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속에서라도 보고 싶다.”
열애에 빠진 젊은이들이 막 헤어진 연인을 돌아서자마자 보고 싶다고 할 때, 또는 반백의 불효자가 이미 저세상으로 가신 부모를 뒤늦은 후회와 함께 애타게 그리워할 때, 또는 어느새 망백(望百)의 나이가 된 이산가족이 고향에 두고 온 부모 형제를 죽기 전 단 한 번만이라도 만나고 싶다며 눈물을 쏟을 때나 쓸 법한 간절한 염원을 꽃말로 가진 야생화가 있습니다.
일 년 중 가장 더운 7월 불볕더위에 그늘 한 점 없는 습지에서 불화살처럼 뜨겁고 강렬한 여름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순백의 꽃을 피우는 해오라비난초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키는 15~40cm로 그렇게 작지는 않지만 녹색의 줄기마다 3~6장씩 달리는, 너비 3~6mm 길이 5~6cm의 잎 등 전초가 그렇게 풍성한 편은 아니어서 눈길을 끌지 못하는 데 반해, 줄기 끝에 1~3개씩 달리는 흰색 꽃만큼은 누구나 보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독창적인 관상미를 뽐냅니다.
“하~ 알 수 없는 조화로다.” 몇 해 전 처음 해오라비난초를 만나고 집에 돌아와, 몇 시간 전에 담은 사진을 컴퓨터 모니터에 올리니 흰 새들이 날아다닙니다. 분명 카메라에 꽃을 담아왔는데, 꽃은 온데간데없고 명품 고려청자에 새겨진 학을 닮은 새들이 흰색 날개를 활짝 펴고 우아하게 춤을 추니 ‘알 수 없는 조화’라고 혼잣말을 했던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길이 3cm의 꽃은 2개의 곁 꽃잎과 하나의 입술 꽃잎으로 이뤄졌는데, 특히 세 갈래로 갈라지는 입술 꽃잎이 좌우 날개를 퍼덕이며 비상하는 백로(白鷺)를 연상케 하며 꿈속에서라도 다시 보고 싶은 강한 열망을 낳습니다. 그리고 새를 닮은 꽃의 형태에서, 다소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바로 해오라비난초라는 이름이 유래한다고 식물학자들은 말합니다. 즉 ‘해오라비’는 백로와 같은 왜가릿과의 새인 해오라기의 경상도 사투리로, 해오라비난초란 해오라기난초의 오기로 봐야 한다는 것. 그런데 해오라비를 해오라기의 지방 사투리로 인정한다 해도, 해오라기는 머리와 등이 검고 통통한 게 순백의 해오라비난초 꽃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온몸이 희고 날렵한 ‘백로난초’라는 이름이 더 적확했겠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아무튼, 중·남부 지역의 양지바른 습지에서 한여름 꽃을 피우는 해오라비난초는 우리 땅에서 자라는 야생 난초 중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관상미가 뛰어납니다. 다만 자생지가 불과 몇몇 곳에 불과한 희귀종인 데다, 꽃이 피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숱한 이들이 찾아 순식간에 자생지가 파괴되기 일쑤여서, 각별한 보호 대책이 요구됩니다. 실제 몇 해 전 수십 송이가 한꺼번에 피어 전국의 야생화 동호인들이 줄지어 찾았던 자생지를 그다음 해 찾아갔다가 단 한 송이의 꽃도 보지 못했습니다.
발길을 돌리면서, 자칫 잘못하다가는 꽃말처럼 꿈속에서나 만나게 되는 것 아닐까 걱정을 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세계적으로도 우리나라와 일본, 중국에만 분포하는데, 중국에는 자생지가 단 한 곳밖에 없고, 비교적 개체 수가 많은 일본에서도 무분별한 채취로 멸종위기를 맞는 등 국제자연보전연맹(IUCN) 국가 단위 멸종위기종 A급으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Where is it?
멸종위기식물 2급으로 지정, 관리 중인 해오라비난초는 경기도·강원도·경상남북도에 최대 200개 개체가 자생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몇 해 전 수원 칠보산의 한 습지에서 꽤 여러 개체가 꽃을 피웠으나, 이후 크게 줄어들자 애호가들이 자발적으로 보호 철망(사진)을 두르기도 했다. 인근의 또 다른 자생지에선 수년째 발견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야생에서 보기 어렵다고 실망하긴 이르다. 광릉 국립수목원 등 여러 식물원에 가면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경남 합천군에선 몇 해 전 해오라비난초에 비해 개체가 크고 꽃이 많이 달리는 큰해오라비난초가 자생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김인철 야생화 칼럼니스트
서울신문 기자로 29년 일했다. '김인철의 야생화산책(ickim.blog.seoul.co.kr)' 블로그를 운영 중이다. '야생화 화첩기행' 저자.
금년은 유래 없는 10일간의 추석 명절 휴일로 국민들은 긴 휴식의 시간을 맞이하게 됐다. 텔레비전에서는 연일 젊은 사람들이 해외여행으로 빠져나갈 것이라는 뉴스를 내보낸다. 해외여행을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지만 명절을 중시하는 어른들에게는 괘씸한 젊은이들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우리 국민 가운데는 명절만 되면 매년 두 번씩 반복되는 교통체증을 겪으면서도 성묘를 하기 위해 고향을 찾는 사람이 많다. 꼭 성묘가 아니더라도 오랫동안 보지 못한 가족과 지인들을 만난다는 즐거움으로 고향을 찾는다. 그런데 명절이 끝난 후에는 부작용도 심심찮게 나타난다. 가족 간 갈등이 표출되기도 하고 이혼율이 급격히 높아진다는 통계도 보인다. 어찌된 일일까? 즐거운 명절이 행복으로 연결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다시 한 번 더 명절의 의미를 되새겨봐야 한다.
명절은 오랜 전통을 계승하면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그 속에는 우리 민족이 가진 특성과 농경문화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계승과 소멸을 되풀이하면서 전통은 우리 앞에 서 있다. 관혼상제를 중시하던 문화를 돌아보면 지금 우리의 전통이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관례는 단발령을 계기로 자취를 감춰버렸고, 혼례는 서양식으로 대부분 진행되고, 상례 역시 장례식장이라는 장소를 설치해 상조회사에서 대신 치루고 있다. 그나마 남은 것이 제사인데 그 역시 원형이 변형되고 있다.
