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차의 고장, 네덜란드에서도 옛 모습 그대로의 ‘전통 풍차’ 마을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킨더다이크-엘샤우트(Kinderdijk-Elshout)는 ‘풍차’로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풍차마을은 캘린더 속 그림처럼 아름답다. 또한 세계에서 손꼽히는 장수마을이기도 하다. 근교에 위치한 로테르담에서는 영화제가 한창이다. 이곳에서 건강도 다지고 문화 충전도 하면 인생이 훨씬 다이내믹해지지 않을까?
수줍은 처녀의 모습 같은 풍차마을
로테르담(Rotterdam)은 게스트하우스로 이용되고 있는 큐브하우스, 펜슬하우스 그리고 거대 쇼핑몰 마크트할레 등 온 도시가 건축학도의 실험실을 연상케 한다. 로테르담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 공습으로 처참하게 파괴되었다가 재건되면서 실험적 건축물들이 도시 전체를 장식하게 됐다. 한국의 리움 미술관과 서울대 미술관을 건축한 렘 콜하스(1944년~)가 이 도시 출신이다. 특히 박물관 단지는 창의적인 예술작품들 말고도 200년이 넘는 나무숲과 운하가 어우러져 마치 북유럽의 자연친화적 도시 같은 분위기를 드러낸다. 숙소지기가 알려준 네덜란드 전통 음식점에서 스탬폿(stamppot)을 먹는다. 식당에서 만난 손님은 “스탬폿은 대부분 집에서 해먹는 음식이라서 일부러 식당에서 사먹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풍차마을을 가겠다는 필자에게 킨더다이크와 잔세스칸스(Zaanse Schans)는 다른 곳이라고 일러준다.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가서 만난 킨더다이크는 로테르담에서 고작 16km 거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데 그 느낌은 확연히 다르다. 갈대밭에 숨어 있는 몇 채의 건물들, 운하와 그 위에 떠 있는 유람선 그리고 운하를 따라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시골의 풍차마을은 도심과는 오랫동안 담을 쌓고 살아온 듯하다. 마치 수줍은 처녀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저지대의 애환을 보듬은 1700년대 풍차들
운하를 사이에 두고 사람 키보다 더 웃자란 갈대밭 ‘풍차 길’을 따라 천천히 걷는다. 눈으로는 19개의 전통 풍차 수를 헤아리고 있다. 그저 카메라 셔터만 누르면 달력 사진이 될 정도로 아름답다. 썰렁한 겨울 풍경조차 아름다운 킨더다이크의 풍차마을은 시간의 빛에 따라 그 느낌도 다르다. 사람들은 많지 않다. 눈으로는 아름다운 풍차가 가득 담기지만 이 마을의 애환이 담긴 현실도 있다. ‘킨더다이크’라는 지명은 ‘어린이의 둑’이라는 의미에서 유래되었다. 이 지역은 알블라서바르드(Alblasserwaard) 해안의 해수면보다 6m나 낮아 항상 거센 밀물과 썰물의 피해를 입어야 했다. 1421년, 일명 ‘성 엘리자베스’라는 대홍수가 발생했는데 요람에 쌓여 있던 어린아이가 물 위를 둥둥 떠다니다 둑 위에 얹혔다고 한다. 풍차는 네덜란드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 도구였다. 배수용으로 만들어진 1700년대의 풍차들은 200년 넘게 해안 간척지의 물을 빼내 주변 지역에 홍수가 나지 않도록 해줬다. 이 마을에는 레크 강과 왈 강 사이의 평지 위로 오래된 8각 원추형의 풍차들이 이어져 있는데 그중 한 곳은 풍차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매표원은 이렇게 말한다.
“다른 풍차 안에서 지금도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저 아름답게만 보이는 풍차에는 이 지역 주민들의 삶의 무게가 아직도 묵중하게 실려 있다. 풍차 안으로 들어서면 팽팽 돌아가는 방향기에 따라 톱니바퀴처럼 돌고 있는 거대한 나무 기둥이 있는데, 실내 공간을 절반 이상이나 차지하고 있어 생활공간이 비좁아 보인다. 또 풍차 소리가 너무 커 기찻길 옆 오막살이가 연상된다. 지독한 악조건 속에 마련된 주거공간이다. 좁은 공간을 활용한 가파른 계단은 위층으로 이어진다. 층의 여백마다에는 가족들의 공간이 마련돼 있다. 부엌, 화덕, 거실, 부부의 침실, 아이들의 좁은 방들이 절묘하게 보일 정도로 옹기종기 배치돼 있다. 하루 이틀이 아니고 수년, 수십 년간 풍차 집에서 생활했을 주민들. 지금은 관광지로 거듭났지만 과거 주민들의 삶은 얼마나 고달팠을까 짐작이 된다.
장수비결? 가족 간의 사랑이 최고야!
야모리 일본 교토대 의대 교수와 세계보건기구(WHO)의 협력으로 10년간 세계 25개국 57개 장수마을을 대상으로 연구가 진행됐는데, 그 연구마을 중 한 곳이 킨더다이크다. 관광안내소 지킴이에게 “이 지역이 장수마을로 알려져 있는데 장수비결이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장수 비결은 없다. 그냥 자연에 순응하면서 살았다”고 말한다. 특별한 비결은 없는지도 모른다. 만약 비결이 있다면 열악한 풍차 집에서도 알콩달콩 지낸 가족 간의 사랑이 아니었을까? 차가운 바람을 피해 로테르담 에라스무스 다리 근처로 가 마스 강으로 지는 해를 바라본다. 그날따라 마스 강을 붉게 물들이며 떨어지는 해가 너무 아름다워 눈물을 글썽였다. “나 죽으면 이곳에 뼛가루를 뿌릴까?” 그날 서글픈 내 마음을 알기나 했을까? 우연히 만난 헬스 트레이너 에밀레가 날 웃게 만들었다. 그는 요새도 내게 묻는다. “리, 언제 다시 올 거니?” 스쳐 지나간 인연에게도 따뜻한 마음을 보여주는 더치(duch)인들. 그들이 사는 도시가 그리워지는 날이다.
Travel Data
찾아가는 방법 로테르담에서 전철이나 기차를 타고 주드플렌(Zuidplein) 역(D, E라인)에서 하차 후 154번 버스를 타면 된다. 45분 정도 소요된다. 로테르담 에라스무스 다리 옆 스피도 선착장에서 배를 타도 된다.
로테르담 현지 교통 정보 시내 일일권 교통카드를 사면 편리하다. 지하철, 버스 등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로테르담 시내버스에는 승무원이 있다. 필히 교통카드를 구입해야 한다. 장기 체류 시에는 지하철역에서 일일권을 사면 된다.
별미 음식 네덜란드인들은 청어 요리인 더치헤링과 발효식품인 하우다 치즈, 요구르트 등을 자주 먹는다. 이러한 식습관이 장수 비결이 됐다. 요즘은 삼발 울렉(인도네시아 고추장)이 건강식으로 인기다. 네덜란드는 팁 문화가 없기 때문에 식당에서 팁을 주지 않아도 된다.
