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뜨면 덥고 습한 공기 대신 서늘하고 건조한 바람이 잠을 깨우는 계절. 얇고 까슬까슬한 리넨 소재 셔츠가 아닌 포근하고 부드러운 카디건에 손이 가는 계절. 가을이 왔다. 계절의 변화에 맞춰 옷도 한층 두툼하게 챙겨 입었지만, 특유의 스산한 기운에 이유 모를 쓸쓸함과 공허함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래서인지 가을만 되면 적적한 마음을 달래줄 진한 멜로 영화 한 편이 생각난다.
이번 주 브라보 안방극장에서는 가을 타는 브라보 독자를 위해 감성 가득한 한국 멜로영화 세 편을 준비했다. 소개하는 작품들은 모두 넷플릭스에서 만나볼 수 있다.
1. 내 머리 속의 지우개 (A Moment To Remember, 2004)
유달리 건망증이 심한 '수진'(손예진)은 어느 날도 어김없이 지갑과 편의점에서 산 콜라를 카운터에 두고 나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돌아간다. 그때 편의점 앞에서 콜라를 들고 있는 '철수'(정우성)를 발견한다. 철수가 자신의 콜라를 훔쳤으리라 생각한 수진은 그의 손에 들린 콜라를 뺏어 들이킨다. 강렬한 첫 만남 이후 수진의 회사에서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서로에게 끌려 마침내 결혼까지 골인한다. 하지만 행복한 신혼 생활도 잠시 수진의 깜빡하는 증상은 더욱 심해져 가고, 철수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듣게 된다.
조기 치매를 앓고 있는 수진과 가난한 목수 철수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영화 ‘내 머리 속의 지우개’는 손예진과 정우성의 애틋한 감정 연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특히 정우성이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따르며 “이거 마시면 우리 사귀는 거다”라고 고백하는 장면은 오랜 시간 지난 지금까지 명장면으로 회자된다.
2. 시월애 (A Love Story, 2000)
1999년, '은주'(전지현)는 자신이 살던 집 '일마레'를 떠나며 새로 들어올 집주인에게 바뀐 주소로 우편물을 보내 달라는 편지를 남긴다. 한편 1997년, 일마레에 이사 온 '성현'(이정재)은 짐 정리를 하다 우편함에서 이상한 편지 한 장을 발견한다. 1999년에 살고 있는 누군가가 자신이 살 집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놓은 것. 반신반의하던 성현은 편지에 답장을 보내고, 편지는 2년을 뛰어넘어 은주에게 도착한다. 마침내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된 두 사람은 우체통을 매개체로 소통하고, 같은 공간 다른 시간 속에서 서서히 가까워져 간다.
영화 ‘시월애’는 엇갈린 시간을 소재로 한 판타지 로맨스물이다. 한국 영화 최초로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됐다. 작품의 중심 배경이 되는 일마레는 일몰 명소로 유명한 강화 석모도에서 촬영한 것으로, 주인공 두 남녀의 애절한 연기와 함께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할 수 있다.
3. 봄날은 간다 (One Fine Spring Day, 2001)
소리 채집자 '상우'(유지태)는 어느 겨울 지방 방송국 라디오PD '은수'(이영애)를 만난다. 마침 자연의 소리를 틀어주는 프로그램을 준비하던 은수는 상우와 녹음 여행을 떠나고, 자연스레 눈이 맞은 두 사람은 여름이 올 때까지 뜨겁게 사랑한다. 하지만 두 계절이 지나고, 이혼 경험이 있는 은수는 결혼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부담을 느껴 서서히 상우를 멀리하기 시작한다. 결국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사랑이 변하면서 상우는 예상치 못한 실연을 맞이한다.
영화 '봄날은 간다'는 두 남녀의 만남과 사랑, 이별을 계절에 빗대 그린 작품이다. 흔들리는 보리밭과 대나무숲, 고요한 사찰 등 청아한 풍경이 작품의 서정적인 분위기를 더한다. 영화에서 이영애는 "라면 먹고 갈래요?", 유지태는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는 명대사를 남겼다.
경남 함양을 이렇게 부르기로 했다. ‘지리산 자락이 숨겨놓은 보물’.
별 기대 없이 찾아간 곳이었다. 이리저리 여행 코스를 검색해 봐도 딱히 눈길을 끌 만한 곳을 발견하지 못했다. 논계 서원을 방문하고 함양에서 몇 군데 돌아볼 곳을 리스트업했다. 여행자 추천 사이트에서 가장 많이 추천해준 개평 마을로 운전 경로를 입력했다.
하회 마을 버금가는 기품 흐르는 ‘개평 마을’
한옥 마을은 어디에 있는 곳을 방문해도 좋다. 최근에 지어져 콩기름 반짝이는 한옥만 아니라면 말이다. ‘좌안동 우함양’이라고 하더니 옛말 그르지 않게 개평 마을은 고즈넉하고 기품 있는 모습으로 여행객을 반겨줬다.
안동 하회 마을의 시끌벅적한 투어리스트들의 소음이 불편하다면 우클릭하여 함양의 개평 마을을 거닐어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안동 하회 마을 버금가는 개평 마을에는 조선 성종 시대 대학자인 일두 정여창 고택이 자리 잡고 있다. 박경리 선생의 대하소설 ’토지’의 드라마가 촬영된 곳이다. 3000여 평의 너른 대지에 12동의 건물이 배치된 남도지방의 대표적 고택으로 중요민속문화재 제186호로 지정돼 있다.
흔히 안동이나 경주를 방문할 때 느껴지는 관광지의 익숙함이 싫어질 때가 있다. 자연스러운 모습에서 역사의 숨결을 느끼고 수백 년 전의 삶들을 유추해보고 싶은데 관광지에서는 그런 생각이 정지된다. 그저 관광객 물결에 휩쓸려 돌아다니다 어느새 그곳을 떠나야 할 시간이 되는 순간들이 언제부턴지 싫어졌다.
그런데 함양은 달랐다. 나에게 느리게 말을 거는 듯싶었다. 마치 시간이 아주 천천히 흐르는 듯 말이다. 개평 마을 일두 정여창 고택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나지막한 담을 한참 바라보았다. 또 골목 어귀 길들을 구석구석 다니며 오랜 세월의 흔적을 이리저리 살펴보기도 했다. 만족스러웠다. 안동 하회 마을 버금가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향유하기에는 하회 마을보다 훨씬 더 풍성한 품이었다.
굽이굽이 모래 섞인 오도재 길, 불빛 받는 밤이면 반짝거려
개평 마을을 떠나 오도재를 넘어보기로 했다. 오도재는 이 지역에서 지리산으로 가기 위해 꼭 넘어야 했던 고개다. 말이 고개이지 정상에 있는 지리산 제일문이 위치한 높이가 750m가 넘는다 하니 작은 산이다.
이 산을 넘어 지리산에 갈 수 있도록 길을 닦으면서 180도 굽이굽이 오도재 길이 만들어졌다. 오도재 길로 인해 경남 내륙에서 보다 안전하게 지리산을 갈 수 있게 되면서 이 길을 통과하는 이가 많아졌다고 한다.
