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공원 소마미술관에서 올해 말까지 영국 테이트미술관 소장품인 누드 전시회를 한다고 해서 다녀왔다. 누드 전시회라 하니 조각같이 아름답고 풍만한 여인의 몸이 상상됐다. 즐거운 기대를 하며 삼총사 친구들과 만날 약속을 했다. 일교차가 심해 아침저녁으론 서늘하지만 한낮에는 아직 햇볕이 강렬했다.
테이트 명작전 ‘누드’는 영국을 대표하는 국립미술관인 테이트 미술관 소장품 중, 18세기 후반부터 현대까지 인간의 몸(누드)을 주제로 한 거장들의 회화, 조각, 드로잉, 사진 등 120여 점을 엄선해서 보여주는 전시회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피카소와 마티스, 르누아르, 드가 등 유명 거장들을 비롯해 초현실주의 및 현대미술 대표 작가인 만 레이, 막스 에른스트, 프랜시스 베이컨, 루시안 프로이드, 루이스 부르주아, 데이비드 호크니 등 영국이 자랑하는 작가들의 작품들을 볼 수 있다. 특히 한 번도 유럽 대륙을 떠나 전시한 적이 없었다는 오귀스트 로댕의 대표작 ‘키스’는 대리석 원본 조각작품이 아시아에서 최초로 전시되었다는데 무게가 3톤이나 되어 1층에 자리 잡았다고 한다.
우리 삼총사는 입구부터 찬찬히 감상하기 시작했다. 작품 중엔 너무 사실적인 모습들도 있어 눈 두기가 부끄러운 그림도 있었지만 대부분 아름답고 탄탄한 몸을 감상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같이 간 친구들은 풍만한 여성의 누드를 보며 동질성이 느껴진다며 웃기도 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모두 탄력적인 몸의 곡선을 자랑했으며 한 번 만져보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중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의 작품을 모범으로 한 고전주의 작품 ‘프시케의 목욕’이 특히 필자의 눈을 사로잡았다. 자연미를 강조한 작품도 있었으며 물질주의와 합리주의에 대항하는 인간 내면의 세계, 상상력과 감각의 세계를 탐구한 신화와 전설, 불안과 공포, 꿈과 무의식 같은 주제를 표현한 작품도 있었다.
상징주의의 작품인 ‘이카루스를 위한 애도’는 한동안 필자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탄력적인 근육을 가진 아름다운 청년이 활짝 펼쳐진 날개 위에 누워 있고 천사인 듯한 아가씨들이 슬픈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그림이다. 날개를 달고 태양에 가까이 가지 말라는 아버지의 경고를 듣지 않은 채 하늘로 높이 비상하는 이카루스를 떠올려봤다. 그리고 태양의 뜨거운 열에 밀랍이 녹아 추락하는 이카루스의 모습도 상상해봤다. 작가가 날고 싶은 인간의 욕구를 꿈과 욕심, 떠오름과 추락이라는 매혹적인 소재로 만들어 썼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상주의, 야수주의, 입체주의, 초현실주의, 사실주의, 표현주의의 작품이 나뉘어 우리 삼총사의 발걸음을 끌어당겼다. 뱀의 유혹에 빠져 아담에게 사과를 권하는 이브를 그린 작품 ‘유혹’도 멋졌다. 이 작품의 한쪽 편에는 이브의 자리를 남겨두고 포토존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 자리에 서면 누구든 아담을 유혹하는 이브가 된다. 매우 재미있는 팬서비스였다. 필자도 엉거주춤 앉아 아담을 유혹하는 이브가 되어봤다. 12월까지 전시하며 흥미로운 작품이 많으니 우리 시니어들도 햇볕 좋은 날 좋은 친구와 함께 아름다운 누드를 감상하러 가보시라 권하고 싶다.
‘깨달음’이라는 단어는 필자 같은 평범한 사람에겐 해당이 안 되는 말인 줄 알았다. 부처님이나 보리수나무 아래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성현이나 훌륭한 사람들이 얻는 고귀한 생각일 거라고만 짐작했다.
친한 친구 삼총사 중 한 명인 이 여사는 독실한 불자다. 그래서인지 폭넓게 우리를 포용해주고 마음 씀씀이가 컸다. 그녀는 집에서 가까운 절에 열심히 다니기도 하고 가끔은 템플 스테이도 한다. 그러면서 템플 스테이에 언젠가 함께 가자고 했다.
그런데 얼마 전 절에서 깨달음을 얻는 행사가 있었다고 한다. 깨달음이란 정말 훌륭한 분들이나 얻는 건 줄 알았는데 보통의 불자도 이 행사에서 깨달음을 많이 얻는다는 것이었다. 벽을 보고 앉아 묵언 수행을 하며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스님과 면담 후 나오면 되지만 무언가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들은 깨달음이 올 때까지 계속 벽을 보고 앉아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녀와 이 행사에 참여한 한 지인은 온종일 앉아 있어도 깨닫는 게 없어 중도 포기했다고 했다.
그게 그렇게 쉽게 오는 게 아닐 텐데 우리의 이 여사는 묵언 수행을 한 지 얼마 안 돼 무언가 깨닫고 스님께 이야기했더니 합격점을 주셨다고 한다. 그게 무어냐고 물어도 구체적으로 설명할 순 없다며 자기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필자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불심이 깊은 그녀에게는 가능한 일인가보다 했다.
어느 날 우리 삼총사는 예술의 전당에서 열렸던 ‘마크 로스코’ 그림 전시회에 갔다. 잘 알고 있는 작가는 아니었는데 안내장에 ‘스티브 잡스’가 사랑한 화가라는 소개가 있었다. 잭슨 폴락과 함께 현대 추상화의 양대 거장으로 불리며, 현대화가 중 세계에서 그림 값이 가장 비싸다는 ‘마크 로스코’의 대형 유화 작품 50점을 볼 수 있는 특별한 전시회였다. 실제로 그림 한 점 가격이 1000억원에서 2000억원을 호가한다고 한다. 전시회의 보험평가액도 국내 전시회 중 사상 최대 규모인 2조 5000억원이었다 하니 실로 어마어마한 작가였다.
(마음을 치유해준다는 마크 로스코의 작품)
‘마크 로스코’의 작품은 관람객들이 근원적 감정과 만나 눈물을 흘리도록 하는 특별한 치유력을 가진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그저 어느 집 벽에 장식품으로 걸리기를 원하지 않았고 많은 사람이 보면서 위로받기를 바랐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마크 로스코’ 전시장에는 그림 앞에 방석을 놓아 사람들이 그곳에서 그림을 보며 명상할 수 있게 해놓았다.
필자 친구 이여사도 그 방석에 잠시 앉아 보았는데 그림에서 무언가 느낌이 있었다고 했다.
필자는 아무리 보아도 빨간색이나 검은색이 칠해진 캔버스로만 보였는데 깨달음을 아는 친구는 그렇게만 보이지는 않았다고 했다.
필자도 삶에서 뒤늦게 깨달은 바가 있기는 하다. 사소한 일로 남편과 말다툼을 하고 며칠간 냉전을 벌일 때 그처럼 답답하고 불편한 시간이 없다는 걸 알게 됐다. 조금씩만 양보하고 조심하면 그럴 일이 없다는 깨달음이었다. 필자의 아들이 어렸을 때 학교 성적 좀 좋다고 천재인 줄 알고 회초리까지 들어가며 억지로 공부를 시켰던 적이 있다. 공부는 정말 하고 싶은 아이가 해야 하고 억지로 시키는 공부는 소용이 없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는 것도 하나의 깨달음일 것이다.
