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6시 40분 부산행 무궁화호 열차에 몸을 실었다. 덜컹덜컹 몸이 흔들린다. 바깥 풍경은 오랜만에 선명히 잘도 보인다. 세련되지 않지만 뭔가 여유롭고 따뜻한 느낌이랄까? 한국 예술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부산포 주모(酒母) 이행자(李幸子·71)씨를 만나러 가는 길. 옛 추억으로 젖어들기에 앞서 느릿느릿 기차 여행이 새삼 낭만적이다. 한껏 기대에 부풀어 들어간 부산포. 작은 낙서, 그림 하나, 스치는 공기까지 어느 것 하나 특별하지 않은 것이 없다.
부산의 마지막 주모를 만나다
부산 지하철 1호선 중앙역에서 용두산 공원 방향으로 걸어가는 길은 깨끗하고 단정하다. 신식으로 잘 닦인 거리. 오래된 주점을 찾아 두리번거리다 오른쪽으로 난 작은 골목에 釜山浦(부산포)라고 쓰인 간판이 보인다. 이곳에 우리나라 예술인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온 주모 이행자씨가 있다. 깡마른 체구에 걸걸한 목소리가 매력적인 이행자씨는 중앙동 바로 옆 동광동에서만 42년째 주모로 살고 있다. 혹자는 이행자씨를 부산의 마지막 주모라고 말한다. 남들 다 떠나갈 때 그 자리를 지키고 앉아 옛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주막은 현재 부산포 하나다. 의미를 모르면 동네 흔하디흔한 주막, 조금만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이면 세상 그 어느 것보다 값진 역사와 예술가의 정이 흐르는 곳, 부산포다.
주막의 분위기는 주모가 잡는다
부산의 중앙동과 남포동 일대는 10여 년 전만 해도 부산의 굵직한 화랑들과 함께 인쇄 골목이 형성돼 있어 문인과 화가들이 넘쳐나는 이른바 예술의 거리였다. 지금은 해운대 일대로 예술 관련 사업이 옮겨가 작가들의 발길이 뜸해진 지 오래다. 외딴섬처럼 덩그러니 남겨진 부산포지만 그 안에는 옛 예술가들의 체취와 발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낙서 하나하나, 벽에 펜으로 휘갈긴 듯 그린 그림 속 인물은 한국 문단과 화단을 주름잡던 일류 작가군단이다. 매일 문지방이 닳도록 부산포를 오간 문화 예술인만 수백은 될 것 같다. 부산포 주모 이행자씨가 이토록 작가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
“내 고집대로 한 거지 뭐. (화장) 진하게 하고 나와서 하하 호호 하는 꼴을 내가 못 봐. 그러니까 손님은 없어. 옛날이야 줄 섰지만. 내 성질이 개떡 같아. 손님들도 내쫓아요. 욕하는 사람, 슬리퍼 신고 오는 사람 다 쫓아내. 슬리퍼는 점심에 밥 먹을 때는 괜찮은데 저녁엔 옛날 어르신들 계시고 이라니까. 분위기도 내가 만들어주는 거지. 그냥 손님들이 만드는 게 아니야. 그래서 뺨때기도 때리고 젊을 때는 말 못해. 마대자루 들고 패지, 물바가지로 퍼붓지. 소문이 났어. 좋게 날 리가 없지.”
베테랑 주모의 애틋한 고객 관리(?)는 바로 어르신들을 제대로 알아보고 보살피는 게 전부였다. 이행자씨가 말하는 그 어르신들이란 1900~1920년생 한국 예술계 전설적 인물이 줄을 잇는다. 독립운동가이자 예술인 먼구름 한형석을 비롯해 오제봉, 김정한, 김종식, 오영재, 천재동, 공초 오상순, 하인두, 시인 구상까지 평생을 살아도 만나 뵙지 못할 귀한 인물들을 주모로서 극진히 맞이했고 술동무로 가시는 날까지 정성을 다해 모셨다. 손님을 가려서 받게 된 것도 문화계 원로 선생님을 모시는 일종의 방법이었다.
“손님들이 이상한 행동 하는 꼴을 내가 못 봐. 들어왔는데 뭔가 느낌 이상한 사람이 들어오면 장사 안 한다고 하고, 소주 보여도 소주 없다고 하고. 보면 알지. 매너가 엉망인 사람이 보인다고. 술 먹고 변할 사람들도 보이고.”
그런데 이행자씨에게는 철칙 하나가 있다. 절대 욕은 안 한다.
“내는 고함은 지르는데 욕은 하지 않아. 근데 누가 나더러 욕쟁이 할머니래. 와? 내가 욕하는 거 봤나. 내가 욕하면 쫓아내는데. 욕하는 사람이 나는 제일로 혐오스럽다. 나도 욕할 줄 알거든. 그런데 안 할 뿐이야.”
누부야 누부야 그냥 갈 수 없잖아展
이행자씨는 서른 초반이던 1970년대 말 ‘대구집’으로 문을 열었다. ‘골목집’이란 이름을 지나 1994년 지금의 부산포로 주막 간판을 바꿨지만 주모도 그대로 추억도 그대로다. 그렇다고 마냥 행복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2003년에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몸에 이상신호가 왔다. 일생일대의 위기였다.
“믿고 지냈던 사람에게 보증을 서줬다가 건물이고 가게고 순식간에… 30여 년 동안 차곡차곡 쌓아온 것을 한 번에 다 날렸으니 난 어땠겠어.”
며칠씩 잠도 안 자고 하루 종일 담배만 3갑씩 피웠다.
“1세대 선생님들은 동동주하고 맥주하고 타서 ‘동맥’이라고 하시면서 섞어 드셨다 아이가. 그게 맛이 괜찮아. 30~40대부터 그렇게 술을 먹었는데 일 터지고 한 달 내내 그렇게 마셨어. 돈이고 뭐고 다 귀찮고. 술도 안 받는데 계속 그렇게 먹었어. 결국 몸이 고장 난 기지.”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한 달도 안 돼 치아가 빠지기 시작했다. 위암 초기였다. 그때 이후로 술은 끊었지만 담배는 손에서 떼지 못했다. 그렇게 쓰러진 주모 이행자를 위해 부산 예술인들을 주축으로 대단한 일이 벌어졌다. 판화가 주정이가 주축이 돼 주모 이행자씨를 돕는 특별전을 펼친 것. 그게 바로 ‘누부야 누부야 그냥 갈 수 없잖아展’(2009. 7. 14~8. 31)이었다.
“옛날 1세대 어른들을 내가 잘 모셨어. 부산포를 살려야 한다 그라셔서 살려주신 거지. 대학에 있는 분들도 있지만 대부분 전업 작가들이시고. 정말 십시일반 해서 도와주셨어. 부산비엔날레 운영위원장 하시던 이두식 선생님도 돌아가시기 전에 작품을 내주셨고.”
이 전시회를 통해서 3000만원이 훨씬 넘는 자금이 모였다. 그래서 현재의 부산포 자리로 옮겨 명맥을 다시 이어갈 수 있었다. 새로운 곳으로 이전해 다시 활기차게 생활을 하지만 몸은 성한 곳이 없다. 예전에는 일하는 사람을 뒀지만 지금은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다 주모 이행자씨의 손을 거친다. 이렇게 한 것이 6년째. 손가락에는 류마티스가 왔고 복숭아뼈 양쪽에 물이 차 추석쯤 병원에 가 치료를 받을 생각이다. 위암 정기검진을 받아야 할 시기가 지났는데도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나는 지금 병원에 가면 눕혀서 못 나와. 병원 가면 문 닫아야 해. 그래서 안 간다 아이가. 한 1년 넘었어. 병원에서 전화 오면 ‘괜찮소. 나 아직 빨딱거리고 잘 돌아다니거든’ 이런다(웃음)! 약만 먹고 안 간다.”
젊었을 때부터 그렇게 좋아하던 산도 다리가 좋지 않아 갈 수 없다. 지리산이고 설악산이고 선생님들과 많이 오르고 종주도 했다.
“그 대신에 용두산 공원은 좀 걸어. 시간 있으면 올라가. 이제 아픈 것도 모르겠어. 이러다 병도 친구 삼아서 함께 같이 있다가 같이 죽자 한다(웃음).”
부산포 주모, 문화계 원로와 어깨를 나란히
“그림 작품 같은 거 잘 보시겠어요?”
이 질문에 피식 웃으면서 짧게 대답한다.
“살다 보면 눈에 보이지 뭐. 세월이 40년인데 좀 안 보이겠어?”
문화계 원로에 대한 얘기를 듣다 보니 주막 주모가 아니라 화랑 관장님과의 대화라 해도 믿을 것 같다. 이행자씨도 그런 얘기를 여러 사람에게 들었다. 주모가 아니라고.
“많이 배우지. 좋은 얘기를 많이 듣고 해서 가끔 보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입으로만 떠드는 사람들도 보여. 자기 스스로 공부한 것이 아니라… 시인들한테도 이게 시냐? 편지 썼냐? 그런다(웃음).”
문화계 인사는 물론 방송국, 신문사 등 언론인, 대학 총장, 의사 등등이 주모 이행자씨의 고객이자 친구, 모시는 선생님들이었다.
“여행도 그런 분들이랑 많이 다녔어. 1993년도에 러시아에 갔었는데 그때만 해도 러시아 가는 게 쉽지 않을 때잖아. 근데도 갔었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레 을 봤는데 정말 너무 잘 봤어. 진짜 값진 인생 살았다. 돈 주고도 못 사는 삶을 살았어. 결혼? 안 해도 돼. 외로워? 뭣 때문에 외롭노?”
결국 이 특별한 주모는 선생님들의 사랑에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고 일평생 결혼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는 안 갔어. 그때 당시만 해도 희귀동물 같은 사람이었어. 드레스를 입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 해본 적이 없어.”
행여나 프러포즈를 해오고 연애하자는 자가 있으면 이행자씨한테 걷어차이기 일쑤였다.
“내가 깡패가 됐잖아. 우리 집에 옛날에 왔던 손님들, 어르신들 빼고 내 발로 팔꿈치로 안 차여본 사람이 없다. 어른들 말고는 다 맞았을 거다. 하도 집적거리니까.”
이행자씨는 어떤 누구를 만나는 것보다 매일 찾아오는 어르신과 대화하고 이야기 듣는 그 시간을 기다리고 사랑했다.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대가라는 사람들이랑 대화라도 하려면 내가 얼마나 노력하고 신경 써야겠어. 아닌데도 맞다고 해줘야 하고 달래줘야지. 문인들이 아주 잘 삐진다. 붙어 싸우다 술 먹으면 또 화해하고 그랬다.”
당시에는 거의 가족이었다. 옛날 1세대 어르신들이 한창 부산포에 드나들 때는 젊은 사람들은 들어와 앉을 자리도 없었다.
“그 시절에는 흥이 나서 놀다 누군가 지명하면 무조건 노래를 불러야 했어. 근데 절대로 젓가락 숟가락 못 두드리게 했다. 여기는 그냥 막걸리집 아니라고 절대 못하게 했다. 끝나면 박수치고 흥 나면 소리 안 나게 박수쳤지.”
이렇게 부산포 안을 가득 채우는 작가들이 많았지만 지금처럼 정확하게 돈을 받을 수 없을 때였다. 가난한 시절 라면값도 없던 분들이 많았다.
“대학교수도 있었지만 작품 활동만 하는 사람들도 있잖아. 그래서 그때부터 감자 주고 우거지 주고 그럼 술 마시고 잡숫고 그냥 가셨다. 어른들이라 외상값 장부도 없었다.”
