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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좀 더 오래 내 곁에 있어줘요”
- 김성예 여사, 참 오랜만이에요. 이런 편지는 언제 썼던가? 결혼을 하고 나서 이듬해던가, 그 이듬해던가 내가 학교 선생으로서 강습이라는 걸 받기 위해 잠시 고향 집에 당신을 남겨놓고 대전이나 공주에 머물러 있을 때 몇 차례 짧은 편지를 썼던 기억이 납니다. 이제 새삼스럽게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막막한 심정인 채로 컴퓨터 앞에 앉아 망설여봅니다. 생각해보면 엎어지고 잦혀지면서 가늘고도 길게 이어온 날들이었습니다. 우리가 결혼을 한 것이 1973년 가을이니까 45년, 반세기 가까운 세월입니다. 우리는 중매로 만났고 별다른 사랑에 대한 확신도 없이 결혼생활을 시작했지요. 그러나 우리의 신혼생활은 결코 순탄하지 못했고 그 이후의 생활도 줄곧 힘이 들었지요. 무엇보다도 아이들 문제와 가난과 질병 때문에 그랬지요. 우리에겐 아이가 쉽게 생겨주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 임신이 잘못되어 두 차례나 큰 수술을 받고 나서 당신은 평생을 병약한 사람으로 살아야 했지요. 그 뒤 겨우 아이 둘을 얻었으나 아이 키우는 일, 아이들과 함께 사는 일에 또 당신은 힘겨워했지요. 그다음은 가난한 집안 살림입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원래 우리 집안은 형제가 여섯이나 되고 논 여섯 마지기뿐인 빈농이었지요. 그러다 보니 부모님은 은근히 우리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요구하는 형편이었지요. 그래서 우리가 서로 부부싸움을 했다 하면 시댁 문제와 돈 문제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을 것입니다. 아예 봉급날이 가까워지면 우리 둘은 돈 문제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곤 했지요. 이미 쓸 돈이 바닥난 형편에 누군가 남들한테 돈을 빌려서 써야 했기 때문이지요. 그 당시 초등학교 교사의 봉급 수준은 매우 열악했고 오늘날 있는 상여금 제도나 성과급 같은 것도 없어 더욱 힘겨운 형편이었지요. 더구나 자주 앓고 병원 신세를 져야 하는 우리로서는 의료보험 같은 혜택도 없어 매양 휘청거려야만 했지요. 그동안 살면서 당신은 여섯 차례 대수술을 받았고 나 또한 네 차례나 대수술을 받은 사람이 되었지요. 그래서 우리는 열 번 깨진 항아리라고 말하면서 살고 있지요. 참 그것만 생각해도 우리가 어떻게 그 고비들을 넘겼는지 아득한 일들이에요. 그다음으로 우리가 함께 살면서 힘들었던 이유는 모두가 나한테 있는 것 같습니다. 본디 고집이 세고 변덕이 심하고 까칠한 성격을 가진 게 바로 나란 사람이었지요. 게다가 자기 좋은 일만 하는 사람이니 함께 살아주기 참 힘들었을 것입니다. 미안해요. 고마워요. 나 같은 사람과 그렇게 오랜 세월 견디며 살아줘서 참으로 감사해요.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많이 빚을 진 사람이 있다면 어린 시절에 나를 키워주신 외할머니와 어른이 되어서 만난 당신일 거예요. 그 두 사람이 나를 오늘의 사람으로 만들어줬다 할 거예요. 직업이 초등학교 선생이었지만 나의 삶의 목표는 좋은 선생님이 되는 것보다 좋은 시인이 되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나는 교직은 직업이고 시인은 본업이라는 괴변을 하면서 살았지요. 이렇게 까다롭고 뒤틀리는 인간과 살았으니 아마도 당신의 괴로움은 배가되었을 줄 압니다. 무엇보다도 시인으로 바로 서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시골에서 사는 가난한 초등학교 선생인 데다가 대학도 나오지 않아 서울에 연줄도 없고요, 그렇다고 잡지나 문학 단체와의 유대도 없을 뿐더러 이념적인 배경도 없었기 때문이었지요. 그야말로 그것은 자갈밭에 뿌린 씨가 싹이 터서 무성하게 자라는 것을 꿈꾸는 일과 같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도움이 있었기에 나는 아직도 한 사람 시를 쓰는 사람으로 살고 있고 100권도 넘는 책을 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공주 사람도 아니면서 공주에 풀꽃문학관을 세우고 또 풀꽃문학상을 제정하여 운영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모두가 당신 덕입니다. 당신이 그동안 참아주고 기다려주고 져주면서 함께 살아준 결과입니다. 이제 나는 당신이 없는 나의 하루하루, 인생을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나보다 더 나에 대해서 잘 알고 나보다 더 나를 걱정해주고 생각해주는 사람이 당신입니다. 정말로 당신과 같은 아내는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아내 자랑하는 사람은 팔불출이라고들 말하지만 정말 나는 팔불출이 되어도 좋은 사람입니다. 비록 당신은 내가 하는 문학과 시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지만 끝까지 이해하고 참고 견디려는 사람입니다. 무엇보다도 내가 1박 2일로 문학강연을 떠날 때면 동행해주는 당신의 배려가 더없이 고맙습니다. 일주일마다 하는 공주문화원에서의 시창작 강의에서도 빠지지 않고 내 강의를 들어주어서 감사합니다. 그러고는 가끔 나한테 부족한 점, 잘못한 점을 지적해주는 당신이지요. 이것만 봐도 오늘날 내가 있게 된 것은 오직 당신 덕분이라는 것을 증명하고도 남는 일입니다. 정말로 당신의 존재를 빼내고 나의 인생은 이제 불가능한 인생입니다. 오로지 나의 인생은 당신에게 업힌 인생이고 당신에게 신세지는 인생이지요. 그야말로 당신은 나의 보호자이며 후견인이며 동행인이고 마지막 보루와 같은 사람입니다. 이런 아내를 어디 가서 찾을 수 있겠어요. 당신은 나에게 행운의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행운이 당신에게는 악운이라는 것이 참으로 미안스럽고 송구한 일이지요. 나이 들어가면서 점점 당신에게 의존도가 높아갑니다. 이제는 한순간도 당신이 없는 나의 삶을 생각할 수가 없어요. 집 안에서 글을 쓰다가도 가끔은 당신을 찾곤 하지요. 여보, 지금 어디 있어요? 그러면 당신은 나 여기 있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집 안 어디에선가 대답을 해주지요. 그러면 나는 다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글을 계속 쓰지요. 참 이런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 걱정입니다. 당신에게 가는 의존도가 점점 높아진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요. 나의 소망은 이러한 삶이 조금 더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는 것뿐이에요.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돈도 아니고 집도 아니고 옷도 아니고 맛있는 음식도 아니고 다만 날마다 날마다 이어지는 평안이고 무사안일이에요. 이 무사안일이 우리의 행복이고 삶의 목표이자 보람입니다. 여보, 앞으로도 오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주셔요. 나도 가능한 대로 이 자리에 이대로 있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미안했습니다. 앞으로도 나는 오래 고맙고 미안할 것입니다. 아침마다 일어나 당신에게 드리는 인사. 여보, 잘 잤어요? 그 인사가 내일도 또 내일도 이어지기를 소망합니다. 나태주(羅泰柱) 시인 시 ‘대숲 아래서’로 등단했다. 2007년 공주 장기초등학교 교장을 끝으로 정년 퇴임했으며, 2010년부터 공주문화원 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대표적인 시로 ‘풀꽃’이 있으며 100여 권의 책을 출간했다.
