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가 되기 전까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 바로 학교다. 학교에서 만나는 친구, 선생님과의 관계에 따라 인생의 방향이 달라지기도 한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속 키팅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영감과 동기를 불어넣은 것처럼. 덕양중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여 폐교 위기 학교를 혁신학교의 대명사로 변화시킨 이준원(65) 교장을 만나 참스승으로서의 삶과 교육에 대한 철학을 들어봤다.
지난해 방영된 EBS 다큐멘터리 ‘무엇이 학교를 바꾸는가’는 공교육 혁신 모델 사례로 덕양중학교의 일대기를 다뤘다.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한 덕양중학교는 교육청으로부터 지속적으로 폐교 요청을 받았던 학교다. 폐교 위기의 학교가 8년 만에 어떻게 공교육 혁신 모델로 우뚝 선 것일까? 그 변화의 열쇠는 이준원 교장이 쥐고 있었다. 그가 2020년 정년으로 퇴임하기 전까지 8년의 세월 동안 덕양중학교에는 그의 손길이 안 닿은 곳이 없었다. 처음 그가 부임했을 때 덕양중학교는 어떤 상태였을까?
“제가 교장으로 왔을 때 덕양중학교는 매년 교육청으로부터 폐교 압박을 받을 만큼 다 쓰러져가는 학교였습니다. 교육장님이 오셔서 학생 수를 늘려야 한다고 당부하고 가셨죠. 제가 부임하던 해 인근 초등학교 6학년이 12명이었는데, 이마저도 확실치 않았어요. 4명은 다른 곳으로 간다고 했기에 실질적인 중학교 입학 인원이 8명이었죠. 당장 중3 아이들이 졸업하면 전교생이 100명 이하로 떨어질 게 불 보듯 뻔했어요. 그래서 학생을 유치하려고 학군 외에 있는 초등학교 6학년 학부모를 만나 저의 비전을 설명하면서 설득했죠. 발품을 판 덕분에 그해 40명 정도 입학할 수 있었어요.”
그렇다면 왜 덕양중학교였을까? 교장 공모제란 절차로 부임했는데, 굳이 폐교 위기인 학교의 교장이 되려고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초임 시절부터 교직을 마칠 때까지 어려운 학교만 골라 다녔어요. 겉으로만 봐서는 잘 모르지만, 사실 우리 모두 내면의 상처를 안고 살아요. 학생들도 마찬가지고요. 특히 외부적인 요인 때문에 아픈 친구들이 많았죠. 가정 형편이 어렵다거나 부모님이 이혼했다거나 여러 가지 아픔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을 교사로서 지도하고 보듬고 싶었어요. 좋은 학군에서 자라 학원에서 미리 선행학습을 한 덕분에 공부도 잘하고 말도 잘 듣는 친구들이 있는 학교에 갈 수도 있겠죠.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런 학교에는 가고 싶지 않았어요. 스스로 ‘그런 친구들에게 교사로서 어떤 역할을 해줄 수 있을까?’ 물었을 때, 그에 대한 대답을 쉽사리 하지 못했거든요.”
실패한 교사의 고백
오랜 세월 교직에 있었던 그가 생각하는 교사의 역할은 무엇일까?
“학교는 학원이 아니죠. 지식의 전달도 중요하지만 학교는 함께 어울려 살고,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식의 양을 측정하는 곳이 아니라, 인간답게 존중받고 인간답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좋지 못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손을 잡고 더 나은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 교사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어둡고 깜깜한 터널 속에서 헤매고 있는 아이들 앞을 밝게 비추는 한 줄기 빛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는 그것이 교사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평교사 시절의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는 “40대 이전에는 실패한 교사였다”고 고백했다.
“사실 마흔 살이 되기 전에는 가면을 쓰고 살았죠. 동료한테 인정받는 선생님, 잘 가르치는 선생님, 친절한 선생님이 되고 싶었어요. 얼굴 표정과 내면의 모습이 너무나도 달랐죠. 마음의 병이 생기는 줄도 모르고 분노나 스트레스를 억누르기만 했어요. 어디 가서 내색도 잘 안 하고 그렇게 다녔는데, 일 년에 한 번씩 축적된 화가 폭발했어요. 그 화는 고스란히 학생과 아내에게 돌아갔어요. 이렇게 제가 불안정하다 보니 아내와 이혼 위기까지 갔고, 어머니와 아내의 갈등은 갈수록 깊어졌어요.”
도저히 이렇게 살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마흔 살을 앞두고 큰 결심을 한다. 치유 상담을 받아보기로 한 것.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 한 선택은 그의 앞길을 바꾸는 교두보가 됐다.
“매주 월요일 저녁마다 치유상담연구원으로 달려갔어요. 내면 치유를 통해 저는 다른 사람으로 거듭났죠. 내면 치유란 것이 특별한 게 아니에요. 그냥 다 같이 모여 각자의 상처를 꺼내놓으면서 서로를 보듬는 일이에요. 저 역시 이제껏 남들에게 말하지 못했던 아픔과 분노, 슬픔을 모두 솔직하게 인정하고 털어내는 일을 그때 했어요. 그 이후론 제 삶이 변했어요. 아내와의 관계도 좋아지고, 학생들과의 관계도 개선되고, 어머니와 아내 사이의 갈등도 눈 녹듯이 사라졌죠. 그때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다면 누구나 상처가 있다는 거예요. 이후 삶의 방향이 이때 결정되었을지도 몰라요. 제가 덕양중학교를 택하고, 그 학교에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경험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속적인 관심과 환대
그가 고백했듯이 한때 가면을 쓴 채 가식적으로 아이들을 대했던 그는 내면 치유 이후 놀랍게 변했다. 그의 변화는 앞서 소개한 EBS 다큐멘터리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졸업식 날 졸업장을 받으러 단상 위에 올라오는 학생들은 이준원 교장 앞에서 어김없이 눈물을 보였다. 정년 퇴임식에서는 교사와 학생, 학부모가 모두 울면서 그를 떠나보냈다. 그 울음의 원인은 모두 한 사람이었다. 그를 보내지 못하는 마음이 모두의 속눈썹을 촉촉하게 했다. 그들은 왜 그리도 아쉬워했을까? 그들에게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재임 시절 누군가를 만날 때 교장이란 지위를 앞세우지 않았어요. 학교 내의 직원과 학생, 그리고 학부모를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났어요. 당연히 차별하지 않았고요. 모두 그 마음을 알아주셨던 것 같아요. 8년 동안 덕양중학교에 있었는데, 사실 4년쯤 하고 나서 다른 곳으로 가야 했죠. 가기로 해놓고 날짜만 기다리고 있는데, 교장실에 학부모님들이 찾아오시더군요. 가끔 그렇게 스스럼없이 찾아오시곤 해서, 그날도 어김없이 재밌게 대화를 나눴죠. 그런데 끝에 다들 ‘다른 데 안 가시죠?’라고 말씀하시더군요.(웃음) 부족한 저를 붙잡아주시는 게 정말 감사했어요. 그때 운 좋게 중임이 가능해지면서 한 번 더 열심히 하게 됐죠.”
실제로 그는 학교 내 구성원에게 세심하게 다가갔다. 얼마나 세심한지 교무실에서 일하는 행정실무사의 생일도 챙길 정도였다. 특히 그는 매일 등교 시간에 교문으로 나가서 아이들을 맞았다. 등교하는 학생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며 아침을 열었다. 8년 내내.
“아이들이 교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나가는 그 순간까지 모두 교육의 연장선이에요. 아이들은 환경과 사람에게 아주 많은 영향을 받죠. 제가 모두를 따뜻하게 대한 것은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에요. 제가 만약 배식하는 아주머니를 함부로 대하면, 아주머니도 배식하면서 아이들을 함부로 대할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모두를 정성스럽고 따뜻하게 대했어요. 매일 아침 교문에서 아이들과 하이파이브한 것도 그런 차원에서였죠.”
하지만 하이파이브만으로는 아이들이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쉽게 열지 않았을 터. 그만의 소통법이 궁금했다. 그는 “아이들에게는 지속적인 관심과 환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먼저 아이들을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죠. 그들의 얘기를 지속적으로 경청했어요. 그 과정에서 그들의 아픔을 헤아리려고 노력했고요. 예를 들어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경험이 있는 아이가 있었는데, 그것이 그 친구에게 가장 큰 상처였더군요. 그 이후 어긋나기 시작했고, 소위 말하는 주먹 좀 쓰고 다니던 친구였어요. 할머니와 살았는데 가정 형편이 어려웠죠. 영하 10℃ 날씨에도 롱 패딩을 못 사서 매일 얇은 트레이닝복을 입고 다녔어요. 자존심은 세서 롱 패딩 입고 다니는 애들 보고 이불을 덮고 다닌다며 깔보더군요. 어느 추운 겨울날 교문 앞에서 그를 만나 ‘춥지?’ 하면서 핫팩을 주머니에 넣어줬어요. 날카로웠던 평소의 눈빛이 봄눈처럼 사라지고, 오히려 ‘교장 선생님은요?’ 하고 따뜻하게 묻더군요. 관심이 이렇게 사람을 변화시켜요. 그동안 지속적으로 관심을 두고 아이들을 따뜻하게 대하려고 노력했어요.”
진심으로 다가가기
그의 환대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같이 일하는 동료 교사와 학부모에게까지 이어졌다. 그는 교사들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주었고, 매주 목요일 ‘이슬비 사랑 학부모 교실’을 통해 학부모와 소통했다.
“혁신학교가 될 수 있었던 동력 중 하나는 교사들의 자발적인 참여 덕분이었어요. 일종의 집단지성이 만들어졌죠. 교사들의 단점 대신 장점을 발굴하려고 노력했어요. 단점을 찍어서 고치려고 하면 잠깐 바뀌는 척만 할 뿐이에요. 진심으로 변화시키려면 그 사람의 장점을 키워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그렇게 모두의 장점이 뭉쳐서 하나의 집단지성을 만들어내는 일을 교장을 하면서 많이 경험했어요. 학부모 모임에서는 가정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아픔에 대해 경청하려고 노력했어요. 가정은 또 다른 학교나 다름없어요. 가정에 문제가 있으면 아이의 표정이 아침부터 밝지 않거든요. 놀라운 건 모임을 통해 학부모의 상처나 아픔에 대해 서로 듣고 공감하는 시간만 가졌을 뿐인데, 이후 그 모임에 참가한 학부모의 아이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어요.”
그의 말처럼 아이들에게 가정은 또 다른 학교라고 할 만큼 중요하다. 그렇다면 사춘기 손주를 둔 시니어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다가가면 좋을까? 손주와 같이 사는 그에게 한번 물어봤다.
“잔소리 대신 전폭적으로 사랑하고 지지하되 깜짝 놀라게 반응하는 게 좋아요. 잘했을 때는 ‘진짜 잘했어!’라는 말과 함께 기쁜 표정으로 맞이해주면 좋아해요. 그들이 가진 본연의 감정을 직시하고 공감해주면 돼요. 아이들은 스스로 존중받을 때 말문을 열어요. 그래서 다짜고짜 다그치고 비난하는 것보다는 언어, 표정, 눈빛으로 아이들과 소통하는 것이 중요해요.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걸 알게 해줄수록 아이들은 달라져요.”
