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우 감독의 다큐멘터리 전쟁영화다. 한국전쟁 때 미군에 의해 수백 명이 죽은 영동군 노근리 사건을 영화한 것이다. 문성근 등 알려진 배우들도 몇 명 출연했으나 딱히 주연 배우라고 꼽을 만한 사람도 없고 줄거리도 단순한 영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을 떼지 못하고 봤는데 그것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필자의 고향이 영동이라 출연 배우들의 말투가 정겨웠다.
1950년 7월, 평화로운 충청북도 황간의 한 작은 마을은 한국전쟁이 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태평했다. 노인들은 나무 그늘에서 한가로이 장기를 두고 있었고 젊은이들은 논밭에 나가 일을 했을 정도로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이었다. 초등학교에서는 합창대회 연습이 한창이었다.
그런데 이 평화로운 마을에도 전쟁의 여파가 밀려온다. 미군들이 간간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하늘에는 전투기들도 보였다. 전쟁 초기 북한군에 밀린 미군들이 저지선으로 이 마을을 선정한 것이다. 미군들은 곧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질 것을 예상하고 주민들에게 피난을 권한다. 남쪽이 아닌 동네의 깊은 산속으로 피난을 가면 산에 숨어 있는 빨치산들에게 습격을 당할 수 있으니 남쪽으로 피난을 가라고 몰아쳤다. 실제로 필자의 조부모와 동네 어르신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대부분의 주민들은 남쪽으로 피난을 가지 않고 깊은 산속으로 몸을 피했다고 한다. 이 지역은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줄기로 깊은 산이 많기도 했다.
남쪽으로 피난길에 나선 수백 명의 주민들은 미군 트럭을 보면 길을 비켜주었다. 그런데 하늘을 몇 차례 선회하던 미군 비행기에서 갑자기 긴 피난민들의 행렬로 폭탄과 총알을 쏟아 부었고 주민들을 대량으로 학살했다. 피난민 속에 위장한 적군이 섞여 있다는 정보에 의해 사살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노근리 쌍굴 터널로 몸을 피한 피난민들마저 저지선에 있던 보병부대의 사격으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무참하게 살해을 당했다. 기록에 의하면 단 25명만이 살아남았다고 한다.
이 사건은 그간 묻혀 있다가 1999년 AP통신의 최상훈, 찰스 J. 핸리, 마사 멘도자 기자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이들읁 노근리 사건에 대한 취재 보도로 2000년 퓰리처상까지 수상했으며 이어서 ‘The Bridge at No Gun Ri’라는 제목의 책을 내기도 했다. 언론의 힘이다.
아쉬운 부분은 당시 피난민이 500여 명이었고 실제 희생자가 300여 명이 넘었다는데 피난민으로 나온 엑스트라 출연은 몇십 명에 불과해서 사실감을 감소시켰다. 그만한 인원 동원이 어려웠다면 컴퓨터 그래픽으로라도 커버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고 본다.
‘작은 연못’이라는 제목도 내용과 동떨어져 영화를 보는 내내 연못을 찾느라고 관심을 가져봤으나 못 찾았다. 굳이 연못이라면 노근리 쌍굴 앞의 웅덩이일지 모른다. 이 영화에 기꺼이 자신의 음악을 쓰게 해준 김민기에게 보답하기 위함이었는지 모른다. ‘작은 연못’은 1993년 김민기의 4집 앨범의 타이틀이다.
겨울도 어느새 그 정점을 찍고 하나, 둘 봄을 헤아리는 마음이 가슴속을 살며시 물들여갈 무렵인 2월 중순에 산과 바다, 그리고 호수를 조망할 수 있는 코스로 산행을 나섰다.
사실은 주6일 근무하느라 주말쯤이며 심신이 피로함에 젖어 아무것도 하기 싫고 그저 시간에 쫒기지 않고 하루를 늘어지게 쉬고 싶다는 생각을 감출 수는 없었지만, 동해안 최북단 ‘해파랑길’은 나에게 아련한 추억이 서려있어 선뜻 승낙하고야 말았다.
다소 이른 시간에 서울에서 출발한 버스는 겨울산의 스산함을 파노라마처럼 스치면서 어둠속을 질주하고 있었다. 비몽사몽(非夢似夢)간에 몇 시간을 달렸는지 드디어 진부령 고개가 눈앞에 나타났다.
‘낯익은 山河’ 굽이굽이 고갯길을 넘으니 흘리~장신리를 지나 드디어 뻥뚫린 듯 바다가 눈에 들어오더니 버스는 대대리 검문소를 유유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대대리~거진 구간은 내 젊은 시절 푸른 제복에 땀 마를 날이 없이 동분서주하며 훈련하던 곳이라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의 모습을 차창으로 내어다 보니 애틋함이 샘솟아 나도 모르게 슬그머니 미소가 떠올랐다.
포병병과의 위관장교시절 이곳 대대리 하천 일대와 반암리 솔밭진지에 진지편성을 해놓고 포탄사격 훈련을 하던 그 시절은 내 인생의 황금기요 젊은 혈기로 똘똘 뭉쳤던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하루의 고단한 훈련을 마치고 병사들은 온종일 훈련의 고단함에 젖어 모두들 텐트에서 코를 골며 깊은 단잠에 빠져있던 시간에 난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하고 진지 순찰을 하던 중이었다. 다음 날, 실시될 포탄사격훈련에서 어떻게 해야 표적 안에 많은 량의 포탄을 명중시킬 것인가? 에 대한 염려와 고된 훈련 뒤의 병사들의 취침상태를 확인하고자 진지 주변을 돌고 있었다.
우연히 때는 보름달이 중천에 덩그러니 떠있었고 쏟아지는 별무리가 아름답던 그 밤에 파도소리는 유난히도 철썩이고 있었다.
출렁이는 물결에 비추인 달빛은 마치 황금 고기비늘처럼 일렁거렸고 수평선 너머에서 너울파도가 간간이 밀려오고 있었으니 환상적인 야경에 그만 넋을 놓고 한동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곳이 바로 지금 차창너머로 지나치고 있는 반암진지였다. 그 시절의 솔밭은 숱한 세월을 견디어 내고 노송(老松)이 되어 동해의 쪽빛 바다와 어우러져 멋진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드디어 해파랑 길이 시작되는 거진항에 도착하여 기념사진을 찌고 본격적으로 산행에 들어갔다. 초입의 가파른 계단에서 숨을 몰아쉬며 오르다 보니 다리는 뻐근하다 못해 쥐가 오를 지경이었다. 능선에 올라서고 나니 그다지 높지 않은 숲길이 길게 연결되어 있었다. 아기자기하게 이어지는 능선 따라 숲길을 걸으니 마음속에 어느새 봄기운이 가득 밀려들어왔다. 더구나 동해의 푸른 바다를 조망하며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마음껏 들이키니 한층 상쾌함이 더해져 갔다.
어느새 몇 굽이를 돌아 ‘화진포 성(城)으로 가는 표지판이 나타나자 좌측으로는 멀리 건봉산 산줄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도 그 산에는 겨우내 내린 눈이 그대로 쌓여있어 설산의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오른쪽으로는 파도가 하얗게 밀려오는 동해바다가 눈에 들어오니 최상의 멋진 코스임이 분명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한국의 산하이던가!” 어찌하여 이 평화로운 곳에 살벌한 철조망을 치고 남북이 서로 차가운 총부리를 맞대고 있단 말인가?
산행이 막바지에 이르자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겨울에 푹 빠져 있는 화진포 호수가 한 눈에 들어왔다. 산 위에서 내려다 본 호수위에는 백색의 고요만이 물들어 있어 마치 한 폭의 동화나라를 보는 듯 한 느낌이었다.
그 산을 내려오는 끝자락이 ‘화진포성’이라 불리는 김일성 별장이 있었으니 아픈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보게 하는 산행이었다. 전망 좋은 별장의 옥상에 올라보니 멋진 설산과 바다가 한 눈에 들어왔다. 동해바다의 쪽빛 물결은 오늘따라 파고가 높아 하얗게 밀려와 부서지는 모습이 환상적이었다.
파도소리를 들으며 모래사장을 걸었다. 모래에 새겨진 발자국 마다 세월의 흔적이 차곡차곡 쌓여만 간다.
