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배국남 대중문화 평론가(knbae24@hanmail.net)
“유흥업소에 안 간다. 2006년 이후로는 한 번도 안 갔다. 왜냐하면, 4만5000원씩 아이들을 후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돈이면 쓰레기더미 안에 있는 아이들을 도와줄 수 있다. 파리가 눈에 알을 낳아도 쫓을 힘이 없는 아이들이다. 그 아이를 살리면 그 아이가 변해서 사회를 살린다. 내가 번 돈이 이렇게 소중한 일에 쓰인단 걸 목격했기 때문에 큰돈을 그렇게 쓸 수 없게 됐다.” 구호단체 컴패션 홍보대사에서부터 북한 어린이 돕기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부인 신애라와 함께 사랑나눔 실천을 하는 스타 차인표씨의 말이 큰 울림을 준다.
자살률 1위, 노인빈곤율 1위, 사회적 관계 최하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10월 발간한 보고서 이 적시한 한국의 상황이다. 취업난, 양극화 등으로 인해 가족 해체가 급속히 진행되고 부모에게 버려지는 아이들도 급증하고 있다. 어느 때보다 사랑나눔이 절실할 때다. 하지만 후원, 기부, 봉사 등 사랑나눔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의 사랑을 받는 연예인 스타들이 선행에 적극적으로 나서 많은 사람을 사랑나눔 실천에 참여시키는 아름다운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연예인 스타들이 사랑나눔 기폭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1981년부터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의 후원회장을 맡아 불우한 어린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3년 전부터는 제로캠프라는 청소년들을 위한 비영리 단체의 이사장직을 맡아 문화 예술을 통한 비행 청소년의 교화에 나서는 등 다양한 사랑나눔 실천을 펼치고 있는 최불암씨와 백혈병 어린이, 위안부 할머니, 네팔과 중국 지진 피해자 등에게 거금을 쾌척하는 등 전방위적 선행을 펼치고 있는 송중기씨 등 많은 연예인 스타가 사랑나눔 실천을 활발하게 하고 있다.
최근 들어 연예인 스타들의 사랑나눔의 양태가 진화하며 선행의 스펙트럼이 넓어지고 있다. 그동안 불우이웃이나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성금 기부나 자선단체의 홍보대사, 방송사의 자선 프로그램 출연 등이 스타 선행의 주류를 이뤘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김혜자·한지민·유재석의 재능기부, 김정은·이영애·문근영·한혜진·박해진의 국내외 빈민지역에 학교, 병원, 도서관, 우물 등 시설 기부, 최불암·정애리·고두심·김제동의 재단을 통한 불우 청소년 지원, 이효리·송혜교·송중기의 위안부 할머니 지원 등 스타들의 사랑나눔의 스펙트럼이 크게 확장됐다.
기부 형태도 불우이웃과 시설에 대한 후원, 청소년과 학교의 장학금 쾌척,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성금기탁 위주에서 벗어나 한지민·송혜교 등 스타들의 책 인세 기부, 이승기·박해진 등 쌀 화환 기부, 최강희의 골수 및 장기기증, 차인표-신애라·정혜영-션 부부의 제3세계 어린이 후원금 지원, 김장훈·하춘화의 행사와 캠프를 통한 기부 등 매우 다양해졌다.
일회성 이벤트에 그쳤던 연예인의 사랑나눔과 선행은 수십 년 동안 지속해서 전개해나가는 모습으로 변모하고 있다. 김혜자·최불암·고두심·하춘화·안성기·정애리·차인표·김장훈·최수종·유재석·션·장나라 등은 10~40년에 이르는 장기적 선행을 펼치고 있다.
사랑나눔을 시스템화하거나 조직화하는 스타들도 많다. 공연 등 수입원이 생기는 이벤트 수입의 일부를 계속 기부하는 김장훈을 비롯해 적지 않은 스타들이 자신의 연예활동 수입의 일정 부분을 떼어 소년 소녀 가장이나 독거노인, 장애인들을 지속해서 돕는 것을 체계화했다. 김원희·김정은 등은 ‘따뜻한 사람들의 모임’을, 최수종·오윤아·김수로 등은 ‘좋은 사회를 위한 100인 이사회’를 만들어 조직적으로 봉사활동과 기부사업을 펼치고 있다.
국내의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이웃을 대상으로 주로 이뤄지던 스타들의 사랑나눔은 아프리카, 동남아 등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안성기·김혜자·정애리·박해진·이영애·송혜교·문근영 등 많은 스타가 세계 각국의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나누고 있다. 이민호·장동건·이승기·장근석처럼 스타와 팬클럽이 함께 자선활동이나 선행활동에 나서는 행태도 이제는 일상적 풍경이 됐다.
스타들은 왜 사랑나눔에 나서는 걸까. “조그마한 도움이 한 아이의 생명을 살리고 삶을 변화시킨다. 그리고 도움을 받은 아이가 커서 사회와 이웃에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 성장한다. 참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다.”오랫동안 청소년들에게 장학금 기부를 하고 장애인단체 홍보대사 등 다양한 방면에서 사랑나눔을 실천하는 고두심씨의 말이다.
