이끌어내기 위해 인도하는 식의 대화 방식이다. 자제, 제자분들에게 평소 강조하시는 인생의 가치는 무엇인지요. “첫째도 둘째도 정직입니다. 제가 의미하는 정직은 자기관리를 솔선수범해 실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퇴직할 때 ‘대과(大過) 없이 마쳤다’란 말을 관용어처럼 쓰지 않습니까. 그러나 혼탁한 현실에서 막상 이를 실천하려면 쉽지 않습니다. 부정이 만연한 사회에서 대과 없이 살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거든요. 소극적으로 들리지만 적극적 행동강령이에요. 운도 정직에서 비롯되고, 불운도 정직하지 못한 데서 온 것입니다. 예전에 선현들은 무첨(無添), 즉 선조에게 죄를 더하지 말라는 말을 자주 하셨어요. 욕되게 하지 말라는 뜻이지요. 고리타분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살수록 진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선조, 가족, 자식 앞에 부끄럽지 않고, 그들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고 당당한 삶을 사는 것, 그것 이상이 있을까요. 담담해야 당당할 수 있고 욕심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의 아들이 회사에 갓 입사했을 때 제일 먼저 강조한 것도 돈에 대한 정직이었다. 그것의 구체적 행동강령으로 ‘현금을 수금할 때 당일 보고, 당일 입금’을 실행할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이 총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혹시라도 먼저 입사했다고 친구들에게 밥 살 일 있으면 쩨쩨하게 굴지 말고 아버지 이름 대고 밥 사라’고 자신의 단골식당을 아들과 함께 돌아다니며 일일이 인사시켰다고. 마지막으로 현역 프리랜서로서 ‘인생의 브라보’를 외칠 수 있는 조언을 들려주시겠습니까? “호기심과 활력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꾸 힘들다, 어렵다, 귀찮다 생각하면 도태되고 배제돼요. 행동반경이 좁아지면 사고반경, 사람반경도 좁아집니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저는 지인들이 부르면 불원천리, 산 넘고 물 건너 달려가고요. 지하철에선 되도록 자리를 양보받지 않아요. 손잡이를 양손으로 잡고 서 있으면 오히려 균형력 강화에 좋습니다. 휴대폰은 신제품 출시 소식이 나오면 즉시 바꾸는 얼리어답터입니다. 지금 편한 것에 길들여지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노력해야 해요. 아웃 오브 사이트, 아웃 오브 마인드. 눈에 보이지 않으면 잊힙니다. 이런저런 핑계 대지 말고 새로운 공부, 도구, 환경에 도전하세요.”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 2017-04-28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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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신비주의로 살래. 그게 속 편해”
- 허비되기 쉬운 건 청춘만은 아니다. 황혼의 나날도 허비되기 쉽다. 손에 쥔 게 많고 사교를 다채롭게 누리더라도, 남몰래 허망하고 외로운 게 도시생활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머리에 들어온 지식, 가슴에 채워진 지혜의 수효가 많아지지만, 알고 보면 우리는 모두 은하계를 덧없이 떠도는 한 점 먼지이지 않던가. 그러나 살아있는 동안 한 걸음 더 나아가야만 한다. 어둠속을 부유하는 먼지의 신세를 면하기 위해, 저마다 나름의 별이 되기 위해, 타성에 젖은 삶을 바꾸는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경북 김천시 구성면 우두령(해발 650m) 기슭에 사는 정현선(58)씨 내외. 이 부부는 5년 전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안락하게, 그러나 따분하게 살았던 것 같다. 모두가 성난 말처럼 냅다 달리며 지지고 볶는 도회의 풍속을 견디어 기반을 다졌다. 그러나 일종의 허기나 갈증 같은 게 따개비처럼 들러붙었던 모양이다. 그게 귀촌이라는 거사를 도모하게 했다. 정씨의 남편 김보홍(63)씨는 축구선수 출신으로 체육 분야 직종에 종사했다고 한다. 정현선씨 역시 농협 직원으로 일하며 서울이라는 정글을 섭렵했다. 부부가 밖의 일로 분주했던 나머지 안에서는 정작 얼굴을 마주할 짬이 드물었다지. 부부란 전우와 같아서, 또는 난적과 같아서 단합에도 능하지만 분쟁 역시 빈발하기 마련이다. 이 부부는 전우애나 전투정신을 고취할 여가 자체가 없었단다. 애정 표현도, 부부 싸움도 한가한 시간이 주어지고서야 가능한 게 아니겠는가. 그들에겐 오래 묵은 숙원이었다. 귀촌 말이다. 도시가 오직 탁류일 리 있을까마는, 시골이라고 다만 청류일 리 있을까마는, 마음은 자꾸만 촌으로 향했더란다. 해서, 근 10여 년간 전국 도처의 산간을 순례하며 정처를 물색했다. 부부 둘 다 태어나 성장기 한때에 놀았던 물이 시골이었기에 향수라는 것, 그 못 말릴 본능이 가슴으로 들솟기도 했다. 정현선씨의 얘기는 이렇다. “틈이 나면 주먹밥을 싸들고 전국 산천을 돌아다녔어요. 강원도 화천에서 지리산 자락 구례까지, 일삼아 여행삼아 많이도 누볐어요. 그러나 마음에 딱 드는 곳을 찾기 어렵더라고요. 좋다 싶은 땅은 값이 비싸고, 저렴한 땅은 길이 없거나 하는 식으로 여건이 열악했어요. 그러던 중에 우연히 급매물을 소개받았는데, 가격이나 위치나 괜찮다는 판단이 섰어요. 지금 저희가 사는 이 집과 그렇게 인연이 됐죠.” 시골생활에 넌더리를 내고 역(逆)귀촌을 하는 사람들이 드물지 않다. 살던 집을 헐값으로라도 서둘러 처분하고 시골을 탈출한다. 매력적인 급매물은 순식간에 임자를 만나게 마련이다. 정씨 부부가 사들인 급매물은 임야 포함 2만여 평 부지 위에 지어진 2층집. 산 중턱에 자리한 집이라서 조망이 기차게 후련하다. 우두령 일대는 고험한 산악지구다. 기세 등등, 하늘을 찌르며 솟구친 백두대간 고봉들이 저마다 똘똘하고 출중하다. 산이 거구라 골도 웅숭깊다. 골짜기 푸른 물살은 은어 떼처럼 반짝이며 솰솰 굽이쳐 흐른다. 촌 가운에서도 후미진 산촌을 애호하는 사람이라면 무릎을 탁 치며 쾌재를 부를 경관이다. 원주민과의 융화에 실패하다 우두령 자락으로는 절기 따라 봄비가 내리고, 가을 단풍이 물감을 흘려 내리고, 겨울엔 수북이 눈이 내려 설경이 흐른다. 산꾼들도 우두령 산간을 오르거나 내리기를 무시로 한다. 백두대간을 타는 사람들이다. 애초에 그러려고 했던 게 아니었으나, 정씨 내외는 귀촌 직후 민박집 쥔장으로 변했다. 대간을 타는 사람들의 권유에 의해서였다. “대간을 타는 분들이, 이곳에 잠잘 집이 없어 불편하다, 산꾼들을 상대로 민박집을 하는 게 어떠냐, 그런 권유들을 해왔어요. 