원래 이곳 토양은 모래가 많이 섞인 땅이라 지반이 매우 약해, 급경사로 길을 낼 경우 무너져 내릴 수 있어 경사를 최대한 완만하게 만들게 됐단다. 함양의 원래 토양인 모래와 흙이 섞인 마사토(자잘한 모래와 흙이 섞인 토양을 일컫는 일본식 조어)를 섞어 도로를 포장하면서 밤이면 불빛에 반짝이는 모래알들이 더욱 환하게 길을 밝힌다.
이 장관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전국의 사진작가들이 몰려들어 오도재의 낮과 밤을 렌즈에 담았고 그렇게 오도재 길은 2006년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됐다.
비운의 천재, 최치원이 조성한 함양의 산소 탱크 ‘상림공원’
함양에는 상림공원이 군 중심부에 큰 숲을 이루고 있다. 상림공원은 신라시대 최치원이 천령군(현 함양) 태수로 있을 때 인공적으로 조성한 숲이라고 한다. 비만 오면 마을이 잠기고 논밭이 유실되는 것이 안타까워 함양을 흐르는 강에 둑을 쌓아 상림과 하림을 만들었다는데 현재 하림은 유실됐고 상림만 남아 함양을 대표하는 공원으로 사랑받고 있다.
상림공원에는 뿌리가 다른 두 나무의 몸통이 합해져서 하나가 된 연리목이 있다. 부부간의 금실이나 남녀 간의 깊고 애절한 사랑을 연리목 혹은 연리지로 비유한다. 상림공원 안에 있는 연리목은 수종이 다른 느티나무와 개서어나무 몸통이 결합돼 더욱 상서로운 나무로 여겨진다. 이 나무 앞에서 손을 잡고 기도하면 부부간의 애정이 돈독해지고 남녀 간의 사랑도 이루어진다니 갈등과 불화에 시달리는 남녀라면 함양으로 가볼 일이다.
상암공원 연리목 앞에는 연리목을 설명하는 게시판이 세워져 있다. 게시판 설명에 따르면, 연리목은 워낙 상서롭고 귀한 나무로 여겨져 역사서인 ‘삼국사기’에도 등장한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연리목에 대한 기록이 총 4번이 나온다는데 ◆신라 내물왕 7년 ◆고구려 양원왕 2년 ◆고려 광종 24년 ◆성종 6년이다.
서암정사 암반에 새겨진 석공들의 10년 불사
장마 끝자락 비가 쏟아지는 와중에 찾아간 서암정사는 함양에서 가볼 만한 곳을 검색했을 때부터 내 눈길을 사로잡았던 곳이다. 장대비가 쏟아지고 낮은 안개가 계곡을 굽이굽이 감싸며 올라간다. 이 집중 호우에 사찰을 찾는 이 누가 있으랴?
차에서 내려 쏟아지는 비를 피하며 요리조리 산길을 올랐다. 마침내 서암정사 입구가 눈앞에 나타났다. 벌어진 입이 닫히지 않았다. 여기가 어드메냐? 한국인가? 아니면 천상계 어디인가? 한국의 사찰 중에 이런 곳이 있었다고?
자연 암반에 새겨진 사천왕상을 옆으로 하고 위로 쭉 뻗은 돌계단을 밟아 오른다. 돌계단을 하나하나 오를 때마다 마치 천상계로 올라가는 입구를 걷는 듯하다. 서암정사는 조계종 해인사의 부속 사찰로 인접해 있는 벽송사의 암자였다. 창건주인 원응 스님이 벽송사에서 참선을 하던 중 서암정사의 자연 석굴을 발견했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그 어느 지역보다 빨치산과 국군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라 벽송사는 당시 빨치산들의 야전 병원이었다고.
폐허가 된 사찰을 보듬고 재건하면서 인근 서암정사의 자연 석굴을 발견하고 이곳에서 석불 불사를 일으켜 전쟁으로 죽은 원혼들을 위로했다고 한다. 서암정사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됐다.
1988년 암자까지 차량이 통행할 수 있는 도로가 개설되자 이듬해부터 석굴 불사를 시작했다. 서암정사를 천년만년 도를 닦는 만년 도량으로 만든다는 계획 아래 석공 6명이 30년 동안 조각한 석굴과 문수보살, 보현보살 등이 곳곳의 자연 암반에 새겨져 있다.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장엄하고 이국적인 사찰. 한여름 쏟아지는 장맛비 헤치고 올랐던 꿈같은 여행이었다. 장대비로 제대로 사진 촬영을 할 수 없었던 것이 한이 돼, 오는 가을 다시 한번 서암정사로 가볼 참이다. 서암정사의 가을 모습은 어떨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코로나19의 위세가 대단하다. 바다를 찾으려는 여름휴가 계획이 어그러졌다. 그래도 집에서 방콕만 하면서 휴가를 보내기에는 가는 여름이 너무 아깝다. 집에서 멀지 않아 숙박은 필요 없지만 생각할 테마가 있으면서 한적한 곳을 물색하던 중 천진암이 떠올랐다.
천진암은 천주교 발상지로 알려진 곳이다. 발상지란 역사적으로 큰 가치가 있는 일이나 현상이 처음 나타난 장소를 말하는데 천주교란 서양 종교인 서교다. 우리나라 그것도 깊고 깊은 산골이 발상지라는 데 의문을 평소 갖고 있었다. 이번 기회에 소상하게 알아보고 싶었다. 거기에 100년에 걸쳐 3만 명을 수용할 대성당을 건립한다는 사실도 방문의 구미를 당겼다.
천진암은 이름이 말해주듯 원래 불교 사찰이 있던 곳이다. 주소로는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우산리다. 우산리는 좁은 계곡 탓으로 논밭이 거의 없다. 지금은 이런 계곡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 펜션이나 음식점이 성행하지만 과거 농경시대에는 아주 드물게 집들이 있었던 곳이다. 사람이 살아야 길이 넓어지고 교통이 발전한다. 이런 후미지고 한적한 곳에 하루는 족히 걸어야 당도할 천진암에 사람들이 모여서 천주교 교리에 대한 강학을 했다는 것은 놀랍지만 당시의 시대상에 주목해야 한다.
천주교 박해가 심하던 시절이라 남들의 눈을 피해야 하는 절박함이 있었지만 사찰에서 왕명을 어기는 위험한 천주교 강학을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장소를 제공한 스님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좋게 말하면 종교간 우애라고 하지만 발각되면 목숨을 잃을 위험한 행동을 할 때는 다른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문헌을 찾아보니 조선 정부는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정책을 시행했기 때문에 사찰은 수탈의 대상이 되어도 제대로 항거하지 못했다는 기록을 찾아내고 수긍을 했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 천주교 탄압인 ‘신유박해’ 때 천진암 스님들도 처형당하고 천진암도 불태워졌다. 안타까움은 순교한 분들은 이름이 남아 후세에 추앙을 받고 있으나 장소 제공으로 목숨을 잃은 스님들은 아무 기록조차 없다는 것이다. 슬픈 일이다.
불태워진 천진암 터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져가고 농경지로 개발되어갔다. 1960년대에 와서 남종삼 성인의 후손인 남상철 회장이 다산의 기록에서 천진암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불교 사찰 목록을 조사하고 노인들의 증언을 통해 천진암 터를 찾았다. 그 뒤 토지를 매입하여 성역화 사업을 시작하였다고 천진암 성지 유인물에서 밝히고 있다.
