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월 뒤면 강찬기(59세, 남)씨는 정년퇴직을 한다. 회사의 배려 덕에 퇴직 준비를 어느 정도 마친 강씨이지만 아직 풀지 못한 미해결 과제 때문에 고민 중이다. 그의 고민거리는 다름 아닌 집안의 가계부다. 대부분의 남자 직장인들이 그렇듯이 강씨 역시 생활비가 어떻게 쓰여지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못했다. 하지만 정년퇴직이 다가오자 주 수입원이 중단된 이후의 생활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강씨는 은퇴생활을 위한 개인 용돈과 아내가 원하는 생활비 모두를 해결하려면 퇴직 후에 얼마나 더 일을 해야 하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얼마 전에 부부가 식사를 하던 중 그는 아내에게 생활비 내역에 대해 물었다. 남편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아내 김숙경(56세)씨는 대략의 생활비 규모만 얘기해줄 뿐 구체적인 내역은 복잡하다는 이유로 알려주지 않았다. 의외로 강경한 아내의 태도에 강씨는 당황스러웠다. 혼자 전전긍긍하던 그는 주변의 권유로 재무상담을 받아보기로 했다.
부부의 필요 은퇴자금 계산
상담 의뢰는 강찬기씨가 했지만 상담이 시작될 때는 부부가 함께했다. 은퇴상담은 부부가 함께하면 더 도움이 된다는 상담사의 제안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상담의 첫 주제는 ‘은퇴 후 부부가 생활하는 데 필요한 자금은 얼마나 될까?’였다. 아내 김숙경씨는 현재 가치로 매월 350만원이면 본인 용돈을 포함해 가정의 생활수준을 현재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강씨는 본인이 원하는 은퇴생활을 하려면 매월 150만원 정도의 자금이 필요할 것 같다고 했다. 또 퇴직 후에는 그동안 하지 못했던 취미생활과 사회활동을 충분히 하기를 원했다. 아내는 아내대로 강씨는 강씨대로 각자 원하는 은퇴생활비의 규모를 알고 놀라워했다. 일단 부부가 원하는 매월 500만원(현재가치)의 생활을 위해 필요한 은퇴자금 규모를 계산해보기로 했다. 생활비에는 매년 3%의 물가상승률이 반영되는 것으로 가정했다. 그리고 투자 성향이 보수적인 부부의 성향을 고려해 현재 자산은 은행권을 중심으로 세후수익률 연 1.5%로 운영된다고 가정했다. 부부의 은퇴기간은 30년으로 예상했다.
부부가 원하는 은퇴생활을 하려면 약 22억4000만원이 있어야 한다는 결과에 강찬기씨 부부는 두 번째로 놀랐다.
은퇴를 대비해 준비된 자산
다행히 강찬기씨는 직장생활을 정년까지 한 덕분에 국민연금으로 매월 130만원 정도를 수령할 수 있다. 퇴직연금과 아내가 개인적으로 가입해둔 개인연금도 있어 매월 120만원의 연금 수령이 가능하다. 매월 250만원 정도의 연금소득을 고려해 필요한 은퇴자금을 다시 계산해보니 14억 정도의 자산이 더 필요했다. 은퇴준비자산을 계산할 때, 국민연금은 물가상승률이 반영되지만 퇴직연금과 개인연금은 물가상승률이 반영되지 않는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현재 보유 중인 주택(10억)과 예금(2억)을 합해도 2억원이 부족한 금액이다.
그리고 아직 결혼하지 않은 두 자녀의 결혼자금(자녀 1인당 1억씩 예상)도 고려해야 한다. 몇 번의 계산 시뮬레이션을 더 거쳐 필요 자금 규모를 확인한 부부는 예상 지출내역을 세부적으로 정리해보기로 했다. 부부가 지출내역을 정리할 때 참고한 양식은 [표2]와 같다.
전화위복이 된 재무상담
부부가 함께 지출내역을 정리하는 동안 강찬기씨는 아내의 알뜰함에 놀라면서 감사한 마음까지 들었다. 김숙경씨 역시 한 직장에서 충실히 근무하며 가족들을 위해 경제적 터전을 마련해준 남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부부는 상담 과정을 거치면서 현재 준비된 자산으로 은퇴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월 400만원 정도의 생활비가 적당하다는 데 합의를 했다.
부부가 각각 50만원씩 양보해 아내는 자신의 용돈과 생활비를 포함해 300만원, 남편은 100만원의 용돈을 사용하기로 했다. 친척 경조사비나 외식비 등 가정의 공통 비용이라고 할 수 있는 항목들을 부부가 동시에 지출로 잡아놔 예산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되었다.
부부는 지출내역들을 정리해보며 예산의 중요성에 대해 공감했다. 그리고 사소한 다툼의 원인이었던 경조사비나 외식비 그리고 문화비 등의 예산에 대해서는 이번 기회에 지출 기준과 규모를 합의함으로써 향후 다툼의 소지를 예방하는 효과도 거두었다. 자칫 부부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는 생활비 문제로 재무상담을 하면서 서로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었고 전화회복의 기회도 되었다. 더불어 강찬기씨는 자신이 얼마나 더 일을 해야 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상담을 통해 부부는 역할과 스타일은 달랐지만 서로가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배우자로부터 인정받고 싶어하는 마음을 두 사람 모두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부부는 새로운 30년을 더 잘 이해하며 살아가자는 취지에서 부부심리상담까지 받기로 했다.
총 10회로 구성된 부부상담의 예상비용은 150만원. 올해 계획 중이던 남편의 정년기념 여행비로 충당하기로 했다. 강찬기씨 부부는 정년퇴직 기념여행을 ‘내면 여행’으로 떠나기로 한 것이다.
오랜만에 예술의 전당에서 재미있는 연극 한 편을 보았다.
제목이 이다. 팸플릿을 보니 네 명의 남녀주인공이 티격태격 싸우는 모습이 담겨있는 신나는 블랙코미디인 것 같은데 왜 제목이 '대학살의 신'일까? 궁금했다.
궁금증은 연극이 끝나고서야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
‘대학살의 신’ 이라면 나치의 유대인 말살 정책도 떠오르고 무서운 이미지가 생각난다.
이 연극은 고상한 척 우아해 보이려고 애쓰는 중산층 두 부부의 이야기로 대학살과는 거리가 멀 것 같았지만 실은 그들 내면에 도사리고 있던 자아가 튀어나오니 대학살의 현장처럼 아수라장이 된다는 의미로 제목을 그렇게 지은 것 같다는 필자 개인적인 생각이 든다.
우선은 주인공이 유명한 탤런트와 뮤지컬 분야의 베테랑들이다.
대한, 민국, 만세, 세쌍둥이 아빠인 송일국 씨와 그동안 보아 온 많은 뮤지컬에서 멋진 노래와 연기를 보여주었던 남경주 씨, 최정원 씨, 이지하 씨가 그 주인공이다.
이들이 뮤지컬이 아닌 연극에서 호흡을 맞추어 연기한다니 매우 흥미롭고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가 되었다.
예술의 전당 소극장은 아담한 크기에 경사도가 있어 앞사람에 가려 고개를 이리저리 기웃거리지 않아도 무대가 잘 보여서 다행이었다.
대부분 소극장이 좁은 좌석에 높낮이가 크지 않아 앞쪽에 요즘같이 늘씬하거나 건장한 젊은이라도 앉으면 머리에 가려 연극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날의 좌석은 무대와 매우 가까운 곳으로 손만 뻗으면 주인공과 악수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TV에서만 보았던 송일국 씨는 매우 편안한 이웃집 아저씨처럼 푸근하게 관객에게 다가왔고 뮤지컬 배우인 남경주 씨와 최정원 씨, 이지하 씨는 어쩌면 그렇게 능청스럽게 연기를 하는지 그들의 몸짓과 대사 한마디에 관객은 즐거운 폭소를 터뜨렸다.
2009년에 토니상 연극부문 최우수 작품상과 연출상, 여우주연상, 올리비에 상 최우수 코미디 상을 받은 이 작품은 프랑스 작가인 야스미나 레자의 고품격 코미디이다.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이 된다는 건 동서양이 다르지 않은가 보다.
이 연극도 두 아이가 놀이터에서 싸우다 한 아이의 앞니를 두 개나 부러뜨린 사건 때문에 피해자와 가해자의 부모가 분쟁을 조정하기 위해 만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피해자의 부모인 미셀과 베로니끄가 가해자의 부모인 알렝과 아네뜨를 집에 초대한다.
생활용품을 파는 직업을 가진 미셀 부부는 상대방이 변호사이므로 기죽지 않으려고 허세를 부리는데 평소 장식하지 않던 튤립 꽃을 한 아름 사다가 집안을 장식하고 고상한 척 대화를 해 나간다.
교양과 매너를 갖춘 듯한 가해자 부모인 변호사 부부는 실은 속물 변호사로 아들의 일엔 관심 없고 돈 되는 변호만 쫓는 남편과 그를 혐오하는 고상하고 우아한 모습을 가식으로 펼치는 이중인격 아내이다.
이들 부부는 서로의 속마음을 감추고 예의 바른 척하며 대화를 이어나간다.
그러나 피해 아이의 엄마는 가해 아이의 못된 점을 피력하며 반성과 직접적인 사과를 원하고 가해 아이의 엄마는 놀다가 생긴 일인데 자기 아이가 뭐 그리 잘못했나 라는 속마음을 숨기고 있다.
그러니 대화가 겉돌고 결국은 가해 아이 엄마가 남의 집에서 구토를 하고 이에 고상한 척하던 집주인은 감정이 폭발해 아수라장이 되어버린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설전을 벌이는가 하면 어느 사이에 각자의 부부가 평소의 불만을 터뜨리는 등 서로를 공격하며 대학살의 현장에 못지않은 상황이 펼쳐진다는 이야기다.