젊었던 시절 오만과 착각에 빠졌던 때가 있었다. 어느 날 택시를 탔는데 운전기사가 자꾸 백미러를 통해 필자를 흘끔거리며 쳐다봤다. 필자는 속으로 ‘내가 예뻐서 그러나?’ 하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결혼 후 장롱면허를 꺼내 들고 운전을 시작하면서 그 의문이 풀렸다. 운전을 하다 보면 당연히 백미러를 봐야 했던 것이다. 그때 택시 운전기사가 필자를 보려고 흘끔거린 게 아니었다는 걸 알고는 몹시 부끄러웠지만 그것도 아주 작은 깨달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깨달음은 성현이나 훌륭한 분의 전유물이 아닌 누구라도 얻을 수 있는 것임을 이제야 알겠다. 사소한 일이라 해도 자신을 되돌아본다는 의미에서 깨달으며 사는 건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수비학(數祕學, numerology)이란 특정 숫자가 일련의 사건과 겹치는 현상에 대해 연관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미신이기는 하지만, 기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숫자풀이에 소름이 끼칠 때도 있다. 서양에서 자주 화두에 오르는 13일의 금요일도 여러 가지 예를 들면서 타당성을 부여하는 사람이 있다.
작년에 한 고인의 회고록을 쓰다가 고인이 평소에 숫자 3을 유난히 좋아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남들은 그냥 스쳐 지나갈 수도 있는 일을 고인은 희한하게도 3이라는 숫자가 어떤 것을 예시한다며 신봉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회사 이름도 ‘삼익’으로 정했고 3명의 사람이 모이면 삼총사라 하고 다른 사람이 추가되는 것을 끊었다. 단체 여행도 33명 정원을 고집하는가 하면 정원 하단석도 33개를 깔았다. 어린 시절의 고향 집이 333평이었고 겨울철 방에 두던 화로의 다리가 세 개인 것을 보며 ‘3’이라는 숫자에 유난히 애정을 보이기 시작했단다.
숫자 ‘3’은 정반합의 개념에서 일리가 있긴 하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이 변증법으로 체계화한 것이다. 역사나 정신 같은 모든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해가는 변증법적 전개원리로 설명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즉 하나의 주장인 정(正)에 다른 주장인 반(反)이 나오고, 여기에 더 높은 종합적인 주장인 합(合)이 나와 통합되고 발전되는 과정을 말한다. 그래서 변증법의 기본 전제는 이 세상 모든 것은 지속적인 반복과 끊임없는 모순의 생성과 지양을 통해 변화 발전한다는 창조적 발전의 논리다.
오래전 미국에 갔을 때 당시 로또 1등 금액이 이월되어 사상 최고의 금액이 되었다며 사람들이 흥분했다. 우리는 여행객이었지만, 재미 삼아 해보자며 로또 용지를 집어든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좋아하는 숫자는 대부분 1~9까지였는데 로또 용지는 45번까지 있었던 것이다. 한국인은 7이라는 숫자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7, 17, 27, 37까지 7이 들어가는 숫자는 다 동원했는데도 6개 숫자를 채우려면 여전히 2개의 숫자가 모자랐다. 한 장에 6개의 숫자 조합을 만들어야 하는데 숫자 7을 이미 다 써먹었으니 그다음에 고를 숫자가 없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4’를 ‘죽을 사(死)’와 발음이 같다며 싫어하고, 심지어 엘리베이터 4층은 'Four'의 앞 자인 ‘F'로 표기한 빌딩이 많다. 기독교 계통의 사람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6’을 싫어한다. ‘9’는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필자는 숫자 ‘1’을 좋아한다. 숫자 중 가장 처음 숫자이고 간단해서 좋다. ‘최고’라는 의미도 있지만, ‘처음’이라는 의미도 있다. ‘하나’라는 의미도 있다. 여러 가지 복잡한 것을 싫어하는 성격 때문일 수도 있다. 등산을 할 때 앞에 사람이 있으면 시야도 가리고 걸려서 속도를 조절해야 하기 때문에 맨 앞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순서를 정할 때 성을 가나다 순으로 하면 ‘강’이므로 대부분 첫 번째 경우가 된다. 무엇을 할 때 이름 때문에 가장 먼저 호명이 되면 이젠 운명인가보다 하고 받아들인다.
사회생활을 해보니 ‘2’가 더 좋다는 것을 자주 느낀다. ‘일인자’보다는 ‘2인자’가 여유가 있어 보인다. ‘하나’보다는 ‘둘’이 외롭지 않아서 좋다.
2월의 막바지인 지난 주말 새봄을 기다리며 '따뜻한 콘서트'가 열렸다.
경제신문 '이투데이'가 2013년 이후 5년째 개최하고 있는 음악회라고 한다.
오전부터 하루 종일 눈보라가 흩날려 저녁 나들이가 좀 걱정스러웠지만 출연하는 어떤 가수 때문에 필자는 꼭 참석하기로 했다.
시간에 맞춰 KBS 콘서트홀에 가니 오랜만에 보는 동년 기자님들이 많이 계셨다.
글로만 대하던 동년 기자님들과의 반가운 인사가 이어졌는데 부부가 동행하신 기자님도 여러분이셔서 보기에 참 좋았다.
우리 동년 기자의 좌석은 2층으로 자리에 앉으니 벌써 무대는 화려한 조명으로 예쁘게 반짝여 신나는 공연을 기대하는 설렘으로 마음이 들떴다.
출연 가수를 보니 어린 걸그룹 '모모랜드'의 귀여운 아이들과 중견 여가수 '린' 그리고 독보적 존재를 자랑하는 '전인권' 씨와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가수 '김장훈' 씨가 있다.
김장훈 씨가 출연한다고 해서 기분이 매우 좋았고 마음이 설레기까지 했는데 김장훈 씨와는 몇 년 전 작은 에피소드가 있는 사이이다.
노래도 잘하지만, 기부도 많이 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에도 앞장서는 멋진 사람이라 필자는 그의 왕 팬이 되었다.
오늘 약간 실망스러운 건 좌석이 2층이라 가수와의 소통은 불가능하다는 점이었다. 김장훈 씨는 공연 중 재미있는 퍼포먼스를 하는 유명한 가수이다.
앞자리였다면 언젠가처럼 좀 더 즐거운 관람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웠다.
몇 년 전 강남 모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김장훈 콘서트가 있었다. 제법 큰 무대를 춤과 노래로 종횡무진 휘저으며 신나는 공연을 펼치던 중 갑자기 김장훈 씨가 어시스턴트가 필요한데 누가 도와주겠느냐고 물었다.
같이 간 친구 삼총사가 내게 손들라고 부추겼고 나는 용감하게 조용한 침묵을 깨고 “저요!”하고 소리를 치고 말았다.
누가 나오시겠느냐고 했지만 점잖은 관객들이 잠시 생각하는 동안 아줌마 기질을 발휘한 필자가 큰 소리로 답을 한 것이다.
좀 더 젊었을 때라면 부끄러워서 상상도 못 했겠지만 나이가 들으니 너무 용감해지는 것 같아서 우습기도 했다.
용감하게 소리친 덕분에 무대에 올라가 김장훈씨 옆에 서게 되었다.
가까이에서 본 김장훈 씨는 매스컴에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잘생기고 훤칠했다.
잠시 자기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고 필자가 도와야 하는 일을 말해 주었다.
무슨 큰 도움이 필요한 게 아니고 김장훈 씨가 하모니카를 불 때 필자는 마이크를 그 앞에 잘 대어주는 일을 맡았다.
별일이 아니었으므로 관객석에서 폭소가 터졌고 무대도 매우 화기애애해졌다.