천진암 성역화를 위해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 다섯 분의 시신을 이장하여 이곳에 모셨는데 천진암 강학을 주도한 이벽, 한국인 최초로 영세를 받고 서울 서소문 형장에서 참수 순교를 당한 이승훈, 천진암 강학회에 참석하고 신해박해에 순교한 권일신, ‘유한당 언행실록’의 저자이며 신유박해에 순교한 권철신, 다산 정약용의 형으로 알려진 정약종, 이렇게 5분의 시신이 각기 다른 곳에서 이장되어 모셔져 있다.
한민족 100년 계획으로 30만 평 부지에 3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성당을 짓고 있다. 100년에 걸친 공사 끝에 2079년에 완공되면 세계적인 관광명소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1985년부터 시작된 공사가 아직도 기초 터를 단단히 다지는 중이라고 한다. 지금 터 다지기 공사를 하는 사람은 완공된 성당의 모습을 볼 수 없고 완공된 성당을 보는 사람은 기초 터 닦는 현장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다. 지금 여기서 일하는 사람은 자신이 못 볼 건물을 짓고 있다. 나 아니면 안 되기 때문에 내가 꼭 이루고야 말겠다는 단기완성에서 벗어나 후손에게 완공하도록 배턴 터치를 하는 모습은 느림의 미학을 보여준다.
사실 건축 공사에서 100년은 너무 긴 시간이다. 이익을 추구하는 보통의 건설 회사라면 이렇게 느리게 공사하다가는 다 망하고 만다. 고층 아파트를 지을 때의 공사기간은, 1개 층을 짓는 소요 일수를 1개월로 본다. 30층이라면 30개월이면 충분하다는 계산이다. 천진암을 가 볼 때마다 느끼는 감정이지만 도대체 일을 하는 건지 마는 건지 눈으로 봐서 진전이 없다. 빨리빨리 문화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느린 변화는 또 다른 생각을 불러온다.
천진암 계곡으로 들어가면 그 끝은 천진암 성지다. 관통하는 길이 없으니 들어갔던 곳으로 되돌아 나와야 한다. 단순히 지나가는 목적으로 가는 차량이 없으니 길은 복잡하지 않다. 10여 km에 달하는 계곡이 깊어서 늘 맑은 물이 흐른다. 계곡이 좁아 농토가 별로 없으니 계곡물은 언제나 깨끗하다. 이 물은 팔당댐으로 흘러들어가 서울 시민의 식수로 사용된다. 천주교 신자라면 성지순례 차원에서 찾아가 보길 권한다. 천주교 박해에 대한 역사 공부를 더 한다면 방문의 의미는 더 커질 것이다.
#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저·메이트북스)
로마의 전성기를 이끈 ‘철인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삶과 죽음, 세상의 본질 등에 대해 날카롭게 통찰해 급변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인생 지침서가 되어준다.
# 호모 엠파티쿠스가 온다 (최배근 저·21세기북스)
글로벌 금융위기, 동일본 대지진, 코로나19 등 2000년대 인류에게 발생한 여러 위기를 예리하게 분석한다. 저자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공감과 호혜의 가치를 역설한다.
# 심판 (베르나르 베르베르 저·열린책들)
수술 중 사망한 주인공이 지난 생을 심판하는 천국의 법정에 도착해 삶을 돌아보는 이야기다.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인간' 이후 시도한 희곡으로, 특유의 상상력과 유머가 돋보인다.
# 50이라면 마음청소 (오키 사치코 저·센시오)
라이프스타일 전문가인 저자가 청소를 통해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소개한다. 공간을 향기롭고 쾌적하게 정리해나가면서 마음속에 묵혀뒀던 찌든 때까지 지워나갈 것을 제안한다.
# 예술가의 편지 (마이클 버드 저·미술문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이력서, 프리다 칼로의 연서 등 희대의 예술가들이 손으로 주고받은 90여 편의 기록물을 담았다. 실물 편지 스캔본을 첨부해 시각적 즐거움도 제공한다.
# 아름다운 사찰여행 (유철상 저·상상출판)
여행전문기자 출신 저자가 20여 년 동안 전국의 사찰을 다니며 기록한 책이다. 총 56곳의 산사를 테마별로 소개하며 사찰여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마음 치유 효과도 설명한다.
올 초, 전화기 너머로 흥분을 감추지 못한 친구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도 드디어 할아버지가 된다! 그러니 손자들이 가장 많은 네가, 할아버지 되는 법 잘 가르쳐주기 바란다~”
그의 외아들이 워낙 늦게, 더구나 연상과 결혼해서 손자 보기를 거의 포기했던 친구다. 그래서 그동안 손자들 사진 보여주기에는 1만 원, 구체적인 자랑 설명에는 2만 원의 범칙금을 수령하며 심술을 부렸었다. 그러나 그렇게 들뜬 목소리로 시작한 전화들이 다음과 같은 사연들로 인해 점차 하소연으로 변해갔다.
태명 대며 갈비 뜯기
일단 ‘임신 축하금’이라는 명목의 지출이 시작되었다. “이거 라떼는 없었는데…”라는 말로 어물쩍 넘어가기에는 이 항목이 워낙 광범위하게 전파된 눈치였다. 그래서 ‘지들도 나이 먹어가지고 애 만드느라고 애 많이 썼으니 보신이라도 시키자’ 하는 마음으로 두둑한 봉투를 마련했다. 그 후 손자를 보려면 출산 전부터의 추억이 중요하다며 카카오스토리를 억지로 깔아준 아들 녀석이, 며느리가 산부인과를 다녀올 때마다 초음파 사진들을 보내왔다. 이런 것은 꿈도 못 꾸었는데 참 좋은 세상이다 싶었다. 옆의 각도에서 보니 코가 높아서 예비 아빠를 닮았단다. 태아의 초음파 사진으로 인물 모양새까지 분석하는 것을 보니 요즘 젊은이들은 참 재주가 좋다고 생각했다.
좀 지나더니 ‘뱃속의 아기’라고 부르지 말고 ‘콩딱’이라는 태명을 부르란다. 심장이 ‘콩콩’ 잘 뛰면서 자궁에 ‘딱’ 붙어 잘 크라는 의미라고 한다. ‘들찬’(들에 가득 찬)과의 경합에서 선택된 태명이란다. 이 태명 부르기가 태교의 시작이라고 하면서 예비 아빠 엄마는 안 불러도 될 상황에서도 연신 태명을 일부러 부르며 부모 연습을 했다.
어느 날 전화가 왔다. 갈비가 드시고 싶단다. 그것도 그 비싼 한우 갈비를. 절대 며느리가 먹고 싶은 게 아니라 ‘콩딱님’께서 드시고 싶단다. 그런 어리광을 또 언제 받아주겠나 싶어 ‘내 돈 내고’ 한우갈비집을 오랜만에 갔다.
예비 할머니는 더 신나고
예비 할머니는 신이 났다. 할머니라는 호칭이 싫다던 그는, 백화점 쇼핑의 대의명분을 확보한 기회를 살려 유아용품점들을 쓸고 다니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아들의 다음과 같은 자극적인 문자가 한몫했다. “그것도 안 해주시며 할머니 되려고 하심? ㅋ”
우선 예비 아빠가 어린 시절 입었던 배냇저고리는 이제 너무 낡았다며 수십만 원짜리 저고리를 골랐다. 그 외에 아기 옷을 세탁하기 위한 아기용 세탁기도 따로 샀다. 어른 옷과 함께 세탁하면 균에 오염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유모차는 친구가 10년째 타고 다니는 승용차 가격과 비슷했다. 그런데도 아들 녀석은 “제 아들의 첫 차잖아요. 요즘은 승차감보다 하차감(내려서 보는 흐뭇함)이 더 중요하다고요”라며 외국산 명품 브랜드를 고집했다. 임부용 영양제도 전달했고 산후조리용 기장 미역을 현지에 주문했으며, 사진관에서 찍은 민망한 며느리의 임신부 사진을 실눈 뜨고 봐야만 했다.