숙박 정보 킨더다이크에는 숙박할 만한 곳이 마땅치 않다. 로테르담에 싼 값의 숙박지가 아주 많다.
한 달 여행 포인트 로테르담에서 머물면서 주변을 돌아보는 것이 좋다. 거대 쇼핑몰 마크트할레에서는 다양한 식재료를 구입할 수 있다. 2017년 제46회 로테르담 국제영화제(1월 25일~2월 5일, iffr.com)도 펼쳐진다. ‘조선’에서 14년간 억류생활을 했던 하멜(1630~1692)의 고향인 호르큄(Gorcum) 시도 멀지 않다. 현재 우리나라와 활발한 문화적 교류를 하고 있다. 헤이그도 30분이면 닿는다.
단기 숙소 렌트 방법 유럽에서는 가정집 등을 단기 렌트하는 업체들이 일반화되어 있다. 에어비앤비가 유명하다. 숏스테이그룹(shortstaygroup.com)은 네덜란드, 파리, 바르셀로나의 숙박지를 전문으로 제공한다.
로테르담 시니어 여행 포인트 암스테르담보다 물가가 싸다. 시니어는 대중교통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지하철, 국철 등에는 엘리베이터가 있어 다리가 불편한 사람들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다.
‘굿’은 슬픔과 맞닿아 있다. 죽음 혹은 아픔이 전제하고, 한(恨)이 깔려 있으며 원한풀이로 이어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작년 말 30스튜디오(서울 종로구 창경궁로)의 개관 작품으로 선보인 은 진도의 씻김굿을 연극무대로 옮긴 것이다. 개인의 슬픔을 넘어 한국의 역사, 풀리지 않는 현실 속 한국의 이야기가 한판 굿으로 관객과 어우러졌다.
‘순례의 삶에 한국 근·현대사를 담다
무대는 진도 바다 바위 언덕. 동네 아낙이 바위 주위를 돌며 섭(홍합) 채취를 하고 있고, 높은 바위에 앉은 남자는 바다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주인공 순례는 어기적거리며 무대를 돌아다닌다. 들어오는 관객과 무대 위 남자와 여자의 행동에도 간섭하며 연신 싱글벙글이다. 객석의 불이 꺼지고 본격적인 극이 시작되면 무대를 돌아다니던 순례는 바위 위 남자와 대화를 나누더니 “나, 간다” 한마디 남기고 바다에 몸을 던진다.
수난의 시대를 온몸으로 이겨내며 살아온 순례의 죽음으로 산 자와 죽은 자가 통하는 세계를 열어 영혼을 달래는 ‘씻금’의 시간이 마련된다. 영혼이 된 순례는 굿을 통해 뭍으로 올라오고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남도 민요와 함께 풀어낸다. 육자배기, 흥그레타령, 닭노래, 진도아리랑 등 진도 지역에서 내려오는 노랫가락을 통해 우리의 아픈 이야기 또한 발견하게 된다.
순례의 삶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거울이다. 순례는 시어머니가 낳은 어린 시동생들 보살피느라 정작 내 아이는 입히지도 먹이지도 공부시키지도 못한 것이 아쉽다. 그나마 제대로 키운 장남은 IMF로 잘 다니던 한국은행에서 실직하고 증권에 손을 댔다가 망해 결국 자살을 택했다. 순례의 가정사와 함께 진도 앞바다에서 생을 달리한 넋들도 등장한다. 정신대를 피해 나이 많고 얼굴도 모르는 남자에게 시집갔던 여자의 영혼, 빚을 이겨내지 못해 바닷물에 빠진 연인이 등장해 씻김을 받는다. 구천을 떠돌아 거지꼴이 된 순례의 장남도 돌아와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로 깨끗하게 치유받고 저승 갈 채비를 서두른다. 마지막으로 뭍으로 올라오지 못한 세월호의 영령들까지 달래기에 이른다. 수난의 역사이자 지금의 시대는 ‘씻김’과 ‘길닦음’이라는 제의를 통해 삶과 죽음, 개인과 역사, 극 전체와 관객이 서로 화해하고 보듬으며 화합한다.
‘관객과 배우가 함께 어우러지다
이 연극은 관객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어야 더욱 빛나는 작품이 된다. 마치 굿판을 구경하듯, 길거리 공연을 보거나 시위에 참가한 듯 어깨를 들썩이고 함께 어우러져야 제대로 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관객의 참여를 돕기 위해 무대 뒤 스크린을 적극 활용한다. 배우들이 부르는 남도소리 전곡을 스크린에 띄우고 관객이 따라 부르는 시간도 갖는다. 공연 전부터 순례로 등장하는 배우 김미숙이 무대를 걸어 다니면서 관객에게 툭툭 말을 건네는 것 또한 관객들과 함께 공연을 이뤄간다는 의미다.
특히 연극이 끝나고 나면 실제 굿이 끝나고 음식을 나눠 먹듯 배우들은 막걸리와 떡, 고기 등을 무대에 내온다. 관객과 배우가 함께 어우러져 준비한 음식을 나눠 먹는다. 그 어떤 연극보다 더 쉽게 배우에게 다가가 사진 찍기를 권하고 덕담을 나누는 연극이 바로 이다. 또한 배우들이 정성스레 만든 ‘넋발(씻김굿에 쓰이는 종이 도구로 망자의 혼을 표현한 것)’을 관객에게 기념으로 나눠준다. 연극을 보고 나왔다는 느낌보다는 함께 공연을 하고 나온 느낌으로 극장을 나서게 된다.
굿극 은 2010년 국립남도국악원의 제안으로 진도 씻김굿을 무대 형식으로 제작하게 되면서 시작됐다. 이때 연극학자인 서연호가 굿을 연극화했다 해서 ‘굿극’이라는 개념이 부여됐다. 공연의 맥은 잠시 끊겼다가 작년 말 대본 집필과 연출을 맡았던 이윤택이 국립국악원의 양해를 얻어 자신의 극단인 연희단거리패에서 제작하게 돼 다시 관객들 곁으로 돌아왔다.