하모니카 연주가 끝난 후 감사하다며 불었던 하모니카를 선물로 주었는데 꽤 값이 나간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필자는 그 작고 앙증맞은 하모니카를 가보로 간직하겠다고 생각하며 기분 좋고 신나는 공연을 즐겼다.
그렇게 김장훈 씨는 공연 도중 관객과의 소통을 꼭 하는 사람이었다.
이번 공연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는데 아래층의 어떤 여성관객이 전의 나처럼 큰소리로 답을 해 즐거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만약 필자의 좌석이 가까웠다면 필자가 소리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난다.
어린 아이돌의 무대도 깜찍했고 ‘린’의 노래도 좋았지만, 김장훈 씨와 전인권 씨의 영혼을 울리는 듯한 노래에 감동적이었다.
신나는 콘서트의 여운으로 돌아오는 길의 차가운 바람이 부드럽게 느껴졌다.
이투데이에서 매년 주최한다니 다음에도 초대되어 꼭 콘서트를 보러 올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생각과 계획만으로도 즐거워지는 게 여행이다. 한동안 집안에 우환이 있어 마음고생하는 엄마가 안쓰러웠는지 아들이 국외 가족여행을 제의했다. 한 달여 전부터 아들과 며느리는 열심히 여행지를 알아보고 예약하는 등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예쁜 손녀 손자와 함께여서 더욱 설레고 즐거운 기분이었다(그러나 젊은 시절과 달리 아기들 데리고 다니는 게 그리 쉽지는 않아서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아들이 어렸을 땐 한 손으로 번쩍 안고 다녀도 전혀 힘들지 않았는데 이제는 아기를 잠시 안고 있어도 힘에 부쳐 세월이 야속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필자에겐 국내, 국외여행을 함께하는 친구 삼총사가 있다. 필자와 달리 그 친구들은 평소 일어 공부도 열심히 해서 일본 정도는 자유여행을 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항상 여행사의 패키지를 선호했다. 여행사를 통한 여행과 다 알아서 해야 하는 자유여행은 각각 장단점이 있다. 가이드를 따라 하는 여행은 일단 여행비용이 적게 든다. 또한 그 나라의 어디를 보아야 할지 무엇을 먹을지 등을 전혀 고민할 필요 없이 지시에 따르기만 하면 되니 편하다. 그래서 패키지여행을 선택했는데 친절한 가이드 덕분에 여행한 나라의 볼 만한 곳과 역사 유적지를 돌아보고 새로운 지식도 얻을 수 있어 항상 즐겁고 보람이 있었다. 단점이라면 개인행동을 할 수 없다는 것과 하루 세 번 식사를 해결해주니 가보고 싶은 유명한 맛집을 따로 경험할 수 없어 아쉽다는 점이다.
자유여행은 어디라도 가고 싶은 대로 다니고 먹고 싶은 음식도 고를 수 있어 좋지만 항공권부터 숙소와 여행 장소까지 알아서 정해야 하니 번거롭고 언어도 잘 통하지 않을 것이어서 걱정스러운 점이 있다. 이번 가족여행을 패키지로 갈 것인지 물으니까 아기들이 어려서 패키지는 무리란다. 여행지는 일본이고 여러모로 알아보니 오키나와가 비행시간도 2시간 정도로 짧고 아이들 놀기에 적합한 휴양지라 한다. 벌써 저희끼리 3박 4일의 일정도 다 짜놓아서 따르기만 하면 되니 편했다. 필자와 나이가 비슷한 시니어들도 대부분 고만한 손자 손녀가 있을 것이므로 가족여행으로 일본을 선택할 경우 필자가 경험한 것들을 알려드리면 도움이 될까 해서 이 글을 쓴다.
며느리는 다섯 살 손녀와 17개월 된 손자 때문에 무엇보다 숙소가 편해야 한다며 오키나와 중부쯤에 있는 바닷가의 멋진 호텔 몬테레이를 선택했다. 1박에 40만원이었다. 비행기는 아시아나로 어른 셋에 아기 둘 포함 100만원이었다. 그리고 공항에 내리면 미리 예약한 렌터카를 여행 동안 이용하는 데 26만원, 반환하면서 기름을 가득 채워주면 된다고 한다. 우리는 300km 정도를 다녔고 3만원어치 주유를 해서 반납했으니 쇼핑과 식사를 제외한 여행 기본 비용은 250만원이었다.
호텔에서 아침은 뷔페나 일본 가정식을 골라먹을 수 있어 점심과 저녁만 사먹으면 된다. 미리 검색해간 유명 음식점을 빼놓지 않고 다녀볼 수 있어 좋았다. 이 모든 예약을 며느리는 스마트폰과 인터넷으로 해결했다. 참 편리하기도 하고 스마트폰 기능을 잘 아는 며느리가 대견스럽고 한편 부럽기도 했다.
일본은 모두들 알다시피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다. 필자도 한 번 운전해보고 싶었지만 국제면허가 없어 아쉬웠다. 평소 운전을 잘하는 시니어라면 국제면허를 꼭 따서 오른쪽 운전으로 차를 달려보는 이색적인 경험을 해보면 좋겠다.
우리나라는 10월의 막바지여서 한낮의 태양은 뜨거워도 아침저녁으론 좀 춥다고 느껴지는데 오키나와는 제주도보다 더 남쪽이어서 지금도 기온이 30도를 넘는 한여름이다. 이렇게 미리 계획한 대로 즐겁고 행복한 가족여행이 시작되었다.
요즘 들어 뮤지컬 볼 기회가 많다. 오늘 관람한 공연은 정말 신바람 나는 노래와 춤의 향연이었다. 제목은 좀 생소한 다. 뮤지컬 티켓을 받아 들고서도 나는 ‘킹키부츠’가 무슨 뜻인지 잘 몰랐다. 부츠라고 하니 구두일 것이라는 짐작만 했는데 카탈로그 사진을 보고서 ‘아-이게 킹키부츠구나’ 했다.
80센티미터의 길이에 강렬한 색상과 아찔한 높이의 킬 힐이 ‘킹키부츠’로 여장 남자들이 신는 부츠의 종류를 말하는 것이라니 범상치 않은 구둣가게 이야기일 것으로 생각되었다.
내게는 영화나 연극, 뮤지컬 공연을 같이 다니는 삼총사 친구가 있다. 이번엔 티켓 값이 무려 14만 원이나 했는데 할인 구매한 티켓이 4장이어서 삼총사 외에 동창을 한 명 더 초대했다. 공연 시작이 7시 30분이라 우리는 5시쯤 이태원 블루스퀘어 공연장 앞에서 만나 오랜만에 경리단 길도 걷고 맛있는 식사도 즐겼다.
시작 시간에 맞춰 공연장으로 가니 주말이어서 그런 건지 뮤지컬 배우들의 인기 때문에 그런 건지 객석이 빈틈없이 꽉 찼다. 얼마 전에 봤던 나 등은 알고 있는 내용이었는데 오늘 관람하는 는 줄거리를 전혀 알지 못해 더 흥미롭고 기대되었다.
스토리는 영국 노샘프턴에 있는 ‘프라이스 & 선 제화점’이라는 구둣가게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였다. 주인공 ‘찰리’는 아버지가 운영하는 구두공장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구두만이 전부인 세계에서 자랐다. 찰리의 아버지는 고급 수제 남성화만 고집하는 사람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찰리는 여자 친구 ‘니콜라’와 함께 지겨운 시골 마을에서 벗어나 런던에서 새 삶을 시작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새로운 곳에서 짐을 풀기도 전에 아버지의 사망으로 구두공장을 물려받게 된 찰리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고급스럽지만 유행에 뒤떨어진 수제 구두만 고집했던 아버지의 구두공장은 마구 밀려드는 저가 수입 제품 때문에 문을 닫아야 할 형편에 놓여 있었고 오랜 시간 함께 일한 공장 식구들도 해고해야 할 상황에 이르러 있었다.