송일국 씨의 무난한 연기도 좋았고 뮤지컬에서만 보았던 남경주 씨, 최정원 씨, 이지하 씨의 온몸을 던지며 보여준 연기도 매력적이었다.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이 되어 위선과 가식으로 뒤범벅된 인간의 민낯을 까발린 고품격 코미디 한 편이 관객을 즐겁게 하고 한줄기 소나기처럼 시원하게 가슴을 쳤다.
중간 휴식시간 없이 한 시간 반 동안 이어진 이 연극은 열정적인 배우들의 연기에 언제 끝났는지도 모를 정도로 재미있었다.
우리 집의 식사 담당은 다른 보통 집과 달리 남편이다. 이유는 필자가 10여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져서 몸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맞벌이로 직장을 다니던 필자가 10여년 전 어느 날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진 것이다. ‘
필자가 쓰러지던 그 때는 지금처럼 TV 건강 프로그램도 많지 않아서 건강 상식이 풍부하지 않았고, 뇌졸중이 뭔지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가 회복은 했으나 후유증으로 지금까지도 몸의 왼쪽이 힘이 없고 불편한 상태이다.
주부인 필자가 쓰러지자 우리 가정 생활은 즉시 여러 가지로 비상 사태가 되었다. 세끼 식사는
물론 각종 세금 납부나 은행 문제 처리에 대하여, 남편이 하나도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필자가 남편의 정년 퇴직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쓰러졌는데, 대학 4학년 때 서울의 mbc 방송국에 아나운서로 입사해 중간에 PD로 전환해서 평생을 일했던 남편은 퇴직하자 마자 필자 대신 집안 일을 책임져야 하는 전업 주부로 직업을 바꾸어야만 했다.
발병 이후로 우리 집엔 하루 세 시간씩 도우미 아줌마가 와서 밑반찬도 해주시고 여러가지 집안 일도 도와 주신다. 신앙심이 매우 깊은 아줌마는 우리를 도우러 오시는 걸 커다란 기쁨으로 여긴다고 한다. 도울 수 있는 체력이 있는 것이 고맙고, 또 남을 도울 수 있으니 기쁘다고 한다.
며칠 전 도우미 아줌마가 못 오는 일요일 아침, 일찍 잠을 깬 남편이 어묵탕을 준비 했나 보다. 어묵 반찬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필자는 아침이라 입 맛이 없어서 맛있게 먹어지지 않는데 남편은 나의 입만 바라보며 맛이 어떠냐고 묻는다. 물론 자기의 요리 솜씨를 자랑하고 싶어서인 걸 안다. 이성으로는 모처럼 남편이 애 쓰고 준비한 음식이니 맛있다고 대답을 해야 하는데 하고 생각하면서도 실제 대답은 ‘그냥 오뎅 맛이네요’로 나오고 말았다.
자기 요리 칭찬을 잔뜩 기대한 남편이 나의 대답을 듣더니 그 동안 쌓였던 나에 대한 불만을 털어 놓으며 본격적으로 화를 내기 시작한다. 요리도 못하는 주제에 입만 기관장 급이라고 하면서….
그 날 하루 내내 우리는 기분이 상해서 세 끼를 침묵 속에서 어렵게 식사를 해야 했다. 화가 많이 난 남편에게 말을 붙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월요일에 도우미 아줌마가 일찍 오셨는데, 오자마자 남편은 아줌마한테 찰싹 붙어서 어제 자기가 한 요리에 대한 신퉁치 못했던 반응을 보고하면서 필자의 배려 없음을 불평한다.
이야기를 듣던 아줌마가 “언니를 (필자보다 10년 쯤 어린 아줌마는 날 언니라고 부른다) 그냥, 내 쫒아 버리시지 그러셨어요” 하며 100% 남편 편을 들어 준다. 물론 필자를 위한 작전인 걸 나는 과거의 경험으로 안다. 남편이 어디로 내쫓을까요? 하고 묻다가 웃음 바가지가 터져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아줌마의 지혜로 우리 집 부부 싸움은 쉽게 끝이 났다. 7년 가까이 우리 집안 일을 돕고 있는 아줌마는 우리 부부의 다툼을 조정하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그녀의 남편은 우리 동네 교회의 장로 일을 맡고 있는데 그녀 자신도 물론 독실한 신앙인이다. 평소에도 아줌마는 우리 집의 소소한 부부 싸움의 전문 조정관이다.
많은 퇴직 부부가 그렇겠지만 별 일 없으면 하루 종일 집에서 둘이서만 시간을 보내는 우리 부부는 아들의 표현대로 ‘잘 놀다가도’ 말다툼을 자주 한다. 주로 말이 주는 상처로 다툼을 하는데 한번은 나더러 마약쟁이처럼 커피를 마셔댄다고 해서 며칠 동안 말을 안하고 지낸 적도 있었다. 물론 몸이 약한 필자를 위해서 커피를 줄이라고 하는 말인 줄 다 알지만 같은 말이라도 마약쟁이가 뭐란 말인가? 결국 남편의 사과로 다툼은 끝이 나고 말았는데 그 후로 남편이 말을 조심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 눈에 보인다. 결국 나이들수록 서로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말조심을 해야 한다는 걸 깨달은 사건이었다.
우리 부부의 이런 말다툼이 있을 때마다 외부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는 현재의 우리 상태에서 아줌마의 조정은 필수적이다. 아줌마는 적절하게 양 쪽의 편을 들어주어서 우리의 다툼을 끝나게 한다. 그녀의 그런 모든 능력은 그녀의 깊은 신앙심에서 나온다는 걸 우리 부부는 누구보다도 잘 안다.
허비되기 쉬운 건 청춘만은 아니다. 황혼의 나날도 허비되기 쉽다. 손에 쥔 게 많고 사교를 다채롭게 누리더라도, 남몰래 허망하고 외로운 게 도시생활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머리에 들어온 지식, 가슴에 채워진 지혜의 수효가 많아지지만, 알고 보면 우리는 모두 은하계를 덧없이 떠도는 한 점 먼지이지 않던가. 그러나 살아 있는 동안 한 걸음 더 나아가야만 한다. 어둠 속을 부유하는 먼지의 신세를 면하기 위해, 저마다 나름의 별이 되기 위해, 타성에 젖은 삶을 바꾸는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스스로 자청한 귀촌이라는 점에서는 유쾌한 도발이거나 즐거운 실험이다. 정착에 성공한다면 주야간에 얻어 누릴 것이 많은, 자못 성대한 사업이 바로 귀촌이라는 논평도 널리 돌아다니는 게 사실이지 않던가. 서울에서 이름 난 회사의 간부로 근무했던 김창승(58)씨. 그는 오래도록 그저 평범하고 무난한 인생을 끌어왔더란다. 퇴근 뒤 주점에 들러 한잔 마시는 일이나, 휴일에 느긋하게 골프를 즐기는 정도를 여흥으로 알고 살았다. 뭐 하나에 빠지면 수면 밑바닥까지 함빡 빠져드는 버릇, 그게 특유의 개성이라면 개성이라지. 본인이 선택한 일을 숭상하는 사람임을 알 만하다. 그런데 아마도 김창승씨가 가장 애호하는 건 아내 김태영(57)씨라는 존재였던 모양이다. 아내는 귀촌의 깃발을 들고 앞장서 나섰으며, 그는 즉각 응했다는 게 아닌가. 그는 ‘충성!’을 속으로 외치며 대번에 아내의 뜻을 따랐던 것 같다. 이를 부부애의 한 절경이라 봐도 무리가 없을 터. 세상의 모든 아내들이 부러워할 정경이렷다. 동쪽으로 가자 하면 일쑤 당나귀처럼 어깃장을 부려 서쪽으로 냅다 뛰기도 하는 게 남편이라는 종족이니 말이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아내가 원하는 귀촌을 결행하기 위해 자신의 내부에 들어 있는 생각과 가치관 따위를 새삼스럽게 신중히 점검한 김창승씨는, 귀촌이라는 종목이 사실상 자신에게도 어울리는 탁월한 선택일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이후 매우 신속하게 일을 서둘렀다. 그는 곧장 회사에 사표를 냈다. 2014년 1월 엄동 철에 부부는 마침내 전남 구례군 토지면의 시골로 귀촌했다.
“아내의 고향이 구례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가 인생 후반을 맞이하고 싶다는 게 아내의 소망이었어요. 이 사람은 초등학교 교사인데, 고향의 작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텃밭농사를 통해 순수한 먹거리를 거두어 먹고, 자연의 품안에서 평온한 생활을 하며 늙어가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던 거죠. 어릴 적의 추억이 서린 시골에 대한 향수가 소박하지만 절실한 꿈으로 부푼 것 같았어요. 가만히 생각해보자니 저에게도 신선한 전환일 수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바로 일에 착수했습니다. 집안 어른들의 반대가 심했지만 밀어붙였어요. 어느덧 귀촌 3년의 세월이 흘렀는데요. 아내는 물론 저 역시 크게 만족하며 살아갑니다.”