‘진도 마지막 당골, 고(故) 채정례의 삶 녹아들다
씻김굿이란 서남해안 지역에서 보편적으로 행해지는 넋 굿이다. 살아생전의 좋지 못했던 기억과 마음 깊은 곳의 앙금을 깨끗이 씻어내 망자가 수월하게 이승에서 저승으로 건너갈 수 있도록 돕는다. 굿극 은 진도씻김굿의 마지막 당골(세습무당)인 채정례(1925~2013)와 악사 함인천 부부의 실제 삶을 줄거리로 삼았다. 살아생전 채정례 선생은 씻김굿의 전체 무가와 장단을 당시 남도국악원의 모든 단원에게 전수해 후세에 남겼다. 굿에 사용되는 종이 무구(巫具)인 지전(紙錢)과 고깔, 넋 등의 제작 과정 또한 단원들에게 지도했다고. 국립남도국악원은 제작 초기 진도의 큰 당골인 채정례를 주목했다. 실제 진도에서 부부가 짝을 이루어 세습무계의 전통을 이으면서 원형을 고수한 원로는 채정례 당골과 남편인 함인천이 유일했다. 큰무당이 가지는 위대한 포용력과 함께 여러 당골들 사이에서도 그녀는 오랜 연륜과 탁월한 기예로 존경받아왔다. 씻김굿은 죽은 이를 위한 천도의례이지만, 채정례 당골의 씻김굿 현장은 죽은 이를 위한 자리인 동시에 산 자들의 슬픔까지 걷어내는 자리였다.
글 배국남 대중문화 평론가(knbae24@hanmail.net)
“유흥업소에 안 간다. 2006년 이후로는 한 번도 안 갔다. 왜냐하면, 4만5000원씩 아이들을 후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돈이면 쓰레기더미 안에 있는 아이들을 도와줄 수 있다. 파리가 눈에 알을 낳아도 쫓을 힘이 없는 아이들이다. 그 아이를 살리면 그 아이가 변해서 사회를 살린다. 내가 번 돈이 이렇게 소중한 일에 쓰인단 걸 목격했기 때문에 큰돈을 그렇게 쓸 수 없게 됐다.” 구호단체 컴패션 홍보대사에서부터 북한 어린이 돕기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부인 신애라와 함께 사랑나눔 실천을 하는 스타 차인표씨의 말이 큰 울림을 준다.
자살률 1위, 노인빈곤율 1위, 사회적 관계 최하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10월 발간한 보고서 이 적시한 한국의 상황이다. 취업난, 양극화 등으로 인해 가족 해체가 급속히 진행되고 부모에게 버려지는 아이들도 급증하고 있다. 어느 때보다 사랑나눔이 절실할 때다. 하지만 후원, 기부, 봉사 등 사랑나눔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의 사랑을 받는 연예인 스타들이 선행에 적극적으로 나서 많은 사람을 사랑나눔 실천에 참여시키는 아름다운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연예인 스타들이 사랑나눔 기폭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1981년부터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의 후원회장을 맡아 불우한 어린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3년 전부터는 제로캠프라는 청소년들을 위한 비영리 단체의 이사장직을 맡아 문화 예술을 통한 비행 청소년의 교화에 나서는 등 다양한 사랑나눔 실천을 펼치고 있는 최불암씨와 백혈병 어린이, 위안부 할머니, 네팔과 중국 지진 피해자 등에게 거금을 쾌척하는 등 전방위적 선행을 펼치고 있는 송중기씨 등 많은 연예인 스타가 사랑나눔 실천을 활발하게 하고 있다.
최근 들어 연예인 스타들의 사랑나눔의 양태가 진화하며 선행의 스펙트럼이 넓어지고 있다. 그동안 불우이웃이나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성금 기부나 자선단체의 홍보대사, 방송사의 자선 프로그램 출연 등이 스타 선행의 주류를 이뤘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김혜자·한지민·유재석의 재능기부, 김정은·이영애·문근영·한혜진·박해진의 국내외 빈민지역에 학교, 병원, 도서관, 우물 등 시설 기부, 최불암·정애리·고두심·김제동의 재단을 통한 불우 청소년 지원, 이효리·송혜교·송중기의 위안부 할머니 지원 등 스타들의 사랑나눔의 스펙트럼이 크게 확장됐다.
기부 형태도 불우이웃과 시설에 대한 후원, 청소년과 학교의 장학금 쾌척,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성금기탁 위주에서 벗어나 한지민·송혜교 등 스타들의 책 인세 기부, 이승기·박해진 등 쌀 화환 기부, 최강희의 골수 및 장기기증, 차인표-신애라·정혜영-션 부부의 제3세계 어린이 후원금 지원, 김장훈·하춘화의 행사와 캠프를 통한 기부 등 매우 다양해졌다.
일회성 이벤트에 그쳤던 연예인의 사랑나눔과 선행은 수십 년 동안 지속해서 전개해나가는 모습으로 변모하고 있다. 김혜자·최불암·고두심·하춘화·안성기·정애리·차인표·김장훈·최수종·유재석·션·장나라 등은 10~40년에 이르는 장기적 선행을 펼치고 있다.
사랑나눔을 시스템화하거나 조직화하는 스타들도 많다. 공연 등 수입원이 생기는 이벤트 수입의 일부를 계속 기부하는 김장훈을 비롯해 적지 않은 스타들이 자신의 연예활동 수입의 일정 부분을 떼어 소년 소녀 가장이나 독거노인, 장애인들을 지속해서 돕는 것을 체계화했다. 김원희·김정은 등은 ‘따뜻한 사람들의 모임’을, 최수종·오윤아·김수로 등은 ‘좋은 사회를 위한 100인 이사회’를 만들어 조직적으로 봉사활동과 기부사업을 펼치고 있다.
국내의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이웃을 대상으로 주로 이뤄지던 스타들의 사랑나눔은 아프리카, 동남아 등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안성기·김혜자·정애리·박해진·이영애·송혜교·문근영 등 많은 스타가 세계 각국의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나누고 있다. 이민호·장동건·이승기·장근석처럼 스타와 팬클럽이 함께 자선활동이나 선행활동에 나서는 행태도 이제는 일상적 풍경이 됐다.
스타들은 왜 사랑나눔에 나서는 걸까. “조그마한 도움이 한 아이의 생명을 살리고 삶을 변화시킨다. 그리고 도움을 받은 아이가 커서 사회와 이웃에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 성장한다. 참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다.”오랫동안 청소년들에게 장학금 기부를 하고 장애인단체 홍보대사 등 다양한 방면에서 사랑나눔을 실천하는 고두심씨의 말이다.
40여 년 동안 불우 아동과 청소년들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어온 최불암씨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에 대한 관심과 투자만큼 소중한 일이 없다. 더욱이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아이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면 아이가, 사회가, 국가가 긍정적으로 변한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국내에 있는 고아는 물론 굶주림에 허덕이는 아프리카의 아이들까지 몸과 마음으로 포근히 감싸 안는 김혜자씨는 2019년까지 후원금을 미리 내고 이렇게 말했다. “광고를 찍거나 돈이 생기면 후원하는 아이들 것을 떼어놓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늘 불안하다. 내가 돈이 없어 안 주면 걔네들은 굶으니까. 나야 돈이 없으면 우리 아들이 밥이라도 먹여주겠지만, 그 아이들은 안 되지 않나. 당연한 일이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오랫동안 9억 원에 가까운 돈을 익명으로 기부하고 시골 지역에 청소년을 위한 공부방 등을 지원한 문근영씨는 “제가 기부 등을 하면서 더 행복하고 매우 기쁩니다. 이런저런 상황들, 사연들, 사정들이 있지만 기부할 때 ‘우리 같이 그래도 열심히 살아봐요’라는 그런 메시지 정도는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요”라고 기부 이유를 밝혔다.
