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성장이 절실하던 시절이 있었다. 물불 안 가리고 앞만 보고 달렸더니 대한민국은 ‘아시아의 네 마리 용’ 중 한 마리로 불렸다. 고도성장을 과시하듯 연이어 열린 ‘86서울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 전쟁의 아픔을 말끔히 씻어낸 듯 우리나라가 함박웃음 짓던 그때. 우리를 동경하던 대륙의 청년이 있었다. 한국의 발전상이 그저 궁금했을 뿐 저 먼 미래는 생각지도 못했다는 눈 맑은 청년. 훗날 그는 한류 문화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아는 기업인으로 성장했다. 한류를 파는 중국인, 중국 온라인 패션 기업 한두이서(韓都衣舍) 두정국(杜廷國) 부회장을 만났다.
한류 때문에 하루가 바쁜 사람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정이 빡빡합니다. 이곳저곳 다니며 직접 상담하다가 돌아갑니다.”
한국에 오면 주로 뭐하냐는 질문에 재미없는 답변이 돌아왔다. 중국 패션계에 새바람을 불어넣은 온라인 기업 한두이서그룹주식유한공사(이하 한두이서) 공동 창업자이자 부회장의 서울 일정이 야박할 정도로 쉴 틈이 없다. “그저 일만 하다 간다”는 넋두리가 여운처럼 슬며시 깔린다. 알고 보면 사정이 딱하지도 않다. 한국에 오기 위해 이용하는 중국 칭다오 류팅 국제공항에서 인천국제공항까지 한 시간 거리. 중국 내 출장보다 가까워 당일 출입국이 가능할 정도다.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두정국 부회장에게 대한민국 서울은 나쁘지 않은 업무 장소다.
“한국 분들이랑 짧게 몇 마디 정도 대화하면 제가 한국 사람인 줄 알더라고요. 얘기가 깊어지면요? 그때는 중국놈으로 알아챕니다!(웃음)”
중국 사람을 낮춰 부르는 표현도 넉살 좋게 쓰는 것을 보면 한국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 두정국 부회장은 한국 기업과 한두이서 사이 소통 창구 기능을 톡톡히 하며 한국을 자주 찾고 있다. 최근 한국 콘텐츠 회사와의 만남은 물론 중국 진출을 희망하는 패션 업체와의 선약으로 한국 방문이 부쩍 잦아졌다.
시니어 패션도 한류다
한두이서(韓都衣舍)는 ‘한국 옷을 파는 집’이란 뜻이다. 2006년 온라인 전문회사로 창립해 2년 뒤인 2008년 본격적인 한류 패션 전문 쇼핑몰로 새 단장했다. 중국 온라인 패션 업계 1위 자리를 꿰찰 만큼 성장가도를 달리는 중. 초기부터 지금까지 한국 현지 스튜디오에서 한국인 모델을 기용해 촬영한 이미지로 한두이서 홈페이지(handu.com)를 채우고 있다. 온라인 사이트에 자세를 취하고 있는 모델이 죄다 한국인이라 그런지 친근함이 묻어난다. 한두이서가 특히 한국에서 이름을 알린 이유가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한류 스타 전지현, 지창욱, 박신혜 등을 피팅 모델로 발탁했다는 점. 배우 전지현은 지금도 한두이서를 대표하는 모델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매출에서도 한두이서의 저력을 짐작할 수 있다. 그룹 내 자체 브랜드 16개 중 하나인 ‘H스타일’은 이용 회원만 1700만 명, 연간 매출은 우리 돈으로 3500억 원이 넘는다.
한두이서 홈페이지에는 매일 한류 패션 브랜드를 비롯해 유아, 어린이, 시니어 브랜드에 이르는 제품들이 각각 100개 이상 업데이트된다. 특히 ‘H스타일’ 못지않게 시니어 패션 브랜드의 활약도 눈부시다.
“4, 5년 전에 꽃중년 여성을 겨냥한 한류 스타일의 브랜드 디큐나(Dequanna)를 런칭했습니다. 젊은 중국 여성 패션이 한국과 큰 차이가 안 나는 반면 40대 후반, 50대 초반의 중년 패션은 한국과 많이 다릅니다. 그것을 바꾸고 싶었습니다. 탤런트 윤해영 씨가 ‘디큐나’ 홍보모델로 활약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디큐나의 실제 구매자는 누구일까? 바로 H스타일에서 옷을 사 입는 시니어의 자녀들이다.
“스스로 옷을 사 입는 시니어도 있겠지만 젊은 사람들이 구매합니다. 우리 메인 브랜드인 ‘H스타일’ 회원만 1700만 명이고 한두이서몰 전체 회원이 4000만 명입니다. ‘H스타일’에 들어왔다가 ‘디큐나’가 있으니까 자연스럽게 어머니가 입는 옷에도 눈이 가는 것이죠.”
현재 중국 온라인에서 판매되는 시니어 패션 브랜드 중에서 ‘디큐나’가 1위라고 두정국 부회장은 말했다. 1위가 아니면 배우 윤해영을 어떻게 쓰겠냐며 시원하게 웃는다.
한국에 대한 관심이 한류를 알아보다
두정국 부회장이 배우 윤해영을 설명하면서 MBC 일일드라마 ‘보고 또 보고’에 나왔던 배우라고 소개해서 적잖이 놀랐다. 1990년대 후반 인기리에 방영됐던 드라마이지만 한류 드라마로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 그렇다면 한류 전문가 느낌이 물씬 나는 두정국 부회장은 언제부터 한국을, 한류를 직감한 것일까?
“한국을 알게 된 건 한류 열풍이 불기 아주 오래전 전부터죠.”
이웃 나라 한국의 성장이 궁금했던 두정국 부회장은 한국을 알고 싶은 마음에 1993년 산둥대학교 외국어학원 한국어학과에 진학했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한국어학과가 신설됐으니 한국어를 배운 첫 번째 세대다. 한류 전문가로서의 인생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뭔가 멀리 봐서 전공을 결정한 거라기보다는 한국의 빠른 성장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한국어를 배운 것이 운명이었던 것이죠. 마침 우리 회사 조영광(趙迎光) 회장님도 같은 학과, 같은 반 출신입니다. 유학덕(劉學德) 한국지사장은 기숙사 룸메이트였고요.”
한국어를 전공하면서 자연스럽게 한국 문화에 대해서도 남들보다 많이 알게 됐다.
“1980~90년대, 중국에서는 홍콩류나 일본류가 있었습니다. 오래가지 못했어요. 인기가 좀 생기나 싶었는데 사라졌어요. 그런데 한국어를 전공한 저와 회장님은 한국 문화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한국 문화는 다른 나라의 유행과 달리 침투력이 강했습니다. 1990년대 말 한국 정부도 국가 정책으로 문화 관련 사업에 투자를 많이 했고요. 유행이 오래갈 것으로 판단했고 사업 콘텐츠로 삼기로 했습니다.”
한류 패션을 지탱하는 것은 한류 문화라고 두정국 부회장은 목소리에 힘을 줘 강조하면서, 한류 패션은 한류 문화, 드라마, 연극, 영화 등으로 시작해 패션으로 뻗어나간 것이라고 말했다. 한류 스타에 대한 친근함도 중국 스타와 비교되는 점이었다고.
“중국 일반인에게 연예인이란 거리감이 있고 숭배해야 하는 대상이었어요. 그런데 한류 문화로 알게 된 한국 연예인은 친근감이 느껴졌습니다. 뭐든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친구 같은 대상이었어요. 한국 사람들을 보면 노래도 잘하고, 잘 노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그런 욕구가 있는 만큼 한류 패션도 생명력이 있다고 판단했죠. 결국 우리의 판단이 맞았음이 증명되고 있잖아요. 2003년쯤 한류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벌써 15년이 지났는데 한류의 인기는 여전합니다.”
한류 스타일로 패션 사업을 시작한 지 10여 년. 그 노력의 결과로 중국에서 제일가는 온라인 패션 브랜드로 한두이서는 성장했다. 현재는 한류 패션을 넘어서 뷰티와 생활용품 등 다양한 분야로 진출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투명 경영이 지속가능한 회사를 만든다
두정국 부회장에게 스스로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으니 “마음 관리에 꽤 엄격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5년 전부터 철저하게 채식을 하고 있다. 누구를 만나든 도를 닦는 마음으로 자신을 내려놓고 행동하고 사고한다. 두정국 부회장은 본인의 생각이 회사 비전과도 맞닿아 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철저하게 살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해왔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한두이서의 비전은 사원들과 외부 파트너가 꿈을 성취하고 실현하는 회사가 되는 것입니다. 저만의 생각이 아니고 임원진과 함께 많은 토론을 거친 부분입니다. 내가 아닌 상대방의 꿈에 초점을 맞춰서 생각하고자 합니다. 우리 회사 문화는 협동으로 움직이는 조직입니다. 궁극적으로 직원이 자신의 꿈을 실현할 수 있게 만들면 회사는 자연스럽게 성장합니다. 직원들이 부자가 되면 회사는 더 큰 부자가 되는 거잖아요. 직원이 다 실패하면 회사도 물론 무너지고요.”
최근 한국 사회에서 벌어진 사주 일가의 갑질과 관련한 이야기가 새어나와 두정국 부회장의 의견을 들을 수 있었다.
“경쟁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항상 남을 이기려고 하는 마음 때문이에요. 부작용은 자기 이익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안전하게 오래 사업을 하고 싶다면 투명 경영을 해야 합니다. 저희는 대내외적인 투명 경영을 원칙으로 하고 있어요. 모두가 좀 솔직해야죠.”
한두이서는 수직적인 상하관계를 지양한다. 대신 작은 조직체를 많이 만들어서 개별적으로 일을 하도록 분위기를 만든다. 실적이 좋은 팀이 있는가 하면 반대의 경우도 생긴다. 이때 원인을 파악해 팀원을 다른 조직으로 분산 배치하거나 개인 실력 차에 따라 조직에 기여하게 한다.
“이것도 자연의 법칙입니다. 순환의 원리가 존재하는 것이죠. 우리는 온라인 시장 생태계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두이서는 회사 내 조직이나 관련 외부 업체가 일을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무대를 만들어줍니다. 물류, IT, 생산, 홍보 등 다양한 시스템을 지원합니다. 사내 자체 브랜드이든 파트너 업체이든 모두 한두이서의 시스템 안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길지 않은 회사 연혁에도 불구하고 저희는 빠르게 업무 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온라인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오프라인에서는 이런 조직을 만들기가 쉽지 않아요. 온라인에서는 이런 식으로 조직을 이끌어가야 발전 흐름을 제대로 잡을 수 있습니다.”
한두이서의 장기적인 목적 중 하나가 빅데이터 자료를 기반으로 한두이서 내부 조직을 포함해 함께 일하는 업체가 더욱 편하게 사업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주는 일이라고 했다. 성장 중이거나 온라인 창업을 준비하는 기업이나 개인에게 교육도 제공하고 온라인 생태계에 적응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고. 빅데이터 분석을 할 수 있는 역량을 이미 갖췄기 때문에 한두이서가 중국 내 규모가 가장 큰 온라인 브랜드 그룹이 됐다고 두정국 부회장은 설명했다. 인터뷰 당일에도 중국 진출을 희망하는 업체와 협약식이 있었다.
“우수한 한국 패션 브랜드의 중국 진출을 돕는 것도 우리 일입니다. 오늘은 임블리(부건FNC)와 업무 협약을 맺었습니다. 나라마다 온라인 시장의 규칙이 다릅니다. 무턱대고 진출하면 실패율이 높습니다. 임블리가 한국에서는 잘나가는 회사일지 몰라도 중국 시장에서는 쉽지 않을 겁니다.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거예요.”
끝으로 한류를 파는 두정국 부회장에게 한류의 수명이 언제까지 이어질 것 같냐고 물었다. 뉴웨이브란 이름으로 왔다가 한 시대를 풍미하고 사라진 타이완류, 일본류, 홍콩류는 늘 있었다.