그래 2층 방에 등산객들만을 상대로 민박을 받기 시작했는데요, 그들에게 서울 얘기, 세상 얘기, 산 얘기를 듣는 게 참 즐거웠어요. 적막한 산중에서 뜻밖에도 사교를 할 수 있는 행운이 찾아온 거예요. 그런데 말이죠, 술이며 음식이며 이것저것 퍼주는 바람에 소득은 신통치 않더라고요. 그래서 작심하고 식초 생산에 나섰어요.” “산촌에서 나오는 온갖 재료로 식초를 만드는 거예요? 그건 초심자도 가능한 업종인가요?” “산골에서 마냥 놀기만 하면 무슨 재미겠어요? 흔히 자연을 즐기고자 귀촌을 하지만 시골에서 지내다 보면 욕심이 생겨 귀농의 형태로 양상이 변하는 경우가 있어요. 저희가 그런 케이스죠. 사실, 서울에서 귀촌 교육을 받으며 식초 공부도 미리 해두었어요.” “이른바 천연식초라는 걸 생산하는 농가가 많아요. 이 집만의 특별한 식초 제조법이라도 있나요?” “저희는 일반 설탕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진정한 전통 발효식초를 만들어요. 제가 산골에 와 살며 이젠 정말이지 착하게 살자는 생각을 신념처럼 갖게 되었어요. 소득을 위해서만 식초에 도전한 건 아니에요. ‘착한 음식’으로서의 식초 만들기로 신념을 실천하고 싶은 거예요.” 착하게 살자! 산골 자연이 들려준 뉴스였던 모양이다. 자연은 소리 없이 묻는다. ‘너는 누구인가?’라고. 그런 자연의 질문을 받은 뒤엔 마침내 내가 나에게 되묻는다. ‘너여! 너는 누구인가?’ 월든 숲에 살았던 소로우처럼 자연에 관한 무한한 영감과 감수성을 지니긴 어렵지만, 산촌 자연 속에 사노라면 자못 성찰적인 눈매로 뒤를 돌아보게 된다. 비로소 내 삶의 굴곡과 상처가 아프게 드러난다. 이 과정에서 회심(回心)이 돋아 자연을 닮은 삶의 생태를 꿈꾸기도 한다. 귀촌의 재미는 이 대목에서도 짭짤하게 우러난다. 귀촌한 이들이 흔히 토로하듯이, 정현선씨 역시 내면을 스스로 살피는 삶을 사노라 말하고 있다. 도시에서보다 한결 느긋해지고 수굿해졌단다. 화통하게 잘 웃고, 잘 표현하고, 뭐든 앞장서 차돌처럼 당차게 행동하는 개성의 소유자로 보이는 이 여자는 산촌의 나날들이 흐뭇하다. 식초 분야의 실력자로 소문이 나 곳곳의 귀촌·귀농센터에 강사로 출장을 가기도 한다. 요즘은 가양주를 만들어 상품화를 모색하고 있다. 귀촌 성공 사례로 알려져 견학을 오는 사람들도 많다. 들입다 몰입한 덕에 얻은 근사한 성과들이다. 하지만 그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귀촌 5년 세월 중 4년간은 심히 괴로웠다지? 왜지? 정씨 내외는 마을 원주민들과 오붓하게 어울려 사는 일에 유난한 고초를 겪었던 것이다. 귀촌이란 엄밀히 말하자면 타향살이다. 이 타향살이에 차질이 생기면 이젠 귀양살이 입문이다. “저희는 말이죠, 귀촌 교육을 통해 마을 원주민들과의 융화가 매우 중요하다는 걸 충분히 인식하고 내려왔어요. 융화에 실패하면 지속할 수 없다, 무조건 베풀어야 한다, 그런 걸 염두에 두었죠. 그러나 막상 부딪혀보니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최선을 다했지만 고통스러웠어요. 귀촌이라는 게 자칫하면 무덤이 될 수 있다는 걸 실감했어요.” “어떤 식의 불화가 벌어졌죠?” “시골에선 남자들의 술자리가 잦습니다. 서로 거들어야 할 농사일도 많아요. 저의 남편은 이런 자리 저런 자리 가리지 않고 열심히 동참했어요. 집안일은 뒤로 밀어두고 이웃의 농사일을 거둔다거나, 봉사할 일은 기꺼이 봉사했어요. 하루 종일 남의 농사를 돕다가 밤이 깊어서야 돌아오는 남편을 기다린 밤들이 참 많았어요. 그렇게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결과적으로 돌아오는 건 갈등, 소외, 뒷담화, 그런 것들이더라고요. 이 집을 도와주면 저 집에서 불만을 품고, 저 집을 도우면 이 집에서 좋지 않은 소리를 하고… 도저히 적응하기 힘들었어요. 재미나 보람은커녕 하루하루가 고역스러웠어요.” “사람 사는 곳 어디서나 마찰이나 갈등은 양념처럼 섞여드는 거 아녜요? 산간벽지 특유의 배타성 같은 걸 염두에 두진 않았나요?” “저희 부부가 적극적으로 마음을 열어 행동하는 일에 인색한 사람들은 아니에요. 이 시골에 정착하기 위해 마음을 열고 안간힘을 다했어요. 그럼에도 벽을 허물기 어려웠어요. 맞아요, 벽촌의 풍습이라는 거, 도시적인 생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곳만의 풍토라는 게 엄연하구나, 그걸 넘어서기 정말 어렵네? 차라리 서울로 돌아가는 게 답이겠네? 막판엔 그런 판단이 서더라고요.” ‘신비주의 처세’로 바꾼 뒤 비로소 찾은 평화 이른바 역귀촌을 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원주민과의 갈등이다. 주민들의 심리와 정서를 내 것처럼 헤아려 보듬는 일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귀촌을 해서 단숨에 인기를 끌 묘한 비결이라는 게 있겠는가. 더 통 크게 마음을 여는 수밖에 없다. 똑똑한 티를 내기보다는 얼간이인 양 어설프고 만만하게 처신하는 것도 썩 괜찮은 쇼일 수 있다. 민첩하게 생각을 굴릴 줄 아는 인물에 속할 정씨가 이를 모를 리 없을 테지만, 정작 그녀는 고민과 고독 속에서 끙끙거렸던 것 같다. “주민과의 관계가 불편해지자 부부싸움도 늘어나더라고요. 어휴,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서였죠. 급기야 마을 사람 하나가 저희 집 진입로를 철망으로 막아버리는 사태까지 발생했어요. 진입로 땅을 사들이는 것으로 해결했지만 정말 뿔이 나더라고요. 이게 뭔가? 이러려고 시골에 왔나? 회의가 마구 몰려들었고, 마침내 남편 입에서 서울로 돌아가자는 얘기가 나왔어요. 그러나 제가 반대했죠. 실패하고 돌아가다니, 그건 죽도 밥도 안 되는 거잖아요? 그날 이후 생각을 완전히 바꿔먹는 것으로 살 길을 찾아냈어요.” “뭐죠, 그게?” “신비주의! 이제 나 신비주의로 산다! 그런 거요. 하하하.” “마음을 여느라 공연히 힘만 빼기보다는 차라리 빗장을 거는 쪽으로? 은둔처럼?” “해탈이죠. 비닐이고 뭐고 마구잡이로 노천에서 소각하는 모습을 참지 못해 그러지 말라 권유할 경우, ‘뭐야? 너나 잘해!’ 하는 투로 반응하는 사람들과는 싹 등 돌리고 사는 게 유일한 길이라고 판단했어요. 그건 적중한 처세였어요. 비로소 속 편하게 살 수 있게 됐으니까요.” 정씨는 고등어처럼 싱싱한 언사로, 말끔한 표정으로 ‘신비주의 처세’ 이후의 만족과 안심을 토로한다. 기다리고 참고 끌어안으면 상처가 아물 수 있다. 고통이라는 씨앗을 발아시켜 멀리 가는 향을 뿜는 꽃을 피울 수도 있다. 산골 벽촌이라는 쓸쓸한 공동체를, 텃세를, 폐쇄적 문화를 하나의 상처로 가늠해 나의 행보를 인내 속에서 조절하고 조화하는 처신은 진취적이고 창의적인 것일 수 있다. 군인이 돼 별을 달고 싶은 꿈을 먹고 자랐다는 정씨는 전혀 다른 방책으로 곤경을 벗어났다. 굴종에 가까운 나약한 타협 대신, 나의 길 내가 간다는 식의 투지로 고뇌를 해결했다는 게 아닌가. 그러고서야 산골짝에서 무슨 재미를 볼 수 있을꼬 싶지만, 내가 가는 길이 바로 지름길이라는 것도 여지없는 진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등의 저서가 있다.
