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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편! 이렇게 참는다] ‘욱’할 땐 일단 피하는 게 상책
- 부부가 부부가 함께 세월을 쌓다 보면 때때로 다툴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하면 이 지옥 같은 전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를 깊이 고민한다. 그래서 집안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나 경제문제가 아니면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작은 일들은 남편이 하자는 대로 대부분 들어준다. 그런데도 남편이 술을 지극히 사랑하기 때문에 부부싸움을 참 많이도 했다. 술을 많이 마시면, 술을 이기지 못하고 그냥 쓰러져 자는 편이라 주사는 없지만 술자리를 좋아해서 늦는 날이 많아 집안일을 두고 말을 섞어 볼 시간이 없다. 아들도 엄마의 장점 중 첫 번째로 ‘인내심이 많다’는 것을 꼽을 만큼 필자가 살아가면서 인내심을 발휘하여 참아내는 방법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방법은 싸움이 시작되면 일단 밖으로 나가 공원에서 바람을 쐬면서 자리를 피해 시간을 버는 것이다. 남편은 뒤끝은 없는데, ‘욱’하는 성품의 소유자라 한 번 화를 내면 불같다. 나중에 감당해야 할 일은 그 순간에는 생각조차 없는 모양이다. 대신 그 자리만 피하고 나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새새거린다. 이런 방법은 여름에는 최고의 방법이지만 겨울에는 쓸 수가 없다. 머리를 식히려 밖에서 배회했다간 얼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겨울엔 공원 대신 대형마트를 은신처로 삼는다. 마트에 갔다 와도 공원에 다녀온 것과 같은 효과를 낸다. 필자가 집에 들어가면 남편은 반가워하는 눈빛을 확연히 드러낸다. 그러면서 자기 것도 사왔느냐고 묻는다. 부부 싸움한 건 기억조차 없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그런 모습을 보면 참, 어린애 같다. 둘째는 아들을 앞세우는 방법. 남편이 열 받아 있을 때 어린 아들을 안고 있으면, 화를 못 낸다. 아들이 어릴 때는 특히 유효했다. 어린 아들 앞에서는 차마 화를 낼 수가 없는 것이다. 남편은 결국 뜨거운 화기를 주체하지 못해 밖으로 나가 버린다. 그리고 몇 시간 지나면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간식을 사 들고 들어온다. 들어와선 “확 가출해 버리려고 했는데 아들 먹일 간식거리를 전해줘야 해 가출을 못 하고, 할 수 없이 들어왔다”고 둘러댄다. 어이가 없다. 필자는 지금도 남편이 화를 내려는 눈치가 보이면 은근슬쩍 다 큰 아들을 앞세운다. 그러면 남편의 화가 슬그머니 꼬리를 감춘다. 아들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것도 있지만 아버지의 체면과 권위의식 때문에 아들 앞에서는 참는 것이다. 필자는 이런 남편의 약점을 아낌없이 활용한다. 셋째는 남편이 화를 내면, 부리나케 어머니에게 고자질해 혼쭐나게 하는 것이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도 있듯이 어머니도 심정적으로는 당연히 아들의 편을 들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아들의 행복을 위해서 눈 질끈 감고 며느리 편을 들어 준다. 남편이 어머니 앞에서는 필자에게 무척이나 잘해주는 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 방법은 현재는 사용할 수 없다. 어머니가 저세상으로 가셨기 때문이다. 아무튼 필자의 집에서는 이 세 가지 방법만 쓰면 전쟁은 죄다 끝이 난다.
- 2016-07-05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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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성 남과 금성 녀가 천륜이 되기까지
- 수술실에서 나온 지가 얼마나 되었을까? 몽롱하게 피어나기 시작하는 의식을 느끼며 무거운 눈을 겨우 추켜 올렸다. 뿌옇게 보여오는 세상이 살아 있음을 확인해주었다. 몇 번을 깜빡거리다 다시 눈을 감으려 하자 누군가 볼 따귀를 마구 때렸다. 어렴풋이 정신 차리라는 소리로 들려왔다. 깊게 눈을 감았다가 힘을 내서 희미한 세상을 올려다보았다. 15시간 만에 깨어난 것이었다. 운명적 만남 첫 번째 눈에 들어오는 사람은 자기 얼굴보다 커다란 군인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었다. 까맣게 타올라 알 수 없는 모습이 필자의 두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다시 눈을 감았다. 정신을 가다듬어 곰곰이 생각해보니 지금 공군 훈련소에 있어야 할 사람이 눈앞에 와 있는 것이다. 웬일인가 싶어 순간에 만감이 교차했다. 갑자기 죄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무서워졌다. 옛말에 고무신 거꾸로 신으면 죄받는다는 말이 번개처럼 스쳐갔다. 그때, "이 사람하고 결혼을 해야만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족쇄가 되었다. 다른 어떤 생각도 그 사람과 헤어지면 마치 벼락이라도 맞을 것만 같았다. 필자는 입학하게 된 대학교가 영 마땅치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마지막 날에 늦게나마 막 떠나려는 전철에 올라탔다. 그 안에서 한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걸었고, 그 남자는 같은 학교 3학년 선배였다. 그렇게 만난 사람과 캠퍼스 커플이 되었고, 필자가 3학년이 될 즘에야 그 사람은 공군 장교를 선택했다. 군 입대를 하면서 마음에 갈등이 생겼다. 살아온 환경과 성격이 너무나 달라 결혼까지는 자신이 없었다. 긴 세월에 걸쳐 제대할 때까지 그 사람만을 기다리기가 힘들 것 같아, 필자의 의사를 전달했다. 그 사람은 결국 군 입대 원서를 찢어버렸다. 방황의 순간 입대하는 날 새벽 아침에 그 사람 친구들은 스카치테이프를 구해서 너덜너덜 해진 입대 원서를 붙여 주었고, 필자가 비굴한 용서를 빌면서 그는 군 입대를 할 수가 있었다. 6개월 장교 훈련 기간이 있었다. 대학 입학 후 미팅이라고는 한 번도 해본 경험이 없던 필자에게 그 사이로 다른 남자와 만남의 기회가 주어졌다. 드디어 처음으로 그룹 미팅을 하게 되었고 얼마나 설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에도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남학생들의 소지품으로 뽑기를 하고 일대일로 멋진 한 남자를 만났다. 신비로움과 함께 흥미진진한 대화를 하던 중에 살금살금 배가 아파지기 시작했다. 만남을 방해하는 배를 움켜쥐고 참으려면 더 아파졌다. 모처럼의 기회를 잃고 싶지 않아 억지로라도 웃어가며 꾹 참았다. 식은땀이 줄줄 흘렀고, 끝내는 파트너와 함께 응급실로 실려갔다. 급성 맹장이 터져 복막염으로 대 수술을 하게 된 것이다. 대학 졸업을 하고 그 해 5월 다소곳이 필자는 그 사람 공군 중위와 결혼을 했다. 결혼이 뭔지도 모르고 의무감 만으로 한 것 같기도 했다. 아옹다옹 4년이라는 세월의 교제기간이 있기는 했지만, 성격적 엇갈림은 이미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가 따로 없었다. 그 갈등이나 다툼은 잠시도 멈추지를 않았고 그 사람이나 필자나 똑같이 개성이 강해 늘 요란한 평행선이었다. 한 사람은 무조건 고기를 좋아했고 한 사람은 채식을 즐겨 했다. 필자는 칼국수를 선택하면 그 사람은 설렁탕을 먹자며 칼국수는 입에도 대지를 않았다. 어쩌면 그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필자는 정리 정돈을 잘하고 아기자기한 편이었으나 그 사람은 정리된 것들을 홀 가닥 뒤집어 놓는다. 한번 외출하고 돌아와 보면 도둑이 들어왔다 간 것처럼 온 집안이 난리가 나있다. 놀란 가슴에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는다. 또한 얄팍한 거짓말을 해서 꼭 필자에게 들키곤 한다. 아무것도 아닌 듯했지만 늘 사소한 것들로 싸움은 끝이 없었다. 그때마다 체념도 하고 포기도 하고 가끔씩은 여행을 하면서 아이들만 의지하며 그렇게 지냈다. 그리고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에는 다시 배움의 만학 도가 되어 학교생활에 몰두하면서 그 고통의 힘겨운 시간들을 버틸 수가 있었다. 남편보다는 천륜 서로가 관심을 갖지 않기로 하고 새로운 것들에 최선을 다하며 갈등의 아픔을 치유해 나갔지만, 남편은 점점 더 함정의 수렁으로 빠져들며 필자를 힘들게만 했다. 저질러진 뒤처리는 모두 필자의 몫으로 고스란히 남아 돌아왔다. 남이 아닌 남편을 외면할 수가 없다면 차라리 자신을 위하여 품어야만 했다. 아이들이 성장을 하고 필자의 품에서 떠나면서 말했다. 엄마 아빠는 우리가 없으면 맨날 싸워서 어떻게 사느냐고 걱정을 했다. 물론 염려가 되는 부분이기도 했지만 결과는 정 반대였다. 나이 먹고 몸은 점점 고장이 나고 자식들은 곁에 없었지만, 결국 남는 것은 두 부부뿐이었다. 세월 속에 힘들고 병들어 의지할 곳 없을 때, 끝내는 두 사람 밖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슬픈 어느 날에 드디어 뼈 속 깊이 체험하게 되었다. 부부 싸움도 젊고 힘이 남아 돌아가니 싸우는 것이었다. 무조건 자기만이 옳다고 주장하니 개성 강한 두 사람은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삶에 지혜가 생겨나고 뭔가 터득해가는 나이가 되어보니 곁에 있어서 참고 살아와준 남편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필자가 숙연해지면서 철이 들고 있었다. 상대를 인정하며 모든 것은 자신으로부터 크라고 마음먹으며 내려놓으니 평화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왜 진작에 풋풋한 젊은 날에는 그런 것들을 인식하지 못 했을 까. 인생 반 고개를 훌쩍 넘어가려 하니 이제야 자신을 성찰하며 깨우치고 알 것만 같다. 그래서 옛말에 인생은 60부터라는 말이 있는 것인가 보다. 결국 인생이란 참아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얻어지는 것, 그것이 자연의 섭리와 순리라는 것을 알게 해주고, 조물주는 극과 극의 사람이 만나 부딪치며 터득하고 참아가면서 그 속에서 인간이 되라고 인연을 맺어 준 것만 같다. 미운 정 고운 정 아쉬움 정까지 다 들어버린, 이제 남편보다는 아이들의 아빠이자 소중한 가족의 가장이 되었다. 이 세상 모든 부모가 미치도록 자신의 아이들을 사랑하듯, 누구보다 가장 가까운 동반자인 그 사람과도 영원히 함께하는 삶의 따뜻한 사랑을 나누어야만 할 것 같다. 가족이라는 위대한 천륜이 되어버린 그 사람을 어찌 남편이라는 말로만 외면한단 말 인가. 이 날까지 함께 함을 깊이 감사하며 곁에 있을 때 더욱 잘해야 하겠다.