- 2018-05-28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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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 장성군 시골에 사는 윤태홍·이숙연 부부
- 어딜 가도 꽃잔치가 한창이다. 희거나 붉거나 노란 꽃송이들 우르르 일으켜 세우는 봄의 힘. 그걸 청춘이라 부른다. 자연의 청춘은 연거푸 돌아온다. 인간의 청춘은 한 번 가면 끝이다. 조물주의 디자인이 애초에 그렇다. 청춘은 전생처럼 이미 아득하게 저물었다. 바야흐로 생애의 가을에 접어든 사람에겐 말이다. 그러나 인생의 가을을 절정으로 가늠하는 사람에겐 여전한 봄. 싱싱한 태도와 관점이 청춘의 사촌인 회춘(回春)을 데려다 주기도 한다는 점에서 인생이란 흥미진진한 극장! 신을 발견했다. 새파랗던 청춘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어느새 어중간한 중늙은이로 변해버린 게 아닌가. 흉포한 세월의 간계에 부질없는 삿대질을 해대는 대신, 그는 올 것이 왔다는 투로 태연히 응하기로 했다. 과학교사였던 그에겐 매사 과학적 사고를 하는 버릇이 있다지. 어차피 거역할 수 없는 숙명엔 대번에 순응하자는 게 그의 과학적 인생관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게 인색한 조물주가 주입한 숙명에 짓눌리지 않는 길이라는 지론 또한 그의 과학이렷다. 윤 씨는 교장을 찾아가 사직서를 제출하는 것으로 모종의 일을 꾸미기 시작했다. 그 모종의 일이란 반전 평화운동이나 조국의 통일운동 같은 웅장한 사업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의 내밀한 영혼과 관련됐을 수도 있을 그 모종의 일이란 귀촌이었다. 귀촌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었더란다. 사실 그건 오크통에 숙성시킨 와인처럼 그가 오랫동안 무르익힌 숙원이었다. 적당한 때가 오면 시골에 들어가 살겠다는 포부. 귀촌으로 인생 가을을 회춘의 계절로 누리겠노라는 열망. 그는 포부와 열망 자체가 믿을 만한 길잡이인 걸 알아차리고 귀촌을 단행했다. 미련도 불안도 없이 사표를 던졌다. 마치 담 밖에서 부르는 연인의 음성에 이끌려 집을 나서는 사람처럼 스윽 도시를 벗어났다. “남들이 뜯어말리더라고요. 그 어중간한 나이에 시골 가서 무슨 재미를 보겠느냐, 웬 생고생을 자청하느냐, 그런 소리들을 했어요. 그러나 은퇴 이후 어떻게 살 것인가를 미리 생각해왔던 저에겐 귀촌이 움직일 수 없는 답이자 길이었어요. 이미 오래전부터 귀촌에 매력을 느끼고 모색해왔으니까. 다만 타이밍을 기다렸을 뿐인데, 예순 나이에 접어들 즈음, 이제 때가 왔다, 더 미룰 수 없다, 그런 판단을 했죠.” “평생 생활고에 쫓기다 옥살이까지 했던 세르반테스. 그가 ‘돈키호테’를 써 성공한 게 예순 무렵이었죠.” “저의 꿈은 소박해요. 일테면, 깨끗한 공기를 마시며 살고 싶다, 그런 거….” “선생께서 미리 간파한 귀촌의 매력 요소란 어떤 것들이죠?” “일단은 제 취향과 잘 맞을 거라 봤어요. 딱히 도시에 환멸 같은 걸 느끼진 않았지만, 마음은 자주 시골로 흘러갔어요. 텃밭을 가꾸고, 나무를 기르고, 앞산 뒷산을 산책하고, 그런 한적한 생활에 대한 선망이 많았어요. 생활비를 줄일 수 있을 거라는 점에도 호감을 느꼈어요. 시골의 싼 땅값도 매력 요소라 봤고요. 이래저래 귀촌으로 은퇴 이후 노년의 삶을 한결 생동감 넘치게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네요.” “살터를 잡는 일부터 착수했겠죠?” “광주 인근 나주나 담양에 터전을 마련하려고 많이 돌아다녔지만 마땅치 않았어요. 우연히 이곳 이 마을을 발견한 건 행운입니다. 땅값도 쌌어요. 광주의 아파트 한 채 값이면 땅 사고 집짓고, 그럭저럭 충분하리라는 예상대로, 이후 과정은 일사천리로 잘 진행되었죠.” 원주민보다 귀촌 가구가 더 많은 마을 귀촌을 작심한 이후 불과 반년 안짝 만에 집짓기까지 마치고 이사를 했다. 윤태홍 씨의 아내 이숙연(57) 씨가 동지애를 발휘해 한껏 조력한 성과였다지. 이 씨 역시 교사 출신이다. 영어를 가르쳤었다. 부부 교사였으니 연금을 합산하면 쏠쏠하리라. 부부가 보유한 나름의 물적 토대는 귀촌의 돛을 미는 순풍 역할을 했을 테다. 500여 평 부지를 사 번듯한 2층집을 짓는 데엔 처음의 예상대로 아파트 한 채 값이 들어갔단다. 이후 집 뒤편 산자락에 있는 묵정밭을 추가로 사들였다. 날 보러 와요, 라고 어여삐 노래한다. 윤 씨네 집 둘레에 피어난 봄꽃들이 말이다. 봄 아니고 꽃 아니더라도 헌칠한 마을이다. 높고 낮은 산들이 어깨를 겯고 둥글게 둥글게 원을 그리며 한바탕 춤을 추어대는 그 복판에, 혹은 꽃잎들 환하게 벌어진 그 안통 화심(花心) 부위에 마을이 들어앉았다. 저 아래 초록빛 호수 위로는 아지랑이 아롱거린다. 전쟁이 터지더라도 감쪽같이 무사할 듯 외진 맛이 있는 반면, 볕 바른 양달 일색이라 으슥한 구석 없이 포근하다. 대를 이은 농투성이로 살았던 원주민들은 대부분 도시로 흩어져 나갔다. 바야흐로 귀촌·귀농 전성시대라 해야 하나. 지금 이 마을을 이룬 24가구 중 70%가 도시에서 유입된 귀촌 가구들이라는 게 아닌가. 어떤 이들이지? “저와 같은 퇴직자들, 자영업을 하다 들어온 사람, 예술인, 광주로 출퇴근하는 건설업자 등 다양합니다. 원주민보다 외지인이 더 많아 텃세, 그런 건 없어요. 