끝으로 그가 생각하는 참스승의 모습과 앞으로의 계획을 물어봤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따뜻한 환대를 맛본 사람은 그것을 잊지 못해요. 아이들도 마찬가지예요. 진심으로 따뜻한 환대를 받아본 아이들은 커서도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다가갈 줄 아는 어른이 되는 법이죠. 이는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니고, 내면으로부터 큰 변화가 있어야 생길 수 있어요. 그래서 늘 아이들의 상처에 귀 기울이며 진심으로 다가가려고 노력했어요. 그것이 참스승의 길이라고 생각하면서요. Turn your scars into stars. 제가 가장 좋아하는 속담이에요. 상처를 희망의 별로 바꾸는 일. 아이들의 상처를 보듬어서, 그것을 큰 밑거름으로 만들어주는 일. 참스승의 역할은 그런 것이 아닐까요? 앞으론 제가 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순회강연을 할 예정이에요. 제 얘기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희망의 별이 되기를 바라면서요.”
폐교 위기의 학교를 정상화하려면 얼마나 큰 노력을 기울여야 했을까? 8년의 교장 생활은 보람도 있었겠지만, 그 이면에는 고충도 있었다. 용인에서 고양까지의 긴 출근 거리로 인해 8년 내내 주말부부를 감수해야 했다. 교육 현장에서 실험적인 시도를 하는 그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었고, 그를 믿고 따라왔던 학생·학부모·교사들이 있었기에 그 일을 해낼 수 있었다. 그가 학교에 있었던 8년 사이 학생 수는 늘어났고, 학습 부진아를 찾아볼 수 없는 학교로 성장했다. 그가 연단에 서면 떠드는 아이들이 없을 정도로 아이들은 그를 존경하고 존중했다.
졸업식에서 이준원 교장을 보고 눈물 흘리던 교사와 학부모, 학생들. 처음에는 그 광경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그를 만나고 나서 다큐멘터리의 그 장면을 이해하게 됐다. 남의 아픔을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 남의 얘기를 경청하고자 하는 마음. 이 모든 것은 진심이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진심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오늘도 별처럼 빛나는 진심을 품고 미래 세대를 위한 강연을 하고 있을 그를 응원하며 마친다.
박정자와 윤석화, 두 사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연극배우다. 두 여배우가 하나의 연극을 만들기 위해 뭉쳤다. 박정자가 주연을 맡고 윤석화가 연출을 맡는 ‘해롤드와 모드’가 그것이다. 선후배 사이이자 연극계를 대표하는 고참으로서 팬데믹 코로나에 도전하듯 무대에 올리는 연극이 인생의 의미를 숙고하며 풀어내는 ‘해롤드와 모드’라서 더 의미심장하다. 삶의 지혜를 말하는 ‘모드’ 역을 맡은 배우와 그 모드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연출이라는 교차적 입장에 서서 서로 배려하며 내어주는 두 사람.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삶과 연극을 들여다봤다.
삶을 연극과 함께하다 보니 어느새 연극 속 인물과 같은 나이가 되었다. 1962년에 연극 ‘페드라’로 데뷔해 팔순인 2021년에도 여전한 현역으로 무대에 오르고 있는 배우 박정자의 얘기다. 5월 1일부터 무대에 올라가는 ‘해롤드와 모드’에서 맡은 모드는 그녀와 나이가 같은 팔순이다. 그녀가 모드 역을 맡은 건 이번이 일곱 번째. 드디어 현실의 인물이 자신이 연기하는 인물의 나이를 따라잡은 것이다. 그녀는 이번이 자신에게 마지막 모드 역이 될 거라고 이미 밝혔다.
“이제 좀 내려놓고 싶어서, 가벼워지고 싶어서요. 뱀은 때가 되면 허물을 벗기도 하고 애벌레도 허물을 벗고 나비가 되는 것처럼 그런 기분이에요. 이 허물을 내가 옳게 벗을 수 있을까, 그런 염려가 있긴 하죠.”
박정자, 80세의 모드가 되다
‘해롤드와 모드’는 규범을 거부하며 자살 시도를 벌이는 게 유일한 취미인 부잣집 아들 해롤드가 장례식장에서 만난 자유분방하고 귀여운 80세 할머니 모드를 통해 삶의 즐거움을 깨닫고 사랑을 느끼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미 오랜 시간 무대에 오른 검증된 작품이고 박정자 개인으로서도 큰 애착을 느끼는 만큼, 그녀가 생각하는 이 작품이 말하고 싶어 하는 바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결국은 소통을 말하고자 하는 거죠. 부모와 친구, 사회, 국가, 세계… 이미 우리는 소통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소통이란 게 좋은 의미여야 하지만 지금은…. 그래서 인물과 작품을 통한 선한 소통으로 사람들이 조금 더 성숙해지길 바라는 거죠.”
그녀가 보는 모드는 무공해 그 자체인 인물이다. 소유하지 않지만 모험적이라 매일 새로운 걸 해보자는 마인드다. 그렇다고 현자인 체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인생을 먼저 산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줄 뿐이다.
“이 연극을 보고 모드를 롤모델로 삼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바랍니다. 그러면 사회가 더 아름다워질 거예요.”
소유로부터의 자유를 누리다
박정자는 모드가 ‘나이를 먹어도 구질구질하지 않아서 좋다’고도 했다. 그런 모드의 모습은 그녀 자신의 삶의 철학과도 일치하는 듯 보였다.
“차를 버린 지 3년 됐어요.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정 가기 어려운 덴 카카오택시를 타고 가고. 거기에 굉장한 기쁨이 있어요. 바로 내가 소유했던 걸 내려놓는 것이죠.”
그녀는 그러한 소유로부터의 자유를 ‘정화’라고 표현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가정에 대한, 사회에 대한 정화다.
“자동차는 내가 늘 혼자 타고 다니는데 공해 문제, 기름 문제 때문에 나라도 줄여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오, 나 애국자야.’ 그런 생각도 해요.(웃음) 쓰레기 분리수거처럼 작은 것부터 시작해야죠. 작은 것부터 출발하면 삶이 정화될 수 있어요. 그것은 스스로에 대한 정화이기도 하지만 그 영향을 주변에 줄 수도 있죠.”
관객을 만나 함께 행복해지고 싶다
주변 생활을 자신의 법칙으로 정화하고 있는 박정자는 사람들이 자신을 그저 ‘연극배우 박정자’로만 기억해줬으면 좋겠다는 간결함으로 이어졌다. 간결함은 어느 정도는 의도적인 잊어버림과도 같다.
“너무 오래 갖고 있으면 병이 돼요. 연연해하면 발목 잡히는 거니까. 늘 아침이면 해가 떠오르는데, 마음도 새로워야 되겠죠. 그래서 되도록 그런 걸 없애려고 해요.”
새로운 해와 새로운 마음으로 가다듬지만, 코로나19는 아직 암중모색 중인 상태다. 그래서 그녀는 당장은 행복하지 않다고 웃으며 말했다.
“이제 관객을 만나면 행복해질 거예요. 작년에는 그래도 ‘노래처럼 말해줘’라는 배우의 모노드라마를 했어요. 작년 2월 코로나가 막 터질 때였죠. 나는 그 작품으로 숙제를 다 했다고 생각하거든. 좋았어요. 많은 관객들이 울기도 하고, ‘저 배우처럼 나이 먹어야지’ 하는 생각도 했다고 해요. 내가 참 좋은 일을 했구나 싶죠. ‘해롤드와 모드’를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하면 좋겠어요.”
이번 ‘해롤드와 모드’가 특별한 것은 연출을 후배이자 그녀만큼이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연극배우 윤석화가 맡았다는 점이다.
“(윤석화에게) 내가 팔십에 연극을 하게 되면 그때는 네가 연출하라고 말했었죠. 그 약속을 지키게 됐어요. 사실 우리는 계속 티격태격해요. 티격태격 정도가 아니지.(웃음) 창작을 하는 사람들은 만족이 있을 수 없어요. 서로 부딪칠 때는 심하게 부닥치기도 하죠. 그런데 그건 우리가 바라는 목표가 하나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우정이란 참아주는 거죠. 참고 기다리고…. 그건 상대를 위해서라기보단 나 자신을 위해서일 거예요.”
윤석화, 극 속에 담긴 시적 메타포를 찾다
그렇다면 이제 연출을 맡은 윤석화의 말을 직접 들어볼 차례다.
“선생님과 저하고 굉장히 친하기 때문에, 친한 사람과의 작업은 힘들 수 있죠. 함께 산전수전 다 겪었고요. 내 연출작에 처음 출연하시는 것도 아니고. 친하기 때문에 어려운 점이라면 제가 연출로서 배우로서 애매한 것들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도 선생님께 빛나는 정점이 되기 위해 감사하며 행복하게 작업하고 있습니다. 어렵지만.(웃음)”
박정자가 모드 역을 이번으로 끝내겠다고 공언한 만큼, 두 사람이 함께하는 ‘해롤드와 모드’ 무대는 이번이 마지막이 될 예정이다. 그렇다면 연출가로서 윤석화가 이번 ‘해롤드와 모드’에서 주안점을 두는 부분은 무엇일까? 그녀는 이 작품의 스토리 자체가 완벽하다는 점을 전제로 설명했다.
“지금까지의 ‘해롤드와 모드’가 스토리텔링이 강했다면, 저는 그 행간에 시적 메타포를 좀 더 그려 넣고 싶어요. 무대를 미니멀하게 만든 것도 그런 정서, 즉 누구나 보면 그 사람들의 모습이 아름답다는 걸 은연중에 느낄 수 있게 하는 데 주안점을 둔 거죠.”
혼자서 모든 걸 책임져야 하는 연출의 고통
박정자에게 이번 모드가 일곱 번째 모드인 것처럼, 공교롭게도 윤석화에게도 이번 ‘해롤드와 모드’는 일곱 번째 연출 작품이란 의미가 있다.
“어떤 면으론 연기보다 연출이 낫지 않나?(웃음) 제가 원하는 모험심이란 게 창의력과 연관되어 있어요. 그래서 스태프들에게 ‘내가 또 이상한 거 주문하지?’ 하고 자주 물어요. 그러나 예술은 새롭기 때문에 이상한 거죠. 우리에게 답습이란 교육이에요. 그런데 교육도 어떤 면에선 교육을 뛰어넘어 창의로 가야 하죠. 답습은 기본 과정이고 창의와 창조는 그것을 뛰어넘는 건데, 그걸 위해선 모험도 필요하고 새로운 발상이 필요해요. 그런 게 저에게 좀 맞지 않나 싶어요.”
배우로서 뿐만 아니라 CEO로서, 복지재단 이사장으로서 다양한 경험을 쌓은 그녀에게 답습을 넘어서야 한다는 방법론은 체질화된 요소일 거라는 짐작이 들었다. 그러나 연출가로서의 어려움은 그녀를 스쳐 지나가기만 하지 않았다.
“연출은 혼자서 모든 걸 책임지는 일이죠. 배우도 외로운 작업이지만 뭔가 표현해냄으로써 자기만족, 관객의 박수라는 보상이 있어요. 그러나 연출은 그런 게 없죠. 배를 몰고 가는 선장이 배를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하면 나머지는 기계가 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배우뿐만 아니라 스태프도 그렇고 다 자기 생각이 다르고 성격도 달라요. 그걸 합심해서 최선을 이루게 해야 배가 제대로 가잖아요. 큰 배를 지휘하는 선장도 외로울 텐데(웃음) 망망대해에서 사람과 계속 부딪치며 조율해야 하니까 어려운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스스로를 낮추지 않으면 포용할 수 없어
늘 밝고 활기찬 그녀 특유의 에너지가 넘쳤다. 어떻게 저렇게 에너지가 유지될 수 있을까?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과정을 거치든 고난 없는, 절망 없는 삶은 없죠. 그 화두를 넘어갈 수 있는 것은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거죠.”
