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화폐는 아직도 국제 시장에서 공식 환전이 안 되는 돈이다. 그런데도 한국인들이 많이 가는 중국 여행지의 경우에는 한국 돈이 별 불편 없이 사용된다. 그만큼 한국인들이 여행으로 많이 찾는다고 한다.
물론 호텔 숙박비나 식비 등 큰돈은 여행사에서 알아서 지급하므로 관여할 바 아니고 개인적으로 쇼핑에 사용할 돈을 말한다.
호텔 룸서비스 팁, 마사지 가게, 기념품점, 동네 행상, 기념품 판매점, 농산물 판매점, 공항 면세점에서도 한국 돈이 통한다.
한국 돈 1만 원은 중국 돈으로 약 60위안이다. 중국 돈 1위안은 우리 돈으로 약 167원이다. 미국 돈 1달러가 약 6.71 위안이다. 물건값이 중국 돈으로 되어 있으면 한국 돈으로 얼마인지 금방 계산이 어렵다.
그래서 한국 돈으로 지급 할 수 있으면 금액에 대한 감이 있으므로 계산이 편한 것이다. 우비 하나에 3000원, 좀 더 고급은 5000원, 삼단 우산은 5000원, 장뇌삼 10뿌리에 1만 원부터 굵은 뿌리는 하나에 5만 원도 부른다. 행상이 가지고 다니는 현지 교통지도가 1000원 식이다.
호텔 룸서비스 팁은 보통 1불을 놓고 나온다. 1불은 우리 돈 약 1120원 정도이지만, 1000원으로 간단하게 보면 된다. 그래서 테이블에 팁으로 1000원권 지폐를 놓고 나온다. 무거운 가방을 방까지 갖다 주는 팁도 마찬가지로 1000원이다. 1불은 우리 돈을 미국 돈으로 환전해야 하므로 환전 수수료가 붙는다. 환전한 미국 돈이 한정적이므로 우리 돈 1000원보다 귀하게 쓰인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이 많이 가는 중국 여행지에 갈 때는 우리 돈 1000원짜리를 많이 준비해 가면 좋다. 1만 원권도 그대로 사용하지만, 1000원 지폐가 더 용도가 많다. 굳이 수수료 내가며 위안화로 환전해 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면세점에서도 가격을 미국 돈, 중국 돈, 한국 돈으로 따로 매겨놓았다. 역시 한국 돈으로 지급하면 편하다. 지갑이 불룩한 것이 싫어서 주머니에 대충 넣어둔 한국 돈을 꺼내 줬더니 구겨진 돈은 은행에서 환전해주지 않는다며 반드시 지갑에 넣어 다니라는 충고를 들었다.
동전은 걸어 다닐 때 짤랑거리고 무게도 있어 불편하다. 보안 검색 때도 금속이므로 여지없이 걸린다. 보안 검색은 공항뿐 아니라 중요 관광시설을 이용하기 전에 받는다. 백두산 산문에서 입산 절차를 밟을 때도 거쳐야 한다. 따로 가방에 넣어 두거나 아예 동전은 떠날 때부터 안 가지고 가는 것이 좋다.
단, 유럽에서는 화장실이 대부분 유료이므로 유로 동전이 필요하다. 보통 한번 사용에 30센트, 50센트를 받는다. 동전이 없으면 지폐로 내면 팁으로 생각하고 거스름돈을 주지 않는 일도 있다. 여러 명이 함께 가면 합해서 지폐로 사용할 수도 있다.
충주 땅 변두리 후미진 동네에 사는 너를 찾아간 것은 들판에 황금빛 물결이 일기 시작하는 어느 해 가을이었지. 논에는 벼농사, 밭에는 주로 사과 농사를 짓는 마을. 사과 과수원에는 누런 잎이 떨어지기 시작하고, 나뭇가지마다 매달린 사과들은 태양의 후예들인 양 붉은 빛깔로 여물어가고 있었어. 모처럼 찾아온 나를 위해 너는 한 과수원으로 데려가 사과 한 상자를 사서 선물이라며 안겨준 뒤, 손수 차를 몰아 마을 변두리에 있는 큰 저수지 부근으로 데려갔지.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공개하지 않은, 늘 혼자 가서 머물다 오곤 한다는 너만의 성소(聖所)로!
네가 말한 성소는 저수지를 둘러싼 울창한 숲속 무덤 몇 기가 있는 아늑한 장소였어. 한낮인데도 도래솔 몇 그루가 무덤 둘레를 감싸고 있어 자연스레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고, 그 적요한 품에 들자 성소라는 네 말이 실감으로 다가왔지. 들뜬 마음이 가라앉고 명상에 들기에 안성맞춤인 곳.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자기 내면으로 잠수할 수 있는 곳. 우리는 마른 잔디 위에 앉아, 깊고 푸른 저수지 물결을 내려다보며 한가로움을 즐겼고, 잠시 눈을 감고 명상에 들기도 했지.
그렇게 너를 만나고 온 후 보름쯤 지났을까. 후배를 통해 너의 갑작스런 부고를 들었지. 청천벽력이었어! 우리는 이제 쉰 살을 막 넘은 나이였고 정신적, 영적으로 토실토실 여물어가는 때였지. 평생을 목회자로 살아온 너는 자발적 가난을 택해 남들이 가려 하지 않는 시골 오지로 스며들어, 노인들이 대부분인 교우들을 지극정성으로 섬기고 살았어. 예수의 거룩한 종지(宗旨)를 따라 살려는 이들은 점차 줄어들고, 천민자본의 코뚜레에 코가 꿴 이들이 점점 늘어나는 세상을 직시하며 너는 마지막까지 올곧게 살려고 몸부림쳤지.
네가 세상을 떠난 뒤에, 매스컴에서는 너의 아름다운 삶을 기리는 보도가 줄을 이었지. 죽기 1년 전에 네가 작성해놓은 유서도 공개됐어. 그 아름답고 의미심장한 유서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너의 갑작스런 죽음을 더욱 안타까워했지. 그때 네가 남긴 유서의 일부야.
나는 오늘까지 주변인으로 살게 된 것을 감사하고/모아 놓은 재산 하나 없는 것을 감사하고/목회를 하면서 호의호식하지 않으면서도 모자라지 않게/살 수 있었음을 감사하며/이 땅에서 다른 무슨 배경 하나 없이 살 수 있었음을 감사하고/앞으로도 더 얻을 것도 없고 더 누릴 것도 없다는 것에/또한 감사하노라.//사람들의 탐욕은 하늘 높은 줄 모르며 치솟고/사람들의 욕망은 멈출 줄 모르고 내달리며/세상의 마음은 흉흉하기 그지없는 때에/아무런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음에 참으로 감사하노라.
이쯤에서 내가 너를 만나게 된 사연을 잠깐 얘기해볼까 해. 우리가 만난 건 강릉 땅에서였지. 서울에서 ‘기독교사상’이란 잡지 일을 하던 나는 필화사건이 터져 회사에서 쫓겨났지. 나는 부득이 홍천 땅으로 가서 잠시 목회를 하다가 네가 사는 강릉의 해변가에 있는 농촌 교회로 부임했어. 너는 강릉 시내에서 아주 작은 교회를 섬기고 있었고, 민주화운동을 위해서도 헌신하고 있었지.
그렇게 사회운동에 열정을 쏟으면서도 여린 감성을 지닌 너는 시를 사랑하는 문학도였고, 어린 시절 조부에게 한문을 배운 터라 동양 경전에도 해박했어. 서로의 공통된 관심이 우리를 가깝게 했고, 우린 자주 붙어 다녔지. 주위에선 그렇게 붙어 다니는 우리를 보고 놀리곤 했어. “전생수는 고진하의 보디가드 같다”고. 나는 60kg이 채 나가지 않는 홀쭉이였고, 너는 내 몸무게의 두 배나 되는 뚱보였으니까. 물론 남들의 그런 놀림도 너는 개의치 않았어.
