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절벽’이 우리 경제를 조여오고 있다. 1980년대부터 시작된 저출산으로 한국전쟁 후 한국 경제를 이끌어온 베이비붐 세대를 이어 경제를 주도할 ‘생산인구’가 부족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2015년 출산율은 1.25명에서 1.17명으로 크게 줄었다고 한다. 이처럼 생산가능 인구가 줄어듦으로써 정부의 세금 자원도 줄어 세금으로 이뤄지는 복지정책이 어렵게 되었다. 통계가 아니어도 저출산 현상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장가, 시집갈 나이가 훨씬 지났음에도 결혼할 생각조차 않는 총각, 처녀들이 많다. 결혼 적령기가 지난 딸을 둔 친구가 있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시집을 늦게 가겠다는 것이 아니라 가지 않겠다고 해서 그렇다. 딸의 논리 정연한 이유를 듣고 설득할 말을 잃었다고 실토한다. 혼자 살아도 행복하고 앞으로도 큰 문제 없을 것 같은데 왜 시집가서 남편을 섬기고 아이 낳는 고통까지 짊어져야 하느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30대 중반이 지난 필자의 아들 녀석도 같은 부류에 속한다. 혼자 살기도 힘든데 벌어서 여자까지 먹여 살려야 하느냐고 묻는다. 또 지금의 이 고통을 후세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 고차원적 변명도 한다. 이해가 전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설득을 해야 할까? 자식들 인생이니 알아서 살도록 나둬야 할까? 생각이 복잡해진다. 부모는 자식들이 새 가정을 만들어 오순도순 살아가기를 바란다. 세상을 살다 보면 분명 힘든 일도 생기고 일심동체라 일컫는 부부도 격한 싸움을 할 때가 있다. 부부싸움이 잦은 사람에게 “그렇게 싸울 바에야 아예 헤어지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살려고 하니 싸우지 헤어지려면 뭐하러 싸워요!” 이해가 가는 말이다. 어떤 경우에도 서로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 있을 때는 난관도 견디어내기 마련이다. 그게 가족의 힘이고 그 힘은 결혼을 해야 생겨난다.
어느 철학자는 “결혼은 해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한다”라고 하면서 하지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 해보고 후회하는 편이 낫다고 덧붙였다. 자신의 결혼을 후회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런 통계를 아직 보지 못하였지만,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주변이나 친구들을 봐도 결혼을 후회한다고 말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필자와 같은 세대는 독신으로 사는 사람이 적었다. 다만, 형편이 어려워 결혼이 늦은 사람들은 있었다. 결혼을 후회하는 경우는 결혼 자체가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불만 때문이지 않을까? 그래서 이혼을 해도 또 재혼을 하는 것 아닐까? 결혼 자체를 싫어한다면 재혼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기에 말이다. 배우자가 문제될 뿐인 것이다. 부부 사이가 좋지 않은 부모를 둔 자녀들은 결혼을 꺼리는 경우를 종종 본다. 부모의 결혼생활을 통해 미리 경험하고 상상하기 때문이다. 부모가 지지고 볶으며 싸우는 모습만 봐왔기 때문에 선뜻 결혼을 결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부모의 책임도 크다.
우주의 법칙은 무엇인가? 한 마리의 작은 잠자리도 종족을 이어가기 위하여 가을 하늘을 날며 암수가 사랑을 나눈다. 한 그루의 꽃도 씨를 남긴다. 모든 동물도 새끼를 낳아 기른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들이야 더 말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고귀한 새 생명의 탄생은 우리가 해야 할 대자연의 기본 법칙이 아닐까? 또한 자신을 세상에 있게 한 부모에 대한 보답이다. 왜 자기를 낳아 이렇게 고생하게 만들었냐고 반문하면 딱히 할 말을 찾기 힘들다. 그러나 결혼해서 참기름이 쏟아지도록 행복하게 사는 부부가 얼마나 많은가?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서로를 의지하며 행복하게 사는 노부부들을 보면 부럽다. 그들은 분명 결혼은 안 하면 후회한다고 말할 것 같다. 70대까지 독신으로 살아온 한 시니어가 KBS 1TV ‘내 말 좀 들어봐!’라는 코너에 출연해 혼자 사는 외로움을 실토하며 꼭 결혼하라고 몇 번이나 강조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혼자’라는 용어가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는 오늘날 혼자 살겠다는 처녀, 총각들을 어찌하오리? 저출산율에서 벗어나는 고민을 함께해야 할 때다.
인간에게 적당한 경쟁은 삶을 활기차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이든 그렇겠지만 지나침은 부족함만 못하다. 지나치다는 것은 이성을 잃고 감정에 휩싸이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형제끼리 심한 갈등이 이어지면 어른들은 자주 이런 속담을 인용하시곤 한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
그리곤 실제로 더 주시곤 했다. 미워서 하나도 주기 싫은 마음인데 두 개를 주겠다는 것은 화를 삭이고 더 이상의 갈등을 없애겠다는 의미다.
농부에게 가뭄은 내 목이 타는 것 이상의 고통이다. 논에 물을 대기 힘들 정도로 가뭄이 심하면 물을 먼저 대기 위한 싸움이 치열해진다. 한 농부가 낮에는 물 순서가 돌아오지 않아 밤새 물을 대고 잠깐 눈을 붙이고 나오니 아래 논 주인이 물꼬를 터 그 물을 다 훔쳐가고 말았다. 마을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는 젊은 귀농 부부라 물정을 몰라서 그러려니 하고 참고 넘겼다. 그러나 이튿날에도 같은 상황이 되풀이되었다. 화가 난 농부는 아래 논 주인을 혼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 마침 마을을 돌아보던 신부님과 마주쳤다. 농부는 신부님께 물 도둑의 행실을 소상히 고했다. 그러자 신부님이 이렇게 말했다.
“서로 사는 방법을 구하세요. 먼저 아래 논에 물을 대주고 나중에 형제님의 논에 물을 대세요.”
농부는 처음에는 어이가 없었지만 곰곰이 생각하다가 신부님 말씀을 따르기로 했다. 밤새 아래 논에 물을 대주고 난 다음에 자신의 논에 물을 대느라 잠을 못 잔 농부는 새벽이 되어서야 잠들게 되었다.
이튿날 아침 젊은 부부가 달려왔다. 논의 물꼬를 터 물을 받으며 안 그래도 미안했는데 이제 자신의 논에까지 물을 대주시니 감사해서 어찌할 바 모르겠다고 했다. 농부는 허리를 몇 번이고 숙이면서 진심으로 감사해하는 젊은 부부와 화해했다. 그리고 앞으로 서로 교대로 논에 물을 대기로 했다. 미움을 없애고 도움을 주고받는 믿을 만한 이웃이 된 것이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화가 나는 마음이 누그러진다. 그래도 완전히 풀리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방법이 아주 확실한 처방이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겁을 주거나 미움으로는 상대의 마음을 얻기 힘들다. 필요 때문에 잠시는 숙일 수 있지만 오래가지 않는다. 반면 감사와 감동은 오랫동안 따뜻함으로 남는다. 악을 제거하는 확실한 방법은 공동선이다. 약육강식이 아닌 베푸는 것으로 선을 돌려받는 것이다. 나이 들어가며 조금씩 깨달아지는 것이 있어 좋다. 그래도 또 상황에 맞닥뜨리면 아직도 남은 성질을 부리기도 한다.