김창승씨 내외가 깃들어 사는 집은 오래된 기와집. 마당엔 갖가지 나무와 화초들이 자라고, 온갖 작물들이 자라는 텃밭도 솔숲처럼 싱그럽다. 낡고 빛바랜 태로 세월의 풍상을 웅변하는 고가(古家)가 자아내는 푸근한 정감. 길차게 자란 채 집을 빙 에두른 대나무들이 뿜는 청신한 기운. 남도의 전형적 농가의 구색이며, 수더분해서 다분히 이상적인 조경이며, 꾸민 바 없이 자연스럽게 잘 꾸며진 미학의 공간이다. 아니, 이토록 고리타분한 집에서 살려고 시골을 내려왔소? 하고 딴죽을 걸 사람이 드물지 않겠지만, 인간이란 저마다 다양한 취향을 관철하며 즐기며 살아가게 돼 있는 동물. 김씨 내외는 이 옛집이 취향과 구미에 맞아 오직 만족스럽다는 거다. 집 뒤 저편으로는 지리산이 거인의 눈을 껌벅이고 있으며, 집의 전면으로는 수려한 섬진강이 요요히 남실거린다. 명당에 들어앉은 집이라 간주한 내외는 이 집을 아예 사서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으나 여의치 않았단다. 집주인이 집을 팔 의향이 눈곱만치도 없어서였다. 그래서 당분간 그냥 빌려 쓴다.
먹거리 정도는 자급하기로
귀촌이나 귀농을 하는 사람들이 맨 처음 해결할 문제는 단연 거처나 땅을 확보하는 일이다. 게다가 시골의 집값, 땅값은 늘 생각보다 비싸며, 매물 자체가 드물며, 뭘 모른 채 엄벙덤벙 순진하게 덤벼들었다가는 잔머리 굴리는 재주를 가진 이들의 농간에 깜박 속아 넘어갈 수도 있다.
“귀촌 시 가장 어려운 문제는 역시나 들어가 살 집을 장만하는 일입니다. 시골에 빈집은 드물지 않지만, 대부분의 집주인들이 절대 팔지 않겠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어요. 도시에 나가 사는 자제들이 언젠가는 들어와 살거나 별장 용도로 쓰겠다는 생각들이니까요. 그렇다면 현지의 사정도 파악할 겸 잠정적으로 세 들어 살 집을 마련하는 게 현명한 방법이지만, 딱히 임대할 만한 집도 드문 게 현실입니다. 저희도 상당한 공을 들이고서야 이 집을 빌릴 수 있었습니다. 우선은 부지런히 발품을 파는 수밖에 없지요.”
“집 지을 땅이나 농토를 구입하려고 10년을 돌아다녔다는 사람도 있습디다. 뜸들이다 늙어버리는 것이죠. 이상적인 터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도 과욕이지 않을까 싶어요.”
“자연 경관이 빼어난 땅을 덜컥 샀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개발이나 건축을 할 수 없는 땅을 속아서 사는 케이스죠. 계절마다 땅 사정이 다르다는 점도 유념해야 해요. 여름엔 바람골이라 시원하겠다 싶어 사들였다가 겨울이 돼서야 유난한 얼음골이라는 걸 알고 낙심하는 수가 있으니까요. 땅이나 집의 거래 때 마을의 내부 가격과 부동산 업체에 내놓는 가격차가 크게는 두 배에 달한다는 점도 염두에 둬야 해요.”
“선생 내외는 혹한기 1월에 여길 들어왔어요. 춥고 외롭고 불안하진 않았나요?”
“고가의 보일러를 손보고, 벽지를 바르고, 그러곤 그냥 살았어요. 당시엔 TV도 없었어요. 온천지에 깜깜한 밤이 내리면 7시부터 잠을 잤죠. 그렇게 긴긴 겨울을 좀 스산하게 지냈으나, 어느덧 봄이 왔고요, 그 첫봄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몰라요. 이어 여름이, 가을이 오가고, 절기에 맞춰 농사가 시작되거나 마무리되고, 온갖 꽃들이 피고 지고, 참으로 감동적이었어요. 꿈꾸듯이 지낸 날들이었어요.”
“일은? 농사는? 그저 자연 풍경을 관람하며 지냈나요?”
“아내가 교직에 있고, 나름 물적 여력도 좀 있고 해서 황급히 돈벌이에 나서진 않아도 되는 여건이었어요. 그렇지만 이왕에 시골에 살게 됐으니 부부의 먹거리 정도는 자급을 하자, 뭐든 소소하게나마 농사도 지어보자는 생각으로 농토 400평을 샀습니다. 거기에 주로 콩을 심어 된장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귀촌과 귀농을 겸한 방식으로 살아온 셈이죠.”
도시라고 왜 매력 요소가 없을까마는, 한결 안전한 삶이 시골에서라고 거저 주어질 리가 있을까마는, 인구와 차량과 소음이 거품처럼 바글거리는 도회의 생활이란 시골에 비해 피로와 고독을 가중시키는 게 사실이다. 차갑고 쓸쓸한 인간관계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은 곳, 타산이 없는 동행을 만나기 어려운 장소가 도시이기도 하다. 그러나 경쟁과 긴장이 덜한 시골에서 권태를 피해 생기를 유지하고 행복을 구가한다는 게 용이한 일만도 아니다. 적막하거나 적적한 시골살이에 무기력하게 코 꿰게 된다면 그 역시 낭패가 아닐 수 없다. 김창승씨는 가급적 일을 만들어 거기에 온전히 투신하는 게 복된 삶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이즈음의 그는 거의 일벌레다.
“시골 인심은 정말 순후해”
“콩농사와 벼농사, 그리고 양봉도 합니다. 벌통 20개를 운영하고 있어요. 왜 양봉이냐? 지리산 지구인 이곳엔 산야초가 타지에 비해 두 배 정도 많아요. 벌들이 꿀을 물어올 꽃들이 지천이라는 얘기죠. 과수농사도 좀 합니다. 아내는 저보고 일을 벌이지 마라, 좀 편하게 살자, 그렇게 투정처럼 말하지만 일이 즐거우니 어떡하나요? 물론 농사로 아직 수입을 올리진 못하고 있어요. 경험을 축적하는 단계라는 거.”
“구례군 귀농귀촌협회장이기도 하죠? 귀농귀촌인들의 실태에 훤하겠어요. 그들은 어떤 문제에 가장 큰 애환을 느끼죠?”
“만족할 만한 소득을 올리기가 어렵다는 점이죠. 농사로 돈을 만지기란 실로 어려워요. 더구나 막연히 뭔가 잘되겠지 하고 무작정 들어온 경우는 실패하기 십상이에요. 시골에 내려와 살고자 한다면 미리 도시에서 한 가지쯤 기능을 익혀두는 게 현명하다고 봅니다. 목공, 배관, 전기기술, 중장비 또는 숲 해설사라거나, 유용하게 써먹을 기능 분야가 많으니까.”
“마을 주민들과 흐뭇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어떤 처신이 필요할까요? 융화에 실패하고 패잔병처럼 철수하는 이들이 드물지 않아 묻는 질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대목이죠. 흠. 전통 농경사회의 특성이랄까, 시골 주민들은 ‘외지 것들’ 또는 ‘도회지 놈들’에게 일단 경계심을 품게 마련입니다. 개나 끌고 다니며 괜히 거들먹거리는 사람들, 온갖 참견을 하고, 육하원칙을 내세워 따지고 비판하는 부류들을 좋아할 리가 없죠. 제가 온몸으로 느낀 거지만, 시골 인심은 정말 순후해요. 주민들 속으로 겸손하게 들어가야 합니다. 돈 드는 일도 아녜요. 경로당에 수박 한 덩이 들고 가서 노인들과 어울리는 일은 사실 즐거운 일입니다. 마을 사람 하나와 싸움을 하면, 그건 결국 마을 전체에 싸움을 거는 일과 마찬가지라는 걸 알아야 해요. 존중하라! 그리 말하고 싶어요. 우리네 어버이들이 대부분 시골 출신 아니겠어요?”
자아도취엔 리스크가 많지만 겸허한 실천으로는 길이 열린다. 시골이라는 공동체에서 나를 낮추면 뜻밖에도 쏟아져 들어오는 것들이 많다. 우호적인 눈길, 미더운 관심, 끈끈한 유대감이 시골살이를 안정적인 쪽으로 데려다준다. 그렇다면 귀촌이란 수신(修身)이구나! 교만하거나 우매한 나를 독사의 눈으로 냉철하게 돌아봐 교정하는 교실에 들어선 것이라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자신을 세우되 이웃을 품는 일, 끔찍한 아귀다툼의 세태에서 한발 떼어 자연과 인간에게 순하게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는 일, 이는 음풍농월만큼이나 발랄한 자아실현의 길이지 않겠는가.
“아침저녁으로 새롭게 변하는 자연 풍경들이 정신과 영혼을 정화해주는 것 같아요. 이건 도시에선 도저히 느낄 수 없는 행운이죠. 산과 들과 강, 하늘과 별과 숲을 바라보면 때로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오르기도 하고, 때로는 환희가 가득하기도 합니다. 마치 감동적인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할 때처럼…. 이런 경험을 반복하면서 내가 비로소 내 삶의 주인이 되었다는 주체의식과 생기를 깨달아요. 예전엔 아내가 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로운 섬처럼 저를 느끼곤 했으나, 이젠 온전한 기쁨을 느껴요. 뭔가 한층 높고 고결한 곳에 있다는 실감이랄까, 그걸로 만족스러운 겁니다.”
삶의 일상에 자연이 붙어 있을 경우, 행복의 빈도는 더 잦아진다. 강바람에 들이 일어서고 눕는 풍경을 바라보는 일, 나뭇가지 하나를 집 삼아 밤을 나는 박새를 바라보는 일, 별이 모이는 걸 바라보는 일, 이 모든 소소한 풍경들에서 내 심장의 볼륨이 높아지는 걸 깨달을 수 있는, 시골살이란 어쩌면 낙원으로의 입문이다. 낙원의 한 치 곁엔 늘 연옥이 있는 법이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평화보다 전쟁의 연속이었다. 지금의 평화는 극히 이례적이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인간 사이도 마찬가지다. 화합보다 갈등을 빚는 시간이 더 많게 느껴진다. 사소한 대화를 하다가도 작은 말의 가시에 상처를 입었던 경우는 얼마나 많았던가. 그럴 때마다 끝까지 다가갈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생각에 좌절감이 밀려오곤 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사소한 감정싸움에서 복잡한 다툼까지 대부분의 갈등은 ‘다름’보다는 ‘거리’ 조절의 실패에서 비롯하는 경우가 많음을 알게 된다. 가족 간에도 그렇다. 부모의 지나친 관심이 아이의 반발을 사듯 친구 사이에도 거리 조절이 안 되어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많다. 이럴 때 대부분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이 치명상을 입는다.