이때 똑똑한 여직원 ‘로렌’이 새로운 틈새시장을 개척해야 한다고 조언하고 찰리는 망해가는 공장을 다시 일으킬 결심을 한다. 찰리가 아는 사람 중에는 유쾌한 여장 남자 ‘로라’가 있었다. 로라에게서 아이디어를 얻은 찰리는 여장 남자들이 편하게 신을 수 있는 아름다우면서도 튼튼한 ‘킹키부츠’로 공장을 다시 일으킬 계획을 세운 뒤 로라를 구두 디자이너로 데려와 밀라노에서 열리는 패션쇼에 ‘킹키부츠’를 선보이려 한다.
그러나 여장 남자인 로라를 공장 사람들은 탐탁해하지 않았고 사사건건 시비가 붙었다. 그러던 어느 날 로라는 공장 직원인 ‘돈’과 권투시합을 하게 된다. 사실 로라의 아버지는 권투선수였다. 자신을 남자답게 기르려고 어릴 때부터 권투를 가르쳤던 아버지 덕분에 로라는 권투를 잘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합 날 로라는 일부러 돈에게 져주었고 그걸 알게 된 공장 사람들은 로라를 좋아하게 된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킹키부츠’로 성공하게 된다는 이야기인데 주인공 찰리 역할은 탤런트 ‘이지훈’이 맡았고 로라 역할은 ‘정성화’가 맡아 열연을 펼쳤다. 정성화는 뮤지컬 에서 안중근 역으로 감동을 주더니 이번 작품에서는 여장을 하고 나와 관객을 즐겁게 해줬다. 특히 로라와 함께 여장 남자로 분장한 엔젤 팀 남자 배우들이 어찌나 예쁜지 나는 그들이 남자라는 사실을 극 중반에야 알았다. 6명의 엔젤 중에 예쁘긴 한데 어쩐지 남자 같은 이미지가 느껴져 옆자리 친구에게 “저기 두 번째 있는 사람은 남자인가봐.” 했더니 “다 남자야.” 해서 깜짝 놀랐다. 여자보다 더 예쁜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허벅지까지 오는 킬 힐의 ‘킹키부츠’를 신고 노래와 춤을 췄다. 그들이 얼마나 열심히 연습을 했을지 짐작이 되었다. 다른 뮤지컬과 다르게 관객들이 소리도 지르고 손뼉도 치며 호응하는 모습이 매우 흥겨웠다. 나와 친구들도 마구 환호하며 신나게 관람했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엔젤 팀의 여장 남자들이 객석을 돌아다니며 관객의 호응을 유도했다. 관객들이 모두 일어서서 몸을 흔들며 손뼉을 치고 있는데 갑자기 누가 내 어깨를 두드려서 돌아보니 예쁜 엔젤들이 지나가며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이파이브도 하고 객석이 들썩일 만큼 즐거운 시간이었다. 배우들이 객석을 누비고 다니며 관객과 소통하는 모습은 끝까지 많은 감동을 주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함께 공연을 본 친구들에게서 카톡이 왔다. 오랜만에 신나는 공연 봐서 좋았다며 고맙다고 했다. 가을이 오는 길목에서 유쾌하고 신나는 뮤지컬로 우정도 다지고 맘껏 즐거웠던 하루였다.
드물디드문 ‘90대 철학 교수’이자 글로써 1960~1970년대 한국 사회를 흔들었던 김형석(金亨錫) 연세대 명예교수는 요즘 활발한 강연과 집필 활동을 통해 그야말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최근에 100세를 바라보며 만든 책 (덴스토리 펴냄)를 출간한 김 교수는 오랜 세월 동안 겪은 다양한 경험과 깨달음에 대한 자신의 소회를 담담하게 펼쳐놨다. 결코 흔치 않은 100년 동안의 시간을 경험한 노교수의 삶과 지혜를 살펴보자.
한 시절 젊은이들은 1960년대 등과 같은 그의 수필을 읽으면서 밤을 지새웠다. 김 교수의 수필을 읽던 청년들이 어느덧 50, 60대가 됐지만 지금도 그는 왕성한 집필 활동을 하며 세상과 만나고 있다. 연세대 명예교수인 김형석 교수의 이야기다. 시대를 뛰어넘고 있는 김 교수는 최근 출판가에서 가장 ‘묵직한’ 저자다. 90살을 넘어 100살에 가까워진 김 교수지만 작년 한 해 동안 활발한 외부 활동으로 그 이름을 다시금 각인시키더니 와 의 두 저서가 베스트셀러에 오름으로써 스스로 현 시대가 요구하고 있는 작가임을 증명했다. 그런 그가 그동안 강연했던 내용을 묶어 사랑과 희망이 있는 이야기가 담긴 책 를 내놨다.
90대에 다시 맞이한 베스트셀러 작가로서의 즐거움
“를 작년에 내놨습니다. 그리고 과거에 내놨던 와 를 개정하여 다시 출간했죠. 는 워낙 오래된 책이라 처음에는 출간이 어렵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출판사 사장이 직접 찾아와서, 자기 할아버지가 그 책을 꺼내 주면서 꼭 내라고 했다는 거예요.”
김 교수는 사람들이 예수를 객관적으로 알아야 하는데, 교회가 감싸니 예수가 어떤 화두를 가진 사람인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예수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찾아보자는 문제의식을 갖고 만든 책이 바로 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은 시대를 앞선 책이기도 했다.
“과거에 책이 나왔을 때는 호응이 없었는데, 지금 읽히기 시작하니 교회 안 사람이나 밖에 있는 사람이나 호응이 있고 반응이 좋아요. 젊었을 때 써서 지금보다 문장도 좋고. 내가 봐도 훌륭해(웃음).”
김 교수는 백 살이 가까운 지금도 200자 원고지에 친필로 글을 쓴다. 타자기는 안 쓰고 스마트폰도 안 쓴다. 그는 지난 1년 반 동안 조금 무리했다고 말했다.
“이라는 계간지에 1년에 200자 원고지 400장을 쓰는 게 있어요. 그런데 3개월 후에 쓰는 걸 반복하는 것보다는 원고를 미리 써놓는 게 좋겠다 싶어 한꺼번에 쓴 거죠. 그게 좀 무리가 됐어요. 그래서 금년에는 안 써요(웃음). 할 때 하자 싶어서 한 일인데, 그렇게 무리했던 게 나은 거 같아요.”
가족이 떠나니 집이 비고 친구가 떠나니 세상이 비었다
“우리 어머니가 100세에 돌아가셨습니다. 죽음을 담담한 운명으로 받아들이셨어요. 그분은 더 오래 사는 게 걱정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직계 중에 먼저 돌아가신 사람이 없는데 자신이 그보다 늦게 갈까 봐 그랬던 거예요.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한 달쯤 전에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면서 ‘내가 먼저 갈 것 같아서 다행이다. 그런데 나는 가면 되고, 네 처가 가게 되면 집이 빌 텐데 집이 비면 어떡하지?’라고 말씀하시데요. 어머니가 가시고 아내도 가고 그러니 정말 집이 빈 거예요. 외국 여행하고 돌아올 때 오고 싶지 않고 공항에 내려도 ‘빈 집에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있고 아침에 잠에서 깨면 아무도 없다는 걸 알게 됐죠. 어머니와 아내가 집이었어요.”