“제가 50년은 더 이 분야에서 일할 수 있을 겁니다. 한류의 유통기한을 구체적으로 얘기할 수는 없지만, 일본류나 홍콩류보다는 길 수밖에 없습니다. 한류 문화 기반이 이미 잘 닦여 있으니까요. 한류가 없어지지 않는다면 한류 패션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드라마와 영화를 계속 만들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일할 것 같습니다.(웃음)”
법무부 2017년 통계자료를 보면 일반 교도소에서 출소한 6만 2624명 중 3년 이내에 24.7%가 재복역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지난해 법무부 교정본부 통계에 따르면 출소 후 창업, 취업에 성공한 출소자 1670명의 재범률은 일반 출소자와 비교할 때 현저히 낮은 수치를 보였다. 이는 대부분 출소자들이 가장 시급한 해결 과제로 생계 문제를 꼽는 만큼 출소자의 취업이 재범을 방지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임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현실에 맞춰 일반 비영리법인 사회적기업에서 출소자들에게 새로운 삶을 영위해나갈 수 있도록 실질적으로 큰 도움을 주는 업체가 있어 화제다. 바로 일반기업으로는 최초로 법무부 인가를 받은 한울배터리 사회적협동조합 이명원 대표가 그 주인공이다.
사회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출소자들에게 취업은 사회와 출소자를 잇는 가장 효과적인 가교(架橋) 역할이 되고 있다. 이 업체는 갱생보호대상자와 사회취약계층 채용에 중점을 두고 사회 공익을 실천하는 비영리법인 사회적협동조합이며 예비 사회적기업이기도 하다.
이명원 대표는 “전문기술 습득을 위한 직업훈련이 출소자 취업의 질적 향상과 더불어 재범 방지에도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 배터리를 판매하거나 출장 교체 서비스 및 갱생보호대상자와 사회 취약계층을 고용해 기술교육을 제공하고 있다”며 “갱생보호대상자 및 사회 취약계층의 안정된 일자리 창출을 위한 교정본부의 구인·구직 만남의 행사에 참여하고, 직업 훈련을 통한 창업을 지원하고, 매출 수익금을 갱생보호대상자와 사회 취약계층, 결손가정 청년 등의 사회 진출과 복귀에 도움을 주고자 한다”고 밝혔다.
이명원 대표는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사업체를 운영하던 중에 부도를 막기 위해 돈을 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빚을 갚지 못해 결국 1년 형을 선고받는다. 가족을 생각하며 그 절실함에 절망을 딛고 교육을 통하여 기술을 습득하였고, 모범수가 되어 가석방되었다. 출소 후 유통 분야 10여 년, 배터리 분야 9년 등 20여 년에 걸친 사업 경험을 토대로 서울시에서 3000만 원을 지원받고 무담보대출은행에서 1000만 원을 빌려 그 당시 받은 기술교육의 중요성을 전파하고 확대하기 위하여 사업자 20여 명을 모아 힘을 합쳤다. 이로 인해 배터리업체를 열어 전국 30여 곳에 지점을 내면서 한울배터리사회적협동조합을 설립했다.
이명원 대표는 “나 자신이 전과자였기에 재소자 내면에 엄습하는 현실적 불안감과 두려움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재소자들의 성공적인 사회 복귀를 위한 일자리 창출이 재범률을 낮추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이 일을 하게 된 동기는 갱생보호대상자들은 출소 후에도 안정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다시 방황하며 결국 재범을 하게 되는 상황이 무척 안타까웠고, 당장 먹고살 걱정 때문에, 사회에서의 삶보다 오히려 수감생활이 더 마음이 편하다는 재소자들의 말에 충격을 받아 이들을 위한 일자리 창출과 더불어 자립을 위한 다양한 지원으로 재범을 줄여나가야겠다는 생각에 설립을 추진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한울배터리사회적협동조합은 취약계층과 출소자들의 주요사업 특징과 그중 배터리사업을 대표사업으로 적극 지원하고 있다. 또 출소자의 생계를 위한 일자리 창출, 창업지원, 기술교육 등은 현실적이고 지속가능한 것이 중요하기에 그 일환으로 자동차정비 기술교육을 시행하고 있다. 특히 상대적으로 운영 리스크가 적고, 기술습득이 용이한 차량 및 배터리 사업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주요 사업 분야는 차량용 배터리, 산업용 배터리, 정류기반 배터리, UPS 배터리 설치 및 유지보수로, 조합원 모두가 다년간의 차량 및 배터리 분야의 사업 노하우를 지닌 전문가들로 구성되어 차량에 관한 모든 상담과 업무가 가능하다. 한울배터리 서울 본점을 비롯해 전국 30여 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으며, 조합원 모두 개인사업자를 갖고 있어 분류상 사업자 협동조합인 것이 특징이다. 운영비를 제외한 모든 수익금은 사회복지사업에 환원되고, 갱생보호대상자 및 취약계층 결손가정 청년 등의 일자리 창출을 위한 사업 다각화와 고용 인원 증대에 활용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한울배터리사회적협동조합은 배터리사업을 위주로 하는 시스템분야에서 2017년에 법무부 고용 실적 1위를 기록했다. 또 한울배터리사회적협동조합은 법무부, 교정본부, 한국법무보호복지공단과 연대하여 갱생보호대상자들을 위한 다양한 지원사업을 펼쳐오고 있으며, 교정본부와 법무보호복지공단과의 유기적인 연대로 많은 공공단체들이 사업에 동참하고 있다. 법무부 사회적협동조합의 인가를 최초로 받은 취지와 공로를 인정받아 ‘2016 대한민국 인물대상(사회공헌부문)’ ‘2018 이노베이션 기업 &브랜드대상’ ‘2018 대한민국 미래를 여는 인물대상’ 등을 수상했다.
이명원 대표는 “회사 운영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시 하는 것은 업무 시 직원들의 안전”이라며 “안전한 작업을 통해 생산성 향상을 높이는 데 주력하고 있으며, 사회적 적응 능력 배양과 더불어 마음에 담아둔 이야기나 개인적인 문제 등에 이르기까지 사소한 것이라도 함께 고민하고 들어주며 소통의 시간을 갖는 직장문화를 만들어나가고 있다”고 전한다.
한울배터리사회적협동조합은 향후 출소자들 모두가 건전한 사회인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기여하는 데 중점을 둘 예정이다. 올해부터 사업 영역을 확장해 갱생보호대상자들을 위해 기숙사를 설립하여 편안한 환경을 제공할 예정이다. 아울러 정비소 개설, 여성 출소자를 위한 크리닝사업부 신설 등을 계획하고 있고, 조합원들과 아이디어를 공유해 출소자들의 경제 자립 프로세스 마련을 위한 방안도 꾸준히 마련할 계획이다. 향후 갱생보호대상자들에게 문턱이 높은 일자리, 기업 외면의 본질적 문제점을 분석·파악하는 데 중점을 두고 기술교육을 병행·고용을 확대함으로써 일자리 창출에서 나아가 창업을 위한 단계적인 서비스를 펼쳐나간다는 방침이다.
경사이신(敬事而信)의 마음으로 ‘함께 나눔, 함께 행복, 함께 발전’을 위한 건강한 사회 만들기에 노력하는 이명원 대표는 “갱생보호대상자의 창업교육과 기술교육, 각 구치소 및 교도소 교정본부 산하기관의 구인·구직 만남의 날 행사에 지속적으로 적극 노력할 예정”이라 밝혔다.
김일태(63) 화백에게 금화의 선두주자라는 말을 쓰니 바로 지적이 날아온다.
“금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세계에 없습니다.”
유일무이. 특유의 단호한 목소리 톤에서 자신의 업에 대한 자부심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김 화백이 예술가로서의 높은 긍지가 느껴지는 이 문답 너머에는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아시아인 최초로 영국 사치 갤러리에서 단독 전시를 하고 교황청 집무실에 그의 금화가 걸렸다. 또 아시아태평양브랜드재단의 100대 브랜드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력이 화려한 그의 작품 세계가 궁금했다. 그 내밀한 세계를 들여다봤다.
얼마 전 김일태 화백은 우리나라 개인 최초로 아시아태평양브랜드재단(APBF) 100대 브랜드에 선정됐다. 2015년 영국 런던에 있는 사치 갤러리에서 아시아인 최초로 단독 전시회를 가진 이후 들려온 또 하나의 낭보다. 사치 갤러리는 현대미술 콜렉터 찰스 사치가 운영하는 갤러리로 영국 현대미술의 판도를 바꿨다는 평가를 받는 곳이다. 그곳에서 단독으로 전시회를 가진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이번에는 하나의 고유한 브랜드로서 인정을 받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금화를 학문의 영역으로 끌어올리고자 연구했던 지난 40여 년간의 노력을 보상받는 느낌입니다. 예술도 인류에 엄청난 기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증거이기도 하니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죠.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하는 독창적인 발상으로 세계적으로 알리게 돼 더 기쁩니다.”
김 화백은 구스타프 클림트 이후 화폭에 금을 조금 붙이는 기법은 있었으나 캔버스 전체를 금으로 된 물감으로만 완성하는 사람은 자신뿐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그가 추구하는 것은 황금의 미학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과학의 영역에 닿아 있기도 하다. 금으로 된 물감이라는 기상천외한 소재를 만들기 위해 그가 추구했던 노력과 열정, 그리고 고통을 살펴보면 더욱 그렇다.
“비싸고 좋은 금을 가지고 왜 저렇게 할까. 물질의 욕망에 사로잡힌 분들은 저를 거의 미친 사람 취급했죠. 그러나 저는 미술인이었기 때문에 독창적인 창의력만이 미래가 있다고 생각해서 재료가 비싸고 어려웠지만 그래도 끝까지 꿈을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금은 천 년이 지나도 변치 않을 소재
아무리 흉내 내기 힘든 금화라 해도 어째서 금이었을까? 얼핏 생각해봐도 회화의 재료로 쓰기에는 결코 쉽지 않은 물질이다.
“금이라는 소재는 인류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귀한 보석류에 속했기 때문에 드러내기보다는 감추기만 했죠. 그걸 감추기보다는 밖으로 드러나게 해서 문화로 발전시켜 다 같이 공유하면 어떨까 싶었어요. 그리고 왜 서양인이 만든 화학적인 물감으로 그림을 그려야 하는지에 대한 반감도 있었죠. 농사도 유기농이 좋듯 순금의 다양한 색을 이용해서 작품을 만들자는 생각이 떠올랐어요.”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금으로 된 미학을 선보이고 싶다는 생각. 이것은 다른 사람과 다른 예술적 방향성을 지향하고 싶다는 김 화백 본연의 미학이 적용된 결과이기도 했다. 또한 재료로서의 금은 천 년이 지나도 색이 변하지 않는다는 장점도 있었다. 자손 대대로 물려줄 수 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기에 미술품으로서 불멸에 가까운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금의 매력은 보석이라서 있는 게 아니에요.”
김 화백이 금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 그것은 금 본연의 색이었다. 금이 가진 색은 햇빛에 비출 때, 비가 올 때, 바람이 불 때 등등 상황에 따라 나오는 색이 다 다르게 보인다고 한다. 김 화백의 설명에 따르면 그 색은 총 아홉 가지. 착시 현상이 아니라 조도에 의해 색이 변한다는 것이다.
“황금이 한 색깔이 아니다. 그걸 알아낸 순간 엄청난 매력을 느꼈죠. 그래서 금을 물감화하기로 했습니다.”
황금 물감을 만들기 위한 천연오일 개발
김 화백의 작업실에 들어가자 뭔가 독특한 향내가 났다. 허브 향과 비슷한 이 냄새는 금을 물감으로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금의 소재를 계속 탐구한 그의 노력의 결과이기도 하다.
“금을 분말화해서 직접 개발한 천연오일에 섞어 칠을 합니다. 이 냄새는 천연오일의 향이죠. 천연오일을 쓰는 이유는 광물질은 기존 오일이 닿는 순간 새카맣게 변질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콩과 식물 여섯 가지를 배합한 오일을 만들어내는 데 시행착오로 5~6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야말로 기본적인 재료에서부터 차별화를 생각해 그림을 그린 셈이다. 그가 어째서 이런 생각을 품게 됐는지, 그 근원을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어머니가 37년간 미술교사로 교단에 있었어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미술 공부를 할 수 있었죠. 그러나 제가 대학에 들어간 1970년대 초에는 시대적으로 교사 돈으로는 자식의 대학 공부가 불가능했어요. 저는 많은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했죠. 편안하게 그림을 그릴 여유가 없었던 시절이었어요.”
그렇게 10여 년을 그림과 상관없이 살았다. 그러다 운 좋게 돈을 벌게 됐고 그때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림을 그릴 것이냐, 아니면 물질의 욕망이나 추구하면서 편안하게 살 것이냐고.
“선택하는 데 5년 걸렸어요. 먹고살기 위해 장사를 할 것이냐, 하늘이 내게 준 재능으로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에 내 인생을 던질 것이냐. 선택은 후자였죠.”
