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각박해졌다는 말을 할 때 우리는 상징적으로 하늘을 얘기한다. 사실 눈앞에 닥친 일을 해결해야 하는 급급한 상황에 치이다 보면 하늘 한 번 올려다볼 틈 없이 바쁘게 사는 현대인이다. 그런데 요즘은 하늘을 올려다봐도 특별히 보이는 게 없다. 낮에는 태양이 눈부셔서 올려다보기 힘들고, 밤의 하늘은 거리를 밝히는 가로등과 거리를 가득 메우고 달리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그리고 별들을 흉내 낸 인조 조명들이 정작 별들을 몰아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도시에 모여 살며 그 많은 밤하늘 가득한 별들을 추방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아마 그들은 자신들을 반기는 곳으로 갔을 것이다. 그중의 한 곳-별을 만날 수 있는 길을 나는 사진을 하며 알게 되었다.
물론 작정하고 도시를 떠나 한적한 산이나, 아직 오염되지 않은 시골로 가면 별을 만나볼 수 있다. 그런데 난 의외의 곳에서 그 별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곳에는 몽돌들이 쉬지 않고 오르고 내리는 파도와 함께 으르렁 드르렁거리며 굴렀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같이 간 아내가 바로 곁에서 큰 소리로 이야기해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아내는 소리에 민감하다. 버스나 택시를 탔을 때 기사 아저씨가 틀어놓은 라디오나 음향기기의 소리가 조금만 커도 난 볼륨을 조금이라도 줄여 달라 양해를 구한다. 집 안이든 밖에서 다른 사람들과 만날 때든, 아내와 함께 있을 때면 난 내 큰 목소리에 신경을 써야 했다. 이제야 겨우 내 목소리가 낮아져 아내의 지적을 많이 받지 않지만 그동안 38년이 걸렸다. 그런 아내가 이렇게 커다란 소리에 둘러싸여 있는데도 조금도 얼굴 찌푸리지 않는다. 마치 아무 소리도 나지 않거나 좋아하는 음악을 작게 틀어놓고 무심히 할 일을 하며 즐기는 모습이다. 바람소리, 파도소리, 수천수만의 몽돌이 파도에 밀려 굴러 올라가고, 다시 한꺼번에 굴러 내리며 마냥 부딪치는 소리는 조금도 멈춤 없이 되풀이되며 막힘 없는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도 말이다. 세상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이 굉장한 소리가 아내의 귀를 압박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막힘 없이 트이는 해방감을 만들어준다는 것을 알았다. 아내는 무조건 큰 소리를 싫어한 게 아니라 내 소리를 포함해 좋아하는 소리와 싫어하는 소리가 구분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틈날 때마다 그곳에 갔다. 힘든 일이 생겨도 집에서 도시락을 싸 각자 사진기를 챙겨 그곳으로 갔다. 그곳은 늘 한산하다. 우리와 우리가 초대한 사람 외에 다른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우린 큰 소리 속에서 사진 작업을 했다. 사진기 뷰파인더를 통해 매번 다르기도 하고 크게 보면 같기도 한 바람과 물에 비치는 빛의 모습을 언제나 파도와 몽돌들이 서로 부딪쳐 으스렁거리는 소리 속에서 관찰했다. 사진기가 없었다면 우리는 맨눈으로 그렇게 오랫동안 그 이미지의 변화를 섬세히 볼 수 없었을 것이다.
해가 기울어 석양의 각도가 낮아지면, 굴러가는 몽돌을 감싼 물에 직접 비친 빛이 수면을 점점 더 넓게 비추며 그늘진 물빛과 대조를 이룬다. 수평선 가까이 태양이 떨어질수록 색 온도도 낮아진다. 주위에 깃들기 시작하는 어둠 속에서 갓 잘라낸 짙은 오렌지빛 태양은 수면에 면을 이루며 반짝인다. 때로는 그 빛들이 물과 하늘의 경계선이 되어 흐르기도 한다. 그때 렌즈 조리개를 가능한 한 닫아 셔터 스피드를 길게 해 파도에 밀린 몽돌이 구르며 사진에 남길 시간의 흔적이 내 머리에 떠오르게 한다. 스틸사진을 오래 되풀이한 사람의 뇌에 미리 그려지는 프레임 중 하나다. 그 이미지가 궤적이 되어 실제 한 장의 스틸에 담긴다. 돌의 크기와 모양에 따라 굴러간 속도도 달라 제각기 다른 흔적이 보인다. 굴러가는 속도가 빠를수록 긴 시간의 흔적을 남기고, 느린 속도는 짧은 흔적을 남긴다.
‘속도가 빠를수록 시간은 느려지고 이동거리가 짧아지면 시간은 그만큼 빨라진다’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사진 속에 들어온다. 한 천재 과학자가 이미 오래전에 발견하고 세상에 소개한 변하지 않는 수(상수-C) 얘기를 우리는 그렇게 겨우 렌즈의 힘을 빌려 볼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시간이라는 붓이 그려낸 변형된 빛의 흔적이었다. 그처럼 우린 수많은 몽돌에 다녀간 별을 사진으로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내 렌즈를 통해 들어온 별들은 결국 내 사진에 선과 면으로 맺혀졌지만, 나중에 자세히 보니 모두 점이었다. 수많은 별이 다녀간 것이다. 사진과 달리 실제 풍경을 보고 있는 내 눈에는 흐르는 파도도, 파도에 구르는 몽돌도 모두 빛나는 점이었다. 마치 동트기 전 새벽녘 하늘에 더욱 크고 밝게 드러내는 몇몇의 별처럼!
여기에 한 가지 이미지가 더 보태졌다. 점인 별이 선으로 모였듯이, 그 선이 이어져 구르며 면의 흔적을 만들어낸다. 이 이미지들은 사진이 아니면 나눌 수 없는 얘기다. “색은 우주와 인간의 두뇌가 만나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장소”란 말을 남긴 폴 세잔이 떠오른다. 시간에 따라 바뀌는 색을 맨눈으로 관찰한 그의 기억력은 절대색감에 바탕을 두었을 것이다. 그런 능력을 지닌 그의 두뇌와 우주에도 매 순간 서로 다른 새로운 별들이 빛으로 다녀갔을 것이다.
세상이 각박해졌다는 말을 할 때 우리는 상징적으로 하늘을 얘기한다. 사실 눈앞에 닥친 일을 해결해야 하는 급급한 상황에 치이다 보면 하늘 한 번 올려다볼 틈 없이 바쁘게 사는 현대인이다. 그런데 요즘은 하늘을 올려다봐도 특별히 보이는 게 없다. 낮에는 태양이 눈부셔서 올려다보기 힘들고, 밤의 하늘은 거리를 밝히는 가로등과 거리를 가득 메우고 달리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그리고 별들을 흉내 낸 인조 조명들이 정작 별들을 몰아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도시에 모여 살며 그 많은 밤하늘 가득한 별들을 추방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아마 그들은 자신들을 반기는 곳으로 갔을 것이다. 그중의 한 곳-별을 만날 수 있는 길을 나는 사진을 하며 알게 되었다.
물론 작정하고 도시를 떠나 한적한 산이나, 아직 오염되지 않은 시골로 가면 별을 만나볼 수 있다. 그런데 난 의외의 곳에서 그 별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곳에는 몽돌들이 쉬지 않고 오르고 내리는 파도와 함께 으르렁 드르렁거리며 굴렀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같이 간 아내가 바로 곁에서 큰 소리로 이야기해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아내는 소리에 민감하다. 버스나 택시를 탔을 때 기사 아저씨가 틀어놓은 라디오나 음향기기의 소리가 조금만 커도 난 볼륨을 조금이라도 줄여 달라 양해를 구한다. 집 안이든 밖에서 다른 사람들과 만날 때든, 아내와 함께 있을 때면 난 내 큰 목소리에 신경을 써야 했다. 이제야 겨우 내 목소리가 낮아져 아내의 지적을 많이 받지 않지만 그동안 38년이 걸렸다. 그런 아내가 이렇게 커다란 소리에 둘러싸여 있는데도 조금도 얼굴 찌푸리지 않는다. 마치 아무 소리도 나지 않거나 좋아하는 음악을 작게 틀어놓고 무심히 할 일을 하며 즐기는 모습이다. 바람소리, 파도소리, 수천수만의 몽돌이 파도에 밀려 굴러 올라가고, 다시 한꺼번에 굴러 내리며 마냥 부딪치는 소리는 조금도 멈춤 없이 되풀이되며 막힘 없는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도 말이다. 세상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이 굉장한 소리가 아내의 귀를 압박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막힘 없이 트이는 해방감을 만들어준다는 것을 알았다. 아내는 무조건 큰 소리를 싫어한 게 아니라 내 소리를 포함해 좋아하는 소리와 싫어하는 소리가 구분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틈날 때마다 그곳에 갔다. 힘든 일이 생겨도 집에서 도시락을 싸 각자 사진기를 챙겨 그곳으로 갔다. 그곳은 늘 한산하다. 우리와 우리가 초대한 사람 외에 다른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우린 큰 소리 속에서 사진 작업을 했다. 사진기 뷰파인더를 통해 매번 다르기도 하고 크게 보면 같기도 한 바람과 물에 비치는 빛의 모습을 언제나 파도와 몽돌들이 서로 부딪쳐 으스렁거리는 소리 속에서 관찰했다. 사진기가 없었다면 우리는 맨눈으로 그렇게 오랫동안 그 이미지의 변화를 섬세히 볼 수 없었을 것이다.