우리는 그렇게 친했지만, 어쩌다 객지에서 만나 여관 같은 데서 함께 잠을 자게 될 때는 좀 힘들었어. “내가 코를 좀 심하게 고니까 너 먼저 자!”라고 늘 말하곤 했지만, 내가 잠을 청하려 애쓰다 보면 너는 항상 먼저 잠에 떨어져 천장이 들썩거릴 정도로 심하게 코를 골았으니까. 그렇게 잠을 설치고 난 어느 날 아침에 국밥을 먹으며 너는 병든 후배가 입원하고 있었던 병상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해 함께 킬킬대며 웃었지. 후배가 입원한 병원에서 불편한 쪽잠을 자고 나오는데, 같은 병실에 있던 이들이 이렇게 쑥덕거리더라는 거야. “코 고는 소리가 어찌 큰지 시골 경운기 가는 소리 같았어!” 너무 미안한 너는 병실을 나오며 이렇게 대꾸했다고 했어. “죄송합니다. 시끄러운 경운기는 이만 물러갑니다!”
하여간 그렇게 네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 나는 시골로 솔가해 잡초를 키우며 살고 있어. 너 역시 목회생활을 마치고 자유로워지면 네 고향에 돌아가 소나 몇 마리 기르며 살고 싶다고 했지. 그처럼 소박한 바람을 왜 하느님은 들어주지 않고 일찍 데려가셨는지? 네가 살던 충주 땅 부근을 지날 때나 촉촉이 비가 내려 문득 네가 그리워질 때면 원망을 담은 이런 물음을 하늘에 던져보기도 하지. 그리고 네가 남겨둔 시 몇 구절을 혼자 읊조리며 위로를 받아.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도/본디 제 맘이 아닌/우주의 움직임//사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낙담하지 말라/그대 속에 그대보다 더 큰 숨이/물결치고 있나니/그 숨결 속에 그대 삶을 묻으라.
나뭇잎 한 잎 떨어지는 것도 ‘우주의 움직임’이라는 겸허한 네 통찰 앞에서 나는 절로 옷깃을 여미게 돼. 그리고 작은 우리 속에 ‘더 큰 숨이 물결’친다는 너의 시구를 보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넌 이미 우주의 비의(秘意)를 깨친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곤 해.
네가 이승에 있을 적에 가끔씩 꽃엽서를 주고받곤 했지만, 오늘처럼 이렇게 네게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쓸 줄은 몰랐어. 그래도 너의 이름에 기대어 편지 몇 줄을 쓰면서 꽃보다 향기롭게 살았던 너의 삶을 조금이나마 드러내고 싶었어. 물론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네가 사랑했던 불우한 이 땅의 민초들, 저 산과 들의 이름 없는 풀꽃들이 네 아름다운 삶을 말없이 증언하고 있지만 말이야.
고진하(高鎭河) 시인·목사
강원 영월생. 1987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 ‘프란체스코의 새들’, ‘얼음수도원’, ‘거룩한 낭비’, ‘명랑의 둘레’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시 읽어주는 예수’, ‘잡초치유밥상’, ‘조금 불편하지만 제법 행복합니다’가 있다. 영랑시문학상, 김달진문학상 수상. 현재 한살림교회 목사.
백두산 탐방 일정에 윤동주 생가 방문이 있었다. 강신영 동년기자, 이경숙 동년기자와 함께 한 이번 여행에 동행한 신광철 시인의 시평(詩評)이 이동하는 버스에서 이어졌다.
윤동주, 참담한 이름이다. 눈물을 통해서 바라보아야 이해되어지는 맑은 시인이다. 시를 한 편도 발표하지 못한 시인. 시집을 한 번도 내지 못하고 간 시인. 스물아홉이란 나이에 싸늘한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한 시인이다. 첫 시집이 유고(遺稿) 시집이 되었다. 윤동주 시인 자신은 받아보지도 못한 시집이 되었다. 그의 이름에는 성장하지 못한 소년이 들어 있다. 아니 청년이겠지? 스물아홉, 가장 빛나는 시절을 막 넘기려는 나이다. 스물아홉에 죽음을 맞이한 윤동주 시인은 순결의식에 안타까워 쩔쩔매게 하는 빛나는 슬픔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그의 죽음을 정지용 시인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시집 서문에 이렇게 썼다.
“무시무시한 고독 속에서 죽었구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도 없이!”
자신이 쓴 시를 이 세상에 한 작품도 발표한 적이 없었다. 그렇게 미완의 한 시인은 죽었다.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라는 정지용 시인의 글에서 또 한 번 숙연해진다. 윤동주 시인을 떠올리면 미완성이라는 단어가 그의 곁에 서성이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성숙보다는 어린아이 같은 순수와 파릇파릇한 양심에 기댄 인생관이 보인다. 막 봄을 만난 나무가 추위에 겨우 견디고 있는 모습이 그려진다.
- 신광철 시인의 산문 中
숙연한 마음으로 생가를 들어섰다. 대문 앞에 있는 돌비석에는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 생가’라는 글과 함께 한문이 새겨져 있었다. 1945년, 해방을 6개월 앞두고 29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 윤동주는 간도 이주민 3세로 1917년 북간도 명동촌(明東村)에서 태어났다. 윤동주의 성장기는 부러울 것이 없었다. 10칸짜리 생가 옆에는 교회가 있고, 소학교도 얼마 안 된 거리에 이웃해 있었다. 소년 윤동주에게는 교육자요, 기독교 목사인 큰 외숙 김약연(金躍淵, 1868~1942)의 영향이 매우 컸다. 규암(圭巖) 김약연은 명동소학교를 창립하고, 교장을 지낸 우국 교육자다. 그러나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에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서 작고했다. 당시 그의 나이 29세였지만 실제로는 만 27년 1개월 17일을 살고 갔다.
관리인의 안내로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푸르디푸른 스물아홉의 나이에 현해탄 건너 일본 감옥에서 생체실험을 당하면서 쓸쓸하게 죽어간 시인의 아픔이 절절이 다가왔다. 동행한 이경숙 동년기자가 시비(詩碑) 앞에서 윤동주의 서시(序詩)를 낭송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윤동주 생가에 하루 500여 명의 한국인들이 다녀간다고 하니 그나마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
머지않아 불어올 훈풍
이튿날, 우리는 도문을 향해 출발했다. 명동촌 입구에서 중국 공안이 버스를 세우고 차에 오른다. 공안의 표정이 일순간 섬뜩해보였다. 이곳이 중조(中朝, 중국과 조선) 변경에서 가까운 도시라 검문이 철저하다고 했다. 탈북자들을 감시한다는 명목 하에 한 사람 한 사람 여권 사진을 대조하면서 검문을 했다.
얼마 후 고대하던 두만강에 드디어 도착했다. 압록강 강변에서 보았던 북한의 풍경이 더욱 가까이 눈에 들어왔다. 무심한 강물만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내 마음을 대신하듯 빗방울이 간간이 뿌려댔고 하늘도 잔뜩 찌푸려 있었다. 이곳 강물에 손 한 번 담가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친구와 함께 ‘눈물 젖은 두만강’도 불러보고 싶었다. 철조망 너머로 손에 잡힐 듯 보이는 북한 땅은 고요하기만 했다. 두만강 철교는 러시아와 중국, 북한의 접경 지역으로 민간인 출입이 쉽지 않다고 한다.
4월 27일 남북 정상회담에 이어 북미회담까지 이루어졌으니 앞으로 이곳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머지않아 훈풍이 불어오기를 기대해본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곳 분위기는 정중동이라고 할까? 어쩌면 훈훈한 바람은 머나먼 남의 얘기가 될 수도 있다.
강을 가로질러 물보라를 일으키며 배를 타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마도 중국인들이겠지? 친구와 나는 그저 마음으로만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부르면서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자리를 떴다.
하지만 언젠가는 유라시아 대륙 철도를 타고 자유롭게 두만강 철교를 건너게 될 날도 오지 않을까 희망을 가져본다.
4박 5일의 모든 일정이 두만강에서 끝났다. 과연 나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낀 걸까? 출발하기 직전의 설렘은 광개토대왕릉을 탐방하면서 아쉬움으로 다가왔다. 마치 현란한 마술쇼를 보여주듯, 안개 장막을 걷어내고 고운 속살을 보여주던 백두산 천지의 모습은 오랜 감동과 전율로 남았다.
압록강과 두만강에서 희망의 싹을 보았으니 더 이상 무엇을 바랄까? 그저 감사할 뿐이다. 언젠가 또다시 이곳을 찾는다면 기쁨에 겨워 목청을 돋워보리라.
기존 출판의 문제점인 비용과 재고부담을 극복하고자 ‘개인출판’이 등장했다. 자신만의 책을 갖고 싶은 독자라면 교보문고의 개인출판 시스템 ‘퍼플’을 이용해보자.