그런데 며느리가 노산이라서 제왕절개를 해야 했다. 예비 할머니는 시를 잘 받아서 태어나야 한다며 사찰에 가서 택일을 받고 축원기도를 부탁했다. 21세기 대명천지에 말이다. 그러나 아들과 예비 손자를 뒤에 업은 예비 할머니에게는 거칠 것이 없었다. 내친김에, 돌림자를 딴 이름은 친가에서 지어줘야 한다며 작명소까지 일찌감치 다녀왔다.
양수가 갑자기 터져 원래 잡은 날보다 이틀 먼저 수술을 하고 콩딱이가 태어났다. 그런데 코로나19 상황이라 면회가 아예 되질 않았다. 1인당 4만 원짜리 백일해 예방주사를 맞아야 아기를 볼 수 있다고 해서, 노부부가 가정의학과까지 다녀왔는데. 퇴원하면 사진관에서 또 출산 기념사진을 찍을 거라는 아들에게, 병원비와 산후조리원 비용에 보태라면서 봉투를 건네주고 돌아섰다.
그는 액수를 차치하고서라도 합리성이 결여된 지출 항목들과 쓸데없는 과정이 많다는 것이 못마땅했다. 정부 지원의 산후도우미 시스템이나 지자체에서 제공하는 아기용품 대여 서비스는 찾아보지도 않고, 육아휴직을 하면 수당이 적어질 것 같아 유아용 카시트 사는 게 걱정이 된다며 눈치를 보는 아들 녀석이 얄미워지기까지 한다고 했다. 그런데 아기 사진을 보며 친구들이 “어? 손자가 자네랑 판박이네” 했더니 입이 귀에 걸리면서 “그렇지! 식구들도 다 그렇다고 하네~” 하며 밥값을 계산했다.
아기 울음소리의 대가
우리나라 합계 출산율은 0.92명으로, 2018년 0.98명보다 더 낮아졌다. 1970년 출생통계 작성 이후 최저치이고, 평균이 1.63명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서도 가장 낮다. 이런 상황에서는 그저 아기 울음소리 듣는 것만으로 모든 것들이 너그럽게 수용될 수 있다. 또한 ‘우리 때는 없었던 것’들이 서먹하고 수용하기에 어색하지만, 그것들은 나름대로의 이유와 호응이 있었기에 존재 가능한 것들이라는 관점도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애들을 낳아 다시 아비 노릇을 해야 한다고 상상을 해보자. 할아버지인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기꺼이 통장 잔고 감소를 참아내야 한다. 그래서인지 요즘 그 친구는 늦게 배운 조부(祖父)질에 날 새는지 모르며, 손자 사진 범칙금 납부의 큰손 노릇을 기꺼이 하고 있다.
코로나19의 여파로 세상이 바뀌고 있다. 당연히 여행 풍속도도 달라졌다. 여럿이 다니는 여행은 점차 사라지고 혼자 혹은 둘이 떠나기 좋은 한적한 드라이브 코스가 인기를 얻고 있다. 인적이 드문 곳, 적당한 거리두기를 할 수 있는 곳을 선호하는 추세다. 그렇게 훌쩍 떠나 갑갑했던 마음을 풀어놓고 당일치기로 놀기 딱 좋은 곳이 있다. 바로 강화도다!
강화도령이 살았던 터전, 용흥궁
조선 25대 왕 철종(哲宗)이 강화도령이었던 시절에 지냈던 곳이다. 임금으로 추대된 사람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을 잠저(潛邸)라고 하는데, 당시 강화도령은 가족이 모반사건에 연루되는 바람에 14세 때 이곳 강화로 유배되었다. 원래는 보잘것없는 초가였으나 훗날 강화도령이 왕위에 오르자 강화 유수 정기세(鄭基世)가 집을 보수 단장해 용흥궁이라 불렀다. 사람이 살지 않아 좀 휑한 모습이지만 관리는 잘되어 있었다. 150년 된 고택의 안채와 사랑채, 별채, 마루, 작은 정원, 우물, 반질반질한 문고리를 보며 강화도령 이원범으로 살던 철종의 모습이 느껴져 짠했다. 14세부터 19세까지 동네 아이들과 어울리기도 하고 산으로 땔감을 구하러 가기도 하며 평민으로 살았던 터전이다. 강화도령 이원범, 철종의 이야기가 깃든 용흥궁 담장에는 능소화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용흥궁은 강화 나들길 1코스다. 강화읍 관청리 441-0
한옥의 멋,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용흥궁 담 넘어 건너편 언덕에 전통 한옥으로 지어진 성당의 외양이 독특하다. 얼핏 보면 성당 같지 않고 마치 절처럼 보인다. 바실리카 양식과 동양 불교 사찰 양식을 융합한 건축물로 알려져 있다. 마당 한쪽에는 불교를 상징하는 나무 보리수가 100년 넘도록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사찰의 범종처럼 생긴 종도 보인다. 분명 성당인데 절의 분위기가 더 느껴지는,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한 건물이다. 서로 다른 전통문화를 존중하고 함께하는 남다름을 본다.
성당 입구의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며 마음을 가다듬어본다. 상사화가 바람에 흔들리는 마당엔 초대 주교 고요한 신부의 비석과 성당 축성 100주년 기념비가 있다. 강화 시내가 한꺼번에 눈에 들어오는 높은 언덕이다.
댓돌 위에 신발을 벗고 들어서면 목재로 이루어진 깔끔한 실내가 성스러움을 더한다. 동서양의 오묘한 분위기가 잘 조합된 실내다. 열린 창으로 자연의 풍경이 한가득 들어온다. 양 벽면에는 강화성당의 역사를 보여주는 사진들이 진열돼 있다. 밖으로 나가면 뒤편으로 낮은 담장의 사제관이 조용히 자리 잡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약탈당한 계단 난간 등 건축물의 일부가 복원된 모습도 볼 수 있다. 주변의 풍경과 자연스럽게 잘 어울리는 성당이다. 강화읍 관청길 27번길 10
소창길’을 아시나요
용흥궁과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을 나와 내려오다 보면 길가에 서 있는 커다란 굴뚝이 보인다. 1960~70년대에 강화도 산업의 전성기를 주도했던 심도직물의 흔적이다. 직물 공장은 강화도 경제의 대표적 징표다. 강화도서관 옆으로 이화직물 터가 있고, 아기들 기저귓감으로 많이 쓰였던 친환경 직물 ‘소창’을 만들어내던 유명 직물 업체들이 터를 잡고 있다. 그래서 이 골목에 ‘소창길’ 코스가 새롭게 더해졌다. 강화 중앙시장 B동 3층에 위치한 ‘관광플랫폼’이 스토리워크 길 출발지다. 1960년대의 직물공장 전경과 소창 만드는 과정을 구경하고 체험할 수 있는데 현재는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한산하다. 가는 길에는 100년의 세월을 품은 낡은 건물에 자리 잡은 ‘낙원 떡집’이 있다. 순수한 떡 맛을 자랑한다. 질 좋은 강화 쌀에 첨가물은 소금 한 가지밖에 안 넣는다고 자부심이 대단하다. 소박한 식사를 하고 싶으면 읍내 중심에 있는 50년 전통의 ‘강화국수’ 집으로 가면 된다. 강화도에 가면 알싸한 순무김치 맛도 봐야 한다.
