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진시황이 불로불사약을 구해오라며 서복에게 동남동녀3천명을 거느리고 가게 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실제로 제주도와 오키나와에는 서복이 다녀간 흔적으로 보이는 것들이 남아 있다. 이 이야기는 인간의 영생, 늙지 않고자 하는 영생을 대표하는 일화로 자주 인용된다. 이런 욕망에 시달리는 이들은 진시황뿐이 아니라 우리 주위에서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이들은 제주나 일본이 아닌 성형외과를 찾는다. 그래서 순천향대학교 부천병원 성형외과장 박은수(朴殷秀·48) 교수를 만났다. 글·사진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많죠. 적지 않습니다.”
바삐 수술을 마치고 나온 그에게 다짜고짜 성형외과에 시니어 환자가 많은지 물어봤다. 돌아온 대답은 예상 외였다. 아무래도 대학병원은 개원가의 개인 병원에 비해 사정이 다를까 했는데 그렇지 않다고 했다.
“정확한 통계는 자료를 봐야겠지만, 제 체감으로 시니어 환자의 비중은 한 35% 전후가 아닐까 싶네요. 젊어지거나 아름다워지고 싶어 하는 것은 나이와 무관하게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욕망이니까요. 생각보다 남자 환자도 꽤 됩니다.”
남자도 많다고? 성적 편견인지 몰라도 기본적으로 외모에 관심이 더 많은 것은 여성이 아니던가. 이 의외의 현상에 박은수 교수가 내놓은 답은 이랬다.
“성형외과 학계에서도 주목하고 있는 최근의 현상은 바로 100세 시대로의 진입입니다. 과거만 하더라도 기대수명이 짧기 때문에 노후에 어떤 질환이 나타나더라도 그저 참고 견디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본인들도 앞으로 살아야 할 날들이 많이 남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지요. 남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번째 인생을 살아가려면, 다른 사회활동을 위해서 좋은 인상과 외모가 필요하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는 것 같아요. 그래서 투자에도 과감해질 수 있는 것이고요. 성형에 대한 욕망을 나쁘게만 볼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수명이 길어진 만큼 사회로부터 받는 좋은 인상에 대한 요구 기간이 길어졌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그의 환자 중에 봉사활동 과정에서 더 나은 리더십을 얻기 위해 성형을 선택한 환자도 있었다고 했다. 이러한 변화는 학계에도 영향을 줘, 학계에서는 노화를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라, 일종의 질환으로 보고 접근하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했다. 특히 항노화 등 관련 분야에 대한 연구는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다.
박 교수는 늘어나는 시니어들의 성형을 설명할 만한 또 다른 요인으로 시술 방법의 변화와 정보를 꼽았다.
“비침습적(非侵襲的) 시술, 그러니까 째거나 꿰매지 않고 시술하는 다양한 방법들이 등장했기 때문에 큰 각오를 하지 않아도 병원을 찾을 수 있게 됐죠. 또 어르신들 사이에서도 활발하게 정보 교류가 되는 것도 한 몫하고 있습니다.”
특히 시니어들에게는 갈수록 기능적 개선과 성형의 경계가 모호해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예를 들어 눈꺼풀이 처져 느끼는 불편함을 개선하면, 단순히 시야만 편해지는 것이 아니라 외모도 개선되고, 자신감도 생기고, 그 과정에서 삶의 변화가 나타날 수도 있잖아요.”
그럼 시니어의 성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균형이죠. 간혹 젊은 여성들은 본인이 성형을 했다는 흔적을 내보이고 싶어 하는 경우가 있고, 그 이유를 알 것 같긴 해요. 간혹 중년분들도 그런 요구를 하시는 경우가 있는데, 적극적으로 이해를 구하는 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균형을 맞추는 것이에요. 시니어들의 성형은 티를 덜 내면서 인상을 밝게 하는 데 중점을 두는 것이 만족도가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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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입학하던 해 아버지는 내게 나침반을 선물하셨다. 가죽 케이스에 들어 있었다. 그때는 나침반 선물의 의미를 잘 몰랐다. 나이 오십에 들어서고 나니 하고 싶었던 말씀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떨림을 멈춘 나침반은 아무 쓸모가 없다. 타오르는 불꽃은 항상 더 높이 오르려고 혀를 날름거리며 떤다. 사람이라면 심장의 떨림이 있으라는 무언의 메시지였다. 방향 없이 나아가지 말아야 한다는 압력이었다. 지금도 그 나침반은 떨림을 멈추지 않고 있다. 나침반 바늘은 떨면서 묻는다. “떨림 없는 시간을 살고 있지 않나”라고. 선택의 순간마다 아버지의 나침반이 있었다.
지금도 심장이 떨리는 일을 찾아 공부하고 사람들을 만난다. 작은 모임을 꾸리고 그 모임이 또 다른 모임을 만든다. 느슨하지만 가느다란 연대의 끈은 놓지 않고 있다. 학교를 마친 이후에도 공부를 멈춘 적이 없지만 학위는 없다. 끊임없이 글을 쓰지만 작가 명함은 없다. 자격증 따는 일과는 거리를 두고 살아온 듯하다. 학위를 바랐다면 대학원을 갔어야 했다. 작가 명함이 필요했다면 책을 냈어야 했다. 간절히 필요하지 않았다. 상황에 따라 필요한 공부를 했고, 매일 글을 읽고 쓰는 생활이 즐거웠을 뿐이다.
떨림은 희망이다. 사막을 40년 동안 헤매면서도 유대인들이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가나안’이란 보이지 않는 희망 때문이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더 귀하게 여긴다. 목적지까지 길이 얼마나 험한지 알고 간다면 금방 지쳐버리거나 중간에서 포기할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것이 힘이 더 세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는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하는가.
오십을 넘기면서 성한 데보다 상한 데가 많아서인지 상처에 와 닿는 소금기가 자주 느껴진다. 그럴 때면 눈에 보이지 않는 희망에 대해 생각한다. 희망을 희망하는 존재를 지켜주는 것은 서로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는 일이 아닌가 싶다. 인간은 사실 입장을 바꿔 생각하기 어려운 존재다. 생각도 존재가 만든 집이고 보면 더욱 그렇다.
아이들이 어릴 때 작은 케이크를 나눠 먹으라고 주면, 두 녀석은 서로 많이 먹겠다고 다툰다. 평소에도 다툼이 일상인 형제지만 먹는 것으로 다투는 것은 딱해 보였다. 솔로몬의 해결책을 고민했다. 아무리 어린애라도 둘 다 불만을 품을 수 없는 해결 방법이 필요했다.
“네가 형이니까, 케이크를 두 조각으로 나누렴. 그런 다음에는 동생인 네가 먼저 고르렴”
이렇게 하니, 형은 기를 쓰고 똑같은 크기로 케이크를 잘랐다. 형은 자를 권리, 동생은 고를 권리를 가졌으니 불만이 있을 수 없다. 혹 불만이 있다 해도 겉으로 드러낼 수가 없다. 입장 바꿔 생각하기가 어렵다 보니 제도적으로 만든 것이 민주주의의 핵심일 것이다. 내 맘대로 하고 싶은 욕구가 통제되기 시작하니, 이 또한 나이 듦이 주는 선물이다.
인도 힌두교에서는 50세가 넘은 남자는 임서기(林棲期)라 하여 가정을 떠나 숲 속에서 혼자 사는 관습이 있다고 한다. 동네 뒷산에 원두막을 치고 혼자 산다. 그동안 자신을 돌아볼 여유도 없이 바쁘게 살았으니 자신을 돌아보고 수행하라는 종교적 의미가 있다. 물론 사바나의 수사자처럼 자손번식의 임무가 끝난 늙은 남자는 가정에 짐이 된다는 현실적 의미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평균수명 50세 사회에서 나온 종교적 관습이다. 백세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는 인생 후반전을 보다 넓고 큰 세상에서 설계하라는 유혹의 관습으로 읽힌다. 가장 강한 유혹은 자신을 돌아보고 싶은 유혹일 것이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에서 무사회 수장인 궁보삼이 숨을 거두기 전 수제자에게 일러준 마지막 수는 노원괘인(老猿掛印)이었다. 궁씨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무술 64수 중 최고 단계인 노원괘인은 바로 ‘돌아보는 것’이었다. 돌이킬 수는 없지만 돌아볼 수는 있다. 되돌아갈 수는 없지만 뒤돌아볼 수는 있다. 이것은 시간에 갇힌 인간에게 주어진 마지막 한 수가 아닐까.
뒤돌아보니 눈앞의 숫자들과 코앞의 숙제에 발목 잡혀 허우적댔다. 절망하지 않으려고 희망하는 사람들을 보지 못했다. 아니 내 절망이 더 커 보였다. 주먹을 더 불끈 움켜쥐었다. 움켜쥔 주먹을 펼치면 가진 것이 다 쏟아질까봐 두려웠다. 이제는 크게 다치지 않을 낙법도 익혔고, 좀 다친다 해도 별것 아니라는 배포도 늘었다. 펼친 주먹은 새로운 것을 쥘 수 있는 기회라는 것도 알았다.
나침반의 바늘은 아직도 떨림을 멈추지 않고 있다. 떨림의 유혹이 멈추지 않는 한 인생 후반전은 더 넓은 세상에서 시작할 수 있다. 새로운 제2의 인생을 살라는 유혹이다. 떨리는 나침반의 바늘은 느슨한 관계를 확장하라고 한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놓지 말라고 한다. 그곳이 진북(眞北)이라고 알려준다.
후반전은 어릴 적에 던졌던 막막한 인생에 대한 질문의 답을 기록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건가.’ 이 질문의 답을 구해가는 여정, 또는 그 질문을 감당해가는 과정이 아닐까. 주먹을 펼쳐 아픈 이들도 감싸면서 나간다면 전반전보다 공은 강하게 골문으로 돌진할 것이다. 백세인생 후반전의 휘슬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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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정책 컨설팅을 주로 하는 홍보컨설턴트이며 부천 놀라온 오케스트라 기획홍보이사
인체는 그야말로 신비로운 기관이라 어딘가 이상이 생기면 ‘이상 신호’를 보낸다. 그러나 그 신호를 알아채지 못한다면 그것은 무용지물이 된다. 의사들은 실제로 많은 환자들이 나중에서야 그것이 이상을 나타내는 신호였구나 하며 후회한다고 한다. 이번에 만난 홍유식(洪裕植·46)씨 역시 그랬다. 그의 몸이 두 번이나 말을 걸어왔지만,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생명이 위독한 위기를 맞이했지만, 순천향대학교 부천병원 김형철(金炯喆·56) 교수의 도움으로 정상 생활로 돌아올 수 있었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홍유식씨가 몸에 통증을 처음 느낀 것은 2014년 9월이었다. 여느 때처럼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던 참이었다. 저녁쯤 되었을 때 낯선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평소에 알고 있던 배앓이하고는 고통의 수준도, 시간도 차이가 있었다. 잠을 청해봤지만 통증은 더 심해졌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동네의 큰 병원을 찾았다.