그냥 술만 팔면 될 텐데 스스로 예술가의 가치를 흠뻑 느꼈기에 정성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다르다고 했잖아. 요즘은 택도 없다(웃음). 주는 만큼 받아야지.”
주막이니까 주모로 불러야지
지금도 주모로 부르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이모로 불리는 건 싫다. 누군가 무심코 그렇게 부르면 “내가 느그 이모도 아닌데 왜 그리 부르노!” 하며 부산 사투리가 강하게 터져 나온다.
주모라고 불리는 게 그럼 왜 좋을까?
“옛날에 동동주 팔고 그러던 곳을 주막이라고 했잖아? 어르신들이 있었던 곳. 그러니까 주모지. 원래 여기 세 집이 있었는데 지금은 이거 하나 남았어. 강나루는 시인 마누라가 하는 곳이었는데 거기도 어려울 때 시인들이 시화전도 열어주고 했던 곳이야.”
그렇다고 모두가 주모라고 부를 수 있는 게 아니다. 적어도 부산 사진의 역사라고 불리는 김탁돈(동아대 전 신문방송학과 교수) 정도는 돼야 부를 수 있단다.
“내가 올해 일흔두 살이니까 한 10년 더 살면 될까?”
갑작스러웠다. 아직도 젊고 생생한 주모의 입에서 그리움이 느껴졌다.
“어른들 참 많이 모셨지. 부산 세관장, TBC 사장, 대학 총장, 회장. 안 온 사람이 없어. 근데 이제 다 돌아가셨다. 나도 선생님들 따라갈 때가 얼마 남지 않았네. 지금도 선생님들 모여서 동맥 한잔씩들 하시겠지?”
부산포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에게 물려주고 싶은데 아직 물색 중이라고 했다. 술 팔고 밥 팔면서 예술을 하는 사람이 이 자리를 지켰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정말 부산포를 다 접고 나면 뭘 하고 싶은지 물었다.
“옛날에 건물 있을 때는 시골 들어가 살려고 했는데 그건 안 되겠고. 슬슬 산책하고 살 수 있을까 몰라. 성질이 급해서 뭘 할는지. 뭐 일하면서 살겠지.”
“거기 선배님들, 저 배고픈데 밥 좀 사주세요!”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64학번 구대열과 이인재가 뒤를 돌아봤다. 두 사람은 학교 정문을 나와 미라보다리를 막 벗어나려던 차였다. “늦게 일어났는데 하숙집 아줌마가 반찬이고 뭐고 치워버려서 밥도 못 먹고 나왔어요. 네?” 처음 만난 여자가 후배 행세를 한다. 난감한 두 남자. 그런데 대답을 듣기도 전에 행동에 들어가는 여자.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팔짱을 꽉 끼고는 목적 달성(?)을 위해 앞으로 전진한다. 이래도 되는 걸까? 에라 모르겠다. 가자, 진아춘(進雅春)으로!
학림에서 만나자더니 진아춘으로 직행하다
혜화동(서울시 종로구)에서 낭만여행을 해보기로 했다.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64학번 동기인 구대열 이화여대 명예교수와 이인재 동보항공 회장과 함께 길을 나섰다. 혜화동 일대는 1946년부터 1975년까지 마로니에공원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의 본관과 문리대, 법대 등이 있었던 대학 캠퍼스였다. 이후 서울대학교가 관악 캠퍼스로 옮겨가면서 서울대 혜화동 캠퍼스 시대는 막을 내렸다. 사라진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문리대학이다. 우리 시대에는 찾아볼 수 없는 전설 속의 서울대학교 문리대 출신들과의 데이트라서 그런가? 예사롭지가 않았다. 첫 번째 만남 장소였던 학림다방 의자에 엉덩이가 닿기도 전에 “옛날 우리 식대로 하자”며 중화요리집인 진아춘으로 향한다. 진아춘에 들어서 앉자마자 시키는 것은 군만두와 배갈. 추억의 음식이라며 그때 느낌을 재연하는 것이란다.
구대열 옛날에 학생이 중국집에 들어온다는 것은 좀 과한 거였어. 겨울에 차가운 도시락 들고 진아춘에 가서 100원인가 주면 뜨끈한 국물을 줬잖아. 거기에 밥 말아 먹고 했지.
성북동 근처에서 하숙을 했던 이인재 회장은 도시락을 가지고 다녔던 구 교수는 그나마 형편이 나은 학생이었다고 입을 열었다.
이인재 그때 1인당 GDP가 100달러 안팎이었거든. 도시락 가지고 와서 데워 먹은 사람은 형편이 나은 사람이었어요. 나는 하숙집으로 밥 먹으러 다녔다고. 주문을 하면 딱 배갈이랑 군만두였지.
옛 진아춘은 지금보다 많이 작았다. 방과 방 사이에 작은 구멍을 만들어놓고 하나의 전구로 빛을 나눠 쓰며 전기를 아끼던 시절이었다. 개구진 친구 한 녀석은 남자와 여자가 한 방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 구경을 해보겠다며 틈 사이로 고개를 들어올리기도 했다. 메뉴판도 예전과는 많이 다르다. 오로지 군만두 아니면 자장면을 시켜 먹던 시절 메뉴판에서 그나마 특별한 요리는 탕수육이었다.
이인재 우리 마누라하고 연애할 때 어쩌다 와서 하나 시키는 게 탕수육이었어요. 술은 한 10병은 더 마실 수 있었지만 주머니 사정이 어려워서 그러지 못했습니다.
진아춘은 당시 서울대생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중식당이다. 송형국 사장은 춥고 배고픈 학생들에게 매번 아량을 베푸는 것이 일이었다. 외상도 많았다. 돈 없는 학생들이 뭘 좀 먹겠다며 신분증이며 시계며 열심히 맡겼다. 1996년, 결국 주인을 찾지 못한 시계를 모아 서울대학교 기록관에 기증했다. 지금까지 서울대와의 인연 때문일까. 군만두를 먹고 지불한 돈은 서울대학병원 암센터로 기부된다.
그 시절 시위는 학점 없는 교양과목
당시 서울대학 문리대는 거의 모든 시위의 발원지였다. 64학번과 뗄 수 없는 역사적 사건은 바로 한일협정 반대 시위였다.
구대열 우리가 입학하고 얼마 안 됐을 때였어요. 초년병에다가 시골에서 올라왔기 때문에 서울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잘 몰랐어요.
이인재 그 당시의 ‘시위’는 교양과목 같은 것이었어요. 서울대나 고려대, 연세대도 마찬가지고. 다들 거리로 나갔어요. 근데 학점은 없었죠. 출발할 때는 3, 4학년들이 맨 앞에 서서 갔는데 어쩌다 보니 내가 제일 앞장서서 걷더라고요. 다들 어디 가고 없었어요(웃음). 경찰서로 끌려가 곤봉으로 얻어맞기도 했어요. 척추가 원래부터 안 좋았는데 그 후 시위를 위해 길거리 나가는 것을 자제했습니다.
서울법대 학장 출신이던 유기천 총장 퇴진운동도 문리대학에서 크게 있었다.
구대열 그때는 정치 문제로 시위를 한 게 아니고 그 ‘쌍권총 총장’이라고 유기천 총장 있잖아. 군 정부에서 올려놓은 사람 물러나라고 그땐 그랬지. 1, 2학년 때는 한일협정 반대했고 그다음엔 총장….
자유와 낭만의 이름으로 남다
사라진 지 꽤 오래된 그 이름,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세상 많은 학교의 학부와 학과가 생겨나고 사라졌지만 서울대학교의 문리대학만큼만은 아련한 향수 속에 회자된다. 이유는 무엇일까?
구대열 문리대학에는 각 과마다 학생이 10명에서 20명이었어요. 이곳이 좋았던 게 학과 개념이 거의 없었어요. 듣고 싶은 과목은 다 들었어요. 내가 2학년인데 4학년 강의를 들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고 다른 과 수업도 마찬가지였고 문리대학 자체가 전인교육장이었던 거죠. 인격체를 만드는 것이란 자부심이 강했어요. 대신 학점이 형편없었어(웃음).
이인재 머리는 좋은데 가난한 학생들이 모인 곳이 문리대였어요. 먼 길을 돌아서 우리처럼 부산에서 광주에서 많이들 몰려들어 왔어요. 전국에서 별놈들이 다 왔는데 이과와 문과가 갈리지 않아서 그런지 문리대 학생들이 특별한 면이 있었어요.
구대열 학교 정문 미라보다리 앞에서 들어오는 친구들한테 100원만 달라고 해서 300원, 400원 모이면 밥 먹으러 가는 친구도 있었다니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돼서 마음만 동동 구르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의 문을 두드려주셔요. 이번 호에는 대학 시절, 문학의 길로 이끌어주신 은사님을 그리워하며 민병삼 소설가께서 편지를 보내주셨습니다.
그해 5월의 교정은 참 따뜻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청옥색 무명을 펼쳐놓은 것 같은 청명한 하늘에서 따사로운 햇살이 꽃가루처럼 쏟아져 눈이 부셨습니다. 그 5월 어느 날이 저한테는 벅차고 두려운 하루였습니다. 숙명에 묶이는 순간이었고요. 선생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제가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해에 강의실에서 선생님을 처음 뵈었습니다. 그때가 1965년 가을학기였지요. 과묵하신 선생님은 좀처럼 웃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셨을 만큼 범접할 수 없는 분이셨습니다.
이듬해에 마침 학교신문 에서 문학상 공모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 문학에 뜻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고등학교 교지에 고작 콩트나 발표했던 게 전부였을 만큼 일천해서 감히 문학을 입에 담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단편소설을 덜컥 내고 말았습니다. 아마 치기였던 것 같습니다. 제 작품이 선정될 것으로는 기대하지 않았는데도 그게 입선작이 됐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선생님이 저를 부르시더니 느닷없이 “민 군, 소설을 써보게” 하고 슬쩍 떠보는 듯한 어조를 흘리셨지요. 저는 그저 선생님을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그러자 “소설을 써보라고!” 하고는 더 보태는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갑자기 소설을 쓰라니… 저는 선생님의 제안을 환청으로 받아들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벅찼습니다. 그리고 두려웠지요. 그건 제가 과연 소설을 쓸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었습니다. 선생님이 습작을 권하셨다는 건 언감생심 낭중지추까지는 아니라도, 저한테서 어떤 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지요. 그건 감격을 넘어서 미래의 길을 밝혀주는 등불이었습니다. 그때가 바로 선생님과의 인연이 시작되는 날이었고, 숙명으로 묶이는 순간이었습니다.
저희 세대가 1960년대를 질곡에 비유했지만 저한테는 그게 억압된 자유와 희망 없는 민주주의에 묶인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그것이었지요. 민주투사들은 저 같은 부류를 여물이나 처먹는 돼지로 생각했을 겁니다. 그래도 할 수 없었습니다. 빨리 졸업하고 취직하는 게 우선이었으니까요.
비로소 고백하지만 그때 습작을 하면서도 ‘소설’을 몰랐습니다. 어떻게 써야 소설다운지를 깨닫지 못하고 대구 쓰기만 했지요. 그러다 보면 소설이 될 것으로 믿었고요.
시간은 냇물처럼 흘렀습니다. 졸업을 앞둔 시점에서 ‘소설’은 잠시 접어야 했습니다. 기약 없는 유예였지요. 문학? 소설? 그건 구름이었습니다. 취직이 먼저였으니까요. 선생님은 제자들의 취업을 위해서 동분서주하셨지요. 그저 추천장이나 써주고 그치는 게 아니었습니다. 제자를 데리고 직접 회사나 학교로 찾아가는 게 예삿일이 돼버렸습니다.