※소창길 코스 중앙시장 관광플랫폼에서 출발해 심도직물 굴뚝 - 천주교 인천교구 강화성당 - 이화직물 터 - 금융상사 - 조양방직 - 동광직물 - 남화직물 - 상호직물 - 경도직물 - 소창체험관으로 이어진다. 2시간 정도 소요.
빈티지 감성 카페, 조양방직
과거의 방직 공장을 그대로 살려서 빈티지한 매력을 보여주는 레트로 감성 카페다. 조양방직은 1933년 홍 씨 형제가 민족자본으로 설립한 방직공장으로 한때 엄청난 전성기를 누렸다고 한다. 그 시절의 흔적들이 빈티지한 멋으로 탈바꿈해 핫한 카페가 됐다. 그 옛날 우리의 언니와 누나들이 가족들을 먹여 살리느라 기계를 돌리던 시절을 상상하도록 자극한다. 강화읍 향나무길 5번길 12
평화로운 궁궐터, 고려궁지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에 저항해온 우리 민족의 역사가 있는 곳. 고려 왕조가 몽골에 대항하기 위해 고종 19년(1232)부터 원종 11년(1270)까지 38년간 머물렀던 궁궐의 터다(사적 제133호). 당시의 궁궐은 1270년 송도로 환도할 때 몽골의 압력으로 모두 허물어졌고 행궁과 장녕전, 만녕전, 외규장각 등은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불타 없어졌다. 지금은 강화 유수가 업무를 보던 동헌과 유수부의 경력이 업무를 봤던 이방청만 남아 있다. 푸른 잔디가 시원하게 깔린 자연 풍경이 평화롭기만 하다. 강화읍 강화대로 394
조용한 마음의 울림, 교동마을과 향교
느릿느릿 옛 시간을 즐기고 싶다면 시간이 멈춘 듯한 교동마을로 가볼 일이다. 예스럽고 정감 있는 마을을 둘러보다 보면 지치고 복잡했던 마음이 어느새 가라앉는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완화되면 강화읍에 위치한 강화 향교(고려 전기에 창건)와 우리나라 최초 향교인 교동 향교 방문도 빠뜨릴 수 없다. 강화나들길 1-18코스다. 강화군 교동남로 229-49
해안도로 따라 의미 있는 드라이브 코스, 덕진진
강화도에는 월곶진, 제물진, 용진진, 덕진진, 초지진의 5진(鎭)과 광성보, 선두보, 장곶보, 정포보, 인화보, 철곶보, 승천보의 7보(堡)를 합친 강화 12진보(鎭堡)가 있다. 그중 덕진진은 김포 덕포진과 더불어 해협의 관문을 지키는 강화도 제1포대였다. 적당한 거리 두기를 하며 해안도로를 따라 볼 수 있는 ‘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 전적 시설 풍경은 산책과 드라이브 코스로 의미 있다.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46
섬에서 즐기는 슬기로운 문화생활 ‘도솔미술관’, ‘해든뮤지엄’, ‘전원미술관’
최근 서울과 같은 대도시를 떠나 작품 전시를 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고즈넉한 강화 땅에서 감상하는 개성 있고 멋진 미술관. 언택트 여행으로 유유자적 멋진 시간을 누려보자.
도솔미술관은 초지진과 가깝고 고즈넉해서 좋은 사람과 조용히 산책할 겸 가보면 좋은 장소다. 강화 들판을 달려 소나무가 예스러움을 더해주는 작은 마을에 다다르면 단정한 한옥 갤러리가 눈에 들어온다. 총 4개의 전시관이 있는 도솔미술관은 야외전시관, 2개 층의 실내 전시장, 별관으로 나뉘어 있다.
뜰안채 야외전시장에서는 사진작가의 아프리카 바오밥나무 작품이 전시돼 있다. 실내로 들어가면 별관을 비롯해 2개 층으로 이루어진 전시장에서 매달 바뀌는 전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전시장 창가에 걸터앉아 강화 들녘을 유유자적 내다보며 함께 온 사람과 조용조용 대화를 나누는 다정한 풍경이 아름답다. 강화군 길상면 길상로 210번길 52-71
해든뮤지엄은 갤러리로 걸어 들어가는 입구의 긴 경사면에서부터 설레게 된다. 자연과 잘 어우러지는 건축물로 2013년 한국건축가협회에서 선정하는 ‘올해의 건축 베스트7’에 뽑히기도 했다. 실내 사진 촬영이 안 돼 아쉽지만 야외의 조각작품과 설치미술, 그리고 대형 미러가 볼 만하다. 정원의 휴식공간과 잘 어울리는 자연이 아름다운 곳. 강화군 길상면 장흥로 101번길 44
전원미술관은 강화도에서 출생한 한국화가 유광상 씨가 운영하는 갤러리다. 작가의 예술세계를 보여주는 작품과 일본 유학 시절에 그린 그림 등을 다양하게 감상할 수 있다. 강화군 송해면 솔정리 561
이색적이고 따뜻한 ‘동네 책방’
강화군청 부근엔 볼거리가 많다. 강화성당과 용흥궁, 중앙시장, 궁터, 중앙시장 청년몰, 소창길…. 이곳들을 다 돌아본 뒤 한숨 돌리며 조용히 서점을 들러보는 건 어떨까. 소금빛 서점, 국자와 주걱, 책방 시점 등은 강화도 간 김에 누리는‘소확행’이다.
‘소금빛 서점’ 이 있는 고택 계단을 올라서면 대문 바로 앞 양옆으로 ‘그 여자 그릇 유림상회’와 ‘그 남자 책방 소금빛 서점’이 있다. 그 남자의 안목으로 고른 책들이 진열된 소금빛 서점은, 얼마 전 방영 종료된 SBS 드라마 ‘더킹: 영원의 군주’에서 배우 이민호가 책 읽는 장면을 찍은 장소로 더 알려졌다. 그 여자의 그릇 유림상회는 채색이 독특한 그릇 한 점쯤 갖고 싶게 하는 곳이다. 그 남자, 그 여자의 책과 그릇이 있는 감성 공간이다(서점과 그릇가게 앞의 대문을 열면 100년 고택 대명헌을 만난다. 김구 선생이 한동안 머물렀다는 운치 있는 한옥 숙박업소로 예약제로 운영된다).
강화읍 남문안길 7
‘국자와 주걱’은 한적한 마을의 한옥을 책방으로 꾸민 시골 책방 겸 북 스테이다. “작은 책방. 작고 불편함. 그러나 좋은 책. 따뜻한 밥상. 깨끗한 잠자리. 그리고 많은 정”이라는 책방 소개글이 다정하다. 책만 보러 갔다가 주인장의 푸근한 인심에 다시 찾는 곳이다. 큰 도로에서 마을길로 접어들어 꼬불거리는 좁은 길로 주춤주춤 운전해 들어가면 이 특별한 책방과 만난다. 강화군 양도면 강화남로 428번길 46-27
아름다운 일몰에 반하다, 장화리
강화도의 마지막 코스는 누가 뭐래도 일몰 풍광이 장관인 장화리다. 강화도 남부 해안도로를 따라 펼쳐지는 강화 갯벌과 서해의 해넘이는 여행자들의 관심사다. 이곳에서의 일몰 시간은 아주 짧다. 찰나의 장화리 노을 앞에서 두근두근하면서도 경건한 시간을 맛보며 강화 여행을 마무리할 수 있다.
