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집집마다 활짝 피어 올랐던 카네이션 꽃들이 아쉬운 눈빛으로 저만큼 자취를 감추고 그 남은 향내마저 시들어 뒹굴 때쯤이면 부서진 꽃잎들은 흐린 미소로 전해온다. 또다시 6월의 꽃들은 정녕 눈부심이라고 나지막하게 내 귓가에 희망을 담고 속삭여온다.
장하다. 내 딸들아! 그리고 앞으로도 화이팅!
내게는 두 딸이 있다. 그리고 그 딸들은 6월이 되면 한아름의 장미꽃으로 내게 남은 열정을 태워주는 불씨가 된다. 그들이 가져다 주는 행복선물에 나는 고여 드는 눈물로 하늘 우러러 깊은 감사를 드린다. 어느 부모나 자식에게 최선을 다하고 그 자식이 잘 되기를 소원하지만 이 서서히 타오르는 계절, 그것들은 분명 그 아름다운 어떤 보석보다 빛나고 귀한 인생의 값진 선물이리라.
우리 가족은 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격은 시련의 시간들이 많았다. 나라의 경제위기와 함께 닥쳐온 가정의 몰락, 그 여파의 빈털터리로 도피해야만 했던 이민생활, 어린 나이에 겪어야 했던 이산가족의 아픔, 낯설기 만한 이국 땅에서 살아남기 위한 수단으로 겪어야 만 했던 수많은 고통들, 그 상처들은 피나는 눈물로 파고들어와 뼈 속으로 스미는 칼날이었다. 험난한 절벽아래 낭떠러지 위기의 고통을, 우리는 어쩌다 상봉하는 가족이었지만 그리움의 빛깔로 채워진 가족이라는 힘으로 빛나는 기회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온몸으로 발버둥을 쳤던가.
다행히도 아이들은 긍정의 힘으로 열심히 잘 버티어 주었고 그 초라하고 가난했던 상처들은 이제 얼룩진 추억으로 남아 삶의 한 페이지를 장식해 주었다. 그리고 이제 그 힘겨웠던 돌덩이 들은 멋진 유학생활로 탈바꿈하여 어엿하고 당당한 여의사들이 되어 사회에 공헌을 하고 있다. 이 어찌 더한 빛나는 기쁨이 있으리오.
우리의 삶이 때론 아무리 견디기 힘들다 해도 지독한 고통과 함께 견디어 냈기에 지나고 보면 그래도 견뎌 낼 만했었다고 그리고 참아낸 만큼 또 하나의 찬란한 눈부신 행복으로 우리 곁에 머물러 주기에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가 말이다. 살면서 찾아오는 순간의 기쁨을 또 누릴 수 있기에 그 어떠한 고통도 더 견뎌 나갈 수 있을 것이리라. 또한 그 기쁨 눈물은 기도로써 간절히 갈구했던 부모의 마음이었기에 더 값지게 솟아 날것이다.
나를 모르는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말한다. 물 안주고 너무도 잘 자라주었다고 말이다. 어느 어떤 나무가 물 안 먹고 자랄 수 있단 말 인가. 나는 그저 회심의 미소로 답할 뿐이다. 언젠가 시간과 침묵이 말해줄 것을 기대할 뿐이다. 부모와 자식 그 관계가 뭔지는 아직 잘 모르지만 언제나 부모는 자식 잘 되기만을 위해 온몸을 불사르고 자식은 이 다음 언젠가 또 부모가 되었을 때 아마도 그 때쯤이면 부모마음 어미마음을 이해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내 생일이 담긴 6월이 찾아오면 두 딸들은 호텔 부폐로 프랑스 레스토랑으로, 가난해진 어미를 끌고 다니며 명품으로 포장시키고 그 화려한 선물 아름다운 유혹으로 나를 초대 한다. 이제는 나이 들고 시들어진 어미에게 카네이션 보다 따뜻한 마음으로 잔잔한 가슴에 불씨를 댕겨준다. 누군가 말했듯이 행복은 누구에게나 자기 안에 웅크리고 앉아 언제고 주인님이 꺼내어 줄 때만을 얌전히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나는 또 나의 그날이 오면 내 안에 잠자고 있던 행복들을 끄집어 내어 아주 찬란하게 환한 빛으로 말하고 싶다.
다시 찾아온 6월의 눈부신 행복이라고.
그리고 그 강하게 퍼부어대던 낯 설은 소나기의 위기 속에서 훌륭한 꽃으로 피어나준 내 아이들에게 고마움의 박수갈채를 보낸다.
동·서양의 많은 미술가들이 배를 주제로 한 그림들을 즐겨 그리거나 조형물 또는 설치미술로 남겨왔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쳐 있고 강도 많아서 유년기, 성장기, 노년기 중 한때를 바다나 강 곁에서 살아 온 우리들에게 배는 아주 익숙한 풍경이다.
배는 물을 건너는 교통수단일 뿐 아니라 어업을 생계로 하는 이들에게 곧 삶의 터전이었다. 문학을 비롯해 여러 예술 장르로 배에 얽힌 주제는 독자들에게 많은 상상력을 키워 주기도 하고, 질박한 서민 애환에 공감대를 형성해 주기도 했다.
화가들은 마음 속 정서를 점, 선, 면으로 분할한 구도 속에 색채로 표출해 낸다.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시각을 통하여 화가의 깊은 정서에 접근하게 된다. 그 접점이 화가가 의도하는 사유에 근접하든 아니든, 그림을 보고 속뜻을 풀어 가는 과정이 보는 이들에게 때론 안온한 열락을, 혹은 거친 갈등의 아픔을 가져 온다.
그림 속의 배는 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만, 언젠가 그 배는 물 위로 흘러갈 것이란 우리들의 인식이 잠재되어 있어, 배는 머무르되 물은 흐르고, 물은 잠시 머무르되 배는 흐른다.
박석호(1919~1994) 화가의 배 그림 ‘고선(古船)’을 처음 보았던 순간의 감흥은 아직도 생생하다. 인사동 어느 화랑의 유리 진열대에 덩그러니 혼자 걸려 있던 거칠게 짙은 청회색의 배 한 척이 두 눈 가득 다가왔다.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꿈을 꾸듯 하염없이 배를 바라보았다. 짙은 납빛 하늘에, 유려한 필선의 흐름이 돛과 배의 몸통을 슬며시 구분 지어서 그렇지, ‘저런 배도 있을까?’ 그렇게 며칠을 유리 밖에서 살피며 그림이 눈에 익을 때까지 천천히 의식을 작품 속에 이입해 보기도 했다. 초겨울 찬비가 내리는 저녁, 그림 중앙 작은 사각의 조타실과 선실 창틈으로 새어 나오는 노란 불빛에 시선이 빨려 들어가면서, 다소의 조급함이 풀리기 시작했다. 거친 마티에르에 여리게 스미고 번져 나오는 그 불빛, 거센 풍파에 깨지고 부서진, 아픈 여정을 이제 막 돌아온 고선(古船)에서, 그래도 내일의 새 항해를 꿈꾸는 화가의 자화상이리라 깨닫는 찰나, 그것은 환희이며 동시에 아픔이었다. 내가 소장하는 첫 번째 배 그림이 되었다.
홍익대학교 미대 1회 졸업생인 박석호는 이미 남관(1911~1990) 선생의 화실에서 미술의 기초 실력을 닦고, 김환기(1913~1974) 선생의 빛나는 제자로 인정받으며, 졸업 후 바로 모교의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박석호는 1966년 학교의 부조리한 인사에 강하게 저항하다 동료 교수 4명과 함께 주저 없이 강단을 뛰쳐나오게 된다.
신산한 삶 속에서도 산과 들, 사찰, 바닷가로 자유롭게 다니며 민초들의 힘겨운 삶의 현장과 주변의 보잘것없는 스산한 풍경까지 농밀한 화필로, 밀도 높은 작품을 이루어 간다. 1980년대에서 생의 말년까지 십 수 년은 배 그림을 유난히 많이 그렸다. 어시장, 이름 없는 작은 포구에 옹기종기 정박하는 어선, 이제는 배의 기능을 마친 앙상한 용골의 폐선, 비를 머금은 어부의 귀항 등을 유채, 수채, 파스텔의 재료를 광범위하게 사용하여 그렸다. 1994년 운명할 때 화실에 걸려 있던 유작이라 칭하는 ‘한촌(寒村)’을 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4호 사이즈의 작은 화폭이 수평으로 양분되고 하늘은 온통 노을과 구름으로 뒤덮였다. 먹청빛 짙은 바다 가운데 작은 배 한 척이 무심히 머물러 있다. 두세 번의 거친 붓질만으로도 작은 배는 시선을 확 사로잡는다. 붉은 노을빛이 바다에 어리고, 배 그림자도 파도의 흔들림 없이 잔잔한 바닷물에 번져 있다.