오래된 친구 사이일수록 이 거리를 잘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까웠던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카메라 포커스가 맞지 않듯 내가 그동안 알고 있던 거리 측정에 차질이 발생한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우화처럼 가까이 다가가면 가시에 찔리고 멀어지면 추위에 떨게 되는, 가시털로 가득한 호저(豪猪) 부부 같은 딜레마다.
친구들 간에도 약자인 친구가 늘 상처 입는 것은 이런 이치 때문이다. 주어진 환경이 열악해 따뜻한 곳으로 가까이 가려다 날카로운 가시에 찔리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처해 있는 환경과 처지의 다름에 상관없이 다툼 없고 평안한 삶을 누리려면 서로 간의 거리를 적당하게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비결이 아닐까 한다.
나이 들면서 인간관계가 적당한 속도로 멀어지는 것이 서로를 지켜주는 현명한 방법이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그것은 인간뿐만이 아니라 사물과도 마찬가지다. 옛사람들은 이를 관조(觀照)와 달관(達觀)으로 표현했다. 관조는 사물과의 관계에서 필요한 것이고 달관은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필요한 것이다. 우리 선조들은 이 두 가지가 인생을 사는 지혜라고 생각했다.
특히 나이를 먹어가면서 물질에 욕심을 내는 것처럼 추한 모습은 없다. 모든 것을 서서히 내려놓고 떠날 준비를 해야 할 나이이기 때문이다. 욕심을 버리고 물질을 멀리하려면 적당히 거리를 두는 방법밖에 없다. 그것이 관조의 힘이다. 관조의 태도를 견지하다 보면 모든 것이 부질없게 느껴지고 물욕이 사라진다. 인생의 참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은 덤이다.
달관한 사람은 남과 부딪힐 일이 없다. 깨우치지 못한 인간들이 사소한 시비로 씩씩댈 때 달관한 친구는 옆에서 조용히 미소 짓는다. 감정의 과잉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 알기 때문이다. 선천적 달관자가 가장 행복하나 그렇지 못하다면 후천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인생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고 설파한 찰리 채플린의 말은 곱씹을수록 고개가 끄덕여진다. 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아닌 일에 매달려 자신의 감정을 학대하고 삶을 피폐하게 만든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김민기의 노래 ‘봉우리’의 가사처럼 세상을 내려다보며 바다를 생각할 정도이면 적당한 거리가 아닐까.
김성은이 공연할 때면 어김없이 찾아와 무대 안팎에서 호들갑을 떨면서 “내가 스텔라의 남편이요”라고 외치는 남자가 있다. 바로 그녀의 이탈리아 남편 카를로다. 대기실에서는 이탈리아어로 예쁘다는 의미의 “Bella Bella”를 연발한다. 소프라노 Stella Kim 김성은의 목소리만큼 아름답고 특별한 사랑과 사람을 향한 따뜻한 시선을 들여다봤다.
현재 유럽에서 프리마돈나로 왕성한 활동을 하는 소프라노 Stella Kim의 한국명은 김성은이다. 이탈리아 베로나 아레나극장에서 동양인 최초로 오페라 의 주인공인 질다 역을 멋지게 열연해서 유럽 현지 언론으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스페인 비냐스 국제콩쿠르, 플라시도 도밍고 국제콩쿠르, 이탈리아 토티 달 몬테 국제콩쿠르, 스페인 아라갈 국제콩쿠르 등 유명 국제콩쿠르에서 우승한,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소프라노다.
스페인 황실 신년음악회에서는 플라시도 도밍고와 협연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얼마 전에는 예술의전당에서 김성은 초청독창회가 음악평론가들과 애호가들의 찬사 속에 끝났다. 음악을 좋아하는 한량 이봉규도 감각적이고 매력적인 독특한 음색을 온몸으로 발산하는 김성은 공연을 놓칠 리가 만무하다. 그날 무대에서 뿜어내는 그녀만의 오묘하면서 섹시한 타고난 천상의 목소리를 접하고는 그녀가 왜 유럽에서 그토록 주목을 받는지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맑고 호소력 넘치는 목소리
나는 그동안 수많은 소프라노 공연을 국내외에서 감상했지만 음악 전문가가 아니라서 그런지 목소리의 차이를 선명하게 느끼지 못했다. 그저 고음의 꾀꼬리처럼 아름다운 소리들이 음색에 따라 각자 조금씩 차이가 있다는 점은 느꼈지만 이렇게 확연한 차이를 느껴보기는 김성은이 처음이다.
대중가요 가수로 말하자면, 전통적인 여가수들과 심수봉 목소리의 차이를 금방 느낄 수 있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재즈 가수로 말하면 루이 암스트롱의 독특한 음색이 다른 재즈 가수들과 확연하게 다른 것처럼, 김성은의 목에서 흐느끼듯 터져 나오는 음색은 가히 독보적이다. 여태껏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은 목소리다. 물론 비전문가로서 음악을 그저 즐기기만 했던 한량 이봉규의 평가이기에 음악평론가들이 내 글을 읽으면 생각이 다를 수는 있겠지만, 그동안 즐겼던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솔직하게 느낀 점이다.
요즘은 문화평론가들이 정치평론을 하고 변호사나 의사들도 너도나도 TV에 나와 정치평론을 해대는 자유로운 세상이기에 나도 이 정도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키다리 아저씨와의 운명적 만남
아름다운 프리마돈나를 사로잡은 사람은 아홉 살 연상의 이탈리아 심리상담사(psychology counselor) 카를로다. 올해로 벌써 결혼 20년 차. 그와의 인연도 오페라가 맺어주었다. 오페라 정극의 주인공을 뽑는 콩쿠르에서 1등(주역)에 뽑혀 이탈리아의 트레비조에서 40일간 생활하게 되었는데 그때 그녀에게 방을 내준 집주인이 카를로다. 당시에는 남자로 보이기보다는 거처할 집을 내준 키다리 아저씨로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 후 약간의 세월이 흘러 다음번 이탈리아 공연 때 만났는데 카를로의 식구들이 따뜻하게 대해줘 강한 인상이 남았다. 인연이 되려니까 하늘도 도왔는지 이탈리아 공연 스케줄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레 만날 기회도 늘어났다. 그렇게 시작된 연애가 4년쯤 무르익어갈 무렵 그녀의 어머니가 이탈리아를 방문했는데 카를로의 인간미에 반해버렸다.
“왜 결혼 안 하냐? 카를로와 결혼하든지, 아니면 지금 깔끔하게 헤어져라!” 하고 압박을 해온 것이 결정적으로 통해 트레비조 대성당에서 1997년 결혼했다. 당시 김성은과 카를로의 결혼은 이탈리아에서 화제였다고 한다.
이탈리아 남자와 동양인 프리마돈나의 결혼은 당시로서는 이탈리아에서도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국제결혼의 장점을 물으니, “국제결혼 이전에 여자와 남자가 만나서 사랑하고 결혼한 것이고, 이탈리아 남자와 한국 여자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고 힘주어 말한다.
결혼한 지 20년 됐고 이탈리아에서 생활한 지도 그 이상 되기 때문에 김성은은 국제결혼의 실감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오히려 공연을 위해 가끔 한국에 오면 낯설고 어색할 때가 많단다. 이탈리아에도 고부간의 갈등이 있겠지만 시어머니는 그녀를 아주 사랑하고 예쁘게 봐준다. 외국 며느리라서 봐주는 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존경받는 오페라 가수가 내 며느리라는 것이 자랑스러워서 그런 것 아닐까.
이탈리아도 점을 많이 본다니 놀랍다. 카를로가 김성은을 만나기 전 브라질 여의사와 사귀고 있을 때 점을 보았는데 점쟁이 왈 “너는 동양 여자랑 결혼한다”고 했단다. 카를로는 그 소리를 듣고 무척 충격을 받았다. 그 후 그 말이 귓가에 계속 맴돌았고 그러던 어느 날 눈앞에 동양 여인 김성은이 나타나 운명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사랑에 눈이 멀어 콩깍지가 씌면 아무거나 마구 갖다 붙이면서 운명론자가 되어버리는 경향은 이탈리아 남자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동양계의 귀하고 아름다운 프리마돈나의 마음을 훔치려고 지어낸 말인지 진실인지는 카를로만이 알 것이다. 카를로의 직업이 심리상담사이기에 합리적인 의심은 들지만 이 정도로 넘어가자!
‘범생’ 남편과의 찰떡궁합
프리마돈나라고 해서 한량 이봉규가 우아한 질문만 하고 보내줄 리가 없다.
“이탈리아 남자들이 바람을 많이 피운다는데…”라는 도발적 말에 그녀는 웃으면서 “내 남편은 삼식이”란다. “하루 세끼를 집에서 먹는 ‘범생이’라서 바람피울 줄도 모를걸요?” 남편을 만나본 적이 없기에 그 말을 믿어야지 어쩌겠나? 김성은이 공연할 때면 어김없이 찾아와 무대 안팎에서 호들갑 떨면서 “내가 스텔라의 남편이요”라고 외친단다. 대기실에 찾아와서는 이탈리아어로 예쁘다는 의미의 “Bella Bella”를 연발한다. 이탈리아에도 팔불출이 있기는 매한가지.