- 2017-04-26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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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중한 관계를 해치는 대화들
- 종교와 정치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노선이 달라 언제든 충돌이 발생할 수 있다. 아무리 친한 친구나 가족 간에도 하나의 통일된 생각을 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간혹 관계를 힘들게 한다. 필자에게도 이런 경험이 있다. 대학교 4년을 늘 형제처럼 붙어 다녔던 친구가 있다. 졸업하고 직장을 잡고도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를 하며 친분을 유지했다. 우리의 우정이 영원할 것처럼…. 그러다 관계가 틀어지는 결정적 계기가 있었다. 바로 대통령 선거였다. 다 지나간 이야기이니까 이니셜로 밝혀도 되겠다. 당시 후보는 YS(김영삼)와 DJ(김대중)였다. 우리나라 민주화를 이끈 두 거목이다. 두 사람은 수십 년간 야당생활을 하면서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기틀을 잡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YS의 통일민주당과 DJ의 평화민주당으로 갈라서게 되면서 따르는 사람들도 분열했다. 한 사람은 호랑이를 잡겠다고 여당과 합당을 했고 한 사람은 야당에 남아 정치를 계속했다. 결과적으로 두 분 다 목표를 달성하긴 했다. 그런데 두 사람만 헤어진 게 아니다. 두 사람을 지지했던 지지자들, 즉 우리 같은 일반인들도 갈라서게 됐다. 필자와 친구도 그랬다. 당시 친구는 자신이 지지하는 사람을 필자에게 설득시키려 했다. 필자가 늘 자기편이고, 자기 생각과 같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은 달랐다. 친구 관계가 좋다고 지지하는 사람까지 똑같아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필자의 주관이었다. 학교에서 반장선거 할 때도 자신이 지지하는 사람이 당선이 되면 좋겠지만 안 된다 해도 크게 문제될 것 없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친구는 집요하게 자신의 주장을 이야기했고 필자는 그 주장에 응할 수 없었다. 잠시 설전이 있었고 그 후 만남도 연락도 소원해졌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시절의 친구로 돌아가지 못했다. 1년에 한두 번 모임 때 만나 의례적인 인사나 나누는 사이가 됐다. 정치뿐 아니라 종교도 관계를 힘들게 한다. 우리 부부는 성당에 다니고 어머님은 교회를 다니신다. 신교와 구교일 뿐 다 같이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런데 어머님은 우리 부부가 성당에 다니는 것을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하신다. 자신의 교회로 와야 한다고 난리시다. 만날 때마다 그렇게 강조를 하시니 뵙는 것이 점점 불편하다. 물론 연세 드셔서 종교를 갖고 즐거워하시는 것을 보면 참 좋고 다행이다 싶다. 그렇게 행복해하시는 것은 좋은데 그게 지나쳐 강요를 하시니 문제다. 필자의 경험을 통해 살펴보았듯, 종교와 정치에 대한 대화는 참 어렵다. 갈등의 원인은 지나친 데서 나온다. 각자가 다른 인격체인 만큼 생각이 다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도 상대의 관점을 존중하지 않고 동일시하려는 데 문제가 있다. 인정하지 않고 자기 뜻이 관철되지 않는다고 타인을 배척하거나 적으로 삼으면 갈등은 커진다. 특히 종교, 정치와 관련한 대화에서는 서로의 입장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내 생각이 중요하듯 다른 사람의 의견도 중요하다. 요즘 태극기 집회와 촛불 집회를 보면서 착잡한 마음이다. 서로 상처받지 않고 궁극적으로는 화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자의 가치를 인정해줘야 한다. 내가 중요하듯 다른 사람도 소중한 인격체로 인정받을 때 갈등은 치유될 수 있고 관계가 새롭게 형성될 수 있다. 아직도 마음속 저 깊은 곳에는 친구와의 우정이 마그마처럼 저장되어 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필자가 먼저 친구에게 연락해 마음을 전하고 싶다. 이제는 관심을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친구의 마음을 돌릴 수 있지 않을까?
- 2017-03-31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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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중 잣대가 문제
- 20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 에는 중량감 있는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메릴 스트립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65세 사진작가 킨케이드 역으로 출연했고, 메릴 스트립은 가정주부 프란체스카 역을 맡았다. 남편과 아이들이 4일간 집을 비운 사이 킨케이드가 프란체스카의 집에 우연히 들렀다가 사랑에 빠져 정사를 나누고 갈등한다는 줄거리다. 중년의 외도에 대해 여러 가지를 생각해보게 하는 영화다.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대부분 명화라며 칭찬하는 분위기다. 남녀 구분 없지만 특히 여성들이 더 열광한다. 언젠가 EBS에서 주말의 명화로 이 영화를 방영한다고 하자 주변 여성들이 꼭 보라며 단체 카톡방에 글을 올렸다. 안 본 사람은 꼭 봐야 하고 이미 본 사람도 다시 볼 만한 영화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필자는 시큰둥해했다. 서부영화에서 카리스마를 보이며 멋진 총잡이로 나왔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너무 늙어 주름이 자글자글한 것도 보기 안쓰러웠고, 그런 나이의 남자에게 프란체스카의 마음이 움직여 정사까지 나누게 되는 전개도 큰 공감이 되질 않았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라며 같이 도망가서 살자는 킨케이드의 유혹도 도덕적으로 용서하기 어려웠다. 프란체스카는 남편과 별 불만 없이 살고 있었고 아이들까지 있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프란체스카가 가정을 버리고 킨케이드를 따라나섰다면 돌팔매를 당할 만한 줄거리였다. 여성들이 남편의 외도에 대해서는 ‘절대 불가’의 입장을 밝히면서도 이 영화에 대한 평가에 관대한 것을 보면 대리만족이 아닐까 한다. 영화에서는 되고 현실에서는 안 된다는 이중 잣대인 셈이다. 우리나라 성인 남녀의 외도에 대한 조사 자료는 많다. 남자들의 외도율은 매우 높다. 여성들도 남성들보다는 낮지만 꽤 높은 수준이다. 통계라는 것이 어느 정도의 신뢰도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필자 주변의 남자들이 예외 없이 외도 경험이 있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는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남자들은 성 경험이 있어야 비로소 성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편이다. 군대에 입대한, 성 경험이 없는 졸병들에게 부대 인근의 매춘부를 붙여줄 정도로 남자들은 ‘숫총각 딱지’를 떼도록 강요받는다. 요즘은 성매매를 강력히 단속하고 있어서 분위기가 좀 달라지기는 했지만, 남성들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 여자들과 섹스할 수 있는 기회는 널려 있는 편이다. 외도의 기준이 어디까지인지는 애매하다. 배우자 이외의 이성과 데이트 정도 한 것을 외도로 보는 사람도 있고, 정사를 나눈 것만 외도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남자들은 외도 기준을 상당히 깊은 관계에 둔다. 매춘부와의 섹스 정도는 외도로 보지 않는 사람도 많다. 남자의 본능 차원에서 이해돼야 한다는 것이다. 남자들은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도 섹스를 할 수 있으므로 마음을 주지 않으면 외도가 아니라는 입장이다. 종종 여성들도 마음을 주지 않은 섹스 정도는 눈감아주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자들은 남편의 외도를 용서하지 못한다. 그러니 외도를 하더라도 들키지 말아야 한다. 여성들은 폐경이 되면 성욕이 현저히 떨어진다고 한다. 그러나 남성들은 여전히 성욕을 주체하지 못한다. 섹스리스 부부 중 남편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여러 가지 병이 생길 수 있다며 불만을 터뜨리지만 성욕이 떨어져버린 아내는 꿈쩍도 안 한다. 신혼부부라면 이혼 사유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50대가 넘으면 애걸해봤자 “나이 들어 주책”이라는 소리만 들을 뿐이다. 가수 조영남씨가 쓴 책에 보면 5년마다 배우자를 바꾸는 공약을 내세우면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개그가 있다. 남녀 모두 열렬히 동의하는데 특히 여자들이 더 뜨겁게 호응하더라는 얘기다. 생물학적으로 3년이 지나면 호르몬 작용에 의해 사랑하는 감정이 식는다고 한다. 그 무렵 둘 사이에 아이가 태어나고 아이가 가교 역할을 하게 되면서 부부의 정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미국 영화에는 정상적으로 부부생활을 하는 커플보다 이혼을 하거나 별거인 커플이 더 많이 등장한다. 전 남편과 현 남편이 같이 만나 즐거운 시간을 갖는 장면도 있다. 우리나라도 이혼율이 높아지면서 이혼에 대한 시각이 상당히 관대해졌다. 이제 혼인빙자간음죄에 이어 간통죄까지 폐지되었다. 개인의 사생활을 국가가 개입해 제재를 하는 것은 잘못됐다는 것이다. 섹스는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이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종족보존의 본능을 벗어나 섹스라는 쾌락을 즐길 줄 아는 동물이다. 그런 선물을 도덕적 잣대 때문에 억제하고 살아야 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각자가 알아서 처신할 일이지만, 외도는 ‘적당한 간식’이며 ‘삶의 활력소’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많다. 단, 배우자에게 들키지 말아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붙는다.