‘이제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대구의 한 화랑에서 다른 화가의 배 그림 ‘새벽어촌’을 구입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배를 접안할 시설조차 마땅치 않은 남도 어느 포구에 작은 어선 위로 두 사람의 어부가 짐(물고기)을 들어 다른 한 사람의 등목에 얹고 있다. 배 위 어부의 등으로 하얗게 서리가 덮였다. 짐을 나르려는 어부는 발목이 젖은 모래에 박히고, 목에서 어깨까지 짐의 무게에 짓눌려, 목과 얼굴은 짐 상자에 녹아 붙어 버렸다. 손에 낀 장갑도 허연 성에에 뻣뻣하다.
어쩌면 평범한 어촌 일상이 보는 이를 잔뜩 긴장시킨다. 신선하게 느끼던 바다의 푸른 빛깔도 한 조각 얼음 되어 가슴에 박힌다. 침도 삼킬 수 없는 그 막막하고 아픈 고단함이 나를 깨운다. 크게 꾸짖는다.
‘너는 게으르지 않은가’
손장섭(1941~)은 전남 완도에서 태어나, 치열하게 한 세대를 살아가는 올연한 거목 같은 화가이다. 우리나라 질곡의 긴 역사를 회화로 펼쳐 왔다. 해방, 남북분단, 민주화의 투쟁에 거침없는 화필로 포효해 왔다. 그러나 언제나 그의 그림 기저에는 우리네 이웃 서민들의 팍팍하고 고단한 삶을 따뜻이 어루만지고 있다. 특히 그가 자라온 어촌의 아낙들과 고깃배의 그림들은 하얀 물감을 덧바르는 특이한 채색으로 경직된 선의 분할이 서정적인 풍경으로 바뀐다.
‘외포리의 저녁’이라는 표제가 붙은 그림은 내가 세 번째 소장한 배 그림인데, 미술품 경매회사의 온라인 경매를 통해 구입한 작품이다. 강화도 외포리 선착장에 머무르고 있는 배를 실경으로 담담히 그린 서경적인 작품이다. 석양의 하늘은 이미 붉은 노을로 질펀하다. 바다 건너 낮은 산들이 띠를 이루며, 모래톱에 배 너덧 척이 머물러 있다. 왼편 가까이 거의 부서진 하나는 배로서의 소임을 다 마친 채, 서서히 해체 되어 가는 폐선으로 보인다.
그런데, 바다에 녹아든 노을의 긴 그림자가 이 배를 포근히 휘감고 있다. 바닷물 가까이 우뚝한 큰 배는 당당한 위용으로 시선을 압도한다. 서너 개의 돛대가 노을을 수직으로 가른다. 뱃머리 돛대 위 푸른 깃발은 바람에 나부낀다. 범상치 않은 구도에, 잔잔하며 거친 붓질이 황혼녘의 포구를 아련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한다. 이 그림을 한 동안 바라보고 있노라면, 인생 초·장·노년이 파노라마처럼 흐르고 있음은 나만의 감성일까?
이 그림의 화가 김태(1931~)는 함경남도 홍원의 해변마을에서 출생하여 월남, 서울대 미대를 졸업, 모교 교수로 정년을 한 사람이다. 비교적 과작(寡作)인 편인 이 화가는 특이한 구도, 과감한 붓터치, 원색의 광휘가 보는 이들을 그윽한 그림의 세계로 이끄는 매력이 있다. 특히 한적한 어촌이나 해변마을의 배가 있는 실경들은 우리에게 고향의 어린 시절 향수를 담뿍 느끼게 한다.
그림을 보고 느끼는 감정은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그렇지만 그림을 제대로 보고 읽기까지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림이란 표면을 통하여, 화가가 표출하고자 하는 세계에 발을 들여 놓으려는 진지한 자세가, 그 예술혼에 근접하려는 깊은 사색이, 화가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 살피는 과정이, 좋은 그림을 만나고 소장하고, 그 그림을 대할 때 깊은 마음 속 정화를 체험할 수 있다.
달빛이 유리창으로 고여 오는 늦은 저녁, 설거지를 마친 노처와 나란히 배 그림 앞에 앉아, 마른 뱃전을 적시는 바람 사이로 아련히 유년(幼年)의 바다를 떠올리고, 아직도 그 바다를 건너지 못하는 빈 배 위에 흰 세월 너울만 얹고.....
>> 글.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리뷰어
지적인 외모와 편안한 목소리로 사랑받아온 아나운서 오유경(吳維景·45)의 명함에 생소한 단어가 눈에 띈다. 바로 ‘CEO’다. 지난 5월부로 KBS 사내기업 KBSAVE의 어엿한 CEO가 된 것. 20년 가까이 천직으로 삼았던 아나운서라는 타이틀을 내려놓고 KBS 한류추진단이 만드는 라는 잡지의 편집인으로 활동하며 기분 좋은 성과를 낸 덕분이었다. 이제 막 걸음마를 내딛기 시작한 CEO 오유경에게 는 멘토와도 같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CEO 오유경으로서의 삶을 결정했을 때, 그녀의 남편은 라는 책을 건네며 묵묵히 격려해주었다.
“남편은 서울대 미생물학과 교수였는데 5년 전에 벤처 창업을 했어요. 교수에서 CEO로 변신했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죠. 그런 남편이 먼저 를 읽고는 그동안의 시행착오에 대해 깨달았다며 이번에 CEO가 됐으니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해줬어요. 때마침 회사를 출범하는 시점에 있던 터라 급여나 휴가 등과 같은 매뉴얼을 짜는 데 큰 도움이 됐죠.”
합리적인 근로자 → 감성적인 CEO
똑 부러지는 아나운서 이미지만큼이나 합리적이고 빈틈없는 논리를 주장해왔던 그녀가 점점 감성적으로 상황을 이해하고 대화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매 순간 합리적인 결정을 내려야 하는 CEO에게는 더욱 유익한 변화라고 말한다.
“그전에는 근거가 타당하고 논리가 맞아야만 결론을 내리고, 겪어보기 전엔 쉽게 결정을 내리지 않았어요. CEO는 좋은 결정을 내려야 하는 사람이잖아요. 제가 존경하는 한 CEO에게 수많은 결정을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었던 비결을 물어봤더니 ‘계산하지 않고 직관으로 판단한다’고 하셨어요. 처음엔 큰일을 하시는 분이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하시나 했는데, 생각해보니 직관이라는 것이 잠재된 경험, 지혜, 지식의 결과물이더라고요. 근데 를 보면 책의 표지부터 ‘직관의 오류를 깨뜨리는 심리의 모든 것’이라는 문구가 나와요. 물론 성공한 CEO들은 오랜 경험과 직관을 통해 좋은 결정을 내렸겠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때론 수정할 부분도 생길 거예요.”
그녀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행동하게 하려면 그 사람의 심리와 감성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특히 책의 2부 ‘사람의 심리’에서 ‘연봉으로 직원들의 동기를 높일 수 있을까?’, ‘때론 현금보다 보온병이 더 좋다’, ‘이달의 우수사원은 별로 우수하지 않다’ 등 직원의 성과에 따른 보상과 동기부여에 대한 이야기는 그녀가 가장 절절하게 공감하는 내용이다.
“CEO가 조직원들에게 어떻게 피드백을 해주느냐에 따라 그 직원은 열정을 다하기도 하고 때론 이방인처럼 지내기도 하죠. 그게 바로 동기부여인데, 책에서도 나오지만 동기부여는 상여금이나 물질적인 보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녜요. 요즘 인센티브제를 도입하는 회사도 많고, 업종에 따라 다르겠지만 사명감을 가지고 창조적으로 일해야 하는 사람들에겐 별로 도움이 안 돼요. 오히려 ‘내 가치가 이것밖에 안 돼?’라는 생각이 들거나 보상만큼의 일밖에 할 줄 모르게 되죠. 결국, 그 보상이 그 사람의 한계를 설정하게 되고, 그것을 뛰어넘는 크리에이티브한 발상을 차단해요. 때문에 저도 사람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는 방법이 아닌 그 사람의 가치를 스스로 높여줄 방법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어요.”