대진항 바로 옆 양지바른 곳에서 고단했던 발걸음을 멈추고 소박한 점심으로 허기를 달랬다. 이 멋진 산행 끝에 먹는 점심식사는 그 어떤 산해진미와 비교할 수 없이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소주와 막걸리를 곁들인 채, 산행담(山行談)에 열을 올리며 모두들 행복해 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슬그머니 내면으로부터 솟아오르는 행복바이러스가 멀리 퍼져갔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거친 바다 마을 출신의 사내라 해도 이 우주선 같은 치료기는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차라리 폭풍우 속 배 위가 더 속 편하지 않았을까. 돌아가는 기계 위에 누워 있으려니 좀이 쑤시고 욕지거리가 나올 것 같았다. 낮은 목소리의 소음은 조용했지만 시끄러웠다. 임재성(林在聲·56)씨는 그래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 기계가 큰 병을 낫게 해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암(癌)이라는 큰 병을 말이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보통 암이라고 하면 자신의 건강을 과신하던 어떤 사람이 느닷없는 선고에 당황하게 되는 병이라고 생각하고, 실제로도 그런 사례가 많다. 그런데 국립암센터에서 만난 임재성씨는 그에 반해 억울한 구석이 많은 경우다.
전라남도 여수시에서 주유소 사업을 하던 그는 교직에 있는 아내와 함께 평범한 가정을 평탄하게 꾸려나가고 있었다. 사업은 남부럽지 않을 정도로 유지됐고, 그의 활달한 성격에 주변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자녀도 1남 1녀다. 마치 동사무소 입구에 꽂혀 있는 홍보물 표지 사진 속 가족을 그대로 옮겨놓았다 해도 믿을 정도였다.
이 반짝이는 가족의 삶에 작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1989년부터다. 별 신경을 쓰지 않았던 건강검진에서 B형 간염에 감염됐다는 결과가 나왔다.
매년 빠짐없이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원래 건강에 자신이 있었어요. 실제로 간염 환자가 겪는다는 식욕부진이나 피로감 같은 것은 하나도 느끼지 못했어요. B형 간염도 어머니를 통해 받은 것이니 크게 동요할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정기적인 검사만 제때 받으면 되겠지 하고 평소처럼 생활했어요. 주변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면서요. 그때만 하더라도 주(主)님이 아닌 주(酒)님을 모실 때였죠(웃음).”
그 시절부터 그는 정기적인 건강검진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 B형 간염은 까딱하면 간암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경고를 들어왔기 때문에 건강검진만큼은 반드시 지키는 생활을 이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작은 균열은 조금씩 더 벌어지기 시작했다.
2014년 말, 광주에서의 건강검진 결과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간암일 수 있다는 의사의 말. 하지만 그를 더 화나게 한 것은 정기검사 때마다 만났던 의사의 태도였다.
“간 상태가 나쁘지 않아서 아직 B형 간염 약을 먹을 단계는 아니라고 했거든요. 그랬던 그 의사에게서 느닷없이 암 진단을받았으니 당황스러울 수밖에요. 그 상황에서 요즘 의술이 좋아져 초기 간암은 치료된다고 이야기하는데 위로가 위로처럼 받아들여지지 않더라고요.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당연히 암 선고는 그에겐 충격이었다. 여느 암 환자처럼 그 역시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고, 부정과 분노 등 다양한 과정을 거쳤다. 죽기 전에 손주는 볼 수 있을까, 죽음을 준비해야 하나, 고통은 어느 정도나 될까, 더 괴로워지기 전에 차라리 생을 끝내는 것이 나을까. 말도 안 되는 걱정과 의문들이 그를 괴롭혔다. 심지어 검게 변해 죽어 있는 물고기들이 바닷가로 잔뜩 밀려오는 악몽을 꿀 정도였다.
그렇게 암 선고에 당황해하고 있을 때 처가 쪽 친척으로부터 일산으로 올라오라는 제안을 받았다. 일산에 국립암센터가 있으니 진단이든 치료든 그곳이 가장 정확하고 믿을 수 있는 곳 아니겠냐는 조언이었다. ‘약사님’ 친척의 조언이었기 때문에 의심할 필요도 없었고, 믿어보기로 했다. 그 길로 바로 서울로 향했다. 그러고는 국립암센터의 방사선종양학 전문의 김태현(金泰現·46) 교수를 만났다.
비장의 카드 ‘양성자치료기’
김태현 교수는 “임재성씨는 간암 환자 중 우리 주위에서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형태의 환자예요”라고 설명했다 .
“B형 간염은 한국 사람들에게서 아주 흔하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독 한국과 중국 사람들에게서 많이 볼 수 있어요. 이에 반해 일본과 서양인들은 C형 간염 보균자가 많죠. 최근에는 간염 예방 백신의 보급이 적극적으로 이뤄지고 있어 그 수가 줄고 있지만, 그래도 B형 간염 보균자는 우리 주위에 적지 않습니다. 이 간염이 우리 몸에 들어오면 염증이 일어났다 나았다를 반복하는데, 이러다 암으로 발전되는 경우가 많아요.”
임씨의 경우 간암 초기였기 때문에 경동맥 화학색전술로 치료를 했는데, 원하는 만큼 예후가 나오지 않아 간암고주파열치료술까지 시도했다. 경동맥 화학색전술은 간 전체에 여러 암세포를 치료할 수 있도록 약을 뿌리는 방식이고, 간암고주파열치료술은 특정 암세포에 고주파를 쬐어 높은 마찰열을 발생시켜 괴사시키는 치료법이다.
“문제는 임재성씨의 증세가 다발성(多發性)이라는 것이었죠. 암세포가 또 발생했는데 이번에는 그 위치가 애매했어요. 접근이 무척 어려운 부위라 수술도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양성자치료였어요.”
400억원 넘는 꿈의 치료기
양성자치료기는 CT나 방사선치료기와 같은 ‘의료기기’로 생각하기 쉽지만 ‘의료시설’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국립암센터의 양성자치료기도 장비가 먼저 자리 잡은 뒤에 그 위로 건물이 지어졌다. 지어진 건물 안으로 장비를 넣는 것이 불가능한 규모이기 때문이다. 세계 최초의 양성자치료 장비는 가속기 반경이 4km 정도였다. 우주의 기원을 좇는 입자가속기와 유사한 가속기를 통해 수소 원자의 핵을 빛의 속도로 가속시키면 튕겨져 나오는 방사선을 받아 암세포에 쏘이는 방식이다.
의사들에게 이 장비가 꿈의 장비로 불리는 이유는 일반적인 방사선치료 장비와 달리 주변 조직에 미치는 영향이 최소화되기 때문이다. 일반 방사선 장비는 방사선을 투과할 때 암세포 앞뒤의 정상 조직이나 장기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방사선 조사각을 이리저리 돌려 쪼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반면에 양성자치료기는 정확히 암세포에만 조준사격이 가능하다. 주변에 미치는 영향도 훨씬 미미하다. 암세포를 죽인 뒤 몸을 통과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소멸한다. 치료하는 의사 입장에서도 부담이 적은 셈이다. 일반적인 방사선치료가 식욕부진이나 설사, 두통 등의 부작용을 동반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국립암센터의 양성자치료기는 2007년부터 본격 치료를 시작했고, 지금은 삼성서울병원에 한 대가 더 도입돼 국내에 2대가 운용 중이다. 국립암센터의 양성자치료기 도입 예산은 약 480억원이었고, 삼성서울병원이 밝힌 양성자치료기 도입 예산은 1000억원 선이다. 일반인이 상상하기 힘든 규모의 치료 시설이다. 전 세계적으로도 60대가 안 되는 귀한 장비다.
치료비는 건강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되면서, 예전의 10분의 1 수준이 됐다. 암종, 치료기간, 치료횟수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100만~800만원 수준이다.
김 교수는 “최대한 건강한 간 조직을 유지시키는 데 가장 주의를 기울였어요. 임씨와 같이 만성 간변병증이 있는 경우는 낮은 백혈구·혈소판 수치 때문에 출혈이 잘 멈추지 않아 수술을 하려면 위험을 감수해야 하니까요. 그래도 치료가 잘되어 이제는 더 이상 암세포가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됐어요. 다행이죠.”
암 환자 더욱 위험하게 하는 건 ‘얇은 귀’
임씨가 양성자치료기를 통해 본격적인 치료를 받은 것은 2016년 2월부터다. 이 과정에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의사들은 가능성과 확률을 이야기하지만, 기본적으로 B형 간염 보균자는 간암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하시는 편이 도움이 될 거예요. 우리나라에 이렇게 B형 간염 보균자가 많은데, 그에 비해 경각심은 너무 부족한 것 아닌가 싶어요. 저도 그랬으니까요. 이와 함께 또 경각심을 가져야 할 곳이 있어요. 바로 언론이에요. 요즘 종편에서 의학 관련 프로그램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믿어선 안 될 이야기들이 많은 것 같아요. 암 환자는 기본적으로 귀가 얇아질 수밖에 없어요. 마음이 다급하니까요. 이 마음을 악용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일부 엉터리 프로그램도 그렇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그는 주변의 다른 암 환자들과 등산을 하거나 모임을 갖는 등 활동을 해왔는데, 불필요하게 효과도 없는 건강식품에 돈을 쏟아 붓는 사람을 적지 않게 목격했다. 효과가 좋다고 암 환자들을 유혹하는 각종 식품들에 대해 김 교수도 비슷한 의견을 말한다.