- 2017-03-14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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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 플러스의 시간
- 어느 때부터인가 시니어를 지칭하는 단어가 ‘50플러스’가 되었다. 외국에서 건너온 단어이기도 하지만, 50세에 직장을 퇴직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실감이 난다. 50대에 활발히 인생 이모작 활동을 시작하고 60대 중반에 피크를 이루는 것이 대세인 것 같다. 이란 책은 50+인생학교 학장 정광필씨가 최재천 교수, 박원순 서울시장 등 11명의 이야기를 모아 낸 책이다. 전체적으로 경어체로 통일 시킨 것이 좀 거슬렸다. 경어체는 겸손의 자세는 있어 보이지만 가르치는 것 같아 거부감이 들기도 한다. 인생 이모작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가지 책이 나온 바 있다. 그 나이가 어떤 의미이며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 갈 것인가에 대한 토론이었다. 추상적인 설계부터 각자의 전공에 따라 여러 가지 주장을 해왔다. 이런 책들 덕분인지 시니어에 대한 인식은 어느 정도 되어 있는 것 같다.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 갈 것인가에 대해 각자 택할 방식은 각자의 몫이다. 여러 사람의 글 중에 ‘개저씨는 왜 혼자가 되었나?’를 쓴 이승욱 씨의 글이 마음을 당겨 이 책을 사게 되었다. ‘개저씨’는 아저씨를 낮춰 부르는 경멸의 단어이다. 시니어들이 범람하는 사회에서 필자 나이 또래들도 눈에 거슬리게 느끼는 일들을 지적했다. 매너는 당연하지만, 특히 말을 적게 하고 경청하라는 것이다. 시니어가 되면 말이 더 많아 지는 사람도 있고 말수가 적어지는 사람도 있다. 특히 말이 많은 사람은 상대를 피곤하게 하고 말을 많이 하다 보면 실수가 불가피하다. 자녀들에게 문제가 발생하면 아빠와 상의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60%라고 한다. 그러나 자녀들에게 물어 보면 1% 이하가 그런 생각이 있다는 것이다. 시니어들은 자신이 신식 아빠라는 환상에 젖어 있지만, 그래봤자 구세대라는 것이다. 그러니 소통이 될 리가 없다. 행복한 성문화대표 배정원씨의 글은 늘 재미있다. 아직도 남자들도 입에 담기 꺼려하는 성생활 이야기를 여자가 하고 있어서 눈길을 끈다. 미인이면서 늘 웃는 인상에 긴 머리를 하고 있어 젊어 보인다. 여자의 입장에서 성에 대한 얘기를 풀어 놓아 남자들에게 여성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사랑과 섹스, 로맨스에는 은퇴가 없다’며 지속적인 성생활을 주장하고 있다. 섹스를 하면 좋은 점은 면역력 강화를 비롯해서 상당히 많은데 시니어들은 오히려 성생활 중단 및 기피로 갈등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섹스를 하고 나면 상대방의 성 에너지가 내 몸 속에 7년이나 머문다는 주장도 눈길을 끈다. 성생활은 시니어들의 고민 중 큰 요소이긴 하다. 몸이 예전 같지 않은데다 배우자마저 등을 돌리고 있어 고민을 풀 수 있는 환경이 점점 나빠지고 있는 것도 큰 문제이다. 최광철- 안춘희 부부는 90일 동안 유럽 5개국 3,500km을 자전거로 횡단했다. 원주시 부시장까지 역임한 사람이다. 스마트폰과 구글지도 덕분에 초행길을 무사히 완주한 것이다. 시니어들의 버킷리스트에 여행은 빠짐없이 들어간다. 그래봤자 여행단 따라 3박 4일 정도 쉬고 오는 정도의 여행일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한꺼번에 화끈하게
- 2017-03-02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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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운 사람 부드럽게 사로잡는 법
- 인간에게 적당한 경쟁은 삶을 활기차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이든 그렇겠지만 지나침은 부족함만 못하다. 지나치다는 것은 이성을 잃고 감정에 휩싸이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형제끼리 심한 갈등이 이어지면 어른들은 자주 이런 속담을 인용하시곤 한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 그리곤 실제로 더 주시곤 했다. 미워서 하나도 주기 싫은 마음인데 두 개를 주겠다는 것은 화를 삭이고 더 이상의 갈등을 없애겠다는 의미다. 농부에게 가뭄은 내 목이 타는 것 이상의 고통이다. 논에 물을 대기 힘들 정도로 가뭄이 심하면 물을 먼저 대기 위한 싸움이 치열해진다. 한 농부가 낮에는 물 순서가 돌아오지 않아 밤새 물을 대고 잠깐 눈을 붙이고 나오니 아래 논 주인이 물꼬를 터 그 물을 다 훔쳐가고 말았다. 마을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는 젊은 귀농 부부라 물정을 몰라서 그러려니 하고 참고 넘겼다. 그러나 이튿날에도 같은 상황이 되풀이되었다. 화가 난 농부는 아래 논 주인을 혼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 마침 마을을 돌아보던 신부님과 마주쳤다. 농부는 신부님께 물 도둑의 행실을 소상히 고했다. 그러자 신부님이 이렇게 말했다. “서로 사는 방법을 구하세요. 먼저 아래 논에 물을 대주고 나중에 형제님의 논에 물을 대세요.” 농부는 처음에는 어이가 없었지만 곰곰이 생각하다가 신부님 말씀을 따르기로 했다. 밤새 아래 논에 물을 대주고 난 다음에 자신의 논에 물을 대느라 잠을 못 잔 농부는 새벽이 되어서야 잠들게 되었다. 이튿날 아침 젊은 부부가 달려왔다. 논의 물꼬를 터 물을 받으며 안 그래도 미안했는데 이제 자신의 논에까지 물을 대주시니 감사해서 어찌할 바 모르겠다고 했다. 농부는 허리를 몇 번이고 숙이면서 진심으로 감사해하는 젊은 부부와 화해했다. 그리고 앞으로 서로 교대로 논에 물을 대기로 했다. 미움을 없애고 도움을 주고받는 믿을 만한 이웃이 된 것이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화가 나는 마음이 누그러진다. 그래도 완전히 풀리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방법이 아주 확실한 처방이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겁을 주거나 미움으로는 상대의 마음을 얻기 힘들다. 필요 때문에 잠시는 숙일 수 있지만 오래가지 않는다. 반면 감사와 감동은 오랫동안 따뜻함으로 남는다. 악을 제거하는 확실한 방법은 공동선이다. 약육강식이 아닌 베푸는 것으로 선을 돌려받는 것이다. 나이 들어가며 조금씩 깨달아지는 것이 있어 좋다. 그래도 또 상황에 맞닥뜨리면 아직도 남은 성질을 부리기도 한다.
- 2017-02-27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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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똑똑한 은퇴] 친도(親道)를 아시나요?
- 해가 어스름해지기 시작하자 연신 동네 어귀를 쳐다보는 노부부. 이제나저제나 읍내에 나간 아들이 오기를 기다리며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늦은 시간인데도 아들이 안 오면 부모는 슬슬 동구 밖으로 마중을 나간다. 멀리서 희끗희끗 보이는 물체가 아들인가 하고 좀 더 높은 곳이나 나무 등걸 위에 올라가 굽어보기도 한다. 수십 년 전 산골 혹은 시골에서 장이 서는 날이면 있음직한 장면으로 부모들의 애틋한 마음이 잘 느껴진다. 이 같은 자식에 대한 부모의 마음을 잘 나타내는 한자가 바로 부모 ‘친(親)’이다. 親이라는 한자를 살펴보면 설 입(立) 밑에 나무 목(木)이 있고 그 옆에 볼 견(見)이 붙어 있다. 위에서 언급한 장면이 그대로 연출되는 듯한 한자다. 요즘엔 설이나 추석 명절에 오는 자녀들을 기다리는 부모들이 그런 마음일 것이다. 명절을 쇠러 가는 차들이 한꺼번에 밀려 도로가 엄청 막히는데다 눈이나 비까지 오기라도 하면 자식들이 무사히 도착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진다. 장에서 돌아오는 아들의 마음도 급하다. 자신을 기다릴 부모님이 생각나 발걸음이 빨라진다. 아니나 다를까 동네 어귀에서 고개를 빼고 기다리는 늙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보인다. 아들은 “아이고, 왜 여기까지 나오셨어요?” 하며 지게를 내려 “다리도 아프실 텐데 이 지게 타고 가시지요” 한다. 지게가 없다면 업고라도 갈 태세다. 이런 장면을 보는 듯한 한자가 바로 ‘효(孝)’다. 아들[子]이 늙은[耂] 어머니(아버지)를 업은 듯한 글자다. 의미도 잘 갖다 붙인다고 하겠지만 필자가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한자 어원 풀이에 나오는 해석이다. 모든 도덕규범의 기초인 ‘효’ 효도(孝道)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부모를 잘 섬기는 도리 또는 부모를 정성껏 잘 섬기는 뜻으로 표현돼 있다. 한마디로 ‘부모에 대한 자식으로서의 도리’라는 의미다. 효도를 대부분 유교적 도리라고 말하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규범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가족을 넘어 사회(공동체)와 국가의 근본을 이루는 무언(無言)의 규범이자 사회적 합의라 할 수 있다. 효도를 근간으로 행복한 가족이 이뤄지고 그 가족의 구성원들이 사회에 나가 열심히 소득 및 소비활동을 함으로써 지역 공동체는 물론 국가 경제가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시대 이전부터 효가 모든 도덕규범의 기초를 형성해왔다. 이 대목에서 드는 의문 하나. 효도가 부모에 대한 자식의 도리를 의미하는 한자라면 자식에 대한 부모의 도리를 뜻하는 한자어는 없을까? 필자가 과문(寡聞)한 탓인지는 모르지만 그런 뜻을 가진 한자어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자식을 낳은 부모가 자식에 대해 도리를 지키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어서 한자어는 물론 순우리말에도 없을 거라는 게 주변의 해석이다. 그래서 필자가 한번 만들어봤다. ‘친도(親道)’. 글자 그대로 자식에 대한 부모로서의 도리를 뜻한다. 부모의 도리도 생각해야 할 시대 평균수명 100세 시대가 되면서 집집마다 걱정거리가 늘고 있다. 이렇게 말하면 돌팔매를 맞을지도 모르지만 연세 많은 조부모 또는 부모가 오래 사시기 때문이다. 