“미치겠더라고요. 너무 아파 집 근처의 대학병원에 갔는데, 응급실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었어요. X선 촬영과 CT(컴퓨터 단층촬영)를 찍자는데, 공복이 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더라고요. 결국, 겨우겨우 지쳐 잠이 들었는데, 자고 일어났더니 씻은 듯이 나았어요. 별일 없을 것 같기도 하고, 응급실의 응대도 맘에 들지 않아 집으로 와버렸죠.” 그렇게 해프닝처럼 지나가나 보다 생각했다.
꽤 이름난 자산운용사의 마케팅 총괄로 근무 중인 홍씨는 몸도 별 탈 없어 건강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싱가포르에서 지낼 때 즐기던 골프도 이상 없이 쳤다.
다음 통증은 2015년 12월에 찾아왔다.
“연말에 집에 있을 때였죠. 갑자기 장이 꼬인 듯한 통증이 찾아왔어요. 고통이 시작되자마자 생각난 것이 1년 전 그때였어요. 안일하게도 그때 떠오른 생각은 또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지지 않을까였어요. ‘ 나쁜 요령이 생긴 거죠. 그래서 무조건 자야 한다고 생각했고, 억지로 잠들었다 일어나니 또 멀쩡하더라고요.”
하지만 나쁜 요령은 다시는 통하지 않았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얼마 되지 않아 고통이 다시 찾아왔다.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다. 올해 2월 1일 홍씨는 똑같은 부위에 또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지겠지 생각했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았죠. 다음 날 출근했는데도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죠.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이전에 찾았던 대학병원을 다시 찾았어요. 다행히 전에 촬영했던 사진들이 그대로 있어 진단에 도움이 됐죠. 담낭에 돌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병원에 도착해 병명도 알았고 치료만 받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수술 날짜가 문제였다. 병원에서 수술 날짜를 협의한 날이 2월 5일이었는데, 수술은 11일 후인 16일에나 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곧 다가올 설 연휴 때문이었다.
“명절이 있었으니까 병원으로선 어쩔 수 없었겠죠. 마음으로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몸은 이해해주지 못하는 것 같더라고요. 이 고통을 안고 열흘이나 넘게 버틸 생각을 하니 끔찍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병원을 찾던 중 김형철 교수님을 만나게 됐죠.”
김형철 교수는 그때의 홍씨를 이렇게 기억했다.
“담낭 담석이었죠. 이 담낭 담석이라는 건 담낭 안에 작은 결석이 생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평소에는 아무 문제 없다가 갑자기 급성담낭염으로 발전하는 때도 있어요. 염증이 생기는 축농증의 일종입니다. 급성괴사성 담낭염은 바로 조치를 안 하면 패혈증으로 사망에 이를 수 있는 병입니다.”
담낭 담석의 무서움은 무엇보다 통증에 있다고 김 교수는 말한다.
“옛날 할머니들이 갑자기 아팠다, 괜찮았다 하는 것을 가슴앓이 한다고 표현하잖아요? 아마 그런 경우 대부분 담낭 담석으로 봐도 틀리지 않을겁니다. 숫자로 따지면 10단계에서 9에서 10 정도의 심한 통증을 동반합니다. 이런 통증을 앓는 환자에게 며칠이나 기다렸다 수술받으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죠. 당시 홍씨는 복막염까지 의심되는 소견이었어요. 그래서 바로 수술을 진행했죠.”
홍씨는 김 교수의 신속한 조치로 제때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그때가 설날을 이틀 앞둔 2월 6일이었다. 홍씨가 김 교수를 만난 것은 행운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김 교수는 어려운 외과 수술로 꼽히는 복강경 담낭절제술을 5000건 가까이 성공시킨 명의로 꼽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뿐만 아니라 50회 이상의 간이식수술과 무수혈 간이식수술로도 병원을 알렸다.
수술은 복강경 담낭 제거 수술로 진행됐는데, 평균적인 수술 시간보다 두 배 이상 소요됐다. 담낭에 고인 고름이 생각보다 심해 시야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복강경 수술은 몸에 작은 구멍을 뚫어 카메라와 조명, 수술도구가 달린 작은 관을 넣어 수술하는 방식. 개복수술과 달리 환자 몸의 절개부위를 최소화하기 때문에 환자의 회복속도가 굉장히 빠른 장점이 있지만, 시야가 좁고 수술 부위에서 도구의 움직임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집도의의 능력에 따라 수술 성공률이 달라진다. 김 교수는 당시 수술부위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고 했다.
“환부가 고름으로 덮여 수술에 애를 먹었습니다. 담낭 제거 수술의 어려운 점 중 하나는 간에서 내려오는 총수담관이 다치지 않도록 하는 것인데, 고름과 섬유화변성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어요. 예를 들자면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는 밤에 고속도로에서 운전하는 것과 비슷하죠. 그래서 시간이 좀 더 걸리긴 했지만,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한 가지 의문이 든다. 담낭을 그냥 떼어내도 괜찮은 걸까? 담석만 떼어낼 수는 없는 것인지 질문하니 불가능하다고 김 교수는 답한다.
“반복적인 염증으로 담낭은 이미 그 기능을 잃은 상태이기 때문에 절제할 수밖에 없습니다. 담낭은 소화에 필요한 쓸개즙을 분비하는 역할을 하지만, 이것이 없다고 해서 우리 몸에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습니다. 장기적으로 약을 먹을 필요도 없고, 오래 지나지 않아 자연스럽게 몸이 적응하게 됩니다.”
우리 몸에서 생기는 담석의 종류는 세 가지라고 김 교수는 이야기한다. 담석은 성분에 따라 일반적으로 콜레스테롤 담석(cholesterol gallstone)과 색소성 담석(pigment gallstone), 혼합형 담석으로 크게 나눈다. 이런 담석이 당낭은 물론이고 간 내외의 담도에 발생하는 것을 담석증이라 부르고, 담석이 담낭에 생길 때 이를 담낭결석이라고 부른다. 담석증은 급성 담낭염이나 폐쇄성 황달, 심한 담도염의 원인이 되고, 췌장염까지 유발하기도 한다.
“과거에는 색소성 담석이 많았지만 최근에는 콜레스테롤 담석이 압도적입니다. 콜레스테롤 담석은 콜레스테롤 수치가 증가해 침전되면서 담석이 형성되는 것인데, 원인으로는 서구적인 식생활로 생활환경이 바뀌면서 나타나는 것으로 분석됩니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한정식처럼 육류와 채소를 골고루 먹을 수 있는 균형 잡힌 식생활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홍씨는 다행히 수술이 잘 마무리돼 며칠만에 퇴원할 수 있었다.
“수술 후 생활이요? 많이 바뀌었죠. 2013년 이후 운동을 끊었었는데, 다시 시작했어요. 콜레스테롤 담석이라고 해서 음식에 주의하고 있죠. 특히 곱창을 좋아했는데, 이젠 될 수 있으면 먹지 않기로 했습니다. 삼겹살처럼 기름기 많은 음식도 자제하고 있어요. 집에서는 평소 아내가 워낙 잘 챙겨줬기 때문에 큰 신경은 안 쓰고 있습니다. 이제는 몸에서 이상 신호가 느껴진다면 다시는 간과하지 않을 겁니다. 큰 교훈을 얻었어요.”
홍씨는 김형철 교수에 대한 깊은 감사의 뜻을 몇 번이나 표현했다. 설 연휴를 앞두고 수술을 하느라 김 교수가 연휴를 반납하고 병원으로 출근해 그의 수술 후 몸 상태에 신경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이런 김 교수의 모습에 홍씨의 아버지가 어느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린 감사의 글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설날 휴가를 반납하고 정성을 다하여 수술하고 설날에도 출근하여 환자를 보살피는 그의 따듯한 마음은 어디에서 유래하였을까?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자의 덕목에서 나오는 것일 게다”라고 칭송했다.
하지만 정작 김 교수는 당연한 일 아니냐며 되레 반문한다.
“외과의에게 수술환자 때문에 휴일이 반납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죠. 병원이 위치한 부천 인근은 젊은 부부들이 많이 사는데, 요즘 젊은 사람들 살기 힘들잖아요. 아파서 수술하려 해도 회사 눈치, 윗사람 눈치를 봐야 하니까요. 아픈 것도 눈치 보는 사람들에게 수술이라도 원할 때 해줘야죠. 그래서 여긴 주말 수술이 꽤 많습니다. 병원 설립자께서도 의사는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을 위한 존재라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설립자인 고(故) 서석조(徐錫助, 1921~1999) 박사는 “의료인은 삶 중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두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치료하는 가장 낮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실제로 취재가 진행된 날은 주말 오전이었는데, 병원 곳곳은 치료를 기다리는 환자들로 북적였다. 김 교수는 취재에 응한 이날 수술을 두 건이나 소화해야 했다.
이런 김형철 교수의 성향은 병원 내에서도 뚜렷이 드러나, 여러 가지 미담을 남기기도 했다. 지난 4월 김 교수는 국제진료센터 센터장 자격으로 병원과 협력관계에 있는 카자흐스탄의 알마티시 마시모프 헬스센터를 방문했다. 김 교수는 한 여자아이와 마주치게 되는데, 큰 눈이 귀여웠지만, 병색이 완연했다.
큼밧(kymbat)이라는 이름의 이 아이는 랑거한스세포 조직구증식증이라는 희귀병을 앓고 있었는데, 이 병은 백혈구의 일종인 ‘랑거한스세포’가 급증해 몸의 장기들을 침범하면서 문제를 일으키는 병으로, 특히 유아일수록 더 위험하다. 김 교수는 사연을 듣자마자 치료를 약속했고, 큼밧은 긴급 비자를 받아 아버지 카이랏(Kairat)씨와 함께 한국에 와 치료를 받고 호전될 수 있었다.