나이 듦은 원숙일까, 낡음일까. 누군가에겐 연륜으로 작용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고집불통의
외통수를 만들기도 한다. ‘불로초’를 찾아 헤매는 ‘영원한 젊음에 대한 집착’도 안쓰럽다. 또 ‘너희는 늙어봤냐, 나는 젊어봤다’로 나이를 계급장인 양 밀어붙이며 유세하는 것도 볼썽사납다. 여기 밥 잘 사고 젊은이들과 무람없이 농담을 주고받으며 지덕체의 균형을 이루며 사는 진정한 ‘어른’이 있다. 바로 이길원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명예이사장이다. 영원한 현역으로 산다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글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장
정보화 사회의 키워드인 사이버는 그리스어 ‘키베르니테스(kybernetes)’에서 유래했으며 ‘키’를 잡고 있음을 의미한다. 원로가 젊은이와 다른 것은 인생에서 ‘가상의’ 키를 잡고 저어갈 줄 아는 능력이 있다는 점이다. 이길원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이사장(72)을 이 코너 인터뷰 대상자로 섭외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늘 젊은 친구가 모여들고, 일상을 놓지도 않고 꽉 움켜쥐지도 않은 채 여유롭게 ‘키를 제대로 잡고’ 지덕체의 균형을 이루며 사는 ‘어른’이라 생각해서였다. 처음 인터뷰 섭외를 청했을 때, 그는 눈웃음을 지으며 “90까지는 활동해야 하는데 인생 은퇴가 어디 있느냐”며 “나는 영원한 현역이다. 단지 노는 물이 달라졌을 뿐이다”라고 손사래를 치며 사양했다.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이 있지요. 저는 패러다임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박수칠 때 새로운 것을 시작하라는 것으로요. 옛날에는 인생을 2막으로 나누었지요. 30세까지의 준비기와 60세까지의 활동기로 양분했습니다. 이제는 90세까지 사는 세상. 저는 인생을 3막으로 구분합니다. 태어나서 20대 후반까지가 준비기, 그 이후부터 60대까지가 활동기 그리고 90대까지가 서드 에이지(third age)입니다. 서드 에이지 시기에도 마음먹기에 따라 하고 싶은 것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이길원 이사장은 장년기에는 성질이 불같아 아내와 티격태격 싸움도 자주 하고 밖으로 나돌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이가 드니 역시 배우자뿐이라는 생각이 든단다. 서로 등 긁어주는 배우자가 최고란 마음이 절로 들면서 부부금실도 좋아졌다고 털어놓는다. “건강이 최고로 중요하다”는 그는 아내에게 “아프면 범죄다. 무슨 짓을 해도 좋으니 아프지만 말라”며 오후 4시엔 무슨 일이 있어도 손잡고 꼭 헬스클럽엘 간다. 아내 역시 “지금이 인생에서 가장 절정기”라며 행복해한단다. 자녀들도 자립했고, 이제는 스스로의 삶에서 뭔가를 이뤄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없어 욕망을 내려놓으니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자유로워진다는 설명이었다.
회장님의 본업 내지 생업은 사업이십니다. 국제PEN클럽 이사장 등 활동을 활발히 하시면서도 시를 500편, 시집은 8권이나 발간하셨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시인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만….
“제 본업은 시를 쓰는 일이고 생업이 사업이지요. 그런데 사업가와 시인은 모순된 것이 아닙니다. 사업이 인간의 마음을 얻는 것이라면, 시 쓰기는 인간을 탐구하는 작업입니다. 서로 통합니다. 제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마음에 드는 시 한 편을 쓰고 나면 짜릿한 쾌감을 느낀답니다. 시를 쓰면 사물이나 사람을 폭넓은 시각으로 이해하고 공감하게 됩니다. 그런 것이 사업에도 도움이 됐습니다.”
국제PEN클럽 회장을 역임하셨지만 본래 특수인쇄업체인 스티커 회사 ‘태평양그랜드’를 창업, 38년간 운영해오셨지요. 오너 경영자들은 한결같이 스스로 현직에서 물러나기 쉽지 않다는 말씀을 하시던데요.
“내가 죽고 난 후 회사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해보았어요. 그렇게 생각하니 결론이 간단하더군요. 책상을 빼는 것이 회사 간판을 내리는 것보다 낫다. 나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욕심입니다. 성공한 기업이란 나 아니면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나 없이도 잘 굴러가는 기업이라고 다시 정의를 내려봤어요. 저는 단계적으로 후계자 교육을 시켰습니다. 제 시대 땐 경영자 혼자 장군 멍군 다 일을 했는데, 아들에게 일을 시켜보니 팀워크로, 시스템으로 일을 처리해 나보다 더 잘해낼 것 같더라고요. 내가 며칠 걸려 조사한 일도 반나절에 해내는 걸 보고 물려줘도 되겠구나 싶었습니다.”
경영 승계 수업을 할 경우 아버지의 ‘질문’이 ‘심문’으로 변해 갈등을 빚는 경우도 종종 있던데요.
“묻고 기다려준 것이 내 나름의 비결입니다. 일찍부터 ‘너라면 이 경우 어떻게 하겠느냐? 상대라면 어떻게 할 것 같으냐?’라는 질문을 습관적으로 했어요. 직원들에게나 고객들에게나 경영자로서 얼굴이 서려면 물려받아 얻은 게 아닌 나름의 업적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게 부담을 준 말의 전부일 겁니다. 실패를 했을 때도 ‘네가 그러면 그렇지’ 하며 못미덥다고 전권회수를 하기보다는 ‘내가 방풍벽으로 있을 때 실수를 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실수도 경영 수업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아들들과는 편하게 술친구도 하지요.”
삼성 이병철 회장―이건희 회장―이재용 부회장은 3대에 걸쳐 사업 교훈으로 ‘경청’을 물려주었다고 하는데요. 자제분들에게 강조하신 것은 무엇인지요.
“한마디로 신뢰입니다. ‘영업이란 제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너 자신을 파는 것이다, 능력이 야 웬만한 사람들이 다 갖고 있지만 호감을 얻거나 신뢰를 받는 사람은 흔치 않다, 사업의 기초는 상대방에게 신뢰를 주는 것이다, 신뢰하지 않는 사람과 누가 사업 파트너가 되겠느냐, 사업의 핵심은 호감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임기응변으로 얼렁뚱땅 넘기려 하지 말고 솔직해져라, 한 가지 거짓말을 덮기 위해서 백 가지 거짓말을 하게 되는 법이다’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야기했지요. 사업을 한 지 10년쯤 되자, 아버지 말이 무슨 말인지 ‘머리’가 아닌 ‘몸’으로 알겠다고 하더군요.”
2선으로 후퇴해 이른바 ‘뒷방 노인’이 되면 심리적으로 외롭다고들 하십니다. 한 퇴직 오너분은 실무 경영에 참여하고 싶어도 ‘(현직 사장인) 아들이 부르기 전엔 절대 집무실에 들어가지 않는다며 피눈물 나는 맹세와 마음수련을 거듭했다고 합니다.
“허허, 저는 할 일이 많아서인지 더 즐겁던데요. 일주일에 한두 번 회사에 나가면 직원들이 모두 좋아해요. 제가 수전노처럼 굴지 않기 때문이에요. 경영 승계를 한 후 부자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아버지가 손을 놓지 못하고 간섭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우리 집은 오히려 아들이 ‘너무 회사에 무관심한 것 아니냐’고 제게 불평할 정도입니다. 저는 문단활동, 국제PEN클럽 활동, 망명 북한작가 돕기, 시창작 강의 등 할 일이 많습니다. 돈 문제도 내가 버는 만큼이 내 돈이 아니라, 내가 쓰는 만큼만이 내 돈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 맞는 사람들과 밥 먹고 술 마실 때 쓸 수 있을 정도면 되지, 뭘 더 바라겠습니까.”
흔히 나이든 분들은 젊은이들과 어울리고 싶은데, 그들이 어렵다며 피한다고 합니다. 젊은이들과 잘 어울리시는 비결이라도 있으신지요.
“나이를 먹으면 남을 통해 행복을 찾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가 돼야 합니다. 스스로 행복해지는 방법도 찾아야 하고, 사람들에게 행복을 나눠주기도 해야 합니다. 역설적이지만 외로움을 즐길 줄 알아야 사교적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즐거워야 남도 즐겁지요. 안 그러면 주변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거나 피곤하게 만듭니다. 나이 많다고 거들먹거리며 대우나 받으려 하고 폼만 잡으면 꼰대로 소외당하지요.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저는 모임에 나가면 대우받으려 하기보다는 사람들과 잘 적응할 방법을 찾습니다. 나이 든 선배로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려고 하면 오히려 ‘식욕, 성욕 다 당신들 못지않다. 당신들보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더 젊다’고 농담을 하며 벽을 허물곤 한답니다.”
밥 잘 사고 젊은이들과 무람없이 농담을 주고받는다고 해서 그를 ‘세상모르는 팔자 좋은 금수저 출신 어르신’이라고 보면 오산이다. 이길원 이사장은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이다. 사업이 잘나갈 때는 있는 약속도 취소하면서 만나던 사람들이 사업이 어려워지자 없는 약속도 만들어 핑계를 대며 피했다. 이런 인간의 온갖 행태를 다 경험하고 목격했기에 그는 더 단단해질 수 있었다. 인간의 원초적인 모습을 보며, 조변석개의 인심을 겪으며, ‘사람은 누구나 제 입에 밥알 털어넣기 바쁘다’는 진리를 뼈저리게 터득했단다. 사람들에게 기대지 않을수록 외로움을 덜 탄다. ‘자립심=사교심’이 그의 지론이다. 역설적이지만, 경제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혼자서 버틸 줄 아는 내(耐) 고독력이 사교력과 모임적응력의 바탕이 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플루트를 새로 배우신다고 들었습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으신지요?
“어려서부터 음악을 좋아했습니다. 다시 태어나면 음악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지요. 고등학교 때 아버지가 과학자가 되라고 강권하셔서 화학과로 진로를 정했는데, 막상 가보니 적성에 안 맞지 뭡니까. 또 사업을 할 때는 바빠서 악기를 배울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때 풀지 못한 원을 고희가 지난 지금 이루고 있는 것이지요. 지금 나이에 뭘 새로운 걸 배우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얼마나 즐거운지 모릅니다. 날씬한 플루트 몸매는 내 손놀림에 따라 음계를 달리합니다. 낮은 음으로 속삭이다가 높은 비음으로 유혹하면 저절로 감성에 젖게 되지요. 게다가 휴대도 간편해 노후에 배울 악기로 딱 안성맞춤이라 생각합니다.”