심지어 아내의 노래를 CD로 들을 때도 눈물을 펑펑 쏟는다고 하니 아까 김성은이 한 말을 믿기로 했다. 두 사람은 부부싸움을 할 때도 여느 부부와 다르다고 한다. 김성은이 “너는 왜 코가 삐뚤어졌니?” 하고 남편에게 시비를 걸면 카를로는 “너는 왜 코가 납작하니” 하며 응수한단다.
이탈리아 남자들의 코가 중간에 약간 휘어진 것을 지적하면서 놀리면 한국 여자들의 납작한 코를 얘기하며 맞받아친다고 하니 유치한 사랑싸움의 극치다. 그만큼 다정하다는 것을 자랑하는 말로 들렸다. 결혼생활이 오래되고 느긋해서 그런지 카를로는 10년 전까지만 해도 “여자는 10년 살고 바꿔야 한다”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하더니, 이제는 “뭐든 다 해줄 수 있으니까 제발 이혼만 요구하지 마라!”고 어리광을 핀다고 한다.
그녀는 공연 등으로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아도 다 이해해주면서 외조를 해주는 카를로가 늘 고맙다. 이탈리아 남자와 한국 남자의 차이를 묻자 “이탈리아 남자들은 가족 구성원을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 각자의 중요하고 개별적인 사생활을 존중해준다. 그렇게 자유를 얻는 대신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한국 남자들은 권위적이긴 하지만 모든 책임을 감수한다. 간혹 힘들고 귀찮을 때는 한국 남자 같은 스타일에 의지하고픈 마음도 든다”고 솔직히 털어놓는다.
다시 태어나도 이 남자랑?
“다시 태어나도 이탈리아 남자랑 결혼하고 싶냐?”고 물었더니 “한국 남자랑 안 살아봐서 다음 생에는 꼭 한국 남자랑 살아보고 싶다”며 깔깔대고 웃는다. 그런데 그 눈가에 진심이 묻어나온다. 20년 넘게 이탈리아 남자와 외국에서 생활했으니 고국이 그리웠을 것 같다. 또 한국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한국 남자와 살아봤으면 하는 마음도 슬쩍 해봤으리라.
완벽한 결혼생활이 어디 있으랴. 김성은은 지금 행복하기에 다음 생의 바람을 얘기할 수 있는 것 아닐까? 만약 행복하지 않으면 당장 이혼하고 보따리 싸서 한국으로 날아올 것 같은 성격의 소유자임을 한량 이봉규는 간파했다. 승부욕이 강하고 처절한 노력 끝에 유럽에서 성공한 프리마돈나가 되었는데 싫은 결혼을 참으면서 살 김성은이 아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지금 나름대로 만족한 결혼생활과 이탈리아 생활을 즐기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12세의 딸 알레그라의 사진을 보여준다. 기가 막히게 예쁘게 생겼다. 알레그라를 성악가로 키우고 싶은데 엄마를 안 닮아 노래를 못한다며 아쉬워한다. 그런데 펜싱을 배운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딸이 이탈리아 3개 도(道)의 12세 펜싱대회에서 2등을 했단다.
“제2의 김연아를 기대해보라! 얼굴도 예쁘니까 올림픽에서 금메달 따는 순간 세계적인 대스타가 될 것”이라고 부추기니까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 프리마돈나 김성은도 별 수 없이 자식바보다. 52세의 소프라노는 대체로 은퇴할 나이이지만 그녀는 오히려 지금이 전성기다. 그 원동력은 가족의 사랑이 아닐까? 그녀는 말을 할 때도 마치 노래하는 것 같다. 고음의 목소리로 흥얼거린다. 인터뷰하는 동안에도 마치 한 편의 아름다운 오페라를 감상하는 느낌이어서 행복했다.
하루는 남편이 필자를 조용한 찻집으로 불러냈다. 평소에 안 하던 행동을 해서 석연찮은 생각이 들었다. 얼마 만에 오는 찻집인가. 그래서일까 전혀 모르는 사람과 앉아 있는 느낌이 들었다.
커피 향을 맡으며 한 모금 마시려는 순간 남편은 다짜고짜 “나 집을 나가볼까 해, 며칠만이라도 나가서 살아볼래” 하고 말했다. 막상 그런 말을 듣고 보니 머릿속이 하얘졌다.
필자는 “누가 할 소리…” 하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말한 것은 어느 정도는 수긍한다는 의미였다. 물론 그놈의 사춘기 두 아들만 아니었으면 필자가 할 소리였다.
당시는 남편의 목소리도 지겨울 때였다.
매일 다리라는 바지와 와이셔츠 가지고 싸운 날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참을 만큼 참고 살던 시절이었으므로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남편은 집으로 돌아와 주섬주섬 가방에 짐을 싸더니 그대로 나가버렸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게 허락을 해놓고 막상 저녁이 되면 베란다 창가에 앉아 아파트 안으로 들어오는 차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던 것이다,
현관문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에도 귀를 기울였다. 어느 날부터인가는 자꾸 비관적인 생각만 들었다. ‘만약 남편이 끝끝내 돌아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지?’ 경제적인 면도 걱정됐다.
두 아들의 말대꾸는 혼자서 어찌 감당해야 하나, 그래도 남편이 있을 때는 아이들이 움찔하기라도 했는데 아빠가 없으니 그야말로 대들 기세였다. 그저 필자 살아갈 걱정만 태산이었다. 남편이 어디서 밥을 제대로 먹고 있는지는 별로 걱정되지 않았다.
잠을 자도 푹 자지 못했다. 한밤중에 잠을 깨는 날이 많았는데 웅크리고 자는 필자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베개를 가슴에 안고 거실을 서성이기도 했다. 하루 이틀 정도는 홀가분했는데, 사나흘이 지나자 불안이 엄습해왔다. 시누이에게 전화를 걸어 남편의 근황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몸이 허해서 일어나는 불안증일지도 모른다 생각하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다시 남편을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 사람은 필자에게 무슨 말을 할까.
남편과 같은 공간에 있을 때는 아웅다웅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자주 싸움을 했다. 그런 상대가 없어졌으니 후련할 일인데 불안해하면서 창문 앞에서 서성대는 모습이라니.
남편이 다시 내 앞에 떡하니 나타난다고 해도 오순도순 살 자신도 없으면서 말이다. ‘속이 시원하지가 않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더니 그런 건가?’ 더럭 겁이 났다. 온갖 잡념들이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심장도 쿵쿵댔다.
얼마 후 “나야 나” 하고 전화가 왔다. 반가운 마음이 들었지만 퉁명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무슨 짓을 하면서 지냈는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이혼을 하지 않으려 마음을 먹은 이상, 그냥 모른 척 살아야만 했다. 그는 구렁이 담 넘듯 성큼 집 안으로 들어섰다.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세상에 있는 욕을 다 퍼붓고 싶었지만 별말 하지 않았다. 관계는 더 서먹해졌지만 그래도 그의 그림자라도 있는 것이 덜 쓸쓸했다.
필자는 요리하는 것을 즐겨하는 편이다. 평생 그토록 칼을 잘 쓰면서도 지금까지도 자르지 못하는 게 있으니 바로 부부의 연이다.
5월, 캘리포니아는 눈부시다. 겨울 내내 인심 좋게 내린 비에 캘리포니아는 몇 년째 심각했던 가뭄이 완전히 해갈됐다. 덕분에 온갖 풀이며 나무들이 싱그럽게 초록을 품었고 꽃들은 만개했다. 도저히 집 안에서는 감당이 안 되는 날씨. 꽃무늬 스카프라도 두르고 나서보기로 했다.
마침 시간을 내서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언젠가 ‘LA 인근 가볼 만한 곳’이라는 검색어로 눈에 담아두었던 곳이다. 남가주에서 프러포즈와 결혼식 장소로 손꼽힌다는 곳. 그러나 이름만 들어서는 전혀 로맨틱할 것 같지 않은 ‘닉슨 기념관’이다. 캘리포니아 오렌지 카운티의 작은 도시 요바린다는 미국의 37대 대통령이었던 리처드 닉슨의(1913~1994) 고향이다. 요바린다 시에 있는 닉슨 기념관은 미국 내 13개의 전직 대통령 기념관 중 하나로 대통령 기록 전시관, 닉슨 생가 그리고 닉슨 부부의 묘지가 있다. 총 9에이커(약 1만1000평)에 이르는 이곳은 원래 닉슨의 아버지 프랭크 닉슨의 오렌지 농장이었다. 1990년 닉슨의 가족과 지지자들이 닉슨 재단을 설립해 기념관을 만들어 관리하다가 지금은 미국 문서보관소가 운영하고 있다. 중앙 홀에 들어서는 순간 한눈에 닉슨의 대형 초상화가 눈에 들어왔다. 그의 이름 앞에 항상 붙어 다니는 ‘임기 중 불명예 퇴진한, 미국 역사상 가장 불명예스러운 대통령’이라는 수식어 때문일까. 그림 속 그의 눈빛엔 회한이 담겨 있는 듯하다. 비슷한 상황에 있는 고국의 한 얼굴이 떠올랐다. 아마도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조금 무거워지는 마음에 봄나들이 장소를 잘못 택한 것이 아닐까 후회하며 한 무리의 사람들을 따라 걸음을 옮겨본다. 빨강머리 앤이 살고 있을 것 같은 하얀 이층집이 눈에 들어오자 마음엔 다시 봄바람이 분다. 지금도 사람이 사는 것처럼 잘 보존되어 있는 닉슨의 생가다. 완벽히 어울리는 커다란 호두나무는 수령이 100년도 넘은 고목이다. 닉슨은 이곳에서 5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나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우등생이었던 닉슨은 하버드대학으로부터 입학 허가를 받지만 집안 사정으로 인해 근처 휘티어칼리지에 입학한다. 후에 듀크대학 대학원에서 법학을 전공, 변호사가 되지만 워싱턴 정가에서 그는 학력으로 인한 콤플렉스가 적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해군에서 군복무를 마친 닉슨은 1946년 공화당 하원의원으로 정치인생을 시작한다. 이후 상원의원에 이어 1952년 아이젠하워의 러닝메이트로 나와 부통령에 당선된다.