참다운 인간이 되는 방법은 스스로 낮추고 포용하는 것밖에 없다고 그녀는 믿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자기를 비우지 못한다. 욕심 때문이다.
“낮추지 않으면 포용할 수가 없어요. 어떻게 보면 해롤드가 보는 모드가 그런 사람이죠. 모든 것은 헛되고 헛되거든요.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이든 800년 전이든 그 역사 속에서 어떤 사람이 어떻게 살아냈는지 그 철학은 우리에게 남아 있지만, 그 사람이 누렸던 것은 다 모래알보다 못하게 사라졌어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순간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죽기 전에는 결코 미리 죽지 않는 사람
윤석화의 요즘 삶은 본인 스스로가 표현하길 ‘거꾸로 가는 시계’ 같은 생활이다. 예순이 넘은 나이지만 엄마로서 아이들을 키우고 있고, 남편 뒷바라지도 하고 여러 가지로 아직까지 무척 분주하다. 그런 와중에도 그녀다운 한결같은 면을 계속 유지하는 비결이 궁금했다.
“내 속에 내가 너무 많지 않게 하기 위해서 저에게 쉼을 주려고 노력해요. 마음에 쉼을 주는 방법은 딱 하나더라고요. 항상 감사하고 기뻐하며 기도하는 삶. 저는 크리스천이에요. 사실 교회 다닌다고 모두가 믿음을 갖지는 않죠. 그러나 저는 믿음이 생기니 정말 편안해졌어요. 물론 주님이 주신 믿음으로 가는 길은 정말 어려운 거 같아요. 그런데 제 삶의 마디마디에 고난이 많았기에, 고난이 저에게 믿음을 준 거죠. 혹여나 이상한 몸부림을 쳤을 수도 있었겠죠. 그러나 너무도 감사하게 믿음을 허락해주셔서 자신을 비우고 다시 회복할 수 있고 다시 새로운 소망을 볼 수 있어서 좋아요.”
그녀가 자신을 유지하는 해법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항상 감사하기에 나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는 힘을 갖게 된 것. 그녀는 웃으면서 “내가 죽어야 다시 살 수 있어요”라고도 말했다.
“ ‘죽기 전에는 결코 미리 죽지 않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한 치 앞도 모르는 삶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으면 죽으리라고 생각해요. 그러지 않으면 ‘미리 죽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없을 거 같거든요.”
한 편의 긴 시를 읽는다는 느낌으로
공연을 앞두고 맨정신으로 하루하루를 지낼 수 있는 연출가는 많지 않을 것이다. 윤석화 또한 마찬가지다.
“요즘은 거의 잠을 못 자요. 제 머릿속에 그림이 있지만 공연은 배우 예술이기 때문에 구상한 게 얼마나 나와줄 것인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죠. 가끔 공연한다는 게 도박 같다는 생각을 해요. 엄청난 모험심이 필요하니. 내가 생각했던 그림만큼 나오고 그 의미가 제대로 전달될지… 살 떨리죠.”
어느새 46년간 연극을 한 그녀가 생각하는 연극의 의미란 ‘좋은 질문을 찾아서 관객들에게 내어놓는 것’이다. 그리고 관객 각자가 자신의 답을 갖고 돌아가는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해롤드와 모드’는 어떤 연극일지 물어봤다.
“ ‘해롤드와 모드’는 죽음을 통해 삶을 얘기하는 작품이에요. 모드의 대사 중 아름답고 현명하고 지혜로운 것들이 참 많거든요. 한 편의 긴 시를 읽는다는 느낌으로 보시고 극장 문을 나서면 가장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어떤 사람은 하나, 어떤 사람은 일곱 개, 어떤 사람은 여러 개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그것들이 여러분 삶을 응원하고 회복할 수 있는 힘이 되길 바랍니다.”
연기 인생 66년 차, 출연 작품 300편 이상, 코믹‧멜로‧드라마‧다큐멘터리‧사극 등 장르 불문 어떤 캐릭터든 소화 가능. 배우 이순재를 두고 하는 말이다. 수십 년간 다양한 캐릭터로 안방과 스크린에 웃음과 감동을 선물한 그는 후배들의 귀감이 되는 인생 멘토이자 시니어 시청자들 마음 속의 오랜 벗이다. 이번주 브라보 안방극장에서는 국민배우 이순재의 열연이 돋보이는 영화 세 편을 소개한다. 소개하는 작품은 모두 넷플릭스에서 만나볼 수 있다.
1. 덕구 (Stand by me, 2017)
영화 ‘덕구’는 이순재가 노 개런티로 찍은 작품이다. 가족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돋보이는 시나리오가 마음을 사로잡아서다. 영화는 일흔 살 할아버지와 일곱 살 손자 덕구의 이야기를 다룬다. 덕구 할아버지는 아들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고, 며느리도 없이 두 손자를 홀로 키우며 살아가는 어깨가 무거운 가장이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사정을 알 턱이 없는 덕구는 그 나잇대 애들답게 돈가스가 먹고 싶다며 투덜대고,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른다. 영화는 이런 평범한 서사를 반복하며 러닝타임 내내 단조로운 분위기를 유지한다. 그러나 지루하기는커녕 갈수록 눈은 벌게지고 코끝은 찡해진다. 특히 덕구 할아버지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뒤부터는 덕구와 함께하는 평범한 순간들이 오래도록 잔상에 남는다. 눈빛만으로 먹먹함을 자아내는 이순재의 연기는 말할 필요도 없다. 시청 전 손수건 준비는 필수다.
2. 로망 (Romang, 2019)
수십 년 세월의 풍파를 견디고 황혼에 접어들 무렵 서로가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주며 살아가는 부부를 보면, 어떤 역경 일이 닥쳐도 끄떡없을 것 같은 단단함이 느껴진다. 그러나 예고 없이 찾아오는 치매는 고난에 면역력이 있는 이들도 받아들이기 힘든 시련이다. 특히나 부부가 함께 기억이 흐릿해지기 시작한다면 절망의 깊이는 배가 된다. 영화 ‘로망’은 몸도 마음도 닮아가는 45년 차 부부가 치매 판정을 받고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기존 치매 영화와 달리 ‘부부동반 치매’라는 새로운 소재로 고령화 사회에 새로운 화두를 던진다. 이순재는 자신보다 더 빨리 치매가 악화되는 아내의 곁을 지키는 택시운전사 ‘조남봉’ 역을 맡아 노년기 애틋한 사랑을 절절하게 녹여냈다. 연기 경력 도합 110년이 넘는 이순재와 정영숙의 관록이 빛나는 부부 연기가 눈물샘을 자극한다.
3. 굿모닝 프레지던트 (Good Morning President, 2009)
“야동 나와라, 야동!” MBC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의 ‘야동 순재’를 기억한다면 이순재가 정극 뿐 아니라 코믹 연기의 달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의 재치와 능청은 영화 ‘굿모닝 프레지던트’에서도 빛을 발한다.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서로 다른 세 대통령의 사적인 고민과 삶을 유쾌하게 그려낸다. 퇴임을 앞둔 노년의 대통령 ‘김정호’(이순재)는 244억 복권에 당첨돼 어떻게 하면 자신의 신분을 노출하지 않고 당첨금을 받을 수 있을지 고민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미남 대통령 ‘차지욱’(장동건)은 첫사랑 앞에서 마냥 수줍은 청년이 된다. 여자 대통령 ‘한경자’(고두심)는 철없는 남편의 대책 없는 내조로 이혼을 고민한다. 영화는 대통령을 진중하고 거리감 있는 이미지로 묘사하던 기존 영화와는 달리 장진 감독 특유의 유머 코드로 캐릭터들의 인간미를 극대화한다. 울다가 웃으면 곤란하니 앞서 소개한 영화와는 다른 날에 시청하길.
시골에 내려가 민박집이나 펜션을 운영하는 이가 많지만 뜻대로 순항하는 사례가 드물다. 이를 모르지 않았던 이정형(60, 희양산토담펜션 대표) 씨는 불운한 운명이 도래한 걸 깨달은 사람처럼 심오한 고민을 했던 것 같다. 기어이 펜션을 짓겠다고 기세를 돋우는 남편 강인구(66) 씨를 보기 좋게 꺾을 묘한 수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정형 씨는 실패했다. 그녀가 아는 인구 씨는 좀 과장하자면 지구인 77억여 명 가운데 가장 끔찍한 옹고집쟁이. 결국은 남편이 이겼다. 정형 씨는 실의와 불안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오잉, 이게 웬일? 펜션 사업이 썩 순조롭게 돌아가는 게 아닌가.
정형 씨가 반기를 든 건 펜션 문제에서만은 아니었다. 인구 씨가 귀농을 제안했을 때부터 열렬한 반대운동에 나섰으니까. “혼자 내려가시옵소서!” 처음엔 그리 심드렁히 답하는 걸로 기선 제압을 도모했다. 하지만 애당초 한 번 먹은 뜻을 쉬 굽힐 남편이 아니었다. 지구별에 존재하는 동종 옹고집들의 빛나는 자존심이 걸려 있다는 투로, 인구 씨는 불퇴전의 고집을 부려 마침내 아내를 대동하고 귀농을 실현하는 혁혁한 전과(戰果)를 거두었다. 포성이 지축을 흔드는 전쟁은 아닐망정, 나름 지능적이고 조직적인 전략이 아니고선 승리할 수 없는 게 부부싸움이다. 인구 씨는 그간 축적한 투쟁 자산 혹은 고집의 막강 위세를 총동원해 성공, 어쩌면 가족사에 길이 남을 치적(?)을 세운 건지도 모른다.
물론 인구 씨 입장에선 누구에게나 지지받기 어려운 서푼짜리 생고집을 부린 게 아니었다. 어엿한 합리에 기반을 두고 귀농을 선창했으니까. 반평생 근무했던 주방기구회사에서 은퇴한 그는 ‘어서 오라!’ 속삭이는 시골의 유혹을 물리칠 길이 없었다. 은퇴자의 쓸쓸한 삶의 오후를 견디기 힘들었으니 말이다. 편의점 삼각김밥과 저지방우유를 사들고 서울의 여기저기 공원이나 야산을 배회하다 해 저물면 털레털레 귀가하는 나날들. 그는 자신의 모습이 늙은 거북이를 데리고 산책하는 것처럼 우스꽝스럽고 한심했으며, 마침내 영혼까지를 다한 고뇌와 모색을 하다 고향으로의 귀농을 발상했던 것이다. 외로이 홀로 계신 고향집의 노모님도 모시고, 놀려둔 농토로 일감을 만들고, 아내와 둘이 전원의 낭만도 즐기고, 이래저래 귀농보다 더 현실적이고 진취적인 노후 대책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으니, 여기엔 아무런 오류가 없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그렇다면 아내 정형 씨는 왜 귀농에 반기를 번쩍 들었나. 보나마나 생고생할 게 빤해서였다. 날마다 풀이나 뽑다가 손가락 관절염에 걸릴 테고, 쏟아지는 별들을 바라보는 재미도 어쩌다 한두 번이지 허구한 날 올려다보자면 뒷목만 뻐근할 테고, 마트나 백화점을 돌아다니는 대신 죄 지은 것 없이 시골집에 얽매이는 옥살이를 해야 할 게 아닌가. 게다가 모기나 파리 따위 해충은 또 어떻고? 최악의 경우, 집 안으로 스며든 뱀이 소파에 똬리를 틀고 앉아 TV 시청을 하는 엽기적 정경을 목도할 수도 있는 게 시골생활이다. 이래저래 정형 씨는 귀농하자는 소리를 듣는 순간 오만정이 떨어졌던가보다.