나는 타인의 남일 뿐이다
18년간 방송 진행만 하던 그녀가 직접 제안하고 성과를 내야 하는 일을 하다 보니 상처도 받고 낙담도 많이 했다. 하지만 일을 하다 보면 실패를 피할 수는 없는 법, 그녀만의 마인드 컨트롤이 필요했다.
“전에 한 보험 외판원이 저에게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보험 상품을 권유하다 보면 거절당할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내가 거절당한 게 아니라, 상품이 거절당한 것’이라 생각했다고 해요. 내가 거절당했다고 생각하면 다시 그 고객을 만나는 것이 부담스럽겠지만, 상품이 거절당했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그 고객에게 알맞은 상품은 무엇인가 고민해서 더 좋은 상품이 나오면 다시 찾아가 계약을 성사시킨다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듣고 제 경우에 대입해보고 나니 한결 마음도 편해지고 생각도 유연해졌어요. 또 한 가지, ‘나는 타인의 남일 뿐’이라는 거죠. 나는 훌륭하다고 생각했을지라도 다른 이에겐 부족해 보일 수 있잖아요. 일도, 대인관계도 상대의 입장과 상황을 고려해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하려 해요.”
중년, 쌓아온 경험의 보석들을 엮어나갈 때
한때 그녀의 꿈은 ‘40대에 가장 빛나는 여자 아나운서’가 되는 것이었다. KBS ‘생로병사의 비밀’, ‘시사투나잇’ 등의 진행을 맡았고 한국방송대상 아나운서상(2005)까지 수상하며, 꿈과 현실의 교집합이 점점 맞아갈 쯤 그녀는 CEO로서의 제2인생을 시작했다.
“예전에는 최고의 진행자가 되어야 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계속 무언가를 추구하며 살아왔어요. 어떻게 보면 그때보다 지금이 더 목표지향적이어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하루하루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것에 만족하고 있어요. 일을 하다 보면 실패할 경우가 생기는데, 목표에만 집중하면 그 과정의 소중함을 느끼지 못할 때가 많아요. 결과가 실패로 났다고 해서 제 모든 과정을 실패로 단정 지을 수는 없는 건데 말이죠. 그 과정에 충실하면 결과가 기대에 못 미치더라도 나 자신을 인정하고 만족할 수 있게 돼요.”
그녀는 자신의 인생2막을 ‘애벌레에서 나비로의 진화’로 비유했다.
“애벌레는 나쁘고, 나비는 좋다 말할 수 없듯이 아나운서와 CEO, 둘 중 뭐가 좋고 나쁨을 떠나 차원이 다른 일을 하고 있잖아요. 전에는 부족한 것이 있으면 공부하고 배워서 채우려고 했는데, 이 나이에는 그게 다가 아닌 것 같아요. 자꾸 새로운 것들을 준비하기보다는 지금까지 내가 잘 쌓아온 경험들을 살리는 게 더 중요하죠. 그동안 살면서 열심히 보석들을 모았다면 이제는 하나둘씩 꿰어서 작은 목걸이라도 하나 만들어내야 하지 않겠어요?”
화장기 없는 얼굴. 보송보송 바람결에 흩날리는 머리칼. 한 떨기 수선화처럼 여리여리한 배우 예수정(芮秀貞·60). 수줍은 소녀 같았던 그녀와 대화를 할수록 소녀가 아닌 소년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속에 석유통을 지니고 있다며 야무지게 쥐는 두 주먹. 연극을 이야기할 때 빛나는 눈동자. ‘5월은 역시 어린이달’이라며 개구지게 웃음 짓는 모습까지. 건강보조식품이 아니라 연극을 먹어야 건강해진다는 그녀. 그래서일까? 무대 위에서 더 건강하게 빛나는 배우 예수정을 만나봤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1979년 연극 으로 데뷔, 그야말로 인생의 반 이상을 연기자로 살아온 예수정이다. 가슴을 파고드는 내면 연기로 보는 이의 심장까지 쿵쿵거리게 만드는 그녀가 요즘 가장 설레는 일은 무엇일까?
“나이가 들면서 실질적으로 인간관계에서 설레는 게 줄어서인지, 자연이 주는 설렘이 커요.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여명(黎明), 길을 나설 때 찬란한 햇빛, 이렇게 꽃이 핀다든지 나뭇가지가 새순 내느라고 그러는 것을 봐도 설레고요.”
조금은 의외의 답변이었다. 그래도 예수정 하면 ‘배우’라는 타이틀을 빼놓을 수 없는데, 작품 속 역할이 주는 설렘은 없는지 궁금했다.
“어떤 역할을 맡아서 설레는 것보다는 어떤 작품을 대할 때 설레는 마음이 커요. 내 심장을 가장 뛰게 했던 작품은 2012년과 작년에 했던 이에요. 메시지가 강한 작품이죠. ‘구조가 왜 사람의 자유를 박탈하는가?’, ‘우리는 해방을 향하여 걸어나가야 한다.’ 등의 메시지는 평생 머릿속에만 있거든요. 실제로 내가 데모를 한 것도 아니고, 늘 삶의 과제처럼 남아 있는 거죠. 근데 작품에서는 액팅(acting)이 되어 있고 난 액팅 아웃(acting out) 하잖아요. 그런 작품을 만나면 피가 뜨거워지죠.”
어떤 역할을 연기한다는 것은 가슴속에 지니고 있던 무언가를 펼쳐낸다는 기분일까? 그녀는 그보다도 더 벅찬 감동으로 다가온다고 표현했다.
“펼쳐볼 수 있다는 말로는 모자라요. 그대로 행위하니까, 그때야말로 진짜 살아 있는 것을 느껴요. 평상시 제 삶은 고즈넉해서 뭔가 역동치는 것은 없거든요. 그런데 같은 작품을 만나면 굉장히 행동적으로 변하죠. 실제 삶 자체보다도 더 큰 의지를 갖고 한 발을 딱 내딛는 거예요. 언젠가 나도 내 삶에서 그 한 발을 분명히 내디딜 것을 희망하지만 될지는 모르겠어요. 그러나 작품에서 내가 맡은 역할은 그 한 발을 내딛거든요. 사고가 현현화되고, 나의 이상이 현상화되는 순간인 거죠. 그래서 공연을 하는 것 같아요. 물론 배우로서의 삶이 어렵지만, 실제 삶은 굉장히 생생하고 풍부해지죠. 우리 딸도 연극공부를 해서 지금은 연출가로 활동하고 있는데, 물론 고생할 게 눈에 선하죠. 하지만 내 경험을 통해서 분명히 아는 것이 있어요. 연극을 통해 인생을 배우고 삶이 풍부해질 것이란 거죠. 그래서 딸에게도 ‘훌륭한 길 택했다’고 얘기해줬어요.”
내겐 참 고마운 직업 ‘배우’
단순히 배우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연기한다’기보다는 한 인간이 거대한 사고를 이뤄내는 과정에 연기가 양질의 영양분을 더해주고 있는 듯했다. 그녀에게 배우라는 직업이 주는 의미가 남다를 것 같았다.
“배우라는 직업이 무척 고마워요. 내 인생의 근본적인 목적을 향하는 길에 현재 내 직업이 절대 흠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든요. 온전히 만족하고 행복하죠. 직업과 내 인생은 서로 보탬이 돼요. 작품을 통해서 나 개인 예수정보다 더 나은 정신을 들여다보고, 그 정신을 들여다봄으로써 나의 삶이 더 좋아지는 것을 발견하죠. 사실 작품이 끝나면 배우는 다시 누추해지거든요. 그것을 인지하면서 덜 누추해지도록 노력하는 가운데, 다른 작품을 만나게 되고, 그 노력한 만큼이 분명히 작품에 입혀진다고 봐요. 그런 과정에서 작품을 보는 여유가 생기고 그만큼 인생을 사는 폭도 넓어지죠. 이렇게 서로 도와주고 있으니 얼마나 고맙습니까. 최고의 직업이죠.”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배우라는 직업이 숙명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그녀가 이 숙명을 직감한 순간은 언제일까? 그 순간 역시 운명과도 같았다.