강화군 화도면 장화리
코로나19로 해외여행이 어렵게 되자, 이국적인 국내 여행지가 주목받고 있다. ‘바다 위의 식물 낙원’이라 불리는 경남 거제도의 외도 보타니아도 그중 한 곳이다. 사실 외도 보타니아의 인기는 새삼스럽지 않다. 1995년 개장 이래 누적 방문객 수가 2000만 명이 넘는 거제 대표 명소이니 말이다. 나만 해도 그 방문자 수에 ‘4’를 더했다. 이번 방문 때는 비가 왔다. 비 오는 날의 섬 여행도 꽤 낭만적이었다.
바깥 섬이 식물의 낙원이 되기까지
거제도 남쪽 외딴 섬 외도(外島)는 미운 오리 새끼였을까. 마음 심 자를 닮아 ‘지심도’, 보배에 비길 만한 풍광을 지녀 ‘비진도’라 불리는 거제도의 다른 섬들에 비하면 이름조차 초라한 섬이었다. 그랬던 외도가 부침개처럼 운명이 뒤집히는 일이 벌어졌다. 50여 년 전 이창호(1934∼2003) 씨가 낚시하러 외도에 들른 것이 인연이 되어, 몇 년에 걸쳐 외도를 매입한 것이다.
이창호 씨와 그의 아내 최호숙 씨는 1969년부터 외도를 해상식물원으로 가꾸기 시작했다. 무시로 닥치는 태풍과 거친 파도에 맞서며 척박한 땅에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웠다. 외도는 기후가 따뜻하고 물이 풍부해 종려나무, 야자나무, 선인장 같은 아열대 식물이 자라기에 적합했다. 첫 삽을 뜬 지 26년이 지난 1995년에 이르러서야 세상에 외도 보타니아를 선보일 수 있었다. ‘보타니아’(botania)는 ‘botanic’과 ‘utopia’의 합성어로서 바다 위 ‘식물의 낙원’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 외도는 ‘보타니아’라는 이름에 걸맞게 아름답고, 이국적인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마치 미운 오리 새끼가 백조가 된 것처럼.
국내 최초 해상식물원의 인기는 개장한 지 25년째인 지금도 여전하다. 외도행 유람선 선착장이 거제도에 7곳이나 있으며, 유람선이 매일 여러 차례 외도 보타니아를 왕복한다. 바람의 언덕과 더불어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하는 ‘2019~2020 한국관광 100선’에도 들어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해금강 유람선 타고 바다 위 정원으로
외도 선착장 7곳 중에 도장포를 애용한다. 도장포 가까이에 외도 보타니아와 인기 쌍벽을 이루는 바람의 언덕과 신선대가 있어서다. 외도로 가는 길에 즐기는 해금강(海金剛) 유람은 덤이다. 선실 밖으로 나가 출렁대는 유람선에 몸을 맡기고, 파도를 가르며 달리는 기분이 상쾌하다.
해금강은 강이나 바다가 아닌, 바다 위로 솟은 바위섬이다. 금강산처럼 경치가 아름답다고 하여 ‘바다 위의 금강산’이라 부른다. 해금강 해안 절벽 위에는 거센 바람을 견디며 살아온 노송들과 석란, 풍란 같은 희귀한 난초들이 자생한다. 절벽 아래에는 파도가 오랜 세월 조각해놓은 십자동굴, 부엌굴 등의 해식동굴이 있다. 선장의 설명을 들으며 해금강의 기암을 바라보면 사자, 촛대, 기도하는 소녀처럼 보인다.
30분가량의 해금강 유람이 끝나면 외도 보타니아에 도착한다. 외도 모양을 형상화한 빨간 등대가 맨 먼저 반긴다. 선장이 1시간 반 뒤에 유람선으로 돌아오라고 당부한다. 순환형 산책 코스대로 걸으면 되므로 관람시간 90분이 턱없이 부족하진 않다.
유럽식 정원과 건축물로 꾸민 외도
외도 보타니아 관광은 아치 모양의 작은 정문을 지나면서부터 시작된다. 세계 각국 방문객을 맞이하는 외도 광장에는 한글·영어·한자로 쓴 ‘외도 보타니아’ 조형물들이 장식돼 있다. 광장을 지나면 향나무 여러 그루를 연결해서 한 몸처럼 다듬어놓은 나무 작품이 보인다. 이곳의 인공미를 대표하는 작품이 아닌가 싶다. 이 나무는 눈이 부리부리한 뿔 달린 도깨비 또는 기세등등한 불꽃을 닮았다. 산책로 입구에 턱 버티고 서 있어 사찰의 사천왕상 같은 존재로 느껴진다.
선인장, 알로에, 용설란 등이 자라는 선인장가든을 지나면 외도 보타니아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비너스가든이 나온다.
지중해풍의 건축물과 고속도로처럼 시원하게 뻗은 정원,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세워진 하얀 비너스상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최호숙 씨가 영국 버킹검 궁의 뒤뜰을 모티브로 직접 구상하고 설계한 공간이라고 한다. 비너스가든 끝에 있는 유럽식 사택 ‘리하우스’는 KBS 드라마 ‘겨울연가’(2002)의 마지막 촬영 장소였다. 외도 보타니아를 전국에 소문낸 일등 공신이다.
이탈리아어로 ‘환영합니다’라는 뜻을 지닌 벤베누토정원은 사계절 꽃이 피는 꽃동산이다. 철따라 튤립과 양귀비, 수국, 동백 등이 피고 진다. 이 꽃들은 관람객들의 감탄을 먹고 자란다. 꽃길을 걷다 보면 짙푸른 동백숲길과 대숲길이 나타난다. 밀감나무 3000그루와 편백나무 8000그루가 늘어선 ‘천국의 계단’을 내려서면 야자수 산책로가 기다린다. 프랑스식 연못과 조각상을 배치해 이국적인 정취가 가득하다. 외도 보타니아는 구석구석 아름답다. 귀부인이 그려진 화장실 이정표마저 예쁘다. 화장실 벽 둥근 창으로 보이는 해금강과 외도 등대는 또 어떻고.
바람의 고향 도장포
외도 관람을 마치고 도장포로 돌아와 바람의 언덕에 오른다. 하늘이 맑으면 언덕 아래에 제주도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비췻빛 바다가 일렁인다. 바람의 언덕은 바다로 돌출한 곶이라 늘 세찬 바람이 분다. 풀들이 바람 부는 방향으로 일제히 누워 있다. 언덕 위의 풍차는 신나서 춤추듯 바람개비를 씽씽 돌린다. 비바람에 우산이 뒤집혀도 시원한 바람이 그저 반갑다. 만약 이 언덕을 ‘도장포 잔디공원’이나 ‘도장포 민둥산’이라고 이름 지었다면 얼마나 낭만이 없었을까.