지금은 출판사에 투고되는 원고의 대부분이 사장되고 있다. 자가 출판은 글을 쓴 저자가 직접 사비를 들여서 책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자비 출판이라고도 부른다. 이 경우 출판사는 저자에게서 책을 만드는 데 필요한 비용을 먼저 받고 일을 진행한다. 비용도 문제지만 지명도 없는 저자는 ‘재고처리’ 때문에 고생이 많다.
기획 출판은 일반적인 출판 방법으로 원고를 받고 책을 만드는 데 필요한 모든 비용을 출판사가 부담하는 대신, 정가의 약 10% 정도를 인세로 저자에게 지급하는 방식이다. 출판사가 모든 비용을 부담하고 마케팅과 물류 관리까지 모두 알아서 해주기에 저자로서는 비즈니스 면에서 출판사에 일임하고 저작에만 집중하면 된다.
개인출판은 기존의 출판과 달리 비용부담이 전혀 없다. 먼저 주문을 받은 후 제작과 판매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디지털시대의 출판문화의 대혁신이다. 원고작성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책임이다. 누가 교정을 하거나 수정할 수 없다. 충분한 원고가 먼저 작성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시 100페이지, 산문 200페이지 이상이 보통이다. 물론 전문사적은 제한이 없으나 소책자인 경우에도 30페이지 이상을 보통 요구하고 있다.
원고가 완성되면 교보문고 홈페이지에 회원가입을 한다. 다음에 ‘작가등록’을 한다. 등록승인은 곧 나온다. 홈페이지 '북 만들기 START'에 들어가 안내서에 따라 PDF 양식으로 작품을 올린다. 제목을 정하고 차례, 저자소개, 책 소개가 중요하다. 표지는 책의 얼굴이다. 앞표지, 뒤표지, 등지, 앞날개, 뒷날개 모두 디자인하여야 한다.
판매자 계정을 만든 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판매신청을 하면 관리자의 승인이 날 때까지 며칠이 소요된다. 보완해야 할 부분에 대해서는 수정 요구가 들어온다. 정도에 따라 여러 날이 필요할 때도 있다. 승인이 완료되면 홈페이지 ‘신간 서적’에 제목, 차례, 저자, 책 소개가 등재된다.
POD 도서는 주문형 출판으로 파일 형태로 가지고 있다가 주문이 있을 때 제작되어 고객에게 배송되는 시스템이다. 즉 편집이 완료된 파일만 있다면 특별한 비용이 들지 않고, 오히려 판매 수익을 받는다. 도서 정가에 제작비용과 저자 인세가 포함되는 것으로 작가가 지급하는 비용은 전혀 없다. 제작 사양을 모두 포함한 판매 정가가 정해지고 정가의 20%가 인세로 지급된다. 출간된 책은 교보문고의 유통망을 통해 웹사이트뿐 아니라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PC의 교보 eBook 애플리케이션, 제휴 채널 등에서 판매된다.
동년배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 지인이 아무개가 입원했다는 소식을 전하며 좀 냉소적인 표정을 지었다. 자연스레 “왜 입원했는데?”라는 질문이 이어졌다. “몸이 가려워서 입원했다고 하더라고.” 그렇게 대답하는 지인의 목소리에는 부정적 음색이 뚜렷했다. 표정에도 몸이 좀 가렵다고 입원까지 하느냐는 핀잔이 완연히 드러났다. 다른 사람들 역시 중병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별일 아닌 것 가지고 무슨 입원까지….’ 하는 내색을 감추지 못했다.
오래전 중국에서는 죄인에게 ‘자백을 강요하는’ 다양한 물리적 고문 중에 특정 나뭇가지로 가려움증을 유발하는 것이 있었다. 실제로 심한 가려움은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면 ‘인내하며 견디기’ 어렵다. 임상적으로도 가려움 때문에 손톱으로 자기 피부를 피가 날 때까지 긁어대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요컨대 가려움증이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심각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필자가 피부과 전문의 수련과정 중 ‘가려움증’에 대한 교육을 받을 때 스승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다. 전문의로서 개원한 초년생이 맞닥뜨릴 가장 다루기 어려운 환자는 가려움증을 호소하는 환자군(群)이라는 내용이었다. 가려움증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이 혹시나 젊은 전문의가 새로운 지식으로 자기 고통을 덜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찾아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만큼 원인이 다양하고 심한 증상의 피부 가려움증은 치유하기가 쉽지 않다.
근래 가려움증을 호소하는 ‘이웃’이 유독 많아졌다. 대부분 가려움증 때문에 숙면을 못 취하고 점잖게 예의를 지켜야 할 자리에서 자꾸만 몸을 긁적이게 돼 민망하다고 하소연한다. 이를테면 고통스럽다기보다는 ‘귀찮고 성가신’ 수준의 가려움증이 많다는 의미다.
가려움증은 일명 피부소양증(皮膚瘙痒症)이라고 하는데, 특히 70세 이상 노령층에서 흔히 나타나는 가려움증은 노인성 소양증(瘙痒症)이라 부른다. 이처럼 가려움증은 학명(學名)으로 자리를 잡았을 정도로 흔하다.
가려움증의 원인은 뭘까?
크게 내적인 원인과 외적인 원인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내적인 원인으론 젊은 시절의 왕성하던 피지선 활동이 노령화에 따라 현격히 줄어드는 상황을 들 수 있다. 둘째, 외적인 요인으론 생활습관에 따른 현상을 지적할 수 있다. 즉 피부에 기름을 공급하며 윤기를 주던 피부기름샘이 ‘고갈’되었는데도 피부 관리는 여전히 젊은 시절의 ‘옛 추억’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관리를 잘 못한다며 피부가 짜증을 내는 것이 바로 가려움증인 셈이다.
내적 요인인, 부족한 피지선의 재활성화는 오늘날의 의학 수준으론 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외부에서 이를 공급하는 방법밖에 없다. 외적인 원인을 파악하고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현실적이라는 얘기다. 무엇보다 샤워나 목욕 횟수를 줄여야 한다. 아울러 피부에 보습용(補濕用) 기름, 밀크로션을 도포하는 것이 손쉬운 대안이다. 특히 샤워나 목욕 후에는 보디로션을 ‘열심히’ 바르는 게 큰 도움이 된다. 우리는 ‘뽀송뽀송한’ 피부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개운하다’며 자주 ‘때’를 밀곤 하는데 이는 전형적인 반피부적 행위다.
세제인 비누와 샴푸 사용 횟수와 양도 줄여야 한다. 궁극적으론 세제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게 필자의 주장이다. 피지는 더러워서 제거해야 할 ‘배설물’이 결코 아니다. 근본적으로 피지는 수용성이라 더운물로 샤워하면 저절로 닦인다. 그런데도 우리는 계면활성제가 첨가된 세제를 지나치게 자주 사용한다. 피부를 자극하고 환경을 오염시키는 ‘좋지 않은’ 물질인데도 온몸에, 온 머리[頭皮]에 ‘아무 생각 없이’ 발라대고 있는 것이다.
몇 년 전 산성비에 대해 걱정하는 질문을 받은 한무영 교수(서울대공대)는 “샴푸가 산성비보다 100배 독하다”(조선일보, 2011. 4. 9.)고 지적했다. 이는 지난 반세기 동안 필자가 고독하게 주장해온 샴푸의 유해성을 드라마틱하게 대변한 말이다. 피부 관리와 관련해 정말 유념해야 할 사항이다.
‘샴푸가 정말 나쁜가요’라는 제하의 의학 산문을 썼을 때의 일이다. 이 글을 읽고 가장 많이 제기된 질문은 ‘샴푸를 어떻게 안 쓸 수 있는가?’, ‘대안은 무엇인가?’, ‘비누는 괜찮은가?’ 하는 내용들이었다. 실로 ‘샴푸 중독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근래 개인이나 소규모 업체가 만든 비누가 시중에 나도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비누의 제작 과정이 아주 간단해서 쉽게 만들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특히 ‘꿀 비누’, ‘인삼 비누’ 등 특수 식물 향이 들어간 ‘허브 비누’ 제품이 시장에 많이 나와 있다. 그리고 거의 예외 없이 친환경성 비누임을 강조한다. 하지만 여기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물론 이런 비누에 함유된 꿀과 인삼 등 각종 식물성 성분이 알레르기를 일으킬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그러나 비누가 갖고 있는 태생적인 문제를 제거했다는 주장은 억지일 뿐이다.