해가 기울어 석양의 각도가 낮아지면, 굴러가는 몽돌을 감싼 물에 직접 비친 빛이 수면을 점점 더 넓게 비추며 그늘진 물빛과 대조를 이룬다. 수평선 가까이 태양이 떨어질수록 색 온도도 낮아진다. 주위에 깃들기 시작하는 어둠 속에서 갓 잘라낸 짙은 오렌지빛 태양은 수면에 면을 이루며 반짝인다. 때로는 그 빛들이 물과 하늘의 경계선이 되어 흐르기도 한다. 그때 렌즈 조리개를 가능한 한 닫아 셔터 스피드를 길게 해 파도에 밀린 몽돌이 구르며 사진에 남길 시간의 흔적이 내 머리에 떠오르게 한다. 스틸사진을 오래 되풀이한 사람의 뇌에 미리 그려지는 프레임 중 하나다. 그 이미지가 궤적이 되어 실제 한 장의 스틸에 담긴다. 돌의 크기와 모양에 따라 굴러간 속도도 달라 제각기 다른 흔적이 보인다. 굴러가는 속도가 빠를수록 긴 시간의 흔적을 남기고, 느린 속도는 짧은 흔적을 남긴다.
‘속도가 빠를수록 시간은 느려지고 이동거리가 짧아지면 시간은 그만큼 빨라진다’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사진 속에 들어온다. 한 천재 과학자가 이미 오래전에 발견하고 세상에 소개한 변하지 않는 수(상수-C) 얘기를 우리는 그렇게 겨우 렌즈의 힘을 빌려 볼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시간이라는 붓이 그려낸 변형된 빛의 흔적이었다. 그처럼 우린 수많은 몽돌에 다녀간 별을 사진으로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내 렌즈를 통해 들어온 별들은 결국 내 사진에 선과 면으로 맺혀졌지만, 나중에 자세히 보니 모두 점이었다. 수많은 별이 다녀간 것이다. 사진과 달리 실제 풍경을 보고 있는 내 눈에는 흐르는 파도도, 파도에 구르는 몽돌도 모두 빛나는 점이었다. 마치 동트기 전 새벽녘 하늘에 더욱 크고 밝게 드러내는 몇몇의 별처럼!
여기에 한 가지 이미지가 더 보태졌다. 점인 별이 선으로 모였듯이, 그 선이 이어져 구르며 면의 흔적을 만들어낸다. 이 이미지들은 사진이 아니면 나눌 수 없는 얘기다. “색은 우주와 인간의 두뇌가 만나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장소”란 말을 남긴 폴 세잔(Paul Cézanne)이 떠오른다. 시간에 따라 바뀌는 색을 맨눈으로 관찰한 그의 기억력은 절대색감에 바탕을 두었을 것이다. 그런 능력을 지닌 그의 두뇌와 우주에도 매 순간 서로 다른 새로운 별들이 빛으로 다녀갔을 것이다.
함철훈(咸喆勳) 사진가·몽골국제대학교 교수
1995년 민사협 초청 ‘손1’ 전시를 시작으로, 2009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 2012년 이탈리아 밀란시와 총영사관 주최로 전을 FORMA에서 개최. 2006년 인터액션대회(NGO의 유엔총회)서 대상 수상. 저서로 , 등이 있다.
국민 드라마 의 바르디바른 둘째 아들 용식, 뜨거운 열정과 헌신으로 무대에서 빛나는 베테랑 연극인, 그리고 막말 논란으로 시끄러웠던 문화체육부 장관까지. 어느새 올해 67세를 맞이한 유인촌의 이미지는 이렇듯 여러 갈래로 만들어져 있다. 장님 코끼리 만지듯 매스컴의 요란한 스포트라이트에서 어느 순간 사라져 연극인으로 돌아간 그는 OBS의 대담 프로그램 MC를 맡아 3년째 드라이빙하고 있다. 광대로서, 그리고 뼛속까지 순간예술인임을 자각한 유인촌과의 만남 뒤로 생각보다 진중한 얘기가 있었다.
유인촌은 자신이 맡은 OBS 의 방향성이 최근의 방송 트렌드와는 다르게 진중한 점이 좋다고 한다. 뭐든지 예능화되는 요즘 TV 프로그램들과 비교하면 그가 과거에 진행자로서 인기를 얻었던 에 가까운 느낌이다.
“요즘 방송은 장점보다는 단점을 드러내고 사람을 바보로 만들고…. 그래서 이 프로그램만은 정말 좋은 점, 장점, 들어서 감동할 수 있는 점을 중심으로 만드는 게 좋겠다 싶었어요. 물론 그렇다 보니 방송이 원하는 자극은 없어요. 그러나 보고 나면 따뜻해져요. 다행히 OBS가 그걸 지켜주고 있습니다. 매주 다른 분을 만나기에 그분들에게 보고 배우는 게 많아요.
1년에 50여 명을 만나니 지금까지 150여 명을 만난 셈이죠.”
그는 기억에 남는 사람이 많지만 특히 이어령 박사, 이명현 전 교육부 장관, 김희수 건양대학교 총장을 꼽았다.
“이어령 선생은 첫 방송에 모셨고 개인적으로도 존경하는 분이죠. 이명현 전 교육부 장관은 과거에 김영삼 정부 시절에 교육부 장관을 하셨던 분인데 인생 스토리가 너무 놀라웠어요. 한국전쟁 전에 걸어서 월남한 뒤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고생하시다가 검정고시로 서울대 철학과를 입학한 분이죠. 김희수 건양대학교 총장은 김안과를 만드신 분인데, 지금도 새벽 네 시에 일어나서 학교에 간다는 얘기를 듣고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죽을 때까지 연구할 게 생겼다
유인촌을 의 영원한 둘째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그가 어느새 67세라는 나이에 이르렀다는 사실이 아주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제가 공직에서 나와 다시 연극을 하면서 그런 얘기를 했어요. 지금이 전성기다.”
유인촌에게 전성기라는 개념은 철저히 연극인 유인촌으로서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말이다. 연극에서의 시간은 보통 삶의 시간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영상은 젊은 사람들이 잘할 수 있지만 무대는 달라요. 희곡 작품 자체가 일상이 아니라 어렵거든요. 그런 것들이 소화되고 공감대를 가질 수 있으려면 남자는 40이 넘어야 해요. 그 전에는 아기 같아요. 사실 40대까지는 대학생 역할을 했었어요. 성인 남자의 역할은 40대 후반에서 50대가 되어야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지금이 전성기’라고 얘기한 거죠.”
그것이 4년 전 얘기. 지금 유인촌은 또 다른 전기를 맞이하고 있다.
“지금은 개인으로서 하려 했던 일은 거의 다 했다고 생각해요. 그건 겉으로 보이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제 그동안 했던 걸 모두 지우고 연기자로서 새로운 뭔가를 다시 시작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연기 외의 다른 사업이라든지 기관장이라든지 말고요. 순수하게 내가 배우로 뭘 한다고 하면 그동안 쭉 쌓아왔던 걸로는 다 했어요. 그래서 공부를 다시 하고 있어요. 기본적으로 배우 훈련입니다. 발성부터 다시 공부하고 있어요.”
연극인 유인촌이 발성부터 다시 배운다? 납득이 되지 않는 얘기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동안 해왔던 작업이 겉으로만 보였던 거라면 이제는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것들에 집중하고 싶어요. 특히 저는 우리만의 전통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양복을 입고 있어도 한국 사람이 갖고 있는 전통의 멋이나 깊이를 체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이제부터 그런 연구를 시작하고 정리해 죽을 때까지 할 계획입니다. 수련하는 느낌으로.”
아이들에게 자아를 찾는 기회 주고파
근본으로 돌아가 새로운 길을 찾고자 하는 그는 올해부터 의미와 가치에 중점을 둔 계획을 여러 가지 세우고 있다.
“사실 극장도 내가 퇴직하고 나와서 대관료를 만원 받으며 운영했었어요. 젊은 친구들 하라고. 그걸 3년을 했네요. 올해는 청소년, 특히 소년원과 쉼터에 있는 아이들이나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자아를 찾는 기회를 주기 위해 자전거 여행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있어요. 여름방학 기간에 4박
5일 동안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라이딩 투어를 준비하고 있죠.”
그러고 보니 그는 소문난 자전거 마니아이기도 하다. 그와 자전거는 어떻게 인연이 맺어진 걸까?
“오래전부터 탔죠. 그런데 옛날에는 그냥 설렁설렁 타다가 본격적으로 타기 시작한 건 한 15년쯤? 늘 탔지만 취미 내지는 생활처럼 된 건 그 정도 됐죠. 저는 배우를 했잖아요. 연기를 하기 위해 모든 기능적인 걸 다 배워야 했어요. 수영, 자전거, 바이크, 펜싱, 검도, 스쿠버다이빙, 윈드서핑…. 다 연기할 때 필요한 것들이었죠. 그러다 보니 적당히 한 게 아니라 업계에서 알아볼 정도로 했죠. 승마도 장애물까지 할 정도였으니까. 지금은 다는 못하고 걷기, 자전거, 수영, 스키, 스노보드 정도만 하고 있죠.”
그는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어야 직성이 풀린단다. 취미도 운동도 생활 속에 깊숙이 배어 있다. 특히 걷기는 그가 여전히 좋아하면서 계속할 수 있는 취미이자 운동이다. 670km를 걸어서 종단한 경험이 있는 그는 아직도 웬만하면 걸어 다닌다. 장관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삶의 보람을 일깨운 마지막 햄릿
연극인으로서의 성공, 정치인으로서의 논란. ‘개인적으로 할 건 다했다’고 말하는 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유인촌의 삶의 그래프는 급격하다. 그가 ‘내가 잘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는 언제였을까?