미술계의 이단아, 가족도 떠나다
김 화백이 생각하는 예술인의 조건은 간단명료했다. 예술인은 새로운 것에 도전해 미래를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금으로 그림을 그리는 그의 시도는 미술계에서는 파격이었다. 당연히 인정받기 힘들었다.
“기존 미술계 사람들은 서양인이 만든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고 공부합니다. 그러면서 무슨 창작을 논하고 독창성을 말할 수 있어요? 애당초 비교를 거부한다는 게 제 첫마디였어요. 그리고 떠났어요. 산에서 10년 6개월 동안 오로지 금을 갖고 작품화할 수 있는 기술을 만들어내는 데 몰두했죠. 40대에서 50대까지 그렇게 시간을 보냈어요.”
‘언젠가는 틀림없이 예술의 가치가 사람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칠 때가 올 텐데, 왜 지금 모방만 하며 사는가’라는 기성 미술계에 대한 그의 비판에는 그간 겪었던 고통의 나날들이 묵직하게 담겨 있었다.
“엄청난 끈기와 상상을 초월하는 재료비의 압박에 맞설 두둑한 배포가 아니고서야 이룰 수 없는 결과이거든요. 삶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였죠. 나는 미치지도 않았고 단지 미래를 준비하고자 하는 것인데 미친놈, 이단아로 취급했을 때 정말 죽고 싶었어요. 말을 아프게 던지는 사람은 쉽게 던지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은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상처를 입게 되는 법입니다.”
그를 버린 것은 미술계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아내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 아이의 엄마인 제 아내마저도 이해를 못했죠. 금으로 그리다 보니 재료비가 비싸요. 그래서 작은 부동산을 처분해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하니 미친 사람 취급했어요. 결국 이혼했죠.”
주변도, 심지어 가족도 이해 못했다. 그는 고립된 데다 답이 안 나오는 모서리에 매달린 기분이었을 게다. 정말로 미쳐도 이상하지 않았을 그런 시간 속에서 그를 견디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어차피 최고가 되려면 미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세상은 긍정과 부정으로 나뉘어서 보게 되는데, 나에게도 언젠가 긍정의 세상이 올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죠.”
그의 확신은 10여 년의 오랜 시간을 거쳐 마침내 그 결실을 봤다.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에 드디어 데뷔하면서, 데뷔 첫해에 작품들을 완판했다. 그 후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신라호텔에서 단독 전시회를 가졌고, 역시 그곳에서도 36점의 작품을 완판했다. 그의 이름은 서서히 다른 나라에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해외 유수의 전시관에서 80여 차례 전시회를 가졌고, 그것들이 모여서 사치 갤러리에서의 단독 전시라는 쾌거를 이루게 됐다.
도자기와 금화의 결합 실험
김 화백의 그림은 다양한 사람이 봐도 공통적인 느낌을 가질 수 있다. 금이라는 소재가 주는 느낌의 보편성도 그렇거니와, 그의 작품관 자체가 추상보다는 해학적 상징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공통적으로 독자에게 친근감 있게 다가갈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그것이야말로 독자들에게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한다.
“자기 자신만 아는 추상화를 그려놓고 네 맘대로 생각하라고 물음표를 던지는 건 예술인의 태도로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는 직관적인 그림을 그린다. 그래서 작업실에서 본 그의 그림은 호박과 돼지, 집안의 온기, 어머니의 사랑 등을 많이 다루고 있다. 이는 한국 사람이 특히 좋아하는 소재들이라고 한다.
최근 그는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바로 도자기와 금화의 결합이다.
“1300℃의 도자 가마에서 구워내는 작품을 작업하고 있어요. 굉장히 어렵습니다.”
우선 가마에 들어갈 도자기를 100개 정도 만든다. 그리고 흙을 구워낸 후 그 위에 유약 처리를 한다. 다음으로 유약 위에 금을 넣어서 낮은 온도에 구워낸다. 이런 작업으로 지난 7년 동안 단 열 개의 작품밖에 안 나왔다. 지독하게 비효율적이다. 그도 “그 시간에 그림을 그렸으면 200점은 그렸을 텐데…”라며 허탈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작업실에 있는 황금 도자기 거북이를 가리키면서, 어렵고 힘들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고 그것이 그가 금화를 그리게 된 유일한 동기라고 했다.
서양에서 먼저 알아본 금화의 가치
그가 자신의 뚝심을 밀어붙이는 이유는 그의 작품이 결정적으로 인정받은 것이 한국이 아니라 서양화의 본고장이었다는 점에서도 기인한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외국에서 첫 전시회를 열었을 때, 세계적인 스타 데미 무어, 보이 조지가 제 작품 장미를 사갔죠. 너무 아름답다면서. 그게 참 기억에 남네요.”
지금 김 화백의 작품은 각계각층 저명인사들의 선택을 받는 작품군 대열에 올랐다. 자신의 힘들었던 시절을 기억하는 그는 소외된 계층을 위해 그림이 팔리면 10%씩 기부를 하고 있다. 또한 그는 기독교인이라 성화는 제작비를 안 받고 제작한다. 의뢰인이 재료비, 즉 금을 사오면 그걸로 그려주는 것이다. 이 또한 그가 자신의 성공에 대해 세상에 보답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에게 아직 한국 시장은 도전해야 할 영역이다. 아니, 사실 고국은 모든 미술인에게 도전의 대상이 아닐까. 당장 미국의 저명한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가진 작가여도 한국 대중에게는 ‘그런 사람이 있나’ 하는 정도의 반응밖에 못 받는 것이 우리네 미술인들의 현실이다. 김 화백의 말마따나 자신이 ‘배우라면 아카데미상을 열 번 받을 정도의 쾌거’를 이룬 셈이지만 대중에게 그의 이름은 아직 낯설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한 곡만 성공해도 전 국민이 다 알지만 미술인은 그렇지 않죠.”
그는 지금까지 편견과 부족한 예우, 척박한 환경을 버티며 작업을 했다. 그러나 그는 그런 현실이 원망스럽다가도 좀 더 분발하고 노력해야 한다고 다짐하는 듯했다. 미술인으로서는 전 세계 어느 작가에게도 뒤지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혼자만의 고독한 싸움
“작가는 늘 새로운 아이디어와 새로운 작품을 독자에게 보여야 한다는 점에서 굉장한 중압감이 있죠. 미술은 온전히 캔버스와 나와의 싸움입니다. 누군가와 함께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단한 벽과 정면으로 부딪쳐야 하는 인생을 60여 년 산다는 것은 자존감으로 견디는 것과 같은 의미다. 그 과정에서 그는 일반인으로선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것들을 떠나보내야 했다. 지독하게 외롭고 고독한 길에서, 그림은 애인이고 자식 같은 것이 됐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여전히 거듭 다짐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예술이 음악처럼 삶의 교훈과 지혜, 정신적 지주가 될 수 있는 현실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앞으로도 더욱 많이 그려서 독자에게 보답해야죠.”
충북 영동 심천면. 물이 깊다[深川] 하여 이름 붙은 이곳에 뿌리 깊은 나무 한 그루가 있다. 수령 150년이 넘는다는 아름드리 느티나무 위 나란히 자리 잡은 두 개의 새 둥지. 살랑이는 봄바람을 타고 은은히 퍼지는 술 익는 내음. 이 고즈넉한 풍경과 꼭 닮은 ‘시나브로 와이너리’ 소믈리에 가족을 만나봤다.
“아가, 와인 한 모금 마셔볼래?”
이른 아침, 시아버지 이근용(60) 씨가 며느리 박영광(28) 씨에게 와인을 건넨다. 그러곤 와인의 향과 풍미에 대해 심도 있는 대화가 이어진다. 숭늉이라면 또 모를까. 아침부터 와인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구부간(舅婦間) 모습에 시어머니 이성옥(58) 씨가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평범하지 않은 시부모와 며느리의 일상은 이들 모두가 소믈리에이기에 가능한 풍경이다. 여기에 한 명 더, 아들 이병욱(33) 씨 역시 소믈리에다. 국내에서는 첫 번째로 가족 모두가 소믈리에 자격을 갖고 있다는 이들의 와인사랑은 2007년, 이근용 씨가 귀농을 결심하면서부터 숙성되기 시작했다.
“아들이 초등학교 5학년 때, 남편이 귀농을 하겠다며 덜컥 회사를 그만뒀어요. 어느 날 영동에 땅을 사더니 이름도 ‘불휘농장’이라 지었더라고요. 불휘가 ‘뿌리’의 고어인데, 자기 이름에 ‘근(根)’자가 들어가서 그렇게 지었다나.(웃음) 그렇게 한동안은 대전 집과 영동을 오가면서 농사를 하다가 2009년에 지금 집터에 정착했어요. 그때 뒷마당에 있는 느티나무가 참 마음에 들었죠. 이웃 어르신 권유로 포도를 재배했는데, 수확물은 품질이 괜찮았어요. 근데 판로를 개척하지 못해 벌이가 시원치 않았죠. 그러던 차에 영동군에서 와인산업 특구 조성을 한다는 거예요. ‘이거다’ 싶었는지 이번엔 남편이 와인 양조에 도전장을 내밀었죠.”
결과부터 말하자면, 남편의 도전은 성공적이었다. 대부분 와이너리가 레드 와인에 심혈을 기울였던 반면, 청포도로 화이트와인을 선보인 것이 차별화가 됐던 것. 천천히 음미하고, 서서히 와인에 빠져든다는 의미로 ‘시나브로’라는 브랜드네임을 달았다. 또 보금자리의 터줏대감인 느티나무의 모습을 본따 와인 레이블도 만들었다. 그렇게 탄생한 불휘농장표 시나브로 와인은 각종 와인 품평회에서 대상, 금상의 영예를 안으며 토종 와인 업계에서 이름을 알리게 됐다.
시나브로 새댁, 토종 와인 전도사 되다
한창 와인 사업에 물이 오를 무렵, 아들 병욱 씨는 당시 여자 친구였던 영광 씨를 와이너리에 초대했다. 와인과 함께한 저녁식사에서 서로에게 호감을 느낀 근용 씨 내외와 영광 씨는 그 이듬해 가족이 됐다. ‘시나브로’라는 와인 콘셉트와는 다르게(?) 그야말로 속전속결 이뤄진 셈. 결혼과 더불어 아들 내외는 부모님의 와이너리를 함께 운영하겠다는 결심도 들려줬다. 와인과는 동떨어진 일을 해왔던 두 사람, 특히 서울 토박이였던 영광 씨가 귀농을 결심한 까닭이 궁금했다.
“서울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오히려 전원생활에 대한 로망이 있었어요. 당시에 한창 사업이 바빴는데 시부모님 두 분이 감당하시기에 버거우실 것 같더라고요. 가업도 돕고 전원생활의 여유를 경험해보고 싶어 귀농을 결심하게 됐죠.”
가업에 뛰어들며 영광 씨와 남편 병욱 씨는 소믈리에가 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2015년 아버지 근용 씨, 2016년 어머니 성옥 씨에 이어 2017년 아들 내외까지 소믈리에 자격을 취득, 이로써 소믈리에 패밀리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현재는 온 가족이 영동 유원대학교 와인발효·식음료서비스학과에 입학해 전문성을 높이기 위한 과정을 밟고 있다.
가업과 학업을 위해 서울과 영동을 오가며 바쁜 나날을 보내는 탓에 신혼인데도 좀처럼 얼굴 보기가 힘들다는 아들 부부. 인터뷰를 당일에도 가능한 한 네 사람이 모이길 바랐으나,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정을 소화하느라 아쉽게도 아들 병욱 씨가 함께하지 못했다. 가업이니 늘 가족이 붙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각자의 업무에 충실하느라 이 또한 쉽지 않은 상황. 포도 농사부터 와인 판매까지 일련의 과정을 단 네 사람이 해내고 있으니 그럴 법도 하다. 각자의 역할 분담은 어떻게 나뉘어 있을까?
“아버님은 포도 재배와 양조, 어머님은 체험 프로그램 운영과 판매, 저와 남편은 와이너리 홍보와 마케팅을 맡고 있어요. 그런데 가족끼리 하는 사업이다 보니 선 긋듯 일하기보다는 모두 주인의식을 갖고 책임을 다하게 되더라고요. 전에 직장에 다닐 때와 가장 다른 점은, 일을 해도 일하는 것 같지 않다는 거예요.(웃음) 하는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가족이 함께여서 그런 것 같아요.”