“대학교를 (고려대) 독문학과를 나왔는데, 그때 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알게 됐어요. 브레히트의 ‘극장은 시민계몽의 공간이다’라는 말을 알고서는 ‘아, 내 평생 여기(극장)에서 산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다’라고 강하게 느꼈죠. 그 이후로 연극반에 들어갔고 엄마(배우 故 정애란) 몰래 연기를 시작했어요. 내가 고생할까 봐 연기하는 걸 반대했던 엄마의 마음도 이해했지만, 저 나름의 신념은 있었던 것 같아요. 내가 배우라는 것이 굉장히 소망이 가득한 일이라는 것 말예요.”
부끄러운 첫사랑의 추억처럼 살아 숨 쉬는 ‘열정’
처음 배우를 꿈꿨던 그때의 열정이 여전히 그녀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듯했다. 연기 인생 37년, 그때 가슴을 울렸던 그 결심이 현재는 어떻게 발현되고 있는지 물었다.
“그 생각을 남 앞에서 이야기할 만큼 내 삶 자체가 계몽적이거나 혁명적이지는 못했어요. 때문에 입으로 말할 순 없지만 부끄러운 첫사랑의 추억처럼 가슴속에서 없어지지는 않죠.”
그동안 쌓아온 연기 내공이 있는데 나름의 사명감이나 소명의식은 분명할 것 같았다. 그런 기자의 이야기를 듣자 그녀는 ‘내공’이나 ‘연륜’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부끄럽기만 하다고 손사래를 쳤다.
“그런 것까지는 없고요. 소신이라면, 내 사고가 계속 앞을 향해 걸어나가고 있는 한 이 직업을 계속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근데 나도 모르죠. 어느 순간 나 스스로 느낄 때 내 사고가 앞으로 걸어나가고 있지 않다고 느끼면 빨리 떠나야죠. 무대나 필름에 폐를 끼치면 안 되니까요. 그때는 무슨 사명감이나 소명의식 때문에 질질 붙들고 있지 말고 떠나야죠. 떠나고 싶지 않으면 앞으로 걸어나가야겠지만.(웃음)”
그녀의 말처럼 정년이 없는 배우로 살아가다 보면 쌓여가는 경력만큼 부담되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부담을 설렘이라 표현하고 있었다.
“이제는 어떤 작품이 나에게 왔을 때 내가 나이든 사람으로서의 그 특성을 얼마만큼 표현해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겉으로 찌글찌글한 모습만이 나이든 사람은 아니거든요. 나 역시 뭔지는 모르겠으나 이만큼(60년)을 살아왔다면 중간에 실수도 있었겠지만, 단 1초라도 은총을 받아 한 발자국이라도 걸어나갔다면 그 흔적들이 어떤 작품을 만났을 때 여태 먹은 끼니만큼의 밥값은 해야지 될 텐데, 그게 어떻게 묻어져 나올까? 나도 궁금해요. 그래서 ‘어떤 역할을 하고 싶다’는 없어요. 어떤 역할이든 좋아요. 거기에 내 끼니가 어떻게 나올지 나도 궁금하고 설레거든요.”
어떤 역할이든 좋다고 말한 그녀. 요즘 떠오르는 중년의 로맨스, 특히 젊은 남자배우와 중년 여배우의 로맨스를 다룬 작품도 적지 않다. 유독 멜로물과는 거리가 먼 배우 예수정. 혹시 그녀도 그런 로맨스를 꿈꿔본 적은 없을까?
“저는 뭐랄까. 사람이 참 건조해서. 아마 제가 만에 하나 그런 역할을 맡게 된다면, 그리고 그 역할이 제 피를 끓게 한다면 조금 또 다른 시각을 볼 것 같아요. 인생의 경험이 많아진 만큼 역으로 젊었을 때 청춘의 삶 속에 있었던 보석 같은 정서가 흐려졌을 수가 있죠. 어떤 젊은이를 만났을 때 남성이라서 끌리는 로맨스가 아니라, 그 젊은이를 통해서 다시 내 안에 생성되는 조금은 잊고 지냈던 그런 것들이 소생되면서 꽃처럼 피어나는 그런 거라 할까? 아, 소통하는 것. 그 노인 안에도 있는 젊음의 생기, 그 외부의 매개체와 함께 소통할 수 있다는 것 말이죠. 그런 쪽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작품이 아닌 실제 그녀가 젊은이들과 소통하는 방법은 남달랐다. 아니, 오히려 방법이 없는 것이 방법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특별한 방법은 없어요. 그냥 친구처럼 지내요. 그게 아마 동지의식이 있어서인가 봐요. 같은 작품을 하다 보면 동료애로 만나게 되죠. 제자들이 스승의 날 이야기를 꺼내면 ‘야야, 친구의 날은 없니? 하긴 에브리데이 친구의 날이니 친구의 날은 없나 보다.’고 말하기도 해요. 저는 아마 ‘공연’이라는 분명한 매개체가 있어서 가능할지도 모르겠어요. 무대 앞에서는 다 같은 배우니까요.”
조금 전 이야기와는 다른 면모였다. 자신을 건조한 사람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참 친근한 사람이니 말이다. 그녀는 왜 자신을 건조하다고 생각할까?
“옛날에 어떤 분이 날 표현하기를 ‘습기 없는 나무’ 같대요. 어? 이 사람 나를 참 잘 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사람이 좀 촉촉한 느낌이 나야 로맨틱하고 그런데, 그걸 아마 무의식적으로 차단하고 사는지 몰라요. 스스로 습관들인 자신의 삶이 건조한 쪽으로 가는 게 아닌가 싶어요. 말하다 보니 그게 나만의 (실수하지 않으려는) 방어책이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연극’을 먹어 건강하고, ‘연기’를 해서 행복한 그녀
그녀는 배우로 살아가며, 연극을 하는 것이 곧 삶의 행복이자 건강의 비결이라 말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건강한 에너지가 샘솟는 법. 그녀가 하고 싶은 역할은 무엇인지 물었다.
“하고 싶은 역할이요? 다 해봤어요. 대학 때부터 굉장히 하고 싶었던 라는 작품이 있었어요. 한 여성이 굉장히 육체적으로는 쇠퇴해지고, 정신적으로도 젊었을 때 순수성을 잃고 거기다 마약까지 하게 되죠. 그 여인은 자기가 본의 아니게 영혼, 정신, 육체가 다 망가진 삶 속에서도 순수함에 대한 동경을 놓지 않아요. 정말 감사하게도 그 역할을 두 번이나 할 수 있었어요.”
예수정의 데뷔작 의 연출을 맡았던 한태숙 감독은 당시 ‘예수정은 속에 불덩이가 있는 여자’라고 표현했다. 지금도 그 불덩이는 활활 타오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제는 준비할 것도 없어요. 늘 내 속에 있으니까요. 없어지지 않아요. 넘칠 듯한 석유통을 품고 있거든요. 불은 언제나 붙어요. 오히려 그게 내 인생의 커다란 함정이랄까? 그래서 항상 조심하고, 나를 건조하게 만드는지도 몰라요. 삶 속에서 그게 확 타버리고 난 다음에는 어떠한 고통으로 다시 그 열량을 채워가야겠죠. 배우는 숙명적으로 ‘고통은 성숙의 미로’라는 말처럼 그 고통에서 벗어나 한 송이 꽃을 피워내야 해요. 그 고통을 지나 아름다운 꽃을 피웠을 땐 ‘아, 이 고통이 결국 내 삶을 꽃을 피우는 대미지였구나’라는 것을 깨닫곤 하죠. 또 한 가지, 나는 연극을 먹고 건강해지는 사람이거든요. 연극이 날 건강하게 하고, 내 삶의 활력을 가져다주죠. 누구든 매 순간 충실하면 그만큼 행복해질 수 있어요. 저는 연기가 생활이니까, 그걸 날마다 충만히 하는 가운데 늘 무언가가 채워지는 거죠. 그게 제겐 힘이 되고 행복인 셈이에요.”