또 형편이 어려워 치료를 포기한 몽골인 근로자의 간이식을 집도한 것도 병원 내에서는 잘 알려진 일이다.
김 교수는 “국제진료센터를 맡아 외국인 환자 유치를 하고 있는데 책임감이 큽니다. 과거엔 공업이 국내 산업을 이끌었다면 이제는 의료가 그 역할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하지만 무조건 돈 많은 환자만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돈 없는 외국인도 환자니까요. 돈도 중요하지만 치료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설명했다.
경력 35년 이상의 신인 밴드가 데뷔한다. 앞뒤가 맞지 않는 말 같지만 어찌 됐든 사실이다. 이 경력 넘치는 밴드는 컨트리음악의 한 장르인 블루그래스(Bluegrass) 음악 밴드인 ‘실버그래스’. 나 와 같은 이름난 경연은 아니지만, 당당히 오디션을 통해 경쟁을 물리치고 정식 데뷔를 할 기회를 잡았다. 이 실버그래스의 다섯 멤버인 김구(金口·60), 김원섭(金元燮·60), 이웅일(李雄逸·60), 임영란(林永蘭·55), 장광천(張光天·56) 시니어 뮤지션을 만나봤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노년반격(老年反擊)’. 시니어 입장에선 좀 언짢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다소 발칙하기도 한, 아니 내가 아직 살아 있음을 보여주고픈 의욕을 불러일으킬 것 같은 이름의 행사가 얼마 전 열렸다. 노년반격은 아마추어 시니어 음악인을 발굴해 육성하기 위한 행사로, 전국 55세 이상의 시니어를 대상으로 진행됐다. 서울 우리마포복지관과 글로벌 제약사 한국에자이가 공동 주최하고 신노년연합과 한국음악발전소, 한국음악실연자연합회가 공동 후원했는데, 1차 사전 심사를 거쳐 7팀이 2차 오디션에 올라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그렇게 발탁돼 데뷔의 기회를 얻은 두 팀 중 한 팀이 바로 실버그래스다. 실버그래스의 데뷔곡 ‘첫 번째 가출’의 녹음 현장에서 이들을 만났다.
낯설지만 친숙한 블루그래스
이들이 사랑하는 블루그래스 음악은 18세기 무렵 미국 애팔래치아에 정착한 영국 이주민들의 전통음악이 토대가 됐다고 알려져 있다.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웨일스 등에서 온 발라드나 무곡을 기반으로 현악단의 음악과 북미 민속음악이 결합되며 형식을 갖추기 시작했다. 명칭은 빌 먼로가 이끌었던 밴드 ‘빌 먼로 앤드 히즈 블루 그래스 보이즈(Bill Monroe & His Blue Grass Boys)’에서 유래했으며 이들이 활동한 1950년대 후반부터 생겨났다고 한다. 대부분 곡이 피들(바이올린의 일종), 벤조, 만돌린, 어쿠스틱 기타, 더블베이스 등으로 구성된 밴드에 의해 연주된다.
실버그래스 역시 이런 블루그래스 밴드의 구성을 따르고 있다. 멤버 중 김구씨가 만돌린을, 김원섭씨는 콘트라베이스, 이웅일씨와 장광천씨는 어쿠스틱 기타, 임영란씨는 벤조를 담당한다. 다른 블루그래스 밴드와 마찬가지로 모든 멤버가 악기 연주와 노래에 참여한다.
한국인에게 블루그래스란 음악은 단어부터 생소하지만, 일단 대표적인 한두 곡을 들어보면 어떤 음악인지 금방 알 수 있다.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노래 중 하나는 1976년 조영남에 의해 발표된 ‘내고향 충청도’다. 올리비아 뉴튼존이 발표한 ‘Banks Of The Ohio’를 번안한 이 곡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가사 내용이나 멜로디 구성 등으로 인해 전형적인 블루그래스로 평가받는다. 이 곡 이외에도 다양한 블루그래스 음악이 번안되어 1970년대 이후 한국인들에게 사랑받아왔다.
동호회 덕분에 의기투합
하지만 한국에서 정식으로 블루그래스란 음악의 저변이 확대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동호인들은 1981년 의정부 장호원 캠프장에서 ‘한국 블루그래스 협회’를 창립한 것을 ‘역사적 사건’으로 꼽는다. 이때 실버그래스의 멤버이자 오랜 친구 사이이기도 한 이웅일, 김구씨도 그 현장에 있었다.
실버그래스는 2006년 개설된 포털사이트 ‘다음’ 카페 ‘한국 블루그래스 음악 클럽(cafe.daum.net/KBMA)’의 회원들로 구성됐다. 물론 이들 중 상당수는 그때 의정부 모임의 출신들이기도 하다.
사실 실버그래스의 노년반격 출전 계기는 이랬다. 오디션 공고를 본 클럽 운영자가 참가 제한자격인 만 55세 이상인 회원 중 적당한 멤버들에게 추천을 한 것. 그렇게 의기투합하여 준비 없이 경연에 나서게 됐다.
이웅일씨는 그래도 큰 문제는 없었다고 했다.
“사실 대부분 멤버가 클럽 설립 초창기 때부터 함께한 멤버이기도 하고, 여러 무대위에서 함께 즉석 공연을 많이 했던 사이라 화음을 맞추는 데는 문제없었습니다. 또 워낙에 블루그래스 음악이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특징이 있기도 하고요. 덕분에 오디션에서도 긴장하지 않고 연주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이웅일씨는 1970년대 말 라디오 방송에서 블루그래스 음악을 접했던 것이 계기가 되어 음악을 시작하게 됐다고 했다. 벤조를 배우게 된 것도 이 즈음이었다고.
“그 후 일 때문에 사우디에 1년간 있었던 적이 있는데, 그곳에선 외국으로 송금하는 것이 자유롭더라고요. 그래서 국내에선 구하지 못했던 블루그래스 악보들을 영국이나 호주의 서점을 통해서 사 모았어요. 그렇게 확보한 악보들을 동호인들과 공유하기도 했고요. 아마 국내 보급된 악보 중 상당수는 저를 통한 것일 겁니다.(웃음)”
인력개발 분야 연구원인 이웅일씨의 ‘절친’ 김구씨는 20대 후반부터 귀금속 관련 일을 해 온 사업가. 실버그래스 안에서는 만돌린을 담당하고 있다.
“만돌린을 시작하게 된 것은 아무도 하지 않으려 해서였어요.(웃음) 아무래도 기타나 벤조보다 인기가 없었거든요. 가볍기도 하고, 독특한 음색 때문에 지금은 매력에 빠져 있습니다. 만돌린은 배우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악기지만, 바이올린과 유사한 음역의 소리가 마음을 치유해 주는 힘이 있는 것이 특징이지요.”
김구씨는 서울 약수동 자신의 매장 인근에 지하 연습실을 만들어놓고, 음악연습뿐만 아니라 지역 어르신들을 초대해 봉사활동 차원에서 무료로 기타와 우쿨렐레 강습을 진행하고 있기도 하다.
각기 다른 악기마다의 매력이 원동력
김원섭씨 역시 ‘이 바닥’에서 꽤 오랜 이력의 소유자다. 블루그래스 클럽에는 음악적 뿌리가 같은 요들음악을 하다 전향한 이들이 많은데, 김원섭씨 역시 그런 사례다. 대학 시절 ‘한국 바젤 요들 클럽’을 통해 음악을 시작해, 지금까지 식지 않는 음악에 대한 열정을 자랑하는 블루그래스 애호가 중 한 명이다.
사실 노년반격에는 솔로로 지원해 최종 예선까지 올랐다가 콘트라베이스가 부족한 실버그래스에 합류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고 합류하게 됐다.
“콘트라베이스를 시작한 건 10년 정도 됐는데, 각각의 다른 악기들 소리를 감싸안으며 조화롭게 만드는 것이 매력이죠. 음악은 어깨너머로 배우는 것보다는 정식으로 익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 대학생에게 레슨을 받았고, 노래에도 관심이 많아 성악을 개인지도 받기도 했습니다. 음악은 자기관리를 할 수 있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해줘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나갈 겁니다.”
실버그래스의 홍일점인 임영란씨는 얼마 전까지 숙명여자대학원에서 음악치료를 가르쳤던 음악 전문가. 그 역시 요들을 거쳐 블루그래스를 즐기게 되었는데, 특히 벤조 특유의 음색에 빠져 본격적으로 악기 연주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했다.
“피아노와 기타는 조금씩 다룰 줄 알았지만, 본격적으로 해봐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벤조가 처음이었어요. 처음 시작할 땐 음악이 아닌 소음에 가족들의 볼멘소리도 있었지만, 50대 여성이 겪는 변화를 음악으로 극복할 테니 감수해 달라고 부탁했더니 그때부터는 잘 협조해 주더라고요. 딸은 클래식 기타 전공자이고 남편도 취미로 악기를 연주하고 있으니 어렵지 않았습니다.”
훤칠한 체형에 카우보이모자가 인상적인 장광천씨는 현재 부천에서 활동 중인 교회 전도사다. 고등학교 시절 우연히 한 강좌에 참석했던 것이 음악을 하게 된 계기가 됐다. 당시 강단에 서 있던 이는 1970년대 유명했던 블루그래스 마니아인 요들 전도사 김흥철씨. 그때만 해도 이렇게 오랫동안 음악을 하게 될지는 몰랐다고 했다.
“블루그래스 가스펠을 부르며 교회 내에서 활동을 계속했었죠. 군부대 방문이나 봉사활동 등 한 해에 70~80회 정도 공연도 했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의 뿌리는 대부분 이 블루그래스 음악에서 왔다고 추측돼요. 실제로 미국에는 블루그래스 찬송 음반도 많고요. 그래서 저도 블루그래스 가스펠 앨범을 준비 중이고, 곧 선보일 예정입니다.”
시니어들의 ‘희망’ 됐으면
물론 이들의 활동은 오디션 입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지난달 27일에 그들의 데뷔곡 ‘첫 번째 가출’이 공개됐다. 전형적인 블루그래스 곡의 형태를 띠는 이 노래는 노년반격의 프로듀서인 가수 이한철이 작곡했고, 작사는 멤버 중 김원섭씨의 가사 초안을 뼈대로 다른 멤버들이 살을 붙였다.