- 2016-07-05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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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편! 이렇게 참는다] 남편 땜에 화난 이야기, 품으며 산다.
- 결혼식에서 말한다. '이 결혼을 통하여 이제 몸과 마음이 한 몸이니 머리카락이 파뿌리가 되도록 서로 사랑하며 살라’고. 그러나 사람들은 사랑하기보다는 싸우며 파뿌리가 되기도 한다. 부부는 한 몸이 되어 자식을 낳고 연대감을 가지며 가족을 보살피고 양육의 의무를 나눈다. 이러는 사이 사랑으로 몸과 마음과 영혼이 한 몸 인줄 알고 일을 벌이면 알 듯 모르겠고 모르는 듯 알 것 같은 상황이 연출된다. 오죽하면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라고 하겠는가. 결혼 초 시집에서 함께 살았다. 필자는 막내 며느리였고 근처에 시누 두 사람이 살았다. 필자는 남편과 7년의 열애 끝에 결혼을 했고 시어머니는 늘 몸이 안 좋았다. 형제가 10명 이었다. 기본적으로 시부모님을 좋아했다. 시아버님의 근면한 모습과 시어머니의 후덕한 부분이 좋았다. 남편을 낳아주신 부모님께 감사했고 온화한 가정의 분위기를 만드시는 분에 안도했다. 그런데 신혼이었지만 남편은 함께 저녁을 먹기 힘들 정도로 귀가 시간이 늦었다. 필자는 종일 시부모님의 손님과 시누들의 접대로 쉴 새 없이 차를 타고 과일을 깎고 식사를 준비하느라 바빴다. 가사 도우미도 있었지만 안방에서 들려오는 ‘아기야’ 소리에 언제라도 튀어나갈 준비를 하고 지냈다. 손님이 많은 날은 방문객이 20여명 일 때도 있었다. 어느 날, 남편이 귀가하자 오늘은 다리가 아파서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벌떡 일어나더니 엄마에게 가서 따지겠다고 했다.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렸다. 필자가 원하는 것은 한 마디였다. “수고했구나.” 남편이 첫 월급을 가져오는 날이었다. 내미는 봉투가 뜯겨 있었다. 명세표를 보니 돈이 비었다. 순간 필자는 “혼자 벌은 것이니 혼자 쓰든지 다 채우라”고 했다. 미리 시부모 용돈과 자신이 쓸 것을 빼고 남은 금액이라 얼마 되지 않았다. 화를 내어 고쳐졌고 그 후 필자는 살림을 도맡아하기 시작했다. 제할 것도 필자가 했다. 남편은 회식이다 접대다 많은 출장으로 얼굴 보기 힘들었다. 그러다 필자보다 먼저 귀가하면 벼락이 떨어졌다. 육아와 살림과 일을 하는 필자는 늘 종종거리며 다녔다. 동등한 관계를 원하면 대책 없이 하는 말이 있었다.“힘들면 하지 마.“ “남자랑 여자랑 같니?" 그리곤 슬며시 다리 안마를 해줄까 물어오곤 했다. 바꿀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날선 요구보다 포기를 익히게 된다. 부부싸움이 ‘칼로 물베기’라고 하는 이유는 처음 사랑했던 순간의 떨림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무엇이든 참아낼 수 있으며 오히려 배려를 즐길 수 있게 되기까지 한다. 엄마들이 많은 세월 남편도 품고 자식도 품고 친척도 품고 품으며 살은 과정을 이제 나도 가는 것이다.
- 2016-07-04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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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 자서전] 모성애 꽃은 그렇게 피어났다
- 첫번째 오남매가족사진, 1번 임산부필자 3번 40대의필자 4번 빛바랜 가족사진들 6번 두딸과 필자모습 카네이션 꽃들이 만발하는 5월이 되면 유년 시절의 필자는 그리움 반 미움 반으로 시들어진 꽃다발을 가슴에 품고 엄마를 그리다 잠이 들곤 했다. 어린 마음속에서 흘린 눈물은 차곡차곡 쌓여 강하고 모진 모성애를 잉태하기 시작했다. 눈물 속의 회상 어린 시절 필자 5남매는 주말이면 어김없이 어머니를 면회하기 위해 병원으로 향해야 했다. 필자가 아주 어릴 때부터 시작된 일종의 주말 이벤트였다. 그날도 우리는 큰오빠의 지시 아래 엄마에게 필요한 것과 음식을 정성껏 준비하고 묵묵히 오빠를 따라나섰다. 그리고 버스에 타 자리에 앉자마자 이내 차창 밖으로 시선을 떨군 뒤 멍하니 바깥만 응시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에 얼굴을 들 수가 없어서였다. 버스가 서울 중랑구 면목동을 지나 중곡동 가까이에 닫자 필자의 가슴은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마치 멀고 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변해 있을 어머니를 만나려면 미리 단단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철창문이 열리고 퉁퉁 부어오른 모습으로 뒤뚱뒤뚱하며 걸어 나오는 어머니. 어머니 얼굴은 오랫동안 빛을 못 봐 하얗게 변해 버렸다. 또 오랜 병원 생활로 비정상적으로 부어 마치 ‘큰 바위 얼굴’ 같았다. 그리고 약에 취해버려 연신 흐느적댔다. 자식들은 그 만남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눈을 피하며 안절부절 어머니를 맞이했다. 아버지를 다른 여자에게 빼앗기고 그것도 모자라 구타까지 당했던 어머니. 그 옛날 귀한 집 외동딸로 태어나 심성 바르고 순수하며 착하던 어머니가 한평생을 정신 줄을 놓으시고 병원 생활로 약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어머니 그만 해요. 도대체 왜 그래? 그까짓 아버지 뭐하러 생각해! 우리가 있잖아.” 필자가 보탤 수 있는 말은 이뿐이었다. 이따금 아버지가 자식에 대한 책임감만으로 마지못해 병문안 왔다 가는 날에는 어머니의 병세는 더 나빠지고 어머니의 정서뿐 아니라 자식들 기분도 엉망이 되곤 했었다. 필자는 그런 아버지를 늘 원망했다. 돈 잘 벌어 양쪽 집 9남매 대학 보내 주는 것보다는 차라리 따뜻한 가정 속 아버지를 더 몸서리치도록 그리워했다. 그래서 5남매는 서로 만나면 침묵한다. 그게 더 아프지 않을 유일한 방법이니까 도망치듯 떠나온 어머니의 품 대학을 마치고 도망치듯 같은 캠퍼스 선배와 결혼했다. 그토록 그립던 사랑을 갈구하며 현실을 도피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전쟁 터 같은 생활들이 너무나 싫었다. 그러나 결혼생활 또한 살아온 각자의 삶이 다르듯 많이 부딪쳤다. 대학 졸업 후 시작한 교사직과 함께 나름대로 결혼생활에도 충실했으나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자신이 없었다. 결혼 2년 후 큰아이를 임신하며 또 고통이 다가왔다. 건축 장교로 제대한 남편이 중동으로 파견 나간 후 필자가 임신 중독증으로 교단을 떠나야 했던 것이다. 혼자 남은 임산부 새댁은 유난히도 겁이 많았고 신혼생활의 달콤함을 접고 시댁으로 들어가 배부름을 혼자 감당해야 했다. 부자인 시어머니와 시아버지는 늘 여행을 일삼아 집을 비우셨고, 아침에 왔다 오후 5시면 돌아가는 도우미 아주머니가 유일한 친구였다. 어쩌다 어머니가 병원에서 퇴원할 때면 시부모의 허락을 받아 친정으로 달려갔다. 그토록 그리던 어머니를 마음으로 느끼며 손을 꼭 잡고 함께 잠드는 밤이면 비록 병든 어머니였으나 그 품이 왜 그리 따뜻했을까. 시댁에서 밤마다 방에 드리운 길다란 옷걸이 그림자가 무서워 잠 설쳤던 한 달 동안의 밀린 잠을 푹 잔듯했다. 중동에서 돌아온 남편은 건설 회사를 차렸고 4년 후 작은아이를 가졌다. 남편은 큰아이 때 못 해준 것을 만회하기 위해 이 아이를 여왕마마처럼 모시겠다고 굳게 약속을 하더니 반대로 필자도, 두 아이도 용서할 수 없는 큰 사고를 쳤다. 남편은 무릎 꿇고 벌벌 떨면서 사죄했지만 용서되지 않았다. 결국 죽을 힘 다해 쌓아 올렸던 가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필자는 모든 것들은 다 포기 할 수 있었으나 아이들만큼은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커다란 혼란과 방황이 시작되었고 그때부터 자신과의 싸움은 실로 ‘의지의 한국인’ 수준이었다. 그 방황을 감수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 다시 대학을 다니며 학문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대학 때와는 전혀 다른 전공을 선택해 20세 차이 나는 아이들과 캠퍼스를 누볐다. 배움은 채워지지 않는 상처투성이 사랑의 빈 공간을 그나마 채워주었다. 늦은 나이에 다시 생소한 학문을 하며 젊은이들과 함께한 캠퍼스 생활은 신선한 삶의 충격이었다. 그 충격을 오래 누리고 싶어 대학원까지 다녔다. 그리고 드디어 시간강사, 전임강사가 되어 전국을 누렸다. 자신이 얼마나 멋지고 훌륭한지,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지 확인하면서 모습이 무척이나 대견스러웠다. 백 번 말보다는 보여주는 교육이라고 했던가. 다행히도 두 아이들은 필자를 자랑스러워△하며 열심히 그 뒤를 따라와 주었다. 큰아이는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필자를 추천하여 아이가 다니는 과학고등학교에서 장한어머니상도 받게 해주었다. 