이길원 이사장을 만나는 날 겨울바람이 매섭게 불어댔는데 그날도 플루트 레슨을 받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는 “지금은 초보 수준이지만 프로 수준에 이를 때까지 꾸준히 연습할 생각”이라며 “손자들 앞에서 데뷔 음악회를 여는 게 향후 목표”라고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인생 3막, 서드 에이지에 대해 쓴 시가 있는지 물어보자 그는 노년의 관조와 여유를 다룬 자작시를 나직하게 암송하기 시작했다. 때론 강한 목소리로, 때론 부드러운 목소리로 시를 읽어나가는 그에게서 거친 파도와 싸우는 손마디 굵은 어부와 열정적으로 연기를 펼치는 배우의 모습이 느껴졌다. 낭만가객, 음유시인의 면모를 잃지 않고 고독하게 인생의 파도를 헤쳐 온 그에게 커튼콜의 힘찬 갈채를 보내고 싶어졌다. “브라보! 브라비시모, 유어 라이프!”
마침표 연습 2
이길원
내 연기(演技)가
비록 마음에 들지 않았더라도
아이야
커튼콜하며 무대 비우는
배우에 갈채 보내듯 박수를 쳐라.
최선을 다한 나의 연기다
막이 내린다고 우는 사람 있더냐.
촘촘히 등 돌려 무대 내려오는 나는
박수를 받고 싶다.
내 서던 무대에 누군가 또 열정을 보일 것
이제는 너의 차례
신(神)이 누구에게나 한 번 주는 배역
비록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최선을 다해라
산다는 건
주어진 역할에 따르는
한 편의 연극 같은 것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결혼을 하면 서로 사랑하고 관심을 갖기 때문에 건강에 이롭다는 것은 오랜 상식이다. 여러 조사 연구에서도 독신자보다 배우자가 있는 사람이 암, 치매, 폐렴 등과 같은 질병에 걸릴 확률이 낮고 평균수명도 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면 잔소리가 심한 배우자와 그렇지 않는 배우자 중 어느 편이 건강에 도움이 될까? 건강은 부부 금실과 비례할까? 미국은퇴자협회(AARP)는 10월호 회보에서 ‘배우자와 건강의 상관관계’라는 제목의 특집을 통해 이런 궁금증을 풀어줬다.
글 남진우 뉴욕주재기자 namjin@etoday.co.kr
1. 부부는 체질도 닮는다 오래 같이 산 부부는 외모만 닮는 것이 아니라 생물학적으로도 비슷해진다. 미시간대학 연구팀은 1500쌍의 노부부를 대상으로 한 혈액검사를 통해 신장 기능, 콜레스테롤 수치, 손의 악력, 우울증 등과 같은 건강 상태와 체질이 유사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브리티시콜롬비아대학과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 연구 팀도 결혼한 지 40년이 넘은 미국인 부부 1700쌍을 대상으로 한 공동 조사에서 오래 같이 산 부부는 정신적, 신체적으로 서로 거울을 보는 것처럼 닮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2. 배우자의 우울증은 만성질환 요인
에든버러대학이 10만 쌍이 넘는 영국인 부부의 상담 및 검진 자료를 분석한 결과, 만성질환은 유전적 요인뿐 아니라 배우자 정신건강상태의 영향을 많이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예를 들면 배우자가 우울증이 있으면 만성질환이 발생할 위험이 높아지는 것으로 조사됐으며, 식사, 생활습관, 부부가 공유하는 환경도 만성질환과 연관성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3. 부인의 잔소리는 보약
미시간주립대학은 2016년 발간한 연구보고서에서 부인의 바가지는 남편 건강에 도움이 되지만 남편의 잔소리는 부인 건강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부인의 잔소리는 귀에 거슬리지만 남편에게 보약과 같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남편이 잔소리하지 않고 잘해주면 부인의 당뇨병 위험이 낮아지는 것으로 조사됐다.
4. 긍정적 배우자는 만성질환의 백신
미시간대학이 노부부 2000쌍을 대상으로 4년간 조사 연구한 결과, 부부 중 한 사람이라도 사고가 낙관적이고 긍정적이면 비관적인 성향의 부부에 비해 당뇨나 관절염 같은 만성질환의 발생률이 낮고 기동성과 운동능력도 더 나은 것으로 나타났다.
5. 부부싸움 스타일에 따라 발생하는 질환도 다르다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과 노스웨스턴대학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부부싸움을 할 때 목청을 높이는 부부는 심장병과 혈압 관련 질병 위험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꾹 참는 스타일은 목과 척추질환 그리고 근육통으로 고생할 확률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6. 운동습관도 닮는다
존스홉킨스대학은 최근 연구 조사를 통해 부인이 운동량을 늘렸을 때 남편이 운동량을 늘릴 확률이 70%나 높아지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에 비해 남편이 운동량을 늘려 권장 운동량을 달성했을 때 부인이 이에 동참할 가능성은 40% 정도 높아지는 것으로 조사됐다.
7. 함께하는 다이어트는 역효과
다이어트는 부부가 함께하지 않는 것이 좋다. 콜로라도주립대학이 과체중 부부 50쌍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부부가 함께 다이어트를 할 경우 한 사람이 다이어트에 성공하면 다른 한 사람은 실패할 확률이 더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8. 나쁜 습관은 전염된다
배우자의 나쁜 습관은 배우자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 맥길대학이 7만5000쌍의 부부를 대상으로 연구 조사한 6건의 국제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배우자가 제2형 당뇨병을 앓는 경우 상대 배우자가 당뇨병에 걸리는 비율이 26% 더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당뇨병전기의 위험성도 더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부부는 나쁜 식습관과 운동습관을 공유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배우자가 당뇨병 진단을 받았을 경우 상대 배우자도 당뇨병 검사를 받거나 식습관을 점검해보는 것이 좋다.
9. 배우자 간병은 건강 저해 요인
배우자가 만성질환이나 중병을 앓으면 상대 배우자도 신체적, 정신적으로 큰 영향을 받게 된다. 특히 뇌졸중의 경우 배우자의 건강에 장기간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노스웨스턴대학의 셰릴 램피지 심리학 교수가 밝혔다. 뇌졸중을 앓는 배우자를 간병할 경우 첫해는 물론 이후 7년간 신체와 정신건강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조사됐다.
사례> A는 B와 1968년 초부터 동거하다가 1971년 12월 15일 혼인신고를 마친 법률상 부부로, 둘 사이에 자녀 C를 두었다. A는 B와 서울에서 혼인생활을 하던 중 1981년경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사업을 시작하면서 그곳으로 이주하여 B 및 C와 함께 생활하다가 1987년경 스리랑카로 이주하여 건설업체 생산업체 등을 운영하였다.
A는 1995년 3월경 여자 문제로 부부싸움을 한 후 집을 나가 연락을 끊고 스리랑카에서 알고 지내던 노르웨이 여성과 스웨덴에서 동거를 시작하였다. B는 A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자 1995년 6월경 A가 운영하던 사업체들을 정리한 후 귀국하였다.
그 후 A는 귀국하였으나 B의 연락을 피하였고, 2006년경 노르웨이 여성이 사망할 때까지 스리랑카에서 동거하며 생활하였다. A와 B는 A가 최초 가출한 이후 자녀 C의 결혼식장 등에서 잠깐 만났을 뿐 거의 왕래를 하지 않고 16년 넘게 서로 떨어져 별개로 생활을 영위해왔다. A는 자녀 C가 결혼할 때 상당한 돈을 지원하였다.
B는 귀국한 이후 시댁 식구들과 연락하거나 시댁을 방문한 적이 없었고, 투병 중인 시아버지를 문병하거나 시아버지를 비롯한 시댁 식구들의 장례식에 참석한 적도 없었으며, 자녀 C도 거의 왕래가 없었다. B는 A와 혼인생활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고, 혼인생활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혼란스럽기만 한 상태다.
A는 B를 상대로 이혼청구를 하였다. A의 이혼 청구는 인용될까.
혼인생활의 파탄에 주된 책임이 있는 배우자는 원칙적으로 그 파탄을 사유로 하여 이혼을 청구할 수 없다는 것이 민법의 기본적인 태도이나 예외적으로 유책배우자의 이혼 청구를 허용할 수 있다.