를 보면 김 교수의 절친한 친구인 김태길 교수와 안병욱 교수의 이야기가 나온다. 무엇보다 그의 인생에서 소중한 인연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만난 두 친구, 서울대의 김태길 교수, 숭실대 안병욱 교수였다. ‘철학계의 삼총사’로 불렸던 이들은 반세기 동안 사랑이 있는 경쟁을 벌인 ‘축복받은 관계’였다. 도산 안창호 선생과 인촌 김성수 선생 다음으로 자신에게 가장 많은 가르침과 도움을 준 사람은 바로 이 두 친구였다고 그는 고백한다.
80대 중반쯤의 어느 날, 안 교수가 “더 늙기 전에 셋이서 1년에 네 번쯤 만나자”고 제안한다. 김태길 교수의 대답은 거절이었다. 이유는 “우리 셋이 다 80대 중반인데, 누군가 한 사람씩 먼저 떠나가야 할 테고, 그러면 다 보내고 남은 사람은 얼마나 힘들겠느냐”는 것이었다. 결국 이들은 멀리서 마음을 같이하면서 지냈고 김태길 교수는 2009년, 안병욱 교수는 2013년에 세상을 떠났다. 김 교수는 두 친구의 죽음을 겪으며 “집 식구가 떠나니까 집이 텅 빈 거 같은데 친구가 떠나니 세상이 빈 것 같다”고 말했다.
“어머니께서 떠나고 5년쯤 지나고 나니 친구들이 가기 시작하는데 둘이 비슷한 때 가더라고. 세상이 비는 거 같았어요. 남들은 잘 몰라요, 나는 그걸 왜 느끼느냐 하면 친구다운 친구를 가졌기 때문이었죠. 독일의 괴테가 임종할 때 의식이 흐려져서 환상 비슷한 걸 보게 되는데 바람에 종이가 날아가는 걸 보더니 저거 쉴러의 편지인데 날아가는 거 아니냐며 걱정했다고 해요, 야스퍼스는 막스 베버가 세상을 떠나자 한 1년 동안 아무것도 못했다고 하고.”
그는 자신도 ‘이젠 인생 마감을 어떻게 할까를 더 많이 생각한다’며 “죽음을 생각하지만 두렵지는 않다”고 말했다.
“뭔가 남길 수 있는 사람은 감사한 거죠. 내가 있어서 행복한 사람이 있었고, 내가 있어서 인생을 아름답게 산 사람도 있었고, 내가 있어서 즐거움과 고통을 함께 나눈 사람이 있었다면 그게 저한텐 남는 것이지요.”
행복은 인격에서부터 시작
나이 들어서 행복을 맛본다는 건 쉽지 않다. 김 교수는 나이 들어 경험할 수 있는 행복은 주어지는 게 아니라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 철학자 가운데 가장 원로 철학자가 아리스토텔레스거든요. 그가 윤리학을 가장 처음 쓴 사람인데 윤리학에서 하는 말이 ‘행복은 누구나 원한다. 그리고 인격이 최고의 행복이다’라는 말이에요. 내 인격이 행복을 만들어서 줄 수 있고 다른 사람이 행복을 내게 주고 행복이란 그렇게 나눠서 쌓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행복을 만드는 인격을 갖춰야 한다는 주장이죠. 윤리학자가 문제를 제기하고 결론을 내놓은 셈이에요.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나이 들면서 행복도 커지는 거죠. 나이 들면서 행복해지는 게 인생인 겁니다.”
인격이 최고의 행복이라면, 그 인격이란 무엇일까? 김 교수는 철학자들이나 윤리학자들은 인격을 두 가지로 나눠서 본다고 설명했다.
“인격이란 나에게 있어서 성실하게 사는 것, 그리고 이웃에 대해선 사랑을 가지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성실과 사랑이에요. 성실한 사람은 항상 노력하고 성장하는 사람입니다. 성실한 사람은 자기를 알기 때문에 겸손합니다. 성실한 사람에게는 진실이 있고, 성실보다 더 귀한 인격은 자신에게 있어선 없다고 보는 사람입니다.”
문제의식을 가짐으로써 철학자가 된다
김 교수의 친구 안병욱 교수는 가장 성실하게 산 사람을 공자로 봤다고 한다. 공자는 성실했기 때문에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살았다는 것이다. 석가나 예수는 공자가 한계로 느낀 걸 종교로 해결하고자 했다. 그래서 예수는 성실에 경건이 더해진 철학을 만들었다는 게 김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성실만 갖고 있으면 종교로 가기 어렵다고 말했다.
“호수에 바람이 불거나 파도가 치면 달그림자가 안 뜹니다. 그런데 조용해지면 달그림자, 별 그림자를 볼 수 있죠. 경건하다는 건 이성이 작용을 멈췄을 때 모든 걸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호수가 조용해졌을 때 별 그림자가 뜨는 것 같은 상태죠. 그때 종교가 오게 됩니다.”
김 교수는 철학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거듭 말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철학이 있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
“아마 이렇게 보면 좋을 거예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대구에서 중고등학교 교사로 있는 제자를 만난 적이 있어요. 그가 나 보고 4년 동안 대학을 다니고 공부도 열심히 했는데 학교에서 배운 건 다 잊어버렸다고 했습니다. 나도 그런 현상을 잘 알죠. 인상은 남아 있는데 기억을 못하는 것. 알지만 이상하죠? 난 대학 다닐 때 강의 들었던 것, 읽었던 책을 다 기억하는데. 나는 기억력이 좋은 게 아니라 문제의식이 있었던 겁니다. 강의 듣는 것, 책을 읽는 것 다 문제의식이 그릇이 되어 거기에 담았습니다. 그러니 잊을 수 없게 된 겁니다. 철학이 왜 필요한가에 대한 답이 여기에 있습니다. 일류 대학을 나와서도 문제의식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졸업하면 평범해집니다. 반면 일류 대학이 아니더라도 문제의식을 가지고 살면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즉 철학적 사유를 가진 사람이 지도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평생 동안, 나에게는 두 별이 있었다
김 교수의 아우라는 긍정적이다. 불안한 요인이 섞여 있지 않다. 아흔을 넘어 백세로 가는 이에게 그러한 긍정의 힘은 놀랍고 희귀한 사례다. 그에게도 하지 않으면 후회될 게 있을까?
“93세 때 밤에 자다가 ‘지금까지 살아온 동안을 정리하면 뭐가 될까?’ 싶었어요. 그래서 일어나서 메모를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잤어요. 메모는 세 문장이었습니다. ‘나에게는 두 별이 있었다. 진리를 찾아가는 그리움과 겨레를 위한 마음이었다. 그 짐은 무거웠으나 사랑이 있었기에 행복했다.’ 철학자로서의 나는 진리를 추구했고 사회적으로는 겨레들이 좀 더 잘 살았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우리 시대는 일제강점기, 공산 치하를 겪어야 했으니. 못해서 아쉽겠다는 건 그 두 가지를 위해서 좀 더 일했으면 좋았겠다는 겁니다. 가끔씩 인터뷰를 하면 기자들이 ‘젊었을 때 낭만이 있었느냐, 연애는 했느냐, 연애 결혼했느냐 중매 결혼했느냐 같은 걸 묻는데 속으론 ‘그건 왜 물어봐. 관심 밖이야’라고 말하곤 해요(웃음).”
김 교수는 자신이 고마운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했다. ‘나와 우리를 위해 마음 써줬는데 고마운 사람이다.’
“를 쓰고 나니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거 같아서 홀가분해요. 아쉽냐고요? 그런 건 생각 안 나요. 이 책 한 권만 쓰고 끝나는 게 아니라 또 쓸 거니까.”
지혜가 묻어나오는 그의 저서에는 ‘성실’을 표현해내는 인격이 반짝인다. 그래서 김 교수의 책은 그리울 수밖에 없다.