“작년에 이해랑연극상 수상자들과 함께
공연을 하게 됐어요. 처음에는 ‘나는 햄릿을 하면 안 된다’고 했어요. 60대 중반 넘어선 사람에게 왕자 역할 하라고 하면 욕먹는다고. 그런데 이해랑연극상 받은 사람들이 젊은 사람이 없었어요. 윤석화가 전체에서 가장 막내였고 내가 그다음이었으니. 그래서 결국 내가 햄릿 역할을 하게 됐는데, 굉장히 책임감이 느껴졌죠. 다행히 유종의 미를 거뒀어요. 어떻게 보면 그게 저의 햄릿 역할의 마지막이었습니다. 내 연기 인생의 전반부가 으로 정리가 됐어요. 그러면서 연기하고 연극하길 참 잘했다고 처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계산하지 않는 스타일이라고 정의했다. 물질적 계산보다는 명분과 충분한 목적과 필요성이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 그가 세운 극장도 처음에는 한 달에 2500만원씩 빠져나갔는데 그때마다 다른 곳에서 일한 돈으로 메꾸면서 운영했다고 한다. 꼭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기에 저질렀다는 그의 말에서 평소의 신념과 의지를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는 내 일에 더 집중하려고 해요. 주변에 여러 가지가 연관이 되어 있는데 정리하고 있어요. 제게 섭섭한 것도 있고 아쉬운 것도 있겠지만 좀 좁히려고요. 이제 와 일을 벌이는 건 안 좋다고 생각해요. 연극도 1년이나 2년씩 구상하고 준비해서 하려고 해요. 작년에는 의도치 않게 연극 일이 많았지만, 올해는 쉬면서 지금까지의 삶을 정리하는 책을 써볼까 합니다.”
나이는 장애가 아니다
“젊다는 것은 젊어서 좋은 거예요. 그것 외에는 크게 장점이 없어요. 그러니까 늙는다는 것은 핸디캡이 아니에요.”
그는 ‘어차피 늙는 건데 (인생을) 잘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침 그가 주연과 연출을 맡았던 연극 중 톨스토이의 중편소설 를 원작으로 한 라는 작품이 있는데, 늙어감에 관한 총체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가 유난히 애착을 가진 작품이기도 했다.
“제가 를 1997년에 호암아트홀에서 초연했는데 지금까지 매번 적자였어요. 그러나 작품의 의미나 형식이 너무 좋아서 적자가 나는데도 계속 공연을 하고 있어요. 이 작품의 대사 중에 ‘중후하게 늙을 것인가 가련하게 늙을 것인가, 중후하고 가련하게 늙을 것인가’라는 말이 나와요. 그 질문을 관객에게 계속하는 거예요.”
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다. 삶을 관조하는 늙은 얼룩말을 맡았던 연기자 유인촌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간이다.
는 병든 말 ‘홀스또메르’를 통해 인간 삶을 들여다보는 작품이다. 화자인 얼룩말은 다양한 역경을 겪은 늙은 말이다. 이 얼룩말의 시각을 통해 이야기되는 사랑과 고통, 아름다움과 추함, 젊음과 늙음 등은 인간사 희로애락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예술의 보람과 감동을 알기에 놓을 수 없다
“‘인간은 자기 땅이라고 하면서 밟아보지도 않아. 자기 사람이라고 하면서 그 사람을 욕해. 내 여자라고 말하면서 다른 여자와 살아.’ 는 이런 인간의 속성을 말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어요. 관객 중에 홀스또메르가 말하는 이런 사람이 꼭 있어요. 그 사람은 나와 눈을 못 마주쳐요. 그래서 흥행은 안 되죠(웃음). 하지만 나이 들어 이 연극을 보신 분들은 공연이 끝나도 일어나지를 못해요. 자신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되는 거죠. 그리고 울기도 합니다. 저도 그 작품을 생각하면 지금도 두근두근해요.”
한번은 사업을 하다 부도를 내고 자살하려고 마음먹은 사람이 친구 때문에 를 보게 됐는데 이 연극을 본 후 죽으면 안 되겠다는 걸 깨달았다고 그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생겼다는 거지. ‘내가 꼭 성공하겠다, 그리고 당신을 후원하겠다’는 내용이었어요. 제가 얼마나 감동을 받았겠어요. 그걸 보면서 예술로서의 목적이 달성됐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그런 편지 하나 때문에 연극 일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거니까요.”
궁금했다. 유인촌은 어떤 이유로, 어떤 힘으로 연극이라는 자신의 세계를 이렇게 끌고 올 수 있었을까? 그 의문이 다소 풀리는 순간이었다.
기억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제가 같은 작품을 했는데 어떻게 늙어갈지를 왜 생각하지 않겠어요?”
그렇다. 지금의 유인촌은 그 고민의 결과다. 예술은 사람에게 화두를 던질 수 있고 그 화두를 접한 사람은 더욱 발전할 수 있다.
“운동을 하기 싫지만 취미를 갖고 싶으면 예술을 가까이 하는 게 좋아요. 일본의 단카이 세대들은 동호회가 많이 활성화돼 있어요. 그래서 박물관의 날, 미술관의 날 등을 정해서 집중적으로 예술을 접합니다. 돈을 모아서 강연회를 열기도 해요. 아주 지적인 취미생활인 거죠. 우리도 할 게 많아요.”
기자가 늘 놓치지 않고 묻는 마지막 질문, 그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지를 물었다.
“예전부터 그랬어요. 저는 기억되지 않는 게 좋다고. 가족에게도 내가 죽으면 화장해서 뿌리라고 말해뒀어요. 광대 팔자라는 게 그런 거예요. 남기지 않는 게 좋다. 연극은 순간예술이에요.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는 거죠. 저는 저를 영상으로 남기는 게 어색하거든요. 그래서 영화를 안 했어요. 필름은 50년, 70년 돼도 남는 것이라 부담스럽거든요.”
방송에 나오지 않으니 젊은 사람들은 이미 자신을 몰라서 지하철을 타도 아무 불편이 없다는 말을 하면서 그는 살짝 웃었다.
“사람마다 저에 대한 느낌을 갖고 있겠죠. 누군가에게는 방송인으로, 누군가에게는 배우로. 그냥 그렇게 각자의 나름대로 가벼이 기억에 남아 있는 게 좋겠어요.”
유인촌과 ‘홀스또메르’가 오버랩되면서 옳다 그르다 선을 긋기 전에 인생역정 겪고 마침내 거울 앞에 선 그에게 다시 오는 것과 오지 않는 것은 무엇일지 큰 의미가 없을 듯하다. 편협한 생각으로 나눴던 대화, 그끝에 알게 된 건 그가 영원한 연극인이라는 거다.
며느리가 세상을 떠난 지 이제 3개월이 되어간다. 그동안 뭔가 정리가 안 된 듯 미진함이 늘 남아 있었다. 어느 날 영정 사진이 필요하니 찾아놓으라는 아들 전화를 받고 사진을 찾다가 아들 방 한쪽에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는 흰 주머니를 봤다. 뭘까? 하는 궁금증이 일어 살짝 열어보니 새하얀 봉투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알고 보니 며느리 장례식 때 조문객들에게 받았던 봉투들이었다.
필자는 그 봉투들을 하나씩 꺼내봤다. 봉투 주인들의 마음이 아주 또렷하게 전달되었다. “감사합니다!” 봉투를 하나씩 꺼내어 거기에 쓰인 글들을 하나하나 조심스레 읽으며 저절로 나온 말이었다. 들어주는 사람도 없는데 필자의 목소리는 너무 예의 바르고 정중했다. 필자가 봉투를 꺼내보고 있는 그 방엔 아무도 없었다. 듣는 이도 대답하는 이도! 그러나 그들의 모습이 한 명 한 명 다 보였고 필자의 인사를 반갑게 받아주는 아름다운 모습도 환하게 보였다.
아직 슬픈 마음이었지만 그들의 어려운 발걸음에 필자의 마음을 꼭 전하고 싶었다. 후회 없도록 진심을 건네고 싶었다. 차가운 냉방에서 홀로 그런 예식을 치르고 나니 온몸에 냉기가 돌았다. 흰 봉투는 말이 없었지만 이 세상을 함께한 인연으로 발걸음을 재촉해 다녀간 사람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내를 잃은 아들을 위해 온 후배와 선배와 친구들 이름이 어느새 마음속에 빼곡했다.
그날 장례식장은 사람들로 엄청 북적였다. 젊은 나이에 폐암 선고를 받은 며느리는 여섯 살짜리 딸을 두고 절대 가기 싫었을 테지만 가야만 할 이유가 있었나보다! 이런 생각에 미치는 순간 필자는 며느리의 물건을 정리해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는 걸 직감했다. 전화번호도 정리해야겠지? 저 많은 책도 버릴 건 버려야지? 사시사철 며느리가 입었던 옷들도 누굴 주든지 아니면 버리든지 해야겠지? 세간들도 꼭 써야 할 것들만 남기고 정리하자….
어지럽게 소용돌이치던 머릿속을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듯했다. 죽음이란 자신의 삶을 정리할 시간도 안 주고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지. 며느리는 죽음이 눈앞에 와 있음을 알아차렸을 때 자신의 주변을 얼마나 깔끔하게 정리하고 싶었을까. 그러나 그러지 못하고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전부 내맡긴 채 생이 닫혀가고 있는 시간을 바라봤을 것이다. 그리고 통탄했을 것이다. 미약한 호흡이 끊어져가던 며느리의 모습이, 그 모습을 바라보는 필자의 허탈감이 온몸을 휘감았더랬지.