비누는 가장 쉽게 제조할 수 있는 ‘공산품’이다. 즉 ‘액체(기름)+가성소다(양잿물)→고체(비누)+액체(글리세린)’라는 화학방정식이 ‘비누 제조 과정’이다. 이를 종합해보면 기름과 강산(强酸)인 가성소다의 화학적 반응체가 바로 ‘비누’인 것이다. 즉 모든 비누는 강알칼리다. 양잿물의 다른 형태인 셈이다. 시중에 유통하고 있는 모든 비누의 산성도는 pH 9.5~12다. 그런데 피부 표면을 에워싸고 있는 보호막, 일명 산성외투(Acid-Mantel)는 pH 4.5~5인 약산성이다. 즉 비누가 피부의 보호막을 파괴한다는 얘기다. 따라서 피부 관리라는 측면에서 비누는 큰 도움이 안 된다. 피부과학의 원로 지멘스(Siemens) 교수는 자고로 “거지에게는 피부병이 없다”고 말했다. 아울러 “비누는 인간이 발명한 최악의 제품”이라고 주장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비누는 엄격한 의미에서 기름이 빠져나간 ‘고체’다. 그리고 흠이라면 산도가 높은 ‘강알칼리성’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고체화된 비누이기 때문에 산도가 높은 것이다. 그렇다면 액상 ‘물비누’가 한 가지 대안이다. 산도가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이다(pH 7~7.5). 추천할 만한 아이템이다.
반면 샴푸에는 계면활성제인 SLS(Sodium Lauryl Sulfate)가 함유되어 있다는 사실이 문제의 핵심이다. SLS는 세척력이 강한 화학 물질이지만 피부를 상하게 하는 가장 확실한 피부 자극제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한편 세발제(洗髮劑)로 샴푸 대신 비누를 사용하는 것이 모발 관리의 대안일 수 있다. 비누는 확실한 피지 제거 기능이 있다는 장점과 더불어 피부와 모발을 건성으로 만든다는 단점도 있다. 하지만 샴푸처럼 피부 환경을 파괴하지는 않는다.
두피에는 모공이 있고, 이 모공을 통해 모근에서 생성된 피지가 피부 밖으로 스며 나온다. 다시 말해 모공을 통해 환경 유해 물질인 샴푸가 체내로 들어갈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샴푸는 한 달에 한 번만 쓰는 세제가 아니어서 더욱 염려스럽다.
세계 굴지의 한 화장품 회사 CEO는 “피부에 보습을 하는 것이 피부 관리의 시작이며 끝”이라고 말했다. 동감한다. 인체의 생리를 알면서 관리해주면 피부는 그만큼 ‘행복’해한다. 그래야 피부가 ‘덜 늙는다’. 이제는 노령자의 피부도 ‘세상이 바뀌었다’는 걸 알고 싶어 한다.
몇 해 전 소설 을 읽었던 기억이 새롭다. 개인적으로 소설가 김훈을 좋아한다. 사물의 본질을 캐 들어가는 생각의 집요함에 몸서리가 나지만 그의 언어는 절제되고 담백하여 울림이 크다. 때로 그의 언어가 고답적이고 사변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산문집 을 읽으며 그 생각이 바뀌었다. 본질적으로 그의 언어는 머리가 아닌 몸의 언어다. 그가 ‘길’에 천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영화 은 감독(황동혁)의 영화라기보다 작가 김훈의 영화다. 이미 원작을 통해 빽빽이 작가가 세워 놓은 말의 숲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은 까닭이다. 아니 감독은 애초에 그 삼엄한 언어의 포위망을 벗어날 생각이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영화가 전쟁을 배경으로 함에도 창과 칼보다 언어가 주 무기가 된다. 그러나 그럼으로써 매우 한국적인 ‘말의 전쟁’이 탄생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미 십 년 전 정묘년에 호란을 겪었으면서도 명나라를 향한 명분론에 사로잡힌 조정은 아무 대비도 없이 또 한 번의 호란을 맞이한다. 정보는 어두웠고, 군대는 허약했으며, 국가 시스템은 흐트러졌다. 지난번처럼 강화도로 피신하려던 계획은 공신들의 이기적 작태와 정보 누설로 막혀 부득이 가까운 남한산성으로 들어와 버틸 수밖에 없었다. 영화는 한겨울 추위와 허기로 가득 찬 47일간의 기록이다.
영화는 소설처럼 장으로 나뉘어 다큐멘터리처럼 진행된다. 영화 초반 김상헌이 성으로 함께 들어가자는 말을 듣지 않은 뱃사공을 죽이고 나중 그의 손녀 나루가 성에 들어오면서 작은 스토리가 만들어지나 영화의 큰 줄기는 척화파 김상헌(김윤석)과 주화파 최명길(이병헌)의 말싸움으로 구성된다. 미래를 모르니 판단할 근거도 없고 결론도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식량이 떨어져 간다는 냉혹한 현실뿐이다.
영화의 또 다른 축은 영의정 김류로 대표되는 이기적이고 권위적인 기득권층과 대장장이 서날쇠(고수)로 대표되는 민초의 대비다. 자신의 실패를 부하에게 뒤집어씌워 죽이는 김류의 비겁한 행위와 자신의 의무도 아니면서 김상헌의 부탁으로 적지로 뛰어드는 서날쇠의 행동은 비록 상투적이기는 하나 낡고 썩은 권력의 위선을 드러내려는 작가의 의도를 극대화한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영화의 백미는 김훈의 현란한 내공이 발휘된 김상헌과 최명길의 언어 대결이다. 둘의 논리는 한 치의 빈틈이 없어 우열을 가릴 수 없다. 흥미로운 것은 둘 모두 ‘길’을 말한다는 점이다. 죽음을 각오하여 열리는 진정한 삶의 길도 있고, 비루하지만 삶으로써 얻어지는 내일의 길도 있다. 그리하여 김상헌은 자결로써 죽음을 얻었고, 최명길은 항복이라는 치욕을 통해 삶을 얻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오늘의 현실을 떠올리며 기이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오늘날 우리 정치가 보여주는 지리멸렬함과 해묵은 명분 싸움의 뿌리가 이리도 길고 깊다는 것에 대한 새삼스러운 깨달음 때문이었다. 당시는 정보가 부족해서 어쩔 수 없었다 해도 모든 정보를 손바닥 보듯 하는 지금도 여전히 전근대적인 싸움을 벌이는 모습을 보며 역사 위에 잠자는 기분이 들어 모골이 송연했다.
영화가 사실과 다른 장면이 하나 있다. 영화에서는 김상헌이 자결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사실 그는 죽지 않고 청나라로 끌려갔다가 돌아와 82세까지 장수했다. 오늘에는 지탄의 대상인 그의 명분론은 조선 사회를 지배하는 키워드로 그의 후손들이 승승장구하는 바탕이 된다. 그로부터 시작된 안동김씨는 조선 후기 세도정치의 주역이 되며 망국의 씨앗이 되었다는 아이러니가 씁쓸하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돼서 마음만 동동 구르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이번 호에는 최학 소설가께서 故김용덕 교수님께 쓴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김 교수님.
참으로 오랜만에 인사 올립니다. 40년 가까운 세월을 흘려보내면서, 더러 예전 초등학교 시절의 방학숙제를 떠올리듯 가끔 교수님을 생각하긴 했지만 ‘인사’는 엄두조차 내질 못했습니다. 그곳에서 잘 계시겠지요? 이런 치렛말은 모두 생략하겠습니다. 교수님은 이미 ‘그곳’, ‘계시다’ 등등의 언어들과도 전혀 무관하실 테니 말입니다. 따라서 제 인사는 단지 저 혼자의 회억이고, 제 자신에게 들려주는 독백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1980년의 어느 봄날이었습니다.