>> 김형석 교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민주화 운동기를 거쳤고,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강연을 듣고 성장했으며 윤동주 시인과 같은 반에서 공부했다. 또 김수환 추기경은 후배로, 인촌 김성수 선생은 멘토로 많은 가르침을 준 사람이라고 고백했다. 60세에 뇌출혈로 쓰러져 20년간 투병 한 아내를 떠나보낸 후 연희동 주택에서 10여 년째 홀로 살고 있다. 4녀 2남의 자녀들에게도 “나를 위해 마음 쓰지 않도록 하고 싶었다”며 고독을 견디기 위해 글을 썼고, 책을 읽고, 강연을 하는 삶이 무르익어가고 있다.
누구나 어린 시절 동화책을 많이 읽고 자란다. 미녀와 야수, 신데렐라, 백설 공주, 인어공주, 잠자는 숲 속의 미녀나 전래동화로는 해님 달님, 콩쥐 팥쥐, 장화홍련전, 흥부 놀부 등이 있다. 재미있는 건 서로 다른 나라임에도 동화의 내용이 비슷한 작품이 많다는 점이다. 나쁜 새엄마와 의붓언니에게서 구박받으면서도 씩씩하게 견디어 드디어 왕자님과 결혼까지 하게 되는 신데렐라도 우리나라의 콩쥐 팥쥐와 같은 내용이어서 흥미롭다. 나라가 달라도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나쁜 일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권선징악의 뜻을 분명히 알려주고 있다.
월트 디즈니에서 만든 영화 ‘말레피센트’를 보게 되었다. 매우 섹시하고 예쁜 여배우 안젤리나 졸리가 주연을 맡았다. 월트 디즈니에서 각색하여 새로운 시각으로 만들어낸 작품으로 잠자는 숲 속의 미녀 이야기가 펼쳐졌다. 필자가 어린 날 읽었던 내용으로는 왕국에 공주가 태어나고 축하받는 자리에 초대받지 못한 나쁜 마녀가 아기 공주에게 16살 되는 날 물레 바늘에 찔려 영원히 잠들고 깨어나지 못한다는 저주를 내리면서 다만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키스를 받으면 깨어날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심술 맞은 마녀가 말레피센트였는데 영화는 필자가 알고 있던 내용과 좀 달랐다. 말레피센트는 그렇게 나쁜 마녀가 아니었다.
세상에는 왕국과 경계를 이루는 곳에 요정 나라가 있었다. 요정 나라의 어린 요정 말레피센트는 우아한 날개를 가진 어여쁜 소녀였다. 어느 날 그곳에 인간 세상 사람인 어린 소년 스테판이 찾아온다. 둘은 첫 만남부터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친해진다. 이들은 점점 멋진 청년과 아름다운 요정으로 자라며 우정을 키웠다. 어느 날 스테판은 말레피센트에게 키스를 하고는 인간 세상으로 돌아갔다. 그 무렵 인간 세상의 왕은 요정 세계를 지배하려고 요정 나라 숲을 침략했다.
그러나 말레피센트의 지휘로 숲 속 요정들이 힘을 합쳐 대항해 왕은 참패를 당한다. 왕은 죽기 전에 요정인 말레피센트의 힘을 없애는 자에게 왕국을 물려주고 공주와의 결혼을 허락한다 했다. 이에 신하였던 스테판은 왕이 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사랑하는 요정 말레피센트의 날개를 자르기로 하고 그녀를 찾아간다. 출세에 눈이 멀어 아름다운 우정과 사랑도 돌아보지 않는 인간의 속성이 안타깝고 슬프다. 오랜만의 만남에 즐거워하는 말레피센트에게 약을 탄 음료를 마시게 한 후 잠든 그녀의 날개를 잘랐으니 추악한 욕망을 가진 이기적인 인간의 마음에 분통이 터졌다. 잠에서 깨어난 요정은 날개가 없어진 걸 알고 절망을 느낀다.
자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스테판이었기에 배신과 절망은 더욱 컸다.
말레피센트의 날개를 가져온 스테판은 왕위를 이어받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며 예쁜 공주 오로라를 낳았다. 오로라의 탄생을 축하하는 파티에 많은 사람이 초대되고 작은 요정 삼총사도 찾아와 행운을 빌어준다.
그때 날개는 없지만 막강한 힘을 가진 숲의 지배자 말레피센트가 나타나 공주에게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16세가 되는 날 물레 바늘에 찔려 영원한 잠에 빠질 거라는 저주를 내린다. 이에 스테판은 공포를 느껴 세 요정에게 16세 되는 다음 날 왕궁으로 데려오라며 공주를 맡아 키워 달라고 부탁하고 깊은 숲 속으로 보낸다. 그리고는 나라에 있는 모든 물레를 창고에 모아 아무도 사용할 수 없게 했다.
아기는 무럭무럭 귀엽고 예쁘게 자라났다. 어느 날 숲으로 놀러 간 오로라는 말레피센트와 만난다. 말레피센트는 미워할 수 없는 아기 공주의 수호천사가 되어 돌보고 위험에서 지켜준다. 오로라를 사랑하게 된 마녀는 그가 곧 16세가 될 시기에 공주의 저주를 풀려고 노력하지만, 영원히 라고 했기 때문에 풀 수가 없었다.
그 무렵 숲에 있던 공주는 길을 지나던 소년을 만나게 되는데 그는 이웃 나라 왕자였다. 그들은 다음에 만날 것을 약속한다. 이 왕자가 후에 잠든 공주를 키스로 깨울 것이라는 암시를 받게 된다. 한편 말레피센트가 자신에게 그런 저주를 내렸다는 걸 알게 된 공주는 16세가 되던 날 왕국으로 간다. 왕은 16세 되는 다음날 데려오려고 했는데 하루 일찍 도착한 오로라를 감금하라 명령하고 공주는 궁을 헤매다 결국 물레 바늘에 찔려 잠이 들고 만다. 숲에서 만났던 왕자가 해법일 줄 알았는데 왕자의 키스에도 일어나지 않던 공주가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리며 입맞춤 한 말레피센트의 키스에 눈을 뜬다. 진정으로 공주를 사랑한 건 말레피센트였다.
스테판 왕은 병사를 동원해 말레피센트를 죽이려 하고 말레피센트는 위기에 빠진다. 그때 아버지가 잘라 온 마녀의 날개를 발견한 공주가 벽에서 떼어내자 날개는 주인을 찾아 날아가 말레피센트는 막강한 힘을 되찾게 되고 왕은 성에서 떨어져 죽는다. 이후 인간 세상과 요정 나라가 화합하여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다. 동화 속 이야기지만 출세에 눈이 멀어 사랑과 우정을 배반한 추악한 인간의 욕망에 화가 났고, 복수심에 불탔지만 어린 공주를 사랑하게 되는 마녀의 애틋한 마음이 훈훈했던 영화이다.
말레피센트를 연기한 안젤리나 졸리의 우아하고 매력적인 모습과 풋풋한 오로라 공주역의 엘르 패닝의 연기가 환상적으로 다가왔다. 멋진 한편의 영화가 어린 날 감동으로 읽었던 동화책처럼 잔잔하게 필자 마음을 적셔주었다.
(PS-오로라 공주 어린 시절 역을 맡은 귀여운 아기가 안젤리나 졸리의 친딸이었다는데 캐스팅된 이유가 재미있다. 오디션 보던 모든 아기들이 마녀로 분장한 안젤리나 졸리를 보고 울음을 터뜨렸는데 친딸인 비비안 졸리 피트만이 엄마를 알아보고 울지 않아서 뽑혔다고 한다.)