원주민들 자체가 순후하지만, 다들 편하게 어울려 지냅니다.” “이사 뒤 가장 먼저 공들여 한 일은 무엇이었죠?” “제가 소나무를 무척 좋아합니다. 광주 아파트에 살 때도 화분에 소나무를 길렀어요. 소나무를 바라보면 왜 즐거움이 샘솟을까, 그 이유를 잘은 모르겠지만 그놈들을 애호했어요. 정원 둘레에 소나무를 심어 가꾸고 싶다는 염원은 사실 귀촌 동기에 속합니다. 해서, 공들여 소나무부터 심기 시작했어요.” “소나무로 뜰을 둘렀으니 솔향이 은은할 테고, 달빛이 솔가지를 타고 흐를 테고, 수시로 운치를 즐기시겠다.” “소나무뿐일까. 모든 자연 환경이 아름답죠. 그러나 제가 풍경을 즐기는 일에 능하진 못합니다. 낭만적인 성향의 인물은 전혀 아니라서.(웃음)” “그럼 어떤 성향?” “흠. 원만한 성품이랄까? 눈앞에 주어진 일에 단순하게 매달리는 기질이고요, 부지런히 내가 할 일을 찾아 나서는 성격이기도 하죠. 딱히 안 해도 될 일을 굳이 찾아 열심히 매달리곤 했어요. 귀촌 이후 아로니아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도 그런 성격 탓이죠.” 윤 씨는 800평 규모의 아로니아 농사를 짓는다. 이왕에 사들인 널따란 묵정밭을 그냥 놀리기란 대지의 여신에게 결례되는 일이거니와, 시골의 적막 속에 찻물이나 마시며 도 닦는 사람처럼 고요하게 눌러앉아 지내기란 고문처럼 고역스러워서였겠지. “농원을 보여주실래요?”라고 부탁하자 나른하던 그의 표정에 갑자기 생기가 돈다. 강박과 속박 없이 맘껏 즐기는 일상 4월의 아로니아나무들은 미처 깨어나지 못해 둔하다. 윤 씨 홀로 살뜰한 눈매로 나무의 싹눈을 이리 쳐다보고 저리 들여다보고, 마치 현미경으로 박테리아균의 신비한 동향을 살피듯 진지하다. 귀촌 1년 만에 농부로 변신한 그는 3년여가 더 흐른 현재는 영락없는 농사꾼이다. “텃밭농사도 그렇고 농사라는 거 진짜 재미있습디다. 아로니아 농사에 관한 한 별로 어려울 것도 없더라고요. 워낙 강한 작물이라서요. 병충해에 강하거든요. 극단적으로 농약 살포를 자제하더라도 농사를 망치진 않아요.” “수익성은?” “하향세가 뚜렷해요. 재배 농가가 급증해서죠. 재작년엔 2000만 원 정도의 매출을 올렸지만 작년엔 반 토막 났어요. 작물 전환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체리나 굵은 대추로 바꿀까 해요.” “선생은 과학을 전공했어요. 농사에도 과학을 적용하시나?” “농사도 응용과학이지 않겠어요? 그 점에서 제겐 농사가 유리하죠. 제가 가장 싫어하는 두 가지가 있는데요, 고집스럽게 말만 앞세우고 행동은 없는 처신, 그리고 자기합리화입니다. 그런 쓸모없는 것들을 경계하고, 과학적인 사고에 따른 주도면밀함과 준비성으로 살아가는 게 좋다고 봐요. 자랑은 아니지만, 제게 몸에 밴 과학적 실천은 있다고 봅니다.” 다시 집 안으로 들어와 다탁에 마주앉는다. 그의 아내가 주방에서 다과를 가져와 탁자에 놓고 원래의 자리였던 저편 의자에 다시 앉는다. 말수가 드물다. 그림자처럼 조용한 거동. 묵언수행을 하는 도류처럼, 식물처럼, 시종을 일관해서 고요하다. 말보다 내밀한 침묵의 웅변이란 게 있겠지. 세상에서 할 말을 이미 다해버렸거나, 말이 아닌 은근한 눈빛으로 부부애를 나누기에 숙달됐을 수도 있겠지. 아니면 부부간에 언쟁이라도 있었나? 흔하디흔한 게 부부싸움이지 않던가. 그러나 윤 씨 말하길, “우리에겐 그 흔한 부부싸움이 아예 없다”고 한다. “부부싸움이 되질 않아요. 왜냐? 집사람이 전혀 대꾸를 안 하거든요.(웃음)” “저런! 남편을 숫제 포기하셨을까?” “대꾸를 하거나 제동을 걸어봤자 먹히지 않아서겠죠. 때로 저 사람이 나에게 관심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섭섭한 생각도 들지만, 사실은 천성이 그래요. 소리 없이 남편을 도와주고 믿어주고 챙겨주고, 숨 쉬는 공기처럼 제겐 고마운 존재죠. 제가 그걸 모를 정도의 멍청이는 아닙니다.(웃음)” “귀촌이라는 급격히 바뀐 환경에 남편은 빠르게 적응하는 반면, 아내는 적응이 더딘 경우가 드물지 않죠.” “배려가 필요하겠죠. 상대의 성향을 존중하는 자세 말이죠. 저는 제법 활달한 편입니다. 외부 활동이 잦아요. 반면 아내는 이웃의 단짝 친구와 어울리거나, 집에서 혼자 조용히 머무는 걸 즐겨요. 그런 아내를 위해 도서관엘 자주 들러 소설책들을 빌려다 줍니다.” 배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메마른 공유지를 적시는 단비. 윤 씨의 성정은 담백함이 넘쳐 무색무취에 가깝다. 그러나 아내에게 쓰는 마음은 나긋하거나 촉촉하겠지. 부부가 불화하고서도, 아내를 고려하지 않고서도, 시골생활을 무사히 누릴 묘한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귀촌 4년 차. 윤 씨는 더 바빠졌다. 오라는 곳도 가야 할 곳도 많아졌다. 그는 이걸 생동하는 삶의 징표로 본다. “제가 일찌감치 서예와 사진에 열을 냈어요. 이젠 꽤 조예가 생기고 동호인 모임들에도 빠지질 않아요. 귀촌 공부도 여전합니다. 이미 예전에 집짓기 학교나 각종 귀촌 교육 프로그램을 섭렵했지만 지금도 열심히 찾아다녀요. 한문 고전 강독 모임에도 참여해요. 때론 몸이 둘이라도 부족할 지경이에요. 귀촌에 만족합니다. 강박과 속박 없이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비로소 맘껏 즐기며 사니까. 이보다 나은 삶이 어디 있을꼬.” 귀촌으로 자유를 얻었다는 얘기다. 상처가 없는 지평, 자유를.