이번 추석 명절에도 조상들의 산소를 찾아 성묘를 하고 차례를 지낼 것이다. 그런데 농경사회에서 만들어진 성묘의 풍습은 급속한 도시화와 핵가족화로 인해 변화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장례 방식이 매장에서 화장으로 옮겨가면서 묘지 문제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지 오래되었다. 이러한 형태로 진행되면 성묘를 가는 사람들도 줄어들 것이고, 한 세대만 지나면 성묘 자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70~80세가 넘은 어른들에게는 목숨보다 더 중요한 일이 조상의 묘를 돌보고 제사를 지내는 일일 텐데, 그 후손들은 그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마음도 있고, 심지어 손자 세대로 가게 된다면 이마저 사라질 처지에 놓여 있다.
변화는 자연스런 이치일지도 모른다.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고,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해야 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고 옳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과거에서 현대로, 현대에서 미래로 변화하는 것을 쉽사리 인정하지 못하는 기성세대에게는 성묘가 사라진다는 사실이 매우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요즘에는 제사를 언제 지낼 것인가를 두고 설왕설래하는 집안도 많다. 과거에는 늦은 밤 시간에 시작해서 새벽에 끝났지만 요즘에는 직장 문제로 늦은 시간까지 제사를 지내는 일이 불편해서 제사시간을 바꾸는 경우가 있다. 만약 시간을 바꾸지 않으면 다음 날 결근을 하거나 휴가를 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제사를 지내는 일 자체가 후손으로서의 의무감 이외에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심지어 제사 절차나 상차림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제사를 지내지 않거나 다른 종교 시설에 모시겠다고 호언장담하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제사를 지내기 싫어서 종교를 바꾸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씁쓸할 뿐이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 정말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전통을 지키기 위해 성묘의 방법을 바꾼 가족이나 문중도 많다. 흩어진 조상님들의 산소를 찾아 성묘하려면 많은 시간이 소비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제는 조상들의 산소를 한곳에 모아놓고 제사를 지내거나 성묘를 하는 가족이 늘어나고 있다. 불과 30년 전만 해도 용납될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은 이러한 문제를 두고 심하게 비난하는 사람은 없다. 성묘나 제사가 사라지는 것보다 오히려 어떠한 방법으로든 지켜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전통을 지키자니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고, 전통을 버리자니 불효자라는 소리를 들을 것 같은 현실 속에서 누구나 진퇴양난의 고민을 할 것이다.
조선시대의 예학자였던 신의경 선생은 개장(改葬)을 논의하면서 “옛날의 개장은 분묘가 어떤 이유에서 붕괴되어 시신이나 관이 없어질 우려가 있을 때 하는 것이었으나, 요즈음에는 풍수설에 현혹되어 아무 이유가 없이도 천장(遷葬, 천묘)을 하는데, 이것은 심히 잘못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장(移葬)이나 개장은 특별한 이유 없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이며, 이것은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훼손되었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하지 않아야 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집안이 번창하기를 기대하면서 조상의 묘를 함부로 이전하거나 개장하는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조상을 한곳에 모시고 성묘를 하는 것은 부득이한 선택일지 모른다.
과거 매장하던 풍습에서 화장하는 풍습으로 바뀐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지만 이제 70% 정도의 국민이 화장 방식을 선택하고 있다. 최근에는 시신을 화장해 그 유골을 그릇에 담아 봉안당(奉安堂)에 모시는 가족이 늘고 있다. 국토가 좁은 우리나라에서 국가의 정책으로 화장을 권장하는 것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고, 봉안당이나 수목장이 관심을 받는 것도 자연스런 현상이다. 필자가 평소에 노인을 많이 상대하고 있지만, 과거처럼 매장을 고집하는 사람은 드물다. 조상들의 묘를 돌보는 것은 자신들의 책무이지만 정작 본인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자식들에게 짐을 지우지 않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다. 후손들이 잘 해내기도 어렵고 선산에 묻혀도 수시로 돌볼 자녀도 많지 많다는 것을 그들은 너무나 잘 안다. 그래서 스스로 미래에 대해 포기하는 것일까.
전통을 계승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선진국이 자신의 정체성을 전통에서 찾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의 고민은 불편한 진실도 아니고 어쩌면 자연스럽고 당연한 질문일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나를 이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해준 조상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고, 동시에 죽음의 문제를 떠올리게 된다.
시대가 달라지면 조상을 생각하는 마음도 달라지고 방법도 달라진다. 어떤 것이 정답이라고 말하는 것도 어려운 문제다. 이 세상에 정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가장 좋은 방법은 가족과 친척 혹은 문중에서 충분한 논의를 거쳐 좋은 방법을 강구하는 것은 어떨까. 그 속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도리에 대해 고민하는 일이다. 이번 추석은 행복한 명절이 되기 위한 지혜를 모아보면 좋겠다.
죽은 사람에게 입히는 옷이라고 알고 있는 수의(壽衣)는 우리 전통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단어다. 엄밀히 따지면 장례 과정에서 염과 습을 할 때 입히는 옷이라고 해서 습의(襲衣)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 수의라는 단어는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가 의례준칙을 통해 임의로 뜯어고친 예법을 우리 민족에게 강요하는 과정에서 변질된 단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이 과정에서 변질된 것은 또 있다. 바로 삼베수의의 등장이다. 현재 우리 장례문화에서 삼베수의는 표준이 된 상태. 일부 지역에서 만들어지는 삼베수의는 가격이 1000만원을 넘기도 한다. 대통령 중 가장 최근에 사망한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도 황금색 삼베수의를 입고 국립묘지에 잠들어 있다. 그런데 왜 삼베수의가 문제라는 걸까?
최근 한 편의 논문이 학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단국대학교 대학원 전통의상학과 최연우 교수의 ‘현행 삼베수의의 등장배경 및 확산과정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이다. 일제가 죄수복을 상징하는 삼베로 짠 수의를 어떻게 우리나라에 확산시켰는지 확인하도록 해주는 연구였기 때문이다. 최 교수는 연구 과정에서 한 권의 책 에 주목했다.