물론 부모가 건강하게 오래 살면서 경제적으로도 자식들에게 큰 짐이 되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뭐랄 게 없다. 하지만 거동이 불편해지기 시작하면서 병도 하나둘 늘어나고 정신도 예전 같지 않은 상황이 수년간 지속되고 있다고 해보자.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남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연세 많은 노인들은 자식에게 부담을 주기 전에 죽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 치매라도 걸려 정신마저 없어지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태산이다. 최근 지방 중소도시는 물론 서울 강남의 대로변에 하루가 다르게 들어서는 것이 요양병원이고 요양원이다. 농경사회에서는 집이 일터이자 병원이었다. 가족 중에 누구 하나가 아프면 모두가 돌아가며 돌봤다. 하지만 산업화 사회가 되면서 집과 일터, 병원이 분리되고 조부모와 부모, 자녀들이 따로 살게 되면서 누가 아프면 보통 일이 아니다. 병이 길어지면 가족관계가 파탄나기도 하고 경제적으로도 파산에 이르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누구나 처음엔 내 부모인데 하면서 달려들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돈과 정(情)은 떨어지고 갈등이 커진다. 하지만 누굴 탓할 것인가. 불효하고 싶은 자식은 없을 것이다. 기왕이면 남부럽지 않게 효도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내가 먼저 살아야 하고, 내 자식부터 챙기게 된다. 늙은 부모를 소홀히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고 상황인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뭘까. 나이가 들수록 각자 스스로 부모의 도리, 즉 친도(親道)를 생각하면서 살아야 한다. 건강하게 오래 살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가, 예상보다 오래 살 경우에 대비해 의료비를 포함한 생활비는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회생 불가능한 병에 걸리거나 그러한 상태에 이르렀을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치매 등에 걸렸을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남는 재산이 있다면 어떻게 증여 또는 상속할 것인가 등등을 생각해봐야 한다는 말이다. 어떻게 되겠지 하는 어설픈 기대는 자식에게 짐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많다. 이것이 오늘날 100세 시대를 살아가는 시니어들의 가장 큰 고민이자 어려움이다.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 제나라의 경공이 정치에 관해 물었을 때 공자가 한 대답이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는 의미다. 아울러 각자 자신의 역할에 충실할 때 정치가 잘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군군신신(君君臣臣)은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핵심이고, 부부자자(父父子子)는 수신제가(修身齊家)의 핵심이다. 평균수명이 70세 정도일 때는 은퇴 후 10여 년 더 살다 가면 되니까 자식이나 다른 가족들한테 큰 짐을 지울 일이 없었다. 이제 평균수명이 80세, 90세를 넘은 100세 시대에는 수신제가로서의 ‘부부자자(父父子子)’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더 곱씹어봐야 할 것이다. 좋든 싫든 친도는 100세 시대에서 생겨난 시대적 요청이다. 부부자자(父父子子)는 곧 ‘친친효효(親親孝孝)’, 즉 부모가 부모로서의 도리를 다하고 자식이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다. 오늘날은 자식에게만 효도를 바랄 것이 아니라 부모의 도리도 함께 생각해야 할 시대다. >>최성환(崔聖煥)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한국은행 과장, 조선일보 경제전문기자, 고려대 국제전문대학원·경영대학원 겸임교수, 한화생명 경제연구원 상무, 은퇴연구소장 등 역임.
- 2017-02-27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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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 잡히고 해외여행을 떠나라니요
- 가슴 떨릴 때 세계여행을 떠나야지 늙어서 다리 떨릴 때 여행 가면 사서 개고생이라고 어느 장년모임에서 젊은 강사가 말한다. 돈이 있어야 세계여행을 다녀올 텐데 무슨 돈으로 여행을 가라는 말이냐는 청중들의 질문에 강사는 답변을 준비한 듯 꼭 집어서 집을 잡히고 그 돈으로 여행을 가라고 한다. 주택 역모기지론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강사는 신바람이 나서 자식이 부모를 모시는 시대는 지나갔다, 집을 자식에게 물려줄 생각 하지 말고 신나게 폼 나게 다 쓰고 한 푼도 자식에게 줄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한다. 한발 더 나아가 셀프부양 시대라며 자신의 몸은 스스로 돌봐야지 자식이 나를 부양해줄 것이라는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한다. 유튜브에서 인기가 있는 어느 스님은 고부간의 갈등이나 부모 자식 간의 트러블을 예방하기 위해서 자식이 20세가 지나면 부모 자식 간 정을 끊고 서로 간섭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동물들의 세계를 봐도 다 큰 자식을 끼고 사는 동물은 없다고 한다. 자식들이 바쁘다는 핑계로 부모님을 자주 찾아보지 못하고 전화도 제대로 하지 않는 세태에 이런 달콤한 강의는 자식들에게는 면죄부를 주고, 부모 세대에는 찾아오지 않는 자식을 탓하기에 앞서 변화된 시대를 탓하고 자식들을 억지 이해하게 만든다. 심지어는 우리 세대가 부모에게 효도하는 마지막 세대이며 자식에게는 버림받는 첫 세대라고 자학적으로 말한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탓에 모 대학에서 대학생들을 상대로 부모를 누가 모셔야 하느냐는 설문조사를 했는데 무려 70%가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답했다고 한다. 젊어서 국가에 열심히 세금을 납부했으니 늙어서는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게 그 이유였다. 자식을 열심히 키워준 것에 대한 대답은 없었다. 사자가 다 큰 자식 사자를 돌보는 일은 없다, 젊은 자식 개가 늙은 어미 개에게 먹이를 갖다 주는 일도 없다는 등 짐승의 행태를 사람에게 비유해 부모 자식 간에도 남남처럼 서로 간섭하지 말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홍보하고 사회 분위기를 조장하는 모든 행위에 서글픔을 느낀다. 사람은 동물이지만 짐승은 아니다. 남녀가 성년이 되어 결혼하고 자식들이 태어나고 재롱떨며 자라는 모습을 보는 것이 살아가는 즐거움이다. 짐승이 자식에게 먹이를 주는 본능과는 또 다른 이성이 사람에게는 있어 만물의 영장이라 한다. 옛날부터 세상에서 보기 좋은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마른 논에 물들어가는 것과 자식 입에 밥 넘어가는 것이라고 했다. 자식을 위해 하는 모든 행위는 부모의 즐거움이다. 여기에 대한 보답으로 늙은 부모를 모시는 것은 수천 년 동안 해온 인류역사다. 이것이 사람과 짐승과 다른 점이다. 자식이 스무 살이 넘었다고 쫓아낸 후 나 몰라라 하고 해외여행 다니면 부모 마음이 편할까. 부모는 개천에서 뒹구는데 자식인 나만 잘살면 행복할까. 부모 자식 간은 한 몸과 같다. 오른팔이 아픈데 왼팔이 희희낙락할 수 없다. 부모와 자식 사이를 동물에 빗대어 억지로 떼어놓고 행복 운운하는 것에는 수긍할 수 없다. 행복의 최소 단위는 가족이고 가족이 행복해야 내가 행복하다. 가족을 모아주는 정책을 개발하고 할머니 할아버지를 포함한 가족의 개념을 해체하지 않고 함께 살게 하는 묘수를 찾아야 한다. 핵가족화가 고착화되다 보니 가족의 개념도 희미해져간다. 초등학생이 함께 사는 강아지는 가족이라 하고 따로 사는 할머니 할아버지는 가족이 아니라고 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내가 번 돈 내가 다 쓰고 죽는다고 신나게 쓰다가 돈이 떨어지는 날 죽지 않으면 어찌하는가. 인명은 재천이라고 했다. 점쟁이도 아닌데 죽는 날을 어찌 안단 말인가. 나는 해외여행보다 일하며 돈 버는 것이 좋다. 누군가 그렇게 일만 하다가 죽을 것이냐고 물어보면 일하다 죽는 것이 해외여행하다 죽는 것보다 낫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여행은 절대 안 하고 자린고비처럼 돈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해외여행을 갈 기회가 있으면 즐거운 마음으로 가겠지만 집을 저당 잡혀서까지 해외여행 갈 마음은 없다. 내 입에 고기반찬 들어가는 즐거움보다 손자 입에 사탕 하나 물려주는 것이 할아버지의 기쁨이다. 이제는 농경사회도 아니고 직장 때문에 핵가족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노골적으로 유명 강사들이 핵가족을 찬양하는 것에는 반대한다. 대가족 단위로 함께 사는 것이 경제적으로 이득임은 자명하다. 지금의 할머니 할아버지는 무식하지도 않고 위생관념도 투철하기 때문에 손주들의 양육 면에서도 함께 사는 것이 도움이 된다. 맞벌이 부부가 대세인 요즘, 아이들을 맡길 곳이 마땅치 않아 아이 돌보는 양육자가 바뀌고 있다. 미안한 부모는 돈으로 아이들의 환심을 사려고 한다. 어느 초등학생이 생일파티라며 4만원짜리 뷔페에 친구들을 데리고 오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부모가 아이들을 직접 관리하지 못하니까 혹 나쁜 길로 빠질까봐 이런저런 생각을 못하게 여러 학원을 투어하도록 교육 프로그램도 짠다. 아이는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렇게 자란 아이들은 정서적으로 불안하고 인격형성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정부는 대가족제도의 장점을 홍보해야 한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영어선생, 수학선생을 하면 일거양득이다. 대가족으로 함께 사는 지혜를 정책으로 반영 보급하도록 정부는 앞장서야 할 것이다.