가사 내용은 시니어들의 어린 시절 추억을 그대로 담고 있다. 강냉이 장수를 보고 사달라고 조르다 부모님께 혼이 나 가출을 한 주인공이 결국 아버지에게 ‘아프지 않은’ 매를 맞는다는 내용이다. 멤버들은 노래를 작사하는 과정이 서로의 추억담을 꺼내놓는 작업 같지 않은 작업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30년 넘게 각자의 음악을 해 온 이들이지만, 정식 데뷔는 처음인지라 모든 과정이 새롭고 떨릴 수밖에 없다.
실버그래스 멤버들은 “노년반격을 통해 많은 경험을 할 수 있게 되어 기쁘고 설렙니다. 어릴 시절을 추억할 수 있는 우리의 노래로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시니어에게 힘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번 기회를 통해 블루그래스 음악이 보급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우리를 통해 많은 시니어들이 음악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기를 기대합니다”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이들은 “실버그래스 밴드 구성은 즉흥적인 면이 있었지만, 앞으로 오랜 기간 활동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관객들 앞에 많이 설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라며, “나이가 많아도 두려움을 가질 필요 없고, 우리도 늦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습니다”라고 전했다.
이들은 5월부터 노년반격을 통해 함께 합격한 부산 출신의 시니어 그룹 ‘바야흐로’와 함께 콘서트를 갖는 등 본격적인 활동을 펼칠 예정이다.
최근 분노조절장애(충동조절장애)로 인한 범죄가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얼마 전 초등학생 아들을 마구 때려 숨지게 하고 시신을 잔인하게 훼손한 아버지도 경찰 범죄심리분석관의 범죄 행동분석 결과 충동조절장애가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 1월에도 충동조절장애와 우울증 등 정신병을 앓던 50대 남성이 식당에서 흉기를 들고 ‘묻지마 난동’을 부리다 경찰에 붙잡혔다. 과연 이 충동조절장애는 무엇일까?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도움말 중앙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김선미 교수
흔히 일반적으로 분노조절장애 혹은 분노충동조절장애라고 부르는 이 질병을 의학계에서는 충동조절장애라고 이야기한다.
정신건강의학과에서는 방화, 절도 등 자신과 타인에게 해가 될 만한 행동을 하려는 충동을 자제하지 않고 바로 행동으로 옮겨 해결하는 경우가 반복될 때 충동조절장애라고 진단한다. 하지만 신문이나 방송에서 범죄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충동조절장애는 이것보다는 넓은 의미의 개념으로 단일 질환이 아닌 자기 조절의 어려움이 많은 대부분의 경우를 포함한다.
쉽게 이야기하면 자기 자신이나 타인에게 해가 될 수 있는 파괴적 행동을 반복하거나, 각종 상황에 대해 지나치게 분노를 폭발시키는 등 행동이나 정서적으로 자기조절이 어려운 경우를 뜻한다고 이해하면 된다.
생물학적, 사회 심리적 요인 등 복합적으로 작용
그렇다면 충동조절장애는 왜 일어나는 것일까? 현장의 의료진은 충동조절장애의 원인은 무엇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고 이야기한다. 공통적으로는 유전적, 생물학적, 환경적, 사회심리적인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추측하는 정도다.
생물학적으로는 뇌의 변연계와 안와전두엽 부위의 기능장애, 세로토닌 신경전달이 감소한 경우가 흔히 원인으로 거론된다. 또한 과거의 뇌 손상, 두부 손상, 뇌염 등과도 관련이 있다고 알려졌다. 환경적, 사회심리적으로 볼 때는 아동기에 알코올중독, 학대와 방임, 부모 간의 불화 등이 많았던 환경에서 성장한 경우 이 장애가 더 흔하게 일어난다는 연구 결과들도 있다.
실제로 초등학생 아들을 때려 숨지게 한 아버지 역시 아동기에 학대를 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부천 원미경찰서에 따르면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체벌을 많이 받았다고 진술했다.
지속적인 음주, 충동조절장애 유발할 수도
노화와 충동조절 장애는 상관이 있을까?
이에 대해 중앙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의 김선미 교수는 “노화가 직접적인 영향을 주진 않지만, 술과 같은 독성물질을 만성적으로 사용하는 경우엔 발병 가능성이 높아집니다”라고 설명하고, “섭취 기간이 늘어날수록 뇌의 기능 저하를 일으키면서 충동조절장애의 유발인자로 작용할 수 있어 위험합니다”라고 경고했다.
치매 등의 퇴행성 뇌 질환에서도 충동조절의 어려움이 나타날 수 있다. 또한, 노인 우울증의 한 증상으로서 우울감과 함께 분노와 충동 조절의 어려움이 나타날 수 있다고 한다.
특히 치매와 같은 퇴행성 뇌 질환 중에서도 전두측두엽치매는 기억력 저하보다 충동과 행동조절의 어려움, 성격변화 등이 나타난다. 이러한 특징은 초기에 더욱 두드러지는데, 이런 증상이 의심되면 진단도구로 신경인지검사와 함께 뇌 MRI(자기공명영상), PET(양전자 단층촬영) 등의 뇌 영상 촬영이 유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터넷 중독도 충동조절장애 증상
충동조절장애의 증상으로는 단지 화를 참지 못하는 것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상대에 대한 무차별적인 언어폭력이나 적대 행동도 증상 중 하나고, 폭력 행동이나 파괴적 행동, 방화, 도둑질도 이에 속한다. 특히 병적인 도박은 충동조절장애의 대표적 증상 중 하나로, 도박중독의 치료 역시 충동조절장애 치료에 기반을 둔다.
최근에 사회적 문제로 지적되고 있는 인터넷 중독이나 컴퓨터 중독, 게임 중독, 쇼핑 중독 등도 의학계에서는 충동조절장애로 보고 치료법을 연구하고 있다.
충동조절장애를 진단하는 특이한 검사법은 딱히 없는 상황. 다만 원인을 감별하기 위한 혈액검사, 뇌파검사, 뇌 영상 검사(MRI), 심리평가, 고위인지기능검사 등이 진단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예방방법 역시 딱히 알려진 것은 없다.
충동조절장애의 치료는 질환별로 차이가 있으나, 일반적으로 약물치료와 정신치료(인지행동치료, 분석적 정신치료, 지지치료, 상담 등)를 병행하는 방법이 가장 흔히 이용된다.
때에 따라서는 약물치료도 겸하게 되는데, 우울감이나 분노, 충동성 등을 조절하기 위해 항우울제, 기분 조절제, 항정신병 약물 등의 다양한 약물이 치료에 이용된다.
활발한 활동이 정신건강 유지 비결
김선미 교수는 이러한 정신건강의 질환을 예방하기 위해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활발한 활동이 좋다고 조언한다.
“시니어들이 정신건강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는 생물학적, 유전적 요인도 있지만, 질병, 퇴직으로 인한 경제력 상실, 배우자의 죽음, 신체적 능력 저하 때문입니다. 또한, 신체적 노화로 인해 불안해하거나 자아존중감이 상실되며, 가정, 사회에서의 역할 상실로 인해 삶에 대한 의미를 상실하게 됨으로써 우울해지기 쉽습니다. 가능한 한 가족을 비롯한 다른 사람과 함께 지내는 시간을 늘리고 자원봉사, 종교생활, 평생교육, 재취업 등 사회적 활동을 통해 삶에 대한 이유를 찾고자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노인대학이나 복지관 등의 시설을 이용해 꾸준히 평생교육을 받거나 취미, 운동, 종교, 자원봉사활동 등을 통해 인생의 즐거움을 찾으며 정신적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우울증 예방에 도움이 됩니다.”
좀 과장해 온 방송이 ‘먹방(먹는 방송)’이고 ‘쿡방(요리 방송)’이다. 정규 편성표를 가득 점령한 본방송에, 채널을 가리지 않고 거의 무한 재생되는 재방송까지 더하면 브라운관에서 요리하고 먹는 장면이 끊이지 않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 덕분에 이른바 스타 셰프들이 연일 미디어의 중심에서 활약하고 있다. 어떤 이는 만능 요리 비법을 선보이며 사람들을 주방 안으로 끌어들이고, 또 어떤 이는 허세 가득한 동작과 신출귀몰한 요리 기술로 대중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다.
미디어의 중심에 선 이들 대부분이 남성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심영순, 홍신애 등 여성 요리인 또는 푸드스타일리스트들의 활약이 돋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허셰프’라는 별칭으로 사랑받는 최현석을 비롯해 샘 킴, 이찬오, 레이먼 킴 등 최근의 요리 유행을 이끄는 주동력은 역시 남성들이다.
하필 지금에 이르러 이런 현상이 두드러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떤 이는 “인간의 대표적 본능인 ‘식탐’을 자극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지만 지나치게 단순한 분석이 아닐까 싶다. 식탐을 자극하는 방송 프로그램이 최근 들어 갑작스레 만들어지진 않았기 때문이다. “요리하는 남성이 여성에게 성적으로 매력적이기 때문”이라는 추측 역시 마찬가지. 요리 잘하는 남성이 여성에게 인기가 많은 현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최근 들어 유독 요리 유행이 도드라진 데는 분명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중심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옮아가는 도중에 필연적으로 생겨난 현상’이라는 분석은 귀 기울일 만하다. 남성의 도움 없이도 생활할 수 있게 된 여성들이 강한 남성보다는 모성적 남성을 원하면서 요리 잘하는 남성의 인기가 더욱 높아지고 더불어 남성들이 요리에 더 관심을 갖게 됐다는 주장이다.