그 전해, 한국일보사가 우리나라 사상 초유인 1000만원의 원고료를 내걸고 장편소설을 공모한 일이 있었지요. 대상은 기성작가와 신인을 망라하는 것이었습니다. 1973년 모 신문사의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이 당선되어 문단에 발을 들여놓고 있던 저는 그 몇 년 사이 작품 발표의 지면조차 제대로 얻지 못한 채 낙백의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지요. 그런 때에 광고를 보곤 결심을 했습니다. 좋다, 다시 공개 경쟁에 나서보자. 무명 신인작가의 설움을 씻을 호기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당시 서울의 한 조그만 잡지사에 근무하고 있던 저는 동료 직원들의 양해를 얻어 반년 넘게 소설쓰기에 매달렸습니다. 신촌의 와우아파트라고 아시죠? 어느 날 한 동(棟)이 와르르 무너져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아파트. 제가 그 아파트의 단칸방 하나를 얻어 살고 있었습니다. 돌이 갓 지난 딸애가 엉금엉금 제게로 기어오면 발로 아이를 밀어내면서 원고 칸을 메워나갔지요. 그렇게 완성한 작품이 홍경래의 난을 소재로 한 장편 역사소설 이었습니다.
운 좋게 그 소설이 당선되었습니다. 신문 한 면 가득히 심사평, 당선소감, 인터뷰 등 저에 관한 기사가 실린 다음 날부터 세상이 달라지더군요. 작품을 들고 가도 거들떠보지 않던 문학지 편집자들이 먼저 연락을 해서 작품을 달라지 않나, 미리 장편 출판을 계약하자면서 출판사 사장들이 번갈아 찾아오질 않나(교수님 생전에는 문자메시지 같은 것도 없어서 모르시겠지만, 요즘은 이런 문장 뒤에는 꼭 ‘ㅎㅎ’ 혹은 ‘ㅋㅋ’ 같은 이상한 부호를 붙인답니다. 옛사람들이 쓰던 ‘가가(呵呵)’와 흡사합니다).
아무튼 저는 그 덕에 화곡동에 마흔두 평짜리 단독주택을 마련했으며 전업작가의 길로 나선다고 출판사도 때려치웠습니다.
매일 이 신문에 연재되고 있던 그 해, 교수님으로부터 뜻밖의 엽서를 받았습니다. 좋은 역사소설거리가 있어서 작가에게 주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교수님의 존함은 전부터 알고 있었기에 저는 놀라움과 반가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화신백화점 옆에 있던 ‘종로다방’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교수님을 뵈었습니다. 단아한 모습에 말씀도 적으셨지요. 뒤늦게 셈해보건대, 그때 교수님은 쉰을 갓 넘긴 연세였고 저는 겨우 서른에 올라선 철부지였습니다. 온전히 기억하지 못합니다만 그때 주신 말씀의 대강은, 여러 해 동안 ‘기축옥사(己丑獄事)’에 관한 연구를 해봤는데 연구를 할수록 여기에 숨겨진 이야기가 많음을 알게 되었다, 중요하고도 흥미로운 이 이야기를 논문으로는 생동감 있게 독자에게 전할 수가 없다, 누군가 역사에 관심 있는 작가가 이를 소설로 형상화해주면 좋겠다, 그러면서 관련 저술이 든 노란 봉투를 제게 넘겨주셨지요. ‘역사가는 위대한 작가가 될 수 없지만, 작가는 위대한 역사가가 될 수 있다’는 말을 인용하시며 저를 부추겨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날 선선히 제가 그 일을 해보고 싶다고 말씀드렸던 것도, 저 또한 이전부터 이 사건에 소설가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589년 전주에서 정여립이 반란을 꾀한다는 고변이 있었고 이로써 수백 명이 희생을 당한 옥사의 실상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그동안 논란이 많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여기서 송익필 등의 음모론을 실증적으로 제기한 최초의 현대 역사가가 바로 교수님임은 누구도 부인치 못합니다.
서경덕, 이황, 기대승, 이이, 조식 같은 선학(先學)은 물론 정철, 유성룡, 이발, 김성일, 이산해, 김장생, 조헌, 허엽, 허봉, 김우옹, 성혼 등 조선 중기의 내로라하는 명사들이 죄 이 사건에 관련돼 있었기에 이를 소설화하는 일은 곧 우리 역사소설의 한 정점을 긋는 일이며 그 작업은 지난하고 시간이 많이 소요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저는 당시에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하여 교수님께 약속을 드리고서도 저는 쉬 작업에 들 준비를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딴짓거리를 하며 세월을 허비하는 중에도 그 약속은 무슨 채무인 양 제 심중에 남아 무게를 더해갔던 것도 사실입니다. 10년이 더 지나서였습니다. 홀연 교수님이 세상을 떠나셨다는 놀라운 소식을 접했습니다. 뒤늦게 사실을 안 저는 장례에도 참석치 못한 죄스러움에 한동안 몸을 떨었습니다. 돌아가시기 두 해 전쯤이었던가요? 교수님은 또 한 번 제게 서신을 주셨지요. 대전에 내려갔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잘 지내느냐? 그런 안부의 글이었지만 저는 마치 질책하시는 것만 같아 답장조차 드리지 못했습니다.
15년 전쯤 됩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여겨 방학을 맞아 안동 지례마을에 들어갔습니다. 산골 한옥 뒷방에 들앉아 한 주일 꼬박 컴퓨터 자판을 두들겨 500여 장을 만들었는데 다 부질없는 짓이었습니다. 한 달 후, 읽어보곤 주저 없이 지워버렸기 때문입니다. 2005년 교환교수로 중국 남경에 가 있는 동안은 전초작업이라 여기며 화담 서경덕에 관한 장편소설 한 편을 완성했습니다.
교수님, 종로다방에서 만났던 그 새파란 작가가 어느새 교수님보다 더 긴 세월을 대학 교단에 있다가 재작년 정년을 맞았습니다. 그러곤 소설을 쓰겠다고 충청도 연산 산골에 임시 거처도 하나 마련했습니다. 첫해를 어영부영 보낸 뒤, 올봄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지난 주말 1300장을 넘겼습니다. 2500장은 돼야 마무리가 될 듯합니다. 일단 이야기를 주재하는 동안은 퇴계, 율곡 같은 이도 사료를 근거로 제 의도껏 주물러볼 요량입니다. 제가 이미 율곡 죽은 나이보다 17년을 더 살고 있기에 어려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1584년에서 1589년, 이 과거 5년의 시간에 몰입돼 있는 요즘의 나날이 제겐 경이입니다. 제 거처에서 5분만 걸어 나가면 김장생이 걸었던 길을 만나고, 차로 10분만 나가면 정여립이 머물렀던 절간 마당에 섭니다. 아, 그래서 누군가가 저로 하여금 이맘때 이곳에 있게 했구나 싶은 생각마저 들 때가 많습니다. 명랑하게 들려오는 매미소리, 새소리도 제겐 16세기 말의 것이 됩니다.
성패는 뒷전으로 돌리겠습니다. 내년 봄날, 상하 두 권짜리 소설책을 존경하는 김용덕 교수님 묘소에 놓을 수 있다면, 종로다방에서 드렸던 제 약속을 지키는 것이 된다고 여기겠습니다.
최 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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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경북 경산 출생. 고려대 국문학과와 같은 대학 대학원 졸업.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이 당선되어 문단 등단. 1979년 한국일보 장편소설 공모에 역사소설 ‘서북풍’ 당선. 1981년~현재 우송대 교수. 고려대문인회 회장 역임. 현재 한중백주문화교류협회 회장. 저서로 창작집 ·, 장편소설 ·, 산문집 ·· 등.
을 집필한 김택근 작가가 성철 스님께 보내는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위선과 아만과 허무가 넘실대는 요즘, 세상을 깨웠던 스님의 장군죽비가 그립다는 사연을 소개합니다.
김택근 작가·언론인
성철 스님, 감히 스님의 삶과 사상을 들춰서 을 출간했습니다. 책은 쇄를 거듭해 팔려나가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자꾸 부끄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스님께서는 남김없이 비우고 떠났지만 저는 스님의 생을 완전히 태우지 못했습니다. 스님께서 세상에 계셨더라면 죽비를 들어 이렇게 일갈하셨을 것입니다.
“어찌 사량분별로 허튼짓을 했단 말인가.”
일개 서생이 글자를 동원하여 고승의 생을 옮겼으니 실로 무모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반딧불로 수미산을 태워보겠다는 어리석음이었습니다. 그래도 스님의 생을 따라가 보고 싶었습니다. 영원한 자유를 얻는 깨달음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곧장 젊은 날의 고뇌와 방황을 얘기하셨지요. 영원한 행복을 찾기 위해 책 속으로 들어갔지만 책은 답을 주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를 읽다가 한 곳에 눈이 딱 멈췄습니다.