- 2017-02-01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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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지금은 라디오 시대> DJ, 그리고 <최유라쇼>의 쇼호스트 최유라의 인생 후반전은 지금이 최고의 순간
- 롯데홈쇼핑의 인기 프로그램 를 시작하기 위해 현장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최유라(51)의 모습은 전문 CEO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그녀를 MBC 표준FM 의 DJ로만 기억하는 사람은 그녀의 절반만을 알고 있는 셈이다. 그녀가 진행하는 는 2009년에 시작해 올해 무려 8년 차를 맞이하고 있는 독보적인 홈쇼핑 프로그램이다. 가 세운 매진과 완판의 기록은 최유라를 명품 비즈니스 업계의 블루칩으로 각인시켰다.그녀가 말하는 쇼호스트로서의 삶 그리고 인생 후반전을 들어본다. “저는 살면서 홈쇼핑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직접 만지고 느껴보고 사는 것이 재미가 있거든요. 어떻게 남의 말을 듣고 사느냐 하는 생각이 있었죠. 그리고 그걸 파는 사람이 물건을 얼마나 알아서 저렇게 말할 수 있는가 싶었어요. 그래서 아예 안 봤죠.” 현재 홈쇼핑에서 가장 뜨거운 호응을 얻고 있는 독보적인 홈쇼핑 프로그램 의 쇼호스트이자 를 이끌고 있는 베테랑 라디오 DJ로 모르는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려운 최유라가 하는 말이다. 홈쇼핑에 전혀 관심도 없었기에, 그녀가 홈쇼핑 쇼호스트가 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쇼호스트, 결정까지 1년이 걸리다 “홈쇼핑 회사들이 저한테 제안을 해왔어요. 결정하는 데 1년이 걸렸죠. 이들이 제 요구사항을 결정하는 데 8개월 걸렸어요. 제 요구사항은 ‘내가 쓰는 것, 먹는 것, 우리 집에 있는 것부터 하자. 그럼 하겠다’였어요.” 그녀는 “내가 쇼호스트도 아닌데 직접 써보지 않은 걸 어떻게 팔아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말에 회사들은 매우 당혹스러워했다. 그러나 그녀의 입장은 단호했다. “지르듯 한 말이었기 때문에 요구사항을 보낸 후에는 잊고 있었어요. ‘그게 될까?’ 싶은 마음도 있었죠. 그런데 받아들이지 않으면 할 필요가 없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나는 좀 답답하게 사는 사람이라…. 굳이 돈벌이하려는 거면 방송에서 벌면 되지 싶었고.” 당시 그녀의 제안을 가장 심사숙고한 회사는 롯데홈쇼핑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계약이 체결되고, 최유라는 홈쇼핑 무대에 서게 된다. 그게 벌써 7년 전 이야기다. “2년 차, 3년 차까지는 참 힘들었어요. 일단 업체들의 검증도 필요했고, 업체들에서는 ‘저희는 아직 홈쇼핑 계획 없습니다’라고 하고. 특히 외국 업체들은 명품 홈쇼핑 개념을 모르더군요. 독일도 일본도 마찬가지였죠. 저가 물건들의 판매를 홈쇼핑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홈쇼핑의 위력은 시간이 흐르면서 꾸준하게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나갔고, 마침내 폭탄이 터졌다. 최유라가 쇼호스트를 맡은 제품들 중 명품 가전제품을 만드는 다이슨의 제품들이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연속 매진을 기록한 것이다. “직접 영국 다이슨 본사에 가서 확인하고 공장도 보면서 공을 많이 들였어요. 신제품을 방송하면서 대박을 쳤죠. 다이슨을 수입하는 수입사가 깜짝 놀랐어요. 그러면서 다이슨의 모든 신상품은 백화점과 최유라에게만 준다는 방침을 세웠죠.” 마담 초이, 인생이 바뀌다 최유라의 인생도 그때를 기점으로 변했다. “그때부터 계속 해외에 나가게 됐어요. 매해 2월에 프랑크푸르트에서는 암비안테 박람회가 열려요. 세계의 주방 가전 명품이 모이는 세계 최고의 박람회죠. 물건 판매는 안 하고 계약만 체결되는 자리예요. 그러다 보니 각 업체 CEO들과 친분도 쌓게 됐어요. 참 신기한 일이죠.” 그녀는 초청을 받아 암비안테 박람회 휘슬러 부스에서 라이브 요리쇼를 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요리를 소개하면서도 휘슬러의 우수성을 선보이는 일석이조의 자리다. 이제는 박람회에 가면 ‘마담 초이’ 안 오냐며 그녀를 찾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다. 그녀의 인스타그램에는 박람회와 비즈니스 업계를 통해 친해진 친구들로 가득하다. “제가 정말 꿈에 그리던, 이건 이뤄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런 사람이 돼버렸어요.” 그녀가 확고한 자부심을 갖고 있음은 인터뷰 도중에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는 단순한 쇼호스트가 아니라 자신이 데리고 있는 스태프들과 함께 기획에서부터 디렉팅까지 전부 컨트롤하고 있었다. 인터뷰 도중에도 스태프들에게 꼼꼼히 지시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프로페셔널한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 ‘자신답지 않은 것’을 거부하는 여자 최유라는 마흔다섯 살 때부터 은퇴를 준비했다고 한다. “남편에게 말했어요. 은퇴를 할 때는 신중히, 오랜 시간을 두고 놓치는 거 없이 차근차근 마무리하고 싶다고. 그래서 은퇴에 걸리는 시간을 10년으로 잡자고.” 그녀는 예순 살이 되기 전에 뭔가를 이뤄놓고, 예순 살을 전후로 앞뒤 10년을 자신이 ‘키운 아이들’ 모습을 보면서 쉬고 싶었다. 남편은 좋다고 승낙했고, 그때부터 최유라의 인생 후반전은 시작된 셈이다. 그때 마침 홈쇼핑에서 제안이 들어온 것은 운명적인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방송 출연, MC 섭외도 많이 와요. 그런데 제가 재미가 없어요. 30대라면 할 수도 있겠는데 은퇴 준비를 하면서 방송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거죠. 너무 소모적이기 때문이에요. 감각적인 재미와 과장된 그 무엇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자리이기 때문에…. 그것들을 생각해보니 지금 하는 라디오와 홈쇼핑의 와 역행하는 거예요.” 그녀는 자신의 신념과 맞지 않는 일은 하지 않는다. 그래서 뒤에서 욕도 많이 들었다고 한다. “저건 뭐 혼자 잘났다고 잘난 척하고…. ‘아니, 를 왜 안 해? 웃기다 이거지?’ 이런 얘기도 듣고. 그런데 저는 정말 할 얘기가 없어서 안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따지는 사람도 있었어요. ‘웃기고 있네, 네가 왜 할 얘기가 없어? 너같이 말 잘하는 애가.’” 그녀는 정말 할 얘기가 없어서 나가지 못한다. 대부분의 방송 프로그램, 특히 가족 이야기가 주가 되는 토크형 프로그램은 아이들이 말썽도 부리고 가출도 하는 등 갈등이 있어야 시청자들이 재밌다. 그런데 최유라의 아이들은 너무 ‘평범하게’ 자랐다. 아침 먹고 학교 가고 돌아오는 일상의 반복. 그러니 방송에서 원하는 ‘에피소드’가 없는 게 당연하다. “다 상술인 줄 알았는데 믿음이 간다” 스스로 납득하지 못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는 최유라의 성격은 쇼호스트 일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이 쓰는 물건만을 소개한다. 그래서 소위 ‘지르는’ 식의 제품소개를 질색한다. 그녀가 생방송 중에 실제로 요리를 하는 것은 꼭 필요한 사람만 사도록 하기 위함이란다. 방송 진행 중에 단점까지 다 말해버릴 정도로 그녀는 정직하다. “솔직히 홈쇼핑의 모든 용어가 불편해요. ‘추가 구성’이라는 말도 어떻게 보면 미끼죠. 살 것도 아닌데 사게끔 만드니까. 그래서 ‘추가 구성이라고 하지 말고 선물이라고 하자’ 했어요. 그런데 선물이라는 표현이 심의에 걸리더군요. 너무나 걸리는 게 많아(웃음). 결국 부속이 아니라 동급의 명품으로 함께 줄 수 없으면 본 제품만 판매하고 가격을 낮추자는 쪽으로 정리를 했죠.” 그녀의 성공적인 도전은 소비자들의 반응으로 확인되고 있다. “중심을 잡아주는 게 정말 중요해요. 사람들은 다 느껴요. 내가 잘난 척을 하는지 말로만 어떻게 하려는 건지. 그래서 명확하게 해야 해요. 어떤 분이 문자를 보낸 적이 있어요. ‘홈쇼핑은 다 상술인 줄 알았는데 믿음이 간다’고. 그래서 저는 모든 의견을 받을 수 있는 SNS를 개방했어요. 물건 예고편, 개인적인 얘기까지 알려주는 공간을 만든 거죠. 