이보다 어떤 값진 보석이 또 있을까? 1997년 온 나라에 IMF라는 경제 위기가 몰아 닥쳤다. 하루아침에 남편 회사는 문을 내리고 가족은 빈털터리가 되었다. 고심 끝에 이민의 길을 선택했다. 한 가정의 기둥이 되어 위기를 기회로 삼아 어떻게든 어 다시 지붕을 쌓아가야 한다는 신념으로 가득했다. 남편을 설득해 먼저 보내고 초등학교를 졸업한 작은딸을 그 이듬해에 보냈다. 그리고 큰딸을 한국에 둔 채 필자는 2001년 LA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만으로 허물어져가는 가정의 든든한 기둥이 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동안 어렵게 오랜 시간 투자해 얻은 교수의 길, 필자의 것들을 다 포기해야만 했다. 무궁화 꽃 속으로 흐르는 눈물 한국과학기술대학교(KAIST)에서 국비 장학생으로 과외하며 생활하던 큰아이는 방학만 되면 가족이 보고 싶고, 엄마 품이 그립다며 열일 제치고 미국으로 날라왔다. 비록 낯설고 물 설은 이국 땅, 남의 나라였지만 그리웠던 가족의 재회는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삶의 원동력이었는지 모른다. 힘겨웠던 바닥생활 2년 후, 해변의 도시 싼타모니카에 세탁소를 시작했다. 필자는 바느질을 하고 남편은 빨래하며 자리잡기 시작했고 백인동네에 멋진 이층 집도 장만했다. 주말이면 1박 2일 파티도 열며 나름대로 훌륭한 이민생활을 했다. 다른 사람들은 필자 가족을 무척 부러워했다. 그러나 작은 아이가 우등생으로 ‘캘리포니아주립대 LA캠퍼스(UCLA)’를 졸업하고 언니가 있는 한국으로 나와 버렸다. 왔다갔다 하던 큰아이는 어느덧 멋진 의사가 되었고 작은 아이도 남의 나라에서는 더 이상 꿈을 펼 수가 없다며 훌쩍 떠나와 버렸다. 아이들이 떠나고 난 빈 자리를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가 없었다. 2층 아이의 방에는 덩그러니 아이의 그림자만 남아 있었고, 텅 비어버린 커다란 집은 더 이상의 따뜻한 가정이 아니었다. 심지어는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세탁소 2층에 머무르며 일만하며 살았다. 세탁소 재봉틀 앞에 큰 거울을 붙여놓고 필자 얼굴과 마주보며 외로움을 달래곤 했다. 필자는 또다시 미국 한 의대에 입학했고, 그 길만이 유일한 정신적 버팀목이었다. 세탁소 일이 끝나는 저녁 6시에 가서 밤 11시면 돌아왔다. 장장 8년에 걸쳐 졸업했다. 그리고 작은아이도 1년 후 의대에 합격했다. 어느덧 나이 60세를 향하면서 이민생활도 고갯길에 접어들어 수시로 불안감이 몰려왔다. 남편이 있어도 파고드는 고독함은 중병이 되어 대학병원 응급실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삶과 죽음이 하루에도 수십 번을 머리 속에서 교차했다. 어느 날인가 남의 나라에서 아이들과 떨어져 소리 없이 죽어가는 꿈을 꾸었다. TV 속에 한국 뉴스가 끝나고 애국가만 흘러도 눈물이 주룩주룩 얼굴을 타고 내렸다. 삶의 질을 찾아 떠나온 18년 세월에 늙고 병만 들어 마음은 마냥 연약해져만 갔다. 아이들이 있는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점점 더 몸을 황폐하게 만들어갔다. 마음이 아프면 몸도 아프다고 했던가? 미국은 사람 사는 곳이 아니라 일만 하는 노예의 삶이니 받아들이라며 세탁소에서 일만하던 남편도 필자 뒷바라지에 다리를 못쓰게 되었다. 병들은 부부는 낯설은 이국 땅에 내려앉은 눈커플만 껌뻑 거리며 나란히 누워버렸다. 피붙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다. 산다는 것에 깊은 회의를 느끼며, 아무리 좋은 선진국, 부와 사치스러운 명예, 그따위 것들이 있어도 아무것도 아님을 철저히 느끼던 날에 다시 아이들 곁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남편을 설득하고 뿌리를 내렸던 세월을 미련 없이 정리했다. 고생하며 정들어온 곳, 아픈 추억들이 고스란히 담긴 땅을 뒤로한 채 고국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비행기 차창 너머로 피땀 흘려 견뎌온 시간들이 추억과 함께 너풀대며 날아다녔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행복한 꿈으로 온몸이 날아 갈 것만 같았다. 행복은 별 것 아니었다. 하늘에 떠 있는 작은 공간, 부푼 가슴이 천국이었다. 오랜 시간 공들여 모든 것들을 얻었으나 또 다 버리고 선택한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 다시 만나 만들어가는 소중한 가정의 행복을 무엇에 비유한단 말인가. 아이들을 향한 모성애 꽃이 만발하는 날, 한국 행 비행기 날개 가슴에는 무궁화 꽃이 활짝 피어났다.
- 2016-06-22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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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후경제] 브라보라이프 첫 걸음, 자기사랑
- ‘사랑한다.’는 말이 어느 시대보다 많이 쓰여지고 있다. 연인 사이에야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 인간관계 증진을 위하여 꼭 필요한 말로 권해진다. 부부 사이에도 그렇고 자식과의 관계에도 마찬가지다. 친구나 이웃에게도, 고객에게도 사랑한다는 말을 자연스럽게 사용한다. 종교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한다. 사랑의 지고한 가치가 있어서다. 사랑한다는 것과 사랑을 받는 것은 다같이 행복의 지름길이다. 사랑하고 사랑 받는 삶을 희망한다. 특히 후반생에 있어서 브라보 라이프는 사랑으로 충만한 삶이 아닐까? 사람은 가진 것이 있어야 다른 사람에게 베풀 수 있다. 내가 가진 재물이 있어야 이웃에게 나눠줄 수 있다. 많고 적음은 별개다. 나눌 수 있는 것은 재물만은 아니다. 마음도 그 하나다. 재능도 그렇다. 그 양은 많아도 적어도 나눌 수 있다. 콩 한 톨을 열 사람이 나누어 먹고 한강에 던지니 ‘퐁당’하더라 했다. 요즘에 이르러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개뿔도 가진 것이 없다면 주고 싶은 마음이 꿀떡 같아도 줄 수 없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나의 삶 속에 차곡차곡 쌓인 사랑이 있을 때에 그 사랑을 하나씩 꺼내어 남에게 줄 수 있다. 재물과 마찬가지로 내 속에 쌓아 놓은 사랑이 없다면 꺼낼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부모나 주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는 커서도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한다. 베풀 수 있는 사랑이 곳간에 쌓여 있어서다. 부모나 가족에게 받지 못하여도 스스로 사랑을 쌓는 경우도 있지만 쉽지 않다. 베푸는 것에 인색한 사람이 없지는 않겠지만, 채워져 있다면 쉽게 남에게 줄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다. 새로 채워서 주는 경우보다 쉬울 수 있다. 우리 주변에서 그런 현상을 종종 만난다. 미움을 받고 자란 아이는 미움이 가득 쌓이게 된다. 다른 내용물이 들어갈 틈이 없다. 꺼낼 수 있는 것은 미움이 대부분이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기 시작한다. 피해망상에 시달리기도 한다. 다른 사람이 해코지나 하지 않을까 의심을 하거나 사람을 피하려 한다. 사랑으로 아이를 키워야 하는 이유다. 부부싸움으로 세월을 산 사람의 자녀는 결혼 생활이 닮아 가기에 십상이다. 어느 집의 딸아이는 나이가 40살이 지났지만 시집 가기를 꺼린다. 부부싸움에 평온할 날이 거의 없었다. 부모의 모습이 남아 있어서다. 마음에 사랑이 메말라 있어서다. 사랑의 곳간이 비었다. 내 인생의 중추는 나 자신이다. 주인공이다. 나를 사랑해야 한다.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내 속에 사랑을 쌓아 가는 일이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줄 수 있는 사랑이 부족해서다. 자신이 행복하지 않으면 주변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 행복을 전달할 수 없어서다. 짜증스러우면 나의 행동과 말이 곱게 나가기 어렵다. 내가 건강해야 다른 사람을 보살필 수 있다. 건강하지 못하거나 불행하면 나에게 나오는 기운은 불행이다. 상대방이 불행해지고 어려움을 겪게 된다. 자신을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수신제가 평천하라고 하는 옛말이 있다. 자신을 먼저 닦는다는 의미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나를 갈고 닦는다 함은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이다. 내가 제대로 서지 않고서 가족이나 주변을 일으켜 세울 수 없다. 우리는 대체로 자신의 인생은 늘 뒷전에 두었다. 자식을 위해서 우선이었고 가족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기 일쑤였다. 