루게릭병 환자 돕기에서부터 어린이 재활병원건립 후원까지 다양한 자선사업과 캠페인을 왕성하게 펼쳐 ‘선행천사’라는 별칭을 얻은 션. 그는 사랑나눔 실천 공개에 대해 “일부 사람들이 (사랑 나눔을) 조용히 할 수 있는데 왜 공개하냐고 말한다. 연예인이기에 많은 사람에게 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일을 알려서 그걸 공유하면 더 빨리 이룰 수 있다. 겨울을 나는 데 필요한 연탄이 300만 장인데, 혼자서 기부할 수 없는 양이기 때문에 많은 분에게 알리면 300만 장의 기적을 쉽게 이룰 수 있다”고 설명했다.
춤을 무대 공연으로만 생각해 대중은 무대 위의 댄서가 춤추는 것을 바라만 보던 시대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전문적인 교육을 받아야 할 수 있는 발레나 아크로 바틱 등은 일반인이 흉내 낼 수없는 재주였다.
댄스의 역사에서 버논 캐슬 부부의 공로를 크게 봐야 하는 이유는 바로 춤을 대중화시킨 사람이기 때문이다.이들 부부는 20세기 초 자연가로운동을 주창하며 춤은 거리를 걷듯 일반인들도 쉽게 출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기초해 영국이 전 세계 댄스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나라마다 다르고 심지어 같은 나라에서도 춤이 달라 불편했던 것을 통일시키는 작업을 한 것이다. 춤을 일부 전문가만 추는 것이 아니라 일반인들도 쉽게 배우고 즐길 수 있게 한 것이다. 100년 전 일이다. 이런 정리는 왈츠, 탱고, 폭스트로트 같은 볼룸댄스가 먼저 진행됐고 이후 라틴댄스도 같은 방식으로 체계화됐다. 덕분에 댄스가 댄스스포츠로 발전해 오늘날 생활체육으로도 즐길 수 있게 됐다.
이런 작업이 진행된 것은 당시 사회 전반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18세기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 세상이 급격하게 변하던 시기였다. 제조업이 발달하자 농촌 인구가 줄어들었고 사람들은 도시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모든 것이 실용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사고도 팽배해졌다. 예를 들면 긴 드레스는 일하는데 비효율적이라 점차 편한 옷을 선호하게 되었다.
이 즈음 영국에서는 여성들의 참정권 요구가 있었다. 일부 돈 있는 남자들에게만 있던 것을 여성들도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요구는 비록 30세 이상의 여성들에게만 한정되는 것이었지만, 1918년 드디어 받아들여졌다. 남성과 동등한 참정권은 10년 후인 1928년에 이루어졌다.
20세기 초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4년간 이어졌다. 전쟁 통에도 사치보다는 실용적인 의상으로의 변화가 요구되었다. 산업 현장에서는 전쟁으로 부족한 일손을 여성들이 담당했고, 전쟁터에서는 직접 탄약을 나르고 간호를 하는 등 바빴다. 해리 폭스라는 사람은 이 무렵 폭스트로트라는 춤을 만들었다. 이때 여성들 드레스 밑단이 1인치 올라가며 비로소 발목이 보이게 됐다. 이전까지 여성의 의상은 발목을 가리는 것이 관습이었다.
초기 발레는 긴 드레스를 입고 췄다. 그러다가 의상이 점점 짧아졌고 20세기 초에 들어오면서 클래식 발레에서 보다 자유로운 다리 동작을 위해 드레스가 무릎 위로 올라가는 튀튀가 나오게 됐다. 1920년에는 샤넬라인이 등장했다. 여성의 드레스 밑단이 무릎 아래까지 올라온 것이다. 이는 사람들에게 미니스커트에 못지않은 충격을 줬고 거의 혁명적 사건이었다. 1900년 초 이사도라 덩컨이 유럽 무대에서 현대 무용을 펼친 것도 비슷한 시기의 움직임이다. 이전까지 발레는 발레복과 토슈즈가 필수였는데 이사도라 덩컨이 맨발 혹은 헐렁한 옷을 입고 춤을 춰서 그런 형식마저 무너뜨린 것이다.
우리나라도 해방 후 한국전쟁 때 서양 춤이 미군에 의해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당시 우리나라 여성들의 춤 의상은 긴 치마였다. 하지만 춤추는 데 방해가 되었고 불편했다. 긴 치마라도 관계없이 우리 식으로 발전시킨 춤이 바로 ‘지르박’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지터벅’이다.
에어비앤비의 잘나가는 시니어 호스트로 소문난 최형식(崔亨植·64), 박만옥(朴萬玉·56) 부부의 집으로 찾아가는 과정은 물음표의 연속이었다. 관광지와 거리가 먼 서울 강북의 전형적인 아파트 밀집지역. 휑한 지하주차장에 내려서도 그 물음은 계속됐다. 인터폰을 통해 잠긴 철문들을 통과하며 외국 관광객들은 여행 기분을 느낄 수 있었을까? 최씨는 “그게 바로 우리가 넘어야 할 불리한 조건이었다”고 설명한다.
“에어비앤비도 일반적인 숙박업과 다를 바 없어요. 지리적 위치가 중요하죠. 우리 집 주변은 관광지도 없고, 경치가 뛰어나지도 않아요. 그래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나름의 노력이 필요했죠.”
이들 부부는 자신들이 가진 경쟁력 중 하나는 ‘아침밥’이라고 했다. 아내 박만옥씨는 다양한 경험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전 세계 건설현장을 돌며 현장 소장으로 근무했던 남편 덕분에 다양한 식문화 경험도 했고, 부하 직원들을 초대해 식사대접하는 일도 잦았거든요. 그래서 외국인 입맛도 어렵지 않게 맞출 수 있게 됐죠. 워낙 요리에 관심이 많아 한국에 돌아와서 일식, 양식, 한식 공부도 했어요.”
단지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 집의 원칙은 아침식사를 오전 7시 시작, 최씨 부부도 함께 식사한다.
“음식을 따뜻하게 차려주고, 함께 식사해요. 함께 밥을 먹으면서 여행에 대한 정보도 나누고 소소한 일상에 대해 이야기해요. 마치 가족을 얻은 기분을 느끼죠.”
출가한 자녀의 빈방을 활용하는 대부분의 시니어들과 달리 최씨 부부의 두 아들은 아직 부부와 함께 살고 있다. 방이 모자랄 땐 두 아들이 한 방을 쓰기도 한다. 한국관광공사에서 사정할 땐 두 아들 모두 친구 집으로 보내 방을 확보한 적도 있다. 물론 가족의 평범한 생활 모습은 ‘객’들에게 그대로 노출된다.