아무리 좋은 물건이라도 쓰는 사람들의 의견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나는 정직으로 승부한다’고 말하는 그녀는 기업에서 봉급을 받는 게 아니라 롯데홈쇼핑에서 월급을 받고 있다. 그래서 기업에 ‘물건만 잘 만들라’고 말할 수 있다. 물건에 하자가 있으면 방송에 올라오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다. “어떤 때는 포장이 안 좋아 방송을 그만둔 적도 있어요. 회사가 고맙긴 해요. 그런 내 만행을 다 받아주니까. 그러잖아요, 고객을 만나는 건데, 부실하면 말이 안 되죠.” 내 이름을 걸고 하는 ‘토크쇼’ 좋은 물건은 소통의 매개체이며 그걸 잘 이용하고 싶다는 최유라는 혼자 해도 어색하지 않은 토크쇼를 할 수 있는 게 행운이라고 말했다. 어떻게 보면 최유라는 지금 자신의 이름을 내건 토크쇼를 하고 있는 셈이다. 소위 MC들이 가지는 꿈, 자신의 이름을 내건 토크쇼를 하고 싶다는 꿈을 그녀는 이미 이루고 있다. 그녀는 휘슬러를 판매하기 위해 쇼를 시작할 때, 그날의 시사와 사회, 가사에 대한 내용으로 오프닝을 한다. 스토리가 있는 다. 이것이 바로 그녀가 자신의 쇼를 대하는 진정성의 증거다. 그리고 그 진정성은 자신이 판매하려는 제품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물건을 팔 때 그 물건을 왜 써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잘 사용하는 것인지도 알려줘야 소비자들의 마음이 움직이겠다 생각했죠. 그런 촘촘한 배려가 소비심리가 얼어붙은 요즘에도 계속 매진행렬을 만들어내는 이유라고 봐요.” 이제 51세. 그녀가 말한 예순 살 이전 10년이라는 인생 후반전의 초반이다. “작년은 건강과 환경이 캐치프레이즈였어요. ‘좋은 명품은 환경적으로 우수한 것’이라는 생각에서 실행했죠. 그럼 2017년은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가 어떤 캐치프레이즈를 제시해야 할까? 스태프들에게 물으니 다들 거창하게 생각하더군요. 저는 올해 ‘우리의 기본 밥상을 바꾸는 것’이 목표예요. 특히 설탕, 소금에 대한 것들을 바꿀 거예요. 설탕은 참 백해무익하죠. 그런데 안 들어가면 안 되는 재료예요. 바로 그 부분에 대한 답을 드리려고 해요.” 스쳐가더라도 기억에 남는 사람 되고파 “요즘이 가장 좋아요. 우리 부부는 살면서 더 좋아지는 중이에요. 서로가 서로에게 느꼈던 아픔과 상처들이 있지만, 지금은 편안해요. 가감 없이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거든요. 젊었을 때 저 사람 없이 못 살겠다는 생각 해본 적 없는데 이제는 저 사람과 끝까지 살 수 있다는 게 행복해요.” 최유라는 아이들에게 ‘내가 이렇게 너희들을 위했는데’ 하는 기대치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아이들과 인생에 대한 얘기를 나눌 수 있게 됐다. 이제 그 나이에 이르렀음이 행복하고 요즘 그 행복을 온전히 누리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언뜻언뜻 스치는 기억들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고 말한다. “사정이 각각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위로를 준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좋은 연예인, 괜찮은 사람, 그렇게 스쳐가더라도 남는 사람.” 그녀의 소망을 듣고 있자니 마치 라디오를 듣는 듯 편안했다. 그녀의 아날로그적 매력이 훅 하고 밀려왔다. ‘마음’, ‘진정성’, ‘기준’이라는 단어들과 아주 잘 어울리는 사람.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참 드문 시대를 살고 있지 않은가. 최유라가 만들어갈 인생 후반전이 기대되는 이유다.
- 2017-01-31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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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회가 만난 CEO 스토리] 인생 3막의 장밋빛 인생, 이길원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명예이사장
- 나이 듦은 원숙일까, 낡음일까. 누군가에겐 연륜으로 작용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고집불통의 외통수를 만들기도 한다. ‘불로초’를 찾아 헤매는 ‘영원한 젊음에 대한 집착’도 안쓰럽다. 또 ‘너희는 늙어봤냐, 나는 젊어봤다’로 나이를 계급장인 양 밀어붙이며 유세하는 것도 볼썽사납다. 여기 밥 잘 사고 젊은이들과 무람없이 농담을 주고받으며 지덕체의 균형을 이루며 사는 진정한 ‘어른’이 있다. 바로 이길원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명예이사장이다. 영원한 현역으로 산다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글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장 정보화 사회의 키워드인 사이버는 그리스어 ‘키베르니테스(kybernetes)’에서 유래했으며 ‘키’를 잡고 있음을 의미한다. 원로가 젊은이와 다른 것은 인생에서 ‘가상의’ 키를 잡고 저어갈 줄 아는 능력이 있다는 점이다. 이길원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이사장(72)을 이 코너 인터뷰 대상자로 섭외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늘 젊은 친구가 모여들고, 일상을 놓지도 않고 꽉 움켜쥐지도 않은 채 여유롭게 ‘키를 제대로 잡고’ 지덕체의 균형을 이루며 사는 ‘어른’이라 생각해서였다. 처음 인터뷰 섭외를 청했을 때, 그는 눈웃음을 지으며 “90까지는 활동해야 하는데 인생 은퇴가 어디 있느냐”며 “나는 영원한 현역이다. 단지 노는 물이 달라졌을 뿐이다”라고 손사래를 치며 사양했다.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이 있지요. 저는 패러다임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박수칠 때 새로운 것을 시작하라는 것으로요. 옛날에는 인생을 2막으로 나누었지요. 30세까지의 준비기와 60세까지의 활동기로 양분했습니다. 이제는 90세까지 사는 세상. 저는 인생을 3막으로 구분합니다. 태어나서 20대 후반까지가 준비기, 그 이후부터 60대까지가 활동기 그리고 90대까지가 서드 에이지(third age)입니다. 서드 에이지 시기에도 마음먹기에 따라 하고 싶은 것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이길원 이사장은 장년기에는 성질이 불같아 아내와 티격태격 싸움도 자주 하고 밖으로 나돌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이가 드니 역시 배우자뿐이라는 생각이 든단다. 서로 등 긁어주는 배우자가 최고란 마음이 절로 들면서 부부금실도 좋아졌다고 털어놓는다. “건강이 최고로 중요하다”는 그는 아내에게 “아프면 범죄다. 무슨 짓을 해도 좋으니 아프지만 말라”며 오후 4시엔 무슨 일이 있어도 손잡고 꼭 헬스클럽엘 간다. 아내 역시 “지금이 인생에서 가장 절정기”라며 행복해한단다. 자녀들도 자립했고, 이제는 스스로의 삶에서 뭔가를 이뤄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없어 욕망을 내려놓으니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자유로워진다는 설명이었다. 회장님의 본업 내지 생업은 사업이십니다. 국제PEN클럽 이사장 등 활동을 활발히 하시면서도 시를 500편, 시집은 8권이나 발간하셨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시인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만…. “제 본업은 시를 쓰는 일이고 생업이 사업이지요. 그런데 사업가와 시인은 모순된 것이 아닙니다. 사업이 인간의 마음을 얻는 것이라면, 시 쓰기는 인간을 탐구하는 작업입니다. 서로 통합니다. 제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마음에 드는 시 한 편을 쓰고 나면 짜릿한 쾌감을 느낀답니다. 시를 쓰면 사물이나 사람을 폭넓은 시각으로 이해하고 공감하게 됩니다. 그런 것이 사업에도 도움이 됐습니다.” 국제PEN클럽 회장을 역임하셨지만 본래 특수인쇄업체인 스티커 회사 ‘태평양그랜드’를 창업, 38년간 운영해오셨지요. 