부모세대는 우리보다 더욱 그랬다. 고운 옷을 보아도, 맛있는 것이 눈에 띄어도 늘 자식을 떠올렸다. 몸이 아파도 자신을 챙기기를 망설였다. 경제적으로 늘 부족이었던 이유도 있지만, 삶의 우선순위가 자신은 늘 뒤로 미뤄졌다. 끼니 때우기가 어려웠던 시절엔 어머니는 늘 밥을 먹어 배부르다며 부엌에서 물을 마시기 예사였다. 이제는 장수시대다. 자녀들의 생활은 쉽지 않은 상황이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힘든 세월을 살얼음 위를 걷듯 한다. 우리가 직장을 다닐 때는 남자 혼자 벌어서도 집안 살림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어림도 없다. 자녀를 위한 희생이 부모로서의 책임으로도 볼 수 있지만, 희생보다는 그들의 힘을 덜어줄 수 있는 방도를 미리 찾아야 한다. 그것이 자녀를 위한 일이다. 자녀의 도움이 없이 노후를 보낼 수 있어야 한다. 자녀에게 도움을 받지 않을 건강을 챙겨야 한다. 내가 아프면 오래 산다는 것은 재앙이다. 자식에게 짐만 된다. 노인 자살률이 높은 이유다. 당장에는 마음이 아플지 모르지만 자식에게 집중하지 말고 자신의 삶을 위하여 경제적인 부분도 챙겨두어야 한다. 달랑 집 한 채 가졌다면 노후 자금을 위한 주택연금에 가입하자. 걸을 수 있을 때에 가고 싶은 곳도 많이 다녀두자. 먹고 싶은 것도 자신에 많이 먹여주자. 좋은 음식도 나부터 먹자. 젊은이는 먹을 수 있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런 일이 곧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다. 우리는 그 동안 나를 너무도 혹사하였다. 이제는 나를 우선적으로 사랑하자. 남에게 베풀 수 있는 곳간에 사랑을 채우는 일이다. 언제고 꺼내어 필요한 사람에게 줄 수 있게 말이다. 사랑도 쌓여야 남에게 줄 수 있다
- 2016-05-30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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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활건강] 치매 예방주사는 대화로 푸는 소통이다
- 고령화 사회에서 건강한 노인이 덜 건강한 노인을 돌보는 노노케어(老老Care)는 시대적 소명이다. 선진국일수록 보건환경 개선으로 고령화는 필연이며 반면 출산율은 점점 줄어들어든다. 당연히 전체 인구는 고령화와 저 출산이 서로 상쇄되어 별로 줄지 않지만 사회인구는 점점 고령화가 되어간다. 고령화 사회의 노노케어는 젊은이들에게 생산과 후세 교육에 전념토록 할 수 있는 여력을 주고 활동적인 시니어에게 새로운 일자리 창출된다. 필자는 퇴직 후 제2의 인생을 노노케어의 선두에 서겠다는 각오로 이론적인 재무장을 위해 사회복지사 자격을 취득하고 노인운동지도사. 수지침사, 맛사지사 등 다수의 민간자격 시험에 합격하고 지금 치매지원센터에서 치매전문 자원봉사자의 일을 하고 있다. 치매는 고령화 사회에서 환자도 그렇지만 가족도 제일 겁먹는 질환이다. 중풍은 의식이 있는 본인이 괴로운 병이라고 하면 치매는 가족이 고달픈 병이다. 가죽 끈 같은 끈끈한 가족의 유대감이 없으면 한식구라는 관계가 어느 날부터 해체되고 심지어 치매 환자를 죽이기까지 한다. 치매는 병인데도 일반인이 치매에 대해 너무 모르기 때문에 제발 정신 차리라고 환자를 때리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80대의 치매할아버지가 철로를 걷다가 열차에 치여 사망한 사고가 발생했는데 치매할아버지의 법률상 보호자인 할머니에게 열차 지연에 대한 벌금을 부과 하였다. 할머니도 고령인 데다 할아버지의 매 순간을 감시할 수 없었다고 항변하였지만 판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더욱 의외인 것은 아들에게는 무죄를 선고하며 그 이유로 같이 살지 않는 다는 점을 들었다. 치매환자를 돌보는 봉사자의 한사람으로 치매는 외로워서 생기는 병이라고 감히 말한다. 치매는 영어로 Dementia라고 하고 일본에서는 인지증(認知症)이라고 하지만 한자로는 치매(癡呆)라고 쓴다. 치매 글자는 癡(어리석을 치) 呆 (어리석을 매 )자로 무릎을 탁 칠만큼 치매환자의 상태를 글자의 의미에 잘 담고 있다. 癡 는 병질부 즉 암(癌),병(病)과 같은 병질부를 쓰고 있으며 안에는 의심할 의(疑 )자가 들어있다. 인간관계에서 서로 소통이 없으면 남을 의심 하게 된다. 소통이 없는 치매환자는 의심이 많다. 자기 물건을 자기가 숨겨놓고 숨긴 사실을 잊어버린 채 누가 훔쳐갔다고 남을 의심한다. 심지어는 요양보호로 방문한 요양보호사와 남편과의 관계를 의심하기도 한다. 서로 소통이 원활한 사람은 의심이 있을 이유가 없고 이런 사람은 치매가 없다. 매(呆) 자를 자세히 보면 나무(木)위에 입(口)을 내미는 형상이다. 얼마나 말을 하고 싶었으면 말할 상대를 찾으러 나무위에 올라가서 입을 내밀어 보겠나? 결국 대화 상대를 못 찾고 어리석을 매(呆)자가 되어 치매환자가 된 것이 아닌가하는 연민의 정을 느낀다. 바꾸어 말하면 혼자 외롭게 살면서 말할 사람이 없는 사람이 치매에 잘 걸린다. 사람의 의사소통의 기본이 말인데 말할 상대가 없으면 외로워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렇게 치매 한자를 풀어 의미를 새겨보면서 치매는 외로워서 생기는 병이라는 확신을 갖는다. 치매는 외롭게 혼자 있는 사람들에게 친구하자고 찾아온다. 최근 치매는 노인성 질환이라는 통념과 달리 20∼30대 청년층 치매 환자가 매년 증가하고 있는데 전문가들은 서구화된 식생활과 운동부족, 음주 및 우울증 등을 원인으로 꼽고 있습니다. 필자는 이런 이유 말고도 사람사이의 대화소통에 주목하고 있다. 예전에는 대가족사회며 농경사회여서 가족, 이웃 간 소통은 저절로 이루어 졌다. 나이 들어 노동에 종사 못하고 집에 혼자 남게 된 노인들이 치매에 많이 걸린다. 치매 봉사활동을 하면서 많은 치매 환자분들을 만나보면 대개가 외로운 사람들이다. 현대의 치매 환자의 증가는 점차 대화가 없어지는 가정과 이웃, 현대 사회가 주범이라 생각한다. 1인 세대가 늘어가고 혼자 밥 먹는 사람이 폭발적으로 늘어간다. 사람끼리 모여 있어도 각자 스마트폰으로 카톡으로만 대화한다. 카톡으로 반갑게 대화하던 사람도 실제 만나면 시들해진다. 카페인 중독이라 하여 카톡이나 페이스북 인터넷은 중독에 가깝도록 이용하지만 사람 냄새나는 직접대화는 점점 줄어든다.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서로 키스하는 감질내는 형국이다. 보건 복지부 자료에 의하면 치매로 인한 비용도 2008년 8,625억 원에서 2012년 1조9,234억 원으로 123%나 늘었다. 세부적으로는 의료비(4,826억원→1조1,891억원), 교통비(10억원→23억원), 간병비(3,146억원→6,217억원)와 같은 직접비용이 모두 2배 이상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치매로 인한 사회·경제적 손실이 10년마다 두 배씩 증가하는 것으로 추정돼 2020년에는 18조9000억 원, 2030년에는 38조9000억 원으로 예상한다. 그동안 의료과학의 발전으로 획기적인 치료약이 개발되겠지만 가족이 해체되고 이웃과 고립화되어 혼자 살아가는 외톨이들 에게는 치매는 피하기 어렵다고 본다. 은퇴하기 전에 누구랑 어디서 무엇을 하고 지낼 것인가 고민하기 전에 남들과 어울리는 소통력을 시니어들은 키워야 한다. 부부가 함께 해외여행을 가는 것보다 친구랑 함께 가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난다. 부부가 함께 행동을 하면 좋겠지만 3,4십년을 서로 다른 생활을 바쁘게 해오다가 어느 날 퇴직했다고 젖은 낙엽처럼 딱 붙어서 함께 지내려고 하면 평소 못 보던 단점을 자주 보게 된다. 퇴직 후 부부싸움이 잦아지는 부부를 방송에서도 주제로 다룬다. 평소 이웃사촌이라는 동네친구를 사겨야 한다. 좋은 이웃친구란 나와 경제력이 비슷하고 성격이 잘 맞는 사람이다. 시니어들은 살아온 세월이 있어 나와 잘 맞을지 않을지는 금방 알아낸다. 성격상 잘 맞지 않는 부분을 고치려하거나 한두 가지 좋은 점이 있다고 계속 친구로 지내려는 생각은 더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 나이 들면 성격은 고치기 어렵다. 빨리 헤어져야 한다. 지금 가입해 있는 스포츠나 취미 동호회가 있다면 목숨 줄처럼 꼭 붙들어야 한다. 나이 들어 새로운 모임에 가입하려고 하면 잘 받아주지도 안을뿐더러 혹 받아준다고 해도 개밥에 도토리처럼 외톨이가 되기 쉽다. 그런 면에서 탁구나, 배드민턴이나 테니스 등 적성에 맞는 스포츠를 좀 젊었을 때 배워두면 좋습니다. 필자는 테니스를 30년이나 함께한 동호회가 있는데 주말이면 함께 늘 운동을 하고 식사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갖는다. 나이 들수록 인문학 공부를 해야 한다. 인문학은 사람과 소통하는 도구요 자산. 필자는 해마다 실시하는 동네 도서관의 독서마라톤 대회에 참가하여 5만 페이지의 책을 읽고 독후감을 제출하면서 상도 받는다. 막연히 하는 것보다 무슨 일이든 목표를 세워서 하면 동기부여가 확실하여 달성하기가 쉽다. 읽은 책의 내용은 자연스럽게 남들과 대화를 할 때 녹아 나온다. 남들과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어울리며 소통하는 여유로움이 치매예방주사다.