예수정(芮秀貞)
1979년 연극 ‘고독이라는 이름의 여인’으로 데뷔, 1980년 고려대 독어독문학과 대학원 문학석사, 1984년 독일 뮌헨 루드비히 막시밀리안 대학 연극학석사, 2004년 제5회 김동훈연극상, 2005년 제26회 서울 연극제 여자 연기상, 제10회 히서 연극인상, 제41회 동아연극상 연기상, 2006년 제1회 한국 여자 연극인상 등 수상. 연극 ‘밤으로의 긴 여로’, ‘19그리고 80’, ‘고곤의 선물’, ‘벚꽃 동산’, ‘허난설헌’, ‘바다와 양산’, ‘그린 벤치’, ‘손님’, ‘늙은 부부 이야기’ 등 주연.
글 김성수 문화평론가
원작소설이 얼마나 팔렸고, 영화가 또 얼마나 선전했는가는 사실 연극을 평가하는 데 아무런 자료를 제공해 주지 못한다. 연극은 그것만이 가지는 특별한 문법이 있고, 그것을 모르는 한 그 어떤 명성도 무대에서는 헛것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추민주 연출과 김애란 작가가 친구였다는 점은 이 작품에겐 행운이었다. 뮤지컬 ‘빨래’를 성공시킨 그 뚝심과 소외된 공간을 향하는 따뜻한 시선이 연극적 언어를 무대에 구현시켜줄 최고의 기술진과 만나 흥미로운 도전을 성공시켰다.
세상에서 가장 어린 부모와 가장 늙은 자식. 부모들은 아직도 부모를 공부하고 있는 중인데 열여섯밖에 안 된 아름이는 조로증 때문에 벌써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 너무도 어린 나이에 부모가 되어 버린 대수와 미라는 청춘의 특권을 포기해야 했고, 너무도 빨리 늙어버리는 아름이는 부모보다도 먼저 철이 들어야 했다.
대수와 미라의 자식 사랑, 아름이의 짧지만 눈부신 청춘이, 역설적이지만, 처절해서 너무나 아름답다. 무거운 이야기를 가볍게 풀어나가면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세상은 아직은 견딜만 하다는 사실, 희생이 결코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자연스럽게 선택된다는 사실 등, 고귀한 인생의 비밀들을 알려준다.
어느덧 두근거리는 심장을 잃게 된 모든 어른들에게 강추하는 연극. 이 연극을 보기만 하면 갑자기 남은 인생이 정말 심장이 두근댈 만큼 기대가 될 테니까!
일정 2015.03.13.~05.25.
장소 유니플렉스 2관
연출 추민주
출연 오용, 정문성, 이규형, 이율, 곽선영, 김지훈 등
제작 공연기획 동감
그날 동네 꼬맹이들은 죄 동구 밖 팽나무 숲 그늘에 모였다. 스무 명은 족히 될 성싶었다. 읍에서 나왔다는 아저씨 둘이 아이들을 줄지어 앉혔다. 자 자, 꼬맹이들은 앞쪽에 앉고 큰 놈들은 뒤쪽에 앉아, 알았지? 이 더운 날 흰 와이셔츠에 양복저고리까지 걸친 걸 보면 아저씨들은 분명 읍내의 큰 교회에서 나온 이들이 분명했다.
글 최학 소설가 / 우송대 교수
일러스트 윤민철 작가
그 더운 여름날 팽나무 숲의 기억
전에도 이런 일은 여러 번 있었다. 앞으로 열심히 교회에 나오라는 아저씨들 따라 찬송가 몇 구절을 부르고 나면 공책과 연필, 운 좋으면 초콜릿까지 얻어 걸릴 수 있었다.
땅바닥에 퍼질고 앉은 아이들이 잔뜩 기대에 찬 눈빛으로 아저씨들을 보고 있는 사이 한 아저씨가 먼저 왜 이리 덥지? 하면서 천천히 양복저고리를 벗었다. 그 순간 아이들은 모두 제 눈을 의심했다. 그리곤 신음소리도 내지 못한 채 얼음덩이처럼 굳어버렸다. 아저씨의 어깨를 한 바퀴 두르고 겨드랑이 아래로 내려온 건 벨트. 가죽 벨트에 달린 권총집이며 거기 삐죽이 고개를 내민 빛나는 권총 손잡이까지 똑똑히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이다. 뒤이어 다른 아저씨도 저고리를 벗었는데 그도 마찬가지였다. 권총이었다! 만화나 영화에서만 봤던 권총의 실물을 내 동네에서 우리 눈으로 똑똑히 볼 줄은 아무도 상상치 못했다.
“미군 열차에 돌멩이 던진 놈, 누구야?”
두 아저씨가 우리들 앞에 굳건히 다리를 벌리고 섰다. 좀 전 같이 웃음 띤 얼굴이 아니었다. 노여움을 가득 묻힌 낯빛, 무서운 눈초리... 금방이라도 빵빵, 우리를 향해 총을 쏠 것만 같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두 손을 움켜쥔 채 바르르 몸을 떨었다. 요란한 매미소리도 귓전에 들리지 않았다.
한 아저씨가 우리를 향해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는 경찰서에서 나온 아저씨들이다. 우리가 왜 너희를 여기 불러 모았는지 알겠지?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바로 대답하지 않으면 모조리 경찰서로 끌고 갈 것이다. 알겠어? 응, 그저께 저녁 여기 동네 앞을 통과하는 미군 열차에 돌멩이 집어 던진 놈, 누구야? 돌 던진 놈 있지, 어느 놈이야?”
순간 나는 숨이 턱 막혔다. 옆 자리 경렬이가 바르르 몸을 떨었고 내 앞의 용수가 흠칫 놀라며 어깨를 곧추세웠다. 쟁쟁한 적막이 흐르는 사이 다른 아저씨가 말했다.
“허, 요놈들 봐라. 말을 않겠다 이거지?”
그가 가볍게 오른손을 옮겨 제 권총집을 쓰다듬는 순간이었다.
“얘가 그랬어요! 얘가 돌 던졌어요!”
누군가 바락 소리를 질렀다. 뒤쪽이었다. 아이들의 눈이 그쪽으로 쏠렸다. 등하교 때마다 곧잘 우리에게 제 책보자기를 떠맡기던 민호였다. 그가 온몸을 떨면서 제 옆의 경수를 가리켰다. “넌 안 그랬니? 너도 했잖아! 얘, 얘도 돌 던졌어요. 나만 아니에요!” 튕기듯 일어난 경수는 민호뿐만 아니라 제 앞뒤 애들까지 한꺼번에 짚었다. 그게 신호였다. 스무 명의 아이들이 저마다 발광하듯 제 동무들을 고발하기. 마침내 내 단짝 경렬이 나보다 먼저 나를 가리켰고 나 또한 약간이라도 늦으면 죽을세라 앞의 용수를 지적했다. 그리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으며 이내 팽나무 숲은 아이들의 울음소리에 묻혔다.
‘기브 미 쪼꼬레또!’를 외치며 자란 세대
내 어린 시절을 보낸 그 산골 마을 앞에는 경부선 철길이 있었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는데 해질 무렵이면 미군들을 잔뜩 태운 군용열차가 마을 앞을 통과했다. 열차가 오기 전부터 철둑 이편저편에 서 있던 마을 아이들은 열차가 다가오기 무섭게 두 팔을 흔들어대며 ‘기브 미 쪼꼬레또!’를 외쳐댔다. 그러다보면 실제로 열차에서 초콜릿이며 오렌지가 던져지기 일쑤였고 때로는 뚜껑을 따지 않은 C레이션이 통째로 얻어 걸리는 횡재를 할 때도 있었다.
그 무렵 난생 처음 본 일회용 종이컵, 플라스틱 스푼 등에 대한 놀라움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열차를 탄 미군들의 숫자며 그들이 던져주는 ‘물건’의 양이 눈이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동네 아이들은 예사로 기차를 향해 팔을 쭉 뻗으며 감자를 내지르기 시작했다. 미군들 또한 감자로 응수해 오자 급기야 돌멩이를 던지는 지경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형사들이 돌아간 뒤, 아이들은 누구 하나 동무를 찾는 법 없이 뿔뿔이 흩어졌으며 이후 골목을 달음박질하는 아이들의 소리조차 한 달 넘게 사라졌다.
아이들보다 닭이 더 많았던 교실
많은 또래의 아이들이 통학 열차를 타고 대구를 내왕하며 중학교를 다녔지만 나는 폐광이 있는 산 아래의 농림학교에 다녔다. 비인가 중학 과정의 이 학교의 교실엔 아이들 숫자보다 닭들이 더 많았다.