‘나에게 한 권의 책이 있으니, 종이와 먹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펼쳐 여니 글자 한 자 없으나, 항상 큰 광명을 발한다(我有一券經 不因紙墨成 展開無一字 常放大光明).’
글자가 없는 경전. 스님의 수행은 결국 문자를 버리는 데서 시작됐습니다. 깨달음은 책에 있지 않고 마음에 있었습니다. 깨달음은 글자로는 이룰 수 없는[不立文字] 것이었습니다.
‘교(敎)는 부처님 말씀이요, 선(禪)은 부처님 마음이다.’
아, 얼마나 명징한 비유입니까. 이 구절을 읽으며 무릎을 쳤습니다. 스님께서는 결국 마음을 닦는 참선에 들었습니다. 스님의 수행은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이었습니다. 저는 당시를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습니다.
스님께서 저 언덕으로 건너가신 지 벌써 24년이 되었습니다. 남아 있는 우리는 이렇듯 시간을 헤아리지만 스님께서는 시간을 벗어나 계실 것입니다. 스님께서 열반하신 1993년 11월의 해인사가 떠오릅니다. 다비식 날에는 비가 내렸습니다. 찬비는 남은 자들의 가슴속으로 흘러들었습니다. 바람 불고 잎이 지고 사람들은 오열했습니다. 이 시대 사람들은 지난날 지구라는 별에서 성철이라는 이름의 스님과 함께 또 다른 진리의 별을 바라보았습니다. 그것은 축복이었습니다. 위선과 아만과 허무가 넘실대는 세기말에 최선을 다해 살다 간 선승의 삶은 아쉬움 너머의 희망이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었습니다. 스님께서는 평생 누더기를 걸치고 음식 또한 가장 적게 드셨습니다. 아마도 세상에 머문 자리가 가장 적게 패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삶의 향기는 가장 멀리 날아갔습니다.
스님께서는 숱한 법어를 남기셨지만 제게 가장 인상적인 것은 1982년 부처님오신날에 발표한 ‘자기를 바로 봅시다’였습니다. 스님, 다음 구절을 기억하시지요.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이 세상이 본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주려고 오셨습니다.”
저는 이 법어를 읽으며 스님의 길을 따라 걷고 싶어졌습니다. 중생이 변하여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고 본래 중생이 부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의 눈만 뜨면 자신의 본래 모습인 부처를 볼 수 있으니, 내가 있는 이곳이 부처가 사는 불국토요, 극락이라는 것입니다. 극락은 그래서 하늘에 있는 것도 아니고, 저 먼 나라에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서 처음 정각을 이루시고 일체 만유를 다 둘러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기이하고 기이하구나! 일체 중생이 모두 여래와 같은 지혜덕상이 있건마는 분별망상으로 깨닫지 못하는구나.”
부처님의 이 말씀이 불교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렇듯 사람마다 무한한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지구라는 별에서 선포한 사람은 부처님이 처음이었습니다. 스님께서는 분명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켰는데 사람들은 아직도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스님께서는 눕지 않는 수행 장좌불와(長坐不臥) 10년, 산문 밖을 나서지 않는 동구불출(洞口不出) 10년 등 많은 일화를 남겼습니다. 하지만 저는 스님께서 주도하신 봉암사결사야말로 비할 수 없는 위대한 불사(佛事)로 여깁니다. 마침 올해는 봉암사결사 7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우리도 부처님 법대로 살아보자’는 산중의 포효는 지금도 선승들을 깨우고 있습니다.
“먹고살 길이 없으면 강도짓을 할지언정 천추만고에 거룩한 부처님을 팔아서야 되겠는가.”
한국 불교는 봉암사결사 이전과 이후로 확연하게 나뉜다고 생각합니다. 봉암사에서는 법당에서 불교 아닌 것들을 모두 추방했습니다. 오직 부처님과 그 제자들만 모셨습니다. 가사, 장삼도 새로 만들어 입었습니다. 원색을 추방하고 괴색으로 통일했습니다. 요즘 스님들의 장삼이 그때 만들어진 것입니다. 또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을 실천했습니다. 당나라 때 백장 스님의 청규정신을 이어받은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공주규약에 담아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봉암사결사의 공주규약은 오래된 법이었지만 삿된 것들을 물리친 새 길이었습니다. 스님께서는 또 우리 불교계에 삼천 배를 남기셨습니다.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대문을 들어올 때는 돈 보따리와 계급장은 소용없으니 일주문 밖에 걸어놓고 알몸만 들어오라고 하지요. 사람만 들어오라 이겁니다. 그리고 들어오면 ‘내가 뭐가 잘났다고 당신을 먼저 만날 수 있나?’ 하지요. 부처님을 찾아왔다면 부처님부터 뵈라는 뜻입니다. 부처님을 정말로 뵈려면 절을 삼천 번은 해야지요.”
어찌 보면 절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상(像)이나 그림이나 조각에 절을 해도 결국은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흙덩이나 썩은 나무에게 절을 했더라도 성심을 다했다면 그 간절한 마음이 자신을 정화시킵니다.
몸으로, 말로, 생각으로 지은 삼업(三業)의 몸뚱이를 아래로 내던지는 자체가 바로 참회입니다. 욕심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앞세우고 세상에 머리를 치켜든 사람들이 절을 하면 아만(我慢)이 사라집니다. 절하는 사람에게는 평화가 찾아옵니다.
삼천 배를 하면 비로소 이웃과 생명이 보인다고 합니다. 삼천 배를 마치면 거의가 눈물을 쏟습니다. 참회의 눈물이며 환희의 눈물이며 고마움의 눈물인 것입니다. 삼천 배를 마친 신도들을 스님은 어떤 눈길로 바라보셨는지 궁금합니다. 삼천 배는 분명 나를 씻기는 기도입니다. 스님께서 또 ‘남을 위해 기도하고, 남모르게 남을 도우라’고 이르셨습니다.
“불교는 세상과 거꾸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은 전부 내가 중심이 되어 나를 위해 남을 해치려고 하는 것이지만, 불교는 나를 완전히 내버리고 남을 위해서만 사는 것입니다.”
깨친 사람은 은둔의 도사가 아니고, 신통력을 지녀 이를 과시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도를 얻었으면 중생을 사랑하고 제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상구보리(上求菩提)면 하화중생(下化衆生)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남을 돕는 것도 어려운데 남몰래 남을 돕는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마음에 남을 도왔다는 자국 자체가 없어야 진정한 불공입니다. 도와주었다는 뿌듯함이나 숭고함이 남아 있다면 진정한 보살도를 행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님의 호통이 귀에 쟁쟁합니다.
“아까운 돈과 몸으로 남 도와주고 왜 입으로 공덕을 부수어버리는가?”
남을 돕고 불공을 자랑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속이는 일입니다. 성철 스님은 그래서 ‘자기를 속이지 말라(不欺自心)’고 이르셨습니다.
요즘 특별한 스님들, 목소리 큰 스님들이 많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자신에게 감탄하고 자신을 숭배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저마다 이름 하나 간수하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습니다. 더 큰 밥그릇을 찾고 포만감에 뒤뚱거리고 있습니다. 자기 집의 무진장 보화는 놔두고 밖에서 거지 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삼 스님의 죽비가 그립습니다.
스님, 두서없이 길어졌습니다. 글을 마치며 이 편지를 보낸다면 부칠 곳이 어딘지 생각해봤습니다. 스님께서는 지금 어디 계십니까?
헝가리는 부다페스트를 기점으로 도나우 강 근교 지역(약 45km)을 묶어 도나우 벤트(Danube Bend)라 부른다. 도나우 벤트 중 ‘센텐드레’는 부다페스트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다. 1000년의 역사가 흐르는 고도로 사적과 문화유산이 많고 17~18세기의 화려한 건축물들이 도시를 빛낸다. 특히 도시 전체에는 예술미가 넘쳐난다. 1920년대, 독립적인 삶을 추구하기 위해 시골 마을로 숨어 들어온 예술가들이 만든 도시답게 말이다.