이때 선생님이 저를 부르셨어요. 마침 경남 거제도에 있는 한 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를 구한다며, 제 동기 중에서 희망자를 찾아보라고 하시더군요. 그 순간이 제 운명을 또 한 번 바꿔놓았습니다. 그 학교에 제가 갈 것을 자청했습니다. 선생님이 놀라시며 갑자기 마음이 바뀐 이유를 물으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소설을 쓰기로 마음을 굳혔고, 농어촌에서 색다른 경험을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지요. 선생님은 고개를 갸웃하시면서도 입가에 웃음이 엷게 번졌습니다. 제가 작심하고 소설에 전념할 것 같아 기특하다는 표정이었지요.
그때가 1967년 2월 하순이었고, 신학기를 불과 며칠 앞둔 시점이었습니다. 부임할 곳이 도서지방이라, 부산에서 배를 타고 두어 시간을 가야 했습니다.
서울역에 졸업 동기들과 함께 선생님이 배웅을 나오셨어요. 뜻밖이었습니다. 선생님까지 나오실 것으로는 상상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거제도에 가서 딱 1년만 있으라고 하시면서 담배 한 보루를 손에 쥐어주셨어요. 자식 같은 나이의 제자한테 담배라니… 민망해서 몸 둘 바를 몰라 쩔쩔맸습니다.
사실 저는 기약 없이 떠났습니다. 그렇게 한 학기가 지나가면서 비로소 정신이 들었습니다. 서울역에서 저를 배웅하시던 선생님 얼굴이 어른거려 곧 채찍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습작을 시작했습니다. 한 달에 단편 한 편씩을 선생님한테 우송하기로 스스로 다짐했지요. 그 약속은 거의 지켜졌습니다. 문제는 원고의 질에 있었습니다. 제가 읽어봐도 조금도 나아진 게 없었습니다. 플롯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해 오로지 이야기 만드는 일에만 몰두한 탓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반성할 줄을 몰랐습니다. 반성하는 방법을 몰랐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습니다.
그 당시에는 문학지를 통해 등단하려면 2회 추천을 받아야 했지요. 그때 선생님이 월간의 소설 추천위원이셨습니다. 추천위원으로 선생님을 비롯해 김동리, 황순원, 오영수, 안수길 선생 등이 계셨습니다.
어쨌든 습작에 게을리하지 않아 1968년 8월호에서 선생님한테 초회 추천을 받았습니다. 1차 관문을 통과해 절반의 성공을 한 셈이었지요. 그때가 마침 여름방학이 시작된 시점이었습니다. 어느 날 느닷없이 전보가 날아왔습니다. 선생님이 남해안으로 여행하는 길에 제가 머물러 있는 ‘장승포’에 들르시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선생님이 도착하시는 시간에 맞춰 부두로 나갔지요. 선생님이 배에서 내리시는 모습을 보고 은사이기 전에 아버지와 해후하는 듯한 마음이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습니다.
장승포에서 딱 하룻밤 묵으신 선생님은 이튿날 곧장 남해로 떠나셨습니다. 선생님은 버스에 오르시면서 “계속 써!” 하는 말씀만 남기셨어요. 그 짤막한 두 마디에서 행간을 읽지 못했으면 매우 섭섭했을 뻔했습니다.
저는 그다음 해에 거제도를 떠났지요. 꼭 2년을 있었습니다. 서울에 오기는 했으나 교사 자리가 저를 기다린 건 아니었습니다. 선생님이 또 이 학교 저 학교로 저를 데리고 다니셔서 모 여고에 채용이 됐습니다. 그때가 1969년 2월이었습니다. 저는 추천완료를 받기 위해서 소설 습작에 매진했습니다. 심지어 숙직을 대신하면서까지 썼으니까요.
소설을 쓰는 일이 중노동일 때가 많았습니다. 자기자신과의 싸움에서 지면 못하는 작업이었습니다. 그걸 선생님한테 배웠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1970년 에 추천이 완료됐지요. 선생님한테 사사한 지 햇수로 4년 만이었습니다.
저는 비로소 작가가 됐습니다. 기쁜 마음에 앞서 두려움이 먼저 찾아왔습니다. 작가로서 홀로 서야 한다는 중압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선생님이 작고하신 지 40년이 넘었습니다. 이제 와서 새삼 그리워한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선생님은 저에게 참스승이셨습니다. 중국의 한퇴지(韓退之)는 ‘사설(師說)’에서 ‘옛날의 학자는 반드시 스승이 있었다. 스승이라 함은 도(道)를 전하고, 업(業)을 주고, 의혹을 푸는 소이(所以)다’라고 했습니다.
만우(晩牛) 박영준(朴榮濬) 선생님.
선생님은 품격이 높고 맑은 풍류사종(風流師宗)이셨습니다. 저에게는 진정한 사부님이셨고요. 제가 등단한 지 올해로 47년이 됐습니다. 아직은 뇌와 손가락이 망가지지 않아 계속 쓰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민병삼(閔丙三)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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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충남 대전 출생. 연세대 국문과 졸업. 1970년 월간 으로 등단. 소설집 , 등. 장편소설 , , , , , , 등 다수. 한국소설문학상, 동서문학상, 유주현문학상 수상.
여기에 잘 웃는 부부가 있다. 남편의 인상은 얼핏 과묵해 보이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빙그레 슬며시 웃는 얼굴이다. 아내의 얼굴은 통째로 웃음 그릇이다. 웃음도 보시(布施)라지? 부부가 앉는 자리마다 환하다. 원래 그랬던 건 아니다. 귀농을 통해 얼굴에 정착한 경관이라는 게 아닌가.
엎치락뒤치락, 파란과 요행이 교차하는 게 인생이라는 미스터리 극이다. 조물주는 낮잠을 주무시다 깨어 심심하면 인간을 공깃돌처럼 가지고 논다. 이랬다저랬다, 줬다 뺐었다, 횡포가 심하다. 그러나 인간은 뜻밖에도 견고한 작품이다. 벼락을 일곱 번이나 맞고도 멀쩡한 사람이 있다지 않은가. 지금 내 앞에 미소를 짓고 앉아 있는 곽성진(75)·이옥희(71)씨 부부 역시 일종의 날벼락을 맞은 바 있다. 그러나 끄떡없다. 쌩쌩하다. 도시라는 정글을 벗어나 참신한 시골생활을 누리고 있다. 산봉우리들이 덩실덩실 강강술래를 하는 소백산 자락, 옴팡진 산촌에 산다.
전남 여수에서 태어난 곽씨는 부산에서 대학을 나왔으며, 결혼을 했으며, 사업으로 오랫동안 승승장구했다. 선박부품업체를 경영했었다. 알아주는 눈들이 많은 사장이었다. 그러나 인간사가 흔히 그렇듯, 그가 구가했던 꽃길은 어느 사이 가시밭길로 바뀌었다. 졸지에 파산하면서 벼랑 끝으로 밀려났다. 길바닥에 나앉아야 할 지경이었다지. 곽씨의 얘기를 들어볼까.
“완전한 추락이었어요. 그렇다고 주저앉아 굶을 수는 없는 일이라서 리어카를 장만해 포장마차를 차렸어요. 부끄럽습디다. 아내가 용기를 주더군요. 돈을 벌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라도 기꺼이 해야 한다고…. 아내는 안주를 만들고 저는 손님들 시중을 들었어요. 다행히 장사가 잘됐어요. 잘나가던 시절에 일식집을 수시로 드나들던 가락을 살려 일식집 스타일의 안주와 술을 내놓았는데, 그게 적중했어요. 단기간 내에 소문이 좋게 났죠. 제법 돈을 모을 수 있었어요. 그 자금으로 통닭가게를 인수해 운영했고, 그 역시 매우 번창했어요. 이후 아내는 일식집을 개업했고, 저는 건축업에 나섰어요. 그런데 이 건축업에서 다시 철저하게 무너졌어요. 두 번째 도산을 경험했던 겁니다.”
온탕과 냉탕을 거듭 넘나들었구나. 그 와중에 세월이라는 도적은 곽씨에게서 젊음을 앗아갔다. 쓸쓸하고 스산한 황혼의 동구에서, 그는 황급히 다시 살길을 찾아야만 했다. 초원을 뒤덮은 풀처럼 수북한 걱정과 불안이 주야간에 어깨를 짓눌렀을 것이다. 이때 그의 등을 툭툭 치며, 임이시여, 걱정 마소서, 까짓것 다시 시작하면 그만 아니겠소, 라는 투로 당차게 재기를 독려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아내 이옥희씨였다. 시골로 가자고, 농사를 짓자고, 소박한 낙원을 일구자고, 아내는 그리 주동했다. 곽씨는 선선히 응했다. 강인한 기질과 낙천적 근성을 겸비한 아내의 민첩한 상황 판단력을 믿어서였다. 부부는 즉시 귀농을 결행했다. 그게 10여 년 전의 일. 결과는 성공적. 비결은 근면 혹은 부부애. 옛일을 회고하는 곽씨의 언사는 수굿해 온순한 성정이 묻어난다.
군내에서 손꼽히는 강소농(强小農)
“여기 예천군 은풍면 산촌은 원래 아내의 고향입니다. 아내에겐 유난한 향수가 있었어요. 늘그막엔 고향에 돌아가 살자는 얘기를 자주 했어요. 사업 파산이 결국 아내의 숙원을 이루게 한 셈이니 사람의 일이라는 게 참 묘하죠. 물론 부담이 없지는 않았어요. 도시에서만 살아온 내가, 게다가 모든 걸 잃은 빈손으로, 과연 시골 정착이 가능할지 불안했어요. 하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거처를 마련하는 일, 농지를 구하는 일, 뭐 하나 만만한 게 없었겠죠?”
“아내의 친지들에게 도움을 많이 받은 덕분에 자립이 가능했어요. 특히 처남이 집과 배 과수원을 빌려주고 농사를 도와줘 비교적 순탄하게 자리를 잡아나갈 수 있었죠. 농업기술센터에서 농사기술을 부지런히 배우기도 했고. 주 작목은 배였어요. 생과 상태로 출하하기도 했지만, 배즙 가공이 그보다 세 배쯤 소득이 높다는 걸 알고 배즙 생산에 집중했죠. 요즘은 칡즙, 양파즙, 가시오가피즙, 헛개나무즙도 생산합니다.”
“판로 확보는 어떤 방식으로 했죠?”
“미국의 자동차 판매왕 조 지라드의 책에서 힌트를 얻은 게 주효했습니다. 그는 한 개인이 평균 250명 정도와 인맥을 형성한다고 봤습디다. 여기서 그의 성공철학인 1대 250 법칙이 만들어집니다. 한 사람에게 호감을 얻는 것은 그와 연결된 250명에게 호감을 사는 것과 같다는 논리죠. 공감이 됐어요. 그래서 제 주변의 친척, 친지, 친구 등 지인들과의 유대 형성에 공을 들였어요. 그게 판매망이 되었어요. 현재 제 핸드폰엔 2300명쯤의 고객명단이 입력돼 있습니다.”
곽씨는 이른바 6차 농업을 구현하고 있다. 1차 농업은 생산을, 2차는 가공을, 3차는 체험이나 관광 농업을 말한다. 이 셋을 통합한 게 6차 농업이다. 그의 농장 ‘소백산 웰빙농원’은 예천 군내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소농이다. 두말하면 잔소리이지만, 이는 거저 얻어진 성취가 아니다. 지진을 겪은 사람은 지진이 얼마나 무서운지 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삶의 지진이 우리의 발밑을 서성거리는 걸 안다. 심혈을 기울이고서야 재앙을 면제받을 수 있다는 걸 안다. 곽씨 내외는 온몸을 써 농사에 매달렸다.