- 2018-05-14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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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보랏빛, 흰색, 노란색, 분홍색 저마다 뽐내고 있다. 겨우내 금방 말라 죽을 것만 같던 나무도 어느새 연두색 잎사귀로 뒤덮여 몸체가 안 보일 지경이다. 점점 짧아져 쥐꼬리만 한 봄이지만, 그래도 역시 봄은 좋은 계절이다. 이런 천지가 그 유혹에 안달 난 우리를 자꾸 밖으로 끌어낸다. 그 기운에 기대어 겨우내 몸 사리느라 못 만난 친구를 만났다. 이런저런 살아온 이야기 끝에 친구가 말했다. “지난 주말 우리 며느리가 친구들이랑 시내 호텔에서 하룻밤 논다고 우리 아들한테 손주를 맡기고 나갔단다. 그래서 아들이 손주만 데리고 우리 집에 왔더라고. 그게 뭐 요새 트렌드라나 뭐라나.” 이 친구도 시어머니 노릇 하려 이 말을 하나 하고 속으로 생각했지만, 그 뒷말은 잇지 않았다. 그가 내게 마음을 숨기거나 교양이 있어서가 아니다. 며느리가 안 듣는 데서 며느리를 흉보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요즘 트렌드이기 때문이다. 명색이 고등교육을 받은 세대가 시어미가 되었다고 모여앉아 며느리 흉보는 모습이 옹졸해 보였는데 바람직한 변화이지 싶다. 언뜻 우리의 꽃다웠던 그 시절이 생각났다. 엄한 시어머니 밑에서 숨죽이며 살지 않았던가. 목구멍까지 치미는 말도 억지로 꿀꺽 삼키며 지내지 않았던가. 그 기간은 착한 며느리 코스프레를 하며 지낸 듯하다. 매일매일 평소 자신의 모습인 양 연기하며 지냈으니 그 억울함은 얼마나 컸나! 자가 발전한 참았던 분이 어디로 터지겠는가. 남편은 무방비상태에서 애꿎게 폭탄을 맞을 수밖에 없다. 부부 사이에는 전쟁이 시작되고 영문 모르는 남편은 이 싸움에서 이길 수도 휴전의 방법도 알 길이 없다. 아내는 자기 마음을 몰라주는 멍청한 남편이 야속하기만 하다. 결혼할 때는 서로 지나치게 잘 맞아 아무 말 안 해도 내 마음을 알아줄 줄 알았더니 갈수록 눈치가 발바닥이다. 하지만 정작 억울한 것은 남편이다. 멍하니 아내만 바라보다 센 펀치를 한 대 맞은 셈이다. 더 기가 막힌 것은 항상 여린 연두색 잎사귀일 것 같던 그녀가 이제는 사철나무 두꺼운 고무나무 껍질이 된 것이다. 여자로서 이런 일이 반복되며 그 꽃다운 시절을 다 보내고 말다니. 하지만 다 잃은 것은 아니다. 그 덕에 ‘세상에 더 없는 며느리’, ‘착한 새언니’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러나 그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월든’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무엇이든 그 값어치는 우리가 그것을 위해 내놓으려고 하는 인생의 분량과 같다“라고 했다던데. 과연 인생의 반을 대가로 바칠 만한 것이었을까? 문득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영화배우 최은희가 남긴 말이 귓가에 맴돈다. 무슨 대단한 유언이 아니라 자신의 영결식장에 가수 김도향이 부른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를 틀어 달라는 요청이었다. 스치는 봄바람 속에 흔들리는 꽃마저 예쁘다. 꽃이 만발한 동안 그 귀한 시절을 만끽했으면 좋겠다. 그때 하루하루가 얼마나 좋고 아까운지 알았으면 좋겠다. 결코, 우리와 다르게 지내는 젊은 세대를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너희가 정녕 부럽다!
- 2018-05-09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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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수 장혜진, 남자로 다시 태어나 야성적인 목소리의 가수가 되고픈 천생 가수
- TV조선 프로그램 ‘강적들’에서 나와 같이 방송했던 이준석이 독립야구연맹 총재로 취임하던 날 행사장에서 가수 장혜진과 마주쳤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전광석화처럼 “조만간 인터뷰합시다!” 하고 대시했다. MBC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를 보며 그녀의 노래에 심취했던 한량 이봉규가 동물적으로 반응했던 것. 우물쭈물하는 장혜진을 보더니 내 옆에 있던 김성경 아나운서가 “인터뷰 해, 언니~ 나도 했어!”라고 거들어주는 바람에 운 좋게 다시 만났다. 장혜진은 인터뷰하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하루 종일 노래에만 빠져 있을 뿐 모르는 사람과는 말 섞기를 불편해하고 어색해하는 내성적인 성격이라는 점을 금세 간파했다. 인터뷰하는 동안 한량 이봉규 특유의 느물느물 전법으로 그녀를 밀어붙였다면 인터뷰는 무미건조(無味乾燥)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평소와 다르게 공손한 자세로 노래에 관한 얘기부터 꺼냈다. 다행히 대화가 술술 풀렸다. 장혜진은 겉으로는 야리야리하게 보이지만 속으로는 아주 강한 자기 철학을 가진, 전형적인 외유내강(外柔內剛)형 인물이다. 첫 모습을 봤을 때 상당히 까칠할 것 같고 깍쟁이처럼 보였는데 인터뷰가 진행될수록 ‘허당’이면서 따뜻한 여인의 성정이 느껴졌다. 한마디로 말하면 종잡을 수 없는 여러 가지 캐릭터가 중첩되는 여인이었다. 그런 성격이 오늘날의 장혜진을 대가수로 만든 원동력일지도 모른다. 노래를 부를 때마다 완벽하게 감정을 이입해 관객에게 전달하는 그녀에게 다중적인 성격이 도움이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MBC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에서 장혜진이 열창했던 곡 ‘술이야’를 들었을 때 한량 이봉규가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그녀가 매일 술에 젖어서 살 수밖에 없는, 사랑을 갈구하는 순정파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가사의 마지막 소절 “정말 영영 이제 우리 둘은 남이야 저물어가는 오늘도 난 술이야~”를 들을 때마다 1년에 360일 술을 마시는 주당 이봉규는 영락없이 냉장고에서 막걸리를 꺼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정작 장혜진의 주량은 맥주 한 잔이란다. 