“삼베수의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1925년 발간된 이 책을 통해서예요. 김숙당이 쓴 최초의 전문 재봉 서적인데 그동안 김숙당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지지 않았어요. 그러다 조사를 통해 식민통치 기관이었던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교원으로 근무했던 사실을 확인했죠.”
김숙당은 당시 우리의 전통문화와는 거리가 멀었던 삼베수의를 이 책을 통해 강조한다. 최 교수는 일제가 우리 민족의 자원을 수탈하기 위해 철저한 사전 준비를 했고, 삼베수의가 등장한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 아니겠냐고 추측한다.
“결국 그 후 의례준칙을 통해 삼베수의는 명문화돼요. 기록을 살펴보면 1934년에 의례준칙이 제정됐고, 삼베와 무명을 수의로 사용한다고 규정했죠. 일제는 이렇게 규칙을 정해놓는 것으로 끝낸 것이 아니라 의례준칙시행서를 통해 지방별로 이 규칙을 실행하도록 강제했어요. 각종 단체와 기관도 동원됐습니다. 당시 이렇게 절약된 비단이 일본 신사에 바쳐졌다는 기록도 있어요.”
일제가 준 영향은 우리의 장례문화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영좌(靈座) 주변이 국화로 장식되는 것이 대표적 사례다. 국화는 일본 왕실을 상징하는 꽃이다. 우리 조상들은 장례에서 생화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전통이었다. 대신 종이꽃을 사용했다.
유가족이 팔 완장과 가슴에 리본을 착용하는 것도 일제의 잔재 중 하나다. 학계에선 일제가 군중이 모이고 군중의 활동이 만세운동으로 변질되는 것을 최대한 막기 위해 장례를 가족 중심으로 간소화하고 구분을 위해 가족에게 완장을 차게 했다는 이야기도 했다.
최 교수는 “일본에 의해 강제로 피해를 입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장례에서도 고인이 마지막으로 삼베수의를 입고, 국화꽃으로 조문을 받는 것이 답답했고, 완장과 리본을 찬 상주들을 보면서 가슴이 아팠다”고 말했다.
삼베는 죄인을 위한 옷감
그렇다면 우리 조상들은 수의로 어떤 옷을 입었을까. 을지대학교 장례지도학과 이철영 교수는 가장 좋은 옷을 생각하면 된다고 말한다.
이 교수는 “삼베수의가 잘못 전해지고 있는 전통이라는 것이 학계에선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일반적으로 평상복 중에서 가장 좋은 옷을 수의로 지어 입었습니다. 당연히 비단과 같은 재료가 많이 쓰였고요. 평소에 옷감으로 사용되지도 않는 삼베를 수의로 입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죠.”
실제로 조선시대 때 삼베로 만든 옷은 범죄자들이 입는 죄수복으로 쓰였다. 조상들이 삼베옷을 ‘상복’으로 사용한 것은 상주나 가족은 ‘부모님을 죽음에 이르게 한 죄인이자 불효자’라는 개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자식된 도리로 스스로 고행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이런 의미의 상복을 우리는 고인에게 입히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베수의 관습이 지속된 것은 일제의 의례준칙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가정의례준칙 때문이라는 의견도 많다. 1969년 가정의례준칙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는데 ‘식물성 의복 또는 수의를 갈아입히고 입관한다’는 표현이 나온다. 삼베수의가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 삼베수의가 정착된 배경 중 하나로는 삼베가 대마라는 특수한 작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대마는 환각제인 대마초의 재료가 되는 식물이기에 1977년 국가에서는 대마관리법을 제정하고 대마 재배를 허가제로 변경한다. 이러한 제도적 변화는 늘어나는 삼베수의의 수요에 비해 공급이 제한되는 결과를 낳았고, 이를 좌지우지하는 유통상들에게는 커다란 이권이 됐다.
영원히 입는 옷, 수의
그렇다면 수의는 조상들에게는 어떤 옷이었을까. 최연우 교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보통 수의를 인생에서 마지막에 입는 옷이라고 생각하잖아요. 하지만 우리 조상들은 영원히 입는 옷이라는 개념도 가지고 있었죠. 육체가 있는 상태에서 마지막까지 입고 있다가 제사나 차례와 같은 강신(降神) 과정에서 입고 나타나는 옷도 마지막에 입었던 수의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당시 예서를 살펴보면 환갑이나 진갑이 되면 수의를 미리 준비하는 풍습이 있었음을 알 수 있어요.”
가장 좋은 옷을 입기 위해 관리는 관복을, 유학자들은 하얀 심의를 입었다. 여성은 혼례복으로 입던 원삼을 입기도 했다. 최 교수에 따르면 한 종가집 종부는 혼례식에 입었던 옷을 수의로 다시 준비하면서 “땅으로 시집간다”는 표현을 썼다고 한다. 실제로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출토되는 전통복식들을 살펴보면 우리 조상들은 비단으로 만들어진 화려한 색상의 옷들을 입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전통 수의를 지키려는 노력은 연구로 끝나지 않았다. 출토복식 전시회를 통해 일반인에게 우리의 전통 수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고, 또 전통 수의의 복원이 이뤄지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입었던 곤룡포 수의다. 김 전 대통령 생전에 단국대학교 측이 이희호 여사에게 제안해 미리 준비해놨던 전통 수의가 장례식에서 사용됐다. 곤룡포는 조선시대 때 국상에서 망자(임금)가 입었던 수의다. 단국대 측은 아예 전통복식을 따르는 수의를 보급하기 위해 ‘단국상의원’이라는 회사를 설립해 전통 예복을 판매하고 있다.
오늘은 어버이날이다.