내외가 농장에 쏟은 비지땀이 몇 드럼에 달할지는 뒷산 신령에게 물어보면 알 일이다. 땀뿐이랴. 부단한 열정, 상황을 물고 늘어지는 집요한 정신, 패잔병처럼 여기는 눈총을 감수하는 뱃심까지 가세했을 테지. 예순이 넘은 빈털터리 늦깎이로 농사에 입문, 마침내 기세를 돋운다는 건 아마도 거의 이변이다. 곽씨는 은연중에, 노년의 귀농도 매력적일 수 있다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대단한 소득을 올리는 건 아니지만 충분히 만족스럽습니다. 농장이 돌아가는 상황을 비유하자면, 작은 옹달샘 하나를 팠는데 거기에서 사시사철 샘물이 찰랑거린다 할까? 이 옹달샘은 계속 퍼 써도 마르질 않아요. 계속 샘물이 솟구치니까. 덕분에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하고 있어요. 큰 분의 뜻이리라. 제가 천주교인입니다.”
“머리 좋고, 의식 있고, 신념 강한 젊은 사람들조차 고전하는 게 귀농생활이라고들 해요. 정착 과정에서 가장 힘든 건 어떤 점이었나요?”
“초기엔 괜히 왔다는 생각도 잠시 했었어요. 농사에 문외한이었다는 것, 그게 가장 난처했어요. 눈앞이 캄캄하더라고. 그러나 일단은 생계 문제가 워낙 다급해서 잡념을 거두고 일에만 몰두했죠. 실로 앞만 보고 달려왔어요. 만만한 게 하나 없었지만 다 헤쳐 나왔어요. 사실, 맨손으로 시작했지만 겁날 건 없었어요. 왜냐면, 형편이 더 나빠질 수는 없었으니까(웃음).”
자연과 교제하며 산촌을 노니는 부부
사람의 난제는 대체로 시간이 해결해준다. 슬픔도 아픔도 시간이 지나면 적응된다. 그러나 생계의 문제는 질이 다르다. 굴러떨어진 밑바닥 자체를 디딤돌로 삼아 기어이 뛰어올라야만 한다. 귀농은 그에게 비상 발령이었으며, 결과는 승전이었다. 도시에 버텨 재기를 꾀하기란 어려웠을 거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런 그에게 도시와 시골의 장단점을 묻자 돌아오는 답이 이렇다.
“온갖 상품 시장과 문화가 구비된 도시의 편리성에 비하자면 시골은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은 게 사실이죠. 가령,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선 수십 리 먼 길을 달려 나가야만 하니까. 그러나 시골에선 자연과 동화하는 삶을 누릴 수 있다는 명백한 장점이 있죠. 반면에 도시는 주로 인간끼리 부대끼며 살아가야 하고 말이죠. 경쟁과 소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시골에 비해, 물적 조건이 중시되는 도시에선 정서적 안정을 취하기 어렵다는 점이 중대한 단점이라 봐요. 경제상의 기회가 많다는 건 도시의 최대 장점이겠고.”
“시골의 자연이 좋다지만, 날이면 날마다 이어지는 적막 속에 사는 일은 때로 고역이지 않을까요?”
“단골 고객이라든가 도시의 지인들이 스스로 찾아와 식사와 대화를 즐기고 돌아갑니다. 그리운 벗들을 불러들여 회포를 푸는 일도 낙이에요. 고즈넉한 산촌에 살지만, 나름의 사교가 적절히 이뤄지는 것이죠. 갑갑증을 느끼진 못하고 살아요.”
“마을 주민들과의 소통에 잡음은 없었나요?”
“이곳이 아내의 고향이라서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에 용이했어요. 아내가 마을 부녀회장을 맡아 맹활약을 하기도 했죠. 농토에 질긴 애착을 갖고 평생을 살아온 원주민들에겐 특유의 자기 기준이라는 게 있습니다. 존중해야 할 대목이라 봐요. 과거의 시골 정서라는 게 붕괴되고 있는 것도 현실이죠. 그러나 음식을 이웃과 나누길 즐기는 풍습은 여전합니다. 몸에 밴 나눔의 문화랄까. 이런 면은 꾸준히 지속되고 전승되면 좋겠어요. 그런데 남모를 고독을 느끼는 게 한 가지 있습니다. 호남 태생인 제가 영남에서 산 세월이 55년인데 아직도 호남사람이라며 은근히 무시한다는 거! 선거철엔 아예 입을 봉하고 살아요. 무시무시한 분위기라서(웃음).”
산등성이를 올라 사과 농장으로 들어선다. 사나운 8월의 폭염이 사과나무 잎사귀에 쏟아진다. 나무 아래론 푸른 그늘이 짙어 땀을 씻을 만하다. 재기를 목표로 삼아 귀농, 어언 70대 복판에 접어든 부부는 여전히 일벌레다. 그러나 사람이 일만 하면 무슨 재미? 여흥과 일락(逸樂)이 없다면 반쯤은 허사다. 부부는 자연과 교제하는 일로 산촌을 노닌다. 아침 햇살에 새벽안개가 어떻게 해산하는지를, 밤이면 별들이 모여 무슨 잔치를 벌이는지를 유심히 관람하겠지. 감관이 열리고, 촉수가 파랗게 서겠지. 그것으로 어쩌면 범람처럼 덮쳐오는 노년기의 우수를 능히 해치울 수도 있으렷다.
“늘 그 자리에 있는 너럭바위, 사계 내내 짙푸른 솔숲에 번번이 눈이 가고 마음이 움직여요. 나 같은 노년에도 할 일이 있다는 것. 자연과 교감할 수 있다는 것, 그게 귀농으로 얻은 가장 큰 기쁨의 원천이에요. 그럼에도 이즈음엔 다 부질없다는 허무감이 듭니다. 애초의 목표를 거의 달성했다는 만족감 뒤에 찾아오는 허탈과 허무. 무엇으로 그걸 극복할지, 요즘 자주 생각에 사로잡혀요. 제가 말이죠, 사후 묘비명을 정해두기도 했어요. ‘여기 아내를 몹시 사랑하다가 떠난 사람이 묻혀 있다.’ 이게 제법 근사해 보였어요. 그러나 그마저 부질없다 느껴지는, 이 허무감의 정체는 무엇일꼬.”
인생의 황혼에 귀농이라는 새벽길을 훤하게 열어젖힌 사람의 눈가에 그늘이 서린다. 허무의 심연을 무슨 수로 건너나. 그는 화두 하나를 집어든 셈이다. 파란하늘에 뜬 흰구름 몇 조각, 당싯당싯 산을 넘는다.
박원식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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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 , 등의 저서가 있다.
꼽아보니 횟수로 벌써 5년 차다. 필자가 K사의 SNS 계정에 가입한 날은 지난 2012년 4월 25일이었다. 그곳은 고교 동창이 친구맺기(요즘 말로 선팔)하자며 보내온 톡에서 처음 접한 ‘신세계’였다. “그래! 바로 이거야” 하며 혹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여태 몰랐어?” 하고 물었던 친구의 SNS 계정엔 세월을 훌쩍 뛰어넘은 한 중년의 프로필 사진은 물론 필자가 청춘을 보냈던 부산의 고향 풍경들이 올라와 있었다. 그리 잘 찍지 못한 일상의 평범한 일명 ‘뽀샵’ 사진들과 간단한 메시지가 대부분이었지만 필자를 30여 년 전 시간여행자로 만들어주기에 충분했다.
필 받은 김에 즉시 회원가입을 했다. 그런데 가입 절차를 마친 뒤 한참 고민스러웠다. “도대체 뭘 올려야 하지?” 마음의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었던 탓도 있지만 평소 주위에 뭘 알리며 자랑 같은 걸 잘 못하는 스타일이었던 것이다.
결국 고민 끝에 ‘귀요미’ 두 아들의 사진을 첫 번째로 올렸다. 베개 하나를 놓고선 둘이 붙어서 잠자는 모습이라니. 늦은 밤 퇴근한 아빠의 눈에 들어온 두 아들의 모습은 참으로 흐뭇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요즘에야 각자의 방에서 자고 만나기만 하면 티격태격해서 좀처럼 보기 힘든 옛 모습이 되고야 말았지만.
소소한 일상에 여행이나 산행 다녀온 후기 등으로 SNS에 한참 빠져 살던 어느 날, 동네 미용실로 밤마실을 갔다. 두 녀석들 머리 자르는데 산책삼아 함께 다녀오라는 마님의 ‘협박’도 있고 해서 마지못해 따라나선 길이었다. 잠시 후 엄청난 일이 벌어질 줄 감히 짐작도 못하고 말이다.
“아버님, 오늘 처음 오셨죠?”
미용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솔 톤 목소리로 오버하며 맞이하는 원장님 목소리에 미용실 안에 있던 여자들이 모두 필자를 쳐다봤다.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였다. 그러곤 막무가내로 ‘훅’ 밀고 들어오셨다. 두 아들은 직원에게 맡기더니 잘해드리겠다며 미용할 생각도 없던 필자의 머리를 만지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이 건조하다며 뭔가 척 바르더니 꾹꾹 누른 뒤 두피 스케일링이라나 뭐라나 뭔가를 머리에 씌우고선 한참 후끈후끈하게 해준다. 또 이건 특별 ‘싸비스’라 다음번엔 공짜가 아니라며 묻기도 전에 선수를 치신다.
그런데 제법 시원했다. 처음엔 좀 부담스럽더니 어차피 내맡긴 머리, 비슷한 가격에 새삼 스타일도 살아나면 내심 이참에 내 단골집도 바꿀 수도 있겠거니 하는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다. 바로 그 순간, 또 뜻밖의 제안을 하는 원장님!
“안경을 벗고 있어 잘 안 보일 테니 머리하는 모습, 인증 샷 삼아 한 장 찍죠?” 한다. 무심코 “예” 하고 말았다.
사단이 난 건 바로 그날 밤이다. “버섯돌이??(부산 사는 중학교 친구), 삼촌 완전 웃겨… 나 완전 때굴때굴 거실 바닥을 구르고 있어~~ 때굴때굴...쿵(수원 조카), 파마로 급선회함 해보지(동탄 친구), 인생 즐기다 가는 겨, 하고 싶은 거 다 해봐야 안 되겠나?(초등학교 친구), 목에 두른 꽃분홍 수건도 한몫하네(양산 친구), ㅍㅎㅎ 상태야, 예쁜 상태!(고교 친구), 예쁜 파마 했나, 후기 올려라(대학 친구), 피부도 좋으세요(직장 후배),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 같다, 나도 관리 좀 해야겠네.”
왜? 무엇 때문에?
밤중에 쏟아진 뜨거운 반응, 급기야 견자단(홍콩 액션배우) 닮았다는 반응까지… 평소 잠잠하던 필자의 SNS에 불이 난 이유는 미용실 원장님이 찍어준 그 사진을 ‘나만 보기’가 아니라 전체 공개로 잘못 올린 탓이었다.
“안 그래도 요리조리 셀까 찍는 거 좀 못마땅했는데 애도 아니고 아닌 밤중에 이게 뭔 주책이냐고!”
평소 안 긁던 마님의 바가지란 바가지는 그날 한참이나 이어졌다.
어디서부터 시작됐을까? 이 무모한 주책없음은!
어쩌면 특별할 거 없는 필자의 SNS 계정에 꾸준히 찾아와주는 팬들을 위해 뭔가 ‘꺼리’가 필요하겠다는 나름의 현실 직시 내지는 봉사정신으로 작심하고 올렸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소동은 며칠 동안 이어졌다.그 와중에 정말 내 편이 따로 있구나! 했던 것은 “아빠 대박! 꽃향기가 나네요, 향기 나는 아빠 ㅋ”라며 엄지 ‘척’ 해준 사춘기 큰아들의 반응이었다. 사진 속 꽃병에 담겨져 있던 꽃을 아빠와 ‘콜라보’시켜준 녀석의 기특한 해석력이라니!