“남편에겐 어머님을 모실 수 있는 낙향이자 귀농이라는 좋은 뜻에 의한 결심이었겠지만 나는 절대적으로 반대를 했다. 그러나 도저히 이길 수 없더라. 결국은 꾹 참고 져줬다. 이런 내가 시골생활 대비 차원에서 준비한 건 운전면허증을 따둔 거 하나였다. 운전을 할 줄 알아야 답답할 때 바람이라도 쏘일 수 있을 거라서.”
사생결단의 각오로 펜션 사업 반대
정형 씨 내외가 여기 문경시 가은읍 산골로 귀농한 건 2016년 초. 내려오자마자 남편은 벼농사를 시작하더란다. 벼농사에 덤벼든 속도보다 더 신속하게 착수한 건 펜션 짓기였다. “우리 펜션이나 해보더라고!” 그렇게 툭 던져놓고 산 아래 논의 일부를 터로 다져 건축에 나섰다. 번갯불에 콩 볶아 먹을 초고속 질주였다. 이쯤이면 인구 씨의 특기가 고집부리기 맞나? 그게 아니라, 가령 필요하다면 뒷산도 헤딩으로 부수고 나설 슈퍼 울트라급(級) 박력의 보유자라 봐야 하지 않을까. 여하튼 파랗게 질린 정형 씨는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고 다시금 투쟁 전선에 나섰다.
“이번엔 사생결단을 하고 반대를 했다. 펜션은 무슨? 기어이 저지하고 말리라! 꽤나 독을 품었던 거다. 그러나 또 졌다. 원통하지만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웃음)”
펜션을 왜 반대했지? 잘될 수도 있는 일 아닌가?
“잘될 거라는 보장이 어디에 있나? 아무리 날고뛰더라도 자리 잡히기까진 고전할 게 분명해보였던 거다. 게다가 자금 사정도 변변치 않았거든. 건축비 외에 운영비도 많이 들어갈 텐데, 그러고 나면 밥은 뭐로 먹고? 근심과 불안이 아주 많았다.”
부군의 펜션 사업 착수가 충동적인 건 아니었겠지?
“나 몰래 충분히 구상해온 것 같았다. 건축의 초벌 설계까지 직접 해서 설계사무소에 맡긴 걸 보면 이미 오래전부터 펜션에 꽂혔다는 걸 알겠더라. 남편이 뭐든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인 건 분명하다. 무슨 일을 해서든 가족들 밥은 굶기지 않을 남자다.”
봄에 펜션 건축을 시작해 여름에 오픈했다지? 일사천리로 진도를 뺐구나.
“양가 형제들이 많이 도와줘 일이 순조로웠다. 남편이 건축을 주도하는 사이에 나는 부지 곳곳에 꽃을 부지런히 심었다. 꽃을 좋아해서가 아니다. 전에 아파트에 살면서는 꽃에 별 관심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귀농해서 쌓이는 스트레스를 풀 방법이라곤 개울에 나가 다슬기를 줍거나 꽃을 심는 방법밖엔 없었거든.”
드디어 펜션을 오픈한 뒤엔 어땠나? 손님이 얼마나 오던가?
“처음엔 지인들만 간간이 왔다. 그러다가 차츰 문경 지역을 여행하며 지나가던 사람들이 주말에 좀 들어오더라. 이듬해 3, 4월에도 비슷한 추세였다. 5, 6월엔 거의 찾는 이가 없어 객실이 늘 비었다. 그런데 7월 말쯤부터 2주 동안은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방 여덟 개가 다 찼다. 아하, 이게 성수기라는 거구나! 여름 한철 장사로 1년을 먹고사는 게 펜션이라는 얘기가 실감으로 다가오더군. 이후 손님이 꾸준히 늘어 초기의 불안감에서 성큼 벗어날 수 있었다. 상당히 빠른 성장 속도로 자리가 잡혀나간 셈이다.”
예상보다 빠르게, 기대보다 흡족하게 안도할 만한 상황이 펼쳐졌다는 얘기다. 매우 따분한 날들이 오래 이어질 수 있다는 걱정이 많았으나 정반대 방향으로 일이 흘러가는 걸 보며 정형 씨는 비로소 재미와 자신감을 얻기 시작했다. 처음의 격렬했던 반대 시위의 기억을 내심 멋쩍어하면서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겨울 비수기를 제외하고는 무자비한 불황에 진저리를 칠 일이 없었다는 게 아닌가. 펜션 개업 만 4년이 지난 현재, 해마다 점증한 손님의 수효로 이미 궤도에 올라섰다. 재방(再訪) 비율은 무려 90%. 한 번 찾아왔던 고객 대부분이 다시금 찾아오고 있는 것이다. 이미 탄탄한 단골층을 형성했으니 귀농 성공사례라 쳐도 무방하겠다.
고객들 위해 심은 배추 500포기
이와 같은 일련의 성취는 거저 굴러들어온 행운의 산물이 아니다. 비결이 무엇일까. 우선 정형 씨네 펜션이 들어앉은 자리의 경관부터가 빼어나다. 낮에는 물론 달빛 부서지는 오밤중에도 장엄한 암봉을 허옇게 드러내는 명산 희양산이 지척에 있어 상서로운 느낌을 주는 곳이다. 반딧불과 가재가 서식하는 맑은 개울이 펜션 앞을 흐르니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까지 물에 들어가 놀기 좋은 곳이기도 하다. 사방에서 넘실거리는 야산들이 주는 싱그러움과 적당한 적막감 역시 도시에 지친 나그네들의 마음을 보듬어준다.
그러나 이 모든 수려한 자연 경관보다 펜션의 쾌조에 더욱 기여한 건 정형 씨 부부의 노력과 수완이다. 인간사의 인과(因果)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찾아오는 법이다. 그들은 젖 먹던 힘까지 다 쏟아 붓고 있는 것 같다.
“처음엔 막막했다. 그저 청결한 환경을 유지하기 위해 객실 청소를 비롯한 미화 작업에 만전을 기했다. 특히 내가 꽃을 많이 심었다. 부지가 넓은 편이라 꽃밭, 꽃길 외에 텃밭 공간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어 유용했다. 거기에 온갖 야채를 심기 시작한 건 손님들과 나누어 먹기 위해서였다.”
일종의 마케팅 전략으로?
“그저 우리 집을 찾아준 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 뜻으로 고객들에게 야채를 나누기 시작했다. 지내놓고 보니 그 소소한 선의의 표시가 고객의 환심을 자연스럽게 유발하는 효과를 나타냈다는 걸 알겠더라. 누구나 필요한 만큼 야채를 채취해 가져가도록 했다. 아침이면 방방마다 옥수수나 감자를 쪄 돌리기도 했다. 얼마 전엔 배추 500포기를 심었다. 모두 손님들을 위한 물량이다.”
이 펜션은 작은 놀이동산 같은 구색을 갖추었다. 왜 이렇게 꾸몄지?
“영업을 시작하고 얼마쯤 지나 고객층의 경향에 특징이 있다는 걸 알았다. 어린 자녀를 대동한 30, 40대 부부들이 주로 투숙했으니까. 그래 아이들이 맘껏 뛰어놀 수 있는 놀이공간과 시설을 보강했다. 작은 수영장을 만드는 식으로. 텃밭 체험에도 아이들은 신나했다. 안전사고 예방을 위한 장치에도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아이들에게 안성맞춤의 공간으로 입소문이 난 모양이다. 도시의 한정된 공간으로부터 아이들을 해방해 한때나마 자연 속에 풀어놓고 싶은 젊은 부모들. 정형 씨는 그들의 니즈에 적극 부응했으며, 그게 펜션의 안정세를 북돋운 요인으로 작용했다.
주면 줄수록, 마음을 쓰면 쓸수록 돌아오는 것도 많은 게 인간관계다. 그러다 보면 욕심이 생기기 마련이다. 잘나가던 영업집들이 도중에 망가지는 게 그 욕심 때문이지 않던가.
“초심을 유지하게 위해 자제한다. 돈 냄새 풍기지 않는 영업집을 지향하면서. 우리 부부가 늘 하는 말이 있다. ‘일이 고되지만 그저 즐기자. 무리할 거 없다, 그냥 먹고사는 정도에서 만족하자!’ 지금 무난하다고 앞으로도 잘될 거라 방심하지도 않는다.”
어려운 점도 많을 테지?
“좋은 접객을 위해서는 친밀감을 자아내는 대화의 기술이 필요했는데 내겐 그게 쉽지 않았다. 서비스가 지나쳐 오히려 손님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건 아닐지 고민도 많이 했다. 컴맹이었던 내가 뒤늦게 블로그를 배워 펜션 이야기를 올리는 일도 만만치 않아 진땀을 뺐다.”
시골에 내려와 펜션을 운영하고자 하는 사람에겐 어떤 조언을 하고 싶은가?
“펜션 사업이란 게 쉽지 않다. 이곳 주변의 펜션들 대부분이 부진하거나 사실상 휴업 상태에 놓여 있다. 권장하고 싶지 않다는 얘기다. 우리는 땅을 가지고 있어 비교적 수월했지만 투자비도 많이 들고 부대비용도 수시로 발생해 고난에 빠질 수 있다. 오직 돈벌이를 목적으로 뛰어들 경우에는 실패하기 십상이다.”
당신은 처음엔 귀농을 결사반대했다. 이젠 귀농에 호의적일까?
“내가 귀농으로 얻은 가장 큰 선물은 마음의 여유다. 도시에서와 달리 느긋하고 편안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인간으로 좀은 변했거든. 그러나 여자의 입장에서 솔직히 말하자면, 시골이 도시보다 좋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다. 손발 걷어붙이고 진흙탕에도 뛰어들어야 하는 게 귀농생활이다.”
이왕지사 시작한 일, 죽이 될지 밥이 될지 몰라도 일단 최선을 다해 한번 가보자. 정형 씨는 그런 심정으로 진력했다. 새로운 환경에 빠르게 적응했고 진지하게 관여했다. 정형 씨 내외가 그간 쏟은 땀의 총량이 몇 톤에 달할지는 저 고매한 희양산 바위봉이 알려나. 그런데 정형 씨의 펜션이 궤도에 오른 가장 큰 비결은 스스로 선의를 끌어내는 힘에 있는 게 아닐까. 타인의 호의를 기대하기 이전에 나의 선의로 먼저 공기를 따뜻하게 데우는 능력의 진실. 이는 단지 펜션 운영에만 적용될 공리이랴. 타인을 찍어 누르고서야 내가 존재할 수 있다는 미신마저 횡행하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가장 유력한 기법일 수 있다. 그나저나 정형 씨는 아직도 단단히 벼르고 있단다. 남편의 고질적인 옹고집을 단 한 번이라도 와지끈 무너뜨리기 위해.
“어휴, 단 20분만 같이 있어도 혈압이 오른다. 선의도 통하지 않더라. 남편 성질이 불이거든. 늘 내가 패하고 마는 거다. 언젠가는 한 번쯤 이기고 말겠다는 결의를 전혀 포기하지 않고 있다. 하하하.”
정형 씨가 주는 귀농 Tip
•무작정 내려왔다가 시행착오로 고통을 겪는 경우가 흔하다. 미리 귀농·귀촌 교육을 받는 등 충분한 사전 준비를 하자.
•마을과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 거처를 마련하자. 그게 차라리 원주민들과 더 원만한 관계를 형성할 수 방법이다. 지나친 간섭을 받지 않을 수 있으니까.