가족 해체 등의 사회 불안이 이른바 ‘집밥 열풍’의 주요인이라는 설도 설득력을 갖는다. 먹고살기 힘들어지면서 남성들이 어머니가 해주는 밥을 먹을 때와 같은 편안함을 갈구하게 됐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복고주의’라는 견해도 있다. 원시사회 때부터 임신 및 육아가 여성의 몫이었던 반면, 식량 획득과 요리는 남성의 몫이었으므로 최근의 유행은 과거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이라는 것이다. 이른바 성적 분업 이론(남성과 여성의 생리학적 특징의 차이에 따라 일이 나뉜다는 학설)에 근거한 주장이다. 개인적으로는, 돌아가려는 시기와 현재 사이의 간격이 터무니없이 멀어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이런 맥락과 비슷한 주장들이 최근 유행과 더불어 곳곳에서 제기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요리에 진실로 그리워하는 것이 있다
더러는 지겨울 만도 하다. 튀기는 소리, 지지는 소리, 끓는 소리에 맛있다는 호들갑까지 더해진 천편일률적 요리 방송이 시청자들에게 쾌감만 선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백과사전이 ‘미국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저술가이자 환경운동가’라고 설명하는 마이클 폴란은 저서 에서 현대인들이 직접 요리하지 않고 텔레비전 등 미디어를 통해 요리에 심취하는 현상을 ‘요리의 역설(Cooking Paradox)’이라 지칭했다. 미디어의 영향으로 요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잘난 듯 떠들어대지만 사람들이 실제로 요리하는 시간은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폴란은 ‘1960년대 중반 이후 미국 가정에서 식사 준비에 필요한 시간은 하루에 고작 27분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또 다른 저서 에서는 “우리는 음식의 홍수에 빠져 있지만 정작 ‘진짜 음식’은 드물다. 슈퍼마켓 선반에서 ‘진짜 음식’이 사라지고 ‘그럴싸한 음식’을 가장한 가공식품이 빼곡히 들어찼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최근 요리 유행의 핵심은 손쉬운 요리, 값싼 요리, 다가가기 쉬운 요리다. 폴란은 그런 요리들을 떠받쳐줄 기둥이 그다지 깨끗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우리나라라고 다를 리 없다. 음식평론가 황교익 씨는 우리나라 특유의 ‘치맥’ 유행을 ‘값싼 육류를 제공하려는 정부와 산업계의 노림수가 대중에 통한 결과’라고 비판하고, 요리사 겸 저널리스트인 박찬일은 모 언론에 기고한 칼럼 ‘달걀의 운명’에서 달걀이 대량 생산되는 현실을 두고 ‘이 불안한 풍요가 실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지’ 불안해한다. 우리 삶에 가장 가까운 닭고기와 달걀의 현실이 이럴진대 다른 식재료는 오죽할까.
요리 방송이 주로 밤 시간대에 편성된 것에 대해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이유는 간단하다. 먹지 않아도 될 시간에 식욕을 지나치게 돋움으로써 건강상 부작용을 일으킬 소지가 높기 때문이다.
굳이 렙틴(Leptin)이니 글렐린(Glehlin)이니 하는 신경호르몬 이름을 들먹이지 않아도, 요리 방송의 부추김에 떠밀려 맥주 캔과 더불어 기름진 안주거리를 찾은 경험이 누구든 한두 번쯤은 있을 터. “이른바 ‘쿡방’ ‘먹방’의 영향으로 뇌에 내성이 생기고 더 자극적인 음식을 찾게 돼 비만 등 건강에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의사들의 진언은 괜한 걱정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런 바람을 선선하게 느낀다. 갖가지 역효과에 눈 감으려는 무책임함 때문이 아니다. 어떤 잇속이 걸려 있기 때문도 아니다. 무엇보다 나쁜 영향 못지않게 결정적으로 좋은 영향이 분명 그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남자에게 요리는 무슨 존재인가
요리 늦바람이 골프나 주식투자보다 재미있고 가치 있다고 입을 모은다. 남이 해주는 요리만 먹던 ‘상남자’들이 아내의 전유물로만 여기던 칼을 집어든 이유는 뭘까.
은퇴한 남편이 집에 돌아오는 것과 달리 중년 부부의 경우 아내는 점차 밖으로 활발하게 움직인다. 남자들의 요리는 가정 평화는 물론, 고령화시대에 대비해 반드시 익혀야 하는 필수 학습으로 회자되고 있다.
남자들의 요리는 생의 진실을 담아낸 영화처럼 따뜻하며 때로는 코끝 찡하게 먹먹하다.
결국 우리의 인생이 맵고 짜고 달고 시큼하기 때문일 것이다.
요리는 섬처럼 고립된 개인들을 잇는 역할을 한다. 누군가를 위해 상을 차리고 함께 나눠 먹는 것은 상대방의 입맛과 식습관, 식탁 위를 넘나드는 이야기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영화 의 주인공 도완득은 언제나 혼자 밥을 먹고 등·하교하며 자신의 삶에 누구도 초대하지 않는 다. 그러나 영화 말미에서 끈질기게 거절하던 반 친구의 “라면이나 먹고 가자”는 말에 “그러자”고 답한다. 그는 이제 누군가와 함께 밥상에 앉는 것을, 자신의 삶에 타인이 들어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영화 은 핀란드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주인공과 각자 상처를 지닌 채 식당을 찾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린 따뜻한 영화다. 카모메 식당은 우리나라의 분식집쯤 되는 작은 동네 식당. 세 여인은 이곳에서 시나몬 롤과 오니기리를 먹으며 각자의 상처를 치유한다.
요리를 하거나 음식을 제공하겠다는 것은 상대와 유대관계를 맺겠다는 적극적 신호다. 어릴 적부터 여기저기에서 자주 들어왔던 “한술 뜨라”는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언어 습관은 바로 그 정신에서 출발했다.
제임스 L. 브룩스 감독의 걸출한 코미디 영화 에서 타인을 거부하던 시절의 주인공 멜빌 유달(잭 니컬슨)은 홀로 식당에서 음식을 사먹기만 한다. 그러다가 이웃집에 사는 게이 화가 사이먼(그레그 키니어)을 받아들이면서부터는 중국식 수프를 나눈다. 편견에 사로잡혀 있던 주인공이 게이 화가에게 마음의 문을 열었음을 보여주는 장치로서 음식을 선택한 것은, 실로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이다. 음식에는 그런 힘이 분명히 있다.
지금의 요리 열풍에도 그처럼 명쾌한 힘이 내재돼 있다. 그 동안 우리 가장들은 나쁜 의미에서 독야청청했다. 전통적 가부장제의 영향으로 근엄함과 배타심을 구분하지 못하고 스스로 차단막을 내걸었던 이가 많았다. 시대가 바뀌었음에도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가 그로 인해 자기 고립의 함정 속으로 스스로 빠져들고 말았다.
‘삼식이’라는 말을 아시는가? 은퇴 후 삼시세끼를 부인이 해주는 식사로 해결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뉘앙스부터 천박하고 불쾌하기 짝이 없으니 바람직하지 않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생산 가능 인구(15세에서 64세 사이)와 생산 불가능 인구 사이의 비율이 2060년에 이르러 50대50이 된다는 고령화 사회에서 누구도 그 유행어의 비극에서 자유롭기 힘들다. 쉽게 말해, 한때 배달의 기수였던 남성들이 현대에 이르러 계륵 같은 존재가 되고 있는 것이다.
최근의 요리 유행은 계륵과 가족 사이에 음험하게 드리워진 차단막을 걷어내도록 하고 있다. 음식을 타인과 나누는 요리의 정신이 계륵들로 하여금 스스로 벽을 허물게 만들고 있다.
최근 요리 열풍의 핵심에 나이 지긋한 남성들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자. ‘차줌마’로 일컬어지는 차승원, ‘백 주부’라는 애칭으로 사랑받는 백종원, 중화요리의 대가라는 이연복 등은 모두 마흔을 훌쩍 넘긴 중년 남성들이다. 그들은 방송의 중심에서 너나 할 것 없이 “요리는 어렵지 않다”, “당신도 할 수 있다”고 외치면서 그 동안 요리에서 소외돼 있던 계층, 다시 말해 중년 남성들을 주방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그런 점이 오히려 쉽게 요리에 접근하고자 하는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게 아닐까.
백 주부는 자신의 요리를 세발자전거에 비유했다. 어린 아이도, 할머니 할아버지도, 자전거를 한 번도 안 타본 사람도 겁내지 않고 타 볼 수 있는 세발자전거처럼 누구나 시작해 볼 수 있는 수준이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저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는 용기를 주어 다음에는 두 발 자전거 타기로 발전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주방 안으로, 관심 속으로
최근 은퇴 전후 남자들에게 요리교실이 인기다.
실제로 서울 서초구 양재동 서초문화원의 ‘아버지요리교실’은 정원 25명으로 3개월씩 진행하는데, 은퇴 전후의 50, 60대가 주축이다. 서울대 노화고령화사회연구소와 이화여대 글로벌식품영양연구소, 순창군이 함께 시행하는 ‘골드쿡’ 프로젝트는 은퇴 전후의 중·장년층 남성들을 대상으로 한 요리실습이다. 서울특별시 양천구청이나 강남구청 등이 꾸준히 운영해온 중년 남성 대상의 ‘아버지 요리교실’ 등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남양주 시청의 ‘아버지 요리교실’, 광주광역시 농업기술센터의 ‘아버지 요리교실’ 등 최근의 요리 유행에 힘입어 개설된 아버지 대상의 요리교실 역시 하나둘이 아니다.
고양시 ‘젠틀맨 생활 요리 교실’은 55세 이상의 은퇴 남성을 두 팔 벌려 환영하는 남성을 위한 요리 교실로, 실생활에서 꼭 필요한 간단한 생활 요리법을 전수해준다. 수업 소개란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 있다. ‘남성만의 요리 교실로, 새로운 인간관계와 자아를 재정립하고 그동안 소원했던 가족들과 가까워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유익한 강좌’라고.
여기에 경기 부천시, 광명시, 고양시, 충북 음성군, 강원 영월군, 경북 칠곡군 등 군 단위에서 시행되는 남자 요리교실과 ‘시니어 요리교실’ ‘행복남요리교실’ ‘츠지원’ 같은 사설 요리 강좌까지 합치면 중년 남성 대상의 요리 강좌가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만들어지고 있다.
해외 유명 셰프를 초빙하는 경우도 있고 값비싼 식자재와 조리도구를 사용한다. 8~10명 정도의 수강생만 받아 소수 정예로 운영되는 만큼 전문직이나 높은 사회적 위치와 함께 경제적 여유가 있는 수강생들이 찾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강좌에 참가하는 남성들의 마음은 한결 같다. 가족을 비롯한 사랑하는 이들에게 자신의 요리를 대접하겠다는 것, 그래서 그들과 좀 더 가까워지려는 것이다.
요리 잘하는 최철주 전 중앙일보 논설 고문은 “나이 먹은 남자들의 요리는 치유일 수밖에 없다”며 “가족을 위해, 혹은 지친 누군가를 위해 배려와 진심을 담아 요리하는 행위 자체만으로도 가치 있다”고 말했다. 요리는 다름 아닌, 자신의 진심을 상대에게 전하는 커뮤니케이션의 강력한 한 방법이다.