효도를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서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 간 인식 차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효도를 하여야 하고, 받아야 하는 입장에 선 시니어들은 고민이 깊어간다. 즐거워야 할 가정의 달에 설ㆍ추석 명절 스트레스처럼 ‘가정의 달 스트레스’를 어깨에 짊어진 안타까운 현실이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오면 반갑고, 가면 시원하다고 한다. 효도를 받는 입장에서는 이처럼 전통적인 혈연ㆍ정서적 의미의 효도를 바라고 있다. 필자는 쌍둥이 손주와 외손자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입이 귀에 붙는다. 옛날 할아버지ㆍ할머니께서 손자들에게 내리 사랑하셨던 것처럼 손주가 있는 자체가 축복이다. 뺨을 비비고 껴안아주면서 따뜻한 체온을 느끼는 것이 행복이다.
효도를 하는 입장인 자녀 세대는 용돈, 비상시 목돈 등 부양료 지급 등을 우선순위로 꼽아 경제ㆍ물질적 지원 의미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지금의 세태다. 지금은 맞벌이하지 않으면 살기 어려운 형편이다. 숨 가쁜 직장생활과 고달픈 육아 등으로 부모가 원하는 효도의 실천이 쉽지 않다. 시니어 세대처럼 전업주부는 꿈꾸기 어려운 옛 이야기가 되었다. 오히려 시니어는 손주들을 돌보는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도맡아야 주어야 한다. 이것이 정서적 교감을 하는 좋은 계기가 된다.
자녀 세대가 효도를 바라보는 관점이 변화하는 것을 단순히 물질만능주의로 해석해서 안 되는 것이 현실이다. 빛의 속도로 변하는 세상에 효도의 개념도 변하고 있음을 속히 인식하여야 한다. 자녀들이 부모가 필요할 때 미리 알아서 티 나지 않게 보살펴주는 지혜를 익혀야 한다. 내가 필요하다고 부르거나 찾아가는 일을 삼가야 한다. 그들은 시니어보다 더 어렵게 살고 있다고 이해하여야 한다.
부모로부터 재산을 물려받은 자식이 그 후에는 부모 봉양을 나 몰라라 해서 결국 효도계약서까지 쓰는 게 세간의 화제였다. 효도의 정도에 따라 자식을 차별하여 상속분쟁ㆍ폭탄이 터져 풍비박산한 경우도 종종 보아왔다. 부모와 자식 세대 간 갈등이 계속 늘어나자 국회에서는 불효자방지법이 발의돼 계류 중이다. 아무리 법으로 효도와 부양 의무를 규정하더라도 효도의 총량을 수치적으로 정의할 수는 없다. 부모와 자식이 평상시 대화를 통해 인식의 차를 좁혀 가는 게 가장 중요하다.
부모만큼 자식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 살면서 모든 것을 물려주신 아버지와 어머니는 분명 내편이다. 인생의 스승이자 가장 큰 지지자로 언제나 믿을 수 있는 부모는 영원한 내편이다. 이 말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는 진실이다. ‘나이든 부모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라는 책은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풀어야할 본질적인 숙제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일본의 심리학자 ‘가시미 이치로’의 저서다.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고 믿으며 그렇게 우리도 나이가 들어간다고 저자는 말한다. 사람이 늙어가면서 추해지고 정신이 희미해지는 현실의 부모를 있는 그대로 받아드리는 것이 미래의 자신을 받아드리는 것이다. 미운 마음이 들 때마다 한때는 부모님도 최고의 시절이 있었음을 상기하라고 한다.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보다는 인간 대 인간으로 이해하며 젊었든 늙었든 삶 자체가 소중하다고 말한다.
이 책을 덮으며 자신에게 끝임 없이 질문을 했다. 천하의 불효자도 처음에는 부모를 잘 모시고 싶은 효심이 있었다. 그런데 왜 불효자가 되었을까? 급격하게 변화한 세대차이가 범인이다. 궁핍한 세대를 살아오면서 절약이 몸에 배이고 위생관념이 덜하던 시대를 살아온 부모세대는 소변을 두 번보고 양변기의 물을 내리려하고 풍요와 위생관념이 투철한 자식세대는 이런 모습에서 기겁을 한다. 함께 살면서 생각과 관념의 사소한 차이로 틈이 벌어지면 시간이 지날수록 틈이 누적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다.
요강을 머리맡에 두고 방안에서 오줌을 누고 가래를 땅바닥에 뱉고 보이지 않는ㄴ 바이러스는 인정하지 않는 부모세대와 일회용 기저귀에 익숙한 자녀세대는 머리로는 부모에게 효도를 해야 한다는 마음이 앞서 있다가도 이내 부모의 더러움을 보고 고개를 돌리고 만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2등은 필요 없는 승자독식의 경쟁 세상에서 살아가는 젊은이들과 효를 위해서라면 허벅지살을 도려내는 아픔도 마다하지 않던 부모세대와는 생각이 다르다. 머리로는 효도를 하려고 하지만 감성적으로 부모를 멀리하고 무슨 전염병 환자를 보듯 도망가려 한다. ‘당신은 부모님을 사랑하십니까?’ 라는 그럴듯한 질문보다 ‘당신은 부모님이 먹다가 남긴 밥을 먹을 수 있습니까?’ 라고 고쳐 물어보면 답이 나온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사람과 만나고 헤어진다. 만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인연도 있고 더 오래 만나지 못해 그립고 아쉬운 인연도 있다. 인간관계를 의지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리라. 인연은 구름처럼 마음 한구석을 지나간 그림자요, 물 위에 떠가는 꽃 이파리다. 만나고 싶어도 이승에서는 못 만나는 친구도 있고 인연이 되면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는 지인도 있다.
중학교 때 같은 반 친구 Y는 미소년이었다. 곱상한 외모에 여성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그의 외모는 거의 스타급이었다. 필자는 그 친구와 친하게 지내고 싶었지만 말도 못하고 그저 주위를 맴돌며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졸업 후 서로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바람에 더 이상 만나지 못했다. 다른 친구를 통해 종종 소식만 듣다가 고등학교 졸업 후 가족 모두가 남미 우루과이로 이민을 갔다. 이민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날 기회가 있었다. 환송회를 한다는 연락을 받고 급하게 갔는데 그 친구는 벌써 떠나버리고 없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을지 궁금하다. 남미로 여행이라도 가면 수소문해서 만나보고 싶은 친구다.