어이가 없어서 “어떻게 술도 마실 줄 모르는 사람이 ‘술이야’를 부르면서 그런 표정과 목소리를 내뿜을 수 있나?”라고 따져 물었더니, “그만큼 힘들고 괴로워서 술에 맨날 젖어서 산다고 감정 이입했다”고 말하면서 몰입이 안 되면 노래가 잘 안 된다고 말했다. 술은 체질적으로 안 맞아 마실 줄 모르지만 술에 취한 사람의 감정처럼 몰입할 수는 있다는 장혜진의 설명이 알듯 모를 듯했다. 체조 선수가 가수가 된 사연 그녀의 이력이 의외로 다채로웠다. 그녀는 대학교에서 기계체조와 리듬체조를 전공했다. 원래는 체조 선수였지만 부상을 당해 선수생활을 접고, MBC 합창단 단원으로 활동했다. 그때 유명 가수들의 백코러스를 담당했는데 좀 더 멋진 모습을 연출하고 싶어서 부단한 노력을 했다. 당시 이수만이 경영하던 종로3가의 ‘SM 카페’에 하루 종일 죽치고 앉아 차 한 잔 시켜놓고 해외 유명 가수들의 뮤직 비디오를 분석했다. 동작 하나하나, 의상, 조명, 창법 등을 면밀하게 관찰하느라 온종일 뮤직 카페에 있어도 즐거웠다. 본인이 직접 동대문시장에서 옷감을 구입해서 의상디자인까지 하면서 “어떡하면 여성 코러스로서 가장 섹시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에 몰두했다. 그때부터 천생 가수의 기질이 나타났던 셈이다. 그 시절 그녀의 오랜 친구였던 강승호가 그룹 ‘소방차’의 막내 매니저로 일할 때 방송국에서 예능 PD에게 발로 차이고 꾸지람을 듣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했던 장혜진은 강승호에게 “이렇게 막내 매니저로 살지 말고, 네가 제작자로 나서라. 일단 내가 너의 가수가 돼줄 테니 그다음부터는 나를 발판 삼아 인기 있는 가수들을 많이 키워내라!”고 조언했다. 그 말을 들은 강승호는 일주일 만에 아시아레코드에서 계약을 따내고 신곡을 들고 장혜진을 찾아와 녹음하자고 들이댔다. 이 앨범에 바로 1991년 장혜진을 가요계에 데뷔시킨 ‘꿈속에선 언제나’라는 타이틀곡이 들어 있다. 그녀의 조언대로 강승호는 장혜진을 1호 가수로 내세워 엔터테인먼트 기획사 운영을 시작해 김종서, 박상민, 박완규, 캔 등의 실력파 가수들을 발굴하면서 승승장구했다. 그런데 강승호가 한술 더 떠 장혜진에게 결혼하자며 집요하게 달려들었다. 강승호의 집념에 그녀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고 결국 두 사람은 결혼했다. 남편 강승호는 전형적인 0형 혈액형 성격으로 다혈질이고 저돌적이다. 장혜진을 데뷔시킬 때도 그랬고 결혼을 승낙받을 때도 성격이 그대로 나타났다. 결혼을 망설이던 장혜진은 어느 날 갑자기 “결혼에 대한 환상 같은 거 갖지 말고 친구처럼 이 사람과 살아봐도 괜찮겠다. 남자 뭐 별거 있어?”라는 마음이 들더라는 것. 앨범 작업을 같이 하다 보니 편해지기도 해서 28세 때 강승호의 끈질긴 청혼을 받아들이고 면사포를 썼다. 권태기, 갱년기 그런 거 잘 모른다 인터뷰 시간이 조금 흐르면서 장혜진도 이봉규를 경계하는 마음이 슬쩍 느슨해진 듯 보였다. 그 틈을 타 “결혼생활 26년이 되었으면 그동안 권태기도 많았겠다. 그리고 나이도 갱년기를 겪을 시기니까 힘들 때도 있을 것 같다”고 찔러봤다. 그녀는 담담하게 “권태기나 갱년기 그런 거 잘 모르겠다. 예민한 성격이 아니고, 바쁘게 살아서 그런가?” 하고 반문한다. 내친김에 “부부싸움하면 누가 이기나?” 하고 물고 늘어졌다. “남편이 이긴다. 나는 눈물부터 나와서… 울면 지는 것”이라고 곧바로 받아치는 것으로 봐서 이들 부부관계의 권력 서열이 대충 짐작됐다. 결혼생활 만족도를 점수로 물었더니 “80점”이라고 답한다. 곧바로 가수생활 만족도를 물었더니 “100점이 넘는다”고 대답하면서 표정이 확 바뀐다. 만족도가 높은 이유는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직업으로 삼아 평생 노래와 함께 살고 있음을 행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란다. 장혜진의 해석, 천생 가수임에 틀림없다. 사실 이봉규도 평소에 가수가 최고 직업이라고 생각해왔고 “다시 태어나면 가수가 되고 싶다”는 말을 방송에서도 여러 차례 한 바 있다. 빤한 답변이 예상되지만 똑같은 질문을 장혜진에게 했더니 “다시 태어나면 야성적인 목소리를 가진 남자 가수가 되고 싶다”고 한다. 록 밴드를 좋아하는데 특히 마이클 볼튼이나 레드 제플린처럼 야생의 목소리를 선호해서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는 것. 그래서일까? 장혜진의 목소리에서도 뭔가 끈적끈적하고 야생성이 느껴진다. 1996년 이후 성대결절로 공백기를 거치면서 고음을 자제하고 중저음 위주의 창법을 쓰고 있지만 그녀가 야생의 목소리를 좋아해 그쪽으로 목소리를 가다듬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장혜진은 어릴 적부터 노래를 잘한 타고난 가수이기도 하지만 무시무시한 노력파다. 하루 종일 노래만 생각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팝의 본고장인 미국으로 건너가 실용음악과 양대 산맥이라 불리는 버클리음대에서 3년간 공부했다. 그녀는 또 자신이 고집하는 장르에 집착하지 않고 다른 장르의 가수들과 함께 앨범 작업을 하는 등 가수로서 다양한 시도를 해왔다. 평소 장혜진의 음악을 생각하면 파격적이라 할 만큼의 도전이었다. 그녀가 대학 시절 기계체조와 리듬체조를 전공했기에 “노래 부르면서 ‘봉춤’ 같은 것을 시도하면 어떨까?” 하고 다소 실례가 될 수도 있는 질문을 해봤더니 장혜진은 의외로 반기면서 “핑크가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리본으로 공연을 했는데 참 부러웠다”고 본인도 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럴 만한 곡을 못 만나서 자신의 전공을 노래에 살릴 수 없었다는 것. 체조 전공자로서 단련된 신체 덕분일까. 장혜진은 암벽등반을 즐긴다. 밧줄을 타고 내려올 때 하늘을 나는 느낌을 받는다니 놀랍다. 진정한 자유인의 모습까지 보인다. 그녀의 자유로운 영혼으로 인해 종잡을 수 없는 여러 캐릭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은 아닐까. 그녀의 꿈은 죽을 때까지 무대에 서는 것. 노래에 대한 그녀의 열정과 삶의 철학을 엿본 한량 이봉규는 육십 평생을 돌아본다.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장혜진과 인터뷰하는 동안 많이 배웠다. 이제부터라도 내가 좋아하는 직업에 감사해하며 몸과 마음을 다해 몰입해야겠다고 다짐해본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를 외쳐본다. 땡큐! 장혜진!