위의 사례에서는 장기간의 별거 및 혼인 파탄에 관하여는 다른 여자와 장기간 동거한 A에게 주된 책임이 있으나 자녀에 대해서는 최대한 배려를 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위의 사례에서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은 B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A가 가출하여 다른 여자와 동거하였지만, B가 시댁과 따로 생활하면서 B는 물론 자녀 C의 시댁과의 유대관계도 사실상 단절되었다. 또한 B가 그 유대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거나 A로 하여금 가정에 복귀할 수 있도록 갈등원인을 제거하고 관계를 복원하기 위한 시도를 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위와 같이 혼인 실체가 완전히 해소되는 과정에서 피고의 책임이 전혀 없다고 보기도 어려우므로 유책배우자의 이혼 청구에 대한 인용 가능성을 신중하게 고려할 수 있다. 유책배우자의 이혼 청구를 예외적으로 허용할 수 있는지를 판단할 때는, 유책배우자의 책임의 양태·정도, 상대방 배우자의 혼인 계속의사 및 유책배우자에 대한 감정, 당사자의 연령, 혼인생활의 기간과 혼인 후의 구체적인 생활관계, 별거기간, 부부간의 별거 후에 형성된 생활관계, 혼인생활의 파탄 후 여러 사정의 변경 여부, 이혼이 인정될 경우의 상대방 배우자의 정신적·사회적·경제적 상태와 생활보장의 정도, 미성년 자녀의 양육·교육·복지의 상황, 그 밖의 혼인관계의 여러 사정을 두루 고려하여야 한다.
위 사례의 경우 대법원은 유책배우자의 이혼 청구를 예외적으로 인정하였다. 따라서 A의 이혼 청구는 인용된다.
‘외레순’ 해협을 사이에 두고 스웨덴 헬싱보리와 덴마크 헬싱괴르가 인접해 있다. 뱃길로 고작 7km. 해협을 통과하는 모든 배들에게서 선박 통행세를 거둬들이던 황금의 도시. 서로 차지하기 위해 호시탐탐 싸움을 벌이던 곳. 손바닥만큼이나 작은 도시이지만 매력은 폴폴 넘친다.
이신화 여행작가 ('on the camino'의 저자, www.sinhwada.com)
북스테후데가 처음 오르간 연주를 했던 성모교회
스웨덴 남서부 말뫼후스 주 북부의 항구도시인 헬싱보리. 느릿느릿 여유롭게 쿨라가탄(Kullagatan) 쇼핑가를 배회한다. 골목은 넓지만 길지 않고 골목 숫자도 많지 않아 길 헷갈릴 일도 없다. 다행히 하늘은 맑고 햇살도 따뜻하다.
붉은 벽돌로 지은 고딕양식의 멋진 생마리 교회(St. Mary)에서 발길을 멈춘다. 100년(1350~1450년경)에 걸쳐 만들어진 이 교회는 단아하면서도 멋스럽다. 경내에는 아름다운 제단이 있고 바닥에는 16~17세기의 무덤 석판이 흩어져 있다. 스테인드글라스가 아름다운 창문으로는 옅은 햇살이 스며든다. 2층 발코니에 걸친 듯한 두 개의 오르간 파이프가 시야에 들어온다. 17세기, 청년 디트리히 북스테후데(Dietrich Buxtehude, 1637~1707)가 자유롭게 연주하는 모습이 아련히 스쳐간다.
청년 때는 헬싱보리(1657~1658), 그 후에는 헬싱괴르(1660~1668), 31세부터는 독일 뤼벡에서 40년 넘게 오르간 연주자로 활동했다. 북스테후데는 헨델, 바흐 등 후기 바로크 거장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705년, 20세 청년 바흐는 북스테후데의 곡에 매료당해 아른슈타인에서 뤼벡까지 400마일을 걸어 그를 만나러 갔고 그곳에서 3개월간 머무른다. 당시 북스테후데는 68세의 고령으로 후임자를 찾고 있었다. 단, 자신의 딸과 결혼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북스테후데의 딸을 본 바흐는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북스테후데의 딸은 엄청난 박색이었다고 한다.
헬싱보리의 위대한 영웅 ‘망누스 스텐보크’
중앙광장으로 나가 이 도시에서 가장 화려한 시 청사를 본다. 네오-고딕 형식으로 지은 시 청사 건물엔 63m의 탑이 있고 매일 차임벨이 연주된다. 1967년에 유네스코에 등재된 건축물이다. 시 청사 앞에는 헬싱보리의 전쟁 영웅인 망누스 스텐보크(Magnus Stenbock, 1665~1717)의 말 탄 동상이 있다.
보기만 해도 위상이 느껴지는 스텐보크는 헬싱보리 전투(1710년 2월 28일~3월 5일)에서 덴마크를 물리치고 승리를 이끈 인물이다. 중앙거리를 벗어나 체르난(Ka˙˙rnan) 요새를 향해 오른다. 오르는 길목에 거인 골리앗의 목을 잘라 짓누르고 있는 다윗상이 있다. 헬싱괴르를 째려보면서 ‘넘보면 죽는다’고 위협하는 느낌의 모습이다. 성벽 계단을 따라 올라서면 짙은 가을색이 내린 요새에 탑 한 기(높이 35m, 폭 15m)가 우뚝 서 있다. 원래 14개였으나 전투 때 다 부서졌다고 한다. 체르난 요새는 덴마크령일 때인 1310년에 짓기 시작해 1320년에 완성된 감시탑, 방어탑이다. 19세기에 개·보수해 원형을 복원했고 1967년에 역사적인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둔커 기업가, 웃손 건축가, 잉그마르 베르히만 감독을 만나다
요새를 비껴나 외레순 해협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방파제처럼 길게 이어지는 위티 다리의 이름이 재미있다. 세계적인 조각가 칼 밀레스(Carl MIlles, 1875~1955)가 만든 긴 석조물 꼭대기의 천사 조각상을 고개를 외로 꼬고, 눈을 치켜뜨고 쳐다본다. 마치 파도가 일렁이는 듯한 둔커문화센터(Dunkerskulturhus, www.dunkerskulturhus.se)도 기웃거린다.
이 문화센터는 전시, 공연, 연주회 등이 열리는 종합예술센터다.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를 건축한 요른 웃손(Jorn Utzon, 1918~2008)의 아들인 킴 웃손(Kim Utzon, 1957~현재)의 작품. 웃손 집안은 3대가 유명한 건축가로 활동 중이다. 둔커하우스는 헬싱보리의 기업가이자 사업가인 헨리 둔커(1870~1962) 가의 소유다. 둔커 일가는 고무공장을 1981년에 짓고 고무장화를 만들어 세계적인 기업이 되었다. 헬싱보리 대극장(1921년 개장) 앞에서 만난, 해학이 넘치는 햄릿 돌조각 표정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길 건너의 대극장을 바라보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잉그마르 베르히만(Ingmar Bergman, 1918~2007) 감독을 생각한다. 1944년, 26세의 잉그마르 베르히만은 이 극장의 전임 연출가가 된다. 그의 첫 직장이었다. 당시 말뫼후스에 새 극장이 생기면서 헬싱보리 극장은 존폐위기 상황. 그는 부임해서 시나리오 을 썼는데 영화화됐다. 다음해(1945년)는 라는 작품을 첫 연출했다. 2년간 머무르는 동안 그의 역량은 충분히 인정받았다. 보조금은 되돌아왔고 그는 본격 영화감독이 되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영화인들의 교과서로 일컬어지는 잉그마르 베르히만 감독의 작품들. 그가 머물렀던 집, 담벼락 사진 속의 젊은 감독은 예리한 눈빛이었다.
◇ Travel Tip!
가는 방법 스웨덴 스톡홀름까지 운항하는 직항이 없다. 핀란드 헬싱키와 서울 간 직항노선은 있다. 헬싱키를 경유해 페리 여객선을 타고 스톡홀름을 기점으로 헬싱보리까지 이동하면 된다. 헬싱보리에서 스칸드라인을 타면 5분 만에 덴마크 헬싱괴르에 도착한다. 스칸드라인은 매시간 20분 운항된다.
현지 교통 도시가 작아서 도보로 다니면 된다.
통화 정보: 스웨덴은 유럽연합의 회원국이지만, 유로화가 아닌 스웨덴 크로나(SEK)를 공식 통화로 사용한다. 현지 은행이나 ATM을 이용하면 된다.
맛집과 주류 헬싱괴르 마리 성당 주변이나 쿨라가탄 거리의 식당을 이용하면 된다. 스웨덴은 주류 숍이 따로 있는 것도 특색. 코파르베리(Kopparberg, 사과맥주, 7%)가 맛있다.
언어 공용어는 스페인어지만 대부분의 국민들이 영어를 잘한다.