고등학교 친구 J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IMF 전후에 만나 어려운 시기를 같이 보냈다. 취업 기간을 빼고는 거의 매일 만났다. 사무실을 차려 전업 투자자로도 같이 활동했다. 그러나 주식투자는 수익의 변동이 크고 성공하기가 어려웠다. 일정한 수입이 없어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J는 할 수 없이 강남에 있는 아파트를 팔고 전세로 옮겨 살다가 나중에는 봉천동에서 월세로 살았다. 자존심이 강한 J는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일이 절대 없었고, 결국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필자가 취직을 하게 되어 좀 도와주려고 하던 차에 그의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망연자실했다. 좀 더 헤아렸어야 했는데 후회가 컸다. 내세에 만나면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P는 자격증 시험공부를 공부하다 만난 지인이다. 수년을 함께 공부하고 낙방도 함께 경험하면서 많이 가까워졌다. 필자는 다른 일을 하느라 중도에 포기했지만 P는 계속 공부를 해 10년 만에 자격증을 땄고 현재 관련 업계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서로가 하는 일이 달라지니 만나는 시간이 점점 뜸해졌다. 필자가 열심히 공부해서 동종 업계에서 활동하게 되었다면 관계가 더 긴밀해졌을 것이다. 아쉽다.
부친이 돌아가신 지 6년이 지났다. 밖에서는 무골호인이었지만 집에서는 너무 엄격하신 아버지였다. 일방적으로 강하게 요구하시는 것들이 많아 필자가 가끔씩 반발했다. 스스로 결정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좀 더 자유를 주셨더라면 필자의 삶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반발하는 마음에 아버지가 권하고 강요하시면 무조건 하기 싫은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부친의 바람과는 달리 전공, 종교, 직업 등에서 매번 다른 길을 택하곤 했다.
아버지는 교장으로 정년퇴직하기 직전 뇌졸중으로 쓰러져 17년을 고생하시다 돌아가셨다. 병으로 고생하실 때는 성격이 많이 부드러워지셨다. 아무리 잘해도 한 번도 칭찬을 받은 적이 없어 어느 날 넌지시 왜 그러셨냐고 여쭈어보았다. 교만해질까봐 그랬다고 말씀하셨다. 표현은 하지 않으셨지만 자식을 깊이 사랑하셨던 것이다.
우리 가족이 이나마 살고 있는 것은 다 아버지의 역량 덕분이라고 여겨진다. 기대에 못 미친 불효자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정신 차려 잘해드리려고 하니 안 계신다. 마음 아프게 해서 죄송해요. 다시 만나면 잘해드릴게요. 아버님 사랑합니다.
후회와 그리운 마음에 때늦은 사부곡을 불러본다.
지난 4월 14일 이투데이 신문사에서 자매지 제2기 동년기자단 발단식이 있었다. 1기 때보다 더 체계적이고 철저한 준비로 보다 성숙된 모습을 보여준 이 자리에는 지난해 4월 선발되어 활동해온 1기 기자들과 2기로 선발된 40여 명의 기자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이투데이 총괄 대표 및 이투데이PNC 대표, 브라보 편집국과 임직원 모두는 따뜻하고 친절하게 동년기자들을 맞이해주어 분위기가 훈훈했다. 지난해와 달리 의자 배열도 회의식으로 배치해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인사를 나눌 수 있도록 배려해 화기애애한 시간을 만들어줬다.
총괄 대표님께서는 축사를 시작으로 글쓰기에 관해 조언을 해주셨다. 글쓰기는 특별히 잘 쓰려고 애쓰는 것보다는 일상의 이야기를 평범하게 쓰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하시는 말씀에 많은 공감이 됐다. 특히 대표님이 하신 말씀 중에 인상적인 내용이 있었는데 그것은 요즈음 나이 드신 어머님을 만날 때마다 녹음을 하신다는 말씀이었다. 순간 필자의 귀가 쫑끗 서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표님이 어머님을 만날 때마다 녹음을 하는 첫 번째 이유는 어머님의 삶을 알아가기 위함이고, 두 번째 이유는 어머님의 음성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서라고 하셨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지며 필자의 어머니가 생각났다. 애써 어머니의 음성을 기억해보았지만, 들려오기는커녕 아득히 먼 이야기처럼 아스라한 느낌만 몰려왔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고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었다.
필자는 미국에서 지내는 동안 정신없이 바쁜 삶을 살았다. 가게를 비울 수 없어 아침 새벽에서부터 저녁까지 일만 했다. 그러던 중에 한국에 계신 어머니가 운명하셨다는 통보를 받았다. 때마침 비자 문제로 한국을 드나들 수도 없을 때였다. 딸이 비보를 전해줬다. "엄마! 놀라지 말아요. 진짜 놀라지 말고 차분하게 들어요. 외할머니, 그러니까 할머니가 오늘 아침에 돌아가셨어요."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두 다리의 힘이 풀렸고,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그저 멍하니 앉아 달려갈 수 없는 처지를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장례식이 치러지는 4일 내내 필자는 전화통만 붙잡고 있었다. 국제전화로 생중계 듣듯 어머니 마지막 가시는 길을 전해 들어야 했다. 이제 영영 헤어져 뵙지 못할 어머니께 인사도 못 드린 불효자가 되어 몇 날 며칠을 눈물 속에서 보냈다. 그리고 그 시간들은 저 혼자 무례하게도 흘러갔다.
필자의 어머니는 팔십 평생을 병원에서 사셨다. 아버지로부터 받은 지독한 정신적 충격으로 사시는 내내 고달픔의 연속이셨을 것이다. 우리 집 다섯 자식, 작은집 네 자식을 어머니는 자신의 호적에 올려야만 하셨다. 돌아가시기 몇 년 전부터는 요양원에서 생활하셨고 우리 집 5남매는 그곳에서만 엄마를 만나야 했다.
돌아가시기 5년 전, 한국에 잠깐 방문했던 필자는 엄마에게 거의 매일 찾아갔다. 어머니는 실내에서만 생활을 하셔서 그런지 얼굴은 하얬고 약물에 중독되어 퉁퉁 부어 계셨다. 몸은 날로 여위어갔지만 만날 때마다 둘째 딸인 필자의 두 손을 꼭 잡고 자식들 걱정에 여념이 없으셨다. 그러고는 마지막에는 꼭 " 나 좀 살려다오! 나 좀 데려가줘!" 하셨다. 그 말씀은 가슴에 꽂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하필이면 기억하는 게 어머님의 슬픈 음성뿐이다.