인생 100세 장수시대가 됐다. 어언 70년을 거의 살았고 앞으로 살아야 할 날도 30년은 족히 남았다. 즐거웠던 추억은 인생의 등불로 삼았고 아팠던 기억은 좋은 가르침으로 남았다.
◇학생회장 후보로 인생의 희열
새 학기가 시작하는 봄을 맞아 필자 아파트와 가까운 초·중·고등학교에서는 학생회장선거가 진행되었다. 아침마다 교문에서 붉게, 푸르게, 노랗게 만든 피켓을 들고 성인보다 더 열심히 선거 운동하는 모습이 아름답게 보였다.
이 아름다운 모습을 보며 총등학생 시절 총학생회장 선거가 생각났다. 학생 수가 적고 선생님과 교실이 부족해 몇 개 학년이 한 교실에서 합동수업을 가끔 했던 지금은 아예 없어져 버린 시골의 조그만 초등학교 이야기다.
학생들은 학급장은 물론이요 총학생회장도 선거로 뽑는다는 것이 있는지도 몰랐다. 물론 선거를 해 본 일도 없었고 선생님이 임명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았다.
4학년이 되자 담임선생님이 급장선거를 시행했다. 산간벽지에서는 놀라운 변화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4.19혁명이 났던 해였다. 그런데 더 신기했던 건 필자가 급장에 뽑힌 것이다.
얼마 후 총학생회장선거가 실시되었다. 그간 6학년 중에서 임명하던 학생회장도 전교생이 직선하도록 바뀌었다. 지금 생각해도 이해하기 힘들지만 4·5·6학년에서 한 명씩 후보를 내도록 했다. 필자는 4학년 대표로 학생회장 후보자가 됐다. 합동연설을 하고, 각 교실을 돌면서 선거운동했던 기억이 지금도 뚜렷이 남아 있다.
그리고 선거운동이 끝난 후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서 큰 칠판에 바를 정자를 그려가면서 진지하게 개표가 진행했다. 모두가 한 표 나올 때마다 목이 터지도록 함성을 질렀다. 6학년 선배가 당선됐다. 만약 그 선배가 낙선하였으면 어떡했을까? 지금 생각해도 다행한 일이었다.
문제는 다음에서 발생하였다. 5학년 형을 누르고 2등이 된 것이었다. 2등이 확정되는 순간 가슴에서 이제까지 느끼지 못한 무언가 뜨거운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양말도 없이 맨발로 고무신을 신고 집으로 돌아오는 자갈길이 비단길처럼 포근하게 느껴졌다. 전교생이 모여 투표지 한 장마다 이름을 연호하던 개표장의 함성이 귀에 쟁쟁하게 들리는 듯했다.
다음 날 학교가 내 집처럼 아늑하게 느껴졌다. 선생님들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칭찬해주셨다. 거의 처음 느껴보는 환대에 가슴이 벅찼다.
멀리만 느껴졌던 교무실을 즐겁게 찾는 찾아가기 시작하였다. 교무실 한쪽에 있는 ‘미니 도서실’을 열심히 찾는 학동이 됐다. 비록 수십 권에 불과하나 교과서가 아닌 ‘책’을 부지런히 읽기 시작했다.
그때 만난 ‘장발장’·‘삼총사’·‘모세의 기적’ 등은 훗날 탐독했던 다른 책보다 오래 기억에 남았고 인생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수줍음을 많이 탔던 ‘시골소년’은 읍으로, 대도시로, 그리고 서울로 진학해 학교생활을 재미있게 하면서 힘차게 성장했다. 그 밑거름은 첫 ‘희열’이었다.
◇인생을 바꿀 뻔했던 증기기관차
필자는 50년 전 고교 입시를 치렀다. 당시 중학교부터 전 과목에 대한 시험을 시행하던 시절이었다. 인생이 확 바뀔 수도 있었던 중요한 순간이었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다행히 대도시 소재 고등학교에 어렵게 합격했다. 시골 동네에서 몇 년에 하나 날까 말까 하는 영광이었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되지 않았다. 입학등록금 준비도 문제였으나 한 번도 가보지 않는 대도시로 등록하러 가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었다. 등록 마감은 다음 날 정오까지 주어졌고 추가등록은 인정되지 않았다.
필자는 결행이 잦은 버스를 기다릴 수 없어서 기차를 선택했다. 우리 마을 종점에서 아침 6시에 출발하는 버스는 정상적으로 운행해야 5시간 걸려서 광주에 도착하던 때였다. 그리고 비포장 자갈 도로에는 비가 내리거나 눈이 오면 버스가 다닐 수 없었다. 당시는 특히 겨울철이어서 더 그래 보였다.
전날 오후 3시간 넘게 걸어 나와서 읍내 기차역 앞 여관에서 자고 마감시각에 늦지 않으려고 새벽 5시 첫차를 탔다. 8시 광주에 도착하는 통학차였다. 문제는 엉뚱하게도 ‘기차’에서 터졌다.
칙칙폭폭 석탄 연기를 내뿜으며 힘차게 달리던 증기기관차가 화순에서 광주로 가는 너릿재 중간 오르막길에서 숨이 막히는 듯 멈춰 서고 말았다. 시커먼 열차는 제동이 잘 안 되는지 삑삑 요란한 소리와 함께 속절없이 뒤로 내달렸다. ‘정오 마감시각’ 맞추기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화순역까지 밀려 내려온 기차는 한 시간 넘게 물과 석탄을 보충해 증기를 생산한 후 고개를 힘겹게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또 숨이 차고 말았다. 후진과 에너지 보충이 반복됐다. 마감 시각을 놓칠 수도 있다는 공포감이 들었다. 당시에는 다른 수단을 찾을 수 없었다.
두 번이나 숨이 막혔던 열차는 운행 예정 시각을 3시간 더 넘기고서야 겨우 목적지에 도착했다. 냅다 은행으로 뛰었다. 운명을 가를 뻔했던 순간이었다.
“운 좋은 학생이구나!” 잠시 후 접수창구를 닫으면서 격려해주었던 은행원 누나의 그 한 마디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그때부터 ‘시간의 중요성’을 제일로 삼았다. 다른 것은 채우거나 보완할 기회가 주어지지만 한 번 지나간 시간은 결코 되돌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사회에 진출하여서도 약속시각에 늦지 않도록 노력했다. 모든 업무는 기한 전에 마감하고 여유를 가지는 것을 생활신조로 삼았다.
사회 은퇴 후 자원봉사와 교육 수강, 강의, 친구 모임에 세계 최고 수준의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그 편리함도 알았다. 나이 들어서 운전하는 부담도 덜어야겠다는 생각에 승용차 사용을 자제하고 있다.
가까운 곳에 사는 아들 가족과 ‘승용차 나눠 사용하기’도 하고 있다. 키는 하나씩 나누어 가지고 주차 스티커는 양쪽에서 발부받아 이용에 불편이 없도록 했다. 평일에는 아들 가족이 출ㆍ퇴근에 전용하고 특별한 일이 있는 경우에만 내가 사용한다.
◇첫 입학식 60년 전과 후
[새 학기를 맞아 환갑 띠동갑 쌍둥이 손주와 외손자의 입학식이 열렸다. 60년 전 초등학교 입학식이 연상됐다. 아이들의 손을 꼭 잡고 ‘친구 잘 사귀면서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랐다.
오전에 쌍둥이 손녀와 손자의 초등학교 입학식이 열렸다. 바로 집과 가까운 학교이지만 눈을 두리번거리면서 잔뜩 호기심을 드러냈다. 예나 지금이나 새로움에 대한 관심은 같은가 보다.