40여 년 동안 불우 아동과 청소년들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어온 최불암씨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에 대한 관심과 투자만큼 소중한 일이 없다. 더욱이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아이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면 아이가, 사회가, 국가가 긍정적으로 변한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국내에 있는 고아는 물론 굶주림에 허덕이는 아프리카의 아이들까지 몸과 마음으로 포근히 감싸 안는 김혜자씨는 2019년까지 후원금을 미리 내고 이렇게 말했다. “광고를 찍거나 돈이 생기면 후원하는 아이들 것을 떼어놓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늘 불안하다. 내가 돈이 없어 안 주면 걔네들은 굶으니까. 나야 돈이 없으면 우리 아들이 밥이라도 먹여주겠지만, 그 아이들은 안 되지 않나. 당연한 일이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오랫동안 9억 원에 가까운 돈을 익명으로 기부하고 시골 지역에 청소년을 위한 공부방 등을 지원한 문근영씨는 “제가 기부 등을 하면서 더 행복하고 매우 기쁩니다. 이런저런 상황들, 사연들, 사정들이 있지만 기부할 때 ‘우리 같이 그래도 열심히 살아봐요’라는 그런 메시지 정도는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요”라고 기부 이유를 밝혔다.
루게릭병 환자 돕기에서부터 어린이 재활병원건립 후원까지 다양한 자선사업과 캠페인을 왕성하게 펼쳐 ‘선행천사’라는 별칭을 얻은 션. 그는 사랑나눔 실천 공개에 대해 “일부 사람들이 (사랑 나눔을) 조용히 할 수 있는데 왜 공개하냐고 말한다. 연예인이기에 많은 사람에게 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일을 알려서 그걸 공유하면 더 빨리 이룰 수 있다. 겨울을 나는 데 필요한 연탄이 300만 장인데, 혼자서 기부할 수 없는 양이기 때문에 많은 분에게 알리면 300만 장의 기적을 쉽게 이룰 수 있다”고 설명했다.
1970년대를 살았던 국민이라면 밤 12시에 울리는 사이렌 소리를 기억한다. 24년 전인
1982년 1월 5일, 광복 후 줄곧 갇혀 있었던 대한민국의 밤이 세상에 풀려났다. 밤 12시~새벽 4시의 야간 통행금지(통금)가 해제된 날이다. 전국 도시의 거리에 사람이 오가게 된 것도, 새벽까지 마셔야 직성이 풀리는 한국인의 술자리 습관도 모두 이때 시작됐다. 글 유충현 기자 lamuziq@etoday.co.kr
“네온불이 쓸쓸하게 꺼져가는 삼거리 / 이별 앞에 너와 나는 / 한없이 울었다 / 추억만 남겨놓은 젊은 날의 불장난 / 원점으로 돌아가는 0시처럼”
가수 배호의 노래 ‘0시의 이별’ 가사다. 통금과 함께 불 꺼지는 거리 풍경과 이별할 수밖에 없는 연인들의 안타까운 심정이 나타난다. ‘0시의 이별’에는 금지곡 딱지가 붙었다. 남녀가 0시에 헤어진다면 통행금지 위반인데 가사가 통금위반을 부추긴다는 이유였다고 한다.
밤과 낮의 구분 없이 거의 모든 생활이 가능한 오늘날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광복 후 37년간 한국인들은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 집 바깥을 돌아다닐 수 없었다. 미군정 시절 북한의 간첩을 경계한다는 목적으로 도입됐지만, 이후 정부는 ‘범죄예방’ 등의 명목으로 통행금지 조치를 존속시켰다. 전쟁이나 재해 재난이 아닌 상황의 평시통금은 세계적으로도 사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때 그 밤문화…11시 30분 되면 귀가전쟁 시작
자정이 되면 ‘애~앵~’ 사이렌 소리가 울려 펴지고 서대문 로터리에는 철제 바리케이드가 설치됐다. 2인1조로 이뤄진 야경꾼들은 나무로 만든 딱따기를 치며 “통금!” 이라고 길게 소리친다. 단속은 엄혹했다.
김근석 전 경정(1970~80년대 서울 종로구 필동파출소에서 순경으로 근무)은 “귀가전쟁이 시작되면 번화가 입구쪽 차선이 사람으로 빽빽했다. 택시를 잡기 위해 합승은 기본이었고 ‘따블’이나 ‘따따블’ 요금을 부르는 게 일상적이었다”고 회상했다.
국민들의 밤문화는 완전히 달랐다. 혹시라도 통금에 걸리면 보통 곤욕이 아니었다. 일단 파출소에 잡혀갔다가 즉결심판에 넘겨져 벌금을 물었다. 예전 회사들은 별도의 숙직실을 두고 있었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대의 유물이다. 술꾼들은 10시30분 정도가 되면 슬슬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를 하거나 술집 문을 닫고 밤새 마시는 선택을 해야 했다.
반대로 통행금지가 오히려 외박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일부러 애인과 술을 마시다가 깜빡한 척하고 통금을 넘겨버리는 수법은 당시 젊은 남녀들에게 흔했다. 덕분에 여인숙이나 여관 같은 서민형 숙박업이 높은 수익을 올리던 시기이기도 했다. 남자들은 굳이 섬에 가서 배를 놓친다든가, 두메산골에서 술이 떡이 되어 운전 못 한다고 버티는 등의 영웅담(?)도 심심찮게 회자됐다.
국가는 아주 가끔씩 통행금지를 풀어줬다. 1년에 단 두 번 통행금지가 해제된 날이 있었는데, 크리스마스와 12월31일이었다. 사람들은 이때에만 해방감을 만끽하기 위해 거리로 쏟아져 나왔는데, 이 때문에 젊은이들에게 크리스마스는 성스러운 휴일이 아니라 ‘해방의 날’이었다. 서울 명동과 충무로, 종로 일대가 젊은이들의 해방구였다.