가족 모두가 임원, 회의는 식사시간에
가족이 사업을 함께하면 공과 사 구분이 어려울 것 같다고 말하니, 고개를 끄덕이는 세 사람. 장점이 크지만 자칫 단점이 될 수도 있다 여기며 차츰차츰 균형을 잡아나갈 계획이라고. 서로 일적으로 대면할 때, 가장 먼저 달라지는 게 바로 호칭 아닐까? 각자의 직함은 어떻게 되는지 물었다.
“남편이 대표, 아들은 실장, 며느리는 이사예요. 저는 작년까지 홍보 팀장이었는데 애들이 오고 나서 홍보이사로 승진했어요.(웃음) 기업으로 따지면 가족 모두가 임원인 셈이죠.”
일과 관련한 회의는 따로 시간을 정해두지 않고 주로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하는 편. 부모 자식 간 일상 대화에서도 마찰이 있기 마련인데, 사업을 함께하는 네 사람의 의견이 충돌하는 것은 당연지사. 일 때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가끔은 서운한 마음이 생긴다는 근용 씨다.
“나랑 아내는 그동안 해온 것이 있으니 뭔가 변화를 주더라도 천천히 했으면 하는데, 애들은 또 그게 아니더라고요. 자신들이 연구하고 판단한 거를 과감하게 추진하려는 경향이 있죠. 그런 점에서 트러블이 생기곤 해요. 멀리서 보면 별일 아닌데도, 가족이니까 더 가감 없이 얘기하게 되잖아요. 그러다 보면 서로 서운한 말을 할 때도 있고요. 다 잘해보려는 마음에서 생기는 갈등이죠. 그래도 역시 가족이다 보니 금세 마음 풀고 웃게 돼요.”
새로운 와인을 만드는 과정에서 시음은 필수. 가족 구성원이 60대, 50대, 30대, 20대인 덕분에 각자 세대의 대표주자가 되어 의견을 나누고 대중적인 와인 맛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특히 근용 씨가 영광 씨의 의견을 적극 수용하며 와인 맛을 조절한 덕분에 이전보다 젊은 여성 고객의 주문도 늘어났다고. 일 때문에 와인을 달고 살지만, 꼭 그렇지 않더라도 평소 와인을 즐기기에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유지된다는 이들이다.
글로리아 와인, 그 이후
인터뷰 당시, 시나브로 와인들 좀 자랑해주시라 했더니 근용 씨 내외는 너 나 할 거 없이 ‘글로리아’ 와인을 꺼내 들었다. 사랑스러운 핑크빛이 도는 레드 와인인데, 캠벨과 아로니아로 맛을 냈다. 그런데 시나브로 특유의 느티나무 레이블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와인 잔을 모티브로 한 브랜드 로고가 눈에 들어왔다. 시어머니 성옥 씨는 와인 자랑을 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며느리 자랑으로 넘어갔다.
“가장 최근에 탄생시킨 와인이에요. 우리 며느리 이름(영광)을 따서 ‘글로리아’라고 지었어요. 이 로고 디자인은 며늘아기가 아이디어를 낸 거예요. 창가에 있는 보자기 상자들 보이죠? 다 며느리가 배워서 꾸며놓은 것들이에요. 참 예쁘지 않나요?”
그러고 보니 창가마다 줄줄이 전통 보자기로 감싼 상자들이 진열돼 있었다. 토종 와인을 판매하는 와이너리인 만큼 제품 포장도 한국식으로 시도하는 중이란다. 아직 해외 와인에 비해 국내 와인이 저평가받는 것이 안타깝다며 적극 토종 와인 홍보에 나서겠다는 영광 씨. 열정적인 며느리의 모습에 반한 근용 씨 내외는 장차 시나브로 와이너리를 아들 부부에게 물려줄 계획이다. 막중한 임무라 부담이 될 법도 한데, 이 패기 넘치는 새댁은 글로리아 와인처럼 핑크빛 청사진을 그리고 있었다.
“아직 개척 단계에 있는 사업이라고 생각해요. 해야 할 일도, 변화시킬 것도 많죠. 뭔가를 시도해보고, 좋든 나쁘든 결과를 보면서 다양한 경험을 쌓아가는 중입니다. 멀리 보고 하나하나 시나브로 정착해나가야죠. 아마 저와 남편이 시부모님 나이가 됐을 때쯤엔 시나브로 와인이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지 않을까요?(웃음)”
시나브로 브랜드 와인 중 가족 이름을 담은 와인은 ‘글로리아’가 처음이다. 앞으로 대대손손 가업을 이어가시며 후손들의 이름을 딴 와인을 만들면 어떨지 제안하자, 맞장구를 치며 웃음꽃이 피는 세 사람. ‘소원 나무’라 별칭을 붙인 정원의 느티나무처럼, 오랜 세월 사랑받는 장수기업으로 이름 남길 소망한다.
이제 우리는 ‘대전’ 하면 바로 ‘빵집’ 성심당을 떠올린다. 그만큼 대전을 대표하게 된 아이콘 성심당은 지역 공동체와 함께 성장하는 착한 기업의 대명사로도 유명하다. 성심당의 고집은 기업정신이기도 하다. 그것은 나눔과 환원을 통한 가족 같은 공동체의 선을 향한 고집에도 적용된다. 아들은 빵을 굽고 딸은 요리를 하며 아내는 홍보를 맡는 등 온 가족이 빚는 성심당의 아름다운 가치와 그 원동력, 聖心堂 가족의 세상을 향한 희망의 얘기를 임영진 대표를 만나 들어봤다.
성심당은 철저히 ‘대전 프리미엄’을 지킨다. 그래서 다른 지역에 지점을 내지 않아 성심당의 신선한 빵을 맛보려면 무조건 대전을 가야 한다. 그나마 대전역, 롯데백화점 대전점 등 대전 안에는 몇 군데 지점을 마련해서 운영하고 있기에 예전보다 접근성이 좋아졌다.
대전역에 내렸을 때 고소하고 달콤한 튀김소보로 냄새와 함께 길게 늘어선 사람들의 줄을 따라가다 보면 발견할 수 있는 게 성심당 대전역점이다. 엄청난 인기 덕분에 전국 곳곳에서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들어오는 수많은 유치 러브콜에도 불구하고 성심당이 대전이라는 지역성을 꿋꿋이 지키는 것은 그로 인해 얻는 것이 더 많기 때문이다.
“대전까지 와서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성심당 빵을 사가는 사람들의 표정에 담기는 기쁨. 그 모습이야말로 성심당 빵이 만드는 기적이죠. 100년 가업(家業)으로 오래가려면 여기저기서 다 먹을 수 없는 간절함과 기다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올해로 62년째 대를 이어 성심당을 경영하고 있는 임영진 대표는 자신이 하고 있는 업의 소탈함만큼이나 소탈한 인상으로 성심당이 대전을 지키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의 지론에는 성심당의 오랜 세월에서 얻어진 단순하고도 단단한 논리가 있었다.
삶은 롤러코스터와 같다
“빵은 음식이니까, 무슨 일이 날지 매일 불안하죠.”
성심당은 얼마 전 큰일을 겪었다. 성심당을 대표하는 빵인 부추빵에서 이물질이 나온 것이다. 이에 대해 중앙지에서 크게 내용을 다뤘고, 성심당에서는 사과문을 발표한 후 후속 조치를 취했다. 식품 기업에서 이런 사고가 날 때마다 기업에 미치는 파장은 클 수밖에 없다.
“완전 비상이었죠. 그래서 음식은 폭탄이라고도 해요. 하루에 빵 몇만 개를 만드는데 그중에 이런 일이 벌어지니…. 성심당에는 전국에서 견학을 와요. 빵 만드는 과정은 모두 공개되고 있고요. 그런데도 이런 실수가 벌어진 거예요. 직원들에게는 이번 일을 계기로 다시 정신 차리자고 얘기를 했어요. 너무 죄송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태에도 불구하고 또 불을 꺼주는 일이 있었다. 개그맨 이영자가 나오는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그녀가 성심당 빵을 먹으러 가는 장면이 나온 것이다. 그러자 성심당 빵은 불티나게 팔렸고 논란도 다소 잠잠해졌다.
“삶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구나, 내 계획대로 삶이 살아지지 않는구나 싶었죠.”
성심당 역사의 가혹한 순간들
임영진 대표가 삶을 롤러코스터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가 성심당을 운영하면서 겪은 온갖 우여곡절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대전을 대표하는 명물로 정착이 된 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62년의 성심당 역사에는 잔인한 운명의 생채기들이 곳곳에 새겨져 있다. 성심당의 모든 것을 태웠던 화재 또한 그렇다.
2005년에 일어난 화재는 심각했다. 성심당 운영 48년째 되던 해, 여러 가지 안 좋은 상황이 겹쳐서 경제적인 문제가 회사의 미래를 불투명하게 만들던 차에 화재가 일어났다. 임 대표는 성심당을 부동산에 내놓기까지 했을 정도로 절체절명의 위기였다고 회고했다.
“그때 직원들이 큰 도움을 줬죠. 한창 추울 때였는데 찬물로 재를 닦고 중고 빵 기계를 구입해서 빵을 만들고. ‘잿더미 속의 우리 회사 우리가 살리자’라는 구호로 단합하여 위기를 극복해보자고 나섰어요.”
화재를 딛고 일어난 성심당이었지만 그 후에도 예기치 못한 일들이 연이어 발생했다. 임 대표의 동생이 프랜차이즈 사업을 한 것도 그중 하나다. 동생이 시작한 프랜차이즈 사업은 실패했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성심당이 떠안게 되어 또다시 심각한 위기를 불러왔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대전 시민들과 직원들은 성심당에게 변치 않는 애정을 보여줬고 일으켜 세웠다. 성심당은 대전이 키운 빵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대전이라는 도시의 역사가 성심당의 역사와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전 시민과의 가족과 같은 연대감, 이것이 성심당이 대전을 떠나려 하지 않는 이유이자 성심당이 추구하는 사회 환원의 한 배경이기도 하다.
“성심당 같은 회사 100개가 있으면 한국이 바뀐다”
성심당은 최근 독특한 기업 모델로도 인정받고 있다. 바로 사회적 화두인 공유경제의 사례로서다. ‘성심당과 같은 기업 100개가 생기면 한국 경제의 구조를 바꿀 수 있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사회 환원적 행보를 보이고 있는 성심당은 매년 회계, 납세 명세서를 직원에게 공개하며 이윤의 15%를 성과보수로 지급한다. 인사고과의 40%를 차지하는 기준은 동료 직원 사랑이다. 임 대표는 미래 기업은 공유의 개념이 아니면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 것 같다고 말한다.
“모두 자기 걸 챙기기만 하면 전부 싸움이 되고 빈부격차도 커지고 좋아질 게 하나도 없잖아요. 자본주의 사회의 파멸을 막기 위해선 뭔가 내놓고 같이 가자고 해야죠. 크게 보면 그게 행복한 삶을 위한 해결책이 되리라고 봐요.”
기업 경영의 목표가 오로지 돈이면, 단순히 돈이 좀 안 벌린다 싶으면 모든 게 무너진다. 그러나 행복이 목표가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접근하는 방법도, 기업 경영도 달라진다. 임 대표는 그것이야말로 하느님이 세상을 만든 후 인류의 행복을 위해 원했던 바가 아니었겠냐고 되물었다. 어떻게 보면 성심당은 가장 높은 사람의 뜻으로 그렇게 하는 게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기쁠 때마다 생각나는 아버지, 故 임길순 회장
성심당이 지금의 문화를 갖게 된 근원을 알고 싶어졌다. 그래서 성심당을 만든 임 대표의 아버지 故 임길순 회장에 대해 물었다. 임 대표는 아버지가 단순하고 우직한 분이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러한 자신의 성정을 기업 경영에 그대로 투영했다.
빵은 신선도가 가장 중요할 수밖에 없다. 특히 대전은 좁은 지역이다. 임 회장은 빵의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다시 찌거나 튀긴 게 아닌 방금 만들어낸 빵만을 팔았고 그게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성심당 전설의 시작은 그렇게 매우 소박하고 아주 기본적인 장사의 정신에서부터 만들어진 셈이다. 임 대표는 자신이 그러한 부모님의 철학과 논리를 그대로 따랐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렇게 62년을 운영했으니, 모르는 사람이 없는 거죠.”
아버지의 가르침은 한마디로 ‘기본을 지켜라’였다. 거래처와의 관계, 대전시와의 관계, 고객과의 관계에 있어 아버지가 추구했던 것은 철저히 기본을 지키는 예의였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믿음 속에서 성심당이 커지기 시작했다.