마이클 폴란은 요리 방송이 요리에 대해 떠들기 좋아하게 만들 뿐 요리 자체로 끌어들이지 못한다고 역설했지만, 우리나라에서 일고 있는 요리 유행은 그와 양상이 사뭇 다르다. “요리는 어렵지 않다”는 어떤 요리인의 주장에 고무돼 실제로 많은 남성들이 요리에 도전하고 있으며, 적어도 도전하려 하고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요리는 사람들의 유대관계에 좋은 영향을 미칠 게 분명하다. 부작용을 여럿 양산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지만, 요리가 가족 또는 타인과의 벽을 허물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최근의 요리 유행을 반갑게 맞이하고 싶다.
예나 지금이나 ‘밥’은 중요한 소통 수단이다. 어느 종교 지도자는 밥을 나눈다는 것은 음식과 시간을 함께하는 것만이 아니라 미래의 꿈과 비전도 함께 나누는 것이라고 했다.
중년 남자들이 ‘먹방’과 ‘집밥’을 통해 찾고자 하는 것은 ‘맛’이 아닌 ‘정’이고 ‘온기’가 아닐까. 분명, 요리라는 행위에는 그처럼 명쾌한 힘이 있다.
{ 남자가 가도 괜찮은 요리 수업 }
양천구 ‘아버지 요리 교실’
3·6·9·12월, 1년에 4회 양천구 지역 남성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요리 강좌. 한 달 과정으로 매주 토요일 4회 수업한다. 장어구이, 들깨수제비 등 비교적 난도 있는 요리 수업을 진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초문화원 ‘아버지 요리 교실’
10~12월 3개월 12주 과정으로 진행하며, 강의 신청은 10월 31일까지 받는다. 매주 목요일 오후 6시부터 9시까지 수업한다. 단호박 밤수프부터 제육볶음, 황태찜, 연어 스테이크 등 반찬과 일품요리를 두루 배울 수 있다.
롱런아카데미 ‘아빠 요리 교실’
분기별로 2개월 8주 과정. 매주 월요반과 수요반 2회 운영한다. 두 강좌 모두 요리의 기본인 계량법과 밥 짓기로 시작해 떡갈비 같은 접대용 음식은 물론이고 생선 손질법과 찌개 끓이는 법 등 생활에 꼭 필요한 지식을 알려준다.
고양시 흰돌종합사회복지관 ‘젠틀맨 생활 요리 교실’
은퇴한 남성이 노후에 자신의 손으로 직접 요리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개설한 요리 강좌로 기본적 요리 용어부터 꼼꼼하게 알려준다. 매주 목요일 12회 수업을 진행한다.
‘빠빠라빠빠 빠빠빠 달려라 달려 로보트야. 날아라 날아라 태권브이’ 이제는 익숙한 이 멜로디. 1970년대 어린이들의 가슴에 승리의 브이를 그려 넣었다. 이제는 그 어린이들이 모두 성인이 돼 또 다른 어린이들의 아버지,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태권브이를 찾는다. 당시에는 우상, 이제는 추억이 돼 버린 태권브이. 그 역사적인 만화 뒤에는 감독 김청기(金靑基·74)가 있었다. 일흔을 넘긴 나이지만 아직까지 왕성하다. 그에게 욕심이 아닌 꿈 그리고 한국 만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내년이면 벌써 불혹이다. 사람이냐고? 그게… 사람은 아니고 키가 장장 56m에 달하는 로봇이다. 그러니까 올해 39세. 사람으로 따지면 아직 청춘 그 자체지만, 로봇들 사이에서는 원로 스타이자 대선배님인 ‘로보트 태권V’다.
지난 7월 24일은 태권브이의 39번째 생일이었다. 서울 피규어 뮤지엄W에서는 태권브이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를 마련했는데, 1층 전시장을 태권브이 캐릭터로 가득 채웠다. 그런데 점점 재미있는 상황이 벌어졌다. 태권브이가 처음 나왔을 1970년대에는 상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태권브이의 피규어와 영화 필름을 들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성인들(요즘은 ‘키덜트’라 부르는)도 보이고, 아들의 손을 잡고 온 40대 아버지의 모습도 보인다. 이들 모두 1970년대, 그 시절엔 태권브이에서 눈을 떼지 못했던 어린이들이었으리라. 이들은 한 사람을 기다리며 얼굴에 드러나는 기대감과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화백이오’라고 온 세상 사람들에게 표현을 하는 듯 베레모를 쓴 노신사가 등장하자 이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린다. 바로 ‘태권브이의 아버지’ 김청기 감독이다. 들뜬 것은 그들뿐만 아니었다. 김 감독도 들뜬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말 기분이 너무 좋아요. 이렇게 제 작품을 기억해주고 아직까지 찾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말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오니 제가 다시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 창작은 늙지 않는다
부천에 있는 작업실에서 만난 김 감독은 색다른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수묵화가 바로 그것. 그런데 특이한 것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수묵화 사이로 태권브이가 의연하게 솟아 있는 점이다. 고전과 현대의 조화. 일흔 넷의 나이에도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는 감각은 바로 꾸준한 창작 활동에 있었다.
“창작을 하는 것은 유일하게 제가 젊다고 느끼게 해주는 순간이에요. 창작과 생각이라는 것은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더 좋은 창작물을 만들기 위해 노력합니다. 창작이란 경험과 실패를 딛고 일어나야 멋있고 참신한 것이 나오니 말입니다. 요즘은 상식을 뛰어넘는 엉뚱함이 있어야 합니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히면 절대로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래서일까. 만화 감독이라는 세계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한 노력은 끝이 없다. 트렌드와 시대 흐름을 분석하는 데 시간을 아끼지 않는다. TV와 드라마, 책 등을 꾸준히 보면서 ‘왜 인기가 많은지’ 또는 ‘어떤 매력으로 대중에게 다가가는지’에 대한 분석 말이다. 이 모든 것들이 대중의 요구를 파악해 그에 맞는 창작을 하는 밑거름이 되기 때문이다.
“수묵화도 새로운 창작을 하는 재미있는 일 중 하나예요. 하지만 제 꿈은 따로 있죠. 어린이뿐만 아니라 남녀노소가 모두 즐길 수 있는 실사애니메이션 합성 영화를 만드는 것이에요. 우리나라에서도 디즈니의 같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 목표입니다.”
◇ 태권브이도 벌써 불혹이야
“저는 태권브이를 기획할 때 이렇게까지 재평가를 받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재평가 받고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을 보면 항상 뿌듯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잘 만들 걸 그랬네요.”
1960년 만화가로 입문한 김 감독. 1976년 ‘로보트 태권브이’가 탄생하기 전까지 그는 TV 광고나 프로그램 타이틀 로고를 그리곤 했다. 그러나 그가 꿨던 꿈은 그것이 아니었다. 장편 만화를 그리는 것. 이나 같은 일본 만화가 당시 어린이들을 사로잡던 시절. 대한민국 만화감독 김청기는 위기감과 절박함을 느꼈다. 일본의 문화에 우리나라 문화가 잠식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그 시절 김 감독이 기획했던 태권브이는 그처럼 대한민국 만화 감독으로서의 자존심이 달린 문제였다. 그렇게 태어난 태권브이는 일본 만화에 빼앗겼던 대한민국 만화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데 초석이 됐다. 이렇게 감독의 혼과 작가정신이 담긴 태권브이에 대한 반응이 움트기 시작하면서,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생겨났다. 밤낮없이 태권브이 작업에 몰두하던 시절이었다. 피로가 몰려와 실수로 주인공 훈이의 얼굴을 약간 찌그러지게 그린 것이다. 작은 선의 변화도 실제 만화에서는 윤곽선이 크게 보이기 때문에 꽤나 큰 실수였다. 그런데 이런 단순한 실수도 대중은 심오하게 해석했다.
“당시 피곤이 몰려와 실수를 한 것이었는데, 혹자는 ‘훈이의 얼굴이 찌그러진 것은 작가의 심오한 의도가 들어 있는 것’이라고 해석하려고 하더라고요. 이제야 고백합니다만 그것은 단순한 실수였습니다. 하하.”
◇ 1970년대와 현재
김 감독은 1970년도를 돌아보면 어찌 만화를 그렸나 싶다. 요즘은 케이블TV를 통해서 수많은 만화영화를 볼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TV조차 보급이 많이 안 됐던 시기 아닌가. 또, 그 당시 부모들의 인식은 ‘만화영화는 아이들 공부에 방해가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만화가는 사회적으로 지탄의 대상이었다. 김 감독은 그때 회의감 때문에 펜을 놓고 싶었다고 술회했다. 하지만 40년이나 지난 지금. 그 어린이들이 한 아이의 부모님이 됐다. 김청기 만화를 향유했던 그들은 이제 아이들의 손을 잡고, 태권브이가 있는 곳을 향한다.
“그 당시 어린이들을 생각하면 참으로 불쌍해요. 이렇다 할 문화 콘텐츠가 전무했으니까요. 그런데 이제는 그 어린이들이 커서 태권브이를 보는 것을 넘어 캐릭터까지 구매를 하고 있어요. 정말 감회가 새롭습니다.”
◇ 멈추지 않는 도전, 그리고 로봇
김 감독은 자신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해나가고 있다. 첨단 기술을 사용해 완성도 높은 실사애니메이션 합성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김 감독은 이런 영화를 만들기 위한 인프라가 부족했던 1980년대 실사애니메이션 합성 영화의 시초격인 를 제작한 경험이 있어 자신감도 넘친다. 아직 가제지만 제목도 정해놓았다. ‘RG로봇’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이 영화에 거는 기대가 상당하다. , 등 성인들도 좋아하는 일본 만화가 전 세계를 강타하는 요즘. 한국에서도 어린이에게만 국한된 영화가 아닌 성인도 좋아하는 만화 영화를 만들어 보겠다는 심산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만화영화는 너무 어린이들에게 편중돼 있는 실정입니다. 이제는 그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타깃을 조금 더 다양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년 여름 개봉을 목표로 ‘RG로봇’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저는 시나리오와 기획, 스토리보드 구성을 맡고 있죠.”
김 감독의 욕심은 끝이 없다. 그러나 만화에 대한 욕심이 열정으로 보이는 것은 김 감독의 깊은 고민이 그 꿈에 비치기 때문일 것이다.
“기자님, 이젠 아파트 중개 안할렵니다!”