대한민국 밤의 족쇄를 풀어준 88올림픽 유치
대한민국의 밤에 채워진 족쇄를 풀어준 것은 다름아닌 1988년 서울올림픽이었다. 1981년 9월 독일(당시 서독)의 바덴바덴에서 전해진 올림픽 개최지 선정 소식은 한국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통행금지가 있는 상태에서 올림픽을 치를 수는 없었다. 사회에 팽배한 민주화 요구도 어떤 형태로든 숨통을 터 줘야 했다.
1981년 11월 19일 전국경제인연합회관 19층 중국음식점에서 여야 중진 국회의원들의 회동이 있었다. 권정달 민정당 사무총장은 이날 갑자기 통금해제안을 꺼냈다. 이견이 나오지 않아 4분 만에 논의가 끝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가급적 이른 시일 안에 통금을 해제하겠다고 밝혔다.
1982년 1월 5일 새벽 4시를 기해 50개시 139개군 지역의 야간 통행금지 조치가 해제됐다. 나라를 되찾은 뒤 처음으로 밤이 국민들에게 돌아왔다. 시민들은 잠을 잊은 채 37년 만에 되찾은 자유를 환호하며 거리를 활보했다. 적지 않은 인원이 새벽 1시에 길거리로 나와 만세를 불렀을 정도였다고 한다. 밤을 되찾은 시민들은 한풀이라도 하듯 거리로 쏟아져 나와 새벽 서울시청 시계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심야극장도 이 시절 생겨났다. 통금이 해제된 지 꼭 한 달 뒤인 2월6일 첫 심야 상영영화인 이 개봉했다. 개봉 첫날 밀려드는 인파에 극장 유리창이 깨졌다는 보도기록물은 처음 맛보는 자유를 만끽하고자 했던 당시의 분위기를 설명해 준다. 심야영화의 흥행몰이는 을 필두로 , 등으로 이어지는 에로영화 전성기를 만들기도 했다.
술문화도 변했다.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룸살롱, 단란주점 등 새벽까지 이어지는 한국의 밤문화도 이때 시작됐다고 한다. 이전에는 최대한 급하게 마시던 국민들이 새벽까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통금 이후 급등한 민간소비, 오일쇼크 극복 원동력
1982년의 통금해제는 국민의식이 자유로워지고 성숙해진 계기로 평가된다. 통금이 해제되면서 범죄율이 높아질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으나 큰 혼란은 없었다.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 ‘돌려받은 4시간의 자유’는 37년간 계속되어온 억압을 빠르게 지워갔다. 버스와 지하철은 자정 이후까지 연장 운행됐고 택시 영업도 밤새 계속됐다. 철야 영업 간판을 내건 가게들도 속속 등장했다. 통제에 익숙하던 사회에 자율적 질서가 자리를 잡아갔다.
기대 이상의 경제적 효과도 뒤따랐다. 서비스 부문의 고용이 늘고 얼어붙은 기업 마인드와 소비심리가 살아났다. 비행기의 이착륙 시간도 구속에서 풀려나 바이어와 관광객의 입국도 늘었다. 1980년 마이너스 0.2%를 기록한 민간소비 증가율이 1982년 6.9%, 1983년 9.0%로 높아졌다. 우리 경제는 1982년 7.2%, 1983년 10.7%라는 고성장을 기록하며 2차 오일 쇼크 등으로 인한 국제적 경제 침체에서 빠르게 벗어날 수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야간 통행금지 해제 무렵부터 디스코텍과 카바레, 룸살롱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고 대형 폭력조직이 생겨났으며 퇴폐향락문화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는 주장도 있다. 에너지 사용량이 증가하였고, 유흥업소의 영업시간 연장으로 향락적인 사회 환경이 조성되었으며,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한 청소년 범죄가 발생하여 사회적인 문제로 지적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간 통행금지 해제는 국민의 기본권과 자율성 회복의 상징적인 조치였다.
한류와 케이팝 등의 여파로 문화의 힘을 실감하는 요즘. 30여 년을 문화체육관광부에 몸담았던 신현웅(辛鉉雄·72) 웅진재단 이사장은 세종대왕을 떠올려 보곤 한다. 훈민정음 창제와 더불어, ‘종묘제례악’을 작곡할 만큼 언어와 음악의 힘을 바탕으로 정치를 펼친 세종의 선견지명에 감탄하던 그에게 는 단연 고개를 끄덕이게 할 만한 책이었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웅진재단에서 수학·과학·예술분야 영재들을 위한 장학 사업을 운영하는 신 이사장은 분기마다 3~4권의 책을 직접 골라 지원하고 있다. 도 아이들을 위한 책을 고르면서 접하게 됐는데, 평소 세종대왕의 문화 정치에 관심이 있던 그에게는 더욱 흥미롭게 다가왔다.
“21세기는 문화의 시대라고 하잖아요. 그동안 정치적 성장이나 경제적 기적은 많이 이루어 왔는데 이제는 명실공히 문화 국가를 만들어야 할 때가 온 것 같아요. 세종은 ‘예(禮)와 악(樂)을 갖춘 사람이 덕인(德人)’이라 했는데, 그 정신을 되살려서 나라의 격도 더 높이고 온 국민이 문화와 더불어 화평하게 사는 세상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재미있게 읽었어요.”