“단순해요. 새로운 경영법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하라는 거죠. 그렇게 나누다 보니 나눈 것들이 되돌아와서 성장을 시켜주더라고요.”
그러나 아버지를 생각하면, 임 대표는 안타까워지는 마음이 있다.
“사실 아버지는 이북에서 사셨는데, 한국전쟁 때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피란길에 오르셨어요. 살아남기만 해도 다행이었던 상황이어서 나머지 인생은 덤으로 사는 삶이라고 생각하셨어요. 그래서 남은 인생은 남을 도와야 한다고 자신과 약속하셨죠. 그걸 지키신 겁니다. 그리고 고생하는 것만 보고 가셨어요. 고향이 아닌 곳에서 얼마나 힘드셨겠어요. 그런데 지금 성심당이 대전 브랜드 1위가 되었으니 이걸 보면 얼마나 기뻐하실지…. 기쁠 때 아버지 생각이 나요. 이걸 보셨어야 하는데 싶어서.”
임 대표는 아버지를 하늘에서 만나도 욕먹지는 않겠다 싶어 다행이라며 웃었다. 자신에게 돈이 아니라 정신을 물러주셔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감동만 하고 실천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족이 없었다면 이렇게 열심히 안 했을 거예요. 그리고 혼자 할 때보다는 가족과 함께할 때 가치가 더 커집니다.”
임 대표는 4남매를 두었었다. 그러나 그중 아들 한 명을 어린 나이에 지병으로 잃었다. 그런 아픈 경험은 사람으로서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 희로애락이 깊어지고 삶과 사람의 소중함을 깨닫게 됐다. 그러한 깨달음은 가족적인 기업으로서 성심당을 세우는 데 큰 도움이 됐다.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달라진 것이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실천이다. 아무리 좋은 말과 방법이라도 ‘그 손해 보는 걸 왜 하느냐’라고 생각하는 순간 실천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감동은 하지만 실천은 하지 않아요”라는 임 대표의 담담한 목소리에는 폐부를 찌르는 진실이 담겨 있었다.
성심당과 다른 회사들이 구별되는 것은 그 지점이다. 실천하느냐 안 하느냐의 차이. 너무나도 단순하지만 그 누구도 쉽게 하지 못하는 그 차이 말이다.
“기법이나 기술이 아니라 이런 마음을 모방해야죠. 그래야 오래가는 기업이 될 수 있다고 봐요. 오래가기 위해서는 이익보다는 가족과 같은 직원들의 행복이 우선이죠.”
성심당의 경영 철학은 다른 제과점은 물론 중국에서도 벤치마킹의 대상이다. 그렇게 성심당의 생각이 퍼져나가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 번에 거창하게 바꾸지는 못한다 해도 조금씩이라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희망이 있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빵으로 돈을 벌지만 궁극적으론 세상에 희망을 주는 일이 성심당의 목표다.
나는 직원의 조력자
물론 성심당의 나눔과 공유, 그리고 가족 친화 기업이라는 추구가 항상 행복한 결과만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임 대표 또한 배신감도 느껴보고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싶은 일들도 겪기를 반복했다. 세상의 모든 경영자들이 그렇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도 임 대표는 자신이 좇는 가치가 옳다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어쩌면 그 뚝심과 확신이야말로 성심당 성공의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사실 빵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90%는 나가서 자신의 빵집을 차리고 싶어 해요. 그런 사람들에게 투자하고 지원하는 건 손해 아니냐고도 말하죠. 하지만 그게 그 사람의 꿈인 걸요. 그래서 저는 조력자 역할을 하기로 했어요.”
성심당은 동료애가 강하기로 유명하다. 특히 매주 사보 형태로 내놓는 한가족신문은 10여 년 전부터 만들기 시작했는데 성과를 공유하고 삶의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다. 기술인이라는 특성상 서로 살갑기가 어려운 제빵인들의 특성상 이런 자리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여기서의 실천 성과는 인사고과에 반영되어 보상이 따른다. 그래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사람은 싸웠지만 화해한 사람들이다. 그러다 보니 서로 돕고 사랑하는 사례들도 늘어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기다리는 마음으로 62년, 세상이 답하다
빵을 만드는 것은 일 자체가 어렵고 돈을 벌기도 쉽지 않다. 새벽부터 준비해야 할 정도로 손이 많이 가며 사람들이 예약을 하지도 않는다. 예약이 없으니 수량을 알 수 없는데, 그렇다고 안 만들거나 부족하게 만들어놓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러니까 팔릴지 안 팔릴지 모르는 빵을 만들어놓고 무작정 기다리는 마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 마음의 불안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임 대표가 제빵업의 어려움을 말하면서 “전생에 무슨 죄를 졌는지…” 하고 웃음 짓던 모습이 떠오른다. 구조적으로 빨리 돈을 벌 수 없는 구조, 기다림이 체질이 되어야 하는 직업. 그 체질이 곧 마음이 된 것이야말로 임 대표의 힘이 아닐까. 수많은 시련과 실망 속에서도 그는 나눔과 사랑을 계속 말한다. 오로지 믿음 하나에 자신을 맡겨 구도를 거듭하며 정진하는 수도자의 모습과 비슷하다. 불확실에 대해 믿으면서 정성을 담아야 하는 일을 62년 동안 한 회사라면, 지금의 성공에 대한 대답으로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 임영진 성심당 대표와 인터뷰하면서 가장 많이 떠오른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다’. 임 대표는 그런 사람이고, 그가 경영하는 성심당은 그런 회사다. 그 뚝심을 느꼈기에, 성심당 가족이 만들 미래와 희망을 기대해본다.
홍성열(洪性烈·63) 마리오아울렛 회장의 삶을 들여다보면 도전과 기적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토종 브랜드 론칭, 초대형 패션 아울렛 도입 등등 돈도 지원도 부족한 상황에서 “그게 되겠어?”라는 주변의 비웃음까지 들어야 했던 그의 선택과 도전들은 모두 커다란 성공이 되어 보답으로 돌아왔다. 지난 40여 년 동안 도전을 멈추지 않았던 그는 요즘 마리오아울렛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일과 함께 경기도 연천군에서 운영하고 있는 마리오허브빌리지 경영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그의 인생과 준비 중인 또 다른 선택에 대해 들어봤다.
“밖에 나오면 좋죠. 회사 안에 있으면 머리가 아파.(웃음)”
농담을 건네는 쾌활하고 시원시원한 목소리에는 자수성가하여 산업의 지형까지 바꾼 사람다운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홍성열 마리오아울렛 회장이 바로 그 사람이다. 그가 경영하고 있는 가산디지털단지 마리오아울렛은 평일 10만 명 이상, 주말에는 20만 명 이상의 고객을 불러들이고 있으며 온라인 몰을 론칭하여 1년 만에 11만 명의 회원 수를 보유할 정도로 꾸준한 성공을 거듭하고 있다. 이 모든 시작은 형제들의 돈을 긁어모아 마련한 사업자금 200만 원이었다.
“홍성열 회장은 슈퍼 마리오다”
홍 회장이 200만 원을 들고 패션 유통업에 뛰어든 것은 1980년대,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거의 40여 년 전 이야기다. 당시 우리나라의 의류 생산 산업은 호황기를 거쳐가고 있던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국내 의류 업체들은 외국 바이어들의 지시에 따라 하청받은 제품을 공장처럼 찍어내는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홍 회장은 단순한 노동력 제공과 지시 답습이 아닌 토종 브랜드가 필요함을 직감했고, 고민과 연구 끝에 1985년에 패션 브랜드 까르뜨니트를 출시했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까르뜨니트는 한국 최초로 일본 게이오백화점에 입점하는 성과와 함께 한국 제품이라면 싸구려라고 홀대하던 일본 바이어들을 불러들였다. 당시 일본에서는 닌텐도에서 출시한 비디오 게임 ‘슈퍼 마리오’가 게임의 역사를 바꾸며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을 때였다. 일본 바이어들은 홍 회장에게 게임에 나오는 캐릭터의 이름을 따서 마리오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바이어들 사이에서 “홍 회장은 슈퍼 마리오다. 마리오 제품을 수입하면 다 팔린다”는 얘기가 돌 정도였기 때문이다. 홍 회장은 신뢰와 책임으로 꾸준히 사업을 성장시켰다.
한 사람의 도전이 거대 아울렛 타운을 만들다
1997년부터 시작된 IMF 체제는 국가의 산업구조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1차, 2차산업을 주로 맡던 공장들이 문을 닫자 수많은 인력들이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구로공단의 공장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폐쇄된 공장들이 싼값에 무더기로 쏟아졌다. 그런 국가적 위기 앞에서 홍 회장의 과감한 기획은 결정적인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주변의 비웃음을 무시하고 넓은 공장 부지를 싸게 매입한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아울렛이란 단어를 전혀 모르던 시절에 자신의 별명을 붙여 도심형 정통 패션 아울렛인 마리오아울렛을 세웠다. 2001년의 일이었다.
경제위기가 지속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렴한 상품을 주로 찾게 될 것이며, 그러한 소비 성향과 판매가 사이의 이격 현상 때문에 재고가 쌓이게 된 회사들은 재고 처리가 급박해질 수밖에 없는 게 산업의 순리다. IMF 같은 대형 외환위기를 겪어본 적이 없는 대부분의 사람은 홍 회장을 비웃었지만, 그는 그러한 자연스러운 산업의 순리를 따라 마리오아울렛을 통해 그 판을 커다랗게 깔아준 셈이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건물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돌 정도로 손님이 몰렸고, 3년 만인 2004년에 2관을 열고 이어서 3관까지 개장했다. 이후 대기업들이 대형 아울렛을 주변에 개점함으로써 과거의 공단지대는 연매출 1조 원가량의 돈이 움직이는 거대 아울렛 타운으로 재편됐다. 한 사람의 의지가 지역 산업의 구조를 송두리째 바꾼 사례가 만들어진 것이다.
무분별한 확장 거절, 서비스와 가치를 높인다
당연한 얘기이지만 마리오아울렛은 신규 출점에 대한 많은 제안을 받고 있다. 지방은 물론이고 심지어 중국 쪽에서도 제안이 들어온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 회장은 모두 거절하고 가산의 마리오아울렛에만 힘을 기울이고 있다. 이를 통해 가산의 구심점이 되는 동시에 자체 브랜드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다. 2017년 8월부터 7호선 가산디지털단지역 이름은 ‘가산디지털단지(마리오아울렛)역’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역명 병기 사업은 명칭의 인지도와 이용 편의 증진 가능성을 심의하여 엄격하게 선정되는데, 이 결과는 마리오아울렛이 지역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다는 인정이기도 하다.
마리오아울렛은 또한 무분별한 확장을 배척하는 대신 서비스와 가치를 높여 소비자에게 제공하는 방향으로 가는 중이다. 홍 회장은 일찌감치 대기업들이 무분별한 확장 전략으로 중소기업들이 이뤄놓은 터전을 잠식하고 있는 상황을 비판적으로 말한 바 있고, 마리오아울렛 또한 그러한 전략을 배제함으로써 그 말을 실천에 옮기는 중이기도 하다.
물론 마리오아울렛이 ‘한 우물만 판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변화를 시도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울렛으로서는 이례적으로 홈페이지와 앱을 제공하는 것부터가 새로운 도전을 증명한다. 그리고 상당수 아울렛이 이미 준테마파크적 성격을 갖게 된 것처럼 마리오아울렛 또한 다양한 즐기는 공간들을 통해 유통과 소비공간으로서의 성격만을 가지는 것에서 탈피한 지 오래다. 서비스적인 면에서 보면 매년 두 자릿수 이상 증가하고 있는 해외 고객들을 위해 다국어 쇼핑 가이드, 외국어 안내 서비스, 자국통화결제서비스 등도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한국경영학회 최우수 경영 대상, 올해의 브랜드 대상, 국무총리 표창, 한국유통대상 대통령상 등 경영 분야의 수많은 수상 실적들로 드러났다.
‘자연이 만든 천당’이 허브빌리지의 목표
“우리나라는 새로운 걸 하려고 하면 야단맞아요. 그래서 뭔가를 하기가 겁나죠.”
홍 회장의 말이 엄살로만 들리지 않는 것은 마리오아울렛만 하더라도 공장지대에 유통시설이 들어설 수 없다는 정부 규제와 계속 줄다리기를 하면서 완성시켰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최근에 언론에 오르내리게 된 일들도 그렇다.