풍차 왼쪽, 숲속 계단을 오르면 호젓한 동백숲길이 나온다. 이 숲길이 도장포마을 윗길로 이어진다. 윗길에서 굽어본 도장포마을 전경도 엄지를 치켜세울 만큼 장관이다. 마을 뒤로는 산이, 앞으로는 바다가 마을을 포근히 감싸고 있다.
도장포마을 남쪽 바닷가에는 신선이 머물렀다는 신선대가 있다. 부안의 채석강과 지형이 비슷하다. 책을 포개놓은 듯 가로지층이 차곡차곡 쌓여 있어 태곳적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공룡 발자국 같은 작은 웅덩이도 수없이 많다. 깎아지른 절벽 사이로는 파도가 으르렁대며 들락거린다. 신선대를 본 사람들이 웅장한 기암절벽과 절벽 아래 몽돌해변을 두고두고 이야기하는 이유를 알 만하다.
◇이색 명소&맛집◇
매미성 매미성은 2003년 태풍 매미 때문에 바닷가 경작지를 잃은 백순삼 씨가 자연재해로부터 작물을 지키기 위해 16년 동안 혼자 쌓아 만든 성벽이다. 처음에는 시멘트 벽돌로 쌓아 볼품이 없었다. 점차 네모반듯한 화강암을 쌓고 시멘트로 메우는 방식으로 바꿔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유럽 중세시대의 성을 연상케 해 이국적인 명소로 인기를 끌고 있다. 실제 풍경보다 사진에 담았을 때 더 멋지게 보여 인생사진 명소로 유명해졌다.
경남 거제시 장목면 복항길
외도널서리 외도 보타니아 설립자인 최호숙 씨가 구조라해변에 유리 온실 콘셉트 카페인 외도널서리를 개장했다. ‘널서리’(nursery)는 ‘묘목을 기르는 땅’이라는 뜻으로 외도 보타니아와 통하는 면이 있다. 유럽풍으로 지어 외국에 여행 온 듯한 기분을 낼 수 있다는 점도 같다. 테라스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빛깔 고운 구조라에이드 한 잔 어떨까. 계절에 상관없이 초록 식물을 감상할 수 있는 게 큰 매력이다.
경남 거제시 일운면 구조라로4길 21, 매일 10:00~21:00
예이제게장백반 거제도에서 이름난 무한리필 게장 백반집이다. 본점은 도장포에 있다. 바람의언덕점은 도장포와 가까워 외도 관광 전후에 들르기 좋다. 메뉴는 게장백반 한 가지다. 메인 요리인 간장게장과 꽃게장을 비롯해 불볼락구이, 간장새우, 충무김밥, 조개미역국 등 반찬이 한 상 가득 나온다. 작은 꽃게를 사용하지만, 살이 제법 차 있어 먹을 만하다. 쫀득한 맛이 일품인 간장새우도 리필된다.
경남 거제시 남부면 해금강로 132, 매일 10:30~21:00, 게장백반 1인분 1만5000원
한국의 서원을 보고 싶다는 생각에 불현듯 떠난 여행길. 가장 보고 싶었던 곳은 단연코 병산서원이었다. 안동 하회마을을 돌아보고 난 후, 병산서원을 향해 차를 몰았다. 지도에서 보면 낙동강의 물줄기는 S자로 흐른다. S자가 만든 골짜기 안에 하회마을과 병산서원이 나란히 있다. 하회마을을 투어하고 병산서원을 방문하면 꽉 찬 1일 코스로 손색이 없다.
병산서원은 하회마을에서 6km 떨어진 거리에 있으니 멀다고는 할 수 없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불편하기 그지없다. 하회마을에서 곧장 갈 수 있는 대중교통 수단이 없다 보니 버스를 타고 가다 중간에서 내려 한참을 걷든지 아니면 다시 안동까지 가서 병산서원으로 가는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한다. 안동의 관광 구역을 묶어 투어 버스를 운행해보는 것이 필요해 보였다.
운전하면서 온갖 아이디어로 안동 지역 관광을 증진하는 말의 향연을 나누고 있을 때였다. 신장이 족히 190cm 정도는 되어 보이는 체격 좋은 외국인이 땀을 뻘뻘 흘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무거운 배낭 차림으로 포장도 안 된 도로를 걷고 있는 옆을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다.
“잠깐, 저 친구 병산서원 가는 거 아닐까?” 우리 일행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고 길 한쪽에 차를 세우고 그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Are you going to Byeong San?” 맞았다. 안동 하회마을에서 걸어오는 길이란다. 아직 4km도 넘게 남은 길이었다. 이 친구를 앞좌석에 태우고 병산서원을 향해 다시 출발했다. 연세대학교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독일 청년이었다. 1년 전에 한국에 왔고 시간이 날 때마다 한국 곳곳을 혼자서 돌아다닌다고 했다.
한국어도 거의 하지 못하는 독일 청년이 안동까지 혼자 여행 와서 걸어 다니는 것을 보니 마음이 짠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지만 습하고 무더운 여름 날씨에 고생이 심해 보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가다 보니 어느새 병산서원 주차장이었다. 돌아갈 때도 태워줄 테니 편하게 서원을 관람하고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한 후 독일 청년과 헤어졌다.
이제부터 병산서원을 차근차근 훑어볼 시간. 중장년층 세대의 병산서원에 대한 관심은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3’에서 시작됐을 듯싶다. 유 교수는 “인문적·역사적 의의 말고 미술사적으로 말한다 해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원 건축으로 한국 건축사의 백미”라며 병산서원의 아름다움을 극찬했다. 아울러 “하회의 답사적 가치는 어떤 면에서는 하회마을보다 꽃뫼 뒤편 병산서원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
많은 사람이 병산서원에 들어서자마자 만대루에 감탄한다. 다른 서원에서는 볼 수 없는, 200여 명은 함께 모여 강학할 수 있을 만큼 규모가 큰 망루다. 만대루를 떠받치고 있는 휘어진 모습 그대로의 기둥들과 주춧돌, 커다란 통나무를 깎아 만든 계단까지 자연의 모습이 건축물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 모래사장의 풍경과 낙동강 물줄기를 감싸 안은 산세들을 만대루에서 내려다보고 있으니 옛 서생들이 품었던 기개가 느껴진다. 자연의 섭리를 깨우치며 공부할 수 있도록 대자연을 건축으로 끌어들인 한국 건축의 백미라는 유홍준 교수의 찬양에 고개를 끄덕였다.
만대루 밑을 통해 마당으로 들어서면 좌우로 동재와 서재가 있고 맞은편으로는 입교당이 있다. 입교당에 앉아 만대루가 들어선 서원의 앞쪽을 바라보면 산을 끼고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만대루 기둥 사이사이로 보이는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인 듯해 잠시 말을 잃을 정도다.