책의 저자인 극작가 신봉승은 현 정부 부처의 장 자리에 조선시대 명현들을 대입해 이상적인 정치가의 표상을 제시했다. 대통령에 세종대왕, 국무총리에 오리 이원익, 기획재정부 장관에 퇴계 이황 등 20명이 등장한다. 1998년부터 이듬해까지 문화관광부 차관을 지낸 그에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 선정된 연암 박지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박지원은 과거에 낙방하고 스스로 학문을 깨치기 위해 북경과 열하에 가서 직접 그들의 학문과 문화를 접하고 돌아왔죠. 그때 탄생한 것이 바로 고요. 사실 문화라는 것이 그래요. 어떠한 법칙이나 이론으로 국민들을 일부러 계도한다 해서 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자신의 경험을 통해 눈을 뜨고 그것이 몸에 배서 우러나는 것이죠. 그러한 식견과 유연한 사고방식을 가진 연암을 문화체육부 장관으로 꼽은 걸 보면 저자 역시 문화에 대한 가치관이 잘 갖춰진 분이라 생각해요.”
법으로 다스리지 말고, 예를 가르쳐라
‘법으로 규제하면 피동적인 국민이 되고, 예(禮)를 가르치면 스스로 알아서 행동하는 상식적인 국민이 된다.’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으로 꼽힌 사계 김장생이 남긴 말이다. 신 이사장은 문화도 지식의 차원을 넘어 피부로 접할 수 있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모든 것을 법이나 정책으로 해결하면 한계가 있어요. 하지만 예가 갖춰지면 자연히 사람 도리를 하게 되고, 질서가 생기게 되죠. 그런 과정이 ‘본(本)’이라 할 수 있고 거기에 덧붙여지는 지식이나 법 등을 ‘말(末)’이라 할 수 있어요. 아이를 교육할 때도 예를 가르치는 것이 기본이고, 간혹 나타나는 비행청소년들을 훈계하기 위한 부수적인 방법으로 법을 적용하게 되는 거죠. 이게 거꾸로 되면 사회가 아주 삭막해지고 황폐해져요. 문화도 마찬가지죠. 먼저 음악도 듣고 예술 작품도 보며 문화를 몸에 배게 하려는 노력이 필요해요. 그 뒤에 지식이나 정책 등이 어우러져야 잘 흡수가 되는 거죠. 제가 문화관광부에 있을 때도 깊은 철학과 신념은 없었지만 그런 것에 의미를 두고 하려고 노력했어요.”
신 이사장은 문화란 모든 삶의 양식이라 말한다. 문화적인 삶을 살면 인생이 풍성해지고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것. 나이가 들수록 일상을 단조롭게 느끼는 이들이 많지만, 다양한 문화를 향유하는 사람은 그만큼 할 일이 많아 지루할 틈이 없다고 한다.
“예전에는 음악 한 곡 들으려면 얼마나 어려웠는지 몰라요. 지금은 간단하잖아요. 해외 공연이나 유명 미술품을 만날 기회도 많아졌고, 찾아보면 알뜰하게 문화적 욕구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많아요. 저도 좋은 책을 많이 읽으려 하고, 영화나 공연도 보면서 틈틈이 글도 쓰고 있어요. 특히 발레 공연은 거의 다 볼 정도로 좋아해요.”
‘짜르디 짜르디’ 하지 말고 ‘비스타리 비스타리’
여유가 생기면 해외여행도 어렵지 않으니 얼마든지 여러 나라의 문화를 경험해볼 수 있는 요즘이다. 신 이사장은 다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언어를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만큼 문화와 언어를 한 몸처럼 생각하는 그는 2008년 다문화가족 음악방송을 개국했다. 타지에서 외롭게 살아가는 다문화가족을 위해 각 나라의 DJ가 모국어로 모국의 음악과 소식, 한국 생활에 필요한 정보 등을 제공한다. 다문화가족 음악방송을 이야기하는 신 이사장의 눈빛에서 문화에 대한 그의 진심어린 애정과 신념이 느껴졌다.
“1970~1980년대에 영국과 사우디아라비아에 문화 공보관으로 있었을 때가 생각나요. 고향 생각에 힘들 때 다른 무엇보다 ‘그리운 금강산’이나 ‘가고파’ 같은 노래를 듣는 게 가슴 찡한 위안이 되던 때였죠. 지금 우리나라에 와 있는 외국인들이 17만 명이 넘어요. 그들을 돕는다고 돈을 얼마나 많이 줄 수 있겠어요. 그럴 수 없다면 그들 나라 노래 한 곡이 더 큰 위로가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시작하게 됐죠. 물론 많이 알려진 것은 아니지만 실제 모국의 언어가 그립고 소통이 간절한 외국인들에게는 희망이고 활력이 되는 존재예요.”
신 이사장은 오래전부터 해외를 방문하게 되면 그곳의 시나 노래를 그 나라 언어로 외워가며 존중을 표하고 있다. 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외국 시 한 구절을 부탁하자, 그보다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하나 들려준다고 했다.
“네팔 히말라야산맥 등반대를 가이드하는 현지인을 ‘셸파’라 하는데, 그들 말이 한국 사람은 너무 ‘짜르디 짜르디’ 한다는 거예요. ‘짜르디’는 ‘빨리’라는 뜻인데, 걷다가 중간에 쉬면서 자연도 감상하고 해야 하는데 한국인들은 재촉하기 바쁘대요. 그럴 때면 셸파들은 ‘아직 영혼이 따라오지 못해서 몸이 갈 수가 없다’며 ‘비스타리 비스타리(천천히 천천히)’ 휴식을 즐긴다고 해요. 근데 그것을 보니 지난 수십 년간 앞만 보고 일에만 매진하며 달려온 한국 중·장년들이 생각났어요. 이제는 너무 ‘짜르디 짜르디’ 하지 말고 지난날도 되돌아보면서 철학적인 면에서 자신을 다스려 보기도 하고, 앞으로의 여정도 살펴봤으면 좋겠어요. 영혼이 올 때까지 기다린다는 셸파들의 말처럼 이제는 ‘비스타리 비스타리’ 하면서 영혼을 살찌우는 문화적인 삶을 즐기면 어떨까요?”