필자는 마음이 아팠지만 고개를 숙인 채 엄마를 자리로 조용히 안내하고는 살금살금 도망치듯 요양원을 빠져나왔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창문 너머로 엄마의 모습을 훔쳐봤다. 어머니는 어느 날 필자가 사다 드린 새 옷을 갈아입고 챙 달린 흰 모자를 쓰신 채 자리에 누워계셨다. 몸이 불편하신지 얼굴을 찡그리신 채 인상을 쓰고 두 눈만 껌뻑거리고 계셨던 어머니. 필자는 무거운 마음으로 독하게 돌아섰는데 그때 그 모습이 영영 마지막이 되고 만 것이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죄책감을 안고 필자의 고향인 충남 부여, 엄마를 모신 곳으로 달려갔다. 엄마의 다정했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아버지와 함께 나란히 누워 계셔서 외롭지는 않을 것이라고 애써 위로하며 눈물만 남기고 그 자리를 떠나왔다. 그때만 해도 엄마의 여린 음성이 어렴풋이 들려오는 듯했다. "괜찮다. 나는 이제 편안해. 걱정 말아라. 아버지가 영원히 내 곁에 있으니까."
대표님의 말씀을 듣다가 왜 필자는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어머님의 음성을 녹음해둘걸 후회가 되었다. 늘 바쁘다는 핑계로 엄마를 잊고 산 세월이 죄인처럼 느껴졌다. 이제라도 가끔씩은 어머니와의 추억을 되새기며, 하늘 어딘가에서 필자에게 건넬 착한 우리 어머니의 음성을 어렴풋이나마 느끼며 살아야겠다.
바람이 불고 비까지 내리는 날이었지만 동년기자단 발단식에 참석하기를 참으로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2기 기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지난 1년 동안 서로의 글을 보며 삶을 공유하고 정을 쌓아온 1기 기자들과도 얼굴을 마주하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더불어 필자의 감성을 일깨워주신 총괄 대표님의 감동적인 말씀에 감사드린다. 임직원분들의 친절함에도 고맙다는 말을 전해드리고 싶다.
저 하늘에서도 영원히 내 삶의 주춧돌이 되어주실 우리 엄마를 기리며….
며칠 지나면 크리스마스이고 다음 날은 아버님 기일이다. 형제자매와 조카들에게 "아버님 기일 오후 4시에 메모리얼 파크에서 모이자“고 ‘가족밴드’에 올렸다. 형제자매들은 가족들의 소통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가족밴드를 이용한다.
의사소통의 변천사
통신수단이 발달하기 전에는 직접 대면하여 소통하였다. 어른이나 상사를 찾아뵙고 말씀을 나누고 지인을 직접 만나서 의사소통하는 방법이다. 지금도 이 방법이 최고의 예절로 자리하고 있다. 우편제도가 발달하면서 편지를 애용하였다. 정성이 제일 많이 들어가는 이 방법은 중장년이면 꼬박 밤을 새운 경험이 있을 것이다. 글재주 좋은 사람은 ‘편지대필’로 친구의 연애를 돕기도 하였던 시절도 있었다.
이제는 거의 사라졌지만 비싼 요금에도 불구하고 빠른 전보가 이용되었던 시대도 있었다. “만원속히송금요불효자" 10자 기본요금이 적용되던 50여 년 전 도시에 유학하던 친구가 시골 부모님께 학자금을 이중으로 보내달라는 전보내용이다. ”직접 찾아가서 설명하는 것은 거짓말이 되어서 싫고, 편지는 한 장을 다 채우기 귀찮다.“고 너스레를 떨던 친구가 생각났다.
통신수단과 의사소통의 발달
80년대 전화사용이 보편화 되면서 세상이 전화기 속으로 다 들어오는 것 같았다. 시골 이장 집에서 전화를 기다리던 일이 추억으로 남고, 공중전화, 삐삐를 거치면서 주요 통신수단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지난 세월 풍미했던 전보처럼 휴대폰의 발달에 따라 메시지문자도 많이 이용되고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SNS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그중에서 ‘가족밴드’가 가족들과 서로 소통하면서 정보를 하나의 장에서 공유할 수 있어서 매우 편리하고 효율적이다. 밴드의 소식은 모두가 공유할 수 있어서 좋다. 자유토론을 하고 합의 결과를 착오 없이 실행할 수 있다. ‘아버님 기일 공지’를 마치고 올해를 회상했다. 여름에 어머님이 소천하셔서 내년에는 두 차례 ‘추모모임’이 예정되었다.
부모님 덕분에 건강하게 살고 있는 나이 든 형제자매 세대보다 아들ㆍ딸ㆍ조카와 손주들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다음세대 아이들은 서울에서 나서 자라고 학교도 마쳤지만 전문 직업인이 되어 세종ㆍ대전에 멀리 울산까지 사는 곳은 전국구다. 어머님이 돌아가셔서 매우 슬펐지만, 막내 동생의 딸의 교사 취임 등 좋은 소식이 많아 ‘40년 가족모임’ 중에서 제일 기분 좋은 날이 될 것 같다.
문명의 이기를 활용한 가족밴드
요즘은 길거리에서 전철이나 버스 안에서도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누구든지 기쁘거나 급한 소식을 전하고 축하와 격려를 한다. 밴드가족이 소식을 공유하여 언제나 쌍방소통이 가능하다. 댓글로 참석가능 여부까지 다 알 수 있으니 얼마나 편리한가! 형제자매와 온가족들을 만날 수 있는 부모님의 기일을 가다린다. 가족밴드를 기다린다.
요즘 은퇴 강의를 할 때 빼놓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강의를 들을 때 다들 웃어넘기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찬바람이 부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바로 ‘우리나라 중·장년들의 세 가지 오해’ 때문이다. ‘나는 100세까지 못 살 거야, 내 자식은 다른 집 자식과 다를 거야, 내 배우자는 다른 배우자와 다를 거야’라는 생각은 오해 또는 착각일 수 있다.