- 2018-03-29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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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부가 함께 살아야 하는 이유
- 토요일 아침에 회원들과 테니스 시합을 하면서 운동은 물론 덕담과 웃음이 오가는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여성회원들이 가벼운 먹을거리도 갖고 오니까 먹는 재미도 쏠쏠하다. 일석이조 (一石二鳥)가 아니라 일석 오조 정도는 된다. 이런 날 아침에 우리를 슬프게 하는 문자 한통이 날아들었다. 예전에 함께 운동하던 K씨가 자신의 아내가 이침에 사망했다는 비보다. K씨는 55년생이니 아직 60대 중반이 못되었고 그의 아내는 이제 겨우 60대 초반나이에 들어섰다. 부랴부랴 병원에 달려 가보니 K씨는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반쯤 넋이 나가 멍하니 앉아 있다. 힘없이 아주 수동적으로 문상객을 맞이하고 있다. 돌아가신 분은 어젯밤에도 아들하고 밤 열두시까지 이야기하다가 잠이 들었다고 한다. 아침에 코피가 나는데 멈추지 않는다고 하여 119 구급차를 불러서 대형병원으로 기는 도중 절명했다고 한다. 이미 죽어서 병원에 왔기 때문에 최종 사인(死因)은 '불명'으로 기재되어있다고 한다. 이런 허망한 일이 어디 있나! 남편이자 상주인 K씨도 더 이상 사망원인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없고 자꾸 물어본다는 것도 고문에 가까운 질문으로 보여 더 묻기가 어려웠다. 문상 간 우리 일행들이 모여서 과연 사망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추리형식으로 추정해 보았다. K씨는 공기업에서 퇴직 후 작은 빌딩의 관리인으로 취업하여 대부분의 주야 시간을 빌딩에서 먹고 자고 지낸다. K씨의 아내는 착실한 크리스천으로 교회 일에 매진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을 교회에서 보내고 있다. 겉으로 봐서는 평범하고 모범적인 가정이다. 남편이 집에 없으니 아내는 식사를 부실하게 먹거나. 라면 등으로 대충 때우거나 건너뛰기도 하면서 건강에 나쁜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짐작들을 했다. 주위에 혼자 사는 여자들을 보면 남편이 있고 없고에 따라 여자의 식사수준이 크게 달라지는 경우를 종종 본다. 옆집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티격태격 부부 싸움도 했지만 늘 시장을 봐오는 모습을 봤다. 하지만 남편인 할아버지가 죽자 늘 빈손으로 집에 들어오고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져 간다. 보살펴줄 사람도 없고 간섭할 사람도 없으니 대충 먹고 대충 지내는 것 같다. 서로 보호해주기도 하고 눈치도 봐야하는 가족의 보이지 않는 힘이 대단하다. 남자들도 마찬가지다. 기러기아빠들이 건강상태가 좋지 못한 경우를 많이 본다. 친구 P씨는 지방의 태양광 발전소에서 혼자 근무했다. 저녁에 라면에 소주 몇 잔으로 저녁을 대신하는 날도 많았다. 그리고 몇 년 후 아침에 죽어있는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63세에 불과했다. 퇴직하고 제2의 직장은 급여가 적어도 근무조건이 나빠도 ‘나이든 나를 채용 해주는 것도 고맙지’ 하고 감지덕지 한다. 평생현역이라는 말도 듣기 좋고 월 100만원의 수입은 은행에 10억 가까운 돈을 정기 예금한 것과 같다며 일을 하라고 부추기는 사회적 요구에 K씨처럼 당장 먹고 살기가 어렵지 않는 은퇴자도 일자리에 내 몰리고 너도 나도 일자리를 찾아 나선다. 나이든 남편이 일을 하니 나도 뭔가를 해야 한다고 아내도 봉사활동이나 몇 푼 밖에 못 받는 싸구려 허드렛일에 매달린다. 나이든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것이 거의 막노동수준의 일이다. 남편이 어렵게 돈을 버는데 나만 잘 먹을 수는 없다는 자격지심에 절약이 도를 지나치어 굶기까지 한다.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사는가! 가족들에게 유언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저세상으로 떠나는 것은 비극이다. 왜 돈을 벌어야 하는지에 대한 확고한 의식 없이 무조건 일만하는 것도 문제다. 나이에 맞게 적당하게 일하고 영양보충에 돈도 쓰면서 인생을 즐겁게 즐기면서 살아야 한다. 죽은 뒤에 아등바등 많이 번 돈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늙어갈수록 부부란 함께 살면서 때로는 힘을 내는 엔진역할도 하고 때로는 몸을 쉬게 하는 브레이크 역할도 하고 더러는 정서적으로 편안하게 하는 윤활유 역할을 서로 대신 해 주어야 한다.
- 2018-01-02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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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 만남 속에서 지켜야 할 것들
- 30년 동안 부부동반으로 만나는 모임이 있다. 원래 7커플이 모였으나 지금은 4커플만 모인다. 죽은 사람도 있고 이민 간 사람, 스스로 탈퇴한 사람도 있다. 그동안 국내 여행은 몇 번 다녀 왔다. 각 집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 보니 거칠 것 없이 친하다. 송년 모임을 하다 보니 또 단체 해외여행 얘기가 나왔다. 그동안 수없이 해외여행 얘기가 나왔으나 번번이 무산되었다. 적금을 붓기도 했지만, 때가 되면 한 팀이 못 갈 사정이 생겼다며 빠지면서 없던 얘기가 되곤 했던 것이다. 이번 연말모임에서도 또 해외여행 얘기가 나왔다. 멀리 캐나다, 베네수엘라 얘기도 나왔고 가깝게는 일본 중국 필리핀 여행 얘기도 나왔다. 그런데 가장 연장자인 70대 수원 사는 사람이 있다. 사람이 좋아 꿈속에 사는 사람 같다. 이번에도 베네수엘라 등 해외여행 얘기를 꺼냈다. 안 될 줄 알면서도 그런 얘기를 하는 과정이 즐겁다. 그런데 앞에 있던 일산 친구가 정면으로 70대 연장자에게 그동안 해외여행 프로젝트를 여러 번 깬 장본인이라며 비난했다. 순식간에 분위기는 얼어붙고 언쟁이 계속 되나 했더니 70대 연장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가버렸다. 나이 들어 이렇게 다퉈도 되나 싶었다. 일산 친구가 웃으면서 “얘기해봐야 성사도 안 될 것이니 지나가는 얘기로 하자”고 했으면 되었을 것을, 정색을 하며 그동안 쌓인 감정을 폭발시키다 보니 싸움이 된 것이다. 나이 들었다는 것이 헛말이 되었다. 모든 면에서 자제하고 상대방을 이해해주는 입장이 되어야하는데 친한 사이끼리 이런 일이 벌어지니 어이가 없었다. 오히려 갈수록 서로 어린 애로 가는 느낌이다. 이러다가는 30년 모임이 깨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서로 잘 알고 너무 속속들이 알다 보니 조심성이 없는 것이다. 부부모임이라 그런 것 같다. 남자들끼리는 속 얘기를 별로 안 한다. 남자들은 술이나 마시며 바깥세상 돌아가는 얘기나 한다. 그런데 여자들은 집안 얘기부터 다 한다. 결혼 전부터 만났으니 그동안 아이들 커 온 얘기며, 남자들 흥망성쇠를 다 안다. 그러면서 친하다는 이유로 거침이 없는 것이다. 자존심을 건드리기도 한다. 형제들 모임도 그렇다. 너무 서로의 사정을 잘 알다 보니 자존심을 건드려 싸움으로 번지는 일이 많다. 이 경우도 여자들까지 포함되다 보니 소소한 얘기까지 불씨가 되는 경우가 많다. ‘낯선 사람 효과’라는 것이 있다. 낯선 사람 앞에서는 좋은 이야기만 한다.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도록 서로 조심하고 예의를 지킨다. 서로 잘 모르니 호기심도 있고 기대감도 있다. 과거에 뭘 했는지 묻지도 않지만, 본인이 스스로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그러므로 자존심 상하는 일이 없다. 그래서 나이 들면 새로 만나는 사람들 모임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잘 아는 사람끼리 만나면 너무 허식이 없어 피곤하다는 것이다. 사람은 주변에 얼마든지 많다. 이 나이에 남에게 신세 질 일도 없고 일부러 잘 보이려 할 필요도 없다 보니 기본을 망각하는 경우도 있긴 하다. 그러나 그런 사람에게는 사람들이 붙지 않는다.