신성로마제국 때의 건축물이 남아 있는 도시
부다페스트에서 센텐드레(북쪽으로 약 20km)까지는 대중교통(지하철, 버스 혹은 배)으로도 쉽게 접근할 수 있다. 도시의 ‘카노노크(kanonok)’ 거리를 따라가면 시 청사를 만나고 곧 메인 광장에 이른다. 메인 광장으로 다가설수록 골목길의 운치는 깊어진다. 반질반질 윤기 나는, 자갈돌 박힌 골목의 양 옆으로 고풍스러운 건축물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다. 이 도시는 약 1000년 전, 고대 때부터 사람들이 정착했다. 로마제국의 통치 시절에는 ‘늑대성’으로 불리며 군사적인 요충지 역할을 담당했다. 9세기에 마자르족이 장악했고 16세기부터는 오스만투르크(1541~1686)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때 원주민들은 대거 이 도시를 떠났다. 17세기 말, 16년간의 질긴 오스만투르크와의 전쟁(1683~1699)을 끝내고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의 신성로마제국이 이 도시를 점령한다. 이때부터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바키아인 등 지중해 연안 사람들이 이주해오면서 바로크 스타일의 주택과 지중해풍의 교회 등을 건축한다. 자그마한 시골 마을이었던 센텐드레는 1872년에 도시로 승격됐고 2010년에는 인구가 2만5000명이 될 정도로 그 규모가 커졌다.
독립을 선언한 예술인들 모여들다
센텐드레의 메인 광장은 오래전부터 부다, 비셰그라드, 필리스의 시골길이 만나는 교통의 요지였다. 광장 한가운데에는 1763년에 만들어진 ‘페스트 십자가’가 서 있다. 세르비아 상인들은 페스트에서 구제된 것에 감사해하며 바로크 양식의 그리스 정교 십자가를 도시에 헌정했다. 십자가에는 그리스도의 이콘(Icon)이 새겨져 있다. 십자가 밑에는 세르비아 남자가 거꾸로 묻혀 있다는 전설이 흐른다. 옛날 세르비아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위로 올라온다고 믿는 관습이 있어 시체가 나오지 못하도록 머리를 밑으로 매장했다는 것이다. 광장 주변으로는 합스부르크 지배 시절에 만들어진 17~18세기의 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다. 1752년에 건축된 바로크 양식을 가진 블라고베스텐슈카(Blagovesztenszka, 성 수태고지) 세르비아 정교회가 눈길을 끈다. 베이지색 건물에 청록 뾰족 지붕이 돋보인다. 그것보다 더 관심을 끄는 것은 작은 개인 갤러리, 다양한 기념품 숍, 부티크, 액세서리 가게, 레스토랑 등이다. 특히 여행객의 눈길을 사로잡는 곳은 숍에 진열된 전시품들. 예사롭지 않은 ‘예술감’이 느껴진다. 그 이유가 있다. 헝가리 공산주의 정권 시절인 1929년부터 예술가(화가, 음악가, 시인, 문학가)들은 이 도시에 울타리를 만들었다. 독립이 필요했던 200여 명의 예술가들이 집단으로 대거 이주한 것이다. 이후부터 이 도시의 트레이드마크는 ‘예술과 예술인’이 됐다. 헝가리의 대표 도예 작가인 코바치 머르기트(Kovacs margit, 1902~1977)의 도자기 박물관이 유명하다. 18세기의 건축물인 ‘소금 상인의 집’을 개조해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11개 전시관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300개 이상의 작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온 도시에 퍼져 있는 예술적인 제품들은 관광객들의 주머니를 열게 만든다.
도시 가장 높은 곳의 플레바니아 교회
센텐드레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플레바니아(성 요한) 교회로 향한다. 약간 경사진 언덕의 좁은 골목에는 호기심을 자아내는 건물이 많다. 이 교회 자리는 원래 성채였다. 중세 때는 성 안드레(Saint-Andre´)를 위한 로마네스크 스타일의 작은 교회가 있었다. 성 안드레는 ‘센텐드레’라는 지명과 무관하지 않다. 이후 몽골의 침공으로 파괴됐다가 1241~1280년 사이에 재건됐고 14~15세기에는 고딕 양식의 석조 성당이 최초로 건축됐다. 16세기에 터키 침공으로 파괴됐고 지금 건물은 18세기의 것이다. 교회는 작고 소박하다. 마침 일요일이라서 결혼식이 한창이다. 실내를 기웃거리는 여행객을 위해 성당 안을 보라고 친절을 베풀어주는 헝가리인의 마음씨가 살갑다. 교회에서 구시가를 내려다보면 매력적인 지붕들이 돋보인다. 숍이 된 주택 안쪽도 훤히 들여다보인다. 그러나 야트막한 언덕이라서 도나우 강을 훤하게 조망하지는 못한다. 교회 입구에는 헝가리의 전위 예술가인 초벨 벨라(1883~1976)의 박물관이 있다. 초벨 벨라가 죽기 한 해 전인 1975년에 개관했다. 내부에는 초벨과 그의 부인 마리아 모독(1896~1971)의 작품을 볼 수 있다. 또 일로스바이 바르가 이스트반(Ilosvai Varga Istva´n, 1895~1978)의 작품도 상설 전시되고 있다. 국제적으로 성공한 초벨 벨라는 1930년대 중반부터 센텐드레와 인연을 맺었다. 이어 옛 향기가 물씬한 토록(Torok)식 좁은 골목을 헤집으면서 18세기에 건축된 베오그라드 교회로 간다. 이 도시에서 가장 높은 첨탑(48m)을 가진 베오그라드 교회는 성 요한 교회보다 훨씬 크고 화려하다. 1756~1764년에 체코의 둥근 천장이 있는 본당으로 확장했고 탑을 기점으로 중간은 ‘남성 교회’, 그 아래를 ‘여성 교회’로 나누었다. 주교들의 묘소는 본당 지하에 있다.
도나우 강변과 보그다니 골목
언덕을 내려와 도나우 강변으로 향하면 먼저 ‘보그다니(Bogda´nyi)’ 거리에 이른다. 도나우 강변과 가장 가까운 이 골목엔 해묵은 분위기가 켜켜이 배어 있다. 선착장이 인접한, 내륙의 첫 골목이니 긴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18~19세기의 낡은 건물들은 숍으로 이용되고 있다. 오래된 유적들은 긴 역사를 증명해준다. 로마 때 이용되던 공중목욕탕도 발견됐다. 현재의 와인 박물관도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 도시의 와인 만들기는 수세기 동안 오랜 전통을 이어왔다. 오스만투르크 침략 이후 이주민(세르비아인, 달마시아인, 그리스인)들은 적포도주를 만들기 시작했다. 19세기의 펌프는 아직 남아 있고 당시 집집마다 갖고 있던 코챠뇨(kacsa´rnya, 포도주 저장실)도 많이 발견됐다. 코챠뇨 1호집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요제프 2세(1741~1790, 재위 1765~1790)가 치안 판사의 비리를 조사하라고 조사관에게 준 집이다. 이 집에서는 헝가리의 유명한 작가 모르 요커이(Mo´r Jo´kai, 1825~1904)가 러브 러비(Rab Raby)라는 작품을 집필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한편 보그다니 거리에서 가장 가까운 도나우 강에서는 옛 로마시대의 돌다리 흔적, 센텐드레의 섬, 포도원의 아름다운 언덕 등을 볼 수 있다.
토요일마다 예술 시장이 열리는 예뉴 둠챠 거리
보그다니 거리를 거슬러 올라오면 다시 메인 광장을 만나고 곧추 직진하면 예뉴 둠챠(Jeno″ Dumtsa) 거리다. 1897년, 시 승격 25주년을 기념해 당시 시장인 예뉴 둠챠(1838~1917) 이름을 붙였다. 그리스인 예뉴 둠챠는 부모를 따라 20세에 이곳으로 이주해와 79세까지 거주했다. 대법원장을 지냈고 시민에 의해 선출된 도시 최초의 시장이었다. 그는 부다와 센텐드레를 연결하는 ‘통근열차’를 만든 것 외에도 도시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인물이다. 이 거리의 특별한 재미는 주말에 열리는 장터다. 마치 잔칫날을 만난 듯 흥겨워진다. 생선, 소시지는 물론 다양한 먹거리와 기념품들이 등장한다.