“미국에서 온 노부부는 가족끼리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무척 좋아했어요. 아이들을 자기 자식처럼 대해주기도 하고요. 다른 나라 가족의 생활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은 그들에겐 매우 흥미로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아이들도 불편해하지 않아요. 집으로 찾아온 외국인들과 스스럼없이 친해지기도 하고 함께 놀러 나가기도 해요.”
최씨는 에어비앤비를 통해 얻은 가장 큰 선물은 끊임없이 외국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눌 누군가가 찾아와준다는 것이다. 1997년 이란 테헤란 현장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노후가 우울해질 수도 있었지만, 많은 외국인 친구들과의 만남을 통해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심리치료 효과까지 얻었다.
“일부에선 에어비앤비 호스트를 시작하면 당장 떼돈을 벌 수 있을 것처럼 호들갑을 떨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요. 돈이 목적이라면 후회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노후에 보람 있는 일을 찾는다면, 에어비앤비도 좋은 후보 중 하나가 될 겁니다.”
파티를 즐기는 것이 또 미국 문화다. 주말이면 사람들이 모여 크고 작은 파티가 열린다. 차와 간단한 다과를 하는 것도 그들은 티 파티라고 했다.
집집마다 주말이면 파티가 성행한다. 한 주 내내 열심히 일을 하고 금요일 오후가 되면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파티가 시작된다. 그것이 미국의 문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특별히 멕시칸들이 사는 지역은 바비큐 냄새가 진동하고, 그 경쾌하고 묘한 음악소리가 이 집 저 집에서 크게 울려 퍼져 공해가 되기도 했다.
미국 손님들이 가끔씩 자기들 집으로 필자 부부를 초대해주었다. 필자는 초대를 받으면 무조건 응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문화가 궁금해서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때마다 정성껏 코리안 바비큐를 준비했다. 제일 한국적인 선물로, 직접 마켓에서 질 좋은 초이스 고기를 사다가 정성껏 양념을 해서 준비를 하면 대인기를 독차지했다.
우선 코스코에서 가장 좋은 갈빗살을 적당히 준비한다. 때때로 질 좋은 LA 갈비도 선호한다. 준비한 싱싱한 고기를 찬물에 얼마간 담가놓았다가, 깨끗하게 빨아서 핏물을 제거한 후에 꼭 짜놓는다. 갖은 양념을 준비한다. 달콤하고 아주 맛난 싱싱한 배와 양파 그리고 마늘 생강 등을 믹서에 곱게 갈아놓는다.
달달 한 진간장에 약간의 죽염 소금과 각종 양념을 잘 섞어 준비하고, 짜놓은 고기에 가볍게 설탕을 약간 뿌려 간이 배도록 한다. 고기가 조금 연해지는 것 같다. 다시 모든 양념을 섞어 남편의 넓적한 손으로 정성껏 주무른다. 장갑을 끼고 하라고 해도 남편은 손맛이라며 기어코 두툼한 맨손으로 주물러댄다.
마지막으로 고소한 참기름과 깨소금을 넣고, 한두 점 프라이팬에 구어 살짝 양념을 맛본다. 그리고는 하루쯤 냉장고에 숙성을 시킨다. 그 후에 몇 시간 냉동을 시켜놓고 있다가 당일 아침에 꺼내어 다시 냉장실에 보관한다. 가기 전에 바로 반드시 숯불에 구워 정성껏 초대한 집으로 선물로 가지고 간다.
코넬리 부부인 정겨운 손님들이 산타모니카에서 롱 비치로 이사를 갔다. 롱 비치도 해변도시로 필자는 처음으로 가보는 곳이었다. 마침 금요일 저녁에 초대를 받았다. 세탁소 일을 서둘러 마치고 롱 비치로 향했다. 미국도 불타는 금요일이었다.
온통 도로가 트래픽(교통체증)으로 꽉 막혀있었다. 1시간이 훨씬 지나서야 겨우 도착을 했다. 집안 입구에서부터 멋들어진 캔들 향이 코를 찔러왔다. 미국인들은 무척 초를 좋아한다. 현관에서부터 화장실, 부엌 등등 어느 곳에나 색색의 촛불들이 화려하게 수를 놓으며 불타오른다.
코넬리 부인의 고향인 남미 브라질의 향기도 약간은 있었지만 대체로 미국 사람들의 향내가 흘러나왔다. 이곳저곳에는 두 부부의 사랑스러운 사진이 장식되어있다. 아름다운 서구식 인테리어가 고급스러웠다. 코넬리 부인이 한때는 브라질의 모델이었다고 한다. 구석구석에 그녀의 자태가 커다랗게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걸려있었다. 젊은 날의 앳되고 날씬하며 활기찬 모습들이었다.
커다란 식탁 위에는 각종의 미국 음식들이 진열되어있었다. 더러는 브라질 음식도 섞여있다. 실내에서 이루어지는 파티였으므로 미국식 바비큐는 없었다. 필자 부부는 숯불에 미리 구워온 한국식 바비큐를 식탁 가운데에 올려놓았다. 미국 사람들은 신기하게 바라보더니 한 점씩 가져가기를 시작했다. 먹어보고는 또 가져간다. 먹고 나면 또 먹고 싶은 묘한 맛이 있다는 것이다.
순식간에 커다란 접시, 하나 가득한 것이 다 사라졌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엄지손가락을 쳐들며 최고라며 입맛을 다신다. 소스의 맛이 특별하다는 것이다. 모두들 소스 레시피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대체로 미국은 생고기 위에다 단순하게 소금이나 바비큐 가루를 뿌려먹는 것이 일수였기 때문이다.
다음 파티에도 또 해줬으면 하는 무언의 부탁을 받았다. 남편은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기분이 아주 좋은듯했다. 이번에도 한국인의 선물이 최고의 성공을 거둔 것이었다. 그날 이후로도 몇 번은 더 해주었고 필자의 집 앞마당으로도 미국인들을 초대했다. 그들은 아주 행복하다며 코리안 바비큐가 역시 최고의 인기를 끌었다.
한국 사람들의 입맛은 아마도 세계를 제패할 날이 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 유행하는 말이 있다. ‘부모가 자식에게 돈을 안 주면 맞아서 죽고, 돈을 다 주면 굶어서 죽는다’는 것이다. 듣는 순간 기가 막혀 말문이 막혔지만, 시간이 갈수록 되돌려 생각을 해보니 대단한 풍자적 명언이다. 부모와 자식이란 무얼까?
아침 새벽 5시 자명종 소리가 곤한 잠을 깨운다. 어젯밤 12시, 잠자리에 들던 큰딸아이가 꼭 깨워줘야 한다며 간곡히 부탁을 했다. 올여름휴가 여행은 독일, 이탈리아로 떠난다고 했다. 필자가 사용 후 적립된 비행기 마일리지를 최대한 자기가 이용하여 성수기 가격으로 간다고 한다. 가족 합산 마일리지는 언제나 간단한 질문 하나로 단번에 그저 딸의 몫이 되고 만다. 부모는 자식이 덤으로 얻은 것을 쓰겠다는데 안 된다고 할 수도 없다. 큰딸은 매년 휴가 때가 되면 해외여행이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라며 전 세계를 누비며 여유를 만끽했다.