- 2018-01-02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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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받고 싶은 사람
- 우리 집 아파트 11층에 대학 선배 언니가 산다. 필자보다 8년이나 학번이 빠르니 나이도 꽤 들었는데 어떻게 관리를 했는지 필자랑 친구처럼 보여서 아파트 부녀회라도 열리면 다들 비결 좀 알려달라고 한마디씩 한다. 선배는 남편과 사이좋기로 소문이 났고 늘 다정하다. 노후대책도 연금이나 이자 수입으로 아주 튼튼히 해놓은 것 같다. 남편이 은퇴한 지는 오래되었는데 그동안 수고했으니 남은 인생 편하게 쉬게 하고 싶다며 재취업 같은 건 생각도 하지 말라 하고 두 사람이 철마다 여행 다니고 운동도 하고 좋은 음식 먹으러 다닌단다. 보통 남편들이 은퇴시기가 되면 노후 걱정과 불안감으로 부부싸움이 늘기도 하고 부담스러워진다. 물론 선배는 경제적으로 안정된 노후대책을 마련해놓고 있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두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은 본받을 만하다. 선배가 남편에게 하는 말투나 태도는 필자처럼 무뚝뚝하지 않고 언제나 상냥하다. 남편을 부를 때도 “여보~~오” 하며 뒷마디의 톤이 올라가니 필자처럼 애교 없는 사람은 따라 할 수도 없다. 하도 사이가 좋아 보여 남편이 미울 때가 한 번도 없었느냐고 물어보았다. 미울 때가 왜 없었겠냐며 그래도 상대편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해보니 미운 생각이 없어지더라고 했다. 현명하게 사는 선배가 존경스러웠다. 언젠가 선배와 김치공장 견학을 갔다 오던 날이었다. 김치공장에서 우리가 직접 만든 김치는 택배로 보내준다 해서 그날 만든 겉절이 1kg 정도만 들고 왔다. 동네 어귀쯤 오자 선배가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상냥한 코맹맹이 소리로 “여보~ 다녀왔어요. 지금 주민센터 앞 지나고 있어요~” 했다. 김치공장 견학 간 것을 알고 있었던 선배 남편이 아마 우리가 무거운 김치를 들고 오는 걸로 알았는지 마중을 나오겠다고 하는 것 같았다. 만든 김치는 택배로 받을 거니까 무거운 건 없으니 힘들게 나오지 말라고 선배는 말했다. 필자 남편은 지방에 일 때문에 내려가 전화할 사람도 없었는데 다정하게 전화하는 선배를 보니 간질거리기도 했지만 부럽기도 했다. 힘드니까 나오지 말라고 재차 말하는 선배의 얼굴은 남편을 생각하는 마음이 그대로 나타나듯 발그레하니 참 예뻐 보였다. 버스에서 내리는데 저만큼에서 선배 남편이 걸어오고 있었다. 외출하고 오는 아내를 마중 나온 것이다. “ 아이, 무거운 짐 없으니 나오지 말랬더니…” 하면서도 언니는 아주 기쁜 표정이었다. 인사를 나누고 앞서서 걸어가는 두 사람을 보니 정말 다정해 보이고 보기 좋았다. 작은 일에서도 서로 배려하고 아껴주는 모습이었다. 선배를 보면서 ‘나도 남편에게 저렇게 말 한마디라도 다정하게 해줘야지’ 하는 다짐을 해보지만 작심삼일이다. 선배 부부처럼 살려면 서로의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도 많은 시간을 같이 살아왔고 앞으로도 함께 보내야 한다. 선배네 부부가 좋아 보인다고 부러워만 하지 말고 필자도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선배처럼 한 번 더 생각하고 이해하는 마음을 배워야 할 것 같다. 인생 후반기를 선배네 부부처럼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인생의 롤 모델이 될 만하다는 부러운 생각이 들게 하는 부부다.
- 2017-09-05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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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쁘게 산다는 건 좋은 일일까?
- 남자들이 퇴직하고 나면 두 부류로 나뉜다. 한 부류는 삼식이로 하루 세끼를 집에서 해결하고 하루 종일 TV와 논다. 그래서 아내는 때 맞춰 밥을 대령해야 하고 간식까지 제공해야 한다. 그동안 이웃과 사회 활동에 길들여진 아내는 불평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부부 싸움이 종종 일어난다. 그전에는 돈을 벌어오던 남편이라 대우를 받았지만, 이제는 그렇지 못하니 싸움에서도 밀리는 것이다. 반면에 직장생활 할 때보다 더 바쁘게 사는 시니어들도 있다. 필자도 그렇다. 이 경우는 너무 바빠서 문제이다. 자신보다 남을 위해 봉사하거나 남들과의 관계를 위해서 희생하는 경우가 많다. 개인적으로도 매일 프로그램을 정해 놓고 움직인다. 월요일은 댄스, 화요일은 노래교실, 수요일은 장애인 봉사 등으로 정해 놓았다. 다른 일이 생기면 결석을 할 수는 있으나 별 일없으면 그대로 움직인다. 올해는 맡은 일이 많아서 임기가 끝날 때까지는 열심히 할 작정이다. 일하는 재미도 있고 그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도 즐겁다. 성취감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살면서 얻은 것도 많지만, 잃은 것도 많다. 복이 많았는지 어지간한 것은 다 해 봤으므로 더 이상 욕심도 없다. 그래서 삶의 방식을 바꿔 인생을 재설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년부터는 되도록 바깥일을 접고 필자 위주의 삶으로 전환할 것이다. 혹자는 그러면 우울증이나 허탈감으로 삶이 무력해질 것이라고 걱정한다. 그러나 그동안의 여정으로 볼 때 시간을 가치 없이 보내지는 않을 것 같다. 밖으로 나돌지 않아도 충실히 내 안에서 나를 위해 할 일들을 찾으면 되기 때문이다. 여행도 있고, 영화 감상도 있고, 독서도 있고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많다. 필자의 생활 중에 댄스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동호인들끼리 즐기는 모임이 있고, 장애인들을 가르치는 프로그램도 있고, 시니어들에게 댄스를 가르치는 모임도 있다. 필자의 건강을 위하여, 봉사를 위하여, 성취감을 위하여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살다가는 좋은 반려자를 만나기 어렵다. 같이 댄스를 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필자가 마음을 비우고 한다지만, 다른 여자들과 춤을 추는 동안 옆에서 보기에는 불편한 것이다. 댄스 외에도 다른 스케줄도 그렇다. 다 따라다니기에도 벅차다. 차 한 잔 마실 여유로운 시간을 갖고 싶어도 잠시도 쉼 없이 뛰듯이 사는 것을 보면 차마 그런 말이 안 나온다는 것이다. 바쁘게 산다는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니다. 우선, 댄스를 줄이고, 공적인 활동을 줄일 것이다. 그리고 ‘나를 위한, 나에 의한, 나의 삶’을 찾도록 노력할 것이다. 늘어지게 자고 아침에 느긋하게 일어나도 괜찮은 삶을 찾아보겠다.