그래 이 순간부터야. 지체하지 말고 정리하자. 주변의 모든 것들을 직접 내 손으로 간추릴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음에 감사하며!
필자는 마치 빛나는 보석을 움켜쥔 듯 봉투가 든 흰 주머니를 들고 아들 방을 나왔다.
화란춘성(花爛春盛)이라고 했던가요. 꽃이 만발(滿發)하고 봄이 무르익는 4월, 따듯한 남쪽 나라 제주도는 더할 나위 없습니다. 발 닿고 닿는 곳마다 연분홍 벚꽃잎이 휘날리고, 노란색 유채꽃이 휘황찬란하게 빛을 발합니다. 아니 ‘춘사월(春四月)’ 제주도에선 벚나무와 유채가 아니라도, 풀이든 나무이든 생명이 있는 것들은 모두가 꽃을 피우는 듯 섬 전체가 꽃으로 흐드러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데 그런 제주의 봄에 화룡점정(畵龍點睛)을 하는 야생화가 따로 있습니다. 뭍에서는 만날 수 없는 꽃, 제주의 특산 야생화라 일컬을 수 있는 꽃, 하지만 너무 귀하지는 않아 누구나 보고 즐길 수 있는 꽃, 바로 뚜껑별꽃입니다.
해안이나 높지 않은 오름의 양지바른 풀밭에 자생한다고 하는데, 처음엔 뜬금없이 ‘저지곶자왈’ 주차장 길섶에서 뜻밖의 조우를 했습니다. 그리고 처음 보는 순간 강렬한 보라색 꽃 색에 넋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앙증맞은 생김새에 다시 또 기함했습니다.
개별꽃이니 쇠별꽃, 큰개별꽃 등 다른 ‘별꽃’들과 마찬가지로 뚜껑별꽃도 키가 10~30cm 정도로 작습니다. 하지만 뚜껑별꽃은 꽃 색이나 생김새가 유별난데, 석죽과에 속하는 다른 별꽃들과 달리 앵초과로 족보를 달리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가지런히 돌아 나는 다섯 장의 꽃잎은 지름이 1cm 안팎에 불과할 정도로 아주 작지만, 독특한 보라색 꽃 색만은 단번에 보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꽃잎 중앙의 수술과 암술 둘레에는 흰색과 자주색, 진보라색의 띠가 2, 3중으로 둘러쳐지면서 노란색 꽃밥과 어우러져 멋진 색의 조화를 보여줍니다. 게다가 5개의 수술대엔 붉은색 잔털이 수북하게 나 있어, 보면 볼수록 신비감이 들 정도입니다.
동그란 열매가 영글면 종자를 퍼뜨리기 위해 가운데가 갈라지면서 뚜껑이 떨어져 나가듯 벌어지고 별 모양의 꽃받침이 도드라지게 드러납니다. 꽃 피는 모습이 아니라, 바로 열매 맺은 뒤의 이런 모습에서 뚜껑별꽃이란 이름이 유래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독특한 꽃 색을 따서 보라별꽃으로, 또는 밤하늘에 빛나는 별만큼이나 총총하게 핀다고 해서 별봄맞이꽃으로도 불립니다. 뚜껑별꽃이 활짝 핀 모습을 보려면 게으름을 피운다 싶을 만큼 시간적 여유를 갖고 다가가야 합니다.
학명 중 속명인 ‘Anagallis’는 ‘해가 뜨면 다시 핀다’는 뜻이라고 하는데, 날이 저물면 꽃잎을 닫고 해가 중천에 올라올 즈음에야 다시 활짝 열리는 뚜껑별꽃의 속성이 그대로 담긴 용어라 생각됩니다.
Where is it?
뚜껑별꽃은 전 세계적으로 24개 종이 온대와 열대에 분포한다. 국내에서는 제주도와 추자도, 그리고 전남의 일부 섬에만 1개 종이 자생한다. 아직은 대륙성 기후에는 적응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남방식물, 남부 도서지방이 분포의 북방한계선인 아열대 식물인 셈이다. 제주도에서는 남쪽 바닷가의 현무암 틈새나 올레길 길섶 등지에서 비교적 흔하게 만날 수 있다. 특히 4월 서귀포의 명승지인 외돌개에 가면 현무암 바위틈 곳곳에서 풍성하게 꽃 핀 것을 만날 수 있다. 석양 무렵 외돌개에서 맞는 일몰(사진)도 일품이다.
올해 정유년(丁酉年)은 열두 동물로 나타내는 12지신 중에서 ‘닭[酉]’띠 해가 된다. 예로부터 중국이나 우리나라에는 새해마다 정해진 열두 동물이 윤회하며 한 해를 상징하는 풍습이 있는데 그로부터 기인된 것이다. 용(龍)을 빼고 열한 동물은 인간 주변에 있는 것들이고, 날개 있는 동물로는 닭이 있을 뿐이다.
중국 서진(西晉)의 진수(陳壽 233~297)가 편찬한 에는 ‘한(韓)에는 꼬리가 5척(尺)이나 되는 세미계(細尾鷄)가 있다’고 적혀 있고, 송(宋)의 범엽(范曄 398~445)이 지었다는 에도 ‘마한(馬韓)에 장미계(長尾鷄)가 있는데 꼬리가 다섯 자[尺]나 된다’는 기록이 있다. 또 당(唐)의 위징(魏徵 580~643)이 지은 에 ‘백제에는 닭이 있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에서 토종화된 닭을 키웠다고 여길 수 있다.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 1890~1957)은 ‘닭’의 어원(語源)이 산스크리트어로 해동(海東=우리나라)을 부르던 kukuta[닭] svara[귀함]가 한자로 구구타귀(矩矩吒貴), 계귀(鷄貴)에서 ‘구구, 꼬꼬댁’ 등으로 음전화(音轉化)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한(漢)의 한영(韓嬰 ?~?)이 지은 에는 닭이 다섯 가지 덕(德)이 있는 덕금(德禽)이라 표현되어 있는데 닭 벼슬의 관(冠)은 문(文), 발 갈퀴는 무(武), 죽을 때까지 용감히 싸우는 모습은 용(勇), 먹을 것을 보고 친구를 부르는 행위는 인(仁), 밤을 지켜 때를 잊지 않고 알리는 것을 신(信)이라 표현해 칭송하였다고 한다.
이런 거창한 칭송이 아니더라도 닭은 새벽을 알려주는 울음만으로도 신령(神靈)한 동물일 수밖에 없었다. 온갖 악귀(惡鬼)들이나 무서운 맹수들이 활개 치던 길고 두려운 어둠을 그 낭랑한 울음소리와 함께 거둬내고, 밝은 새날을 맞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닭은 태양을 불러오는 상서(祥瑞)로운 동물인 것이다.
새해가 돌아오면 집에 벽사(辟邪)의 의미로 호랑이 그림과 더불어 닭 그림을 붙였다. 와 에 실린 김알지(金閼智 65~?)의 탄생 신화도 닭의 울음에서 비롯된다. 당시 신라 4대 왕 석탈해이사금(昔脫解尼師今 ?~80)은 그 닭이 울던 시림(始林)을 계림(鷄林)이라 고쳐 부르고 국호(國號)로 삼았다. 이후 15대 기림왕 10년(307)에 다시 ‘신라’로 바뀔 때까지 계림은 두 세기 이상 국내외에서 통칭되었다.
이만익(李滿益 1938~2012) 화백의 그림 은 여러 ‘닭의 신화’를 모티브로 그린 작품이다. 빛나는 태양과 눈부시게 서기(瑞氣)를 내뿜는 닭 울음의 순간이 가히 백미이다. 간결한 구도와 짙은 색감, 굵은 선이 신화의 한 장면으로 자연스레 이어지고 있다. 닭이 올라앉은 복숭아나무는 꽃이 만개하여 무르익은 봄의 정취도 그만이다. 잘 아는 수집가를 졸라서 입수하게 된 이 그림을 큰아이의 결혼청첩장에 쓰려고 의논하였더니 이 화백도 아주 기뻐하였다. 수집한 미술품으로 가족달력을 만들 때도 온 가족이 손꼽는 작품이다.
이 화백은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 남하하여 서울의 효제초등학교, 경기중·고등학교 시절, 전국의 미술대회를 석권한 빼어난 인재였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수석 입학하였고 졸업 후 서울예고 등에서 10여 년의 교직 생활 후 파리로 유학, 빈한한 여건 속에 괴츠아카데미(Goetz Academy)에서 앙리 괴츠(Henri Goetz, 프랑스 화가)에게 사사(師事), 그러나 2년여 후에 뜻한 바 있어 귀국하였다.
이후 그는 “우리는 서양화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큰 오류를 범해, 우리라는 주체를 잃어버린 채 서양의 재료와 방법을 받아들였다. 우리의 미술 교육이 서양 사람이 되도록 그 감성마저 바꾸어놓았다”고 개탄하며 새로운 작품세계를 구축, 우리나라의 신화와 설화를 주제로 한 독특한 그림을 그렸다. “다시는 서쪽으로 눈 돌리지 않았다”고 천명하기도 하였다. 88서울올림픽 개·폐회식의 미술감독을 맡아 세계에 “한국 고유의 문화를 격조 높게 승화시켰다”는 아낌없는 찬사를 받았다.