며칠 전, 큰딸이 여행가방을 사고 싶다며 필자의 생각을 물었다. 그것도 하얀색으로 사겠다는 것이다. 필자에게는 여러 종류의 가방 세트가 있어 당연히 반대를 했다. 그러나 결국 딸은 일을 저질렀다. 어느 날 홈쇼핑에서 택배가 왔다. 다름 아닌 가방이었고 황당했지만 받아두었다. 필자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큰 딸에게 조심스럽게 ‘왜 또 샀느냐’고 했다. 더구나 하얀색을 샀으니 때가 타서 어찌 감당하려고 하느냐고 했다. 딸은 미안했는지 색깔을 바꾸겠다고 하더니, 생각 해봐서 반품할 수도 있다고 했다. 필자는 돌려보내기 만을 눈치만 보며 기다렸다. 딸은 결국 그 하얀 가방 안에 짐을 하나 가득 챙겨놓았고 필자는 그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35년 세월, 이날까지 김포공항에서 인천공항까지 배웅과 마중은 당연한 가족행사였다. 출국할 때도 입국할 때도 언제나 부모는 당연하게 기사 노릇을 해야만 했다. 오늘은 큰 맘먹고 이제부터는 안되겠다 싶어 공항 리무진을 이용하라고 설득을 했다. 정거장이 집 앞에서 얼마 되지 않은 곳에 있었고, 딸아이는 어쩐 일 인지 쉽게 수긍을 했다. 큰딸도 어느덧 성인이 되었고 엄마의 충고가 합리적이며 경제적이라는 생각을 한 모양이다. 필자도 웬일인가는 싶었지만 잘 된 일이라 생각하며 동네 리무진 정거장 앞까지만 배웅을 하기로 했다.
새벽부터 일어나 난리를 쳤지만 어쩌다 보니 훌쩍 시간이 흘렀다. 정해진 아침 시간은 아주 빨리 지나갔다. 딸은 늦을 것 같다며 안달을 했다. 그때, 남편이 옆으로 살짝 오더니 공항까지 데려다 주자고 했고, 필자는 단호하게 안 된다고 했다. 자식들도 자기들이 돈을 벌면서부터 자기 돈에 대한 애착이 상당했고 마음대로 자기 돈을 써댔다. 부모가 쓰는 부모 돈은 당연한 것이고 자기들 돈은 엄청 아까워하는 것도 같았다. 필자도 올해부터는 생각을 달리해야겠다는 생각에 냉정하게 안 된다고 했다. 남편은 필자의 한마디에 아무 말없이 돌아서서 방을 나갔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필자도 마음이 조금 불편하기는 했다. 부모가 늘 하던 일들을 중단하려니 어딘가 모르게 편치가 않았다. 그때 남편이 다시 들어왔다. ‘그냥 보내? 안 데려다 줄 꺼야?’ 다시 한번 눈치를 보며 물어왔다. 필자도 잠시 생각을 하다가 ‘여보 돈 내라고 해요. 치사하지만 기름값 3만 원, 2만 원 왕복 통행료까지 5만 원만 내라고 해요.’ 그러면 인천공항까지 데려다준다고 했다.
큰딸이 소리를 질렀다. 무슨 소리냐고 묘한 웃음을 보내더니 싫다고 했다. 엄마 아빠가 어떻게 된 것 아니냐며 그냥 리무진을 타겠으니 걱정 말라고 했다. 필자는 그러라고 했고 오히려 잘 됐다고 위안을 했다. 공항까지는 왕복 3시간, 그것도 토요일 아침이고 또 이래저래 6~7만 원이 훌쩍 들어간다. 자식들은 자기들 돈은 아깝고 부모 돈은 언제나 공짜라는 생각이 있는 모양이었다.
부모는 자식을 죽기 살기로 키우건만, 자식들은 성공해서 돈 좀 벌기 시작하니 조금씩 생각이 바뀌어 가는 것 같았다. 어릴 적 끔찍하게 약속하던 효도라는 말도 옛말이 된지 오래인듯했다. 그저 부모는 언제까지나 베풀어 주기만 해도 되고 자식들은 이따금씩 하는 명품 선물이 대단한 것으로만 착각을 하는 것이었다. 부모가 있는 것 없는 것 다 털어 최고로 키워 놓으니 가끔씩은 부모 마음을 후벼 파 놓기도 한다. 그리고도 자식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아무렇지도 않다. 부모는 마음 아프고 속상해 죽을 것 같아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것만 같았다.
전생에 무슨 업보로 인연을 맺었기에 부모는 자식에게 한없이 주어도 차지 않는 것이고, 자식들은 화가 나면 대책 없이 뿜어내기만 한다. 속상해서 울 때면 엄마 아빠가 뭐 해준 게 있냐며 부모 가슴을 있는 대로 후벼 파 슬프게 만든다. 자식들이 제 아이를 낳고 부모가 되어서 나 알게 될 것인가 싶고,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영원한 미련으로 남아 쓸쓸해진다. 한국에 와서 들려온 웃지 못할 이상한 이야기가 실감이 나는 듯해서 필자도 어느 날부터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아침부터 쏟아지는 더위 속에 리무진을 태우기 위해 10여 분을 길거리에 서 있었다. 보내고 돌아오는 내내 필자 부부는 잘한 짓인가 싶어 영 찜찜했다. 긴 시간이 지난 후 잘 도착했다는 카톡 문자를 받고서야 마음이 놓였다. 부모라는 자리는 왜 이리도 무겁고 힘든 것일 까. 다 큰 자식을 여행 보내면서도 마음은 편치가 않았다. 필자 부부는 자식들 짝사랑에서 냉정하게 해방되고, 부부의 앞날이나 생각하자고 굳게 마음을 먹었다. 자식과 정 떼기를 하는 불안한 첫걸음 날이었다.
미국은 노인천국이다. 그러나 백인 노인들에게도 부족한 것이 있다면 외로움이 그 한 몫을 차지했다. 미국의 노인들은 대체로 검소하지만 부유하고 고독한 만큼 사랑도 넘쳤다. 미국인들이 인정머리 없고 이기적이라고 누가 그랬는가. 자본주의가 넘치는 미국에 살면서 얻을 것과 배울 것은 끝이 없었다.
하얀 은발머리가 햇빛에 반짝이며 곱게 단장한 백인 할머니 한 분이 지팡이를 짚으며 뒤뚱뒤뚱 세탁소 안으로 들어왔다. 재빨리 소리를 질러 남편을 불렀고 남편은 얼른 뛰어나가 할머니를 두 팔로 부축했다. 필자는 아직 외국인 손님이 어색하기만 해서 선뜻 나설 수가 없었다. 머리가 하얀 할머니는 얼굴에 소녀 같은 천진한 미소를 띠며 카운터 앞 의자에 앉았다. 처음 오는 손님이라고 했다. 언뜻 봐도 80은 넘어 보이는 단아한 모습의 예쁜 미국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두 부부의 모습을 번갈아 보시더니 이것저것 물어왔고, 남편은 상냥하고 친절하게 하나하나 답변을 했다.