아이들은 영어 수학을 공부하는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고추 모종내기, 깻잎 따기, 염소 키우기, 하천 부지 개간에 동원됐으며 따로 닭들을 책임진 나는 틈날 때마다 사료를 주고 닭똥을 치웠으며 자전거 뒷자리에 계란을 싣고 자갈 많은 신작로를 달렸다. 볕 좋은 날이면 유치환 시집이며 봔 루운의 같은 책을 들고는 닭들을 피해 폐광으로 올라가기도 했다. 일제 때 코발트를 캐냈다는 이곳엔 고대의 성전 같은 건조물들이 군데군데 서 있었고 그 아래에 끝도 깊이도 알 수 없는 캄캄한 갱들이 미로처럼 뻗어 있었다. 더러 애들과 함께 관솔불을 켜서 갱 안으로 들어가 보면 인체의 해골이며 뼈다귀들을 어렵잖게 발견할 수 있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때 보도연맹 사람들을 집단으로 학살한 현장이었다는 사실은 훨씬 뒤 내가 고향을 떠난 뒤에 알았다.
명색이 학교를 다니고 있었지만 그때도 나는 여전히 배가 고팠고 입을 것이 마땅찮았으며 앞날은 암담하기만 했다. 양은그릇에 담긴 흰 쌀밥을 간장에 비벼 먹는 꿈을 꾼 날에도 나는 계란을 싣고 읍내에 갔으며 구판장에 그것을 넘긴 뒤에는 또 하릴없이 4학년 때 짝꿍이었던 수리조합장 딸이 살고 있는 기와집 근처를 몇 바퀴 돌다가 호롱불 켜진 대밭 아래 초가로 돌아와야 했다. 시간 맞춰 역으로 가면 통학열차에서 내리는 교복 입은 그 아이를 먼 데서라도 지켜볼 수 있었지만 내겐 그럴 용기도 없었다.
무작정 상경해 고생 끝 대학 입학
고등학교 입학자격 검정고시 합격증을 쥔 뒤 나는 무작정 서울로 가는 밤 열차를 탔다. 그리고 그날 내 옆자리에 앉았던 못된 아줌마를 지금도 잊지 않는다. 점심 저녁을 건너 뛴 아이가 혼자 꼬르륵 소리를 내며 옆에 앉아 있는데도 그녀는 삶은 계란 네 개를 차례차례 혼자 다 먹었다! 다음 날 아침 용산역에 내린 나는 멀리 인왕산만 바라보며 독립문까지 타박타박 걸어 형님의 셋방을 찾아 들었다.
형들 덕에 서울의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은 내 생애의 행운이었다. 간신히 교복을 걸치고 책가방을 들고 학교를 다녔지만 아직 미래에 대한 꿈을 가질 처지는 아니었다. 공부와 무관하게 대학 진학을 할 만한 집안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더러 글을 쓰기도 했지만 문학을 해보겠다는 뜻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등록금 적은 국립대학 역사학과를 지망했다가 보기 좋게 떨어지곤 낭인 생활을 했다. 입시학원에 가는 대신 2본 동시상영의 싸구려 영화관을 전전했으며 노모의 성화에 못 이겨 두 차례 공무원 시험을 보기도 했다. 다음해 간신히 대학에 적을 올려놓고는 가정교사, 무허가 학원 선생 등을 하며 학비를 벌었다. 대학은 학기 중에도 수시로 교문을 닫았기에 출석일수를 걱정할 일은 드물었다.
간혹 선배들에게 끌려가서 통일, 노동, 매판자본 등등의 얘기를 듣기도 했지만 내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그런 거창한 담론들이 내 귀에 들어올 턱이 없었다. 지하 유인물을 펴낸 주모자로 오인 받아 성북경찰서 취조실에서 하룻밤을 자는 때에는 까닭 없이 그 어린 날 팽나무 숲의 광경이 생생히 살아났다. 더 이상 형사들이며 권총조차 무섭지 아니한데 수치심이 온몸을 감싸왔다. 갈래머리를 한 뽀얀 피부의 조합장 딸아이가 보고 싶었다. 마흔넷에 청상이 되어서도 아들 아홉을 홀로 키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그해 가을, 종로 3가의 한 찻집에서 그 여자아이를 만났다. 그런데 딴 애들 몰래 지우개를 쥐어주던 그녀의 손길 하나까지도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 그녀는 나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다.
대학 강단 떠난 후 소설에 새삼 감사
몹시 소설이란 걸 쓰고 싶었던 것이 그 즈음이었던 듯싶다. 정한숙 선생 담당의 ‘소설창작실습’의 과제를 닷새 만에 완성했다. 바닷가 결핵환자 요양소가 이야기의 주 무대로 돼 있지만 거기엔 내 고향의 코발트 광산은 물론 동구 밖 팽나무 숲과 조합장 딸아이까지 다 들어가 있었다. 생전 처음 단편소설의 분량을 채운 그 소설이 그해 겨울 한 신문사의 신춘문예 당선작이 돼 버리고 말았다.
올해가 내 정년이다. 8월 말일자로 나는 34년간 몸담았던 대학의 교단을 떠나는 것이다. 친구들 대부분이 50대 초 중반에 직장을 떠난 것에 비하면 나는 ‘참 길게도 해먹은’ 셈이다. 쥐뿔의 학위도 없는 내가 일찌감치 대학 강단에 설 수 있었던 것도 다 문학 덕이었다. 스무 해 넘게 문학 강의만 해 오던 내가 정년 10년을 남겨 놓고는 중국을 비롯한 외국 학생들만을 상대로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수업했으며 그 인연으로 중국 백주(배갈)에 대한 관심과 공부를 갖게 되었다. 백주 관련 책을 내고 바깥으로 백주 강의를 다닌 것도 그 때문이었다. 지난해에는 두 나라 관계 인사들과 함께 ‘한중백주문화교류협회’를 만들기도 했다. 뒤늦은 나이이기는 하지만 내가 이렇듯 중국을 새롭게 만난 것도 내 인생의 즐거움 중 하나가 된다.
퇴직 후에도 나는 서울 집에만 머물지 않기로 마음을 먹는다. 계룡산 줄기 끝에 앉은 농가 한 채를 빌려 일주일에 사나흘을 거기서 지내기로 한다. 텃밭을 가꾸고 소설을 쓰고 또 좀 더 깊이 중국을 공부하면서 내 여생을 보내고자 한다.
부끄럽고 고단했던 내 어린 날의 시간들이 내 인생의 남은 세월에서도 각성과 용기의 원천이 돼 줄 것으로 믿고 있다.
최 학
1950년 경북 경산 출생. 고려대 국문학과와 같은 대학 대학원 졸업.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이 당선되어 문단 등단. 1979년 한국일보 장편소설 공모에 역사소설 ‘서북풍’ 당선. 1981년~현재 우송대 교수. 고려대문인회 회장 역임. 현재 한중백주문화교류협회 회장. / 저서: 창작집 ‘식구들의 세월’ ‘손님’ 등. 장편소설 ‘미륵을 기다리며’ ‘화담명월’ 등. 산문집 ‘시가 있는 간이역’, ‘배갈을 알아야 중국이 보인다.’ ‘니하오 난징’ 등.
필자는 고 1때까지만 해도 개인적으로 영화를 보러 간 적이 거의 없는 모범적(?) 학생이었다. 그러나 고 2가 되어서는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 당시 필자는 자전거를 타거나 아니면 주로 걸어서 통학을 했는데 걸어 다니는 길목에는 속칭 하코방이라고 부르던 구멍가게들이 여럿 있었다.
주인은 대개 늙수그레한 남자 노인네들(그렇지만 지금의 필자보다 대부분은 더 젊었을 것이다)로서 손님도 별로 없어서 대개는 동네사람들과 담배나 소주 아니면 푼돈내기 장기들을 두고 있었다. 이런 곳을 지나가게 될 때에는 다리도 좀 쉴 겸 장기구경을 하다가 필자도 모르게 훈수를 해서 야단도 여러 번 맞았지만 어쩌다 상대가 없을 때에는 장기 상대도 해 주면서 이럭저럭 이분들과는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이들 구멍가게의 열어 놓은 문짝에 대개 주변에 있는 삼류극장들의 영화포스터들을 붙여 놓았고 이들 포스터의 아래 쪽 구석에는 소위 포스터권이라는 것이 붙어 있어서 이것을 가지고 가면 3일간의 상영기간 중 마지막 날에는 공짜로 극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여기에 재미를 붙인 필자는 영감님들에게 떼를 써서 포스터 권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였고, 주로 집에 가는 길목에 있던 동도극장에서 엄청나게 많은 영화를 보았다.