조각가 엄태정(嚴泰丁 1938~ )은 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영국의 세인트 마틴스 미술대학에서 수학했다. 그 후 2004년까지 모교에서 후학을 지도하였다. 그는 재학 시절 스승 우성 김종영(又誠 金鍾瑛 1915~1982)의 첫 철조작품 (1958)을 접하고 “장시간 부식된 철재 판재의 스크랩으로 철재가 지니고 있는 시간성과 사물성을 통해서 교묘한 철재의 공간성과 함께 이 조각 작품에 담겨져 있는 숨겨진 진실이 무엇일까 하는 질문에 많은 시간을 허비했던 기억이 난다”고 그의 책 에 쓰고 있다.
엄 화백은 1972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도쿄(1975), 런던(1980) 등 국내외에서 개인전과 단체전에 출품하였다. 그의 조각 정체성의 시발점은 세계적인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 1876~1957)의 금속조각에서 받은 깊은 감동에서 비롯된다. 브랑쿠시는 “조각 본래의 요소는 우의적인 사고, 상징, 성스러움 혹은 물질 속에 숨어 있는 본질의 탐구를 의미하지, 결코 외관을 사실적으로 재생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선언한 사유(思惟)와 명상(冥想)의 구도자(求道者) 같은 조각가였다. 한때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 1840~1917)의 문하에 들까 하다가 “큰 나무 밑에선 작은 나무도 자랄 수 없다”며 독자의 길을 개척한 현대 추상조각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엄 화백은 “브랑쿠시는 세상의 모든 사물의 대상을 주제로 삼고, 그 속에서 본질을 찾아 조각을 이루며, 형이하학(形而下學)의 물질적 한계를 극복하고 초월하여 빛으로, 하늘로, 대지로 형이상학(形而上學)의 예술적 사물이 되어 조각으로 존재하고 있다”면서 브랑쿠시를 ‘넘어야 할 산’이라 하였다.
1997년 현대갤러리, 2009년 성곡미술관 등 엄태정 조각가의 전시장을 찾아다니며 거대한 금속괴(철, 구리, 알루미늄)를 관류(貫流)하는 스케일 큰 그의 예술세계를 느꼈다. 언제나 그의 조각상을 보고 싶으면,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에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의 문인 자하 신위(紫霞 申緯 1769~1847)를 기리는 연못, 자하연(紫霞淵) 앞에 우뚝한 그의 작품
를 찾아간다. 1998년 서울대학교 개교 50주년 기념작인 이 청동 작품은 곧게 뻗은 네 개의 기둥이 공간에서 넓은 나래로 연결되어 사방으로 웅장하고 높은 기운을 내뿜으며, 하늘 높이 비상하고 있다.
그의 소품 조각은 아예 없어서 수집할 길이 없었는데 1998년 10월, 한 옥션에 소품 석 점이 올라왔기에 하도 반가워 이 작품 을 낙찰받았다. 원형의 두툼한 구리판을 열일곱의 크고 작은 세모꼴로 부식시키고 철 기둥에 붙인 이 작품은 원형을 이루며 조응하고 있다. 크고 작은 조각들이 팽팽히 확산과 응집을 이루며 빛을 반사하고 있다. 부식된 자리는 검은 철로 마무리해, 빛의 그늘로 입체감을 주었다. 빛은 밝음이며, 따뜻함이며, 끝없이 밀려오는 환희의 물결이다.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
음악과 춤 영화라고 해서 서둘러 개봉관을 찾았다. 이런 영화는 매니아 외에는 별로 좋아하는 사람이 없어서 금방 종영되기 때문이다.
춤은 탭댄스 일부와 밤하늘을 배경으로 한 비에니즈 왈츠가 나왔다. 영화 ET에서 자전거를 타고 창공을 나르는 듯한 환상적인 배경이다. 정통 비에니즈 왈츠에서 약간 변형하여 두 남녀의 사랑을 표현한 것이 좋았다.
이 영화의 광고 포스터는 요란하다. 광기의 드러머를 소재로 했던 영화 ‘위플레쉬’를 만들었던 감독 데미언 채즐 작품이다.
제73회 베니스영화제 개막작, 여우주연상을 수상, 제41회 토론토국제영화제 관객상 수상, 제52회 시카고국제영화제 개막작,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작 등으로 성가를 높였다. ‘올해 가장 황홀한 경험’, ‘넋을 잃게 황홀하다’, ‘가장 창의적인 영화’, ‘이 영화는 마법이다’ 등의 찬사를 받았다. 2017년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 주연상 등 주요부문의 수상도 예상된다는 것이다.
주연에 재즈 피아니스트 세바스찬 역으로 라이언 고슬링, 배우 지망생 미아 역으로 엠마 스톤이 출연했다.
교통 체증으로 꽉 막힌 도로에서 짜증이 극에 달할 만한데, 차 안에 있던 젊은이들이 하나 둘 밖으로 나와 춤을 추기 시작한다.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이다. 세바스찬과 미아도 나와서 LA 시내를 내려다보며 춤을 춘다.
라라랜드는 꿈을 꾸는 사람들을 위한 별들의 도시이다. 세바스찬과 미아는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 만난다. 황홀한 사랑과 함께 LA의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장면이 넘어간다. 둘은 각자 분야에서 미완성의 상태에서 만나 각자의 무대를 만들어 간다. 순수한 희망이 있을 때이다. 세바스찬의 음악 세계에서 부딪히는 갈등, 미아의 오디션 탈락 등 인생의 험난한 고비를 겪는다. 포기할 수도 있으나 결국 포기하지 않고 열정으로 도전하여 성공한다는 얘기이다.
세바스찬의 재즈 피아노 연주 솜씨는 볼만하다. ‘위플레쉬’의 드럼만큼은 안 되어도 재즈 피아니스트의 매력을 물씬 풍긴다. 미국에서도 재즈의 유행이 왔다 갔다 하는 모양이다. 유행에서 퇴색하면 퇴물이 되는 것이다. 업주의 취향과도 안 맞으면 해고 되는 것이다. 결국 자신의 재즈 카페를 열어 자리 잡는다.
몸뚱아리 하나로 승부해야 하는 배우 미아가 오디션을 보는 과정은 처절하다. 죽도록 연습해온 연기를 초반에 잘라버리는 무례함과 수모를 수없이 겪어야 했다. 애써 오디션 연기를 하는데 정작 심사 측 사람들은 잡담이나 하고 딴 짓을 한다. 이 계통 사람들이 원래 좀 그런 면은 있다. 일인극을 연습해서 무대를 빌렸는데 관객이 한 명도 안 왔다. 꿈을 포기할 만하다. 그러나 운명의 지푸라기가 나타난다.
사랑만 생각했다면 미아가 파리까지 가지 않았을 것이다. 연기 생활을 위해 장기간 떨어져 있어야 했다. 다 포기하고 둘이 아들 딸 낳고 알콩달콩 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각자의 미래가 더 중요했다.
교통체증으로 지방도로로 빠져 남편과 들른 재즈 카페가 세바스찬이 희망처럼 얘기하던 상호였다. 아니나 다를까. 카페 주인은 세바스찬이었다. 둘이 뜨거운 포옹이라도 했어야 했지만 둘 사이를 모르는 남편이 있었다. 멀리서 미소로 만남의 기쁨을 표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나만의 아지트로 가는 길은 누구도 눈치 채기 어렵다. 아니 길이 없다고 하는 편이 좋겠다. 북한산 좁은 등산로를 오르다가 오 부 능선 어느 지점에서 등산로를 살짝 빠져서 큰 나무 사이로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약간 경사가 있는 비탈길을 내려간다. 그 비탈길은 나무가 빽빽해서 주변 지형과 하늘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조심조심 내려가다 보면 어느 순간 마술처럼 눈앞에 넓고 커다란 바위가 나타나고 그 바위에 오르면 시야가 확 트인다. 북한산 인수봉의 거대한 자태가 하늘에 닿아 있고 그 아래로 흘러내리는 수많은 능선이 화려하게 펼쳐진다.
◇계절마다 찾아오는 자연의 향연
봄에 그 바위에 앉으면 어린잎의 연두, 산수유의 노랑, 진달래의 연분홍이 그려내는 색의 향연을 즐길 수 있다. 파스텔조의 색깔을 찬란한 햇빛이 더 가볍고 투명하게 만든다. 수채화가 따로 없다. 봄바람이라도 지나가면 그 바위에 누워 바람과 햇살을 동시에 온몸으로 만끽한다. 눈을 감고 가만히 귀 기울이면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생명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멀리 산새들의 노랫소리도 들린다.
짙은 초록으로 물든 여름에는 비 오는 날이 좋다. 숲에 쏟아져 내리는 빗소리에 묻혀 세상 소란스러운 소리가 다 사라진다. 눈을 감고 들으면 어느 거대한 폭포 속에 들어온 듯 착각에 빠진다. 소나기가 숲에 부딪히며 내는 ‘쏴~아’하는 소리는 속을 시원하게 해 준다. 어느 순간 소나기가 지나가면 계곡마다 안개가 피어오르고 구름 사이로 바다색 하늘이 나타난다. 잠시 조용하던 산 벌레들이 다시 합창을 시작한다. 여름엔 이곳 바위에서 낮잠을 잔다. 우산을 펴고 그 그늘에 얼굴을 넣고 눕는다. 한여름 숲에서는 냉장고 바람이 살살 불어온다. 잠시 눈을 붙이고 나면 머리가 맑아지고 몸이 개운해진다. 삶은 달걀 하나, 김밥 한 줄로 요기가 충분하다. 그곳에는 바다색 하늘과 빛나는 인수봉과 수많은 초록 능선이 있다.