- 2017-08-30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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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틀간의 지옥
- 문자가 왔다. “ 내가 오늘 좀 늦을 것 같아. 기다리지 말고 먼저 저녁 먹어. 다음에 좋은 데 데리고 갈게.” 뭐지? 그냥 무시했다. ‘잘못 왔다고 얘기를 해 줘야 하나’ 하는 생각도 잠시 했으나 무시하기로 했다. 그리곤 한 사건이 떠올랐다. 벌써 오래전 일이다. 남편과 안 좋게 집을 나선 날이었다. 그 날 처리해야 할 일에 대해 생각을 하다가도 그의 화난 얼굴이 눈앞에 불쑥 나타나며 생각이 자꾸만 겉돌았다. 다시는 풀고 싶지 않을 정도로 화는 났지만 부부가 싸움이 오래가면 좋지 않다는 친정엄마의 말이 귓가를 때렸다. 혼란스러웠다. 회사에서 일하다가도 생각은 문득문득 자꾸 돌아가서 집중이 잘 안 되었다. 상황도 모르면서 우선 화부터 냈으니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의 오해에 대한 진실을 얘기하면 멋쩍어 하리라 싶었다. 메시지를 작성했다. 조금은 떨리고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문장을 만들어 날렸다. 화해의 의미로 문장을 날렸는데 답이 없었다. 좀 섭섭했지만 메시지를 날리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무엇인가를 시원하게 해결한 듯한 기분이 되어 나머지 시간에 몰두하고 일을 할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분위기를 보니 얘기를 듣고 싶은 표정이 아니라 좀 황당했다. 그렇게 어정쩡한 저녁을 말없이 먹은 뒤 다음 날 아침이 되었다. 출근해서 회의 중인데 모르는 번호로 자꾸 전화가 울렸다. 계속 울리길래 할 수 없이 전화를 받았다. 애써 흥분을 가라앉히는 듯한 목소리의 여자였다. “누구세요? 어디에요?” “전화하신 분은 누구신지요?” “윤 아무개 부인되는 사람인데요.” “누군 신지 모르겠는데요.” 흥분한 여자는 따발총으로 나에게 가격을 하기 시작했다. ‘여자가 받을 줄 알았다. 언제부터 사귀었느냐, 무슨 관계냐, 잘 걸렸다.’ 영문을 모르는 필자는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자신의 남편에게 요상한 문자를 보냈다는 것이다. 그걸 자기가 용하게 딱 잡았다는 것이다. 언제 그런 문자를 받았냐고 물으니 어제라는 것이었다. 답답한 필자는 길게 통화하기 어려우니 잠시 전화를 확인하겠다고 했다. 어제 보낸 문자의 번호는 마지막 한 자가 틀려 있었다. 급하게 누르느라 오타가 난 것을 모르고 보낸 것이다. “마음이 불편해요. 오늘 저녁에 왜 화났는지 다 얘기해 줄게요.” 이런 문자를 받은 그 여자의 남편은 당황하고 부인은 추궁하고 이틀 동안 지옥같은싸움을 했다는 것이다. 필자가 당황해서 ‘미안하다. 잘 못 갔다’고 설명해도 여자는 믿으려하지 않았다. 남편의 전과가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막무가내였다. 내용을 들은 필자의 남편이 그 여자에게 전화를 걸어 ‘오해 마시라 실수였다.’고 하니 비로소 잠잠해졌다. 그런 상황이 되자 남편은 신나서 해결했고 그걸로 우린 한 편이라며 화해가 이루어졌다. 그들의 이틀간의 지옥으로 쉽게 얻은 평화가 민망했다.
- 2017-08-17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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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으로 미묘한 인간의 감정
- 같은 직장에서 만난 30년 지기 친구 K에 대한 이야기다. 무엇이 그리 급했는지 결혼 전 동거해 아이까지 낳고 그렇게 불같은 연예와 출산의 과정을 거친 후 결혼을 했다. K의 남편은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데다가 잘난 여성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좀 고리타분한 성격의 남자였다. 아들 하나 딸 하나 낳고 그럭저럭 사는가 싶었는데 이 남자, 연애할 때는 느끼지 못했던 성격이 결혼 후 나타나기 시작한 모양이다. 그들의 결혼생활을 구체적으로 알 길은 없다. 다만 가끔씩 K를 만나면 쏟아내는 이야기가 거의 드라마 수준이었다. 필자야 돌싱도 아니고 오리지널 솔로이다 보니 K의 남편과 같은 남자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부부싸움 이야길 실감나게 하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는 K를 보고 있노라면 화가 치밀어 올랐다. K의 남편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난감했다. 부인 알기를 부하 직원이나 하수인 다루듯 하고 툭 하면 욕설과 폭행까지 일삼는다고 하니 분명 정상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필자는 K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헤어져라, 헤어져. 그런 남자랑 더 살아봤자 뭐하겠니?”라고 했다. 그러면 K는 “아이들 때문에 이혼은 못하겠어. 아이들 결혼시킨 후라면 몰라도…” 하면서 눈물 콧물 닦아낸 수건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나 과연 사랑도 정도 없는 남자와의 결혼생활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허구한 날 부부싸움을 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또 어떻고…. 다행히 엄마 마음을 조금은 헤아리는 것인지 아들과 딸은 K에게 자기들 걱정은 하지 말고 이혼하고 싶으면 하라고 했단다. 그러나 시어머니 입장은 달랐다. 사소한 문제로 부부싸움을 하던 하루는 마침 시어머니도 함께 있었다고 한다. K의 남편은 일상적인 대화를 하다 감정이 격해지면 욕을 해대면서 주변의 물건을 던지기도 하는데 그 광경을 지켜보던 시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더란다. 그러면서 나중에 K에게 “난 옛날에 너희 시아버지한테 맞으면서 살았어” 하더란다. K가 폭력을 당하는 것이 부부 사이에 벌어질 수 있는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런 이야기들을 들을 때마다 필자는 참기 힘들었고 더 고통스러웠을 K는 흐느꼈다. 그러나 시도 때도 없이 다투던 그들의 부부 이야기는 이제 더는 들을 수 없게 되었다. K를 만날 때마다 했던 “헤어져라, 헤어져!”라는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얼마 전 K의 남편이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요즘 K는 죽은 남편 이야길 하면서 또 훌쩍인다. 더 이상 볼 수 없는 남편이 이제는 그립기까지 하단다. 부부란 원래 그런 것일까. 필자는 K의 속내를 전혀 짐작할 수 없다. 상대방 입장이 되어봐야 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데, K와 필자는 무엇 때문에 흐느끼고 무엇 때문에 분노했던 것일까. 인간의 감정이란 참으로 미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 2017-08-08 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