위의 세 가지 오해가 정말 오해로만 끝난다면 이보다 더 행복한 인생도 없을 것이다. 80세를 건강하게 훌쩍 넘기고 자녀(손자 손녀 포함)들이 자주 찾아와 안부를 물어주고 배우자와 오순도순 살다 죽으면 더 이상 바랄 게 뭐가 있겠는가? 그러나 문제는 한두 가지 또는 세 가지 모두가 오해로 끝날 수 있다는 것이다. 100세까지 살지 못할 거라면서 허랑하게(?) 살다가 병들어 누워보라. 자식도 배우자도 없이 썰렁한 방에 혼자 누운 인생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일본에서 시작된 고독사(孤獨死)는 결코 남의 나라, 남의 일이 아니다.
어쩌면 중·장년들이 자주 하는 세 가지 오해에서 비롯된 일일 수도 있다. 그 오해들을 좀 더 살펴보자. 첫 번째, 나는 과연 100세가 되기 전에 죽을 것인가? 기대수명(期待壽命, 2014년 기준)이 급속하게 늘어나고 있지만 평균 82.4세로 남자는 79.0세, 여자는 85.5세다. 혹자들은 그런데 왜 100세까지 살 거라고 협박(?)을 하냐고 따질 수 있다. 기대수명은 0세의 출생자가 향후 몇 년을 더 생존할 것인가를 통계적으로 추정한 기대치를 말한다. 같은 연장선상에서 60세 남자가 향후 몇 년을 더 생존할 것인가를 통계적으로 추정한 기대치는 기대여명(期待餘命)이다.
통계청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성별로 각 나이의 기대여명을 구할 수 있다. 60세의 기대여명은 몇 년일까. 남자는 22.4년, 여자는 27.4년이다. 개인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평균적으로 보면 현재 60세의 남자는 앞으로 22.4년을 더 살다가 82.4세경에, 60세의 여자는 27.4년을 더 살다가 87.4세경에 생을 마감할 것이라는 얘기다. 현재 70세의 기대여명은 남자와 여자가 각각 14.5년과 18.3년이므로 남자는 84.5세, 여자는 88.3세까지 산다는 추정치다. 의학발전 등을 감안하면 앞으로 기대여명이 더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60대 남자들은 85세 안팎까지, 60대 여자들은 90세 안팎까지 살 것으로 보는 게 합리적이다. 이 추산도 평균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100세까지 사는 이들도 적잖을 것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5년 11월 현재 우리나라의 100세 이상 고령자는 3159명으로 남자가 428명, 여자가 2731명에 달하고 있다. 인구 5000만 명 중 3159명이면 그리 많다고 할 수는 없지만 문제는 늘어나는 속도에 있다. 2010년의 1835명과 비교할 경우 5년 만에 1324명, 72.2%나 증가한 것이다. 이에 따라 인구 10만명당 100세 이상 고령자는 6.6명으로 2010년 3.8명에 비해 2.8명이나 늘어났다.
일본의 경우 100세 이상 인구가 6만5692명으로 인구 10만 명당 51.7명이나 된다. 일본 정부는 장수사회를 기념하는 취지로 1963년부터 100세 노인에게 기념 은잔을 선물해왔다. 당시만 해도 153명에 불과했던 100세 고령자가 53년이 지나면서 무려 420배로 늘어난 것이다. 작년까지 순은(純銀)으로 만든 잔을 선물했지만 올해부터는 도금한 은잔으로 대체하기로 했다. 2050년에는 100세 인구가 100만 명에 달할 것이라는 추산이 나오는 가운데 은잔에 들어가는 예산을 감당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두 번째, 내 자식은 과연 다른 자식과 다를 것인가? 오해가 아니면 얼마나 좋을까. 효자 효녀를 둔 부모들은 전생에 좋은 일을 많이 해서 복 받았다 생각하며 고마워하면서 살면 된다. 문제는 그렇지 않은 경우다. “이번에 얼마만 해주시면 부모님을 평생 잘 모시겠습니다.” 물론 이런 약속을 잘 지키고 부모를 잘 모시는 자식도 있다. 하지만 재산 다 털어주자 찾아오지도 않는 자식 때문에 후회하는 부모들도 적지 않다. 자식에 대해서라면 유난스러운 우리나라 부모들 아닌가. 최악은 재산을 다 넘겨준 부모도, 넘겨받은 자식도 생활이 어려운 경우다. 처음부터 부모에게 불효하고 싶은 자식은 없을 것이다. 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불효자가 되는 것이다. 자식은 젊기라도 하지만 부모는 나이가 들어 회복 가능성이 전혀 없는 막다른 골목 앞 상황일 수 있다. 재산을 다 주고 나서 후회하는 기간이 이전처럼 10년 안팎이라면 그나마 견딜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30~40년 동안 가난 속에서 후회하며 살아야 한다.
세 번째, 내 배우자는 다른 배우자와 다를 것인가? 물론 믿고 사는 게 편하다. 그러나 이런 경우를 생각해보자. 남편이 90세, 아내가 87세인데 남편이 병들어 눕게 되었다. 지금까지 남편에게 지극정성이었던 아내는 당연히 수발도 직접 들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87세의 여자가 90세 남자를 어떻게 돌볼 것인가? 마음이 있어도 신체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배우자를 끝까지 지켜주고 싶어도 현실적으로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무리하다가는 건강한 아내가 먼저 세상을 뜰 수도 있다. 극단적인 사례라고 생각하겠지만 곧 중·장년들에게 다가올 미래임은 틀림없다.
이쯤에서 내려야 할 결론은 긴 말 필요 없이 ‘거안사위와 각자도생’이다. 거안사위(居安思危)는 ‘편안할 때 위기를 대비하라’는 뜻으로 유비무환(有備無患)과 같은 말이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은 제각기 살길을 찾으라는 말이다. 중·장년들은 이제 100세 인생을 예상하고 은퇴 후 60대, 70대, 80대, 90대를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계획해야 한다. 가족, 친구들과 어울리며 건강하고 재미있게 살려면 필자가 늘 강조하는 5F를 챙겨야 한다. 즉 ‘Finance(돈), Field(할 일), Friend(가족과 친구), Fun(재미), Fitness(건강)’를 연령대별로 설계하고 챙겨놔야 한다.