20대 아들과 50대 아버지가 나란히 앉는다. 어느 사이 두 사람의 눈에 눈물이 흐른다. 영화 중간에 40대 딸에게 “저 때는 다 그랬어”라는 말을 하던 70대 어머니가 조용히 흐느끼자 딸도 덩달아 눈물을 쏟는다. 깔깔대며 손잡고 극장 안에 들어왔던 20대 젊은 연인들이 눈물 훔치는 데 여념이 없다. 부부와 연인, 자식과 부모, 10대와 80대가 동시에 눈물을 흘리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이 모습이 연출된 곳은 바로 요즘 관객과 만나고 있는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와 ‘국제시장’상영관이다.
‘님아…’가 4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 부문 흥행 1위에 올라서고 ‘국제시장’이 화제와 논란 속에서도 600만(1월 19일 현재 누적 관객수 1120만 명)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 고공비행을 하던 지난 1월 2일 서울 용산 CGV를 찾아 둘러본 극장 안 모습이다. ‘님아…’와 ‘국제시장’관객 모습은 다른 한국 영화와 큰 차이가 있다. 대다수 한국 영화 관객은 20~30대 젊은 관객이 주류를 이룬다. 하지만 두 영화의 관객은 10대부터 80대까지 관객층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 그리고 부부, 자녀와 부모 등 가족 관객들이 유난히 많다.
KBS‘인간극장’에 소개됐던 강원 횡성의 강계열(89) 할머니와 76년간 사랑하며 살다가 숨진 조병만 할아버지 부부의 이야기를 담은 ‘님아…’와 1950년 6·25전쟁 때 흥남에서 부산으로 내려와 어머니와 동생, 그리고 자식들의 생계를 책임지며 서독 광부, 월남전 기술자로 일하는 등 가족을 위한 헌신과 희생을 한 아버지의 삶을 다룬 ‘국제시장’은 10대부터 80대 관객까지 공감대를 형성하며 관심을 증폭시키고 있다.
‘님아…’와 ‘국제시장’, 이 두 영화는 어떻게 해서 다양한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한 것일까. 무엇이 청소년부터 장노년층 관객에 이르기까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일까.
스크린 안과 너무 다른 2015년 대한민국 현실이 세대를 가로지르는 공감을 유발한 원인이라는 게 전문가의 분석이다. 부부, 연인 간의 진정한 사랑과 가족을 위한 희생 등이 상실돼가고 있는 현실의 반작용으로 솟구치는 진정한 부부 사랑과 가족애에 대한 갈망이 연령대와 상관없이 영화에 몰입하게 하고 공감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일회용 인스턴트 남녀사랑이 일상화되고 사랑은 물적 토대를 바탕으로 한 외형적 조건 앞에 무기력해진다. 외모, 재산, 학벌, 직업, 연봉 등 스펙으로 대변되는 조건들이 남녀 간의 만남에 우선시된다.
‘결혼’의 저자 남정욱의 지적처럼 이제 결혼 당사자들이 자신을 상품으로 내걸고 가격을 매기면서 서로 상대방의 상품과 품질 및 가격과 비교 흥정을 벌이며 재화나 지위를 목적으로 한 정략혼을 하는 것이 외면할 수 없는 오늘의 현실이다.
그뿐만 아니다. 나보다는 가족이 우선이고 내 삶보다 가족의 생활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담보 잡혔던 이 땅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또한,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평생 단 한 번도 자신을 위해 살아본 적 없으면서도 ‘괜찮다’웃어 보이며 오직 가족을 위해 굳세게 살아온 형, 누이의 모습 역시 점점 자취를 감추고 있다. 대신 유산문제 때문에 형제가 남남이 되고 돈 때문에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버리는 냉혹한 현실이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이러한 차가운 현실 속에서 만난 ‘님아…’속 노부부의 조건 없는 진실한 사랑이, ‘국제시장’의 가족을 위한 조건 없는 아버지의 희생이 세대를 불문하고 수많은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하고 세대를 아우르는 공감을 일으키는 것이다.
“촬영하면서 느낀 점은 할머니에 대한 할아버지의 사랑과 할아버지에 대한 할머니의 사랑은 조건도 없고, 목적도 없는 사랑 그 자체였다. 관객들이 특히 10대~20대 젊은 관객들이 영화를 보면서 영원한 사랑에 대한 힘을 새삼스럽게 느낀 것 같다. 일종의 롤 모델로서 ‘나도 저렇게 사랑해야지’라는 희망을 발견한 것 같다”는 ‘님아…’의 진모영 감독의 말 역시 세대를 가로지르는 공감의 원천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또한, 존재에 대한 가치보다 소유에 올인하는 왜곡된 세태에 대해 성찰을 하게 한 것도 공감의 원천이다.
빠르게 진행된 자본주의와 근대화를 근간으로 한 압축 성장은 우리 사회에 많은 문제를 낳았다. 그중에서 가장 큰 문제는 존재를 아름답고 올바르게 만드는 의미나 인간을 튼실하고 값지게 만들어주는 휴머니즘, 사랑, 가족애 등 소중한 가치가 팽배해가는 물신주의 앞에 실종된 것이다.