헬싱괴르 여행 정보사이트 www.helsingborg.se
주변 연계 여행지 구스타프 아돌프(Gustav Adolf, 1882~1973) 6세와 첫 번째 왕비인 ‘코넛 공녀 마거릿(Princess Margaret of Connaught, 1882~1920)’이 사랑한 여름 궁전인 소피에로 궁전이 있다. 소피에로 궁전은 오스카르(Oscar, 1829~1907) 2세 부부에게 결혼 선물로 받았다. 아돌프 6세와 마거릿은 식물에 관심이 많아 궁전을 영국식 정원으로 가꿔 ‘스웨덴 정원 꾸미기’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소피에로 궁전은 현재 카페로 이용되고 있으며 헬싱보리에서 한 시간 정도 거리에 있다.
정년퇴직을 하고 뒤를 돌아보니 직장에서 정년퇴직 때까지 롱런하는 사람은 그다지 똑똑하지 않은 보통 사람입니다. 너무 똑똑한 사람 중에는 회사의 기술이나 영업 비법을 빨리 터득하고 뛰쳐나가 자기 사업을 해보려다 의욕이 너무 앞서 실패를 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보통 사람은 특출한 공도 세우지 못하지만 눈에 띄게 잘못도 하지 않습니다. 상사는 자기보다 더 똑똑한 부하를 앞에서는 칭찬하지만 속마음은 눈엣가시처럼 생각합니다. 자칫 범을 키우는 우를 범할지 모르고 언제 자기 어깨 위로 올라설지 몰라 의심 반 두려움 반의 사시 눈을 하고 봅니다. 때로는 알아도 모르는 척 넘어가야 롱런합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석축을 쌓아 올릴 때 튀어나온 돌은 정으로 깨트려 배열을 맞춥니다. 입바른 소리하고 정의감으로 상대의 실수를 눈감아주지 못하는 속 좁은 사람들은 적을 많이 만들어 도중하차하거나 승진을 해도 부장급 이상 오르기가 어렵습니다.
혼자 가면 빨리 가지만 둘이 가면 멀리 갑니다. 인생은 마라톤과 같은 장거리 경주입니다. 전후좌우를 살펴볼 줄 아는 혜안이 필요합니다. 군대에서 제식훈련을 할 때도 전체가 하나처럼 움직여야지 남들보다 동작이 빠르거나 늦어도 지적을 받습니다. 내가 살아보니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무리와 잘 섞여 더불어 사는 것이 편합니다.
피위지재(皮爲之災)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죽 때문에 화를 당한다는 말입니다. 강한 표범이 인간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은 결국 그 가죽이 아름답기 때문이라는 구절이 장자(莊子)에 있습니다. 그래서 표범은 멋진 가죽 때문에 맹수의 우두머리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인간에게 죽임을 당하며 씨가 말라가고 있습니다. 만약 표범의 가죽이 소가죽과 비슷했다면 인간의 공격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다가 천수를 다하고 죽었을 겁니다.
사람도 갖고 있는 재주가 너무 특출하면 그 재주 때문에 남들의 시기나 모함을 받아 수명이 단축되기도 합니다. 역사적으로도 너무 똑똑한 사람은 그 재주로 인해 단명했습니다. 삼국시대 때 조조와 유비가 한판 붙을 때입니다. 불리함을 느낀 조조가 이 전쟁에서 이겨도 별 이득이 없으면서 버리기도 아까운 닭의 갈비 같다는 ‘계륵’을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양수라는 부하 장수가 철군 보따리를 쌌습니다. 자기 마음을 읽힌 조조는 양수를 시기한 나머지 죽여버립니다. 양수의 비상한 머리가 결국 수명을 단축시킨 것입니다.
곧게 잘 자란 나무는 용도가 많아 잘려나갑니다. 결국 선산을 오래 지키는 소나무는 굽은 나무입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토지를 팔아서 그 돈으로 재주넘기를 해서 돈을 불리거나 명예를 얻으려고 한 사람들은 대부분 망했습니다. 오히려 바보라고 손가락질 받으며 농사만 지은 사람이 지금은 더 잘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나고 보니 부부간에도 모자란 듯 지고 살면 가정이 편안합니다. 내 주장을 하다 보니 싸움이 일어납니다. 지나친 욕심은 탐욕이 되어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합니다. 부족한 듯 내 탓으로 여기고 져주면서 살아온 것이 지나고 보니 잘 산 것이었습니다.
11월 22일은 대한민국김치협회에서 지정한 ‘김치의 날’이다. 김치 재료 하나하나가 모여 발효 과정을 거치면 22가지 효능을 낸다는 의미다. 우연일 수도 있지만, 김치의 날에 태어나 김치와 한평생을 동고동락한 이가 있다. 바로 포기김치명인 2호 유정임(兪貞任·61) 풍미식품 대표다. 소금에 절인 배추가 양념과 함께 숙성되듯, 인생의 우여곡절을 버무려 명인의 삶으로 승화시킨 그녀에게 김치는 우연이 아닌, 운명과도 같았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누가 김치를 사 먹어? 미쳤군!”
30년 전, 김치를 사 먹는다는 것은 생소하고 의아한 일이었다. 당시 김치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던 유 대표 역시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과 마주해야 했다. 명함을 건네면 뒤에서 박박 찢어버리는 이도 있었고, 험한 말을 들을 때도 있었다. 다행히 솜씨 좋은 유정임표 김치는 금세 입소문을 탔고 김치를 사서 먹겠다는 사람이 점점 늘어났다. 고난도 끊이지 않았지만 ‘포기란 배추를 셀 때나 하는 말’이라는 우스갯소리처럼 그녀에게 결코 포기란 없었다.
“치욕스러울 때도 많았어요. 그럴수록 더 잘하자고 마음먹었죠. 김치는 기계로 찍어내는 게 아니잖아요. 그해의 배추 농사나 재료의 질, 만드는 사람에 따라 맛이 좌우되니 김치 맛이 늘 똑같을 순 없죠. 그래서 힘든 점이 많았어요. 한번은 배추밭을 사놨는데 수확시기에 가보니 노랗게 배추꽃이 펴 있더라고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죠. 하지만 거기서 멈출 수는 없었어요.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며 문제를 파악하고 점검하며 해결 방법을 찾으려 했죠. 매해 환경이 달라지니 여전히 공부하고 있는 셈이에요.”
우리 땅에서 자란 재료만을 사용하는 게 원칙
15평 다락방에서 김치를 팔던 평범한 주부가 2000평 규모의 연 매출 100억원에 달하는 식품회사 대표가 되기까지, 그녀는 지난 30년 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고 말했다. 환희의 순간도 많았겠지만, 그동안의 우여곡절을 떠올리는 듯한 말투였다. 달콤했던 순간에 현혹되기보다는 쓰디쓴 나날들을 기억하며 경각심을 잃지 않는다는 유 대표다.
“승승장구하다가도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게 사업이잖아요. 오너는 항상 긴장하고 살아야 해요.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생길까? 외부에 있다가도 회사에서 전화가 오면 불안해지곤 하죠. 그런 긴장감이 나를 채찍질하고 언제나 최선을 다하도록 하는 것 같아요. 김치명인이 되고 인증패를 받던 날에도 기쁨보다는 잘 지켜야겠다는 부담이 컸어요. 그때부터는 옷차림도 화려하지 않게, 수수하지만 격식을 갖춰 입고 행동도 겸손하게 하려고 노력했죠.”
그녀는 사무실 한편에 드레스룸을 마련했다. 특별한 상황과 만나는 사람에 따라 알맞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다. 인터뷰 당일에도 캐주얼한 차림으로 다른 일정을 마치고 온 그녀는 “5분만!”이라고 외치더니 고운 한복으로 갈아입고 나타났다. 하루에 5~6번 옷을 갈아입을 때도 있다는 유 대표에겐 그만한 이유가 있다. 회사를 경영하며 한국농식품여성CEO연합회 회장, 대한민국김치협회 이사로 활동할 뿐만 아니라, 수원시 제12대 혜경궁 홍씨로도 선발되는 등 다양한 역할을 소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바빠도 ‘김치를 만드는 일’에는 소홀함이 없다.
“예나 지금이나 아침에 출근하면 바로 현장부터 내려가요. 배추가 잘 절여졌는지, 깍두기를 얼마나 담그고 열무를 몇 단이나 다듬어야 하는지 등을 직접 점검하죠. 만드는 김치를 매일 맛보냐는 질문을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당연하죠. 그게 내 일이니까요.”
본업에 충실해야 다른 일도 떳떳하게 마음놓고 할 수 있다는 유 대표는 김치를 만들 땐 좋은 재료가 기본이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우리 땅에서 자란 재료만을 사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단다. 그해 상황에 따라 배추 등 채소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을 때도 있지만 그녀에게 가격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조금 손해를 보면 봤지 비용을 아끼기 위해 재료의 품질을 낮추는 일은 절대 없다.
“싼 김치를 만들어 팔자는 제안도 받았지만, 그런 유혹을 뿌리치고 우리 김치를 지켜낸 건 정말 잘한 일 같아요. 사업이라는 게 잘될 때도 있고, 손해 볼 때도 있는 건데 얕은수를 써가며 돈을 벌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이윤만 따졌다면 맛과 신뢰를 잃었을지도 모르죠. 나와 내 가족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김치를 담갔고, 앞으로도 그 마음은 변치 않을 겁니다.”