봄이 수채화라면 북한산의 가을은 유화다. 북한산 능선들이 어느 순간 온통 노랗고 붉게 변한다. 그 바위에 앉아 있으면 저 북쪽에서 서늘한 바람이 인수봉을 타고 넘어온다. 겨울이 가까이 왔다. 떡갈나무 잎이 바람에 날리는 것을 보면서 생각에 잠긴다. 다리를 세우고 카메라를 장착한다. 거대한 자연 캔버스를 배경으로 셀카를 여러 장 찍는다. 그렇게 또 하나의 가을 시간을 박제로 보관해 둔다.
동양화를 닮은 겨울 산은 화선지에 그린 수묵화처럼 단아하다. 겨울나무를 보면 버리는 것을 배울 수 있다. 그 바위에 서서 훤히 다 드러난 능선과 비탈에 서 있는 나목들을 오래도록 바라본다. 가지 사이를 지나가는 바람이 소리를 낸다. 지난여름 초록이 다 부질없이 느껴진다.
◇바위의 영속성과 살아 있는 것들의 유한성
북한산에는 꽃이 피고 비가 오고 바람이 분다. 낙엽이 지나가면 텅 빈 곳이 된다. 그리고 또 다른 봄이 오고 연두색 이파리가 돋아난다. 수많은 계절이 왔다가 사라져도 그 바위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그 바위는 변하는 것과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을 만날 수 있는 필자의 숨겨진 아지트다
글 신광철 시인, 작가
나를 지배하려 하지 말고 나에게 자유를 주어라. 내 안에는 많은 길과 많은 말과 많은 단어들이 있다. 자유롭게 뛰어놀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목표에 익숙해져 있다. 목표가 없는 삶은 산 게 산 것이 아니라고 한다. 방향을 잃어버린 것을 방황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있다. 인생의 방향은 무엇이어야 할까. 무엇이 되기 위해서, 많은 것을 거머쥐기 위해서, 또는 지배하기 위해서일까. 인생에 목표를 두고 달려왔던 것들을 나열해 보면 단순하다. 대부분 돈 권력 명예 그리고 사랑과 성이 중요한 목표였고, 이것들에 ‘더 많이’라는 구체적 목표 외에는 별 것이 없다. 과연 인생 60을 살아온 지금도 그런가. 그렇다면 그 인생은 올바른 삶인가 묻고 싶다.
내 안에 있는 많은 것들 중에서 내가 진정으로 되고 싶거나 하고 싶은 것이 있을 수 있다. 그걸 꿈이라고 한다. 인생의 방향은 집에서, 회사에서, 학교에서, 종교에서 말하는 꿈이 아니라 바람에도 걸리지 않는 순결한 내 마음이 하고 싶은 것이 진정한 꿈이다. 꿈을 향해 사는 것이 최선이다. 세상에 태어난 진정한 이유는,
‘내가’
‘지금’
‘하고 싶은 일’
을 하는 것이다. 세상이 요구하는 것이 아닌 내가 지금 하고 싶은 그 무엇을 찾아야 한다. 늦은 나이는 없다. 가장 이른 시간은 지금이고 가장 늦은 시간은 다음이다. 더 나쁜 결정이 있다. 포기다. 포기하는 순간 죽은 것이다. 60년 동안 자신에게 물어보지 않았다면 인생에 대한 직무유기다.
행복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을 누리는 것이다. 행복을 외부에서 찾는 사람은 영원한 갈증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행복은 내 안에 있는 충만함을 누리는 것이다. 내 안에 있는 꿈을 실현하는 것이 행복이고, 내 안에 있는 따뜻함을 누리는 것이 행복이다. 행복은 긍정의 토대 위에 놓여 있는 온기다. 존재를 존재 그대로 받아들이고, 모자람과 넘침을 받아들이고, 살아 있음을 살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행복이 온다. 젊게 사는 방법은 육체가 젊은 것이 아니라 마음이 시키는 일에 도전하는 것이 젊게 사는 방법이다.
내 마음이 하고 싶어 하는 것을 꿈이라고 한다. 꿈을 나는 등대라고 말한다. 어느 방향으로 걸어가더라도 다시 바라보면 별처럼 빛나는 꿈, 꿈은 그래서 별이다. 인생의 영원한 등대가 꿈이다. 꿈을 향해 한 발씩 다가가는 것이 행복이다. 꿈은 노력하지 않고 다가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꿈은 땀을 기다리고 있다. 꿈은 기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만든 것이다. 나는 감히 말한다, 나 자신에게. 꿈은 이루어서 자신에게 선물하는 것이 인생에 대한 예의라고.
나의 꿈은 글이었다. 글을 쓰고 싶었다. 꿈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다른 것을 버려야 한다. 세상이 요구하는 것을 버리고 글쓰기에 돌입했다. 글 중에서도 시가 쓰고 싶었다. 시는 굶어야 만날 수 있는 세계다. 산업사회에서 가장 변방에 있는 것이 시다. 산업사회는 인간을 도구로 보는 사회다. 생산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인간을 본다. 생산과 관계되지 않은 것은 도태되는 사회가 산업사회다. 시인이 생산하는 시는 돈이 되지 못한다. 교환경제 속에서 시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없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은 재화를 생산하는 굴뚝과의 교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소외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한국인은 빛나는 존재다
그래서 바꾸었다. 시가 돈이 되지 않으니 돈이 되는 글이 필요했다. 내가 하고 싶은 글쓰기를 하면서 내가 즐거워야 한다는 전제가 있었다. 두 접점에서 만난 것이 한국인이었다. 한국인은 독특하고 희귀한 존재였다. 빛나는 존재였다. 파고들수록 깊고 넓은 세계가 있었다. 놀라운 세상이었다.
내가 한국인이어서 한국인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평균대에서 자랑스러운 것을 말하고 싶다. 한국인은 상상하지 못하는 것들을 이루어 냈다. 먼저 세상에서 말을 정리한다는 것은 엄두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불특정하고,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말은 만들어진다. 말은 상당 부분 비논리적이고, 비계획적이다. 하지만 한국어는 체계적으로 정리가 되어 있는 놀라운 언어다.
우리의 말은 중요하고 핵심적인 말은 한 글자로 되어 있다. 얼굴부터 살펴본다. 눈 코 귀 입. 몸으로 들어가 본다. 살 피 뼈 등 배. 자연으로 가면 한도 없다. 강 산 들 물 눈 비 풀 꽃 씨 그리고 땅이 있다. 땅이 한 글자라면 하늘도 한 글자가 되어야 한다. 하늘은 두 글자인 이유가 있다. 의미를 담기 위해서였다. 하늘은 한늘이다. ‘한’은 무한히 큰 공간을 말하는 우리말 한이다. ‘늘’은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영원한 시간으로 우리말 늘이다. 무한공간인 ‘한’과 무한시간인 ‘늘’이 만나 ‘한늘’이 되었고 ‘ㄴ’이 탈락하여 하늘이 되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동물 중에서도 우리와 가까운 것들은 한 글자로 되어있다. 호랑이 늑대 승냥이 고양이 같은 동물은 여러 글자로 되어 있지만 우리와 밀접한 가축은 모두 한 글자로 되어있다. 놀랍다. 원칙을 두고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상상하기 어려운 말이다. 가축의 이름을 본다. 소 말 양 닭 개. 모두 한 글자다. 돼지도 가축인데 두 글자다. 돼지는 옛말로는 ‘톳’ 또는 ‘’이라고 했다. 지금도 제주도에서는 토시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돼지는 돼지새끼에서 유래한 말이다. ‘아지’는 동물의 새끼를 말한다. 강아지, 송아지 등이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말이다. 톳과 아지가 만나 톳아지가 도야지로, 도야지가 돼지로 되었다. 곡식도 마찬가지로 우리와 밀접한 곡물들은 보리를 제외한 쌀 벼 밀 콩 깨 등으로 대부분 한 글자다. 다음으로 중요한 말이 두 글자로 만들어져 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 한국인에게 잠재되어 있고, 또한 숨어 있다. 우리의 능력을 우리 스스로 깨우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한국인이다. 세계에서 드문 일이, 한국에서는 일상적인 것들이 예상 외로 많은 것에 놀랍다. 나물도 그러한 예 중 하나다. 어느 나라도 들이나 산에서 나는 야생 나무나 풀을 음식의 재료로 상식하는 민족은 없다. 약초로 사용하는 경우는 다른 나라의 경우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전 국민이 산이나 들에서 풀과 나뭇잎을 상시로 뜯어다가 밥상에 올리는 나라는 없다.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프리카나 가난한 나라에서 기아에 허덕이지만 나물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지 못했다.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야생하는 나무와 풀들의 약리 성분과 독특한 맛을 알고 있다는 이야기다. 자연에 대한 이해가 깊다는 것을 말한다. 그만큼 한국인은 탐구심이 강하다. 끝까지 파고들려는 기질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기어이 달성하고 마는 강인함이 있다.
