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2일 도쿄(東京)에서 막을 내린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여자 배구 세계 예선전에서 한국은 4승 3패로 올림픽행 티켓을 거머쥐었다. 순위는 출전 8개국 가운데 4위였지만 앙숙 일본을 3-1로 이긴 데다 올림픽 출전이 확정된 뒤 열린 경기 패배를 빼면 순위가 더 올라갈 수 있었기에 스포츠 팬들은 23일 개선한 김연경 등 선수들을 열렬하게 환영했다.
이때 이후 “한국 여자 배구가 40년 만에 다시 올림픽 메달에 도전한다”는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 기사들에는 ‘나는 작은 새’ 조혜정 관련 내용이 빠지지 않았다. 여자 배구 관련 검색어 수준이었다.
잠시 40년 전으로 시곗바늘을 돌려 본다.
1976년 한국 스포츠의 최대 관심사는 7월 17일부터 8월 1일까지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제21회 여름철 올림픽이었다. 4년 전 제20회 뮌헨 대회에서 올림픽 무대에 처음 나선 북한이 사격에서 금메달 1개, 복싱에서 은메달 1개, 여자 배구 등에서 동메달 3개를 딴 반면 한국은 은메달 1개(유도 재일동포 오승립)에 그쳤다. 충격이었다. 한국으로서는 몬트리올 올림픽을 앞두고 북한과의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지상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 무렵 올림픽 등 국제종합경기대회 선수단 구성 원칙은 ‘소수 정예’였다. 나라의 경제력 때문에 메달을 딸 수 있는 종목만 보낸다는 것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구성된 한국 선수단은 임원 22명과 선수 50명으로 뮌헨 대회를 약간 웃도는 규모였다. 출전 종목은 남녀 배구와 레슬링, 유도, 복싱, 사격이었다. 사격은 1978년 서울에서 열릴 예정인 세계선수권대회 개최국으로서의 위상을 고려해 뮌헨 대회에 이어 또다시 참가하게 됐다. 결과적으로 메달을 따지 못했지만.
1970년대 한국 스포츠를 관통한 김택수 대한체육회 회장의 ‘선(先) 체력 후(後) 기술’ 방침은 시대 상황으로 보아 당위성이 있었다. 그러나 다소의 진통도 있었다. 몬트리올 올림픽을 불과 두 달여 앞둔 4월 25일 여자 배구 대표팀 주 공격수 박인실이 선수촌에서 이탈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무렵 대한배구협회를 맡은 이낙선 회장은 올림픽 메달을 목표로 후원회를 조직하고 발전 기금을 마련하는 등 적극적인 지원을 했다.
그리고 몬트리올 대회를 앞두고 1964년 도쿄 대회에서 일본 여자 배구를 올림픽 금메달로 이끈 다이마쓰 히로부미(大松博文)를 초빙해 김한수 감독, 전호관 코치와 함께 대표팀을 지도하도록 했다. ‘동양의 마녀’라는 신화를 만든 다이마쓰는 ‘회전 리시브’ 등 혹독한 훈련의 대명사였다. 강훈련이 거듭되는 가운데 선수들의 반발이 있었고 결국 박인실이 무단으로 퇴촌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박인실은 당시로는 174cm의 큰 키에 뛰어난 점프력과 강타를 지닌 간판 공격수였다. 이 사건은 당시 상당한 파문과 논란을 일으켰고 결국 협회는 박인실을 제명했다. 여자 배구로서는 큰 손실이었지만 ‘이 없으면 잇몸으로 버틴’ 여자 배구는 동메달의 값진 성과를 거뒀다.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여자 배구가 동메달로 가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8개국이 출전한 가운데 조별 리그 B조에 속한 한국은 첫 경기에서 이 대회 준우승국인 소련과 접전을 펼친 끝에 1-3으로 졌다. 그러나 이후 쿠바와 동독을 풀세트 접전 끝에 각각 3-2로 물리치고 조 2위로 준결승전에 올랐다. 한국은 조별 리그 A조 1위이자 대회 우승국인 일본에 0-3으로 졌으나 3위 결정전에서 헝가리에 3-1(12-15 15-12 15-10 15-6) 역전승을 거두고 동메달을 거머쥐었다.