1960년 기세를 몰아 대통령에 출마하지만 젊고 파워풀한 이미지의 존 F. 케네디에게 패배하고 만다. 그 유명한 TV 생방송 토론이 바로 이때의 이야기다. 하지만 8년 후, 닉슨은 결국 미국 37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이때부터 닉슨은 어쩌면 미국의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기록되었을 만한 많은 업적을 만들어낸다. 닉슨독트린 발표로 베트남전을 끝내고 중국과의 수교로 냉전시대를 종식시킨 평화 대통령. 그는 세계사를 다시 만든 인물이었다. 적어도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는. 닉슨의 업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기념관을 지나면 마지막 ‘워터게이트’ 전시관에 닿게 된다. 전시 내용은 이곳이 닉슨기념관이라는 사실이 민망할 정도로 노골적이다. 이전까지 닉슨의 업적과 미국의 위대함에 감동하던 관람객들은 하나같이 얼굴이 굳어진다. 닉슨의 수치이자 미국의 민낯이기 때문이다. ‘워터게이트’는 미국 역사상 최대의 정치 스캔들이다. 1972년, 워싱턴 D.C.의 ‘워터게이트’ 건물에 입주한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던 침입자들이 체포된다. 이들은 공화당 비밀조직 멤버들. 당시 재선 선거운동 중이던 닉슨은 자신의 관련 여부를 단호히 부인했고 그해 압도적인 표 차이로 재선에 성공, 38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하지만 그의 부정 행위는 결국 서서히 드러난다. 닉슨은 기자회견에서 “나는 사기꾼이 아니다”라며 기자들을 쏘아붙였지만 결국 그가 가담했다는 증거가 담긴 비밀 테이프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다. 국회청문회가 열렸고 끝까지 아니라고 잡아떼던 닉슨은 결국 18분 30초가 사라진, 편집된 녹음 테이프를 내놓았다. 거짓말을 일삼고 국민과 국회를 기만한 대통령은 신임을 잃었다.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통과되고 탄핵이 확실시되자 1974년, 닉슨은 스스로 사임한다. 장장 2년에 걸친 싸움이었다. 전시관은 이 모든 것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 헬기에 올라 백악관을 떠나던 닉슨 부부의 모습이 비디오로 무한 리플레이되고 있다. 닉슨의 생가 뒤편에는 닉슨과 그의 아내 패트 여사의 묘지가 있다.
퇴임 후 포드 대통령의 사면으로 법정에 서지는 않았지만 닉슨은 변호사 자격까지 박탈당하고 1994년 뇌졸중으로 사망할 때까지 20년을 초야에 묻혀 살았다. 바로 이곳에서 거행되었던 닉슨의 장례식에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클린턴과 포드, 카터, 레이건, 부시 전 대통령이 참석했고 전 국민의 애도 속에 그 어느 전직 대통령의 장례식보다 성대하게 치러졌다. 전시관에는 그의 마지막 생전 인터뷰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저는 사랑하는 친구, 내 조국 그리고 나의 정부를 실망시켰습니다. 또 무엇보다 조국을 위해 일하기를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정부와 공무원들이 부패한 집단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습니다…. 남은 평생을 저는 이 엄청난 짐을 지고 살아갈 것입니다….’ (1977년 인터뷰 중) 실패한 대통령이지만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처절하게 사죄한 닉슨. 역사는 그의 업적과 잘못 모두를 공평하게 끌어안고 있었다. 그 영욕을 담고 있는 장소는 아이러니하게도 젊은이들이 사랑을 속삭이며 미래를 약속하는 명소가 되어 있다. ‘지도자의 자격’이라는 말이 그 어느 때보다 피부로 다가오는 지금, 닉슨 기념관은 봄나들이 이상의 의미를 안겨줬다.
시대를 상징하는 목소리가 있다. 포크음악의 전설 세시봉의 막내인 김세환의 목소리가 바로 그렇다. 1970년대를 수놓았던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세상의 아름다움에 대한 노랫말과 귀공자 같은 외모와 함께 어우러져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화려하게 부활한 세시봉의 멤버로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며 새로운 전성기를 이어가고 있는 그는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변치 않는 사유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 모습 그대로 천진난만한 긍정의 에너지로 가득했던 그와의 인터뷰.
관과 공연장에서 보던 그때 그 모습 그대로였다. 전혀 그 나이로 보이지 않는 놀랄 만한 동안이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은 듣기도 싫어요. 그게 뭐가 중요해요? 내 마음, 내 현재가 중요하지.”
나이라는 숫자에 뭔가를 맞춰야 한다는 강박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이 70대를 맞이하는 김세환의 철학이었다. 같은 70세라도 생각하는 게 다 다르잖냐는 그의 반문은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를 던져줬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바꿀 수 없지만 속은 바꿀 수 있잖아요? 칠십이 되면 그 나이에 맞게 어떻게 해야 한다는 생각, 그건 아니지요. 그래서 저는 애들한테도 물어봐요. ‘나 이러는 거 이상하냐?’ 그러면 ‘아니, 아빠는 어울려’라는 대답이 돌아와요. 그럼 오케이죠.”
내 마음, 내 현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김세환과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이런 삶도 있구나 싶었다. 그 이미지를 총체적으로 정의하자면 긍정과 해맑음이라고 부를 수 있으리라. 그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며 “감사하다”는 표현을 자주 썼다.
“저는 지금 꿈이 없어요. 하루하루가 즐거우니까요. 범사에 감사한 마음뿐이에요. 그리고 저는 정말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고민? 지금은 없어요. 굳이 찾자면 아이들인데, 아이들이 아직 직업이 없으니까. 하지만 푸시 안 해요. 다 지 팔자니까요. 제 아버지도 그랬거든요. 아버지도 저에게 큰소리 한 번 친 적 없어요. 그래야 내가 편하죠. 내가 편해야 애들도 편하고. 렛 잇 비.”
“노래도 마이너는 싫다. 밝고 즐거운 노래가 좋다”고 말하는 그의 지론은 흡사 그의 노래가 만들어내는 이미지와 같은 삶의 태도다.
“글쎄요. 난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자랐으니까. 가요계에 나같이 고생 안 하고 가수 된 사람 없어요. 신인상 받고 그다음에 대상 받고. 그때가 총각이었을 땐데 집도 사고. 얼마나 감사해.”
물론 그도 사람이다. 인생에서 무조건 즐겁고 좋은 일만 있을 리 없다.
“저도 희로애락이 다 있죠. 그런데 슬프고 아픈 걸 굳이 계속 삭히는 건 싫어요. 빨리 잊어버려야지. 예를 들어 부부싸움 안 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그런데 부부싸움을 하면 내가 답답해. 그래서 내가 먼저 풀려고 해요. 난 비자금도 없어요. 비자금이 있다는 건 ‘튈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거잖아요.”
사람에 대한 믿음을 가르쳐주신 부모님
그는 자신이 긍정적인 성격이 된 것이 가족의 영향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100세까지 사셨던 어머니께 감사해요. 어렸을 때는 돈을 더 타내려고 어머니에게 거짓말도 하고 그러잖아요? 난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어요. 예를 들어 어머니에게 ‘5000원이 필요하다’고 말하면 어머니는 옷장에 있는 가방에서 꺼내 가져가라고 해요. 그런데 애들 욕심에 6000원 가져가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하지만 어머니는 나중에 내가 더 달라고 하면 또 주실 거라는 확신을 주셨어요. 그래서 그런 욕심을 내본 적이 없어요.”
“나도 널 믿을 테니 너도 양심의 가책 없게 행동하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은 바른 삶에 대한 지침과도 같았다. 그의 어머니는 얼마 전 100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한복만 입는 분이셨죠. 그래서 저는 학교 다닐 때 스타킹만 봐도 이상했어요. 집에 여자 스타킹은 아예 없고 남자 형제 셋이니 남자 신발만 잔뜩 있었어요. 아내와의 관계요? 며느리 눈치 보셨었지(웃음). ‘딸 같다 얘’ 이러고. 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시집살이 절대 시키지 않겠다고 하셨어요. 본인이 많이 고생하셨으니.”
그의 어머니는 피아노, 아버지는 성악을 했다. 그가 노래를 하게 된 데에도 두 사람의 영향이 있었으리라. 그의 아버지 김동원은 당대의 모든 상을 휩쓸었던 대배우였다. 그러나 집에 들어오면 그런 간판에 매달리는 일 없이 아들에게 “나 팝송 하나 가르쳐줘라” 하며 함께 어울리는 아버지였다. 김세환의 긍정적이고 해맑은 자유분방함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를 보며 우는 남자
“우리 마누라 끝내주지.”
아내와는 어떻게 만났느냐고 묻자 나온 대답이다. 거두절미하고 아내를 ‘끝내준다’고 표현하다니 팔불출도 이런 팔불출이 없다.
“아내와는 조병화 시인 딸의 결혼식 사회를 보게 되면서 만났어요. 한눈에 반했죠. ‘띠옹’ 하더라고. 첫사랑이었어요. 그래서 아내에게 말했죠. ‘나를 일단 사귀어보고 네가 선택해라. 네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할게.’ 그리고 아직 손에 물 안 묻히고 살고 있어요(웃음).”