할머니는 전통 빵 리테쉬(Retes, 얇게 편 반죽에 과일을 말아 넣어 구워낸 빵)를 구워 내온다. 체리, 스트로우베리 등 다양한 잼이 들어간 ‘리테쉬’는 달달한 게 맛이 좋고 가격도 매우 저렴하다. 전통 방식으로 굽는 키르토쉬칼라취(일명 굴뚝빵)도 좋은 간식거리다. 또 이 거리에는 예뉴 바르차이(Jeno″ Barcsay, 1900~1988) 화가의 컬렉션이 있다. 그는 여러 차례 센텐드레를 방문하다가 결국 이곳에서 살았다. “나는 센텐드레에서 살았고 센텐드레에서 회화의 길을 창조했다. 센텐드레에는 자연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삶과 예술이 있다. 모든 것이 살아 있다”라는 말을 남겼다. 또 센텐드레에서 가장 큰 정교회인 바로크 양식의 1753년에 건축된 성 피터 앤 폴 교회가 있다. 교회 안에서는 요한 바오로 2세의 동상 등을 볼 수 있다. 또 19세기의 유명한 세르비아 작가이면서 산문 작가인 야코프 이그냐토빅스(Jakov Ignjatovic´, 1822~1889)의 생가(No. 5)도 근처에 있다. 러시아의 ‘고골’과 자주 비교되는 그는 고향 센텐드레를 많이 언급한다. 작가는 책 속에서 묻는다. “당신은 아는가? 센텐드레가 어디 있는지?”라고.
Travel Data
현지 교통 부다페스트 바티아니(Battiany) 역이나 테르(ter) 역에서 센텐드레행 초록색 교외 열차(www.bkv.hu)가 수시로 운행한다. 30~40분 소요된다. 버스(www.volanbusz.hu)나 유람선(www.silver-line.hu)을 이용해도 된다. 대형 유람선은 7~8월 주말에는 매일 운항한다. 비수기나 물 수위가 낮을 때는 작은 배가 정기적으로 운항된다.
센텐드레 관광 사이트 www.iranyszentendre.hu/en
기타 센텐드레 시내에서 약 2km 떨어진 곳에 민속촌이 있다. 약 100년 전 헝가리 각 지방의 가옥과 생활 모습을 재현해놓았다. '한국의 민속촌'과 비슷하다. 60ha의 면적에 여덟 개 지방의 312채 건물들이 있다.
시니어 한 달 여행 포인트 복잡한 부다페스트보다는 센텐드레에 숙소를 정하고 여행을 다니면 좋다. 현지 주민처럼 살아볼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 된다. 헝가리는 부다페스트를 기점으로 도나우 강 근교 지역을 묶어 도나우 벤트라 부르는데 센텐드레 외에도 비셰그라드, 에스테르곰이 있다. 모두 센텐드레와 인접해 있는 소읍들이다. 특히 에스테르곰은 볼거리가 많고 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와 바로 인접해 있다. 날짜를 잘 나눠서 살면 제법 유용한 여행이 될 것이다. 꼭 한 번은 경험해보고 싶은 한 달 여행 방식에 잘 어울린다.
도시 숲을 헤치고 빠른 속도로 버스가 달린다. 희미하게 햇살이 보였다 안 보였다 한다. 짙은 갈색 나무 끝이 파란 하늘 배경으로 흔들흔들, 구름의 속도로 움직인다. 작은 버스정류장에 내려 차갑고 신선한 공기와 마주하며 이정표를 따라 걷는다. 곧 다다른 곳은 김수영 문학관. 문체의 자유를 넘어 진정한 자유세계를 위해 끊임없이 저항하고 아파했던 순수시인 김수영의 세계가 구름이 가는 속도만큼 잔잔히 흐른다.
북한산 신선한 공기가 김수영과 어우러지다
중·고등학교 시절 김수영에 대해 그저 ‘한국문학의 대표적 자유시인’ 정도로만 밑줄을 치고 그대로 외운 기억이 있다. 시간이 흘러 다시금 김수영의 글을 읽어보니 자유라는 표현에 한계가 있음을 새삼 느낀다. 세련된 문장도 문장이지만 소재의 다양성과 감정에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우울한 시대를 희망차게 살아보려는 의지를 엿볼 수 있다고나 할까? ‘진보’라는 말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그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갔을까 하는 궁금증마저 든다. 그런 김수영을 기리는 문학관이 북한산 둘레길이 이어지는 도봉구 한적한 길가에 자리하고 있다. 시를 쓰며 살았던 그의 본가와 묘, 시비 등이 있는 도봉구에 2013년 11월 김수영 문학관이 문을 연 것이다. 도봉구에서 운영하는 김수영 문학관은 개관 이후 한 달에 1500명, 연간 1만8000명이 다녀갈 정도로 도봉구의 명소로 자리 잡았다. 문화시설이 없던 동네에 사람들이 찾아들고 활력이 넘치는 곳을 만든 이가 시인 김수영이다.
김수영 문학관은 5층 건물에 1층과 2층이 전시관으로 꾸며졌다. 제1전시실(1층)은 김수영 연보를 시작으로 한국전쟁, 4·19혁명, 5·16 군사정변 등 현대사의 주요 사건을 경험하며 써낸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다. 김수영의 삶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상영물을 관람할 수 있다. 또한 시를 낭독하고 녹음할 수 있는 작은 공간도 있다. 이외에 관람객이 참여해 만드는 시작 코너와 김수영에게 편지를 쓰는 공간으로 전시실을 알차게 구성했다. 무엇보다 김수영의 시에 좀 더 집중할 수 있게 꾸며놓은 것이 이곳의 매력이다. 원문 전시와 함께 활자화시킨 시를 서랍장 형식으로 만들어놓았다. 원문을 본 뒤 서랍을 열면 희미하게 보이던 원문의 모든 글귀를 쉽게 읽을 수 있다.
제2전시실은 김수영의 산문과 번역서, 일상 유물 등이 전시돼 있다. 어느 한 집안의 벽면처럼 김수영의 어릴 적 모습에서부터 가족들과 찍은 사진 등 소소한 기록들이 펼쳐져 있다. 김수영의 서재도 이곳에 옮겨놓았다. 전시장에 소개된 글은 김수영이 서재에서 어떤 모습으로 생활했을지를 짐작하게 한다.
‘한 편의 시나 산문이 완성되면 김수영 시인은 항상 아내 김현경을 찾았다. 그러면 집안 살림을 하든 다른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하던 일손을 멈추고 달려가야만 했다고 한다. 서재에 들어서면 김수영 시인은 빽빽하게 쓴 시의 초고를 건넸고, 그 시를 정리해서 원고지에 깨끗하게 정서하는 것이 김현경의 못이었다고 한다. 김수영 시인은 시를 쓰는 작업을 마치면 ‘산고(産苦)’를 겪었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서재 오른쪽으로는 김수영이 살아생전 남긴 번역서 등을 전시해놓았다. 왼쪽으로는 시인의 서적을 열람할 수 있는 공간으로 아늑함을 더했다. 이외에도 3층은 구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작은 도서관과 아동열람실, 4층에 대강당, 5층은 휴게 공간이다.
김수영 유족이 함께하는 ‘김수영 문학관’
김수영 문학관은 도봉구에서 직접 관리를 하지만 유족들의 보살핌과 사랑으로 운영되고 있다. 문학관에서 일하는 김은씨는 김수영 시인의 조카다. 수학선생으로 교편을 잡고 있다가 문학관의 명예관장이자 고모인 김수명(83)씨의 부름을 받고 문학관에 들어왔다. 김수명 명예관장은 김수영의 다섯째 동생이다. 문학관에 전시된 전시물 대부분을 기증했다. 40년 동안 두 번의 이사를 거치면서도 김수영의 모든 육필원고 등을 싸들고 다닐 정도로 오빠와 작품에 대한 사랑이 대단했다. 마침 취재를 갔던 날 김수명 명예관장을 만날 수 있었다. 여든셋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힘찬 목소리에 에너지가 넘쳤다. 그녀는 “김수영을 많은 사람들이 접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면서 특히 “아이들에게 자극이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또한 김수영 시인의 시 세계가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날씨가 풀려가고 봄의 기운이 느껴지는 어느 날 문득 김수영 문학관을 찾아가보자. 자유 그 이상의 세상을 꿈꾸던 천상의 자유시인 김수영이 문학관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관람 정보
휴관 매주 월요일, 설날 및 추석 당일
관람시간 오전 9시~오후 5시 40분
관람료 무료
주소 서울특별시 도봉구 해등로 32길 80
TEL 02-2091-56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