- 2016-05-23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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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년기자 칼럼]나도 올챙이 적 있었는데..
- 그날도 광화문 시내로 가기 위해 성북동 뒷길을 통해 삼청터널을 향하고 있었다. 이 길은 솔직히 초보운전자나 초행길인 사람에게는 좀 힘들 수 있는 코스이다. 경사가 급한 언덕길이 구불구불 이어지고 오르내리는 길도 많으며 급커브 길도 심심치 않게 만난다. 그렇지만 이 길을 수십 년째 다니고 있는 나에겐 참으로 편리하고 쾌적하게 달릴 수 있는 친숙한 길이다. 이 길의 장점은 신호등이 없어 논스톱으로 운전할 수 있고 매우 익숙해서 빠른 속도도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게 속도를 낼 수 없어서 보니 앞쪽의 차 두 대가 길이 훤하게 뚫렸는데도 완전히 거북이걸음을 하고 있다. 앞에 앞의 차에는 초보 운전이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눈앞에 훤히 보이는 길인데 좀 심하게 조심스러운 운전을 하고 있었다. 내 입에서 “어휴, 저런 초보운전”이란 말이 나왔다. 추월하면 되겠지만 좁은 골목길이고 구불거리는 오르막 내리막이 계속돼 맘대로 되지 않았다. 차도 흐름을 타야 하는데 너무 느리니 속이 부글부글 끌었다. 그 꼴로 성북동 뒷길에서부터 삼청터널 지나 경복궁까지 내려왔다. 그런데 그 순간 필자 머리를 때리는 생각 하나. 제 속도 오든, 느림보 속도로 오든 내려오는 시간은 5분도 차이가 나지 않는 거 아닌가? 별 차이도 안 나는 걸 초보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고 화냈던 걸 생각하니 참으로 필자 자신이 부끄러웠다. 필자도 초보 시절이 분명 있었고 운전하면서 실수했던 일도 여러 번 있었다. 필자는 운전면허를 차도 없던 1978년에 따 놓았다. 장롱면허로 잠자던 면허증은 결혼 후 남편의 중후한 까만색 승용차를 만나면서 빛을 발했다. 운전 연습을 시켜주면서 부부싸움이 가장 많이 난다는 이야기가 있다. 맘씨 좋은 남편도 연수시켜주며 화를 냈다. 너무나 운전하고 싶었던 필자는 그런 걸 감수했으나 결국 남편 아닌 전문가에게 개인레슨을 받았다. 한번은 동네 골목에서 큰길로 통하는 도로로 나가는데 차들이 많아 잔뜩 긴장하며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조심조심 느리게 가고 있었는데 조수석의 남편이 “앞으로 빼!”라고 소리쳤다. 웬일인가 싶어 보니 오른쪽 유리창 너머로 어떤 아저씨가 뭐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남편이 앞으로 빼라니 그 말대로 앞쪽으로 전진했다. 그런데 이번엔 멈추라고 소리친다. 차를 멈추고 밖으로 나간 남편이 한 아저씨를 부축하고 있었는데 술이 거나하게 취한 아저씨가 마을버스를 기다리며 한쪽 발을 쭉 내밀고 서 있었다고 한다. 내가 그 아저씨의 발등을 지그시 밟고 있었던 것이다. 거북이 운전으로 천천히 가고 있었으니 망정이지 큰 일 날 뻔 했다. 아니 근데 그 아저씨는 왜 발을 그렇게 뻗고 있다가 남의 차바퀴에 깔렸을까? 나도 내려 보니 아저씨 슬리퍼 발등 위로 바퀴 자국이 찍혔다. 차바퀴에 깔렸으니 뼈라도 부서졌으면 어쩌나 걱정스러웠는데 맘씨 좋게 생긴 아저씨는 무슨 운전을 그따위로 하냐는 말씀만 하고는 웃으시며 괜찮다고 하셨다. 병원에 가보자고 해도 괜찮다고 해서 약국에서 파스와 연고를 사드리고 연락처를 드렸다. 추후에 이상이 생기면 연락하라고 당부하고 돌아오는 내내 어찌나 남편의 눈치를 보았던지 지금 생각하니 우습기만 하다. 그런저런 사고가 몇 번 생기자 필자는 안전운전을 제일 우선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초보 시절에 그런 사고도 겪었으면서 그날 앞을 좀 가로막았다고 투덜댔으니 정말 올챙이 적 생각 못 했다. 항상 과거를 돌아보고 남을 이해하는 넓은 마음을 갖자고 다짐했다.
- 2016-05-17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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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날 기획] 가족 모두 모이는 정초, 나누고 싶은 이야기 ‘상속 트러블’
- 상속을 둘러싸고 형제 사이가 나빠지거나 친척간의 왕래가 끊기는 경우는 한국이나 일본 모두 마찬가지. 그런 슬픈 사태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잡음이 생기기 쉬운 포인트를 일본에선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지 일본 시니어 월간지 의 기사를 발췌해 보았다. 가족 모두가 모인 정초는 상속에 대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이태문 동경 통신원 gounsege@gmail.com 홍수미 suming72@gmail.com “우리 형제들은 사이가 좋으니까 걱정 없어”, “다툴 만큼 재산은 없으니까”라고 자주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것은 큰 오산이다. 실제로 상속의 상황이 되면 자신만 손해보고 싶지 않다. 받을 수 있다면 1엔이라도 더 많이 받는 게 사람의 심리. 그렇기 때문에 먼저 상속은 다툼이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게 좋겠다”라고 기타무라 쇼고(사회보험 노무사, 행정서사) 는 말한다. 실제로 일본 가정재판소에서 상속에 관한 조정과 재판을 한 사람은 늘어나고 있고, 그 내역을 보면 상속 재산이 5000만엔 이하로 다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렇다면 상속이 싸움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면 좋을까? 상속의 수속에는 먼저 누가 상속인(상속을 받는 사람)으로 상속할 재산은 어느 정도 있는지를 조사할 필요가 있다. “부모의 재산이 어느 정도 있는지는 실제 자식들도 정확하게 모르는 경우가 많다. 나중에 다투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예금액 등 재산이 어느 정도 있는지를 일람표로 만들어 형제 모두가 그 정보를 공유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자.” (시모이리사 마유미 사법 서사) 상속할 재산의 비율은 민법에서 규정하고 있는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표준. 상속인 전원이 이야기를 하고서 나누는 방법을 바꿔도 괜찮다. 법정상속분에서는 나누는 방법이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경우에 쓸 수 있도록 ‘특별수익’(예를 들어 부모가 살아계신 동안에 집과 맨션의 보증금을 지불한 경우, 그 금액을 상속분에서 빼는 등), ‘기여분’(예를 들어 부모의 일을 무보수로 도운 경우, 그 몫을 더 많이 상속하는 등)이라는 제도도 있다. 하지만 무엇이 어느 정도 인정받을지는 경우에 따라 다르다. “다투는 것을 피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나눌지 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꼭 부모 등 재산을 남기는 피상속인이 건강할 때 해 두는 게 최선이다. 상속은 피할 수 없는 문제이고, 확실하게 형제 모두의 마음속에는 어떻게 될까라고 신경이 쓰인다. 말 꺼내기가 힘들지 모르겠지만 누가 입을 떼지 않으면 이야기에 진전이 없다.”(기타무라 쇼고) 또한 부채 유산이 있어서 상속을 포기하는 경우는 3개월 이내에 신청해야 한다. 아무런 수속을 밟지 않고 3개월이 지나면 자동적으로 부채 유산도 상속받아야 한다. 주의하자. 1. 상속 트러블이 생기기 쉬워 주의가 필요한 경우 '부동산 유산이 있을때' ‘재산은 없다’ 혹은 ‘집과 토지만 있으니 상속으로 다툴 걱정은 별로…’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상속에서 가장 많이 잡음이 생기는 재산이 부동산이다. “돈을 균등하게 나눌 수 있지만, 부동산 그 자체로는 나눌 수 없다. 나눌 수 없는 재산을 상속하는 사람 전원이 불만 없도록 나누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좋을까로 다투는 것이다”라고 기타무라는 말한다. 부동산과 균등의 가치가 있는 재산이 따로 있는 경우는 부동산을 받는 사람, 그밖의 재산을 받는 사람 식으로 나누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독자들의 고민 상담처럼 부동산밖에 없는 경우는 골치아프다. 