‘님아…’와 ‘국제시장’은 물신주의 앞에 실종된 소중한 가치들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영화를 보면서 물신주의 홍수 속에 자라난 젊은 세대는 가족을 위한 희생이나 무한한 사랑의 가치를 절감하게 됐고 부모세대는 “나 역시 영화의 주인공처럼 정말 어렵고 힘들 때도 가족을 지켰지”라며 지나온 인생을 되돌아보며 부부애와 가족애에 대한 의미의 되새김질을 한다. 이러한 감정들이 세대를 뛰어넘은 이해와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부모님께 효도 열심히 해야겠다. 감사한 마음이 든다”는 ‘국제시장’주연 김윤진의 말과 “아버지가 대학교 2학년 때 돌아가셨는데 이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가 그때부터 시작됐다. 돌아가셨을 때 고맙다는 말을 못했다. 영화로나마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는 윤제균 감독의 언급, 그리고 “나도 70 여 년간 조건 없이 서로를 아껴주며 사랑한 강계열 할머니와 조병만 할아버지 부부처럼 살고 싶다”는 진모영 감독의 소망을 두 영화를 보고 극장 문을 나서는 다양한 세대의 관객들 역시 약속이라도 한 듯 똑같이 말한다.
세대를 아우르는 공감의 문양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사관학교라는 단어는 기본적으로 전투적이고 의욕적인 인상을 주기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윤경숙 한국조리사관직업전문학교 이사장이 젊은 날 대학교 진학을 앞두고 전공 선택 기준을 오직‘여자가 거의 없는 학과로 가자’라고 생각했다는 건 나름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80학번인 윤 이사장은 ‘여자라면 가정학과’란 도식이 맘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가 선택한 건 축산학과였다. 그리고 30여 년이 지난 지금, 그녀가 이끄는 한국조리사관직업전문학교는 국내 최초로 특급호텔 인턴십 프로그램을 가진 최고의 조리 특성화 학교로 자리 잡았다.
정부의 일자리 창출과 국민의 건강한 먹거리 제공에 기여하는 전문 직종으로서 유기농관련 인재 양성이 국가적으로 시급한 실정이다.
한국조리사관 직업전문학교는 최근 도시 공간 텃밭이나 영농기술을 사전에 충분히 익힌 후 신중히 판단하여 귀농 귀촌하는 것을 돕고자 한다. 최근 성지 융복합 교육원을 훈련원으로 하여 사전 교육 제안서를 관할 정부기관에 냈으나 결국 채택이 되지 않았다.
한국조리사관 직업전문학교에서 하고자 했던 것은 크게 ‘농식품 종합전문가 과정’과 ‘유기농식품 지도사 과정’ 이었다.
윤경숙 이사장은 “농식품 종합전문가 훈련과정은 6차 산업 모델의 융복합 과정으로 농·식품의 생산, 가공, 유통, 관광을 통합하는 관련 공인자격증은 없는 상태입니다. 농업의 6차 산업화 쪽으로 가야 단순 지역 농산물이나 특산물을 생산하여 판매하는 개념을 뛰어넘어 외래 관광객을 끌어들여 먹거리를 만들어 보게 할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아는 것이 힘이고, 아는 만큼 보이기 때문에 귀농·귀촌을 결행하기 전에 관련 교육을 받는 것이 리스크를 줄이는 좋은 방법이죠.” 무작정 막연한 기대만으로 귀농 귀촌하다보니 실패한 사례가 많다는 것이다. 그러니 도시농업 6차 산업화를 위한 사전 교육을 받고 가게 해야 한다.
사실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가 본격화되고 전원생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귀농귀촌 열풍이 거세게 불어닥치고 있지만 농사를 지으려는 귀농인들의 정착 기반은 여전히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베이비부머 세대인 윤경숙 이사장 또한 중장년 일자리 창출과 건강한 식품 먹거리를 제공한다는 뜻으로 ‘농식품 종합전문가 훈련과정’은 진심이 통할 날이 올 때까지 추진할 생각이다.
윤경숙 한국조리사관 직업전문학교(이하 한조사) 이사장은 강인한 추진력으로 식문화 전문가 육성의 최전선에 서서 세심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1984년에 대학교를 졸업한 후 전공을 살려 정부 산하단체에 취직한 그녀는 결혼식과 출산 전날까지 야근했고 출산 뒤 보름 만에 복직할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일은 녹록치 않았고 결국 1989년에 퇴직서를 제출하고 전업주부가 됐다.
소외된 아이들을 위한 맞춤형 교육 시작
그런데 그 시점에서부터 그녀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됐다. 전업주부로서도 철저하게 살고자 했던 그녀는 요리학원에 등록하여 요리기술조차 일하듯 익혔고, 2년간 한식, 일식, 중식, 제과·제빵, 복어조리, 칵테일 수업을 들었다. 시간이 흐르고 같은 반 학생들이 강사 대신 그녀에게 질문하는 상황까지 되자, 요리학원을 직접 해보자고 결심하게 됐다. 요리를 가르치는 일이 자신의 적성에 맞는다는 확신이 들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40세였던 1992년, 한 가전기업의 요리학원 원장으로 재취업한 그녀는 2년간 해당 기업에 속한 전국의 요리학원들 중 가장 많은 수강생을 모았다. 하지만 조리 매뉴얼에 맞춘 요리 지도에 제약을 느낀 윤 이사장은 1999년 경기도 수원에 현재 한조사의 전신인 ‘동양요리학원’을 차렸다.