“흔히 암에 좋다는 음식 중 상당수는 몸에서 분해되는 과정에서 되레 간에 부담을 주는 경우가 많아요. 간암은 간을 보호하는 것이 첫 번째 목표인데 간을 쉬지 못하게 만들어요. 그러니 예후가 좋을 리 없죠. 환자가 어느 날 갑자기 간 수치가 나빠져서 오는 경우가 있는데, 결국 원인은 음식인 경우가 많아요.”
“그래도 난 운이 좋은 사람”
임재성씨는 그래도 스스로를 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간암이라는 장벽을 만났지만 남들보다 훨씬 수월하게 위기를 넘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비교적 일찍 암을 발견한 것이 운이 좋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덕분에 초기에 치료를 받았잖아요. 또 간암에 효과적이라는 양성자치료기를 알게 되어 혜택을 받았는데, 치료를 받기 직전에 건강보험 적용이 돼서 혜택을 많이 받았어요. 치료 과정에서 임상시험 대상자로 뽑혀 치료비 부담도 줄였고요.”
양성자치료는 아직 모든 암에 적용되지는 않지만 일부 암종을 대상으로 2015년 9월부터 국민건강보험 급여화가 됐다.
“워낙에 가무에 능했는데, 이제는 술과 이별을 해서 대신할 만한 것이 필요했죠. 그래서 드럼연주를 시작했어요. 절로 흥이 나면서 즐거운 마음이 되더라고요. 보통 큰 병에 걸리면 주변 사람들에게 왜 신경 안 써주냐, 왜 이건 안 해주냐며 화를 내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자신의 병은 자신이 챙겨야 해요. 스스로 아무것도 안 하면서 몸이 좋아지길 바라면 그게 이뤄지겠어요? 또 이런저런 주변의 유혹에 빠지지 말고 의료진의 진료에 따르는 것이 제일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치과의사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하세요?” 조윤선 문화체육부장관이 그를 보고 던진 첫 질문이었다. 장영준(張永俊·58) 회장은 대한바이애슬론연맹을 대표해 나간 자리에서 받은 그 질문이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아마 조 장관이 아니라 누구라도 비슷한 질문을 했을 것이다. 바이애슬론이라는 비인기 동계스포츠를 대표하는 자리에 치과의사라니. 더군다나 지금은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둔 중요한 시기. 그는 어떻게 동계스포츠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일까.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장영준 회장은 사실 치과의사들 사이에서는 아주 잘 알려진 인물이다. 올해 1월까지만 해도 그는 선거에서 당선된 대한치과의사협회의 부회장이었고, 그 전부터 협회 기획이사와 홍보이사 등을 경험한 회무에 밝은 사람으로 평가받아왔다. 때문에 치과계 돌아가는 사정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장영준이라는 이름 석 자를 모를 리 없다. 그를 치과계에서 유명하게 만든 또 하나의 직함이 있다. 바로 연세대학교 치과대학동문회장이라는 자리. 현재 국내에는 의대보다 훨씬 숫자가 적은 11개의 치과대학이 있고, 그만큼 의과대학에 비해 결속력이 강하다. 한때는 어떤 대학 동문회가 어느 후보를 지지하는지에 따라 협회 회장이 바뀐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이렇게 그는 뼛속까지 치과의사 그 자체다.
벽안의 한국인 서안나와의 인연
다시 그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조윤선 장관의 질문에 장영준 회장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물론 스포츠도 하나의 전문적인 분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자격이 필요한 분야는 아니잖아요. 단체를 운영한다는 것은 운동과는 별개의 이야기니까요. 치과의사들의 다양한 사회 참여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합니다. 치과의사들에 대한 인식이나 위상이 긍정적으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여러 분야에서의 활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장영준 회장의 바이애슬론과의 인연은 그리 오래되진 않았다. 올해 4월이 그 시작이었다. 바이애슬론 연맹은 곧 있을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성적 향상을 통해 외국인 선수의 귀화를 야심차게 추진했는데, 그중 한 선수인 러시아 출신의 프롤리나 안나(한국이름 서안나·32)의 후원 요청을 받게 된 것이 계기가 됐다. 바이애슬론의 주 무대가 유럽인 만큼, 활발한 활동을 위해서는 스폰서가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만 해도 바이애슬론은 제게 낯선 스포츠였죠. 그러나 제가 운영하는 의료법인 메디피움 이름으로 후원을 해달라는 선수 에이전시 측의 요청이 있었어요. 올림픽을 앞두고 있는 만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고, 또 태극 마크를 달고 뛸 선수를 돕는 일이라 기분 좋게 동의를 했죠.”
후원이 결정된 프롤리나 안나는 2009년 평창 세계선수권대회 스프린트 4위, 계주경기 1위를 차지하고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는 여자 스프린트 7.5km 경기에서 4위를 기록한 세계 정상급 선수다.
이런 그의 응원이 힘이 됐는지, 안나는 한국 바이애슬론 역사상 첫 세계선수권 메달의 주인공이 됐다. 지난 8월 27일 에스토니아 오테페에서 열린 2016 바이애슬론 하계세계선수권대회 여자 스프린트 종목에서 22분 29초 01의 기록으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다음 날 열린 여자 추발 종목에선 3위로 결승선을 통과해 동메달을 하나 더 따냈다. 평창에서의 금메달을 바라는 이들의 기대에 부응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알린 셈이다.
“안나는 결혼과 함께 잠시 은퇴했던 선수였어요. 그러다 2년 만에 복귀했는데 지난여름의 성과로 주변의 우려를 한 번에 불식시켰어요. 여성 운동선수들은 나이가 들면 남성호르몬 분비가 늘면서 오히려 성적이 더 좋아지는 경우가 있어요. 아마 안나도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후원자에서 진두지휘하는 수장으로
일각에서는 마치 용병을 사 모으듯 외국인 선수를 귀화까지 시켜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이 합당한가라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국가대표를 출전시켜야 하는 바이애슬론연맹 입장에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한다.
바이애슬론의 올림픽 출전권은 국가 순위가 기준이 되는데, 이 순위는 9번의 월드컵과 1번의 세계선수권대회를 통해 결정된다. 그런데 한국의 2015~2016 국가 순위는 25위로 22위까지만 주어지는 자동출전권을 얻기는 어려운 상황. 게다가 남자 대표의 경우 성적이 나빠 세계선수권 출전권조차 확보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결국 2016~2017 시즌에서 출전권을 확보하려면 성적을 낼 선수가 필요했다.
장 회장은 “귀화 선수를 더 확보하려고 추진하고 있는데 쉽진 않다고 들었어요. 여자 선수는 선수층이 얇아 보강이 필요하다고 하고. 이런 좋은 기량을 가진 선수들은 단기적인 성과만 내주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어린 선수들이 기량을 갖추는 데 마중물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 안현수 선수가 쇼트트랙 종목의 수준이 낮은 러시아에 가서 금메달도 따고, 러시아 선수들의 기량 향상에 기여한 것처럼, 안나도 바이애슬론 수준이 낮은 한국에서 같은 역할을 하게 되는 셈이죠”라고 말했다.
장 회장은 안나의 후원식이 열리던 날 안나의 성적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리고 후원이 결정되고 얼마 되지 않아 바이애슬론연맹 회장직에 도전하게 됐고 지난 7월 29일 열린 투표에서 제5대 대한바이애슬론연맹 회장에 당선됐다. 가장 강력한 후원자가 된 셈이다. 그 과정을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지난해 3월에 국민체육진흥법이 바뀌고 대한체육회와 국민생활체육회가 통합되면서 새누리당 염동렬 의원이 맡고 있었던 전임 회장자리가 자동으로 공석이 됐어요. 국회의원의 체육단체장 겸직 불가 의견도 있어 새 회장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들었는데 문득 욕심이 나더라고요. 아마 안나를 후원하면서 바이애슬론 매력에 빠진 모양이에요(웃음).”