김치는 재료의 품질도 좋아야 하지만, 기계가 아닌 사람의 손을 거쳐 만드는 식품인 만큼 만드는 이의 ‘손맛’ 또한 중요하다. 즐거운 마음으로 김치를 담가야 그 맛도 좋아진다는 게 유 대표의 생각이다. 그래서 간혹 부부싸움을 하고 왔거나, 안 좋은 일이 있는 직원은 김치 담그는 작업에서 제외시키고 다른 업무를 보도록 한다. 만드는 사람의 감정이 김치 맛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그래왔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직원들의 속사정까지 살피는 유 대표의 살뜰한 모습이다. 이러한 면모는 ‘사원은 가족처럼’이라는 풍미식품의 사훈에서도 잘 드러난다.
“우리 회사는 정년도 없고, 나이에 대한 기준도 없어요. 누구든 일을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함께할 수 있죠. 80세가 넘었는데도 김치를 담그는 분이 계시고, 70대 직원도 많아요. 모든 김치의 속을 내가 다 채울 수는 없잖아요. 나를 대신할 직원들의 정성 어린 손길이 필요하죠. 서로 가족처럼 여기고 믿고 의지하며 일하는 게 바탕이 돼야 해요. 그런 분위기가 원활히 회사를 경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바라보다
풍미식품의 경영 목표 중 하나는 ‘수입의 사회 환원’이다. 김치를 만드는 곳이므로 김치 기증이나 김장 봉사 활동 등 다양한 방법으로 그 목표를 이뤄가고 있다. 올해 9월, 유 대표는 아너소사이어티(사회복지공동모금회 1억원 이상 고액기부자클럽) 회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회사 자금이 아닌, 그동안 강의 활동 등을 하며 모은 개인 재산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 선뜻 내놓은 것이다. 밤낮으로 김치만 생각하며 어렵게 번 돈이지만, 그렇게 거액을 기부할 수 있었던 데에는 유년시절의 아픔이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 대신 동생들 끼니를 챙겨주곤 했어요. 당시 형편이 어려워 학교도 못 갔고 졸업도 미뤄졌었죠. 아마도 그런 아픔 때문에 배움에 대한 갈증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예전의 나처럼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학용품을 사주거나 학비를 지원해줄 때 가장 행복하고 가슴이 벅차요. 내 작은 도움으로 한 아이가 꿈을 키우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정말이지 자다가도 즐거워진다니까요. 방에 분홍색 돼지저금통이 하나 있거든요. 번외 수입이 생기면 거기에다 돈을 모아 일 년에 한 번씩 직원 중 어려운 사람을 돕거나 노인복지회관 등에 기부하고 있어요.”
2014년 세월호 참사 당시에는 진도 팽목항에 김치를 보냈는데, 그 어느 때보다 좋은 재료로 정성을 다해 만든 김치가 슬픔에 잠긴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길 바랐다. 대개 김치를 기증한다고 하면 상품가치가 떨어진 것을 나누어주는 것 아닌가 하는 오해도 있지만, 그럴수록 따뜻한 마음을 담아 더 좋은 김치를 내놓는다는 유 대표다.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바라본다는 그녀는 ‘내 가족이 먹을 수 있는 김치’, ‘직원들을 가족처럼’ 등 인터뷰 내내 가족이라는 말을 내려놓지 않았다. 여성 직장인들은 사회생활을 하며 살림도 하고 엄마 역할도 해내야 하기 때문에 1인 2역의 고충이 있다고 토로한다. 유 대표 역시 예외는 아닐 터. 가족의 일원으로서 그녀는 어떤 모습일까?
“여성은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 그리고 여사장은 더 강하다는 생각으로 여기까지 달려왔어요. 행여나 사업에 실패해서 가세가 기울면 우리 가족이 나를 원망할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남편과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내, 엄마이고 싶어 더 악착같이 일했어요. 그런데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는 없더라고요. 사업을 하기 전에는 음식 솜씨가 좋아서 가족들에게 맛있는 반찬도 자주 만들어줬는데, 그런 게 소홀해져서 미안하죠. 이제는 아이들도 바빠져서 일주일에 한 번 가족이 모여 식사하는 것도 힘들더라고요. 함께하는 시간이 부족한 건 꼭 우리 가족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아요. 여느 가족들처럼 우리 가족도 같이하는 시간을 자주 가지려 노력하고 있어요.”
유 대표는 사업이 30년 동안 탄탄대로를 달릴 수 있었던 것은 남편의 외조 덕분이라고 말한다.
“여성들은 남편의 이해와 신뢰가 없으면 사업하기 힘들어요. 저녁에 업무 약속이 잡히거나 거래처에 가야 할 경우가 많은데, 그럴 때마다 남편이 간섭하거나 불편한 소리를 했다면 지금처럼 왕성하게 일하지 못했을 거예요. 늘 감사한 마음이죠. 가끔 식당에 가면 ‘고객을 가족처럼’이라는 문구가 있는데, 안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가족은 편하니까 허물없이 대하고 잔소리도 하지만 고객은 그렇지 않잖아요. 그래서 저는 ‘가족을 고객처럼’이라고 반대로 말해요. 그렇게 하고 나니 가족을 대하는 태도가 사뭇 달라지더라고요.”
글로벌 김치 홍보대사가 되는 게 꿈
김치에 대한 열정과 가족의 지원으로 회사를 잘 키워가고 있는 그녀에게 ‘성공’이라는 단어는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 그러나 정작 유 대표는 ‘성공’이 아니고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말한다. 성공이라는 단어를 받아들이면 자칫 안일해질 수 있기에 거리를 두기로 한 것. 늘 그렇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사업을 이끌어왔지만, 요즘은 그 끝을 염두에 두기도 한다.
“100세 시대라고 하지만, 그때까지 지금처럼 일할 수는 없잖아요. 얼마나 더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칠십 정도 되면 일선에서 물러나 적임자에게 회사를 물려줘야겠죠. 사업을 이어받아 잘 키워나갈 수 있는 자식이 있으면 승계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기꺼이 사회에 환원하려고 합니다. 후계자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나면, 그때부턴 교육사업이나 강의 등을 하면서 여유롭게 살고 싶어요. 남들처럼 여행도 가보고요. 그런데 일 중독인지는 몰라도 아직은 놓지 못한 것들이 많아요. 천천히 하나씩 내려놓을 준비를 해야겠죠.”
노인들을 대상으로 강의나 봉사를 하며 노후를 보내고 싶다는 유 대표는 일찌감치 레크리에이션과 성교육 자격증 등도 따놓았다. 그녀는 차분하게 노후생활을 설명하다가 어느새 김치 이야기를 하며 눈을 반짝였다. 아직은 내려놓을 때가 아님이 여실히 느껴졌다.
“이만큼 살아보니 사람 일은 알 수가 없더라고요. 당장 내일 무슨 일이 생길지, 뭐가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매일 최선을 다해, 지금 이 순간을 열정적으로 사는 게 지혜로운 것 같아요. 하지만 나름의 꿈과 목표는 있어야겠죠. 그것이 매 순간 한 걸음씩 나아가는 방향을 제시해주니까요. 요즘 내 목표는 김치 홍보대사가 되는 거예요. 우리나라에 계시는 세계 대사들을 모셔와 김치 담그기 퍼포먼스를 하고 싶어요. 대사들이 담근 김치는 각 나라로 보내고요. 그러면 우리 김치가 전 세계인의 식탁에 올라가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게 바로 제 꿈입니다.”
글 박원식 소설가
대전에서 은행원으로 살았던 홍성규씨(75)가 명퇴 뒤 귀촌을 서둘렀던 건 도시생활에 멀미를 느껴서다. 그는 술과 향락이 있는 도회의 풍습에 착실히 부응하며 살았던 것 같다. 어지럽고 진부한 일상의 난리블루스, 그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돼 있는 게 삶이라는 행사이지 않던가. 그러나 문득 쇠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정색을 하고 화드득 나를 돌아보는 순간이 찾아오는 법. 홍성규씨는 그렇게 소스라치듯 자신과 독대한 뒤 곧바로 산골로 들어가기로 했다. 대담하고 파격적인 선택이었다. 반백년 이상을 살았던 도시생활을 일거에 청산한다는 건 일종의 모험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금강이 굽이치는 산발치에 터를 잡은 홍씨는 아내 박명자씨(70)의 손을 슬며시 잡아 유혹처럼 이끌었다. 처음에 아내의 반응은 미미하다 못해 썰렁했다. 난 싫소, 당신 혼자 잘해보시구려! 강과 산이 얼싸안고 춤을 추는 경관이야 기차게 삼삼했지만, 스러져가는 폐가와 길길이 웃자란 잡초들만 무성한 묵정밭으로 이루어진 터전에 아내는 초장부터 정이 떨어졌던 모양이다. 당장이라도 뱀이 대가리를 쳐들고 튀어나올 것처럼 뒤숭숭한 쑥대밭 앞에서 단박에 우아한 감흥을 느낄 여자란 세상에 없다. 홍성규씨는 기함을 치고 앵돌아진 아내를 거듭 꼬드겨 답사를 반복했다. 마침내 부부는 귀촌에 합의를 보기에 이르렀다. 여러 차례 드나드는 사이, 아내 역시 외진 호젓함과 빼어난 풍치에 마음을 열었던 것. 20여 년 전, 귀촌의 시동은 그렇게 걸렸다.