“아들아! 우리 정말 잘해보자구~”
마님의 증언에 의하면 이 말은 아들 녀석 탯줄 자를 때 필자가 감격에 겨운 나머지 했던 말이라나 뭐라나. 이 한 몸 망가져 여러 사람들에게 웃음을 줄 수 있다면야, 또 뜻대로 되지 않는 우리네 삶, 한 번쯤 아무 생각 없이 웃어볼 필요도 있지 않나?
“그래~ 오늘 주인공은 당근 내다, 맞제? 꽃보다 남자! 바로 이런 기 그기다 안 그렇나, 함 웃자!”
800회를 목전에 두고 여러 날 쉬고 있는 SNS 계정도 아쉽지만 이젠 접어야 할 거 같은 생각이 든다. 헤어진 친구도 만나게 해주었고 새로운 인연도 만들어주며 웃고 울게 만들었지만 요즘 요상스러운 것들이 너무 많이 생겨버렸다.
참, 그날 이후 혼자 방 안에서 ‘킥킥거리던’ 마님, 주책없다며 잔소리할 땐 언제고 여태 몰래 꺼내보남? 참 나!
아침 출근길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비가 내린다. 정말 모처럼의 단비다. 제발 대지를 흠뻑 적셔주면 좋겠다. 바싹바싹 타 들어가는 농심이 얼마나 고대한 비인가. 그러나 좀 내리나 하던 빗줄기는 야박하게도 금세 그쳐버린다. 또 태양이 쨍쨍한 햇볕을 내리비추며 심술궂게 혀를 내밀고 있다.
태양을 피하는 방법? 뭐 그런 게 있을까 싶지만 문득 떠오르는 곳이 있다. 피하기보단 오히려 태양을 기꺼이 즐길 수 있는 대표적인 곳, 바로 부산이다. 부산은 가끔이 아니라 수시로 생각하는 곳이다. 벚꽃이며 목련이며 봄꽃 소식에서부터 부고장이며 청첩장까지 줄줄이 달리는 SNS 댓글들 속에서 말이다.
지난 6월 1일 전국에서 처음으로 해수욕장을 개장한 부산은 지금쯤 작열하는 태양을 피해 해운대로 찾아든 사람들로 벅적일 것이다. 필자도 이참에 올여름 휴가지로 부산여행이나 추천해볼까?
부산이 처음이라면 동백섬 한 바퀴 돌고 해운대 백사장 거닐다 달맞이고개에서 야경에 취할 수 있는 데이트 코스도 있고, 줄서서 먹는다는 대연동 쌍둥이 돼지국밥에서 민락동 회센터로 이어지는 식도락 코스도 좋고, 남포동 자갈치시장과 국제시장을 누비는 지름신 쇼핑 코스도 있다는 것을 알고 가면 좋겠다.
필자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전학 와서 대학 졸업 때까지 약 18년간을 살았으니 그야말로 청춘의 황금기를 오롯이 보낸 곳이 바로 부산이다. 몇 년 전엔 졸업 후 약 30여 년 만에 초등학교를 찾아가기도 했다. 학교 정문 앞에 있던 문방구가 아직까지도 있는 걸 보고선 너무 놀랍고도 반가워 한참을 쳐다보며 닫힌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그리고 간절함이 통했는지 이젠 칠순이 훌쩍 지난 그 옛날의 문방구 아저씨와도 짧게나마 재회의 기쁨도 누렸다. 추억의 키워드를 나열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오륙도의 윤슬!
남구 용호동 끝자락을 밟으면 눈앞에 좌~악 펼쳐지는 장관이 있다. 부산을 대표하는 아이콘 중 하나인 오륙도가 바로 그곳이다. 오늘 같은 날 햇빛에 아롱질 그 눈부신 윤슬(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은 정말 혼자 보기엔 아까운 풍경이다.
좌측으론 광안대교를 굽어보며 우측으론 해운대 달맞이고개를 조망할 수 있는, 해안절경을 따라 이어진 길도 너무 매력적이라 쉽게 설명할 길이 없다. 또한 몇 년 전에 개장된 스카이워크에서 내려다보이는 벼랑 끝, 그 넘실대는 파도에 부서지는 바위섬은 아찔한 스릴과 폐부를 찌르는 쾌감을 가져다준다. 그리고 이때다 하고 ‘부산 아지매’들이 권하는 회 한 접시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재주가 없다. 흥정 연습이라도 미리 해둬야지 싶다.
철썩이는 밤바다에 풍경소리, 해동 용궁사!
해운대를 돌아 기수를 북쪽으로 돌리면 금방 닿는 곳이 있는데 최근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와 '몸살'을 앓고 있다는 용궁사다. 바닷가 해안을 따라 조성된 덕분에 용궁사라는 이름이 정말 기가 막히게 어울리는 절이다. 낮 시간대의 비경도 일품이지만 필자는 밤 시간대의 관람을 권하고 싶다.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철썩철썩 귓가를 때리는 파도소리와 바람결에 실려오는 풍경소리가 로맨틱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곳, 그 밤바다의 ‘콜라보레이션‘은 한마디로 끝내준다.
‘Kiss in the dark’은 바로 이런 곳에서 해야 한다. 애독자들이시여, 부디 ’낮 뜨거운‘ 시간을 피해 어둠을 틈 타 살짝궁 다녀가시길 권한다. 참고로 인근의 송정해수욕장 바다 산책로도 추천한다.
제주에 올레길이 있고 서울에 둘레길이 있다면, 부산엔 갈맷길
와우~ 여긴 또 어디일까? 부산 앞바다 남서쪽 끝부분에 위치한 송도해수욕장에서 암남동으로 이어진 해안절경 길인 송도 갈맷길을 빼놓을 수 없다. 최근엔 케이블카까지 재가동 했다고 하니 올 여름 ’핫 플레이스‘가 되지 않을까 싶다. 빨리들 다녀가시라.
어떤 투어이든 일단 여행길엔 입이 심심해선 안 된다. 돼지국밥이나 곰장어 구이, 밀면, 물회도 있으니 입맛 따라 고르면 된다. 부평시장 야시장(일명 깡통시장) 구경하며 거인통닭 시식도 권할 만하다. 인근의 보수동 헌책방 골목에서 독서삼매경에 빠져보는 것도, 단팥죽 한 그릇 하는 것도 이열치열엔 그만이겠다.
아~ 부산, 그곳에 가고 싶다.
한국에서 열리는 국제 규모의 영화제는 꽤 많다. 그중 한국의 3대 국제영화제라 일컬어지며 가장 먼저 개최되는 영화제가 바로 4월 말(4.27~5.6)에 열린 전주국제영화제다. 올해로 18회째를 맞은 전주국제영화제는 전주한옥마을의 인기와 더불어 영화보기 좋은 영화제로 입소문 나고 있다. 해가 갈수록 뜨거운 관심을 얻고 있는 전주국제영화제 현장을 다녀왔다.
영화보고 먹기 좋은 여행지, 전주
전주한옥마을이 급부상한 이유에서일까? 첫 방문이었지만 영화를 즐기는 것이 생각보다 쉬웠다. 여행객이 늘어서인지 게스트하우스, 민박, 굿스테이로 지정된 호텔 등 적당한 가격의 숙박업소가 눈에 쉽게 띄고 접근이 쉬웠다. 취재를 위해 묵었던 ‘J’ 게스트하우스에서도 영화를 보러 온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잠시 쉬다 영화를 보러 가고, 들어오고 하는 모습이 여느 영화제보다 편하게 느껴졌다. 상영관이 몰려 있는 영화의 거리에서 거의 모든 영화제 행사가 진행되는 것도 좋은 환경. 상영관에서 또 다른 곳으로 이동이 편리해 연이어 영화를 보기 좋다. 부산국제영화제처럼 바다를 배경으로 이벤트가 열리고 북적거리기보다 적당히 시원한 날씨에 즐기기 좋은 영화제다. 이번 영화제에는 정우성, 주지훈, 수애, 하지원 등이 방문해 그 어느 해보다 뜨거웠다. 그런데 전주 하면 맛있는 음식을 빼놓을 수 없다. 사실 영화도 영화이지만 손맛 좋기로 유명한 전주 맛집을 가보지 않는다면 영화제를 제대로 느꼈다고 말할 수 없다. 영화제에 참여했던 한 영화 관계자는 SNS에 매일같이 영화가 아닌 음식 사진을 올릴 정도로 전주의 맛에 흠뻑 빠져 있었다.
관객과 소통하고 전주를 알리다
영화의 거리에서 진행된 각종 부대행사에도 많은 인파가 몰렸다. 공예체험과 아트마켓으로 운영된 전주아트마켓과 드라이플라워, 캘리그래피 등 무료체험 행사는 시민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포토존, 버스킹존 등도 운영해 영화를 기다리는 관람객과 소통했다. 한편, 전주영화제작소 앞 주차장에서는 전주시민미디어센터와 협업하여 미니 FM을 진행했다. 누구든 미니 FM을 들을 수 있도록 라디오 부스 앞에 파라솔과 의자를 설치한 것도 인상 깊었다. ‘전주시네마프로젝트 2017’ 선정작이었던 이창재 감독의 ‘N프로젝트’ 실제 제목 공개에도 귀추가 주목됐다. ‘전주시네마프로젝트’는 매년 영화제가 선정한 3명의 감독에게 제작비를 지원하는 전주국제영화제 메인 프로그램이다. 영화 공개 전까지 로 불렸던 영화의 제목은 로 확정, 관객 앞에 나왔다. 이 작품은 지난 2002년 16대 대선 당시 정당 최초로 국민경선제를 실시해 정계에 파란을 일으킨 새천년민주당의 대선 후보 선출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해 안희정 충남지사, 유시민 작가 등이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회고를 들려준다.
한국의 3대 영화제로 자리를 굳히다
사람들은 조심스러워했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렸던 1996년은 박광수, 여균동, 정지영, 강제규 감독 등의 출현으로 한국 영화가 조금씩 인기를 얻고 있었던 때이지만 국제 규모의 영화제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과연 성공할까? 뚜껑을 열어보니 상황은 달랐다. 영화 스타와의 근거리 만남, 다양한 문화에 대한 갈망이 제2도시 부산을 들끓게 했다. 이듬해 부천에서는 장르영화, B급영화, 마니아영화 등을 중심으로 상영하는 부천판타스틱영화제가, 그리고 2000년에는 새로운 대안영화를 소개하고 제시하는 전주국제영화제가 생겨났다. 물론 이외 지역에서도 다양한 콘셉트의 국제영화제가 열리고 있다. 예산 규모면에서 30억원이 넘는 영화제로는 부산과 부천, 전주 세 영화제를 꼽는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는 특히 어느 해보다 발전한 모습으로 관객의 사랑을 받았다. 전체 영화 상영 543회 차 중 279회가 매진됐다. 객석점유율은 80.4%, 총관객 수는 7만9107명이었다. 작년 222회 매진 기록을 훨씬 웃도는 수치였다. 전주국제영화제를 시작으로 크고 작은 영화제가 많이 준비돼 있다. 영화제는 젊은이의 전유물이 아니란 것을 우리 독자들이 알았으면 한다. 과거 세대 감독의 회고전도 있고, 향수 깊은 영화를 큰 스크린에서도 감상할 수 있는 곳이 영화제 현장이다. 내년 봄 혹시 전주에 가는 독자가 있다면 전주국제영화제에도 들러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즐기다 가는 건 어떨까.