또한 부모가 유언장을 남기는 등의 준비를 하지 않은 채 돌아가시면 남은 부동산은 상속인(상속할 권리가 있다고 법률로 인정받은 사람) 전원의 공동 소유가 되고, 처분할 때에도 전원의 동의가 필요하는 등 이것 역시 번거롭다. “토지를 그냥 계속 공동 소유하게 되면 돈은 생기지 않는데도 세금만 내게 된다”고 기타무라는 말한다. 부동산 유산은 이게 골치 ① 공동소유가 되는 게 흔하다 유산 분할이 처리될 때까지 피상속인(재산을 양보하는 사람) 명의 그대로의 부동산은 상속인 전원이 소유주인 공동소유가 된다. 공동소유의 부동산은 다른 공유자 동의가 없는 한 빌려 주는 것도 파는 것도 할 수 없다. 그 토지에 세워진 집의 개수와 철거 등도 원칙적으로는 불가능하다. ② 지방의 토지는 매각하기 힘들다 저출산이 문제가 되고 있는 일본에서는 지방 등에서 인구 감소가 급속하게 진행돼 빈집이 증가하고 있다. “부동산을 상속해도 누구도 살려고 하지 않으니 매각하려고 생각해도 지역에 따라서는 좀처럼 팔리지 않는다. 팔려면 엄청 가격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될지도.” (기타무라) ③ 농지는 전매 허가가 필요하다 상속하는 부동산이 택지가 아니라 논과 밭 등 농지라면 이게 또 골칫덩어리! 농업은 이어받지 않을 생각이니 거기에 집을 지을꺼라고 생각해도 농지 이외에 전용하기 위해서는 수속에 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참으로 힘든 경우도 있다. “농지는 농업위원회 등의 허가 없이는 매매도 할 수 없다.”(시모이리사) ④ 지가는 변동하기 쉽다 “일본인은 부동산 신앙이 강한 경향이 있다. 하지만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평당 지가도 뚝 떨어지는 경우도 있다.”(기타무라) 안이하게 생각해 부동산을 상속하면 손해를 볼 가능성도. “이 토지는 000만엔의 가치가 있을 거라”는 등 부동산에 너무 큰 기대를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잡음을 없애는 포인트 ⑴ 부동산은 가능하면 단독소유로 ⑵ 상속인이 다 모였을 때 부모의 의향을 들어 둘 것 ⑶ 거주 목적이 아니면 부모님 집은 매각해 현금화할 것 “부동산이 있는 가정의 경우, 장래에 그 토지를 어떻게 할 것인가, 재산을 남긴 부모와 상속하는 자식 모두가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 둬야 한다. 누가 부동산을 이어 받을 것인지, 그 경우 받지 않는 형제에게는 무엇을 남길 것인지. 상속할 대상이 아무도 없는 경우는 부모가 살아 있는 동안에 처분해도 좋다고 본다. 특히, 지방에 따라서는 부동산 처분에 시간이 걸리는 경우도 있다는 걸 염두에 두고 일찌감치 준비하자.”(기타무라) 2. 상속 트러블이 생기기 쉬워 주의가 필요한 경우 '부모님 돌보기를 혼자서' 상속을 받는 사람(상속인), 상속을 받는 재산의 비율(법정상속분)은 분명하게 민법에 규정되어 있다. 하지만 ‘법정상속분’대로 나누는 식은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경우도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부모의 간호와 간병이 얽혀 있는 경우이다. “예를 들어 자신은 매일처럼 부모집에 다니면서 부모를 모셨다. 형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도 자신과 동등하게 상속한다니 납득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고 기타무라는 말한다. 부모 등 피상속인을 간병한 경우 기여분이 인정받는 경우도 있다. 가능하면 간병에 들어간 돈, 사용한 시간 등을 기록해 두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답답한 심정을 피하기 위해서 지금 해야 할 것은 “부모의 간병은 자식들 전원이 나눠 부담하는 것”이라고 기타무라는 조언한다. “간병이라는 게 형제들 중에 책임감이 강한 사람, 마음씨가 좋은 사람이 모든 걸 짊어지기 쉬운데, 그렇지만 예를 들어 장남 가족이 간병한다고 하면 그 외의 형제들이 매월 1만엔씩 모아서 형 가족에게 전달하는 등 분담해 둘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부모가 돌아가신 뒤 ‘나만 손해를 본다’, ‘다른 형제는 부모를 모시지 않았는데 똑같이 유산을 요구하는 건 맞지 않다’라는 기분이 생기게 된다.” 또한 상속에서는 며느리, 딸의 남편, 친척 등 상속하는 당사자 이외의 사람들이 참견해서 다투는 경우가 많다. 부모의 간병은 실제로 며느리가 했다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며느리는 가족이지만 상속에 있어서는 제3자라는 미묘한 입장이다. 원래 며느리와 시어머니, 며느리와 시누이라는 관계는 어려운 데다가 상속에 관해 며느리가 참견하기 시작하면 잘 정리될 일도 정리되지 않게 된다. “유산분할 협의는 상속 권리가 있는 혈연자들만이 하는 것으로 하자.”(기타무라) (유산분할 협의란? 유언장이 남아 있지 않는 경우 유산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는 상속인 전원이 이야기를 나누고 정한다. 이 이야기를 유산분할 협의라고 한다. 상속인의 누군가가 행방불명이 됐거나 인지증(치매)에 걸린 경우에도 제외는 안 된다. 제외하면 그 유산분할협의는 무효가 된다.) 상속인 전원이 이야기를 나눠 정하지 못하는 경우는 가정재판소에서 조정을, 그래도 안 되면 재판하게 된다. 잡음을 없애는 포인트 (1) 생전부터 부모 돌보기, 간병은 자식들 모두가 분담 (2) 유산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유산분할 협의는 상속인만으로 3. 상속 트러블이 생기기 쉬워 주의가 필요한 경우 '가족 관계가 복잡 & 독거' 이혼을 해 아이를 양육받지 않았던 경우, 아이를 데리고 재혼한 경우, 내연 관계의 상대방 사이에 아이가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경우 등 가족관계가 복잡한 경우도 상속으로 자주 잡음이 생긴다. “경우에 따라서는 부모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상속인인 자식들이 다른 엄마와 다른 아버지의 형제가 있는 걸 모르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모른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고 해서 그런 형제를 상속인으로부터 제외하는 것은 할 수 없고, 유산분할협의에 참가시키거나 이야기를 나눈 내용을 인정하게끔 할 필요가 있다.”(시모이리사) 예를 들어 남편이 죽은 경우 그 재산의 상속권은 부인만이 아니라 부모와 형제에게도 있다. “아이가 없는 부부로 재산을 모두 배우자에게 남기고 싶은 경우는 유언장을 써 두자. 부모의 유산을 상속하는 경우에는 유류분(遺留分)이라고 해서 예를 들어 유언장이 있어도 상속인이 최저한 상속할 수 있는 재산이 있다. 하지만 형제의 재산 상속에는 유류분이 없기에 100퍼센트 유언장대로 유산을 나눌 수가 있다.”(기타무라) 잡음을 없애는 포인트 (1) 배우자가 아이가 없는 경우 아이가 없는 경우 부모와 형제에게 상속의 권리가 생긴다. 하지만 현대에서는 생활을 부모와 형제에게 의존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부부의 재산은 부부가 쌓아온 것이라는 생각이 일반적. “남편(아내)의 재산은 아내(남편)에게 남기고 싶다”고 한다면 유언으로 분명하게 그 취지를 기재해 두자. (2) 가족관계가 복잡한 경우 예를 들어 모친이 전남편 사이의 아이를 데리고 재혼한 경우 모친의 재혼 상대자인 현 남편이 사망해도 상속인이 되지 못한다. 남편이 “데리고 온 아이도 실제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재산을 넘겨주고 싶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양자 관계를 할지 유언이 필요하게 된다. 유언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는데, 가장 문제가 생기기 어려운 건 법률 전문가인 공증인이 만드는 공정증서유언. 비용은 10만엔 정도(재산액과 상속인의 숫자 등에 따라 다르다)로 전문가가 만들기 때문에 안심. 병원과 시설 등에 공증인을 불러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 집, 토지 이외에 어떤 재산이 있는지? △ 부모 의향을 들어 두자 △ 상속인이 누구이고 몇 명 있는지? △ 빚은 없는지? △ 부모의 간병 등 상속인 한 사람에게 부담이 몰려 있지 않은지? ※기사 중 법률적인 내용은 일본 현지의 법률을 근거로 한 것이므로 국내법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 2016-02-05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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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중년을 노크하다 PART3] 남자와 여자, 여자의 적은 남자인가?