나는 한국인에 대한 관심과 연구를 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인생은 우연이 만든다고 하는데, 어떤 우연은 준비되어 있어 인연과 연결고리를 만들어내는 것을 종종 발견하곤 한다. 그래서 나는 인연은 우연을 가장해서 온다고 말한다. 내가 한국인을 만난 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나는 한국인을 만나면서 인생도 달라졌다. 한국인의 놀라운 세계가 나를 흥분시켰고, 나를 즐겁게 했다. 들어갈수록 오묘한 사상과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한 가지만 더 들어본다. 세계 어느 나라의 건국이념이 경계를 허물고 인간 모두를 이롭게 하자는 내용을 가진 나라가 있을까. 한마디로 없다. 다 같이 이롭게 잘 살자는 홍익인간은 인류공존의 기틀을 만드는 초석이 될 건국이념이다.
다시 뛴다, 인생은 육십부터
인생에 불을 질러라. 물론 나에게 하는 말이다. 사람은 독립된 섬이다. 섬과 섬 사이를 오가는 배가 있고, 새가 있지만 인간은 고립되어 있다. 고립을 피하여 배를 만들었지만 외롭다. 사람, 고립된 섬이다. 손을 잡고 있어도 너는 내가 될 수가 없다. 뜨거운 포옹을 하고 있어도 너는 너고, 나는 나다. 그래서 사람은 사랑을 키운다.
그래서 나는 ‘삶아 난 너를 사랑한다’고 선언했다. 내 삶을 내가 사랑하지 않고서 남을 사랑하는 것은 기만임을 알았다. 나를 사랑한 후에 남을 사랑해야 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나를 사랑하는 일이 쉬운 듯 쉽지 않은 일임을 깨달았다. 그러기 위해서 인간의 속성을 알아야 했다.
생명체는 기본적으로 자기보호본능이 있다. 자기보호본능은 지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기초적인 방어기제였다. 자기보호본능의 핵심이 이기심이다. 생명체의 기본 속성이 자기보호본능이고, 자기보호본능의 핵심이 이기심이라는 말이다. 인간의 마음 한가운데 기둥처럼 서 있는 것이 이기심이라는 이론이다. 이기심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나를 이롭게 하는 마음이 이기심이다. 경쟁을 통해서 더 많이 가져오는 것이 이기심이다. 경쟁과 싸움이 따른다. 하지만 속을 좀 더 깊이 들여다봤다. 이기심은 적을 만들지만 진정한 이기심은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만들지 않아야 하는 것이었다. 타인이 나를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게 만들면 적이 없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 진정한 이기심은 배려와 봉사였다.
또한 꿈을 실현하기 위한 도전이 필요하다. 어떤 길을 가도 내 인생임을 자각하는 순간 두려움은 상당 부분 없어진다. 신에게 기도하는 손보다 실천하는 손이 더 아름답다고 우긴다. 모자라고 어리석은 나 자신을 데리고 사는 것이 힘들지만 인간의 위대함은 모자라고 어리석은 자신을 자각하고 완성을 향하여 한 발씩 나아간다는 데 있다. 욕망이 아름다우면 노래가 될 수가 있다. 꿈이 아름다우면 고난 속에서도 웃을 수 있다.
글쓰기를 인생의 과업으로 설정한 것이 고난으로 안내하고 있지만 즐겁게 가려 한다. 마음이 시키는 일을 하는 만큼 장애를 도전으로 넘어보려 한다. 글쓰기와 한국인에 대한 정체성을 찾아가는 길이 곤란을 안겨 주겠지만 웃으며 갈 것이다. 아름다운 욕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따뜻한 이기심은 배려와 봉사라고 했다. 우리는 진정한 이기심으로 살아가야 한다. 아름다운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은 오늘도 계속되어야 한다.
>> 신광철 시인, 작가
한국문화콘텐츠 연구소장으로 한국, 한국인, 한민족의 근원과 문화유산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언제나 ‘긍정이’와 ‘웃음이‘를 반려동물처럼 데리고 다니세요”라고 당부하는 문학가이자 한국문화를 연구하는 학자다.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이 만 3년1개월의 종지부를 찍고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되었으나 전쟁의 후유증으로 피폐해진 농촌은 더욱 먹고살기가 어려워졌다. 필자는 휴전이 끝난 직후인 53년 8월 14일 경기 부천시 영종면 중산리 1385(현 인천 중구 중산동)에서 5남 3녀의 일곱 번째로 태어났다.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채 보릿고개를 겨우 넘기며, 근근이 입에 풀칠하던 시절의 농촌에서 태어났으니 그 생활이야 오죽했을까마는 그래도 아버지의 부지런함과 노력으로 큰 어려움 없이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당시 사랑채에는 몸이 불편하시어 동생에게 얹혀살고 있는 큰아버님이 야학 서당을 열고 있었기에 집안은 늘 사람들로 붐볐다. 희미한 등잔불 아래 밤마다 천자문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창문을 넘었으니 이는 필자가 성인이 된 이후에도 늘 한자에 관심을 가지고 서예를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특히 필자의 유년기 시절에는 당시 초등학교 근처에 집이 있고 비교적 상태가 좋았던 터라 도시에서 섬마을로 전근해 오시는 선생님들이 필자 집에 방 한 칸을 얻어 자취를 하셨기에 어린 시절부터 선생님들과 가까이 지내곤 하였다.
60년도 3월에 집 근처에 있는 영종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그 학교는 집안 대대로 어르신들은 물론 부모님과 형님, 누님들이 다니던 학교다. 코 닦는 수건을 가슴에 달고, 학교에 첫 발을 떼어 놓았던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농촌임에도 집안은 비교적 큰 농사와 과수원으로 어렵지 않게 살았는데, 필자는 8남매 중에 일곱 번째 이었다. 서열상 위로는 형, 아래는 막내 동생이 있었다. 중간에 끼인 필자는 늘 사랑에 목말라했다. 형은 형이라서 봐주고 동생은 막내라서 특별대우를 받다 보니 결국은 중간에 끼인 필자는 늘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면서 유ㆍ소년시절을 보냈다. 도맡아 잔심부름을 하기도 하고 어쩌다 다투기라도 하면 꾸중은 비교적 필자에게 떨어졌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랐다.
더구나 필자 집에 세를 살고 계시던 선생님들께서 보실 때마다 장난이 심해 단추가 모두 떨어진 옷을 풀어헤친 채 돌아다니는 필자를 보고 유별난 ‘장난꾸러기’라고 하기도 하고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라고 놀리곤 했다. 형제들에 비해 외탁을 해서 키가 조금 작은 편이었는데, 장난삼아 했던 놀림은 청년기 시절 두고두고 상처로 남았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진짜로 다리 밑에서 주워온 고아인줄 알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필자는 내성적인 성격으로 소심하고 숫기가 없었지만 공부는 곧잘 했다. 아마 반에서 1등은 못했어도 4,5등은 늘 했다. 언젠가 송산 백구지라는 해변으로 가을소풍을 갔는데, 전 학년을 모아놓고 장기자랑을 하던 시간이었다. 우리 학년에서는 필자가 선생님께 호출되어 나갔는데, 고개만 푹 숙인 채 결국은 끝까지 노래를 부르지 못하고 들어오고 말았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그 시절, 집에서는 과수원을 크게 하였기에 원두막에 올라가 파수 보는 일을 돌아가면서 했다. 필자는 그 일이 제일 하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올라가서 망을 보곤 했다. 이때 음악책 한 권을 들고 올라가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목청껏 노래를 부르곤 했다. 혼자서는 그렇게도 잘 부르던 노래 실력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소풍날, 장기자랑시간에 고개만 숙이다가 들어왔으니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을 만도 했다.
드디어 초등학교 졸업식이 다가왔다. 그 시절에는 중학교 입학시험이 있었기에 졸업을 앞둔, 면소재지 내에 4개 초등학교 아이들이 중학교에 가서 시험을 보았다. 운 좋게 수석은 못했어도 차석으로 합격통지서를 받았는데, 필자는 입학을 포기해야 했다. 이유는 그때 잘살던 필자 집이 마침 빚더미에 올라앉아 빚쟁이들이 집과 전답을 팔아 그들만의 빚잔치를 했기 때문이다.
입학금은 6600원. 차석합격자는 절반을 면제받았기에 3300원 만내면 중학교에 입학을 할 수 있었는데, 그 돈조차 여의치를 않아 포기해야 했다. 등록을 끝까지 안하니 어느 날, 중학교 교감선생님께서 찾아와서 딱한 집안 사정을 알아보고는 등록금은 고사하고 책만 사가지고 보내라고 했음에도 경황이 없으신 부모님이 포기하였다. 나중에서야 교감선생님이 다녀갔다는 말을 듣고는 어린 마음에 받은 상처는 두고두고 잊을 수가 없었다.
결국 필자는 인천으로 나와 유동에 있는 대양알미늄공장에 취직했다. 그 와중에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늘 떠나지 않았기에 동인천역 전에 있는 영어ㆍ수학학원에 등록했다.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까싶어 새벽에 신문배달을 하고 공장에 갔다가 돌아와서 저녁에 학원으로 가는 고된 생활이 이어졌다. 그후에 둘째 형이 대학을 졸업을 하고 서울 화양동에 있는 씨티즌 시계회사에 취직됐다. 필자를 포함한 네 명의 형제자매는 서울 뚝섬에 5만 원짜리 단칸 셋방을 얻어 서울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각자 할 일을 열심히 해 나갔다.
필자는 서울에서도 공장 생활을 이어갔다. 뚝섬 근처에 있던 한일공업사라는 공장에서 일했는데 처음에는 허드렛일을 시작하다가 점차 프레스 기계공으로 발전하면서 월급도 조금씩 올라갔다. 그런데 여사장은 서울에서는 꽤나 유명한 E여고의 전직 교사이었고, 어떤 연유에서인지 창업해서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웬만큼 신임을 얻은 후에 사장에게 슬그머니 공부에 대한 속내를 드러내 보였는데, 흔쾌히 야간중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시간을 허락해 주었다. 그렇게 주경야독(晝耕夜讀)의 서울 생활이 이어졌고, 2년 후 비록 친구들보다 1년이 늦었지만 당당하게 고등학교에 합격했다.