학원을 열자 비행청소년들이 적잖게 찾아왔다. ‘공부 대신 요리에서 살길을 찾으라’며 부모나 교사에게 등 떠밀려온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윤 이사장에게 있어선 첫 제자들이고 성공시켜야 할 제자들이었다. 그녀는 가정과 학교에서 천덕꾸러기 취급 받는 아이들이 꿈을 찾을 수 있도록 성심성의껏 지도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 아이들도 해낼 수 있다는 강렬한 인상을 심어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무엇보다 각종 요리대회와 자격증 시험 대비에 집중하여 교육을 진행했다. 수상 실적을 관리해 아이들의 대입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라는 실질적인 이유도 있었다.
위기 때마다 기회가 찾아 와
교육 지도의 효율성을 위해 혁신을 도입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윤 이사장은 기존 사업을 확장할 계획까지는 없었다. 그런데 전혀 예측치 못한 시련이 찾아왔다. 임차해 있던 수원의 학원 건물이 경매에 넘어간 것이었다. 갑작스럽고도 불가항력적인 사고에 울며 겨자 먹기로 부지를 찾던 윤 이사장은 2006년 서울 금천구의 한 아파트형 공장을 소개받았다. 300평 규모의 건물은 그녀가 가진 자산에 비해 턱없이 비쌌다. 그런데 포기하려는 차에 계약 담당자는 윤 이사장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금액을 제시했다. 이렇듯 한조사가 서울에 정착하게 된 일은 하늘의 도움이라 할 만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는 아이들 교육에 대한 문제가 계속해서 제기되고 있었다. 아이들이 실기로 대학교 입시에 성공했다고 하여 끝이 아니었던 것이다. 기초학력이 부족한 대학생 제자들은 대학에서의 공부를 따라가기 버거워했기 때문이다. 이론 수업 위주인 대학에서 공부하다 실무능력이 녹슬어 졸업 후에도 취업에 어려움을 겪는 것 또한 문제였다. 그래서 재능이 탁월한 아이들의 ‘손’을 썩히지 않기 위해서 윤 이사장은 기술과 학력을 동시에 완성하는 학점은행제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학점은행제 도입 후 학생 수의 급속한 증가가 이뤄졌고 이내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해졌다. 이번에도 비용이 꽤 많이 모자랐다. 그럼에도 새로운 건물의 주인은 그녀와 계약했다. 위기 속에서 매번 도움과 구원을 얻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느꼈다는 윤 이사장은 새로이 들어가게 된 건물 앞 머릿돌에 다음과 같은 말을 새겼다. ‘여호와께서 이 땅을 우리에게 주셨다.’
귀농 인구를 위한 체계적 교육 시스템 구축 꿈꾼다
지금 윤 이사장은 보다 큰 그림을 꿈꾸고 있다. 식문화의 근본, 바로 농업에 대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농업인구는 1970년대는 50%였던 것이 지금은 7%대에 머물고 있다. 수출은 세계 12위권에 진입하였고,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하고 있지만 농업은 상대적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베이비부머 세대를 중심으로 전원생활을 통해 삶의 가치를 새로이 추구하려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귀농과 귀촌이 늘어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정확하게 보자면, 시설 운영을 통해 소득을 조달하는 ‘귀촌’은 활발한 편이지만 영농을 통해 소득을 조달하는 ‘귀농’은 실패 사례가 워낙 많고 관련하여 제대로 된 교육이 잘 이뤄지지 않는 편이다.
농업 인프라가 허약하기에 제대로 된 귀농이 이뤄지지 않고, 이는 농업의 미래를 어둡게 만들 것이며, 농업의 미래가 암울해지면 한국 식문화의 미래 또한 암울해진다. 윤 이사장은 그래서 농식품 종합전문가 과정과 유기농식품 지도사 과정을 구축하여 농업전문가를 육성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음식으로 시작하여 보다 깊은 근본으로 들어가는 윤 이사장의 결단이 어떤 미래를 만들지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브라보마이라이프’ 시니어기자단 1기로 선발된 강애수님이 보내온 글을 싣습니다.
두 남매를 둔 강애수님은 목원대 기악과 출신으로, 결혼하기 전부터 음악학원을 5년 정도 운영했는데 연년생으로 아이를 출산하는 바람에 학원운영을 접어야만 했던 경력단절 여성중 한 분이십니다. 큰 딸은 카드사에서 디자이너로 근무 중이고 둘째 아들은 대학 졸업을 앞두고 첫 취업에 실패의 고배를 마신 터라 보듬으며 다음을 위해 힘찬 파이팅을 보내고 있다고 하십니다.
강애수님은 작은아이 대학입학과 동시에 컴퓨터를 배운 후 우연한 기회에 이마트모니터와 자문위원 모집 광고를 보고 응모를 하며 글을 쓰고 모니터링을 하는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처음부터 따뜻하고 다정다감한 글을 쓴다거나 감성적인 모습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자신감을 얻었고 활동범위를 넓혀 가고 있습니다.
"넓혀 갈수록 나약하기만 했던 제가 얼마나 성숙했고 생각의 폭도 넓어졌는지 스스로도 놀랐답니다"
현재 고양시 여성-복지참여위원, 양성평등교육진흥원통신원, 서울톡톡기자, 금융감독원 이용자 리포터,안행부 생활공감모니터, 경기도 민원모니터 등 너무나 활발한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현재 활동하는 거의 모든 곳에서 저는 왕 언니로 통하고 있다고 하네요. 아들딸과 같은 청소년들과 활동하는 곳이 많다보니 성실함과 책임감은 기본이었다고 합니다.