- 자료를 고르려 단골 서점에 들렀다가 교양서적 코너에서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분석하고 설명한 책들이 너무 많아서다. 어떤 책은 남자는 머물고 싶은데 여자는 떠나고 싶다고 하고, 어떤 책은 남자는 화성에서 왔는데 여자는 금성에서 왔다고 한다. 남자는 착각하고 여자는 고민한다는 책도 있고, 놀랍게도 남자는 발레하는데 여자는 권투한다는 책마저 꽂혀 있다. 심지어 그런 종류의 책들 숫자가 갈 때마다 늘어난다. 남자와 여자가 그렇게나 다른 존재였던가, 새삼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김유준 프리랜서 기자 dongbackproject@gmail.com 아닌 게 아니라 여성과 남성은 많이 다르다. 그리고 그 대목에 관해서는 연구가 왕성하다. 인문학자들이 공을 들여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어디 학자들뿐이겠는가. 일반 사람들의 시선 또한 종종 그 지점을 향한다. 최근 술자리에서 제법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남성과 달리 여성들이 왜 그토록 손톱 치장에 공을 들이는지에 관한 주장들이었다. 누군가 “요즘 손톱이 유난히 거칠어졌다”고 한마디 툭 던지면서 대화가 시작됐다. 다른 누군가가 “이집트 파라오의 미라에서도 발견됐을 만큼 역사적으로 본디 손톱 치장은 남녀 통틀어 부와 명예의 상징이었다”는 어쩐지 젠체하는 설명으로 그 말을 받았다.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옛날이라면 손톱 치장과 유지에 비용이 수월찮게 들었을 테니 지체 높은 사람들이 자신의 부와 지위를 과시하는 용도로 쓰였을 게 분명하다. 토론의 초점이 ‘근현대에 이르러 그러한 전통이 여성들에게만 전해진 이유’로 모여든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 늦은 밤의 술자리에서 때 아닌 심리학, 인류학 토론이 벌어진 것은 그 때문이었다. 어느 사회심리학자는 이렇게 설명했다. 여성이 화장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이성(異性)에게 잘 보이기보다 스스로 만족하려는 원인이 더 크다’는 게 정설. 손톱 치장은 그 화장 가운데에서도 해당 목적을 달성하는 데 가장 효율적이다. 거울 없이도 원할 때면 곧바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은 누군가로부터 칭찬 듣기를 소망하는 존재. 아무도 자신을 칭찬하지 않는다면 스스로라도 해야 한다. 손톱이야말로 그때 가장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부위다. 그것이 그가 주장하는 ‘여자만 손톱 치장에 열을 올리는 이유’였다. 홍보 전문가인 친구가 덧붙인 말도 그럴 듯했다. 한창때는 화장하지 않은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상황이 달라진다. 꾸미지 않으면 스스로의 모습에 스스로가 실망하기 일쑤. 때문에 슬슬 화장이 진해지기 시작하고, 세월이 훌쩍 더 지나 화장만으로 목적 달성이 여의치 않아지면 반사적으로 손톱을 비롯해 팔이나 다리처럼 얼굴 아닌 부위에 집중하게 된다. 그가 내린 결론은 그러므로 보석이나 장신구, 사치품 따위를 선물해서 여성을 공략하려는 방법은 젊은 여성보다 나이 든 여성에게 더 효과적이라는 것. 보석은 손톱 치장과 맥락을 같이 하기 때문이란다. 남자는 파악과 대응의 파트너 중년 여성들은 이성을 꼭 끌어안고 가야 할 동반자로 보지 않는다. 그보다는 어떻게 해야 더 잘 정복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이해와 상생’보다는 ‘파악과 대응’에 주안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상대가 오른쪽 주먹을 내지르면 왼쪽으로 피하고 왼손으로 옆구리를 쳐서 굴복시켜라’ 하는 식의 책들이 과연 행복한 만남의 카운슬링으로 알맞을까. 그들에게 이성은 오랏줄을 던져 포박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뉴욕 타임스가 베스트셀러로 꼽았다는 같은 책들은 대표적인 예. 저자인 칼럼니스트 세린 야곱은 ‘남자는 어차피 특정적 인성의 여성을 좋아하게 돼 있는 존재’이므로 ‘엄마가 되기보다는 연인이 돼야’ 사랑받을 수 있으며 ‘슈퍼우먼은 강하지만 외롭다’고 못 박는다. 급기야는 ‘여자들이 매달릴 때 나타나는 열 가지 징후’까지 거론하며 결코 그처럼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결국 그가 주창하는 바는 곰보다는 여우가 돼야 한다는 것. 여우가 뭐가 나쁘냐면서. 물론 여우 같은 여자가 지탄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남자들에게 두루 사랑받으며 살아가는 여자들이 비난 받을 이유 또한 없다. 그러나 그런 주장을 듣고 나면 그만 숨이 턱 막힌다. 삶을 군인이 작전 수행하듯 살아서 과연 행복할까 싶다. 먼저, 모든 여성이 여우처럼 살아야 남성을 쟁취할 수 있으며 그래야 행복해진다는 주장이 가당키나 한가? 예를 들어보자. 심리학적으로 남성은 ‘목표가 명확한 여성’일수록 더 호감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배우자를 고르는 조건으로 막연히 ‘마음이 맞다’거나 ‘그저 끌린다’는 식보다는 ‘연봉이 바라는 수준이며 학벌도 커트라인 안에 든다’ 하는 식을 더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여성인 당신은 세상 모든 남자를 숫자로 평가할 것인가? 천성적으로 그렇게 하지 못하는 여성이 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다. 그리고 그들이 모두 불행하지도 않다. 학자들이 그렇게 주장한다고 해서 세상 남자들이 모두 그런 것도 아니다. 경마 정보지 못지않은 책들을 참고서 삼아서 타고난 성품까지 바꿔가며 획일적으로 살아야 남성의 사랑을 쟁취할 수 있다면 남자라는 존재는 과연 무엇인가? 열이면 열 똑같은 상대만을 선호하는 천편일률, 초지일관의 고집불통인가? 남성은 여성의 적이 아니다 남성은 여성의 적이 아니다. 여성 역시 남성의 적이 아니다. 바른생활 교과서에 나올 법한 말이라 다소 객쩍기는 하지만, 어쨌든 둘은 서로 함께 살아가는 동반자 관계다. 서로 적대하지 않고 잘 살아갈 수만 있다면 이성만큼 사랑스러운 존재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연구해야 할 문제는 바로 그 ‘어떻게 해야 서로 잘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여우가 돼야 한다거나 하는 식은 문제의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근본적 해결책은 무엇인가? 세계에서 처음으로 ‘아이큐를 높이는 방법’을 연구했다는 일본의 뇌 과학자 사와구치 도시유키(澤口俊之) 무사시노 가쿠인 대학 국제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지난해 한 방송에 출연해 이렇게 말했다. “남자와 여자는 많이 다릅니다. 굳이 수치로 말하자면 약 80퍼센트는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차이점이 많으니 이를 극복하는 방법도 다양하게 제시돼 있습니다. 그러나 살면서 그 방법들을 모두 수행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차이를 인정하고 내버려두는 편이 더 수월하고 또 바람직합니다. 일일이 대응하기보다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덮어두는 것입니다. 찜찜하게 느껴질지 몰라도 실은 대단히 유용합니다. ‘너는 그렇게 살아라, 나는 나대로 살겠다’고 하는 태도가 오히려 둘의 사이를 더 건강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젊은이들 표현대로라면 ‘쿨’하게 살아가는 것이지요.” 상대를 선택했을 때는 다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무작정 끌려서일 수도 있고, 명확한 장점들이 마음에 들었을 수도 있다. 그랬다면 상대를 믿고 인정해야 한다. 처세서에 기술된 자잘한 잔머리는 한때의 위기상황을 모면하거나 일시적으로 상대의 관심을 끄는 데 쓸모 있을지 몰라도 머나먼 여정을 함께 가기에는 오히려 방해가 될 공산이 더 크다. 윤용인이 쓴 에는 이와 관련해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소개돼 있다. 아끼던 술을 아내가 버린 데 격분한 저자가 아내의 천연비누를 모조리 버렸더니 아내가 화들짝 놀라 금방 술을 사왔을 뿐 아니라 다시는 버리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물론 그 뒤로 저자 역시 비누를 되찾아주었다고 한다. 난데없이 웬 부부싸움 이야기를 늘어놓았는지 의아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전문가의 의견을 끌어내기 위해서였다. 시인이며 심리학자인 김경미는 저서 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심리학에 능통한 분들도 때론 자기 마음을 어쩌지 못하죠. 그래서 어린아이처럼 기 싸움을 벌이고 상대를 내 식대로 고치려 일전을 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모든 심리 전문가들이 부부 문제에 관해 이구동성으로 조언하는 제1항목은 ‘상대를 내 식으로 고치려 하지 마라, 상대를 인정하라’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아무 남자나 만나서 ‘그대로 인정’하기만 하면 행복해진다는 뜻은 아니다. 남자도 남자 나름. 좋은 남자도 있고 나쁜 남자도 있다. 어느 개그우먼이 배우자의 파탄적 혐의 탓에 두 번째 결혼 생활까지 위기에 몰렸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새삼 남성이든 여성이든 배우자를 잘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의 리서치 결과를 지면 관계상 두 가지만 살펴보자. 모두 어떤 남자가 나쁜 남자인가를 가려내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연구들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다음에 기술되는 내용은 ‘그런 경향이 있다’는 정도일 뿐이라는 사실. 먼저 영국 신문 메트로 지(紙)의 기사 내용을 참고해보자. 영국 굴지의 만남 사이트에서 어떤 면에서는 흥미롭고, 어떤 면에서는 유별난 조사를 실시했다. 남자의 발 크기와 바람기와의 상관관계에 관한 리서치다. 언뜻 무슨 생각에서 그런 작업을 했을지 의아하기조차 한데 어쨌든 상당히 엉뚱한 결과가 도출됐다. 발 크기가 클수록 바람기가 많다는 것이다. 발 크기가 285밀리미터인 남성들은 260밀리미터인 남성들보다 세 배 더 바람을 피우며, 295밀리미터인 남성들은 250밀리미터인 남성들보다 다섯 배 더 바람을 많이 피운다는 결과다. 이 조사 결과를 두고 학자들은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과 관계있는 듯하다”고 분석했다. 체격이 좋고 목소리가 낮을수록, 다시 말해 남성 호르몬이 많을수록 바람기가 한눈을 더 잘 판다는 리서치 결과가 있는 것을 감안하면 이것 역시 그와 관련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물론 아직까지 정확한 원인은 찾지 못했다. 두 번째는 오하이오 주립대학 심리학과의 연구 결과다. 18세에서 40세 사이의 남성 800명을 대상으로 설문을 진행했는데, SNS에 직접 찍은 자신의 사진을 많이 올려놓은 남성일수록 겉과 속이 다른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고, 거짓말을 자주 하며, 자기중심적인 남성일수록 SNS에 직접 찍은 자신의 사진을 많이 올려놓았다는 것이다. 특히 자신의 사진을 좀 더 좋게 보이도록 손질하는 사람에게서 그런 경향이 짙었으며, 심한 경우 사이코패스까지 있었다고 한다. 다시금 강조하건대, 발과 페이스북만 확인하고는 상대를 완전히 다 알아냈다고 속단해서는 곤란하다. 남성은 여성의 적인가. 여성은 남성의 적인가. 어느 쪽도 아니다. 남성과 여성은 서로 상생하며 조화를 이뤄야 할 존재들이다. 그런 면에서 최근 인터넷을 중심으로 빚어지는 남과 여의 대결 양상은 심히 우려스럽다. 이성은 당신의 적이 아니다. 평생 함께 가야 할 말 그대로의 동반자다. 채복기 목사는 이라는 책에서 배우자는 ‘또 하나의 반쪽’이며 ‘또 하나의 심장’이라고 말했다. 그런 상대를 적으로 돌려서야 행복이라는 파랑새는 쉽게 잡히지 않을 것이다.