그런데 문득 궁금해졌다. 이렇게 평창올림픽을 위해 애쓰고 있는 입장에서 일련의 국정농단 사태로 인해 올림픽이 마치 범죄의 온상이라도 된 듯한 지금의 상황에 대한 그의 생각이 말이다. 장 회장은 당연히 성공적 개최가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연맹과 조직위원회가 맡은 역할이 달라 세세하게 알긴 어렵습니다만, 지금의 상황이 안타까운 것은 사실이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평창올림픽은 국가적인 사업이라는 점이에요. 실제로 이번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많은 사람이 애쓰고 있고요. 이미 IOC에서도 실사를 다녀갔고, 경기 준비 진행에 문제가 없다는 의견을 받았어요. 한 차례 세계대회를 치러본 경험도 있고, 경기장도 12월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제 국민들이 관심을 가져주시는 일만 남았어요. 연맹 예산이 적어 홍보활동에 많은 한계가 있지만 좋은 성적을 내고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 계속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응원도 열심히 해주시고, 많이 보러 와주시면 좋겠어요.”
이종결합으로 대중화 앞당길 것
바이애슬론은 국내에선 어쩔 수 없는 비인기 스포츠이지만 유럽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국내의 프로야구나 프로농구에 비견될 만큼의 인기 스포츠 중 하나. 유럽 일부 국가에선 하루 24시간 바이애슬론 경기만 방영하는 방송국이 운영되고 있을 정도. 역대 올림픽 성적을 보면 독일이 가장 강국이고, 그 뒤를 노르웨이와 러시아가 뒤쫓고 있다.
장 회장은 “바이애슬론은 크로스컨트리 스키와 사격이 결합된 경기예요. 선수들은 총을 등에 맨 채로 스키를 타고 일정 거리를 달리다가, 사격장에선 사격을 겨뤄요. 바이애슬론이 인기가 있는 이유로는 두 가지 경기, 그러니까 스키와 사격을 함께 볼 수 있다는 점과 과녁을 맞히지 못하면 페널티가 주어지는 역동성이 꼽히죠. 이 밖에도 꽤 흥미로운 요소가 많아요. 한 가지 경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계주도 있고, 앞 주자를 앞질러야 하는 추적 경기도 있어요. 올림픽에서는 11개의 메달이 걸려 있는 종목이니까 비중도 꽤 높다고 봐야 합니다. 남자 5개, 여자 5개, 혼성 1개의 경기가 진행돼요”라고 설명한다.
장 회장이 바이애슬론연맹을 맡으면서 관심 갖는 것 중 하나는 바이애슬론의 대중화다. 결국 국민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이 직접 즐기는 스포츠가 되지 않고서는 인지도와 성적 모두 다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바이애슬론은 생각보다 즐길 수 있는 여지가 많아요. 꼭 스키가 아니더라도 자전거와 같은 다른 종목과 결합할 수도 있고, 사격 역시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소가 많죠. 요즘엔 레이저를 이용한 장비들도 있어 일반인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얼마 전에 대중화를 위한 연맹 차원의 행사가 있었는데, 어린아이들의 반응이 대단했어요.”
치과의사들의 다양한 목소리 듣고 싶어
그가 속한 의료법인 메디피아는 치과뿐만 아니라 의료검진센터 등 다양한 과목이 결합된 의료법인이다.
“메디피아를 시작한 시기는 1990년이었어요. 다른 과목 의사들과 의기투합해서 만들었는데, 어려움이 생겨 경매에 넘어가게 된 상황까지 처해 할 수 없이 모든 지분을 제가 인수하게 됐죠. 2000년 1월 1일에 이사장이 됐어요. 경영 정상화가 되면서 2013년에는 판교에 분점도 냈죠. 치과의사가 다른 메디컬 분야의 경영에까지 참여한다는 것이 한계도 있고 공부도 필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조직의 힘과 팀워크 그리고 소통의 중요성을 알게 됐어요.”
그가 최근에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 중 하나는 바로 치과의사를 위한 일종의 사회운동, ‘행복한치과만들기 준비위원회’다. 그는 이 위원회를 통해 철학자 강신주를 초청, 대담을 진행한 적도 있고, 청년이나 여성 치과의사들과의 모임도 진행했다.
“치과의사들에게 ‘우리는 행복한가’라는 화두를 던져보고 싶었죠. 치과의사들이 불행하다고 느낀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다양한 계층의 치과의사들과 터놓고 이야기해보고 싶었어요. 젊은 치과의사들이나 여성 치과의사들의 생각은 어떤지, 동료로서 선배로서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다양한 시도들을 했습니다.”
이런 모임에서 여러 직함을 갖고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도 그가 놓지 않는 것은 치과의사라는 스스로의 정체성이다. 이제는 직원이 300명인 의료법인의 대표라면 진료를 쉴 법도 한데, 아직도 매주 환자를 대면하고 직접 진료하는 활동을 멈추지 않는다. 이유에 대해 묻자 간단하게 대답한다.
“배운 것이 이것이고, 치과의사니까요.”
뜨거운 여름만큼이나 열광하게 했던 리우올림픽이 막을 내렸다. 많은 선수가 그동안 피땀 흘려 노력했던 결과를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 메달을 따고 못 따고, 메달의 색깔을 떠나 그동안 수고했던 모든 선수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스포츠는 국경과 사상이나 이념 그리고 종교를 떠나 모두를 아우르는 가장 순수한 경기다. 말 그대로 지구촌의 축제다. 메달의 색깔에 따라 환희가 오가지만, 아쉽게 4위에 그쳐 메달을 놓친 경우도 있다. 우리의 국민요정 리듬체조 손연재 선수가 그렇고 여자골프 양희영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들의 도전은 아름답다. 최선을 다했고 후회 없는 경기를 펼쳤다. 모든 국민도 아낌없는 응원을 보냈다. 그들이 있었기에 그동안은 참 행복했다. 누구에겐가 기쁨을 주고 희망을 주는 것을 참 보람된 일이다. 아니 누구 때문에 내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은 더 좋은 일이다. 우리가 함께 살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번 올림픽에서 많은 교훈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교훈은 포기하지 않는 정신이었다. 펜싱의 박상영 선수가 막판 대역전극으로 에페 개인전에서 헝가리 선수 게라 임레 선수에게 14대 10의 패배위기를 막판에 뒤집으며 금메달을 거머쥔 것은 감동이었다. 패색이 짙어가는 그 위기에서 ‘나는 할 수 있다’는 주문을 자신에게 외우며 뛰어나가는 그 정신은 적진을 향해 달려가는 용사의 모습 그 자체였다.
사격에 진종오 선수 또한 집념의 승리였다. 남자 50M 권총 결선에서 9번째 탄환이 만점 10.9에서 6.6을 기록한 것, 이렇게 점수가 나와 버리면 가망이 거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다. 필자도 고등학교 때 사격선수여서 그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타킷의 검은 중심을 벗어나 버리면 스스로 좌절하고 포기하기 마련이다. 그때부터는 불안해지고 집중력이 떨어져 그다음 점수도 좋은 점수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진종오 선수는 역시 특등 사수다웠다. 그 실수를 탁월한 집중력으로 극복하고 드디어 금메달을 확보한 것이다.
필자가 고등학교 시절 공기소총 충청북도 대표 선수로 태릉 선수촌에서 전국대회를 위해 보름 동안 합숙한 적이 있었다. 그때 국가대표 코치로부터 지도를 받았는데 그 교훈이 지금도 나의 인생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언제든 누구든 실수는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실수에 집착하다 보면 더 큰 어려움에 휩쓸려 버릴 수가 있다. 그때 마인드 컨트롤이 필요하다. 국가대표 코치로부터 배운 그 한마디다 ‘이미 날라가버린 탄환은 잊어버려라’ 이말 한마디는 나에게도 큰 힘이 되었고 이번 진종오 선수에게서도 바로 입증이 되었다.
결국, 진종오 선수는 그 충격적 실수를 이겨내고 금메달을 따 사격 3연패를 달성했다. 실수를 이겨내고 다시 도전하는 힘! 그것이 새로운 세계를 여는 이정표가 된다. 그 교훈은 이번 올림픽에서도 보았듯 바로 는 그 말과 연결된다. 올림픽이 주는 크고 작은 감동 속에는 이러한 교훈이 있어 어떠한 드라마 보다도 짜릿한 맛이 있지 않나 싶다.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은 잊어버려라. 그리고 끝까지 포기하지 마라...’
? 미국사회 한 번 믿어보자 안 믿고 살려니 안전불안증 생기겠다 ” 마음먹으니 사회란 한 구석에서는 늘 사건사고가 있는 거로 이해가 되었다, 그 후로는 격주로 전화하면서도 서로 걱정하는 일은 없어졌다.