그는 2015년 전두환 전 대통령의 아들 전재국 씨가 소유한 경기도 연천의 허브빌리지를 매입했다. 2017년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사저를 박 전 대통령이 구속되기 사흘 전에 매입했다. 사람들에게 화제와 함께 의혹을 불러일으킨 이 두 번의 거래에 대해 그는 소위 ‘로열패밀리’와의 관계를 의심하는 ‘음모론’을 강하게 부인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사저는 오래전부터 강남의 주택으로 이사를 가려 했는데 박 전 대통령의 주택이 급매로 괜찮은 가격에 나와 구입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고향인 충남 당진에서 20년 전부터 개인농장을 운영해오고 있던 터였다. 그래서 허브빌리지는 도시농업과 정원 문화에 관심이 많았기에 사업 투자 목적으로 인수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지금까지 보여줬던 경영 방식을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디자인 불모지에서 과감하게 토종 디자인 브랜드를 론칭하고 문 닫은 공장들이 즐비했던 황무지에 아울렛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개념을 가져와 성공시킨 그다. “경영이란 남들이 건드리지 않는 열쇠를 통해 얻어내는 최선의 효과”라는 공식은 그의 삶이 증명하고 있다. 허브빌리지의 경우를 보면, 네 번의 유찰을 통해 최초 감정가 250억 원에서 지속적인 하락이 이뤄져 홍 회장은 118억 원이라는 저가에 인수할 수 있었다. 현재 허브빌리지는 홍 회장이 야심차게 진행하는 본격적인 사업 구상 아래 운영이 이뤄지고 있다.
“‘허브빌리지는 동산이다, 건축이다’를 넘어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운영하고 있어요. 돈을 보고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허브빌리지는 자연이 만든 천당이 되는 걸 목표로 하고 있죠. 천당을 가보지 않았지만 마치 천당이라고 느낄 만큼 도랑 치고 가재 잡고 합니다.(웃음)”
경영인이 추구하는 예술가로서의 삶
이처럼 원칙과 정도를 걷는 홍 회장에게 어릴 적 꿈에 대해 묻자 비밀이라고 말하며 한참을 망설이더니 겨우 대답이 나왔다.
“아티스트였죠. 패션 디자이너. 아무래도 어렸을 때부터 패션 쪽이 제 적성에 맞았어요. 주변에 그런 일을 하는 친구가 있었다면 제 직업이 달라졌을 거예요.”
그 말이 그렇게 어렵게 나와야 했단 말인가? 의아했다. 아무튼 그가 가졌던 크리에이터로서의 꿈은 아직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그는 패션 전시관을 만들려고 기획하고 있다.
“선두에 있다는 건 힘들죠. 그래도 나이 들어서는 젊은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왜곡과 와전으로 피곤하게 만드는 최근의 논란들에 대해서 그는 어느 정도 해탈한 듯하다. 그는 과거 인터뷰들에서도 오랜 기간 사업을 하면서 겪어야 했던 불미스러운 일들을 헤쳐 나가게 해준 것은 정도(正道)를 지키는 것이라고 여러 번 말하기도 했다.
“저에 대한 오해도 많고 하지만 아무래도 이런저런 과정에서 많이 걸러져요. 저를 믿는 사람은 꾸준히 저를 지지해주죠.”
누구에게나 스스럼없이 솔직하고 담대한 그에게 미래 계획을 물었다.
“브랜드를 키워서 국격을 높이고 싶습니다.”
그 말을 듣자 그의 어린 시절 꿈이 아티스트였다는 것이 순식간에 이해가 됐다. 마리오아울렛을 타 지역에 확장하지 않은 채 가산의 독보적인 아이콘으로 운영하고 있는 것, 그리고 허브빌리지를 단순한 휴식공간이 아닌 작품으로 생각하고 경영한다는 것, 모두 자신이 만든 창작품을 소중히 다루며 그 가치를 독보적으로 승화시키려는 예술가의 자세와 매우 흡사하지 않은가. 그리고 그 모든 시도는 브랜드 가치로 연결되고 있다. 또 길은 그 앞에 활짝 열렸다.
무모한 도전을 성공으로 연결시킨 남자. 홍성열 회장은 지금까지 그렇게 불리고 있다. 그러나 그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예술로서의 경영이 아닐까. 서두르는 것 같지만 하나의 뚝심을 갖고 경영을 펼쳐나가는 그의 미래가 계속 궁금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남사스럽다. 배우나 가수처럼 TV 속 남자들뿐만 아니라 주위 젊은이들 중에서도 ‘화장한 남자’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래도 막상 시작하려니 여전히 남사스럽다. 좋다. 그래도 한번 해보자. 하지만 부끄러운 마음을 겨우 내려놓고 화장을 시작하려 해도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 모든 일이 그렇듯 결국 스스로 공부하고 연습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여성의 ‘화장술’에 비하면 코스요리 대 라면 끓이기 정도로 간단하다. 조금 노력하면 십수 년 젊어 보이는 일상이 나를 기다린다.
액티브 세대 남성에게 화장이 관심 대상이 된 것은 기호의 변화가 아니라 수요의 발생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은퇴 후에도 새로운 직업을 찾거나 다양한 사회활동에 참여하게 되면서, 자리와 역할에 맞는 안모의 꾸밈이 필요해졌다. 흰머리나 주름살이 중후함을 대변해주는 시대는 사라지고 있다.
화장품점 문턱 쉽게 넘는 방법
화장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화장품 구매다. 남성들에겐 가장 높은 진입 장벽이다. 젊은 여성이 가득한 곳에 들어가 잘 알지도 못하는 제품들을 둘러보고 선택하는 일은 결코 유쾌한 경험이 아니다. 이럴 때 남자들에게 조금이나마 편한 점포는 편의점과 대형마트다. 편의점 업계는 화장품 브랜드와의 협업을 통해 여러 화장품을 선보이고 있다. 특히 화장품 유통점으로의 접근이 불편하고 곤란한(?) 남성들을 전략적으로 공략하고 있다.
좀 더 다양한 제품을 만나고 싶다면 주변의 헬스&뷰티숍 매장 방문도 괜찮다. 올리브영(Olive Young), 롭스(LOHB′s), 랄라블라(lalavla, 구왓슨스)가 대표 브랜드들이다. 한곳에서 다양한 브랜드의 화장품 제품을 만날 수도 있고, 매장 직원에게 궁금한 사항들을 물어볼 수도 있다.
화장하는 남성, 즉 ‘그루밍族’이 늘면서 남성을 위한 서비스도 확대되어가는 추세다. 올리브영은 남성을 위한 ‘그루밍존’을 설치해 화장품을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진짜 화장의 시작은 스킨·로션이 아냐
그렇다면 화장은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중년의 남성 화장품은 스킨과 로션부터 생각나기 마련이지만, 전문가들은 ‘나이를 극복하는’ 효과를 얻기 위한 거라면 ‘BB크림’을 바르라고 권한다.
BB크림의 주요 기능은 크게 두 가지다. 먼저 잡티와 주름을 가려주는 효과가 있다. 여성들이 “집 앞 슈퍼마켓에 갈 때도 BB크림은 꼭 바른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 낯빛을 밝게 만들어준다. 술과 담배에 찌든 어두운 얼굴빛이 고민이라면 고려해보는 것이 좋다. 최근 선보이는 기능성 BB크림들은 ‘자외선 차단(UV) 기능’을 갖추고 있다. 피부 노화의 직접적인 원인은 햇볕과 함께 피부를 자극하는 자외선에 있다. 젊은 피부를 오래 유지하고 싶다면 자외선 차단 기능이 있는 BB크림을 추천한다.
BB크림을 바를 때는 로션처럼 손바닥으로 비벼서 바르면 안 된다. 손자국이 남기 때문에 손끝으로 조금씩 두드리며 발라야 한다. 화장용 스폰지를 사용하면 훨씬 잘 발린다. 또 목과 얼굴의 경계는 피부 색깔에 맞춰 농도를 조절해가면서 발라주면 자연스럽다.
올리브영 상품본부의 성기철 MD는 “들뜨지 않는 자연스러운 화장을 하려면 수분크림을 발라주는 것이 좋고, 전문적인 기능을 갖춘 프라이머 화장품을 사용하면 소량의 BB크림으로도 효과를 극대화하면서 피부의 모공과 요철도 쉽게 숨길 수 있다”고 조언한다. 아울러 “화장은 반드시 밝은 곳에서 하고, 면도를 깔끔하게 하는 게 남성 화장의 기본”이라고 강조했다.
좀 더 극적인 효과를 원한다면
BB크림이 익숙해졌다면 그다음 생각해볼 수 있는 화장품은 바로 ‘립밤’이다. 립밤은 입술 보습을 위한 화장품인데, 전문가들은 BB크림만 바르고 입술을 방치하면 오히려 생기 없어 보이기 쉽기 때문에 입술의 윤기 확보를 위해 립밤을 꼭 발라주라고 권한다.
일반적으로 BB크림은 한 가지 색상으로만 제조되기 때문에 자신의 피부 색깔에 딱 맞는 제품을 선택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피부색과 잘 어울리는 화장을 하려면 ‘프라이머+파운데이션’의 조합도 생각해볼 수 있다. 물론 본격적인 화장이기 때문에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효과는 극대화할 수 있다. 헬스&뷰티숍에는 남성을 위한 피부톤 측정기기가 준비되어 있어 어렵지 않게 자신에게 맞는 색상을 찾을 수 있다.
피부가 깨끗하면 선크림에 컨실러 정도만 발라도 된다. 컨실러는 문콕 등으로 까진 자동차의 도장을 가리는 ‘붓 페인트’ 같은 기능의 제품. 검버섯이나 색소침착 등 반점을 가리는 데 사용하는 화장품이다.
화장하는 것만큼 지우는 일도 중요하다. 피부과 전문의인 최광호 초이스피부과 원장은 “BB크림은 수성 제품이 아니므로 1차로 클렌징오일이나 로션으로 닦아낸 뒤 2차로 폼 클렌징을 손바닥에 덜어 충분히 거품을 낸 후 가볍게 문질러 세안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화장은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중년의 남성 화장품은 스킨과 로션부터 생각나기 마련이지만, 전문가들은 ‘나이를 극복하는’ 효과를 얻기 위한 거라면 ‘BB크림’을 바르라고 권한다.
세상에 이기지 못할 것이 운발이라고 한다. 운칠기삼(運七技三), 운이 70%라면 재능과 노력은 30%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다. 심지어는 운11. 기 마이너스 1이란 이야기조차 있다. 운이 좋아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윤은기(66) 한국협업진흥협회장은 그 답을 협조와 협업에서 찾는다. 그는 개인이나 기업이나 공생, 상생하는 것이 운을 좋게 만들고, 지속가능경영을 가능케 한다고 말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가 아니라 ‘남을 돕는 자’를 돕는다”가 그의 신조다. 남과 나눠야 운이 따른다. 운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라기보다 후천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다. 별명이 ‘미스터 콜라보(Mr. collabo)’인 그를 여의도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윤 회장께선 일찍이 미래의 물결, 정보화사회를 이야기하는 등 미래 트렌드를 남보다 앞서 예측하시고 강의해왔습니다. 그런데 운 이야기를 강조하시는 게 좀 모순 같습니다.
“정보화를 넘어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운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내가 말하는 운이란 덕행의 인과법칙입니다. 지극히 과학적입니다(웃음). 남을 돕지 않는 자에겐 운이 따르지 않아요. 아무리 똑똑하고 잘난 사람도 남이 도와주지 않거나 방해를 하면 성과를 낼 수 없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노력뿐만 아니라 남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는 점입니다. 귀인을 만나야 운이 좋아질 수 있습니다. 귀인을 만나려면 먼저 인간 존중,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최근 를 쓴 일본의 원로 변호사 니시나카 쓰토무도 국내 언론 인터뷰에서 ‘운=도덕과학’이라고 풀이한 바 있다. 니시나카 변호사는 “도덕적 과실이 운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하다.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라도 갚지 않으면 운이 나빠진다. 은혜를 받기만 하면 ‘도덕적 부채’로 쌓인다”고 말했다. 도덕적 선행과 나눔이 운을 불러온다면, 도덕적 부채와 독과점은 금전적 부채보다도 더 큰 불운을 초래한다는 지적이다.