그때 본 영화 중 은 한 순진한 소녀가 파리의 일류 모델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뮤지컬 드라마로서 청순하고 매력적인 오드리 헵번과 당대 최고의 무용수 프레드 아스테어가 주연을 맡은 작품이다. 당시까지 을 보지 못했던 필자는 이 영화에서 오드리 헵번을 처음 보자마자 그대로 푹 빠져 왕 팬이 되어버렸다.
등으로 유명한 조지 거슈윈의 재즈 선율이 작품의 묘미를 한껏 살려주며, 할리우드 최고의 의상디자이너 에디스 헤드의 화려하고 황홀한 의상 쇼 속에서 오드리 헵번의 매력이 더욱 빛나는 이 영화를 보기 위해 다섯 번이나 극장을 갔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또 하나 도 잊을 수 없는 영화다. 진주만 공습 직전, 하와이의 미군 기지를 무대로 평범하고도 다양한 군인들의 갈등, 사랑, 좌절 등과 함께 부대 내의 폭력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이 영화는 1953년 제25회 아카데미상을 8개 부문에서 수상하였다. 이 영화는 후에 세계적 가수가 된 프랭크 시나트라가 데뷔하자마자 남우조연상을 수상해 화제가 되었고, 바닷가에서의 워든(버트 랭커스터)과 캐런(데보라 커)의 키스 신은 영화사의 명장면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 매지오(프랭크 시나트라)가 뚱보 저드슨(어니스트 보그나인)의 폭행으로 죽은 후 프루잇(몽고메리 클리프트)이 밸브가 없는 신호용 트럼펫으로 연주하는 주제가 는 참으로 사람의 심금을 울려 그 장면을 다시 보러 극장을 4번이나 갔었으며 나중에 트럼펫을 꼭 배우겠다고 결심까지 했었다.
이렇게 한 번 영화에 재미를 붙이게 되자 때로는 계림극장이나 명동극장 등 시내 중심부까지도 진출하게 되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브리지트 바르도의 전라(全裸) 신이 잠깐 나온다 하여 그 당시로서는 최고로 야하다고 하던 이라는 영화를 보러 명동극장에 갔다가 물리를 가르치시던 K선생님을 만난 일이었다. 그분을 보는 순간 아찔하기는 했지만 돈암동에서 명동까지 가서 비싼 입장료 내고 들어갔는데 도저히 그냥 나갈 수는 없었고, 그렇다고 이리저리 피해가며 볼 기분도 아니어서 될 대로 되라 어떻게 되겠지 하는 심정으로 오히려 그때까지도 필자를 발견하지 못하고 계시던 선생님 앞으로 일부러 걸어가 꾸뻑 절을 하고는 선생님께서도 이런 영화를 보러 다니십니까, 하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다행히 K선생님께서도 요 녀석이 하시면서 꿀밤을 주시기는 하셨지만 더 이상 문제를 확대하지 않아 무사히 영화를 보고 나올 수 있었다. 여하튼 이렇게 영화를 보다보니 나중에는 제작자 누구, 감독 누구, 배우 누구 하면 영화를 보지 않고도 내용을 떠올릴 수 있을 정도가 되었고, 고 2가 끝나갈 때쯤 1년 동안 본 영화들을 세어 보았더니 136개였던 것으로 기억되지만 물론 개중에는 동시상영으로 본 것도 여러 개 있어서 극장을 그 회수만큼 들어갔던 것은 아니었다.
이런 버릇은 고 3이 되면서 일단 수그러들었으나 대학에 들어간 이후에도 꽤 자주 영화를 보러 다녔다. 그런데 당시에는 유일하게 단성사만 예약제도가 있었고 또 단성사에서 상영하는 영화라도 미리 영화를 보려고 계획했던 것이 아니라 데이트 도중에 갑작스레 결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예약을 하지 못 해 표를 사놓고 두, 세 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영화를 자주 보러 다니다 보니 나중에는 예약을 하지 않고도 별로 기다리지 않고 영화를 볼 수 있는 요령을 터득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단성사의 경우는 상영시간 좀 전에 예약창구에 가서 예약을 했으니 표를 달라고 하다가 이름이 없다고 하면 “이상하다, 분명히 예약을 했는데.”라면서, 그러면 예약하고 안 온 다른 사람 표라도 달라고 하면 대개는 표를 살 수 있었다.
이 방법이 실패하거나 다른 극장의 경우는 극장 기도(입구를 지키는 사람이라는 일본어)를 찾아가 새끼손가락을 펴 보이며 “형! 표 없수?”라고 묻는다. 당시 기도들은 대개 동네 깡패의 중간보스쯤 되는 사람들로서 월급 대신인지 부수입인지는 모르지만 매회 표를 몇 장씩 가지고 있었고 필자의 말은 똘마니 중 한 명인 척하며 여자 친구를 데리고 왔으니 표 좀 구해달라는 뜻이다. 그러면 때에 따라 두 장 내지 넉 장을 구할 수 있었고 표 값을 지불할 때는 우수리는 받지 않았다. 그리고 넉 장일 때는 주변에서 표를 구하려고 서성대는 사람들에게 나머지 두 장을 넘기면 된다.
이런 방법이 통했던 것은 고등학교 때 본의 아니게 잠시나마 노랑머리파라는 동네 깡패들과 어울렸던 경험이 있었던 데다 어차피 그들에게도 필자가 자기들의 똘마니든 아니든 표만 팔아주면 아무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결혼 후에는 공부하랴, 아이들 기르랴 등 이런 저런 사유로 영화에는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되었고 당시까지는 영화비디오가 있다는 사실조차 잘 몰랐으며 그저 음반 모으기에만 열을 올렸다.
1944년 서울 출생.
아호 무애(無碍). 경기고, 서울대 토목공학과 졸. 서울대대학원 교통공학 박사. 서울대, 명지대 토목공학과 및 교통공학과 교수 역임. 현재 명지대 명예교수, 서울특별시 무술(우슈)협회 회장 홍익생명사랑회 회장, 월드뮤직센터 이사
오늘은 어제의 미래이며, 내일의 과거가 된다. 즉, 오늘을 잘 사는 것은 과거와 미래를 잘 사는 것과 같다. 계획하는 일도, 하고 싶은 것도 많은 새해. 지난날의 후회도, 다가올 날의 걱정은 버리고 당장 오늘, 바로 지금에 충실해 보는 것은 어떨까?
◇ 지금 이 순간
#라이프 애프터 라이프
“인생을 몇 번이고 다시 살 수 있다면 어떨까? 마침내 제대로 살아낼 때까지” 완벽한 이상향을 향해 펼쳐지는 끝없는 회귀, 반복되는 삶과 죽음 속 오늘의 의미. 삶의 새로운 진화를 꿈꾸는 당신에게, 가슴 저민 시간 여행을 선사 한다
저자: 케이트 앳킨슨 (임정희 옮김) ㆍ 출판사: 문학사상
#일단은 즐기고 보련다
75세에도 하는데 그대들이 못한다고?
그 나이가 어때서! 망설이다가 기회를 잃은 것들을 생각하면 너무 아쉽고 후회스럽다. 하고 싶은 일,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일단 문을 열고 나가라. 75세 도보여행가의 유쾌한 삶의 방식
저자: 황안나 ㆍ 출판사: 예담출판사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당신에게
원하는 것을 알지 못할 때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일도 어렵고, 사랑도 어렵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애써 고민을 숨기며 괜찮은 척 살아가는 이들의 삶의 중심을 잡아주는 스토아철학의 빛나는 통찰
저자: 변지영 (윤한수 사진) ㆍ 출판사: 카시오페아
#지금 여기 깨어 있기
깨달음을 경전 속에 가두지 마라. 지금, 여기, 이곳에서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지금 행복해야 한다. 지금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야 한다. 지금 깨닫고 나머지 인생은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법륜스님이 전하는 깨달음의 길에 이르는 방법.