뜨거운 여름만큼이나 열광하게 했던 리우올림픽이 막을 내렸다. 많은 선수가 그동안 피땀 흘려 노력했던 결과를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 메달을 따고 못 따고, 메달의 색깔을 떠나 그동안 수고했던 모든 선수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스포츠는 국경과 사상이나 이념 그리고 종교를 떠나 모두를 아우르는 가장 순수한 경기다. 말 그대로 지구촌의 축제다. 메달의 색깔에 따라 환희가 오가지만, 아쉽게 4위에 그쳐 메달을 놓친 경우도 있다. 우리의 국민요정 리듬체조 손연재 선수가 그렇고 여자골프 양희영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들의 도전은 아름답다. 최선을 다했고 후회 없는 경기를 펼쳤다. 모든 국민도 아낌없는 응원을 보냈다. 그들이 있었기에 그동안은 참 행복했다. 누구에겐가 기쁨을 주고 희망을 주는 것을 참 보람된 일이다. 아니 누구 때문에 내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은 더 좋은 일이다. 우리가 함께 살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번 올림픽에서 많은 교훈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교훈은 포기하지 않는 정신이었다. 펜싱의 박상영 선수가 막판 대역전극으로 에페 개인전에서 헝가리 선수 게라 임레 선수에게 14대 10의 패배위기를 막판에 뒤집으며 금메달을 거머쥔 것은 감동이었다. 패색이 짙어가는 그 위기에서 ‘나는 할 수 있다’는 주문을 자신에게 외우며 뛰어나가는 그 정신은 적진을 향해 달려가는 용사의 모습 그 자체였다.
사격에 진종오 선수 또한 집념의 승리였다. 남자 50M 권총 결선에서 9번째 탄환이 만점 10.9에서 6.6을 기록한 것, 이렇게 점수가 나와 버리면 가망이 거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다. 필자도 고등학교 때 사격선수여서 그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타킷의 검은 중심을 벗어나 버리면 스스로 좌절하고 포기하기 마련이다. 그때부터는 불안해지고 집중력이 떨어져 그다음 점수도 좋은 점수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진종오 선수는 역시 특등 사수다웠다. 그 실수를 탁월한 집중력으로 극복하고 드디어 금메달을 확보한 것이다.
필자가 고등학교 시절 공기소총 충청북도 대표 선수로 태릉 선수촌에서 전국대회를 위해 보름 동안 합숙한 적이 있었다. 그때 국가대표 코치로부터 지도를 받았는데 그 교훈이 지금도 나의 인생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언제든 누구든 실수는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실수에 집착하다 보면 더 큰 어려움에 휩쓸려 버릴 수가 있다. 그때 마인드 컨트롤이 필요하다. 국가대표 코치로부터 배운 그 한마디다 ‘이미 날라가버린 탄환은 잊어버려라’ 이말 한마디는 나에게도 큰 힘이 되었고 이번 진종오 선수에게서도 바로 입증이 되었다.
결국, 진종오 선수는 그 충격적 실수를 이겨내고 금메달을 따 사격 3연패를 달성했다. 실수를 이겨내고 다시 도전하는 힘! 그것이 새로운 세계를 여는 이정표가 된다. 그 교훈은 이번 올림픽에서도 보았듯 바로 는 그 말과 연결된다. 올림픽이 주는 크고 작은 감동 속에는 이러한 교훈이 있어 어떠한 드라마 보다도 짜릿한 맛이 있지 않나 싶다.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은 잊어버려라. 그리고 끝까지 포기하지 마라...’
1. 가락지를 낀 용의 꿈
필자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 나의 할아버지는 용꿈을 꾸셨단다. 호사다마라 했던가?
그런데 자세히 보니 용의 다리에 가락지가 끼어 있어 그것이 무엇인지 걱정스러웠다고 하셨다. 그 덕택에 필자가 양자로 가서 잘 살 수 있었음에도 할아버지는 당신 손자를 남겨 두는 결심을 하고 나의 사촌 형을 양자로 보내셨다고 한다. 필자는 서울에서 식품사업을 하시던 아버님 슬하의 5남 2녀 중 장남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으나 겨우 걸음마를 하던 다음 해에 바로 6.25 사변으로 인해 어머니는 필자를 들쳐 메고 아버지와 함께 피난길에 올랐는데 기차를 타고 남으로 가던 중 인민군 비행기들의 기총사격에 전 승객이 정신없이 숲 속으로 피신했다가 다시 올라타고 매달려서 가는 행렬이었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 왼쪽 다리를 약간 삐어 낮에는 잘 놀고 밤마다 아프다고 했으나 시골에서는 당시 마땅한 병원도 없었으니 아이의 꾀병이라고 그냥 넘긴 것이 화근이 되어 2~3세 때부터 심한 골수염을 앓게 됐다.
그러나 신이 나를 살리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마침 당시 부산에 전후 서독에서 파견된 서독병원이라는 것이 부산 대신동에 있어 그곳에서 진료를 받고 바로 완쾌 상태로 퇴원하게 되었다. 당시 나이 8살이었는데 병원에서는 통원치료를 하던지 약 1년간 입원을 시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학교에 갈 나이라 입학을 시키고 통원치료를 결정한 것이 화근이 되어 아직 후유증을 앓고 있어 보행이 불편하다. 어린 나이에 너무 활발하게 놀다 보니 환부가 제대로 치료되지 않고 후유증이 남게 된 것이었다.
2. 학문의 길
초등학교 시절 담임선생에게 통지표의 국어 과목에 ‘수’가 없으니 ‘수’를 좀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말해 국어에 ‘수’를 받을 정도의 수준이었지만 필자는 대체로 우수한 학생 측에 들었다. 그러나 당시 진해에서 일류중학이라는 진해중학교에 응시하여 입학시험을 치르고 나서 혼자 고민에 휩싸이기 시작하였다. ‘과연 합격할 수 있을 것인가’ 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었다. 다행히 우여곡절 끝에 거의 꼴찌 수준으로 겨우 합격하였다.
합격 이후엔 학문에 뜻을 둔 공자와 비슷한 나이 15세에 공부의 즐거움을 깨우치기 시작하였는데 꼴찌 수준의 합격이 필자를 자극했던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1학년 첫 학기부터 상위권의 수준으로 시작했던 필자는 중학 시절 내내 상위권이었다.
고등학교 때도 공부를 잘해 수석으로 졸업했으나 가정 사정이 여의치 못해 대학 진학을 잠시 미루고 닥치는 대로 일해야 했다. 장남인 필자는 4명 동생을 돌보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필자는 일하는 와중에 지방 행정직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마침 동생들이 대학 공부를 시작하고 어느 정도 사회생활에 익숙해질 무렵 지난 7년간 접었던 대학 공부를 시작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1970년 당시 5급을류 지방 공무원 월급은 약 1만 원 정도로 집 월세 충당하는 정도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사직하고 학원 강의를 하던 시기에 배움의 필요성을 통감하게 된 것이다.
필자는 상대에 진학하여 공부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를 축적하는 길이 꿈을 실현하는 첩경임을 생각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며 학문을 하기 위해서는 대학을 꼭 가야 하는지 대학 생활을 통해서 이를 확인하고 싶다는 강한 집념 때문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7년이 지나서 진학한 대학 4년은 꿈같은 세월이었다. 엄청난 지식을 습득하게 되고 생활 중에 터득한 사업 경험을 이론적으로 정립하는 계기도 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물 안의 개구리가 세상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전기가 되었던 것 같다. 한국경제의 흐름을 읽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방향설정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대학 4년은 학문의 즐거움을 알게 된 시기기도 했다. 이런 즐거움으로 수석 졸업할 수 있었지만 한편에선 미래의 진로에 대한 걱정이 생겼다. 그러나 아직도 동생들 학업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학계로 나아가고 싶은 생각이 맘은 접고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 다시 산업전사로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먼 훗날 이론과 실제를 최대한 일치시키는 교수가 될 수 있으리라는 꿈을 안고 현실 속의 길을 찾기로 하여 당시 최고의 보수를 주는 대기업 건설회사에 취업하게 되었다.
3. 중동 건설 현장을 누비면서 아라비아 상인의 숨결을 느끼다.
필자가 취업한 시기에 건설회사는 한참 중동 붐이 일어 대졸 신입사원에게 최고의 월급을 주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당시 중소기업이었던 한국유리(주) 기획실에 동시 합격하였지만 모든 사람이 추천한 건설 회사로 취업하였다. 희망하던 기획실이 아닌 자재부로 인사명령이 났다. 기왕이면 큰 뜻을 펴기 위해 나는 중동근무를 지원하였더니 사우디아라비아 TEP 본부 자재구매 담당으로 명령을 내주었다. 여기서 사우디아라비아 상인들의 상술의 대단함을 깨우쳤고 향후 중동국가와 업무상 협상하는 기술을 배우는 전기가 되었다. 영어가 능통하여 구매업무도 그리 어렵지 않게 진행할 수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 말도 좀 익혔다. 운전 기술도 익히는 기회가 되었다.