‘하늘은 스스로를 돕는 자보다 남을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은 과학적 근거가 있다. 남을 돕는 봉사를 하고 난 뒤에는 거의 모든 경우 심리적 포만감, 즉 ‘하이(high)’ 상태가 며칠 또는 몇 주 동안 지속된다. 의학적으로도 혈압과 콜레스테롤 수치가 현저히 낮아지고 엔도르핀이 정상치의
3배 이상 분비되어 몸과 마음에 활력이 넘친다. 이른바 마더 테레사 효과다. 기업의 사회적 공헌(CSR,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리더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개인의 사회적 공헌(PSR, Personal Social Responsibility) 실행은 이타적이라기보다는 운을 불러들이는 이기적 행위인 셈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말은 많이 합니다. 반면에 일반 개인의 사회적 공헌(PSR)은 그만큼 강조되진 않지요.
“‘사회 공헌, 기부’ 하면 거대 담론으로만 생각합니다. 나중에 여유 생길 때 기부한다고 미뤄두면 평생 하기 힘듭니다. 기부는 물질적 여유가 아니라 평상시 태도, 습관입니다. 저는 재능기부 차원에서 군에 강의를 갑니다. 또 공군 순직 조종사 유자녀 장학금을 매년 1000만원씩 지원하는 일을 7년째 해오고 있습니다. 기부를 꾸준히 하는 것은 남을 위하는 것을 넘어 스스로 행복하게 사는 비결입니다.”
그는 “돈이 많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며 앰뷸런스를 이용하며 운전기사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소개했다. “부자들은 앰뷸런스에 시체가 실리는 순간부터 가족이 싸우는 경우가 많다는 거예요. 그렇게 산다면 부자인들 무슨 삶의 의미가 있겠습니까. 저는 있어야 나누는 것이 아니고 나누어야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짜 부자는 돈이 있는 게 아니라 마음을 나누는 사람입니다.”
1년에 기부금 1000만원을 약정하고 꾸준히 하는 것, 쉬운 일은 아닌데요. 사모님도 처음부터 동의하셨는지 살짝 궁금합니다.
“저는 집사람을 설득해야 할 때 집에서는 절대 말을 꺼내지 않습니다(하하).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이나 술집에 데려가 이야기를 시작하지요. ‘사는 게 뭐 별것 있나, 잘사는 인생이란 무엇인가’ 등등으로요. 먼저 길을 닦고, 마음을 촉촉하게 적신 뒤 본론을 꺼내지요. ‘우리 여행 한 번 덜 가고, 골프 한 번 덜 치자, 소비를 조금 줄이더라도 좋은 일을 해보자, 돕고 사는 게 재미지, 혼자 잘사는 게 무슨 재미인가’ 하고요. 똑같은 이야기라도 반응이 전혀 달라요. 집사람이야 콩나물값 깎아가면서 알뜰살뜰 살림하는 전업주부인데 처음엔 좋아하지 않았지요. 하지만 지금은 저보다 더 기부에 적극적이랍니다.”
윤 회장은 스스로의 전공을 심경학, 즉 심리경영학(그는 학부는 심리학, 석·박사는 경영학을 전공했다)이라고 말하곤 한다. 심리를 경영할 줄 안다는 의미에서다. 그는 “정의파, 대의명분파들이 설득에 실패하고 저항에 부딪히는 이유는 단 하나다. ‘옳으냐’로 ‘좋으냐’를 무시하거나 압박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진정한 소통은 ‘옳다’를 넘어, 마음속으로 ‘좋다’고까지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이성보다 감성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에 이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베스트셀러 비결도 사모님과의 심경학 소통 덕분이라면서요.
“하하. 네. 제 책의 첫 독자, 안테나 마켓은 집사람입니다. 작가에겐 책 내용이 정리돼 영감이 오는 ‘유레카’의 순간이 있습니다. 한밤중이라도 깨워 한바탕 책 내용을 설명하지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심드렁해하면 책의 콘셉트 혹은 틀을 바꿉니다. 베스트셀러가 된 책은 대부분 집사람이 한밤중 잠결에 들어도 흥미롭게 들은 책, 말 된다고 집사람이 동의를 표한 책이었습니다(웃음).이번 협업 책도 그렇고요.”
진정한 소통은 같은 세대, 같은 수준의 말을 쓰는 사람뿐 아니라 이질적 그룹의 사람과 통하는 것이다. 그의 강의가 폭넓은 호응을 얻는 것도 그 덕분이다. 이장우 브랜드마케팅그룹 회장, 차동엽 신부, 장용동 목사 등 숱한 명사들이 윤 회장의 강의를 ‘내 인생에 영향을 준 명강의’로 꼽는 것도 소통력 때문이다.
윤 회장께서 살아오시면서 겪은 가장 큰 고비는 무엇인가요.
“1980년도에 발간된 앨빈 토플러의 을 읽고 우리나라가 살 길은 정보화사회에 빨리 도전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갖게 됐습니다. 잘 다니던 종합무역상사에 사표를 내고 1983년 여의도에 정보전략연구소를 차렸는데 2년 만에 퇴직금까지 모두 까먹고 엄청난 부채를 지게 된 거예요. 하루가 지나면 부채는 늘고 철수하자니 빚 감당을 못하겠고. 그때가 내 인생의 최대 위기였습니다. 마침 1985년 앨빈 토플러가 방한해 붐이 일어나면서 극적으로 위기를 벗어나게 됐습니다. 그때 깨달은 것은 세상 모든 일은 반드시 때가 있다는 거였습니다. 너무 늦어도 안 되지만 너무 빨라도 안 된다는 겁니다. 이후, 무슨 일이든 최적의 타이밍을 찾아내려고 심사숙고했습니다. 사람들은 좋은 아이디어가 생기면 자신감이 넘쳐 성급하게 뛰어드는데 그러면 실패하기 십상이지요.”
우리나라 최초의 골프 칼럼니스트로 골프와 경영을 접목한 글로 인기를 끄셨지요.
“우리 사회의 내로라하는 인사들치고 저랑 골프를 치지 않은 사람은 드물지요. 골프를 치면서 인생의 깊은 내공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글로 써본 것이지요. 특히 김종필 전 총리랑 골프를 치면서 들은 인생 허업(虛業) 이야기가 제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정치는 허업이야. 잘났다고 하는 저 사람(정치인)들이 하는 일이 뭐가 있어? 온갖 폼은 다 잡지만 남는 게 뭐 있어? 정치는 자기들끼리 싸우다 다 잃는 거야. 제일 어리석은 직업이 정치야’라고 허무하게 말씀하신 게 기억에 남아요.”
인생의 산전수전을 다 겪은 분께 그런 이야기를 들었기에 허명(虛名), 허업(虛業)에 대한 내려놓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지나치게 욕심을 많이 부리면 반드시 터지거나 넘어지게 돼 있다. 윤 회장은 인생의 욕심을 풍선과 계단오르기에 비유해 설명한다. 계단을 하나씩 올라가면 문제가 없지만 한꺼번에 많이 오르려 하면 반드시 고꾸라지는 게 인생의 법칙이다. 풍선도 마찬가지다. 있는 힘껏 풍선을 끝까지 불 수는 있지만 그러다가 터질 수도 있다. 그래서 80~90% 정도만 불고 남겨둬야 한다. 너무 빵빵하게 불면 언제 터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힘을, 마음을 내려놓아야 하는 이유다.
탈속의 이야기만 했네요. 세상 이야기로 돌아와 볼까요. 정보화사회, 협업 등 늘 기업 경영의 화두를 먼저 설정, 새바람을 일으키셨습니다. 또 시(時)테크, 골드칼라 등 시사용어를 선도해 유행시키셨는데요. 그 촉(觸)의 비결이 무엇인지요.
“지도자라는 것이 무슨 의미겠습니까. 선지자, 선견, 먼저 보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지도자는 지도를 가진 사람입니다. 즉 방향성을 제시하는 게 중요합니다. 청년기에 군에서 훌륭한 리더를 만나 생각의 틀을 다진 게 제겐 큰 도움이 됐습니다. 청년 장교(중위) 때 투스타 김동호 장군의 부관을 하다 보니 엄청난 용량의 공부가 필요했습니다. 인생의 한창때 존경할 만한 롤모델을 만나는 것은 큰 운입니다. 책 100권, 아니 1000권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칩니다.”
책 에서 귀인효과를 말씀하시는데요. 김동호 장군이 윤 회장님의 귀인이셨나보군요.
“맞습니다. 김 장군은 영어, 일어 등 외국어 실력도 뛰어나시고, 유도, 검도 유단자에다 특히 인품이 뛰어난 분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지덕체, 문무를 겸비하신 분이었습니다. 김 장군이 면접하는 모습을 보고 단번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제 실력을 묻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이력, 종교, 꿈을 들려주시며 리더로서 이렇게 노력하겠다고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겁니다. 당시 제 주변 동료 장교들은 퇴근 후 취직 공부를 해야 한다며 24시간 근무해야 하는 부관을 기피했어요. 저는 퇴근 후 두 시간 공부보다 이분을 모시는 게 훨씬 큰 공부가 되겠다는 느낌이 한 번에 오더군요. 존경받는 것도 기쁘지만, 존경하는 사람을 가까이 두는 것이 더 기쁜 일입니다.”
윤 회장은 그 후 4년간을 한결같이 김 장군을 곁에서 ‘모셨다’. 제대하는 토요일, 오후 3시까지 초과 근무를 자청한 것은 초급 장교 중 전무후무해 공군 본부에서 화제가 될 정도였다. 윤 회장은 김 장군과의 인연을 40년째 이어오고 있다. 지금도 1년에 두세 차례씩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고 예전 어록과 교훈을 같이 추억하며 이야기꽃을 피우곤 한다.
김 장군도 훌륭하시지만 그분을 한눈에 알아본 윤 회장님도 대단합니다. 더구나 20대 중반의 청년 장교 때요.
“그런가요.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알아보는 용인술도 중요하지만,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알아보는 ‘역용인술’도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롤모델을 만나고 싶어 하지만 스스로 찾아보려고 노력하진 않거든요. 존경하는 사람이 없으면 반쪽 인생이에요. 한 번도 사랑해보지 못하고 죽는 것보다 더 불행하고 불쌍한 삶이지요. 어려운 의사결정을 할 때 ‘김 장군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자기객관화가 되면서 답이 보여요. 존경할 대상이 생기면 상대의 장점 DNA가 보이고 배워야 할 사항이 쏙쏙 들어와요. 존경하는 사람을 가지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지요.
“앞으로 10년 정도는 우리나라 모든 영역, 모든 분야에 협업문화를 확산시키는 일에 매진할 계획입니다. 그 후에는 청소년 시절부터 꿈이었던 소설가로 데뷔하고 싶습니다. 소설은 현실에서는 추진할 수 없는 이상향을 마음껏 그릴 수 있으니까요. 제가 존경하는 소설가 김주영 선생님도 수시로 만나고 있고 최근에는 김홍신 선생님도 몇 번 만났습니다. 평생 동안 경험한 일들과 상상했던 일들을 융합시켜 멋진 소설을 쓰는 게 내 인생의 마지막 직업이 될 겁니다.”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한의학 병의원의 대표적 브랜드 중 하나로 꼽히는 자생한방병원이 혁신을 꾀하고 있다.첫 번째 혁신은 본원 이전이다. 서울시 강남구 압구정동에 여러 개 건물에 나눠져 있던 본원 조직과 시설을 지상 15층 규모의 강남구 논현동 신사옥으로 옮겨 합쳤다. 시설만 확대된 것이 아니다. 한자리 진료 시스템과 외국인 전용 국제진료센터가 도입된다. 또 다른 혁신은 자생한방병원 본원의 새 수장이 된 이진호(李晋昊·38) 병원장의 등장이다. 불혹의 나이도 안 된 그의 존재는 자생한방병원 혁신의 핵으로 평가받는다.
이진호 병원장은 맡은 중책에 대해 “부담이 없지는 않지만 기대가 더 크다”고 말한다.
“한의대를 졸업하고 나서 한의사로서의 생활을 이 병원에서 시작했습니다. 한의학을 여기서 배운 것이나 마찬가지죠. 덕분에 설립자인 신준식 박사님의 철학이나 이념을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좋은 기회를 잡은 만큼 꿈을 펼쳐보고 싶습니다. 잘될 것 같은 예감도 들고요(웃음).”
주변에서는 이진호 병원장을 도전의식이 강하고 적극적인 스타일이라고 평가한다. 그래서인지 신사옥 이전만으로도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을 텐데 새로운 작품을 내놨다. 바로 ‘한자리 진료 시스템’이다. 한자리 진료 시스템은 한의사와 양의사가 동시에 환자를 대면해 진단하고 치료 계획을 수립하는 양·한방 협진 치료다. 그간 양·한방 협진 시스템 구축을 위해 꾸준히 노력해온 자생한방병원이라서 가능한 시스템이다. 치료를 위해 양의학과 한의학의 관점에서 환자의 상태를 그 자리에서 크로스체크(교차검증)한다는 의미가 있다.