•펜션을 구상한다면 무엇보다 위치 선정에 공을 들여야 한다. 일단은 경관이 좋은 곳이어야 승산이 있다.
•인근의 귀촌·귀농인들과 긴밀히 사귀자. 단 한 사람하고라도 우정을 나눌 경우 시골생활의 외로움과 어려움을 크게 덜 수 있다.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삶, 가사노동으로 반복되는 하루. 아이 셋을 키우는 한 주부의 일상이다. 한때 자신만의 시간을 갖지 못해 우울증까지 겪었던 그녀. 기분 전환 겸 수강해본 ‘홈가드닝’ 수업이 인생을 바꿀 줄 누가 알았을까. 맨손으로 흙을 만지는 순간 매력에 푹 빠졌다는 그녀는 1년 만에 50여 개 식물로 집을 가꾸는 ‘플랜테리어 마니아’가 됐다. 이제는 더 나아가 관련 사업도 준비하고 있다는 주부 정지예(47) 씨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홈가드닝 수업으로 펼쳐진 초록빛 인생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의 한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서니 집 안 곳곳에서 저마다의 자태를 뽐내는 식물들이 반긴다. 성인 키 정도 되는 길쭉한 키다리 식물부터 손바닥 크기의 ‘초미니’ 식물까지 종류도 제각각이다. 이 모든 생명을 돌보는 식물의 어머니(?)는 주부 정지예 씨. 가리키는 식물마다 생소한 이름을 줄줄 읊는 정 씨의 모습에서 프로의 향기가 느껴졌다. 식물을 본격적으로 키우기 시작한 지는 1년 정도 됐단다. 지난해 봄, 우연한 계기로 알게 된 동네 문화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부터다.
“아이를 낳고 개인 시간 하나 없이 살다 보니 우울증이 도졌어요. 답답한 마음에 서울에서 용인으로 이사를 왔지만, 그것도 잠시더라고요. 결국 생활은 집 안에서 하는 거니까요. 그러다 ‘홈가드닝’ 클래스를 듣게 됐는데, 그런 기분 아세요? 공이 바닥을 치고 튀어오르는 것처럼 벅찬 느낌이요. 텃밭을 가꾸고 흙을 만지는데 딱 그런 기분이 들더라고요.”
오랜만에 웃음을 되찾은 정 씨는 그날 이후 집 안에 새 식구를 하나둘 들였다. 그 개수가 점점 많아져 집 안에서 차지하는 부피가 커질 무렵, 공간과의 조화를 자연스레 고민하기 시작했다. 식물과 어울리는 화분을 고르고, 그에 걸맞은 아기자기한 소품을 배치했다. 우울한 기운이 감돌던 집 안은 한 폭의 정원처럼 변해갔다. 그와 동시에 건조하게 말라 있던 정 씨의 마음속에도 푸릇한 새싹이 돋았다.
“말 그대로 치유가 됐어요. 겨울에 키우던 식물 잎이 다 떨어져 가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뿌리가 살아 있더라고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심었죠. 봄부터 서서히 잎이 피어나기 시작하더니, 여름이 되니까 앙상하던 애가 숲처럼 무성해지는 거예요. 어려운 상황에서도 열심히 살아내는 식물을 보면서 저 역시도 포기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죠.”
식물을 키울수록 새로 알고 싶은 점이 많아진다는 정 씨는 지난해 가을 심도 있는 공부를 위해 경기도에서 주관하는 조경가든대학 교육 과정을 수료했다. 식물과 정원 관리 등에 대한 기본적인 이론과 실습을 배우는 과정으로, 경기도민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수업이다. 현재는 방 한 칸짜리 작업실을 마련해 식물과 관련한 작은 사업도 준비하고 있다. 우울함을 달래기 위해 취미로 시작한 활동이 일자리로까지 이어진 셈이다.
“적은 비용으로 몇 배의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게 플랜테리어 같아요. 추운 계절에 싱그러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도 엄청난 장점이고요. 저도 그렇지만 남편도 취미가 별로 없는 사람이었거든요. 식물 키우기 시작한 뒤로 많이 즐거워해요. 좋아해주는 덕분에 분갈이는 남편한테 다 시켜요.(웃음) 같은 취미를 즐길 수 있음에 감사하죠.”
작은 변화만으로 새롭고 산뜻하게
정 씨의 집은 남동향으로 어두운 편은 아니지만, 거실에 베란다가 없고 창밖에 햇빛을 가리는 어닝이 설치되어 있어 식물을 키우기에 최적의 공간은 아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식물이 사계절 내내 건강한 상태를 유지한다. 분양하기 전 식물이 거주하는 환경에서 잘 자랄 수 있는지의 여부를 먼저 확인하기 때문. 관리하는 식물의 수를 50여 개 이상 늘리지 않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단순 장식품이 아닌 살아 있는 생명인 만큼 온전히 책임질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기르겠다는 주의다.
“무리하는 순간 취미가 아니라 노동이 될 수도 있어요. 본인도 스트레스를 받을 거고, 관리에 점점 소홀해지겠죠. 그러면 식물도 힘들거든요. 행복하기 위해 시작한 거니까 욕심내서 들여오고 싶지는 않아요. 물론 100 개가 넘는 식물도 능숙하게 관리할 수 있다는 분들은 더 많이 키워도 되죠. 사람마다 다 다르니까요. 저는 지금이 딱 좋은 것 같아요.”
식물을 자주 분양하지도 않고, 인테리어에 큰 비용을 들이는 것도 아니지만 정 씨의 공간은 그녀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시시각각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한다. 작은 변화를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 있다는 그녀의 비결은 ‘있던 것’ 활용하기. 정 씨는 키우던 식물도 하나의 인테리어 소품으로 재탄생시킨다. 분갈이를 하다 떨어진 작은 필레아페페 줄기를 휑한 욕실 세면대 옆에 올려두거나, 삼겹살을 구워먹고 남은 로즈마리를 유리병에 담아 놓는 식이다.
가든 소품도 집 안에 굴러다니던 것을 색다르게 이용하는 편이다. 사용하지 않는 수납장 한 칸은 세로로 세워 작업실의 화분대로, 화분 받침은 핸드 워시 등 욕실 용품과 소형 식물을 놓을 수 있는 인테리어 소품으로 활용한다. 몸집이 커졌지만 분갈이를 해주기 애매한 식물은 화분째 철제 바스켓이나 유리 용기에 옮겨 담는다. 시중에 판매하는 소품을 마구잡이로 배치하는 대신 집에 있는 물건을 활용하면 한층 더 자연스럽고 세련된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다는 것이 그녀의 설명.
이케아나 H&M 홈등 대중적인 브랜드 제품을 구매할 때도 있다. 가격이 부담스럽지 않으면서도 실용성이 높다는 것이 그 이유. 정 씨는 이케아에서 산 싱크대를 거실 화분대로 사용한다. 분갈이용으로 구매했으나 예상보다 높고 넓어서 화분을 올려두기에 더 알맞았다고. 정 씨의 빛나는 응용력은 거실을 한층 더 이색적으로 만들었다. 물이 나오지 않는 싱크대와 식물의 조합, 꽤 멋스럽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녀만의 독특한 영감은 어디에서 나올까? 정 씨는 아마존 등 해외 직구 사이트에서 구매한 원서를 보며 주로 아이디어를 얻는다. 국내 서적도 좋지만, 조경 역사가 깊은 서양 서적을 참고하면 훨씬 넓은 안목을 기를 수 있다는 것. 영어를 읽지 못해도 책 속에 실린 사진을 보며 응용해보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된다. 정 씨는 여러 서적 중에서도 ‘어반 정글’(Urban Jungle), ‘에버그린’(Evergreen)을 추천했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했다. 우연한 기회로 ‘인생 취미’를 찾은 정 씨처럼, 브라보 독자들도 작은 계기부터 만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코로나블루’로 갑갑하고 울적한 마음이 조금은 가시지 않을까.
객석의 불이 꺼지고, 무대 조명이 켜지면 공연장의 공기는 일순 긴장한다. 준비됐는가. 이제 모두 날아오를 시간이다. 가수가 잠시 숨을 고른 뒤 노래의 첫 소절을 몸 밖으로 밀어낼 때, 무대와 객석의 시간은 새로운 표정으로 흘러간다. 나와 세계의 경계가 사라지는 몰아(沒我)의 순간. 가수는 노래하는 자신을 잊고, 관객은 그 몰입에 취해 역시 자신을 잊는다. 시간은 황홀하게 타오르고, 순간은 확장된다. 이 순간은 일회적이고 영원히 불가역적이다. 삶은 찰나적으로 완성되고, 존재는 충만해진다. 화인(火印)과도 같은 그 강렬한 시간은 각자 개별적이고 절대적 삶의 무늬가 된다.
음악은 이곳의 언어이자 피안(彼岸)의 언어다. 우리를 실존의 속박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게 하는 예술 장르는 음악이 유일하다. 음악을 추억하는 것은 단순히 지난 시절의 에피소드를 떠올리는 것이 아니다. 어떤 충만함으로 타오르던 내 삶의 가장 높고 거룩했던 한때를 되새기는 것이다. 삶은 덧없고 허망하지만, 음악이 빚어내는 빛나는 순간들이 있어 그 허망함을 잠시라도 잊는다. 음악은 삶의 시간들을 풍요롭게 채워주는 영혼의 재화다. 부와 명예와 지위를 얻은들, 삶의 허기를 채울 수 없다. 또한 음악은 가장 아름다운 삶의 렌즈다. 그 렌즈를 통해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고 재구성한다. 이 세상에는 각자의 음악으로 구축한 무수한 평행 우주가 있다. 그러므로 너는 나의 곁에 있지만, 나의 세계로 절대 들어올 수 없다.
눈물겹도록 곤궁했던 젊은 시절, 나는 음악이 있어 겨우 숨을 쉴 수 있었다. 내 마음을 뜨겁게 달군 노래가 많았다. 그 뜨거움에 의지해 청춘의 한때를 걸어 나왔다. 그때 음악은 내게 종교적 힘을 준 경전이었다.
들국화 전인권의 샤우팅이 솟구쳐 오를 때, 나는 실재하는 감각으로서 자유가 무엇인지를 느꼈다. 그 아득하고 아찔한 목소리와 함께 내 청춘의 한낮도 작렬했다. “울며 웃던 모든 꿈/ 그것만이 내 세상”(그것만이 내 세상)이라고 전인권의 목소리가 도도하게 울려 퍼질 때, 이념의 격정이 들끓던 광장과는 또 다른 세상이 열렸다. 그곳은 존재의 고독과 불안으로 가득했다. 들국화는 도덕적 엄숙주의의 시대에, 개인적 욕망의 아름다움을 알려줬다.
김현식의 노래는 위험하고 불안한 기운으로 가득했다. 그는 짧은 생을 마칠 때까지 일탈과 자학을 삶의 양식으로 삼았다. 삶의 부조리에 저항하듯 절규했다. 이 날것의 샤우팅은 ‘분노와 슬픔’의 자식인 블루스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이지적 무늬가 있는 전인권의 것과는 결이 달랐다. ‘넋두리’는 그의 사실상 마지막 유작인 5집 수록곡이다. 이 곡에서 “갈 테면 가라지 그렇게 힘이 들면”이라며 자신의 비극적 운명을 비웃으며, 단말마적 비명처럼 노래를 토해냈다. 그는 삶과 노래의 경계를 지워버렸다.