브라보마이라이프 시니어기자단 모집 사고가 나간후 얼마되지 않아 곧바고 응모 지원서를 보내올 정도로 열정이 뜨거우신 분입니다.
본인 소개서 중 한 문장을 소개해드립니다.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활동해 왔고 자칭 모범생 스타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디테일한 기사도 쓰고 싶고 시니어로서 더 큰 도약을 하고 싶습니다."
빠름~~빠름~~
온통 빠르게 달리는 초스피드시대.
브레이크 없이 달리던 사람들이 요즘 과거의 흔적을 들쳐보며 선조들의 지혜에서 새로운
삶의 지혜를 깨우치려하고 있습니다.
더 새로운 것~~~
더 창의적인 것에 대한 해답을 옛 것에서 찾아보는 지혜가 필요한 요즘입니다.
옛 것을 바르게 익히고 새로운 것을 배우면 스스로 스승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있겠지요.
저는 ‘브라보마이라이프’(www.bravo-mylife.co.kr. m.bravo-mylife.co.kr) 시니어 기자이지만 병무청 '청춘예찬' 어머니기자 이기도합니다.
청춘예찬 어머니기자들은 다들 군에 다녀온 자녀나 군 생활 중에 있는 자녀를 둔 분들이 대상이라
모두 시니어에 속합니다.
이런 자격을 갖춘 어머니기자들이 국군장병들에게 무슨 음식을 해 주면 좋을지?
군 가산점에 대해 찬성하는지? 설문조사를 하기로 한 것입니다.
고즈넉한 역사의 현장인 서오릉에서 하면 안성맞춤이란 생각이 들었기에
제가 적극 추천을 했답니다.
ㅎㅎㅎㅎ 시대의 변화를 읽고 있었기에. 역사는 행동하는 자들이 변화시킨다는 사실을요.
지금 생각해 보니 안성맞춤이 안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네요.
불특정 다수에게 설문조사라~~~새로운 도전이라서 어머니들끼리 만반의 준비를 했답니다.
판넬과 스티커, 필기도구 등...
저는 제일 잘 하는 일이 바쁜척!!! 이다 보니 시간 안에 도착을 못하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총총한 발걸음으로 노래까지 룰루랄라 부르면서 폭발적인 에너지를 발휘하면서 서오릉으로 갔답니다.
버스를 타고 가는데도 비행기를 탄 느낌으로 달려갔답니다.
어머니기자들 리허설도 하지 않았는데 어찌나 잘 하시는지!!!
서오릉 관람객들 어찌나 적극적으로 설문에 응하시던지요.
그분들의 모습 속에서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군에 보내며 가장 가슴 아픈 사람이 바로 부모의 마음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군시절 계란후라이가 먹고 싶었다는 분이 계셨죠. 하여 계란후라이 무한 제공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순간 짭쪼름 하면서 땡글땡글한 계란 장조림 생각이 어찌 나던지 입맛까지 다셨답니다.
한 어머니께서는~~~
인스턴트는 주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바로 눈가가 촉촉해 지더라구요. 눈가에 맺히는 눈물에서
진정성이 느껴졌고 그 진정성은 어떤 웅변보다도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군대간 아들에게 대한민국 최고의 밥상을 차려주고 싶은 어머니 마음 이해하고도 남지요.
오죽하겠습니까? 저도 경험자랍니다.
설문에 참여하신 분들은 짧은 멘트 하나 남기고 갔을 뿐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오늘과 같은 소통으나 다양한 채널을 통해서 개선을 요구한다면
국군장병들의 입맛에 맞는 요리는 지속적으로 개발될 것입니다.
여론의 힘은 정말 대단하기 때문에 언젠가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게 되지 않을까요?
딸 밖에 없어 군에 보낸 자식이 없다 하시면서도 군 가산점을 주어야 한다며 스티커를 붙여 주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군대에 보낼 자식이 없어도 군 복무자에게는 일정 부분의 혜택에 대해서는 동의하고 공감하였습니다.
군 복무자에 대한 가산점 부여가 평등권을 침해한 위헌으로 판결을 받아 가산점이 폐지되었지만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저도 목숨으로 국권을 사수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는 장병들에게 사회의 복귀를 도와야함은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설문에서도 군 가산점 제도에 공감하며 거의 몰표를 받은 점으로 보아 국군장병을 위한 가장 핵심적인 제도는 군 가산점인 것 같습니다.
긍정적 변화와 발전은 늘 문제의 노출로부터 시작된다고 하는데 꼭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노출된 문제를 공식화하여 법과 제도를 세우기도 하는가 하면 오랜 관행이 사라지기도 합니다.
역사의 발전은 이런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지요?
오늘처럼 이렇게 소통을 통해 가까운 답을 찾고 또 찾아서 가다보면 말입니다.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마찰만 존재할 뿐이죠.
50을 넘긴 어머님기자들이지만 똘똘 뭉친 기자정신으로 현장을 통해 수확도 푸짐하고 자질을 충분히 보여 주셨지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라도 혼자보다는 지위고하를 떠나 옆의 누군가와 협력해서 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고 서로 역할을 나누어 하다 보면 더 좋고 많은 컨텐츠를 창출해 낼 수 있음을 깨닫는 만족스러운 하루를 보냈습니다.
아쉬움이 남는다면
고등학교를 끝으로 역사 공부를 하지 않아서 무식이 탄로났다는 것.
역사를 보는 눈을 좀 키우려면 역사와 소통을 해야겠어요.
오늘 받은 영향이 정말 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