저자: 법륜 ㆍ 출판사: 정토출판
◇ 2015 한 해를 책임질 도서
#한 줄의 기적, 감사일기
쓸수록 힘이 나고, 매일매일 행복해지는 ‘한 줄의 기적, 감사일기’. 당연하게만 여겼던 모든 일에서 감사와 깨달음을 찾다보면, 어느새 일상은 행복으로 가득해진다.
저자: 양경윤 ㆍ 출판사: 쌤앤파커스
#행복다이어리 ‘Present’
서울대학교 행복연구센터장 최인철 교수가 다이어리에 담은 행복의 조건과 기술. 빡빡한 업무와 스케줄로 가득 찬 다이어리는 이제 그만, 2015년은 ‘Present’에 선물 같은 나의 일상을 채워보자.
저자: 최인철 ㆍ 출판사: 한스미디어
#2015 가계북
부자 되는 사람들의 비밀 노트. 똑똑한 경제생활의 시작. 소득과 지출만 적는 평범한 가계부가 아니다.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알짜 경제 정보는 물론, 연간 월간 스케줄러까지. 끝까지 쓸 맛 나는 종이 가계북의 매력에 빠져보자.
저자: 그리고책 편집부 ㆍ 출판사: 그리고책
#연말정산 완전정복
세금폭탄을 피하고 환급액을 늘리는 초간단 지침서.재테크의 마무리는 연말정산. 손해 보지 않는 연말정산을 위한 핵심 정보와 2015 개정 포인트를 짚어준다.
저자: 유흥관 ㆍ 출판사: 위즈덤하우스
#습관의 재발견
지키지 못할 계획만 세우는 ‘계획중독자’에서 벗어나라. 작게, 사소하게, 가볍게. 못하는 게 더 어려운 작은 습관의 힘. 결심과 포기를 반복하는 이들에게 무조건 실천 가능한 전략으로 작은 습관 프로젝트를 시행하기를 제시한다.
저자: 스티븐 기즈 (구세희 옮김) ㆍ 출판사: 비즈니스북스
◇ 2015 트렌드를 읽어라
#빅피처 2015
2015년은 변곡점의 시대, ‘진화형 어젠다’와 ‘전통 어젠다’를 주목하라. 하버드대 출신 국내 전문가 11인이 말하는 2015 대한민국 주요 이슈와 쟁점들
저자: 김윤이 외 10명 ㆍ 출판사: 생각정원
#2015 생생트렌드
국내 최초 빅데이터 기반의 새로운 트렌드서. 2015년 달라질 비즈니스, 문화, 라이프스타일의 흐름과 액티브 시니어의 영향까지 빅데이터로 분석하고 인포그래픽으로 시각화하다
저자: 타파크로스 ㆍ 출판사: 더난출판
#핫트렌드 2015
산업계 최전선에서 날아온 냉철한 분석과 뜨거운 예측, 글로벌 핫트렌드 25. 저자들이 엄선한 25개 트렌드를 ‘새로운 사람’, ‘새로운 사물들’, ‘새로운 도시들’로 나눠 트렌드의 발전방향을 분석하고, 실무에 적용하는 기술을 제안한다.
저자: 핫트렌드연구소 핫트렌드 연구위원회 ㆍ 출판사: 호름출판
벌어지는 입을 닫을 수 없다. 피곤한 하루를 마친 태양. 잠에 들려는 듯 바다 속으로 사라지며 물결을 빨갛게 물들인다. 그 순간 잡념은 사라지고 도시에 아름다움에 흠뻑 취한다. 어떤 이들은 그 순간을 간직하기 위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고, 어떤 이들은 아무 방해도 받기 싫다는 듯 멍하니 그 장관을 음미한다.
지중해에서 가장 큰 섬. 이탈리아의 최남단에 위치한 시칠리아. 영화 대부, 시네마 천국, 그랑블루 등 수많은 영화의 배경이 될 만큼 그 자연 풍광과 도시의 모습이 아름답다. 독일 문학의 상징 괴테도 말했다. “시칠리아를 보지 않고서는 이탈리아를 봤다고 말할 수 없다.”
◇ 괴테가 사랑한 도시 ‘팔레르모’
시칠리아 안에서도 괴테가 세계 최고도시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은 곳이 있다. 북부에 위치한 팔레르모다. 영화 ‘대부’의 배경으로 유명한 이 곳에는 ‘4개의 모서리’를 뜻하는 콰트로 콴티(Quattro Canti)와 팔레르모 두오모 성당이 있다. 콰트로 콴티는 예술작품으로 꾸민 3층 건물 4채를 말한다. 1층은 사계절 여신들의 조각상이 있는 분수, 2층은 시칠리아를 지배한 왕들, 3층에는 성녀의 모습이 담긴 조각상이 있어 콰트로 콴티만의 세련미를 느낄 수 있다. 1184년 팔레르모 대주교에 의해 세워진 팔레르모 두오모 성당에서는 다양한 건축 양식을 엿볼 수 있다. 이 성당은 팔레르모를 지배한 여려 세력의 다양한 건축 양식이 섞여있다. 외부는 고딕 양식, 남쪽 현관은 카탈로니아 양식, 돔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혼합돼 있어 신비로움을 더한다. 내부에 있는 왕들의 무덤과 보물을 구경하는 것도 팔레르모 두오모 성당을 즐기는 색다른 요소다.
◇ 시네마천국의 배경 ‘체팔루’
영화 ‘시네마 천국’에서 주인공 토토가 데이트를 하던 낭만적인 해변 마을을 기억하는가. 유럽 왕족과 유명 인사들이 가장 선호한다는 체팔루다. 이러한 명성에 걸맞게 건물과 해변,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은 그 속에 있는 사람을 영화 속 주인공처럼 만들어준다. 팔레르모 두오모 성당 보다는 작지만 그보다 화려한 모자이크가 있는 체팔루 두오모 성당과 페스카라 문도 으뜸이지만, 무엇보다 해안도로를 따라 이어지는 절경을 빼놓고 체팔루를 얘기 할 수 없다. 해안가 따라 이어진 다소 이탈리아 정서의 소박하고 낡은 건물과 고즈넉한 해변이 드넓은 바다와 조화를 이뤄 보는 이들의 혼을 빼놓는다. 한 폭의 그림. 환상적인 도시. 그 이상의 수식어를 더 넣을 수 있다면 그것은 체팔루다.
◇ 시칠리아 최고의 휴양지 ‘타오르미나’
시칠리아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휴양지 타오르미나. 영화 ‘그랑블루’ 배경지이기도 하다. 타오르미나 절벽 위에 세워진 그리스극장은 이 도시의 대표적인 볼거리다. 기원전 3세기 때 지어진 이 야외극장은 눈앞에 바다가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한다. 특히 여름에는 발레나 음악회 등이 열려 로맨틱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아기자기한 상점이 들어서 있는 움베르토 1세 거리는 저녁이 되면 많은 관광객들로 북적거린다. 예쁜 도자기와 기념품, 장식품을 전시하는 상점이 많아 유쾌함 넘치는 곳이다.
◇ 아르키메데스의 고향 ‘시라쿠사’
거리 자체가 중후한 멋을 뽐내 영화 속에 자주 등장하는 두오모 광장, 아레투사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강의 신’ 알페오스가 샘에 뛰어들어 스스로 강이 되었다고 전해지는 아레투사의 샘, 1만6천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그리스 극장부터 검투경기를 즐기기 위해 만들어진 로마원형 경기장까지. 이 모든 것을 둘러볼 수 있는 곳이 있다. 고대 그리고 최고의 수학자 아르키메데스의 고향 시라쿠사다. 거리의 야경이 유난히 빛나는 시라쿠사는 낭만과 역사가 공존한다.
◇ 유럽 최대의 활화산이 있는 ‘에트나’
유럽에서 가장 높은 활화산 에트나산(3350m). 기원전 2700년부터 화산활동을 한 세계에서 가장 긴 역사를 가진 화산답게 최근까지 그 위력을 보여주고 있다. ‘불의 신’ 불카누스의 대장간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에트나 화산은 2013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에 등재 됐다.
투어2000에서는 시칠리아를 포함한 이탈리아 8박 9일 일정의 패키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올 여름 지중해의 보배, 시칠리아의 낭만에 취해보는 것은 어떨지.
사진 : 투어2000 / 문의 : 투어2000(02-2021-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