신중현의 ‘아름다운 강산’은 지금껏 나의 애국가다. 절묘한 리듬 기타 위로 장장 8분 동안 삶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신중현의 기타와 함께 삶이 고동치고 세계가 출렁인다. “실바람이 불어오는” 이 땅과 “붉은 태양이 비추는” 저 바다를 주유하는 대서사가 우리를 이끈다. 그리고 “우리 모두 다 끝없이 다정해”라고 대단원에 이를 때, 다정(多情)이라는 단어에 연민의 물기가 고인다.
관계의 괴로움 때문에 우울한 날이 길어질 때마다, 나는 정태춘의 ‘북한강에서’를 들었다. 그리고 훼손되지 않은 어떤 시원(始原)을 생각했다. “과거로 되돌아가듯 거슬러 올라가 처음처럼 신선한 새벽”을 마주하면, 나는 다시 푸른 신생의 설렘을 얻어 살 만해질 것이라 믿었다.
김정호는 다음을 기약하지 않는 사람처럼 노래를 불렀다. 그에겐 목숨 한 줌과 노래 한 소절을 기꺼이 맞바꿔버린 듯한 처절함이 있어, 그의 노래가 끝나면 삶의 한 시절이 닫히는 듯했다. 평생 고독과 허무를 자기 집으로 삼은 그는, 자신의 노래 ‘하얀 나비’처럼 어느 날 우리 곁을 떠났다.
서울 성북동 ‘대원각’의 주인이었던 김영한 여사는 1000억 원에 가까운 전 재산을 불교계에 통째로 시주한 뒤,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 돈이 그 사람(백석) 시 한 줄 만도 못해.” 김 여사는 한때 시인 백석의 연인이었다. 이 말을 빌려 말하고 싶다. “삶의 어떤 것도 내 가슴속의 노래 한 줄만 못해.”
지난 2013년 들국화 재결성 앨범을 녹음하던 중, 전인권이 화장실에 가 거울에 비친 초로의 자신과 마주쳤다. 그 순간의 감회를 주변 지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녹음 부스 안에는 청년이 있었는데, 화장실 거울 안에 낯선 노인이 있었다.” 그때 그의 나이 예순이었지만, 노래를 녹음하는 순간의 전인권은 여전히 가슴 뜨거운 청년이었다. 음악은 늙지 않는다. 음악은 시간의 물리성을 거슬러, 모든 순간을 처음처럼 갱신한다.
오늘밤 오래된 LP판의 먼지를 닦아내고, 삶의 턴테이블에 올려보자. 내 몸 안에 숨어 있던 청년 한 명이 걸어 나올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사금파리처럼 다시 반짝일 것이다.
이주엽 작사가이자 음악 레이블 ‘JNH뮤직’ 대표. 가수 정미조, 재즈 보컬리스트 말로, 기타리스트 박주원 등의 음반 제작과 매니지먼트를 하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 젊은 영웅들이 배를 타고 세계의 동쪽 끝까지 가서 황금양털을 찾아오는 설화가 있다. 바로 ‘아르고호 이야기’다. 이아손 원정대는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황금양털을 찾는 모험을 한다. 마침내 그들이 도착한 곳은 흑해 연안에 접한 고대 조지아의 첫 번째 국가 ‘콜키스’(Kolkhis)였다. 그곳에서 원정대는 이아손에게 반한 ‘메데아’(Medea)의 도움을 받아 황금양털을 가지고 그리스로 돌아간다. 조지아가 신화의 땅으로 불리는 이유 중 하나다.
흑해의 진주 바투미의 핫 플레이스
흑해의 석양이 아름다운 고급 휴양도시 바투미는 조지아의 여름 수도라고 부를 만하다. 여름철이면 주변국에서 온 많은 사람이 휴가를 보낸 후 돌아간다. 그렇다 보니 현대식 건물과 유럽 양식의 건축물과 집들이 뒤섞여 있다. 관점에 따라 난개발로 볼 수도 있고, 신구(新舊)의 조화로 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조지아에서 가장 복잡한 거리이면서 현대화된 도시라는 점이다.
바투미는 ‘불러바드(Boulevard) 해변’과 유럽광장이 중심인 ‘구시가’로 나눠 둘러보는 게 좋다. 다양한 공원과 테마파크가 모여 있는 불러바드 해변에서 여름철에만 영업을 하는 ‘선셋 레스토랑’이 있다. 음식뿐 아니라 조지아의 화려한 전통 무용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불러바드 해변에서는 뮤직 페스티벌 등 크고 작은 축제가 매일 밤 열린다. 해변을 걸으며 이곳 분위기에 푹 빠져보는 시간만으로도 행복하다. 미학적 감동을 넘어 잠들어 있는 나를 깨워주는 해방의 공간에 온 듯한 자유가 느껴진다.
해변 옆 힐튼호텔 20층 ‘스카이라운지’는 전망을 즐길 수 있는 바투미의 숨겨진 명소다. 시시각각 다르게 물드는 바다와 하늘을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다. 수평선을 향해 기울어가는 붉은 태양을 배경으로 나뭇잎 떨어지듯 활강하는 패러글라이딩과 오렌지색 바다 위로 검은 물살을 남기며 가로지르는 배를 보고 있으면 어디선가 클라리넷의 선율이 감미롭게 들려온다. 흑해가 삶의 가장 빛나는 순간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거대한 공간이 되는 시간이다.
무슬림을 상징하는 남자 ‘알리’와 조지아 정교회를 상징하는 여자 ‘니노’의 이야기를 담은 두 조형물 ‘알리&니노’는 저녁 7시가 되면 조금씩 움직이며 서로 아슬아슬하게 만나지만 키스도 못하고 서로 다른 곳을 쳐다보며 다시 멀어진다. 안타깝고 가슴 저리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표현한 이 작품도 바투미를 상징한다.
여행을 하다 보면 운 좋게도 행복한 기운이 느껴지는 마을에 들를 때가 있다. 바투미 구시가지가 그런 곳. 마치 동화 속 마을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메데아 동상’이 있는 유럽광장을 중심으로 천문 시계탑, 황금빛 공연 예술극장, 황금 포세이돈 동상, 신화 속 마녀 사이렌의 조형물, 꽃 장식 테라스가 있는 레스토랑들이 모여 “이곳이 신화의 땅“이라고 속삭인다. 기꺼이 길을 잃고 한 집 한 집 들어가 눈부시게 아름다운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싶다.
‘보르조미’ 광천수는 신의 선물
조지아 중부지방에 있는 보르조미 국립공원은 유럽 최대 규모의 공원이다. 침엽수와 활엽수의 광활한 원시림으로 이루어져 있어 몸에 좋은 피톤치드가 많은 곳으로 유명하다. 조지아 사람들은 자녀가 천식을 앓으면 이곳에 데려와 요양을 시킨다. 뇌전증을 앓았던 차이콥스키도 이곳에서 치유하며 음악적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보르조미 시내에 그의 동상이 있다.
이 공원에서 조지아 3대 상품 중 하나인 ‘보르조미 생수’가 생산된다. 한국에서도 수입했던 보르조미 광천수는 자연 탄산 미네랄워터가 빙하로 덮여 있다가 여과되어 내려오는 물이다. 제정 러시아 시절 이곳에 주둔해 있던 러시아 군대 지휘관이 광천수를 마시고 위장병이 나은 후 휴양지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그 후 러시아 왕족과 귀족들도 이 물을 들여와 마셨다고 한다. 1894년에는 광천수를 병에 담기 위한 공장까지 생겼다. “신은 아제르바이잔에게는 원유를, 조지아에게는 물을 선물했다”는 말이 있다. 1000년을 마셔도 마르지 않을 물이 보르조미에 있기 때문이다. 줄을 서 차례를 기다린 후 광천수를 마셔봤다. 쇳물 냄새에 짭조름한 맛이었다.
고즈넉하고 쓸쓸한 그리움의 도시 ‘쿠타이시’
조지아를 여행하다 보면 교회가 참 많이 보인다. AD 337년에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할 정도로 조지아 사람들의 삶에는 종교가 크게 자리 잡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는 교회도 많다. ‘쿠타이시’(Kutaisi)에 있는 ‘바그라티 대성당’(Bagrati Cathedral) 역시 의미 있는 교회 중 하나다. 조지아 역사상 최초의 통일 왕국을 이룩한 후 그 상징으로 지었다고 한다. 웅장한 규모와 녹색 지붕이 인상적인 이 성당은 조지아 건축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기원전부터 도시로 형성된 쿠타이시는 고대부터 조지아 역대 왕국의 수도였다. 현재도 교통, 행정의 중심도시 역할을 한다. 교회 앞마당에서 내려다본 쿠타이시의 해질녘 시가지는 지나온 굴곡의 시간을 대변하듯 고즈넉하면서도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물들어갔다.
조지아의 경찰은 1등 신랑감
조지아에서 유리로 만들어진 가장 멋진 건물은 무조건 경찰서로 보면 된다. 경찰서 건물이 이토록 환하고 밝고, 멋진 데는 이유가 있다. 러시아로부터 독립한 후 집권한 ‘사카슈빌리’ 전 대통령은 경찰 개혁을 추진했다. 2004년 부패의 화신이었던 경찰 수장과 3만 명의 경찰을 일시에 해고한 뒤 새 경찰을 모집해 완벽한 물갈이를 했다. 뇌물을 받지 못하게 하려고 급여도 20배 이상 인상했다. 또 모든 경찰 활동을 밖에서 볼 수 있도록 건물을 투명한 유리로 만들었다. 당시의 개혁은 한계와 어두운 측면도 있었지만, 일선 경찰들은 크게 변했다. 이때부터 조지아에서 경찰은 1등 신랑감이 됐다.
요즘 조지아 청소년들은 ‘케이팝’(K-pop)에 열광하고 있다. 탈레비에서 있던 일이다. 일몰을 감상하기 위해 공원으로 걸어가는데, 맞은편에서 오던 세 명의 소녀가 “안녕하세요?” 하면서 한국말로 인사를 건넸다. 반갑고 신기해서 30여 분 정도 대화를 나눴다. 소녀들은 케이팝이 너무 좋아서 한국어 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다.
‘고리’(Gori)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케이팝 때문에 전공을 아예 ‘동양 언어’로 선택하려 한다는 ‘타마르’(Tamar)도 우리를 반겨줬다. 한국인을 직접 만나 정말 기쁘다며 한국 드라마와 노래에 대한 꽤 해박한 지식을 자랑했다. 준비한 김밥과 라면으로 함께 저녁 식사를 마친 그녀는 자신의 친구를 숙소로 불렀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기타를 치며 케이팝과 ‘술리코’(Suliko)를 비롯한 조지아 노래를 부르며 작은 콘서트를 열어줬다.
고리의 광장에서 만난 스탈린타마르를 만났던 ‘고리’는 소련 독재자 스탈린의 고향이기도 하다. 시청 광장에 아직도 그의 동상이 있다. 사진과 유물을 모아놓은 박물관과 생가, 그가 사용했다는 전용열차를 전시해놓은 공원도 있다. 수많은 사람을 죽인 역사의 패륜아라는 생각에 그곳을 둘러보는 동안 기분이 유쾌하지 않았다.
바람의 나라 아르메니아로 가는 길
바르지아에서 출발해 11번 도로를 타고 아르메니아 제2의 도시 ‘규므리’(Gyumri)로 향했다. 1번 도로를 이용할 것을 주로 추천하지만, 이동거리 때문에 11번 도로를 선택했다. 염려했던 것보다 도로 상태는 좋았다. 새롭게 포장된 구간도 많았다. 오히려 차량이 별로 없어 한갓지고 더 좋았다.