풍경을 볼까. 산과 강이 긴박한 교제를 한다. 산은 제 늠름한 하체를 강에 들이밀었고, 강은 수줍은 듯 살포시 온몸으로 산을 받아들인다. 이 소리 없는 통정과 협연을 관람하는 건 능선마루에 늘어서서 관음증에 취한 수목들이다. 도대체 여기에서 무슨 후끈한 일이 벌어지는지를 염탐하겠다는 양, 수면 위 허공으로는 연신 물새들이 선회한다. 밤이면 별들이 모여 수군거리겠지. 달빛은 요요히 쏟아져 산을 흘러 강물로 스며들겠지. 홍성규씨는 시를 짓는 버릇이 있는 사람이니 신바람이 날 수밖에 없을 게다. 알아주는 이가 많은 수묵 화가인 아내에게도 역시 이하동문이렷다.
풍경이 수려하다지만 풍경만 뜯어먹고 살 수 없는 게 생활이라는 난적이다. 유유히 음풍농월을 즐기며 참하게 찻잔이나 기울이면 그만일 것 같지만, 철따라 피고 지는 꽃들의 마술에서 시를 건져 올리고 그림을 길어 올리면 그만일 성싶지만, 그러나 널리 알려졌듯이 삶이란 고달픈 나그네 길이라서 고난을 피할 길이 없다. 게다가 홍성규씨 내외는 거하게 손에 움켜쥔 것도 없는 채로 산골에 입장했다. 산골이 주는 고립감과 권태도 만만치 않은 난관이리라. 홍씨의 얘기를 들어볼까.
“가령, 홍매화가 흐드러지게 피어나는데도 무심히 지나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귀촌하면 안 됩니다. 정서가 맞질 않으니까. 그 무엇보다, 그저 편안하게 살 궁리만 하는 사람이라면 절대 시골에 들어와서는 안 됩니다. 마음을 싹 비우고 갖가지 고생을 할 각오를 해야만 하는 것이죠. 산골의 적막이나 고독을 견딜 수 있는 힘을 발휘한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에요. 우리 부부도 초기엔 생각이 마구 왔다 갔다 했어요. 마치 향수처럼 도시 생각을 하곤 했는데, 우리가 지금 독립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왜 이러고 사나? 하는 회의가 없지 않았어요. 3년쯤 지나고 나자 비로소 만족감이 찾아듭디다.”
강물에 자동차가 떠내려가기도
“강철 같은 기세로 올라오는 풀들을 해치우는 일은 거의 전쟁이라죠? 선생의 거처 면적은 자그마치 2000평이에요. 이 너른 터를 간수하는 일부터가 벅차겠어요. 노년에 적당히 살기로는 터를 작게 잡을수록 이상적이라는 충고들이 많던데, 이건 믿을 만한 정보일까요?”
“연로한 분들의 경우엔 무리해서 너른 터를 잡지 말아야겠죠. 하지만 300평 이상은 돼야 뭐든 마음먹은 대로 활개를 쳐볼 수 있지 않을까요? 여하튼 온갖 노동과 정성을 쏟아야 기반이 잡히는 게 산골 살림입니다. 사람들은 우리 집을 둘러보고 거참 근사하다고들 하지만, 구석구석 비지땀을 쏟은 현장이라는 걸 알진 못해요. 물론 시골에서의 건강한 노동은 커다란 성취감을 줍니다. 모든 주변 사물과 정들게 되고요. 마치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정들듯이….”
“과도한 노동으로 골병이 들거나 우울증에 걸리기도 하더군요.”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창밖으로 보이는 저 돌담장은 3년에 걸쳐 쌓았어요. 돌담을 쌓다 보니 재미가 생겨 봄가을로 열심히 돌을 주워다 쌓아올린 것인데 3년이나 걸렸어요. 그 와중에 병을 얻기도 했지만, 햐, 완성을 하고 나서는 얼마나 좋던지…. 마치 영화 한 편을 만든 감독처럼 신나더라고요. 골병은 피해야겠지만, 하나하나 나만의 작품을 만들어간다는 성취감과 만족감이 크기에 시골살이를 애호할 수밖에 없어요.”
강의 이름은 올목강이다. 강굽이 형세가 오리의 목을 닮아 ‘올목강’이라 부른다. 이 강엔 교각이 없는 채로 콘크리트를 부어 납작하게 가설한 잠수교가 걸려 있다. 이 옹색한 다리나마 없었던 시절엔 배로 강을 건넜다. 폭우가 쏟아지면 잠수교는 순식간에 물에 잠긴다. 그렇게 되면 꼼짝없이 갇힐 수밖에. 장마철이나 봄가을의 폭우 때는 여러 날씩 외부와 고립된다.
“별안간 고립될 가능성에 대비해 음식이나 가축 사료를 늘 충분히 비축해둡니다. 한번은 새벽에 잠이 깨어 나가보니 마당까지 물이 차올라 아예 싯누런 바다로 변했더라고요(웃음). 세상에 물 구경, 불 구경처럼 신나는 게 없다지만 기가 막힙디다. 우당탕탕 굽이치는 물살에 아름드리 통나무며, 컨테이너 박스며, 자동차며, 뭐든 막 떠내려가더라고요. 그 난리 통에 강 저편에 세워뒀던 우리 승용차도 떠내려갔어요. 졸지에 차를 잃어버렸지만, 차보다 정말 아까웠던 건 마당의 컨테이너 박스에 보관했던 집사람의 그림이었어요. 모조리 물에 잠겨버렸죠.”
아내 박명자씨는 그림 그리기를 밥 먹듯이 해온 인물이다. 무채색 먹의 농담(濃淡)으로 사물을 표현한다. 세필을 활용한 정교한 사생보다 일필휘지, 대담하고 호방한 작풍을 구사한다. 그림만 봐서는 여자의 작품이라 알아챌 수 없을 만큼 활달하고 후련하다. 남편의 눈에는 이런 아내의 작품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명품이다. 그런 판국에 수해를 입어 그림들이 모두 물속 용궁 나들이를 했으니 상심이 컸을 게다. 수려한 강변에 사는 가혹한 대가를 치른 셈이다. 그런 변을 겪을 때면 귀촌이 후회될 성싶지만, 아서라, 홍씨는 수해이든 수난이든 자연의 형제로 살아가기로 작정을 한 자가 기꺼이 감당해야 할 수련이거나 단련의 계기로 받아넘기는 낌새다.
정든 오누이처럼
홍성규씨는 이라는 시집을 낸 바가 있다. 염염한 로맨틱이 비치는 제목이지만, 그의 적성은 자연과 사교하는 쪽으로 사뭇 발육했다. 이를테면 그는, 산골에서 꽃향기가 천지간에 가득하면 황홀해져 춤추고 싶어 하고, 비바람에 갈피없이 흔들리는 꽃들의 비통한 몸부림에도 섬세하게 가슴이 닿아 시적 충동을 느끼는 개성의 소유자로 보인다. 일찍이 세간에 횡행하는 욕망이나 허영은 대충 놔버렸기에 간소하게 먹고도 뿌듯하게 자족하는 생리가 몸에 익었다.
“시골에선 도시에 비할 때 생활비 지출을 절반 이하로 줄일 수 있습디다. 한 달에 150만원이면 뒤집어쓰고도 남을 지경이지만, 형편이 여의치 않을 때는 70만원 남짓으로도 까딱없어요.”
“텃밭에 키우는 작물들로 충분히 자급자족이 되겠죠? 닭들은 마구 알을 낳을 테고.”
“불필요한 외출을 즐거이 자제하며 살기 때문에, 거처 내부에서 사는 재미를 쏠쏠히 느끼기에, 지출을 줄일 수 있는 여지가 많죠. 승용차 대신 작은 트럭을 굴려 유지비를 절감하고, 가끔 먼 곳을 여행할 경우엔 대중교통을 이용해 검소한 살림을 운영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인간이란 역시나 돈 문제로 충돌하게 마련인 동물입디다. 때론 아내와 토닥거리기도 하는데 그게 주로 금전 문제 때문이었어요. 끙.”