1980년대 초 리야드 시내는 상가도 크게 형성되지 않았다. 따라서 건설용 자재를 구매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아서 해외에서 구매하여 조달하였으나 급한 자재는 현지에서 조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공사 팀으로부터 자재 조달 독촉을 받았던 독특한 자재 A가 생각난다. 당시 필요한 자재는 상권이 제대로 형성되어 있지 않아 수소문하여 어느 주택가에서 상호를 달고 있는 공급업자를 찾았다. 급한 김에 대충 가격 협상을 하고 공급을 하고 나서 보니 약 3배나 비싸게 구매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중동국가의 무표정한 협상력 앞에서는 국내 업자는 한순간 실수하면 엄청난 바가지를 쓴다는 사실을 터득하게 되었다.
모든 물건을 생산하지 않고 수입해서 판매하는 까닭에 부르는 것이 값이 되고 모르면 속아 넘어가게 되어 있는 곳이 중동이었다. 이후 상대와 협상 시에 얼굴에 표정을 나타내지 않는 기술을 터득하여 많이 활용하고 있다.
그런대로 사우디아라비아 생활은 재미는 있었지만 33세에 결혼하여 바로 해외근무를 하게 되어 아직 아이가 없는 관계로 회사에서는 연장근무를 요청하였지만 귀국을 결심하였다.
4. 세계 제1의 중공업 회사를 만들어내다
대학 재학 중에 아산학자금을 받아 공부했던 연고로 인하여 귀국 후에 현대중공업(주) 플랜트 사업본부 계약관리부에 근무하게 되었다. 구매부서의 업무도 재미있고 할 만했지만 주위에서 바라보는 의혹의 눈초리는 아주 거북스러웠다. 따라서 수출과 관련된 업무를 하려고 하던 차 현대중공업(주) 계약관리부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당시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현대에서 정주영 회장과 함께 일을 하던 한유동 전무가 담당 중역이었다. 필자가 계약관리부로 가게 된 것도 한 전무의 뜻이었지만 직장 생활을 하면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었다. 당시 계약서의 핵심 사항을 짚어가면서 일을 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기도 하였지만 리더십도 출중하여 회사의 임직원들이 많이 존경하는 그런 분이었던 것 같다.
1981년 만 하더라도 한 달에 한 번 정도 쉴 수 있었고 그 외는 업무에 전념하는 시간이었다. 당시 필자는 혼자 회사에서 제공한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업무에 전념하였다. 우리는 현대가 이미 국가적인 회사였으므로 현대가 잘되는 길이 우리나라가 잘되는 길이라는 믿음으로 열심히 근무하였다.
계약관리부서는 요즘 PM 부서와 같은 역할을 하는 조직으로 회사의 대표이사로부터 프로젝트에 대한 전반적인 위임을 받아 사장을 대신하여 업무를 수행하는 역할을 한다.
미국, 영국 등 구미 국가를 위시하여 호주, 인도, 중국 등 전 세계적인 프로젝트를 총괄관리하다 보니 각 국가 및 회사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해양플랜트 분야의 업무를 수행하면서 선진국의 기업들과 계약과 협상 업무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우리의 업무도 세계화의 수준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회의하면서 영문으로 회의록 (MOM)을 만들고 노트북이 생기면서 회의 시 바로 회의록을 작성하여 상호 서명하는 수준까지 이르니 어떤 계약과 협상 업무도 가능하게 되었다. 단지 기술적으로 좀 미진한 부분은 세계적인 설계회사와 하도급 계약을 하던지 합작회사를 설립하여 경영하는 식으로 보완해 나갔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어느 사이 우리도 모르게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선박을 만드는 회사로 성장하게 되었고 조선업 세계 1위 회사로 성장해 나아갔다.
초기 단계에 인도 ONGC사로부터 수주한 Win, Wips 공사는 실행률이 85% 정도가 되는 수익이 많이 나는 프로젝트였다. 필자는 개인적으로도 클레임 보험사고 처리 등의 업무에서 600만 달러 이상의 순익을 창출하는 데 기여했다.
해양사업본부는 인도 ONGC사로부터 인정을 받아 약 25년간 매년 지속해서 프로젝트를 수주하여 한때 ONGC사업본부라는 호칭으로 불리기도 하였었다. 이와 관련 인도는 미국, 프랑스, 일본 등에 발주하지 않고 한국의 현대에게 지속적인 발주를 함에 따라 위 기간 약 20억 달러 이상의 예산을 절감하는 성과를 내기도 하였다.
5. 함께하여 행복하다
먼 길을 갈 때는 함께 가라고 했다. 필자는 사랑하는 5남매들과 함께하여 행복했다.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필자가 존재할 수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우리 오남매는 어려운 가정 사정으로 집도 절도 없는 상황임에도 함께 노력하여 다 대학을 졸업한 자랑스러운 사람들이다.
필자 집안에 행복을 몰고 온 사람은 어쩌면 나의 아내인 것도 같다. 아내와 결혼하자마자 5남매의 장남인 필자를 도와 얼마 되지 않은 월급을 쪼개 동생들 학업을 지원하고 집안을 평화롭게 이끌어왔다. 회사 야유회 때 부부동반이라 같이 가자고 하였더니 옷이 없어 함께하지 못하겠다고 이야기했는데, 순간 너무나 미안했던 기억이 새삼스럽게 난다.
어려운 상황에서는 아들 둘은 이제 장성하여 결혼하여 독립적인 생활을 하고 있으니 이 또한 큰 행복이라 생각한다. 손자를 보고 손자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으니 이 즐거움 또한 어디에 비길 수가 있을까? 며느리가 수시로 전화로 안부를 물어오는가 하면 손자가 커가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보내 우리 부부를 즐겁게 해주고 있다.
6.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을 찾아서 도전
대기업 30년 중소기업 10년의 직장 생활을 하다 보니 양자의 주요한 차이는 도덕성에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필자가 앞으로 살아가는 방향은 도덕성을 지키면서 살 수 있는 방향이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려 개인사업자 등록을 하여 필자만의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필자가 스스로 도덕성을 허물지 않는 한 누구도 필자에게 도덕에 반하는 일을 시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에서 외자 유치 3500만 달러를 성사시킨 필자는 이를 회사가 갚지 못할 시 처할 수 있는 어려움을 생각하면서 도덕성이 모자란 그런 결정을 했는데 당시 이런 생활을 접기로 했다.
필자는 전문성이 있으면서 혼자서 할 수 있는 국제계약 컨설팅을 하는 일이다. 틈틈이 시간 나는 대로 한양대 및 중앙대나 전문 교육기관, 한국플랜트협회, 건설전문공제조합 등에서 국제계약 관련 강의를 한다. 신문사에서 집필 요청이 있으면 글을 쓰기도 한다.
강의는 대학 졸업 당시 학계로 나가고 싶었던 꿈을 실현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루에 7시간 강의를 하는 필자를 보고 아내는 철인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강의 자체를 즐기다 보니 강의를 시작하면 나는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필자가 또 하나 사명감을 느끼는 일이 있다. 100세 시대를 맞이하여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창출하는 일이다. 원래 국가가 앞서서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국가 발전의 새로운 동력으로 삼아야 할 일이나 현재 국가가 해주기를 기다릴 수 없는 실정이다.
서울시에서 실시하는 SBA의 창업 닥터 과정을 이수하면서 청장년들의 창업을 지원하는 창업닥터로서 자격을 취득하고 KDB 시니어브리지 센터 1기 과정 도심권 인생설계 1기과정 등을 수료하면서 많은 뜻을 함께하는 좋은 동지들을 만나게 되었다.
개인적인 꿈도 있다. 할아버지의 이름을 붙여 장학회를 하나 만드는 것이다. 이름하여 가칭 ‘태성(太晟)장학회’ 다. 가난으로 인하여 젊어서 배우지 못하는 후손이 없도록 해두고 싶은 생각으로 오래 동안 머릿속으로 구상하고 있다.
바야흐로 100세 시대다. 시니어들이 건강한 삶을 살면서 국가와 사회를 위해, 또 자기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또 다른 이상 사회를 꿈꿔가는 것은 필자의 또 다른 꿈이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 인생의 최고의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
화이트 타이거: 최강 전차군단(White Tiger, Белый Тигр)
러시아의 카렌 샤흐나자로프 감독이 만든 전쟁 영화이다. 주연에 비탈리 키시쳰코, 알렉세이 베르트코프, 블라디미르 일린이라는 사람들이 나오지만 알려진 배우들은 아니다.