병산서원 곳곳에는 배롱나무가 심어져 있다. 예로부터 선비, 유학자들이 서원 혹은 향교에 심었고 사찰에서도 많이 심었던 꽃나무다. 이 나무를 심는 데는, 1년에 한 번씩 나무껍질이 벗겨지는 배롱나무처럼 정진을 거듭해 심신을 수련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그러나 꽃이 흐드러지게 핀 배롱나무가 너무 황홀하다. 가끔 수련에 지장이 되는 날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배롱나무 자태에 취하고 만대루 풍경에 취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병산서원을 나서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독일 청년이 의자에 앉아 우리를 기다리다 반겨준다. 우리가 떠나버린 건 아닌지 걱정한 모습이다. 오늘 밤 숙소를 물어보니 다시 서울로 올라가야 한다며 안동버스터미널에 내려줄 수 있는지 물어본다. “Of course!!” 병산서원의 황홀한 자태에 취한 저녁, 우리는 안동버스터미널에 눈동자 파란 외국인을 내려주며, 저 친구가 오늘을 평생 기억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병산서원
병산서원은 고려 중기부터 안동 풍산에 있던 교육기관인 풍악서당(風岳書堂)을 모체로 건립됐다. 지방 유림의 자제들이 모여 공부하던 곳으로, 고려 말 공민왕 때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 왕의 행차가 풍산을 지날 무렵, 풍악서당의 유생들이 난리 중에서도 학문에 열중하는 것을 보고 왕이 크게 감동하여 많은 서책과 사패지(賜牌地)를 주어 유생들을 더욱 학문에 열중하도록 격려하였다.
200년이 지나면서 서당 가까이에 가호가 많이 들어서고 길이 생기며, 차츰 시끄러워지면서 유림들이 모여 서당을 옮길 곳을 물색하던 중에 서애 류성룡 선생께서 부친상을 당하시고 하회에 와 계실 때 그 일을 선생에게 문의하니, 서애 선생께서 병산이 가장 적당할 것이라고 권하게 되었고 유림들은 선생의 뜻에 따라 1575년(선조 8) 서당을 병산으로 옮기고 ‘병산서원’이라고 고쳐 부르게 됐다.
1614년(광해 6)에 우복 정경세, 창석 이준, 동리 김윤안, 정봉 안담수 등 문인들이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존덕사를 창건하여 선생의 위판을 봉안하였다. 1662년(현종 3)에 선생의 셋째 아들인 수암 류진(柳袗, 1582~1635) 공의 위패를 종향하였다.
병산서원은 1863년(철종 14)에 조정으로부터 '병산서원'으로 사액을 받았으며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이 내려졌을 때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중 하나다. 1978년 3월 31일에 사적 제26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서애 선생의 문집을 비롯하여 각종 문헌 1000여 종 3000여 책이 소장되어 있다. (병산서원 공식 홈페이지에서 발췌)
사람들은 꽃철이 되면 아랫녘으로 떠나고 수목원을 찾지만 나는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양천 향교에 간다. 서울시 강서구에 위치한 이곳에 가면 조용한 향교 담장 위로 피어난 능소화를 볼 수 있다. 옛 교육기관에서 꽃과 함께 고즈넉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시간이다.
도심 속에서 옛 시간과 소통하는 양천 향교는 마을 골목길을 따라 잠깐 걸어 들어가 사찰 홍원사 뒤편으로 가면 있다. 산을 등지고 안정감 있게 들어앉은 모양새다. 향교는 옛 성현들의 덕을 기리고 제를 모시며 지방 향리들을 교육하던 기관이다. 현대적 교육기관이 생겨나면서 대부분 해체되었지만 아직도 전국적으로 230여 개의 향교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서울에서는 유일하게 양천 향교만 남아 있어 그 의미가 크다.
조선 태종 연간(서기 1411년경)에 설립된 양천 향교는 옛 선비정신을 잊지 않기 위해 지금도 성인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맞춤형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또 미디어 시대에 맞는 생활예절 교육과 함께 다양한 소통 창구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그러나 현재는 코로나19 여파로 휴관 중이다. 그래서 더 조용해진 향교다.
담장을 둘러쌓았던 능소화도 예년에 비해 많이 줄어든 모습이다. 그래도 잊지 않고 피어나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에 귀 기울이려는 듯 꽃잎을 활짝 열었다. 능소화의 전설 속에는 그 옛날 구중궁궐에 살던 소화라는 궁녀 이야기가 있다. 어여뻤던 소화는 임금의 사랑을 얻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어느 날부터 임금이 자신을 찾지 않자 그리움에 점점 병이 들어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담장 밑을 서성이고 내다보며 오매불망 임금만을 기다리다가 안타깝게 세상을 뜬 소화. 그녀는 “담장 가에 묻혀 내일이라도 오실 임금님을 기다리겠노라”고 했고 그 영혼이 깃들었는지 소화가 지냈던 처소의 담장을 덮으며 꽃이 주렁주렁 피어났는데 그 꽃이 바로 능소화다.
능소화는 오래전 사신들이 중국을 드나들며 가져온 꽃으로 화사한 색상과 모습이 기품 있어 양반꽃으로 불리기도 한다. 주로 사대부 뜰에서만 볼 수 있었고 민가에서는 함부로 심지 못했다. 사람들은 능소화가 다 피고 질 때 미련 없이 꽃송이를 톡 하고 떨어트리는 모습이 마치 소화의 지조를 닮은듯하다고 풀이한다. 능소화의 꽃말은 '영광', '기다림', '명예'다.
예전에는 능소화가 흔치 않았다. 그래서 이맘때면 멀리 경상도까지 내려가 운치 있는 한옥 담장을 뒤덮으며 피어난 능소화를 촬영한 적도 있다. 그러나 이제는 한강변 산책길에서 굵은 나무 기둥을 칭칭 감으며 피어난 능소화를 볼 수 있고 고속도로변의 높은 벽을 뒤덮으며 피어난 모습을 보기도 한다. 그뿐 아니라 능소화 터널을 이룬 신식풍 조경의 공원도 생겨났다. 어느덧 주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꽃이 되었다.
능소화는 역시 담장을 타고 피는 게 제일 어울린다. 마침 향교 관리인이 굳게 잠긴 문을 잠깐 열어주어 동재와 서재, 그리고 강학 공간이 있는 마당까지 들여다봤다. 향교 옆길로 한 걸음 옮기면 궁산 근린공원으로 이어진다. 울창한 숲길은 여름인데도 서늘하다. 길을 따라 나지막한 산책로를 걷는 즐거움이 있다. 아울러 겸재정선미술관과 궁산땅굴, 구암공원, 허준박물관으로 연결되는 강서 역사문화 둘레길을 알차게 돌아볼 수 있지만 생활 속 거리두기 때문에 실내 관람은 어렵다.
바이러스로 조심스러운 세상이다. 지금은 향교를 속속들이 들여다보지는 못하지만 주변 뜰을 거닐며 유생들의 선비정신과 능소화의 전설을 떠올리는 시간도 제법 괜찮다. 게다가 한적한 분위기가 유유자적 생활 속 거리 두기에 적당하다.
향교를 고리타분한 구시대의 유물처럼 생각하기 전에 한 번쯤 옛 성현들의 흔적을 통해 차분한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지. 유생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뜰에서의 담백한 어느 하루, 여름 햇살을 받은 능소화가 향교 담장 위에서 눈부시다.
주소: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 234
△ 주변 볼거리
△서울식물원을 비롯해 겸재정선기념관, 구암공원, 허준박물관, 궁산땅굴이 이어져 있다. 향교 입구 부근에 위치한 사찰 홍원사와 전통 방식으로 면을 만들어 국수를 주렁주렁 널어놓은 ‘옛날국수’ 집 구경은 덤이다.
△이타제면소의 잔치국수(5000원)와 굴림만두(4000원)로 맛난 한 끼가 가능한 곳이 근처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