의외였다. 그는 지난 20여년간 아파트만 취급하던 분양 마케팅 전문가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고급 아파트나 주상복합 주택 전문 컨설턴트를 겸하고 있기도 했다. 그런 그가 아파트 분양 시장에서 손을 떼겠다니. 처음엔 귀를 의심했다. “그럼 앞으로는….”이라는 기자의 질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의 입에서 '단독주택 리모델링'이라는 말이 튀어 나왔다. 낡은 집을 새로 고쳐 주거의 질을 높이는 것은 물론이고 자산가치도 크게 올라 돈도 벌수 있는 신종 재테크 수단으로도 손색이 없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시공 전문가부터 관련업계 대학교수까지 같이 사업할 팀원들을 모시고 있다고 했다. 이쯤되면 요즘 확실히 핫(HOT)하게 뜨고 있는 최고의 부동산 재테크 아이템일 것이라고 직감했다. 그래서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또 나섰다. ‘단독주택 리모델링’ 실제 사례를 통해 성공 노하우를 전해드리고자 한다.
① 시세차익형 “무조건 싸게 사라”
과연 단독주택 리모델링으로 돈을 벌 수 있을까. 아까운 시공비만 고스란히 날리는 것은 아닐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오히려 시세차익으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적지 않다. 하지만 핵심포인트가 있다. 그 단독주택을 일단 얼마나 싸게 매입하느냐가 관건이다.
단독주택 전문가에 따르면 단독주택도 지역별로 그 지역에 알맞는 대략적인 시세만 존재하지 아파트 시세처럼 딱 떨어지는 시세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노후한 정도가 천차만별로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발품을 파는 만큼 낡고 허름한 주택을 얼마든지 싼 가격에 살 수 있는 기회가 곳곳에 존재한다. 이렇다보니 만약 낡고 노후한 단독주택을 시세보다 크게 싼 가격에 사서 리모델링을 통해 깨끗하게 포장(가치 상승)한 뒤 매도하면 리모델링 비용을 빼고도 시세차익을 바로 거둘 수 있는 곳이 적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대지가격 외에 건물 가격은 거의 없는 주택이라면 금상첨화다. 이렇게해서 돈을 벌수 있다는 입소문이 돌자 수도권에서 거의 쓰러져가는 낡은 단독주택만 사러 다니는 전문 투자꾼이 나타나기도 한다는 것이 현지 부동산 중개업소 관계자의 전언이다.
안양에 사는 박웅구(가명·45)씨가 바로 그런 케이스다. 리모델링 비용을 치르고도 그가 당장 손에 쥘수 있는 시세차익이 1억원에 이른다. 사연은 이랬다. 그가 안양에서 거의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낡은 2층짜리 단독주택을 1억5000만원에 사들인 것이 지난 연말. 박 씨가 계약하기 전 이 주택은 5년간 사람이 살지 않아 최소한의 관리는 커녕 건물이 서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노후돼 있었다. 이렇듯 너무 낡아 있다보니 매입하려는 이가 전혀 없었고 집값은 뚝뚝 미끄러져 내려갔던 것. 그는 “거의 쓰러져간다는 표현이 걸맞다”며 당시 상황을 전했다. 주변 주택시세가 3억5000만원인데 1억5000만원에 계약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는 리모델링 공사비로 1억원을 투자했다. 박씨의 투자비가 주택 매입가를 포함해 2억5000만원인 점을 감안하면 1억원에 이르는 시세차익을 거둔 셈이다. 주변 부동산 관계자는 “주변 아파트 시세가 3억9000만원을 호가한다. 리모델링으로 단장했으니 주변 시세만큼은 충분히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같은 시세차익은 고급 단독주택도 마찬가지다. 금액자체가 크다보니 오히려 더 많은 시세차익을 거둘 수 있다. 예전에는 고급빌라나 도시형생활주택을 짓는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최근 상황이 바뀌고 있다. 주택공급 과잉을 비롯해 경기침체로 인해 고급 단독주택 시장도 리모델링 바람이 불고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여기서 관건은 대지가 크고 오래된 고급 단독주택을 고를 수 있느냐다. 단독주택 리모델링은 건물가격은 거의 없고, 땅(대지) 가격만 남은 단독주택일수록 재테크 측면에서 리모델링 효과를 크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서초구의 한 고급단독주택 단지에 살고 있는 박달수(가명·60)씨. 그는 극심한 부동산 경기 침체에도 자신이 살고 있는 단지 주택 가격이 하락하지 않은 점에 주목했다. 다른 아파트나 고급 주택들은 가격이 추풍낙엽처럼 곤두박질치는 데도 그의 단독주택 가격은 별반 영향을 받지 않고 있었던 것. 궁금증이 발동한 박씨. 그의 지인과 부동산 전문가 의견을 들어본 결과는 비결은 넓은 대지면적에 있었다. 오래된 주택일수록 땅지분이 많아 주택 가격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 오히리 리모델링으로 건물가격까지 높이면 시세차익을 볼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시세가 40억원에 이르는 낡은 주택에 3억5000만원을 투입해 리모델링에 나섰다. 그결과 최근 시세가 50억원을 호가한다. 박씨는 “처음엔 초기 투자비용이 부담됐지만 리모델링으로 오히려 돈을 벌게 됐다. 당장 팔 생각은 없지만 주변 낡은 주택보다 분명 좋은 가격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② 임대수익형 “자식 창업이나 증여용으로 활용”
임대수익도 쏠쏠히 올릴 수 있다. 단독주택을 상가주택으로 증축하거나 리모델링하면 큰 무리없이 월세 등 임차료 수익을 거둘 수 있다. 물론 구청 인허가 등 관련 절차가 밟긴 해야 한다. 하지만 보통의 경우 가정용 정화조를 상업용으로 늘리는 공사를 하는 수준에서 절차가 마무리된다. 정화조 공사 필증을 리모델링 건축사 사무실에 전달하면 알아서 관련 절차를 밟아주는 게 대부분이다. 도로 이격거리나 주차장 등 인허가 절차가 상대적으로 까다로운 신축보다 훨씬 간결한 셈이다.
최성관(가명·65)씨는 살고 있던 서울 돈암동 6억원짜리 아파트를 팔기로 했다. 대신 은평구 역촌동에 대지 330㎡규모의 2층짜리 단독주택을 같은 가격에 매입했다. 30대 초반 나이에도 결혼도, 취업도 못한 큰 딸을 위해서다. 그는 딸이 단독주택 2층에 카페를 차릴 수 있도록 배려해주기로 했다. 전체 연면적 165㎡가운데 2층 면적이 66㎡로 넓지는 않지만 카페를 차릴 경우 월 400만~500만원의 수익을 올릴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월세도 최대한 저렴하게 받아 수익을 내는데 보태도록 하기로 마음 먹었다. 딸이 당장 먹고 살 걱정은 덜어주고 싶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더욱이 상속이나 증여도 감안해서 가게 명의도 딸에게 넘겨줄 생각이다. 최 씨는 “1억5000만원 시공비가 만큼 딸에게 투자하는 셈이다. 기존에 없던 마당도 생기고 하니 어찌보면 살기는 더 좋다”고 말했다.
서초동 서래마을에 살고 있는 서일택(가명·68)씨. 오래된 2층 낡은 집(13억원)을 고쳐 노후 임대수익용으로 활용하기로 했다. 특히 서씨는 1층 임대계약할 카페 콘셉트까지 정해놨다. 딱딱한 주상복합 상가나 식당이 식상한 만큼 탁트이고 여유로운 지중해식 콘셉트으로 운영하는 사업자에 임대주기로 했다. 보증금 1억원에 월세가 900만원에 이르지만 워낙 카페 수요가 많은 곳이라 벌써부터 가게를 달라는 사업자들이 줄을 섰다. 서씨가 오히려 임차인을 고르기만 하면 되는 상황인 것. 뿐만아니다. 반지하도 반전세(보증금 1억원, 월세 750만원)에 세를 놓기로 했다. 2층을 서씨가 거주용으로 활용한다고 해도 1650만원에 이르는 월세수익을 올릴 수 있는 셈이다. 1억5000만원 리모델링 비용은 보증금(2억원)으로 해결이 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구상이다. 실제 방배동 서래마을 같은 경우 주택은 물론 카페 등 상권 임대 수요도 많아 연간 수익률이 10%를 웃도는 사례도 적지 않다.
서씨는 “옆 동네(반포동) 30평형대 아파트가 16억원이 넘는다. 여긴 3층짜리 건물에 마당이 있는데도 13억원이면 주택을 구입할 수 있다. 게대가 임대수익도 올릴 수 있어 일석이죠 효과”라고 말했다.
투자 컨설팅 전문가에 따르면 자산가들은 2층짜리 단독주택을 상가주택으로 용도 변경해 4층짜리 상가로 증축하길 원한다. 4층은 본인이 살면서도 1~3층을 임대를 줘서 임차수익을 거둘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해선 안될 사안이 있다. 단독주택을 리모델링하는 경우는 정화조 공사 등 간단한 시공필증만 있으면 간략하게 인ㆍ허가 절차를 밟을 수 있지만 증축의 개념이 들어가면 얘기가 달라 질 수 있다. 특히 해당지역이 문화재 보호지역 등 규제로 묶인 지역이라면 더욱 그러하다는 것. 따라서 투자를 결정할 때 직접 발품을 팔고 구청 등에 직접 확인하는 꼼꼼함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반대로 지역개발 호재가 터지면 용도 변경이 수월해져 부동산 자산 가치가 오를 가능성이 크므로 직접 컨설팅을 받아보며 정보획득에도 힘을 쏟는 노력이 필요하다.
③ 게스트 하우스형 “홍대 등 최고 상권서 발품 팔아야”
단독주택 리모델링으로 돈버는 법은 또 있다. 바로 개조한 주택을 게스트 하우스로 활용하는 것이다. 은행지점장을 은퇴한 양문기(가명·58)씨가 바로 그랬다. 제2 인생을 살기 위해 최근 중고차 무역업을 하던 양씨가 우연히 중국인 등 외국인들과 어울리게 되면서 게스트 하우스라는 새 아이템을 알게 된 것. 여기에 한류바람이 계속 불고 있다는 점도 그가 외국인 상대 숙박업에 뛰어들게 계기가 된 셈이다. 그는 외국인들이 선호하는 홍대 인근 상수동에 최근 10억원짜리 단독주택을 매입했다. 원래 유치원 건물로 쓰던 주택이었지만 영업이 안되는 터에 저가에 매물이 나온 것을 그가 급매물로 잡은 것이다. 관광객을 받을 수 있도록 커다란 방 8개(수용인원 4~8명)로 개조하는데 투입한 비용(리모델링)이 1억8000만원이었다. 이에 총 투자 비용은 11억8000만원.