국경을 넘자 고원지대 특유의 초원이 펼쳐졌다. 초원의 풀밭을 쓸며 지나가는 바람의 출렁임이 보였다. 누런 벌판으로 여름날 오후의 햇볕이 쏟아졌다. 눈이 부셨다. 그대로 서서 두 눈을 감고 두 팔을 한껏 벌렸다. 바람이 담아 오는 오래된 전설을 듣고 싶었다. 부드러운 저음색의 목관악기 소리가 끊이지 않고 바람에 실려 왔다. 한이, 처연함이, 소망이 스며 있는 소리였다. 바람은 손가락 사이를 간지럽히며 빠져나갔다. 노아의 이야기와 격조 높은 아르메니아의 문화와 검소한 신앙이 남아 있는 곳으로.
◇조지아 중서부 지역에서 꼭 가봐야 할 곳◇
우플리스치헤(Uplistsikhe)의 ‘고대 동굴도시’
기원전 10세기경에 만들어진 고대 동굴도시다. 바위를 깎아 공동 집회장소, 궁전, 와인 저장고, 감옥 등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태양신을 섬기는 종교도시였는데 기독교인들이 이주해오면서 그들의 삶의 터전이 됐다. 11세기에는 실크로드의 거점으로 인구가 2만여 명까지 늘어날 정도로 커졌지만 13세기에 몽골 침입으로 폐허가 됐다.
아할치헤(Akhaltsikhe)의 ‘라바티’(Rabati) 성’
13세기에 세워진 도시다. 조지아어로 ‘새로운 요새’라는 의미를 지닌다. 오스만 제국에 점령당할 때 구시가지에 있던 ‘라바티 성’은 폐허가 됐다. 2011년 복원을 시작해 새로 문을 열면서 조지아의 유명 관광지로 변신했다.
바르지아(Vardzia)의 ‘동굴도시’
쿠라 강변의 ‘에루쉐티’(Erusheti) 산비탈에 동굴을 파서 만든 도시다. 12세기에 몽골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짓기 시작해 타마르 여왕 때 완공됐다. 서쪽과 동쪽에 각각 6개의 수도원과 여왕 타마르의 방, 접견실, 회의실, 대장간 등 300여 개의 방과 25개의 와인 저장실로 이루어진 군사요새다. 한때는 5만 명을 수용할 만큼 큰 규모였다. 중세 때는 수도원으로 사용됐다.
거실에 앉아 VOD로 영화보기를 했다. 가까운 지인들과 집안에서 멋진 대화를 나누던 ‘영화 논-픽션’을 택했다. 1년 전에 영화관에서 매혹되었던 이들의 지적인 토크, 특히 요리가 담긴 넓은 접시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대화를 나누던 풍경을 다시 보고 싶었다.
종이책과 e-Book간의 선택이나 문제는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도 진행 중인 고민이다. 책이나 신문이 인터넷 사이트라는 시공간을 넘어 순간적으로 먼저 전한다. 이런 현실에 현대인들은 이미 익숙하다. 이 영화를 만든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은 "우리가 사는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디지털화는 일어나고 있다. '논-픽션'은 그러한 변화에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에 대한 영화"라며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 물살에 몸을 맡기는 것뿐이다"라고 말한다.
영화 속에서 출판사를 운영하는 성공한 편집장 알랭이 작가 레오나르와 새 책 출판에 대한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시작이 된다. 알랭은 레오나르가 자신의 사적인 경험을 창작에 적용하는 것을 회의적으로 대꾸한다. 그러다가 EU 정책에 대한 토론까지 나아간다.
편집장 알랭은 퇴근한 뒤에도 그런 시간이 계속된다. 영화배우인 아내와 친구 부부 등이 모여서 자신들만의 의견을 자유롭게 피력한다. 블로그 조회 수와 책 판매에 관한 비교, 그리고 읽고 쓰는 사람들의 생각을 말한다.
각자의 무릎 위에 음식이 담긴 접시를 올려놓고 지적인 토크가 쏟아져 나오는 풍경은 생경하다 못해 경이롭다. 책을 중심으로 한 출판이나 정치와 문화 민주주의, 디지털화에 따른 대중의 취향과 그들의 삶에 대한 담론이 위트 있고 아름답다. 개운하고 유쾌하다.
일상에서 늘 만나는 이웃이나 친구들의 대화가 마냥 수다가 아니다. 비판이나 세상의 문제제기, 그리고 문제 해결에 따른 의견들이 담담하면서도 빛나는 사유의 언어로 나타난다. 영화의 모든 대사가 탄탄하고 시원하게 터져 나온다. 도서 출판계의 위기가 다가온 세상에 현재와 미래의 고민이 무겁고 지루할 만 한데 영화 보는 내내 시종일관 귀 기울여 경청하게 된다.
게다가 그들만의 각자의 연애가 유지되고 있음을 서로 눈치채고 있는 중이었다. 알랭의 아내 셀레나와 작가 레오나르가 오랜 연인 관계였다. 물론 알랭도 회사의 젊은 디지털 마케터 로르와 연애 중이다. 이런 아슬아슬하기만 한 일상이 복잡하게 얽히는 감정 씬 하나 없이 가볍게 해결해 나간다. 섬세한 감정의 흐름을 굳이 차단하지 않는다.
작가 레오나르가 부인에게 결국 고백한다. “사실 나 바람피웠어” 놀라운 이 말에 “알고 있었어. 당신 책도 순 그 얘기잖아”영화를 보는 사람이 더 놀라울 뿐이다.
우리의 보편적 정서로는 가능키 어렵겠지만 그들은 결국 공존을 택한다. 막장을 우아하게 승화시켰나 잠깐 시큰둥했지만 파리지앵들의 쿨한 감정 정리가 시원하기까지 하다. 완벽하게 쿨하다. 이 또한 무거울 수 있는 주제를 벗어나게 하는 유쾌한 장치가 되어준다.
특히 작가 레오나르가 서점에서 진행되는 소설가와의 대화 장면이 있다. 독자와 작가와의 자유로운 비판은 간간히 가슴이 쫄깃해진다. 직설적이면서 촌철살인의 질문과 대답은 바라보며 멋지기까지 하다. 때로 영화 전편으로 음악으로 채운 듯한 작품을 볼 때가 있다.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대화가 가득한 영화다.
무엇보다도 나는 이 영화를 보기 전부터 줄리엣 비노슈가 나온다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 그녀가 출연했던 영화 ‘초콜릿’을 떠올렸다. '세상의 모든 초콜릿'이라는 이름의 초콜릿 가게를 연 그녀에게 집시의 자유분방한 기질을 가진 조니 뎁이 나타나던 영화. 그때의 신비로운 아름다움과는 다르게 인생의 내공이 조금 더 묻어나는 연기를 한 줄리엣 비노쉬가 반가웠다.
매일 오후 12시 20분이 되면 만나게 되는 반가운 목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대한민국 대표 라디오 프로그램. 바로 ‘싱글벙글쇼’다. 국내 시사 풍자 라디오 쇼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싱글벙글쇼’의 안주인으로서 33년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김혜영은 공동 진행자인 강석과 함께 오랜 세월 사람들이 듣고 싶은 얘기들을 들려주고 웃음과 위로를 전하며 변치 않는 사랑을 받고 있다. 격동의 시대 한복판을 살아오면서 치른 김혜영의 삶과 깨달음이 위기의 시대인 지금 어떻게 다가올 수 있을지, 그녀와의 반가운 인터뷰를 통해 탐색해봤다.
가히 역병의 시대다. 코로나19로 기존의 모든 것들이 흔들리는 세상이다. 일상에서는 언제 침입할지 모를 전염병이 걱정이고 경제 지표를 읽는 사람들은 세계적인 경기 위축 현상이 불러올 혼돈을 걱정한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다. 1987년부터 지금까지 무려 33년 동안 ‘싱글벙글쇼’를 진행하고 있는 김혜영 또한 아랑곳하지 않고 항상 우리 곁에서 힘을 보태주는 그런 이들 중 한 명이다.
항상 우리 곁에 있는 사람
처음 인사는 흉흉한 상황인 만큼 코로나19 바이러스로부터의 안부를 먼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일은 하고 있는데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죠. 요즘 줌바 댄스에 재미 붙였는데.(웃음) 그래도 자기관리는 계속하고 있어요. 여의도공원과 여의도 아파트 광장을 수시로 걷고 PT도 계속 받아요. 최근에 춤추는 걸 한번 해보자 해서 줌바 댄스를 시작했는데요. 몸이 가벼워지더라고요. 그런데 어쨌든 상황이 이리 돼서….”
비록 안타까움이 묻어났지만 라디오에서 들을 수 있는 그 밝고 반가운 목소리 그대로였다.
김혜영은 무엇보다도 액티브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열정이 있는 사람답게 많은 걸 배웠고 배우는 중이다.
“필라테스, 우쿨렐레와 캘리그래피도 배우거든요. 라디오 녹음하는 날에는 스튜디오까지 계단을 걸어 올라가고요. 나이가 들면 허벅지 근육으로 살아야 하니까요. 건강하게 늙고 싶은 마음이에요. 오늘도 중요하지만 다음 일도 대비해야 하는데, 저희 같은 방송인은 몸 자체가 상품이잖아요? 다른 무엇보다 건강해야겠다는 생각이 앞설 수밖에 없죠.”
그녀는 나이 들어 싫은 건 얼굴 주름뿐이고 나쁜 건 없다고 단언했다. 긍정의 에너지가 그녀 주위에 넘실거리고 있는 듯했다.
“마음의 여유, 경제적 여유, 아이들이 다 큰 것에 대한 여유가 있죠. 그리고 남편이 내게 시간을 주는 것도 고마워요. 그동안 열심히 살았으니 너의 시간을 충분히 가지라고 하거든요. 그래서 그냥 내가 건강하고 즐거우면 된다고 생각해요. 행복하냐고요? 그렇죠.”
남편과의 오래된 약속
그러고 보니 김혜영의 남편 얘기가 궁금했다. 김혜영이 유명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남편은 지금껏 미디어에 노출된 적이 없다.
“나로 인해서 TV와 잡지에 나가고 싶지 않다는 게 남편이 결혼 전 내걸었던 조건이었어요. 저는 십분 이해할 수 있어요. 그래서 실물은 공개 안 해요. 남편은 결혼을 하고 지금까지 마음의 변화가 없는 사람이에요. 변덕을 부리면 제가 부리지, 남편은 한결같아요. 그래서 아가씨들이 저 사는 모습 보면 결혼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아무래도 그녀의 남편은 대쪽 같은 남자인 듯싶다. 그러나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방송하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쫑파티하고 밥 먹고 들어오는 것을 보곤 ‘너는 연예인이기 전에 가정주부니까 제 시간에 들어와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한 번 대판 싸우고 제가 깔끔하게 정리했죠.(웃음) 그다음부터는 그런 거에 대한 얘기가 없어요. 현재까지. 그리고 제가 문제를 일으킬 일을 안 하니까요.”
“사람이 너무 좋다”
김혜영은 요즘 동네 사람들과 다양한 취미활동과 함께 어른들을 모시는 사회공헌적 모임도 하고 있다. 1년에 한 번 5월에 소장품을 팔고 공연도 하는 등 행사를 크게 연다. 그녀 또한 나누는 일에 재미를 느끼게 된 걸까? 알고 보니 국제구호 NGO 단체인 월드채널에서 홍보대사로 일하며 10여 년 동안 매년 3000만 원씩 기부하고 있었다. 캄보디아에 자신의 이름으로 된 학교도 지었다니 그녀의 봉사활동 또한 묵직하고 오래된 셈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관계맺기를 힘들어한다. 그런데 그녀는 나이 들어가며 그 관계망이 오히려 더 넓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 비결이 궁금했다.