사실 협진은 양의학계나 한의학계 모두에게 숙제였다. 일반 종합병원에서는 각 치료과목 간 이견을 줄이기 위해, 한의원이나 한방병원에선 과학화를 위해 협진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구성원 간 이해관계나 눈에 보이지 않는 상하관계 때문에 효과적인 협진 시스템을 구성하기가 쉽지 않았다.
“한자리 진료 시스템은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장기간 여러 분원에서 협진을 위한 다양한 시도들을 해왔기 때문에 가능한 방식이죠. 또 오랜 협업을 통해 자생한방병원의 진료 방식이나 철학을 이해하는 양의학 의료진이 고스란히 신사옥으로 옮겨왔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래도 발생할 수 있는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해 당분간은 시범 운영하면서 자리를 잡아갈 예정입니다.”
한자리 진료를 받는 환자는 두 분야의 의사를 30분간 만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몸 상태나 앞으로 받게 될 치료 계획 등에 대해 설명을 듣는다. ‘3분 진료’로 대변되는 국내 의료 환경에선 보기 드문 광경이다. 참여할 수 있는 의사의 자원이 한정적이기 때문에 일단은 수술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증상이 심한 환자를 우선 대상으로 한다. 아직은 이런 협진이 건강보험 항목으로 잡혀 있지 않기 때문에 별도의 추가 진료비를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한방 비수술 척추치료의 길을 걸어왔지만, 무조건 수술이 안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필요한 환자는 수술을 해야 하는 것이 맞고, 수술이 가능한 병원으로 의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만 수술을 하게 되면 환자의 상태가 확연하게 달라지기 때문에 그 전에 환자와 의사 모두가 확신할 수 있을 만큼 마지막까지 확인하고자 하는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한의학의 과학화를 위한 노력은 여러 형태로 결실을 맺었는데, 그중 하나가 외국인 환자를 위한 국제진료센터 설립이다. 한의학이 낯선 외국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과학화된 연구가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그들 스스로 한방병원을 찾긴 어려웠을 것이라고 이 병원장은 설명한다.
“한의학의 과학화 중 중요한 요소는 통역입니다. 양의학의 언어, 용어에 익숙한 이들을 위해 한의학 용어들을 분석하고 번역하는 것이죠. 한의학이 연구를 한다고 해서 갑자기 과학적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원래 과학적인 분야였는데 표현 방식이 달랐을 뿐이죠. 외국인 환자들이 한의학을 이해하고 저희를 믿었던 것도 이런 노력 때문입니다. 또 해외 분원 설립이나 봉사활동 등 그들에게 직접 다가가려는 노력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신사옥을 준비할 때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환자를 위한 서비스 확충이다. 환자가 의사를 찾아가는 강압적인 분위기가 아닌 환자가 편안하게 진료받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려는 노력이다.
“유럽의 병원들은 의사가 환자를 찾아가는 구조가 대부분이죠. 이에 반해 국내 병원은 환자들이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에요. 이 부분을 개선하기 위해 많은 투자를 했습니다. 환자가 기다리는 공간이나 입원실 모두 척추 환자를 고려해 설계됐어요. 지금과 같은 혁신과 성장이 가능했던 건 환자들의 믿음과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경영적인 관점에서는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우리가 갖고 있는 감사한 마음을 신사옥에 담았습니다.”
현재 시니어들은 국가와 가정을 위해 몸을 혹사하고, 마음 돌볼 시간조차 없이 열심히 살아온 세대다. 그래서 현재 자신의 몸과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지친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회복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상식을 제대로 갖고 있지 못하다. 이제 내가 누구인지,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아야 할 때다. 이번 호에서는 명상의 대가 안동환 코치를 만나봤다. ‘마음공부’를 통해 나를 알고 내 마음을 간수하는 법을 터득하면 좋겠다.
‘몸을 느끼고, 맘을 살피고, 숨을 다스리자’는 몸맘숨 명상은 마음을 돌보는 데 최적이라고 한다.
서강대 사학과 76학번이고 올해 61세의 안동환 코치는 나이보다 훨씬 젊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가 활동하는 분야를 생각하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이라 할 수도 있다. 그는 대체의학의 심신건강과 코칭에 대한 전문성을 바탕으로 다수의 대기업과 정부기관을 비롯해 한국예술종합학교 등에서 강의와 수련을 지도해왔다. 그의 대표적인 브랜드는 동서양의 심신수련법과 코칭을 접목한 ‘몸맘숨 명상’. SK그룹의 손길승 전 회장, 최종현 전 회장 등 28년 동안 임직원을 대상으로 심기신 수련(몸맘숨 명상)도 지도해왔다.
안동환 코치가 몸맘숨 명상을 시작하게 된 데에는 ‘아픈’ 사연이 있다.
“젊었을 때 편협한 사고 속에서 보내다가 5년 동안 아팠습니다. 간, 눈, 기관지 천식 등 안 아픈 데가 없었어요. 그때가 스물여덟 살 무렵이었습니다. 5·18 민주화운동 때 쓰러졌어요. 전두환 대통령 부류가 보기 싫어 속병이 났었나봐요(웃음).”
안동환 코치는 1956년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에서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그런 태생이 영향을 미쳤을까. 그는 운동권 활동을 열심히 했다. 하지만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기가 막혀서 기가 막힌 병’에 걸렸다. 그러면서 자신이 투쟁가의 기질을 가진 인간은 아님을 깨달았다.
“이쪽 진영의 신념으로만 세상을 재단하고 행동으로 옳기려니 힘이 들었어요. 평소 측은지심이 많은데다 감수성이 풍부하고 정의로운 성향이어서 전투적이고 투쟁적인 사고를 흡수하기엔 벅차고 힘들었나봅니다. 그것이 몸에 영향을 끼쳤고요.”
고통스러웠던 젊은 시절, 몸맘숨 명상을 통해 극복
그가 쓰러진 곳은 도망 다니다가 숨어 들어간 시골 외삼촌댁이었다.
“얼마 동안 기절해 있었는지 몰랐어요. 1분인지 한 시간인지… 일어났는데 기운이 없는 거예요. 걷지도 못하고 눈도 확 나빠지고 변비와 설사 증세가 한꺼번에 나타나고 하루에도 몇 번씩 쓰러질 만큼 몸이 힘들었죠. 그렇게 무기력증이 심해지고 기가 막힌 병들에 의해 심신이 망가져갔죠.”
세상을 받아들이지 못한 그의 마음의 병도 점점 깊어갔다.
“동료들은 잡혀 들어가 있는데 나는 안 잡히고… 죽지 못해 살았지.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허리까지 망가졌어요. 오래 서 있지도 못하고 누워 있어도 아파서 잠도 안 오고. 그런데 양의학 병원에 가니 간수치도 정상이고 소변검사를 해도 문제가 없었어요. 내시경 검사를 해도 원인이 발견 안 되고.”
한의원에 가도 딱히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간경화다 뭐다 얘기만 많았고 나아질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5년 동안 이런저런 방법을 찾아보며 투병을 했다. 그러다가 단전, 기공을 접하게 됐고 그때부터 급속하게 몸이 나아졌다. 기를 터득하면서 안경도 벗게 됐고 허리도 아프지 않게 됐다.
고집 센 마음을 유연한 마음으로 돌리는 게 마음수련
그는 아픈 와중에 역사 교사로 일했다. 한 시간 수업하고 한 시간 양호실에서 보내야 하는 생활의 반복이었다. 그러다 몸맘숨을 접하고 이 길을 가겠다고 마음먹은 후 교사를 그만두고 지도자가 되어 3년간 보급활동을 하면서 SK그룹과 만나게 됐다. 그는 SK그룹의 손길승 전 회장, 최종현 전 회장의 마음훈련 코치를 도맡아 했다.
“나이가 들어 노화로 몸이 망가지기도 하지만, 몸을 다스리는 건 마음입니다. 마음을 잘 다스려야 몸도 잘 다스릴 수 있어요.”
그는 몸과 상관없이 나이가 들면 마음도 늙어간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마음이 늙어갈 때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귀띔해준다. 첫 번째 부류는 고집이 세지는 사람들이다. 통계로 보면 상당수의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고집이 세지면서 고정관념이 강해진다. 마음이 점점 굳어지는 것이다. 두 번째 부류는 첫 번째 부류와 반대로 유연해지는 사람들이다.
“살다 보니 이쪽 얘기도 맞고 저쪽 얘기도 맞다는 걸 깨닫고 유연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음수련은 고집이 세지는 마음을 유연한 마음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존경받으며 잘 늙어갈 수 있어요.”
그러나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왜 그런 걸까?
“마음공부 한다고 자격증 주는 거 아니잖아요? ‘마음이 다스려지는 거냐? 그냥 이렇게 사는 거지’ 하죠. 전부 돈 되는 공부만 하고, 몸 관리만 하고. 마음관리는 신경도 안 쓰죠. 그나마 마음공부 한다는 사람들도 종교단체에나 가서 하죠. 하지만 그런 사람들 중에서도 몸과 마음을 형식적으로 관리하는 경우가 많아요. 저도 교회에 다니지만 종교로 마음공부를 하라는 말은 못 하겠어요. 종교를 뛰어넘는 마음공부를 해야 해요.”
그는 마음수련에서 호흡을 중시한다.
“호흡하는 것이 곧 마음관리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누군가를 기분 나쁘게 만들면 그는 숨이 거칠어지겠죠. 그런데 중환자실에 가보면 환자들 숨이 거칩니다. 즉 몸이 나빠도, 마음에 스트레스를 받아도 숨이 거칠어진다는 거죠. 그러니까 숨을 다스리면 몸과 마음을 동시에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다스리는 거죠.”
그는 마음이 거칠어진 사람들의 몸을 살펴보면 비틀려 있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자세만 바르게 해도 신경의 흐름이 달라져 마음이 평정을 얻는다는 주장이다. 그가 말하는 숨 호흡법은 어떻게 이뤄지는지 들어보자.
“우선 자세를 바르게 한 다음에 배꼽 밑 아랫배에 의식을 집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숨을 들이마시면서 풍선처럼 배를 부풀려야 해요. 그다음엔 숨을 내쉬면서 풍선에 바람을 뺍니다. 그러면서 배꼽 밑 아랫배에서 무슨 냄새가 나나, 무슨 소리가 들리나, 어떤 일이 벌어지나 집중하면서 심(깊게), 장(크게), 세(가늘게), 균(균등하게) 하는 거죠. 배꼽에 마음을 놓고 보는 겁니다.”
시니어의 위기, 마음을 다스려야 해결된다
처음부터 마음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 몸이 아파서 마음만이라도 편안해지려고 마음공부를 시작한다.
“젊을 때는 격렬한 운동을 통해 몸과 마음의 스트레스를 풀지만 점점 몸이 늙어지면 그렇게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나이가 들면 동적인 방법에서 정적인 방법으로 몸과 마음을 관리해줘야 합니다. SK그룹에서 제가 강의를 할 때 마흔 살 이상 임원진들에게 이 방법을 추천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수련은 결코 쉽지 않다고 말한다.
“마음수련은 정적이고 재미도 없고 지루해서 모두들 실천하기 어려워하죠. 하지만 이 방법은 사람다워지려고 하는 것이지 무슨 테크닉이 아니에요. 일단 맛을 봐야지요, 첫 숟갈에 배부를 순 없어요. 마음수련은 스스로에게 일종의 자격증을 주는 일과 같습니다.”
퇴직 후 위기에 빠지는 사람들이 많다. 자신감도 떨어지고 ‘내가 왜 잘렸지?’ 하며 자책하는 마음이 심해지기도 한다. 아내와 딸이 뭐라고 툴툴대기라도 하면 ‘내가 월급 안 갖다 줘서 저러나’ 하는 생각에 화가 나는 날도 있다. 안 코치는 그럴수록 마음을 잘 다스려야 가정의 위기를 극복하고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최종현 전 회장이 폐암으로 세상을 떴는데 몸맘숨 명상은 잘 하셨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경제계의 수장으로 최 회장님이 겪은 스트레스를 감안했을 때, 심신수련을 하셨기에 그나마 육십에 돌아가시지 않으시고 칠십에 돌아가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분은 삶과 죽음에 결코 연연해하시지 않았고 책을 쓰시다가 죽음을 평화롭게 맞이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