한낮에도 그저 적요한 읍내 도로변에 찻집이 있다. ‘카페, 버스정류장’이라는 간판을 달았다. ‘버스정류장’이란 떠나거나 돌아오는 장소. 잠시 머물러 낯선 곳으로 데려다줄 버스를 기다리거나, 마침내 귀환하는 정인을 포옹으로 맞이하는 곳. 일테면, 인생이라는 나그네길 막간에 배치된 대합실이다. 우리는 모두 세월의 잔등에 업히어 속절없이 갈피없이 흔들리며 먼 길을 가는 나그네가 아니던가. 저마다 여정을 손에 쥔 순례자이며 여행자! 상호에 서린 서정을 음미하며 찻집으로 들어선다.
‘카페, 버스정류장’ 주인 박계해(57)씨는 5년여 전까진 문경시 가은읍의 산골에서 귀농자로 살았다. 그보다 더 오래전엔 중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교직생활은 신바람 났었더란다. 그럼에도 교사직을 버리고 귀농을 한 건 그 어떤 틀에 사로잡혀 살기를 악어의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넣는 일처럼 싫어하는 성향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결정적인 이유는 남편이 어느 날 귀농을 선창하고 나선 데 있었다. 그녀는 고분고분 따랐으며, 남편보다 더 빠르게 시골생활에 적응했다지.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에 그렇게 시작된 시골 살림은 이후 10여 년간 계속됐으나 다시 행선지를 바꾸었다. 인생이라는 여행 혹은 순례에 무슨 고정된 목적지가 있을 것인가. 박계해씨는 우연히 상주시 함창읍의 거리를 걷다가 오래된 일본식 2층 고가에 필이 꽂혀 단박에 임대를 하고 찻집을 차렸다.
교사에서 농촌생활자로, 다시 소읍의 찻집 운영자로. 다채로운 편력을 하며 중년기 15년여의 세월을 흘러온 셈이다. 섭렵이 쏠쏠했으니 드라마도 푸짐하렷다. 행복과 불행이, 만족과 불안이, 빛과 그늘이 순리처럼 그녀의 시간을 곡예하며 통과했을 게다. 그렇다면 마땅히 자리에 모시어 경청하는 게 사리에 맞는 일. 운치도 정취도 남실거리는 찻집에 마주앉아 한 여자의 삶에 서성거리는 나름의 광량(光量)이라는 걸 느껴볼 수 있는 기회란 행운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귀농 10년의 얘기부터 들어볼까? 순식간에 학교에 사표를 내고 후다닥 귀농한 대목으로부터 얘기가 시작되었다.
“남편의 제안을 따라 귀농 교육을 받으며 곧바로 제 마음도 시골로 향했어요. 제 고향이 하동 악양의 시골인데요, 허물어져가는 돌담집에 대한 애호 같은, 농촌의 자연과 풍경에 매료되는 성향 덕분이었죠. 드디어 지인의 소개로 가은의 시골을 둘러보게 되었는데, 모든 게 맘에 들었어요. 빈집 하나를 사서 적당히 고쳐 시골 살림을 시작했어요. 도시 출신인 남편과 달리 저는 풀이나 피도 잘 뽑고, 매사 빠르게 적응했어요. 시골생활의 많은 점들이 좋았어요.”
“귀농의 초기 정착에 갖가지 애환을 겪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선생의 시골생활은 좀 달랐군요. 일테면, 어떤 점들이 만족스러웠죠?”
“무엇보다 도시에서와는 달리 자연이 주는 감흥들이 참 좋았어요. 하늘, 땅, 나무, 풀, 모든 자연 생태가 주는 힘이라는 것, 그게 좋았어요. 재래식 화장실을 쓰며 도시에서 좌변기를 쓸 때 느꼈던 죄의식을 갖지 않을 수 있다는 점도 만족스러웠어요. 이웃분들과의 소통은 늘 즐거웠어요. 제가 말이죠, 마을 부녀회장을 맡기도 했어요. 상(喪) 당한 집에서 이웃들과 둘러앉아 전을 지진 기억도 많아요. 학교생활의 경험을 살려 할머니들을 모신 학급을 운영하기도 했어요.”
귀농 경험, 책으로 펴내다
“처음 3년간은 아무런 불편 없이 살았어요. 교직 근속 20년을 채우기 직전에 사표를 써 연금 대상자가 되진 못했지만 퇴직 때 받은 돈이 있었기에 미리 걱정하거나 연연해하질 않았어요. 그런데 3년이 지나자 돈이 바닥나고 말았어요(웃음). 저나 남편이나 돈 문제엔 워낙 태평한 사람들이었어요. 저축이라는 걸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았거든요.”
“돈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는 게 귀촌귀농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물질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이 세속에선 환상에 불과할지도 모르죠.”
“저희 집 가훈을 들어보실래요? ‘내비도!’ 바로 그거였어요. 남편이나 저나 그냥 사는 스타일이었어요. 귀농해서 살며 생전 처음으로 돈의 위력을 실감했어요. 어느 정도 돈 문제에 덜미를 잡혔던 거죠. 마치 벌을 받는 것처럼(웃음).”
‘내비도!’ 내버려둬라, 저절로 흘러가련다. 렛 잇 비(let it be)! 근사한 푯대가 아닐 수 없다. 인간의 삶이란 낭만적 지향이건 급진적 가치이건, 물적 토대에 의해서만 실현 가능하다는 소식이 난무하지만, 그게 반드시 그러기만 하랴.
귀농이나 귀촌이란 소유를 헐겁게 하는 실천일 수도 있다. 소유하지 않음이 아니라 가급적 소유의 부피와 무게를 줄이는 지혜를 발휘할 절호의 찬스일 수도 있겠지. 박계해씨의 사고와 삶은 자유로운 지평을 향했던 것으로 보이며, 귀농의 나날들은 한동안 유쾌했던 것 같다. 그러나 통장 잔고가 바닥을 치면서 당장 활로를 찾아야 했다.
“더 이상 여유를 부릴 상황이 아니라서 일을 만들어 덤벼들었어요. 가은읍내에 점포를 얻어 옷을 팔았어요. 전에 천연염색과 바느질 공부를 해둔 게 있었는데, 그게 도움이 됐어요. 손수 염색한 옷가지들이 제법 팔려나갔으니까.”
“시골 옷가게 매상이라는 게 소소했을 테고, 남모르게 진땀 흘린 시절들이었겠어요.”
“당시 아들과 딸, 두 녀석이 학생이었는데 교육비 부담이 컸어요. 어떻게 이 상황을 헤쳐 나갈까, 늘 고심이 많았어요. 그러나 자존심이 상하거나 위축되진 않았어요. 이왕이면 일을 즐겁게 해나가야겠다는 생각으로 가게에 딸린 안방을 동네 사랑방처럼 활용해 아줌마들과 교류를 했어요. 제가 교직에 있을 때 교사 극단을 만들어 활동한 경험이 있는데요, 가은 시골의 초등학교 학부형들과 작당을 해 연극 캠프를 열기도 했습니다.”
고심이 많은 생활이었지만 여흥을 누리는 일에도 게으르지 않았던 셈이다. 취향과 재능을 죽이는 난감한 상황에서도 여하튼 들고 일어서는 게 낙관의 힘이렷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처럼 즐거운 게 다시 있을까. 무슨 일이건 억지로는 하기 싫은 반면, 하고 싶은 일은 기어이 해내면서 살고 싶었어요. 그런데 사실 생활에 보탬이 되고자 벌인 일이기도 했어요. 연극 강사로 나서 수입을 얻었으니까. 주부강좌에 나가 천연염색을 강의하기도 했어요.”
“가은 시골에서의 귀농 경험을 담은 책, 를 출간했더군요.”
“촌에 살며 농사를 좀 했지만 사실 일머리가 서툴렀고 커다란 애착도 없었어요. 자연이 드러내는 사계의 민감한 변화를 만끽하는 일, 야산에 올라 산나물을 뜯는 일, 어른들과 어울리는 일은 참 좋았지만 그것만으로는 다 채워지지 않는 어떤 허기 같은 게 있었어요. 나, 이렇게 살다가 마는 거야? 아니지, 이건 아니지 하는 생각으로 귀농일기를 쓰기 시작했어요. 제가 버지니아 울프를 좋아하는데, 그가 말했어요. ‘기록하지 않은 일은 일어나지 않은 일과 마찬가지다’라고. 그 말에 자극을 받아 마을 얘기,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 좌충우돌한 경험담 등을 글로 썼던 겁니다. 책 출간 뒤엔 글쓰기 강사로 활동하기도 했어요.”
“비록 물적 애환이 자심했다지만 동분서주, 야무지게 자신을 건사한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말이죠, 귀농으로 맞닥뜨린 시련 중에 부부간 갈등이 깊어지는 경우가 드물지 않더군요. 선생의 그 열렬한 날들 중에 부군과의 관계는 어땠나요?”
“흠. 저희 부부는 이혼을 했어요. 제가 먼저 이혼을 원했고, 마침내 남편이 동의해줬어요. 저는 그를 존경하고 좋아하고 사랑했어요. 그러나 더 이상 발전이 없는 한계를 깨달았어요. 소통에 문제가 생겼어요. 각자의 길을 가는 게 옳다는 판단을 했죠.”
언젠가는 섬에서 살고 싶어
이혼을 금기시하는 묘한 모럴도 있지만, 결혼이 자연스럽듯이 이혼 역시 당연한 귀결로 찾아드는 수가 있다. 이혼이 상처가 되지는 않았다고, 차라리 좋은 경험이었다고, 박계해씨는 담담하게 토로하고 있다. 그녀는 이혼 절차를 완료하고 남편과 함께 법원을 나서던 날의 기억을 다음처럼 글로 썼다.
‘그는 내 어깨를 툭 치며 독립을 축하해! 라고 말했다. 그 순간 나는 이 대단한 남자와 결혼했던 것이 뿌듯해서 그에게 몸을 찰싹 붙이고 팔짱을 끼었다.’
박계해씨의 찻집 ‘카페, 버스정류장’은 귀농 이후 그녀의 삶을 새로운 쪽으로 데려다주었다. 인생엔 터닝 포인트라는 게 있는 법. 찻집 운영과 더불어 그녀의 나날은 바닷장어처럼 생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원로 시인 강은교 선생이 이 찻집을 다녀간 뒤 ‘카페 버스정류장’이라는 제목의 시를 발표하기도 했지만, 어지간히 지역의 명소로 부상해 일부러 찾아드는 이가 드물지 않다. 토속적 미감과 모던한 감각이 잘 버무려져 낭만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 적막한 소읍의 찻집에선 차만 파는 게 아니다. 예술인들을 위한 전시장으로, 노래 공연장으로, 시낭송 공간으로 쓰이기도 하니까.
“귀농 이후 그 어느 시절보다도 편합니다. 일단은 규칙적인 소득이 발생하기에 안도할 수 있고, 다양한 개성의 사람들과 만나 삶을 얘기할 수 있다는 게 참 좋아요. 아이들도 잘 자라 아들놈은 부산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하고, 딸은 만화가로 일하고 있어요. 두 번째 책 을 펴낸 일도 즐거운 추억이 되었어요.”
“귀농으로 촉발된 인생의 색다른 여정이 어떤 안착에 이른 거예요?”
“꽤 안심을 느끼지만 이 찻집은 앞으로 5년 정도만 더 할 작정입니다. 경제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만 있다면 이곳을 지역 예술인들에게 내놓고 싶은 생각도 있어요. 저는 다시 어디론가 떠난다거나 환경을 바꿔야겠죠. 음, 요즘엔 시나리오를 쓸 궁리를 하고 있어요. 독립영화가 아닌 상업영화용 시나리오를요. ‘나의 경제’라는 제목의 책도 한 권 쓸 예정이에요.” “가령, 무인도에 혼자 살아야 할 경우 꼭 가져가고 싶은 한 권의 책이 있다면?”