한국 스포츠 사상 첫 여자 올림픽 메달리스트의 영예를 안은 선수는 신세대 스포츠 팬들에게도 이름이 꽤 알려져 있는 조혜정과 이순복, 유경화, 유정혜, 정순옥, 마금자, 장혜숙, 이순옥, 박미금, 변경자, 백명선, 윤영내 등 12명이다. 이들 가운데 유경화와 유정혜는 공격력이 있는 세터로 ‘더블 세터’를 이뤄 주 공격수인 조혜정과 함께 메달 획득에 크게 이바지했다.
조혜정은 숭의여고를 졸업해 서울 사람으로 잘못 알고 있는 스포츠 팬들이 적지 않은데 부산이 고향이다. 부산 봉래초등학교 5학년 때 키가 크다는 이유로 배구 선수로 뽑혔다. 그렇지만 부산여중을 졸업한 뒤 키가 작다는 이유로 고교 진학에 어려움을 겪는 등 설움을 받게 된다. 운동선수들 가운데에는 이런 사례가 심심찮게 있는데 이럴 때 대부분의 선수가 하는 말이 있다. “초등학교(중학교) 때 키가 지금 키다.” 그리곤 예외 없이 웃는다.
어렵사리 진학한 숭의여고 졸업을 앞두고 또 키 얘기가 나왔다. “저렇게 작은 애는 실업에서 못 써먹어.” 어렵사리 국세청에 입단했고 전국대회에서 보란 듯이 MVP로 뽑혔다. 아마추어 시절 실업 배구는 국내 최고 무대였다. 그런데 국가대표 선수 선발에서 몇 차례 탈락했다. 이번에는 “키가 작아. 국내용이야”이라는 얘기가 나왔다.
일반 여성으로도 크지 않은 키인 163cm의 조혜정이 어떻게 올림픽 동메달 국가의 주 공격수로 활약할 수 있었을까. 선수 시절 그의 활약상을 기억하는 올드 팬이라면 남자 선수 못지않은 점프력을 첫손가락에 꼽을 것이다. 달려오면서 시도하는 점프의 높이가 60cm나 됐다. 점프력으로 170cm대 공격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
올림픽 동메달에 가려 있지만 조혜정은 1974년 세계여자배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을 3위로 이끌었다. 2016년 현재 세계선수권대회 최고 성적이다. 이에 앞서 한국은 1967년 대회에서도 3위를 했으나 이 대회에는 여자 배구 강국인 소련을 비롯해 동유럽 나라들이 몽땅 빠진 ‘반쪽 대회’였다. 1973년 우루과이에서 열린 제1회 여자 배구 월드컵에서는 MVP로 선정됐다. 한국은 페루를 3-0으로 누르고 3위를 차지했다. 동메달 나라에서 MVP가 나온 것이다. 그의 뛰어난 경기력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조혜정은 몬트리올 올림픽 이듬해인 1977년 이른 나이에 국내에서 은퇴한 뒤 이탈리아에서 2년 동안 선수 겸 코치로 뛰었다. 테니스의 이덕희 등 여자 운동선수의 외국 진출 사례가 손에 꼽을 정도인 시절이었다. 여자 배구 선수로서는 외국 진출 1호로 리우 올림픽 세계 예선에서 맹활약한 김연경(터키 리그)의 대선배다.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뒤 현대건설 여자 배구단 코치 등 지도자 생활을 했다. 그런데 그의 이력에 특별한 내용이 있다. 35세 적지 않은 나이에 수원대학교 체육학과에 입학한 것이다. 야구 팬들이라면 바로 알 수 있는 조창수 전 프로야구 삼성 라이온스 감독대행과 결혼한 뒤였다. 체육 이론을 공부하고 싶었단다.
이런 그의 적극적인 자세는 2010년 GS칼텍스 여자 프로 배구단 사령탑 선임의 배경이 됐다. 한국 프로 스포츠 사상 첫 여성 감독이라는 특별한 기록이 그의 이력에 추가됐다.
조혜정은 부부 스포츠 커플에 두 딸 윤희와 윤지가 프로골퍼이니 이만한 스포츠 가족을 찾기도 어렵다.
>>>글 신명철 <스포티비뉴스> 편집위원, 전 <스포츠서울> 편집국장 smc6404@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