그 연세에 운전을 직접 하고 세탁물을 하나 가득 차 트렁크에 담아오셨다. 남편은 밖으로 나가 트렁크를 열고 세탁물을 옮기기 시작했다. 비가 쏟아져 천장으로 세어난 빗물이 옷장으로 들어와 옷들이 망가졌다며 대충 50장은 가져온 것 같았다. 달러로 치면 대략 500달러는 될 것 같아 깜짝 놀랐다. 남편은 친절을 있는 대로 하더니 300달러만 받겠다고 했다. 필자는 조금은 못마땅했지만 참아야 했다. 남편은 신이 난 듯 가게를 돌아나가는 할머니 손님을 차에까지 부축하며 정중하게 모셨다. 필자도 그때는 함께 인사를 했고, 할머니는 고맙다며 몇 번이나 두 손을 잡아주었다.
일주일 후, 백인 할머니는 친구 두 명을 데리고 다시 왔다. 필자 부부가 너무 친절하고 상냥해서 모셔왔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소개를 해주겠다며 주름진 환한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그 후로는 무슨 때마다 초콜릿과 손수 구운 비스킷뿐만 아니라 각종의 선물도 있는 대로 가져다주었다. 그 이후로도 5년 정도 단골이 되어 꾸준한 왕래를 했고 주위의 사람들로 매상은 늘어갔다.
어느 날부터 그 할머니가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모습이 뚝 끊겨 필자 부부는 무슨 일인가 걱정을 했다. 얼마 후 보스턴에 사는 아들이 할머니 사망 소식을 전해왔다. 아들은 할머니에게 들었다며 그동안 친절에 대한 감사 인사와 함께 할머니 옷에 대한 거금을 지불하며 모두 찾아갔다. 갑작스러운 비보에 그날은 필자 부부도 행복했던 마음에 그림자가 드리우며 몹시 슬픈 날이었다.
일주일쯤 지났을까, 건장하게 생긴 백인 할아버지가 세탁물 한 보따리를 품에 안고 들어왔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소개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치매 끼가 있는지 한쪽 손을 심하게 덜덜 떨었다. 남편은 반갑다며 여윈 두 손을 덥석 잡고 친절하게 인사를 했고, 할아버지는 사우스 코리안이냐고 몇 번을 물었다. 할아버지는 6.25한국 전쟁 참전 용사였다며 필자 부부 만난 것을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자세히 들어보니 할아버지는 파킨슨병으로 혼자 노인 아파트에 사셨고 아들딸은 타 주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미국 노인들은 거의가 자식들과 멀리 떨어져 혼자 살고 있어 안타까웠다.
남편은 한국에 아버지 생각이 난다며 몇 배로 친절을 베풀었다. 어느 때는 직접 집에까지 배달을 했다. 할아버지는 올 때마다 고맙다며 고액의 팁을 용돈처럼 건네주었고 매주 월요일 첫 손님으로 기분 좋은 매상도 채워주었다. 와이셔츠 5장과 바지 2벌로 매주 똑같은 옷과 속옷 몇 벌이 전부였지만 금액은 만만치가 않았다. 반복되는 세탁으로 옷들은 너덜너덜해갔지만 할아버지는 편하고 좋아하는 옷이라며 변함이 없었다. 필자에게 할아버지 옷은 곧 익숙해졌고 그 할아버지 냄새가 배어있어 금방 알 수가 있었다. 미국인들은 자기가 맘에 드는 것이면 똑같은 옷이 몇 벌씩이나 되었다. 어쩌면 그들은 사치가 아닌 굉장히 검소하며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골 노인 손님들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나는 것 같았다. 노인들은 추수감사절 및 크리스마스뿐만 아니라 누구보다 가장 먼저 각종의 선물을 가져왔다. 시시때때로 이것저것을 가져다주면서 마음의 정을 나누었다. 정이 그립고 외로운 이민자에게는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토박이인 그들도 외로움은 가득했지만 정이 넘치고 마음이 따뜻했다. 그들은 부가 넘치는 나라에 살았지만 고독을 몸에 품고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자식들은 있어도 성인이 되면 부모를 떠나야 했고 부모는 나이가 들면 외로움 친구도 품어야 하는것이 그들 전통적 문화의 일부였다.
미국에 노인들은 거의가 자식들과 멀리 떨어져 살고 있다가 어느 날 병원으로 실려가 조용히 혼자 죽어간다. 땅덩어리가 크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것으로 혼자 또는 부부만이 사는 것에도 자연스레 익숙해져 갔다. 노인들은 정부에서 제공해 주는 아주 저렴한 노인 아파트에서 지내며 정부 보조금인 웰 페어(기본보장 연금)나 쇼셜 연금(사회보장 연금)으로 살고 있다. 메디칼(병원)은 물론이고 후드(음식) 스탬프까지 어쩌면 부자로 생활할 수가 있다. 어떤 이는 차곡차곡 저축도 하면서 살고 있다. 그러나 외로움의 단어는 인간이 풀지 못하는 커다란 공통과제로 남아있는 것 같았다.
필자 부부가 조금 친절과 애정을 베푸니 대가는 그 열 배는 돌아왔다. 물론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다. 그들은 대단히 합리적으로 냉정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결코, 차고 이기적인 사람들과는 거리가 멀었고, 기본적인 질서의 바탕 위에 인간적인 따뜻한 사랑이 마음속 깊이 흐르고 있었다. 사람의 정서는 누구나 비슷했고 겉의 생김새와는 또 다른 것이었다. 진실로 대하니 진실로 통하는 것이었다. 미국에서의 육체적 고생은 참된 삶의 의미를 느끼게 하는 참으로 진솔한 생활이었다.
필자 이민생활 초기에 선배 지인이 말했다. ‘미국은 살수록 매력이 있는 곳’이라고. 물론 전혀 다른 문화가 받아들이기 힘든 것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살면서 새로운 것에 적응한다는 것은 창조의 세계와도 같았고, 황무지의 낯선 땅에서 매력이라는 단어는 생소할 뿐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남의 나라 미국도 사람 냄새 풀풀 나는 따뜻한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지금도 생각나는 아름다운 백인 노인들, 부디 건강하고 활기차게 오래오래 살아 주기만을 바라고 싶다.