합격은 했지만 입학금이 없어 어린 마음에도 그 답답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기에 못 먹는 소주 한 병을 사들고 뚝섬유원지 둑에 홀로 앉아 아련한 강물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홀짝홀짝 술을 마시면서 울기도 하고 푸념도 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런데, 며칠 후에 고향에서 아버지가 그 이자가 비싸다는 장리쌀 한가마니를 얻어 둘러메고 서울로 올라왔다. 올라오던 날 밤, 농사일에 여윌 대로 여윈 아버지가 전세방에서 곤하게 코를 골고 주무시는 모습을 바라보며 왠지 모를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어떻게 해서든지 열심히 공부를 해서 효도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주경야독의 고단한 생활은 변하지 않았지만 어둠 속에 빛을 찾아 헤매듯 열심히 공부를 하던 필자는 3학년이 되던 가을에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맞게 되었다.
서울에서 5만 원짜리 전세방으로 시작한 우리 4남매는 회사로, 공장으로, 학교로, 학원으로 각자 나름대로 모두 열심히 살았다. 힘들고 어렵다는 생각보다는 희망찬 미래를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며, 적어도 행복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만큼 좋은 날들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젊어서 고생은 돈 주고 사서도 한다고 하지 않던가! 어려운 가운데서도 역경을 헤쳐 나갈 수 있었던 것은 긍정적 사고와 순수한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험난한 세상 서로 의지하며 열심히 살자던 어느 날, 바로 손위형님이 홀연히 국가의 부름을 받아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그렇게 형님이 우리 곁을 떠나고 어머님의 생신날이 다가왔다. 군에 가신 형님의 생일은 음력 9월 9일이었고 어머님의 생신은 음력 9월 8일이었는데, 남매들은 어머님 생신날에 맞추어 미리 고향으로 모두 내려갔다. 그런데 내려간 날 저녁부터 필자는 엄청난 복통과 오한에 시달리며 꼼짝 못하고 건넌방 한쪽에 누워 있었다. 그 고통스러운 중에서도 불현듯 군에 간 형님 생각이 떠올랐다. 형님 생일이 오늘인데, 군에서 따뜻한 밥이라도 한 그릇 드셨을까? 이런 생각이 드니 아프다고 그냥 있는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몸을 추슬러 큰형님과 같이 오매불망 그리워하던 형님을 면회 가기로 했다. 군사우편에 찍힌 부대 번호를 이런저런 사람들에게 물어 그곳이 강원 가평군이라는 것만을 알고 무작정 마장동시외버스터미널에서 그곳으로 가는 버스를 타게 되었다.
그런데 활짝 웃는 얼굴로 우리를 반겨야 할 형님은 싸늘한 시신으로 누워있었다. 아! 이 무슨 청천하늘에 날벼락이던가! 그리고 아버지가 비통하게 울부짖으시는 모습을 나는 그때 처음 봤다. 평소의 아버지는 산처럼 높고 엄하신 분이라 눈물도 없는 분 인줄 알았다. 가족 중에 얼굴을 확인하라고 하여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형님의 얼굴을 확인하셨는데, 그 순간 오열과 통곡을 하시면서 비틀거리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뜨거운, 아주 뜨거운 눈물을 삼키고 말았다. 꿈인가. 생시인가.
그렇게 형님은 사랑하는 가족을 남기고 떠나버렸다. 어떤 사유로 싸늘한 죽음을 맞았는지 너무 궁금한 필자 가족에게 부대 측에서는 순직통지서를 전하려고 서울 뚝섬 집주소로 찾아갔으나 사람이 없어 전달이 안됐다고 했다.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오르는 분노! 애절하게 가족을 그리워하던 형님의 편지! 조금만 기다리면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한 순간에 스러지게 만든 사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든 그해 가을, 낙엽처럼 형님은 떠나고 말았다.
그 사건으로 형님은 서울 동작동국립묘지에 묻혔다. 형님이 국립묘지에 묻히던 날은 다음 해 1월 초,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이었는데, 필자는 형님의 영정사진을 안고 묘지까지 행렬을 해야 했다. 행렬 내내 뜨거운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눈보라 속으로 형님의 모습이 언뜻언뜻 스쳐지나갔다. 보이지 않는 분노가 가슴 속 깊은 곳에 소용돌이 쳤다. 형님의 죽음에 항거라도 하듯이 필자는 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리고 1974년 12월 21일 빛나는 육군소위로 임관하게 되었다. 고3 수험생으로 대입 준비를 하던 필자 인생이 전혀 뜻하지 않은 물꼬를 타고 흘러간 것이다.
무난하게 전ㆍ후방에서 군복무를 하던 필자는 1985년 가을쯤, 서울 삼각지에 있는 육군본부 작전참모부로 보직을 받게 되어 서울을 떠난 지 13년 만에 소령 계급장을 달고 금의환향(錦衣還鄕 )게 되었다.
군복무를 하면서도 공부에 대한 열정만큼은 버릴 수 없었던 필자는 이곳에서 일반대학 위탁교육 시험에 합격하여 서울에 있는 건국대학교 경영학과 3학년에 편입하였다. 주경야독의 생활은 결코 필자에게는 낯설지 않았다. 94년 만기전역할 때까지 필자는 공부를 계속하여 서울시립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를 받았다. 필자는 담당 교수님으로부터 박사과정에 대한 권고를 받았으나 이를 뒤로 한 채 새로운 세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22년간의 군복무를 하면서 대부분의 시간들을 전방에서 보냈던 필자는 대개의 직업군인들이 그러하듯이 오직 진급에만 초점을 맞춘 삶을 살아왔었다. 전역을 앞두고 보니 모든 것이 허무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전역 후의 삶은 조금은 다른 방향을 생각하게 되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필자는 전역 후에 직업을 갖는다면 누군가를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원의ㅋㅋ(願意)를 가지고 있던 차에 지인의 추천으로 종교 계통에서 행정직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필자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여가시간을 활용하여 틈틈이 글쓰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정진하여 98년 가을에 순수문학 수필작가로 문단에 정식으로 등단하게 되었다. 아울러 쉬는 날에는 열심히 출사를 나가 사진 찍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수필작가로 문단에 등단한 뒤 2년 후부터는 서예를 시작하였다. 필자의 어린 시절, 사랑방에서 야학서당을 운영하던 큰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 늘 관심을 갖고 있던 차에 강포 김상용 선생님을 만나 서예에 정식으로 입문하여 그야말로 혼을 불사르듯 글공부를 하게 되었다.
2013년 9월 13일. 필자는 그동안 열심히 습작했던 글들을 모아 2권의 수필집을 출간 하게 되었다. 필자의 61세 되던 환갑 날, 서울에 있는 가락2동 성당에서 조촐한 축하미사와 함께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친인척들과 60여 년 동안 살아오면서 이러저러한 신세를 졌던 지인들을 초대하여 식사를 대접하고 수필집을 선물로 드리게 되었다. 약 150여 명의 지인들이 참석하여 성황리에 격려와 축하의 인사가 이어졌다. ‘기적소리 울리는 인생의 기차를 타고’ 는 필자의 제1수필집으로, 태어나 힘차게 시동을 걸며 출발하였던 기차가 어느덧 60여년의 세월을 돌고 돌아 황혼이 아름답게 빛나는 플랫폼으로 멋지게 들어온다는 뜻이다. 내용은 그동안 삶의 애환을 반추하는 내용으로 꾸며져 있다. ‘황금빛 마음의 고향’ 이라는 제2수필집은 어린 시절 고향과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을 글로 표현한 작품집이었다.
필자는 그해 12월, 위 작품으로 순수문학 본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또한 같은 해 11월초에는 종로 인사동에서 동인들과 함께 그동안 갈고 닦았던 서예작품 전시회를 열게 되었다. 청년기 크고 작은 온갖 풍상을 겪으면서 살아온 필자는 뒤늦게 자신의 소질을 계발하여 열심히 작품 활동을 하면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어 무한히 감사한 생각이 들었다.
2014년 12월 31일. 필자는 두 번째 정년퇴직을 맞게 되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쉬지 않고 직장생활로만 만 43년을 살아왔다. 참으로 많은 세월이 흘러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5년 12월에는 꿈에도 그리던 자녀들과의 만남을 위해 미국 콜로라도로 출발하였다. 필자는 딸과 아들, 두 자녀를 두었는데, 모두 미국에서 자리잡아 잘 살고 있다. 외손자 녀석이 초등학교 3학년이 되도록 첫 대면을 못했으니 오죽 보고 싶었을까. 2014년 12월부터 약 2개월간 손자 현서를 만나고, 자녀들과 함께 보냈던 것은 축복의 시간이었다.
필자는 정년퇴직을 하면서 그동안 조금씩 저축해 두었던 돈으로 고향인 인천 신공항 근처에 집을 한 채 지을만한 땅을 사두었다. 이제 그곳에 아담한 집을 짓고 집필 활동을 하면서 살고자 한다. 2020년경에는 새로 지은 소박한 집에서 매년 한 번씩 지인知人들을 초대해서 출판기념회와 사진전시회를 번갈아 열고 싶다. 삶의 멋진 이야기가 흐르는 저녁이 되지 않을까가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