어머님의 손을 잡고 한참 걸어가서 참가했던 초등학교 입학식이 생각났다. 입학 전 몇 년 동안 할아버지가 만든 필사본으로 천자문을 공부하고 시조를 읊었다. 아버지에게 한글을, 어머니에게 산수를 익혔다. 그러나 ‘신학문’을 배우러 처음 가는 학교가 매우 궁금하여 밤잠을 설쳤다.
입학식이 진행되었다. 왁자지껄 떠들던 아이들도 조용해졌다. 옛 입학식 때 교장의 ‘훈화’가 떠올랐다. 당시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뭔가 보통 사람과 다른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하였다. 라디오 소리도 들어본 일이 없던 그 시절, 풍금 반주 애국가를 처음 듣고 가슴이 뭉클했던 것도 기억났다.
책을 처음 받았고 어머니는 공책과 연필을 사줬다. 글씨와 그림이 함께 인쇄된 새 책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잉크에 흠뻑 밴 책의 냄새가 정말 좋았다. 그때부터 책을 좋아하는 학생이 되었다. 어린 시절에 읽었던 책이 기억에 오래 남고 인생에 영향을 가장 많이 주었다. 요즘 아이들은 이미 좋은 책을 읽었기에 학교에서 받은 책에 대한 호기심은 크지 않을 터이다. 입학 전 예쁜 책가방과 필기구도 선물로 이미 챙겼는데 이것도 대단히 감동적이었다.
학교 재학 시절 제일 좋아했던 것은 장난감으로 재미있는 놀이하기였다. 그러나 손주들은 뛰어노는 것보다 체육관, 학원을 찾아 나설 것이다.
한국전쟁 후 지금의 최빈국보다 더 어려웠던 시절, 처음 본 공책과 연필도 신기하게 느껴졌다. 잘 깎이지 않는 연필을 날을 갈아가면서 조심조심 깎아주었던 아버님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공책은 한 번 쓰기도 어려울 정도로 잘 찢어졌다. 딱딱한 연필심에 침을 발라서 공책이 파이지 않도록 글씨를 살살 그려야 하였다. 연필심 흑연으로 입술은 시커멓게 물이 들곤 하였다.
오후에는 외손자가 유치원에 입학하였다. 어린이집을 마치고 내년 초등학교 입학을 대비하는 중이다. 손재주가 좋은 이 녀석은 종이접기 작품을 필자 손에 쥐여주면서 ‘입학선물’이라며 재롱을 부렸다.
담임선생의 당부와 학교생활 안내가 있었다. 새겨듣는 아이들의 눈망울이 초롱초롱하였다. 교실과 선생이 부족하여 합반수업을 하였던 옛날이 생각났다. 아무튼 좋은 환경에서 무럭무럭 자라기를 바랐다.
아들 가족은 아주 가깝게 살고 있다. 아침 일찍 출근하는 아들 가족을 대신하여 쌍둥이의 손을 잡고 유치원의 등교를 도왔다. 올 첫 학년은 육아 휴직한 며느리가 직접 보살피고 있다.
퇴근이 늦은 딸 가족을 위하여 외손자의 어린이집 하교도 가끔 도왔다. 앞으로도 즐거운 마음으로 손주들의 등하교를 보살필 예정이다.
아이들의 입학식이 매우 아름답게 느껴졌다. 기념사진에 예쁜 모습을 담고 교문을 나섰다. 먼 훗날 아이들의 추억에 할아버지는 어떤 모습으로 남을지 상상의 나래를 폈다.
초등학교 4학년 필자 반으로 전학온 아이가 하나 있었다. 그 아이는 필자가 동경해마지 않는 서울에서 왔다. 필자 집으로 놀러온 그 아이와 뒷산에서 장수하늘소를 잡으면서 놀다가 “야, 이건 ‘상수리’라는 거다”고 동굴동굴한 참나무 열매를 정체를 알려주었다. “아니야, 도토리야!” 그 친구가 악착같이 ‘도토리’라고 우겼다. 그 친구를 떠올리면 ‘도토리’와 ‘상수리’를 가지고 얼굴까지 붉혀가면서 서로 우겨댔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서울내기인 그친구는 도토리만 알았지 상수리는 구경도 못해 그리 우겼는데, 세월이 많이 흘러 성인이 된 후에야 그것이 상수리였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그 아이는 생각보다 공부도 잘하고 노래도 잘 불렀다. 그래서 우리는 금새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당시 과수원이 있고 농사도 크게 짓고 있던 필자 집은 학교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어 가끔 그 친구를 데리고 집에 와서 놀곤 하였다. 그 친구에게 들으니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아버지 사업이 망하는 바람에 필자 고향 쪽으로 야반도주했던 것이다. 급한대로 남의 집 행랑채 한 칸을 빌려 살았으니 사는 형편은 나름 짐작할 수 있었다. 어느덧, 그친구와 가까워졌고 또 한 친구와 함께 우리는 ‘삼총사’라고 자칭하면서 열심히 공부도 하고 들로 산으로 싸돌아다니면서 신나게 놀았다. 특히 만화책을 좋아하는 우리는 늘 학교 앞 만화가게에서 만화를 빌려서 돌려보곤 했다.
어느덧 초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관내 4개 초등학교 아이들이 모여서 중학교 시험을 보게 되었는데, 삼총사 중에 한 친구는 인천의 모 중학교 덜썩 합격했고, 상수리를 도토리라고 우겼던 그 친구와 필자는 당당하게 관내 중학교에 수석과 차석으로 합격하게 되었다.
헌데, 그 시기에 필자 집은 아주 어려운 상황으로 그 많던 전답과 과수원을 빚쟁이들이 팔아 빚잔치를 하고 고향의 외곽으로 이사했다가 끝내 서울까지 옮겨가 주경야독의 생활을 이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우연하게도 인천에 간 친구와 필자는 어른이 되어 같은 직업인 군인을 길을 가게 되었다. 긴 세월 돌고 돌아 30여년 만에 군 전역을 하고 다시 만난 그 친구와는 가족처럼 어울려 왕래를 하게되었다.
그 친구 덕분에 어린 시절의 고향친구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인천의 모 중학교 실내체육관에 모여 족구를 하였다. 특히 운동에 소질이 있던 그 친구와 필자는 열심히 운동하면서 어린 시절의 우정을 다져가고 있었는데, 자주 만나다 보니 조금씩 상대방의 단점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겪어보았으니 대략의 성격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 시절에는 그냥 묻혀 지나갔는데, 좀 더 가까이서 겪어 보니 시시때때로 그 친구의 이기적인 성격이 발동하면 자신의 이익이 우선이고 상대방에 대한 벼려는 전혀 없었다. 특히 돈과 관련한 문제에서는 무척이나 예민하였는데, 그런 행동을 하는 그 친구에게 멀미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으로부터 점점 멀어져가는 것을 보면서 친구들 중에 혹자는 우리 둘의 관계를 어린 시절부터 ‘라이벌’ 관계라고 호도 하지만, 절대 그런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 친구와 그렇게 멀어져 갔고 어쩌다 친목모임에서 만나면, 그저 악수정도로 끝내는 그런 친구가 되어버렸다. 어린 시절의 우정을 생각하면, 한편으로는 서먹하고 안타깝기도 하지만, 그 친구를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아직도 시간이 더 필요할 듯하다. 친구란, 삶을 살아가면서 어떤 일을 겪어도 곁에 있어줌으로서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친한 줄로만 알았던 친구가 그렇지 않다는 사실과 친하지 않았던 친구 중에서 진심으로 필자를 생각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친구란, 온 세상이 다 필자 곁을 떠났을 때 필자를 찾아오는 사람이라고 하던데, 과연 필자는 언젠가 그 친구를 찾아가 진정한 화해의 손을 내밀 수 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 하루빨리 그런 날이 오기를 기원해 본다.