“이상의 예요. 어, 그런데 제가 최종적으로 가서 살고 싶은 곳이 섬인데요?(웃음)”
“섬에서의 삶을 꿈꾸세요? 고독을 견딜 수 있겠어요?(웃음)”
“가급적 환경을 새롭게 바꿔 자신의 삶이 점점 나아지는 걸 느끼고 싶어요. 경험 세계를 넓혀 내적으로 성숙하는 기쁨을 맛보며 살고 싶다는 거!”
길은 다양하며, 모든 길마다 나그네의 경전이다. 삶의 문제를 여행으로 혹은 순례로 치환할 수만 있다면 귀농이건 섬이건 가슴 설레는 행로이지 않겠는가. 잠정적인 고난이야 해 뜨기 직전의 어둠이나 추위에 불과할 테고.
길은 다양하며, 모든 길마다 나그네의 경전이다. 삶의 문제를 여행으로 혹은 순례로 치환할 수만 있다면 귀농이건 섬이건 가슴 설레는 행로이지 않겠는가. 잠정적인 고난이야 해 뜨기 직전의 어둠이나 추위에 불과할 테고.
박원식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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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등의 저서가 있다.
2050년경이 되면 평균수명 100세 시대를 넘어 120세 시대가 열린다고 한다. 정열적이고 건강한 삶을 사는 지금의 액티브 시니어가 60부터라면, 앞으로는 100세 액티브 시니어 그룹이 생긴다는 말이다. 이제는 단지 오래 사는 것보다는 얼마나 건강하게 오래 사는가가 중요한 시대가 됐다.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김성윤 교수에게 노년 건강의 의미 있는 삶에 대해 들어봤다.
정신과 의사로서 노인정신건강 클리닉을 담당하고 있다 보니 우울증과 불면증, 그리고 치매로 고생하고 계신 분을 자주 상담하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우울증을 없앨 수 있을까, 불안증을 해결할까, 기억력을 회복시킬 수 있을까 궁리하며 새로 개발된 신약도 써보고, 상담도 하며 같이 고민하지만 큰 도움을 드리지 못해 늘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다행히 한두 번 방문 후 증상이 호전되어 원래의 편안했던 생활로 되돌아간 분도 계시지만, 벌써 몇 년째 고생하며 이 약, 저 약 바꿔도 뚜렷한 효과를 보지 못하는 분도 많습니다. 온몸으로 버텨보지만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에 야금야금 무너져 내리는 바닷가 모래성 같다고나 할까요?
청력 상실 후 환자에 대한 마음가짐 달라져
제가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질병이나 증상을 전혀 새로운 방향에서 바라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약 2년 전, 돌발성 난청으로 양쪽 귀의 청력을 갑자기 잃었습니다.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여러 가지 치료로 조금 회복되기는 했지만 인공와우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수술로 청력이 완전히 돌아올 줄 알았는데 실제로 기계를 켜보니 사람 말소리가 고장 난 스피커에서 나는 잡음처럼 들려 몹시 실망했습니다. 기껏 들리는 소리가 겨우 이 정도란 말인가? 청력 재활 훈련을 열심히 했습니다. 조금씩 나아졌고 1년쯤 지나자 일반 대화는 문제없이 할 정도가 됐습니다. 그래도 시끄러운 식당이나 차 안에서의 대화, 음악감상 등은 아직 어렵습니다. 이제 예전의 상태로는 못 돌아갈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그래, 만일 내 청력이 완벽하게 되돌아온다면 뭘 어쩔건데?” 음… 가만히 생각해보니 청력이 완전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았습니다. 좋아하는 책을 읽고, 자전거 여행을 다니고, 사진을 찍고, 독서를 하고, 모임에 나가고… 소리에 의존해야 하는 몇 가지 일을 빼면 거의 대부분 가능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그냥 그렇게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되지 남들처럼 완벽하게 듣지 못한다고 그게 뭔 대수랴? 청력 완벽해지기를 천년만년 기다리기만 하면 뭐해?”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이런 마음가짐을 제 클리닉에 찾아와 상담하는 환자들, 어르신들께도 적용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건강하고 싶은지 먼저 물어보라
누구나 건강을 원합니다. 그런데 ‘왜 건강하고 싶은지’ 물어보면 대답이 궁합니다. “그거야 뭐… 몸 아프면 괴로우니까…”라는 정도의 대답들을 하십니다. 갈 곳이 정해져야 기차표를 끊듯이, 건강도 목적지가 있어야 관리하기가 더 쉬워집니다. 건강 자체가 목적지는 아닙니다. 여행을 좋아해서 생전에 전국여행을 한 번 해보고 싶다든가, 시골에서 멋진 과수원을 가꿔보고 싶다든가, 딸과 함께 옷가게를 운영해보고 싶다든가, 2년 뒤 소박한 수필집을 한 권 내보고 싶다든가 하는 구체적인 ‘목적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 목적지에 잘 도착하기 위한 도구로 돈과 시간이 있어야 하듯, 건강한 몸도 필요한 겁니다.
예를 들어 부산에 갈 일이 있다고 칩시다. 친구 아들 결혼식이 있을 수도 있고, 부산 사는 딸이 주말에 놀러오라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기차를 타도 되고 시외버스를 타도 됩니다. 목적지가 분명하면 찾아가는 방법이야 그때그때 형편에 따라 맞추면 됩니다. 목적(부산의 볼 일)이 분명하므로 방법(기차, 버스)은 크게 문제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목적지(내 인생의 꿈, 희망사항, 볼일)가 명확하지 않으면, 방법(신체건강, 돈, 시간 등)에 대한 관심이 시들합니다. 딱히 갈 곳이 없는 사람이 기차시간이나 도로상황 등에 관심이 있겠습니까? 갈 곳이 있어야 합니다. 비록 나이는 들었지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한번 제대로 해보겠다는 불타는 욕망이 있어야 합니다. 젊은 사람만 꿈꾸란 법 없습니다. 노년에도 “꿈★은 이루어진다”입니다. 꿈 없으면 건강은 꿈도 못 꿉니다. 청력 회복보다는 꿈 회복이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우울증, 불면증, 기억력 감퇴가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회복된 몸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묻고 싶은 겁니다. 좀 더 심하게 말하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목적지가 명확한 사람만 그 지긋지긋한 증상과 병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목적지를 정할 때 한 가지 요령이 있습니다. 부정 목적지가 아닌 긍정 목적지를 정해야 한다는 겁니다.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것, 이루고 싶다는 것, 남기고 싶다는 것들이 긍정 목표, 긍정 목적지입니다. “이것만은 피하고 싶다”, “이렇게는 안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은 부정 목적지입니다. “암은 걸려선 안 되지…”, “치매는 무서워”, “뇌경색만은 피하고 싶어…” 등이 부정 목적지의 사례입니다. 부정 목적지는 사람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긍정 목표만이 사람을, 나를 움직이게 합니다. “뒷산에 올라가지 마라” 하면 사람들은 뭘 해야 좋을지 몰라 우왕좌왕합니다. “앞산에 올라가라” 해야 앞산을 향해 비로소 움직입니다. 더구나 묘하게도 부정 목표는 꼭 그대로 되는 수가 많습니다. 걱정하는 일도 생각하는 대로 됩니다. 그러니 두려움, 불길한 예상, 꺼리는 마음은 아예 갖지 말아야 합니다.
생각하기 위해 두뇌가 만들어졌다고? 천만의 말씀!
식물은 신경기관이 없습니다. 동물에만 있습니다. 사람보다 더 큰 뇌를 가지고 있는 동물도 있고, “아니, 이게 뇌야?” 싶을 정도로 작고 변변치 않은 신경기관을 가지고 있는 동물도 있습니다. 그래도 모든 동물은 뇌가 있습니다. 뇌는 ‘움직이기 위해서’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움직이는(동) 생물(물)’입니다.
어떤 이유로 동물에 뇌가 만들어졌을까요? 에너지를 가장 효과적으로 쓰기 위해서입니다.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조금이라도 더 많이 에너지를 섭취하고 싶어 하고, 또 섭취한 에너지는 조금이라도 아껴서 효율적으로 쓰고자 합니다. 먹이는 항상 부족하고 모든 생물은 배가 고프기 때문입니다. 지구의 수십억 년 역사를 통틀어 음식이 풍족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우리의 생활이 조금 풍족해진 요즘도 지구 전체로 보면 굶는 사람투성이입니다. 그러니 ‘머리’를 잘 써서 가능한 한 에너지 사용을 요령 있게 하려고 두뇌가 생겨난 겁니다. 생각하려고 두뇌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잘 움직이려고’ 만들어진 겁니다.
바로 여기에 정신건강의 힌트가 있습니다. 몸이 편해지면 뇌가 쉽니다. 먹이를 구하려고 고생고생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쉬는 뇌는 쪼그라듭니다. 안 쓰기 때문입니다. 팔목이 부러져 깁스를 한 다음 한 달 뒤에 풀어보면 팔이 가느다랗게 약해져 있습니다. 그동안 안 썼으니까요. 뇌도 똑같습니다. 반대로 몸을 계속 움직이면 뇌가 활동을 합니다. 배고픈 채로 몸을 움직이면 뇌는 더 많이 활발해집니다. 활동하는 뇌는 사이즈가 커집니다. 이는 동물실험에서도 입증되었습니다. 먹이를 적게 준 쥐가 더 똑똑하고, 더 뇌가 크고, 더 오래 삽니다. 배부르고 편하면 안 됩니다. 장수의 비결, 정신건강과 행복은 어이없게도 ‘배고프고 몸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에 그 비결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는 할까 말까 하는 일은 하는 게 정답이고, 살까 말까 하는 것은 안 사는 게 정답”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항상 부지런히 움직이고, 꿈이 가득한 멋진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힘차고 건강한 노년을 기원합니다.
>>김성윤(金晟倫) 서울아산병원 교수
1979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해 박사과정까지 마쳤다. 신경정신과 전문의로 1994년부터 서울아산병원에 재직 중이다. 현재 서울아산병원 피험자보호센터 소장과 울산의대 교무 부학장을 맡고 있다.
국민 드라마 의 바르디바른 둘째 아들 용식, 뜨거운 열정과 헌신으로 무대에서 빛나는 베테랑 연극인, 그리고 막말 논란으로 시끄러웠던 문화체육부 장관까지. 어느새 올해 67세를 맞이한 유인촌의 이미지는 이렇듯 여러 갈래로 만들어져 있다. 장님 코끼리 만지듯 매스컴의 요란한 스포트라이트에서 어느 순간 사라져 연극인으로 돌아간 그는 OBS의 대담 프로그램 MC를 맡아 3년째 드라이빙하고 있다. 광대로서, 그리고 뼛속까지 순간예술인임을 자각한 유인촌과의 만남 뒤로 생각보다 진중한 얘기가 있었다.
유인촌은 자신이 맡은 OBS 의 방향성이 최근의 방송 트렌드와는 다르게 진중한 점이 좋다고 한다. 뭐든지 예능화되는 요즘 TV 프로그램들과 비교하면 그가 과거에 진행자로서 인기를 얻었던 에 가까운 느낌이다.
“요즘 방송은 장점보다는 단점을 드러내고 사람을 바보로 만들고…. 그래서 이 프로그램만은 정말 좋은 점, 장점, 들어서 감동할 수 있는 점을 중심으로 만드는 게 좋겠다 싶었어요. 물론 그렇다 보니 방송이 원하는 자극은 없어요. 그러나 보고 나면 따뜻해져요. 다행히 OBS가 그걸 지켜주고 있습니다. 매주 다른 분을 만나기에 그분들에게 보고 배우는 게 많아요.