배경은 2차 세계 대전이다. 소련이 베를린을 향해 진군해 나가던 시기였다. 소련군은 탱크에서 온몸에 화상을 입은 군인 한명을 발견한다. 신체의 90% 화상을 입게 되면 대개 사망하는데 이 병사는 놀랍게도 빠른 회복을 보인다. 그래서 소위로 임관되어 다시 탱크에 타게 된다. 이 무렵 독일군은 ‘화이트 타이거’라는 탱크가 신출귀몰하며 소련군 탱크들을 박살 낸다. 일반적인 탱크는 갈 수 없는 늪지대도 다니고 숨어 있다가 기습 공격도 해와 소련군이 베를린 진격하는데 큰 장애물이었다.
화상에서 복귀한 소련군 탱크병은 장교가 되어 화이트 타이거를 잡을 임무를 부여 받는다. 탱크들은 사람처럼 생명이 있어 탱크 세계에도 신이 존재하며 자신에게 화이트 타이거를 제거할 임무를 줬다며 몰두한다. 직속상관은 이 장교가 특별한 영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작전을 맡긴다. 과연 화이트 타이거의 기습 작전을 미리 알고 대비하여 대승을 거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이트 타이거는 또 다시 종적을 감춘다. 소련군들은 화이트 타이거가 늪에 빠져 가라앉았을 거라며 안심하지만, 눈으로 보지 않은 이상 화이트 타이거는 아직 살아있다며 집요하게 추적한다. 폐허가 된 어느 마을에 들어갔을 때 탱크는 보이지 않았지만,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결국 건물 속에 위장해서 숨어 있던 독일군 탱크들을 박살낸다.
그러는 와중에 독일군은 무조건 항복 문서에 서명한다. 전쟁은 끝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탱크 장교는 화이트 타이거에 대비해야 한다며 탱크를 다시 손질한다.
이 영화는 전쟁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반길만한 작품이다. 모든 것이 실감나게 찍었다. 탱크들도 그렇고 포 사격으로 부서지는 장면 등도 그럴 듯하다.
드물게도 러시아 영화하는데서 더 관심이 간다. 러시아 영화는 음습하고 우울해서 미장센이 그럴 듯하다. 특히 전쟁 영화가 그렇다.
90% 화상으로 죽게 된 병사가 다시 살아났을 때는 몸 바쳐 적을 무찌르겠다는 오기가 생길 것이다. 온몸이 화상이니 살아 있어 봐야 존재 가치도 못 느낀다. 오로지 적을 무찌르려는 생각만 있다 보면 남들이 보지 못하는 신통력도 셍길 수 있을지 모른다.
독일군들은 패전했으나 뒷얘기가 의미심장하다. 사람들은 독일 사람들을 악마라고 욕하겠지만, 전쟁은 다윈의 진화론처럼 인류에게는 필요악이며 자기네들이 악역을 맡았을 뿐이라고 한다. 누구나 싫어하는 유대인들을 대신 학살해 줬다고도 말한다. 유럽 통일의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시도는 해봤다고 자위하는 것이다.
패전국인 일본인들도 그런 생각을 하는 모양이다. 아베를 비롯한 일본 우익 정치가들이 옛 제국주의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야욕을 키워가고 있는 점은 눈여겨볼 일이다.
지난 5월 22일 도쿄(東京)에서 막을 내린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여자 배구 세계 예선전에서 한국은 4승 3패로 올림픽행 티켓을 거머쥐었다. 순위는 출전 8개국 가운데 4위였지만 앙숙 일본을 3-1로 이긴 데다 올림픽 출전이 확정된 뒤 열린 경기 패배를 빼면 순위가 더 올라갈 수 있었기에 스포츠 팬들은 23일 개선한 김연경 등 선수들을 열렬하게 환영했다.
이때 이후 “한국 여자 배구가 40년 만에 다시 올림픽 메달에 도전한다”는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 기사들에는 ‘나는 작은 새’ 조혜정 관련 내용이 빠지지 않았다. 여자 배구 관련 검색어 수준이었다.
잠시 40년 전으로 시곗바늘을 돌려 본다.
1976년 한국 스포츠의 최대 관심사는 7월 17일부터 8월 1일까지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제21회 여름철 올림픽이었다. 4년 전 제20회 뮌헨 대회에서 올림픽 무대에 처음 나선 북한이 사격에서 금메달 1개, 복싱에서 은메달 1개, 여자 배구 등에서 동메달 3개를 딴 반면 한국은 은메달 1개(유도 재일동포 오승립)에 그쳤다. 충격이었다. 한국으로서는 몬트리올 올림픽을 앞두고 북한과의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지상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 무렵 올림픽 등 국제종합경기대회 선수단 구성 원칙은 ‘소수 정예’였다. 나라의 경제력 때문에 메달을 딸 수 있는 종목만 보낸다는 것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구성된 한국 선수단은 임원 22명과 선수 50명으로 뮌헨 대회를 약간 웃도는 규모였다. 출전 종목은 남녀 배구와 레슬링, 유도, 복싱, 사격이었다. 사격은 1978년 서울에서 열릴 예정인 세계선수권대회 개최국으로서의 위상을 고려해 뮌헨 대회에 이어 또다시 참가하게 됐다. 결과적으로 메달을 따지 못했지만.
1970년대 한국 스포츠를 관통한 김택수 대한체육회 회장의 ‘선(先) 체력 후(後) 기술’ 방침은 시대 상황으로 보아 당위성이 있었다. 그러나 다소의 진통도 있었다. 몬트리올 올림픽을 불과 두 달여 앞둔 4월 25일 여자 배구 대표팀 주 공격수 박인실이 선수촌에서 이탈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무렵 대한배구협회를 맡은 이낙선 회장은 올림픽 메달을 목표로 후원회를 조직하고 발전 기금을 마련하는 등 적극적인 지원을 했다.
그리고 몬트리올 대회를 앞두고 1964년 도쿄 대회에서 일본 여자 배구를 올림픽 금메달로 이끈 다이마쓰 히로부미(大松博文)를 초빙해 김한수 감독, 전호관 코치와 함께 대표팀을 지도하도록 했다. ‘동양의 마녀’라는 신화를 만든 다이마쓰는 ‘회전 리시브’ 등 혹독한 훈련의 대명사였다. 강훈련이 거듭되는 가운데 선수들의 반발이 있었고 결국 박인실이 무단으로 퇴촌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박인실은 당시로는 174cm의 큰 키에 뛰어난 점프력과 강타를 지닌 간판 공격수였다. 이 사건은 당시 상당한 파문과 논란을 일으켰고 결국 협회는 박인실을 제명했다. 여자 배구로서는 큰 손실이었지만 ‘이 없으면 잇몸으로 버틴’ 여자 배구는 동메달의 값진 성과를 거뒀다.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여자 배구가 동메달로 가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8개국이 출전한 가운데 조별 리그 B조에 속한 한국은 첫 경기에서 이 대회 준우승국인 소련과 접전을 펼친 끝에 1-3으로 졌다. 그러나 이후 쿠바와 동독을 풀세트 접전 끝에 각각 3-2로 물리치고 조 2위로 준결승전에 올랐다. 한국은 조별 리그 A조 1위이자 대회 우승국인 일본에 0-3으로 졌으나 3위 결정전에서 헝가리에 3-1(12-15 15-12 15-10 15-6) 역전승을 거두고 동메달을 거머쥐었다.
한국 스포츠 사상 첫 여자 올림픽 메달리스트의 영예를 안은 선수는 신세대 스포츠 팬들에게도 이름이 꽤 알려져 있는 조혜정과 이순복, 유경화, 유정혜, 정순옥, 마금자, 장혜숙, 이순옥, 박미금, 변경자, 백명선, 윤영내 등 12명이다. 이들 가운데 유경화와 유정혜는 공격력이 있는 세터로 ‘더블 세터’를 이뤄 주 공격수인 조혜정과 함께 메달 획득에 크게 이바지했다.
조혜정은 숭의여고를 졸업해 서울 사람으로 잘못 알고 있는 스포츠 팬들이 적지 않은데 부산이 고향이다. 부산 봉래초등학교 5학년 때 키가 크다는 이유로 배구 선수로 뽑혔다. 그렇지만 부산여중을 졸업한 뒤 키가 작다는 이유로 고교 진학에 어려움을 겪는 등 설움을 받게 된다. 운동선수들 가운데에는 이런 사례가 심심찮게 있는데 이럴 때 대부분의 선수가 하는 말이 있다. “초등학교(중학교) 때 키가 지금 키다.” 그리곤 예외 없이 웃는다.
어렵사리 진학한 숭의여고 졸업을 앞두고 또 키 얘기가 나왔다. “저렇게 작은 애는 실업에서 못 써먹어.” 어렵사리 국세청에 입단했고 전국대회에서 보란 듯이 MVP로 뽑혔다. 아마추어 시절 실업 배구는 국내 최고 무대였다. 그런데 국가대표 선수 선발에서 몇 차례 탈락했다. 이번에는 “키가 작아. 국내용이야”이라는 얘기가 나왔다.