“저는 사람이 너무 좋아요. 그러니 말도 먼저 걸게 되죠. 그리고 방송인이 좋은 점은, 나는 상대를 몰라도 상대는 마음을 열어놓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다가가면 더 많이 마음을 열게 되는 거죠. 저는 사람을 만날 때 쭈뼛거리는 게 없어요. 그냥 편해요. 제가 그렇게 대하니 상대도 편해지는 거고요.”
어머니 덕분에 이룰 수 있었던 많은 것들
김혜영과 인터뷰를 하면 할수록 그녀가 뼛속 깊이 감사의 마음을 품고 살아간다는 인상을 받았다. 33년째 진행한 ‘싱글벙글쇼’에 대한 그녀의 생각 또한 그와 같았다.
많은 사람이 싱글벌글쇼를 푸근하게 들어줘서 종종 잊게 되지만, 사실 싱글벙글쇼는 시사 프로그램이다. 웃음을 밑바탕에 깐 시사 전달이 목적이다. 그러나 불편할 수도 있는 내용을 특유의 해학과 함께 시청자들에게 전하는 게 ‘싱글벙글쇼’의 강점이자 김혜영이 해내야 할 미션이기도 하다. 그 상황에서 그녀는 자신에게 맞춰주는 스태프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너무 편하죠. 나이가 들어 고마운 게 그들이 나에게 맞춰주는 거예요. 그래서 조금만 그들을 안아주면 잘 따라오더라고요. 좋은 MC는 먼저 상대를 인정해주고 장점을 부각해주는 능력이 필요한 법이니까요.”
김혜영은 싱글벙글쇼에서 다양한 연기를 펼쳐 보인다. 들어보면 자연스럽게 연기자로서의 능력이 높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자신의 그런 능력을 ‘어머니 덕분’이라고 돌렸다.
“삶이 힘드셨던 분이었어요. 6남매를 키워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어머니가 나로 인해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에 ‘어떻게 하면 즐거워하실까’를 연구하곤 했어요. 그게 방송에 도움이 되었죠. 그리고 방송국에서 버는 돈을 어머니께 갖다 주는 게 제 기쁨이었죠.”
33년 동안 감사한 사람들
싱글벙글쇼는 원래는 강석이 하고 있었고 김혜영은 그의 상대역으로서 네 번째로 온 사람이었다. 그녀는 당시 서세원이 진행하던 ‘별이 빛나는 밤에’에 게스트로 출연하던 중이었는데, MBC 라디오국 김건영 부장이 그녀의 가치를 알아봐 ‘싱글벙글쇼’에 들어가게 됐다. 그 후로 33년 동안 같은 자리에 앉아 있게 될 줄 알았을까?
“김 부장님은 정년퇴직하셨죠. 생각해보니 저랑 같이 일한 사람들은 다 정년퇴직했어요. 양희은 언니도 저에게 ‘MBC 라디오국에서 제일 독한 년이 너야. 열두 번도 그만뒀을 텐데’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웃음)”
그래서 그런지 그녀가 이 봄날 저녁식사에 초대하고픈 중요한 사람도 바로 싱글벙글쇼 식구였다.
“싱글벙글쇼 대본을 25년간 쓴 작가가 있어요. 박경덕 작가라고, 제가 힘들 때마다 그 품에 안겨서 많이 울었어요. 항상 ‘김 여사 참아, 견뎌내’라고 말해주며 25년 동안 많이 들어주고 토닥여줬죠. 고맙고 아련해요. 그리고 15년 된 김성 작가, 애기작가로는 이자원 씨가 있어요. 내 얘기를 가장 많이 들어준 사람들이에요.”
아직도 소녀처럼
김혜영은 철저한 방송인이다. 결혼식 당일에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방송을 진행한 후 결혼식장에 갔을 정도다. 매일 라디오 방송을 하느라 해외여행 한 번 가본 적이 없다. 그래서 언제든 라디오를 그만두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계획을 짠 적이 있다고 한다.
“한 달간은 절에 들어가 있으려고요. 그리고 애틀랜타에 가서 3개월 지낼 거예요. 지인이 있어서 거길 기점으로 여행을 많이 다녀보고 싶어요. 제주에서도 1년 살고 싶어요. 제주도는 너무 매력적이거든요. 그래서 귤 따고 당근 뽑는 알바도 알아봤어요.”
제주도에서 지내게 되면 아르바이트 일당을 받아 샌드위치, 와인, 과일을 사고 아침 일찍 해변에 가서 해 떨어질 때까지 그 자리에 있다 올 거라고 한다. 그렇게 일당 번 걸 다 쓰면 또 일을 할 거라고 한다. 낭만적인 상상이다. 그러나 동시에 참 소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딸이 그러더라고요. 걸어가도 시원찮은데 어떤 사람이 산에서 막 뛰어다니는 걸 보면 엄마 같은 사람 저기 또 있다고 그래요.(웃음)”
그녀는 방송인이 안 되었다면 연기자가 되려고 더욱 노력했을 거라고 말한다. 사실 그녀의 연기 욕심을 증명하듯 그녀는 코미디언이면서도 드라마를 많이 한 편이다. 첫 정극 연기는 국민 드라마 ‘전원일기’에서 펼쳤다. 이후 ‘당신’이라는 드라마에도 출연했고, 신년 특집드라마 ‘우리들의 신부님’에서는 주인공 역을 맡기도 했다. 가장 유명한 작품은 ‘한지붕 세가족’. 평범한 부부의 아내 역할로 오랫동안 안방을 찾았다.
인생살이는 점수로 매겨지는 게 아니다
사람을 좋아하고 감사의 생활이 내재화된 사람, 그러나 그러한 외향적 성향은 많은 사람과 접촉하는 만큼 상처도 쉽게 받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어떻게 자신을 지켜내고, 나이가 들어서도 바뀌지 않는 긍정과 감사의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을까?
“다 받아들이고 다 인정해버리면 돼요. ‘누가 너보다 방송을 더 잘하네’ 하면 ‘오, 그래 잘하네’ 하고 인정해요. 그 순간부터 편해져요. 누가 나한테 뭐라고 해도 ‘그래, 그럴 수도 있어’ 하죠. 힘든데 그게 돼요. 그래서 엄마가 너무 고맙고 감사해요. 이렇게 긍정적인 성격을 물려주셨으니까요.”
나이가 더 들면 영화에 출연해 재밌는 아줌마 같은 감초 역할을 하고 싶다고 웃으며 말하는 김혜영은 어쩌면 삶에 노련해질 수 없는 사람이기에 그 젊음을 간직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틀렸다. 도리어 그녀는 자신의 강점인 긍정의 힘으로 삶을 수용하고 품에 안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녀의 마지막 말에는 오랜 시간 끝에 감사와 긍정을 내재화한 사람이 본 세상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었다.
“이기려고 하지 마세요. 상대를 이겨서 내가 더 잘났다고 여기는 건 자기 생각이지 사람들은 그렇게 보지 않아요. 인생살이는 점수로 매겨지는 게 아니니까요.”
바이러스성 호흡기 질환 ‘코로나 19’로 인해 집에서 옴짝달싹 못하고 있는 사이에도 봄은 변함없이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유리병 안에 갇힌 거처럼 봄의 향기를 못 맡고 있지만 자연이 아직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어김없이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할 뿐이다.
내게 봄은 꽃이 피는 과정을 통해 생명의 신비를 느끼게 하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봄꽃의 꽃망울이 터질 때 두근거리는 울림을 주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 설렘은 내 삶에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싱그러운 자극으로 나에게 에너지가 된다. 그래서 해마다 봄이 되면 나는 여기저기 많이 기웃거린다.
올해는 직접 봄을 찾아 나설 수 없는 상황이다. 아쉬운 대로 지난 시간 교감했던 봄을 기억과 되새김질을 통해 복원하는 시간을 가졌다. 여러 곳 중 유독 한 곳에 여러 차례 발길이 갔던 흔적이 눈에 띠었다. 경상남도 하동이다.
내 추억 속의 하동은 봄을 찾다 돌아오니 마당 건너편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봄이 보였던 곳이다. 그때부터 거의 해마다 봄이 올 즈음이면 그곳에 갔었다.
부담 없이 살짝 눈이 부시게 햇살에 반짝이는 강물, 깊고 높은 어둠의 고요 속에 수줍은 듯 빛나는 별천지, 바람에 실려와 코끝을 살살 간지럽히는 자연의 향기들이 봄을 말했다. 그렇게 따스하게 토닥여주는 자연이 좋았다.
더군다나 하동에는 소설 ‘토지’의 무대가 되는 평사리가 있다. 그곳은 나에게 사유와 성찰을 위한 최고의 보약이 되는 공간이다. 평사리 땅에 서면 인간의 삶과 인간의 삶이 엮이는 소리가 들리면서 내 마음을 챙길 수 있었다.
이미 드라마로도 여러 번 방송되어 잘 알려졌다시피 ‘토지’는 구한말부터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까지 우리 민족 고난의 역사를 최씨 일가 중심으로 이야기한 박경리의 장편대하소설이다. 무려 25년 동안의 집필 과정을 거쳐 전체 20권으로 완간됐다.
소설이 특히 나에게 줬던 커다란 울림은 인간의 본질적인 삶에 대한 방대한 이야기였다. 소설에는 700여 명에 이르는 다양한 모습의 인간에 관한 보편적 모습이 그려져 있다. 책을 읽을 때 소설 속 인물들의 삶과 상처, 아픔에 대해 상상해 보는 시간을 넉넉하게 가졌다. 그 시간을 통해서 내 삶의 온도와 빛깔과 향기도 바뀌었다. 내가 아닌 관점에서 현상과 감정을 보는 훈련이 되었고, 다른 사람의 아픔에 대해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책을 다 읽고 난 후부터 봄철의 평사리에 가면 자연스럽게 자기성찰을 통해 내면의 에너지를 선물 받았다. 소설 ‘토지’는 봄비처럼 촉촉하게 가슴을 적시며 내 안의 빛과 소금이 되어준 작품이다.
평사리에는 2001년 드라마 세트장으로 사용한 최참판댁과 초가집들이 조성되어 있다.
지난 봄 그곳에 갔을 때 최 참판 댁 앞마당에 서서 멀리 보이는 섬진강을 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았다. 한 굽이 굽이져 흐르는 섬진강을 보니 강에 뛰어들어 자살한 봉순이의 일생이 떠올랐다. 장터를 가기 위해 강둑을 걸어가는 이용의 모습을, 해방 소식을 듣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강둑을 걸어오는 장연학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사랑채를 끼고 돌아 집 뒤편으로 가면 한을 사랑으로 승화시킨 조병수의 아픔이 담겨 있는 대나무 숲이 있다. 그곳에서 그의 인생에 대해 느끼고, 이해하는 사유의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토지’는 사람들의 인생 모습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그 메시지의 핵심은 역경을 극복한 사실로만 국한 시키지 않는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극한의 고통과 고독을 이겨내는 아름다운 삶의 가치에 대해서까지 확장시켜 말하고 있다.
그 양의 방대함만큼이나 인간과 삶을 이해할 수 있는 거의 모든 형태의 인생이야기가 담겨 있는 심연이다. 양에 눈길을 주지 말고, 용기 내어 읽어보길 권한다.
이제 봄이 살살 수를 놓고 있다. 이 봄기운으로 유리벽을 허물어 내고, 내 인생의 소중한 보물인 인연들과 함께 봄날의 설렘을 공감할 수 있는 시간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