1년에 50여 명을 만나니 지금까지 150여 명을 만난 셈이죠.”
그는 기억에 남는 사람이 많지만 특히 이어령 박사, 이명현 전 교육부 장관, 김희수 건양대학교 총장을 꼽았다.
“이어령 선생은 첫 방송에 모셨고 개인적으로도 존경하는 분이죠. 이명현 전 교육부 장관은 과거에 김영삼 정부 시절에 교육부 장관을 하셨던 분인데 인생 스토리가 너무 놀라웠어요. 한국전쟁 전에 걸어서 월남한 뒤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고생하시다가 검정고시로 서울대 철학과를 입학한 분이죠. 김희수 건양대학교 총장은 김안과를 만드신 분인데, 지금도 새벽 네 시에 일어나서 학교에 간다는 얘기를 듣고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죽을 때까지 연구할 게 생겼다
유인촌을 의 영원한 둘째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그가 어느새 67세라는 나이에 이르렀다는 사실이 아주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제가 공직에서 나와 다시 연극을 하면서 그런 얘기를 했어요. 지금이 전성기다.”
유인촌에게 전성기라는 개념은 철저히 연극인 유인촌으로서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말이다. 연극에서의 시간은 보통 삶의 시간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영상은 젊은 사람들이 잘할 수 있지만 무대는 달라요. 희곡 작품 자체가 일상이 아니라 어렵거든요. 그런 것들이 소화되고 공감대를 가질 수 있으려면 남자는 40이 넘어야 해요. 그 전에는 아기 같아요. 사실 40대까지는 대학생 역할을 했었어요. 성인 남자의 역할은 40대 후반에서 50대가 되어야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지금이 전성기’라고 얘기한 거죠.”
그것이 4년 전 얘기. 지금 유인촌은 또 다른 전기를 맞이하고 있다.
“지금은 개인으로서 하려 했던 일은 거의 다 했다고 생각해요. 그건 겉으로 보이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제 그동안 했던 걸 모두 지우고 연기자로서 새로운 뭔가를 다시 시작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연기 외의 다른 사업이라든지 기관장이라든지 말고요. 순수하게 내가 배우로 뭘 한다고 하면 그동안 쭉 쌓아왔던 걸로는 다 했어요. 그래서 공부를 다시 하고 있어요. 기본적으로 배우 훈련입니다. 발성부터 다시 공부하고 있어요.”
연극인 유인촌이 발성부터 다시 배운다? 납득이 되지 않는 얘기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동안 해왔던 작업이 겉으로만 보였던 거라면 이제는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것들에 집중하고 싶어요. 특히 저는 우리만의 전통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양복을 입고 있어도 한국 사람이 갖고 있는 전통의 멋이나 깊이를 체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이제부터 그런 연구를 시작하고 정리해 죽을 때까지 할 계획입니다. 수련하는 느낌으로.”
아이들에게 자아를 찾는 기회 주고파
근본으로 돌아가 새로운 길을 찾고자 하는 그는 올해부터 의미와 가치에 중점을 둔 계획을 여러 가지 세우고 있다.
“사실 극장도 내가 퇴직하고 나와서 대관료를 만원 받으며 운영했었어요. 젊은 친구들 하라고. 그걸 3년을 했네요. 올해는 청소년, 특히 소년원과 쉼터에 있는 아이들이나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자아를 찾는 기회를 주기 위해 자전거 여행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있어요. 여름방학 기간에 4박
5일 동안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라이딩 투어를 준비하고 있죠.”
그러고 보니 그는 소문난 자전거 마니아이기도 하다. 그와 자전거는 어떻게 인연이 맺어진 걸까?
“오래전부터 탔죠. 그런데 옛날에는 그냥 설렁설렁 타다가 본격적으로 타기 시작한 건 한 15년쯤? 늘 탔지만 취미 내지는 생활처럼 된 건 그 정도 됐죠. 저는 배우를 했잖아요. 연기를 하기 위해 모든 기능적인 걸 다 배워야 했어요. 수영, 자전거, 바이크, 펜싱, 검도, 스쿠버다이빙, 윈드서핑…. 다 연기할 때 필요한 것들이었죠. 그러다 보니 적당히 한 게 아니라 업계에서 알아볼 정도로 했죠. 승마도 장애물까지 할 정도였으니까. 지금은 다는 못하고 걷기, 자전거, 수영, 스키, 스노보드 정도만 하고 있죠.”
그는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어야 직성이 풀린단다. 취미도 운동도 생활 속에 깊숙이 배어 있다. 특히 걷기는 그가 여전히 좋아하면서 계속할 수 있는 취미이자 운동이다. 670km를 걸어서 종단한 경험이 있는 그는 아직도 웬만하면 걸어 다닌다. 장관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삶의 보람을 일깨운 마지막 햄릿
연극인으로서의 성공, 정치인으로서의 논란. ‘개인적으로 할 건 다했다’고 말하는 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유인촌의 삶의 그래프는 급격하다. 그가 ‘내가 잘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는 언제였을까?
“작년에 이해랑연극상 수상자들과 함께
공연을 하게 됐어요. 처음에는 ‘나는 햄릿을 하면 안 된다’고 했어요. 60대 중반 넘어선 사람에게 왕자 역할 하라고 하면 욕먹는다고. 그런데 이해랑연극상 받은 사람들이 젊은 사람이 없었어요. 윤석화가 전체에서 가장 막내였고 내가 그다음이었으니. 그래서 결국 내가 햄릿 역할을 하게 됐는데, 굉장히 책임감이 느껴졌죠. 다행히 유종의 미를 거뒀어요. 어떻게 보면 그게 저의 햄릿 역할의 마지막이었습니다. 내 연기 인생의 전반부가 으로 정리가 됐어요. 그러면서 연기하고 연극하길 참 잘했다고 처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계산하지 않는 스타일이라고 정의했다. 물질적 계산보다는 명분과 충분한 목적과 필요성이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 그가 세운 극장도 처음에는 한 달에 2500만원씩 빠져나갔는데 그때마다 다른 곳에서 일한 돈으로 메꾸면서 운영했다고 한다. 꼭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기에 저질렀다는 그의 말에서 평소의 신념과 의지를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는 내 일에 더 집중하려고 해요. 주변에 여러 가지가 연관이 되어 있는데 정리하고 있어요. 제게 섭섭한 것도 있고 아쉬운 것도 있겠지만 좀 좁히려고요. 이제 와 일을 벌이는 건 안 좋다고 생각해요. 연극도 1년이나 2년씩 구상하고 준비해서 하려고 해요. 작년에는 의도치 않게 연극 일이 많았지만, 올해는 쉬면서 지금까지의 삶을 정리하는 책을 써볼까 합니다.”
나이는 장애가 아니다
“젊다는 것은 젊어서 좋은 거예요. 그것 외에는 크게 장점이 없어요. 그러니까 늙는다는 것은 핸디캡이 아니에요.”
그는 ‘어차피 늙는 건데 (인생을) 잘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침 그가 주연과 연출을 맡았던 연극 중 톨스토이의 중편소설 를 원작으로 한 라는 작품이 있는데, 늙어감에 관한 총체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가 유난히 애착을 가진 작품이기도 했다.
“제가 를 1997년에 호암아트홀에서 초연했는데 지금까지 매번 적자였어요. 그러나 작품의 의미나 형식이 너무 좋아서 적자가 나는데도 계속 공연을 하고 있어요. 이 작품의 대사 중에 ‘중후하게 늙을 것인가 가련하게 늙을 것인가, 중후하고 가련하게 늙을 것인가’라는 말이 나와요. 그 질문을 관객에게 계속하는 거예요.”
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다. 삶을 관조하는 늙은 얼룩말을 맡았던 연기자 유인촌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간이다.
는 병든 말 ‘홀스또메르’를 통해 인간 삶을 들여다보는 작품이다. 화자인 얼룩말은 다양한 역경을 겪은 늙은 말이다. 이 얼룩말의 시각을 통해 이야기되는 사랑과 고통, 아름다움과 추함, 젊음과 늙음 등은 인간사 희로애락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예술의 보람과 감동을 알기에 놓을 수 없다
“‘인간은 자기 땅이라고 하면서 밟아보지도 않아. 자기 사람이라고 하면서 그 사람을 욕해. 내 여자라고 말하면서 다른 여자와 살아.’ 는 이런 인간의 속성을 말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어요. 관객 중에 홀스또메르가 말하는 이런 사람이 꼭 있어요. 그 사람은 나와 눈을 못 마주쳐요. 그래서 흥행은 안 되죠(웃음). 하지만 나이 들어 이 연극을 보신 분들은 공연이 끝나도 일어나지를 못해요. 자신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되는 거죠. 그리고 울기도 합니다. 저도 그 작품을 생각하면 지금도 두근두근해요.”
한번은 사업을 하다 부도를 내고 자살하려고 마음먹은 사람이 친구 때문에 를 보게 됐는데 이 연극을 본 후 죽으면 안 되겠다는 걸 깨달았다고 그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생겼다는 거지. ‘내가 꼭 성공하겠다, 그리고 당신을 후원하겠다’는 내용이었어요. 제가 얼마나 감동을 받았겠어요. 그걸 보면서 예술로서의 목적이 달성됐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그런 편지 하나 때문에 연극 일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거니까요.”
궁금했다. 유인촌은 어떤 이유로, 어떤 힘으로 연극이라는 자신의 세계를 이렇게 끌고 올 수 있었을까? 그 의문이 다소 풀리는 순간이었다.
기억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제가 같은 작품을 했는데 어떻게 늙어갈지를 왜 생각하지 않겠어요?”
그렇다. 지금의 유인촌은 그 고민의 결과다. 예술은 사람에게 화두를 던질 수 있고 그 화두를 접한 사람은 더욱 발전할 수 있다.
“운동을 하기 싫지만 취미를 갖고 싶으면 예술을 가까이 하는 게 좋아요. 일본의 단카이 세대들은 동호회가 많이 활성화돼 있어요. 그래서 박물관의 날, 미술관의 날 등을 정해서 집중적으로 예술을 접합니다. 돈을 모아서 강연회를 열기도 해요. 아주 지적인 취미생활인 거죠. 우리도 할 게 많아요.”
기자가 늘 놓치지 않고 묻는 마지막 질문, 그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지를 물었다.
“예전부터 그랬어요. 저는 기억되지 않는 게 좋다고. 가족에게도 내가 죽으면 화장해서 뿌리라고 말해뒀어요. 광대 팔자라는 게 그런 거예요. 남기지 않는 게 좋다. 연극은 순간예술이에요.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는 거죠. 저는 저를 영상으로 남기는 게 어색하거든요. 그래서 영화를 안 했어요. 필름은 50년, 70년 돼도 남는 것이라 부담스럽거든요.”
방송에 나오지 않으니 젊은 사람들은 이미 자신을 몰라서 지하철을 타도 아무 불편이 없다는 말을 하면서 그는 살짝 웃었다.
“사람마다 저에 대한 느낌을 갖고 있겠죠. 누군가에게는 방송인으로, 누군가에게는 배우로. 그냥 그렇게 각자의 나름대로 가벼이 기억에 남아 있는 게 좋겠어요.”
유인촌과 ‘홀스또메르’가 오버랩되면서 옳다 그르다 선을 긋기 전에 인생역정 겪고 마침내 거울 앞에 선 그에게 다시 오는 것과 오지 않는 것은 무엇일지 큰 의미가 없을 듯하다. 편협한 생각으로 나눴던 대화, 그끝에 알게 된 건 그가 영원한 연극인이라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