일반 여성으로도 크지 않은 키인 163cm의 조혜정이 어떻게 올림픽 동메달 국가의 주 공격수로 활약할 수 있었을까. 선수 시절 그의 활약상을 기억하는 올드 팬이라면 남자 선수 못지않은 점프력을 첫손가락에 꼽을 것이다. 달려오면서 시도하는 점프의 높이가 60cm나 됐다. 점프력으로 170cm대 공격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
올림픽 동메달에 가려 있지만 조혜정은 1974년 세계여자배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을 3위로 이끌었다. 2016년 현재 세계선수권대회 최고 성적이다. 이에 앞서 한국은 1967년 대회에서도 3위를 했으나 이 대회에는 여자 배구 강국인 소련을 비롯해 동유럽 나라들이 몽땅 빠진 ‘반쪽 대회’였다. 1973년 우루과이에서 열린 제1회 여자 배구 월드컵에서는 MVP로 선정됐다. 한국은 페루를 3-0으로 누르고 3위를 차지했다. 동메달 나라에서 MVP가 나온 것이다. 그의 뛰어난 경기력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조혜정은 몬트리올 올림픽 이듬해인 1977년 이른 나이에 국내에서 은퇴한 뒤 이탈리아에서 2년 동안 선수 겸 코치로 뛰었다. 테니스의 이덕희 등 여자 운동선수의 외국 진출 사례가 손에 꼽을 정도인 시절이었다. 여자 배구 선수로서는 외국 진출 1호로 리우 올림픽 세계 예선에서 맹활약한 김연경(터키 리그)의 대선배다.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뒤 현대건설 여자 배구단 코치 등 지도자 생활을 했다. 그런데 그의 이력에 특별한 내용이 있다. 35세 적지 않은 나이에 수원대학교 체육학과에 입학한 것이다. 야구 팬들이라면 바로 알 수 있는 조창수 전 프로야구 삼성 라이온스 감독대행과 결혼한 뒤였다. 체육 이론을 공부하고 싶었단다.
이런 그의 적극적인 자세는 2010년 GS칼텍스 여자 프로 배구단 사령탑 선임의 배경이 됐다. 한국 프로 스포츠 사상 첫 여성 감독이라는 특별한 기록이 그의 이력에 추가됐다.
조혜정은 부부 스포츠 커플에 두 딸 윤희와 윤지가 프로골퍼이니 이만한 스포츠 가족을 찾기도 어렵다.
>>>글 신명철 편집위원, 전 편집국장 smc6404@naver.com
동생을 업고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외가에 가는 어머니를 필자는 작은 보따리를 들고 따르고 있다. 그때 필자는 7세 정도 였을까 아직 국민학교를 안 가는 나이였다. 외가에 가면 남의 집 문간방에 외할머니가 혼자 사시고 계셨는데 외할머니는 단아고 조용했다.
외가가 단칸방에서 살아야 할 정도로 어려웠던 이유는 필자의 외할아버지가 독립운동가였기 때문이다. 외할아버지가 몇 번의 옥고를 치르면서 가정 형편은 몰락한 것이다. 외삼촌도 외할아버지를 따라 독립운동 하다 어디선가 돌아갔다고 한다. 외할머니는 아들이 죽은 후 손녀 셋을 키우다 시집 보내고 자신이 의지할 곳이 없어 아들이 하나인 것에 대한 회한이 많으셨다고 한다. 외할머니는 우리 집으로 오셔서 사시다가 돌아가셨다.
외할아버지 함자는 이용기다. 전북 남원군 사매 대신리 사람이다. 1919년 4월 3일 이석기, 조동선 등이 주동하여 전개한 덕과면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원래 이날은 일제 치하에서 매년 행해지던 식수기념일 행사가 있었다. 당시 덕과면장인 이석기는 일제의 식민 통치에 불만을 품고 면직원 조동선 및 면내 유지들과 비밀 회의를 통하여 이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이날 신양리 뒷산의 도화곡에는 이용기를 비롯하여 800여명의 식수기념일 행사에 참여하였고, 헌병 주재소 소장과 보조원들도 점심식사에 초청되었다. 이석기는 여기에 참가한 면민들에게 탁주를 대접한 후 독립만세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이용기, 조동선, 이풍기, 이석화, 복봉순 등이 호응하여 식수기념일 행사장은 삽시간에 독립만세시위장으로 변하였다.
너무나 돌발적인 일 이었기 때문에 이 행사장에 참여했던 헌병주재소 소장도 어쩔 바를 몰랐다. 이에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남원군_전주의 도로를 따라 사매면 오신리에 있는 헌병분견소를 시위행진 하였다. 그는 사율리를 지날 무렵 이석기의 격문 낭독으로 더욱 사기가 충천한 시위군중과 함께 현병주재소 앞 큰길가에 도착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때 남원읍에서 응원 출동한 헌병분대장과 무장군인이 자동차로 도착하자 사태가 긴박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석기와 조동선이 자진 체포되어 그는 이날 시위군중과 함께 무사히 귀가 하였지만, 그 다음 남원 장날을 이용하여 이형기. 방극용. 형갑수. 이용기. 유창근. 천년도. 김해근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날은 전날의 식수기념일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가 체포된 덕과면 면장이자, 그의 6촌형인 이석기가 남원읍으로 호송되는 날이었기 때문에 군민의 분노는 더욱 컸다.
4월 4일 정오경 그는 광한루에 모인 1000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 만세를 외치며 남문과 시장을 거쳐 헌병 분견소로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이 때 미리 장날을 대비하여 헌병과 수비대 병력을 증원 받아서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던 일제는 무차별 사격을 가 하였으며, 시위군중은 많은 사상자를 낸채 해산하였다.
그는 이후 일제의 검속 때 체포되어 이 해 5월 9일 광주지방법원 남원 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루었다. 몇차례 번복된 옥고에 병이 들어 결국 37세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다.
〔피고 이 형기, 이 성기, 이 용기는 그의 친족인 전라북도 남원군 덕과면 면장 李 奭器가 주모자가 되어 군내 면민을 선동하여 조선독립운동을 함으로써 大正 8년 4월 3일 남원 헌병분대에 유치 당 했던 일로 인하여 피고등은 또 다시 조선독립시위운동을 개시, 집단으로 헌병분대에 殺到하여 이를 탈출 시키려 기도, 그 날밤 이 성기의 집에서 회합하고 李氏一家門을 권유, 대집단으로 조선독립만세운동을 벌이도록 할 것을 모의 했던 것으로 동월 4일 아침 피고 이 용기(일명 斗器)는 자기 집에서 太極旗 및 「大韓獨立 巳梅面」이라고 크게 쓴 綿布製 한폭을 만들어 달고 동년 상오 7시경 李氏族 20여명을 집합시켜 놓고 말했던바 일동이 이에 찬성할 뜻을 표하자 이 용기는 먼저 군중들 몰래 남원으로 갔음.
마침 장날을 이용, 동조자들을 규합하고 피고 이 형기,이 성기는 동일 하오 1시경 같이 남원에서 만나 동시장에 많이 모인 良民을 향해 곤봉을 휘두르고 혹은 난폭한 언동으로 조선독립을 위한 만세를 외치도록 강요 선동하였음.
피고 유 창근, 김 해근, 천 년도는 같은 날 남원 북시장에 모여 앞에 기록한 피고 3명으로부터 앞에서 말한 바 와 같이 조선독립 만세를 부르도록 선동교준 같이 곤봉을 휘두르며 혹은 난폭한 언사로써 많은 양민을 향하여 조선독립을 위한 만세를 부르도록 선동하고 동일 오후 2시경 피고 이 용기는 형세를 보다가 미리 준비 했던 구 한국기를 세간정도의 국기대에 높이 달고 피고들과 같이 군중의 선두에서 조선독립 만세를 외치며 군중으로 하여금 이에 따르도록 곤봉을 휘두르며 지휘하고 혹은 기를 흔들며 시장 동북편으로부터 점차 남으로 전진하여 단번에 남원 헌병분대로 쇄도하려는 형세였으므로 이에 경계중인 헌병이 이를 제지 시키려고 또한 해산토록 했으나 열광(熱狂)하는 피고들은 이에 응할 기색은 없이 오히려 반항의 태도로써 점점 난폭하여 짐으로 현장에 있던 헌병 수비병이 발포한 바 사상자 수명을 내고 점점 해산하게 이른 것으로써 즉 피고들은 정치에 관하여 불순한 언동으로 민중을 현혹시키고 따라서 사회의 안녕질서를 방해한 자임].
-필자의 외할아버지의 독립운동 시발점과 일제치하의 판결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