그러나 이제 그는 돈 벌일만 남았다는 판단이다. 외국인 관광객 한명당 5만원의 숙박료를 받는다는 가정하에 방 하나에 최소 4명만 받는다고 쳐도 20만원을 수익이 가능하다. 방이 8개인 점을 감안하면 하루에 160만원, 한달에 4800만원에 이르는 매출을 올릴 수 있다. 이렇게 1년이면 6억원에 이르는 돈을 손에 쥐게 된다. 30% 정도를 운영비(약 2억원)로 지출하더라도 대략 4억원은 순이익으로 남길 수 있다. 물론 공실이 없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지만 국내 최고 상권 중 하나인 홍대 인근 지역인 점을 감안하면 가능하지 않은 일도 아니다. 충분히 승산이 있는 투자가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양씨는 “펜션보다는 미래가 유망한 중국인 등을 상대로 영업을 하는 게스트하우스가 시장에서 먹힐 것으로 봤다. 무역업으로 해외사정에 밝아 앞으로 트렌트를 잘 반영한다면 성공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④ 셰어형 “지인들끼리…주거비용 아낀다”
또다른 틈새유형이 바로 셰어형이다. 특히 전세난에 허덕이는 신혼부부들이 선호한다. 낡은 단독주택을 사들여서 1층과 2층을 나눠서 2세대가 같이 마당있는 집을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 지인인 신혼커플들이 함께 수도권 인근에서 노후한 주택을 리모델링해 함께 공유주택으로 활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같은 돈을 주고도 보다 훨씬 넓은 평수에서 살면서 내집을 소유하면서 전세 걱정도 날릴 수 있기 때문이다.
윤현우(가명·33)·박은혜(가명)씨와 송상범(가명·33)·최은숙(가명)씨 신혼부부 커플이 그런 케이스다. 윤씨와 송씨가 서로 초등학교 시절부터 절친인 까닭에 커플시절부터 어울려 다니다가 또 비슷한 시기에 결혼하게 되면서 아예 같이 살기로 결정한 것. 이들이 선택한 지역은 부천 중동. 썩음썩음한 대지면적 2층짜리 단독주택을 계약한 가격은 3억원. 여기에 들어간 리모델링 시공비는 1억5000만원이다. 총 4억5000만원에 이르는 투자비는 두 커플이 각각 2억2500만원씩 나눠 부담했다. 1층(121㎡)은 윤씨 커플이, 2층(115㎡)은 송씨 커플이 사용하기로 했다. 이들 커플들은 서울은 물론 수도권에서 20평형대 전세 아파트도 얻기 힘든 금액으로 30평대 주택을 각각 전세가 아닌 소유개념을 주거하게되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단독주택은 노후도별로 가격편차가 심한 만큼 오래된 집(구옥)을 싸게 사는 것이 투자 포인트라고 말한다. 여기에 낡은 주택을 리모델링하는 점을 감안해서 단순 인테리어가 아닌 공간활용도까지 고려한 시공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정진화 뉴마이하우스 대표는 "재건축이나 상가 등 시장은 이미 포화단계에 접어들었다. 반면 아직 같은 지역 내에서도 가격에 편차가 존재하는 단독주택은 신종 재테크 수단으로 주목받기에 충분하다"고 강조했다. 다만 "단순히 마감재를 바뀌는 정도의 작업으로는 리모델링 효과를 볼 수 없다. 구조보강까지 함께 작업해야 하므로 전문 업체에 맡겨 부실 시공이 없도록 해야한다"고 말했다.
뭘해도 톡톡튀는 대한민국 1% 슈퍼 울트라 부자들. 하지만 보통사람들이 일상에서 그들을 알아채기란 쉽지 않다. 슈퍼갑부들은 카멜레온처럼 보호색을 띠고 몸을 은신하거나 아니면 아예 군중들이 모이는 대중적인 장소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브라보 마이 라이프 독자들은 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사생활을 무척이나 궁금해한다. 그래서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직접 나서 슈퍼갑부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취재해봤다.
◇대기업 2ㆍ3세대들의 럭셔리 물물교환
자산이 1000억원이 넘나드는 슈퍼리치들은 대개 미술품(그림)을 좋아한다. 포르셰나 BMW 등 고급 자동차는 이미 모두 섭렵했고 명품패션도 모두 경험해 본 까닭이다. 차원이 다른 럭셔리 상품에 눈길을 돌리는 셈이다. 게다가 희귀 그림 등 안전자산인 고가의 미술품은 오래 묵혀둘수록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르기도 하는 데다 자식에 상속할 경우 세금을 피하는 용도로도 활용할 수 있어 더 인기가 높다.
슈퍼리치들이 자신의 저택에 미술품이나 골동품을 보관하는 방을 따로 마련하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그래서 일까. 극소수 이너서클(inner circle) 문화에 익숙하고 이를 즐기는 슈퍼갑부들은 자기들끼리 희귀 미술품과 고급주택을 맞교환하기도 한다. 각자의 이해관계가 맞닥뜨린 결과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 3세인 유종팔(45ㆍ가명)씨가 그런 케이스였다. 수년전 서울 강남구에 25억원을 호가하는 고급주택을 사들인 그는 최근 이 집을 처분해야 했다. 당시엔 여자친구와 단둘이 조용히 지내기 위해 강남의 한 고급주택가 빌라를 선뜻 구입했지만 최근 결별하며 필요 없어진 것. 이 와중에 평소에 막역하게 지내던 VVIP마케터가 희귀 미술품을 가진 슈퍼리치를 연결해 줬고 강남집과 바꾸기로 결정했다.
유씨는 "희귀 그림 주인이 이 분야에 잔뼈가 굵은 대가인 것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딱히 현금이 필요하지 않은 상황이라 그림과 교환했다. 세금을 아낄 수 있다는 점도 고려했다"며 "앞으로도 예술품들을 모아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5000만원짜리 경주마 타는 거부도(巨富), 경주마에 투자로 벌어들인 돈이 10억
부동산개발업으로 1000억원대 슈퍼갑부 클럽에 가입한 김봉갑(70ㆍ가명)씨. 5년전부터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리던 그는 요즘 달고살던 수면제를 단방에 끊었다.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서러브레드 경주마를 타면서 부터다. 사연은 이랬다.
2009년 심장발작으로 전신마취 수술 후 구사일생으로 생명을 건진 김씨. 죽을 고비는 넘겼지만 이후 찾아온 지독한 불면증이 그를 괴롭혔다. 수면제 복용은 당연하고 불면증 클리닉 치료까지 받아봤지만 모두 허사였다. 하지만 지인의 권유로 경기도 부천 인근 승마장에서 경주용말을 타고 나선 밤 9~10시를 넘기지 못한다. 그는 벌써 집으로 돌아오는 차안에서부터 졸기 시작한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경주용말을 타면 낙마에 대한 걱정 때문에 몸과 정신(멘탈)이 바짝 긴장을 한다. 때문에 말을 타고 내리면 몸의 긴장이 갑작스레 풀리면서 피로감이 몰려와 꿀잠을 잘수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말을 타는 자체가 굉장한 체력을 요구하기 때문에 곯아 떨어지는 것이 시간문제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경기도에 한 승마클럽 회원인 그는 요즘에도 일주일에 두세번씩 경주마에 몸을 싣고 클럽 인근 갈대밭으로 갯벌로 내달린다. 뿐만 아니다. 그는 마주 명함까지 팠다. 지금까지 경주마에 투자로 벌어들인 돈이 10억원에 이른다. 손익을 계산해보면 투자금 대비 아직 마이너스이지만 경주 대회 결과에 따라 돈을 더 벌수도 있는데다 상위랭크한 말들도 있어 낙담하지 않는다. 말들 덕분에 지독한 불면증과 이별한 것만 생각해도 말은 여간 효자가 아니다. 더욱이 마주 동호회에서 대기업 임원을 비롯해 전직 장관, 장성 등 고급 인맥도 쌓을 수 있었다. 주말마다 마방을 찾아 자식같은 말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도 그는 그런 고마움의 표현이라고 보면 된다고 했다.
◇전 재산 기부하는 젊은 갑부 "또 벌면 되지요"
슈퍼리치를 상대하는 시중은행 PB팀장들에 따르면 돈이 많은 부자들도 5000원짜리 점심값을 아낀다. 그 돈을 아껴서 다시 종잣돈을 만들어 100억원대, 200억원대 300억원대 등 순차적으로 부자 클럽에 가입하게 된다는 것이다. 역시 지독하다라고 할만큼 근검절약하는 사고방식과 습관이 그들을 부호의 위치로 올려준 셈이다.
하지만 기부할 땐 다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수십억원에서 많게는 수백억원에 이르는 엄청난 재산을 재단 등에 선뜻 기부하기도 한다. 이런 경향은 특히 나이가 젊거나 IT(정보기술)계열에 몸담도 있는 젊은 갑부들에게서 더 강하게 나타난다.
국내 한 IT기업에서 임원직을 맡고 있던 박웅구(48ㆍ가명)씨가 그런 케이스다. 그의 재산을 관리하던 담당 PB에 따르면 100억원에 이르는 회사 주식을 보유하고 있던 그는 사실상 전 재산을 한 재단에 기부했다. 자신이 보유한 주식 모두를 그 재단에 기부하고 나니 박씨에게 남은 재산이라곤 분당의 아파트 한 채와 자동차가 전부였다고. 특히 그 엄청난 거액을 기부하고도 그는 무덤덤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박씨는 "나는 여전히 회사에서 다시 돈을 벌 수 있다.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게다가 그 회사에서 주식을 재단에 기부한 임원들이 서너명 더 있었다고 한다. 그의 담당 PB는 "기부로 인해 자신의 전재산을 내놓는 데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만큼의 부를 이룬 슈퍼리치는 역시 일반인들과 멘탈은 물론 가치관이 많이 다르다는 점을 새삼 느꼈다"고 말했다.
슈퍼갑부는 신변노출을 꺼리다보니 괴이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 특히 보통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야할 때 낡은 차를 타고 가기도 하고 일부러 헌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기도 한다. 자신이 고액자산가임을 숨기기 위해서다. 심지어 고급주택의 모델하우스(견본주택)에 15년 이상된 국산 구형 자동차를 끌고가 문전박대를 당하기도 한다. 이에 그들을 제대로 알아보는 것도 슈퍼리치 마케터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