그러고 보니 이 사람은 첫사랑마저도 성공한 셈이다.
“그러게. 그래서 막장 드라마가 싫어요. 누군가는 재밌다고 열심히 보는데 난 싫어요. 피하고 싶고. 그래도 감정이 많아 영화 보면 막 울기도 해요. 에서 우승하는 거 보고 울기도 하고. 그러면 애들이 ‘아빠 왜 그래?’ 묻고. 막 소리 내서 우니까(웃음).”
그는 매사 긍정적이고 해맑은 사람이지만 싫은 것은 절대 못 참는 사람이기도 하다. “싫은 사람과는 같이 숨쉬기도 싫다”는 그는 사람의 성장 과정이 중요하다는 걸 강조했다.
“똑같은 나무라도 자라는 모습이 다 달라요. 사람도 마찬가지죠. 그래서 배우고 느끼는 게 중요합니다. 그게 안 되면 통제가 안 되니까요.”
그는 긍정적인 사람을 좋아한다. 그리고 긍정적인 사람이 되려면 상대를 이해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제대로 이해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는 간단하게 말했다.
“바꿔서 생각하면 편해요. 난 애들에게 ‘공부해’라고 말 못했어요. ‘만약 내가 자식이라면?’ 하는 생각을 하니까요. 제가 고3 때 텔레비전에 조영남이 나오면, 어머니는 나를 불러 ‘세환아, 조영남 나왔다. 이거 보고 공부해’라고 말씀하시곤 했죠. 나로선 참 고마웠지. 그렇게 느낀 고마움들이 지금의 저를 만든 것 같아요.”
틈만 나면 자전거 탈 생각
김세환은 소문난 자전거광이다. 1986년에 국내에서 처음으로 MTB를 타기 시작해서 벌써 30년 넘게 자전거를 타고 있다. 아니, 자전거에 대한 애착은 더 강해져서 요즘은 그가 속해 있는 자전거 클럽인 ‘한시반클럽’에 가장 많은 시간을 쏟고 있다고 말할 정도다.
“자전거는 어느 면에서는 편해요. 헬멧 쓰고 안경 끼면 내가 김세환인 줄 아무도 모르니까요. 더구나 서 있을 일도 없으니. 그러니 나에게 딱 맞아요. 그리고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지. 땀은 나를 배신하지 않아요.”
그와 함께 자전거를 타던 사람들이 주말 오전에 볼일을 보고 한강에서 모이면 오후 한 시 반 정도가 되곤 했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이 바로 한시반클럽이다. 1990년대 초부터 시작한 한시반클럽에는 40~60대에 속하는 스물다섯 명 정도가 모인다고 한다. 연령대로 보면 김세환이 가장 고참이다. “구멍이 나는 자전거가 있으면 주인보다 내가 고치는 게 더 빠르고 낫다”고 말하는 그를 중심으로 ‘형제보다도 더 자주 만나는 사람들’이다. 이 모임을 오랫동안 해올 수 있었던 것은 확고하게 짜인 규칙들 덕분이다.
“아, 운동만 잘해선 안 되겠구나 싶을 때가 있었어요. 사람이 삐딱해질 수가 있거든요. 한시반클럽만 봐도 강북 팀과 강남 팀이 생각하는 게 달라요. ‘그럼 오늘은 총무가 정한 대로 가자’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멤버의 관혼상제 때는 반드시 100% 참석하게끔 하고 있어요. 그러니 든든하죠. 또 사람마다 속도가 다르잖아요. 우리 모임에는 죽음조와 보험조가 있어요. 죽음조는 엄청 달려요. 그 대신 일찍 가서 보험조가 올 때까지 기다리죠. 느림과 빠름이 있듯이 비우는 사람, 채우는 사람,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삶을 존중해주는 우리끼리의 규칙들이 생성되었어요. 이렇게 가다 보니 모임이 오래갈 수 있었다고 봐요.”
세시봉 멤버로서 받은 사랑 보답하고 싶어
김세환은 한시반클럽 외에도 해동방모임이라는 모임에도 참석하고 있다. 배우이자 연출가인 이해랑 가족들과 김세환의 아버지인 김동원 가족들, 그리고 연출가 윤방일의 가족들이 함께 만나는 모임이다.
연극계 거물들의 모임이 그들의 후손들 모임으로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참 드물다. 어쩌면 오랫동안 깊이 있게 모이는 사람들과의 꾸준한 관계가 김세환의 인간성을 제대로 보여주는 건 아닐까.
“인생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이라면 아버지와 형을 꼽을 수 있겠어요. 아버지는 땅, 형은 기둥이었죠. 음악을 알려준 게 형이었으니. 가수를 안 했으면? 제가 신방과를 졸업했거든요. 그러고 보니 세시봉에서 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나밖에 없어(웃음). 아마 방송국 피디가 됐겠죠.”
세시봉 멤버로서 그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해 많은 사람이 궁금해할 것이다. 그는 그동안 많은 사랑을 받았으니 이제는 그 사랑에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했다.
“조만간 시청 앞 광장에서 무료로 공연할 생각을 하고 있어요. MC 없이 우리만의 공연으로. 이 얘기를 하니 다들 좋다고 했어요. 송창식에게만 말하면 돼요.”
후회되는 일은 없다, 오직 감사할 뿐
그는 매일 열한 시 전에 잠든다고 한다. 그리고 새벽 세 시나 네 시께 일어난다.
“그 새벽이 내 시간이에요. 인터넷으로 전 세계를 돌아다니죠. 최고야 최고. 사진, 의상, 스키, 운동, 신문, 유튜브… 다 있어요. 그것만 해도 하루가 바빠요.”
단순히 그가 가수라서가 아니라, 그는 현재의 트렌드와 함께 숨 쉬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가 나이에 신경 쓰지 않겠다는 것은 그러한 본능에 가까운 동시대성 덕분일 것이다.
“나를 의식하면 불편해집니다.”
김세환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그의 일관된 지론을 듣다 보니, 그가 오래도록 젊음을 유지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마침내 그는 ‘늙어가는 자신’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진 것 아닐까.
“후회되는 거요? 하나도 없어요, 그저 감사할 뿐이지. 편한 대로 가는 게 삶이에요.”
허비되기 쉬운 건 청춘만은 아니다. 황혼의 나날도 허비되기 쉽다. 손에 쥔 게 많고 사교를 다채롭게 누리더라도, 남몰래 허망하고 외로운 게 도시생활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머리에 들어온 지식, 가슴에 채워진 지혜의 수효가 많아지지만, 알고 보면 우리는 모두 은하계를 덧없이 떠도는 한 점 먼지이지 않던가. 그러나 살아있는 동안 한 걸음 더 나아가야만 한다. 어둠속을 부유하는 먼지의 신세를 면하기 위해, 저마다 나름의 별이 되기 위해, 타성에 젖은 삶을 바꾸는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경북 김천시 구성면 우두령(해발 650m) 기슭에 사는 정현선(58)씨 내외. 이 부부는 5년 전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안락하게, 그러나 따분하게 살았던 것 같다. 모두가 성난 말처럼 냅다 달리며 지지고 볶는 도회의 풍속을 견디어 기반을 다졌다. 그러나 일종의 허기나 갈증 같은 게 따개비처럼 들러붙었던 모양이다. 그게 귀촌이라는 거사를 도모하게 했다.
정씨의 남편 김보홍(63)씨는 축구선수 출신으로 체육 분야 직종에 종사했다고 한다. 정현선씨 역시 농협 직원으로 일하며 서울이라는 정글을 섭렵했다. 부부가 밖의 일로 분주했던 나머지 안에서는 정작 얼굴을 마주할 짬이 드물었다지. 부부란 전우와 같아서, 또는 난적과 같아서 단합에도 능하지만 분쟁 역시 빈발하기 마련이다. 이 부부는 전우애나 전투정신을 고취할 여가 자체가 없었단다. 애정 표현도, 부부 싸움도 한가한 시간이 주어지고서야 가능한 게 아니겠는가.
그들에겐 오래 묵은 숙원이었다. 귀촌 말이다. 도시가 오직 탁류일 리 있을까마는, 시골이라고 다만 청류일 리 있을까마는, 마음은 자꾸만 촌으로 향했더란다. 해서, 근 10여 년간 전국 도처의 산간을 순례하며 정처를 물색했다. 부부 둘 다 태어나 성장기 한때에 놀았던 물이 시골이었기에 향수라는 것, 그 못 말릴 본능이 가슴으로 들솟기도 했다. 정현선씨의 얘기는 이렇다.
“틈이 나면 주먹밥을 싸들고 전국 산천을 돌아다녔어요. 강원도 화천에서 지리산 자락 구례까지, 일삼아 여행삼아 많이도 누볐어요. 그러나 마음에 딱 드는 곳을 찾기 어렵더라고요. 좋다 싶은 땅은 값이 비싸고, 저렴한 땅은 길이 없거나 하는 식으로 여건이 열악했어요. 그러던 중에 우연히 급매물을 소개받았는데, 가격이나 위치나 괜찮다는 판단이 섰어요. 지금 저희가 사는 이 집과 그렇게 인연이 됐죠.”
시골생활에 넌더리를 내고 역(逆)귀촌을 하는 사람들이 드물지 않다. 살던 집을 헐값으로라도 서둘러 처분하고 시골을 탈출한다. 매력적인 급매물은 순식간에 임자를 만나게 마련이다. 정씨 부부가 사들인 급매물은 임야 포함 2만여 평 부지 위에 지어진 2층집. 산 중턱에 자리한 집이라서 조망이 기차게 후련하다. 우두령 일대는 고험한 산악지구다. 기세 등등, 하늘을 찌르며 솟구친 백두대간 고봉들이 저마다 똘똘하고 출중하다. 산이 거구라 골도 웅숭깊다. 골짜기 푸른 물살은 은어 떼처럼 반짝이며 솰솰 굽이쳐 흐른다. 촌 가운에서도 후미진 산촌을 애호하는 사람이라면 무릎을 탁 치며 쾌재를 부를 경관이다.