오너 경영자들은 한결같이 스스로 현직에서 물러나기 쉽지 않다는 말씀을 하시던데요. “내가 죽고 난 후 회사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해보았어요. 그렇게 생각하니 결론이 간단하더군요. 책상을 빼는 것이 회사 간판을 내리는 것보다 낫다. 나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욕심입니다. 성공한 기업이란 나 아니면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나 없이도 잘 굴러가는 기업이라고 다시 정의를 내려봤어요. 저는 단계적으로 후계자 교육을 시켰습니다. 제 시대 땐 경영자 혼자 장군 멍군 다 일을 했는데, 아들에게 일을 시켜보니 팀워크로, 시스템으로 일을 처리해 나보다 더 잘해낼 것 같더라고요. 내가 며칠 걸려 조사한 일도 반나절에 해내는 걸 보고 물려줘도 되겠구나 싶었습니다.” 경영 승계 수업을 할 경우 아버지의 ‘질문’이 ‘심문’으로 변해 갈등을 빚는 경우도 종종 있던데요. “묻고 기다려준 것이 내 나름의 비결입니다. 일찍부터 ‘너라면 이 경우 어떻게 하겠느냐? 상대라면 어떻게 할 것 같으냐?’라는 질문을 습관적으로 했어요. 직원들에게나 고객들에게나 경영자로서 얼굴이 서려면 물려받아 얻은 게 아닌 나름의 업적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게 부담을 준 말의 전부일 겁니다. 실패를 했을 때도 ‘네가 그러면 그렇지’ 하며 못미덥다고 전권회수를 하기보다는 ‘내가 방풍벽으로 있을 때 실수를 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실수도 경영 수업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아들들과는 편하게 술친구도 하지요.” 삼성 이병철 회장―이건희 회장―이재용 부회장은 3대에 걸쳐 사업 교훈으로 ‘경청’을 물려주었다고 하는데요. 자제분들에게 강조하신 것은 무엇인지요. “한마디로 신뢰입니다. ‘영업이란 제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너 자신을 파는 것이다, 능력이 야 웬만한 사람들이 다 갖고 있지만 호감을 얻거나 신뢰를 받는 사람은 흔치 않다, 사업의 기초는 상대방에게 신뢰를 주는 것이다, 신뢰하지 않는 사람과 누가 사업 파트너가 되겠느냐, 사업의 핵심은 호감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임기응변으로 얼렁뚱땅 넘기려 하지 말고 솔직해져라, 한 가지 거짓말을 덮기 위해서 백 가지 거짓말을 하게 되는 법이다’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야기했지요. 사업을 한 지 10년쯤 되자, 아버지 말이 무슨 말인지 ‘머리’가 아닌 ‘몸’으로 알겠다고 하더군요.” 2선으로 후퇴해 이른바 ‘뒷방 노인’이 되면 심리적으로 외롭다고들 하십니다. 한 퇴직 오너분은 실무 경영에 참여하고 싶어도 ‘(현직 사장인) 아들이 부르기 전엔 절대 집무실에 들어가지 않는다며 피눈물 나는 맹세와 마음수련을 거듭했다고 합니다. “허허, 저는 할 일이 많아서인지 더 즐겁던데요. 일주일에 한두 번 회사에 나가면 직원들이 모두 좋아해요. 제가 수전노처럼 굴지 않기 때문이에요. 경영 승계를 한 후 부자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아버지가 손을 놓지 못하고 간섭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우리 집은 오히려 아들이 ‘너무 회사에 무관심한 것 아니냐’고 제게 불평할 정도입니다. 저는 문단활동, 국제PEN클럽 활동, 망명 북한작가 돕기, 시창작 강의 등 할 일이 많습니다. 돈 문제도 내가 버는 만큼이 내 돈이 아니라, 내가 쓰는 만큼만이 내 돈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 맞는 사람들과 밥 먹고 술 마실 때 쓸 수 있을 정도면 되지, 뭘 더 바라겠습니까.” 흔히 나이든 분들은 젊은이들과 어울리고 싶은데, 그들이 어렵다며 피한다고 합니다. 젊은이들과 잘 어울리시는 비결이라도 있으신지요. “나이를 먹으면 남을 통해 행복을 찾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가 돼야 합니다. 스스로 행복해지는 방법도 찾아야 하고, 사람들에게 행복을 나눠주기도 해야 합니다. 역설적이지만 외로움을 즐길 줄 알아야 사교적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즐거워야 남도 즐겁지요. 안 그러면 주변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거나 피곤하게 만듭니다. 나이 많다고 거들먹거리며 대우나 받으려 하고 폼만 잡으면 꼰대로 소외당하지요.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저는 모임에 나가면 대우받으려 하기보다는 사람들과 잘 적응할 방법을 찾습니다. 나이 든 선배로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려고 하면 오히려 ‘식욕, 성욕 다 당신들 못지않다. 당신들보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더 젊다’고 농담을 하며 벽을 허물곤 한답니다.” 밥 잘 사고 젊은이들과 무람없이 농담을 주고받는다고 해서 그를 ‘세상모르는 팔자 좋은 금수저 출신 어르신’이라고 보면 오산이다. 이길원 이사장은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이다. 사업이 잘나갈 때는 있는 약속도 취소하면서 만나던 사람들이 사업이 어려워지자 없는 약속도 만들어 핑계를 대며 피했다. 이런 인간의 온갖 행태를 다 경험하고 목격했기에 그는 더 단단해질 수 있었다. 인간의 원초적인 모습을 보며, 조변석개의 인심을 겪으며, ‘사람은 누구나 제 입에 밥알 털어넣기 바쁘다’는 진리를 뼈저리게 터득했단다. 사람들에게 기대지 않을수록 외로움을 덜 탄다. ‘자립심=사교심’이 그의 지론이다. 역설적이지만, 경제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혼자서 버틸 줄 아는 내(耐) 고독력이 사교력과 모임적응력의 바탕이 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플루트를 새로 배우신다고 들었습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으신지요? “어려서부터 음악을 좋아했습니다. 다시 태어나면 음악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지요. 고등학교 때 아버지가 과학자가 되라고 강권하셔서 화학과로 진로를 정했는데, 막상 가보니 적성에 안 맞지 뭡니까. 또 사업을 할 때는 바빠서 악기를 배울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때 풀지 못한 원을 고희가 지난 지금 이루고 있는 것이지요. 지금 나이에 뭘 새로운 걸 배우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얼마나 즐거운지 모릅니다. 날씬한 플루트 몸매는 내 손놀림에 따라 음계를 달리합니다. 낮은 음으로 속삭이다가 높은 비음으로 유혹하면 저절로 감성에 젖게 되지요. 게다가 휴대도 간편해 노후에 배울 악기로 딱 안성맞춤이라 생각합니다.” 이길원 이사장을 만나는 날 겨울바람이 매섭게 불어댔는데 그날도 플루트 레슨을 받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는 “지금은 초보 수준이지만 프로 수준에 이를 때까지 꾸준히 연습할 생각”이라며 “손자들 앞에서 데뷔 음악회를 여는 게 향후 목표”라고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인생 3막, 서드 에이지에 대해 쓴 시가 있는지 물어보자 그는 노년의 관조와 여유를 다룬 자작시를 나직하게 암송하기 시작했다. 때론 강한 목소리로, 때론 부드러운 목소리로 시를 읽어나가는 그에게서 거친 파도와 싸우는 손마디 굵은 어부와 열정적으로 연기를 펼치는 배우의 모습이 느껴졌다. 낭만가객, 음유시인의 면모를 잃지 않고 고독하게 인생의 파도를 헤쳐 온 그에게 커튼콜의 힘찬 갈채를 보내고 싶어졌다. “브라보! 브라비시모, 유어 라이프!” 마침표 연습 2 이길원 내 연기(演技)가 비록 마음에 들지 않았더라도 아이야 커튼콜하며 무대 비우는 배우에 갈채 보내듯 박수를 쳐라. 최선을 다한 나의 연기다 막이 내린다고 우는 사람 있더냐. 촘촘히 등 돌려 무대 내려오는 나는 박수를 받고 싶다. 내 서던 무대에 누군가 또 열정을 보일 것 이제는 너의 차례 신(神)이 누구에게나 한 번 주는 배역 비록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최선을 다해라 산다는 건 주어진 역할에 따르는 한 편의 연극 같은 것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 2017-01-23 08: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