김 현 (전 KBS 연구실장, 여행연출가)
김현·조동현 부부의 '특별한 부부여행 코스' 다섯 번째 -「캐나다 중부 그레이하운드 여행」
캐나다 하면 뭐니 뭐니 해도 나이아가라 폭포는 꼭 가봐야 한다. 에어 캐나다 편으로 나이아가라 폭포가 있는 토론토로 날아가, 나이아가라와 그 주변을 둘러보고 캐나다 중부 일주를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 부부는 교통수단으로 주로 그레이하운드를 이용했지만, 나이아가라 폭포만큼은 하루 차를 렌트해 둘러봤다. 워낙 넓은 데다가 관광버스가 따로 운행되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 제일의 장관으로 불리는 나이아가라 폭포는 토론토에서 온타리호를 끼고 한 시간 반가량 달리면 나온다. 지중해성 기후로 삼각주로 되어 있는 곳인데, 나이아가라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은 웅장한 소리와 바람이다. 소나기가 내리는 것처럼 폭포가 뿜어내는 물줄기 때문에 카메라의 방수 준비는 필수. 또한 캐나다에는 여러 군데의 와이너리가 있는데 그중 나이아가라 폭포 근처에 있는 와이너리가 굉장히 유명하다. 특히 아이스 와인으로 명성이 자자한데, 기존 와인들과는 달리 포도를 1월까지 그대로 두었다가 얼렸다 녹였다 하는 과정을 반복해서 만들기 때문에 훨씬 당도가 높아 달콤하고 깔끔한 맛을 지닌다.
이후부터는 본격적인 중부 일주를 시작하게 된다. 최초의 캐나다 수도였던 킹스턴을 필두로, 현재의 수도 오타와, 몬트리올, 퀘백 등을 돌아보는 것이다. 캐나다의 서부보다는 중부와 중동부 쪽으로 가야 토론토에서 그레이하운드를 이용해 그곳 일대를 전부 돌아볼 수 있다.
기차여행도 그렇지만 렌트를 하거나 그레이하운드를 이용할 때도 미리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어야 한다. 아는 만큼 더 많이 볼 수 있고 더 많이 느낄 수 있는 법이다. 그래야 덤으로 남들이 가보지 못한 보석 같은 마을을 만나는 행운도 얻을 수 있다. 우리 부부가 만났던 ‘Niagara on the Lake’라는 마을이 바로 그 방증이다. 온타리오 호숫가에 있는 조그마한 마을인데 민속춤도 추고 겨울에는 연극, 여름에는 연주를 하는 참 아름다운 곳이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우전드 아일랜드도 빼놓을 수 없다. 온타리오호와 세인트로렌스강이 만나는 지점에서 약 80km에 걸쳐 퍼져 있으며 대략 1500개의 이상의 조그만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북미의 파리로 불리는 몬트리올은 굉장히 추운 도시인데, 이 역시 세인트로렌스강에 떠 있는 섬이기 때문이다. 몬트리올이란 프랑스말로 ‘몽 루아얄’이라 하여 ‘위대한 산’이라는 의미이다. 미리 여행지에 대해 조사하고 공부한 뒤 가게 되면, 똑같은 경관을 봐도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감회를 느끼게 될 것이다.
몬트리올이나 퀘백은 예전에 프랑스 점령지였기 때문에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은 관계로 불어를 쓰고 있다. 이 지역들은 스코틀랜드가 영국에서 독립하려고 하는 것처럼 캐나다에 속해 있으면서도 독립성을 유지하기 애쓰는데, 자기네 문자와 언어를 가지고 있는 민족은 한결같이 독립을 위해 노력한 역사를 갖고 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게서 독립할 수 있었던 것도 우리 문자인 한글을 갖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여행을 여러 번 하다 보면 ‘아, 그렇구나!’ 하는 삶의 지혜까지 자연스럽게 얻을 수 있다.
김 현 (전 KBS 연구실장, 여행연출가)
김현·조동현 부부의 '특별한 부부여행 코스' 네 번째 -「미국 서부 LA~샌프란시스코」
미국은 땅이 넓기 때문에 기차보다는 차를 렌트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특히 미국 서부는 경치가 기가 막히게 좋아 조금 수고스럽더라도 차를 직접 운전해 찬찬히 둘러볼 것을 추천한다. 우리 부부는 LA부터 시작하여 시애틀까지 올라갔다 내려왔지만, LA에서부터 샌프란시스코까지만 가는 것으로도 볼거리가 충분하다. 미국 서부를 돌기 위해서는 1번 도로와 101번 도로를 이용해야 하는데, 1번 도로는 순전히 해안을 끼고 도는 해안 도로이고, 101번 도로는 말 그대로 Freeway다.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려면 당연히 1번 도로를 이용해야겠지만, 좀 피곤할 수도 있으므로 101번 도로와 번갈아 이용하는 것이 좋다.
천사의 도시 로스앤젤레스를 출발하여 샌타바버라, 솔뱅, 롬폭, 샌루이오비스포, 몬트레이, 패블비치 그리고 마지막으로 존 스타인벡의 도서관이 있고 영화 과 의 배경이 된 샐리너스를 거쳐 태평양 연안 제2의 도시인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는 것이 미국 서부 여행의 루트이다.
금문교와 케이블카로 유명한 샌프란시스코는 미국인들에게 일생 중 가장 가고 싶은 도시로 뽑힐 만큼 인기 있는 도시다. 샌프란시스코에도 잊지 못할 추억이 있다. 유니온 스퀘어에 있는 ‘골드 더스트’가 그곳이다. 이곳은 과거 골드러시 시절 금광을 찾으러 온 사람들의 술집에서부터 시작됐는데, 100년 역사를 간직한 고풍스런 술집이다. 그곳에서 아내와 함께 ‘싱가폴슬링’을 한잔했는데, 그 맛도 맛이지만 바텐더의 친절함에 반했던 기억이 난다. 갑자기 우리 테이블로 종이비행기 하나가 날아왔는데, 알고 보니 바텐더가 계산서를 종이비행기로 만들어 손님들에게 날린 것이다. 그 기발함과 센스라니. 이렇듯 여행이란 소중한 추억을 하나씩 하나씩 쌓아가는 일이리라.
또 미국 서부에 가면 반드시 봐야 하는 대표적 관광지 둘이 있다. 요세미티 국립공원과 레이크 타호.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요세미티 국립공원 안에는 빙하기 동안 빙하에 깎여 평평하게 된 암벽과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하는 하프돔(Half Dome)이 있다. 하프돔은 말 그대로 돔이 반이 잘려나간 화강암 돔이다. 레이크 타호는 캘리포니아와 네바다의 주 국경선에 걸쳐 있는 호수인데, 이 또한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얼마나 큰가 하면 비행기를 타고 샌프란시스코에 다다를 즈음 기장이 날개를 오른쪽, 왼쪽으로 움직여 가면서 “여기가 레이크 타호입니다”라고 안내멘트를 해주는데,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데도 육안으로 확인 가능할 정도이다. 이색적인 건 미국은 비행사들도 승객들에게 관광을 시켜준다는 것이다. 그만큼 세계적 명소에 대한 자부심이 크다는 의미일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