누구든 배우자 혹은 가까운 사람을 떠나보내고 혼자 남는다. 그게 인생이다. 오해와 착각은 자유이지만 그 결과는 내가 지고 가야 할 무거운 짐이다. 그래서 끝까지 믿어야 할 존재는 자식과 배우자가 아닌 내 자신인 것이다. ‘9988 234’라는 말이 있지만 99세까지 88하게 살다가 2~3일 앓다가 세상 뜨는 일이 마음대로 될까. 내가 먼저 갈 때 혼자 남은 배우자가 끝까지 품위를 지키며 살다 갈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가장 큰 일이다. 특히 남편이 아내보다 3~4세 정도 더 많을 때 남편이 가고 난 뒤에도 아내는 10년 정도 더 살아야 한다. 남아 있는 아내가 고충 없이 잘 살다가 뒤따라오도록 자산을 남겨둬야 하는 것이다. 이때 먹고 사는 것뿐 아니라 치료비와 간병비도 충분히 챙겨야 하는 것 잊지 마시라.
>> 최성환(崔聖煥)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한국은행 과장, 조선일보 경제전문기자, 고려대 국제전문대학원·경영대학원 겸임교수, 한화생명 경제연구원 상무, 은퇴연구소장 등 역임.
필자는 제주를 정말로 좋아한다. 살고 싶은 곳 중에 우선순위다. 그 풍광에 빠지고 싶고 토속적 먹거리와 풍습에 관심이 많다. 제주 사람들을 사랑한다. 90년 초에 다녔던 회사의 지점장으로 발령을 받아 사택을 얻어 1년 동안 살기도 했었다. 지금도 자주 제주의 추억들이 스치고 지나간다. 그런 여건이어도 그곳으로 이주하는 것에 대하여는 꺼려진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현재 사는 정든 곳에서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최후를 편안하게 맞고 싶어서고, 가까이서 정들어 있는 이웃이나 지인들과의 관계를 멀리하고 싶지 않아서다. 특히 부인들은 더 그런 경향을 띤다. 오랫동안 사귀어 온 이웃과 헤어지기 싫어한다. 몸이 멀어지면, 즉 얼굴을 자주 보지 못하면 마음도 멀어지는 인간사를 알기에 말이다. 이웃사촌이란 말이 웅변한다. 우리 세대는 젊은 시절엔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성공을 위하여 생존경쟁을 하며 살아왔다. 제2의 고향을 만든 셈이다. 사람은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로 보내라고 했다.
필자는 전 직장에서 제주지점장으로 근무하였다. 사택을 얻어 살았고 주민등록도 옮겼었다. 그때 새로운 인연을 만들려는 신의 뜻이었는지 제주시에서 주민등록증을 분실하여 재발급받다 보니 제주시장이 발급기관이 된 적도 있다. 정말 제주 사랑에 흠뻑 빠져 살았다. 물론 90년대 초이니 꽤 세월이 흘렀다. 하루에 제주도를 한 바퀴 돌며 일을 하기예사였다. 제주 곳곳에 발자국을 남겼다. 많은 인연도 만들었다. 제주 토박이에게 그들이 가보지 못한 아름다운 곳을 안내하는 진풍경도 연출했다. 그뿐만 아니라 제주방언 사용에도 깊은 관심을 두다 보니 나를 제주 토박이로 착각하는 대학교수도 있었다. 그 분은 제주 출신으로 제주 방언을 학위 논문으로 하여 박사가 되었다. 한마디로 제주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그곳에서 근무한 시간이 20년이 지났지만, 기억이 생생하고 추억도 늘 미소 짓게 한다. 그때 맺은 인연은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가끔 제주를 꿈꾸기도 한다.
나이가 들어가면 태어나고 유소년 시절을 고향을 그리워하기 마련이다. 외국으로 이민한 노인네가 고국을 그리워한다. 향수병에 시달리기도 한다. 노후에 가장 살고 싶은 지역으로 고향을 들고 있다. 관련한 통계에서도 그런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살던 곳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최후를 보내고 싶어한다. 일종의 신토불이 확대 개념으로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어릴 때 자란 환경 속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의 표출이라 할 수 있다. 고향은 아니어도 새롭게 터를 내려 사는 곳에서 후반생을 즐기고 싶어한다. 제주는 분명 살기에 좋고 머무르고 싶은 곳이기는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 이주하는 것은 꺼리게 되는 이유다.
또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자녀들이 쉽사리 다녀갈 수 있는 곳에 사는 것이 좋다. 물론 늘그막에 자식의 눈치를 볼 것은 아니지만, 자녀들이 오가는 데 불편하지 않은 곳에 사는 것이 바람직하다. 자녀의 숫자도 적지만, 자녀들의 사회적 경제적 여건이 평소에 부모를 찾는 기회를 줄이고 있다. 먹고 살기에 바쁜 세대다. 홑벌이가 아닌 맞벌이를 해야 하는 시대를 산다. 그런 자녀들이 부모를 찾는 시간이 줄어들기 마련이다. 그런 여건에 사는 자녀가 오고 가는 환경이 불편하다면 부모가 거주하는 본가 방문을 어렵게 만드는 꼴이 된다. 불효자는 부모가 만든다는 우스개가 생긴 이유이지 싶다. 찾아보기 힘든 곳에 사는 그 자체가 불효자를 만드는 원인을 제공해서다. 제주는 비행기나 배편을 이용해야 하기에 절차나 이동 경로가 복잡해진다. 이와 같은 이유로 주거지를 제주로 옮기는 것을 꺼린다. 대신에 우리 부부는 본 주거지는 현재 사는 곳에 두고 간단한 생활도구를 챙겨 제주에 일정 기간, 3개월이나 6개월 정도 집을 빌려 살 계획을 세워두고 있다. 그 다음에 다시 풍광이나 공기가 좋은 다른 지역의 평화로운 곳으로 옮겨가는 방법을 구상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국내 지역별 롱스테이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