원주민과의 융화에 실패하다
우두령 자락으로는 절기 따라 봄비가 내리고, 가을 단풍이 물감을 흘려 내리고, 겨울엔 수북이 눈이 내려 설경이 흐른다. 산꾼들도 우두령 산간을 오르거나 내리기를 무시로 한다. 백두대간을 타는 사람들이다. 애초에 그러려고 했던 게 아니었으나, 정씨 내외는 귀촌 직후 민박집 쥔장으로 변했다. 대간을 타는 사람들의 권유에 의해서였다.
“대간을 타는 분들이, 이곳에 잠잘 집이 없어 불편하다, 산꾼들을 상대로 민박집을 하는 게 어떠냐, 그런 권유들을 해왔어요. 그래 2층 방에 등산객들만을 상대로 민박을 받기 시작했는데요, 그들에게 서울 얘기, 세상 얘기, 산 얘기를 듣는 게 참 즐거웠어요. 적막한 산중에서 뜻밖에도 사교를 할 수 있는 행운이 찾아온 거예요. 그런데 말이죠, 술이며 음식이며 이것저것 퍼주는 바람에 소득은 신통치 않더라고요. 그래서 작심하고 식초 생산에 나섰어요.”
“산촌에서 나오는 온갖 재료로 식초를 만드는 거예요? 그건 초심자도 가능한 업종인가요?”
“산골에서 마냥 놀기만 하면 무슨 재미겠어요? 흔히 자연을 즐기고자 귀촌을 하지만 시골에서 지내다 보면 욕심이 생겨 귀농의 형태로 양상이 변하는 경우가 있어요. 저희가 그런 케이스죠. 사실, 서울에서 귀촌 교육을 받으며 식초 공부도 미리 해두었어요.”
“이른바 천연식초라는 걸 생산하는 농가가 많아요. 이 집만의 특별한 식초 제조법이라도 있나요?”
“저희는 일반 설탕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진정한 전통 발효식초를 만들어요. 제가 산골에 와 살며 이젠 정말이지 착하게 살자는 생각을 신념처럼 갖게 되었어요. 소득을 위해서만 식초에 도전한 건 아니에요. ‘착한 음식’으로서의 식초 만들기로 신념을 실천하고 싶은 거예요.”
착하게 살자! 산골 자연이 들려준 뉴스였던 모양이다. 자연은 소리 없이 묻는다. ‘너는 누구인가?’라고. 그런 자연의 질문을 받은 뒤엔 마침내 내가 나에게 되묻는다. ‘너여! 너는 누구인가?’ 월든 숲에 살았던 소로우처럼 자연에 관한 무한한 영감과 감수성을 지니긴 어렵지만, 산촌 자연 속에 사노라면 자못 성찰적인 눈매로 뒤를 돌아보게 된다. 비로소 내 삶의 굴곡과 상처가 아프게 드러난다. 이 과정에서 회심(回心)이 돋아 자연을 닮은 삶의 생태를 꿈꾸기도 한다. 귀촌의 재미는 이 대목에서도 짭짤하게 우러난다.
귀촌한 이들이 흔히 토로하듯이, 정현선씨 역시 내면을 스스로 살피는 삶을 사노라 말하고 있다. 도시에서보다 한결 느긋해지고 수굿해졌단다. 화통하게 잘 웃고, 잘 표현하고, 뭐든 앞장서 차돌처럼 당차게 행동하는 개성의 소유자로 보이는 이 여자는 산촌의 나날들이 흐뭇하다. 식초 분야의 실력자로 소문이 나 곳곳의 귀촌·귀농센터에 강사로 출장을 가기도 한다. 요즘은 가양주를 만들어 상품화를 모색하고 있다. 귀촌 성공 사례로 알려져 견학을 오는 사람들도 많다. 들입다 몰입한 덕에 얻은 근사한 성과들이다. 하지만 그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귀촌 5년 세월 중 4년간은 심히 괴로웠다지? 왜지? 정씨 내외는 마을 원주민들과 오붓하게 어울려 사는 일에 유난한 고초를 겪었던 것이다. 귀촌이란 엄밀히 말하자면 타향살이다. 이 타향살이에 차질이 생기면 이젠 귀양살이 입문이다.
“저희는 말이죠, 귀촌 교육을 통해 마을 원주민들과의 융화가 매우 중요하다는 걸 충분히 인식하고 내려왔어요. 융화에 실패하면 지속할 수 없다, 무조건 베풀어야 한다, 그런 걸 염두에 두었죠. 그러나 막상 부딪혀보니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최선을 다했지만 고통스러웠어요. 귀촌이라는 게 자칫하면 무덤이 될 수 있다는 걸 실감했어요.”
“어떤 식의 불화가 벌어졌죠?”
“시골에선 남자들의 술자리가 잦습니다. 서로 거들어야 할 농사일도 많아요. 저의 남편은 이런 자리 저런 자리 가리지 않고 열심히 동참했어요. 집안일은 뒤로 밀어두고 이웃의 농사일을 거둔다거나, 봉사할 일은 기꺼이 봉사했어요. 하루 종일 남의 농사를 돕다가 밤이 깊어서야 돌아오는 남편을 기다린 밤들이 참 많았어요. 그렇게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결과적으로 돌아오는 건 갈등, 소외, 뒷담화, 그런 것들이더라고요. 이 집을 도와주면 저 집에서 불만을 품고, 저 집을 도우면 이 집에서 좋지 않은 소리를 하고… 도저히 적응하기 힘들었어요. 재미나 보람은커녕 하루하루가 고역스러웠어요.”
“사람 사는 곳 어디서나 마찰이나 갈등은 양념처럼 섞여드는 거 아녜요? 산간벽지 특유의 배타성 같은 걸 염두에 두진 않았나요?”
“저희 부부가 적극적으로 마음을 열어 행동하는 일에 인색한 사람들은 아니에요. 이 시골에 정착하기 위해 마음을 열고 안간힘을 다했어요. 그럼에도 벽을 허물기 어려웠어요. 맞아요, 벽촌의 풍습이라는 거, 도시적인 생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곳만의 풍토라는 게 엄연하구나, 그걸 넘어서기 정말 어렵네? 차라리 서울로 돌아가는 게 답이겠네? 막판엔 그런 판단이 서더라고요.”
‘신비주의 처세’로 바꾼 뒤 비로소 찾은 평화
이른바 역귀촌을 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원주민과의 갈등이다. 주민들의 심리와 정서를 내 것처럼 헤아려 보듬는 일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귀촌을 해서 단숨에 인기를 끌 묘한 비결이라는 게 있겠는가. 더 통 크게 마음을 여는 수밖에 없다. 똑똑한 티를 내기보다는 얼간이인 양 어설프고 만만하게 처신하는 것도 썩 괜찮은 쇼일 수 있다. 민첩하게 생각을 굴릴 줄 아는 인물에 속할 정씨가 이를 모를 리 없을 테지만, 정작 그녀는 고민과 고독 속에서 끙끙거렸던 것 같다.
“주민과의 관계가 불편해지자 부부싸움도 늘어나더라고요. 어휴,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서였죠. 급기야 마을 사람 하나가 저희 집 진입로를 철망으로 막아버리는 사태까지 발생했어요. 진입로 땅을 사들이는 것으로 해결했지만 정말 뿔이 나더라고요. 이게 뭔가? 이러려고 시골에 왔나? 회의가 마구 몰려들었고, 마침내 남편 입에서 서울로 돌아가자는 얘기가 나왔어요. 그러나 제가 반대했죠. 실패하고 돌아가다니, 그건 죽도 밥도 안 되는 거잖아요? 그날 이후 생각을 완전히 바꿔먹는 것으로 살 길을 찾아냈어요.”
“뭐죠, 그게?”
“신비주의! 이제 나 신비주의로 산다! 그런 거요. 하하하.”
“마음을 여느라 공연히 힘만 빼기보다는 차라리 빗장을 거는 쪽으로? 은둔처럼?”
“해탈이죠. 비닐이고 뭐고 마구잡이로 노천에서 소각하는 모습을 참지 못해 그러지 말라 권유할 경우, ‘뭐야? 너나 잘해!’ 하는 투로 반응하는 사람들과는 싹 등 돌리고 사는 게 유일한 길이라고 판단했어요. 그건 적중한 처세였어요. 비로소 속 편하게 살 수 있게 됐으니까요.”
정씨는 고등어처럼 싱싱한 언사로, 말끔한 표정으로 ‘신비주의 처세’ 이후의 만족과 안심을 토로한다. 기다리고 참고 끌어안으면 상처가 아물 수 있다. 고통이라는 씨앗을 발아시켜 멀리 가는 향을 뿜는 꽃을 피울 수도 있다. 산골 벽촌이라는 쓸쓸한 공동체를, 텃세를, 폐쇄적 문화를 하나의 상처로 가늠해 나의 행보를 인내 속에서 조절하고 조화하는 처신은 진취적이고 창의적인 것일 수 있다. 군인이 돼 별을 달고 싶은 꿈을 먹고 자랐다는 정씨는 전혀 다른 방책으로 곤경을 벗어났다. 굴종에 가까운 나약한 타협 대신, 나의 길 내가 간다는 식의 투지로 고뇌를 해결했다는 게 아닌가. 그러고서야 산골짝에서 무슨 재미를 볼 수 있을꼬 싶지만, 내가 가는 길이 바로 지름길이라는 것도 여지없는 진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