- 2015-11-27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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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석테마①] 추석시즌, 나 이럴 때 스트레스 받는다!
- 글. 김숙기 나우미 가족문화연구원장 case1. 사춘기 손주가 말 한마디 안 건넬 때 손주들이 커가는 것을 보는 것이 힘들어도 명절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그런데 사춘기가 되더니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묻는 말에 대답도 안 할 때는 너무 서운하다. 손주들이 어렸을 때는 보내준 사진만으로도 흐뭇했는데 클수록 더 멀어지는 것 같다. 이럴 때 해결책 서운하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손주들과 눈높이를 맞추려는 노력을 하라. “공부 잘했냐”, “밥 잘 먹고 다니냐” 등 뻔한 이야기나 “엄마 아빠 요즘도 싸우냐”, “어느 대학 갈 거냐” 등 대답하기 곤란한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말자. 대신 문자, 카카오톡 등으로 간단한 메시지를 보내고 이모티콘을 많이 활용해보자. 아이들은 권위적이고 훈계하는 어른들에게 다가가지 않는다. case2. 사돈집에 추석선물 보내도 답례가 없을 때 없는 돈 긁어서 매년 두 사돈댁에 선물을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첫째 사돈댁에서는 선물만 받고 아무런 답례가 없다. 사돈댁과 오고가는 정이 있어야 하는데 한두 해도 아니고 무시당하는 심정이 된다. 그렇다고 둘째 사돈댁만 보내는 것도 그렇고 이럴 때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럴 때 해결책 지금처럼 하면 된다. 다만 기대하는 마음을 버리고 선물하라. 사돈댁에서 답례가 없다고 해서 둘째 사돈댁에만 선물을 보내면 가족 간 보이지 않는 갈등이 생길 여지가 많다. 집안마다 처해진 상황이나 여건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자. 사돈댁도 마찬가지다. 내 기준으로 생각해서 감정을 키울 필요가 없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겠지.” 또는 “지금 무엇인가 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우리 할 도리는 했으니 마음은 뿌듯하다” 고 생각하라. case3. 이번 추석에 처가에만 가겠다는 통보를 받았을 때 아들이 얼마 전 이번 추석에 처가에만 가겠다는 전화를 했다. 사돈댁이 부산인데 아이들 데리고 3박4일 놀다오겠다는 것이다. 아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며느리가 “왜 명절 때마다 당신 집에만 가야 하느냐”며 불평을 터뜨려 싸움이 많았다고 한다. 아들이 한 명인데 너무하지 않은가. 이럴 때 해결책 자신의 생각만 고집하지 말고 며느리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배려해주는 자세가 필요하다. 아들 부부가 상의해서 처가에 가는 것으로 결정되었다면 차라리 이번에 며느리에게 전화해서 “그동안 친정에 못가서 힘들었지? 명절에 못 보게 돼 서운하지만 조심해서 잘 다녀와라”고 쿨하게 말해라. 이렇게 본가와 처가의 거리가 먼 경우 한 해씩 번갈아가는 가정이 많아졌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서운한 마음을 다른 것으로 채우는 지혜가 필요하다. case4.며느리와 신경전을 벌였는데 남편과 아들이 며느리편만 들 때 며느리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한마디 할 때가 있다. 지난 명절에도 친인척이 모인 자리에서 너무 짧은 옷을 입고 있어 민망해 한마디 했더니 남편과 아들이 눈치 없이 “괜찮은데 왜 그렇게 예민하게 구느냐”고 오히려 나를 타박한다. 이제는 눈치 보여서 며느리가 잘못한 일이 있어도 말도 못하고 속만 태운다. 이럴 때 해결책 우선 남편이나 아들이 있을 때는 며느리를 절대 야단치지 마라.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신경전을 벌이는 대신 며느리 혼자 있을 때 조용히 이야기를 하자. 내 기준이 다른 가족에게는 적용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잘못한 것, 틀린 것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 앞으로 이야기할 때에는 “내가 생각할 때에는~”, “내가 봤을 때는~” 을 먼저 말하고 뒷말을 잇는 습관을 갖는 것이 좋다. 남편에게 중간에 끼어들지 말라고 미리 요청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case5. 사위가 아무것도 안 해서 얄미울 때 딸만 있는 가정인데 큰딸이 작년에 결혼해서 사위와 명절을 두 번 보냈다. 사돈집이 미국이기 때문에 명절 연휴를 우리와 보내고 있다. 문제는 장인도 팔 걷어붙이고 열심히 집안일에 동참하는데 젊은 사위가 우리 집에 오면 아무것도 안 하고 거실에서 TV만 보거나 방에 들어가 잠만 자다 간다. 교사인 우리 딸이 평상시에도 혼자 집안일까지 다 맡아서 하는데 명절에도 이런 꼴을 보니 너무 얄밉다. 사위는 백년손님이라지만 시대가 달라지지 않았나. 이럴 때 해결책 이럴 때일수록 “내 딸이 자네 만나 너무 고생한다” “내 이럴 줄 알았으면…” 등 대놓고 뭐라고 하는 것은 금물. 그러기 전에 사위가 처갓집과 잘 섞이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반감이 생기지 않도록 장모는 “자네가 많이 피곤했나 보네…” 정도로 끝내고 장인이 나서줘야 한다. 명절 연휴 기간 서로 분담해 할 일을 정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서로 잘 할 수 있는 일,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나누어서 우선 사위에게 선택권을 주는 것. “명절 기간에는 남녀 공평하게 나눠 일하고 함께 즐기도록 하자”고 장인이 유도해주는 것이 자연스럽다. case6. 며느리가 빨리 돌아갈 생각만 할 때 직장을 다닌다는 이유로 음식 다 차려놓은 뒤 도착해서 명절 때 친정 갈 생각만 하는 며느리가 얄밉다. 명절 당일 아침 먹고 조금 있다가 시누이들 보고 가라며 은근히 눈치를 주어도 가기 바쁘다. 아들은 더 있다 가고 싶어 하는 눈치인데 매번 이런 꼴을 보고 있자니 답답하다. 이럴 때 해결책 명절 전에 며느리와 사전에 상의하도록 하자. 그동안 안 했다고 해서 이번 명절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네가 이런 부분은 준비해줬으면 좋겠다”고 분명히 말하고 며느리의 의견을 들어보자. 며느리 입장에서는 시댁에서 다 준비를 해 놓으니 당연히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게 되거나 어떤 것들을 준비해야 할지 몰라 눈치만 보고 있을 수도 있다. 명절 당일에 몇 시쯤 출발할 예정인지도 아들 며느리와 사전에 합의해놓는 게 좋다. 미리 언제 떠날지를 알면 매번 신경전을 벌이지 않아도 된다. case7. 며느리와 딸 사이가 안 좋아서 중간에서 곤란할 때 며느리와 딸 사이가 너무 나빠 고민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친해지겠거니 했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지난 명절에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어 함께 모인 자리에서 불만을 얘기해보라고 했다가 결국 싸움으로 끝났다. 그동안 며느리에게는 딸 입장을 이해하라고 하고, 딸에게는 며느리 편을 들었는데 그것에 대한 불만도 많은 거 같다. 이번 추석에 어쩔 수 없이 만나야 하는데 중간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럴 때 해결책 중간 역할을 잘못하거나 차별적인 요인은 없었는지 살펴보자. 지금까지 해 왔던 방식은 ‘역시 시부모라 딸만 생각하는구나’, ‘이 집안은 며느리가 상전이구나’ 라고 생각돼 각자 서운함, 적대감, 소외감을 키워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던 것. 사실 상황보다는 마음을 이해받지 못한 아픔이 더 클 수 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춰보자. 며느리와 딸에게 상대 입장을 이해시키기 전에 각자 처해 있는 어려움이나 불만 등을 들어보고 중간자 입장에서 마음을 헤아려주는 것이 핵심이다. 이번 추석에는 두 사람 모두 소중한 우리집 식구라는 것을 잘 전달하고 집안일도 중간에서 공평하게 분담해 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 2015-09-21 1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