“금전의 여유가 있으면 덜 싸우게 될까요?”
“부자들은 돈 때문에 더 치열하게 싸우지 않습디까(웃음)?”
“도무지 싸우지 않고, 부처님 가운데 토막처럼 어엿하게 살 수 없는 게 원래 인간일까요?”
“저 고고한 하늘에도 가끔은 번개가 치지 않나요? 부부싸움을 하지 않고 산다는 건 맹물 마시고 술 취하려는 것처럼 가당치 않은 일입니다. 충돌과 마찰 속에서 부부 사이가 더 단단해지는 법이거든요. 우리 내외가 말이죠, 도시에 살 때는 불행하게도 부부싸움을 할 기회가 없었어요. 나는 툭하면 밖으로 나돌아 다녔고, 아내는 아내대로 스케치니 전시회니 하면서 며칠씩 나가 살고 그랬거든요. 모든 시간을 같이 붙어살게 된 귀촌 이후엔 싹 달라졌어요. 자못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부부싸움을 전개해서 진정한 친선을 도모하게 되었으니까요. 이거 쾌거 아닌가요(웃음)?”
“앗! 부부싸움도 창의적 예술이라는 말씀?”
“집식구가 세상에서 가장 유능한 요리사입니다. 뭐 제 입맛에 딱 맞는 음식을 만들어주는 고마운 존재라는 뜻이죠. 대충대충 사는 저에 비해 합리적이고 현명하게 꼼꼼한 여자라는 점도 아주 매력이죠. 그러나 단점이라면 예민하다는 점이에요. 전엔 송곳이었다면 지금은 부지깽이처럼 좀 무뎌졌지만, 아무튼 이런 아내에게 제가 그림 비평을 인정사정없이 해대곤 했어요. 그러니 다툼이 없었을 리가. 오해는 마시라. 다툼의 날들은 이젠 추억의 잔영으로 남았을 뿐이니까(웃음).”
느티나무를 맨손으로 뽑을 천하장사가 있던가. 불화와 앙앙불락이 없는 부부가 있던가. 홍성규씨의 언설은 자주 아내와의 역사를 술회하는 쪽으로 번진다. 20년 세월을 산골에 살며 그는 자연과 교감하는 도락을 만끽해왔다. 일상의 근로로, 절간의 중들이 비운 발우와도 같은 허심(虛心)의 내공으로, 또는 우슬(牛膝, 일명 쇠물팍)이니 쇠비름 같은 산야초를 장복한 건강생활로, 그는 인생의 저물녘을 훈훈하게 통과하고 있다. 그러고서도 한결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존재가 하나 있으니 그게 바로 아내라는 고백을 차마 참지 못하고 토설한다.
“아내에게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을 때면 대통령에게 표창장을 받은 것보다 기쁩디다. 그런 아내가 강변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은 또 얼마나 행복한지…. 노년의 부부란 말이죠, 가급적 산골 외딴집에 살아야 합니다.”
졸혼(卒婚)이라는 요상한 잠정적 결탁이 예찬되기도 하는 이 부박한 세상. 그러나 강변에 사는 내외는 정든 오누이처럼 단란하게 어깨를 겯고 산골의 나날을 동행한다. 이는 아마도, 귀촌이 아니었다면 도달하기 어려운 비경이렷다.
>>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 , 등의 저서가 있다.
미국에서 사업을 하려면 은행거래는 필수였다. 한국과는 비슷한 것들도 더러 있기는 했지만 어딘가 다른 체계들이 제법 많이 있었다.
처음으로 미국계은행을 들어갔다. 가게 앞 길 건너에 마침 은행이 있어서 그곳으로 가기로 했다. 창구 앞에는 모두가 두꺼운 투명 유리로 가려져있어 사람을 경계하고 있었다. 워낙 총기사건이 빈번하니 그다지 대수로운 일은 아니었다. 밑부분으로 둥그렇게 손만 들어갈 수 있는 반원의 구멍이 있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하면 작은 구멍이 뽕뽕 뚫린 곳으로 입을 대고 말을 해야만 한다. 발음이 다른 필자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 간혹 그들은 인상을 찡그리기도 했다. 물론 은행 입구에는 자동기계가 있기는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겁이 났다. 모든 것들이 영어로 되어있으니 처음에는 당황할 수밖에 없다.
미국의 은행은 통장이 없다. 또한 현금보다는 주로 체크라는 종이 수표가 모든 이들에게 애용이 되고 있었다. 미국인들은 대체로 현금을 소지하지 않는다. 신용카드나 체크만 있으면 모든 거래가 순조롭게 이루어진다. 다만 체크를 사용하는 데는 몇 가지 주의할 점이 있었다.
누구에게나 상용되는 체크의 부도는 빈번하게 일어났다. 부도라는 것은 은행 구좌에 돈은 없는데 공 체크를 마구 발행하여 마이너스를 초래하는 것이다. 물론 신용이 쌓여 오래된 고객에게는 어느 정도의 혜택을 주어 일단은 결재를 해주고, 부도 나는 것을 막아주기도 한다. 그러나 공짜가 아니라 그 수수료가 엄청나다.
신용이 없는 사람들은 체크가 들어왔을 때, 구좌에 잔고가 없으면 무조건 상대방에게 돌려보낸다. 그리고는 또 비싼 수수료를 붙인다. 그쪽도 물리고 이쪽도 붙는다. 그 값이 건당으로 치므로 만만치가 않다. 물론 여윳돈이 많아 은행구좌에 달러가 넉넉하게 있으면 문제 될 것이 없다.
체크 관리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통장이 있는 것이 아니니 일일이 자기가 하나하나 관리하며 수첩에 쓰지 않으면, 순식간에 부도가 나서 엄청난 수수료를 감당해야 했다. 미국인들은 반드시 사용하는 그때마다 일일이 적어 내려가는 것이 습관화 되어있었다.
필자는 있는 돈 없는 돈을 다 털어 어렵게 세탁소를 구입했다. 그러므로 당연히 한 달 운영비가 넉넉지가 않았다. 약간의 운영 금을 준비하기는 했지만, 가게를 처음 운영하려니 이것저것 구입할 것이 아주 많았다. 더구나 체크에 날짜를 미리 적어서 그 날짜를 지켜달라고 결재를 해줬지만 어느 때는 소용이 없었다.
수금을 해간 사람들은 때로는 돈이 급했는지 일단 자기 구좌에 입금부터 하고 보는 이도 간간이 있었다. 그 날짜를 꼭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날짜 위에 빨간 펜으로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정확하게 표시를 해놔야만 입금이 안 되는 것이라고, 나중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월말 가까이 오면, 한 달 동안 사용하며 주고받은 체크의 내용이, 은행으로부터 스테이트먼트라는 내역서에 자세히 쓰여져 날라온다. 꼼꼼하지 않은 남편이 필자가 없는 사이에 몇 가지 결재를 해주었다. 필자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사실이었다. 내역서를 받고 정신이 하나도 없다.
쓸데없는 부도 수수료가 500불이나 된다. 한치의 양보도 없이, 정확하게 달러의 숫자가 고스란히 적혀있었다. 은행은 그날그날 들어온 체크 중에 가장 큰 것부터 결재를 먼저 한다. 그리고 남은 돈에서 작은 것들을 결재하다 보면 부족한 것들은 여러 개가 될 수가 있다.
수수료는 건마다 부과를 하니 말도 안 되는 숫자가 순식간에 되어버린다. 한 건마다 무려 35달러를 부과한다. 예를 들면 5달러짜리 수표가 들어와서 돈이 부족하면 일단은 물어주고 그 피를 무조건 물린다. 당연히 처음에는 잘 모르니, 호되게 겪어보고서야 터득이 되는 말도 안 되는 지독한 법칙이 수두룩했다.
눈뜨고 코 베는 느낌이 바로 그것이었다. 미국에서 용기만 갖고 처음으로 시작한 사업은 그 대가를 단단히 맛보아야만 했다. 적어도 수개월은 실수를 거듭하고, 수천 불을 고스란히 날리고 나서야 단단히 똑똑해질 수가 있었다. 당연히 부부싸움은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졌다.
몸은 노동으로 고통스러운데 거기에 돈까지 쓸데없는 것으로 날리니 신경이 날카로울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위로의 말을 했다. 미국에서 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돈을 날려야 하고, 사기도 몇 번을 당해야만 그 뿌리를 내릴 수 있다고, 그것이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라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삭막하기 짝이 없고 정나미가 떨어졌다. 어쩌다 미국까지 와서 고생바가지를 하는지 도대체가 몰랐다. 가게 앞, 산타모니카 바다 모래사장에 앉아서 태평양 바다 지평선을 넘어 한국을 바라보며 펑펑 울었다. 삶에 서러움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넘어가는 석양 아래로 바다 갈매기들만이 꺼억 꺼억 함께 울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